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新約]강해/◆ 공동서신 · 계시록 강해-1

★ 히브리서 1-4장[Ⅰ.뛰어나신 그리스도]/◆ 밤중소리

영국신사77 2020. 4. 16. 12:43

히브리서 차례

히브리서 1장 (1 ~ 7)

(1) 히브리서의 중요성(히브리서 1:1-3)

(2)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히브리서 1:1-3)

(3)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에게 어떻게 나타났나?(히브리서 1:1-3)

(4) 선지자와 그리스도의 차이(히브리서 1:1-3)

(5) 만유의 후사이신 그리스도(히브리서 1:1-3)

(6) 영광의 그리스도(히브리서 1:1-3)

(7) 그리스도와 천사와의 비교(히브리서 1:4-14)


히브리서 2장 (8 - 12)

(8) 하나님의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는 죄(히브리서 2:1-4)

(9) 들은 것을 더욱 간절히 삼가라(히브리서 2:1-4)

(10) 장차 올 세상의 주인공(히브리서 2:5-10)

(11) 둘째 사람과의 신령한 연합(히브리서 2:11-18)

(12)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으신 이유(히브리서 2:11-18)


히브리서 3장 (13 - 18)

(13)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브리서 3:1)

(14) 모세와 그리스도의 비교(히브리서 3:2-6)

(15) 안식의 불합격자(히브리서 3:7-13)

(16) 마음을 강퍅케 말라(히브리서 3:7-13)

(17) 끝까지 견고히 잡으라(히브리서 3:14)

(18) 믿음으로 들어가는 안식의 땅(히브리서 3:15-19)


히브리서 4장 (19 - 26)

(19) 아직 남아 있는 안식의 약속(히브리서 4:1-8)

(20) 가나안 안식의 참 뜻(히브리서 4:2-3)

(21) 제 칠일의 참 뜻(히브리서 4:4-9)

(22)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히브리서 4:10-11)

(23)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히브리서 4:12-13)

(24)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시는 하나님(히브리서 4:12-13)

(25)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히브리서 4:14-16)

(26)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신 대제사장(히브리서 4: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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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강해

◆ 밤중소리 11-06 | VIEW : 4,275

(1) 히브리서의 중요성(히브리서 1:1-3)

(2)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히브리서 1:1-3)

(3)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에게 어떻게 나타났나?(히브리서 1:1-3)

(4) 선지자와 그리스도의 차이(히브리서 1:1-3)

(5) 만유의 후사이신 그리스도(히브리서 1:1-3)

(6) 영광의 그리스도(히브리서 1:1-3)

(7) 그리스도와 천사와의 비교(히브리서 1:4-14)


(1) 히브리서의 중요성

(히브리서 1:1-3)

1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오늘부터 우리는 히브리서를 공부합니다. 

히브리서는 구약과 신약을 유기적으로 접목시킨 놀라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히브리서를 배우면 

구약과 신약과의 정확한 관계를 올바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하신 모든 구원 사역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에 대한 성경적인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히브리서를 배울 때, 

성경에 있어서 구약이 어떤 역할을 하였는가에 대한 해답을 얻게 되며, 

신약에 나타난 복음이 

바로 구약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태어나심과 

죄인들을 위한 희생 제물이 되신 것으로 말미암아 

모두 성취된 사실을 깨달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은 복음을 떠받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읽고 공부하는 일은 

복음을 확실히 하고 확고히 하는데 

대단히 유익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1. 히브리서의 문제점

히브리서에는 저자의 이름이 나오지 않고 있기 때문에 

누가 기록했는지에 분명치 않습니다. 

영어 흠정역에는 그 표제에 바울의 서신이라고 나와 있지만 

아메리카 개정 역과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번역에는 

쓴 사람의 이름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로는 

히브리서는 사도 바울에 의해 기록된 성경이라고 

보편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히브리서라고 하는 이름이 부쳐진 것은 

주후 200년경 마지막 4반 세기경의 일이지만 

왜 그런 이름을 부쳤는지에 대해서는 

뚜렷한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율법적인 제사 제도와 그리스도의 관계가 

어떤 것인가에 대하여 논증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예수 그리스도를 대제사장으로 인정하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이 율법에서 언약하신 메시야는 예수란 사실을 깨닫게 하여 

그들로 복음을 받아 드리게 하려는데 

히브리서를 쓴 목적이 수 있는 것입니다. 

아 서신은 주후 70년 디도에 의해 예루살렘이 멸망당하기 전인 

61년경부터 63년경에 쓴 것으로 예측하고 있습니다.


2. 이스라엘, 유대인, 히브리인 등의 이름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상식적으로 알아두어야 할 일이 있는데 

그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에 대한 호칭이 여러 가지란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이란 말은 야곱이 얍복강 나루에서 천사와 더불어 

밤새도록 씨름하여 얻은 그의 새로운 이름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언약의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라고 말할 때는 

아브라함의 혈통적 자손들을 언약적으로 부를 때 사용됩니다. 

그러나 이 이스라엘이 아브라함의 언약의 자손의 이름으로 불리기는 

예수의 태어나시기 이전까지의 일이요 

그 이후에는 아브라함의 혈통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라 

하나님의 백성이 된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는 말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갈 3:29절에서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를 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갈 6:16절에서 우리를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갈 6:15-16절

15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16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그리고 그들을 또한 유대인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유대인이란 말은 성경에도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주로 신약 성경에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유대인이란 말은 이스라엘 민족들이 

바벨론 포로 기간 이후에 사용되어 왔는데 

'유다'에 사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이스라엘은 북조와 남조가 서로 갈라져 

북조를 이스라엘, 남조를 유다라고 불렀는데 

그들이 포로로 잡혀 갈 당시에는 

이미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을 받은 후이기 때문에 

유다 또는 유다 땅이라고 불려졌습니다.

그래서 그곳에 거주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유대인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히브리인이라고 부르는 또 다른 이름입니다. 

그런데 이 히브리란 말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을 가리키는지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히브리인이란 말은 

이스라엘이나 유대인보다 그 역사가 오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브라함 당시 그의 혈족과 고향을 구심점으로 한 

광범위한 지역의 인종을 뜻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지만 대개의 경우 히브리인이라고 부르면 

아브라함의 순수한 혈통적인 족속들을 일컫는 것으로 

유대인과 동일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3. 히브리서의 강조점

히브리서의 강조점은 

신약이 구약보다 뛰어나다는데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신약이 

구약과 아무런 연관 관계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구약에 있는 제사 제도나 제사 직분은 

신약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여겨 

신약 성경이나 복음을 무시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히브리서를 연구하면 

신약은 구약의 본체란 점과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이 

구약에 나오는 레위 지파의 제사장 직분보다 

월등하다는 사실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희생이 구약에서 드린 동물의 희생보다 

더욱 완전하고 영원한 것임을 설명하는 일에 

히브리서는 빼 놓을 수 없는 성경인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히브리서를 배우면서 

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시며 

구약의 모든 율법과 예언과 계시가 

약에 와서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처리되는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얻으시므로 온전한 신앙으로 성장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

(히브리서 1:1-3)

1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브리서는 두 구분으로 나누입니다. 

하나는 교리적 부분이요 다른 하나는 실행적 부분입니다. 

교리적 부분은 1:1-10:18절까지이며, 

실행적 부분은 10:19-13:25절까지입니다. 

우리가 히브리서를 배우는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자세하고 깊이 있게 알기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아는 일은 

은혜를 받는 일에 가장 가까운 길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가장 빠르고 올바른 길입니다.


1.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

1절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들려주신 말씀에 대하여 언급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당신의 말씀을 두 가지 방편을 통해서 주셨습니다. 

그 하나는 선지자를 통해서인 것입니다. 

그래서 1절 초두에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 가지 방편은 

그 아들을 통해서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2절에서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선지자로 우리에게 말씀하신 시대를 구약 시대라고 말하며 

아들로 말씀하신 시대를 신약 시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2. 선지자와 아들로 말씀하신 하나님

(1) 선지자로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선지자란 말은 '네비임'으로 

영감 받은 예언자란 뜻입니다. 

예언은 사람의 생각이나 사람의 판단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의 감동으로 오는 것입니다. 

선지자란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께서 보이신 비밀을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 전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하나님으로부터 전하라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출4:15절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너는 아론에게 말하고 그 입에 말을 주라 

 내가 네 입과 그의 입에 함께 있어서 너의 행할 일을 가르치리라 

 그가 너를 대신하여 백성에게 말할 것이니 

 그는 네 입을 대신할 것이요 너는 그에게 하나님 같이 되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론의 입에 함께 있겠다고 하셨는데 

이것은 그들의 입에 하나님의 말씀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비밀한 일을 계시 받은 사람들입니다.

암3:7절에서 말씀하시기를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하시는 일에 대하여 

먼저 선지자들에게 보이시고 

그 뜻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씀하라고 명하여 

모든 백성들에게 듣게 하셨습니다. 

선지자들을 통해서 하신 말씀은 

간접적인 하나님의 의사 전달인 것입니다. 

이같은 의사 전달의 하나님의 말씀은 

아담 때부터 세례 요한의 시대까지로 막을 내리셨습니다.


(2) 다음 2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 그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이 모든 날 마지막'이란 곧 말세란 뜻입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그 시기로부터 

주님이 심판주로 다시 오시는 그 시기까지의 역사를 말세라고 부릅니다. 

이 모든날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그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 아들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에 대하여 

요1:1절에서 알려주시기를 말씀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사람으로 태어나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모든 입의 말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십니다. 

하나님은 삼위일체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부의 말씀도 하나님의 말씀이십니다. 

성령의 말씀도 하나님의 말씀이십니다. 

또한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도 

하나님의 말씀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생존시에 

제자들이나 무리들에게 하신 그 입의 모든 말씀은 

한 마디의 말씀도 예외 없이 모두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그러면 왜 하나님은 인간에게 말씀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죄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죄 값은 사망이요 사망이란 지옥을 의미합니다. 

이제 그들은 죄에서 돌이켜 구원을 받을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인간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들이 죄악 가운데서 죽는 것을 원치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이 죄인들을 구원하시려는 뜨거운 사랑을 가지시고 

인간들을 부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고 

인간에게 구원을 주실 위대하고 비장한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이같은 하나님의 계획을 인간들에게 전달하시려는 마음에서 

구약에서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신약 시대에는 그 아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결론 : 하나님은 이 말씀을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통해서 

성령의 감동으로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약과 신약으로 구분되어 있는 성경을 읽고 깨닫는 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며 

그것으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놀라운 은혜를 받아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번 히브리서를 잘 듣고 깨닫는 마음으로 공부하여 

이같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에게 어떻게 나타났나?

(히브리서 1:1-3)

1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하나님은 무슨 말씀을 인간들에게 들려주시려고 하신 것입니까? 옛적에는 선지자들로 조상들에게 그리고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그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하신 바는 무엇이었습니까? 그 말씀의 요지는 무엇이었나 하는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구약과 신약에서 각기 한 절씩만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구약에는 사1:18절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어떤 의미를 나타내신 말씀입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씻어 주시겠다는 약속인 것입니다. 신약에서 말씀하시는 요지는 요3:16절에 잘 나타난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독생자를 주셨다는 말씀은 그를 우리의 대속 제물로 십자가에 못박아 속죄의 피를 흘리게 하심으로 우리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구약에 선지자를 통해서 주신 말씀이나 신약에서 그의 아들을 통해서 주신 말씀이나 다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1. 죄인을 부르시는 하나님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시는 대상은 누구인 것입니까? 죄인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에게 말씀하시기를 죄인들은 모두 내 말을 들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에게 오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사55:1-3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기를 '너희 목마른 자들아 오라 물로 나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히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너희는 귀를 기우리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나는 죄인이 그 죄악 가운데서 죽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배반하여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가 된 인간들을 불쌍히 보시고 이런 인간들에게 그의 말씀을 통해 구원의 길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크신 하나님의 사랑이며 이 얼마나 감사할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까? 이런 사랑과 은혜로 죄인들을 부르시기 위해 구약에서는 선지자들을 통해서 신약에서는 그의 아들을 통해서 오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2. 죄인에게 경종 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죄인의 구원을 위해 선지자들과 아들을 통해 부르시는 말씀을 세상에 보내셨지만 만약 그 말씀을 듣지 않고 죄악의 길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들을 끝내 심판하시겠다고 경종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을 통해서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가령 내가 악인에게 이르기를 악인아 너는 정녕 죽으리라 하였다 하자 네가 악인에게 말로 경고하여 그 길에서 떠나게 아니하면 그 악인은 자기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를 네 손에서 찾으리라 그러나 너는 악인에게 경고하여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라고 하되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지 아니하면 그는 자기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은혜로서만 죄인들을 구원하십니다.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그들이 율법을 지키므로 구원을 얻으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이 율법에서 자신의 죄인 됨을 확인하여 죄인의 죄를 소멸해 주시고 믿음으로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라고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나 지금이나 사랑으로 죄인들을 부르시며 그리스도의 피로 그 죄를 용서해 주시며 믿음으로 구원해 주시는 것입니다. 다만 구약 시대에는 이같은 하나님의 은혜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국한되었었다는 것뿐입니다.

이처럼 구약이나 신약이나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을 이처럼 부르시고 믿음으로 의를 주십니다. 죄인이 구원을 얻으려면 하나님의 의를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의를 얻는 방법은 선행이나 율법을 지키는 일이 아니라 그리스도르 믿는 믿음에 있는 것입니다. 롬3:21-24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 ). 다음에 하나님은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후사가 되는 영광을 주십니다.


