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새서 차례
골로새서 1장 (1 - 11)
(1) 골로새서가 쓰여진 동기(골로새서 1:1-2)
(2) 바울의 감사(골로새서 1:3-8)(골로새서 1:3-8)
(3) 골로새 교인들을 위한 바울의 기도(골로새서 1:9-12)
(4)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신분(골로새서 1:9-12)
(5) 그리스도인 신성(1)(골로새서 1:15-18)
(6) 그리스도인 신성(2)(골로새서 1:15-18)
(7) 화평을 이룬 그리스도의 피(골로새서 1:19-20)
(8) 화평의 뜻(골로새서 1:21-23)
(9)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골로새서 1:24)
(10) 감추어진 복음의 비밀(골로새서 1:25-27)
(11) 권하고 가르치는 일(골로새서 1:28-29)
골로새서 2장 (12 - 20)
(12) 하나님의 비밀이신 그리스도(골로새서 2:1-3)
(13) 그리스도 안에 있는 보화(골로새서 2:1-3)
(14) 공교한 말로 속이는 자(골로새서 2:4-5)
(15) 성도들이 명심해야 할 일(골로새서 2:6-6)
(16) 철학과 헛된 속임수(골로새서 2:8)
(17) 그리스도의 할례(골로새서 2:9-11)
(18) 할례와 세례와의 관계(골로새서 2:12-15)
(19) 폄론하지 말아야 할 몇 가지 사실(골로새서 2:16-17)
(20)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골로새서 2:18-23)
골로새서 3장 (21 - 29)
(21) 위엣 것을 찾는 생활(골로새서 3:1-4)
(22) 벗어버려야 할 옛 사람(골로새서 3:5-6)
(23) 벗어버려야 할 옛 사람(골로새서 3:7-11)
(24) 그리스도인이 입어야 할 옷(골로새서 3:12-14)
(25) 그리스도인의 평강과 감사(골로새서 3:15)
(26) 그리스도인의 말씀으로 풍성히 하라(골로새서 3:16)
(27) 가르치는 일과 권면하는 일(골로새서 3:16-17)
(28) 감사하므로 하나님을 찬양하라(골로새서 3:16-17)
(29) 그리스도인의 가족 관계(골로새서 3:18-25)
골로새서 4장 (30 - 32)
(30) 기도에 항상 힘쓰라(골로새서 4:1-2)
(31) 그리스도인의 지혜로운 처신(골로새서 4:3-6)
(32) 칭찬 받은 성도 상(골로새서 4: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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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 1장
◆ 밤중소리 11-06 | VIEW : 3,066
(1) 골로새서가 쓰여진 동기
(골로새서 1:1-2)
서론 : 골로새서는 바울이 쓴 옥중 서신 중에 하나입니다. 바울이 옥중에서 쓴 서신은 다섯입니다.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그리고 빌레몬서와 디모데후서입니다. 이 골로새서는 바울이 골로새 교회에 보낸 서신으로 그 시기는 바울이 로마에 갇혀 있을 당시인 62년경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골로새 교회는 바울이 세운 교회가 아닙니다. 7절에 보면 '에바브라'란 인물이 등장하는데 이 에바브라에 의해 세워진 교회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에바브라는 바울의 많은 가르침을 받았으며 이 서신도 바울이 에바브라로부터 교회에 침투한 이단 문제로 인하여 어려움을 겪게 됐다는 소식을 듣고 골로새 교회를 바로 세우기 위해 이 서신을 써서 골로새 교회로 보내게 되었습니다. 골로새 교회 안에는 어느덧 잘못된 철학, 유대적 의식주의, 천사 숭배 등의 신비주의, 그리고 금욕주
의 등이 만연되어 뿌리를 내리려 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바울은 이 서신에서 성도들의 진정한 목표가 되시는 예수그리스도의 탁월하심을 논증하고 있으며 성도들은 오직 그 분만을 섬기며 숭배해야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1. 골로새 교회의 문제점
하나님의 교회는 항상 사탄이 공격의 표적이 되어 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가르치지 못하고 교리적으로 약할 때 구원론에 구멍을 뚫어 놓는 것이 사탄의 역사인 것입니다. 에바브라는 바울에 의해 복음을 전수 받기는 했지만 교회를 이끌어 가기에는 역부족인 점이 많았습니다. 골롯새 교회에 침투한 잘못된 거짓 선생들에 의해 번지고 있는 악한 누룩을 살펴보면 다음 몇 가지 점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1) 그들은 사람의 유전을 중시했습니다. 전통적으로나 습관적으로 내려 온 사회적 규범이라던가 비성경적인 유전, 말하자면 제사 문제라던가 미신적인 습관을 따르는 일 등을 허용한 것입니다.
(2) 세상의 초등 학문인 철학을 중요시하며 이로 인하여 골로새 교인들의 신앙이 말씀에 뿌리를 내린 것이 아니라 일종의 관념적 신앙으로 인간의 지혜에 바탕을 두고 연구하고 개발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신앙에 여러 가지 설을 가정하여 혼란을 조성케 하고 있었습니다. 철학은 당시 이론에 치중하여 서로 변론을 일삼아 논쟁하였기 때문에 궤변과 같은 속임수가 나오게 되었으며 바울은 이같은 철학을 세상의 초등 학문이란 말로 경시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이같은 초등 학문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3) 이들 거짓 선생들은 성도들에게 천사 숭배를 가르쳤습니다. 천사는 택한 자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이 부리시는 영으로서 결코 우리의 경배의 대상이 아닌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천사로부터 계시를 받았을 때 그 천사에게 경배하려고 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때 그 천사는 요한을 향하여 '나는 너와 네 형제 선지자들과 또 이 책의 말을 지키는 자들과 함께 된 종이니 그리하지 말고 오족 하나님께 경배하라'고 했습니다.
(4) 또한 이들은 어떤 율법적인 계율을 강요했습니다. 율법의 계명은 우리에게 구원을 이루는 요소가 아닙니다. 율법은 그 계명이 엄격하여 인간에게 외식을 조장하고 구원을 확신을 줄 수 없기 때문에 율법의 계명에 얽매이는 생활을 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이같은 일은 악한 누룩이요 골로새 교회 성도들의 신앙을 죽이는 쑥물이 된 것입니다. 그대로 방치해 두면 이 쑥물이 온 덩어리를 부풀게 할 것이기 때문에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이 이같은 교훈을 받지말고 오히려 그들을 영적으로 대적해야 하겠으므로 이 서신을 쓰게 된 것입니다.
2.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
바울은 골로새 교회 성도들에 대하여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신실하다는 말은 그의 믿음이 진실하다 뜻입니다. 그리고 그의 생활이 신앙인 다운 생활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교회에서 형제라고 부르는 부류에 속한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거짓된 믿음을 갖거나 그의 생활이 복음에 맞지 않는 사람들에 대하여 거짓 형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거짓 형제로 교제해서는 안됩니다. 신실한 형제들로서 사랑하고 교제하는 교회를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 바울은 바로 이같은 신실한 형제들에게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 지어다'고 축원했습니다. 그 당시 골로새 교회에 많은 이단자들이 활개치며 교회를 어지럽힌 것처럼 지금은 인류의 종말에 이르렀기 때문에 사탄이 더욱 기승을 부려 악한 누룩, 계8장에 보면 쑥물을 먹이기 위해 미혹합니다. 이 말씀을 잘 읽고 듣고 깨달아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믿음을 견고히 잡으시기 바랍니다.
(2) 바울의 감사(골로새서 1:3-8)
(골로새서 1:3-8)
서론 : 바울은 골로새 교회를 세워 모범적으로 목회하며 성도들을 잘 양육하고 있는 에바브라를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이라고 칭찬했습니다. 신실하다는 말은 진실한 믿음의 사람이란 뜻인데 믿음직스럽다는 말과 같은 의미가 되겠습니다. 그러면 어떤 일꾼이 신실한 교회의 일꾼인가에 대하여 몇 가지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이란 칭찬을 들으려면
(1)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가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이 되려면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생활을 해서는 안됩니다.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는 쟁기를 메고 뒤를 돌아보는 자로 주의 일에 합당한 일꾼이 될 수 없습니다. 다음에 군사를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자신의 기쁨을 구하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로 그리스도의 군사로 뽑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자신의 생애를 그분만을 기쁘시게 해드리는데 사용해야 합니다. 시간, 정력, 돈 등을 자기 일을 위해 쓰는 사람들은 주를 위해 바칠 것이 없습니다.
(2) 다음에 그리스도의 일꾼 된 자로 인정받으려면 자기 스스로 바울의 심정으로 복음의 빚진 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일만 달란트의 죄값을 탕감 받은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께 일만 달란트의 빚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 사실을 모르고 여전히 복음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이 엄중한 사실을 그들에게 알려 주지 않으면 그들의 빚이 내 빚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신실한 일꾼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잃어 버린 동전의 비유는 나에게 맡기신 잃은 양에 대한 생명을 내가 반드시 찾아야 된다는 경종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뭇 사람들에게 복음의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믿고 책임감에 투철하지 않으면 신실한 일꾼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골로새 교회의 에바브로는 이런 심정으로 교회를 운영해 왔으므로 바울로부터 신실한 일꾼으로 인정받은 것입니다.
(3) 신실한 일꾼이란 그리스도의 고난에 기쁜 마음으로 동참하는 성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남은 고난을 우리를 위해 교회에 남기셨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이유는 바울이 분명히 밝혀주고 있는 대로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라"는 말씀에 근거하고 있습니
다.
예수님께서도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그렇게 하면 그리스도가 받으신 그 영광에 그리스도와 함께 동참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이기는 자에게 주실 상금을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이 되려면 이 상급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2. 에바브라의 열매
바울은 6절에서 에바브라가 골로새 교회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맺은 열매에 대하여 말해 주고 있습니다. 에바브라가 복음의 씨앗을 골로새에 뿌렸을 때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셔서 많은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1) 골로새 교회 성도들은 에바브라가 전하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종들은 복음을 통해서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해 주어야 합니다. 골로새 교회 성도들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으면 그들도 신실한 그리스도의 일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2) 복음을 들은 그들은 열매를 맺어 자란다고 했습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새로운 생명을 공급해 줍니다. 우리들로 새사람의 생활을 이루게 합니다. 이것이 복음으로 자라는 성도의 모습인 것입니다. 골로새 교회 성도들은 이처럼 성장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결론 : 하나님의 교회에는 신실한 일꾼이 필요로 합니다. 이들에 의해 하나님의 교회는 운영되어야 합니다. 신실한 일꾼 한 명의 가치는 신실치 못한 사람들 100명보다 위대한 주의 일을 이룰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이 되시어 신생교회를 골로새 교회처럼 은혜를 깨닫고 온 천사에서도 열매를 맺는 믿음과 은혜의 교회로 이룰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골로새 교인들을 위한 바울의 기도
(골로새서 1:9-12)
서론 : 본문 9절로 12절까지는 골로새 교회 성도들을 위한 바울의 간절한 기도의 내용이 나옵니다. 이 바울의 기도는 목
회자들이 자기 교회 성도들을 위해 기도해야 할 기도의 내용이 되어야 할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바울의 기도이지
만 하나님이 모든 성도들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내용의 기도입니다.
1.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기도했다.
바울은 9절에서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기"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골로새 교인들에게 지혜와 총명을 주시되 그 지혜와 총명으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해 달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들이 일상생활에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느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하는 문제를 잘 분별해서 무슨 일이든 주어진 일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성공적인 삶을 살아간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도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기도가 응답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서 살 수만 있다면 그런 사람의 인생은 형통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길은 무엇입니까? 고전 2 : 10절에서 "오직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분은 바로 성령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이 주시는 신령한 지혜와 총명이 있어야 합니다. 이 지혜는 성령께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지혜의 보고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깨닫는다면 그 말씀을 통해서 지혜와 총명이 풍성해 집니다.
2. 주님께 합당이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기 위해 기도했다.
목회자들은 성도들의 신앙적인 안목을 높이 끌어 올려야 하는데 그 목표점을 "범사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자리에까지" 이르도록 해야 합니다. 그의 생활에서 범사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만 있다면 그런 서도는 성공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가? 주님께 합당이 행할 때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주께 합당이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라"고 한 것입니다. 주께 합당이 행한다는 말은 주님 말씀에 대한 온전한 순종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범사에 주의 뜻이 무엇인가? 분별하여 그 뜻 가운데 살아가는 생활입니다.
3.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고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기 위해 기도했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알기만 하는 신앙은 외식적 신앙이요 죽은 신앙입니다.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들은 성도들로 그의 생활에 모든 선한 열매를 맺도록 신앙적으로 지도해야 합니다. 다음에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해 주시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성장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우리의 신앙적인 삶을 풍성하게 해 줍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항상 그리스도를 아는 일에 게을리 하면 안됩니다. 이 일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간절한 마음으로 배우는 일을 통해서 얻을 수 있습니다.
4.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위해 기도했다.
다음에 바울은 11절 이하에서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능력을 힘입어야 합니다. 심령의 변화, 생활의 변화 등은 그리스도의 능력이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다음에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기 위해 기도했습니다. 견딤과 참음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나타내야 할 인내를 말합니다. 인내란 어려움을 당했을 때 기다리는 일입니다. 이같은 견딤과 오래 참음을 기쁨으로 할 수 있도록 기도한 것입니다.
결론 : 마지막으로 바울은 "우리로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기도했습니다. 감사하는 생활은 그리스도인 생활의 기본입니다. 우리의 감사는 우리의 생활이 하나님께 합당할 때 나오는 감사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기업에 합당한 자로 만드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바울이 골로새 교회 성도들을 위해 간구한 내용처럼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만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4)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신분
(골로새서 1:9-12)
서론 :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신 일을 바로 알고 그 사실을 확실하게 믿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에 기본이 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고 그 성령으로 우리에게 지혜를 주신 목적은 우리들로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3절과 14절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미 이뤄진 그리스도인의 영적 신분을 밝혀 주시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세 가지로 이 사실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셨다고 했다.
첫 번째는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셨다고 했습니다. 흑암이란 영적인 사망을 의미합니다. 곧 마귀의 권세를 의미합니다. 인간은 모두 마귀의 권세 밑에서 사망의 종노릇을 하는 존재들임을 성경은 밝혀 주고 있는 것입니다. 롬 5 : 12절에서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다"고 했습니다.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는 말은 죄가 인간을 지배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죄와 사망은 똑같은 말입니다. 원래 사망이란 말은 죄에서 왔기 때문입니다. 죄 값은 사망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흑암의 권세 아래 있게 된 인생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1) 영원한 죄의 종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내가 죄의 종이 된 일은 세상에 태어난 후, 내가 지은 죄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의 조상, 아담이 지은 죄가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에게 유전되어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말로 죄의 전가라고 부릅니다. 넘겨받았다는 뜻입니다. 다윗은 고백하기를 "내가 죄악 중에 태어났음이여 내 모친이 나를 죄 중에 잉태 하였나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아담의 자손들은 이미 죄로 더러워진 아담의 혈통에서 태어나기 때문에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모두 죄인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의인은 없으니 하나도 없다고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2) 그러므로 모든 인류는 사망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모든 인류는 흑암 중에 태어나 흑암의 권세 아래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롬 6 : 23절에서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선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담에게 정년 죽으리라는 선고는 죄의 삯을 의미하며 아담은 이미 죄 값으로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서 그의 자손들을 번식했기 때문에 아담의 자손들인 온 인류는 죄로 죽은 상태에서 태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3) 그러므로 이런 죄인들이 받을 보응은 영원한 형벌로 이 형벌을 성경에서는 지옥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들이 있다면 병든 사람도 아니오 굶주리는 사람도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므로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을 불신자들인 것입니다. 마치 한 달이면 죽는다고 사형 선고를 내린 죽을 환자에게 오래 살 수 있다고 속이면서 죽는 날 동안 잘 먹이고 입히는 것과 다름이 없는 생애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 흑암의 나라에서 건져내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2.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고 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처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셨을 뿐 아니라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사랑의 아들의 나라란 영생의 나라를 말합니다. 의의 나라를 의미합니다. 하늘의 천국을 의미합니다. '옮기실 것이다'가 아닙니다. 이미 이루신 일을 말씀하시기 때문에 '옮기셨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김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생명이 거듭났기 때문입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주님이 친히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3.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다고 했다.
