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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제2권 42편 낙망 중에 하나님을 바람-57편 원수의 비난에서 건지심을 찬송함

영국신사77 2020. 4. 15. 09:34

42편: 낙망 중에 하나님을 바람

[1-3절]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성도에게는 환난의 때가 있다. 사슴이 보통 때에는 시냇물을 쉽게 찾고 물을 마시지만, 매우 가물 때에는 시냇물을 찾지 못해 갈급해 할 것이다. 이처럼 시편 저자는 평소에는 하나님과 교통하며 평안을 누렸으나, 지금 환난 중에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는 이런 환난 중에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다”고 말하며 또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한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시다. 성도는 환난의 때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의 도우심을 갈망한다.

시편 저자는 또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라고 말한다. 그는 지금 예루살렘 성전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고 성전을 사모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우심이 즉시 없었고,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는 사람들의 계속된 조롱 속에서 그는 주야로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하고 있다.

[4-5절] 내가 전에 성일(聖日)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찬송의 소리를 발하며 저희를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저희를 인도하였다’는 원어(엣닷뎀)는 ‘그들을 천천히 인도하였다’(NASB, NIV) 혹은 ‘그들과 함께 (천천히) 걸어갔다’(KJV)는 뜻 같다. 시편 저자는 이전에 하나님을 기쁘게 섬겼다. 그는 거룩한 절기를 지키는 무리와 함께 성일(聖日)을 지켰고 그들과 함께 기쁘게 찬송하였다. 또 그는 그들과 함께 하나님의 집으로 나아갔다.

시편 저자는 그러나 지금 절기와 성일을 지키지 못하고 있고 기쁨의 찬송도 부르지 못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집으로 올라가지도 못하고 있다. 그는 지금 예루살렘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상태에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이전의 일을 기억하고 마음이 상한다고 말한다. 또 그의 영혼이 왜 낙망하고 불안해 하는가라고 자신에게 묻는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그는 자신에게 하나님을 바라라고 말한다. 그가 하나님을 바라야 할 이유는, 하나님의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돌에 맞아 죽을 스데반이 예수님의 모습을 보며 힘을 얻은 것처럼(행 7:55), 성도가 고난 중에 하나님의 은혜의 얼굴을 보면 힘과 위로를 얻고, 그의 슬픔과 낙심은 기쁨과 찬송으로 변할 것이다. 감옥에서 차꼬에 채인 중에도 하나님을 찬미한 바울처럼(행 16:25), 그는 하나님을 찬미할 수 있을 것이다.

[6-8절]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망이 되므로 내가 요단땅과 헤르몬과 미살 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파도와 물결이 나를 엄몰하도소이다.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 인자함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 찬송이 내게 있어 [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시편 저자는 큰 고난 중에 심령으로 낙심하였다. 그는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 산을 말한다. 요단 땅은 요단강 주위이고, 헤르몬 산은 팔레스틴 북쪽 끝의 높은 산이며, 미살 산은 갈릴리 지방의 작은 낮은 산을 가리킨 것 같다. 그는 핍박자들을 피해 이런 지역들을 방황하며 다닌 것 같다. 또 그는 “주의 폭포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파도와 물결이 나를 엄몰하도소이다”라고 말한다. 그것은 갈릴리 바닷가에 서서 바다의 흉흉한 파도소리와 물결소리를 표현한 것 같다. 그는 그것을 자기에게 덮친 환난에 비교한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그를 큰 고난 중에 버려두셨다.

이런 상황에서 시편 저자는 하나님을 기억하였다. “내가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 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 환난 때에 자포자기하거나 방황하지 않고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은 믿음 있는 자의 바른 태도이다. 선지자 요나는 풍랑의 원인이 자신임을 인정하고 자신을 바다에 던지게 했으나 바다 속에서 하나님을 기억하였다(욘 2:7). 우리는 고난 중에 하나님을 기억해야 한다(신 8:18).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서 창조자요 섭리자이심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나아와야 한다.

또 시편 저자는 낮에는 하나님께서 그 인자하심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 찬송이 그에게 있어 그의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겠다고 고백한다. 낮에 원수들이 그를 해하려고 찾지만 하나님께서 그 인자하심으로 그를 보호하실 것이며, 밤이 되면 그는 그의 생명을 지켜주신 하나님, 그에게 인자를 베푸신 그 하나님께 찬송할 것이다.

[9-11절] 내 반석이신 하나님께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인하여 슬프게 다니나이까 하리로다. 내 뼈를 찌르는 칼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잠시라도 잊지 않으신다. 그러나 시편 저자는 지금 원수의 압제를 인해 슬프게 다니며,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는 원수의 비방은 칼로 뼈를 찌르는 듯한 고통이 되었고 그것이 여러 날 계속되었다. 그래서 그의 영혼은 낙망이 되고 불안하였다. 그러나 시편 저자는 고난 중에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바라보았다. 그는 하나님을 ‘내 반석이신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든든한 피난처이시다. 그는 또 하나님을 ‘내 얼굴을 도우시는 자,’ ‘내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슬프고 낙망되고 불안한 우리의 얼굴에 평안과 용기와 기쁨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는 우리의 힘과 위로이시다. 그러므로 시편 저자는 자신에게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고 말하며 또 그가 그렇게 말하는 까닭은 그가 그의 얼굴을 도우시는 그의 하나님을 찬송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은 인생의 모든 문제의 해답이다.

시편 42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다. 모세도, 여호수아도, 다윗도, 히스기야도, 예레미야도, 바울도 하나님을 ‘사시는 하나님’이라고 불렀다. 신명기 5:26, “사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불 가운데서 발함을 듣고 생존한 자가 누구니이까?” 여호수아 3:10, “사시는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 계시사.” 사무엘상 17:26,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 누구관대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 시편 18:46, “여호와는 생존하시니.” 열왕기하 19:4, “랍사게가 그 주 앗수르 왕의 보냄을 받고 와서 사신 하나님을 훼방하였으니.” 예레미야 10:10, “여호와는 참 하나님이시요 사시는 하나님이시요.” 디모데전서 4: 10, “우리 소망을 살아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파사 왕 다리오도 다니엘을 사자굴에서 건져내신 하나님을 ‘사시는 하나님’이라고 인정했다(단 6:26). 우리는 창조자와 섭리자이신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확신하자.

둘째로, 모든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 하나님께서는 ‘내 생명의 하나님,’ 우리의 생명의 하나님이시다. 그는 이 세상에서의 육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을 뿐 아니라,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을 통해 천국에서 영원히 누릴 영원한 생명을 은혜로 허락하셨다.

셋째로, 우리는 환난의 때에 하나님을 바라며 앙망하자. 성도는 심한 고난 가운데 처하며 하나님의 도움을 받지 못하며 또 원수들의 조롱을 받고 마음이 불안하고 낙망할 때 하나님을 바라고 앙망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결코 버리지 않으시고 도우시고 승리케 하실 것이다.

43편: 낙망 중에 하나님을 바람

[1절]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 경건치 아니한 나라에 향하여 내 송사를 변호하시며 간사하고 불의한 자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시편 저자는 하나님께 자신을 판단하시기를 호소한다. 그런 호소는 하나님을 참으로 경외하고 양심적인 순종 생활 즉 믿음과 행위가 일치하는 생활을 하는 성도만이 감히 할 수 있는 호소이다. 불경건하고 불의한 자가 어떻게 감히 공의의 하나님의 판단을 요청할 수 있겠는가? 죄인들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감히 설 수 없다.

시편 저자는 지금 경건치 않은 나라에서 간사하고 불의한 자들로부터 핍박을 받고 있다. 그래서 그는 공의의 하나님께서 그의 옳음을 판단해주시고 그를 변호해주시고 그를 건져주시기를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이다. 그것은 참된 경건과 진실과 의의 도덕성이 없이는 성도가 감히 가질 수 없는 담대한 호소이다. 이것은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만이 가질 수 있는 담대함이다. 실상, 모든 성도들은 이런 담대한 신앙생활을 사모하고 실천해야 한다.

고린도전서 4:3-4에 보면, 사도 바울은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고 말했다. 이와 같이, 사도 바울은 자책할 것이 없는 신앙생활을 실천하였다. 또 요한일서 3:21-22에서, 사도 요한은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자책할 것이 없는 담대한 신앙생활을 사모하며 실천해야 한다.

[2절]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어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인하여 슬프게 다니나이까?

시편 저자는 평소에 하나님을 그의 힘으로 삼고 살았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진실한 성도들의 힘이 되신다. 다윗은 시편 18편에서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고 고백하였다(시 18:1-2).

이사야 40:28-31에서, 이사야는 이렇게 말했다.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시편 저자는 평소에 하나님을 힘 입고 살았으나 그는 지금 고난 중에 있다. 성도는 고난 중에 해결책이 보이지 않고 믿음이 약해질 때 낙심하고 더욱 힘을 잃는다. 물론 그가 범죄했을 때나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일을 행했을 때도 힘을 잃을 것이다. 시편 저자는 지금 원수들의 압제로 인해 슬프게 다니고 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를 돕지 않으시고 버리신 것처럼 느끼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힘이 되신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3절]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어 나를 인도하사 주의 성산(聖山)과 장막에 이르게 하소서.

‘빛’은 지식과 의와 기쁨을 상징한다. 죄는 어두움이다. 사람은 죄 가운데 있으면 바른 길을 찾을 수 없고 바른 길로 갈 수 없으나, 의 안에서 성령의 기쁨도 경험한다. 성도는 하나님의 진리의 지식과 의 안에서 바른 길을 갈 수 있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의 바른 인도하심을 구한다. 성도는 내일 일을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미래를 다 아시며 그를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실 수 있고 또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선한 목자이시며 섭리자이시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빛과 하나님의 진리로 그를 인도하셔서 하나님께서 계신 곳, 하나님의 보호가 있고 하나님의 기쁨과 평안이 있는 그곳으로 인도해주시기를 구한다.

[4절]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단에 나아가 나의 극락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의 단에 나아가 그에게 예배드리며 주를 찬양하는 것을 귀히 여긴다.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찬양하는 것, 하나님을 섬기는 것,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은 귀한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예배하는 자를 결코 외면치 않으실 것이다. 그는 참된 예배자를 찾으신다. 요한복음 4:23-24,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하나님께서는 그런 예배자의 삶을 보장하시고 그에게 모든 좋은 것을 허락하시고 또 미래의 선한 인도하심을 약속하실 것이다. 그는 그의 기도를 응답하실 것이며 그에게 큰 위로와 격려를 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목자이시며(시 23:1), 우리와 싸우는 자와 싸우시는 하나님이시다(시 35:1).

시편 저자는 특히 하나님을 ‘나의 극락(極樂, 지극한 기쁨)의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우리의 사랑과 기쁨의 대상이시다. 그는 신명기 6:5의 말씀과 같이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해야 할 분이시다. 또 시편 73:25의 고백과 같이, 하늘에서나 땅에서 우리가 하나님보다 더 사모할 자는 없다. 그러므로 성도는 온 세상의 창조자와 섭리자이신 영원하신 하나님, 우리를 죄와 지옥 형벌로부터 구원해주신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님을 사랑하며 기뻐하고 찬송한다.

[5절]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시편 저자는 자신에게 낙심치 말고 불안해 하지 말라고 말한다. 또 그는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고 말한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고난 중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해답을 알고 있다. 그 해답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우리는 환난 중에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에게 기도해야 한다. 그것이 믿음이다. 그럴 때 그는 하나님의 구원과 위로와 도우심을 체험할 것이다. 그의 근심된 얼굴은 기쁨을 얻고 그의 불안한 얼굴은 평안을 얻으며 그의 낙심된 얼굴은 힘을 얻을 것이다.

시편 43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신 심판자이시다. 그는 선한 자에게 상을 주시고 악한 자에게 벌을 내리신다. 이 사실은 악인들에게는 심히 두려운 사실이지만, 하나님의 계명대로 사는 성도들에게는 큰 위로와 담대함이 된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빛과 진리로 우리를 인도하신다. 빛은 지식과 의와 기쁨을 상징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식과 의와 기쁨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다가 복된 천국에 들어가기를 원한다. 세상의 현실이 어떠하든지 간에 하나님을 섬기며 선하게 사는 자는 승리할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고난 중에 하나님만 바라보자. 세상은 고난이 많은 세상이며 고난의 현실을 대처해나가는 성도의 바른 방법은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며 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힘을 주신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라.” 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지극한 기쁨이 되신다. 하나님만 바라보자.

44편: 고난 중에 주의 구원을 구함

[1-3절]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 열조의 날 곧 옛날에 행하신 일을 저희가 우리에게 이르매 우리 귀로 들었나이다. 주께서 주의 손으로 열방을 쫓으시고 열조를 심으시며 주께서 민족들은 괴롭게 하시고 열조는 번성케 하셨나이다. 저희가 자기 칼로 땅을 얻어 차지함이 아니요 저희 팔이 저희를 구원함도 아니라 오직 주의 오른 손과 팔과 얼굴의 빛으로 하셨으니 주께서 저희를 기뻐하신 연고니이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열조들의 날에 행하신 일들을 전해 들었다고 말한다. 그것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이방 민족들을 쫓아내시고 이스라엘 열조를 심으셨고 이방 백성들을 괴롭게 하셨고 이스라엘 백성을 번성케 하셨다. 이것은 여호수아 때의 가나안 정복 사건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우상숭배와 음란의 큰 죄악에 빠져 있었던 가나안 족속들을 징벌하셨고 그 땅에서 쫓아내셨다.

이스라엘 열조들이 그 땅을 얻은 것은 그들의 칼이나 그들의 팔로, 즉 그들의 능력으로 된 것이 아니었고, 오직 하나님의 오른손과 팔과 얼굴 빛으로, 즉 하나님의 도우시는 능력과 힘으로 된 것이었다. 하나님의 능력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엄위하신 심판의 능력이지만, 구원얻는 자들에게는 긍휼하신 구원의 능력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열조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신 까닭은 그들을 기뻐하셨기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도 우리를 기뻐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우리의 행위대로 우리에게 보응치 않으시고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우리를 구원하셨다(딤후 1:9).

[4-5절]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왕이시니 야곱에게 구원을 베푸소서. 우리가 주를 의지하여 우리 대적을 누르고 우리를 치려 일어나는 자를 주의 이름으로 밟으리이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을 ‘나의 왕’이라고 부른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왕이시다(시 5:2; 74:12; 84:3).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만왕의 왕’이라고 불리신다(계 17:14). 왕은 백성을 통치할 뿐 아니라, 원수의 침략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한다.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고 공의롭고 선한 왕이시며 전쟁에 능한 큰 용사이시다. 시편 저자는 그 하나님의 구원과 도움을 간구한다.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여 대적을 누르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승리할 것을 확신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위하여 싸우시는 자이시다(신 1:30; 3:22; 시 35:1).

[6-8절] [이는] 나는 내 활을 의지하지 아니할 것이라[것임이니이다]. 내 칼도 나를 구원치 못하리이다. 오직 주께서 우리를 우리 대적에게서 구원하시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로 수치를 당케 하셨나이다. 우리가 종일 하나님으로 자랑하였나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영영히 감사하리이다(셀라).

