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新約]강해/◆ 바울서신 강해-1

★데살로니가전서 1-5장 ◆ 밤중소리

영국신사77 2020. 4. 13. 23:21

데살로니가전서 차례

데살로니가전서 1장  (1 - 4)

(1) 바울의 축도(데살로니가전서 1:1)

(2) 바울의 감사와 그 근거(데살로니가전서 1:2-4)

(3) 복음의 능력(데살로니가전서 1:5-7)

(4)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데살로니가 교회(데살로니가전서 1:8-10)


데살로니가전서 2장  (5 - 11)

(5) 복음을 전한 바울의 심정(데살로니가전서 2:1-4)

(6) 감찰하시는 하나님(데살로니가전서 2:4)

(7) 참 목자의 자세(데살로니가전서 2:5-8)

(8) 상급을 바라 본 바울의 노력(데살로니가전서 2:9-11)

(9) 바울이 감사한 이유(데살로니가전서 2:13)

(10) 유대인의 운명(데살로니가전서 2:14-18)

(11) 전도에서 오는 상급(데살로니가전서 2:19-20)


데살로니가전서 3장 (12 - 14)

(12) 환난 중에 받는 위로(데살로니가전서 3:1-4)

(13) 시험하는 자(데살로니가전서 3:1-4)

(14) 목회자의 위로(데살로니가전서 3:13)


데살로니가전서 4장 (15 - 19)

(15) 더욱 많이 힘쓰라(데살로니가전서 4:1-6)

(16) 부르심의 목적(데살로니가전서 4:7-8)

(17)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사랑(데살로니가전서 4:9-12)

(18) 자는 자들에 대한 소망(데살로니가전서 4:13)

(19) 그리스도인의 공중 휴거와 성도의 부활(데살로니가전서 4:14-18)


데살로니가전서 5장 (20 - 27)

(20) 재림의 때와 시기(데살로니가전서 5:1-3)

(21) 낮에 속한 자(데살로니가전서 5:4-9)

(22)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의의(데살로니가전서 5:10-11)

(23) 주 안에서 다스리며 권하는 자에 대한 태도(데살로니가전서 5:12-13)

(24) 바울의 권면(데살로니가전서 5:14-15)

(25)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데살로니가전서 5:16-18)

(26) 영적 생활의 권고(데살로니가전서 5:19-22)

(27)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데살로니가전서 5:2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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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전서 1장

◆ 밤중소리 11-06 | VIEW : 2,235

(1) 바울의 축도

(데살로니가전서 1:1)

서론 : 본 데살로니가 전서와 후서는 바울에 의하여 데살로니 교회에 보내진 편지입니다. 데살로니가는 데살로니가만 윗 부분에 위치한 온천 지대로서 카산더에 의하여 주전 315년경에 건축된 도시입니다. 바울이 이 서신을 보낼 당시에는 대부분 그리스인과 많은 유대인들이 그곳 주민으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 교회는 바울이 빌립보를 거쳐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한 일로 세워졌습니다. 처음에는 야손의 집이 집회 장소가 되어 교회를 이루었으며 유대인들로부터 많은 핍박을 받아 온 교회입니다. 본 서신은 바울이 고린도에 있을 때 데사로니가에서 온 디모데와 실라의 보고를 듣고 쓴 것으로 기록 연대에 대해서는 주후 51년 아니면 53년경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 지어다.

1절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내는 바울의 축도입니다. 바울은 그의 서신 서두와 끝에 가서 축도를 잊지 아니했습니다. 축도는 하나님의 교회를 다스리며 그리스도의 사자로 그리스도의 양 무리들을 돌보는 하나님의 종들의 특권입니다. 만약 한국에 있는 미국대사가 본국인 미국의 어떤 정책을 발표한다면 비록 그가 주한미국대사지만 미국 대통령의 권위로 받아 드려지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가 작성한 문안을 자기 생각에 따라 발표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사자들은 양 무리들에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혹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혹은 성령의 이름으로 축복을 선언할 수 있는 권한을 위임 받은 것입니다. 민 6 : 23 - 27 ( ). 하나님의 종으로 자임하던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자연스럽게 이같은 축도를 보냈는데 이같은 일은 사실은 바울이 계시에 의해 받은 일이며 이 일이 교회에서 목사들의 축도로 이어온 것입니다. 바울은 이 축도를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보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은 두 가지 뜻으로 고찰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 편에서 보시는 견해요 다른 하나는 사람 편에서 보는 견해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보는 견해에 따르면

(1) 이들은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백성으로 택

정한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의 명단이 생명책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을 창조하셨고

궁극적으로 이 사람들만 구원하십니다.

(2) 또한 이들은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을 구별화 하시는데 그 방법이 믿음을 주시

고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시므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 쳐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로운 창조물로 만

드시는 방법이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시는 일입니다. 천국에 갈 수 있는 최종적인 승리자는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

뿐입니다. 그리고 사람 편에서 보는 견해입니다. 이들은 믿음을 확실히 소유한 사람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거듭날 수 없습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 성령으로 인 쳐주심으로 성령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그의 예정된 백성들에게 주시는 선물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자기 생각에 따라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을 소유했다는 사실은 자기 입의 말로만 그쳐서는 안됩니다. 자기에게 믿음이 있다고 하는 스스로의

분명하 증거를 가지고 있어야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1) 여기에는 내가 그리스도를 내 구주로 영접했다고 하는 확신이 필요합니다.

(2) 누구 앞에서나 그리스도가 나의 구주이심을 분명히 증거 하는 입술의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끄러워하면 나도 아버지 앞에서 그 사람을 부끄러워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3) 나의 삶의 목적이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사실에 기초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4) 그리스도를 떠난 생애는 살 수 없으니 주의 말씀에 기뻐하는 마음이 늘 그의 마음에 평안을 주는 것입니다. 이같은

일은 그 사람의 인격이나 학식이나 수양 교회에 나온 경력 직분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 속에 내주 하시는

성령의 역사이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구원의 확신을 주는 것입니다. 축도는 하나님의 축복의 선언입니다. 하나님의 축

복의 전달은 은혜와 평강으로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와 평강이 있을 지어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은혜란 그리

스도 안에 있는 풍성한 생명과 하나님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평강이란 하나님과의 화목에서 오는 마음의 평안입니다.

결론 :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와 평강을 선언 받은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은혜와 평

강 가운데서 신앙적으로 크게 성장하여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선언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바울의 감사와 그 근거

(데살로니가전서 1:2-4)

서론 : 바울은 자신이 얼마나 데살로니가 교회를 사랑하는가에 대한 증거로 2절에서 그들을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

하고 또 기도할 때 그들을 잊지 않고 말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처럼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위하

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는 일은 그가 그 교회를 개척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신앙이 장성하여 바울의 마음에 흐뭇

함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기가 복음으로 낳은 성도들이 이처럼 열매를 맺는 일을 자기의 면류관으로 여겼

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1. 주의 종의 마음에 감사가 있게 하라.

교회에는 많은 종류의 사람들이 함께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1) 그들 중에는 하나님의 종에게 근심을 주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생활에 항상 어려

움만 가중되고 질병과 고난 등으로 목회자의 마음에 무거운 짐이 되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마다 마음이 아픕니다.

즐거움 속에서도 그들을 생각하면 곧 우울해 집니다. 잠을 자면서도 그들이 당하는 고통을 생각하면 괴로운 것입

니다.

(2) 어떤 교인들은 괴로움을 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영적 성장이 전혀 없는 경우 그런 교인을 생각할 때마다 괴로움을 받

습니다. 또한 영적 감각이 둔하여 깨달음이 없는 교인들도 괴로움의 대상이 됩니다. 그 중에도 제일 괴로움의 대상이

되는 교인은 모이기에 관심이 전혀 없는 교인들입니다. 주일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그러합니다. 교회 일에

방관하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나그네처럼 무감각하게 출입하는 사람들입니다. 특히 교회에서 파당을 조성하거나 분

쟁을 이르키는 사람들의 경우는 더욱 그러합니다.

(3) 반면에 목회자들의 마음에 기쁨과 즐거움을 주므로 목회자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교인들도 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

데살로니가 교회의 경우가 그러했습니다. 가정에 심방 해 보아도, 길에서 잠깐 만나도, 그리고 생각만 해도, 감사하는

마음이 솟구치는 교인들이 있는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첫째로 신앙에 열심히 있습니다. 마음이 주님을 사랑하는 생각

으로 뜨거운 것입니다. 이들은 어떤 모임이든지 교회에서 정한 모임에 빠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봉사하는 일이 생기면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앞장섭니다.

교회에서 시키는 일이 있으면 무엇에나 예로 순종을 합니다. 이런 사람은 내가 교회를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

해 늘 생각하며 그 일을 하려고 노력합니다. 이들은 목회자의 위로가 되며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을 생각

할 때마다 하나님 앞에 감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처럼 목회자가 자기로 인하여 근심이나 무거운 짐이 되어 걱정을

끼치는 것이 아니라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게 한다면 그 교인은 복이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기왕에 할 신앙생활이 아닙니까? 그 생활에 자기 자신 감사가 있고 기쁨이 있는 생활을 선택해야 즐겁고 복된 생애를

살아갈 수 있습니다. 왜 교회에서 거치는 돌처럼 행동하여 주의 종의 마음에 상처나 주고 감사가 아니라 근심거리가

되게 하는 것입니까? 자기 교회 목사가 자기에 대하여 늘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도록 신앙생활을 잘하여 하나님께 축

복을 받는 여러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경우

(1) 바울은 3절에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 대하여 믿음의 역사가 강했음을 말씀해 줍니다. 믿음의 역사란 말은 모

든 면에서 믿음을 따라 처리한 신앙생활의 태도를 말합니다. 불가능하게 보이는 것도 그들은 믿음으로 이루어 냈습

니다. 나는 할 수 없으나 주님은 하실 수 있다는 믿음으로 주님을 의뢰했습니다. 그 결과 주님이 그 일을 이루어 주신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게 능차 못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2) 바울은 또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사랑의 수고가 있었다고 칭찬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말

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행동에서 나오게 됩니다. 그 행동에는 수고가 따르기 때문에 수고가 없는 사랑은 사랑의 범

주 안에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의 기준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

라"는 말씀에 있습니다. 이 사랑은 두 가지 결실에서 나오는데 하나는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그 마음으로 남을 섬

기는 일입니다. 자신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대접을 받고자 하는 일은 다른 사람에게도 필요한 일입니다. 다음에 다른

사람의 종이 되어 그 사람을 섬기는 자세로 자기를 낮추는 일입니다.

(3) 그리고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가 있었음을 칭찬해 주었습니다. 소망에는

인내가 따라야 합니다. 인내가 없이는 소망의 열매를 먹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

니므로 인내하는 자만이 승리자가 될 수 있습니다.

결론 :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이같은 신앙의 결실을 쉬지 않고 기억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의 신앙생활의

아름다운 면을 나타내어 주의 종으로 기억하게하여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게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복음의 능력

(데살로니가전서 1:5-7)

서론 :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신앙이 바울이 보기에 은헤 가운데 장성하고 있었고 선한 많은 열매를 맺고 있었습니

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그 원인이 복음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 때문임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5절에서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란 말씀에 나타나 있습니다.

1.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다.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롬 1 : 16절에서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멸망에서 영생으로 옮겨지는 것이 구원입니다. 죄인은 절대로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복음은 그 죄인들의 죄를 사하고 구원을 주기 때문에 복음이야말로 참으로 하나님의 능력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란 말은 하나님이 아니시고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기적적인 권능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에서 죄인에게 영생을 주는 일은 복음 외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오직 복음만이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에는 성령의 역사가 따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세상에 보내신 이유가 복음을 믿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은 성령이 임하시면 그 성령이 너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이 가는 곳에 성령이 따르는 것입니다. 만약 복음이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라 해도 성령께서 그 말씀대로 작용하지 않으신다면 아무런 효과를 나타낼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았고 운동력이 있는 이유는 모든 하나님의 말씀에는 그 말씀대로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영의 역사 하심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다음에 복음에는 큰 확신이 따릅니다. 복음을 받아 드린 사람은 인간적인 지혜로 취한 것이 아닙니다. 과학적인 판단이나 철학적인 연구를 통해서 얻어진 결론이 아니라 성령이 주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에 복음에는 지식 대신, 믿음이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그 말씀에 대한 믿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복음을 받아 드린 사람들은 이 큰 확신이 따르기 때문에 진리에 굳게 서서 계속적인 믿음의 생활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2. 데사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보여준 본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평탄하고 안일한 중에 말씀을 받아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이 아니라 많은 환난 중에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1) 바울은 6절에서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받은 환난에 대하여

많은 환난이라고 했습니다. 이방 사회에 복음이 전파되면 제일 먼저 부닥치는 일이 환난입니다. 이 환난은 교회에

대한 핍박으로 그 모습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받은 환난은 교회 창립 초기로부터 시작

된 것입니다. 바울이 이곳에 와서 처음 복음을 전파했을 때부터 환난으로 시작했습니다. 이같은 교회의 핍박은 대

개 두 곳으로부터 나오는데 하나는 율법을 따르는 유대인들로부터요 다른 하나는 이들에 충동을 받은 이방인들로

부터입니다.

(2) 복음의 특징은 많은 환난 중에도 그 능력이 쇠퇴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강력하게 나타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복음

은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이야말로 환난 중에 있는 비참한 인생들에게 참 소망을

주는 기쁜 소식입니다.

(3) 복음은 환난 중에 있는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오히려 성령의 기쁨으로 그 말씀을 받게 했다고 했습니다. 복음

이 환난 중에 더욱 소망으로 역사 하는 것은 그런 환난을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이 더욱 견고해 지기 때문입니

다. 베드로 사도는 벧전 1 : 7절에서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복음은 그것을 믿는 자들에게 환난

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주시며 환난 중에 큰 위로로 역사 합니다.

