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新約]강해/◆ 바울서신 강해-1

★디모데후서 1-4장 ◆ 밤중소리

영국신사77 2020. 4. 13. 23:22

디모데  차례

디모데후서 1장  (1 - 5)

(1) 바울의 문안과 축복(디모데후서 1:1-2)

(2) 복음과 고난(디모데후서 1:3-8)

(3) 하나님의 부르심의 섭리(디모데후서 1:9)

(4) 예수 그리스도로 나타나신 하나님의 섭리(디모데후서 1:10-12)

(5) 믿음과 사랑과 성령으로 지키라(디모데후서 1:13-18)


디모데후서 2장 (6 - 14)

(6)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디모데후서 2:1-2)

(7)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디모데후서 2:3-4)

(8) 경기의 법칙(디모데후서 2:5-7)

(9) 그리스도를 기억하라(디모데후서 2:8-10)

(10) 미쁘신 주님(디모데후서 2:11-13)

(11) 말다툼의 해로운(디모데후서 2:14)

(12) 진리의 말씀을 분변하라(디모데후서 2:15-19)

(13) 귀히 쓰는 그릇(디모데후서 2:20-21)

(14) 그리스도인의 화평과 교제(디모데후서 2:22-26)


디모데후서 3장 (15 - 16)

(15) 말세에 고통하는 때(디모데후서 3:1-5)

(16)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디모데후서 3:6-17)


디모데후서 4장 (17 - 19)

(17) 바울의 엄한 명령(디모데후서 4:1-5)

(18) 바울의 소망한 의의 면류관(디모데후서 4:6-8)

(19) 바울을 버린 제자들(디모데후서 4: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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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후서 1장 (1 - 5)

◆ 밤중소리 01-31 | VIEW : 573

(1) 바울의 문안과 축복

(디모데후서 1:1-2)

바울은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목회 서신으로 디모데 전서와 후서를 보냈는데 오늘부터 강해 하는 더모데 후서는 전서를 보내 고, 얼마 후에 보낸 서신입니다. 디모데 전서가 목회 상의 제반 규준을 다룬 것이라면 후서는 복음 사역 자로서 갖추어야 할 영성과 인품을 다루고 있습니다. 바울의 서신마다 전제되는 서언이지만 바울은 특별히 자신의 사도 직이나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사명에 대하여 위엄 있게 다루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직분은 자기가 스스로 만든 것도 아니며 어떤 권위 있는 사람에 의하여 부여된 것도 아닙니다. 바울은 이 사상에 철저했습니다. 그는 이 직분의 소명을 두 가지로 구분하여 직분 자들에게 확신을 주었습니다.

1. 자신에게 주신 직분

바울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사도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불가항력적입니다. 누구도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 수 있는 존재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느니웨 성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라고 명했을 때, 요나는 이 사명을 거역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내린 하나님의 사명은 불가항력적이었습니다. 끝내는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았을 때 우리는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반드시 그의 뜻을 이루시는 분이시며, 하나님은 그 이루시고자 하시는 뜻을 나에게 주셨을 때 우리는 그것을 절대로 거역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자기가 받은 사도 직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 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 택한 백성들에게 생명의 약속을 주셨는데 하나님의 부르심은 바로 그 약속을 이루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이신 것입니다. 바울은 이 같은 사명을 깨달았기 때문에 그는 이 사명을 감당하는 일에 자신의 생명과 생애를 다 바친 것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살아도 그리스도요 죽어도 그리스도요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의 것이라고 말한 바울의 고백은 가식이 아니라 정말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사명 의식이 그의 마음속에 솟구칠 때 마음이 뜨거워 견딜 수 없어 ‘내가 주의 말씀을 전하지 않으려 하나 내 맘이 뜨거워 견딜 수 없나이다’고 말한 예레미야의 심정이었던 것입니다.

2. 디모데에게 준 축복

하나님의 종들은 말에서나 서신에서나 심방에서나 항상 주의 이름으로 축복해 주어야 합니다. 특별히 사역 자의 가정이나 사역 자들에게는 더 큰 축복으로 복을 축원해 주어야 합니다.

(1) 은혜의 축복이 가장 큰 축복임을 알아야 합니다. ‘네게 하나님의 은혜가 있을 지어다’고 하는 축복의 선언은 모든 그리스도인 들이 가장 사모해야 할 축복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무런 대가 없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공급해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중에 가장 큰 은혜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주신 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때를 따라 풍성히 받아야 하며 피차 주의 이름으로 은혜를 받기 위해 축원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2) 다음에 긍휼의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긍휼이란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가리킵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불쌍히 여김을 받는 생활을 하거나 그런 동정을 받아서는 안됩니다. 사람이 추해집니다. 그렇다고 얻어지는 것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불쌍해 여기심을 받는 일은 축복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중, 세리의 기도는 하나님께 긍휼히 여김을 받는 기도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가나안 여인도 ‘내 딸을 긍휼히 여기소서’라는 간구로 긍휼히 여김을 받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시145:9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만유를 선대 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신다’고 하셨습니다. 시72:13절에서 하나님은 특히 궁핍한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고아와 과부를 긍휼히 여기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긍휼히 여김을 받을 수 있는 비결이 있습니다. 사55:27절에서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 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고 하셨습니다. 회개하는 자가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을 받습니다. 히4:16절에서 ‘우리가 긍휼 하심을 받기 위해 은혜의 보좌 앞에 나갈지니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긍휼히 여김을 받기 위해 간구 해야 하는 것입니다.

(3) 다음에 평강의 축복입니다. 평강은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로막았던 죄악의 문제가 풀렸을 때 내 맘 속에 임재 하시는 하나님의 평안을 의미합니다. 사48:22절에서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평강의 왕이십니다.

결론 : 바울이 디모데에게 축원해 준 축복이 오늘 아침 이 말씀을 들으시는 여러분에게도 똑같이 임하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2) 복음과 고난

(디모데후서 1:3-8)

바울은 밤낮 간구하는 생활을 했으며 그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디모데를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밤낮 간구 했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무릎을 꿇고 기도만 한다는 뜻이겠습니까? 그렇다기보다 바울의 생활 전체가 기도화 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기도 생활에 갈급한 주부는 기도할 시간을 내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방법을 일찌감치 찾아냅니다. 밥하면서 기도합니다. 빨래하면서 기도합니다. 버스 안에서 기도합니다. 그는 눈을 뜨고 길을 걸어가면서도 기도합니다. 기도란 자신의 마음을 주님과 연결시켜 마음에 품고 있는 바를 아뢰는 것입니다. 물론 이 경우, 많은 시간을 교회에서 골방에서 기도할 것입니다. 바울의 경우도 일정 시간,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고 간절히 기도하는 생활을 계속하였지만 항상 기도하는 마음의 자세로 마음으로 주님 앞에 무릎을 꿇은 그의 중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1. 역사성 있는 종교심

디모데의 신앙은 바울이 보기에 참으로 아름답고 칭찬해 줄만 했습니다. 바울은 5절에서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신앙, 가장 칭찬 받을 만한 믿음은 어떤 것입니까? 바울이 디모데에게 말한 것처럼 ‘거짓이 없는 믿음’인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믿음은 거짓이 없는 진실한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지라’고 하신 것은 다윗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는 진실한 믿음, 하나님께 대한 거짓 없는 사랑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의 이 같은 믿음은 이미 외조모로부터 내려와 그의 어머니 유니게에게 전수되고 그 어머니로부터 아들인 디모데에게 전해진 것임을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역사적인 종교입니다.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기독교의 창시자가 되십니다. 그리고 교회는 만천하에 명명백백하게 공개되었습니다. 성경이 그것입니다. 성경은 수 천년간 내려오면서 그 말씀의 일점일획도 떨어지거나 부쳐진 것이 전혀 없이 아직까지 내려왔습니다. 그 이유는 성경은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이 성경에 대해서는 선지자가 증거 하였고 사도들이 증거 했으며 인류의 역사가 증거하고 있습니다. 히12:1절에서는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다’고 한 것입니다.

2.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

디모데는 목회자로써 안수를 받을 때 하나님의 은사를 말할 수 없이 받았습니다. 그 안수자 중에는 물론 사도 바울이 들어가 있습니다. 6절에서 바울이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란 표현은 바울이 다모데에게 안수했다는 사실을 의미하며 그 때 디모데가 받은 말할 수 없는 은사를 ‘다시 불일 듯 하게 하기 위해 너로 생각나게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로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종의 영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은 평안함을 주십니다. 능력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능력입니다. 그리스도인 들이 가져야 할 능력 가운데 가장 권장할 만한 능력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있는 능력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 성도들이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켰다’고 하는 주님의 칭찬을 들은 것입니다.

다음에 사랑의 은사라고 했습니다. 사랑의 은사는 그리스도인의 으뜸가는 은사입니다. 특별히 목회를 하는 주의 종들에게 이 사랑의 은사가 결여되면 사랑의 목회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랑은 허물을 덮어 주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은사로 받지 않으면 열매 맺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3.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바울은 복음 때문에 옥에 갇혀 있는 자기를 부끄러워 말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옥에 갇힌 일에 대하여 부끄럽게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세상의 죄로 인하여 옥에 갇힌 것이 아니라 주의 복음을 위하여 갇힌바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갇힘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자랑할 일입니다. 그 뿐 아니라 오히려 복음 때문에 고난을 받으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에는 고난이 따릅니다. 세상의 어둔 권세와 싸우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위해 받는 고난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는 은혜인 것입니다.