결론 : 하나님은 그의 말씀을 통해서 죄인들을 부르십니다. 죄인이란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아직 하나님의 사랑을 거역하여 그리스도 앞에 나오지 않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복음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는 은혜를 망각하고 하나님의 뜻을 알고도 그 뜻대로 살아가기를 원치 않는 경우입니다. 여러분은 이 두 가지 죄인 중 어느 유에 속해 있습니까? 어느 쪽이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4) 선지자와 그리스도의 차이

(히브리서 1:1-3)

1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브리서의 제목을 부친다면 '그리스도를 깊이 알자'라는 제목이 되겠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알 수 있는 보물 창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라고 하는 이 절대적인 보화를 성경에만 계시해 주심으로 그 누구도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서는 그리스도를 찾을 수도 배울 수도 소유할 수도 없게 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신 것입니까?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신 데 이 말씀은 오직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들만이 깨닫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같은 깨달음은 오직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하나님의 백성들만이 예수 그리스도를 깨달아 믿을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특별하신 배려에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성경을 읽고 그 말씀을 깨달아 그곳에서 예수를 발견하여 그를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축복 받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1절에서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우리에게 말씀하셨다'고 하셨는데 그러면 선지자가 말한 하나님의 말씀과 그 아들이신 그리스도가 하신 하나님의 말씀과는 어떤 차이점이 있느냐는 문제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당시 유대인들 중에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가 아니라 엘리야나 예레미야 같은 선지자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과 선지자와의 관계의 차이점을 아는 일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1. 선지자의 경우

선지자의 경우를 보면 선지자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위하여 특별히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고 그 말씀을 그대로 선포할 사명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이렇게 전하라고 하신 말씀만을 전해야 했습니다. 전하라고 하신 말씀 외에는 결코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없었고 만약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자기 생각이나 자기 주장을 전한다면 그는 거짓 선지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반드시 렘1:3에 있는 말씀대로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고 하는 말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선지자들은 자신들의 개인적인 의사나 생각과 구분하기 위해 말씀을 전하기에 앞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라고 하는 말로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한 말씀은 선지자의 예언대로 반드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이름의 권위와 영광을 위하여 선지자들로 하신 당신의 말씀을 말씀대로 이루어지도록 하셨습니다. 이 일에 대하여 신명기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만일 선지자가 있어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의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방자히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 말지니라'고 하셨습니다(신18:22).


2. 그리스도의 경우

다음에 그러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그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고 말씀해 주었는데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선지자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과 어떤 차이점을 가진 것입니까?

(1) 아들의 말씀은 선지자가 대언한 것과는 달리 친히 하나님의 말씀이란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삼위로 존재하십니다.

그 삼위 중 어떤 분이라도 하나님이시며 삼위 중 누가 말씀하셔도 그 말씀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풍랑과 바람을 향하여 명령을 내리셨을 때, 그것들이 순종했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향하여 말씀으로 명령하셨을 때 살아났습니다. 그 분의 입에서 내리신 말씀이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음이 없으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입의 말씀이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게 하신 시기에 대하여 '이 모든 날 마지막'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이 모든 날이란 인류의 전 역사를 가리킵니다. 우리는 이 모든 날이라고 하신 인류의 역사를 세 구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아담으로부터 아브라함까지의 시기를 말할 수 있습니다. 이 기간은 약 2천년간입니다. 다음에 아브라함부터 예수가 탄생하신 시기까지의 기간입니다. 이 기간도 약 2천년이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로부터 인류의 종말 시기까지입니다. 이 기간도 약 2천년으로 계시되고 있습니다. 이 마지막 기간이 끝난 후에야 두 새로운 시대를 맞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는 안식 시대로 천년왕국 시대입니다. 하나는 영원 무궁 시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들이 참으로 회개해야 할 이 모든 날 마지막에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어 그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게 하신 것입니다.


결론 : 우리 예수님은 참으로 놀라우신 분이십니다. 위대하시고 영광스러운 분이십니다.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분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 분은 나의 선한 목자로 나로 풍성한 생명을 얻되 더 풍성히 얻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지금 이 분의 말씀을 배우며 이 분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리스도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생명의 말씀이시니 그 말씀을 순종하므로 놀라운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5) 만유의 후사이신 그리스도

(히브리서 1:1-3)

1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오늘 본문 2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후사한 말은 상속자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만유의 후사가 되신다는 말씀은 하나님은 만유의 주인이신데 이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신 분이 곧 그리스도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우주 만물의 소유주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후사란 말은 인간 사회에서 자기의 재산을 자기 소생에게 넘겨주는 법적 용어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나 후사가 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후사의 자격에 대하여 창15:3절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또 가로되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 것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1. 그리스도의 만유의 후사의 자격

그러면 그리스도는 어떤 이유로 만유의 후사의 자격을 얻으신 것입니까? 요1:18절 말씀을 보면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아버지 품속이란 하나님의 몸으로 본체를 말합니다. 그 하나님의 몸에는 영원 전부터 독생하신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그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밝혀 줍니다. 하나님께는 오직 이 한 분, 그리스도밖에는 그 몸에 그와 함께 계시는 분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리스도밖에는 그 분의 후사가 될 자격자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심으로 그 후에나 그 전에나 하나님의 후사는 이 분밖에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요10장에서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 누구이건 자기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말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절도요 강도입니다. 그가 누구이든 인간에게 생명을 줄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아버지께로서 나와서 세상에 생명을 주시는 분은 만유의 후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다 같이 '나는 기리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느니라.'


2.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후사로 받으신 권한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후사로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권한은 무엇입니까?

(1) 첫째로 요3:35절에서 '하나님은 그 아들에게 만물을 다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모든 만물은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소유가 되신 것입니다. 이 만물 중에는 모든 인류들까지도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않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2) 다음에 요5:22절 말씀을 보면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가지고 계시는 만물의 심판의 권세를 모두 아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만유의 후사로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마28:18절에서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권세와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입니다. 그것은 그분만이 하나님의 후사이시기 때문입니다.

(3) 그리고 요16:25절에서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노라'고 말씀하심으로 아버지께 있는 것은 모두 주님의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4) 행10:42절 말씀을 보면 '우리를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산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이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거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이상에 열거된 모든 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권한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모든 권세를 주실 상속자로 오직 그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세우셨습니다.


3. 왜 그리스도를 후사로 세우셨는가?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그리스도를 후사로 세우셨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1) 하나님의 자녀들이 받을 하나님의 후사의 자격을 그리스도와 함께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께 가장 적격한 후사의 자격자이시기 때문에 그를 믿는 자녀들로 그 안에서 함께 후사된 자격을 누리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롬8:17).

(2) 다음에 하나님은 그 아들을 믿는 자들을 그 아들과 함께 하나님의 자녀의 자격을 주시기로 섭리하셨습니다(요1:12-14). 이리하여 우리들로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후사가 될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갈4:4-7).


결론 : 우리는 이처럼 하나님의 아들이 된 사람들로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후사가 된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본 받아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장차 주님과 같은 영광의 몸으로 영광의 자리에 앉을 것이라고 약속 받은 사람들입니다.



(6) 영광의 그리스도

(히브리서 1:1-3)

1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2절과 3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 짤막한 말씀에서 그리스도의 놀라운 영광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첫째는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주님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되시며 그 본체의 형상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고 계시며 죄를 정결케 하시는 일을 하실 뿐 아니라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께서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나타내실 때, 그의 이름을 지극히 높이시는데 하나님의 자리에까지 높이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탄의 영은 그리스도를 낮추시는데 피조물의 자리에까지 낮추는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분별할 수 있는 것입니다.


1.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아들

성경에는 모든 만물의 창조주가 오직 하나님뿐이심을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창1:1절에서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말씀해 줍니다. 이 하나님은 삼위의 하나님이신 성부 성자 성령을 가리키는 복수의 하나님이십니다. 골1:15-17 말씀을 보면 '그리스도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자'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존재 시기를 가리키는 것으로 그의 존재는 모든 창조물보다 앞선 자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주님은 피조물이 아니란 의미가 됩니다.

우리는 요1:1절에서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과 성부 하나님과 동일한 하나님 되심을 논리적으로 조심스럽게 전개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느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말씀으로 등장시키고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태초로부터 계셨음을 증거하였고 이 말씀은 또한 하나님이심을 명시함으로써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을 분명하고 명백하게 명시해 놓고 있는 것입니다.

골1:16절에서는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는 이같은 창조를 무엇 때문에, 누구를 위해 하신 것입니까? 이에 대하여 16절 뒷절 말씀에서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다'고 했습니다. 주님이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목적은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자신의 필요에 따라, 바로 당신 자신을 위해 하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이런 말씀은 절대로 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사42:8절에서 '나는 여호와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기이하신 아들의 영광을 바라볼 수 있는데 그것은 성부 하나님은 그 아들을 통해서만 영광을 받으신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도 아들만은 증거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뿐 아니라 전 성경은 오직 그리스도의 위대하심과 그 이름의 지극히 높으심을 증거해 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2.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시다.

본문 3절 말씀을 보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들 죄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 얼마나 귀하고 영광스러운 분이신 가에 대하여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빛이신 그 하나님의 영광은 바라볼 자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의 빛으로 오신 분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요1:9절에서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는데 이 빛이 곧 그리스도시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또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이시라'고 했습니다.

본체란 말은 한몸을 의미합니다. 빌2:6절 말씀에서 '그리스도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라'고 했습니다. 요10:30절에서 예수님은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라'고 하셨습니다. 한 본체란 뜻입니다. 요14:9절에서는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자'라고 하셨습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아버지와 아들은 한 본체이시기 때문입니다. 다음에 '그리스도는 만물을 붙드시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붙드신다고 하신 말씀은 모든 만물의 섭리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지구가 공중에 떠 있는 것도 온 우주가 자전하며 혹은 공전하는 일도 주님이 붙드심으로 한치의 오차 없이 가능한 것입니다. 다음에 '그리스도는 정결케 하시는 일을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모든 죄를 깨끗하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피의 권세와 능력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피는 양심으로 죽은 우리의 죄를 깨끗케 합니다. 그리고 죄인들로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합니다.


결론 : 여러분, 우리의 주님은 이처럼 위대하신 분입니다. 이런 분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분이 우리의 구주가 되시는 것입니다. 이런 분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어 주신 것입니다. 이런 분이 지금도 나를 위해 간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이 시간에 이런 위대하신 분을 다시 한 번 바라보시고 그 분에게 소망을 가지시고 여러분의 모든 것을 그 분에게 맡기시기 바랍니다.



(7) 그리스도와 천사와의 비교

(히브리서 1:4-14)

4 그가 천사보다 훨씬 뛰어남은

그들보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으로 얻으심이니

5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ㄱ)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 다시 ㄴ)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냐

6 또 그가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 때에

ㄷ)하나님의 모든 천사들은 그에게 경배할지어다 말씀하시며

7 또 천사들에 관하여는

ㄹ)그는 그의 천사들을 1)바람으로,

그의 사역자들을 불꽃으로 삼으시느니라 하셨으되

8 아들에 관하여는

ㅁ)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이니이다

9 주께서 의를 사랑하시고 불법을 미워하셨으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주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주께 부어

주를 동류들보다 뛰어나게 하셨도다 하였고

10 또 ㅂ)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11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12 의복처럼 갈아입을 것이요 그것들은 옷과 같이 변할 것이나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 하였으나

13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ㅅ)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느냐

14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 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


오늘 본문 말씀은 그리스도와 천사와의 비교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히브리서를 쓴 기자는 왜 그리스도를 천사와 비교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유대인들의 바르지 못한 메시야관을 바로 잡기 위해서입니다. 유대인들은 천사를 영적인 위대한 존재로 보고 숭배합니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여호와의 사자로 등장하실 때 천사의 모습으로 나타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를 천사보다 낮은 지위의 존재로 착각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그리스도가 천사보다 얼마나 우위에 계시는 분이신가에 대하여 설명해 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오늘날 여호와의 증인들처럼 그리스도를 천사와 동일시하는 이단이 그 당시에도 많았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천사의 위치를 밝힌 것입니다.


1.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라는 참 뜻을 알자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으로 성부 성령과 함께 한 하나님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본체이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약간의 혼돈된 생각을 정리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한 하나님이시지만 아버지는 아들보다 지위 상으로 더 위대하시고 권능이나 영광이 월등할 것이란 생각입니다. 다른 또 한 가지는 하나님은 한 분이신 데 그 하나님이 지상에 내려오셔서 아들로 그 모습을 보이셨다는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지상에 계셨을 때에는 하늘에 하나님이 공석이셨다는 이론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잘못된 생각을 정리하는 일에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지식은 중요한 것입니다. 여기서 아버지도 하나님이시고 아들도 하나님이시란 말씀은 아버지와 아들의 본질이 똑같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본체란 표현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는 분이신 것처럼 아들도 스스로 계시는 분이십니다.

(2)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신 것처럼 아들도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3) 하나님이 거룩하신 분이신 것처럼 아들도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4) 하나님이 피조물이 아니신 것처럼 아들도 피조물이 아니십니다.

(5)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로부터 영광을 받으셔야 하실 분이신 것처럼 

아들도 그런 분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란 이름은 

성부 성자 성령, 이 세분에게만 부칠 수 있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는 천사보다 얼마나 높으시냐?

우리는 4절에 있는 말씀을 깊이 유의해야 하는 것입니다. 

'저가 천사보다 얼마나 뛰어남은'이라고 하셨습니다. 

얼마나 뛰어나다는 말씀은 

천사와는 그 지위나 영광이나 거룩함에 있어서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천사는 피조물이고 

그리스도는 그 천사를 만드신 창조주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사에게는 아들이란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5절에서 '천사 중 누구에게 네가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느냐'고 했습니다. 