(4) 믿음은 인내 중에 성장합니다. 그리고 인내는 환난 중에 그 환난을 참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에 대하여 약 1 : 2절 이하세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

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결론 :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이처럼 처음부터 주의 복음을 바로 받아 드렸습니다. 이같은 믿음을 바울은 7절에서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다'고 극찬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의 신앙을 본받았을 뿐 아니라 주님을 본받은 자

가 되었다는 사실을 놀라운 칭찬입니다. 우리가 좀더 적극적인 신앙적인 자세로 주님을 섬기면 우리들도 이같은

칭찬을 받을 수 있습니다.


(4)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데살로니가 교회

(데살로니가전서 1:8-10)

서론 : 바울은 하나님을 향하는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믿음의 소문이 각처로 퍼지고 있는 사실을 말씀해 줍니다. 데

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칭찬 받을 만한 신앙을 두 가지로 보고 이를 칭찬해 주고 있습니다.

1.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9절 말미에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겼다'고 했습니다. 바울의 이같은 말은 그들이 복음을 받아 드리기 이전에는 우상을 섬기는 생활을 한 것을 의미합니다. 우상은 헛것입니다. 우상은 하나님이 아니며 아무 것도 아닙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데살로니가에서 이런 헛된 우상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생활을 해 온 것입니다.

그들은 그 자리에서 절대로 빠져 나올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자 그들은 헛된 우상을 버리고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께로 돌이켜 그 하나님을 섬기기에 이른 것입니다. 참된 하나님이란 말은 여호와만이 참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믿음으로 그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그 하나님을 의뢰하며 순종하는 진실한 신앙을 말합니다. 사신 하나님이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겼다는 것으로 그들의 신앙이 살아 있는 신앙이었음을 의미합니다. 생명력이 있는 신앙으로 이런 신앙은 성령의 큰 권능으로 임합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신앙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첫째로 하나님은 우주 만물의 창조주가 되시며 지금도 만물을 친히 섭리하고 계심을 믿는 신앙을 말합니다. 다음에 하나님은 그 언약을 반드시 지키심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고 당신을 의뢰하는 사람을 버리지 아니하시며 순종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믿는 신앙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섬기면서도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고 죽은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성도들도 허다한 것입니다.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사람들이 섬기는 하나님은 그들 안에서 살아 역사 하지 않기 때문에 살아 계신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참되시다는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참되시고 거룩하신 분이심을 믿는 신앙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빛의 열매를 맺는다고 했습니다. 빛의 열매는 착함, 의로움, 진실이기 때문에 이들은 그의 생활에서 불의를 미워하고 진실을 기뻐하는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닮아 그 심령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어 나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참되시다는 믿음은 하나님은 그 말씀대로 이루신다는 신앙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가 말씀하신 바를 꼭 이루시는 분입니다. 그런 하나님을 믿고 의뢰하는 신앙은 귀한 신앙입니다. 참되신 하나님은 그의 심판도 공의로우십니다. 의인에게는 영생으로 갚으시고 불의한 자에게는 심판으로 갚으십니다.

2.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는 예수를 기다리는 신앙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신앙에서 다른 교회에서 볼 수 없는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이 10절에서 언급되어 있는 주 재림의 소망인 것입니다. 그들의 이같은 신앙에 대하여 바울은 '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함을 기다린다고 말하니'란 말씀에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이같은 신앙을 언급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신앙생활을 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들의 신앙생활이 그토록 칭찬 받은 이유가 아마도 그들의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소망에서 온 것이 아닌가 여겨지는 것입니다. 재림에 대한 소망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참 소망이어야 하며 그들의 생활에 바탕을 두어야 할 믿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재림 신앙은 모든 성도들의 간절한 소망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우리의 신앙적 자세를 기뻐하십니다. 이같은 신앙을 갖게 하시기 위해 주님은 그의 재림에 관하여 여러 가지로 경종해 주셨습니다. 도적같이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늘의 천사도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주님 자신이 내가 속히 오리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기도했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에게 왜 재림 신앙이 필요한 것입니까? 주의 재림은 주님을 사모하는 진실한 신앙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주의 재림을 대망하는 성도들만이 재림에 합당한 성도의 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재림의 신앙은 성도들에게 위로와 힘을 줍니다.

결론 : 우리는 참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느냐? 나와 함께 계셔서 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그 하나님을 믿는 믿

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느냐? 하나님의 진실하신 약속의 토대 위에 우리의 신앙을 굳게

세워야 합니다. 우리는 과연 다시 오시는 주의 재림을 기다리느냐? 지혜로운 처녀들처럼 등과 기름을 준비하는 신앙생활을 할때 데사로리가 교회 성도들이 받은 칭찬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 밤중소리 11-06 | VIEW : 2,082

(5) 복음을 전한 바울의 심정

(데살로니가전서 2:1-4)

서론 : 바울은 1절에서 그가 가진 역경과 고난 가운데서도 데살로니가에 들어가 그곳에 복음의 씨를 뿌린 일에 대하여

결코 헛된 일이 아니었음은 누구보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친히 알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바울의 그 같은 모험적인 복음의 전파로 인하여 주님을 영접하게 되었고 그들 자신이 많은 고난을 받으면서 복음

을 확장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1. 복음을 위해 받은 고난

바울은 2절에서 데살로니가 교회에 전한 복음은 부정이나 궤계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강조했는데 바울은 그 증거로 복음을 위해 빌립보에서 받은 자신의 고난을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아는 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에서 귀신들려 점치는 여종을 고쳐 주는 일로 그로 인해 돈을 벌 수 없게 된 주인에 의해서 기이한 풍속을 전한다는 이유로 고소 당하여 많은 매를 맞았으며 옥에 갇힌 일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옥에서 풀려 나온 후 곧장 데살로니가로 가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므로 데살로니가에 교회가 세워지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으로 생명의 도리를 전하는 일에 열심이었으나 그 자신은 견디기 어려운 무거운 십자가를 졌습니다. 복음은 그것을 듣는 자들에게 생명과 큰 기쁨과 축복을 주는 만치 전하는 사람들은 그만큼 고난이 따르는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성경을 보면 구약이건 신약이건 평안하고 안일하고 부요한 생활을 하는 중에 복음을 전한 일꾼이 없습니다. 주님은 산상보훈에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는데 그 의란 하나님의 의를 전달하는 복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다'고 하신 말씀 중 나를 인하여 란 말씀은 주님을 증거하는 복음을 의미하신 말씀입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모든 그리스도의 증인들을 보면 고난과 핍박 등으로 얼룩져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사도 시대에 끝난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사도행전은 계속되고 있으며 그리스도를 전하는 그의 증인들은 사도들처럼 사도행전의 거룩한 투쟁사에 기록될 하나님의 일꾼들입니다.

2. 바울의 솔직한 심정

바울은 처음에 데사로니가 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권면했을 때 이같은 바울의 권면은 인간의 허용이나 명예나 욕망을 채우려 함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것이 간사에서 난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간사는 다른 사람을 속이기 위해 바르지 못한 것을 받아 드리도록 꾀는 사탄의 간교를 말합니다. 사탄은 에덴에서 이같은 간사로 아담을 속였습니다. 바울은 간사에서가 아니라 그들의 생명을 구원하려는 뜨거운 사랑에서 생명을 다하여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생명의 길을 권면 했든 것입니다. 부정에서 난 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부정이란 더러운 것을 말합니다. 더러운 욕심에서 나온 것들은 모두 부정한 것입니다. 정욕이나 음란이나 탐심이나 육신의 정욕에서 나온 것들이 부정한 것으로 우리를 더럽히는 것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그들에게 전한 것이 결코 부정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궤계에 있는 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파탄의 길로 이끌고 함정에 빠트리는 것이 궤계입니다. 사탄은 이 궤계에 능한 자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우리를 노리는 이단의 무리들은 이 궤계로 다가와 우리를 돌이킬 수 없는 함정 속에 집어 넣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된 것에 대하여 4절에서 이르기를 '오직 하나님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 전할 부탁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옳게 여긴다는 말의 원어의 뜻은 금이나 은을 연단 할 때 사용되는 말로 시험을 통해 그 진가를 알아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복음의 사역 자로 쓰임 받기까지 어려운 시험을 통해 복음의 사역자로서의 진가를 인정받은 것입니다. 그가 다메섹에 가는 길목에서 회개한 이후로부터 그가 걸어간 발자취는 복음의 일꾼으로 주님의 인정을 받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복음을 전하는 사역 자로서의 부탁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주님은 다메섹 성에 거주하는 아나니아에게 바울에 대하여 이르시기를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이처럼 주님의 부탁을 받아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분명히 하고 이런 일은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일을 함에는 아무 것도 두려워함이 없었으며 생명까지 아끼지 아니하고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결론 : 우리가 주를 위해 하는 모든 일에 대하여 바울처럼 하나님의 부탁을 받았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충성해야 하는 것

입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 일은 주의 일이 아닙니다. 우리를 검증하여 주의 일꾼으로 뽑으시고 우리에게 부탁하

신 그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성도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6) 감찰하시는 하나님

(데살로니가전서 2:4)

서론 : 바울은 하나님을 표현함에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4절 말미에서 '우리 마음을 감찰하

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1. 나의 억울함을 알아주시는 하나님

하나님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라고 처음 부른 사람은 아브라함의 첩 하갈입니다. 하갈이 자기의 여주인인 사라의 학대에 이기지 못해 광야로 도망쳤을 때, 하나님의 사자가 그에게 나타나 그를 위로해 준 것을 계기로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하나님의 이름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란 말의 뜻을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나의 억울함을 알아주시는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하갈은 사라에게 내쫓긴 후, 그 마음에 억울함으로 큰 탄식을 하고 있을 때 아무도 돌보지 않고 누구에게도 위로를 받지 못하며 고통을 당하는 미천한 이 여인에게 나타나시어 그를 위로해 주신 분이 하나님이셨습니다. 억울함을 당할 때, 우리는 나의 억울함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심을 안다는 일은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위로가 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억울함을 당해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참으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2. 나의 딱한 사정을 알아주시는 하나님

다음에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란 말은 나의 딱한 사정을 알아주시는 하나님이시란 뜻입니다. 우리들이 큰 고민에 빠졌을 때, 어려움 속에서 마음이 터질 듯 아플 때, 이런 나의 딱한 사정을 누가 알아 줄 것이냐고 탄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 중에는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도 우리 하나님은 이같은 나의 딱한 사정을 모두 알아주신다는 사실을 알고 감찰하시는 그 하나님께 의뢰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억울한 일을 만나고 불의한 일로 억압을 당해도 우리는 감찰하시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분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내 손으로 복수를 꾀해서는 안됩니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다고 하셨으니 하나님께 기도할 뿐입니다. 이럴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법은 하나님만을 의뢰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내편이 대사 나의 억울함을 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불의한 재판관에게 끈질기게 간구한 한 가난한 과부의 억울한 사정의 경우를 누가복음에서 들려주신 후,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들은 하나님께 기도하여 하나님이 나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도록 그분에게 맡겨야 합니다.

3. 인간의 중심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다음에 하나님은 사람의 외면을 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사람의 중심을 감찰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만홀히 여기심을 받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사울 왕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짐승들을 죽이지 않았을 때 사무엘의 책망을 듣고는 짐승 중 좋은 것을 약탈하여 소유한 것은 하나님께 좋은 것으로 제물을 삼아 섬기려 한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가 말한 입술의 진술은 듣기에 아름답고 겉으로 보기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하나님은 그의 중심을 감찰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를 버리시고 이새의 아들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기로 작정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거짓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가면 안됩니다. 거짓된 서원, 거짓된 기도, 거짓된 행실 등은 하나님이 가증히 여기시기 때문에 아무리 아름답게 포장해도 하나님은 반드시 찾아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감찰하시는 분이란 말은 하나님은 인간의 거짓에 속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움직이는 무기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진실입니다. 하나님은 진실한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진실한 사람을 찾습니다. 기도도 진실하지 않으면 듣지 않으십니다. 아무리 많은 기도를 드려도 진실하지 못한 기도는 듣지 않으십니다.

믿음도 진실한 믿음만이 생명을 얻습니다. 진실한 믿음은 하나님을 경외하는데 있으며 순종하는데 있으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생활에 있습니다.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란 말은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을 달아보신다는 뜻입니다. 바벨론의 벨사살 왕이 귀인 1천명을 데리고 잔치를 베풀 을 때 왕이 앉아 있는 맞은 편 벽에 한 손가락이 나타나 글씨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다니엘이 이 글을 해석했는데 '메네메네 데겔 우바르신'란 말로 왕이 저울에 달려 부족함이 되었다함이란 뜻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일을 저울에 달아보십니다.

결론 : 사도 바울은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고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을 최대의 삶의 목적으로 삼은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과 믿음과 기도와 행위를 감찰하시는 분

이심을 알아 저울에 달아 부족함이 없도록 우리의 삶을 진실하게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7) 참 목자의 자세

(데살로니가전서 2:5-8)

서론 : 바울은 참 목자 상을 보여준 참 목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를 통해서 참 목자 상을 바라보고 배워야 할 것입니

다. 바울의 참 목자 상은 서신 여러 곳에 나오지만 특히 데살로니가전서 2장에 가장 두드러지게 나와 있습니다.

1. 목자는 아첨의 말을 해서는 안 된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너희도 알지만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의 말을 하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거 하신다고 했습니다. 교회에서 다른 이를 지도하며 인도하는 사람들은 아첨하는 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아첨의 말이란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사람들에게 인기나 존경을 얻으려고 의식적으로 아부하는 말을 자주 일삼는 일을 말합니다. 이것은 자기의 신앙적인 양심을 짓밟고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데서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목회자는 탐심으로 일읗 해서는 안됩니다. 바울은 자기와 그의 일행이 데살로니가 교회에서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거 하신다고 했습니다.

