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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제1권 21편 하나님의 능력의 도우심을 기뻐함-41편 빈약한 자를 돌보는 자가 복됨

영국신사77 2020. 4. 15. 09:30

21편: 하나님의 능력의 도우심을 기뻐함

[1-2절] 여호와여, 왕이 주의 힘을 인하여 기뻐하며 주의 구원을 인하여 크게 즐거워하리이다. 그 마음의 소원을 주셨으며 그 입술의 구함을 거절치 아니하셨나이다(셀라).

다윗 왕은 하나님의 힘과 구원을 체험하였고 그 때문에 크게 기뻐하며 즐거워하겠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한 자마다 하나님을 자랑하며 그의 구원을 기뻐할 것이다. 오늘 우리가 죄와 죽음과 사탄의 권세로부터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의 크신 능력의 구원이며 그것은 모든 믿는 이에게 참된 기쁨과 즐거움의 이유이다.

다윗이 구원받은 것은 그의 기도의 응답이었다. 다윗은 고난 중에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시기를 소원하였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마음의 소원을 들어주셨고 그의 입술의 구함을 거절치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친 백성의 진심의 기도와 소원을 잘 들어주신다.

[3-4절] [이는] 주의 아름다운 복으로 저를 영접하시고 정금 면류관을 그 머리에 씌우셨나이다[씌우셨음이니이다]. 저가 생명을 구하매 주께서 주셨으니 곧 영영한 장수로소이다.

다윗이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의 소원을 주셨다고 고백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응답하시고 선한 복으로 그를 맞으셨고 그의 머리에 금면류관을 씌우셨기 때문이다. 다윗은 사울 왕에게 많은 고난을 당했지만 하나님의 약속대로 이스라엘 나라의 왕위에 올라 금면류관을 썼고, 또 이방 나라들과의 여러 전쟁들에서도 다 승리하여 적국들의 왕의 면류관들을 머리에 쓰곤 하였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은 다 선하고 아름답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슬픔 대신 기쁨을, 질병 대신 건강을, 가난 대신 일용할 양식을, 싸움 대신 평안을 주신다. 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수치와 고통 대신 금면류관 즉 큰 영광과 존귀를 주신다.

특히, 다윗은 사울의 칼날을 피하여 도피하던 때나 주위 나라들과 전쟁을 치르던 때들이나 압살롬의 반역의 때 등 자신의 생명의 위협이 있을 경우들에 하나님께 생명의 보존을 구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생명을 지켜 주셨을 뿐 아니라, 그에게 영영한 장수 곧 영생의 구원을 주셨다. 모든 생명은 하나님께 있다. 하나님만 사람에게 생명의 연장과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다.

하나님의 가장 큰 선물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이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일서 5:1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모든 죄를 고백하고 버리기를 결심하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만 믿고 그에게 복종하기를 결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을 주신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구원이다. 이 구원은 사람들에게 가장 큰 복이다.

[5-7절] 주의 구원으로 그 영광을 크게 하시고 존귀와 위엄으로 저에게 입히시나이다. [이는] 저로 영영토록 지극한 복을 받게 하시며 주의 앞에서 기쁘고 즐겁게 하시나이다[하심이니이다]. [이는] 왕이 여호와를 의지하오니 지극히 높으신 자의 인자함으로 요동치 아니하리이다[아니할 것임이니이다].

성도는 세상에서 때때로 고난과 모욕을 당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구원하시고 영광을 주시고 존귀와 위엄을 입혀주신다. 하나님의 기이한 섭리로 인하여 요셉은 여러 해의 종살이와 감옥살이 후 애굽의 총리가 되었고, 하나님의 작정과 뜻 가운데 다윗은 외롭고 힘든 긴 도피 생활 후 왕이 되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후 삼일 만에 영광스런 몸으로 부활하셨다. 성도의 영광은 장차 부활의 몸으로 천국에서 영생할 때 완전히 드러날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이 다윗에게 영광과 존귀가 되는 것은, 그것이 크고 영원한 복이며 거기에 기쁨과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몸의 건강과 재물과 세상 권세 같은 복은 일시적이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복, 즉 영생과 부활과 천국은 영원하다. 또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구원은 현세와 내세에 지극한 기쁨과 즐거움이 된다.

또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이 성도들에게 영원한 복이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의지하는 자를 긍휼로 붙드셔서 요동치 않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정말 아는 자는 하나님만 의지할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그를 붙들어 요동치 않게 하실 것이다. 연약한 인생이 요동치 않는 믿음을 가지고 살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뿐이다. 사도 베드로도 베드로전서 5:10에서,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고 말했다.

[8-9절] 네 손이 네 모든 원수를 발견함이여, 네 오른손이 너를 미워하는 자를 발견하리로다. 네가 노할 때에 저희로 풀무 같게 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진노로 저희를 삼키시리니 불이 저희를 소멸하리로다.

8-12절에서 한글성경에 ‘네, 너를, 네가’라고 번역된 말들은 ‘주의, 주를, 주께서’(2인칭)라고 번역하는 것(KJV, NIV, Poole)이 문맥적으로 바를 것 같다. 다윗은 말한다. “주의 손이 주의 모든 원수들을 발견하심이여, 주의 오른손이 주를 미워하는 자를 발견하시리로다. 주께서 노하실 때에 저희로 풀무 같게 하실 것이라. 여호와께서 진노로 저희를 삼키시리니 불이 저희를 소멸하리로다.” 주의 손이 원수를 발견하신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그를 찾아 심판하신다는 뜻일 것이다.

하나님의 원수들, 곧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또한 하나님의 참된 종들과 성도들의 원수이며 그들을 미워하는 자이기도 하다. 이스라엘을 학대했던 애굽 왕 바로,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웠던 아말렉 사람들, 이스라엘을 자주 침공했던 블레셋, 암몬, 에돔 등의 이웃 나라들은 다 원수들이었다. 또 사울 왕이나 압살롬 등은 다윗 개인의 원수이었다. 역사상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죽였던 로마 황제들, 천주교회, 일본 제국, 공산당은 참 교회의 원수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진노하셔서 그들을 불로 삼키시며 소멸하실 것이다. 그는 심히 음란했던 소돔과 고모라 성을 유황불비를 내려 멸망시키셨다(창 19장).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에서 생활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가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 분향했던 나답과 아비후를 불에 삼키어 죽게 하셨다(레 10장). 모세는 신명기 32:22에서 하나님의 진노의 불이 일어나서 지옥 깊은 곳까지 사른다고 말했다. 히브리서 12:29는 하나님을 ‘소멸하는 불’이라고 표현했다. 마가복음 9:43-48에 보면, 예수께서는 꺼지지 않는 불의 지옥에 대해 말씀하셨다. 요한계시록 21:8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영원한 지옥 불못을 증거하였다. 하나님의 진노는 무섭다. 그것은 소멸하는 불이다.

[10절] 네가[주께서] 저희 후손을 땅에서 멸함[멸하심]이여, 저희 자손을 인생 중에서 끊으리로다[끊으시리로다].

사람은 보통 자기 자녀들을 사랑하며 그들의 행복을 위해 무엇이든 하기 원하지만, 참으로 그들의 행복을 위하는 길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있다. 의인의 자녀들은 복되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신다고 말씀하셨고(출 20:6), 또 그의 계명을 순종하는 자들에게 그들의 자녀들의 복을 약속하셨다(신 28:4). 다윗은 다른 시편에서 증거하기를,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 . . 그[의인의]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저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주니 그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라고 하였다(시 37:25-26).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의 자녀들을 땅에서 멸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미워하시는 자들의 죄를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3, 4대까지 갚겠다고 말씀하셨고(출 20:5), 그의 계명을 거역하는 자들의 자녀들에게 저주가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셨다(신 28:18). 성경은 악인들의 자녀들이 망한 예들을 증거한다.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대적했던 고라와 그 동료들과 그들의 가족들, 즉 아내들과 자녀들까지 땅이 갈라져 산 채로 매장되게 하셨다(민 16장). 또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아간의 범죄로 아이 성 전쟁에서 패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아간뿐 아니라, 그 자녀들도 백성들의 돌에 맞아 죽게 하셨다(수 7장). 또 그는 이스라엘의 악한 왕 아합의 아들들과 손자들 70명을 하루아침에 그들의 선생들에 의해 다 목베임을 당하게 하셨다(왕하 10장).

[11-13절] 대저 저희는 너를[주를] 해하려 하여 계교를 품었으나 이루지 못하도다. 네가[주께서] 저희로 돌아서게 함[하심]이여, 그 얼굴을 향하여 활시위를 당기리로다[당기시리로다]. 여호와여, 주의 능력으로 높임을 받으소서. 우리가 주의 권능을 노래하고 칭송하겠나이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악인들을 벌하실 이유를 설명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을 대적하여 악을 계획하고 해로운 방책을 상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방책은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었다. 그들은 다니엘을 모함해 죽게 하려 했던 그의 동료들이나, 모르드개 죽이기를 왕에게 요청하려 했던 악한 하만처럼(단 6장; 에 7장), 악한 계획을 이루지 못하고 도리어 자신들이 비참하게 죽임을 당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악한 자들을 향해 활시위를 당기실 것이며 그들은 하나님을 피하려고 돌아설 것이다. 악한 자들이 아무리 강한 것 같아도 그들은 결국 하나님 앞에서 굴복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쫓던 애굽 왕 바로의 병거들과 기병들을 홍해 바다에 빠져 죽게 하셨듯이, 또 유다를 침공했던 앗수르 군사 18만 5천명을 하룻밤에 다 죽은 시체가 되게 하셨듯이, 악한 자들을 징벌하시고 주의 백성들을 구원하실 수 있고 그렇게 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다윗은 하나님의 그 크신 능력을 높이고 노래하고 칭송하기를 원한다.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체험한 자들은 다 그러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능력의 구원을 받은 자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죄로 인해 죽었던 우리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살리셨고 죄와 사탄과 사망의 권세에서 우리를 구원해주셨다.

시편 21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힘으로 성도를 도우시고 원수들로부터 구원하신다. 성도는 원수들과의 전쟁에서 하나님께 소원을 아뢰며,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소원을 들어주시고 아름다운 복을 주신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주시는 복을 ‘영영한 장수’ 곧 영생의 복, 큰 영광의 복, 존귀와 위엄의 복, ‘영영토록 지극한 복’이라고 표현한다. 또 하나님께서는 그의 원수들을 완전히 멸하실 것이다. 다윗 왕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이다. 다윗 왕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만왕의 왕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피로 구속받은 모든 성도들에게 적용된다. 우리의 원수는 마귀와 악령들이며 또 악한 세상 권세자들과 핍박자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원수들로부터 구원하셨고 지금도 구원하시며 앞으로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계셔서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며 우리의 원수들을 마침내 다 멸하실 것이다.

둘째로,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의 도우심을 인해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또 하나님의 능력을 찬송하며 하나님의 뜻대로만 살아가자. 하나님께서는 전적으로 부패되고 무능력해졌던 죄인들을 그의 긍휼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으로 구원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고 주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자들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주신 구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능력의 구원을 항상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또 하나님의 그 구원의 능력을 찬송하자. 하나님께서는 만세 전에 택하신 남은 죄인들을 오늘날에도 그 능력으로 구원하실 것이다.


22편: 메시아의 고난

1-21절, 메시아의 고난

[1-2절]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치 아니하오나 응답지 아니하시나이다.

다윗은 하나님을 ‘내 하나님이여’라고 반복해 부르며 낮에도, 밤에도 부르짖었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고난 중에 버려두셨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멀리하여 돕지 않으셨고 그의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않으셨고 그가 밤낮 부르짖어도 응답지 않으셨다.

다윗의 고난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예표이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비슷하게 부르짖으셨다. 그의 십자가 고난은 택한 백성의 죄의 형벌을 담당하신 대속의 고난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깊은 뜻 가운데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죽게 버려두셨고 구원하지 않으셨다.

[3절]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원문은 “그러나 주는”이라는 말(웨앗타)로 시작된다. 다윗은 고난 중에도 하나님을 바라보았다. 고난 중에 믿는 믿음이 참된 믿음이다. 그는 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자이심을 고백하였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찬송해야 한다. 시편 33:1,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의 마땅히 할 바로다.” 시편 150:6,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다고 말한다. 창조자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스스로 계신 자이시며 세상과 구별되어 홀로 영광을 받으셔야 할 하나님이시다.

[4-5절] 우리 열조가 주께 의뢰하였고 의뢰하였으므로 저희를 건지셨나이다. 저희가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치 아니하였나이다.

신앙의 열조들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뢰하였다. 믿음은 창조자, 섭리자이신 영원하신 하나님,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과 그의 지혜와 능력과 선한 목자 되심을 전심으로 의지하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은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로 나타난다. 신앙의 열조들은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에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였다. 기도는 믿음의 자연스런 표현이다. 또 하나님을 의뢰하고 간구한 그들은 그의 응답을 받았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환난에서 건지셨고 그들로 수치를 당치 않게 하셨다.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돌보심과 도우심과 구원하심을 체험할 것이다.

성경은 믿음의 열조들의 많은 체험들을 기록한다. 유다 왕 아사는 구스 군사 백만의 침략을 받았을 때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도우심을 간구하였고 그의 도우심으로 구스 군대를 패배시켰다(대하 14:11). 유다 왕 히스기야는 앗수르의 침략으로 인해 하늘을 향하여 부르짖어 기도하였고 하나님께서는 한 천사를 보내어 앗수르 군대 진영에서 모든 큰 용사와 대장과 장관들을 멸하셨다(대하 32:20-21).

[6-8절]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이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저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믿음의 열조들과 달리, 다윗은 지금 큰 고난 중에 있고 그 고난이 얼마나 컸던지 그는 자신을 ‘벌레’라고 표현한다. 욥도 사람을 “벌레인 사람, 구더기인 인생”이라고 표현했고(욥 25:6), 또 이사야서에도 “지렁이[벌레] 같은 너 야곱아”라는 표현이 나온다(사 41:14). 고난이 많은 인간의 삶을 생각하면 인간은 벌레같이 천해 보인다. 죽은 몸에 벌레가 생기는 것을 보면, 사람과 벌레의 차이가 적어 보인다.

다윗은 자신이 사람들에게 비난을 당하고 멸시를 받는다고 고백한다. 그가 당한 고난은 메시아께서 십자가 위에서 당하실 고난을 예표한다. 원수들은 다윗을 보며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이고 머리를 흔들며 조롱했다. 그들은 그가 하나님을 의지하니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하실 거라고 놀린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자기의 백성을 사람들의 조롱과 멸시 가운데 버려두신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을 때, 지나가는 자들은 머리를 흔들며 그를 모욕하였다(마 27:39-43).

[9-11절] 오직[그러나]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내 모친의 젖을 먹을 때에 의지하게 하셨나이다.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 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내 하나님이 되셨사오니 나를 멀리하지 마옵소서. 환난이 가깝고 도울 자 없나이다.

벌레같이 천해진 상황에서도 다윗은 자신이 어릴 때부터 하나님을 의지하였음을 고백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출생케 하셨고 모친의 젖을 먹을 때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셨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어른들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또한 어린아이들의 하나님도 되신다. 그는 자기의 택한 영혼들을 갓난 아이 때부터 돌보신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것은 커서 그가 신앙고백을 할 때부터가 아니고, “모태(라캄)로부터,” “어머니의 배(베텐)로부터”이다. 이것은, 어린아이가 자신의 신앙고백을 할 수 있기 전에는 교회의 회원이 될 수 없다고 말하는 침례교회의 생각과 다르다. 장로교회는 믿는 가정에서 태어난 어린 생명들이 그 출생 때부터 하나님의 언약 백성임을 믿는다. 그들은 집안에 있는 이방인이 아니다. 이것이 구약시대에 남자 아이에게 난 지 팔일 만에 할례를 베푼 이유요, 신약시대에 유아들에게 세례를 베푸는 근거이다.

믿음의 열조들을 도우셨던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도우시며, 어릴 때 우리를 도우셨던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그리고 늙어 쇠약할 때에도 도우실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나를 멀리하지 마옵소서’라고 하나님께 말한다. 지금 다윗은 환난 중에 아무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있는 어렵고 절박한 상황에 있지만, 그를 도우실 자가 오직 하나님뿐이심을 굳게 믿고 있다.

[12-18절] 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싸며 바산의 힘센 소들이 나를 둘렀으며 내게 그 입을 벌림이 찢고 부르짖는 사자 같으니이다. 나는 물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촛밀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잇틀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사망의 진토에 두셨나이다.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저희가 나를 주목하여 보고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다윗의 대적자들은 거칠고 힘센 황소같이 또 잔인하고 위협적인 사자같이 그를 둘러쌌다. 다윗은 이런 상황에서 심신으로 약해져 그의 생각, 감정, 힘, 그리고 용기가 다 쏟아져 버린 것 같고 그의 모든 뼈가 어그러진 것 같았다. 또 다윗의 마음은 초같이 녹았고 그의 힘은 질그릇 조각같이 말랐으며 그의 혀는 이틀에 붙었다. 그는 거의 죽음 앞에 있는 자, 혹은 거의 죽은 자와 같았다.

또 다윗의 대적자들은 물고 뜯는 개들과 같이 인정이나 도덕성이 없이 다윗을 둘러싸 그의 손과 발을 찔렀다. 육신의 고통이 심하여 모든 뼈들이 다 이탈되어 그 수를 셀 수 있게 된 것 같았다. 다윗의 대적자들은 그를 주목하며 심지어 그의 겉옷을 나누어 가졌고 그의 속옷까지도 제비뽑아 취하였다. 겉옷과 속옷까지 취하는 것은 사람에게 아마 가장 큰 모욕과 수치일 것이다.

실제로 다윗이 언제 이런 고난을 당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지만, 이것은 확실히 메시아의 고난의 예표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작은 인정도 자비도 없는 무리들에게 둘러싸여 십자가 위에서 손과 발에 찔림을 받으셨고 로마 군병들은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가졌고 그의 속옷을 제비뽑아 가졌다(요 19:23-24).

[19-21절] 여호와여, 멀리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내 영혼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 나를 사자 입에서 구하소서. 주께서 내게 응락하시고 들소 뿔에서 구원하셨나이다.

다윗은 극심한 고통의 현실에서도 낙망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았다. 그는 하나님을 “나의 힘”이라고 부른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힘이 되신다.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간구하였다. 그는 하나님께서 고통의 현실에서 자신을 건져주시기를 요청한다. 성도는 환난 중에 하나님께 간구해야 한다. 끝으로, 그는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했다.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들소 뿔에서 구원하셨다는 말씀은 기도 응답의 확신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간구를 응답하실 것이다.

예수께서도 택자들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셨으나,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악인들의 개가를 그치게 하셨고 자신의 의로우심을 증거하셨고 우리의 의와 구원이 되셨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큰 고난 중에라도 낙심치 말고 항상 하나님을 인정하고 믿고 바라보고 또 그의 도우심을 간구하며 기대하자. 하나님께서는 고난 중에 성도들의 믿음의 간절한 기도에 응답하시며 그들을 여러 가지 고난 중에서도 구원해주실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교회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자.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찬송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찬송은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께 마땅히 올려야 할 일이다.

셋째로, 우리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고통과 수치의 죽음을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그의 대속의 고난의 의미를 깨닫고 감사하자. 또 우리는 진리와 의를 위한 고난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에 즐거이 동참하자. 주를 위해 고난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22-31절, 하나님을 찬송하고 전함

[22-24절]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형제들]에게 선포하고 회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너희여, 그를 찬송할지어다. 야곱의 모든 자손이여, 그에게 영광을 돌릴지어다. 너희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여, 그를 경외할지어다. [이는]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 얼굴을 저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부르짖을 때에 들으셨도다[들으셨음이로다].

다윗은 회중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한다. ‘회중’(카할)은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를 가리킨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을 인정치 않고 감사치 않고 찬송치 않을 것이지만, 성도들의 회에서는 하나님께 올리는 찬송 소리가 그치지 않을 것이다.

다윗은 또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을 찬송하라고 권한다. 찬송은 모든 사람이 해야 할 의무이다. 시편 150:6,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송할지어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24장로들과 천만 천사들은 창조주 하나님과 어린양 예수께서 찬송과 영광을 받기에 합당하시다고 찬송하였다(4:10-11; 5:12). 하나님을 참으로 알고 믿고 섬기는 자들은 하나님을 찬송해야 한다.

다윗은 하나님께 찬송을 올려야 할 이유는 하나님께서 고난 당하는 자들의 고난을 멸시치 않으시고 그 얼굴을 숨기지 않으시고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셨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고난 받는 성도들을 돌아보시고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신다. 다윗의 체험과 찬송이 이유는 모든 성도들의 체험이며 찬송의 이유이다.

[25절] 대회 중에 나의 찬송은 주께로서 온 것이니 주를 경외하는 자 앞에서 나의 서원을 갚으리이다.

‘대회’(카할 라브)라는 원어는 ‘많은 회중’이라는 뜻이다. 다윗은 많은 회중 가운데서 하나님을 찬송하였다. 그는 그가 성도들과 함께 부르는 찬송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고백한다. 하나님께 대한 찬송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은혜에 대한 깨달음과 지식과 힘을 가져야 할 수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말했다(고전 15:10). 하나님의 은혜로 하는 찬송은 참된 찬송이다.

다윗은 또한 그의 서원을 경건한 자들 앞에서 갚겠다고 고백한다. 서원은 하나님 앞에서 맹세하며 결심하고 약속하는 것이다. 다윗은 큰 환난 중에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간구하며 서원하였던 것 같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셨으므로, 그는 그 서원한 바를 그대로 갚겠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서원은 꼭 갚아야 한다. 옛날에 입다는 하나님께서 암몬 족속을 그에게 붙여주셔서 승리케 하시면 돌아올 때 집 문에서 제일 먼저 그를 영접하는 자를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겠다고 서원하였고 그것을 이행하였다(삿 11:30-31). 한나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아들을 주시면 그를 하나님의 전에 하나님의 종으로 바치겠다고 서원하였고 그것을 이행하였다(삼상 1:10-11).

[26절]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

본절은 고난에서 건짐 받은 성도를 ‘겸손한 자,’ ‘여호와를 찾는 자’라고 표현하며 그가 받는 복을 말한다. ‘겸손한 자’(아나윔)라는 원어는 ‘고난 당한 자, 겸손한 자’라는 뜻이다. 성도는 고난을 통해 겸손한 인격이 되며 또 이제 하나님을 찾는 자가 된다.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에서 건짐 받은 성도가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먹고 배부르게 하신다.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말했다(시 23:1- 2). 이사야 55:1-2,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또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다. 성도는 평소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경외하지만, 특히 환난 날에 하나님을 찾고 구원을 체험하며, 그 후로는 더 하나님을 찾는 자가 되며 하나님을 찬송하는 자가 된다. 구원받은 체험을 한 자마다 새 노래로 하나님을 찬송하게 될 것이다. 그는 기쁨과 감사의 찬송을 부를 것이다.

또 하나님을 찾는 자의 마음은 영원히 살 것이다. 마음은 영혼의 활동이다. 마음이 죽는다는 말은 마음이 슬픔과 절망 가운데 낙심되고 침체되는 것을 말하고, 마음이 산다는 것은 마음이 기쁨과 소망 가운데 힘을 얻고 활기를 찾는 것을 말한다고 보인다. 극심한 고난 가운데서 구원 얻은 성도는 마음에 힘과 기쁨과 활기를 얻을 것이다. 세상에는 언제나 슬픔과 근심, 환난과 고난이 많지만, 하나님을 찾는 자의 마음은 영원히 기쁨과 힘을 잃지 않을 것이다.

[27-28절]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열방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경배하리니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열방의 주재심이로다.

땅의 모든 끝 곧 만국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는 말씀은 예언이다. 예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다(행 1:8). 우리나라는 그 ‘땅끝’에 속한다. 우리나라에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이 들어온 것은 기독교 2천년 역사에서 단지 100년 전의 일이었다.

열방의 모든 족속, 즉 세상의 모든 족속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것이다. 그것이 세계복음화이다. 세계복음화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 즉 ‘너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얻을 것이다’는 약속에서 이미 암시되었다(창 12:3; 18:18). 이것은 이사야 45:22에서도 암시되었다: “땅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음이니라.” 주께서는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명령하셨고(마 28:19),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다”고 말씀하셨다(눅 24:47).

세계복음화의 이유는 나라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세계 열방은 하나님의 창조물이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의 유일한 통치자이시다. 인류 역사는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 속에 되어진다. 창조도, 타락도, 구속도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 속에 있다. 의인의 고난도, 악인의 핍박도 그렇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도 만세 전에 하나님의 작정하신 바이었다.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나온다(롬 11:36).

[29절] 세상의 모든 풍비한 자가 먹고 경배할 것이요 진토에 내려가는 자 곧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도 다 그 앞에 절하리로다.

