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新約]강해/◆ 바울서신 강해-1

★데살로니가후서 1-3장

영국신사77 2020. 4. 13. 23:21

데살로니후서 차례

데살로니후서 1장 (1 - 4)

(1) 바울의 감사(데살로니가후서 1:1-4)

(2) 환난의 두 가지 의미(데살로니가후서 1:5)

(3) 주님의 공의와 심판(데살로니가후서 1:6-9)

(4)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데살로니가후서 1:10-12)


데살로니가후서 2장 (5 - 8)

(5) 쉬 동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데살로니가후서 2:1-2)

(6) 주의 재림에 있을 두 가지 확실한 징조(데살로니가후서 2:3-4)

(7) 악한 자의 역사(데살로니가후서 2:5-12)

(8) 굳게 서서 지키라(데살로니가후서 2:13-17)


데살로가후서 3장 (9 - 11)

(9) 목회자를 위한 기도(데살로니가후서 3:1-2)

(10)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데살로니가후서 3:3-5)

(11) 그리스도인의 규모 있는 생활(데살로니가후서 3: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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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후서 1장 (1 - 4)

◆ 밤중소리 01-31 | VIEW : 437

(1) 바울의 감사

(데살로니가후서 1:1-4)


서론 :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내는 데살로니가 전서를 써 보낸 후, 그곳에 기록된 주의 재림에 대한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하므로 세상일에는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고 오히려 그런 일은 허무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재림에 관하여 잘못된 이설이 등장하여 주의 날이 이미 왔다고도 하는 등, 성도들의 신앙을 뒤흔들어 혼란에 빠트리는 일까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을 영적으로 바로잡고 미궁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 이 데살로니가 후서를 쓰게 된 것입니다.

1.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칭찬하게 된 이유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바울의 대단한 칭찬을 들었습니다. 바울은 이 같은 칭찬이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된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는 믿음이 성장하며 성도들끼리 서로 사랑하는 사랑이 풍성하며 환난 중에 참는 인내가 있어서 바울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 준 것입니다. 3절과 4절에 이들에 대한 칭찬과 자랑이 나옵니다.

(1) 바울은 이들에게 ‘너희 믿음이 더욱 자랐다’고 했습니다. 성도들의 믿음이 성장하면 목회자들에게 큰 기쁨을 줍니다. 믿음은 밭에 심기운 씨앗과 같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쑥쑥 자라야 합니다. 물도 주고 밭도 가꾸어 주건만 믿음이 성장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님은 눅 13장에서 포도원에 심은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도랑도 파고 거름도 주었건만 심은 지 삼 년이나 지나도 실과를 맺지 못하자 주인이 ‘어찌 땅만 허비하느냐 찍어 버리라’고 말합니다. 자라지 않는 나무는 쓸모가 없는 것처럼 믿음이 성장하지 않는 성도는 교회에 유익을 주지 못하고 말썽만 일으키는 것입니다. 고무신 같으면 잡아 당겨서라도 키우겠지만 그럴 수도 없어 목회자들은 답답할 뿐입니다. 한참 자라나야 할 어린애가 영양실조로 말라서 일어서지도 못할 때 그 어머니의 마음이 아픈 것처럼 목회자의 마음도 믿음이 성장하지 않는 성도들에게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 교회의 경우, 성도들의 신앙이 만족스럽게 성장했습니다. 이럴 때 목회자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목회의 크나큰 보람을 느끼며 성도들에게 오히려 고맙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씨앗입니다. 생명력 있는 씨앗이기 때문에 자라기도 잘하거니와 번식력도 좋습니다. 주님은 복음을 비유하시기를 ‘천국은 마치 한말 가루 속에 넣은 누룩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 작은 누룩은 한말의 가루를 전부 부풀게 하는 것처럼 복음은 그런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는 사람과 멀리 하는 사람과는 그 결실의 차이가 굉장합니다. 그 씨앗을 아름다운 밭에 심으면 30배로 60배로 100배로 열매를 맺는데 좋은 밭이란 말씀을 듣고 깨닫는 마음이며 이런 마음은 회개하여 깨끗해진 마음을 말합니다.

2. 교인들 서로가 각기 다 사랑함이 풍성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교인들 서로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하다고 했습니다. 사랑은 분위기를 훈훈하게 합니다. 가정의 분위기가 훈훈해지려면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가 따듯하고 훈훈하려면 성도들간 서로가 각기 사랑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시기는 불화와 반목을 가져오지만 사랑은 화합과 기쁨을 만들어 냅니다. 하나님도 사랑이시고 예수님도 사랑이십니다.

우리들에게도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처럼 사랑이 풍성해야 합니다. 사랑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의 뜨거움에서 자랍니다. 사랑은 주님의 사랑을 함께 나누어 가질려는 마음이 있을 때 급속도로 성장합니다. 사랑은 쓰면 쓸수록 더욱 뜨겁게 발산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내가 하고자 할 때 비로소 불이 붙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은 위대한 사랑입니다. 그 이상의 사랑은 어디서든 찾아 볼 수 없는 놀라운 사랑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 안에 거하라고 하셨고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주님의 이 새 계명을 지켰으며 이로 인하여 바울의 칭찬을 들었습니다.

3. 모든 핍박과 환난 중에서 인내를 가졌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모든 핍박과 환난 중에서 인내와 믿음을 가지고 견뎌 나갔습니다. 바울은 이 같은 그들의 믿음을 칭찬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언제 어디서 나타나는 줄 아십니까? 핍박과 환난 중에 인내하므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성도들에게 있어서 인내와 믿음은 금보다 더 귀중한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진정한 사랑과 믿음이 없으면 핍박과 환난 중에 끝까지 인내하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결론 : 우리들도 데살로니가 성도들처럼 믿음과 사랑과 인내의 생활을 잘하여 바울의 자랑이 되고 하나님께 감사가 된 것처럼 우리의 믿음과 사랑과 인내로 여러분의 목자에게 기쁨을 안겨 주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목회자가 될 수 있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2) 환난의 두 가지 의미

(데살로니가후서 1:5)

서론 : 바울은 5절에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받는 모든 핍박과 환난에 대하여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이 말은 복음으로 인하여 핍박과 환난 중에 있는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큰 위로가 된 것입니다.

