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차례
히브리서 5장 (27 - 29)
(27) 대제사장의 자격(히브리서 5:1-4)
(28) 예수의 대제사장 직분(히브리서 5:5-10)
(29) 단단한 식물을 먹는 자가 되라(히브리서 5:11-14)
히브리서 6장 (30 - 37)
(30) 죽은 행실에 대한 회개(히브리서 6:1-3)
(31)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히브리서 6:1-3)
(32)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히브리서 6:1-3)
(33) 믿음에서 떨어지는 죄(히브리서 6:4-8)
(34) 하나님이 기억해 두시는 것(히브리서 6:9-12)
(35) 하나님의 확실한 약속(히브리서 6:13-16)
(36) 누가 약속을 받을 자인가?(히브리서 6:17-20)
(37) 견고한 영혼의 덫(히브리서 6:17-20)
히브리서 7장 (38 - 42)
(38) 멜기세댁과 그리스도(히브리서 7:1-10)
(39) 멜기세댁과 그리스도와의 관계(히브리서 7:1-10)
(40) 율법 외 별다른 제사장(히브리서 7:1-19)
(41) 생명의 보증이 되신 예수(히브리서 7:20-25)
(42) 영원히 온전케 되신 우리의 대제사장(히브리서 7:26-28)
히브리서 8장 (43 - 45)
(43) 하늘 성소에 있는 우리의 대제사장(히브리서 8:1-6)
(44) 구약의 하자(히브리서 8:7-13)
(45) 새 언약의 축복(히브리서 8:7-13)
히브리서 9장 (46 - 52)
(46) 첫 장막의 속죄소(히브리서 9:1-5)
(47) 성령이 보이신 뜻(히브리서 9:6-8)
(48) 양심으로 온전케 할 수 없는 구약의 제물(히브리서 9:8-10)
(49) 온전치 못한 율법 아래 중보자(히브리서 9:11-17)
(50) 그리스도의 중보자 직분(히브리서 9:11-17)
(51) 신구약에 나타난 언약의 피(히브리서 9:18-28)
(52) 주의 재림과 구원의 완성(히브리서 9:28)
히브리서 10장 (53 - 61)
(53) 첫 것과 둘째 것(히브리서 10:1-10)
(54)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오신 예수(히브리서 10:5-10)
(55) 영원한 구원(히브리서 10:11-14)
(56) 그 날 후에 세울 하나님의 언약(히브리서 10:15-18)
(57) 사죄자의 신앙적인 자세(히브리서 10:19-20)
(58) 보좌에 나아갈 자격자(히브리서 10:21-25)
(59) 짐짓 죄를 짓는 자(히브리서 10:28-29)
(60)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생활(히브리서 10:30-31)
(61)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히브리서 10:3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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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5장 (27 - 29)
◆ 밤중소리 02-01 | VIEW : 536
(27) 대제사장의 자격(히브리서 5:1-4)
(28) 예수의 대제사장 직분(히브리서 5:5-10)
(29) 단단한 식물을 먹는 자가 되라(히브리서 5:11-14)
(27) 대제사장의 자격
(히브리서 5:1-4)
예수님의 대제사장 직분은 우리의 구원에 있어서 절대적인 진리이기 때문에 히브리서에서는 이 직분에 대하여 많은 말씀을 할애해 주고 있습니다.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존재했던 대제사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는 일에 없어서는 안될 존재였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과 이스라엘의 제사장 직분은 동일한 의미가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의 제사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의 그림자에 불과 했다는 사실을 알고 깨닫는 일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1. 대제사장의 자격
대제사장은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사람을 대표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대제사장은 이스라엘 중에서 가장 거룩한 자라고 불려졌습니다. 대제사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와 예물을 드리고 기도해 주는 직분자로, 몸을 씻고 예복을 입고 머리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이들은 절대로 머리를 풀 수 없었으며 옷을 찢을 수도 없었고 아내가 죽어도 과부를 아내로 취할 수 없었습니다.
1절 말씀을 보면 대제사장의 자격 요건이 나오는데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취한 자’라고 했습니다. 대제사장의 직분이 아무리 거룩하다고 해도 천사나 그밖에 다른 어떤 영적 존재도 이 직분을 취하지 못했습니다. 오직 사람 가운데서 택한 자라야 하는 것입니다. 4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 존귀는 아무나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12 지파 중에 오직 레위 지파를 이 직분에 합당한 지파로 택하셔서 레위 지파의 아론을 대제사장으로 부르시고 아론의 자손들로 대대로 제사장 직분을 맡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중에도 거룩한 자들이 얼마든지 많이 있었으며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고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지만 그러나 그들은 어떤 경우에도 대제사장으로 부르심을 받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레위 지파에 속한 아론의 자손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사람들 가운데서 대제사장을 부르신 것입니까? 2절과 3절에 그 뜻이 나와 있습니다. ( ). 대제사장이 사람을 위하여 예물을 드리고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려면 먼저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처지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이 속죄제물을 드리는 대상자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진리에 유식한 사람도 아니며 온전한 사람들도 아닙니다. 무식하고 미혹한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그 가운데 상당수는 하나님의 말씀에 무식하고 세상사에도 아는 것이 별로 없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영적으로 어려서 사탄의 미혹을 받기 쉬운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백성들을 대표하여 그들을 위해 속죄 제물을 드려야 할 대제사장이라면 이런 백성들의 연약함을 이해하고 동정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자기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대언의 기도를 드리게 되고 모세처럼 눈물을 뿌리며 그들의 사죄를 위해 자신이 죄를 지은 자인 것처럼 회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대제사장이 사람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하늘의 천사들처럼 신령한 존재들이라면 이런 일은 불가능합니다.
대제사장도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겪는 고초나 시련도 겪으며 사람들과 똑같은 환난과 슬픔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는 의인이 없기 때문에 대제사장이라 할지라도 죄 문제로 고민하게 되고 자신도 지은 죄로 인하여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제사장 자신도 자기의 죄와 허물을 위해 하나님께 속죄 제물을 드려야 했습니다.
대제사장이 하는 일 중에 가장 뜻깊은 일이 있는데 그 일이란 일년에 한 번 씩 지성소에 들어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하여 속죄 제물을 드리는 일입니다. 이 때 대제사장은 먼저 자신의 속죄 제물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고서는 결코 지성소에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대제사장은 자신의 죄를 인하여 먼저 송아지의 피로 제사를 드리고 백성들의 죄를 위해 염소의 피로 속죄 제물로 삼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이라고 죄를 범하지 않을 사람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이 세상에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란 단 한 사람도 존재치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대제사장을 세우실 때 연약한 사람 중에서 부르심으로 백성들의 어려움과 연약함을 이해하게 하신 것처럼 오늘날 하나님의 종들도 하나님의 백성들과 똑같이 연약에 싸인 인간들로 당신의 종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사를 천사로 알고 교회에 나오신다면 그런 사람은 몇 일이 못 가 목사에 대하여 실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람의 냄새가 풍기며 목사는 사람이지 사람이상의 존재가 아님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는데 어떻게 목사가 의인이 될 수 있을 것입니까? 누구든지 자기는 죄를 범한 일이 없다고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자라고 하셨는데 어떻게 목사라고 죄 없기를 바라겠습니까?
목사는 양떼들의 연약함을 이해하고 그들을 위해 자신의 경우처럼 뼈아프게 여겨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이 중요하고 양떼들은 목자에게 허물이 있어도 그 허물과 죄를 용서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덮어주는 사랑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 그런데 이런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온전한 제사장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이며 자신을 위해서조차 속죄 제물이 필요한 사람은 온전한 대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히브리서 저자는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이 얼마나 귀중하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28) 예수의 대제사장 직분
(히브리서 5:5-10)
본문 5절부터는 예수의 대제사장 직분에 대하여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의 제사장 직분이 스스로 취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오직 레위 족속 가운데서 택하시고 부르심으로 된 것처럼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도 아론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택하심과 부르심을 받아 이 직분을 받으신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1. 예수의 제사장 직분
예수님의 대제사장 직분은 말씀으로 계셨던 영적 상태로는 받으실 수 없으셨습니다. 왜냐 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은 모두 연약에 싸여 있기 때문에 이런 백성들을 위해 대제사장 직분을 담당하시려면 자기도 연약에 싸여 있어야 하기 때문에 사람이 되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히4:14-15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신 분이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신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같은 그리스도에게 하나님은 우리의 대제사장 직분을 주신 것입니다. 이 직분은 스스로 취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과 아론과 같은 부르심에 의하여 이 직분을 가지신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6절에 나온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하나님의 명령은 아론의 경우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대제사장 직분은 아론의 반차를 좇는 대제사장으로서가 아니라 멜기세댁의 반차를 좇는 대제사장이 되라고 하시는 명령에 따라 된 것임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2. 멜기세댁의 반차를 좇게 된 이유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이 왜 아론의 서열을 따르지 않고 멜개세댁의 서열을 따르는 제사장이 되셨는가에 대하여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론을 대제사장으로 세우실 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셨을 때였습니다. 그리하여 구약의 대제사장들은 율법아래서 범죄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속죄 제물을 드리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던 것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율법에서 속량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제 율법의 속하지 않게 되었으며 은혜 아래 머물게 되었습니다. 요1:17절에서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옛 언약을 폐하시고 새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옛 언약의 대제사장으로 세우신 것이 아니라, 새로운 언약의 대제사장으로 세우셨던 것입니다. 옛 언약의 대제사장은 오직 아론의 자손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라야 자격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레위 자손이 아니라 유다 지파의 자손이심으로 대제사장이 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 언약의 대제사장으로 선택받으시고 부르심을 받은 예수님은 아론이 아니라, 멜기세댁의 서열을 좇아 대제사장으로 세우심을 받게 된 것입니다.
멜기세댁에 관한 말씀은 히7장에 나오기 때문에 이곳에서는 간략히 설명하는데 그치려고 합니다. 창14:18-20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 ).
(1) 멜기세댁이란 사람은 살렘의 왕이자, 하나님의 제사장이었습니다. 율법에는 왕은 제사장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멜기세댁은 율법 아래 있었던 제사장이 아니었기 때문에 율법의 구애를 받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는 우리의 왕으로 오셨고 또 우리를 위한 대제사장으로 오셨기 때문에 그는 마땅히 멜기세댁의 서열을 따라 제사장이 되실 분이 신 것입니다.
(2) 다음에 왕이요 제사장이었던 멜기세댁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났을 때 양이나 송아지나 염소의 피를 가지고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떡은 그리스도의 살이요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제사장 직분은 바로 그의 몸과 그의 피로 이루신 것입니다. 그 몸은 우리를 위하여 찢기신 화목제물이십니다. 그의 피는 우리의 죄를 사죄하는 속죄 제물이십니다.
(3) 다음에 멜기세댁은 그의 제사장 직분을 다른 이에게 넘겨준 일이 없으며 한 번 나타났다가 그 이후에 아무 말도 없습니다. 그 이유는 이 멜기세댁의 제사장 직분을 이어 받을 만한 제사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멜기세댁은 그리스도의 상징적 인물입니다. 멜기세댁의 이 같은 제사장 직과 왕권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넘겨졌습니다.
(4) 다음에 멜기세댁은 혈통이나 족보에 의하여 세워진 제사장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부르심으로 세워진 제사장이었습니다.
결론 : 하나님은 그의 아들로 죄인의 구속을 위한 대제사장으로 삼으셨습니다. 이 분은 우리의 연약함을 직접 체험하신 분으로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 우리를 이해하시며 우리가 시험을 당할 때 우리를 도와주시며 우리가 죄를 범했을 때 누구보다 우리를 이해하시고 긍휼을 베푸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이 분은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하늘의 지성소에서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의 온전한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고 계십니다. 이 분을 의뢰하시기 바랍니다.
(29) 단단한 식물을 먹는 자가 되라
(히브리서 5:11-14)
히브리서 저자는 11절에서 멜기세댁에 관하여는 할 말이 많지만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정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의 양식이기 때문에 이 말씀을 먹는 자는 영적 성장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은 때를 따라 받아먹지만 신앙적으로 장성하지 못하고 어린아이의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런 일이 안타까웠습니다. 멜기세댁과 같은 성경의 깊은 진리를 소화시키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아직 젖을 먹는 어린아이의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탄식했습니다.
1. 두 가지로 구분되는 하나님의 말씀
히브리서 저자는 이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두 가지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젖과 단단히 식물이 그것입니다.
처음 하나님 앞에 나와서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의 영적 식물은 젖에 해당되는 순한 것입니다. 마치 어린아이들이 젖밖에 소화시킬 수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의 자리에서 자라는 이들은 젖이나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젖이라고 표현한 것은 기독교의 초보적인 교리를 말합니다. 이들은 아직 성장하지 못했기 때문에 깊은 단계의 말씀을 이해하여 영적 양식으로 소화시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의당히 젖을 사모하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 한편 우리가 알아야 할 일은 어린아이란 말은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사실입니다. 고전3:1-3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신령한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신령한 자란 영적인 사람으로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영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을 영적인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롬8:5절에 있는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일을 생각하거나 결정할 때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들입니다. 다른 한 가지는 신령한 사람이란 영으로 육신의 행실을 죽이는 사람들입니다. 롬8:13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몸의 행실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인간 본래의 성품을 영으로써 억제시키는 일입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히브리서를 읽어야 할 사람 중에는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조차 가르침을 받아야 할 정도로 어린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탄식한 것입니다. 12절 말씀을 보면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영접한 때가 이미 오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도 때가 오래면 그리스도 안에서 선생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때가 오래면 신앙적으로 크게 성장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 젖만 사모하며 젖만 골라 먹던 시절에서 벗어나 단단한 음식도 취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월이 오래 지나 나이가 들면 그 나이에 걸맞은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5살쯤 되면 이제 뛰어다닐 줄 알아야 하는데 어린 아기처럼 기어다니는 생활을 한다면 이런 어린이는 기형아이지 정상적인 아이가 아닌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2. 장성한 자
그리스도인은 신앙적으로 장성한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장성한 자의 음식은 젖이 아니라 단단한 식물 즉 밥입니다. 이 말씀의 뜻은 어려운 말씀도 잘 이해할 수 있으며 그 말씀 안에 생활할 수 있는 신앙적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은 그 단계가 대단히 장성한 자리에 있었습니다. 이삭을 살려준다는 약속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아직 이삭이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 하나님께서 네 자손은 이삭으로 말미암아 번성하리라고 하신 약속을 믿고 이삭을 제물로 드려도 하나님께서 그 약속의 말씀대로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려 주실 것이라고 하는 믿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14말씀을 보면 믿음이 장성한 그리스도인의 신앙이 세 가지로 나와 있습니다. 첫째로 의의 말씀을 경험한 자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그의 생애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몸으로 경험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말씀의 뜻은 말씀에 대한 순종의 생활을 통해서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체험을 겪었다는 뜻입니다.
다음에 지각을 사용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지각이란 지혜의 감각을 말합니다. 오랜 신앙생활을 통해 연단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무슨 문제가 생기면 즉각적으로 지각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하는 지각, 이렇게 하면 하나님의 뜻을 거스려 하나님의 징계를 맞을 것이라고 하는 지각이 생기는 것입니다.
다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한 사람은 선악을 분별하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선악을 분별한다는 말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잘 판단한다는 뜻입니다.
결론 : 우리는 어린아이같은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안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언제나 믿음이 없고 순종하지 못하므로 축복을 받지 못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우리의 연수에 따라 제대로 성장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장이 있는 그리스도인들만이 열매를 맺으며 진리의 말씀을 깨달아 은혜의 생활 행복한 생활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6장 (30 - 37)
◆ 밤중소리 02-01 | VIEW : 610
(30) 죽은 행실에 대한 회개(히브리서 6:1-3)
(31)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히브리서 6:1-3)
(32)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히브리서 6:1-3)
(33) 믿음에서 떨어지는 죄(히브리서 6:4-8)
(34) 하나님이 기억해 두시는 것(히브리서 6:9-12)
(35) 하나님의 확실한 약속(히브리서 6:13-16)
(36) 누가 약속을 받을 자인가?(히브리서 6:17-20)
(37) 견고한 영혼의 덫(히브리서 6:17-20)
(30) 죽은 행실에 대한 회개
(히브리서 6:1-3)
그리스도를 영접한지 이미 오래되어 단단한 음식을 취해야 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조차 아직도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연약한 히브리 교회의 성도들을 안타까이 여긴 히브리서 저자는 이제 초보적 교리에서 벗어나 완전한데 나아가라고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터를 닦지 말라고 하는 초보적 교리는 어떤 것들이냐에 대하여 본문에서 몇 가지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죽은 행실을 회개하는 일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와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들로 성도들은 이런 교리적 지식을 잘 배우고 견고히 해야 젖을 먹는 어린아이의 자리에서 단단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자리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이 같은 교훈에 대하여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자주 흔들렸던 것입니다.
1. 죽은 행실의 회개
우리는 초보적인 도리에 매달려 언제까지나 젖만 먹는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믿음의 성장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매달리기 쉬운 그리스도 도의 초보적인 도리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가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죽은 행실을 회개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죽은 행실을 회개한다는 말은 기독교의 기본적인 교리에 관한 것입니다. 기독교는 회개의 종교입니다. 회개란 죄를 없애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기독교에서 회개라고 말할 때 우리는 두 가지 면에서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는 예수를 알지 못한 사람들의 회개입니다. 이들의 회개는 구원에 이르는 회개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처음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반드시 회개가 따라야 합니다. 회개 없이는 예수를 영접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회개를 구원의 회개라고 합니다. 이 회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했던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었을 때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몰랐던 사람들이 예수를 영접할 때 나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거역했던 죄에 대하여,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던 일에 대하여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회개가 구원에 이르는 회개인 것입니다. 이 같은 회개는 오직 예수를 처음 믿을 때 단 한 번의 회개로 이루어지며 그 효과는 영원히 계속되는 것입니다. 이 회개로 우리는 우리 인생의 방향을 하나님께로 전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회개로 우리의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이 회개를 마친 사람들입니다.
