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장: 하나님께서 자신을 증거하심
[1-7절]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 가운데로서 욥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누가 그 도량을 정하였었는지[측량하였는지], 누가 그 준승[(목공일에 쓰는) 줄]을 그 위에 띄웠었는지 네가 아느냐? 그 주초(柱礎)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이 돌은 누가 놓았었느냐? 그때에 새벽 별들이 함께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쁘게 소리하였었느니라.
여호와께서 폭풍 가운데서 말씀하신 것은 그의 위엄과 불쾌함을 나타내시는 것 같다. 욥과 그 친구들은 자신들을 반성하며 두려움과 겸비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무지한 말로 이치(에차)[의논]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라고 말씀하셨다. 욥의 문제는 하나님을 대항하는 불경건이나 사악함에 있는 것이 아니고 단지 무지와 사려 깊지 못함에서 나온 불평스런 말에 있었다고 보인다.
하나님께서는 또 그에게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라고 물으셨다. 그가 땅의 기초를 놓으실 때 욥은 존재하지도 않았었다. 하나님께서는 홀로 이 일을 행하셨다(사 44:24). 만일 사람이 하나님의 드러난 창조 세계의 일들도 모른다면, 그는 하나님의 감추인 섭리의 일들에 대해 아는 것처럼 처신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때에 새벽 별들이 함께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쁘게 소리하였었느니라”고 말씀하셨는데 새벽 별들은 하나님의 아들과 동의어로 쓰였고 그것은 천사들을 가리켰다(욥 1:6).
[8-11절] 바닷물이 태에서 나옴같이 넘쳐흐를 때에 문으로 그것을 막은 자가 누구냐? 그때에 내가 구름으로 그 의복을 만들고 흑암으로 그 강보[포대기]를 만들고 계한을 정하여 문과 빗장을 베풀고 이르기를 네가 여기까지 오고 넘어가지 못하리니 네 교만한 물결이 여기 그칠지니라 하였었노라.
바닷물이 무더기같이 넘쳐흐를 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막으셨다. 바닷가의 모래 벌판은 바닷물이 넘지 못하게 하나님께서 주신 경계선이다. 예레미야 5:22, “내가 모래를 두어 바다의 계한(界限)을 삼되 그것으로 영원한 계한을 삼고 지나치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파도가 흉용하나 그것을 이기지 못하며 뛰노나 그것을 넘지 못하느니라.”
[12-15절] 네가 나던 날부터 아침을 명하였었느냐? 새벽으로 그 처소를 알게 하여 그것으로 땅끝에 비취게 하고 악인을 그 가운데서 구축한[쫓아낸] 일이 있었느냐? 땅이 변화하여 진흙에 인친 것 같고 만물이 옷같이 나타나되 악인에게는 그 빛이 금한 바 되고 그들의 높이 든 팔이 꺾이느니라.
하나님께서는 날마다 아침을 오게 하신다. 그가 허락하지 않으시면, 아침이 오지 않을 것이다. 새벽빛이 온 땅에, 땅끝까지 순식간에 비취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빛이 비치면 땅은 진흙에 도장을 찍은 것같이, 예쁜 옷같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천지만물은 밝은 빛 아래서 각각 다양하고 아름다운 색깔과 모양을 드러낸다. 또 아침 빛은 악인을 쫓아낸다. 악인은 아침 빛을 싫어하고 어두운 밤을 좋아한다. 악인들에게는 빛이 없다. 악인들은 빛을 미워하고 두려워하며 빛으로부터 피하며 도망친다. 또 하나님께서는 악인의 빛을 거두신다. 악인에게는 참된 기쁨도 평안도 행복도 없다.
[16-18절] 네가 바다 근원(네베크)[샘]에 들어갔었느냐? 깊은 물밑으로 걸어 다녔었느냐? 사망의 문이 네게 나타났었느냐? 사망의 그늘진 문을 네가 보았었느냐? 땅의 넓이를 네가 측량하였었느냐? 다 알거든 말할지니라.
깊은 바다 속에는 아마 많은 샘들이 있을 것이다. 노아 홍수 때 ‘큰 깊음의 샘들’이 터졌다고 성경은 말한다(창 7:11). 전문 잠수부(다이버)들이 바다 속으로 들어가지만(보통은 수중 30미터 정도 들어간다고 함), 그것은 깊은 바다(보통 5-6km, 최저 약 11km)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잠수함도 물의 압력 때문에 아주 깊은 바다 속으로는 들어가지 못하고 특별한 탐사선도 겨우 900미터 정도 내려간다고 한다. 사람은 바다 속에 대해 지극히 조금 알고 있을 뿐이다. 깊은 물밑으로 걸어 다녀본 사람은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친히 이 모든 것을 만드셨고 그것을 아시며 그것을 주관하시는 자이시다.
하나님께서는 또 ‘사망의 문,’ ‘사망의 그늘진 문’에 대해 언급하신다. 그것은 죽음과 무덤을 가리킬 것이나, 혹시 악인들을 위해 예비된 지옥의 문을 가리킬지도 모른다. 사람은 죽음너머의 세계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며 지옥의 문, 그리고 그 문으로 들어간 세계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한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서만 아시는 세계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땅의 넓이를 네가 측량하였었느냐?”라고 물으신다. ‘측량하다’는 원어(힛보난타)는 ‘지각(知覺)하다, 이해하다’는 뜻이다. 우리는 이 광활한 지구의 넓이를 느낄 수 없다. 오늘 우리도 땅의 크기를 수학적 어림 계산으로만 알 수 있을 뿐이다.
[19-24절] 광명의 처소는 어느 길로 가며 흑암의 처소는 어디냐? 네가 능히 그 지경으로 인도할 수 있느냐? 그 집의 길을 아느냐? 네가 아마 알리라. 네가 그때에 났었나니 너의 연수(年數)가 많음이니라. 네가 눈 곳간에 들어갔었느냐? 우박 창고를 보았느냐? 내가 환난 때와 전쟁과 격투의 날을 위하여 이것을 저축하였노라. 광명이 어느 길로 말미암아 뻗치며 동풍이 어느 길로 말미암아 땅에 흩어지느냐?