1. 그리스도인에게 오는 두 가지 환난

그리스도인 들에게는 환난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고난이 두 가지 모습으로 찾아옵니다. 그리스도인 들에게는 생활의 궁핍과 질병에서 오는 환난이 있습니다. 이 같은 환난은 가정의 큰 십자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환난에 처했을 때 신앙의 연단 과정인 줄로 알고 인내로 참고 그 가운데서 열매를 맺으면 축복이 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도 그들의 생애에 여러 가지 환난과 고난이 오지만 그들에게 오는 고난이나 환난은 믿음의 연단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아무런 의미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사람들에게는 이 같은 고난이나 환난도 그의 신앙 생활에 유익이 될 뿐 아니라 축복의 밑거름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오는 다른 또 한 가지의 환난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환난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이란 말은 그리스도의 이름과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기 위해 받는 고난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이런 고난에 대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는 고난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상급이 약속된 고난입니다. 그런데 이런 고난은 희생이 따라야 합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이 같은 고난을 만나 승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받습니다. 그리므로 주의 뜻대로 살기를 사모하는 진실한 주의 성도들은 이런 환난을 피하지 않습니다. 히 11 : 36절에서 이처럼 말씀해 줍니다.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되 그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치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주기철 · 최권능 목사님 같은 분은 모두 이런 소망의 고난을 받으시고 순교하셨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도 이런 고난을 받고 있지만 인내와 믿음으로 잘 이겨내고 있다고 칭찬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이다.

6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 들이 받는 고난은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시는 심판의 표’라고 했습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그 고난에는 영광과 심판의 두 가지 뜻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들로 환난을 당하게 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가 되는 것이요, 환난을 받는 우리에게는 안식으로 갚으시는 하나님의 공의의 표가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계 18:5-6절에서 ‘그들의 죄는 하늘에 사무쳤으며 하나님은 그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시는데 그가 준 그대로 그에게 주고 그의 행위대로 갑절로 갚아 주라’고 하신 것입니다.

3.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로 만든다.

그리스도인 들이 환난을 받는 것은 그것이 어떤 것이건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얻게 하시려는 목적이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고난을 주시는 하나님의 목적을 이해하므로 우리가 받는 고난이나 환난을 은혜스럽게 받아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생애에 만약 우리에게 오는 고난이나 환난이 전혀 없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연단 받을 기회를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받는 시련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들로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으로 만드시는 기회로 삼으시기 때문에 우리는 고난이나 환난을 두렵게 여기거나 그런 일 중에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믿음으로 이겨내야 하는 것입니다.

시 66편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하시되 우리를 단련하시기를 은을 단련함 같이 하셨으며 우리를 끌어 그물에 들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손으로 우리를 잡아 이끌어 하나님의 그물에 들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누가 이런 그물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들은 가정적인 고난이건 그리스도인의 이름으로 받는 고난이건 은혜롭게 받아 잘 처리해야 합니다. 그런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내게 이루시고자 하는 바를 이루어 드리면 오히려 그 고난의 짐을 주님이 지시기 때문에 가볍게 질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 :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너희가 그 나라를 위하여 고난을 받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받는 고난은 우리가 그 고난에 나타내 보이시는 하나님의 뜻을 살펴 받아 드린다면 놀라운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당하고 있는 여러분의 고난도 이 같은 차원에서 은혜롭게 여기시고 오히려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3) 주님의 공의와 심판

(데살로니가후서 1:6-9)

서론 : 바울은 데살로니가 후서에서 주의 재림에 관한 새로운 계시를 주면서 오늘 주신 본문에서는 그들이 받는 환난이 그날에 보상을 받고 그들에게 환난을 주는 자들이 그날에 주님에 의한 심판을 받을 것을 경종하고 있습니다.

1. 공의로우신 하나님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공의롭다는 말은 하나님은 그가 세우신 의로우신 법대로 모든 일을 처리하신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심는 대로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입니다. 육신으로 자신의 인생을 심으면 썩어 질 것을 거두고 성령으로 심으면 영생으로 거두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같은 하나님의 모든 역사는 그의 공의에서 나온 것들입니다.

또 하나님이 공의로우신다는 의미는 모든 인생은 자신이 행한 행위에 따라 선악간에 심판을 하신다는 뜻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악을 행한 자는 모두 동일한 량의 형벌이 아니라 자기가 행한 악의 량을 따라 갑절의 심판을 내리심이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입니다. 반면에 선을 행하는 자는 모두 동일한 상급이 아니라 자신이 열매를 맺은 대로 그 량에 따라 갑절의 축복을 받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이신 것입니다.

바울은 이 같은 하나님의 공의에 대하여 6절과 7절에서 ‘너희로 환난을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환난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같은 공의는 최종적으로 예수께서 능력의 천사들과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그 때에 나타날 것임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장차 이 세상에는 적 그리스도가 등장하여 교회를 핍박하고 성도들에게 환난을 안겨 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에 성도들은 결코 낙심해서는 안됩니다. 성도들은 반드시 안식으로 보상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2. 주의 재림과 심판

주님은 이런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하시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오신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주의 재림의 모습에 대하여 몇 가지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하늘에서 내려오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다시 여인의 몸에 잉태되어 태어나시거나 출생해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로부터 직접 내려오십니다. 예수님의 초림은 어린 예수로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셨지만 다시 오시는 예수님은 그가 죽으신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던 그 부활하신 영광의 몸을 그대로 가지시고 부활 승천하신 그 하늘에서 이 땅위에 내려 오시는 것입니다.

