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新約]강해/◆ 바울서신 강해-1

★빌립보서 1-4장[옥중서신]

영국신사77 2020. 4. 13. 23:20

빌립보서 차례

빌립보서 1장 (1 - 9)

(1) 그리스도 예수의 종(빌립보서 1:1-2)

(2) 바울의 감사와 기쁨(빌립보서 1:3-6)

(3) 빌립보 교회와 바울과의 관계(빌립보서 1:7-8)

(4) 빌립보 교회를 위한 바울의 기도(빌립보서 1:9-11)

(5) 매임이 복음의 진보가 된 이유(빌립보서 1:12-18)

(6) 바울의 간절한 소원(빌립보서 1:19-21)

(7) 바울의 생사관(빌립보서 1:22-26)

(8) 복음에 합당한 생활(빌립보서 1:27-28)

(9)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목적(빌립보서 1:29-30)


빌립보서 2장 (10 - 16)

(10) 그리스도인의 생활 지침(빌립보서 2:1-4)

(11) 그리스도의 영광(에베소서 1:20-23)

(10) 그리스도인의 생활 지침(빌립보서 2:1-4)

(11)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빌립보서 2:5-11)

(12)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립보서 2:12)

(13)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는 하나님(빌립보서 2:13-14)

(14) 흠이 없고 순전하라(빌립보서 2:13-18)

(15) 빌립보 교회를 향한 바울의 간절한 바람(빌립보서 2:19-24)

(16)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빌립보서 2:25-30)


빌립보서 3장 (17 - 23)

(17) 세 가지 삼가야 할 일(빌립보서 3:1-2)

(18) 바울이 말하는 할례당(빌립보서 3:3)

(19) 무엇이 유익한가(빌립보서 3:4-9)

(20) 바울이 소망한 부활(빌립보서 3:10-12)

(21) 바울의 천국 경주(빌립보서 3:13-16)

(22) 나를 본 받으라(빌립보서 3:17)

(23) 바울의 눈물의 호소(빌립보서 3:18-21)


빌립보서 4장 (24 - 31)

(24) 주 안에 서라(빌립보서 4:1)

(25)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빌립보서 4:2-3)

(26) 항상 기뻐하라(빌립보서 4:4)

(27) 관용을 베풀라(빌립보서 4:5)

(28) 감사함으로 구하라(빌립보서 4:6-7)

(29)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비결(빌립보서 4:8-9)

(30) 자족하기를 배운 바울의 생애(빌립보서 4:10-13)

(31) 하나님께 풍성한 대로 채우시리라(빌립보서 4: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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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1장

◆ 밤중소리 11-06 | VIEW : 2,299


(1) 그리스도 예수의 종

(빌립보서 1:1-2)

서론 : 오늘 새벽부터 강해 할 빌립보서는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보낸 옥중 서신 중 하나입니다. 옥중 서신이란 바울이 복음을 위해 감옥에 갇히는 어려움을 겪었는데 그 옥중에서 기록하여 인편으로 보낸 서신을 말합니다.

1. 빌립보 교회

빌립보 교회는 바울이 두번째 전도 여행시 아시아 비누기아 땅으로 가고자 했을 때, 환상 중에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바울에게 청하여 마게도냐로 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환상을 본 후, 빌립보에 이르러 복음을 전하므로 세워진 교회입니다. 빌립보는 희랍 북쪽에 있는 마게도냐의 한 도시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했을 당시에 이 빌립보는 로마의 식민지였습니다. 이 도시는 원래가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되는 필립에 의해 재건된 도시이며 그 이름을 따서 빌립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곳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박해를 받게 되어 옥에 갇히게 된 일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 빌립보 감옥에 갇혔을 때, 그곳 감옥의 한 간수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 온 집안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한 일이 있었으며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바울은 이 빌립보 교회에 남다른 관심을 쏟았으며 빌립보 교회에서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하여 많은 물질적 도움을 주기도 했습니다. 이 서신은 에베소, 골로새, 빌레몬서 등과 같이 로마의 옥중에서 쓰어진 것으로 전해져 오고 있으며 62년경이라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2. 그리스도 안에서의 바울의 신분

바울은 1절에 나온 말씀처럼 스스로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바울이 여기서 종이라고 말하고 있는 종의 위치는 주인과의 관계에서 절대적인 순종에 두고 있습니다. 바울은 롬 6:16절에서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고 했습니다.

(1)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피로 값주고 사셨으니 자신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종의 신분임을 자임하고 종의 위치에서 철저하게 순종한 것입니다. 종에게는 내 소유가 없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이 자신을 소유한 그 주인의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에게 팔린 몸이 되었다고 믿었으니 철저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종인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종으로 그의 온 생애를 바쳤고 그 주인을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 바쳤습니다.

(2) 바울은 충성스러운 종이었습니다.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했습니다. 충성스럽게 그의 생애를 자신의 상전이신 예수님을 섬겼습니다.

(3) 바울의 생애는 오직 그리스도만을 위한 삶을 살았습니다. 바울에게는 그의 마음에나 안중에나 다른 존재는 없었습니다. 바울이 얼만큼 그리스도를 존귀히 여겼는지 바울은 3:8,9절에서 자신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 버리고 배설물로 여겼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그의 생애를 통해서 살든지 죽든지 오직 그리스도의 영광만을 추구하는 생애를 살아갔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에게 얽메인 생활로 그의 온 생애를 보냈습니다. 이같은 태도야말로 종의 생활 태도인 것입니다.

(4) 바울의 이같은 생애는 그가 그리스도와 함께 누릴 수 있는 영광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이 종의 생활을 마감하려는 그의 생애의 마지막 시점에 가서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에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바울은 롬 8장에서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영광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스스로 종의 길을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결론 : 그리스도 예수의 종은 종의 신분에 있어서 죄에 종과 상대적인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종은 그리스도의 소유로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는 축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우리도 바울과 같은 겸비한 신앙으로 스스로 그리스도의 종의 위치에서 충성하여 그 영광을 누리는 바울과 같은 소망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바울의 감사와 기쁨

(빌립보서 1:3-6)

서론 :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퍽 사랑했습니다. 이처럼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사랑하게 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는데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바울이 복음을 전한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 안에서 성도들간의 교제를 계속해 왔다는데 있었습니다.

1.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위해 기쁨으로 기도한 이유

3절부터 말씀해 주는 바울의 편지는 듣는 이로 하여금 너무나 감격스러운 바가 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했다고 했습니다. 왜 이런 감사가 나왔을까요?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의 교제가 복음 안에서 아름답게 지속되고 있다는데 그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같은 교제는 물론 빌립보 교회와 바울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위해 많이 간구 했는데 그가 간구 할 때마다 항상 기쁨으로 간구 했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을 생각할 때 목회자가 하나님께 감사하고 목회자가 성도들을 위해 기도할 때 항상 기쁨으로 할 수 있다면 목회자나 성도들이나 참으로 복된 만남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목회자가 성도들을 생각할 때 복음 안에서 맺어진 끈끈한 사랑이나 정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가로막힌 담이 쌓여 있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가 나오기에 앞서 '저 사람은 어떻게 다루어야 하지?' 하는 걱정부터 앞서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역시 그렇습니다.

목회자가 성도들을 위해 하나님께 감사할 수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교인들을 위해 기도할 때, 그들이 당면한 문제들을 가지고 기도하노라면 기쁨이나 감사보다 늘 불안한 가운데 목회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할 대상자 중의 거의 모두가 주일 예배에 출석하지 않아 기도하고, 생활이 어려워서, 병들어서, 교회 생활을 20여 년간 계속하고 있으면서도 온전한 11조 생활 하나 못하는 연약한 신앙이어서 걱정, 이 걱정, 저 걱정 때문에 감사라고는 찾아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은 어떻게 이같은 기도를 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까?


2.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

바울이 지적한 대로 복음에서 교제한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것은 교회 생활에서 나타낸 성도들 간의 진실한 사랑의 교제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이같은 교제는 바울이 교회를 개척한 초기부터 시작된 일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복음을 위해 옥에 갇혀 있는 그 가운데서도 이런 그들의 교제가 계속된다고 하는 소식을 듣게 되어 바울의 마음속에 흐뭇함과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넘쳤던 것입니다. 복음 안에서의 교제란 성도들 간에 서로 사랑하는 사랑 안에서의 생활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새 계명이 바로 이 사랑이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노니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바로 이같은 사랑의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랑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를 섬기며, 그리스도를 순종하는 일에 하나가 되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 협력하여 주의 일에 힘쓰고 서로 기도해 주고 협력해 주며 도와주는 일에 하나가 된 사랑의 교통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바울은 이런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생활을 보고 듣고 생각할 때마다 감사가 나왔고 기쁨으로 기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3. 바울의 확신

그러면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이같은 착한 일은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바울은 6절에서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있음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착한 일이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일을 말합니다. 빌립보 교회 성도들처럼 복음 안에서 교제하는 사랑의 생활을 말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 후, 변화된 특징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의 생활 가운데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일일 것입니다.

이 생활이 새롭게 변화된 그리스도인의 생활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생활을 이루게 하시는 이는 누구이십니까? 내 안에 내주 하시는 성령의 역사이신 것입니다. 바울은 이처럼 우리 가운데 들어오셔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성령께서 세상 끝날까지 내 안에 계셔서 우리가 주님을 만나는 그날까지 이같은 아름다운 일을 계속하실 것이란 사실을 바울은 밝혀 주고 잇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가 성령께 의뢰하고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살려고 하는 믿음만 가지면 우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그이가 세상 끝날 까지 우리 안에서 그것을 이루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내주 하시는 성령을 힘입어, 빌립보교회 성도들처럼 복음 안에서 성도의 교제를 계속할 수 있는 믿음의 생활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빌립보 교회와 바울과의 관계

(빌립보서 1:7-8)

서론 :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이처럼 아름답게 평가하는 일이 바울에게는 마땅하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너희가 내 마음

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복음 사역에 있어서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바울과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되었

다고 했습니다. 이같은 바울의 찬사는 빌립보 교회에 대한 바울의 전적인 신뢰를 나타낸 말입니다.


1. 바울과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된 빌립보 교회

바울이 7절에서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너희가 내 마음에 있다고 한 말은 놀라운 사랑과 신뢰의 표현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과 멀리 떨어져 있을 동안에도 그리고 복음을 위하여 옥에 갇혀 있는 괴로움 중에서도 너희가 내 마음에 있었다고 했습니다.

(1) 바울은 빌립보 교회가 바울과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계 2장에서 주님은 버가모 교회성도들이 안디바의 순교의 자리에서도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했다고 칭찬해 주셨습니다. 복음을 위하여 바울이 핍박을 받으며 옥에 갇혔을 때, 빌립보 교인들은 바울을 외면하지 않고 오히려 그 은혜의 일에 함께 참여한 것입니다.

그들이 바울과 함께 은혜의 일에 참여했다는 말은 바울이 어려움을 당할 때 바울을 배신하지 않고 오히려 위로해 주고 기도해 주며 바울이 필요로 하는 것을 챙겨 주므로 바울의 마음에 기쁨을 준 일을 말합니다. 그리고 은혜에 함께 참여했다는 말은 바울이 복음을 위해 받는 고난을 자신들이 받는 것으로 알고 바울을 더욱 사랑했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당할 일을 바울이 당한다고 생각하면서 바울의 고난에 마음으로 동참하고 위로해 주었던 것입니다.

(2) 그리고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하는 일에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바울과 함께 참여하는 자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이단에 대한 변론에 있어서, 핍박자의 핍박에 있어서, 반대자의 공격에 있어서 한결같이 바울 편에 서서 믿음에 동요되지 않고 바울과 함께 공동 보조를 취하므로 빌립보 지방에 복음을 확정시켜 놓은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내 양은 내 음성을 듣고 나는 그들을 안다"고 하셨습니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야 하는것입니다.

해안가에 수천 마리의 팽퀸이 제각기 소리를 내어도 어미를 기다리던 새끼들은 그 많은 팽퀸 중에서 그 수다한 목소리를 구별하여 어미를 찾아가는 것처럼 목자의 음성은 진리이며 진실성이 있기 때문에 양들은 그 음성을 알아듣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양이 아닌 자는 결코 주님을 따르지 아니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도 목자

의 음성을 따르지 않고 도적이나 이리의 음성을 잘못 듣고 따라가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그러나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바울이 들려준 복음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바울과 함께 변명함과 함께 확정한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증거한 바울의 사랑

8절에서 바울이 증거 하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대한 바울의 진실한 사랑은 놀랍고 마음이 뭉클할 정도로 뜨거운 것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에는 사모함이 뒤따르는 것입니다. 이같은 목자의 사랑은 여인의 사랑보다 오히려 한 단계 더 높은 사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바울에게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그 같은 사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자신의 사랑이 결코 거짓이 아니란 사실을 하나님이 내 증인이 되신다는 말로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의 사랑은 입으로 하는 사랑이 아니라 바울의 뜨거운 심장으로 하는 사랑인 것입니다. 바울의 심장은 그리스도의 심장을 심어 놓은 사랑의 심장이었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어떤 처지에 있었던지 자기를 저버리지 아니하고 고난에도 함께 참여해 주고 복음의 투쟁에도 함께 참여해 주고 매이는 자리에까지 함께 참여해 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사랑을 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사랑이 바울의 심장 깊은 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바울은 그리스도의 심장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이러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사랑이 사랑을 받는 사람의 심장에 박히고 또 사랑을 주는 사람의 심장에 박히는 사랑을 해야 합니다.


결론 : 교회의 목자와 교인들 간에 사랑하는 마음, 사모하는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나타내시는 사랑하심과 사모하는 마음과 같이 간절하다면 그 교회는 참으로 복이 있는 교회입니다. 우리 신생교회도 주 안에서 이런 교회를 이룰 수 있기를 바랍니다.


(4) 빌립보 교회를 위한 바울의 기도

(빌립보서 1:9-11)

서론 : 빌립보 교회 성도들과 바울과의 관계는 깊은 사랑으로 맺어졌습니다. 특히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자신에게 나타낸 사랑을 잊을 수 없었으며 이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하여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들을 위해 간구 할 때마다 기쁨으로 간구하여 항상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자기 마음에 담아 두었습니다. 바울은 이같은 빌립보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 그의 기도의 제목은 빌립보 교회가 온전한 가운데 더욱 성장하여 그들이 결국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위해 기도한 것입니다.


1. 사랑과 지식의 풍성을 위해 기도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사랑이 풍성케 하심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픙성 해야 합니다. 빌립보 교인들의 사랑은 칭찬할 만 했지만 그러나 그러스도 안에서의 그들의 사랑은 더욱 성장해야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분량에까지 이르라고 말씀해 줍니다. 우리의 사랑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부족에 대해 알아야 하고 사랑의 생활에 큰 관심을 두고 사랑 안에서 자랄 수 있도록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해 주시기 때문에 늘 겸손하고 회개하는 심령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면 그의 도우심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이 성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우리가 사랑할 때 사랑 안에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 우리의 사랑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줍니다. 그래서 사랑은 사랑을 나타낼수록 더욱 풍성하게 자라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랑을 자라게 하는 뿌리는 무엇입니까? 9절에서 이르기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라고 말씀해 줍니다. 지식과 총명이 우리의 사랑을 풍성하게 한다고 한 것입니다. 사랑에는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지식이 따르지 않는 사랑은 외식에 흐르게 됩니다.

지식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사랑의 방법이 있습니다. 그 방법을 따라 살아 갈 때 우리의 사랑은 점점 풍성해 질 수 있습니다. 총명은 그리스도인의 하나님의 지식을 따라 결정하고 행동하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형제들에게 나타내는 사랑에 지식과 총명이 들어가면 점점 더 풍성한 단계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지식이 없으면 사랑도 없고 총명이 없으면 사랑을 제때에 나태 내지 못하므로 사랑의 가치를 발휘할 수 없는 것입니다.