우리는 빛의 이치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흑암의 처소도 알지 못한다. 우리는 또 눈 곳간과 우박 창고를 잘 알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죄인을 징벌하실 때 사용하신다. 여호수아가 기브온 족속을 위해 아모리 다섯 왕들의 연합군과 싸웠을 때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큰 덩어리 우박들을 내려 여호수아를 도우심으로 아모리인들 중에 이스라엘 자손의 칼에 죽은 자보다 우박에 죽은 자가 더 많게 하셨다(수 10:11). 사람은 또 빛이 나뉘는 길을 알지 못한다. 빛은 1초에 30만 킬로미터, 즉 지구를 일곱 바퀴 반 정도나 도는 속도로 달려나간다. 또 눈에 보이지 않는 동풍의 길도 파악하기 어렵다.
[25-30절] 누가 폭우를 위하여 길을 내었으며 우뢰의 번개 길을 내었으며 사람 없는 땅에, 사람 없는 광야에 비를 내리고 황무하고 공허한 토지를 축축하게 하고 연한 풀이 나게 하였느냐? 비가 아비가 있느냐? 이슬 방울은 누가 낳았느냐? 얼음은 뉘 태에서 났느냐 공중의 서리는 누가 낳았느냐? 물이 돌같이 굳어지고 해면이 어느니라.
폭우가 쏟아져 홍수가 날 때 그것을 주장하는 이는 하나님밖에 없으시고 천둥과 번개의 길을 내는 자도 그 분뿐이시다. 사람은 비와 이슬방울이 어떻게 생기는지 알지 못하고 수증기가 어떻게 공중의 서리가 되는지 혹은 물이 어떻게 얼음이 되는지 그 이치를 알지 못한다. 우리는 물이 섭씨 0도 이하가 되면 언다는 것을 알지만, 왜 그것이 그래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창조 세계는 신비로 가득하다.
[31-33절] 네가 묘성을 매어 떨기 되게 하겠느냐? 삼성의 띠를 풀겠느냐? 네가 열두 궁성을 때를 따라 이끌어 내겠느냐? 북두성과 그 속한 별들을 인도하겠느냐? 네가 하늘의 법도를 아느냐? 하늘로 그 권능을 땅에 베풀게 하겠느냐?
옛날부터 사람들은 밤하늘의 별들을 관찰하며 별자리들의 이름을 붙였다. ‘묘성(昴星)’은 황소자리 별자리(Pleiades)로서 일곱 개의 별들로 되어 있고, ‘삼성(參星)’은 오리온 별자리(Orion)로서 세 개의 별들로 되어 있고, ‘북두성(北斗星)’은 큰 곰 별자리를 가리킬 것이다. 사람은 별들을 묶거나 풀 수 없고 때를 따라 그것들을 이끌 수 없다. 거대하고 광활한 우주 공간인 저 하늘에 떠 있는 무수히 많은 별들 그리고 그것들이 여러 모양들을 이루며 규칙적이게 제자리를 지키는 현상들은 사람이 조금도 관여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역이다.
[34-38절] 네 소리를 구름에 올려 큰 물로 네게 덮이게 하겠느냐? 네가 번개를 보내어 가게 하되 그것으로 네게 우리가 여기 있나이다 하게 하겠느냐? 가슴 속의 지혜는 누가 준 것이냐? 마음 속의 총명은 누가 준 것이냐? 누가 지혜로 구름을 계수하겠느냐? 누가 하늘의 병을 쏟아 티끌로 진흙을 이루며 흙덩이로 서로 붙게 하겠느냐?[티끌이 굳어질 때와 흙덩이가 서로 붙을 때, 누가 하늘의 병을 기울일 수 있느냐?](NASB, NIV).
욥의 목소리가 구름에 도달하기도 어렵겠지만 설령 도달했다 할지라도 구름이 그의 말에 복종치 않을 것이다. 하늘의 번개를 주관하고 그것에게 명령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람은 범죄한 이후 참 지혜를 잃어버렸고 심히 무지하고 허무한 것을 추구하고 사는 상태에 있지만, 확실히 짐승들과는 다르다. 사람에게는 짐승들에게 없는 높은 수준의 지혜와 이성과 도덕성이 있다. 이런 지혜와 총명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자신의 지혜로 구름들의 수를 다 셀 수 없으며 하늘의 물병을 기울여서 단단하게 굳어지는 티끌과 딱딱하게 붙어버리는 흙덩이를 부드럽게 할 능력이 없다. 욥이든지 누구든지 사람은 구름과 비에게 명령할 힘이 없다. 그런 일은 오직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이다.
[39-41절] 네가 암사자를 위하여 식물을 사냥하겠느냐? 젊은 사자의 식량을 채우겠느냐? 그것들이 굴에 엎드리며 삼림에 누워서 기다리는 때에니라. 까마귀 새끼가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먹을 것이 없어서 오락가락할 때에 그것을 위하여 먹을 것을 예비하는 자가 누구냐?
사자는 동물의 왕이라고 불리는 사납고 날렵한 짐승이다. 그것은 100 내지 250킬로그램의 체중을 가지고도 시속 60킬로미터 이상의 속도로 달려가 얼룩말, 영양, 기린, 사슴, 물소, 멧돼지 등을 사냥한다. 낮에는 보통 나무 그늘에서 쉬고 밤에 활동하며 열 마리나 스무 마리씩 떼를 지어 산다. 사람이 사자를 위해 먹이를 사냥할 수 없고 젊은 사자들의 식욕을 채울 수 없다. 오직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기르신다.
까마귀 새끼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오락가락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자이시다. 이 세상의 모든 동물들은 다 하나님의 선하신 배려와 공급 속에 살고 있다. 시편 104:27-29, “이것들이 다 주께서 때를 따라 식물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주께서 주신즉 저희가 취하며 주께서 손을 펴신즉 저희가 좋은 것으로 만족하다가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저희가 떨고 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신즉 저희가 죽어 본 흙으로 돌아가나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세상 만물을 먹이시고 기르시고 섭리하신다.