바울은 또한 14절에서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사함을 얻었도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위에서 밝힌 우리의 두 가지 신분에 대한 하나의 결론적인 말입니다.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신 일과 또 우리를 그 아들의 나라로 옮겨 주신 일을 명백히 하고 이처럼 우리에게 새로운 신분을 주신 일은 우리가 그 아들 안에서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기 때문이라고 한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한 구속이란 구원을 뜻하며 그것은 또한 죄 함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사 우리의 죄 사함을 위한 화목제물로 십자가에서 죽게 하심으로 우리로 그리스도 안에서 죄 사함의 은혜를 내리신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할 일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우리가 늘 감사해야 할 일은 우리로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신 일입니다. 이 일은 우리들이 그 아들 안에서 구속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같은 구원의 은총을 주신 하나님께 우리는 항상 감사하고 또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5) 그리스도인 신성(1)
(골로새서 1:15-18)
서론 : 오늘 본문 15절로 18절에는 그리스도의 신성이 나옵니다. 여기서 신성이란 말은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사람이시지만 그는 곧 하나님도 되신다는 뜻이 그리스도의 신성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언제나 육신으로 오신 예수를 지극히 높이시되 하나님의 자리에까지 올리십니다. 그러나 사탄의 역사는 그
리스도를 한없이 내리되 천사의 자리에까지 내립니다. 즉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아니라 피조물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믿는 사람들은 구원이 없거나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1. 하나님을 어떻게 정의하는가?
하나님을 어떻게 정의하느냐는 문제는 정말로 중요한 문제가 되겠습니다. 하나는 범신론적인 하나님이 있습니다. 이 하나님은 하나님을 인격적인 한 분의 하나님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개념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 애국가에 하나님이 '보우하사'란 말이 나옵니다. 이것을 그 후에 '하느님'이란 말로 바꾸었습니다. 처음에 불렀던 하나님은 유일하신 하나님이신 우리의 하나님을 말하지만 그 후 일부 종교계의 반발로 고쳐진 하느님은 범신론적인 하나님으로 하늘의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여러 종교 단체에서 주장하는 일반적인 하나님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천도교에서 주장하는 하나님은 '인내천'이라 하여 내가 곧 하나님이란 주장입니다. 유대인들은 단일 신으로 하나님의 삼위를 인정치 않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은 구약 적인 하나님이라 말할 수 있지만 구약이건 신약이건 아들이 없는 하나님은 참 하나님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 성경적인 증거입니다. 성경적인 하나님을 인정하고 믿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으로 섬기고 믿지 않으면 하나님을 잘못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는 왜 하나님이신가?
요일 4 : 2절에서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육체를 입으시고 아들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1) 성경에는 오실 메시야에 대하여 그 분은 하나님이시라고 예언되어 있습니다. 사 9 : 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장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 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고 했습니다. 미가가 예언한 그리스도의 말씀을 보면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는 처녀의 몸에서 태어날 메시야에 대한 예언에서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했습니다.
임마누엘이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 1 : 1절에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했습니다. 요한은 하나님과 말씀의 존재와 기원을 동일시하고 있는데 이 말씀을 가리켜 하나님이라고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이런 움직일 수 없는 증거는 너무나도 많은 것입니다. 이처럼 오실 메시야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그는 하나님이셔야 한다고 증거해 주시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메시야라면 그 분은 곧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2) 메시야로 오신 그리스도는 결코 하나님이 아니시면 안됩니다. 왜냐 하면 그 분이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우리에게는 아무런 소망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구원을 주십니다. 그 분을 대신하여 우리의 죄를 속죄해 주고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줄 존재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단자들이 옛날부터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한 것은 사탄의 쑥물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밝히신 이처럼 이란 하나님의 사랑은 더 이상 우리에게 주실 것이 없는 놀라운 사랑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 중 하나 정도, 세상에 보내시고 그에게 우리의 죄값의 십자가를 지게 하신 일을 가리킨 것이 아닙니다. 천사는 우리의 구세주가 될 자격이 없습니다. 그 수도 천천 만만 이거니와 천사의 존재란 하나님이 부리시는 영인 천사 중 하나를 세상에 내려보내시면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는 말씀을 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결론 : 바울은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말할 수 없는 영광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영광을 밝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눈이 열려 이 아침 그리스도의 하나님 된 그 놀라운 영광을 바라보시고 확실한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6) 그리스도인 신성(2)
(골로새서 1:15-18)
서론 : 바울은 본문에서 그리스도의 신성을 증거함에 그리스도의 선재 하심과 그의 창조주 되심을 증거하므로 그리스도가 하나님 되심을 확실히 했습니다.
1.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 받은 인간과 같은 간접적인 형태의 형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참 모습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참 모습을 보고 살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친히 볼 수 있는 하나님의 참모습이신 것입니다. 그런 뜻에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요 1 : 18절에서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아버지를 보여 달라는 요구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2.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라고 했다.
여기서 그리스도를 가리켜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라는 말씀의 뜻은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창조하셨다는 의미가 아니라 창조된 어떤 창조물보다 먼저 계셨던 분이심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아리우스'라고 하는 자는 이 성경 구절을 인용하여 그리스도를 피조물 중에 맨 먼저 창조된 분이라고 주장하여 이단자로 낙인이 찍혔지만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존재 기원을 가리킨 말입니다. 이에 대하여 요1:1절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 대로 "태초에 말씀이 계시느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란 말씀과 같은 뜻이 되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존재는 모든 만물보다 우선하시는데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뜻입니다. 나신 자란 말은 창조를 뜻하는 말이 아니라 스스로의 존재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3.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었다고 했다.
16절 말씀에서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만물이란 대상은 그 다음에 나오는 말씀에서 보여주듯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전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창조주 되시는 하나님을 제외한 모든 대상들이 만물 안에 들어 있습니다.
(1)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은 것들도 그리스도의 창조물들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6일 동안에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이전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세계의 창조도 있었다는 사실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은 것들의 대상이라든가 '보좌', '주관', '정사', '권세'들이란 표현은 이 세상에 속한 6일 창조의 피조물들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영적인 피조물 세계의 존재들로 그리스도는 모든 하나님의 창조 역사에 있어서 주인공이 되신 분이심을 밝혀 주신 말씀입니다.
여기서 말씀해 주는 여러 부류의 존재들은 영적 세계에서의 계급층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하늘에도 엄격한 규율이 존재하며 하늘에 있는 피조물들에게도 제각기 계급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도 가장 영광의 자리에서 일하고 있는 영적 피조물은 천사장이거나 그룹으로 나오는 네 생명들도 그 가운데 들어갈 것입니다.
4.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다.
16절 마지막 절에는 참으로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모든 창조의 역사가 "다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다"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모든 만물의 창조 목적이 오직 그리스도를 위한 일이었음을 말씀해 주고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말씀입니다. 모든 만물의 창조주는 그리스도이시며 이 만물들은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창조되었고 그리스도를 위해 존재하며 그리스도 때문에 만물의 존재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밝혀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믿을 수 있으며 성부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시며 성부 하나님과 함께 영원 전에 스스로 존재하셨으며 앞으로 영원 무궁히 존재하실 유일하신 분이심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17절에서 거듭거듭 말씀하시기를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신 자"이심을 강조합니다. 만물은 피조물들이요 그보다 먼저 계신 자는 창조주이시며 그의 존재는 끝이 없는 영원 전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란 이름으로 불려지는 것입니다.
결론 : 그런데 이런 위대하신 그리스도께서 몸된 교회의 머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같은 주님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속죄 제물이 되셔서 우리를 구속 곧 죄사함의 은혜를 주심으로 교회의 머리가 되신 것입니다. 오직 그 분만이 모든 것의 뿌리인 근본이 되시는 것입니다.
(7) 화평을 이룬 그리스도의 피
(골로새서 1:19-20)
서론 : 바울은 아들의 하나님 되심을 그의 창조 역사를 통해서 논증하고는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를 18절에서 말씀하기를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인데 그리스도는 그 몸의 머리가 되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머
리란 몸의 으뜸인 부분이요 온몸을 주장하고 제어하는 역할을 하는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리스도가 모든 일의 근본이신 분이시며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부활하신 분으로 만물의 으뜸이 되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같은 그리스도에게 "모든 충만으로 거하게"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셨다고 했습니다.
1. 모든 충만과 그리스도
19절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하신 모든 충만이란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는 그리스도만이 만물의 창조와 섭리자 이심을 의미하며 다음에 그리스도야말로 모든 만물의 권세자 이심을 의미하신 말씀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는 창조주이실 뿐 아니라 아버지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아버지가 소유하고 계시는 권세까지 아버지로부터 넘겨받으신 사실에 대하여 말씀해 주시므로 그리스도의 놀라우신 위대하심과 그의 권세에 무한하심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구주가 되시고 심판주가 되시기 위해서는 아버지의 모든 권세가 그리스도에게 넘어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만물의 권세를 내게 주셨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빌 2 : 9절에서는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2.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루신 화평
20절에서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셨다고 하셨습니다. 먼저 왜 모든 만물과 화평을 하셔야 했는가에 대하여 알아야 합니다. 화평의 반대말은 원수입니다. 이 관계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엿새 동안 만물을 창조하신 후,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범죄한 후에는 모두 저주로 변했습니다. 땅도 엉겅퀴를 내게 되었고 수목도 탄식하며 짐승도 잡아먹히게 된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비참하게 된 존재는 인간들입니다. 죄 값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사망이란 말은 두 가지 의미가 들어 있는 말입니다. 하나는 인간이 죽으면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이요 다른 하나는 결국은 영육이 모두 지옥에 들어가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화평을 이루지 않는다면 인간은 이같은 비참한 상태에서 영원히 벗어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사 화평을 이루게 하시려고 그 아들을 사람의 모양으로 세상에 보내시고 그에게 우리의 죄를 대속하게 하시므로 화목 제물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가 어떻게 하나님과의 화평을 이루게 된 것입니까? 그리스도의 피는 세 가지 구속의 일을 완성하셨습니다.
(1) 죄를 용서하시는 역사를 하십니다. 하나님은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하심이 없다고 단정 짓고 그 아들로 화목의 제물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죄가 없으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지시고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셨는데 그가 흘리신 피가 우리의 죄를 씻는 죄 사함의 근거가 된 것입니다.
(2)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 값인 사망을 우리 대신 치르셨습니다. 누구를 물론하고 죄인들은 사망의 빚을 갚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므로 사망의 빚을 갚아 주신 것입니다.
(3) 다음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자신의 살을 찢으시므로 화목 제물이 되어 주셨습니다. 죄인들이 하나님께 가려면 화목 제물이 필요했습니다. 구약에 이스라엘이 드렸던 양은 온전한 화목 제물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지은 죄이기 때문에 사람의 제물이 필요했는데 아담의 후손은 이 제물의 자격자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순전한 유월절의 어린양이 되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이 모든 일을 다 이루시는 순간, 피의 절규를 하셨습니다.
결론 :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하고 그 사랑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주님의 사랑, 이 주님의 은혜가 아니시면 우리들에게는 아무런 소망도 없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마음에 간직하여 우리의 생애를 온전히 주께 바쳐질 수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8) 화평의 뜻
(골로새서 1:21-23)
서론 : 바울은 20절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의 십자가로 화평을 이루신 일을 말씀해 주고 오늘 본문에서는 화평의 뜻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대목은 22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과 화목하시기 위해 우리들을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바로 이 말씀이 우리와 하나님과의 화목의 근거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바로 이같은 자격을 얻게 되었습니다.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완전한 의를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실제로 증거해 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소유한 이런 의는 우리의 어떤 공로나 양심이나 율법적인 행위에서 나온 의인 것이 아니라 온전히 그리스도의 육체의 죽으시므로 우리에게 넘겨주신 의로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같은 의의 소유자가 된 것입니다.
1. 죄로 하나님과 원수가 된 인간들
21절에서 이전에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가 된 상태의 우리의 형편에 대하여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어 있었다"고 말씀해 줍니다. 인간이 죄를 범한 이후에는 하나님과 멀리 떠나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와 하나님과는 동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빛과 어둠이 함께 할 수는 없습니다. 범죄한 후, 아담은 하나님께 나가지 못하고 동산 나무 뒤에 숨었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에덴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죄인은 자신이 원해도 하나님께 나갈 수 없습니다. 인간의 죄악은 하나님으로 가는 길을 막는 높은 담을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소의 휘장이 이같은 사실을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죄는 아무 것으로도 영원히 씻을 수 없으며 하나님과 영원히 떠나 있어야 하며 결국에는 하나님의 심판의 자리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죄는 우리로 마음으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게 한다고 했습니다. 서로 가 반목된 상태에 있으면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죄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그 어떤 방법으로도 정상화시킬 수 없는 일입니다. 영원히 반목될 수밖에 없는 관계의 계속인 것입니다.
2. 화목의 결과
하나님은 이처럼 죄악 되고 소망이 전혀 없는 인간들을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화목 제물로 삼으시어 그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케 하신 것입니다. 화목이란 말은 미움이 사랑으로, 원수 된 관계가 아버지와 아들로 신분이 완전히 뒤바뀐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화목이 이루어지려면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야 할 일이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거룩해야 합니다. 두번째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흠이 없어야 합니다.
세 번째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책망 받을 것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이런 자격을 가지고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것입니까? 이같은 일은 죄인인 인간이 스스로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영원히 원수의 관계가 계속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긍휼히 여기사 이같은 의를 우리에게 요구치 아니하시고 한 사람의 대표 인물을 세우사 그 책임을 수행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 인물로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자기를 인간의 모습으로 낮추시어 아들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화목 제물로 십자가에서 죽어 주신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야 하셨으며 사람이 되시어 죄인들이 지킬 수 없었던 율법을 온전히 지키셔야 했습니다.
그 분은 그의 육체나 영에 아무런 흠 잡힘이 없으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세상에서 살아가시면서 책망 받을 일이 한번도 없으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온전한 흠 없고 점 없는 화목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것입니까? 그 법적인 절차를 따라야 합니다. 23절 말씀에서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들은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 자격자가 될 수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그 어떤 방법으로도 하나님과 화목할 수 없는 처지에 있었지만 예수님께서 그 일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이같은 사실을 하나님은 우리에게 확실하게 맹세로 보이셨는데 그 말씀이 복음입니다. 우리는 복음으로 이 사실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 믿음에 흔들리지 마시고 확실한 믿음을 가지면 그 믿음이 화목의 증거로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가까이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9)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골로새서 1:24)
서론 : 24절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말씀은 그리스도인 들에게 큰 의미가 부여된 말입니다. 주님은 많은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 고난은 우리들을 죄에서 해방시키시기 위한 것이었으며 그의 그 같은 고난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구속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의 자리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자신이 지신 고난을 통하여 말할 수 없는 영광을 얻으시기에 이르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빌 2장에서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이 고난을 모두 지신 것이
아니라 얼마간의 고난을 남기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 고난은 바로 우리가 져야 할 짐으로 남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남겨 놓으신 고난의 짐을 져야 하는 것입니다.
1. 바울이 복음을 위하여 받은 고난의 짐
바울은 복음을 위하여 많은 괴로움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말하기를 그 괴로움을 기쁨으로 받았다고 했습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한다"고 한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받는 이같은 괴로움이 교회를 위하여 남기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으로 알았기 때문에 이 고난의 짐을 괴로운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받는 고난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에 동참하는 상급으로 믿었습니다. 바울 뿐 아니라 모든 사도들은 이런 마음으로 교회를 위하여 받는 고난을 기쁘게 여겼던 것입니다.
행 5 : 41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였다"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우리에게 이처럼 권면해 줍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씀해 주었습니다.