2.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기 위해 기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가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기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지극히 선한 것이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분병하는 생활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버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잘 분별하여 그 뜻을 따라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성별된 생활을 하려면 먼저 내 뜻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하며 악한 것과 선한 것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하며 빛과 어두움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육적인 것과 신령한 것을 분별치 못하는 생활을 하면 결국 분별력이 약해져서 세상에 동조하게 되고 육체의 생각에 동화하는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음에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그 신앙을 가지고 이를 수 있기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신앙은 지속성이 있어야 하며 사랑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지속적인 사랑의 생활을 하려면 두 가지 조건을 따라야 합니다. 하나는 진실한 믿음에서 나온 사랑이어야 합니다.

거짓된 믿음이나 진실치 못한 사랑은 얼마 안가 들통이 납니다. 거짓은 지속성이 없기 때문에 그 본체가 들어 나는 것입니다. 다음에 죄가 없어야 합니다. 죄는 믿음도 사랑도 무참하게 헐어 버립니다. 적은 죄가 큰사랑을 넘어뜨립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죄를 간직하지 않도록 힘써야 하며 혹 죄를 범했을 때는 곧 회개하는 생활을 통해서 그 죄가 믿음과 사랑의 대적 자가 되지 않도록 무력화 시켜야 합니다.

결론 : 바울은 11절에서 의의 열매가 가득하기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의의 열매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맺어집니다. 주님은 참 포도나무이십니다. 가지가 나무에 붙으면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생활은 결국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가장 위대하고 아름다운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는데 있습니다.


(5) 매임이 복음의 진보가 된 이유

(빌립보서 1:12-18)

서론 : 그리스도인이 당하는 모든 일에는 분명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바울이 옥에 갇혀 매임을 당한 일이 인간의 생각으로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 실패한 것같고 

복음을 전하려는 바울의 계획에 큰 차질을 가져온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아니했습니다. 

바울은 이 일에 대하여 12절에서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고 말해 줍니다.


1. 바울의 매임에서 얻은 유익

13절에서 바울은 자신의 매임을 통해서 그 결실이 새로운 장소에서 놀랍게 나타난 사실에 대하여 말씀해 줍니다.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바울의 매임으로 인하여 그에게 새로운 복음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다고 한 것입니다. 바울이 갇힌 곳이 로마였었는데 시위대에 속한 로마 군병이 바울을 감시하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바울이 이처럼 신체적 부자유 속에 밖으로 나가 복음을 전할 수 없는 처지에 있었지만 바울이 갇혀 있는 그 안에도 바울이 복음을 전파하는 일로 인하여 구원을 받아야 할 하나님의 백성들이 많이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옥에 갇히는 일로 그는 그 일을 감당한 것입니다. 바울은 또한 14절에서 자신의 매임이 가져 온 유익에 대하여 자기가 복음으로 매인 일로 형제들 중 많은 수효가 바울을 신뢰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바울을 신뢰하게 되었다는 말은 바울의 매임으로 바울이 정말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임을 증거해 주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로마 교회의 성도들이 바울이 전한 복음에 신뢰를 보냈다는 사실을 밝혀 줍니다. 주님은 거짓 목자는 이리가 오면 양을 버리고 도망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복음을 위해 갇히는 자리에도 들어간 이 사실에 대하여 바울에게 신뢰를 보낸 것입니다. 그 결과 바울과 함께 복음을 전했던 성도들이나 바울의 사도직에 의심을 가졌던 자들도 이제 바울의 복음에 신뢰를 보냈을 뿐 아니라 바울에게 들은 복음을 겁없이 담대함으로 전파하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사실이 자신의 매임에서 온 것으로 여기고 자신의 매임이 오히려 복음의 진보가 되었다고 감사했던 것입니다.


2.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두 무리

바울은 15절 이하에서 복음을 전파하는 두 무리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한 무리는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고 또 한 무리는 투기와 분쟁으로 그리스도를 전하는 무리들인데 이들 두 무리들이 순전한 마음으로 전하건, 혹 순정치 못한 뜻으로 전하건 그들이 전하는 그리스도의 복음에는 잘못이 없었기 때문에 어찌되든 전파되는 것이 그리스도였으므로 이로 인하여 바울은 기뻐하고 기뻐하노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이곳에서 말한 순전하다 순전치 못하다는 말은 복음의 내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바울에 대한 그들의 태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로마 교회에는 기존의 지도층에 의해 교회가 운영되는 기존 파가 있었고 바울을 따르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매임을 전후하여 이들이 복음을 전하는 열의가 더욱 뜨거워졌는데 바울은 바울의 매임으로 인하여 바울을 더욱 신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하게 전하게 된 성도들이 바울을 따르는 무리들로 바울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반대의 경우는 바울과의 관계에 있어서 투기와 분쟁으로 갈라졌는데 이들에 대하여 바울은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이단자들이 아닙니다.

그리고 바울의 복음을 비난하는 자들도 아닙니다. 다만 교회의 분쟁과 바울에 대한 투기하는 마음으로 바울에게 등을 돌렸을 뿐입니다. 바울은 이들에 크게 개의치 아니한 것은 이들이 전하는 복음도 그리스도였으므로 나무랄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분리되거나 분쟁으로 갈라졌을 경우, 양자간에는 서로 시기하는 마음이나 투기하는 마음으로 전도에 경쟁이 붙고 열심을 품어 복음을 전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들의 관계도 이러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같은 방법의 전도는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에는 유익이 있으나 이들의 복음을 전하는 자세에는 문제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법은 아닙니다.


결론 : 이처럼 순전치 못한 마음으로 복음을 전한 무리들은 자신들의 열심과 복음 전함이 바울에게 괴로움을 줄줄 알았지만 바울은 어떤 형태로 전달되었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는 일에 대하여 기뻐하고 기뻐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우리들도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으로 기뻐하는 바울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6) 바울의 간절한 소원

(빌립보서 1:19-21)

서론 : 바울은 자기가 당하는 이 모든 일들이 빌립보 교인들의 기도를 끌어내고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어 바울의 구원에 이르는데 크게 유익이 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19절에서 "이것이"라고 말하는 이것의 대상은 아직까지 바울이 말한바 복음을 위해 자신이 매임 받은 일과 매임 받은 그 가운데서도 시위대 안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

을 전하게 되고 로마 교회 성도들이 바울이 당한 매임에 자극을 받아 바울을 더욱 신뢰하게 되고 겁 없이 담대히 복음을 전하기에 이르게 된 일 등, 그리고 바울을 영접하지 아니했던 무리들이 바울을 괴롭히려는 마음으로(바울이 전하지 않아도 자기들도 전도할 수 있다고 하는 시기와 투기로) 그리스도를 증거하지만 여하튼 예수 그리스도가 널

리 전파되는 이 일이 바울에게는 함 없이 기쁜 일이었으므로 바울은 이 모든 일들로 인하여 자기의 매임이 자신에게 유익이 되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1. 바울을 위한 간구와 성령의 도우심

바울이 19절에서 "이것이 너희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내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안다"고 한 말 중에 내 구원이란 말은 일반적인 구원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종국적인 구원으로 하나님 앞에 영화롭게 설 수 있는 영광을 의미해 주는 말입니다. 바울은 이 구원에 이르는 소망에 대하여 딤후 4:7,8절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라"고 한 것처럼 바울이 소망 중에 바라는 면류관의 상급을 의미해 주는 말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천국에 올라가 주님 앞에 서기까지 우리의 생애는 구원에 이르는 과정입니다. 바울처럼 이같은 최종적인 구원과 그날에 받을 영광의 면류관을 바라보고 복음을 위해 매임을 당하는 일도 기뻐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당하고 있는 어려움으로 인하여 빌립보 교인들이 자기를 위해 간절한 간구를 듣게 되었으니 바울은 자신이 당하는 육신의 괴로움보다 오히려 그런 중에 듣게 되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간구를 더 기뻐한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바울이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이 바울을 도와주시므로 바울은 이같은 일로 인하여 구원에 이르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2. 바울의 소원

바울은 20절부터 그의 간절한 소원을 고백하고 있는데 그것은 '자신의 삶이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는 것과 살던지 죽던지 자기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 그는 새로운 인생관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1) 바울은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한" 생애를 살아 갈 것임을 다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부끄럽지 아니하다는 말은 도덕적으로 흠 없는 생활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아니한 생활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도덕적 기준은 나타난 행위에 두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생활 기준은 바울처럼 하나님께 부끄러운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일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닌 것입니다. 바울은 신앙적인 결단을 내리고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고 올바른 생활로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간 것입니다.

(2) 다음에 바울은 그의 생사관을 뚜렷하게 세웠습니다. 바울은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한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돌본 것이 아니라 자신은 어찌되든 자기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가 존귀히 여겨지면 그것으로 가장 큰 기쁨으로 삼겠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에서 아마도 복음을 전하는 일로 인하여 엄중한 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이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아 혹 사형이나 중형이 선고되더라도 그런 일에는 개의치 않고 다만 자기 몸에서 그리스도만 존귀히 나타낼 수 있다면 그 이상 바랄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결론 : 바울은 21절에서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고 말씀해 줍니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란 말은 바울이 오직 그리스도만을 위한 삶을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바울의 인생의 목적이 오직 그리스도뿐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위해 죽는 일도 그의 삶의 목적을 이루는 일이기 때문에 후회할 것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바울이 원하는 바였습니다. 우리도 바울 같은 인생관을 가지고 바울과 같은 생애를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7) 바울의 생사관

(빌립보서 1:22-26)

서론 : 바울은 삶과 죽음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아마 자신이 로마에서 어떤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할까 생각하면서 그러나 더 삶을 누리면서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는 일이 교회를 위해 더 유익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저버릴 수 없어 이 둘 사이에서 고민한 것처럼 보입니다. 23절에서 "내가 이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1. 바울의 생사관

바울은 죽음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죽는 것도 자기에게 유익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바울과 같은 생사관을 가져야 합니다. 죽음은 인생의 종식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와의 만남이요 하나님이 약속하신 새로운 세계에서의 새로운 생활의 시작입니다. 바울은 하늘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상급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나라에서 누릴 무한한 영광을 바라본 것입니다. 그는 자기를 위해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다고 확신했습니다.

바울처럼 죽음 후에 들어갈 새로운 세계에 대한 믿음과 그곳에서 받을 영광스러운 상급의 면류관을 바라볼 수 있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같은 믿음의 사람들은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순교의 자리에서도 결코 목숨을 구하려는 생각을 갖지 아니합니다. 이들에게는 분명한 생사관이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육신으로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도 무의미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내 일의 열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받을 상급과 하늘에서의 영광은 오직 살아서 이 땅에서 주를 위해 헌신한 열매로 오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이 땅에서 산다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아직까지 하늘의 상급을 위한 많은 열매를 맺었지만 그는 더 많은 열매를 맺으려는 욕심을 가졌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믿음의 선한 싸움은 계속적인 것이었으며 중단할 수 없는 중요한 과제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살아가는 모든 것을 오직 이같은 하늘의 상급과 연결시켜 그 일에만 온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우리들도 바울처럼 흘러가는 세월을 안타까이 여기면서 부지런히 많은 열매를 맺는 생애를 살아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전 15장 마지막 절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주를 위해 수고하는 우리의 수고는 결코 헛됨이 없다고 강조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몸이 건강할 때 힘써 주의 일에 헌신해야 합니다. 우리는 일할 수 있는 환경이 주어졌을 때 그 기회를 놓치지 말고 온 정성과 심혈을 기우려 주의 일에 충성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시간이 생겼을 때 그 시간을 무위하게 보내지 말고 주를 위해 바쳐야 합니다.


2. 바울의 욕망

23절에서 내가 이 두 사이에 끼였다고 했습니다. 바울의 생각에는 차라리 몸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지내는 이것이 좋기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나 여러 곳에서 바울의 가르침을 받고 주 안에서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을 위해서는 더 오래 사는 것이 유익할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왜냐 하면 바울이 그들을 돌보아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의 마음의 생각보다 더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 세상에 더 남아 있기를 원하게 된 것입니다.

24절에서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고 말하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바울에게는 빌립보 교회나 자신이 개척한 여러 교회 성도들의 신앙이 성장하고 그들이 주 안에서 소망 가운데 살아가는 소식을 듣는 것을 큰 기쁨으로 알고 살았습니다. 바울은 그것이 결국 자신의 면류관과 연결되는 것으로 여겼으며 바울은 주 안에서 너희가 곧 내 면류관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빌 4:1절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고 부르고 있습니다.


결론 : 바울의 생사관은 참으로 위대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아름다운 생사관을 가지고 살아간 것입니까? 움직일 수 없는 확실한 믿음에 그 바탕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진리의 말씀에 굳게 서서 바울과 같은 생사관을 가지고 남을 생애를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8) 복음에 합당한 생활

(빌립보서 1:27-28)

서론 :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할 것을 강조해 줍니다. 바울이 이 문제에 대하여 강조하는 이유에 대하여 성도들간 복음을 위하여 협력하는 일과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이 말은 그리스도인이 신앙 생활에 협력하지 못하고 자기에게 대적하는 자에게 담대하지 못하는 이유는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고 성도들이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못하기 때문이란 사실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1. 복음에 합당한 생활이 왜 필요한가?

그리스도인이 가장 유념해야 할 요긴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복음에 합당한 생활입니다. 복음을 믿고 구원을 받은 그리스도인이 자기가 믿고 있는 복음과 자기의 생활이 합치하지 못한다면 이것이야말로 모순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복음에 합당한 생활이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복음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생활을 말합니다. 복음에 있는 말씀과 우리의 생활이 하나가 되어야 하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하나가 아니라 둘이 될 때, 그 사람은 복음을 욕되게 하는 사람이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믿음은 진실성이 결여된 믿음인 것입니다. 거짓된 믿음인 것입니다. 이같은 믿음을 가지고서는 대적들 앞에서 패할 수밖에 없으며 성도들이 한 마음과 한뜻을 가지고 복음을 위하여 협력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들을 비방하는 원수들로부터 비방을 듣게 되고 성도들끼리 다툼과 시기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1) 그리스도인에게 열매 없는 이유는 그의 생활이 복음에 합당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활 따로 말씀 따로 서로 분리하게 되면 그런 그리스도인에게는 열매란 찾을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면 우리의 생활도 그 말씀 안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순종은 곧 행함을 말하는데 야고보 사도는 행함이 없는 믿음을 죽은 믿음이라고 말했습니다.

(2)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못하면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순종을 못하고 조금만 순종하면 그 사람은 구원의 확신을 조금만 가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순종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담대한 믿음으로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으며 누구에게도 자기의 구원을 증거 할 수 있습니다.

(3) 그리스도인이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못하면 신앙의 성장이 전혀 없습니다. 나는 왜 신앙적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늘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으로 살아가는 것일까? 그 원인을 알기 위해 고민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그 원인이 자기 자신이 복음에 합당한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4) 복음에 합당하 생활을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일을 만나거나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 할 때 믿음으로 처리하지 못합니다. 믿음은 순종에서 싹틉니다. 순종 생활은 그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의 응답을 받습니다. 순종한 그대로 축복을 받습니다. 그러나 순종이 없는 사람은 말씀을 알고만 있을 뿐, 말씀의 체험이 없기 때문에 무슨 일이든지 믿음으로 행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인의 담대함은 어디서 오는가?