욥기 38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는 욥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깨우쳐주신다. 하나님께서는 홀로 땅의 기초를 놓으셨다. 그는 바닷물을 주장하시는 섭리자이시다. 그는 빛 자체이시고 세상의 빛을 주관하시는 섭리자이시며 친히 만물과 사람들에게 빛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는 바다 근원과 사망의 문과 땅의 넓이를 아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는 빛과 눈 곳간과 우박 창고를 아시고 동풍의 길도 아신다. 그는 폭우와 우뢰와 번개 길을 내시고 이슬방울과 얼음과 서리를 주관하신다. 그는 하늘의 별들과 별자리들을 홀로 창조하셨고 운영하신다. 그는 구름과 번개와 비를 주장하신다. 그는 사자와 까마귀 같은 모든 동물에게 먹을것을 주시고 생명을 유지하게 하신다. 그는 자연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창조자요 섭리자이신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과 위엄 앞에 두려운 마음으로 겸손히 엎드려 그를 경배하며 그의 위대하심과 그의 지혜와 능력과 자비하심을 찬송하고 잠잠히 그의 섭리하심에 순응하고 그의 모든 계명에 순종해야 한다. 우리는 감히 무지하게 하나님께 도전적이고 불평적인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엘리후가 지적했었고 이제 하나님께서 증거하시는 바와 같이, 만일 욥에게 그런 부족이 있었다면, 그는 그것을 뉘우쳐야 한다. 우리는 오직 전지 전능하신 창조자, 섭리자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모든 말씀을 믿고 순종해야 한다.
39장: 동물 세계가 하나님의 손 안에 있음
[1-2절] 산(山)염소가 새끼 치는[낳는] 때를 네가 아느냐? 암사슴의 새끼 낳을 기한을 네가 알 수 있느냐? 그것이 몇 달 만에 만삭(滿朔)되는지 아느냐? 그 낳을 때를 아느냐?
‘산염소’라는 원어(야알레-살라)는 ‘바위의 영양(羚羊)’이라는 뜻이다. 산염소나 바위의 영양 같은 짐승은 다른 동물이 접근하기 어려운 험준한 바위와 바위 사이 또는 동굴에 여러 마리씩 무리를 지어 생활한다고 한다. 욥은 그런 산염소나 산양, 암사슴 같은 짐승의 새끼 출산에 대해 잘 알지 못할 것이다.
[3-4절] 그것들은 몸을 구푸리고 새끼를 낳아 그 괴로움을 지내어 버리며[그 고통(산고 産苦)을 던져버리며] 그 새끼는 강하여져서 빈들에서 길리우다가 나가고는 다시 돌아오지 아니하느니라.
그런 짐승들은 몸을 구푸리고 새끼를 낳고 그 출산의 고통을 던져버리며 그 새끼들은 강해지고 들판에서 자라다가 어미를 떠나가고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암사슴 같은 짐승은 새끼를 낳은 후 1년 정도 키우지만, 그 후 어린 사슴은 어미를 떠나 독립해 나간다고 한다.
[5-8절] 누가 들나귀를 놓아 자유하게 하였느냐? 누가 빠른 나귀의 매인 것을 풀었느냐? 내가 들로 그 집을, 짠 땅으로 그 사는 처소를 삼았느니라. 들나귀는 성읍의 지꺼리는 것을 업신여기니 어거하는 자의 지르는 소리가 그것에게 들리지 아니하며 초장이 된 산으로 두루 다니며 여러 가지 푸른 것을 찾느니라.
들나귀는 집에서 기르는 나귀와 그 성질이 다르다. 들나귀는 들이나 척박한 벌판을 거처로 삼고 자유로이 산다. 그것은 성읍 사람들의 요란한 소리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사람들이 그것을 제어하려 소리를 질러도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또 그것은 여러 가지 먹을 만한 푸른 것을 찾아 산과 풀밭을 자유로이 두루 다닌다.
[9-12절] 들소가 어찌 즐겨 네게 복종하며 네 외양간에 머물겠느냐? 네가 능히 줄로 들소를 매어 이랑을 갈게 하겠느냐? 그것이 어찌 골짜기에서 너를 따라 쓰레[써레=논이나 밭의 흙을 고르게 하는 도구]를 끌겠느냐? 그것의 힘이 많다고 네가 그것을 의지하겠느냐? 네 수고하는 일을 그것에게 맡기겠느냐? 그것이 네 곡식을 집으로 실어 오며 네 타작 마당에 곡식 모으기를 그것에게 의탁하겠느냐?
집에서 키우는 소는 순하게 길들여져서 외양간에 매어두기도 하고 논이나 밭을 갈게도 하고 써레를 끌게도 하지만, 들소는 그렇지 않다. 들소는 사람에게 복종치 않기 때문에 외양간에 머물게 할 수도 없고 밭이나 논의 일을 위해 사용할 수도 없다. 비록 그것이 힘이 많아도, 욥은 그것을 의지하거나 그의 힘든 일들, 곡식을 집으로 실어 오는 일이나 타작마당에 곡식을 모으는 일 같은 일들을 맡길 수 없다.
[13-18절] 타조는 즐거이 그 날개를 친다마는 그 깃과 털이 인자를 베푸느냐?[타조들의 날개들은 사랑스런 날개와 깃털을 가지고 즐거이 퍼드덕거리도다](NASB). 그것이 알을 땅에 버려두어 모래에서 더워지게 하고 발에 깨어질 것이나 들짐승에게 밟힐 것을 생각지 아니하고 그 새끼에게 무정함이 제 새끼가 아닌 것처럼 하며 그 구로(劬勞)한 것이 헛되게 될지라도 괘념치[마음에 두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 내가 지혜를 품부하지[주지] 아니하고 총명을 주지 아니함이니라. 그러나 그 몸을 떨쳐 뛰어갈 때에는 말과 그 탄 자를 경히 여기느니라.
암타조는 여섯 개 내지 여덟 개의 알을 모래 위 오목한 곳에 낳고 40일 가량 버려두어 부화시키는데, 발에 깨어지거나 다른 들짐승에게 밟힐 것을 생각지 않고 마치 자기 새끼가 아닌 것처럼 그것에 대해 무정하고 그것이 깨어져도 마음을 쓰지 않는다고 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것에게 지혜와 총명을 주지 아니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조가 뛰어갈 때는 말 탄 자를 무시하듯이 잘 달린다. 경주마는 시속 약 72킬로미터로 달리지만, 타조는 보통 시속 64킬로미터, 최고 145킬로미터로까지 달릴 수 있다고 한다.
[19-22절] 말의 힘을 네가 주었느냐? 그 목에 흩날리는 갈기(목덜미에 난 긴 털)를 네가 입혔느냐? 네가 그것으로 메뚜기처럼 뛰게 하였느냐? 그 위엄스러운 콧소리가 두려우니라. 그것이 골짜기에서 허위고(카파르) [앞발로 치고] 힘있음을 기뻐하며 앞으로 나아가서 군사들을 맞되 두려움을 비웃고 놀라지 아니하며 칼을 당할지라도 물러나지 아니하니.