(2) 불꽃 중에 나타나신다고 했습니다. 불꽃 중에 란 표현은 영광 중에 란 말입니다. 죄인의 모습이 아니십니다. 심판 주의 모습으로 오십니다. 이에 대하여 계 19 : 11절 이하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 쓴 것이 있고 또 이름 쓴 것이 하나가 있으니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고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고 했습니다. 이 모습은 불꽃 중에 하늘로부터 나타나시는 주 재림의 모습이신 것입니다.

(3) 천사와 함께 나타나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늘로부터 내려오실 때에는 두 종류의 동행자가 있습니다. 한 부류는 하늘의 군대로 내려오는 백마 탄 자들입니다. 이들은 천사들이 아닙니다. 이들은 천년왕국에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할 첫째 부활 자들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 종류의 동행자는 천사들입니다. 이들의 역할에 대하여 예수님은 마 24 : 31절에서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그의 택하신 자들을 모은다’고 하셨습니다.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모든 성도들을 모아 이들을 지상에 내려는 최종적인 하나님의 심판, 일곱 번째 대접 심판에서 건지시고 주님을 영접하게 하시기 위해 공중으로 끌어올리시는 것입니다.

3. 심판의 대상

주님이 오실 때 주님에 의해 심판 받을 대상자들을 밝히고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거역한 자들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를 싫어한 자들입니다.

또 이들 중에는 주 예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한 자들도 포함됩니다.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 중에도 심판에 해당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주 예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했던 자들입니다. 회개가 없는 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의지하지 않았던 자들입니다. 주여 주여 하면서 열매가 없는 자들입니다. 진리의 말씀에서 떠난 자들입니다.

결론 : 이런 자들이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 들은 주의 재림의 날을 바라보고 소망 가운데 자기 자신을 단장해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에 있는가 스스로 시험하고 확증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4)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

(데살로니가후서 1:10-12)

서론 : 바울은 예수님이 하늘로부터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불꽃 중에 나타나실 일에 대하여 말씀해 주고 그가 오실 때,, 지금 환난 중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공의의 하나님이 안식으로 갚으시는 축복을 받지만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실 일에 대하여 경종 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항상 데살로니가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는데 그 기도의 제목이 바로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받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주님이 오실 때 둘로 나누어지는 성도

바울은 10절에서 주님이 재림하실 때 그를 맞이할 그리스도인 들에 대하여 의미 있는 말씀을 해 주고 있습니다. ‘그 날에 강림 하사 그의 성들에게서 영광을 얻으시고 모든 믿는 자에게서 기이히 여김을 얻으시리라’고 한 것입니다.

(1) 영광을 얻으실 성도들이란 환난 날에 예비처에서 주의 재림을 기다린 슬기 있는 처녀들을 의미합니다. 이들은 주의 재림을 준비하므로 신부의 단장을 마친 무리들입니다. 이 같은 성도들은 항상 주의 재림을 대망 하는 나머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하며 간절한 심령으로 주의 오심을 사모합니다. 이들은 마 25장의 비유에서 말씀해 주시는 것처럼 등과 기름을 준비하므로 혼인 잔치 집에 들어간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혼인집이란 환난의 날에 이런 성도들의 보호를 위해 특별히 하나님께서 예비해 두신 보호처인 것입니다.

(2) 그런데 ‘모든 믿는 자에게서 기이히 여김을 얻으신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기이히 여길 믿는 자들이란 ‘우리의 등불이 꺼져 가니’라고 말한 미련한 처녀들입니다. 이들은 주 재림 시 신부가 준비해야 할 기름을 마련치 못하여 밖에 내어 쫓겨난 미련한 처녀들입니다. 이들은 후 3년 반의 대 환난에 떨어져 그곳에서 비로소 회개케 됩니다. 그러나 이들도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사신 하나님의 백성들이라 결코 버린바 되지 않습니다. 환난 중에서 연단을 받으며 그 연단 중에서 회개하여 온전한 신앙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등과 기름을 준비한 슬기로운 처녀들과 같이 공중으로 휴거 하게 될 때, 함께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하게 될 것입니다. 그 때 슬기로운 처녀들로부터는 영광을 얻으시고 미련한 처녀들로부터는 기이히 여김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대 환난 가운데서 회개하여 신랑을 마지 하게 된 무리들이기 때문에 자신들에게 내려졌던 모든 일과 주님의 재림을 바라볼때 기이히 여기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재림하시는 그날, 기쁨과 감사하므로 영광 중에 맞이할 것이지 대 환난 중에서 회개하여 겨우 구원에 이르러 이 모든 일들을 기이히 여기는 어리석은 성도들이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2. 바울의 소원

데살로니가 교회를 위한 바울의 간구는 종말적인 기도였습니다. 주의 재림 시에 그들이 받을 영광을 위해 기도한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교회를 목양하는 모든 목회자들은 이 같은 바울의 목회 자세를 본받아야 할 줄로 압니다.

(1)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받게 하기 위해 기도한 것입니다. 부르심에 합당하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것은 믿는 사람들의 하나님의 향한 열매를 말합니다. 주님은 마 3 : 8절에서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들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썩어 질 것을 거두는 육신의 열매를 버리고 영생을 거두는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부르심에 합당한 자가 되지 못하면 그 부르심이 무익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도 부르심에 합당한 자가 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2)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심을 위해 간구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마음가짐은 그 마음에 선을 기뻐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역사인데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 주시기 때문에 이를 위해 간구한 것입니다.