그리스도인은 그 누구 앞이건, 어떤 대적 자 앞에서건 담대함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람은 자신에게 허물이 없으므로 책잡힐 것이 없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에 책잡힐 일이 없으면 담대해 질 수 있습니다. 성도가 복음의 합당한 생활을 하면 서로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한 지체로서 한뜻을 가지고 복음을 위해 협력할 수 있는 것입니다. 협력한다는 말은 하나의 공동 목표를 위해 하나를 이룬다는 뜻입니다. 이같은 협력은 진실한 믿음에서만이 가능한데 복음에 순종하는 성도들만이 이 일을 이루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 : 이같은 열매는 성도들에게는 구원의 빙거로 나타나고 우리를 대적하는 복음의 원수들에게는 멸망의 빙거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려면 먼저 말씀을 잘 듣고 깨달아야 합니다. 깨닫지 못하는 말씀을 믿고 순종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했습니다. 다음에 마음속에 들어간 하나님의 말씀이 그 사람의 마음을 뜨겁게 하여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간절함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므로 어떤 대적 자라도 두려워하지 마시고 또한 성도들간 서로 협력하는 신앙생활의 결실이 있기를 바랍니다


(9)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목적

(빌립보서 1:29-30)

서론 : 우리는 29절에서 큰 충격과 도전을 받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고 말씀해 줍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질고도 지시고 저주도 받으시고 가난도 겪으시며 고난도 받으셨으니 우리는 다만 축복만 받으면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 알아야 할 일은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그 같은 고난을 기쁘시게 당하셨습니다. 그러므

로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는 주님이 하신 일에만 의뢰하고 이루어 주신 구원의 복을 받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생애에 있어서 우리가 만나고 당하고 치러야 할 일까지 주님이 모두 책임지시어 우리를 대신하여 고난을 당하신 것은 아닌 것입니다.


1.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궁극적 목적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가기까지는 이 땅에서의 우리의 생애를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 우리의 생애에는 평탄한 길만 있는 것도 아니고 건강할 때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이 땅에서 살 동안 하나님의 말씀에만 잘 순종하여 그 말씀대로 살아가면 복을 받을 것이란 약속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항상 말씀 안에서 순종의 생활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의 생애에는 많은 고난이 따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우리가 마땅히 짊어져야 할 새로운 고난에 대하여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29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를 위해 고난을 받는 생활이 우리 그리스도인 들에게 반드시 따라야 한다는 놀라운 사실을 밝혀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구원을 주신 일은 그 중 가장 위대한 은혜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소망도 주셨습니다. 마음의 평강도 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2. 은혜의 두 가지 뜻

그리스도를 위해 너희에게 은혜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에 대해서 그것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어떻게 써 왔습니까? 자기 자신만을 위해 만족해 온 것입니까?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이 무엇이든지 자기 중심, 자기 만족, 자기 욕구에 의해 움직여 왔으며 그렇게 살아가는 것을 마땅한 양 지내 왔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말하기를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해 은혜를 받았으면서도 그 은혜로 그리스도를 위해 사용한 일이 있는지 부끄러운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은혜를 주신 일에 대하여 두 가지 사실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1) 하나는 "그를 믿을 뿐 아니라"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려고 은혜를 주셨습니다. 참 생명의 길은 그리스도를 믿는 일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믿음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믿을 뿐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한 가지 더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우리가 고난을 받는 일도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 중에 하나라는 것입니다. 이같은 고난을 위하여 주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려면 그의 고난에도 동참해야 할 것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고난의 짐을 남겨 두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를 위해 받아야 할 고난이란 무엇입니까?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그리스도를 생각하므로 참으면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물론 복음을 전하다가 어려움 중에 당하는 고난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활 중에서 받는 어려움이 얼마나 많은 것입니까? 그 때마다 그리스도를 생각하므로 참으며 어려움을 감사하므로 받는다면 이 일이야말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고난이 될 것입니다.


결론 : 은혜는 대단히 귀중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그 은혜를 잘 간직해야 합니다. 행복도 좋고 축복도 좋고 형통도 좋고 건강도 좋지만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받기를 원하시며 여러분이 고난을 받으실 때 그 고난을 그리스도를 생각하시므로 참으시기 바랍니다.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그 일을 하나님은 기뻐하실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 밤중소리 11-06 | VIEW : 3,620


(10) 그리스도인의 생활 지침

(빌립보서 2:1-4)

서론 : 바울은 성도들이 교회를 섬기는 일에 있어서 성도들 간에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느냐에 대한 문제를 본문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교회는 성도들의 공동체입니다. 홀로는 교회를 이룰 수도 없으며 교회에 속할 수도 없습니다. 여러 자체들이 한 몸을 이루기 때문에 서로 조화 있게 협력해야 합니다. 바울은 교회에서 성도들이 이런 일을 어떻게 감당 할 것인가에 대한 교훈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1. 성도들은 어떤 자세로 생활해야 하는가

우리는 우리의 생활 주변에 나 외에 한 믿음으로 가족을 이루고 있는 형제들과 함께 생활합니다. 그러므로 이들과의 교제는 필수적으로 따르게 됩니다.

(1) 그리스도 안에는 권면이 있어야 합니다. 권면이란 말은 타이르고 좋은 의견으로 자기 스스로가 신앙적인 결정을 내리도록 측면에서 도와주는 일입니다. 인간에게는 어리석은 면이 많이 있습니다. 지혜에 있어서도 부족할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이웃에 있는 형제들의 선의의 권면을 잘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같은 권면을 주의 깊게 해 주는 일은 한 형제를 위기에서 건져 주는 일이며 잘못된 길을 걸어간 형제를 바른 길로 인도하는 손길이 되는 것입니다. 잠 13 : 10절에서 "권면을 듣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권면에는 이해와 겸손과 사랑이 수반해야 합니다.

(2) 그리스도 안에는 사랑에 위로가 있어야 합니다. '사랑에 무슨 위로'란 말은 사랑과 위로가 따라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랑은 서로간 한 지체가 된 사실을 확인하는 연결 고리입니다. 그리고 사람은 언제나 강한 것이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약할 때가 있으며 좌절하고 낙심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이 때 그에게 필요한 것은 교훈이 아닙니다. 책망도 아닙니다. 사랑의 위로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위로에는 진실한 사랑이 깃들이어 있어야 합니다. 거짓된 위로는 위

로가 아닙니다. 같은 마음으로 슬퍼하고 아파하며 괴로워 할 수 있어야 받는 사람에게 참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위로는 그 받는 사람에게 새 힘을 줍니다. 슬픔과 고통을 이길 능력을 줍니다. 불행과 좌절을 딛고 일어설 수 있게 합니다.

(3) 그리스도 안에는 성령의 교제가 있어야 합니다. 성령으로 하는 교제란 믿음 안에서의 교제를 가리킵니다. 세상 풍조를 따르거나 세상 풍조를 쫓아 하는 교제는 성령의 교제가 아닙니다.

(4) 다음에 우리에게는 그리스도 안에서 긍휼이나 자비가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불행한 형제들이나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형제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뻗는 일입니다. 가난한 형제를 도와주고 병든 자를 찾아가 위로하고 슬픔을 당한 자에게 위로를 주어야 합니다.


2. 성도들의 결합

바울은 이런 일들이 교회에 있다면 성도들은 어떻게 해야 하느냐에 대하여 말해 줍니다. 2절에서 마음을 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을 품으라고 한 것입니다. 모든 성도들이 뜻을 같이하여 자기 일처럼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다툼이나 허용으로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좋은 일을 하는 일에 다툼이 생기는 이유는 이 일을 통해서 자기들이 칭찬을 듣고 자랑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입니다. 허영이란 자기가 명예를 얻고 칭찬을 들으려는 의도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하라고 했습니다. 겸손한 마음에 대하여 바울은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는 겸손한 마음이 그 밑에 깔려 있어야 합니다. 교만한 자란 자기를 남보다 나은 사람으로 스스로 여기는 사람이요 겸손한 사람이란 다른 사람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는 사람입니다.


결론 : 바울은 4절에서 두 가지 돌 볼 일에 대하여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일을 돌보아 주라고 했습니다. 이 일이야말로 바울의 마음에 기쁨을 충만케 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 들은 누구나 자신이 자신의 일을 잘 돌보아 교회로 짐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일을 돌보아 주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대단히 중요한 존재들입니다. 한 몸에 붙어 있는 지체들이기 때문입니다. 겸손하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이룰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11) 그리스도의 영광

(에베소서 1:20-23)

서론 :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크신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 있음을 말씀해 줍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로 올리사 하나님 우편에 앉히셔서 모든 정사와 권세를 주관하게 하신 이 일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임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그리스도의 다시 살리심

죽은 자의 다시 살리시는 일은 하나님의 능력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으로 그의 능력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모든 성도들의 부활의 첫 열매이기 때문에 주님의 부활은 그리스도인 들의 산 소망이 된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죽은자들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의 능력이 죽은 우리의 몸을 다시 살리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전 15 : 22절에서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에 연합하여 부활할 그리스도인의 부활의 소망은 그 기업에 영광의 풍성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보여 주시는 것으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받아 마음의 눈이 밝혀진 성도들만이 믿음으로 볼 수 있는 소망인 것입니다. 다음에 하나님의 능력은 다시 살리신 그리스도를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사람으로 낮아지시고 죽으사 무덤에까지 내려가셨던 그를 하나님이 다시 살리사 하나님의 보좌에까지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와 강력한 능력으로 이뤄진 것입니다. 이 모든 하나님의 기이하신 역사는 누구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혜와 계시의 영을 받아 마음의 눈이 밝히 열려진 사람만이 믿음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의 새로운 영광

이처럼 그리스도를 하늘에까지 높이 올리신 하나님께서 그 그리스도를 만물의 주관자로 삼으시고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다고 했습니다.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신 능력도 기이하거니와 그를 하늘 위에 올리시고 만물의 주관자, 만유의 주로 삼으신 일은 더욱 놀라운 일입니다. 이같은 일은 만세 전부터 감추어졌던 하나님의 비밀이신 데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현실화된 것입니다. 이것은 죄와 사탄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승리요, 이같은 하나님의 섭리를 모르고 애초부터 하나님을 대적했던 사탄의 결정적인 실패의 원인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와 영광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 하심으로 아루어진 것이니 이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을 믿음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축복된 사람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의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로 주셨으니 이 교회의 지체가 되는 우리는 만물 위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만물을 지배하게 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음에 마지막으로 바울은 증거 하기를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교회가 얼마나 영광스러운 존재인가에 대한 증거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시고 믿음으로 그 지체가 되어 그리스도와 성도는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받으실 모든 영광은 그의 교회도 함께 누릴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이 그리스도의 놀라운 영광에 함께 참여하는 축복 받은 자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을 일컬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기업의 후사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롬 8:18절에서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한 이 영광은 이같은 그리스도의 영광에 동참하는 영광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누릴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인 것입니다.


결론 : 여러분은 이 위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믿고 있습니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충만히 받아 이 놀라운 하늘의영광의 축복을 깨닫고 그 소망 가운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10) 그리스도인의 생활 지침

(빌립보서 2:1-4)

서론 : 버울은 성도들이 교회를 섬기는 일에 있어서 성도들 간에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느냐에 대한 문제를 본문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교회는 성도들의 공동체입니다. 홀로는 교회를 이룰 수도 없으며 교회에 속할 수도 없습니다. 여러 자체들이 한 몸을 이루기 때문에 서로 조화 있게 협력해야 합니다. 바울은 교회에서 성도들이 이런 일을 어떻게 감달 할 것인가에 대한 교훈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1. 성도들은 어떤 자세로 생활해야 하는가

우리는 우리의 생활 주변에 나 외에 한 믿음으로 가족을 이루고 있는 형제들과 함께 생활합니다. 그러므로 이들과의 교제는 필수적으로 따르게 됩니다.

(1) 그리스도 안에는 권면이 있어야 합니다. 권면이란 말은 타이르고 좋은 의견으로 자기 스스로가 신앙적인 결정을 내리도록 측면에서 도와주는 일입니다. 인간에게는 어리석은 면이 많이 있습니다. 지혜에 있어서도 부족할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이웃에 있는 형제들의 선의의 권면을 잘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같은 권면을 주의 깊게 해 주는 일은 한 형제를 위기에서 건져 주는 일이며 잘못된 길을 걸어간 형제를 바른 길로 인도하는 손길이 되는 것입니다. 잠 13 : 10절에서 “권면을 듣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권면에는 이해와 겸손과 사랑이 수반해야 합니다.

(2) 그리스도 안에는 사랑에 위로가 있어야 합니다. ‘사랑에 무슨 위로’란 말은 사랑과 위로가 따라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랑은 서로간 한 지체가 된 사실을 확인하는 연결 고리입니다. 그리고 사람은 언제나 강한 것이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약할 때가 있으며 좌절하고 낙심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이 때 그에게 필요한 것은 교훈이 아닙니다. 책망도 아닙니다. 사랑의 위로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위로에는 진실한 사랑이 깃들이어 있어야 합니다. 거짓된 위로는 위로가 아닙니다. 같은 마음으로 슬퍼하고 아파하며 괴로워 할 수 있어야 받는 사람에게 참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위로는 그 받는 사람에게 새 힘을 줍니다. 슬픔과 고통을 이길 능력을 줍니다. 불행과 좌절을 딛고 일어설 수 있게 합니다.

(3) 그리스도 안에는 성령의 교제가 있어야 합니다. 성령으로 하는 교제란 믿음 안에서의 교제를 가리킵니다. 세상 풍조를 따르거나 세상 풍조를 쫓아 하는 교제는 성령의 교제가 아닙니다.

(4) 다음에 우리에게는 그리스도 안에서 긍휼이나 자비가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불행한 형제들이나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형제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뻗는 일입니다. 가난한 형제를 도와주고 병든 자를 찾아가 위로하고 슬픔을 당한 자에게 위로를 주어야 합니다.


2. 성도들의 결합

바울은 이런 일들이 교회에 있다면 성도들은 어떻게 해야 하느냐에 대하여 말해 줍니다. 2절에서 마음을 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을 품으라고 한 것입니다. 모든 성도들이 뜻을 같이하여 자기 일처럼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다툼이나 허용으로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좋은 일을 하는 일에 다툼이 생기는 이유는 이 일을 통해서 자기들이 칭찬을 듣고 자랑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입니다. 허영이란 자기가 명예를 얻고 칭찬을 들으려는 의도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하라고 했습니다. 겸손한 마음에 대하여 바울은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는 겸손한 마음이 그 밑에 깔려 있어야 합니다. 교만한 자란 자기를 남보다 나은 사람으로 스스로 여기는 사람이요 겸손한 사람이란 다른 사람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는 사람입니다.

결론 : 바울은 4절에서 두 가지 돌 볼 일에 대하여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일을 돌보아 주라고 했습니다. 이 일이야말로 바울의 마음에 기쁨을 충만케 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 들은 누구나 자신이 자신의 일을 잘 돌보아 교회로 짐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일을 돌보아 주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대단히 중요한 존재들입니다. 한 몸에 붙어 있는 지체들이기 때문입니다. 겸손하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이룰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11)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

(빌립보서 2:5-11)

서론 : 오늘 본문 말씀은 너무나도 놀랍고 위대한 말씀입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너희 안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고 말씀해 줍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위대성과 그가 어떻게 하나님이 되시어 사람으로 오셨는가에 대한 놀라운 말씀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은 어떤 마음인가?


1. 그리스도의 본체

그리스도가 어떻게 사람이 되셨으며 우리는 그의 어떤 마음을 품어야 하는가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합니다.

