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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Samuel) 1장: 1장: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슬퍼함 - 10장: 암몬 자손들을 물리침

영국신사77 2020. 4. 14. 18:29


사무엘하

제목차례

1장: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슬퍼함

2장: 다윗이 유다의 왕이 됨

3장: 아브넬의 죽음

4장: 이스보셋의 죽음

5장: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됨

6장: 법궤를 옮겨옴

7장: 다윗에게 주신 약속

8장: 다윗의 승전들

9장: 므비보셋을 선대함

10장: 암몬 자손들을 물리침

11장: 다윗의 범죄

12장: 나단 선지자를 통한 책망

13장: 압살롬이 암논을 죽임

14장: 압살롬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옴

15장: 압살롬의 반역

16장: 시므이가 다윗을 조주함

17장: 후새의 모략

18장: 압살롬의 죽음

19장: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옴

20장: 세바의 반란

21장: 3년 기근

22장: 다윗의 시

23장: 다윗의 용사들

24장: 인구조사의 죄


1장: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슬퍼함

사무엘하는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인 다윗 왕의 역사를 기록한다.

[1-4절] 사울의 죽은 후라. 다윗이 아말렉 사람을 도륙하고 돌아와서 시글락에서 이틀을 유하더니 제3일에 한 사람이 사울의 진에서 나왔는데 그 옷은 찢어졌고 머리에는 흙이 있더라. 저가 다윗에게 나아와 땅에 엎드려 절하매 다윗이 저에게 묻되 너는 어디서 왔느냐? 대답하되 이스라엘 진에서 도망하여 왔나이다. 다윗이 가로되 일이 어떻게 되었느뇨? 너는 내게 고하라. 저가 대답하되 군사가 전쟁 중에서 도망하기도 하였고 무리 중에 엎드러져 죽은 자도 많았고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도 죽었나이다.

다윗이 시글락으로 돌아온 후 제3일이었을 때 그는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의 죽음의 소식을 들었다. 그가 아기스를 따라 그 전쟁에 참여하였다가 제3일에 시글락으로 돌아왔었고 또 아말렉 사람들을 치는데 적어도 하루 종일을 썼으므로 그때는 그가 블레셋 군대에 참여하러 나갔을 때로부터 약 7일이 되는 때이었다. 즉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쟁이 시작된 지 1주일 만에 죽은 것이다. 그 전쟁은 하나님께서 사울을 죽게 하시기 위한 전쟁이었다. 다윗이 그 전쟁에서 블레셋 군대로 참여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이었다. 만일 그가 참여했더라면, 그는 자기 동족 이스라엘에게 사울과 요나단과 이스라엘을 죽였다는 오해를 받게 되었을 것이다.

[5-10절] 다윗이 자기에게 고하는 소년에게 묻되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의 죽은 줄을 네가 어떻게 아느냐? 그에게 고하는 소년이 가로되 내가 우연히 길보아산에 올라보니 사울이 자기 창을 의지하였고 병거와 기병은 저를 촉급히[급히] 따르는데 사울이 뒤로 돌이켜 나를 보고 부르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한즉 내게 이르되 너는 누구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나는 아말렉 사람이니이다 한즉 또 내게 이르되 내 목숨이 아직 내게 완전히 있으므로 내가 고통에 들었나니 너는 내 곁에 서서 나를 죽이라 하시기로 저가 엎드러진 후에는 살 수 없는 줄을 내가 알고 그 곁에 서서 죽이고 그 머리에 있는 면류관과 팔에 있는 고리를 벗겨서 내 주께로 가져왔나이다.

[11-16절] 이에 다윗이 자기 옷을 잡아 찢으매 함께 있는 모든 사람도 그리하고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과 여호와의 백성과 이스라엘 족속이 칼에 죽음을 인하여 저녁때까지 슬퍼하여 울며 금식하니라. 다윗이 그 고한 소년에게 묻되 너는 어디 사람이냐? 대답하되 나는 아말렉 사람 곧 외국인의 아들이니이다. 다윗이 저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 죽이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냐 하고 소년 중 하나를 불러 이르되 가까이 가서 저를 죽이라 하매 그가 치매 곧 죽으니라. 다윗이 저에게 이르기를 네 피가 네 머리로 돌아갈지어다. 네 입이 네게 대하여 증거하기를 내가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죽였노라 함이니라 하였더라.

다윗은 자기 옷을 잡아 찢었다. 옛시대의 사람들은 몹시 슬프고 괴로울 때 자기 옷을 잡아 찢었다. 또 다윗은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과 여호와의 백성과 이스라엘 족속이 칼에 죽음을 인하여 저녁때까지 슬퍼하여 울며 금식하였다. 다윗에게 사울의 죽음을 알려준 그 소년이 죽임을 당한 것은 그가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왕을 죽였다고 보고했기 때문이었다. 실상, 사울은 사무엘상 31:4의 증거대로 스스로 칼에 엎어져 죽었다고 보인다.

[17-20절] 다윗이 이 슬픈 노래로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을 조상(弔喪)하고 명하여 그것을 유다 족속에게 가르치라 하였으니 곧 활 노래라. 야살의 책에 기록되었으되 이스라엘아, 너의 영광이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도다. 이 일을 가드에도 고하지 말며 아스글론 거리에도 전파하지 말지어다. 블레셋 사람의 딸들이 즐거워할까, 할례 받지 못한 자의 딸들이 개가를 부를까 염려로다.

17절 이하는 다윗이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의 죽음을 애도(哀悼)하는 마음으로 지은 노래이었다. 다윗은 이 슬픈 노래로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을 슬퍼하였고 또 명하여 그것을 유다 족속에게 가르치라고 하였다. 활 노래는 아마 활을 사용하여 연주한 노래라는 뜻이다. 야살의 책은 여호수아 10:13에도 언급된 책으로 옛날부터 내려온 역사적 기록물인 듯하다.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은 이스라엘의 영광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이제 길보아 산들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이 수치스런 패전의 소식, 곧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울 이 소식이 블레셋에 알려지지 않기를 바란다.

[21-25절] 길보아 산들아, 너희 위에 우로(雨露)가 내리지 아니하며 제물 낼 밭도 없을지어다. 거기서 두 용사의 방패가 버린 바 됨이라. 곧 사울의 방패가 기름 부음을 받지 않음같이 됨이로다. 죽은 자의 피에서, 용사의 기름에서 요나단의 활이 물러가지 아니하였으며 사울의 칼이 헛되이 돌아오지 아니하였도다. 사울과 요나단이 생전에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자러니 죽을 때에도 서로 떠나지 아니하였도다. 저희는 독수리보다 빠르고 사자보다 강하였도다. 이스라엘 딸들아, 사울을 슬퍼하여 울지어다. 저가 붉은 옷으로 너희에게 화려하게 입혔고 금 노리개를 너희 옷에 채웠도다. 오호라, 두 용사가 전쟁 중에 엎드러졌도다. 요나단이 너의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

사울과 요나단은 이전에 여러 전쟁들에서 항상 승리했으나 블레셋 사람들과 길보아 산들에서 한 전투에서 실패하였다. 비록 사울 왕이 그의 원수이었지만, 다윗은 사울 왕과 요나단의 장점을 인정하였다.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은 평소에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자들이었다. 또 그들은 독수리보다 빠르고 사자보다 강한 용사들이었다.

[26-27절] 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승하였도다.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으며 싸우는 병기가 망하였도다 하였더라.

다윗은 특히 요나단의 사랑을 기억하고 인정한다. 그는 요나단이 자기에게 심히 아름답다고 말하며 또 요나단이 여인의 사랑보다 더 큰 사랑으로 그를 사랑했다고 표현했다. 그는 사울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했다. 그는 옷을 찢고 저녁까지 애통하며 금식했고, 그의 죽음을 도왔다고 자랑스레 말한 아말렉 소년을 즉석에서 처단했고 그의 진심의 슬픔을 표현할 애가를 지어 유다 족속에게 부르게 했다.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와 성도들을 사랑하자. 다윗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사랑하였다. 특히 그는 그의 친구 요나단을 사랑하였다. 그는 그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하였다. 또 그가 사울의 죽음을 슬퍼한 것은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반란자나 배신자의 마음가짐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며 그의 나라인 교회를 가장 사랑하자.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을 가장 사랑하자. 그러므로 주께서는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다(요 13:34). 우리 주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자기 희생의 사랑을 본 보이셨으므로 우리도 다른 성도를 향해 참된 사랑, 온전한 사랑으로 사랑해야 한다. 사도 바울도 에베소서 5:2에서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고 교훈하였다. 우리는 이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원수까지도 끝까지 사랑하자. 다윗은 원수 사울의 죽음이 그에게 마음의 기쁨과 위로가 될 수 있었을 것이지만, 그는 그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했다. 우리도 이런 사랑의 마음을 품고 살자. 주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사랑을 교훈하셨다. 누가복음 6:27-28,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바울도 같은 교훈을 주었다. 로마서 12:14, 19-21,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이것이 하나님의 교훈이며 하나님의 뜻이다.

2장: 다윗이 유다의 왕이 됨

[1-4절] 그 후에 다윗이 여호와께 물어 가로되 내가 유다 한 성으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올라가라. 다윗이 가로되 어디로 가리이까? 가라사대 헤브론으로 갈지니라. 다윗이 그 두 아내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과 갈멜 사람 나발의 아내 되었던 아비가일을 데리고 그리로 올라갈 때에 또 자기와 함께한 종자들과 그들의 권속들을 다 데리고 올라가서 헤브론 각 성에 거하게 하니라. 유다 사람들이 와서 거기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유다 족속의 왕을 삼았더라.