천사 중에는 놀라운 권능과 영광의 천사들도 있지만 

그들 중 아무에게도 아들이란 이름을 주신 일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에게 아들이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는 언약을 

천사에게는 주신 일이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는 천사와는 완전히 구별된 분이십니다. 

6절에서 '하나님의 모든 천사가 저에게 경배할지어다'고 말씀해 줍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모든 천사들의 경배를 받으실 위치에 있는 분이심을 

말씀해 주십니다. 

계5:7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보좌에 있는 24장로들이나 천사들이나 네 생물들이 

다 어린양이신 그리스도에게 경배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9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그리스도에게 부어 

네 동류보다 승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란 이름은 기름 부음 받은 자란 뜻입니다. 

기름 부음을 받은 자만이 메시야의 자격으로 세상에 오실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명을 위해 육신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사에게는 이 같은 사명을 주신 일이 없는 것입니다. 

천사는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러면 천사를 창조하신 목적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알아 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아들과 천사와의 차이점이 명백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7절에 나오는 말씀을 보면 

'그의 천사들을 바람으로 삼으셨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바람이란 말은 난하주에 나온 말씀대로 영들이란 뜻입니다. 

14절에 나온 말씀을 보면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이라고 했습니다. 

부린다는 말은 심부름꾼이란 말입니다. 

14절에 그 해답이 나오는데 '구원을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신 존재가 천사'라고 말씀해 줍니다. 

천사들은 주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영적 심부름꾼으로 만들어진 피조물들입니다. 

그러므로 천사와 아들과는 비교도 될 수 없는 존재임을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 성경에 나타나 있는 천사들의 직무를 보면 

(1) 하나님의 계획을 실행하는 일을 합니다. 

(2) 다음에 성도들을 돕는 일을 합니다. 

(3) 성도들을 인도하는 일을 합니다.

 (4) 주 재림 시에 그의 백성들을 모으는 일을 합니다. 

(5) 죽은 성도들의 영혼을 하늘로 인도합니다. 

이처럼 천사는 영적 피조물 중에 우수한 존재이기는 하지만 

주님과는 비교조차 안되며 

지금은 우리보다 나은 위치에서 영광을 누리지만 

실인즉 우리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심부름꾼에 지나지않습니다. 

우리가 하늘에 올라가면 

우리는 천사보다 우위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주님 앞에 더 감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히브리서 2장

◆ 밤중소리 11-06 | VIEW : 3,722

(8) 하나님의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는 죄(히브리서 2:1-4)

(9) 들은 것을 더욱 간절히 삼가라(히브리서 2:1-4)

(10) 장차 올 세상의 주인공(히브리서 2:5-10)

(11) 둘째 사람과의 신령한 연합(히브리서 2:11-18)

(12)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으신 이유(히브리서 2:11-18)


(8) 하나님의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는 죄

(히브리서 2:1-4)

1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

2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하지 아니함이 공정한 보응을 받았거든

3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4 하나님도 1)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의 뜻을 따라 성령이 나누어 주신 것으로써 

그들과 함께 증언하셨느니라


3절에 보면 '큰 구원'이란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구원을 표현하신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인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구원은 큰 구원입니다. 우리들이 만약 하나님의 이같은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긴다면 우리가 어찌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1. 큰 구원이란 말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구약이나 신약이나 매 일반이지만 죄인에 대한 심판에 있어서는 신약에 와서 달라졌습니다. 그것은 구약에서 정죄하고 있는 율법의 정죄외, 하나님의 아들을 믿지 아니하는 죄가 한 가지 더 첨가되어 있는 것입니다. 장차 모든 인류들에게 내려질 하나님의 심판은 율법을 지키지 못한 죄가 아니라 하나님의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긴 죄,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아들을 믿지 아니한 죄로 인하여 내려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히1장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얼마나 존귀하시고 위대하신 분이심을 알았습니다. 이처럼 귀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희생 제물이 되심으로 죄인의 구원을 이루시고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값없이 은혜로 주신 구원을 등한히 여기는 자의 죄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 구원을 큰 구원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까?


(1) 하나님의 아들이 희생 제물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 드린 양이나 염소의 제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친히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심으로 이루신 구원이십니다.

(2) 이같은 아들의 회생은 하나님의 최대의 사랑의 나타나심입니다. 

롬5:7절에서 그의 아들을 십자가에서 제물로 삼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실히 증거 하셨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사랑이 한이 없으신 하나님 이실지라도 그 이상의 사랑을 나타내실 수는 없습니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값진 하나님의 귀하신 구원의 은혜를 값없이 죄인들에게 은혜로 주신 것입니다. 이 구원을 받는 일에 아무런 조건이 있을 수 없고 하나님은 다만 죄인들을 향하여 이것을 가져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일이야말로 하나님의 위대하신 구원이요 큰 구원이십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큰 구원 앞에서 그 어떤 핑계도 댈 수 없습니다. 이같은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이 일이야말로 하나님의 진노를 스스로 취하는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2.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긴다는 말은 무엇인가?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긴다는 말이 무엇인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등한히 여긴다는 말은 그 사실을 마음에 두지 않고 예사로이 여긴다는 뜻입니다. 몇 가지로 구분해 보도록 합니다.

(1)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놀라운 선물을 바라보면서도 그 사실을 의심하는 일은 하나님 앞에 무서운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왜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는 것입니까? 롬4:20절에서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이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는 것입니다.

(2) 등한히 여긴다는 말은 귀중히 여기거나 소중히 간수하지 않는 일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에게 있어서 생명의 보화이신데 이 보화를 세상에서 우리가 사용하는 것보다도 등한이 여긴다면 어떻게 될 것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려야 할 사람들인데 하나님의 가장 값진 구원의 선물을 천히 여긴다면 그런 일이야말로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는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의 태도를 본 받아야 합니다.

그는 빌3:8절에서 이처럼 말씀해 줍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든 것을 다 해로 여길 뿐 아니라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생명보다 그리스도를 더욱 귀히 여긴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어찌하여 이같은 하나님의 큰 구원을 귀히 여기지 아니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가진 것과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그 기업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가를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3) 등한히 여긴다는 말은 하나님의 은혜를 거역하는 것을 말합니다. 많은 이단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오히려 색욕 거리로 바꾸는 것입니다. 거짓 진리로 바꾸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미혹의 영에 현혹되어서인 것입니다. 한 번 이 미혹의 영에 미혹을 받는 날이면 비 진리인 줄 알면서 빠져 들어가는 것입니다.

(4) 등한히 여긴다는 말은 순종치 않는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이 같은 하나님의 큰 구원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 안다면 반드시 순종이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결론 : 우리가 하나님의 이 큰 구원을 등한이 여기는 증거는 '불순종'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큰 구원을 소중히 여긴다면 우리는 반드시 그 분에게 순종하는 열매가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순종의 생활로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지 않고 귀하게 여긴다는 증거를 나타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9) 들은 것을 더욱 간절히 삼가라

(히브리서 2:1-4)

1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

2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하지 아니함이 공정한 보응을 받았거든

3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4 하나님도 1)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의 뜻을 따라 성령이 나누어 주신 것으로써 

그들과 함께 증언하셨느니라


히 2:1절 말씀을 보면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지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히브리서를 기록한 바울은 그리스도의 크신 영광을 1장에서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모든 날 마지막 그의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신 분이시며, 그는 하나님이 세우신 만유의 후사가 되시며, 그 아들로 말하면 모든 세계를 지으신 창조주가 되시며, 이 분 예수야말로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요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들고 계시는 참 하나님이시며 죄를 정결케 하시며 지금은 하늘 높은 곳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는 분이심을 증거 한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이 분 예수는 하늘에 있는 천사를 창조하신 분이시며 그 천사를 사역자로 부리시는 분이시며 모든 천사의 경배를 받으시는 분이심을 분명히 밝혀 주고 있는 것입니다.


1. 우리는 무엇을 들었는가?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 그리스도는 이처럼 위대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구원은 이처럼 큰 구원인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시간 시간마다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을 들을 때, 마음에 깊이 간직하여 흘러 내려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구원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얻는 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들은 것은 이처럼 그 아들에 관한 올바른 지식입니다.

예수님은 요17:3절에서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 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같은 지식을 무엇으로 어떻게 알 수 있는 것입니까? 3절에서 언급해 주신 바를 보면 처음에 주로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친히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도 표적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으로 증거 하셨는데 성령의 나눠주신 것으로써 증거 했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이같은 구원의 증거는 성령께서 성경에만 기록해 놓으셨습니다. 성경 외에 나타난 그리스도나 성경을 떠난 복음은

어떤 경우에도 다른 복음으로 우리에게 올바른 구원의 길을 제시해 줄 수 없는 것입니다.

(2) 다음에 성경에 기록된 그리스도는 오직 성령의 지혜로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지식이 많은 사람이라도 성경을 깨닫지 못하면 그리스도에 대하여 아무 것도 알 수 없습니다.

(3) 다음에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올바른 지식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미혹의 영은 우리들로 미혹의 길로 이끌어 이단에 빠지게 하지만 성령은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요14:17절에서 '성령은 진리의 영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영을 받은 사람들만이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에게 이진리를 깨닫게 하시기 위해 진리의 성령을 보내신다고 하셨습니다.


2. 우리가 들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다음에 우리가 또 들은 것은 아들을 통하여 들려주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대하여 1절에서 '흘러 떠내려갈까 염려하노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나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리니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아버지의 말씀은 같은 말씀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아버지의 뜻을 모두 나타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가장 중점적인 뜻은 무엇입니까?

요6:40절에서 밝히시기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은 아버지와 아들을 별개로 믿거나 따로 따로 믿거나 알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 아들을 알고 그 아들을 믿고 그 아들을 경배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 일이 결과적으로 아버지께 영광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한 본체이신 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요12:44-45절 말씀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명심해야 할 일은 들은 그 말씀을 흘러 떠내려보내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흘려 보내지 밀라고 하신 말씀은 깊이 간직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을 마음 깊이 간직해 두는 사람이 믿음의 비밀을 소유한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간직하려면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합니다. 사55:3절에서 '귀를 기우리고 내게 와서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다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귀는 할례를 받은 귀라야 하는 것입니다. 렘6:10절에서 할례를 받지 못한 귀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다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흘러 내려가지 않게 받으려면 마음으로 받아야 합니다. 겔3:10절에서 하나님은 겔에게 '내가 네게 이를 모든 말을 마음으로 받으려 귀로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결론 :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구원은 이토록 귀중한 것입니다. 이 구원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깨달아야 받을 수 있고 간직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멀리하고 금식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며 은사를 받은들 무슨 유익이 있을 것입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와 그리스도를 아는 지혜 가운데서 그의 신앙이 바르게 뻗어

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10) 장차 올 세상의 주인공

(히브리서 2:5-10)

5 하나님이 우리가 말하는 바

장차 올 세상을 천사들에게 복종하게 하심이 아니니라

6 그러나 누구인가가 어디에서 증언하여 이르되

ㄱ)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7 그를 2)잠시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시며3)

8 만물을 그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만물로 그에게 복종하게 하셨은즉

복종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하겠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9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2)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10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바울은 히 2장에서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원받은 성도들의 미래에 관하여 말씀하면서 장차 오는 세상의 주인공이 누구인가에 대하여 분명히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장차 오는 세상이란 어떤 것입니까? 우리는 성경에서 두 가지 새로운 세상이 우리에게 온다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약속된 장차 올 나라

그 하나는 주님의 재림시에 이 땅위에 이루어질 그리스도의 나라로 천년왕국입니다. 천년왕국은 창 1:28절의 회복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에덴에서의 안식의 축복을 약속하셨지만 그의 범죄함으로 그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저주의 땅으로 내어 쫓겨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에덴의 안식의 약속을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안에서 구원을 받은 그의 백성들로 누릴 수 있도록 허락하신 것입니다.

다음에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다른 또 하나의 세계는 무궁 세계인 천국입니다. 이 천국은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최종적으로 예비하신 하늘의 예루살렘입니다. 이곳은 우리의 영원한 안식처요 우리의 본향입니다. 우리는 이곳을 바라보면서 모든 어려움을 참고 견디며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장차 나타날 영광이란 바로 이곳의 생활과 이곳에서 받을 상급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 구원 성도의 궁극적 소망

6절 이하에서 보여 주신 말씀은 다윗의 시84:4-6절 말씀의 인용입니다. 다윗은 성령에 감동하여 이 말씀을 기록하게 되었는데 이 말씀은 그리스도에게 적용되는 말씀이며 그가 인자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을 때의 그의 낮아지심과 그가 다시 존귀와 영광으로 관 씌우심을 받은 그의 높아지심에 관한 말씀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6절에서 사람과 인자란 말이 동시에 표현되고 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동일한 표현입니다.

다윗은 그리스도의 낮아지심과 높아지심에 관한 계시를 받고 성령의 감동으로 이 말씀을 기록할 때, 그리스도의 천사보다 낮아지심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신 사건 자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그렇다고 그의 신분이 천사보다 실제로 낮아지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기간은 잠깐동안입니다. 그가 지상에서 공생애를 보내시는 그 기간 동안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역을 마치시고 하늘에 오르신 그리스도에게 다시 존귀와 영광으로 관 씌우시며 만물을 다스리는 모든 권세를 그에게 주심으로 더 영광스럽게 하신 것입니다.

