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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Psalms) 제1권 1편 복 있는 사람-20편 환난 날에 도우시기를 기원함

영국신사77 2020. 4. 15. 09:29

시편강해

김효성 목사

2019년 7월 5일


머리말

주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 바울의 증거대로(마 5:18; 요 10:35; 갈 3:16; 딤후 3:16),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라는 고백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매우 기본적이고 중요하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진술대로(1:8), 우리는 성경의 원본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고 그 본문이 “그의 독특한 배려와 섭리로 모든 시대에 순수하게 보존되었다”고 믿는다. 이것은 교회의 전통적 견해이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은 야곱 벤 카임이 편집한 제2 랍비 성경(봄버그판)을 표준적 마소라 본문으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성경은 성도 개인의 신앙생활뿐 아니라, 교회의 모든 활동들에도 유일한 규범이다. 오늘날처럼 다양한 풍조와 운동이 많은 영적 혼란의 시대에,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가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묵상하기를 원하며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든 뜻을 알기를 원한다.

성경을 가지고 설교할지라도 그것을 바르게 해석하고 적용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올 것이다(암 8:11).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오고 있다. 많은 설교와 성경강해가 있지만, 순수한 기독교 신앙 지식과 입장은 더 흐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요구되는 성경 해석과 강해는 복잡하고 화려한 말잔치보다 성경 본문의 바른 뜻을 간단 명료하게 해석하고 적절히 적용하는 것일 것이다. 사실상, 우리는 성경책 한 권으로 충분하다. 성경주석이나 강해는 성경 본문의 바른 이해를 위한 작은 참고서에 불과하다. 성도는 각자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성경을 읽어야 하고, 성경주석과 강해는 오직 참고서로만 사용해야 할 것이다.


제목차례

1편: 복 있는 사람

2편: 아들에게 입맞추라

3편: 곤경 중에 부르짖음

4편: 하나님께서 주신 기쁨과 평안

5편: 하나님께서는 죄악을 기뻐하지 않으심

6편: 눈물의 탄식을 들으심

7편: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재판장이심

8편: 사람을 존귀케 하심

9편: 공의로 심판하심

10편: 악인에 대한 심판을 호소함

11편: 하나님께서 인생을 감찰하심

12편: 거짓된 세상에서 지키심

13편: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림

14편: 어리석고 부패된 인생

15편: 하나님의 장막에 거할 자

16편: 하나님은 나의 기업

17편: 정직한 부르짖음

18편: 나의 힘과 구원이신 하나님

19편: 하나님의 말씀

20편: 환난 날에 도우시기를 기원함

21편: 하나님의 능력의 도우심을 기뻐함

22편: 메시아의 고난

23편: 하나님께서는나의 목자

24편: 영광의 왕이신 하나님

25편: 하나님을 경외하며 바람

26편: 완전함에 행하며 하나님께아룀

27편: 하나님을 담대히 의지함

28편: 부르짖어기도함

29편: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찬송함

30편: 죽음의위기에서 건지심을 찬송함

31편: 고통중에 담대히 기도하여 응답받음

32편: 회개와 죄사함의 복

33편: 도우시는 하나님을 찬송함

34편: 구원의 하나님을 찬송함

35편: 나와 다투는 자와 다투소서

36편: 의인들에게 인자하심을 베푸심

37편: 악인과 의인의 보응

38편: 병중에서 주의 도움을 구함

39편: 병중에서 인생의 헛됨을 깨달음

40편: 하나님의 도움을 기다리고 기다림

41편: 빈약한 자를 돌보는 자가 복됨

42편: 낙망 중에 하나님을 바람

43편: 낙망 중에 하나님을 바람

44편: 고난 중에 주의 구원을 구함

45편: 왕의 영광

46편: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피난처이심

47편: 온 땅의 왕이신 하나님을 찬양함

48편: 시온에서 하나님을 찬송함

49편: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음

50편: 성도의특권

51편: 회개의 기도

52편: 악인의 영원한 멸망

53편: 어리석은 자

54편: 하나님께서는 나를 돕는 자이심

55편: 핍박하는 악인들을 멸하심

56편: 하나님을 의지하고 찬송함

57편: 원수의비난에서 건지심을 찬송함

58편: 하나님께서 악인의 악을 갚으심

59편: 나의 산성이신 하나님을 찬송함

60편: 하나님의 구원과 도움을 구함

61편: 하나님의 보호를 간구함

62편: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

63편: 나를 도우신 하나님을 찬송함

64편: 원수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65편: 세상을돌보시는 하나님을 찬송함

66편: 하나님의 행하신 일을 찬송함

67편: 민족들로 주를 찬송케 하소서

68편: 원수를 파하시는 하나님을 찬송함

69편: 고난 중에 구원을 간구함

70편: 속히 나를 도우소서

71편: 노인이 주의 의의 구원을 간구함

72편: 바른 판단력을 구함

73편: 악인의 종말과 참 성도의 복

74편: 원수들로부터의 구원을 호소함

75편: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악인들을 꺾으심

76편: 전쟁을 파하신 하나님을 높임

77편: 환난날에 옛적 기사들을 기억함

78편: 거역하는 백성을 긍휼히 여기심

79편: 황폐한 성을구원하소서

80편: 우리를 돌이키소서

81편: 불순종하는백성에게 순종을 원하심

82편: 불의한 재판들과 하나님의 판단

83편: 연합군을멸하시기를 구함

84편: 하나님의 집을 사모함

85편: 하나님의구원을 기도하며 기대함

86편: 곤고함 중에 도움을 구함

87편: 하나님께서 시온을 사랑하심

88편: 곤란 중에 부르짖음

89편: 주의 인자와 신실을 간구함

90편: 하나님의 영원하심과 인생의 덧없음

91편: 하나님의 보호와 도우심을 얻음

92편: 하나님의 인자와 성실을 찬양함

93편: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통치하심

94편: 악인들에게 형벌을 내리실 것임

95편: 하나님께 노래하며 순종하자

96편: 하나님께 노래하며 합당하게 경배하자

97편: 하나님의 통치를 기뻐함

98편: 구원과 심판의 하나님을 찬양함

99편: 거룩하신 하나님을 높이며 경배함

100편: 창조자와 목자이신 하나님께 감사 찬송함

101편: 완전한 길에 주목함

102편: 곤고한 자를 긍휼히 여기소서

103편: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찬송함

104편: 창조와 섭리의 일들을 찬송함

105편: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을 찬양함

106편: 이스라엘의 거역함과 하나님의 인자하심

107편: 하나님의 인자하신 일들을 찬양함

108편: 하나님을 찬송하며 구원을 간구함

109편: 보응의 확신과 구원의 간구

110편: 메시아 시대

111편: 하나님의 의로운 행사를 찬송함

112편: 올바른 자가 복됨

113편: 영원히, 온 세상에서 하나님을 찬양함

114편: 출애굽시대

115편: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을 의지함

116편: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사랑함

117편: 모든 나라들아, 하나님을 찬양하라

118편: 건축자들의 버린 돌을 모퉁잇돌로 삼으심

119편: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함

120편: 거짓과 불화로부터 건지소서

121편: 하나님께서 지키시리라

122편: 예루살렘을 사랑하며 축복함

123편: 멸시 중에 하나님의 긍휼을 구함

124편: 우리편에서 우리를 도우심

125편: 하나님을 믿는 자는 요동치 않음

126편: 사로잡힘을 돌이키심

127편: 하나님께서 집을 세우심

128편: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복

129편: 시온을 미워하는 자

130편: 긍휼의 구원을 기다림

131편: 큰일을 힘쓰지 않음

132편: 하나님의 성막을 사모함

133편: 형제가 동거함이 아름다움

134편: 밤에 성소에서 하나님을 송축함

135편: 살아계신 주권자 하나님을 찬송함

136편: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감사함

137편: 시온을 가장 사랑함

138편: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올림

139편: 하나님의 전지하심

140편: 악인에게서 건지소서

141편: 악인의 올무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142편: 핍박하는 자에게서 건지소서

143편: 원수의 극심한 핍박에서 건지소서

144편: 구원의 하나님을 찬송함

145편: 하나님께서는 광대하시고 은혜로우심

146편: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는 자가 복됨

147편: 이스라엘을 복주신 하나님을 찬양함

148편: 모든 피조물들아, 하나님을 찬양하라

149편: 하나님의 백성아, 하나님을 찬양하라

150편: 각종 악기로 하나님을 찬양하라


서론

시편의 히브리어 명칭은 테힐림 (찬송들)이다. 시편은 성도들의 찬송과 기도의 책이다. 시편은 하나님의 진리의 보고(寶庫)이다. 이 책 속에는 하나님의 진리의 여러 주제가 풍성히 계시되어 있다. 시편은 모든 시대의 성도들에게 많은 교훈과 큰 위로가 된다.

시편의 저자는 여럿이다. 표제어에 의하면, 하나는 모세의 것(시 90편), 73개는 다윗의 것(대부분 1권과 3권에), 12개는 아삽의 것(시 50, 73-83편), 10개는 고라의 후손의 것(42, 44-49, 84, 97-88편), 한두 개는 솔로몬의 것(72, 127편), 한 개는 에스라인 헤만의 것(88편), 한 개가 에스라인 에단의 것(89편) 등이다.

시편의 저작 연대에 관해, 시편 중 가장 오래된 것은 모세의 것으로 주전 1405년경이며, 다윗의 것들은 주전 1020부터 975년 사이에 쓰였을 것이며, 아삽의 시들도 동시대의 것일 것이다. 고라의 후손들의 것과 두 에스라인의 것의 연대는 추정하기 어려우나 포로 이전의 것 같다. 포로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것들도 있다(126, 137편).

19세기의 비평학자들은 시편의 대부분을 바벨론 포로 후기의 것이며, 많은 것들이 마카비 시대의 작품이라고 주장했고, 또 욥기, 잠언, 전도서, 아가서 등도 명백히 포로 후기의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20세기에 와서 악카드와 애굽의 시들이 주전 2천년대에 비슷한 장르를 사용하고 있음이 밝혀졌고 최근에는 히브리어에 아주 가까운 가나안어로 된 우가릿 시가 주전 15세기의 것으로 드러남으로써 성경의 진실성을 더욱 지지하게 되었다.1) 마카비 1서 7:17은 시편 79:3을 성경으로 인용하고 있다. 마카비 시대에 이미 히브리 성경에 시편이 있었다.2)

히브리시의 대표적 특징은 평행법이다.3) 예컨대, (1) 동의적 평행법(시 24:1; 19:2), (2) 반의적 평행법(시 1:6), (3) 종합적 평행법(잠 15:17). 또 고대 히브리시에는 운율이 없다. 델리취, “고대 히브리시는 라임(끝 글자를 맞추는 것)과 운율(meter)을 가지고 있지 않다. 주후 7세기가 지나기까지 유대의 시는 그 둘 중 어느 것도 채택하지 않았다.”4)

시편의 표제어는 성경 본문은 아니지만 믿을 만하다고 본다. 그 중에, 시의 유형들을 말하는 용어들은 다음과 같다.

미즈모르 --현악 반주로 부르는 시(48, 65-68편 등 57개).

쉬르 --성악을 위한 시(48, 65-68, 75-76, 83편 등 27개)

마스길 --명상시 혹은 교훈시(32, 42, 44, 45편 등 13개)

믹담 --명심할 내용이라는 뜻 같음(16, 56-60편 등 6개).

테필라 --기도의 시(5개).

테힐라 --찬양의 시(5개).

식가욘 --정확한 뜻은 모르나 변칙적인 시라는 뜻 같음(시편 7편만).

음악적 용어들은 다음과 같다.

라메낫체아크(‘영장[伶長]으로’)--성전의 찬양대 지휘자를 위해 선정된 시들(4-6, 8-9, 11-14, 18-22, 31, 36, 39-42, 44-47, 49, 51-62, 64-70, 75-77, 80-81, 84-85, 109, 140편 등 55개).

네기놋 --현악기에 맞추어 부른 시(4, 6, 55, 61, 67, 76편).

네킬롯 --관악기에 맞추어 부른 시(5편).

쉐미닛 --여덟 줄의 현악기나 혹은 한 옥타브 낮추는 것을 의미한 듯함(6, 12편).

알라못 --높은 음을 가리키는 것 같음.

마칼랏 --슬프게 부르는 것을 가리키는 듯(53, 88편).

곡을 나타내는 용어들은 다음과 같다.

알 무스 압벤 --‘아들의 죽음이라는 곡으로’라는 뜻(9편)

알 아옐렛 하솨카르 --‘아침의 암사슴이라는 곡으로’라는 뜻(22편)

알 쇼솬님, 슈솬 --‘백합 혹은 백합들에 맞추어’라는 뜻(69편)

알 타쉬케스 --‘파괴하지 말라는 곡으로’라는 뜻(57, 58, 59, 75편)

알 요낫 엘렘 레코킴 --‘침묵의 비둘기라는 곡으로’라는 뜻(56편)

알 학깃티스 --‘깃팃 사람의 악기로’(탈굼), 혹은 ‘깃팃 풍의 곡으로’라는 뜻일 것(8, 81, 84편)

39개 시편들 중 71번 나오는 셀라 라는 말은--(1) ‘쉬라’는 뜻으로 시 낭송자가 이 지점에서 쉬고 악기가 연주되도록 하라는 표시이든지, 아니면 (2) ‘목소리를 높이라’는 뜻인 것 같다.

시편은 5권으로 나뉘어 있다. 제1권(1-41편)은 인간의 행복, 타락, 및 회복에 대한 내용이고, 제2권(42-72편)은 이스라엘의 파멸과 구속에 대한 내용이고, 제3권(73-89편)은 성전 중심의 생활에 대한 내용이고, 제4권(90-106편)은 광야 생활에 대한 내용이고, 제5권(107- 150편)은 말씀 중심의 생활에 대한 것이라고 대략적으로 정리해볼 수 있다. 제1권은 다윗이나 그의 지도 아래 편집된 것 같고, 제2권과 제3권은 히스기야나 요시야 때에 편집된 것 같고, 제4권과 제5권은 에스라나 느헤미야 때에 편집된 것 같다(아춰, 511-12쪽). 옛부터 성경연구가들은 시편의 5권을 모세의 오경에 각각 맞추어 보려 했다.


시편의 특징적 주제는 찬송과 기도이다. 

시편을 내용적으로 분류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찬송과 감사와 간증--1, 8, 33, 50, 57, 95, 147-150편 등.

2. 죄의 고백과 용서를 구함--32, 51편 등.

3. 구원을 간구함: (1) 원수의 핍박으로부터--3, 6, 10, 12편 등.

(2) 질병으로부터--38, 39편 등.

(3) 국가적 재난으로부터--74, 80편 등.

* 저주시(Imprecatory Psalms)--하나님께서 공의를 세우시기를 간청함.

4. 메시아 예언들: (1) 고난의 메시아--22, 40편.

(2) 승리의 메시아--2, 47, 67, 96-100, 110, 117편 등.

(3) 기타--8, 16, 41, 45, 68, 69, 72, 102, 109, 118편 등.

본문 혹은 각주에 자주 사용된 약어

KJV

영어 King James Version.

NASB

영어 New American Standard Version.

NIV

영어 New International Version.

LXX

고대 헬라어 70인역.

Syr

고대 수리아어역.

It

고대 라틴어역.

Vg

고대 라틴어 Vulgate역.

BDB

Brown-Driver-Briggs, Hebrew Lexicon of the O. T.

KB

Koehler-Baumgartner, Lexicon in Veteris Testamenti Libros.

Langenscheidt

Langenscheidt Pocket Hebrew Dictionary.

NBD

The New Bible Dictionary. IVP.

Poole

Matthew Poole, A Commentary on the Holy Bible

JFB

Jamieson, Faussett, Brown의 주석.


1편: 복 있는 사람

[1-2절]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복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첫째로, 복 있는 사람은, 불경건하고 악한 자들을 멀리하는 사람이다. 그는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는 자’로 묘사된다. 악인과 죄인과 오만한 자는 거의 동의어이다. 죄인은 악하고 오만하다. 꾀는 생각을 가리키고, 길은 행위를 가리키고, 자리는 교제를 가리킨다. 사람은 누구나 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악인과 어울리면 악의 영향과 본을 받기 쉽다. 그러므로 성도는 악한 자들을 멀리해야 한다. 잠언 13:20은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고 말했다.

둘째로, 복 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을 가까이 하는 사람이다. ‘여호와의 율법’은 모세오경을 가리키든지, 구약성경 전체를 가리킨다. 모세오경의 율법도, 구약성경 전체도 세 가지를 가르쳐준다. 첫째는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이며, 둘째는 구주에 관한 것이며, 셋째는 의롭고 선한 삶에 관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 책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고 의롭고 선한 삶을 살게 된다.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한다는 것은 성경말씀을 규칙적이게 읽고 그 뜻을 항상 음미하는 것을 말한다.

[3절]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본문은 복된 자, 즉 악인을 멀리하고 성경말씀을 가까이 하는 자를 시냇가에 심은 나무에 비유한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나무들 중에 가장 복된 나무이다. 나무에게 필수적인 물이 풍부하기 때문에 나무로서 걱정거리가 없다. 이 물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과 함께 또 그 말씀 속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의 감동과 활동을 상징한다고 본다.

이 나무는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는다. 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나무로서 제구실을 못하는 것이다. 사과나무는 사과를 많이 열어야 하고 포도나무는 포도를 많이 맺어야 한다. 예수께서도 포도나무의 비유에서 우리가 많은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할 것을 교훈하셨다(요 15장). 열매는 성도의 좋은 인격과 선한 행실을 가리킨다.

시냇가에 심긴 나무는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않는다. 땅에는 때때로 가뭄이 있다. 땅이 가물면 나무 잎사귀가 마르게 되며 심하면 나무가 죽을 수도 있다. 그러나 시냇가에 뿌리를 박은 나무는 물 부족이 없고 시드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 시냇가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감동의 시냇가이며 그것은 결코 마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는 결코 영적 침체가 없다.

또 이렇게 경건한 사람이 계획하고 행하는 일은 다 형통할 것이다. 이것은 이미 레위기 26장과 신명기 28장에 교훈된 바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영육으로 복을 누릴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경건하고 죄짓는 일을 두려워한 요셉과 함께하셨고 범사에 그를 형통케 하셨다(창 39:2-3, 23). 또 그는 하나님과 연합하여 그의 계명을 지킨 히스기야와 함께하셨고 그를 형통케 하셨다(왕하18:6-7).

[4-5절]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본문은 악인 즉 불경건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는 자가 복된 자와 전혀 다르다고 말한다. 즉 악인은 선한 열매를 맺지도 못하고 가뭄을 타고 범사에 형통하지도 못하다는 뜻이다.

이 뿐만 아니라, 본문은 악인이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고 말한다. 이 바람은 세상의 풍조나 환난의 바람 등을 가리킬 것이다. 악인은 세상의 풍조를 따라 이리저리 방황하고 또 환난의 때에 매우 당황할 것이다. 그러나, 의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세상 풍조와 환난 앞에서 든든히 설 수 있다. 잠언 10:25, “회리바람이 지나가면 악인은 없어져도 의인은 영원한 기초 같으니라.” 시편 125:1,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는 시온산이 요동치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

본문은 또 악인이 하나님의 심판을 견디지 못한다고 말한다. 평안한 때에는 악인과 의인이 별차이가 없어보일지도 모른다. 평시에는 악인도 번창하고 형통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일단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면, 악인은 그 앞에 서지 못하고 그 심판을 감당치 못할 것이다. 잠언 24:16의 말씀대로, 의인들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지만, 악인들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진다.

본문은 또 악인 곧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한다고 말한다. 악인은 죽음과 저주 아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복과 영생을 가진 의인들의 회중인 참 교회에 들지 못한다. 악인은 참 교회의 회원이 될 수 없고 장차 영광의 천국에도 들어갈 수 없다. 왜냐하면 주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람은 오직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요 3:5). 의인과 악인은 본질상 차이가 있다. 그것은 생명과 죽음, 천국과 지옥의 차이이다.

[6절]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의인의 길을 알고 계신다. ‘인정한다’는 원어(요데아, 현재분사)는 ‘알고 있다’는 뜻이다. 길은 행위와 삶을 가리킨다. 의인의 삶은 불경건과 악을 버리고 그것들을 미워하고 불경건하고 부도덕한 자를 멀리하고 그 대신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항상 묵상하고 그 말씀을 믿고 그 말씀대로 사는 삶이다.

하나님께서는 의인의 길을 알고 계신다. 그는 의인의 행위와 삶을 처음부터 아시고 또 그의 마음도 다 아신다(시 139:1-4; 히 4:12-13). 그는 단지 그것을 지식적으로 아시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인정하시고 의인을 사랑하시고 그에게 영생의 복을 주신다. 다윗은 시편 16:11에서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악인의 길은 망할 것이다. 악인의 삶은 하나님을 모르고 그를 두려워하지 않고 그의 뜻을 거슬러 불의와 악을 행하는 삶이다. 그것은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의 삶이다. 그것은 이 세상의 유행과 여론과 풍습과 가치관을 따라 사는 삶이다.

악인의 길은 망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심판이다. 그 육신은 늙고 병들고 쇠약하여 마침내 죽을 것이다. 그들이 쌓은 부와 재물은 허무하여 독수리처럼 날아가기도 하고(잠 23:5) 그렇지 않으면 결국 남에게로 돌아갈 것이다(눅 12:20). 악한 일을 행한 자들은 심판의 부활로 나올 것이다(요 5:29). 그 영혼들은 지옥에 던지울 것이며 마지막 날 부활하여 영원한 지옥 불못에 던지울 것이다.

이와 같이, 의인과 악인의 길은 확실히 다르다. 그 둘의 생활방식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고 생활목표가 다르고 그 결말이 다르다.

시편 1편은 시편의 서론과 같고 또 결론과도 같다. 그 주제는 복 있는 자이다. 복 있는 자는 악한 자를 멀리하고 성경말씀을 가까이하는 자이다. 우리는 악을 멀리하고 불경건하고 악한 자들과 친근히 하지 말고, 오직 성경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며 그 의로운 교훈대로 살기를 힘쓰자.

복 있는 자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이 계절을 따라 좋은 열매들을 맺고 그 잎이 마르지 않고 그 하는 일들이 다 형통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인이 되지 말고 의인이 되고 의인의 길을 걷자. 우리는 모든 죄악된 일을 멀리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의만 믿고 의지하고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말씀의 교훈대로 순종하여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만 살자. 그것이 복 있는 자의 삶이다.

2편: 아들에게 입맞추라

시편 2편은 메시아 예언시이다.