2.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이처럼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그의 생애 중에 그리스도를 위해 당해야 할 고난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말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말할 수 없이 괴로운 고난의 십자가를 지셨지만 그 십자가를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조금 남기셨다고 한 말입니다. 예수님은 마 11 : 28절에서 우리를 초청하시는 말씀에서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내 멍에는 쉽고 재짐은 가볍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말씀하신 나의 멍에를 메라고 하신 그 멍에의 짐은 그리스도인들이 져야 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또 이처럼 말씀하셨는데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자신이 져야 할 십자가란 교회를 위해 남기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의 짐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형통하고 평안하며 만족한 삶을 살아갈 사람들인 것이 아니라 교회를 위해서 남겨 놓으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의 짐을 지고 그의 생애를 살아가야 할 사람들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3. 왜 이같은 고난을 주셨나?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연합된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와 연합되지 않으면 진실한 그리스도인 이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과연 그리스도의 무엇에 연합이 된 것입니까?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의 부활하심에 연합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그리스도와 한 가지 더 연합되어야 할 일에 대하여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롬 8 : 17절에서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구원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릴 소망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소망을 이루려면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연합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연합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릴 수 있는 연합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로 이 영광에 동참하게 하시려고 그의 고난을 교회를 위해 남겨 두신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고난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이 고난의 결과 우리에게 돌아오는 영광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것입니다.
결론 : 바울은 계시를 통해서 이 영광을 밝히 보고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쓰레기 같이 여기고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받는 일에 기쁨으로 참여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영광의 소망을 바라보십니까? 여러분이 지고 계시는 주님을 위한 고난을 벗지 마시고 승리로 소망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10) 감추어진 복음의 비밀
(골로새서 1:25-27)
서론 : 바울이 교회의 일꾼된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경륜을 따라 된 일이라고 말씀해 줍니다. 그리고 복음으로 나타난 이 하나님의 말씀이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추어졌던 하나님의 비밀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섭리하신 복음의 비밀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만세와 만대로부터 내려온 하나님의 비밀의 경륜이신 것입니다.
1. 복음의 비밀
성경은 우리의 구속의 예정에 대하여 언제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까? 엡 1:4절에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고 했습니다. 이런 말씀으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모든 창조적인 역사는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하신 그의 백성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위대한 비밀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졌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백성들에 대한 이같은 구원의 섭리가 마감되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만물은 소멸되어 원상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계 20 : 11절에서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데 없더라"고 했습니다. 천년왕국 후에는 이 창조적인 세계는 필요 가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에 우리를 위해 예비해 놓으신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미 예비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심으로 죄인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는 일인데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로 에덴에서 생령으로 삶을 누린 아담의 지위보다 더 영광스럽게 하시는 일로 이같은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 세우신 하나님의 섭리가 복음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같은 일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숨겨져 온 하나님의 비밀이었다고 하셨습니다. 이 비밀을 바울은 계시를 통해서 밝혀 낸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이 복음을 비밀로 하신 것입니까? 그것은 사탄으로 하여금 이 복음의 사역을 방해할 수 없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1) 사탄은 죄로 타락한 인간은 이제 절대로 회복될 수 없는 하나님의 대적 자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줄로 알았습니다. 사탄은 이처럼 인간을 타락시킨 후, 인간에게 복을 주시려고 아담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계획은 실패하고 자신이 인간 세상의 지배자로 군림할 줄로 알았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게 된 것입니까? 이미 죄인이 된 아담의 후손
중에는 인간의 죄를 대속하여 구원을 이룰 만한 존재가 생겨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복음의 비밀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만대와 만세로부터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죄인을 구속하기 위한 대속 제물로 예정해 놓으시고 세상을 창조하셨던 것입니다. 사탄이 이같은 오묘하신 하나님의 복음의 섭리를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실 것으로 알고 있었던 존재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하늘의 천사들도 몰랐고 사탄도 몰랐습니다.
(3) 사탄은 그리스도께서 왜 십자가를 저셔야 하는가에 대하여 전혀 몰랐습니다. 오히려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으면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실패하는 것으로 착각했습니다. 십자가에서 죄인의 죄를 대속 하시는 일이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인 사실을 전혀 몰랐습니다. 만약 그런 비밀을 사탄이 알았다면 사탄은 결코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했을 것입니다.
(4) 사탄은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그리스도의 역사가 하나님의 구원을 이룬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으며 그리스도께서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실 그의 부활에 대하여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같은 사실을 문자적으로 분명히 밝히지 아니하시고 비밀한 계시로 숨겨 놓았습니다. 그리고 다 이루신 후에 그 말씀을 들어 내 놓으시므로 증거로 삼으신 것입니다.
2. 이제는 나타난 복음의 비밀
하나님은 복음을 통해서 이 모든 비밀을 그의 성도들에게 명명백백히 밝혀 놓으셨습니다. 왜냐 하면 이 사실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직 세상 사람들에게는 비밀한 계시로 그대로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아무리 지혜자라 해도 읽어도, 들어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이 진리를 알았기 때문에 거짓된 진리로 이 진리를 따르는 사람들을 미혹하여 진리에서 떨어져 나가게 하는 것입니다. 이 비밀을 이방인 중에 풍성히 나타났습니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가 되어 이 복음을 이방인에게 전달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 육체에 채운 것입니다.
결론 : 바울이 교회의 일꾼이 된 것은 이 하나님의 비밀한 경륜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은혜인 줄로 알고 이 복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일을 너무 감사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우리도 바울 같은 믿음으로 복음을 전하는 일꾼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1) 권하고 가르치는 일
(골로새서 1:28-29)
서론 : 바울이 여러 교회에서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로 각 사람을 권하고 가르쳤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이처럼 생명을 다하여 사명감을 가지고 이방인 성도들을 가르친 목적은 그들로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는 일에 두었습니다. 완전한 자로 세운다고 한 말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성숙한 자리에 이르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지고 교회의 충성스러운 일꾼으로 자라게 하는 일을 말합니다.
1. 누가 완전한 자인가?
우리는 완전한 자란 말을 바울이 할 때, 그리스도 안이란 말을 사용한 일에 유의해야 합니다. 왜냐 하면 그리스도 안에서만이 완전해 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밖에서는 무슨 방법이든지 완전해 질 수 있는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밖에는 언제나 양심의 가책이 따르고 율법의 정죄와 죄에 대한 두려움과 이에 대한 영원한 심판만이 존재할 뿐이며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이 죄에 대한 사유와 사랑과 영원한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인 것입니까? 완전한 자란 말의 뜻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자격자를 의미하며 하나님께서 그렇게 인정해 주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우리들이 먼저 알아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 중에 완전한 자란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예수님만이 죄인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완전한 자란 이같은 그리스도와 똑같은 자격을 갖춘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죄인들인 인간이 어떻게 예수님과 똑같은 완전성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흰눈과 같으신 분, 우리는 진홍같이 많은 죄로 더럽혀진 죄인들입니다. 예수님은 양털보다 더 흰 분이시며 우리는 주홍같이 붉은 죄를 소유한 인간들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우리가 그리스도와 똑같은 완전한 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까? 그 방법은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방법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1) 그리스도의 의만이 하나님 앞에 완전해 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해 지려면 내 의는 버리고 오직 그리스도의 의만을 소유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의를 내 것으로 어떻게 소유할 수 있는 것입니까? 그리스도의 의는 내 죄 값을 완전히 갚아 주신 의입니다. 율법을 완전히 이루심으로 얻으신 의입니다. 이 의를 소유해야 하는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이같은 일을 참으로 믿고 내 마음속에 받아 드릴 때,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어 그의 의가 내게 넘치게 임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의로 하나님 앞에 완전한 자의 자격을 가지고 설 수 있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런 의를 버리고 자기들 이 율법을 지키는 일로 그 율법 안에서 의로워지려고 했기 때문에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의는 외식하는 자의 의였습니다. 세상 종교 역시 인간의 양심이나 도덕적 기준으로 의로워지려고 하기 때문에 죄의 더러움이 영원히 소멸될 수 없으며 완전한 자의 자격을 얻을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가 이루신 그 완전한 의에 의지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의로 완전한 자의 자격을 소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의 사죄와 구원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가려면 완전한 사죄가 필요합니다. 자신이 범한 죄를 씻고 용서를 받는 사죄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죄의 사유함을 받는 길이 한 가지밖에 없는 것입니다. 자신이 힘쓰는 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노력한다고 이룰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자기 죄를 씻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죄의 사유를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길이 그 길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방법은 사죄의 권한을 가지신 하나님의 법적 선언이십니다.
사람이 자신의 죄를 온전히 씻어 완전한 자가 되려면 오직 그리스도의 보혈로 자신의 죄를 씻는 일인데 우리가 이 사실을 믿고 우리의 죄를 하나님께 회개하면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루게 되어 완전한 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 완전한 구원을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구원을 얻을만한 아무런 조건이 자신에게 없다는 것을 전제하고 피로 값 주고 사신 바 되어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완전한 의와 완전한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있으므로 그 분을 믿음으로 그 분과 하나가 되는 일에 그 비결이 있는 것입니다.
결론 : 이것이 복음의 핵심인 것입니다. 바울은 이 진리를 권하며 가르친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와서 말씀을 듣는 일도 이 진리를 믿고 이 진리에 확실히 서서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움을 받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골로새서 2장
◆ 밤중소리 11-06 | VIEW : 2,570
(12) 하나님의 비밀이신 그리스도
(골로새서 2:1-3)
서론 : 바울은 자기가 이방인의 모든 교회를 위하여 힘쓰는 사실을 모든 사람들이 알 수 있기를 원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로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하나님의 비밀이신 그리스도를 깨달아 알 수 있기를 원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전도의 목적은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알려주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설교나 전도의 모든 수단
과 목적을 그리스도를 알리는 일에 두어야 합니다.
1. 그리스도를 깨달은 성도는 어떤 일이 일어나나?
(1) 복음을 받은 성도들은 첫째로 마음에 위안을 받습니다. 위안이란 주님의 위로와 그 위로에서 오는 마음의 평안을 말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주노니"란 말씀처럼 이같은 위안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사 66 : 13절에서 "어미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 55 : 12절에서는 "너희를 위로하는 자는 나여늘 나여늘 너는 어떠한 자이기에 죽은 사람을 두려워하며 풀같이 된 인자를 두려워하느냐"고 나무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위로의 하나님이십니다. 말씀을 통한 위로하심이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우리의 심령에 임할 때 우리의 마음에는 두려움이나 근심 대신 새로운 평안함으로 큰 위로를 받으며 주님을 의뢰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로 통회하는 자를 위로하십니다. 그의 위로는 사죄의 은혜로 임하시며 우리는 사죄를 통해서 마음에 큰 평안과 새로운 소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환난을 당한 자를 위로하십니다. 그러므로 환난을 당한자는 먼저 위로의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환난 중에 위로를 받으며 하나님이 환난을 이기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낙심을 당한 자를 위로하십니다. 리가 혹 낙심을 당할 때, 그 낙심을 이기게 하실 주님을 바라보며 그로부터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새힘을 얻어 낙심을 이기게 하시며 그 자리에서 일으켜 주십니다.
하나님의 위로는 말씀으로 임하십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약속의 말씀은 우리에게 능히 위로를 주고도 남음이 있는 것입니다. 성령을 통해서 풀잎에 내리는 이슬처럼 내 마음에 큰 감동을 주며 내 마음을 어루만져 새 힘을 얻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은 성령의 감동을 통해서 임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성령의 감동을 거역하거나 물리치면 안됩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아 드리는 성도들만이 이같은 위로를 받아 기쁨과 이김을 얻는 새로운 생애를 살아갈 능력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마음에는 주님이 주시는 평안이 임합니다. 이 평안은 세상에서 얻는 것 같은 평안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에서 영원히 솟아나는 평안입니다. 이 평안이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평안과 다른 이유는 그리스도가 화목 제물이 되시어 십자가에서 우리와 하나님과의 죄악의 담을 허시고 이루어 주신 평안이기 때문입니다. 이같은 평안이 내게 임하면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내가 누구를 두려워할까? 하는 믿음을 가지게 되며 하나님을 의뢰하는 믿음으로 더욱 승리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이같은 주님의 평안이 임하시면 걱정과 염려가 사라집니다. 내 모든 염려를 주님이 맡아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실 것을 믿고 의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같은 주님의 평안을 받으면 그의 생활에 새로운 기쁨이 생깁니다. 그리스도인의 참 기쁨은 주님이 주시는 평안이 그 토대가 되는 것입니다.
2. 사랑으로 연합하게 된다.
복음을 받은 성도는 사랑 안에서 연합을 이루게 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몸이란 각 지체들의 연합체입니다. 성도들이 제각기 맡은 직분을 따라 서로 연합할 때 하나님의 교회가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이 연합은 곧 성도들 간에 사랑으로 이루어집니다. 사랑의 줄로 연합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연합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곳에는 사탄의 세력이 침투하여 혼란과 분쟁이 생기는 것입니다. 시기의 줄, 교만의 줄, 미움의 줄로는 연합이 아니라 분열과 분쟁이 옵니다. 사랑 안에서 연합할 때 온전한 교회가 이루어집니다.
3.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게 하는 복음
복음을 받은 성도는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게 된다고 했습니다. 이해란 말은 깨달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부요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풍성한 하나님의 축복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깨닫게 되면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충만한 영적 부요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복의 은혜를 받아 마음에 위로를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아름다운 교회를 이룰 뿐 아니라 복음을 깨달아 그리스도의 부요에 이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13) 그리스도 안에 있는 보화
(골로새서 2:1-3)
서론 : 2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비밀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복음을 두고 하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비밀이란 말은 공개된 비밀을 뜻합니다.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비밀이 바로 복음에 나타난 비밀이며 이것을 그리스도의 비밀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일에 대하여 이사야의 글을 인용하여 이처럼 경종 하셨습니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비밀로 하셔서 하나님을 떠나고 회개할 줄 모르는 완악한 인간들로 구원을 얻
지 못하게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1. 그리스도 안에는 무엇이 있는가?
바울은 말하기를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비밀이신데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비밀을 깨달았고 계시로 이 비밀을 알았기 때문에 그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제일로 여겼으며 빌 3장에서 말하기를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였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모든 것을 해로 여긴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는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놀라운 온갖 보화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후,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고 고백했습니다.
(1) 그 안에는 진리의 보화가 한없이 충만히 있습니다. 요 1 : 14절 말씀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공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진리가 무엇이냐고 질문한 사람은 예수님을 재판한 본디오 빌라도입니다. 모든 사람은 진리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어떤 자연의 법칙을 발견한 과학자의 말을 진리라고도 말합니다. 역사상 이 세상에 존재했던 성현들의 금언을 진리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진리란 영원불변한 것으로 그리스도 안에서만이 발견되는 차원이 높은 고상한 것입니다. 진리는 우리의 신령한 눈을 뜨게 합니다. 생명의 주되신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 있는 눈을 열게 합니다.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진리를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이 진리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는 비밀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소유한 사람들만이 소유할 수 있는 비밀인 것입니다.
(2) 그리스도 안에는 영생의 보화가 숨겨져 있습니다. 진시 왕이 구하지 못한 불로초보다 더 온전한 생명 초가 그리스도안에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이것을 생명수라고 부릅니다.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한 것은 오직 그리스도에게만이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기록한 것은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 안에는 영생의 보화가 숨겨져 있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비밀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허락하신 그의 백성이 아니면 이 비밀을 깨달아 알 길이 없는 것입니다.