목회자는 하나님이 그의 생활을 책임지십니다. 일하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께서 일하는 목회자에게 굶기지 아니하십니다. 목회자는 물질에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됩니다. 그 마음에 애국심이 불붙고 혁명적인 성격을 지녔던 가룟 유다가 이 탐심으로 인하여 돈궤에서 슬쩍 슬쩍하든 그 버릇이 급기야는 예수님을 대제사장에게 팔아 넘기는 크나큰 죄를 저즈렀던 것입니다. 팀십 때문에 신세를 망치는 일은 대통령을 지낸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자손손이 먹이고도 남을 수천 억원대의 돈을 자기 소유로 만들려다가 토해 내게 된 전직 대통령들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목회자는 돈과 이성 문제에만 깨끗하면 그런 대로 성공한 목회라고들 말합니다. 그러나 이 덫에 걸리면 언제인가 일을 저질르게 되는 것입니다. 발람 선지는 발락 왕이 보낸 재물과 약속한 명예에 눈이 어두어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엘리사의 시종 게하시는 하만 장군의 재물을 탐하다가 문둥 병자가 되었습니다. 탐심이 무서운 죄가 되는 것은 사람이 한 번 그 마음에 탐심이 들어가면 마음의 눈이 어두워져 진리까지 거슬리게 되고 신앙 양심까지 유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일이 목회자에게 일어나지 않기 위하여 교회는 목회자에게 일정한 수준의 생활비를 책임져야 하는 것입니다.

(1) 복음을 전하는 자는 복음으로 살리라고 했습니다.

(2)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목회자의 생활에 전혀 어려움이 없도록 잘 보살펴

주는 일에 최대의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목회자는 사례금을 더 받으려고 고함을 치고 장로나 교인들은 덜 주려고

핏대를 올리면 이미 그런 교회는 사랑이나 화목이 금이 간 교회인 것입니다. 그리고 목회자는 교회에서 정한 사례

금을 족한 줄로 알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명감 때문이 아니라 식생활 해결의 방편으로 목회를 한다면 얼마

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목자가 양을 사랑함이 아니고 자기 유익의 대상으로 삼으려 한다면 양의 영적 생명은 죽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같은 탐심의 탈을 쓰지 않고 데살로니가 교회에서 헌신한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그 증인이 되시어 증거 하신다고 했습니다.

2. 목자는 자기 영광을 구하지 말아야 한다.

바울은 6절에서 사람에게는 영광을 구치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사람들에게 영광을 구치 아니했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많은 이적과 기적을 행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사람들로부터 기이히 여김을 받으며 신과 같은 존재로 부각된 적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런 때에 그들이 보내는 영광을 취하지 않았습니다. 양 무리는 자기 목자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사자로 마땅히 존경을 받아야 하지만 그 이상의 영광을 구하거나 받아서는 안됩니다. 바울은 7, 8절에서 참 목자 상에 대하여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유순한 자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다고 했습니다. 유순하다는 말은 아랫사람에 대한 윗사람의 관대함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권리를 유보하고 오히려 부드럽고 너그럽게 대하는 태도입니다. 그리고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했다는 말은 접을 먹이는 어머니가 자기 자녀를 키우는 심정으로 사랑스럽고 조심스럽게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대하고 그렇게 양육했다는 사실을 말씀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양 무리를 사모하는 목자의 심정으로 그들을 대했는데 그 심정은 자신의 목숨까지라도 주기를 즐겨 할만큼 바울의 사랑을 받는 성도였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결론 : 바울의 심정은 목자는 양을 사모하고 사랑하여 목숨까지라도 즐거이 줄 수 있는 목자여야 함을 말씀해 주는 것입

니다. 한편 양 무리들은 목자의 음성을 따르며 그가 염려하며 목회 하지 않도록 존중히 여기고 귀히 여기며 즐거

움을 같이 하며 생활에 큰 관심을 가지고 돌보아 주므로 기쁨으로 양 무리들을 돌볼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8) 상급을 바라 본 바울의 노력

(데살로니가전서 2:9-11)

서론 : 바울이 어떻게 그토록 귀하고 아름다운 목회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까? 그것은 바울이 세상 것에 얽매이지 않고

하늘에 있는 상급을 바라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성도들에게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수고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바울의 마음에는 기쁨과 감사가 넘쳤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바울은 이런 자신의 헌신적

인 일로 반드시 하늘의 상급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1. 자비량한 바울의 복음

전도 바울이 처음에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생활을 위해 스스로 자비량 했다는 것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9절에서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과 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복음을 전파하였노라"고 했습니다. 행18장에 나오는 말씀을 보면 바울은 장막을 만드는 영업을 경영하면서 복음을 전했는데 이런 영업은 육체적 노동으로 바울은 이 영업을 위해 많이 애쓰고 수고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이런 자비량 목회는 오래 계속된 것은 아닙니다.

그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어쩔 수 없는 환경에서 불가피했을 때, 그처럼 수고하며 애쓰는 자비량 방법으로 일했을 뿐, 그 후 자신이 세운 교회로부터 재정적인 도움을 받으면서 주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했습니다. 고후 9 : 4절을 보면 '우리가 먹고 마시는 권이 없느냐 누가 자비량하고 병정을 다니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실과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떼를 기르고 그 양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고 바울이 주장한 것을 보면 목회자가 자비량하는 방법의 목회를 권장한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자비량으로 복음을 전하는 일을 권장하지 않고 오히려 목회자가 그의 일한 값으로 생활하는 일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으며 오히려 생활에 구애받음이 없이 복음 전도에 전심전력할 것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2. 본을 보인 바울의 믿음의 행실

바울은 그의 생활이 양의 본이 되도록 힘썼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그의 후배 격인 모든 목회자들에게 들려주고 있는 교훈은 '너희는 양 무리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취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고 한 것입니다. 바울은 어떻게 본을 보인 것입니까? 바울은 10절에서 '우리가 너희 믿는 자들을 향하여 어떻게 거룩하고 옳고 흠없이 행한 것에 대하여 너희가 증인이라'고 한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가 자신이 전하는 복음과 그의 행실이 일치하지 않으면 복음의 길이 막히고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워지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한 거룩하고 옳고 흠이 없이 행했다는 말은 입에 거짓말이 없고 마음에 간사가 없으며 행위에 불의 함이 없는 순결한 생활을 말합니다. 바울은 율법으로도 흠이 없는 생활을 했노라고 말하리 만치 자기 행위를 철저히 다스리는 생활을 한 것입니다. 옳고 흠이 없었다는 말은 그의 신앙생활에 양심에 꺼리는 생활을 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이런 바울의 모범적인 생활은 하나님이 증인이 되실 뿐 아니라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도 오랜 기간 친히 목격한 일이며 체험한 일이기 때문에 그들 역시 증인이 된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3. 양 무리에 대한 경계의 목적

바울은 11절에서 '아비가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한다'는 말로 그들에게 경계의 몇 말씀을 주고 있습니다. 목자는 양 무리들에게 권면, 위로, 경계의 말씀으로 양육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목회자는 이 세 가지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지혜롭게 활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1) 성도는 목자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면 받아야 합니다. 목회자의 설교는 이같은 권면이 주제가 되어야 하며 심

방도 역시 권면에 목적을 두어야 합니다.

(2) 목회자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를 주어야 합니다. 병든 자, 실패한 자, 어려움을 당한 자들에게 위로

를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주의 말씀으로 전하는 목회자의 위로는 곧 하나님의 위로로 연결됩니다.

(3) 목회자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경계해야 합니다. 경계란 경고의 거울로 삼아 자기 자신의 신앙생활에 적용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목회자는 설교로 성도들의 생활을 경계시켜야 합니다. 순종하도록, 기도할 수 있도록, 깨어 있

도록, 부단히 하나님의 권위로 경계시킴이 필요합니다.

결론 : 이런 목회자의 활동은 성도는 하나님께 합당한 자로 양육시키며 행하게 하려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이같은 일에

충성하는 목회자는 하나님께 충성된 목자요 이같은 목자에 순종하여 신앙생활을 이루어 나가는 성도는 충성된 성

도들인 것입니다. 충성된 목자, 충성된 성도가 되는 교회를 이룰 수 있기를 바랍니다.


(9) 바울이 감사한 이유

(데살로니가전서 2:13)

서론 :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바울에게서 말씀을 받고 들었습니다. 그 때 그들은 바울이 그들에게 들려준 말씀을 사람의

말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하나님께 감사하게 된 원인이 된 것입니다. 데살로니

가 교회 성도들의 신앙이 이처럼 아름답게 성장했기 때문에 바울이 그토록 그들을 사모하며 그들을 위해서는 자신

의 목숨까지라도 주기를 즐겨 한다는 고백을 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세 종류의 사람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세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1) 그 첫째번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도덕적 교훈 정도로 받아 드리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아

말씀 앞에 이끌리어 그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그 말씀이 아직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의 심혼골수를 쪼개

는 역사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아직은 거듭난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이들의 경우는 기독교의 진리인 중생이나 영

생이나 부활이나 천국에 대하여 믿으려 하지 않지만 인간의 도덕적 선을 위해서 종교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기독교

도 다른 종교처럼 그런 일을 하는 일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성경에 기록된 말씀은 사람의 양심을 일깨우고 선행을 하게 하므로 좋은 인격을 형성하며 좋은 사회를 이

룩하는 일에 많은 공헌을 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같은 사람은 그의 행실에 있어서는 성경을 통하여 어떤 좋

은 선행의 영매를 맺게 될는지 모르지만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도 아니며 영생을 가진 사람들도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서도 교회에 자주 나오며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2) 다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사람의 말로 받아 드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도덕적 교훈으로 알고 그것을 따르려

는 의지도 없으며 그렇다고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도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이 사람들은 주위 사람들의

성화같은 권면이나 집안 식구들의 반강제적인 인도로 교회에 자주 끌려 나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의 경우는 오랜

세월 교회에 나온 습관에 이끌리어 안나오기도 아쉽고 인간적인 유대도 돈독히 맺어진 입장이어서 자주 나오게 되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설교가 길면 지루하기 그지없고 어쩌다가 경종 하는 말을 하거나 회개를 권면하는 설교를 하

면 자기를 때리는 설교라고 시험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드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그 들은 말씀이 마음 밭

에 떨어지는 생명의 씨앗이 됩니다. 이 사람들의 마음 밭이 정결하여 그 말씀을 깨닫게만 되면 곧 30, 60, 100배의

결실을 맺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끊임없이 성령의 감동하심과 인도하심을 받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성령의

인도나 감동하심이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을 수 없습니다. 이 사람들은 끝내 영생이 그리스도에게만 있는 것

으로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히 사모하기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 있기를

원하며 순종하면 복을 받는 줄을 믿고 또한 말씀대로 살지 못할 때 슬퍼하며 마음을 찢는 회개를 이룰 사람들인 것입

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

13절 끝을 보면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 하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역사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 말씀이 어디서 역사하는 것입니까? 믿는자 속에서 역사 한다고 했습니다. 성령께서 말씀의 능력으로 우리 안에서 역사 하시는 것입니다. 히 4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검보다도 예리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았다는 뜻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그 말씀에 대한 책임을 지시고 그 말씀대로 이루시기 때문에 살았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실 때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 하나님의 권능으로 그대로 성취된 것입니다. 대저 하나님의 말씀은 능치 못함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아무에게나 역사 하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 믿는자 속에서 역사 하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말씀을 믿는자 속에서 믿음대로 역사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내 말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구하라 그러면 주시리라'고 하셨습니다.

결론 :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생활에 변화를 가져오고 여러분의 생애에 축복을 가져오게 하시려면 그 말

씀을 받을 때에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처럼 사람의 말로 받지 마시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그 말씀이 여러분의 속에서 역사 하여 말씀대로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10) 유대인의 운명

(데살로니가전서 2:14-18)

서론 : 초대 교회 시대에 하나님의 교회가 핍박을 많이 받는 가운데 그 복음을 전하게 되었는데 이처럼 핍박을 가한 무

리가 다름 아닌 유대인들이었다는 사실에 바울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그리고 데살로니가 교회 역시 초기로부

터 핍박을 받으며 성장했는데 그 핍박을 가한 무리들이 데살로니가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15, 16절에서 유대인들이 교회를 핍박한 사실을 자세히 열거하고 하나님의 노하심이 그들에게 임하신 이유

를 밝혀 주고 있습니다.

1. 진리를 대적한 유대인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생존하신 당시로부터 계속적으로 진리에 대적자로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선택받은 그들이 왜 하나님의 대적자가 되어 진리를 대적한 것입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민족이었고 율법을 받은 민족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도 그들 중에 태어났으며 성경에 그들의 메시야로 예언된 사람입니다. 이처럼 복음적이어야 할 유대인들이 오히려 복음을 대적한 이유는 복음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1)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엄중하신 율법만 보았지 하나님의 사랑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

므로 의를 얻으며 구원에 이르는 줄로 확신한 그들에게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다는 엉뚱한 복음이 등장한 것입니다.

그들은 그같은 복음을 도저히 수용할 수 없었습니다.

(2) 유대인들은 육체적인 형식적 의식을 하나님의 약속의 표적으로 잘못 생각했습니다. 할례를 절대시하였고 안식일 지

키는 일을 절대적인 의의 표준으로 여겼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의 안식일의 규례를 무시했다고 판단한 그들은 안식일

로 인하여 예수님을 죽이고자 음모하게 된 것입니다. 이같은 유대인들의 생각은 바울이 각처에서 복음을 전하는 일

에 큰 핍박의 동기로 등장했습니다.

