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新約]강해/◆ 바울서신 강해-1

★디모데전서 1-6장 ◆ 밤중소리

영국신사77 2020. 4. 13. 23:22

디모데전서  차례

디모데전서 1장 (1 ~ 7)

(1) 디모데에게 보낸 바울의 서신(디모데전서 1:1-2)

(2) 경계의 목적(디모데전서 1:3-7)

(3) 율법의 바른 해석(디모데전서 1:8-11)

(4) 넘치는 풍성한 은혜(디모데전서 1:12-14)

(5) 죄인 중에 괴수(디모데전서 1:15)

(6) 바울로 본을 보이신 하나님(디모데전서 1:16)

(7) 디모데에게 보낸 경계 (디모데전서 1:17-20)


다모데전서 2장 (8 - 12)

(8) 디모데에게 준 기도의 권고(디모데전서 2:1-4)

(9) 한 분이신 중보자(디모데전서 2:5)

(10) 속전으로 주신 예수님(디모데전서 2:6)

(11) 바울의 사명(디모데전서 2:6)

(12) 교회에서의 자녀의 위치(디모데전서 2:8-15)


디모데전서 3장 (13 - 15)

(13) 감독의 직분(디모데전서 3:1-7)

(14) 집사의 직분(디모데전서 3:8-13)

(15) 진리의 기둥과 터인 교회(디모데전서 3:14-16)


디모데전서 4장 (16 - 19)

(16) 후일에 나타날 미혹의 영(디모데전서 4:1-5)

(17) 경건의 유익(디모데전서 4:6-8)

(18) 네 연소함을 업신 여기지 말라(디모데전서 4:9-13)

(19) 모든 일에 전심 전력하라(디모데전서 4:14-16)


디모데전서 5장 (20 - 22)

(20) 양떼들에 대한 목회자의 태도(디모데전서 5:1-16)

(21) 장로들에 대한 다스림(디모데전서 5:17-20)

(22) 바울의 엄한 명령(디모데전서 5:21-25)


디모데전서 6장 (23 - 28)

(23) 고용주와 피 고용주와의 관계(디모데전서 6:1-5)

(24) 지족하는 마음(디모데전서 6:6-8)

(25) 부하려 하는 자들의 시험(디모데전서 6:9-10)

(26) 하나님의 사람이 할 일(디모데전서 6:11-12)

(27) 바울의 명령(디모데전서 6:13-16)

(28) 부한 자들에 대한 교훈(디모데전서 6: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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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서 1장

◆ 밤중소리 11-06 | VIEW : 2,919

(1) 디모데에게 보낸 바울의 서신

(디모데전서 1:1-2)


디모데 전 . 후서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서신입니다. 디모데란 이름은 바울의 서신서에 자주 등장하는 이름인데 디모데는 소아시아 루스드라 사람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희랍 사람으로 젊어서 죽은 듯하고 유대인인 어머니와 할머니로부터 종교적 교육을 받으며 자란 견실하고 유대교적 신앙이 독실한 청년이었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의 생애를 통해서 바울의 조수와 같은 역할을 한 청년입니다.

디모데는 바울의 만년에는 에베소 교회에서 목회를 했으며 그 후에는 순회 전도 사업도 한바 있습니다. 바울이 이 편지를 디모데에게 보낸 것은 주후 63년경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서신의 특색은 디도서와 함께 목회 서신으로 분류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디모데와 디도에게 그들이 맡은 교회를 어떻게 목양 하느냐, 그리스도의 양 무리들을 어떻게 먹이느냐에 대한 교훈이 그 주제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1. 바울이 주장하는 사도직

바울은 언제나 그의 서신 서두에 강조하는 것처럼 이곳에서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사도 직분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는 디모데에게 다른 서신보다 사도 직분에 대하여 더욱 강렬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은 복음의 사역자로 활동하고 있는 디모데에게 하나님이 그를 하나님의 종으로 부르심에 대한 소명 의식을 뚜렷하게 심어 주기 위한 것으로 보겠습니다. 바울은 1절에서 하나님을 구주로, 그리스도 예수를 우리의 소망이신 분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사도 직분이 이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에 따른 것임을 디모데에게 인식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받은 사도 직분이 자기가 원해서 취한 것도 아니며 자기의 사명 의식에서 가진 것도 아니며 더욱이 자기의 학식의 소산이거나 어떤 사람의 권유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우리의 구주이신 하나님과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2. 바울의 사명감

바울이 말한 것처럼 명령을 따라 사명을 받았다는 말은 하나님이 주시는 직분의 불가피성과 사명감에 대한 책임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1) 명령을 받았다는 말은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판단에 좌우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타인은 뭐라 해도 명령을 받

은 것은 자기니 자신은 그 직분을 포기할 수 없으며 등한히 할 수도 없으며 누구의 권유로라도 그 직분을 변경시킬

수 없다는 뜻입니다.

(2) 명령을 받았다는 말에는 명령을 받은 바울의 사명감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받았으니 다만 하나님께, 오직 예수님께 죽도록 충성해야 될 것을 사명으로 각오한 바울의 결심을 볼 수 있습니다.

(3) 이같은 바울의 표현은 교회에서 받는 모든 직분에도 해당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에서 받은 직분은 하나

님의 명령으로 받은 것입니다. 명령으로 받았으니 그 직분에 대한 책임이 따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책임을 묻는 일이 반드시 있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직분에 충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한 달

란트 받은 악한 종처럼 수건에 싸서 땅에 묻어 두는 일로 책망을 듣지 않도록 직분에 대한 책임감을 가져야 합니다.

이 명령에 대한 책임은 회피할 길이 없습니다. 하지 않겠다고 물러선다고 물러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직분을 받

지 않겠다고 던져 버린다고 던져질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네게 준 그 달란트를 어떻게 했느냐고 반드시 물으시는 것입니다.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

고 했습니다. 충성하므로 맡은 자의 책임을 모두 감당해야 합니다. 잘하면 주님으로부터 놀라운 칭찬을 듣게 됩니다.

이 칭찬은 장차 받을 상급과도 연관이 됩니다. '네가 지극히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니'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직분에 대

한 책임은 지극히 적은 일에까지 미칩니다. 그리고 그 칭찬 역시 지극히 적은 일부터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잘못하

거나 고의적으로 회피하면 주님의 무서운 책망을 듣게 됩니다. '악하고 나태한 종'이란 불명예스런 책망을 듣게 되고

거기에 해당되는 문책을 받는 것입니다.

결론 : 바울은 디모데를 가리켜 믿음 안에서 참 아들이 된 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바울이 디모데를 믿음으로 이끌고

양육하였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전도하여 주님 앞으로 인도한 사람을 큰그릇으로 만들 수 있는 일은 대단히 보람

이 있고 상급 받을 만한 일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 주신 교회의 직분을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으로

받았다고 하는 책임감을 가지고 영광스럽게 수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2) 경계의 목적

(디모데전서 1:3-7)

3절 말씀을 보면 바울이 복음을 위하여 마게도냐로 갈 때 디모데를 에베소 교회에 머물게 하였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에서 2년간 옥에 갇혔다가 석방된 후, 디모데를 데리고 그레데 섬을 지나 에베소까지 왔지만 바울은 디모데를 그곳에 두고 마게도냐로 떠나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이 디모데를 에베소 교회에 머무르게 한 것은 에베소 교회에 진리에서 떠난 거짓 교사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 거짓 선생들이 에베소 교회에서 한 일은 다른 교훈을 가르치며 신화와 끝없는 족보를 전하는 일들로 이 일이 계속 교회에 만연되어 영적으로 혼미해지면 안될 것이기 때문에 디모데를 그곳에 남기고자 한 것입니다.

1. 다른 교훈

바울은 디모에게게 이르기를 교회에서 다른 교훈 등 잘못된 교훈을 가르치지 말도록 하기 위해 특별히 부탁하고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세 가지 잘못된 교훈이 떠돌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다른 교훈, 두 번째는 신화, 세 번째는 끝없는 족보 등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른 교훈이란 6절에서 밝혀 주는 대로 율법을 가미한 복음을 일컫는 말입니다. 초대 교회에서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가장 어려움을 겪은 일이 기껏 복음을 전파하면 그곳에 유대인의 선생들이 나타나 이 다른 복음을 뿌려 놓는 일이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서도 이들에 의해 곤욕을 치렀으며 이들에 대해 가장 심한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이들을 전하는 교훈을 왜 다른 복음이라고 부르는가 하면 이들은 복음을 전하되 율법을 가미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배격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복음을 전적으로 배척하는 자들도 아닙니다. 이들은 다만 복음만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으니 복음을 받아 드린 사람들은 다시 율법적인 생활을 하여 율법을 지켜야 비로소 온전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하는 주장을 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교회에서 그럴듯하게 받아 드려졌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교훈은 복음의 진리를 잘못 깨닫게 하여 복음을 율법의 뜻을 이루는 하나의 부수적인 것으로 인식하여 구원의 도리를 흐려 놓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교훈에 견딜 수 없었습니다. 믿음으로 의를 얻는다는 복음의 진리가 여지없이 무너져 버리기 때문에 그의 모든 수고가 헛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런 다른 교훈이 에베소 교회에 번지지 못하도록 경계시킨 것입니다. 다음에 신화에 대한 경계의 말도 당부했습니다. 신화란 그 당시 올바른 성경적 교훈에서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성경을 확대시켜 신화적인 이야기를 꾸며 그럴듯하게 가르친 것을 말합니다. 성경적 근거가 없는 전설적 이야기를 가미하여 흥미를 갖게 한다던가 어떤 성경적 인물에 신화적인 요소를 가미하여 성경에 적용시키는 일입니다. 이런 일은 성경적 진실을 왜곡시키는 일이기 때문에 절대로 수용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다음에 끝없는 족보란 족보에 관계된 이야기에 중점을 두어 교회에서 시끄럽게 하는 일을 가리킵니다. 유대인들은 족보를 중요시합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자신들의 지파나 조상에 관한 족보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어떤 이들은 이런 일에 흥미를 가지고 착념하므로 복음의 진리를 흐리게 하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교회에는 복음적 진리를 알려는 순수한 마음에서가 아니라 성경에서 어려운 문제만 골라서 목회자에게 따져 묻는 식으로 답변에 곤경을 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같은 난 문제는 하나의 비유적 해석이기 때문에 정확한 답변으로 이해시키기 어려운 것들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같은 일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고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2. 경계의 목적

목회자가 경계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바울은 세 가지를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청결한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마음의 청결은 회개로 이룹니다. 죄가 마음에 거하지 않도록 하는 일입니다. 다음에 선한 양심이라고 했습니다. 죄를 보거나 범하면 양심이 민감하게 활동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선한 양심을 가지고 그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우리고 양심을 따라 생활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양심은 결코 하나님의 교훈과 모순됨이 없는 것입니다. 다음에 바울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사랑도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라고 한 것입니다. 진리에 거짓이 있을 수 없는 것처럼 사랑에 거짓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결론 : 그리스도인이 이런 경계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목회자는 양 무리들을 잘 살피고 돌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3) 율법의 바른 해석

(디모데전서 1:8-11)

복음이 율법주의자들에 의해 방해를 받고 있는 것은 율법과 복음이 대립되거나 상반되어서가 아니라 율법을 가르치며 따르는 자가 율법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가지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용하고 있기 때문임을 바울은 이곳에서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1. 율법은 선한 것이다.

율법은 결코 악한 것이 아닙니다. 율법으로 의를 얻지 못하고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율법의 책임이 아닙니다. 그것을 지킬 수 없는 인간의 책임인 것입니다. 율법은 의롭고 거룩하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① 율법은 선한 것입니다. 바울은 8절에서 '사람이 율법을 법 있게 쓰면 율법은 선한 것인 줄 우리는 아노라'고 했습니

다. 율법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들은 다 선한 것입니다.

② 율법은 의로운 것입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완전한 의의 표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인인 인간들은 도저히 지

킬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도록 하신 것입니다.

③ 율법은 변하지 않습니다. 천지가 없어져도 율법은 일획 일점도 변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죄인을 심판하시는 하나님

의 의의 표준으로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리스도인 들에게는 율법이 정죄 할 수 없지만 그리스도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율법이 심판의 기준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만약 율법이 폐기되거나 변한다면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하

나님의 은혜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질 것입니다.

이처럼 율법은 너무 거룩하고 의롭고 완전하기 때문에 인간들이 그 율법을 지키는 일로 의롭게 될 수는 없는 것입니

다. 아니 오히려 그 존귀하고 아름다운 것이 우리를 정죄 하므로 우리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롬3:20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그 같은 사실에 대하여

롬7:22절에서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

을 보는도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2. 율법과 복음의 상호관계

바울은 9절 이하에서 율법과 복음과의 상호 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9절에서 '알 것은 이것이니'라고 했는데 이 말씀이 바울이 이 두 가지를 비교하면서 정의해 보려는 서론인 것입니다.

① 바울이 하는 말은 율법은 옳은 사람을 위해 세운 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법이란 법을 거역하거나 지키지 못하는 사

람들을 징계하기 위해 존속하는 것입니다. 법에 저촉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율법이 필요하지 않는 것입니다. 복음은

율법을 온전히 이룬 것이며 율법의 적용을 받지 않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정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한 옳은 사람이란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한 의를 받은 사람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 들은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롬8:33-34절에서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 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 하

리요'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선언 받은 사람은 율법의 정죄에서 벗어난 사람들입니다.

