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舊約]강해/◆ 역사서[강해]

사무엘하(Samuel) 19장: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옴 - 24장: 인구조사의 죄

영국신사77 2020. 4. 14. 18:30


제목차례

19장: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옴

20장: 세바의 반란

21장: 3년 기근

22장: 다윗의 시

23장: 다윗의 용사들

24장: 인구조사의 죄


19장: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옴

[1-8절] 혹이 요압에게 고하되 왕이 압살롬을 위하여 울며 슬퍼하시나이다 하니 왕이 그 아들을 위하여 슬퍼한다 함이 그 날에 백성들에게 들리매 그 날의 이김이 모든 백성에게 슬픔이 된지라. 그 날에 백성들이 싸움에 쫓겨 부끄러워 도망함같이 가만히 성으로 들어가니라. 왕이 얼굴을 가리우고 큰 소리로 부르되 내 아들 압살롬아,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니 요압이 집에 들어가서 왕께 말씀하되 왕께서 오늘 왕의 생명과 왕의 자녀의 생명과 처첩들의 생명을 구원한 모든 신복의 얼굴을 부끄럽게 하시니 이는 왕께서 미워하는 자는 사랑하시며 사랑하는 자는 미워하시고 오늘 장관들과 신복들을 멸시하심을 나타내심이라. 오늘 내가 깨달으니 만일 압살롬이 살고 오늘 우리가 다 죽었더면 왕이 마땅히 여기실 뻔하였나이다. 이제 곧 일어나 나가서 왕의 신복들의 마음을 위로하여 말씀하옵소서. 내가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옵나니 왕이 만일 나가지 아니하시면 오늘밤에 한 사람도 왕과 함께 머물지 아니할지라. 그리하면 그 화가 왕이 젊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당하신 모든 화보다 더욱 심하리이다. 왕이 일어나 성문에 앉으매 혹이 모든 백성에게 고하되 왕이 문에 앉아 계시다 하니 모든 백성이 왕의 앞으로 나아오니라. 이스라엘은 이미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였더라.

다윗의 슬픔은 어느 정도 정당했다. 그는 아버지로서 아들을 참으로 사랑하였다. 또 그는 반역자인 아들 압살롬을 죽이기를 진심으로 원치 않았다. 요압이 압살롬을 죽인 것은 왕의 명령을 어긴 잘못된 행위이었지만, 다윗은 그의 슬픔이 백성의 얼굴을 부끄럽게 했다는 요압의 충고를 받아들였다. 그것은 백성을 배려하고 단합을 생각해서이었다. 여기에 다윗의 겸손과 자제력과 포용력이 나타나 있다.

[9-10절] 이스라엘 모든 지파 백성들이 변론하여 가로되 왕이 우리를 원수의 손에서 구원하여 내셨고 또 우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나 이제 압살롬을 피하여 나라에서 나가셨고 우리가 기름을 부어 우리를 다스리게 한 압살롬은 싸움에 죽었거늘 이제 너희가 어찌하여 왕을 도로 모셔 올 일에 잠잠하고 있느냐 하니라.

백성들의 마음은 주권적 섭리자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었다.

[11-15절] 다윗 왕이 사독과 아비아달 두 제사장에게 기별하여 가로되 너희는 유다 장로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왕의 말씀이 온 이스라엘이 왕을 궁으로 도로 모셔 오자 하는 말이 왕께 들렸거늘 너희는 어찌하여 궁으로 모시는 일에 나중이 되느냐? 너희는 내 형제요 내 골육이어늘 어찌하여 왕을 도로 모셔 오는 일에 나중이 되리요 하셨다 하고 너희는 또 아마사에게 이르기를 너는 내 골육이 아니냐? 네가 요압을 대신하여 항상 내 앞에서 군장이 되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시기를 바라노라 하셨다 하라 하여 모든 유다 사람들로 마음을 일제히 돌리게 하매 저희가 왕께 보내어 가로되 왕은 모든 신복으로 더불어 돌아오소서 한지라. 왕이 돌아와 요단에 이르매 유다 족속이 왕을 맞아 요단을 건네려 하여 길갈로 오니라.

다윗은 모든 유다 백성들로 마음을 일제히 돌리게 했다. 다윗은 여론을 중시했다. 그는 그들의 마음을 거스르거나 분열시키며 왕위에 복귀하기를 원치 않았다. 또 그는 반란군의 장군인 아마사에게 그를 요압 대신 군장으로 삼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전달케 했다. 그것도 이스라엘의 단합을 위한 것이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잘못을 범한 때에 아마사에게만 잘못을 묻는 것은 적절치 않을 것이다. 다윗은 이스라엘 전체를 생각하는 왕다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16-23절] 바후림에 있는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급히 유다 사람과 함께 다윗 왕을 맞으려 내려올 때에 베냐민 사람 1천명이 저와 함께하고 사울의 사환 시바도 그 아들 열 다섯과 종 스무명으로 더불어 저와 함께하여 요단강을 밟고 건너 왕의 앞으로 나아오니라. 왕의 가족을 건네려 하며 왕의 선히 여기는 대로 쓰게 하려 하여 나룻배가 건너가니 왕이 요단을 건너려 할 때에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왕의 앞에 엎드려 왕께 고하되 내 주여, 원컨대 내게 죄 주지 마옵소서. 내 주 왕께서 예루살렘에서 나오시던 날에 종의 패역한 일을 기억하지 마옵시며 마음에 두지 마옵소서. 왕의 종 내가 범죄한 줄 아옵는 고로 오늘 요셉의 온 족속 중 내가 먼저 내려와서 내 주 왕을 영접하나이다.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대답하여 가로되 시므이가 여호와의 기름 부으신 자를 저주하였으니 그로 인하여 죽어야 마땅치 아니하니이까? 다윗이 가로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기로 너희가 오늘 나의 대적이 되느냐? 오늘 어찌하여 이스라엘 가운데서 사람을 죽이겠느냐? 내가 오늘날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을 내가 알지 못하리요 하고 시므이에게 이르되 네가 죽지 아니하리라 하고 저에게 맹세하니라.

시므이도 급히 유다 사람들과 함께 다윗 왕을 맞으려 내려왔다. 그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빌었다. 다윗은 그를 죽이지 않았다. 그의 이런 행동도 회개하는 죄인에 대한 긍휼과 이스라엘의 단합을 위한 그의 마음을 보인다. 그를 저주하던 자가 그 앞에 굴복하였다. 이처럼 다윗은 이스라엘 나라의 단합과 일치를 위해 자신의 미움의 감정을 자제하였고 백성의 여론을 중시했고, 겸손과 인내와 관용의 덕을 보였다. 그것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덕성이다.

[24-30절] 사울의 손자 므비보셋이 내려와서 왕을 맞으니 저는 왕의 떠난 날부터 평안히 돌아오는 날까지 그 발을 맵시 내지 아니하며 그 수염을 깎지 아니하며 옷을 빨지 아니하였더라. 예루살렘에서 와서 왕을 맞을 때에 왕이 저에게 물어 가로되 므비보셋이여, 네가 어찌하여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더뇨? 대답하되 내 주 왕이여, 왕의 종 나는 절뚝발이이므로 내 나귀에 안장을 지워 타고 왕과 함께 가려 하였더니 나의 종이 나를 속이고 종 나를 내 주 왕께 참소하였나이다. 내 주 왕께서는 하나님의 사자와 같으시니 왕의 처분대로 하옵소서. 내 아비의 온 집이 내 주 왕 앞에서는 다만 죽을 사람이 되지 아니하였었나이까? 그러나 종을 왕의 상에서 음식 먹는 자 가운데 두셨사오니 내게 오히려 무슨 옳음이 있어서 다시 왕께 부르짖을 수 있사오리이까? 왕이 저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또 네 일을 말하느냐? 내가 이르노니 너는 시바와 밭을 나누라. 므비보셋이 왕께 고하되 내 주 왕께서 평안히 궁에 돌아오시게 되었으니 저로 그 전부를 차지하게 하옵소서 하니라.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도 내려와서 왕을 맞았다. 그는 왕이 떠난 날부터 평안히 돌아오는 날까지 그 발을 맵시내지 아니하며 그 수염을 깎지 아니하며 그 옷을 빨지 아니하였다.22) 그는 다윗의 고난에 동참하는 생활을 하였다. 그는 왕의 예루살렘 귀환으로 만족하였다. 그의 말은 진실하였고 그의 마음은 순수하였던 것 같다.

[31-39절]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가 왕을 보내어 요단을 건네려고 로글림에서 내려와서 함께 요단에 이르니 바르실래는 매우 늙어 나이 80세라. 저는 거부(巨富)인 고로23) 왕이 마하나임에 유할 때에 왕을 공궤[음식을 후원하고 공급]하였더라. 왕이 바르실래에게 이르되 너는 나와 함께 건너가자. 예루살렘에서 내가 너를 공궤하리라. 바르실래가 왕께 고하되 내 생명의 날이 얼마나 있삽관대 어찌 왕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리이까? 내 나이 이제 80세라. 어떻게 좋고 흉한 것을 분간할 수 있사오며 음식의 맛을 알 수 있사오리이까? 어떻게 다시 노래하는 남자나 여인의 소리를 알아 들을 수 있사오리이까? 어찌하여 종이 내 주 왕께 오히려 누를 끼치리이까? 종은 왕을 모시고 요단을 건너려는 것뿐이어늘 왕께서 어찌하여 이 같은 상으로 내게 갚으려 하시나이까? 청컨대 종을 돌려 보내옵소서. 내가 내 본성 부모의 묘 곁에서 죽으려 하나이다. 그러나 왕의 종 김함이 여기 있사오니 청컨대 저로 내 주 왕과 함께 건너가게 하옵시고 왕의 처분대로 저에게 베푸소서. 왕이 대답하되 김함이 나와 함께 건너가리니 내가 너의 좋아하는 대로 저에게 베풀겠고 또 네가 내게 구하는 것은 다 너를 위하여 시행하리라 하니라. 백성이 다 요단을 건너매 왕도 건너가서 바르실래의 입을 맞추고 위하여 복을 비니 저가 자기 곳으로 돌아가니라.