결론 : 우리를 구원해 주신 목적에 대하여 ‘그리스도를 믿을 뿐 아니라 그를 위해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고난이 없이는 복음이 전파되지 않습니다. 교회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 부여되어 있습니다.


(3) 하나님의 부르심의 섭리

(디모데후서 1:9)

바울이 9절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 말씀은 성경 안에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부르심의 비밀을 밝혀 놓은 것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인가? 인간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서만 가능한 것인가? 기독교 교리 면에서 대단히 중요한 문제의 해답이 이 말씀 안에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의 부르심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그 부르심을 간략히 주린 말로 표현한다면 소명(召命)이라고 합니다. 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성경적 증거는 성경 도처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누구든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로 올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롬8:30절에서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부르시고, 마태를 부르시고, 삭개오를 부르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비록 신약 성경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43:1절에서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말씀해 주신 것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은 아무에게나 해당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구태여 부르심이란 단어를 사용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다’고 하셨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소유물로 내정되어 있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당신의 소유물을 지명하여 부르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절대로 실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양이 아닌 자는 결국은 내어쫓깁니다. 요10:27절에서 예수님은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아려 저희는 나를 따른다’고 하셨습니다. 나를 따른다는 말씀에는 끝까지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고난의 길이라도 주님을 따르는 일에 낙오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2. 하나님의 부르심의 이유

하나님은 우리를 왜 부르신 것입니까? 그 첫째 이유는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었다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도덕적인 행위에 따르지 아니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어떤 구원을 받을 만한 조건이 있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고전1:26-29절 말씀을 펼쳐 보시기 바랍니다. ( ). 우리에게는 하나님께 자랑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 우리는 죄인으로써 그 죄 값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안다는 일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이해하는 일에 절대적인 요소인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심에 있어서 오직 자기 뜻에 따라 하셨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왜 우리를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하시어 당신의 아들로 삼으신 것입니까? 이렇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이에 대하여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 뜻을 영원하신 당신의 영광에 두셨기 때문에 피조물의 지혜로서는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지혜로 알 수 없다 하여 그것을 왜 그렇게 하셨는가 하고 하나님께 따지거나 힐문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그가 만드신 피조물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만드심을 받은 자는 만드신 분에게 순종해야 하며 그 분에 뜻에 합당한 그릇으로 사용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롬9:18-23절 말씀을 펼쳐 보시기 바랍니다. ( ). 우리 인간의 지혜로 이해가 될 수 없어도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하여 왈가왈부할 수 있는 처지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분은 토기장이처럼 자신의 원하시는 뜻을 어떤 일이라도 처리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은 어떤 표준으로 언제 세우신 것입니까?

영원 전부터 이미 세워 놓으셨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과 나에 대한 구원은 어제오늘에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계획된 일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따라 영원 전부터 세우신 일이란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누가 이 같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 자가 있을 것입니까? 누가 이렇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힐문하고 그 뜻에 대항할 자가 있을 것입니까? 다음에 하나님은 이런 당신의 뜻을 그리스도 안에서 세우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모든 문제에 있어서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존속해 있음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심에 있어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셨다’고 했습니다. 은혜란 댓가 없이 거저 주시는 선물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 대하여 은혜로 부르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에서 온 우리의 구원이 이처럼 귀중한 것임을 알고 그 은혜와 사랑 안에서 믿음을 견고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4) 예수 그리스도로 나타나신 하나님의 섭리

(디모데후서 1:10-12)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섭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타났다고 말씀해 주었습니다. 바울은 10절에서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섭리는 무엇이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시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나타나심, 곧 그리스도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신 일은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를 이루시는 일에 절대적인 역할을 하신 것입니다.

1. 그리스도께서 나타내셨다.

우리가 알아야 할 일은 하나님의 창조적 역사는 오직 우리 인간의 창조가 그 중심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을 제외한 모든 만물만의 창조는 하나님의 창조의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 필요한 모든 것을 창조하신 후, 맨 마지막에 인간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다스리는 권세를 인간에게 부여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은 하나님의 창조의 모든 영역을 더럽혔습니다. 만물의 회복은 인간의 회복으로서만이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말씀이 롬8:19-21절에 있습니다. ( ).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나타나신 일은 하나님의 모든 창조 역사에 그 영향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보이는 우주는 말할 것도 없고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 하나님의 보좌에 이르기까지도 중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입니다.

계5장에서 어린양 되신 그리스도께서 등장했을 때, 네 생물은 말할 것도 없고 24장로들과 천천 만만의 모든 천사들과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그 가운데 모든 만물들이 찬양과 영광을 그에게 돌리는 놀라운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의 속죄로 나타나심

그러면 만물을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섭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어떻게 나타난 것입니까?

10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들어 내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최대의 원수는 죄와 사망입니다. 이 원수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은 인간을 타락시켰으며 자기 종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 인간의 죄가 영적 세계와 물질 세계를 온통 사망으로 오염시켰습니다. 하나님은 이 사망을 폐하시기 위해 죄 없는 그리스도를 죄 있는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에서 죄 값을 치르게 하심으로 사망을 폐하심으로 그 섭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이루신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함을 들어 내셨다고 했습니다. 복음은 이 같은 하나님의 위대한 섭리의 완성이요 그 선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가장 명예롭고 귀중한 일꾼은 복음 전파의 사역 자들인 것입니다.

3. 복음을 맡은 바울의 사명

바울은 11절에서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반포 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 복음의 일꾼이 이토록 영광스럽기 때문에 바울은 세상에서 누려 온 명예와 지식과 영광을 배설물처럼 여기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혜를 가장 존귀한 것으로 알았습니다.

교회에서 받은 우리의 직분은 복음을 위한 직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직분에 대해 결코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위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는 일에 쓰임 받는 일꾼으로 뽑힌 영광스러운 직분인 것입니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위해 부끄러워 아니하고 오히려 기뻐한 것은 바로 이런 연고에서인 것입니다. 내가 지금 받고 있는 고난이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라면 그 고난에는 놀라운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이 같은 고난은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고난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릴 수 있는 바로 그 고난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산상보훈에서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이 은혜는 영원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섭리이십니다. 창세 전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를 택정 하시고 이런 나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어 그 은혜를 나타내신 것입니다.

결론 : 나는 이 복음을 위하여 하나님에 의하여 복음의 일꾼으로 세우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인의 사명을 다하여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세상에 나타낼 수 있어야 합니다. 혹 이 일을 위해 우리의 생애에 고난, 핍박, 시련이 와도 이 복음을 위해 기쁘게 감담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5) 믿음과 사랑과 성령으로 지키라

(디모데후서 1:13-18)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생활을 계속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일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인간의 노력이나 방법으로 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 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일에는 믿음과 사랑이 따라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스스로 본 받아 지키는 일이 중요합니다. 또한 이 일을 이루기 위해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지켜야 가능한 것입니다.

1. 부탁한 것을 지키라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행동 지침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말씀과 함께 그의 생애를 달려가야 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다. 본 받는다는 말은 그 말씀대로 살아 나가는 생활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지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킬 때 생명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은 그 말씀을 지킬 때에 해당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듣고 지키는 자에게 복이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지킨다는 말은 그 말씀에 대한 신뢰를 의미합니다. 말씀을 신뢰할 때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적은 이 때에 나타납니다.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이 없다 또는 네 믿음대로 되리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말은 모두 말씀을 믿을 때 그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다고 하신 말씀은 그 말씀을 믿을 때 그 말씀대로 성취되는 역사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본 받아 지킬 때의 두 가지 자세에 대하여 말씀하기를 ‘믿음과 사랑’으로써 하라고 권면 하였습니다. 사랑으로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사랑이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두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말씀에서 사랑을 빼면 남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행실의 본이 되어 믿음과 사랑으로 지켜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지키는 일은 내 속에 내주 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가능하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성령께 의뢰하여 그의 도우심을 간구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이시며 영의 결실은 성령의 능력으로만이 가능합니다. 성령의 내주는 우리들로 이 같은 생활의 결실을 위해 계시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빌1:6절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고 했습니다.