다윗은 중대한 일을 결정할 때마다 먼저 하나님께 물었다. 주권적 섭리자 하나님을 범사에 인정하는 자는 하나님께 항상 기도할 것이다. 그는 자기와 함께한 사람들과 그 가족들을 다 데리고 올라가서 헤브론 각 성에 거하게 하였다. ‘헤브론 각 성’이라는 표현의 뜻을 잘 알 수 없지만, 헤브론은 여러 마을들로 형성된 큰 도시이었던 것 같다. 헤브론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다윗의 활동 근거지가 되었다. 유다 사람들은 와서 거기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유다 족속의 왕을 삼았다. 그것은 선지자 사무엘이 그에게 기름을 부었던 때로부터 약 10여년 후이었다. 다윗이 헤브론에서 유다 족속의 왕이 된 날 수는 일곱 해 여섯 달이었다(삼하 2:11). 사무엘하 5:4-5, “다윗이 30세에 위에 나아가서 40년을 다스렸으되 헤브론에서 7년 6개월 동안 유다를 다스렸고 예루살렘에서 33년 동안 온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스렸더라.” 다윗의 전 통치연대는 주전 1010-970년경이라고 추정된다.

[4-7절] . . . 혹이 다윗에게 고하여 가로되 사울을 장사한 사람은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니이다 하매 다윗이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에게 사자들을 보내어 가로되 너희가 너희 주 사울에게 이처럼 은혜(케세드)[자비]를 베풀어 장사하였으니 여호와께 복을 받을지어다. 너희가 이 일을 하였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은혜(케세드)[자비]와 진리로 너희에게 베푸시기를 원하고 나도 이 선한 일을 너희에게 갚으리니 이제 너희는 손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할지어다. 너희 주 사울이 죽었고 또 유다 족속이 내게 기름을 부어 저희의 왕을 삼았음이니라.

다윗은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되기를 원하였다. 그는 사울의 추종자들에 대해 서운한 감정을 가지지 않았고 감정적으로 보복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는 본래부터 이스라엘의 합법적 왕정에 대해 반란이나 반역 같은 생각을 가지지 않았다. 그는 사울의 추종자들을 징벌하기를 원치 않고 소위 화합정치를 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는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을 축복하며 그들의 선하고 충성된 행위에 대해 보상하기를 원하였다.

[8-11절] 사울의 군장 넬의 아들 아브넬이 이미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데리고 마하나임으로 건너가서 길르앗과 아술과 이스르엘과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온 이스라엘의 왕을 삼았더라.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비로소 이스라엘 왕이 될 때에 나이 40세며 두 해 동안 위에 있으니라. 유다 족속은 다윗을 따르니 다윗이 헤브론에서 유다 족속의 왕이 된 날 수는 일곱 해 여섯 달이더라.

그러나 이스라엘 전체의 화합은 시간이 필요했다.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은 나이 40세에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고 2년간 왕위에 있었다. 그러나 유다 족속은 다윗을 따랐고, 다윗은 헤브론에서 7년 6개월간 유다 족속의 왕이 되었다. 이스라엘 나라는 과도기적으로 두 나라로 분리되었다. 두 나라 간의 갈등은 몇 년간 계속되었다.

[12-17절] 넬의 아들 아브넬과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신복들은 마하나임에서 나와서 기브온에 이르고 스루야의 아들 요압과 다윗의 신복들도 나와서 기브온 못가에서 저희를 만나 앉으니 이는 못 이편이요 저는 못 저편이라. 아브넬이 요압에게 이르되 청컨대 소년들로 일어나서 우리 앞에서 장난하게 하자. 요압이 가로되 일어나게 하자 하매 저희가 일어나 그 수효대로 나아가니 베냐민과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편에 열 둘이요 다윗의 신복 중에 열 둘이라. 각기 적수의 머리를 잡고 칼로 적수의 옆구리를 찌르매 일제히 쓰러진지라. 그러므로 그곳을 헬갓핫수림[날카로운 칼의 들판]이라 일컬었으며 기브온에 있더라. 그 날에 싸움이 심히 맹렬하더니 아브넬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의 신복들 앞에서 패하니라.

이처럼 동족 간의 갈등과 싸움, 죽임과 죽음이 있었다.

[18-23절] 그곳에 스루야의 세 아들 요압과 아비새와 아사헬이 있었는데 아사헬의 발은 들노루같이 빠르더라. 아사헬이 아브넬을 쫓아 달려가되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아브넬의 뒤를 쫓으니 아브넬이 뒤를 돌아보며 가로되 아사헬아, 너냐? 대답하되 내로라. 아브넬이 저에게 이르되 너는 좌편으로나 우편으로나 치우쳐서 소년 하나를 잡아 그 군복을 빼앗으라 하되 아사헬이 치우치기를 원치 않고 그 뒤를 쫓으매 아브넬이 다시 아사헬에게 이르되 너는 나 쫓기를 그치라. 내가 너를 쳐서 땅에 엎드러지게 할 까닭이 무엇이냐? 그렇게 하면 내가 어떻게 네 형 요압을 대면하겠느냐 하되 저가 치우치기를 싫어하매 아브넬이 창 뒤끝으로 그 배를 찌르니 창이 그 등을 꿰뚫고 나간지라. 곧 그곳에 엎드러져 죽으매 아사헬의 엎드러져 죽은 곳에 이르는 자마다 머물러 섰더라.

그곳에 스루야의 세 아들 요압과 아비새와 아사헬이 있었다. 스루야는 다윗의 누이이었다(대상 2:16). 그러면 요압과 아비새와 아사헬은 다윗의 조카들이다. 아사헬은 비록 그의 발이 들노루같이 빨랐으나 불행하게도 그 싸움에서 아브넬의 창 뒤끝에 찔려 죽었다.

[24-29절] 요압과 아비새가 아브넬의 뒤를 쫓아 기브온 거친 땅의 길 가 기아 맞은편 암마산에 이를 때에 해가 졌고 베냐민 족속은 함께 모여 아브넬을 따라 한 떼를 이루고 작은 산꼭대기에 섰더라. 아브넬이 요압에게 외쳐 가로되 칼이 영영히 사람을 상하겠느냐? 마침내 참혹한 일이 생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네가 언제나 무리에게 그 형제 쫓기를 그치라 명하겠느냐? 요압이 가로되 하나님이 사시거니와 네가 흔단[틈의 실마리]의 말을 내지 아니하였더면 무리가 아침에 다 돌아갔을 것이요 그 형제를 쫓지 아니하였으리라 하고 나팔을 불매 온 무리가 머물러 서고 다시는 이스라엘을 쫓아가지 아니하고 다시는 싸우지도 아니하니라. 아브넬과 그 종자들이 밤새도록 행하여 아라바를 지나 요단을 건너 비드론 온 땅을 지나 마하나임에 이르니라.

[30-32절] 요압이 아브넬 쫓기를 그치고 돌아와서 무리를 다 모으니 다윗의 신복 중에 19인과 아사헬이 궐(闕)이 났으나 다윗의 신복들이 베냐민과 아브넬에게 속한 자들을 쳐서 360명을 죽였더라. 무리가 아사헬을 베들레헴에 있는 그 아비 묘에 장사하고 요압과 그 종자들이 밤새도록 행하여 헤브론에 이를 때에 날이 밝았더라.

사무엘하 2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범사에 하나님께 기도하자. 다윗은 중요한 일을 결정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우리도 그렇게 하자. 그것이 믿음이며 성경적이다. 잠언 3:6은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고 말했다.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자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믿는 자요 그런 자는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기며 또 범사에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 우리는 쉬지 말고 기도하고(살전 5:17) 범사에 기도하자.

둘째로, 우리는 항상 선한 일을 도모하자. 다윗은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그들의 왕 사울을 위해 한 선한 일에 대해 듣고 그들을 축복하며 그들에게 선하게 보응하기를 원했다. 성경의 교훈의 요점은 우리가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는 주의 말씀은 우리가 세상에서 선을 행하라는 교훈이다(마 5:14-16). 아모스 5:14는 너희는 살기 위하여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라고 말했다. 선행은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이다(딛 2:14). 우리는 항상 선한 일을 도모하자.

셋째로, 우리는 고난의 시간을 잘 참고 기다리자. 사울은 죽고 다윗은 하나님의 응답과 지시를 따라 헤브론으로 올라가 왕이 되었다. 그러나 고난이 다 끝난 것은 아니었다. 그를 죽이려 했던 사울은 죽었으나 이스라엘 나라가 둘로 나뉘어 갈등을 가지게 되었다. 사울의 군장 아브넬은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데리고 마하나임으로 건너가 그를 스라엘의 왕을 삼았다. 다윗이 전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 위해서는 아직 7년 반의 세월이 더 필요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이렇게 이루어져 가고 있었다. 우리는 고난의 시간을 잘 참고 기다려야 한다.

3장: 아브넬의 죽음

[1절]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오래매 다윗은 점점 강하여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가니라.

하나님의 뜻은 대세(大勢)를 통해 점점 드러났다.

[2-5절] 다윗이 헤브론에서 아들들을 낳았으되 맏아들은 암논이라.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의 소생이요 둘째는 길르압이라. 갈멜 사람 나발의 아내 되었던 아비가일의 소생이요 셋째는 압살롬이라. 그술 왕 달매의 딸 마아가의 아들이요 넷째는 아도니야라. 학깃의 아들이요 다섯째는 스바댜라. 아비달의 아들이요 여섯째는 이드르암이라. 다윗의 아내 에글라의 소생이니 이는 다윗이 헤브론에서 낳은 자들이더라.

일부다처(一夫多妻)는 하나님께서 옛시대에 더러 허용하셨으나 그것이 하나님의 본래의 뜻은 아니다. 하나님의 뜻은 분명히 일부일처(一夫一妻) 곧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혼이다(창 2:24; 딤전 3:2).

