히브리서 차례
히브리서 11장 (62 - 82)
(62) 바라는 것들의 실상인 믿음(히브리서 11:1-2)
(63)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브리서 11:1-2)
(64) 선진들의 증거(히브리서 11:1-3)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브리서 11:3)
(65) 믿음으로 알 수 있는 두 가지 사실(히브리서 11:1-3)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브리서 11:3)
(66) 믿음으로 드린 아벨의 제사(히브리서 11:4)
(67) 에녹의 믿음(히브리서 11:5-6)
(68) 노아의 믿음(히브리서 11:6-7)
(69) 아브라함의 믿음(히브리서 11:8-19)
(70) 본향을 바라보며 살아간 믿음의 선진들(히브리서 11:13-16)
(71) 이삭의 믿음(히브리서 11:20)
(72) 야곱의 믿음(히브리서 11:21)
(73) 요셉의 믿음(히브리서 11:22)
(74) 모세의 믿음(히브리서 11:23-26)
(75) 애굽을 떠나온 믿음(히브리서 11:27-29)
히브리서 12장 (83 - 92)
(83) 벗어버려야 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히브리서 12:1-2)
(84)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히브리서 12:1-2)
(85)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히브리서 12:3-4)
(86) 참 아들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징계(히브리서 12:5-13)
(87) 화평을 좇으라(히브리서 12:14)
(88) 거룩함을 좇으라(히브리서 12:14)
(89)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히브리서 12:15-17)
(90)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히브리서 12:15-17)
(91) 우리의 이른 곳(히브리서 12:18-24)
(92) 경건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섬기자(히브리서 12:25-29)
히브리서 13장 (93 - 99)
(93) 가장 긴요한 권면(히브리서 13:1-4)
(94)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히브리서 13:5-6)
(95) 영원히 동일하신 예수 그리스도(히브리서 13:7-9)
(96)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히브리서 13:10-13)
(97) 영구한 도성을 찾는 그리스도인의 생활(히브리서 13:14-16)
(98) 목자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자세(히브리서 13:17)
(99) 바울의 축복기도(히브리서 13: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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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1장 (62 - 82)
◆ 밤중소리 02-01 | VIEW : 605
(62) 바라는 것들의 실상인 믿음(히브리서 11:1-2)
(63)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브리서 11:1-2)
(64) 선진들의 증거(히브리서 11:1-3)
(65) 믿음으로 알 수 있는 두 가지 사실(히브리서 11:1-3)
(66) 믿음으로 드린 아벨의 제사(히브리서 11:4)
(67) 에녹의 믿음(히브리서 11:5-6)
(68) 노아의 믿음(히브리서 11:6-7)
(69) 아브라함의 믿음(히브리서 11:8-19)
(70) 본향을 바라보며 살아간 믿음의 선진들(히브리서 11:13-16)
(71) 이삭의 믿음(히브리서 11:20)
(72) 야곱의 믿음(히브리서 11:21)
(73) 요셉의 믿음(히브리서 11:22)
(74) 모세의 믿음(히브리서 11:23-26)
(75) 애굽을 떠나온 믿음(히브리서 11:27-29)
(62) 바라는 것들의 실상인 믿음
(히브리서 11:1-2)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며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성경에는 믿음에 대한 말씀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우리도 이 믿음을 떠나서는 생활 할 수 없을 만치 믿음이란 말을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약속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 믿음으로 우리는 어떤 어려움이 와도 흔들리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의뢰합니다. 우리는 천국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 믿음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은 헛것이며 우리는 가장 불쌍한 생애를 살아가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천국에 대한 확실한 믿음으로 우리는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생애를 나그네 생활이라고 믿고 살아가고 있으며 장차 그곳에 들어갈 소망을 가지고 기쁨으로 고난을 당하며 시련과 환난의 고통도 참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이란 무엇인가? 무엇을 믿음이라고 하나는 것인가? 이에 대한 정의가 히11:1절에 간략하게 기술되어 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다.
첫째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말씀해 줍니다. 여기서 바라는 것들이란 말은 바란다, 희망한 다의 뜻을 나타내고 있는 ‘바라지고 있는 것들’이란 뜻입니다. 이 바라지는 것은 인간의 어떤 신념이나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의하여 계속 바라지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바람, 곧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우리가 바라지는 소망도 있을 수 없고 그 소망에 대한 믿음도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상이란 말은 본질, 혹은 실재 확인이란 뜻입니다. 이 말씀을 쉽게 간추려 설명한다면 우리의 믿음이란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모든 미래의 소망에 대하여 우리의 생활 속에서 성취되고 이루어지는 본질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소망으로 얻은 것입니다. 천국도 소망에 속한 장래적인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약속하신 그 많은 약속도 우리들이 믿음으로 바라보는 것들이며 실제로 받은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롬8:24절에서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소망이 눈에 보이는 것이라면 우리는 믿음으로서가 아니라 그곳으로 달려가는 노력을 통해서 그 소망을 이룰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특징은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믿음은 그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들을 꿈속의 일처럼 여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손으로 잡고 있는 것으로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약속에 의지하여 그것들을 우리가 소유한 것처럼 여길 수 있는 것입니다.
2. 믿음으로 약속한 것들
우리가 천국의 경우를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들 중 누구도 천국에 가 본 일이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권사님이 천국에 다녀왔다는 간증을 통해서 그 천국을 믿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천국은 눈에 보이는 것도 없고 가 볼 수도 없습니다. 단지 우리의 바라는 것일 뿐입니다. 소망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 소망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문학작품이나 신념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그 존재를 믿는 것입니다.
천국은 약속을 받은 사람이 소망으로만 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사람에겐 천국을 볼 수도 없으며 보여 줄 수도 없습니다. 믿음에 대해서 예수님은 막11:24절에서 실감 있는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믿고 기도한 일에 대하여 받은 줄로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는 그 목적이 아직 이루어지지 아니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예수님은 받은 줄로 믿으라고 하십니다. 어떻게 이 같은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헛것이 아닙니다. 허망한 것도 아닙니다. 실재이기 때문에 믿음대로 이루어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약5:15절에서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시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고 말씀해 줍니다. 이 말씀은 허황 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인즉 허황 된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의 기도를 드렸다면 아직 병든 상태에서 호전되지 않았어도 하나님께서 일으켜 주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일으켜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결론 : 아브라함의 믿음이 이런 믿음이었습니다. 롬4:18-22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약속하신 것을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는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랐다고 했습니다. 그의 바람은 자기의 신념이나 경험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네 자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시겠다‘고 하신 그 약속에 따른 믿음인 것입니다. 우리도 이 같은 믿음을 가지고 우리의 생애를 살아간다면 감사와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63)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
(히브리서 11:1-2)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보지 못하는 것들이란 보여지지 않는다는 뜻이며 하나님에 의하여 보여지지 않는 상태에 숨겨져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증거란 말은 드러나다, 선포하다 는 의미의 뜻이 있습니다. 이처럼 믿음이란 하나님에 의해 비밀히 숨겨진 것들을 드러내 보이는 것을 말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고 과학적으로 체험적으로 증거가 안되지만 그러나 믿음은 그 비밀한 것들을 확실한 증거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천국은 없는 것을 억지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비밀한 곳에 숨겨져 있습니다. 우리는 그 비밀한 곳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찾고 우리의 믿음으로 그곳을 확실하게 바라보는 것입니다.
1. 믿음이 없으면 소망으로 살아갈 수 없다.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 믿음이 없으면 그 사람은 죽어 있는 사람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신앙의 증거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삼았다고 했습니다. 믿음은 막연한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그 뿌리가 견고하고 확실합니다. 견고하고 확실한 뿌리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마24:35절에서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꿈이 아닙니다. 모두 실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꿈에서 보는 허상으로 생각하면 그 말씀에서 오는 축복을 하나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 손으로 지금 잡을 수 있는 실체인 것입니다. 이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만이 순종의 생활을 할 수가 있습니다.
2. 믿음을 어떻게 가질 수 있을 것인가?
그러면 우리가 이 믿음을 어떻게 가질 수 있는 것입니까? 첫째로 믿음은 우리의 마음속에서 우리들 스스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믿습니다로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한다고 믿음이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들이 신앙생활에 실패하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이 믿음을 자기자신이 만들어 보려고 힘쓰는데서 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믿음의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엡2:8절 말씀에는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가지려면 하나님으로부터 이 선물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 선물을 받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이 선물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주십니다. 롬10:17절에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믿음을 선물로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이요 생명이기 때문에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셔야 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간절히 바라며 그 말씀을 깨닫기를 원하는 진실한 마음을 가지고 들어야 합니다.
다음에 믿음을 받으려면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선물로 주실 하나님을 만나야 믿음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방법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는 일은 영적으로라야 가능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면 그 만남이야말로 성경적인 만남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참 모습은 그의 언약을 통해서 우리에게 나타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영적인 교통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언약을 통해서 그 안에서 하나님과의 실질적인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때 확실한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다음에 믿음은 회개한 사람에게 선물로 주십니다. 회개한 사람과 회개치 못한 사람과의 신앙적인 수준은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습니다. 믿음과 회개는 언제나 정비례한다는 사실을 알고 언제나 회개하기에 재빠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다음에 하나님께서는 순종하는 사람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십니다. 순종의 생활은 그리스도인의 가장 바람직하고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믿음의 생활입니다. 순종은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어렵고 무거운 짐은 모두 자신이 지시고 우리에게는 가벼운 짐만 지우십니다.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고 하셨습니다. 순종이 어렵다고 하는 말은 믿음이 없이 순종을 하려니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진실한 믿음으로 받아드리면 순종은 쉬운 것입니다. 믿음의 힘으로 순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마음에 달렸습니다. 순종하려고 하는 진실한 마음을 하나님께 보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순종의 힘을 반드시 공급해 주십니다.
결론 : 믿음이 없으면 소망도 한낱 꿈에 지나지 않으며
하나님이 분명하게 언약하신 축복도
떠도는 구름처럼 우리 손에 잡혀질 수 없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아무런 증거도 찾을 수 없습니다.
증거 없는 믿음은 그 생활에 흥미가 없고 힘들기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마른땅을 촉촉이 적시는 이슬비처럼
우리의 메마른 심령을 적셔서
믿음을 통해서 바라는 소망을 실상으로 붙잡아
여러분의 소유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64) 선진들의 증거
(히브리서 11:1-3)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성경에는 소망이란 단어가 많이 나옵니다. 소망이란 말은 성경적으로 볼 때 신앙적인 말입니다. 우리들이 소망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분명하고 확실하지만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있거나 우리의 손으로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거나 우리의 노력으로 그것을 가질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소망이 아닙니다.
1. 무엇으로 소망을 보는가?
그러면 우리의 소망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구원이라고 했습니다. 구원이란 영원한 생명을 말하며 부활을 말하며 하늘에 있는 천국을 말합니다. 그러면 무엇이 우리의 이 같은 소망을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그리고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선진들이란, 믿음으로 살아간 우리의 믿음의 선진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다 우리의 믿음의 선진들이요 선배들입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증거를 얻은 사람들입니다.
골1:5절 말씀을 보면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둔 소망을 인함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소망을 쌓아 두셨습니다. 그러면 이 놀라운 소망을 우리는 어떻게 보는 것입니까? 아무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안경을 쓰고 그곳을 바라보면 확실한 증거를 잡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에 모든 일에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믿음의 눈으로 천국을 보아야 그 천국이 보이며 믿음의 안경을 쓰고 성경을 읽어야 그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믿음의 안경은 무슨 재료로 만들어집니까?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은 다 말씀에 근거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소망을 찾으며 그 말씀을 믿는 믿음에서 그 소망이 확실해 지고 확실한 증거를 잡을 수 있는 것입니다.
2. 잘못된 신앙들
오늘날 교회에 믿음으로가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 소망을 이루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말씀이 아니라 이적으로 믿음을 가지려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일은 이적은 복음도 아니며 믿음도 아닙니다. 이적은 사람에게 믿음을 주지 못합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메시야로서의 여러 가지 이적을 보여 주시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많은 이적을 친히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이적으로 예수를 믿지 못했으며 또다른 이적을 원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이적을 원하는 것이라고 책망하시고 요나의 이적 밖에는 보일 이적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나의 이적이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시고 장사한지 사흘만에 무덤에서 살아나시는 주님의 부활을 가리키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에 대한 이적을 부활에 대한 이적으로 한정시키셨습니다. 부활에 대한 이적을 믿는 것이 믿음이요 신앙인 것입니다. 이적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바른 신앙을 가지고 있는가 여부를 시험하시려고 하나의 시험의 도구로 쓰시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신13:1-5절 말씀을 보면 어떤 선지자가 일어나 혹 이적과 기사를 보이고 그들이 말하는 대로 그 이적과 기사가 이룰지라도 그 말을 청종하면 안 된다고 경고해 주신 것입니다. 이 같은 일은 그 사람을 하나님이 시험하사 이적을 중히 여기나 하나님의 말씀을 중히 여기나 시험하시는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주의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은사 신앙입니다. 은사 신앙이란 은사를 받아야 확실한 믿음을 가질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은사위주로 신앙 생활을 것을 말합니다. 약 20여년 전, 한때 방언 운동이 굉장히 번졌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성령 받은 증거는 방언에서 나오기 때문에 방언을 받지 못하면 구원을 확인하 수 없다는 주장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산에 올라가거나 교회 성전에서 이 방언 받기 위해 할렐루야 고함을 지르고 방언을 흉내내려고 혀 꼬부라지는 소리를 지르며 난리를 부린 것입니다. 방언은 성령의 은사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이 은사는 교회의 유익을 위해 성령께서 필요한 사람에게 은사로 주시는 것입니다.
다음에 한 가지 유의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상에 의지하는 신앙입니다. 무엇인가 보려고 하고 무엇인가 들으려고 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런 일에 기우러져서는 안됩니다. 믿음은 환상이니 이상이나 환청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이런 신앙에 마음이 쏠리게 되면 신비적인 신앙에 빠져 들어가 믿음이 병들게 됩니다.
눈에는 보이는 것이 없어도 귀에는 들리는 음성이 없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을 의뢰하며 그 말씀을 따라가는 신앙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진실한 믿음인 것입니다.
결론 : 우리의 신앙의 선진들은
믿음으로 증거를 삼는 생활을 했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누가 믿음으로 증거를 삼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입니다.
말씀을 전적으로 의뢰하는 사람입니까?
말씀을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진실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65) 믿음으로 알 수 있는 두 가지 사실
(히브리서 11:1-3)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히브리서11:1-3절 말씀은 우리의 믿음과 중요한 연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여러 시간 이 문제를 가지고 강해했습니다. 오늘은 본문 3절 말씀을 통해서 두 가지 사실을 배우려고 합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다윈의 진화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가 어떻게 탄생되었는가에 대한 논란은 옛날부터 과학적으로 혹은 종교적으로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지구의 형성의 각가지 학설은 비 성경적이기 때문에 우리가 고려해 볼 가치조차 없는 것이고 우리는 다만 성경에 나타난 말씀에 의하여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다고 하는 사실과 또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아니하는 것으로부터 온 것인 줄 믿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하여 살펴보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설에 가장 위협적으로 나온 것이 소위 다윈의 진화론입니다. 다윈이란 사람은 1809년에 태어나 1882년까지 살아온 1800년대의 사람으로 영국의 세계적 물리학자로 진화론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사람입니다. 다윈은 케임브리지 대학 신학부를 졸업한 사람으로 목사가 되어야 할 사람이 박물학에 흥미를 가지고 깊숙이 연구한 것이 동기가 되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의 앞잡이가 된 것입니다.
진화론을 간략히 말한다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단순물질로부터 여러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는 생명체로 성장했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경우를 예로 들면 우리 인간은 하나님이 흙으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수 만년 전의 모습은 원숭이였으며 그 이전의 모습은 더 단순한 존재로 그 기원을 거슬려 올라가면 아메바와 같은 단순 세포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주장의 증거는 세계도처에서 수집한 화석에 의하여 발견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이것을 체계화하여 쓴 책이 다윈의 진화론으로 오늘날 초등학교로부터 대학원에 이르기까지 교과서로 사용하고 있을 정도로 막대한 영향을 주는 책으로 사탄의 작품인 것입니다.