말은 힘이 좋은 짐승이다. 그 목에 흩날리는 갈기는 그 힘의 상징이다. 옛 시대에 말은 전쟁의 필수 도구이었다. 말은 또한 겁이 없는 짐승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자기를 위협해도 움츠리지 않는다. 그의 위엄스러운 콧소리는 두렵다. 말은 골짜기에서 앞발로 치며 달리고 자기 힘을 과시하고 앞으로 전진하며 적군들을 맞아 싸운다. 그것은 두려움을 비웃고 놀라지 않으며 칼을 만나도 물러나지 않는다.
[23-25절] 그 위에서는 전동(箭筒)(‘전통’이라고도 발음함)[화살통]과 빛난 작은 창과 큰 창이 쟁쟁하며 땅을 삼킬듯이 맹렬히 성내며 나팔소리를 들으면 머물러 서지 아니하고 나팔소리 나는 대로 소소히[쓸쓸히] 울며[나팔소리 가운데 ‘힝힝’ 하고 울며] 멀리서 싸움 냄새를 맡고 장관의 호령과 떠드는 소리를 듣느니라.
말은 그 위에서 화살통과 빛난 큰 창과 작은 창들이 쟁쟁하는 소리를 내며 땅을 삼킬 듯 맹렬히 성내고 나팔소리를 들어도 머물러 서지 않으며 나팔소리 가운데 ‘힝힝’[혹은 ‘하하’] 하고 울며 멀리서 싸움 냄새를 맡고 장관의 호령과 떠드는 소리를 듣는다.
[26-27절] 매가 떠올라서 날개를 펼쳐 남방으로 향하는 것이 어찌 네 지혜로 말미암음이냐? 독수리가 공중에 떠서 높은 곳에 보금자리를 만드는 것이 어찌 네 명령을 의지함이냐?
매는 작은 것은 25cm 정도이지만, 큰 것은 66cm 정도나 되며 날개를 펴면 날개폭이 119cm나 되는 것도 있으며, 독수리는 매보다 좀더 커서 크기가 보통 80-90cm가 되고 날개폭은 약 2m가 된다고 한다. 또 독수리는 부리가 약 5cm나 되고 끝이 2.5cm 정도 아래로 굽어져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지혜로 이런 새들을 만드셨고 섭리하신다.
[28-30절] 그것이 낭떠러지에 집을 지으며 뾰족한 바위 끝이나 험준한데 거하며 거기서 움킬 만한 것을 살피나니 그 눈이 멀리 봄이며 그 새끼들도 피를 빠나니 살륙 당한 자 있는 곳에는 그것도 거기 있느니라.
독수리는 높은 나무 위나 높은 산 절벽이나 바위 끝에 둥지를 만든다고 한다. 독수리와 매는 동물들 중에서 시력이 가장 좋은데, 매의 시력은 사람보다 약 8배나 더 좋아 하늘에서도 쥐를 선명하게 볼 수 있다고 한다. 또 그것들은 작은 동물들을 잡아먹으며 짐승의 시체도 먹는다. 예수께서는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가 있다고 말씀하셨다(마 24:28; 눅 17:37).
사람은 어떤 동물들에 대해 아는 것이 매우 적고 모르는 것이 많으나,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친히 만드셨고 그것들의 구조와 생리를 잘 아신다. 그는 다른 동물이 접근하기 어려운 험준한 바위들 사이나 동굴에 무리 지어 생활하는 산염소나 영양 종류나 암사슴을 만드셨고, 들이나 척박한 벌판을 거처로 삼고 자유로이 사는 들나귀와 들소도 만드셨다. 그는, 자기가 낳은 알에 대해 무정하지만 경주마보다 빠른 타조를 지으셨고 그 성질과 생리를 잘 아신다. 그는 힘있고 겁 없는 말도 만드셨다. 그는 낭떠러지에 집을 짓는 매와 독수리도 만드셨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들을 다 창조하셨고 섭리하신다. 본장에 언급한 여덟 가지 동물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만드셨고 그러므로 그는 그것들을 다 잘 아신다. 그러나 욥은 그 어느 하나도 잘 알지 못한다. 우리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욥과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 세상의 창조자이시며 주권적 섭리자이신 그 분 앞에서 우리 자신이 지식과 능력이 지극히 제한적이고 부족한 피조물이며 또한 심히 무지하고 죄악된 존재임을 깨닫아야 하고, 겸손히 엎드려 우리의 무지와 불경건, 죄와 더러움을 고백하고 주 예수님의 속죄를 믿고 하나님만 높이며 그의 모든 계명을 힘써 지켜야 한다. 또 우리는 결코 하나님과 변론하려 하지 말아야 한다.
40장: 네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1-5절] 여호와께서 또 욥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변박하는 자(잇소르)[비난하는 자](BDB, KB)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하나님과 변론하는 자는 대답할지니라.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미천하오니(칼라)[보잘것없사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내가 한두 번 말하였사온즉 다시는 더하지도 아니하겠고 대답지도 아니하겠나이다.
욥은 친구들과 변론하면서 하나님을 비난하는 듯한 말을 몇 번 했었다. 9:30-31, “내가 눈 녹은 물로 몸을 씻고 잿물로 손을 깨끗이 할지라도 주께서 나를 개천에 빠지게 하시리니 내 옷이라도 나를 싫어하리이다.” 13:26-27, “주께서 나를 대적하사 괴로운 일들을 기록하시며 나로 나의 어렸을 때에 지은 죄를 받게 하시오며 내 발을 착고에 채우시며.” 16:12-13, “내가 평안하더니 그가 나를 꺾으시며 내 목을 잡아 던져 나를 부숴뜨리시며 나를 세워 과녁을 삼으시고 그 살로 나를 사방으로 쏘아 인정 없이 내 허리를 뚫고 내 쓸개로 땅에 흘러나오게 하시는구나.” 27:2, “나의 의를 빼앗으신 하나님, 나의 영혼을 괴롭게 하신 전능자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욥을 책망하셨고, 욥은 대답하여 말하기를 “나는 보잘것없사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내가 한두 번 말하였사온즉 다시는 더하지도 아니하겠고 대답지도 아니하겠나이다”라고 하였다.