[1-3절]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버리자 하도다.

‘분노한다’는 원어(라가쉬)는 ‘소란하다, 격분하다’는 뜻이다. 이 세상의 왕들과 관원들은 서로 꾀하여 여호와 하나님과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을 대적하며 하나님의 통치를 속박으로 여기며 그에게서 벗어나기를 원하였다. 악인들은 당을 지어 악을 행하며(롬 2:8)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을 잘하지만, 그들의 모든 계획은 헛될 것이다.

이 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그대로 이루어졌다. 유대의 종교지도자들과 헤롯 왕과 로마 총독 빌라도는 함께 연합하여 하나님의 보내신 메시아를 십자가에 죽게 하였다. 사도 베드로는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라고 말하였다(행 4:27-28). 악한 자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부정하고 그의 보내신 메시아를 대항하였지만, 그들의 계획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4-6절]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 그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저희를 놀래어 이르시기를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 온 땅과 거기 있는 왕들을 통치하시며 심판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그를 대적하는 자들을 보고 웃으신다. 주님(아도나이)이신 그는 그들을 비웃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셔서 그들을 놀라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긍휼과 사랑이 풍성하신 자이지만, 또한 그를 대적하고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분노하시는 자이시다. 그는 엄위하신 하나님이시다. 그가 노하시면 모든 사람은 다 놀라며 두려워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놀라게 하시며,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고 말씀하실 것이다. 원문에는 ‘내가’라는 말(아니)이 강조되어 있다. 그것은 메시아를 거절하고 대적하는 세상의 왕들과 하나님을 대조시킨다. 또 ‘나의 왕’이라는 말은 사람들에 의해서나 사람들의 혈통에 따라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특별한 작정과 뜻에 따라 세움을 받은 왕이라는 뜻이다. 메시아께서는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일을 행할 왕이시다.

‘내 거룩한 산 시온’은 하나님께서 구별하신 예루살렘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거기에 거하신다. 하나님께서 그의 왕 메시아를 그곳에 세우신다는 것은 메시아께서 그곳에 오실 것을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육체로 그곳에 오셨고 부활하심으로 자신을 주와 그리스도로 확증하셨고(행 2:36), 그의 복음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땅에 전파될 것이며 또 장차 재림하심으로 온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다(계 22:3).

[7-9절] 내가 영(令)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끝까지 이르리로다. 네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질그릇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영’(令, 코크)은 ‘칙령, 작정(decree)’이라는 뜻이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의 작정을 전한다. 그는 메시아의 예표가 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전한다. 본문의 내용은 확실히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다. 그것은 세 가지의 내용이다.

첫째로, 메시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실 것이다.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오늘날’은 언제인가? 하나님께도 우리에게와 같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신 자가 아니신가? 그러므로 하나님께 ‘오늘날’은 영원한 현재라고 표현할 수 있다. 하나님과 그의 아들의 관계는 영원적이다. 그것은 그의 아들의 신성(神性)에서 증거된다. 시간 세계 속에서의 관계라면 아들은 참된 하나님이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창세 전에 그가 아버지와 함께 누렸던 영광에 대해 말씀하셨다(요 17:5). 성경의 풍성한 증거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은 그가 행하신 기적들과 부활로 확증되었다(요 20:30-31; 롬 1:4).

둘째로, 메시아 왕국은 온 세상 땅끝까지 미칠 것이다. 다윗 왕국의 확장은 메시아 왕국을 예표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온 세상의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며(마 28:19; 행 1:8)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셀 수 없이 큰 무리가 구원을 얻을 것이다(계 7:9). 이 예언은 오늘날 거의 이루어졌다.

셋째로, 메시아께서는 철장으로 세상을 다스리고 심판하실 것이다. ‘저희를 깨뜨린다’는 원어(테로엠)는 고대 번역들(LXX, Syr, Vg)에서 ‘저희를 다스린다’(티르엠)는 말로 읽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다니엘 2:34에서 ‘열방을 부서뜨리는 돌’로 예언되셨고 요한계시록에서는 ‘철장으로 다스리는 자’로 묘사되셨다(계 2:27; 12:5; 19:15). 그의 통치권은 그의 구원 사역에서 이미 이루어지고 있으나, 그는 또한 장차 온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다(행 17:31; 딤후 4:1).

[10-12절] 그런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관원들아, 교훈을 받을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

하나님께서 대적자들을 패하게 하시고 메시아를 통해 자신의 뜻을 이루실 것이기 때문에, 이 세상의 왕들과 관원들과 온 세상 사람들은 지혜와 교훈을 받아야 한다. 본문은 세 가지의 교훈을 말한다.

첫째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향해 가져야 할 가장 기본적 태도이다(잠 1:7). 우리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두려워하고 그 앞에서 떨어야 한다. 그러나 기쁨과 즐거움을 가지고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13:28도,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라고 교훈하였다. 경건함과 두려움과 기쁨은 성도의 정상적 신앙생활의 덕이다.

둘째로,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주와 중보자이시며 세상의 모든 왕들 중의 왕이시다. 모든 사람은 그를 구주와 주로 고백하고(롬 10:9; 고전 12:3) 그에게 복종하고 그를 사랑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그들의 삶의 길에 속히 임할 것이다. 고린도전서 16:22,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셋째로, 하나님만 의지하라. 세상이나 세상 권세를 의지하지 말고 사람이나 그의 지혜도 의지하지 말고 돈이나 재물도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이 참으로 의지할 자는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뿐이다.

시편 2편의 교훈은 무엇인가? 이 세상은 소란하고 하나님과 그의 뜻을 거역할지라도, 우리는 창조자와 섭리자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의 뜻을 거역하지 말고 그의 왕권을 속박으로 여기지 말고 자원함으로, 자발적으로 그를 경외하고 섬기며 그의 모든 명령에 순종해야 한다.

또 우리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께서 인류의 유일한 구주로 보내신 자이심을 깨닫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그가 온 세상을 다스리는 주님이시며 그의 나라인 신약교회가 땅끝까지 확장될 것이며 그가 영광 가운데 다시 오실 때 온 세상을 심판하실 것을 알자. 그러므로 우리는 영원하신 창조자와 섭리자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며 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사랑하며 순종하고, 이 세상의 헛된 부귀 영화 권세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자.

3편: 곤경 중에 부르짖음

[1-2절]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소이다. 많은 사람이 있어 나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 하나이다(셀라).5)

이 시의 표제어에 의하면, 다윗은 그 아들 압살롬을 피할 때 이 시를 썼다. 그 당시에 다윗을 반역하는 일이 커갔고 반역자 압살롬에게로 오는 백성이 많았다고 성경은 증거한다(삼하 15:12). 주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치며 그를 향해 등을 돌렸다(마 27:22-23). 사도 바울의 전도사역의 말기에 많은 사람들이 그를 버리고 그와 입장을 같이하지 않았다. 디모데후서 1:15,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 그 중에 부겔로와 허모게네가 있느니라.” 디모데후서 4:16,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다윗의 대적자들은 그에 대해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들의 말은 다윗을 낙심시킬 만했다. 사람들이 그를 대적하는 것도 두려운 일이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지지하시고 도우신다면 걱정할 일이 아니나, 만일 하나님께서 그를 지지하지 않으시고 돕지 않으신다면 큰 일이 아닌가? 그러나 다윗은 그런 어려운 때에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그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진 자이었다.

[3-4절]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니이다.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셀라).

다윗의 대적자들의 말은 완전히 잘못된 비난이었다. 다윗은 고난 중에도 하나님만 의지하고 바라보는 믿음의 사람이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원수들의 비난과 공격을 막아주실 그의 방패이시며, 그에게 왕의 영광을 주셨고 그것을 끝까지 지켜주실 그의 영광이시며, 그의 머리를 드시는 자, 즉 그로 낙심하거나 수치를 당치 않게 하시고 그에게 힘과 명예 회복을 주시는 자이심을 고백하고 있다.

다윗은 그의 목소리로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했다. 우리는 기도할 때 보통 마음 속으로나 조용한 소리로 기도하지만(느 2:4), 때때로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에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한다. 잡념에 떨어질 수 있는 묵상 기도나, 비성경적 신비주의에 떨어질 수 있는 관상 기도보다는 소리내어 기도하는 것이 더 나은 것 같고, 시시때때로 우리는 부르짖는 기도를 올려야 할 것이다. 예레미야 29:12-13,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부르짖음은 기도하는 이의 간절한 심령을 나타낸다.

기도의 대상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그는 사람의 기도에 응답할 수 없는 우상이나 그를 도울 수 없는 거짓 신이 아니다. 아합 시대에 참 선지자 엘리야와 대결하였던 바알 선지자들은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나 아무 소리도 없었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었다(왕상 18:26). 그러나 엘리야의 하나님은 참 하나님이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이셨다(렘 10:10). 그는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살아계셔서 자기 백성의 기도를 들어주신다. 그 하나님을 알고 그에게 나아가 그에게 기도하는 자는 복되다.

우리의 하나님께서는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시는 것은 그가 살아계신 참 하나님이시라는 증거이다. 그는 엘리야의 기도를 들어주셨고 불로 응답하셨다(왕상 18:37-39). 본문은 그가 그 성산에서 응답하신다고 말한다. 그 성산은 하나님께서 계신 천국과, 그가 계신 표를 두신 예루살렘과,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몸된 교회를 가리킨다고 본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기도의 응답이 있다. 그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기도가 응답받는다(요 14:13-14). 기도는 아름다운 말이나 경건한 모양에 가치가 있지 않고, 믿음과 진실함에 있고 하나님의 응답하심에 있다.

[5절]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천만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이다.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피난 중에 있었던 다윗 왕은 많은 대적자들과 그들의 악한 비난 중에 있었지만, 그는 밤에 누워 평안한 잠을 잤다. 그에게 상심함과 두려움이 있었다면 그는 단잠을 잘 수 없었겠지만,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간구했던 그는 편안하게 단잠을 잘 수 있었다. 하나님의 법을 순종치 않는 자의 받는 벌들 중의 하나가 경심증(驚心症)이지만(신 28:28),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들에게 단잠을 주신다(시 127:2).

다윗이 단잠을 잘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붙들어 주시기 때문이었다. ‘나를 붙드신다’는 원어(이스메케니)(미완료시제)는 ‘나를 계속 붙드신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한번만 도우시고 붙드신 것이 아니고 계속 도우시고 붙드셨다. 다윗이 환난 중에서도 평안한 잠을 잘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

다윗은 또 그를 대적하여 둘러선 수만명의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겠다고 고백한다. 다윗에게는 대적자들을 두려워하지 않을 담력과 용기가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용기와 담력이었다. 사무엘상 30:6, “백성이 각기 자녀들을 위하여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다윗이 크게 군급(窘急)하였으나[고통스러웠으나] 그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어 용기를 얻었더라.” 구약시대의 선지자 엘리야나 미가야, 초대교회의 아다나시우스나 종교개혁 때의 루터의 용기와 담력도 그러했다. 잠언 28:1,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니라.”

[7-8절]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이는]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꺾으셨음이니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셀라).

다윗은 하나님께서 잠잠히 계시지 말고 일어나 행동하시며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부터, 그 대적자들의 위협으로부터 그를 건져주시기를 기도한다. 그는 큰 곤란 중에 낙심하거나 당황한 채로 있지 않았고 또 단지 인간적 대책을 궁리하거나 의논하지 않았고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의 도우심과 구원을 요청한 것이다. 이것은 성도의 놀라운 특권이다. 우리에게는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께서 계시다.

원문의 7절 중간에 있는 ‘이는[왜냐하면]’이라는 말(키 י������)은 그가 하나님의 구원과 도움을 요청하는 근거를 보인다. 그의 기도의 근거는 하나님께서 과거에 그의 모든 원수들의 뺨을 치셨다는 사실이었다. ‘뺨’이라는 원어(레키 י������������)는 ‘턱, 뺨’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그의 과거의 경험은 고난 중에 그의 현재의 기도의 근거가 된다.

8절 상반절도 그의 기도의 근거를 계속 말한다. 그의 기도의 근거는 구원이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다윗의 지식과 확신이었고 성경에 확실히 증거된 하나님의 진리이다(시 37:39; 62:6; 렘 3:23; 욘 2:9; 계 7:10; 19:1). 다윗은 블레셋 장수 골리앗과 싸울 때도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고 말했었다(삼상 17:47). 구원은 사람들에게나 군대의 힘에나 그 어떤 인간적 수단과 방법에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있다.

다윗은 끝으로 “주의 복이 주의 백성에게 있게 하소서[혹은 ‘있나이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복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 구할 내용이며 그들이 이 땅 위에서 또 영원토록 받아 누릴 내용이다.

시편 3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어려운 문제를 만났을 때 부르짖어 기도하자. 기도는 성도의 특권이다. 마태복음 7:7-11,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요한복음 14: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을 믿는 자마다 환난의 날은 기도할 기회이다. 우리는 기도하되 때때로 소리내어 부르짖어 간절히 기도하자. 우리는 혼자 있을 때 잡념들에 떨어지기 쉬운 묵상 기도나 명상보다 또박또박 소리를 내어 기도하는 것이 좋고 때때로 소리내어 기도할 수 있다.

둘째로, 우리는 우리를 해치려는 대적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방패로 삼자. 하나님께서는 그를 의지하고 그에게 피하는 자들에게 방패가 되신다(3절). 다윗은 시편 18:1-2에서,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구원이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알고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하고 시시때때로 그 구원을 체험하자. 구원은 단순히 인간적인, 세상적인 방법들에 있지 않고, 오직 주권적 섭리자이시며 전능하신 하나님께 달려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대적자들을 능히 물리치실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선다면 그는 언제나 우리편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대적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을 우리의 방패로 삼자.

4편: 하나님께서 주신 기쁨과 평안

표제어에 ‘영장(伶長)’이라는 말(메낫체아크)은 ‘찬양지휘자’를 가리키는 것 같다. 시편에 ‘현악’(네기노스)에 맞춘 노래라는 표제어를 가진 것은 7개가 있다(4, 6, 54, 55, 61, 67, 76편).

[1절] 내 의(義)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다윗은 하나님을 ‘나의 의(義)의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성도의 의는 그의 행위에 있지 않고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의에 있다. 모든 사람은 죄인이지만, 구약시대에는 짐승 제사로, 신약시대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로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나의 의는 이것뿐 예수의 피밖에 없다.” 성도는 그 의를 힘입어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가 기도한다.

또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를 곤란 중에 너그럽게 하셨다고 말한다. ‘너그럽게 하셨다’는 원어(히르카브타)는 ‘안심케 하셨다, 건지셨다’는 뜻이다. 과거에 다윗이 어려운 일을 당하여 마음에 근심과 걱정, 불안과 초조함이 있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마음의 여유와 안정을 주셨고 그를 건져주셨다. 다윗은 과거에 주셨던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현재의 고난 중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다윗은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라고 말한다. 실상, 다윗이 가진 의(義)도 하나님의 긍휼에 근거한 것뿐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며 하나님께서 그가 지금 당한 환난에서도 그에게 마음의 여유와 안정을 주시고 그를 건져주시기를 간구하는 것이다.

[2-3절]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변하여 욕되게 하며 허사를 좋아하고 궤휼을 구하겠는고?(셀라).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

다윗은 사람들이 여러 날 동안 그의 영광을 변하여 욕되게 한다고 말한다. 그의 영광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왕권의 영광을 가리킬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택하시고 기름을 부으셨고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셨다. 백성들은 그의 왕권의 영광을 인정하고 높이고 그를 존경했어야 했다. 그를 왕으로 세우신 자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그의 영광을 변하여 욕되게 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를 비난하고 모욕하고 해치려 하고 있었다.

다윗은 또 그들이 허사를 좋아하고 거짓을 구하고 있다고 말한다. 악인들은 거짓을 구하고 그들의 계획은 다 허사(虛事)이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허락지 않으시며 그것을 무(無)로 돌려버리시기 때문이다. 옛날에 동생 요셉을 종으로 팔아버렸던 형들의 계획이나, 훗날에 왕을 속이고 다니엘을 모함했던 그의 동료 총리들의 계획은 다 허사가 되었다. 악한 자들의 악한 계획은 다 허사이다.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의 계획을 폐하시고 경건한 자들을 택하신다. ‘경건한’이라는 원어(카시드)는 ‘인자(仁慈)함’(케세드)을 가진 자라는 맛을 가진 단어이다. 경건한 자는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아 인자(仁慈)할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그의 인자한 성품을 본받는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위해 그런 경건한 자를 택하신다.

또 하나님께서는 이런 자의 기도를 들어주신다. 또 그는 이런 자를 인정하시고 도와 주시고 그의 대적들을 파하신다. 경건한 자에게도 어려운 일들이 있으나 그는 결국 그 모든 일들에서 승리할 것이다.

[4-5절] 너희는 떨며 범죄치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셀라). 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뢰할지어다.

다윗은 대적자들에게 말한다. ‘떨라’는 원어(리게주)를 헬라어 70인역은 ‘분노하라’고 번역했다. 본문은 다윗의 대적자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뜻이거나, 에베소서 4:26의 인용처럼 그들이 다윗을 향해 분노함을 지적하는 뜻일 것이다. 다윗의 대적자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하며 노한 감정을 버리고 범죄치 말아야 한다.

다윗은 또 그들이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하라고 말한다. 사람은 밤에 침상에 누울 때 자신을 반성케 된다. 다윗의 대적자들은 밤에 침상에 누워서 자신들을 반성하면서 잘못되고 지나친 말이나 감정이나 행위를 버리고 잠잠해야 할 것이다.

또 다윗은 그들에게 의의 제사를 드리라고 말한다. 구약의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의 의를 예표하였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의롭다고 여기시는 은혜의 수단이었다. 참된 제사는 사람의 죄를 씻고 그에게 의를 준다. 물론 성도는 형식적 종교 의식을 버리고 참된 믿음과 진심으로 의로운 제사를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또 다윗은 대적자들에게 하나님을 의뢰하라고 말한다. 아마 그들은 다윗을 대적하기 위해 인간적 생각과 계산, 사람들의 수와 힘을 의지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것들을 다 헛되게 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그들에게 그런 것을 다 버리고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권한다. 우리가 의지할 대상은 하나님뿐이시다.

[6-8절] 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취소서.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시니이다.

많은 사람들은 다윗에게 좋은 일이 있으리라고 기대하지 않았고 오히려 절망적 전망을 가졌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다윗은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을 앙망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였다. 그것은 그의 진노의 얼굴이 아니고 그의 은혜의 얼굴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마음에 기쁨을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기쁨이 충만하신 하나님이시며 그는 우리에게 기쁨을 주신다. 성령의 열매는 기쁨이다(갈 5:22). 하나님의 나라는 기쁨이 충만한 나라이다(롬 14:17). 다윗은 하나님께서 주신 기쁨이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 즉 추수 때의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이라고 고백하였다.

또 그는 많은 대적자들의 비난과 핍박 속에서도 평안한 잠을 잤고 안전한 삶을 누렸다고 고백한다. 이것은 하나님을 의(義)로 삼고 그를 의지하며 사는 성도가 누리는 복이다. 주께서는 우리에게 평안을 약속하셨고 허락하셨다. 주 예수께서는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고 말씀하셨다.

시편 4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의(義)가 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우리의 의(義)가 되신다. 로마서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고린도전서 1:30,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우리 주님 예수께서는 우리의 의가 되신다. “나의 의는 이것뿐 예수의 피밖에 없네.”

둘째로, 이 세상에는 곤란한 일들이 많지만, 하나님께서는 과거에도 곤란 중에 안정을 주셨고 지금도 또 미래에도 그러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께 간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대적자들의 악한 계획을 파하실 것이다.

셋째로, 악한 자들과 시험이 많은 세상에서, 우리가 항상 주의 얼굴빛을 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큰 기쁨과 평안을 주신다.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 가운데 영원히 거하시는 성령께서는 우리 속에 기쁨을 주신다. 성도는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한다. 또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른 참 평안을 주신다.

5편: 하나님께서는 죄악을 기뻐하지 않으심

[1-3절]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사(心思)를 통촉하소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본문은 다윗의 기도에 대해 말한다. 첫째로, 그의 기도는 마음 중심에서 나오는 기도이었다. ‘심사’(心思)라는 원어(하기그)는 ‘중얼거림, 탄식’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무의미한 말을 반복하는 형식적인 기도가 아니고 마음 중심에서 나오는 기도, 간절한 탄식의 기도를 가리킨다고 본다.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한다고 말한다. 그의 기도는 마음 중심에서 나오는 간절한 기도이었다.

둘째로, 그의 기도는 하나님의 왕권을 인정하며 하는 기도이었다. 그는 하나님을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라고 부른다. 즉 그는 하나님을 그의 왕으로 인정하며 그 앞에 복종하는 마음으로 기도한 것이다. 참된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바른 지식과 믿음을 가질 때 올릴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주권자이시다. 우리의 주인은 우리 자신이 아니고 바로 하나님이시다. 이것이 올바른 고백이다. 참된 기도는 바로 이런 지식과 믿음으로 드리는 기도이다.

셋째로, 그의 기도는 정성스런 기도이었다. 그는 아침에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아침은 하루를 시작하는 첫 시간이며 하루 중 가장 귀한 시간이다. 하루를 시작하는 첫 시간에, 먼저 하나님을 찬송하며 감사하고 그에게 우리의 소원을 아뢰는 것은 가장 합당하다.

[4-6절] [이는]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유(留)하지 못하며 오만한 자가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하리이다[못할 것임이니이다]. 주는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시며 거짓말하는 자를 멸하시리이다. 여호와께서는 피 흘리기를 즐기고 속이는 자를 싫어하시나이다.

원문은 ‘왜냐하면’이라는 말(키)로 시작한다.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의 원수들을 물리치셔야 할 이유는 하나님께서 죄악을 기뻐하지 않으시며 악이 그와 함께 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본질적으로 지극히 거룩하시고 의로우시고 선하시고 진실하시기 때문에 그의 속성에 맞지 않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그와 함께 있게 하지도 않으신다. 그러므로 다윗은 지금 그를 대적하는 악한 자들의 위협 속에서 탄식하는 중에 기도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곧 그들을 물리치실 것을 확신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행악자들을 미워하시며, 오만한 자들이 하나님의 눈앞에 서지 못할 것이다. ‘오만한 자’라는 원어(홀렐림)는 ‘자랑하는 자들’(BDB, NASB)이라는 뜻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거짓말하는 자들을 멸하시며 피 흘리기를 즐기고 속이는 자들을 미워하신다. 사람이 존귀하게 지음을 받았지만 죄로 인해 더러워지고 악하게 변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버리실 수밖에 없다. 사람도 자기에게 있는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너무 더러워지면 버릴 수밖에 없다.

