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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Job) 31장욥--나는 의롭게 살았다 -37장 하나님께서는 능력이 크심

영국신사77 2020. 4. 15. 09:27


31장: 욥--나는 의롭게 살았다

[1-4절] 내가 내 눈과 언약을 세웠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 그리하면 위에 계신 하나님의 내리시는 분깃이 무엇이겠으며 높은 곳에서 전능자의 주시는 산업이 무엇이겠느냐? 불의자에게는 환난이 아니겠느냐? 행악자에게는 재앙이 아니겠느냐? 그가 내 길을 감찰하지 아니하시느냐? 내 걸음을 다 세지 아니하시느냐?

욥은 처녀에게 주목치 않았다. 마음으로라도 범죄치 않기 위해서이었다. 그는 불의와 악을 행하는 자에게 재앙이 임할 것을 알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길을 감찰하시고 그의 걸음을 다 세신다. 그는 그의 품은 마음과 생각과 뜻을 다 아신다. 그는 그것이 깨끗하고 선한지 아니면 불결하고 악한지 판단하시고 보응하신다.

[5-6절] 언제 나의 행위가 허탄하였으며 내 발이 궤휼[거짓]에 빨랐던가. 그리하였으면 내가 공평한 저울에 달려서 하나님이 나의 정직함[순전함]을 아시게 되기를 원하노라.

세상 사람들은 악하고 헛된 것을 구하고 그 발걸음이 거짓에 빠르지만, 욥은 하나님의 공평한 저울에 달려 자신의 정직함이 드러나기를 원한다. 이것은 평소에 하나님 앞에서 순종한 자만 가질 수 있는 담대함이다. 성도의 담대함은 진실한 순종의 삶에서 나온다.

[7-8절] 언제 내 걸음이 길에서 떠났던가. 내 마음이 내 눈을 따라갔던가. 내 손에 더러운 것이 묻었던가. 그리하였으면 나의 심은 것을 타인이 먹으며 나의 소산이 뿌리까지 뽑히는 것이 마땅하니라.

‘길’은 정로(正路) 즉 의의 길을 가리킨다. 욥은 인생의 정로를 지켰고 그 길을 떠나지 않았다. 또 그는 자신의 눈에 보이는 육신적인 것과 감각적인 것에 빠져 손을 더럽히지 않았다. 욥은, 자신이 정로에서 떠났든지, 그의 마음이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 헛되고 죄악된 것에 빠졌든지, 그의 손에 더럽고 죄악된 것이 묻었다면, 그의 심은 것들을 다른 사람이 먹고 그의 거두는 것들이 뿌리까지 뽑힐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의 공의의 보응과 징벌을 알고 있는 것이다. 욥은, 비록 그가 고난 중에 있지만 하나님의 계명의 정로를 떠나지 않았고 헛되고 죄악된 것을 좇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9-12절] 언제 내 마음이 여인에게 유혹되어 이웃의 문을 엿보아 기다렸던가. 그리하였으면 내 처가 타인의 매를 돌리며 타인이 더불어 동침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는 중죄(重罪)라. 재판장에게 벌받을 악이요 멸망하도록 사르는 불이라. 나의 모든 소산을 뿌리까지 없이할 것이니라.

욥은 간음을 큰 죄로 여기며 조심하였다. 이웃의 문을 엿보아 기다리는 것은 이미 마음이 부패되어 은밀한 접촉의 기회를 노리는 것이다. 성도는 그런 은밀한 접촉을 하지 말아야 한다. 만일 성도가 음란죄에 떨어지면 고통스러운 결과를 경험할 것이다. 그는 경제적 파탄을 당하고 그의 처는 남의 종이 되어 남의 맷돌을 돌리는 신세가 되거나 다른 남자가 그와 동침하는 일이 생길 것이다. 간음죄는 중죄(重罪)이다. 그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간부와 음부가 다 죽임을 당해야 했다(레 20:10). 모든 죄, 특히 간음의 죄는 불과 같다. 불이 나무나 집이나 물건들을 모두 다 사르듯이, 죄, 특히 간음죄는 복된 모든 좋은 것들을 다 없앤다. 죄는 불행과 재앙을 가져온다.

[13-14절] 남종이나 여종이 나로 더불어 쟁변할 때에 내가 언제 그의 사정을 멸시하였던가. 그리하였으면 하나님이 일어나실 때에는 내가 어떻게 하겠느냐? 하나님이 국문하실 때에는 내가 무엇이라 대답하겠느냐?

욥은 종의 사정을 멸시하지 않았다. 종이 무엇을 잘못했을 때 꾸짖는 것은 정당한 일이지만, 종이 무엇을 불평하거나 호소할 때 그것을 듣는 것은 그를 인격적으로 대하는 것이다. 만일 그가 종을 멸시했더라면 하나님께서 그를 심판하러 일어나 심문하실 때 하나님께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사람을 멸시하는 잘못도 범치 말아야 한다. 우리는 남을 멸시할 만큼 그렇게 완전한 인격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엄격하게 심판하신다면 우리는 그 앞에 머리를 들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남을 존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15절] 나를 태 속에 만드신 자가 그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우리를 뱃속에 지으신 자가 하나가 아니시냐?

욥이나 종은 다 하나님의 창조물이다(잠 22:2). 한 부모의 자녀들이 서로 우애 있게 지내야 하듯이, 한 하나님께서 만드신 인류는 넓은 의미에서 한 형제들로서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 우리는 세상에 있는 가난한 자나 부자나, 귀한 자나 천한 자나 막론하고 다 하나님의 창조물임을 알고 서로를 귀하게 여겨야 한다.

[16-23절] 내가 언제 가난한 자의 소원을 막았던가. 과부의 눈으로 실망케 하였던가. 나만 홀로 식물을 먹고 고아에게 먹이지 아니하였던가. 실상은 내가 젊었을 때부터 고아를 기르기를 그의 아비처럼 하였으며 내가 모태에서 나온 후로 과부를 인도하였었노라. 내가 언제 사람이 의복이 없이 죽게 된 것이나 빈궁한 자가 덮을 것이 없는 것을 보고도 나의 양털로 그 몸을 더웁게 입혀서 그로 나를 위하여 복을 빌게 하지 아니하였던가. 나를 도와주는 자가 성문에 있음을 보고 내가 손을 들어 고아를 쳤던가. 그리하였으면 내 어깨가 어깨뼈에서 떨어지고 내 팔뼈가 부러짐이 마땅하니라. 나는 하나님의 재앙을 심히 두려워하고 그 위엄을 인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느니라.

욥은 가난한 자나 과부나 고아를 무시하지 않았고 그들이 어려울 때 그들을 돌아보았고 도왔다. 그는 그들이 먹을것이 없을 때에 먹을것을 주었고 입을 것이 없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고 그에게 재앙을 주셨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와 고아와 과부를 돌보시는 하나님이시다(신 10:18; 시 68:5). 가난한 자를 돌아보는 것은 성도가 마땅히 힘써야 할 일이다. 잠언 14:31,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존경하는 자니라.” 사도들도 가난한 자들을 돌아보는 일을 힘썼다.

[24-28절] 내가 언제 금으로 내 소망을 삼고 정금더러 너는 내 의뢰하는 바라 하였던가. 언제 재물의 풍부함과 손으로 얻은 것이 많음으로 기뻐하였던가. 언제 태양의 빛남과 달의 명랑하게 운행되는 것을 보고 내 마음이 가만히 유혹되어 손에 입맞추었던가. 이 역시 재판장에게 벌받을 죄악이니 내가 그리하였으면 위에 계신 하나님을 배반한 것이니라.

욥은 재물을 의지하거나 소망하지 않았다. 우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마 6:24). 물질적 부요는 신앙생활에 오히려 방해거리가 된다.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더 어렵다(마 19:23-24).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 6:9-10에서 말하기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라고 하였다.

욥은 해와 달을 섬기지도 않았다. 해와 달을 보고 ‘손에 입맞추는 것’은 그것을 숭배하는 종교적 태도를 나타낸다. 그는 돈에 대한 애착을 해와 달을 섬기는 우상숭배와 연관해 말했다. 해와 달을 섬기는 것이 우상숭배이듯이, 돈 사랑도 우상숭배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돈을 사랑하지 말고 그 어떤 우상도 섬기지 말아야 한다.