9절 말씀을 보면 그리스도의 고난과 존귀에 대하여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깐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란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천사들보다 잠깐 못하게 하심을 입은 육신의 몸으로 세상에 오셨지만 그가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시고 부활 승천하심으로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을 행하신 목적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천사보다 낮은 자리로 내려 오셔서 고난을 받으신 일은 모든 사람을 구원의 길로 이끄시려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죄악과 멸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그의 아들을 천사보다 더욱 낮추시는 인자의 몸으로 세상에 보내시고 그의 속죄 제물을 통해서 하나님의 큰 구원을 이루신 사실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같은 일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놀라우신 하나님의 은혜를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도 인간들은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저버리고 그 아들을 귀히 여기지 아니하며 영접하지 않으므로 스스로 멸망의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2:2절로 나오는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천사들로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 함과 순종치 아니함이 공변된 보응을 받았거든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천사를 통하여 모세에게 주신 율법도 어기면 그것이 범죄가 되어 정당한 보응을 내리셨거든 하물며 그 아들로 큰 구원을 이루신 하나님의 은혜를 거역하는 자들이 받을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클 것인가 하는 경종인 것입니다.

10절 말씀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큰 구원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 많은 아들을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께서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되신 일이 합당한 일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8절 하 반절에서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저에게 복종한 것을 보지 못하고'란 말씀은 우리가 그 같은 주님의 영광을 실제로 보지 못하고 있지만 그가 다스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 우리는 분명히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을 밝혀 주는 말씀입니다.


결론 : 우리의 죄는 그리스도께서 인자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셔야 하리만치 컸습니다. 우리가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을 수 있는 소망은 순전히 이같은 주님의 고난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알고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간직하여 순종의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11) 둘째 사람과의 신령한 연합

(히브리서 2:11-18)

11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12 이르시되 

ㄴ)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

13 또 다시 ㄷ)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하시고 또 다시

ㄹ)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

14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16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4)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17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18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우리는 성경을 인용하여 말씀을 전할 때 '안에서'란 말과 '연합'이란 말을 잘 인용합니다. 성경을 상고해 보면 인간의 조상을 둘로 구분하여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신령적 조상이요 다른 하나는 육적 조상입니다. 육적 조상은 아담을 의미하고 신령적 조상은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육적 조상에 대하여 고전15장에서 첫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하여는 둘째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이 죄인의 구세주가 되셔야 하신 이유

이 첫 사람 아담은 그의 범죄로 인류 최초의 죄인이 되었고 그로 인하여 그의 모든 육신적 자손들이 죄인의 자손으로 태어나 함께 죄인이 되었습니다. 죄 값은 사망임으로 사망은 아담 안에서 모든 인류에게 왕 노릇하게 되었습니다. 죄인에게는 소망이 전혀 없었습니다. 오직 죄 값으로 말미암은 죽음이 있을 뿐입니다. 죄인들에게는 한 가지 희망이 있을 뿐입니다. 이 세상에 구세주가 나타나서 인간의 죄를 대속하여 사망의 사슬에서 풀어 주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같은 희망은 절대로 바랄 수 없는 희망 사항에 불과합니다. 왜냐 하면 인류는 모두 구세주의 도우심으로 구원을 받을 대상만 존재할 뿐 구세주가 되어 죄인의 죄를 대속해 줄 무죄한 인간은 존재할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독생자를 둘째 사람으로 세상에 보내신 이유가 여기에 있으셨든 것입니다. 그분에게는 죄가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분명 사람으로 태어나셨지만 아담의 자손으로서가 아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는 둘째 사람으로 세상에 태어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 분은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심으로 분명 사람으로 태어나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죄가 전혀 없으신 하나님이시면 서도 사람으로 세상에 오셔야 하셨던 이유가 실로 이런 사실에 있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둘째 사람이시기 때문에 우리 역시 둘째 사람에 속한 사람이 되어야 그리스도와 연합할 수 있으며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기업의 후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둘째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이같은 일은 인간적인 방법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인간들에게는 그런 방법이나 그런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방법으로만이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방법이란 어떤 것입니까? 요1:12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는 말씀이 바로 그 방법인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을 믿는 자는 이 하나님의 방법에 의하여 둘째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후손으로 인정되며, 아담 안에서의 인생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인생으로 바뀌어지고 사망 안에서의 생활이 생명 안에서의 생활로 바뀌어지고 이 세상에서의 소망이 하늘의 소망으로 바뀌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육신적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의 새로운 생명인 영이 살아났기 때문에 주님과 영적인 연합이 이뤄진 것입니다.


2. 둘째 사람의 특징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둘째 사람의 특징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이 분은 하늘에서 나신 분입니다. 첫 사람이 아니시기 때문에 하늘에서 나신 일은 당연합니다. 이 세상은 죄로 더럽혀졌고 모든 인간은 죄의 자손이기 때문에 땅에서는 둘째 사람이 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하늘에 그의 생명이 속한 둘째 사람에게 속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 역시 하늘에 속한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2) 다음에 둘째 사람의 특징은 하늘의 생명을 가지셨다는데 있습니다. 우리의 예수님은 이 세상의 생명을 가지신 분이 아니라 하늘의 영원한 생명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죄로 죽게 된 인생들에게 생명을 주시려면 하늘의 생명을 가지고 계셔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담과 연합이 되었을 때 그의 죄로 인하여 사망이 왕 노릇했든 것처럼 이제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었으므로 그의 의로 인하여 생명이 왕 노릇하게 된 것입니다.

(3) 다음에 둘째 사람은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셔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보다 그 지위가 높은 자가 아니시면 죄인들을 구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보다 더 높으신 존재가 누구이십니까? 하늘의 천사도 부리는 영으로 그의 지위가 결코 사람보다 높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둘째 사람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아들로 인하여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그 아들과 함께 자녀의 권세를 주신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아담의 자손들이 아닙니다. 아담의 자손으로서의 우리의 신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우리는 죽은 사람으로 우리를 지배하게 하거나 죽은 사람의 죽은 생명으로 살아가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인 성령으로 거듭난 것입니다. 이제 새로운 생명으로 새롭게 태어난 것입니다. 우리는 새 생명 가운데서 새롭게 살아가야 할 하늘에 속한 새 사람들입니다.


(12)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으신 이유

(히브리서 2:11-18)

11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12 이르시되 

ㄴ)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ㄴ) 시편 22:22

22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 가운데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

13 또 다시 ㄷ)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하시고 또 다시

ㄷ) 이사야 8:17

17 이제 야곱의 집에 대하여 

얼굴을 가리시는 여호와를 

나는 기다리며 그를 바라보리라


ㄹ)볼지어다 

ㄹ) 이사야 8:18

18 보라 나와 및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자녀들이 

이스라엘 중에 징조와 예표가 되었나니 

이는 시온 산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

14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16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4)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17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18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11절 말씀을 보면 우리 주님께서 우리들에 대하여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주님이 우리와 같이 육신을 입으신 일은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인 마귀를 없이 하시고 사망의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신 주님

우리와 주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성경에서는 여러 가지로 밝혀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1절은 아직까지 밝혀진바 없는 전혀 새로운 관계를 보여 주고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큰 감명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제 우리와 그리스도는 하나님 안에서 한 가족 관계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형님이 되시고 우리가 아우가 되는 형제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을 안다는 일은 중요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우리는 그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아버지의 유업을 이을 자들이 된 것입니다.

이 사실은 예수님과 우리는 한 가정의 가족 관계에서 한 형제가 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형님 한 번 잘 두어 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운동선수들에게는 오빠 부대들이 많이 따르지만 예수님이야 말로 믿는 모든 여성의 참 오빠이신 분이십니다. 다 '오빠 한 분 잘 두었다.' 그런데 우리 형님이신 예수님은 어찌 겸손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지 우리를 형제라고 부르시는 일에 조금도 부끄럽게 여기지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이 더러운 죄인을 사랑하시고 한 형제라고 부르시는 일에 부끄러이 여기시지 않는다는 사실은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우리는 이같은 우리 예수님을 부끄럽게 해 드리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브끄러워 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부끄러워한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다른 사람들 앞에 나타내는 일을 창피하게 생각하는 일을 말합니다. 믿지 않는 친구들이나 사람들 앞에서 자기도 예수를 모르는 사람인 척 시치미 떼는 일 같은 짓은 예수님을 부끄럽게 하는 일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이 잡혀 가시는 뒤를 좇다가 대 제사장 집 뜰에서 이런 일을 저질렀습니다. '자기는 예수가 누구인지 모른다'고 딱 잡아뗐습니다. 나중에는 맹세하면서 저주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빌라델비아 교회 성도들은 비록 가진 능력은 적었지만 그리스도의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므로 칭찬을 들었습니다.


2. 예수님이 육신을 입으신 이유

14절과 15절에서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으셨던 일에 대하여 그 이유를 밝혀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가 육신을 입고 있기 때문에 이 자녀들을 영광으로 이끄시기 위해서는 우리와 똑같은 형제의 모습을 지녀야 하셨으므로 육신을 입게 되신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첫째로 사망의 권세를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하려고 우리와 같이 혈육에 속하시기 위해 육신을 입으셨다고 하셨습니다. 마귀를 잡으려면 그가 가지고 있는 권세를 무너뜨려야 하는 것입니다. 마귀가 쥐고 있는 사망 권세를 우리는 도저히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죽으면 다시는 살아날 수 있는 권세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만이 부활로써 이 권세를 이기실 수 있으셨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부활의 권세로 마귀의 사망 권세를 이기신 그리스도와 한 몸으로 연합되어 한 형제가 되었으므로 우리도 우리 형님과 함께 사망 권세를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2) 다음에 예수님이 육신을 입으신 것은 우리를 죄의 종의 자리에서 일으켜 주려 함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종은 한평생 주인의 부림을 당하는 처지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싹으로 받는 것이라곤 사망입니다. 우리는 이같은 비참한 처지에서 헤어나올 수 없는 죄의 종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죄를 이기시고 죄를 심판하신 예수님은 우리를 죄의 종의 자리에서 해방시켜 주신 것입니다.

(3) 다음에 또한 시험 당하는 자들을 도와주려 함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18절에서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 땅위에 계실 때 많은 시험을 몸소 겪으셨습니다.

시험을 당할 우리를 능히 도와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요14:18절에서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고 하셨습니다. 시험에 지지 아니하시고 세상을 이기신 주님이 우리가 시험을 당할 때 즉시 도와주시므로 우리로 시험을 이기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결론 : 어떤 방법으로 도우십니까?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않는 일로 도와주십니다. 피할 길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인내하여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주심으로 이기게 하십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일로 이기게 하십니다. 주님이 우리의 환난에 동참하시므로 이기게 하시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3장 (13 - 18)

◆ 밤중소리 02-01 | VIEW : 1,298

(13)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브리서 3:1)

(14) 모세와 그리스도의 비교(히브리서 3:2-6)

(15) 안식의 불합격자(히브리서 3:7-13)

(16) 마음을 강퍅케 말라(히브리서 3:7-13)

(17) 끝까지 견고히 잡으라(히브리서 3:14)

(18) 믿음으로 들어가는 안식의 땅(히브리서 3:15-19)


(13)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히브리서 3:1)

1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우리는 1절에 나온 말씀에서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는 말씀을 듣게 됩니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생애에 있어서 생각이란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좋은 일에 생각이 깊은 사람은 존경을 받습니다. 그러나 모든 일에 생각이 미천한 사람은 그의 인격이나 그의 활동에 경솔한 면을 나타내 보입니다. 효자다 열녀다 하는 말들은 별것이 아닙니다. 부모님에게 깊은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면 효자가 되고 일편단심 남편만을 생각하는 삶을 살면 열녀가 되는 것입니다.


1.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그리스도인이란 예수를 깊이 생각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지배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 사람의 생각인 것입니다. 이것을 좀더 유식하게 표현하면 사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과 생각하는 일들이 구별되어야 합니다. 만약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면서도 세상 사람과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세상사람이지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입니다. 골3:2절에서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사람이 돈을 생각하면 돈의 노예가 됩니다. 술을 생각하면 술꾼이 됩니다. 낚시를 생각하면 낚시꾼이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그의 생각을 언제나 위엣 것에 두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애를 살아갈 수 잇는 것입니다.

생각에도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옅은 생각이요 하나는 깊은 생각입니다. 옅은 생각이란 육신에 새겨진 생각입니다. 이 생각은 마음에 품은 것이 아니라 머리에 기억되는 생각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이해관계에 좌우되기 때문에 변덕을 잘 부립니다. 예수를 믿어도 변덕스럽게 믿는 사람들이 이 사람들입니다. 한때는 반짝했다가 얼마간 지나면 사그라집니다. 문제가 생겨야 교회에 나오고 발등에 불이 떨어져야 기도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면에 깊은 생각이 있습니다. 이 생각은 마음에 새겨진 생각입니다. 이 생각은 그 무엇으로도 지을 수 없습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는 말씀은 바로 이 같은 생각을 말합니다. 예수의 생각이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고 떠나지 않는 상태, 예수의 생각으로 마음이 꽉 들어찬 상태, 이런 상태의 마음이 예수를 깊이 생각하는 마음인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깊이 생각해야 할 이유는 먼저 우리들은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하나님의 부르심 곧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을 말합니다. 부르심을 받았다는 말은 선택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거룩한 백성이란 놀라운 칭호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2. 예수님의 두 가지 사역

우리는 1절에서 우리 주님의 두 가지 사역에 대하여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은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 시라’는 것과 다른 하나는 ‘우리의 대제사장’이시라는 사실입니다.

(1) 예수를 가리켜 ‘믿는 도리의 사도’시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은 우리의 신앙의 사도 시라는 뜻입니다. 사도란 말은 헬라어로 ‘아포스토로스’라고 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란 의미가 됩니다. 이 말씀의 뜻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보내심을 입은 자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것입니다.