(1) 6절에서 이르기를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원래가 하나님의 본체이십니다. 본체란 말은 하나님의 실체란 뜻으로 하나님 바로 그 분이시란 의미가 됩니다. 여기서 왜 본체란 말이 나온 것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삼위의 인격적 하나님이 한 본체를 이루어 계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삼위이십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의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분들은 모두 인격적인 분들이시며 제각기 자신들을 나타내실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이 세 분 하나님은 실인즉 셋이 하나의 본체로서 존재하시는 유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비밀은 완전한 영적 지식으로만이 이해가 가능합니다. 이 세상에서 인간의 말로는 삼위의 하나님이시면 서도 한 본체를 이루어 한 하나님으로 계시는 인격적인 분의 모습을 들어 낼 도리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에서 그렇게 말씀해 주시고 있기 때문이며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 우주 만물 중에 한 분 하나님 외에는 전부 피조물들입니다. 피조물은 인간의 속죄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줄 수 없습니다. 그 일이 하나님만이 가능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다음에 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아들의 신분으로 내려오시므로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육신을 가지셨기 때문에 아들이 되셨고 그 결과 자기를 낮추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낮추심에 대하여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고 했습니다. 어찌 그뿐입니까? 죽기까지 복종하셨다고 했는데 그 일이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했습니다. 똑같은 권능과 영광을 가지시고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고 운행하시는 주님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이처럼 비천한 종의 형체로 사람이 되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2. 너희는 이 마음을 품으라

바울은 우리가 이처럼 주님의 마음을 품으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 11:29절에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무엇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까? 바로 그리스도의 마음인 것입니다. 사탄은 교만하므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을 뿐 아니라 저주를 받았습니다. 이 자에게는 영원한 형벌을 내리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겸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미워하십니다.

그런데 온유와 겸손은 저절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희생이 따르고 순종이 따라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두 가지를 모두 이루신 분입니다. 그는 죽기까지 순종하신 분이십니다. 그 분은 자기 목숨을 죄인들을 위해 기꺼이 희생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온유와 겸손은 약한 것이 아닙니다. 가장 강한 무기가 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는 이 자신의 낮아지신 온유와 겸손하므로 어떤 보상을 받으신 것입니까?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이셨다고 하셨습니다.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성삼위 중에서도 예수의 이름에 더욱 영화롭게 해 드린 것입니다. 온 세계 인류와 만물이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고 있었지만 이 일로 인하여 예수님은 자신을 영광스럽게 드러내셨습니다.


결론 : 겸손한 자는 하나님이 그를 높여 주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겸손한 자에게는 생명도 주시고 영예도 주시고 재물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12)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빌립보서 2:12)

서론 : 오늘 본문에는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보낸 서신 중에서 주목할 만한 말씀이 나옵니다.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성경에는 구원에 대한 3가지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는 ‘구원을 얻었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두 번째는 ‘구원하시리니’란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것으로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1. 구원을 얻었다.

엡 2:8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구원을 얻었나니 란 말씀은 이미 구원을 얻었다는 뜻으로 구원 문제가 과거형으로 나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졌다면 구원은 이미 얻은 것입니다. 구원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얻었다는 말은 약속에 의한 확실성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구원은 미래적인 것입니다. 구원의 완성은 우리의 부활의 완성으로 성취됩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구원을 얻었다고 믿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약속은 내 안에 계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지 내 스스로가 믿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 들은 성령으로 새로운 생명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인 들은 성령의 증거로 이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2. 구원하시리니.

다음에 딤후 4:18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란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말씀해 주는 구원이란 낱말은 우리의 완성된 구원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의 최종적인 구원이 완성될 때까지 책임지시고 구원을 이루어 주실 것임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그 구원을 하나님께서 끝까지 책임져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에 신실하신 분입니다. 우리의 행실이나 의로움에 구애됨이 없이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의 구원을 온전히 이루어 주십니다. 그리스도인 들은 이 같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기 때문에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의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순전히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의 죄 값을 치루신 일, 그 일이 구원의 근거가 되고 있습니다.


3. 구원을 이루라

오늘 본문에는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무슨 말입니까? 우리는 이미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그리스도인의 구원은 아직도 소망 중에 있는 미래적인 사건입니다. 그리고 현재와 미래와의 사이에는 도달 과정이라고 하는 시간이 흘러가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서울역에서 부산행 특급 열차를 탔습니다. 차표도 끊었습니다. 열차 안에 자기 좌석에 앉았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서울은 출발했지만 아직 부산에 도착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천국 역까지 이르는 과정에는 시험 역도 있고 환난 역도 있으며 유혹 역도 있습니다. 이 같은 역은 아직 우리가 지나가 보지 못한 역들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이루는 생애 중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여러 가지 인생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기차표를 잃으면 안됩니다. 자기가 앉은자리도 확실히 지켜야 합니다. 열차를 내려도 안 되고 누가 무어라 해도 열차를 바꿔 타면 안됩니다. 적어도 구원의 열차를 탄 그리스도인 들에게는 이런 노력이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이 과정을 바울은 믿음의 선한 싸움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또한 운동장에서 달려가는 일로 비유해서 말씀해 주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구원의 과정을 지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두렵고 덜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결론 : 성도가 이 구원을 이루어 나가는 자세에 대하여 두 가지로 일러주었습니다. 하나는 항상 복종하라고 한 것입니다. 순종의 생활 없이는 누구든 자기의 구원을 이루지 못합니다. 두 번째는 두렵고 떨림으로 이루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세는 이런 과정에서 항상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가지라고 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생활은 무엇보다도 구원을 이루는 과정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이 구원을 이루는 생활에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13)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는 하나님

(빌립보서 2:13-14)

서론 : 성경에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많은 진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다만 믿음으로 그것을 깨닫고 순종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 있는 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 13절에서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고 말씀해 줍니다. 우리 안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그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무엇인가 행하고 계시다는 사실은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이 진리를 알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과 모르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 들과는 너무나도 그 생활에 현격한 차이가 들어 나는 것입니다.


1. 우리 안에서 하나님은 무엇을 사시는가?

우리는 성경에서 혹은 하나님이 임재 하신다, 혹은 성령께서 내주 하신다, 그리고 예수님이 함께 하신다는 말을 듣게 됩니다. 이 말씀은 모두 똑같은 의미에서 성령의 임재 하심을 의미합니다. 성령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본체이시기도 하기 때문에 성령 안에서 삼위 하나님이 제각기 자신의 모습을 나타내실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이 내주 하시는 목적은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믿는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이십니다. 그리고 성령은 그 사람을 떠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임재 하시므로 그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성령은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역사 하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가운데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란 무엇입니까? 물론 구원을 이루는 그날까지 우리를 주장하시어 구원에 차질이 없게 하시는 일입니다.


2. 일하시는 방법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방법에 대하여 우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말씀해 줍니다. 여기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일은 하나님은 우리에게 소원을 주시는 분이란 사실입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시시때때로 여러 가지 소원이 일어나기도 하고 사라지 기도합니다. 이런 것들이 누구로부터 말미암은 것인가에 대하여 알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소원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영적인 일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육신의 소원은 하나님이 주시는 소원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 아직 잔재하고 있는 정욕에서 나온 것들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소원은 말씀을 통해서, 기도를 통해서 권면을 통해서 영적 감동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은 성령께서 간절한 마음과 강한 감동하심을 주시므로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거역하면 우리는 결과적으로 육신을 위한 삶을 살아가게 되며 하나님의 일을 거역하는 죄악 가운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는 말은 하나님의 뜻을 우리 마음속에 심어 주시고 우리들로 그 뜻을 따라 생활할 수 있도록 우리의 생애를 주장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자유의지를 무시하시고 우리를 무조건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그 뜻을 이루게 하시려고 강권적으로 지배하시는 방법으로 우리를 다스리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로 행하게 하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들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시고 소원을 가지게 하시며 우리들로 그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도록 인도하실 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이 주시는 소원을 알 수 있고 그 뜻을 이루는 생활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합니다. 말씀 안에 있는 하나님의 소원을 내 마음에 간직하여 자신의 소원으로 승화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의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육신의 사람은 죽이고 영의 새로운 사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자신의 마음에 심겨져 있는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는 생활을 해 나가야 합니다.


결론 : 만약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아무런 소원도 없다면 하나님을 위한 뜨거운 소원이 없다면 그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역사를 찾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뜨거운 소원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 소원은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소원이며 여러분들이 그 소원을 이루고자 하는 의욕을 가지고 하나님을 의뢰할 때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14) 흠이 없고 순전하라

(빌립보서 2:13-18)

서론 : 바울은 13절에서 우리 마음에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하나님의 일을 행하는데 있어서 모든 일에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요즈음 교회마다 분쟁에 휩싸이고 원망과 시비가 비등하는 것은 교회를 어지럽히는 사탄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이루는 일이기 때문에 결코 원망과 시비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피차에 겸손하므로 덕을 세우고 사랑으로 연합하여 하나님이 하시는 일인 것처럼 하나님께 영광이 되어야 합니다.


1. 바울의 염원

바울은 15절에서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서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바울로 그들을 위해 수고 한 결실이 헛되지 않기를 원했습니다.

(1)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생활에 흠이 없고 순전하기를 바랬습니다. 흠이 없다는 말은 죄가 없는 생활을 말합니다. 순전하다는 말은 하나님 앞에 진실할 것을 의미합니다.

(2) 다음에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로 세상에서 빛들로 나타내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은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상입니다. 지금 우리의 세대는 더더욱 그런 세대인 것입니다. 잘못된 세상,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에서 멀리 떨어진 세상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까지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세대입니다. 이 같은 세대에 그리스도인 들은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야 합니다.

빛이란 어두움을 밝히는 능력입니다.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는 어두움의 세상입니다. 어두움은 죄악, 부도덕, 불순종을 의미합니다. 그들 가운데서 빛을 내라고 했습니다. 성도의 빛은 무엇으로 나타냅니까? 주님은 선행으로 나타낸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은 그 자체가 벌써 빛을 발휘하는 능력인 것입니다. 소극적인 방법으로는 어두움에 동조하지 말고 어두움에서 떠나야 합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인이 이 빛 된 생활을 하려면 먼저 자기 생활에 흠이 없어야 합니다. 죄를 범하면서 빛을 나타낼 수는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생명의 말씀을 밝히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밝히는 일은 말씀을 들어 내는 일입니다. 말씀을 들어 내려면 그리스도인 스스로가 말씀 안에서 말씀대로 생활하는 일로 나타내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2. 빌립보 교회의 열매와 바울의 상급

바울은 왜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이처럼 그들의 생활에 흠이 없고 순전하기를 원한 것이겠습니까? 물론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사랑하는 바울의 간절한 사랑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곳에서 좀 색다른 면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16절에서 “나의 달음질도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나로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고 한 것입니다. 바울은 아직까지 많은 수고와 달음질을 해 왔습니다. 특히 빌립보 교회를 위해 눈물겹도록 수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들의 신앙이 잘못되거나 그들의 달려갈 길을 제대로 가지 못한다면 그것은 바울에게도 치명상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날에 자랑할 것이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천국 경주장에서 1등 상을 받기 위해 일해 왔습니다. 바울이 그간 빌립보 교회에 쏟은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다면 바울은 헛된 경주를 한 결과밖에 안 된다는 사실을 염려한 것입니다. 모든 하나님의 종들은 바울과 같은 이런 아름다운 생각을 가지고 목회를 해야 할 줄로 압니다. 자기가 기른 양 무리들에 대한 책임감이 바울처럼 철저해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가 수고한 만치 많은 결실을 맺어 그것이 주님 앞에서 그대로 칭찬과 상급이 될 수 있기를 바랬습니다. 바울의 목회와 복음을 전하는 수고에는 늘 하나님 앞에서의 자랑거리를 준비하는 마음이 깔려 있었습니다. “울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둔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복음 전파 자로서 자신이 수고 한 수고의 결실은 그 사람에게 큰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결론 : 바울은 빌립보 교인의 믿음의 제물과 봉사와 함께 자기를 그 위에 순교의 제물로서 하나님께 드린바 된다고 해도 자기는 빌립보 교회와 함께 기뻐하고 기뻐하리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신생교회 성도들도 하나님의 종과 하나가 되어 하나님 앞에 자랑할 것이 있기 위해 힘쓰는 생활을 하므로 함께 기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5) 빌립보 교회를 향한 바울의 간절한 바람

(빌립보서 2:19-24)

서론 : 바울은 복음으로 인하여 로마에 갇힌 몸이 되었으나 그의 머리에는 항상 빌립보 교회 생각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목자는 늘 바울과 같은 심정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자기가 책임 맡은 양 무리의 생각으로 늘 머리에 가득 차야 할 것입니다.

잠 27:23 “네 양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어 네 소떼에 마음을 두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참 목자상에 대하여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목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런 목자가 되시는 분입니다. 목자는 양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펴야 합니다. 이것은 영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하는 면과 그 양이 당면한 모든 문제점을 위해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네 소떼에 마음을 두라는 말씀은 늘 양 무리들의 생각을 마음에 간직하고 염려하는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1. 디모데를 빌립보 교회에 보내려는 이유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사정이 궁금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은 영오의 몸으로 움직일 수 없었고 그곳 소식을 전해 줄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근래에 빌립보 교회의 사정은 어떠한가? 교인들의 신앙 상태는 어떠한가? 빌립보 교회가 어려운 일을 겪는 일은 없는지? 이런 일들이 알고 싶어 바울은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메를 빌립보에 보내어 그 소식을 가지고 오도록 조처했습니다. 바울이 디모데를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이유에 대하여 19절에서 “너희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정확한 형편을 알기 전에는 마음에 평안이 없었고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디모데로 하여금 그곳 소식을 가지고 오게 하여 자기로 하여금 안위를 얻도록 하라고 한 것입니다. 바울에게는 이토록 양 무리에 대한 진실한 사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이 믿음으로 낳은 아들로 복음을 위하여 바울의 명령이면 자기 목숨이라도 아끼지 아니하고 바칠 수 있는 바울의 심복이었습니다. 20절 말씀에서 바울과 뜻을 같이하여 빌립보 교회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디모데 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2. 디모데를 일꾼으로 만든 연단

바울에게는 많은 제자들이 있었지만 바울에게 있어서 디모데는 모든 제자들보다 신임이 두터웠습니다. 바울에게 빌립보 교회의 사정을 올바로 전달하려면 바울처럼 빌립보 교회를 진실히 생각해 줄 사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에게 이 디모데는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없음이라고 한 것입니다.

교회에는 교인이 많습니다. 큰집에는 은그릇도 있고 금 그릇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깨끗하게 한 그릇만이 주인의 쓰임을 합당한 그릇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디모데가 바로 이 같은 일꾼이었습니다. 교회에 나오는 성도가 모두 교회의 일꾼은 아닙니다. 어느 경우이든 그리고 어떤 큰 교회이건 간 참 일꾼은 그 수효가 적습니다. 교회의 일꾼은 언제인가 그 진실한 일꾼의 모습을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 때가 바로 어려움을 당할 때인 것입니다. 가족을 버리고 세상의 영화나 재물을 버리고 같은 사명을 가지고 바울과 함께 주를 위해 생애를 받칠 사람은 디모데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 다른 일꾼들은 어떻게 되었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까? 21절에서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라고 했습니다. 자기 일을 희생하고 그리스도의 일을 하는 사람이 교회의 일꾼입니다. 자기 일 때문에 주의 일을 희생하는 사람은 디모데와 같은 교회의 일꾼이 아닌 것입니다.