바르실래는 겸손히 왕의 요청을 거절하며 그 대신 김함을 부탁했다. 그는 욕심이 없고 선하고 친절하였고 왕을 진심으로 섬겼다.

[40-43절] 왕이 길갈로 건너오고 김함도 함께 건너오니 온 유다 백성과 이스라엘 백성의 절반이나 왕을 호행하니라. 온 이스라엘 사람이 왕께 나아와서 고하되 우리 형제 유다 사람들이 어찌 왕을 도적하여 왕과 왕의 권속과 왕을 좇는 모든 사람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네었나이까 하매 유다 모든 사람이 이스라엘 사람에게 대답하되 왕은 우리의 지친인 까닭이라. 너희가 어찌 이 일에 대하여 분내느냐? 우리가 왕의 물건을 조금이라도 먹었느냐? 왕께서 우리에게 선물 주신 것이 있느냐? 이스라엘 사람이 유다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는 왕에 대하여 십분을 가졌으니 다윗에게 대하여 너희보다 더욱 관계가 있거늘 너희가 어찌 우리를 멸시하여 우리 왕을 모셔오는 일에 먼저 우리와 의논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나 유다 사람의 말이 이스라엘 사람의 말보다 더 강경하였더라.

왕이 길갈로 건너오고 김함도 함께 건너왔다. 온 유다 백성과 이스라엘 백성의 절반이나 왕을 호위하며 함께 왔다. 왕을 모시는 일에 유다 사람들의 말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말보다 더 강경하였다.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교회의 단합을 위하자. 다윗은 이스라엘 나라의 단합과 일치를 위해, 자기를 대적하는 자들에 대한 자신의 미운 감정을 자제하고 백성의 여론을 중시하였고 겸손과 인내와 관용과 너그러움의 덕성을 보였다. 우리도 그런 마음을 가지자. 에베소서 4:1-6,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우리는 교회의 단합과 일치를 위하자.

둘째로, 우리는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자. 므비보셋과 바르실래 등은 다윗의 고난에 동참하였다. 므비보셋은 왕의 떠난 날부터 평안히 돌아오는 날까지 그 발을 맵시내지 아니하며 그 수염을 깎지 아니하며 그 옷을 빨지 않았다. 골로새서 1:24에 보면, 사도 바울은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말하였다. 우리도 순수한 마음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일을 위해 그의 고난에 동참하자.

20장: 세바의 반란

압살롬의 반란을 이제 막 제압했을 때 또 반란이 일어났다. 세상은 사람들의 불완전함과 마귀의 역사가 많은 세상이다.

[1-2절] 마침 거기 난류(이쉬 벨리야알)[악한 사람] 하나가 있으니 베냐민 사람 비그리의 아들 세바라 하는 자라. 저가 나팔을 불며 가로되 우리는 다윗과 함께할 분의(分誼)[몫]가 없으며 이새의 아들과 함께 할 업(業)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각각 장막으로 돌아가라 하매 이에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 좇기를 그치고 올라가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좇으나 유다 사람들은 왕에게 합하여 요단에서 예루살렘까지 좇으니라.

압살롬을 제압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중에 세바의 반란이 있었다. 세바는 교만하고 악한 사람이었다. 잠언 17:11, “악한 자는 반역만 힘쓰나니.” 그는 바른 판단력을 가지지 못했다. 온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윗 좇기를 그치고 올라가 세바를 좇았으나, 유다 사람들은 왕에게 합하여 예루살렘까지 좇았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다인들과의 다툼으로 감정이 상했던 것 같다. 그들은 이성적으로 행하지 않았고 감정에 따라 행동한 것 같다. 사람들의 여론은 바람과 같다. 그것은 때때로 이성적이지 않고 감정적이다.

[3절] 다윗이 예루살렘 본궁에 이르러 전에 머물러 궁을 지키게 한 후궁 열 명을 잡아 별실에 가두고 먹을 것만 주고 더불어 동침치 아니하니 저희가 죽는 날까지 갇혀서 생과부로 지내니라.

다윗은 예루살렘 본궁에 이르러 전에 머물러 궁을 지키게 한 후궁 열 명을 잡아 별실에 가두고 먹을 것만 주고 더불어 동침치 아니하였다. 그들은 죽는 날까지 갇혀서 생과부로 지냈다. 아무리 반역자인 왕의 명령이라도, 악한 일에 대해서는 죽음으로 저항했어야 하였다. 골육지친과의 동침은 율법이 금한 큰 죄악이다(레 18:6).

[4-7절] 왕이 아마사에게 이르되 너는 나를 위하여 3일 내로 유다 사람을 소집하고 너도 여기 있으라. 아마사가 유다 사람을 소집하러 가더니 왕의 정한 기한에 지체된지라. 다윗이 이에 아비새에게 이르되 이제 비그리의 아들 세바가 압살롬보다 우리를 더 해하리니 너는 네 주의 신복들을 거느리고 쫓아가라. 저가 견고한 성에 들어가서 우리들을 피할까 염려하노라 하매 요압을 좇는 자들과 그렛 사람들과 블렛 사람들과 모든 용사들이 다 아비새를 따라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쫓으려고 예루살렘에서 나와서.

아마사가 왜 지체했는지 알 수 없으나 그는 어떻게든 왕의 명령을 지켰어야 했다. 그 명령 불수행은 그에게 죽음이라는 예상치 못한 비극을 가져왔다. 아마사가 지체하자, 다윗 왕은 아비새를 보냈다.

[8-13절] 기브온 큰 바위 곁에 이르매 아마사가 맞으러 오니 때에 요압이 군복을 입고 띠를 띠고 집에 꽂은 칼을 허리에 매었는데 저가 행할 때에 칼이 빠져 떨어졌더라. 요압이 아마사에게 이르되 형은 평안하뇨 하며 오른손으로 아마사의 수염을 잡고 그 입을 맞추려는 체하매 아마사가 요압의 손에 있는 칼은 주의치 아니한지라. 요압이 칼로 그 배를 찌르매 그 창자가 땅에 흐르니 다시 치지 아니하여도 죽으니라. 요압과 그 동생 아비새가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쫓을새 요압의 소년 중 하나가 아마사의 곁에 서서 가로되 요압을 좋아하는 자와 다윗을 위하는 자는 요압을 따르라 할 때에 아마사가 길 가운데 피 속에 굴어졌는지라[뒹굴어졌는지라]. 그 소년이 모든 백성의 섰는 것을 보고 아마사를 큰 길에서부터 밭으로 옮겼으나 거기 이르는 자도 다 멈추어 서는 것을 보고 옷을 그 위에 덮으니라. 아마사를 큰 길에서 옮겨가매 사람들이 다 요압을 따라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쫓아가니라.

아마사가 요압의 손에 있는 칼을 주의하지 않은 순간적 부주의가 목숨을 잃는 일이 되었다. 한 나라의 군장의 목숨이 이렇게 허무하게 끊어졌다. 요압이 칼로 그를 찌른 것은 아마 압살롬과 함께 반역하였다는 것에 대한 미움과 또 자기 대신 이스라엘의 군장으로 임명되었다는 것에 대한 시기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왕의 뜻을 존중하지 않고 순복하지 않고 거스른 일이었다. 그것은 요압이 압살롬을 죽인 후 두 번째로 행한 무례한 행동이었다. 그것은 또한 이스라엘의 단합을 전혀 고려치 않은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14-17절] 요압이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 두루 행하여 아벨과 벧마아가와 베림 온 땅에 이르니 그 무리도 다 모여 저를 따르더라. 이에 저희가 벧마아가 아벨로 가서 세바를 에우고 그 성읍을 향하여 해자[성 밖으로 둘러 판 못] 언덕 위에 토성(土城)을 쌓고 요압과 함께한 모든 백성이 성벽을 쳐서 헐고자 하더니 그 성에서 지혜로운 여인 하나가 외쳐 가로되 들을지어다, 들을지어다, 청컨대 너희는 요압에게 이르기를 이리로 가까이 오라. 내가 네게 말하려 하노라 한다 하라. 요압이 그 여인에게 가까이 가니 여인이 가로되 당신이 요압이니이까? 대답하되 그러하다. 여인이 저에게 이르되 여종의 말을 들으소서. 대답하되 내가 들으리라.

세바의 반란, 그를 따르는 이스라엘의 여론, 요압의 무례한 행동 등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다윗과 그의 나라를 선히 인도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세바를 제압하셨고 이스라엘의 여론을 잠잠케 하셨다. 그것은 한 지혜로운 여인을 통해 이루어졌다.