[6-9절] 여호와께서 폭풍 가운데서 욥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네가 내 심판을 폐하려느냐?(annul)(한글 국한문의 ‘피하려느냐’는 잘못임.) 스스로 의롭다 하려 하여 나를 불의하다 하느냐? 네가 하나님처럼 팔이 있느냐? 하나님처럼 우렁차게 울리는 소리를 내겠느냐?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판단과 섭리가 정당함을 엄위하게 증거하셨다. 하나님의 섭리는 가장 지혜롭고 의롭고 선하시다. 욥은 자기 의를 변호하려고 하나님을 정죄해서는 안 된다. 의로운 성도도 하나님 앞에서는 여전히 심히 부족하며 많은 단련이 필요한 존재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항상 정당하다. 또 성도의 고난은 언제나 유익하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합력하여 우리의 성화를 이루실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여러 가지 고난을 통해 인격적으로 성숙해진다. 그것은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는 말씀의 뜻이다. 고난은 우리의 지식과 인격의 성숙을 이룬다.
[10절] 너는 위엄과 존귀로 스스로 꾸미며 영광과 화미(華美)(하다르)[광채]를 스스로 입을지니라.
이것은 하나님께서 욥으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본질적 차이를 더 느끼고 그에게 복종케 하시려고 하신 표현이다. 하나님께서는 위엄과 존귀로 자신을 꾸미시고 영광과 광채를 스스로 입으셨지만(시 96: 6), 욥은 그렇게 자신을 꾸밀 수 없고 영광과 광채를 입지도 못한다. 위엄과 존귀와 영광과 광채는 하나님과 사람의 본질적 차이이다.
[11-14절] 너의 넘치는 노를 쏟아서 교만한 자를 발견하여[바라보며] 낱낱이 낮추되 곧 모든 교만한 자를 발견하여[바라보며] 낮추며 악인을 그 처소에서 밟아서 그들을 함께 진토에 묻고 그 얼굴을 싸서 어둑한 곳에 둘지니라. 그리하면 네 오른손이 너를 구원할 수 있다고 내가 인정하리라.
하나님께서는 넘치는 노를 쏟으셔서 모든 교만한 자들을 보시며 낱낱이 낮추시며 악인을 그 처소에서 밟아서 그들을 다 무덤 속에, 어둑캄캄한 곳에 묻히게 할 수 있으시지만(사 2:11, 12, 17), 사람인 욥은 교만한 자를 보고 낮출 힘이 없고 악인을 제압하거나 징벌하여 정당하게 그를 무덤에 들어가게 할 능력도 없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현실은 선을 권장하고 악을 징벌하는 도덕 질서가 세워지지 못하고 사람들이 고통과 탄식 속에 그런 상황을 관망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다. 불의와 불법이 있는 세상이다. 그러나 실상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절실히 요청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만일 네가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네 오른손이 너를 구원할 수 있다고 내가 인정하리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네가 그렇게 하지 못하니 내 앞에 순복하고 내가 너를 향해 섭리하는 일에 대해 잠잠하라”는 뜻이다. 사람은 하나님과 비교할 수 없는 존재이며 하나님의 섭리 앞에서 잠잠히 바라보아야 할 뿐인 자이다.
[15절] 이제 소같이 풀을 먹는 하마를 볼지어다. 내가 너를 지은 것같이 그것도 지었느니라.
하나님께서는 다시 큰 짐승인 하마를 들어 말씀하신다. ‘하마’라고 번역된 원어(베헤모스--KJV, NASB, NIV)는 옛날 학자들은 ‘코끼리’로 보았고 근래 학자들은 ‘하마(河馬)’라고 보았다(BDB, KB). 본문의 묘사는 그 둘에 어느 정도 다 맞는 것 같다. 하마와 코끼리는 육지에서는 풀을 먹지만, 물 속에서도 잘 활동하는 짐승이다.
[16-18절] 그 힘은 허리에 있고 그 세력은 배의 힘줄에 있고 그 꼬리 치는 것은 백향목이 흔들리는 것 같고 그 넓적다리 힘줄은 서로 연락되었으며 그 뼈는 놋관 같고 그 가릿대[갈빗대]는 철장 같으니.
하나님께서는 그 짐승의 힘이 허리에 있고 그 배의 힘줄에 있다고 말씀하신다. 또 그는 그것의 꼬리 치는 것이 백향목이 흔들리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신다. 하마의 꼬리는 보통 56센티미터이며 코끼리는 1미터라고 한다. 또 하나님께서는 그것의 넓적다리 힘줄이 서로 연락되었으며 그 뼈가 놋관 같고 그 갈빗대는 철장 같다고 말씀하신다. ‘갈빗대’라는 원어(게렘)도 ‘뼈’라는 뜻이라고 한다(BDB).
[19-24절]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물[행하신 일들] 중에 으뜸이라. [그러나] 그것을 지은 자가 칼[아마 송곳니]을 주었고 모든 들짐승의 노는 산은 그것을 위하여 식물을 내느니라. 그것이 연 줄기 아래나 갈밭 가운데나 못 속에(비차)[늪 속에] 엎드리니 연 그늘이 덮으며 시내 버들이 둘렀구나. 하수가 창일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놀라지 않고 요단강이 불어 그 입에 미칠지라도 자약하니(이브타크)[자신만만하니] 그것이 정신 차리고 있을 때에 누가 능히 잡을 수 있겠으며 갈고리로 그 코를 꿸 수 있겠느냐?
하나님께서는 그 짐승이 그가 만드신 것들 중에 으뜸이며 그것에게 칼 같은 송곳니를 주셨고 모든 들짐승의 노는 산이 그것을 위하여 식물을 내며, 그것이 연 줄기 아래나 갈밭 가운데나 늪 속에 엎드리니 연 그늘이 덮으며 시내 버들이 두르며, 강물이 넘칠지라도 그것이 놀라지 않고 요단강이 불어 그 입에 미칠지라도 자신만만하니 그것이 정신 차리고 있을 때 누가 능히 잡을 수 있겠으며 갈고리로 그 코를 꿸 수 있겠느냐고 말씀하신다. 하마는 몸무게가 보통 1톤(1,000kg) 이상이며, 가장 큰 것은 2.6톤이 되며, 코끼리는 보통 5톤이고 가장 큰 것은 6.6톤이 된다고 한다. 코끼리나 하마는 풀이나 땅의 식물을 먹고 강이나 늪에서 잘 지낸다. 그러나 하마는 요단강에 서식하지 않는다고 하니 본문의 묘사는 코끼리에 더 적합해 보인다.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사람은 지혜로우시고 능력이 많으신 주권적 섭리자 하나님과 변론하거나 그를 비난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비난하는 자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주제넘게 하나님과 변론하거나 그를 정죄해서는 안 된다.