[29-30절] 내가 언제 나를 미워하는 자의 멸망을 기뻐하였으며 그의 재앙 만남을 인하여 기운을 뽐내었던가. 실상은 내가 그의 죽기를 구하는 말로 저주하여 내 입으로 범죄케 아니하였느니라.

욥은 그를 미워하는 자의 멸망을 기뻐하지 않았고 그가 재앙 당함을 인해 뽐내지 않았다. 그는 원수의 영혼을 저주하는 죄를 범치 않았다. 욥은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착한 성도이었다. 레위기 19:18에서 하나님께서는 “원수를 갚지 말라”고 말씀하셨고 잠언 17:5는 “사람의 재앙을 기뻐하는 자는 형벌을 면치 못할 자니라”고 말했다. 주께서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셨고(눅 6:27-28), 사도 바울도,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고 교훈하였다(롬 12:20).

[31-32절] 내 장막 사람의 말이 주인의 고기에 배부르지 않은 자가 어디 있느뇨 하지 아니하였었는가. 나그네로 거리에서 자게 하지 아니하고 내가 행인에게 내 문을 열어 주었었노라.

욥의 종들은 주인의 고기로 배부르지 않은 사람이 없었고 또 그가 나그네로 거리에서 자게 하지 않고 그의 집 문을 열어주었다고 증거하였다. 경건은 구제와 선행으로 표현된다. 아브라함도 평소에 나그네를 잘 대접하였고, 롯도 그러하였다. 우리는 손님 대접하기를 힘써야 하고(롬 12:13) 특히 어려움 당한 이웃들을 돌아보아야 한다.

[33-37절] 내가 언제 큰 무리를 두려워하며 족속의 멸시를 무서워함으로 잠잠하고 문에 나가지 아니하여 타인(아담 ם������אָ)[아담](KJV, NASB)처럼 내 죄악을 품에 숨겨 허물을 가리었었던가? 누구든지 나의 변백을 들을지니라. 나의 서명이 여기 있으니 전능자가 내게 대답하시기를 원하노라. 내 대적의 기록한 소송장이 내게 있었으면 내가 어깨에 메기도 하고 면류관처럼 머리에 쓰기도 하며 내 걸음의 수효를 그에게 고하고 왕족처럼 그를 가까이 하였으리라.

욥은 자기 자신이 사람들의 멸시를 두려워하여 자기 죄악과 허물을 아담처럼 숨기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결백을 담대히 말하며 자기를 송사하는 대적자들과 변론하기를 원한다. 그는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기를 원한다. 의인의 마음은 담대하다(잠 28:1).

[38-40절] 언제 내 토지가 부르짖어 나를 책망하며 그 이랑이 일시에 울었던가. 언제 내가 값을 내지 않고 그 소산물을 먹고 그 소유주로 생명을 잃게 하였던가. 그리하였으면 밀 대신에 찔레가 나고 보리 대신에 잡풀이 나는 것이 마땅하니라 하고 욥의 말이 그치니라.

욥은 자신의 토지에 대해서나 그 소산에 대해 불법한 일을 하지 않았다고 말하며, 그의 토지가 부르짖어 그를 책망하거나 그의 밭이랑들이 함께 우는 일이 없었다고 말한다. 그는 정당하게 땅을 샀고 또 그 땅에 농작물을 경작하였다. 그는 그 경작을 누구에게 맡겼다면 그에게 정당한 수고의 대가를 지불하였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거나 그가 부당하게 남의 토지를 빼앗으므로 그로 생명을 잃게 했다면, 그는 자기 밭에서 밀 대신 찔레가 나고 보리 대신 잡풀이 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한다. 우리는 도적질하거나 남의 것을 빼앗지 말아야 하고, 오히려 우리 손으로 수고하여 구제하고 선을 행해야 한다(엡 4:28).

욥기 31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간음을 조심해야 한다. 욥은 처녀를 주목하거나 이웃의 아내에 대해 불결한 마음을 품지 않았고, 이성에 대해 늘 깨끗한 마음과 단정한 태도로 대했다고 말했다. 간음은 큰 죄악이다. 우리가 이런 죄에 떨어지면, 하나님께 복 받기를 기대할 수 없고 육신적 질병이나 경제적 파탄을 당하게 될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불의하고 거짓된 것을 멀리하고 바르고 진실한 삶을 살아야 한다. 욥은 사람의 정로를 벗어나 거짓되고 헛되고 죄악된 것을 구하지 않았다. 사람은 육신의 더러운 감정과 욕심을 따라 살기 쉬우나 우리는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 앞에서 바르고 정직하고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 그것이 복된 길이며 평안의 길이다.

셋째로, 우리는 돈을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 욥은 물질적 복을 받았고 물질적 여유가 있었지만 돈을 의지하고 사랑하거나 돈에 소망을 두지 않았다. 돈을 사랑하는 것은 일만 악의 뿌리이다. 탐심은 우상숭배이다. 성도는 돈을 버릴 줄 알아야 참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

넷째로, 우리는 가난한 자나 어려운 처지에 있는 자들을 돌아보며 그들에게 선을 베풀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이다. 우리는 사람을 무시하지 말고 인격적으로 대하고 구제와 선행에 힘써야 한다. 우리는 심지어 원수들에 대해서도 그들이 재앙 당할 때 기뻐하지 말고 그를 위해 기도하고 그에게 선을 베풀어야 한다.


32장: 엘리후가 말을 시작함

[1-5절] 욥이 스스로 의롭게 여기므로 그 세 사람의 대답이 그치매 람 족속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노를 발하니 그가 욥에게 노를 발함은 욥이 하나님보다 자기가 의롭다[자기를 정당화] 함이요 또 세 친구에게 노를 발함은 그들이 능히 대답지는 못하여도 욥을 정죄함이라. 엘리후가 그들의 나이 자기보다 많으므로 욥에게 말하기를 참고 있다가 세 사람의 입에 대답이 없음을 보고 노를 발하니라.

욥기 32장부터 37장까지에 기록된 긴 내용은 엘리후라는 사람의 말이다. 람 족속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인 엘리후는 분명히 욥의 친구들과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는 매우 경건한 자이었고, 욥의 친구들과 달리, 그의 판단은 매우 건전하였다고 보인다. 욥의 세 친구들의 대답이 없자, 엘리후는 그들에게 노를 발하였다.

엘리후가 욥에게 노한 것은 그가 하나님보다 자기가 옳다고 자기를 정당화하기 때문이었다. 욥은 자신이 양심에 크게 가책되는 악을 행하지 않았다는 확신 속에서 자신을 고난 속에 두신 하나님의 섭리에 항의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어려운 역경에서도 생각으로나 말로나 행실로 하나님의 섭리에 저항해서는 안 된다.

또 엘리후가 세 친구에게 노를 발한 것은 그들이 욥에게 대답하지 못하면서 욥을 정죄하기 때문이었다. 남을 부당하게 정죄하는 것도 나쁜 일이다. 잠언 17:15는, “악인을 의롭다 하며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자는 다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느니라”고 말했다.

[6-10절]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발언하여 가로되 나는 연소하고 당신들은 연로하므로 참고 나의 의견을 감히 진술치 못하였노라. 내가 말하기를 날이 많은 자가 말을 낼 것이요 해가 오랜 자가 지혜를 가르칠 것이라 하였으나 사람의 속에는 심령이 있고 전능자의 기운이 사람에게 총명을 주시나니 대인(大人)이라고 지혜로운 것이 아니요 노인이라고 공의를 깨닫는 것이 아니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내 말을 들으라. 나도 내 의견을 보이리라.

엘리후는 욥이나 그 친구들과 달리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그들이 말하는 동안 잠잠히 참고 있었고 감히 그의 의견을 말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노인들이 일반적으로 인생 경험이 많아 젊은이들보다 더 지혜롭기 때문이었다. 노인들이 경건과 도덕성을 구비한다면 아마 그러할 것이다. 그러므로 엘리후는 “날이 많은 자가 말을 낼 것이요 해가 오랜 자가 지혜를 가르칠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디도서에서 젊은 목회자 디도에게 늙은 여자들이 젊은 여자들을 가르치게 하라고 교훈하였다(딛 2:3-4).