[6-11절]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있는 동안에 아브넬이 사울의 집에서 점점 권세를 잡으니라. 사울에게 첩이 있었으니 이름은 리스바요 아야의 딸이더라. 이스보셋이 아브넬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내 아버지의 첩을 통간하였느냐? 아브넬이 이스보셋의 말을 매우 분히 여겨 가로되 내가 유다의 개 대강[개 머리]이뇨? 내가 오늘날 당신의 아버지 사울의 집과 그 형제와 그 친구에게 은혜를 베풀어서 당신을 다윗의 손에 내어주지 아니하였거늘 당신이 오늘날 이 여인에게 관한 허물을 내게 돌리는도다.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맹세하신 대로 내가 이루게 아니하면 하나님이 아브넬에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라. 그 맹세는 곧 이 나라를 사울의 집에서 다윗에게 옮겨서 그 위를 단에서 브엘세바까지 이스라엘과 유다에 세우리라 하신 것이니라 하매 이스보셋이 아브넬을 두려워하여 감히 한 말도 대답지 못하니라.

아브넬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하신 약속을 알고 있었으나 사울에 대한 충성 때문에 그 아들 이스보셋을 섬겼다. 그러나 왕과 감정의 골이 생겼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왕국을 허무시는 일이었다.

[12-16절] 아브넬이 자기를 대신하여 사자들을 다윗에게 보내어 가로되 이 땅이 뉘 것이니이까? 또 가로되 당신은 나로 더불어 언약하사이다. 내 손이 당신을 도와 온 이스라엘로 당신에게 돌아가게 하리이다. 다윗이 가로되 좋다, 내가 너와 언약하려니와 내가 네게 한가지 일을 요구하노니 나를 보러 올 때에 위선 사울의 딸 미갈을 데리고 오라. 그렇지 않으면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하고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에게 사자들을 보내어 이르되 내 처 미갈을 내게로 돌리라. 저는 내가 전에 블레셋 사람의 양피 일백으로 정혼한 자니라. 이스보셋이 보내어 그 남편 라이스의 아들 발디엘에게서 취하매 그 남편이 저와 함께 오되 울며 바후림까지 따라 왔더니 아브넬이 저에게 돌아가라 하매 돌아가니라.

다윗은 온 이스라엘을 통일시키는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가 미갈을 데려오라고 한 것은 미갈이 그의 합법적 아내임을 나타내고 인간의 결혼관계가 세상 사는 동안 누구도 무효화할 수 없는 관계임을 보인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9:6). 그가 미갈을 데려오라고 한 것은, 부수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고려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자신의 신분 즉 자신이 사울 왕의 사위임을 보이기를 원했을지도 모른다. 인간적으로 볼 때, 다윗은 사울의 왕가를 이을 만한 인물이었다. 그것은 그가 사울의 추종자들의 마음을 얻고 이스라엘을 통합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스보셋이 순순히 다윗의 청을 들어준 것을 보면 그 배후에 다윗과의 약속을 지키려는 아브넬의 역할이 있었을 것이다. 라이스에게는 무정하게도 보이지만, 실상 그가 미갈과 결혼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무효이었다. 미갈은 다윗과 결혼한 자이었기 때문이다.

[17-21절] 아브넬이 이스라엘 장로들에게 말하여 가로되 너희가 여러번 다윗으로 너희 임금 삼기를 구하였으니 이제 그대로 하라. 여호와께서 이미 다윗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 종 다윗의 손으로 내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블레셋 사람의 손과 모든 대적의 손에서 벗어나게 하리라 하셨음이니라 하고 아브넬이 또 베냐민 사람의 귀에 말하고 이스라엘과 베냐민의 온 집이 선히 여기는 모든 것을 다윗의 귀에 고하려고 헤브론으로 가니라. 아브넬이 종자 20인으로 더불어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에게 나아가니 다윗이 아브넬과 그 함께한 사람을 위하여 잔치를 배설하였더라. 아브넬이 다윗에게 고하되 내가 일어나 가서 온 이스라엘 무리를 내 주 왕의 앞에 모아 더불어 언약하게 하고 마음의 원하시는 대로 모든 것을 다스리시게 하리이다. 이에 다윗이 아브넬을 보내매 저가 평안히 가니라.

‘이스라엘과 베냐민의 온 집이 선히 여기는 모든 것’은 다윗이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되는 것이다. 다윗은 온 이스라엘의 연합이라는 대의(大義)를 위해 원수의 군장(軍長)을 포용하고 선대하였다. 아브넬의 뜻은, 비록 하나님의 허락하심이 있어야 되는 것이지만, 다윗의 보기에 좋은 것이었다. 그러므로 다윗은 그를 평안히 보냈다.

[22-26절] 다윗의 신복들과 요압이 적군을 치고 크게 노략한 물건을 가지고 돌아오니 아브넬은 이미 보냄을 받아 평안히 갔고 다윗과 함께 헤브론에 있지 아니한 때라. 요압과 그 함께한 모든 군사가 돌아오매 혹이 요압에게 고하여 가로되 넬의 아들 아브넬이 왕에게 왔더니 왕이 보내매 저가 평안히 갔나이다. 요압이 왕에게 나아가 가로되 어찌 하심이니이까? 아브넬이 왕에게 나아왔거늘 어찌하여 저를 보내어 잘 가게 하셨나이까? 왕도 아시려니와 넬의 아들 아브넬의 온 것은 왕을 속임이라. 왕의 출입하는 것을 알고 모든 하시는 것을 알려 함이니이다 하고 이에 다윗에게서 나와서 사자들을 보내어 아브넬을 쫓아가게 하였더니 시라 우물가에서 저를 데리고 돌아왔으나 다윗은 알지 못하였더라.

요압은 자기 동생을 죽인 아브넬에 대해 미워하는 나쁜 감정과 그가 다윗을 속이려고 왔다는 잘못된 선입관을 가지고 있었다.

[27-30절] 아브넬이 헤브론으로 돌아오매 요압이 더불어 종용히 말하려는 듯이 저를 데리고 성문으로 들어가서 거기서 배를 찔러 죽이니 이는 자기의 동생 아사헬의 피를 인함이더라. 그 후에 다윗이 듣고 이르되 넬의 아들 아브넬의 피에 대하여 나와 내 나라는 여호와 앞에 영원히 무죄하니 그 죄가 요압의 머리와 그 아비의 온 집으로 돌아갈지어다. 또 요압의 집에서 백탁병자[유출병자](KJV, NASB)나 문둥병자나 지팡이를 의지하는 자나 칼에 죽는 자나 양식이 핍절한 자가 끊어지지 아니할지로다 하니라. 요압과 그 동생 아비새가 아브넬을 죽인 것은 저가 기브온 전쟁에서 자기 동생 아사헬을 죽인 까닭이었더라.

요압의 행동은 비겁하고 악한 행위이었다. 아브넬은 자기 방어를 하지 않은 상태이었다. 더욱이, 요압의 행동은 사사로운 감정으로 대의(大義)를 어그러뜨리는 어리석은 행위이었다. 대의가 무엇인가? 그것은 이스라엘을 통합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아브넬이 계획한 바이었고(9-10절), 다윗과 언약한 내용이었고(12-13절, 21절), 그것은 온 이스라엘이 선히 여기는 것이었다(19절). 그러나 사사로운 감정 때문에 요압의 눈에는 그 대의가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

[31-34절] 다윗이 요압과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옷을 찢고 굵은 베를 띠고 아브넬 앞에서 애통하라 하니라. 다윗 왕이 상여를 따라가서 아브넬을 헤브론에 장사하고 아브넬의 무덤에서 소리를 높여 울고 백성도 다 우니라. 왕이 아브넬을 위하여 애가를 지어 가로되 아브넬의 죽음이 어찌하여 미련한 자의 죽음 같은고. 네 손이 결박되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착고[차꼬]에 채이지 아니하였거늘 불의한 자식의 앞에 엎드러짐같이 네가 엎드러졌도다 하매 온 백성이 다시 그를 슬퍼하여 우니라.

아브넬은, 비록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지 못했고 또 이제까지 다윗과 원수관계였지만, 사울 왕가를 지킨 정당하고 충성된 군장이었다. 그는 용기를 가지고 다윗에게 와서 온 이스라엘의 통합을 의논하고 그것을 실행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애석하게도 죽임을 당한 것이다. 그것은 다윗의 의도한 바가 아니었다. 다윗은 아브넬의 죽음을 매우 애도하였고 온 백성도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울었다.

[35-39절] 석양에[아직 해 지기 전에](KJV, NASB) 뭇 백성이 나아와 다윗에게 음식을 권하니 다윗이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해 지기 전에 떡이나 다른 것을 맛보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라 하매 온 백성이 보고 기뻐하며 왕이 무슨 일을 하든지 무리가 다 기뻐하므로 이 날에야 온 백성과 온 이스라엘이 넬의 아들 아브넬을 죽인 것이 왕의 한 바가 아닌 줄을 아니라. 왕이 그 신복에게 이르되 오늘 이스라엘의 방백이요 또는 대인이 죽은 것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이 되었으나 오늘날 약하여서 스루야의 아들인 이 사람들을 제어하기가 너무 어려우니 여호와는 악행한 자에게 그 악한 대로 갚으실지로다 하니라.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대의를 중시하자. 다윗은 이스라엘의 통합을 위하여 아브넬과도 화해하였다. 하나님께서 신약교회에 주신 대의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참 교회의 건립과 확장이다. 주께서는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셨다(마 28:19-20). 우리는 개인의 이익이나 명예나 행복을 초월하여 이 대의를 위하는 자가 되자.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참 교회의 건립과 확장을 위해 살자.