(3) 그리스도 안에는 천국의 보화가 숨겨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 13 : 44절에 나오는 밭에 숨겨진 비유의 말씀을 통해서 천국의 비밀을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보화가 곧 그리스도이시며 이 보화야말로 하나님의 비밀로 보화의 가치를 깨달은 자만이 자신의 보화로 사서 그 보화를 소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보화들이 그리스도 안에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배우고 듣고 깨달아 확실히 그 보화를 내 것으로 소유하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부요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도 이같은 보화의 가치를 알고 그 보화로 말미암아 그 보화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과 이 보화의 가치를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과는 생활 방식이나 그들의 인생관에 있어서 하늘과 땅의 차이점을 들어 내 놓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나그네 같은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만약 우리의 생애 가운데서 이 보화를 발견하고 그 보화의 참가치를 깨닫는다면 그 사람은 새로운 소망의 생애를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밭을 발견한 나그네가 자기의 모든 소유물로 그 밭을 산 것처럼 여러분의 생을 그리스도에게 맡기시고 그 안에서 즐거워하는 생활, 그 안에서 축복 받는 생애를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14) 공교한 말로 속이는 자
(골로새서 2:4-5)
서론 : 바울이 골로새 교회 성도들에게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의 비밀이신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 해준 일은 공교한 말로 속이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교회에는 언제나 공교한 말로 진리를 대적하는 자가 나타나 성도들을 속여 미혹하는 무리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골로새 교회에도 이런 류의 거짓 선지자들이 나타날 것을 경계하여 성도들의 믿음을 견고히 하게 하려고 바울은 큰 염려 가운데 자신이 받은 그리스도에 관한 계시를 가르치기에 게을리 하지 아니했습니다.
1. 공교한 말로 속이는 자
공교하다는 말은 인위적으로 그럴듯 하게 꾸민 말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에는 인간의 지혜라든가, 인간의 철학에서 나온 학문이 많은 작용을 합니다. 이같은 일은 인간의 지혜로 믿음을 넘어뜨리려는 사탄의 간교인 것입니다. 공교한 말은 그 목적이 진실을 감추고 사람을 속이려는데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도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다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이같은 사탄의 일꾼들이 공교한 말로 우리를 속여 다른 복음을 따르게 하려고 기회를 엿보아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우리들 주변에 있는 이들 공교한 자들의 형태를 보면 소위 몰몬교 라고 일컫는 말일 성도 그리스도의 교회가 있습니다. 이들은 그들이 몰몬 경이라고 하는 그들의 경전을 받은 경위를 공교한 말로 꾸며 많은 사람들을 미혹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들의 몰몬교 경전을 읽으면 그 간교에 넘어가게 됩니다. 이처럼 공교한 말을 이길 수 있는 비결은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에 대한 부요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또 하나의 경우를 든다면 통일교의 원리 강론이란 통일 교도들의 경전이 그것입니다. 이들 통일교의 윈리 강론은 인간의 타락론부터 공교한 말로 꾸몄습니다. 이들은 성경에 있는 사실적인 내용을 상징, 예표란 말로 그럴듯하게 넘기고 간교한 해석을 시도하므로 우리의 믿음을 빼앗아 가는 것입니다. 그들은 인간의 타락은 선악과를 먹은 것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것을 영적으로 해석해야 올바른 해답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와와 사탄과의 간음 사건으로 해석합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일은 바로 간음을 의미하며 가인은 이들 가운데서 태어난 뱀의 자손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영적 구원만 이루셨고 다른 구세주가 와서 육적 구원을 이루어야 하는데 문선명 이가 바로 그 구세주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문과의 피 가름이라는 끔찍한 교리가 먹혀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주변 가까이서 우리를 공교한 말로 속이는 무리들 중에 여호와의 증인이란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중요 교리는 모두 공교한 말로 꾸민 거짓말입니다. 그들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그리스도를 피조물로 깎아 내리는 일입니다. 이것은 진리를 대적하는 사탄의 최대 작전인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부인할 뿐 아니라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면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협박합니다. 그들은 파수대라고 하는 선전 매체를 통해서 공교한 교리를 주장하는데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믿고 섬기면 구원이 없다고 주장하며 구원은 오직 여호와의 증인에게만 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는 천사 중에 하나로 우리 인간들 보다 약간 능력이 많은 분이라고 주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시려는 성경적인 진리를 부인하고 거짓된 말로 속이는 것입니다. 요즈음 들소리 신문이라고 교계 신문과 어떤 출판사를 경영하는 통합측에 속한 어떤 교회 장로는 안식교에 대해 이단이 아니라 견실한 교단이며 진리를 파수하는 교단이라고 엉뚱한 주장을 하므로 많은 성도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공교한 말로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안식교의 주요 교리는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날로 유대인들이 율법적으로 지켜 온 토요일 안식일을 고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키는 주일에 대해서 주님이 부활하신 날이란 사실을 숨기고 다만 옛날 로마에서 태양신을 섬겼던 날이었기 때문에 그날을 주일로 섬기는 일은 비 성경적이며 구원이 없다는 주장입니다. 이들은 율법적인 안식일을 고집하므로 그리스도인 들로 그리스도의 공로로 구원받은 사실을 잊어 버리게 하고 율법적인 구원을 믿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하나님의 비밀이신 그리스도를 올바로 모르거나 사탄이 꾸며낸 공교한 말로 우리를 너머지게 하려는 일입니다.
결론 : 이런 이단 설 외에도 우리들 주변에는 수많은 미혹의 무리들이 공교한 말로 우리에게 침투하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명을 노략질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들의 무기는 진리가 아닙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일에 성령의 감동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지혜로 공교하게 하여 교회에 들어와 성도들을 미혹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쑥물을 늘 경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혜 가운데 믿음이 성장하여 진리로 굳게 무장해야 합니다.
(15) 성도들이 명심해야 할 일
(골로새서 2:6-6)
서론 : 바울은 골로새 교회 성도들에게 공교한 말로 속이는 거짓 선생들에게 속임을 당하지 않으려면 다음 몇 가지 교훈을 명심할 것을 말씀해 줍니다. 예수를 주를 받은 사람이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 할 것인가를 교훈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1. 그 안에서 뿌리를 박으라
바울은 6절에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주만이 있을 뿐, 다른 일체의 존재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우리들은 그리스도 예수밖에는 다른 믿음의 대상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실을 뚜렷이 마음에 새겨야 하는 것입니다. 사탄의 사주를 받은 거짓 선생들은 그리스도로부터 우리의 마음을 떠나게 하려고 공교한 말로 미혹합니다.
특히 마지막 시기에는 거짓 선지자, 거짓 그리스도가 많이 등장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한 백성이라도 미혹한다고 예언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다는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말입니까? 오직 그리스도 예수만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속죄 제물이 되시어 죽으셨다는 확실한 믿음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늘 아래나 하늘 위에나 이 세상에서 우리의 믿음의 대상은 그리스도 예수인 것입니다.
언제 문성명이란 사람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어 준 것입니까? 지난날에도 그러하고 근래에도 자칭 예수로 사칭하는 자들이 많은데 이들이 언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 값을 치르기 위해 죽어 준 것입니까? 성경에 기록된 대로 2천년 전에 본디오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아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 그리스도 예수밖에는 우리의 구세주가 없는 것입니다.
이 믿음을 가진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는 사람인 것입니다. 다음에 그 안에서 행하라고 한 것입니다. 공교한 말로 속이는 이단자들의 교훈에 속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의 신앙생활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앙생활이 아니란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는 생활은 그리스도 안에서 순종하는 생활을 말합니다. 공교한 말로 속이는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순종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이상스러운 교리를 말씀보다 앞세워 그 교리를 따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생활이나 교훈에 있어서 그리스도 밖으로 튀어나오는 일은 대단히 위험한 일입니다.
다음에 그리스도 안에서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으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뿌리를 온전히 그리스도 안에 박아야 하는 것입니다. 뿌리에서 이삭이 나오고 나중에 결실이 나오는 것입니다. 신앙의 뿌리를 엉뚱한 곳에 박는다면 그의 신앙적인 성장이 점점 이상해지며 나중에 보면 그 열매가 전혀 그리스도 예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닌 이상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뿌리를 잘못 박은 사람은 그의 신앙생활이 대단히 위험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날이 갈수록 그의 신앙의 뿌리가 굳어지기 때문에 공교한 그 자리에서 제자리로 옮겨지기가 대단히 어려운 것입니다.
처음에는 별 것 아닌 줄 알고 몇 번 잘못된 집회에 참석하든 것이 그곳에 뿌리를 내리면서부터 돌이킬 수 없는 이단자로 굳혀지는 것입니다. 뿌리를 잘못된 곳에 내리고 그 뿌리로부터 영생을 바라고 천국을 소망한다면 이같은 일은 콩씨를 뿌리고 팥을 거두려는 헛된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뿌리를 박는다는 말은 믿음의 대상과 생명적인 연합 관계를 맺는 일을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은 사람은 그 분과만 생명적인 연합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2.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라
바울은 골로새 교회 성도들에게 자기가 그들에게 교훈을 준대로 믿음에 굳게 설 것을 당부했습니다. 굳게 서라는 말은 누가 밀쳐도 넘어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귀는 그의 일꾼들을 보내어 가끔 우리에게 다가와 슬쩍 건드려 보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교훈을 받은 그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그 유혹의 손길을 물리쳐야 하는 것입니다. 이때 만약 약간만이라도 흔들리면 계속 잡아 흔들어 받은 교훈에서 끌어내려 진실한 믿음에서 떠나게 합니다.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라는 말은 바울이 받은 계시로 그들에게 가르친 대로 그 믿음을 저버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계시가 오늘날 우리에게 성경으로 주어졌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믿는 순결한 믿음만이 복음입니다. 공교한 말에 속아 잘못된 곳에 서면 그리스도 에수를 믿는 믿음에 굳게 서지 못합니다.
결론 : 마지막으로 감사함으로 넘치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감사가 넘치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단자들, 공교한 말로 속이는 자들의 특색은 그들의 신앙에는 주님께 대한 진정한 감사 생활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거짓된 믿음에서는 감사가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고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가 넘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16) 철학과 헛된 속임수
(골로새서 2:8)
서론 : 바울은 골로새 교회 성도들에게 철학과 헛된 속임수를 경계했습니다. 대개의 경우, 교회에 침투하여 공교한 말로 미혹하는 일은 이 철학이란 학문과 헛된 속임수인 것입니다. 바울은 이 철학에 대하여 세상의 초등 학문이라고 말하고 이같은 초등 학문을 좇지 말라고 경계했습니다. 여자가 자신의 순결을 지키려면 방어적이어야 합니다.
옛날에는 순결을 지키는 방패로 은장도를 몸에 지니고 있었습니다.
세상에 남자들이 모두 다 예의바른 사람들은 아닙니다. 그런데 여자보다 남자의 순결을 지키는 일은 더욱 어렵습니다.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물리친 요셉의 경우는 요셉의 경우에만 가능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마치 유혹의 손길이 득실거리는 거리에 서성거리고 있는 청년과 같은 존재들입니다. 유혹을 물리치고 복음의 순결을 지키는 일은 믿음의 선한 싸움에 첫째번 조건이 됩니다.
1, 철학을 조심하라
우리는 철학이라고 하는 세상의 초등 학문을 조심해야 합니다. 철학이란 인간의 지혜학입니다. 모든 지식에 관한 근본 원리를 추구하는 학문을 철학이라고 부르는데 말하자면 학문의 바벨탑이 철학입니다. 철학의 기원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닙니다. 모든 근본을 캐내어 하나님의 존재와 대결하려는 인간의 지혜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이 같은 세상의 철학이란 학문에 대하여 세상의 초등 학문이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후, 신학에서 소위 종교 철학이란 학문을 만들어 놨지만 이 종교 철학이 하나님의 존재를 변증하거나 그리스도의 존재를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이 철학에 깊이 빠지면 무신론 사상, 허무주의 사상, 신비주의 사상에 물들기 쉬운 것입니다.
2. 헛된 속임수
다음에 바울은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고 경계했습니다. 속임수는 결국은 진리에 의해 무너지기 때문에 헛된 속임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은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대적하는 모든 학문과 이론은 헛된 속임수에 속한 것들입니다. 우리는 길거리에서 이상한 판을 벌여 놓고 사람들의 시선을 끌게 한 후 속임수로 돈을 갈취하는 사기꾼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이 속임수에 넘어가면 모든 것을 잃은 후에야 정신을 차리게 되는데 그 때는 이미 생명을 노략질 당한 후인 것입니다.
(1) 박태선의 경우 (박장로 전도관) 그럴듯한 속임수로 미혹하는데 그는 모인 군중들에게 묻기를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신 분이신가? 아니다. 왜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시다.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시다면 왜 그의 백성들이 마귀 아래서 고통을 당하고 핍박을 당하고 시련을 당하는데 가만히 보실 수 있는가? 그러므로 하나님은 전지하시지만 전능하신 분은 아니다.' 이런 식으로 미혹하는 것입니다.
(2) 구인회란 자칭 예수가 있었는데 지금은 죽었습니다. 재림 주는 구씨 성씨 가진 사람이다. 계21:17절 천국의 성곽의 길이가 144규빗, 1+4+4=9 그래서 구씨라야 한다고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하면서 사람들을 미혹했습니다.
(3) 과학자들 무엇을 추구하려고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창조주가 아니란 것을 증거해 내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화성에 우주선이 착륙했다. 그 목적? 화성이 생명체가 있는 것을 찾으려고 했다. 아무 것도 없어서 실망하고 있다. UFO로 지금도 난리들이다. 우주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지구의 창조가 제일 먼저, 넷째 날에 우주를 창조하심. 인간을 중심으로 창조했으며 인간의 구원을 목적으로 창조 사역을 이루심. 인간 외에는 다른 우주인이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속임수란 진실을 가장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까지는 먹혀 들어갑니다. 그러나 이같은 모든 일은 사탄의 작품인데 그 목적이 우리의 생명을 노략질하는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영적 분별력은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서 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이요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그 말씀이
영 분별의 잣대가 되는 것입니다. 다른 것으로 잣대를 삼으려다가 그곳에 또 미혹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계 13 :11절에는 거짓된 것으로 속이는 사탄의 모습을 잘 보이고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의 모습에 대해 생기기는 새끼양처럼 생겼지만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은 용의 말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입에서 나오는 말을 가지고 영을 분별해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에서는 용의 말이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결론 : 성령이 증거하는 말씀은 복음의 진리에서 이탈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만을 증거 합니다. 그리스도만을 높입니다. 그리스도만을 자랑합니다. 그리스도께만 영광을 돌립니다. 그가 지신 십자가와 그가 흘리신 보혈과 그가 베푸시는 사죄의 은혜와 그를 믿음으로 주시는 구원의 진리만을 전합니다. 그런데 이런 진리의 말씀에 무엇인가 이
상한 토를 달면 다른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만을 좇아야 합니다.
(17) 그리스도의 할례
(골로새서 2:9-11)
서론 : 바울은 본문 11절에서 그리스도의 할례에 대하여 말씀해 줍니다. 그리스도의 할례란 곧 세례에 관한 것임을 알게 됩니다. 바울이 다음 12절에서 그렇게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할례는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이 받은 하나님의 백성된 표식입니다. 그 당시 이 표식을 할례란 의식으로 행했는데 그 의식이 손으로 한 의식이었습니다.
이 할례로 아브라함의 자녀들은 이방인과 구별되는 백성으로 성별 시켰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면 믿지 않는 사람들과의 구별이 필요합니다. 그 구별을 바울은 그리스도의 할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할례는 아브라함이 행했던 것처럼 손으로 하는 할례인 것이 아니라 손으로 하지 아니할 할례라고 말하고 너희가 이 할례를 받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 성별의 방법
하나님의 백성은 구약 시대이건 신약 시대이건 성별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성별 시키는 일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구약적 방법이요 하나는 신약적 방법입니다. 구약은 그림자요 신약은 실체이기 때문에 그 의식에도 그림자와 실체의 차이를 드러내 놓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에는 육체적 할례를 받았습니다. 육적 할례란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손으로 행하는 할례입니다. 이스라엘은 할례를 받아야 할 민족입니다. 예수님도 이 할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는 육적 할례 제도가 폐지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성별하는 일에 할례가 소용이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왜? 신약 시대에는 참 할례가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신약적인 할례를 그리스도의 할례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에 있어서도 구약적인 하나님의 계명은 율법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계명에 대하여 예수님은 새 계명을 준다고 말씀하시고 그 계명이 사랑이라고 말씀하시므로 구약적 계명인 율법이 원래 그 본체가 사랑임을 나타내셨습니다.