(3) 주의 이름이 우리 가운데서 영광을 얻으시기 위해 기도했습니다. 주의 이름이 우리 가운데서 욕을 받게 하면 안됩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끊임없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헌신과 생활에 있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어야 합니다. 늘 그리스도의 향기를 뿜을 수 있어야 합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할 수 있을 정도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을 생활의 신조로 삼아야 합니다.

결론 : 우리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은헤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은혜에 합당한 생활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생애를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 (5 - 8)

◆ 밤중소리 01-31 | VIEW : 821

(5) 쉬 동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

(데살로니가후서 2:1-2)

종말에 관한 계시는 그것을 제대로 깨닫고 주 재림에 소망을 두며 성경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 들에게는 그렇도록 유익할 수가 없지만 반면에 준비도 하지 않고 소망도 가지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두려움을 주기 때문에 교회 안에 많은 잡음을 일으키며 혼란을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에도 종말에 이르렀다고 생각하는 열성 주의자들의 종말에 대한 절박감으로 교회에 큰 혼란을 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에 의해 교회 안에 혼란을 일으키고 있는 일에 우려를 갖게 된 바울은 이들에게 두 가지 중요한 경계를 주면서 쉬 동심하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1. 쉬 동심하지 말 것을 경종 하였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관심은 1절에 있는 말씀처럼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그들은 주의 재림과 그 앞에 모이는 일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주님이 강림하실 때 성도들은 그 앞에 모이게 된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성도들의 공중 휴거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성도들의 공중 휴거 문제는 말썽을 일으키기 쉬운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언제 성도들의 휴거가 있느냐는 문제는 종말론을 다루는 일에 중요하며 듣는 사람들에게 대단히 민감한 문제입니다. 이 휴거는 대개 세 가지 부분으로 나뉘는데 하나는 7년 환난 전 휴거 설입니다. 교회는 환난 전에 휴거 된다는 것입니다. 다음에 환난 중 휴거 설 있습니다. 이 휴거설은 전 3년 반 마지막 시점에서 성도들이 휴거 되어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할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또 하나의 휴거 설은 환난 후 휴거 설입니다. 성도들의 휴거는 여섯째 대접이 끝난 후 마지막 재앙으로 내리는 여섯 번째 대접 심판이 끝나고 일곱 번째 심판 때에 내리는 환난에서 건져내시고 주님을 영접하게 하시려고 공중으로 이끌어 올리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일에 대하여 쉬 동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주 재림에 관하여는 신앙의 경성과 기도로 깨어 있는 생활과 순종으로 인한 신부의 단장이 필요하지 동심하는 일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들의 세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의 재림이 어느 때보다 가까웠지만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처럼 쉬 동심해서는 안됩니다.

쉬 동심하는 일이 왜 나쁜 것인가? 이처럼 동심하는 자들은 미혹을 받습니다. 동심하는 사람은 이미 정상적인 신앙생활에서 떠난 것을 의미합니다. 신앙적 이성을 잃은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이들의 동심에 대하여 2절에서 ‘혹 영으로나 혹 말로나 혹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알이 이르렀다고 쉬 동심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주의 재림에 그리스도인 들을 동심시키는 일은 악령의 역사인데 그 중에는 ‘영으로나 말로나 사도들에게 받았다는 편지’등으로 미혹하는 일로 사람들을 동심시켜 교회에 혼란을 일으킨다고 한 것입니다. 우리들도 지난 78년에 교계와 세상을 휩쓸었던 시한부 종말론 자들의 미혹으로 많은 성도들이 미혹을 받았으며 많은 교회가 영적 혼란에 빠졌던 일이 있었습니다.

영이란 말은 영적으로 무엇을 받았다고 하는 계시 파들의 주장을 가리킵니다. 이런 자들의 거짓된 계시나 예언은 주의 재림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모르는 많은 성도들을 미혹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한 번 미혹을 받으면 사탄은 한 영으로 지배하기 때문에 그 가운데서 빠져 나올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다음에 말로 미혹한다고 했습니다. 말이란 설교로 미혹하는 경우를 가리킵니다. 이들은 대개 목회자들에게 속하는 무리들입니다. 이들의 두려운 선언과 재앙에 대한 경종과 언제 오신다는 시한부 설은 많은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주며 능히 그들의 마음을 동심케 할 것입니다.

다음에 편지로 미혹한다고 했습니다. 이 편지에 대해서는 ‘혹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라고 했습니다. 사도들에게 받은 편지는 그 당시 가장 권위 있는 말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들여졌습니다. 이들은 이처럼 주의 사도들의 편지까지 잘못되게 혹은 거짓 되게 인용하면서 미혹하는 일을 서슴지 않는 것입니다.

다음 두 번째로 주의 재림 설로 인하여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주의 재림은 성도들에게 두려움을 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들에게 기쁨을 주며 지상 최대의 축복을 주시기 위해 오시는 것입니다. 만약 주의 재림을 두려운 가운데서 맞으면 그 사람은 분명 주님의 두려운 심판을 받을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 재림을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다면 주의 재림으로 기쁨과 축복이 넘칠 것입니다.

결론 : 주의 재림의 날은 두려워해야 할 그런 날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 들에게는 그 어느 시대의 성도들보다 더 큰 기쁨의 날이여 최대의 축복을 받는 날입니다. 진실한 성도들은 그날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그날을 두려움에서가 아니라 기쁨으로 소망 가운데 기다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6) 주의 재림에 있을 두 가지 확실한 징조

(데살로니가후서 2:3-4)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재림에 대하여 미혹 받지 말 것을 당부하면서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쉬 동심하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아니할 그것이라’고 주의를 환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들은 주의 재림을 간절히 사모하며 그의 오심을 기다려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쉬 동심하거나 두려워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대개의 경우, 잘못된 종말론에 미혹 받은 사람들이 쉬 동심하여 정상적인 신앙생활에서 이탈하게 되고 두려운 마음으로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바울은 종말의 주의 재림의 시기에 대하여 역사적으로 반드시 등장할 결정적인 두 가지 징조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다.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을 것을 예언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지적한 배도란 지난날 천주교의 배도를 의미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천주교도 배도 세력 중에 하나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인류의 종말에 등장할 그 배도의 세력은 아닌 것입니다.