그러나 율법이 가르키는 모든 의식은 그것이 할례건 절기건 안식일이건 그리스도 오실 때까지의 예표로 그림자일 뿐

입니다. 이같은 일에 대하여 바울은 롬 11장에서 하나님의 비밀을 알려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꺾으신

것은 이방인으로 그 뿌리에 접부침을 얻게 하려는데 있었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거역은 오히려 복음

을 유대인 아닌 이방 세계에 널리 전파하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3)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구약적 제사 제도를 폐하시고 모든 율법의 규례를 폐하시기 위해 유대인들을 세계에 흩으셨습

니다. 하나님을 그의 재림 직전에 이스라엘에게 회개의 영을 보내시므로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남은 자들의 민족적

구원이 이뤄질 것입니다. 주의 재림 직전에 이스라엘이 독립될 것이란 성경적 증거는 많습니다. 이스라엘의 독립은

그 자체가 인류의 종말에 이르렀다고 하는 하나의 시대적 징표로 나타나 있으며 그리고 이스라엘은 주의 재림이 있

는 인류의 종말까지 소멸되지 않고 하나의 국가로서 지속되어 나갈 것입니다.

그 이유는 종말에 관한 성경적인 예언은 회복된 이스라엘이 그 표적이 되어 진행되어 나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

고 이스라엘의 남은 백성들에 대한 구원은 이미 성경에 여러 차례에 걸쳐 예언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앞으

로 예수님의 재림을 알리는 성경적 예언의 성취를 위한 표적으로 반드시 필요한 나라인 것입니다.

2. 이스라엘이 거역한 민족적인 축복

원래가 이스라엘은 모든 이방인들보다 하나님의 축복이 약속된 민족입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그의 자손들로 형성된 이스라엘은 혈통적으로 이미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받은 복된 사람들입니다. 다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 민족을 통해서 주셨고 그들이 역사적으로 그 말씀을 간직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오늘까지 하나님의 말씀이 유지되어 온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살아 계시는 능력과 권능을 친히 맛보면서 살아온 민족입니다.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역사가 그대로 성경이 된 것이니 얼마나 복된 민족이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오직 이스라엘에게만 제사 제도와 율법을 통해서 죄사함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 중에 보내심으로 이방인들보다 하나님의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를 배척하였고 하나님의 은혜로서가 아니라 율법으로 의를 얻으려 했기 때문에 구원에서 떨어져 나가게 된 것입니다.

결론 : 이런 이스라엘의 비운은 주의 재림시까지 계속될 것이며 그때 가서야 메시야을 죽인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며 재

림하시는 주님을 메시야로 영접하게 될 것입니다.



(11) 전도에서 오는 상급

(데살로니가전서 2:19-20)


서론 :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 많은 핍박을 견뎌 냈으며 어려운 생명의 고비에서도 조금도 두려워함이 없이 담대하게 처

신했습니다. 바울이 어떻게 이처럼 담대함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일까? 그의 이런 해답이 19절에 나와 있습

니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1. 복음으로 낳은 자녀

바울은 자기가 복음을 전하여 세운 교회들을 향하여 나의 자녀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갈 4 : 19절에서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사실상 그들을 자신이 낳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고전 4 : 15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스승이 많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여러 해를 걸쳐 살아가는 가운데 많은 스승이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아비의 영광을 차지하느냐? 복음을 제일 먼저 전하여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한 사람에게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생각하면서 우리의 소망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우리의 소망이라고 표현한 것은 차원이 높은 의미의 소망임을 말합니다. 전도 인으로서의 바울의 소망은 자신이 전한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신앙적으로 성장하는 일에 소망을 두었습니다. 또한 바울에게 있어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우리의 기쁨'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복음으로 낳은 자녀들이 믿음의 터전 위에서 자라나는 것을 볼 때 큰 기쁨을 느꼈습니다. 이런 기쁨은 고난과 시련을 무릅쓰고 전도하여 결실한 사람들만이 체험할 수 있는 심령으로 누리는 크나큰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이야말로 자신의 자랑의 면류관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뿌린 이같은 복음 전도의 상급이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었기 때문에 바울이 아직까지 언급한 이 모든 것들이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힘써 노력하여 거둔 복음의 결실은 나중에 우리의 면류관으로 우리에게 되돌아 올 것입니다. 복음의 씨를 뿌리는 일은 결코 헛됨이 없습니다. 다니엘은 이같은 상급을 일찍이 바라보고 예언했습니다. 단 12 : 3절에서 '많은 사람을 옳은 대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비취리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2. 해산의 수고와 양육

어린애를 잉태하여 해산하고 그를 양육하는 일에는 어머니의 많은 수고가 따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결코 기피할 수 없게 하시기 위해 모든 생명체에게 모성애라고 하는 불가항력적인 사랑의 힘을 주셨습니다. 이 사랑은 본능적인 사랑으로 이 사랑의 힘으로 모든 생명체가 번식하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전도하여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한 사람들에게 본능적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충성스러운 일꾼으로써 온갖 정성을 다하여 양육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갈 4 : 19절에서 바울은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라고 했습니다. 영적인 참 해산의 수고는 전도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형상에 이르기까지 돌보아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수고에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나타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처럼 주님의 사랑을 공급해 주어야 신앙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해산의 수고에는 기도가 들어가야 하고 성경을 가르치는 일이 따라야 하며 어려움을 당할 때 도와주고 위로해 주며 물질적으로도 헌신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양육의 책임을 감당하려면 우선 그 대상자에게 신앙적인 본을 보여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애를 쓰고 전도는 해서 교회에까지는 인도했지만 얼마 안가 떨어져 나가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거의 신앙적인 본을 보여 주지 못한 원인이 많은 것입니다. 바울은 담대하게 '너희는 나를 본 받는자 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전도한 사람이 전도 받은 사람에게 본이 안 될 때 좋은 결실을 거두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결론 : 예수님은 잃은 동전의 비유, 읺은 양의 비유, 씨뿌리는 비유, 달란트의 비유 등을 통해서 복음 전도가 얼마나 우

리에게 긴급한 일인가? 얼마나 우리 주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인가에 대하여 많이 듣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도 바울과 같은 기쁨과 소망과 자랑의 면류관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실하고 해산의 수고를 아끼지 아니하

는 전도자가 되어 많은 면류관을 자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데살로니가전서 3장 (12 - 14)

◆ 밤중소리 01-31 | VIEW : 547


(12) 환난 중에 받는 위로

(데살로니가전서 3:1-4)

서론 :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한 바울의 사랑과 열심이 이토록 컸기 때문에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당하고 있는 환난에 견딜 수 없었습니다. 환난 중에 있는 그들의 마음을 믿음으로 견고케 하고 위로해 주어야 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를 그곳으로 위로의 사자로 보내게 된 것입니다.

1. 우리의 형제

바울은 다모데를 소개하기를 ‘우리이 형제 곧 그리스도 복음의 일꾼이라’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들입니다. 그 이유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인데 그리스도인들은 그 몸의 각 지체를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각 지체는 각기 받은 은사가 다르지만 그 지체가 하는 일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이기 때문에 다 동일한 것입니다.

교회를 세운다는 말은 무엇인가? 그리스도의 복음의 일꾼이 되는 일입니다. 복음을 위한 하나님의 일꾼들이 바울이 말하는 형제들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교회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이 한 형제들이라고 부르기 쉽지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들 중에는 거짓 형제들도 있으며 가만히 들어와 교회를 분열시키는 이다적인 형제들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복음의 하나님의 일꾼으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 복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일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바울이 말하는 형제들인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인들은 환난을 당한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복음을 전하는 일을 시작하면서부터 환난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14절 후 반절에서 ‘저희가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너희도 너희 나라 사라들에게 동일한 것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핍박은 두 가지 형태로 그리스도인에게 찾아옵니다.

하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려는 자에게 핍박이 오는 것입니다. 적당주의 신자는 가정이나 직장이나 사회에서 환난을 받지 않습니다. 다음에 복음을 전하는 일에는 반드시 환난이나 핍박이 뒤따른다는 사실입니다. 너희는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복음을 전하는 자는 다음 세 가지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첫째는 핍박이나 환난을 당할 때 이상히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전도하거나 주님을 위해 할 때 주변에서 어려운 일이 닥쳐오면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왜 이런 일이 생기는가 하고 의아해 하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다음에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계 21 : 8절에서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세 번째는 성도들이 복음을 전하면서 받는 핍박이나 고난을 영광의 상급으로 알아야 합니다. 마 5 : 11절에서 예수님은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에게 상이 있음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늘의 상은 우리가 주를 위해 당하는 어려움, 시련, 핍박, 고난 등과 비례한다는 사실을 알 때, 우리는 어려운 시련 속에서도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환난 당하는 자의 위로

바울은 자신의 신복인 디모데를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목적이 환난을 당하는 그들을 위로하기 위함이었음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위로란 하나님의 말씀으로 소망을 심어 주는 격려를 의미합니다. 위로의 목적은 더욱 소망을 견고히 붙잡고 승리토록 하려는 데 있습니다. 디모데가 그들에게 가서 한 일은 그들을 위로함으로

(1) 그들의 믿음을 더욱 굳게 하려는 데 있었습니다. 환난 중에 낙심할는지 모르는 그들에게 위로하므로 더욱 굳게 하려는 데 있는 것입니다.

(2) 3절 말씀을 보면 ‘이 여러 환난 중에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사람은 강한듯 하면서도 약합니다. 강한 의지로 출발했어도 도중에 의외의 어려움에 부닥치면 주춤할 때가 있으며 그 일을 포기할 때도 있는 것입니다. 위로란 그런 경우, 누군가가 그들을 위로하므로 그들의 마음이 환난으로 요동치 않게 하려는 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이런 목적으로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것입니다.

결론 : 핍박과 환난은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에 반드시 당하는 일이며 당해야 하는 일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하여 그들에게도 이 환난을 당해야 할 일에 대하여 미리 일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핍박이나 환난을 당해도 결코 두려워하지 말고 믿음을 더욱 굳건히 하여 끝까지 싸워야 하며 오히려 환난을 당하고 있는 형제들을 위로해 줄 수 있는 믿음의 성장한 성도의 자리에 이르러야 하겠습니다.


(13) 시험하는 자

(데살로니가전서 3:1-4)

서론 :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환난 중에 시험을 받고있다는 소문을 듣고 견딜 수 없이 궁금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이 사랑하고 아낀 교회였습니다. 그들의 신앙이 바르게 성장하며 모든 면으로 칭찬 들을만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바울의 마음을 흡족하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시험하는 자가 등장하여 이 같은 바울의 바람을 헛되게 할까 염려하여 위로해 주고 또 그들의 믿음을 알기 위하여 디모데를 사자로 보내게 된 것입니다.

1. 시험하는 자의 유혹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하여 바울이 걱정한 것은 시험하는 자의 유혹이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그리스도인이 어려움을 당하거나 핍박이나 환난을 당할 때 영락없이 찾아와서 시험하는 자가 있습니다. 이 자가 사탄인 것입니다.

사탄은 지혜가 출중합니다. 그러나 그 지혜가 진실하거나 순결하지 못하고 간교합니다. 간교하다는 말은 간사하고 교활한 것을 의미합니다. 사탄은 그리스도이들을 시험하는 일에 있어서 자신의 간교한 지혜를 총동원합니다. 그의 최종적인 목표는 우리들로 믿음에서 떠나게 하여 우리의 인생을 파탄시키려는데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같은 사탄의 모습을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자를 찾는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사탄이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시험의 방법을 살펴보겠습니다.

(1) 먼저 사람들의 마음속에 의심을 품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심을 품게 하고 기도를 하는 중에 응답에 의심을 품게 하는 것입니다. 그 방법은 여러 가지인데 그 근본목적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을 떠나게 하는데 있습니다. 사탄은 하와를 유혹할 때 그의 마음속에 의심을 품게 했습니다. ‘참으로 너희더러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기서 하와가 넘어진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견고히 붙잡지 못하고 사탄의 말에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2) 사탄의 시험은 환난 중에 찾아옵니다. 그리스도인이 환난 중에 빠지게 되었을 때, 제일 먼저 찾아오는 불청객이 사탄입니다. 40일 금식을 마치신 예수님을 제일 먼저 찾아온 자는 사탄이었으며 그는 그 어려운 가운데 처해 있는 예수님께 돌을 명하여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시험을 던진 것입니다.

2. 사탄은 하나님을 시험하게 만든다.

사탄의 간교는 그리스도인들로 교묘한 방법으로 하나님을 시험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시험하시지도 않으려니와 우리에게 시험을 받으시는 분도 아니십니다.

사람들이 기도할 때 하나님께 그 무엇을 보여 주시를 원합니다. 보여 주시면 믿겠습니다. 이런 식의 기도에 끼어 들어 거짓된 것으로 보여 주는 일을 사탄이 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예수님을 이끌어 성전 꼭대기에 세우게 하고는 그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붙들어 주실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사탄은 영적 존재임으로 그의 시험의 방법은 세 가지로 역사합니다.

(1) 가장 많이 사용하는 방법은 그 사람의 가장 가까운 사람이나 그 사람이 가장 아끼는 사람을 통해서 시험합니다. 사탄이 예수님을 시험할 때 베드로를 통해서 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달콤한 말속에 사탄이 숨어 있음을 아시고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말씀으로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욥이 시련을 당할 때 사탄은 그 아내를 통해서 욥의 마음을 격동시키려 했습니다. 그러나 욥은 아내의 말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께 대한 순전한 신앙을 지켰습니다.

