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舊約]강해/◆ 역사서[강해]

★사무엘상(Samuel) 1장-8장

영국신사77 2020. 4. 14. 18:27


사무엘강해

김효성 목사

2018년 6월 8일 수정


머리말

주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 바울의 증거대로(마 5:18; 요 10:35; 갈 3:16; 딤후 3:16),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라는 고백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매우 기본적이고 중요하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진술대로(1:8), 우리는 성경의 원본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고 그 본문이 “그의 독특한 배려와 섭리로 모든 시대에 순수하게 보존되었다”고 믿는다. 이것은 교회의 전통적 견해이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은 야곱 벤 카임이 편집한 제2 랍비 성경(봄버그판)을 표준적 마소라 본문으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성경은 성도 개인의 신앙생활뿐 아니라, 교회의 모든 활동들에도 유일한 규범이다. 오늘날처럼 다양한 풍조와 운동이 많은 영적 혼란의 시대에,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가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묵상하기를 원하며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든 뜻을 알기를 원한다.

성경을 가지고 설교할지라도 그것을 바르게 해석하고 적용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올 것이다(암 8:11).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오고 있다. 많은 설교와 성경강해가 있지만, 순수한 기독교 신앙 지식과 입장은 더 흐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요구되는 성경 해석과 강해는 복잡하고 화려한 말잔치보다 성경 본문의 바른 뜻을 간단 명료하게 해석하고 적절히 적용하는 것일 것이다. 사실상, 우리는 성경책 한 권으로 충분하다. 성경주석이나 강해는 성경 본문의 바른 이해를 위한 작은 참고서에 불과하다. 성도는 각자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성경을 읽어야 하고, 성경주석과 강해는 오직 참고서로만 사용해야 할 것이다.


사무엘상

제목차례

[사무엘상]

1장: 사무엘의 출생

2장: 엘리와 그 아들들의 죄

3장: 사무엘을 부르심

4장: 엘리의 죽음

5장: 블레셋에 재앙을 내리심

6장: 블레셋 사람들이 법궤를 돌려보냄

7장: 사무엘이 다스림

8장: 이스라엘이 왕을 요구함

9장: 사울이 사무엘을 만남

10장: 사울이 왕으로 선택됨

11장: 길르앗 야베스를 구원함

12장: 사무엘의 임직식 설교

13장: 사울이 합당치 않게 제사 드림

14장: 요나단이 블레셋을 물리침

15장: 아말렉을 다 멸하지 않음

16장: 다윗에게 기름부음

17장: 다윗이 골리앗을 죽임

18장: 사울이 다윗을 미워함

19장: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 함

20장: 요나단이 다윗과 언약함

21장: 다윗이 아히멜렉에게 들림

22장: 사울이 제사장들을 죽임

23장: 다윗이 광야 요새로 피함

24장: 다윗이 사울의 옷자락을 벰

25장: 나발과 아비가일

26장: 다윗이 사울의 창과 물병만 취함

27장: 다윗이 블레셋으로 내려감

28장: 사울이 신접한 자에게 물음

29장: 다윗이 참전(參戰)을 모면함

30장: 다윗이 아말렉과 싸움

31장: 사울과 그 아들들의 죽음


[사무엘하]

1장: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슬퍼함

2장: 다윗이 유다의 왕이 됨

3장: 아브넬의 죽음

4장: 이스보셋의 죽음

5장: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됨

6장: 법궤를 옮겨옴

7장: 다윗에게 주신 약속

8장: 다윗의 승전들

9장: 므비보셋을 선대함

10장: 암몬 자손들을 물리침

11장: 다윗의 범죄

12장: 나단 선지자를 통한 책망

13장: 압살롬이 암논을 죽임

14장: 압살롬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옴

15장: 압살롬의 반역

16장: 시므이가 다윗을 조주함

17장: 후새의 모략

18장: 압살롬의 죽음

19장: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옴

20장: 세바의 반란

21장: 3년 기근

22장: 다윗의 시

23장: 다윗의 용사들

24장: 인구조사의 죄


서론

히브리어 성경은 사무엘서와 열왕기서가 각각 한 권씩이다. 성경을 필사하는 서기관들은 주전 1세기쯤 구약성경의 각 책에 있는 모든 절과 단어수를 각 책의 끝에 기록했는데(이것을 마소라 피날리스 masora finalis라고 부름) 사무엘서와 열왕기서는 그것이 하나씩뿐이다. 봄버그판 이후 근래의 히브리어 성경은 둘씩으로 분리하였다. 헬라어 70인역(Septuagint)은 사무엘서와 열왕기서를 다 ‘왕국의 책’이라고 불렀고 각각 2권씩이다. 라틴어 벌게이트역(Vulgate)은 영어성경과 한글성경처럼 이 책들을 사무엘상하와 열왕기상하로 불렀다.

사무엘서는 저자나 저작 연대가 분명하지 않으나, 그 내용의 범위를 볼 때 솔로몬 때나 그 이후 유다 나라의 한 선지자에 의해 기록되었을 것이다. 특히 사무엘상 27:6에 “아기스가 그 날에 시글락을 그에게 주었으므로 시글락이 오늘까지 유다 왕에게 속하니라”는 말은 이 책의 저작 연대가 남북 왕국이 나뉜 후임을 보인다.

사무엘상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 시대의 역사를 기록한다. 사울의 통치연대는 주전 1050-1010년이라고 본다. 사무엘상 1-8장은 사무엘의 활동에 대해, 사무엘상 9-15장은 사울의 활동에 대해, 또 사무엘상 16-31장은 다윗의 피난 생활에 대해 증거한다. 사무엘상의 특징적 진리는 교만과 불순종이 사람의 실패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사울의 실패를 통해 잘 증거되었다.

사무엘하는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인 다윗 시대의 역사를 기록한다. 다윗의 통치연대는 주전 1010-970년이라고 본다. 사무엘하 1-10장은 다윗의 승리적 통치에 대해, 사무엘하 11-24장은 다윗의 범죄와 고난에 대해 증거한다. 사무엘하의 특징적 진리는 첫째,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메시아를 약속하신 것과, 둘째,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죄에 대해 징계하신다는 것이다. 후자는 다윗의 범죄와 그가 받은 징벌을 통해 잘 증거되었다.


본문 혹은 각주에 자주 사용된 약어

KJV

영어 King James Version.

NASB

영어 New American Standard Version.

NIV

영어 New International Version.

LXX

고대 헬라어 70인역.

Syr

고대 수리아어역.

It

고대 라틴어역.

Vg

고대 라틴어 Vulgate역.

BDB

Brown-Driver-Briggs, Hebrew Lexicon of the O. T.

KB

Koehler-Baumgartner, Lexicon in Veteris Testamenti Libros.

Langenscheidt

Karl Feyerabend, Langenscheidt's Pocket Hebrew Dictionary to the Old

Testament.

Holladay

William L. Holladay, A Concise Hebrew and Aramaic Lexicon of the

Old Testament.

Poole

Matthew Poole, A Commentary on the Holy Bible

JFB

Jamieson, Faussett, Brown의 주석.

NBD

The New Bible Dictionary. IVP.

NBC

The New Bible Commentary. IVP.


사무엘상

1장: 사무엘의 출생

[1-2절]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에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라 하는 자가 있으니 그는 여로함의 아들이요 엘리후의 손자요 도후의 증손이요 숩의 현손이더라. 그에게 두 아내가 있으니 하나의 이름은 한나요 하나의 이름은 브닌나라. 브닌나는 자식이 있고 한나는 무자(無子)하더라.

본장은 선지자 사무엘의 출생에 대해 증거한다. 사무엘은 에브라임 산지에 살았던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의 아들이다. 엘가나는 역대상 6장의 증거대로 레위 지파 사람이다(6:28; 34-38). 그러면 ‘에브라임 사람’이라는 말은 ‘에브라임 지파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고, ‘에브라임 지역의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에게는 두 아내가 있었다. 레위 사람 엘가나가 두 아내를 취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어긴 일이었다. 그들의 갈등은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하나님의 뜻은 일부일처(一夫一妻)다. 인간의 모든 문제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데서 생긴다.

[3-5절] 이 사람이 매년에 자기 성읍에서 나와서 실로에 올라가서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며 제사를 드렸는데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여호와의 제사장으로 거기 있었더라. 엘가나가 제사를 드리는 날에는 제물의 분깃을 그 아내 브닌나와 그 모든 자녀에게 주고 한나에게는 갑절을 주니 이는 그를 사랑함이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니.