종말에 세계적으로 등장할 배도 세력은 계 17장에 나오는 음녀의 세력을 가리킵니다. 계 17장에서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큰 음녀의 세력과 적 그리스도의 정체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곧 살후 2장에 나오는 바울의 말과 맥이 같은 종말적 계시인 것입니다.

이 음녀는 ‘많은 물위에 앉은 큰 음녀’라고 했습니다. 이 음녀는 짐승인 적 그리스도가 등장하는 시기를 전후하여 세상에 머리를 쳐들게 됩니다. 이 음녀가 머리를 쳐드는 일에 대하여 계 8장에서 셋째 천사와 넷째 천사의 나팔로 나오는데 ‘횃불 같이 타는 큰 별이 하늘에서 떨어져 강들의 삼분의 일과 여러 물 샘에 떨어지니 이 별 이름은 쑥이라’고 했습니다. 배도적 사상은 사탄으로부터 내려옵니다. 이 영적 어두움이 온 세상에 뒤덮여 지는데 특히 하나님의 교회를 상징하는 강들과 여러 물 샘에 떨어진다고 했습니다. 이 세력이 등장하면 온 세계의 종교 세력은 적 그리스도를 구심점으로 하여 하나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력이 전세계의 종교기관을 장악하고 움직이기 때문에 그 세력은 능히 바벨론을 이룰 것입니다.

이 음녀는 음행의 포도주로 온 세계 인류를 취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진리가 사라지게 되고 아모스 선지가 예언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의 기갈 시대가 오는 것입니다. 이 음녀는 계 17:3절에서 붉은 빛 짐승인 적 그리스도를 탔다고 했습니다. 이 자의 등장은 깨어 있는 성도들은 다 알 수 있습니다. 이 무서운 세력이 사탄의 능력을 힘입어 적 그리스도에게 신적 권위를 부여하며 그 신상 앞에 경배를 시키는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이 자가 먼저 세상에 등장해야 인류의 종말이 오며 주의 재림을 전후하여 이런 일이 먼저 일어날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2. 다음에 멸망의 아들이 나타난다.

바울은 두 번째의 징조로 3절에서 밝히기를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라’고 한 것입니다. 성경에는 적 그리스도의 이름이 여러 가지로 나타나 있습니다. 짐승, 붉은 짐승, 열 뿔, 작은 뿔, 대적하는 자, 불법의 사람, 적 그리스도 등 많은 이름으로 나타나지만 그 자의 정체는 바로 적 그리스도입니다.

불법의 사람이라고 말한 것은 이 자가 인류의 종말에 등장하여 하나님을 대적할 것이기 때문에 부쳐진 이름이며 멸망의 아들이란 이자는 최종적으로 재림하시는 그리스도에 의하여 멸망을 당할 자이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 것입니다. 4절에서 이 자에 대하여 ‘저는 대적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이 자의 대적은 두 가지로 나타날 것입니다. 하나는 유대인들에게 나타나는 대적인데 유대인들에게 종교적 핍박을 가하며 제사와 예물을 금지시키며 자신을 하나님이라 하여 경배시키려는데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이 자가 세상의 구세주로 자신을 나타내 보이면서 자신의 표를 받게 하고 그 표를 받지 않는 자는 죽일 뿐 아니라 모든 매매를 금지한다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우상을 만들어 모든 인류들로 그 앞에 경배케 하는 일을 시킨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자에 대하여 4절에서 ‘저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자는 인류의 종말에 예루살렘에 새롭게 세워진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 자신의 우상을 그곳에 세워 경배케 하므로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할 것입니다. 이런 존재가 인류의 종말에 반드시 등장하는 것입니다.

결론 : 이 두 가지 징조는 주의 재림이 이르렀다고 하는 결정적인 증거로 등장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징조가 이르기도 전에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하는 잘못된 거짓 선생들의 미혹에 넘어가 교회에 혼란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고 경종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주의 재림을 사모하고 준비하되 결코 쉬 동심하거나 두려워하므로 신앙적 손상을 입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7) 악한 자의 역사

(데살로니가후서 2:5-12)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적 그리스도의 등장과 그 자가 세상에 등장한 후 이 자에 의해 자행될 미혹의 역사에 대한 자세한 계시를 이곳에서 밝혀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씀해 주는 적 그리스도의 모습은 단 7장과 계 13장에 나오는 활동 모습과 똑같기 때문에 우리는 주의 깊게 살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1. 적 그리스도가 나타날 시기

바울은 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불법의 비밀이란 적 그리스도를 등장시키려고 하는 사탄의 비밀한 계획을 말하는데 이 자는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세상에 등장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려는 음모를 획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자의 등장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사탄이 제아무리 활동하려 해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활동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탄은 하나님을 대적한 후, 그의 성품이 간교해 지고 범사에 하나님을 훼방하며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방해하는 일을 하지만 그 같은 사탄의 역사는 결코 성공작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탄의 이런 계궤와 그가 하고자 하는 모든 일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탄의 그런 일들을 역으로 이용하시어 그의 백성들을 연단 하시고 회개케 하시며 죄와 싸우게 하시어 온전케 하시는 일에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적 그리스도로 아무 때나 세상에 그 모습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세우신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 그의 등장은 인류의 종말, 주님이 재림하실 그 시기에 가서야 이 자를 등장시키시는 것입니다. 막는다는 말은 허락하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이 막는 하나님의 역사가 마감되면 이 자의 등장이 허락되는데 ‘막는 자가 있어 그 중에서 옮길 때까지 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옮기신다는 말은 7년 환난이 온 후, 전3년 반이 지나고 후3년 반의 시기에 이르렀을 때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두 증인으로 전3년 반 기간의 예언의 사역을 마치시고 그의 백성들을 안전지대인 하나님의 예비처로 인도하신 다음, 이 세상에서 옮기시는 것입니다. 후 3년 반에는 구원을 위한 성령의 사역이 없습니다. 다만 후 3년 반에 떨어진 미련한 처녀들로서의 성도들이 있지만 이들은 내주 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을 뿐, 복음을 전하므로 구원을 얻게 하는 복음 전파의 사역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때에 불법한 자의 비밀의 활동이 본격화 할 것입니다.