[7절]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인자를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경배하리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풍성한 인자하심을 믿는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풍성한 인자에서 비롯된다.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받을 자는 아무도 없다. 성도는 하나님의 풍성한 긍휼과 사랑으로 택하심과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구원받은 자와 구원받지 못한 자의 차이는 하나님의 긍휼을 입었느냐, 못 입었느냐의 차이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풍성한 인자가 얼마나 귀하고 감사한 것인가!

다윗은 하나님의 풍성한 인자를 힙입어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고 그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경배할 것이라고 고백한다. ‘주의 집’ (베세카)과 ‘성전’(헤칼 코드쉐카 ‘주의 거룩한 전’)은 동의어로 쓰이기도 하지만(시 65:4), 본문에서 성전은 예루살렘에 있는 성막을 가리킬 수도 있고(시 68:29) 하늘 성소를 가리킬 수도 있다(시 11:4; 18:6). 여하튼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해 경배하는 것은 성도의 모습이다. 여기에 경건한 성도와 불경건한 악인과의 차이점이 있다.

[8절] 여호와여, 나의 원수들을 인하여 주의 의(義)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

‘나의 원수들’(KJV, NASB)이라는 원어(쇼레라이)는 ‘나를 해하려고 엎드려 주목하는 자들’이라는 뜻이다(BDB). 다윗은 하나님을 자신의 의(義)로 삼고 살았을 뿐 아니라(시 4:1), 이제 원수들 앞에서 그의 공의로운 인도와 판단과 처분을 바란다. 성도는 스스로 원수에게 보복할 필요가 없다.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께 있다(신 32:35; 롬 12:19). 하나님께서는 곧 공의로운 판단과 처분을 보이실 것이다.

[9절] [이는] 저희 입에 신실함이 없고 저희 심중이 심히 악하며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 같고 저희 혀로는 아첨하나이다[아첨함이니이다].

그가 하나님께 공의로운 판단과 처분을 호소한 이유는 그의 원수들이 악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입에는 신실함이 없었다. 악한 자들은 자기의 이익과 불이익을 따라 이 말도 하고 저 말도 한다. 신실함이 없는 말은 일종의 거짓말이다. 진실한 자는 그가 처한 상황이 그에게 이익이 되든지 해가 되든지 관계치 않고 바른 말을 하고 한결 같은 말을 한다.

또 그들의 심중은 심히 악하였다. 악인들은 겉보기는 선량할지라도 마음 속은 심히 악하다.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 모든 사람의 마음이 심히 악하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고 증거하였다(렘 17:9). 예수께서는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라고 말씀하셨다(마 15:19).

또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 같다. 무덤이 열리면 나쁜 악취가 날 것이다. 악인들의 악한 마음에서 악한 말이 나온다. 주께서는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낸다고 말씀하셨다(마 12:35). 중생한 자에게도 악한 본성이 남아 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라”고 교훈하였다(엡 4:31).

또 그들은 혀로 아첨의 말을 했다. 아첨의 말은 남의 비위를 맞추는 말이며 일종의 거짓말이다. 시편 12:2, “저희가 이웃에게 각기 거짓을 말함이여,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하는도다.” 아첨의 말은 상대에게 유익을 주지 못한다. 잠언 29:5, “이웃에게 아첨하는 것은 그의 발 앞에 그물을 치는 것이니라.”

[10절] 하나님이여, 저희를 정죄하사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고 그 많은 허물로 인하여 저희를 쫓아내소서. 저희가 주를 배역함이니이다.

다윗은 그의 원수들에 대해 하나님께 말씀드린다. 첫째로, 그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정죄하시기를 구한다. ‘정죄하소서’라는 원어(하아쉼)는 ‘유죄(有罪)라고 선언하소서’(BDB), ‘유죄(有罪)라고 여기소서’(NASB), ‘벌하소서,’ ‘멸망시키소서’(KJV, Langenscheidt)라는 뜻이 있다. 다윗은 원수를 보복하려 하지 않고 하나님께 맡겼다. 하나님께서는 공의로 판단하셔서 그들을 벌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벌은 공의롭고 철저하며 사람의 보복보다 훨씬 더 무섭다.

둘째로, 그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자기 꾀로 인해 넘어지게 하시기를 호소한다.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우셔서 악인들을 자기 꾀로 인해 넘어지게 하신다. 에스더서에 보면, 하만은 높이가 50규빗이나 되는 나무를 집 뜰에 세우고 의로운 모르드개를 거기 달아 죽이려고 계획하였으나 그 나무에 자기 자신이 달려 죽임을 당했다(에 5:14; 7:10). 다니엘서에 보면, 악한 자들은 선한 다니엘을 사자굴에 던져 죽이려고 한 법령을 제정케 하였으나 그들과 그 처자들이 거기에 던지웠다(단 6:7, 24).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행한 대로, 공의로 보응하신다.

셋째로,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의 원수들을 쫓아내시기를 구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허물이 많았기 때문이며 또 주 하나님을 배역하였기 때문이다(9절). 하나님의 종 다윗을 대적하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신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내쫓으시고 징벌하시기를 호소하였다. 그는 원수 갚는 것이 하나님께 있음을 아는 자이었다.

[11-12절] 오직 주에게 피하는 자는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인하여 영영히 기뻐 외치며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 [이는]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로 함같이 은혜로 저를 호위하시리이다[호위하실 것임이니이다].

본문은 성도에 대해 몇 가지로 묘사한다. 첫째로, 성도는 하나님께 피하는 자이다. 피하는 것은 환난 중에 하나님을 의지하고 맡기는 것이다. 둘째로, 성도는 하나님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창조자요 섭리자시며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죄와 죽음과 지옥 형벌로부터 구원해주신 자임을 아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할 것이다. 그는 하나님을 세상에서 가장 사랑할 것이다. 셋째로, 성도는 의인이다. 의인은 하나님의 명령을 행하는 자이다.

본문은 또한 성도의 기쁨에 대해 증거한다. 다윗은 원수들의 핍박 속에서도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한다. 그는 자신뿐 아니라, 하나님께 피하는 자가 다 기뻐하며 영영히 기뻐 외치며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할 것이라고 말한다. 신약 성도도 똑같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16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말했고, 빌립보서 4:4에서도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하였다.

본문은 성도의 기쁨의 이유로 11절에 “주의 보호로 인하여”라고 말하고, 12절은 원문에 ‘이는’이라는 말로 시작하여 하나님께서 의인에게 복을 주실 것이기 때문에 또 하나님께서 방패로 함같이 은혜로 저를 호위하실 것이기 때문에 기뻐한다고 말한다. 성도들은 원수들의 비난과 핍박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의인을 복 주시며 보호하시기 때문에 기뻐한다. 성도는 환난 중에도 기뻐한다.

시편 5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악을 멀리해야 한다. 4 -6절,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유하지 못하며 오만한 자가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하리이다. 주는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시며 거짓말하는 자를 멸하시리이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미워하시고 교만한 자, 거짓말하는 자, 불신실한 자, 더러운 말을 하는 자, 아첨하는 자를 미워하신다. 잠언 6:16-19,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 곧 그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6, 7가지니 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및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니라.” 그러므로 아무리 훌륭한 자라도 죄를 지으면 하나님의 버림을 당할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들은 악을 멀리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성도다운 삶을 늘 지켜야 한다. 우리는 고난과 원수들의 핍박 중에도 하나님의 인자하심만 의지하며 그를 경외하고 참된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의 의,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의만 의지하고 하나님의 계명대로 의를 행해야 하고, 또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주권 곧 그가 온 세상의 주인이시며 왕이심을 인정하고 그의 공의의 판단과 처분만 구하며 아침마다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수고로운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과 그의 약속 때문에 항상 기뻐하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내세의 복된 천국과 이 세상에서의 보호를 약속하셨다. 우리의 소망은 천국이며 그것은 우리의 기쁨의 이유요 원천이다. 또 주께서는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하신다. 우리가 이 세상 사는 동안, 그는 우리를 도우시고 보호하신다. 우리 속에 거하시는 성령께서도 우리에게 기쁨을 주신다. 또 하나님의 기도 응답은 시시때때로 우리에게 기쁨이 된다. 우리는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자.

6편: 눈물의 탄식을 들으심

[1-2절] 여호와여, 주의 분으로 나를 견책하지 마옵시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긍휼히 여기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다윗은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무서운지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사울 왕을 버리시고 악령으로 고통 당하게 하신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나님의 진노는 참으로 무섭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께서 진노하심으로 그를 징계하지 마시기를 구한다.

그는 지금 자신의 몸이 수척하며 쇠약하고 뼈가 떨린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형편을 하나님께 아뢰며 하나님의 긍휼과 치료를 간구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긍휼로 그의 몸의 연약을 치료하시고 그의 건강을 회복시켜 주실 것을 간구하는 것이다. 사람은 부족해서 하나님의 긍휼이 아니고서는 그에게 무엇을 구할 수 없다.

[3-5절] 나의 영혼도 심히 떨리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인자하심을 인하여 나를 구원하소서. [이는]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없음이오니] 음부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

다윗은 자신의 영혼까지도 심히 떨린다고 말한다. 심령의 두려움은 몸의 연약 못지 않게 문제이다. 또 그의 고통은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그래서 그는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라고 말한다.

마치 파선 당한 배의 선원들이 구조 신호를 보내면서 구조 요청을 하듯이, 다윗은 그의 연약 중에서 하나님께 구원을 호소한다. 하나님께서는 본래 다윗과 함께 계셨고 그를 지키시고 도우셨으나 다윗은 지금 하나님께서 자기 곁에 계시지 않다고 느끼고 있다. 그것은 아마 그의 범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잠시 그를 떠나가셨음을 암시하는 것 같다. 그러므로 그는 “여호와여, 돌아오소서”라고 간구한다.

하나님의 구원은 특히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긍휼하심에 근거한다. 하나님의 긍휼 외에는, 그가 우리를 구원하셔야 할 이유가 도무지 없다. 그의 공의뿐이라면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만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긍휼과 자비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의 중단과 마침이 있고 우리의 구원과 회복이 가능했다. 하나님께서는 공의의 하나님인 동시에 긍휼의 하나님이시다.

그가 하나님께 구원을 간구한 이유는 그가 죽으면 하나님을 기억할 수 없으며 무덤에서 주께 감사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그의 육신을 두고 한 말이다. 사람이 죽어 몸이 무덤에 묻히면 그 몸은 의식이 없는 시체에 불과하므로 하나님을 기억할 수도, 감사할 수도 없다. 그가 좀더 살기를 원한 것은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에게 감사하기 위해서이었다. 성도의 삶의 목적은 단지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데 있다.

[6-7절]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내 눈이 근심을 인하여 쇠하며 내 모든 대적을 인하여 어두웠나이다.

다윗은 지금 심한 고통의 상태에 처해 있다. 그는 탄식함으로 곤핍했다. 그의 심령은 답답하고 괴로워 신음하며 한숨지었고 몸도 마음도 피곤하며 지쳤다. 또 그는 밤마다,6) 즉 여러 날들을 많은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호소하였다. 그의 침상과 요는 밤마다 많은 눈물로 적셔졌다. 그의 고통은 매우 컸다. 또 그의 눈은 근심으로 인해 쇠해졌다. 특히 그의 근심은 그의 많은 대적자들을 인한 것이었다.

다윗의 고통은 성도의 고통의 예이다. 그것은 우리의 부족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가 없으셨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고통을 겪으셨다. 그가 안식일에 38년된 병자를 고쳐주셨을 때 유대인들은 그를 죽이려 하였고(요 5:16, 18), 그가 안식일에 오른손 마른 사람을 고쳐주셨을 때도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분기(憤氣)가 가득하여 저를 죽이고자 했다(마 12:14; 눅 6:11). 또 요한복음에 보면, 그가 성전에서 설교하셨을 때에 사람들은 돌을 들어 그를 치려 한 적도 있었고(요 8:59; 10:31), 누가복음에 보면, 그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책망하는 설교를 하셨을 때에 그들은 그에게 맹렬히 달라붙어 그를 비난하였다(눅 11:53-54). 마침내,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그를 죽이려고 의논했고 그 일을 이루었다(마 27:1). 그는 이사야의 예언대로 ‘사람들에게 멸시와 미움을 당한 질고를 아는 자’이셨다(사 53:3). 사람이신 예수님의 고통은 참으로 크셨다.

[8-10절] 행악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이는] 여호와께서 내 곡성을 들으셨도다[들으셨음이로다].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내 모든 원수가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떪이여, 홀연히 부끄러워 물러가리로다.

본문은 다윗의 기도를 세 가지의 단어로 말한다. 첫째는 ‘곡성’이다. 다윗은 하나님께 눈물의 기도를 올렸다. 그는 밤마다 눈물로 그의 침상과 요를 적셨다. 둘째는 ‘간구’이다. 그는 자신의 소원을 간절히 하나님께 아뢰었다. 1-4절에는 ‘여호와여’라는 말이 다섯 번 나온다(1, 2, 2, 3, 4절). 다윗은 하나님의 이름을 반복하여 간절히 불렀다. 셋째는 ‘기도’라는 일반적 용어이다.

눈물의 간구를 올린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을 확신한다. 그는 “행악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이는 여호와께서 내 곡성을 들으셨음이로다”(8절)라고 말하고, 또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9절)라고 말한다. ‘들으셨다’는 원어(완료형)는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실 것이라는 그의 확신을 나타낸다. 기도 응답이 아직 나타난 것은 아니겠지만,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의 평안을 통해 하나님의 응답을 확신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또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라고 말한다.

다윗에게 주신 기도 응답의 내용은 그에게 악을 행하던 원수들이 홀연히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떨며 그를 떠나가는 것이다. 전에는 교만하고 의기양양했던 그들이 이제는 몸둘 바를 모르게 부끄러워하며 심히 떨고 당황할 것이다. 의인에게는 고난이 많지만 구원과 승리도 있고(시 34:19) 천적(天的)인 평안도 있다(요 14:27).

시편 6편의 교훈은 무엇인가? 성도는 때때로 심신의 연약함에 떨어진다. 많은 경우 그것은 자신의 죄와 부족 때문에 온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 긍휼을 구하며 그가 우리의 심신의 연약을 고쳐주시고 회복시켜 주시기를 간구하자. 신약성도들은 하나님께서 구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십자가 대속의 의(義)를 힘입고 다시 일어나야 하고 의와 거룩과 선의 목표를 향해 담대히 한걸음씩 나아가야 한다.

우리는 고난 중에 하나님께 구원을 호소하자. 하나님께서는 환난 날에 우리의 구원이 되시고 우리의 도움이 되신다. 오직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을 의지하며 그렇게 하자. 시편 50: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세상에서의 환난은 하나님을 체험하는 기회가 된다. 또 우리는 우리의 생명까지도 하나님과 그의 뜻에 맡기며 살아 있는 동안 하나님을 섬기며 그에게 감사하자.

이 세상 사는 동안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에게도 탄식과 눈물과 근심의 심한 고통의 때가 있을 수 있지만, 성도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함으로 승리할 수 있다. 고난 중에 아뢰는 성도의 간절한 눈물의 간구와 호소는 반드시, 속히 하나님의 응답을 얻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악을 행하며 우리를 핍박하고 죽이려 하는 원수들도 그의 기이한 방법으로 물리쳐주실 것이다. 기도는 성도의 승리의 비결이다.

7편: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재판장이심

[1-2절]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주께 피하오니 나를 쫓는 모든 자에게서 나를 구하여 건지소서. 건져낼 자 없으면 저희가 사자같이 나를 찢고 뜯을까 하나이다.

다윗에게는 그를 쫓고 핍박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사자같이 그를 찢고 뜯으려고 하고 있었다. 그가 사울에게 쫓기던 때의 상황이 그러하였다. 그러나 이런 고난의 상황 속에서 그는 하나님을 ‘내 하나님’이라고 부르며 하나님께 피하고 그를 의지하며 그의 구원을 간구한다. 하나님을 알고 그를 경외하고 믿고 의지하는 자는 환난 중에 그에게 피하고 그의 구원을 간구할 수 있다.

[3-5절]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것을 행하였거나 내 손에 죄악이 있거나 화친한 자를 악으로 갚았거나 내 대적에게 무고히 빼앗았거든 원수로 나의 영혼을 쫓아 잡아 내 생명을 땅에 짓밟고 내 영광을 진토에 떨어뜨리게 하소서(셀라).

“이것을 행했다”는 말은 다음에 나오는 말을 가리킨 것 같다. 그는 그의 손에 죄악이 있거나 그가 자기와 화친한 자를 악으로 갚았다면, 원수들이 그를 쫓아 잡아 그의 생명을 땅에 밟고 그의 영광을 진토에 떨어뜨리게 하시라고 하나님의 공의에 호소하며 담대히 구원을 간구한다. “내 대적에게 무고히 빼앗았거든”이라는 말씀은 삽입구절로 “나는 무고히 나의 원수된 자를 건져내었도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나은 것 같다(KJV). 이 말씀은 그가 자기를 잡아죽이려고 쫓던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죽이지 않고 살려준 일에 맞다(삼상 24:7; 26:11). 사도 요한의 말대로, 성도는 자기가 자기를 책망할 것이 없을 때, 즉 자기 행위가 양심적으로 결백할 때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하나님께 간구한 바를 얻을 것이다(요일 3:21).

[6-8절] 여호와여, 진노로 일어나사 내 대적들의 노를 막으시며 나를 위하여 깨소서. 주께서 심판을 명하셨나이다. 민족들의 집회로 주를 두르게 하시고 그 위 높은 자리에 돌아오소서. 여호와께서 만민에게 심판을 행하시오니 여호와여, 나의 의와 내게 있는 성실함을 따라 나를 판단하소서.

다윗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간구한다.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에게 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진노는 악인들의 분노보다 수십 갑절 더 크고 무섭다. 하나님께서 악인들에게 공의로 심판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율법에 경고된 바이다. 다윗을 대적하고 핍박하는 자들이 분노할 때 그것을 막을 자는 주권적 섭리자이신 살아계신 하나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노하시면 대적들의 노함은 저지될 것이다. 세상에서 성도에게 대적자들이 많으나 심판자이신 하나님께서 일어나시면 그들을 물리쳐 주실 것이다. 원수 갚는 일은 하나님께 있다. 성도의 모든 문제의 해결도 하나님께 있다. 그러므로 성도는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지 말고 그 문제를 하나님께 가지고 나가야 한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민족들의 집회에서 심판을 행하시기를 구한다. ‘민족들’이라는 말(움밈)은 영어성경들처럼 ‘백성들’(peoples)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민족들 혹은 백성들이 주를 둘러 모이고 주께서 그 높은 자리에 앉으심은 위엄 있는 재판관의 모습이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의 나라들과 백성들을 심판하시는 재판관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심판하시되 공의로 심판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다윗은 자신의 의와 성실함을 따라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기를 담대히 구한다. ‘성실함’이라는 원어(톰)는 ‘온전함’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대략적 의미의 완전함을 가리킨다. 엄격한 의미에서 하나님 앞에 완전한 자는 세상에 아무도 없지만, 하나님을 경외하고 믿고 하나님의 명령과 교훈에 순종하며 사는 자는 의로운 자요 온전한 자로 간주된다. 그는 그를 대적하는 악한 원수들과 현저히 구별된다.

[9절] 악인의 악을 끊고 의인을 세우소서. 의로우신 하나님이 사람의 심장을 감찰하시나이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악인과 의인을 구별하여 악인들의 악을 끝나게 하시고 의인들을 세우시기를 간구한다. 세상에는 악인이 끊임없이 득세하고 활개치고 있다.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이 아니고서는 세상에 완전한 도덕적 질서는 세워질 수 없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을 공의로 심판하실 날을 정하셨고 심판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행위를 정확히 구별하신다. 본문에 사람의 ‘심장’이라는 원어는 ‘마음과 내부(內部)’라는 말인데, ‘내부’라는 원어(켈라요스)는 ‘신장(腎臟), 생각, 감정, 품은 뜻’을 가리킨다. 또 ‘감찰한다’는 원어(바칸 ן������������)는 ‘시험한다, 검사한다, 판별한다’는 뜻이다. 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과 생각과 감정과 품은 뜻을 다 시험하시고 악인들을 끊고 의인들을 세우실 것이다.

[10절]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

‘마음이 정직한 자’는 ‘의인’과 동의어이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을 순종하며 행하는 자이다. 성도의 특징은 마음의 정직함에 있다. 성도는 거짓과 간사함을 미워한다. 세상은 의인을 알지 못하여도 하나님께서는 그를 아시고 그를 악한 자들로부터 지키실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나의 방패는 하나님께 있다”고 고백한다. 성도는 악한 대적들의 핍박을 받을 때 육신의 힘이나 칼이나 세상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을 의지한다. 육신의 힘이나 칼이나 세상을 의지하는 자는 그것들로 인해 수치를 당할 것이지만, 성도는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인해 승리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악한 자들의 공격으로부터 성도를 보호하시는 방패가 되신다.

[11-13절]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사람이 회개치 아니하면 저가 그 칼을 갈으심이여, 그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 죽일 기계를 또한 예비하심이여, 그 만든 살은 화전(火箭)[불화살]이로다.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도덕적인 하나님이시다. 그는 의로운 재판장이시다. 그는 악인들의 악을 조금이라도 용납하지 않으신다. 만일 그가 악을 눈감아 주신다면, 그는 불의한 재판관이실 것이다. 그는 악인들에게 평안과 복을 주지 않으신다(사 48:22; 57:21). 그는 악인들의 악에 대하여 매일 분노하신다. 악인들은 매일 하나님의 진노와 징벌의 위험 속에서 살고 있다.

다윗은 또, “사람이 회개치 아니하면 저가 그 칼을 갈으심이여, 그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 죽일 기계를 또한 예비하심이여, 그 만든 살은 불화살이로다”라고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죄를 회개하라고 명하셨다(마 4:17; 눅 13:3). 사도 바울은,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다”고 말하였다(행 17:30). 회개는 모든 사람의 의무이다. 그러나 악인은 회개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며 거절하고 그의 진노를 쌓고 있다. 그러므로 로마서 2:5는,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라고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회개치 않는 자들을 위해 벌을 준비하셨다. 그것은 매우 치명적인 벌이다. 사람이 회개치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그 칼을 갈으시고 그 활을 당기시고 그 화살을 쏘시며 또 ‘죽일 기계’를 예비하신다. 하나님께서는 특등 궁수(弓手)이시다. 그의 불화살은 악인들의 심장에 명중할 것이며 그들에게 치명적일 것이다.