(2) 다음 방법으로는 사탄이 내 마음에 그의 생각을 넣어 줍니다. 사탄이 유다의 마음속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어 주었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기도도 하지 않고 말씀으로도 깨어 있지 못하고 있을 때, 이 같은 무방비를 틈타 여지없이 공격하여 그의 생각을 내 마음속에 집어 넣으므로 내 마음을 여지없이 사로잡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늘 채워야 합니다. 주님을 사모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잠 4 : 23절에서 이르시기를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3) 사탄은 우리의 환경을 통해서 역사합니다. 요나의 경우,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가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경우, 우리는 잘못 판단하여 사탄의 계략에 넘어가는 것입니다. 십일조 생활하지 않아도 잘되는 사업, 아무래도 무엇인가 잘못된 곳이 있습니다. 사탄은 그것 보라는 듯 격려해 주겠지만 곧 큰 낭패가 찾아 오게되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 주변에는 시험하는 자가 독사처럼 도처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거나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방법으로 살아가면 반드시 사탄의 시험의 도구가 됩니다. 우리는 이 사탄이 주는 시험의 도구가 되지 않기 위해 깨어 기도하며 늘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14) 목회자의 위로

(데살로니가전서 3:13)

서론 : 목회자는 양 무리에게 위로를 주는 위치에 있기는 하지만 또한 양 무리들로부터 위로를 받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위로의 형태가 판이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에 위로의 사자로 보냈던 디모데가 바울에게로 돌아와 그들의 소식을 전해 주었을 때, 바울은 많은 위로를 받은 것입니다. 디모데는 데살로니가 교회로부터 믿음과 사랑과 기쁜 소식을 가지고 온 것입니다.

1. 디모데가 가지고 온 소식

디모데가 바울에게 전한 데살로니가 교회의 기쁜 소식이란 데살로니가 교회 교인들이 바울을 생각할 뿐 아니라 간절히 보고자 하였다는 것입니다. 양 무리들이 목자를 생각해 주고 보고자 하는 마음은 목자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이것이 목회자와 성도들 간의 끈끈한 정인 것입니다. 양이 목자를 보고싶어하는 마음도 없고 생각하는 마음도 없다면 목자나 양이나 어딘가 잘못된 곳이 있는 교회인 것입니다. 하물며 목회자가 심방 하는 일조차 귀찮게 여기고 고맙게 여길 줄 모른다면 무엇인가 크게 잘못된 심령인 것입니다.

바울은 또한 그들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위로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환난을 이긴 믿음, 시험하는 자의 유혹을 이긴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믿음을 들었을 때, 바울은 자신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 동안 보살펴주며 영적인 아비의 입장에서 키워준 뿌듯한 보람을 느끼며 모든 환난과 궁핍 가운데 있었지만 위로를 받았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7절에서 ‘이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2. 바울의 기쁨

바울에게는 남다른 기쁨이 있었습니다. 바울의 기쁨은 양들이 신앙으로 성장하고 환난을 이기는 그 믿음에서 얻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기쁨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서 모든 기쁨으로 기뻐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기쁨은 바울의 감사가 되어 이 같은 일에 내가 무엇으로 하나님께 보답할꼬 라고 말했습니다. 9절에서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보답할꼬’했습니다. 바울의 이런 기쁨은 목회자들의 한결같은 바람입니다. 목자는 양 무리들이 자신을 생각해 주고 보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사모할 때 목회자로서의 보람을 느끼며 또한 자랑스런 긍지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일들은 또한 목회자에게 교회를 위해 더욱 충성하려고 하는 마음을 솟구치게 하여 양 무리들의 그 사랑에 보답할 것을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3. 바울의 기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교인들의 아름다운 소식을 듣자 그들의 얼굴이 더욱 보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들에게 축원했습니다.

(1) 바울의 간구한 기도의 제목은 ‘너희 믿음의 부족함을 온전케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보기에 아직도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는 믿음이 부족했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그들에게 더욱 채워줄 수 있었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목자의 마음입니다. 연세 많은 부모가 한갑이 넘은 아들을 염려하는 것처럼 목회자의 눈에는 아무리 성숙한 믿음의 성도들일지라도 부족한 것으로 여기며 더욱 그 믿음이 성숙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2) 바울은 또 하루속히 데살로니가로 가는 길이 열려져서 그들에게 직행하여 만날 수 있기를 위해 기도한 것입니다. 이 말씀은 바울이 얼마나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사모하는가를 보여 줍니다.

(3) 다음에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간의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되기를 원했습니다. 바울은 12절에서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에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넘치게 하사’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하는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는데 바울은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에 사랑하라’는 말씀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같은 바울의 말은 바울이 주님의 온전한 사랑으로 교회 성도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4)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님께서 강림하실 때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라고 한 말은 우리들의 생활에서 죄를 멀리하고 혹 죄를 범했을 때는 곧 회개하므로 흠을 제거하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흠을 제가하는 방법은 한 가지 뿐입니다. 그것은 흠을 하나님께 자백하고 회개하는 일입니다. 주님이 오실 때는 거룩함에 흠이 없어야 신부의 자격으로 영접할 수 있습니다.

결론 : 여러분은 자기가 속해 있는 목회자를 사랑하고 협력하며 위로해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믿음에 굳게 서서 흔들림이 없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성장하면 목회자의 큰 기쁨이 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5 - 19)

◆ 밤중소리 01-31 | VIEW : 574

(15) 더욱 많이 힘쓰라

(데살로니가전서 4:1-6)


서론 :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바탕은 하나님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를 깨달아 그대로 행하는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바울에게 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에게서 받은 대로 행하고 있었지만 바울은 더욱 많이 힘쓰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1. 바울의 권면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 교인들에게 준 권면은 ‘주 예수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준 무슨 명령으로 준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서신에서 바울이 자신의 견해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성도들에게 권면한 말씀이 실인즉 주 예수로 받은 명령이란 사실을 밝혀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생활입니다. 바울은 1절에서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께 기쁘시게 할 것을 우리에게 받았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행하는 모든 일의 표준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도 바울의 이 같은 권면을 받아 드려 그런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들에게 “더욱 많이 힘쓰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언제나 정지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정지는 정체를 의미하며 정체는 신앙생활의 파탄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들입니다. 좋은 군사란 그들을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해드리는 자를 말합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의 군사로 모집한 분은 우리 주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들을 군사로 모집한 주님을 위한 좋은 군사로 그분에게 충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군사는 싸워야 하며 이 싸움은 쉬면 안됩니다. 군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더욱 많이 힘쓰라는 말은 그리스도인의 뜨거운 열심을 의미합니다. 롬 12 : 11절에서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어 주를 섬기라’고 했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일에 뜨거움이 없으면 얼마 안가 열심이 식어지며 주의 일에 나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더욱 이라고 하는 추진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믿음의 싸움에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우리의 순종도 우리의 기도도 이 더욱의 원리가 적용되어야 합니다. 어제보다 더욱 아름다운 믿음, 오늘보다 더욱더 좋은 믿음을 가지기 위해 더욱 힘쓰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맥이 빠진 것처럼 매사에 희미한 사람, 영적 감각이 무뎌서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생활에 실격자들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더욱이 결여된 사람입니다. 다음에 많이 힘쓰라고 했습니다. 많다는 말은 량을 의미합니다. 많은 량을 생산하라는 뜻입니다. 숙련공일수록 생산량이 많아지는 것처럼 더욱 열심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더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

바울은 3절에서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의 음란한 행실을 책망하면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어떻게 그들의 몸을 거룩하게 지킬 수 있는가에 대하여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곧 음란을 버리고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취할 줄을 알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좇지 말고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바울은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 아내 취할 줄을 알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몸의 거룩함과 존귀함을 지키는 일은 그 첫째가 음란에서 자기를 지키는 일입니다. 자기 아내를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취하라는 말은 아내외에 다른 여자와의 음란한 행실을 갖지 말라는 뜻입니다. 다른 여인과 음란한 행실을 하면 이미 아내를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취하는 태도가 아닌 것입니다. 다음에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좇지 말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본능적인 색욕은 절제하지 않으면 음란에 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음란한 행실을 즐기는 일은 남자들의 색욕에서 나오는데 이런 일은 이방인들이 즐겨하는 일이지 그리그도인들은 그들의 행실을 본받아서는 안돼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음란한 도시 가운데 세워진 교회이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교인들이 이 같은 색욕으로 말미암아 음란의 유혹에 빠지게 될 것이기 때문에 이처럼 경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색욕을 좇는 일에 분수를 넘으면 형제를 해하게 됩니다. 음란한 행실로 인하여 희생되는 경우를 말하는데 음란은 한 가정을 능히 파탄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그리스도의 군병들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열심을 내야 할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들입니다. 음란을 버리고 우리의 몸을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옷 입어야 하며 더욱 많이 주의 일에 힘쓰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16) 부르심의 목적

(데살로니가전서 4:7-8)

서론 : 바울은 말하기를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은 우리로 부정케 하려하심이 아니라 거룩케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이 말은 그리스도인은 특별히 음란한 생활에서 멀리해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는 말입니다. 이방인들은 음란으로 자기들의 몸을 더럽히지만 그리스도인은 그 몸이 이제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 되었으니 음란으로부터 지켜 더러움에 거하지 않고 거룩함과 존귀함을 지키라고 한 것입니다.


1. 부정케 하심이 아님

바울은 7절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우리로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 거룩케 하심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이 말하고 있는 이 말씀의 뜻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구원을 받은 것은 우리들로 지난날의 죄 가운데서 살아온 그 삶을 계속 살게 하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들로 그 같은 죄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따라 거룩한 생활을 하게 하시려는데 있다는 사실을 밝혀 준 것입니다.

(1)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오해한 나머지 자신의 행동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죄인 줄 알면서 ‘하나님이 용납하여 주실 것이라’는 생각으로 죄를 계속 저지르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그에다 자신에게 하나님의 징계가 당장에 없을 때는 하나님이 용납해 주시거나 이해, 동조하시는 것으로 잘못 생각하여 좀처럼 그 자리에서 일어날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일은 결코 우리들로 부정을 저질러도 좋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란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일단 그의 백성으로 만드신 후에는 우리들로 다시는 지난날의 죄 가운데서 살아가는 것을 용납치 아니하시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도록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어두움에서 빛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신다는 믿음으로 악을 행하기에 담대하다면 그런 믿음은 하나님이 주신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로 지난날에 부정한 생애를 살아왔지만 그런 우리들로 거룩한 열매를 맺게 하시기 위해 죄악에서 불러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들 포도나무 가지인 우리들을 참포도나무인 그리스도와 접부치심으로 참포도나무 가지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지난날의 들 포도나무의 결실을 맺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롬 11 : 17절에서 ‘돌 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요 15 : 5절에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모든 말씀은 우리들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뜻을 밝혀 주고 있는데 우리들로 부정케 하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함에 동참시키시려는데 있음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2) 초대교회로부터 기독교에는 이단들이 극성을 부렸습니다. 영혼의 구원만을 중시한 나머지 육은 구원에 아무런 지장이 없는 것이라고 하며 오히려 육은 원래가 악한 것이기 때문에 구원을 받은 이후에 그리스도인이 육신대로 살아도 구원에는 지장이 없다는 구원론이 그 같은 것들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롬 6장에서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그 가운데 어찌 살리오’라고 이런 악한 무리들의 주장을 한 마디로 일축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죄에 대하여는 이미 죽은 자들이기 때문에 그 죄 가운데 계속하여 살아갈 수 없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2. 하나님이 부르신 목적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은 우리로 거룩케 하시려는데 그 뜻이 있다는 사실을 말씀해 줍니다.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죄에 대하여 미워하십니다. 빛이 어두움과 함께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는 하나님의 그 빛을 받은 사람들입니다(고후 4 : 6).

그러면 성도들은 무엇으로 어떻게 거룩해 지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성도들을 거룩케 하는 능력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면 그 열매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함이 되는 것입니다. 보혜사 성령님은 성도들의 생활을 거룩하게 하십니다. 성령은 끊임없는 감화와 감동으로 성도들의 생활에 깊이 개입하시어 거룩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결론 :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거룩함을 저버리면 그것은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오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리는 일이라고 경종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활 가운데서 어떤 열매를 맺고 있는 것입니까? 부정한 열매입니까? 아니면 거룩한 열매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신 것은 우리들의 생활을 거룩하게 하시려는데 있다는 사실을 알고 거룩함을 위해 더욱 많이 힘쓰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17)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사랑

(데살로니가전서 4:9-12)

서론 :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바울로부터 그들이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은 대로 형제를 사랑한다고 칭찬을 받았습니다. 교인들이 형제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랑한다는 일은 어려운 일이며 그 신앙이 성숙한 단계에 있음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마게도냐에 있는 모든 형제들에게 베푼 사랑은 인간적인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은 대로 사랑했다는데 높이 평가받을 만한 것입니다.

1. 형제 사랑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

우리는 율법에서 벗어난 사람들입니다. 율법에 대하여 죽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율법을 지킬 의무가 없으며 율법은 우리를 정죄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율법과의 관계를 어떻게 가져야 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율법을 온전케 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무엇으로 율법을 온전케 하신 것입니까? 사랑으로 온전케 하셨습니다. 우리는 율법을 온전케 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십계명에 나오는 첫째계명부터 넷째 계명까지 밝혀 주고 있는 계명에 따라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 계명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행하지 않는 자들에게 저주를 주시기 위해 주신 계명입니다. 예수님은 십계명을 온전케 하신 사랑에 대하여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마 22 : 34이하에서 어느 율법사가 질문하는 계명에 대하여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5계명부터 10계명에 이르는 대인 관계의 계명에 대해서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도 사랑이요 사람에게도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요 13 : 34절에서 새 계명을 주신다고 하시면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랑의 계명은 우리를 정죄하지 않습니다. 사랑의 계명은 두려움에서가 아니라 감사와 기쁨으로 순종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랑의 계명은 십계명에 나오는 정죄의 계명보다 더 적극적이요 능동적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열매로 나타납니다. 십계명은 사랑에서 나왔으며 사랑은 십계명보다 더 위대하고 우위에 있는 계명입니다. 사랑의 생활을 실천하는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과 기쁨을 얻지만 계명에 집착하는 그리스도인은 의무감과 두려움에서 억지로 지키려하기 때문에 불안과 초조감을 줍니다.