[18-22절] 여인이 말하여 가로되 옛 사람들이 흔히 말하기를 아벨에 가서 물을 것이라 하고 그 일을 끝내었나이다. 나는 이스라엘의 화평하고 충성된 자 중 하나이어늘 당신이 이스라엘 가운데 어미 같은 성을 멸하고자 하시는도다. 어찌하여 당신이 여호와의 기업을 삼키고자 하시나이까? 요압이 대답하여 가로되 결단코 그렇지 아니하다. 결단코 그렇지 아니하다. 삼키거나 멸하거나 하려함이 아니니 그 일이 그러한 것이 아니니라. 에브라임 산지 사람 비그리의 아들 세바라 하는 자가 손을 들어 왕 다윗을 대적하였나니 너희가 저만 내어 주면 내가 이 성읍에서 떠나가리라. 여인이 요압에게 이르되 저의 머리를 성벽에서 당신에게 내어 던지리이다 하고 이에 여인이 그 지혜로 모든 백성에게 말하매 저희가 비그리의 아들 세바의 머리를 베어 요압에게 던진지라. 이에 요압이 나팔을 불매 무리가 흩어져 성읍에서 물러나서 각기 장막으로 돌아가고 요압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왕에게 나아가니라.

그 지혜로운 여인은 반란자 세바를 제거하였고 성 아벨을 구원했다. 그뿐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의 반역적 여론을 잠재웠고 이스라엘의 분열을 막았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닥친 추가적 환난을 그 지혜로운 여인을 통해 피하게 인도하셨다.

[23-26절] 요압은 이스라엘 온 군대의 장관이 되고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는 그렛 사람과 블렛 사람의 장관이 되고 아도니람은 감역관이 되고 아힐룻의 아들 여호사밧은 사관이 되고 스와는 서기관이 되고 사독과 아비아달은 제사장이 되고 야일 사람 이라는 다윗의 대신(大臣)이 되니라.

‘대신’이라는 원어(코헨)는 ‘제사장’이라는 뜻이지만, 때때로 ‘주요 관리’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삼하 8:18; 20:26; 왕상 4:5).

다윗은 압살롬으로 인한 고통이 가시기도 전에 세바의 반란으로 인해 고통을 당했으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다 선히 인도하셨다.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세바 같은 반역자가 되지 말자. ‘난류’ 즉 ‘벨리알의 사람’ ‘악하고 무가치한 자’가 반역을 도모했으나 그의 마지막은 목 베임을 당한 것이었다. 잠언 17:11은 “악한 자는 반역만 힘쓰나니 그러므로 그에게 잔인한 사자가 보냄을 입으리라”고 말한다. 우리는 집에서는 부모님을 공경하고 순종하고, 교회에서는 교역자들과 장로들을 존중하고 그들의 성경적 교훈과 인도에 순복하며, 사회에서는 위정자들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일꾼들인 줄 알고 존경하고 그들의 합법적 지도를 따르자. 그것이 옳은 길이다.

둘째로, 우리는 사람들의 여론을 너무 믿지 말자. 여론은 참고할 만은 하지만 때때로 바람과 같이 허무하다. 사람이 여론만 의지하면 아무 일도 못할 것이다. 그는 옛날 이야기에 당나귀를 이고 가는 어리석은 사람처럼 될 것이다. 사람들은 때때로 선동을 당하기도 한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만 믿고 나아가자. 압살롬의 반역도, 세바의 반란도 염려할 것이 없다. 우리는 복잡한 세상에서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믿고 나아가자.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고 국가의 흥망성쇠를 주장하시고 역사를 주장하시는 주권적 섭리자이심을 믿자. 오직 하나님만 믿고 그의 계명만 순종하며 하나님 앞에서 바르다고 확신하는 것을 붙잡고 꿋꿋하게 살자.

21장: 3년 기근

[1-6절] 다윗의 시대에 연부년(年復年) 3년 기근이 있으므로 다윗이 여호와 앞에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는 사울과 피를 흘린 그 집을 인함이니 저가 기브온 사람을 죽였음이니라 하시니라. 기브온 사람은 이스라엘 족속이 아니요 아모리 사람 중에서 남은 자라. 이스라엘 족속들이 전에 저희에게 맹세하였거늘 사울이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위하여 열심이 있으므로 저희 죽이기를 꾀하였더라. 이에 왕이 기브온 사람을 불러 물으니라. 다윗이 저희에게 묻되 내가 너희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내가 어떻게 속죄하여야 너희가 여호와의 기업을 위하여 복을 빌겠느냐? 기브온 사람이 대답하되 사울과 그 집과 우리 사이의 일은 은금에 있지 아니하오나 이스라엘 가운데서 사람을 죽이는 일은 우리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 왕이 가로되 너희의 말하는 대로 시행하리라. 저희가 왕께 고하되 우리를 학살하였고 또 우리를 멸하여 이스라엘 경내에 머물지 못하게 하려고 모해한 [그] 사람의 자손 일곱을 내어 주소서. 여호와의 빼신 사울의 고을 기브아에서 우리가 저희를 여호와 앞에서 목매어 달겠나이다. 왕이 가로되 내가 내어 주리라 하니라.

다윗의 시대에 삼년 동안 계속해서 매년 기근이 있었다. 이 기근은 그 원인을 생각할 때 다윗의 통치 초기에 있었던 것 같다. 이전 시대의 죄악에 대한 형벌이 때때로 후시대에 전달된다. 삼년 동안이나 계속된 그 기근의 피해는 심각하였을 것이다. 그것은 온 백성의 생존의 문제이었다. 다윗은 그 심각한 국가적 재난을 당하여 여호와 앞에 간구하였다. 기도는 성도가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다. 기도 생활은 성도의 믿음에 비례한다. 믿음이 큰 사람은 하나님께 강한 기도를 드릴 것이다. 그러나 믿음이 작은 사람은 약한 기도를 드릴 것이며, 믿음이 없는 사람은 어려운 일을 당해도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할 줄 모를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믿음의 사람 다윗의 기도에 대해 응답하셨다. 그러나 그 응답은 그 기근 자체를 당장 거두시는 응답이 아니고, 그 기근의 원인을 알게 하시는 응답이었다. 그 기근의 원인은 사울이 이스라엘이 기브온 사람들에 대해 하나님께 한 맹세를 어긴 죄악 때문이었다. 다윗은 기브온 사람들을 불러 물었고 그들의 요구대로 사울의 자손 일곱을 그들에게 내어주어 목매어 달게 하였다.

[7-9절] 그러나 다윗과 사울의 아들 요나단 사이에 서로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한 것이 있으므로 왕이 사울의 손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은 아끼고 이에 아야의 딸 리스바에게서 난 자 곧 사울의 두 아들 알모니와 므비보셋과 사울의 딸 메랍24)에게서 난 자 곧 므홀랏 사람 바실래의 아들 아드리엘의 다섯 아들을 잡고 저희를 기브온 사람의 손에 붙이니 기브온 사람이 저희를 산 위에서 여호와 앞에 목매어 달매 저희 일곱 사람이 함께 죽으니 죽은 때는 곡식 베는 처음날 곧 보리 베기 시작하는 때더라.

다윗은, 어려운 일이지만 하나님 앞에서 공의를 세우는 일이므로 그 일을 즉시 시행하였다. 죄는 벌을 받아야 했다. 죄는 자기만 망케 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손도 망케 한다. 기브온 사람들은 그들을 산 위에서 여호와 앞에 목매어 달았다. 그들은 한 날에 함께 죽었다.

[10-14절] 아야의 딸 리스바가 굵은 베를 가져다가 자기를 위하여 반석 위에 펴고 곡식 베기 시작할 때부터 하늘에서 비가 시체에 쏟아지기까지 그 시체에 낮에는 공중의 새가 앉지 못하게 하고 밤에는 들짐승이 범하지 못하게 한지라. 이에 아야의 딸 사울의 첩 리스바의 행한 일이 다윗에게 들리매 다윗이 가서 사울의 뼈와 그 아들 요나단의 뼈를 길르앗 야베스 사람에게서 취하니 이는 전에 블레셋 사람이 사울을 길보아에서 죽여 벳산 거리에 매어 단 것을 저희가 가만히 가져 온 것이라. 다윗이 그곳에서 사울의 뼈와 그 아들 요나단의 뼈를 가지고 올라오매 사람들이 그 달려 죽은 자들의 뼈를 거두어다가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의 뼈와 함께 베냐민 땅 셀라에서 그 아비 기스의 묘에 장사하되 모두 왕의 명대로 좇아 행하니라. 그 후에야 하나님이 그 땅을 위하여 기도를 들으시니라.

다윗은 길르앗 야베스에서 사울의 뼈와 그의 아들 요나단의 뼈를 가지고 올라오게 하였고 또 달려 죽은 그 일곱 아들들의 뼈를 거두어다가 함께 베냐민 땅 셀라에서 그 조상 기스의 묘에 장사하게 하였다. 그것은 사울 가정에 내려진 그 슬픈 징벌의 사건에 대해 다윗이 베풀 수 있었던 최선의 배려이었다. 그 후에야 하나님께서 그 땅을 위해 기도를 들으셨다. 막힌 기도의 문이 열렸고 기도 응답이 왔다. 죄는 기도를 가로막는다. 그러나 죄를 회개하고 청산할 때 기도의 문이 열리며 기도의 응답이 오는 것이다.