22절에 나오는 말씀을 통해서 디모데가 이처럼 바울의 진실한 협력자로 바울의 신임을 받게 된 것은 디모데가 받은 연단의 결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디모데는 바울과 함께 복음을 위해 수고하는 중에 많은 연단을 받았으며 그 연단을 통해서 바울의 신임을 받은 진실한 교회의 일꾼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교회의 일꾼으로 쓰시기 위해서 많은 연단의 과정을 거치게 하시는 것입니다.


결론 : 하나님의 교회는 바울과 같은 목자가 필요하고 목자에게는 디모데처럼 목자와 뜻을 같이할 수 있는 일꾼이 필요한 것입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이처럼 바울과 바울이 신임한 진실한 일꾼, 디모데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6)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빌립보서 2:25-30)

서론 :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게 보내는 이 편지를 쓴 후, 이 편지를 속히 빌립보 교회에 전달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서 헌금과 봉사를 위해 바울에게 보낸 에바브로디도 편에 이 서신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바울이 옥에 갇힌 상태에서 그에게 헌신적으로 봉사하였고 이 일 때문에 몸에 병까지 생겨 바울과 빌립보 교회의 큰 근심이 되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병을 고쳐 주셨고 에바브로디도 자신도 자기 때문에 빌립보 교인들이 염려하는 일을 더러 주기 위해 빌립보로 가기를 원했기 때문에 바울은 그를 급히 보내게 된 것입니다.


1. 에바브로디도의 신앙

에바브로디도에 대한 바울의 신임과 칭찬은 대단했습니다. 그만큼 에바브로디도는 바울에게도 빌립보 교인들에게도 하나님께도 인정을 받은 일꾼이었습니다. 바울은 그에게 여러 가지 아름다운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1) 그는 나의 형제라고 불렀습니다. 계 1:9절에서 사도 요한은 형제 된 자의 자격을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고 규정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형제는 아마 30절에서 밝혀 준 에바브로디도의 충성심에 바탕을 둔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저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했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2)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라고 불렀습니다. 교회에는 약삭빠른 친구들이 많이 있습니다. 영광은 자신이 누리기를 원하면서 주를 위한 수고는 짊어지기를 싫어하며 즐거워하지도 않습니다. 이런 형제는 거짓 형제입니다. 진실한 형제는 어려울 때 수고의 짐을 함께 짊어집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바울이 옥에서 어려움을 당할 때 바울을 위해 수고하는 일에 참여한 형제입니다. 그뿐 아니라 함께 군사 된 자라고 했습니다. 이 군사는 그리스도의 군사를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군사는 두 가지 면에서 합격해야 합니다. 하나는 자기 일을 돌아보지 않고 오직 주의 일에 전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음에 모집한 자만을 기쁘게 해 드려야 그리스도의 군사가 될 수 있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바울과 함께 그리스도의 군사된 사명을 이루는 형제였습니다.

(3) 바울은 에바브로디도에게 그는 빌립보 교회의 사자로 나의 쓸 것을 돕는 자라고 했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돕는 자로 봉사했습니다. 돕는 자란 말은 봉사직을 말합니다. 교회에서 다른 사람을 위해 섬기는 자란 뜻입니다. 섬기는 자는 다른 사람의 종의 자리에서 헌신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주님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남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고 하셨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그런 일을 한 것입니다. 그는 지금 하늘 나라에서 으뜸이 되는 영광 가운데서 살아갈 줄로 아는 것입니다.

(4) 다음에 에바브로디도는 성도들을 사모하고 교회에서 자신을 위해 염려하는 일을 근심했습니다. 26절에서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자기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는 이처럼 형제들에 대한 사랑이 남달리 컸습니다. 사모한다는 말은 큰사랑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봉사하고 헌신하며 염려하고 도와주지만, 자신에 대해서는 다른 형제들에게 누를 끼치게 될까 보아 오히려 에바브로디도처럼 근심하는 것입니다.

(5) 에바브로디도는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아니하고 그리스도의 일을 위해 헌신했다는 사실에서 그의 놀라운 주님께 대한 사랑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아직까지 에바브로디도에 대한 두터운 신임과 형제로써 깊은 사랑 가운데서 교제하고 있었지만 바울이 칭찬한바와 같은 놀라운 일꾼이란 사실은 몰랐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향하여 “너희가 주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저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고 했습니다.


결론 : 우리는 교회에서 충성스럽게 헌신하는 자들을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존귀히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존귀히 여긴다는 말은 그리스도 안에서 참으로 존경해 주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칭찬하는 일에 인색하며 칭찬이 나오면 헐뜯기가 일수입니다. 이런 사람들 때문에 교회에 분쟁이 오고 미움과 다툼이 생기는 것입니다. 일꾼을 아끼고 사랑하며 존귀히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빌립보서 3장 (17 - 23)

◆ 밤중소리 01-31 | VIEW : 1,546

(17) 세 가지 삼가야 할 일

(빌립보서 3:1-2)

서론 :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말과 세 가지 삼가야 할 일에 대하여 언급해 줍니다. 하나는 개들을 삼가라했고 다음에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마지막으로 손 할례당을 삼가라고 했습니다.


1. 주 안에서 기뻐하라

하나님의 백성들의 생활에는 기뻐함이 따라야 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복음 때문에 옥에 갇혀 있는 몸이었음에도 이 같은 말을 빌립보 교인들에게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어디에서도 기뻐하는 생활을 실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행 5 : 40절에서 사도들이 복음을 위하여 채찍에 얻어 맞았을 때,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했다고 했습니다. 바울 자신도 복음을 전하다가 빌립보 감옥에 갇혔을 당시, 밤중쯤 되었을 때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양했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쇠사슬로 착고에 채워져 있는 상태에서도 기뻐하며 찬양한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입니까?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핍박을 받고 고난을 받는 일에는 아름다운 상급이 약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마 5 : 11절에서 예수님은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잇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이 모든 환경과 조건을 초월하여 주 안에서 기뻐할 것을 원하십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삶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으며 하나님이 나의 모든 생애를 주장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우리의 생애를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권능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위해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난을 기억해 두십니다.

우리는 이 모든 말씀을 믿고 이 말씀에 근거하여 주 안에서 기뻐하는 일을 생활화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기쁨을 주시고 우리의 생에 즐거움을 주시기 위해 세상에서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2. 세 가지 삼가야 할 일

바울은 2절에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세 가지 삼가야 할 일에 대하여 경종해 주고 있습니다.

(1) 개들을 삼가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정결하고 지조 있는 생활을 강조한 경종입니다. 개들은 불결한 존재입니다. 정조관념이 없는 짐승입니다. 그리고 개에게는 포악한 성질이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되 지난날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갔을 때처럼 개처럼 해서는 안됩니다. 정결한 마음은 회개에서 나옵니다. 신앙의 지조는 진리의 말씀에서 나옵니다. 우리 주변에는 마치 개들처럼 배회하면서 더러움에 협력할 동조자를 찾는 무리들이 있습니다. 이들을 삼가야 하는 것입니다. 삼가라는 말은 조심하라, 그들에게 가까이 가지 말라, 그들에게서 떠나라는 말씀입니다.

(2)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라고 했습니다. 죄를 낙으로 삼는 무리들을 말합니다. 악행을 하는 일을 예스럽게 여기며 조금도 뉘우치는 마음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을 삼가라고 했습니다. 행악자와 가까이하면 그들과 한 무리가 됩니다. 방비가 없는 선은 언제나 악에게 먹히웁니다. 교회에서 이들을 사랑이란 미명아래 받아 드리면 조만 간에 그들의 손에 의해 교회는 어지러워질 것입니다.

(3) 마지막으로 바울은 손 할례당을 삼가라고 했습니다. 손 할례당이란 의식적인 할례를 최상으로 여기는 무리들을 의미합니다. 손 할례란 원래 몸에 상처를 준다는 뜻인데 이들은 몸에 할례의 상처를 주는 것으로 선민된 증거로 삼은 것입니다. 바울이 특별히 이들에 대하여 경종한 것은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특히 이들 손 할례당에 의해 많은 핍박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복음을 받아 드린 후에도 할례를 전제조건으로 절대시했으며 할례의 무익함을 주장하는 바울에게 도전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에 나타난 거짓 선생들에 의해 갈라디아 교인들이 미혹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로 정죄했습니다.


결론 : 바울은 자신이 세우고 말씀으로 양육한 빌립보 교인들이 좋은 신앙을 지속적으로 간직하여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를 수 있기를 바랬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 안에서 기뻐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개들을 삼가야 하며 행악하는 무리를 삼가야 합니다. 그리고 복음을 변질시키는 손 할례당을 경계히야 합니다.


(18) 바울이 말하는 할례당

(빌립보서 3:3)

서론 : 바울은 2절에서 손 할례당을 삼가라는 경종을 주고 3절에 와서 성경적인 할례당은 누구인가에 대해 언급해 줍니다. 이스라엘이 받아온 할례란 원래 복음으로 의를 얻는 하나의 그림자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 할례는 그 실체인 복음이 나타났을 때 당연히 그 모습을 감추고 복음의 의를 드러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 의식에 철저했던 유대주의자들은 복음을 받아 드린 이후에도 할례를 계속하였고 할례를 무익한 것으로 주장하는 바울을 매도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부득불 할례의 참 의미를 밝혀 주려는 것입니다.


1. 할례의 의의

할례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명하신 하나님의 백성의 외적 표식으로 주신 것입니다. 이 할례는 이스라엘의 남자들에게만 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성별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으로 성별한 하나님의 백성의 표식으로 유대인들은 반드시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성별을 명하신 것인가?

(1) 하나님께서 보내실 메사야가 오실 때까지 이스라엘은 성별되어야 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육신적으로는 아브라함의 씨로부터 시작이 되며 다윗의 혈통을 통해서 태어나실 것이기 때문에 아브라함부터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까지 순결한 혈통이 계승되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혈통을 중히 여기시어 이방인과 구별시키신 것입니다.

(2) 하나님은 세상에 메시야를 보내시기 위해 말씀을 보내셨습니다. 이 말씀은 순전하게 온전히 보존되어야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말씀을 보존할 책임 있는 족속이 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들로 아브라함의 자손을 택하시고 메시야에 대한 끊임없는 약속을 주시면서 그들로 그 말씀을 순수하게 보존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3) 그러나 그리스도의 태어나심으로 메시야의 혈통이 계속될 필요성이 없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이스라엘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으로 등장한 교회에 의하여 보존하게 되었으므로 메사야의 혈통도 유대인들에 의한 말씀의 보존도 무너져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성별된 백성으로 받아온 할례가 복음 안에서 새로운 성별된 백성으로 옮겨졌기 때문에 율법적인 할례 의식은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된 것입니다.


2. 신약에 나타난 참 할례

예수님이 구원의 사역을 완성한 신약시대에 와서는 이스라엘의 육신적인 혈통과 성별된 백성으로 표시하는 할례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예표나 그림자로 뒷켠으로 물러갔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성별의 표시가 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신약시대에서는 할례나 무 할례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 같은 의식이 하나님의 백성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으며 상관도 없는 것입니다. 다만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새로워지는 중생만이 하나님의 백성의 성별된 표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초대교회 시대에 교회 안에 할례의 유익을 주장하면서 사람이 그리스도를 영접해도 할례를 받아야 된다고 주장하는 무리들이 많았습니다. 바울은 이들을 공박하면서 성경에서 말씀해 주는 참 할례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참 할례당의 자격으로 세 가지를 들었습니다.

(1)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이 바울의 말은 성령 안에서 주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 참 할례당이라는 주장입니다. 예배도 성령으로 드려야 합니다. 그런 예배라야 신령과 진정의 예배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봉사도 성령 안에서 합니다. 성령으로 하는 봉사라야 열매가 있습니다.

(2)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할례로 자랑하는 유대인들은 실상인즉 성별된 생활도 못하였고 아무런 열매도 없었습니다. 참 할례당은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육적 할례는 이제 자랑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속죄, 구원, 소망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나에게 하나님의 사죄와 의와 구원과 천국을 주신 그리스도로 자랑하는 것입니다.

(3) 참 할례당은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자라고 했습니다. 육체의 혈통이 자랑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율법의 행위도 자랑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육신적으로 신뢰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합니다.


결론 : 우리는 어떤 율법적 행위나 할례의 행위 등 어떤 인간의 공로에 의한 의를 따르는 자들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성령으로 봉사하고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성별된 생활을 하는 우리가 참 할례당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19) 무엇이 유익한가

(빌립보서 3:4-9)

서론 : 바울은 2절에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손 할례당이라 지칭하는 유대주의자들을 경계하고 3절에서 참 할례당이 누구인가에 대하여 성경적으로 증거했습니다. 이제 바울은 4절부터 자신의 경우를 예를 들어 자기가 육체적으로 말하면 할례를 주장하는 그들보다 얼마나 자랑할만하며 혈통적으로도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한 입장에 있지만 자신이 그런 것들을 자랑으로 여기지 아니하며 유익한 것으로 여기지도 아니하는 이유를 복음적으로 해명해 주고 있습니다.


1. 바울이 육신으로 자랑할만한 일 들

바울은 육체를 신뢰하는 다른 사람들에 비하여 자신은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들이 주장하고 자랑하는 하례의 경우와 혈통의 경우를 들어 말합니다.

(1) 바울은 내가 8일만에 할례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8일만에 할례를 받았다는 말은 그가 할례 받은 일이 율법적으로 하자가 없는 완전한 할례였음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체적으로 볼 때 바울은 유대인으로써 신뢰할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할례가 무익한 것임을 주장하는 것은 할례는 할례 그 자체가 목적인 것이 아니라 복음으로 성별시키는 일에 대한 하나의 그림자였으므로 복음이 온 이상, 할례는 무익한 것임을 주장한 것입니다.

(2) 바울은 자기는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인 이스라엘 족속이요 자파를 따진다면 베냐민 지파에 속한 유대인이며 그러므로 그는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임을 자랑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3) 다음에 바울은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까지는 철저한 율법주의자였습니다. 십계명 뿐 아니라 장로들의 유전까지 철저하게 지키는 생활을 통해서 스스로 율법으로는 흠이 없다고 자부하기까지 했습니다.

(4) 바울에게는 이 모든 것 위에 열심이 또한 대단했습니다. 그는 바리새인 중에서도 선두에 서서 교회를 핍박하고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도 찬성하며 그 증인으로 옷을 지키는 일을 했습니다. 다메색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여 예루살렘으로 압송하기 위해 대제사장의 공문을 가지고 많은 부하들을 거느리고 갔었던 사람입니다.


2. 왜 육신의 일을 해로 여겼나?

그러던 바울이 그러면 왜 육신의 일을 해로 여긴 것인가? 바울은 7절에서 “그러나”라는 말로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고백이 있기까지는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역사가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다메섹에 길에서 하늘 보좌에 계시는 주님을 직접 뵈었으며 소경이 되어 아나니아로부터 안수를 받은 일, 바울의 회심, 아라비아에서의 3년간의 기도생활 등, 그는 그 동안 많은 과정을 겪었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영원 전에 바울을 하나님의 종으로 택정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같은 연유로 바울은 지난날의 생애를 벗어버리고 새로운 생애의 길을 걸은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은 그리스도를 알고 나서부터는 그의 인생관이 완전히 새롭게 바뀌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은 그리스도를 안 후로부터 어떤 인생관을 가지고 어떤 삶의 자세를 가지고 살아온 것입니까?

(1)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겼다고 했습니다. 바울의 이 같은 고백은 그리스도를 위한 일이라면 자신의 그 어떤 생애도 희생한다는 뜻입니다. 해로 여기는 일에는 제한이 없었습니다. 모든 것을 해로 여긴다고 했습니다. 바울에게 있는 그 어떤 것이라도 그리스도보다 우선한 것은 없었으며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에 방해해도 좋을 존재란 있을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명예도, 바리새인이란 체면도 그 해박한 지식이나 학문도 자랑스러운 가문도 그리스도를 위하는 일이라면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긴다고 한 것입니다.