율법의 구애를 받지 않는 것입니다. 율법은 죄인들만을 정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의롭다고 인정받은 것입

니까? 갈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율법을 주신 이유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 없는 죄인이란 사실, 자기

들은 어떤 방법으로도 의인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 주시려는데 있었습니다. 율법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구원의 선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율법과 복

음은 모순된 존재들이 아닙니다. 율법이 있으므로 복음이 있게 되었고 복음이 있으므로 율법이 더욱 존재의 의미를 갖

게 된 이유를 알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율법이 없어도 복음이 존재할 수 없고 복음이 없어도 율법의 존재가 아무런 의미

가 없는 것입니다. 그 율법이 능히 어떤 누구도 구원에 이루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론 : 율법이 법으로 적용될 사람은 그리스도를 거역함으로 죄사함을 받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복음을 거역했

기 때문에 부득불 율법의 정죄를 받아 심판에 이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같은 교훈을 하나님의 영광

의 복음을 좇음이라고 했습니다.


(4) 넘치는 풍성한 은혜

(디모데전서 1:12-14)

바울은 13절에서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의 일꾼으로 모든 일에 능하게 하신 일에 대해 주님께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전에 자기는 훼방 자였으며 핍박 자였으며 포행자였으나 그가 하나님의 긍휼 하심을 입어 그리스도의 충성된 일꾼이 된 일에 대하여 감사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은혜의 그 풍성함을 찬양했습니다.

1. 바울이 긍휼을 입은 이유

13절에서 바울이 자신에 대하여 솔직히 고백한 대로 자기는 하나님의 긍휼 하심을 받을 만한 위인이 못되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훼방했던 자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던 자요, 그리스도인들에게 포행 했던 장본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도리어 하나님의 긍휼 하심을 얻게 된 것은 그가 믿지 아니했을 때 알지 못하고 행하였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한 이 말은 알지 못하고 한 일이라고 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지은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지만 특별히 알지 못하고 저지른 죄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긍휼 하심을 받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똑같이 긍휼 하심을 받는 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사람이 회개했을 때에 그런 대접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알고 행한 죄와 모르고 행한 죄를 둘 다 똑같이 간주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눅12:47절에서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징계에도 심판에도 이 원리는 반드시 적용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알고도 고의적으로 범죄 하는 행위를 삼가야 합니다. 받는 징계나 심판이 더욱 클 것이기 때문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특히 선생들에 대한 책임에 대해 '선생 된 우리가 더욱 큰 심판을 받는 줄 알라'는 경종을 주고 있습니다.

2. 바울의 감사

바울은 자기에게 사도의 직분을 주신 것은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충성 되이 여기셨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직분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것으로 믿고 자신의 직분에 충실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종들은 그리스도로부터 충성된 일꾼의 인정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누가 그리스도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것인가? 누가 그리스도의 충성된 종이 되는 것인가?

①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는 그리스도의 충성된 종이 될 수 없습니다. 디베랴 바닷가에서 주님과 베드로와의 대화에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3번씩이나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내 양을 먹이라고 하

셨습니다. 사랑이 커야 그가 받치는 충성도 진실하고 참된 것이 됩니다.

② 자기의 삶에 목적을 주님께 두지 않고는 충성된 종이 될 수 없습니다. 바울의 생애는 철두철미하게 그의 삶 자체를 주

님께 헌신했습니다. 바울은 고후5:14절에서 이처럼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 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 말씀대로 그리

스도를 위해 사는 일꾼으로 그의 평생을 보냈습니다.

③ 다음에 누구든지 자기에게 맡겨 주신 일에 전심전력하며 그 사명을 다 이루지 않고는 충성된 자로 인정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지극히 적은 일에 충성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지극히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내가 네

게 큰 것으로 맡기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인정을 받으려면 지극히 적은 일이라고 등한히 여기지 말고 맡

겨 주신 일에 충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 바울은 14절에서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고 했

습니다. 바울에게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무나도 컸으며 너무나도 풍성했다고 했든 것입니다. 바울에게는 믿음

도 풍성했으며 사랑도 풍성했습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와 믿음과 사랑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넘치도록 풍

성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넘치는 주님의 선물을 잘 받아서 우리 생활 가운데 축복으로 충만히 채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5) 죄인 중에 괴수

(디모데전서 1:15)

바울은 15절에서 놀라운 선언을 했습니다. 이 바울의 선언은 그 후 하나님의 의를 설명하는 일에 인용되었으며 그리스도 앞에 나온 죄인들에게 용기를 주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그리스도와 자기와의 연합 계를 의에서 찾지 않고 오히려 죄로 연결시키면서 두 가지 놀라운 사실에 대하여 힘차게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1.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 오셨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도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 말은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미쁘신 말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왜 이처럼 감탄하고 감격스러운 심정을 억누르지 못한 표현으로 이 같은 말을 하게 된 것입니까?

(1) 예수님은 거룩하신 창조주가 되시며 인간에게 친히 율법을 주신 분이시며 눈에 보이는 세계나 보이지 않는 세계나

모두 그 분이 창조하셨으며 그 분 자신을 위해 창조하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은 지금도 그의

말씀으로 온 만물을 붙들고 계시며 지배하시고 섭리하시며 운행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우리 같은

죄인들이 그런 분 앞에 나갈 수 있을 것입니까? 그러나 그 일이 현실적으로 우리에게 이뤄진 것은 그는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시려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죄인의 몸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셨고 세상에서 죄인과 더불어 잡

수셨고 죄인과 말씀을 나누셨으며 죄인을 위로해 주셨고 죄인의 죄를 용서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 분은 친히 말씀 하시기를 '나는 의인을 구하려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찾아 구하려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지금도

주님은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죄인의 친구가 되시기 위해 죄인을 찾으십니다. 여기서 죄인이란 말은 자기가 참으

로 죄인임을 스스로 깨달아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죄인이지만 자신이 죄인인줄 모르

고 여전히 죄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그리스도와 연결시킬 수 없는 죄인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는 죄인입니다. 성

경은 죄인을 명백히 둘로 구분했습니다. 하나는 죄인이면서도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는 죄인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율

법을 의지합니다. 양심을 따라 의롭게 살아가려고 힘씁니다. 자기를 죄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다음에 자신은 참으로 하나님 앞에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인 사실을 깨닫고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마음을 찢는

회개를 하는 죄인들입니다. 주님이 찾으시는 죄인은 바로 이같은 죄인들입니다. 주님이 이같은 죄인을 찾으시는 이유

는 그들을 그 죄 가운데서 구원하시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같은 죄인을 긍휼히 여기십니다. 예수님이 바리

새인과 한 세리의 기도를 비유적으로 대조시키신 교훈의 말씀은 한 세리가 자신의 죄에 대하여 회개하고 하나님의 불

쌍히 여기심을 간구하는 기도였습니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마음을 찢으며 자신의 죄를 자복 할 때 그 사람은 하나

님의 긍휼 하심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같은 죄인을 그 죄에서 건져 내사 그리스도의 의를 주십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의 무화과나무 옷을 벗기시고 그리스도의 의를 상징하는 가죽 옷을 입히셨습니다. 탕자는 집에

돌아오자 아버지께서 미리 준비해 놓으신 좋은 옷을 내다 입히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죄와 허물 가운데서 살아온 옛

사람은 죽어야 합니다. 이제 새 사람으로 옷 입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긍휼 하심을 받는 사람만이 이런 은혜를 입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같은 죄인을 불러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이같은 죄인을 불러 천국의 소망을 주

시고 영원한 기쁨과 즐거움을 주십니다.

2. 나는 죄인 중에 괴수로라

둘째로 바울은 자기는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교회와 성도들을 핍박했던 죄인었지만 알지 못하고 했으므로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을 받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스라엘 사람이요, 베냐민파요, 유대교인이며 그 중에서도 하나님께 열심 있는 바리새파 사람이요 율법으로는 흠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철저하게 그리스도를 대적했던 이 자가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위대한 사도의 반열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를 가리켜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고 한 것입니다. 바울의 이 고백은 과장된 것이 아닙니다. 참으로 자기를 모든 죄인 중에 괴수로 여기며 가슴을 친 것입니다.

결론 : 여러분, 누구나 자신의 심령과 마음을 살펴보면 우리의 입에서도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는 고백이 나올 것입니

다. 바울은 현재적인 자신의 참모습을 바라보면서 너무나도 감격스러워 했습니다. 우리에게도 바울과 같은 아름

다운 심정이 우리의 마음에 들어차 바울처럼 보람있는 생애를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6) 바울로 본을 보이신 하나님

(디모데전서 1:16)

바울은 16절에서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은 이유에 대하여 두 가지로 분류해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에 대하여 일체 오래 참으셨다는 것입니다. 다음에 이러한 일은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1. 바울이 긍휼을 입은 까닭

바울은 그리스도의 훼방 자요 포행자였지만 자신이 그리스도의 긍휼 하심을 입은 것은 주를 믿어 영생을 얻는 자에게 본이 되게 하시려는데 목적이 있었다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① 바울은 여기서 그리스도는 우리에 대하여 오래 참으시는 분이심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벧후 3 : 8, 9절에서 '주께

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죄인들에 대하여 오래 참으시는 그의 긍휼 하심을 나타내신 표현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참으시는 목적에 대하여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라고 말씀해 줍니다. 하나님은 죄인이 그 죄악 중에서 죽는 것을 결코 원치 아니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꺼져 가는 등불도 끄지 아니하시며 상한 갈대도 꺽지 아니하시는 사람의 주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바

울은 자신이 그런 죄인이었다고 고백하면서 재기 불능한 이런 죄인이었던 자기를 하나의 모델 케이스로 삼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② 만약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래 참으심이 없으셨다면 우리는 구원을 얻거나 자비나 긍휼을 얻을 기회조차 없이 죄

를 소멸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의 불로 이미 심판을 받았을 것입니다.

2. 바울에게 보이신 본

우리는 여기서 바울에게 보이신 하나님의 긍휼에 대하여 무엇을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악인의 심판이 당장에 내려지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보여 주십니다. 심판 받을 죄인에게조차 심판을 미루시고 그들의 회개를 기다리신다는 사실을 놀라운 사랑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죄를 범했을 경우,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나 심판이 급속히 내리지 않는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그 일을 이해하셨다거나 하나님이 못 보신 척 봐 주신다거나 하나님이 내편이 되셔서 나를 도와주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악도 용서치 아니하십니다. 또 모르는 척 넘어가시는 분도 아니십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의 심판이 내려지지 아니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죄를 범한 우리들 스스로가 회개하기를 바라시면서 오랜 기간 우리에게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 동안 우리 하나님은 길이 참으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범죄한 사람은 곧 속히 죄에서 돌이켜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죄를 범한 이후에도 하나님의 징계가 없을 뿐 아니라 더욱 형통하는 길을 걸어갈 수도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죄악 중에 형통하는 경우에 대한 교훈의 말씀이 있습니다. 잠 23 : 17절에서 '네 마음으로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항상 여호와를 의뢰하라'고 했습니다.

시 73편에서 아삽은 악인의 형통에 대하여 실족할 번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시 73 : 1 - 12, 16 - 19. 세상에서 악인들이 건강하게 잘 사는 것은 한 가지 죄를 더 추가하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회개하기까지 기리 참으시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심판을 잊으신 것도, 심판에서 제외시킨 것도 아닙니다. 그들이 형통하는 생활은 결코 그리스도인들이 부러워할 생활이 아닌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사실에 대하여 눈을 떠야 합니다. 하나님의 긍휼 하심과 길이 참으심은 회개하는 사람들

에게는 구원을 이루게 되지만 끝까지 그리스도를 거역하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큰 심판의 재료가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길이 참으시는 긍휼과 사랑을 깨달아 속히 회개하여 더욱 풍성한 은혜와 축복을 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7) 디모데에게 보낸 경계 

(디모데전서 1:17-20)

바울은 디모데에게 '아들 디모데'라고 불렀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이 복음으로 낳은 아들이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 것입니다. 바울이 18절과 19절에서 경계하고 있는 말씀이 두 가지로 나오는데 '선한 싸움을 싸우라'는 것과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1. 영광을 받으실 하나님

바울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에 있어서 17절에서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어지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① 만세의 왕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은 영원하신 왕이심과 그 분에 의해서 만물이 창조된 것을 나타내는 처음

이요 나중이란 뜻이 되겠습니다.

② 썩지 아니하실 분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가지고 계시는 영원한 생명을 말하며 하나님이 바로 생명의 원천

이 되신 분이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③ 보이지 아니하신 분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신령한 분이시오 영적 존재이심을 나타낸 표현입니다.

④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유일하신 하나님을 말합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하

나님은 세세토록 모든 피조물의 존귀와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심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2. 바울이 디모데에게 명한 경계

바울은 디모데에게 청년 목회자로서 그가 목회자로서의 목회 자세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경계해 주고 있습니다.

(1)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여기서 선한 싸움이란 말은 믿음의 싸움을 의미합니다. 이 싸움은 육신의 일

과 영의 일의 대결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생활은 이 싸움의 연속입니다. 육신은 성령을 거슬리고 성령은 육신을 거

슬리면서 이 두 세력이 우리 몸에서 서로 견제하는 가운데 우리의 생애가 계속되는 것입니다. 이 견제가 곧 믿음의

싸움인 것입니다. 이 싸움에서 성령의 능력이 이기도록 우리가 성령께 의지하고 죄와 대적하는 생활을 해야 하는데

이 생활이 믿음 의 선한 싸움으로 불려집니다.

㉠ 바울은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했는데 이 싸움의 첫째 조건은 죄의 옷을 벗고 의의 옷을 입는 싸움입니다. 육의 사람

은 의의 옷을 싫다고 합니다. 죄의 옷을 벗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벗기고 입히는 싸움이 선한 싸움으로 나타

나는 것입니다.

㉡ 이 싸움은 옛 행실을 버리고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싸움입니다. 열매가 없는 생활이 옛 행실입니다. 이런 것은 쓰레기

통에 버려야 합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반드시 성령의 열매가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 이 싸움은 불순종을 버리고 순종의 열매를 맺는 싸움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그 자체가 하나의 전투요 싸움입니

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하고 성령의 이한 검을 가져야 하고 성령 안에서 무시로 기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

리의 싸움은 요즘 대권 주자들의 싸움처럼 정치적 힘을 겨룬 정치 싸움이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싸움은 공중

권세 잡은 악의 영과의 싸움인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 싸움의 무기를 가르쳐 주고 있는데 18절에서 '전에 너

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한 것입니다. 이 예언은 바울이 주님께 받은 계시를 디모데에

게 지도했었는데 그 예언을 따라 그것을 가지고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한 것입니다.