[15-22절] 블레셋 사람이 다시 이스라엘을 치거늘 다윗이 그 신복들과 함께 내려가서 블레셋 사람과 싸우더니 다윗이 피곤하매 장대한 자의 아들 중에 삼백 세겔 중 되는 놋창을 들고 새 칼을 찬 이스비브놉이 다윗을 죽이려 하므로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다윗을 도와 그 블레셋 사람을 쳐죽이니 다윗의 종자들이 다윗에게 맹세하여 가로되 왕은 다시 우리와 함께 전장(戰場)에 나가지 마옵소서. 이스라엘의 등불이 꺼지지 말게 하옵소서 하니라. 그 후에 다시 블레셋 사람과 곱에서 전쟁할 때에 후사 사람 십브개가 장대한 자의 아들 중에 삽을 쳐죽였고 또 다시 블레셋 사람과 곱에서 전쟁할 때에 베들레헴 사람 야레오르김의 아들 엘하난이 가드 골리앗의 아우 라흐미를 죽였는데 그 자의 창 자루는 베틀채 같았더라. 또 가드에서 전쟁할 때에 그곳에 키 큰 자 하나는 매 손과 매 발에 가락이 여섯씩 모두 스물 네 가락이 있는데 저도 장대한 자의 소생이라. 저가 이스라엘 사람을 능욕하므로 다윗의 형 삼마의 아들 요나단이 저를 죽이니라. 이 네 사람 가드의 장대한 자의 소생이 다윗의 손과 그 신복의 손에 다 죽었더라.

3년 기근이 해결된 후에 연거푸 네 번의 전쟁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다 승리케 하셨다. 다윗의 신하들은 다윗에게 “왕은 이스라엘의 등불을 끄지 마옵소서”(원문)라고 말했다. ‘등불’이라는 말은 ‘기쁨, 행복’을 상징한다(BDB). 왕의 생존과 건강은 백성의 기쁨과 행복과 평안이다. 가드의 장수들은 다윗의 부하들의 손에 다 죽었다.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죄는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복을 가로막고 우리의 기도의 응답을 가로막는다. 사울의 죄는 다윗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의 평안을 빼앗아갔다. 다윗은 혹독한 기근을 경험해야 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 기근을 거두어주시기를 간구하였지만, 그 기도는 응답되지 않았다. 한 해만이 아니고 두 해, 세 해나 그 재난은 계속되었다. 이사야 59:1-2,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예레미야 5:25, “너희 허물이 이러한 일들을 물리쳤고 너희 죄가 너희에게 오는 좋은 것을 막았느니라.”

둘째로, 우리는 죄를 청산해야 기도 응답을 받고 복을 얻는다. 14절, “그 후에야 하나님이 그 땅을 위하여 기도를 들으시니라.” 믿음의 사람 다윗이라도, 국가적 재난인 3년 기근을 해결하고 경제적 사회적 안정과 평안을 회복하려면, 먼저 죄를 청산하여야 했다. 그것이 중요했다. 죄를 청산하기 전에는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수 없었고 복을 주시겠다는 기도의 응답을 주지 않으셨다. 그러나 그 죄가 청산되었을 때, 기도 응답을 얻었고 또 그 결과로 오는 평안의 복을 얻을 수 있었다.

셋째로, 죄는 빨리 깨닫고 청산할수록 좋다. 본장에 기록된 기근이 3년 기근이다. 기근이 3년이나 계속되었다. 한 해 기근이 들었을 때는 그것을 하나님께서 내리신 재난이라고 심각하게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내년에는 기근이 없겠지 하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힘든 한 해를 지났을지 모른다. 그러나 다음해에도 기근이 있었고, 또 그 다음해에도 있었다. 그제서야 다윗과 그 백성은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았던 것 같다. 3년이 지나서야, 즉 그 재난의 고통이 심해진 후에야, 다윗은 진지하게 하나님께 엎드렸던 것 같다. 죄는 빨리 깨닫고 청산할수록 좋다. 우리는 우리의 현실 상황과 그 원인을 민감하게 파악해야 한다.

22장: 다윗의 시

1-20절, 하나님은 나의 반석이심

[1-3절] 여호와께서 다윗을 모든 대적의 손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그 날에 다윗이 이 노래의 말씀으로 여호와께 아뢰어 가로되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높은 망대시요 나의 피란처시요 나의 구원자시라. 나를 흉악에서 구원하셨도다.

본장은 시편 18편의 내용이다. 여호와께서 다윗을 모든 대적의 손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날에 다윗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아뢰었다. ‘반석’은 낮의 뙤약볕이나 폭우나 밤에 추위를 피할 수 있는 곳, 곧 환난을 피하는 피신처를 말한다. ‘요새’는 적의 침략을 막을 수 있는 성, 곧 옛날 북한산성, 남한산성 같은 산성이나 오늘날 전쟁시 군 지휘소인 지하벙커 같은 것을 말한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반석, 우리의 요새, 우리를 건지시는 자, 우리 하나님이시다.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라는 원문은 “내가 피할 나의 바위이신 하나님이시요”라고 번역할 수 있다(MT, KJV). ‘구원의 뿔’은 ‘구원의 힘’ 곧 능력 있는 구원자라는 뜻이다. ‘높은 망대’는 적의 침공으로부터 안전한 곳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피할 바위, 우리의 방패, 우리의 능력의 뿔, 곧 능력 있는 구원자, 우리의 높은 망대, 우리의 피난처, 우리의 구원자이시다. “흉악에서 구원하셨도다”라는 말은 “나를 강포에서 구원하시도다”(MT, KJV, NASB)라고 번역할 수 있다. ‘강포’는 악한 자들의 강포함 혹은 난폭한 자들을 가리킬 것이다. 이 세상에는 강포하고 난폭한 자들이 많이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강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하나님이시다.

[4-7절] 내가 찬송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사망의 물결이 나를 에우고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음부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아뢰었더니 저가 그 전(殿)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나의 부르짖음이 그 귀에 들렸도다.

다윗은 과거의 경험이 미래의 구원을 확신하게 만듦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찬송받으실 여호와이시다. 왜냐하면 그는 온 세상을 홀로 창조하셨고 홀로 섭리하시며 자기의 백성을 죄와 사망과 원수들에게서 건지시는 자이시기 때문이다. 다윗은 또 사망의 물결이 그를 에우고 불의의 창수가 그를 두렵게 하였으며 음부의 줄이 그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그에게 이르렀다고 말한다. ‘불의’라는 원어(벨리야알)는 ‘무가치한 자, 멸망’이라는 뜻을 가진다(BDB). 영어성경들은 ‘불경건한 자들’(KJV), ‘멸망’(NASB, NIV)이라고 번역하였다. 다윗에게 닥친 환난은 죽음과 멸망으로 이끄는 환난이었다.

그러나 다윗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그의 들으심을 체험하였다. 그것이 성도의 체험이며 특권이다. 세상에는 많은 환난이 있지만,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계시고 그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시다. ‘그 전(殿)에서’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계신 성전 곧 하늘 처소인 천국과 땅의 처소인 성막을 가리킬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계신 전에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

[8-9절] 이에 땅이 진동하고 떨며 하늘 기초가 요동하고 흔들렸으니 그의 진노를 인함이로다. 그 코에서 연기가 오르고 입에서 불이 나와 사름이여, 그 불에 숯이 피었도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셔서 원수들에게 진노하셨음을 증거한다. 그것은 천둥과 번개와 지진 등을 묘사했다고 본다. ‘그의 코’ 또는 ‘[그의] 입’은 신인동형적(神人同形的) 표현, 즉 하나님께서 사람의 모양을 가지신 것처럼 비유적으로 묘사하는 것이다.

[10-13절] 저가 또 하늘을 드리우고 강림하시니 그 발 아래는 어둑캄캄하도다. 그룹을 타고 날으심이여, 바람 날개 위에 나타나셨도다. 저가 흑암 곧 모인 물과 공중의 빽빽한 구름으로 둘린 장막을 삼으심이여, 그 앞에 있는 광채로 인하여 숯불이 피었도다.

‘저가 하늘을 드리우고[구부리고] 강림하신다’는 표현도 비유적인 표현이다. 하나님께서는 땅에 내려오시고 빽빽하고 어두운 비구름과 바람과 번개를 사용하여 그의 진노를 발하신다.

[14-16절]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뇌성을 발하시며 지존하신 자가 음성을 내심이여, 살을 날려 저희를 흩으시며 번개로 파하셨도다. 이럴 때에 여호와의 꾸지람과 콧김을 인하여 물밑이 드러나고 땅의 기초가 나타났도다.

다윗은 또 하늘의 천둥 뇌성과 번개와 바람을 하나님의 음성, 그의 꾸지람과 콧김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연현상들을 일으시키고 그것들을 자유로이 사용하신다. 그것들은 사람들에게 여전히 두려운 일이며 확실히 사람의 능력을 초월한 하나님의 손길이다.

[17-20절] 저가 위에서 보내사 나를 취하심이여, 많은 물에서 나를 건져내셨도다. 나를 강한 원수와 미워하는 자에게서 건지셨음이여, [이는] 저희는 나보다 힘센 연고로다. 저희가 나의 재앙의 날에 내게 이르렀으나 여호와께서 나의 의지가 되셨도다. 나를 또 넓은 곳으로 인도하시고 나를 기뻐하시므로 구원하셨도다.