‘풍비한’이라는 원어(다쉔)의 뜻은 ‘살찐, 부유한, 힘있는’이다. 이 말은 육신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존귀하고 힘있는 자를 가리키는 것 같다. 그는 평소에 하나님을 무시하고 세상과 돈을 의지하며 살았을지도 모르나 이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그에게로 돌아오며 영의 양식을 먹고 하나님께 경배할 것이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지만, 부자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

또 본문에 ‘진토(아파르)[즉 흙]에 내려간다’는 말은 ‘풍비한’이라는 말과 대조되며 죽음을 가리킬 것이다. 그러면 ‘진토에 내려가는 자’는 가난하고 가련하고 힘이 없어 죽어가는 자를 가리킨다. 그는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 즉 거의 죽을 지경에 떨어졌으나 스스로 자신을 건지거나 회복시킬 힘이 없는 자이다. 그러나 그런 자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고 복된 새 생명을 얻는다. 옛날부터 이런 자들이 많이 예수님을 믿었고 구원을 받았다(고전 1:26).

이와 같이, 본문은 각양의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올 것을 암시한다. 부자도 가난한 자도, 권세자도 평범한 시민도, 용사도 가련한 자도 다 회개하고 구원을 받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 굴복할 것이며(빌 2:10-11) 택함 받은 모든 사람이 구주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온 세상에 가득할 것이다.

[30-31절] 후손이 그를 봉사할 것이요 대대에 주를 전할 것이며 와서 그 공의를 장차 날 백성에게 전함이여, 주께서 이를 행하셨다 할 것이로다.

구원받은 자들의 자손들이 하나님을 섬길 것이다. 구원의 복음과 바른 신앙생활은 경건한 모든 사람에게와 우리의 자녀들에게 전해져야 한다(신 6:6-7; 엡 6:4). 또 구원받은 성도는 특히 하나님의 의를 전파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구약성경을 이루기 위해 오셨고(마 5:17), ‘다 이루셨다’고 십자가 위에서 말씀하셨고(요 19:30), 우리의 의(義)를 위해 율법의 완성이 되셨다(롬 10:4).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롬 3:24). 이것이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다. 하나님께서는 바른 신앙의 계대(繼代)가 주님 오실 때까지 이루어지기를 원하신다. 고린도전서 11: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디모데후서 2:1-2,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네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고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우리를 죄와 멸망으로부터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하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주이시다.

둘째로, 우리는 고난 중에 낙심치 말고 하나님께 기도하자. 세상에는 고난이 많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와 간구를 들어주신다.

셋째로, 세계복음화는 하나님의 뜻이다. 27-28절,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열방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경배하리니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열방의 주재심이로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과 구원의 복음을 만방에 전하자.

23편: 하나님께서는 나의 목자

[1-2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하나님과 그 백성의 관계는 목자와 양의 관계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목자시며 우리는 그의 양이다. 목자는 양을 먹이고 보호하며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른다. 에스겔 34:15, “내가 친히 내 양의 목자가 되어 그것들로 누워 있게 할지라.” 요한복음 10: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하나님의 양인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의 소유자로서 부유하시고 전능자로서 모든 것을 하실 수 있고 자기 백성과 함께하시고 그들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고 공급하시기 때문이다. 신명기 8:4는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은 40년간 광야 생활을 하였으나 그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했고 그 발이 부릍지 아니하였다고 증거하였다. 마태복음 6:33에 기록된 대로, 예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 하나님께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풍족히 주신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신다. ‘쉴 만한 물’이라는 원어(메 메누코스)는 ‘잔잔한 물’이라는 뜻이다. 양들이 풀을 뜯어먹고 잔잔한 시냇가에서 물을 마시면 무엇이 더 필요하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영의 양식이며(마 4:4) 성령께서는 우리 속에서 흘러 넘치는 생수의 강이시다(요 7:37-39). 그것은 푸른 풀과 잔잔한 시냇물 같은 만족한 은혜이다.

[3절]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신다. ‘소생시킨다’는 원어(예슈베브)는 ‘회개시킨다, 회복시킨다, 새 힘을 준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죽은 영혼을 살리셨고 또 시시때때로 죄와 실수로 인해 우리의 영혼이 연약해지고 피곤해질 때 우리의 영혼을 회개시키시고 회복시키시며 새 힘을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힘을 주시는 자이시다(사 40:27-31).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방향은 의(義)이다. 의는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의 구원의 내용이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의를 이루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롬 10:4).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로마서 3:22-24,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것이 구원이다. 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는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로 실제로 의로운 인격이 되고 의로운 삶을 살아가려고 애쓴다. 이것이 성화(聖化)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법적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뿐 아니라, 실제로 의로운 인격이 되고 의롭게 사는 것이다(살전 4:3).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이유는 그의 이름 때문이다. 성도에게는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 그리스도인’이라는 하나님의 이름, 그리스도의 이름이 붙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의 특별한 소유로 삼으셨고 우리에게 존귀한 이름을 주셨고 또 그 이름 때문에 우리를 의의 길, 거룩한 길로 더욱 인도하시는 것이다.

[4절]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환난 많은 세상을 가리킬 것이다. 세상에는 곳곳에 죽음의 위협과 공포가 있다. 각가지 질병과 사고가 있고 지진,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있다. 또 세상에는 영적인 무지와 부도덕의 어두움도 가득하다. 세상에 참된 교회들과 성도들이 있지만, 심지어 교회들 안에도 거짓된 목사들과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교인들이 적지 않은 것 같다. 또 마귀는 세상 곳곳에서 성도들을 넘어뜨리고 삼키려고 두루 다니며 찾고 있다(벧전 5:8).

그러나 성도는 해(害)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해’는 영적인 혹은 육적인 죽음을 가리킬 것이다. 성경은 성도에게 두려워 말고 담대하라고 교훈한다. 여호수아 1:6, 7, 9,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라,”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요한복음 16:33,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성도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같은 세상에서도 평안과 담대함을 가지고 산다.

성도가 세상에서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며 그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우리를 지키시고 우리를 위로하시기 때문이다. ‘지팡이’(쉐베트)는 사나운 짐승들을 물리치는 무기이며, ‘막대기’(미쉬안 ן������������������)는 양들을 인도하는 도구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좋은 길로 인도하시고 우리의 원수들을 물리쳐 주신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을 물과 불 가운데서도 지키시겠다고 말씀하셨다(사 43:2). 또 그는 그의 품안에 거하는 자들을 무서운 질병과 재앙에서 건지시겠다고 말씀하셨다(시 91:1-10). 이 세상이 악하고 험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키고 인도하신다.

[5절]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여기에 ‘상’은 밥상을 가리킨다. 그것은 기쁨과 즐거움의 일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먹는 즐거움도 주실 것이다. 그것도, 그의 원수 앞에서 그렇게 하실 것이다. 다윗의 원수들은 다윗이 실패하고 망하기를 바랐겠지만,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시고 그에게 기쁜 일을 주시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다윗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그의 원수들 앞에서 증거하실 것이다.

또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머리에 기름을 바르셨다고 말한다. ‘기름을 바른다’는 원어(디쉔)는 ‘기름을 바르다, 기름지게 만들다, 기쁘게 받다’는 뜻이 있다. 옛날에 잔치 자리에서 주인은 귀한 손님의 머리에 기름을 발라주었다고 한다. 죽었다가 나흘 만에 살림을 받았던 나사로의 집에서 예수님을 위해 잔치할 때 나사로의 여동생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예수님의 발에 부었었다(요 12:3). 잔치에 초청을 받아 참여한 손님들은 기름의 좋은 향기로 기분이 좋아질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귀한 손님처럼 대우하셨다. 얼마나 큰 은혜이었는지!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도 동일한 은혜를 주실 것이다.

또 다윗은 자신의 잔이 넘친다고 고백한다. 하나님께서 차려주신 상은 풍성한 식탁이었다. 음식도, 포도즙도 풍성했다. 부유한 주인이 손님들에게 기쁨의 포도즙을 잔에 넘치게 부어주듯이,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풍성하고 넘치는 은혜를 주셨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풍성하고 넘치는 은혜를 주실 것이다.

[6절]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종 다윗을 은혜로 택하셨고 구원하셨고 인도하신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 1:9에서 말하기를,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고 하였다.

다윗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평생 그를 따를 것이라고 확신한다. 과거에 우리와 함께하셨던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또 남은 날들도 우리와 함께하실 것이다. 예수께서는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마 28:20). 성령께서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하실 보혜사이시다(요 14:16). 이 세상의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우리를 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롬 8:35, 38-39).

다윗은 하나님의 집에 영원히 거하겠다고 고백하였다. 이것은 그가 성전 중심의 삶을 살겠다는 대답인 동시에 영원한 천국의 소망과 확신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그것을 깨닫는 사람은 하나님 중심, 성전 중심, 천국 중심으로 살 것이다. 그는 주의 재림이 가까움을 볼수록 모이기를 더 힘쓸 것이며(행 2:42; 히 10:25), 장차 영광의 천국에서 영원한 영광의 삶을 누릴 것이다(계 22:5).

시편 23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하나님을 목자로 삼은 자는 영육의 부족함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지혜롭고 능력이 많으시고 선하신 목자이시다. 그는 자기의 양들을 지키시고 영육의 좋은 것으로 공급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만 진실히 믿고 섬기자.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우리로 의의 길을 가게 하신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살았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또 우리는 실제적으로도 의롭고 선한 삶을 힘써야 한다.

셋째로, 세상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이지만, 우리는 해를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심과 그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우리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심을 깨닫고 감사하자.

넷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우리의 평생에 함께하실 것을 믿고 하나님의 집에 영원히 거하기를 소원하자. 우리는 하나님 중심, 교회 중심으로 살고 영원한 영광의 천국만 사모하며 소망하자.

24편: 영광의 왕이신 하나님

[1-2절]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이는]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건설하셨음이로다].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다. 이 광대한 지구와 거기에 가득한 것들과 세계와 그 가운데 거하는 자들이 다 하나님의 것이다. 산들과 골짜기들, 나무들과 풀들, 꽃들, 새들, 짐승들, 곤충들, 벌레들, 땅 속의 금은보석의 광물들, 바다들과 강들과 물고기들이 다 하나님의 것이며, 여러 피부색들과 여러 언어들과 다양한 풍습의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천지만물 곧 우주만물과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참된 주인이시요 소유자이시다. 우주는 하나님의 소유물이다.

성경은 이런 진리를 여러 곳에서 밝히 증거한다. 창세기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출애굽기 19: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신명기 10:14, “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과 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로되.” 욥기 41:11,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 역대상 29:11,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시편 50:12, “세계와 거기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천지만물이 다 하나님의 소유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것의 터를 바다 위에 세우셨고 강들[혹은 물들] 위에 건설하셨기 때문이다. 즉 천지만물과 모든 생물과 사람을 만드신 이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것들의 주인이신 것이다. 시편 89:11도, “하늘이 주의 것이요 땅도 주의 것이라. 세계와 그 중에 충만한 것을 주께서 건설하셨나이다”라고 말하였다. 하나님께서 천지만물, 즉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그는 당연히 천지만물의 소유자이신 것이다.

[3-4절]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

‘여호와의 산’은 하나님께서 계신 곳, 성막이 있는 곳을 가리킨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 곧 온 세상의 창조주이시며 주인이신 하나님을 섬기며 그와 교제할 수 있는가? 다윗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또한 도덕적인 하나님이시므로 경건하고 도덕적인 자만 하나님을 섬기며 그와 교제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이치에도 맞고 성경적이다.

첫째로,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는 손이 깨끗해야 한다. 손은 사람이 일을 하는 주된 도구이다. 손은 사람의 행동을 나타낸다. 사람의 손은 나쁜 일도 할 수 있고 좋은 일도 할 수 있다. 악한 자는 손으로 살인, 간음, 도적질 등을 행한다. 그러나 선한 자는 거룩한 손을 들고 하나님께 기도하며(딤전 2:8) 그 손으로 의와 선을 행한다. 사람은 손이 깨끗해야 하나님을 섬기며 교제할 수 있다.

둘째로,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는 마음이 청결해야 한다. 첫 사람이 범죄한 이후, 모든 사람의 마음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되어 있다(렘 17:9).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람의 마음에서 악한 생각, 살인, 간음, 도적질, 거짓 증거, 비방 등이 나온다(마 15:19). 그러나 사람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을 때 그 마음이 깨끗케 된다(행 15:9). 이렇게 마음이 깨끗케 된 자만 하나님을 뵈올 수 있다(마 5:8). 사람은 마음이 깨끗해야 하나님을 섬기며 교제할 수 있다.

셋째로,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는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않아야 한다. 허탄한 것은 물질적인 것, 세상적인 것, 죄악된 것을 가리킨다. 주께서는 물질적인 것을 썩는 양식이라고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6:27,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재물은 허무하게 없어질 수 있는 것이다. 잠언 23:5,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날개를 내어 하늘에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 그러므로 사람은 마음을 이런 것에 두지 말고 믿음의 일(요 6:29), 주의 일(고전 15:58), 선한 일(딤전 6:17 -18)에 두어야 하나님을 섬기며 교제할 수 있다.

넷째로,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는 거짓으로 맹세하지 않아야 한다. 사울 왕은 맹세하고(삼상 14:39; 19:6) 그가 한 맹세를 쉽게 저버렸다. 그러나 사사 입다(삿 11:30-39)와 사무엘의 모친 한나(삼상 1:10-11, 24-28)는 그들이 맹세한 바를 그대로 지켰다. 사람은 거짓 맹세하지 않아야 하나님을 참으로 경외하는 자요 그와 교제할 만한 자이다.

[5-6절] 저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셀라).

본문의 ‘저’는 앞절에 말한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청결하고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않고 거짓 맹세치 않는 자를 가리킨다. 이런 사람은 참으로 회개하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자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생명 얻는 회개를 주신 자이다. 하나님께서 주셔야 사람이 참으로 회개할 수 있다. 베드로의 증거대로, 이방인 고넬료가 예수님 믿고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께서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기 때문이었다(행 11:18).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 복을 받을 것이며 그의 구원의 하나님께 의(義)를 얻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 중의 복은 구원의 복이며 그 구원의 내용은 의(義)이다. 사도 바울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고 말했다(롬 3:23-24). 또 그는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고 말했다. 사람이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받는 가장 귀한 복이다.

세상에는 하나님을 찾지 않는 자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도덕적으로 부패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긍휼과 만세 전 선택으로 하나님을 찾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받는 자들이다. 그들은 참으로 회개하고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구주 예수님을 믿는다. 이들은 하나님의 구원과 의를 받는다. 우리가 바로 그들이다.

[7-10절]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뉘시뇨?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들지어다](원문, KJV, NASB).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뉘시뇨?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셀라).

본문에 5번이나 반복하여 언급된 ‘영광의 왕’은 하늘의 천군 천사들을 거느리신 만군의 여호와를 가리킨다. 그는 우리를 위해 마귀와 모든 악령들을 물리치시는 강하고 능하신 하나님, 전쟁에 능하신 하나님이시다. ‘영광의 왕’은 특히 하나님께서 보내실 메시아를 가리킨다. 메시아께서는 시편 22편에 고난의 종으로, 시편 23편에 선한 목자로, 본 시편에 영광의 왕으로 증거되셨다. 그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려고 십자가에 죽으셨고 장사한 지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주와 그리스도 되심을 증거하셨고(행 2:36) 영광 가운데 승천하셨다. 디모데전서 3:16,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

이제 다윗은 “영원한 문들아, 네 머리를 들라”고 외친다. ‘영원한 문’은 ‘옛부터 있는 문’(NASB, NIV)이라고도 번역된다. 그것은 천국문을 가리킬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땅 위에 오셨다가 부활 승천하심으로 천국에 들어가실 때 천국문은 그를 위해 활짝 열려야 할 것이다. ‘옛부터 있는 문’은 인류 초기부터 있는 교회(계 13:8)의 문을 가리킬 수도 있다. 지상의 교회들, 곧 주의 백성들은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으나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쁨으로 영접해야 하며 또 그가 장차 만왕의 왕과 이 세상의 심판주로 세상에 재림하실 때에도 그러해야 한다. 

“너희 머리를 들라”는 말씀은 영광의 왕을 즐거이 환영하라는 뜻이다. 천국에 있는 천사들은 승천하시는 메시아를 환영해야 한다. 또 지상에 있는 교회들과 하나님의 백성들도 마음문을 활짝 열고 영광의 왕이신 주 그리스도를 기쁨으로 영접해야 할 것이다.

시편 24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천지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과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만물의 참 소유자이시다. 우리는 이 사실을 바로 알고 하나님을 믿고 섬기며 순종하자.

둘째로,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청결하고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않고 거짓 맹세하지 않는 자, 즉 회개하고 죄씻음 받은 자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고 교회의 참 회원이 될 수 있고 장차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셋째로, 이렇게 하나님을 찾는 자들이 구원의 복, 곧 의를 얻게 된다. 이것은 신약성경이 증거하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복과 같다.

넷째로, 이제 우리는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영광의 왕이신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한다. 천국에 있는 천사들과 성도들은 주님의 천국 입성을 환영했을 것이다. 이제 땅에 있는 교회들도 그러해야 하며, 또 장차 재림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모하며 대망해야 하고,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고백해야 한다.

25편: 하나님을 경외하며 바람

[1-3절]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 보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였사오니 나로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나의 원수로 나를 이기어 개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소서. 주를 바라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려니와 무고히 속이는 자는 수치를 당하리이다.

다윗의 원수들은 까닭 없이 그를 속이며 핍박했으나, 그런 상황에서도 다윗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였다. 하나님을 바라며 의지하고 그에게 기도하는 것은 원수들에 대한 최선의 대책이다. 이렇게 하나님을 바라며 의지하는 자는 결코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

[4-5절]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이는]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하나님이심이오니] 내가 종일 주를 바라나이다.

다윗은 원수들의 핍박 중에서 하나님의 길을 걷기를 원했다. 길은 생활방식을 말한다. 하나님의 길은 하나님의 진리의 교훈을 가리킨다. 성경은 곧 하나님의 길이다. 다윗이 하나님의 교훈을 구하는 이유는 그가 하나님을 종일 앙망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구원하셨고 또 구원하실 것이다. 어려운 문제를 직면할 때 하나님의 교훈대로 사는 것은 환난을 이기는 최선의 길이다.

[6절] 여호와여,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부터 있었사오니 주여, 이것을 기억하옵소서.

‘이것’은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을 가리킬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하시며 그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도 영원하시다. 시편 136:1,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편 136편에는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는 말이 26번 나온다. 다윗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긍휼과 인자를 알고 이 사실에 호소한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도움을 얻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영원하신 긍휼과 자비 안에서뿐이다.

[7절] 여호와여, 내 소시(少時)의 죄와 허물을 기억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을 인하여 하옵소서.

다윗도 그의 어릴 때, 즉 그가 아직 믿음과 인격이 많이 부족했을 때의 실수와 부족은 때때로 부끄럽고 고통스러운 기억의 일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이미 다 용서하셨고 기억하지 않으실 것이다. 사람은 어릴 때의 기억 때문에 더욱 겸손케 된다. 다윗은 이제 어른이 되어서도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선하심만 의지하며 원수의 공격으로부터 그를 건져주시기를 기도한다.

[8-9절] 여호와는 선하시고 정직하시니 그러므로 그 도(道)로 죄인을 교훈하시리로다. 온유한 자를 공의로 지도하심이여, 온유한 자에게 그 도를 가르치시리로다.

선하심과 정직하심이라는 이 대조적 두 속성은 하나님의 도덕적 완전성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의는 선하심을 겸비한 의이며 그의 선하심은 의를 겸비한 선하심이다. 선하심과 정직하심 즉 사랑과 의는 하나님의 필수적 속성들이며 우리는 그 둘을 똑같이 본받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선하고 올바른 길을 죄인들에게 교훈하신다. 그는 특히 온유한 자들에게 그 길을 가르치신다. ‘온유한 자’라는 원어(아나윔)는 ‘고난 당하는 자들, 겸비한 자들’이라는 뜻이다. 고난은 사람을 온유하고 겸손하게 만든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물리치시고 온유하고 겸손한 자들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나님의 참된 양들은 겸손히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른다(요 10:27; 계 14:4).

[10-11절] 여호와의 모든 길은 그 언약과 증거를 지키는 자에게 인자와 진리로다. 여호와여, 나의 죄악이 중대하오니 주의 이름을 인하여 사하소서.

하나님의 모든 길들은 인자와 진리이다. 하나님께서는 인자하시고 진실하시며 그 자신의 행하시는 모든 일이 인자와 진실이시며 또한 그는 우리에게 인자와 진실의 삶을 교훈하신다. 특히 하나님의 길은 그의 언약과 증거를 지키는 자들에게 그러하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과 언약을 맺으셨고 계명들을 주셨다. 그의 언약과 계명들을 지키는 자들에게는 그의 인자와 진실이 있다. 다윗은 자신의 죄악이 크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인해 그의 큰 죄악을 용서해주시기를 간구한다. 성도는 하나님의 언약과 계명들을 지키려 할 때 자신의 죄가 크고 심각함을 더욱 알게 되며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게 된다.

[12-15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누구뇨? 그 택할 길을 저에게 가르치시리로다. 저의 영혼은 평안히(베토브 בוֹט������)[형통하게, 행복하게] 거하고 그 자손은 땅을 상속하리로다. 여호와의 친밀함(소드 דוֹס)[친밀한 대화]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 그 언약을 저희에게 보이시리로다. 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앙망함은 내 발을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임이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복되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택할 길을 가르쳐주실 것이다. 그는 또 그의 영혼에 평안과 행복을 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또 그의 자녀들에게 땅을 상속받는 복을 주실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현세에서의 안정뿐 아니라 장차 영원한 천국을 기업으로 얻는 것을 가리킬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또 그에게 친밀함을 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또 그의 언약을 그에게 알게 하실 것이다. ‘그의 언약’은 신구약성경이다. 그것은 성경을 깨닫는 복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바른 지식, 충만한 지식을 가지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또 그의 발로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이다. 그물은 원수들이 쳐놓은 시험거리이다. 마귀는 성도를 범죄케 하려고 그의 발 앞에 그물을 쳐놓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항상 그를 앙망하는 자의 발이 그물에 걸리지 않게 하실 것이다.

[16-18절] 주여, 나는 외롭고 괴롭사오니 내게 돌이키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 마음의 근심이 많사오니 나를 곤난에서 끌어내소서. 나의 곤고와 환난을 보시고 내 모든 죄를 사하소서.

다윗은 외롭고 괴로운 상태에서 하나님의 긍휼과 구원을 구한다. 인생의 난제(難題)의 해결책이 하나님께 있다. 다윗은 또 자신의 죄들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한다. 그는 자신이 당하는 고난이 자신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책이라고 느끼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용서를 받으면 고난으로부터 구원도 얻을 것이다.

[19-22절] 내 원수를 보소서. 저희가 많고 나를 심히 미워함이니이다. 내 영혼을 지켜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오니 수치를 당치 말게 하소서. 내가 주를 바라오니 성실(톰)[완전함]과 정직으로 나를 보호하소서. 하나님이여, 이스라엘을 그 모든 환난에서 구속하소서.

다윗은 그를 심히 미워한 원수가 많았으나 그 현실을 믿음과 기도로 대처했다. 그는 하나님께 피하며 그를 의지했고 그에게 기도했다. 그는 평소에 완전함과 정직함으로 행하였고 그래서 담대하였다.

시편 25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원수들이 핍박하는 고난 중에도 그들과 일일이 맞대결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자. 다윗은 원수들의 핍박 중에서도 하나님만 바라보았다. 실상,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문제의 완전한 해결자이시다. 그러면 우리는 환난 중에도 하나님의 교훈을 사모하며 그가 지시하시는 길로만 행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고난 중에 우리의 과거의 모든 죄를 기억하고 회개하며 하나님의 긍휼만을 의지하자. 우리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에 근거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모든 죄를 버리고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만 의지하고 인자하신 하나님께 우리의 죄의 용서를 빌고 사함을 얻자.

셋째로, 우리는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온유함과 겸손함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온전함과 정직으로 행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시고 우리의 택할 길을 가르쳐주시고 친밀한 교제와 대화를 허락하시고 바른 성경 지식을 얻고 우리의 발이 원수들이 친 그물에 걸리지 않게 하시고 우리로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시고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를 고난으로부터 구원해주실 것이다.

26편: 완전함에 행하며 하나님께 아룀

[1-2절]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요동치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지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니 나를 판단하소서. 또한 내가 여호와를 의지하였사오니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이다](MT 액센트에 근거; KJV).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길요사이)[나의 신장(腎臟), 내부]과 내 마음을 단련하소서[검토하소서].