[14-17절] 악인이 죄악을 해산함이여, 잔해를 잉태하여 궤휼을 낳았도다. 저가 웅덩이를 파 만듦이여, 제가 만든 함정에 빠졌도다. 그 잔해는 자기 머리로 돌아오고 그 포학은 자기 정수리에 내리리로다. 내가 여호와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 지극히 높으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리로다.

악인들은 악한 일들을 위하여 애쓰며 남을 해치는 일들을 은밀히 계획하고 거짓된 일들을 행한다. ‘해산한다’는 원어(예캅벨)는 ‘(해산을 위해) 진통한다’는 말이다. 악인은 악행을 수고로이 계획하고, 은밀하게 또 거짓되게 수행하며 정정당당하지 못하게 행한다.

그러나 사람의 심장을 감찰하시는(9절)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에게 공의로 보응하신다. 악인들은 의인을 해하려고 웅덩이를 파 만들지만 자신이 거기 빠지며 그를 해하려고 계획한 그것이 자기에게 돌아오고 그의 포학함이 자기 머리에 떨어진다.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의 보응이다. 시편 다른 곳에도 비슷한 말씀이 있다. 시편 9:15, “열방은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짐이여, 그 숨긴 그물에 자기 발이 걸렸도다.” 시편 57:6, “저희가 내 걸음을 장애하려고 그물을 예비하였으니 내 영혼이 억울하도다. 저희가 내 앞에 웅덩이를 팠으나 스스로 그 중에 빠졌도다.”

성도는 세상을 사는 동안 사자같이 우리를 해하려는 원수들의 핍박을 예상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말하였다(딤후 3:12).

성도는 원수들의 핍박을 당할 때 하나님께 피하고 하나님께 호소하고 기도할 수 있다. 시편 18:2,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재판장이시기 때문에 공의로 심판하셔서 악인들을 벌하신다. 악인들은 자기가 판 웅덩이에 자신이 빠질 것이다. 시편 1:6,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성도는 평소에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게 살아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께 담대히 기도할 수 있고 또 하나님의 응답을 기대할 수 있다. 요한일서 3:21-22,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8편: 사람을 존귀케 하심

[1절]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

‘여호와’라는 명칭은 ‘스스로 계신 자’라는 뜻이고, ‘주’라는 명칭은 소유권과 통치권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는 영원자존자, 즉 영원 전부터 스스로 계신 자이시며 온 세상의 주인이시며 왕이시다. ‘아름답다’는 원어(앗디르)는 ‘엄위하다’는 뜻이다(BDB, NASB, NIV). 주 여호와 하나님의 엄위하심과 영광이 온 천지만물에 가득하다.

[2절]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報讐者)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대적자들이 많다. 그들은 마귀와 악령들이며 악한 자들, 즉 악한 정치가들, 무신론적 지식인들, 이단자들, 양심을 저버린 부도덕한 자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어린아이들의 입술의 고백을 통하여 그 대적자들을 잠잠케 하실 것이다. ‘어린아이’라는 원어(올렐)는 ‘어린아이 또는 소년’이라는 뜻이다. 소년 다윗은 블레셋 장수 골리앗에게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고 말했고(삼상 17:45, 47) 그와 싸워 이겼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새 시대가 오면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렘 31:34).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진리가 지혜로운 자들에게는 숨겨졌고 어린아이들에게는 계시되었다고 말씀하셨다(마 11:25). 주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을 때에 거기에는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치는 아이들이 있었다(마 21:15). 하나님께서는 순진한 어린아이들이 하나님을 믿고 고백케 하신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세상의 약한 것을 택하셔서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신다고 말했다(고전 1:27-29). 이런 일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증거한다.

[3절]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주의 손가락’은 신인동형적(神人同形的) 표현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영이시지만 물질적 몸을 가진 존재처럼 묘사한 것이다. 사람의 손가락이 물건을 만들 수도 있고 집을 지을 수도 있는 기계와 같듯이, 하나님의 손가락은 뛰어난 성능을 가진 전자동기계와 같으시다. 그는 뛰어난 발명가이시며 장인(匠人)이시며 과학자이시며 미술가이시다. 온 세상과 만물은 그의 창조의 작품들이다. 하늘과 달과 별들은 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다. 그것들은 우연히 된 것이거나 영원히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심으로 시작되었다. 또 하늘은 광대하고 신비하며 달과 별들은 오묘막측하다. 사람들은 인류 역사 약 6천년에 겨우 달이나 화성 등에 로켓을 보내어 탐험을 시작한 정도이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심히 크고 웅장하다.

[4절]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人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眷顧)하시나이까?

“사람이 무엇이관대”라는 표현은 사람이 광대한 우주와 비교할 때 너무 미미한 존재임을 나타낸다. 광대한 우주에 비해 지구는 한 작은 공이며 사람은 그 공 위에 보이지 않는 작은 점에 불과하다. 광대한 우주에 비교하면 사람들은 무(無)와 같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무가치해 보이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셨다. 그는 사람들을 생각하시며 돌보신다. ‘권고(眷顧)한다’는 원어(파카드)는 ‘방문한다, 돌본다, 보살핀다’는 뜻이다. 피조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일차적 관심은 단순히 우주나 지구가 아니고 지구 위에 사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는 첫 사람 아담과 하와를 자기 형상대로 창조하셨고 그들의 자손인 인류를 다스리시고 복과 벌을 내리시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하신다. 사람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이렇게 놀랍게도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의 대상이 되었는가?

[5-9절]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 아래 두셨으니 곧 모든 우양(牛羊)과 들짐승이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어족과 해로(海路)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잠시 천사보다 못하게 하셨다. ‘천사보다’라는 원어(메엘로힘)는 ‘하나님보다’라고 번역할 수도 있지만(NASB), 고대의 번역들(LXX, Syr, Targ)처럼 ‘천사보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KJV). 왜냐하면 사람은 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존재가 아니라 무한히 못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또 만일 다윗이 ‘하나님보다’라고 말하려 했다면 2인칭으로 ‘당신보다’라고 표현했을 것 같다. 또 시편에서 ‘하나님’이라는 원어(엘로힘)가 ‘재판장’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기도 했고(시 82:1, 6), 또 ‘천사들’로 번역된 다른 구절도 있다. 시편 97:7, “너희 신들아,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LXX, Vg, Syr). 또 신약성경 히브리서 2장은 이 본문(아마 LXX)을 인용하면서 천사로 읽었다. 또 ‘조금’이라는 원어(메아트)는 ‘조금’ 혹은 ‘잠시’라는 뜻이다. 사람은 본래 천사보다 못한 존재가 아니지만, 범죄함으로 인해 잠시 천사보다 못한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다. 사람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아 존귀하고 영광스런 존재이었으나 범죄함으로 그 영광과 존귀를 잃어버렸다(롬 3:23; 시 49:12).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한 대속제물로 십자가에 죽으셨을 때 잠시 천사보다 낮아지셨으나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영화와 존귀를 얻으셨고 또 그를 통해 구원받은 성도들은 장차 영화와 존귀를 얻을 것이다. 로마서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빌립보서 3:21,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구원의 결과는 영광이다.

또한 사람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어 모든 생물을 다스리는 임무를 받았지만(창 1:26, 28) 범죄함으로 어리석은 우상숭배에 떨어졌다. 그러나 이제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고전 15:45, 47) 구원받은 성도들은 바른 지식을 가지고 사람의 임무를 완수하여 피조물들의 종이 되지 말고 그것들을 다스려야 한다.

시편 8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온 세상에 나타난 하나님의 엄위하심과 영광을 찬송하자(1, 9절). 시편 19:1,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은 그의 영광을 드러낸다.

둘째로, 우리는 교만을 버리고 어린아이같이 겸손한 자가 되어 하나님을 알고 섬기자. 마태복음 11:25-26, “그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마태복음 18:3,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우리는 겸손히 하나님을 섬기자.

셋째로, 우리는 사람으로 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사람의 의무를 다하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으로 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를 주시고 만물을 다스리게 하셨다. 우리는 사람으로 태어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며 이 세상에서 돈이나 육신의 쾌락에 종노릇하지 말고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하고 섬기며 그의 명령을 지키고 만물을 다스리는 사람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

9편: 공의로 심판하심

[1-3절]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사(奇事)를 전하리이다. 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지극히 높으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니 내 원수들이 물러갈 때에 주의 앞에서 넘어져 망함이니이다.

‘감사한다’는 원어(야다)는 ‘찬송한다’는 뜻도 가진다. 감사와 찬송은 성경에서 거의 동의어이다(대상 25:3; 시 92:1-3; 95:2; 100:4 등). 다윗이 전심으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의 모든 기사를 전하며 기쁨과 즐거움으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겠다고 말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를 보호하시고 도우시며 그의 대적자들을 징벌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다윗의 원수들은 지금 다윗을 공격하고 비난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징벌하실 때 그들은 물러갈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넘어져 망할 것이다.

[4-6절] [이는] 주께서 나의 의와 송사를 변호하셨으며 보좌에 앉으사 의롭게 심판하셨나이다[심판하셨음이니이다]. 열방을 책하시고 악인을 멸하시며 저희 이름을 영영히 도말하셨나이다. 원수가 끊어져 영영히 멸망하였사오니 주께서 무너뜨린 성읍들을 기억할 수 없나이다.

원문은 ‘이는(왜냐하면)’이라는 말(키)로 시작된다. 다윗의 원수들이 넘어져 망하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판단과 의, 그리고 그의 송사를 지지하시고 변호하신다. 그는 보좌에 앉으셔서 세상의 모든 나라들과 거기 사는 모든 사람들을 의롭게 심판하신다. 이 사실은 참으로 감사하다. 사람의 양심은 선과 진실이 인정을 받는 도덕적 세계를 원하며 세상 사람들도 입으로는 그런 세계를 인정할 것이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불의와 악을 행하며 또 그런 것과 타협한다.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살려는 자는 세상에서 오히려 고난을 당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공의로 심판하실 것이다. 하나님과 그의 율법을 무시하는 악한 자들과 이방 나라들은 영원히 멸망하여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질 것이다.

[7-8절] 여호와께서 영영히 앉으심이여, 심판을 위하여 보좌를 예비하셨도다.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심이여, 정직으로 만민에게 판단을 행하시리로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주인이시요 심판자이시다. 그는 인류 역사 속에서 자주 심판을 행하셨다. 마지막 날에도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심판을 행하실 것이다(벧후 3:7; 계 20:11-15). 그는 공의와 정직으로 심판하실 것이다. 그는 의로우신 재판장이시다(시 7:11). 로마서 2:6,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9-10절] 여호와는 또 압제를 당하는 자의 산성이시요 환난 때의 산성이시로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인간의 삶의 여정에는 사람들의 압제도 있고 여러 어려운 일들도 있다. 어떤 때는 그것이 하나님의 징벌로 오지만, 어떤 때는 세상의 헛됨을 깨닫고 하나님만 소망케 하는 훈련 과정으로 온다(시 39:6-7).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압제당하는 자에게 산성이시요 환난 때의 산성이 되신다. 산성은 요새와 피난처를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원수들의 교묘하고 집요한 공격과 핍박으로부터 안전하게 피신할 곳이 되신다. 하나님께서는 긍휼로 의인들을 보호하시고 변호하시며 악인들을 징벌하신다. 인생의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하는 길은 살아계신 하나님께 피하는 데 있다.

하나님의 이름을 안다는 것은 그를 체험한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않으시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아는 자들은 그를 의지할 것이다. 그를 의지하고 찾는 자들은 그의 말씀을 붙들고 그에게 기도하며 그의 돌보심과 도우심을 체험할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하나님을 더욱 더 의지하게 될 것이다.

[11-12절] 너희는 시온에 거하신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 행사를 백성 중에 선포할지어다. [이는] 피 흘림을 심문하시는 이가 저희를 기억하심이여,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 아니하시도다[아니하심이로다].

‘시온’은 구약시대에 성막과 성전이 있었던 예루살렘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하늘 위에 계시며(왕상 8:30) 세상을 초월해 계시며(왕상 8:27) 온 우주에 충만하시지만(렘 23:24), 그는 또한 시온에 특히 성막과 성전에 계셔서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셨다. 그는 오늘날에는 교회 즉 성도들 안에 계신다(고전 3:16).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셔서 이스라엘 백성의 억울한 일들을 갚아주셨다. 다윗은 하나님을 찬송하고 그의 행한 일들, 곧 그의 공의의 심판을 백성 중에 선포하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행하신 의롭고 선한 일들을 체험하는 자마다 그를 찬송하며 그의 일들을 증거할 수 있을 것이다.

12절은 원문에서 ‘왜냐하면’이라는 말로 시작되며 찬송과 전도의 이유를 말한다. ‘심문하신다’는 원어(다라쉬 שׁ������������)는 ‘심사한다’는 뜻 외에 ‘갚는다’는 뜻도 있다. ‘가난한 자’라는 원어는 ‘핍박당하는 자’라는 뜻이다. 성도가 하나님을 찬송하고 증거해야 할 이유는 하나님께서 의인들의 피흘림 당함을 갚으셨고 그들을 기억하시고 핍박당하는 자들의 부르짖음을 잊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13-14절]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나를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여, 미워하는 자에게 받는 나의 곤고를 보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찬송을 다 전할 것이요 딸 같은 시온의 문에서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다윗에게는 그를 미워하는 자들이 많았고 그들에게서 받는 고난과 곤고함은 컸다. ‘사망의 문’은 사람이 그 문을 열고 들어가면 죽는다는 뜻이다. 다윗은 지금 원수들로 인해 곤고함이 심하여 죽을 지경에 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어려운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믿고 의지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자, 즉 그를 들어올려 건져내시고 피하게 하시는 자임을 믿었다. 그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믿었고 하나님께서 그를 긍휼히 여기시고 돌아보시고 도우시기를 기도하며, 또 그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체험하면 시온의 문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찬송하고 증거하며 기뻐하겠다고 말한다.

[15-16절] 열방은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짐이여. 그 숨긴 그물에 자기 발이 걸렸도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알게 하사 심판을 행하셨음이여, 악인은 그 손으로 행한 일에 스스로 얽혔도다. (힉가욘, 셀라).

힉가욘은 ‘울리게 부르라’는 음악 용어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는 이방 나라 사람들은 경건한 사람들을 빠뜨리려고 웅덩이를 파고 그들의 발로 걸리게 하려고 몰래 그물을 쳤다. 악인들은 경건한 자들이 그들과 동류가 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악을 지적하고 책망하기 때문에 그들을 미워한다(요 7:7).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셔서 공의로 심판하심으로 자신을 알리신다(시 7:11; 9:4).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결과로, 경건하고 선한 자들을 해치려던 이방 나라들은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졌고 자기가 숨긴 그물에 자기의 발이 걸렸고 자기의 손으로 행한 일에 스스로 얽혔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로운 처분이며 악인들로 하여금 자신의 무지하고 악함을 깨닫게 하시는 일이다. 불경건한 악인들의 악한 계획은 자신들만 해롭게 할 것이다(에 6-7장; 단 6장).

[17-18절] 악인이 음부로 돌아감이여,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열방이 그리하리로다. 궁핍한 자가 항상 잊어버림을 보지 아니함이여, 가난한 자가 영영히 실망치 아니하리로다.

‘음부’(쉐올)는 지옥을 가리킨다. 궁핍한 자와 가난한 자는 성도를 가리킨다. 불경건하고 부도덕한 악인들과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열방은 지옥의 판결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18절은 원문에 ‘이는(왜냐하면)’이라는 말로 시작되며 그것은 불경건한 악인들이 지옥에 들어가는 이유를 보인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악인들에게 미움과 핍박을 당하며 때때로 잊혀진 것 같으나 실상 잊혀진 것이 아니며 그의 소망도 없어진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고통을 기억하시며 그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시며 악인들을 공의로 보응하실 것이다.

[19-20절] 여호와여, 일어나사 인생으로 승리를 얻지 못하게 하시며 열방으로 주의 목전에 심판을 받게 하소서. 여호와여, 저희로 두렵게 하시며 열방으로 자기는 인생뿐인 줄 알게 하소서(셀라).

하나님께서 일어나신다는 것은 그가 일어나 행동하신다는 뜻이다. 다윗의 기도는 악인이 대적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하나님께서 악인을 미워하시고 벌하심을 증거하시기 위해서 또 그로 인해 성도가 보호와 위로를 얻기 위해서이다. 하나님께서는 일어나 공의로운 심판을 시행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심판을 시행하시면, 사람들은 두려움을 가지고 자신들이 무력하고 보잘것없는 인생뿐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인생’이라는 원어(에노쉬)는 ‘병약한’(아누쉬) 존재라는 맛을 가지는 말이다. 지금 악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들을 핍박하고 해치려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무력하게 엎드러질 것이다.

시편 9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신다. 그는 심판을 위해 보좌를 예비하셨다(7-8절).

둘째로, 하나님의 원수들은 반드시 멸망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악한 원수들을 영영히 멸하실 것이다. 열방은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질 것이다(15절). 악인들은 다 영원한 지옥 불못에 들어갈 것이다(17절).

셋째로, 성도들은 고난 중에서라도 구원을 얻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의를 변호하실 것이다(4절). 그는 압제 당하는 자의 산성이 되시며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 않으실 것이다(12절).

넷째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기뻐하며 찬송하고 감사하며 그의 하신 일들을 항상 전파하자(1-2, 11, 14절). 우리는 하나님께서 악인들을 벌하시고 우리를 고난에서 건지심을 체험할 때 더욱 그러할 수 있다.

10편: 악인에 대한 심판을 호소함

[1-2절]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악한 자가 교만하여 가련한 자를 심히 군박(窘迫)하오니 저희로 자기의 베푼 꾀에 빠지게 하소서.

시편 저자는 지금 큰 환난 가운데 있다. 그는 자신을 ‘가련한 자’라고 표현하며 악한 자가 교만하여 가련한 자를 심히 핍박한다고 말한다. ‘가난한’ 혹은 ‘가련한’이라는 원어들(아니 혹은 아나우 )은 ‘가난한, 겸손한, 고난 당하는’이라는 뜻을 가진 동의어로 성도를 묘사하는 말로 쓰인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악하고 교만하지만, 성도는 심령이 가난하고 겸손하며 때때로 고난과 핍박을 당한다.

시편 저자는 환난 중에 하나님께서 그를 도와주지 않으시고 멀리 서 계시다고 느끼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그의 깊으시고 높으신 뜻 가운데 성도를 환난에 버려두신다(시 13:1; 35:22; 38:21). 그가 환난 때에 우리의 산성이시요 피난처시며 큰 도움이시지만(시 9:9; 46:1), 성도는 때때로 그의 즉각적 도우심을 경험치 못한다.

그러므로 시편 저자는 악인이 자기가 베푼 꾀에 빠지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호소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호소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간구를 들으실 것이다. 그 어렵고 답답한 시간은 그에게 결코 손해가 아니고 영적인 큰 유익이 될 것이다. 그 시간은 그의 믿음을 더 순수하고 강하게 만들 것이다.

[3-4절] 악인은 그 마음의 소욕을 자랑하며 탐리하는 자는 여호와를 배반하여 멸시하나이다. 악인은 그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치 아니하신다 하며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다시 번역하면, “이는 악인이 마음의 소욕을 자랑하며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탐욕자들을 축복함이니이다. 악인은 그 얼굴의 교만으로 하나님을 찾지 않으며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나이다”(KJV). 이 본문은 악인으로 그가 베푼 꾀에 빠지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호소한 이유를 나타낸다. 악인은 세상적 욕심을 자랑한다. 성경은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라고 말한다(요일 2:16). 또한 악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탐욕자들, 즉 불의의 이익을 취하는 자들을 축복한다. 악인은 세상을 사랑하고 또 세상에 속한 자들을 사랑한다. 세상의 부귀와 영광이 그의 삶의 목표요 가치 기준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에게 탐심은 우상숭배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을 유일한 주인으로 선택하였다. 성도는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다(갈 5:24). 아직도 돈을 사랑하는 자는 헛된 신앙의 집을 짓는 자이다.

악인은 또한 교만하며 무신론적이다. 그는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 그의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그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였다면 모든 악을 회개했을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악을 떠날 수 있다(잠 16:6). 교만하고 하나님을 찾지 않는 자는 악을 버리지 못하며 돈 사랑과 육신의 쾌락 사랑을 버리지 못할 것이다.

[5-7절] 저의 길은 언제든지 견고하고 주의 심판은 높아서 저의 안력(眼力)이 미치지 못하오며 저는 그 모든 대적을 멸시하며 그 마음에 이르기를 나는 요동치 아니하며 대대로 환난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나이다. 그 입에는 저주와 궤휼과 포학이 충만하며 혀 밑에는 잔해와 죄악이 있나이다.

악인의 길은 때때로 견고해 보인다. 악인이 장수하고 세력이 강하고 건강하고 형통하기도 한다(욥 21:7-13; 시 73:3-12; 렘 12:1). 더욱이, 하나님의 심판은 높아서 악인의 눈에 미치지 못한다. 악인은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그는 또 모든 대적자를 멸시하고 자신의 평안과 형통을 확신하며 자신의 실패나 고난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는다. 이것은 패기와 용기같이 보이지만, 실상 헛된 자만심에 불과하다.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는 자신의 미래를 자신하는 것은 어리석은 태도일 뿐이다.

또 악인의 입에는 저주와 궤휼과 포학이 충만하며 혀 밑에는 잔해와 죄악이 있다. ‘죄악’이라는 원어(아웬)는 ‘허탄함’(KJV)이나 ‘사악함’(NASB)이라는 뜻이다. 말은 인격을 나타낸다. 선한 사람은 선한 말을 하지만, 악한 사람은 악한 말을 한다(마 12:34-35). 악인은 남을 저주하고 속이고 포학하고 해치고 헛되고 사악한 말을 한다.

[8-11절] 저가 향촌 유벽한 곳에 앉으며 그 은밀한 곳에서 무죄한 자를 죽이며 그 눈은 외로운 자를 엿보나이다. 사자가 그 굴혈에 엎드림같이 저가 은밀한 곳에 엎드려 가련한 자를 잡으려고 기다리며 자기 그물을 끌어 가련한 자를 잡나이다. 저가 구푸려 엎드리니 그 강포[그의 강한 것들]로 인하여 외로운 자가 넘어지나이다. 저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잊으셨고 그 얼굴을 가리우셨으니 영원히 보지 아니하시리라 하나이다.