이 회개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가 되고 의에 대해서는 산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 구원의 회개가 없이는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이 회개가 없이 우리가 우리의 생활이나 생애에서 하는 모든 회개는 회개의 가치를 나타낼 수 없습니다. 이 회개로서 우리는 아담으로 내려오는 사망의 원죄가 소멸되고 우리가 아직까지 지은 모든 죄가 용서받을 뿐 아니라 우리의 평생의 모든 죄까지도 사죄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롬6:2-7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세례를 받으므로 우리도 그와 함께 죽었다고 했습니다.
2. 그리스도 안에서의 회개
다음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후에 저지르는 죄에 대하여 어떻게 처리해야 하느냐는 문제에 당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이 세상에서는 육신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으므로 육신이 죄의 유혹을 받아 죄를 저지를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런 죄에 대해서는 어떻게 처리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이 죄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회개 생활로 처리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회개는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의 회개와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이 회개는 새로운 생명을 얻기 위한 회개가 아닙니다. 이 회개는 새 생명을 얻은 사람들이 그의 생활 가운데 나타나는 죽은 행실에 대한 회개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범하는 죄는 정죄 받을 죄가 아닙니다. 이런 그리스도인의 죄는 불신자들이 받는 정죄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처리를 받아야 할 죄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불순종에 대한 회개인 것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회개가 없으면 세상 사람들과 성별되지 못한 생활을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의 뜻을 거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신 목적은 하나님을 향하여 새로운 열매를 맺게 하시려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려 불순종하면 그런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징계의 손길이 나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죽은 육신의 사람의 죄악의 근성을 죽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영으로 육을 죽이는 생활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죽은 행실을 온전히 죽이지 못하고 그 가운데 살아갈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짓는 죄에 대하여 책임을 지고 하나님께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 교회의 성도들은 이런 회개에 철저하지 못하므로 신앙생활 한지가 오래 되었으나 항상 어린아이들처럼 젖만 먹는 어리석은 자리에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결론 : 우리의 신앙은 반드시 성장해야 합니다. 정상적인 성장을 이루기 위해서는 죽은 행실에 대한 회개에 철저해야 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새사람의 행실로 자신을 단장해야 하는 것입니다.
(31)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
(히브리서 6:1-3)
히브리서를 받는 교회의 성도들이 젖이나 먹고 단단한 음식을 먹지 못하게 된 이유 중에 하나는 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없으면 신앙적으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신앙의 성장이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그 근원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없이도 교회에 잘 나오는 사람들도 있기는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사람인가? 습관적인 믿음을 가지고 교회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그들입니다. 성령이 주신 믿음이 아니라 육신적인 습성에서 자라난 믿음입니다. 이 믿음을 가진 사람은 영적인 일에는 관심이 없고 어려움을 당할 때 신앙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을 가진 사람은 머리로만 자라지 하나님께 대한 바른 신앙으로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신앙은 뿌리 없는 고목 같으며 화병에 꽂은 꽃꽂이 같아서 겉보기에는 신앙처럼 보이지만 성장과 결실이 없는 죽은 신앙입니다.
1. 하나님께 대한 참 신앙
하나님께 대한 참 신앙은 어떤 것입니까? 히11:6절에서 이르시기를 하나님이 계신 것과 그를 찾는 자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것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없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의 죄를 위하여 그의 아들을 보내신 사랑의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택정하시고 나를 구속해 주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 같은 믿음은 혈육으로 기질 수 있는 믿음이 아닙니다. 인간의 지혜나 지식이나 경험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심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은 그에게 칭찬하시면서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신앙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성령으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듣고 순종하는 신앙이 하나님께 대한 바른 신앙으로 성장하는 길입니다. 만약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갖지 못하면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도 못하고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생활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오랜 세월이 흘러도 초보적인 교리에 얽매어 늘 어린아이의 자리에서 생활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2. 세례에 관한 교리
그리스도인은 세례에 대하여 올바른 성경적 지식을 가져야 세례를 받은 교인 으로서 바른 신앙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세례와 구원과의 올바른 성경적 지식을 가져야 합니다. 천주교나 또 기독교 안의 어떤 교파에서는 세례를 구원의 조건에 결부시켜 하나님의 구원을 세례에 구속을 받게 하므로 주님의 십자가의 공로를 훼손시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세례는 구원에 절대로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 사실에 흔들리면 어느 교인이 침례 교회로 교적을 옮길 때 또 침례 형식의 세례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구원은 선행에도 있지 않고 세례에도 있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 하나만으로 얻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하나만으로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구원에 이르는 하나님의 지식입니다. 이 사실을 믿는 일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입니다. 같은 예수를 믿어도 사회 혁명가로서의 인간 예수를 믿으면 구원이 없습니다. 메마른 세상에 사랑의 불을 지핀 사랑의 성현으로 받들어 섬기는 사람에게는 구원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이루신 모든 사건을 믿는 것이 구원을 이루는 길이요 방법입니다.
세례란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회개했다고 하는 표로 받는 신앙고백의 의식입니다. 세례에 이런 믿음이 따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세례 자체엔 아무런 구원의 능력도 없습니다. 구원의 보증도 아닙니다.
회개란 우리가 이제 죄에서 깨끗해 졌다는 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했다는 증표도 아닙니다. 우리를 깨끗케 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서만 가능합니다. 그러면 세례의 참뜻은 무엇입니까? 벧전3:21절에서 이처럼 말씀해 줍니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례를 받았다면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죄에 대하여 죽었으니 이제 그 가운데서 더 살아갈 수 없다. 나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의에 대하여 살았으니 내 생활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을 통하여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겠다고 하는 신앙적인 생활에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 이런 신앙을 가지지 못하므로 우리의 신앙은 언제나 젖이나 먹는 어린아이의 자리에서 더 성장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참 세례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그리스도와의 영적 연함입니다. 이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은 이런 사실을 명심하고 참 세례의 생활 가운데로 들어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영적 연합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32)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
(히브리서 6:1-3)
다음에 히브리서 저자는 말하기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데 나아갈지니라’고 했습니다.
1. 안수문제
안수는 성경적으로 두 가지로 구분됩니다. 신앙 생활을 하는 가운데 안수를 받는 경우가 있고 직분 자를 세울 때 안수를 받습니다. 어느 것이건 안수는 기름 부움을 받은 하나님의 종들에 의해 합법적으로 실시해야 합니다.
눅13:10절 말씀을 보면 우리는 병자를 위해 안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안수하심으로 많은 병자들의 병을 고치셨습니다. 그러므로 병자가 병을 고침 받기 위해 주의 종에게 안수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막10:16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을 품에 안으시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해 주셨다고 했습니다. 교인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 하나님의 종의 안수 기도를 받을 수 있습니다.
행8:17절 말씀을 보면 사도들의 안수 기도로 성도들이 성령을 받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성령을 충만히 받으려는 성도가 목사의 안수 기도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장로교 헌법 규칙 제12조에 의하면 ‘교회에서 헌법에 의지하여 성직을 받은 자 외에 병자를 위하여 함부로 안수하는 일은 삼가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능력을 받았다고, 은사가 있다고 성직자가 아닌 집사나 장로나 권사들이 교인들의 머리에 손을 얹고 안수하는 일은 삼가야 할 일입니다.
안수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해야 하며 안수로 나타난 효과는 안수자의 능력이나 믿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에 의하여 나타난 사실을 인정하고 안수 자는 결코 교만해서는 안됩니다. 직분 자들에게 하는 안수는 집사나 장로를 세울 때 시행하는 안수입니다. 교회는 특별히 이 안수에 신중하고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이 없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안수에 대한 성경적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안수를 함부로 주고받거나 안수 받는 일을 경솔히 여기면 이로 인하여 그 사람은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대개 이런 유의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이 성장하지 못하고 늘 젖이나 먹는 어린아이의 자리에서 더 깊고 넓은 영적 세계로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2. 죽은 자의 부활 문제
죽은 자의 부활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최종적인 소망임과 아울러 그리스도와의 연합교리에 있어서 절대적인 진리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에게 부활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지 못하면 그리스도와의 연합 관계도 그리스도인의 최종적인 소망도 희미해 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신앙이란 언제까지 가도 젖만 먹는 어린아이의 자리에서 더 성장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몸은 영체가 아닙니다. 부활체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 아들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받기 위해 아들과 같이 부활할 것입니다. 이 부활에 관한 진리를 잘 배우고 이해하고 깨닫는 일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오늘날 부활의 교리가 아직 확고히 정립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경적인 부활 관을 가지고 부활을 소망으로 삼아 신앙 생활을 하려면 성도들에게 있어서 성숙한 신앙의 단계에 이르러야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부활은 두 가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순교자들을 위해 예비하신 첫째 부활입니다. 이 부활에 참여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 부활은 상급부활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가장 영광스러운 부활입니다. 왜냐 하면 이 부활에 참여하는 순교자들은 지상의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천년동안 왕 노릇하게 되며 하늘에 올라간 후에도 그 왕권이 계속되기 때문입니다. 이 부활은 주님이 재림하시는 그 시기에 이뤄질 것입니다. 또 하나의 부활은 일반적인 부활로 마지막 부활이라고 하며 생명의 부활이라고도 말합니다. 이 부활의 시기는 천년왕국이 끝나고 최종적으로 천국에 올라갈 때 이루어 질 것입니다.
3. 영원한 심판의 교리
다음에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알게 되면 죄에 대하여 회개치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두려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영원한 심판에 대한 경종으로 예수님이 비유적으로 경종하신 일이 있습니다.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내 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심판에 관한 두려운 말씀을 깨닫고 신앙 생활을 한다면 그의 신앙은 성장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젖이나 먹고 자라는 신앙이 언제나 어린 자리에 있는 것은 이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결론 : 우리는 신앙적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어린아이의 자리에서 어제까지나 머물러 있으면 안됩니다. 우리는 이 같은 초보적 교리와 그리스인의 생활을 잘 감당하여 우리의 신앙의 차원을 영적으로 높여야 합니다. 완전한 대로 나가기를 힘쓰는 성도들만이 성장하는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33) 믿음에서 떨어지는 죄
(히브리서 6:4-8)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말씀은 신학적으로도 많은 논쟁이 계속되는 구절입니다. 알미니안 주의를 따라 성경을 해석하는 많은 사람들은 이 구절을 인용하여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도 타락하여 지옥에 갈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처럼 히6장에 나오는 이 말씀을 가지고 칼빈주의적 예정론을 공박하는 것입니다.
1. 문제의 풀이
(1) 이 문제의 키는 4-6절에 있습니다. 첫째로 ‘한번 비췸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한 번 빛을 얻었다는 말은 빛을 받았다는 말과는 다릅니다. 잠시 동안 빛을 받았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빛의 소유자인 것이 아니라 빛의 비췸을 잠시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을 얻기까지는 빛의 비췸을 여러 번 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빛의 비췸을 통해서 사람들로 하나님의 말씀을 접하게 하시고 어느 정도 이해하도록 하십니다. 때로는 은혜를 주시기도 하시며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도 하십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씨앗의 비유에서 돌밭에 떨어진 씨는 분명 구원이 보장된 경우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기쁘게 받아드리고 그 말씀에 소망을 가지고 그 말씀으로 인한 시험이 오기까지 얼마간 그리스도인처럼 살아가기도 했습니다. 그가 신앙에서 떨어지기까지는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으로 착각을 주었으며 구원받은 무리들과 함께 신앙 생활을 해 왔을 것입니다. 우리는 빛의 비췸만을 받아 하나님 앞에 나오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빛을 받아 빛의 자녀로서 빛의 열매를 맺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2) 두 번째로 하늘의 은사를 맛보았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은사란 표현은 성령이 주시는 각가지 은사를 말합니다. 은사는 고전12장에는 성령의 9가지 은사가 나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일은 성령의 은사는 구원받은 포적이 아니란 사실입니다. 성령을 받았다는 말은 성령세례를 받은 것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는 반드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에게만 주시는 은사가 아닙니다.
옛날 사울에게도 성령이 임하여 예언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발람도 성령의 감동으로 예언을 했습니다. 발람의 당나귀는 성령의 역사에 따라 사람의 방언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고 이들이 다 구원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물론 성령을 받고 구원을 받은 사람이 은사를 받고 교회를 위해서 헌신해야 할 것이지만 거듭나지 못한 사람이 은사를 받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3) 다음에 성령에 참여한바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구원받은 사람은 성령에 참여한 사람인 것이 아니라 성령을 받은 사람입니다. 참여한다는 말은 잠깐동안 성령의 권능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을 말합니다. 부흥회 같은 곳에서 크게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았다든가 어떤 환상을 보았다든가 성령의 부인할 수 없는 역사를 체험한 상태를 성령에 참여한 것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4) 다음에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맛보았다는 말은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 그 말씀의 능력을 체험한 것을 의미합니다.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이 같은 경우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순종은 지속적으로 계속하지 못합니다. 말씀으로 인한 시련이 올 때에는 말씀에서 떠나게 되어 하나님을 배반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세의 능력이란 말은 영생과 천국에 대한 어느 정도의 소망을 말합니다. 그런데 6절에서 이르시기를 만약 이런 생활을 하다가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하여 호개케 할 수 없다고 한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타락은 어떤 범죄를 지적한 것이 아니라 옳은 길에서 벗어났다 다른 길로 방향을 바꾸었다는 뜻으로 믿음에서 영영히 떠난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2. 이 말씀의 참뜻을 생각하자
이런 사람들은 그들이 타락하기 이전까지는 얼마간 교회에 나와서 알곡처럼 그리스도인다운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자신도 자신에 대하여 그리스도인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에게 자신의 거짓된 모습이 들어나는 날이 오는 것입니다. 타락하는 일이 그 일입니다. 이 타락의 동기가 어떤 죄에 기인했든지, 다른 사람의 권면에서 온 것인지 환경의 변화에서 온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 때 이들은 믿음에서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들이 떨어지는 이유는 그들은 결과적으로 구원을 받지 못한 가라지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성경적으로 분명히 알아야 할 일은 구원받은 성도들은 어던 경우에도 멸망의 자리에 이르거나 구원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런것처럼 보일 때도 있겠지만 결국은 회개하여 돌아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들이 구원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신앙생활을 해 온 사람들임을 8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들의 신앙생활의 결실은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일이었습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생명의 열매를 맺습니다.
결론 : 오랜 신앙 생활 중, 아무런 열매가 없이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은 이런 경우에 해당되기 쉬운 것입니다. 열매가 없이,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신앙 생활을 한다면 이런 경우에 해당하기 쉬운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경종으로 삼아 그리스도 안에서 열매를 맺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소망을 바라보고 달려가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34) 하나님이 기억해 두시는 것
(히브리서 6:9-12)
오늘 본문 10절에는 하나님이 우리의 행위에 대하여 기억해 두시는 두 가지 일에 대하여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사랑으로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신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와 은혜를 힘입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1. 두 가지로 나타난 하나님의 자비
하나님의 자비는 두 가지로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의 모든 불의를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어 주시는 일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은 이후에도 우리는 죄를 초월해서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혹 범죄 해도 하나님께서는 그 죄를 계속적으로 용서해 주신다는 사실은 놀라운 은혜인 것입니다.
다음에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의 죄에 대해서는 용서해 주시고 그의 기억에서 사라지게 하시지만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의에 대해서는 반드시 기억해 두신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장사꾼이 외상 장부에 외상값을 치부하듯 우리가 행한 모든 일에 대하여 상급을 주시기 위해 어느 것 하나라도 빠짐없이 기억해 두신다고 하는 사실은 이 또한 놀라운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다 똑같이 이처럼 자비하신 분이신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배신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생각은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이신 것입니다.
10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불의치 아니 하사 너희 행위를 기억해 두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과연 우리의 어떤 행위를 기억해 두시는 것입니까? 우리의 행위란 신앙의 열매를 가리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지만 우리의 축복과 하늘의 상급은 행위로 말미암아 받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행위란 곧 말씀에 대한 순종의 열매를 말합니다. 믿음과 행위는 따로 떨어져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우리는 그 말씀을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순종의 결실이 행위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다른 또 한가지의 열매가 있습니다. 잠12:14절에서 ‘사람은 입의 열매로 인하여 복록에 족하며 그 손의 행하는 대로 자기가 받느니라’고 했습니다. 입술의 열매도 상급의 열매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록이 우리의 방정맞은 입술로 인하여 사라져 버릴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믿음의 입술을 가져야 합니다. 입으로 시인하는 입술입니다.
우리의 구원에도 우리의 입술의 시인이 따릅니다. 롬10장에서 이르기를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말씀해 줍니다.
2. 하나님이 기억해 두시는 것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을 기억해 두신다고 하셨습니다. 사랑은 그것을 밖으로 나타내는데 생명이 있습니다. 마음에는 품고 있지만 밖으로 나타내지 못하는 사랑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없습니다. 사랑은 열매로 나타낼 때 가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사랑을 나타낼 때 지극히 주의해야 하고 명심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내라는 것입니다. 자기 이름이나 공명심이나 자기의 자비심이 아닙니다. 반드시 주님의 이름을 위해 사랑을 나타내라는 것이 성경적 교훈입니다.
그러면 주의 이름으로 나타내는 사랑이란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은혜와 사랑에 감사해서 다른 이에게 베푸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은밀한 중에 베푸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자기가 한 일에 나팔을 불면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상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기억해 두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상대방에게 물질을 주는 것만으로 전달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허물을 덮어 주는 일도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죄를 용서해 주는 일은 더 큰사랑입니다. 사랑의 결실은 진실이 따라야 하고 정성이 깃들여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성도들을 섬긴 일을 기억해 두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남을 섬기는 일에는 인색하고 섬김을 받는 일은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이 하신 말씀을 기억해 두어야 할 것입니다.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남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섬긴다는 말은 첫째로 성도를 돌보아 주는 일입니다. 어려움을 당할 때, 먹을 것이 없을 때, 병들고 외로울 때 위로해 주고 도와주는 일입니다. 다음에 섬기는 일은 성도들을 진리의 말씀대로 올바르게 인도하는 일을 말합니다. 잘못된 길로 빠져나가지 않도록 늘 영적으로 돌보아 주는 사랑의 보살핌이 있어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을 위한 모든 행위를 기억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이런 일에 소망을 가지고 모든 성도들이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아야 합니다.