그러나 다른 한편, 사람 속에는 영이 있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기운 혹은 영감(KJV)이 그에게 총명을 주시기 때문에, 세상에서 높은 자라고 반드시 지혜로운 것이 아니고 노인이라고 반드시 공의를 깨닫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 그러므로 잠언 1:7은 참 지혜가 하나님을 경외함에서 나온다고 말했고, 잠언 2:6은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신다고 말했다. 또 시편 119:97-100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깨닫는 자는 원수보다, 스승보다, 노인보다 더 지혜롭게 된다고 말하였다.

[11-14절] 내가 당신들의 말을 기다렸고 당신들이 할 말을 합당하도록 하여 보는 동안에 그 변론에 내 귀를 기울였더니 자세히 들은즉 당신들 가운데 욥을 꺾어 그 말을 대답하는 자가 없도다. 당신들이 혹시라도 말하기를 우리가 지혜를 깨달았었구나. 그를 이길 자는 하나님이시요 사람이 아니라 하지 말지니라. 그가[욥이] 내게 말을 내지 아니하였으니 나도 당신들의 말처럼 그에게 대답지 아니하리라.

“할 말을 합당하도록 하여 보는 동안에”라는 원어는 “할 말을 찾는 동안에”라고 번역할 수 있다. 12절의 ‘꺾는다’는 원어(야카크)는 ‘깨우친다, 잘못을 증명한다’는 뜻이다. ‘이긴다’는 원어(나다프)는 ‘찌르다, 패배시키다, 치다’는 뜻이다. 14절의 ‘그’는 욥을 가리킨다.

엘리후는 욥의 친구들이 욥을 깨우치거나 욥의 잘못을 증명하지 못했고 욥의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는 그들이 마치 지혜를 깨닫고 하나님의 지혜로 욥을 책망한 것처럼 말하지 말라고 한다.

잠언 10:20-21은, “의인의 혀는 천은과 같고” “의인의 입술은 여러 사람을 교육한다”고 말하고, 잠언 25:11은,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사과니라”고 한다. 우리는, 물론, 잘못을 행한 자에게는 충고와 책망의 말을 해주어야 할 것이다. 잠언 27:5-6은,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 친구의 통책은 충성에서 말미암은 것이나 원수의 자주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바르게 행하는 자에게는 위로의 말도 할 수 있어야 한다. 데살로니가전서 5:14,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

[15-22절] 그들이 놀라서 다시 대답하지 못하니 할 말이 없음이로구나. 그들이 말이 없이 가만히 서서 다시 대답지 아니한즉 내가 어찌 더 기다리랴. 나도 내 본분대로 대답하고 나도 내 의향을 보이리니 내게 말이 가득하고 내 심령이 나를 강박함이니라. 보라, 내 가슴은 봉한 포도주 같고 새 가죽 부대가 터지게 됨 같구나. 내가 말을 발하여야 시원할 것이라. 내 입을 열어 대답하리라. 나는 결코 사람의 낯을 보지 아니하며 사람에게 아첨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아첨할 줄을 알지 못함이라. 만일 그리하면 나를 지으신 자가 속히 나를 취하시리로다.

엘리후는 나이 많은 다른 이들의 말을 인내하며 들었고 이제 자신이 대답할 몫을 말하고자 한다. 그는 마치 봉한 포도주같이, 새 가죽부대가 터지게 됨같이 할 말로 가득하다고 말한다. 성도는 쓸데없는 말을 많이 하지 말고 상대방의 말을 잘 듣고 신중히 생각하고 판단하여 말하는 것이 좋다. 의인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한다(잠 15:28).

엘리후는 또 자신이 사람의 낯을 보지 않고 사람에게 아첨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아첨의 말은 일종의 거짓말이다. 아첨은 악한 일이다. 잠언 26:28, “거짓말하는 자는 자기의 해한 자를 미워하고 아첨하는 입은 패망을 일으키느니라.” 잠언 29:5, “이웃에게 아첨하는 것은 그의 발 앞에 그물을 치는 것이니라.”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의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거하시느니라”고 말했다(살전 2:5). 그러나 이단자들은 원망하며 불만을 토하며 그 정욕대로 행하고 그 입으로 자랑하고 이익을 위해 아첨한다(유 16).

욥기 32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범사에 바른 판단을 해야 한다. 엘리후는 욥이 하나님보다 자신을 정당화하므로 또 친구들이 욥의 잘못을 증명치 못하면서 그를 정죄하므로 그들에게 노를 발하였다. 우리는 의롭게 살고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의 섭리에 끝까지 겸손히 복종해야 하고 잠시라도 하나님의 섭리에 저항해서는 안 되고, 또 정당한 이유 없이 남을 정죄해서도 안 된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를 사모하고 구하고 얻어야 한다. 하나님의 지혜는 성경말씀을 많이 읽고 묵상하고 실천함으로써 얻을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를 얻어야 지혜로운 자가 되고 또 다른 이에게 조언을 줄 때도 스승이나 노인보다 더 나은 조언을 줄 수 있다.

셋째로, 우리는 필요한 경우 남에게 유익한 충고를 주고 또 필요한 경우 위로의 말도 줄 수 있어야 한다. 충고와 위로는 우리가 다른 이들에게 줄 수 있는 두 요소이다. 우리는 잘못 행하는 자에게 적절한 충고를 주어야 하고 또 마음이 약한 자에게는 위로와 격려를 주어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남에게 충고나 위로를 줄 때 신중함과 진실함으로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무슨 일이든지 상대방의 말을 잘 들어보고 깊이 생각하고 신중히 판단해 말해야 하고 성급히 말하여 실수하지 말아야 하고, 또 남에게 거짓말이나 아첨의 말을 해서는 안 된다.

33장: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다 알리지 않으심

[1-7절] 그런즉 욥이여, 내 말을 들으며 나의 모든 말에 귀를 기울이기를 원하노라. 내가 입을 여니 내 혀가 입에서 동하는구나. 내 말이 내 마음의 정직함을 나타내고 내 입술이 아는 바를 진실히 말하리라. 하나님의 신[영]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시느니라[살게 하시느니라]. 네가 할 수 있거든 일어서서 내게 대답하고 내 앞에 진술하라. 나와 네가 하나님 앞에서 일반이니 나도 흙으로 지으심을 입었은즉 내 위엄으로는 너를 두렵게 하지 못하고 내 권세로는 너를 누르지 못하느니라.

엘리후는 욥에게 자기 마음의 정직함을 나타내고 자기가 아는 바를 진실하게 말하겠다고 말한다. 성도는 거짓을 버리고 항상 진실을 말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또 엘리후는 자신이 욥보다 나은 것처럼 높은 마음을 가지지 않았다. 그는 허풍이나 허세를 품지 않고 겸손한 자세로 말하기를 원한다. 성도는 항상 겸손한 자세로 말해야 한다.

[8-12절] 네가 실로 나의 듣는 데 말하였고 나는 네 말소리를 들었느니라. 이르기를 나는 깨끗하여 죄가 없고 허물이 없으며 불의도 없거늘 하나님이 나를 칠 틈을 찾으시며 나를 대적으로 여기사 내 발을 착고[차꼬]에 채우시고 나의 모든 길을 감시하신다 하였느니라. 내가 네게 대답하리라. 이 말에 네가 의롭지 못하니 하나님은 사람보다 크심이니라.

욥은 자신이 깨끗하고 죄가 없으며 허물과 불의도 없다고 생각했다. 성도가 거리낌 없이 사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순종하는 삶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일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4:4에서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한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거리낌 없이 산다고 해서 하나님을 비난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욥은 욥기 13:24, 27에서 하나님께서 그를 대적하시고 그의 발을 차꼬에 채우신다고 표현하였다. 그러므로 엘리후는 “이 말에 네가 의롭지 못하니 하나님은 사람보다 크심이니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완전하고 철저한 공의 앞에서 우리 모두는 여전히 연약하고 부족한 죄인이다.