엘가나에게는 이런 약점이 있었으나 하나님을 섬기는 경건함도 있었다. 그는 매년 실로에 올라가 여호와께 경배하며 제사를 드렸다. 당시에 성막은 실로에 있었다. 엘가나는 제사를 드리는 날에 제물의 분깃을 한나에게는 갑절을 주었으나1) 여호와께서는 그로 아이를 갖지 못하게 하셨다. 자녀의 잉태와 출산은 하나님께 달려 있다. 그는 인간의 생사화복(生死禍福)을 주관하시는 섭리자이시다.

[6-8절]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므로 그 대적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동하여 번민케 하더라. 매년에 한나가 여호와의 집에 올라갈 때마다 남편이 그같이 하매 브닌나가 그를 격동시키므로 그가 울고 먹지 아니하니 그 남편 엘가나가 그에게 이르되 한나여, 어찌하여 울며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뇨?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뇨?

엘가나의 가정에는 평안이 없었고 갈등과 시기와 격동함과 번뇌만 있었다. 브닌나는 교만하였고 남에 대한 동정과 배려가 없었으며 한나는 연약하고 예민한 여성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갈등은 남편의 차별적 사랑 때문에 더욱 커졌다.

[9-11절] 그들이 실로에서 먹고 마신 후에 한나가 일어나니 때에 제사장 엘리는 여호와의 전 문설주 곁 그 의자에 앉았더라. 한나가 마음이 괴로와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서원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사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한나는 기도의 사람이었다. 그것은 심적 고통 중에 단련된 일이었을 것이다. 그가 자녀를 갖지 못한 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었다. 그것은 그의 신앙과 인격의 훈련을 위해 주신 일이었다. 그는 고통 중에 더욱 간절히 하나님을 사모하며 기도했고 심지어 서원기도를 올렸다. 서원은 스스로 자신을 하나님께 묶는 간절한 기도이다.

[12-18절] 그가 여호와 앞에 오래 기도하는 동안에 엘리가 그의 입을 주목한즉 한나가 속으로 말하매 입술만 동하고 음성은 들리지 아니하므로 엘리는 그가 취한 줄로 생각한지라. 엘리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 한나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여,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나의 심정을 통한 것뿐이오니 당신의 여종을 악한 여자로 여기지 마옵소서.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은 나의 원통함과 격동됨이 많음을 인함이니이다. 엘리가 대답하여 가로되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의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가로되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수색이 없으니라.

한나는 여호와 앞에 오랫동안 기도했다. 그는 형식적으로 기도한 자가 아니고 참으로, 진실하게, 간절하게 기도하였다.

[19-23절] 그들이 아침에 일찌기[일찍이] 일어나 여호와 앞에 경배하고 돌아가서 라마의 자기 집에 이르니라. 엘가나가 그 아내 한나와 동침하매 여호와께서 그를 생각하신지라. 한나가 잉태하고 때가 이르매 아들을 낳아 사무엘이라 이름하였으니 이는 내가 여호와께 그를 구하였다 함이더라. 그 사람 엘가나와 그 온 집이 여호와께 매년제와 그 서원제를 드리러 올라갈 때에 오직 한나는 올라가지 아니하고 그 남편에게 이르되 아이를 젖떼거든 내가 그를 데리고 가서 여호와 앞에 뵈게 하고 거기 영영히 있게 하리이다. 그 남편 엘가나가 그에게 이르되 그대의 소견에 선한 대로 하여 그를 젖떼기까지 기다리라. 오직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이에 그 여자가 그 아들을 양육하며 그 젖떼기까지 기다리다가.

그 후 엘가나가 그 아내 한나와 동침하였고 여호와께서 그 여자를 생각하심으로 한나는 잉태하였고 때가 되어 아들을 낳았고 그 이름을 ‘사무엘’(쉐무엘이라고 지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들으셨다’는 뜻이라고 본다. 한나는 그가 낳은 아들을 양육하며 젖떼기까지 기다렸다. 아이가 젖떼는 나이는 보통 2-3살이었다고 한다.

[24-28절] 젖을 뗀 후에 그를 데리고 올라갈새 수소 셋과 가루 한 에바와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가지고 실로 여호와의 집에 나아갔는데 아이가 어리더라. 그들이 수소를 잡고 아이를 데리고 엘리에게 가서 한나가 가로되 나의 주여, 당신의 사심으로 맹세하나이다. 나는 여기서 나의 주 당신 곁에 서서 여호와께 기도하던 여자라. 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였더니 여호와께서 나의 구하여 기도한 바를 허락하신지라. 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 하고 그 아이는 거기서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한나는 사무엘을 젖뗀 후 그를 데리고 수소 셋과 밀가루 한 에바와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가지고 여호와의 집에 나아갔다. 한나는 생각에 변함이 없었고 하나님 앞에서 한 약속을 그대로 지켰다.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엘가나 가정의 갈등은 일부일처의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 데서 시작되었다. 게다가 브닌나의 교만과 시기 질투심이 그 갈등을 증폭시켰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죄 때문에 온다. 죄는 슬픔과 불행을 가져온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여 의를 행하는 자는 평안을 누릴 것이다(사 48:17-18). 우리는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지 말고 오직 그 뜻에 순종하며 살자.

둘째로, 우리는 고통 중에 하나님께 기도하자. 한나는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마음의 고통이 있었다. 게다가, 브닌나는 그를 심히 격동시켰다. 한나는 마음이 괴로워서 울었고 음식을 먹지도 못했다. 그러나 그는 그 고통 때문에 더욱 하나님을 찾고 그를 의지했고 그에게 기도했다. 그는 간절히 기도하였다. 그는 서원의 기도를 하였다. 그는 오랫동안 기도했다. 그의 간절한 기도는 마침내 응답을 받았다. 하나님께서는 한나를 생각하셨다. 그는 한나를 긍휼히 여기셨다. 한나는 잉태하였고 아들을 낳았다. 하나님께서는 한나의 구한 것을 허락하셨다. 기도는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다. 예수께서는,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라고 말씀하셨고 강청의 기도, 즉 끈질긴 기도를 하고 낙망치 말고 기도라고 교훈하셨다(마 7:7-8; 눅 11장; 18장).

셋째로, 우리가 하나님께 서원한 것이 있으면 우리는 그것을 이행해야 한다. 사람과의 약속도 부득이한 일이 아니면 지켜야 한다. 하물며 하나님과의 약속이랴! 한나는 아들을 주시면 그를 평생에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서원하였고 그 약속을 이행하였다. 서원을 이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참으로 경외하며 순종한다는 표이다. 우리도 하나님과 약속한 것이 있으면 다 이행하자. 성경은 하나님의 장막에 유할 자는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치 아니하는 자라고 말했다.

2장: 엘리와 그 아들들의 죄

1-11절, 한나의 기도

본문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한나의 기도이다. 한나는 하나님께 서원하며 아들을 주시기를 기도했고 그의 허락을 받아 사무엘을 잉태하여 낳았다. 그는 아이를 젖뗀 후 그의 서원대로 실로의 하나님의 집에 올라가 그 아이를 바친 후 하나님께 이 기도를 올렸다.

[1절] 한나가 기도하여 가로되 내 마음이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를 인하여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을 인하여 기뻐함이니이다.

한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즉 하나님의 호의와 기도 응답 때문에, 그의 마음에 즐거움을 얻었다. 또 그의 뿔은 여호와를 인하여 높아졌다. ‘뿔’은 ‘힘’을 가리킨다. 그는 전에는 낙심하고 고민하였으나, 이제 힘을 얻게 되었다. 또 그의 입은 그의 원수들을 향해 크게 열렸다. 그의 원수들은 브닌나와 그 친구들을 가리킬 것이다. 그는 전에는 그들 앞에서 할 말이 없었으나 이제는 말할 내용과 힘을 얻었다. 그가 이렇게 마음이 즐겁고 힘을 얻고 입이 열린 것은 그가 하나님의 구원을 인해 기뻐하기 때문이다. ‘그의 구원’은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심으로 번민과 슬픔에서 그를 건져주신 일을 가리킨다.

[2절]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

‘거룩하신 이’는 모든 피조물보다 초월하신 자라는 뜻이다. 그가 하나님을 거룩하신 이라고 부른 까닭은 주밖에 다른 이가 없고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시기 때문이었다. ‘반석’은 인간이 의지하고 피할 곳, 곧 피난처를 말한다. 하나님과 같이 지혜와 권능이 있으시고 살아서 역사하시는 자는 없고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시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의지하고 경외하는 자들의 피난처시요 구원자이시다.

[3절]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보시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며 사람의 행동을 달아보시는 자이시다. 그는 사람들이 지식과 도덕성이 심히 부족함과 그들의 교만과 오만을 알고 계시며 그들이 심히 부패했고 선을 행하기에 무력함을 알고 계신다. 그는 사람의 선악 여부와 선악의 정도를 달아보신다. 그는 모든 것을 공의로 판단하시고 심판하시고 보응하신다.