둘째로, 우리는 우리에게 고난을 주신 하나님의 섭리의 이유를 알지 못하는 경우에라도 하나님 앞에서 잠잠해야 하고 하나님을 앙망하고 그를 의지하고 의탁하며 겸손히 복종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지극히 지혜로우시고 공의로우시고 선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모든 섭리도 그러하시며 그의 하시는 모든 일들이 선을 이룰 줄 알아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하마나 코끼리 같은 하나님의 놀라운 창조물을 보면서 하나님의 크신 지혜와 능력을 알고 또한 사람이 그렇게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도 알고 겸손히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한다.
41장: 온 천하의 것이 내 것이다
[1-2절] 네가 능히 낚시로 악어를 낚을 수 있겠느냐? 노끈으로 그 혀를 맬 수 있겠느냐? 줄로 그 코를 꿸 수 있겠느냐? 갈고리로 그 아가미를 꿸 수 있겠느냐?
본문에 ‘악어’라는 원어(리웨야산)는 고래나 악어 같은 ‘큰 바다짐승’을 가리킨다(BDB, KB). 영어성경들은 원어의 글자대로 리바이어선(leviathan)이라고 번역했다(KJV, NASB, NIV). 사람이 낚시로 악어나 고래를 낚거나 끈으로 그 혀를 매거나 줄로 그 코를 꿰거나 갈고리로 그 아가미를 꿰는 것은 다 불가능한 일이다.
[3-5절] 그것이 어찌 네게 연속 간구하겠느냐? 유순한 말로 네게 이야기하겠느냐? 어찌 너와 계약하고 영영히 네 종이 되겠느냐? 네가 어찌 새를 놀리는 것같이 그것을 놀리겠으며 네 소녀들을 위하여 그것을 매어 두겠느냐?
악어는 몸체의 길이가 보통 3-4미터 정도이며 몸체의 무게는 200 내지 250킬로그램 정도라고 한다. 악어의 화석은 예전에 15미터 정도의 악어도 있었음을 보인다. 청색 고래(blue whale)는 바다 짐승 중 가장 큰 짐승으로서 길이가 30미터 정도까지 자라고 무게는 200톤(2,000킬로그램) 이상이 된다고 한다. 어떻게 이런 큰 바다짐승들이 사람에게 무엇을 간구하며 유순한 말로 이야기할 수 있겠으며 사람과 계약을 맺고 영영히 사람의 종이 되겠는가? 사람이 어떻게 그것을 새를 놀리듯이 놀리며 어린 딸들을 위해 그것을 줄에 매어 두겠는가?
[6-9절] 어찌 어부의 떼가 그것으로 상품을 삼아 상고[상인]들 가운데 나눌 수 있겠느냐? 네가 능히 창으로 그 가죽을 찌르거나 작살로 그 머리를 찌를 수 있겠느냐? 손을 그것에게 좀 대어 보라. 싸울 일이 생각나서 다시는 아니하리라. 잡으려는 소망은 헛것이라. 그것을 보기만 하여도 낙담하지 않겠느냐?[엎드러지지 않겠느냐?]
어부들은 물고기를 잡듯이, 창이나 작살로 악어나 고래를 잡아 어(魚)시장에 내다 나누어 팔 수 있겠는가? 사람들은 그 짐승을 잡으려 손을 대어도 그것이 대들까봐 놀라 엎드러질 것이다. 그것을 잡으려는 소망은 헛될 것이다. 그것을 보기만 해도 엎드러질 것이다.
[10-11절] 아무도 그것을 격동시킬 용맹이 없거든 능히 나를 당할 자가 누구냐? 누가 먼저 내게 주고(NASB)(히크디마니)(혹은 ‘나보다 앞서 행하여’) 나로 갚게 하였느냐?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악어나 고래도 제어하고 이길 용맹이 있는 자가 없거든, 하물며 그런 짐승을 만드신 하나님을 당할 사람이 있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악어나 고래보다 더 크시고 능력이 많으신 자이시다. 그는 홀로 온 천하만물을 만드셨고 땅 위에나 하늘에나 바다 속에 있는 크고 작은 모든 생물들의 소유자요 주관자이시다. 사람은 그 하나님 앞에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마땅하겠는가?
[12-28절] 내가 악어의 지체와 큰 힘과 훌륭한 구조에 대하여 잠잠치 아니하리라. 누가 그 가죽을 벗기겠으며 그 아가미 사이로 들어가겠는고? 누가 그 얼굴의 문을 열 수 있을까? 그 두루 있는 이가 두렵구나. 견고한 비늘은 그의 자랑이라. 서로 연함이 봉한 것 같구나. 이것, 저것이 한데 붙었으니 바람도 그 사이로 들어가지 못하겠고 서로 연하여 붙었으니 능히 나눌 수도 없구나. 그것이 재채기를 한즉 광채가 발하고 그 눈은 새벽 눈꺼풀이 열림 같으며 그 입에서는 횃불이 나오고 불똥이 뛰어나며 그 콧구멍에서는 연기가 나오니 마치 솥이 끓는 것과 갈대의 타는 것 같구나. 그 숨이 능히 숯불을 피우니 불꽃이 그 입에서 나오며 힘이 그 목에 뭉키었고[있고] 두려움이 그 앞에서 뛰는구나. 그 살의 조각들이 서로 연하고 그 몸에 견고하여 움직이지 아니하며 그 마음이 돌같이 단단하니 그 단단함이 맷돌 아랫짝 같구나. 그것이 일어나면 용사라도 두려워하며 경겁하여 창황하며[당황하며] 칼로 칠지라도 쓸데없고 창이나 살이나 작살도 소용이 없구나.
하나님께서는 또 악어 혹은 고래의 구조와 움직임에 대해 말씀하신다. 그 두려운 이, 견고한 비늘, 그것의 재채기, 그 눈꺼풀, 그 입과 코의 숨결, 그 목의 힘, 그 견고한 살, 돌 같고 맷돌 아랫짝같이 단단한 그 마음을 언급하신다. 또 그는 그것이 일어나면 용사라도 두려워 당황하며 창이나 살이나 작살도 소용이 없다고 말씀하신다.