둘째로, 우리는 바르고 지혜롭게 처신하자. 다윗은 선악을 구별했고 잘못된 것은 자기의 군장 요압의 잘못이라도 악이라고 단정했고 적의 군장이라도 불의하게 당한 죽음은 진심으로 슬퍼하였다. 그의 처신은 바르고 지혜로웠다. 우리도 바르고 지혜롭게 생각하고 처신하자.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때때로 인간의 계획과 달리 이루어짐을 깨달아야 한다. 아브넬의 계획은 실패하였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좌절시키신 일이었다. 실상 아브넬은 다윗을 이스라엘 왕으로 세우기를 원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았으나 그 뜻에 복종치 않았다. 그도 하나님 앞에서 선한 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계획은 실패하여도 하나님의 뜻은 실패하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낙심치 말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아가자.

4장: 이스보셋의 죽음

[1-4절]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아브넬의 헤브론에서 죽었다 함을 듣고 손맥이 풀렸고 온 이스라엘이 놀라니라.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에게 군장(사레 게두딤)[부대들의 장] 두 사람이 있으니 하나의 이름은 바아나요 하나의 이름은 레갑이라. 베냐민 족속 브에롯 사람 림몬의 아들들이더라. 브에롯도 베냐민 지파에 속하였으니 일찍 브에롯 사람들이 깃다임으로 도망하여 오늘까지 거기 우거함이더라. 사울의 아들 요나단에게 절뚝발이 아들 하나가 있으니 이름은 므비보셋이라. 전에 사울과 요나단의 죽은 소식이 이스르엘에서 올 때에 그 나이 다섯 살이었는데 그 유모가 안고 도망하더니 급히 도망하므로 아이가 떨어져 절게 되었더라.

믿음의 사람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이 절뚝발이가 된 것은 불행하게 보이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불행이 아니고 오히려 행복이었다. 왜냐하면 만일 그가 다리를 절지 않았더라면 그는 작은 아버지 이스보셋이 죽었을 때 그를 이어 왕이 되어 다윗과 싸우게 되었을 것이며 그 싸움은 이스보셋처럼 실패할 싸움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다리를 전 것 때문에 왕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몇 년 후에 다윗의 사랑과 후대를 받았다. 성도에게는 불행같이 보이는 일도 결과적으로 자신에게 유익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5-8절] 브에롯 사람 림몬의 아들 레갑과 바아나가 행하여 볕이 쬘 때 즈음에 이스보셋의 집에 이르니 마침 저가 낮잠을 자는지라. 레갑과 그 형제 바아나가 밀을 가지러 온 체하고 집 가운데로 들어가서 그 배를 찌르고 도망하였더라. 저희가 집에 들어가니 이스보셋이 침실에서 상 위에 누웠는지라. 저를 쳐 죽이고 목을 베어 그 머리를 가지고 밤새도록 아라바 길로 행하여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 왕에게 이스보셋의 머리를 드리며 고하되 왕의 생명을 해하려 하던 원수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머리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오늘 우리 주 되신 왕의 원수를 사울과 그 자손에게 갚으셨나이다.

5, 6, 9절에, 레갑이 바아나보다 먼저 언급된 것은 동생이 그 일을 주동했음을 보이는 것 같다. 그들은 그를 위해 충성을 맹세했을 그들의 군주 이스보셋을 살해했으니 이것은 큰 배신이었고 하나님 앞에서 심히 악한 일이었다. 그들의 행위와 말은 기회주의적이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유익을 위해 자기들의 군주를 살해한 것이지, 진정 다윗과 이스라엘을 위해 한 일이 아니었다. 더욱이, 의로운 군주를 그 침상에서 살해한 것은 선한 일이 아니고 매우 악한 일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울 왕의 악행을 그의 가정에 이런 식으로 갚으셨다. 사울과 세 아들은 전쟁터에서 이방 블세셋 사람들의 칼에 죽게 하셨고, 이스보셋은 배신자들인 두 군장의 칼에 죽게 하셨다. 그러나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은 다리를 젊으로 왕위를 잇지 못하게 하셨다. 사울의 인간적 생각과 계산은 철저히 부서졌고 실패했다. 또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다윗의 억울함과 원통함을 보복하셨다.

[9-12절] 다윗이 브에롯 사람 림몬의 아들 레갑과 그 형제 바아나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 생명을 여러 환난 가운데서 건지신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전에 사람이 내게 고하기를 사울이 죽었다 하며 좋은 소식을 전하는 줄로 생각하였어도 내가 저를 잡아 시글락에서 죽여서 그것으로 그 기별의 갚음을 삼았거든 하물며 악인이 의인을 그 집 침상 위에서 죽인 것이겠느냐? 그런즉 내가 저의 피흘린 죄를 너희에게 갚아서 너희를 이 땅에서 없이 하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소년들을 명하매 곧 저희를 죽이고 수족을 베어 헤브론 못가에 매어달고 이스보셋의 머리를 가져다가 헤브론에서 아브넬의 무덤에 장사하였더라.

다윗은 모든 일을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행하려 하였다. 그는 그의 생명을 여러 환난 가운데서 건지신 여호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가리켜 맹세하며 말했다. 그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었다. 그것이 경건이다. 다윗은 자기들의 군주를 살해한 자들의 악행을 처벌했다. 만일 그런 죄악을 허용한다면, 세상이 얼마나 악하고 무질서하게 되겠는가? 또 그는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이스보셋이 그의 원수 사울의 아들이었지만 그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와 예우를 지켰다.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므비보셋을 통해, 성도에게 불행같이 보이는 일도 선한 결과를 가져올 것을 알고 어떤 경우에라도 낙심치 말자. 사도 바울은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말했고(롬 8:28), 또 그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말했다(빌 4:6-7).

둘째로, 우리는 레갑과 바아나같이 배신자나 기회주의자가 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죽도록 충성하는 자가 되자. 배신자와 기회주의자는 자기의 세상적 유익을 위해 이리저리 변하는 자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람, 진리의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충성된 자가 되어야 한다. 충성은 항상 자기 위치를 지키는 것이다. 충성된 자는 일구이언(一口二言)하지 않는다. 고린도전서 4:2,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요한계시록 2:10,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디모데전서 3:8, 11, “집사들도 단정하고 일구이언(一口二言)을 하지 아니하고 술에 인 박이지 아니하고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 “여자들도 이와 같이 단정하고 참소하지[남을 그릇되이 비난하지] 말며 절제하며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할지니라.”

셋째로, 우리는 다윗같이 선하게, 공의롭게 처신하자. 다윗은 자기를 죽이려 했던 원수 사울에 대해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에 대한 공경과 예의를 끝까지 지키려 하였고 그의 아들에 대해서도 그러했다. 그러나 다윗은 악을 악으로 바르게 분별하고 판단하였고 군주를 살해한 악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성경은 우리에게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라고 교훈한다. 우리도 범사에 선하게, 공의롭게 처신하자.


5장: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됨

[1-3절]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에게 나아와 말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는 왕의 골육이니이다. 전일 곧 사울이 우리의 왕이 되었을 때에도 이스라엘을 거느려 출입하게 한 자는 왕이시었고 여호와께서도 왕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며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 이에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헤브론에 이르러 왕에게 나아오매 다윗 왕이 헤브론에서 여호와 앞에서 저희와 언약을 세우매 저희가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제야 이스라엘 백성이 다윗을 향한 또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게 하셨다. 그들은 다윗이 자기들의 지도자로서 적절하고 하나님의 뜻도 그러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스라엘 모든 장로들은 하나님의 감동 가운데 다윗과 온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다. 다윗은 하나님의 때가 되어 자연스럽게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추대되었다.

[4-5절] 다윗이 30세에 위(位)에 나아가서 40년을 다스렸으되 헤브론에서 7년 6개월 동안 유다를 다스렸고 예루살렘에서 33년 동안 온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스렸더라.

다윗은 아마 20세 이전에 선지자 사무엘에게 기름부음을 받았고 10여년 동안 고난의 피신 생활을 했고 30세에 유다 왕이, 또 37세에 이스라엘 왕이 되었다. 그는 70세까지 이스라엘을 통치하였다. 다윗과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는 이렇게 이루어졌다.

[6-9절] 왕과 그 종자들이 예루살렘으로 가서 그 땅 거민 여부스 사람을 치려 하매 그 사람들이 다윗에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소경과 절뚝발이라도 너를 물리치리라 하니 저희 생각에는 다윗이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함이나 다윗이 시온 산성을 빼앗았으니 이는 다윗성이더라. 그 날에 다윗이 이르기를 누구든지 여부스 사람을 치거든 수구(水口)로 올라가서 다윗의 마음에 미워하는 절뚝발이와 소경을 치라 하였으므로 속담이 되어 이르기를 소경과 절뚝발이는 집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더라. 다윗이 그 산성에 거하여 다윗성이라 이름하고 밀로에서부터 안으로 성을 둘러 쌓으니라.

다윗은 우선 이스라엘의 수도를 건립하려 했다. 그는 여부스 족속들이 거하는 시온 산성 곧 예루살렘을 후보지로 정했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이며 가나안 족속들은 다 멸해야 할 족속들이었다. 다윗 왕과 그의 부하들은 예루살렘으로 가서 시온 산성, 즉 요새이었던 시온성을 빼앗았다. 그것이 다윗성이다.

[10-12절]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 두로 왕 히람이 다윗에게 사자들과 백향목과 목수와 석수를 보내매 저희가 다윗을 위하여 집을 지으니 다윗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세우사 이스라엘 왕을 삼으신 것과 그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그 나라를 높이신 것을 아니라.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은 하나님의 뜻이며 섭리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점점 강성해 갔고 하나님께서는 그와 함께하셨다. 의인은 처음부터 강하지는 못해도 점점 강해진다. 잠언 4:18,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거니와.”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를 세우셔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신 것을 깨달았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길을 열기도 하시고 막기도 하신다.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는 이는 바로 주권적 섭리자 하나님이시다.