(2) 다음에 바울은 믿음과 선한 양심을 가지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 들이 선한 양심을 버리면 그 사람의 믿음의 배는

파선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양심을 왜 선한 양심이라고 한 것입니까? 그리스도인은 죄로 더러워졌던 양심이

새로워진 사람들입니다. 세속에 때묻지 아니한 순수한 양심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양심은 세상 사람들의 양

심과 다릅니다. 세상 사람의 양심은 자기 마음속에 있는 양심을 말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 마음에 채워져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양심의 활동은 하나님을 향하여 그 양심이 찾아가는 것입니

다. 이것을 버리는 사람은 믿음의 배를 파선시키는 사람입니다.

결론 :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서 이 선한 양심을 버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에 대하여 사탄에게 내어 주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그 대가로 받는 무서운 하나님의 징계를 의미해 주는 말입니다. 그들이 구원의 자리에서 떨어졌

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징계로 다른 사람들의 믿음을 훼방하지 못하게 하며 자기도 회개할 수 있게 하기 위

해서인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선한 양심과 믿음을 가지고 우리의 생애를 살

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모데전서 2장 (8 - 12)

◆ 밤중소리 01-31 | VIEW : 454

(8) 디모데에게 준 기도의 권고

(디모데전서 2:1-4)

바울은 젊은 목회자인 디모데에게 모든 사람들을 위한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기도를 네 종류로 구분하여 그 중요성과 필요성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밝히고 있는 기도의 대상의 범위가 대단히 넓다는데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은 누구를 의미합니까? 자기 교회의 양 무리들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 모든 사람 중에는 심지어 원수의 무리들까지도 들어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1. 누가 이 같은 기도를 할 수 있는 사람인가?

그러면 누가 이런 기도를 할 수 있을 것입니까? 하나님과 동행하는 신앙의 사람들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가 무엇인지 알고 그런 기도 생활에 전념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음에 기도의 능력을 믿는 사람만이 가능합니다. 자기가 기도하면서 그 기도가 허공을 치는 기도인 것으로 생각하면서 한다면 하루 이틀이나 몇 달쯤은 계속되겠지만 일생 동안 계속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요한낙스란 사람은 기도의 위력을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를 대적하던 영국의 여왕은 그의 기도를 스코트란드의 군대보다 더 두려워했습니다.

2. 기도의 형식

우리의 기도는 간구, 기도, 도고, 감사로 나옵니다.

간구 = 일정한 요구하는 조건을 가지고 하나님께 구하는 기도

기도 =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과 더불어 하는 영적인 교통

도고 = 남들을 위해 기도하는 기도.

감사 = 기도의 방식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자

2. 기도해야 할 사람들과 그 이유

바울은 2절에서 특별히 기도해야 할 사람들에 대하여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하여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교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은 경건해야 합니다. 경건이란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에서 나오는 언행으로 이런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사회 주변의 안정과 평안한 중에서 많은 결실을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한국과 같은 정치적 혼란기에 있는 사회적 환경 속에서는 모략이 심하고 인신 공격이 따르고 범죄가 극심하기 때문에 그런 사화 분위기에 휩싸여 안정되고 평안한 생활이 어려우며 경건한 생활을 이루기가 힘든 것입니다. 물론 성도들은 어떤 역경이나 혼란 속에서도 그의 믿음을 가지고 모든 주변의 여건을 이겨가면서 경건하고 단정한 생활을 해야 할 것이지만 우리가 스스로 그런 환경 속에 뛰어들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임금들이나 지위가 높은 사람들로 정치를 잘하므로 사회가 안정되고 평안하게 되면 그리스도인의 생활에도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에 그런 기도를 권고 한 것입니다.

우리는 전쟁보다도 평화를 혼란보다는 질서를 핍박보다는 평안함을 기도해야 하며 그런 생활을 추구해야 합니다. 혹 사화 환경이 변하여 혼랑이 올지라도 그 혼란의 와중에 빠져 비 신앙적인 행동을 취해서는 안되며 핍박을 받는 경우에도 감사하므로 그 핍박을 받아야 할 것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들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실 있게 하신다면 이는 하나님의 축복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지 않음이 없기 때문에 무조건 부정적인 태도로 대항하거나 매도하지 말고 순종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교훈입니다. 우리가 권세 앞에 대항하면 그들의 저항을 받게되며 그 저항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많은 어려움을 가져오게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는 불의 앞에 굴복한다거나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조치에 굴종하는 자세를 가져서는 안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문제에 대하여 한 마디 말씀으로 교훈하신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가이사의 것을 가이사에게’란 유명한 말씀이 그것입니다. 가이사는 세상 권세자들을 나타낸 말씀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것을 침범치 않는 이상, 가이사의 것을 가이사에게 돌려 주어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나라나 사회나 가정이나 이웃이나 모든 사람들의 화평과 평안을 위해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결국 자기의 생활에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론 : 이 같은 기도는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만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우리의 생활이 간구, 기도, 도고, 감사를 계속하는 생활로 이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9) 한 분이신 중보자

(디모데전서 2:5)

바울은 5절에서 굉장히 중요한 문제에 대하여 언급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 중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라’는 말씀은 짧은 말씀이지만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1. 하나님은 한 분이시심

너무나 단순한 진리의 선언 같지만 깊이 맘에 새겨야 할 말씀입니다.

① 우리는 한 분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주님은 마6:24절에서 ‘한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겸하여 재물을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한 분 하나님외 다른 것을 섬기는 일은 곧 우상 숭배가 되는 것입니다.

② 그러면 한 분이신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주님은 이에 대하여 ‘오직 하나님은 하나이신 하나님이시니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첫째 되는 계명이라’고 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라고 하셨으니 마음을 다하여 섬겨야 합니다. 여기에는 신앙의 정조는 말 할 것도 없고 뜨거운 사랑을 나타내야 합니다. ‘목숨을 다하라’고 하셨으니 충성하되 죽도록 충성해야 합니다. ‘뜻을 다하라’고 하셨으니 우리의 마음에 간직한 깊은 사랑을 다 쏟아 섬기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2. 중보도 하나이시니

중보란 말은 중간에서 화해의 역할을 담당할 위치에 계시는 분을 의미합니다. 한글사전을 찾아보았더니 (예) 사람과 신과의 사이에 있는 예수의 직분이라고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왜 화해자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죄인들입니다. 죄인들은 하나님과 거리가 멀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가까이 할 수 없고 죄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갈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미워하시거나 원수로 대해서가 아니라 인간이 죄로 인하여 스스로 하나님께 등을 돌린 것입니다. 이런 관계는 죄 때문이니 이 죄를 소멸할 수 있는 화해자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화해자의 직분을 가지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십자가에서 화해의 제물이 되셨습니다. 화목제로 드리신 바 되었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같은 중보자의 모습으로 보여 주신 인물이 구약에 모세와 대제사장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참 중보자가 되신 것입니다. 하늘과 땅 사이에 하나님과 사람과의 참 중보자는 오직 한 분, 그리스도 예수뿐입니다.

그러면 이 한 분 그리스도 예수를 우리는 어떻게 섬겨야 하는 것입니까? 구원은 오직 한 분만을 믿음으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 그 분만이 중보자가 되신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천주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마리아는 절대로 중보자 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는 구세주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낳으셨으니 하나님의 부인 격으로 높이고 심지어는 마리아 무오 설까지 주장하며 마리아도 부활 승천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베드로도 중보자, 바울도 중보자라고 말하면서 그들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일은 대단히 잘못된 행실이며 하나님과 우리와의 참 중보자가 되시는 예수님의 고유 권한을 박탈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3. 그 중보자는 누구이신가?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했습니다. 사람이라고 한 것입니다. 중보자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영적 존재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중보자로서의 자격이 없습니다 중보자는 두 쪽 모두 친근해야 합니다. 그리고 두 쪽에 모두 흠이 없어야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그의 독생자가 되시는 분입니다. 이 독생자는 아버지 안에 영원히 존재하시는 독생하신 하나님이시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사람이 되신 분입니다. 그 분은 사람으로서 흠과 점이 없는 분입니다. 그는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어 죽으셨습니다. 그가 사람이 되신 목적이 바로 여기에 계셨던 것입니다. 그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 분이 부활하신 목적이 그의 부활의 생명, 영원한 하늘의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결론 : 그의 이름에 이미 중보자적인 요소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란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뜻으로 우리의 영원한 왕이 되시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예수란 자기 백성들의 죄를 구원하신다는 뜻이기 때문에 그는 우리의 영원한 구주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중보자이신 예수님께 더 가까이 나가 그 분의 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


(10) 속전으로 주신 예수님

(디모데전서 2:6)

6절에 있는 말씀은 그의 중보적인 역할이 모든 사람을 위해 자기를 속전으로 주신 것으로 된 사실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면 증거 할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1. 그리스도의 중보의 역할

중보의 직분은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의 속전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속전이란 대속의 값을 치른 것을 의미합니다. 일종의 대속금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속죄에 치루신 값에 대하여 베드로 사도는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없고 점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고 했습니다(벧전 1 : 18-19).

원래가 속전이란 말은 노예 제도하에서 연류된 말입니다. 노예란 돈으로 매매되든 살품입니다. 그리고 그 노예의 자리에서 해방되려면 자기 몸값을 치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는 돈이 없기 때문에 평생 가야 그 몸값을 치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매로 팔려 다니므로 평생가야 자유를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노예였기에 주님께서 그의 몸으로 속전을 갚으시고 우리에게 귀중한 자유를 주신 것입니까? 롬6:17절에서 바울은 ‘너희가 원래 죄의 종이더니’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원래가 죄의 종이었다고 성경은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왜 종이라고 부른 것입니까? 진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사탄의 유혹에 패하여 범죄 했기 때문에 결국 죄에 진자가 되어 그의 종의 자리에 떨어진 것입니다.

2. 죄의 종의 속전과 의의 종의 신분

죄의 종은 영원한 사망의 형벌아래 있는 자들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같은 인간이 어떻게 해야 죄의 멍에를 벗어버리고 죄에서 자유함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까? 종은 팔리는 몸이기 때문에 속전을 지불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죄 값을 치를 수 있는 죄의 속전은 무엇입니까? 이에 대하여 히9:22절에서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죄의 속전은 오직 피인 것입니다. 다른 것으로 그 어떤 것으로도 죄의 속전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피는 죄의 종의 피여서는 안됩니다. 흠이 없는 어린양의 피만이 효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 피는 하늘 위에서나 하늘 아래나 오직 한 분의 피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이 흠 없는 피인 것입니다.

노예란 원래가 매매의 대상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켜 주셨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합니까?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피로 우리를 당신의 소유로 사셨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원래는 죄의 종이었지만 그리스도께서 그의 피를 속전으로 지불하심으로 사셨기 때문에 우리의 신분은 그 자리를 옮겨 그리스도의 종이 된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의의 종이란 새로운 신분으로 불려집니다.

롬6:22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의의 종은 어떤 신분을 가진 사람입니까?

① 다시는 죄에게 종노릇하는 생활을 해서는 안 될 사람입니다. 우리의 죄 값으로 갚으신 그리스도의 속전은 영원한 속죄제물이십니다. 롬6:2절에서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살겠느냐’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우리의 생애 중에 곧잘 죄에게 굴복하여 그 종노릇을 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불법인 것입니다. 이처럼 불법을 행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따끔한 징계를 내리십니다.

② 다음에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롬6:13절 ( ) 6:19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고 한 것입니다. 의의 종은 의에게 종된 자기 신분의 의무를 감당하여 거룩함에 이르러야 하는 것입니다.

③ 다음에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의의 종이 된 우리는 이제부터는 살든지 죽든지 주의 소유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설자리가 없는 우리들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전 생애가 우리를 소유하고 계시는 주님께 달려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한 속전으로 주신 분이십니다. 나의 죄 값은 그리스도의 피의 속전으로 남김없이 청산되어 그리스도의 소유로 확정되었습니다. 그의 소유임을 알고 죄에게 종노릇하지 말고 우리의 소유주가 되시는 주님을 따라 의의 거룩함에 이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11) 바울의 사명

(디모데전서 2:6)

바울은 중보자이신 예수님과 예수님이 자기를 속전으로 주사 자기를 죄의 종의 자리에서 해방시켜 주신 진리를 깨달았을 때 그의 마음은 뜨겁게 감격했으며 그는 자신이 맡은 교회의 직분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임을 큰 자랑으로 여기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이 일을 7절에서 ‘이를 위하여 내가 전파하는 자와 사도로 세움을 입은 것은 참말이요 거짓말이 아니니 믿음과 진리 안에서 내가 이방인의 스승이 되었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 이를 위하여란 말의 의미

바울이 디모데에게 전한 딤전 2장에서의 그리스도의 사역은 그 일이 바로 복음의 내용이었던 것입니다. 복음이란 죄의 종으로 소망이 없을 뿐 아니라 영원한 형벌을 받아야 할 인간에게 소망을 주는 가장 복된 소식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복음을 전파하는 직분은 최대의 영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 세상에 세워진 그리스도의 교회는 바로 이 같은 복음의 사역을 이루시기 위해 세우신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죄인들을 향하여 우리는 크게 외쳐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오직 한 분,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는 죄인들을 속죄하시기 위해 자기 몸을 속전으로 주셨다.