사도 요한은 형제 사랑을 구원을 얻은 성도들의 열매로 보고 구원 문제와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요일 3 : 14절에서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므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신약 성경을 보면 십계명을 지키는 일로 구원의 증거를 삼으라고 하신 일이 없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십계명을 지키므로 구원의 확신을 가지라고 하신 일도 없습니다. 십계명을 지키는 일은 구원받은 사람들의 생활의 의무라고 하신 일도 없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형제들에 대한 사랑은 별개의 사랑이 아닙니다. 요일 4 : 20절에서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2. 형제 사랑은 무엇이냐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형제에 대한 사랑을 말합니다. 그리고 더 범위를 넒힌다면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1) 사랑은 서로 도와주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말에 그쳐서는 안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가난한 형제나 어려움을 당하고 있거나 도움을 주어야 할 형제들에게 도움의 손을 뻗혀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그 말 자체가 실천적이며 실제적인 사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2) 다음에 사랑은 형제의 허물을 용서해 주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어떻게 나타난 것입니까? 주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기도문에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란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형제에 대한 용서에 대하여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주라고 하신 것입니다.

(3) 사랑은 이웃에 악을 행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웃에 진실하고 무고하지 아니하며 까닭 없이 미워하지 않는 일입니다.

결론 : 형제에 대한 사랑은 교회를 세우는 줄입니다. 사랑은 온전히 매는 띠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가리키는 바 형제의 사랑을 배우고 그 사랑 가운데서 행하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십계명을 지키는 일보다 더 값진 생활이며 하나님 앞에 생명의 결실이 있는 생활인 것입니다.


(18) 자는 자들에 대한 소망

(데살로니가전서 4:13)

서론 : 그리스도안에서 죽은 사람들에 대하여 성경에서는 잔다는 표현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왜 잠을 잔다고 한 것입니까? 잔다고 한 말은 죽은 것이 아니란 뜻입니다. 다시 깨어날 소망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1. 소망이 있는 그리스도인의 죽음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에 대한 관심이 많습니다. 죽은 후에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죽음의 상태는 어떤 것일까. 죽음이란 육신과 영혼이 각기 어떤 상태에 있는 것인가? 하는 문제 등은 우리들의 많은 관심을 끕니다. 우리들에게 죽음이 있는 이상, 이런 문제에 대해 관심을 안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1) 영혼 수면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육체뿐 아니라 영혼까지도 육체와 함께 잠을 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 중에는 여호와의 증인들과 안식일교회가 있습니다. 대개 이단적인 교회에서 이런 주장을 폅니다. 이들의 주장인즉 죄 값은 죽음이라고 했는바 그 죽음은 육체와 영혼이 함께 죽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육신은 땅에 묻히고 영혼은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요 둘 다 무덤에서 잠을 자다가 마지막 날에 부활로 함께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성경에서 자기들의 주장에 맞는 몇몇 구절을 가지고 이단적인 주장을 펴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성경에 어떤 문제가 제기되면 먼저 성경 전체의 내용을 살펴보는 가운데 합리적인 해석을 내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고전 15 : 16절 이하에서 말씀해 주는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하는 성경구절을 내세웁니다. 이들의 주장은 그리스도들인에게 부활이 없었다면 망하였을 것이란 내용은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이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고전 15장은 사람이 죽어서 천국에 올라가는 문제를 다룬 성경이 아니요 그리스도인들의 죄의 처리와 최종적인 소망에 관한 부활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에 올라가 안식을 취하고 있는 죽은 성도들에게도 부활의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고전 15장에서 증거해 주는 부활은 주로 그리스도의 부활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부활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연합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는 죽어 무덤에 그 육신이 잠들고 계셨을 때 그의 영혼도 함께 잠드신 것입니까? 예수님은 회개하는 한 강도에게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말씀에서 영혼이 육신과 분리해서 천국이라고 하는 낙원에 올라간다는 사실을 밝히셨습니다. 바울의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란 말은 그리스도의 부활은 죄를 이가고 승리한 선언이시기 때문에 만약 그의 부활이 없으셨다면 우리에게는 아무런 소망도 없으며 여전히 죄 가운데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죽은 자들도 죄의 사유함이 보장되지 않았으므로 구원에 이르지 못하고 망하였을 것이란 주장인 것입니다.

(2) 죽으면 육신과 영혼이 분리된다는 것이 성경적인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에서 그들이 죽자 곧 천사가 와서 그들의 영혼을 데리고 하나는 아브라함의 품으로, 하나는 음부로 데리고 갔다고 하신 것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비유이지만 비유라도 사실과 모순된 비유는 비유로 인용될 수 없습니다.

(3) 예수님은 몸과 영혼을 분리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마10:18절에서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하셨습니다. 영혼은 잠을 자는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구원해 주신 생명은 우리의 영혼입니다. 물론 부활은 영과 육이 함께 영화로운 몸으로 다시 사는 일이지만 부활은 아직 우리들에게 소망 가운데 있습니다. 영생으로 거듭나게 하시고 영원한 생명으로 살리신 우리의 영혼이 육신의 몸과 함께 무덤에서 잠을 잔다는 말은 영혼도 함께 죽는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4) 예수님은 요6:63절에서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으로 죽은 영이 살리심을 받았는데 그 영이 육신과 함께 땅에서 잠을 잔다면 살리심을 받았다는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5) 바울은 우리의 육의 몸이 죽으면 하늘에 우리가 거처할 영원한 짐이 있다고 말씀해 주었습니다(고후5:1-2). 8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고 했습니다.

결론 : 그리스도인의 최종적인 소망은 부활입니다. 이 부활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산 증거로 우리에게 보장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 같은 보증으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부활이 소망으로 있지만 우리의 육체가 죽으면 우리의 영은 주님께로 올라갑니다. 이 사실은 성경이 분명히 우리에게 그 비밀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19) 그리스도인의 공중 휴거와 성도의 부활

(데살로니가전서 4:14-18)

서론 : 바울은 성도들의 부활 문제를 다루면서 주의 재림 시에 있을 부활과 휴거 문제에 대해 언급해 주고 있습니다. 이 문제는 종말론적인 입장에서 볼 때 대단히 중요한 계시가 됩니다. 원래 바울의 이 같은 언급은 그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죽은 자들에 대한 많은 의문점들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로 인하여 그들에게 올바른 부활 관과 사후 관을 심어주어 죽은 자들의 가족과 성도들에게 위로해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1. 주의 재림

16절에서 바울은 주의 재림에 대하여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주 재림에 대한 이 모습은 주님께서 적그리스도의 군사들과의 마지막 결전을 위해 아마겟돈에 재림하시는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계19:11절 이하에 나오는 계시에서 주 재림과 그의 심판을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14절에서 이때 ‘예수 안에서 죽은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고 했습니다. 16절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만을 보면 이 때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모든 성도들이 함께 부활하여 주님의 재림 시에 동시에 지상에 내려오는 것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때의 부활은 분명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의 부활이기는 하지만 그 중에 첫째부활 자들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부활에 관한 계시는 성경에 여러 가지로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처럼 다양하게 단편적으로 나오는 문제에 대하여 어느 한 가지로 정립하기란 어려운 것입니다. 고전15:22-24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부활의 순서가 나오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라고 했습니다. 세 번째는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 부활은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의 부활이기 때문에 이 순서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그에게 붙은 자의 부활이 있는데 이 부활은 계20:4절 이하에서 순교자의 부활로 나옵니다. 그리고 이 부활을 첫째 부활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으며 바울이 데살로니가 전서에서 말씀해 주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는 부활’은 바로 이 첫째부활 자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음에 그리스도인의 마지막 부활의 시기는 천년왕국이 지난 후, 흰 보좌 심판 시인데 이 때 모든 죽은 자의 부활이 있게 되며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2. 성도의 공중 휴거

바울은 17절에서 성도들의 공중 휴거에 대하여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란 말씀이 그것입니다. 살아남은 자란 주님이 재림하실 때 지상에 생존해 있는 모든 성도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 무리들 중에는 대환난 전 하나님의 예비처에 들어가 보호를 받고 있는 슬기 있는 처녀들과 기름을 준비치 못하여 대환난에 남게 된 미련한 처녀들이 있는데 이들은 대환난 중에서 적그리스도의 핍박을 받으며 환난을 통과하여 끝까지 남는 자들입니다. 다음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로 유대인의 구원입니다.

이들 세 무리들은 주의 재림과 함께 공중으로 천사들에 의하여 끌어올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미 지상에는 일곱째 대접 심판이 진행 될 것이기 때문에 지상에서의 최후의 탈출이 되겠습니다. 그곳에서 주님과 함께 내려와 지상에서 적그리스도의 무리들과 싸워 그들을 섬멸시킨 후, 첫째 부활 자들과 공중에 올라오셔서 지상에서 휴거 된 성도들과 함께 모이게 되는데 이때 성도들은 이처럼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공중 휴거 시 모든 성도들이 홀연히 변화 받아 신령한 몸으로 휴거 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 문제는 고전15:51절 말씀과 연결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이때 일어나는 부활과 변화는 주의 재림 시기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최종적인 유업을 받을 시기인 천년왕국 후가 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고전15:24절의 ‘그 후에는 나중이니’란 말씀의 그 시기에 있을 대부활인 것입니다.

결론 :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이 같은 주의 재림 시에 있을 심오한 사건에 대해 말씀해 주는 이유는 그들이 죽은 자들에 대한 궁금증으로 소망 없는 자같이 슬퍼하는 일이 있다는 말을 듣고 위로해 주려는 의미에서 기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활의 소망은 그리스도인들의 놀랍고 위대한 소망입니다. 이 같은 소망을 우리도 믿음으로 가져야 하겠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20 - 27)

(20) 재림의 때와 시기

(데살로니가전서 5:1-3)


서론 : 데사로니가 교회는 주 재림의 소망을 가지고 주의 재림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살아갔습니다. 이처럼 주 재림의 소망이 있는 교회는 한편 믿음이 있고 열매를 맺는 생활을 하는 반면 또 지나친 기대감에서 신앙생활이 잘못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에 바울은 종말적인 면에서 이런 점을 그들에게 깨우쳐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이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4 : 13 - 18절에서 주의 재림과 부활 문제, 성도들의 공중 휴거 문제에 이르기까지 자세히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5장에 들어와서도 주의 재림에 대한 시기와 때에 대하여 경종해 주고 있습니다.

1. 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이른다.

성경에는 주의 재림에 대한 때와 시기에 대하여 밝혀주는 계시가 없습니다. 단 9 : 24절 이하에서 계시해 주신 70 이레에서 초림의 시기와 재림의 시기를 산출할 수 있는 방법을 주셨는데 그것이 장차 적그리스도가 등장하여 그 자에 의해 체결될 1 이레의 언약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기간은 인류의 최종점에 이르러 적그리스도가 등장했을 당시의 7년 기간이기 때문에 그 시기가 이르기 전에는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기에 이르렀다고 해도 모든 사람들이 ‘졸며 자는’ 자리에 있을 것이기 때문에 이런 명백한 성경적 징조도 깨어 있는 성도들 외 바라볼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1) 밤에 도적같이 이른다는 말은 준비되지 않은 성도들에게 주시는 경종입니다. 4절에서 바울은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함에 그날이 도적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도적같이 맞이할 사람들에 대하여 예수님은 몇 가지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① 눅 21 : 34절에서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날이 덫과 같이 임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방탕한 생활과 술 취하는 생활과 염려하는 가운데 마음이 둔해진 사람들에게 도적같이 임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② 마 24 : 37 - 39절에 있는 말씀에서 주 재림의 때는 마치 노아의 때와 같은데 노아의 때에 많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하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했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들처럼 먹고 마시는 생활에 치중하다보면 마음이 둔해지는데 이런 자들에게 주의 재림은 도적 같다고 하신 것입니다.

③ 마 25 : 1 - 13절에서 주님은 등에 기름을 준비치 못한 미련한 처녀들에게 도적같이 임할 것임을 경종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의 재림에 무관심하여 준비하는 생활을 못하면 주님은 이런 사람들에게 도적같이 오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준비란 ‘깨어 기도’하는 일이요, 회개하고 열매를 맺는 일이요, 예언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생활을 말합니다.

④ 바울은 도적같이 오시는 모습에 대하여 임산부에게 임하는 해산의 고통에 비유해서 말해 줍니다.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다’고 했습니다. 종말에 이른 성경적인 징조는 70 일에 나오는 1 이레 기간과 계 11장에 나오는 두 증인의 예언의 사역을 통해서 알 수 있지만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는 이때야말로 안전한 때요 평안한 때인 줄로 오해하고 있을 것입니다.

2. 멸망이 홀연히 임하리라

주의 재림이 도적같이 임하는 자들에게는 그들의 멸망이 홀연히 임하리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멸망 받을 자들은 모두 짐승의 표를 받을 자들입니다. 인류의 종말에 짐승이라고 하는 적그리스도가 등장하여 많은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이 자는 사탄으로부터 받은 권세와 능력을 가지고 이적을 행하며 하나님으로 경배와 찬양을 받게 됩니다. 더욱이 그 시기에는 경제적 대공황 기에 이를 때이기 때문에 짐승에게 경배하여 그 표를 받지 않으면 물건의 매매가 일체 금지 당하기 때문에 성령으로 거듭나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사람들은 모두 이 표를 받게 됩니다.