2. 그리스도의 할례란 무엇인가?
그러면 그리스도의 할례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11절에서 그리스도의 할례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라고 했으며 육적 몸을 벗는 할례라고 한 것입니다.
(1) 그리스도의 할례란 옛날 모양 손으로 행하는 육적 할례가 아닙니다. 구약 시대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할례란 절대적 조건이었습니다. 출 4 : 24에는 놀라운 사건이 나옵니다. 모세가 그의 아들에게 할례를 주지 아니한 연고로 하나님께서 모세를 치시려 하신 일이 있었습니다 이때 모세의 아내 십보라가 아들의 양피를 베어 모세의 발 앞에 던지며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라고 말했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치려 하시던 손길을 거두셨습니다. 이처럼 구약시대에는 남자아이들의 양피를 베는 일로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할례는 양피를 베는 할례가 아닙니다. 요즈음 비뇨기과에 가면 위생상 이유로 이 남자아이들의 양피를 베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이것은 신약적인 할례도 구약적인 할례도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약속에 의한 할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할례란 말의 의미에 대하여 바울은 '육적 몸을 벗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육신에 대하여 죽은 생활을 의미하기 때문에 영적인 의미의 말이 됩니다. 정욕으로 사용했던 육신을 그리스도 안에서 벗어버려 새로운 그리스도 안에서의 생활로 성별시키는 일이 그리스도인의 할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할례로써 양피를 베는 일로 성별시켰지만 그리스도인은 성별된 생활로 성별되는 것입니다. 이같은 일은 그리스도의 의와 연관이 됩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받은 일은 곧 세상과 구별되는 할례가 되며 이 할례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육적 몸을 벗는 생활로 실제적인 할례의 생활에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롬 8:6절에서 육신의 생각은 사망, 영의생각은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육신의 할례는 육적 성별은 가능했지만 정말로 하나님의 백성인 영적인 성별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할례를 받은 이스라엘이 이방인들과 같이 육적 생활을 할 때 그 할례는 무 할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할례는 실제적으로 의롭다 하심을 주시므로 성별시키셨습니다. 이 할례는 거듭날 때 성령의 임재 하심으로 성별의 그리스도의 할례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육의 몸을 벗지 못하는 생활을 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의의 선언을 받았기 때문에 할례자의 실제적인 생활에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 그러면 그리스도인의 할례 받은 생활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내가 날마다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게 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것은 롬 8 : 14절 말씀처럼 영으로 육을 죽이는 생활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할례는 성령으로 사는 생활로 나타납니다. 세상 사람들과 성별된 그리스도의 할례 받은 생활을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18) 할례와 세례와의 관계
(골로새서 2:12-15)
서론 : 세례를 받는 일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면 이 세례는 어디서 온 것이며 어떤 영적 의미가 있으며 구약의 할례와는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인가? 이 세례 문제를 가지고 생긴 교단이 소위 침례교회이며 그 후, 일반 교회에서 실시하는 물세례를 버리고 침례 세례를 하는 교회들이 많아졌습니다.
1. 세례의 두 가지 뜻
바울은 본문에서 세례의 깊은 뜻을 할례와 연관시켜 해석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세례에 대하여 영적 의미를 부여해 주고 있으며 우리가 의식적으로 행하는 물세례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영적인 연합 관계와 연결시키므로 세례의 참뜻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가 받는 물세례에 대한 두 가지 의미를 살펴보고 세례의 영적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고 합니다.
(1) 세례에는 소극적인 뜻이 있습니다. 세례는 구원의 수단이 아니란 사실입니다. 세례와 구원과는 전혀 상관관계가 없습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사람이 세례를 받고 구원이 그 세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은 성도가 그리스도와의 영적인 연합을 위한 의식으로 받는 것이 세례입니다. 다음에 세례는 중생에 이르는 과정도 아닙니다. 세례라고 하는 과정을 거쳐야 중생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중생은 세례와는 아무런 관계없이 성령으로 되는 것입니다. 다음에 세례는 의를 얻는 방편도 아닙니다. 의는 아브라함과 같이 믿음으로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2) 세례에는 적극적인 면이 있습니다. 세례는 그리스도에 대한 외적인 신앙고백입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은 어떤 형편에 있든지 세례란 방법을 통해서 자신이 그리스도를 영접했다는 양심적인 신앙고백을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거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의식은 비록 구원과는 상관이 없다고 해도 누구나 거절하면 안됩니다. 주님께서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중생한 사람은 주님의 명령을 거역하지 않습니다.
다음에 세례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란 깊은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란 두 가지 의미를 가진 말입니다. 12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해 줍니다. 세례의 참 뜻은 세례 받는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지낸 일과 부활하신 일에 연합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2. 바울이 말하는 세례
그런데 본문에서 바울이 말하는 세례란 물세례를 의미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이 세례는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받는 중생의 역사 곧 성령 세례를 의미해 줍니다. 침례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사람이 세례를 받을 때 물 속에 몸을 담겨야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물에서 올라올 때 살리시는 부활에 연합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롬 6장과 여기서 말하고 있는 세례는 둘 다 그리스도인들이 받을 물세례에 대한 언급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와의 영적인 연합으로서의 성령 세례를 의미합니다. 물세례는 성령 세례를 상징해 주는 하나의 의식에 불과합니다. 침례 교인들처럼 물세례를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다시 부활하는 의식으로 집례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의식은 구약의 정결케 하는 의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부정한 것을 물로 씻어 정결케 했습니다. 부정한 자에게 짐승의 피를 뿌려 정결케 하는 의식으로 삼았습니다. 물은 곧 죄를 사하는 피를 말하고 이 피는 곧 그리스도의 피를 의미해 줍니다.
세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준 것은 정결케 하는 율법의 의식에 따라 회개의 상징으로 실시했던 것입니다. 침례란 말은 '팝디죠'란 말에서 나왔는데 그런데 이 팝디죠란 말이 물에 담근다는 침례란 말의 뜻도 있지만 물로 씻는 세례란 의미로도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눅16:24 찍어, 핍디죠= 출30:20 물로 씻어, 핍디죠) 그러므로 성경에 나오는 팝디죠란 단어를 침례란 해석으로 할 수도 있고 세례란 말로 해석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성별은 성령께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인 영적 세례로 이루어 주시고 우리는 물세례로 그 사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성별을 이룬 사람들만이 물세례의 의의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13절에서 바울은 이같은 사실을 증거해 줍니다. ( ). 죄와 무 할례로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고 있는 진정한 세례인 것입니다.
결론 : 그리스도는 이 모든 일을 십자가로 승리하시고 십자가로 이루셨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세례를 받은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되었으므로 이 모든 일에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19) 폄론하지 말아야 할 몇 가지 사실
(골로새서 2:16-17)
서론 : 오늘 본문 말씀은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에 잘 배워서 성경대로 깨달아야 합니다. 이 말씀을 좀 평이한 언어로 표현하고 있는 현대인의 성경에 기록된 말씀대로 읽어 드리겠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먹고 마시는 것이나 명절이나 매월 초하루나 안식일에 관해서 아무도 여러분을 비판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이런 것들은 실체이신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이와 똑같은 말씀이 갈 4:10절에 나와 있습니다.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1. 이 말씀에 나타난 대략적인 내용
우리는 먼저 본문에 나오는 말씀의 대략적인 내용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먹고 마시는 것 = 율법에서 규정한 규례로 정결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의 구별을 말하며 이것은 또 절기에 따른 금식이나 금욕적인 생활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2) 절기 = 절기는 율법에서 유대인들에게 지키기를 명하는 행사입니다. 유대인들이 큰 명절로 지키는 오순절, 이 오순절은 칠칠절 혹은 맥추절이라고도 부릅니다. 유월절, 장막절, 초막절이라로도 부르며 7월15일에 지키는 유대인들의 추수감사절입니다. 이 절기에 이르면 유대인들은 율법에 명한 바에 따라 반드시 지켜야 했습니다.
(3) 월삭 = 그 달의 초하룻날을 의미하며 이 날은 제날로 나팔을 불고 안식했으며 특별한 희생제를 드렸습니다.
(4) 안식일 = 안식일은 엿새 동안은 일하고 이레 되는 날에 안식하는 율법적인 규례로 하나님께서 레위기 23:1절 이하에서 언급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이런 것들 때문에 아무에게든지 너희가 판단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말씀이 우리에게 교훈해 주는 것은 "먹고 마시는 것이나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 따위는 유대인들이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이전까지 율법적인 조항으로 지켜졌던 것들이니 이제 장래 일에 그림자로 필요했던 이것들은 본체가 되시는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완전히 폐해졌다는 사실을 밝히고 그런 일 때문에 다른 사람으로부터 특히 유대교에 열심 있는 거짓 선생들로부터 판단을 받거나 좋지 않게 비판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14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이런 것들, 즉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율법)을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인과 율법적인 생활
그러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율법적인 생활을 해야 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있어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인은 율법을 이뤘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에 근거합니다. 그리스도는 율법 아래에 태어나시고 그 율법을 온전히 이루셨으며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하므로 율법의 의를 이미 얻은 것입니다. 다음에 그리스도인은 율법의 정죄를 받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유는 이미 율법을 모두 이루어 율법보다 더 완전한 하나님의 의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은 무 율법주의자가 아니란 사실입니다. 우리에게는 새로운 율법인 그리스도의 율법이 있습니다. 이 율법은 새로운 계명으로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사랑의 법은 율법과 모순되는 법이 아니며 오히려 율법의 완성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율법을 지켜야 하느냐는 문제에 대한 해답은 어떻게 내려야 합니까? 율법에는 의식적인 조항이 있고 계명적인 조항이 있습니다. 의식적인 조항은 먹고 마시는 의식, 제사의식, 절기의식, 정결의식 등인데 이 조항들은 이미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라졌습니다. 절기 의식도 유월절도 성취되었고 무교절도 성취되었으며 맥추절도, 이런 절기 의식은 사실상 아무런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그런데 요는 안식일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이 안식일은 10계명 중에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분명히 안식일을 명시하면서 안식일도 장래 일의 그림자라고 규정짓고 있다는데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안식에 그 제정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안식은 7일 안식을 말하는 토요 안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서의 안식의 그림자임을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히 4:3-10)
신약 시대에는 주일이 안식일이 된 것이 아닙니다. 안식일은 하늘에서의 참 안식의 그림자로 보이신 것이기 때문에 이 조항이 비록 10계명 중에 있다고 하나 안식일은 그림자로서의 역할로 이미 그 시효가 끝났습니다. 우리는 그 안식일에 얽매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만약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면 안식일을 어겼을 때의 저주와 심판도 함께 받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하나님의 은혜가 무너져 버립니다.
결론 : 안식일은 우리의 참 안식의 그림자일 뿐입니다. 우리가 만약 안식일을 따라 그 규례를 지킨다면 우리는 율법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이며 그리스도를 헛되게 믿는 것이 됩니다. 바울은 안식일이 10계명에 있는 하나님의 계명인줄 알면서도 안식일은 그림자에 속한 의식적인 규례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든 안식일에 대하여 우리를 판단하려는 자들에게 분명한 성경적인 증거를 가지고 대항해야 하는 것입니다.
(20)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골로새서 2:18-23)
서론 : 골로새 교회를 비롯해 그 당시 교회 안에는 율법적인 복음을 전하는 무리들이 있어서 일부로 겸손을 위장하고 성도들에게 다가왔기 때문에 이들에 의해 골로새 교회 성도들의 상급이 빼앗길까 보아 그들을 경계하여 그들로 인하여 상을 빼앗기는 일이 없도록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또 그들은 성도들에게 천사에 대한 숭배를 강조한 것으로 보입니다. 천사 숭배함을 인하여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같은 일은 지금의 천주교에서 마리아나 베드로와 같은 존재를 숭배하고 그들을 중보자로 세워 그들에게 기도하는 일을 하고 있는데 아마도 천사를 이같은 중보자 적인 위치에서 숭배해야 한다고 미혹한 것으로 보입니다.
1. 이런 자들의 헛된 교훈
바울은 거짓 선생들이 주장하는 대로 그들은 허황된 무엇을 보고 그것을 헛되이 과장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세계를 보고 그 세계에서 천사의 탁월한 모습을 보았으며 그 일을 과장하여 미혹하는 일로 천사 숭배를 강요한다고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분명히 영의 세계를 본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보았다는 것은 육체의 마음을 좇아 본 것으로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투시란 말에 매력을 느끼며 또 그런 은사를 가진 사람들을 우러러봅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 보아도 투시의 은사란 말은 없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영적 세계를 보고 과장하는 일입니다. (유령의 별장이란 영화, 갑자기 별장이 나타나고 인물이 등장, 살해 장면이 나옴. 어떤 심령 주의자가 나타나 그의 투시력에 의해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공포 영화) 요즘 심령 과학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죽은 사람과 대화도 하고 어떤 사건이 일어나기도 전에 먼저 보기도 하며 자신의 영이 멀리 날아가서 그곳에 있는 다른 사람과 만나기도 합니다. 이런 영적 세계와의 접촉은 사탄의 역사입니다. 사람은 영적 존재이기 때문에 이 영이 어떤 영적 훈령을 받으면 영의 세계에 들어가 활동할 수 있거나 그 세계의 비밀을 알아낼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이 심령과 학이란 말로 많은 그릅들이 생겨 경쟁적으로 연구하며 실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일에 매혹되면 그런 세계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라고 하는 어떤 목사, 치료의 광선이라고 과대 선전, 목사들을 미혹하여 한 번에 20만원씩 받고 가리키는데 알고보니 기를 받는 일이다. 기도를 가장하고 성경을 오용해서 기의 훈련에서 나오는 이상한 광선을 성경적으로 해석하여 신비적인 은사를 제공해 주는 것처럼 속여 돈을 뜯는 사례 등도 있음) 대개 이런 자들의 보았다는 신비적인 일은 헛되이 과장된 것들로 신앙적으로 큰 해를 끼치는 것들입니다.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분에 의해 지체인 우리들은 마디와 힘줄로 새 힘을 공급받아 연합하여 우리의 신앙을 성장케 하는 것인데 이런 사람들의 주장은 헛된 곳에 미혹하게 하므로 그런 정상적인 성장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2. 왜 의문에 순종하느냐 ?
바울은 20절에서 "너희가 세상의 초등 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 말씀해 줍니다. 의문이란 율법에 따라 살아가는 생활을 말하는데 골로새 교회 성도들 중 많은 사람들이 먹고 마시는 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 등을 지키는 생활로 겸손을 가장하고 그리스도를 붙들지 못하고 다른 영적 존재를 숭배하는 일 등으로 유혹 받기 때문에 바울은 이런 일들을 세상의 초등 학문이라고 말하면서 이런 자들의 속임수에 넘어가고 있는 골로새 교회 성도들의 어리석음을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적인 생활을 강조하는 무리들은 21절에서 지적한 말씀대로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는 교훈을 주고 있었습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 들이 거룩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율법에서 금하는 모든 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 율법에서 요구하는 것들은 일시적이며 부패하는 것들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의 교훈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하나님 숭배인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가 자기 방법에 따라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에 따르지 않는 숭배는 받지 아니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 신을 하나님으로 섬겼다가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을 자초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의 겸손은 위장된 겸손으로 그런 겸손은 교만보다 더 나쁜 것으로 우리의 신앙을 위선적으로 만듭니다. 또 그들의 교훈은 우리의 몸을 괴롭게 하는 일을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따라야 하는 것처럼 말하지만 몸을 괴롭게 하는 일은 경건의 수단이 될 수도 없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도 아닙니다.
