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차례
에베소서 1장 (1 - 11)
(1) 하나님의 뜻으로 사도된 바울(에베소서 1:1-2)
(2) 하늘의 신령한 복(에베소서 1:3-6)
(3) 하나님의 택하심(에베소서 1:3-6)
(4) 그리스도가 이루신 은혜의 사역(에베소서 1:7-12)
(5) 예정의 비밀을 알게 하신 지혜(에베소서 1:7-12)
(6)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비하신 예정(에베소서 1:7-12)
(7) 그리스도 안에서의 통일(에베소서 1:7-12)
(8) 성령의 인 치심(에베소서 1:13-14)
(9) 바울의 감사(에베소서 1:13-14)
(10) 지혜와 계시의 정신(에베소서 1:17-19)
(11) 그리스도의 영광(에베소서 1:20-23)
에베소서 2장 (12 - 22)
(12) 허물과 죄로 죽은 자(에베소서 2:1-5)
(13)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의 은혜(에베소서 2:1-5)
(14)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심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에베소서 2:5-7)
(15) 믿음과 하나님의 선물(에베소서 2:8-9)
(16) 그리스도인과 선한 일(에베소서 2:10)
(17) 선한 일은 무엇인가?(에베소서 2:10)
(18) 그러므로 생각하라(에베소서 2:11-13)
(19) 둘로 하나를 만드심-1(에베소서 2:14-18)
(20) 둘로 하나를 만드심-2(에베소서 2:14-18)
(21) 이제부터 변화된 우리의 신분(에베소서 2:19)
(22) 신령한 성전 건축(에베소서 2:20-22)
에베소서 3장(23 - 30)
(23) 바울에게 주신 복음의 계시(에베소서 3:1-6)
(24) 복음의 일꾼이 된 바울(에베소서 3:7)
(25) 바울의 겸손(에베소서 3:8-11)
(26) 은혜를 주신 목적(에베소서 3:8-13)
(27) 바울의 간구(에베소서 3:14-19)
(28) 우리 마음에 계시는 주님(에베소서 3:14-19)
(29)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라(에베소서 3:14-19)
(30) 우리 중에 행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베소서 3:20-21)
에베소서 4장 (31 - 40)
(31) 부르심에 합당한 생활(에베소서 4:1-3)
(32) 하나인 교회(에베소서 4:4)
(33) 하나이신 하나님의 역사(에베소서 4:5-6)
(34)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에베소서 4:7-10)
(35) 교회의 직임(에베소서 4:11-12)
(36) 그리스도 안에 온전한 사랑(에베소서 4:13-14)
(37) 사랑으로 연결되는 지혜(에베소서 4:15-16)
(38) 이방인과 같이 행하지 말라(에베소서 4:17-20)
(39) 새 사람을 입으라(에베소서 4:21-24)
(40) 벗는 싸움과 덧입는 싸움(에베소서 4:25-31)
에베소서 5장 (41 - 48)
(41)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에베소서 5:1-2)
(42) 성도의 생활지침(에베소서 5:3-7)
(43) 빛의 열매(에베소서 5:8-9)
(44) 살리시는 빛의 역사(에베소서 5:10-14)
(45) 세월을 아끼라(에베소서 5:15-17)
(46) 성령 충만한 생활(에베소서 5:18-21)
(47) 부부와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에베소서 5:22-27)
(48) 육체를 미워하지 말고 양육하여 보호하라(에베소서 5:28-33)
에베소서 6장 (49 - 53)
(49) 가정의 질서(에베소서 6:1-3)
(50) 가정의 질서(자녀에 대한 교육)(에베소서 6:1-4)
(51) 고용 관계의 질서(에베소서 6:5-9)
(52) 그리스도인의 싸움(에베소서 6:10-13)
(53) 하나님의 전신갑주(에베소서 6: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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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1장
◆ 밤중소리 11-06 | VIEW : 4,801
(1) 하나님의 뜻으로 사도된 바울
(에베소서 1:1-2)
서론 : 오늘 새벽부터 우리는 에베소서에 대한 말씀을 공부하게 됩니다. 에베소서는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의 내용입니다. 이 서신은 바울이 로마에서 억류된 생활을 하면서 보낸 서신 중에 하나로 보기 때문에 '빌립보서''골로새서' '빌레몬서'와 함께 옥중 서신이라고 불려 집니다. 바울은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복음의 계
시를 편지 형식으로 여러 교회에 보냈는데 바울의 이같은 계획은 이 서신이 장차 하나의 성경을 이룰 것이라고 하는 그의 놀라운 통찰력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보내진 서신은 비단 보내는 그 교회 뿐 아니라 주변에 있는 여러 교회에서도 회람 식으로 돌려 읽혀졌습니다.