2. 하나님이 창조역사
우리는 성경에서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로 하나님의 창조를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창1:1절에 나오는 말씀은 하나님의 창조역사를 증거해 주는 첫 번째의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천지창조는 저 하늘의 뭇별이나 해나 달이나 우주 만물의 모든 존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45:12절에서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땅을 만들고 그 위에 사람을 창조하였으며 내가 친수로 하늘을 펴고 그 만상을 명하였노라’고 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과학자들이 우주의 탄생 기원에 대하여 별의별 연구 결과를 발표하고 있지만 이에 대하여 하나님은 그들의 엷은 지식과 천박한 지혜를 비웃으시는 것입니다. 렘31:37절에서 ‘위로 하늘을 측량할 수 있으며 아래로 땅의 기초를 탐지할 수 있다면 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행한 모든 일을 인하여 그들을 다 버리리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의 창조역사에 대하여 성경은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라고 하셨으며 흙으로 아담을 만드시고 아담의 갈빗대로 하와를 만드시어 축복해 주셨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셨을 때 그 최초의 인간인 아담은 원숭이가 아니라 지금 우리보다 더 완벽하고 성숙한 인간의 모습으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에게 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인간을 하나님이 창조하시되 하나님의 형상대로 온전한 모습으로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지금 눈에 보이는 이 세계가 보이지 아니하는 것에서 온 것인 줄 아는 것입니다. 하늘에 있는 영적 존재까지도 없는 곳에서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것들입니다. 모든 만물에는 만물의 시작이 있습니다. 이 시작 이전에는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존재한 것이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스스로 계셨을 뿐입니다.
이 우주만물이 하나님으로 창조된 사실을 믿음으로 알 수 있고, 이 모든 세계가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말미암아 창조된 것을 알 수 있다면,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만들어진 사실을 믿음으로 안다면 우리의 소망이 비록 보이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확실한 실상으로 그리고 증거로 잡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놀라운 축복을 받을 수 있게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의 언약을 말씀으로 주셨습니다. 죄 사함의 언약을 주셨습니다. 의의 언약을 주셨습니다. 천국의 언약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이 언약을 확실히 받을 수 있습니다. 선진들이 가지고 살아온 믿음이 바로 이 같은 믿음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결론 : 우리가 우리의 생애에 우리가 바라는 모든 소망이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이뤄진다고 하는 믿음을 가질 수 있다면 우리는 소망 가운데 축복된 생애를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그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고 그 안에서 생활한다면 우리의 믿음은 성숙해 지며 그 믿음으로, 말씀에서 언약하신 실상을 볼 수 있으며 말씀을 증거로 삼아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66) 믿음으로 드린 아벨의 제사
(히브리서 11:4)
히브리서를 쓴 저자는 2절에서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고 말씀하고 4절부터는 이 선진들의 믿음으로 증거를 삼고 살아온 사람들의 믿음의 생활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 첫 인물로 등장시킨 믿음의 선진으로 아벨을 들고 있습니다.
1. 제사로 의로운 자라 증거 받은 아벨
창4장에 나오는 가인과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께 드리는 인류 최초의 제사입니다. 이 제사에서 아벨이 믿음으로 제물을 드림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함을 받은 최초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경우는 어떠합니까? 롬4:1-3절 말씀을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은 믿음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을 이루실 줄을 끝까지 믿었는데 하나님은 이 같은 그의 믿음을 기쁘게 보시고 의로 여기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롬4:18-22).
가인과 아벨은 아담이 에덴에서 쫓겨난 후, 저주받은 땅에서 낳은 아들들입니다. 이들이 장성해서 제각기 기업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아벨은 양을 치고 가인은 농사를 지었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제사 때가 되매 제각기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이 제사에서 하나님은 양을 잡아 제물로 드린 아벨의 제물은 받으시고 농산물로 제물을 삼은 가인의 제물은 물리치신 것입니다. 이 때 가인은 시기심이 가득하여 아벨을 돌로 쳐죽였습니다. 그러면 왜 가인의 제물은 물리치시고 아벨의 제물은 열납 받으셨는가 이 문제는 하나님으로부터 의를 받는 일에 결정적인 해답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여기서 제사란 무엇인가에 대해 알아야 하겠습니다. 제사란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하나의 방법입니다. 아담이 범죄한 후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졌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제사라고 하는 하나의 방법을 주심으로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제사는 제물을 드리는 형식으로 치러졌습니다. 그래서 아벨은 양으로 가인은 농산물로 드린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에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데 두 가지 제물이 나와 있습니다. 하나는 화목 제물이요 다른 하나는 속죄 제물입니다. 화목 제물은 짐승을 잡아 각을 떠서 하나님의 제단에 드리는 것으로, 속죄 제물은 짐승의 피로 드려졌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그 몸이 찢기시고 그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고 우리의 죄를 속죄하신 일에 대한 그림자로 율법에서 보여 주신 것입니다.
2. 가인과 아벨이 드린 제물
아벨과 가인은 하나님께 드린 제물이 각기 달랐습니다. 가인의 제물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제물이 아니었습니다. 율법에서도 하나님은 하나님께 드릴 제물에 대하여 언제나 분명하게 명하셨습니다. 곡식으로 화목제와 속죄제로 삼는 일은 없었습니다. 가인은 자신의 공로를 내세웠습니다. 자기가 애써 노력하여 수확한 것으로 제물로 삼고 그것을 인정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는 이 같은 제물을 받지 않으십니다. 가인의 마음에는 선한 것이 없었습니다. 6-7절. 가인에게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9절.
그러면 아벨의 제물을 보겠습니다. 아벨은 양을 제물로 삼았습니다. 양이란 제물에 믿음의 근거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양을 잡아 드리라고 하신 말씀에 순종하므로 아벨이 하나님의 언약을 믿은 것입니다. 아벨은 아담으로부터 전수 받은 하나님의 속죄의 언약을 믿고 따랐습니다. 아벨이 양의 첫 새끼를 잡았다고 했는데 왜 잡은 것입니까? 먹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창9:1-3. 그것은 양으로부터 피와 기름을 빼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양과 기름으로 제물을 삼았다고 한 것입니다. 양의 피와 기름이 어떤 일에 쓰여졌는가 알아보면 민18:17절에서 양의 피는 단에 뿌리고 그 기름은 불살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화제로 드린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오실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제물인 것입니다.
아벨이 드린 제물은 가인의 제물보다 더 나은 제물이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인정받은 제물만이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는 제물이란 사실을 말씀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벨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하는 선언을 받았습니다. 아벨은 인물이나 인격이나 선행을 통해서 의롭다함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께 드린 제물로 인해서인 것입니다. 아벨의 제물은 믿음으로 드린 제물이므로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것입니다.
결론 : 지금 세상은 두 종류의 인종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하나는 가인의 자손이요 하나는 아벨의 자손입니다. 이 같은 후손은 다른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제물 한 가지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가인의 제물을 드리는 인류는 가인의 후손이요 아벨의 제물을 드리는 인류는 아벨의 자손입니다. 가인의 자손은 아무리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제물을 삼아 하나님께 드려도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벨의 후손은 그의 믿음의 제물로 인하여 반드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하심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어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삼으시어 화목제물과 속죄 제물로 받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 다른 속죄제물이나 화목제물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믿음이 없는 자가 아니라 믿음이 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67) 에녹의 믿음
(히브리서 11:5-6)
오늘은 에녹의 믿음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에녹은 어떤 이유로 믿음의 선진으로 볼 수 있는가? 오늘 본문을 보면 에녹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자란 증거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 증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에녹이 죽음을 보기 전 그를 하늘에 옮기 우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에녹은 하나님이 계신 것과 또 그를 믿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렸다고 하신 것입니다. 아벨이 믿음의 제사로 하나님의 의를 인정받았다면 에녹은 그의 생활, 그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린 믿음의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1. 에녹이란 인물
성경에서는 에녹의 인물과 생애를 아주 짧게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짧은 기록 속에 담겨진 그의 생애는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창세기에 나와 있는 에녹의 일생은 간단명료합니다. 그는 65세에 므두셀라를 낳았다고 했습니다. 그는 300년간을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 속에서 자녀들을 낳았다고 했습니다. 그는 결국 365세를 살았는데 그의 생애는 하나님이 데려가심으로 이 땅에 존재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365세란 나이만도 노인인데 그 당시는 인류의 조상인 아담이나 하와까지도 땅에 살아 있을 시기였습니다. 그 당시 우리 인류의 조상들이 누린 연세를 살펴보면 깜짝 놀랄만한 장수였음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아담이 930년, 셋이 912세, 에모스가 905세, 게난이 910세, 마할랄렐이 895세, 야렛이 962세, 에녹이 365세, 므두셀라가 969세, 라멕이 777세, 노라가 950세 그리고 그 후, 아브라함이 175세로 나오고 있습니다. 사람의 나이가 홍수 심판 이전까지는 굉장히 길었지만 그 후에는 급격히 줄어들어 200세를 넘기지 못했으며 아브라함은 175세로 줄어들었고 그 후부터 더 단축되어 갔습니다. 다윗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80세를 넘기기가 어려운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시90:10절에서 ‘우리의 연수가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라’고 했습니다.
2. 에녹의 믿음
에녹은 믿음의 생애를 보낸 사람입니다. 그는 무려 300년간을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애를 보냈다고 했습니다. 300년간의 세월은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의 생애 중에 과연 우리는 얼마만큼이나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애를 살아온 것입니까?
‘하나님과 동행하더니’란 말씀의 원어는 ‘그 하나님 곁에서 행하다’ 또는 ‘그 하나님 가까이서 살더니’란 뜻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하나님 곁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까? 시140:13절에서는 ‘정직한 자가 주의 앞에 거하리이다’고 했습니다. 요일3:24절에서는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한다’고 했습니다. 에녹은 세상에 죄악이 관용했던 시대에 살아온 사람입니다. 에녹에 대한 기사가 유다서에 약간 언급되어 있습니다. 유1:14-16말씀을 보면 그 시대 사람들이 경건치 않은 죄인의 생활을 하고 있었음을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에녹은 원망하는 자들과, 불만을 토하는 자들과 정욕대로 행하는 자들에게 뜨거운 사랑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외쳤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결국 순종치 않고 그 마음의 완악함을 버리지 못하여 노아 홍수 심판 시에 물에 잠겨 죽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에녹은 365세에 하나님이 그를 데리고 가셨다고 했습니다. 에녹은 주검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에녹을 승천시키신 것입니까? 이 일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자에게 주시는 영생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의 아들을 주신 이유는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을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의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에녹처럼 죽지 아니하는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다른 또 한 가지는 에녹의 승천은 하나님의 심판 이전에 있을 그리스도인의 공중 휴거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이 에녹을 하늘로 취하신 것은 에녹으로 장차 이 땅에 임할 홍수 심판에서 구원받기 위해서였습니다. 인류의 종말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은 어느 한 지역에만 해당하는 심판이 아닙니다. 방주에 들어간 생명체만이라도 살 수 있는 심판이 아닙니다. 이 지구가 세 갈래로 갈라지면서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이 드러나 이 지구를 온통 불태우는 심판입니다. 이 심판에서 살아남을 인류는 하나도 없습니다. 오직 에녹처럼 하늘로 이끌리심을 받는 성도들만이 새시대의 유업을 받을 수 있습니다. 홍수 심판에서의 구원은 에녹과 노아로 나타나 있습니다. 에녹은 심판 전에 들림 받은 구원이요 노아는 심판 중에 방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노아 시대에는 방주로 구원을 베푸셨지만 인류의 종말에 있을 하나님의 심판 시에는 에녹과 같이 하늘로 끌어올리심으로 구원하십니다.
결론 : 에녹은 수도승처럼 산에 입산하여 도를 닦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집에서 자녀를 기르면서 그리고 사회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애를 살아간 사람입니다. 우리의 남은 생애가 얼마 안됩니다.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을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68) 노아의 믿음
(히브리서 11:6-7)
히11:6절에 나오는 말씀은 1절에 나오는 말씀과 같은 맥의 말씀입니다. 1절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는데 6절에서 이 말씀을 주석해 주고 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는 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그러면 그런 믿음이란 어떤 것인가? 이에 대하여 두 가지로 구분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하나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그가 계신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없이는 아무리 신앙생활의 연륜을 쌓아도 헛수고입니다.
1.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는 믿음
그러면 사람들이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무엇을 근거로 믿을 수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을 찾을 수 있고 알 수 있고 믿을 수 있는 분명한 길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특별계시로 주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는 하나님이 계심을 믿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만이 계시를 통해서 하나님이 계심을 믿게 되며 그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다음에 하나님을 찾는 이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가장 악한 생각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도 주시지 아니하시고 화도 내려주시지 않는다‘는 사상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찾는 자에게 반드시 상을 주신다고 하는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사상입니다. 그런 중에도 가장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은 그의 아들을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신다고 하는 말씀에 대한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찾는다는 말은 하나님을 따라간다는 의미입니다. 따라간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순종하는 생활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상급이 있습니다. 이것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2. 노아의 믿음
오늘은 노아의 믿음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심판에서 그의 가족과 함께 구원함을 받으므로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노아가 하나님의 심판의 경종을 받았을 때, 아무 것도 본 것이 없었습니다. 홍수가 억수 같이 쏟아지는 가운데서 경종을 받은 것이 아니라 노아는 다만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심판의 경종을 받은 것입니다. 인류의 종말에는 인류 역사상 가장 두려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게 됩니다. 그 심판에 대하여 베드로 사도는 불의 심판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같은 하나님의 종말의 심판에 대하여 노아와 같은 믿음이 없이는 믿음으로 방주를 예비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물의 심판은 노아 시대에 홍수로 이미 끝났고 앞으로 장차 이 세상에 임할 심판은 불의 심판입니다. 우리는 물의 심판을 거울삼아 장차 우리에게 닥쳐 올 불의 심판을 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물의 심판과 불의 심판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심판은 언제나 인간의 죄악이 관용할 때 내려진다는 사실입니다. 창6:13, 계18:4. 인간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여 물의 심판이 내려진 것처럼 불의 심판은 인간의 죄악이 하늘에 사무침으로 내려진다고 하신 것입니다. 다음 두 번째의 공통점은 모든 인류가 하나님이 없는 생활을 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종말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노아의 때에 비유해서 경종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장가들고 시집가고 먹고 마시는 탐심과 환락 위주의 생활을 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세 번째의 공통점은 홍수 심판을 받으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이 내리시는 심판인줄을 몰랐던 것처럼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고 하셨습니다. 핵전쟁으로 죽고 천재지변으로 혹독한 재앙을 만나도 그것을 하나님의 심판인줄 모르고 더욱더 악해진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들 수 있는 공통점은 그 당시에는 믿음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곳에 들어간 노아의 가족들만 살아남은 것처럼 마지막 심판 시에는 믿음으로 예수를 영접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만이 구원을 얻어 천국을 기업으로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노아는 방주를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노아가 방주를 만든 것은 노아가 하나님을 경외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노아와 같은 믿음으로 종말적인 불의 심판에서 건지심을 받으려면 우리의 한평생 변함없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의 생활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창6:8절 말씀을 보면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고 했습니다. 노아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은 이유에 대하여 노아는 그 당시 하나님 앞에 의인이었다고 했습니다. 노아의 의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얻은 의인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기 때문에 노아처럼 심판에서 건져내 주시는 것입니다.
결론 : 노아는 장차 임할 하나님의 경고를 믿음으로 그와 그의 가정이 구원을 받았으며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의의 후사가 된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심판을 믿고 노아처럼 우리의 온 생애 동안 그 심판을 준비하는 생활을 통해서 노아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69) 아브라함의 믿음
(히브리서 11:8-19)
아브라함은 구약 성경에 나오는 중심 인물이며 성경 전체에서 아브라함이 차지하는 비중은 대단히 큽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린 믿음을 몇 가지로 밝혀 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갈 바를 알지 못하였으나 순종하여 고향을 떠났습니다.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에 거할 때에도 외방에 있는 나그네처럼 장막에 거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 같은 생활을 한 것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천국을 소망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가 나이 많아 경수가 그쳤으나 믿음으로 잉태하는 힘을 얻어 하나님이 약속하신 이삭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아브라함의 믿음은 약속하신 하나님을 미쁘신 분으로 그 분을 믿고 의뢰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1. 아브라함의 믿음
아브라함은 예수님의 족보에서 첫째 인물로 등장합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부르신 것은 아브라함을 통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형성하시고 그 민족을 통하여 메시야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섭리가 성경에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히11:18절 ‘네 자손이라 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갈3:16절 말씀에서 ‘이 약속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제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고 한 것입니다.