시편 저자는 원수와의 싸움에서 자신의 활이나 칼을 의지하지 않을 것이라고 고백한다. 그는 자신의 힘과 수단을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고백한 것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대적에게서 구원하셨고 그들을 미워하는 자로 수치를 당케 하신 과거의 경험을 말한다. 또 그 일로 인해 우리가 종일 하나님으로 자랑하였다고 증거하며 또 하나님의 이름을 영영히 감사하겠다고 고백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과거의 일에 근거하여 현재 그의 도우심을 간구한다.

[9-16절] 그러나 이제는 주께서 우리를 버려 욕을 당케 하시고 우리 군대와 함께 나아가지 아니하시나이다. 주께서 우리를 대적에게서 돌아서게 하시니 우리를 미워하는 자가 자기를 위하여 탈취하였나이다. 주께서 우리로 먹힐 양 같게 하시고 열방 중에 흩으셨나이다. 주께서 주의 백성을 무료로 파심이여 저희 값으로 이익을 얻지 못하셨나이다. 주께서 우리로 이웃에게 욕을 당케 하시니 둘러 있는 자가 조소하고 조롱하나이다. 주께서 우리로 열방 중에 말거리가 되게 하시며 민족 중에서 머리 흔듦을 당케 하셨나이다. 나의 능욕이 종일 내 앞에 있으며 수치가 내 얼굴을 덮었으니 나를 비방하고 후욕하는 소리를 인함이요 나의 원수와 보수자(報讐者)의 연고니이다.

시편 저자는, 그러나 이제는 이스라엘이 심한 고난 가운데 있다고 고백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버려 모욕을 당하게 하셨고 전쟁 때에 그들의 군대와 함께하지 않으셨다. 그들은 대적들에게서 패하여 돌아섰고 그들을 미워하는 자들에게 탈취를 당하였다. 그들은 먹힐 양같이 잡혔고 열방 중에 흩어졌다. 그들은 아무 몸값도 받지 못하는 자들과 같았다. 그들은 이웃 나라들에게 욕을 당했고 주위에 있는 자들에게 조롱과 비웃음을 당했다. 그들은 이방인들의 말거리가 되었고 이방 나라들 가운데서 머리 흔듦을 당했다. 그들의 불명예가 종일 그 앞에 있었으며 수치가 그 얼굴을 덮었다. 그것은 그들을 비방하고 욕하는 소리 때문이었고 그들의 원수와 보수자(報讎者) 때문이었다.

성도에게는 환난의 때가 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지 않으시는 것 같고 모욕과 수치를 당하고 실패하고 탈취당하고 무가치하게 취급을 당하고 조롱과 욕을 당할 때가 있다. 그러나 그런 고난의 현실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본문은 여섯 번 “주께서”라는 말을 반복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 모든 고난의 현실을 주셨음을 증거한다. 또 여기에 고난의 현실로부터의 회복과 해결의 실마리도 있다.

[17-21절]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임하였으나 우리가 주를 잊지 아니하며 주의 언약을 어기지 아니하였나이다. 우리 마음이 퇴축지 아니하고 우리 걸음도 주의 길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나 주께서 우리를 시랑의 처소에서 심히 상해하시고 우리를 사망의 그늘로 덮으셨나이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잊어버렸거나 우리 손을 이방 신에게 향하여 폈더면 하나님이 이를 더듬어 내지 아니하셨으리이까? 대저 주는 마음의 비밀을 아시나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대적에게 모욕을 당했고 패전했고 흩어졌고 놀림을 받았다. 시편 저자는 “주께서 우리를 시랑의 처소에서 심히 상해하시고 우리를 사망의 그늘로 덮으셨나이다”라고 말한다. ‘시랑’(탄님)은 여우와 이리의 중간쯤 되는 재칼이라는 짐승이다. 이스라엘이 처한 곳은 죽음의 위협과 위험이 가득하였다.

그러나 이런 상황 속에서 그들은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 앞에 성실히 행했고 하나님을 잊지 않고 그의 언약을 어기지 않았다. 하나님을 항상 기억하고 의지하는 것이 믿음이다. 주의 언약을 어기지 않았다는 말은 창조자와 섭리자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대로 행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지하며 그의 계명대로 행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지 않았고 그들의 걸음도 그의 길을 떠나지 않았다. 진실한 성도는 고난 중에도 주를 따르는 길에서 돌아서지 않고 그 길을 떠나지 않는다.

시편 저자의 고백은 하나님 앞에서 진심의 고백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만일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잊어버렸거나 우리의 손을 이방신을 향하여 폈더면 하나님께서 이를 더듬어 내셨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마음의 비밀을 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참된 마음도, 변질된 마음도 아신다.

[22-26절]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주여, 깨소서.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 일어나시고 우리를 영영히 버리지 마소서.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고 우리 고난과 압제를 잊으시나이까? 우리 영혼은 진토에 구푸리고 우리 몸은 땅에 붙었나이다. 일어나 우리를 도우소서. 주의 인자하심을 인하여 우리를 구속하소서.

이스라엘 백성은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다. 그 고난은 온종일 계속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실 때문에 고난과 압제를 받았다. 사도들이나 초대 교회 성도들이 그러하였다. 그들은 단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 때문에 고난을 받았다. 또 시편 저자는 “우리 영혼은 진토에 구푸리고 우리 몸은 땅에 붙었나이다”라고 말한다. 게다가, 하나님께서는 주무시고 그들을 영영히 버리신 것 같았고 얼굴을 가리우시고 잊으신 것 같았다.

그러나 시편 저자는 고난 중에 낙망치 않고 기도하였다. 그는 “주여, 깨소서 . . . 일어나소서,” “일어나 우리를 도우소서”라고 기도한다. 성도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향해 가까이 나아가고 하나님을 더욱더 의지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 소리 듣기를 좋아하시고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하시고(신 4:7) 우리가 간절히 기도할 때 우리의 소원들을 들어주신다. 하나님께 대한 참된 믿음은 기도로 나타나고 간절한 기도는 그의 응답을 가져온다.

시편 저자는 특히 하나님의 긍휼을 의지하며 구원을 간구한다. “주의 인자하심을 인하여 우리를 구속(救贖)하소서.” 우리는 부족함이 많으므로 우리의 의(義)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 우리의 담대함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인자하심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라”고 말씀하셨다(요 14:13). 그의 이름을 우리를 대속하신 구주의 이름이다.

시편 44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왕이시다. 그는 우리를 기뻐하셔서 그의 능력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재능이나 돈이나 건강을 의지하지 말고 우리의 왕이신 하나님만 의지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고 바르게 살자.

둘째로, 성도는 고난 중에도 하나님과 그의 언약을 잊지 말아야 하고 또 하나님의 길을 떠나지 말아야 한다. 성도에게는 때때로 고난이 있다. 심지어 죽음의 위협도 있다. 고난은 성화와 선한 인격 훈련을 위해서도 오지만, 주로 우리의 죄와 실수 때문에 온다. 성도는 고난 가운데 인내하며 하나님을 의심하지 말고 믿음의 훈련을 받고 또 자신을 반성하며 생각나는 죄를 철저히 회개하며, 고난의 해결자 되신 하나님을 바라고 그의 길을 떠나지 말아야 하고 그의 계명을 힘써 순종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죽을 것 같은 극심한 고난 중에도 낙심치 말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만 의지하고 간구하자. 우리는 환난의 날에 오직 하나님의 긍휼만 의지하며 하나님께 도움을 호소하고 구원을 간구하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고 하나님의 은혜로 고난도 극복한다.

45편: 왕의 영광

[1-2절] 내 마음에서 좋은 말이 넘쳐 왕에 대하여 지은 것을 말하리니 내 혀는 필객[능숙하게 글 쓰는 이]의 붓과 같도다. 왕은 인생보다 아름다워 은혜를 입술에 머금으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왕에게 영영히 복을 주시도다.

시편 저자가 성령의 감동으로 노래한 왕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고 신적 존재이시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켰다고 본다. 그는 인생보다 아름다우시다. 그것은 지혜와 덕의 아름다움을 가리킬 것이다. 그는 은혜를 입술에 머금으셨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그는 자비로운 왕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영원히 복을 주신다.

[3-5절] 능한 자여, 칼을 허리에 차고 왕의 영화와 위엄을 입으소서. 왕은 진리와 온유와 공의를 위하여 위엄있게 타고 승전(勝戰)하소서. 왕의 오른손이 왕에게 두려운 일을 가르치리이다. 왕의 살이 날카로워 왕의 원수의 염통을 뚫으니 만민이 왕의 앞에 엎드러지는도다.

왕은 능한 자이시며 칼을 허리에 차고 영화와 위엄을 입으셨다. 그는 위엄 있게 말을 타고 전쟁하시는 자와 같고 오른손으로 두려운 일들을 행하시는 자이시다. 또 그는 진리와 온유와 공의를 위해 싸우실 것이다. 진리와 온유와 공의는 하나님의 속성이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이다(마 11:29). 그 왕은 원수의 심장을 찌르실 것이다. 그는 전쟁에서 이기실 것이다. 그의 화살은 날카로워 원수의 염통을 뚫으실 것이며 만민이 그 앞에 엎드러질 것이다. 재림하실 주 예수께서는 사탄과 악령들과 그들에게 복종했던 악한 사람들을 마침내 영영한 지옥 불못에 던지실 것이다(마 25:41; 계 19:20; 20:10; 21:8).

[6-7절]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당신의 보좌는, 오 하나님이시여,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이니이다. 왕이 정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시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왕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으로 왕에게 부어 왕의 동류보다 승하게 하셨나이다.

본문은 왕의 영광을 증거한다. 본 시편에 ‘왕은’ ‘왕의’ 등의 말은 ‘당신은’ ‘당신의’라는 뜻이다. 본문은 왕을 향해 ‘하나님이시여’라고 부른다. 이 왕은 확실히 메시아를 가리킨다. 그는 이사야서에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신 아버지’로 예언된 자이시다(사 9:6).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이시며(요 1:1) 참 하나님이시며(요일 5:20) 우리의 크신 하나님이시다(딛 2:13).

또 왕은 영원하시다. 그의 보좌는 영영하다. 세상의 왕들은 영원하지 않고 세상 나라들도 영원하지 않으나, 메시아께서는 영원한 왕이시며 그의 나라도 영원하다. 그의 나라는 망하거나 없어지지 않는다(단 2:44). 요한계시록 11:15,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노릇하시리로다.”

또 왕은 공의를 행하신다. 왕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이며 왕은 정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신다. 세상의 왕들은 공의를 변질시키고 악을 행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공의의 왕이시다(사 9:7).

또 하나님께서는 즐거움의 기름을 그에게 부으실 것이다. 공의의 하나님께는 기쁨과 즐거움이 충만히 있다. 죄는 슬픔을 가져오지만, 의는 기쁨을 가져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기쁨과 즐거움이 충만하신 자이시며, 천국은 기쁨이 충만한 곳이다(롬 14:17). 

[8-9절] 왕의 모든 옷은 몰약과 침향과 육계의 향기가 있으며 상아궁에서 나오는 현악은 왕을 즐겁게 하도다. 왕의 귀비 중에는 열왕의 딸[딸들]이 있으며 왕후는 오빌의 금으로 꾸미고 왕의 우편에 서도다.

왕과 왕비는 영화로우시다. 왕의 모든 옷은 몰약과 침향과 육계의 향기가 있다. 몰약과 침향(알로에)과 육계(계피)는 값비싼 향료이었다. 출애굽기 30:23-25에 보면, 몰약과 육계는 거룩한 관유를 만드는 원료이었다. 왕의 옷의 향기는 인격의 아름다움을 상징한다고 본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가장 아름다운 인격이시다.

또한 상아궁에서 나오는 현악은 왕을 즐겁게 한다. 세상에서 뿐만 아니라, 천국에서도 천사들과 성도들의 찬양과 악기 연주는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할 것이다.

또 왕의 귀비들 중에는 열왕의 딸들이 있다. ‘왕의 귀비(貴妃)들’은 왕을 섬기는 존귀한 여인들을 가리킨다. ‘열왕의 딸들’은 궁중의 교육을 받은 아름답고 교양과 품위를 갖춘 자들이다. 왕의 귀비들은 성화된 성도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나타낸다고 본다.

왕후는 오빌의 금으로 꾸민다. 성경에서 ‘오빌의 금’은 유명하다(왕상 9:28; 10:11; 22:48; 대상 29:4; 욥 22:24; 28:16; 사 13:12). 왕후가 오빌의 금으로 매우 아름답고 존귀하게 꾸민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으로 말미암아 교회에게 주신 완전한 의(義)와 영광을 나타낸다고 본다. 또 왕후는 왕의 우편에 선다. 그것은 존귀와 특권을 가리킨다.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로 왕 같은 제사장이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특권을 누린다(벧전 2:9).

[10-12절] 딸이여, 듣고 생각하고 귀를 기울일지어다. 네 백성과 아비 집을 잊어버릴지어다. 그러하면 왕이 너의 아름다움을 사모하실지라. 저는 너의 주시니 너는 저를 경배할지어다. 두로의 딸이 예물을 드리고 백성 중 부한 자도 네 은혜를 구하리로다.

본문은 왕후에게 주는 교훈이다. 왕후는 이 말씀을 듣고 생각하고 귀를 기울여야 한다. 왕후는 자기의 백성과 아비의 집을 잊어버려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된 모든 성도는 옛 사상, 옛 관습, 옛 가치관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성경적 사상을 가지고, 하나님의 규례 즉 성경과 성경적 교회의 규례를 배우고, 하나님의 가치관 즉 성경적 가치관을 취해야 한다. 또 왕후는 왕께 경배해야 한다. 왕은 왕후의 주(主)이기도 하시기 때문이다. 모든 성도는 교회의 머리요 만왕의 왕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 경배해야 하고 복종해야 한다.

왕후는 복을 누릴 것이다. 왕은 왕후의 아름다움을 사모할 것이다. 남편은 아내가 완전히 남편만 생각하고 위할 때 그를 더욱더 사랑하고 사모할 것이다. 주 예수께서는 부모나 처자를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그의 제자 되기에 합당치 않다고 말씀하셨다(마 10:37-38). 또 본문은 두로의 딸이 왕후에게 예물을 드리고 백성 중 부한 자들도 그의 은혜를 구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이방인들이나 부한 자들도 교회에 소속하게 될 것을 보이는 것이라고 본다(행 17:4).

[13-15절] 왕의 딸이 궁중에서 모든 영화를 누리니 그 옷은 금으로 수 놓았도다. 수 놓은 옷을 입은 저가 왕께로 인도함을 받으며 시종하는 동무 처녀들도 왕께로 이끌려 갈 것이라. 저희가 기쁨과 즐거움으로 인도함을 받고 왕궁에 들어가리로다.

‘왕의 딸’은 왕후를 가리킨 것 같다. 왕후는 단수명사로 표현되고(9-12절) ‘딸’이라고 불리며(10절) 금으로 단장되었다(9절). 왕후는 궁중에서 모든 영화를 누리며 그 옷은 금으로 섞어 짠 것이다. 성경은 성도가 누릴 영광에 대해 말한다. 성도는 주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그의 영광의 몸과 같이 변화될 것이며(빌 3:21), 보석으로 단장된 거룩한 예루살렘 성에 거할 것이다(계 21:10-11). 성도들은 장차 나타날 그 영광을 소망하며(롬 8:18) 그것을 바라고 즐거워한다(롬 5:2).

또 왕후는 왕께로 인도함을 받는다. 신부에게 가장 큰 복은 신랑이다. 그것이 사랑하는 부부의 관계이다. 교회의 가장 큰 복은 하나님 자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장차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어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실 것이며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실 것이다(계 21:3).