[13-16절] 다윗이 헤브론에서 올라온 후에 예루살렘에서 처첩들을 더 취하였으므로 아들과 딸들이 또 다윗에게서 나니 예루살렘에서 그에게서 난 자의 이름은 삼무아와 소밥과 나단과 솔로몬과 입할과 엘리수아와 네벡과 야비아와 엘리사마와 엘랴다와 엘리벨렛이었더라.

다윗은 인간의 연약성을 지닌 인간이었다. 인간은 육체의 연약성을 가진 존재이다. 다윗은 헤브론에서 이미 여섯 명의 아내와 여섯 명의 아들을 가졌었다(삼하 3:2-5). 그는 헤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온 후에 아내와 첩들을 더 취하였고 11명의 아들과 또 딸들을 낳았다. 그러면 다윗의 아들들은 모두 17명이었다. 일부일처는 하나님의 뜻이지만, 옛날 아직 진리의 지식이 어두운 시대에 하나님께서 일부다처를 허용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연약성을 가진 다윗을 성별하여 이스라엘의 왕과 지도자를 삼으셨다.

[17-21절] 이스라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았다 함을 블레셋 사람이 듣고 다윗을 찾으러 다 올라오매 다윗이 듣고 요해처[요새]로 나가니라. 블레셋 사람이 이미 이르러 르바임 골짜기에 편만한지라. 다윗이 여호와께 물어 가로되 내가 블레셋 사람에게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저희를 내 손에 붙이시겠나이까?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말씀하시되 올라가라. 내가 단정코 블레셋 사람을 네 손에 붙이리라 하신지라. 다윗이 바알브라심에 이르러 거기서 저희를 치고 가로되 여호와께서 물을 흩음같이 내 앞에서 내 대적을 흩으셨다 하므로 그곳 이름을 바알브라심[‘주께서 깨뜨리셨다’는 뜻]이라 칭하니라. 거기서 블레셋 사람들이 그 우상을 버렸으므로 다윗과 그 종자들이 치우니라.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을 때 어려운 일이 곧 생겼다. 이스라엘 백성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았다 함을 블레셋 사람들이 듣고 다윗을 잡으러 올라온 것이었다. 구약교회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진행할 때에 이처럼 어려운 일이 생겼다. 이런 다급한 때 다윗은 먼저 하나님께 물었다. 또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자기 손에 붙이실 수 있음을 알았다. 그는 하나님께서 주권자이심을 믿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그가 창조자시요 주권적 섭리자이심을 믿는 것이며 그렇게 믿는 자는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며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 다윗은 그 전쟁에서 승리하였고 이방인들의 우상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깨끗이 다 제거하였다.

[22-25절] 블레셋 사람이 다시 올라와서 르바임 골짜기에 편만한지라.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온대 가라사대 올라가지 말고 저희 뒤로 돌아서 뽕나무 수풀 맞은편에서 저희를 엄습하되 뽕나무 꼭대기에서 걸음 걷는 소리가 들리거든 곧 동작하라. 그때에 여호와가 네 앞서 나아가서 블레셋 군대를 치리라 하신지라. 이에 다윗이 여호와의 명대로 행하여 블레셋 사람을 쳐서 게바에서 게셀까지 이르니라.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믿고 기다리자. 다윗은 선지자 사무엘에게 기름부음을 받으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목자로 택함받은 자라는 선언을 받고 약 10년간 고난의 피신 생활을 한 후 유다 족속의 왕이 되었고 그 후에 또 7년 반의 세월이 더 지난 후 비로소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 하나님의 일은 반드시 이루어지지만 우리에게 많은 인내를 요구한다. 주께서는 마지막 때에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질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다(마 24:12-13).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심만 사모하자. 하나님께서는 다윗과 함께하셨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였고 노아도 그러하였다. 요셉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으로 형통한 자가 되었다. 히스기야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므로 형통한 자이었다. 구원받은 성도는 이미 성령께서 내주(內住)하시는 자이다. 그것은 성도에게 매우 큰 복이며 특권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며 친밀한 교제를 체험하려면,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믿고 의지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여 정직한 삶을 살아야 한다. 잠언 3:32, “대저 패역한 자는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거니와 정직한 자에게는 그의 교통하심이 있으며.”

셋째로, 우리는 고난 중에 오직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의 선한 인도하심을 구하며 따르자. 하나님의 뜻대로 이스라엘의 왕이 된 다윗과 그의 나라에도 블레셋 사람들의 침공이라는 고난이 있었다. 그 고난이 두 번이나 연거퍼 왔다. 우리에게도 비슷할 것이다. 성도에게는 많은 고난이 있다(시 34:19). 그러나 그런 고난의 때마다 우리는 오직 기도로 대처해야 하고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믿고 의지하며 그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그의 기도 응답과 지시에 순종해야 한다. 우리는 고난 중에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고 더욱 강한 기도의 무릎으로 승리하자.

6장: 법궤를 옮겨옴

[1-5절] 다윗이 이스라엘에서 뺀 무리 3만을 다시 모으고 일어나서 그 함께 있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바알레유다로 가서 거기서 하나님의 궤를 메어 오려 하니 그 궤는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이름하는 것이라. 저희가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그 새 수레를 모니라. 저희가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하나님의 궤를 싣고 나올 때에 아효는 궤 앞에서 행하고 다윗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잣나무로 만든 여러 가지 악기와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양금과 제금으로 여호와 앞에서 주악하더라.

다윗은 블레셋과 전쟁을 치룬 후 쉴 틈 없이 이 일을 행한 것 같다. 바알레유다는 기럇 여아림이었다(수 15:9). 하나님의 궤는 그곳에서 20년간 방치되었던 것 같다(삼상 7:1-2). 웃사와 아효가 하나님의 궤를 싣고 나올 때 다윗과 이스라엘 족속은 잣나무로 만든 악기들을 주악하였다. ‘양금’(메나아네아)은 ‘딸랑이 종류의 악기’를 가리키는 것 같다(BDB, KB). ‘제금’은 심벌즈이다(KJV, NASB).

다윗이 하나님의 궤를 다윗성으로 가져오려 한 것은 그의 경건성을 나타낸다. 10명이면 충분할 일이지만, 3만명이나 동원하여 이 일을 도모한 것은 그가 이 일을 얼마나 크고 중요한 일로 여겼는지를 보인다. 본장에는 ‘하나님의 궤’라는 말이 일곱 번, ‘여호와의 궤’라는 말이 일곱 번, 합하여 14번이 나온다. 역대상 13:3에 보면, 다윗은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궤를 옮겨오자. 사울 때에는 우리가 궤 앞에서 묻지 아니하였느니라”고 말했다. 사무엘상 14:18에 보면, 사울도 한 번 아히야에게 하나님의 궤를 가져오게 하여 하나님께 물은 적이 있었으나, 사울은 항상 하나님의 궤 앞에서 묻지 않았다.

그러나 다윗의 경건성은 달랐다. 시편 132편에 보면, 다윗은 하나님의 성막을 찾기 위해 매우 근심하였고 그는 편한 잠을 잘 수 없었고 그러다가 에브라다의 나무 밭에서 그것을 찾았다고 증거하였다(1-9절). 다윗에게는 하나님을 사모하는 이런 간절한 경건함이 있었다. 하나님의 궤는 곧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이 있는 그의 임재의 표이었다. 하나님의 궤를 사모한 것은 곧 하나님을 사모한 것이며 그의 말씀을 사모한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사모하고 그것을 믿고 사랑하고 순종하기를 원한 경건한 성도이었다.

[6-11절] 저희가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의 잘못함을 인하여 진노하사 저를 그곳에서 치시니 저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여호와께서 웃사를 충돌하시므로 다윗이 분하여 그곳을 베레스웃사라 칭하니 그 이름이 오늘까지 이르니라. 다윗이 그 날에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로 오리요 하고 여호와의 궤를 옮겨 다윗성 자기에게로 메어 가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고 치우쳐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 간지라. 여호와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달을 있었는데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

다윗의 간절한 소원으로 시도된 그의 첫 번째 시도는 실패하였다. 그들이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렀을 때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는데,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웃사의 잘못함을 인하여 진노하셔서 그를 그곳에서 치셨고 웃사는 거기서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었다. 여호와께서 웃사와 충돌하시므로 다윗은 마음이 상하여 그곳을 ‘베레스웃사’ 곧 ‘웃사를 치심’이라고 불렀다.

다윗의 첫 번째 시도가 실패한 원인은 하나님의 법궤를 가져오는 일을 하나님의 규례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민수기 4:15에 보면, 성막의 성소와 그 모든 기구들은 아무나 만지지 말고 오직 레위 자손 중 고핫 자손이 메어야 했다. 역대상 15:13에 보면, 다윗은 그것을 깨닫고 “전에는 너희가 메지 아니하였으므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를 충돌하셨나니 이는 우리가 규례대로 저에게 구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고 고백하였다. 하나님의 일은 열심만 가진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일은 겸손히 하나님의 규례와 교훈대로, 지식과 덕을 가지고 행해지고 이루어져야 한다.

[12-15절] 혹이 다윗 왕에게 고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궤를 인하여 오벧에돔의 집과 그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 한지라. 다윗이 가서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성으로 올라갈새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행하매 다윗이 소와 살진 것으로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때에 베 에봇을 입었더라.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부르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 오니라.

다윗은 두 번째에는 그 궤를 규례대로 옮겼다. 본문에는 ‘메어’라는 말(알라)이 두 번 나오지만(12, 15절) 그 단어는 ‘가져 올라온다’는 뜻이다. 그러나 13절의 ‘멘 사람들’이라는 표현에서 ‘메다’는 원어(나사)는 ‘어깨에 짊어지다, 메다’는 뜻이다.

[16절] 여호와의 궤가 다윗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저를 업신여기니라.