결론 :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를 기억하실 뿐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언약하신 그 언약을 또한 기억하시어, 그 언약대로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하나님께 얼마나 기억되는 일을 한 것입니까? 우리의 행위가 하나님께 보다 많이 기억될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과 상급을 받는 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35) 하나님의 확실한 약속
(히브리서 6:13-16)
그리스도인들은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소망이 없다면 그리스도인의 생애는 공허할 뿐입니다. 이 소망에 대하여 바울은 롬8장에서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진 구원은 그리스도인들이 누릴 영생을 말합니다. 이 우리의 영생에 관한 것은 지금 우리들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눈에도 보이지 않는 것을 우리가 무엇을 근거로 소망으로 삼고 우리의 전생애를 이 소망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입니까? 그 근거는 무엇입니까? 이 같은 질문의 해답이 곧 하나님의 약속인 것입니다.
1. 맹세로 세우신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과 그 말씀을 믿는 우리들과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실 일에 대하여 말씀으로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은 말씀을 믿는 자에게 그대로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께서 맹세로 주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한 가지 예로 히브리서를 기록한 저자는 아브라함의 경우를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 맹세로 하셨다고 했습니다. 무엇을 약속하신 것입니까? 14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가라사대 내가 반드시 너를 복주고 복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하셨더니’란 말씀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하나님의 맹세로 약속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갈대아우르 땅을 떠나 가나안을 향하여 떠났으며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렸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을 당시의 나이는 75세였으나 그가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을 때에는 100세로 25년간이나 오랜 세월이 지난 후였습니다. 아브라함은 과연 하나님의 약속대로 아들 이삭을 받았으며 많은 재물을 받아서 당대의 대부호가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경우를 통해서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그 약속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는 일에 있어서 인간적인 면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왜냐 하면 이삭을 낳을 당시는 아브라함의 나이가 이미 100세나 되어 죽은 자와 같이 되었고 아내 사라도 나이 많아 경수가 끊겼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극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을 반드시 이루어 주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주시기 위해 아브라함에게 맹세로 약속하신 것을 이루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다면 우리의 처지가 아무리 어려운 가운데 빠져 있다고 해도 하나님은 반드시 그 약속을 이루어 주신다고 하는 사실을 믿어야 하 는 것입니다. 다른 한 가지는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자신의 환경이나 세월의 흐름이나 자기 몸의 조건이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기에는 도저히 불가능한 중에 있었는데도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약속하신 그것을 이루실 것을 믿고 끝까지 기다림으로 그 약속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이에 대하여 롬4장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해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구원도 우리의 의도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얻어진 것입니다. 우리들도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이 있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인정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2. 맹세로 보이신 하나님의 약속
그러면 하나님은 왜 맹세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입니까? 이 문제에 대하여 두 가지를 그 이유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17절에 나와 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그 어떤 경우에도 변할 수 없습니다. 만약 형편에 의하여 하나님의 뜻이 수시로 변할 수 있다면 이런 일이야말로 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예수를 믿어도 구원을 받을는지 받지 못할는지 확신을 가질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순종의 생활을 해도 약속대로 축복을 받을는지 그렇지 않을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경우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이유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약속하신 그 일에 대하여 그 뜻을 변치 아니하신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기 때문입니다. 다른 또 한 가지는 18절에 나와 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거짓말하실 수 없다’는 사실에 근거하는 것입니다.
결론 : 언제나 맹세는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절대로 변함이 없다는 것을 확약하는 행위인데 하나님은 자기보다 더 큰 자가 없으므로 자기 이름을 가리켜 맹세하신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이처럼 약속하신 것을 변경하실 수 있다면 그 분은 이미 하나님이실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약속을 확실히 믿고 그 약속의 토대 위에 믿음을 세워 약속하신 모든 것을 받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36) 누가 약속을 받을 자인가?
(히브리서 6:17-20)
하나님의 약속은 아무나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17절에서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을 자들에게 그 뜻을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그 약속을 기업으로 받을 자에게 하셨기 때문에 그 기업을 받을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약속을 받을 자
(1) 성령을 따라 난 자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을 자들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이사과 이스마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을 기업으로 받은 사람은 먼저 난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삭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난 자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후사를 약속하실 때 이삭을 주시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갈4:28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과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이삭과 이스마엘의 경우를 예로 든 것인데 이스마엘은 육체를 따라 났으며 이삭은 성령을 따라 난 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성령을 따라 난 자들이란 누구를 말하는 것입니까? 주님이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 가운데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이 성령으로 난 사람들이며 이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을 자들인 것입니다.
(2) 다음에 그리스도의 피로 정결함을 얻어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자들만이 하나님의 약속을 기업으로 받을 자들입니다. 히9:14-15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냐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를 정결케 하사 우리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섬기게 하신 것입니다.
(3) 우리가 하나님의 기업을 약속으로 받는 백성이 되려면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여야 하는 것입니다. 갈4장에서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고 했습니다.
(4) 우리가 하나님의 기업의 약속을 받는 자들이라면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을 수 있는 자라야 합니다. 롬8:17절에서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 없는 주님의 영광을 상상할 수 없는 것처럼 고난이 없는 그리스도인의 영광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십자가를 지기를 싫어하는 사람이 어떻게 주님과 함께 영광에 동참할 수 있을 것입니까?
(5) 그리고 하나님의 기업을 약속으로 받을 자라면 인내로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릴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히10:36절에서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볼 때 다음 세 가지 조건을 항상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결코 더딘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응답이 늦으면 하나님의 약속을 잊어버리지만 하나님은 반드시 이루어 주실 시기에 어김없이 이루어 주십니다. 더디게 응답하시는 경우도 없지만 일찍 응답하는 경우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가장 적절할 때, 우리에게 가장 유익한 때 그 때에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인내 뒤에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같은 하나님의 법칙을 알지 못할 때 하나님을 쉽게 저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너무 더디다고 생각하는 사람,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참아 기다리지 못하는 사람은 그실 하나님의 약속을 받을 자격조차 없는 사람들입니다.
다음의 약속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받게 되어 있습니다.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멀리 저버리고 자기의 뜻만 행하면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그 뜻을 행한 후에 주시는 보상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맹세로 주신 하나님의 약속은 어떤 것입니까? 이 약속은 성경에 한줄기 힘찬 광맥처럼 뚜렷하게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에게 영생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맹세로 하신 약속은 그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심으로 우리에 대한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확실한 증거는 하나님이 그의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떠나서는 믿음의 뿌리가 내려질 수 없습니다. 믿음이 있느냐는 질문은 당신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느냐는 말과 직결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는 사람만이 시련 중에도 끝까지 참을 수 있습니다.
결론 : 우리는 분명 성령을 따라 난 사람들입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기업의 약속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저 높은 곳을 바라봅시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십시다. 하나님이 맹세로 약속하신 그 언약을 믿고 하나님을 의뢰하여 그의 약속을 소망으로 삼고 끝까지 달려가는 승리자가 되십시다.
(37) 견고한 영혼의 덫
(히브리서 6:17-20)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를 약속의 기업으로 주셨습니다. 이 기업은 하늘에 간직한 놀라운 축복으로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바로 이 축복의 소망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같은 소망을 그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일에 맹세로 약속하심으로 그 뜻이 변치 아니하심을 확정지으셨습니다. 본문 19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1. 영혼의 닻
이처럼 하나님께서 맹세로 보증하신 약속은 우리에게 있어서 마치 영혼의 닻이 된 것입니다. 배에 있어서 닻은 어떤 역할을 하는 것입니까? 바다에 파도가 일고 바람이 심히 불 때 만약 그 배에 닻이 없다면 그 배는 끝없이 표류하다가 침몰해 버리고 말 것입니다. 닻은 튼튼한 줄에 단단히 매여져서 바다 밑창에 힘있게 박힘으로 배로 어떤 풍랑 가운데서도 파선되지 않도록 붙들어 줍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이 약속하신 소망이 있는 것은 마치 이 배의 닻 같아서 세상 물결에 결코 요동치 않는 것입니다. 세상은 망망한 바다와 같습니다. 이 바다에는 거센 바람도 불어오거니와 사나운 물결도 밀려옵니다. 광풍노도가 밀어닥치는 날이면 인생이라고 하는 연약한 작은 배는 이런 세상 풍랑에 이리 밀리고 저리 밀려 혹은 낙심하기도 하며 혹은 침몰하기도 하며 혹은 절망에 빠지기도 하며 혹은 파선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영혼의 닻이 있는 한, 그리스도인들은 아무 풍랑 속에서도 염려할 바가 없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의 튼튼하고 견고한 영혼의 닻이 되어 휘장 안에까지 들어가게 된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말입니까? 닻이란 하나님의 맹세로 약속하신 우리의 소망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닻은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휘장 안은 지성소를 말합니다. 이 지성소는 구약적인 지성소가 아닙니다. 구약시대 하나님의 성전에 있는 지성소는 일년에 한차례씩 대제사장만이 속죄일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말씀하고 있는 지성소는 하늘의 지성소를 의미하며 이곳에는 멜기세댁의 반차를 좇아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우리의 소망은 이 세상에서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니며 우리의 어떤 어려운 형편이나 처지에 따라 희미해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소망은 영혼의 닻 같아서 이미 우리를 위하여 지성소 안에 먼저 들어가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튼튼하고 견고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애에 시련과 고난이 와서 우리가 그 거센 세파 가운데서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는 어려움은 겪을지언정 우리의 소망은 결단코 흔들림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맹세로 약속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소망은 하늘의 지성소에 견고히 박혀 있는 것입니다.
이 닻은 어떤 경우에도 주님이 계시는 하늘의 지성소에 견고히 붙들려 매어 있기 때문에 세상의 그 어떤 존재도 흔들어 뽑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롬8장에서 이처럼 외쳤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한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예수님은 요5:24절에서 ‘우리는 영생을 얻었고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고 밝혀 주셨습니다. 그 뿐 아니라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누구든지 아버지 손에서 빼앗아 갈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소망과 그 소망을 이루기 위해 바치는 우리의 노력과 인내는 결코 헛됨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맹세로 약속하신 그 약속을 믿음으로 확고한 소망을 갖지 아니하면 마치 닻 없는 배처럼 우리 인생이 요동하여 세상으로 흘려 떠내려 갈 것입니다.
2. 휘장 안에 들어간 닻
19절에서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것은 휘장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휘장 안에는 멜기세댁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들어가신 예수님이 계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성전와 지성소와의 사이에 가로막혔던 휘장을 찢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들로 그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리’고 하셨습니다. 이 성소 휘장이 찢겨지고 우리 예수님이 먼저 그곳에 들어가심으로 우리에게 휘장 안으로 들어가는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지금 헛된 것을 붙잡고 헛된 소망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의 소망은 우리의 영혼의 닻이 되어 이미 주님이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계시는 하늘의 지성소에 내려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이차람 확실합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소망 가운데 흔들리 말며 살아가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히브리서 7장 (38 - 42)
◆ 밤중소리 02-01 | VIEW : 553
(38) 멜기세댁과 그리스도(히브리서 7:1-10)
(39) 멜기세댁과 그리스도와의 관계(히브리서 7:1-10)
(40) 율법 외 별다른 제사장(히브리서 7:1-19)
(41) 생명의 보증이 되신 예수(히브리서 7:20-25)
(42) 영원히 온전케 되신 우리의 대제사장(히브리서 7:26-28)
(38) 멜기세댁과 그리스도
(히브리서 7:1-10)
멜기세댁이란 인물은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을 위해 하나님께서 창세기에 예비해 두신 대단히 중요한 인물입니다. 이 멜기세댁은 창14장에 그림자처럼 나오다가 바람처럼 사라져 버리는데 이상하게도 시110:4절에서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직분과 결부시킨 예언이 한 번 나오고 히브리서에 와서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과 연관되는 수수께끼의 인물로 등장하여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1. 창세기에 등장하는 멜기세댁
창14장에 보면 엘람 왕 그돌라 오멜이 자기를 섬기는 이웃 나라들이 자신을 배신한 일에 격분하여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나라를 쳐 전쟁을 일으키는 모습이 나옵니다. 이들이 싯딤 골짜기에서 싸울 때 소돔과 고모라 왕이 그에게 패하여 병사들은 역청 수덩이에 빠지고 왕들은 겨우 도망했습니다. 엘람 왕은 소돔과 고모라 성에 들어가 모든 재물을 약탈하고 주민들을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그 때 그 성에서 살아가고 있었던 아브라함의 조카 롯과 그의 가족들도 포로로 잡혀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 같은 롯의 소식을 듣고 집에서 길러온 용사 318명을 거느리고 단숨에 쫓아가 엘람 왕을 기습했습니다. 이 기습전에서 대승한 아브라함은 그들에게 포로로 잡혀간 자기 조카 롯과 모든 사람들과 재물도 빼앗아 올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 올 때 소돔 왕이 친히 아브라함을 영접하러 마중 나왔으며 살렘왕 멜기세댁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 아브라함을 영접했던 것입니다. 이 때 멜기세댁이란 이름이 성경에 처음 등장하고 있으며 이 자리에서 멜기세댁은 아브라함에게 축복했습니다. 그의 축복은 ‘천지의 주재이시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의 대적을 너의 손에 부치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양할 지로다’고 했습니다.
2. 멜기세댁의 신분
멜기세댁의 신분을 보면 그는 살렘 왕이라고 했습니다. 살렘이란 말은 평강이란 뜻입니다. 이곳이 어디인지 알려진바 없지만 지금의 예루살렘을 배경으로 한 도시로 아마도 그 지경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그 당시 살렘이란 지역을 지배하는 왕의 신분으로 있었으며 아브라함에게도 알려지고 그도 아브라함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에 대하여 전혀 몰랐다면 신분도 모르는 사람에게 그의 노략물의 십분의 일을 바칠 이유도 없었거니와 멜세댁에게 축복 기도를 받지도 아니했을 것입니다.
그의 이름을 풀어보면 멜기란 말은 왕, 세댁이란 말은 의란 의미로 멜기세댁이란 의의 왕이란 뜻인 것입니다. 그의 신분에 대하여 성경에서는 그를 살렘의 왕이라고 했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다고 했습니다. 히7장을 보면 멜기세댁은 아브라함보다 높은 자로 나와 있는데 그 이유는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해 주었으며 아브라함으로부터 11조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멜기세댁은 예수님의 제사장 직분과 왕의 직분을 설명하는데 반드시 성경에 등장해야 할 인물입니다. 만약 이 사람이 없었더라면 예수님은 그의 제사장직에 대한 성경적인 증명이 전혀 없기 때문에 우리의 제사장이시며 왕이신 그의 직분에 대해 증거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의 백성들의 속죄 제물이 되셨다면 그 제물이 하나님께 드려져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에 따르면 그 속죄 제물을 드려야 할 사람이 대제사장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유대인들에게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제사장이란 반드시 레위 지파의 자손 중에서 나와야 하는데 유다 지파이신 예수님이 무슨 성경적 근거로 대제사장 직분을 하실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예수님이 왕이 되시는 일은 그가 유다 지파에 속하셨으며 다윗의 자손이기 때문에 인정을 받으실 수 있지만 그가 대제사장이 되실 수 없는 것은 그는 레위 지파에 속한 제사장의 자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성경에 멜기세댁이 등장하지 않았다면 그리스도의 속죄제물과 제사장 직에 대하여 설명할 길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왜 멜기세댁이 등장하여 예수님으로 하여금 레위가 아니라 멜기세댁의 서열을 따라 제사장이 될 사실을 증거해 주는 것입니까? 멜기세댁은 레위 자파도 아니요 아론의 자손도 아닙니다. 아론이나 레위란 인물은 아브라함이 멜기세댁을 만난 이후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제사장의 직분은 반드시 레위지파의 자손들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알 수 있는데 멜기세댁이란 사람이 이들이 존재하기 이전에 제사장의 직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라 제사장은 동시에 왕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멜기세댁은 살렘 왕이요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멜기세댁의 반열을 따라 제사장이 된 예수님은 멜기세댁처럼 왕과 제사장이 동시에 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 :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왕의 직분과 제사장 직분의 법적 근거를 만들어 놓으시기 위해 이미 창세기에 멜기세댁을 등장시키신 것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시요 우리의 대제사장이십니다. 예수님의 이 같은 신분은 멜기세댁과 같이 영원히 변함이 없으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왕이시며 우리의 제사장이신 예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 그에게 간구하며 그의 도우심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39) 멜기세댁과 그리스도와의 관계
(히브리서 7:1-10)
우리는 어제 본문에서 멜기세댁이란 인물이 가리켜 주는 의미를 알아보았습니다. 오늘 아침은 그의 이름으로부터 그의 직위에 이르기까지 멕시세댁은 그리스도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멜기세댁이란 이름에 담겨진 메시야적인 의미
멜기세댁이란 이름에는 메시야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연관되는 것입니다. 멜기세댁이란 이름이 의의 왕인 것처럼 사32:1절에서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의로 통치하는 왕’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보라 장차 한 왕이 의로 통치할 것이요 방백들이 공평으로 정사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예언하고 있는 ‘장차 의로 통치할 왕’이란 그리스도가 장차 만 왕의 왕으로 온 세상을 통치하실 일에 대한 예언인 것입니다. 이 예언은 유대인이 소망하고 있는 메시야왕국(천년왕국)에서 이뤄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멜기세댁이란 이름은 그 이름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 직분에 대한 예언적인 뜻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의 직분은 살렘 왕이라고 했습니다. 살렘이란 평화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살렘 왕이란 평화의 왕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평화의 왕으로 오신 분입니다. 사53:5절에서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익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또 사9장에서 주님의 탄생에 대한 예언에서 ‘평강의 왕’이란 이름으로 나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우리에게 평화를 누리게 하신 평화의 왕이시며 평강의 왕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또한 멜기세댁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우리 주님에 대하여 히7:26절에서 ‘하늘보다 높이 되신 우리의 대제사장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멜기세댁은 그의 이름이나 그의 직분등 모든 일에 있어서 다 그리스도의 예표 인물로서 적중하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묘하고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2. 멜기세댁은 그리스도의 높으심을 증거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멜기세댁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높으신 분이신 가를 보여 주셨다는 사실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시야에 대하여 기대와 소망은 가졌지만 그 분의 위치가 아브라함이나 다윗이나 모세정도의 인물로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느 날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 각하느냐 뉘 자손이냐’고 물으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그들은 ‘다윗의 자손이니이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다시 한 가지 문제에 대한 질문을 계속하셨습니다.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기를 내가 네 원수를 네 발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하시니 그들은 유구무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이스라엘의 조상으로 삼으셨지만 아브라함보다 더 높은 멜기세댁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메시야이신 예수님은 바로 이 멜기세댁의 서열을 따라 왕과 제사장이 되신 분이라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3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 ). 멜기세댁의 신분이 마치 수수께끼처럼 나오고 있습니다. 그의 신분이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다고 했습니다. 방불하다는 말은 똑같다는 뜻이 아니라 비슷하다는 뜻입니다.