결론 : 대개 이런 무리들이 교회에 머리를 쳐들고 나타나는 이유는 우리의 신앙생활을 복음적으로 지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상을 빼앗으려는 사탄의 계교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빼앗지 못하게 하라고 한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 (21 - 29)
◆ 밤중소리 01-31 | VIEW : 728
(21) 위엣 것을 찾는 생활
(골로새서 3:1-4)
서론 : 바울은 3 : 2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생각해야 할 생활의 목표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고 했습니다. 1절에서 그 이유를 밝히기를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고 한 것입니다. 바울의 이 같은 말은 세례의 참 뜻과 그리스도의 세례를 받은 자들의 생활에 대하여 말씀해 주는 것입니다.
1.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은 사람
바울이 1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는 말은 그의 죽으심과 그의 다시 살아나심에 대한 연합 관계를 밝혀 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너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령으로 새로운 생명을 받았으면 그렇게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았다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그 부활의 생명에 연합이 되었으므로 그리스도의 새로운 생명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이 생명은 중생의 생명이요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죽었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 하신 말씀처럼 새 사람이 된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이처럼 우리의 엣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지낸바 되어 죽었고 그의 부활하심에 연합하여 새로운 생명을 받아 이제 다시 살아났다면 엣사람의 행실이나 생각을 버리고 새 사람의 새로운 생명 가운데서 새로운 생각을 가지고 새로운 생활을 해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인의 생활원칙
그리스도인에게는 움직일 수 없는 생활 원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위엣것을 찾는 생활입니다. 위엣것에 대하여 바울은 1절에서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위엣 것이란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찾고 그리스도를 생각하는 일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언제나 그리스도를 찾아가는 생활을 해야 하며 그리스도만을 생각하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에게만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생활이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 그 놀라운 영광을 바라보며 그 상급을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생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세상 소망은 그리스도와 함께 무덤에 장사지낸바 되었기 때문에 죽은 소망이 된 것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인에게는 새로운 소망이 생긴 것입니다. 그것은 하늘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 그리스도의 영광에 동참하는 생활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생활, 위엣 것을 생각하는 생활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생활을 의미해 주는 말입니다. 이제 우리의 소망이 하늘에 있으니 우리의 생활은 마땅히 그 나라를 구해야 하며 그의 의를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아예 감추었다고 한 것입니다. 여기서 감추었다는 말은 우리의 새로운 생명이 지금은 나타나지 않았지만 분명히 하나님 안에서 보장받았으며 그리스도께서 다스리는 새로운 나라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 중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새로운 생명의 광채가 나타날 것이라고 말씀해 주는 것입니다. 이 광채는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이기신 그 부활의 생명을 말하며 그리스도인들이 부활로써 그의 소망을 완전히 이룰 때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새로운 생명의 광채가 드러날 것이란 의미가 되겠습니다.
우리의 새로운 삶은 마땅히 위엣 것을 추구하는 삶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생활은 그리스도만을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생활해 나가는 구심점을 그리스도에게 맞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위엣 것을 생각하라는 말은 그리스도만을 사랑하는 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로 충만한 생활을 할 것을 권면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이 같은 생활을 해야 할 이유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며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다는데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똑같은 공동운명체가 된 사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안에 감추어진 우리의 생명은 절대 안전합니다. 이 생명은 사탄이 노략질하지 못합니다. 그 누구도 이 생명을 빼앗지 못합니다.
결론 :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우리의 육체에 대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와 같이 여기는 생활어야 합니다.. 이 생활은 지난날 우리들이 육체의 정욕대료 살아온 모든 행실을 버리는 생활입니다. 이 같은 생활은 성령의 능력 가운데 살아가는 생활을 통해서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생활은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기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우리의 생의 목표로 하여 살아가는 생활입니다. 이 생활은 우리의 육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는 생활입니다. 우리의 육체를 이제는 의의 병기로 사용해야 합니다. 죄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의의 병기로 의의 인도하심을 따라야 합니다. 땅엣 것을 죽이고 위엣 것을 찾는 생활 우리의 생활은 날마다 이 같은 생활로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22) 벗어버려야 할 옛 사람
(골로새서 3:5-6)
서론 : 땅엣 것을 생각지 말고 위엣 것을 찾는 생활을 할 사람은 먼저 땅에 있는 우리의 지체부터 죽여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5절에서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고 말씀해 줍니다. 이 지체는 우리의 영을 거스리고 우리의 새로운 생명에 도전하며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고 하는 우리의 영적인 생활 의지를 막는 존재입니다. 우리의 육체는 이 육체가 새롭게 변화 받는 부활의 소망을 이루기 이전까지는 언제나 우리의 영적인 생활을 거스립니다. 우리가 원하는 영적 생활을 도와주거나 순응하는 생활에 익숙하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거역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지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체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르시기를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경종해 주는 것입니다 .육체대로 살지 않으려면 그 지체를 죽여야 하는 것입니다.
1. 우리가 죽여야 할 땅의 지체들
바울은 5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죽여야 할 것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언급해 주고 있습니다.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 말씀은 여러 가지로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를 줍니다. 이 말에 대하여 바울은 롬 6 : 11절 이하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는 말은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로 여기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영적 신분은 분명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하여 죽었고 의에 대하여 살았지만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이 되기 이전까지의 우리의 삶은 죄와의 투쟁의 삶인 것입니다. 육신이라고 하는 이 세상에서의 몸을 가지고 살아갈 때는 육신이 부활할 때까지 죄의 유혹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육체에 속해 있는 죄의 병기로 익숙해져 있는 지체들을 죽이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울은 또한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싸워야할 믿음의 선한 싸움이란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지체에 속한 것은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라고 했으며 특히 탐심은 우상 숭배라고 경종하고 있습니다.
(1) 음란이 첫째로 지적되고 있습니다. 땅에 거하는 모든 인간 누구에게나 음란의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종의 번식을 위해 모든 생명체에게 성욕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타락한 이후 이 인간 번식의 기본적인 성욕이 음란 화되어 범죄 화된 것입니다. 죄를 범한 후, 아담과 하와가 자신들의 벗은 몸을 부끄럽게 여기게 되었다는 말은 음란한 마음에서 생긴 것입니다. 노아 시대와 소돔과 고모라 시대에 임한 하나님의 심판은 이 음란 화된 세상에 대한 심판이요 인류의 마지막에 임할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도 음란한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함이신 것입니다. 지금 사회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음란의 심각성을 보시기 바랍니다.
(2) 부정이라고 했습니다. 이 부정이란 행실의 더러움을 말합니다. 부정은 음란보다 더 광범위한 온 인류 사회의 타락상을 의미합니다. 마음에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 이 부정에 뿌리를 박고 있기 때문에 입으로 나오는 것, 행실로 나타나는 모든 것들이 더러움으로 들어차 있으며 이 더러움이 이 세상을 더욱 악하게 만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3) 사욕이라고 했습니다. 사욕이란 이기적인 생각에서 나오는 자기 본위, 자기 중심의 생활 방식을 말합니다. 인간들은 도덕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그 마음의 중심이 이 사욕에 의해 움지기는 것입니다. 남의 유익에 대해선 어불관언이고 자신의 유익만을 추구하기 때문에 부정부패가 만연해 지고 모략과 모함과 도적질과 사기와 살인이 끄칠날이 없는 것입니다. 자기의 유익만을 좇는 생활은 사욕이 되며 이 사욕의 결과는 범죄와 이어지는 것입니다.
(4) 악한 정욕이라고 했습니다. 이 악한 정욕은 물질을 탐하는 일에 집착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온갖 욕망을 의미합니다.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정욕이 없을 수는 없지만 악한 정욕은 그 사람으로 색욕의 노예, 물질의 노예로 만들어 죄로 번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5) 탐심이라고 했습니다. 탐심은 물질에 대한 무절제한 욕심을 말합니다. 이 탐심에 물든 사람은 어떤 방법이든지 가리지 않고 돈을 버는 일이라면 온갖 방법을 동원하는 것입니다. 이 탐심은 동물적인 욕망으로 이 탐심에 빠지면 사람들은 끝없는 욕심에 사로잡혀 온갖 부정을 저지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신약적인 우상숭배로 이 탐심을 들고 있다는 사실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탐심은 우상숭배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탐심이 우상숭배인 이유는 이 탐심에 빠진 사람은 그의 안중에 오직 물질의 욕심만이 있을 뿐, 다른 것이 존재치 않습니다. 물질 앞에 자신의 생명은 말할 것도 없고 자신의 영혼까지 바칠 수 있는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탐심에 젖은 사람은 물질을 하나님보다 더 섬기며 물질이 그 사람의 인생의 전부이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이 우상숭배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결론 : 바울은 6절에서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고 경종해 주고 있습니다. 이런 죄악이 우리의 생애에 하나님의 징계를 부르며 심판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새 옷을 입고 이 같은 온갖 더러운 육체의 옷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23) 벗어버려야 할 옛 사람
(골로새서 3:7-11)
서론 :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이 지난날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전에 육체 가운데서 살아갈 때는 그 가운데서 행하는 생활을 했다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5절에 있는 죄악, 음란과 부정과 사악과 악한 정욕과 탐심 가운데서 살아 온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었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벗어버려야 할 옛사람
그리스도인은 벗어버려야 할 것과 새로 입어야 할 것이 무엇인가가 분명해야 합니다. 벗어버린 것에 대하여 옛사람과 그 행위라고 했고 새로 입은 것은 새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인 사람은 그 지체대신 입어야 할 것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나쁜 나무에서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땅의 지체는 악한 나무입니다. 죄악의 나무이기 때문입니다. 그 나무에서 영생의 결실을 맺을 수 없습니다. 나쁜 과실을 맺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음란과 부정과 사악과 악한 정욕과 탐심 등입니다. 이런 것들은 절대로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며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8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벗어버려야 할 죄악에 대하여 몇 가지 더 추가해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분을 벗어버리라고 했습니다. 분이란 우리의 악한 감정을 겉으로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인간은 그의 일상생활 가운데서 분을 곧잘 표출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이 같은 분냄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경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쉬 분내는 자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분은 우리로 하여금 그 다음 단계인 범죄로 이끕니다. 그래서 시 4 : 4절에서 “너희는 분 내어도 범죄치 말라”고 했으며 엡 4 : 26절에서는 분을 오래 품고 있으면 다른 사람에게 해를 주게 되므로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경계해 주는 것입니다. 또 딛 1 : 7절에서 감독의 자격에 대하여 “급히 분내지 아니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분은 서로간의 평화를 깨고 다툼을 가져오므로 잠 15 : 18절에서는 “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킨다”고 한 것입니다.
(2) 악의를 벗어버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악의란 악한 의도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치 아니한 마음의 계획도 이 악의에 속합니다. 사람이 생각하고 계획하는 악의는 설 수 없습니다. 만약 그 악의를 실현하기 위하여 악의와 함께 손을 잡는 사람은 시험의 올무에 빠지게 됩니다. 결국 일을 성사시키지도 못하고 인생의 패배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잠16장에서 하나님은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악한 의도는 결국은 성사할 수도 없으며 오히려 시험의 올무가 되어 함정에 깊이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잠 14 : 22절에서 “선을 도모하는 자에게는 인자와 진리가 있지만 악을 도모하는 자는 그릇 가는 것이라”고 경종하고 있습니다.
(3) 훼방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바른 것을 거역하는 행위가 훼방입니다. 진리를 대항하여 거스리는 일입니다. 훼방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이웃을 훼방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시 15 : 3절에서 이웃을 훼방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훼방하는 훼방이 있습니다. 이 같은 훼방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훼방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치 말라고 엄히 경종해 줍니다. 상전을 훼방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상전에게 훼방하는 일도 악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진리를 훼방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들은 진리를 대적하는 자들도 다른 복음을 전하거나 이단적인 주장으로 진리를 오도하는 자들이 이에 속합니다. 성령을 훼방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막 3 : 29절에서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사함을 받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누가 이 우리는 이 같은 훼방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되며 다른 사람들로부터 훼방을 당하는 자가 되어서도 안됩니다.
(4) 입에 부끄러운 말을 벗어버려야 합나다 입의 부끄러운 말이란 욕설, 저주, 모함, 이간질 등의 부도덕한 말을 말합니다.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결국은 그 사람에게 돌아올 씨앗이 되는 것입니다. 언제인가 그 열매를 먹게 되는 것입니다. 남에게 쏟아 부은 저주도 머물 곳이 없으면 자신의 머리로 돌아온다고 했습니다.
(5) 서로 거짓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거짓의 아비는 마귀라고 하셨습니다. 누가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까? 딤전 4 : 2절에서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하는 자가 거짓말을 한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사람을 입혀 주신 이유는 하나님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가 되게 하시기 위해서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사람들입니다. 원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들은 범죄하므로 인하여 그 형상이 사라졌지만 그리스도와 연합되므로 회복이 되었습니다. 새사람이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그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배우는 학문이나 연구나 생각하는 모든 지식의 방향이 육체의 생각에서 영의 생각으로 새로워진 것입니다.
결론 : 이제 새사람을 옷 입은 사람은 지난날의 더러운 누더기 옷인 육체의 지체들을 죽이고 새사람 가운데서 새로운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으로 옷 입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믿음의 선한 싸움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이 싸움에는 국경이나 인종의 차별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 싸움에 매일매일 승리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24) 그리스도인이 입어야 할 옷
(골로새서 3:12-14)
서론 : 오늘 본문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입어야 할 새 옷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밝혀 주고 있습니다.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으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혐의를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그 위에 사랑을 더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1. 그리스도인이 알아야 할 자신의 신분
(1)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자라고 말씀해 줍니다. 교회란 말은 세상에서 불러낸 무리들이란 의미가 있는 말로 세상과 구별된 무리란 뜻입니다. 이 같은 구별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하신 것으로 성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별된 사람들을 하나님의 택하신 자라고 부르는데 그리스도인이 바로 이런 무리 중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세상에는 하나님의 택하신 무리와 그렇지 않은 무리들이 존재합니다. 우리가 그 택하신 무리 가운데 속하고 있다는 사실은 무한한 영광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2)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거룩은 무리 중에 속해 있는 나의 신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한 자들을 거룩한 무리, 택함을 받지 못한 무리들을 죄인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하다는 말은 나의 인격으로 말이 암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이 사실 하나 때문으로 이 같은 우리의 소속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앞으로 거룩해져야 할 무리인 것이 아니라 이미 거룩해진 무리들입니다. 다만 우리는 우리의 신분이 이처럼 이미 거룩해졌기 때문에 우리의 행실이 거룩해져야 한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분상 이미 거룩함을 받은 사람이며 하나님으로부터 거룩하다고 인정을 받고 있지만 우리의 행실은 거룩함을 향하여 열매를 맺어야 할 사람들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그 비결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면 열매를 맺으리라고 하셨는데 이 열매가 우리의 거룩한 생활로 우리의 거룩한 신분을 따라가게 하는 우리의 생활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 여러 사람들로부터 받는 별의별 사랑이 있지만 그 중에 가장 존귀하고 아름다운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독생자를 주신 물증적인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들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요, 거룩하게 성별 된 자요,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들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과연 이처럼 우리의 신분에 합당한 행실을 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분은 그러한데 우리의 행실이 그렇지 못하다면 어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며 그 분에게 영광을 돌리는 생활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까? 바울은 12절에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행하라고 말씀해 줍니다.
2. 그리스도인이 입어야 할 새 옷
그러면 이런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새옷을 입어야 하는가? 이에 대한 해답으로 바울은 몇 가지 그리스도인들이 그 생활에 나타내야 할 사랑의 열매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 누가 뉘게 겸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고 말씀해 줍니다.
(1) 긍휼이란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2) 자비란 말의 반대말은 잔인으로 자비란 따듯한 인정에서 나온 마음을 말합니다. 주님은 12 : 7절에서 하나님은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
(3) 겸손이란 다른 사람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 을 가진 사람은 남을 섬길 수 있는 사람입니다.
(4) 온유란 겸손과 비슷한 단어로 교만하지 아니하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있는 마음입니다.