왕후와 시녀들은 또 왕궁에서 풍성한 기쁨과 즐거움을 누릴 것이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에는 기쁨과 즐거움이 있다. 구원받은 자에게는 기쁨과 즐거움이 있다. 천국은 의와 평강과 희락이 넘치는 곳이다(롬 14:17). 천국에는 슬픔과 애통과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않을 것이다(계 21:4).

[16-17절] 왕의 아들들이 왕의 열조를 계승할 것이라. 왕이 저희로 온 세계의 군왕을 삼으리로다. 내가 왕의 이름을 만세에 기억케 하리니 그러므로 만민이 왕을 영영히 찬송하리로다.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왕노릇할 것이다(계 5:10; 20:6; 22:5). 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구원받은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모든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원히 찬송할 것이다. 요한계시록 5:13은 만물이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라고 찬송할 것을 증거하였다.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새 마음으로 신적 구주를 섬겨야 한다. 주 예수께서는 신적인 왕이시다. 그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해 자기 몸을 버리셨고 피를 흘리셨다. 왕후가 자기의 백성과 아비의 집을 잊어버려야 하듯이, 우리는 우리의 옛 사상과 관습과 가치관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성경적 사상을 가지고 바른 교회의 규례를 배우고 성경적 가치관을 취해야 한다. 우리는 오직 주 예수를 믿고 사랑하고 그에게 경배하며 찬송하고 그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하심을 본받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은혜를 입술에 머금으셨다. 즉 그의 입에는 은혜로운 말씀이 있다. 그는 진리와 온유와 공의를 위해 싸우신다. 그는 원수들을 진멸하시는 엄위하신 자이시다. 그는 공의로 나라를 다스리신다. 우리는 그의 도덕적 완전을 본받자. 우리는 그를 본받아 의롭고 선하게 살아가자.

셋째로, 우리는 천국 기쁨과 영광을 누리자. 그에게는 즐거움의 기름이 부어지셨다. 그의 옷에는 좋은 향기가 있고 그의 궁궐에는 즐거운 악기 소리가 있다. 왕비는 금으로 만든 영광의 옷을 입고 시녀들은 기쁨과 즐거움을 누린다. 그것은 성도들이 장차 천국에서 누릴 복이며 이 세상에서도 상당히 누릴 복이다. 성도는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한다.

46편: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피난처이심

[1-3절]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에즈라 베차롯 니므차 메오드)[환난 중에 바로 얻을 도움](a very present help in trouble)(KJV, NASB)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셀라).

하나님께서는 섭리자이시다. 그는 그를 경외하고 죄를 멀리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을 환난 중에 즉시 도우실 것이다. 세상에는 지진과 해일 같은 천재지변이 있고 전쟁이나 흉년, 각종 질병과 사고 등의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피난처와 힘과 도움으로 삼는 자는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이사야 43:1-2, “너는 두려워 말라. . . .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4-5절]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극히 높으신 자의 장막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 하나님이 그 성중에 거하시매 성이 요동치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은 교회를 가리킨다고 보인다. 특히 예수님 믿고 성령을 받은 성도들의 모임인 신약교회는 하나님의 성전이다(고전 3:16). 한 시내가 하나님의 성에 나뉘어 흐른다. 그것은 신약교회 속에서 활동하시는 성령님을 가리킨다. 주께서는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그를 믿는 자들의 받을 성령을 가리켰다(요 7:38-39). 신약교회 속에는 성령의 감동과 역사하심이 있다. 그것은 구주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이 누리는 은혜와 복이다.

하나님의 성은 복되다. 첫째, 그 성에는 기쁨이 있다. 하나님의 성에 흐르는 시내는 그 성을 기쁘게 한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에 기쁨을 주신다. 성령의 열매는 기쁨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4:4에서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교훈하였다.

둘째, 그 성에는 평안과 안정이 있다. 그 성은 요동치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곳에는 평안함과 견고함이 있다(요 14:27).

셋째, 그 성에는 하나님의 빠른 도우심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새벽에 도우실 것이다. ‘새벽에’라는 원어(립프노스 보케르)는 ‘새벽이 될 때’ 혹은 ‘일찍이’라는 뜻이다. 밤중에 기도했는데 아침이 될 때 하나님께서 도우시고 역사하셨다.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셔서 밤에 앗수르 진에서 군사 18만 5천명을 치셨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보니 그들이 다 시체가 되었었다(왕하 19:35).

[6-7절] 이방이 훤화하며 왕국이 동하였더니 저가 소리를 발하시매 땅이 녹았도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셀라).

이방 나라들은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떠들썩하고 요란하였다. 세상 사람들은 때때로 하나님의 교회를 대적한다. 그러나 그때 하나님께서는 소리를 발하시며 그들을 징벌하신다. 그 하나님의 소리는 분노의 소리이며 책망과 징벌의 소리이다. ‘땅이 녹았다’는 말은 떠들썩하던 일이 잠잠해지고 그 세력들이 파해졌다는 뜻이다. 심지어 교회 안에 들어온 악한 자들의 대적도 하나님께서 엄하게 징벌하셨다. 모세를 대적하던 고라와 그 동료들과 족장 250명의 세력은 하나님의 징벌을 받음으로 잠잠해졌고, 다윗을 대적하던 압살롬과 아히도벨은 하나님께서 꺾으심으로 죽었다. 예수님을 배신했던 가룟 유다는 비참하게 죽었고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40년 후쯤 처참하게 망했다.

하나님께서 소리를 내신 까닭은 그가 우리편이시기 때문이다. 7절,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니.” ‘만군의 여호와’라는 말은 하늘의 천군 천사들을 거느리시고 사용하시는 능력의 하나님을 의미한다. 그가 ‘우리’ 편이시고 ‘우리의’ 피난처라고 말한 그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고 성경 교훈대로 믿고 죄를 회개하고 순종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편이시며 그들의 피난처이시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을 대적하고 핍박하는 무리들에게 분노와 책망의 소리를 발하시는 것이다.

[8-9절] 와서 여호와의 행적을 볼지어다. 땅을 황무케 하셨도다. 저가 땅끝까지 전쟁을 쉬게 하심이여, 활을 꺾고 창을 끊으며 수레를 불사르시는도다.

하나님의 행하신 일들은 그가 살아계신 증거이다. 죽은 자는 행동하지 못한다. 산 자만 행동한다.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셔서 많은 일들을 행하셨다. 본문은 하나님의 행하신 일들 중에 특히 땅을 황무케 하심과 땅끝까지 전쟁을 쉬게 하시고 활을 꺾고 창을 끊으시며 수레를 불사르심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그와 그의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난 무리들을 다 파하셨다. 그는 인류 역사와 특히 이스라엘 역사에서 그렇게 하셨고 우리의 짧은 생에서도 그렇게 하셨다. 그러나 그는 최종적으로도 모든 불의와 거짓을 파하시고 의와 진리가 이기게 하시며 온 세상에 전쟁을 그치게 하실 것이다.

[10-11절]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열방과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셀라).

‘이르시기를’이라는 작은 글자는 성경의 영감성을 보인다. 성경의 저자는 때때로 하나님으로서 말한다(신 11:14).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라고 말씀하신다. ‘가만히 있어’라는 말은 두려워하지 말고 요동치 말고 조용히 바라보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행하심을 확인하는 데는 사람의 노력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가만히 보면 된다. “내가 하나님 됨을 알라”고 말씀하시는 그 분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모세의 하나님, 다윗의 하나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 신구약성경을 주신 하나님이시다.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아는 것이 영생이며(요 17:3) 거기에 인생의 참된 평안과 기쁨과 행복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또 “내가 열방과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신다. 지금은 하나님의 이름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서 높임을 받고 있지 못하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그를 욕하고 멸시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이 온 세상에서 높임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회복될 것이다.

시편 저자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라고 다시 말한다. 하늘의 천군천사들을 거느리시고 쓰시는 능력의 하나님께서는 그를 경외하며 그의 계명을 순종하는 그의 백성과 함께하시며 환난 때에 그들의 피난처가 되신다. 비록 야곱같이 부족이 있고 많은 고난을 받은 자들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피난처와 힘과 도움이 되시는 것이다.

시편 46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만군의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하신다(7, 11절). 비록 우리가 부족했던 야곱 같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믿고 순종하고자 하는 자들을 결코 버리지 않으시고 항상 함께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것이 복이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피난처시며(1, 7, 11절) 힘과 도움이시다. 하나님의 교회에는 성령의 감동과 역사하심의 시냇물이 있다. 오늘날도 성령께서는 주의 백성들과 함께 계셔서 환난 날에 빠른 도움이 되시며 우리를 그 환난에서 건져주시고 우리에게 평안과 기쁨을 주신다.

셋째로, 우리는 환난 날에 두려워하지 말고 그를 의지하고 모든 문제를 그에게 아뢰고 가만히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보면 된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의 피난처이시며 힘과 도움이심을 아는 자는 고난 중에 결코 두려워하지 않고 가만히 섭리자 하나님을 앙망할 것이다.

47편: 온 땅의 왕이신 하나님을 찬양함

[1-2절] 너희 만민들아, 손바닥을 치고 즐거운 소리로 하나님께 외칠지어다. [이는] 지존하신 여호와는 엄위하시고 온 땅에 큰 임군이 되심이로다.

‘만민들’은 어떤 제한이 없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가리킨 것 같다. 우리는 어떤 높은 사람이나 존경받을 인물을 치하할 때 손뼉을 친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손뼉을 치며 즐거운 소리로 찬양해야 할 분이시다.

만민들이 손뼉을 치며 하나님을 즐거이 찬양해야 할 이유는, 지존하신 여호와께서 엄위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자 곧 피조 세계를 초월해 계신 지극히 높으신 자이시다. 창조 이전부터 계신 그는 지혜와 능력이 무한하시다. 사람은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 곧 육신적인 것, 물질적인 것만 생각하기 쉽다. 사람은 심히 추하고 천박하며 인간 세계에는 심히 부도덕한 것들이 많다. 죄인은 감히 하나님 앞에 설 수 없고 고개를 들 수 없다. 우리는 이사야처럼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로다”라고 외쳐야 할 자들이며(사 6:5), 시몬 베드로처럼 주 앞에 엎드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해야 할 자들이다(눅 5;8). 그러나 초월자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높고 고상한 것을 생각하신다. 그는 지극히 거룩하시고 엄위하시다.

만민들이 손뼉을 치며 하나님을 즐거이 찬양해야 할 다른 하나의 이유는 그가 온 땅에 큰 왕이 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홀로 세상을 다스리시는 큰 왕이시다. 즉 섭리자이시다. 인류 역사는 그의 손에 있다. 그는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고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지극히 높으신 자이시다(단 4:17, 25, 32; 5:21).

[3-4절] 여호와께서 만민을 우리에게, 열방을 우리 발 아래 복종케 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기업을 택하시나니 곧 사랑하신 야곱의 영화로다(셀라).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즉 구약교회를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나라들과 모든 백성들을 이스라엘 자손의 발 아래 복종케 하신다. 이 말씀은 사람들을 복종시키는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을 보인다. 이것은 하나님의 왕권, 즉 통치권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만민을 다스리시는 권세를 가지고 계신다. 또 그는 오늘날도 자녀들로 하여금 부모에게, 학생들로 하여금 선생에게, 또 교인들로 하여금 목사와 장로들에게 복종케 하신다. 그는 모든 민족을 굴복케 하신다.

세상 나라들과 모든 백성들을 복종케 하신다는 말씀은 세계복음화를 예시한다. 세계복음화는 하나님의 뜻이다.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다. 로마서 9:15-16,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다니엘 2:44, “이 열왕의 때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하고 영원히 설 것이라.”

시편 저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기업을 택하시니 곧 사랑하신 야곱의 영광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기업은 모든 세계에서, 특히 이방세계에서 하나님의 택함을 입은 자들을 가리킨다. 시편 2:8,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끝까지 이르리로다.” 교회는 택자들의 모임이며 그들의 수효는 셀 수 없이 많다. 에베소서 1: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그들은 장차 영광스런 천국의 기업을 이어받을 것이다. 그것은 회개하고 구주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을 위해 하늘에 간직된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이다(벧전 1:4).

[5-7절] 하나님이 즐거이 부르는 중에 올라가심이여, 여호와께서 나팔 소리 중에 올라가시도다. 찬양하라, 하나님을 찬양하라. 찬양하라, 우리 왕을 찬양하라. [이는] 하나님은 온 땅에 왕이심이라. 지혜의 시로 찬양할지어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찬송을 받으시면서 올라가신다고 말한다. 역사상 하나님께서는 종종 땅에 내려오셨다가 올라가셨다. 창세기 17:22,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그를 떠나 올라가셨더라.” 이 말씀은 특히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어 오심과 지상 생애의 끝에 승천하심을 암시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는 사람이 되어 이 세상에 오셨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그는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속죄사역을 이루신 후 부활하셨고 승천하셨다. 주 예수께서는 확실히 천사들과 하늘의 성도들의 찬송을 받으시면서 영광 가운데서 승천하셨다(딤전 3:16).

우리가 하나님을 찬송해야 할 이유는 그가 온 땅에 왕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왕이시며 온 땅에 왕이시다. 그는 온 땅에 큰 왕이시다(2절). 그러므로 우리는 즐거운 목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5절). 즐거워하는 자들이 하나님을 찬송할 것이다(약 5:13). 또 우리는 나팔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사람이 만든 악기들의 최상의 용도는 하나님을 찬송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시편 150:3-5는 우리가 나팔과 비파와 수금과 소고와 현악과 퉁소와 제금 등 모든 악기를 사용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교훈하였다.

본문은 또 ‘지혜의 시로’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말한다. ‘지혜의 시’라는 원어(마스킬)는 ‘이해력’이라는 뜻으로서, 시편의 표제어로 열 세 번 ‘묵상시’(BDB) 혹은 ‘교훈시’(게세니우스)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많은 찬송시들은 하나님의 일들을 묵상하는 시들이다. 본문은 ‘이해력을 가지고 하나님을 찬양하라’(KJV)는 뜻 같다.

[8-9절] 하나님이 열방을 치리하시며 하나님이 그 거룩한 보좌에 앉으셨도다. 열방의 방백들이 모임이여,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다. 세상의 모든 방패는 여호와의 것임이여, 저는 지존하시도다.

하나님께서는 열방의 왕이시다. 그는 자기 백성을 다스리실 뿐 아니라, 또한 열방 곧 온 세상을 다스리신다. 또 그의 통치는 거룩하고 의로우시다. 그에게 복종하는 자는 영생과 복을 누리지만, 그를 거역하는 자는 영원한 멸망과 불행을 당할 것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열방의 방백들을 모으시고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신다. 또 세상의 모든 방패들은 여호와의 것이다. 방패는 대적자들의 공격을 막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구원을 방해하거나 어지럽히는 자들을 막으시고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자들에게서 지키신다. 또 하나님께서는 높임을 받으실 것이다. 마지막 날에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고 높일 것이다.

시편 47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온 땅의 큰 왕이시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의 왕이실 뿐 아니라 온 세상의 왕이시다. 그는 통치자 곧 섭리자이시다. 그의 통치는 공의롭고 엄위하시다. 그 앞에 열방은 복종해야 한다. 그는 장차 공의로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다.