2. 끝까지 전도인의 사명을 이루라

전도인의 사명은 쉽고 평탄한 것은 아닙니다. 바울을 따랐던 많은 무리들이 다 바울을 배신하여 세상으로 등을 돌린 일에 대하여 바울은 탄식하면서 경계하고 있습니다. 15절에서 바울은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부겔로와 허모게네가 들어 있다고 했습니다. 이들의 이름이 오네시보로와 같이 아름다운 이름으로 성경에 남겨졌으면 얼마나 영광스러웠겠지만 잠깐동안의 고난을 인하여 바울을 버리고 세상으로 떠나 버린 자로 남겨졌다는 사실은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 힘겹고 또 소망으로 살아가는 생활이 어렵다 해도 그 길을 버려서는 안됩니다. 자기 생애의 끝날 까지 달려가는 경주장이 성도들의 한평생이란 사실을 깊이 깨닫고 말씀의 길로 달려가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16절에서 오네시보로란 사람을 굉장히 칭찬하면서 주님께 그가 자기를 선대한 일에 대하여 반드시 긍휼을 베풀어주실 것을 기원하고 있습니다. ‘원컨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저가 나를 자주 유쾌케 하고 나의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 아니하여 로마에 있을 때에 나를 부지런히 찾아 만났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목회자에게는 때로는 위로가 필요합니다. 바울은 그 어려운 요건 속에서 오네시보로를 통해서 위로를 받은 것입니다. 오네시보로가 바울에게 위로가 된 것은 그가 바울을 자주 유쾌케 했다고 했습니다. 아마도 바울이 필요로 하는 재정적 도움을 주었을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다음에 바울이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는 바울을 존귀히 보았으며 더욱 가까이 했다는 말입니다. 그뿐 아니라 나를 부지런히 찾아 만났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오네시보로는 바울을 섬기는 일에 바울의 손발처럼 바울의 복음 사역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오네시보로가 이처럼 복음을 전하는 바울의 고난에 함께 동참한 일에 대하여 주의 날에 이 일에 대한 주의 긍휼을 주님께 부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행실의 본으로 삼아 사랑과 믿음과 성령으로 지키면서 여러분의 생애를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디모데후서 2장 (6 - 14)

◆ 밤중소리 01-31 | VIEW : 640

(6)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디모데후서 2:1-2)

바울은 디모데에게 ‘네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디모데가 많은 증인들 앞에서 바울에게서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한 자만이 복음의 충성된 사역 자가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가 그런 사역 자가 될 수 있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디모데에게 부탁하여 복음의 일꾼으로 세운 것처럼 디모데로 하여금 바울에게서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가르쳐 부탁할 때 복음이 효과적으로 전파되어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 될 수 있을 것입니다.

1. 바울의 부탁

복음의 일꾼은 은혜 속에서 강해야 합니다. 그래야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믿음으로 복음을 전파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해야 할 그리스도인은 강하고 담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하신 말씀은 ‘너는 강하고 담대하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처음에 강하기는 했습니다. ‘내가 죽을지언정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나이다’고 맹세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 같은 결심은 그에게 유혹이 왔을 때 순식간에 무너졌습니다. 베드로의 강한 의지와 담대함은 혈기에서 나온 것으로 그에게 위기가 왔을 때 배신하게 된 것입니다. 아시아에서 바울을 따랐던 사람들은 처음에는 바울의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했지만 그것이 끝까지 계속되지 못한 것은 그들의 동참이 혈기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해야 참 강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은혜 속에서 강하다는 말은 은혜로 말미암아 강하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강함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고난을 이길 수 있습니까? 핍박을 이길 수 있습니까? 주님의 십자가를 질 수 있습니까? 주를 위해 순교할 수 있는 것입니까? 그것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내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성령이시며 성령이 이 일을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2. 충성된 자들에게 부탁하라

하나님은 교회를 위하여 일꾼을 쓰십니다. 그러면 어떤 일꾼을 쓰십니까? 충성된 자들을 쓰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자들에게 부탁하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 중에 한 달란트 받은 자의 달란트를 빼앗아 다섯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고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없는 자는 있는 것까지 빼앗기고 있는 자는 더 받으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충성된 자에게 사명을 주시고 나태한 자는 그가 받은 사명까지 빼앗겨 충성된 자에게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들은 자신이 맡은 직분이나 사명에 있어서 충성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빼앗기게 됩니다. 성도들이 더 나은 직분을 받는다거나 더 많은 직분을 받는 일은 그만큼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있는 것까지 빼앗기는 일은 한 달란트를 받아 그것마저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무엇이라고 우리에게 말씀해 주는 것입니까?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교회의 직분에 충성하는 일에는 크고 작고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지극히 적은 일에 충성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제각기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혹은 책망을 받기도 하고 혹은 칭찬을 듣기도 하는데 충성된 자에게 하신 말씀은 이렇습니다. ‘네가 지극히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잘 하였도다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충성된 자를 살피시고 반드시 찾으십니다. 시101:6절에서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거하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수종 하리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의 일을 맡아 그 일에 헌신하는 일은 주님을 수종 하는 일입니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이처럼 하나님은 충성된 자와 동거하십니다. 그로 하나님을 수종들이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결론 : 딤전1:12절에서 바울은 고백하기를 ‘나를 충성 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직분은 하나님이 여러분을 충성 되이 여기시어 주신 것인 줄 아시고 맡은 사명을 위해 죽도록 충성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7)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

(디모데후서 2:3-4)

바울은 3절에서 디모데에게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군사란 말은 그리스도의 일꾼이란 의미로 그리스도인이 감당해야 할 사명감에 초점을 둔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군사들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군사 된 자의 사명을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1. 군사 된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인은 하나의 군사들입니다. 군사란 전쟁터에서 적과 싸우는 군병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성경에서 천사들을 지칭할 때에도 천군 천사란 말로 나타냅니다. 하늘의 군사는 하나님 편에서 사탄의 군사들과 싸우는 영적 군병들입니다. 계12장에는 하나님의 군병들인 하늘의 군사들과 사탄의 군병들인 악령들과의 치열한 전쟁의 모습이 나옵니다. 이 싸움의 결과 사탄과 그의 군병들은 공중에 있을 곳을 상실하고 땅으로 내어 쫓기는데 이 때부터 지상에는 무서운 종말적인 환난이 오게 되며 하나님의 교회가 핍박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계12:7-9절에서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 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저희의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큰 용이 내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쫓기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들을 왜 군사들이고 한 것입니까? 사탄과 싸우는 영적 군병들이기 때문입니다. 군사라고 했지만 그리스도의 군사는 좋은 군사들입니다.

2. 군사들의 세 가지 유의점

바울은 그리스도인을 군사라고 비유하고 군사로서의 세 가지 유의점을 밝히면서 강하고 담대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1) 그리스도의 군사들은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 지니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모든 그리스도인의 표본적인 중심 인물로 삼고 자신을 닮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이 같은 생각과 권면은 그의 교만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중심에서 나온 진실한 권면인 것입니다. 군인은 언제나 어디서나 고난을 받아야 할 위치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군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난이 없이는 맡겨 주신 임무를 감당할 수 없는 것이 군인의 신분인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경우도 같은 것입니다. 우리의 대장이신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셨으니 우리도 그와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상급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고난이 없이는 영광이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2) 바울은 4절에서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 그는 그리스도의 군사가 되며 하나님께서 그의 생활을 보장해 주십니다. 국가에서 군인의 생활을 보장해 주는 경우와 같이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신다는 것이 성경의 증거입니다. 예수님이 마6:33절에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자기 생활에 얽매인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생활과 순종보다는 육신의 생각과 정욕적인 생활에 얽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같은 자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합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군사들처럼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3) 그리스도의 군사들인 그리스도인 들은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해야 드려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 들은 자신의 삶의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부르신 분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일에 모든 생애의 목적을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고후5:9절에서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고 했습니다.

엡5:10에서 바울은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히12:28절에서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기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결론 : 우리는 우리의 생활 중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 위해 얼마나 힘써 왔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들임을 잊지 말고 군사된 사명을 다하기 위해 힘써야 할 것입니다.


(8) 경기의 법칙

(디모데후서 2:5-7)

바울은 5절에서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경기란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있었던 올림픽 경주를 의미하며 그것을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과 연결시켜 교훈 해 주고 있습니다.

1. 경기의 법칙

선수가 경기에 나간 이상, 일 등에 입선하여 면류관을 받아야 합니다. 경기에는 많은 선수들이 참여합니다. 그러나 면류관을 차지할 선수는 단 한명 뿐입니다. 금 메달리스트만이 영광을 얻으며 많은 상금을 받습니다. 바울은 이처럼 신앙의 경주 장에서도 일등으로 달려야 상을 받는다고 말씀해 줍니다. ‘면류관을 얻지 못한다’고 한 말은 우리가 장차 그 나라에 가서 받을 놀라운 상급을 의미하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신앙의 경주는 놀라운 특색이 있습니다. 세상의 달리기 경주는 많은 사람이 함께 달려 그 중에서 등수를 뽑지만 신앙의 경주는 달리는 사람이 자기 험자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범대로만 잘 뛰면 누구라도 일등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면 믿음의 경주에서 일 등을 하려면 어떤 법칙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그 목표가 분명해야 합니다. 그 목표점에 대하여 히11:2절에서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했습니다. 바로 예수 그분이 우리의 달리기 목표인 것입니다. 누구라도 아무리 달리기를 잘 했다 해도 이 목표점이 분명치 않다면 그런 경주는 헛수고에 불과합니다.