다윗은 자신이 완전함에 행하였다고 말한다. ‘완전함’이라는 원어(톰)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으로 흠과 부족이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 노아가 완전하다는 말(타밈, 창 6:9)이나 욥이 순전하다는 말(탐 ם������, 욥 1:1)은 같은 어원이다. 다윗은 노아와 욥같이 평소에 경건하고 도덕적인 삶, 흠과 부족이 없는 삶을 살았다.

다윗은 또 자신이 하나님을 의지하였고 요동치 않으리라고 말한다. 그는 물맷돌로 블레셋 장수 골리앗과 싸워 이긴 때부터 믿음의 사람이었다(삼상 17:45-47). 또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요동치 않을 것이다. 시편 125:1은,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는 시온산이 요동치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라고 말한다.

다윗은 담대히 하나님의 판단을 구한다. ‘내 뜻과 내 마음’은 ‘나의 깊은 생각과 마음과 뜻, 즉 나의 마음 중심’을 가리킨다. 그는 담대히 하나님의 판단과 시험을 구한다. 그에게는 믿음의 담대함이 있었다.

[3-5절] 주의 인자하심이 내 목전에 있나이다. 내가 주의 진리 중에 행하여 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아니하였사오니 간사한 자( 나알라밈)[자신을 감추는 자들, 속이는 자들]와 동행치도 아니하리이다. 내가 행악자의 집회를 미워하오니 악한 자와 같이 앉지 아니하리이다.

3절을 다시 번역하면, “이는 주의 인자하심이 내 목전에 있으며 내가 주의 진리 중에 행하였음이니이다.” 이 구절은 앞절에서 하나님의 판단을 구했던 그의 담대함의 근거를 보인다. 그의 담대함의 근거는 첫째 하나님의 인자하심이었고 둘째 그의 평소의 순종생활이었다.

다윗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인자하심, 즉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사랑을 믿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것은 오직 그의 인자하심 때문이다. 그의 인자하심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죄 용서함을 받았고 감히 거룩하신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것이다.

다윗은 또 평소에 하나님의 진리 중에 행했다. 우리는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교훈을 따라 행해야 한다. 사도 요한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을 보며 심히 기뻐하였다(요이 2, 요삼 4).

또 다윗은 자신이 거짓되고 악한 자들과 함께 앉거나 동행하지 않았고 또 그럴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시편 1:1이 말한 복 있는 자의 모습과 같다. 성도는 친구를 잘 사귀어야 한다. 그는 경건하고 선한 친구를 사귀어야 한다. 잠언 13:20,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 고린도전서 15:33,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6-7절] 여호와여, 내가 무죄하므로(베닉카욘)[깨끗함 중에서, 무죄함 중에서] 손을 씻고 주의 단에 두루 다니며 감사의 소리를 들리고 주의 기이한 모든 일을 이르리이다.

다윗은 깨끗한 손으로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고백한다. ‘손을 씻는다’는 말은 제사장들이 성소에 들어갈 때와 단에 가까이 가서 제물을 불사를 때에 먼저 그들의 손과 발을 물대야에서 씻는 것을 생각케 한다(출 30:19-20). 후에 솔로몬 성전에서는 물대야 열 개 외에 바다라는 것을 한 개 만들었는데, 번제물은 물대야들에서 씻고 제사장들은 바다에서 씻었다(대하 4:6). “주의 단에 두루 다니며”라는 말은, 다윗이 제사장은 아니지만 제사장들이 제단 주위에서 분주히 제사들을 수행하듯이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뜻이다.

우리는 거룩한 손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며 깨끗한 제물을 그에게 드려야 한다. 디모데전서 2:8,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말라기 1:11,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죄를 품고 하는 기도나 봉사를 받지 않으실 것이다.

다윗은 또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를 증거하겠다고 말한다. “감사의 소리를 들리고”라는 말은 하나님을 섬기면서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고 하나님께 감사의 말씀을 소리내어 아뢴다는 뜻이다. 우리는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시 50:14; 100:4). 또 “주의 기이한 모든 일을 이르리이다”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모든 기이한 일들을 증거하고 찬송하겠다는 뜻이다. 그것은 찬송의 내용이기도 하고 또 전도의 내용이기도 할 것이다.

[8-12절] 여호와여, 내가 주의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거하는 곳을 사랑하오니 내 영혼을 죄인과 함께, 내 생명을 살인자와 함께 거두지 마소서. 저희 손에 악특함[악함]이 있고 그 오른손에 뇌물이 가득하오나 나는 나의 완전함에 행하오리니 나를 구속(救贖)[구원]하시고 긍휼히 여기소서. 내 발이 평탄한 데 섰사오니 회중에서 여호와를 송축하리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계신 집과 그 영광이 거하는 곳, 곧 성막을 사랑하였다. 하나님을 알고 그를 경외하는 자는 하나님의 성막을 사랑할 것이다. 오늘날 말로 하면, 하나님을 알고 그를 경외하는 자는 교회를 사랑할 것이며, 주 예수께서 피흘려 사신 백성 곧 예수님 믿는 자들을 사랑할 것이다. 진실한 성도들은 교회를 사랑할 것이다.

또 다윗은 완전함에 행하겠다고 고백한다. 그는 1절에서 완전함에 행하였다고 말했고, 3절에서 진리 중에 행하였다고 했다. 이제 그는 “나는 나의 완전함에 행하오리니”(11절)라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순전한 마음을 가지고 양심에 거리낌없는 순종 생활을 힘썼고 흠 잡을 데 없는 삶을 살고 있었다. 12절에 “내 발이 평탄한 데 섰사오니”라는 말도 평지에 견고히 섰다는 뜻도 되지만, 또한 의와 정직 가운데 섰다는 뜻도 된다.

그러나 다윗의 대적자들의 모습은 달랐다. 그들은 9절에 ‘죄인’과 ‘살인자’라고 표현된다. 또 10절은 “저희 손에 악함이 있고 그 오른손에 뇌물이 가득하다”고 말한다. 악인은 온갖 방법들을 동원하여 남을 해치고 남을 죽이려 한다. 이런 상황에서, 다윗은 “내 영혼을 죄인과 함께, 내 생명을 살인자와 함께 거두지 마소서”(9절), “나를 구원하시고 긍휼히 여기소서”(11절)라고 기도한다. 그는 지금 죽을 위기에 처해 있지만, 담대히 하나님의 인자하심(3절)의 구원을 간구한다.

시편 26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완전하게 행하자. 1-2절,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요동치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지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마음을 단련하소서.” 11절, “나는 나의 완전함에 행하오리니 나를 구속하시고 긍휼히 여기소서.” 사람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계명대로 흠과 점 없이, 완전하게 사는 것은 가장 복된 삶이다. 그것이 구원받은 성도의 삶이다. 우리가 이렇게 믿음과 순종으로 살 때 우리는 담대함을 얻고 환난 중에도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할 수 있고 구원을 얻고 승리할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악한 자들과 함께 앉거나 교제하거나 동행하지 말고 하나님의 인자하심만 의지하며 주의 진리 안에 행하고 깨끗한 손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깨끗함 중에 행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를 증거하자. 또 우리는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하나님의 긍휼을 의지하며 그에게 담대히 기도하자. 5절, “내가 행악자의 집회를 미워하오니 악한 자와 같이 앉지 아니하리이다.” 환난 날의 담대함은 평소에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랑하며 그의 계명을 순종하여 완전하고 깨끗하게 행할 때만 가능할 것이다. 하나님을 믿고 섬기며 그의 계명대로 사는 신앙생활은 평소의 생활이다. 그의 계명을 순종하는 자마다 환난 날에 담대할 것이다.

27편: 하나님을 담대히 의지함

[1-3절]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나의 대적, 나의 원수된 행악자가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다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안연(晏然)하리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빛, 우리의 구원, 우리의 생명의 능력이시다. 빛은 지식과 의, 기쁨과 행복을 상징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지식과 의와 기쁨과 행복이 되신다. 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위험에 처해 있을 때 우리를 건져주시며, 우리가 병들고 낙심할 때 우리를 치료하시고 새 힘을 주시는 자이시다. 세상에는 우리를 위협하는 일이 많지만, 하나님을 믿는 자는 그것을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 않는다.

다윗의 대적자들과 그 원수된 행악자들은 그의 살을 먹으려고 그에게로 다가왔으나 실족하여 넘어졌다. 그를 핍박하던 사울은 엎드러졌고 그를 대적하던 아들 압살롬도 죽고 말았다. 그는 군대가 그를 대적하여 진을 칠지라도 마음이 두렵지 않으며 전쟁이 일어나 그를 치려 할지라도 안연할 것이라고 말한다. ‘안연하다’는 원어(보테아크)는 ‘안전하다’는 뜻이다. 그가 그런 마음을 가지는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구원하심과 보호하심을 확신하였기 때문이다.

[4절]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

‘아름다움’이라는 원어(노암)는 ‘사랑스러움’이라는 뜻이며, ‘사모한다’는 원어(바카르)는 ‘묵상하다, 기쁨으로 생각하다’는 뜻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집에 거하여 하나님을 만나며 그와 교제하며 그를 섬기며 그를 사랑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그를 묵상하기를 원하고 있다. 그렇다. 하나님을 사모하는 것, 이것이 참된 경건이며 믿음이다. 그러나 이런 경건한 삶은 하나님께서 주셔야 된다.

[5-6절] [이는]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바위 위에 높이 두시리로다[두실 것임이라]. 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두른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내가 그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여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다윗이 환난 때 하나님과 교제하기를 원한 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문제의 해답이시며 그를 의지함이 환난에서 승리하는 길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환난 날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그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 장막 은밀한 곳에 숨기실 것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그를 바위 위에 높이 두실 것이며 그의 머리는 그를 두른 원수 위에 들릴 것이다. 바위 위에 높이 두는 것은 안전함을 가리키며 머리가 원수 위에 들린다는 표현은 확실한 승리를 의미한다. 이제 다윗은 그 장막에서 하나님께 즐거운 제사를 드리고 노래하며 그를 찬송하겠다고 말한다.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아는 성도는 하나님께 영광을 올린다.

[7-8절] 여호와여, 내가 소리로 부르짖을 때에 들으시고 또한 나를 긍휼히 여기사 응답하소서.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 마음이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다윗은 소리로 부르짖을 때에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시기를 구한다. 성경은 부르짖는 기도에 대해 많이 말한다(시 18:6; 28:1; 57:2; 렘 29:12; 눅 18:7). 부르짖는 기도는 간절한 기도이다. 묵상기도는 때때로 잠이 오고 잡념이 들 수 있지만, 소리내서 하는 기도나 부르짖는 기도는, 남에게 방해가 되지 않게 한다면, 더 낫다.

다윗은 또한 “나를 긍휼히 여기사 응답하소서”라고 말한다. 감히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확신할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긍휼에 의지하여 그의 응답을 기대할 뿐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긍휼을 의지하며 기도하는 것이다.

다윗은 또 하나님의 얼굴을 찾겠다고 말한다. 성도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이다(시 24:6). 하나님의 얼굴을 찾는 것은 하나님과의 바른 교제를 구하는 것이다. 참 경건은 하나님을 구하는 것이며 거기에 모든 문제의 해답이 있다.

[9-10절]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버리지 말고 떠나지 마옵소서. [이는]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영접하실 것임이니이다].

다윗은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라고 말하며, 하나님을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라고 부른다. 그는 과거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체험하였다. 선지자 사무엘도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돌을 취하여 에벤에셀 즉 ‘도움의 돌’이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여기까지 도우셨다는 뜻이었다(삼상 7:12).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도우시고 건지시는 구주이다.

다윗은 이제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 “나를 버리지 말고 떠나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한다. 주의 얼굴은 은혜와 위로의 얼굴이며 기쁨과 평강의 얼굴이다. 하나님의 버리심은 그의 진노의 행위이시다. 다윗은 지금 하나님께서 그를 노하여 버리지 마시기를 간구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경외하며 사모하는 자들을 결코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다윗은 또 자신의 간구의 근거를 말한다. 그것은 인간 부모가 자기 자식을 버리지 않으나 혹 버리는 경우가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결코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고 영접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11-12절] 여호와여, 주의 길로 나를 가르치시고 내 원수를 인하여 평탄한 길로 인도하소서. 내 생명을 내 대적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 위증자와 악을 토하는 자가 일어나 나를 치려 함이니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시하시는 길로 행해야 한다. 그 길은 정로(正路)이며(사 30:11), 옛적 길 곧 선한 길이다(렘 6:16). 하나님의 길은 바른 길, 선한 길, 지혜의 길, 평안의 길이며, 우리의 행복을 위한 길이다(신 10:12-13).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환경 여건 속에서도 오직 하나님의 길, 곧 성경에 계시된 그 길을 걷고 지켜야 한다.

‘평탄한’이라는 원어(미쇼르)는 ‘정직한’이라는 뜻도 있다(NIV). 하나님의 길은 올바르고 정직한 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든든히 세우시며 평안을 주시며 올바르고 정직한 길로 행케 하신다. 다윗이 하나님의 길과 평탄한 길을 구한 이유는 원수들 때문이었다. 다윗의 원수들은 ‘위증자’이었다. 그들은 다윗에게서 흠 잡을 것이 없으므로 거짓 증거를 사용하였다. 또 그들은 강포를 토하는 자이었다. ‘악’이라는 원어(카마스)는 ‘강포’라는 뜻이다. 성도는 온유한 자이나 악인은 강포하다. 원수들은 그를 없애고 죽이려는 뜻을 품고 있었다.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의 생명을 대적의 뜻에 맡기지 마시고 선한 길로 인도하시기를 구한 것이다.

[13-14절] 내가 산 자의 땅에 있음이여, 여호와의 은혜 볼 것을 믿었도다[만일 내가 산 자들의 땅에서 주의 선하심 볼 것을 믿지 않았더라면 (나는 낙심하였을 것이라)](KJV, NASB). 너는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다윗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확신했다. ‘산 자들의 땅’은 이 세상을 가리킬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천국에서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선하심과 은혜를 베푸신다. 시편 34:8,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디모데전서 4:8,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로마서 8:28,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성도는 이런 진리를 믿고 환난 중에도 낙심치 말아야 한다.

다윗은 이제 하나님의 감동 가운데 다른 이에게 교훈을 준다. 그것은 하나님을 바라라, 강하고 담대하며 하나님을 바라라는 교훈이다. 하나님을 바라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소망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기도 응답과 도우심과 구원을 믿고 소망하는 것이다.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뿐이다. 시편 39:7,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디모데전서 4:10,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진력하는[모욕을 당하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

우리는 강하고 담대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바라야 한다. 세상은 영적 싸움터와 같다. 히브리서 10:34-35,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그러나 이 담력은 순종 생활에서 나온다.

시편 27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빛, 우리의 구원, 우리의 생명의 능력이심을 바로 알고 의지하며, 세상이나 세상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자. 우리를 대적하는 원수들은 실족하여 넘어질 것이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바르게만 살자.

둘째로, 우리는 세상의 썩어지고 없어질 것을 구하지 말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구하자. 우리는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승리케 하심을 깨닫고 오직 하나님과의 교제를 사모하며 그를 의지하고 그의 뜻을 행하자.

셋째로,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께 소리로 부르짖어 기도하자.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항상 구하며 환난 중에 과거에 우리를 도우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그의 도우심과 구원을 간구하며 또 확신하자.

넷째로, 우리는 우리를 해치려는 원수들을 겁내지 말고 오직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길만 담대히 걷자. 우리는 항상 강하고 담대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자. 순종의 길은 의의 길이며 평강의 길이다.

28편: 부르짖어 기도함

[1-2절]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나의 반석이여, 내게 귀를 막지 마소서. 주께서 내게 잠잠하시면 내가 무덤에(보르)[구덩이] 내려가는 자와 같을까 하나이다. 내가 주의 성소를 향하여 나의 손을 들고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다윗은 죽음의 구덩이에 내려갈 듯한 절망적인 상황을 만났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신앙훈련의 기회이었다.

다윗은 그때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1절, “여호와 나의 반석이시여(KJV, 원문의 액센트),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2절, “내가 . . . 주께 부르짖을 때에.” 부르짖음은 조용히 묵상하거나 속삭이는 기도가 아니고 큰 소리로 하는 기도, 때때로 울부짖는 기도이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귀를 막지 마시기를 구한다. 하나님께서는 영으로 우리 속에 거하셔서 우리의 작은 소리도 잘 들으신다. 하물며 우리의 부르짖는 기도를 얼마나 더 잘 들으시겠는가. 우리의 죄가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지 않는다면, 우리가 회개하고 순종하며 기도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잘 들어주실 것이다.

다윗은 주의 성소를 향해 손을 들고 기도하였다. ‘성소’라는 원어(데비르 코드쉐카)는 ‘성소의 내실(內室)’ 곧 지성소(NIV)를 가리킨다. 지성소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한다. 손을 드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복종과 간절함의 표시라고 본다.

[3-5절] 악인과 행악하는 자와 함께 나를 끌지 마옵소서. 저희는 그 이웃에게 화평을 말하나 그 마음에는 악독이 있나이다. 저희의 행사와 그 행위의 악한 대로 갚으시며 저희 손의 지은 대로 갚아 그 마땅히 받을 것으로 보응하소서. 저희는 여호와의 행하신 일과 손으로 지으신 것을 생각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저희를 파괴하고 건설치 아니하시리로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악인과 함께 이끌지 마시기를 구한다. ‘함께 끈다’는 말은 동등하게 행하게 버려두거나 동등하게 취급하여 처리하는 것을 뜻할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악인처럼 악하게 행동하게 버려두지 마시고 그를 지켜 바른 길로 행케 하시며, 또 그를 악인처럼 멸망의 길로 가지 않게 하시기를 구한 것이다. 즉 그는 자신과 악인의 결말이 다름을 증거해주시기를 구한 것이다.

본문은 악인들의 모습도 증거한다. 그들은 이웃에게 화평을 말하나 그 마음에는 악독이 있다. 즉 악인들은 이중적이고 위선적이다. 또 악인들은 악하며 악을 행한다. 악인들은 또한 하나님의 행하신 일들을 생각지 않는다. 즉 그들은 불경건하다. 악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그를 두려워하지 않고 그를 사랑하지 않는 자들이다.

본문은 악인들의 결말도 증거한다. 4절, “저희의 행사와 그 행위의 악한 대로 갚으시며 저희 손의 지은[행한] 대로 갚아 그 마땅히 받을 것으로 보응하소서.” “여호와께서 저희를 파괴하고 건설치 아니하시리로다.” 의인의 결말과 악인의 결말은 명백히 다르다. 시편 1:6,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악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멸망할 것이다.

[6-7절] 여호와를 찬송함이여, 내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심이로다.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시니 내 마음이 저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저를 찬송하리로다.

다윗은 고난 중에 하나님을 의지하고 간구하였다. 그는 하나님을 알았고 진심으로 그를 의지하였고, 그의 믿음은 환난 날에 하나님께 간구함으로 표현되었다. 믿음은 기도로 나타난다. 그러나 우리에게 믿음이 없으면 우리가 어떻게 기도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주께서는 낙망치 말고 기도하라고 교훈하신 후에,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부언하셨다(눅 18:8).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어주셨고 그를 도우셨다. 7절,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시니 내 마음이 저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나의 힘’이라는 말은 낙심하거나 연약할 때 힘이 되셨다는 뜻이며 ‘나의 방패’라는 말은 원수들의 비난과 공격을 막아주셨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의지하는 자를 도우시고 힘 주시고 지켜주신다. 믿음의 기도는 응답을 받는다. 마가복음 11:24,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받는]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이제 다윗은 기도의 응답으로 인해 하나님을 찬송한다. 찬송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감사하며 높이는 노래이다. 기도의 응답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체험한 자마다 찬송할 것이다.

[8-9절] 여호와는 저희의 힘이시요 그 기름 부음 받은 자의 구원의 산성이시로다.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며 주의 산업에 복을 주시고 또 저희의 목자가 되사 영원토록 드십소서.

‘저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며 ‘그 기름 부음 받은 자’는 왕 다윗을 가리킨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의 힘이시요 기름 부음 받은 자신에게 구원의 산성이 되심을 확신한다.

다윗은 그 하나님께 몇 가지 소원을 아뢴다. 첫째, 그는 하나님께서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기를 구한다. 구원은 원수의 핍박이나 질병이나 여러 재난에서 건져내심을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주이시다. 특히 그는 우리를 죄와 사망과 지옥 형벌에서 건져내셨다. 이 큰 구원에 비교해보면, 그 외의 것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현실의 어떤 어려움에서라도 우리를 건져주실 것이다.

둘째,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산업에 복 주시기를 구한다. ‘그의 산업’은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킨다. 그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물이다(시 7:6; 14:2; 26:18; 시 135:4). 하나님의 산업은 오늘날 신약교회도 포함한다. 하나님께서는 복의 근원이시며 복을 주시는 자이시다. 그의 복은 영육의 것을 포함하고 현세적인 것과 내세적인 것을 포함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영육의 좋은 것을 주실 것이다.

셋째, 그는 하나님께서 저희 목자가 되시기를 구한다. ‘목자가 된다’는 원어(라아)는 ‘[양을] 먹인다, [양을] 인도한다’는 뜻이다.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께서는 양된 우리에게 영육의 양식을 주시고 우리를 의의 길, 선한 길로 인도하실 것이다.

넷째, 그는 하나님께서 저희를 영원토록 붙드시기를 구한다. “영원토록 드십소서.” ‘든다’는 원어(나사 )는 ‘들어올린다, 붙든다, 돕는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과거에도 자기 백성을 붙드시고 도우셨고 또 앞으로도 영원히 붙드시고 도우실 것이다. 

시편 29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죽음의 구덩이에 내려갈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계신 하늘 성소를 향하여 손을 들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하자. 하나님께서는 기도를 들어주시며 특히 부르짖어 기도하는 간절한 기도, 전심으로 올리는 기도를 잘 들어주신다. 시편 50: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예레미야 29: 12-13,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둘째로, 우리는 악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의 보응을 깨닫고 악인으로 살지 말고 의인으로 살자. 우리는 모든 종류의 악을 버리고 오직 선을 취해야 한다. 시편 7:11-12,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사람이 회개치 아니하면 저가 그 칼을 갈으심이여, 그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 전도서 12:14,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을 항상 의지하며 쉬지 말고 기도하고, 특히 어려운 일이 있을 때 기도하자. 우리는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을 영육으로 먹이시고 영원히 붙드시는 하나님의 힘과 구원을 믿고 간구하자. 또 우리는 하나님의 응답을 체험할 때, 우리를 도우시고 구원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께 진심의 찬송을 올리자.

29편: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찬송함

[1-2절] 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지어다. 여호와의[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너희 권능 있는 자들’은 이 세상 권세자들을 가리킬 것이다. 다윗은 이 세상의 권세자들에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한다. 세상의 권세자들은 영광과 능력을 자기 자신들에게 돌리기 쉽다. 그러나 모든 권세는 이 세상의 창조자요 섭리자이신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며 하나님께서만 온 우주에 홀로 참 권세자시다. 사람의 권세는 일시적이며 얼마 동안 있다가 조만간 없어지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라’는 말을 두 번이나 말한다. 이 세상의 권세자들은 모든 영광과 능력을 하나님께만 돌려야 한다. 우리는 모든 영광과 능력을 하나님께만 돌려야 한다.

다윗은 또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라고 말한다. 사람의 이름이 그 자신의 인품과 사회적 지위와 영광을 나타내듯이,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 자신의 어떠하심과 그의 지위와 영광을 나타낸다.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은 하나님께서 본래 가지고 계신 영광을 말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피조물이 만든 분이 아니시고 스스로 계신 분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스스로 계신 분 즉 영원자존자(自存者)이시다. 그는 태초에 천지만물을 창조하셨고 그것을 보존하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이시며 지혜와 능력, 아름다움이 충만한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본래 가지고 계신 영광, 즉 그의 이름에 합당한 그 영광을 그에게 돌려야 한다.

다윗은 또 거룩한 옷을 입고 하나님께 경배하라고 말한다. ‘거룩한 옷을 입고’라는 원어(베하드랏 코데쉬)는 ‘거룩함의 영광으로’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피조세계와 구별되고 특히 죄악된 것들과 구별되시는 거룩한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경배하되 이 세상의 죄악된 것들과 구별된 거룩한 생각과 방식으로 경배해야 한다. 우리 하나님께 대한 예배는 거룩한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오늘날, 교회가 부패하되 예배까지 부패하여 예배가 사람을 즐겁게 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매우 잘못된 일이다. 예배는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도록 거룩하게 드려져야 한다.

[3-6절] 여호와의 소리가 물 위에 있도다. 영광의 하나님이 뇌성을 발하시니 여호와는 많은 물 위에 계시도다. 여호와의 소리가 힘 있음이여, 여호와의 소리가 위엄차도다. 여호와의 소리가 백향목을 꺾으심이여, 여호와께서 레바논 백향목을 꺾어 부수시도다. 그 나무를 송아지같이 뛰게 하심이여, 레바논과 시룐으로 들송아지같이 뛰게 하시도다.