둘째로, 하나님의 뜻은 세계복음화 곧 하나님 나라의 건립이다. 하나님의 섭리의 목표는 구원이다. 하나님께서는 열방을 그 발 아래 복종케 하신다. 열방의 방백들은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다. 하나님을 거역하던 죄인들은 하나님께로 돌아와 죄사함의 구원을 받아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에게 복종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것이다.

셋째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즐거이 찬양해야 한다. 그들은 손벽을 치며 찬양해야 한다. 그는 온 땅에 큰 왕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보다 더 위대한 자가 누구인가? 그는 그 어떤 사람보다 위대하시다. 우리는 사람을 높이거나 자신을 높이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48편: 시온에서 하나님을 찬송함

[1-3절] 여호와는 광대[위대]하시니 우리 하나님의 성, 거룩한 산에서 극진히 찬송하리로다. 터가 높고 아름다워 온 세계가 즐거워함이여, 큰 왕의 성 곧 북방에 있는 시온 산이 그러하도다. 하나님이 그 여러 궁중에서 자기를 피난처로 알리셨도다.

시편 저자는 위대하신 하나님을 하나님의 성에서 극진히 찬송하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특히 지혜와 능력에 있어서 위대하시다. 그는 이스라엘을 해하려고 침입한 열방을 다 멸하셨다. 하나님의 성은 하나님께서 구별하신 거룩한 산이며 거기에는 그의 임재하심과 영광이 있고,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은 절기 때마다 거기 모여 그를 섬긴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와 능력을 체험한 자들은 하나님의 산, 곧 교회에 올라와 그를 극진히 찬송할 것이다.

시편 저자는 북방의 시온 산에 세워진 하나님의 성이 터가 높으며 아름답고 온 세계가 그것을 즐거워한다고 말한다. 구약시대에 예루살렘 성이 그러하였다. 그 성은 신약시대에 교회에 해당한다. 세계의 참된 성도들은 교회를 사모하고 사랑한다. 그 성의 영광은 새 예루살렘 성 곧 천국에서 충만하게, 완전하게 나타날 것이다(계 21장).

시편 저자는 또 하나님께서 특히 그 성의 여러 궁궐들에서 자신을 피난처로 알리셨다고 말한다. 견고한 성이나 그 성에 있는 아름다운 집들이 피난처가 되지 못하지만, 그 성에 계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피난처가 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면,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닥친 어떤 어려운 문제들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는 우리의 반석, 우리의 요새, 우리의 방패가 되신다(시 18:1-2). 시편 91:1-3은,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 내가 여호와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이는 저가 너를 새 사냥군의 올무에서와 극한 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라고 말했다.

[4-8절] [이는] 열왕이 모여 함께 지났음이여[지나갔음이여], 저희가 보고 놀라고 두려워 빨리 갔도다[갔음이로다]. 거기서 떨림이 저희를 잡으니 고통이 해산하는 여인 같도다. 주께서 동풍으로 다시스의 배를 깨뜨리시도다. 우리가 들은 대로 만군의 여호와의 성, 우리 하나님의 성에서 보았나니 하나님이 이를 영영히 견고케 하시리로다(셀라).

하나님께서 피난처시라고 말한 이유는 이방의 왕들이 모여 연합군을 이루어 하나님의 백성을 침략하였으나 그 왕들이 다함께 죽었기 때문이다. ‘함께 지나갔다’는 말은 다 죽었다는 뜻이다. 그들은 보고 놀랐고 두려워 빨리 갔으며 패배로 인한 두려움이 그들을 사로잡았고 그들의 고통은 해산하는 여인의 고통 같았고 그들은 다 죽었다.

그것은 다 하나님의 하신 일이었다. 그는 동풍으로 다시스의 배들을 깨뜨리셨다. 다시스의 배들은 튼튼한 전함(戰艦)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강한 동풍으로 그것들을 침몰케 하셨다. 그는 때때로 자연 현상을 자유로이 사용해 이스라엘의 원수들을 치시며 그의 의로운 뜻을 이루셨다. 그는 여호수아 때에 하늘에서 큰 덩이의 우박을 내려 아모리 다섯 왕들의 군대를 치심으로 여호수아 군대를 지원하셨고(수 10:11), 사무엘 때에는 큰 우뢰소리로 블레셋 사람들을 어지럽혀 그들로 이스라엘 앞에 패하게 하셨다(삼상 7:10).

시편 저자는 하나님께 관해 전달되어 내려오는 증언을 들었을 뿐 아니라, 친히 시온 성에서 그의 행하심을 보았다. 열조들의 하나님께서는 오늘날에도 우리의 하나님, 우리가 체험할 수 있는 하나님이시다. 시편 저자는,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 성을 영원히 견고하게 하실 것이라고 말한다. 주께서는 친히 교회를 견고히 세우시고 우리들을 끝까지 지키실 것이다. 그는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 반석[시몬 베드로의 신앙고백]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지옥]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하셨다(마 16:18).

[9-11절]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의 전 가운데서 주의 인자하심을 생각하였나이다.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과 같이 찬송도 땅끝까지 미쳤으며 주의 오른손에는 정의가 충만하였나이다. 주의 판단을 인하여 시온 산은 기뻐하고 유다의 딸들은 즐거워할지어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의 전에서 그의 인자하심을 생각하였다. 그것은 그가 성전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기도할 때 그러했다는 뜻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강대한 원수들을 물리쳐 주신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었다. 오늘날 우리의 구원도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와 긍휼이다(엡 2:8-9).

시편 저자는 하나님께 그의 이름과 같이 찬송도 땅끝까지 미쳤다고 아뢴다. 그의 말은 인자하신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 세계까지 전파될 것이며 이방인들도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리라는 뜻이다. 과연 이 예언적 말씀대로 오늘날 하나님의 진리가 온 세계에 전파되었고 각 나라, 각 족속에서 믿는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었다.

또 시편 저자는 하나님께 하나님의 오른손에 정의가 충만하였다고 고백한다. 하나님께서는 능력의 오른손으로 공의를 행하신다. 그는 자기를 거슬러 악을 행하는 자들을 공의로 심판하시고 징벌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신 재판장”이시다(시 7:11).

시편 저자는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을 인해 시온 산이 기뻐하고 유다의 딸들이 즐거워하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공의의 판단으로 불의한 자들을 징벌하시기 때문에, 성도들은 비록 세상에서 악인들로 인해 때때로 환난과 핍박, 슬픔과 고통을 당하지만 하나님의 공의의 판단으로 인해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될 것이다.

[12-14절] 너희는 시온을 편답하고 그것을 순행하며 그 망대들을 계수하라. 그 성벽을 자세히 보고 그 궁전을 살펴서 후대에 전하라. [이는] 이 하나님은 영영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인도하실 것임이로다].

시편 저자는 유다의 딸들 즉 하나님의 백성에게 시온을 거닐고 그것을 돌고 그 망대들의 수를 세고 그 성벽을 자세히 보고 그 궁전을 살피라고 말한다. 시온 성을 두루 거닐며 돌아보고 그 망대와 성벽을 자세히 살피라는 것은 시온 성이 이상이 없다는 것, 즉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호하셨고 그들의 피난처가 되셨고 그것을 구원하셨다는 것을 확인하라는 뜻이다. 그는 또 하나님께서 시온을 보호하시고 구원하신 사실을 후대에 전하라고 말한다. 한 세대는 가고 또 한 세대는 온다. 어른들은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고 가르쳐야 한다(신 6:6-7; 11:18-19; 욜 1:3).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를 우리의 자녀들에게 전해야 할 이유는 이 하나님께서 영원히 우리의 하나님이시며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 백성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세상에 공의를 시행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고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신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영생의 길이며 그의 뜻대로 사는 것이 평안과 행복의 길이다.

시편 48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피난처가 되신다. 그는, 우리의 삶의 여정에서 경험한 대로, 우리를 대적하는 자들을 패배케 하시며 교회를 견고히 세우시고 지켜주신다.

둘째로, 우리는 위대하신 하나님을 교회 안에서 극진히 찬송해야 한다. 하나님의 성, 곧 교회는 터가 높고 아름다우며 세계의 모든 성도는 그것을 사모하며 즐거워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긍휼함으로 우리를 도우시고 구원하셨음을 깨닫고 그에게 극진히 기쁨의 찬송을 올리자.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며 그의 뜻대로 바르고 선하게 살면서 우리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에 관해 힘써 전하며 가르쳐야 한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지식의 시작이며 영생이며 평안과 행복이다. 부모가 자녀들에게 남겨줄 수 있는 가장 귀한 유산은 이 지식과 믿음이다.

49편: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음

[1-4절] 만민들아, 이를 들으라. 세상의 거민들아, 귀를 기울이라. 귀천 빈부를 물론하고 다 들을지어다. 내 입은 지혜를 말하겠고 내 마음은 명철을 묵상하리로다. 내가 비유에 내 귀를 기울이고 수금으로 나의 오묘한 말을 풀리로다.

남녀노소의 구별 없이, 피부색과 국적과 언어의 구별 없이, 사회적 신분, 지식 수준, 경제적 여유 등과 관계없이,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 곧 지혜와 명철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비유’와 ‘오묘한 말’이라고도 표현한다. 성경말씀은 심오하며 때때로 금방 잘 깨달아지지 않고 성령께서 깨닫게 하실 때 깨달아진다. 그러나 그 말씀은 우리가 귀를 기울여 들어야 할 말씀이다. 그래야 우리가 하나님을 바르게 믿을 수 있고(롬 10:17), 그래야 온전한 자가 되며(딤후 3:16-17) 복된 삶을 누릴 수 있다(시 1:2-3; 계 1:3).

[5-9절] 죄악이 나를 따라 에우는 환난의 날에 내가 어찌 두려워하랴.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풍부함으로 자긍하는 자는 아무도 결코 그 형제를 구속(救贖)하지 못하며 저를 위하여 하나님께 속전(贖錢)을 바치지도 못할 것은 저희 생명의 구속(救贖)이 너무 귀하며 영영히 못할 것임이라. 저로 영존하여 썩음을 보지 않게 못하리니.

“죄악이 나를 따라 에우는”이라는 원어는 “나를 속이는 자들의 악이 나를 둘러싸는”이라는 뜻이다. 원수들은 그를 속이고 해치고 죽이려고 하였으나 그는 그들의 핍박과 죽음의 위협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을 의지하였기 때문이다.

사람의 구속(救贖) 즉 구원은 재물을 가지고 되지 않는다.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풍부함으로 자긍하는 자는 아무도 결코 그 형제를 구속(救贖)하지 못하며 그를 위해 하나님께 속전(贖錢)도 바치지 못한다. 왜냐하면 사람의 생명의 구속이 너무 귀하여 영영히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돈으로 다른 이를 죽지 않게 하지 못한다.

사람의 육체의 생명도 고귀하여 천하를 얻어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소용이 없을 것이지만(마 16:26), 영생은 더욱 그러하다. 주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1만 달란트 빚 탕감으로 비유하셨다(마 18:24). 그것은 우리가 결코 갚을 수 없는 금액이다. 구원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배로운 피로만 가능하다(벧전 1:18-19).

[10-12절] 저가 보리로다. 지혜 있는 자도 죽고 우준하고 무지한 자도 같이 망하고 저희의 재물을 타인에게 끼치는도다. 저희의 속 생각에 그 집이 영영히 있고 그 거처가 대대에 미치리라 하여 그 전지(田地)를 자기 이름으로 칭하도다.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치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사람은 지혜 있는 자나 우준하고 무지한 자나 모두다 죽으며 그의 재물이 다른 이에게 가는 것을 볼 것이다. 사람은 실로 죽는 존재다. 머리가 좋고 공부를 잘 하는 자도 그렇지 못한 자도 결국 죽으며, 그가 죽으면 그가 가지고 있는 재산은 자식이나 가족에게로 돌아간다.

그러나 사람들은 속으로 자기 집이 영원히 있고 그 거처가 대대에 미치리라고 생각하며 그 토지를 자기 이름으로 불러 ‘아무개의 땅’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영원히 살 것처럼 산다. 그러나 이것은 무지하고 어리석은 일이다. 사람은 죽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죽을 것을 알고 사는 것이 지혜이다.

사람이 존귀한 자이지만 죽고만다면 짐승과 다를 바가 없다. 사람이 죽는 자일 뿐이라면 참 허무하다(전 12:7-8). 그렇기 때문에 사람의 참된 가치와 소망은 이 땅의 것에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있으며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영원한 생명 곧 영생에 있다. 그러므로 다윗은 죽을병에 걸렸을 때 시편 39:7에서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라고 고백하였다.

[13-15절] 저희의 이 행위는 저희의 우매함이나 후세 사람은 오히려 저희 말을 칭찬하리로다(셀라). 양같이 저희를 음부[무덤]에 두기로 작정되었으니 사망이 저희 목자일 것이라. 정직한 자가 아침에 저희를 다스리리니 저희 아름다움이 음부[무덤]에서 소멸하여 그 거처조차 없어지려니와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시리니 이러므로 내 영혼을 음부[무덤]의 권세에서 구속(救贖)하시리로다(셀라).

‘저희의 이 행위’는 그들의 집과 땅을 영원히 자기 소유로 생각하며 사는 자들의 행위를 가리킨다. 그들의 이 행위는 그들의 우매함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죽으면 그들의 소유가 그들의 것이 되지 못하고 남의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후손들은 오히려 그들의 말을 칭찬할 것이다. ‘후세 사람’이라는 원어(아카레헴)는 ‘그들의 후손들’이라는 뜻이다. 그들의 후손들도 우매할 것이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 마치 양들이 양우리에 모이듯이, 모든 사람은 양같이 무덤에 두기로 작정되었다. ‘음부’(쉐올 לוֹא������)는 무덤을 가리킨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다(히 9:27). 목자가 양을 치듯이, 사망은 모든 사람을 지배한다.

시편 저자는 돌연히 “정직한 자가 아침에 저희를 다스리리니”라고 말한다. 그는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들이 새 세계에서 악인들을 통치할 것이라고 말한다. 성도들은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얻을 것이며(계 2:26) 천년왕국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릴 것이다(계 20:4). 그러나 악인들은 죽을 때 세상에서 누리던 그 아름다움을 잃어버리고 그 거처들도 없어질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참된 구원자이시며 자기 백성을 영접하시고 그들의 영혼을 무덤과 지옥 권세에서 구속(救贖)하실 것이다. 성도는 죽을 때 하나님의 은혜로 영생의 나라인 천국으로 인도될 것이다.

[16-20절] 사람이 치부(致富)하여 그 집 영광이 더할 때에 너는 두려워 말지어다. [이는] 저가 죽으매 가져가는 것이 없고 그 영광이 저를 따라 내려가지 못함이로다. 저가 비록 생시에 자기를 축하하며 스스로 좋게 함으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지라도 그 역대의 열조에게로 돌아가리니 영영히 빛을 보지 못하리로다.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세상 사람이 부자가 되고 집이 크고 아름답고 사치할 때에 성도는 마음이 위축되고 두려운 마음을 가질 필요가 없다. 성도는 악인들의 세상적, 물질적 부귀영화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부자는 죽을 때 가져가는 것이 없고 그의 영광이 그를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무덤에 묻히는 시체는 수의 한 벌과 관 한 개면 족하다. 그는 그의 땅과 집, 금은보석과 돈을 가져갈 수 없다. 그것을 무덤 속에 넣어준다 할지라도, 그는 그것을 사용하거나 누리지 못한다.