‘많은 물’은 그가 직면한 큰 환난을 가리킨다. ‘위에서 보내사’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보내셨다는 뜻이라고 본다. 다윗이 사면초과의 곤란을 당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천사들을 동원하셔서 그를 건져주셨다. 그의 원수와 그를 미워하는 자들은 그보다 힘이 강하였지만,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비상한 방법으로 그를 도우셨다. 다윗은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였고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건져주셔서 그를 넓은 곳, 곧 평안하고 안전한 곳으로 인도하셨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하신 까닭은 “그가 나를 기뻐하셨기 때문이라”고 고백하였다.

1-20절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을 알자. 하나님을 아는 것이 참 지혜요 지식이다. 영원 전부터 스스로 계신 하나님, 온 세상의 창조주시요 섭리자이신 그는 지혜와 능력이 무한히 많으신 자이시다. 또 그는 선하심과 긍휼과 자비도 무한히 많으시다. 특히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멸망하는 인류 가운데 일부를 그의 긍휼로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 대속 사역을 이루심으로 우리를 죄와 영원한 지옥 형벌로부터 구원하셨다. 그 뿐만 아니라, 그는 구원받은 백성이 세상에 사는 동안, 영육의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주시고 또 세상에는 많은 환난이 있고 악한 자들로 인한 강포한 일들이 있지만, 그는 우리의 반석, 우리의 요새, 우리의 방패, 우리의 높은 망대, 우리의 피난처, 우리의 구원자가 되어 주신다. 우리는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알자.

둘째로, 우리는 세상에 사는 동안 당하는 환난 중에 오직 기도하자. 기도는 하나님을 알고 믿는 자들의 당연한 표현이며 특권이다.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면 우리는 우리의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을 것이다. 우리가 환난 중에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성전에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다. 비록 우리에게 우리보다 힘쎈 강한 원수들과 미워하는 자들이 있을지라도, 살아계신 전능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켜주시고 건져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기도하자.

셋째로,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하나님만 의지하며 하나님만 소망하며 하나님 앞에서 그의 계명대로 바르게만 살아가자. 첫 사람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김으로써 낙원에서 쫓겨났었다. 죄는 죽음과 불행의 원인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우리 자신과 세상의 불행의 근본 원인을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왔으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과 그의 계명 즉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 다시는 세상의 헛된 것들, 곧 돈과 육신의 쾌락과 몸의 죄성을 따라 살지 말고, 천국을 소망하며 의롭고 선하게 살아야 한다.

21-51절, 내 의를 따라 상 주심

[21-25절]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상 주시며 내 손의 깨끗함을 좇아 갚으셨으니 이는 내가 여호와의 도를 지키고 악을 행하여 내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며 그 모든 규례를 내 앞에 두고 그 율례를 버리지 아니하였음이로다. 내가 또 그 앞에 완전하여 스스로 지켜 죄악을 피하였나니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내 의대로, 그 목전에 내 깨끗한 대로 내게 갚으셨도다.

다윗은 하나님의 공의의 보응에 대해 말한다. ‘의’(義)는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하여 율법에 일치한 것을 가리킨다. ‘손의 깨끗함’은 손으로 악을 행치 않았음을 말한다.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의 도를 지키고 그 모든 규례를 늘 기억하여 버리지 않고 지켰다고 말한다. 또 ‘완전하다’는 말은 흠이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그것은 자신의 의지로 악을 행치 않는 인격적 성숙함을 말한다. 성도의 율법 순종과 인격적 성숙함은 담력을 만들고 하나님의 기도 응답을 가져온다. 사도 요한은,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으리라”고 말하였다(요일 3:21).

[26-28절]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특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리심을 보이시리이다.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자를 살피사 낮추시리이다.

다윗은 자신의 체험에 비추어 하나님의 공의의 보응에 대해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자비한 자에게는 그의 자비를 보이시며, 흠 없는 자에게는 그의 온전하신 능력과 응답을 주시며, 깨끗한 자에게는 그의 의로우심을 보이신다. 그러나 사특한 자 곧 하나님의 교훈을 거스르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노와 분을 나타내신다. 하나님께서는 고난받는 성도들을 구원하시고 교만한 자들을 살피시고 낮추신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공의로운 보응을 내리신다.

[29-32절] 여호와여, 주는 나의 등불이시니 여호와께서 나의 흑암을 밝히시리이다.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에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성벽을 뛰어 넘나이다.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정미(精美)하니 저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에게 방패시로다. 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이며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 바위뇨?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의 힘이 되셔서 그의 원수들을 다 멸하게 하셨다고 말한다. 하나님을 ‘나의 등불’이라고 표현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지식과 의, 기쁨과 행복이 되심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야 할 의의 길을 밝히 보이시고 우리에게 기쁨과 행복이 되신다. 다윗은 하나님 때문에 무지와 죄, 슬픔과 불행을 극복할 수 있었다. 그의 용기도 하나님을 의뢰함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하나님을 의뢰하며 적군에 달렸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성벽을 뛰어넘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완전하고 제련된 광석과 같이 깨끗하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다 믿고 지킬 만한 거룩한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에게 피하는 자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을 것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방패 되심을 체험할 것이다.

[33-37절] 하나님은 나의 견고한 요새시며 나를 온전한 곳으로 인도하시며 나의 발로 암사슴 발 같게 하시며 나를 나의 높은 곳에 세우시며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니 내 팔이 놋활을 당기도다. 주께서 또 주의 구원의 방패를 내게 주시며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 내 걸음을 넓게 하셨고 나로 실족지 않게 하셨나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견고한 요새와 같으시다. 하나님 안에 거하는 자는 든든하다. 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길을 온전케 하신다. 또 그는 우리의 발을 암사슴 발같이 힘있게 하시고 활기 있게 하신다. 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전쟁의 기술도 가르쳐 주셔서 잘 싸우게 도우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가장 훌륭한 훈련 교관이시다. 또 그는 그의 구원의 방패를 주셔서 원수의 공격을 잘 막게도 하신다. 또 그는 우리를 도우셔서 우리의 걸음이 실족하지 않게 하신다.

[38-43절] 내가 내 원수를 따라 멸하였사오며 저희를 무찌르기 전에는 돌이키지 아니하였나이다. 내가 저희를 무찔러 파하였더니 저희가 내 발 아래 엎드러지고 능히 일어나지 못하였나이다. 이는 주께서 나로 전쟁케 하려고 능력으로 내게 띠 띠우사 일어나 나를 치는 자로 내게 굴복케 하셨사오며 주께서 또 내 원수들로 등을 내게로 향하게 하시고 나로 나를 미워하는 자를 끊어버리게 하셨음이니이다. 저희가 둘러보아도 구원할 자가 없었고 여호와께 부르짖어도 대답지 아니하셨나이다. 내가 저희를 땅의 티끌같이 부스러뜨리고 거리의 진흙같이 밟아 헤쳤나이다.

다윗은 그의 원수들을 다 무찔렀다. 그는 그들을 다 굴복시켰고 그들을 땅의 티끌같이 부스러뜨렸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시고 도우셨기 때문이었다. 다윗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확신하였다.

[44-46절] 주께서 또 나를 내 백성의 다툼에서 건지시고 나를 보존하사 열방의 으뜸을 삼으셨으니 내가 알지 못하는 백성이 나를 섬기리이다. 이방인들이 내게 굴복함이여 저희가 내 풍성(風聲)을 듣고 곧 순복하리로다. 이방인들이 쇠미(衰微)하여 그 견고한 곳에서 떨며 나오리로다.

다윗의 왕정 생활은 외부의 원수들만 있지 않았고 백성들의 다툼과 소요도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까지도 도우셨다. 그는 그를 백성의 다툼에서 건지셨고 그를 보존하셨다. 또 하나님께서는 그를 이방 나라들 위에 높이셨고 이방인들이 그 앞에 굴복하고 그에게 떨며 나오게 하셨다. 한 국가의 평안도, 세계 역사도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하나님께서는 홀로 온 세상의 주권적 섭리자이시다.

[47-51절] 여호와는 생존하시니 나의 바위를 찬송하며 내 구원의 바위이신 하나님을 높일지로다. 이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보수(報讎)하시고 민족들로 내게 복종케 하시며 나를 원수들에게서 나오게 하시며 나를 대적하는 자 위에 나를 드시고 나를 강포한 자에게서 건지시는도다. 이러므로 여호와여,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리이다. 여호와께서 그 왕에게 큰 구원을 주시며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인자(仁慈)를 베푸심이여, 영원토록 다윗과 그 후손에게로다 하였더라.

여호와께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다. 그는 다윗의 원수들에게 공의로 보복하셨고 그들을 그 앞에 굴복케 하셨고 또 이방 나라들도 그에게 복종케 하셨다. 다윗의 왕정 생활은 국내외적으로 어려움이 없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와 함께하셨고 그를 도우셨다. 그의 승리적 생애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을 찬송하며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이 세상 사는 동안 많은 원수들을 만나지만 두려워 말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의롭고 깨끗하고 완전하게만 살자. 하나님께서는 공의의 보응자이시다. 우리의 원수는 단지 우리를 해치는 악한 사람들뿐이 아니고 죄와 죽음과 마귀와 악령들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만 유지한다면, 그 어떤 원수들도 문제될 것이 없다.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이는 주권적 섭리자 하나님이시다. 그는 우리의 원수들을 다 물리치실 수 있고 물리쳐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만 의지하고 바르게만 살자.