이 소식은 긴급을 요하는 하늘의 메시지인 것입니다. 바울은 이 같은 복음의 전달자로 세우심을 받은 일에 대하여 감격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일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종들의 경우도 너무나도 불 신앙적인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복음을 전하고 성도들로 온전한 믿음의 사람으로 양육하여 그리스도의 신부로서의 자격을 얻게 하는데 그 존재 목적을 두어야 하는데 하나의 기업체처럼 세를 확장시키고 그 이름을 크게 내려는데 목적을 두는 교회가 너무나도 많은 것입니다. 양 무리들을 키우는데 있어서도 진리의 말씀으로 키워야 하거늘 세상적인 지혜와 세속적 생활에 적응시키는 방법으로 오도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한편 그리스도의 양 무리들을 존귀히 여겨 각각 제각기 맡은 양 무리들을 성실히 돌보아야 할 것인데 다른 교회의 양떼들을 도적질하여 자기 양 무리에 합류시키는 방법으로 교세를 확장시키는 잘못된 전도 방법을 취하고 있는 교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 같은 일은 사도 바울의 경우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경우 역시, 교회에서 맡은 자신의 직분에 대한 신앙적인 존귀함을 깨닫지 못하고 교회 안에서 스스로 높아지려는 교만과 직분에 대한 충성심보다는 오히려 자기를 알아주기를 바라며 다른 형제들보다 높임과 대접을 받고자 하는 잘못된 신앙생활에 젖어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본이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과 한 사람의 영혼이라도 구원하려는 뜨거운 사명감에서 전도하는 일은 어디서든 찾아보기 어려운 것입니다. 이런 일은 ‘이를 위하여 내가 전파하는 자와 사도로 세움을 입었다’고 말하고 있는 바울의 경우와 비교할 때 심히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2. 바울의 심정

바울은 자기에 대하여 ‘자신은 거짓 사도도 아니며 거짓 종도 아니라’고 확신하였으므로 자기가 전파자와 사도로 세움을 받은 것은 참말이며 거짓말이 아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사도 바울처럼 이같이 말할 수 있는 것입니까?

사명을 받은 사람은 바울과 같은 심정으로 자신의 생명을 주의 복음을 위해 받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유익, 자기가 속한 교회의 유익만을 위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 그렇게 해야 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렇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부르신 그 부르심의 뜻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종들은 박태선 처럼 자기의 왕국을 세우고 문선명처럼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앉는 일이 아닙니다. 교회를 바벨탑처럼 높이 쌓아 올리고 자기의 이름을 내는 방법의 목회가 아닙니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때를 따라 양 무리들에게 양식을 줄 수 있는 진실한 종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의 깊은 뜻을 생각해야 합니다. 죄의 종으로 사망의 멍에를 메고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죄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 죄 가운데서 구원해야 하겠다는 뜨거운 열의와 ‘믿음과 진리 안에서 내가 이방인의 스승이 되었노라’고 자부한 바울의 사명감을 가지고 주님이 원하시는 뜻을 이루어 드릴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12) 교회에서의 자녀의 위치

(디모데전서 2:8-15)

바울은 8절부터 여러 교회에서 남자와 여자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에 대하여 언급해 주고 있습니다. 특히 여자에 대한 신앙 생활에 대하여 많이 언급해 주고 있는데 주의 계명으로 받은 이런 바울의 교훈에 마음을 기울여야 합니다.

1. 남자들의 책임

바울은 남자들의 책임에 대하여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교회에서 남자들은 특히 분노와 다툼을 버려야 합니다. 비록 자신의 주장이 성경적이거나 교회에 유익한 것일지라도 그로 인하여 다툼이 생기거나 분노를 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대개의 경우, 남자들의 횡포에서 나오기 때문에 남자들과 결부시켰습니다.

오히려 남자들은 교회에서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라고 한 것입니다. 거룩한 손이란 기도하는 손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손을 들어 기도한다는 말은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헌신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간절함과 진실함을 나타내는 기도인 것입니다. 모세가 홍해서 밤새도록 손에 있는 지팡이를 들어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강풍에 홍해가 갈라져 이스라엘 백성들이 건너가게 된 것입니다. 아론과 훌의 손이 모세의 손을 드는 일에 들려졌을 때 이스라엘은 전쟁에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남자의 손은 이런 일에 쓰임 받아야지 결코 분노와 다툼을 일으키는 일에 사용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2. 여자의 몸가짐

바울은 9절부터 여자들의 신앙생활에서 덕을 세우는 일과 가정생활에서 마땅해 행해야 할 바에 대하여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① ‘여자들로 아담한 옷을 입으라’고 했습니다. 아담한 옷이란 깨끗하고 품격에 맞는 옷을 가리킵니다. 사치스럽거나 더럽거나 품격이 없는 옷이 아닙니다. 누가 보든지 정숙하고 그리스도인답게 보이는 정결한 옷을 입어야 합니다. 그러나 시대에 뒤진 옷을 입으란 말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 눈에 혐오감을 주거나 수도승처럼 보이는 이상한 옷을 입는 일은 격려할 일이 아닙니다.

②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라고 했습니다. 염치란 말은 조촐하고 깨끗하여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을 가리킵니다. 이런 마음은 여자에게 있어서 귀중한 덕목 중에 하나입니다. 여자가 부끄러움을 모른다면 그런 여자의 마음은 철면피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③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금, 진주, 값진 옷 등은 그 당시 최고급에 속하는 여자들의 노리개나 귀중품으로 이런 일에 재물을 허비하거나 마음을 쓰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그 대신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참으로 값진 것들은 땋은 머리나 값진 옷이나 금이나 은으로 만든 장신구들이 아니라 모든 일에 선행으로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선행은 확실한 보상이 따릅니다. 그리고 선행을 할 수 있는 손길은 남자들보다 여자들의 손길입니다. 이런 일이 하나님을 공경한다는 사람들의 마땅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④ 여자들은 일체 순종하므로 종용히 배우라고 했습니다. 여자들이 교회 일에 깊숙이 개입하여 남자들을 지도하려는 자세는 좋지 않다고 성경에서 말씀해 줍니다. 이것은 여자들을 무시하거나 경히 여겨서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덕을 세우기 위해 권고하고 권면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순종하라고 했습니다. 순종은 남자나 여자나를 가릴 것 없이 귀한 미덕입니다.

바울은 12절에서 굉장히 놀랄만한 말씀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가르치는 것이란 교회에서의 봉사 직에 해당하는 말은 아닙니다. 교사들은 남자도 있고 여자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합니다. 다만 여기서 말하는 것은 여자들이 교회에서 가르치는 위치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남자를 주관한다는 말 역시 지배하거나 통솔하는 위치를 말합니다. 아직 우리 교단에서는 이런 말씀에 비취어 여자의 장로 직이나 목사직을 허락하지 않고 있지만 이런 성경적인 진리가 이제 완전히 무너져 가고 있습니다.

결론 : 15절 말씀은 해석하거나 이해하기가 어려운 말씀입니다. 그러나 여자들이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바울의 이 말은 비단 여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을 이루는 데 있어서 정절로써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생활은 하나의 해산의 고통이 따릅니다. 우리가 이런 해산의 고통을 받으면서 우리의 신앙을 정절로 온전히 지키면 이로써 구원을 얻게 하실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3장 (13 - 15)

◆ 밤중소리 01-31 | VIEW : 604

(13) 감독의 직분

(디모데전서 3:1-7)

바울은 교회의 가장 중요한 직분에 해당되는 감독 직분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감독은 그 말 그대로 교회를 감독하는 직분입니다. 이 직분을 맡은 자는 교회를 운영하는 일에 중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주님께서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1. 감독의 직분은 무엇인가?

지금도 감리교 같은 교단에서는 감독이란 말을 사용합니다. 그러면 감독이란 직분은 무엇을 말합니까? 초대교회에서 선출한 감독은 장로의 직분을 말합니다. 장로 직은 교회에서 가장 권위 있는 최고의 직분입니다. 그 후, 특별히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은사 받은 장로를 감독이라 하였는데 지금 교회의 목사직분을 의미합니다. 목사는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장로는 교회의 행정적이고 신령적인 일을 맡아 관할하는 직분 자로 세웠던 것입니다.

감독의 직분은 그 사람의 인간성, 품성이 다 선한 일을 사모하는 일에 하나가 될 수 있는 인물이어야 합니다. 신앙과 그의 인간성이 동일해야 합니다. 바울은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면 선한 일을 사모한다 함이로다’고 했습니다. 선한 일을 사모한다는 말은 선한 일에 대한 적극적인 행동이 내포된 마음의 결의를 가리킵니다. 악은 그 모양이라도 버리고 어떤 경우나 환경 속에서도 선한 일에 마음을 두고 그 일을 항상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선한 일을 사모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2. 감독이 사모해야 할 선한 일은 무엇을 말하는가?

감독이 사모해야 할 선한 일에 대하여 바울은 2절 이하에서 몇 가지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①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사람의 외형적으로 나타난 인간됨이 다른 사람에게 책망 받을 만한 일이 없는 일반적인 인격이 갖추어져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은혜가 있는 것으로 보이며 신앙적으로 성숙하게 보인다고 해도 보편적인 인격의 결함으로 비난을 받는 사람이라면 감독의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인격적으로 비난받을 만한 사람이라면 이 직분이 허용될 수 없는 것입니다.

② 감독은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한 아내의 남편이란 말은 축첩을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짝지어주신 아내를 최상의 반려자로 알고 사랑하고 이해하며 화목하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부부의 정절이 있는 자가 감독의 직분을 맡을 수 있는 것입니다.

③ 감독은 절제할 수 있는 자라야 맡을 수 있습니다. 절제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생활의 절제로 사치나 방종이나 덕행에 있어서 절제가 필요합니다. 다른 하나는 정욕의 절제로 시기나 다툼이나 혈기에 있어서 절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④ 감독은 근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근신은 마음의 절제라고 볼 수 있는데 마음 속 깊이 삼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절제가 나타나는 생활의 문제라면 근신은 나타나지 않는 마음의 문제라고 보겠습니다.

⑤ 감독은 아담해야 합니다. 그의 신앙생활 가운데 그의 몸과 생활에서 풍겨주는 그리스도인의 외모를 말합니다.

⑥ 감독은 나그네를 대접할 줄 아는 자라야 합니다. 이웃 사랑의 교훈인데 그 당시의 긴요한 도덕적 생활의 필수 조건이었습니다.

⑦ 감독은 가르치기를 잘하는 자라야 합니다. 초대교회 시절에는 장로가 가르치는 일과 교회를 다스리는 일 등을 함께 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가르치는 일을 못하면서 은혜만 가지고 감독직분을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잘 가르치려면 자신이 먼저 철저하게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배운 일에 자기가 먼저 다른 사람의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⑧ 감독은 술을 즐기지 아니하는 자라야 합니다. 술은 사람의 중추신경을 마비시킵니다. 술은 멀쩡한 정신을 혼미케 하여 엉뚱한 일을 저지르게 하는 것입니다. 이성을 마비시키고 판단력을 흐리게 하며 단정하고 예의 있는 생활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⑨ 감독은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며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단정함으로 복종케 하는 자라야 한다고 했습니다. 폭력적인 인간이 감독이 될 수 없습니다. 관용이란 폭이 넓은 이해력을 말합니다. 감독이 돈을 사랑한다면 큰 일입니다.

결론 : 감독 직분은 새로 입교한 자에게 맡겨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이들에게 맡기면 영적으로 교만해 빠지기 쉬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감독은 교회 뿐 아니라 밖에서도 선한 증거를 가진 사람이라야 한다고 했습니다. 교회에서 감독의 직분이 존귀하고 귀중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 맡은 책임이 크다는 사실을 알 때 두려운 마음으로 이 일을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14) 집사의 직분

(디모데전서 3:8-13)

바울은 교회의 가장 중요한 직분인 감독에 직분에 대한 자격요건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언급하고 8절 이후부터는 집사 직분에 대한 자격에 대하여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집사는 장로와 함께 교회의 항존 직입니다. 지금 각 교회들은 교회 운영의 편의를 위해 1년 직인 서리 집사 직을 많이 택하고 있지만 안수 집사라고 말하는 집사 직이 성경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해 주는 교회의 항존 직분입니다.

1. 집사의 자격

바울은 집사의 자격에 대하여 마음 몇 가지로 열거해 주고 있습니다.

① 8절에서 이와 같이 집사들도 단정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단장해야 한다는 말은 몸가짐을 의미하는 것보다 마음의 단정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흐트러짐이 없는 마음을 말합니다.

② 다음에 집사는 일구이언을 아니하는 자라야 한다고 했습니다. 한 입으로 두 말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한 번 약속한 것은 신의 있게 지킬 수 있는 말의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이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교회 앞에서 약속한 것은 그 어떤 경우에도 약속을 어기지 아니하고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하는 것입니다. 비록 자신에게 해로움이 온다해도 약속은 지켜야 할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뱀을 보고 간교하더라고 했습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간교했기 때문에 그 마음도 간교하다는 뜻입니다. 사람의 말이 간사하면 그 사람의 인격 역시 간사한 것입니다. 말에 있어서 표리가 부동한 사람을 보고 이중인격자라고 말합니다. 이중인격자는 교회의 집사의 직분 자로서의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③ 다음에 집사는 술에 인 박이지 아니한 자라야 한다고 했습니다. 술은 감독이나 장로나 집사나 마시면 안 된다는 것이 성경의 교훈입니다.

④ 집사는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는 자라야 한다고 했습니다. 정당한 방법으로 수입을 올리는 이익이 아니면 결코 이를 탐내면 안됩니다. 공의로운 법에 어긋나는 일이면 비록 많은 이익이 보장된 사업이라도 직각 포기해야 하는 것입니다. 직업도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악업을 경영하거나 그런 곳에 근무하는 일은 안됩니다. 성경에서는 개 같은 자의 소득은 성전에 들여놓아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⑤ 다음에 집사는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한다고 했습니다. 깨끗한 양심이란 회개한 심령을 말합니다. 마음이 정결한 자라야 깨끗한 양심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마음의 비밀이란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하나님의 비밀이라고 했습니다. 이 비밀을 마음에 깊이 간직해야 합니다.