그에게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를 잘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말은 멜기세댁이 아담의 자손이 아니란 뜻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치고 아담의 자손이 아닌 존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멜기세댁은 천사였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천사가 왕으로 사람을 다스리며 제자상으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린다는 일은 성경에서 상상도 하지 못할 일입니다. 이 말의 뜻은 멜기세댁의 인간적인 계보가 전혀 없다는 데서 한 말입니다.
멜기세댁이 그리스도의 예표적 인물로 등장하기 위해서는 그에 대한 족보가 없어야 합니다. 그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적 인물이기 때문에 그의 존재가 성경에서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한 존재로 기록되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멜기세댁을 성경에 등장시키실 때부터 그의 족보를 기록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마 1장에는 예수님의 족보가 나옵니다. 그러나 이 족보는 예수님의 육신적인 혈통관계를 계보로 만든 것이지 그 분은 원래가 하나님의 본체이시며 영원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족보에 해당되실 분이 아니십니다. 멜기세댁은 육신적인 예수님의 예표가 아니라 그의 왕권과 제사장 직분에 대한 서열로 등장하는 인물이기 때문에 그의 인간적인 족보가 성경에서 삭제되었으며 영원히 존재하는 하나님의 아들처럼 등장시킨 것입니다.
결론 : 멜기세댁의 제사장 직분은 성경적으로 그리스도에게 넘겨 드림으로,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예표 인물로서의 성경적인 사명을 이룬 것입니다. 우리는 이 멜기세댁에 대하여 깊은 지식을 가짐으로 우리 주님의 제사장 직분에대하여 놀라운 지식을 갖게 되며 우리의 신앙이 장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40) 율법 외 별다른 제사장
(히브리서 7:1-19)
이스라엘은 율법에 따라 제사제도가 운영되어 왔습니다. 그러므로 제사장은 율법에 의해 레위 지파에서 계승해 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사장 직은 아론의 서열을 따른 것도 아니며 율법에 따라 세워진 것도 아님으로 그의 제사직분은 율법 아래에서의 제사 직분과 다른 새로운 것이어야 합니다. 만약 율법에 의한 제사제도가 계속 필요하다면 하나님은 결코 멜기세댁의 반차를 좇은 예수를 새로운 제사장으로 세우시지 아니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율법에 따른 제사제도를 폐하시기 위해 70년 로마의 대도에 의해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폐허화시키셨습니다. 그 때부터 이스라엘은 율법에 의한 제사제도를 이행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폐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율법에 의한 구약적 제사제도를 폐하시고 예수 그리스돌 말미암아 새로운 제사제도를 세우신 것입니까?
1. 하나님께서 새로운 제사제도를 세우신 목적
그 이유는 이 땅의 성전에서 드리는 구약적 제사제도는 죄인을 구원하는 일에 온전치 못했다는데 있습니다. 율법아래 제사장은 아론의 서열을 따라 제사장 직에 오른 사람들로 모두 아담의 혈통적 자손들입니다. 이들 역시 우리와 동일한 죄인들입니다. 죄인인 인간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율법아래 제사장들이 다만 지성소 안에 들어가는 일에도 자신의 속죄를 위한 제물을 가지고 1년에 한 번 식밖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이런 제사장은 온전한 제사장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율법 아래 제사장은 온전한 제사장으로 하늘의 지성소에 들어가신 예수님에 대한 하나의 그림자에 불과했습니다. 28절 말씀을 보면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삼았다’고 했습니다. 약점이란 죄를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 가장 거룩해야 할 제사장이 죄악이라고 하는 약점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 그의 백성들의 죄를 위해 회개해야 할 제사장이 우리와 같은 죄인이요 죄라고 하는 약점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 제사가 온전한 제사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율법 아래 제사장은 언제인가 죽는 날이 오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제사장 직분이 다른 사람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처럼 율법 아래 제사장은 온전치 못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 제사는 죄인을 구원하는 일에 온전치 못했습니다. 만약에 율법으로 죄인을 구원하실 수 있었다면 하나님께서는 결코 율법 이외 다른 방법으로 구원의 길을 보이지 아니하셨을 것입니다. 인간의 죄를 사하지도 못하고 구원을 베풀지도 못하는 것이 율법 아래의 제사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통하여 이루시고자 계획하신 일은 죄인을 온전히 구원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이처럼 죄인들을 죄악 가운데서 온전히 구원하시기 위해서는 불완전한 율법 제도를 변경시키야 했습니다. 그리고 율법외 다른 제사제도를 세우셔야 했습니다.
2. 율법 외 다른 제사제도
그러면 율법도 따르지 않고 아론의 제사장 직도 아닌 다른 방법으로 어떻게 새로운 제사제도를 세울 수 있는 것입니까? 이에 대한 해답으로 하나님께서는 그 성경적 근거를 벌써 창세기에 예비해 두셨던 것입니다. 율법과도 상관이 없고 아브라함과도 상관이 없으며 레위 지파와도 상관이 없는 멜기세댁의 서열을 따른 예수 그리스도를 왕과 제사장으로 세우시는 제사제도를 확립하신 것입니다.
이제 새로운 제사장이신 예수님은 율법에 의해 제사장 직분을 수행치 않으시기 때문에 우리는 율법과 상관이 없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새로운 제사장 직에 오르시면서 우리에게 새로운 법을 주신 것입니다. 그 범이 율법이 이루지 못한 것을 이루는 온전한 법으로 롬8:2절에서 성령의 법이라고 했습니다. 율법이 우리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법이 우리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 아래 제사장들보다 온전하신 분이십니다. 또한 그리스도는 자기를 위한 속죄 제물을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율법 아래 제사장들은 자신의 죄를 위해 송아지의 피로 속죄 제물을 삼았지만 예수님은 죄가 전혀 없으신 분이심으로 자신을 위해서는 회생 제물을 드리실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제사장은 마땅히 율법 아래 제사장이 일한 것과 같은 자리에서 일하실 분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피로 희생 제물을 삼으신 분입니다. 그가 드린 제물은 율법 아래 제사장들이 드린 짐승의 피와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그의 영원하신 피로 제물로 삼아 단번에 드리셨기 때문에 또 다른 제물이 필요치 않는 것입니다. 그가 드린 제물은 영원한 속죄 제물로 한 번 만으로 족한 것입니다.
다음에 예수님의 제사장 직분은 영원히 변치 아니하십니다. 그에게는 죽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결론 : 이런 제사장은 우리에게 꼭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이제 우리의 죄를 가지고 우리의 제사장 앞으로 나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4:16절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긍흀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해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하늘의 지성소에서 나를 위해 간구하고 계시다는 이 사실을 꼭 명시하시고 그 분께 소망을 두시고 그 분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41) 생명의 보증이 되신 예수
(히브리서 7:20-25)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두 가지 언약을 주셨습니다. 그 하나가 아담과 세우신 언약으로 창2:16절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22절 말씀을 보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다’고 했습니다.
1. 첫 언약
사람이 처음 창조를 받았을 때는 생령이었습니다. 생령은 죄를 범할 수도 있고 범하지 않을 수도 있는 몸입니다. 그러나 생령은 육체와는 달리 죽지 아니할 몸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만약 죄를 범하면 정녕 죽으리라는 선언을 내리심으로 아담이 죄를 범했을 때 그는 생령이 육체가 되어 죽음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아담의 자손으로 육체로 태어나 죄의 종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온전히 죄 가운데서 살아갈 수밖에 없지만 생령으로 살아갈 당시엔 죄냐? 하나님의 말씀이냐에 대하여 아담에게 자유 선택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이 선택에서 불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스스로 파기해 버린 것입니다. 그 결과 아담은 죄의 종으로 타락하게 되었고 사망이 왕 노릇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인류의 대표자로 세워 생명의 언약을 주셨으므로 아담의 실패는 곧 인류의 실패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율법이 생명의 언약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만약 율법으로 생명에 이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은 결코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지 아니하셨을 것이라고 성경은 계속 강조해 주고 있습니다. 갈3:21절에서도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불순종한 아담에게 정년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죽음의 언도는 두 가지로 구분됩니다. 하나는 육체의 죽음입니다. 아담은 범죄함으로 이제 생령이 육체로 전락되었습니다. 흙은 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육체의 죽음이 하나님의 심판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판에 이르는 하나의 과정일 뿐입니다. 죄에 대한 온전한 심판은 영혼에 대한 심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마10:28절에서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히9:27절에서는 ‘한번 죽은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인간의 육신의 죽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은 후에 영혼에 대한 심판에 있다는 사실을 성경은 분명히 밝혀 주고 있는 것입니다.
2. 더 좋은 언약
그러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다고 말씀하시는데 더 좋은 언약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말입니까? 이 언약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세우신 새로운 언약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언약을 세우신 것처럼 그리스도와 언약을 세우셨는데 이 언약을 새 언약, 더 좋은 언약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아담 안에서 죄인이 된 모든 인류는 하나님의 율법 아래서 언제나 정죄 의식 가운데서 살아가야 했습니다. 사람은 율법을 지키지 못함으로 아담의 죄 값을 담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인이란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의 온전한 법인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사실에서 명백해 지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로 하나님은 인간에게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통해서 이 율법을 이기고 첫 언약을 파할 수 있는 더 좋은 언약을 세우신 것입니다. 이 언약을 은혜 언약이라고도 합니다. 이 언약의 요지는 그리스도께서 죄인의 속죄 제물이 되시어 아담의 죄에서 해방시켜 주셨으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으면 첫 언약의 실패에서 회복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첫 언약은 아담과 다만 말씀으로만 세우셨지만 하나님의 둘째 언약은 그 아들의 피로 세우셨습니다. 이 언약은 그리스도에게 주셨지만 그를 믿는 자에게 그 아들과 함께 하나님의 후사가 된다고 하는 약속이 따르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이 언약에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가 어떻게 우리의 생명의 보증이 되시는가에 대하여 몇 가지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21절에서 이 언약은 하나님의 맹세로 세워졌습니다. 23,24절에서 그는 영원히 살아 계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의 제사 직분도 갈림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다음에 그는 자신을 하나님께 단번에 드리셨기 때문에 또 다른 제물이 필요치 않은 것입니다. 25절에서 그가 항상 살아서 간구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은 자들은 그리스도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으며 25절에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결론 : 그리스도안에 있는 사람들은 아담이 실패한 첫 언약과는 상관없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을 받는 것입니다. 이 언약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맹세로 세운 언약입니다. 그리고 그 아들을 이 언약의 보증으로 삼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속죄의 피를 흘리셨습니다. 우리는 이 언약의 축복 받은 하나님의 백성임을 알고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42) 영원히 온전케 되신 우리의 대제사장
(히브리서 7:26-28)
26절에서 ‘이런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다’고 했습니다. 이런 대제사장이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하신 대제사장 직분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는 죽음이 없기 때문에 이 땅위의 제사장들처럼 자주 갈림이 없는 제사장입니다. 그는 죄가 없으심으로 자기를 위해 속죄 제물을 드릴 필요가 없는 제사장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오른편에 항상 계셔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제사장으로 우리를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는 제사장입니다. 이런 분이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다는 것은 말할 수 없는 우리의 축복입니다. 이런 대제사장이야말로 우리에게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1. 첫 언약 밑에 있었던 제사장들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삼았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대제사장의 직분으로 지성소에 들어가 대속의 제물을 드릴 수 있었지만 그들에게 거룩함이나 의로움이 있어서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율법의 정죄를 받는 죄인 중의 하나였기 때문에 거룩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지성소에 들어가기에 앞서 자신을 위해 송아지의 피로 속죄 제물을 삼아야 했습니다.
율법 밑에 제사장들에게는 그들에게 악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죄인의 마음속에는 악이 존재합니다. 악이 함께 존재하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제사장의 직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 제사장 직분이 온전치 못하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더러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의를 이룰 수 없는 몸이요 인간이 짓는 온갖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없는 연약한 몸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2. 더 좋은 언약 아래의 제사장
그렇지만 우리의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아래의 제사장 같지가 않으십니다. 그 분은 모든 면에서 완전하신 분입니다. 그는 빛이시기 때문에 그의 거룩하심은 완전하십니다. 그는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시오 하나님의 본체이심으로 그의 본질이 완전히 거룩하십니다.
그 분에게는 악이 전혀 없으십니다. 악이 없다는 말은 죄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신 분이심으로 악이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그분은 세상에서 한 번도 죄를 범하신 일이 없기 때문에 악에 물든 일도 없으십니다. 그 분에게는 더러움이 없으십니다. 그 분은 죄인에게서 떠나 계십니다. 그는 세상에 계셨을 때에도 하늘의 생명을 가지신 분으로 계셨습니다. 그에게는 죄가 없으시기 때문에 죄의 지배를 받은 일도 없습니다. 그 분은 부활하신 후, 승천하심으로 실질적으로 거룩한 곳에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위에서 우리의 제사장으로 일 하실 필요가 없는 분입니다. 양을 잡을 필요가 없기 때문에 짐승을 잡아 제단에 드릴 필요가 없으신 것입니다. 이 세상 제사장들은 자신의 죄를 위해 송아지를 잡아 제물로 드렸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에게는 죄가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이 땅위의 제사장들은 지성소 안에 들어가 법궤 앞에 서서 일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계실 분이요 지상의 지성소에 계실 분이 아니십니다. 율법 아래 제사장들은 1년에 한차례밖에 지성소 안에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1년에 한 번 만 들어가실 필요가 없는 분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동등이신 분이며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늘 그곳에 계십니다.
지금 우리들에게는 율법 아래 있었던 그런 제물이나 제사 제도가 필요치 않기 때문에 우리의 제사장도 필연코 구약시대의 제사장이어서는 안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가 이미 용서받은 사람들입니다. 그가 한 번 흘리신 피는 우리의 죄를 단번에 영원히 속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우리의 죄를 위해서는 양이나 송아지나 염소를 잡아 그 피를 흘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지금도 우리의 속죄 제물로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에게 양을 잡아 속죄 제물을 드릴 제사장은 필요치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그의 속죄 사역을 다 마치셨을 때 그는 다 이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때 성소의 휘장이 찢겨져 하늘의 지성소로 들어가는 새롭고 산길이 열렸습니다. 그러므로 휘장이 막혀 있는 지상의 지성소에 들어가는 제사장이 우리에게는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전한 의를 소유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미 우리는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되었고 율법의 정죄에서 벗어난 사람들입니다. 이 같은 놀라운 자격을 가진 우리가 율법 아래 제사장들을 통하여 아무런 가치도 없는 짐승을 제물로 드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결론 : 이런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합당한 이유는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합당한 제사장은 오직 이런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십니다. 그 분이 우리의 제사장으로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 분의 공로를 힘입어 하늘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 같은 대제사장이 있다고 하는 믿음과 확신은 우리의 죄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회개할 수 있는 담대한 믿음을 갖게 합니다. 여러분은 이 분께 소망을 두시고 이 분 앞에 나아가 간구하시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히브리서 8장 (43 - 45)
◆ 밤중소리 02-01 | VIEW : 444
(43) 하늘 성소에 있는 우리의 대제사장(히브리서 8:1-6)
(44) 구약의 하자(히브리서 8:7-13)
(45) 새 언약의 축복(히브리서 8:7-13)
(43) 하늘 성소에 있는 우리의 대제사장
(히브리서 8:1-6)
히 7장에서 우리는 하늘 성소에서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여러 가지 증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한 분이심을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8:1절에 와서 ‘이제 한 말에 중요한 것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제사장이라 해도 그 분이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분이라면 아무 의미도 없는 것입니다.
1. 우리에게 있는 우리의 대제사장
그러면 이런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다고 하는 사실이 왜 우리에게 그토록 중요합니까? 이에 대해 몇 가지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이런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다고 하는 사실은 우리들로 죄로 인해 결코 낙심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완전한 의인이 없는 것처럼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갈 사람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죄로 인하여 낙심하게 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정죄의 두려움에서 낙심하게 됩니다. 구원에서 떨어졌을 것을 염려해서 낙심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죄를 미워하고 죄를 범했을 때 원통히 여기며 마음을 아파하고 통회하는 일은 좋은 일입니다. 이런 행동은 우리로 회개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죄를 인하여 낙심한 나머지 비관해서는 안돼는 것입니다. 구원에서 떨어진 것으로 알고 두려워해서도 안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다고 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죄를 범했을 때 곧장 지성소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님이 계시는 은혜의 보좌 앞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곳은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우리의 대제사장을 만나는 곳입니다. 그곳에는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그리스도의 의로운 피가 있어서 우리가 자백하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실 뿐 아니라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해 주십니다. 우리는 비록 용서 받기 어려운 가증한 죄를 범했어도 그곳에 들어가 우리의 대제사장 앞에 그 죄를 고하고 회개하면 그분의 긍휼히 여김을 받으며 죄사함의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2) 다음에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 구원이 주어졌는데도 구원의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살아가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구원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구원이 자신에게서 나오는 줄로 알고 있기 때문에 구원의 확신을 가지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그 공로가 있고 우리는 다만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만으로 이뤄진다는 사실을 정말로 깨닫기 전까지는 언제나 구원이 자기 행실이나 자신의 믿음을 따라 좌우되는 것으로 알기 때문에 확신을 갖지 못하고 늘 흔들거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보면 언제나 그 믿음이 흔들리게 되고 의심을 갖게 되며 낙심하지만 예수를 보면 확신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이 무엇이고 멸망이 무엇인가에 대한 이 한 가지 사실만 제대로 깨닫는다해도 보통 놀라운 은혜가 아닌 것입니다. 내가 만약 예수를 믿는 믿음을 갖지 못하였다면 내 생명은 파멸되어 영원한 멸망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로 말미암아 그곳에서 건지심을 받은 것입니다. 이 같은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감사한 것입니까?