[13-18절] 하나님은 모든 행하시는 것을 스스로 진술치 아니하시나니 네가 하나님과 변쟁(辯爭)함은 어찜이뇨? 사람은 무관히 여겨도[사람은 알지 못하는도다] 하나님은 한번 말씀하시고 다시 말씀하시되 사람이 침상에서 졸며 깊이 잠들 때에나 꿈에나 밤의 이상 중에 사람의 귀를 여시고 인치듯 교훈하시나니 이는 사람으로 그 꾀를 버리게 하려 하심이며 사람에게 교만을 막으려 하심이라. 그는 사람의 혼으로 구덩이에 빠지지 않게 하시며 그 생명으로 칼에 멸망치 않게 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는 모든 행하시는 일에 대해 다 진술하지 않으신다. 그는 진술하실 의무가 없으시다. 그러므로 그의 행하시는 일들을 우리가 다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여서 그와 변론하려는 태도는 옳지 않다. 사람은 하나님의 섭리에 오직 잠잠히 순응해야 한다.

또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난이 제한적이며 하나님의 본심이 고난이 아니고 평안이라는 것을 안다. 예레미야 애가 3:33,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 시편 30:5, “그 노염은 잠깐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안다(롬 8:28).

그러나 하나님께서 항상 침묵하시는 것이 아니고 옛 시대에 여러 방식으로 말씀하셨고 지금은 성경을 통해 말씀하신다. 단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무감각할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귀를 여시고 인치듯이 확실하게 교훈하신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목적은 사람으로 그 꾀를 버리고 교만하지 않게 하시고 그로 파멸의 구덩이에 떨어지지 않고 죽임을 당하지 않게 하시기 위함이다.

[19-22절] 혹시는 사람이 병상의 고통과 뼈가 늘 쑤심의 징계를 받나니 그의 마음[생명]은 식물을 싫어하고 그의 혼은 별미를 싫어하며 그의 살은 파리하여 보이지 아니하고 보이지 않던 뼈가 드러나서 그의 혼이 구덩이에, 그의 생명이 멸하는 자에게 가까와지느니라.

엘리후는 사람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심각한 병으로 고통을 당하는 경우에 대해 말한다. 그 사람은 뼈가 늘 쑤시며 입맛이 떨어져 음식 먹기를 싫어하고 살이 빠져 수척하며 보이지 않던 뼈가 튀어 나와서 그의 영혼은 죽음의 구덩이에 가까워지기도 한다.

[23-26절] 그럴 때에 만일 일천 천사[사자] 가운데 하나가 그 사람의 해석자로 함께 있어서 그 정당히 행할 것을 보일진대[보인다면] 하나님이[그로] 그 사람을 긍휼히 여기사 이르시기를[그를 긍휼히 여겨 말하게 하기를] (NASB) 그를 건져서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게 하라. 내가 대속물을 얻었다 하시리라[하게 하라]. 그런즉 그 살이 어린아이보다 연하여져서 소년 때를 회복할 것이요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므로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사 그로 자기의 얼굴을 즐거이 보게 하시고 사람에게 그 의를 회복시키시느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때 만일 그에게 단 한 명의 사자라도 해석자로 있다면 그는 그를 긍휼히 여기며 옳은 것 곧 하나님의 뜻을 전달할 것이다. 그것은, “그를 건져서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게 하라. 내가 대속물을 얻었다”는 내용이다. 그러면 그의 살은 어린아이보다 연해져서 소년의 시적을 회복할 것이며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므로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그로 자기 얼굴을 즐거이 보게 하시고 그의 의를 회복시키실 것이다. 그는 건강도 회복될 것이다.

[27-28절] 그가 사람 앞에서 노래하여 이르기를 내가 전에 범죄하여 시비(야솨르)[옳은 것]를 바꾸었으나 내게 무익하였었구나. 하나님이 내 영혼을 건지사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게 하셨으니 내 생명이 빛을 보겠구나 하리라.

‘사람 앞에서 노래하여’(야쇼르 알 아나쉼)라는 원문은 ‘사람들을 보며’(KJV)라는 뜻이라고 보인다.12) 본문은 죄의 징계로 극심한 질병의 고통을 받은 그가 사람들을 보며, ‘내가 전에 범죄하여 옳은 것을 바꾸었으나 내게 무익하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내 영혼을 죽음의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게 건지셨고 내 생명이 빛 곧 기쁨과 행복을 누리리라’고 간증할 것이라는 뜻일 것이다.

[29-30절] 하나님이 사람에게 이 모든 일을 재삼 행하심은 그 영혼을 구덩이에서 끌어 돌이키고 생명의 빛으로 그에게 비취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여러 번 이런 징계의 고난을 주시는 목적은 그로 하여금 죽음의 구덩이에서 건지시고 생명의 빛 즉 영생의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하려 하심이다. 엘리후는 ‘구덩이’라는 말을 여러 번 했는데(18, 22, 24, 28, 30절), 그것은 멸망의 구덩이인 지옥을 암시한다. 하나님의 구원은 멸망의 구덩이인 지옥으로부터의 구원이다. 

[31-33절] 욥이여, 귀를 기울여 내게 들으라. 잠잠하라. 내가 말하리라. 만일 할 말이 있거든 대답하라. 내가 너를 의롭게 하려 하노니 말하라. 만일 없으면 내 말을 들으라. 잠잠하라. 내가 지혜로 너를 가르치리라.

엘리후는 모든 일을 정당히 판단하고 말하려 한다. 그는 욥이 옳으면 옳은 것을 인정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는 욥이 할 말이 없으면 자기의 말을 좀더 들어보라고 말한다.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의롭게 살아야 하나 고난 중에 하나님의 섭리를 의심하거나 불평하거나 비난해서는 안 된다. 욥이 자신의 의와 성결을 주장하며 하나님을 비난하는 것은 잘못이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행하시는 것들을 다 진술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다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하나님과 변론하려 하지 말고 잠잠히 참고 믿고 순응하고 복종해야 한다.

셋째로, 하나님의 본심은 우리에게 고난을 주는 것이 아니고 평안을 주는 것이다. 그는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며 사람으로 교만치 않게 하시고 구원을 얻게 하신다. 우리는 그의 긍휼과 대속의 은혜로 지옥 형벌에서 구원을 받았고 또 상당한 평안을 누리며 산다.

34장: 하나님께서 불의하지 않으심

[1-4절] 엘리후가 말을 이어 가로되 지혜 있는 자들아, 내 말을 들으며 지식 있는 자들아, 내게 귀를 기울이라. 입이 식물의 맛을 변별함같이 귀가 말을 분별하나니 우리가 스스로 옳은 것은 택하고 무엇이 선한가 우리끼리 알아보자.

세상에는 선과 악, 의와 불의가 섞여 있다. 어리석은 자는 아무 말이나 함부로 말하고(잠 12:18), 또 아무 말이나 다 믿지만(잠 14:15), 지혜로운 자는 선과 악, 의와 불의를 분별하여 듣고 말한다.

[5-9절] 욥이 말하기를 내가 의로우나 하나님이 내 의를 제하셨고 내가 정직하나 거짓말장이[거짓말쟁이]가 되었고[내가 나의 의를 거슬러 거짓말을 하랴?](KJV, NASB) 나는 허물이 없으나 내 상처가 낫지 못하게 되었노라 하니 어느 사람이 욥과 같으랴. 욥이 훼방하기[조롱하기]를 물마시듯 하며 악한 일을 하는 자들과 사귀며 악인과 함께 다니면서 이르기를 사람이 하나님을 기뻐하나 무익하다 하는구나.