(1)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했습니다. 창12:1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이에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가라고 하신 땅이 어디인지조차 몰랐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길을 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아브라함의 순종을 기뻐하셨습니다.
(2) 아브라함의 순종은 하나님께 대한 그의 믿음에서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희 친척 본토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세상에 소망을 두고 살아온 우리의 생활이 새롭게 그 방향을 바꾸어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새로운 땅, 하나님 나라를 소망으로 삼고 살아갈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고향을 떠난 것처럼 우리의 신앙 생활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일에 근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2.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를 얻었다.
성경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으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음에 이를 의로 여기셨다’고 하신 말씀대로 믿음으로 의를 얻은 사람입니다. 행위로 말하면 하나님 앞에 아브라함만큼 온전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의를 얻은 것은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믿음으로였다고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통하여 보여 주신 그리스도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이 믿음을 의로 여기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네 후사’라고 약속하셨는데 이 후사한 이삭만을 가리킨 것이 아니라 이삭을 통해서 주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갈3:16절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시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통하여 보여 주신 그리스도의 언약을 믿었으니 아브라함의 이 믿음을 의로 여기신 것입니다. 요8:56절에서 주님은 바리새인들에게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처럼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본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일생 일대의 큰 시험이 왔습니다. 그것은 백세에 나은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으로 데려가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내려진 것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에게 왜 이 같은 시험이 온 것인가에 대하여 성경적으로 깨달아야 합니다. 17-19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 ).
하나님은 이삭을 통해서 아브라함의 사랑을 시험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한 순종의 한계를 아브라함에게 가장 귀한 것인 이삭을 통해서 알려고 하신 것입니다. 이 시험에 아브라함은 합격했습니다.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줄 아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음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부활의 신앙을 시험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믿음은 부활에 대한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단에 바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이삭을 다시 살리실 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19절에서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아브라함은 이삭을 하나님의 명을 따라 제단에 바친 것입니다.
결론 :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으며 하나님은 그의 믿음대로 그에게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을 형성하셨으며 이삭의 씨로 예수 그리스도를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삼아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도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의 생활을 이루시므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을 아브라함과 함께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70) 본향을 바라보며 살아간 믿음의 선진들
(히브리서 11:13-16)
본문 13절로 16절까지는 이들 구약시대의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에 대해 그들이 소망으로 삼고 살아온 근원적인 근거에 대해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표현하면 이들 믿음의 선진들의 소망은 이 땅에 둔 생활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비하신 하늘의 한 성, 다시 말하면 하늘의 예루살렘 성으로 곧 천국을 소망으로 살아간 것임을 밝혀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약속을 받지 못했지만 그 약속을 멀리서 바라보고 환영했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는 생활을 했는데 그 본향이란 하나님이 저희를 위하여 하늘에 예비한 성이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같은 말씀을 통해서 구약 시대에 살아간 사람들 중에도 믿음을 따라 천국에 올라간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1. 믿음을 따라 죽은 선진들
13절에서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들이 따랐다고 하는 믿음이란 무엇에 대한 믿음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한 성으로 표현된 천국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했다’고 했는데 그들이 그들의 생애 중에 멀리서 보고 환영한 것이란 그들이 찾아갈 본향으로서의 천국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약속은 받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살아서 이 같은 약속의 성취를 보지 못한 채 죽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 같은 표현은 아벨이나 에녹이나 노아나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 등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실행할 것이라고 하는 믿음을 가지고 그들의 생애를 살아간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특히 아브라함의 경우에서 10절 말씀을 보면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는 말씀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 나라의 소망 가운데 이삭과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는 생활을 하면서 그 나라를 동경하고 그 나라가 반드시 성취될 것으로 믿은 것입니다.
이 같은 선진들의 증거는 무엇을 말씀해 주는 것입니까? 우리는 그들보다 더 확실한 약속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가운데 요14:2-33절 말씀에서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구약 성도들에게는 이런 확실하고 분명한 약속이 없었지만 믿음으로 그 나라를 소망하고 그들의 삶의 목적을 그 나라에 두었던 것입니다.
2. 우리가 본 받아야 할 선진들의 믿음
이 같은 믿음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의 신앙에 큰 교훈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을 먼 장래의 일로 생각하는 나머지 재림의 준비나 신부의 단장에 대해서는 듣기조차 싫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교훈해 주시는 것입니까? 마24:42절에서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고 하셨으며 44절에서 이어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눅21:36절에서는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말씀으로 미루어보아 우리는 믿음의 선진들처럼 비록 우리의 생애 중에 주의 재림이 없을지라도 그것을 바라고 재림의 주를 영접할 것을 믿음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13절에서 이들은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늘에 예비된 본향을 믿음으로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그들에게는 그들이 살아가고 있는 이 땅에서의 생애를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했다는 것입니다. 외국인과 나그네라는 말은 자신들이 살아가는 이 땅이 자신들의 본향이 아니라 장차 본향에 들어가는 나그네길이란 것을 의미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사실을 거듭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15절에서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다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만약 이들이 자신들이 등지고 나온 고향 땅이 본향이라고 한다면 그들은 언제인가 그곳에 돌아갈 기회가 주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소망한 본향은 그들이 떠나온 고향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비하신 하늘의 본향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16절에서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 땅에 있는 우리의 본향보다 더 나은 본향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 본향은 이 땅에 있어서 우리가 돌아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이라고 본향이 있는 곳을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들이 사모한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 본향이 눈에 보이는 곳이거나 지금 우리가 들어갈 수 있는 곳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그 말씀으로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곳은 우리들이 믿음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실상’이요 ‘증거’로써 확실하게 잡을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 : 바울은 이 성에 대하여 고후5:8절에서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고 말씀해 주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하늘의 본향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장막과는 전혀 다른 하늘의 본향인 사실을 믿으시고 그 나라에 소망을 두시기 바랍니다.
(71) 이삭의 믿음
(히브리서 11:20)
본문 20절에서 이삭의 믿음에 대하여 매우 간략히 기술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오는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시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과 하나님은 약속 관계로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에덴에서도 이 약속으로 인격적인 관계가 이루어졌습니다. 그 후 하나님은 죄로 죽게 된 인생에게 그 아들에 대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때, 언약의 백성이 되어 그 언약의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언약을 믿은 이삭
이삭의 생애 중에는 훌륭한 일이 많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신 믿음은 이삭이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두 아들에게 그 언약에 따라 축복하였다는 데 있습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태어난 아들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원래 무자한 처지였습니다. 아브라함이 75세시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 언약에 의하여 이삭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 남녀간의 단순한 결합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결정되며 태어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들의 예정에 대해서 ‘창세 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정하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스마엘과 이삭을 아들로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스마엘은 약속 없이 태어난 아들이요 이삭만이 약속을 따라 태어났습니다. 이스마엘은 육신의 자녀로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에게는 약속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기업의 후사가 될 수 없습니다.
이삭의 믿음에 대하여 창세기에는 자세히 밝혀진 것이 없습니다. 다만 그의 신앙적인 면을 보여 주는 몇몇 사건을 볼 수 있을 뿐입니다. 이삭이 어렸을 때 아버지의 손에 끌려 자신이 하나님께 드리는 번제 제물 인줄을 모르고 모리아 산에 올랐습니다. 산에 올라가 자기를 제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려고 할 때 이삭은 아버지께 반항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노쇠한 늙은이요 이삭은 기력이 왕성한 소년이었습니다. 아버지께 반항하고 그 손을 뿌리쳐 도망칠 수도 있었지만 아버지 손에 순순히 자신을 맡겨 밧줄로 묶게 하고 나무 덤이 위에 올려놓게 한 것입니다. 이처럼 이삭은 어려서부터 순종의 신앙을 가진 믿음의 아들이었고 하나님께서 자기를 제물로 원하신다면 제물로 바치기를 원했던 아름다운 믿음의 아들이었습니다.
2. 이삭이 아들에게 한 축복 기도
이삭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경건한 생활을 하며 하나님을 믿으며 자라 온 이삭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아들이 없었습니다. 이삭은 하나님께 기도하여 야곱과 에서를 낳았습니다. 창25:21절 말씀을 보면 ‘이삭이 그 아내가 잉태치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함에 여호와께서 그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 아내 리브가가 잉태하였다’고 했습니다.
이삭은 그 성품이 심히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 창26장을 보면 이삭이 아비멜렉을 떠나 그랄 골짜기로 가서 장막을 칠 때 아브라함이 팠던 우물을 다시 팠습니다. 그런데 이삭을 시기하는 그랄 목자들이 이삭의 목자들과 싸우게 되었을 때 이삭에게는 그들을 물리칠 힘이 있었지만 싸우지 않고 다른 곳에 이르러 우물을 팠습니다.
이삭은 노년에 이르러 자기 아들들에게 축복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삭은 두 쌍둥이 아들 가운데 야곱보다 에서를 더 좋아했습니다. 에서가 장남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머니 리브가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동생인 야곱을 더 사랑했습니다. 이삭은 에서에게 이르기를 ‘너는 나를 위하여 사냥하여 가져다가 별미를 만들어 나로 먹게 하여 죽기 전에 여호와 앞에서 네게 축복하게 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이삭의 계획을 수포로 돌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어머니 리브가의 작전으로 야곱으로 하여금 에서와 같은 모습으로 분장시켜 눈이 어두운 남편을 속여 장자의 축복을 받게 했습니다.
아마 이삭은 하나님께서 이삭보다 야곱을 더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러나 그 이유로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긴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언약을 믿음으로 두 아들에게 축복 기도를 한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장남의 약속이 야곱에게로 돌아갔을 때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두려운 마음으로 장자의 축복이 이삭에게로 돌아갔음을 선언하게 된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이삭의 집에 난데없는 환난이 닥쳤습니다. 에서가 야곱을 미워하여 죽이려 하기 때문에 이삭과 리브가는 야곱을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피신시킨 것입니다.
결론 : 이삭의 위대함은 그의 믿음과 순종과 기도에서 온 것입니다. 그리고 이삭의 이런 인간성과 믿음은 그 아버지 아브라함의 신앙적 유산을 이어받은 것입니다. 이삭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야 합니다. 이 믿음이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 약속은 우리의 소망이기도 합니다. 보이지 않고 잡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실상으로 바라보고 증거로 잡으시기 바랍니다.
(72) 야곱의 믿음
(히브리서 11:21)
본문 21절에서 야곱의 믿음에 대하여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야곱의 생애는 파란만장했지만 그의 임종시에 가서 요셉의 각 아들들에게 믿음으로 축복해 주었고 지팡이에 의지하여 하나님께 경배하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1. 야곱의 생애
우리가 성경에서 야곱이란 사람을 대할 때 야곱은 너무나도 평범한 인물이라는 데 놀라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은 이삭의 가정에 쌍둥이로 태어난 형제 중 동생입니다. 어머니 리브가는 아이를 생산치 못하여 아기가 없자 이삭이 하나님께 기도하여 얻은 아들입니다. 이들 쌍둥이는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싸웠는데 역대로 그 자손들이 싸워 왔으며 이 싸움은 인류의 종말에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야곱은 해산할 때 형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나왔다 하여 부쳐진 이름인데 그 이름의 뜻은 ‘발꿈치를 잡는다’는 뜻입니다.
야곱이라 하면 얻어맞는 사람의 전형적인 인물로 등장합니다.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할 때 연단을 통하여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을 만드는 징계의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형을 제치고 형이 받을 축복을 자기가 받으려 고하는 이기적 성품, 팥죽으로 장자의 명분을 자기 것으로 만든 욕심, 아버지를 속인 간교한 행동 등은 하나님이 그가 태어나기 이전에 그에게 약속한 축복을 받기에 부족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야곱의 전 생애를 통해서 하나님의 언약을 받기에 합당한 그릇으로 만드시어 결국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사실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2. 야곱의 연단
야곱은 자신을 죽이려는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하란에 있는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가게 되었습니다. 그가 괴나리봇짐을 지고 벧엘에 이르렀을 때 꿈에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나타나시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는 언약을 주셨고 야곱은 그 자리에 돌 단을 쌓고 그 위에 기름을 부어 하나님께 서원 하기를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야곱이 라반의 집에서 살아갈 동안 이 약속을 지키지 않으므로 하나님께서 라반으로 야곱을 미워하게 하셨고 그 집을 떠나게 하신 것입니다. 야곱은 형을 골탕먹인 대가로 라반으로부터 품삯을 자주 변경 받았으며, 그리고 아버지를 속인 대가로 라반으로부터 20년간이나 속임을 받는 생애를 살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 야곱이 결정적인 순간을 만나게 되었는데 라반의 집에서 도망하여 고향으로 가는 얍복강 나루터에서 하나님에 의해 환도 뼈를 꺾임으로 깨져 야곱이란 이름을 ‘이스라엘’로 고침 받은 것입니다.
여기서 야곱의 생애는 새롭게 전개되며 육신적인 야곱은 죽고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하심을 받는 새사람 이스라엘로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 같은 야곱의 변화는 오랜 세월에 걸친 하나님의 연단의 손에 의해 가능했습니다. 인생의 어려운 고비에서 시련을 받고 계시는 분은 그 시련이 하나님의 손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알고 자기를 연단하여 새로운 사람으로 만드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본문에서 말씀해 주시는 야곱의 믿음이란 요셉의 아들들에게 준 믿음의 축복기도를 말합니다. 야곱은 형 므낫세와 동생 에브라임에게 기도할 때 손을 어긋맞겨 기도했습니다. 오른손을 동생에게 올려놓고 기도한 것입니다. 에브라임은 옛날 자기처럼 형을 팥죽으로 기만하지도 않았고 아버지를 속이지도 아니했지만 야곱은 손자들에게 기도해 줄 때 동생에게 장자의 축복 기도를 해 준 것입니다. 이것은 야곱의 믿음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이 야곱의 기도대로 에브라림은 이스라엘의 12지파에 들어가는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다른 또하나의 야곱의 믿음은 그가 고센 땅에 온지 17년만에 자신의 주검이 가까이 왔을 때 자기 몸의 장사를 위해 애굽 땅에 매장하지 말고 조상의 무덤에 묻히기로 아들에게 맹세시킨 일입니다. 그리고 야곱은 지팡이를 의지하여 하나님께 경배하고 죽은 것입니다. 여기서 야곱의 믿음이 드러났습니다.
결론 : 이삭의 인생에 비하여 야곱의 생애는 너무나도 험준하고 굴곡이 많았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야곱에게 반드시 그의 인생의 변화를 가져오는 하나님의 역사가 있었던 것처럼 우리의 생애에도 하나님의 손길에 의하여 야곱과 같은 우리들의 변화를 반드시 이루신다는 사실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생활을 찾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야곱의 인생 길을 걷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오늘 주시는 말씀을 통해서 야곱의 인생을 배워 환도 뼈가 부러진 연후에 가서야 변화되는 그런 방법이 아니라 내가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그 은혜에 감사하여 내 몸을 주님께 헌신하므로 야곱으로부터 이스라엘로 변화 받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73) 요셉의 믿음
(히브리서 11:22)
요셉은 야곱의 11번째 아들입니다.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두 딸 레아와 라헬을 아내로 맞았고 또 그들이 거느리고 있는 몸종들을 첩으로 맞아 4명의 부인을 거느리고 살았습니다. 그들의 몸에서 나온 아들들이 12명으로 이들로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세운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야곱의 가장 큰사랑을 입고 있었던 아내 라헬의 아들로 태어났고 라헬은 요셉 밑으로 베냐민을 해산하다가 아기만 살고 어머니는 그만 죽었습니다.
1. 요셉에게 나타내신 하나님의 섭리
우리는 요셉의 생애에서 너무나도 분명한 하나님의 섭리하시는 뜻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요셉이란 사람의 일생은 완전히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에 의하여 이뤄진다고 하는 사실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요셉은 그의 온 생애를 통하여 오직 하나님만을 믿고 의뢰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요셉의 믿음은 어디서 온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꿈을 통해서 그에게 약속하셨는데 요셉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약속을 소망으로 삼고 그 소망을 믿음으로 그의 생애를 살아간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꿈이 있어야 합니다. 이 꿈은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그 말씀을 믿는 사람들에게 주십니다. 우리는 말씀으로 주신 꿈을 소망으로 삼고 하나님을 의뢰하여 자신의 인생을 살아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그 꿈을 우리에게 이루어 주시기 위해 요셉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애를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꿈은 하나님이 이루어 주시기 때문에 하나님만 믿고 의뢰해야 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은 요셉에게 어떻게 꿈을 이루게 하셨는가?