다윗의 아내 미갈은 다윗의 경건과 간절한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여호와의 궤가 다윗성으로 들어올 때에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그를 업신여겼다. 그는 다윗이 하나님을 사모하며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는 심정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에게는 진지한 믿음이 없었다.

[17-19절] 여호와의 궤를 메고 들어가서 다윗이 위하여 친 장막 가운데 그 예비한 자리에 두매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 앞에 드리니라.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 드리기를 마치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백성에게 축복하고 모든 백성 곧 온 이스라엘 무리의 무론 남녀하고 떡 한개와 고기(에쉬파르)[대추야자떡](KB, NASB, NIV) 한 조각과 건포도떡 한 덩이씩 나눠주매 모든 백성이 각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번제는 하나님의 속죄의 은혜를 구하며 그에게 온전히 헌신함을 다짐하는 뜻이 있고 화목제는 속죄의 은혜를 구하는 동시에 하나님과 화목하고 교제함을 나타내는 뜻이 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를 구했고 온전한 헌신을 각오했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사모하였다.

[20-23절] 다윗이 자기의 가족에게 축복하러 돌아오매 사울의 딸 미갈이 나와서 다윗을 맞으며 가로되 이스라엘 왕이 오늘날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날 그 신복의 계집종의 눈 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다윗이 미갈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저가 네 아비와 그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로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 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 한지라. 그러므로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으니라.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다윗같이 하나님을 사모하자. 다윗은 부족이 없지 않았지만, 그의 장점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간절히 사모한 것이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법궤를 다윗성으로 모셔오기를 간절히 사모한 데서 나타난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모하고 그의 말씀을 사모하자. 신명기 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시편 73:25,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성경말씀을 힘써 읽자.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규례대로 행하자. 법궤를 가져오려는 다윗의 처음 시도가 실패한 것은 하나님의 규례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율법을 가감치 말고(신 4:2) 좌우로 치우치지 말고 행해야 한다(신 5:32). 성경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 중요한 한 목적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는 것이다(딤후 3:16-17).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흠과 점이 없는 온전한 인격자가 되기를 원하신다(살전 5:23; 딤전 6:14).

7장: 다윗에게 주신 약속

[1-3절] 여호와께서 사방의 모든 대적을 파하사 왕으로 궁에 평안히 거하게 하신 때에 왕이 선지자 나단에게 이르되 볼지어다, 나는 백향목 궁에 거하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 있도다. 나단이 왕께 고하되 여호와께서 왕과 함께 계시니 무릇 마음에 있는 바를 행하소서.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평안을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섭리자이시다. 다윗의 승리와 평안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었다. 하나님의 궤를 다윗성으로 가져온 다윗은 그 궤가 휘장 가운데 있는데 자신이 백향목 궁에 거하는 것을 죄송스럽게 생각했다. 그는 하나님을 정성껏 섬기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고 그를 위해 성전을 짓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성전 건축의 생각은 다윗의 자원적 마음에서 나왔다.

[4-7절] 그 밤에 여호와의 말씀이 나단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가서 내 종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나를 위하여 나의 거할 집을 건축하겠느냐?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부터 오늘날까지 집에 거하지 아니하고 장막과 회막에 거하며 행하였나니 무릇 이스라엘 자손으로 더불어 행하는 곳에서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먹이라고 명한 이스라엘 어느 지파에게 내가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위하여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하였느냐?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에게 특별한 감동 중에 말씀하셨다.

[8-11절] 그러므로 이제 내 종 다윗에게 이처럼 말하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데서 취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고 네가 어디를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세상에서 존귀한 자의 이름같이 네 이름을 존귀케 만들어 주리라. 내가 또 내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한 곳을 정하여 저희를 심고 저희로 자기 곳에 거하여 다시 옮기지 않게 하며 악한 유(類)[유의 사람들]로 전과 같이 저희를 해하지 못하게 하여 전에 내가 사사를 명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와 같지 않게 하고 너를 모든 대적에게서 벗어나 평안케 하리라. 여호와가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이루고.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다윗을 이스라엘의 주권자 곧 왕으로 삼았고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에 정착케 하셨음을 친히 증거하셨고 또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이루리라”고 약속하셨다. 다윗은 하나님을 위해 집 곧 성전을 짓기를 소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위해 집을 세우실 것이라고 약속하신 것이다. 그 집은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실 나라 곧 신약교회를 가리켰다고 본다.

[12-17절]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내가 네 앞에서 폐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같이 그에게서는 빼앗지 아니하리라.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나단이 이 모든 말씀과 이 모든 묵시대로 다윗에게 고하니라.

이 예언과 약속은 일차적으로 다윗의 아들 솔로몬에게서 이루어질 일들에 관한 것이라고 보지만, 더 깊고 완전한 의미에서 그것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메시아에 관한 일들이라고 본다. 솔로몬의 왕국은 결국 실패하고 멸망하였다. 그러나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는 영원히 견고하게 세워질 것이다.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에게 천사는 그가 잉태하여 낳을 자는 다윗의 위를 받을 자이며 영원히 야곱 집에서 왕노릇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고 말했다(눅 1:31-33). 그것이 천국으로 이어질 신약교회이다.

원문 15절에 ‘내 은총’이라는 말(카스디)[나의 인자(仁慈)]이 문장 서두에 나와 강조되어 있다. 다윗에게 주신 이 모든 예언들과 약속들은 하나님의 인자(仁慈)에서 비롯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인류의 구원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의 행위이시다.

[18-22절]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가로되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오며 내 집은 무엇이관대 나로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 주 여호와여, 주께서 이것을 오히려 적게 여기시고 또 종의 집에 영구히 이를 일을 말씀하실 뿐 아니라 주 여호와여, 인간의 규례대로 하셨나이다. 주 여호와는 종을 아시오니 다윗이 다시 주께 무슨 말씀을 하오리이까? 주의 말씀을 인하여 주의 뜻대로 이 모든 큰 일을 행하사 주의 종에게 알게 하셨나이다. 여호와 하나님이여, 이러므로 주는 광대하시니 이는 우리 귀로 들은 대로는 주와 같은 이가 없고 주 외에는 참 신이 없음이니이다.

다윗 왕은 시시때때로 하나님께 기도할 줄 아는 경건한 사람이었다. 본장 18절부터 마지막까지는 그의 기도 내용이다. 그는 이 기도에서 주권적 하나님을 인정하면서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의 약속을 그대로 다 이루시기를 소원하였다. 다윗은 18절 이하에서 하나님을 ‘주 여호와’라고 여섯 번이나 반복해 불렀다(18, 19, 20, 25, 28, 29절). 또 그는 하나님을 ‘여호와 하나님’(22, 25절), 또 ‘만군의 여호와’(27절)라고도 불렀다. ‘여호와,’ 특히 ‘주 여호와’는 하나님의 영원자존하심과 주권적 섭리자 되심을 나타내는 명칭이다. 다윗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그의 주권적 섭리 가운데 이루어질 것이다. 세상의 모든 일이 그러하며 우리의 개인의 생애와 국가와 세계의 미래도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주권적 작정과 섭리 가운데 다윗의 집에 영구히 이루어질 일 곧 메시아 왕국에 관한 일을 말씀하셨다.

[23-26절] 땅의 어느 한 나라가 주의 백성 이스라엘과 같으리이까? 하나님이 가서 구속(救贖)하사 자기 백성을 삼아 주의 명성을 내시며 저희를 위하여 큰 일을, 주의 땅을 위하여 두려운 일을 애굽과 열국과 그 신들에게서 구속하신 백성 앞에서 행하셨사오며 주께서 주의 백성 이스라엘을 세우사 영원히 주의 백성을 삼으셨사오니 여호와여, 주께서 저희 하나님이 되셨나이다. 여호와 하나님이여, 이제 주의 종과 종의 집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을 영원히 확실케 하옵시며 말씀하신 대로 행하사 사람으로 영원히 주의 이름을 높여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 하게 하옵시며 주의 종 다윗의 집으로 주 앞에 견고하게 하옵소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크신 은혜를 고백하며 그가 이 은혜를 끝까지 견고케 하시기를 소원했다.

[27-29절]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의 종에게 알게 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위하여 집을 세우리라 하신 고로 주의 종이 이 기도로 구할 마음이 생겼나이다. 주 여호와여, 오직 주는 하나님이시며 말씀이 참되시니이다. 주께서 이 좋은 것으로 종에게 허락하셨사오니[약속하셨사오니](KJV, NASB, NIV) 이제 청컨대 종의 집에 복을 주사 주 앞에 영원히 있게 하옵소서.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사오니 주의 은혜(베라카)[복]로 종의 집이 영원히 복을 받게 하옵소서 하니라.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권적 섭리자이심을 알자. 그는 다윗을 위해 사방의 모든 대적을 파하셨고 그를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고 또 다윗의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실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을 ‘주 여호와’(여섯 번), ‘여호와 하나님’(두 번) 불렀다. ‘주 여호와’는 그가 영원하신 주권적 섭리자이심을 뜻한다. 우리는 세상을 창조하시고 홀로 섭리하시는 주권자 하나님을 굳게 믿자.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을 감사하자. 하나님께서는 사울에게 은총을 거두셨듯이 다윗에게는 거두지 않겠다고 말씀하셨다. 다윗과 사울의 차이점은 다윗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다는 점이다. 구원받는 자와 멸망하는 자의 차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안 받고의 차이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큰 복이다. 하나님께서는 신약 성도들에게 은혜를 주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만 의지하며 그 은혜를 감사하자.

셋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구원의 복을 누리자.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해 집을 이루실 것이며 그의 아들을 통해 그의 나라와 그 나라의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실 것이라는 약속은 메시아 약속이었다(사 9:6-7; 눅 1:31-33).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미 이 큰 구원의 은혜와 복을 받은 자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구원의 복을 감사히 누리며 주 예수님만 믿고 따르자.