3절부터 9절까지에 ‘여호와의 소리가’라는 말이 여섯 번 나온다. 그것은 하늘의 천둥소리를 가리킨다고 본다. 비올 때 때때로 하늘에서 나는 천둥소리는 창조자와 섭리자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는 폭우를 쏟아내시기 전에 하늘이 캄캄한 비구름으로 뒤덮이게 하시고 천둥과 번개를 치게 하신다. 자연 세계의 큰 위엄은 창조주 하나님의 큰 위엄을 나타낸다.

천둥과 번개가 얼마나 요란하고 힘이 있든지 그 소리는 백향목을 꺾어 부순다. 백향목은 키가 36미터까지나 크고 튼튼한 나무이다. 그러나 번개와 벼락이 치면 그런 큰 나무도 꺾이며 그 토막들은 송아지같이 사방으로 뛸 것이다. 레바논과 시룐은 들송아지같이 뛸 것이다. 시룐은 헤르몬 산을 가리킨다. 헤르몬 산은 레바논 산 동편에 있는데, 시돈 사람들은 그 산을 시룐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7-9절] 여호와의 소리가 화염을 가르시도다. 여호와의 소리가 광야를 진동하심이여, 여호와께서 가데스 광야를 진동하시도다. 여호와의 소리가 암사슴으로 낙태케 하시고 삼림을 말갛게 벗기시니 그 전에서 모든 것이 말하기를 영광이라 하도다.

본문도 뇌성과 번개를 가리킨다. 광활한 광야는 하나님의 우렁찬 천둥소리로 진동한다. 9절에 ‘낙태한다’는 원어(쿨)는 ‘출산한다’는 뜻이다(KJV, NASB). 본문은 새끼를 밴 암사슴이 천둥소리에 깜짝 놀라 새끼를 출산한다고 표현한다. 천둥, 번개, 폭우로 수풀에 감추인 것이 다 드러난다. 9절의 ‘모든 것’(쿨로)은 ‘그의 모든’이라는 뜻으로 ‘그의 모든 백성’을 가리킬 것이다. 자연만물도 그러하지만, 특히 그의 모든 백성은 성전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10절] 여호와께서 홍수 때에 좌정(坐定)하셨음이여, 여호와께서 영영토록 왕으로 좌정하시도다.

‘홍수 때에’라는 원어(람맙불)는 ‘그 홍수 때에’라는 말로서 노아 시대의 홍수를 가리키는 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노아 홍수 때에 그 홍수 가운데 계셨다. 하나님께서는 그 홍수를 내리셨고 그 홍수를 주관하셨다. 창세기 6:17,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식 있는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자가 다 죽으리라.” 노아 홍수 때에 증거되었듯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에 유일하고 영원하신 왕이시다. 세상에는 하나님께서 한 분뿐이시다.

[11절]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신다. 능력의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실 수 있고 주실 것이다. 또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은 완전하여 사람이 세상에서 당하는 어떤 역경도 이길 수 있는 힘이다. 하나님께로부터 힘을 얻는 자는 세상에 두려울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이사야 40:28-31,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빌립보서 4: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또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평강을 주신다. 그는 천지만물을 주관하시는 왕이시며 천지를 진동시키실 수도 있고 그 반대로 천지에 평안과 안정을 주실 수도 있다. 이사야 45:7,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그에게는 사람의 모든 시끄러운 문제들을 해결하실 능력이 있으시다. 참 평안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으로 말미암는다. 요한복음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데살로니가후서 3:16,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노라.”

시편 29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영광과 능력을 우리 자신이나 어떤 피조물에게 돌리지 말고 하나님께만 돌리자. 하나님께서는 본래부터 영광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 즉 그의 본래의 영광을 그에게 돌려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거룩한 방식으로 그에게 경배하자. 2절,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우리는 자연만물 속에, 특히 천둥과 번개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깨닫고 거룩함의 영광으로,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을 돌리자.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영원한 왕이심을 깨닫고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기자. 그는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섭리자이시다. 또 그가 자기 백성에게 힘과 평강을 주심을 깨닫고 그에게 구하여 얻자.

30편: 죽음의 위기에서 건지심을 찬송함10)

[1-3절] 여호와여, 내가 주를 높일 것은 주께서 나를 끌어내사 내 대적으로 나를 인하여 기뻐하지 못하게 하심이니이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나를 고치셨나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내 영혼을 음부(쉐올)[무덤]에서 끌어내어 나를 살리사 무덤(보르)[구덩이]으로 내려가지 않게 하셨나이다.

다윗은 어렵고 힘든 상황에 처해 있었고 그의 대적들은 그를 주목하고 있었다. 다윗은 하나님께 “나를 끌어내소서,” “내 대적으로 나를 인하여 기뻐하지 못하게 하소서”라고 말한다. 또 그는 심한 질병으로 거의 죽을 지경에 떨어져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나를 고치셨나이다,” “내 영혼을 음부에서 끌어내어 나를 살리사 무덤으로 내려가지 않게 하소서”라고 말한다. 원인이 무엇이든지 간에, 성도에게는 종종 죽음의 위기가 있다.

다윗은 그 어려운 상황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였다. 어려운 때 하나님께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자는 행복하지만, 절망적 상황에서 하나님께 도움을 청할 줄 모르는 자는 불쌍하다. 고난은 유익하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해 우리의 믿음과 인격을 단련시키신다(롬 5:3-4). 다윗은 하나님의 기도 응답을 체험하며 하나님을 높인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곤란에서 건져내셨고 병을 고치셨고 죽음의 구덩이에서 그를 끌어내셨다. 다윗은 이 체험을 통해 더욱 하나님을 섬기며 그를 위해 살게 되었다. 성도는 기도의 응답, 즉 구원 체험을 통해 하나님을 더 높이며 그를 섬기며 그를 위해 살게 된다.

[4-5절] 주의[그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 거룩한 이름에(레제케르 코드쇼)[그의 거룩함을 기억하며] 감사할지어다. 그 노염은 잠간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이는 잠시간은 그의 진노 안에 있으나 생명은 그의 호의 안에 있음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다윗은 성도들에게 하나님을 찬송하고 감사하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자들은 그의 뛰어나신 위엄과 영광, 그의 크신 긍휼의 영광을 인하여 하나님을 찬송하고 감사할 것이다. 찬송은 성도의 마땅한 의무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잠시 동안 지속된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즐거운 마음으로 인생을 징벌하시는 것이 아니다. 예레미야는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라고 말했다(애 3:33). 그는 사람들의 죄악 때문에 매를 들어 그들을 때리시지만, 자기 백성을 영원히 노하지는 않으신다.

그러므로 다윗은 “생명은 그의 호의 안에 있다”고 말한다(KJV). ‘생명’이라는 원어(카임)는 ‘평생’이라는 뜻보다는 ‘복된 생명’이라는 뜻 같다. 그것은 구원과 기쁨과 복을 포함하는 개념일 것이다. 물론 본문은 이러한 생명이 오랫동안 지속될 것을 암시한다. 그것은 전반부의 ‘잠시간’이라는 말(레가)과 대조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징벌하시지만 또한 고치시고 회복시키신다. 하나님의 호의는 그의 진노와 비교할 수 없이 크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올 것이다.” 사사기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께서 주신 평강의 기간은 그가 내리신 징벌의 기간보다 보통 2배에서 심지어 5배 가량까지 길었다.

[6-7절] 내가 형통할 때에 말하기를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라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주의 은혜로 내 산을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

다윗은 자신이 형통할 때 자신감과 안정감을 가졌었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지 못하는 육신적 자신감과 안정감은 오래가지 못한다. 실상 그런 자신감과 안정감은 잘못된 것이다. 사람의 삶에는 평안과 고난이 번갈아 나타나며 고난이 닥치면 사람은 여지없이 자신의 연약과 무력을 드러낸다. 우리의 평안과 힘은 하나님 안에서만 있다. 우리는 그 안에서 힘과 용기를 가진다.

다윗은 또 하나님께서 그 은혜로 자신의 산을 세우셨다고 고백한다. ‘내 산’ 곧 다윗의 산은 다윗의 왕국을 가리킬 것이다. 그 왕국은 시온 산에 세워져 있을 뿐 아니라, 구약성경은 왕국을 ‘산’으로 자주 표현한다(사 2:2; 단 2:35, 44). 자신의 왕국이 하나님의 은혜로 굳게 세워졌다는 다윗의 깨달음은 바른 것이었다. 그러므로 시편 127:1은,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라고 말했다. 사도 바울도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고백하였다(고전 15:10). 우리의 가정이나 사업도, 교회도 그러하다.

그러나 다윗은 또 하나님께서 그 얼굴을 가리우시니 자신이 근심하였다고 말한다. 세상이 밝은 것은 태양 때문이며 그것이 가려지면 땅 위에 그늘과 어두움이 생기는 법이다. 하나님의 은총의 빛 아래서 인생은 평안과 형통을 누리지만, 그 빛이 가려지면 그에게 즉시 환난과 곤고함이 찾아올 것이다. 우리는 이 이치를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모든 좋은 것들이 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8-10절]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고 여호와께 간구하기를 내가 무덤에 내려갈 때에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어찌 진토가 주를 찬송하며 주의 진리를 선포하리이까? 여호와여, 들으시고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여호와여, 나의 돕는 자가 되소서 하였나이다.

다윗은 죽지 않기를 하나님께 간구하였다. 9절 전반부를 직역하면, “나의 피에, 내가 무덤에 내려갈 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이다. ‘나의 피에’라는 말은 ‘내가 피 흘려 죽을 때에’라는 뜻 같다. 그것은 ‘내가 무덤에 내려갈 때’라는 구절과 같은 뜻이라고 보인다. 다윗은 자신이 죽고나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하며 자신이 죽지 않기를 하나님께 간구한 것이다.

그가 죽지 않아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9절 후반부가 그것을 보인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을 찬송하고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하기 위해서이었다. 그는 삶의 의미를 하나님을 찬송하고 그의 진리를 선포하는 데서 찾았다. 이러한 삶의 목표는 매우 성경적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사 43:21). 사도 바울은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했다(고후 5:15).

다윗은 자신의 생명의 회복과 연장이 하나님의 긍휼과 도우심으로 될 것을 믿었다. 그것은 올바른 생각이다. 우리의 생명의 연장과 강건함 그리고 의롭고 바른 삶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에 달려 있다.

[11-12절]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이는 잠잠치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케 하심이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영히 감사하리이다.

다윗은 전에 슬픔 가운데 있었고 베옷을 입은 자와 같았다. 그것은 그의 대적들 때문에, 그의 질병 때문에, 죽음의 위협 때문에이었다. 그는 큰 질병 중에, 죽음의 위기에 있었다. 이 세상은 슬픈 일이 많은 세상이며 우리도 구원받기 전에는 슬픈 세상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셨고 그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다. 죽음의 곤경에서 구원받은 자들은 이처럼 기쁨의 춤을 출 것이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를 육지같이 건너고 추격하던 애굽 군대에게서 구원받았을 때 하나님께 찬송하며 기뻐하였다(출 15장). 에스더 때 유다인들은 멸절될 위기에서 하나님의 기이한 섭리로 구원받았을 때 슬픔이 변해 기쁨이 되고 애통이 변해 즐거움이 되었던 12월 14일과 15일을 부림절로 지키기 시작하였다(에 9:21-22). 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돌아올 때 슬픔이 변하여 춤추며 즐거워함이 되리라고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 말씀하셨다(렘 31:13).

다윗은 그런 기쁨으로 춤추며 기뻐하였다. 죄와 영원한 지옥 형벌로부터 구원받은 우리에게도 항상 기뻐해야 할 이유가 있다. 그래서 성경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교훈한다(살전 5:16; 빌 4:4).

하나님의 큰 구원을 체험한 다윗은 이제 심령에서 나오는 찬송을 하나님께 돌리고 영원히 그에게 감사를 올리고자 한다. ‘내 영광으로’라는 말은 ‘내 영혼으로’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와 지옥 형벌에서 구원하신 목적도 그의 은혜를 찬송케 하시기 위함이다(엡 1장).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은 우리는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올려야 한다(히 13:15).

우리는 세상에서 고난이 있음을 알고 두려워하지 말자. 성도에게는 대적자도 있고 몸이 아플 때도 있으며 하나님의 진노를 당할 때도 있고 주께서 얼굴을 가리우셔서 근심하며 슬퍼할 때도 있다.

우리는 고난받을 때 하나님께 부르짖어 간구하자. 우리는 우리 자신을 성찰하며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자.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은 백성의 부르짖는 기도를 외면치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간절한 기도를 응답하실 것이다. 우리는 잠깐 그의 진노 안에 있으나 그의 호의 안에 우리의 생명이 보존될 것이다. 저녁에는 울음이 있을지라도 아침에는 곧 기쁨이 올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송하자.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자. 우리는 그의 거룩하신 이름을 찬송하고 감사하자. 우리는 심령으로 하나님을 찬송하며 영원히 그에게 감사하자.

31편: 고통 중에 담대히 기도하여 응답받음

[1-4절]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로 영원히 부끄럽게 마시고 주의 의로 나를 건지소서. 내게 귀를 기울여 속히 건지시고 내게 견고한 바위와 구원하는 보장이 되소서. 주는 나의 반석과 산성이시니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인하여 나를 인도하시고 지도하소서. 저희가 나를 위하여 비밀히 친 그물에서 빼어 내소서. 주는 나의 산성이시니이다.

다윗은 고난 중에 하나님께 피하였다. 그것이 믿음이다. 하나님께 피하는 자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을 것이다. 그는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다윗은 “주의 의로 나를 건지소서”라고 기도했는데, 그가 말한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의를 가리킬 것이다. 그는 시편 4:1에서 하나님을 “내 의의 하나님”이라고 불렀다. 신약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로 주신 하나님의 의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이다.

다윗은 지금 급박한 구조가 필요한 고난 가운데 있다. 그는 하나님께 “내게 귀를 기울여 속히 건지시고 내게 견고한 바위와 구원하는 보장이 되소서”라고 기도하였고 하나님을 “나의 반석과 산성”이라고 고백하였다. 또 그는 하나님께 “주의 이름을 인하여 나를 인도하시고 지도하소서”라고 기도하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주신 그의 이름이 모욕을 당하지 않고 영광을 얻기 위해서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이름의 영광을 위해 자기 백성을 지키시고 구원하시며 선한 길로 인도하신다. 또 다윗은 원수들이 비밀히 친 그물에서 자기를 빼어내 주시기를 기도한다.

[5-8절]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구속(救贖)하셨나이다. 내가 허탄한 거짓을 숭상하는 자를 미워하고 여호와를 의지하나이다. 내가 주의 인자하심을 기뻐하며 즐거워할 것은 주께서 나의 곤란을 감찰하사 환난 중에 있는 내 영혼을 아셨고 나를 대적의 수중에 금고치 아니하셨고 내 발을 넓은 곳에 세우셨음이니이다.

다윗은 자신의 영을 하나님께 부탁한다. 우리의 영을 돌보아 줄 수 있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다. 다윗은 또 하나님을 ‘진리의 하나님’으로 부르며 그가 자신을 구속(救贖)하셨음을 고백한다. 진리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죄와 멸망으로부터 구속(救贖), 곧 구원하셨다.

다윗은 또 “내가 허탄한 거짓을 숭상하는 자를 미워하고 여호와를 의지하나이다”라고 고백한다. ‘허탄한 거짓’이라는 원어(하벨레 솨웨)는 ‘헛된 우상들’이라는 뜻이다. 이방인들의 신들과 우상들은 속이는 헛된 것들이다. 그것들은 사람에게 구원이나 복을 주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를 멸망의 지옥으로 인도한다.

다윗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기뻐하고 즐거워하겠다고 고백한다. 그것은 그가 곤란 중에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체험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곤란을 감찰하사 환난 중에 있는 그의 영혼을 아셨고 그를 대적의 손 안에 감금되지 않게 하셨고 그의 발을 넓은 곳, 곧 편안하고 안전한 곳에 세우셨다고 말한다.

역사상,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종들과 백성들을 환난 가운데 버려두지 않으시고 여러 번 비상한 방법으로 구원하셨다. 성경은 성도들의 이런 체험을 많이 증거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사건뿐 아니라, 아사 왕 때, 여호사밧 왕 때, 히스기야 왕 때, 다니엘과 친구들의 때 등의 역사는 그런 예들을 보여준다. 신약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큰 환난을 통과할지라도 장차 흰옷 입은 승리자로 나타날 것이며(계 7:9-10, 14) 또 천국의 영광을 누릴 것이다.

[9-13절] 여호와여, 내 고통을 인하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근심으로 눈과 혼과 몸이 쇠하였나이다. 내 생명은 슬픔으로 보내며 나의 해는 탄식으로 보냄이여, 내 기력이 나의 죄악으로 약하며 나의 뼈가 쇠하도소이다. 내가 모든 대적으로 말미암아 욕을 당하고 내 이웃에게서는 심히 당하니 내 친구가 놀라고 길에서 보는 자가 나를 피하였나이다. 내가 잊어버린바 됨이 사망한 자를 마음에 두지 아니함 같고 파기[깨진 그릇]와 같으니이다. 내가 무리의 비방을 들으오며 사방에 두려움이 있나이다. 저희가 나를 치려 의논할 때에 내 생명을 빼앗기로 꾀하였나이다.

다윗은 고난 가운데 있다. 그의 심신은 쇠약해졌다. 그의 사는 날들은 슬픔과 탄식의 시간이었다. 그 고통의 시간들이 여러 날들과 아마 여러 해들 계속되었다. 그의 기력이 약하며 그의 뼈는 쇠하였다. 다윗은 그의 연약과 고통이 자신의 부족과 죄 때문이라고 고백한다. 하나님의 징벌은 엄격하고 혹독하였다. 그러나 그의 징계는 그가 죄인을 사랑하시는 표이며 그 영혼을 구원하고 그 인격을 거룩케 하는 유익이 있다.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께 긍휼을 간구한다. 그는 하나님의 용서를 통해서만 자신이 고통의 현실에서 구원받을 수 있음을 믿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에 근거한다.

다윗은 대적들과 이웃들에게 모욕과 비난을 당하였다. 친구들은 그를 놀라고 사람들은 그를 따돌렸다. 그는 죽은 자같이, 깨진 그릇같이 사람의 생각에서 잊어버린 바 되었다. 또 그는 죽음의 위협을 당했다. 원수들은 그의 생명을 빼앗기를 의논하였다. 다윗이 당한 고난은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과 비슷하였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의 모욕과 비난을 당하셨다. 유대 지도자들은 그의 전도사역 초기부터 그를 죽이기를 의논하였고 마침내 그 일을 이루었다(마 12:14; 요 5:18; 마 26:3-4, 59). 성경은 주 예수님을 믿는 우리도 세상에서 모욕과 핍박과 비방을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행 14:22; 딤후 3:12).

[14-16절] 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사오니 내 원수와 핍박하는 자의 손에서 나를 건지소서.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 비취시고 주의 인자하심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다윗은 극심한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였다. 그는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한다. 참 믿음이 세상을 이긴다. 다윗은 또 자신의 시간들이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고백한다. ‘내 시대’라는 원어(잇토사이)는 ‘나의 시간들’이라는 뜻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신앙이다. 주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참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마 10:29).

다윗은 원수들의 손에서 자신을 건져주시기를 하나님께 간구한다. 원수들과 핍박하는 자들의 손이 힘있어 보이지만, 하나님의 손은 더 힘이 있으시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그를 원수들의 손에서 건져주실 것이다. 그것은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다윗은 또 하나님의 은혜의 얼굴빛을 간구한다. 제사장들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노라”고 축복하였다(민 6:25). 하나님께서 긍휼과 인자하심을 다윗에게 베푸신다면, 그가 원수들과 핍박자들의 손에서 구원받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17-20절] 여호와여, 내가 주를 불렀사오니 나로 부끄럽게 마시고 악인을 부끄럽게 하사 음부에서 잠잠케[잠잠히 무덤으로 가게] 하소서. 교만하고 완악한 말로 무례히 의인을 치는 거짓 입술로 벙어리 되게 하소서.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 지요. 주께서 저희를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사 사람의 꾀(로케스)[공모(共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비밀히 장막에 감추사 구설의 다툼에서 면하게 하시리이다.

다윗은 그가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으니 그로 부끄럽게 마시기를 구하였고, 악인을 부끄럽게 하셔서 그들로 잠잠히 무덤으로 내려가게 하시기를 구하였다. 또 그는 교만과 경멸로 거만하게 의인들을 비방하는 거짓 입술들로 벙어리 되게 하시기를 간구한다. 악한 비방의 말은 그쳐져야 할 것이다. 다윗은 성도를 ‘주를 두려워하는 자,’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하는 자’라고 묘사한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고 인정하고 그를 두려워하는 것이 경건이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런 성도를 위해 큰 은혜를 쌓아두시고 베푸신다고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경외하고 의지하는 자를 위해 그의 선하심을 나타내시고 그의 좋은 것들을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은밀한 곳에 숨기시고 비밀히 장막에 감추셔서 사람의 공모(共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구설의 다툼에서 면하게 하실 것이다. 누가 사람들의 음모를 막고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으랴.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경외하고 의지하는 자들을 보호하시고 막으시고 건지실 것이다.

[21-22절] 여호와를 찬송할지어다. 견고한 성에서 그 기이한 인자를 내게 보이셨음이로다. 내가 경겁한 중에 말하기를 주의 목전에서 끊어졌다 하였사오나 내가 주께 부르짖을 때에 주께서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셨나이다.

다윗은 하나님을 찬송한다. 그가 하나님을 찬송하는 이유는 견고한 성에서 그의 기이한 인자를 그에게 보이셨기 때문이었다. 견고한 성은 하나님의 품을 가리키는 것 같다. 하나님의 품보다 더 견고한 피난처는 없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은밀한 품에서 다윗에게 기이한 인자하심을 베푸셨다. 다윗은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놀라고 당황해서 이제는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셨나보다, 그의 눈길과 관심이 나를 떠나셨나보다라고 생각했었다. 이것은 마음의 눈이 어두워 현실만 보고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한 연약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께 부르짖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어주셨다.

[23-24절] 너희 모든 성도들아, 여호와를 사랑하라. 여호와께서 성실한 자를 보호하시고 교만히 행하는 자에게 엄중히 갚으시느니라. 강하고 담대하라.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다윗은 성도들에게 두 가지를 교훈한다.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것은 율법의 핵심 내용이다. 신명기 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할 이유는 그가 천지만물을 만드신 자이시요 그것들을 섭리자시며 우리의 목자이시며 우리에게 천국과 영생을 주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을 말한다(신 10:12-13; 요일 5:3).

둘째는 강하고 담대하라는 것이다. 그것은 믿음과 사랑에 필수적 요소이다. 우리가 강하고 담대하지 못하면 우리는 불신앙과 죄악과 타협하고 변절하고 실패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담대한 믿음으로 천국을 기업으로 얻는 자가 되어야 한다(히 10:34-35). 하나님께서는 그를 경외하는 성도들을 보호하시고 구원하시지만, 교만히 행하는 자에게 공의의 형벌로 엄중히 갚으신다. 주께서는 성령으로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므로(마 28:20; 요 14:16) 우리와 우리가 받은 구원과 영생을 빼앗을 자는 아무도 없다(요 10:28).

우리는 고난 중에 하나님께 피하자. 다윗은 심신의 심한 고통과 원수들의 위협 중에서 그것이 자기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느꼈으나 오직 하나님께 피하며 기도하였다. 그는 하나님을 그의 피난처, 그의 반석과 산성으로 삼았다. 우리도 고난 중에 하나님께 피하자.

우리는 하나님의 의와 인자만 의지하며 기도하자. 다윗은 하나님의 의와 그의 인자만 의지하며 기도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의 때문에, 그 의를 힘입어 하나님께 담대히 기도하자.

그러면 하나님께서 원수들의 은밀한 그물에서 우리를 건져주실 것이다. 우리의 시간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다스리시는 섭리자이시다. 그는 교만하고 완악한 말로 무례하게 의인을 비방하는 악인들을 공의로 징벌하실 것이다. 그는 성도를 사람들의 꾀와 공모로부터, 구설의 다툼으로부터 건져주실 것이다.

모든 성도는 우리를 죄와 지옥 형벌에서 구원하시고 세상의 고난 중에서도 지키시고 건져주시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또 모든 성도는 강하고 담대해야 한다. 우리는 불신앙과 죄악과 타협하거나 변절하지 말고 강하고 담대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고 순종해야 한다.