그가 살아 있을 때 스스로를 축하하며 남들의 칭찬을 받을지라도, 그는 결국 열조들에게로 돌아갈 것이다. 죽은 영혼은 천국이나 지옥에서 모일 것이다. 무덤에 묻힌 몸이 햇빛을 보지 못하듯이, 영광의 부활에 참여치 못하는 자들은 다시는 밝은 빛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과 같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존귀하게 지으셨지만, 사람이 하나님과 그의 계명과 자신의 죄악됨과 세상의 헛됨을 깨닫지 못한다면 짐승과 다를 바 없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참된 지식과 깨달음이 중요하다.

시편 49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사람의 생명의 구속(救贖)은 심히 값진 것이다. 그것은 은이나 금으로 살 수 없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핏값으로만 가능하다.

둘째로, 사람은 존귀하지만 깨닫지 못하는 자는 멸망하는 짐승과 같다(12, 20절). 깨달음 없는 사람은 헛된 우상을 섬기며 돈을 하나님보다 더 가치 있게 여기며 또 남들에게 짐승보다 더 악한 일을 행한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구원하실 자들을 무덤과 지옥에서 구원하여 천국으로 영접하신다.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는 것은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보화이다. 그것을 주실 자는 하나님뿐이시다!!


50편: 성도의 특권

[1-3절] 전능하신 자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사 해 돋는 데서부터 지는 데까지 세상을 부르셨도다. 온전히 아름다운 시온에서 하나님이 빛을 발하셨도다. 우리 하나님이 임하사 잠잠치 아니하시니 그 앞에는 불이 삼키고 그 사방에는 광풍이 불리로다.

‘해 돋는 데서부터 해 지는 데까지’는 동양과 서양의 각 나라, 각 민족, 각 언어, 각 피부색을 다 포함한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을 다 불러모으신다. 그가 세상을 모으시는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함이다. 그에게는 세상을 불러모으실 권한과 권세가 있으시다.

하나님께서는 온전히 아름다운 시온에서 빛을 발하셨다. 시온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이며 그가 발하시는 빛은 죄악을 추방하는 공의의 빛이다. 그 빛은 세상의 모든 사람을 심판하실 기준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오셔서 공의로 심판하실 것이다. 그는 잠잠치 않으시며 그 앞은 불이 삼키고 그 사방에는 광풍이 불 것이다. 그는 말씀으로 의와 불의, 선과 악, 진리와 비진리를 밝히시고 불과 광풍으로, 즉 능력과 위엄으로 온 세상을 공의롭고 철저하게 심판하실 것이다.

[4-6절] 하나님이 그 백성을 판단하시려고 윗 하늘과 아래 땅에 반포하여 이르시되 나의 성도를 내 앞에 모으라. 곧 제사로 나와 언약한 자니라 하시도다. 하늘이 그 공의를 선포하리니 하나님 그는 심판장이심이로다(셀라).

온 세상을 심판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먼저 자기 백성을 심판하시려고 그들을 모으신다. 하나님의 백성은 ‘제사로 나와 언약한 자’라고 표현되었다. 구약의 중요한 규례는 제사이며 그 핵심은 속죄이었다. 그것은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방법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을 예표하였다. 거기에 죄의 용서와 하나님과의 화목이 있고 영생이 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매우 중요한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믿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의 특징은 공의이다. 공의는 하나님의 계명에 일치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도덕적 속성과 의지가 나타난 것이 그의 계명이다. 하나님께서는 계명을 따라 공의로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다.

[7-15절] 내 백성아, 들을지어다. 내가 말하리라. 이스라엘아, 내가 네게 증거하리라. 나는 하나님 곧 네 하나님이로다. 내가 너의 제물을 인하여는 너를 책망치 아니하리니 네 번제가 항상 내 앞에 있음이로다. 내가 네 집에서 수소나 네 우리에서 수염소[숫염소]를 취치 아니하리니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천산(千山)의 생축이 다 내 것이며 산의 새들도 나의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않을 것은 세계와 거기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책망하기를 원하신다. 그것은 그들의 제사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은 항상 하나님 앞에 번제를 드렸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서 수소나 숫염소를 취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삼림의 짐승들과 수천 개의 산들에 있는 짐승들이 다 하나님의 것이며 산의 새들도 또한 들의 짐승들도 다 그의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그가 배가 고프시다 하더라도 자기 백성에게 말씀하지 않으실 것은 세계와 거기에 충만한 것들이 다 그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상 그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는가? 하나님께서는 단지 자기 백성의 제사를 원하신 것이 아니었다.

그가 원하신 것은 첫째로, 감사로 제사하는 것이다. 그는 우리가 그의 모든 은혜, 특히 그의 속죄의 은혜를 감사하기를 원하신다. 그것이 참 믿음과 하나님 섬김의 일이 될 것이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에게 서원한 것을 갚기를 원하신다. 그에게 쉽게 서원하고 쉽게 그것을 저버리는 것은 그를 멸시하는 태도이다. 하나님께 서원한 것을 갚는 것은 그를 인정하고 두려워하는 바른 태도이다. 셋째로, 그는 우리가 환난 날에 그에게 부르짖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을 믿는 자는 특히 환난 날에 그를 의지하고 그의 도움을 간구할 것이다.

[16-21절] 악인에게는 하나님이 이르시되 네가 어찌 내 율례를 전하며 내 언약을 네 입에 두느냐? 네가 교훈을 미워하고 내 말을 네 뒤로 던지며 도적을 본즉 연합하고 간음하는 자와 동류가 되며 네 입을 악에게 주고 네 혀로 궤사를 지으며 앉아서 네 형제를 공박하며 네 어미의 아들을 비방하는도다. 네가 이 일을 행하여도 내가 잠잠하였더니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너를 책망하여 네 죄를 네 목전에 차례로 베풀리라 하시는도다.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의 위선을 지적하신다. 악인은 하나님의 율례를 전하며 하나님의 언약을 말하면서 실제로는 악을 행하는 위선자이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다”고 말씀하셨었다(사 29:13). 우리는 위선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또 악인들의 실상을 지적하신다. 악인들은 하나님의 교훈을 미워하고 그의 말씀을 뒤로 던진다. 사람들의 죄악들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는 것이 근본적인 죄악이다. 또 그들은 도적을 보면 연합하고 간음하는 자와 동류가 된다. 시편 1:1은 복 있는 자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한다”고 말하였다. 악한 친구와의 교제는 우리의 선한 행실을 더럽힌다(고전 15:33). 또 악인들은 악하고 거짓된 말을 하고 형제를 공박하며 비방한다. 이와 같이, 악인들은 말과 행위로 악을 행하는 자들이다.

하나님께서는 또 악인들의 결말을 선언하신다. 하나님께서 잠잠하실 때 악인들이 그를 무시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악을 낱낱이 다 드러내시고 그 행위대로 공의롭게 보응하실 것이다(롬 2:6).

[22-23절]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성도는 우선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말고 그를 기억하고 생각해야 한다. 만일 그를 생각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찢으실 것이며 그들을 건질 자 없을 것이다.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이 불경건이요 모든 죄의 근원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잊지 않고 기억할 때 그의 이름을 부르고 그를 의지하며 그의 계명을 힘써 행하게 될 것이다.

성도는 또한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려야 한다. 감사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그의 은혜를 인정하는 데서 나온다. 성도는 또한 행위를 옳게 해야 한다. 의롭고 선한 행위는 참된 회개의 열매이며 구원의 표이다. 그런 행위는 그의 구원을 확증한다.

시편 50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구약 성도는 제사로 하나님과 언약한 자이다. 5절, “나의 성도를 내 앞에 모으라. 곧 제사로 나와 언약한 자니라.” 이것은 구약 성도의 특권이었다. 구약의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을 상징한다. 신약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다.

둘째로, 우리는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드려야 한다. 14절,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23절,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감사는 하나님과 그의 은혜를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으로 구원받은 신약 성도들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며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의 계명을 즐거이 순종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환난 날에 하나님을 불러야 한다. 이 세상에는 환난이 많고 그 원인은 하나님의 징계도 있고 단순한 인격 훈련도 있지만, 모든 환난은 인격 단련의 유익뿐 아니라, 특히 기도 응답을 체험케 하는 유익이 있다. 우리는 환난 날에 기도하여 응답받는 체험을 하자.


51편: 회개의 기도

본 시편은 표제어의 설명대로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의 지적을 받고 회개하며 죄사함을 간구하는 내용이다.

[1-2절]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다윗은 하나님의 긍휼에 근거하여 죄사함을 간구하였다. 사람의 죄사함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에 근거한다. 하나님의 공의는 진노를 일으키지만 그의 긍휼은 죄사함을 가능케 한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기를 간구했다. 죄는 더러운 때와 같다. 몸이 더러울 때 깨끗이 씻듯이, 죄는 깨끗이, 말갛게 씻음 받아야 한다.

[3-4절]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다윗이 죄씻음을 간구한 까닭은 그가 자신의 죄를 알고 그의 죄가 항상 그 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죄에 대한 깨달음이 있고 그것을 부끄럽고 고통스럽게 생각할 때 회개할 수 있다.

다윗은 자신의 죄가 하나님께 범한 죄임을 고백한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라는 원문(레카 레밧데카 카타시)은 직역하면 “내가 주께, 오직 주께만 범죄하여”이다. 다윗은 그가 밧세바와 그 남편 우리아에게 잘못한 것이 단지 사람에게 잘못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잘못한 것임을 강조하여 고백한 것이다.

성경은 죄가 단지 인간 관계의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께 대한 죄임을 말한다. 요셉은 그와 동침하기를 청하는 보디발의 아내에게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라고 말하였다(창 39:9). 율법을 주신 이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율법을 범한 죄는 그의 속성을 침해하고 그의 권위를 손상시킨 악이다. 여기에 죄의 심각성이 있다. 부모를 공경하고 살인하지 말고 간음하지 말고 도적질하지 말고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율법을 어긴 것은 바로 하나님 앞에 죄를 짓는 것이다. 다윗은 또 자신의 죄를 판단하시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고백한다. 율법을 주신 하나님께서는 공의로 세상을 심판하신다.

[5-6절]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

사람은 죄 가운데서 잉태되어 죄 가운데서 출생한다. 즉 죄성을 가진 죄인으로 태어난다. 사람의 죄성은 뿌리깊다. 이것을 원죄라고 한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만 가능하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중심의 진실함과 지혜의 깨달음을 원하신다. 그것이 마음의 변화이다. 구원은 마음의 변화이다. 불경건하고 부도덕하던 심령이 변하여 하나님을 진실히 경외하고 그의 계명을 따라 의와 선을 행하는 지혜를 얻는 것이 구원이다.

[7-9절]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

우리의 죄를 씻어주실 분은 하나님뿐이시며 그가 우리 죄를 씻어주실 때 우리는 깨끗함을 얻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씻어주시는 도구는 우슬초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상징한다. 죄는 오직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로 씻어진다.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죄씻음은 완전하다. 본문은 그것을 눈에 비교하였다. 이사야 1:18,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또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죄씻음의 결과는 기쁨과 즐거움이다. 우리는 죄씻음의 구원을 받을 때 기쁨과 즐거움도 함께 받는다.

[10-11절]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사람의 본성은 부정(不淨)하며(마 15:19) 죄는 마음을 더욱 더럽힌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은 마음의 변화, 즉 생각과 감정과 의지의 변화를 가져온다. 또 하나님께서는 우리 속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해주신다. ‘정직한 영’이라는 원어(루아크 나콘)는 ‘견고한 영’(NASB, NIV)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의지의 새로움을 나타낸다. 우리는 견고한 의지를 가지고 결심하며 의와 선을 실천해야 한다.

다윗은 또 자신을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기를 기도한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지지 않기를 구한 것이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성도의 큰 특권이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교제의 단절은 곧 멸망이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사울을 떠나셨고 그가 하나님께 기도했지만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대답지 않으셨다(삼상 28:6).

다윗은 또 주의 성령을 그에게서 거두지 마시기를 기도한다. 여호와의 영께서는 사울에게서 떠나셨고 그의 부리신 악령이 그를 번뇌케 하였었다(삼상 16:14). 이단자는 성령이 없는 자이다(유 19). 그러나 성령께서는 구주 예수님을 믿는 자들 안에 오셨고 영원히 거하신다(요 14:16; 롬 8:9). 또 그는 거룩한 영으로서 우리에게 거룩한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주시며 우리의 거룩한 삶의 원동력이 되신다.

[12-13절]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그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다윗은 또 하나님께 구원의 즐거움을 자기에게 회복시켜 주시기를 기도한다. 죄는 우리에게 근심과 슬픔과 두려움을 주었지만, 죄사함의 구원은 기쁨과 평안을 준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은혜이며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다(살전 5:16-18). 구원받은 성도들이 들어갈 하나님의 나라는 기쁨과 평강이 충만한 곳이다(롬 14:17).

다윗은 또 하나님께 자원하는 심령을 주셔서[혹은 ‘당신의 자유하신 영으로’(KJV, LXX)] 그를 붙들어 주시기를 기도한다. 하나님께서는 그 기쁘신 뜻을 자유로이 행하시는 주권자이시다. 우리는 본래 죄의 종이었으나 우리에게 전달된 하나님의 복음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고 의에게 종이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씻음을 통해 자유함을 얻었으므로 억지로 순종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자원하는 심령으로 하나님께 나아와 그의 명령을 즐거이 행해야 한다.

다윗은 또, “그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라고 말한다. 큰 실수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죄씻음 받은 성도는 자신의 경험을 다른 이들에게 간증함으로써 자기와 같은 자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도와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죄의 심각성과 죄씻음의 필요성, 또 죄씻음의 길과 죄씻음의 행복에 대해 그들에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4-15절]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주여, 내 입술을 열어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여 의를 주신다. 다윗은 피흘린 죄에서 자신을 건져주시기를 구한다. 그는 충성된 신하 우리아를 고의적으로 전장에서 죽게 하였다. 그런 종류의 죄를 지은 자는 죽어야 마땅하였다. 살인자나 간음자는 죽어야 마땅한 죄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구원해주셨다. 우리의 구원도 그러하였다.

구원은 하나님의 의의 행위이다. 하나님의 의는 죄인을 정죄할 수밖에 없으나 대속 제물을 통해 그 의가 만족되었고 우리의 구원이 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롬 3:24; 고전 6:11). 다윗은 하나님께서 주신 이 의(義)를 찬송하고 노래하며 전파하기를 소원한다. 영원히 죽을 죄인이며 지옥 형벌을 받아야 마땅한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대속으로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는 만입이 있어도 다 찬송하고 감사할 수 없는 귀한 은혜이다. 여기에 성도의 찬송이 있다(찬 23, 192, 405장).

[16-17절]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제사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바이었으나 그가 모든 제사를 무조건 기뻐하는 것이 아니시다. 그는 범죄자들이 회개치 않고 드리는 제사는 기뻐하지 않으신다(사 1:11, 13). 그는 오히려 상하고 통회한 마음을 원하신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참된 회개이다.

[18-19절]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 그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저희가 수소로 주의 단에 드리리이다.

다윗은 회개의 기도를 간절히 올린 후 하나님의 선한 뜻 가운데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으시기를 기도하였다. 지도자의 죄는 자신에게뿐 아니라 그가 책임 맡은 단체에 불행을 가져올 것이지만, 그의 회개와 죄사함은 그 단체에 회복이 될 것이다. 부모가 범죄하면 자녀들에게 불행이 오지만, 그가 회개하면 회복이 올 것이다. 다윗 왕의 범죄로 이스라엘 나라에는 어려움이 있고 예루살렘 성의 허물어짐이 있고 이방 나라의 침입의 위험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제 그는 그 죄를 회개하며 주의 선한 뜻 가운데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아주시기를 구한 것이다.