욥은 전에 “나의 의를 빼앗으신 하나님”(욥 27:2)이라는 표현을 했고, 또 “결코 내 입술이 불의를 말하지 아니하며 내 혀가 궤휼[거짓]을 발하지 아니하리라”고 말했다(욥 27:4). 아무리 고난 중에라도 욥이 만일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조롱했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악한 자들과 더불어 살면서 악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고 살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여러 가지 점에서 유익이 많다. 고난은 우리에게 교정의 유익뿐 아니라, 예방의 유익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경우에라도 사람이 하나님을 기뻐하나 아무 소용도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10-12절] 그러므로 너희 총명한 자들아, 내 말을 들으라. 하나님은 단정코 악을 행치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단정코 불의를 행치 아니하시고 사람의 일을 따라 보응하사 각각 그 행위대로 얻게 하시나니 진실로 하나님은 악을 행치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공의를 굽히지 아니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는 결코 악을 행치 않으시고 불의를 행치 않으신다. 또 그는 각 사람을 그 행위대로 공의롭게 심판하시고 보응하신다. 이것은 성경의 기본 진리이다(전 12:14; 롬 2:6). 엘리후의 말은 욥도 하나님의 엄격한 잣대로 보면 흠과 점이 없지 않으므로 그가 당한 고난이 하나님의 엄격한 공의의 섭리 안에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 같다.

[13-15절] 누가 땅을 그에게 맡겼느냐? 누가 온 세계를 정하였느냐? 그가 만일 자기만 생각하시고[‘그가 만일 자기의 결심대로’(NASB) 혹은 ‘자기의 의도하신 대로’(NIV)] 그 신[영]과 기운을 거두실진대 모든 혈기 있는 자가 일체로 망하고 사람도 진토[흙]로 돌아가리라.

하나님께서는 세상 만물에 대한 소유권과 통치권을 가진 자이시다. 그가 자기의 뜻대로 그들의 영과 호흡을 거두신다면, 이 세상의 모든 생명체들과 모든 사람은 다 죽어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권한을 사용치 않으시고 우리에게 많은 은혜와 선을 베푸셨고, 우리는 그의 선하신 섭리 속에 살아왔고 지금도 살고 있다.

[16-17절] 만일 총명이 있거든 이것을 들으며 내 말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공의를 미워하는 자시면 어찌 치리하시겠느냐? 의롭고 전능하신 자를 네가 정죄하겠느냐?

하나님께서는 공의를 미워하지 않으시고 의롭고 전능하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다 이해하지 못할 때에도 그의 섭리를 비난하거나 조롱하지 말고 겸손히 또 잠잠히 받아들여야 한다.

[18-20절] 그는 왕에게라도 비루하다 하시며 귀인들에게라도 악하다 하시며 왕족을 외모로 취치 아니하시며 부자를 가난한 자보다 더 생각하지 아니하시나니 이는 그들이 다 그의 손으로 지으신 바가 됨이니라. 그들은 밤중 순식간에 죽나니 백성은 떨며 없어지고 세력 있는 자도 사람의 손을 대지 않고 제함을 당하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판단치 않으신다. 사람의 외적 영광과 아름다움은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가치 있지 않다. 사람은 실상 그렇게 가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사람은 밤중에 순식간에 죽어가며 심지어 권세 있는 자도 사람의 손을 대지 않고 제함을 당하기도 한다.

[21-22절] 하나님은 사람의 길을 주목하시며 사람의 모든 걸음을 감찰하시나니 악을 행한 자는 숨을 만한 흑암이나 어두운 그늘이 없느니라.

하나님께서는 동생을 죽인 가인의 악행을 보셨고(창 4:9-10), 동생을 팔아넘긴 요셉의 형들의 악행을 보셨다(창 45:4-8). 시편 139:7-8은,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지옥](KJV)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라고 말하였다.

[23-25절] 하나님은 사람을 심판하시기에 오래 생각하실 것이 없으시니 세력 있는 자를 조사할 것 없이 꺾으시고 다른 사람을 세워 그를 대신하게 하시느니라. 이와 같이 그들의 행위를 아시고 그들을 밤사이에 엎으신즉 멸망하나니.

세상의 재판은 확실한 증거들을 수집하고 확인하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사람은 무엇을 바르게 판단할 능력도 부족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완전한 지혜와 지식으로 즉시 바른 판단을 하신다. 또 그는 그 바른 판단에 의거하여 그의 능력으로 악한 권력자를 꺾으시고 그를 폐하시고 다른 사람을 세우기도 하신다.

[26-28절] 그들을 악한 자로 여겨 사람의 목전에서 치심은 그들이 그를 떠나고 그의 모든 길을 무관(無關)히 여김이라. 그들이 이와 같이 하여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이 그에게 상달케[이르게] 하며 환난 받는 자의 부르짖음이 그에게 들리게 하느니라.

악인들이 하나님을 떠났다는 말은 그를 경외치 않고 그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다는 뜻이다. 또 하나님의 모든 길을 무관히 여겼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일과 그가 명하신 모든 일에 대해 관심이 없다는 뜻이다. 악인들은 하나님과 그의 뜻에 대해 무지하고 무관심하다. 그 결과, 그들로 인해 사람들이 고통과 해를 당하고 호소할 곳이 없어서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그 부르짖음이 하나님께 상달된다.

[29-30절] 주께서 사람에게 평강을 주실 때에 누가 감히 잘못하신다 하겠느냐? 주께서 자기 얼굴을 가리우실 때에 누가 감히 뵈올수 있으랴. 나라에게나 사람에게나 일반이시니 이는 사특한 자(카네프)[불경건한 자] (BDB, NASB)로 권세를 잡아 백성을 함해(陷害)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평안을 주실 때 아무도 그것을 정죄하지 못한다. 또 그가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기로 뜻하시면 그의 은혜와 도우심을 얻을 자가 아무도 없다. 이것은 개인에게나 국가에게나 일반이다. 또 그는 공의로우셔서 악한 자가 권력을 잡지 못하게도 하시며 자기 백성들로 그의 압제의 올무에 걸리지 않게도 하신다.

[31-32절] 누가 하나님께 아뢰기를 내가 징계를 받았사오니 다시는 범죄치[패역하게 행치] 아니하겠나이다. 나의 깨닫지 못하는 것을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악을 행하였으면 다시는 아니하겠나이다 한 자가 있느냐?

하나님께 징계를 받는 사람은 자신의 패역함을 깨닫고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며 혹 알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나의 깨닫지 못하는 것을 내게 가르치소서”라고 그에게 아뢰어야 마땅하지만, 악인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33절] 하나님이 네 뜻대로 갚으셔야 하겠다고 네가 그것을 싫어하느냐? 그러면 네가 스스로 택할 것이요 내가 할 것이 아니니 너는 아는 대로 말하라.

33절은 번역하기 어려워 보이고 영어번역들도 다양하다. ‘싫어하다’는 원어(마아스)는 ‘거절하다, 멸시하다’는 뜻이다. 본절 전반부는 아마, “네가 멸시하였기 때문에, 그가 네 생각대로 보응하시겠느냐?”일 것이다.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생각대로 보응하지 않으심을 말하는 것 같다. 사람의 생각은 불완전하고 부족하다. 우리는 사람의 생각을 완벽하게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34-37절] 총명한 자와 내 말을 듣는 모든 지혜 있는 자가 필연 내게 이르기를 욥이 무식하게 말하니 그 말이 지혜 없다 하리라. 욥이 끝까지 시험받기를 내가 원하노니 이는 그 대답이 악인과 같음이라. 그가 그 죄 위에 패역을 더하며 우리 중에서 손뼉을 치며 하나님을 거역하는 말을 많이 하는구나.

엘리후는 욥이 지혜와 지식이 없이 자신의 죄 위에 하나님께 패역한 말을 더한다고 지적한다. 사람이 고난 중에서라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말을 하는 것은 잘못이다. 욥의 부족이 여기에 있다고 보인다.