둘째로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달려가야 일등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죄는 우리의 생애를 무겁게 하는 인생의 짐입니다. 이 짐을 벗어버려야 잘 달려갈 수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인내로써 끝까지 달려가야 일 등을 할 수 있는 경주입니다. 이 요건만 갖추면 누구라도 일 등의 영광을 차지하여 면류관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은 경기하는 자가 아무리 달라기를 잘해도 법대로 경주하지 않으면 그 경기 자체가 무효가 되기 때문에 달려가는 것이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디모데에게 법대로 달릴 것을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인의 달려가는 자세

달리기 경주에서 올바른 자세로 뛰지 않으면 일 등을 차지하기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자세로 뛰어야 하는 것입니까?

(1) 변화 받은 심령을 가지고 뛰어야 합니다. 이 코스는 달리기 이전의 심령 상태로는 달릴 수 없는 곳입니다. 변화 받기 이전의 심령은 이 세상 코스에 익숙한 심령입니다. 이 심령으로는 아무리 달려도 목표 지점에 다다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2) 이 코스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달려 갈 수 없는 곳입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말은 육신의 자기를 죽이고 영을 따라 살아가는 생활을 의미합니다. 자기 십자가란 경주 중에 오는 시험, 핍박, 어려움 등으로 많은 시련이 따릅니다. 이것을 벗어버리려 다간 큰짐을 짊어지게 됩니다. 이 십자가를 잘 지고 달려가야 하는 것입니다.

(3) 이 코스는 뒤에 있는 것은 잃어 버리고 앞에 있는 푯대만을 향하여 달려가야 하는 곳입니다. 뒤에 있는 것이란 세상 것으로 지난날 우리가 쫓아갔던 것으로 이 경주 코스에는 무익한 것입니다. 이 줄을 끊어 버리지 않으면 앞으로 달려갈 수 없습니다. 롯의 아내가 이 줄에 얽매어 뒤를 돌아보다가 소곰 기둥이 된 것입니다. 주님은 롯의 처를 생각하라고 하셨습니다.

(4) 이 코스는 일사불란한 마음으로 달려가야 합니다. 부모나 처자나 형제를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이 경주 코스를 달릴 수 없습니다. 이 경주는 죽느냐 사느냐의 결사적인 경주입니다. 한눈을 팔면 함정에 빠지며 함정에 빠지면 그 사람의 신앙은 제자리걸음에 머물러 있을 것입니다. 뒤로 물러서면 침륜에 빠지게 됩니다.

틈을 주면 우는 사자처럼 기회를 엿보는 사탄의 공경을 받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6절에서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습니다. 수고하는 농부란 복음을 전파하는 그리스도의 일꾼들을 말합니다. 수고 한 농부가 제일 먼저 곡식을 먹는 것처럼 수고하는 복음 전도자는 양무리의 곡식의 첫열매를 먹을 자격이 있다고 했습니다.

결론 : 우리는 모두 천국을 달리는 경주장에서 지금 경주를 시작한 사람들입니다. 경주를 시작한 이상, 반드시 이겨야 합니다. 면류관을 받아야 합니다. 경주의 법측을 잘 지키고 그 길을 달려가면 반드시 면류관을 받는 소망의 날이 오는 것입니다.


(9)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디모데후서 2:8-10)

바울은 8절에서 ‘나의 복음과 같이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생애는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생활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기억하고 있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사람됨과 앞으로 그 사람의 할 일에 대하여 예측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의 기억이 그 사람의 행동과 인격을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1. 그리스도인이 기억해야 할 대상

그리스도인이 기억해야 할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기억이란 말은 자기 생애의 중요한 사안을 마음에 새겨 남겨 두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는 말은 그리스도를 자기 생각의 중심에 깊이 새겨 두라는 뜻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생애에서 늘 예수 그리스도만을 생각해야 합니다. 한편 그리스도인 들은 온 생각을 오직 그리스도에게 집중시켜야 하는 뜻입니다.

외아들 가진 어머니가 그 아들을 생각하듯이, 장사꾼이 돈 버는 일을 하루 종일 생각하듯이 아니 그 이상으로 그리스도인은 주님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능력과 은혜 생활은 그리스도를 기억하는데서 나옵니다.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일에 명심해야 할 일은 그 분이 누구이신 가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두 가지로 밝혀 주었습니다.

(1) 첫째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다윗의 씨라고 말했습니다. 다윗의 씨란 하나님이 다윗을 통해 약속하신 언약으로 그리스도는 약속의 메시야이심을 나타내신 말입니다. 그리스도는 인류의 구원을 약속하신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에 의하여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 아들은 구원의 능력이 계시는 분이십니다.

(2) 다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사망 권세를 이기신 분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를 사망에서 구원해 주신 분이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를 믿는 자는 결코 멸망하지 않으며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의를 들어 내신 분이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범죄로 인하여 대속의 제물로 죽으셨지만 그의 죽으신 일로 모든 죄인의 죄 값을 갚으셨기 때문에 죄는 소멸되고 의를 얻을 수 있게 된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망이 의를 삼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신 그리스도를 음부에 묶어 두실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죄 값을 다 갚았으며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일은 그리스도의 신앙 생활의 승리의 비결인 것입니다.

2. 메임 받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

복음의 원수들은 복음의 일꾼들을 핍박합니다. 전도자를 옥에 가두는 것은 이 도리가 세상에 퍼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막기 위해 바울을 옥게 가두었는데 그러면 그로 인하여 복음이 메임을 받은 것입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의 형상이 일어났습니다. 바울이 빌립보 감옥에 갇혔을 때 간수와 그 가족이 복음을 받아 드려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런 어려운 여건 속에서 복음의 유명한 말씀을 남길 수 있게 되었는데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로마의 폭군 네로는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 들을 학대하고 학살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수효가 줄어든 것도 아니요 교회가 지상에서 사라진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더욱 복음이 힘있게 전파되었고 그리스도인의 수효는 더욱 많아졌습니다. 그리고 급기야는 로마 자체가 기독교를 국가적인 종교로 수용하여 기독교가 온 유럽을 휩쓸었고 복음이 세계를 정복하는 일에 크나큰 역할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바울이 복음으로 로마를 정복하고 세계를 정복한 것입니다.

바울이 영오의 몸이 된 것으로 복음의 길이 막힌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로 인하여 총독 앞에서 임금들 앞에서 로마의 황제 앞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되어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어떤 환경 속에서도 복음을 위하여 참았습니다. 바울이 참은 것은 자신의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복음이 세상에 전파되게 하려는 순종에서였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택하신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 구원의 복음이 하나님의 뜻대로 전파되기 위해 전도 인들에게 고난도 주시기 때문에 성도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 어떤 고난도 참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 복음 전도자는 그 육신의 몸이 메임 받아도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로 메임 받지 아니합니다. 그리스도인 들은 때를 얻든지 얻지 못하든지 이 하나님의 말씀을 힘있게 외치고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10) 미쁘신 주님

(디모데후서 2:11-13)

바울은 13절에서 주는 일향 미쁘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할 수 없으리라’고 말씀해 주었습니다. 여기서 미쁘다는 낱말의 뜻은 믿음직하다, 진실하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11절에서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할 것이라’고 한 것은 ‘이 말은 믿음직하도다’는 말로 믿음에서 나온 바울의 감탄사인 것입니다.

1. 주와 함께 죽는 자의 축복

주님의 말씀은 믿음직합니다. 진실하기 때문입니다. 그의 모든 말씀이 미쁘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만약 주님께 믿음직스러운 진실성이 없으시다면 우리는 무엇에 근거하여 그 말씀을 믿고 그 말씀에 소망을 둘 것입니까? 그 말씀 가운데 다만 조그마한 부분이라도 진실성이 결여되어 있다면 우리의 믿음은 무너져 버릴 것입니다.

천지는 없어져도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이라도 변치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약속에 거짓이 없으심을 나타내시기 위해 자기 이름으로 맹세하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미쁘신 주님의 말씀은 주님을 위해 고난을 당하는 그리스도인 들에게 바울은 세 가지로 말씀해 줍니다.

하나는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이 말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와의 영적 연합 관계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롬6:3-7절 말씀을 보면 4절과 5절에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 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의 육신은 이미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었으므로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곧 내 몸의 죄 값의 지불이심으로 그의 죽으심은 곧 나의 죽음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연합하여 죄에 대하여 죽은 자는 또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주님과 연합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부활은 미래적인 것이지만 확실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영원한 생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원리를 우리는 우리의 몸의 행실과 연결시켜야 합니다. 이에 대하여 롬6:6절에서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주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사람만이 그리스도 안에서 주와 함께 사는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의 생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에 나타나 있는 다른 또 하나의 의미는 우리가 주를 위해 우리의 생명을 버리면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의 부활에 참여하는 축복을 받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가장 크고 영광스러운 상급입니다.

2. 참으면 왕 노릇 할 것이라

바울은 12절에서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히12:1절에서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3절에서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부끄러움과 고통을 참으신 일을 생각할 때 우리가 당하는 고난을 우리는 능히 인내로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인내란 말과 왕 노릇 한다는 말이 결부되어 있습니다. 왕 노릇 한다는 말은 천년왕국에서의 상급으로 첫째 부활자들에게 주시는 영광입니다. 이에 대하여 계20:4절에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 노릇 한다’고 했습니다. 첫째 부활자란 주를 위해 목숨을 버린 순교자들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주를 위해 참는 인내의 극치는 바로 그리스도를 위해 죽는 자리에까지 이르는 일입니다.