시편에서 성도는 ‘무죄한 자’ ‘외로운 자’ ‘가련한 자’ ‘가난한 자’ 등으로 묘사된다. 악인은 이런 성도를 해치려 한다. 악인은 한적한 곳에 앉으며 은밀한 곳에서 성도를 엿본다. 그는 사자가 그 굴에 엎드림같이 은밀한 곳에 엎드린다. 악인이 공공연히 악을 행하지 못하고 은밀히 하는 것은 양심 때문일 것이다. 악인은 또 의인을 향해 강포하다. ‘그 강포’라는 원어(아추마우)[그의 강한 것들]는 ‘그의 강한 수족(手足)’을 가리킨 것 같다. 악인은 폭력적이다. 세상에서 의인들은 핍박과 고난을 당한다. 사도 바울은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말했다(딤후 3:12).

악인은 또 무신론적이다. 그는 하나님을 부정하는 무신론적 사고 때문에 악을 담대히 행한다. 시편 14:1은,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라고 말하였다.

[12-15절]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 가난한 자를 잊지 마옵소서. 어찌하여 악인이 하나님을 멸시하여 그 마음에 이르기를 주는 감찰치 아니하리라 하나이까? 주께서는 보셨나이다. 잔해와 원한을 감찰하시고 주의 손으로 갚으려 하시오니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자니이다. 악인의 팔을 꺾으소서. 악한 자의 악을 없기까지 찾으소서.

악인은 하나님을 멸시하며 하나께서 감찰치 않으신다고 생각한다. 실상 그는 무신론자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악인의 잔해와 원한을 다 보셨고 감찰하셨다. ‘원한’이라는 원어(카아스)는 ‘괴롭힘, 분노’ 등의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악인이 무시한다고 무시를 당하는 분이 아니시다. 그는 오히려 모든 일을 다 감찰하시고 판단하시며 그 손으로 악인의 악행에 대해 갚으신다. 하나님의 공의의 보응은 성경이 밝히 증거하는 근본 진리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악인을 징벌하심으로 성도를 도우시고 돌보신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신원하시는’ 자(신 10:18)이시며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시 68:5)이시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긍휼이 많으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롭고 선하게 살지만 이 세상에서 악한 자 때문에 핍박을 당하여 외롭고 가련하기까지 한 성도는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기도해야 한다. 시편 저자는 그러므로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라고 말한다. 기도는 믿음의 자연스런 표현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일어나시고 손을 드시고 가난한 자를 잊지 마시고 악인에게 합당한 징벌을 내리시기를 구하였다.

[16-18절] 여호와께서는 영원무궁토록 왕이시니 열방이 주의 땅에서 멸망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으니 저희 마음을 예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고아와 압박 당하는 자를 위하여 심판하사 세상에 속한 자로 다시는 위협지 못하게 하시리이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왕, 곧 세상의 영원한 통치자이시며 심판자이시다. 그는 성도의 호소를 들으신다. 17절의 ‘겸손한 자’라는 원어(아나임)는 ‘가난한 자, 핍박당하는 자’라는 뜻으로 성도 자신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핍박당하는 성도의 간구를 들으신다. 또 그는 성도의 마음을 준비시키신다. 그는 성도가 악을 버리고 의와 선에 굳게 서도록 준비시키신다. 그는 특히 억울하게 고통당하는 자의 간구에 귀를 기울이신다. 하나님을 모르고 부도덕한 이방인들은 그의 땅 곧 이 세상으로부터 멸망을 당할 것이다(16절). 악인은 새 예루살렘 성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성밖에 있을 것이다(계 21:27; 22:15).

시편 10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세상은 악하며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고통을 당한다. 세상 사람들은 교만하여 순진한 자들을 핍박한다. 그들은 이익을 탐하고 하나님을 멸시하며 부정한다. 그들의 입에는 저주와 거짓과 포학이 가득하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한다. 그들은 가련한 자(2, 9절), 외로운 자(9, 10, 14절), 가난한 자(12절), 겸손한 자(17절)라고 표현된다. 악한 세상의 사람들은 성도를 미워할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말하였다(딤후 3:12).

둘째로,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의 왕이시며 통치자시요 심판자이시다.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그 온 세상을 홀로 통치하신다. 16절, “여호와께서는 영원무궁토록 왕이시니.” 온 세상의 통치자이신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시다. 그는 세상의 모든 일들을 다 보시고 감찰하시고 판단하시고 선악간에 공의로 보응하신다.

셋째로, 성도는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께 모든 문제를 아뢰어야 한다. 시편에는 성도가 고난 중에서 하나님께 부르짖는 내용, 특히 악인들의 악행에 대해 하나님의 공의로운 판단과 보응을 호소하는 내용이 많다. 12절,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 14절,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기도한다.

11편: 하나님께서 인생을 감찰하심

[1-2절]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더러 새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찜인고? [이는] 악인이 활을 당기고 살을 시위에 먹임이여, 마음이 바른 자를 어두운 데서 쏘려 하는도다[함이로다].

다윗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그에게 도망하라고 권면하였다. ‘새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는 표현은 새가 사냥꾼을 피하여 산 속으로 날아 숨듯이 도망하라는 말이다. ‘네 산’은 ‘네가 피신할 곳’이라는 말로서 피신할 인간적, 세상적 방책을 의미한다.

2절은 원문에 ‘이는[왜냐하면]’이라는 말로 시작된다. 이것은 믿음 없는 친구들이 그에게 도망하라고 권면하는 이유를 말한다. 그것은 악인이 활을 당기고 살을 시위에 먹이며 그를 쏘려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성도는 ‘마음이 바른 자’로 표현된다. 그는 이성과 양심을 따라서 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바르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자이다. 그러나 이와 대조되게, 악인은 그런 성도를 어두운 데서 쏘려 한다. ‘어두운 데서 쏜다’는 말은 은밀히 해치려 한다는 뜻이다. 악인들은 솔직하거나 정정당당하지 못하고 거짓되며 이중적이다.

다윗은 환난 중에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다”고 고백한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피난처이셨다.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는 것이 믿음이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당황하거나 두려워 떨거나 낙심하는 것은 믿음 없음을 드러낼 뿐이다. 참 믿음은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에게 피하며 그의 품에 안기는 것이다. 시편 46편 저자도,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고 말했다(시 46:1).

[3절]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할꼬?

‘터’(foundations)는 하나님의 진리들을 가리킨다고 본다. 그것은 성경에 계시된 교리들과 생활 교훈들 곧 신앙생활의 기본 원리들을 가리킨다. 그것은 기독교의 기초이다. 실상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터이시다(고전 3:11). 우리는 기독교의 기본적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온전한 데로 나아가야 한다(히 6:1-2).

건물은 기초가 튼튼해야 한다. 기초가 튼튼하지 않으면 그 건물은 언젠가 무너지고 말 것이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이다. 기독교의 기본적 교리들이 부정되거나 무시된다면, 거기에 어떤 기독교적 삶이 가능하겠는가. 기독교의 기본적 교리들이 부정된다면, 거기에 참된 기독교는 없을 것이며 기독교인의 믿음과 소망은 헛될 것이다. 거기에는 신앙의 정조와 절개를 지키는 보수신앙과 의롭고 선하게 사는 도덕적 삶이 무의미하며 무가치할 것이다.

때때로 세상이 악화되어 사상적, 윤리적 기본이 흔들리는 시대가 있고 심지어 오늘날처럼 교회조차도 배교적이고 부도덕하게 되는 때가 있다. 세상은 심히 불경건하고 음란하고 쾌락적이며 자유주의적 교회들은 성경에 계시된 기독교의 기본 교리들을 부정하고 왜곡시키며 심지어 낙태와 동성애 등의 윤리적 악들을 포용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터는 견고하다. 디모데후서 2:19,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시편 102:27, “주는 여상(如常)하시고.” 말라기 3:6, “나 여호와는 변역지 아니하나니.” 히브리서 13:8-9,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우리는 성경대로 믿고 신앙의 절개를 지키며 의롭고 선하게 살아야 한다. 디모데후서 1:13,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라.”

[4절] 여호와께서 그 성전에 계시니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 안목이 저희를 감찰하시도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므로, 성도의 경건하고 의로운 삶의 기초는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그 성전에 계신다. 그는 무한하시고 온 우주에 충만하시지만 특히 천국에 계시며, 또 옛시대에 성막과 성전에서 구름으로 그의 영광 곧 그가 사람들과 함께하심의 영광을 나타내셨다. 그는 오늘날에는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 가운데 성령으로 함께 계신다(고전 3:16). 그는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다.

그는 특히 그 영광의 보좌를 하늘 즉 천국에 두셨다. 그의 보좌는 통치하시는 왕의 보좌이며 심판하시는 재판장의 보좌이다.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는 심히 거룩하고 위엄이 있으시다. 하나님께서는 하늘 보좌에서 온 세상을 통치하시고 의인들과 악인들을 감찰하시고 그들을 공의로 판단하시고 그들의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살피신다. 하나님의 눈은 매우 밝으시다. 하나님의 시력은 완전하시다. 그의 시력은 약해지거나 쇠하여지지 않으신다. 그는 우리의 삶을 감찰하신다. ‘안목’이라는 원어(아프아프)는 ‘눈꺼풀’ 즉 ‘눈’이라는 뜻이며 ‘감찰한다’는 원어(바칸)는 ‘시험한다, 증명한다’는 뜻이다.

그는 사람의 행위뿐 아니라 생각과 감정과 뜻까지도 다 아시고 그의 선함과 진실함을 시험하시고 판단하신다. 시편 139:1-4, 23,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5절] 여호와는 의인을 감찰하시고 악인과 강포함을 좋아하는 자를 마음에 미워하시도다.

하나님께서는 의인들을 감찰하시고 시험하시며 그들이 과연 진실한 신앙고백자인지, 참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의지하는지, 혹시 형식적이거나 위선적인 자가 아닌지 시험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또 악인과 강포함을 좋아하는 자를 마음에 미워하신다. 그는 겸손하고 사랑하는 의인을 인정하시지만, 교만하고 강포한 악인을 미워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그의 도덕적 판단이다. 하나님의 판단은 분명하시고 정확하시다. 세상 사람들은 악인들을 칭찬하고 그들을 친근히 할지 몰라도 악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는 항상 명확하시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악인들을 미워하신다.

[6절] 악인에게 그물을 내려치시리니 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이 저희 잔의 소득이 되리로다.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에게 그물을 내려치신다. 그것은 악인들이 받을 징벌이다. 아무리 약삭빠른 사람이라도 하나님께서 내려치시는 그물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또 그 징벌은 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으로 묘사된다. 그것들이 악인들의 소득이다. 불과 유황은 맹렬한 불의 형벌을 가리킨다. 유황은 성냥이나 화약의 원료로 불이 아주 잘 타는 물질이다. 하나님께서는 심히 음란한 소돔과 고모라 성에 유황과 불을 비같이 내리셨고(창 19:24) 또 최종적 지옥도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으로 성경에 묘사되어 있다(계 21:8). 태우는 바람은 환난과 재앙의 바람을 가리킬 것이다. 하나님께서 악인들에게 내리실 형벌을 통해 하나님의 공의가 증거되고 의인들의 억울한 고난이 보상되며 마침내 세상의 도덕 질서가 확립될 것이다.

[7절] [이는]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좋아하심이니] 정직한 자는 그 얼굴을 뵈오리로다[그의 얼굴은 정직한 자를 보시리로다](MT, KJV).7)

본문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처분의 이유, 즉 의인을 시험하여 인정하시고 악인의 악을 판단하시고 징벌하시는 이유를 제시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의로우시기 때문이다. 의(義)는 도덕적 표준에 일치함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도덕적으로 완전하시다. 실상, 그 자신이 도덕적 표준이시다. 또 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일을 좋아하신다. 하나님께서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고 악한 일을 미워하시는 것은 의로우신 하나님께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사실이다. 또 그의 얼굴은 정직한 자들을 보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의 악행을 미워하시지만, 의인들의 선한 행위들을 좋아하시고 그들에게 더 풍성한 은혜와 평강과 능력을 내리실 것이다.

시편 11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환난 중에 하나님께로 피하자. 이 세상은 환난이 많고 믿는 자들에게도 그러하다. 그러나 성도는 환난 중에 하나님께로 피한다. 그것은 믿음의 당연한 표현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마다 어려운 일을 당할 때 기도할 것이다. 시편 46:1,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오늘날 기본이 흔들리는 세상과 교회의 현실에서 우리는 주 예수님과 사도들을 통해 전수된 역사적 기독교, 성경에 계시된 모든 진리를 믿고 보수하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그에게 항상 피하자.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감찰하심을 알자.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온 세상을 감찰하고 계신다. 그는 눈은 밝고 완전하시다. 그의 시력은 세월이 흐른다고 쇠해지지 않으신다. 그는 의인들과 악인들을 아시고 감찰하시고 판단하신다. 그는 공의로운 재판장이시다. 그는 의인들과 악인들에게 그들의 행한 대로 공의로 보응하실 것이다.

셋째로,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의로운 삶을 살자.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을 미워하시고 그들의 악한 행위들에 대해 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으로 징벌하실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의인들의 삶을 인정하시고 기뻐하시고 그들에게 좋은 것으로 복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우리는 우리 속에 남은 모든 악한 것들을 다 버리고 오직 의로운 삶을 살자.

12편: 거짓된 세상에서 지키심

[1-2절] 여호와여, 도우소서.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가 인생 중에 없어지도소이다. 저희가 이웃에게 각기 거짓을 말함이여,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하는도다.

다윗은 하나님께 도움을 간구한다. 성도가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하나님을 모시고 산다는 것이 행복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도우시고 구원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며, 성도는 어려울 때마다 하나님께 도움을 간구할 수 있고 그의 응답함을 체험한다.

다윗이 하나님께 도움을 구한 까닭은 경건한 자가 끊어지고 충실한[충성된, 신실한, 믿을 만한] 자가 인생 중에 없어지기 때문이었다. 원문에는 1절 하반절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두 번 나온다. 경건하고 충성된 자가 하나씩, 둘씩 없어져 가는 현실은 슬프고 안타깝고 또 이런 구약교회의 영적, 도덕적 현실은 매우 절망적이게 보인다.

사람들은 서로 거짓말을 하며 아첨의 말을 하고 두 마음으로 말한다. 그들은 자기에게 유리하거나 불리하면 거짓말을 하고 남의 비위를 맞추며 속과 겉이 다른 말을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거짓말하는 자를 매우 미워하신다(잠 6:19). 또 아첨의 말은 사람을 멸망시킨다(잠 26:28).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고 교훈하였다(엡 4:25).

이런 현실에서 성도가 어떻게 신앙과 경건, 정직과 충성을 논할 수 있겠으며, 이런 현실에서 그가 어떻게 신앙과 정직을 지키며 또 고난과 외로움을 각오함이 없이 진리를 전파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이때 성도에게 하나님의 도우심이 절실히 필요한 것이다.

[3-4절] 여호와께서 모든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를 끊으시리니 저희가 말하기를 우리의 혀로 이길지라. 우리 입술은 우리 것이니 우리를 주관할 자 누구리요 함이로다.

사람의 거짓과 교만은 그의 말에서 드러난다. 사람들은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를 가지고 있다. 사람은 자기보다 지위가 높거나 돈이 많은 사람에게는 아첨하고 그렇지 못한 자에게는 자기를 자랑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를 끊으실 것이다. 그는 사람이 거짓된 아첨의 말이나 자랑의 말을 하지 못하게 하실 것이다. 그는 철저한 공의로 세상을 다스리실 것이다. 그는 사람의 말 한마디까지도 공의로 갚으실 것이다.

[5절] 여호와의 말씀에 가련한 자의 눌림과 궁핍한 자의 탄식을 인하여 내가 이제 일어나 저를 그 원하는 안전지대에 두리라 하시도다.

성도는 세상에서 악인들에게 눌림을 당하고 탄식하므로 가난하고 궁핍한 자, 가련하고 고통을 당하는 자로 표현되지만, 하나님께서는 정한 때에 일어나셔서 악인을 심판하시고 성도를 구원하실 것이다. “저를 그 원하는 안전지대에 두리라”는 구절에서 ‘그 원하는’이라는 원문(야피아크 로)은 ‘그를 비방하는 자로부터 건져’(NIV)라는 의미이든지, 혹은 ‘그가 원하는’이라는 뜻이라고 본다(NASB). 안전지대는 더 이상 원수의 비방과 핍박이 없고 싸움과 위협도 없고 오직 평안함만 있는 곳을 가리킨다.

[6절]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

악인들의 말은 악하고 거짓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순결한 은같이 오류나 거짓이 없다. 사람의 말은 불완전하고 불확실하고 거짓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완전하고 확실하며 정직하고 순결하여 전적으로 믿고 신뢰할 만하다(시 19:7-8).

[7절] 여호와여, 저희를 지키사 이 세대로부터 영영토록 보존하시리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악한 세대에서 성도를 지키시고 보존하실 것이다. 5절에 “내가 이제 일어나 저를 그 원하는 안전지대에 두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그대로 지켜질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전에 경건한 롯을 심히 음란한 소돔 성으로부터 구원하셨다(창 19:16-17, 29; 벧후 2:7-8).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키시고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 시편 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8절] 비루함이 인생 중에 높아지는 때에 악인이 처처에 횡행하는도다.

이 세상이나 부패한 교회에서, 악인들은 곳곳에서 활보하고 있고 비루함 즉 대단히 나쁘고 야비하고 부도덕한 일, 저질스럽고 무가치한 일이 사람들 중에 커지고 많아지고 있다.

시편 12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이 세상은 물론이며 교회도 때때로 심히 부패함을 알자. 구약교회인 이스라엘 사회는 그러하였고 신약교회의 역사도 그런 점들이 보인다. 교회가 부패할 때 경건하고 충성된 자를 찾아보기 어렵고 거짓과 아첨이 유행하고 참된 성도들은 눌림과 궁핍 때문에 탄식한다. 세상은 의례 그렇고 그러므로 회개해야 구원을 받지만, 교회도 때때로 그러한 것이다(딤후 3:1-5).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을 고난 가운데 그대로 버려두지 않으시고 끝까지 지키심을 알자. 하나님께서는 거짓말로 비방을 받는 참된 성도들을 돌아보시고 도우실 것이다. 그는 그들을 지키시고 건지셔서 다시는 고난이 없는 그 원하는 안전지대에 두실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순결함을 알자. 6절,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들은 완전하고 확실하고 정직하고 순결하다(시 19:7-8).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에 거짓과 오류가 없다고 믿는다.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다 이루어질 것이다.

13편: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림

[1-2절]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 내가 나의 영혼에 경영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쳐서 자긍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다윗은 원수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었다. 그는 여러 날 동안 마음에 근심하고 그의 원수는 그를 대항하여 자긍하며 의기양양해 하였다. ‘종일토록’이라는 원어(요맘)는 ‘날마다’(KJV, NIV) 혹은 ‘계속’(BDB)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의 마음의 근심과 고통은 여러 날 동안 계속되었고 점점 커져갔다고 보인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잊으신 것 같고 그 얼굴을 숨기신 것 같았다. 그는 다윗을 돕지도 않으셨고 그를 핍박하는 악인을 징벌하지도 않으셨고 다윗에게 위로의 말 한마디도 주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원문에 보면 다윗은 1절에서 2번, 2절에서 2번 아드 아나라고 부르짖는다. 우리 말 성경은 3번은 ‘어느 때까지’라고 번역했고 1번은 ‘언제까지’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침묵하심이 여러 날 동안 계속되었고 그의 마음의 고통도 여러 날 동안 계속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높으신 뜻, 깊으신 뜻, 지혜로우시고 선하신 뜻, 완전하신 뜻 가운데 어느 기간 동안 다윗을 그렇게 버려두셨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을 향해 ‘여호와여’ 하며 부르짖었다. 우리에게는 부르짖으며 기도할 하나님께서 계시다. 우리는 고아가 아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는 우리 아버지이시다. 기도는 성도의 특권이다. 그는 그의 정하신 때에 우리의 기도를 들으실 것이다.

[3-4절]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저를 이기었다 할까 하오며 내가 요동될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

고난 중에 다윗은 하나님께 두 가지를 기도하였다. 첫째로, 그는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소서”라고 기도하였다. ‘생각한다’는 원어(나바트)는 ‘본다, 주목한다, 중시한다(regard)’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주목하시고 중시하신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큰 행복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생각하셔서 롯을 소돔에서 건지셨다(창 19:29). 또 하나님께서는 라헬을 생각하셔서 요셉을 잉태케 하셨고(창 30:22), 한나를 생각하셔서 사무엘을 잉태케 하셨다(삼상 1:19). 이 세상에서 직면하는 우리의 모든 문제들의 해결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관심과 배려 안에 있다.

둘째로, 다윗은 “나의 눈을 밝히소서”라고 기도하였다. ‘눈을 밝힌다’는 것은 낙망하기 쉬운 고난의 현실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며 또 자신이 처신할 바를 바르게 깨닫고 바르게 판단하게 해달라는 것이다. 물론 자신의 부족이 있으면 철저히 반성하는 것도 포함될 것이다. 고난의 현실 속에서 사람이 눈이 어두우면 바른 길을 알지 못하고 방황하며 믿음 없이 행하고 말과 행위에 실수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눈이 밝아야 한다.

또 다윗은 자신이 이렇게 하나님께 간구하는 목적을 표현하였다. 그는 사망의 잠을 자지 않기 위해 기도한다고 말했다. 낙심은 사람을 불신앙에 떨어지게 하고 불신앙의 결과는 영적 죽음이다. 불신앙은 영적으로 잠자는 것과 같다. 그것은 죽음에 이르는 잠이다. 또 그는 그의 원수가 그를 이기었다고 승리의 개가를 부르고 기뻐하지 않게 하기 위해 기도한다고 말했다. 성도가 의와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거나 손이 피곤해지면 대적자들이 기뻐할 것밖에 없을 것이다.

[5-6절] 나는 오직 주의 인자하심을 의뢰하였사오니 내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나를 후대하심이로다.

다윗은 고난의 현실 중에서도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의지했다. 성도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긍휼하심을 의지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거룩하시기 때문에 죄인인 사람이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 특히 고난 중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하심밖에 의지할 것이 없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면 우리의 모든 어려운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을 멀리하지 말고 그에게 더 가까이 나아가 그의 긍휼과 인자의 품에 안겨야 할 것이다.

다윗은 고난 중에서 하나님의 구원과 그를 후대하심을 확신하고 있다. 지금은 원수들이 그를 핍박하고 대적하지만, 그는 하나님께서 그를 도우시고 그에게 좋은 것을 주실 것을 확신한다. 시편 34:8에서 그는,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말했다. 로마서 8:32에서 사도 바울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라고 말한다. 우리가 우리의 영혼을 영원한 지옥 형벌에서 건져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현실의 고난 중에서도 우리를 건져주실 것을 확신할 수 있다.