이들의 멸망이 홀연히 임한다는 사실은 셋째화인 일곱 대접 심판 시 일곱째 대접을 공기 가운데 쏟을 때 내리는 최종적인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말씀인데 이 심판은 이 지구상의 모든 인류가 지구의 폭발과 함께 불에 타서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론 : 주의 날이 도적같이 이를 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의 재림을 사모하며 그의 오심을 기다리는 우리에게는 결코 도적같이 오시지 않습니다. 다시 오시는 주님을 도적같이 오시는 것처럼 마지하지 말고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하는 간절한 심정으로 사모하는 신부의 입장에서 맞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1) 낮에 속한 자

(데살로니가전서 5:4-9)

서론 : 바울은 낮에 속한 자와 밤에 속한 자가 있음을 말하고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로써 주의 재림이 밤의 도적 같이 임하여 멸망이 홀연히 임할 자들은 결코 빛이나 낮에 속한 자들이 아니요 밤이나 어두움에 속한 자들임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1. 밤이나 어두움에 속한 자들

그러면 누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한 자들입니까?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일은 바울이 말하고 있는 핵심은 구원론 적인 입장에서 구원받을 자와 멸망 받을 자를 구분하려는 의미에서 이 말씀을 전개하는 것이 아니란 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바울은 주의 재림 시에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복 있는 성도들이 누구인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주고 이로 인하여 데살로니가 교회나 모든 교회들로 재림의 주를 맞이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될 수 있도록 하려는 데 목적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1) 밤에 속한 자란 주의 재림에 소망을 두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의 핵심적인 목표를 어디에 두어야 하느냐는 문제에 대해 그리스도인은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눅 12 : 35절 이하에서 성도들의 신앙적인 자세에 대해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 밤이나 어두움에 속한 자들은 잠을 잔다고 했습니다. 7절에서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한다’고 했습니다. 잠을 잔다는 말은 그들의 신앙적인 상태를 의미하는데 깨어 경성하여 있지 못한 생활로 세상에 취한 상태, 세속적 신앙, 기복적 신앙에 젖어 있는 상태를 의미해 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종말에 살아가는 성도들의 영적 상태에 대하여 이 밤에 속한 상태에 있을 것이라고 경종하셨는데 노아 시대 사람들의 예룰 드신 것입니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멸하기까지 저희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주인이 도적이 어느 경점에 올 것을 알았더라면 꺠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임자가 오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세상적인 생활을 하면서 세속에 물들면 그 영이 잠든 상태에 있으므로 잠에 속한 자들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에게 주님은 도적같이 임할 것이라고 경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2.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바울은 그러나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의미 있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4절과 5절에서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날이 도적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주의 재림에 대해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소망 가운데 주의 오심을 기다리고 있었든 교회였습니다. 주님은 성도들의 신앙이 이렇게 주의 재림을 사모하며 그의 오심을 기다리는 신앙을 가장 기뻐하십니다. 그런 준비를 시키기 위해 주신 성경이 바로 요한계시록인 것입니다.

(1) 어두움에 속하지 않으려면 6절에서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지라’고 했습니다. 자는 생활은 깨어 있지 못한 신앙을 말하는데 깨어 근신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깨어 있는 방법은 우리의 신앙생활의 태도를 말하는데 기도가 없는 생활은 우리들로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게 한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주의 재림을 맞이하는 성도들에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성도들이 깨어 있어 근신하지 못할 때 그의 생활이 죄에 물들게 됩니다. 죄에 물든 심령은 이미 빛이 사라지고 어두움이 드리운 심령인 것입니다. 사람이 죄를 짓고 속히 회개하지 못하면 그 마음이 어두워집니다. 근신하라는 말씀은 회개하라는 말입니다.

(2) 우리는 근신하여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고 했습니다. 근신하는 몇 가지 방법을 제시해 주었는데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부치라고 했습니다. 믿음이 있어야 하고 사랑의 생활로 주의 사랑 안에 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구원에 대한 확실한 소망을 가지고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결론 : 주의 날은 어두움에 속한 자들에게는 환난과 심판의 날로 맞이할 것이요 오직 빛에 속한 자들만이 온전한 구원과 축복의 날이 될 것입니다. 밤이나 어두움에 속한 자들이 되지 말고 깨어 있어 근신하여 신랑을 맞이할 수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22)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의의

(데살로니가전서 5:10-11)

서론 : 바울은 10절과 11절에서 우리의 신앙생활의 목표를 어디에 두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이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신앙이 성숙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심오한 사랑과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바쳐야 할 사랑에 대하여 해답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일은 우리로 깨든지 자든지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깨든지 자든 지란 말은 죽든지 살든 지란 말로 우리의 전 생애를 주를 위해 그리스도를 위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자기와 함께 라고 하신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을 의미해 주는 말입니다. 바울의 이 말은 대단히 성숙한 영적 상태의 신자에게 주는 말로 성도들은 믿음의 세월이 자라면 신앙도 함께 자라 어릴 적에 먹든 젖을 그만 먹고 단단히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주신 말입니다. 이 말씀을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생활을 못하면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죽으심의 의의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1.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누구를 위함인가?

바울은 10절에서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의 죽으심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분명한 대답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모른다면 그리스도인이 된 의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바로 나 때문이다라고 하는 그 죽으심의 원인을 분명히 찾지 못한다면 나와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죽으심은 모든 사람을 위한 죽으심이 아닙니다. 나를 위해 죽으신 것입니다.

내 죄가 아니라면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실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내가 내 죄로 인하여 지옥에 들어갈 이유가 없다면 무엇 때문에 그 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하신 것입니까?

주님의 죽으심은 내 죄를 사하시고 나를 그 죄악 가운데서 구원하시어 나에게 영생을 주시려는데 목적을 두신 것입니다. 이 사실을 확실히 알고 이 믿음으로 자신의 생애를 이 분을 위해 바칠 수 있는 사람이 제대로 믿음이 들어간 그리스도인입니다.

2. 깨든지 자든지

그러면 이런 그리스도인은 어떤 생활를 해야 하는 것입니까? 바울은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의 이 말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초점을 그리스도에게 맞추는 생활을 의미합니다.

(1) 갈 2 :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2) 고전 10 : 31절에서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과을 위해 하라’고 말씀해 주었습니다.

(3) 그리스도인의 생활 중,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생활은 가장 보람있고 상급이 있는 생활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려면 먼저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화목제물이 되사 죽으셨으니 나 역시 주님과 함께 옛사람은 죽은 것입니다. 이제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생활이 새롭게 태어난 우리의 생활인 것입니다.

3. 피차 권면하고 덕을 세우라

바울은 11절에서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성도들이 서로 권면하고 덕을 세우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성도들의 신앙생활의 성장에는 서로의 권면이 필요합니다. 권면이란 잘하는 일에는 격려해 주고 잘못하는 일에는 책선으로 바로 잡아 주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자기 스스로의 일은 자기라고 하는 그늘에 가려서 정확한 모습을 보지 못할 때가 많은 것입니다. 그러나 객관적 입장에서 볼 때는 잘잘못을 보고 선의의 판단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서로간의 권면은 정말로 필요한 것입니다. 이런 권면이야말로 신앙적 성장에 절대적 요소라고 보겠습니다. 덕을 세우라는 말은 그리스도인들은 그의 언행이나 권면에 조차 덕을 세워야 합니다. 덕의 가장 필수적인 요소는 겸손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자기 스스로 본을 보이므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따라오도록 인도하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우리의 생활에 대한 성찰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과연 성도답게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그리스도 안에서 주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를 살피면서 내 생애를 주님과 함께 살 수 있도록 힘쓸 수 있는 성도가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23) 주 안에서 다스리며 권하는 자에 대한 태도

(데살로니가전서 5:12-13)

서론 : 바울은 12절부터 교회 안에서의 성도들의 신앙생활의 지침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수고하는 자들에 대한 자세, 성도들간의 사랑의 유대,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는 생활에 대한 권면을 상세히 언급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1. 수고하고 주 안에서 다스리며 권하는 자에 대한 자세

여기서 바울이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이라고 했는데 이들은 교회를 담임한 주의 종들을 의미해 주는 말입니다. 더 광범위하게 말한다면 교회에서 가르치고 성도들을 돌보는 일에 전념하는 교역자들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1) 이들에 대하여 ‘너희 가운데서 수고한다’고 했는데 이들은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수고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아무나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은사로 주시고 세우셔야 합니다. 말씀을 배워서 진리를 깨닫고 그 말씀의 능력 가운데서 믿음과 행실의 본을 보여 줄 수 있어야 말씀을 가르칠 수 있는 자로 세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야고보 사도는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고 경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감당하지도 못할 큰 일을 맡아 가지고 결국에는 너머져 버리며 비극적인 종국을 고하는 하나님의 종들이 어디 한두 명입니까?

(2) 하나님의 종들은 양무리들을 위해 기도하는 일에 수고하는 사람들입니다. 히 13 : 17절에서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개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주의 종들은 양 무리들의 영혼을 위해 자기가 빚진 것을 갚아줄 책임이 있는 보증인 같이 기도한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종들은 양 무리들의 영혼의 책임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그 책임에 대한 분명한 심문을 받게 될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종들은 양 무리의 본이 되기 위해 수고하는 사람들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주장하는 자세를 취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고 권면했습니다. 본이란 말은 신앙생활의 본으로 가르치는 바를 스스로 양 무리들에게 보여 주라는 뜻입니다. 자제하고 절제하고 겸손하며 사랑을 나타내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목회가 지고 있는 수고의 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4) 주의 종들은 양 무리들을 다스리는 일을 하며 이를 위해 수고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요한에게 부활 후 만나신 자리에서 ‘내 양을 먹이라’는 말씀을 두 번 하시고 세 번째로는 ‘내 양을 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친다는 말은 다스린다는 의미가 됩니다. 성도들을 다스리는 일은 당회에서 하지만 당회장인 목회자에게 그 책임이 있으며 실질적으로 양 무리들을 다스리는 일은 목회자가 합니다. 이 일은 많은 신경이 쓰여지는 일이며 만약 이 일에 미숙하거나 착오를 일으키면 교회에 큰 혼란이 오게 되며 분쟁까지 초래되기 때문에 다스리는 일은 굉장히 수고로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5) 성도들을 권하는 자의 수고도 큰데 이 권하는 사명 역시 주의 종들에게 짊어진 책임인 것입니다. 겔 3 : 17 - 19절 말씀을 보면 선지자인 겔에게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악인에게 일러서 그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케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라’고 경종하셨습니다. 악인에게는 권면이 필요합니다. 그 사람이 그 권면을 듣지 않고 멸망을 받았다면 자기 죄악으로 죽은 것이지만 만약 권면해야 할 사람이 권면을 하지 않고 악한 길에서 돌이키게 아니하면 그 악인은 자기 죄로 죽지만 그 죄인의 피 값을 권면치 아니한 사람에게로 돌리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2. 이들에게 양 무리가 할 일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이들을 너희가 알고 저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고 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1) 이런 자들을 알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종임을 알라는 뜻입니다. 주님이 자기 양 무리들을 위해 세우신 주의 사자임을 알라고 한 것입니다. 무시하거나 불순종하는 일은 주님이 싫어하시는 일입니다.

(2)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라고 했습니다. 주님을 대신하여 자기 영혼을 위해 수고하는 목자들에 대하여 가장 귀히 여기라고 한 것입니다. 가장 귀히 여기란 말은 존경하라는 말입니다. 주의 일을 성실히 이행할 수 있도록 협력하라는 말입니다. 어려운 일을 도와주고 성심껏 협력해 주라는 말입니다.

(3) 다음에 서로 화목 하라고 했습니다.

결론 : 양과 목자 사이에 화목을 이루지 못하고 간격이 있거나 틈이 생기면 안됩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화목해야 합니다. 목자는 양 무리들을 사랑하고 양 무리는 목자를 가장 귀히 여기며 따르는 일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24) 바울의 권면

(데살로니가전서 5:14-15)

서론 : 바울은 14절과 15절에서 간곡한 어투로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신앙생활에 있어야 할 몇 가지 생활 태도에 대하여 간곡히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바울의 권면은 교회 생활을 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권면의 말씀을 자신의 신앙생활에 적용하는 자세를 가지고 잘 배워야 할 것입니다.

1.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라

(1) 첫째의 권면은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지적하고 있는 규모란 말씀의 규모를 말합니다. 가정에서 가정의 위기를 가져오는 여인이 누군가 하면 살림에 규모 없는 여인입니다. 이처럼 규모 없는 신앙생활은 세상사람들과 구분하기 어려운 세속적 신앙생활로 돌아가게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신앙생활에 짜임새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즉 말씀의 규범안에서 살아가는 생활을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말씀에 규모없이 살아가는 성도들을 방치하지 말고 그들에게 권면하기를 권계하라고 한 것입니다. 경계하는 일로 권면해 주라는 의미입니다. 그들의 규모 없는 생활을 방치해 두는 일은 그의 신앙 생활을 파탄시키는 일이기 때문에 권계하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2) 두 번째 권면은 마음이 약한 성도들을 안위해 주라고 했습니다. 교회에서 안위해 주어야 할 대상자는 마음이 약한 자들입니다. 마음이 약하다는 말은 아직 믿음이 어려 모든 일에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지적해 준말입니다. 두려워한다는 말은 말씀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에 순종하는 일을 두렵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매사에 믿음의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방황합니다.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혹은 질병으로, 혹은 사업의 실패로 낙심 중에 있는 성도일 경우도 있습니다. 바울은 이런 믿음의 식구들에 대하여 안위해 주라고 한 것입니다. 안위해 주라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해 주라는 뜻입니다. 붙들어 주라는 뜻입니다. 이들을 너무 책망하면 신앙적 용기를 잃어버리고 더 큰 낙심 가운데 빠져 버릴는지 모릅니다.

(3) 세 번째로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라고 했습니다. 힘이 없다는 말은 신앙 생활 중에 지쳐 있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시험 중에 지쳐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지쳐 자포자기하는 상태에서 신앙적인 갈등 속에 빠져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교회에서 이들을 붙들어 주지 않는다면 이들은 넘어질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넘어짐을 결코 용납하시지 않습니다. 그들을 다시 회생시킬 수 있는 방법은 붙들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붙들어 준다는 말은 여러 가지로 그들의 힘이 될 수 방법을 모색하고 간구해야 합니다.

(4)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오래 참으라고 권면했습니다. 오래 참는 일은 기도에도 필요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생활에도 필수적입니다. 고전 13장에서는 사랑에 대하여 ‘성내지 아니하며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오래 참으라는 말은 의미 있는 말입니다. 다툴 만한 일에도 오래 참으며 욕을 당해도 성내지 아니하며 인내로 화평을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이런 인내는 사랑이 없이는 이루어 낼 수 없기 때문에 사랑으로 화목해야 하는 것입니다.