[27-30절] 그것이 철을 초개같이, 놋을 썩은 나무같이 여기니 살[화살]이라도 그것으로 도망하게 못하겠고 물매 돌도 그것에게는 겨같이 여기우는구나. 몽둥이도 검불같이 보고 창을 던짐을 우습게 여기며 그 배 아래는 날카로운 와륵[기와조각] 같으니 진흙 위에 타작 기계같이 자취를 내는구나.
그것은 철을 지푸라기같이, 놋을 썩은 나무같이 여기며 화살이나 물매 돌도 겨같이 여기고 몽동이도 검불같이 여긴다. 그 배 아래는 날카로운 가와조각 같아 진흙 위에 타작 기계같이 자취를 낸다.
[31-34절] 깊은 물로 솥의 물이 끓음 같게 하며 바다로 젖는 향기름 같게 하고 자기 뒤에 광채 나는 길을 내니 사람의 보기에 바닷물이 백발 같구나. 땅 위에는 그것 같은 것이 없나니 두려움 없게 지음을 받았음이라. 모든 높은 것을 낮게 보고(라아)[보고] 모든 교만한 것의 왕이 되느니라.
그것은 깊은 물을 끓는 솥의 물 같게 하고 바다로 젖는 향기름 같게 하고 자기 뒤에 광채 나는 길을 내므로 바닷물이 백발 같다. 그것은 모든 높은 것을 두려움 없이 보며 모든 교만한 것의 왕이 된다.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천하만물이 다 하나님의 것이다. 11절,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주 되심과 천하만물이 다 그의 것임을 바르게 알고 깨닫고 인정하자.
둘째로, 창조자 하나님께서는 악어나 고래보다 더 크시다. 10절, “아무도 그것을 격동시킬 용맹이 없거든 능히 나를 당할 자가 누구냐?” 창조자께서는 피조물보다 그 존재와 지혜와 위엄과 능력이 더 크시다. 그러므로 피조물인 우리는 창조자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 앞에서 겸손해야 하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높이며 그의 계명에 복종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까닭 없는 고난을 당할 때에라도 하나님께 불평하거나 대항하는 말을 하지 말고 하나님의 섭리에 겸손히 복종해야 한다.
42장: 욥의 회개와 회복
[1-3절]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주께서는 무소불능(無所不能)하시오며 무슨 경영[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여호와께서는 무슨 일이든지 하실 수 있는 전능자이시며 무엇을 계획하시고 이루시는 주권자이시다. 그러므로 전능하신 주권적 섭리자 하나님께 사람은 겸손히 복종해야 한다. 욥은 38:2에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그대로 되받아 3절에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라고 말했다. ‘이치’라는 원어(에차)는 ‘의논, 뜻’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가리킨다. 욥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그것에 대해 도전적인 말들을 했다. 이제 그는 그런 말들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을 받아들인다. 우리는 잘 모르는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에 대해 무례한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4-6절]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여,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恨)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욥은 과거에 선조들이나 다른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에 대해 귀로 듣기만 하였으나 이제 하나님을 눈으로 뵈옵는다고 고백한다. 욥이 하나님을 눈으로 뵈옵는다고 표현한 것은 하나님의 친 음성을 듣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회개한다. 그는 의로운 자이었지만 고난 중에 하나님의 섭리에 전적으로 순복하지 못하고 몇 번 도전적인 말을 하였다. 이제 그는 자신의 그 무례한 말까지 회개하는 것이다. 욥은 그가 당한 고난과 그의 부족을 통해 보다 더 성숙한 인격으로 자라고 있었다.
[7절]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욥의 세 친구들에게 노하셨다. 그 까닭은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말이 욥의 말처럼 정당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욥의 세 친구들은 욥의 고난이 그와 그의 자녀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줄곧 말했었다. 그것은 정당한 이유 없이 욥을 정죄한 것이며 하나님 앞에 큰 죄이었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노하신 것이다. 또 다른 인물인 엘리후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노하지 않으신 것 같다.
[8절] 그런즉 너희는 수송아지 일곱과 수양[숫양] 일곱을 취하여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너희의 우매한 대로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리라.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
번제 같은 제사는 아벨 때로부터 있었다. ‘번제’는 속죄와 헌신을 상징하는 제사이었다. 욥에게 잘못된 정죄의 말을 했던 친구들은 욥에게 가서 그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자신들을 위해 번제를 드려야 했다. 사람에게 잘못한 것은 그 사람에게 가서 푸는 것이 옳다.
[9절] 이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 가서 여호와께서 자기들에게 명하신 대로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욥을 기쁘게 받으셨더라.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은 가서 여호와께서 자기들에게 명하신 대로 행했다.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었으나, 사람의 고난이 하나님의 징벌 때문에 온다고만 알고 있었고 욥을 그릇되이 정죄하였었다. 하나님께서는 욥이 드린 번제를 받으셨고 그들의 잘못을 용서하셨고 그 중심을 받으셨다.
[10절] 욥이 그 벗들을 위하여 빌매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욥에게 그전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
욥이 그 친구들을 위해 빌매 여호와께서는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그에게 이전의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셨다. 자신을 비방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선한 일이다. 욥이 그 친구들을 위해 빌 때 하나님께서는 욥의 곤경을 돌이키셨다. 그는 욥에게 이전 소유보다 갑절을 주셨다. 물질의 복도 하나님의 복이다(창 26:12-13).
[11절] 이에 그의 모든 형제와 자매와 및 전에 알던 자들이 다 와서 그 집에서 그와 함께 식물을 먹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내리신 모든 재앙에 대하여 그를 위하여 슬퍼하며 위로하고 각각 금 한 조각과 금고리 하나씩 주었더라.
욥이 회복되자, 그의 모든 형제와 자매들과 또 전에 알던 자들이 다 와서 그 집에서 그와 함께 음식을 먹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내리신 모든 재앙에 대하여 그를 위해 슬퍼하며 위로하고 각각 금 한 조각14)과 금고리 하나씩 주었다. 그것은 욥에게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12-15절] 여호와께서 욥의 모년(暮年)[노년]에 복을 주사 처음 복보다 더 하게 하시니 그가 양 1만 4천과 약대 6천과 소 1천 겨리와 암나귀 1천을 두었고 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낳았으며 그가 첫째 딸은 여미마라 이름하였고 둘째 딸은 긋시아라 이름하였고 세째[셋째] 딸은 게렌합북이라 이름하였으며 전국 중에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가 없었더라. 그 아비가 그들에게 그 오라비처럼 산업을 주었더라.