다윗은 또 이런 확신 가운데서 하나님을 기뻐하고 찬송하겠다고 말한다. “내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이다.” 하나님의 구원과 후대하심은 그의 기쁨의 이유이며 찬송의 이유이었다. 이것은 또한 우리의 기쁨과 찬송의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4:4에서 성도들에게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는 교훈하였다. 또 그는 히브리서 13:15에서,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고 교훈하였다.

시편 13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 경외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의 삶에도 때때로 고난의 시간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성도에게 주시는 고난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때때로 우리를 여러 가지 고통 가운데 버려두시지만, 그러나 어떤 고난이든지 고난은 우리에게 유익하다. 그것은 우리로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고(고후 1:8-9), 교만하지 않고 겸손케 하고(고후 12:7), 또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지키게 한다(시 119:71).

둘째로, 우리는 세상에서 어려운 문제를 직면했을 때 하나님께 다윗처럼 “나의 눈을 밝히소서”라고 기도하자. 우리는 우리의 마음의 눈이 밝아져 우리에게 고난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기를 원한다. 우리는 고난의 현실 속에서 우리 자신의 부족을 깨닫기를 원한다. 또 우리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한 참된 믿음을 포기하거나 낙망하거나 하나님을 향해 불평하지 않기를 원한다. 우리에게 닥친 모든 일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일어난다.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일어나지 않는다. 또 그 모든 일은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준다. 우리는 그것을 알기를 원한다.

셋째로, 우리는 고난의 현실 중에서 오직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의지하자. 우리가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오직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이다. 하나님 앞에서 행위로 온전한 자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구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의지하며 고난 중에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 주 예수께서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고 말씀하셨다(요 14:13-14). 또 히브리서 4:16은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고 교훈하였다. 우리는 고난 중에 하나님의 인자하심만 의지하자.

14편: 어리석고 부패된 인생

[1절]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하나님께서 안 계시다고 말하는 것보다 더 무지하고 어리석은 일은 없다. 왜냐하면 온 세상을 창조하셨고 그 세상을 다스리고 계신 영원자존하신 하나님께서 계시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의 생사화복(生死禍福)을 주장하시고 국가의 흥망성쇠(興亡盛衰)를 주장하시는 자이시다.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은 자식이 부모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자신을 낳으시고 기르신 부모를 부정하는 것이 큰 무지요 어리석음이듯이,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은 큰 무지요 어리석음이다.

또 하나님을 부정하는 자는 그 행위가 부패하게 되어 있다. 인류의 역사가 그것을 증거한다. 사람들은 다 죄인이며 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로 그를 두려워함이 없이는 악을 떠나지 못한다. 잠언 16:6, “인자와 진리로 인하여 죄악이 속(贖)하게 되고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인하여 악에서 떠나게 되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을 부정하고 하나님 없이 사는 자는 범죄하기 쉽고 범죄할 수밖에 없다. 그런 사람들에게서 참된 도덕성을 기대하기 어렵다. 세상에도 비교적 선한 사람들이 있으나 그들의 선행은 결함이 있는 선행이다. 그것은 환경에 따라 변하며 흔히 자기 자랑을 동반하고 위선적이다.

[2-3절]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사람들을 보시니 하나님을 찾는 자가 없고 다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보신 것이니 확실한 사실이다. 세상의 종교들은 우상숭배적이고 고행과 금욕을 가르치나 사람들로 하여금 참된 의와 선을 행하게 하지 못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긍휼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으로 말미암아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고 새 생명의 구원을 얻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바로 알고 바로 섬길 수 없고 우상숭배와 죄를 떠날 수 없고 도덕적인 삶을 살 수 없다.

[4절]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뇨? 저희가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하는도다.

본절을 다시 번역하면, “죄악을 행하는 자, 곧 내 백성을 떡 먹듯이 먹으며 여호와를 부르지 않는 자는 다 무지하뇨?”(KJV, NASB, NIV)이다. 악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참된 경건이 없고 사람을 사랑함이 없다.

[5절] 저희가 거기서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

‘거기서’라는 말은 악인들이 악을 행하는 장소를 가리키는 것 같다. 악인이 하나님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는 악을 행하는 곳에서 양심의 가책을 받고 하나님을 크게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진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의인들과 함께 계심을 느끼기 때문이다. 성경은 다윗을 죽이려 했던 사울이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하심을 보고 다윗을 더욱 두려워하였다고 증거한다(삼상 18:12, 28-29). 하나님께서는 그를 경외하고 순종하는 의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을 도우신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의 특권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도 때때로 그 사실을 보고 알게 된다.

[6절] 너희가 가난한 자의 경영을 부끄럽게 하나 오직 여호와는 그 피난처가 되시도다.

악인은 가난한 자 즉 고난 당하는 성도의 계획을 부끄럽게 한다. 즉 그는 그 계획을 방해하고 좌절시키려 한다. 그것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는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고난 당하는 성도들의 피난처가 되신다. 그것은 세상에서 성도들이 누리는 복이다.

[7절]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도다. 여호와께서 그 백성의 포로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 즉 예루살렘에서 나오기를 소원했다. 이것은 경건한 자들의 소원인 동시에 예언적 간구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과연 택한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시온에 보내주셨다. 다윗의 예언적 간구는 성취되었다. 동일한 예언이 이사야 2:2 이하에도 나온다. 이사야 2:2,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 들 것이라.” ‘여호와의 전의 산’은 시온산 즉 예루살렘 성이다. 주께서는 “그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회개와 죄사함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다”고 말씀하셨고(눅 24:47), 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다(행 1:8).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포로된 것을 돌이키실 것이다. 이 말씀은 성도들이 원수들의 핍박 아래에서 건져냄을 받는 것을 뜻하며 또 이스라엘 백성이 장차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돌아올 것을 예언하는 뜻도 있다. 또 영적으로 죄와 사탄과 사망에 포로된 인생들이 구원받을 것을 의미하는 뜻도 있다고 본다.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실 자로 이 세상에 오셨다(마 1:21). 우리는 죄와 영원한 지옥 형벌로부터 구원을 받은 자들이다.

이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구원을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한다. 구원은 하나님의 백성의 기쁨과 즐거움의 이유이다. 실상, 죄와 사탄과 사망으로부터의 구원보다 더 큰 복이 무엇이며 더 기쁘고 즐거운 일이 무엇이겠는가.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말씀하셨고(눅 10:20), 사도 바울은 “항상 기뻐하라. . . .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교훈하였다(살전 5:16-18).

시편 14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무신론은 어리석은 사상이다. 왜냐하면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영원자존하신 하나님께서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이며 그 하나님께서 친히 다스리고 계신 세상이다.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시다. 세계사는 하나님께서 그의 작정하신 바를 이루시는 역사이다. 그는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고 국가의 흥망성쇠를 주장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신론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둘째로, 무신론자는 부도덕하다. 어리석은 무신론자들은 그 행위가 부패하고 가증하며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다. 하나님께서는 도덕의 근거가 되신다.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죄를 멀리하고 의와 선을 행하게 된다. 무신론에서는 도덕의 근거가 없다.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다면 인간이 도덕적이어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러므로 무신론자들은 많은 악을 행하였고 또 행하고 있으며 특히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해왔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구주 예수님을 믿는 자가 의와 선을 행한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의인들과 함께 계신다. 성도는 세상에서 핍박을 당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피난처가 되신다. 세상은 불경건하고 부도덕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새 세계를 만드실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다. 이 하나님의 구원은 시온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회개와 구원의 운동은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어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확장될 것이며(눅 24:47; 행 1:8), 오늘날 온 세상에 충만히 이루어지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들과 함께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섬기고 의지하며 그의 뜻대로 의롭게만 살아야 한다.

15편: 하나님의 장막에 거할 자

[1-2절]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유할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거할 자 누구오니이까?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일삼으며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주의 장막’과 ‘주의 성산’은 천국을 가리킨다. 천국에 들어가 살기에 합당한 자들에 대해 본문은 열 한 가지의 자격을 말한다.

첫째로, 정직하게 사는 자이다. ‘정직하게’라는 원어(타밈)는 ‘완전하게’라는 뜻이다. 창세기 6:9는,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고 말하였고, 욥기 1:1은, “[욥은] 순전하고[완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고 말하였다. 완전함이란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게 살며 흠이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것을 말한다. 성도의 성화(聖化)의 목표는 도덕적 완전함이다.

둘째로, 의를 행하는 자이다. 의는 기준에 맞는 것을 말한다. 도덕적 기준은 바로 하나님의 계명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도덕적 속성과 뜻을 반영한다. 양심도 하나님의 도덕성을 반영한다. 그러므로 의로운 삶이란 양심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교훈대로 사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주관과 편견과 이익을 따라 살지 말고 하나님께서 주신 객관적 원칙 즉 그의 계명과 성경 교훈대로 살아야 한다.

셋째로, 그 마음으로 진실을 말하는 자이다. 진실은 사실 그대로를 가리킨다. 진실은 하나님의 속성이며 하나님 나라의 행동 원리이다. 마귀는 거짓말쟁이이며 거짓말쟁이들의 아비이다. 그러나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계 22:15). 성도는 자신에게 유익이 되든지 해가 되든지 진실만을 말해야 한다.

[3절] 그 혀로 참소치 아니하고 그 벗에게 행악지 아니하며 그 이웃을 훼방치 아니하며.

넷째는, 그 혀로 참소하지 않는 자이다. ‘참소한다’(라갈)는 원어는 ‘돌아다니며 거짓말로 남을 비방한다, 중상(中傷)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이웃의 명예를 훼손시키는 행위이다. 출애굽기 23:1은, “너는 허망한 풍설을 전파하지 말며 악인과 연합하여 무함[모함]하는 증인이 되지 말라”고 말했다. 느헤미야의 원수들은 그가 유다 사람들과 함께 모반하려 한다는 거짓말로 그를 비방하였었다(느 6:6).

다섯째는, 그 벗에게 악을 행치 않는 자이다. 악이란 남에게 해를 끼치는 행위를 가리킨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들에서 쳐죽인 일이나(창 4:8) 형들이 요셉을 미디안 상인들에게 종으로 판 것이나(창 37장)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은 30개에 팔아 넘긴 것은 다 악한 일이다. 살인, 폭력, 간음, 강간, 도적질, 인신 매매, 사기, 거짓된 비방, 명예 훼손 등은 다 천국에 합당치 않은 악한 일들이다.

여섯째는, 그 이웃을 훼방치 않는 자이다. 훼방은 남의 흠을 들어 그를 비난하는 것을 말한다. 이웃에 대한 말은 정당한 것이라도 꼭 필요한 경우 외에는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꼭 필요한 경우란, 교회의 유익을 위해 공적으로 증언하는 것이나 재판 석상에서 증언하는 것이나 남의 거짓된 비난에 대해 해명하는 것 등이다. 사도 바울은 교회의 유익을 위해 후메내오와 빌레도, 부겔로와 허모게네, 구리장색 알렉산더 등을 언급했고(딤전 1:20; 딤후 1:15; 2:17; 4:14), 사도 요한은 디오드레베를 언급했다(요삼 9). 그러나 우리는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마 7:1)는 주의 교훈을 기억해야 한다.

[4절] 그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를 존대하며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치 아니하며.

일곱째는, 그의 눈에 망령된 자를 멸시하는 자이다. ‘망령된’이라는 원어(니브제 ה������������������)는 ‘야비한, 비열한’이라는 뜻이다. 그는 비열한 자를 칭찬하거나 높이지 않고 멸시한다. 잠언 17:15는, “악인을 의롭다 하며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자는 다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느니라”고 말했고, 잠언 28:4는, “율법을 버린 자는 악인을 칭찬하나 율법을 지키는 자는 악인을 대적하느니라”고 했다.

여덟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을 존경하는 자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도덕성의 근본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요(잠 8:13),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악에서 떠나게 된다(잠 16:6). 그러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사람의 가치를 평가하는 데 있어 첫 번째 요소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세상의 부귀와 영광을 누렸던 악한 아합 왕보다, 비록 가난하지만 하나님을 경외한 선지자 엘리야가 확실히 더 존귀하고 가치 있는 자이다.

아홉째는, 자기가 한 맹세가 비록 자신에게 해가 되어도 지키는 자이다. 맹세는 하나님 앞에서 말하는 행위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는 맹세를 지킬 것이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그것을 지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맹세를 지키지 않는 것은 하나님 앞에 죄가 된다. 신명기 23:21, “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원하거든 갚기를 더디 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반드시 그것을 네게 요구하시리니 더디면 네게 죄라.” 사사 입다의 귀한 점은 그가 자기에게 해로운 서원을 이행한 것이었다. 그는 서원한 대로 그의 사랑하는 무남독녀(無男獨女)인 딸을 하나님께 번제물로 드렸다(삿 11장).

[5절] 변리로 대금치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치 아니하는 자니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이다.

열째는, 이자를 위해 돈을 빌려주지 않는 자이다. ‘변리’라는 원어(네쉐크)는 ‘이자 혹은 고리대금(usury)’이라는 뜻이다(BDB).8) 성경은 사회에서 인정된 대금업 혹은 은행업을 정당한 것으로 여기지만(마 25:27; 눅 19:23), 성도간에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것이나 특히 고리대금(高利貸金)을 금한다(출 22:25; 레 25:35-37).

열한째는,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롭게 하지 않는 자이다. 성도는 불의의 이익을 구해서는 안 된다. 성경은 장로나 집사의 자격으로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않는 것’을 꼽았다(딤전 3:3, 8; 딛 1:7). 우리는 돈을 정당하게 벌어야 한다. 잠언 16:8은, “적은 소득이 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나으니라”고 말한다. 더욱이,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롭게 하는 것은 참으로 악한 일이다.

시편 15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천국에 들어가 살기에 합당한 자들의 자격은 도덕적 완전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고 법적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지만,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실제로도 도덕적으로 의롭고 선하게 사는 것이다(마 5:20, 48; 7:21; 살전 4:3; 딤후 3:17). 빌립보서 4:8, “무엇에든지 참되며 . . .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 도덕적 완전은 우리의 행위의 문제, 곧 윤리의 문제이다.

도덕적 완전은 의와 진실과 선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천국에 합당한 자들은 하나님의 계명대로 의롭게 살고 진실을 말하며 이웃에게 선을 베풀어야 한다. 그들은 이웃을 거짓말로 비방하지 않고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않고 남의 흠을 들어 비난하지 않고, 또 비열한 말을 하는 자들을 멸시한다. 또 천국에 합당한 자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경하고 하나님 앞에서 한 서원은 자기에게 해가 될지라도 갚는다. 또 천국에 합당한 자들은 불의의 이익을 구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자를 위해 돈을 빌려주지 않고 또 뇌물을 받지 않는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법적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지만, 실제로도 도덕적 완전을 위해 힘써야 한다. 선한 행실이 없는 믿음은 큰 환난과 시험이 올 때 넘어지기 쉽지만, 선한 행실이 있는 믿음은 크게 요동치 않고 견고히 설 수 있다(마 7:24-27; 벧후 1:10-11).

16편: 하나님께서는 나의 복과 기업

[1-2절] 하나님이여, 나를 보호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시오니 주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다윗은 하나님께 피하며 그의 보호하심을 구한다. 세상에는 성도를 범죄케 하는 마귀의 시험과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이 많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보호자요 피난처이시다. 이것은 성도에게 큰 복이다. 다윗은 “주는 나의 주시오니 주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고 말한다. ‘주’라는 말은 주인, 소유자, 왕이라는 개념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주님, 즉 우리의 주인과 소유자와 왕이시다. 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유일한 복이시다. 하나님께서는 땅의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보배이시다. 이 세상의 모든 것, 해 아래 있는 모든 것은 다 헛되다(전도서).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유일하고 영원한 복이시다.

[3-4절]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나는 저희가 드리는 피의 전제(奠祭)[붓는 제사]를 드리지 아니하며 내 입술로 그 이름도 부르지 아니하리로다.

다윗은 땅에 있는 성도를 존귀한 자라고 말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한 친 백성이기 때문이다(벧전 2:9). 다윗은 그들에게 그의 모든 즐거움이 있다고 말한다. 사도 바울도 빌립보 교인들을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불렀고(빌 4:1),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는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고 말하였다(살전 2:20).

그러나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들은 괴로움이 더할 것이다. 세상에는 창조자와 통치자이신 한 분 하나님께서 계시며 그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은 헛것이다(시 96:5; 렘 10:11). 하나님께서는 우상숭배를 미워하시기 때문에,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헛수고하는 것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의 재앙을 피할 수 없다. 그들은 많은 괴로움을 얻을 것이다. 우리는 이방신의 이름도 미워해야 한다.

[5-6절]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산업 곧 기업이시다(시 73:26; 119:57). 땅에 있는 물질적인, 육신적인 것, 즉 땅이나 집이나 금은보석이나 현금 등은 지금 있다가 장차 없어질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성도에게 영원한 기업이시다. 또 ‘잔’은 기쁨과 즐거움의 상징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영원한 기쁨과 즐거움이 되신다.

또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분깃을 지켜주신다. ‘분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복을 가리킬 것이다. 그것은 영적, 육체적 복, 현세적, 내세적 복, 개인적, 가정적 복을 포함할 것이다. 아무리 좋은 복이라도 그것을 잘 지키지 못하면 계속 복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복을 지켜주시면, 우리는 영원히 복된 자가 될 것이다.

다윗은 또 하나님께서 그에게 배정하시고 주신 구역, 즉 현재 그가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복이 실로 아름답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정신적, 육신적 복은 참으로 아름답다. 거기에 더하여, 성도가 장차 들어갈 새 하늘과 새 땅과 거기서 누릴 영광스러운 몸의 부활과 영생은 참으로 아름다운 복이다.

[7절]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심장이 나를 교훈하도다.

하나님께서는 교훈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시편 73:24도,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신다”고 말했다. 사람은 무지하고 어리석어서 잘못 행할 때도 많고 알면서도 연약해 넘어질 때도 많다. 그때 하나님의 교훈은 크게 유익하다. 그 교훈은 오늘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책이다. 디모데후서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다윗은 교훈하시는 하나님을 찬송한다. 세상에는 교훈을 싫어하는 사람이 많다.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한다(잠 1:7).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의 교훈을 감사히 받았고 교훈하신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다. 다윗은 밧세바를 범하고 그 남편 우리아를 죽게 한 큰 죄를 지은 후 선지자 나단이 그의 죄를 지적하고 그를 책망했을 때 즉시 회개하였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하나님의 교훈을 겸손히 받는다. 하나님의 교훈은 생명과 평안의 길이기 때문이다.

다윗은 그의 심장이 밤마다 그를 교훈한다고 말한다. ‘밤마다’라는 원어(아프 렐로스)는 ‘심지어 밤에도’라는 뜻이다. ‘심장’이라는 원어(킬야)는 ‘내장, 속, 마음’을 가리킨다. 또 ‘교훈한다’는 원어(야사르)는 ‘책망한다’는 뜻이다. “그의 심장이 밤마다 그를 교훈한다”는 말은 낮에 진지하게 받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속에 간직되어 밤에도 그를 교훈하고 책망한다는 뜻일 것이다.

[8절]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다윗은 하나님을 항상 자기 앞에 모시고 살았다. 그것이 경건한 삶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인정하며 높이며 경배하며 그의 말씀 듣기를 사모하며 그에게 기도하는 삶이다. 사람은 어려운 일을 당할 때 하나님을 찾고 그의 도움을 구하지만, 평안하고 건강할 때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하나님 없이 불경건하게 살기 쉽다. 그러나 경건한 자는 항상 하나님을 모시고 산다. 다윗은 어린 목동 시절에도, 왕이 된 후에도 경건하게 살았다. 아브라함은 이사 가는 곳마다 하나님께 단을 쌓았다. 요셉은 종살이하면서도 하나님을 경외하였고,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하나님을 섬겼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오른편에 계셨다. 오른편은 힘있는 편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오른편에 계시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힘이 되신다는 뜻이다. 다윗은 하나님을 항상 모시고 살았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힘이 되셨다. 성도가 여호와를 앙망하면 새 힘을 얻는데(사 40:31), 그를 항상 모시고 산다면 더욱 힘을 얻을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의 오른편에 계시므로 요동치 않는다고 고백한다. ‘요동치 않는다’는 것은 믿음이 없어 불안하거나 근심 걱정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계명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께 힘을 얻어 환난 중에서도 평안함을 얻고 담대하며 낙심치 않는다. 풍랑 중에 당황했던 제자들은 믿음 없다는 책망을 들었으나,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다.

[9절]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광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거하리니.

‘이러므로’라는 말은 하나님을 항상 모시고 삶으로 심령에 요동함이 없기 때문에라는 뜻이다. 다윗은 이러므로 그의 마음이 기쁘다고 말한다. 성령의 열매는 기쁨이다(갈 5:22).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다(롬 14:17). 그러므로 바울은 “항상 기뻐하라. . . .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말하였다(살전 5:16-18). 하나님 안에 기쁨이 있고 그와 교제하는 자마다 그 기쁨을 맛볼 것이다. 다윗은 또 “내 영광도 즐거워한다”고 말한다. ‘내 영광’이라는 말은 사람에게 존귀한 부분인 영혼을 가리킨다. 그것은 ‘내 마음이 기뻐한다’는 구절과 뜻이 같다.

다윗은 또 그의 육체도 안전히 거할 것이라고 말한다. 사람은 영혼의 기쁨뿐 아니라 육체의 평안도 필요하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영육의 복을 주신다. 그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과 성막 제도뿐 아니라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셨고 발이 부르트지 않고 신발이 해어지지 않게 하셨다(신 8:3-4). 시편 23:2, 4,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10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본절은 앞에서 말한 영육의 기쁨과 평안의 이유를 다시 보충한다. 다윗의 기쁨의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의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음부’라는 원어(쉐올)는 ‘무덤’ 혹은 ‘지옥’을 가리킨다. 여기서 그것은 영혼이 들어가는 곳이므로 ‘지옥’을 가리킬 것이다. 사람이 죽은 후 그 영혼이 지옥에 던지우면, 살아 있을 때 그의 기쁨과 즐거움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오히려 그는 슬피 울며 통곡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혼을 지옥에 버리지 않으실 것을 확신하고 기뻐한다.