(5) 누구에게든지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고 했습니다. 율법은 ‘이는 이 눈은 눈’이라고 하는 보복과 심판을 정당화시키지만 이 같은 일은 악을 악으로 갚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는 일은 악에게 지는 일입니다. 악은 사탄의 무기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사탄의 무기로 원수를 갚는다면 그 사람은 이미 사탄의 병기로 타락한 사람이 됩니다. 성경에서는 너희는 악은 그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런 일에 대하여 그리스도인들이 취할 태도를 밝혀 주고 있습니다. ‘오직 피차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좇으라’고 한 것입니다. 피차 대하든 지란 말은 1대1의 경우요 모든 사람을 대하든 지란 말은 많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선을 좇으라는 말은 상대방은 나에게 악으로 공격해 왔어도 나는 그 사람에게 선을 좇아 행하라는 말입니다.

악을 이길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병기는 선입니다. 바울은 롬 12 : 20절에서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러하므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했습니다. 상대는 나에게 악으로 대하지만 나는 그에게 선으로 대하면 그것이 그리스도의 승리인 것입니다. 승리란 말은 악한 사탄의 궤계에 빠지지 않는 일이요 그런 것들이 모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는 일이며 또 하늘의 상급도 되는 것입니다.

악에게는 이겨야 합니다. 그 악의 대상이 바로 사탄이기 때문입니다. 그 악을 이기는 방법은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사탄이 싫어하는 방법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 방법이 바로 선입니다.

결론 : 우리는 교회 생활에서 형제들을 권면하기도 하고 권면을 받기도 하여 그리스도의 의를 이루며 우리의 생활이 항상 믿음 가운데 서 있어야 합니다.


(25)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

(데살로니가전서 5:16-18)

서론 :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가에 대하여 아는 사람은 그 하나님의 뜻을 따르게 마련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은 그 어떤 경우에도 선하시며 우리에게 유익하며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는데 그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본문에서 세 가지로 묶어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

바울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말함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뜻’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바울이 이처럼 하나님의 뜻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뜻이란 말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까? 이 같은 바울의 말은 우리에게 롬 8장에 있는 말씀을 상기시켜 줍니다. 롬 8 : 32절에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처럼 풍성히 주시는 하나님,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신 뜻은 무엇입니까?

2. 항상 기뻐하라

첫째의 뜻은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슬퍼하거나 낙심하는 일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런 것들은 우리의 신앙에 큰 손상을 주는 일이며 우리로 소망을 가지고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일에 큰 장애 요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항상 기뻐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뻐하는 모습을 좋아하십니다. 즐겁게 살아가는 모습을 원하십니다. 비록 그의 생활에 슬퍼해야 할 조건들이 물밀 듯 밀려와도 그런 가운데서도 기뻐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은 왜 기뻐해야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왜 그의 자녀들에게 기뻐할 것을 명하고 계시는 것입니까?

(1) 하나님은 그 어떤 경우에도 나를 지극히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생활에는 기쁨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슬픔이란 외로운 사람, 도움을 받을 길이 없는 사람, 절망적인 사람들에게 필요한 일이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들에게는 오직 기쁨만이 있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은 언제나 내게 있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알고 계시기 때문에 그것을 이루어 주실 것을 믿는다면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은 내가 지금 겪고 있는 어떤 어려움 중에도 내게 그것을 감당할 능력을 주시고 나의 환난 중에도 나와 함께 하시기 대문에 우리는 기뻐하는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은 내가 당하는 모든 환난을 통하여 오히려 나에게 모든 일을 합력 하여 선을 이루어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어떤 경우, 어떤 환경에 처했어도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항상 기뻐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같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아신다면 우리는 언제나 항상 기뻐하는 생애를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3. 범사에 감사하라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의 생활 중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생활 조건이 있는데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그것입니다. 이곳에서도 범사에 감사하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대개의 경우, 신앙이 아름답게 성장한 성도일수록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풍성합니다. 우리들에게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조건들이 얼마나 많은 것입니까? 하나님은 늘 우리에게 감사해야 할 조건들을 풍성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많은 심는 자는 많은 것으로 거두시게 하시기 위해 더욱 풍성하게 심을 씨앗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수록 감사할 수 있는 일들이 날마다 더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있는 일들을 만들어 주시는 주님의 손길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4. 쉬지 말고 기도하라

다음 세 번째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영적 대화입니다. 대화는 원만한 대인 관계를 이루는 일에 반드시 필요한 요건입니다. 하나님과의 교통에도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부자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대화가 자주 있을수록 가까워지며 대화가 가까워질수록 더욱 친숙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은 기도로 하나님과 가까워지며 교제가 되는 것입니다. 쉬지 말라는 말은 계속적으로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기회 있는 대로 기도하며 기도하기를 힘쓰라는 뜻입니다.

결론 :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 위해 하나님 앞에 나온 사람들입니다. 이처럼 말씀을 듣는 것도 그 말씀대로 살아가기 위한 우리의 생활의 의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뜻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이 세 가지,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신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겨 그 뜻대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26) 영적 생활의 권고

(데살로니가전서 5:19-22)

서론 : 19절로 22절까지는 매우 짧은 성경 구절로 엮어져 있는데 그러나 대단히 중요한 영적 교훈을 주시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성령을 소멸치 말며 예언을 멸시치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그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했습니다. 이 권면은 또한 주의 이름으로 명하는 주님의 명령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이 말씀에서 영적 생활의 중요한 핵심을 네 가지로 구별하여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권고하고 있습니다.


1.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

바울은 19절에서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성령이 내주 하십니다. 성령의 내주를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말로도 표현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보증으로 성령을 주셨을 뿐 아니라 우리의 신앙생활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시기 위해 주셨습니다.

성령은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나님께 기도하게 하십니다.

성령은 우리의 완악한 마음을 깨어 회개케 하십니다.

성령은 우리의 옛 행실을 버리게 하십니다.

성령은 우리로 전도하게 하십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케 하심으로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성령은 우리로 그리스도의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게 하십니다.

이 같은 일을 이루시기 위해 성령은 내 속에서 끊임없이 우리를 감동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성령의 감화와 감동을 받아 그 능력에 의해 생활해 나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감동이나 감화하심을 소멸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의 소멸은 정욕과 교만과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옵니다. 우리의 생활이 정욕에 이끌리고 세상에 이끌리면 성령의 감화 감동하심은 우리의 의지에 의해 그 능력이 꺾이게 되고 우리의 생활은 세상과 짝하는 세속적 신앙으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정결할수록 성령의 감화 감동하심이 강하게 나타나며 주의 뜻대로 살려고 마음의 결단을 내리면 성령은 내 속에서 더욱 강력한 능력으로 우리의 생활을 주관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성령의 역사를 소멸하는 일은 신앙적으로 퇴보하며 하나님의 언약에서 떨어지는 일이기 때문에 성령을 소멸하면 안돼는 것입니다.


2. 예언을 멸시치 말라

다음에 바울은 예언을 멸시치 말라고 권고했습니다. 바울이 여기서 멸시치 말라는 예언에 대하여 잘못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사람의 길흉을 점치는 개인적인 예언을 말함은 결코 아닙니다. 성경에서는 숨겨져 있는 개인의 길흉 사를 예언하는 점쟁이들을 죽이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무당이 하건 박수가 하건 예수 믿는 사람이 하건 사람의 길흉을 예언하는 일은 모두 금지되어 있습니다. 이런 일은 점치는 귀신 들린 사람들이 하는 점패 술인 것입니다. 예언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성경이란 하나의 분명한 예언서입니다.

바울이 이 편지를 보낼 당시는 하나님의 계시가 글로 작성되어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같은 완성된 성경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 당시 교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임시적으로 전하는 은사적인 예언자가 있었습니다. 이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예배 시간에 성령께서 감동해 주실 때 일어나 예언을 하였는데 이들은 예언을 통해서 영적 분별을 하기도 했으며 구원의 도리를 가르치기도 했으며 책망도 했습니다. 또 어떤 범죄한 형제들에 대하여 견책도 했습니다. 이런 예언을 멸시하는 일은 곧 하나님의 말씀에 도전하는 일이기 때문에 바울은 예언을 멸시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예언적인 은사가 교회에 없습니다. 목사는 완전한 예언서인 성경으로 구원의 도리를 전하고 성도들을 책망하고 하나님의 정확한 뜻을 전하게 된 것입니다.

3.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라

바울은 21절에서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라’고 했습니다. 헤아리라는 말은 영적 은사나 예언이나 성령의 감동이나 먼저 헤아릴 필요가 있다는 뜻입니다. 헤아린다는 말은 참과 거짓을 분별하는 일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헤아리는 일로 올바른 신앙 노선을 걸어가야 합니다(요일4:1). 영이 하나님께 속했나 시험해 보라고 했습니다.


4,.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

바울은 22절에서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했습니다. 영육간에 모든 악은 우리들로 타락하게 하며 하나님을 거역하게 하는 안내자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가장 경계해야 할 일이 악의 유혹입니다. 그러므로 악은 그 모양이라도 버린다는 각오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결론 : 우리는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권면한 이 네 가지 긴요한 신앙생활의 지침을 거울로 삼아 아름다운 신앙적 결실을 맺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27)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데살로니가전서 5:23-28)


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1)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24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25 형제들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26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모든 형제에게 문안하라

27 내가 주를 힘입어 너희를 명하노니

모든 형제에게 이 편지를 읽어 주라

28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서론 : 바울은 주님의 재림을 바라보면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그날에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기를 원하는 마음에서 축원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종들은 그에게 주신 권위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울은 서신마다 이런 축원으로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루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평강의 하나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하나님은 평강의 하나님이십니다. 그의 백성들에게 당신의 평강으로 주장하시기 때문입니다.


1.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신다.

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기를 축원한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거룩은 두 가지로 분류가 됩니다

그 중 하나는 의인이 되는 일입니다. 거룩하다는 말은 의인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행함에서 오는 거룩함이 아니라 법적으로 인정하는 선언적인 거룩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그리스도 안에서 이 같은 거룩함을 선언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의인입니다. 의인으로 선언 받았기 때문에 다시는 죄인의 자리로 내려앉아 율법의 정죄를 받거나 죄인으로서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다른 한 가지는 그리스도인의 성화입니다. 이 성화란 그리스도인들의 생활 중에 그의 행위가 의롭게 성장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성화는 성령의 인도하심과 순종의 생활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이 성화는 결코 그리스도인의 의의 표준이 아닙니다. 어떤 성도들이건 만약 의로워지기 위해 성화 되는 생활을 한다면 그는 의로워질 수도 없으려니와 그의 행동은 마땅히 정죄 받을 일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그 어떤 이유에서도 믿음으로 얻는 의외에 다른 의를 인정해 주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화는 끝날이 없습니다. 왜냐 하면 인간은 자기 행위나 생활로 온전한 성화를 이룰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화는 하나의 생활의 표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영접한 그날부터 성화의 첫 단계의 걸음마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이 완성된다거나 중단되는 일이 없이 그의 생애가 마쳐지고 주님 앞에 설 때까지 이어집니다.


2. 영과 혼과 몸이 흠이 없게 보존되기를 원한다고 했다.

바울은 신앙생활의 표적을 주의 강림과 맞추고 있습니다. 주의 강림하실 때까지 그들의 영과 혼과 몸이 흠 없게 본존 되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인간의 구성요소를 셋으로 구분했습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3분 설이라고 합니다. 3분 설이란 이처럼 인간의 요소를 영과 혼과 몸으로 구분하지만 2분 설은 영과 혼을 둘로 보지 않고 하나로 보아 영혼이라고 부릅니다. 영은 하나님이 인간에게만 주신 것으로 혼이나 몸과 독립된 존재로 여깁니다. 영은 죽을 수 없지만 혼과 몸은 죽을 수 있는 것으로 여깁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거듭난 것도 영이요 영생을 얻은 것도 영으로 보는 것입니다. 혼은 생명체의 생명을 움직이는 생명력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짐승에게는 영은 없고 이 생명체만 있기 때문에 혼이 죽으면 몸도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 외에 다른 모든 짐승들에게는 영이 없고 혼만 존재하기 때문에 육체의 생명이 죽으면 모든 것이 소멸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문제에 성경적으로 더 신중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셨을 때, 아담에게 먼저 혼을 주시어 사람을 만드신 후, 그 속에 다시 영을 부어 주신 것이 아니란 사실입니다. 창 2 : 7절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이 된지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므로 생령이 되었다는 말씀은 사람은 짐승들처럼 혼과 몸을 구분하고 또 영을 따로 구분하신 것이 아니라 코에 생기를 넣으실 때 영과 혼이 하나가 되어 아담을 살려낸 것으로 해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영과 혼이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체인 영과 육체의 생명력인 혼이 구분되지 않고 하나로 만드심으로 몸이 죽으면 몸과 영혼은 완전히 분리되어 육은 땅에 묻게 되고 영혼은 하나님 앞에 가서 심판을 받게 되는 것으로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과 혼과 몸이 흠 없이 보전되기를 기원한 바울의 언급은 표현상 영과 혼을 구분했을 뿐, 영이 있고 혼이 따로 있어서 이 세 가지가 보존될 수 있기를 원한 것은 아니라는 견해입니다. 만약 혼이 영과는 별도로 존재해서 인간의 생명을 주관한다면 혼을 보존하는 일에 대한 성경적 교훈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것은 없고 육체의 죄악에 대한 이야기만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 같은 권면은 영은 진리의 말씀과 성령의 내주로 보존되고 혼과 몸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생활로 이것이 거룩한 생활의 열매를 맺는 일로 보존되기를 원한 것입니다.


결론 : 주님의 강림은 죄인을 심판하시기 위함이기 때문에 흠과 점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같은 그리스도인의 성결은 내가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주 하시는 성령이 하십니다. 그러므로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