1. 바울의 사도적 신분
에베소는 광대한 로마제국의 판도에 있는 아시아의 수도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 중 첫번째로 나오며 주님으로부터 '처음 사랑을 버린 교회'로 책망을 들은 교회이기도 합니다. 이곳은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던 곳인데 바울은 3차 전도 여행시 두란노 서원에 머물면서 복음을 전한 결과 세워진 교회입니다. 바울은 편지 서두에서 먼저 자신의 사도적 신분에 대하여 선포하고 있습니다. 1절에서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12사도 중에 들어가 있는 사도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의 편지에 사도란 이름을 부치기에 어색한 점이 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바울의 대적 자들은 바울을 모함하기 위해 그가 전하는 이신득의의 복음을 비방하고 바울의 사도 직에 정면으로 도전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목격하였고 주님으로부터 말할 수 없는 복음의 비밀스러운 여러 계시를 받았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자신을 이방인의 사도의 직분을 주셔서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고 하는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으며 예루살렘의 다른 사도들도 바울의 사도직을 인정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의 사도 직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예수의 사도"가 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란 하나님의 선택을 의미합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자
바울은 서신을 보냄에 있어서 서신을 받을 대상자에 대하여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의 신실한 자들"에게 보낸다고 했습니다. 성도란 거룩한 무리란 뜻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성별된 사람들을 말합니다. 성도의 이름을 듣는 무리는 이미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를 이룬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신실한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신실하다는 말은 진실한 믿음의 소유자란 의미가 되겠습니다. 이들은 세상에 소망을 둔 사람이 아닙니다. 오직 주님께만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성도들입니다. 육신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새로운 생애를 보람 있게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신실한 자라고 말했는데 신실치 못한 자란 '두 주인을 섬기는 자'를 말합니다. 하나님과 세상을 섬기는 일에 명확한 태도를 세우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에 있어서 분명한 선택을 하지 못하고 이것도 취하고 저것도 취하는 지조 없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진실한 신앙의 사람들은 오직 예수님만 자기 생애의 전부로 여깁니다. 이같은 그리스도인들은 바울과 함께 그리스도의 형제들입니다. 이같은 형제들은 바울의 서신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겸손히 받아 드려 더욱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3. 은혜와 평강이 있을 지어다.
바울은 이처럼 그리스도 예수 안의 신실한 자들을 향하여 은혜와 평강의 축복 기도를 해 주었습니다. 평강이란 말은 헬라어로는 '에이레네'인데 히브리어로는 '샬롬'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보통 마음의 평안을 의미해 주는 그 이상으로 번영과 재물의 축복까지를 기원해 주는 일반적인 인사로 사용되어 왔지만 성도들이 사용할 때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아들을 통해서 주시는 특별하신 은총이란 뜻이 들어가 있습니다.
결론 : 바울은 은혜와 평강을 축원했습니다. 이 은혜와 평강은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나오는 특별하신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앞으로 에베소서의 강해를 들으시면서 바울이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간구한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난 은혜와 평강이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2) 하늘의 신령한 복
(에베소서 1:3-6)
서론 : 인간을 구원하시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예정은 너무나도 놀랍고 신비스러우며 또 얼마나 감격스러운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에 있어서 구원하실 백성들을 미리 예비하셨느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중요한 문제인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두 학설로 구분되어 수 천년간 논쟁이 계속되어 오고 있는 문제가 이 문제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예정설을 주장하는 신학을 소위 '칼빈주의' 신학이라고 부르며 예정설을 인정하지 않고 인간의 자유의지로 구원이 선택된다는 학설이 '알미니안'주의라고 부릅니다.