2. 우리의 제사장이 계신 곳
제사장들은 일하는 곳이 있습니다. 율법 아래 대제사장들은 땅의 성소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했습니다. 대제사장은 특히 아론의 서열을 따라 내려 왔습니다. 아론의 큰아들부터 계속하여 그 장자가 이 직분을 맡아 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장막 안에서 제사장 직분을 이루실 분입니다. 2절에서 ‘그가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그의 제사장 직분을 참 생명을 주시는 영적 장막에서 이루십니다. 율법 아래 있었던 지성소는 하늘 지성소의 모형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은 참 성소에서 일하실 분이시지 모형으로 만들어 놓은 지상의 지성소에서 일하실 분이 아닙니다.
이제 온전한 것이 왔으니 그림자는 물러가야 하는 것입니다. 다 이뤘다고 하신 십자가에서의 마지막 말씀으로 땅위에 존속했던 성소는 찢겨진 휘장과 함께 물러갔습니다. 이제 온전한 제사장, 온전한 제물, 온전한 속죄의 피, 온전한 지성소를 모두 갖추었으니 그림자는 쓸모 없게 된 것입니다.
그림자 시대는 이미 지나갔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드리신 화목제물로서의 그 몸이나 속죄제물로서의 그의 피는 우리를 온전히 구원함에 있어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의 제사장 직분도 영원하심으로 우리에게 미치는 사죄와 구원도 영원한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누가 이 같은 구원의 대상자안가에 대하여 알아야 합니다. 히7:25절 말씀을 보면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한길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아가는 길입니다. 구원의 길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을 통해야 합니다. 그 길은 찢겨진 휘장 안으로 열려진 길입니다. 이 길을 새롭고 산길이라고 했습니다. 이 길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자기 몸을 찢으심으로 열어 놓으신 길입니다. 여러분은 이 분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며 소망의 이 길을 끝까지 걸어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44) 구약의 하자
(히브리서 8:7-13)
구약과 신약의 약이란 말은 계약이란 의미입니다.
구약이란 옛날 계약이고 신약은 새로운 계약이란 뜻입니다.
여기서 계약의 대상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상호 관계를 말합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과 인간과의 계약이 필요한 것인가?
그 원인은 창2:16절에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에 근거하는 것입니다.
것입니다.
한 번 내려진 하나님의 선고는 취소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처럼 죄로 죽게 된 인간들에게
생명을 준다는 약속으로 새로운 계약을 맺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먼저 맺은 계약이 구약이고
그 다음에 맺은 계약이 신약입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구약과 신약은 둘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하나이라는 사실입니다.
1. 구약과 신약
(1) 우리는 먼저 구약에 대하여 올바른 견해를 가져야 합니다.
구약은 이스라엘 민족과 하나님과 세운 계약으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돌 판에 새겨 주신 내용이 그 주된 내용입니다.
간추려 말하면 십계명입니다.
이 계약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으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는데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계명을 온전히 지키는 조건으로
그 안에서 약속된 의와 생명입니다.
이런 약속이 레18:5절에서 이렇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너희는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 나는 여호와니라’
고 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이 말씀에 대하여 갈3:12절에서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고 말씀해 줍니다.
그러면 이 같은 질문이 나오게 됩니다.
의를 얻을 수 있고 생명이 약속된 구약이 있는데,
왜 신약을 다시 주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구약에는 중대한 흠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율법에서 발견된 하자란 무엇입니까?
2. 흠이 있는 구약
그 첫째 결함은 율법 아래 살아가는 자는
그 율법을 반드시 지켜야 의를 얻고 생명에 이를 수 있다고 하는 데 있습니다.
어떤 사형 선고를 받은 기결수에게 한 가지 조건을 제시하고
그것을 지키기만 하면 살려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사형수는 살려 준다는 말에 솔깃해서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재판관이 제시한 조건이란 10미터 높이를 단번에 뛰어넘는 일입니다.
그러면 이 사형수는 자기가 노력만 하면
10미터 높이를 단숨에 뛰어 넘을 수 있는 것입니까?
율법을 온전히 지키는 일이란 이보다 더 어려운 일입니다.
롬3:20절에서 이 문제에 대하여 말씀하기를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
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율법은
의로우며 거룩하며 마땅한 것이지만
인간의 힘이 그것을 이루는 일에 절대로 미칠 수 없는 것입니다.
다음에 율법이 요구하는 의는
우리의 생활에서 실제로 얻을 수 있는 현실적인 의가 아니라
그림의 떡으로 바라만 보아야 할 의였었다는 데 하자가 있었습니다.
갈2:16절에서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
고 바울은 선언했습니다.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거늘
그 율법으로 의를 얻겠다고 노략하는 일은
모순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다음에 인간은 연약하여
범죄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인간은 아담이 범죄한 후, 모두 죄의 종으로 타락했습니다.
이 같은 위치는 그 어떤 경우에도
죄의 빚을 갚기 전에는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그런 인간이 하나님의 완전한 의의 법인 율법을 지킨다는 일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뿐 아니라 이처럼 인간이 율법을 지키려다
그 율법을 범하므로 정죄를 받는데도
그 정죄에서 벗어날 길이 율법에는 전혀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일은 율법을 지키려는 사람들에게
결정적 함정이요 절망에 이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결국 율법은 빛 좋은 개살구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의를 주겠다, 생명을 주겠다는 약속은 좋지만
인간에게는 이 약속을 지킬 능력이 없기 때문에
약속을 바라보면 소망이 있을 것 같지만
율법을 지키는 생활을 하면
당장에 그 덫에 걸리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에서는 하나님의 자비나 긍휼을 얻을 길이 없는 것입니다.
오직 그것을 지킴으로 의를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키지 못하는 자에게는 율법에 의한 정죄와 저주만이 있을 뿐입니다.
생명이냐 저주냐의 두 길만이 있는데
이 두 갈래의 길에서
어느 한 사람이라도 생명을 얻을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갈2:21절에서
*갈2:21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롬3:10절에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하심으로
한사람도 율법으로 생명에 이를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밝혔습니다.
결론 : 이처럼 인간에게 생명을 준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있지만
생명은 고사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빼앗고
저주와 정죄만을 주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의 크나큰 약점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율법에서 벗어난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해 주신 것입니다.
늘 그 은혜에 감사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45) 새 언약의 축복
(히브리서 8:7-13)
우리는 어제 구약의 결정적인 흠을 찾아보았습니다. 구약에는 이처럼 많은 결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간을 구원한다는 약속은 있었지만 그 약속을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결함을 보충함으로 죄 가운데서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에게 참 생명을 줄 수 있는 새로운 언약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 같은 약속은 구약에서 이미 언급된 것입니다. 히8:8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저희를 허물 하여 일렀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으로 새 언약을 세우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새 언약으로 다시 세우신 언약은 구약의 모순점과 결함을 완전하게 보충하는 언약이기 때문에 인간을 온전히 구원할 수 있는 언약입니다. 죄의 문제와 사망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을 받을 수 있는 언약이기 때문입니다.
1. 새 언약의 축복
그러면 이 같은 새 언약은 언제 세워지는 것입니까? 10절에서 밝혀 주신 말씀을 보면 ‘그 날 후에’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날 후에란 말은 구약이 지나간 후에란 뜻입니다. 갈3:19절에서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영원한 생명의 계약으로 주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 존속하도록 주신 임시적인 언약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율법을 폐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언약을 세우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율법이 더 이상 계속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새 언약에 들어온 백성들은 누구입니까?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으로 세울 언약이라고 말씀하심으로 이스라엘 집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이스라엘이 신약에 와서는 영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녀란 이처럼 하나님의 영적 자녀란 뜻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영적 자녀란 약속의 자녀를 말합니다. 롬9:6-8절 말씀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십니다.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바울은 갈3:29절에서 말씀하기를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했습니다. 신약에 와서 하나님의 백성이나 아브라함의 자손은 구약에서처럼 육신적인 자손을 의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따른 약속의 자녀를 의미한 것으로 나와 있으며 그 약속의 자녀란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요1:12절 이하에서 요한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자격이 육적인 아브라함의 자손에 있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이처럼 밝혀 주고 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로 모두 한결같이 하나님의 새 언약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인 것입니다.
새 언약은 하나님과 우리와 직접 세워진 언약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직접 언약을 세울 수 없는 이유는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가 된 죄인의 자리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중보자가 필요했습니다. 그 중보자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처럼 새 언약은 우리의 중보자이신 예수님과 하나님과 세우신 언약입니다. 그러므로 이 계약의 조건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계약의 조건을 온전히 이루어 그 계약을 성사시키시기 위해 자신의 몸을 낮추시고 종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고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이 계약을 만족스럽게 이루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 같은 새 언약에 동참하는 방법은 그 같은 사실을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 계약의 조건은 예수님에게만 적용되는 계약으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모두 이루셨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우리를 위해 새 언약의 조건을 이루신 그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입니다.
2. 새 언약의 완전한 성격
이 언약은 완전한 언약이기 때문에 다른 조건을 부칠 것도 없고 뺄 것도 없습니다. 십계명은 돌비에 새겨진 언약이었지만 새 언약은 마음 비에 새겨진 언약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이 언약에 참여하게 되면 성령께서 임재하시어 우리의 굳은 마음을 제하시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며 하나님의 율례를 행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그리고 이 새 언약에 들어온 사람들은 하나님의 완전한 백성으로 인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 언약에 들어온 사람들에게는 정죄함이 없습니다. 이 언약에 들어온 사람은 영생을 얻는데 누구든지 이 영생을 빼앗을 자가 없습니다.
결론 : 우리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언약에 들어가 있는 참 이스라엘입니다. 우리에게 언약을 이루게 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는 우리의 구원의 보장이십니다. 우리는 이 영광스런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일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그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9장 (46 - 52)
◆ 밤중소리 02-01 | VIEW : 542
(46) 첫 장막의 속죄소(히브리서 9:1-5)
(47) 성령이 보이신 뜻(히브리서 9:6-8)
(48) 양심으로 온전케 할 수 없는 구약의 제물(히브리서 9:8-10)
(49) 온전치 못한 율법 아래 중보자(히브리서 9:11-17)
(50) 그리스도의 중보자 직분(히브리서 9:11-17)
(51) 신구약에 나타난 언약의 피(히브리서 9:18-28)
(52) 주의 재림과 구원의 완성(히브리서 9:28)
(46) 첫 장막의 속죄소
(히브리서 9:1-5)
우리는 아직까지의 히브리서 강해를 통해서 첫 언약의 지성소와 새 언약의 지성소가 어떻게 다른가에 대하여 많은 말씀을 들었습니다. 구약은 첫 언약에 대한 지성소에 대한 기록이요 신약은 새 언약에 대한 지성소에 대한 기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첫 언약에 관한 지성소는 이 땅에 속한 것이요 새 언약의 지성소는 하늘에 속한 것임을 알았습니다. 땅에는 율법을 따라 제사장 직을 맡아 일하는 제사장이 있었고 하늘에는 멜기세댁의 서열을 따라 하나님의 맹세로 된 제사장이 있습니다.
1. 첫 장막의 모습
첫 장막의 모습이 1-5절까지 간략히 기술하고 있습니다. 땅의 성소에는 첫 장막이 있고 그 안에 등대가 놓여 있습니다. 이 등대는 순금으로 만든 촛대인데 일곱 개의 불을 컸습니다. 다음에 상이 있습니다. 이 상은 향단이라고 부릅니다. 이 향단도 금으로 장식되었습니다. 다음에 괴어 놓은 떡으로 진설병이 있었습니다. 이 떡은 누룩이 섞이지 아니한 것으로 12개를 두절로 겹쳐 놓았습니다. 이 떡은 안식일마다 교대해 놓는데 묵은 떡은 제사장이 먹었습니다.
첫 장막 안에 성소가 있고 다음 둘째 휘장 뒤에는 지성소가 있습니다. 그리고 지성소 안에는 금 향로와 법궤만이 있었습니다. 금향로는 성도들의 기도를 상징하는 것으로 대제사장이 가지고 지성소를 들어갑니다. 그리고 법궤는 전체가 금으로 입혔습니다. 법궤 안에는 세 가지 상징적 물건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만나가 담긴 금항아리입니다. 이 만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합니다.
다음에 법궤 안에는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들어 있습니다. 이 지팡이는 하나님이 제사장으로 택한 자와 아닌 자와의 구별을 위해서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 모세를 거역하는 고라와 다단과 온의 무리들을 불로 심판하신 하나님께서는 지팡이 한 개씩을 취하여 두령의 이름을 쓰게 한 후, 그 지팡이들을 법궤 앞에 두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그 지팡이 가운데 하나님이 택한 자의 지팡이에는 싹이 날 것이라고 말씀하심으로 이로서 하나님의 택한 제사장과 아닌 제사장을 구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튿날 그 수많은 지팡이 중에 오직 한 지팡이에만 싹이 났는데 그 지팡이는 바로 아론의 지팡이였습니다. 아론의 지팡이에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 살구 열매가 열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패역한 자의 표징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다음에 법궤 안에는 언약의 비석이 들어 있었습니다. 이 돌이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십계명입니다. 이 돌 판은 두 개의 돌 판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는 1-4계명까지요 다른 하나는 5계명부터 10계명으로 대신 관계와 대인 관계로 구별지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그 위에는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구릎이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언약의 상징적 존재들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보좌의 모형으로 은혜 언약의 그림자로 보이신 것들입니다.
2. 성소에서 섬기는 사람들
구약에서 성소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로 대제사장이 있고 다음에 제사장들이 있었으며 제사장의 일을 도와주는 레위인들이 있었습니다.
대제사장은 아론의 아들로부터 시작이 되면서 그 대제사장의 큰아들이 이 직분을 계승해 내려 왔습니다. 이들을 성별 시키고 그 머리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이들은 매일 백성들을 위해 소제를 드렸는데 소제란 식물로 드리는 제사를 말합니다. 그리고 백성들을 위한 속죄 제물에 피를 뿌렸습니다.
다음에 제사장들은 아론의 자손들입니다. 이들은 제사 드리는 일을 맡아 왔으며 율법을 백성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여러 가지 의식을 인도하였고 백성들을 축복하였으며 민사재판을 집행했습니다. 이들이 제사장 직에 오르기 위해서는 몸의 여러 부분에 기름과 피를 뿌렸으며 기름은 붓지 아니했습니다. 기름을 부은 대상은 오직 대제사장뿐입니다.
다음에 레위인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제사장의 심부름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은 유월절의 어린양의 희생으로 그들의 장자를 하나님께 바치기로 하였는데 하나님께서는 레위 지파의 사람들을 이스라엘 장자로 구분하여 그들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소유이며 이들에게는 기업이 따로 없고 백성들이 바치는 십일조로 생활을 하게 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제사 제도를 만드신 것입니까?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가는데는 반드시 화목 제물과 속죄의 피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누구나 죄를 범하고는 하나님께 나아갈 길이 없습니다. 그것을 이들을 통해서 그 길을 열어 줄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런 제사 제도는 우리의 화목 제물로 보내실 그리스도의 희생의 그림자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결론 : 그리스도는 이 땅위에서 우리와 하나님과의 화목 제물로서 그 몸을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리고 속죄의 피를 십자가에서 흘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성소의 휘장을 찢으시고 새롭고 산길을 열으신 그 순간 땅의 지성소는 없어지고 하늘의 지성소의 길이 열렸습니다. 그리스도를 힘입고 누구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47) 성령이 보이신 뜻
(히브리서 9:6-8)
구약이건 신약이건 죄 값이 사망이란 진리는 변함이 없습니다.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성소에는 피 없이는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특별히 구약에서는 백성들의 죄를 피로 속하는 속죄일이 율법에 제정되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7월10일을 속죄일로 지켰습니다. 대제사장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속하기 위해 일년에 한번씩 지성소에 들어가는 날입니다.