⑥ 집사는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성경은 부부의 연합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두 몸이 한 몸을 이루는 것이 부부의 결합입니다. 이 같은 의무를 이행하지 못하는 사람은 집사 직을 맡을 자격이 상실된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⑦ 다음에 집사는 자녀와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라야 한다고 했습니다. 신앙적으로 가정을 관장하고 자녀들을 신앙적으로 키우며 가정을 믿음 안에서 화평을 이룰 수 있는 자라야 집사 직을 받을 만한 자격자인 것입니다.

2. 여자 집사직

바울은 11절에서 여자의 집사 직에 대하여 말씀해 줍니다. ‘여자들도 이와 같이 단정하고 참소하지 말며 절제하며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한다고 했습니다.

참소하지 말라는 말은 다른 사람에 대하여 비방하거나 모함하는 일 등을 의미합니다. 여자들은 특히 한두 명이라도 모이면 이 같은 쓸데없는 말들을 잘하기 때문에 특별히 주의를 주고 있습니다. 절제하라는 말은 모든 일에 근신하고 말에나 행동에나 모든 일에 삼가라는 뜻입니다.

다음에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한다고 했습니다. 충성은 남자들에게 뿐 아니라 여자들에게도 요구되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바울은 이런 자들에게 집사 직분을 주기 이전에 먼저 이들을 시험해 보라고 했습니다. 10절에서 ‘이에 이 사람들을 먼저 시험하여 보고 그 후에 책망할 것이 없으면 집사의 직분을 하게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교회의 직분 자들은 즉흥적으로 세우지 말고 그의 신앙과 인품을 일정 기간 동안 시험해 보고 그 후에 주라고 했습니다.

결론 : 바울은 13절에서 ‘집사 직의 직분을 잘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고 했습니다. 아름다운 지위란 하늘에서의 상급을 말합니다. 믿음의 큰 담력이란 그리스도인의 심령에 임하는 믿음의 은혜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우리들이 맡은 교회의 직분이 이처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그 직무를 잘 수행하며 충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15) 진리의 기둥과 터인 교회

(디모데전서 3:14-16)

바울은 교회에 대하여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라고 말하고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청년 목회자인 디모데에게 이처럼 진리의 기둥과 터인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는 일이 얼마나 중요하고 놀라운 일인가에 대하여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다.

바울은 15절에서 하나님의 교회를 집이란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집이나 몸은 같은 뜻입니다.

교회를 하나님의 집으로 말할 때 그리스도는 그 집을 맡은 아들이요 우리는 그 아들로 인하여 양자로 입적된 자녀들인 것입니다. 히 3: 6절에서 ‘그리스도는 그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몸으로 말할 때 그리스도는 그 머리가 되시고 우리는 그 머리에 연결된 각 지체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 집은 세 가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로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하나님이 교회란 하나님이 피로 값 주고 사신 하나님의 소유된 교회임을 나타낸 말입니다. 이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미치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소유로 하나님이 임재 하시는 곳이 곧 성전인 것입니다. 내 마음속에 성령이 거하시고 그 지체들이 서로 연결되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주는 그리스도이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신앙고백 위에 세워진 모임입니다. 살아 계시다는 말씀에서 보여 주시는 대로 하나님은 살아 계신 분입니다. 만물의 창조주가 되시고 만물의 주관자이시며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교회는 바로 이런 하나님의 소유가 되시고 그 분이 머리가 되시며 그 분이 그 가운데 임재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만유보다 크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내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는 진리의 기둥이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진리의 기둥입니다. 진리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이 진리에 대하여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라고 말씀하시고 ‘내가 곧 진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시어 오신 분이시며 그의 말씀은 곧 아버지의 말씀이므로 그가 곧 진리가 되시는 것입니다.

교회가 진리의 기둥이 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진리가 전파되며 지켜지는 곳은 오직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기둥은 교회뿐입니다. 이스라엘이 불기둥의 인도하심을 받은 것처럼 교회는 진리의 기둥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영원히 인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진리의 터이니라고 했습니다. 고전 3 : 10 - 11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 ). 집을 세우는 데는 터가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집을 세우는 진리의 터전인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진리의 터전입니다.

2. 경건의 비밀

이 일에 대하여 바울은 너무 놀랍고 기이하며 감격스러워서 16절에서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고 탄성을 질렀습니다. 경건이란 말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올바른 자세를 말합니다. 하나님을 공경하는 일은 비밀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비밀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비밀은 큰 것입니다. 이 비밀의 근원이 되신 그리스도는 누구이신 것입니까? 이에 대하여 바울은 16절에서 ‘그는 육신으로 나타나신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경건의 비밀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1)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바 되셨다고 했습니다. 그 분은 태초로부터 말씀으로 계셨던 분이시오 하나님이 시요 독생하신 하나님으로 아버지의 품안에 계셨던 분이십니다. 그 분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이 일은 크신 비밀입니다. (2) 영으로 의롭다하심을 입으셨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야말로 경건의 큰 비밀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3) 천사들에게 보이셨다고 했습니다. 이 비밀은 천사들도 몰랐습니다. (4) 만국에서 전파되었다고 했습니다. 복음으로 전파된 사실을 말합니다. (5) 이 분은 이미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6) 영광 가운데 올리우심 곧 승천을 하셨습니다.

결론 : 하나님의 교회는 진리의 기둥입니다. 진리의 터전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집입니다. 그 집은 나와 여러분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우리의 존재는 이처럼 놀라운 존재로 하나님의 집이 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들도 하나님의 교회의 지체의 직분을 잘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4장 (16 - 19)

◆ 밤중소리 01-31 | VIEW : 430

(16) 후일에 나타날 미혹의 영

(디모데전서 4:1-5)

바울은 후일에 일어날 일에 대하여 예언적인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1절에서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성령이 밝히 말씀하셨다’는 전제로 이처럼 말했습니다. 이로 보아 바울은 성령에 의해 여러 계시들을 받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1. 후일에 일어날 미혹의 영의 역사

교회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지만 그곳에도 악령의 역사가 일어날 것이란 사실에 대하여 경각심을 주고 있습니다. 이런 일은 믿음에서 떠나 사탄의 가르침을 좇는 무리들에 의해 일어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처럼 악령의 역사가 교회에 들어와서 영적으로 교회를 미혹케 하는 일을 하는데 이 같은 일을 할 자가 누구냐는 것입니다. 그들에 대해서 믿음에서 떠난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에서 따났다는 말은 믿음을 가졌던 자가 그 믿음에서 떠날 때, 그들은 결과적으로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아 교회를 혼란케 할 것임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가라지로 전락한 자들입니다. 성도들이 그 믿음에서 떠나면 가라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들은 진리의 말씀을 견고히 붙잡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진리의 기둥이요 터전이기 때문에 진리를 놓치거나 이탈할 때, 그 즉시 믿음에서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2. 그들의 특색

바울은 이들 가라지들의 특색으로 2절부터 몇 가지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았다고 했습니다. 지을 수 없는 확인의 표로 그 마음이 죄악으로 완고하고 견고해 진 상태를 말합니다. 양심이 화인 맞으면 죄의 인 침을 받게 되고 영원한 죄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인에는 성령의 인 치심과 양심에 치는 화인이 있는데 성령의 인은 하나님의 확인으로 참 구원받은 성도들로 성령의 영원한 임재 하심을 받은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양심의 화인은 믿음에서 떠난 가라지들입니다. 이들은 죄의 종으로 완전히 사로잡혀 있는 자들이며 죄의 함정에서 도저히 빠져 나올 수 없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그들 스스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죄를 따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죄악 중에 방치해 두시는 것입니다.

(2) 외식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양심에 화인을 맞았으니 양심의 활동이 정지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그는 양심대신 외식이라고 하는 새로운 행동 지침을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외식이란 사람들에게 그럴듯하게 보이기 위해 꾸미는 일입니다. 거짓말은 다반사인 것입니다. 양심이 없으니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거짓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귀는 처음부터 거짓말쟁이라고 했습니다. 이들의 거짓말은 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말, 진리를 거역하는 일에 사용됩니다. 이단이 이들의 거짓말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이들이 따르는 미혹의 가르침에 대하여 두어가지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혼인을 금하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들은 남녀간의 결혼을 하나의 추악한 성적 충동의 결합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혼을 자신의 몸을 더럽히는 불결한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결혼은 남녀의 당연한 결합으로 이에 대하여 하나님은 ‘둘이 합하여 하나가 될지니라’고 선언하시고 축복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혼을 금하라고 가르치는 일은 귀신, 곧 사탄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2) 또 이들이 가르치는 일 중에 하나는 식물을 폐하라는 것입니다. 이 가르침에는 두 가지 뜻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는 금식이나 단식을 통해서만이 사람이 의와 거룩함에 이를 수 있다고 하는 가르침입니다. 그리하여 회교도들처럼 금식이나 단식을 교회의 하나의 의무적인 의식인 것처럼 규례화 시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율법적 교리에서 나온 것을 교회에 그대로 접목시키는 일입니다. 오늘날에도 안식교회 같은 잘못된 교단에서는 율법에서 금하고 있는 식물을 먹으면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바울은 이에 대하여 ‘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와 진리를 아는 자라면 식물을 구별할 것이 없다고 밝혀 주고 모든 식물은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힐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결론 : 우리는 율법의 가르침이나 인간의 규례를 진리보다 윗자리에 올려놓고 그것을 가르치거나 따르면 안됩니다. 인간의 유전과 율법은 우리를 속박하고 다시 죄의 종의 자리로 올가미 씌우려는 사탄의 계략임을 알아야 합니다.


(17) 경건의 유익

(디모데전서 4:6-8)

바울은 6절에서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선한 일꾼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좇은 선한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고 말씀해 주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 같은 거짓 선생들의 거짓된 교훈을 형제에게 깨우쳐주면 그리스도 예수의 선한 일꾼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네가’라고 디모데를 지칭한 말은 동시에 이 말씀을 읽는 모든 목회자에게 향한 말입니다.

1. 선한 일꾼

목회자는 선한 일꾼입니다. 그러면 선한 일꾼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말입니까?

첫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잘 가르치는 일꾼을 말합니다. 선한 일꾼의 가장 중요한 자격은 하나님의 말씀을 양 무리들에게 잘 가르치는 일입니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은 양 무리들에게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주는 일꾼이라고 하셨습니다.

다음에 선한 일꾼이란 그리스도께 충성스런 일꾼을 말합니다. 모든 주의 일꾼들이 달란트를 청산하는 심판대 앞에 섰을 때에 충성된 종, 악하고 나태한 종의 판별이 내려질 것입니다.

선한 일꾼은 삯군이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삯군의 목적은 돈과 명예와 대접을 받는 일에 목적을 두고 일하기 때문에 양을 사랑하고 주의 말씀으로 양육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목적 달성의 방편으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삯군은 양도 자기 양이 아니므로 이리가 오면 양을 버리고 도망한다고 했습니다. 선한 일꾼은 선한 목자여야 합니다. 선한 목자는 바로 예수님 자신이십니다. 목자는 목자장이신 예수님을 본받아 선한 목자가 되어야 합니다.

선한 일꾼으로 양 무리를 잘 가르치고 충성스럽게 일하면 그것이 결국 자기 자신을 양육하며 선한 일꾼으로 더욱 온전케 된다고 말씀했습니다. ‘믿음의 말씀과 네가 좇은 선한 교훈으로 양육을 받을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2. 경건에 이르기 위한 연습

목회자는 버릴 것과 연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라’고 했습니다. 성경을 신화로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신화를 연구하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 신화를 인용하는 일은 무가치한 일입니다. 그런 것들은 허탄하고 망령된 일이라고 경종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도 신화가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일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 나라의 단군 신화 같은 신화는 미신이요 우상이며 인간의 존엄성을 스스로 짓밟는 일이며 날조된 이야기이기 때문에 단연 배척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보다는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고 했습니다. 경건이란 하나님을 섬기는 도리를 말합니다. 이런 일에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이 같은 바울의 말은 그 당시 유명하게 전개되었던 운동경기를 염두에 두고 한 말입니다. 운동 선수가 그 운동에 숙련되려면 피나는 연습이 따라야 합니다. 실패가 거듭되는 가운데 실력이 향상됩니다. 그리스도인의 경건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익숙하지 못한 경건 생활을 하려면 곧 넘어집니다. 실패합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계속적인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경건 생활은 이처럼 노력을 기우림이 없이는 성장이 없는 것입니다. 연습을 거듭해서 경건한 생활의 열매를 맺도록 해야 합니다. 은혜를 받았다고 경건된 생활이 저절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연달을 받아 경건의 생활에 숙련시키는 연습으로 숙련된 경건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저절로 경건 생활을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경건 생활에 익숙한 훌륭한 성도들을 보면 그들은 그들의 생애 동안에 실패와 시련이 거듭된 끊임없는 경건의 연습으로 다져진 사람들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경건의 연습에는 유익이 있다고 했습니다. 육체의 연습에는 약간의 유익이 있습니다. 이것은 운동경기의 경우를 말합니다. 이 세상에서 얻는 명예와 재물, 그 이상의 소득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도 그 사람들은 그토록 많은 연습을 통해서 목적을 달성하는 것입니다. 하물며 경건이 주는 유익은 그에다 비교할 수 없는 것이어 늘 이 생활을 안이하게 생각하면 안돼는 것입니다.

경건의 연습에는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도리에는 금생에도 약속이 있습니다.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원하노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내생에도 약속이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과 상급의 약속입니다.