(2) 그러면 바울의 이 같은 자세는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고 자신의 존재를 그리스도 안에서 찾기 위함이라고 한 것입니다. 가문에서, 학문에서, 율법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찾으려는 바울의 노력은 그리스도에게 미치게 한 것입니다.


결론 : 바울은 자신의 체험을 통해서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보다 더 고상한 지식은 없으며 그리스도의 의보다 더 온전한 의는 없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가 그리스도의 위대한 일꾼이 된 것은 이 같은 그의 인격전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가 바울처럼 능력 있는 일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 모든 것을 회생하면 바울의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20) 바울이 소망한 부활

(빌립보서 3:10-12)

서론 : 바울은 그리스도와 연합된 영광을 바라보았습니다. 그것은 부활의 권능입니다. 그리고 이 부활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연합될 수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에 이르고자 한 것입니다.

1. 부활의 권능

우리는 본문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의 부활에 동참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려고 하는 바울의 위대한 신앙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부활의 권능이란 말과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한다는 표현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바울은 죽은 자의 부활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는 고전 15장에서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확고한 믿음을 가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13절 이하에서 바울은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고 말씀해 주며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금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서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 단정 짓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10절에서 언급한 부활의 권능이란 말은 그리스도와 연결된 말입니다.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 하여”란 말에서와 같이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과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그 부활의 권능과 그리스도가 당하신 고난에 대하여 알려고 한 것입니다. 왜냐 하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말한 이 같은 표현은 자기자신도 그리스도와 같은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하려는 큰 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부활에 대하여 한 가지로 말하고 있지 아니합니다. 바울은 고전 15 : 40절 이하에서 그리스도인의 부활이 모두 동일한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영광이 사람마다 각기 다르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부활의 첫 열매이자 가장 영광스러운 부활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받으신 부활의 영광은 그가 성육신으로 세상에 내려오시기 이전보다 더 영광스러운 것이었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이 원하고 바란 부활은 바로 그리스도와 같은 이런 영광스러운 부활에 대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같은 부활은 바울 뿐 아니라 지난날 많은 선지자들도 바랬던 부활입니다. 히 11 : 35절 말씀을 보면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이 부활에 대하여 성경에서는 첫째부활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첫째부활 자들에 대한 영광에 대해 계 20 : 5절 이하에서 “이는 첫째 부활이라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년 동안 왕 노릇하리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 부활의 소망을 바라보고 그리스도가 받으신 그 부활의 권능을 알기를 원했으며 자신도 그리스도와 같은 고난에 참여하여 영광의 부활에 이르기를 간절히 소망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바울이 그의 생애에서 받은 복음을 위한 고난의 의미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고난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되어 그리스도의 영광의 부활에 이를 수 있기를 소망한 삶을 살아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겸손하고 두려운 심정으로 12절에서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뤘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려면 그리스도의 고난에도 참여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고난에 참여하려는 싸움을 싸워 온 것입니다. 바울은 이 싸움을 믿음의 선한 싸움이라고 말했습니다. 롬 8 : 17절에서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고 한 바울의 말은 자신의 경우를 고백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 육체에 채우노라고 말했으며 자기 몸에 그리스도의 흔적이 있노라고도 말했습니다. 이 같은 바울의 말은 장차 자신이 받을 영광스러운 부활을 바라보고 그 부활에 참여하려는 바울의 신앙을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 : 바울은 아 편지를 쓰면서도 아직 그 목표에 이른 것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런 소망을 바라보고 그 자신의 남은 생애를 살아가기를 원했습니다. 우리들도 더 나은 부활의 영광을 보라보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바울처럼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생애를 보내야 하겠습니다.


(21) 바울의 천국 경주

(빌립보서 3:13-16)

서론 : 바울은 그가 하나님 나라에 가서 받을 상급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는 일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이 같은 고백은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부활을 본 받는 일로 모든 부활 중에 가장 영광스러운 부활을 말합니다. 성경에서는 이 부활을 첫째부활이라고 말하며 이 부활의 영광은 순교자가 받을 수 있는 면류관입니다. 바울은 이 면류관을 소망한 것입니다.

1. 아직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했다.

바울은 이 소망에 대하여 아직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이 부활을 푯대로 하여 남은 생애를 좇아가노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확신이 없었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남은 생애의 순간까지 오직 그것을 목표로 달려가는 삶을 살아간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은 이 상급을 얻기 위하여 어떤 자세로 뛰는 생애를 살아간 것입니까? 13절에서 이르기를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잃어버리고”라고 헸습니다. 바울은 지금 경주장 마지막 꼴인 지점에 다다르고 있습니다. 이제 그곳까지 얼마 남지 아니한 것입니다. 바울에게는 마지막 스피드를 내야할 그런 시점에 이른 것입니다. 그는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는 경주를 달렸습니다. 달리기 선수가 경주장에서 뒤에 있는 것에 미련을 두고 달린다면 그 선수는 우숭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롯의 식구들도 이 경주장을 달렸는데 롯의 아내가 그만 뒤를 돌아보다가 실격자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이 경주에 대하여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쟁기를 들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말한 잊어버려야 할 뒤엣 것이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달리기에 필요 없는 모든 것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만약 바울에게 자신의 학식이나 명예가 거치적거리는 일이었다면 바울은 그것을 벗어버려야 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겼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것을 잃어버리지 못하면 마음의 줄이 되어 우리의 마음과 몸을 세상에 묶어 두기 때문에 달리기 경주에 1등으로 꼴인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편 바울은 “앞에 있는 것은 잡으려고”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잡아야 할 앞에 있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가 얻으신 부활의 권능이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가장 영광스러운 면류관으로 여겨진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려는 소망이 바울의 마음에 꽉 들어찼으며 바울은 이 소망만을 유일한 달리기 목표로 달려간 것입니다. 바울에게는 이 면류관이외에는 보지 않기로 했습니다. “오직 한 일”이란 바로 이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는 일로 이 일만을 푯대로 하여 달려갔습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2. 구원과 상급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의 큰 도전을 시도하기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 도전이란 구원과 상급에 대한 새로운 인식입니다. 구원과 상급을 혼돈하면 안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확실히 구원을 받습니다. 모든 성도들은 천국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상급에 동참하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된 자격이지만 상급은 하늘 나라에서 살아가는 일에서 누릴 권세인 것입니다. 한국에 태어나면 모든 국민은 한국의 시민권을 얻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 안에는 여러 가지 계층이 있습니다. 대통령이 있고 장관이 있으며 명예스럽고 영광스러운 직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베대의 어미에게 이르시기를 “당신의 아들들을 내 좌우 편에 앉히는 일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였든지 그들이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그 상급이 자신을 위하여 예비한 것으로 믿고 달려간 것입니다. 상급이 많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는 그만큼 계급이 많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면류관으로 나와 있는 모든 성도들에게 주시는 상급은 하나님 나라에 올라가 받을 높은 계급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 계급은 잠시 잠깐동안 계속되는 것이지만 하나님 나라의 계급은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회생하면서 이 상급을 위한 경주장을 달려가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 바울이 달려간 경주장을 지금 우리도 달려가고 있습니다. 달리기 선수들에게는 1 등을 한다는 영광의 비전을 가져야 하는 것처럼 이제 우리들도 자세를 가다듬고 이 길을 바울의 심정으로 달려가야 합니다.


(22) 나를 본 받으라

(빌립보서 3:17)

서론 : 바울은 17절에서 “너희는 함께 나를 본 받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그 신앙에 있어서 자기를 본 받기를 원했습니다. 아직 어린아이들과 같이 성숙하지 못한 그들의 신앙이 성장하고 믿음에 견고하기 위해서 자신의 믿음과 자신의 생활을 본 받기를 간절히 바랬습니다.

1. 본 받아야 할 일

바울은 자기가 가진 믿음이 어디서 온 것인 줄을 알고 있었으며 왜 자기가 자기 생명을 다하여 그 복음을 전해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이 원하고 바라는 소망이 너무나도 확실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생애는 온통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삶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런데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경우를 보면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자기처럼 소망 있는 삶을 살아가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아무에게도 부끄러울 것이 없는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려고 힘썼습니다. 그런데 빌립보 교인들의 경우는 그러하지 못했습니다. 세상에 속한 세속적 생활에 깊이 물들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열매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는 나를 본 받으라고 말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의 무엇을 본 받아야 하는 것입니까?

(1) 그리스도를 가장 존귀히 여기는 일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바울은 실제적으로 체험한 사람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하는 일이라면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기노라고 했습니다. 세상에 있는 것들은 모두 지나가는 그림자일 뿐입니다. 진실한 것, 참 진리는 오직 하나뿐입니다. 그가 곧 예수이심을 바울은 철저하게 깨달았습니다. 바울은 이 같은 자신의 믿음을 본 받으라고 한 것입니다.

(2) 바울은 육체를 자랑하지 않는 일에 자신을 따르라고 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육체로 자랑했습니다. 그들의 할례 의식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의 외식적인 모든 행위가 그러했습니다. 할례나 무 할례나 그리스도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오직 믿음만이 절대적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3) 바울은 그리스도의 의를 잡는 일에 자기를 본 받을 것을 원했습니다. 바울은 철저한 율법주의 자였으며 율법의 조문으로는 죄로 책잡힐 것이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율법을 지켜온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런 의로서는 영생이나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의만이 구원을 줄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바울은 이 같은 사실을 그가 써 보낸 서신에서 밝혀 주고 있습니다. 구원을 얻는 의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의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이 의에 굳게 서서 그 길을 잘 달려가야 하는 것입니다.

(4) 바울은 위로부터 부르심의 상을 얻기 위해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하여 달려 좇아가는 일을 해 왔습니다. 바울의 이런 신앙생활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 뿐 아니라 우리들에게도 절대적으로 필요한 신앙의 거울입니다. 바울이 원한 하나님 나라에서의 상은 주님처럼 영광스러운 부활로 받을 수 있기를 원하는 일이었습니다. 이 같은 바울의 소망을 거울 삼아 천국의 경주장을 잘 달려 갈 수 있기를 원했습니다.

바울은 우리로 본을 삼은 것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우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늘 바울 곁에서 바울의 동역자로 함께 일한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를 가리킵니다. 이들의 생활은 언제나 바울을 본 삼아 바울에게 순종하고 따랐으므로 모든 성도들에게 본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 뿐 아니라 빌립보 교인들이 늘 곁에서 살펴볼 수 있었던 이들의 믿음의 생활도 본 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과 자신의 동역자들이 그들에게 보여준 그대로 본을 받아 바울을 본 받으려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의 믿음의 행실을 보여 주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교회 생활에 있어서 자기 한 사람의 위치가 모든 성도들에게 대단히 크게 미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신앙을 책임지고 있는 지도자들의 생활이 다른 성도들의 신앙 생활에 영향을 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지도층에 속한 직분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믿음과 생활이 다른 사람들의 본을 보여 줄 수 있어야 그 교회가 제대로 신앙적으로 성장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의 생활은 교회 앞에 공개된 생활임을 알아 다른 사람들의 생활에 좋은 영향을 끼치도록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원래가 그리스도를 본 받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자리에 계시고 너무 높으신 위치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연히 우리의 지도층의 생활을 눈여겨보면서 본 받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은 바울처럼 그의 생활에 티가 없어야 하며 본 받을 만한 본을 보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같은 사실을 알고 늘 본을 보여 주어야 하겠습니다.


(23) 바울의 눈물의 호소

(빌립보서 3:18-21)

서론 : 바울은 17절부터 21절에 이르기까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눈물겨운 간절한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빌립보 교회에는 바울이 전한 복음을 따르지 아니하는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생활에 나타나고 있는 소문은 바울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어찌하든지 그들의 마음을 돌이켜 복음의 사슬에 매이게 하여 열매 맺는 성도들로 성장시키기 위한 간절한 바람으로 눈물로 호소하며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바울의 권면은 오늘 아침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권면으로 듣고 주님이 가슴 아파하시는 우리들의 어린 신앙의 자리에서 성장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바울의 눈물의 권면

바울이 지적한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한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말입니까?

(1)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입니다. 십자가 없이는 우리의 죄가 소멸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일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사죄의 은총을 배척하는 일이기 때문에 십자가의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일 때문에 십자가를 외면하는 생활을 한다면 이들은 십자가의 원수된 자리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십자가는 율법의 마침이 됩니다. 율법의 사명은 인간들에게 죄를 지적해 주고 그 죄를 정죄하는 일에 있었습니다. 이것은 인류의 구원이 율법에 있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십자가에 와서 그리스도에게로 이끄는 몽학선생의 구실을 다 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빌립보 교회에는 율법의 의를 얻으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노라고 외식적 생활을 해 왔으며 할례를 주장하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바울이 떠난 후, 거짓 선생들이 나타나 잘못된 복음으로 십자가의 원수로 만든 것입니다.

(3)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놀라우신 사랑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보여 주시고 우리에 대한 사랑의 확실한 증거로 삼으셨습니다. 그리스도를 올바로 섬기지 않는 일은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2. 빌립보 교인들의 잘못된 신앙

그러면 빌립보 교회 성도들 중 많은 형제들이 어떤 신앙생활을 하기에 이토록 바울이 눈물을 흘리며 그들의 생활이 십자가의 원수된 생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 주고 있는 것입니까?

(1) 저희 신은 배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그들은 배로 하나님을 삼는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섬기며 헌신하며 충성하는 일보다 그들의 배를 위하는 생활을 살아간 것입니다. 탐심을 버리지 못하고 육신의 일 때문에 다투는 일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2)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다고 했습니다. 빌립보 교인 중, 많은 무리들이 추구한 영광은 바울처럼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그 놀라운 부활의 권능을 알려고도 아니했으며 그 권능에 참여하려는 노력도 하지 아니했습니다. 바울처럼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는 생활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추구하는 생활은 부끄러운 영광에 있었습니다. 이 세상사람들이 따라가는 세상의 영광을 의미합니다. 부끄럽다는 말은 하나님 앞에 벌거벗은 수치를 감추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3)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아직도 빌립보 교인들 중, 많은 형제들은 땅에 얽매인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은 세속적 신앙이었습니다. 노아 시대의 사람들이 이런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다가 홍수 심판으로 멸망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어떤 자세를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까? 바울은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했습니다.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는 말은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이 아니라 하늘에 소속된 사람들임을 밝힌 것이며 그러므로 우리의 생활은 그 나라의 시민답게 살아가야 하는데 그들은 땅의 일을 생각하는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에 그들에게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린다고 했습니다. 주 재림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 것이나 그들은 주의 재림에 관하여 전혀 외면하는 생활을 해 온 것입니다. 세상 것만을 추구하는 일에 열심을 냈으며 그들의 신앙생활을 땅에 것에 맞추며 살아간 것입니다.


결론 : 이 같은 빌립보 교인들의 생활 태도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된 생활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주께서 재림하시면 우리는 그의 영광에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소망을 가지고 하늘의 시민답게 살아갈 것을 눈물을 흘리며 빌립고 교인들에게 간곡히 권면한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 (24 - 31)

◆ 밤중소리 01-31 | VIEW : 1,356

(24) 주 안에 서라

(빌립보서 4:1)

서론 :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지극히 사랑했습니다. 1절에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이라고 했습니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이라”라고도 했습니다. 비록 빌립보 교회 안에 책망 받을 만한 많은 성도가 있었지만 바울은 그들을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사랑의 품에 안았고 주 안에 설 것을 당부하므로 그들로 올바른 신앙생활을 통해서 자기와 함께 천국 경주장을 달려가 줄 것을 원했습니다.