[4절] 용사의 활은 꺾이고 넘어진 자는 힘으로 띠를 띠도다.

사람들은 사람의 외모만 보고 어떤 이를 용감하다고 말하고 다른 이를 유약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중심을 보시고, 때로는 다른 사람들의 기대와 정반대로 그를 평가하고 섭리하기도 하신다. 그러므로 겉보기에 용사 같은 자의 활이 꺾일 것이며, 사람들 보기에 넘어진 자들, 즉 초라하고 무력해 보이는 자들이 힘으로 띠를 띨 것이다. 그 힘은 하나님께서 주신 힘이다.

[5절] 유족하던 자들은 양식을 위하여 품을 팔고 주리던 자들은 다시 주리지 않도다. 전에 잉태치 못하던 자는 일곱을 낳았고 많은 자녀를 둔 자는 쇠약하도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기대와 전혀 다르게 섭리하기도 하신다. 물질적 여유를 가지던 자가 양식을 위해 품을 팔기도 하고, 주리던 자가 다시 주리지 않기도 한다. 전에 잉태치 못하던 자가 자녀 일곱을 낳기도 하고, 많은 자녀를 둔 자가 쇠약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물질적 여유나 자녀 많음을 자랑할 것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환경을 급격히 정반대가 되게 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6-7절]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하나님께서는 주권적 섭리자이시다. 그는 인간의 생사화복(生死禍福)을 주관하시는 자이시다. 한나는 신명기 32:39의 말씀을 알고 있었다.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와 함께하는 신이 없도다. 내가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건질 자 없도다.” 이사야 45:7도 같은 진리를 보인다.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8절]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핍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드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위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이는]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 위에 세우셨도다.

사람의 생명도, 돈도, 존귀와 영광도 다 하나님의 섭리의 손 안에 있다. 왜냐하면 땅의 기둥들이 여호와의 것이며,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 위에 세우셨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께서 온 세상의 창조자이시기 때문에 그가 또한 온 세상을 통치하시고 주관하신다는 뜻이다. 창조자 하나님께서는 또한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말이다.

[9절] 그가 그 거룩한 자들의 발을 지키실 것이요 악인으로 흑암 중에서 잠잠케 하시리니 힘으로는 이길 사람이 없음이로다.

‘그 거룩한 자들’이라는 원어(카시도)2)는 ‘그의 성도’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성도의 발을 지키신다는 것은 그의 성도로 실족하지 않고 범죄하지 않게 지키신다는 뜻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악인들로 재앙 중에 던져 잠잠케 하실 것이며 마침내 지옥 캄캄한 흑암에 던지실 것이다. 회개치 않고 악을 행하던 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땅 위에서도, 또 장차 지옥에서도 변명할 말이 없을 것이다. 힘으로 심판자 하나님을 이길 사람은 아무도 없다.

[10절]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라. 하늘 우뢰로 그들을 치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땅끝까지 심판을 베푸시고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며 자기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시리로다 하니라.

‘자기 왕’이나 ‘자기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는 궁극적으로 메시아 곧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킬 것이지만, 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왕 같은 제사장과 성령의 기름부음 받은 자가 된 신약 성도들도 가리킬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시시때때로 힘을 주신다.

[11절] 엘가나는 라마의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그 아이는 제사장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기니라

우리는 한나의 기도를 통해 두 가지 교훈을 얻는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을 바로 알자.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신 거룩하신 자이시고 사람의 행동을 달아보시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다. 그는 특히 사람을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며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 주권적 섭리자이시다. 그는 온 세상에 사는 사람들을 심판하시는 자이시다. 참 하나님을 아는 것이 영생이요(요 17:3) 행복이다.

둘째로, 우리는 그 하나님 안에서 살자. 한나는 하나님을 인해 즐거워했고 하나님을 인해 힘을 얻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성도의 발을 지키시는 자이시다. 그는 그의 왕, 그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에게 힘을 주시는 자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문제의 해답이 되시며 우리의 기쁨과 힘이 되신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며 주의 능력의 얼굴을 항상 구하라고 교훈한다(빌 4:4). 빌립보서 4:13, “내게 능력 주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전통본문).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기쁨과 힘이 되시는 하나님 안에서 살며 날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힘을 받아 누리자.

12-36절, 엘리와 그 아들들의 죄

[12-17절]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자라.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더라. 그 제사장들이 백성에게 행하는 습관은 이러하니 곧 아무 사람이 제사를 드리고 그 고기를 삶을 때에 제사장의 사환이 손에 세살 갈고리를 가지고 와서 그것으로 남비에나 솥에나 큰 솥에나 가마에 찔러 넣어서 갈고리에 걸려 나오는 것은 제사장이 자기 것으로 취하되 실로에서 무릇 그곳에 온 이스라엘 사람에게 이같이 할 뿐 아니라 기름을 태우기 전에도 제사장의 사환이 와서 제사 드리는 사람에게 이르기를 제사장에게 구워 드릴 고기를 내라. 그가 네게 삶은 고기를 원치 아니하고 날것을 원하신다 하다가 그 사람이 이르기를 반드시 먼저 기름을 태운 후에 네 마음에 원하는 대로 취하라 하면 그가 말하기를 아니라. 지금 내게 내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억지로 빼앗으리라 하였으니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

‘불량자’라는 원어(베네 벨리야알)는 ‘벨리알의 아들들’이라는 말로서 ‘무가치한 자들’(NASB) 혹은 ‘악한 자들’(NIV)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지혜와 지식의 시작이며 근본이며,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 모든 불행의 원인이다. 엘리의 아들들은 비록 제사장이었지만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종교생활은 생명 없는 형식과 습관에 불과하였다. 그들은 제사장의 몫인 가슴과 뒷다리 외에 제사 드린 자들의 몫을 취한 것으로 보이며(레 7:34) 또 제물의 기름을 단 위에 불사르기 전에 제물을 취하려 했다(레 7:34). 그들은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하는 큰 죄를 범하고 있었다.

[18-21절] 사무엘이 어렸을 때에 세마포 에봇을 입고 여호와 앞에 섬겼더라. 그 어미가 매년제를 드리러 그 남편과 함께 올라갈 때마다 작은 겉옷을 지어다가 그에게 주었더니 엘리가 엘가나와 그 아내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게 후사를 주사 이가 여호와께 간구하여 얻어 드린 아들을 대신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니 그들이 그 집으로 돌아가매 여호와께서 한나를 권고하사 그로 잉태하여 세 아들과 두 딸을 낳게 하셨고 아이 사무엘은 여호와 앞에서 자라니라.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는 매년 실로에 올라갈 때 사무엘에게 작은 겉옷을 지어다 주었다. 하나님께서는 한나에게 세 아들과 두 딸을 낳는 은혜를 주셨다. 아이 사무엘은 여호와 앞에서 자랐다.

[22-26절] 엘리가 매우 늙었더니 그 아들들이 온 이스라엘에게 행한 모든 일과 회막문에서 수종드는 여인과 동침하였음을 듣고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하느냐? 내가 너희의 악행을 이 모든 백성에게서 듣노라. 내 아들아, 그리 말라. 내게 들리는 소문이 좋지 아니하니라.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으로 범과케 하는도다. 사람이 사람에게 범죄하면 하나님이 판결하시려니와 사람이 여호와께 범죄하면 누가 위하여 간구하겠느냐 하되 그들이 그 아비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음이었더라. 아이 사무엘이 점점 자라매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더라.

엘리는 매우 늙었는데, 그 아들들이 온 이스라엘에게 행한 모든 일과 회막문에서 수종드는 여인들(출 38:8)과 동침했음을 들었다. 그가 아들들에게 그 잘못을 지적했으나, 그들은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들은 교만하고 완악하였다. 그들이 이처럼 완악한 마음을 가진 것은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여부는 사람의 행실의 변화를 보고 알 수 있다. 아이 사무엘은 점점 자랐고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았다.

[27-30절] 하나님의 사람이 엘리에게 와서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 조상의 집이 애굽에서 바로의 집에 속하였을 때에 내가 그들에게 나타나지 아니하였느냐?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내가 그를 택하여 나의 제사장을 삼아 그로 내 단에 올라 분향하며 내 앞에서 에봇을 입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이스라엘 자손의 드리는 모든 화제를 내가 네 조상의 집에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나의 처소에서 명한 나의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의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스스로 살찌게 하느냐?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영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

하나님의 사람이 엘리에게 왔다. 하나님께서는 옛 시대에 그의 뜻을 선포하기 위해 하나님의 사람들을 예비하시고 보내시고 사용하셨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다. 오늘날에는 성경이 하나님의 살아 있는, 충만한 말씀이다. 신약교회 시대에는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고 바르게 전하는 설교자가 하나님의 사람이다.