욥기 34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고난 중에도 하나님의 섭리를 조롱하거나 비방하지 말자. 욥은 자신이 의롭고 정직하였으나 하나님께서 그의 의를 제하셨다고 말하였다. 그것은 하나님을 조롱하며 비방하는 일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악과 불의를 행치 않으신다. 그의 지식은 즉각적이고 완전하며 그의 공의의 판단도 완전하다. 엄격한 잣대로 보면, 욥도 흠과 점이 없지 않으며 그의 당한 고난도 넓은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공의의 섭리 안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고난 중에라도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을 인정하고 그의 의로우심을 의심치 말고 그의 섭리를 조롱하거나 비방치 말자.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악인들처럼 살지 말고 바르고 선하게만 살자. 악한 자들은 하나님의 법을 떠나며 하나님의 일에 무관심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공의로 그들을 다스리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모든 악을 멀리하고 하나님의 법을 힘써 지키며 그의 하시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특히 고난 중에 겸손히 자신을 살피며 혹시 우리 속에 악한 것이 없는지 반성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하며, 모든 일을 섭리자 하나님께 맡기며 참고 기다려야 한다. 우리는 결코 하나님께 불평하거나 원망하는 말을 하지 말고 또 패역한 말도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악한 자들처럼 살지 말고 하나님을 믿고 인내하며 오직 그의 계명에 순종하여 의와 선을 행하자.

35장: 사람의 의는 하나님께 유익을 드리지 못함

[1-5절] 엘리후가 말을 이어 가로되 네가 이것을 합리[합당]하게 여기느냐? 네 생각에 네가 하나님보다 의롭다 하여 이르기를 유익이 무엇인고, 범죄한 것보다 내게 이익이 무엇인고 하는구나[네 생각에 네가 하나님보다 의롭다 하느냐? 이는 네가 이르기를, 주께 유익이 무엇인고, 범죄한 것보다 내게 이익이 무엇인고 함이니라]. 내가 너와 및 너와 함께 있는 네 동무들에게 대답하리라. 너는 하늘을 우러러 보라. 네 위의 높은 궁창(솨카크)[구름](BDB, KJV, NASB)을 바라보라.

사람은 하나님보다 의롭지 않다. 또 자기가 의로워도 주께 유익이 없고 자신에게도 이익이 없다는 말도 잘못이다.

[6-8절] 네가 범죄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네 죄악이 관영한들 하나님께 무슨 관계가 있겠으며 네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네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 네 악은 너와 같은 사람이나 해할 따름이요 네 의는 인생이나 유익하게 할 뿐이니라.

하나님의 섭리는 지극히 공의로우시다. 또 우리가 아무리 의롭게 살아도 그 의로운 행위가 하나님께 아무 유익을 드리지 못한다. 그것은 단지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거나 가기 자신에게 유익할 뿐이다. 사람의 죄도 하나님께 해를 끼치지 못하고 자신에게나 타인에게 해를 끼칠 뿐이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죄를 징벌하실 것이다.

[9-11절] 사람은 학대가 많으므로 부르짖으며 세력 있는 자의 팔에 눌리므로 도움을 부르짖으나 나를 지으신 하나님 곧 사람으로 밤중에 노래하게 하시며 우리를 교육하시기를 땅의 짐승에게 하심보다 더하게 하시며 우리에게 지혜 주시기를 공중의 새에게 주심보다 더하시는 이가 어디 계신가 말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구나.

사람들은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을 참으로 찾지 않는다. 요한계시록 9장에 보면, 사도 요한은 여섯째 천사가 나팔을 부는 환상을 보았다. 그것은 큰 강 유브라데 주위에서의 세계적 전쟁에 관한 것이다. 그 전쟁에 동원될 군인들은 ‘이만만’ 명 즉 약 2억명이다. 그러나 이 재앙에서 죽지 않고 남은 자들은 그 손으로 행하는 일을 회개치 않고 오히려 여러 귀신과 또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금, 은, 동과 목석의 우상에게 절하고 또 그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적질을 회개치 않았다(계 9:13-21). 그것이 심히 죄악된 인생의 모습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은혜를 주실 때 그의 고난이 그에게 구원과 성화가 되는 것이다. 시편 119:67, 71,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12-13절] 그들이 악인의 교만을 인하여 거기서 부르짖으나 응락하는 자가 없음은 헛된 부르짖음은 하나님이 결코 듣지 아니하시며 전능자가 돌아보지 아니하심이라.

믿음 없는 자들의 부르짖음은 하나님의 응답하심을 받지 못하는 헛된 부르짖음일 뿐이다. 잠언 1:24-33, “내가 부를지라도 너희가 듣기 싫어하였고 내가 손을 펼지라도 돌아보는 자가 없었고 도리어 나의 모든 교훈을 멸시하며 나의 책망을 받지 아니하였은즉 너희가 재앙을 만날 때에 내가 웃을 것이며 너희에게 두려움이 임할 때에 내가 비웃으리라. 너희의 두려움이 광풍같이 임하겠고 너희의 재앙이 폭풍같이 이르겠고 너희에게 근심과 슬픔이 임하리니 그때에 너희가 나를 부르리라. 그래도 내가 대답지 아니하겠고 부지런히 나를 찾으리라. 그래도 나를 만나지 못하리니 대저 너희가 지식을 미워하며 여호와 경외하기를 즐거워하지 아니하며 나의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나의 모든 책망을 업신여겼음이라. 그러므로 자기 행위의 열매를 먹으며 자기 꾀에 배부르리라. 어리석은 자의 퇴보는 자기를 죽이며 미련한 자의 안일은 자기를 멸망시키려니와 오직 나를 듣는 자는 안연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평안하리라.”

[14절] 하물며 말하기를 하나님은 뵈올 수 없고 일의 시비는 그 앞에 있으니 나는 그를 기다릴 뿐이라 하는 너랴.

본절은 아마, “참으로 네가 말하기를 내가 그를 보지 못한다고 하나, 판단이 그 앞에 있으니 너는 그를 간절히 기다리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은 것 같다(BDB). 성도는 고난 가운데 비록 하나님을 뵈올 수 없으나 그가 모든 일을 공의롭게 판단하실 것을 믿고 오직 그를 간절히 바라고 기다려야 한다. 그것이 참된 믿음이다.

[15-16절] 하나님이 진노하심으로 벌을 주지 아니하셨고 횡포(파쉬)[어리석음](BDB)를 심히 살피지 아니하셨으므로 이제 너 욥이 헛되이 입을 열어 지식 없는 말을 많이 하는구나.

하나님께서 욥에게 진노하여 보응하신 것이 아니지만, 하나님의 엄격한 공의의 심판 앞에 설 의인은 세상에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성도는 고난 가운데서 헛된 말, 지식 없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욥기 35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고난 중에 자신의 의의 부족함을 인식하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의를 내세우지 말고 또 그의 섭리를 어리석게 비난하지 말자. 하나님의 엄격한 공의 앞에 설 수 있는 의인은 아무도 없다. 우리의 의는 누더기 옷과 같다. 이사야 64:6,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또 우리의 좁은 생각은 하나님의 높고 깊은 뜻을 다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 중에 오직 잠잠히 하나님의 뜻을 묵상하자.

둘째로, 우리는 고난 중에 참으로 하나님을 찾자. 우리는 환난 중에라도 모든 일을 판단하실 이가 하나님이심을 깨닫고 하나님만 간절히 기다리자. “판단이 그 앞에 있으니 너는 그를 간절히 기다리라.”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공의로 판단하시고 섭리하신다. 고린도전서 4:5는,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 교훈했다.

36장: 하나님의 공의로우심, 선하심, 엄위하심

[1-7절] 엘리후가 말을 이어 가로되 나를 잠깐 용납하라. 내가 네게 보이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오히려 할 말이 있음이라. 내가 먼데서 지식을 취하고 나를 지으신 자에게 의를 돌려보내리라. 진실로 내 말이 거짓이 아니라 지식이 구비한 자가 너와 함께 있느니라. 하나님은 전능하시나(카비르)[능력이 많으시나] 아무도 멸시치 아니하시며 그 지능(코아크 레브)[마음(지혜)의 힘]이 무궁하사 악인을 살려 두지 않으시며 고난 받는 자를 위하여 신원(伸寃)하시며 그 눈을 의인에게서 돌이키지 아니하시고 그를 왕과 함께 영원히 위(位)에 앉히사 존귀하게 하시며.