그때에 즉 그가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는 때, 즉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때,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실 것이며 그들은 수소로 하나님의 단에 드릴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의인들의 올바른 제사, 온전한 순종과 헌신을 기뻐하신다. 실상, 인간의 모든 문제는 영적 문제 곧 죄 문제이며 신앙 문제이다. 우리는 개인적으로나 단체적으로 신앙이 바르면 평안과 형통을 누릴 것이지만, 우리가 죄 가운데 있으면 불행과 죽음이 있을 것이다.

시편 51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본 시편은 죄의 본질을 증거한다. 죄는 하나님께 대한 범죄이다. 4절,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죄는 하나님의 인격과 속성과 권위와 영광에 대한 모독이요 손상이요 침해이다. 거기에 죄의 심각성이 있다. 또 모든 사람은 죄악 중에 출생하며 날 때부터 죄악성을 가지고 태어난다.

둘째로, 본 시편은 죄씻음의 필요성과 가능성에 대해 증거한다. 죄인들은 죄씻음을 받아야 한다(1-2절). 사람이 죄인의 신분으로는 영원한 멸망을 피할 수 없다. 죄씻음이 필요하다. 죄는 하나님의 긍휼과 그리스도의 피로만 씻음받을 수 있다. 이를 위해 그들에게 참으로 회개하는 상한 심령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다.

셋째로, 본 시편은 죄씻음의 결과에 대해 증거한다. 그 첫 번째 결과는 마음의 변화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정결한 마음을 주시고 또 견고한 영을 주신다. 그는 우리의 의지를 새롭게 하신다.

죄씻음의 두 번째 결과는 하나님과의 교제의 회복이다. 죄인은 본래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으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 앞에서 물리치시거나 쫓아내지 않으실 것이며 또 그의 영을 우리에게서 거두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그와 다시 그리고 계속 교제케 하실 것이다.

죄씻음의 세 번째 결과는 구원의 즐거움의 회복이다. 하나님께서는 죄씻음 받은 성도들에게 기쁨과 평안을 주실 것이다. 죄인에게는 기쁨과 평안이 없으나, 죄씻음 받은 성도에게는 기쁨과 평안이 있다.


52편: 악인의 영원한 멸망

본 시편은 표제어의 내용대로 에돔 사람 도엑이 사울 앞에서 다윗이 아히멜렉의 집에 왔다고 말하던 때에 지은 것이다.

[1절] 강포한 자여, 네가 어찌하여 악한 계획을 스스로 자랑하는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항상 있도다.

‘강포한 자’라는 원어(깁보르)는 ‘힘센 자’(mighty man)(KJV, NASB, NIV)라는 뜻이다. ‘악한 계획’이라는 원어(라아)는 ‘악한 일’이라는 뜻이다. ‘힘센 자’는 에돔 사람 도엑을 가리켰다. 다윗은 그에게 네가 왜 악한 일을 자랑하는가라고 묻는다. 도엑은 제사장 아히멜렉을 죽게 하는 악한 일을 행했다. 다윗은 그러나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항상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그를 경외하는 성도를 향하신 그의 인자하심을 가리킨다. 성도는 비록 부족함이 없지 않으나 하나님의 인자하심 때문에 원수의 핍박 속에서 피할 길을 얻고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고 구원을 얻는다.

[2-4절] 네 혀가 심한 악(하와)[멸망](BDB)을 꾀하여 날카로운 삭도같이 간사를 행하는도다[거짓을 행하는 자여, 네 혀가 멸망을 꾀하며 날카로운 면도칼 같도다](NASB, NIV). 네가 선보다 악을 사랑하며 의를 말함보다 거짓을 사랑하는도다(셀라). 간사한[속이는] 혀여, 네가 잡아먹는 모든 말을 좋아하는도다.

사울 왕의 칼날을 피해 도망하던 다윗은 아히멜렉에게 방문하여 먹을 것을 요청하고 칼도 있으면 하나 줄 것을 청했었다. 그러나 후에 도엑은 사울에게, 다윗이 아히멜렉에게 찾아왔고 아히멜렉이 다윗을 위해 하나님께 물었고 그에게 음식도 주고 골리앗의 칼도 주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말로 인해 사울은 아히멜렉이 다윗과 공모하여 자기를 대적했다고 오해하여, 아히멜렉과 제사장 85명과 여자들과 아이들까지 다 죽였다(삼상 22:18). 도엑의 말은 사울에게 오해를 줄 수 있는 말이었다. 그것은 실상 거짓말과 같았다. 그의 말로 인하여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죽임을 당한 것이었다. 실상, 다윗은 사울 왕을 반역한 일이 없고 악을 도모하지도 않았다. 또 제사장 아히멜렉은 다윗과 공모한 일이 없었다. 그는 아무 잘못이 없었다. 그는 다윗과 사울 왕과의 갈등의 문제도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삼상 22:15).

[5절] 그런즉 하나님이 영영히 너를 멸하심이여, 너를 취하여 네 장막에서 뽑아내며 생존하는 땅에서 네 뿌리를 빼시리로다(셀라).

도엑의 악한 일과 거짓말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공의로 보응하실 것이다. ‘그런즉’이라는 원어(감)는 ‘이와 같이’(likewise)(KJV)라고 번역되기도 하였다. 그것은 도엑이 악을 행한 것같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재앙을 내리실 것을 보인다. 원수를 갚는 일은 하나님께 있다. 신명기 32:35, “보수(報讎)는 내 것이라. 그들의 실족할 그때에 갚으리로다. 그들의 환난의 날이 가까우니 당할 그 일이 속히 임하리로다.” 로마서 12: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악한 자를 영원히 멸하실 것이다. 그는 그를 그 집에서 뽑아내시며 생존 세계에서 제거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보응은 참으로 무섭다.

[6-7절] 의인이 보고 두려워하며 또 저를 비웃어 말하기를 이 사람은 하나님으로 자기 힘을 삼지 아니하고 오직 그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며 제 악으로 스스로 든든케 하던 자라 하리로다.

의인들은 도엑의 결말을 보고 두려워하며 또 그를 비웃으며 그가 하나님으로 자기 힘을 삼지 않고 그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며 자기의 악으로 스스로 든든케 하던 자라고 말할 것이다. 세상의 악한 자들은 하나님 대신에 그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는 자들이다. 재물은 일시적으로 힘이 될지 모르나 갑자기 없어지기도 하고 전쟁의 날에나 죽음 앞에서 아무 소용이 없다. 또 악으로 자신을 든든히 하는 것은 심령을 완악케 할 뿐이다.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악인을 멸망시키실 것이며 의인은 그 광경을 보고 두려워할 것이다.

[8절] 오직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영히 의지하리로다.

‘오직 나는’이라는 원어(와아니)는 ‘그러나 나는’이라는 말로서 앞에 말한 악인과 자신을 대조시킨다. 악인은 악을 행하다가 하나님의 공의의 보응을 받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의인은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올리브 나무)와 같다. 하나님의 집은 하나님께서 주인이시며 의와 사랑, 평안과 기쁨이 넘친 집이다. 푸른 감람나무는 죽었거나 시든 나무가 아니고 생기가 넘친 나무이며 감람 열매 즉 올리브 열매를 많이 맺는 나무이다. 감람유 즉 올리브유는 식용과 약용으로 유용하게 쓰인다. 또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영히 의지할 것이다. ‘의지하리로다’는 원어는 완료형이지만, 확신이나 소원을 나타내는 완료형이다.

의인의 삶과 악인의 삶은 현저히 대조된다. 악인은 하나님을 자기 힘으로 삼지 않고 오직 그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며 악으로 자신을 든든케 하는 자이다. 그는 일시적으로 잘되는 것 같으나 결국 망할 것이다. 그러나 의인은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을 것이다. 그는 일시적으로 고난 당할 수 있으나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9절] 주께서 이를 행하셨으므로 내가 영영히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이 선함으로 주의 성도 앞에서 내가 주의 이름을 의지하리이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악인에게 공의의 심판을 행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 영영히 감사하고 하나님의 이름이 선하시기 때문에 성도들 앞에서 그의 이름을 의지하겠다고 고백한다.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의 거짓되고 악한 말들에도 불구하고 다윗을 보호하셨고 구원하셨고 그를 해치려는 악인들을 멸망시키셨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고 성도에게 그의 인자하심으로 주신 선한 일이라는 것을 깨닫는 성도들은 하나님께 영영히 감사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더욱 의지할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한 자마다 그에게 감사할 것이다.

시편 52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악한 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면도칼같이 남을 해치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악한 사람은 악을 행할 때 거짓말로 명분을 만들고 다른 사람들과 자기 양심을 속인다. 우리는 선보다 악을 행하거나 의보다 거짓을 행하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속이는 혀를 가지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 대신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고 악으로 스스로 든든케 하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보응을 두려워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악한 자들의 악행에 대해 보응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그 행한 대로 갚으시는 공의의 심판자이시다. 그는 악인들을 멸하실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서 살 자격이 없는 자들이다. 그들은 복된 새 세계에서 살 자격이 없고,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자들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분명하게 증거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보응과 지옥 형벌을 두려워해야 한다.

셋째로, 성도는 악과 불의와 거짓을 버리고 의와 선과 진실을 행해야 한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한 삶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신 본래의 모습이다. 그것이 원의(原義) 즉 원래의 의이었다. 구주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의 정상적인 삶은 바로 이런 선한 모습이다. 또 성도는 하나님의 인자하심만 의지하고 하나님을 찬송해야 한다. 우리의 구원도 성화도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또 까닭 없이 죽은 의로운 제사장들과 그 가족들에게는 천국에서의 보상이 있을 것이다.

53편: 어리석은 자

[1절]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며 가증한 악을 행함이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본 시편은 시편 14편과 내용이 거의 같다. ‘어리석은 자’는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못하는 자요 그래서 잘못된 행동을 하고 자신에게 불행하고 해로운 결과를 피하지 못하고 당하는 자이다.

우선, 어리석은 자는 마음으로 하나님이 없다고 말한다.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이 사람의 가장 근본적인 어리석음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계시기 때문이며 그가 천지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셨고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주 만물과 인간의 역사를 다스리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은 자식이 부모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을 부정하는 자는 행위가 부패하게 되어 있다. 인류 역사가 그것을 증거한다.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이는 악을 떠나지 못한다(잠 16:6). 하나님 없이 사는 자는 죄악될 수밖에 없고 때때로 가증한 악을 행한다. 그들 속에서는 참된 선을 찾아볼 수 없다. 예수님을 안 믿는 자들 중에도 착한 사람들이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 착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것부터가 착하지 못한 것이며 또 하나님 경외함이 없는 선은 환경 여건에 따라, 자기 자신에게 유리하고 불리함에 따라 변할 수 있는 선이다. 그것은 결함이 있는 선이다.

[2-3절]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는 자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각기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지만, 그런다고 계신 하나님이 안 계신 것이 아니다. 폭우가 쏟아지는 밤에도 비구름 너머에 빛나는 태양이 있듯이, 세상에 무신론자들과 부도덕한 자들이 가득해도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계셔서 세상을 살피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신즉 모든 사람이 다 물러가 더러워졌고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었다. 물러갔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으로부터, 즉 인생의 정로(正路)로부터 물러갔다는 뜻이다. 인생은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졌고 인생의 정로에서 탈선하였다. 그것이 죄이다. 죄는 사람의 인격을 더럽히는 요소들이다. 그것은 다 자신의 마음을 더럽히고 타인들의 마음에 고통을 주고 인간 관계를 병들고 황폐하게 만들고 온 세상을 어지럽힌다. 하나님을 떠난 자들은 더러워졌고 온 세상이 더러워졌다. 사람은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나 깨끗한 것을 좋아하고 깨끗해야 하지만, 세상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하나님의 뜻은 사람이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이며 그것이 인간다운 모습이다. 그러나 죄인은 선을 행하지 않는다. 그는 인간답지 못하고 사나운 짐승과 같다. 이 세상에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도 없다. 세상의 종교나 도덕적 교훈은 죄인을 변화시켜 의롭고 선한 자가 되게 하지 못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구원이 아니고서는 새 삶을 살 수 없다.

[4-5절] 죄악을 행하는 자는 무지하뇨? 저희가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하나님을 부르지 아니하는도다. 저희가 두려움이 없는 곳에서 크게 두려워하였으니 너를 대하여 진 친 저희의 뼈를 하나님이 흩으심이라. 하나님이 저희를 버리신 고로 네가 저희로 수치를 당케 하였도다.

죄악을 행하는 자는 무지한가? 그렇다. 무지하다. 왜냐하면 죄는 하나님의 진노를 가져오고 자신에게 불행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가 그것을 알았더라면 죄악을 행치 않았을 것이다. 또 죄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의 백성을 떡 먹듯이 먹는다. 떡 먹듯이 먹는다는 말은 너무 쉽게, 양심의 가책 없이 해치고 죽인다는 뜻이다. 인간의 죄악은 경건하고 순진한 사람들을 미워하고 핍박하고 해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핍박하는 것이며, 그것은 큰 죄악이다(마 25:42-45; 행 9:4).

또 죄를 짓는 자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사람이 창조주 하나님을 찬송하고 감사하며 기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죄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그것이 곧 불경건이다. 실상,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으므로 악을 행한다.

그러나 죄악을 행하는 그들, 곧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하는 그들은 하나님의 징벌을 받을 것이다. 그들은 두려움이 없었던 곳에서 크게 두려워할 것이다. 그것은 성도를 대적하는 그들의 뼈를 하나님께서 흩으셨기 때문이다. 사람이 뼈가 부서져 흩어지면 회복이 불가능할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전혀 예상치 못했던 두려운 징벌일 것이다. 또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셨기 때문에 성도들은 원수들을 이기고 그들로 수치를 당하게 할 것이다. 원수들은 한때 교만하고 자랑하고 당당하게 보였으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징벌로 패망하여 수치를 당할 것이며, 하나님의 백성은 결국 원수들을 이길 것이다.

[6절] 시온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줄 자 누구인고? 하나님이 그 백성의 포로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며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본문의 첫 문장은 원문에서 시편 14:7과 같이 “오,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노라”이다. 이것은 경건한 자들의 소원인 동시에 또한 예언적 기도이다. 하나님께서는 과연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시온 곧 예루살렘에 보내주셨다. 다윗의 예언적 기도는 성취되었다. 또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포로된 것을 돌이키실 것이다. 육신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은 장차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돌아올 것이다. 그러나 영적으로 온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죄와 사망과 불행과 사탄의 포로된 상태에서 구원받아 새로운 삶을 살 것이다.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실 자로 이 세상에 오셨다(마 1:21).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될 복음이 온 세상 모든 족속들에게 전파될 것이다(사 2:2; 눅 24:47).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자들 중에 속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한다.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의 백성의 기쁨의 이유이다. 사실, 죄와 사망과 사탄의 권세와 지옥 형벌로부터의 구원보다 더 큰 복은 없다.

시편 53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무신론은 어리석은 사상이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창 1:1). 하나님께서는 영원하시다. 그는 영원자존하신 하나님이시다. 천지만물은 그에 의해 창조되었다. 무신론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에서 피조물이 창조주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이니 어리석고 악한 사상이다. 창조주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은, 부모가 낳아 양육하여 자란 자녀가 자기를 낳은 부모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어리석고 악한 사상이며 허무한 사상이다.