둘째로, 우리는 다윗처럼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과 지혜로 원수들과 싸우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방패와 요새가 되시며 또 우리의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는 가장 뛰어난 훈련 교관이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과 용기로 이 세상을 힘있게 살고 우리의 원수들과 우리 앞의 어려운 문제들을 다 이기자. 우리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 진리의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믿음의 방패와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엡 6:10-18). 우리는 강건한 전사가 되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다윗처럼 하나님만 찬송하자. 왜냐하면 우리의 삶의 모든 복과 우리의 봉사의 모든 힘과 그 성취는 다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이다. 영원하신 하나님께서는 천지만물의 창조자요 섭리자이시며 우리의 구주이시다. 그는 세상에서 홀로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다.

23장: 다윗의 용사들

[1-7절] 이는 다윗의 마지막 말이라. 이새의 아들 다윗이 말함이여, 높이 올리운 자, 야곱의 하나님에게 기름 부음 받은 자, 이스라엘의 노래 잘하는 자가 말하도다. 여호와의 신이 나를 빙자하여 말씀하심이여, 그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의 바위가 내게 이르시기를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여, 저는 돋는 해 아침 빛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고 비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 같으니라 하시도다. 내 집이 하나님 앞에 이 같지 아니하냐? 하나님이 나로 더불어 영원한 언약을 세우사 만사에 구비하고 견고케 하셨으니 나의 모든 구원과 나의 모든 소원을 어찌 이루지 아니하시랴? 그러나 사악한 자는 다 내어버리울 가시나무 같으니 이는 손으로 잡을 수 없음이로다. 그것들을 만지는 자는 철과 창자루를 가져야 하리니 그것들이 당장에(바솨벳)[그곳에서](KJV, NASB) 불사르이리로다 하니라.

본문은 다윗의 마지막 말이다. 이새의 아들 다윗은 ‘높이 올리운 자,’ ‘야곱의 하나님에게 기름 부음 받은 자,’ ‘이스라엘의 노래 잘하는 자’이었다. 그는 비천한 가문에서 이새의 아들로 태어났고(삼상 18:23) 아버지의 양을 치던 자이었으나(삼상 16:11) 이스라엘의 왕으로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았고 높이 올리웠고 본래 구변과 음악의 재능이 있었고(삼상 16:18) 성령의 감동으로 많은 시를 저작했다.

다윗은 여호와의 영의 감동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온 우주의 가장 높으신 통치자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의 계명과 법도대로 공의롭게 사람들을 다스리는 왕은 참된 왕이다. 그런 왕에게는 돋는 해와 아침 빛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은 맑고 밝은 은혜, 곧 슬픔과 불행이 없는, 영광스러운 복이 준비되어 있고, 또 비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 같은 생명감 넘치는 은혜가 예비되어 있다. “내 집이 하나님 앞에 이 같지 아니하냐?”는 원문은 “비록 내 집이 하나님 앞에 이 같지 아니할지라도”라고 번역할 수 있다(KJV, BDB). 다윗은 비록 완전하지는 못했을지라도 그 중심이 하나님을 향했고 하나님께서는 그와 영원한 언약을 맺으셨고 그에게 모든 좋은 것을 약속하시며 보장하셨다. 그러므로 다윗은 그의 모든 구원 곧 죄와 여러 가지 환난과 죽음으로부터의 구원과 그의 모든 소원을 다 이루게 될 것을 확신하고 기대했다. 그러나 그는 또한 악한 자들이 내어버림을 받고 가시나무같이 불태워질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8-12절] 다윗의 용사들의 이름이 이러하니라. 다그몬 사람 요셉밧세벳이라고도 하고 에센 사람 아디노라고도 하는 자는 군장의 두목이라. 저가 한 때에 8백인을 쳐죽였더라. 그 다음은 아호아 사람 도대의 아들 엘르아살이니 다윗과 함께한 세 용사 중에 하나이라. 블레셋 사람이 싸우려고 모이매 이스라엘 사람들이 물러간지라. 세 용사가 싸움을 돋우고 저가 나가서 손이 피곤하여 칼에 붙기까지 블레셋 사람을 치니라. 그 날에 여호와께서 크게 이기게 하셨으므로 백성들은 돌아와서 저의 뒤를 따라가며 노략할 뿐이었더라. 그 다음은 하랄 사람 아게의 아들 삼마라. 블레셋 사람이 떼를 지어 녹두나무가 가득한 밭에 모이매 백성들은 블레셋 사람 앞에서 도망하되 저는 그 밭 가운데 서서 막아 블레셋 사람을 친지라. 여호와께서 큰 구원을 이루시니라.

8-39절까지는 다윗의 용사들 37명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다윗과 다윗 왕국 곧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운 충성된 용사들이었다. 그들은 다윗에게 힘과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8-12절에는 우선 그 용사들 중에 대표적인 세 명의 이름과 그들의 용맹한 업적이 기록되어 있다.

첫 번째 인물은 요셉밧세벳 혹은 아디노라는 자이다. 그는 군장의 두목인데, 한때에 800인을 쳐죽였다. 역대상 11:11은 그의 이름이 ‘야소브암’이며 한때에 300인을 죽였다고 기록한다. 본절에 800인은 아마 여러 번 죽인 수를 합한 것일 것이다(델리취).

두 번째 인물은 엘르아살이다. 그도 세 용사 중 하나이다.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려고 모였으나 이스라엘 사람들이 물러갔을 때, 그 세 용사는 싸움을 돋우었고 그는 나가서 손이 피곤하여 칼에 붙기까지 블레셋 사람들을 쳤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크게 이기게 하셨으므로 물러갔던 백성들은 돌아와 그의 뒤를 따라가며 노략할 뿐이었다. 엘르아살의 업적은 하나님의 도우신 은혜이었다.

세 번째 인물은 삼마이다. 블레셋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녹두나무가 가득한 밭에 모였고 이스라엘 백성이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도망쳤을 때, 삼마는 그 밭 가운데 서서 막아 블레셋 사람들을 쳤다. 여호와께서는 큰 구원을 이루셨다. 삼마의 큰 업적도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이었다.

[13-17절] 또 삼십 두목 중 세 사람이 곡식 벨 때에 아둘람 굴에 이르러 다윗에게 나아갔는데 때에 블레셋 사람의 떼가 르바임 골짜기에 진쳤더라. 그때에 다윗은 산성에 있고 블레셋 사람의 영채는 베들레헴에 있는지라. 다윗이 사모하여 가로되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누가 나로 마시게 할꼬 하매 세 용사가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충돌하고 지나가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길어 가지고 다윗에게로 왔으나 다윗이 마시기를 기뻐 아니하고 그 물을 여호와께 부어드리며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이다. 이는 생명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갔던 사람들의 피니이다 하고 마시기를 즐겨 아니하니라. 세 용사가 이런 일을 행하였더라.

그 다음의 세 명의 용사들은 다윗을 위해 목숨의 위험을 무릅쓰고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충돌하고 지나가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길어 가지고 다윗에게로 왔다. 그것은 무모하게 보일 정도로 용감하고 충성된 행동이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며 그 물 마시기를 즐거워하지 않았다.

[18-23절] 또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아우 아비새니 저는 그 3인의 두목이라. 저가 창을 들어 3백인을 죽이고 그 삼인 중에 이름을 얻었으니 저는 3인 중에 가장 존귀한 자가 아니냐? 저가 저희의 두목이 되었으나 그러나 첫 3인에게는 미치지 못하였더라. 또 갑스엘 용사의 손자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니 저는 효용한 일을 행한 자라. 일찌기[일찍이] 모압 아리엘의 아들[혹은 ‘사자 같은 사람들’(KJV)] 둘을 죽였고 또 눈 올 때에 함정에 내려가서 한 사자를 죽였으며 또 장대한 애굽 사람을 죽였는데 그의 손에 창이 있어도 저가 막대를 가지고 내려가서 그 애굽 사람의 손에서 창을 빼앗아 그 창으로 죽였더라.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가 이런 일을 행하였으므로 세 용사 중에 이름을 얻고 30인보다 존귀하나 그러나 첫 3인에게는 미치지 못하였더라. 다윗이 저를 세워 시위대 장관을 삼았더라.

그 세 용사의 우두머리는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아우[아마 형, 대상 2:16] 아비새이다. 또 한 사람은 갑스엘 용사의 손자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이다. 다윗은 그를 세워 시위대 장관을 삼았다. 그 다음에, 본문에 빠진 한 사람이 있다. 두 번째 3인 중, 아비새와 브나야 외에 나머지 한 명은 누구인가? 그는 아마 요압일 것이다. 그래야 모두 37명이 된다(39절). 요압은 말년에 다윗을 거역했기 때문에(삼하 18:14; 20:10; 왕상 1:7) 그 이름이 언급되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다윗의 통치 기간에 그는 분명히 중요한 용사들 중 한 명이었다.