하나님의 사람이 엘리에게 말했다. ‘밟는다’는 원어(바아트)는 ‘[발로] 찬다’는 뜻이다(BDB, KJV, NASB). 엘리의 아들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을 발로 찼고 멸시하였다. 그러나 엘리는 그들을 하나님보다 더 중히 여겼다. 그들의 죄는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멸시한 것이었고 엘리의 죄는 아들들을 엄히 책망하며 징벌치 않은 것이었다. 자녀를 사랑하는 자는 자녀의 범죄를 엄히 징벌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람은 또 엘리 자손들의 제사장직이 계속되지 못하고 폐지되리라고 선언하였다. 그 까닭은,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길 것임이니라”(원문)고 하셨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멸시하는 것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멸시하면 그는 우리를 멸시하실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존중히 여기면 그도 우리를 더욱 사랑하시고 귀히 여기실 것이다.

[31-34절] 보라, 내가 네 팔과 네 조상의 집 팔을 끊어 네 집에 노인이 하나도 없게 하는 날이 이를지라. 이스라엘에게 모든 복을 베푸는 중에 너는 내 처소의 환난을 볼 것이요 네 집에 영영토록 노인이 없을 것이며 내 단에서 내가 끊어 버리지 아니할 너의 사람이 네 눈을 쇠잔케 하고 네 마음을 슬프게 할 것이요 네 집에 생산하는 모든 자가 젊어서 죽으리라. 네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한날에 죽으리니 그 둘의 당할 그 일이 네게 표징이 되리라.

‘팔’이라는 원어(제로아)는 ‘팔’(KJV)이라는 뜻과 함께 ‘힘’ (BDB, NASB, NIV)이라는 뜻이 있다. ‘환난’이라는 원어(차르)는 ‘곤경, 재난’이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의 자손이 그를 슬프게 하고 그의 집에 영원히 노인이 없을 것이며 홉니와 비느하스가 한날에 죽을 것이며 그것이 그에게 증표가 되리라고 선언하셨다.

[35-36절] 내가 나를 위하여 충실한 제사장을 일으키리니 그 사람은 내 마음, 내 뜻대로 행할 것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리니 그가 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영구히 행하리라. 네 집에 남은 사람이 각기 와서 은 한 조각과 떡 한 덩이를 위하여 그에게 엎드려 가로되 청하노니 내게 한 제사장의 직분을 맡겨 나로 떡 조각을 먹게 하소서 하리라 하셨다 하니라.

하나님께서 일으키실 ‘충실한 제사장’, 그의 마음과 그의 뜻을 행할 자,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견고한 집을 세우실 자, 그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영구히 행할 자는 제사장 사독을 가리킨 것 같다. 열왕기상 2:35, “제사장 사독으로 아비아달을 대신하게 하니라.”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자가 되자. 엘리의 아들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했고 그러므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멸시했고 회막문에서 수종드는 여인들과 동침하는 죄를 지었다. 하나님을 아는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계명을 지키고 범죄치 않는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매우 소중히 여기자. 엘리의 아들들의 죄는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하는 죄이었다.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하는 것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진실한 마음과 정성으로 또 시간을 잘 지켜서 하나님께 예배드리자(요 4:24).

셋째로, 우리는 가족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자. 엘리는 그의 아들들의 죄들을 엄히 징벌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보다 아들들을 더 사랑했기 때문이다. 주 예수께서는 우리의 부모나 자녀를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주께 합당치 않다고 말씀하셨다(마 10:37).

3장: 사무엘을 부르심

[1절] 아이[소년]3)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異像)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하나님께서는 옛 시대에 이상이나 꿈을 통해서 혹은 직접 나타나셨다(민 12:6; 히 1:1). 그러나 때가 되어 그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이 되신 하나님이시다(요 1:14). 그는 하나님의 특별계시 중의 특별계시이시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며 자신과 자신의 뜻을 나타내신다. 사도 바울은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말씀이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한다고 말하였다(딤후 3:17).

[2-9절]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때에 그가 자기 처소에 누웠고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 엘리에게로 달려가서 가로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가로되 나는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누우라. 그가 가서 누웠더니 여호와께서 다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일어나서 엘리에게로 가서 가로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대답하되 내 아들아, 내가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누우라 하니라.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나타나지 아니한 때라. 여호와께서 세 번째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일어나서 엘리에게로 가서 가로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엘리가 여호와께서 이 아이[소년]를 부르신 줄을 깨닫고 이에 사무엘에게 이르되 가서 누웠다가 그가 너를 부르시거든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라. 이에 사무엘이 가서 자기 처소에 누우니라.

하나님께서는 어느 날 밤 사무엘을 부르셨다. 그는 반복해서 음성으로 사무엘을 부르셨다. 그는 미디안 광야, 호렙산 부근에서 모세를 부르실 때도 음성으로 부르셨다(출 3:4).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온 후 호렙산에 모였을 때 그는 불과 구름과 나팔소리와 함께 내려오셨고 음성으로 모세에게 대답하셨다(출 19:19).

[10-14절]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가로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이스라엘 중에 한 일을 행하리니 그것을 듣는 자마다 두 귀가 울리리라. 내가 엘리의 집에 대하여 말한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그 날에 그에게 다 이루리라. 내가 그 집을 영영토록 심판하겠다고 그에게 이른 것은 그의 아는 죄악을 인함이니 이는 그가 자기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스스로를 저주하되](NASB)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그러므로 내가 엘리의 집에 대하여 맹세하기를 엘리 집의 죄악은 제물이나 예물로나 영영히 속함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노라.

하나님께서 엘리의 집을 영영토록 심판하겠다고 말씀하신 것은 그의 아는 죄악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그가 자기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엘리의 집에 대해 맹세하기를, “엘리 집의 죄악은 제물이나 예물로나 영영히 속함을 얻지 못하리라”고 하셨다.

[15-18절] 사무엘이 아침까지 누웠다가 여호와의 집 문을 열었으나 그 이상(異像)을 엘리에게 알게 하기를 두려워하더니 엘리가 사무엘을 불러 가로되 내 아들 사무엘아 하니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가로되 네게 무엇을 말씀하셨느냐? 청하노니 내게 숨기지 말라. 네게 말씀하신 모든 것을 하나라도 숨기면 하나님이 네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사무엘이 세세히 말하고 조금도 숨기지 아니하니 그가 가로되 이는 여호와시니 선하신 소견대로 하실 것이니라 하니라.

사무엘은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숨김없이 다 말하였다.

[19-21절]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 말로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의 온 이스라엘이 사무엘은 여호와의 선지자로 세우심을 입은 줄을 알았더라.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다시 나타나시되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여호와의 말씀으로 사무엘에게 자기를 나타내시니.

하나님께서는 사무엘과 함께 계셨다. 하나님께서 사람과 함께하심은 그의 경건과 믿음과 의와 관계가 있다(시 5:4-6). 하나님께서는 또 사무엘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셨다. 또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온 이스라엘 백성은 사무엘이 여호와의 선지자로 세우심을 입은 줄을 알았다. 하나님께서는 또 실로에서 그의 말씀으로 사무엘에게 다시 나타나셨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말씀의 충만함을 얻어 백성에게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선포하고 가르칠 것이다.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성경을 열심히 읽자.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성경말씀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성경을 열심히 읽어야 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딤후 3:16).

둘째로, 우리는 자녀 교육을 잘 해야 한다. 엘리는 자녀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않아 마침내 온 가정이 멸망당했다. 우리는 우리 자신만 성경책을 읽지 말고 우리 자녀들도 성경책을 읽도록 권면하고 또 부모로서 성경말씀으로 자녀들을 교훈하기를 힘써야 한다. 에베소서 6:4,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가정의 기쁨과 행복은 자녀들의 경건과 평안에 있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와는 함께하지 않으시고 그를 징벌하셨으나, 사무엘과는 함께하셨다. 엘리는 무지와 죄 가운데 있었고 사무엘은 하나님을 경외하였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성경책을 읽고 기도하며 그의 계명을 힘써 순종하자. 그것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평안과 생명의 길이다.


4장: 엘리의 죽음

[1-2절] 사무엘의 말이 온 이스라엘에 전파되니라. 이스라엘은 나가서 블레셋 사람과 싸우려고 에벤에셀 곁에 진치고 블레셋 사람은 아벡에 진 쳤더니 이스라엘을 대하여 항오를 벌이니라. 그 둘이 싸우다가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 앞에서 패하여 그들에게 전쟁에서 죽임을 당한 군사가 4천명 가량이라.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 말씀하시는 때가 되었다. 블레셋과의 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은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일어난다.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블레셋 사람 앞에서 패하여 4천명 가량이 죽었다.