다윗은 또 하나님께서 ‘그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이므로 기뻐한다고 말한다. ‘그의 거룩한 자’는 누구를 가리키는가? 다윗은 죽었고 그의 몸은 썩었다. 이 말씀은 성령의 감동으로 메시아의 부활을 예언한 것이라고 본다. 이 예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그대로 이루어졌다. 예수께서는 죽은 지 3일 만에 몸이 썩지 않고 영화로운 몸으로 부활하셨다. 사도행전 2:29-32에 보면, 사도 베드로는 이 구절을, 다윗이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내다보면서 그가 음부(무덤과 지옥)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지 않을 것을 예언한 것이라고 증거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은 자의 부활의 첫열매로서 성도의 소망이며 기쁨의 이유가 된다.

[11절]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생명의 길로 그에게 보이실 것이라고 말한다. 성도는 세상에서 죽음의 위협을 당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보호자이시므로 우리는 죽지 않고 살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생명의 원천이시다. 그는 “모든 육체의 생명[영]의 하나님”이시다(민 16:22; 27:16). 생명의 근원은 그에게 있다(시 36:9). 사람은 범죄함으로 죽게 되었었으나 하나님의 죄사함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다시 얻는다.

하나님께서 보이신 생명의 길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셔서 그를 믿는 자가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셨다(요 3:16). 예수께서는 그의 말을 듣고 그를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고 말씀하셨다(요 5:24). 그는 하늘로부터 내려오신 생명의 떡이시다(요 6:48). 그가 오신 것은 양들로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하심이었다(요 10:10). 그는 부활이요 생명이시다.

또 하나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그의 오른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기쁨의 하나님이시며 성도에게 기쁨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천국은 기쁨과 즐거움의 세계이다. 거기에는 눈물과 죽음과 아픈 것이 더 이상 없을 것이다(계 21:4).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은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기쁨이 아니고, 영원한 기쁨이다.

시편 16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을 ‘나의 주’ ‘나의 유일한 복’ ‘나의 기업’으로 바로 알자. 온 세상의 창조주와 섭리자이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유일하시고 영원하신 복이며 기업이시다.

둘째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교훈을 받자.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에게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말씀이다(딤후 3:16). 우리는 성경을 주야로 읽고 들음으로써 교훈을 받자.

셋째로, 우리는 영생과 기쁨을 누리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을 죄와 지옥 형벌에서 구원하셨고 몸의 부활과 영생과 천국의 복을 주셨다. 하나님께서 주신 영생의 구원으로 인해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자.

17편: 정직한 부르짖음

[1절] 여호와여, 정직함을 들으소서. 나의 부르짖음에 주의하소서. 거짓되지 않은 입술에서 나오는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소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로운 기도를 들어주시기를 소원한다. ‘정직함’이라는 원어(체데크)는 ‘의로움’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의롭고 정직하게 행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잘 들어주실 것이다. 요한일서 3:21-22,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다윗은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했다. 고난 중에서 성도는 때때로 부르짖어 기도한다. 다윗은 또 “거짓되지 않은 입술에서 나오는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소서”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진실한 기도를 잘 들어주실 것이다.

[2-3절] 나의 판단을 주 앞에서 내시며 주의 눈은 공평함을 살피소서. 주께서 내 마음을 시험하시고 밤에 나를 권고(眷顧)하시며 나를 감찰하셨으나 흠을 찾지 못하셨으니 내가 결심하고 입으로 범죄치 아니하리이다.

‘나의 판단’이라는 말은 ‘나에 대한 판단’을 가리키는 것 같다. 다윗은 평소에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살려고 애썼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양심적으로 잘못 행함이 없었고 말로라도 범죄치 않겠다고 결심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현실은 어두웠다. 그는 원수들로 인하여 고통을 받고 있었다. 그는 이제 이런 고통의 현실 속에서 하나님께 의롭고 공정한 판단을 호소하는 것이다. 살아계신 섭리자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살고자 애쓰는 자가 아니고서는 감히 이런 담대한 호소를 할 수 없을 것이다.

[4-5절] 사람의 행사(페울로스)[행위들]로 논하면 나는 주의 입술의 말씀을 좇아 스스로 삼가서 강포한 자의 길에 행치 아니하였사오며 나의 걸음이 주의 길을 굳게 지키고 실족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성도들에게 믿음과 사상만 중요한 것이 아니고 또한 행위와 삶도 중요하다. 성도의 행위의 표준은 성경말씀 곧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다. 성경의 주요 내용은 강포한 자의 길을 버리고 선한 마음을 가지고 사랑하며 살라는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살았고 강포한 자의 길에 행하지 않았으며 또 하나님의 은혜로 그의 걸음은 하나님의 길, 곧 하나님께서 교훈하시고 성경에 기록하신 생활 방식을 굳게 지키고 실족지 않았다.

[6절] 하나님이여, 내게 응답하시겠는 고로 내가 불렀사오니 귀를 기울여 내 말을 들으소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시는 자임을 믿었다. 시편 65:2,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 주 예수께서는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교훈하셨다(마 7:7-8).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신 인격적 신이시므로 기도에 응답하시며, 긍휼이 많으시므로 고통 중의 부르짖음을 돌아보시며, 전능하시므로 무엇이든지 또 언제든지 원하시면 도우실 수 있다.

다윗은 하나님께 기도하였고 그의 응답을 기다리고 있다. 기도의 응답은 때때로 더딘 것같이 보이나 우리는 낙심치 말고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며 기다려야 한다. 시편 40:1은,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라고 말한다. 믿음의 선진들은 기도의 사람들이었다. 아브라함은 시시때때로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고, 모세는 어려울 때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렸고, 사무엘도, 다윗도 그러했다. 히스기야, 다니엘, 에스라, 느헤미야는 다 기도의 사람이었다. 예수께서는 새벽에 기도하셨고, 밤을 새우며 기도하셨고, 땀을 흘리며 기도하셨다.

[7-9절] 주께 피하는 자를 그 일어나 치는 자에게서 오른손으로 구원하시는 주여, 주의 기이한 인자를 나타내소서. 나를 눈동자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사 나를 압제하는 악인과 나를 에워싼 극한 원수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

하나님을 믿는 자는 환난 중에 그에게 피하며 그를 의지할 것이다. 시편에는 하나님께 피한다는 표현이 자주 나온다. 5:11, “주에게 피하는 자는 다 기뻐하며.” 7:1,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주께 피하오니 나를 쫓는 모든 자에게서 나를 구하여 건지소서.” 11:1,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더러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찜인고.” 16:1, “하나님이여, 나를 보호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피하는 자들을 그 일어나 치는 자들에게서 오른손으로 구원하시는 자이시다. 오른손은 능력의 손이다. 세상에는 성도들을 대적하는 자들이 많다. 사람들은 자신의 악함이 드러날 때 성도들을 미워한다. 마귀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미워하고 시험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피하는 자들을 그의 대적들과 원수들로부터 그의 능력의 손으로 구원하신다.

‘주의 기이한 인자’는 사람들의 생각과 기대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인자로 도우심을 가리킨다. 구원은 하나님의 인자의 손길이다. 우리는 부족하고 연약한 자들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셨고 또 시시때때로 그의 긍휼과 인자로 우리를 도우신다.

다윗에게는 그를 압제하는 악인들, 그를 에워싼 극한 원수들이 있었다. 성도들에게 가장 악한 원수는 사탄이며 그밖에도 많은 원수들이 있다. 다윗은 이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 그를 눈동자같이 지켜주시기를 구한다. 눈동자는 사람의 몸의 지체 중에서 매우 민감하게 지키는 부분이다. 눈꺼풀은 자동셔터문, 눈썹은 보초병, 그리고 눈물샘은 자동세척장치와 같다. 사람이 자기 눈동자를 보호하듯이,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보호하신다.

또 다윗은 하나님께서 날개 그늘 아래 그를 감추시기를 간구하였다. 시편에는 이런 표현이 자주 나온다(36:7; 57:1; 91:1, 4). 어미새의 ‘날개 그늘’은 새끼들에게는 가장 평안하고 안전한 장소이다. 하나님의 날개는 그 어떤 어미새의 날개보다 더 평안하고 안전하다.

[10-12절] 저희가 자기 기름에 잠겼으며 그 입으로 교만히 말하나이다. 이제 우리의 걸어가는 것을 저희가 에워싸며 주목하고 땅에 넘어뜨리려 하나이다. 저는 그 움킨 것을 찢으려 하는 사자 같으며 은밀한 곳에 엎드린 젊은 사자 같으니이다.

성도를 핍박하는 악인은 어떤 자인가? 첫째로, 악인은 자기 기름에 잠긴 자, 즉 물질적 부요 속에서 자기 만족에 빠져 있는 자이다. 둘째로, 악인은 그 입으로 교만하게 말하는 자이다. 악인은 자신을 크게 생각하며 자랑하는 말을 잘 한다. 사람의 교만한 마음은 그의 눈과 얼굴 표정과 특히 그의 말에서 나타난다. 셋째로, 악인은 성도를 해치려 하는 자이다. 그는 성도의 걸음을 에워싸며 눈을 땅을 향하게 한다. 11절 후반은 옛날 영어성경(KJV)처럼 “그들의 눈을 땅을 향하게 하나이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은 것 같다. 그것은 성도를 해하려는 악인들의 음흉한 표정을 묘사한 것 같다. 그들은 은밀한 곳에 엎드린 젊은 사자와 같다.

[13-14절] 여호와여, 일어나 저를 대항하여 넘어뜨리시고 주의 칼로 악인에게서 나의 영혼을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금생에서 저희 분깃을 받은 세상 사람에게서 나를 주의 손으로 구하소서. 그는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심을 입고 자녀로 만족하고 그 남은 산업을 그 어린아이들에게 유전하는 자니이다.

악인들은 이 세상에서 자기의 분깃을 받은 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인이신 이 세상에서 물질적 부요를 누리며 자녀들도 많고 그 남은 산업을 그 어린아이들에게 물려주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것은 합당치 않다.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의 구원을 호소한다. “여호와여, 일어나 저를 대항하여 넘어뜨리시고[저를 대면하여 굴복시키시고] 주의 칼로 악인에게서 나의 영혼을 구원하소서.” 하나님께서 잠잠하신 동안 악인들은 자기 세상인 양 활개를 치지만, 그가 일어나시면 상황은 즉시 바뀔 것이다.

[15절]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다윗은 의로운 삶을 끝까지 힘쓰다가 주님을 뵈올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후 죽을 때까지 의롭게 살아야 한다. ‘깰 때에’라는 말은 죽은 후 천국에서 깨는 것을 가리킬 것이다. 그때 우리는 주의 형상을 뵈올 것이다. 그는 영광스런 몸을 가지고 계신다. 그를 뵙는 것은 매우 큰 행복이 될 것이다.

시편 17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의로운 삶을 살자.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이제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고 죄를 멀리함으로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다윗은 고난 중에 자신의 의와 순전을 고백하였다. 우리는 악인처럼 남을 해치고 강포하고 교만하고 땅의 것만 구하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고난 중에 하나님께 피하며 그의 인자를 의지하며 구원을 간구하자. 성도의 의로운 삶은 환난 중에 기도의 담대함이 될 것이다. 의인들의 기도와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있다(약 5:16; 요일 3:21-22).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눈동자같이 지키시고 그의 날개 아래 감추실 것이며 우리의 원수들을 파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과 내세 천국에만 소망을 두고 살자. 이 세상의 부귀영화는 잠시 있다가 없어질 것이다. 악인들은 이 세상의 헛된 것만 구하는 자들이지만, 성도는 하나님과 내세 천국을 보화로 삼는다. 우리는 의롭게 살다가 죽은 후 천국에서 영광의 주님을 뵈올 것이다.

18편: 나의 힘과 구원이신 하나님

1-27절,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1-3절]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반석’이라는 원어(셀라)는 적들의 공격을 피할 수 있는 ‘울퉁불퉁한 바위나 절벽’(BDB)을 가리킨다. ‘바위’라는 원어도 보호하고 방어하는 것을 말하며, ‘산성’이라는 원어(미스가브)도 ‘안전하게 높은 곳’을 가리킨다(BDB). ‘구원의 뿔’은 구원의 능력을 말한다.

사람들은 사랑하는 남편이나 아내 혹은 자녀들을 자신의 힘으로 삼고 살거나 세상의 재력가나 권세자를 힘으로 삼지만, 죽음의 위기에서 그들은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온 세상의 창조자와 섭리자이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우리의 구주, 반석, 요새, 피할 바위, 방패와 산성이신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의 도움이 되신다.

다윗은 고난 중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힘과 도움이 되셨고 그 일로 인해 그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그는 또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고 말한다. 그는 지금 고난 중에 있지만 하나님께 기도할 것이며 그의 원수들의 공격으로부터 구원을 얻을 것을 확신한다. 오늘날도 고난 많은 세상의 현실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변함이 없이 우리의 힘이 되시고 그것을 체험한 자들마다 다윗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4-6절] 사망의 줄(케벨)[혹은 ‘고통’](LXX, KJV)이 나를 얽고[에워싸고] 불의(不義)(벨리야알)[혹은 ‘악한 자들’]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음부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 내가 환난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저가 그 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 귀에 들렸도다.

다윗을 죽이려는 음모와 시도들이 그를 에워쌌고 악한 원수들이 홍수같이 그를 두렵게 했고 지옥에 떨어뜨릴 듯한 고통이 그를 둘렀고 그를 죽이려는 올무들이 여기 저기 그 앞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환난 중에 다윗의 대책은 주위 환경여건만 쳐다보지 않고 위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는 하나님께 자신이 처한 상황을 그대로 아뢰었고 하나님께 간구하며 부르짖었다. 기도, 특히 부르짖는 기도는 원수들 앞에서 성도의 가장 강한 무기이며 환난을 당한 성도가 가질 가장 좋은 대책이다. 환난 중에 성도의 할 일은 기도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성전에서 다윗의 기도를 들으셨다. ‘그의 전’은 천국과 땅의 성전을 다 의미할 수 있다고 본다.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시며 자기 백성의 기도에 응답하신다(시 50:15; 마 7:7).

[7-8절] 이에 땅이 진동하고 산의 터도 요동하였으니 그의 진노를 인함이로다. 그 코에서 연기가 오르고 입에서 불이 나와 사름이여, 그 불에 숯이 피었도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원수들에게 진노하고 징벌하셨다. 그가 노하시면 그의 음성은 천둥소리 같아서 땅과 산의 터를 진동시키시고, 그의 코에 연기가 오르고 그의 입에 불이 나와 원수들을 징벌하신다.

[9-11절] 저가 또 하늘을 드리우시고 강림하시니 그 발 아래는 어둑캄캄하도다. 그룹을 타고 날으심이여, 바람 날개로 높이 뜨셨도다. 저가 흑암으로 그 숨는 곳을 삼으사 장막같이 자기를 두르게 하심이여, 곧 물의 흑암과 공중의 빽빽한 구름으로 그리하시도다.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높은 하늘 위에 계시지만 고난 당하는 성도를 돕기 위해 땅에 내려오신다. 그는 그룹을 타고 나시며 바람 날개로 높이 뜨신다. 그룹은 하나님을 호위하는 천사들이다. ‘바람 날개’라는 말은 ‘영의 날개’라는 뜻으로 천사들에 대한 비유적 표현이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사역을 수종든다. 그들은 빛처럼 빠르게 이동하며 일한다. 하나님의 발 아래는 어둑캄캄하다. 그는 물의 흑암과 빽빽한 구름으로 그 숨는 곳을 삼으신다.

[12-15절] 그 앞에 광채로 인하여 빽빽한 구름이 지나며 우박과 숯불이 내리도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뇌성을 발하시고 지존하신 자가 음성을 내시며 우박과 숯불이 내리도다. 그 살을 날려 저희를 흩으심이여, 많은 번개로 파하셨도다. 이럴 때에 여호와의 꾸지람과 콧김을 인하여 물밑이 드러나고 세상의 터가 나타났도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면 그 영광의 광채로 인하여 빽빽한 구름이 우박과 천둥 번개로 변할 것이다. 천둥은 그의 음성과 같다. 하나님께서는 우박과 불을 내리신다. 그는 자연 현상들을 주관하시고 그것들을 사용하신다. 그는 천둥과 번개, 우박과 불 등으로 원수들을 흩으시고 파하신다. 그는 자연 현상들을 자유로이 사용하셔서 그 원수들을 징벌하시고 자기 백성을 그들에게서 구원하신다.

[16-19절] 저가 위에서 보내사 나를 취하심이여, 많은 물에서 나를 건져내셨도다. 나를 강한 원수와 미워하는 자에게서 건지셨음이여, 저희는 나보다 힘센 연고로다. 저희가 나의 재앙의 날에 내게 이르렀으나 여호와께서 나의 의지가 되셨도다. 나를 또 넓은 곳으로 인도하시고 나를 기뻐하심으로 구원하셨도다.

‘많은 물’은 많은 환난을 가리킨다. 다윗의 원수들은 세력이 강하고 다윗보다 힘센 자들이었다. 다윗이 당한 환난은 재앙과 같았다. 그러나 다윗은 환난 중에 하나님을 의지하였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환난에서 건져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의지하는 자, 그의 뜻에 순종하며 의롭게 살고자 하는 자를 버리지 않으시고 구원하신다.

[20-24절]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상 주시며 내 손의 깨끗함을 좇아 갚으셨으니 이는 내가 여호와의 도를 지키고 악하게 내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며 그 모든 규례가 내 앞에 있고 내게서 그 율례를 버리지 아니하였음이로다. 내가 또한 그 앞에 완전하여 나의 죄악에서 스스로 지켰나니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갚으시되 그 목전에 내 손의 깨끗한 대로 내게 갚으셨도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의롭고 깨끗하게 행했다. 의(義)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을 말한다. 다윗은 하나님의 도(道)를 지키고 악하게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고 하나님의 모든 규례를 그 앞에 두고 버리지 않았다. 성경 교훈대로 사는 것이 의요 성경 교훈을 거슬러 행하는 것이 악이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완전하게 행했다. ‘완전하다’는 원어(타밈)는 ‘책망할 것이 없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의를 따라, 그의 손의 깨끗함을 좇아 갚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의롭고 깨끗한 행위에 대해 상주시고 갚아주신다. 의로운 자들은 평안이 강과 같을 것이며(사 48:18), 유다 왕 히스기야처럼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 것이며(왕하 18:6-7), 환난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다.

[25-26절]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특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리심을 보이시리니.

공의의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선악의 행위에 따라 그에게 공의로 보응하신다.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신다. ‘자비하다’는 원어(카시드)는 ‘자비하다, 친절하다’는 뜻이다. 주께서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다(마 5:7). 또 야고보서 2:13은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고 말한다.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신다. ‘완전하다’는 원어(타밈)는 ‘책망할 것이 없다’는 뜻이다. 성도는 하나님을 전심으로 믿고 따르며 흠 없고 책망할 것 없는 인격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성도에게 응답하시며 복을 주시며 능력을 베푸신다.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신다. 죄는 우리를 더럽고 불결하게 만들지만 죄를 떠난 자는 깨끗하다. 성도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중에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해야 한다(고후 7:1). 하나님께서는 이런 성도에게 그의 깨끗하심, 즉 그의 의롭고 선하신 처분을 항상 내리실 것이다.

그러나 사특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르심을 보이신다. ‘사특하다’는 원어(익케쉬)는 ‘비뚤어지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교훈을 거스르고 비뚤어지고 패역하게 행하는 자에게 노와 분으로 갚으신다(롬 2:8-9). 악인에게는 평안이 없다(사 48:22).

[27절]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눈은 낮추시리이다.

하나님께서는 공의로 통치하신다. 하나님의 공의의 처분은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눈은 낮추시는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을 바로 알자.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스스로 계신 하나님으로서 홀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고 섭리하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는 지금도 살아계셔서 그를 경외하는 자들을 지키시고 환난에서 구원하신다. 그는 우리의 힘과 구원, 우리의 반석과 요새, 우리의 피할 바위와 방패와 산성이시다.

둘째로, 우리는 환난 때에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자. 환난 때에 다윗의 부르짖는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오늘날에도 그를 경외하고 의지하고 순종하는 자기 백성의 부르짖는 기도를 들어주신다. 하나님을 믿는 자는 그에게 기도한다. 기도, 특히 부르짖는 기도는 환난 당한 성도의 가장 좋은 대책이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깨끗하게, 완전하게만 살자. 우리의 신앙생활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 앞에서 의롭고 선하게만 산다면, 우리에게 닥친 환난은 염려거리가 아니다. 그것은 믿음과 기도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다. 다윗의 의와 그 손의 깨끗함을 따라 상주시며 응답하신 하나님께서는 오늘날도 구주 예수님을 믿는 우리의 행위의 의와 온전함에 상주실 것이다.

28-50절, 이길 힘과 구원을 주심

[28-29절] 주께서 나의 등불을 켜심이여, 여호와 내 하나님이 내 흑암을 밝히시리이다.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에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 넘나이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등불을 켜시며 흑암을 밝히실 것이다. 본문의 흑암은 슬픔과 불행을 상징하고, 등불은 기쁨과 행복을 상징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서 슬픔과 불행을 제거하시고 그를 건져내셔서 기쁨과 행복을 주실 것이다. 또 그러면 다윗은 사람을 의지하거나 칼과 창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며 적군에 달리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담을 뛰어넘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만 의지하며 용감히 행하는 성도들에게 좋은 것을 주실 것이다.

[30-31절] 하나님의 도(道)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정미(精美)하니 저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의 방패시로다. 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이며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 반석이뇨?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다. ‘도’는 생활 교훈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완전한 교훈은 우리의 생활 지침이다. 또 하나님의 말씀은 정미하다. ‘정미(精美)하다’는 원어(체루파)는 ‘제련되다’는 뜻이다. 용광로에서 깨끗하게 제련된 광석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오류가 없고 다 진리이며 유익하다. 성경은 오류가 없고 완전하다. 시편 12:6,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 시편 19:7,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피하는 자, 즉 그를 의지하는 모든 사람들의 방패이시다. 그는 환난 날에 원수들의 불화살을 막아주시는 방패가 되신다. 여호와께서는 세상에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다. 그 외에 다른 신이 없다. 그는 자기 백성이 의지할 반석이시며 피난처와 요새시다. 세상에는 여호와 외에 다른 하나님이 안 계신다. 그는 우리를 죄와 죽음과 영원한 멸망으로부터 또 마귀와 악령들로부터 건져주신 우리의 유일한 구주이시며 우리의 영원한 기쁨과 소망이시다.

[32-34절] 이 하나님이 힘으로 내게 띠 띠우시며 내 길을 완전케 하시며 나의 발로 암사슴 발 같게 하시며 나를 나의 높은 곳에 세우시며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니 내 팔이 놋활을 당기도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힘을 주신다. 육신의 힘도 주시지만, 특히 영혼의 힘, 즉 믿음과 소망으로 살고, 선을 행하고 낙심치 않고, 사랑하고, 진리를 위하여 싸우고, 고난을 참을 힘을 주신다. 우리는 때때로 연약하고 피곤해지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힘이 되신다.