[24-39절] 요압의 아우 아사헬은 30인 중에 하나요 또 베들레헴 도도의 아들 엘하난과 하롯 사람 삼훗과 하롯 사람 엘리가와 발디 사람 헬레스와 드고아 사람 익게스의 아들 이라와 아나돗 사람 아비에셀과 후사 사람 므분내와 아호아 사람 살몬과 느도바 사람 마하래와 느도바 사람 바아나의 아들 헬렙과 베냐민 자손에 속한 기브아 사람 리배의 아들 잇대와 비라돈 사람 브나야와 가아스 시냇가에 사는 힛대와 아르바 사람 아비알본과 바르훔 사람 아스마웻과 사알본 사람 엘리아바와 야센의 아들 요나단과 하랄 사람 삼마와 아랄 사람 사랄의 아들 아히암과 마아가 사람의 손자 아하스배의 아들 엘리벨렛과 길로 사람 아히도벨의 아들 엘리암과 갈멜 사람 헤스래와 아랍 사람 바아래와 소바 나단의 아들 이갈과 갓 사람 바니와 암몬 사람 셀렉과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병기 잡은 자 브에롯 사람 나하래와 이델 사람 이라와 이델 사람 가렙과 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도합이 37인이었더라.

24-39절은 그 나머지 31명의 용사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처음 여섯 명과 더불어, 다윗의 용사들은 모두 37인이었다. 맨 마지막에는 다윗에 의해 고의로 죽었던 헷 사람 우리아도 들어 있다.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거하며 감사하자.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만왕의 왕이시며 온 세계 교회의 주님이며 머리이시다. 그는 의로 세상을 다스리신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영원한 언약을 맺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거하며 감사하자. 골로새서 2:6-7,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믿음과 의로만 살며 충성하자.

둘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가 되자. 용감하고 충성된 다윗의 37명의 용사들처럼, 우리는 다윗보다 크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용감하고 충성된 용사들이 되자. 주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와 바울을 세우셨고, 그 후에 교회들에 목사들과 신학자들과 선교사들과 장로들과 교사들 등 많은 봉사자들과 일꾼들을 세우셨다. 디모데후서 2:3,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라.”

셋째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봉사하자. 다윗의 용사들 중에 대표적으로 엘르아살과 삼마가 하나님의 은혜로 큰 승리의 업적을 이루었듯이, 하나님의 교회의 일꾼들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일한다. 바울은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 고백하였다(고전 15:10). 그것이 바른 고백이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라”고 권면했다(벧전 4:11).


24장: 인구조사의 죄

본장은 다윗이 인구조사를 한 죄와 하나님의 징벌을 기록한다. 이 사건은 다윗의 생애에 기록될 만한 두 가지의 큰 실수 중 하나이다.

[1절]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저희를 치시려고 다윗을 감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

다윗의 인구조사의 실수는 하나님의 진노에서 비롯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진노하셨기 때문에 다윗의 실수와 범죄를 허락하셨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진노하신 까닭은 그들이 압살롬의 반역과 세바의 반란 때에 그들을 따랐기 때문일 것이다(삼하 15:12; 20:2). 반역자들을 따르는 일은 하나님께서 진노하실 큰 죄악이다. 역대상 21:1은 같은 사건을 기록하면서 “사단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고 말한다. 거기의 ‘격동하다’는 원어와 본절의 ‘감동시키다’는 원어는 동일하다(수스 תוּס). 사탄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안에서 활동할 수 있을 뿐이다. 인구조사를 하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뻐하는 대신 군인들의 수와 군대의 세력을 의지하고 자랑하려는 교만의 죄악이라고 보인다. 하나님께서 버려두시면 경건한 다윗이라 할지라도 사탄의 시험에 떨어져 큰 죄를 지었다.

[2-9절] 왕이 이에 그 곁에 있는 군대 장관 요압에게 이르되 너는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로 다니며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인구를 조사하여 그 도수(都數)[백성의 수]를 내게 알게 하라. 요압이 왕께 고하되 이 백성은 얼마든지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백 배나 더하게 하사 내 주 왕의 눈으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그런데 내 주 왕은 어찌하여 이런 일을 기뻐하시나이까 하되 왕의 명령이 요압과 군대장관들을 재촉한지라. 요압과 장관들이 이스라엘 인구를 조사하려고 왕의 앞에서 물러나서 요단을 건너 갓 골짜기 가운데 성읍 아로엘 우편 곧 야셀 맞은편에 이르러 장막을 치고 길르앗에 이르고 닷딤홋시 땅에 이르고 또 다냐안에 이르러서는 시돈으로 돌아서 두로 견고한 성에 이르고 히위 사람과 가나안 사람의 모든 성읍에 이르고 유다 남편으로 나와서 브엘세바에 이르니라. 저희 무리가 국중(國中)을 두루 돌아 아홉 달 스무 날 만에 예루살렘에 이르러 요압이 인구 도수(都數)[백성의 수]를 왕께 고하니 곧 이스라엘에서 칼을 빼는 담대한 자가 80만이요 유다 사람이 50만이었더라.

역대상 21:5에는 “이스라엘 중에 칼을 뺄 만한 자가 110만명이요 유다 중에 칼을 뺄 만한 자가 47만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유다 사람 50만명은 47만명에 대한 어림수일 것이다. 사무엘하와 역대상 21장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숫자의 차이는 ‘담대한 자’라는 말(카일)에 있다고 본다. 20세 이상의 수효는 110만명이지만, 그 중 용감한 자들의 수가 80만명이라는 뜻일 것이다.

[10-13절] 다윗이 인구 수를 조사한 후에 그 마음에 자책하고 여호와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 다윗이 아침에 일어날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다윗의 선견자된 선지자 갓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가서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네게 세 가지를 보이노니 너는 그 중에서 하나를 택하라. 내가 그것을 네게 행하리라 하셨다 하라. 갓이 다윗에게 이르러 고하여 가로되 왕의 땅에 7년 기근이 있을 것이니이까? 혹시 왕이 왕의 대적에게 쫓겨 석 달을 그 앞에서 도망하실 것이니이까? 혹시 왕의 땅에 3일 동안 온역이 있을 것이니이까? 왕은 생각하여 보고 나를 보내신 이에게 대답하게 하소서.

다윗은 잘못 생각하여 인구 조사하는 실수를 했지만, 곧 깨닫고 돌이켰다. 우리는 미련한 자이어서 실수하고 범죄할 수 있지만, 그 죄를 깨닫는 즉시 돌이켜야 한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다윗의 선견자인 갓을 통해 7년 기근,25) 3달 피난, 3일 온역의 세 가지 중 하나를 택하라고 말씀하셨다. 그 셋은 다 무서운 재앙들이었다.

다윗이 하나님께 회개했는데, 왜 하나님의 징벌이 선언되었는가? 사람이 죄를 회개해도 벌을 받는가? 또 이것은 예수님의 대속 사역 이전의 구약사건이니까 그러한가? 우리는 ‘벌’이라는 말을 분명히 정의할 필요가 있다. 만일 벌이 죄에 대한 정확한 대가를 의미한다면, 죄의 벌은 죽음과 지옥에 던지움이며 죄인이 회개하면 이런 벌은 없다. 그러나 만일 벌이 이런 엄격한 진노의 형벌 말고 훈련을 위한 징계와 매도 포함한다면, 죄를 회개해도 이런 벌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 가운데 성도에게 주어진다. 이것은 사랑의 징계와 매이다. 이런 징계는 신약성경 히브리서 12장에 증거된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받은 신약성도에게도 있다. 그러므로 주 안에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들도 죄 짓는 일을 두려워하고 멀리해야 한다. 루터는 말하기를, 우리가 죄의 길을 갈 때에는 “하나님은 우리와 정반대로 역사하신다”고 하였다. 신약성도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14-17절] 다윗이 갓에게 이르되 내가 곤경에 있도다.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크시니 우리가 여호와의 손에 빠지고 내가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않기를 원하노라. 이에 여호와께서 그 아침부터 정하신 때까지 온역을 이스라엘에게 내리시니 단부터 브엘세바까지 백성의 죽은 자가 7만인이라. 천사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그 손을 들어 멸하려 하더니 여호와께서 이 재앙 내림을 뉘우치사 백성을 멸하는 천사에게 이르시되 족하다. 이제는 네 손을 거두라 하시니 때에 여호와의 사자가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 곁에 있는지라. 다윗이 백성을 치는 천사를 보고 곧 여호와께 아뢰어 가로되 나는 범죄하였고 악을 행하였삽거니와 이 양 무리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청컨대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비의 집을 치소서 하니라.

피신생활의 혹독한 경험을 했던 다윗은 사람들의 핍박과 죽음의 위협을 피하여 피신하는 것 대신 다른 것을 구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그 아침부터 정하신 때까지 이스라엘에게 온역을 내리셨고 단부터 브엘세바까지 백성의 죽은 자가 7만명이었다.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였으니 자신과 자신의 아버지 집을 치시기를 겸손하게 고하였다.