롬8장에는 현재의 우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말씀해 줍니다. 시련이 있습니까? 고난이 있습니까? 환난이 있습니까?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누릴 수 있는 영광을 바라보고 이기시기 바랍니다. 순교의 자리에까지 이를 수 있다면 그 이상 가는 영광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론 : 주를 위해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죽으면 죽으리이다 이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만나는 소망 가운데 여러분의 남은 생애를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11) 말다툼의 해로운

(디모데후서 2:14)

바울은 14절에서 교회 안에서의 말다툼의 해로움에 대하여 크게 경종해 주고 있습니다. ‘이는 유익이 하나도 없고 도리어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한다’고 한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왜 불화가 일어납니까? 그 원인을 찾아보면 부부간의 말다툼인 것입니다. 의좋은 친구가 서로 원수처럼 되는 원인도 알고 보면 말다툼에서 시작됩니다. 정치의 혼란과 나라와 나라간의 분쟁도 말다툼이 그 근원적인 원인이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1. 말다툼은 왜 일어나는가?

잠10:12절에서 ‘미움은 다툼을 일으킨다’고 했습니다. 평소에 자기 마음 속에 숨겨져 있었던 감정이 표면으로 나오는 것이 다툼입니다. 이처럼 다툼은 그 진원지가 미움에서 나오기 때문에 그리스도인 들은 다툼을 무조건 피해야 합니다. 사랑으로 용서하고 이해할 때 다툼이 아니라 화합이 되는 것입니다.

잠18:6절에서 ‘미련한 자의 입술은 다툼을 일으킨다’고 했습니다. 미련한 말이 다툼의 시발점이 되기 때문에 다투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그의 인간성이 본래 본능에 의하여 충동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미련한 사람들끼리 모이면 다툼이 그칠 날이 없으며 부부간도 둘 다 미련하면 그 집안에 말다툼이 그칠 날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중에 한사람이라도 지혜로우면 다툼이 멈추어집니다.

잠15:1절에서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한다’고 했습니다. 급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나 앞뒤를 가리지 않는 과격한 말은 말다툼을 일으킵니다.

잠13:10절에서 ‘교만에서는 다툼만 일어날 뿐이라’고 했습니다. 교만한 사람들끼리 모이면 말다툼만 일어나다가 무의미하게 헤어져 버리게 됩니다. 자기가 잘난 점, 자기 주장만 옳다고 주장하니 다툼이 생기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2. 다투는 자의 해로움

다투는 일은 자신에게 여러 가지 해로움을 가져올 뿐 아니라 이로 인하여 자기 인생에 크나큰 손실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잠17:19절에서 ‘다툼을 좋아하는 자는 죄과를 좋아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서로 다투다 보면 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서로 비판하게 되며 다툼에서 형제끼리 미워하게 됩니다. 다툼에서 얼마나 많은 사건들이 터지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가정적으로는 이혼이 이에서 나오고 국가적인 견지에서는 전쟁이 이에서 나오며 친구끼리 서로 원수가 되는 일도 이 다툼이 그 시작인 것입니다.

잠17:14절에서 ‘다투는 시작은 방축에서 물이 새는 것 같은즉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 시비를 그칠 것이

니라’고 했습니다. 다툼이 있는 장소에 욕설, 더러운 말, 망령된 행실이 나오게 됩니다. 방축에서 물이 새면 그 집안은 망하는 것입니다. 다툼에서 떠나고 다툼을 멀리해야 합니다.

잠19:13절에서 ‘다투는 아내는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21:9절에서는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여자가 남편에게 대들고 말다툼을 일으키는 것은 가정을 파탄시키는 불행을 초래합니다.

그리스도인 들이 삼가야 할 다툼이 있습니다. 신17:12절 말씀을 보면 ‘사람이 만일 천자히 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서서 섬기는 제사장이나 재판장을 듣지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죽여 이스라엘 중에서 악을 제하여 버리라’고 했습니다. 천자히 한다는 말은 제사장이나 재판장을 무시하고 거리낌없이 마음대로 행하는 행동을 말합니다. 미리암의 경우가 그러했습니다. 고라와 다단과 온 등이 행한 일이 그러 했습니댜. 옛날이나 지금이나 주의 종들과는 다투지 말아야 합니다.

3. 지혜로운 자의 태도

잠20:3절에서 ‘다툼을 멀리하는 것이 사람에게 영광이라’고 했습니다. 다툼을 멀리할 수 있는 길은 사랑입니다. 잠10:12절에서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는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의 다툼에 끼여들어서는 안됩니다. 잠26:17절에서 ‘길로 다니다가 자기에게 상관없는 다툼을 간섭하는 자는 개 귀를 잡는 자와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결론 : 누구에게나 말다툼은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도리어 옆에서 듣고 구경하는 자들을 망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다툴 일이 생겨도 다툼을 피해야 합니다. 다투고 싶은 마음을 억제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는 겸손과 다른 사람의 허물을 덮어 주는 사랑이 있다면 원만한 이해로 다툼의 고비를 넘길 수 있고 화평을 누릴 수 있습니다.


(12) 진리의 말씀을 분변하라

(디모데후서 2:15-19)

바울은 15절에서 디모데에게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라’고 했습니다. 디모데 뿐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 들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바울은 분별이란 말을 쓰지 않고 분변이라고 했습니다. 대개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단어지만 분별은 사물을 종류에 따라 나누는 것을 의미하고 분변이란 사물이 같지 않은 것을 알아내는 일을 말합니다. 진리의 말씀과 그렇지 않은 말씀은 엄연히 다릅니다. 이것을 알아내는 일이 진리를 분변하는 일입니다.

1. 그리스도인은 진리의 말씀을 잘 분변해야 합니다.

왜 진리의 말씀을 분변하는 일이 중요한 것입니까? 그것은 이단이 진리와 비슷한 모습으로 자신을 나타내어 많은 사람들을 유혹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리의 말씀을 잘 분변 할 능력이 없으면 우리는 이단에 미혹을 받게 될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잘 분변하려면 다음 몇 가지 성경적 방법을 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첫째로 성경의 해석은 성경으로 해석하는 원칙을 고수해야 합니다. 사34:16절 말씀을 보면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 보라 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 그의 신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에는 짝이 있기 때문에 짝을 맞추어 올바른 해석을 시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있는 어느 한 가지 견해만을 옹고집으로 주장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결과를 초래하는 것입니다. 행17:11-12절에서 베릐아 사람들의 성경 연구 태도가 나옵니다.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성경끼리 대조하면서 연구하는 일은 권장할 만한 성경 연구 태도입니다.

두 번째로 성경은 성경 전체의 맥에 의해 해석되어야 합니다.

벧후3:16절에서 이르기를 성경을 억지로 풀면 멸망한다고 했습니다. 인간 지식으로 성경을 풀면 모든 기적과 기사가 상징적 비유적 해석으로 풀어야 하기 때문에 성경은 하나의 신화적 기사에 불과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음에 목회자들의 성경 연구 태도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냐 하면 성도들에게 성경을 풀이해 주며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란 형식으로 전달해 주기 때문입니다. 잘못 가르치면 함께 멸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목회자들은 성경을 조직적으로 연구하는 일은 말할 것도 없고 성경 전체의 진리를 명백하게 깨닫고 말씀을 준비하는 일에 정성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2.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

바울은 디모데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고 했습니다. 주의 종은 하나님 앞에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일에 부끄러울 일이 없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인정된 자로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끊임없는 자기 성찰과 의로운 생활에 노력이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선생 된 자들이 받을 심판이 더 크다고 경종해 주었습니다. 하나님께 인정받기 위한 자세를 가지고 힘쓰는 생활을 게을리 해서는 안됩니다.

3.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바울은 16절에서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고 경종해 주고 있습니다. 망령되다는 말은 신실치 못하다는 뜻입니다. 신실치 못한 말은 마땅히 버려야 합니다. 성경의 진리를 망령되게 풀거나 망령되게 전하거나 헛된 말로 가르친다면 이런 일은 경건치 않는 일에 점점 나아가게 된다고 했습니다.

이런 인물 가운데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다고 했습니다. 이들은 교회에서 말씀을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인물들이지만 진리의 말씀을 분변치 못하므로 많은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들의 주장에는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고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심으로 부활은 지나갔으며 이제 부활은 없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고전15장에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부활의 보증이 되거늘 그의 부활로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고 주장하는 일은 진리를 왜곡시키는 일입니다

결론 :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구원에 이르도록 지켜 주십니다. 그리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불의에서 떠나라고 하셨다고 했습니다.


(13) 귀히 쓰는 그릇

(디모데후서 2:20-21)

바울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교회에서 하나님에 의해 어떻게 쓰임을 받게 되는가에 대해 귀히 쓰는 그릇과 천히 쓰는 그릇에 대한 비유로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교회에는 여러 가지 종류의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 성도들이 모두 똑같이 쓰여지는 것이 아니라 귀히 쓰는 그릇도 있고 천히 쓰는 그릇도 있다는 사실을 말씀해 줍니다.