[3-4절] 백성이 진으로 돌아오매 이스라엘 장로들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로 오늘 블레셋 사람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하니 이에 백성이 실로에 보내어 그룹 사이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의 언약궤를 거기서 가져왔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언약궤와 함께 거기 있었더라.


이스라엘 장로들은 이스라엘의 죄악과 제사장들의 부패 때문에 하나님께서 징벌하시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들은 회개해야 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가져오면 승리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큰 착각이었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는다면, 언약궤는 아무런 힘이 없을 것이다. 

종교 의식 자체에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착각이다. 종교적 의식보다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자의 마음가짐이 더 중요하다. 참 회개와 믿음과 순종이 없는 종교 의식은 무의미하고 오히려 가증스러울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사 1:12-13).


[5-9절] 여호와의 언약궤가 진에 들어올 때에 온 이스라엘이 큰 소리로 외치매 땅이 울린지라. 블레셋 사람이 그 외치는 소리를 듣고 가로되 히브리 진에서 큰 소리로 외침은 어찜이뇨 하다가 여호와의 궤가 진에 들어온 줄을 깨달은지라. 

블레셋 사람이 두려워하여 가로되 신이 진에 이르렀도다 하고 또 가로되 우리에게 화로다. 전일에는 이런 일이 없었도다. 우리에게 화로다. 누가 우리를 이 능한 신들의 손에서 건지리요. 그들은 광야에서 여러 가지 재앙으로 애굽인을 친 신들이니라. 

너희 블레셋 사람들아, 강하게 되며 대장부가 되어라. 너희가 히브리 사람의 종이 되기를 그들이 너희의 종이 되었던 것같이 말고 대장부같이 되어 싸우라 하고.


여호와의 언약궤가 진에 들어올 때에 온 이스라엘이 큰 소리로 외치자 땅이 울렸다. 

블레셋 사람은 여호와의 궤가 진에 들어온 것을 알고 두려워하였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옛날 애굽 사람들을 치셨던 일들과 

애굽에서 나온 후의 많은 일들을 알고 있었다.


[10-11절] 블레셋 사람이 쳤더니 이스라엘이 패하여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였고 살륙이 심히 커서 이스라엘 보병의 엎드러진 자가 3만이었으며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였더라.


이번 전투에서도 이스라엘은 패하여 3만명이나 죽었다. 또 하나님의 궤는 블레셋 사람에게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그 전투에서 죽임을 당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언하신 대로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 두 아들에게 죽음의 벌을 내리셨다.


[12-15절] 당일에 어떤 베냐민 사람이 진에서 달려나와 그 옷을 찢고 그 머리에 티끌을 무릅쓰고 실로에 이르니라. 그가 이를 때는 엘리가 길 곁 자기 의자에 앉아 기다리며 그 마음이 여호와의 궤로 인하여 떨릴 즈음이라. 그 사람이 성에 들어오며 고하매 온 성이 부르짖는지라. 엘리가 그 부르짖는 소리를 듣고 가로되 이 훤화하는 소리는 어찜이뇨? 그 사람이 빨리 와서 엘리에게 고하니 때에 엘리의 나이 98이라. 그 눈이 어두워서 보지 못하더라.


엘리는 길 곁 자기 의자에 앉아 전쟁의 결과를 기다리며 특히 그 마음이 언약궤로 인해 떨렸다. 그의 나이는 98세이었다.


[16-18절] 그 사람이 엘리에게 고하되 나는 진중에서 나온 자라. 내가 오늘 진중에서 도망하여 왔나이다. 엘리가 가로되 내 아들아, 일이 어찌 되었느냐? 소식을 전하는 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 앞에서 도망하였고 백성 중에는 큰 살륙이 있었고 당신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임을 당하였고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나이다. 

하나님의 궤를 말할 때에 엘리가 자기 의자에서 자빠져 문 곁에서 목이 부러져 죽었으니 나이 많고 비둔한 연고라. 그가 이스라엘 사사가 된 지 40년이었더라.


두 아들이 죽었고 하나님의 궤가 빼앗겼다는 말을 들었을 때 엘리는 자기 의자에서 자빠져 문 곁에서 목이 부러져 죽었는데 나이가 많고 몸이 둔한 까닭이었다. 그가 사사가 된 지 40년이었다.


[19-22절] 그의 며느리 비느하스의 아내가 잉태하여 산기가 가까왔더니 하나님의 궤 빼앗긴 것과 그 시부와 남편의 죽은 소문을 듣고 갑자기 아파서 몸을 구푸려 해산하고 죽어갈 때에 곁에 섰던 여인들이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라. 네가 아들을 낳았다 하되 그가 대답지도 아니하며 관념치도 아니하고 이르기를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고 아이 이름을 이가봇)[영광이 없다]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의 궤가 빼앗겼고 그 시부와 남편이 죽었음을 인함이며 또 이르기를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므로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였더라.


그의 아들 비느하스의 아내는 잉태하여 해산할 때가 가까웠는데 하나님의 궤 빼앗긴 것과 시아버지와 남편의 죽은 소식을 듣고 갑자기 아파서 몸을 구푸려 해산하고 죽어가고 있었다. 그는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에 대답하지도 않은 채 “영광이 이스라엘에게서 떠났다”고 말하며 그 아이의 이름을 ‘이가봇’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하나님의 궤가 빼앗겼고 시아버지와 남편이 죽었기 때문이다.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하나님의 심판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엘리 집에 선언된 심판은 그대로 이루어졌다.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한 날에 죽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 시대에 심판을 선언하시고 그대로 이루셨다. 

그는 롯의 시대에 소돔성의 심판을 선언하시고 그대로 이루셨다. 

그는 후에 예루살렘의 멸망을 선언하시고 그대로 이루셨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온 세상에 불 심판을 경고하신다(벧후 3:7). 

그 심판은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마지막 불 심판과 지옥 형벌을 두려워하고 

그 심판을 대비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모든 죄를 회개해야 한다. 

엘리와 두 아들은 하나님 앞에서 끝까지 회개치 않다가 마침내 죽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회개를 요청하신다. 

세례 요한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 . .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고 말했다(마 3:8-10). 

요한계시록 2장-3장에 보면, 주께서는 에베소와 버가모와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회개하라고 말씀하셨다(계 2:5, 16; 3:19). 

우리는 모든 죄를 회개하고 버려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종교적 형식주의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여호와의 언약궤를 가져오면 전쟁에서 이길 줄로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함께하지 않으시면 언약궤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언약궤 자체에 힘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가 그를 진심으로 의지하고 순종할 때 나타난다. 

그러므로 사무엘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고 말했다(삼상 15:22). 

또 하나님께서는 호세아를 통해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고 말씀하셨다(호 6:6). 

예수께서는, 십일조를 드리지만 의와 사랑을 버린 자들,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한 자들,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한 자들을 책망하셨다(마 23:23, 25, 28). 

우리는 종교적 형식주의에 빠지지 말자.


5장: 블레셋에 재앙을 내리심

[1-3절] 블레셋 사람이 하나님의 궤를 빼앗아 가지고 에벤에셀에서부터 아스돗에 이르니라. 블레셋 사람이 하나님의 궤를 가지고 다곤의 당에 들어가서 다곤의 곁에 두었더니 아스돗 사람이 이튿날 일찌기[일찍이]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그 얼굴이 땅에 닿았는지라. 그들이 다곤을 일으켜 다시 그 자리에 세웠더니.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이겼고 하나님의 궤를 가지고 그들이 섬기는 신 다곤의 당에 들어가서 그것을 다곤 곁에 두었다. 하나님의 궤는 포로처럼 잡혀와 이방 신전 안에 이방 신상 곁에 놓여졌다. 이스라엘 하나님의 법궤는 이방신 다곤 앞에 굴복된 것 같았다. 그런데 아스돗 사람들이 이튿날 일찍 일어나 보니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 엎드러져 그 얼굴이 땅에 닿아 있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그런 일은 분명히 그 법궤의 주인이신 이스라엘 하나님 외에는 할 자가 없었다.

[4-5절] 그 이튿날 아침에 그들이 일찌기[일찍이]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얼굴이 땅에 닿았고 그 머리와 두 손목은 끊어져 문지방에 있고 다곤의 몸둥이만 남았더라. 그러므로 다곤의 제사장들이나 다곤의 당에 들어가는 자는 오늘까지 아스돗에 있는 다곤의 문지방을 밟지 아니하더라.