[18-25절] 이 날에 갓이 다윗에게 이르러 고하되 올라가서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으소서 하매 다윗이 여호와의 명하신 바 갓의 말대로 올라가니라. 아라우나가 바라보다가 왕과 그 신복들이 자기를 향하여 옴을 보고 나가서 왕의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가로되 어찌하여 내 주 왕께서 종에게 임하시나이까? 다윗이 가로되 네게서 타작마당을 사서 여호와께 단을 쌓아 백성에게 내리는 재앙을 그치게 하려 함이로라. 아라우나가 다윗에게 고하되 원컨대 내 주 왕은 좋게 여기시는 대로 취하여 드리소서. 번제에 대하여는 소가 있고 땔 나무에 대하여는 마당질하는 제구와 소의 멍에가 있나이다. 왕이여, 아라우나가 이것을 다 왕께 드리나이다 하고 또 왕께 고하되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을 기쁘게 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 왕이 아라우나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다. 내가 값을 주고 네게서 사리라. 값 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 하고 은 50세겔로 타작마당과 소를 사고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니 이에 여호와께서 그 땅을 위하여 기도를 들으시매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재앙이 그쳤더라.

아라우나는 왕에게 번제의 소와 땔나무 등을 드리겠다고 말했다. 그는 즐거이 자신의 재물을 바치기를 원했다. 그는 경건하고 충성된 인물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의 제사를 위해 정당한 값을 주고 그 땅과 제물을 사기를 원했다. 왕은 은 50세겔로 타작마당과 소를 샀다. 역대상 21:25는 “그 기지값으로 금 60세겔을 달아주었다”고 기록한다. 그것은 그 타작마당과 제물의 값뿐 아니라, 그 주위의 상당한 땅을 포함하는 값일 것이다. 다윗은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다. 번제는 속죄와 완전한 헌신을 상징하며 화목제는 속죄와 하나님과의 화목과 교제 회복을 상징한다. 여호와께서는 그 땅을 위하여 기도를 들으셨고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내리신 재앙을 멈추게 하셨다.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은 후에 성전이 세워지는 중요한 땅이 되었다. 역대상 22:1에 보면, 다윗은 그 땅을 “이는 여호와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이스라엘의 번제단이라”고 불렀다. 또 역대하 3:1은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 아비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고 기록했다. 옛날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그 외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려 하였던 그 모리아 산, 그리고 이제 다윗이 이스라엘과 자신의 죄를 속하기 위해 번제와 화목제를 올렸던 그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이 바로 솔로몬의 성전이 세워질 곳이었다. 다윗이 그 타작마당을 산 것은 성전대지를 확보한 일이 되었다. 하나님의 일은 신기하게 진행되었다.

본문의 교훈은 분명하다. 첫째로, 우리는 잠시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마귀의 시험에 떨어지고 죄의 유혹에 넘어진다는 것을 알자. 다윗이라도 그러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깨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자. 그러므로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말씀하셨다(마 26:41).

둘째로, 우리는 특히 불신앙과 교만에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자. 다윗은 잠시라도 하나님 대신 군인들의 수효와 군대의 세력을 의지하고 기뻐하려 하였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만 의지하고 기뻐하고 세상적인 것, 물질적인 것, 인간적인 것을 의지하거나 자랑하지 말자.

셋째로, 우리는 죄의 징계를 두려워하며 죄를 깨달을 때 즉시 회개하자. 죄는 하나님의 무서운 징벌을 가져온다. 우리는 하나님의 징벌을 두려워하고 죄를 깨달을 때 즉시 회개함으로 씻음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의지하고 참된 순종을 결심하고 의와 선을 행하자.

미주

1) ‘갑절’이라는 원어(마나 아카스 압파임)는 ‘얼굴의 몫’이라는 뜻이다. 영어성경들은 'a worthy portion'(가치 있는 몫)(KJV), 'a double portion'(갑절)(NASB, NIV) 등으로 번역한다.

2) 원문에는 카시도 ‘그의 성도’라고 쓰여 있으나(케팁), 마소라 학자들은 카시다우 ‘그의 성도들’로 읽으라(케레)고 제안한다. 영어성경들은 후자를 취했다. 'his saints'(KJV, NIV), 'His holy ones'(NASB). 그러나 가급적 원문에 쓰여진 대로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3) ‘아이’라는 원어(나아르)는 ‘아이, 소년, 청년’이라는 뜻이 있다.

4) 오펠은 테코르라는 말과 동의어인 것 같다. 오펠은 사무엘상 5-6장에 다섯 번(5:6, 9, 12; 6:4, 5), 테코르는 두 번(6:11, 17) 사용되었다. 오펠은 엉덩이 부분에 생기는 종양을 가리키는 것 같다(BDB). 헬라어 70인역(LXX)과 옛날 영어성경(KJV)은 이런 뜻을 반영한다.

5) 쉬브임 이쉬 카밋쉼 엘렙 이쉬는 ‘70명, 5만명’이라는 말로서, ‘5만 70명’으로 보는 것이 가장 좋고, 고대 헬라어 70인역이나 권위 있는 영어역들(KJV, NASB)도 그렇게 번역하였다.

6) 원문에 ‘취한다’는 동사(라카)가 네 번 나오며(11, 13, 14, 16절), 15절과 17절에서는 ‘십일조를 취한다’는 단어(아사르)가 사용되었다.

7) 히브리어 본문과 영어역 KJV, NASB의 본문은 필자의 번역과 같다. 그러나 영어역 ASV, NIV의 본문은 한글개역성경의 본문과 같다.

8) 마소라 본문에는 숫자가 없고 헬라어 70인역은 1절을 생략했다.

9) 전통적 히브리어 마소라 본문은 이러하나, 고대의 역본들(LXX, Syr, Vg), 많은 히브리어 사본들, 및 영어 NASB는 한글개역본문과 같다.

10) 본절뿐 아니라, 17장에 여러 번 나오는(40, 41, 43, 45, 48, 48, 49, 50, 51, 54, 55, 57, 57절 등) ‘블레셋 사람’이라는 원어(합플리쉬티)는 ‘그 블레셋 사람’이라는 뜻으로 블레셋 장수 골리앗을 가리켰다.

11) 가돌 메옷은 단순히 ‘심히 큰 자’(KJV)라는 뜻이다.

12) 우리 말에 ‘갈멜 족속’(LXX)이라는 원어(켈립보 [케팁], 칼립비[케레])는 ‘갈렙 족속’이라는 뜻이다(Vg, Targ, KJV, NASB, NIV).

13) Luther, Calvin을 비롯하여 Matthew Poole, Matthew Henry, 박윤선, 이병규 등이 이런 견해를 가진다.

14) ‘새벽’이라는 원어(네쉐프)는 ‘새벽 어두움’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보통은 ‘저녁 어두움’ 즉 ‘황혼’을 가리킨다(BDB, NIV).

15) 히브리어 마소라 본문은 ‘아람’이라고 읽지만(KJV, NASB), 6개의 히브리어 사본들과 고대 헬라어 70인역과 고대 수리아어역은 시편 60편의 제목과 역대상 18:11-12과 같이 ‘에돔’이라고 읽는다. 원문은 ‘에돔’이라고 보이며 히브리어 레쉬(ר)와 달렛(ד)은 글자가 비슷하기 때문에 필사상의 오류가 생긴 경우인 것 같다.

16) 영어역인 NASB는 “그 여인은 그의 부정함을 깨끗케 하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는 뜻으로 번역했다. 그러나 전통적 히브리어 마소라 본문의 액센트를 고려하면 한글개역처럼 번역할 수 있다(KJV, NIV도 그러함).

17) 원문을 직역하면, “[그들을] 톱 안에와 쇠 써레 안에와 쇠 도끼 안에와 벽돌 가마 안에 두었다”이다. 그것은 그들을 그렇게 죽였다는 뜻인지도 모른다(아마 KJV, NASB). 그러나 한글개역처럼 번역하기도 한다(NIV).

18) ‘욕되게 하다’라는 원어 인나는 'humble'(BDB), 'force'(KJV), 'violate'(NASB) 등으로 번역된다.

19) ‘채색옷’이라는 원어(케소넷 팟심)는 ‘손바닥이나 발바닥까지 닿는 긴 옷’(BDB, NASB)이나 ‘채색옷’(KJV)을 가리킨다.

20) 역대상 2:17은 ‘이스마엘 사람’이라고 되어 있다.

21) LXX, Syr, Vg은 리 (나를 위해)로 읽고 NASB, NIV가 따름.

22) ‘맵시낸다’와 ‘깎는다’는 원어(아사)는 ‘한다’는 뜻으로 발을 씻거나(BDB) 가꾸고(KJV, NASB, NIV) 수염을 깎는 것을 가리켰다고 본다.

23) 원문(이쉬 가돌 메오드)은 ‘매우 위대한 사람’이라는 뜻이지만(KJV, NASB), 문맥상 ‘거부’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NIV).

24) 전통적 히브리어 마소라 본문에는 ‘미갈'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사본상의 오류인 것 같다. 2개의 사본과 헬라어 칠십인역의 일부와 수리아어역은 ‘메랍’이라고 되어 있다. 옛날 영어성경(KJV)은 전자를 따랐으나 근래의 영어성경들(NASB, NIV)과 한글개역은 후자를 따른다. 사무엘상 18:19는 메랍의 남편이 므홀랏 사람 아드리엘이라고 증거하였다.

25) 역대상 21:12는 ‘3년’이라고 되어 있다. 헬라어 70인역의 본문은 ‘3년’으로 되어 있다. 영어성경 NIV는 ‘3년’이라는 본문을 취한다. 만일 3년이 맞다면, 이것은 히브리어 전통(마소라)본문의 필사상의 오류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