1. 피 없이 들어갈 수 없는 지성소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면 속죄를 받아야 합니다. 죄인은 어떤 모양으로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율법에서 짐승의 피를 흘리면 죄의 용서함을 받는다고 말씀해 주고 있으므로 하나님께 속죄 받는 방법으로 자신의 죄를 그 짐승에게 전가시켜 짐승으로 자기의 죄 값을 치르게 하기 위해 그 짐승을 잡아 그 피로써 하나님께 자신의 속죄 제물로 드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제사장은 언제나 하나님의 성소에서 속죄 제물을 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은 연수가 많아지면 죽게 되며 그 직분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제사장은 언제나 지성소에 머물러 그의 백성들을 위해 항상 간구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은 일정한 기간만 그곳에 머물러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그 직분의 갈림이 없이 영원히 그곳에 계신다고 하셨습니다. 그 분은 죽음이 없는 대제사장이 시요 멜기세댁의 서열을 좇아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세우심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그 분도 속죄의 피를 가지고 그곳에 들어가셔야 했습니다. 오직 피만이 속죄 제물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죄를 위해서는 이 땅의 대제사장처럼 송아지의 피가 필요 없었습니다. 그분에게는 죄가 없으시기 때문에 자신의 속죄 제물은 드릴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속죄 제물로서의 피만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염소의 피로 그의 백성의 속죄 제물로 삼으신 것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며 흠과 점이 없으신 자신의 피로써 속죄 제물을 삼으시고 그 피를 가지고 하늘의 지성소에 들어가신 것입니다. 그가 드리신 속죄 제물은 단 한 번만으로 영원히 효력이 있는 영원한 제물이기 때문에 한 번 흘리신 피로써 그의 영원한 제사장 직분을 온전히 이루실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지성소에 항상 계실 뿐 아니라 그의 피로 삼은 영원한 속죄 제물을 가지고 들어가셨으며 우리를 위하여 항상 간구하시는 직분 을 영원히 계속하시기 때문에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힘입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온전히 구원함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2. 성령이 보이신 뜻
우리의 대제사장 되시는 주님이 오시기 이전까지는 이 성소의 휘장이 성소와 지성소를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성령이 이런 일로 우리에게 보이신 뜻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8절에서 ‘첫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첫장막이 서 있을 기간이란 구약 시대를 의미합니다. 그 때에는 지성소로 들어가는 길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대제사장을 거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속죄의 모든 사역을 이루시어 이 휘장을 찢으시고 하늘의 지성소에 들어가심으로 우리들에게 새롭고 산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다음에 예수님의 이 같은 사역을 통해서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셨다고 했습니다. 휘장이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휘장이 찢겨진 것입니다. 그 찢겨진 자리가 하나님께로 가는 새롭고 산 실로 열려지게 된 것입니다. 다른 곳은 아직도 휘장으로 단단히 막혀져 있습니다. 그 어떤 방법으로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 누구를 통해서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열어 놓으신 그 새로운 길을 통해서만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안다는 일은 이처럼 놀라운 일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이처럼 생명에 이르는 일이기 때문에 축복 중에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성경을 읽는 것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기도한다고 알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그 분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서 그를 간절히 사모하면서 그 분에 대하여 알기를 원하는 마음이 간절한 사람에게 말씀으로 깨닫게 해 주십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에게 자신을 나타내시기 때문입니다.
결론 :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없이 은혜를 받으려는 사람은 잘못된 은혜를 받아 오히려 참된 믿음에서 떨어져 나가게 됩니다. 우리의 생애에는 바람이 불어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태풍이 닥쳐올 때도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닻을 오직 그리스도에게 내리 운 사람들만이 시험을 이기고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이런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48) 양심으로 온전케 할 수 없는 구약의 제물
(히브리서 9:8-10)
본문 9절 말씀을 보면 ‘율법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는 섬기는 자로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구약은 사람을 거룩하게 하는 일에 있어서 의식을 통한 형식적 방법을 취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사람의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짐승의 피로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이 우리의 양심을 온전케 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런 일은 다만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의 하나의 그림자일 뿐 그리스도가 오신 후로는 이 같은 그림자는 마땅히 사라져야 했습니다.
1. 음식으로 구별한 거룩한 백성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면 하나님의 거룩함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나 다름이 없습니다. 벧전1:16절에서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 지어다 하셨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이것은 레11:45절에 나온 것을 베드로가 인용한 말씀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이 말씀을 이스라엘에게 주시면서 그들로 어떤 방법으로 거룩 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까? 하나님은 그들의 생활에 나오는 의식으로 구별시키셨습니다. 먼저 먹는 식물로 구별하도록 명하셨습니다. 이 율법적 규례가 레11:1-12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음식을 먹는 일에 부정한 음식과 정결한 음식을 구별할 것을 명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에 와서는 이 같은 음식으로 성별케 하는 거룩함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 이유는 온전한 것이 왔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음식 중에는 거룩한 것과 부정한 것이 없으며 아무 음식이나 감사함으로 먹으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은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부정한 음식과 정결한 음식을 구별해서 먹게 하신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정말로 정결한 음식을 먹어야 거룩한 백성이 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주신 구례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서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생활을 해야 거룩한 백성이 될 수 있다는 데 참 의미를 두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먹는 속된 음식은 속된 생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 율법의 결례
이스라엘 백성들은 비단 음식으로만 거룩을 구별지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생활에 적용하도록 결례란 의식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몸을 더럽혔을 때 물로 씻는 일로 정결하게 하는 의식을 말합니다(민19:11-13). 바리새인들은 이런 일을 과장하여 장로의 유전이란 것을 만들어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는다던가 시장에서 돌아와서는 물을 몸에 뿌리지 아니하면 먹지를 아니했습니다.
우리는 구약에서 물로 씻는다는 결례의 의미가 신약에 와서 어떤 의미로 해석되고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딛3:5절에서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였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물은 우리의 죄를 씻는 회개를 말하며 종국적으로는 우리의 죄를 정결케 하는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에 와서는 물로 씻어 거룩하게 하는 의식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레17:11절 말씀을 보면 짐승이 피가 우리의 죄를 속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의식은 우리의 육체에 나타난 죄를 속하는 일에 형식적으로 적용될 뿐 우리의 양심의 죄를 소멸하는 일에는 아무런 효과도 없는 것입니다. 양이나 염소나 송아지의 피가 우리들이 지은 죄에 대하여 용서를 받는다고 하는 하나의 의식은 될 수 있을지언정 아담으로부터 내려온 원죄에 대한 죄를 사죄하거나 사망에 이르는 우리의 죄가 용서함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속죄 제물이 되실 일에 대한 하나의 그림자로 보여 주신 일에 지나지 않으므로 오늘날에는 짐승의 피로 속죄 제물을 드리는 일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히10:22절에서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고 했습니다. 우리들의 마음에 뿌림 받은 것은 짐승의 피가 아닙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피인 것입니다. 이 피야말로 우리의 양심의 악을 깨닫게 하고 그 악을 정결케 씻어 주시는 맑은 물인 것입니다.
이처럼 음식이나 물이나 짐승의 피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거나 양심을 온전케 할 수 없습니다. 이런 것들은 온전한 것이 올 동안만 존속하도록 하신 하나의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양심이란 사람의 생명의 원천인 영혼을 말합니다. 인간이 죄로 죽어 있는 것은 육신인 것이 아니라 양심입니다.
업2:1절에서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고 하셨는데 살리신 것은 우리의 영적 생명, 우리의 영혼인 것입니다.
결론 : 양심으로 온전케 되기 위해서는 마음에 피 뿌림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언약하신 새 언약의 피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을 깨닫고 정결하게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그리스도의 피를 속죄 제물로 믿는 우리의 믿음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그리스도의 피로 뿌림 받아 우리의 모든 죄를 사유해 주심으로 우리의 양심으로 온전케 되는 것입니다. 이 온전한 양심을 가지시고 믿음으로 승리하는 생활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49) 온전치 못한 율법 아래 중보자
(히브리서 9:11-17)
우리는 아직까지 많은 시간에 걸쳐서 구약적 제사나 제물이 우리의 속죄 제물로 온전치 못하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오늘은 구약적 중보자인 제사장의 온전치 못한 중보자직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5절에 나온 말씀을 보면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1. 중보자의 의미
중보란 말은 두 편의 원수 관계를 없애고 서로 화해시키는 일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중보자란 말은 바로 이 같은 일을 담당할 중재자를 가리킵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사람과의 사이에는 왜 중보자가 필요한 것입니까? 그것은 사람은 하나님과의 계약을 순종치 못함으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을 받게 된 인간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무조건 용서하시고 선언하신 심판을 거두시고 생명을 주실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신 말씀은 반드시 이루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또한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죄인 중 하나도 멸망 받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겔18:23절에서 ‘내가 어찌 악인의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서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같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이사야를 통하여 많은 말씀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벧후3:9절에서는 ‘오직 너희를 위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신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성경의 전 내용은 아담 이후 죄로 멸망 받게 된 인간에게 어떻게 구원해 주실 것인가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으로 꽉 들어차 있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이루시기 위한 하나님의 결정적인 방법으로 취하신 것이 바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심판의 공의도 이루시고 그의 불같은 사랑도 이루시기 위하여 세우신 것이 바로 중보자이십니다. 이 중보자가 구약에서는 제사장으로 나왔으며 신약에서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이 중보자는 둘인 것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하나인 것입니다.
2. 구약의 중보자
이 중보자에 대하여 먼저 구약의 경우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구약에서 세우신 제사장은 이 직분을 어떻게 감당함으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동시에 만족시켜 드리는 화해의 사명을 이룬 것입니까?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차례씩 지성소에 들어가 염소의 피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속죄의 제물을 드리는 일로 죄 값이 사망이라는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어 드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같은 제물을 받으심으로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는 것으로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무슨 문제입니까?
(1) 첫째로 중보자는 하나님 앞에 온전한 사람이어야 하는데 구약의 제사장은 자신도 죄인이라는 약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죄인은 중보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제사장들은 먼저 자신의 죄를 속하는 속죄 제물을 드린 후에야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백성들의 중보자로 염소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 안에 들어가 속죄 제물을 드림으로 중보자의 역할을 감당해 왔던 것입니다. 이 같은 제사장의 사역은 그가 온전한 중보자가 될 수 없다는 증거가 되며 온전하신 분이 오시기까지만 존속했던 임시적인 중보자였음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2) 다음에 증보자는 언제나 살아 있어서 이 소임을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중보자가 죽는다면 이런 중보자는 임시적인 직분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사장들은 이 세상에서는 반드시 죽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가 맡았던 중보자 직분도 갈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제사장 직분은 영원히 죽지 아니하시는 다른 중보자가 세워질 때까지만 필요했던 임시직이었습니다.
(3) 제사장의 중보자직은 일년에 한차례씩 지성소 안에 들어갈 때만 효력이 있기 때문에 언제
나 죄를 지을 수 있고 속죄의 은혜를 받아야 할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온전한 중보자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제사장의 중보자직은 지성소 앞에 내리어진 휘장을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이 휘장이 있는 한 하나님과 죄인들의 화해가 온전치 못하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장은 자신도 그것을 제치고 겨우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온전한 중보자로서의 제사장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휘장을 찢어 그 가운데로 새로운 길을 열어 줄 중보자가 나타날 때까지만 필요한 임시직으로의 중보자로 세움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결론 : 그러므로 우리가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구약의 제사 직분은 하나님과의 실질적인 화목을 이루게 함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장래 하실 일에 대한 하나의 예표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때가 됨에 온전한 중보자로서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50) 그리스도의 중보자 직분
(히브리서 9:11-17)
어제는 구약에 나오는 제사장의 중보자적 직분이 불완전한 이유에 대하여 배웠습니다. 율법에 나오는 구약의 모든 제사 제도나 제사 직분은 그리스도에게 와서 온전해 진다는 사실을 깨닫는 일은 매우 중요한 지식입니다. 이 기초적 성경 지식이 없이는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직분을 이해할 수 없으며 구원론에 대한 구약적 배경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알고 믿는 일에 많은 장애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11,12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장래 좋은 일이란 우리가 장차 들어갈 천국의 영광을 말합니다. 우리에게 이 같은 축복을 이루는 대제사장으로 오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1. 영원한 속죄 제물이 되신 그리스도의 피
우리는 예수님의 피가 어떻게 우리의 영원한 속죄 제물이 될 수 있느냐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어떻게 죄인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케 하사 우리에게 오히려 긍휼하심을 얻게 하시어 도리어 생명을 얻기에 이르게 된 것입니까? 이 문제에 해답을 찾으려면 우리는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 가에 대한 지식부터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속죄 제물이 되신 예수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독생하신 하나님으로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품속에 계셨던 분이십니다. 그 분은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본체이십니다. 이런 분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사람으로 오시어 우리의 속죄 제물이 되어 주신 것입니다. 그 분이 흘리신 피는 그 무엇보다 더 소중합니다. 그 분이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일은 하나님 앞에 우리가 지은 모든 죄값을 지불하고도 남을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분이 우리를 대신하여 피를 흘리시고 죽으신 일은 우리의 죄값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치르고도 남을 만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그의 아들을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죄에 대한 공의로우신 심판을 내이심으로 인간이 범한 죄값을 다 치루게 하신 것입니다.
2. 공의 뒤에 나타내신 하나님의 사랑
죄의 심판을 공의로 내리신 하나님은 이제 그가 베푸시고자 원하시는 사랑을 나타내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같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일이기 때문에 인간들은 전혀 알지 못하고 있는 사실들입니다. 아직도 하나님과 원수의 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하나님과 등져 있는 인간들에게 사랑의 메시지를 전하시게 된 것입니다. 이제 너희들의 죄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모두 용서 받았다. 이제 돌아 오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내게로 돌아오면 내가 너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고 너희에게 영생을 줄 것이며 나는 너희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 이렇게 메시지를 전하시는 것입니다. 이 메시지가 바로 복음입니다.
이사야 선지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사55장에서 하나님께서는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이미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대하여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업2장에서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우리와의 온전한 중보자의 자격을 갖고 계시는가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자기의 피로서 속죄 제물을 삼으셨기 때문에 속죄 제물로서의 그 효과가 영원한 것입니다. 다시는 죄 때문에 짐승을 잡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2) 그 분은 영원한 생명을 가지신 부활한 몸으로 지성소에 들어가셨기 때문에 중보자가 갈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 분은 항상 그곳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그의 피를 힘입어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 그 분의 실질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3) 그 분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원수의 담을 허셨습니다. 성소의 휘장이 찢어진 일은 바로 이것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결론 : 이처럼 우리 예수님은 갈보리의 십자가로 우리와 하나님과의 온전한 중보자가 되셨습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피는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뿐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이 예수를 확실하고 분명하게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이 예수를 견고히 의뢰하시어 여러분의 생애를 그 분에게 맡기시기 바랍니다.
(51) 신구약에 나타난 언약의 피
(히브리서 9:18-28)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언약을 세우실 때에도 피로서 세우셨다고 했습니다. 물론 그 피는 짐승의 피였지만 이 피는 곧 그리스도께서 흘리셔야 할 피를 상징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신약이란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그러나 이 새 언약은 이미 구약 여러 곳에서 예언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55:3절에서 ‘너희는 귀를 기우리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고 했습니다. 이곳에서 영원한 언약이라고 한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운 신약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렘31:31절에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고 한 것입니다.
1. 새 언약이 세워지려면
그런데 새 언약이 세워지려면 먼저 그 조건이 조성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담의 죄 값을 속해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죄를 가지고서는 이 언약에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죄를 속하기 위해서는 피를 흘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이 언약을 이루시기 위한 언약의 피이십니다.
마26:18절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담의 유전적인 죄에서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율법의 정죄에서 해방시키는 일은 오직 한 가지 길 뿐,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 값으로 저주 받아 죽으셔야 했습니다.
2. 첫 언약의 피
구악에서 첫 언약이라고 하는 말은 대개의 경우, 모세에게 주신 율법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율법으로 인간이 지켜야할 하나님의 뜻을 알리시고 이 법을 지키는 생활을 통해서 생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한 법이 첫 언약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언약에도 피를 사용하셨습니다. 죄인이 새로운 생명을 얻으려면 그 죄를 속하는 피 흘림이 있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만 주신 것이 아니라 그 율법을 범했을 때 용서 받을 수 있는 길을 피 흘리는 제사 제도를 통해서 보여 주셨던 것 입니다. 이 같은 일은 죄인들로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열어 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하나님께 나아가는데는 육체의 정결을 얻어야 했는데 그런 일은 짐승의 피로써 족했던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히9:13절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하여 거룩케 하거든’이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는 땅에 있는 지성소의 법궤가 아니라 하늘의 지성소에 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양심의 정결함을 얻어야 하는데 그것은 짐승의 피로는 절대로 얻을 수 없고 다만 흠없고 점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피로서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3. 새 언약의 피
하늘의 지성소는 땅의 지성소와 다릅니다. 하늘의 지성소에는 법궤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있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보좌에 앉아 계시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정결하게 하는 방법도 모형으로 할 수 없습니다. 실체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실체란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흘리신 피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림자로 오신 분이 아닙니다. 양이나 염소나 송아지와 동등한 자격으로 세상에 오신 분이 아닙니다. 그 자신이 하나님이 예비하신 온전한 속죄제물이기 때문에 자기가 죽어서 그의 피를 속죄 제물로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대제사장이 해마다 새로운 제물을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해마다 자주 드리실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는 영원한 하나님의 어린양이시기 때문에 한 번 흘리신 피로 족한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제물로 드리신 예수님은 언제나 그곳에 계시기 때문에 새로운 제물을 드릴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를 지을 적 마다 이 땅에 다시 내려오셔서 자주 십자가를 지실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27절 말씀을 보면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인간은 생령이었지만 그 근본은 흙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범죄한 인간은 생령의 상태에서 다시 흙의 상태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그 근본된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범죄한 인간의 심판이 아닙니다.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인간의 심판은 흙으로 돌아간 후, 말하자면 육신이 죽은 후, 그 영혼이 하나님 앞에 가서 받는 심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범죄 한 후 육체로 타락하므로 그 상태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는 몸이 되었습니다.
결론 : 그래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 나라에 가게 되며 마지막에는 죽지 아니할 부활한 몸이 되어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생명의 언약에 들어가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임을 명심하고 감사하는 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52) 주의 재림과 구원의 완성
(히브리서 9:28)
28절은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에 관한 말씀으로 우리의 속죄와 구원의 완성의 과정을 단순하고 간략하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었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1.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성경에는 예수님이 두 번 오시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첫 번째가 예수님의 초림이요 두 번째가 재림입니다. 왜 두 번 오시느냐? 그 이유는 오시는 이유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오심의 목적은 죄인의 구원에 있습니다. 28절에서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려고’ 오셨다고 했습니다. 초림의 예수는 온유하고 겸손한 분으로 그 모습을 세상에 보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오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예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 분은 십자가에서 그의 초림의 사명을 모두 이루셨습니다. 단번에 드리신 바 되었다는 말씀이 바로 이 일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는 부활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시 오십니다.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재림입니다. 초림 때와 재림 때의 죄인의 관념이 다르게 나타나 있습니다. 초림 시에는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오셨는데 재림 때는 ‘좌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나타나시기 위해’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때 죄인이란 누구를 말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거역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요3:18절에서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는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죄의 종목이 있지만 하나님께는 그의 사랑으로 보내신 자 그의 아들을 믿지 아니하는 것보다 더 무서운 죄는 없는 것입니다. 이들에 대한 심판을 위해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의 모습을 가장 실감 있게 보여주신 계시는 계19장에 나와 있습니다.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심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 그의 입에서 이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저희를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포도주 틀을 밟겠고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을 쓴 것이 있으니 만 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초림의 예수님도 재림의 예수님도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같은 신분을 가지신 분이시지만 이처럼 초림과 재림과는 엄청난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2. 주의 재림은 어떻게 오는가?