결론 : 우리는 목회자이건 성도들이건 그리스도 예수의 선한 일꾼들이 되어야 합니다. 경건의 계속된 연습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금생 뿐 아니라 내생에도 약속을 받는 성도가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18) 네 연소함을 업신 여기지 말라

(디모데전서 4:9-13)

바울은 경건의 연습으로 말미암은 유익에 대하여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9절에서 탄성을 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 모든 사람들이 받을 만 하도다’고 했습니다. 왜 그리스도인들이 경건 생활에 힘을 써야 하는 것입니까? 바울은 우리가 경건 생활을 위해 수고하고 전력한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우리의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두었기 때문입니다. 누구든 자신의 인생의 소망을 하나님께 둔 사람이라면 금생과 내생에까지 약속이 있는 경건 생활에 수고하고 진력해야 할 것을 교훈해 주었습니다.

수고한다는 말은 고생을 달게 받는다는 뜻입니다. 진력한다는 말은 있는 정성을 모두 기울인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참으로 올바르게 섬기기 위해서 얼마만큼 고생을 달게 받았으며 있는 정성을 쏟아 생활을 해 온 것입니까? 깊이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1. 네가 가르치고 명하라

바울은 디모데에게 11절에서 ‘네가 이것들을 명하고 가르치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성도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경건 생활에 대하여 가르치고 명할 책임이 있음을 알려 주었습니다.

가르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명령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리에게 권명하시는데 그 권면 자체가 하나님의 명령인 것입니다. 목회자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다른 것으로 가르치면 안됩니다. 세상 교훈으로 가르치거나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로 가르치면 안됩니다. 교회에 와서만이 들을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의 종들이 권면하거나 권계 할 때는 때로는 하나님의 권위로써 명령하는 자세도 있어야 합니다.

2.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라

바울은 디모데에게 12절에서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목회자의 나이가 어리면 업신여김을 받기가 쉽습니다.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라는 말은 스스로 목회자의 권위를 세우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 방법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일을 두 가지로 알려 주었는데 하나는 믿는 자에게 본이 되라는 말과 권하는 일과 가르치는 일에 착념하라는 것입니다.

3. 믿는 자에게 본이 되는 일

바울은 디모데에게 믿는 자에게 본이 되라고 했습니다. 주의 종은 마땅히 믿는 자들에게 본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여기서 본이 될 수 있는 일에 다섯 가지를 지적했습니다.

(1) 말에 본이 되어야 합니다. 목회자의 말은 목회에 중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말에 본이 되지 못하면 사람으로부터 신임을 얻을 수 없으며 주의 종이 신임이 상실될 때 목회자로서 성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종들은 입에 파숫군을 세워야 하며 늘 말에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조금만 말을 삼가고 다투는 말을 삼가야 합니다.

(2) 그의 행실에 있어서 본이 되어야 합니다. 보편적인 생활에 나타나는 행실이 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언행에 인격적인 요소가 갖추어져 있어야 합니다. 행실과 말이 일치되도록 그 생활에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3) 사랑에 본이 되어야 합니다. 설교의 주제는 사랑입니다. 사랑을 전하는 자에게 사랑이 없거나 사랑으로 양 무리들을 다스릴 수 없다면 목회자의 자격에 결격이 되는 것입니다.

(4) 믿음에 본이 되어야 합니다. 목회자는 믿음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양 무리들은 언제나 목자의 믿음을 본 받기 때문에 믿음이 없으면 양 무리들에게서 믿음을 심어줄 수 없습니다. 목회자가 확실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면 양 무리들이 흔들리게 됩니다.

(5) 정절에 있어서 본이 되어야 합니다. 이 문제는 범위가 넓습니다. 신앙의 정절, 맘의 정절 등이 포함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13절에서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고 했습니다. 읽는 일이란 성경을 읽는 일로 성경에 대한 연구를 의미합니다. 목회자는 읽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으므로 자질을 향상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권하는 일은 권면을 의미합니다. 성도들에게 늘 하나님 말씀으로 권면하여 그 권면대로 살 수 있도록 이 일에 착념하라고 한 것입니다. 가르치는 일에 착념하라고 했습니다. 성도들에게 늘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훈하며 인도해야 합니다.

결론 : 성도들의 생활보다 목회자의 생활은 더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힘들고 정신적 부담이 큽니다. 이 사실을 양 무리들은 알아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서는 근심으로 말고 즐거움으로 감당하게 하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9) 모든 일에 전심 전력하라

(디모데전서 4:14-16)

바울은 디모데에게 장로회에서 안수 받았을 때 예언으로 받는 것을 기억하고 조심하며 자신의 신앙생활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내 보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안수 받을 때에 받은 은사

디모데는 장로회에서 목사로서의 안수를 받은 사실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 생활을 하면서 교인으로써 약간의 교회 정치는 알아야 합니다. 자기 교회 목사의 소속이 어디냐에 대한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목사는 그 교회 소속이거나 당회 소속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청빙을 하지만 노회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목사는 노회에 소속해 있습니다. 교회에서 마땅치 않아도 개교회 임의대로 목사를 처리할 수 없습니다. 언제나 노회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목사가 교회 시무를 그만 둘 때도 노희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목사는 기름부음을 의미하는 안수를 받아야 하는데 이 안수를 노회에서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14절에서 디모데에게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란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장로의 회란 오늘날 노회와 같은 교회 기관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목회자는 노회에서 안수 받을 때, 안수기도를 받고 권면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울은 ‘예언으로 말미암아 받는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조심 없이 말라고 한 것입니다. 그 때 말씀을 통해서 권면하며 일려 주는 그 말씀을 조심 없이 흘러 버리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2.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라

바울은 15절에서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라고 했습니다. 목회자는 교회를 위해 참으로 막중한 사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지 않으면 안돼는 것입니다.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목회자는 성도들에게 진보를 보여야 합니다. 진보가 없으면 답보 상태에 머무르기 때문에 신앙적 자극이나 격려를 줄 수 없습니다. 생활, 신앙, 모든 일에 뚜렷한 향상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바울은 16절에서 중요한 말씀으로 디모데에게 격려해 주고 있습니다. ‘이것을 향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고 한 말씀이 그것입니다. 목회자의 무거운 책임이 나타나 있습니다. 먼저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고 한 것입니다. 듣는 자란 양 무리들을 말합니다. 양 무리의 온전한 구원의 역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가르치는 목자의 책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만약 목자가 본이 못되며 읽는 일, 권하는 일, 가르치는 일에 전심 전력을 다하지 못하여 교인들을 실족시킨다면 그 책임을 목자에게 돌리시겠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목자는 이 같은 책임감에 철저하여 목회를 해야 올바른 목회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고 하신 말씀대로 목회자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도 이런 일은 필요하다고 말씀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악인에 대한 심판에 있어서도 그 악인에 대한 책임을 그를 양육해야 할 자에게 먼저 그 책임을 묻는다고 경종하신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겔3:18절에서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케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네가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교회에서 이처럼 목회자가 전심전력을 다하여 하나님의 교회를 섬길 때 양 무리들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목자를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목자가 가르치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배워 마음에 깊이 간직해야 합니다.

결론 : 하나님의 교회는 목자와 양 무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연결되어 서로 협력하여 교회를 세워나가야 합니다. 목자는 자신이 맡은 책임을 완수하며 양 무리들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순종으로 따라야 합니다. 이런 관계로 교회가 운영될 때 교회는 은혜롭게 성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5장 (20 -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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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양떼들에 대한 목회자의 태도

(디모데전서 5:1-16)

바울은 디모데에게 목회자가 교회에서 양 무리들에 대한 태도에 대해 여러 가지로 자세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교회에는 신분으로나 나이로나 각양각층의 사람들이 모여서 한 소망 가운데서 사랑으로 연결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집결 체입니다. 목회자는 이들을 지혜롭게 대하고 권면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1. 여러 계층에 대한 목회자의 태도

바울은 늙은이, 젊은 이, 늙은 여자, 젊은 여자 등 다각도로 목회자가 상대해야 할 계층의 사람들에 대하여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① 늙은이들에게 대하여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비에게 하듯 하라’고 했습니다. 나이가 많은 분들을 대할 때 조심해야 할 점은 꾸짖지 말라는 것입니다. 늙은이들은 노염을 잘 타고 이해심이 부족합니다. 그런 분들에게 젊은 목회자가 꾸짖는 일은 좋은 목회 방법이 아닌 것입니다. 그들에게 오히려 아비께 하듯 하라고 했습니다. 부모를 꾸짖는 자식은 없습니다. 대하듯 하라는 말은 예절과 예의를 지키라는 말입니다. 마음으로 우러나오는 존경심과 어른들에게 대하는 공손한 마음으로 깨닫게 해 주어야 효과가 있는 것입니다.

② 젊은이들에게는 형제에게 하듯 하라고 했습니다. 사랑으로 권면하고 너그럽게 이해해 주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목회자는 정죄하는 것이 능사가 아닙니다. 성도들로 자신들의 행실에 대하여 회개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하며 깨달아 바른 신앙 생활에 들어갈 수 있도록 선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③ 늙은 여자들에 대해서 어미에 대하듯 하라고 했습니다. 어른으로 존대해야 하며 어머니 같은 존경과 정감을 가지고 사랑으로 권고하며 권면해야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젊은 여자들에 대해서는 자매에게 대하듯 하라고 했습니다. 일절 깨끗함으로 대할 것을 명했습니다. 여기서 깨끗하라는 말은 자미에게 대하듯 하라는 말씀에서 음란한 생각이나 행실을 삼가라는 뜻으로 풀이됩니다. 목회자가 주의할 점은 돈과 명예와 여자에 관한 끼끗함에 있습니다. 돈이나 명예나 여자에게 걸림이 되면 목회자의 치명상이며 특히 여자 문제에 대해서는 돌이킬 수 없는 치명상을 입게 됩니다. 그러므로 젊은 여자들을 대할 때는 신중히 하며 절제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젊은 여자들에게 갖는 사랑은 자매와 같이 깨끗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친근한 마음을 가지되 깨끗한 마음에서 주변 사람들에게 오해가 없도록 본인에게도 오해를 주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2. 과부들에 대한 목회자의 태도

3절 이하에서 바울은 과부들에 대한 태도에 대하여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 참 과부인 과부를 경대하라고 했습니다. 경대라는 말은 존경하는 마음으로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혹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을 때는 그들에게 효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한다고 했습니다. 효에 대하여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고 했습니다. 과부들로 교회나 다른 성도들에게 폐를 끼치게 하지 말고 그 가족들로 봉양 할 수 있도록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과부를 둘로 구분해서 말씀해 줍니다. 첫째로 참 과부인 과부에 대하여 9절에서 나이 60이 넘은 과부라고 했습니다. 다음에 한 남편의 아내였던 여자라고 했습니다. 다음에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는 여자라고 했습니다. 이들 과부들 중에도 자녀를 양육하고 나그네를 대접하며 성도를 섬기는 겸손한 자세와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하는 일과 모든 선한 일을 좇은 과부에 대하여 바울은 경대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과부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며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로 생활하는 여자라고 칭찬했습니다.

젊은 과부에 대해서 바울은 과부의 명단에 기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과부의 명단이란 평생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고 홀로 남은 생애를 주를 위해 헌신할 것을 약속한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육체의 정욕 때문에 혹 시집가게 되는 경우도 있을 터인즉 그렇게 되면 그들의 서원을 이루지 못함으로 그리스도를 배반하게 된다고 경종한 것입니다.

또 이런 과부들이 하는 일에 대하여 게으름을 익혀 집집에 돌아다니며 망령된 폄론을 한다고 한 것입니다. 폄론이란 남의 비밀을 들추어내거나 다른 사람을 헐뜯는 것을 말합니다. 젊은 과부들은 시집가서 아이를 낳고 집을 잘 돌보라고 했습니다. 젊은 과부들은 수절하는 것보다 재혼하는 편이 좋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가정 일에 충실한 여자가 될 것을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 : 참과부는 그 당시 교호에서 전적으로 도와주었으므로 젊은 과부도 교회의 도움을 받으려 했지만 친척이 돌보고 교회로 짐 되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의 권고를 깊이 새겨야 할 것입니다.


(21) 장로들에 대한 다스림

(디모데전서 5:17-20)

바울은 17절부터 교회의 장로들에 대한 예우와 송사에 대하여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장로는 교회에서 가장 높은 지위에서 교회를 다스리는 지도자들이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교회의 예우와 또 그들에 대한 법적 소송 문제는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1. 잘 다스리는 장로의 예우

장로의 직무는 한 마디로 말해서 교회를 잘 다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장로는 교회의 행정적 치리적 최고기관인 당회의 조직원입니다. 그러므로 당회원의 신앙과 그들의 충성은 그 교회 발전의 척도가 되는 것입니다. 잘 다스린다는 말은 영적인 면에서 심방을 하는 일, 성도들을 위로하는 일, 치리 하는 일 등 이 모든 일에 모범이 되어야 하며 성실하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장로들은 교회에서 교회 행정적인 모든 일을 장악하고 처리하기 때문에 사심이 없이 정직하고 타당성 있게 일을 해야 하며 신앙적으로 하자가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장로교 헌법에 있어서 장로직은 교회의 취고의 직분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17절에서 장로를 두 가지 부분으로 나누고 있다는 점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하나는 잘 다스리는 장로들이라고 했습니다. 이들에 대하여 바울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장로는 존경받을 만한 직분 자들입니다. 오랜 신앙생활로 덕망을 쌓았으며 교회에서 오랫동안 헌신하고 충성한 사람들이며 모든 성도들에 의하여 검증을 받고 선출되었기 때문에 마땅히 존경을 받아야 할 자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배나 존경할 자로 알라고 했습니다. 목회자들도 장로들에게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의견을 존중해 줄줄 알아야 합니다.