32편: 회개와 죄사함의 복

[1-2절]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

다윗은 죄사함에 대해 증거한다. ‘허물’(페솨 )이나 ‘죄’(카타아)는 구약성경에서 죄를 가리키는 대표적 용어들이다. ‘정죄’라는 말(아본)은 ‘죄, 죄책, 죄의 형벌’이라는 뜻이 있다. 허물이 사함을 얻고 죄가 가리움을 받고 정죄를 당하지 않는 것은 다 죄사함을 말한다. 죄사함은 죄 자체가 없어진다기보다 하나님께서 그 죄를 덮으시고 그 죄의 책임을 묻거나 그 형벌을 내리지 않으시고 죄 없는 것처럼 간주하시는 것을 말한다.

죄사함을 받은 자는 그 마음이 깨끗해지고 그의 영혼 속에 거짓이 없게 된다. 원문에는 2절 앞부분이 중간에 나온다. 시편 51: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사도행전 15:9,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죄사함은 법적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도 사람의 심령을 깨끗케 하고 진실하고 정직하게 만든다.

죄사함은 참으로 복되다. 다윗은 ‘복이 있도다’라는 말을 두 번이나 반복한다. 죄사함의 복은 인간에게 가장 큰 복이다. 죄의 결과는 모든 불행, 특히 죽음과 지옥 형벌이지만, 죄사함의 결과는 하나님의 모든 복, 특히 영광스러운 천국과 영생이다. 생명의 구속(救贖)은 너무 귀하다(시 49:8). 사람의 목숨은 주님의 말씀과 같이 온 세상과도 바꿀 수 없이 가치 있는 것이다(마 16:26). 주께서는 한 비유에서 죄사함의 구원이 사람이 1만 달란트 빚을 탕감받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셨다(마 18:23-27). 이 세상에서 죄사함의 복보다 더 큰 복은 없다.

[3-5절]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셀라).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셀라).

다윗은 자신이 토설치 않고 잠잠했을 때, 즉 자신이 죄를 고백지 않았을 때의 심적 고통을 증거한다. 그때 그는 병든 자와 같이 종일 신음하였고 뼈까지 쇠하는 고통을 당했다. 하나님의 손은 밤낮으로 그를 누르셨고 그의 심신의 진액은 변하여 여름 가물에 메마름같이 되었다. 성도는 죄를 짓고 회개치 않을 때 이런 고통을 당한다. 죄는 잊으려 해도 쉽게 잊을 수 없고 지우려 해도 쉽게 지울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죄로 인한 고통은 우리로 하여금 진실한 회개를 하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자신의 죄를 하나님께 솔직히 고백하였다. 원문은 5절의 첫 부분이 중간 이후에 나온다. 다윗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그 죄를 숨기지 않고 하나님께 자복하였다. 다윗이 죄를 고백하기 전까지 하나님께서 그것을 모르셨는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들을 다 아시지만, 그가 원하시는 것은 단지 우리가 우리의 죄를 그 앞에서 인정하고 그 죄로부터 돌이켜 떠나는 것이다. 잠언 28:13은,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고 말하였다.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다윗의 죄를 용서해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고 그것을 떠나기로 결심할 때 우리의 죄를 다 용서하신다. 요한일서 1:9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말하였다.

[6-7절] 이로 인하여 무릇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저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에우시리이다(셀라).

“이로 인하여”라는 말은 하나님께 죄를 고백하면 용서받기 때문에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회개의 기회를 주실 때가 있다. 죄인은 그 기회를 포착해야 한다. 이사야 55:6-7,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지금은 은혜받을 때이다. 고린도후서 6:2,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다윗은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저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라고 말한다. 홍수는 큰 환난과 어려움을 가리킨다. 성도가 하나님께 회개하고 기도하면 큰 환난도 극복할 수 있다.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하나님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그를 건지신다(시 34:19). 의인도 때로는 넘어지지만 하나님께서 손으로 그를 붙들어주심으로 아주 엎드러지지 않는다(시 37:24). 의인은 일곱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난다(잠 24:16). 환난의 큰 바람은 의인을 삼키지 못한다.

다윗은 또한,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에우시리이다”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은신처이시다. 그는 우리의 요새이시며 피할 바위이시며 방패이시다(시 18:2). 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환난에서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우리를 둘러싸실 것이다.

[8-9절] 내가 너의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같이 되지 말지어다. 그것들은 자갈[재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오지 아니하리로다.

다윗은 죄인의 길을 살피며 바른 길을 지시하고 교훈하기를 원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항상 주목하시고 우리에게 바른 길을 보이시고 교훈하신다. 성경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교훈하시고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는 내용이다. 그러므로 시편 119:105는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말하였다. 또 디모데후서 3:16-17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고 말한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교훈과 인도는 가장 선하다.

특히, 다윗은 무지한 말과 노새같이 되지 말라고 교훈한다. 노새와 말은 지혜와 이해력과 판단력이 없는 무지한 짐승들이다. 그것들은 자기 편한 대로 가려는 성향이 있다. 그래서 주인들은 그 짐승들에게 재갈을 끼우고 굴레를 씌워서 그것들을 통제한다. ‘재갈’은 짐승의 입에 끼우는 쇳토막이며, ‘굴레’는 그것과 짐승의 목을 걸쳐 맨 끈이다. 짐승들은 재갈과 굴레로 통제된다. 즉 그것들은 주인의 지속적 간섭과 제재를 통해 이끌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하나님의 징계를 통해 비로소 바른 길을 걷는다면 부끄러운 일이다.

[10-11절] 악인에게는 많은 슬픔이 있으나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에게는 인자하심이 두르리로다.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

악인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섬기지 않고 그 명령대로 행치 않고 자신의 쾌락을 따라 사는 자인데, 그에게는 많은 슬픔이 있다. ‘슬픔’이라는 원어(마크오브)는 ‘고통, 슬픔’이라는 뜻이다. 악인은 마음의 고통, 육신의 질병, 가정적, 환경적 고통 등 여러 가지 고통과 슬픔을 당한다. 잠언 13:21, “재앙은 죄인을 따르고 선한 보응은 의인에게 이르느니라.” 악인에게는 평안이 없다(사 48:22; 57:21). 의인에게도 고난이 많지만(시 34:19) 그러나 그 심령에는 하늘의 기쁨이 있다. 사도행전 5:40-41, “[저희가]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베드로전서 4:13,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의(義)는 도덕적 표준에 맞는 것을 말한다. 의인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요 마음이 정직한 자이다. 의인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마음을 올바르게 가지고 올바르게 사는 자이다. 사람의 마음은 군대의 지휘통제소와 같아서 마음이 정직하면 말과 행동도 정직하게 된다. 의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함과 그의 계명을 지키는 도덕성을 가진다. 도덕성이란 의와 선과 진실을 말한다. 하나님의 인자하심 곧 하나님의 호의와 은혜와 사랑은 이런 의인들을 두루 감싼다.

다윗은 또 의인들에게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바르게 살고자 하는 자들에게 평강과 형통의 복을 주시고 기쁨과 즐거움을 주신다. 우리가 항상 기뻐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뜻이다(살전 5:16, 18).

우리는 죄사함의 복의 가치를 깨닫고 하나님께 찬송과 감사를 돌리자. 또 죄사함 받은 자답게 모든 죄를 버리고 의롭고 선하게만 살자.

죄는 감추어 둔다고 결코 감추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에게 고통이 될 뿐이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하나님 앞에 솔직히 다 고백하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은신처이시며 환난에서 보호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환난 중에 하나님을 찾아 만나도록 그에게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 우리의 갈 길을 보이신다. 우리는 무지한 말과 노새같이 되지 말고,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교훈을 순종하자.

우리는 모든 악을 버리고 하나님만 신뢰하고 좌우로 치우치지 말고 그의 말씀대로 바르게 살자. 그러면 기쁨이 우리의 삶에 넘칠 것이다.

33편: 도우시는 하나님을 찬송함

[1-3절]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여호와 안에서,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의 마땅히 할 바로다. 수금으로 여호와께 감사하고 열 줄 비파로 찬송할지어다. 새 노래로 그를 노래하며 즐거운 소리로 공교히 연주할지어다.

오늘날 의인은 하나님의 긍휼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대로 사는 자들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기쁨의 이유이시다. 성도는 하나님을 기뻐하며 하나님 안에서 기뻐해야 하며 또 기쁨으로 그를 찬송한다. 찬송은 정직한 자들의 마땅히 할 바이다. 하나님을 알고 그의 말씀대로 올바르게 살고자 하는 자라면 당연히 하나님을 찬송할 것이다. 찬송은 경건한 성도의 신앙고백이며 삶의 특징이며 삶의 열매이다(히 13:15).

본문은 찬송의 방법에 대해 말한다. 첫째, 우리는 악기를 사용하여 찬송한다. 수금(키노르)은 리라(lyre)라는 작은 통속적 악기이다. 비파(네벨)는 수금보다 조금 나은 작은 하프 같은 악기이다. 악기의 가장 좋은 용도는 찬송이다. 둘째, 우리는 새 노래로 찬송한다. 그것은 형식적으로 하지 말고 늘 새로운 마음으로 찬송하라는 뜻일 것이다. 셋째, 우리는 즐거운 소리로 찬송한다. 찬송은 즐거움으로 불러야 찬송답다. 넷째, 우리는 공교히 연주한다. 우리는 목소리든지 악기든지 가장 아름답게, 잘 연습하여 하나님을 찬송해야 한다.

[4-7절] [이는] 여호와의 말씀은 정직하며 그 행사는 다 진실하시도다[진실하심이로다]. 저는 정의와 공의를 사랑하심이여, 세상에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충만하도다.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저가 바닷물을 모아 무더기같이 쌓으시며 깊은 물을 곳간에 두시도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뻐하며 찬송해야 할 첫 번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정직하시며 그의 행사들이 다 진실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공의와 진실로 세상을 섭리하신다. 이 사실은 악인들에게는 큰 두려움이 되지만, 성도들에게는 기쁨의 찬송의 이유가 된다.

하나님을 기쁘게 찬송해야 할 두 번째 이유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온 세상에 충만하기 때문이다. 창조 세계가 그의 사랑의 결과이며 그의 섭리의 모든 일이 다 그러하다. 그는 그의 선하심으로 만물을 돌보시고 먹이신다. 특히 그는 그의 긍휼과 인자로 죄인들을 구원하셨고 또 여전히 연약성을 가진 성도들을 오래 참으시고 돌아보시며 의의 길로 인도하시고 모든 좋은 것으로 만족케 하신다(시 103:3-5).

하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음을 받았고 그 만상(萬象) 곧 하늘에 있는 모든 것들, 즉 해와 달과 별들은 그 입 기운으로 이루었다. ‘그 입 기운’은 성령을 가리킬 것이다. 입 기운은 말할 때 나오므로 말씀과 거의 같은 뜻일 것이다. 삼위는 하나이시다. 또 바닷물은 육지로 올라와 뒤덮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지구에 중력을 주셔서 바닷물이 고이게 하시며 달의 인력을 인해 바닷가에 밀물과 썰물이 생기게 하신다. 일반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자연법칙을 사용해 자연만물을 보존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지구의 위대한 관리자이시다.

[8-12절] 온 땅은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세계의 모든 거민은 그를 경외할지어다. [이는] 저가 말씀하시매 이루었으며 명하시매 견고히 섰도다[섰음이로다]. 여호와께서 열방의 도모(에차)[의논, 계획]를 폐하시며 민족들의 사상(마카솨보스)[생각들, 계획들]을 무효케 하시도다. 여호와의 도모는 영영히 서고 그 심사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여호와로 자기 하나님을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빼신 바 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모든 사람은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관리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 광대한 우주 안에서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을 경외해야 하고 그 우주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 그것은 피조물로서 하나님 앞에서 지극히 당연히 가져야 할 마음가짐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할 이유는 그가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고 그것들은 ‘그대로 되었다’고 성경은 말한다(창 1:7, 9, 11, 15, 24, 30).

하나님께서는 이방 나라들의 목적과 계획들을 다 폐하시고 무효케 하신다. 역사상 세계적 제국들, 즉 바벨론, 메대 파사, 헬라, 로마 등의 제국들의 계획들이 폐해졌다. 1,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 이탈리아, 일본이나, 그 후 러시아나 중국이나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목적과 계획들이 그러했다. 그들의 계획들은 다 폐해졌지만,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은 영원히 다 이루어질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 “내가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모략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고 말씀하셨다(사 46:10).

여호와께서 그들의 하나님인 나라, 곧 그가 자기 기업으로 택하신 백성은 복되다. 왜냐하면 세상 나라들의 계획은 다 폐하여지고 세상 나라들은 다 망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하고 그의 뜻은 반드시 다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행복자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일이다(신 33:29; 시 65:4).

[13-15절]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감찰하사 모든 인생을 보심이여, 곧 그 거하신 곳에서 세상의 모든 거민을 하감하시도다. 저는 일반의 마음을(야카드 립밤)[그들의 마음을 비슷하게(KJV), 그들의 마음을 다(NASB, NIV)] 지으시며 저희 모든 행사를 감찰하시는 자로다.

성경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신다고 말한다(시 2:4; 11:4; 115:16; 사 66:1; 마 5:34; 계 4:2). 주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마 6:9). 시편 115:3은 하늘은 하나님께서 직접 주관하시는 영역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높은 하늘에 계실지라도 땅에 있는 모든 사람을 다 감찰하신다. 오늘날 인공위성들은 고성능 망원렌즈 카메라가 장착되어 있어서 땅에 있는 물체들과 그 움직임들을 자세히 관찰할 수 있다. 하나님의 눈은 사람이 만든 인공위성보다 더 성능이 좋으시다. 비록 사람들이 많고 광범위하게 흩어져 살고 있을지라도, 또 그들이 처한 상황이 다양할지라도, 그는 모든 사람을 다 감찰하실 수 있다. 그래서 시편 139편 저자는 하나님을 떠나 피할 수 있는 곳이 없다고 말하였고(7-9절), 또 히브리서 4:13은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다”고 말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마음을 지으신 자이시므로 사람의 마음과 행동을 다 감찰하신다. 그는 사람의 생각과 심리와 감정을 통달하시는 가장 뛰어난 심리학자이시다. 그는 사람들의 마음의 생각과 뜻을 다 아시고(히 4:12; 계 2:23) 그들의 모든 말과 행위도 다 아신다(시 139:3-4). 그러므로 그는 마지막 날 모든 사람들의 모든 언행에 대해 공의롭고 철저하게 심판하실 것이다(마 12:36; 롬 2:6; 계 20:12).

[16-19절] 많은 군대로 구원 얻은 왕이 없으며 용사가 힘이 커도 스스로 구하지 못하는도다. 구원함에 말은 헛것임이여, 그 큰 힘으로 구하지 못하는도다. 여호와는 그 경외하는 자 곧 그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살피사 저희 영혼을 사망에서 건지시며 저희를 기근시에 살게 하시는도다.

많은 군대와 용사와 말의 힘은 구원이 되지 못한다. 블레셋 장수 골리앗은 큰 용사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무장하였지만, 소년 다윗의 물맷돌에 맞아 쓰러졌고 죽임을 당했다. 애굽이나 앗수르나 바벨론이나 헬라나 로마가 망한 것이나 소련이 붕괴된 것은 군사력의 부족 때문이 아니었다. 큰 군대와 많은 군사력이 승리를 보장하지 못한다.

구원은 하나님께 있다. 다윗은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고 말하였고(삼상 17:47), 또 시편 3:8에서도 구원은 여호와께 있다고 고백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경외하는 자들 곧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보살피신다. 그는 그들의 영혼을 사망에서 건지시며 기근 시에 살게 하신다. 죄로 인해 죽은 영혼이 새 생명을 얻는 것이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며, 영혼이 살면 하나님과 연합하여 하나님 안에 거하며 하나님의 도우심과 돌보심을 얻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또 그들의 육신적 필요도 공급하시고 채우실 것이다.

[20-22절] 우리 영혼이 여호와를 바람이여, 저는 우리의 도움과 방패시로다. [이는] 우리 마음이 저를 즐거워함이여, [이는] 우리가 그 성호를 의지한 연고로다. 여호와여, 우리가 주께 바라는 대로 주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베푸소서.

우리가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고 의지하면 그를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도움과 방패이시다. 또 우리가 하나님을 많이 의지하고 바라면, 우리는 그의 인자하심을 체험할 것이며 그가 우리의 도움과 방패 되심을 풍성히 체험할 것이다.

시편 33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을 찬송하자. 찬송은 성도가 마땅히 할 일이며 악기로, 새 노래로, 즐거이, 또 공교히 찬송해야 할 일이다. 성도가 하나님을 찬송해야 할 이유는 하나님께서 공의와 긍휼로 세상을 통치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자. 우리는 왜 그러해야 하는가? 그것은 열방의 계획들은 다 폐하여지고 오직 하나님의 뜻이 다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들은 복되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감찰하신다. 인간의 힘이나 말(馬)의 힘은 무익하고 하나님께서 능력의 팔로 건져주신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만 바라자.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도움과 방패이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의지하고 또 주의 인자하심을 늘 사모할 때, 우리의 이 험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방패 되심을 늘 체험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그 어떤 것들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자.

34편: 구원의 하나님을 찬송함

[1-4절]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그를 송축함이 내 입에 계속하리로다. 내 영혼이 여호와로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가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 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함께 그 이름을 높이세. 내가 여호와께 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곤고한 자’라는 원어(아나윔)는 ‘고통 당하는 자들’이라는 뜻이다. 다윗이 입으로 하나님을 항상 송축하며 그의 영혼이 하나님을 자랑하리라고 말하며 곤고한 자가 이를 듣고 기뻐할 것이라고 말한 이유는, 그가 두려운 환난 중에 하나님께 기도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응답하셨고 그를 그 모든 두려운 일에서 건지셨기 때문이다. 그것은 표제어의 말대로 다윗이 블레셋 땅에 피신하였을 때 체험하였던 바이었다(삼상 21장). 

[5-7절] 저희가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입었으니 그 얼굴이 영영히 부끄럽지 아니하리로다.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여호와의 사자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 치고 저희를 건지시는도다.

다윗은 고난받는 성도들이 하나님을 앙망하고 광채를 입었다고 말한다. 그 광채는 하나님의 은혜의 얼굴빛이다. 그들은 실패치 않을 것이며 그 얼굴은 부끄러움을 당치 않을 것이다. 6절의 ‘이 곤고한 자’는 바로 자신을 가리킬 것이다. 다윗은 곤고함 중에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들으셨고 그를 그 모든 환난에서 건져주셨다. 하나님께 부르짖는 자마다 같은 은혜를 체험할 것이다.

하나님의 천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을 둘러 보호하고 그들을 건지실 것이다. 아람 왕이 선지자 엘리사를 잡으려고 도단성에 군사들을 보내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불말과 불병거를 가득히 보내어 그 성을 에워싸 막게 하셨고 아람 군대의 눈을 어둡게 하여 선지자를 그 위기에서 벗어나게 하셨다(왕하 6:14-23).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도 충성되이 믿다가 풀무불이나 사자굴에 던지우는 고난을 당하였으나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어 그들을 구원해주셨다(단 3장, 6장).

[8-10절]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성도들은 거룩한 자, 곧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어 하나님을 알고 그를 섬기며 그의 뜻에 순종하여 죄와 불결을 떠난 자들이다. 또 성도는 ‘하나님께 피하는 자’(8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9절), ‘하나님을 찾는 자’(10절)이다. 성도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어려울 때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에게 피하며 그를 찾는다.

8절은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그의 기도 응답, 그의 도우심과 구원하심, 그의 돌보심 등 그가 베푸시는 모든 은혜와 복을 가리킨다. 그것은 성도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성도들은 장차 천국에서뿐 아니라,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도우심과 돌보심과 복을 체험할 수 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궁핍할 경우가 거의 없을 젊은 사자도 환경적으로 먹이가 없거나 몸이 아프거나 몸의 일부분을 다쳤을 때 궁핍할 수 있을 것이지만, 하나님을 찾는 성도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믿음의 부요함은 물론이거니와 육신적으로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주 예수께서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자들에게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의식주의 필요를 넉넉히 공급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6:33), 사도 바울도 경건, 즉 하나님을 경외하고 말씀과 기도로 사는 삶이 범사에 유익하며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다고 증거했다(딤전 4:8). 금생의 유익은 심령의 평안, 몸의 건강, 물질적으로 필요한 것들의 공급, 환경적 평안 등이며 내세의 유익은 천국과 영생이다.

[11-14절] 너희 소자들아, 와서 내게 들으라. 내가 여호와를 경외함을 너희에게 가르치리로다. 생명을 사모하고 장수하여 복 받기[좋은 것 보기]를 원하는 사람이 누구뇨? 네 혀를 악에서 금하며 네 입술을 궤사한 말에서 금할지어다.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따를지어다.

하나님을 경외함은 모든 사람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이며 사람이 영원한 생명과 행복을 얻는 길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해야 하는 까닭은 그가 천지만물의 창조자요 섭리자이시며 만복의 근원이시기 때문이다. 피조물들이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또 하나님을 경외하며 영원한 생명을 사모하고 하나님의 복 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마땅히 악을 버리고 선을 구해야 한다. 그는 악하고 거짓된 말을 금해야 하며 선과 화평을 구해야 한다. 인간의 죽음과 모든 불행은 죄 때문에 왔고, 구원은 죄로부터 해방되고 거룩함의 열매를 맺는 것이다(롬 6:22). 거룩한 열매는 곧 선한 열매이다. 그러므로 선지자 아모스는 “너희는 살기 위하여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지어다”라고 말하였다(암 5:14). 사도 바울은 로마서 2:7에서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라고 말하였다.

[15-18절]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 귀는 저희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 여호와의 얼굴은 행악하는 자를 대하사 저희의 자취를 땅에서 끊으려 하시는도다. 의인이 외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저희의 모든 환난에서 건지셨도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하나님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며 그 귀는 그들의 부르짖음에 기울이신다. 마치 아기 엄마가 아기에게서 눈길을 떼지 않고 멀리서도 그 아기의 울음소리를 금방 알아차리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백성에게 눈길을 떼지 않으시고 그들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신다. 의인들은 자신의 부족을 깨닫고 하나님께 상한 마음으로 통회하며 부르짖는다. 악인들은 자신의 부족과 죄를 깨닫지 못하지만, 의인들은 고난 중에 자신을 살피며 하나님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며 기도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죄를 고백하며 하나님의 도우심과 구원을 간절히 구하는 의인들의 기도를 잘 들어주신다. 그들이 부르짖을 때 여호와께서는 들으셨고 그들을 모든 환난에서 건지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은 끊어버리신다. 그의 얼굴은 행악하는 자들을 대하시며 그들의 자취를 땅에서 끊으려 하신다. 그는 악인들이 악을 행하는 것을 보시고 노하신다. 천국은 의인만 들어갈 수 있고 악인들은 결코 들어갈 수 없다. 고린도전서 6:9-10,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요한계시록 22:15,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새 예루살렘 성]밖에 있으리라.”

[19-22절]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그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 악이 악인을 죽일 것이라. 의인을 미워하는 자는 죄를 받으리로다. 여호와께서 그 종들의 영혼을 구속(救贖)하시나니 저에게 피하는 자는 다 죄를 받지 아니하리로다.

의인에게는 고난이 많다. 의인은 조금만 잘못해도 하나님의 징계를 받으며 잘못이 없어도 인격 단련을 위해 고난을 받는다. 아브라함은 100세까지 아내 사라가 낳은 자녀가 없었고, 기근 시 애굽에 우거(寓居)하러 갔다가 아내를 빼앗겼고, 조카 롯을 구하러 전쟁을 치렀고, 여종 하갈로 인해 가정적 갈등을 겪었고, 그랄에 우거하다가 또 아내를 빼앗기는 등 여러 가지 고난을 경험하였다.

의인에게는 고난이 많으나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고난에서 그를 구원하신다. 또 그는 그의 모든 뼈를 보호하셔서 그 중 하나도 꺾이지 않게 하신다. 이것은 영육의 온전한 구원을 암시한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은 장차 천국에서 영육의 완전한 몸으로 영생하는 구원이다. 하나님께서 그 종들의 영혼을 구속(救贖)하시며 그에게 피하는 자, 곧 그를 의지하는 자는 정죄를 받지 않는다.

그러나 악인들은 죽임을 당할 것이다. 악은 악인들을 죽일 것이다. 노아 시대에 홍수로 죽은 자들이나 소돔 고모라 성에서 유황불비로 멸망당한 자들은 다 그들의 악 때문에 죽임을 당했다. 그들이 회개하고 악을 버렸더라면 그들은 죽임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악인들은 의인들을 미워하며 의인들을 미워하는 자는 정죄를 받을 것이다.

신약 성도는 하나님의 큰 구원을 받은 자이다. 우리는 단순히 몸의 질병이나 세상의 환난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고, 인간의 모든 불행의 원인인 죄로부터 구원을 받았다. 우리는 죄사함을 받았다. 또 그것은 죄의 결과인 죽음과 지옥 형벌로부터의 구원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마음과 입술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항상 찬송하자.