예수야말로 하나님이 보내신 오직 단 한분의 믿음의 길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2) 다른 한 가지는 예수는 우리의 대제사장이시라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이란 사람을 대표하여 하나님 앞에서 속죄 제사를 드리며 그의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께 속죄의 기도를 하는 직분 자를 의미합니다. 이처럼 우리 주님은 하나님 편에서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하나님을 대변하여, 하나님의 뜻을 사람에게 전달하시는 사도의 직분 자로서 다른 한 가지는 사람을 대표하여 사람의 죄를 하나님 앞에 속죄하고 자기 백성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는 대제사장으로 세우심을 받으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사역에 대한 예수님에 관하여 깊은 깨달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우리에게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관계는 우리가 배울수록 그 진리가 깊으며, 더 알수록 더욱 신비스러움을 바라보며 더 깨달을수록 그 은혜가 말할 수 없이 큰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믿는 도리의 사도로서의 예수를, 우리의 대제사장으로서의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결론 : 히브리서는 바로 이 같은 예수를 깊이 생각하게 하기 위해 기록된 성경인 것입니다. 우리는 히브리서를 배우면서 믿는 도리의 사도이신 그리스도를 잘 배워야 합니다.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잘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이 예수를 내 마음에 깊이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십시다.


(14) 모세와 그리스도의 비교

(히브리서 3:2-6)

2 그는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신실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이 하셨으니

3 그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

4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5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언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서 신실하였고

6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와 같이 하셨으니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


히브리서 기자는 2절 이하에서 모세와 그리스도를 비교하고 있습니다. 물론 모세와 그리스도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왜 이곳에서 모세를 등장시켜 그리스도와 비교한 것일까요? 그것은 유대인들이 모세를 메시야의 표본 인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율법에서 메시야를 증거 할 때 ‘하나님께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실 것이라고 말하므로 그렇게 인식되어 온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를 모세와 비교하여 그가 모세보다 얼마나 위대하신 분이신가 에 대하여 증거하므로 그리스도의 메시야 되심을 확실히 증거하려고 한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집에서의 충성

저자는 본 절에서 모세와 그리스도의 하나님의 집에서의 충성심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집에서의 모세의 충성심은 성경이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민12:7절에서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나의 온 집에 충성됨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모세와 비교해 볼 때 감히 비교될 수 없을 만치 우월한 분으로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모세보다 다욱 큰 영광을 받을 만한 분이심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 비교에 있어서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다’고 한 것입니다. 집 자체는 존귀치 않습니다. 그 집을 짓고 그 집에서 영광을 누릴 집주인이 존귀한 것입니다. 모세와 그리스도의 비교가 그러하다고 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4절에서 ‘집마다 지은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고 말씀해 준 것은 그리스도에게 적용시킨 말입니다. 3절에서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 하다는 말씀으로 모세는 집에 비유되고 그리스도는 집을 지은 자라는 뜻인데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으로 집을 지으신 이로서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신 사실을 의미하는 말씀입니다.


2. 모세는 사환으로 그리스도는 아들로 충성

두 번째로 모세와의 비교에서 5절과 6절에서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다’고 했습니다. 모세가 충성한 것은 ‘장래의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충성했다’고 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모세가 한 일은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선지자로서의 충성이라고 한 것입니다. 장래에 말할 것이란 창3:15절에서 언약하신 구세주의 언약으로 구약 시대의 모든 선지자들은 모세를 비롯하여 말라기까지 모두 이 일에 대한 것을 증거하고 예언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모세가 일한 하나님의 온 집이란 이스라엘을 말합니다. 구약의 교회는 곧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께 충성한 일은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그 분으로 이루실 복음을 전하는 일꾼으로 충성한 것입니다. 이 같은 일을 사환의 사역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 사환이란 메시야인 것이 아니라 메시야를 증거 하는 선지자로서의 위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6절에서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다’고 말씀해 줍니다.

그러면 그의 집 맡은 아들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여기서 그의 집이란 그리스도께서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모세가 충성한 하나님의 온 집과는 다른 의미의 집입니다. 모세의 충성은 이스라엘에 국한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스라엘에서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일에 충성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집 맡은 아들의 신분으로 등장하십니다. 그의 충성은 집 맡은 아들로서의 충성을 의미합니다.

이 말씀은 그가 근본 하나님이시지만 인자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셔서 그의 죽으시기 까지 복종하시는 충성을 이루셨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의 메시야관은 편협적인 것이며 이스라엘에 국한시킨 잘못된 것이며 모세를 메시야의 표본 인물로 인식하는 것은 잘못된 성경관이란 사실을 강력히 증거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6절 하반 절에 나오는 말씀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집에 해당하는 사람이 누구인가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로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가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소망을 뜻합니다. 우리의 소망은 부끄럽지 않습니다. 그 소망의 담대함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소망이야말로 우리의 자랑인 것입니다. 이런 자랑이 없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감사도 나오지 않고 감격도 없으며 삶의 보람도 없습니다.


결론 : 이처럼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놓치지 않으면 그의 집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의 집이란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말하며 영생과 천국의 유업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15) 안식의 불합격자

(히브리서 3:7-13)

7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ㄱ)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ㄱ)시 95:7 이하

7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 

너희가 오늘 그의 음성을 듣거든

8 너희는 1)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의 맛사에서 지냈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지어다


8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9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 년 동안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10 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에게 노하여 이르기를

그들이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11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였느니라

12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

13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우리는 그간 예수님의 위대성에 대하여 여러 번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는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신 분이시며 

하나님께서 만유의 후사로 세우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는 천사와도 비교할 분이 아니시며 

유대인들이 숭배하는 모세와도 비교할 수 없는 분이심을 명백하게 밝혀 주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그 예수께 사로잡힌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예수 한분만으로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며 

인생을 승리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 주신 8절 말씀을 보니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서도 마음을 강퍅하게 하면 

그는 마치 광야에서 멸망을 받은 이스라엘처럼 

안식에 들어갈 기회를 상실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1. 광야의 시험을 거울 삼으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시험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그 시험 중에 그들의 마음의 강퍅함으로 인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멸망당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이스라엘은 마음의 강퍅으로 인하여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가지 견고히 잡지를 못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 결과 그들은 실족하여 버림을 당한 것입니다.

이 같은 일은 우리에 대한 하나의 경종과 거울로 보여 주신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광야란 하나의 시련의 장소입니다. 왜 시련의 장소인가? 그곳엔 물이 없습니다. 양식도 없습니다. 고기도 없습니다. 길도 사납습니다. 안식할 곳도 없습니다. 그러면 광야에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뱀이 있습니다. 육신의 정욕적인 시험이 있습니다. 마귀의 시험이 있습니다.

그런데 광야는 애굽에서 나온 사람들이 가나안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통과해야 할 길인 것입니다. 이 광야는 오늘날 교회를 상징해 줍니다. 세상에서 빠져 나온 사람이라면 천국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교회라고 하는 광야 길을 한평생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 길을 나그네길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광야는 육신적으로 살만한 곳이 결코 아닙니다. 물이 없는 곳이 광야니 기갈의 어려움이 찾아옵니다. 광야에는 양식이 생산되지 않으니 살아가기가 어려운 곳입니다. 안식처가 없으니 쉴 만한 곳도 찾을 수 없는 곳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어떻게 그 오랜 세월 동안 살아온 것입니까? 그들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나를 먹고 살아갔습니다. 반석에서 물이 터져 나와 마셨습니다. 이런 일등은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는 것입니까? 이 일에 대하여 신8:2절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2. 교회 생활과 광야 생활

교회는 하나님이 우리를 연단하시는 시련의 장소입니다. 그러면 이 시련은 어떤 시련입니까?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살아가는 것을 배우게 하시는 시련의 장소인 것입니다.

교회는 결코 육신대로 살아갈 곳이 아닙니다. 만약 교회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지 않고 육신대로 살아가면 반드시 시행착오가 찾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련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는 곳입니다. 교회에서 인생을 실패한 사람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의 생애가 왜 형통하지 못하며 어려움 속에서 실패한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지난날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육신대로 살아가려고 힘썼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광야임으로 육신으로는 교회 생활에서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만을 의뢰했었다면 그들은 광야 생활에서 어려움을 겪지 아니해도 좋았을 것입니다. 왜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기 때문에 그 말씀에 순종하고 말씀을 의뢰하면 그대로 이루어지는 기적이 창조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교회 생활의 원칙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란 곳은 영적인 광야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육신적으로 살려는 사람들에게는 절대로 축복이 오지 않고 목이 갈하는 어려움이 오고 배가 주리는 가난이 오고 행로에 지치는 피곤이 오며 뱀에 물리는 질병이 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더욱 하나님을 원망하고 거역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결국은 안식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멸망한 한 것처럼 신앙 생활에 실패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기적적인 축복을 체험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곳이 교회인 것입니다.


결론 : 오늘날까지 예수를 믿는 신앙 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님이 언약한 축복된 생애를 살아가지 못하고 실패한 사람들은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의 생애를 살아가지 못하고 자기 뜻대로 살아 왔다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하고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16) 마음을 강퍅케 말라

(히브리서 3:7-13)

7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ㄱ)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ㄱ)시 95:7 이하

7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 

너희가 오늘 그의 음성을 듣거든

8 너희는 1)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의 맛사에서 지냈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지어다


8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9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 년 동안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10 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에게 노하여 이르기를

그들이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11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였느니라

12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

13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광야 생활에 승리는 인내와 소망과 순종과 하나님 의뢰에 있었습니다. 광야란 시련의 장소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때때로 어려움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조금만 마음을 가지고 육신의 뜻을 따라 행동하면 그 때부터 광야의 어려움 속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어려움이 와도 인내로 길이 참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면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루시는 기적이 창조되며 말씀대로 성취하는 놀라운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광야 생활을 하는 사람은 소망을 견고히 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 생활을 하면서 받는 모든 시련은 결코 무의미한 것이 아닙니다. 신령한 마음의 눈을 떠서 좀더 먼 시야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을 의뢰하는 그리스도인의 생활

하나님을 의뢰하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어떻게 나타나는 것입니까? 일체 자기 자신의 인간적인 방법을 버리고 하나님의 방법을 따르는 생활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인내도 버리고 소망도 버리고 순종도 버리며 하나님 의뢰도 버렸습니다. 그들은 왜 이 같은 광야 생활에 따라야 하는 하나님의 방법을 버린 것입니까? 이에 대하여 성경은 그들의 마음이 강퍅했기 때문이라고 말씀해 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분명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이 이르시는 말씀을 가까이서 들었지만 그들의 마음이 강퍅했기 때문에 그 말씀이 먹혀들지 아니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의 마음이 왜 강퍅해 진 것입니까? 13절에 나와 있는 말씀을 보면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죄의 유혹을 받아 드릴 때 우리의 마음은 강퍅해 지는 것입니다. 강퍅하다는 말은 성질이 괴팍하고 고집이 센 악한 마음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1) 마음이 강퍅한 자의 신앙 생활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는 들어도 순종치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는 순종을 하려 해도 생각뿐 순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음이 강퍅한 상태로 있는 이상, 어떤 방법으로도 고칠 수 없는 것입니다. 강퍅한 마음을 버리지 못하면 죄의 유혹을 거역할 수가 없습니다. 죄의 유혹을 받아 드릴 때 그 마음은 순종의 의욕이 사라지고 육신의 정욕과 탐심을 따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2) 강퍅한 사람이 하는 일이 세 가지로 나와 있습니다. 하나는 마음이 미혹된다는 것입니다. 10절 하반 절에서 ‘너희가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났기 때문에 죄의 유혹에 미혹을 쉬 받는 것입니다. 미혹을 물리칠 능력이 상실된 것입니다. 다음에 ‘내 길을 알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이 가리키는 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길은 그의 말씀에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등뒤로 던질 때 소망의 길이 어두워집니다. 하나님의 길을 알 길이 없는 것입니다. 다음에 마음이 강퍅한 자는 하나님을 시험하는 생활을 합니다. 하나님은 시험을 받으실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시험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뢰해야 하는 것입니다. 9절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행사를 바라보고 시험을 통해서 증험했지만 그래도 40년 동안이나 시험하는 생활을 계속하므로 이들에게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할 것’이란 선언을 내리시게 된 것입니다.


2.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그러면 우리는 이런 역사적 사실을 바라보고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 것입니까? 12절에서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자는 악심을 품고 있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사람은 결국은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자기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 주변에 이런 사람이 있는가 염려해야 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다음에 13절에서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런 염려와 권면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할 수 있는 방법’임을 가리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그 말씀만을 순종하는 일을 가장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으로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다음에 하나님이 증거하신 것을 믿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아들에 대하여 증거하셨습니다. 이 증거를 무시하면 망합니다. 하나님은 안식에 대하여 증거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믿지 않으면 안식의 축복에서 제외됩니다.


결론 : 우리는 마음이 강퍅하여 죄의 유혹을 받으므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거역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광야에서의 이스라엘처럼 육신의 뜻을 따라 살아간다면 결국은 멸망합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거역하여 멸망한 일을 기억하고 마음의 강퍅으로 인하여 안식에서 제외되는 불행한 생애를 살아가면 안돼는 것입니다.


(17) 끝까지 견고히 잡으라

(히브리서 3:14)

14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오늘 주신 14절 말씀을 보면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시작과 끝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이십니다. 시작과 끝이 되신다는 뜻입니다. 시작은 좋은데 끝이 나쁘면 그것은 실상인즉 좋은 것이 아닙니다.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은 시작은 좋았지만 끝은 나빴다고 바울의 책망을 들었습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고 했습니다. 성령으로 시작한 일은 참 잘 한 일이지만 그것이 육체로 마친 일은 대단히 잘못된 일로 좋게 시작한 일이 결과적으로 유익이 없었습니다.


1. 시작이 중요한 그리스도인의 신앙

신앙생활은 시작이 중요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성공한 사람들의 경우를 거의 모두가 신앙생활의 시작을 잘 한 사람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시작이 잘된 사람은 어떤 종류의 사람입니까?