4절에 ‘지식이 구비한 자’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 같다(NASB). 엘리후는 자신이 하나님께 지식을 얻어 하나님의 정당하심을 말하겠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시지만(창 18:14) 아무도 멸시치 않으신다. 그는 사람과 대화하시고 언약을 맺으신다. 심지어 그는 아브라함과 변론하셨고 모세와도 변론하셨다(창 18:22-33; 출 32:30-34). 그는 고아를 돌아보시며 도우시는 자이시다. 그는 지혜가 많으시다. 그러나 그는 악인을 살려두지 않으시고 죽이시며 고난받는 자들의 억울함을 갚아주시는 공의의 심판자이시다. 또 그는 의인에게서 눈을 돌이키지 않으시고 그를 왕과 함께 영원히 위에 앉히시고 존귀케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공의와 긍휼의 통치자이시다.

[8-10절] 혹시 그들이 누설(縷絏)(직킴)[차꼬들]에 매이거나 환난의 줄에 얽혔으면 그들의 소행과 허물을 보이사 그 교만한 행위를 알게 하시고 그들의 귀를 열어 교훈을 듣게 하시며 명하여 죄악에서 돌아오게 하시나니.

사람들이 죄수들이나 포로들처럼 포승줄이나 차꼬들에 묶이거나 환난의 줄에 매였으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소행과 허물을 보이셔서 그들의 교만한 행위, 즉 그들이 교만하고 높은 마음으로 처신한 것을 알게 하신다. 사람들의 교만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악을 행하게 만든다. 하나님께서는 또 그들의 귀를 여셔서 교훈을 듣게 하시고 명하여 죄악에서 돌이켜 돌아오게 하신다. 그것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이다(시 119:67). 하나님의 징계는 우리의 유익을 위하시며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신다(히 12:10).

[11-12절] 만일 그들이 청종하여 섬기면 형통히 날을 보내며 즐거이 해를 지낼 것이요 만일 그들이 청종치 아니하면 칼에 망하며 지식 없이 죽을 것이니라.

고난 중에도 하나님의 훈계를 듣고 그를 순종하고 섬기는 자들은 고난에서 건짐을 받고 형통한 날과 즐거운 해를 보낼 것이지만, 그의 말씀을 듣지 않는 자들은 결국 칼에 망하며 지식 없이 죽을 것이다.

[13-14절] 마음이 사곡한(카네프)[불경건한](BDB, NASB) 자들은 분노를 쌓으며 하나님께 속박을 받을지라도 도우심을 구하지 아니하나니 그들은 젊어서 죽으며 그 생명이 남창(男娼)(케데쉼)[몸을 파는 남자들]과 함께 망하려니와.

불경건한 자는 온갖 악을 행하며 하나님의 진노를 쌓는다. 그런 자는 하나님의 징벌로 어떤 환난의 속박을 당할지라도, 하나님께 회개하며 도우심을 간구하지 않는다. 그런 자는 젊어서 죽을 것이며 음란한 자들과 함께 망할 것이다. 불경건은 모든 죄와 멸망의 근본이다.

[15-16절] 하나님은 곤고한 자를 그 곤고할 즈음에 구원하시며 학대당할 즈음에 그 귀를 여시나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너를 곤고함에서 이끌어내사 좁지 않고 넓은 곳으로 옮기려 하셨은즉 무릇 네 상에 차린 것은 살진 것이 되었으리라.

하나님께서는 그를 경외하며 곤고할 때 부르짖는 자들을 그 곤고할 즈음에 구원하신다. 시편 34:6,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학대당할 즈음에 그들의 귀를 여신다. 시편 119:67,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욥을 포함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의인들을 곤고함에서 이끌어 내셔서 좁지 않고 넓은 곳으로 옮기려 하셨다. 또 욥의 밥상에 차린 모든 것은 살진 것이 되었을 것이다.

[17-18절] 이제는 악인의 받을 벌이 네게 가득하였고 심판과 공의가 너를 잡았나니 너는 분격함을 인하여 징책을 대적하지 말라. 대속(代贖)함을 얻을 일이 큰즉 스스로 그릇되게 말지니라.

18절은 번역하기가 매우 어려워 보이지만,13) 아마, “분노가 너를 조소하는 데로 이끌지 않도록 주의하라. 또 대속물의 큼이 너로 곁길로 가지 못하게 하라”(NASB)는 뜻 같다. 엘리후는 욥이 악인의 벌 같은 고난을 받는 중에 분노함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조롱하는 죄를 짓지 않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우리는 분노를 조심해야 한다. 시편 37:8,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여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 에베소서 4:26-27,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야고보서 1:20,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19절] 너의 부르짖음(슈아)[‘부르짖음’ 혹은 ‘부요’]이나 너의 세력이 어찌 능히 너의 곤고한 가운데서 너로 유익하게 하겠느냐?

KJV, “그가 네 부요를 귀중히 여기겠는가? 아니라. 금도 모든 힘의 세력도 아니라.” NASB, “네 부요와 네 힘의 모든 세력이 너를 곤경으로부터 지키겠는가?”

[20-21절] 너는 밤 곧 인생이 자기 곳에서 제함을 받는 때를 사모하지 말 것이니라. 삼가 악으로 치우치지 말라. 네가 환난보다 이것을 택하였느니라.

‘밤 곧 인생이 자기 곳에서 제함을 받는 때’는 ‘죽는 때’를 가리킨다. 그는 욥에게 비록 고난 중에서라도 죽음을 사모하지 말라고 말한다. 또 ‘악으로 치우치지 말라’고 한다. 그가 말하는 악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조롱하는 태도를 가지는 것을 말한다. “네가 환난보다 이것을 택하였음이니라”는 구절에 ‘이것’은 앞에서 말한 ‘악’을 가리킨다.

[22-23절] 하나님은 그 권능으로 큰 일을 행하시나니[높임을 받으신다] (NASB, NIV) 누가 그같이 교훈을 베풀겠느냐? 누가 그를 위하여 그의 길을 정하였느냐? 누가 말하기를 주께서 불의를 행하셨나이다 할 수 있으랴?

하나님께서는 권능과 위엄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교훈을 베푸시고 행할 바를 다 작정하시고 항상 의롭게 행하신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그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그를 향해 두려움을 가져야 하고 함부로 대항하는 말이나 조롱하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24-26절] 너는 하나님의 하신 일 찬송하기를 잊지 말지니라. 인생이 그 일을 노래하였느니라. 그 일을 모든 사람이 우러러 보나니 먼 데서도 보느니라. 하나님은 크시니 우리가 그를 알 수 없고 그 연수를 계산할 수 없느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의 일들을 알고 그를 찬송해야 한다. 하나님의 일들은 세상의 모든 사람이 우러러 보고 먼 곳에서도 본다. 특히,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구속사역은 오늘날에 온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찬송한다. 하나님께서는 크신 하나님이시다. 그의 지혜와 능력과 선하심은 지극히 크시다. 그의 연령은 계산할 수 없다. 그는 영원부터 영원까지 스스로 계신 하나님이시다.

[27-33절] 그가 물을 가늘게 이끌어 올리신즉 그것이 안개 되어 비를 이루고 그것이 공중에서 내려 사람 위에 쏟아지느니라. 구름의 폐임(펼쳐짐)과 그의 장막의 울리는 소리를 누가 능히 깨달으랴. 그가 번개 빛으로 자기의 사면에 두르시며 바다 밑도 가리우시며 이런 것들로 만민을 징벌하시며 이런 것들로 식물을 풍비(豊備)히 주시느니라. 그는 번개 빛으로 그 두 손을 싸시고 그것을 명하사 푯대를 맞추게 하시나니 그 울리는 소리가 풍우를 표시하고 육축에게까지 그 올라오는 것을 표시하느니라.

하나님께서는 땅과 바다와 호수 등에서 물을 가늘게 이끌어 올리셔서 안개와 구름을 만드시고 또 때를 따라 공중에서 풍성한 비를 땅 위에 내리신다. 또 천둥과 번개도 그가 내리시는 것들이다. 그는 그것으로 악한 자들을 징벌하시고 이스라엘의 대적들을 패하게도 하셨다. 사무엘상 2:10에 보면, 한나는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라. 하늘 우뢰로 그들을 치시리로다”라고 기도했다. 사무엘상 7:10에 보면, 사무엘이 번제를 드릴 때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가까이 왔으나 그 날에 여호와께서 블레셋 사람에게 큰 우뢰를 발하여 그들을 어지럽게 하시므로 그들이 이스라엘 앞에 패했다.