8장: 다윗의 승전들

[1-2절] 이 후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쳐서 항복 받고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메덱암마를 빼앗으니라. 다윗이 또 모압을 쳐서 저희로 땅에 엎드리게 하고 줄로 재어 그 두 줄 길이의 사람은 죽이고 한 줄 길이의 사람은 살리니 모압 사람이 다윗의 종이 되어 조공을 바치니라.

다윗은 이스라엘 서남쪽 해변에 있는 블레셋 사람들을 쳐서 복종시켰다. 그는 블레셋 사람을 쳐서 항복 받고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메덱암마를 빼앗았다. ‘메덱암마’라는 말은 ‘모성(母城, 어머니 도시)의 권세’라는 뜻으로 ‘으뜸 되는 성’을 가리킨다(NASB). 역대상 18:1은 “이 후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쳐서 항복받고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가드와 그 동네를 빼앗고”라고 기록한다. 가드는 블레셋 성들 중 대표적 성이었던 것 같다. 다윗은 또 이스라엘 동남쪽에 있는 모압을 쳐서 그들을 굴복시켰다.

[3-6절] 르홉의 아들 소바 왕 하닷에셀이 자기 권세를 회복하려고 유브라데강으로 갈 때에 다윗이 저를 쳐서 그 마병 1천 7백과 보병 2만을 사로잡고 병거 1백승의 말만 남기고 그 외의 병거의 말은 다 발의 힘줄을 끊었더니 다메섹 아람 사람들이 소바 왕 하닷에셀을 도우러 온지라. 다윗이 아람 사람 2만 2천을 죽이고 다메섹 아람에 수비대를 두매 아람 사람이 다윗의 종이 되어 조공을 바치니라.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

다윗은 또 이스라엘 북동쪽에 있던 소바 왕을 복종시켰다. 역대상 18:4는 “그 병거 1천승과 기병 7천과 보병 2만을 빼앗고 그 병거 1백승의 말만 남기고 그 외의 병거의 말은 다 발의 힘줄을 끊었더니”라고 기록한다. ‘마병’이나 ‘기병’은 같은 단어(파라쉼)이다. 사무엘하는 역대상에 언급된 ‘병거’(레케브)를 생략한 것 같다. 역대상 18:4의 기병 7천과 사무엘하 8:4의 마병 1천 7백의 차이는 분류상의 차이, 즉 포함과 생략의 차이이든지, 필사상 오류로 인한 것일 것이다. 고대 헬라어 70인역이나 히브리어 사해사본에는 역대상과 같이 병거 1천과 기병 7천이라고 되어 있다. 다윗은 다메섹 아람에 수비대를 두었다. ‘수비대’라는 원어(네치빔)는 ‘대표부들’(prefects, deputies)(BDB), 혹은 ‘주둔부대들(military posts), 수비대들(garrisons)’(KB, Langenscheidt)이라는 뜻이다. 다윗은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여러 전쟁들에서 위기와 죽음을 모면케 하셨고 그에게 승리를 주셨던 것이다.

[7-12절] 다윗이 하닷에셀의 신복들의 가진 금방패를 빼앗아 예루살렘으로 가져오고 또 하닷에셀의 고을 베다와 베로대에서 매우 많은 놋을 빼앗으니라. 하맛 왕 도이가 다윗이 하닷에셀의 온 군대를 쳐서 파하였다 함을 듣고 그 아들 요람을 보내어 다윗 왕에게 문안하고 축복하게 하니 이는 하닷에셀이 도이로 더불어 전쟁이 있던 터에 다윗이 하닷에셀을 쳐서 파함이라. 요람이 은 그릇과 금 그릇과 놋 그릇을 가지고 온지라. 다윗 왕이 그것도 여호와께 드리되 저가 정복한 모든 나라에서 얻은 은금 곧 아람과 모압과 암몬 자손과 블레셋 사람과 아말렉에게서 얻은 것들과 소바 왕 르홉의 아들 하닷에셀에게서 노략한 것과 같이 드리니라.

다윗은 전쟁의 노획물들을 다 하나님께 드렸다. 그는 물질에 대한 욕심을 갖지 않았다.

[13-14절] 다윗이 염곡[소금 골짜기]에서 에돔 사람15) 1만 8천을 쳐죽이고 돌아와서 명예를 얻으니라. 다윗이 에돔에 수비대를 두되 온 에돔에 수비대[대표부들 혹은 주둔부대들]를 두니 에돔 사람이 다 다윗의 종이 되니라.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더라.

[15-18절] 다윗이 온 이스라엘을 다스려 모든 백성에게 공과 의를 행할새 스루야의 아들 요압은 군대장관이 되고 아힐룻의 아들 여호사밧은 사관이 되고 아히둡의 아들 사독과 아비아달의 아들 아히멜렉은 제사장이 되고 스라야는 서기관이 되고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는 그렛 사람과 블렛 사람을 관할하고 다윗의 아들들은 대신이 되니라.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을 공의롭게, 바르게 통치하였다.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사모하자.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다(6, 14절). 하나님께서는 전쟁들에서 그를 도우셨고 위기와 죽음을 모면케 하셨고 그를 구원하셨고 원수를 물리치고 승리케 하셨다. 바울은 세상의 모든 어려운 일들에서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넉넉히 이긴다고 증거하였다(롬 8:37-39). 하나님께서는 그의 진실한 성도들을 도우실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과 구원을 사모하며 체험하자.

둘째로, 우리는 물질에 종이 되지 말자. 다윗은 전쟁의 승리로 인한 많은 노획물에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그는 그 노획물을 다 하나님께 바쳤다. 그는 물질에 대한 사랑보다 하나님을 더 경외하고 사랑하였다. 그것이 바른 물질관이다. 주 예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과 물질을 둘 다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마 6:24). 물질에 종이 되지 말자.

셋째로, 우리는 우리나라에도 공의의 통치가 이루어지도록 기도하자. 다윗은 공의로 나라를 통치했다. 그것은 좋은 왕의 모습이다. 세속 사회에서의 공의의 통치는 도덕질서를 바로 세우는 것이다. 또 공의로 통치되는 사회는 인간의 자유와 인권이 존중되는 사회이다. 그런 사회에서 사람들은 자유롭게 힘써 일함으로 자기를 발전시키고 돈을 벌고 상당한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 성경은 주인이 종에게 함부로 위협하지 말고 부모도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교훈했다. 또 성경은 근면하게 일함으로 유여함을 누리라고 교훈하였다. 우리는 우리 자유대한민국이 공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나라가 되기를 위해 늘 기도하자.


9장: 므비보셋을 선대함

[1-6절] 다윗이 가로되 사울의 집에 오히려 남은 사람이 있느냐? 내가 요나단을 인하여 그 사람에게 은총(케세드)[자비]을 베풀리라 하니라. 사울의 종 하나가 있으니 그 이름은 시바라. 저를 다윗의 앞으로 부르매 왕이 저에게 묻되 네가 시바냐? 가로되 종이 그로소이다. 왕이 가로되 사울의 집에 남은 사람이 없느냐? 내가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총[자비]을 베풀고자 하노라. 시바가 왕께 고하되 요나단의 아들 하나가 있는데 절뚝발이니이다. 왕이 저에게 묻되 그가 어디 있느냐? 시바가 왕에게 고하되 로드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 있나이다. 다윗 왕이 사람을 보내어 로드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서 저를 데려오니 사울의 손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이 다윗에게 나아와서 엎드려 절하매 다윗이 가로되 므비보셋이여 하니 대답하되 주의 종이 여기 있나이다.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은 절뚝발이였다. 그는 전에 사울과 요나단의 죽은 소식이 이스르엘에서 왔을 때에 나이가 다섯 살이었는데 그 유모가 안고 급히 도망하다가 그를 떨어뜨려 절게 된 것이었다(삼하 4:4). 다윗 왕은 사람을 보내어 로드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서 그를 데려오게 했다. 로드발은 요단강 북쪽, 요단강 건너편 이스라엘 변방에 있었던 마을이다. 다윗은 요나단과의 언약과 맹세(삼상 20:14-17)를 지키기를 원했고 그의 아들에게 자비를 베풀기를 원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한 언약과 맹세를 지키려 하였다.

[7-13절] 다윗이 가로되 무서워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비 요나단을 인하여 네게 은총[자비]을 베풀리라. 내가 네 조부 사울의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먹을지니라. 저가 절하여 가로되 이 종이 무엇이관대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왕이 사울의 사환 시바를 불러서 이르되 사울과 그 온 집에 속한 것은 내가 다 네 주인의 아들에게 주었노니 너와 네 아들들과 네 종들은 저를 위하여 밭을 갈고 거두어 네 주인의 아들을 공궤하라[공급하며 섬기라]. 그러나 네 주인의 아들 므비보셋은 항상 내 상에서 먹으리라 하니라. 시바는 아들이 열 다섯이요 종이 스물이라. 시바가 왕께 고하되 내 주 왕께서 온갖 일을 종에게 명하신 대로 종이 준행하겠나이다 하니라. 므비보셋은 왕자 중 하나처럼 왕의 상에서 먹으니라. 므비보셋에게 젊은 아들 하나가 있으니 이름은 미가더라. 무릇 시바의 집에 거하는 자들은 므비보셋의 종이 되니라. 므비보셋이 항상 왕의 상에서 먹으므로 예루살렘에 거하니라. 그는 두 발이 다 절뚝이더라.