먼저 교회에 잘 출석하는 사람입니다. 직분을 주면 신앙이 좋아진다고 생각하면 잘못된 판단입니다. 처음에 주일을 잘 지키지 못하는 가운데 신앙적으로 성장한 사람을 보면 직분을 받고 10여 년 후에 보아도 그 버릇 그대로 계속되는 것입니다. 여전히 주일 예배만 나오고 다른 예배에는 얼씬도 안 합니다. 그러면 왜 흐리멍덩한 신앙이 그의 온 생애를 주장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처음부터 견고히 잡아야 할 것을 잡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릴레이 선수들이 달려오는 선수의 배턴을 확실히 잡지 않고 무조건 뛰어가면 아무리 잘 뛰어도 등수에 들 수 없습니다. 잡아야 할 것을 잡지 않고 뛰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이 처음에 확실히 잡아야 할 것이란 무엇입니까?


2. 그리스도인들이 잡아야 할 것

(1) 이에 대하여 히10:23절에서 이처럼 말씀해 줍니다.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으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처음에 굳게 잡아야 할 것은 믿는 도리의 소망입니다. 그러면 믿는 도리의 소망은 무엇을 말합니까? 빌3:9-14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우리가 꽉 잡아야 할 믿는 도리의 소망이란 첫째로 그리스도에게서 난 의입니다. 우리는 이 의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 의는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완전한 의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 의를 소유하게 된 것은 우리의 공로나 노력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오직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은 것으로 그리스도의 의인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 의를 내 것으로 소유하게 되었으며 하나님께서는 이 의를 내 소유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이 의를 끝까지 견고히 붙잡아야 합니다.

(2) 다음에 우리가 견고히 잡아야 할 것은 예수의 이름입니다. 예수란 분은 우리가 교회에 발을 들여놓는 시간부터 영원히 나와 함께 하실 분이시기 때문에 그 이름을 붙잡는 일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여러분, 예수란 이름보다 더 아름다운 이름을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예수란 이름보다 더 사랑스러운 이름을 불러 보신 일이 있습니까? 질병 중에 불러도 좋고 실패 중에 불러도 좋고 순교의 사형장에서 불러도 좋은 이름이 이 예수 이것만 왜 그 예수의 이름을 붙잡지 않는 것입니까? 우리의 마음은 왜 이렇게도 예수에게 차며 무심한 것입니까? 그 분에게 왜 이렇게도 인색한 것입니까?

우리는 이 예수를 처음 믿을 때부터 견고히 붙잡아야 합니다. 이 분께 소망을 두고 이 분만 붙잡는 생애를 보내신다면 우리의 생애는 이 예수로 말미암아 보람있고 아름답게 장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예수를 견고히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3) 다음에 우리가 견고히 잡아야 할 것으로 부활의 권능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 인과 부활은 절대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두 가지로 구분됩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이시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한 신령적 연합은 바로 이 두 가지 사실에 있는 것입니다. 그의 죽으심으로 우리는 속죄의 은혜를 받았고 그의 부활하심으로 우리는 하늘의 새 생명을 받아 영생을 얻게 된 것입니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시지 못하고 무덤에 묻혀 있으시다면 우리는 무슨 생명을 받아 영생하며 우리의 소망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우리는 이 부활의 소망을 견고히 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4) 다음에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견고히 붙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늘의 부르심의 상을 바라보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은 의욕이 없습니다. 마음에 뜨거움이 없습니다. 이 소망을 견고히 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 여러분, 우리의 믿음은 그 출발점이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의 의와 부활의 권능과 하늘의 상급은 확실합니다. 우리가 견고히 잡아야 할 절대적인 확실성을 하나님은 맹세로 보장해 주셨습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약속하신 이는 미쁘신 분이시라고 했습니다. 그는 거짓이 없으시며 천지는 없어져도 그 분의 말씀은 일점 일획이라도 변함이 없으십니다. 우리는 이 분을 신뢰하고 그 분을 견고히 붙잡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안식에 넉넉히 들어갈 수 있습니다.


(18) 믿음으로 들어가는 안식의 땅

(히브리서 3:15-19)

15 성경에 일렀으되 

ㄴ)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격노하시게 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으니

ㄴ)시 95:7

7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 

너희가 오늘 그의 음성을 듣거든

8 너희는 1)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의 맛사에서 지냈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지어다


16 듣고 격노하시게 하던 자가 누구냐 

모세를 따라 애굽에서 나온 모든 사람이 아니냐

17 또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 누구에게 노하셨느냐 

그들의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범죄한 자들에게가 아니냐

18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

19 이로 보건대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우리는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이 그리스도에게 약속한 안식과 직결된 사건이며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건에서 교훈을 삼아야 한다는 사실을 히브리서는 밝혀 주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히 4장에 가서 더욱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의 안식의 땅을 밟지 못하고 광야에서 멸망 받은 사실에 대하여 끊임없이 경종해 주므로 우리의 불순종이 어떤 결과를 가져 올 것인가에 대하여 경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1. 광야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은 이유

이스라엘이 광야 생활에서 멸망을 받은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그들은 모세나 아론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하나님의 나타나심과 하나님의 영광을 친히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하나님을 격노케 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는 들었지만 그 말씀에 대한 순종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저자는 결론적으로 19절에서 순종이 없는 그들에게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로 보건대 저희가 믿지 아니함으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볼 때, 믿음과 순종은 떨어질 수 없는 연관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요3:36절에 나와 있는 말씀은 의미심장한 면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아들을 믿는다는 말과 아들을 순종한다는 말이 똑같은 의미로 나와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가 해야할 하나님께 대한 가장 큰 순종은 무엇입니까?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입니다. 이 순종을 저버리면 우리에게는 영생도 없으며 아무런 소망도 없습니다. 이 순종은 영생과 천국의 조건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우리가 해야할 순종은 무엇입니까? 그 아들에 대한 순종입니다. 아들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바를 순종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에게 영생이 있고 부활 있고 소망이 있다고 믿으면서 그에게 순종하지 못한다면 그런 믿음이 어떻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이 되겠습니까?


2. 듣는 사람의 태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의 마음의 자세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마음이 강퍅했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강퍅한 마음으로 들을 때 그 말씀이 어찌 좋은 밭에 씨앗의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입니까? 그러면 어떤 자세로 말씀을 들어야 하는 거입니까?

먼저 하나님의 말씀은 귀로 듣지만 마음으로 받는다고 했습니다. 세상 말은 잘 알아듣고 대단한 흥미를 가지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암만 들어도 캄캄하고 흥미를 상실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세상 사람의 귀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할례 받은 귀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세상 말에 동조하지 않습니다. 할례란 말은 회개한 사람의 귀를 말합니다. 회개치 못한 사람의 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혹 깨달아도 순종치 않으므로 더 큰 죄를 짓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회개를 거부함으로 마음이 완악해 진 사람들에게는 그 귀를 듣지 못하게 하시고 그 눈을 감겨 보지 못하게 하심으로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마13:14절에서 이사야로 하신 말씀을 인용하시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다음에 하나님의 말씀은 할례 받은 마음으로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10:16절에서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목이 곧다는 말은 교만을 의미합니다.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은 교만하기 때문에 말씀을 듣기는 들어도 순종하기를 즐겨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참된 표식은 회개함으로 그 마음이 새로워지는 일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받아야 할 마음의 할례인 것입니다.

다음에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멸망한 이유는 그들이 계속하여 죄를 짓는 생활을 해 왔다는 데 있었습니다. 17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40년 동안이나 계속하여 하나님께 범죄 했습니다. 불순종은 죄가 되며 그 일이 계속될수록 보다 큰 죄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다음에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생활을 하지 아니함으로 안식의 약속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순종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실한 신뢰에서 오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뢰하지 못하는 사람은 순종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결론 : 하나님은 이 같은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보여 주시면서 우리에게 엄숙하게 경종해 주시는 것입니다. 15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할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교회라고 하는 광야생활에 들어간 사람들입니다. 이 광야생활을 성공적으로자 하는 사람만이 젖과 꿀이 흐르는 안식의 땅을 밟을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4장 (19 - 26)

◆ 밤중소리 02-01 | VIEW : 828

(19) 아직 남아 있는 안식의 약속(히브리서 4:1-8)

(20) 가나안 안식의 참 뜻(히브리서 4:2-3)

(21) 제 칠일의 참 뜻(히브리서 4:4-9)

(22)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히브리서 4:10-11)

(23)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히브리서 4:12-13)

(24)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시는 하나님(히브리서 4:12-13)

(25)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히브리서 4:14-16)

(26)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신 대제사장(히브리서 4:14-16)


(19) 아직 남아 있는 안식의 약속

(히브리서 4:1-8)

1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2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3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그가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ㄱ)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어졌느니라

4 제칠일에 관하여는 

어딘가에 이렇게 일렀으되 

ㄴ)하나님은 제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5 또 다시 거기에 

ㄱ)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6 그러면 거기에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7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ㄷ)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나니

8 만일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더라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해 애굽에서 나오기는 했지만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 받은 이유는 

광야 생활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하나님을 시험하고 원망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일을 하나의 신앙 생활의 큰 경종으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말씀해 줍니다. 이 일에 대하여 1절에서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으로 우리들이 느끼고 깨달아야 할 일이 있습니다. 

이런 우리의 깨달음을 위해 히브리서는 강도 높게 경종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지난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식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모든 과정이 

교회에 나오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늘의 안식 세계로 가는 하나의 노정기의 그림자로 보여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에게 천국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있을지라도 

이스라엘의 이 같은 실패를 통하여 

그들처럼 안식에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1. 가나안 안식의 참 뜻

히브리서에서는 이스라엘에게 언약하신 가나안 안식의 약속은 

우리들에게 주신 참 영적 안식의 그림자임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보여 주고 있는 몇 가지 사실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애굽이라는 도성이 나옵니다. 

성경에 나오는 애굽이란 나라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상을 상징해 줍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기전까지는 

애굽이란 나라에서 노예 생활을 해 왔습니다. 

그들은 이 노예 생활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습니다. 

애굽에 이스라엘 백성으로 태어난 그들은 

한평생 노예 생활을 하다가 나중에는 그곳에서 죽었습니다. 

이같은 이스라엘의 생애는 

우리들이 죄악 세상에 태어나 죄의 종으로 한평생 노예 생활을 하다가 

급기야는 죄 값으로 죽어야 할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모세는 용케도 애굽에서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하는 자기 신분을 얼마간 속여 왔지만 

사람을 죽이는 살인죄를 범하는 일로 

죄인인 자신의 신분이 탄로되어 광야로 쫓겨난 것입니다.


(2) 다음에 애굽 왕 바로에 대하여 살펴보면 

바로는 세상 임금으로 불려지고 있는 사탄의 상징적 존재입니다. 

바로가 끝까지 이스라엘을 추적하여 죽이려 든 것과 같이 

사탄은 끝까지 이 세상 사람들을 죄에 얽어매어 종으로 부려먹고 있는 것입니다.


(3) 그리고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넌 일은 교회와 세상과의 간격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홍해를 하나님의 기적으로 건넜습니다. 

이스라엘은 홍해를 건넌 일로 바로의 지배에서 완전히 벗어나 

새로운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인도함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홍해를 건넌 사람들입니다. 

세상과 교회간에는 그 가운데 홍해가 가로막혀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홍해를 건너 사탄의 지배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지배를 받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옛 생활이 그립고 애굽으로 되돌아가고 싶어도 

중간에 홍해가 가로막혀 있으므로 건너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애굽을 사모했지만 

결국은 단 사람도 애굽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오히려 광야에서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받아 멸망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갈 곳은 교회뿐입니다. 

자신이 교회 생활이 싫다고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생활이 어렵다고 세상으로 나가 보세요. 

세상으로 돌아간다고 세상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잔득 얻어맞기만 하고 되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3) 광야란 교회 생활을 상징합니다. 

이스라엘은 광야 생활에서 실패했습니다. 왜 실패한 것입니까? 

그들은 광야 생활을 하면서 애굽을 사모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애굽에서 살아온 방식대로 살아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광야에서 지난날 세상에서 살아간 방법대로 살려고 하다간 반드시 실패합니다. 광야에는 쌀이 없습니다. 물도 없습니다. 고기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곳에서 애굽에서 살아간 생활 방법이 통할 리 없었습니다. 

그곳에서는 없는 것을 있게 하시며 

기적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4) 광야의 지도자로 모세란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모세는 율법을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율법으로 인도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율법은 우리를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지 못합니다.


(5) 광야에는 여호수아란 인물이 나옵니다. 

이 여호수아는 예수님을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율법이 실패한 것은 

가나안에 들어갈 일은 율법이 할 일인 것이 아니라 

예수가 하실 일이기 때문입니다.


결론 : 광야 생활 40년은 그리스도인들의 교회 생활의 한 생애를 상징해 줍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들어가기는 했지만 

그 땅은 안식의 땅의 그림자일 뿐 참된 안식의 땅은 아니었습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안식이 아니라 

다른 안식을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알에 대하여 앞으로 며칠간 계속해서 공부하면서 

안식이 무엇인가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깨달으려는 것입니다.


(20) 가나안 안식의 참 뜻

(히브리서 4:2-3)

2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3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그가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ㄱ)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어졌느니라


이스라엘에게 주신 가나안 안식은 

실인즉 신약 시대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거울로 주신 것이며 

그들에게 약속한 안식이란 그들에게 성취된 것이 아니라 

장차 우리가 들어갈 천국 안식에 대한 그림자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일에 대하여 

고전10:1절 이하에서 그 신령한 뜻을 보여 주고 있으며 

결론적으로 11절에 와서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특히 6절에서 하시는 말씀은 우리로 안식에 들어가는 일에 

그들이 당한 일을 거울로 삼을 일에 대한 분명한 언급입니다. ‘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행한 것같이 

즐겨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한 것입니다.