1. 귀히 쓰는 그릇

20절에서 ‘큰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라 나무와 질그릇도 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큰집이란 하나님의 집인 교회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큰집에는 여러 종류의 그릇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릇의 종류를 바울은 네 가지로 구분했는데 금 그릇, 은그릇, 나무그릇, 질그릇 등입니다.

이 네 종류의 그릇은 하나님께 쓰임 받을 은사, 직분, 개인의 재능 등을 의미합니다. 자신이 어떤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것을 하나님을 위해 쓰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큰 영광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달란트의 비유에서 이런 그릇들을 찾아 볼 수 있는데 한 달란트,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 등 이들이 제각기 가지고 있는 달란트는 많이 가지고 있다고 귀한 것이 아니고 적게 받았다고 천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는 하나님이 친히 각기 세 사람에게 준 것이기 때문에 모두 귀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달란트를 가지고 성실하고 충성되게 헌신하여 주인에게 드릴 이익만 남겼더라면 모두가 똑같이 상급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 달란트를 큰집에 쓰임 받는 그릇과 연결시킨다면 다섯 달란트는 금 그릇에, 두 달란트는 은그릇에, 한 달란트는 나무나 질그릇쯤 될 것입니다. 그러면 1 달란트는 왜 상급이 없었고 오히려 저주를 받게 된 것입니까? 그것은 한 다란트를 받았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달란트를 사용하지 않고 땅에 그대로 묻어 두었다는데 있습니다.

그러면 누가 귀히 쓰는 그릇이 되는 것입니까? 바울은 21절에서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다’고 했습니다. ‘이런 것’이라고 한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19절에서 밝혀 주는 대로 불의에서 떠나라고 말한 그 불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릇이 훌륭해도 그 그릇이 깨끗지 못하면 곧 더러우면 귀히 쓸 수가 없는 것입니다. 25년 전의 일이지만 송월동에 거주하고 있을 때, 근처 어느 교회에 다니는 권사님 한 분을 잘 알고 지냈습니다. 그 분에게 겉보기에 인품과 사람됨이 훌륭해 보이는 아들이 있습니다. 미남이고 음악에 천재성이 있어서 교회에서 성가대를 지휘한 일이 있으며 좋은 신학대학까지 졸업한 아들입니다. 그런데 이 아들이 목사가 되는 일을 싫어했습니다. 여자를 데리고 집집을 돌아다니며 문간에서 기다리는 일, 구질구질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청년이 어떤 일을 하게 된 것입니까? 소매치기, 국제 소매치기가 된 것입니다. 보기에는 금 그릇으로 보였지만 그릇이 깨끗지 못하고 더러우니까 주의 종이 아니라 국제 소매치기로 쓰임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큰 것만을 좋아하면 안됩니다. 금이나 은그릇만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큰 것 받을 생각을 말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그릇 그대로, 그 그릇을 귀히 쓰는 그릇으로 닦아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깨끗케 하면 주인이 귀히 쓰는 그릇으로 사용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회개하는 생활로 정결하게 하고 순종하는 생활로 주인의 손 가까이 있게 되면 주인의 쓰심에 합당한 그릇이 되어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2. 천히 쓰는 그릇

집에서 아무리 값진 그릇으로 작만 해 놓은 그릇이라 해도 만약 그 안에 술 먹고 토한 더러운 오물이 담겨져 있다면 주인은 그 그릇을 쓰지 않습니다. 은으로 만들어진 좋은 쟁반인데 그것을 쓰려고 보니 그 안에 냄새 나는 음식 찌꺼기가 쌓여 닥을 수도 없을 정도로 말라 버렸다면 급한 용도에 쓰임 받을 그릇으로 사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 하면 그것 외에도 그 집에는 다른 그릇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비록 나무 그릇이나 질그릇이라 할지라도 자신을 깨끗하게 해 두면 주인이 그 그릇에 합당한 대로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한 그릇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주방입니다. 하나님은 교회에서 하시는 일이 대단히 많습니다. 그 하실 일을 계획하실 때마다 합당한 그릇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비록 질그릇 같은 존재라 해도 자신을 깨끗이 닦아 놓으면 하나님의 눈에 쉬 발견되어 주인의 쓰심에 합당한 그릇으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을 교회의 일꾼으로 쓰시는 것입니다.

결론 : 여러분은 큰집에 있는 그릇들입니다. 어떤 그릇입니까? 무슨 그릇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자기를 깨끗케 하시어 주인의 쓰심에 합당한 그릇으로 하나님의 손에 쓰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14) 그리스도인의 화평과 교제

(디모데후서 2:22-26)

바울은 디모데에게 22절에서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의 이 말은 하나님께 깨끗한 그릇으로 합당하게 쓰임을 받으려면 청년의 정욕을 피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23절 이하에서 그리스도인이 화평의 교제를 이루는 일에 필수적인 자세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의 · 믿음 · 사랑 · 화평을 좇으라

그리스도인 들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과 함께 교제를 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런 교제에 대하여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서로간의 교제가 필요합니다. 교제가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가정도 하나의 교제의 장소이며 사회의 모든 구조가 교제가 그 기초가 되어 있습니다. 교회 역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이 모임은 곧 교제를 전제로 합니다. 그런데 이 교제의 대상이 중요한 것은 우리가 누구와 교제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인격과 품위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은 자와 교제하면 어리석은 자 중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자와 교제하면 지혜로운 자 중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그 생활 자체가 교제의 틀 속에서 지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와 접촉하며 생활하느냐는 문제는 그 사람의 신앙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특히 신앙생활이 아직 어린 성도가 교회에서 신앙적으로 잘못된 생활을 하는 성도들과 자주 접촉하며 신앙적인 교제를 나누는 일은 그 사람의 신앙생활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지름길이 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전도하는 사람은 전도 받은 사람에게 신앙적인 본을 보여 주어야 하며 모범적인 신앙생활로 그 사람으로 자신의 신앙생활을 따라 올 수 있도록 자주 접촉하는 교제를 게을리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구와 교제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유익이 되는 것입니까?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하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사람이란 누구를 말하는 것입니까? 그 심령이 새로워진 사람을 말합니다. 정결하고 성실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는 사람을 말합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라고 다 교제할만한 그리스도인인 것은 아닙니다. 입으로는 주여 주여를 부르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는 사람들이 허다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믿음의 형제들과 교제하면서 우리가 취할 것은 무엇입니까?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고 했습니다. 의를 좇으라고 한 말은 올바른 행실과 신앙적인 대화, 순종을 뜻합니다. 믿음을 좇으라고 한 말은 하나님께 대한 의뢰와 거짓이 없는 믿음의 교제를 말합니다.

사랑을 좇으라고 한 말은 서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허물을 덮어 주며 용서해 주며 상대방을 존경하며 도와주는 교제를 말합니다.

화평을 좇으라고 한 말은 시기, 투기, 다툼을 버리고 이해하고 화목하고 넓은 마음으로 포용할 수 있는 교제를 말합니다. 모이면 주의 이름을 높이는 대화를 나누면서 모이면 기도하고 해어지면 주의 이름을 전하는 생활이 우리 몸에 습관화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모이면 다른 사람의 흉이나 보고 해어지면 게으름이나 피는 생활은 올바른 교제의 생활이 아닌 것입니다.

2.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바울은 디모데에게 23절에서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삼가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고 주의를 환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다투는 일은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이 그 원인이 된다고 했습니다. 러시아가 공산주의 혁명으로 망할 당시에 러시아 정교회 주교들은 그들의 모임에서 성경을 토론했는데 천사가 바눌 끝에 몇이나 앉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다투었다는 것입니다.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자들이 이 같은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일삼는 것입니다. 바울은 24절부터 하나님의 종들이 어떻게 맡은 사명을 이룰 것인가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종은 다투지 말아야 합니다. 교인들 앞에서 다투면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로 망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종은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온유해야 합니다. 자기를 낮추고 다른 이에게 관용하며 긍휼히 여길 사람을 긍휼히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종은 가르치기를 잘 해야 합니다. 늘 성경을 연구하는 자세가 필요하며 말씀을 준비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종은 참을성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종은 거역하는 사람들을 징계하되 온유함으로 해야 합니다. 사랑으로 징계하여야 하며 하나님의 자비로 회개할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결론 : 모든 그리스도인 들은 내가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를 받아 다른 사람이 나를 본받아 신앙생활에 유익함이 되도록 자기를 살피고 자신의 신앙 성장을 위해 힘써야 합니다.


디모데후서 3장 (15 - 16)

◆ 밤중소리 01-31 | VIEW : 425

(15) 말세에 고통하는 때

(디모데후서 3:1-5)

바울은 1절에서 디모데에게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른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세에 사람들이 저지르는 수다한 죄악을 열거하고 있는데 무려 19가지나 되며 이런 죄가 하늘에까지 사무쳐 결국 하나님의 심판이 내려진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1.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란 인류의 종말에 하나님이 내리실 환난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말세란 ‘마지막 날’을 가리킵니다. 그날은 인류가 심판을 받을 날입니다. 계16장에 나오는 일곱 대접 심판이 지상에 내려질 그런 시기를 말합니다. 습1장에서 경종해 주시는 대로 온 지면에서 악인들을 멸절시키는 그날을 말합니다. 이 날은 이 세상에 살아가고 있는 모든 인류의 죄를 최종적으로 심판하시는 날이 될 것입니다. ‘이 때가 반드시 오리니 네가 그것을 알라’고 바울은 경종해 주었습니다.