둘째로, 무신론은 부도덕하다. 사람의 도덕성, 즉 바르고 선하게 살려는 마음은 창조주 하나님의 도덕성에서 나왔다. 그러므로 창주주 하나님을 부정하는 자는 도덕의 근거를 잃어버릴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그는 이해관계에 따라서 기회주의적이게 된다. 더욱이, 무신론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을 핍박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도덕적인 삶을 추구하며 무신론과 부도덕을 정죄하기 때문이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무신론자들로 수치를 당케 하실 것이다. 무신론자들은 세상에서 불경건하고 부도덕한 생활을 하고 특히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그 불경건하고 부도덕한 생활을 죄로 간주하시고 징벌하시며, 그 결과 그들은 수치를 당할 것이다. 모든 악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징벌로 수치를 당할 것이다.

넷째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인정하며 그를 경외하고 그의 계명을 순종하고 실천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세상에서 무신론자들에게 핍박을 받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구원하시고 지키실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죄와 사망과 사탄의 권세와 지옥 형벌로부터 구원을 얻을 것이다. 세상에 구원보다 더 큰 복은 없다. 그것은 구원받은 성도의 기쁨과 감사의 이유이다.

54편: 하나님께서는 나를 돕는 자이심

[1-3절]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주의 힘으로 나를 판단하소서. 하나님이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이소서. 외인이 일어나 나를 치며 강포한 자가 내 생명을 수색하며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셀라).

다윗은 지금 고난 중에 있다. 그는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였지만,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낯선 자들이 일어나 그를 쳤다. 강포한 그들은 그의 생명을 찾았다.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던 사울은 다윗을 시기하고 미워하고 죽이려 했고 사울에게 충성을 바친다고 생각한 자들은 다윗을 잡는 일에 앞장섰다. 그들은 하나님을 그들 앞에 모시지 않는 자들, 즉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자들이었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자들은 악을 행한다. 경건한 다윗에게 고난의 현실이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단련을 위해 주신 현실이었다.

다윗은 고난 중에 하나님을 의지하며 기도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는 그를 인정하시고 사랑하시고 왕으로 작정하시고 기름 부으신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하며 그의 구원을 간구했다. 그는 도망 다니며 피곤하고 지쳤을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힘으로 그를 판단하시고 변호해주시기를 구하였다. 그는 하나님을 의지했고 믿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기도는 믿음의 표현이다. 믿음이 있는 자는 하나님께 기도할 것이지만, 믿음이 없는 자는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을 것이다.

[4-5절] 하나님은 나의 돕는 자시라. 주께서 내 생명을 붙드는 자와 함께 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에게 악으로 갚으시리니 주의 성실하심으로 저희를 멸하소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돕는 자시라고 고백한다. 돈이나 세상 권력은, 있는 것이 없는 것보다 도움은 되겠지만, 결정적 도움, 완전한 도움은 되지 못한다. 돈이 질병을 막아내지 못하고 돈이 사고나 천재지변을 막아내지 못한다. 성도에게는 재력과 세상 권력의 도움이 없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항상 그의 도움이 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어려울 때 완전한 도움이 되신다.

다윗은 또한 하나님께서 그의 생명을 붙드는 자들과 함께하신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다윗의 생명을 붙드는 자이시며 또 그런 자들을 그에게 주셨다. 사무엘상 23:14에 보면,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매일 찾았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그의 손에 붙이지 아니하셨다. 원수들이 성도의 생명을 해치려 하고 죽이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를 지키시면 그들은 그를 해치지 못한다.

다윗은 하나님께 원수들을 멸하시기를 간구한다. 성도의 원수는 궁극적으로 사탄이다. 가까이는 사탄의 하수인 노릇하는 사람들, 악하고 거짓되고 무지한 자들이 하나님의 사람을 미워하고 핍박하고 해치려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원수들을 재앙으로 갚으실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주의 성실하심으로 저희를 멸하소서”라고 말한다. ‘성실하심으로’라는 원어는 하나님의 진리대로, 율법대로, 공의롭고 일관되게라는 뜻이라고 본다. 하나님께서는 진리대로, 공의롭게 그들을 멸하실 것이다. 로마서 13:19,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6-7절] 내가 낙헌제로 주께 제사하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주의 이름이 선하심이니이다. 대저 주께서 모든 환난에서 나를 건지시고 내 원수가 보응받는 것을 나로 목도케 하셨나이다.

다윗은 하나님께 낙헌제로 제사드리며 그의 이름에 감사하겠다고 말한다. ‘낙헌제로’라는 원어(비네다바)는 ‘자원함으로, 혹은 자원제물로’라는 뜻이다. 구약의 제사는 일차적 의미인 속죄의 의미 외에 예배와 헌금의 의미도 있었다. 다윗은 하나님께 의무적인 제사나 형식적인 제사, 즉 오늘날 말로 하면 의무적인 예배나 형식적인 헌금이 아니고 기쁨과 즐거움의 예배와 헌금, 자원함의 예배와 헌금을 드리겠다고 고백한 것이다. 또 그는 하나님의 이름에 감사하겠다고 말한다. 감사는 의무와 형식에서 나오기 어려울 것이다. 참된 감사는 기쁨과 즐거움에서 나오며 자원함으로만 할 수 있다.

다윗은 자신이 자원함으로 제사를 드리고 감사를 올리는 이유가 하나님의 이름이 선하시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다윗의 자원적 제사와 감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체험했을 때 나온 것이다. 하나님께서 좋으신 하나님이심을 체험함이 아니면 어떻게 사람이 기쁨과 즐거움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헌금하며 감사할 수 있겠는가.

다윗이 체험한 하나님의 선하심은 7절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그의 모든 환난에서 그를 건지셨고 그의 원수가 보응받는 것을 그로 보게 하신 것이었다. 다윗은 많은 환난을 겪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환난에서 그를 건져주셨다. 또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미워하고 핍박했던 원수들에게 보응하셨고 다윗으로 하여금 그것을 눈으로 보게 하셨다. 그것이 다윗이 체험한 하나님의 선하심이었다.

신약 성도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죄씻음의 구원을 체험한 자들이다. 우리는 전에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들이었다(엡 2:1). 우리는 죄와 마귀에게 종노릇하였던 자들이었고(롬 6:6; 엡 2:2), 본질상 진노의 자녀들이었다(엡 2:3). 우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었고 세상에서 소망이 없었고 하나님도 없었던 자들이었고(엡 2:12), 하나님과 원수이었다(롬 5:10).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주셨고 십자가에 대속 제물로 내어주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이었다(요 3:16; 롬 5:8; 요일 4:9-10).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전 6:11; 롬 3:21-24).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어 그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골 1:13). 이것이 우리가 체험한 구원이며 이 구원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찬송하고 기뻐하며 사랑하고 그를 위해 산다.

시편 54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성도의 삶에는 때때로 악한 자들의 핍박이 있다. 세상에서 성도에게는 고난이 많다(시 34:19). 특히 하나님의 종들에게는 고난이 많다. 주께서는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고 말씀하셨다(마 5:11-12). 사도 바울도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말하였다(딤후 3:12).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자이다. 다윗은 “하나님은 나의 돕는 자시라. 주께서 내 생명을 붙드는 자와 함께하시나이다,” “대저 주께서 모든 환난에서 나를 건지시고 내 원수가 보응받는 것을 나로 목도케 하셨나이다”라고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의 현실에서 우리를 도우시고 지키시고 구원하시고 우리의 억울함을 풀어주시는 자이시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며 감사해야 한다. 다윗은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주의 힘으로 나를 판단하소서. 하나님이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이소서”라고 기도하였다. 또 그는 하나님께서 원수를 갚아주시기를 구하였고 주의 응답하심에 대해 감사하며 자원함의 제사를 드리기를 결심하였다.

넷째로, 우리는 평소에 바르게 살아야 한다. 다윗이 평소에 바르게 살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공의의 판단을 구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평소에 하나님을 경외하며 성경 읽고 기도하는 생활을 해야 하고 또 그의 계명과 성경의 교훈대로 바르고 선하고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 그래야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담대히 하나님께 무엇을 기도할 수 있다.

55편: 핍박하는 악인들을 멸하심

[1-3절] 하나님이여,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아잔)[들으시고] 내가 간구할 때에 숨지 마소서. 내게 굽히사(하크쉬바)[귀를 기울이사] 응답하소서. 내가 근심(시아크)[불평]으로 편치 못하여(아리드) [안정이 없어](BDB) 탄식하오니 이는 원수의 소리와 악인의 압제의 연고라. 저희가 죄악으로 내게 더하며 노하여 나를 핍박하나이다.

다윗은 지금 매우 불편한 마음 상태에 있다. 그는 근심으로 편치 못하여 탄식한다. 다윗은 지금 마음에 안정이 없고 탄식하고 있다. 그가 그런 마음 상태에 있는 까닭은 원수들 때문이었다. 그의 원수들은 목소리로 그를 위협하며 핍박하고 압제하며 그에게 고통을 주었다. 다윗은 원수들의 이런 위협과 핍박과 고통과 분노로 인해 지금 마음의 안정을 잃고 탄식하고 있다. 그는 이런 상태에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가 아뢸 때 자리를 피하지 마시고 그에게 귀를 기울이시기를 간구한다.

[4-8절] 내 마음이 내 속에서 심히 아파하며 사망의 위험(에이모스)[공포들]이 내게 미쳤도다. 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고 황공함이 나를 덮었도다. 나의 말이 내가 비둘기같이 날개가 있으면 날아가서 편히 쉬리로다. 내가 멀리 날아가서 광야에 거하리로다(셀라). 내가 피난처에 속히 가서 폭풍과 광풍을 피하리라 하였도다.

다윗의 마음은 원수들의 핍박으로 인해 심히 아프다. 마음의 고통은 육신의 고통보다 더 심하다. 그는 마음의 큰 고통을 당하고 있었고, 사망의 공포와 두려움이 그를 덮치고 있었다. 그는 고통과 두려움 가운데서 비둘기같이 멀리 날아가 광야에 거하여 편히 쉬기를 원한다. 성안에서의 생활이 산이나 광야보다 편리한 점은 있겠지만, 인간 관계 속에서 마음의 고통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그는 피난처에 속히 가서 폭풍과 광풍 같은 사람들의 핍박과 압제를 피하기를 원한다.

[9-11절] 내가 성내에서 강포와 분쟁을 보았사오니 주여, 저희를 멸하소서. 저희 혀를 나누소서. 저희가 주야로 성벽 위에 두루 다니니 성중에는 죄악과 잔해함이 있으며 악독이 그 중에 있고 압박과 궤사가 그 거리를 떠나지 않도다.

다윗은 성안에서 악한 일들을 보았다. 악인들은 성안에서 강포와 압박, 악독과 잔해, 분쟁과 속임을 행했다. 그들은 세력이 있어 활보하며 주야로 성벽 위에 두루 다녔고 악한 일들이 성중에 또 거리에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사람의 덕성들과는 정반대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온유하고 선하고 사랑하며 진실하기를 원하시지만, 그들은 정반대로 악하고 강포하고 남을 해치며 압제하고 서로 싸우고 속였다. 악인들이 세력을 얻으면, 백성들은 탄식할 것이다. 의인들은 이런 악인들 가운데서 하루라도 편하게 지낼 수 없다. 다윗은 이런 현실에서 “주여, 저희를 멸하소서. 저희 혀를 나누소서”라고 하나님께 호소한다. 의인들은 하나님만 바라며 의지하고 하나님께 호소한다. 그들은 모든 일을 하나님의 의로운 처분에 맡긴다.

[12-15절] 나를 책망한 자가 원수가 아니라 원수일진대 내가 참았으리라. 나를 대하여 자기를 높이는 자가 나를 미워하는 자가 아니라 미워하는 자일진대 내가 그를 피하여 숨었으리라. 그가 곧 너로다. 나의 동류, 나의 동무요 나의 가까운 친우로다. 우리가 같이 재미롭게 의논하며 무리와 함께하여 하나님의 집안에서 다녔도다. 사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임하여 산 채로 음부[지옥]에 내려갈지어다. 이는 악독이 저희 거처에 있고 저희 가운데 있음이로다.

다윗을 책망하고 자기를 높이는 자는 본래 다윗의 원수이거나 그를 미워했던 자가 아니었다. 만일 그러했더라면 다윗은 오히려 참고 그를 피하여 숨었을 것이다. 다윗의 원수는 이전에 친했던 친구이었다. 그는 전에 그와 함께 의논하던 상대이었고 함께 하나님의 집에 올라갔던 친구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를 비난하고 대적하는 자가 되었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미워한 것같이, 형들이 동생 요셉을 미워한 것같이, 가룟 유다가 주님을 배신하여 원수들의 앞잡이가 된 것같이, 다윗의 친구는 이제 다윗을 대적하는 자가 되었다. 그러나 대적자들의 결말은 비참하다. 황폐함이 그들에게 임하며 그들은 산 채로 지옥에 내려갈 것이다. 악인은 평안하고 형통한 것 같다가 갑자기 지옥에 던지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악행에 보응하실 것이다.

[16-19절] 나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시리로다.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여호와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로다. 나를 대적하는 자 많더니 나를 치는 전쟁에서 저가 내 생명을 구속(救贖)하사 평안하게 하셨도다. 태고부터 계신 하나님이 들으시고(셀라) 변치 아니하며 하나님을 경외치 아니하는 자에게 보응하시리로다.

다윗은 큰 고난 중에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그는 불평 중에 마음에 안정이 없으며 마음이 몹시 아팠을 때(2, 4절), 죽음의 공포들과 두려움들이 그를 사로잡았을 때(4-5절),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였다. 그는 하루 세 번씩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기도하였다. 하루 세 번씩 기도하는 것은 경건한 성도들의 삶의 모습이었다(단 6:10).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실 것을 믿었다(16, 17, 19절). 태고부터 계신 하나님, 영원 전부터 스스로 계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기도를 잘 들으시는 하나님이시다. 다윗은 “나를 치는 전쟁에서 저가 내 영혼을 평안 가운데 건져내셨도다”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미래의 확실한 일을 표현한다. 성도에게 대적자들이 많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를 도우시고 건지신다. 그러나 심령의 변화가 없는 자, 자신의 지은 죄들을 뉘우치고 회개할 줄 모르는 자,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는 자는 하나님의 공의의 보응을 받을 것이다.

[20-21절] 저는 손을 들어 자기와 화목한 자를 치고 그 언약을 배반하였도다. 그 입은 우유 기름보다 미끄러워도 그 마음은 전쟁이요 그 말은 기름보다 유하여도 실상은 뽑힌 칼이로다.

다윗을 대적하는 악인은 화목을 깨뜨리는 자이었다. 그는 손을 들어 자기와 화목한 자를 치고 그 언약을 배반했다. 그는 화평을 미워하는 자이다. 그들의 말들은 우유 기름보다 부드러워도 그 마음에는 미움과 시기와 분노와 살기가 있다. 다툼과 불화는 지옥에 들어갈 자들의 죄악이며, 화목은 천국의 덕이다. 화평과 온유는 성령의 열매이다(갈 5:22-23). 천국은 의와 평강과 희락의 나라이다(롬 14:17).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가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과 거짓과 외식과 시기를 버리라고 교훈한다(엡 4:31; 벧전 2:1).