요셉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꿈은 곡식 단과 하늘의 별들에 관한 것으로 자기가 모든 형제들의 아비가 될 일과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가 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형의 곡식 단들이 요셉에게 절을 했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12지파들의 양식을 요셉이 먹일 일에 대한 것이며 하늘의 있는 형들의 12별들이 자기별에게 경배한 것은 요셉이 모든 형들 위에 뛰어난 왕이 될 것이란 꿈으로 하나님은 이런 꿈을 이루시기 위해 요셉의 온 생애를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요셉에게 주신 꿈은 쉽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으로 몇 번인가 주검을 초월한 위험한 시련을 겪게 하셨으며 유혹을 이기게 하시고 인내로 기다리게 하시는 방법을 통해서 그를 애굽의 바로 왕다움의 치리자로 삼으심으로 이루신 것입니다.
우리는 요셉의 믿음의 생애에서 두 가지 사실을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로 나의 모든 일은 내가 하려는 내 의도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될 것임을 알고 그 일이 실패해도 낙심하거나 원망하지 말아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서 어처구니없는 모함을 받아 감옥에 들어갔지만 낙심하거나 원망치 아니했습니다. 그가 그 오랜 감옥 생활 속에서도 모범적인 죄수 생활을 했으며 모든 사람에게 두터운 신망을 받았습니다. 요셉의 믿음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그 때를 기다린 것입니다. 다음 두 번째는 요셉은 그 어떤 환경 속에서도 자기가 해야 할 바를 성실하게 했으며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 그 결과는 하나님께 맡긴 것입니다. 잠16:3절에서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고 하셨습니다. 요셉은 이런 신앙을 가지고 애굽에서 자신의 길을 오직 하나님께 의뢰하여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그의 꿈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요셉의 믿음에 대해서 그의 임종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떠날 것과 자기 해골에 대한 조치에 대하여 명했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일에 대하여 창50장에 마지막 절에 가서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요셉이 그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를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정녕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애굽은 이스라엘의 언약의 땅이 아닙니다. 요셉은 애굽에서 말할 수 없는 영광을 누렸지만 그 땅이 영원한 도성이 아니고 하나님이 약속한 땅은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가나안에 있음을 믿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곳에서 정착하려고 하지 말고 이 땅을 떠나라고 명한 것입니다. 애굽에서 영광을 누리고 부요한 생애를 살아간다고 그곳에 소망을 두고 삶의 터전을 삼아서는 안됩니다.
요셉의 믿음은 견고하고 단호했습니다. 자신은 애굽에서 총리의 자리에까지 올라가 큰 영광을 누렸지만 그의 마음은 항상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 애굽 땅에서 살았지만 자신이 죽은 후, 그 해골만이라도 하나님의 언약의 땅에 매장하리라고 결심하여 이스라엘에게 명한 것입니다.
결론 : 하나님은 이런 요셉의 믿음을 높이 평가하셨습니다. 우리가 요셉의 생애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우리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기만 하면 우리의 생애 주변의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그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주는 견인차 역할을 한다는 사실입니다.
(74) 모세의 믿음
(히브리서 11:23-26)
본문에는 모세의 부모와 모세의 믿음이 나옵니다. 천하의 큰 흉년을 만나 야곱이 요셉을 따라 애굽에 왔을 때, 요셉의 식구까지 모두 70명이었는데 400년이 지나자 60만 명이 되었습니다. 그 후 요셉도 죽었고 요셉을 아는 애굽의 왕들도 죽었습니다. 애굽의 새로운 왕이 치리 할 때, 수효가 많아진 이스라엘 민족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노예로 부리게 되었고 아들을 낳을 수 없도록 법으로 조치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비밀리에 아들들을 낳았고 슬기로운 이스라엘 산파들은 이스라엘 여자들의 생리적인 핑계를 대어 이스라엘 남자아이들을 살려내어 인구를 번식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런 중에 레위족인 그랏의 아들 아므람이 요게벳을 아내로 맞아 모세을 낳은 것입니다. 모세의 부모는 모세를 더 이상 집에서 키울 수 없게 되자 갈대 상자에 넣어 강물에 떠내려가게 하므로 때마침 강가에서 목욕을 하든 바로의 딸 공주에게 발견되어 공주의 아들로 키우게 된 것입니다. 모세란 이름은 ‘물에서 건졌다’는 뜻으로 이 이름은 바로의 공주가 지어 준 이름입니다.
1. 모세의 믿음
모세는 어려서부터 유모로 젖을 먹였던 어머니로부터 자기가 이스라엘 사람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고 동족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하루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노예로 일하는 공사장에 갔다가 동족을 학대하는 애굽 사람을 죽이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이 탄로가 나게 되어 애굽에서 도망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는 미디안 지방으로 도망가 그곳에서 목축업을 하고 있는 이드로의 집 머슴으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이도로의 딸과 결혼하게 되었고 40여 년간을 목동 생활을 계속해 오다가 호렙산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모세의 믿음에 대해 24절 이하에서 몇 가지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란 칭함을 거절했다고 했습니다. 모세는 세상의 영광에 도취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태어나게 하신 것은 그로 애굽의 왕이 되게 하시려는 뜻에서가 아니라 그를 통해서 장차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 가나안으로 인도하시려는 뜻에서인 것입니다.
다음에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했다고 했습니다. 모세는 자기가 어떤 생활을 해야 하며 어떤 생애를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삶의 목적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까?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에서 누리는 낙은 잠깐동안만 지속됩니다. 하나님이 없는 낙은 어떤 낙이든 죄악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낙보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로 받게 되는 고난을 더 귀히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목적을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그리스도를 믿을 뿐 아니라 그를 위해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일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일은 그리스도의 영광에 동참하는 일이란 사실입니다.
2.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능욕
그런데 26절 말씀에 모세가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이끌어 내신 분은 여호와의 사자로 이 분은 곧 그리스도이십니다. 성경에는 비록 신약에서 뿐 아니라 구약에서도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백성들과 동행하시며 인도하시는 분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풀무불 속에 들어갔을 때 그 안에 또다른 한 명이 그들과 함께 거닐고 있었는데 그를 가리켜 신의 아들과 같다고 했습니다. 이 분은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모세는 장차 될 일에 대한 예언에서 이스라엘에게 나타날 메시야에 대하여 ‘나 같은 선지자’란 표현을 썼습니다. 모세는 이 때에 이미 그리스도의 존재에 대하여 알고 있었으며 자신이 하는 그 모든 일이 오직 그 분을 위한 일임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처럼 애굽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재물보다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능욕을 더 기쁘게 여겼다고 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다음 구절에 나와 있는 대로 ‘이는 상 주심을 바라보임이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같은 모세의 믿음을 상기하시면서 마5:11절에서 이처럼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모세는 눈앞에 있는 이 세상 상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하늘에 예비된 더 나은 상을 주시는 그리스도의 상을 바라본 것입니다.
결론 :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비스가산 꼭대기에 올라가 가나안 땅을 바라보는 가운데 하나님이 그의 생명을 거두어 가셨습니다. 모세는 믿음을 가지고 그의 생애를 살아간 사람입니다. 우리들에게도 모세와 같은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상주시는 이를 바라볼 수 있는 믿음이 있는 사람은 승리적인 생애를 살 수 있습니다.
(75) 애굽을 떠나온 믿음
(히브리서 11:27-29)
27절부터 29절까지에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이끌고 나올 당시의 모세의 위대한 믿음을
몇 가지로 구분해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모세가 애굽을 떠나 올 때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유월절의 예를 정하였다고 한 것입니다.
다음에 믿음으로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넌 사실에 대하여 언급해 주고 있습니다.
1. 애굽을 떠난 담대한 믿음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나님의 소명을 받았을 때, 그는 이 소명을 기피하려고 했습니다. 왜 그러냐하면 모세에게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애굽 땅에 정착하고 있는 이스라엘 벡상들을 설득하여 애굽을 떠나게 하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었고 또 이스라엘 백성들을 자신의 노예로 부려먹고 있는 애굽 사람들의 손에서 빼내는 일은 더욱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에게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시고 애굽에 있는 동족에게 가서 말하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고 하라는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그리고 모세의 손에 있는 지팡이를 던지라고 하시고 그 지팡이로 뱀이 되게 하시고 그의 손을 폼에 넣었다가 내어보니 문둥병이 발하게 하시는 등, 모세에게 이적의 권능을 주셨습니다.
이제 모세는 하나님의 소명을 받고 담대한 믿음으로 애굽에 가서 바로 왕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바로 왕의 협박과 핍박을 견뎌내고 열 재앙의 이적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이끌어 낸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심을 믿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았으며 자기를 이스라엘의 인도자로 섭리하셨음을 알았습니다. 모세는 모든 일을 믿음으로 행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믿음을 기뻐하시고 친구처럼 모세를 만나서 이야기 하셨으며 모세를 사람 앞에서 하나님처럼 높여 주셨습니다.
2.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를 정하였다.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날 수 있게 된 결정적인 동기는 유월절의 어린양의 피로 말미암아서였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왕의 마음을 강퍅하게 만드시고 결과적으로 열 번째 재앙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권능을 바라볼 수 있게 하셨습니다. 열 번째 재앙이 애굽에 사는 모든 가정의 장자를 죽이는 재앙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유월절을 정하여 어린양을 잡아 그 피로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게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죽음의 천사가 피를 바른 집은 장자를 죽이지 않고 그냥 넘어가리라는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모세는 이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로 말씀대로 어린양을 잡아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는 유월절을 지키게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 드렸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양을 잡아 하나님이 명하신 말씀대로 양의 피로 문설주와 인방에 바른 것입니다.
이로 애굽의 모든 장자들은 그날 밤 죽임을 당했지만 고센 땅에 살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무사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예를 유월절의 영원한 절기로 정한 것입니다. 이런 유월절의 예는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았을 때 제사제도가 생겨나게 되었고 이런 유월절의 예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속죄의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의 생명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를 이루신 것입니다.
3. 홍해를 건넌 믿음
모세의 인도를 받고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 주변에 장막을 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왕의 정예군이 이스라엘을 뒤쫓아 왔습니다. 앞에는 홍해요 뒤에는 바로 왕의 군대의 추격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 같이 두려운 일이 그들의 눈앞에 이르렀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려움으로 떨었습니다. 어찌할 바를 몰라 모세를 원망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믿음으로 말하기를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믿음을 보시고 모세에게 명하여 그의 손에 있는 지팡이를 홍해로 내밀게 하셨습니다. 이 때 하나님은 홍해를 갈라지게 하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바다를 믿음으로 건너간 것입니다. 그러나 애굽 군대는 갈라진 홍해 바다에 들어가 뒤쫓기는 했지만 그들은 물에 엄몰되어 죽었습니다.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믿음이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홍해를 건넜기 때문이지만 애굽 군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습니다. 믿음의 근거도 없이 홍해를 건너다가 물이 수장되어 버린 것입니다.
믿음의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삼고 기도할 때 하나님의 응답이 내려집니다. 그 말씀을 근거로 순종할 때 그 말씀대로 이루어집니다.
결론 : 우리들의 생애에는 간혹 홍해를 건너가야 하는 위험이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무모하게 자기 생각대로 홍해를 건너가려다 간 애굽 군대처럼 홍해를 건너는 것이 아니라 그 물 속에 엄몰되어 수장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애에 홍해를 만났을 때 믿음으로 건너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이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히브리서 12장 (83 - 92)
◆ 밤중소리 02-01 | VIEW : 691
(83) 벗어버려야 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히브리서 12:1-2)
(84)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히브리서 12:1-2)
(85)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히브리서 12:3-4)
(86) 참 아들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징계(히브리서 12:5-13)
(87) 화평을 좇으라(히브리서 12:14)
(88) 거룩함을 좇으라(히브리서 12:14)
(89)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히브리서 12:15-17)
(90)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히브리서 12:15-17)
(91) 우리의 이른 곳(히브리서 12:18-24)
(92) 경건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섬기자(히브리서 12:25-29)
(83) 벗어버려야 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
(히브리서 12:1-2)
11장에서 믿음의 선진들의 위대한 신앙의 행적을 살핀 히브리서 저자는 이런 사실들을 그들 신앙인 들의 뒤를 따라 갈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의 생활에 대한 교훈과 연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를 기록한 저자는 특별히 그리스도인의 신앙 생활을 경주와 연결시켜 11장의 믿음의 선배들과 한 경주장을 달린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그런 경주를 제대로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특히 이 경주에서 저자가 강조하는 바가 두 가지 있는데 이 경주를 방해하는 요소가 바로 우리의 몸을 지배하는 죄악이라는 사실과 다른 한 가지는 하나님은 우리를 얽매이게 하고 믿음의 경주장을 달리는 일에 결정적으로 장애 요소가 되는 이 죄를 친히 다스리시기 위해 징계를 내리시며 이 징계의 결과 우리는 그 경주를 끝까지 달릴 수 있다고 하는 징계의 유익에 대해 누누이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우리 앞에 당한 경주
1절에서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달려가는 믿음의 생애는 외로운 투쟁이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 증거도 증인도 없는 허공을 달리는 무익한 경주를 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허다한 증인들은 우리의 믿음의 생활에 증거로 세울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그들이 걸어간 믿음의 생애를 본받는 일은 결코 허무한 일이 아니며 부끄러울 일이 아닌 것입니다. 여기서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는 일에 벗어버려야 할 일과 바라보아야 할 일에 대하여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함에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무거운 짐이 되는 대상은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요일2:15절에서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을 사랑하면 우리의 발목이 세상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롯의 시대나 노아의 시대 사람들이 이런 생활을 했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고 우리 주님께서 경종하신 것입니다. 롯의 아내는 세상 것을 사랑하는 나머지 뒤를 돌아보다가 구원의 결정적인 자리에서 소금기둥으로 굳어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씨뿌리는 비유에서 가시떨기에 뿌려진 씨앗에 대하여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은 우리의 경주를 달리지 못하게 하는 무거운 짐이 되는 것입니다. 생명의 길을 찾기 위해 주님을 찾아 나온 한 부자 청년은 그의 재물이 그에게 무서운 짐이 되어 근심하며 주님을 떠났습니다.
2.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려야 한다.
다음에 벗어버려야 할 것이 ‘얽매이기 쉬운 것’인데 이 문제에 대해서는 그 대상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얽매이기 쉬운 죄’라고 말씀했습니다. 얽매인다는 말은 얽어매어 그 자리에서 빠져 나올 수 없도록 한다는 뜻인 것입니다. 바로 죄가 그런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지난날 우리는 죄의 종이었습니다. 죄가 시키는 대로 끌려 다녔습니다. 죄가 명하는 대로 순종했습니다. 그 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이 죄의 종의 자리에서 벗어났으며 죄에서 해방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죄는 멀리 떠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지배했던 죄의 권세는 사라졌지만 죄의 세력은 우리의 육신의 정욕과 탐심 가운데서 우리를 유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죄가 우리를 사로잡아 우리들로 믿음의 경주를 하지 못하게 그 가운데 얽매이게 하는 것입니다. 죄는 우리를 이끌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끌고 가지 못합니다. 죄는 우리를 지옥으로 이끌어 갈 수 없습니다. 그런 권세는 이미 사라진 것입니다.