(5) 오래 참음을 옷 입으라고 했는데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림에 대한 자세를 말하며 응답과 소망은 인내하는 자에게만 허락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인내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6) 서로의 혐의를 용납하라고 했습니다. 허물을 덮어주는 일은 사랑에서 나옵니다. 남을 정죄하는 자는 자신도 정죄를 받습니다.
(7)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온몸을 온전히 매는 띠라고 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오직 사랑의 바탕에서만이 가능합니다.
결론 : 사랑을 공급해 주지 않으면 아무 것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옷을 입고 그 위에 띠가 없다면 아무 것도 걸칠 수가 없습니다. 이 사랑의 띠를 띠어야 벗을 것을 벗고 입을 것을 입을 수 있는 것입니다.
(25) 그리스도인의 평강과 감사
(골로새서 3:15)
서론 : 바울은 15절에서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은혜생활은 그의 심령에서 나오기 때문에 심령의 새로워짐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1. 그리스도의 평강으로 채우라
그리스도인의 심령은 먼저 그리스도의 평강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평강으로 지배를 받으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평강이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안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주노니 내가 주는 평앙은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르다”고 하셨습니다. 부활하신 후에도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주노니”란 말씀이셨습니다. 평강과 평안은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단어로 마음에 근심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안은 우리에게 어떻게 임하며 어떻게 우리의 마음을 주장하는 것입니까?
(1) 사죄에서 오는 평안입니다. 죄인들의 마음에는 불안과 두려움이 있을 뿐입니다. 누구에게나 인간의 마음에는 참 평안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에게는 근본적으로 죄의 뿌리가 있어서 늘 범죄하는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는 아무런 죄가 없노라고 우겨도 그의 양심은 늘 자기자신을 죄인이라고 정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음 받은 사람들에게는 그의 마음에 두려움 대신 참 평안이 강처럼 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2) 죄의 승리와 사랑의 승리에서 오는 평안입니다. 죄의 사슬에 메임 받은 속박에서 벗어나 진리로 말미암아 승리한 평안함이 그의 생애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평안함이 깃든 사람은 자신의 생애가 오직 그리스도로 인하여 새로워졌기 때문에 그곳에는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새로운 인생만이 전개되는 것입니다.
(3) 우리의 생애 중에 끊임없이 찾아오는 모든 염려를 주님께 맡기는 데서 오는 평안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모든 염려를 주님이 돌보아 주시기 때문에 너희 염려를 다 그에게 맡기라고 권면하시는 것입니다. 염려는 우리 인생들의 무거은 짐이 되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염려가 우리의 짐이 될 수는 없습니다. 염려를 주님께 맡겨진 마음에는 주님의 평안이 임하는 것입니다.
(4) 장차 나타날 소망에서 오는 평안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우리의 모든 불안과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하여 평안을 줍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지금 우리의 현실적인 생활인 것이 아니라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소망인 것입니다. 이 소망은 현재의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난을 능히 이기게 합니다. 그러므로 고난과 환난이 닥쳐도 내 마음의 평안함을 빼앗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같은 평강이 그의 마음을 주장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씀해 줍니다. 교회는 한 몸을 이룬 성도의 모임입니다. 여러 성도들이 한몸을 이루는 일은 그리스도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을 주장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2. 감사하는 자가 되라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평강을 주장하면서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고 했습니다. 은혜생활의 최고 단계는 감사생활입니다. 모든 것을 다 갖추어 있어도 감사생활을 하지 못하면 은혜생활이 못되며 감사가 없는 마음에는 평강도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것은
(1)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애를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애를 온전한 구원을 이루시는 일에 가장 선하시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생각한다면 그 마음에 감사가 넘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일을 처리하심에 있어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기 때문에 감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혹 우리가 죄를 범하였어도 하나님은 징계를 통해서 의의 평강의 열매를 맺게 하시며 결과적으로 선을 이루어주시기 때문에 징계를 받는 중에도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욥의 경우가 그러했습니다.
(3) 하나님은 미쁘신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분은 나에게 가장 절실하게 필요로 하신 분이시며 그 분이 계시지 않는다면 내 생애는 아무 것도 아니란 사실을 알 때 감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감사야말로 그리스도인이 은혜생활을 이루는 일에 필수적인 전제조건이 됩니다.
결론 :우리는 그리스도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을 주장하게 하여 우리의 생애 중에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6) 그리스도인의 말씀으로 풍성히 하라
(골로새서 3:16)
서론 : 바울은 15절과 16절에서 그리스도의 영적 건강법에 대하여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속 사람은 어떻게 강건케 할 수 있는 것이냐 ? 그리고 그 건강을 어떻게 유지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한 영적 건강법이 대해 언급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1.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게 하라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영적 건강의 첫째 비결은 말씀이 우리 안에 풍성히 거하게 하는 방법이라고 한 것입니다.
(1) 그리스도의 말씀은 곧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말씀으로 존재하시고 말씀 안에서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지금도 말씀으로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말씀을 떠나서는 그리스도가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심령에 말씀이 풍성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 풍성히 거하고 계시다는 뜻이 됩니다.
(2) 말씀은 곧 믿음입니다. 말씀이 없이는 믿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 우리의 믿음이며 이 믿음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말씀으로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곧 복음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영적 생명은 이 말씀으로 지탱하기 때문에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섭취하지 못하는 심령은 믿음으로 성장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혹 어떤 일을 계기로 은혜를 받았다고 해도 말씀이 병행하지 못하면 처음에는 불꽃처럼 타다가 타다 남은 부주깽이처럼 곧 꺼져버리고 맙니다. 말씀이 없는 사람의 열심은 곧 신비적 신앙으로 빠지게 되기 쉬우며 사람의 미혹에 넘어가기 쉬운 것입니다. 말씀이 없을 때 한쪽으로 치우치는 기형적인 신앙을 갖게 되는데 그것이 은사 중심의 생활인 것입니다. 은사도 주로 눈에 보이고 다른 사람에게 자랑하며 어떤 능력으로 나타낼 수 있는 것을 선호하기 때문에 올바른 믿음의 생활에서 이탈하기 쉬운 것입니다.
(3) 그리스도의 말씀은 곧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누구에게 어떻게 임하는 것입니까? 말씀을 믿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 말씀대로 이루어주십니다.
의심하지 않고 말씀을 믿으면 이 산더러 명하여 바다에 던지우라해도 그대로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밤새도록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했지만 주의 말씀에 순종했더니 그물이 찢어질 만치 잡혔습니다. 이것이 기적인 것입니다. 한 백부장은 주님께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하면서 그 말씀을 믿었더니 하인의 중한 병이 고침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기적인 것입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게 능치 못함이 없다”고한 말씀은 말씀을 믿을 때 그 말씀대로 이뤄진다고 하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말씀으로 축복하시고 치료하시는 것입니다.
(4) 말씀은 곧 응답입니다. 주님은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어 주시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말씀을 믿고 기다리는 사람이 하나님의 응답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그리스도의 말씀이 이처럼 역사 하는 것입니까? 히 4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가 살아있으며 그 안에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운동력이 있는 것입니다.
2. 말씀을 어떻게 풍성히 거하게 하느냐 ?
말씀을 풍성히 거하게 하는 방법은 말씀과 접촉하는 일입니다.
사 48 : 16절 “내게 가까이 나아와 내 말을 들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와야 합니다. 시 1 : 1절에서 복 있는 사람에 대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말씀을 즐거워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음식맛을 잃으면 병든 사람의 증거인 것처럼 그리스도인이 말씀의 맛을 모르면 영적으로 병든 사람입니다. 말씀이 달고 그 말씀이 즐거움과 기쁨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시 119 : 165절에는 “주의 말씀을 즐거워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저희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고 했습니다. 말씀이 풍성히 거할 때 그 사람의 생애는 장애물이 제거되고 형통케 되는 것입니다. 시 111 : 2절에서 “하나님의 행사가 크시니 이를 즐거워하는 자가 다 연구하는 도다”고 했습니다.
결론 : 그리스도인은 말씀을 풍성히 거하도록 말씀을 공부해야 합니다. 말씀의 능력을 맛보는 생활을 통해서 말씀과 가까이해야 합니다. 말씀이 풍성히 거할 때 여러분의 생애도 풍성해 질 것입니다.
(27) 가르치는 일과 권면하는 일
(골로새서 3:16-17)
서론 : 그리스도인의 영적 건강의 비결은 첫째로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속에 풍성히 거하는 일이요 다음에는 가르치는 일과 권면하는 일이 따라야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라고 한 것입니다. 가르치는 일은 그리스도 안에서 말씀을 가르치는 일을 의미합니다. 권면은 타일러 힘쓰게 하는 일로 이 두 일은 결국 교회의 지도급 인사에 의해서 성도들을 지도해 나가는 일입니다.
1. 가르치는 일
피차 가르치라고 했는데 가르치는 일에는 가르치는 사람과 가르침을 받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가르치는 자는 구약에서는 선지자적인 사명자를 의미하고 신약에서는 사도적인 사명자를 의미합니다.
(1) 이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그가 써 보낸 서신 첫머리에서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이라고 표현하므로 자신의 사도직분이 전혀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임을 분명히 밝혀 주었습니다. 사도 바울에 대하여 주님은 아나니아에게 말씀하시기를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의 일꾼은 이처럼 주님의 택한 그릇으로 예정된 사람들입니다.
(2) 특별히 가르치는 자는 말씀의 은사와 하나님의 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종들은 선지학교에서 성경을 전문적으로 공부하며 연구한 사람들입니다. 주의 종들의 전문분야는 성경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학문은 모르지만 성경에는 능통해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지혜로 성경을 깨닫고 그 깨달은 말씀을 성도들에게 가르치는 일을 맡은 사람들이 목사들입니다.
(3) 말씀을 가르치는 자의 교회에서의 위치는 그리스도의 대행자, 또는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의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사자라 불립니다. 애베소 교회에 나타나신 주님의 모습을 보면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으시고 일곱 금촛대 사이로 다니시는 이”로 나타나셨는데 일곱 금촛대란 교회를 말하며 일곱별이란 그 교회에 세우신 사자로 주의 종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주의 종들은 그리스도의 권위로써 교회를 다스리며 양 무리들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4) 말씀을 가르침을 받는 자는 그리스도의 양 무리들을 말합니다. 가르침을 받는 자의 태도에 대하여 엄격하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순종하고 복종하라고 했습니다. 히 13 : 17절에서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수종하고 복종하라”고 엄히 명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의 가르침은 그리스도의 명한바 에 따라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하기 때문이며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주님께서 그에게 그의 양 무리들을 맡기셨기 때문입니다.
즐거움으로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그 이유로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양 무리들은 자신들의 영적 생명의 책임을 지고 수고하는 목자에 대하여 귀히 여길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의 생활과 가정의 모든 일에 이르기까지 잘 살펴서 기쁜 마음으로 보람있게 일할 수 있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딤전 5 : 17절에서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을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 할 것이니라”고 한 것처럼 말씀을 가르치는 자를 양 무리들은 존경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혹이 존경을 받을 만한 인품을 갖추지 못한 경우에도 그렇게 하라고 하신 말씀인줄 알아야 합니다. 베드로나 마태 같은 제자는 존경받을 만한 사람들이 못되었지만 사도의 직분을 받았으며 그 직무를 이행한 것입니다.
2. 권면하는 일
교회에는 권면하는 직분이 있습니다. 이들을 장로라고 부릅니다. 성경을 보면 목사도 장로로 불리지만 말씀을 가르치는 자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장로는 목사와 함께 교회를 다스리는 일을 합니다. 장로는 자신의 위치를 잘 알아야 맡은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습니다. 장로는 목사와 동등한 위치에 있는 분이 아닙니다. 목사는 당회장의 직분을 가지고 장로인 당회원 들을 지도하고 지시하며 다스립니다. 장로는 주의 종에게 아론과 훌과 같은 사명 자들임을 알아야 합니다. 목사의 손을 들어주어 피곤치 않게 하며 목회에 전념할 수 있도록 지혜롭게 교회의 업무를 진행시켜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 목사가 주의 양 무리들을 다스리며 말씀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충성되고 지혜있는 종이 되어야 합니다. 장로들이 교인들을 권면하려면 스스로가 신앙적으로 교회 생활에 가정 생활에 본을 보일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에서는 큰 사명을 맡을수록 그만큼 많은 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28) 감사하므로 하나님을 찬양하라
(골로새서 3:16-17)
서론 : 바울은 골로새 교회 성도들에게 “감사하므로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했습니다. 찬양은 신령한 신앙 생활에 반드시 따라야 할 조건이기 때문에 이처럼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17절에서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1. 하나님께 찬양하라
하나님을 찬양하는 방법에 대하여 시와 찬양과 신령한 노래라고 했습니다. 시는 하나님께 대한 찬양 시를 말하며 다윗이 기록한 시편의 시는 모두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양 시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던 것입니다. 찬미는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는 노래이며 신령한 노래란 시와 찬미로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을 의미합니다. 심령의 은혜는 하나님께 대한 찬양에서 풍성해지는 것입니다. 이 같은 노래는 언제나 감사하므로 해야 합니다. 찬양은 감사한 마음에서 나와야 참 찬양이 됩니다.
찬양은 하나님께 크게 영광이 되는 일로 예배 시에는 말할 것도 없고 평상시에도 하나님께 대한 찬양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가장 아름다운 마음의 선율로 영광을 돌리는 방법이 우리의 이 찬양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찬양은 또한 하나님께 올리는 기도입니다. 비록 내가 작사한 것이 아니라도 그 가사를 깊이 음미하면 은혜가 넘치게 됩니다. 그리고 간구하는 마음으로 부르는 신령한 노래의 찬양은 그 자체가 훌륭한 기도로 그 향이 하나님의 보좌에 올리우심을 받을 것입니다.
2. 무엇을 하든지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라
내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나는 죽고 내 속에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신다’고 말씀해 줍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연합된 나의 영적 신분을 의미하는데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나는 이미 죽었으며 그의 부활하심에 연합하여 그의 새로운 생명(영생)으로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의 생애는 주님이 주장하고 계시며 주를 위해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미 죽어서 장사지낸바 된 나를 위해 살아가는 생활은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내 생명을 주관하시는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하든지 말에 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라고 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빌 1 : 6절에서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고 했습니다. 우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셨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해 줍니까? 이것이 그리스도를 위한 삶인 것입니다. 이 같은 일은 시작하신 분도 그리스도요 그 일을 이루시는 분도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할 때 무엇이든지 그 일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할 때 그 일이 하늘의 상급이 되는 것입니다. 내 이름으로 할 때 그 일이 이미 내게 칭찬이 되고 상급이 되었으므로 하나님께 영광이 안됩니다. 그 일이 나의 하늘의 상급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타내며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하라는 뜻입니다. 자신이 무슨 일을 하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영광을 나타내야 합니다. 자기에게 불이익한 일이라 해도 그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이 된다면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한다는 말은 내가 그리스도의 입장에서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이런 생활을 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생활 가운데서 언제나 입의 말을 조심하게 될 것입니다. 입에 파수꾼을 세워 말을 함부로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마음에 그리스도께서 계시기 때문에 덕을 세우는 말과 행실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의 모든 행실에서 그리스도의 빛을 발산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3.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바울은 17절 마지막에서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그를 힘입는다는 말은 그로 말미암는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중보가 되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의를 얻었으며 그리스도에게 연합이 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야할 감사 역시 그리스도를 힘입어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도 그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올리는 것은 그를 힘입어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론 : 그리스도인들은 찬미의 생활이 항상 우리 생활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행위가 마치 주의 힘으로 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생활을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힘입어 늘 하나님께 감사하는 생활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29) 그리스도인의 가족 관계
(골로새서 3:18-25)
서론 :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이 세상에서 살아갈 동안 육신적인 가족 관계를 이루며 살아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족관계는 천국의 가족의 모형이 되어야 하며 그러므로 성경에 합당해야 하며 이웃에 있는 모든 가정에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입니다.