[22절]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

모든 사람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이다(마 11:28). 인생의 짐은 죄의 짐이며, 또 죄의 결과로 가지는 근심과 걱정, 슬픔과 고통, 가난과 질병의 짐이다. 구원받은 성도도 사람이므로 세상의 일로 인한 염려와 두려움, 낙심, 고통이 있고 때때로 핍박과 고난도 있다.

그러나 성도는 자신의 짐을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신 창조자시며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우리를 구원하신 자이시다. 그는 우리를 죄와 영원한 지옥 형벌에서 구원하셨다. 그는 우리의 짐을 져주시는 자이시다. 그에게 무엇을 맡긴다는 것은 그를 믿고 의지하고 그에게 기도하며 의탁하는 것을 말한다. 시편 68:19는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라고 말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적당히 그를 붙들어 주실 것이다. 그는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실 것이다. 요동한다는 말은 낙심하거나 범죄하는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의지하는 자들을 요동치 않도록 굳게 붙드시며 낙심치 않고 평안케 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시편 125:1은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가 시온 산이 요동치 않고 영원히 있음 같다고 말하였다.

[23절] 하나님이여, 주께서 저희로 파멸의 웅덩이에 빠지게 하시리이다. 피를 흘리게 하며 속이는 자들은 저희 날의 반도 살지 못할 것이나 나는 주를 의지하리이다.

악인은 돈이나 명예나 권세 등 자기 유익을 위해서라면 이웃을 해하거나 죽이기도 하며 자기에게 유리하거나 불리하면 언제든지 속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로 파멸의 웅덩이에 빠지게 하실 것이다. 그들은 세상에서 일생의 절반도 살지 못할 것이다. 최종적으로 그들은 지옥에 던지울 것이다. 다윗을 끈질기게 죽이려 하였던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전사했고, 다윗을 대적해 반란을 일으켰던 아들 압살롬은 에브라임 수풀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성도는 그런 자들과 달라야 할 것이다. 다윗은 원수들의 핍박 속에서도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만 바라고 모든 일을 하나님께 의탁하였다.

시편 55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세상 사는 동안 고난을 각오하며 살아야 하고, 때때로 친구의 배신까지도 각오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아는 바이며 다윗이 경험한 바이며 신약시대에 주 예수께서 친히 경험하신 바이다. 그것은 심히 마음 아픈 일이지만, 우리는 그런 고난까지도 각오하며 살아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악하게 살지 말고 선하게 살아야 한다. 악한 자들은 미워하고 시기하고 분노하며 악하고 강포하며 싸우고 속인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의 교훈대로 온유와 선함과 진실함으로 살아야 한다. 에베소서 2:10,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성도의 삶은 선한 삶이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만 의지하며 그에게 우리의 모든 짐을 맡기며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사람의 외적인 조건들을 자랑하거나 의지하지 말고 돈도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성경말씀만 믿고 행해야 한다. 그것이 경건하고 선한 삶이다.

56편: 하나님을 의지하고 찬송함

[1-4절] 하나님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사람이 나를 삼키려고 종일 치며 압제하나이다. 나의 원수가 종일 나를 삼키려 하며 나를 교만히 치는 자 많사오니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주를 의지하리이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올지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 아니하리니 혈육 있는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다윗의 원수들은 그를 삼키려고 종일 그를 치며 압제하며 삼키려 하였다. 교만하게 그를 치며 대적하는 자들이 많았다. 다윗은 원수들의 핍박과 압제로 인해 두려움도 느꼈다. 그러나 그는 그때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였다. “하나님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그는 고난 중에 자신의 부족을 깨달았고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원수의 핍박을 허용하셨다고 느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자신을 긍휼히 여기시기를 구했을 것이다.

또 그는 하나님을 의지했다.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주를 의지하리이다.”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의 말씀을 붙들고 찬송하며 감사하였다. 성도는 고난을 당할 때 처음에 좀 당황하고 낙심되고 두려워하기도 하지만 그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을 앙망하고 의지하면 힘을 얻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믿게 하는 증거의 말씀이며 약속의 말씀이다. 우리는 그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믿고 그의 살아계심과 그의 약속을 체험한다. 참된 믿음은 고난 중에 나타난다. 다윗은 고난 중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기도하였고 그때 사람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담력을 얻음을 고백한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원수들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기도는 성도의 힘이며 해결책이다. 시편 50:15에서 하나님께서는,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말씀하셨고,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고 약속하셨다(마 7:7-8; 요 14:13-14).

[5-7절] 저희가 종일 내 말을 곡해하며 내게 대한 저희 모든 사상은 사악이라. 저희가 내 생명을 엿보던 것과 같이 또 모여 숨어 내 종적을 살피나이다. 저희가 죄악을 짓고야 피하오리이까? 하나님이여, 분노하사 뭇 백성을 낮추소서.

다윗의 원수들은 종일 그의 말을 곡해하였고 그들의 모든 사상은 사악하였다. 악한 자들은 자기의 좁은 생각과 이해와 판단으로 상대방을 오해하고 그에게 해를 끼치려 한다. 또 그들은 다윗의 생명을 엿보며 은밀히 모여 그의 종적을 살폈다. 당을 지어 악을 도모하는 사람들은 용감하지도 못한 자들이요 당당치도 못한 자들이다.

“저희가 죄악을 짓고야 피하오리이까?”라는 7절 전반절의 원문(알-아웬 팔레트 라모)은 “[저희의] 죄악으로 인해 저희를 던지소서”라는 뜻일 것이다(NASB). 또한 다윗은 “하나님이여, 분노하사 뭇 백성을 낮추소서”라고 말한다. 다윗은 원수들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의 징벌을 하나님께 호소한 것이다.

[8절]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으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사울의 칼을 피해 이곳 저곳으로 피신하는 것을 다 세고 계셨고 그의 눈물들을 그의 병에 담듯이 다 기억하고 계신다. 또 그는 그것을 그의 책에 다 기록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공의로 보응하시는 심판자이시다. 신명기 32:35, 41, 43, “보수(報讎)는 내 것이라 그들의 실족할 그때에 갚으리로다. 그들의 환난의 날이 가까우니 당할 그 일이 속히 임하리로다,” “나의 번쩍이는 칼을 갈며 내 손에 심판을 잡고 나의 대적에게 보수(報讎)하며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 보응할 것이라,” “너희 열방은 주의 백성과 즐거워하라. 주께서 그 종들의 피를 갚으사 그 대적에게 보수(報讎)하시고 자기 땅과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시리로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순교자들의 피까지도 갚으실 것이다. 요한계시록 6:9-11,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 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伸寃)하여[원통함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9절] 내가 아뢰는 날에 내 원수가 물러가리니 하나님이 나를 도우심인 줄 아나이다.

다윗은 기도의 응답과 하나님의 도우심을 확신한다. 기도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에, 기도는 전쟁터 같은 세상에서 성도의 완전한 대책이며 해결책이고 최상의 무기와 같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의지하며 기도하는 자들을 위하시고 반드시 그들을 곤란에서 건져주실 것이다.

[10-13절]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여[하나님 안에서] 그 말씀을 찬송하며 여호와를 의지하여[여호와 안에서] 그 말씀을 찬송하리이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서원함이 있사온즉 내가 감사제를 주께 드리리니 주께서 내 생명을 사망에서 건지셨음이라. 주께서 나로 하나님 앞,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지 않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다윗은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했다. 그는 또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겠다고 말한다. 말씀은 믿음의 근거이다. 다윗은 또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담력을 얻었다. 이런 평안과 담력은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믿고 의지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다윗은 또 하나님의 선하신 약속과 능력의 말씀을 체험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생명을 사망에서 건지셨다.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께 서원했던 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의 제물을 드리겠다고 말한다.

또 하나님께서는 다윗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지 않게 하셨다. 원수들이 날마다 그를 죽이려 하였고 그가 그들을 피하기 위해 방황했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돌보셨고 삶의 기쁨을 누리게 하셨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을 찬송하며 그에게 감사하는 것이다. 찬송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이요(사 43:21)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다(엡 1:4-14).

시편 56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원수들의 핍박과 위협을 당하는 두려운 날에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의 긍휼을 구하며 기도하자. 기도는 성도의 특권이며 힘이고 모든 고난의 해결책이다. 빌립보서 4:6,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눈물을 그의 병에 담으시고 그의 책에 기록하실 것이며 그의 원수들을 공의로 보응하시고 성도의 억울함을 풀어주실 것이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는 공의의 심판자이시다. 그는 반드시 악인들을 징벌하시고 성도의 억울함을 풀어주실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올리자. 10절,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 말씀을 찬송하며 여호와를 의지하여 그 말씀을 찬송하리이다.” 12-13절, “내가 감사제를 주께 드리리니 주께서 내 생명을 사망에서 건지셨음이라.”


57편: 원수의 비난에서 건지심을 찬송함

[1절] 하나님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서 이 재앙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

다윗은 환난 중에서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였다. 그것은 고난 중에 자기의 부족을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환난 때 우리의 부족을 깨닫는다. 하나님의 엄격한 공의 앞에 설 자는 아무도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을 구할 것밖에 없다. 다윗은 환난 때 피할 곳이 있었다. 그는 하나님의 날개 그늘 아래서 재앙의 날이 지나기까지 피하기를 원하였다. 우리에게 하나님 아버지께서 계시고 그가 우리의 피할 곳이 되시고 환난 때 도움을 청할 곳이 되신다는 것은 큰 복이다.

[2절] 내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

다윗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홀로 주관하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시다. 그는 죄 많고 누추한 인생과 감히 비교할 수 없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그는 우리를 불러 자녀로 삼으셨고 우리는 감히 그를 아버지라 부르며(롬 8:15)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간다(히 4:16). 그는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자이시다. 그는 섭리자이시며 좋으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리라”고 말하였다(롬 8:28).

[3절] 저가 하늘에서 보내사 나를 삼키려는 자의 비방에서 나를 구원하실지라(셀라). 하나님이 그 인자와 진리를 보내시리로다.

다윗의 원수들의 비방은 그를 삼키려는, 즉 죽을 것 같은 큰 고통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구원하실 것이다. ‘하늘에서 보내사’라는 말은 천사들을 보내신다는 뜻 같다. 또 그가 다윗을 구원하시는 방법은 그의 인자와 진리를 보내심으로써이다. 그의 인자라는 말은 다윗이 부족이 없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도우심을 보인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인자를 구한 것에 대한 응답이기도 하다. 또 그의 진리라는 말은 다윗에 대한 거짓된 비방에 대해 참된 말, 바른 말로 변호하신다는 뜻일 것이다.

[4절] 내 혼이 사자 중에 처하며 내가 불사르는 자 중에 누웠으니 곧 인생 중에라. 저희 이는 창과 살이요 저희 혀는 날카로운 칼 같도다.

다윗의 원수들은 ‘사자들’ ‘불사르는 자들’과 같았다. 그들은 약한 자들을 죽이려 하고 분노한 감정으로 행하는 자들이다. 그들의 이는 창과 살이며 그들의 혀는 날카로운 칼과 같았다. 그들은 남을 비난하고 죽이는 자들이다. 성경은 홍수로 멸망당한 노아 시대 사람들의 악을 ‘강포함’이라고 증거하였다(창 6:11). 로마서 3장은 “[사람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르다”고 말한다(롬 3:13-15). 사람의 본성은 참으로 악하다.

[5절]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고난의 상황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높인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그에게 우리의 모든 소원을 아뢰는 것은 그가 하늘 위에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시며 그의 영광이 온 세계에 드러나야 마땅함을 믿기 때문이다. 주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에서 “대개[이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있기 때문이옵나이다]”는 마지막 말은 그런 뜻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을 아는 자마다 그런 믿음을 가지고 기도할 것이다. 바울은 빌립보에서 많이 매를 맞고 옥에 갇혔으나 밤중에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을 찬송하였고 그때 감옥이 열리는 기적을 경험하였다(행 16:25-26).

[6절] 저희가 내 걸음을 장애하려고 그물을 예비하였으니 내 영혼이 억울하도다[기가 꺾이도다]. 저희가 내 앞에 웅덩이를 팠으나 스스로 그 중에 빠졌도다(셀라).

다윗의 원수들은 그의 길 앞에 그물을 준비했고 웅덩이를 팠다. 그들은 악하고 비겁한 자들이었다. 다윗은 그들로 인해 마음이 낙심되었다. 그러나 다윗은 원수들이 하나님의 징벌을 받을 것을 확신한다. 그들은 그들이 판 웅덩이에 그들 자신이 빠질 것이다. 에스더서에 나오는 하만이 모르드개를 미워하고 죽이려고 세웠던 나무에 자신이 처형되었던 것처럼(에 5, 7장), 악한 자들은 하나님께서 징벌하실 때 스스로 판 웅덩이에 빠질 것이다.

[7-8절]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다윗은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송을 올린다. 그는 ‘확정된 마음으로’ 즉 굳은 결심을 가지고 그렇게 하였다. 8절에 ‘내 영광아’라는 말은 그의 영혼을 가리킨다고 본다. 그는 진심으로 찬송하려 했다. 또 그는 비파와 수금을 가지고 또 새벽을 깨우며 찬송하려 하였다.

[9-10절] 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열방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대저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나이다.

다윗은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온 세계 만민에게 증거하며 찬송하기를 원하였다. 그가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송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커서 하늘에 미치고 그의 진리가 궁창에 이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인자하심과 그의 진리로 죄인들을 구원하신다. 그의 인자하심은 그가 우리의 죄를 오래 참으시고 용서하심에서 드러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으로 구원을 얻었다. 또 하나님의 진리는 그가 자기 백성에게 약속하신 구원의 약속을 이루심에서와, 또 악인들에게 공의의 벌을 내리겠다고 하신 경고를 시행하심에서 나타난다. 하나님께는 거짓이나 불신실함이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진리로 구원을 받은 모든 자들은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송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와 진리를 찬송해야 한다.

[11절]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5절에서 말한 내용이 반복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을 고백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영광 중에 계신 주권적 섭리자이시다.

시편 57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우리의 원수들이 우리를 죽일 듯 비방할 때 하나님께 피하자. 원수들의 비방에 대한 다윗의 대처는 하나님의 긍휼을 의지하며 간구한 것이었다. 고난 중에 하나님의 긍휼을 의지하며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이 성도들의 바른 대처 방법이다. 우리는 다윗처럼 하나님의 선한 섭리를 신뢰하고 하나님께서 인자와 진리로 우리를 구원하실 것을 확신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악한 자들을 징벌하실 것을 믿자.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으로 그를 그 위험에서 건져주실 것을 믿었을 뿐 아니라, 또한 그 앞에 웅덩이를 팠던 원수들이 자기들이 판 그 웅덩이에 빠질 것을 예견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공의로 악인들을 징벌하신다. 우리의 원수는 사탄과 악령들과 악한 자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원수들을 지옥 불못에 던지실 것이다(계 20:10; 21:8).

셋째로,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굳게 확정하고 새벽을 깨우며 즐거이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자.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 또 성도를 핍박하는 악인들을 벌하시는 그의 공의로우신 주권적 섭리를 깨닫고 그를 높이며 그의 영광을 찬송하자.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시며 의인을 구원하시고 악인을 징벌하신다. 우리는 새벽 일찍 일어나 하나님을 찬송하며 그의 말씀을 묵상하자. 찬송은 성도의 마땅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