그러나 죄는 우리들에게서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닙니다. 우리를 지배하고 부려먹을 권세는 분명 상실하여 종이 호랑이가 되었지만 먹지 못할 곶감 찔러나 본다는 격으로 신앙 생활의 방해꾼으로 우리 주변을 맴돌면서 우리의 경주에 걸림돌 구실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죄의 함정에 빠져 그 가운데 얽매인바 되면 더 이상 경주를 계속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죄를 벗어버리는 일에 대하여 4절에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죄는 대항하여 싸워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죄의 권세를 이기신 주님의 생명이 있습니다. 우리는 죄에 굴복할 사람들이 아니요 죄와 더불어 맞서 싸울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신분은 이미 결정된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 싸워 이길 수 있는 권세가 주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고 죄를 대적해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경주장을 달려야 할 경주자들입니다. 이 경주장의 목표는 주님이 계시는 천국입니다. 우리의 소망의 완성을 이루는 그 나라에 가기까지 이 경주를 달리려면 먼저 세상 것으로 무거운 짐이 된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과 우리를 얽매이게 하여 이 경주장의 경주를 방해하는 죄를 벗어 버려야 합니다. 이 두 가지를 벗어버리고 이 경주에 끝까지 달려가 소망을 이룰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84)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
(히브리서 12:1-2)
히브리서를 기록한 저자는 1절에서 우리 앞에 당한 믿음의 경주를 위해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경주해야 할 것을 말씀해 주고 2절에서 우리가 이처럼 달려갈 믿음의 경주의 목표점에 대하여 밝히고 있습니다. 경주에는 분명한 목표지점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목표가 잘못됐다면 아무리 잘 달려가도 그 경주는 허사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1. 믿음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
히브리서 기자는 2절에서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적 경주의 목표를 예수께 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을 경주의 목표로 삼고 달려가려면 그 분이 달려가신 길을 따라 가야 할 것임을 밝히면서 그가 걸으셨던 길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가리켜 ‘믿음의 주’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주란 단어는 지배한다는 의미가 있는 말입니다. 믿음을 지배하는 분으로 우리의 믿음은 오직 그 분에게만 있다는 뜻입니다. 선진들이 증거와 실상으로 삼고 달려온 믿음도 그 분께 목표를 두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의 목표도 그 분께만 있는 것입니다. 다른 존재를 목표로 삼고 경주한다면 그 경주는 올바른 믿음의 경주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진리로 오신 분이시며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길이 없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 분 예수를 우리의 믿음의 주로 삼는다면 우리의 생애는 오직 그 분만을 위한 삶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마10:37절에서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삶의 승리가 있는 것입니다.
2. 온전케 하시는 분이신 예수님
다음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했습니다. 믿음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은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분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만이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의 주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여기서 온전케 하신다는 말은 자기 스스로의 온전을 의미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분을 믿는 사람들을 온전케 하시는 분이란 뜻입니다. 우리는 그 분을 왜 믿는 것입니까?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예수는 우리의 죄를 온전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죄를 단번에 없이해 주셨습니다. 그의 피는 우리의 죄를 소멸하셨을 뿐 아니라 영원히 말소해 주시므로 죄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는 우리의 구원을 온전케 하시는 분입니다. 히7:25절에서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 분을 믿는 일은 이미 우리가 바라는 모든 것들을 보장받는 일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예수님은 요5:24절에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고 하셨습니다.
그 뿐 아니라 예수를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진다고 하신 것입니다. ‘영접하는 자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이 분 예수만이 홀로 믿음의 주가 되십니다. 이 분 외에는 다른 어떤 믿음의 주도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행4:12절에서 베드로가 말하기를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고 한 것입니다. 이 분만이 우리의 믿음의 경주의 목표가 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바라보자’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계속되는 말씀에서 이 분 예수가 우리를 온전케 하시기 위해 어떤 일을 하셨는가에 대하여 말씀해 주시고 우리도 그 분을 본 받아 믿음의 경주장을 달리는 일에 장애 되는 모든 어려움을 인내로써 이겨내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않으셨느니라.’ 아멘. 예수님이 바라보신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이란 물론 이 일을 감당하심으로 얻으신 그의 말할 수 없는 영광을 가리킵니다. 이 일에 대해 빌2:6절 이하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영광을 바라보시면서 그가 당하실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셨다고 하셨습니다.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셨다는 말은 부끄러움을 부끄럽다고 마음에 새기지 아니했다는 뜻입니다. 믿음의 선진들도 그들이 겪은 시련과 핍박을 개의치 않았던 것입니다. 히11:35절에서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마5:11-12절에서 하신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결론 :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예수, 이 분을 바라보면서 믿음의 경주장을 달려가되 그 분이 앞에 있는 영광을 바라보시며 십자가의 부끄러움까지도 개의치 않으신 그 믿음을 본 받아 그 분과 함께 누릴 영광을 소망으로 바라보면서 끝까지 인내로써 달려가야 하는 것입니다.
(85)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히브리서 12:3-4)
3절부터는 목표점을 향하여 달려가야 할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생애에 대하여 인내로써 승리하기 위해 우리의 믿음의 주시며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본으로 삼으라는 권면의 말씀으로 교훈해 주십니다. 이 일에 대하여 두 가지로 말씀해 주시는데 하나는 죄와 싸우는 일이요, 하나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일입니다.
1.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3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한 생애 달려갈 경주장은 우리의 삶에 피곤을 주며 낙심할 수밖에 없는 어려운 일들을 만나게 합니다. 우리가 악과 더불어 싸울 때 그 싸움의 기간이 길고 상대방이 악랄할 때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피곤에 지치게 되는 경우를 많이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히브리서 기자는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앞에 오는 모든 어려움을 인내로 참으셨습니다. 2절에서 이 일에 대하여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의 경주장을 달려가면서 우리 앞에 부닥치는 이런 난관들을 만났을 때 이 분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승리의 비결입니다. 우리는 그 분이 겪으신 고난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본체이신 그가 종의 형체로 세상에 오신 일, 그가 자기를 세상에 보내신 이에게 죽도록 충성하신 일, 십자가에서 겪으신 그의 괴로움은 우리로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해 본으로 보여 주신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2. 그리스도인들이 이겨야 할 악의 세력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은 평안한 중에 주님 앞에 이르기를 바라는 생활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애에는 고난과 시련과 징계와 핍박이 필연적으로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럴 때 우리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에 대하여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하며 또 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일은 우리의 생애 중에 주를 위해 받는 고난이 많으면 많을수록 하늘에서 받는 상급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11:35절에서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했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베드로 사도는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 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의 대가가 클수록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그로부터 받는 즐거움과 기쁨이 더욱 큰 것입니다. 주님은 이런 놀랄 만한 상급을 준비하시고 우리에게 그 영광에 동참케 하시기 위해 약간의 시련을 주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일에 대하여 롬8:17절에서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고후4:17절에서는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라’고 말씀해 주었습니다. 우리가 받을 영광에는 이 땅에서의 고난이 뒤따라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혀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려운 일을 당하고 만날 때마다 피곤하여 낙심될 그런 시기에도 결코 좌절하지 말고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 예수를 생각하므로 이겨내야 하는 것입니다.
4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피 흘리기까지란 말은 순교의 자리에 이르기까지란 뜻입니다. 히브리서를 받는 교회의 성도들에게 이르기를 그들이 악의 세력에 의해 많은 시련과 연단을 받고 핍박 가운데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러나 아직 피를 흘리는 순교의 지경에까지는 이르지 아니한 것이 아니냐는 말로 힘을 내라고 격려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11장에서 거론한 믿음의 선진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고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다’는 것을 상기시키면서 인내로써 끝까지 싸울 것을 격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4절에 나오는 죄와 싸운다는 말은 두 가지 의미가 주어져 있습니다. 하나는 밖으로부터 오는 죄와의 싸움으로 그리스도인들을 대적하는 악의 세력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하나는 우리의 안에서 우리를 찌르고 우리의 믿음의 경주를 방해하는 요인이 되는 죄를 말합니다. 이런 죄와의 싸움에도 게을리 하면 안돼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가 달려가야 할 믿음의 경주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반드시 달려가야 할 경주입니다. 이 경주의 낙오자가 된다면 우리의 소망은 허사가 되며 우리는 아무 것도 얻을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목적은 우리로 구원을 얻게 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경주장에서 만나는 이 같은 고난을 인내로써 견디고 이기려면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싸우라고 하신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할 것입니다.
(86) 참 아들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징계
(히브리서 12:5-13)
5절부터는 하나님의 징계의 유익에 대하여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징계가 그리스도인들을 온전케 하는 일에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에 대하여 강조해 주고 있습니다. 징계가 없이는 믿음의 경주장을 달리는 일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또 징계를 받을 때 우리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에 대하여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1.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히12장에 징계에 관한 문제가 제기된 일은 이 글을 받아 읽는 교회의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징계를 통해서 많은 시련을 받고 있으며 또 낙심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있다는 사실을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곳에서 하나님의 징계로 말미암은 고난이나 시련은 믿음의 경주에 유익이 된다고 하는 사실을 밝혀 주면서 힘을 내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씀해 주는 징계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잘못을 저질렀을 때 하나님의 채찍을 맞는 징계와 우리의 육적 사람을 벗게 하시며 영적인 결실을 맺게 하시기 위해 내리시는 훈련으로서의 징계가 있습니다. 어느 것이건 징계는 아버지와 자식간의 올바른 관계에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징계를 받을 때 이것을 올바로 받아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첫째로 주님으로부터 징계를 받을 때 그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고 했습니다. 경히 여긴다는 말은 징계를 징계로 여기지 않거나 자신에게 온 어려운 일에 불만을 품는 일을 말합니다. 노아 홍수 시, 그 당시 세상 사람들은 홍수로 물에 빠져 죽으면서도 그 일이 하나님의 심판인줄 인정치 않았습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 그 어려운 일이 하나님의 손에서 나온 징계인줄 모르면 사람이 회개할 수 없고 오히려 불만을 토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음에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꾸지람도 징계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그럴 때 낙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그 말대로 징계로 나타납니다. 혹은 병으로 혹은 실패로 혹은 고난으로 혹은 시험으로 여러 가지 모양으로 우리에게 찾아오는 것입니다. 징계는 우선 우리의 생애에 괴로움을 줍니다. 그러므로 징계를 받을 때에 낙심하기가 쉬운 것입니다. 그런데 그럴 때 낙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어떤 경우에든 낙심은 금물입니다. 낙심은 우리의 신앙을 퇴보시키며 침륜에 빠지게 할 뿐 유익이 없는 것입니다.
2. 징계를 받는 태도
8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징계를 받을 때, 낙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징계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참 아들들에게만 내리신다는 사실과 징계는 아들의 유익을 위해 필수적이란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비가 자기 아들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그 일에 대하여 징계가 없다면 그 아들은 버리운 자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징계를 받을 때 오히려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된 사실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 우리의 육신의 아버지로부터도 징계를 받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징계 없이 장성한 아들이 어디 있을 것입니까? 하물며 영의 아버지께서 어찌 징계가 없겠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영의 아버지의 징계가 육의 아버지의 징계보다 우선하는 이유는 육신의 아버지는 자기 뜻대로 하는 징계지만 영의 아버지는 우리의 참 유익을 위해,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시기 위해, 다시 말하면 우리의 영원한 생명과 구원과 하늘의 상급을 위해 주시는 징계이기 때문에 더욱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9절 말씀에서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우리에게 있는 나쁜 습성을 고치고 선한 열매를 맺게 하시기 위한 채찍으로 내리시기 때문에 육의 사람이 죽고 영의 사람으로 열매를 맺기까지 오랜 기간 지속되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참음으로 이 과정을 통과해야 하는 것입니다.
11절에서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의 열매를 맺는다고 했습니다. 징계는 채찍이기 때문에 쓴 것입니다. 징계를 즐겁다고 여길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받을 당시에는 슬펴 보입니다. 슬퍼 보인다는 말은 쓰게 여겨진다는 뜻입니다. 얻어맞는 일이기 때문에 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의 열매를 맺는다고 한 것입니다. 연달한 자란 익숙하게 단련 받은 자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연달하기 까지엔 많은 징계를 받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의의 열매는 저절로 맺어지는 게 아닙니다. 징계로 연달하심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 12절 13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은 하나님의 징계로 인하여 좌절되고 소진된 상태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것을 일으키는 일은 징계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가지고 하나님께 새 힘을 얻어야 합니다. 13절에 나오는 말씀 중에 저는 다리란 마음의 동요로 흔들리는 자세를 가리킵니다. 흔들리는 발을 똑바로 세워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는 새로운 출발을 시도하라는 뜻입니다.
(87) 화평을 좇으라
(히브리서 12:14)
우리는 14절에 나오는 말씀에서 우리의 신앙 생활에 나타나는 열매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목표에 비하여 얼마나 미약한가에 대해 스스로 부끄러움을 금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주를 보지 못하리란 말씀은 구원에 절망적인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하여 한번쯤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1. 하나님은 왜 화평을 원하시는가.
하나님은 화평의 하나님이십니다. 고전14:33절에서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화평의 반대말은 어지러움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어지러움은 질서가 파괴된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화평이 없는 사회는 무질서의 사회이기 때문에 분쟁이 생기고 싸움이 생기고 전쟁이 일어납니다. 결국 인류에게 파멸을 주는 것입니다.
화평에 대하여 주님은 마5:9절에서 말씀하시기를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라’고 하셨습니다. 화평의 범위에 대해서 롬12:18절에서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하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2. 화평은 어떻게 하는가.
화평의 결과는 화목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원수들과의 화평을 통해서 우리에게 화평을 이루는 일에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원수들과의 화평을 위해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본체이신 그리스도께서 세상과의 화평을 이루시기 위해 종의 모습으로 자신을 낮추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것은 말할 수 없는 사랑과 겸손을 말합니다. 사랑과 겸손이 없이는 어떤 화평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게 하심으로 원수와의 화평을 이루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롬5:8절에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라고 했습니다. 화평은 상대방이 어떤 형편에 있던지 그것과는 상관없이 우리가 이루어야 할 일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그리스도인들과의 화평을 이루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성도들간의 화평이 없으면 질시와 투기가 따르기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욕을 먹으며 경원을 당하게 되어 결국 복음의 길이 막히는 것입니다. 성도들간의 화평은 먼저 죄의 용서로 이루어집니다. 이 죄는 특히 자기와의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지은 성도의 죄를 용서해 주는 일입니다. 이에 대하여 우리의 생활에 중대한 도전을 받는 말씀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주님이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신 후,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여기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고 하신 말씀은 우리의 구원을 박탈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중생하여 구원을 가졌다고 해도 우리는 죄를 범하는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 때 우리는 하나님께 회개하여 죄의 용서하심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죄에 용서가 따르지 않으면 우리는 계속적인 하나님의 징계를 받게 될 것입니다. 회개하여 사죄를 받을 때까지 우리는 은혜로운 성도의 생활을 못할 것이며 영적인 많은 괴로움을 받을 것입니다.
다른 하나의 경우의 도전은 마18:21절에 있는 베드로의 질문에서 나옵니다.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과연 이런 용서의 생활을 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도저히 불가능 한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화평은 죄의 용서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화평의 자세에 있어서 내가 먼저 화해를 상대방에게 청해야 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산상보훈에서 형제와 화목하는 일에 대하여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마5:23-26절 말씀. 그런데 화평은 다른 사람 아닌 나의 유익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주님은 25절과 26절에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다음에 우리는 그러면 세상 사람들과의 화평은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성경적 해답을 들어야 하겠습니다. 먼저 선행으로 화평을 이룰 수 있습니다. 마5:15-16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착한 행실을 세상 사람이 본다면 그들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셨습니다. 화평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화평에는 어느 경우건 진실과 희생이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진실이 없이는 화평의 기초가 무너지기 때문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화평이 불가능합니다. 회생이 없이는 화평의 재료가 없기 때문에 화평이 성립될 수 없는 것입니다.
결론 : 화평은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추구해야 할 주님의 명령입니다. 왜 그리스도인들이 화평을 추구해야 하는 것입니까? 교회에 내 가정에 내가 살아가는 사회에 화평이 이뤄져야 평안한 가운데 신앙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88) 거룩함을 좇으라
(히브리서 12:14)
지난 시간에 이어 14절 말씀 중 ‘거룩함을 좇으라’는 말씀에 대하여 공부하는 시간이 되겠습니다. 거룩함을 좇으란 말씀은 여러 가지 의미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이 그리스도인의 거룩함에 대하여 교훈하시는 바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알아야 합니다.
1. 거룩과 그리스도인
거룩함을 좇으라는 말은 세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이미 거룩해졌다는 뜻이요 다른 하나는 거룩한 자처럼 살아야 한다는 뜻이요 세 번째는 거룩해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1) 그리스도인은 이미 거룩하다는 선언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너는 거룩하다’는 선언을 내리셨습니다. 그래서 거룩한 무리 가운데 들어갔습니다. 이 같은 선언은 우리가 거룩해서이거나 거룩해져서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해졌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완전한 하나님의 의의 소유자가 됩니다. 구원의 확정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소유하지 못하면 누구든지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구원에도 이를 수 없습니다. 천국 백성으로 천국을 유업으로 받을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 졌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법적인 선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이상, 우리에게 거룩하다고 선언하신 하나님의 선언은 합법적인 것입니다. 변질될 수도 없고 빼앗길 수도 없습니다.