2. 그 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라

8절에서 ‘그 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불법한가 나타나자 곧 주 예수의 입 기운으로 저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신다고 했습니다. 이 일에 대한 정확한 계시는 단 7장과 계 13장과 19장에 상세히 계시되어 있는 것입니다. 적 그리스도는 바로 이 시기에 그 모습을 세상에 나타내 보이실 것입니다.

바울은 9절에서 이 불법한 자는 사탄의 역사를 따라 임한다고 했습니다. 적 그리스도는 사탄이 보내는 그의 사자입니다. 이 자는 가룟 유다처럼 태어날 때부터 멸망의 자식으로 예정된 가운데 태어날 것입니다. 그래서 계 17정에서는 이 자에 대하여 무저갱의 사자라고 했습니다. 이 자의 활동에 대하여 계 13:3절에서 이르기를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능을 그에게 주었더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붉은 용으로부터 모든 권세를 위임받은 이 불법의 인물은 그가 가진 그 권세와 능력을 가지고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라’고 한 것입니다. 원래가 사탄은 거짓의 아비라고 했습니다.

(1) 그런데 적 그리스도는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한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멸망하는 자들이란 원래가 마귀와 함께 멸망 받을 자로 세상에 태어난 자들입니다. 사탄은 누가 택자 인지, 누가 불택자 인지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에 그 미혹의 대상을 설정하지 않고 아무에게나 손길을 뻗으며 짐승의 표를 주겠지만 결과적으로는 이 모든 자들이 사탄에게 속하여 멸망 받기로 예정된 자들인 것입니다.

(2) 그러면 이처럼 멸망 받을 자의 대상에 대하여 10절에서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택정을 받지 못한 사람은 진리의 사랑을 거역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없으므로 구원함에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3)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처럼 적 그리스도를 등장케 하시어 미혹의 영으로 역사 하시는가? 이에 대하여 12절에서 이르시기를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결론 : 진리를 거역하고 불의의 행실을 좋아하며 믿음을 거역하는 자들은 결국 재림하시는 주님에 의해 심판을 받습니다. 우리는 적 그리스도의 등장해 관한 바울의 이 같은 경종에 귀를 기우려 그 때에 세상에 나타날 불법한 자의 정체를 똑바로 보아 미혹 받지 않고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8) 굳게 서서 지키라

(데살로니가후서 2:13-17)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생각할 때 항상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마음을 위로하시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게 하시기를 기원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사탄의 모든 유혹을 이겨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기 위해 ‘굳게 서서 말로나 우리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1. 하나님의 부르심

바울은 13, 14절에서 복음으로 부르신 하나님의 부르심에 관하여 몇 가지 사실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셨다고 했습니다. 처음부터 택하셨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구원 받을 자들을 처음부터 예정하셨다는 의미로 그리스도 안에서 창세 전에 택정 하신 것을 말합니다. 처음이란 말은 창세 전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은 구원하실 그의 백성들을 미리 작정해 놓으시고 만물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무대로 이 세상의 창조가 필요하셨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하나님의 구원 사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복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종말의 하나님의 역사도 이 택한 사람들을 구원하시려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2) 다음에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자들을 성령으로 거룩하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이 성령으로 거듭남으로 이미 완전히 거룩해진 것입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생명이 중생으로 다시 살아나기 때문입니다. 이 거룩은 하나님의 법적 선언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의 의가 내 의가 되어 내 소유가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이런 법적 자격을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다른 하나의 거룩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생활에서 얻을 수 있는 거룩입니다. 이것은 의를 얻게 되는 방법이거나 수단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이루어야 할 생활의 조건이며 성결의 과정입니다. 이것 역시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내 안에서 역사 해 주시므로 이루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3) 다음에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택한 백성들에게 진리를 믿게 하십니다. 구원을 이루는 일에는 진리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진리는 곧 그리스도의 복음을 말하는데 하나님은 이 복음의 진리를 통해서 그의 백성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고전1장에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진리라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성경이라도 그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빼 버리면 그 성경은 이미 진리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그 택하신 자들에게만 성령을 통해서 진리를 믿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오직 택자를 구원하시기 위해 진리를 준비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구원의 역사를 위해 바울은 그 복음으로 저희들을 부르신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주님의 양 무리들을 부르시는 목자 되신 예수님의 음성임을 알고 언제든지 어느 때나 이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2. 굳게 서서 지키라

바울은 14절에서 하나님께서 복음으로 우리를 부르신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연합된 사람들이요 그가 받을 유업을 함께 받을 하나님의 상속자들이며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옷 입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영광에 동참하는 사람들이기에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15절에서 데사로니가 교인들에게 ‘이러므로 형제들아 굳게 서서 말로나 우리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을 지키라’고 권고했습니다. ‘이러므로’란 말은 이런 까닭에 란 뜻으로 바울이 아직까지 그들에게 말한 이 모든 말씀으로 비취어 보아서란 의미입니다. 우리의 부르심이나 택하심이나 구원은 추호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누구의 말이나 유혹에 흔들림이 없이 믿음에 굳게 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그 동안 그들에게 말씀으로 증거한 것이나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이란 바울이 편지로 그리스도의 교훈을 써 보낸 그 교훈을 지키는 생활을 하라고 한 권고를 말합니다.