1. 양 무리를 사랑한 바울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심정으로 사랑했습니다.

(1) 사랑하고 사모했다고 했습니다. 양 무리를 향한 목자의 사랑은 어떻게 나타나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린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정말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선한 목자로 자기 생명을 버리신 것입니다. 목자는 주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양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이 모든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베드로의 확답을 들으신 후,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목자는 먼저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주님의 양 무리를 사랑해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목자는 주의 양 무리를 참으로 사랑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양 무리들에게 사랑이 안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의 양 무리를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목자가 양 무리를 사랑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사모했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대상이 떨어져 있으면 사모하게 됩니다. 간절히 보고 싶고 그리워하는 마음이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바울은 이 사모하는 심정으로 빌립보 교인들을 보고 싶어했습니다.

(2) 바울은 양 무리들을 자신의 기쁨으로 삼았습니다. 목자는 바울처럼 양 무리들을 기쁨으로 삼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목회에 보람도 없고 재미도 없습니다. 양들이 잘 될 때 진심으로 기뻐하는 마음이 목자의 마음입니다. 양은 항상 목자의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목자는 양들로 인하여 늘 근심과 염려의 짐을 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양이 병들면, 양이 실패하면, 양이 사고를 당하면 이 모든 괴로움의 짐이 목자에게 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목자에게 기쁨을 주는 양이 될 수 있는 것입니까? 첫째로 주 안에서 살아가는 올바른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 같은 성도는 목자의 기쁨이 됩니다. 주님의 뜻대로 살려고 열심을 내는 성도들은 목자에게 기쁨이 됩니다. 목자와 함께 교회를 위하여 고난의 십자가를 지는 성도는 목자에게 큰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3)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자신의 면류관으로 알았습니다. 목자의 면류관은 양 무리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피로 값 주고 사신 양 무리들을 기업으로 목자에게 주셨습니다. 자기 기업에 충성할 때 그 양 무리는 곧 하나님 앞에 상급이 됩니다.

한 성도, 한 성도가 자신의 면류관이 되므로 그 양 무리들을 잘 돌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귀히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면류관처럼 소중하게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같은 성도들에게 간곡히 권고하고 싶은 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주 안에 서라”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주 안에 서기 위해서는 첫째로 진리를 잘 깨달아야 합니다. 진리로 허리띠로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진리의 토대가 무너지면 모든 것이 다 무너져 버립니다. 진리의 토대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을 잘 배우고 잘 분별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 성도들 중, 많은 사람들이 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여 잘못된 길을 가므로 바울의 근심이 되어왔던 것입니다.

다음에 순종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순종보다 더 좋은 선물은 없습니다. 순종의 생활을 배워야 합니다. 무엇이든지 저절로 얻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은혜만 받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하기 때문에 순종의 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순종의 생활은 은혜를 받는 것으로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순종하고저 끈기 있게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힘써야 그 대가를 얻을 수 있습니다.

다음에 소망을 굳게 잡고 달려가야 합니다. 세상을 바라보다가 손에 잡은 소망을 놓쳐 버리면 그대로 세상의 늪에 빠져버리게 됩니다.


결론: 여러분은 목자에게 사랑을 받고 사모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양들이 되셔야 합니다. 그 같은 방법은 주의 뜻대로 살기를 간절히 바라고 순종하는 생활을 잘하며 헌신하고 충성할 때 저절로 목자의 마음에 심겨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주 안에 굳게 서는 생활을 하시어 목자의 기쁨이요 면류관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25)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빌립보서 4:2-3)

서론 :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서 마음이 하나가 되지 못하여 교회에 거슬리는 두 부녀들에게 같은 마음을 품고 협력해야 한다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 부녀들의 이름이 하나는 유오디아요 다른 한 명은 순두게라는 여인으로 나와 있습니다. 이들은 바울을 도와 복음을 전하는 일에 협력한 바울의 유력한 부녀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 간에 분쟁이 있다는 말이 바울에게 들려 온 것입니다.

1. 부녀들로 인한 빌립보 교회의 분쟁

교회의 분쟁에는 여자들이 많이 개입됩니다. 교회에서 여자들의 파워가 쎄기 때문입니다. 빌립보 교회에 일어난 분쟁이 어떤 것인지는 나타나 있지 않기 때문에 모르지만 대개의 경우, 교회의 운영 문제로 다투는 일이 많은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그 부녀들의 이름을 밝히면서 권면한 것을 보면 바울과도 잘 아는 사이인 것으로 짐작케 하는데 바울이 그 교회에서 복음을 전할 때 많은 도움을 주었던 부녀들로 보입니다. 그래서 그들에 대한 바울의 권면이 정중하면서도 간절한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교회는 어두운 곳에서 빛을 비취는 곳이기 때문에 언제나 흑암의 권세가 틈타는 곳입니다. 사탄이 교회를 훼방하는 일 중에 하나는 교회로 분쟁케 하여 복음을 전하는 일에 방해를 놓습니다 .교회에서 일어나는 분쟁에는 허용되는 것이 있고 허용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분쟁이 허용된다는 말은 만약 교회에 이단이 침투하여 교회를 어지럽힐 때 교회에서는 그들 무리들과 싸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진리를 파수하지 못하면 그 교회는 조만 간에 사탄의 교회로 전락해 버리는 것입니다. 거짓 선생들의 거짓된 복음을 막아야 합니다. 악의 세력이 발호하지 못하도록 죄와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하면 안될 분쟁이 있습니다. 이상과 같은 일 외에는 절대로 분쟁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시기와 파당으로 말미암은 분쟁은 용납될 수 없습니다. 눅 17 : 17절에서 주님은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 지고 분쟁하는 집은 무너진다고 경종하시므로 화합하고 용납하고 사랑으로 하나가 되라고 하신 것입니다. 교회에서 분쟁이나 다툼은 교만한 마음에서 일어납니다. 온유와 겸손으로 자신을 낮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2. 바울의 권면

바울은 다툼을 끝내는 일로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했습니다. 대개의 경우, 다툼은 서로가 자기 의견대로 되지 않을 때 나오는 법입니다. 자신의 의견이 가장 접합하고 사리에 맞으며 교회를 위해서도 가장 좋은 방법인 줄로 고집하기 때문에 이로 인하여 충돌이 생겨 분쟁이 나고 심한 경우에는 교회가 서로 갈라지는 일까지 생기는 것입니다. 이런 때에는 나뉘어진 서로의 의견의 일치점을 찾아야 합니다.

의견이 다르고 방법이 달라도 섬기는 주님은 한 분이십니다. 그 주님을 참으로 사랑한다면 서로간 약간씩 양보하여 같은 마음을 품을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바울의 복음 사역을 돕고 아직까지 주님을 위해 귀하게 쓰임 받는 동역자들이 있음을 상기시키면서 그들을 도와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들에 대하여 참으로 자기와 멍에를 같이한 자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말한 멍에란 복음을 위한 십자가를 말합니다. 바울과 함께 십자가를 짊어지고 바울이 하고저한 복음 사역에 생명을 다하여 협력해 준 일꾼들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들 부녀들에 대하여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이라고 했습니다. 교회 안에는 예나 지금이나 부녀들의 활동이 활발합니다. 부녀들을 빼면 교회를 운영하거나 교회를 위해 일할 일꾼을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대하여 이들을 도우라고 했습니다. 도우란 말은 이들이 하려는 복음 사역을 방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더 적극적으로는 그들에게 협력하여 많은 결실을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이들에 대하여 대단치 않게 여겼고 이들이 하려는 복음 사역에 대하여 거치는 돌처럼 방해하는 일이 많았던 것으로 바울에게 들렸든 모양입니다. 바울은 이 편지에서 그들 부녀들의 이름을 다 거론하지는 아니했지만 그 중에 한 명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는 말로 글레멘드라고 하는 아름다운 주의 일꾼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이 글레멘드가 중심이 되어 활동하는 바울의 동역자들을 대단치 않게 여겼던 모양입니다.


결론 :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향하여 이들을 도우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있느니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들은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며 바울이 인정하고 주님이 인정해 주는 일꾼이란 사실을 이처럼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바울의 권면을 통해서 교인들끼리 분쟁을 삼가야 할 것과 복음에 힘쓰는 자들에게 협력해 주고 도와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배워야 할 줄로 압니다.


(26) 항상 기뻐하라

(빌립보서 4:4)

서론 :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주 안에서 기뻐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기뻐하라는 말은 기쁨을 가지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생활 가운데서 기쁨을 창조하는 생활을 가리킵니다.

1. 그리스도인의 생의 특색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의 삶에 아주 특별한 특색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의 마음에 왠지 모르게 기쁨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슬픈 것 같지만 기뻐하고 괴로운 것 같지만 기쁨의 삶을 지내는 것이 그리스도의 삶인 것입니다. 만약 기쁨이 없이 지낸다면 그 사람은 소망이 없는 생애를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생애에 기쁨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까?

(1)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를 믿고 하나님을 의뢰하며 자기 생애를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 같은 섭리는 내가 어려움을 당할 때에도, 실패했을 때에도 전혀 변함이 없이 내 생애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생애를 믿고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기쁨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인들의 생애에는 하나님의 축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간 사람 중에 단 한 사람도 하나님의 축복에서 제외된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는 그리스도인은 어떤 환경 속에서도 기쁨을 가질 수 있습니다.

2. 기뻐하라

바울이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기뻐하라고 한 말은 권면이 아닙니다. 주 안에서의 명령입니다. 바울이 그의 서신에서 밝히고 권하며 명하는 모든 말은 주님으로부터 직접적인 계시를 받은 것이거나 성령께서 바울의 글을 통해서 주님의 뜻을 전달하게 하시려고 감화감동을 주신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바울의 이 같은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기뻐하라는 말은 우리의 생애에 있어서 제한을 두면 안 된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는 말입니다. 전도서를 보면 사람의 생애에는 울 때가 있으면 웃을 때가 있고 슬퍼할 때가 있으면 또한 춤을 출 때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우리의 생애 중에서 우리는 항상 기뻐해야 하는 것입니다. 웃을 때만 아니라 울 때도 기뻐하라는 것이고 춤출 때만 아니라 슬퍼할 때에도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기쁨은 우리의 생의 모든 조건과 환경을 초월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우리에게 말하는 기쁨은 바로 이 같은 기쁨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 기쁨을 가지고 살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물론 세상 사람들이 기뻐하는 그 기쁨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기쁨입니다. 이 기쁨을 소유한 그리스도인은 값진 보물을 소유하고 살아가는 아름다운 신앙의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주를 인하여 핍박을 받고 모든 악한 말을 들을 때에도 기뻐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복음을 전하다가 관원에 잡혀 매 맞는 수모를 당했지만 그들은 기뻐했다고 했습니다.

3. 누가 기뻐할 수 있는 것인가?

그러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이 이처럼 기뻐하는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기뻐하지 않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더 많은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이 같은 기쁨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까?

(1)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들만이 이 같은 기쁨의 생활이 가능한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내 심령 속에 가득히 찰 때, 그의 심령 속에는 감사가 있고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이 기쁨은 그 사람의 생애에 찾아오는 모든 불행도 이길 수 있습니다. 기쁨을 잃어버린 생활은 주님을 잃어버린 생활입니다.

(2) 소망을 바라볼 수 있는 성도들만이 이 같은 기쁨의 생활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현실에 안주하거나 만족하는 사람이 아니라 소망중에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현재의 어려움이나 시련도 소망으로 바라보면 그로 말미암아 장차 나에게 무한한 유익이 오게 되며 축복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의 생애에서 기쁨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 : 여러분, 기쁨은 우리에게 퍽 유익합니다. 기쁨은 우리 마음에 평안을 줍니다. 기쁨은 가정에 사랑과 축복을 줍니다. 기쁨은 우리의 신앙생활을 기름지게 합니다. 기쁨은 교회에 화평을 줍니다. 기쁨은 인생의 어려움을 이기게 합니다. 여러분의 생활에 주님으로 말미암아 항상 기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7) 관용을 베풀라

(빌립보서 4:5)

서론 :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을 주고 곧이어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고 말씀해 줍니다. 관용이란 말은 너그럽게 받아 드리는 마음과 상대방을 용서해 주는 마음을 뜻합니다. 이 관용은 사랑과 서로 연계되는 말입니다. 바울은 너희 관용을 알게 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이미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겉으로 나타내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처럼 관용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그 관용을 또한 나타내야 할 사람들입니다.

1. 화평은 관용에서 온다.

하나님은 우리와 화평을 이루시는 일에 어떤 마음을 가지신 것입니까? 말할 수 없는 관용을 베푸셨다고 하셨습니다. 롬 3 : 25절에서 하나님께서 예수를 화목제물로 세우신 일은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우리의 모든 죄를 간과하심으로 하셨다고 말씀해 줍니다. 간과하셨다는 말은 우리가 지은 죄가 태산보다 더 높지만 그것을 용서하시는 관용을 베푸신 사실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가정에서 화평을 이루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교회에서 화평을 이루어야 합니다. 형제들 간에 화평을 이루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에서 화평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화평을 이루는 첫째 조건이 관용인 것입니다. 관용이 없으면 화평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런데 관용은 아무나 그리 쉽게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첫째로 관용에는 용서가 따라야 합니다. 시기와 미움을 가진 마음으로는 관용이 나올 수 없습니다. 허물을 덮어주는 용서가 있어야 관용이 나올 수 있습니다. 용서는 관용의 결과처럼 보이지만 용서가 없이는 관용이 따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형제들에게 관용을 베풀려면 먼저 그 형제의 허물과 죄를 덮어주고 용서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다음에 관용하는 마음에는 인내가 따라야 합니다. 상대방이 나에게 악한 말을 하거나 손실을 끼치는 행동으로 나왔을 때 관용을 베풀려면 인내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 같은 인내는 관용에서 오는 주님의 칭찬과 상급을 바라볼 때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관용하는 마음을 가지려면 자신의 부족함을 알아야 합니다. 나도 다른 사람들로부터 관용을 받아야 할 부족한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전제하면서 살아가야 관용을 베풀 수 있는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옵시고”란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아야 할 죄인임을 인식한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죄지은 내 형제들의 죄를 용서해 주어야 하는데 이 같은 일은 자신의 부족을 통감하는 사람들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나 다른 사람으로부터 관용을 받을 수 있는 비결은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관용을 베풀어주는데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2.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고 말한 후,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는 의미 있는 말씀을 들려주었습니다. 주께서 가깝다는 말은 주의 재림이 가까웠다는 의미로 아람어로 ‘마라나타’라고 합니다. 초대교회 당시에는 주님의 재림의 소망 가운데 살아갔기 때문에 주님이 곧 오십니다 고 하는 이 ‘마라나타’란 말이 교인들간의 인사말이 되어 왔었습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주께서 가깝다고 한 말은 우리가 더욱 경성하여 주의 뜻대로 살아가야 오실 주님을 영접할 수 있을 것이 아니냐는 의미로 준말입니다. 이 말은 위로요 격려가 되는 말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가운데 그들처럼 마라나타란 의미로 인사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주님이 가깝다는 말을 하면 오히려 정신 나간 사람으로 취급을 받게 됩니다. 참으로 이 세대는 패역한 세대요, 믿음이 없는 세대요, 노아의 때와 같은 롯의 때와 같은 세대인 것입니다.

주 재림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항상 기뻐하는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베풀 수 있습니다. 주께서 가깝다고 하신 말씀을 우리는 신앙적으로 받아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재림이 언제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십니다. 그리고 그 시기가 매우 가깝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우리의 영광스러운 소망이기 때문에 그 소망에 우리의 신앙생활의 표적을 두고 살아가야 합니다.