또 그는 우리의 길을 완전하게 하신다. 그는 우리의 행위와 삶이 흠이 없게 되도록 도우신다. 우리의 거룩한 행위와 온전함은 하나님께서 도우시고 이끄시는 은혜이다. 우리는 성령의 힘과 도우심으로 거룩하고 선한 인격을 점점 더 이룬다.

하나님께서는 또 우리 발로 암사슴 발 같게 하시고 우리를 높은 곳에 세우신다. 암사슴 발은 튼튼하고 지치지 않고 잘 달리는 발이다. 그것은 힘있는 신앙생활을 뜻한다고 본다. 골짜기는 고난을, 높은 곳은 평안과 승리를 가리킬 것이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빈번히 실패할 것이지만, 그의 은혜로 평안과 승리의 삶을 산다.

하나님께서는 또 우리의 손을 가르쳐 원수와 싸우게 하시며 우리의 팔을 굽혀 놋활을 당기게 하신다. 성도는 사탄과 악령들과 세상의 악한 자들과 싸운다(엡 6:10-13). 신앙생활은 영적 싸움의 과정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한 가장 좋은 훈련 대장이시다.

[35-36절] 주께서 또 주의 구원하는 방패를 내게 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들고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 내 걸음을 넓게 하셨고 나로 실족지 않게 하셨나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구원의 방패를 다윗에게 주셨다. 그런 방패가 없었다면, 다윗은 원수의 화살들에 부상당했거나 심지어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구원의 방패로 이기게 하셨다.

하나님의 능력의 오른손은 다윗을 굳게 붙드셨다. 다윗은 마음이 연약해지고 두려움이 생기고 생각이 착잡해질 때가 없지 않았을 것이지만 크게 낙심하거나 요동치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능력의 손으로 그를 붙드셔서 그 모든 어려움을 잘 참고 이기게 하셨다.

또 하나님의 온유함은 그를 크게 하셨다. 이새의 막내아들, 양 치던 목동 다윗을 들어 유대 나라의 왕을 삼으신 자는 온유하신 하나님이셨다. 그는 다윗이 실수하고 범죄했을 때도 그를 버리거나 떠나지 않으시고 그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를 들어 사용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걸음을 넓게 하셨다. ‘내 걸음을 넓게 하셨다’는 원어는 ‘내 아래에 있는 나의 발판들을 넓게 하셨다’는 의미이다. 징검돌을 딛고 개울을 건널 때, 그 디딤돌이 작으면 발이 미끄러질 위험이 크겠으나, 그 디딤돌이 크고 넓으면 발이 미끄러지지 않고 잘 건널 수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걸음에 디딤돌들을 넓게 하셔서 그로 미끄러져 넘어지지 않게 해주셨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성도들을 위해서도 그들의 발 아래 겨우 디딜 만한 작은 돌들을 놓아두지 않으시고, 크고 넓은 돌들을 두셔서 걷기에 안전하고 실족지 않게 하실 것이다.

[37-39절] 내가 내 원수를 따라 미치리니 저희가 망하기 전에는 돌이키지 아니하리이다. 내가 저희를 쳐서 능히 일어나지 못하게 하리니 저희가 내 발 아래 엎드러지리이다. 대저 주께서 나로 전쟁케 하려고 능력으로 내게 띠 띠우사 일어나 나를 치는 자로 내게 굴복케 하셨나이다.

다윗은 원수와 접전하여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성도는 영적 전쟁에서 원수 마귀와 악령들이 우리 발 아래 완전히 굴복할 때까지 싸워야 한다. 원수들은 참으로 강하지만, 우리의 대장 예수께서는 전쟁에 능한 큰 용사이시며 그를 믿고 순종하는 자마다 승리할 것이다. 전쟁에서의 다윗의 승리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으로 전쟁케 하려고 능력으로 그에게 띠 띠우셨고 그를 대적하여 일어난 자들로 그 앞에 굴복케 하셨다.

[40-42절] 주께서 또 내 원수들로 등을 내게로 향하게 하시고 나로 나를 미워하는 자를 끊어버리게 하셨나이다. 저희가 부르짖으나 구원할 자가 없었고 여호와께 부르짖어도 대답지 아니하셨나이다. 내가 저희를 바람 앞에 티끌같이 부숴뜨리고[부서뜨리고] 거리의 진흙같이 쏟아 버렸나이다.

“내 원수들로 등을 내게로 향하게 하시고”라는 원어는 옛날 영어성경처럼 “내 원수들의 목을 내게 주사”라고 번역하는 것이 문맥상 자연스럽다. 다윗이 원수를 멸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힘을 주셔서 믿음의 선한 싸움에서 이기게 하신다. 원수들은 부르짖었으나 구원할 신이 없었고 심지어 여호와께 부르짖었으나 하나님께서는 악한 자의 기도를 듣지 않으셨다. 다윗은 그들을 바람 앞에 티끌같이 부서뜨렸고 거리의 진흙같이 쏟아버렸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원수들을 완전히 패배케 하셨다.

[43-45절] 주께서 나를 백성의 다툼에서 건지시고 열방의 으뜸을 삼으셨으니 내가 알지 못하는 백성이 나를 섬기리이다. 저희가 내 풍성(風聲)을 들은 즉시로 내게 순복함이여, 이방인들이 내게 복종하리로다. 이방인들이 쇠미하여 그 견고한 곳에서 떨며 나오리로다.

다윗은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그의 전임자 사울에게 많은 핍박을 받았다. 사울은 그를 시기하여 여러 번 죽이려 하였다. 다윗이 왕위에 오른 후에도, 백성의 여론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니었다. 그를 대적하는 악한 자들이 항상 있었다. 그는 백성의 다툼 속에서 피곤하거나 낙망하기도 했을 것이나 하나님을 의지했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백성의 싸움에서 건져주셨다. 그는 그의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해주셨다.

하나님께서는 또 열국을 제압하는 권세도 주셨다. 다윗은 열방의 으뜸이 되었다. 그래서 이전에 다윗을 알지도 못했던 백성들이 이제 그를 섬기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온 세계의 하나님이시며 만국을 다스리는 하나님이시다. 세계 역사는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 안에 있다. 이방인들은 다윗의 소문을 들은 즉시 그에게 복종할 것이며 그들은 쇠약해져서 그 견고한 곳에서 떨며 나와 완전히 항복할 것이다.

[46-50절] 여호와는 생존하시니 나의 반석을 찬송하며 내 구원의 하나님을 높일지로다. 이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보수(報酬)하시고 민족들로 내게 복종케 하시도다. 주께서 나를 내 원수들에게서 구조하시니 주께서 실로 나를 대적하는 자의 위에 나를 드시고 나를 강포한 자에게서 건지시나이다. 여호와여, 이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이다. 여호와께서 그 왕에게 큰 구원을 주시며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인자를 베푸심이여, 영영토록 다윗과 그 후손에게로다.

세상의 다른 모든 신들은 인간의 고안물이며 생명이 없는 헛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셨고 지금도 살아계셔서 세상을 통치하신다. 그는 다윗을 위해 이방 나라들을 그의 발 아래 복종케 하셨고 그를 원수들과 대적자들로부터 구원하셨다. 이제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감사하며 찬송한다.

본문은 몇 가지 교훈을 준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생존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셔서 많은 일들을 행하셨다. 예레미야 10:10, “오직 여호와는 참 하나님이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이시요 영원한 왕이시라.”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쁨과 힘을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등불을 켜셔서 기쁨과 힘을 주신다. 그는 우리에게 힘으로 띠 띠우시며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고 전쟁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러 가지 힘들고 어려운 일들 중에서도 낙망치 말자.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큰 구원을 주신다. 그는 다윗의 원수들에게 보복하시고 그를 건져주셨다. 그는 다윗을 백성의 다툼에서 건져주셨고 민족들로 다윗에게 복종케 하셨다. 그는 다윗에게 큰 구원을 주셨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믿고 섬기며 그의 계명에 순종하자.


19편: 하나님의 말씀

[1-6절]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낮]은 날[낮]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해는 그 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 온기에서 피하여 숨은 자 없도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자연만물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심을 증거한다. 자연만물은 하나님을 증거한다. 이것을 자연계시라고 한다. 하늘은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선포하고 그의 창조 사역을 나타낸다. 모든 사람은 이 자연계시를 통해 하나님의 존재하심과 그의 지혜와 능력을 알 수 있고 그것을 몰랐다고 핑계할 수 없다(롬 1:20).

자연계시는 무언(無言)의 계시이다. 그것은 무언의 선포요 무언의 지식이다. 낮은 낮에게 해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전하고 밤은 밤에게 달과 별들을 통하여 전하지만, 아무 말도, 아무 소리도 없다. 자연계시의 소리9)는 세상에 사람이 사는 곳은 어디에나 미친다. 해는 멋있는 새 신랑과 같고 지칠 줄 모르는 달리기 선수와 같으며, 온 세상은 그것의 따뜻한 온기(溫氣)를 받고 있다.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연 은총 속에서 살고 있다(행 14:17; 17:25-28).


[7-8절]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

본문은 성경의 복된 성격과 유익에 대해 말한다. 율법, 증거, 교훈, 계명은 다 성경을 가리킨다. 첫째로, 성경의 규범은 완전하다. 성경은 오류가 없다. 성경은 우리의 신앙과 생활에 정확무오한 규칙이다. 그것은 완전한 규범이기 때문에 우리의 죄악됨을 깨우치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로 나오게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죄로 죽은 영혼을 살리고 병든 영혼을 고치며 침체된 영혼을 회복시킨다.

둘째로, 성경의 증거는 확실하다. 성경의 증거가 확실하므로 성경은 우리의 믿음의 확실한 근거와 내용이 된다. 그것은 우둔한 자에게 지혜와 지식을 준다. 누가복음 1:4는 그 책을 기록한 목적이 우리가 배운 내용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말했고, 디모데후서 3:15는 성경이 사람에게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준다고 말했다.

셋째로, 성경의 교훈은 정직하다. 성경은 의로운 지침이 된다. 디모데후서 3:16은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올바른 말씀은 사람의 마음에 참 평안과 기쁨을 준다.

넷째로, 성경의 계명은 순결하다. 성경의 계명들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며 우리의 구원과 행복을 위하는 거룩한 계명이다. 순결한 말씀은 사람의 눈을 밝게 한다. 죄는 영적으로 사람의 눈을 어둡게 만들지만, 의와 거룩은 사람의 눈을 밝게 만든다.


[9-10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道)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규례는 확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악을 미워하시는 거룩한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악에서 떠나야 한다. 잠언 8:13,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또 그의 진리는 영원하다. 우리는 천국에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할 것이다. 또 여호와의 규례는 확실하고 다 의롭다. 하나님의 말씀은 의에 대해 확실하게 가르친다. 그것은 우리의 이성과 양심에 비추어 보아도 분명하다.

그러므로 성경은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말씀이다. 세상에서 금은 가치 있는 물건이다. 그러나 세상 물건은 결국 썩어질 것이며 마지막 심판 날 다 불타 없어질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영원한 것들, 즉 믿음과 의, 천국과 영생을 가져다 준다. 또 성경은 “송이꿀보다 더 단” 말씀이다. 꿀은 우리의 입에만 달고 좋지만, 성경은 우리의 영혼에 송이꿀보다 더 달아 참된 기쁨과 위로와 힘과 용기를 준다.


[11절] 또 주의 종이 이로 경계를 받고 이를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

성경말씀은 우리가 지켜야 할 규칙이다. 하나님의 뜻은 계명 순종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를 경외하고 사랑하며 그의 모든 계명을 지키는 것을 요구하신다(신 10:12-13). 성경은 우리가 그것을 지키지 않으면 어떤 벌을 받을 것인지에 대해서도 말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지키면 복을 누리며 큰 상을 받을 것에 대해서도 말한다. 신명기 28:2-6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자들에게 임할 건강의 복, 자녀의 복, 물질의 복, 사회적 복에 대해 증거한다.


[12-13절]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또 주의 종으로 고범죄(故犯罪)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치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정직하여(에삼)[온전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허물(쉐기아)은 ‘실수로 범하는 죄, 부지(不知) 중에 범하는 죄’를 말한다. 레위기 4:2의 ‘그릇 범하는 죄’(쉐가가)와 같다. 우리는 양심에 자책할 것이 없는 최선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전 4:4). 그러나 영적으로 어린 자들에게는 실수로 범하는 죄들이 적지 않으며 사람은 무지하여 자기 실수를 잘 깨닫지도 못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또 기도 중에 성령의 깨닫게 하심으로, 그리고 친구의 충고를 통해 자신의 부족과 실수를 깨달을 수 있다. 어린아이는 부모의 책망과 징계를 통해 온전케 된다(잠 22:15).

우리는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야 한다. ‘벗어난다’는 말은 ‘깨끗케 된다’는 뜻이다. 숨은 죄도 죄이다. 그러므로 숨은 죄도 깨닫고 버림으로 깨끗함을 얻어야 한다. 우리는 숨겨진 죄가 하나도 없도록 하나님께 고백하며 깨끗한 삶을 살아야 한다.

‘고범죄’(故犯罪)라는 원어(제딤)는 ‘뻔뻔스런 죄들’을 가리킨다. 이것은, 죄인 줄 알면서 범하는 죄이다. 뻔뻔스런 죄는, 실수로 짓는 죄보다 더 큰 죄이다. 예를 들어, 배교(背敎)는 진리를 알면서도 그것을 고의로 저버리는 고범죄이다. 고의적 살인자는 반드시 사형을 당해야 했다. 우리는 고범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목표는 ‘정직함’ 곧 ‘온전함’이다. 그것은 크고 작은 죄를 떠나는 것이다. 고범죄는 물론이고 실수의 죄까지도 깨닫고 버리는 것이다. 흠과 점이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가 되는 것이다.


[14절]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시편은 성도들의 마음의 묵상이요 입술의 고백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기쁘게 받으셨고 후시대 성도들을 위해 교훈이 되게 하셨다. 그것들은 성령의 특별한 감동으로 기록되어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고 전달하는 성경말씀이 되었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자연계시를 통해 하나님께서 계심과 그의 속성이 어떠함을 알자. 자연만물은 세상에 하나님께서 계심과 그가 지혜와 능력의 하나님이시라는 핑계할 수 없는 증거이다.


둘째로,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의 완전하고 확실하고 정직하고 순결한 말씀임을 알고 그 말씀을 정금보다 더 사모하자. 또 그 말씀이 꿀보다 더 단 것을 체험하자. 우리는 성경을 읽고 듣기를 힘쓰자. 성경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며, 또 그 말씀을 지키는 자는 큰 상을 얻는다.


셋째로, 성경은 무엇보다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고 그 죄를 멀리함으로 정직한 자, 곧 온전한 자가 되게 한다. 디모데후서 3:17,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온전함이다.


20편: 환난 날에 도우시기를 기원함

[1-3절] 환난 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 너를 높이 드시며 성소에서 너를 도와주시고 시온에서 너를 붙드시며 네 모든 소제를 기억하시며 네 번제를 받으시기를 원하노라(셀라).

인생의 여정에는 어려운 일들이 많다. 야곱은 바로 앞에서 자신의 지난 130년의 세월을 ‘험악한 세월’이었다고 표현했다(창 47:9). 모세는 시편 90편에서 “우리의 연수가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라고 말했다. 더욱이 시편 34:19는 의인에게 고난이 많다고 말한다.

그러나 정신적, 육신적, 경제적 어려움이 있는 환난 날에,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도우시며 그의 기도를 들으신다. 그를 높이 드신다는 말은 안전한 곳에 두신다는 뜻이다. 야곱은 하나님을 “나의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사자”라고 표현했다(창 48:16). 하나님께서는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다(시 46:1). 환난 때에 도우시는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사실은 성도에게 큰 복이다. 다윗에게 응답하셨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응답하셨고 또 이 이후에도 응답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계신 곳 성소에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실 것이다. 성소는 일차적으로 천국을 가리키지만(왕상 8:30), 또한 땅 위에 있는 성막과 성전도 가리킨다(출 25:8). 하나님께서는 시온의 성소에 거하시고 거기에서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솔로몬은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한 후 “종이 이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라고 말했고(왕상 8:29), 다니엘은 포로 생활 중에서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다”(단 6:10).

구약의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 성전이시다(요 2:19, 21). 또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는 하나님의 성전이다(고전 3:16). 하나님께서는 성소에서 우리를 도우시고 시온에서 우리를 붙드신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의 성도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기도했고 오늘 우리는 교회에서 합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마태복음 18:19,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요한복음 14: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본문의 ‘너’는 참된 성도를 가리킨다. 다윗은 자신의 체험에 비추어 다른 성도에게도 같은 체험이 있기를 기원한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뿐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다.

다윗은 소제와 번제에 대해 말한다. 소제는 곡물 제사로서 그리스도의 속죄사역과 온전한 순종을 상징하는 예물이고, 번제는 그리스도의 속죄사역과 온전한 헌신을 상징하는 예물이라고 본다. 또 구약의 제사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의 마음가짐을 교훈하는 뜻도 있다고 본다. 우리는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고 헌신해야 한다. 원문에 ‘소제들’과 ‘번제들’이라는 복수명사는 성도가 하나님께 드린 모든 예배, 모든 신앙고백, 모든 봉사, 모든 순종, 모든 헌금을 가리킬 것이다.

우리는 많은 예배와 많은 찬송과 많은 기도와 많은 헌금을 하나님께 드린다. 우리의 모든 예물, 모든 감사와 신앙고백과 헌신과 순종과 봉사와 헌금을 하나님께서 과연 기쁘게 받으시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옛날 아벨과 그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창 4:4). 하나님께서는 그를 참으로 경외하고 중보자의 속죄의 은혜를 사모하며 그를 위해 자신을 온전히 드리고 그의 명령에 순종하는 자의 예배들, 찬송들, 기도들, 봉사들, 헌금들을 기쁘게 받으실 것이다. 또 하나님께서 사람의 모든 예물들을 기쁘게 받으시면 그는 예물 드린 자에게 더 많은 은혜와 복을 주실 것이다.

[4-5절] 네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하시고 네 모든 도모[계획]를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우리가 너의 승리로 인하여 개가를 부르며[기뻐 외치며]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 기(旗)를 세우리니 여호와께서 네 모든 기도[청원, 간구]를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성도에게는 마음의 여러 소원들과 계획들, 기도의 제목들이 있다. 특히 환난 중에 있는 자에게는 그 환난으로부터 구원받는 것이 중요한 소원일 것이다. 성도는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지 않는 선한 소원과 기도 제목은 무엇이든지 가질 수 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성도의 마음의 소원과 계획과 청원을 들어주시기를 기원한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셨다(요 14:13). 사도 바울은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고 말했다(빌 2:13).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는 소원은 육신의 욕심에서 나온 것이며 하나님께서 들어주지 않으실 것이지만, 그가 주시는 선한 소원들은 다 이루어질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기도를 들으시는 주님”이시다(시 65:2).

다윗은 하나님께서 성도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를 환난에서 구원하실 것을 확신하면서 기뻐 부르고 승리의 깃발을 세우겠다고 말한다. ‘승리’라는 원어(예슈아)는 ‘구원, 승리’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기도 응답이 확실하므로 성도의 구원과 승리도 확실하다. 또 동료들과 교회의 온 회중은 고난 당하던 형제의 구원과 승리를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함께 기뻐할 것이다.

[6절]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속한 바 기름 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는 줄 이제 내가 아노니 그 오른손에 구원하는 힘으로 그 거룩한 하늘에서 저에게 응락하시리로다.

기름은 성령을 상징한다고 본다. 구약시대에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은 다 기름부음을 받았다. 그것은 성령께서 그들과 함께하시는 표이었다. 신약시대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 오셨다. 그것이 ‘그리스도’라는 말의 의미이다. 사도행전 10:38,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하셨음이라.”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은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들이다. 요한일서 2:20,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디도서 3:6,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사.”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름부음 받은 자들을 구원하시고 그의 오른손의 구원하는 힘으로 그 거룩한 하늘에서 그들에게 응답하실 것이다. 성령의 인치심 혹은 기름부으심을 받은 성도가 환난 중에 빠졌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외면치 않으시고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오른손으로 그를 구원하실 것이다.

[7-9절]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저희는 굽어 엎드러지고 우리는 일어나 바로 서도다[저희는 굴복하였고 엎드러졌으나 우리는 일어났고 바로 섰도다]. 여호와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부를 때에 왕은 응락하소서.

‘자랑한다’는 원어(나즈키르)는 ‘언급한다, 부른다, 자랑한다’는 뜻이다(BDB). 사람들은 병거와 말, 즉 세상적, 인간적 도움물을 의지한다. 그들은 자신의 건강이나 재물을 의지한다. 그러나 성도는 다르다. 성도는 세상 것을 무시하지는 않으나 그것을 의지하지 않는다. 성도는 오직 온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만 의지하며 그의 이름만 부르며 의지하며 자랑한다. 그것이 참 믿음이다. 세상 것을 의지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헛되이 만드실 때 확실히 실패하고 멸망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징벌하시면 사람이 가졌던 건강도 잃어버리고 그 누렸던 물질적 유여도 없어질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믿는 성도들을 건지시고 일어나게 하시고 바로 서게 하실 것이다. 잠언 24:16,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

그러므로 성도는 환난 때에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의 구원을 요청해야 하며 두려워하거나 낙심하여 기도하는 일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의지하는 자들을 도우시는 왕이시다. 그는 우리가 부르짖어 기도할 때 응답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신다.


시편 20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이 세상 사는 동안 성도에게는 고난과 환난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특정한 죄에 대한 징벌로 주시는 것이든지, 또는 죄의 징벌이 아닌 경우에도 그의 깊으신 뜻 가운데 우리의 인격의 단련을 위해 주시는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 고난과 환난일지라도 낙심치 말고 잘 대처해야 한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이미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자들, 즉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들을 결코 버리지 않으시고 구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다. 그는 온 세상의 통치자 곧 왕이시다. 그는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고 환난 중에 구원하시는 자이시다. 그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올리는 우리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우리에게 구원과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셋째로, 그러므로 우리는 환난 날에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기도해야 한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적 수단과 방법을 의지하지만,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 안에서 가지는 우리의 선한 소원과 계획, 우리의 청원과 간구를 그는 외면치 않으실 것이다. 그는 하늘에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에게 구원과 승리를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며 오직 그의 계명을 지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