다른 또 하나의 장로의 직분에 대하여 바울은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이라고 했습니다. 장로 중에는 다스리는 직의 장로와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장로의 직이 있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장로교 헌법에서는 일반직 장로를 치리 장로라고 부르고 목회직 장로를 목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런 직분을 가진 목회자들에게 교회는 잘 다스리는 장로들보다 ‘더 할 것이니라’고 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잘 다스리는 장로직보다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 는 목회자들을 그들보다 더욱 존경할 자로 알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고 하였다는 성경을 인용하면서 그들의 생활에 대한 전적인 책임을 교회는 져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전9:9절에서 ‘모세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를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전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고 하셨다는 말씀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일하는 소에게 먹을 것을 먹이면서 일을 시키라는 뜻인데 바울은 이것을 교회를 담임한 목회자들의 경우와 연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마10:10절에서 예수님은 12제자들을 불러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저 먹을 것을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복음을 전하는 자는 복음으로 살리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는 복음을 전하는 목회자의 생활비를 최대한도로 보장하여 담임목사로 생활로 인하여 목회운영에 지장이 없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2. 장로들에 대한 송사

다음에 바울은 19절에서 교회의 장로들에 대한 송사에 대하여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송사라는 말은 재판을 의미하는데 이 재판은 교회 안에서의 재판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비를 가리는 특별한 재판입니다. 교회의 재판국은 교회의 치리회를 말하는데 오늘날 당회가 이 구실을 하고 있습니다. 송사의 안건이 고소로 들어왔건 인지된 사건으로 취급하건 일단 송사가 들어오면 당회에서 즉각 재판국을 설치하여 재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때 장로들의 건은 보다 신중히 취급하라고 했는데 두 세 증인이 분명할 때 송사를 받지만 증거가 불충분하거나 증인이 분명치 않을 때 그 같은 송사를 받아 드리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장로의 직분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며 교회에 사탄의 어두운 권세로 인하여 혼란을 초래하지 않기 위한 신중한 조치인 것입니다.

결론 : 그리고 범법자들에게는 교회에서 의당히 꾸짖어 나머지 사람들로 두려워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장로는 교회의 핵심적 직분입니다. 그 책임을 잘 이행해야 합니다. 존경받을 자로 존경해 주어야 합니다. 특별히 죄를 범해서는 안되며, 혹 그들에 대한 송사가 있어도 신중히 처리해야 한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는 장로나 성도들이나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지체를 이루는 한 지체로써 허로 사랑하고 협력하며 하나님의 교회를 자 세워나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22) 바울의 엄한 명령

(디모데전서 5:21-25)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가 목회 생활을 하면서 반드시 지켜야 할 몇 가지 일에 대하여 엄히 명했습니다. 첫째로 아직까지 바울이 말한 이 모든 교훈을 지켜 한편으로 치우치지 말 것과 다음에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 것과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하지 말 것, 자기자신을 지켜 정결케 하라는 것 등입니다.

1. 택하심을 받은 천사

바울은 디모데에게 명할 때 하늘 보좌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그 앞에서 명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와 택하심을 받은 천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천사들 중에는 택하심을 받은 천사와 택하심을 받지 못한 천사들도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을 위한 거룩한 일을 위한 직분 자로 선택받은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히1:14절에서 ‘모든 천사는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를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택 천사는 사탄의 무리가 되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 되었고 하나님은 또 이들을 통해서 당신의 구원 사역을 위한 악한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오묘하신 비밀로써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로 나타난 것들입니다.

2. 편견 없이 하라

목회자는 목회하는 알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이나 권면하는 일에 있어서 편건이 없어야 합니다. 누구에게는 관대하고 누구에게는 인색하거나 차별을 두지 말고 말씀에 따라 공정하고 공평하게 처리해야 할 것을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편견은 파당을 일으킬 염려가 있으며 한편 쪽 사람들에게 서운함이나 노여움을 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바울은 이 같은 교훈을 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에 바울은 아무 일에든지 편벽되이 하지 말라고 명했습니다. 편벽되다는 말은 한쪽으로 지나치게 기우는 행동을 말합니다. 목회자의 편벽은 고집이 되어 분열을 가져오기 쉬운 것입니다. 목회자는 교회를 돌보는 일에 있어서 언제나 중용의 도를 걸어가야 합니다. 성도들은 동일한 양 무리들로 동일하게 대하여 동일한 수준과 배려로서 상대해야 하며 무슨 일에나 한 곳으로 지나치게 치우치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3.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라

바울은 디모데에게 아무에게나 경솔하게 안수하지 말라고 명했습니다. 안수란 말은 직분자의 선택을 말하며 장로나 집사 직분을 세우는 일을 말합니다. 3장에서 바울이 말한 자격을 잘 감안하고 그들을 신앙적으로 시험해 본 후, 결격 사유가 없을 때, 안수하여 세우라는 말입니다.

4.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하지 말라

다음에 바울은 목회자는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하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경계했습니다. 여기서 간섭한다는 말은 그 죄에 개입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목회자는 죄를 책망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지 결코 죄에 동참하거나 죄에 간섭하는 일로 덕을 상실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죄에서 자신을 지켜 흠이 없고 정결한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결론적으로 모든 은밀한 것은 결국은 드러난다고 했습니다. 드러나는 일은 악행 뿐 아니라 선행도 밝히 드러난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드러나는 일에 있어서 바울은 사람에 따라 일정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의 죄는 밝히 드러나 먼저 심판에 나아가고 어떤 사람들의 죄는 그 뒤를 좇는다’고 한 것입니다. 그 뒤를 좇는다는 말은 늦게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결국엔 모두 드러나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고 했습니다.

죄가 드러나지 않았다고 회개하지 않거나 그 죄에 책임을 회피하면 안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에 감사하면서 두려운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회개하여 그 죄 문제를 해결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결국은 드러나 더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때가 이르면 거두리라’고 하셨습니다. 악행 뿐 아니라 선생 역시 동일한 방법에 의해 하나님에 의해 밝히 드러나 그 보상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뢰하고 열심히 계속해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 바울은 디모데에게 약간의 포도주를 마실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디모데에게 자주 일어나는 병이 있고 또 비위가 좋지 않았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술은 몸에 해롭고 결코 권장할 것이 아니지만 비위나 자주 나는 병의 치료를 위해서 치료약이 없었던 그 당시에는 부득이한 치료 방법으로 포도주를 마실 것을 권면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을 우리들 생활의 기본으로 삼고 살아가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6장 (23 -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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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고용주와 피 고용주와의 관계

(디모데전서 6:1-5)

그리스도인의 사회 생활에는 복잡한 관계에 얽혀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목회자는 하나님의 뜻을 잘 깨달아 양 무리들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면 신앙생활에 차질을 가져올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종들과 상전들 간의 관계에 대하여 이곳에서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1. 종들에 대한 처신

바울은 ‘무릇 멍에 아래 있는 종들은 자기 상전들을 범사에 마땅히 공경할 자로 알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상전과 종들간의 관계를 두 경우를 들어 각기 언급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상전이 불신자요 종은 신자의 경우입니다. 지금도 사회 각계 각층의 직장의 경우, 이런 관계에 놓여 있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경우, 인간 사회에서는 주인과 노예 또는 종업원이나 하급 직원이지만 하나님 편에서 볼 때는 정반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상전은 사탄에 속한 멸망의 자식이요 종은 오히려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회 질서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요, 하나님이 정하신 것입니다. 이런 경우, 종은 자기 상전을 섬기는 일에 자기가 예수를 믿고 자유한 몸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생각에서 상전에 대하여 경히 여기는 자세를 취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종은 언제나 자신의 위치를 지킬 줄 알아야 한다는 사실을 권면해 주고 있습니다. 범사에 마땅히 공경할 자로 알라고 했습니다. 반항하거나 미워하거나 경시하는 태도를 가질 것이 아니라 범사에 마땅히 공경할 자로 알고 순종하라고 한 것입니다.

인간의 제도나 사회 질서를 파괴하거나 기존 질서를 인간적 폭력 수단으로 변경시키는 것이 기독교가 아닙니다. 복음으로 모든 인간의 심령을 변화시켜 그 속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므로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다음에 믿는 상전의 경우를 말하고 있습니다. 종도 믿는 사람, 상전도 믿는 사람이라면 그들의 영적 신분은 형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같은 경우는 종과 상전과의 관계를 어떻게 유지해야 할 것입니까? 바울은 형제라고 경히 여기면 안 된다고 경종해 주고 있습니다. 종이 일에 나태하거나 속으로라도 경히 여기거나 원망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오히려 ‘더 잘 섬기게 하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불신자를 상전으로 섬기는 경우보다 더 잘 섬기라는 말은 종이 섬기는 일로 유익을 받는 자가 불신자가 아니라 형제인 상전이 기 때문에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그 상전들은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 같은 상전과 종들간의 원리는 현대 사회의 고용주와 노동자와의 관계에도 연관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 믿음이 있는 종이 불신자의 상전 앞에서 종으로서의 책임을 다 수행치 못하면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게 되며 그 이름에 욕을 끼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너는 이것들을 가르치고 권하라’고 했습니다.

2. 다른 교훈에 대한 경고

바울은 3절에서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 할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다른 교훈이란 바른 말 곧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대한 교훈에 반하는 것임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이런 다른 교훈에 대하여 4장에서 언급해 준바 있습니다. 이들의 영적 배후자는 귀신이라고 했는데 이들은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는 등의 교훈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경종해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교훈을 철저히 지킬 것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착념이란 말은 온 생각과 마음을 그곳에만 집착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만약 그리스도인이 이런 교훈에 착념치 아니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것인가? 이 일에 대하여 바울은 몇 가지로 경종해 주고 있습니다.

교만해 진다고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교만은 하나님의 교훈에서 떠날 때 생기는 것입니다. 변론과 언쟁이 생긴다고 했습니다. 인간의 지혜와 지식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충돌하게 됩니다. 그 결과 교회 안에 투기 분쟁 훼방 악한 생각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사람의 마음을 부패하게 하고 진리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경건의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게 된다고 경종한 것입니다.

결론 : 그리스도인은 무엇보다 바른 교훈에 집착하며 언제나 어느 경우에나 그 교훈에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24) 지족하는 마음

(디모데전서 6:6-8)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말씀과 그 교훈에 착념하려면 지족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6절에서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며 경건이 큰 이익이 된다’고 한 것입니다. 지족이란 말은 자족이란 말과 비슷합니다. ‘자기 분수를 알아 족한 줄을 안다’는 뜻입니다. 쉽게 말하면 스스로 만족하는 마음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경건 생활이란 하나님을 잘 섬기는 생활인데 그리스도인이 지족하는 마음을 가졌다면 하나님을 섬기는 경건 생활에 큰 이익이 된다고 뜻입니다.

1. 지족하는 마음이란 무엇인가?

그러면 지족하는 마음 곧 자족하는 마음이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7절에서 그 해답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 하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그대로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만족하는 생활의 기준을 두 곳에 두고 있습니다. 무엇이냐? 먹을 것과 입을 것인데 이것들이 있은 즉 족한 줄로 알라는 것입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은 자족하는 생활에 필수적인 최저조건입니다. 우리의 한 생애가 이 세상에서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인가 우리는 아무 것도 가지고 갈 수 없는 곳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 생활은 나그네 생활입니다. 나그네 생활은 나그네로 살아가야 할 조건만 채워지면 만족인 것입니다. 바울은 그것이 먹을 것과 입을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잠30:7절에서 야게의 아들 아굴은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먹이시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이 기준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신앙인 다운 생활의 기준인 것입니다. 이 조건만 갖춘다면 그것으로 만족한 줄로 여기는 생활이야말로 성경이 우리에게 교훈해 주시는 자족하는 생활입니다. 이 이상 지나친 것은 탐심이라고 했습니다.

욥은 부자였지만 그 마음속에는 자족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은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들어갈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 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 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 지어다’고 했습니다.

2. 자족해야 할 이유

우리가 자족해야 할 이유는 우리는 세상에 올 때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경영하는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된 것뿐입니다. 다만 우리에게 헛되지 아니한 것 한자가지가 있으니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영생을 유업으로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 아무 것도 가지고 가는 것도 없습니다. 내가 세상을 떠날 때 하나님께서 나로부터 취하시는 것은 오직 내 영혼뿐입니다. 그 영혼이 하나님 앞에 가서 과연 어떤 선고를 받을 것이냐? 하는 문제만이 중요한 일인 것입니다. 이것을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자족하는 생활을 즐겨 할 수 있지만 이 같은 일에 눈이 어두운 사람은 헛된 세상일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3. 자족의 비결

우리는 어떤 생활 방법으로 자족하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인가? 어떤 방법으로 자족하는 생활이 가능한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한 성경적인 해답을 얻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에 대하여 마6:31절에서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지 말라 이 모든 것들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 · · ·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이처럼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염려를 주께 맡기고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이야말로 자족하는 생활을 할 수 있는 성경적인 방법인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자기 인생의 제일 목표를 하나님의 영광에 두어야 합니다. 그래야 경건 생활이 가능한 것입니다. 잠15:16절에서 ‘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 보다 나으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결론 : 인생은 나그네길입니다. 나그네는 본향이 있습니다. 나그네는 본향에 가는 것이 소망입니다. 예수님은 이 일에 대하여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않음 같이 너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자족하는 마음이 없으면 이미 나그네가 아니요 이 땅에 자신의 영원한 집을 세우려는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이 땅에는 우리에게 영구한 도성이 결코 없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25) 부하려 하는 자들의 시험

(디모데전서 6:9-10)

바울은 자족하는 생활이 그리스도인의 경건 생활에 큰 이익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 후, 세상 것에 마음을 두고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재물에 관심을 두는 사람들의 영적 생활의 위험성에 대하여 놀라운 경종을 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진다’고 했습니다.

1. 부하려는 하는 자들의 해

그러면 부하려 하는 자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사업이나 자기 생애의 모든 일을 경영하는 일에 있어서 그 제일의 목적을 물질적 이익에 두고 있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이런 사람들은 돈의 위치를 자기 인생에서 가장 윗자리에 둔 사람들로 이런 사람들의 신앙은 입으로는 주님을 부르겠지만 하나님보다 실상인즉 돈을 더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 나름대로는 자기가 굉장한 믿음의 사람으로 자부할는지 모르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중심을 살피시기 때문에 자기의 판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판단에 따라 평가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사람들의 결실과 소득은 무엇인 것입니까?