우리의 거룩함은 또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성취된 우리의 영적 신분입니다. 우리는 모든 일에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이뤄진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는 온전히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그 분에게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모든 것이 나의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2. 거룩한 자가 되라
우리는 또한 거룩한 자가 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벧전1:15절 이하의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거룩한 자가 되라는 말씀은 거룩한 자신의 위치를 지키라는 뜻입니다. 이런 자신의 거룩함을 지키라는 말씀은 진리의 말씀에 굳건히 서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는 그리스도인의 거룩이 무너져 버립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항상 믿음 안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거룩함을 좇으란 말씀은 거룩의 열매를 맺으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영생의 열매를 맺어야 할 생명 나무들입니다. 그 나무에는 필연적으로 거룩함의 열매가 맺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거룩의 본체가 되시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아 성장하는 나무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반드시 거룩의 열매가 맺어지는 것입니다. 만약 열매가 맺지 않는다면 좋은 나무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분이 죄인의 자리에서 의인의 자리로 옮겨졌으며 우리의 행위가 죄를 행하기에 담대한 자리에서 거룩의 열매를 맺어야 할 자리로 옮겨졌습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의의 열매를 맺어야 할 나무들입니다. 예수님은 요15장에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포도나무에 접부침을 받은 가지들이기 때문에 당연히 포도나무의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열매는 내가 맺을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내가 맺는 것도 아닙니다. 이런 열매를 가리켜 성령의 열매라고 말합니다. 성령의 열매라고 말하는 것은 성령의 권능으로 성령에 의해 맺는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나약하고 도저히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거룩함의 결실을 맺을 수 없는 죄인들임을 깨닫고 통탄스러운 심정으로 성령께 의지하며 그의 도우심을 사모해야 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믿음의 의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고 하는 간절한 열정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믿음의 생활을 한다면 내가 이루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내 안에서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빌1:6절에서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주신 말씀을 보면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거룩함을 좇으라’고 했습니다.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거룩함의 공동체를 이루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말씀해 주시는 의미는 하나는 우리들로 사람들 앞에서 거룩함의 표적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룩하지 않는 일에 결코 합류하거나 한 무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거룩하지 않은 자리에서 빠져 나오라는 의미가 됩니다.
결론 : 그리스도인들은 거룩한 곳이 그의 설자리요 거룩한 자리가 그의 앉을 자리입니다. 우리는 거룩한 말이 아니면 듣지 말아야 하며 거룩한 곳이 아니면 가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항상 거룩함을 좇아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다운 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89)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
(히브리서 12:15-17)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말씀을 두 가지로 나누어 오늘은 15절에서 말씀하시는바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에 대한 것과 내일은 16,17절에 나오는 ‘에서와 같은 망령된 자’에 대한 말씀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15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우리가 교회에서 신앙 생활을 하면서 특히 두려워해야 할 일에 대하여 몇 가지로 경종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란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자란 뜻입니다. 교회에는 신앙 생활을 한다고는 하지만 결국은 구원에 이르지 못하고 멸망에 이르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씨 뿌리는 비유에서 네 종류의 밭에 똑같은 씨앗을 뿌렸지만 열매를 맺는 밭은 한곳뿐이었습니다. 세 곳의 밭은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면 구원의 은총을 말합니다. 왜 구원을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까? 구원은 우리가 이룰 수 있는 것도 아니요 우리가 우리 마음대로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물로 주셔야 가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습니다. 이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는 일에 우리에게서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으시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값도 없이 주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우리에게 거저 선물로 주시기 위해 치르신 대가는 말할 수 없이 큰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처럼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 같은 하나님의 은혜야말로 귀하고도 귀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다고 성경은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사람들은 누구인 것입니까?
(1) 하나님의 은혜를 소중히 여기지 아니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이 은혜를 보화가 감추인 밭으로 비유하시면서 한 나그네가 이 밭을 발견하고는 자기에게 있는 모든 것을 팔고 그 밭을 샀다고 하셨습니다. 은혜는 이처럼 소중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경히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경히 여긴다는 말은 하나님의 은혜의 소중함을 모르고 자기 생애에 아무런 가치도 부여하지 않는 생활 태도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교회 안에 많이 있습니다.
(2) 다음에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란 은혜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의 선물을 은혜로 주신 것은 하나님을 향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내 생애를 나를 위한 삶이 아니라 주님을 위한 삶으로 새롭게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열매를 맺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에 대해 깊이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3) 다음에 은혜에 이르지 못한다는 말은 은혜를 거역한다는 뜻입니다. 이들은 불신앙적인 생활을 하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여깁니다. 완악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며 회개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교회에는 여전히 나오며 교회에서 자기의 목소리를 높이며 권리 행사를 단단히 합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불순종하는 생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행실을 고치지 않고 있으며 나중에는 고의적으로 불순종하는 자리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2. 교회에서 자라는 쓴 뿌리
다음 두 번째로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라’고 했습니다. 열매를 맺는 나무에 있어서 뿌리란 그 나무의 생명과도 같습니다. 열매는 뿌리에서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쓴 뿌리란 독이 있는 뿌리로 그 나무에서 자라난 열매란 자연히 독이 있는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이 쓴 뿌리는 교인들이나 교회에 괴로움을 줍니다. 그래서 괴롭게 한다고 했습니다. 이런 존재에 대해서 우리는 특별히 경계해야 하는데 두 종류로 구분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 종류는 다른 사람에게 독을 주는 존재로 이들은 많은 사람들을 사망으로 이끄는 일을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계2장을 보면 두아디라 교회에 이런 쓴 뿌리가 나서 교회를 타락시켰습니다. 이 교회에 나타난 쓴 뿌리는 자칭 선지자의 모습으로 나타났는데 이 자가 교회에 나타나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했다’고 했습니다. 한 쓴 뿌리로 인하여 교회 전체가 피해를 본 것입니다.
다른 하나의 경우는 거짓된 진리, 배교로 더러움을 입게 하는 쓴 뿌리가 있습니다. 애초부터 배교자의 모습으로 교회에 침투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를 떠난 자들이 사탄의 가르침을 받아 쓴 뿌리가 된 자들입니다.
결론 : 너희는 돌아보라고 하신 것입니다. 돌아보는 일은 먼저 자기 자신부터 살펴보라는 뜻입니다. 늘 자신의 신앙을 하나님의 말씀의 거울에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자신의 생활이 과연 그리스도 안에서 열매를 맺는 생활인가를 살펴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음에 이들로 자기가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더러움은 영적인 더러움이기 때문에 속히 진리 가운데 돌이키지 아니하면 양심에 화인을 맞게 되고 그렇게 되면 회개할 길이 막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경종을 삼으시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믿음으로 살아가시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90)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
(히브리서 12:15-17)
16절에서 음행하는 자와 망령된 자에 대한 경종이 나옵니다. 이 두 가지 문제에 대한 경종은 어느 시대의 교회이건 늘 거울로 삼아 성도들의 생활에 범하기 쉬운 이 종류의 죄를 멀리 하고 자기를 불 신앙적인 더러움에서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1. 음행하는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성경에서는 구약이건 신약이건 음행하는 자에 대한 심판에 대하여 엄히 경종하며 경계하고 있습니다. 음행이란 성적인 부도덕을 의미합니다. 음행이란 단어는 간음이란 말보다 범위가 넓습니다. 간음은 법적인 문제에 국한할 수 있는 말이지만 음행이란 말은 모든 부도덕한 성적 행위를 총칭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음행에 관하여 혹독하리 만치 심판하실 것을 선언하신 것입니까?
음행은 첫째로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있어서 모든 부도덕의 원천이 되기 때문입니다. 음행하는 생활을 계속하고는 거룩한 생활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음행이란 범죄 중에서도 가장 부끄럽고 은밀한 죄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 앞에서 감추게 되고 하나님 앞에서도 숨기려고 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스스로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죄가 음행인 것입니다. 그리고 인생에게 달콤한 맛을 주며 육체적 쾌락을 주기 때문에 그 일을 벗어버리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음행은 자신의 인생 뿐 아니라 가정의 순결을 파괴하기 때문에 가정에 파탄이 오게 되고 부부간의 사랑에 금이 가게 되고 이런 현상이 사회적으로 확산되면서 온 사회가 음란 화되어 소돔과 고모라 성을 이루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가 이런 현상을 드러내 놓고 있으며 사탄은 성도들의 가정에까지 이런 미끼를 가지고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이런 음행 죄를 이길 수 있는 것입니까? 부부간의 순결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늘 사랑 안에서 부부 생활이 원만히 이뤄져야 하며 그 자녀들에게 가정의 순결과 부부간의 사랑의 본을 보여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음에 미혹을 받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사회에는 성적 유혹이 도처에 깔려 있습니다. 그런 유혹에서 이기려면 늘 자제하는 힘을 길러야 하며 경건 생활에 힘쓰도록 말씀을 묵상하며 늘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음행 죄가 무서운 것은 유혹을 좀처럼 물리치기 어려운데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처럼 그 자리에서 재빨리 빠져 나올 수 있는 결단력이 있어야 하는데 이 일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리고 음행은 그 범하는 자에게 있어서 의도적이며 계획적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회개가 어려운 것입니다.
2.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를 두려워하라
다음에 히브리서 기자는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한 그릇 식물을 위해 판 사건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주는 사건입니다. 그 사건은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의 중대한 비유적이 교훈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장자의 명분이란 하나님의 백성된 명분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장자의 명분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많은 아들들 가운데 맏아들에게만 주신 특권인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누구나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만한 선한 사람, 의로운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그들은 이 영광스러운 반열에 들어올 수 없는 것입니다. 장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예정한 자만이 장자로서의 특권이 있습니다.
그런데 에서는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팔았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장자의 명분을 팔았다는 말의 뜻을 잘 알아야 합니다. 에서는 자신에게 주어진 장자의 그 귀한 명분을 귀히 여길 줄 몰랐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구원, 곧 하나님의 백성된 이 특권을 귀히 여길 줄 모른다면 에서처럼 망령된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에서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물질이었습니다. 배가 곺은 에서에게 당장 자기에게 아무 것도 줄 수 없는 장자의 명분 따위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는 동생 야곱의 계략에 넘어가 팥죽 한 그릇에 그것을 팔아먹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저지른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당장에 자기에게 어떤 물질적 유익이 있는 일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일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조금도 중요하지 않은 것입니다. 쉽사리 말씀을 버리고 물질을 취하는 쪽으로 생각이 기우러 지고 행동이 따르는 것입니다. 장사하는 일 때문에 주일을 지키는 못하는 사람, 물질 때문에, 어떤 육신적인 긴요한 일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는 일 따위는 지금 우리 세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비일비재한 일입니다.
결론 : 17절에서 이르시기를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한번 버린바 되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한다고 하신 말씀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크게 경종을 주시는 말씀입니다.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는 구원의 은혜를 받을 수 없다는 말씀이 되겠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결코 자만하는 자리에 이르러서는 안됩니다. 그런 사람들은 망령된 행실로 인하여 회개할 기회마저 얻지 못하고 버림받을 것이란 두려운 경종을 늘 거울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91) 우리의 이른 곳
(히브리서 12:18-24)
오늘 본문에는 구약시대의 성도들과 신약시대의 성도들의 차이점을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또 율법과 복음과의 놀라운 차이점을 비교해 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율법이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을 당시의 그 두려움을 상징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복음은 이처럼 두려운 시내산이 아니라 하늘의 시온산에서 내려진 것임을 말씀해 주고 있으며 그곳에는 두려움이 아니라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님이 계시고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 곧 우리의 죄를 속죄해 주시므로 두려움이 아니라 소망을 주는 속죄의 피가 있는 곳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곳이 우리가 이른 곳이라고 한 것입니다.
1. 시내산의 두려움
히브리서 기자는 본문에서 우리의 이른 곳에 대하여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이른 곳이란 우리가 와 있는 현재의 영적 장소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결코 시내산에 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내산은 하나님의 두려움이 나타나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으로 율법을 주신 곳입니다. 그곳에는 소망이 없습니다. 왜냐 하면 율법에는 죄인에 대한 정죄가 있을 뿐 사죄의 은혜가 없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여기서 율법을 주신 시내산의 두려움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시내산은 만질만한 불붙는 산이라고 했습니다. 만질만한 산이란 표현은 이 산이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능히 가서 만질 수 있고 올라갈 수 있는 유형적인 산임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내산은 우리에게 생명을 줄만한 신령한 산이 아닌 것입니다. 이 산의 형편에 대하여 불붙는 산, 검은 구름, 흑암, 폭풍, 나팔 소리 등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이 산에 임재하셨을 당시의 두려운 모습을 구약 성경에 있는 그대로 나나낸 말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출19장에서는 ‘시내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고 하셨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고 나팔 소리가 커지며’ ‘우레와 번개와 나팔 소리와 산의 연기를 보고 떨었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시내산에 강림하셨을 때에는 사람들 뿐 아니라 짐승까지라도 가까이 올라오지 못하도록 명하셨으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려워하여 일제히 더 이상 말씀하지 말 것을 간청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율법은 이처럼 두려운 가운데 모세가 받았습니다. 율법은 이처럼 사람들에게 두려움과 떨림을 주는 하나님의 계명입니다. 이 계명을 받은 자는 마땅히 이 계명에 의해 심판하실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하는 것입니다.
2. 우리가 이른 곳
22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이 예루살렘’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와 있는 곳은 시내산이 아닙니다. 시내산의 두려움은 율법과 함께 사라지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시온산에 이른 것입니다. 우리가 이른 곳은 시온산입니다. 시온산이란 하나님의 보좌를 가리킵니다. 우리의 지성소는 땅의 지성소인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휘장을 찢으시고 새로운 길을 열어 놓으시고 그 길을 통해서 올라가신 하늘의 지성소를 의미해 줍니다. 땅의 지성소에는 하나님의 법궤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안애는 시내산에 임하셨던 그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십계명의 돌 판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 돌 판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경종해 줍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른 산은 하늘의 시온산인데 그곳에는 법궤가 있는 것이 아니라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님이 계시며 그 안에는 소나 염소의 피가 뿌려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로 뿌려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언약을 받은 곳은 이처럼 시온산인 것입니다. 또 우리가 이른 곳은 하나님의 도성인 예루살렘이 있는 곳입니다. 우리는 장차 이 도성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그의 택한 백성들을 위해 우리 주님께서 예비해 두신 곳이기 때문입니다. 시내산에는 이런 영광스러운 하늘의 예루살렘이 약속되어 있지 아니합니다. 또 그곳에는 천만 천사가 있는 곳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천사들은 이 나라의 주인들이 아닙니다. 이 나라의 유업을 이어 받을 존재들도 아닙니다. 이들은 장차 우리들을 섬기는 심부름꾼으로 우리 주변에서 우리를 지켜 주고 보디가드 역할을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가 있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하늘에는 장자들의 총회가 있습니다. 장자들이란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들을 말합니다. 그들의 총회가 있습니다. 지금 세상에는 여러 교파가 갈라져서 서로 찢고 싸우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하늘에는 오직 하나 뿐인 장자의 총회가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 총회가 곧 하늘의 교회이기도 한 것입니다. 지상 교회는 하늘 교회의 하나의 모형입니다. 우리는 하늘에 올라가서도 하늘의 교회에서 영원토록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찬양할 것입니다. 그곳에는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이 계시며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선진들이 부활을 기다리며 영적인 몸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 : 무엇보다도 대견스러운 것은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님이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분이 뿌린 속죄의 피는 아벨의 피보다 더 위대한 능력을 가지고 그의 백성들의 죄를 속죄해 주는 은혜의 역사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른 곳은 바로 이런 곳입니다. 그 나라에 소망을 두시고 그 나라를 바라보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생애를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92) 경건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섬기자
(히브리서 12:25-29)
오늘 본문에서도 율법과 복음을 비교하면서 하나님을 거역한 자들에게 대한 엄중한 심판의 경종이 나옵니다. 신약 시대의 하나님의 새 언약은 결코 심판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아들을 죄인들을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심판하신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거역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지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은 죄까지 포함되는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1. 하늘로조차 경고하신 자를 거역하지 말라
25절에서 ‘너희는 삼가 말하신 자를 거역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신 자란 ‘땅에서 경고하신 자’이신 시내산의 하나님을 의미하고 또 ‘하늘로조차 경고하신 자’이신 시온산의 하나님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땅에서 경고하신 자를 거역한 저희가 피하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땅이란 시내산을 의미하며 이처럼 하나님께서 시내산에 내려 오셔서 모세에게 주신 율법을 어긴 사람들에게조차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사하지 아니하셨다는 것을 강조해 줍니다. 율법의 명령은 준엄했습니다. 누구든지 그 명령을 어긴 사람은 용서받지 못하고 율법에 따라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모든 인간은 이 율법에 의해 죄인의 사슬에 얽매이게 되었습니다. 율법을 온전히 지켜 하나님 앞에 의를 얻을 수 있는 육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지난날 이스라엘이 모든 일에 이 율법을 거역함으로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사실과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어떻게 연결시켜야 하는 것입니까? 이 일에 대하여 25절 중반에서 ‘하물며 하늘로조차 경고하신 자를 배반하는 우리일까 보냐’는 말씀으로 우리에게 경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나오는 하늘은 22절에서 말씀하신 하늘의 시온산을 말합니다. 그 시온산에는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이 계셨지만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님도 계셨고 아벨의 피보다 더욱 큰 사죄와 구원의 능력이 있는 그리스도의 뿌린 피가 있습니다. 우리는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로 말미암아 그의 피로 구원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땅의 시내산이 아니라 하늘의 시온산이며 그 은혜는 시내산에서 주신 율법이 아니라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님의 피로 이루셨습니다. 율법과 그리스도의 피로 내리신 은혜의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다릅니다. 시내산의 율법은 정죄의 역할을 하지만 시온산의 은혜는 속죄와 구원을 내려 주십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모두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하늘로조차 경고하신 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경고는 무엇입니까?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를 믿지 않는 자에게는 영원한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엄중한 경종이 따랐습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요3:18절에서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신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없을 것이라는 판단은 대단히 잘못된 생각입니다.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더 무서운 심판이 있습니다. 더 무섭다는 것은 율법에서 정죄하는 그 정죄보다 더 무섭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늘로조차 경고하신 분을 배반하는 불순종의 자리에 빠지거나 배교하는 죄를 범하지 마라야 하는 것입니다.