욥기 36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경건하게 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시지만 아무도 멸시하지 않으신다. 그는 지혜가 많으시며 악인을 공의로 심판하시고 고난받는 자들의 억울함을 갚아주신다. 그는 또 크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찬송하며 경건하게 살아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모든 악을 버려야 한다. 그는 환난을 통하여 인간의 교만과 악을 깨우치시고 교훈하신다. 만일 그들이 그의 교훈을 청종하면 그들이 형통할 것이나, 만일 그들이 그의 교훈을 청종치 않으면 그들은 결국 멸망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환난 날에 자신을 성찰하고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하고 겸손히 그에게 기도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고난 중에 분노함으로 하나님을 조롱하는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 엘리후는 욥이 고난 중에 분노함으로 권능과 위엄의 하나님을 조롱하는 죄를 짓지 말아야 하고 그에게 함부로 대항하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 함부로 불평하거나 원망하는 말이나 특히 분노하며 대항하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37장: 하나님께서는 능력이 크심

[1-5절] 이로 인하여 내 마음이 떨며 자기 처소에서 떠나느니라[뛰느니라]. 하나님의 음성 곧 그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들으라. 들으라. 그 소리를 천하에 퍼치시며 번개 빛으로 땅끝까지 이르게 하시고 그 후에 음성을 발하시며 위엄의 울리는 음성을 내시고는 그 음성이 들릴 때에 번개 빛을 금치 아니하시느니라. 하나님이 기이하게 음성을 울리시며 우리의 헤아릴 수 없는 큰 일을 행하시느니라.

1절의 ‘이로 인하여’라는 말은 앞장 끝에서 말한 하나님의 엄위하심과 능력의 일들을 가리킨다. 엘리후는 자연만물과 그 현상들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엄위하심과 능력의 일들을 인해 그의 마음이 떨리며 뛴다고 말한다. 엘리후는 하나님께서 천둥과 번개를 사용하심을 묘사하고 있다고 보인다. 그는 천둥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표현한다. 천둥소리는 온 천하에 퍼지고 번개 빛은 땅끝까지 이른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다 이해하고 헤아릴 수 없는 큰 일들을 행하신다.

[6-13절] 눈을 명하여 땅에 내리라 하시며 적은 비와 큰비도 그같이 내리게 하시느니라. 그가 각 사람의 손을 봉하시나니 이는 그 지으신 모든 사람으로 그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짐승들은 숨는 곳으로 들어가서 그 굴에 머물며 남방 밀실에서는 광풍이 이르고 북방에서는 찬 기운이 이르며 하나님의 부시는 기운에 얼음이 얼고 물의 넓이가 줄어지느니라. 그가 습기로 빽빽한 구름 위에 실으시고 번개 빛의 구름을 널리 펴신즉 구름이 [그의] 인도하시는 대로 두루 행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무릇 그의 명하시는 것을 세계상[온 세상의 지면에]에 이루려 함이라. 혹 징벌을 위하며 혹 토지를 위하며 혹 긍휼 베푸심을 위하여 구름으로 오게 하시느니라.

엘리후는 하나님께서 눈을 명하여 땅에 내리라 하시고 적은 비와 큰비도 그같이 내리게 하신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손을 봉하신다는 말은 이런 일들은 사람의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님을 말하는 것 같다. 이것은 창조자, 섭리자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일이다. 눈이 내리고 비고 오면 짐승들은 숨는 곳으로 들어가 그 굴에 머문다. 남방에서 태풍 같은 광풍이 밀려오고 북방에서 찬 공기가 닥쳐온다. 하나님의 부시는 기운에 얼음이 얼고 물의 넓이가 줄어진다. 그가 습기로 빽빽한 구름 위에 실으시고 번개 빛의 구름을 널리 펴시니 눈과 비구름은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대로 두루 행한다. 그래서 그것들은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것들을 온 세상의 지면에 이룬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악인들이나 악한 땅에 징벌을 내리시는 데 그것들을 쓰기도 하시고 또 논과 밭을 위해, 그의 긍휼 베푸심을 위해 쓰기도 하신다. 그는 천둥과 번개, 적은 비와 큰비, 남방으로부터의 광풍과 북방의 찬 공기, 물의 얾, 비구름 등을 다 주관하신다.

[14-22절] 욥이여, 이것을 듣고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기묘하신 일을 궁구하라. 하나님이 어떻게 이런 것들에게 명령하셔서 그 구름의 번개 빛으로 번쩍 번쩍하게 하시는지 네가 아느냐? 구름의 평평하게 뜬 것과 지혜(데임)[지식]가 온전하신 자의 기묘한 일을 네가 아느냐? 남풍으로하여 땅이 고요할 때에 네 의복이 따뜻한 까닭을 네가 아느냐? 네가 능히 그와 함께하여 부은 거울 같은 견고한 궁창을 펼 수 있느냐? 우리가 그에게 할 말을 너는 우리에게 가르치라. 우리는 어두워서 진술하지 못하겠노라.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을 어찌 그에게 고할 수 있으랴. 어찌 삼키우기를 바랄 자가 있으랴[만일 사람이 말한다면, 정녕 그는 삼키울 것이라](KJV). 사람이 어떤 때는 궁창의 광명을 볼 수 없어도 바람이 지나가면 맑아지느니라. 북방에서는 금빛이 나오나니 하나님께는 두려운 위엄이 있느니라.

엘리후는 욥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기묘한 일들을 알 수 있느냐고 묻는다. 그는 네가 하나님께서 어떻게 구름을 하늘에 평평하게 뜨게 하시는지 아느냐, 지식이 온전하신 하나님의 기묘한 일들을 아느냐, 남풍이 고요히 불 때 옷이 따뜻해지는 까닭을 아느냐, 네가 능히 하나님처럼 부은 거울 같은 견고한 궁창을 펼 수 있느냐고 묻는다. 실상, 사람은 하나님의 기묘한 일들에 대해 무엇을 말할 만한 지식이 없다. 사람이 감히 하나님 앞에 무엇을 말할 수 있겠는가? 어두운 비구름은 때때로 해를 가리지만 바람이 불어 비구름을 지나가게 하면 하늘이 맑아지고 우리는 밝은 해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 어떻게, 왜 구름이 거기에 생기고 바람이 그때에 부는지 모른다.


[23-24절] 전능자를 우리가 측량할 수 없나니 그는 권능이 지극히 크사 심판이나 무한한 공의를 굽히지 아니하심이니라.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를 경외하고 그는 마음에 지혜롭다 하는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시느니라.

우리는 전능자 하나님을 다 측량할 수 없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은 그가 자신을 알리신 작은 부분과 분량만큼이다. 하나님께서는 권능이 지극히 크시고 심판이나 무한한 공의를 굽히지 아니하신다. 그러므로 아무리 지혜로운 사람이라 할지라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사람은 오직 하나님을 경외해야 한다.

욥기 37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전능하시고 엄위하시며, 그의 지혜로운 뜻대로 자연만물과 그 현상들을 주관하시고 구름과 바람과 눈과 비를 주관하신다. 12절, “구름이 그의 인도하시는 대로 두루 행하나니 이는 무릇 그의 명하시는 것을 온 세상의 지면에 이루려 함이라.”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들을 적당한 때에 그의 지혜로우시고 공의로우시고 선하신 목적을 위하여 사용하신다.

둘째로,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측량할 수 없다. 23절, “전능자를 우리가 측량할 수 없나니.” 욥기 36:26, “하나님은 크시니 우리가 그를 알 수 없고.” 시편 145:3, “여호와는 광대하시니 . . . . 그의 광대하심을 측량치 못하리로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아는 바는 그가 자신을 나타내신 지극히 작은 부분뿐이다. 물론 그 지식은 확실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다 알 수 없는 크신 하나님, 무한하신 하나님이시다.

셋째로, 사람은 겸손히 하나님을 경외해야 한다. 하나님을 경외함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의 기본적 마음가짐이다. 하나님을 참으로 아는 자는 그를 경외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겸손히 하나님을 경외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