첫째로 시험에 들게 된다고 했습니다. 돈을 벌려고 애를 쓰다가 그보다 더 큰 것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시험에 들게 되어 신앙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돈에 눈독을 드리는 사람들은 비록 그 사업이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사업인 줄 알면서도 돈에 이끌려 사업에서 손을 끊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일을 지킬 수 없는 사업인줄 알면서도 그 사업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불법한 방법인줄 알면서도 가 사업을 운영해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겹치게 되면 말할 수 없는 시험의 수렁 속에 빠지게 되어 결국은 그 수렁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잠23:4절에서 이르시기를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라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날개를 내여 하늘에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의 눈에 비취는 돈이란 사실상 허무한 것입니다. 애쓴다고 돈이 벌리는 것도 아니며 돈이 벌렸다고 그 돈이 그 사람의 소유로 쓰여질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한평생 애만 쓰고 많은 돈을 벌기는 했지만 자기 자신은 얼마 써보지도 못하고 죽는 사람들이 어디 한 두 사람입니까?

다음에 올무에 빠지게 된다고 했습니다. 새 사냥꾼은 새를 잡는 일에 올무를 놓고 잡습니다. 마귀는 인생 길에 올무를 놓아 걸려 넘어지게 합니다. 딤전3:7절 말씀을 보면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고 했습니다. 마귀는 부하려는 자들의 앞길에 올무를 쳐 놓고 있다가 낚아채면 그 올무에 걸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패역한 자들을 징계하시는 하나님의 올무도 있습니다. 렘50:24절을 보면 ‘내가 너를 잡으려고 올무를 놓았더니 네가 깨닫지 못하고 결렸고 네가 나 여호와와 다투었으므로 만난바 되어 잡혔도다’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올무에 잡힌바 되면 하나님이 풀어 주시기 전에는 그 올무에서 빠져 나올 길이 없는 것입니다.

부하려는 자들이 이 같은 올무에 빠지는 이유는 속히 부자가 되려는 욕심 때문입니다. 돈은 조금씩 쌓아 올려야 제대로 모을 수 있는 것입니다. 적은 소득으로부터 시작하여 순서와 질서를 따라 모아져야 정상적인 부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일에 합당한 노력이 따라야 하고 정성이 따르고 정직하고 올바른 방법의 경영이 따르고 하나님의 축복이 그 위에 임해야 부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잠28:20절에서 ‘충성된 자는 복이 많아도 속히 부하고자 하는 자는 형벌을 면치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세 번째로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진다고 했습니다. 정욕이란 어리석고 해로운 것입니다. 부자가 되려는데 온 마음을 쏟는 사람들은 이 해로운 정욕의 포로가 되어 버립니다. 바울은 결론적으로 부하려는 자들의 결과에 대하여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침륜이란 도덕적으로 인간 이하의 자리에 이르게 된 것을 의미하며 멸망이란 생명의 상실을 의미합니다.

결론 : 그러면 그리스도인은 부자가 되어서는 안돼는 것입니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첫째로 그의 인생관이 뚜렷해야 합니다.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제일의 목적으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음에 돈을 버는 일에 반드시 하나님의 방법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주일을 잘 지킬 일, 십일조를 철저히 하는 일,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철두철미하게 헌신하고 사명을 감당하는 일 등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복을 주시되 쌓을 곳이 없도록 주십니다. 여러분들은 부자가 되기에 힘쓰지 마시고 남은 생애를 주를 위해 자신의 생애를 바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6) 하나님의 사람이 할 일

(디모데전서 6:11-12)

바울은 디모데에게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라고 불렀습니다. 디모데가 특별히 목회의 사명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이처럼 부른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들은 모두 하나님의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 말의 뜻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으로 소유된 사람들을 가리킨 말입니다.

1. 하나님의 사람이 해야 할 일

바울은 하나님의 사람이 해야 할 일에 대하여 11절에서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사람들이 피해야 할 일과 취해야 할 일에 대하여 구분해서 말씀해 줍니다.

피해야 할 일에 대하여 이것들을 피하라고 했습니다. 부하려는 마음과 돈을 사랑하는 마음을 피하라고 한 것입니다. 부하려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졍욕에 떨어질 것이기 때문에 피해야 합니다. 그리고 돈을 사랑하는 일은 일만 악의 뿌리가 되기 때문에 피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들을 사랑하고 욕심을 가지면 끝내는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되며 결과적으로 믿믐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찌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해야 할 일에 대하여 바울은 몇 가지로 말씀해 줍니다. 의를 좇으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의를 위해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의의 표준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 기준을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에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경건을 좇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올바른 도리에 마음을 쓰고 그 일에 힘써야 합니다.

믿음을 좇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은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의 전부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믿음을 저버리면 생명의 길을 포기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사랑을 좇으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주님이 주신 새로운 계명입니다. 율법의 모든 계명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제 우리에게 아무런 구속력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새로운 계명이 주어졌습니다. 사랑의 계명인 것입니다. 이 계명은 그리스도인들을 사랑 안에 얽매이게 할 것입니다.

인내를 좇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인내가 있어야 합니다. 인내란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는 일에 필수적인 조건입니다. 우리들이 씨앗을 뿌린 결실은 인내에서만이 거두어 드릴 수 있습니다.

온유를 좇으라고 했습니다. 온유는 자신이 낮아지고 다른 사람을 섬기며 겸손할 때 나타나는 것입니다.

좇으라는 말은 쉬지 말고 부지런히 따라가야 될 것을 의미합니다. 흘러가는 물이 쉬면 곧 더러워지고 썩습니다. 달려가는 달리기 선수가 쉬면 면류관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람들인 그리스도인들이 의, 경견, 믿음, 사랑, 인내, 온유를 좇지 아니하면 신앙이 퇴보하게 되고 결국 부하려는 마음과 돈을 사랑하는 미혹을 받게 될 것입니다.

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바울은 12절에서 디모데에게 이르기를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생애는 하나의 선한 싸움의 연속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싸움에 승리자가 되어야 합니다. 싸움을 싸우라고 한 것은 싸움에 지지 말고 이기라는 뜻입니다.

엡6:12절에는 이 싸움의 대상이 나옵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에게 대함이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 싸움에 이기려면 먼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합니다. ‘진리로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부치고 평안의 복음의 신을 신고 믿음의 방패와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고 한 것입니다.

이 싸움은 싸우다가 쉬다가 하는 싸움이 아닙니다. 계속 싸우지 않으면 이기기 어려운 싸움입니다. 이 싸움은 적에게 틈을 보여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이 싸움은 공격적이라야 합니다.

3. 영생을 취하라

다음에 바울은 영생을 취하라고 했습니다. 앞에 있으니 뒤따라 좇아가 잡으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빌3:12절에서 이 일에 대하여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뤘다고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고 했습니다.

결론 : 그리스도인의 푯대는 오직 그리스도입니다. 세상에 얽매이게 하는 이 모든 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아야 합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영생을 취해야 하는 것입니다.


(27) 바울의 명령

(디모데전서 6:13-16)

바울은 디모데에게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권위로써 디모데에게 명령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까지 점도 없고 책망할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말한 명령이란 아직까지 바울이 일러준 교훈에 대한 순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 나타나실 때까지 점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재림은 막연한 일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약이 이르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신다고 했습니다.

1. 하나님의 속성

바울은 주님의 재림을 언급하면서 이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하여 하나님의 속성을 밝혀 주면서 그의 약속의 신실성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15절에서 하나님은 복 되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복 되시다고 하는 말씀은 하나님은 모든 복의 창조자이시며 그 복을 누리게 하실 수 있는 분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은 근본적으로 복되신 분이십니다.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복되시지 않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의 우리의 삶은 그 자체가 저주가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만물에게 복을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의 복되심이 오늘날 그의 창조하신 만물에 미치고 있기 때문에 아름다운 질서가 유지되고 있으며 앞으로 그의 백성들은 이 복되신 하나님의 모든 축복을 천국에서 영원히 누리게 될 것입니다.

다음에 바울은 하나님께 대하여 ‘홀로 한 분이신 능하신 자’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며 하나님 외에 다른 존재가 없다는 뜻으로 하나님의 자존하심과 영원하심과 만물의 주관자이심을 나타낸 말입니다. 지금 이 세상에 존재하는 만물은 오직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 안에 존재하고 있으며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 존재도 생존할 수도 없으며 존속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은 어느 누구의 도움이 없이 스스로 모든 일을 결정하시며 집행하시는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이 바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것입니다.

다음에 바울은 하나님께 대하여 ‘만 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라’고 했습니다. 만 왕의 왕이시란 말은 그 분 위에 왕이 없고 그 분 외 만유의 지배자가 있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는 군왕이 많으며 앞으로 하나님 나라에서 왕권의 상급을 받을 성도들도 많이 있지만 하나님은 그들 왕위의 왕으로 군림하시는 분이심을 말씀해 주십니다. 이런 분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16절에서 바울은 ‘오직 그 분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처음과 나중이 되신 분이십니다. 이 같은 표현은 오직 하나님께만 영원하심이 있고 그 분은 생명 그 자체이시기 때문에 그에게 죽음이란 존재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만물은 그의 창조물들이며 그의 창조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에 하나님 외 모든 존재는 한정적인 존재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나타내는 이름으로 하나님은 자기 이름을 ‘여호와’라고 하셨습니다. 이 여호와란 이름의 뜻은 스스로 존재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분은 자존 자이시며 생명이 되시며 그 생명을 만물에게 공급해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사망이 그에게 미칠 수 없는 것입니다.

다음에 바울은 하나님께 대하여 그 분은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빛에 거하신다는 말은 하나님은 그 빛 자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빛은 그의 영화로움과 거룩하심과 의로우심의 표현입니다. 가까이 가지 못한다는 말은 죄인들에게 해당됩니다. 죄인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빛에 견딜 수 없습니다. 썩어질 육체나 혈과 육으로는 가까이 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이 입으신 부활의 몸으로 하나님의 영광으로 옷 입으면 거룩하신 하나님과 한 가족으로 함께 지낼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계21:3절에서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신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다음에 바울은 하나님께 대하여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라’고 했습니다. 요일1:18절에서 말씀하시기를 ‘원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 보기를 원했지만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를 보고 살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보는 것이 아버지를 보는 것이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피조물들은 그 분에게 존귀와 영광과 영원한 능력을 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이런 분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며 우리는 이 분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28) 부한 자들에 대한 교훈

(디모데전서 6:17-21)

부한 것은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것이지만 부와 구원과는 서로 융화가 잘 안 된다고 성경은 말씀해 줍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가하면 약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는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약5:1-3절에서는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쓸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어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고 했습니다. 대단히 두려운 경종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께서 많은 물질적 축복을 늦추시는 이유는 아마 이런 이유에서가 아닌가 여겨집니다.

1. 부한 자들의 생각

재물이 많은 사람들의 신앙생활은 어려운 점이 많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로는 돈이 많으면 신앙생활하기가 얼마나 멋있고 재미있겠는가고 여기겠지만 실상인즉 부자일수록 괴로움이 많은 것입니다. 그 이유는 지난날 가난했을 때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마음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가난했을 때는 이제 자기가 부자가 되면 더욱 예수를 잘 믿고 하나님께 철저하게 십일조 생활도 하며 교회를 위해서 많은 것으로 헌신하며 충성하며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도 많은 사업을 할 것이라고 장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 부자가 된 후에는 돈에 대한 욕심이 더 생겨 가난했을 때의 약속은 허사로 돌아가고 더욱 인색해 지고 믿음도 더욱 퇴보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을 보면 가난한 처지에 있었던 사람들이 주님을 잘 섬겼던 사실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가난하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하셨습니다. 가난한 자를 택하여 부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신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가난한 사람들과는 뗄 수 없는 연관 관계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도들이나 성도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한결같이 공통점이 있다면 가난한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실패 중에 있는 사람, 병중에서 고통을 받는 사람, 모든 일에 절망적인 사람들이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으며 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었으며 그들이 주님을 섬기는 일을 했습니다.

재산이 부요해지면 대개의 경우, 그의 믿음이 세속화되며 마음이 부요해져서 하나님과는 거리가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세대의 부한 자들에게 명하라고 한 것입니다. 모든 주의 종들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에게 디모데에게 명한 것을 경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2. 부한 자들에게 명할 일들

① 마음을 높이지 말라고 했습니다. 마음이 높다는 말은 교만을 말합니다. 돈이 생기면 사람이 교만해지기 마련입니다. 돈이 많으면서도 겸손하다면 그 사람은 참으로 훌륭한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②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라고 했습니다. 돈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악의 뿌리인 것입니다. 재물에 소망을 두는 사람은 하늘의 소망이 어두워집니다. 재물은 정함이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축복을 누리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눈을 세상에 있는 물질에 돌리지 말고 하나님께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③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라고 했습니다. 선한 일이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부하든지 가난하든지 항상 그의 생활 가운데서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선한 일과 선한 사업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이 왜 나에게 재물을 후히 주셔서 부자가 되게 하셨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많이 준 자로부터 많은 것을 거두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많이 심을 자에게 많은 것을 거두게 하실 것인즉 많이 받았다면 많이 심어야 하는 것입니다.

④ 나눠주기를 좋아하고 동정하는 자가 되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가진 자신의 소유로 구제하는 일을 많이 하라는 뜻입니다. 내 것이 하나님의 소유임을 알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대로 써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 부한 자들은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행위의 결실을 맺을만한 때까지 우리를 연단하시고 시험하시면서 그 믿음에 합당한 대로 물질의 축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한 자들은 자기를 낮추어 부를 누리게 하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려야 하며 가난한 자들은 오히려 자신의 가난함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자가 되기에 힘쓰지 말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 즉 족한 줄로 알고 이런 생활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