주님의 재림에 대하여 오늘 주신 말씀을 보니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소망 중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소망은 지금 우리에게 이뤄진 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심으로 이뤄진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이 온전해 지고 영원히 죽지 아니하는 생명으로 변화 받고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는 일은 오직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처럼 구원에 이르는 대상에 대하여 두 가지로 구별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죄와 상관이 없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자기를 바라는 자들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죄와 상관이 없는 자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의 사유함을 받은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자기를 바라는 자들이란 그리스도의 재림을 소망 중에 바라는 성도들을 말합니다. 사도 요한처럼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주의 재림을 소망 중에 기다리는 성도들이 그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의 초림과 재림의 차이점을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초림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베들레헴 땅에 죄인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재림 때에는 부활하시고 하늘에 올라가신 영광의 모습으로 오십니다.
초림의 예수는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재림의 예수는 죄와 상관없는 자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십니다.
초림의 예수는 그를 영접하는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나 재림의 주님은 자기를 바라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시기 위해 오십니다.
그러면 언제 예수님의 재림이 있을 것입니까? 이에 대하여 재림하실 예수님은 ‘때와 기간은 아버지께 속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결론 : 그러나 때와 징조에 대하여 성경에서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경종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예수님은 우리에게 요한계시록이란 주의 재림의 관한 별도의 성경을 주심으로 주 재림을 준비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주님을 맞이할 신부는 죄와 상관이 없어야 합니다. 죄와 상관이 있는 성도가 되지 마시고 죄를 회개하고 순종하는 생활을 통해서 죄와 상관이 없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히브리서 10장 (53 - 61)
◆ 밤중소리 02-01 | VIEW : 596
(53) 첫 것과 둘째 것(히브리서 10:1-10)
(54)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오신 예수(히브리서 10:5-10)
(55) 영원한 구원(히브리서 10:11-14)
(56) 그 날 후에 세울 하나님의 언약(히브리서 10:15-18)
(57) 사죄자의 신앙적인 자세(히브리서 10:19-20)
(58) 보좌에 나아갈 자격자(히브리서 10:21-25)
(59) 짐짓 죄를 짓는 자(히브리서 10:28-29)
(60)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생활(히브리서 10:30-31)
(61)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히브리서 10:32-39)
(53) 첫 것과 둘째 것
(히브리서 10:1-10)
오늘 본문 9절에 있는 말씀을 보면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면 폐하신 첫 것은 무엇을 말하며 세우신 둘째 것은 무엇인 것입니까? 왜 하나는 폐하심을 받고 또 하나는 세우심을 받은 것인가? 이에 대하여 안다는 것은 예수를 믿는 일에 중요한 지식이 되는 것입니다.
1. 첫 것은 왜 폐해졌나?
하나님은 첫 것을 폐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폐하여 버리신 첫 것이란 무엇입니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율법을 가리킵니다. 율법은 인간에게 의를 약속하신 첫 번째의 언약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폐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폐하셨다는 말씀의 뜻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율법이 인간에게 의를 약속하였지만 율법을 지킴으로 의를 얻을 육체가 없기 때문에 유명무실한 이 법을 폐지하신 것입니다.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라고 1절에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장차 오는 좋은 일이란 예수 그리스도로 이루실 구속의 은혜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입니다. 율법이 우리에게 의를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우리들을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여 그리스도로 우리에게 의를 주시는 것입니다.
율법은 아직도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법도로 살아 있습니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없어짐이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에서 벗어났다, 율법의 정죄를 받지 않는다는 뜻은 율법이 그 법을 어기는 그리스도들에게 대하여 구속력이 없어졌다는 뜻입니다. 우리 나라에는 간통죄란 죄목이 있습니다. 미국이나 일본에는 이런 법 조항이 없습니다. 우리 나라도 앞으로 간통죄가 형법에서 사라져버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때는 사람들이 간통을 했어도 법으로 그 사람을 다스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간통죄를 범해도 좋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같은 죄는 구속력이 있고 없고가 아니라 인간의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 것입니다. 율법의 경우도 이와 똑 같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율법은 하나님의 법이기 때문에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이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정죄하는 구속력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미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롬8:1절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이 율법의 구속력 때문에 율법을 지켜 왔지만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정죄가 아니라 다만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지키는 것입니다.
2. 둘째 것으로 세우신 은혜의 법
여기서 하나님은 둘째 것을 세우시게 된 것입니다. 율법은 의도 줄 수 없고 생명도 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에게 적용이 안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의도 주시고 생명도 주시는 다른 법을 세우시게 된 것입니다. 이 법이 은혜의 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율법을 대신하여 우리에게 은혜의 법으로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십니다.
이 둘의 차이점은 굉장히 큰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들에게 그것을 지키는 자들에게 의를 주겠다고 약속은 하고 있지만 우리 인간들은 선천적으로 죄인으로 태어나기 때문에 율법이란 법은 절대로 지킬 수 없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빚 좋은 개살구 격입니다. 약속이 있으면 무엇합니까? 그것을 지킬 수 없을 때는 그 약속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신기루 같은 율법의 약속을 폐하시고 새로운 은혜의 법을 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주시는 믿음의 의의 법을 주신 것입니다. 인간에게 의와 생명을 주시는 일에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작정하시고 율법으로 주실 것이라고 하신 첫째 것을 폐하신 것입니다.
다음에 두 번째로 하나님이 폐하신 첫 것은 불완전한 속죄 제물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율법으로 의와 생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지만 사람들이 율법을 지키지 못하고 오히려 그 정죄로 죽게 된다는 사실을 아시고 그 율법의 올무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으로 속죄제물을 드리는 제사제도를 세우신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이 사람에게 온전한 의를 줄 수 없는 법이었기 때문에 그 속죄제물 역시 온전히 죄를 용서해 주는 제물이 될 수 없었습니다. 이것도 율법처럼 그림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짐승의 피가 죄로 죽게된 인간의 죄를 용서해 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할 수 있다면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실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아담의 원죄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법을 떠난 인생들이 근본적으로 죄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첫 것인 짐승의 속죄 제물을 폐하시고 둘째 것인 그리스도의 속죄의 법을 새롭게 세우신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왜 그리스도의 속죄 제물이 완전한 제물인가에 대하여 몇 가지 알아야 합니다. 첫째로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완전한 제물이 되셨습니다.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율법은 우리를 정죄했지만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의를 주십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의는 율법처럼 계명을 지키는 일로 주시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주시는 믿음의 의인 것입니다.
(54)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오신 예수
(히브리서 10:5-10)
우리는 어제 첫 것이 무엇이며 그것이 왜 폐해지고 둘째 것을 세우셨는가에 대하여 배웠습니다. 첫 것이란 곧 율법을 가리키는데 이 율법은 1절에서 밝히시기를 다만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 참 형상이 아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런 그림자는 참 형상이 올 때 마땅히 사라져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장차 오는 좋은 일의 참 형상으로 오셨기 때문에 첫 것인 율법은 폐해지고 둘째 것인 예수 그리스도로 세우신 은혜의 법이 세워진 것입니다.
1.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왔나이다.
7절에 나오는 말씀을 보면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고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첫 것을 폐하시고 둘째 것을 세우실 사명을 가지시고 세상에 오실 일에 대한 시편40편에 예언된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시편에 나오는 기록은 다윗의 기도로 나오지만 실인즉 구약적인 제사와 율법을 폐하시고 새로운 은혜의 법을 세우시는 메시야에 대한 예언인 것입니다. 이 시는 다윗이 하나님을 찬양한 시이지만 그 영적 배후는 예수님께서 세상에 임하실 일에 대한 예언으로 계시된 것입니다. 5절에서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란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실 일에 대한 것이며 그 때에 이루실 주님의 사역에 대한 자기 고백의 예언으로 보여 주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제사와 예물은 첫 것인 율법에 대한 의식인 것입니다. 이런 것으로는 사람을 온전케 할 수 없기 때문에 원치 아니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 해답이 4절에 나와 있는데 ‘이는 황소와 송아지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제사와 예물은 원래가 속죄 제물이 될 수 없는 것이며 참 형상이 아니라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제사와 예물이 아니신 것입니다. 삼상15:22절에서 ‘하나님은 제사보다 순종을 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미6:8절에서 ‘공의와 인애와 사랑과 겸손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원하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므로 이 같은 그의 뜻을 이루신 것입니다. 원치 아니하신 것은 폐하시고 원하신 것을 취하신 것입니다. 7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고 하셨습니다. 두루마리 책은 구약을 말합니다. 두루마리는 옛날 구약성경을 기록할 때 사용한 양피지를 가리키는데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은 이 같은 두루마리에 율법서, 시가서, 역사서, 선지서 등을 기록했습니다. 두루마리 책은 바로 구약에 예언된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책으로 구약성경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그런데 7절 말씀에 의하면 이 같은 두루마리 책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곧 자기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새로운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실 일에 대한 예언으로 기록된 책이 성경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 두루마리 책에 기록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오셨다고 했습니다. ‘두루마리 책에 나를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루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뜻은 어떤 것입니까? 요6:38-40절 말씀을 펼치시기 바랍니다. ‘내가 하늘로서 내려 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고 하신 말씀이 그것입니다.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며 그런 사람들은 하나도 잃어버린바 되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같은 뜻을 이루시기 위해 어떻게 세상에 오신 것입니까? 빌2:6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 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성육신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인 율법을 이루심으로 그것을 폐하시고 자신의 피로 새로운 둘째 것, 은혜의 언약을 세우신 것입니다.
결론 : 이처럼 예수님은 첫 것을 폐하시고 둘째 것을 세우시기 위해 세상에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오신 분입니다. 그는 이 같은 하나님의 뜻을 십자가를 지심으로 이루셨습니다. 그리하여 그가 운명하실 때, ‘다 이뤘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이리하여 그림자인 첫 것은 폐해지고 참 형상인 둘째 것이 세워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나와 깊은 관계를 가지신 분입니다.
(55) 영원한 구원
(히브리서 10:11-14)
오늘 본문 말씀 중 14절 말씀은 우리 기독교 교리에 있어서 중요한 진리가 되는 말씀입니다.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고 하신 말씀이 그것입니다. 이 말씀의 뜻을 알기 쉽게 간략히 말한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속죄 제물이 되심으로 그의 피의 대가로 죄 사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영원한 구원이 이뤄진다는 뜻입니다.
옛날부터 신학적 크다란 논쟁이 되어 온 교리 문제로써 구원에 관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피로 속죄를 받고 구원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에서 떨어질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그의 생애 중, 죄를 범했을 때에, 그 죄로 인하여 멸망을 받느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속한 장로교회의 입장은 분명하고 명쾌합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죄 사함을 받고 구원에 이른 사람은 어떤 일이 있어도 결코 멸망할 수 없으며 한 번 주어진 구원은 절대로 변함이 없이 영원히 계속된다고 진리를 믿는 것입니다.
1. 한 번 에 족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구원이 왜 한 번으로 족한 것인가에 대한 성경적인 해답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그리스도를 영접하므로 얻는 구원은 새로운 생명을 받는 일을 말합니다. 요1:12절에서 ‘그의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졌는데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담으로부터 난 자는 죄와 사망 가운데 있기 때문에 한 명의 의인도 없으며 한 명도 구원에 이를 자가 없는 것입니다. 이 같은 이치와 동일하게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는 그의 생명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기 때문에 한 명도 아담의 자손으로 되돌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담의 자손들은 아담 안에서 온전히 아담과 하나가 된 것처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이 생명적인 연합에서 벗어날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자기에게 오는 자는 한 명도 잃어버린바 되지 않는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요6:37절에서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죄를 범했다고 그 이유로 영생이 취소되거나 생명을 잃어버린바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죄는 모두 가증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기에 합당하지만 그러나 죄는 두 가지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아담 안에서 죄를 짓는 경우와 그리스도 안에서 죄를 짓는 경우입니다. 아담 안에서 짓는 죄는 하나는 원죄요 하나는 고범 죄입니다. 인간은 원죄로 심판을 받게 되고 고범 죄로 그 받는 형벌의 경중이 결정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범하는 죄는 이미 원죄는 소멸되고 고범 죄뿐인데 이 고범 죄는 이미 용서받은 것들입니다. 용서받았다는 말은 하나님의 심판에서 제외되었다는 뜻으로 그리스도인의 죄는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으로 처리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처리되는 것입니다. 이 처리는 두 가지가 따릅니다. 하나는 징계가 따르고 하나는 하늘의 상급에 연관이 되는 것입니다.
(3) 다음에 그리스도의 피는 영원한 속죄 제물로 하나님께 이미 드려졌습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죄를 범했을 때 하나님께 드린 속죄제물은 양이나 송아지나 염소 따위의 피였습니다. 이런 것들은 죄를 범할 때마다 잡아서 피를 흘려야 하는 것으로 그 사람의 죄를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제물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소나 양이나 염소와는 달리 거룩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속죄 제물이 되신 분입니다. 그의 피는 죄인들을 단번에 온전히 속죄할 수 있기 때문에 구원과 영생이 주어집니다. 우리가 만일 죄를 범할 때마다 새로운 제사를 드려야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들이 죄를 범할 때마다 다시 세상에 오셔서 계속적으로 십자가를 지셔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은 그가 한 번 피를 흘리신 것으로 죄인의 온전한 구원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4) 다음에 우리의 구원이 영원하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영원하시고 변함이 없으신 계획에 의하여 이루어졌다는데서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선택과 구원의 예정은 이미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정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의 생각 뿐 아니라 우리의 전 생애를 알고 계시며 우리가 언제 어떻게 범죄할 것이란 사실까지 벌써 아시고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에 그런 장래적인 일이 우리의 구원을 소멸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4) 다음에 우리의 구원이 영원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보증해 줍니다. 롬8:1절에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정죄란 말은 죄 값으로 받는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십자가에서 심판을 받았습니다. 죽은 사람은 또 죽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이 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가 소멸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었기 때문에 영원히 변질될 수 없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 예수님은 하늘의 지성소에서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지금도 우리를 위해 간구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히10:14절에서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56) 그 날 후에 세울 하나님의 언약
(히브리서 10:15-18)
11절에서 14절까지는 땅에서 제물을 드린 제사장과 하늘의 지성소에 계시는 제사장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땅위의 제사장들은 매일 하나님의 성전에 서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 이유는 한 번의 제사로는 계속적으로 범하는 사람의 죄를 속죄할 수 없기 때문에 죄를 범할 때마다 똑같은 일을 반복해 온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일은 사람의 죄를 기억나게 하거나 사죄의 은총을 맛이나 볼 정도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경우는 모든 인간의 죄를 위하여 자신을 영원한 속죄 제물로 단번에 드리신 것입니다. 12절에 나오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그 분은 이제 속죄제물로서의 그의 사명을 마치시고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는 것입니다.
1.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언약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은혜로 주시는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은 하나님의 언약에 의한 것입니다. 이 언약을 새 언약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같은 새 언약은 예전에 선지자들을 통해서 약속하신 것입니다.
16절에 그 자세한 내용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그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고 하신 말씀이 그것입니다.
‘그 날 후’라고 하신 말씀은 첫 것이 지나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한 속죄 제물을 드린 이후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날에 세울 언약은 돌비에 새겨진 율법으로 된 언약이 아닙니다. 16절 이하에 있는 말씀은 예레미아31:33-34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치 아니하리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2. 우리의 마음에 새기는 새 언약
하나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법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이 말씀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에 두고 우리 마음에 기록하십니다.
이것은 진리를 증거 하시는 성령의 내주 하시는 역사를 말합니다. 성령은 진리를 증거 하십니다.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십니다. 우리로 진리를 믿게 하십니다. 우리는 진리가 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이유는 이처럼 하나님이 주시는 새 언약을 우리들로 믿게 하사 우리에게 사죄의 은총을 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 새 언약의 체결자가 되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우리 마음에 두고 우리 생각에 기록하는 일은 성령의 내주로 성령은 우리 마음속에서 나의 영과 하나가 되어 나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배하시고 나로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 가운데 살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다음에 이 새 언약은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남이 되고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리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새 언약을 통해서 우리와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가 정립되는데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법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관계를 롬8:14절에서 밝혀 주고 있습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지난날의 원수의 담은 무너지고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그의 자녀가 되는 언약이 새 언약인 것입니다.