그 이튿날 아침에는 다시 세워 놓은 신상이 엎드러졌을 뿐 아니라, 머리와 두 손목이 끊어져 문지방에 있는 일까지 생겼다. 다곤을 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어제보다 더 크셨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블레셋 사람들 가운데서 자신의 살아계심과 능력을 증거하셨다.

[6-7절] 여호와의 손이 아스돗 사람에게 엄중히 더하사 독종의 재앙으로 아스돗과 그 지경을 쳐서 망하게 하니 아스돗 사람들이 이를 보고 가로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우리와 함께 있게 못할지라. 그 손이 우리와 우리 신 다곤을 친다 하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독종 재앙으로 아스돗과 그 지경을 쳐서 망하게 하셨다. ‘독종’이라는 원어(오펠)는 ‘(부어오르는) 종양, 종기’를 가리킨다.4) 아스돗 사람들은 이 재앙이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하나님께서 내리신 것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 독종 재앙은 하나님께서 내리신 일이었다. 그것은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이방 세계에서 그의 능력을 나타내신 일이었다.

[8-9절] 이에 보내어 블레셋 사람의 모든 방백을 모으고 가로되 우리가 이스라엘 신의 궤를 어찌할꼬. 그들이 대답하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가드로 옮겨가라 하므로 이스라엘 신의 궤를 옮겨갔더니 그것을 옮겨간 후에 여호와의 손이 심히 큰 환난을 그 성에 더하사 성읍 사람의 작은 자와 큰 자를 다 쳐서 독종이 나게 하신지라.

아스돗 사람들은 그 궤를 가드로 옮기자 여호와의 손이 가드 성에 심히 큰 환난을 더하셨고 그 성의 작은 자나 큰 자를 다 쳐서 독종이 나게 하셨다. 그 독종은 전염성을 가진 종기이었다.

[10-12절] 이에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에그론으로 보내니라. 하나님의 궤가 에그론에 이른즉 에그론 사람이 부르짖어 가로되 그들이 이스라엘 신의 궤를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와 우리 백성을 죽이려 한다 하고 이에 보내어 블레셋 모든 방백을 모으고 가로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보내어 본처로 돌아가게 하고 우리와 우리 백성 죽임을 면케 하자 하니 이는 온 성이 사망의 환난을 당함이라. 거기서 하나님의 손이 엄중하시므로 죽지 아니한 사람들은 독종으로 치심을 받아 성읍의 부르짖음이 하늘에 사무쳤더라.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궤를 에그론으로 보냈다. 하나님의 궤가 에그론에 이르자 에그론 사람들은 자기들을 죽이려 한다고 부르짖으며 블레셋 모든 방백들을 모아 이스라엘 신의 궤를 그 본 처소로 돌려보내자고 의논했다. 사망의 환난이 극심하였기 때문이다.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시다. 하나님께서는 블레셋 사람들이 섬기는 다곤을 엎드러뜨리셨고 그 머리와 두 손목을 끊어지게 하셨다. 그는 또 아스돗과 가드 거민들을 독종 재앙으로 치셨다. 다곤은 죽은 신, 곧 생명 없는 우상에 불과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의 유일한 하나님이시며 천지만물을 창조하셨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다른 신들은 사람들이 고안해내고 만들어낸 가짜 신들이며 우상에 불과하다(시 96:5; 렘 10:10-11). 우리는 살아계신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만 믿고 섬기며 따르자.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독종 재앙을 내리셔서 그 법궤를 이스라엘 땅으로 돌려보내게 섭리하셨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궤를 다시 찾아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그러나 그 불가능한 때에 하나님께서는 비상한 방식으로 개입하셔서 그 일을 가능케 하셨다. 우리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자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바랄 수 없는 것을 중에 하나님을 믿고 바라자(롬 4:17-18).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의 전능하신 섭리를 믿고 의지하자.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을 옹호하셨다. 사사 엘리의 손자는 이스라엘에게서 영광이 떠났다는 뜻으로 이가봇이라는 이름을 얻었다(삼상 4:21).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이방 땅에서 그의 능력으로 자신의 영광을 옹호하셨다. 이사야 42:8,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이것은 다니엘서의 진리와도 통한다. 다니엘은 바벨론 나라에서 포로의 신분으로 살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때, 그곳에서도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느부갓네살, 벨사살, 다리오 등 이방인들의 왕들은 다니엘의 하나님을 찬양했다(단 2:47; 3:28-30; 4:37; 6:25-27). 우리는 영광의 하나님을 찬양하자.

6장: 블레셋 사람들이 법궤를 돌려보냄

본장은,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과의 전쟁에서 이겨 여호와의 법궤를 빼앗아갔으나 그것이 그들 성읍들에 큰 독종 재앙을 가져온 고로 그것을 이스라엘 땅으로 돌려보내게 된 일을 증거한다.

[1-4절] 여호와의 궤가 블레셋 사람의 지방에 있은 지 일곱 달이라. 블레셋 사람이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을 불러서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의 궤를 어떻게 할꼬? 그것을 어떻게 본처로 보낼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라. 그들이 가로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보내려거든 거저 보내지 말고 그에게 속건제를 드려야 할지니라. 그리하면 병도 낫고 그 손을 너희에게서 옮기지 아니하는 연고도 알리라. 그들이 가로되 무엇으로 그에게 드릴 속건제를 삼을꼬? 가로되 블레셋 사람의 방백의 수효대로 금독종 다섯과 금쥐 다섯이라야 하리니 너희와 너희 방백에게 내린 재앙이 일반임이니라.

하나님의 법궤가 7개월간 이방인들의 땅에 빼앗겨 있었다. 그러나 그 기간은 하나님께서 블레셋 땅에 재앙을 내리시고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신 기간이기도 했다. 블레셋 사람들은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을 불러 물었고 그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은 그 재앙이 하나님께서 내리셨기 때문에 블레셋 사람의 방백의 수효대로 금독종 다섯과 금쥐 다섯을 속건제물로 삼아 본 처소로 돌려보내어야 한다고 말했다.

[5-6절] 그러므로 너희는 너희 독종의 형상과 땅을 해롭게 하는 쥐의 형상을 만들어 이스라엘 신께 영화를 돌리라. 그가 혹 그 손을 너희와 너희 신들과 너희 땅에서 경하게 하실까 하노라. 애굽인과 바로가 그 마음을 강퍅케 한 것같이 어찌하여 너희가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겠느냐? 그가 그들 중에서 기이하게 행한 후에 그들이 백성을 가게 하므로 백성이 떠나지 아니하였느냐?

그들이 쥐의 형상을 말한 것은 독종 재앙이 쥐가 전염시킨 병이었음을 보인다. 또 그들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애굽에서 내리신 열 가지 재앙들을 기억하면서 마음을 강퍅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7-9절] 그러므로 새 수레를 만들고 멍에 메어 보지 아니한 젖 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수레를 소에 메우고 그 송아지들은 떼어 집으로 돌려보내고 여호와의 궤를 가져다가 수레에 싣고 속건제 드릴 금 보물은 상자에 담아 궤 곁에 두고 그것을 보내어 가게 하고 보아서 궤가 그 본 지경길로 올라가서 벧세메스로 가면 이 큰 재앙은 그가 우리에게 내린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를 친 것이 그 손이 아니요 우연히 만난 것인 줄 알리라.

그들은 이 재앙이 과연 이스라엘 하나님께서 내리신 것인지 확인하기를 원했다. 그 송아지들을 떼어 집으로 돌려보낸, 멍에 메어보지 않은 젖소 두 마리가 처음 메는 새 수레를 메고 곧장 목적지로 가리라고 기대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제안을 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감동하신 제안이었다.

[10-12절] 그 사람들이 그같이 하여 젖 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수레를 메우고 송아지들은 집에 가두고 여호와의 궤와 및 금쥐와 그들의 독종의 형상을 담은 상자를 수레 위에 실으니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까지 따라가니라.

블레셋의 방백들은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것은 그들이 그 재앙에서 피할 다른 길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 암소들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아마 새끼들을 생각하며 울었겠지만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갔다. 하나님께서는 암소들까지도 감동하시고 인도하셔서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증거하셨다.

[13-16절] 벧세메스 사람들이 골짜기에서 밀을 베다가 눈을 들어 궤를 보고 그것의 보임을 기뻐하더니 수레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 큰 돌 있는 곳에 이르러 선지라. 무리가 수레의 나무를 패고 그 소를 번제로 여호와께 드리고 레위인은 여호와의 궤와 그 궤와 함께 있는 금 보물 담긴 상자를 내려다가 큰 돌 위에 두매 그 날에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께 번제와 다른 제를 드리니라. 블레셋 다섯 방백이 이것을 보고 그 날에 에그론으로 돌아갔더라.