우리 장로 교회는 하나님의 예정 위에 세운 신학을 교단의 기본적 교리로 삼고 있습니다. 이것은 신학이라기 보다 성경적 진리인 것입니다. 그리고 한국에도 여러 교파들이 있는데 성결교회, 감리교회, 침례교회 등에서는 알미니안 주의의 신학적 견해를 따르고 있지만 어떤 교회는 목사님들의 성경 연구나 연구한 신학에 따라 장로교가 아닌 교단의 교회에서도 하나님의 예정을 받아 드리는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1.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
애베소서에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하신 경륜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구원 섭리에 있어서 제일 먼저 등장시킨 것이 있는데 바울은 그것을 "하나님의 예정"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실인즉 하나님의 예정을 주장한 신학자는 사도 바울입니다. 칼빈 선생은 사도 바울이 계시로 받아 성경에 기록한 하나님의 예정을 다른 이보다 먼저 발견하여 조직적으로 체계화 시킨데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3-14절까지는 우리를 구속하는 일에 있어서 성부 성자 성령의 3위 되시는 하나님의 역사와 우리들이 이 3위 하나님께 올려야 할 영광에 대하여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문제는 우리의 신앙 생활에 중요한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말씀을 듣는 일이나 성경을 연구하는 일에 반드시 깨달아야 할 일이기 때문에 여러 차례에 걸쳐 자세히 말씀드리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먼저 3절에서 하나님을 호칭하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분은 범신론자들이 부르는 일반적인 하나님이 아닙니다. 다른 종교에서 부르거나 인정하는 하나님은 조물주로서의 존재로 인정받는 그런 하나님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명시해 주시는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약 시대에 오직 한 분뿐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그들의 하나님으로 섬겼습니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 와서 그 여호와 하나님은 사랑으로 그의 아들을 보내심으로 인간과 새로운 관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비밀이 벗겨졌는데 아버지와 아들은 둘이 아니라 하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이같은 아버지와 아들의 하나님으로서의 위치가 삼위일체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들이 없는 자는 아버지가 없으며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아버지를 믿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육신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인 특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백성이 되지 못하고 구원의 약속을 받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 안에서 주시는 하늘의 신령한 복
3절 말씀을 보면 이런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셨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복을 주셨다고 하는 대상은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예정하신 약속의 자손들을 의미합니다.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이란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모든 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생명을 얻는 복도 신령한 복입니다. 천국의 유업도 신령한 복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살 동안에 받는 모든 것들도 그것이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신령한 복인 것입니다.
결론 : 그런데 이같은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은 누구에게나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주시는 특별하신 은혜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같은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약속의 자녀들입니다.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믿으므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보낸 이 에베소서를 통해서 이 특권적이고 영광스러운 신령한 복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이 복을 받아 누릴 수 있는 성도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하나님의 택하심
(에베소서 1:3-6)
서론 : 하나님의 예정에 대하여 '택하심' 또는 '예정'이란 말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택정하신 시기와 이유와 목적에 대하여 간략하게 기술하고 있는데 이 모든 일이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에 있음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1. 택하신 시기
바울은 4절에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라고 말씀해 줍니다. 여기서 택하신 시기에 대하여 밝히기를 "창세 전"이라고 명시해 줍니다. 이것은 만물을 창조하시기 이전이란 뜻이며 인간이 만들어지기 이전이란 의미로도 해석이 됩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이같은 계시를 주셨는가? 인간의 구원은 어떤 선행이나 의로운 행위나 학식이나 도덕적 기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란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입니다.
롬 9:11절에서 에서와 야곱의 경우를 들어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에 의해 야곱을 사랑하시게 되었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의 구원은 이미 하나님의 예정하신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해답이 됩니다. 천지만 물을 창조하시기 이전에 하나님께서는 이미 창조와 심판에 대한 모든 계획을 완전하게 세우셨으며 그 계획에 의해 지금 역사가 진행되고 있는데 그 같은 계획에 의해 그의 구원받을 백성들이 선택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선택하셨다는 말에는 선택되지 않은 불택자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불택자들에 대해서 예수님은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 도다"고 하시고 택자들에 대해서는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0:26,27). 또 예수님은 택하심을 받은 사람들에게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불택자들에 대해서는 "저주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고 명령을 내리셨습니다(마25장).