우리는 이 세상 사는 동안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고 앙망하고 의지하며, 또 여러 가지 크고 작은 어려운 문제들을 당할 때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에게 구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체험하자.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며 살자.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의 뜻에 순종하며 사는 성도는 모든 선한 것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우리가 영광스런 천국과 복된 영생의 삶을 원할진대,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버리며 선을 구하고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악을 버리고 선을 구하는 것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환난 중에 의인의 부르짖음은 들으시지만 악인은 끊어버리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며 의와 선을 행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하나님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져주신다.

35편: 나와 다투는 자와 다투소서

[1-3절] 여호와여, 나와 다투는 자와 다투시고 나와 싸우는 자와 싸우소서. 방패(마겐)[작은 방패]와 손 방패(친나)[온 몸을 막는 큰 방패](BDB)를 잡으시고 일어나 나를 도우소서. 창을 빼사 나를 쫓는 자의 길을 막으시고 또 내 영혼에게 나는 네 구원이라 이르소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편에 계심을 확신한다. 이 확신과 담대함은 하나님을 믿고 그의 계명을 순종하는 데서 나온다. 이것이 의인이 가지는 담대함이다(잠 28:1; 요일 3:21). 다윗은 하나님께서 방패와 큰 방패를 잡으시고 창을 빼어 그를 쫓는 자의 길을 막으시기를 구한다. 하나님께서는 원수의 공격으로부터 우리를 능숙하게 방어해주시며 다윗을 쫓는 원수들의 길을 가로막고 그들이 그에게 가까이 못하게 하실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하기를 원한다.

[4-6절] 내 생명을 찾는 자로 부끄러워 수치를 당케 하시며 나를 상해하려 하는 자로 물러가 낭패케 하소서. 저희로 바람 앞에 겨와 같게 하시고 여호와의 사자로 몰아내소서. 저희 길을 어둡고 미끄럽게 하시고 여호와의 사자로 저희를 따르게 하소서.

다윗은 자기 생명을 찾는 자, 곧 그를 죽이려 하는 자로 부끄러움과 수치를 당케 하시고 그를 해치려 하는 자로 물러가 낭패를 당케 하시기를 구한다. 그는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의 공의로운 처분을 믿었다. 그는 자기를 대적하는 원수들과 싸우지 않았고 자기의 두렵고 위태한 형편을 하나님께 아뢰며 그의 선한 처분을 구하였다. 그는 그의 대적자들로 바람 앞에 겨 같게, 즉 평안과 안정이 없게 하시고 그들의 길이 어둡고 미끄럽게 하시기를 구한다.

다윗은 또 하나님의 사자가 그들을 몰아내고 뒤쫓게 하기를 구한다. ‘따르다’는 원어(라다프)는 ‘뒤쫓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그의 천사를 보내어 자기 백성을 지키시고 위험에서 건지신다. 하나님의 사자는 성도를 위한 경호원과 같다. 이 기도는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의 처분을 보인다. 다윗은 하나님의 교회를 대표하여 하나님의 공적인 처분을 선포한 것이다. 물론, 신약 아래서 우리는 이런 기도 대신에 주님의 교훈대로 악인들이 회개하고 복을 받아 좋은 사람 되기를 기도를 해야 할 것이다(마 5:44).

[7-8절] 저희가 무고히 나를 잡으려고 그 그물을 웅덩이에 숨기며 무고히 내 생명을 해하려고 함정을 팠사오니 멸망으로 졸지에 저에게 임하게 하시며 그 숨긴 그물에 스스로 잡히게 하시며 멸망 중에 떨어지게 하소서.

악인들은 정당한 이유 없이 의인들을 핍박하고 해치려 한다. 그들은 의인들을 빠뜨리려고 은밀히 함정을 파고 그물을 구덩이에 숨겼다. 그들의 싸움은 비겁하고 정정당당치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갑자기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악인이 의인을 해하려고 은밀히 베푼 그물에 자신이 걸려 멸망케 하실 것이다.

[9-10절] 내 영혼이 여호와를 즐거워함이여, 그 구원을 기뻐하리로다. 내 모든 뼈가 이르기를 여호와와 같은 자 누구리요. 그는 가난한 자를 그보다 강한 자에게서 건지시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노략하는 자에게서 건지시는 이라 하리로다.

성도의 원수는 성도보다 강한 자요 성도를 노략하는 자이며, 성도는 세상에서 가난하고 궁핍한 자이며 악한 자들에게 고난을 당하는 자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고난에서 구원해주시고 성도는 그의 구원을 기뻐하며 그를 찬송할 것이다. 성도의 영혼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그의 모든 뼈는 하나님의 구원을 고백할 것이다. 이것은 뼈 속 깊은 곳에서 나오는 기쁨의 찬송과 고백을 가리킬 것이다.

[11-13절] 불의한 증인이 일어나서 내가 알지 못하는 일로 내게 힐문하며 내게 선을 악으로 갚아 나의 영혼을 외롭게 하나 나는 저희가 병 들었을 때에 굵은 베옷을 입으며 금식하여 내 영혼을 괴롭게 하였더니 내 기도가 내 품으로 돌아왔도다.

악인들은 불의한 증인들을 동원해 그가 알지도 못하는 일로 그를 비난했다. 그는 평소에 남들에게 선을 베풀었지만, 그들은 그의 선에 대해 보답하기는커녕 악으로 선을 갚았다. 그것은 보통 악보다 더 악한 일이다. 또 그들은 다윗의 영혼을 외롭게 했다. 그러나 다윗은 그들이 병들었을 때 굵은 베옷을 입고 금식하며 그의 영혼을 괴롭게 했다. 주께서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라”고 말씀하셨다(눅 6:27). 그의 기도가 그의 품에 돌아왔다는 말씀은 그의 기도가 그에게 복이 되었다는 뜻일 것이다.

[14-16절] 내가 나의 친구와 형제에게 행함같이 저희에게 행하였으며 내가 굽히고 슬퍼하기를 모친을 곡함같이 하였도다. 오직 내가 환난을 당하매 저희가 기뻐하여 서로 모임이여, 비류가 나의 알지 못하는 중에 모여 나를 치며 찢기를 마지 아니하도다. 저희는 연회에서 망령되이 조롱하는 자 같이 나를 향하여 그 이를 갈도다.

다윗은 악한 이웃이라도 병들었을 때 그의 친구와 형제에게 행함같이 그에게 행하며 마치 모친을 곡함같이 몸을 굽히고 슬퍼하였다. 그러나 악인들은 다윗이 환난을 당할 때 기뻐하였고 서로 모여 악을 도모했다. 성도들은 모여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믿음과 선행을 서로 격려하며 교제한다. 그러나 악인들은 모여 악을 도모한다. 악인들은 당을 지어 불의를 좇는 자들이다(롬 2:8). 의인들은 하나님만 바라고 그와 동행하며 선을 행하는 것으로 만족하지만, 악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상관치 않고 악을 행하며 악한 말로 의인들을 비난한다.

[17-18절] 주여, 어느 때까지 관망하시리이까? 내 영혼을 저 멸망자(쇼에헴)[그들의 파괴들](NASB, NIV)에게서 구원하시며 내 유일한 것을 사자들에게서 건지소서. 내가 대회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많은 백성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얼마 동안 고난에 버려두신다. 성도는 고난 중에 자신의 부족을 깨닫고 회개하며 심령의 깨끗함을 얻고 육신적 쾌락에 빠지지 않게 되며 겸손해지며 하나님만 간절히 바라며 의지하게 된다. 고난의 기간은 성도에게 그의 인격 단련을 위해 유익하다.

다윗은 고난 중에 하나님의 구원을 요청했다. 원수들은 사자같이 그를 해치고 파괴시키려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구원자이시다. 그는 얼마 동안 잠잠하시지만, 마침내 성도를 위해 일어나실 것이다. 다윗은 구원의 하나님을 많은 백성 중에서 감사하며 찬송하겠다고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간증이다. 찬송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이며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다.

[19-21절] 무리하게 나의 원수된 자로 나를 인하여 기뻐하지 못하게 하시며 무고히 나를 미워하는 자로 눈짓하지 못하게 하소서. 대저 저희는 화평을 말하지 아니하고 평안히 땅에 거하는 자를 거짓말로 모해하며 또 저희가 나를 향하여 입을 크게 벌리고 하하 우리가 목도하였다 하나이다.

다윗의 원수들은 까닭 없이 그를 미워했다. 그러므로 다윗은 그들이 환난 당한 자신으로 인해 기뻐하지 못하게 하시고 눈짓하지 못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눈짓한다’는 표현은 경멸의 눈짓, 흘기는 눈짓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들은 평안히 땅에 거하는 자들을 거짓말로 모해했다. 또 그들은 다윗을 향해 조롱과 멸시의 입을 크게 벌리고 기뻐하였다. 그러나 지금도 세상을 다스리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그는 온 우주의 대주재자이시다. 그는 악인들을 얼마 동안 내버려두시지만, 마침내 그들을 꺾어 승리치 못하게 하실 것이다.

[22-24절] 여호와여, 주께서 이를 보셨사오니 잠잠하지 마옵소서. 주여, 나를 멀리하지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 나의 주여, 떨치고 깨셔서 나를 공판하시며 나의 송사를 다스리소서.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공의대로 나를 판단하사 저희로 나를 인하여 기뻐하지 못하게 하소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살아계셔서 모든 것을 감찰하시고 판단하시며 악인들의 악행을 다 보고 계시는 주 하나님 곧 주권적 섭리자이심을 믿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께서 악인들의 악행을 보시고 잠잠치 마시며 떨치고 깨시며 일어나 행동하시며 모든 일을 공의대로 판단하시고 처리하시기를 구한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공의의 심판자이시다. 다윗은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이길 것을 확신한다. 그것은 그가 평소에 양심에 거리끼는 일을 행치 않았고 의롭게 행했기 때문이다.

[25-28절] 저희로 그 마음에 이르기를 아하 소원 성취하였다 하지 못하게 하시며 우리가 저를 삼켰다 하지 못하게 하소서. 나의 해를 기뻐하는 자들로 부끄러워 낭패하게 하시며 나를 향하여 자긍하는 자로 수치와 욕을 당케 하소서. 나의 의를 즐거워하는 자로 기꺼이 부르고 즐겁게 하시며 그 종의 형통을 기뻐하시는 여호와는 광대하시다 하는 말을 저희로 항상 하게 하소서. 나의 혀가 주의 의를 말하며 종일토록 주를 찬송하리이다.

다윗은 원수들이 개가를 부르지 못하고 수치와 욕을 당케 하시기를 하나님께 구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의 영광을 위해 필요하며 또 악인들의 회개를 위해서도 필요하다. 또 다윗의 정당함을 이해하고 그의 경건과 의를 격려하는 자들도 있을 것이다. 다윗은 그 신앙 동료들로 하나님을 항상 찬송케 하시기를 기도하며, 자신도 하나님의 의를 종일토록 찬송하겠다고 고백한다.

시편 35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성도는 이 세상에서 때때로 억울한 일을 당한다. 무고히 당하는 핍박도 있다. 성도에게는 때때로 욥처럼 까닭 없는 고난도 있다. 성도는 그런 일을 각오해야 한다.

둘째로, 성도는 그때 하나님께 호소하며 도움을 얻을 수 있다. “나와 다투는 자와 다투소서.” “잠잠하지 마시고 공의로 판단하소서.” 하나님께서는 성도와 함께하시며 그를 도우시며 그를 위해 싸우실 것이다.

셋째로, 성도는 끝까지 의롭게 살고 선하게 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우시며 하나님의 공의는 살아 있다. 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끝까지 선하게 처신하기를 원하신다. 사도 바울은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말하였다(롬 12:17, 21). 우리는 끝까지 의롭고 선하게 살자.

36편: 의인들에게 인자하심을 베푸심

[1-4절] 악인의 죄얼(페솨)[죄악]이 내 마음에 이르기를 그 목전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 하니 저가 스스로 자긍하기를 자기 죄악이 드러나지 아니하고 미워함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함이로다[이는 저가 그 죄악이 드러나서 미움을 받기까지 스스로 자긍함이라](KJV). 그 입의 말은 죄악과 궤휼이라. 지혜와 선행을 그쳤도다. 저는 그 침상에서 죄악을 꾀하며 스스로 불선(不善)한 길에 서고 악을 싫어하지 아니하는도다.

악인은 그의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함이 지혜와 지식의 시작이며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악에서 떠나게 되는데(잠 16:6)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으니 악할 수밖에 없다. 또 악인은 스스로 자긍한다.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는 자는 자신을 크게 여기고 세상의 것들을 자랑한다. 또 악인은 그 입의 말이 죄악과 거짓이다. 말은 사람의 인격을 드러낸다. 악한 자의 말은 악하고 거짓되다. 또 악인은 지혜와 선행을 그쳤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와 선을 행하는 것이 지혜인데, 악인은 지혜를 버렸고 선을 버렸다. 또 악인은 그 침상에서 죄악을 꾀하며 선하지 않은 길에 스스로 서며 악을 싫어하지도 않는다. 그는 우연히 실수로 악을 행하는 자가 아니다. 그는 계획적으로 악을 행하는 자이며 악을 싫어하지 않는 자이다.

그러나 이런 악인과 대조하여, 성도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범죄치 않으려고 애쓴다. 또 그의 입의 말은 선함과 진실함이다. 또 그는 지혜를 구하며 악을 싫어하고 선을 좋아하고 선한 일을 실천한다.

[5-6절]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있고 주의 성실하심이 공중에 사무쳤으며 주의 의는 하나님의 산들과 같고 주의 판단은 큰 바다와 일반이라. 여호와여, 주는 사람과 짐승을 보호하시나이다.

하나님께서는 완전한 섭리자이시다. 다윗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있다고 말한다. 햇볕과 단비는 세상에서 의인과 악인을 구별치 않고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이다(마 5:45). 하나님께서는 특히 죄인을 향해 구원의 사랑을 나타내셨고 독생자를 보내어주셨다(요 3:16). 또 다윗은 하나님의 성실하심이 공중에 사무쳤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성실하심은 자연만물 속에, 특히 해와 달의 규칙적 운행 속에 잘 나타나 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동일하셔서(시 102:27) 우리가 신뢰할 만한 하시며 특히 언약을 성실히 지키신다.

또 다윗은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의 산들과 같으며 하나님의 판단이 큰 바다와 같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의는 악인들의 세력 앞에서 위축되지 않는다. 그의 의는 크고 힘이 있고 흔들림이 없이 확고하다. 그는 공의로 세상을 통치하시며 의인과 악인을 심판하실 것이다(롬 2:5). 또 하나님의 판단은 큰 바다와 같아서 경솔하거나 불완전하지 않고 포괄적이며 심오하고 완전하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과 짐승들을 보호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완전한 섭리자로서 모든 사람들과 모든 짐승들까지도 보존하신다. 그는 공중의 새들을 먹이신다(마 6:26; 욥 38:41). 그는 특히 사람들을 구원하시고 새 인류를 만드시고 그들을 세상 끝날까지 지키신다.

[7-8절]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인생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 피하나이다. 저희가 주의 집의 살찐 것으로 풍족할 것이라. 주께서 주의 복락의 강수로 마시우시리이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참으로 보배롭다. 그 인자하심은 특히 그가 죄인들을 구원하심에서 잘 나타났다. 하나님께서는 죄와 연약성을 가진 인생들을 질병과 위험에서 건지시고 사망과 멸망에서 건지신다. 그는 무지한 우리에게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혜와 지식을 주시고 하나님과 그의 약속을 믿게 하시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그의 자녀들이 되게 하신다. 또 그는 장차 의인들에게 영광스런 부활을 허락하셔서 천국에서 영생케 하실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날개 그늘 아래 피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구원하심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사람이 피할 곳은 하나님밖에 없다. 그가 어떤 죽을병에 걸려보면 그것을 알 수 있다. 그를 사랑하는 부모도 남편도 자식도 그 누구도 우리를 참으로 도와줄 수 없다. 한마디로 속수무책이다. 심지어 환자를 방치하는 가족도 있고 그를 버리고 도망치는 사람도 있다. 오직 하나님만 우리의 도움이 되신다. 그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의 슬픔과 질병, 두려움과 절망을 변화시켜 기쁨과 건강, 평안과 소망이 되게 하신다.

인자하신 하나님께 피한 자들은 하나님의 집의 살진 것으로 풍족할 것이다. 주께서는 주의 복락의 강수로 마시우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은 살지고 기름지고 풍성한 음식을 배불리 먹는 것과 같고 시원하고 맑은 시냇물을 실컷 마시는 것과 같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은 영육의 복이며 또 현세와 내세의 풍족함과 즐거움, 즉 넘치는 즐거움이다. 하나님께 피한 자들은 내세에서 뿐만 아니라, 현세에서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러한 복을 맛볼 것이다.

[9절] 대저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광명 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이다.

하나님께 피하면 좋은 것을 풍성히 얻는 까닭은 생명의 원천이 그에게 있기 때문이다. 여기의 ‘생명’은 영육의 생명을 다 포함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첫 사람 속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셔서 산 자가 되게 하셨다. 그 생명은 하나님과 연합된 생명이었다. 인간은 본래 죄 없는 상태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롭게 선하게 살았고 하나님께서 주신 기쁘고 복된 삶을 누렸다.

원천 혹은 샘이라는 말은 말 그대로 근원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는 땅 위에 있는 모든 생명들의 근원이시다. 그는 모든 생물들에게 생명을 주셨다. 또 원천은 풍부함도 나타낸다. 하나님의 생명은 끝없이 솟아나는 생명이며 결코 마르지 않는 생명이다. 또 원천은 신선함과 시원함도 나타낸다. 하나님의 생명은 깨끗하고 시원한 샘물처럼 우리에게 참 기쁨과 활기와 만족을 주는 생명이다.

‘주의 광명 중에’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빛이 되심을 말한다. 하나님의 얼굴은 모든 피조세계를 비춘다. 하나님의 빛은 곧 생명이다.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생명이 있었으며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말했다(요 1:4). 예수께서는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다(요 8:12).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세상에 생명과 기쁨이 되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빛 가운데서 빛을 본다. 빛은 어둠을 밝히는 지식을 상징할 뿐만 아니라 또한 기쁨과 위로와 행복도 상징한다. 성도는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 하나님을 알고 그의 뜻을 알 뿐 아니라, 또한 그가 주시는 기쁨과 위로와 행복을 맛보며 소유하며 누린다.

[10-12절] 주를 아는 자에게 주의 인자하심을 계속하시며 마음이 정직한 자에게 주의 의를 베푸소서. 교만한 자의 발이 내게 미치지 못하게 하시며 악인의 손이 나를 쫓아내지 못하게 하소서. 죄악을 행하는 자가 거기 넘어졌으니 엎드러지고 다시 일어날 수 없으리이다.

하나님을 안다는 말은 세상에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알고 그를 경외하며 섬기는 것을 가리킨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아는 자들에게 그의 인자하심을 계속 베푸시며 마음이 정직한 자에게 그의 의를 베푸시기를 구한다. 하나님을 아는 자는 정직한 마음을 가지며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의, 즉 그의 의로운 처분을 베푸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의인들의 억울한 사정을 듣고 공의롭게 처리하실 것이다.

다윗은 또 교만한 자의 발이 그에게 미치지 못하게 하시며 악인의 손이 그를 쫓아내지 못하게 하시기를 하나님께 기도한다. 공의롭고 인자하신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악한 자들로부터 보호하실 것이다. 악한 자는 교만하여 순진한 성도를 미워하고 시기하며 해치려 하고 때때로 하나님의 교회에 들어와 세력을 가지고 교회를 분란시키고 진실한 성도를 쫓아내려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성도들을 교만한 자와 악한 자로부터 보호하실 것이다.

다윗은 또 “죄악을 행하는 자가 거기 넘어졌으니 엎드러지고 다시 일어날 수 없으리이다”라고 말한다. ‘거기’라는 말은 원수들이 다윗을 해치며 쫓아내려고 그에게 다가왔던 곳을 가리킬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이 악을 행하며 의인들을 치려 했던 그곳에서 엎드러지게 하실 것이다. 또 그는 악인들이 엎드러지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하실 것이다. 의인들은 일곱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지만(잠 24:16), 악인들은 그렇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실 때 그들은 넘어져서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시편 36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죄인들은 모든 악을 버리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사모해야 한다. 사람들이 죄 가운데 살면 현세와 내세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와 심판을 피할 수 없다. 그것은 불행한 일이다. 그러므로 죄인들은 모든 죄악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나아오고 그의 인자하심의 품에 들어와 죄사함과 구원을 얻어야 한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생명의 근원이시다. 사람들과 모든 생물들의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다. 사람들에게 주시는 가장 큰 복인 영생 곧 영원한 생명이 오직 그에게 있다. 사람은 본래 죽는 존재가 아니었지만, 범죄함으로 때문에 죽는 존재가 되었다. 그는 영적으로 죽었고 육신적으로 죽을 것이며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의인들에게 복락의 강수를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복의 근원이시다. 모든 좋은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는 의인들에게 땅 위에서도 복락의 강수 즉 풍성한 복을 주셔서 누리게 하실 뿐만 아니라, 장차 천국에서 영원한 생명과 완전한 의와 풍성한 기쁨과 평안을 주셔서 누리게 하실 것이다.

37편: 악인과 의인의 보응

1-11절, 악인을 인해 불평하지 말라

[1-3절]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티스카르의 힛파엘형)[짜증내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푸른 채소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 땅에 거하여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지어다.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는다’는 원어(레에 에무나)는 ‘그의 진리 혹은 진실함으로 살라’는 뜻이거나 ‘그의 진실함을 품으라’는 뜻 같다. 우리는 행악자 때문에 불평하거나 짜증내지 말고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악을 행하거나 불의를 행하는 자들은 일시적으로 형통하고 번창할 수 있으나 풀같이 조만간 쇠잔하고 멸망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직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해야 한다. 우리는 이 세상의 돈이나 권력을 의지하지 말고 사람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홀로 온 세상의 주권적 섭리자이시며 만복의 근원이시기 때문이다. 또 우리는 선을 행해야 한다.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것은 남에게 선을 행하고 유익을 주는 것이다. 그것이 모든 사람들을 향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뜻이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거하며 그의 진리와 그의 성실함을 품고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약속의 땅이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가나안 땅이지만, 오늘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참된 교회를 가리킨다고 본다. 우리는 하나님의 참된 교회, 즉 하나님의 바른 말씀을 전하는 교회에 속하여 신앙생활을 잘 하고 하나님의 진리의 교훈 안에 살고 그의 성실하심을 품고 바르고 성실하게,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

[4-6절]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후 )(강조함)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

우리는 세상의 부귀 영광과 육신적 쾌락을 기뻐하지 말고 창조자요 섭리자이신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기뻐하고 그에게 찬송과 기도를 올리며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말씀들을 기록한 성경을 묵상하는 것을 좋아해야 한다. 또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어떤 방향으로 살아가고 어떤 일들을 행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하나님께 다 맡기며 그를 의지해야 하고 성경에 교훈하신 대로 그의 선한 인도하심을 구하며 따라 행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을 주권적 섭리자로 믿고 인정하는 자가 가질 마땅한 마음가짐이다. 이것이 성도의 바른 마음가짐이다.

우리가 우리의 길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을 의지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의 소원을 들어주실 것이다. 물론 우리의 소원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그의 뜻에 일치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잠언 16:3도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고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이다.

또 우리가 우리의 길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를 의지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의를 빛같이, 우리의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나타내실 것이다. 비록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변호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억울함을 풀어주시고 우리의 정당함을 주위에 밝히 증거해주시고 우리를 변호해주실 것이다.

[7-8절]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찌증내지] 말지어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여[짜증내지]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

우리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고 그 앞에서 잠잠하며 그를 의지해야 한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 앞에 이르러 뒤에서 쫓아오는 애굽 군대 때문에 당황할 때 모세는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 14:13-14). 시편 62:1은,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도다”라고 말했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참고 기다려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된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으시며 우리 기도를 들으시고 큰 환난에서 우리를 건지실 것이다. 시편 40:1,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예수께서는 낙망하지 말고 기도하라고 교훈하시면서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고 말씀하셨다(눅 18:7).

우리는 악한 자들이 형통하며 악한 계획을 이룬다고 불평하거나 짜증내거나 분노하지 말아야 한다. 공의의 하나님께서 그의 작정하신 때에 악인들의 악을 공의롭게 벌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또 우리가 분노하고 짜증내면 행악에 치우칠 뿐이다. 하나님의 섭리에 불만하는 일이 되지 않게 해야 한다. 하나님의 섭리에 불만하고 불평하는 것은 교만과 불신앙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고 말했다(약 1:20).