1. 우리의 경계로 주신 이스라엘의 패역

(1) 고전10:6절 하반 절에서 

저희가 악을 즐겨 하는 것 같이 

즐겨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이제 우리는 구원을 받았으니 

멸망에 이르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니 지옥에 갈 염려는 없다, 

우리는 영생을 얻었으므로 우리의 구원은 확실하다 

이렇게 자랑하면서도 

실인즉 육신의 소욕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경종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악을 즐겨 행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찌하다가 죄를 범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죄를 즐거워하는 일은 없으며 

죄란 사실을 알면 통회하는 심령으로 회개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정상적인 신앙 생활인 것입니다. 

만약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이라고 자랑하면서도 

죄의 길에서 돌이킬 줄 모르며 악을 행하기에 담대하다면 

그들은 마치 광야에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나님을 따르고 

모세의 뒤를 따라가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고 멸망 받은 것처럼 

참 안식에 미치지 못할 것임을 경종하신 것입니다.


(2) 다음에 11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런 일이 거울이 되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율법과 양심이 우리의 죄를 보여 주는 마음의 거울이 되는 것처럼 

안식에 들어가는 거울로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3) 다음에 11절 후반 절을 보면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했다고 하신 것입니다. 

안식에 들어갈 소망이 말세에 살고 있는 성도들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소망만 가지고는 못 들어갑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경우로 보아 분명하다는 사실을 경계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특별히 사도 바울이 이곳에서 강조한 점이 네 가지로 나옵니다. 

하나는 7절에 나온 말씀을 보면 우상 숭배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탐심이란 우상 숭배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탐심으로 움직이면 

목사이건 장로이건 성도들이건 다 우상 숭배자가 되는 것입니다. 

다음에 강조한 점은 간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간음은 영적 간음과 육적 간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모두가 그리스도인에겐 치명적인 범죄인 것입니다. 

영적 간음죄는 이단을 따르거나 

거짓된 진리에 미혹되어 그리스도를 배반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의 생명이 반드시 죽습니다. 

육적 간음은 자신의 인생이 파멸되고 가정이 파괴되며 

돌이킬 수 없는 죄가 되는 것입니다.

다음에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을 당했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에는 

원망이 아니라 늘 감사하는 일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2. 이스라엘이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일에 대하여 

2절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이 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치 아니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는 했지만 

그들에게 유익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말씀이 우리의 생활에 유익이 될 수 없다면 그 말씀은 들으나마나 입니다. 

지금 교회에 들으나마나 한 성도들이 얼마나 많은 것입니까? 

그러면 그 말씀이 왜 유익함이 되지 못한 것입니까?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치 아니함이라고 그 이유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믿음이 말씀과 화합치 못하면 

그 말씀이 아무런 유익도 우리에게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믿는 자에게만 유익이 됩니다.


결론 : 참 안식은 지나간 것이 아닙니다. 아직 분명히 남아 있습니다. 

이 안식에 넉넉히 들어가게 하시려고 

우리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생활을 본보기로 보여 주시며 

안식에 들어갈 하나의 경계로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특별히 유의할 점은 안식에 들어가는 일에 

말씀을 믿는 일과 순종하는 일을 동일시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안식은 들음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듣고 믿음으로 들어간다는 사실을 보여 주시기 위해 

경계로 보여 주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리의 소망은 안식의 땅입니다. 

이스라엘이 걸어간 불신의 발자취를 살펴보는 일로 경계를 삼아 

광야에서 멸망 받은 이스라엘을 본 받지 말고 

오직 믿음과 순종으로 들어갈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21) 제 칠일의 참 뜻

(히브리서 4:4-9)

4 제칠일에 관하여는 

어딘가에 이렇게 일렀으되 

ㄴ)하나님은 제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5 또 다시 거기에 

ㄱ)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6 그러면 거기에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7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ㄷ)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나니

8 만일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더라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9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안식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3절에서 이르기를 ‘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었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이 일이 이루어졌다고 하는 안식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가 소망으로 기다리는 천국의 안식이 

하나님의 안식으로부터 온 것임을 분명히 밝혀 주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안식

히4:4절에는 ‘하나님은 제 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몇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일을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일곱째 되는 날에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 중에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일이 안식일의 성경적 유래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이 안식일 문제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칠 일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일을 절대시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보다 거룩하게 안식일을 지키려고 

장로의 유전까지 만들어 놓았습니다.

오늘날 안식교 같은 기독교계의 일부에서도 

이스라엘이 율법에서 지켜온 토요일 안식일을 고집하고 

그리스도인이 만약 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면 

구원에 이룰 수 없다는 주장을 펴고 있습니다. 

우리는 4절 말씀에서 하나님의 안식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우리는 이 안식에 대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에 대한 

성경적 교훈을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제칠 일에 모든 일을 쉬셨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쉬셨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안식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 안식은 이레 중 제 칠일에 국한시킨 

그런 의미에서의 안식을 가리킨 것이 아닌 것입니다. 

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또 다시 거기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제 칠일에 누리신 안식은 

율법에서 명령한 안식일을 의미한 것이 아니라 ‘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한다’고 하신 

그 새로운 하나님의 안식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에서 명하고 있는 안식일은 

이 같은 하나님의 안식에 대한 하나의 그림자로 

온전한 안식이 올 때까지 존속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 문제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인 것입니다.


2. 두 가지 의미의 하나님의 안식

하나님께서 내 안식이라고 말씀하신 그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고 하신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안식일을 지키는 일에 들어오지 못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약속하신 영원한 안식에 들어올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 안식이 처음에는 하나의 모형으로 나타났습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가나안 안식입니다. 

하나님의 안식은 하나의 복음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순종치 아니함을 인하여 들어가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안식이 약속되었지만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그 약속이 허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안식은 영영히 사라져 버린 것입니까? 

그런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8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고 했습니다. 

이 다른 날의 안식이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안식을 위해 재 칠일에 안식하셨고 

이 안식이 확실하고 반드시 성취되어야 할 하나님의 안식이기 때문에 

율법에 안식일을 정하여 그것을 지키도록 명령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안식의 비밀이 드러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안식이 아직 실현되지 않았으므로 

안식의 소망은 아직 효력이 있는 것입니다. 

9절에서 ‘그런즉 안식 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10절에서는 

‘이미 그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여 쉬는 안식에 대하여 

계14:13절에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저희 수고를 거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 행한 일이 따름이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이런 안식을 소망하면서 살아갔습니다(빌1:22-26). 

*빌1:22-26

22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23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24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25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26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이 안식이야말로 천국의 영원한 안식을 말합니다.

이제 율법적인 안식일은 아무 의미가 없게 되었습니다. 

안식일은 장래 일의 그림자인데 

그리스도께서 그 그림자의 실체로 오셨으며 

참 안식에 대한 확실한 약속을 주셨고 

그 안식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율법아래서 

참 안식이 무엇인지 몰랐던 시대의 유대인들에게나 

율법에 따라 필요한 것이지 

그리스도 안에서는 안식일이 존재 의미가 없어진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골2:16절에서 

안식일을 인하여 폄론하지 말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골2:16절

16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결론 : 율법적인 안식일은 그리스도 안에서 폐해졌습니다. 

만약 이 안식일을 지키려면 다른 율법의 계명도 지켜야 하며 

혹 그런 것들을 지켰다고 해도 

의로워질 수 있거나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율법의 저주를 받아 정죄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안식을 기념하고 

그 안식에 소망을 두게 하시는 새로운 날을 주셨습니다. 

그날을 성경에서는 주의 날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날은 주님께서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영원한 안식의 몸으로 다시 살아나신 부활의 날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에 연합된 우리에게는 

율법이 제시하고 있는 그림자가 아니라 

새로 주신 주의 날이 

우리의 영원한 안식의 날까지 이어질 것입니다.


(22)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

(히브리서 4:10-11)

10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

11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11절 말씀을 보면 ‘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안식은 확실합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신 후, 제 칠일에 안식하심으로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안식을 보여 주셨고 

이스라엘이 가나안 안식에 실패하므로 

다른 안식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그 후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통해 안식일을 지키게 하심으로 

그리스도로 이루실 안식의 그림자로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가 오셔서 우리의 속죄 제물로 죄에서 건져주시고 

그의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하늘의 영원한 생명을 주셨으며 

하나님의 안식의 확실한 약속으로 

그 안식의 소망 가운데 살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1. 안식에 들어가도록 어떻게 힘쓰나?

우리는 안식일을 지키는 일에 힘써야 할 사람들이 아닙니다. 

구약적인 율법적 안식일은 하나님의 안식의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일에 힘쓰는 사람은 

율법에 얽매어 율법의 저주 아래 살아가는 사람들로 

안식의 소망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힘 쓸 일은 안식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도록 힘쓰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안식에 들어가기 위해 어떻게 힘써야 하는 것입니까?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들어간다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들어가기를 힘쓰는 자가 들어갈 수 있는 곳이 하나님의 안식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 일에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앞으로 들어갈 하나님의 안식에 대하여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고 경종해 주므로 

안식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를 거역하는 자는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밝힌 것입니다.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안식에 소망을 두고 

그 소망을 향하여 생애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죄의 유혹을 받지 않도록 죄를 이기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히3:13절 말씀에서 ‘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고 했습니다. 

죄는 우리를 유혹합니다. 

이 유혹을 받아 드리면 우리의 마음이 강퍅하게 되어 

불순종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마치 그들의 불순종으로 광야에서 멸망 받은 것처럼 

우리에게 안식이 아직 남아 있다고 할지라도 

그 땅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이 죄를 이기는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까? 

롬6:11 절 말씀에서 그 비결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기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룬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우리도 그와 함께 죽은 것입니다. 

이것이 연합의 뜻입니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이미 죽은 사람이므로 

죄에 대하여 마치 죽은 자처럼 

죄의 유혹을 받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주님과 영원한 생명적 연합이 되었으므로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와 같이 여기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맺어야 할 열매는 바로 이런 생활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2.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영의 사람과 육의 사람을 동시에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육의 사람이 죽은 줄로 여기고 

영의 사람으로 살아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으로 육의 정욕과 죄의 유혹을 이기는 싸움에서 

육을 죽이는 훈련을 잘하여 마음의 강퍅을 면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려면 믿음에 굳게 서야 합니다. 

히3:14절에서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자가 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잡아야 할 대상은 우리의 소망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게 참여한 자가 되리라고 하신 참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는 일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약속하신 하나님의 안식을 

우리의 소망으로 끝까지 잡는 일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스라엘은 이 안식에 대한 소망과 믿음에 굳게 서지 못하므로 넘어졌습니다. 

우리는 아직 우리에게 남아있는 하나님의 안식을 소홀히 여겨 

불순종하는 생활로 이스라엘의 전철을 밟아서는 안돼는 것입니다.


(2) 다음에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는 생활을 하려면 

하나님의 상급을 바라볼 수 있는 소망을 간직하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히11:6절 말씀은 우리에게 큰 위로와 격려가 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한다’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바울은 이 하늘의 상을 바라보고 뒤에 있는 것은 잃어버리고 

앞에 있는 상을 위하여 그의 생애를 달려갔다고 했습니다.


결론 : 우리는 광야 같은 교회 생활에서 안식의 땅을 바라보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며 달려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아직 우리에게 남아있는 확실한 안식의 소망을 끝까지 붙잡고 

안식의 땅에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불순종으로 하나님을 거역하다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은 것처럼 약속은 받았지만 실패한 전철을 밟지 말고 

순종하고 힘쓰는 생활을 통하여 

약속의 땅에 넉넉히 들어갈 수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23)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

(히브리서 4:12-13)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오늘 본문 12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히브리서 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안식에 대한 약속과 그 약속을 이루는 모든 일이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1. 무엇이 하나님의 말씀인가?

우리는 무엇이 하나님의 말씀인가에 대하여 알아야 할 것입니다. 

히1:1절에서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들에게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한 가지는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서 조상들에게 하신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구약이라고 부릅니다. 

구약은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에게 주신 말씀을 

이스라엘 조상들에게 전하게 하신 말씀입니다.

다음에 다른 하나는 이 모든 날 마지막 날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고 했는데 

이 말씀이 오늘날 신약이라고 불려지는 성경입니다. 

그 아들이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삼위 되시는 분 중에 한 분이시며 

하나님의 본체를 이루고 계시는 절대적인 분이심으로 

그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들이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한 서신서 등은 

아들을 증거하시는 아들의 영으로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말씀은 

그 아들의 말씀 가운데 포함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은 말씀으로 무엇을 하셨나?

하나님은 그의 말씀으로 무엇을 하셨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입의 말씀이시기 때문에 

모든 것이 그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권능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창조 사역을 그의 말씀으로 하셨다고 했습니다. 

히11:3절 말씀에는 ‘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안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으로 창조하신 일이 창1:1절에 나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의 역사를 에스겔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에스겔이 하나님의 권능에 의해 깊은 골짜기로 옮기심을 받았을 때, 

그의 눈앞에는 죽은 사람의 뼈만이 가득차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앙상한 뼈를 바라보는 에스겔에게 ‘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는가’고 물으셨습니다. 

에스겔은 이 때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뼈들을 향하여 명령했습니다. 

그랬더니 에스겔이 대언한 하나님의 말씀대로 뼈들이 움직이더니 

살아 있는 여호와의 큰 군대를 이루었습니다. 

하나님이 선포하시는 말씀은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그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일은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는 인류의 역사가 단 한치의 오차도 없이 

온전히 하나님이 세우신 계획대로 이뤄진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한번 말씀으로 약속하신 하나님의 안식도 이 같은 맥락에서 확실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금부터 몇 천년 전에 어느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셨다해도 

그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질 때까지 

이 땅에서 소멸됨이 없이 계속 살아 움직여 역사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다’고 했습니다. 