결론 :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축원 기도를 드리면서 하나님을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이런 위로와 소망을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런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위로하시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게 하시기를 기원했습니다. 이 아침에도 이런 하나님의 위로와 은혜의 역사가 여러분에게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데살로가후서 3장 (9 - 11)

◆ 밤중소리 01-31 | VIEW : 438

(9) 목회자를 위한 기도

(데살로니가후서 3:1-2)

가장 많은 계시를 주님으로부터 받은 능력 있는 하나님의 종,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자기를 위해 기도해 줄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당부한 기도 제목은 3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주의 말씀이 달음질하기를 위해, 두 번째는 하나님의 말씀이 영광스럽게 되기 위해서, 세 번째는 무리하고 악한 자에게서 구원받기 위해 기도하기를 부탁한 것입니다.

1. 목회자를 위한 기도의 필요성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일은 헛된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면서 과연 그런 기도가 필요한 것인가? 의심할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의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그런 기도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란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특히 성도들은 하나님의 종들을 위해 반드시 기도해 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성도들의 이 같은 기도는 주의 종들의 사역에 큰 능력으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런 사실을 체험적으로 알았기 때문에 많은 교회를 향하여 자신에 대한 기도에 대하여 간곡히 부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행 12장을 보면, 베드로가 복음을 위해 감옥에 갇힌바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두 군사들 틈에서 쇠사슬에 메어 누워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파숫군들은 문 밖에서 삼엄하게 옥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천사가 옥중에 나타나 베드로의 옆구리를 차서 깨우며 급히 일어나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의 몸에서 쇠사슬이 벗겨지고 옥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면 이런 역사는 어떻게 일어난 것입니까. 성경에는 베드로는 기도치 않았지만 교회는 그를 위해 간절해 하나님께 빌었다고 했습니다. 그는 교회의 기도로 옥에서 풀리는 기적의 역사를 체험케 된 것입니다.

2. 바울이 부탁한 기도의 제목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그의 기도의 부탁이 세 가지로 나옵니다.

(1) 바울은 주의 말씀이 달음질하기를 위해 기도를 당부했습니다. 주의 말씀이 달음질한다는 말은 빨리 주의 복음이 모든 사람들을 위해 전달되기를 원하는 그의 복음에 대한 뜨거운 열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서 주의 복음이 더 널리, 더 빨리, 더 많이 확산되기를 소망하고 계십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일이라면 어떤 길도 사양하지 않고 달려갔으며 자기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했습니다. 복음은 그 자체가 폭발적인 능력입니다. 그 속에는 사람의 심령을 변화시키고 확산시키는 놀라운 폭발력이 있습니다.

(2) 두 번째가 하나님의 말씀이 영광스럽게 되기를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에 바울은 말하기를 ‘듣든지 아니 듣든지 전하라’고 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기억해야 할 일은 결실 함이 없다고 낙심하거나 구원받은 사람이 없다고 복음을 전했던 입을 봉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그의 말씀이 세상에 전파되는 것으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3) 바울의 세 번째 기도 제목은 무리하고 악한 자에게서 구원받기 위하여 기도해 주기를 부탁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다가 옥에 갇히면 그것은 우리들에겐 다시없는 영광이지만 그러나 손실을 보게 되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그는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데 거치는 장애물이 없게 해 달라는 기도를 부탁한 것입니다.

3.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니라

바울은 2절 하반 절에서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왜 이런 말을 했을까요? 바울이 한 이 말의 뜻은 믿음은 모든 사람이 다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인간의 구원에는 매우 제한적이란 뜻입니다. 믿음은 인간의 자유 의지에 의하여 자기 소유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복음을 자기 소유로 가지려고 그의 자유 의지를 발휘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택하신 자들이 이 복음을 받아 드릴 수 있도록 역사 하시기 때문에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참 보화입니다. 이 보화는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이 보화를 소유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여기서 전도자의 전도하는 자세에 대하여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1) 복음을 전달받은 자가 복음을 거역했을 때,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는데 사람이 그를 믿게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2) 우리는 오랜 기간을 두고 전도해도 결실이 적으면 실망함. 노아의 경우 120년간 전도 8가족만 구원, 하나님이 허락하지 아니하신 것입니다. 누가 누구에게 전하든지 내 양은 내 말을 듣고 다 주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결론 : 하나님의 종들의 복음 전도를 위해 성도는 배후에서 쉬지 말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복음의 역사가 강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10)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

(데살로니가후서 3:3-5)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교인들에게 우리 주님은 미쁘신 분이시니 그 미쁘신 주님께서 너희를 굳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켜 주실 것이라고 위로하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미쁘다는 말은 믿음직스럽다는 뜻으로 전적인 신뢰감을 나타낸 말입니다. 예수님이야 말로 그의 모든 성도들에게 신뢰를 받으실 만한 미쁘신 분이십니다.

1.미쁘신 주님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미쁘시다 는 말은 우리에게 언약하신 약속을 지키시는 일에 신실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분의 약속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약속은 언제나 성도들에게 용기와 확신과 위로를 줍니다.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구원에 대하여 확실한 약속을 주시고 그 약속을 지키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미쁘신 예수님은 자신의 언약에 신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을 굳게 하시고 우리를 악한 자에게서 지켜 주실 것을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2. 바울의 확신

바울은 4절에서 그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명한 것을 행하고 또 행할 줄을 주안에서 확신한다고 했습니다. 바울의 이런 확신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아름다운 신앙과 그들이 바울이 권고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에 전적인 신뢰를 보이고 있다는 믿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명한 모든 말씀은 곧 주님이 주신 명령입니다. 바울은 그 모든 것들을 오직 주님의 계시에 의해 그들에게 명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깨닫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그들이 그 명령에 따를 것을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은 그 확신을 주의 인도하심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5절에서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한다는 말고 그의 확신을 나타낸 것입니다.