[9-11절] 대저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기대하는(카와)[소망하는, 의지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리로다. 잠시 후에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오직 온유한(아나우)[가난한, 고통받는, 온유한, 겸손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

악인들은 결국 끊어질 것이다. ‘끊어진다’는 말은 죽음을 가리킨다. 그것은 사형집행을 통해서든지 혹은 하나님의 직접적 개입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악인의 형통은 일시적이다. 잠시 후에 악인은 없어질 것이다. 우리가 그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그가 없을 것이다.

이와 달리, 의인들은 하나님을 기대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를 소망하고 의지한다. 또 의인들은 땅에서 가난하고 고난을 받지만, 온유하고 겸손하다. 이런 의인들은 땅을 얻을 것이다. 땅은 이 세상에서의 물질적 기업뿐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 곧 천국도 가리킬 것이다. 구원받은 성도들의 가는 목적지는 천국이다. 또 의인들은 풍부한 평안을 누릴 것이다. ‘화평’이라는 원어(솰롬)는 ‘평안’이라는 뜻이다. 성경에서 평안은 심적 평안, 육적 건강, 물질적 여유, 환경적 평안을 다 포함하는 포괄적 개념이다. 우리말에 ‘안녕’과 비슷하다. 이사야 48:18은, “만일 [네가 나의 명령을] 들었더면 네 평강이 강과 같았겠다”고 말한다. 의인은 이 세상에서도 풍성한 평안을 누리고 장차 천국에서 충만한 평안을 누릴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행악자를 인해 짜증내거나 불평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행악자는 반드시 멸망할 것이기 때문이며 우리가 불평하고 짜증내는 것은 교만하고 하나님의 섭리를 믿지 않는 일이 될 수 있고 또 짜증내고 불평하다가 범죄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보며 기다려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의 형통함을 오랫동안 허락하지 않으실 것이다. 악인들은 하나님의 작정하신 때에 하나님의 공의의 벌을 받아 반드시 멸망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고 기다려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고 선을 행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참 교회에 거하며 성실해야 한다. 우리는 세상의 것을 기뻐하지 말고 섭리자 하나님을 기뻐하고 우리의 미래를 그에게 맡겨야 하고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 잠잠히 참고 그를 기다려야 한다. 우리는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주실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복을 누리며 풍성한 평안을 누리며 또 장차 천국에 넉넉히 들어가게 될 것이다.

12-26절, 의인의 삶이 복됨

[12-15절] 악인이 의인 치기를 꾀하고 향하여 그 이를 가는도다. 주께서 저를 웃으시리니 그 날의 이름을 보심이로다. 악인이 칼을 빼고 활을 당기어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엎드러뜨리며 행위가 정직한 자를 죽이고자 하나 그 칼은 자기의 마음(레브)[심장]을 찌르고 그 활은 부러지리로다.

악인은 의인 치기를 꾀하며 그를 향해 이를 간다. 악인은 양심의 가책을 억누르며 의인을 해치는 일을 계획하고 그를 향해 이를 갈고 또 칼을 빼고 활을 당기어 그를 엎드러뜨리며 죽이고자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악인에 대해 보응하실 것이다. 그는 악인을 웃으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악인을 심판하는 날이 오는 것을 보시기 때문이다. 악인이 그 날을 모르고 날뛰고 있으니 우스운 일이다. 악인이 의인을 향해 빼어든 그 칼은 자신의 심장을 찌르고 그 활은 부러질 것이다. 사울이나 하만처럼, 악인이 성도를 죽이려는 계획은 좌절되고 도리어 자신이 죽게 되고 망하게 될 것이다.

[16-17절] 의인의 적은 소유가 많은 악인의 풍부함보다 승하도다. [이는] 악인의 팔은 부러지나 의인은 여호와께서 붙드시는도다[붙드심이로다].

의인이 가진 적은 소유는 많은 악인이 가진 풍부함보다 더 낫다. 왜냐하면 악인의 팔은 부러지지만 의인은 여호와께서 붙드시기 때문이다. 악인의 팔이 부러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징벌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재난을 주실 것이며 악인들은 결국 멸망할 것이다.

그러나 의인은 하나님께서 붙드실 것이다. 그의 팔은 부러지지 않고 튼튼할 것이다. 의인은 물질적 궁핍함이 없을 것이다. 내세에서 뿐만 아니라, 현세에서도 그에게는 평강과 건강과 행복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잠언은 “가산(家産)[재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말했다(잠 15:16).

[18-20절] 여호와께서 완전한 자의 날을 아시니 저희 기업은 영원하리로다. 저희는 환난 때에 부끄럽지 아니하며 기근의 날에도 풍족하려니와 악인은 멸망하고 여호와의 원수는 어린양의 기름같이 타서 연기 되어 없어지리로다.

‘완전한 자’라는 원어(테미밈)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의 계명대로 흠 없이 행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완전한 자의 날들을 아신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세상에서 사는 날들을 아신다. 성도들의 삶은 섭리자 하나님의 눈앞에 있다.

또 성도들의 기업은 영원한 천국이다. 천국은 파산하거나 망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또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의 계명대로 사는 성도들은 환난 때에도 부끄럽지 않을 것이며 기근의 날에도 먹을 것이 풍족할 것이다. 그들에게 질병이 닥쳐오고 경제적 문제가 생겨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붙드시고 그들의 필요를 공급하실 것이며, 그들은 그 어려움에서 곧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악인들은 결국 멸망할 것이며 여호와의 원수들은 어린양의 기름같이 타서 연기되어 없어질 것이다. ‘어린양의 기름같이’라는 원어(키카르 카림)는 문맥적으로는 우리말 성경같이 번역할 수 있으나(KJV), 언어적으로는 ‘초장의 영광같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BDB, NASB, NIV). 들판의 풀들과 꽃들이 시들어 버리듯이, 악인들의 영광은 연기같이 사라질 것이다.

[21-22절] 악인은 꾸고 갚지 아니하나 의인은 은혜를 베풀고 주는도다. [이는] 주의 복을 받은 자는 땅을 차지하고 주의 저주를 받은 자는 끊어지리로다[끊어질 것임이로다].

악인과 의인은 대조된다. 악인은 꾸고 갚지 않는다. 악인은 갚을 돈의 여유가 있어도 갚지 않는다. 정직한 인격은 그의 돈 계산의 정확함에서 드러난다. 돈 셈이 흐린 사람은 좋은 인격이 아니다.

그러나 의인은 은혜를 베풀고 준다. 의인 욥은 고백하기를, “내가 언제 가난한 자의 소원을 막았던가. 과부의 눈으로 실망케 하였던가. 나만 홀로 식물을 먹고 고아에게 먹이지 아니하였던가. 실상은 내가 젊었을 때부터 고아를 기르기를 그의 아비처럼 하였으며 내가 모태에서 나온 후로 과부를 인도하였었노라”고 했다(욥 31:16-18). 옛날부터 경건한 성도는 구제에 힘썼다. 사도행전에 보면, 욥바의 다비다는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았고 경건한 고넬료도 백성을 많이 구제하였다(행 9:36; 10:2). 예수께서는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고 말씀하셨고(눅 12:33), 또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고 전해진다(행 20:35).

의인이 구제를 힘쓰는 것은 하나님의 복을 받는 자가 땅, 곧 영원한 천국을 기업으로 얻기 때문이다. 영광스러운 천국을 바라보는 자는 이 땅의 영광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그는 즐거이 땅의 것, 곧 물질적인 것을 가난한 자들과 나눌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 악인은 영원한 죽음과 멸망을 경험할 것이다.

[23-24절] 여호와께서 사람[선한 사람](KJV)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시나니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하나님께서는 악인의 걸음도 작정하셨지만, 특히 의롭고 선한 자들의 걸음을 정하셨고 그 길을 기뻐하신다. 잠언 19:21,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이 완전히 서리라.” 의인은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않는다. 의인도 연약한 마음과 죄악된 성질을 가지고 있으므로 실수하거나 낙망할 때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붙드심으로 그는 완전히 엎드러지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잠언 24:16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난다”고 말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넘어지지 않게 붙드시거나 혹은 넘어졌을 때 일으켜 세우실 능력을 가지고 계신다.

[25-26절]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저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주니 그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

다윗은 일평생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구걸함을 보지 못했다고 증거한다. 의인은 자신뿐 아니라 그의 자손도 복되다. 그는 복을 그 자손에게 끼친다. 하나님께서는 의인과 그 자손들에게 물질적 부족이 없게 하실 것이다. 그것은 그가 그들을 붙드시는 증거이다.

본문은 21절에 이어 의인의 특징이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구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선행과 구제를 기분적으로나 혹은 남에게 보이려고 한두 번 행하는 것이 아니다. 조건 없는 사랑과 선행이 참 사랑이며 참 선행이다. 의인은 종일토록 혹은 평생토록 남에게 그런 선과 그런 사랑을 베푼다. 그 결과, 그의 자손들은 복을 받는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악인은 하나님의 공의의 보응을 받을 것이다. 마지막 심판 때에는 물론이거니와,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공의로 징벌하실 것이다. 악인들은 멸망할 것이다. 그들의 영광은 들판의 풀들과 꽃들처럼 그리고 연기같이 사라질 것이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의인들을 끝까지 붙드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의인들을 악인의 손에서 건져주실 것이다. 그는 의인들에게 이 세상에서도 평안과 행복을 주시고 영원한 천국의 기업을 상속받게 하실 것이다. 의인들은 환난 때에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기근의 날에도 굶주리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때때로 넘어질 수 있으나 하나님께서 붙들어주시므로 아주 엎드러지지 않는다. 그의 자손들도 복을 받을 것이다.

셋째로, 그러므로 우리는 의인으로 살아야 한다. 의인들은 비록 악인들에게 핍박을 받는 가난하고 궁핍한 자이지만, 하나님의 계명대로 사는 정직한 자들이다. 또 의인들은 완전한 자이다. 즉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계명대로 흠 없이 산다. 특히, 의인들은 어려운 자들에게 은혜를 베풀고 구제하는 자이다. 그는 한두 번이 아니고 종일토록, 일평생 그런 선한 삶을 사는 자이다. 우리는 그런 의인들로 살아야 한다.

27-40절,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라

[27-29절]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영영히 거하리니 여호와께서 공의를 사랑하시고 그 성도를 버리지 아니하심이로다. 저희는 영영히 보호를 받으나 악인의 자손은 끊어지리로다. 의인이 땅을 차지함이여, 거기 영영히 거하리로다.

우리는 악에서 떠나고 선을 행해야 한다. 죄가 사망과 모든 불행의 원인이므로 사람이 악을 떠나는 것은 영생과 행복의 필수 조건이다. 또 선을 행하는 것은 죄를 회개한 성도들의 당연한 열매이며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뜻이다. 디도서 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救贖)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왜 우리가 악에서 떠나고 선을 행해야 하는가? 그 이유는 여호와께서 의를 사랑하시고 그 성도들을 버리지 아니하시기 때문이다. 의는 하나님의 계명을 행하는 것인데, 그 계명의 핵심은 사랑,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성도가 의를 실천하고 이웃 사랑을 행할 때 그를 결코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성도는 영영히 보호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악인의 자손은 끊어질 것이다. 악인은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할 것이다.

의인은 땅을 차지하며 거기 영원히 거할 것이다. 본 시편은 땅에 대해 많이 말한다. 9절,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리로다.” 11절,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22절, “주의 복을 받은 자는 땅을 차지하고.” 34절, “여호와를 바라고 그 도를 지키라. 그리하면 너를 들어 땅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라.” 땅에 대한 약속은 세상에서의 안정뿐 아니라, 장차 천국에서의 복된 삶을 가리킬 것이다.

[30-31절] 의인의 입은 지혜를 말하고 그 혀는 공의를 이르며 그 마음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으니 그 걸음에 실족함이 없으리로다.

다윗은 또 의인의 특징을 말한다. 의인은 그 마음에 하나님의 법이 있고 그 입과 혀에 지혜와 의의 말씀이 있다. 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고의적으로 혹은 부주의하여 잊어버리기 때문에 죄를 짓게 된다. 그러나 의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그것을 마음으로 믿고 마음에 간직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법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 신명기 6:6은,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라”고 말했다.

마음에 하나님의 법을 둔 자는 그 입과 혀로 지혜와 의의 말을 할 것이다. 사람은 마음에 있는 것을 입으로 말한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법대로 의롭게, 선하게, 진실하게 사는 것이 의이며 지혜이다. 성도는 지혜와 의의 말씀을 마음에 품고 그것을 입과 혀로 말한다. 또 이런 자의 걸음은 하나님의 지키심으로 실족함이 없을 것이다.

[32-33절] 악인이 의인을 엿보아 살해할 기회를 찾으나 여호와는 저를 그 손에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재판 때에도 정죄치 아니하시리로다.

세상에는 악인이 의인을 엿보아 그를 죽일 기회를 찾는 일이 있다. 이 세상은 의인에게 위험한 세상이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마 10:16)라고 말씀하셨다. 악인은 때때로 교회 안에도 있어서 하나님의 참된 성도들과 종들을 핍박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의인을 인정하시고 보호하신다. 사울이 매일 다윗을 죽이려고 찾았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사울의 손에 붙이지 않으셨듯이(삼상 23:14), 하나님께서는 의인을 악인의 손에 버려두지 않으실 것이다. 순교는 특별하고 예외적인 경우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심판 때에도 의인들이 정죄를 받지 않게 하실 것이다.

[34절] 여호와를 바라고 그 도를 지키라. 그리하면 너를 들어 땅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라. 악인이 끊어질 때에 네가 목도하리로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고 그의 도를 지켜야 한다. 하나님을 바라는 것이 경건이요 그의 길을 지키는 것이 의와 선과 진실이다. 그것이 의인들의 삶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의인들을 높이시고 땅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다. 사무엘상 2:30,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 땅은 앞에서도 여러 번 나온 대로(9, 11, 22, 29절), 세상의 안정된 기업뿐 아니라, 의인들이 장차 들어갈 영원한 천국을 가리킬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의인들을 높이시고 그들에게 영원한 땅을 주실 것이다. 그러나 악인들은 끊어질 것이며 의인들은 그들의 끊어짐을 볼 것이다.

[35-36절] 내가 악인의 큰 세력을 본즉 그 본토에 선 푸른 나무의 무성함 같으나 사람이 지날 때에[그가 가버렸으며](KJV, NASB, NIV) 저가 없어졌으니 내가 찾아도 발견치 못하였도다.

악인들의 세력은 때때로 외형적으로 거대하고 튼튼하고 번창하여 보인다. 그러나 그런 악인들의 세력과 외형적 번창함은 일시적이다. 악인들은 얼마 후에 보니 가버렸고 없어졌고 찾아도 발견치 못할 것이다. 악인들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서, 그가 주신 각양 은혜가 풍성한 이 세계에서 살 자격이 없고 복된 생명을 누릴 자격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죽이시고 그들에게 공의로운 심판을 내리실 것이다.

[37-40절] 완전한 사람을 살피고 정직한 자를 볼지어다. 화평한 자의 결국은 평안이로다. 범죄자들은 함께 멸망하리니 악인의 결국은 끊어질 것이나 의인의 구원은 여호와께 있으니 그는 환난 때에 저희 산성이시로다. 여호와께서 저희를 도와 건지시되 악인에게서 건져 구원하심은 그를 의지한 연고로다.

성도는 ‘완전한 사람,’ ‘정직한 자,’ ‘의인,’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라고 표현된다. ‘완전한 사람’이란 도덕적으로 비교적 흠과 점이 없는 자를 가리키고, ‘정직한 자’는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자를 가리키고, ‘의인’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를 가리킨다. 우리는 완전한 자, 정직한 자를 살피고 주목하며 그런 삶을 사모하고 실천해야 한다.

이런 성도는 땅 위에서 복을 누릴 것이다. 그는 평안을 누릴 것이다. 37절 후반절은 옛날 영어성경처럼(KJV) “이는 그 사람의 결국은 평안임이니라”고 읽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것은 문맥적으로나 원문의 액센트상으로나11) 타당해 보인다. 우리는 평안을 얻으려면 도덕적으로 온전하고 정직한 자가 되어야 한다. 악인에게는 평안이 없지만, 의인에게는 강물과 같은 평안이 예비되어 있다(사 48:18, 22).

또 그는 환난 때에 하나님의 도우심과 구원을 얻을 것이다. “의인의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나온다”(39절). 또 하나님께서는 환난 때에 성도의 산성과 요새와 안전한 은신처가 되신다. 그가 하나님을 의지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악인에게서 건져 구원하신다. 그러나 악인들이나 범죄자들은 함께 멸망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교회와 이 세상에서 끊어질 뿐만 아니라 주께서 가르치시고 성경에 밝히 증거된 영원한 지옥 형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고 그의 법대로 그의 길을 지키고 행하며 모든 악에서 떠나고 모든 선을 행하며 정직한 자, 온전한 자가 되자. 이것이 성경이 밝히 가르치는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헛된 세상과 세상의 것들을 바라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바라며 그의 계명대로 바르고 선하게 살라고 명하신다.

둘째로,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으시고 이 땅 위에서도 환난과 원수들과 죽음의 위험에서 지키시고 그의 평안과 도우심과 구원을 항상 체험하게 하실 것이며 또 복되고 영원한 천국에 넉넉히 들어가게 하실 것이다. 세상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일지라도 살아계신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지키시고 도우시고 함께하실 것이다.

셋째로, 세상의 악인들의 큰 세력은 일시적이며 결국 영원히 멸망할 것이다. 이 세상과 세상 사람들을 지배하는 사탄과 악령들과 악한 사람들은 결국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과 영원한 멸망을 당할 것이다.

38편: 병중에서 주의 도움을 구함

[1-5절] 여호와여, 주의 노로 나를 책하지 마시고 분노로 나를 징계치 마소서. [이는] 주의 살이 나를 찌르고 주의 손이 나를 심히 누르시나이다[누르심이니이다]. 주의 진노로 인하여 내 살에 성한 곳이 없사오며 나의 죄로 인하여 내 뼈에 평안함이 없나이다.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감당할 수 없나이다. 내 상처가 썩어 악취가 나오니 나의 우매한 연고로소이다.

다윗은 지금 심히 고통스러운 병중에 있다. 그는 살에 성한 곳이 없고 뼈에 평안함이 없다고 말하고 그의 상처는 썩어 악취가 난다고 말한다. 그는 이런 그의 고통이 자신의 큰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징계라고 고백한다. 그는 하나님의 화살이 그를 찔렀고 그의 손이 그를 심히 누르셨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로 이런 고통이 왔고 자신의 죄악이 자기 머리에 넘쳐서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짐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죄악을 자신의 우매함이라고 표현한다. 다윗은 이런 상황에서 “여호와여, 주의 노로 나를 책하지 마시고 분노로 나를 징계치 마소서”라고 기도한다.

[6-8절] 내가 아프고 심히 구부러졌으며 종일토록 슬픈 중에 다니나이다. 내 허리에 열기가 가득하고 내 살에 성한 곳이 없나이다. 내가 피곤하고 심히 상하였으매 마음이 불안하여 신음하나이다.

다윗은 몸이 아파 펴지 못하고 심히 구부러졌으며 종일토록 슬픈 중에 다녔고 그의 허리에 열기가 가득하고 그의 살에 성한 곳이 없었다. 그는 피곤하고 심히 상하고 연약해져서 마음이 불안하고 신음하였다. 그는 아마 피부에 난 심한 종기로 인해 온 몸이 매우 고통스런 상태에 있었고 마음도 몹시 피곤해져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심신으로 연약한 상태에 있었다. 성도는 때때로 이런 연약에 떨어질 수 있다.

[9-11절] 주여, 나의 모든 소원이 주의 앞에 있사오며 나의 탄식이 주의 앞에 감추이지 아니하나이다. 내 심장이 뛰고 내 기력이 쇠하여 내 눈의 빛도 나를 떠났나이다. 나의 사랑하는 자와 나의 친구들이 나의 상처를 멀리하고 나의 친척들도 멀리 섰나이다.

다윗은 고난 중에서 하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며 그의 모든 소원과 그의 탄식을 그에게 아뢴다. 그는 그의 심장이 뛰고 기력이 쇠하며 눈빛도 떠났다고 말한다. 또 그는 사랑하는 자와 친구들이 그의 상처를 멀리하였고 그의 친척들도 그를 멀리하였다고 말한다. 욥이 큰 고난 중에 처해 있었을 때 그의 아내가 그를 멀리했듯이, 또 사도 바울이 고난 충만한 전도사역 중에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를 버렸듯이, 하나님의 사람 다윗도 질병과 고통 중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서 멀리함을 당하였다. 그는 쓸쓸하게 고난을 견뎌야 했다.

[12-14절] 내 생명을 찾는 자가 올무를 놓고 나를 해하려는 자가 괴악한 일을 말하여 종일토록 궤계를 도모하오나 나는 귀먹은 자같이 듣지 아니하고 벙어리같이 입을 열지 아니하오니 나는 듣지 못하는 자 같아서 입에는 변박함이 없나이다.

다윗의 고난은 심신의 고통과 사랑하는 자들의 멀리함 정도만이 아니고, 그의 생명을 찾는 자들이 그를 죽이려고 올무를 놓았고 그를 해하려는 자들이 그에 대해 악한 소문을 퍼뜨린 일이 있었다. 그들은 악한 일을 위해 열심이 많아서 종일토록 악한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다윗은 악한 원수들에 대해 잠잠하였다. 그는 귀먹은 자같이 듣지 않았고 벙어리같이 입을 열지 않았으며 그의 입에는 변론함이 없었다. 그가 원수들에 대해 이렇게 대처한 까닭은 그가 자신의 형편을 하나님께 다 아뢰었고 그에게 맡겼고 그의 공의와 긍휼의 주권적 처분을 믿고 기대하였기 때문이다. 다윗은 고난 중에 그의 모든 소원을 사람에게 즉 가족이나 친구나 세상의 권세자들에게 말하지 않았고 오직 하나님께 아뢰었다. 우리의 모든 문제의 해결은 오직 하나님께 있다.

[15-16절] [이는] 여호와여, 내가 주를 바랐사오니 내 주 하나님이 내게 응락하시리이다[응락하실 것임이니이다]. [이는] 내가 말하기를 두렵건대 저희가 내게 대하여 기뻐하며 내가 실족할 때에 나를 향하여 망자존대(妄自尊大)할까 하였나이다[하였음이니이다].

원문 15절과 16절은 ‘이는[왜냐하면]’이라는 말로 시작된다. 그것들 은 그가 원수들 앞에서 잠잠했던 이유를 말한다. 그는 병중에서 모든 일들을 하나님께 맡기고 잠잠히 하나님만 바랐고 하나님의 응답만 기대하였다. 또 다윗이 비록 어리석은 죄 때문에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다 할지라도 그의 원수들이 그의 고난을 기뻐하고 자신들을 크게 여기고 자긍할 정당성은 없었다. 그들은 다윗보다 더 악한 자들이다.

[17-20절] [이는] 내가 넘어지게 되었고 나의 근심이 항상 내 앞에 있사오니[있사옴이오며, 이는 내가] 내 죄악을 고하고 내 죄를 슬퍼함이니이다. 내 원수가 활발하며 강하고 무리하게 나를 미워하는 자가 무수하오며 또 악으로 선을 갚는 자들이 내가 선을 좇는 연고로 나를 대적하나이다.

원문 17절과 18절은 다윗의 원수들이 자긍할지도 모르는 이유를 말한다. 그것은 다윗이 심신의 고통으로 낙망하고 실족할 지경에 있었고 근심이 계속 그를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며 또 그가 자신의 죄를 깨닫고 고백하며 그 죄를 슬퍼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근심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요(시 51:17) 그가 원하시는 근심이었다(고후 7:10). 다윗의 원수들은 악한 일을 행하는 데 활발하며 강하였고 정당한 이유 없이 그를 미워하는 자들이 많았다. 세상에는 악인들이 의인보다 많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부족과 연약이 없지 않았으나 대인관계에서는 잘못한 일이 없었고 선하게 처신하였다고 보인다. 그러나 악으로 선을 갚는 자들은 다윗이 선을 따른다는 것 때문에 오히려 그를 대적하였다. 악인들의 마음가짐은 참으로 악하다.

[21-22절] 여호와여, 나를 버리지 마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하지 마소서. 속히 나를 도우소서. 주 나의 구원이시여.

다윗은 심한 고난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지 마시고 멀리하지 마시고 속히 그를 도우시고 구원하시기를 구하였다. 그는 하나님을 ‘주 나의 구원이시여’라고 부른다. 그는 본 시편에서 하나님을 세 번이나 ‘주님’(아도나이)이라고 불렀다(9, 15, 22절). 그것은 그가 하나님을 그의 주인이시며 주권적 섭리자로 여겼고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짐을 믿었음을 보인다. 또 고난 중에 회개하며 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 누구든지 주 하나님을 의지하며 자신의 부족과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간구하면 하나님의 응답을 얻을 것이다.