2. 진동하지 아니할 나라의 유업
26절을 보면 두 종류의 ‘진동’이란 말이 나옵니다. ‘그 때에는 그 소리가 땅을 진동했다’고 했습니다. 이 진동은 시내산에 하나님이 임하셨을 때 있었던 진동으로 이 진동에 대하여 18, 19절에서 ‘흑운과 흑암과 폭풍과 나팔 소리’ 등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이 같은 진동은 율법의 엄위와 그 율법을 범하는 자들에 대한 심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진동과는 달리 더 무서운 진동이 있을 것임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26절에서 ‘내가 또 한번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에 의해 또 한번 있을 이 진동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주의 재림으로 인한 인류의 최종적인 심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계6:12절 이하에 나오는 여섯째 인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총담 같이 검어지고 온 달이 피 같이 되며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선 과실이 떨어지는 것 같이 땅에 떨어지며 하늘은 종이 축이 말리는 것 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기운다’고 하셨습니다. 이 진동은 하나님의 은혜를 거역한 자들에 대한 무서운 심판으로 율법에 의한 심판보다 더 두려운 심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진동치 아니할 새로운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됩니다. 27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 또 한번이라 하심은 진동치 아니하는 것을 영존케 하기 위하여 진동할 것들 곧 만든 것들의 변동 될 것을 나타내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진동치 아니할 나라는 하늘의 시온산을 의미하며 우리가 소망하는 천국입니다. 그곳에는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총회와 우리의 영원한 교회가 있으며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님도 계십니다.
결론 : 이처럼 우리는 영원히 진동치 못할 나라를 유업으로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고 했습니다. 은혜를 받는 생활은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기는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히브리서 13장 (93 - 99)
◆ 밤중소리 02-01 | VIEW : 1,205
(93) 가장 긴요한 권면(히브리서 13:1-4)
(94)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히브리서 13:5-6)
(95) 영원히 동일하신 예수 그리스도(히브리서 13:7-9)
(96)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히브리서 13:10-13)
(97) 영구한 도성을 찾는 그리스도인의 생활(히브리서 13:14-16)
(98) 목자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자세(히브리서 13:17)
(99) 바울의 축복기도(히브리서 13:18-25)
(93) 가장 긴요한 권면
(히브리서 13:1-4)
히브리서 13장은 히브리서의 결론으로 히브리서를 받는 교회 성도들에게 교회 생활의 권면과 당부가 나옵니다. 특히 1절로 4절까지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가장 긴요한 몇 가지 권면을 주고 있습니다. 형제 사랑과 손 대접하는 일과 어려움을 당하는 형제들을 생각해 줄 것과 혼인을 중히 여기며 침소를 더럽히지 말 것에 대하여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1. 형제 사랑하기와 손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1절에서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형제란 단어는 혈육적인 형제를 의미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한 지체로 연합된 성도들을 의미합니다. 이에 대하여 히2:11절에서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셨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주가 되시며 우리의 하나님이시지만 우리를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25:40절에서 최후의 심판의 자리에서 모든 사람들을 심문하실 때에 이렇게 말씀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주님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내 형제’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라는 말씀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형제의 사랑 중에 가장 귀한 것은 용서에 있습니다. 이 용서는 거의 무제한적입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주라고 하셨습니다. 다음에 어려움을 당할 때 도움을 주는 일입니다. 위로해 주고 기도해 주고 한 가지로 슬퍼하며 기뻐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 사랑은 교회를 이루는 끈끈한 연결 줄입니다. 이 사랑의 줄로 서로서로 연결되어 교회가 믿음으로 견고해 지며 사탄의 공격과 핍박으로부터 진리를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다음에 손님 대접하는 일에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한 일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 천사를 대접했다는 말은 아브라함의 경우를 예로 든 것인데 아브라함이 자기 집을 찾은 손들을 극진히 대접한 일이 있었는데 그들이 알고 보니 여호와의 사자들이었으며 이 일로 아브라함은 이삭의 잉태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을 더욱 확고히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최후의 심판의 자리에서도 주님께서 반드시 물으실 것이란 사실을 강조하셨습니다. 마25:35절에서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다’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이들에 대하여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의 유업을 받을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다음에 3절에서 ‘자기도 함께 갇힌 것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자기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받는 자를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복음을 위해 옥에 갇힌 자들과 학대를 받는 자를 생각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2.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말라
4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말라’고 했습니다. 혼인을 귀히 여기란 말씀은 혼인으로 맺어진 부부는 끝까지 한 몸으로 서로 사랑하고 위로해 주며 존중해 주라는 뜻입니다. 혼인을 경히 여기는 나머지 혼인에 대하여 책임을 지지 않고 쉬 이혼을 하거나 부부간 경망스럽게 행동하는 일은 마땅히 금지되어야 합니다.
침소를 더럽히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부부간의 침소는 깨끗하고 거룩합니다. 부부간의 성적 결합을 더럽다고 여기면 안됩니다. 침소를 더럽히는 경우가 더러운 것입니다. 침소를 더럽힌다는 말은 혼외 정사를 뜻합니다. 침소의 주인은 어디까지나 부부지간입니다. 이를 벗어나면 침소를 더럽히는 결과가 되며 이런 일은 하나님께 죄가 되는 것입니다.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침소를 더럽힌다. 음행한다, 간음한다는 말은 모두 비슷한 내용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모두 성생활에 관한 경종이 되는 말입니다. 왜 성경에서는 이런 성적 범죄에 대하여 엄중하게 다루고 있는 것입니까? 인간의 성적인 범죄는 인간의 도덕적 마지노 선이 무너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성의 질서가 무너지면 가정이 설자리가 없는 것입니다. 사회 질서가 파괴되는 것입니다.
음행이란 하나님이 허락하지 아니한 음란한 행위를 말합니다. 짐승과의 교접이나 남성들간이나 여성들간의 동성애 등의 온당치 못한 성행위를 가리킵니다. 간음이란 말은 율법적인 의미가 주어진 말입니다. 부부간이 아닌 이성과의 음란한 행동이나 성적 관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죄에 대하여 엄히 다스리시겠다고 경종하시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하나님이 금하신 죄에 대해서는 두려운 마음으로 멀리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일은 경건의 연습이 필요하며 죄에 대하 두려움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신앙적인 의지가 필요합니다. 올바른 부부생활과 지식을 가지고 이처럼 무서운 죄의 유혹에 넘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94)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히브리서 13:5-6)
본문 5절에 나오는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의 생활과 생애에 지침이 되는 교훈입니다.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 이유로 두 가지를 들고 있습니다. 하나는 주님이 우리를 버리거나 떠나지 아니하신다는 사실과 다른 하나는 주님은 나를 돕는 분이시란 사실을 들고 있습니다.
1. 돈을 사랑치 말라
5절에서 ‘돈을 사랑치 말라’고 했습니다. 돈 곧 재물에 대한 경종은 성경 여러 곳에 나와 있습니다. 딤전6:10절에서 ‘돈을 사랑함이 일만악의 뿌리가 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산상보훈에서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성경에 왜 이처럼 돈에 대하여 대단히 위험한 것처럼 경종해 주는 것입니까? 돈은 정말로 우리가 가까이하면 안될 그런 존재인 것입니까? 그러면 왜 우리 하나님은 우리에게 재물의 축복을 주시는 분으로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까?
돈을 사랑한다는 말은 돈의 비중을 하나님보다 더 우위에 둔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겸하여 섬기는 일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재물은 하나님이 우리의 생애 중에 우리에게 내리시는 축복 가운데 하나일 뿐, 그것을 섬기거나 우리의 마음을 재물에 빼앗겨서는 안돼는 것입니다. 딤전6:9-10절 말씀을 찾아보시겠습니다. ( ). 이 말씀에 따르면 돈을 사랑한다는 말은 돈을 사모한다는 의미로 나와 있습니다. 사모한다는 말은 사람이 어떤 대상을 우러러 받들고 마음으로 섬기는 일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돈을 사랑하는 자들은 자연히 돈에 미혹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 같은 미혹은 우리로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롯이 이런 길을 걸었습니다. 발람이 이런 길을 걸었습니다. 가룟 유다가 그러했고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가 이런 길을 걸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살아가는 데 있어서 재물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는 재물에 초연 하라든가 재물에 관심을 갖지 말라는 말씀은 없습니다. 우리는 열심히 일해서 재물을 소유해야 합니다. 지혜롭게 사업을 경영해서 많은 재물을 가져야 합니다. 이런 일은 결코 죄악이 아닌 것입니다. 이런 일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보편적인 축복이기도 합니다. 돈에 마음이 빼앗기고 돈에 의해 자기 생애가 좌지우지된다면 이런 사람은 돈을 사랑하는 사람이요 결국 돈 때문에 믿음에 큰 손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의 신앙적인 생활 태도는 어찌해야 하는 것입니다.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고 하신 것입니다. 현재 내가 살아가고 있는 내 생활에 대하여 언제나 만족스러운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내가 소유하고 있는 재물에 대하여 족하게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안다고 해서 발전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을 하며 특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질의 축복을 주시는 법칙을 잘 지키는 생활을 하면 우리의 재물은 날로 많아지며 그것을 유용하게 사용하며 저축하므로 더 나은 생활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족한 줄 모르는 사람은 미혹을 받기 쉬우며 부정한 방법에 마음이 기울기 쉬운 것입니다. 현재의 내 생활에 감사를 모르는 사람은 장차의 축복을 만들어 나갈 수 없는 것입니다.
2. 주님은 나를 돕는 자이시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인들이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아야 할 충분한 이유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신다는 말씀은 그가 우리의 모든 생애를 책임져 주신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그가 우리를 떠나지 아니하신다는 사실 역시 하나님이 우리를 떠나지 아니하신다면 그 분이 그의 백성들에게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시고 그가 언약하신 모든 축복을 우리에게 내려 주신다는 사실을 전제한 것입니다. 마6:31절에서 예수님은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 모든 일에 복을 받을 수 있는 그리스도인만의 비밀한 비법을 가리켜 주신 것이 아닙니까?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6절에서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 하리요 하노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란 말은 과연 하나님이 나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또 나를 떠나지도 아니하시니 우리는 어떤 경우에나 담대한 믿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는 이처럼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엇을 무서워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믿음만 확고히 가진다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돌보시고 지켜 주시는데 사람들이 내게 어찌할 것입니까?
결론 :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간다면 하나님은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시어 나를 떠나지 아니하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난하건 부유하건 높은 자리에 있건 낮은 자리에 있건 잘살건 못살건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는 담대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나가야 합니다.
(95) 영원히 동일하신 예수 그리스도
(히브리서 13:7-9)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을 이루신다는 사실과 이 같은 진리는 창세 전에 이미 결정되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백성들을 택정하신 사실을 의미해 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을 가르치며 말씀으로 인도하던 인도자들을 생각하여 그들의 교훈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을 본받아야 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1.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라
교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르고 성도들을 인도하는 지도자가 있게 마련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갈리리 호숫가에서 가진 베드로와의 대화에서 ‘너는 내 양을 먹이라’는 말씀을 세 번씩이나 하셨습니다. 이처럼 교회에는 주님의 양인 교회의 성도들을 말씀으로 먹이고 인도하는 목자가 있습니다. 이 목자는 주님이 세우시고 주님에 의해 관장하십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를 받은 교회에게 이들을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위해 말씀을 가르치고 권면하며 인도해 온 지도자들을 생각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생각하라는 말은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그들을 우리의 기억 속에 두고 때때로 그들이 가르친 교훈을 추억하며 자기의 신앙을 점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 받으라’고 한 것입니다.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라는 말씀은 그들이 어떤 생애를 지냈으며 어떤 모습으로 그의 생애를 마쳤는가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보라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를 이끌어 온 교회의 지도자들, 하나님의 종들은 대개의 경우, 핍박 중에 고통을 당하며 시련 중에 환난을 이기면서 복음을 전했었습니다. 그리고 최후에는 그들의 생명까지 복음을 위해 버리는 순교의 자리에 이른 것입니다. 그것을 주의하여 살펴보고 그 같은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는 언제나 동일하시다.
8절에 나와 있는 말씀은 너무나도 유명한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그의 구원을 이루시며 그 아들을 믿음으로만이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의 섭리는 영원하도록 변함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는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구원을 주시고 신약 시대는 예수를 믿는 것으로 구원을 베푸시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 섭리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사실은 영원토록 변함이 없는 절대적 진리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요10:8절에서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라’는 말씀을 하신 것은 창세 이후로 양의 문이신 구원의 주는 오직 예수님 뿐이란 사실을 밝히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11:26절에서 모세의 믿음에 대하여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7절에서 말씀하신 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우리를 생명의 길로 인도해 온 많은 교회의 지도자들이 있으나 그들은 한결같이 예수 그리스도만을 증거 했으며 그리스도의 교훈으로 인도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람은 바뀌고 시대는 변해도 그 분만이 우리의 영원한 구주이심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다음에 히브리서 기자는 9절에서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다른 교훈이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다른 교훈으로 잘못된 교훈을 의미해 주는 말입니다. 그 다른 교훈의 하나가 그 다음에 나오는 식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마음은 은혜로써 함이 아름답고 식물로써 할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식물이란 말은 구약에 나오는 율법적인 규례를 의미합니다. 정결한 음식으로 깨끗케 하는 규례인데 이 같은 일은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이전, 육체에 제한된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온전한 것을 이루실 때까지의 예법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예법 자체도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해 주는 것으로 온전한 것이 온 이후로는 그림자로 보여 주신 율법적 규례나 예법은 마땅히 사라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골2:16절에서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장래 일이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실 구속의 사역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의 십자가와 부활로써 이것들을 온전히 이루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것으로 사람이 의롭게 되려거나 이 같은 율법적 규례에 얽매어 신앙 생활을 하는 일은 자기자신에게 전혀 유익이 될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율법으로 굳게 함이 아닙니다. 어떤 음식의 규제로 의롭게 여김을 받으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은혜로써 굳게 해야 합니다. 은혜로써 굳게 한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나타내신 하나님의 은혜로 채우라는 뜻입니다.
결론 : 예수 그리스도는 언제나 동일하십니다. 만물의 창조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변할 수 없는 분입니다. 아울러 그 분에 관한 견해나 그 분을 통한 하나님의 섭리나 구원의 은혜는 시대를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히 동일하신 예수님에 대한 진리는 오직 하나입니다. 이 진리를 마음에 깊이 간직하시는 아름다운 믿음의 소유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96)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히브리서 13:10-13)
오늘 본문의 내용은 구약적 제물인 짐승과 신약적 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비유적으로 비교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이 속죄의 제물로 고난을 당하신 예수를 따라 예수의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야 할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기는 좀 어려운 면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리스도께서 골고다 언덕에서 속죄의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의 구원 사역을 완성하신 사실에 대한 구약과의 비교설명입니다.