벧세메스 사람들은 골짜기에서 밀을 베다가 눈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보고 기뻐하였다. 그 수레는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 큰 돌 있는 곳에 이르러 멈추었다. 무리는 수레의 나무를 패고 그 소를 번제로 여호와께 드렸다. 레위인들은 여호와의 궤와 그 궤와 함께 있는 금 보물 담긴 상자를 내려다가 큰 돌 위에 두었다. 그 날 벧세메스 사람들은 여호와께 번제들과 다른 제사들을 드렸다. 블레셋 다섯 방백들은 이것을 보고 그들에게 임한 재앙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내리신 재앙이었음을 확인하였고 그 날에 에그론으로 돌아갔다.

[17-18절] 블레셋 사람이 여호와께 속건제로 드린 금독종은 이러하니 아스돗을 위하여 하나요 가사를 위하여 하나요 아스글론을 위하여 하나요 가드를 위하여 하나요 에그론을 위하여 하나이며 드린 바 금쥐는 여호와의 궤를 놓은 큰 돌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견고한 성읍과 시골 동리 곧 다섯 방백에게 속한 사람의 모든 성읍의 수효대로였더라. 그 돌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에 오늘까지 있더라.

블레셋 사람이 여호와께 속건제로 드린 금독종은 아스돗과 가사와 아스글론과 가드와 에그론을 위해 각각 하나씩이었고, 드린 금쥐는 여호와의 궤를 놓은 큰 돌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견고한 성읍들과 다섯 방백에게 속한 사람의 모든 성읍의 수효대로이었다.

[19-21절]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 고로 그들을 치사 (5만) 70인을 죽이신지라. 여호와께서 백성을 쳐서 크게 살륙하셨으므로 백성이 애곡하였더라. 벧세메스 사람들이 가로되 이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를 우리에게서 뉘게로 가시게 할꼬 하고 사자들을 기럇여아림 거민에게 보내어 가로되 블레셋 사람이 여호와의 궤를 도로 가져왔으니 너희는 내려와서 그것을 너희에게로 옮겨가라.

그런데 사고가 생겼다.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 고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치셔서 5만 70명을 죽이셨다.5) 이것은 블레셋 전쟁에서 죽은 3만 4천명보다(삼상 4:2, 10) 더 큰 숫자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에게 내리신 추가적 징벌이었다. 벳세메스 사람들은 하나님께 대한 참된 두려움이 없었음에 틀림없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밝히 금하신 하나님의 거룩을 침범하는 큰 죄를 범하였다. 여호와께서 백성을 쳐서 크게 살육하셨으므로 백성들은 애곡하였다. 벧세메스 사람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기럇여아림 거민들에 여호와의 궤를 도로 가져가기를 원하였다.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자기 영광을 이방인들에게 빼앗기지 않으신다. 그는 블레셋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에게 깨달음을 주셨고 법궤를 돌려보내게 섭리하셨다. 여호와 하나님은 온 세상의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며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그 사실을 알고 하나님의 영광을 증거하는 자가 되자.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암소까지도 주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이전에 나귀의 입을 열어 선지자 발람을 책망하신 적이 있으셨다(민 22:28). 하나님께서는 그의 뜻을 이루기 위해 모든 사람의 마음을, 심지어 이성 없는 짐승까지도 감동하시고 사용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며 그의 주권적 섭리를 믿고 그를 따르자.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거룩하시고 심히 두려우신 자이시다. 그는 블레셋 사람들을 독종 재앙으로 크게 치셨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의 거룩을 침범한 벳세메스 사람들도 5만 70명이나 죽이셨다. 여호와 하나님은 지극히 거룩하시고 두려우신 자이시다. 하나님을 경외함은 지혜와 지식의 근본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움으로 섬겨야 한다(히 12:28).


7장: 사무엘이 다스림

[1-2절] 기럇여아림 사람들이 와서 여호와의 궤를 옮겨 산에 사는 아비나답의 집에 들여놓고 그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히 구별하여 여호와의 궤를 지키게 하였더니 궤가 기럇여아림에 들어간 날부터 20년 동안을 오래 있은지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

블레셋 사람들이 돌려보낸 하나님의 궤는 기럇여아림 거민에게로 보내졌다. 하나님의 궤는 기럇여아림에 들어간 날로부터 20년 동안 오래 거기에 있었다. 이스라엘 온 족속은 여호와를 사모하였다(나하)[슬퍼하며 여호와를 구하였다](NIV). 20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 사무엘이 하나님의 선지자와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본격적으로 활동한 것이라면, 그의 나이는 아마 40세가 넘었을 것이다.

[3절]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 섬기라.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이방신들과 아스다롯을 섬기고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큰 진노를 받을 만한 일이다. 하나님의 사람 사무엘은 그 문제점을 직선적으로 지적했다. 이스라엘의 영적 각성은 참된 회개에서 시작되어야 했다. 그것은 모든 우상들을 버리고 하나님만 섬기는 데서부터 시작하는 것이었다.

[4-6절]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제하고 여호와만 섬기니라. 사무엘이 가로되 온 이스라엘은 미스바로 모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리라 하매 그들이 미스바에 모여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그 날에 금식하고 거기서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라. 사무엘이 미스바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니라.

이스라엘 백성은 사무엘의 교훈에 순종했다. 그들은 즉시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제하고 여호와만 섬겼다. 사무엘은 또 그들에게 미스바 기도회를 제안하였다. 온 이스라엘 백성은 미스바에 모였다. 그들은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부었다. 물을 부은 것은 자신들의 불결하고 죄악됨을 인정하고 정결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는 뜻이 있는 것 같다. 그들은 그 날에 금식하고 거기서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라고 고백하였다. 사무엘은 미스바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렸다. ‘다스린다’는 원어(솨파트)는 ‘재판한다’는 뜻인데, 그것은 그가 사사처럼 백성을 재판하고 하나님의 공의를 시행하면서 그들을 다스린 것을 나타낸다.

[7-9절] 이스라엘 자손이 미스바에 모였다 함을 블레셋 사람이 듣고 그 방백들이 이스라엘을 치러 올라온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듣고 블레셋 사람을 두려워하여 사무엘에게 이르되 당신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쉬지 말고 부르짖어 우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시게 하소서. 사무엘이 젖 먹는 어린양을 취하여 온전한 번제를 여호와께 드리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응답하셨더라.

이스라엘 백성에게 큰 위기가 닥쳤다. 국가적 대각성이 일어나려 한 때에 마귀의 시험이 닥친 것이었다. 개인의 신앙성장과 교회의 부흥의 과정에는 반드시 큰 위기가 있다. 그것은 사탄의 시험이다. 그러나 회개한 이스라엘 백성은 위기에서 바르게 대처하였다. 기도는 바른 위기대처법이다. 성도가 기도하면 어떤 위기라도 극복할 수 있다. 사무엘은 젖 먹는 어린양을 취하여 온전한 번제를 여호와께 드리고 이스라엘을 위해 여호와께 부르짖어 기도했다. 온전한 번제는 하나님의 속죄의 은혜를 의지하고 온전한 헌신을 각오하는 뜻이 있다. 여호와께서는 사무엘과 그 백성의 기도를 응답하셨다.

[10-11절] 사무엘이 번제를 드릴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가까이 오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블레셋 사람에게 큰 우뢰를 발하여 그들을 어지럽게 하시니 그들이 이스라엘 앞에 패한지라. 이스라엘 사람들이 미스바에서 나가서 블레셋 사람을 따라 벧갈 아래에 이르기까지 쳤더라.

그 날에 여호와께서는 블레셋 사람들에게 큰 우뢰를 발하여 그들을 어지럽게 하셨고 그들은 이스라엘 앞에서 패하였다. 이스라엘은 큰 승리를 거두었다. 하나님의 방법은 너무 쉬웠다. 큰 천둥을 조금 동원하신 것뿐인데, 그것으로 그 전쟁의 승패가 갈리었다.

[12-14절]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가로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 이에 블레셋 사람이 굴복하여 다시는 이스라엘 경내에 들어오지 못하였으며 여호와의 손이 사무엘의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을 막으시매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에게서 빼앗았던 성읍이 에그론부터 가드까지 이스라엘에게 회복되니 이스라엘이 그 사방 지경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도로 찾았고 또 이스라엘과 아모리 사람 사이에 평화가 있었더라.

‘에벤에셀’(에벤 하아제르)은 ‘도움의 돌’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시키는 기념돌이었다. 블레셋 사람들이 굴복한 이후 그들은 다시는 이스라엘 경내에 들어오지 못했고 이스라엘은 그 사방 지경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도로 찾았다.