여호와께서는 욥의 노년에 복을 주셔서 처음 복보다 더하게 하셨다. 그는 양 14,000마리와 약대 6,000마리와 소 1,000겨리[2,000마리]와 암나귀 1,000마리를 두었다. 그의 재산은 처음 재산의 배갑절이었다. 또 그는 처음의 수만큼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낳았고 그의 세 딸들은 전국 중에 가장 아름다웠다. 사람의 외적인 아름다움도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다. 욥은 그들에게 그 오라비들에게처럼 기업을 주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욥에게 물질적인 복과 가정적인 복을 주셨다.
[16-17절] 그 후에 욥이 140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4대를 보았고 나이 늙고 기한이 차서 죽었더라.
그 후에 욥은 140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4대를 보았고 나이 늙고 기한이 차서 죽었다. 욥은 장수하였다. 그가 30세쯤 결혼하였고 두 번이나 자녀를 10명 낳는데 적어도 30년쯤 지났다고 가정한다면, 욥은 200세 이상을 산 것이다. 구약의 헬라어 70인역(LXX)은 욥이 170년을 더 살았고 그의 연령이 240세이었다고 기록하였다. 그의 연령을 보면, 욥은 아브라함과 이삭 때의 인물이라고 보인다. 아브라함은 175세, 이삭은 180세를 살았었다.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지식과 능력이 유한한 피조물인 우리는 전능하신 창조자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유를 알지 못하는 고난 중에도 무례하게 하나님께 불평하거나 대항하지 말고 오직 겸손히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그의 하시는 일을 참고 기다려야 한다. 이것이 욥기의 결론적 교훈이며 중심 진리이다.
둘째로, 우리는 욥의 친구들처럼 고난당하는 이웃에 대해 쉽게 정죄하지 말아야 한다. 모든 고난이 특정한 죄의 징벌이 아니기 때문이다.
셋째로, 우리는 우리에게 잘못을 행한 사람이 와서 사과하면 용서해야 하며 그를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주께서는 용서를 비는 이웃에게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교훈하셨다(마 18:22).
넷째로, 하나님의 본심은 고난을 주시는 것이 아니고 평안을 주시는 것이다. 예레미야 애가 3:33,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경외하며 의롭게, 흠과 점이 없이, 온전하게 사는 자들에게 평안과 회복과 영생을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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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
1) Matthew Poole, Albert Barnes, A. R. Fausset 등. 탈무드는 모세로 봄(Baba Bathra 14b).
2) Luther, Keil & Delitzsch, E. J. Young, M. F. Unger, G. L. Archer 등.
3) Matthew Poole, A Commentary on the Holy Bible, I, 921.
4) 욥의 자녀들은 10명이었고 자녀들이 어느 정도 컸다고 보면(1:2) 30세쯤 결혼하여 약 30-40년이 지났다고 볼 수 있으며, 고난 후 140년을 더 살았으니(42:16) 200세는 넘었을 것이다. 헬라어 70인역 본문은 “170년을 더 살았으며 그의 연령이 240세이었더라”고 되어 있다.
5) 구약성경에는 엘로힘이 2570회, 여호와가 약 6823회 사용되었다(BDB).
6) Lancelot Brenton, The Septuagint Version: Greek and English, p. 698.
7) 헬라어 70인역 후기(後記)는, 우스 땅이 에돔과 아라비아 국경 Ausis땅이며, 욥은 에서의 아들 자레의 아들, 즉 아브라함의 5대손이었다고 말한다.
8) 왕상 15:3, 5, 14; 16:7; 왕하 3:2; 8:18, 27; 10:30; 12:2; 13:2, 11; 14:3, 24; 15:18, 24, 28; 16:2; 17:2; 18:3; 21:2; 22:2; 23:32, 37; 24:9, 19; 대하 14:2; 24:2; 25:2; 26:4; 27:2; 28:1; 29:2; 33:2; 34:2; 36:5, 12.
9) 근래의 영어성경들(NASB, NIV)은 한글개역성경처럼 “그를 호출하겠느냐?”고 번역하였다. 이것은 문맥을 따라 원문을 고쳐 읽은 것이라고 본다.
10) 마소라 본문의 읽기이다(ASV는 한글개역처럼 번역함). 그러나 LXX, Syr, Targ, Vg, KJV, NASB, NIV 등은 부정어 로를 인칭대명사 로로 읽으며, “비록 그가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를 의뢰하리라”고 번역한다.
11) 원어의 뜻은 분명치 않은 것 같다(BDB, KB). 그러나 사전들이 제안하는 뜻은 ‘소득’(BDB), ‘재산’(Langenscheidt, Holladay)(NIV) 등이다.
12) 학자들이 원문의 야쇼르를 쉬르 (노래하다)에서 나온 야쉬르로 고쳐서 읽으려 하지만(BDB, KB, NASB), 본문 그대로 두고 슈르 (보다)(KJV)에서 나온 것으로 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된다.
13) ‘징책’이라는 원어(세페크)는 어떤 사전은 ‘조롱,’ ‘징책,’ ‘풍부’라는 뜻을 제시하고(BDB), 다른 사전은 뜻을 제시하지 않았다(KB). 영어성경들은 다양하게 번역한다. KJV--“분노가 있기 때문에 그가 너를 쳐서 데려가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게 되면 큰 대속물도 너를 구할 수 없으리라.” ASV--“분노가 일어나 네가 징책을 대적하게 하지 않게 하고 대속물의 큼이 너로 곁길로 가지 못하게 하라.” NIV--“아무도 부요로 너를 유혹하지 못하도록 하라. 큰 뇌물이 너로 곁길로 가지 못하게 하라.”
14) ‘금 한 조각’이라는 원어(케시타 에카스)는 단순히 ‘한 개’라는 말로서, ‘개’라는 원어(케시타)(창 33:19과 수 24:32에도 쓰임)는 그 정확한 무게를 알지 못하는 단위라고 한다(BDB, NB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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