시편 38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하심의 엄함을 알자. 다윗은 고난 중에 하나님의 징계하심을 느꼈다. 그의 몸에 성한 곳이 없고 그의 뼈에 평안함이 없고 그의 상처가 썩어 악취가 나며 그의 허리에 열기가 가득하였고 그는 심신으로 피곤하였다. 게다가 그의 사랑하는 자들이 그를 멀리하고 원수들까지 그를 해하려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죄에 대해 엄하게 징계하신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징계가 우리의 부족과 연약, 곧 우리의 죄 때문에 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다윗은 고난 중에 이 일이 자신의 죄 때문에 온 것을 느꼈다(3, 4, 18절). 하나님의 징계의 이유는 우리의 죄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 중에 첫째로 우리 자신을 반성하며 우리의 부족과 죄를 찾아보고 깨달아지는 모든 부족과 죄를 고백하며 회개하기를 힘써야 한다.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은 우리의 죄이다.

셋째로, 우리는 고난 중에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의 긍휼만 믿고 의지하며 하나님께 우리의 구원과 회복을 간구해야 한다. 다윗은 하나님을 여호와 영원자존자, 주님 곧 주권적 섭리자, 또 심판자와 구주로 믿었고 오직 그에게 용서와 도우심과 구원을 간구했다. 우리에게 닥친 고난의 해결책은 오직 주 하나님께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녀들을 징계하시되 그들의 거룩함을 위해 그렇게 하신다(히 12:10).

39편: 병중에서 인생의 헛됨을 깨달음

[1-2절] 내가 말하기를 나의 행위를 조심하여 내 혀로 범죄치 아니하리니 악인이 내 앞에 있을 때에 내가 내 입에 자갈[재갈]을 먹이리라 하였도다. 내가 잠잠하여 선한 말도 발하지 아니하니 나의 근심이 더 심하도다.

다윗은 자신의 행위를 조심하며 혀로 범죄치 않기를 원했다. 성도는 그릇된 길이나 악한 길을 조심하고 바르고 선한 길 걷기를 구하고 힘써야 하며 혀로 범죄치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온전한 사람이다(약 3:2). 다윗은 특히 악인이 그 앞에 있을 때에 자기 입에 재갈을 먹이겠다고 말한다. 악인은 남의 말을 오해만 하고 비난거리로만 삼기 때문에, 성도는 악인 앞에서 변론이나 변명하려 하지 말고 잠잠한 것이 지혜일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잠잠하여 바르고 정당한 말도 하지 아니하므로 그의 고통(케에브)이 더 심하였다. 바른 말을 참는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3-4절]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뜨거워서 묵상할 때에 화가 발하니 나의 혀로 말하기를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年限)의 어떠함을 알게 하사 나로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다윗은 악인들 앞에서 잠잠하려 할 때 마음에 열이 나고 화가 나서 하나님께 아뢰며 호소한다. 그는 하나님께 자신의 종말과 연한의 어떠함을 알게 하시며 자신의 연약함을 알게 하시기를 구한다. 본문에 ‘연약함’이라는 원어(카델)는 ‘덧없음’(NASB)을 뜻한다. 인생은 연약하여 마침내 늙고 병들고 죽는다. 사람의 일생은 참 덧없다. 우리의 일생은 제한적이고, 출생한 때가 있듯이 죽는 때가 있다. 우리는 죽음의 때를 생각해야 하고 인생의 덧없음을 인식하며 살아야 한다.

[5-7절]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뿐이니이다(셀라).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날을 손 넓이만큼 되게 하셨다고 말한다. 손 넓이는 약 10센티미터에 불과하다. 사람의 일생은 매우 짧다. 또 다윗은 그의 일생이 하나님 앞에서 없는 것 같다고 말한다. 우리의 짧은 일생은 하나님 앞에서 무(無)에 가깝다. 영원에 비하면 세상의 백년은 무에 가깝다. 다윗은 또 사람마다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뿐이라고 말한다. ‘허사’라는 원어(헤벨)는 전도서에 38번이나 나오는 ‘헛되다’는 단어이다. 그것은 본래 ‘숨’이라는 뜻이다.

다윗은 또 각 사람이 그림자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림자’라는 원어(첼렘)는 ‘허상, 유령’이라는 뜻이다. 사람이 죽고마는 존재라면 그의 세상 생활은 영원한 실체가 아니고 허상(虛像)과 같다. 또 사람들의 모든 분주복잡한 일들도 죽음 앞에서 볼 때 무의미하고 헛되어 보인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가 죽고나면 누가 취할지 알지 못하는 그 헛된 재물을 위해 목숨을 걸 듯이 분주하게 일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라고 말한다. 짧고 덧없는 한 평생의 삶에서 우리가 바라고 소망하며 살 만한 삶의 목표와 가치는 무엇인가? 그것은 다 지나가 버리는 헛된 세상의 어떤 것들에 있지 않고, 오직 영원 전부터 스스로 계신 하나님, 태초에 하늘과 땅과 그 가운데 만물을 창조하시고 지금도 온 세상을 섭리하시는 하나님께만 있다.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뿐이며 우리의 삶의 목표와 가치도 하나님뿐이다.

[8-11절] 나를 모든 죄과에서 건지시며 우매한 자에게 욕을 보지 않게 하소서. 내가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아니하옴은 주께서 이를 행하신 연고니이다. 주의 징책을 나에게서 옮기소서. 주의 손이 치심으로 내가 쇠망하였나이다. 주께서 죄악을 견책하사 사람을 징계하실 때에 그 영화를 좀 먹음같이 소멸하게 하시니 참으로 각 사람은 허사뿐이니이다(셀라).

다윗은 죽음에 이를 큰 병에서 그 원인이 자신의 죄임을 인식했다. 그러므로 그는 그에게 닥친 고난이 그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책이라고 말하며 자신을 모든 죄에서 건져주시고 자신을 회복시켜 주시기를 구하였다. 실상, 죄는 다윗의 중한 질병의 원인이었을 뿐 아니라, 또한 이 세상의 모든 불행의 근본적 원인이다.

다윗은 자신의 질병이 자신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책임을 깨닫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앞에서 불평하는 말을 하거나 사람들에게 변명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손이 그를 치심으로 쇠망하였다고 말한다. 또 그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죄를 견책하시고 징계하실 때 그 영화를 좀먹음같이 하시므로 각 사람은 참으로 헛되다고 말한다. 사람이 일시적으로 건강하고 부귀영광을 누린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치시면 하루아침에 헛되게 될 것이다.

다윗은 이런 깨달음 속에서 하나님께 자신을 모든 죄과에서 건져주시고 그의 징책을 옮겨주시기를 구한다. 하나님께서 병으로 그를 치셨으므로 그의 병에 대한 치료와 회복도 하나님께 있다. 하나님께서는 치료의 하나님이시다(출 15:26). 그러므로 우리는 병들었을 때 병 낫기를 기도해야 한다. 야고보서 5:14-15,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다윗은 또 자신의 병이 우매한 자들에게 비난거리가 되지 않게 되기를 간청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이름이 세상에서 모욕을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12-13절] 여호와여, 나의 기도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내가 눈물 흘릴 때에 잠잠하지 마옵소서. 대저 나는 주께 객이 되고 거류자가 됨이 나의 모든 열조 같으니이다. 주는 나를 용서하사(하솨 밈멘니)[내게서 주의 얼굴을 돌리시사] 내가 떠나 없어지기 전에 나의 건강을 회복시키소서(아블리가)[나로 기쁘게 하소서].

다윗은 병중에서 자신의 죄를 깨닫고 뉘우치며 하나님의 용서를 빌며 그의 치료를 간구하는 눈물의 기도를 올린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와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시고 그가 눈물 흘릴 때 잠잠하지 마시기를 간구한다. 그가 이렇게 기도한 것은, 병상에 있는 그에게 죽음의 그늘이 졌고 그의 일생이 짧은 나그넷길같이 끝날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 하나님께 질병의 치료와 건강의 회복을 간구한다. 그는 주의 노하신 얼굴을 그에게서 돌리시고 그로 기쁘게 하시기를 구한다. 병든 자들은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약 5:13-18).

본 시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의 사람의 일생이 짧고 헛됨을 알자. 이것은 사람들이 죽음 앞에서 절실하게 실감하는 바이다. 죽음 앞에서는 세상의 부귀와 영화가 무슨 의미가 있으며 무슨 가치가 있는 것인가? 인생은 짧고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는 헛되다. 하나님 없는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참으로 다 헛되다.

둘째로, 우리는 이 세상의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징책의 손을 보자. 이 세상의 모든 불행은 죄의 징벌에서 기원한다. 우리는 늘 부족하기 때문에 고난 중에 우리의 부족을 깨닫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창조자와 심판자이신 하나님 앞에 겸손과 두려움으로 엎드려 생각나는 우리의 부족들을 고하며 그의 긍휼을 구하며 그의 구원과 회복을 원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우리의 소망을 오직 하나님께만 두자.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영생의 소망뿐 아니라, 이 세상에서 질병의 치료와 건강의 회복도 하나님의 손 안에 있음을 알고 하나님께 기도하자. 요한복음 6:68,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야고보서 5:16,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우리의 소망은 영원하신 하나님뿐이다.

40편: 하나님의 도움을 기다리고 기다림

[1-2절]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

다윗은 그가 처한 상황을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이라고 표현한다. 그것은 자기 힘으로는 빠져나올 수 없는 ‘멸망의 웅덩이’(NASB)를 가리킨다. 다윗은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였다. 부르짖는 것은 간절한 기도를 가리킨다. 우리는 비상한 때에는 부르짖어 기도해야 한다. 다윗은 또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고 기다렸다. 그의 부르짖으며 기다리는 기도는 마침내 하나님의 응답을 얻었다. 주께서는 그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셨고 그를 멸망의 구덩이와 수렁에서 끌어 올리셨고 그의 발을 반석 위에 두어 견고케 하셨다.

[3-4절]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여호와를 의지하고 교만한 자와 거짓에 치우치는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나님께서 그의 입에 두신 새 노래는 구원의 체험에서 나온 노래를 가리킨다. 그것은 멸망의 웅덩이에서 구원받은 체험이다. 다윗의 체험은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줄 것이다. 그들은 다윗의 큰 구원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의 손길을 보고 그의 살아계심을 깨달을 것이며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게 될 것이다. 교만한 자나 거짓에 치우치는 자를 크게 여기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다.

[5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도소이다. 내가 들어 말하고자 하나 주의 앞에 베풀 수도 없고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

다윗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그의 친밀함을 보인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섬기며 그를 경외하고 경배하고 사랑하고 순종하였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기적들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생각들도 많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심과 노아 시대에의 홍수 심판과 소돔과 고모라 성에 내리신 유황불 심판은 그의 기적이었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많은 기적의 역사이다. 성경은 기적을 증거하는 책이다. 또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가지신 생각들은 포괄적이고 주밀하고 완전하시다. 그것들은 개인과 교회와 온 세계의 일들을 다 포함한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계를 만세 전에 계획하셨고 그 뜻을 이루시며 그 뜻은 영원까지 이른다. 다윗은 하나님의 그 모든 기적들과 생각들을 다 열거할 수 없고 그 수를 셀 수도 없다고 말한다.

[6-8절] 주께서 나의 귀를 통하여 들리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치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그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단순히 제사들을 기뻐하시거나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통하여 들린다’는 원어(카라)는 ‘(우물이나 구덩이 등을) 판다’는 뜻이다. 나의 귀를 통하여 들리신다는 말은 (1) 나의 귀를 여셨다, 혹은 (2) 나의 귀를 뚫으셨다는 뜻이다. 율법에 의하면, 평생 주인과 살기를 원하는 종은 귀를 뚫었다(출 21:5-6). 헬라어 70인역은 “주께서 나를 위해 한 몸을 준비하셨나이다”라고 번역했고 그 구절은 신약성경 히브리서 10:5에 인용되었다. 그것은 아마도 귀를 뚫어 영원한 종을 삼음으로 종의 몸을 준비하셨다는 뜻 같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단지 형식적인 제사가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이다(삼상 15:22-23; 사 1:13-14, 16-17).

다윗은 성령의 감동으로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다. 구약성경은 오실 메시아에 대해 증거하였다. 요한복음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메시아께서는 하나님의 법을 마음에 두고 하나님의 뜻을 즐거이 행하실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죽기까지 아버지께 순종하셨다(빌 2:8; 히 4:8-9).

[9-10절] 내가 대회 중에서 의의 기쁜 소식을 전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내 입술을 닫지 아니할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내가 주의 의를 내 심중에 숨기지 아니하고 주의 성실과 구원을 선포하였으며 내가 주의 인자와 진리를 대회 중에서 은휘치 아니하였나이다.

다윗은 대회 즉 큰 무리들 가운데 의의 기쁜 소식을 전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의 기쁜 소식인데 죄 많은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구원의 일을 가리킨다. 다윗은 하나님의 의의 소식을 전하는 입술을 닫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다윗이 감추지 않고 말하는 그 하나님의 의는 메시아로 말미암은 구원이며 그 내용은 하나님의 인자와 진리이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약속하셨고 그것을 성취하셨다. 그의 의와 그의 구원은 완전하다. 그것은 하나님의 크신 인자의 결과이다. 우리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이다.

[11-12절] 여호와여, 주의 긍휼을 내게 그치지 마시고 주의 인자와 진리로 나를 항상 보호하소서. 무수한 재앙이 나를 둘러싸고 나의 죄악이 내게 미치므로 우러러 볼 수도 없으며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으므로 내 마음이 사라졌음이니이다.

다윗은 무수한 재앙이 그를 둘러쌌다고 말한다. 그를 둘러싼 재앙이 그의 죄를 깨닫게 하였다. 그는 자신의 죄악이 크고 머리털보다 많다고 고백한다. 우리는 고난 중에 우리 자신의 부족과 죄를 깨닫는다. 우리의 고난은 많은 경우 죄 때문에 온다. 다윗은 이제 고난 중에 하나님의 긍휼을 구한다. 주께서 우리에게 긍휼을 거두시면 우리는 죄 가운데 버려져 멸망할 것이지만, 주께서 긍휼을 베푸시면 우리가 죄사함을 받고 확실히 영생을 누릴 것이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크신 긍휼과 은혜와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다(엡 2:4-5; 딛 3:5). 또 다윗은 하나님께서 인자와 진리로 자신을 항상 보호해주시기를 구하며 그때 우리는 이 세상에서도 항상 승리할 수 있다.

[13-15절] 여호와여, 은총을 베푸사 나를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나의 영혼을 찾아 멸하려 하는 자로 다 수치와 낭패를 당케 하시며 나의 해를 기뻐하는 자로 다 물러가 욕을 당케 하소서. 나를 향하여 하하 하는 자로 자기 수치를 인하여 놀라게 하소서.

다윗에게는 그의 영혼을 찾아 멸하려는 원수들이 있었다. 그들은 그를 해치기를 기뻐하며 그를 조롱하고 멸시하였다. 성도에게는 그를 미워하고 핍박하고 해치려는 자들이 있다. 성도들의 가장 큰 원수는 사탄이다. 사탄은 성도를 속이며 범죄케 하는 영이다. 성도는 세상에서 사탄과 악령들과 싸우며 그 싸움의 과정에는 많은 고난과 핍박이 뒤따른다. 다윗은 그 싸움 속에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구원을 간구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도우시고 구원하실 것이다. 또 다윗은 하나님께 원수들로 수치와 낭패를 당케 하시기를 구한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위하신다. 그는 성도와 싸우는 자들과 싸우시고 대적하는 자들을 대적하신다(시 35:1). 사탄과 악령들과 악한 핍박자들은 최종적으로 지옥 형벌을 받게 될 것이다(마 25:41; 계 20:10; 21:8).

[16-17절] 무릇 주를 찾는 자는 다 주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는 항상 말하기를 여호와는 광대하시다 하게 하소서.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나 주께서는 나를 생각하시오니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건지시는 자시라. 나의 하나님이여, 지체하지 마소서.

다윗은 자신을 가난하고 궁핍하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대해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신다(약 2:5).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는 특히 영적으로 가난하다. 그는 자신의 부족을 깨닫고 자신을 낮춘다. 다윗은 하나님을, 그를 생각하시고 도우시고 건지시는 자라고 말한다. 세상에는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생각하는 자가 별로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성도를 생각하시고 돌아보시며 그를 도우시고 그를 위험한 상황에서 건지신다. 다윗은 이제 하나님의 도우심과 구원을 간절히 기도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주시며 그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그의 위대하심을 체험하게 하실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신속한 도우심을 구한다. 그의 간절한 기도는 곧 응답될 것이다.

시편 40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을 알자.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을 능력으로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 개인과 인류 전체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주밀하고 완전하다. 그는 항상 살아계셔서 자기 백성의 부르짖는 기도를 들어주시고 그들을 능력으로 구원하시고 또 인자와 진실을 베푸신다. 하나님께서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은 하나님의 의이며 그의 인자와 긍휼과 사랑의 표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그의 의와 긍휼을 알자.

둘째로, 우리는 고난 중에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그 죄를 다 버리고 오직 의와 선을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다윗은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자신의 죄가 많음을 깨달았다. 우리는 고난 중에 우리의 부족과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그 죄를 다 버려야 하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만 의지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즐거이 순종하여 의와 선을 행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늘 승리하며 새 노래로 하나님을 찬송하게 될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간절하고 끈질기게 하나님께 기도하자. 다윗은 극심한 고난 중에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며 하나님을 기다리고 기다렸고 마침내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 우리는 어떤 고난의 현실 속에서도 낙심치 말고, 사탄과 악령들과 인간 원수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가난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간절하고 끈질기게 기도하자.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과 도우심과 구원을 확신하며 기다리고 기다려 응답받자.


41편: 빈약한 자를 돌보는 자가 복됨

[1-3절] 빈약한 자를 권고(眷顧)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저를 건지시리로다. 여호와께서 저를 보호하사 살게 하시리니 저가 세상에서 복을 받을 것이라. 주여, 저를 그 원수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 여호와께서 쇠약한 병상에서 저를 붙드시고 저의 병중 그 자리를 다 고쳐 펴시나이다.

다윗은 빈약한 자를 배려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한다. ‘빈약한’이라는 원어(달)는 ‘비천한, 연약한, 가난한’이라는 뜻이며, ‘권고(眷顧)하는 자’라는 원어(마스킬)는 ‘배려하는 자, 돌아보는 자’라는 뜻이다. 비천하고 연약하고 가난한 자를 배려하는 자가 복이 있는 까닭은 그가 하나님의 선하신 마음을 본받았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고아를 도우시는 자시요 과부의 재판장이시라고 말한다(시 10:14; 68:5).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신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또한 선하신 하나님이시다.

다윗은 그런 자가 받을 복에 대해 말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런 자를 환난과 재앙의 날에 건지실 것이라고 말한다. 또 그는 하나님께서 그런 자를 보호하시고 살게 하실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과 같이 선한 마음을 품고 사는 자들은 이 세상에서 그런 복을 받을 것이다.

다윗은 또 “주여, 저를 그 원수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라고 말한다. 이 구절은 “주께서 저를 그 원수의 뜻에 맡기지 않으시리이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나은 것 같다(KJV). 하나님께서는 그가 원수들에게 해를 당치 않도록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구원하실 것이다.

또 다윗은 “여호와께서 쇠약한 병상에서 저를 붙드시고 저의 병중 그 자리를 다 고쳐 펴시나이다”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병중에, 그의 연약한 병상에서 그를 붙드시고 치료하셔서 회복시키실 것이다. 그가 연약한 자를 배려했듯이, 하나님께서는 그가 연약할 때 그를 배려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출애굽기 15:26,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시편 103:2-4,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救贖)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4절] 내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내 영혼을 고치소서 하였나이다.

다윗은 병중에서 회개하며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며 영혼의 치료를 간구한다. 사람에게 있어서, 육신의 병의 치료보다 영혼의 회복이 더 중요하고 영혼이 회복되면 육신의 치료도 뒤따를 것이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우리가 병들었을 때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고 말했다(약 5:16).

[5-9절] 나의 원수가 내게 대하여 악담하기를 저가 어느 때에나 죽고 그 이름이 언제나 멸망할꼬 하며 나를 보러 와서는 거짓을 말하고 그 중심에 간악을 쌓았다가 나가서는 이를 광포하오며 나를 미워하는 자가 다 내게 대하여 수군거리고 나를 해하려고 꾀하며 이르기를 악한 병이 저에게 들었으니 이제 저가 눕고 다시 일지[일어나지] 못하리라 하오며 나의 신뢰하는 바 내 떡을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다윗은 몸만 아픈 것이 아니고 원수들로 인한 심적 고통도 컸다. 그의 원수들은 그가 언제 죽어 망할 것인가 하며 악담하였다. 그들은 그를 보러 와서는 그를 위하는 것같이 거짓을 말하고 심중에 간악을 품었다가 나가서는 그를 비방하는 말들을 퍼뜨렸다. 그를 미워하는 모든 자들은 그에 대해 수군거리고 그를 해하려고 꾀하며 그가 악한 병이 걸렸으니 이제 눕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라고 말했다. 성도들은 비천하고 연약한 자를 배려하지만 악인들은 성도와 너무 다르다.

심지어 그가 믿고 신뢰했고 그와 친근히 식탁 교제를 나누었던 그의 가까운 친구도 그를 대적하여 발꿈치를 들었다. 다윗은 마음에 큰 상함과 슬픔을 가졌을 것이다. 이 구절은 요한복음 13:18에서 메시아 예언으로 인용되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가룟 유다는 3년간이나 주님을 따르며 많은 말씀과 기적들을 듣고 보았고 그의 사랑을 받아 재정관리까지 맡았으나 그를 배신하고 팔아 넘겼다.

[10-13절] 그러하오나 주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일으키사 나로 저희에게 보복하게 하소서. 나의 원수가 승리치 못하므로 주께서 나를 기뻐하시는 줄을 내가 아나이다. 주께서 나를 나의 완전한 중에 붙드시고 영영히 주의 앞에 세우시나이다.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송할지로다. 아멘, 아멘.

다윗은 고난 중에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의 긍휼을 구한다. 또 그는 그의 긍휼로 그를 병상에서 일으키심으로 원수들에게 되갚음이 되기를 원한다. 성도의 구원과 승리는 단지 자신의 명예를 위함이 아니고 그가 섬기는 하나님의 명예를 위함이다.

다윗은 또 그의 원수들이 그를 이기지 못함을 볼 때 주께서 그를 기뻐하시는 줄을 안다고 고백한다. 세상의 모든 일들을 주권적으로 섭리하시는 하나님께서 성도의 원수들이 그를 이기지 못하게 하시는 것은 성도를 기뻐하시는 확실한 증거이다.

또 다윗은 그의 원수들과 대조하여 주께서 그를 그의 완전함 가운데 붙드시고 영영히 주의 앞에 세우실 것을 확신한다. ‘그의 완전함’은 그의 칭의(稱義)와 그의 성화(聖化)를 다 포함할 것이다. 칭의는 법적 의이며 성화는 실제적 의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의(義)로 구속(救贖)하셨고 우리를 의롭다고 여기셨고 또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며 평생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 칭의와 성화는 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요 하나님의 은혜이다. 참 성도는 하나님을 믿고 그의 계명을 순종하고 죄를 멀리하고 의와 선을 실천한다. 또 ‘영영히 그의 앞에 세우신다’는 말은 구원의 영원한 보장을 가리킨다.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로 끝까지 참고 견딜 것이다. 빌립보서 1:6,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이제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송할 것이라고 말하며 ‘아멘, 아멘’으로 글을 마친다.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구원하신 자는 하나님을 영원히 찬송할 것이다. 찬송은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이며 구원받은 성도의 마땅한 일이다(엡 1:6, 12, 14).

시편 41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비천하고 연약하고 가난한 자를 배려하는 자가 되자. 이런 자가 복이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품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남을 긍휼히 여기는 선한 자가 되자. 이것은 재앙의 날에도 구원을 얻는 복된 길이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쇠약한 병상에 있는 성도를 붙드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치료하는 하나님이시다(출 15:26). 그러므로 야고보는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고 말했다(약 5:14-16). 하나님께서는 성도에게 건강의 회복을 주실 것이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원수들이 승리치 못하게 하실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그의 계명들에 순종하면, 하나님께서는 확실히 우리편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살아계셔서 성도와 싸우는 자와 싸우실 것이며 성도의 원수들이 결코 승리치 못하게 하실 것이다.

넷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우리의 완전한 중에 붙드신다. 성도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계명을 지키어 완전함에 거함이 가장 큰 복이다. 시편 119:1, “행위 완전하여 여호와의 법에 행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