다윗은 므비보셋에게 어떤 자비를 베풀었는가? 그는 우선 그에게 그의 조부 사울의 밭을 다 도로 주었다. 또 그는 사울의 종 시바에게 네 주인의 아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며 섬기라고 명하였다. 이와 같이 다윗의 자비는 물질적 배려로 표현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므비보셋을 인격적으로 대우하였다. 그는 두 발이 다 절뚝이는 절뚝발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아들들 중 하나처럼 대우하여 항상 그의 밥상에서 먹게 하겠다고 말하며 그렇게 했다. 본문은 이 사실을 강조하여 네 번이나 언급한다. 7절,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먹을지니라.” 10절, “네 주인의 아들 므비보셋은 항상 내 상에서 먹으리라.” 11절, “므비보셋은 왕자 중 하나처럼 왕의 상에서 먹으니라.” 13절, “므비보셋이 항상 왕의 상에서 먹으므로 예루살렘에 거하니라.” 다윗은 므비보셋을 자기 아들처럼 인격적으로 대우하였다.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한 언약과 맹세를 신실하게 지키자. 다윗은 요나단과 맺은 언약과 맹세를 신실하게 지켰다. 하나님 앞에서 한 약속과 맹세는 반드시 지켜야 한다. 신명기 23:21, “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원하거든 갚기를 더디 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반드시 그것을 네게 요구하시리니 더디면 네게 죄라.” 시편 15:4, “[주의 성산에 거할 자는]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치 아니하며.” 모든 성도는 세례를 받을 때, 결혼을 할 때, 교회 직분을 받을 때, 하나님 앞에서 서약을 한다. 우리는 그러한 세례 서약, 결혼 서약, 임직 서약 등을 잘 지켜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한 언약과 맹세를 신실하게 지켜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자비와 호의를 베풀자. 다윗은 원수의 가정에 자비를 베풀기를 원했고 베풀었다. 그는 불쌍한 절뚝발이 므비보셋에게 자비를 베풀었다. 보통 세상 사람들은 재산이나 학력이나 세상적 지위가 없는 사람들을 무시한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 하며 세상적으로 없는 사람들까지도 사랑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과 뜻이며 하나님께서 성경에 교훈하신 우리의 생활 지침이다. 레위기 19:18,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주께서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다(마 5:7). 또 그는 우리가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하며 우리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며 우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베풀며 우리를 모욕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교훈하셨다(마 5:44; 눅 6:27-28).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자.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감사하자. 다윗의 므비보셋에게 한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의 예표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다윗이 므비보셋에게 베푼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이 큰 자비를 우리에게 베푸셨다. 우리는 하나님께 사랑을 입을 만한 자들이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크신 자비와 은혜를 베풀어주셨다. 그는 우리의 추하고 더러운 죄들을 용서해주셨다. 우리가 전에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었으나,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셨고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은혜로 구원하셨다(엡 2:3-5). 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을 주셨고 천국 기업을 상속받는 자들이 되게 하셨다(요 1:12; 롬 8:15-17).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나그넷길 같은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에게 마음의 평안과 위로를 주시고 또 물질적 필요, 즉 의식주의 필요도 공급해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와 사랑을 항상 감사하자.


10장: 암몬 자손들을 물리침

[1-5절] 그 후에 암몬 자손의 왕이 죽고 그 아들 하눈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 다윗이 가로되 내가 나하스의 아들 하눈에게 은총을 베풀되 그 아비가 내게 은총을 베푼 것같이 하리라 하고 그 신복들을 명하여 그 아비 죽은 것을 조상(弔喪)하라 하니라. 다윗의 신복들이 암몬 자손의 땅에 이르매 암몬 자손의 방백들이 그 주 하눈에게 고하되 왕은 다윗이 조객을 보낸 것이 왕의 부친을 공경함인 줄로 여기시나이까? 다윗이 그 신복을 보내어 이 성을 엿보고 탐지하여 함락시키고자 함이 아니니이까? 이에 하눈이 다윗의 신복들을 잡아 그 수염 절반을 깎고 그 의복의 중동볼기까지 자르고 돌려보내매 혹이 이 일을 다윗에게 고하니라. 그 사람들이 크게 부끄러워하므로 왕이 저희를 맞으러 보내어 이르기를 너희는 수염이 자라기까지 여리고에서 머물다가 돌아오라 하니라.

암몬 자손의 방백들은 그들의 주 하눈에게 다윗의 조문객들이 이 성을 엿보고 탐지하여 함락시키려고 왔다고 잘못된 조언을 하였고 하눈은 그들의 조언을 듣고 그 조문객들을 잡아 그 턱수염 절반을 깎고 그 의복의 가운데를 볼기까지 자르고 돌려보냈다. 이와 같이 하눈은 다윗과 그의 조문객들을 오해하였고 그들을 매우 모욕했다.

[6-8절] 암몬 자손이 자기가 다윗에게 미움이 된 줄 알고 사람을 보내어 벧르홉 아람 사람과 소바 아람 사람의 보병 2만과 마아가 왕과 그 사람 1천과 돕 사람 1만 2천을 고용한지라. 다윗이 듣고 요압과 용사의 온 무리를 보내매 암몬 자손은 나와서 성문 어귀에 진을 쳤고 소바와 르홉 아람 사람과 돕과 마아가 사람들은 따로 들에 있더라.

다윗의 선한 행위가 어려운 문제로 돌아왔다. 이 세상은 요동하는 바다 같아서 때때로 예상하기 어려운 환난이 일어난다. 이런 환난은 사탄의 끊임없는 활동 때문에 혹은 인간의 연약과 부족 때문에 올 것이며, 때로는 하나님의 깊으신 뜻 가운데 사람편에서는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중에도 올 것이다. 이 전쟁은 암몬 자손들이 먼저 시작한 전쟁이었다. 그들이 잘못해 놓고 겁이 나서 그들 스스로 일으킨 것이다. 다윗편에서 그것은 방어적 전쟁이었다. 그러나 방어적 전쟁은 항상 정당성을 가진다. 그 전쟁이 하나님의 징벌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께서는 그 전쟁을 도우실 것이다.

[9-14절] 요압이 앞뒤에 친 적진을 보고 이스라엘의 뺀 자 중에서 또 빼서 아람 사람을 대하여 진치고 그 남은 무리는 그 아우 아비새의 수하에 붙여 암몬 자손을 대하여 진치게 하고 가로되 만일 아람 사람이 나보다 강하면 네가 나를 돕고 만일 암몬 자손이 너보다 강하면 내가 가서 너를 도우리라. 너는 담대하라. 우리가 우리 백성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하여 담대히 하자.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요압과 그 종자가 아람 사람을 향하여 싸우려고 나아가니 저희가 그 앞에서 도망하고 암몬 자손은 아람 사람의 도망함을 보고 저희도 아비새 앞에서 도망하여 성으로 들어간지라. 요압이 암몬 자손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요압과 아비새라는 경건한 용장들을 주셨다. 요압은, 비록 때때로 다윗의 뜻과 다르게 행했지만,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믿는 믿음이 있었고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실 것을 바랐다. 그는 그 전쟁을 믿음으로 대처하고 있었다.

[15-19절] 아람 사람이 자기가 이스라엘 앞에서 패하였음을 보고 다 모이매 하닷에셀이 사람을 보내어 강 건너편에 있는 아람 사람을 불러내매 저희가 헬람에 이르니 하닷에셀의 군대 장관 소박이 저희를 거느린지라. 혹이 다윗에게 고하매 저가 온 이스라엘을 모으고 요단을 건너 헬람에 이르매 아람 사람들이 다윗을 향하여 진을 치고 더불어 싸우더니 아람 사람이 이스라엘 앞에서 도망한지라. 다윗이 아람 병거 7백승의 사람과 마병 4만을 죽이고 또 그 군대장관 소박을 치매 거기서 죽으니라. 하닷에셀에게 속한 왕들이 자기가 이스라엘 앞에서 패함을 보고 이스라엘과 화친하고 섬기니 이러므로 아람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다시는 암몬 자손을 돕지 아니하니라.

아람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스라엘 앞에서 패하였음을 보고 모였고 소바 왕(삼하 8:3) 하닷에셀은 강 건너편에 있는 아람 사람들을 더 불러내었으나 이스라엘 앞에서 패하여 도망했다. 그 전쟁은 다윗의 완전한 승리이었고 암몬은 큰 해를 당하였다.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사람들의 잘못된 조언을 조심하자. 하눈은 방백들의 잘못된 조언 때문에 결국은 큰 낭패를 당했다. 잘못된 말을 하는 자는 악하고 마귀적인 자이다. 우리는 사람의 말을 다 믿지 말고 잘 분별하고 조심해서 듣고 믿어야 한다. 우선, 그가 믿을 만한 건전한 인격자인가를 분별해야 한다. 잠언 14:15, “어리석은 자는 온갖 말을 믿으나 슬기로운 자는 그 행동을 삼가느니라.”


둘째로, 우리는 남을 오해하지 말자. 하눈은 방백들의 잘못된 조언 때문에 다윗의 조문객들을 오해했다. 잘못된 생각과 판단, 또 거기서 나오는 잘못된 정죄는 불의의 죄이다(약 3:9-10). 우리는 잘 모르는 것은 그냥 하나님께 맡기자. 우리는 잘못된 추측으로 범죄치 말자. 고린도전서 4:5,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셋째로, 우리는 남을 모욕하지 말자. 다윗은 선한 마음으로 조문객을 보냈는데, 하눈과 그의 신하들은 그 조문객들을 모욕했다. 사람을 모욕하는 것은 나쁜 일이다. 선을 악으로 갚는 것은 큰 악이다. 우리는 친절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하며(마 5:44)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롬 12:17, 21).


넷째로, 우리는 예상치 못한 환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믿음으로 대처하자. 다윗은 선을 행하다가 당한 환난을 믿음으로 잘 대처했다. 시편 34:19,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에베소서 6:10-11,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는 환난 중에도 하나님만 의지하고 그 앞에서 바르게만 살아가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고 승리케 하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