(1) 바울은 5절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한 말에서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우리가 알기로는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보다 더 크고 위대하고 아름다운 사랑은 없을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로 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사랑 안에 들어간다는 말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사는 생활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 들의 신앙생활의 승리의 비결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위로,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축복이 오직 그 사랑 안에서만이 강하게 나타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 들에게 하나님의 사랑 없이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기준이 됩니다. 순종이 없는 사랑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순종이 따르지 않는다면 아무리 사랑을 외쳐도 그 사랑은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2)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이 말은 ‘그리스도인 들은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에 대한 인내를 배우라’는 말입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내의 말씀이라고도 말하는 이유는 인내하는 자만이 말씀의 결실을 맺으며 말씀의 소망을 가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 들에게 인내가 없으면 하나님의 약속을 바랄 수 없습니다. 히 10 : 36절에서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받으신 영광은 주께서 끝까지 그의 사역을 이루심에 인내하시어 그 결실을 맺었다는데 있습니다. 히 12 : 22절에서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달려가야 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했습니다.

성경에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으려면 그와 함께 고난도 받아야 할 것이라고 말씀해 줍니다. 우리에게 닥쳐오는 고난을 이기고 그 영광에 이를 수 있는 비결은 오직 인내로서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인내가 없이는 고난도, 핍박도, 시련도 이길 수 없는 것입니다.

결론 :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임하시어 우리들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살게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인내로 우리의 소망을 이룰 수 있도록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믿을 때, 우리의 구원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오 내 속에 임재 하시는 주께서 이루어 주신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빌 1 : 6절에서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고 했습니다.


(11) 그리스도인의 규모 있는 생활

(데살로니가후서 3:6-18)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교인들에게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따라야 할 규모 있는 행동에 대하여 경계하고 있습니다. 특히 6절에서 ‘규모 없이 행하고 우리에게서 받은 유전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들에게서 떠나라‘고 했습니다. 규모란 말은 본보기란 뜻입니다. 그리스도인 들은 마땅히 다른 사람에게 본보기로 자신의 행동을 보여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받은 유전이라 바울이나 다른 사도들이 보낸 서신으로 일러준 교훈을 의미합니다. 이런 것들을 지키지 아니하는 형제들에게서 떠나라고 한 것입니다.

1. 바울이 보인 규모 있는 생활

바울은 자신이 스스로 교회 앞에서 규모 있는 생활을 한 일에 대하여 말해 주고 있습니다.

(1) 첫째로 수고하지 아니하고 양식을 취하는 자에 대해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 중에 일하지 않고 먹는 게으른 자들에 대해 이처럼 경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경우를 예로 들었습니다. 바울은 ‘누구에게든지 양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했다’는 사실을 경종 했습니다. 바울이 이런 생활을 한 것은 아직 신앙적으로 어린 처지에 있었던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물질적인 폐를 끼쳐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장애가 될 것을 우려해서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에게 그런 누를 끼칠 만한 권리가 없어서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목회자는 복음으로 살아야 할 하나님의 일꾼들이기 때문에 교회에서 의당 모든 생활비와 활동비를 책임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초기에 그런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면서까지 덕을 세운 것입니다. 모든 목회자들이 본 받을 만한 미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이 일하지 않고 먹는 자는 일종의 기생충적인 존재입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 교회에는 규모 없이 행하는 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만 만드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일하지 않은 이유는 주 재림의 긴박성 때문에 일하는 것도 배우는 것도 필요 없다는 경망스럽고 잘못된 종말관에서 온 것입니다. 또한 신비적 신앙을 가진 사람들 중에 구하면 주신다고 하신 일, 염려하지 말고 구하라고 하신 말씀 등을 잘못 오해 한데서 나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들은 결국 교회에 누를 끼치게 되고 다른 사람에게 신앙적인 나쁜 영향을 주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류의 사람들에게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고 엄히 책망하였습니다.

2. 게으른 자의 경우

일하기를 싫어하는 자는 게으른 자를 말하는데 이 게으른 자에 대한 교훈이 잠언에 많이 나와 있습니다.

잠20:4절에서 ‘게으른 자는 가을에 밭 갈기를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거둘 때에는 구걸할지라도 얻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잠19:15절에서 ‘게으름이 사람으로 깊이 잠들게 하나니 나태한 사람은 주릴 것이니라

십계명에도 엿새 동안에 힘써 네 모든 일을 하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들은 일을 하되 부지런히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두 가지 생활 지침이 있습니다.

자신의 일에 대해서는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교회를 봉사하는 일에는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하나님은 게으른 자에게 명하시기를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고 하셨습니다.

잠12:27절에서 ‘사람의 부귀는 부지런한 것이니라’

시128:2절에서 하나님의 축복이 어떤 모양으로 받느냐?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도에 행하는 자로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고 하셨습니다. 손의 수고가 없으면 하나님의 축복도 만들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않는 자에게 해야 할 일

바울은 14절에서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말을 순종치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저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그러나 원수와 같이 생각지 말고 형제 같이 권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거나 순종치 않는 자들에 대한 우리의 처신에 대하여 그 사람을 지목하라고 했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들과의 교제를 삼가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교제란 일반적인 교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형제로서의 교제로 이런 사람들과는 일정한 신앙적인 경계선을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부끄럽게 하라는 말은 그런 생각에 동조하지 말고 책선 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사람들과 곧잘 어울려 한 무리가 되는 경우조차 있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생각이나 생활이나 헌신이나 규모 있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질서와 평강의 하나님이시므로 우리의 생활에서 그런 열매를 요구하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