결론 : 관용에는 화평이 따릅니다. 관용에는 기쁨이 따릅니다. 관용하는 생활이랴말로 나에게 무한한 유익이 되며 내 신앙의 성장에 밑거름이 됩니다. 여러분들은 관용하는 마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관용을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28) 감사함으로 구하라

(빌립보서 4:6-7)

서론 : 우리의 생활에는 가끔 염려해야 할 일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 때 그리스도인들은 그 염려를 어떻게 대처하느냐?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염려를 대처하는 하나님의 방법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6절과 7절에 나와 있는 말씀이 바로 그 내용입니다.

1.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

하나님께서는 한 마디로 우리에게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염려하지 말아야 할 그 범위가 분명히 제시되어 있습니다. “아무것도”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라고 하신 이 말씀은 아무 일에 도란 의미로 우리의 생활 가운데 나타나는 모든 염려를 통털어 일컫는 말입니다. 적은 일은 말할 것도 없고, 큰일, 복잡한 일, 단순한 일, 중대한 일, 사소한 일, 개인적인 일, 가정적인 일 등, 모든 것이 다 포함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이처럼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1) 염려는 우리에게 이로움보다 해로움을 줍니다. 주님은 너희가 염려함으로 너희 키를 한자나 더 크게 할 수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염려는 이방인들이 하는 것이라고도 하셨습니다.

(2) 그리스도인의 염려는 불 신앙에서 나옵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생애를 믿음으로 맡기지 못했을 때 염려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돌보아 주신다는 사실을 의심할 때 염려가 찾아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모든 생애를 주장하시고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망각했을 때 이 염려가 엄습하는 것입니다.

(3) 염려는 믿음에서 떠나게 하고 나를 불 신앙으로 인도합니다. 염려는 세상 근심에 잠기게 하고 이 세상 근심은 우리에게 결과적으로 사망을 이루게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인은 염려를 어떻게 해야 하나?

바울은 염려하지 말고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일에 대하여 분명한 해답을 제시했습니다.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한 것입니다.

(1) 우리의 염려해야 할 일들을 우리는 염려대신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께 아뢰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염려하는 방법이 다른 것입니다. 아기들이 무엇이 필요하면 엄마에게 달라고 하듯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염려도 자신이 짊어지지 말고 하나님께 아뢰라는 것입니다. 그 방법이 기도와 간구인 것입니다. 기도와 간구는 동일한 표현이지만 기도는 반드시 간구여야 하는 것입니다. 간구란 간절히 구하는 신앙적인 기도의 자세를 말합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염려를 맡기고 그 해결을 부탁하는 일은 간절히 구하는 기도로 아뢰어야 하는 것입니다.

구하는 기도의 자세는 감사함으로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왜 받기도 전에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까?

구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믿기 때문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받을 것으로 확신할 때 감사가 나오게 됩니다.

하나님은 감사함으로 간구하는 기도를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믿음의 기도에는 응답의 역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2) 7절에서 “그리하면”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이처럼 우리의 모든 염려를 감사함으로 아뢰면 이란 뜻입니다. 이런 기도에는 어떤 일이 생기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같은 우리의 간구를 어떻게 처리하시느냐는 것입니다.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했습니다.

첫째로 이런 기도에는 하나님의 평강이 임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지식에 뛰어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지각에 뛰어나신 섭리로 우리를 주장하시는 분이시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무엇인가 구하면 기도의 응답을 믿기 때문에 기도하는 우리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평강이 임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도의 일차적인 응답에서 오는 하나님의 선물인데 이 선물은 성경이 주십니다. 그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신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 속에서 더욱 큰 믿음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결론 : 우리는 무슨 염려를 안고 고민하고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고민하고 그 고민 가운데서 허우적거리는 생활을 결코 기뻐하지 아니하십니다. 염려를 키우면 그 염려가 우리들에게 의심을 안겨 주고 우리의 믿음의 길을 가로막으며 급기야 그 염려가 눈덩이처럼 커져서 우리의 생애를 짓누를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염려를 당신에게 맡기라고 하십니다. 기도와 간구로 감사함으로 아뢰라고 하십니다. 이 생활이 우리의 믿음의 생활에 모습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생애에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나며 도우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만날 수 있습니다.


(29)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비결

(빌립보서 4:8-9)

서론 : 8절 9절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사회생활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 말씀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사회생활은 그 사회에 적응하는 도의 생활에 그 기준을 두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법에 순응하는 생활을 해야 하지만 그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도의 생활에도 솔선 수범해야 하며 사회인의 지탄을 받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곳에서 어느 시대나 어느 사회에서나 공통적으로 따라야 할 도의 생활에 대하여 자기를 표본으로 하여 본받으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1. 그리스도인이 따라야 할 사회적 도의 생활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사회에서 적응해야 할 도의 생활로 다음 몇 가지 사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1) 무엇에든지 참되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사회 생활에서 가장 명심해야 할 일은 진실함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사회인들에게 진실하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으면 자신뿐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게 됩니다. 어떤 경우에든지 진실해야 합니다. 진실은 동서고금 어느 사회에서나 그 사람의 인격을 가늠하는 표준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2) 무엇에든지 경건하라고 했습니다. 경건이란 도덕적인 거룩한 생활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도덕적 생활에 흠이 있으면 사회인들의 지탄을 받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사회 생활은 다른 사람들의 관심의 초점이 됩니다. 그러므로 그 생활이 투명하게 비취게 되는데 그 투명성을 간직해야지 그 안에 흠집이 발견되면 안됩니다. 사회인들 앞에서 불 경건한 모습을 드러내서는 안됩니다.

(3) 무엇에든지 옳으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웃이나 친지들 간에 경우에 어긋나는 일로 비난을 받아서는 안됩니다. 저 사람은 예수를 믿는 사람인데 그는 참으로 옳은 일만 한다고 하는 평가를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4) 무엇에든지 정결하라고 했습니다. 정결이란 말은 행실과 마음가짐에 있어서 깨끗함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모든 생활 면에 깨끗함과 순결을 보여 줄 수 있어야 합니다.

(5)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 하라고 했습니다. 사랑 할 만 하라는 말은 사랑을 받을 만 하라고 한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미움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어떤 경우에 처하든지 무엇에든지 사랑을 받을 만한 행실을 해야 하며 친근해야 합니다.

(6)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 하라고 했습니다. 칭찬을 듣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일반적인 선행에서 나옵니다. 예수님도 우리에게 착한 일을 하여 너희 빛을 비취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착한 일은 이웃에게 빛을 비취게 됩니다. 그것이 칭찬으로 돌아오게 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이웃으로부터 칭찬을 들을 수 있도록 힘쓰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2. 평강의 하나님이 함께 하시리라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덕은 그리스도인의 도덕적 행실,, 곧 덕행을 말합니다. 그리고 기림이란 다른 사람에게 인정을 받는 일, 칭찬을 듣는 일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도의적 행실이나 남에게 인정받고 칭찬 받을 만한 일에 있어서 바울이 말한 바를 생각하여 힘써서 그리스도의 복음의 빛을 내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라는 권면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9절에서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고 했습니다.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시리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설교로 전한 바를 배우고 바울이 전한 바를 듣고 바울의 생활에 대하여 보고들은 바를 그대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진실한 것을 가르쳤으며 올바른 것을 받게 했으며 진리의 말씀을 듣게 했습니다. 그리고 말과 행실에 있어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었습니다. 그래서 “행하라”고 한 것입니다.

결론 :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시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평강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이 함께 하시면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생활에 항상 평강이 넘칩니다. 그런데 그분을 모시는 비결은 바울에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는데 있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바울의 이 말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바울이 말한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들이 되어 평강의 하나님이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30) 자족하기를 배운 바울의 생애

(빌립보서 4:10-13)

서론 : 바울에게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로 인하여 주 안에서 새로운 기쁨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의 이 같은 말은 빌립보 교회가 이전에 바울의 복음 사업을 위해 종종 재정적 도움과 선물을 보내왔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어떤 연고에서인지 잠시 중단되었다가 이번에 다시 싹이 나기 시작했는데 이에 바울이 감격하였으며 이 같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태도에 감사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회로부터 이 같은 도움을 받았던 일과 지금 다시 그런 일이 계속된데 대하여 감사하게 생각한 것은 그가 어떤 사심이나 물욕에서가 아니라 주의 복음을 위해 반드시 필요로 했기 때문입니다.

1. 바울이 배운 생활의 비결

바울은 11절로 13절에 이르기까지 그가 복음을 전하면서 그가 가졌던 생활상의 태도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바울의 생활은 자족하는 생활이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자족하는 생활이 결코 자기자신이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생활해 가면서 배운 생활철학임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먼저 자신의 입장에 대하여 한 마디 변명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어려울 때 그리고 가난할 때 물질적 도움을 받고싶어 하며 또 도움을 받을 때 기뻐하지만 바울의 경우는 자신의 처지가 궁핍은 하지만 그렇다고 그 궁핍하므로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부요할 때 신앙생활을 잘 하고 그겋지 못할 때 낙심하는 경우가 많지만 바울의 경우는 오히려 그 반대의 입장에 서 있었습니다.

(1) 바울은 어떤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했습니다. 자족한다는 말은 스스로 만족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하는 자족하기를 배웠다는 말은 모든 당면한 생활에 있어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웠다는 의미가 됩니다. 바울은 심히 어려운 가운데서라도 복음을 효과 있게 전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웠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처지가 경제적으로 어떤 입장에 있던지 그런 환경에 적응하고 대처해 나갈 수 있으며 만족할 수 있는 생활의 비결을 터득했노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 바울은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안다고 했습니다. 비천하다는 말은 인생의 가장 말단의 형편에 놓여 있는 비참한 처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모욕을 당하고 부끄러움을 당하며 인간 이하의 취급을 당했을 그런때에도 태연자약하였으며, 기뻐하는 마음을 잃지 않았으며 소망을 견고히 잡고 살아갈 수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비천한 가운데서도 바울처럼 그리스도인다운 품위를 잃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런 입장에 있는 성도들이 어려움을 만나고 가난한 처지에 있다고 그 품위를 손상시키면 안 되는 것입니다.

(2) 바울은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았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사람이 재물이 풍부할 때 그의 처신이 자신의 신앙생활은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도 신앙의 영향을 끼치는데 바울은 그에게 아무리 풍부한 물질이 있다 할지라도 결코 그런 일이 없이 비천에 처해 있을 당시에나 다름없이 처신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바울은 교회에서 분에 넘치는 물질적 도움과 천사와도 같은 대접을 받아 온 일도 많았습니다. 그런 때 바울은 교만하지 않고 그 물질이나 대접에 맘을 빼앗기지 않고 그 중심이 늘 주님을 향하여 뜨거웠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배부르며 배고품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배부르면 생의 즐거움으로 여깁니다. 배고프면 괴로움으로 여깁니다. 풍부하면 만족합니다. 궁핍하면 낙심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런 모든 환경 속에서도 잘 적응하여 그 어떤 경우를 만나거나 어떤 환경에 처하든지 똑같은 마음가짐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같은 생애를 살아온 바울의 비결은 어디 있는 것입니까? 13절에서 말씀하기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인격에서 나온 일도 아니며 바울이 힘써 노력한 대가로 그 같은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순전히 자기에게 능력주시는 주님의 은혜였다는 사실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결론 : 바울이 세상을 살아간 목적이 세상에 있는 물질을 바라거나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어떤 즐겁고 기뻐할 것을 원하고 바랐던 것이 아닙니다. 그는 복음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기쁨으로 삼았으며 하늘의 상급과 소망을 바라보는 것으로 영광으로 삼았습니다. 바울의 생애를 본 받는 일은 우리의 생애에 바울과 같은 영광을 안겨줄 것입니다.


(31) 하나님께 풍성한 대로 채우시리라

(빌립보서 4:14-23)

서론 :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자신에게 보내준 물질적 도움에 대하여 그들이 자신의 괴로움에 함께 참여한 것으로 인정해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마 10 : 41절에서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라고 하셨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바울에게 물질적 도움을 주었을 뿐인데 복음을 위해 자신이 당한 그 많은 괴로움에 참여한 자로 인정하여 이 일에 그들도 자기와 같은 상급을 받을 것임을 언급해 주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크게 격려를 주는 말씀입니다.

1. 바울이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잊지 못하는 이유

바울이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파하든 초기에 그에게 많은 애로가 있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려면 먼저 자신의 생계에 대한 물질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도 물질이 많이 소요됩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서는 이 일까지 감당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처럼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그 시기에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자원하여 바울의 생활비를 부담하여 주고 그가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드는 일절의 비용을 기쁨으로 담당해 주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이들의 물질적 도움을 17절에서 선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자신이 선물을 받은 것도 기쁘지만 그것보다도 바울에게 선물을 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그들의 신앙생활에 유익한 과실을 맺은 것이며 또 그들에게 이 과실이 더 많기를 위함이라고 말해 주고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복음을 위해 생명을 받쳐 헌신하는 바울에게 물질적인 도움을 준 일은 비록 인간인 바울에게 건네 준 것이지만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에게 베푼 이런 사랑에 대해 풍성한 대로 그들의 모든 쓸 것을 채워 주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하는 일꾼을 도와 주는 일은 그 도와주는 일이 몸으로건 물질로건 기도로건 반드시 하나님이 기억하시며 그가 한 이 일에 대해 갚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억하심은 두 가지 사실에 근거합니다. 하나는 선행을 위한 사람에게는 30. 60, 100배로 갚아 주시기 위해서이며 악행을 행하는 자들에게 갑절로 심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2. 바울의 문안과 축도

바울은 언제나 그의 서신 마지막에 가서 교회 식구들에 대한 문안을 잊지 아니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문안 뿐 아니라 자기와 함께 하는 모든 성도들의 문안도 빠트리지 아니했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그 가운데서도 가이사 집 사람 중 몇에게 문안을 부탁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지적한 가이사란 당시 로마의 황제를 말하며 가이사 집 사람이란 가이사 집에서 기거하는 사람들이나 그 집 노예들과 아마 인척들까지도 포함되었을 것입니다. 이들은 바울이 로마에서 옥에 갇히는 생활 가운데서 알게 된 사람들이며 바울에 의해 복음을 받아 드려 성도가 된 형제들일 것입니다.

바울은 23절 끝절에 가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 지어다”는 축도를 끝으로 편지를 마감하고 있습니다.

축도는 그 당시 사도들에게 주신 권한으로 바울은 서신 마지막에 가서 반드시 이 같은 축도로 마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 28 : 19절에서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그의 제자들에게 명하셨습니다.

(1) 제자를 삼는 일은 양의 목자를 가르치는 것으로 제자들에게 당신의 양을 맡기셨으며 목자의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2) 다음에 세례를 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에 대한 세례는 목자들에게 주신 권한입니다.

(3) 다음에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목자는 그리스도의 양떼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지키게 해야 합니다.

(4) 또 한 가지 권한은 성도들에 대한 축도 권입니다. 축도 권이란 주의 종들이 직접 주의 이름으로 베푸는 축복의 선언입니다. 이 축복의 선언은 ‘주의 이름으로 가도하나이다’로 복을 축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있기를 원하나이다’는 식으로 중보적인 기도가 아닙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직접 선포하는 선언입니다. 그래서 ‘있을 지어다’로 끝맺게 됩니다.


결론 : 이 같은 축도는 바울의 서신을 통해서 그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계시에 그 근거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같은 사도적 권한은 오늘날 주의 종들에게 계승되었으며 주의 종들은 예배를 마감하는 끝머리에 가서 이 축도로 친히 주의 이름으로 축복을 선언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