1. 부부의 관계
모든 사람들의 삶의 본고장은 가정입니다. 가정을 떠나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가정이 신앙생활의 첫출발 점이기 때문에 가정생활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성경적인 교훈을 살펴야 합니다. 가정의 핵심은 부부간입니다. 그러면 부부는 가정에서 상호 어떤 관계를 가져야 하며 어떻게 가정을 이루어 나갈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중요한 일인데 18절에서는 아내들에게 19절에서는 남편들에게 그들이 가정에서 취할 서로간의 위치에 대하여 말씀해 줍니다.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가정에 주시는 말씀이기 때문에 주안에서의 순종을 의미합니다. 복종하라는 복종의 뜻은 남편을 주장하려는 자세를 가지고 남편을 지배하는 아내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남편을 속이는 생활과 남편의 의견을 무시하는 아내의 태도는 가정을 불화와 파탄으로 이끌어갑니다. 원만한 가정은 남편에 대한 아내의 순종에서 출발한다는 사실을 가리켜 주십니다. 아담의 가정을 보아도 그 아내 하와의 불순종으로 불행이 찾아온 것입니다. 아담이 아내에게 일러준 하나님의 말씀을 하와가 무시한데서 나온 것입니다. 아합 왕의 가정도 그 아내 이세벨이 자기 남편 아합 왕을 꽉 쥐고 대소사의 정사를 휘둘렀기 때문입니다.
남편에 대해서는 아내를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이 사랑은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자기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은 버리지 말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멸시하지 말고 존중해 주라는 뜻이 있습니다. 아내에게 폭군노릇을 하지 말고 아내의 의사를 무시하지 말라는 뜻이 있는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를 괴롭히지 말라고 했습니다. 술을 마시고 집에 들어와 아내를 괴롭히는 일, 상습적인 투전으로 아내를 괴롭히는 일, 아내에게 완력을 사용하므로 괴롭히는 일을 삼가야 하는 것입니다.
2. 자녀들과 부모와의 관계
가정에는 부부뿐만 아니라 그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부모와 자녀간의 상호 관계는 가정의 질서를 유지하는 일에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먼저 자녀들에 대하여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했습니다. 이런 순종은 주 안에서 부모를 기쁘게 해드리는 일이라고 말해줍니다.
엡 6장에서는 부모님을 공경하는 일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데 잘되고 이 땅에서 오래 살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자녀들은 나쁜 행실이나 말로 부모님의 근심거리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거짓말로 부모를 속여서는 안됩니다. 부모님의 허물을 들추어내서는 안됩니다. 범사에 예로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음에 부모들은 자기 자녀에 대하여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고 했습니다. 자녀들의 노를 격발 시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억울하게 매질하는 일은 자녀들에게 노를 결발 시킵니다. 옳은 일을 했는데도 심한 책망으로 마음을 상하게 한다면 노를 격발 시킬 것입니다. 이런 일은 자녀들을 정서적으로 키우는 일에 암적 요소가 됩니다.
22절에는 종들과 상전들에 대한 상호 관계를 말씀해 줍니다. 인류사를 보면 고대에는 노예제도가 공식적으로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종의 제도가 인정을 받아 온 것은 인간의 완악한 마음에서 나온 것으로 본래 하나님이 주신 제도가 아닙니다. 그러나 종이 공인된 사회에서는 그 사회의 질서를 위해 종과 상전과의 엄격한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종의 신분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이처럼 그 상전에게 순종하는 생활을 통해서 질서를 유지하는 일에 협력하라고 했는데 이것은 이들이 유업의 상을 상전에게서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받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결론 : 25절에서 바울은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어디서 어떤 환경 속에서 살아가든지 불의한 일에 가담해서 사회 질서를 파괴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외모로 사람을 취하심이 없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신분이 어떤 위치에 있건 그리스도안에서는 자신의 신분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기 때문입니다.
골로새서 4장 (30 - 32)
◆ 밤중소리 01-31 | VIEW : 629
(30) 기도에 항상 힘쓰라
(골로새서 4:1-2)
서론 :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에게 기도를 항상 힘쓸 것을 당부했습니다. 그리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도란 영적 생명을 유지하고 그 생명을 성장시키는 절대적 요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영적 양식이라면 기도는 영적 호흡입니다. 아무리 오랜 신앙 경력을 가지고 해박한 성경 지식을 가지고 있다해도 기도가 없으면 머리 깎인 삼손과 다름이 없고 날개 빠진 독수리와 다름이 없습니다.
1. 기도는 그리스도인의 생명 줄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기도는 그의 생명 줄입니다. 하나님과의 교통이 기도로 이루어지며 지속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기도는 자신의 생애에 일어나는 문제 해결의 열쇠입니다. 구하라 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무엇이든지 원하는 것을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내 이름으로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받지 못함은 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무엇을 구한다는 일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며 이 구하는 일은 곧 기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기도는 믿음을 성장시키는 촉진제입니다. 믿음의 성장은 들음과 기도와 순종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기도 없이는 들음에 은혜가 따르지 않으며 기도 없이는 순종의 열매를 맺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2. 기도의 두 가지 자세
그리스도인의 기도에는 두 가지 자세가 필요합니다. 바울은 2절에서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고 했습니다.
(1) 그리스도인들이 기도 생활을 하려면 항상 힘써야 합니다. 기도하는 일에 힘쓰지 않으면 기도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면 저절로 기도가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에 힘쓰는 사람만이 기도가 성장하며 기도가 성장하는 사람만이 항상 기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기도는 영적 생활에 속한 일입니다. 우리의 속 사람은 영적 생활을 따르려는 소원은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번번이 실패합니다. 그 이유는 영의 일은 속 사람은 원하지만 우리의 겉 사람은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육신의 제약을 받습니다. 시간의 제약, 장소의 제약, 육적 노력의 제약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은 모든 세상일에는 익숙해져 있어서 잘 감당하지만 기도에는 익숙해져 있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육신을 기도하려는 영적 요구에 굴복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신이 기도하는 일에 익숙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려는 영적 요구에 곧 순응하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이처럼 기도는 영의 요구에 따르는 숙련의 연습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힘쓰는 자만이 기도하는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기도는 육신의 사람이 지루하게 여깁니다. 무릎을 꿇으면 곧 실증을 느낍니다. 기도는 육신의 사람에게 응답의 확신을 주지 못합니다. 늘 의심을 갖게 합니다. 기도하려는 사람들은 곧 기도를 미루어야겠다는 핑계가 생깁니다. 피곤하니 다음 기회에, 지금 급한 일이 있으니 이 일을 마치고 나서해야겠다는 이유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명심해야 할 일은 이처럼 육신의 사람의 요구를 따르다보면 기도는 할 시간도 없고 의욕도 생기지 않으며 기도하는 일이 무익하고 공허한 일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그리스도인의 생활에는 기도가 따르지 않으며 그러면서도 용케도 신앙 생활은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3.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바울은 2절 마지막에 가서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쉽게 풀이해서 말한다면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기도함으로 깨어 있는 생활을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기도에는 감사가 따라야 합니다. 왜 감사가 따라야 하느냐? 기도는 응답의 방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구하고 그 일에 응답 받는다면 감사해야 합니다. 그런데 기도하면 응답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으니 감사하는 기도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빌 4 : 6절에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했습니다. 감사 기도는 믿음에서 나옵니다. 기도하는 일에 하나님의 응답을 확신한다면 감사가 나오게 됩니다.
기도는 또한 우리의 생활에 영적 경성의 방법입니다.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통은 우리로 늘 깨어 있게 합니다.
결론 : 기도는 힘쓰는 자만이 응답 받을 때까지 할 수 있습니다. 감사하는 기도는 응답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우리로 깨어 있게 하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31) 그리스도인의 지혜로운 처신
(골로새서 4:3-6)
서론 :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종들을 위해 기도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해 바울은 3절과 4절에서 강조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불신 세상에서 외인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이 지혜로워야 한다는 사실에 대하여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종들을 위한 기도
바울은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종들은 그 당시나 지금이나 많은 기도의 뒷받침이 없으면 그 사명을 감당하기 어려운 사람들입니다. 물론 주의 종들은 스스로 자신을 위해 성도들보다 보다 많은 시간을 기도에 바쳐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변에서 도와주는 성도들의 기도도 반드시 필요로 합니다. 바울 같은 위대한 사도에게 성도들의 기도가 필요했다면 우리의 경우는 더 말할 나위 없는 것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설교가요 목회자였던 스펠죤 목사님에게 목회 성공의 비결을 묻는 사람이 찾아 왔었습니다. 목사님은 그 사람을 데리고 자신이 목회 하는 교회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이 24시간 기도를 계속하고 있는 지하실의 어느 기도실로 안내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기를 위해 기도하는 500여명의 성도들의 뜨거운 기도를 들려주었습니다. 그 시간이 이미 자정을 넘은 밤중이었는데도 그 기도 실은 기도하는 수효도 줄지 않고 기도의 뜨거운 열기도 식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스펼죤 목사님은 이것이 자신의 목회 성공의 비결이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성도들이 자신들을 위해 기도하는 일에 있어서 그 기도할 제목까지 거론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말씀의 문을 열어주실 것을 위해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전도의 문이란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의미합니다. 주님은 기도하면 응답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성도들의 기도는 제각기 자기자신의 기도에 대한 응답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성도들이 한 가지 기도의 제목, 자기 교회의 하나님의 종을 위해 기도할 때 그 종은 그만큼 능력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심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주님으로부터 많은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심을 위한 기도의 부탁은 바울은 하나님의 비밀에 대한 더 깊은 깨달음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1. 대인관계의 처신
5절부터는 그리스도인들의 대인관계에서의 처신 문제를 교훈해 줍니다.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외인과 사회생활을 하는 가운데 그들에게 지혜롭게 처신해야 할 것을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지혜를 쓰지 못하고 그들의 손에 이끌림을 받는다면 신앙적인 순결을 잃게 되며 또 사회인들의 함정에 빠지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잠언서는 바로 이 같은 지혜로 주신 성경입니다.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을 대적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지혜로 이 대적을 이겨나가야 합니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외인들에 대하여 지혜로 처신하지 못하고 경거망동하는 행동을 보이거나 부도덕한 일로 비난을 받아서는 안됩니다. 세월을 아끼라는 말은 그리스도인들이 사회인들에 대하여 결정적인 시기를 포착하여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기회로 삼으라는 뜻입니다.
6절에서 바울이 말하는 바는 성도들이 일상생활에 사용하는 말의 사용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교훈입니다.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말은 은혜 가운데서 해야 합니다. 모든 언어 구사에 있어서 은혜롭게 하라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외인들을 만나 대화할 때 조급하거나 패역하거나 불성실할 때 신임을 잃게 되어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게 됩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베드로는 벧전 3 : 15절에서 “너희 속에 있는 소망을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16절에서도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소금은 고르게 합니다. 음식 맛을 고르게 하며 먹는 사람들로 음식 맛을 돋보이게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말은 소금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그 말에 맛을 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의 빚을 진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복음 전하는 일로 이 빚을 갚아야 합니다. 만약 갚지 못하면 하나님은 그 빚을 내게서 찾으실 것입니다. 이처럼 복음의 빚을 갚으려면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사람들에게 지혜롭게 행동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말도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르게 하듯 해야 합니다.
(32) 칭찬 받은 성도 상
(골로새서 4:7-18)
서론 : 바울은 7절부터 18절에 이르기까지 골로새 교회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 말미에서 자신의 주변에서 바울을 도우며 주의 일에 힘쓰는 일곱 명의 일꾼을 골로새 교인들에게 소개하면서 그들이 전하는 문안과 함께 그들에 대한 칭찬을 보내주고 있습니다.
1. 일곱 명의 문안과 칭찬
(1) 두기고 : 두기고란 제자는 바울의 심복으로 이 편지를 가지고 골로새 교회를 방문한 주인공입니다. 바울은 이 두기고에 대하여 칭찬하기를 “그는 사랑을 받는 형제”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형제란 뜻입니다. 주님은 누구를 사랑하시는 것입니까? 나를 사랑하는 자가 나의 사랑을 입는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증거는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들로 주님께 대한 사랑의 증거는 말이나 기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순종에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두기고는 “신실한 일꾼”이라고 했습니다. 주의 일꾼 중에는 신실치 못한 자들도 있는 것입니다. 이들에 대하여 삯군이라고 했습니다. 신실하다는 말은 자신이 믿는 바를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는 골로새까지 가는 심부름을 마다아니하고 솔선해서 그 임무를 마쳤습니다. 바울은 이 두기고에게 주 안에서 함께 된 종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에서 종이란 말은 주인에게 생명을 다하여 순종하며 그 주인의 뜻을 이루는 충성된 일꾼들에게 사용되는 말입니다. 대개의 경우 목사를 주의 종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다른 어떤 성도들보다 더욱 주님께 충성해야 할 위치에 있는 교회의 신실한 일꾼이란 뜻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자기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종이란 이름으로 부를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이 두기고처럼 하나님의 종으로부터 주 안에서 함께 된 종이라고 부를 수 있는 충성된 성도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오네시모 : 다음에 바울은 오네시모에 대해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이 오네시모는 원래가 골로새 사람으로 빌레몬 집안의 종으로 있었던 사람입니다. 이 오네시모는 그 주인에게 범죄하여 로마로 도망갔다가 그곳에서 또 어떤 좋지 않은 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에 갇히게 되어 그 감방에서 바울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오네시모는 바울을 만난 후 완전히 새롭게 변화 받아 지난날 골로새 교회 성도들이 알고 있는 오네시모가 아니라 새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이 편지에서 알려 주고 있습니다. 오네시모는 그가 회개한 후에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가 된 것입니다. 그는 바울의 수족 같은 일꾼이 되어 골로새 교인들에게 오히려 자랑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3) 아리스다고와 마가와 유스도 : 이리스다고에 대하여 바울은 10절에서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도고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마가에 대해서는 바나바의 생질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리스다고는 데살로니가 사람입니다. 그는 끝까지 그리스도의 고난에 바울과 함께 동참한 사람입니다. 바울이 이 편지를 골로새 교회에 보내는 그 시기에도 바울과 함께 로마에 갇혀 있었습니다. 여기서 소개하는 마가는 마가복음을 쓴 저자이며 바울의 제자로 복음을 위한 일꾼으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유스도란 사람은 예수란 이름을 가진 사람으로 그 이름의 뜻이 정의란 의미인데 이 사람도 바울에게는 복음을 위해 함께 일하는 귀한 일꾼 중의 한명입니다. 11절에서 저희는 할례당이라고 말해 주고 있습니다. 할례당이란 말은 할례를 받은 유대인이란 의미로 해석됩니다.
바울은 이들을 소개하면서 이들만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 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주변에는 많은 동역자들이 있었지만 지금 이 편지를 보내는 그의 주변에는 이들만이 그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역사하고 있음을 밝혀 주는 것입니다. 11절 말미에서 이런 사람들이 나의 위로가 되었다고 말씀해 줍니다. 성도들이 교역자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역사 하면 그 일이 교역자에게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교역자의 위로가 될 수 있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4) 바울은 이 사람들 외에도 골로새 교회에서 골로새 교회의 소식을 가지고 바울에게로 와서 바울에게 큰 위로와 기쁨을 준 사람 중 하나인 에바브라에 대하여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에바브라는 바울과 함께 골로새 교회를 세운 일꾼입니다. 그의 신앙생활에 대하여 바울은 항상 너희를 위하여 애써 기도한다고 말했습니다. 성도들을 위해 애쓰는 기도는 칭찬과 상급을 받습니다. 바울은 14절에서 누가와 데마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누가는 누가복음의 저자요 유명한 의사로 알려진 사람입니다. 데마에 대해 이 사람은 처음에는 바울과 더불어 열심히 일했으나 딤후 4 : 10절 말씀을 보면 그가 나중에 세상으로 가버렸다고 했습니다.
결론 : 바울이 이름을 거론한 이 사람들은 모두 신실한 교회의 일꾼들로 바울을 도와주었으며 바울에게 큰 위로를 준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종의 이름으로 불려진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그들의 신앙을 본 받아 교회를 위한 신실한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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