2. 택하신 기준
예정론에 있어서 하나님은 어떤 기준에 의해 그의 백성들을 예정하셨느냐는 것이 중요한 질문이 됩니다. 그러나 이런 질문은 인간이 이해하기에 어려운 영적인 의미가 부여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5절에서 "그 기쁘신 뜻대로"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또 어떤 것인지 알 수도 없으며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따라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하셨다"는 것, 우리는 이 사실만 믿으면 된다. 인간적인 이성이나 지식으로 이해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이해하라'고 하셨지 '믿으라'고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일에 대해 꼬치꼬치 따지는 사람들에 대해 토기장이의 비유를 들어 입을 봉쇄해 버렸다. 롬 9:19-21절에서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어리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한이 없겠느냐'고 힐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이처럼 창세 전에 택하신 이유에 대하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예정하셨다는 사실을 말씀해 줍니다. 이것은 우리로 하나님의 자녀의 자격을 주시려고 그렇게 하셨다는 뜻이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적어도 거룩하고 흠이 없어야 한다.
거룩이란 완전한 거룩으로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흠이 없다는 것은 죄와 더러움에서 벗어 난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온전하심 같은 온전한 의로움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이 일을 어떻게 이루셨는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 주시고 우리는 다만 그를 믿음으로 이 모든 하나님의 은혜를 소유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유업으로 받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결론 : 바울은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을 택하신 목적에 대해 6절에서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우리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기 위해서 그런 예정을 세우셨으며 우리를 통해서 그것을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특히 여기서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신다는 말씀은 비록 입술의 찬양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전 생애를 통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는 생활의 열매를 의미합니다. 우리를 예정하신 그 은혜 가운데는 이처럼 우리들이 해야 할 바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4) 그리스도가 이루신 은혜의 사역
(에베소서 1:7-12)
서론 : 3절 - 6절에 이르는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사역에 있어서 그리스도 안에서 창세 전에 택하셨음을 말씀해 주고 있다. 이같은 선택은 인간의 양심이나 선행이나 공로에 기준을 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하신 것임을 밝혀 준다. 이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다. 은혜란 댓가 없이 거저 주시는 선물을 가리킨다. 이런 선물을 우리에게 주신 이유는 자기의 아들로 삼아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하늘의 신령한 복을 주시기 위하심이라고 말씀해 준다.
1. 하나님의 은혜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사역
오늘 본문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심에 있어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사역이 나온다. 7절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라고 말씀해 준다. 이 말씀을 두 가지로 구분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역사는 그 동기가 그의 은혜의 풍성하심에 따르는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다. 주님은 풍성한 은혜의 소유자이시다. 요 1:17절 말씀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고 했다. 요 1:14절에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말씀해 준다. 이것은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가 예수 그리
스도로 말미암아 그대로 세상에 나타난 것을 의미해 준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시면 하나님의 은혜가 이 세상에 나타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예수는 하나님의 은혜 그 자체가 되시는 분이시다. 요한은 증거하기를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다"고 했다. 예수님이 은혜 그 자체이심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거저 주신 은혜의 대상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모든 은혜를 가지시고 세상에 오셔서 그 은혜를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
에서 예정하신 그의 자녀들에게 주신 것이다.
② 다음에 그의 피로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다고 했다.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가 나온 것은 곧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의 피에 근거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가 은혜 자체가 되시는 이유는 그의 십자가에 있다. 그가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는 그 분의 은혜가 지극히 풍성하심을 증거 하는 잣대가 된 것이다.
만약에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지 않으셨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은혜가 되실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예정은 이처럼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로 출발하셨으며 그 은혜를 나타나심에 있어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사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게 하신 일로 증거를 삼게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예정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은혜는 절대적인 전제 조건이다.
2. 그리스도의 피가 은혜가 되는 이유
7절 하반 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다"고 말씀해 준다. 그리스도의 피가 은혜가 되시는 것은 그의 피로 죄 사함을 받았기 때문이다. 죄의 용서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왔다. 그런데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십자가에서 흘리신 아들의 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만약 그리스도의 피가 없으셨다면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으로 나타날 것인가?