다음에 새 언약의 약속은 우리의 죄를 하나님께서 다시 기억치 않으시겠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지난날의 더럽고 추한 모든 죄를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기억도 아니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분명히 회개한 죄에 대하여 다시 들추어내어 추억하거나 마음에 상처를 입히는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이미 완전히 용서를 받은 일이며 하나님께서도 기억에서 잊으신 것이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끄집어내어 상처를 입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회개한 다른 사람의 죄를 들추어내거나 그 사람에게 회상시켜 주는 일로 상처를 입혀서도 안됩니다. 하나님이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기억에서조차 사라진 일을 사람이 왈가왈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은 잠정적인 것이거나 일시적인 것이거나 조건부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이며 영원히 변함없는 구원이심을 믿고 우리의 구원에 결코 흔들림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57) 사죄자의 신앙적인 자세
(히브리서 10:19-20)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신앙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처럼 영원하신 속죄 제물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자세로 그의 생애를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로 그냥 죄 가운데서 살아가게 하시기 위해 그 고귀한 피로 속죄해 주시고 구원을 베풀어주신 것일까요? 그렇다면 이미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공의를 상실하신 분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1. 죄의 용서함을 받은 그리스도인의 생활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은 어떠해야 하는 것입니까? 성경에는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이 어떠해야 한다는 기준을 엄격히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롬7:4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죄를 지어도 좋으냐는 문제에 대해 바울은 롬6:2절에서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서 더 살리요’라고 말씀했고 6절에서는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죄를 받은 사람은 그 사죄함에서 오는 참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먼저 죄의 용서에서 오는 기쁨과 평안이 그 마음에 넘치는 것입니다. 죄의 용서를 받은 사람에게는 두 가지 면에서 축복이 옵니다. 하나는 하나님과의 화평의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하나님을 향하여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다른 또 한 가지는 내 인생에 평안함과 감사가 따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내가 너의 모든 죄를 용서했다’는 선언을 들었을 때의 기쁨과 감격은 형용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이 같은 우리의 사죄에서 오는 축복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신 온전한 제사로 얻은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받아 누릴 수 있는 특권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몇 가지로 알아보겠습니다.
2. 그리스도인의 특권
(1) 우리에게 지성소가 열려져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축복입니다. 이 땅위의 지성소는 성소 뒤에 있어서 휘장으로 막혀져 있으며 대제사장만이 일년에 한차례씩 들어갔지만 이 지성소가 하늘로 옮겨진 후에는 땅의 지성소는 소용이 없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첫 것을 폐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늘에 있는 이 지성소에 어떻게 들어가는 것입니까? 그 지성소에도 휘장이 내려져 있는 것입니까? 이 문제는 예수님의 대제사장직 문제와 직접적 관계가 있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합니다.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 휘장이 사라져 버렸다거나 휘장이 필요 없게 되었다는 말씀은 언급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성소 휘장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까? 휘장 한 가운데가 찢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휘장 가운데로 새로운 길이 열린 것입니다.
하늘에 지성소에도 들어가는 길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새롭고 산길이 열렸다고 했습니다. 그 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열어 주신 길인데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셨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속죄 제물로 자신의 몸을 드리심으로 열어 놓으셨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 앞에 제사장이 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 휘장이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 휘장을 찢으시고 우리로 그 길로 하늘의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새롭고 산길을 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휘장이 찢겨져 하늘의 지성소로 가는 길이 열렸다는 말은 하늘 문이 열렸다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다만 우리들의 신령한 눈이 어두워 바라볼 수 없을 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지성소에 들어가는 시간은 언제가 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제사장의 직분을 행할 때 그 때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제사장의 직분은 두 가지로 구분됩니다. 하나는 자신의 죄를 위하여 하나님께 속죄 제물을 드릴 그 때입니다. 다른 하나는 백성들의 죄를 위하여 속죄제물을 드릴 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죄나 형제들의 죄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피를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할 때 우리는 그 찢겨진 휘장 안으로 들어가 하나님의 보좌 앞, 지성소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히4:16절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해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긍휼하심이란 사죄의 은혜요 돕는 은혜란 하나님의 인도하십입니다.
결론 : 죄를 가지고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 그리스도의 피로써 정결하게 씻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돕는 은혜를 받기 위하여 또한 그곳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 새롭고 산길이 항상 열려져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58) 보좌에 나아갈 자격자
(히브리서 10:21-25)
22절에는 하나님의 보좌에 나갈 수 있는 자가 누구인가에 대하여 밝혀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고 말씀했습니다.
1. 누가 보좌에 나아갈 수 있는가?
누가 보좌에 나아갈 수 있는가에 대하여 몇 가지 자격 요건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22절에서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고 했습니다. 그러면 참 마음을 가진 자란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양심의 악을 씻고 몸을 맑은 물로 씻은 사람’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인 사실을 깨닫고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서 씻음 받은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피로 뿌림 받아 그 양심의 악을 깨닫고 그리스도의 보혈로 그 몸을 맑은 물로 씻음 받지 못한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의 지성소에 들어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2) 다음에 온전한 믿음을 가진 자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누구를 말하는 것입니까? 23절 말씀에서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믿는 도리의 소망을 굳게 잡는 자들을 가리킨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믿음의 소망이 있습니다. 이 소망은 이 땅위의 것이거나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롬8장에서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소망에 흔들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염려하는 생활로, 세상을 바라보는 생활로, 죄악의 유혹을 받는 생활로 소망에 흔들려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이 소망을 굳게 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우리의 소망을 굳게 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소망만 굳게 잡되 결코 흔들림이 없어야 합니다.
2. 모이기를 힘써라
교회 생활에 중요한 두 가지 요소를 24절과 25절에서 밝혀 주고 있습니다.
(1)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라고 했습니다. 교회 생활의 중요한 원리는 서로 돌아보는 일인데 특별히 사랑과 선행에 대하여 격려해 주라고 하신 것입니다. 교회란 곳은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시기 잘하는 사람, 투기심이 많은 사람, 다른 사람을 헐뜯기를 좋아하는 사람 등등 실로 다양한 사람들의 모임이 교회입니다. 교회를 잘 섬기며 선행하는 사람에게는 중상이나 모략 대신에 칭찬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모범적인 성도들에게는 주의 이름으로 축복해 주고 격려를 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2) 다음에 모이기를 힘쓰라고 했습니다. 교회란 곳은 모이는 곳입니다. 사람들의 모임이 없이는 교회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불러모으신 곳이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몸을 이루는 곳입니다. 주님이 머리가 되시고 우리가 그 지체가 됩니다. 그래서 주의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이는 일에 서로 권면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오시는 날이 가까울수록 더욱 그러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주일예배에 모이고 주일 찬양예배에 모이고 삼일 밤 예배에 모이고 구역 예배에 모이고 새벽 기도회에 모이고 심야 기도회에 모이고 여하튼 모이기에 힘쓰는 교인이 온전한 교인 구실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모임의 유익에 대하여 몇 가지 알아두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모이면 말씀을 듣고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기 때문에 말씀으로 교훈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중에 우리의 신앙이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임이 있는 곳에 우리 주님이 친히 임재하시어 축복해 주십니다. 내 이름으로 두세 사람이 모인 그곳에 나도 함께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임에서 다른 사람의 흉이나 보고 쓸데없는 잡담이나 하고 신앙에 유익이 없는 무익한 말이나 늘어놓는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모임은 많은 시간을 질질 끌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모임이 끝나면 곧 집으로 달려가 집안 일도 살피고 아이들도 보살피고 남편에게도 아내로서의 의무를 잘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남에게 거부감을 주거나 예수를 믿는 여자가 왜 저러냐는 식의 비방을 들어서는 안돼는 것입니다.
결론 : 여러분은 참 믿음을 가지셨습니까? 그리스도의 피로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올바른 회개를 하신 것입니까? 또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 신앙 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소망을 견고히 잡지 못하고 세상일로 흔들리는 일은 없습니까? 여러분은 저 하늘의 지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돕는 은혜를 받기 위해 은혜의 보좌 앞에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59) 짐짓 죄를 짓는 자
(히브리서 10:28-29)
오늘 본문에는 ‘짐짓 죄를 범하는 자’에 대한 두려운 경종이 있습니다. 26절에 나오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에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린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짐짓 범하는 죄’란 무엇이며 이 죄가 어떤 것이기에 ‘다시 속죄하는 제가가 없다’고 하신 것인가? 이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합니다.
1. 그리스도의 제물을 욕되게 하는 죄
예수님은 우리의 온전하신 속죄 제물이 되신 분입니다. 아무리 큰 죄라 해도 그 죄에 대하여 사죄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요일1:9절에 있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형제가 죄를 범했을 때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씩이라도 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용서받지 못할 죄가 없다는 사실을 성경은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하는 죄’는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요일5:16-17절을 보시겠습니다. ( ). 이 말씀으로 볼 때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죄에 대하여 두 가지 면에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12:31-32절에서 하신 주님의 말씀에 이렇게 나타나 있습니다.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또 한가지는 히6:3절 이하에서 나오는 말씀입니다.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고 했습니다.
2. 짐짓 범하는 죄의 종류
이 말씀을 정리해 보면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았다고 한 말씀은 그 진리를 믿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사람은 성령의 끊임없는 감동과 인도하심을 받아 교회도 나오고 복음을 듣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 드리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그는 짐짓 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짐짓 이란 말은 ‘일부러’ ‘고의적으로’란 뜻입니다. 이미 진리를 받았으면서도 그것을 일부러 거역하는 사람들, 그 진리를 못들은 척 하는 경우, 그에게 구원의 은혜가 미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짐짓 죄를 범한다’ 또는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죄를 범했다’ ‘타락했다’는 말은 우리가 육체로 범하는 어떤 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거짓말했다거나 살인을 했다거나 간음죄를 범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모든 죄는 어떤 죄라도 용서함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의미해 주는 죄란 진리에서 떨어지는 죄, 구원의 은혜에서 벗어나는 죄로써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거역하고 그 은혜를 멸시하는 죄를 가리킵니다.
성령을 거역하는 죄 역시 동일한 의미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성령은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영이십니다. 성령은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에 경종을 주십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사람들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고 믿음을 주십니다. 그런데 이런 성령의 역사 하심과 인도하심을 끝까지 거역하는 자들은 이 세상 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서도 그 죄를 용서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이 같은 죄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구분하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지만 결론적으로 보면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거역하여 구원의 길에서 스스로 떠나는 일입니다. 이런 죄를 용서할 수 있는 다른 어떤 은혜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는 것입니다. 그 이유에 대하여 히6:6절에서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보이기 때문’입니다. 그 아들을 보내신 것 이상, 우리를 구원해 주실 다른 사랑의 방법이 없습니다. 아들을 속죄 제물로 보내신 일은 하나님의 최대 최상의 사랑이요 그 이상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같은 죄에 대해서는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았는데 어떻게 속죄의 제물이 있을 수 있을 것입니까? 그 분이 바로 우리의 속죄 제물이신 데 그 분을 짓밟고서는 다시 드릴 속죄 제물이 없기 때문에 오늘 본문 27절에 있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한 죄’라고 정죄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읽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됩니다. 히4:2절에 있는 말씀처럼, 들은 말씀과 자기의 믿음이 서로 화합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예수를 아는 사람이 되기를 원치 아니하시고 믿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듣기만 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치 아니하시고 들은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진실한 믿음을 가지고 올바른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60)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생활
(히브리서 10:30-31)
본문 32절에서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고 말씀해 줍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영접한 이후, 우리의 생활에 두 가지 변화가 온 사실을 실감 있게 체험하게 됩니다. 하나는 우리의 심령의 변화입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한 우리의 마음은 죄를 버리고 하나님 앞에 열매를 맺는 생활을 추구하기 때문에 새로워지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생활 환경의 변화입니다. 주위로부터 우겨 쌈을 당하는 곤고함을 당하게 됩니다.
1.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느니라
히브리서 기자는 신32:35-36절 말씀을 30절에 적용시키고 있습니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원수라고 하신 말씀은 두 종류로 구분됩니다. 하나는 26절에서 말씀해 주신 바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하는 자’를 말합니다. 이들의 죄는 속죄 제물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겨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한 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죄를 위해 드릴 속죄 제물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들 원수들에게 엄중한 심판으로 갚으십니다. 이들에 대한 심판은 이 땅위에서 하심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는 끝까지 참으시면서 누구든지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이들에 대한 심판은 하나님이 오래 참으시는 것에 비례해서 심히 두렵게 나타납니다. 그들의 육체가 죽는 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됩니다. 히9:27절에서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서 자색 옷 입은 부자가 들어간 음부란 곳이 그 심판의 장소입니다. 그리고 세상 끝 날에 백보좌 심판을 거쳐 둘째 사망의 장소에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둘째 사망의 두려움에 대하여 예수님은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 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다’고 하신 것입니다.
2. 주의 백성들에 대한 심판
다음에 다른 또 하나의 심판이 있습니다. 이 심판에 대하여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안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심판 받을 대상자가 원수인 것이 아니라 ‘그의 백성’이라고 하신 일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들을 몇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이들 중 하나는 교회의 가라지 들입니다. 교회에는 알곡만 있는 곳이 아닙니다. 가라지도 함께 있어서 알곡과 함께 자라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가라지의 존재는 교회에 암적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에 대하여 원수가 이들을 심었다고 말씀하시고 마지막 날에 이 원수를 불태우는 심판을 내리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2) 또 하나의 심판의 대상자는 누룩입니다. 누룩은 악한 교훈으로 진리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을 진리에서 돌이키게 하고 이단을 형성합니다. 두아디라 교회에 나오는 이세벨의 교훈이 이 누룩에서 나온 쑥물입니다. 바울은 이 누룩에 대하여 갈5:7절에서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치 않게 하더냐 그 권면이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고 했습니다.
(3) 다른 또 하나의 심판의 대상자가 있습니다. 이들은 받은 은혜를 망각하고 육신의 일로 하나님의 일을 등한히 하는 자들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악한 종이 이들입니다. 믿음은 반드시 증거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증거도 없는 믿음을 인정하지 아니하십니다. 믿음을 나타내는 증거는 무엇입니까? 열매인 것입니다. 열매를 맺을 시기에 맺지 못하는 나무는 찍어 버리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을 향하여 열매를 맺게 하시려는데 있기 때문에 열매를 맺지 못하는 생활은 믿음을 스스로 저버린 생활이 됩니다.
31절에서 말씀하시기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두려 울진저’라고 경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 있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살아 있는 믿음이란 열매를 맺는 믿음입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있는가 스스로 시험해 보라는 말씀을 명심하여 자기 신앙에 대한 온전한 확인이 필요한 것입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면 빨리 돌이켜 열매 맺는 생활에 들어가야 합니다. 자신이 교회에서 가라지 노릇을 하는 자가 아닌가 늘 자기를 살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고 열매도 없으면서 구원의 확신을 가지려 하고 죄를 회개도 하지 않으면서 속죄의 은혜를 받았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은 모두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결론 :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신 것은 하나님 앞에 믿음의 바른 생활을 하게 하시려는데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인줄 믿으면서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들이 아닌가 스스로 살펴보는 가운데 소망을 견고히 붙잡고 흐트러짐이 없는 믿음의 생활을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61)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히브리서 10:32-39)
그리스도인의 신앙 생활은 언제나 그 믿음의 담대함에 승리의 비결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35절 말씀에서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상을 얻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히브리서는 구약적 언약에서 좀처럼 빠져 나오기 어려운 유대인들에게 보낸 서신입니다. 이 히브리서 수신자들은 예수를 믿고 신앙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구약적 율법에 얽매어 믿음에 많은 제한을 받으면서 확고한 신앙 생활을 하지 못하는 처지에 있었습니다. 이에 히브리서 저자는 유대인들에게 그들이 섬기는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구약에서 언약된 메시야이시며 그가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는 구약적 속죄 제물의 완성임을 성경적으로 증명하며 배도적인 신앙의 두려움을 일깨워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로 이 같은 하나님의 말씀의 권면으로 새 힘을 얻어 앞으로 닥쳐올 여러 환난과 핍박을 이길 수 있는 믿음의 담대함을 주기 위하여 지금 이모저모로 격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1. 빛을 받은 후에 받는 고난
히브리서 저자는 32절에서 지난날 그들이 믿음을 받아 드린 후에 그로 인하여 겪지 않을 수 없었던 고난을 회상시키고 있습니다.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고 한 것입니다.
히브리서를 받아 읽는 성도들이 구체적으로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그들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빛을 받았다는 말은 그리스도를 영접했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교가 역사적으로 많은 국가에서 핍박을 받은 일은 명백한 사건으로 종교사나 역사 서적에 남아있는 것입니다.
특히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을 절대시하는 동족들에게 많은 핍박을 당했습니다. 이런 사실은 사도행전에 많이 나타나 있으며 사도들과 많은 복음의 일꾼들은 이런 상황에서 순교의 제물로 많은 피를 흘린 것입니다. 이들이 받은 고난에 대하여 몇 가지로 밝혀 주고 있습니다.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했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비방은 복음이 이방 종교와 전혀 다른 방법의 의와 구원론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기독교가 우상 숭배를 반대하고 거절하는 일은 지금도 같지만 이런 배타적인 성경 진리가 그 당시 이방 사회에서는 크나큰 비방거리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잡아 가두거나 매질을 하거나 심지어는 죽임을 당하는 혹독한 환난도 당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생업을 이어가는 산업도 빼앗겼습니다.
2. 고난을 이기는 그리스도인의 소망
그러면 이들은 어떻게 이 같은 고난과 환난을 참음으로 이길 수 있었는가? 어떻게 이런 시련을 기쁘게 당할 수 있었던가? 34절에서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산업은 이 땅위에 있지 않습니다. 이 땅위에서 우리가 경영하는 산업은 다만 더 낳은 우리의 영구한 산업을 얻기 위한 삶의 방편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위의 산업을 포기하므로 영구한 산업을 얻을 수 있다면 기쁨으로 그 길을 택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적 태도인 것입니다. 주님은 이 산업에 대하여 우리에게 너무나도 분명하게 언급하셨고 약속하셨습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늘에서 있을 상은 바로 우리의 영원한 산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벧전4:12절에서 ‘너희를 시련 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셨는데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 우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실 일은 영구한 산업의 축복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소망이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신앙의 담대함을 가지고 그 어떤 고난과 환난의 시험 중에도 배도 하는 일을 하거나 불순종하는 일로 그리스도를 저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결론 :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재림은 매우 가까운 것입니다. 어느 시대에 살아가는 성도이건 주의 재림에 소망을 두고 고난과 환난을 이겨야 합니다. 뒤로 물러가는 생활은 하나님이 결코 기뻐하지 아니하십니다.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윤에 빠질 자들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할 자들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의 원수로써 심판 받을 대상자들이 아니라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들인 것입니다. 어떤 어려운 시련 속에서도 인내하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받을 수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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