운동력이 있다는 말은 살아서 역사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이 살았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그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심판의 기준이 됩니다. 

성경에는 우리를 심판하시는 분명한 기준이 있습니다. 

그 기준이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장차 인류를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 

이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 되어 

낱낱이 심문을 받으며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12장에서 ‘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하실 이가 있으니 

곧 나의 말이 마지막 날에 심판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인류는 한사람의 예외자도 없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 사람의 어떤 공력에 의하여 용서를 받거나 

그 사람의 덕행이나 선행을 통하여 구원받는 경우는 절대로 없습니다. 

사함 받는 일이나 구원받는 일이나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가령 하나님이 누구를 심판하시느냐는 문제에 대하여 알려면 

이 문제에 대하여 하나님의 말씀은 

어떻게 말씀해 주고 있느냐를 살펴보면 간단히 알 수 있습니다. 

요3:18절 말씀을 보면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함으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고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분명한 해답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느냐 믿지 아니하느냐는 문제에만 관계되었다는 사실을 

밝혀 주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 :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면 안됩니다.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

고 7절에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남아 있어도 

오직 그 말씀에 따라 그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는 자만이 

그 약속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안식의 언약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이 언약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안식을 이루어주실 때까지 효력이 있습니다. 

순종치 아니한 이스라엘을 본 받지 말고 

약속을 믿고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24)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히브리서 4:12-13)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우리는 지난 시간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서 역사한다는 말씀을 배웠습니다. 

오늘은 이 말씀에 이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속에서 역사 하시는 모습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뜻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다음에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숨길 것이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마음의 생각과 뜻까지라도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모든 것이 드러난다고 하신 것입니다. 

감찰하신다는 말은 ‘세심한 것까지라도 자세히 보아 살핀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감찰하시는 자 앞에서는 아무 것도 숨길 것이 없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격적 존재로 나타낸 말입니다. 

그리고 그 같은 일을 하시는 분은 바로 성령이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그 말씀 앞에 숨길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의 책망을 들을 때, 

‘우리가 어찌 할꼬’하는 심정으로 마음을 찢는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죄를 지적 받았을 때 아무리 그 말씀을 무시하려고 해도 

드러난 죄에 대한 처리는 불가피한 것입니다. 

회개하고 그 죄를 버리던가. 

아니면 말씀의 책망을 들으면서 그대로 죄 가운데 살아가던가 입니다. 

후자일 경우, 물론 하나님의 후속조치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마음에 빛으로 들어옵니다. 

이 빛 앞에 우리 마음속에 있는 것 중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우리의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까지 찔러 쪼개어 내어 

어떤 죄라도 드러내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들에게 들어오면 

이 말씀을 통해서 역사 하시는 성령에 의해 그런 권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는 

마치 벌거벗은 자 같이 그 수치를 감출 곳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회개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드러난 우리의 죄를 

하나님 앞에 자복하고 통회한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의 죄가 그리스도의 피로써 정결케 되며 

죄 사함의 은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양심 앞에는 숨겨진 죄들이 너무나도 많은 것입니다. 

양심이 모르는 죄는 사람들이 회개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가장 귀한 문제인 영생과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사랑을 거역했던 일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것이 

가장 무서운 인간의 죄인데도 

양심은 그런 것들에 대하여 전혀 감각이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또 다른 한 가지는 교회에 나와서 말씀을 듣기는 해도 

회개치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신의 죄를 고의적으로 숨기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징계를 통해서 

언제인가는 그 죄를 스스로 인정하여 회개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강퍅하거나 마음이 죄로 멍들어 있거나 그 마음에 성령의 역사가 없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죄를 드러내어 책망하며 

회개케 하는 능력이 나올 수 없습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인생의 바른 생애와 

얼마나 깊은 연관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에 대하여 

시119:9절 이하의 말씀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셨습니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 

우리의 행실을 무엇을 따라 삼가하라고 하신 것입니까? 

주의 말씀을 따라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 이유는 그 말씀에서 떠나지 않으려는데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생활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이 

그 생활의 구심점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는 이유는 범죄치 않게 하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깊이 박혀 있는 사람은 

그 말씀에 붙잡혀 있기 때문에 범죄할 수 없습니다.


다음에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앞에 직고한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모든 행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우리가 행한 그대로 행위 책에 전부 기록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행한 그대로 보응하시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한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그 어떤 것이라도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마귀와 싸울 수 있는 유일한 영적 무기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의 검이라고 한 것입니다. 

마귀는 그 어떤 방법으로도 위협을 느끼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앞에는 견뎌낼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서 그 말씀대로 역사 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사탄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이야말로 좌우에 날선 검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귀가 가져오는 모든 유혹을 이길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 같은 사탄의 유혹 앞에서 

오직 하나님의 말씀의 권능으로 대항해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드리고 그 말씀을 믿을 때 

그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기적이 나타나기 때문에 

우리의 생활에는 이 말씀의 무기가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성령의 검을 가지고 믿음으로 전진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믿고 

말씀 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


(25)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

(히브리서 4:14-16)

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예수님과 대제사장과의 관계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예수에 대하여 대제사장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분은 율법적인 대제사장인 것이 아니라 

멜기세댁의 서열을 따른 대제사장이심을 거듭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일에 왜 그토록 중요한 것이지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4:14절에서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다’고 말씀해 주는 것입니다.


1. 우리에게 있는 큰 대제사장

14절에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 대제사장은 곧 예수님을 가리키는데 

그러면 예수를 가리켜 왜 큰 대제사장이라고 부르는 것입니까? 

그 분은 이 땅위에 존재했던 

율법하의 대제사장과 같은 존재가 아니셨기 때문입니다. 

구약시대에 있었던 대제사장은 율법을 따라 세워진 사람들로 

대제사장이란 직분을 맡아 왔습니다. 

이들은 레위의 혈통으로 태어난 사람들 가운데 세워진 사람들로 

직분만 대제사장일 뿐 

모든 것이 우리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경우는 그렇지 아니합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신 것은 

율법에 의해 세워진 직분상의 대제사장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맹세로 되셨다고 했습니다. 

히7:20-21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

또 예수께서 제사장 된 것은 맹세 없이 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시110:4절에 있는 말씀을 인용한 것인데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댁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누구의 반차를 좇았다고 하셨습니까? ? ( )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은 누구의 반차를 따라 되었습니까? ?  

그런데 우리 예수님이 대제사장이 되신 것은 

레위 족속인 것이 아니라 ? 멜기세댁이라고 한 것입니다. 

무엇이건 순서를 따라 그 직위를 인계 받는 것이 성경적입니다. 

예수님은 레위 족속이 아니십니다. 

그러면 ? 족이신가요? 유다 족이십니다. 

이 족속은 절대로 대제사장이 될 수 없는 족속입니다. 

그런데 왜 그 분은 성경에서 우리의 대제사장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까? 

무엇에 근거해서 레위 족속도 아닌 그리스도가 

대제사장의 직분을 가진 것일까요? 

히브리서 저자는 바로 이 점을 성경적으로 증거하기 위해 

이곳에 멜기세댁을 등장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멜기세댁은 레위 족속에 속하지 아니한 사람이었지만 

하나님께서 그에게 대제사장이란 직분을 주신 것입니다(창14:18절 참조).


2. 멜기세댁의 반차를 따른 우리의 대제사장

멜기세댁은 유다 족속이 아닙니다. 

멜기세댁이 살아 있을 당시에는 아브라함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에 대하여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 후, 이 멜기세댁의 제사장 직분은 

아무에게도 인계되거나 전수된 일이 없습니다. 

그 후에 생긴 제사장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레위 지파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대제사장의 직분을 취하신 일은 

율법에 의해 내려온 레위 지파의 반차를 좇은 것이 아니라 

바로 멜기세댁의 제사장 직분을 이어 받은 제사장 직분이심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아무런 법적 절차 없이 우리의 제사장이 되신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대제사장 직분에 대하여 언제나 이의를 달았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예수님의 제사장 직분이 

어떤 절차에 의해 받게 되셨는가에 대해 명쾌한 해답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같은 성경적 근거는 

성경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아무런 이의를 달수가 없는 것입니다. 

율법적 제사장직만을 고집하므로 

예수의 대제사장 직을 거부해 온 유대인들의 잘못된 생각을 

근본적으로 뜯어고친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세우시기 위해 

이미 창세기에서 멜기세댁을 등장시키시고 

그를 근거로 하여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직의 법적 증거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다음에 우리의 대제사장은 

율법에 따라 실체가 오면 사라져 버릴 레위 족속으로 세우신 것이 아니라 

영원히 온전케 되신 아들로 세우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율법은 약점을 가진 인간을 제사장으로 세웠다고 했습니다. 

약점이란 온전해 질 수 없는 결점인데 이것은 인간의 죄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언제나 율법을 범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렇지 아니하십니다. 

그는 영원히 온전케 되신 분입니다. 

그는 하늘의 생명을 가지신 분입니다. 

그 분에게는 죄가 전혀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히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이 직분을 가지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큰 대제사장이신 다른 또 하나의 이유는 

그 분은 이 땅위에 계시는 제사장이 아니시오 

하늘의 지성소에 계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땅위에서 제사장 직분을 가진 대제사장은 

하늘에 올라갈 수 없습니다. 

그들은 다만 지성소 안에 있는 하나님의 범궤 앞에서 

하나님께 대속의 기도를 드릴 수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장차 나타날 일에 대한 분명한 그림자에 불과한 것입니다.


결론 : 예수님은 그림자가 되시는 지성소에 들어가신 분이 아니라 

새롭고 산길을 통해서 하늘의 지성소에 올라가신 분이십니다. 

지상의 대제사장은 죽음으로 인하여 대제사장의 변동이 있었지만 

예수님은 영원히 살아 계시는 영원한 우리의 제사장이시기 때문에 

영원히 변동됨이 없는 분입니다. 

16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받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보좌 앞에 나아가 

우리의 대제사장 앞에 여러분의 모든 것을 아뢰시기 바랍니다.


(26)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신 대제사장

(히브리서 4:14-16)

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본분 15절에 나오는 말씀은 우리에게 대단히 고무적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신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는 말씀입니다.


1. 우리의 연약을 맛보신 대제사장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을 맛보신 대제사장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이 세상에 사람의 모습으로 계셨을 때 

그 육체의 고통을 통해서 

우리가 겪어야 할 모든 연약함을 맛보신 분이시라는 뜻입니다. 

배곺음도 당하셨으니 배곺음의 고통도 아시는 것입니다. 

시험의 어려움을 겪으셨으니 우리가 시험을 받을 때 그 어려움을 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에 대하여 염려치 말라고 하시면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버지께서 아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능히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또 시험 받을 즈음에 피할 길을 열어 주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은 항상 살아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제사장이라고 하셨습니다. 

히7:25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온전히 구원하신다는 말씀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구원받을 모든 백성들을 한 명도 버리지 아니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의 제사장이신 예수님은 

우리가 지은 모든 죄를 위하여 하나님께 대언자가 되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요일2:1절에서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모든 죄의 재판장이신 하나님 앞에 계셔서 

우리의 대언자로 우리를 위하여 변호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그리스도를 힘입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를 힘입고 살아간다는 말은 참으로 놀라운 축복입니다. 

이 말씀 속에는 세 가지 뜻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의 처리를 이미 받은 사람이란 뜻입니다. 

다음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를 힘입은 자란 뜻입니다. 

마지막 다른 한 가지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확실한 소망을 가진 자란 뜻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를 힘입은 사람들은 

온전히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2. 우리에게 이 같은 대제사장이 있음을 기억하자

우리에게 이 같은 대제사장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의 신앙 생활에 얼마나 든든하고 믿음직스러운지 모르는 것입니다. 

3: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깊은 생각은 우리에게 소망을 든든히 해 주며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며 어떤 시련 속에서도 결코 낙심치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할 때 

먼저 우리의 속죄의 확실한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분은 지금도 나를 위해 기도하고 계심으로 

어떤 경우에서도 나를 온전히 구원해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이 같은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의 도리를 굳게 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 지어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주이신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생명의 구주이심을 굳게 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에게만 사죄의 은총이 있으며 

그에게만 우리에게 주시는 영원한 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그 어떤 것도 우리에게 

속죄도 의도 영생도 소망도 줄 수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혜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16절에 있는 말씀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해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연약한 그릇들임으로 범죄하기 쉬운 존재들입니다. 

그렇다면 만약 우리가 죄를 범했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우리의 대제사장을 찾아 그분께 간구하면 

그는 우리를 위하여 흘리신 그의 속죄의 피를 가지시고 

우리를 위해 아버지 하나님께 간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뿐 아니라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받기 위해서도 나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의 죄 문제만 해결해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도 내려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이 같은 주님의 도우심을 얻기 위해 

항상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은혜의 보좌는 바로 우리가 주님께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그 자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자리는 새롭고 산길을 통해서 은혜의 보좌와 직통으로 뚫린 자리입니다. 

우리가 기도하기 위해 주님을 향하여 무릎을 꿇는 그 자리는 다른 자리가 아닙니다. 

은혜의 보좌라고 하신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사실입니까?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우리 예수님은 우리를 안식의 땅까지 인도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음성을 들을 때 

지난날 모세의 음성을 듣고 패역했던 이스라엘처럼 

강퍅하지 말고 순종하라고 경종해 주시는 것입니다.


결론 : 죄를 범해도 시험이나 고난 중에도 낙심하지 마시고 

우리의 대제사장 앞으로 나아가기면 하면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받을 수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