그러면 이 말세의 때에 이 지상에서 살아가는 인류들은 어떤 생활을 살아가는 것이겠습니까? 그들의 도덕적 타락상과 하나님 앞에 패역한 죄악을 바울은 자세하게 구분하여 경종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자의 때는 노아의 때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롯의 때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노아의 때에 대해서 성경에서 말씀하시기를 ‘죄가 세상에 관용했다’고 했습니다. 가득 찼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때의 죄악의 세상을 물로 심판하셨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은 하나님을 전혀 잃어버린 도성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의 불로 그 도성을 멸하셨습니다. 마지막 시대에 대하여 계18:5절에서 ‘그 죄는 하늘에 사무쳤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불의한 일을 기억하셨다고 했습니다.

2. 하늘에 사무친 죄가 어떤 죄인가?

그러면 이처럼 하늘에 사무친 죄란 어떤 것을 말합니까? 그것이 3장에서 보여주신 인간의 타락상인 것입니다.

(1)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사랑은 두 가지 원칙에서 지켜져야 하며 인간은 그 사랑 안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며 다른 하나는 이웃에 대한 사랑인 것입니다. 그런 데 인류의 종말에 이를수록 이 두 사랑이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자기를 사랑하는 시대가 되는 것입니다.

(2) 사람들은 돈을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버리고 자기를 사랑하게 된 원인이 바로 돈을 사랑한데서 온 것입니다. 그러나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했습니다.

(3) 사람들은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한다고 했습니다. 자긍이란 하나님 없이 내가 할 수 있다는 자기 신뢰를 말합니다. 교만이란 다른 이를 업신여기고 자기가 최고인줄로 자부하는 자기를 높이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훼방이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며 거역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4) 사람들은 부모를 거역한다고 했습니다. 부모에 대한 거역은 인간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계명 중에서 가장 무서운 죄악인 것입니다.

(5) 사람들은 감사하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모든 것을 주시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6) 거룩하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모든 행위가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것을 의미합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처럼 온 사회가 음란화 되어 패역한 사회를 이룰 것입니다.

(7)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고 자기 본위로 살아가는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원통함을 풀지 아니한다고 했는데 이는 분을 마음에 풀고 그것을 풀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결국은 큰 죄악을 만들어 냅니다.

(8)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참소란 고자질로 서로간 믿지 못하는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마귀의 본성이 참소라고 말씀해 줍니다. 절제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이성적 자제력을 상실해 버린 상태를 말합니다. 사납다고 했습니다. 용서나 관용이 전혀 없고 굶주인 맹수의 성품들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선한 것을 좋아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정욕의 충동에 의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9)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 보다 더 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들이 될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결론 : 이것은 인류의 종말에 있을 사회상인데 주로 믿음을 떠난 교회의 헝편을 말해 주는 경종인 것입니다. 주님은 이런 날에 인자 앞에 서도록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계18:5절에서 이르시기를 그들 악의 무리들 가운데서 나오라고 하셨습니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하셨습니다. 믿음으로 신부의 단장을 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16)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디모데후서 3:6-17)

바울은 6절 이하에서 진리를 대적하는 자들이 교회를 부패케 하는 모습을 보여 주면서 14절에서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목회자들 뿐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의 확신한 일에 거하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확신할 수 있는 길이 바로 성경에 있다는 사실을 밝혀 주고 성경을 배우고 확신한 믿음을 가지라고 한 것입니다.

1. 대적하는 자의 결국

6절에서 바울이 ‘저희 중’란 말은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들로 그 당시 가정에 다니면서 새로운 지식이라 하여 부녀자들을 가르쳤던 영지주의자들을 의미합니다. 영지주의란 인간의 지식을 중요시하는 이단으로써 이들이 말하는 지식이란 철학적 지식을 말합니다. 기독교를 하나님의 말씀에서가 아니라 철학적 지식과 결부시켜 이런 특별한 지식을 가진 사람들만이 최고의 믿음의 영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믿고 있는 바울 당시 사회적으로 유행했던 무서운 이단의 무리들입니다. 그 당시 가정에서도 많은 여자들이 이런 새로운 학문을 받아드리기 위해 선생들을 가정에 맞아 드렸으며 이들은 은밀히 집집을 찾아다니며 이런 지식을 가르치는 가운데 그 중에는 기독교를 믿는 가정의 여자들도 많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거짓된 선생들과 접촉하는 여자들을 향하여 바울은 어리석은 여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진리를 저버리고 솔깃한 철학적 지식에 매료되어 미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이 학문에 깊이 빠지면 빠질수록 더욱 무서운 죄 가운데 빠지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하게 되며 복음을 저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진리의 지식에 이르지 못하고 이 같은 이단에서 빠져 나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잘못된 지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여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진리를 대적하는 자들입니다. 마치 모세 당시 모세가 행한 이적을 흉내내어 거짓된 이적으로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했던 애굽의 술사들인 얀네와 얌브레처럼 진리를 대적하는 자들이니 이들은 결국 그들의 마각이 드러날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허망한 거짓된 진리를 가지고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어리석은 여자들을 유혹하는 이단자들이 있는데 이들 중 가장 극성을 부리는 무리들이 바로 여호와의 증인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공교히 꾸며 사람들로 잘못된 지식에 미혹을 받도록 하여 결국 그 함정에 빠지면 발을 빼 낼 수 없는 것입니다.

2. 경건자의 핍박

바울은 12절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자들은 반드시 핍박을 받으리라고 밝혀 주고 있습니다. 가정에서 가족들로 오는 핍박이 있습니다. 사회에서 직장에서 오는 핍박도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외식하는 자들이나 잘못된 신앙의 길을 따르는 무리들로부터의 핍박도 있습니다. 바울은 여러 곳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이 같은 핍박을 받은 것입니다. 이 같은 무리와 거짓 교훈으로부터 자신을 신앙적으로 지키는 일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확신한 일에 거해야 합니다.

성경은 뉘게서 배웠느냐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감 받은 하나님의 종으로부터 성경적으로 배워야 확신한 믿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디모데가 가지고 있는 확신한 믿음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기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15절에서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다’고 칭찬해 주고 있습니다. 디모데가 어려서부터 배워서 알고 있는 그 성경이 디모데에게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가 있게 했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성경을 멀리하거나 읽기에 게을리 해서는 안됩니다.

성경은 믿음의 지혜를 주는 책입니다. 그 지혜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교훈하는 일에 유익한 책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가까이하여 그 성경에서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를 책망하는 일에 유익한 책입니다. 성경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책망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성경을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의 책망을 들을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바르게 하는 일에 유익한 책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잘못된 믿음, 잘못된 사상, 잘못된 생각이나 행실을 바르게 고쳐줍니다.

성경은 우리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책입니다. 의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가르쳐 주는 책은 성경밖에 없는 것입니다.

결론 :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책이기 때문에 성경만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로 온전케 만들게 하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에 온전케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능력과 감화력이 있고 심령을 새롭게 하는 능력이 성경에 있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4장 (17 - 19)

◆ 밤중소리 01-31 | VIEW : 609

(17) 바울의 엄한 명령

(디모데후서 4:1-5)

바울은 결론적으로 디모데에게 엄한 명령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 명령이란 말씀을 전파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라고 했습니다. 1,2절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니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고 했습니다.

1.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바울이 하나님 앞이라고 한 말은 만물의 주관자이시며 최종적인 심판주가 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권위를 나타낸 말이며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이라고 한 말은 하나님의 심판권을 집행하시는 아들의 권위를 나타낸 말입니다. 그리고 그 분은 반드시 나타나시며 그가 나타나신 바 되면 그의 나라가 세워지는데 죄인들에게는 이것이 심판의 표적이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소망의 실현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이 명하는 일에 있어서 왜 이같이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와 그의 나타나심과 그의 나라를 두고 하셨는가를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그리스도의 재림과 하나님의 심판과 하나님의 나라의 실현은 반드시 있으니 내가 명하는 자를 너는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라는 뜻으로 나타내신 경종인 것입니다.

말씀을 전파하라는 명령은 하나님의 종들이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지상 명령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전파되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일은 두 가지가 병행되어야 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선포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으로 그의 독생자를 보내신 일입니다. 이것은 복음입니다. 다음에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거역하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입니다. 이 두 가지가 겸존해야 진리가 되며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근래에는 그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의 메시지는 전하지만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은 죄인들의 심판에 대해서는 전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심판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심판의 설교를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3절과 4절에 나오는 말씀이 종말에 하나님의 말씀이 외면을 당할 것임을 예언해 주고 있습니다.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둔다’고 했습니다. 때가 이른다고 하는 그 때란 인류의 종말의 시기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 때에 사람들은 바른 교훈을 듣기 싫어한다고 한 것입니다. 농담조의 구수한 이야기, 만담조의 재미있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귀가 가렵다는 말은 얄팍한 세상적인 이야기에 솔깃해 하는 귀를 말합니다.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둔다고 했습니다. 세속적인 생활, 정욕과 탐심을 이루게 할 스승을 둔다는 말입니다. 이들에 대하여 예수님은 마24:48절에서 ‘악한 종’이라고 정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진리는 심각한 것으로 허탄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2.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런 사회적 상황에 동조하지 말고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고 했습니다.