1. 구약적 속죄 제물과 그리스도의 제물
10절과 11절에서는 구약적 제사 제도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부치고 있습니다. 10절에서 ‘우리에게 제단이 있다’고 하는 제단은 희생 제물을 올려놓는 구약적 제단을 의미합니다. 모든 제물 중 고기는 제단에서 섬기는 제사장들이 먹을 수 있었으나 속죄 일에 드리는 희생 제물은 장막에서 섬기는 제사장이나 레위인들도 먹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이 제물은 어떻게 처리한 것입니까? 11절에서 이르기를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대제사장은 일년에 한차례씩 속죄 일에 지성소에 짐승의 피를 가지고 들어가 백성들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드렸습니다. 이 때 제사장은 송아지의 피로써 자기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을 드린 후, 백성들의 죄를 위한 짐승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짐승의 고기는 영문 밖에서 불사른 것입니다. 영문 밖이란 병영의 문으로 성문 밖이란 뜻입니다. 예루살렘 성문 밖에서 속죄 제물로 잡은 짐승의 고기를 불태운 것입니다. 이처럼 짐승의 고기를 성문 밖에서 불지른 이유는 속죄 제물로 더러워졌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레16:26절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속죄제 수송아지와 속쇠제 염소의 피를 성소로 들여다가 속죄하였은즉 그 가죽과 고기와 똥을 밖으로 내어다가 불사를 것이라.’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12절에서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고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영문 밖이란 성문 밖과 같은 뜻인데 11절에서 ‘영문 밖에서’란 말은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신 그리스도의 고난의 장소를 암시해 주는 말입니다.
여기서 이 말씀이 의미해 주는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성문 밖에서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신 일은 이스라엘이 속죄 일에 백성들의 속죄 제물을 불태운 것처럼 속죄 일의 속죄 제물을 온전히 이루신 사실을 나타낸 것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죄인들의 죄를 짊어지신 죄인의 자격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의 죽으심은 죄가 없는 하나님의 아들의 자격으로 죽으신 것이 아니라 자신은 죄가 없으셨지만 그의 백성들의 죄를 대신 지시고 죄인으로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도 저주받으신 바 되어 성문 밖에서 그의 몸을 불사르시는 속죄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아직까지는 짐승으로 제물을 삼았지만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제물로 드리셨기 때문에 다시는 짐승을 잡아 제물로 삼는 속죄 제물을 드릴 필요 없게 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히9:13,14절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하여 거룩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2. 그리스도의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나아가자
13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라고 한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제물로 속죄함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그 능욕을 지자’고 했습니다. ‘그 능욕’이란 말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난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에 대하여 히12:2절에서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나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부끄러움을 참으신 그 그리스도의 고난의 십자가를 져야한다는 사실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롬8:17절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참께 받아야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산상보훈에서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고 하셨습니다.
결론 : 다음에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세상을 등지고 오직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생활을 의미합니다. 영문 안은 멸망 받을 도성입니다. 그곳에는 소망도 없고 속죄도 없으며 영생도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신 영문 밖으로 나와 그에게 나아가야 소망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받는 고난에는 보다 큰 소망과 보상이 있습니다.
(97) 영구한 도성을 찾는 그리스도인의 생활
(히브리서 13:14-16)
오늘 본문 14절에서는 그리스도인의 궁극적 삶의 목표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목표점을 우리가 찾아가는 본향으로 말씀해 주고 있으며 그곳을 영구한 도성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이 세상에서의 생애는 나그네길을 걷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나그네는 그 길의 종착지점이 있는 것입니다. 그곳이 그 나그네가 목표로 삼고 걸어가는 본향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최종적인 본향은 하늘에 영구한 도성이라고 한 것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이 목표점을 바라보지 못하고 그의 나그네길을 걸어간다면 그는 소망이 있는 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1. 그리스도인들에게 장차 올 것
14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은 이 땅에서 살아가지만 이 땅에는 없는 곳을 찾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곳은 장차 올 것인데 이 장차 올 나라는 우리가 찾는 영구한 도성으로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 땅에서 살아갈 동안에도 재물로는 갑부에 해당하는 거부였지만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서 살아갔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로 ‘히11:10절에서 이르시기를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영구한 도성이 없는 이 세상에서 이 세상에 소망을 두며 호화스러운 집을 짓고 그곳에서 안락한 생활을 즐겨 한 것이 아니라 장차 올 도성인 하늘의 성을 소망으로 바라보며 살아갔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히 11장에서 열거한 그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에 대하여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 나라에서 보다 영광스러운 삶을 누리기 위해 더 낳은 부활을 얻으려고 생명까지라도 바쳤다고 증거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이 땅에서 누릴 영광이나 행복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구한 도성이 있는 하늘의 예루살렘이라면 우리는 마땅히 예수님이 지신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생활이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의 최상의 생활인 것입니다. 이 나라는 장차 올 것이라고 했습니다. 장차란 말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의 생애가 마쳐지고 육신을 벗어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는 그날을 의미합니다. 다른 하나는 주의 재림으로 오는 인류의 종말 시기를 가리킵니다.
2. 그리스도인들이 드려야 할 제사
15절에서 ‘이러므로’라고 말씀해 줍니다. 이 이러므로 란 말은 그러기 때문이란 뜻으로 우리의 삶의 목적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구한 도성이라면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대답인 것입니다.
(1) 하나는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고 했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인들이 주의 영광을 찬미하는 일을 왜 제사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까? 제사란 구약적인 표현으로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 제단에 제물을 드리는 일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 같은 제사는 지금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필요치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제물로 하나님의 제단에 드려지므로 구약적 제물을 제단에 드리는 제사는 끝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드려야 할 제사는 구약적 제물을 제단에 올리는 제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찬미의 제사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드리는 찬미는 하나님께 열납되는 영적 제사인 것입니다. 이 찬미는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제사라고 하셨습니다. 이 찬미에 대하여 15절에 나온 말씀을 보면 ‘이는 그 이름을 증거 하는 입술의 열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미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거 하는 입술의 열매인 것입니다. 롬10:10절에 이르시기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했습니다. 은혜를 받은 마음으로 진실한 신앙 고백이 동반한 찬양은 바로 그리스도를 입으로 시인하는 열매이기 때문에 구원에 이르는 방편이 되는 것입니다. 이 찬미에 대해서 항상 찬미의 제사를 드리자고 했습니다. 늘, 우리의 전 생애에 걸쳐 찬미의 제사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기븐 좋을 때만 부르고 예배 시간에만 부르고 어쩌다가 생각나서 부르는 것이 아니라 항상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부르는 찬양이야말로 찬미의 제사인 것입니다.
(2) 다음에 16절에서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했습니다. 오직 선을 행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선을 행하는 일은 착한 일의 열매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착한 행실을 하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서로 나눠주는 일은 구제의 손길을 말합니다. 있는 자는 없는 형제들에게 나눠주는 일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결론 : 이런 일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물질의 축복을 주시는 목적은 형제들에게 선을 베풀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선한 일을 하라는데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우리에게 입을 주신 것은 그 입술로 하나님을 찬양하라는데 있습니다. 그런 일에 우리의 입술을 쓰고 그런 일에 우리의 재물을 사용하면 하나님은 더욱 많은 은혜와 재물의 축복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제사, 항상 찬미의 제사를 드릴 것과 선한 일과 서로 나눠주는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98) 목자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자세
(히브리서 13:17)
17절에 나오는 말씀은 양인 그리스도인들과 그들을 인도하고 그들에게 꼴을 먹일 목자간의 상호 관계를 나타낸 말씀입니다. 여기 나와 있는 말씀은 물론 양 무리들에게 그들을 주안에서 양육하는 목회자에게 대할 태도에 대한 교훈적인 권면이지만 또한편 목자들이 어떻게 양 무리들을 돌 볼 것인가에 대한 목회자의 목회 자세에 대해서도 아울러 교훈해 주신 말씀입니다.
1. 교회를 인도하는 목회자의 자세
먼저 본문에 간단히 나온 목회자의 자세 즉 주님이 바라시는 목회자 상이 어떤 것인가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교회의 지도자는 양 무리들의 영혼을 위해 경성하는 자임을 말씀해 줍니다. 너희 영혼을 위해 경성하는 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경성이란 말은 깨어 있다는 뜻입니다. 목회자는 양 무리들을 위해 마땅히 깨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목자들이 자기 양떼들을 위해 밤새워 지키며 길을 이탈하지 않도록, 사나운 짐승에게 잡혀 먹지 않도록 늘 보살펴 주는 목자로서의 책임을 비유적으로 나타낸 말입니다.
다윗이 어렸을 당시 자기 아비 집의 양 무리의 목자로 양을 칠 때에 그가 어떻게 그 양 무리들을 지켰는가에 대하여 다윗의 고백을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삼상17:34절에서 ‘주의 종이 아비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떼에서 새끼를 움키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었나이다’고 사울 왕에게 고한 것입니다.
교회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사탄의 공격 표적이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두 가지 방법으로 교회를 공략합니다. 하나는 거짓 진리로 미혹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참 생명을 죽이는 쑥물입니다. 다음에 세상의 영화와 영광으로 유혹합니다. 기복적인 신앙은 이 유혹에 넘어간 결과입니다. 예수님이 종말의 시기를 노아의 때와 같고 롯의 때와 같다고 하신 것은 교회가 세속에 물들어 하나님 중심의 생활을 버리고 세상의 영광과 재물을 따라가는 시대가 될 것이란 경종인 것입니다. 주의 종들은 이런 위기 상황에서 자기에게 맡겨진 양 무리들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양 무리들을 기키는 자세가 바로 경성인 것입니다.
(2) 경성하는 자세에 대하여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회개할 자란 말은 빚 보증인이란 뜻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빚을 보증하는 사람의 책임은 대단히 무겁습니다. 그래서 잠언에서는 빚 보증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경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빚 보증을 잘못 서 주면 그 책임을 증인이 고스란히 짊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들은 양 무리들에게 이 같은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요즘은 교회가 하나의 기업화되고 또 목회자가 권위적으로 교회를 운영하기 때문에 이런 성경적 교훈은 진부한 이야기처럼 들려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의 양 무리를 맡은 목회자에게 반드시 빚 보증인으로의 그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24:45절 이하의 말씀에서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들에게 주시는 상급과 악한 종들에 대한 심판에 대하여 분명히 말씀하신 것입니다.
2. 인도하는 자에 대한 양들의 자세
교회를 인도하는 목회자들에 대한 양들의 자세에 대하여 두 가지로 말씀해 줍니다. 하나는 순종하고 복종하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저희로 이 일을 즐거움으로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는 것입니다.
(1) 순종하고 복종하라고 했습니다. 양과 목자는 같은 그리스도인이지만 같은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피로 값주고 사신 교회를 위해서 여러 가지로 직분을 배정하셨습니다. 엡4:11절에서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서 주님은 이처럼 여러 직책을 주셨습니다.
특별히 성도들을 인도하는 목회자의 직분은 귀하고도 중합니다. 이런 직분은 모든 교회 성도들이 알아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당신을 대신하여 교회에 세우신 목자임을 알고 범사에 순종하며 복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순종하고 복종해야 한다는 말을 인간적인 대인 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님을 먼저 전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면하고 명하는 바를 따르라는 뜻입니다. 왜냐 하면 이들은 우리 영혼을 위해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기 때문입니다.
(2) 다음에 즐거움으로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고 했습니다. 자기의 영혼을 위해 애쓰며 힘쓰는 목회자로 그런 사명을 즐거움으로 하게 하도록 하는 일은 성도들의 의무인 것입니다. 그런 일을 근심으로 하게 할 때 자신에게 무슨 유익이 있을 것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진실한 하나님의 종을 대적하는 일은 주님을 대적하는 일입니다. 자기 영혼의 보증인으로 기도하는 하나님의 종을 괴롭히는 일은 교회를 넘어지게 하는 일입니다.
결론 : 우리의 생애는 교회에서 시작되고 교회에서 마감됩니다. 교회야말로 양의 우리인 것입니다. 성도는 교회에서 순종하고 복종하는 자세로 하나님의 종을 대접하여 그들로 근심으로서가 아니라 즐거움으로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99) 바울의 축복기도
(히브리서 13:18-25)
작년 12월 2일 처음 히브리서를 강해하기 시작했는데 어느덧 오늘 아침 100회 째로 강해를 다 마치게 됩니다. 히브리서를 쓴 저자는 이 서신을 받는 교회에게 기도를 부탁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서신을 마감하면서 그들에게 권면의 말을 쓴 것을 용납하라는 겸손한 양해를 구하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또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에게 있기를 축원하면서 서신을 마감하고 있습니다.
1. 저자의 기도와 송영과 축복
저자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부탁하면서 그들을 향한 이 서신의 내용이 선한 양심에 기초를 두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속히 그들에게 돌아가기를 원하기 때문에 이로 인하여 기도하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제 이 편지를 마감하면서 20절과 21절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몇 가지 사실에 대하여 이루어 주시기를 간구하는 말로 송영을 보내고 있습니다.
여기서 저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원함에 예수님과 연관시키고 있습니다. 20절에서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은 양의 큰 목자가 되시는 분입니다. 큰 목자란 말은 양의 오직 하나뿐이신 진실한 목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양의 목자라고 하셨고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라고 하셨습니다. 그 분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구원을 얻을 자가 없기 때문에 예수야말로 양의 큰 목자이십니다. 그 분은 세상에 있는 모든 양 무리들의 참 목자이십니다. 이 땅위에 목자의 직위를 가지고 양 무리들을 돌보는 하나님의 종들이 많지만 이들은 큰 목자이신 예수님이 당신의 교회를 세우시기 위해 잠정적으로 주신 직분에 불과할 뿐, 예수님만이 영원한 양의 큰 목자이십니다.
그리고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영원한 언약의 피입니다. 구약의 짐승의 피는 이 분 예수가 오시기 이전까지의 언약의 그림자로서의 피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원한 언약의 피로 그의 피로써 하나님의 언약을 완전히 이루셨으며 이제 이후로는 다른 피를 흘릴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다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셨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는 그의 부활로써 그가 모든 인류의 속죄의 피를 흘리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셨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에 대하여 롬1:4절에서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 하나님은 그의 아들의 피로써 우리와 평강을 이루셨습니다.
히브리서를 보낸 저자는 이 평강의 하나님이 히브리서를 받아 읽는 모든 성도들에게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한다’는 축복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모든 선한 일에 온전케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생각하여 그의 뜻대로 살 수 있기를 원하는 의지만 보인다면 하나님은 우리로 모든 선한 일에 온전케 우리의 생애를 주관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로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로 선한 일에 온전케 하시는 것은 우리들로 자기 뜻을 우리 안에서 행하게 하시는 데 있습니다. 다음에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한다’고 했는데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선행은 하나님 앞에 즐거움을 주는 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생활이 그리스도인들의 마땅한 생활이며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사 우리들로 그런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간구한 것입니다.
2. 마지막 인사
21절에서 히브리서 저자가 이 편지를 받아 볼 성도들에게 여러 가지로 경계하고 훈계하며 책망한 말에 대하여 ‘권면의 말’이란 부드런 말로 표현하면서 그 같은 권면을 용납하라고 말해 주고 있습니다. 용납하란 말은 본문에 나와 있는 모든 훈계에 비해서 보다 부드러운 말로 위로를 주려는 생각에서 사용한 말입니다. 23절에서 우리 형제 디모데가 놓인 것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디모데를 우리 형제란 이름으로 부르고 그에 관한 기사를 이곳에 기록한 것으로 보아 이 히브리서를 쓴 저자가 사도 바울이란 설이 유력하게 강조되고 있습니다.
24절에서 ‘너희를 인도하는 자와 및 모든 성도에게 문안하라’고 했습니다. 문안이란 주 안에서 평안을 주고받는 인사입니다. 이 서신은 아마 이 서신을 전달한 사람이나 이 서신을 받을 만한 처지에 있는 직분자가 교회 안에서 읽는 것으로 전달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모든 사람들의 문안에 대한 인사를 빼지 않으므로 친밀감을 표시했으며 그들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결론 : 25절에서 ‘은혜가 너희 모든 사람에게 있을 지어다’는 말씀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새벽마다 이 말씀을 귀담아 들으신 여러분들에게 히브리서를 받아 읽은 그 옛날 히브리 교회 성도들에게 저자가 선언한 것 같은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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