[15-17절]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 이스라엘을 다스렸으되 해마다 벧엘과 길갈과 미스바로 순회하여 그 모든 곳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렸고 라마로 돌아왔으니 이는 거기 자기 집이 있음이라. 거기서도 이스라엘을 다스렸으며 또 거기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더라.

사무엘은 사는 날 동안에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15절 이하에 세 번 나오는 ‘다스린다’는 원어도 6절의 말과 같이 ‘재판한다’는 단어이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사사로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공의를 시행하며 재판하였고 그들을 다스렸다. 그는 해마다 벧엘과 길갈과 미스바로 순회하여 그 모든 곳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그는 통치자의 직무를 부지런히 수행하였다. 또 그는 세 성을 순회한 후에는 라마로 돌아왔는데, 거기에 그의 집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거기서도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또 그는 거기서 여호와를 위해 단을 쌓았다. 사무엘은 참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섬기는 사람이었다.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순수한 경건을 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순수하게 하나님만 믿고 따르기를 원하신다. 영적 각성은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이방신들을 버리고 하나님만 섬기는 순수한 경건과 그 결단으로 일어난다. 모든 성도는 모든 죄를 철저히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말씀에 온전히 순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우리가 그의 은혜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그를 간절히 사모할 때까지 우리를 버려두신다. 그러나 그의 때에 그는 참 회개와 믿음과 영적 각성을 우리에게 허락하신다.

둘째로, 신앙의 부흥과 성장에는 반드시 마귀의 시험이 있다. 블레셋의 침공이 한 예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선지자 사무엘의 교훈을 순종하여 모든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만 섬기기로 결심한 때에 위기가 찾아왔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도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셨고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그 일을 이루셨다. 하나님의 종 바울은 세계 복음화를 시작한 그의 전도사역에서 많은 고난을 경험했었다. 우리는 신앙의 부흥과 성장의 과정에 위기가 있고 마귀의 시험이 있음을 기억하자. 우리는 그때 두려워하거나 당황치 말고 인내하며 그 위기를 바르게 대처하자.

셋째로, 신앙 부흥과 성장에서 직면하는 영적 위기를 극복하는 길은 믿음과 기도밖에 없다. 이스라엘이 직면한 블레셋의 침공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에게 기도하는 길밖에 없었다. 오늘날도 속죄신앙과 온전한 순종의 각오로써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는 자는 마귀의 온갖 시험을 이길 것이다. 기도는 위기를 대처하는 성도의 바른 방법이다. 성경과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람들은 기도로 위기를 극복한 자들이었다. 그것이 성경과 역사가 증거하는 바이다. 하나님께서는 에벤에셀의 하나님, 곧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이시다.


8장: 이스라엘이 왕을 요구함

[1-3절] 사무엘이 늙으매 그 아들들로 이스라엘 사사를 삼으니 장자의 이름은 요엘이요 차자(次子)의 이름은 아비야라. 그들이 브엘세바에서 사사가 되니라. 그 아들들이 그 아비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 이(利)(베차)[불의한 이익]를 따라서 뇌물을 취하고 판결을 굽게 하니라.

사무엘이 늙었을 때 그는 그의 아들들로 이스라엘 사사를 삼았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가장 남쪽에 있는 브엘세바에서 아버지의 일을 도운 듯하다. 그러나 그 아들들은 아버지 사무엘의 행위를 따르지 않았고 불의한 이익을 따라 뇌물을 취하였고 판결을 굽게 하였다.

사무엘은 몇 가지 점에서 잘못했다. 첫째로, 그는 자녀 교육에서 실패하였다. 그는 나라를 잘 다스리기 위해 힘썼지만 가정을 돌보는 데는 실패하였다. 그는 가정도 잘 다스렸어야 했다. 둘째로, 그는 그 아들들의 인격을 잘 모르고 사사로 세웠다. 그는 필경 보통 부모들처럼 자기 아들들을 좋게만 보는 편견을 가졌다. 셋째로, 그는 자기 아들들에 대해 권징을 시행하지 않았다. 그는 그들에게서 사사직을 박탈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 아들들에 대해서 엄격하지 않았다.

[4-5절]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모여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열방과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

이스라엘 장로들은 사무엘이 늙었고 그 아들들이 바르게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장래를 위해 왕을 세우기를 요청했다.

[6-9절] 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 한 그것을 사무엘이 기뻐하지 아니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내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날까지 그들이 모든 행사로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김같이 네게도 그리하는도다. 그러므로 그들의 말을 듣되 너는 그들에게 엄히 경계하고 그들을 다스릴 왕의 제도를 알게 하라.

사무엘은 이스라엘 장로들이 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고 한 요청을 기뻐하지 않았다. 그것은 이제까지 그가 통치자의 역할을 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율법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따라 나라를 공의로 다스리고자 힘썼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요청을 허락하셨지만 기쁜 허락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그의 뜻 가운데 그들의 요청을 허락하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요구가 결국 하나님을 버린 것임을 분명히 하셨다. 그들은 신정주의(神政主義)를 버리고 왕정주의(王政主義)를 택하였다. 그것은 열방을 본받은 것이었다. 교회가 세상을 본받는 것은 옳지 않다.

[10-18절] 사무엘이 왕을 구하는 백성에게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일러 가로되 너희를 다스릴 왕의 제도가 이러하니라. 그가 너희 아들들을 취하여 그 병거와 말을 어거케 하리니 그들이 그 병거 앞에서 달릴 것이며 그가 또 너희 아들들로 천부장과 오십부장을 삼을 것이며 자기 밭을 갈게 하고 자기 추수를 하게 할 것이며 자기 병기와 병거의 제구를 만들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너희 딸들을 취하여 향료 만드는 자와 요리하는 자와 떡 굽는 자를 삼을 것이며 그가 또 너희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의 제일 좋은 것을 취하여 자기 신하들에게 줄 것이며 그가 또 너희 곡식과 포도원 소산의 십일조를 취하여 자기 관리와 신하에게 줄 것이며 그가 또 너희 노비와 가장 아름다운 소년과 나귀들을 취하여 자기 일을 시킬 것이며 너희 양떼의 십분 일을 취하리니 너희가 그 종이 될 것이라. 그 날에 너희가 너희 택한 왕을 인하여 부르짖되 그 날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지 아니하시리라.

사무엘은 왕을 구하는 백성에게 그들을 다스릴 왕의 제도에 대해 말했다. 본문에 ‘취해’라는 말이 여섯 번 나온다.6) 백성을 다스리고 다른 나라와 견줄 수 있는 왕의 권세를 유지하려면 많은 사람들이 수고해야 할 것이다. 왕은 권세를 가지고 백성을 지배하는 자가 될 것이다. 그때 백성은 그들이 선택한 왕을 인해 고통을 당하여 부르짖을 것이지만, 여호와께서는 그들에게 응답하지 않으실 것이다.

[19-22절] 백성이 사무엘의 말 듣기를 거절하여 가로되 아니로소이다. 우리도 우리 왕이 있어야 하리니 우리도 열방과 같이 되어 우리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이다. 사무엘이 백성의 모든 말을 듣고 여호와께 고하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들의 말을 들어 왕을 세우라 하시니 사무엘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성읍으로 돌아가라 하니라.

이스라엘 백성은 사무엘의 말 듣기를 거절하였다.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교회 목회는 단지 세습적 방식으로 행해져서는 안 된다. 사무엘은 그 아들들이 아버지의 신앙과 도덕성을 가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사사로 삼았다. 목회는 세습적 방식으로 계승되어서는 안 된다. 아들이 인정된 품격을 소유하고 있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그에게 인계하는 것은 잘못이다.


둘째로, 교회는 직분자를 바르게 세워야 한다. 사무엘은 도덕성이 없는 자기 아들들을 사사로 세웠다. 그들은 사사의 자격이 없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마땅히 징벌을 받아야 하였다. 교회의 장로 후보자는 책망할 것이 없는 자이어야 한다(딤전 3:1-4). 교회는 성경에 지시하신 대로 지식과 인격에 있어서 흠 없는 자를 장로로 세워야 한다.


셋째로, 교회는 신정주의, 즉 하나님의 왕 되심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 이스라엘 장로들과 백성은 하나님을 버렸고 하나님의 종 사무엘을 버렸다. 그들은 열방과 같이 왕을 세우기를 원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에 있어서 왕이시며, 성경말씀은 우리의 신앙과 행위의 정확무오한 유일의 규칙이다. 우리는 하나님만 우리의 왕으로 모시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만 우리의 신앙생활의 규칙으로 삼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