경책이란 말은 책망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한 일에는 경책이 필요합니다.

경계란 주의를 환기시켜 주는 일을 말합니다. 늘 경계시켜 불순종의 자리에 이르지 말도록 붙들어야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권하라고 했는데 이 말은 권면을 의미합니다. 선한 일에 열심을 내도록 권면해야 하는 것입니다. 늘 기도하고 봉사하며 충성하도록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일들은 하나님의 종들이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실천해 나가야 할 일들입니다.

하나님의 종들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이 세 가지 요소가 빠진다면 이미 하나님의 말씀의 전달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들은 사람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전해야 할 것은 전해야 합니다. 허사인 것처럼 여겨져도 들을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겔3:27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듣기 싫은 자는 듣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들을 자는 들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듣지 아니할 자가 99명이요 들을 자가 한 명이라도 그 한 명을 위해 말씀이 전달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 바울은 결론적으로 너는 이런 풍조에 물들지 말고 모든 일에 근신하라고 했습니다. 고난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전도인의 일을 하라고 했습니다. 네 직무를 다하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이야 세상에 좋은 것 바라고 좇아가지만 우리는 참 소망을 바라보고 좀더 차원 높은 그리스도인의 생애를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18) 바울의 소망한 의의 면류관

(디모데후서 4:6-8)

바울은 이제 이 땅위에서의 자신의 생애가 거의 끝마쳐 감을 예감하고 있었습니다. 나이도 많이 들었거니와 자신의 죽음이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것인가에 대하여 예감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6절에서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고 했습니다.

1. 바울이 바라본 면류관

관제란 말은 자신의 몸 전체를 불살라 주님께 드릴 제물과 같은 것으로 바울이 순교의 제물이 될 것을 상징해서 한 말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를 사랑함에 자기의 고난과 죽음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이 일에 대하여 바울은 행20:22-24절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한 것입니다. 바울이 주님을 섬기는 생활은 순교자적인 생활이며 그는 관제와 같이 주님께 제물이 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어떤 인생을 살았으며 어떤 인생 길을 걸어간 것입니까? 바울은 내가 선한 싸움을 싸웠다고 했습니다. 바울의 전 생애는 선한 싸움을 싸우는 생애였습니다. 바울은 이 싸움을 위하여 내가 날마다 죽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선한 싸움은 믿음의 싸움으로서 육은 죽고 영으로 승리하는 영적 투쟁인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제일차적인 싸움이 전개됩니다. 그것이 아직까지 나와 가장 절친했던 육의 사람과 싸우는 일입니다. 육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얻지 못합니다. 육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합니다. 육은 우리로 그리스도인다운 생활을 할 수 없게 합니다. 그러므로 이 육의 사람을 속히 죽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싸움에 이미 들어간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그의 죽으심에 연합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그의 죽으심에 연합되었으니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은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로 인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분명 죄에 대하여 죽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와 같이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죄와 타협하지 아니하고 죄를 멀리하며 죄와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 가장 승리적인 방법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과 회개로 죄를 씻음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그의 부활과의 연합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들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시기 위한 것이며 우리는 그의 부활의 생명을 받은 것입니다. 그와 연합이 된 사람은 그가 소유하고 계시는 모든 것을 함께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광도 그리스도와 함께 받는다고 했습니다.

다음에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의 싸움에도 동참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받는 고난의 지극히 적은 것이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는 일은 놀라운 축복의 연합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이처럼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싸워야 할 세 가지 싸움이 있습니다. 죄에 죽는 싸움, 의에 동참하는 싸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싸움입니다. 이것을 바울은 선한 싸움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고백처럼 평생 이 싸움을 싸운 신앙의 투사였습니다.

2. 자기의 달려갈 길을 마친 바울

바울은 나의 달려갈 길을 마쳤다고 했습니다. 그의 달려갈 길의 최종점은 순교입니다. 그는 순교의 제물로 선한 싸움의 그의 생애의 달려갈 길을 마쳤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생애는 하나님 앞에 얼마나 값지고 얼마나 보배로운 생애였습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달려갈 길을 마치되 관제와 같이 그리스도 앞에 향내 나는 순교의 제물로 드림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삶의 길이었습니까?

바울은 믿음을 지켰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그의 전 생애를 믿음을 지키는 일에 전력을 쏟았습니다. 믿음은 지키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믿음을 지키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자기 인생의 종점에 와서 자신 있게 외쳤습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고 했습니다. 의의 면류관은 바울처럼 주를 위해 살아간 성도에게 주시는 영광스러운 상급입니다.

결론 : 바울은 이 상을 바라본 것입니다. 이 상을 푯대로 좇아가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그의 생애를 순교로 장식함에 의의 면류관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쾌재를 부른 것입니다. 이 상급은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동일하게 예비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달려간 그 길을 소망으로 달려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19) 바울을 버린 제자들

(디모데후서 4:9-22)

바울은 디모데후서를 마감함에 가장 가슴아픈 일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가 어려움을 당했을 때, 바울을 따랐던 제자들이 그를 버리고 떠난 사실에 대하여 말해 주고 있습니다.

1. 바울은 떠나 제자들

바울은 디모데에게 ‘저는 빨리 내게로 오라’고 했습니다. 바울에게는 자기를 도와 줄 진실한 일꾼이 필요했습니다. 바울이 그의 생애에 가장 곤경을 당하고 있었을 때 바울 곁에서 바울을 도우며 함께 일했던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다고 했습니다. 데미는 바울이 데마가 ‘나를 버렸다’는 말에서 바울 가까이서 바울을 도우며 주의 일을 했던 그의 동역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동역자란 어떤 역경이 찾아와도 함께 생사고락을 해야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같은 데마가 바울을 배반한 것입니다.

데마가 바울을 떠난 것은 바울과 함께 복음을 위해 격는 고난이 너무 심하여 감당하지 못했던 이유도 있었겠지만 바울의 말을 들으면 그가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 곁을 떠났다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씨 뿌리는 비유에서 돌밭에 떨어진 씨앗이 처음에는 기쁨으로 복음을 받아 드렸다가 말씀으로 인한 고난이 올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마지막 시대에 살아가는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할 수 없으면 그리스도에게 오는 환난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오히려 그 고난에 동참하는 일을 영광으로 여기는 믿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을 철저히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이 좋은 그리스도인들이 때로 혹독하리 만치 경제적으로 혹은 육신적으로 시련과 고통 속에서 어려움을 겪는 사실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집사님, 참 안됐어, 무엇인가 얻어맞을 일이 있었을꺼야’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은 것입니다. 큰 환난을 대비시키시는 하나님의 연단인 경우도 있습니다. 더 아름다운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시기 위한 훈련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게 하시어 더욱 소망 가운데 살아가게 하시며 하늘의 큰 상급으로 보상하시려는 하나님의 좋으신 섭리 가운데 그런 십자가를 짊어지고 살아가게하는 성도들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을 당하는 성도들을 가볍게 판단하거나 업신여기는 생각을 가지고 경멸하거나 무시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데마처럼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기가 짊어진 고난의 짐을 벗으려 한다면 이런 사람들은 헛된 믿음의 생활을 해 온 것입니다.

바울의 곁을 떠난 바울의 제자는 데마 혼자 뿐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게도 있었는데 이 사람은 갈라디아로 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14절에서 특별히 한 인물에 대하여 분노하고 있습니다. 이 자의 이름이 알렉산더란 사람입니다. 이 자는 처음에 바울을 따라 다니며 복음 사업에 종사하며 바울을 도왔던 자였었는데 그 후, 진리에서 떠나 급기야 바울을 대적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바울은 이 자에 대하여 딤전1:19절에서도 언급해 주고 있는데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한 자’라고 정죄하고 있습니다. 한때 바울과 함께 소망을 가지고 복음에 동역했던 주의 일꾼이 바울을 배신하여 이제는 바울에게 악착같이 해를 끼치는 사탄의 일꾼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일을 하는 일에 있어서 참으로 조심하고 올바른 길을 택하고 진리에 굳게 서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런 곤욕 가운데서 깊은 탄식을 하면서 16절에서 무엇이라 했습니까?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느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환난을 이기지 못하는 믿음은 가라지의 믿음인 것입니다. 우리는 마5:11절에서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말씀 끝에 하신 축복의 말씀을 깊이 새겨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리는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니라.’


2. 주님의 도우심

이처럼 많은 사람들은 고난 중에서 다 바울을 버리고 그 곁을 떠나고 진리를 대적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자리에 떨어졌지만 바울이 힘을 얻고 위로 받은 것은 17절에서 주님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셨다고 했습니다.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세상을 이기신 능력의 주님이 내가 어려움을 당할 때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해 주시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데마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알렉산더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물질의 복도 좋지만 환난을 이기게 하시는 연단의 복이 더 좋은 복인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