하나님께서 우리가 받아야 할 죄 값을 그의 아들에게 넘기셔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게 하심으로 우리의 죄 값을 모두 갚아 주심으로 우리의 죄가 용서받은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다음에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구속해 주셨다. 구속이란 말은 옛날에 노예를 속전을 주고 자기의 소유로 샀다는 뜻이 된다. 하나님께서 죄의 종노릇을 하던 우리들을 속전을 지불하시고 당신의 소유로 사셨다. 그 속전은 금이나 은이 아니라 그 아들의 피로 지불하신 것이다.
결론 : 우리가 믿고 섬기며 의뢰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예정을 이루시기 위해 세상에 오셔서 그의 피를 흘리시는 일로 그의 사역을 이루셨다.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그의 피로 구속 곧 죄 사함을 얻게 하신 그 풍성하신 은혜에 감사하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5) 예정의 비밀을 알게 하신 지혜
(에베소서 1:7-12)
서론 : 하나님의 예정으로 이루신 구속과 죄 사함의 은혜는 세상에는 온전한 비밀입니다. 비밀이란 말은 공개된 하나님의 말씀이라 할지라도 인간의 지혜나 지식으로는 그 뜻을 깨달아 알 수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복은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이기 때문에 하늘에 속하여 이 신령한 복을 받아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택자 만이 알 수 있는 비밀인 것입니다.
1. 세상 지혜로는 알 수 없는 하나님의 비밀
8절 말씀을 보면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하늘의 신령한 지혜와 총명을 넘치게 주셨다는 뜻입니다. 이 지혜와 총명은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이 주시기 때문에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언제까지나 비밀에 속한 것이어서 깨달아 알 수도 없으며 예수를 믿어 구원에 이를 수도 없는 것입니다.
고전 1:18절 말씀에서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묘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비밀을 세상 사람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이게 하심으로 그들로 따르지 못하도록 하셨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판단에 따라 그들 스스로가 배척하였으므로 그 책임이 그들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란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어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인데 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불신자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늘의 신령한 것을 알 수 있는 지혜와 총명을 주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고전 1:21절 말씀에서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지혜는 놀랍게 발전했습니다. 우주를 정복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똑같은 인간을 얼마든지 복제할 수 있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같은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인간의 지혜는 이제 막다른 골목에까지 이르러 스스로 하나님의 진노를 초래하여 심판을 자초하고 있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비밀이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비밀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알 수 있는 지혜는 하나님이 주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비밀을 성령으로 알려 주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셔서 이 하늘의 신령한 복을 주시기로 예정된 자들에게만 이 비밀을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이 오시면 너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구약 시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갖지 못했던 것은 이처럼 그 분을 알 수 있게 하시는 성령께서 보내심을 받지 않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고전 2:9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2 : 12절 말씀에서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려면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영을 아무에게나 주지 아니하시고 제한하시는 이유는 오직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하신 그의 백성들에게만 주시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자기 선택이냐? 아니면 하나님의 선물이냐? 하는 문제는 신학적으로 많은 논란을 거듭하고 있지만 성경을 올바로 해석하기만 한다면 그 해답은 자연히 나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결론 : 성령의 인도와 감동이 따르지 않으면 성경을 비록 100독을 한다 한들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잘못된 신학과 이단적 주장들이 그런 사람들에 의해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기도하여 하나님의 지혜와 총명을 더 충만히 받아 그를 아는 풍성한 지혜 가운데서 믿음으로 성장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6)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비하신 예정
(에베소서 1:7-12)
서론 : 바울은 본 절에서 하나님의 예정의 비밀을 밝히고 있다. 9절에 나오는 말씀이 그것이다.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예정의 필요성은 "하나님의 기쁘심을 따라" 된 것이다. 우리가 그것들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며 모든 문제의 해답을 오직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두어야 한다.
1. 때가 찬 경륜
하나님의 예정은 "때가 찬 경륜"을 위한 것임을 말씀해 준다. 때가 찼다는 말은 역사적으로 성취될 시기를 말하며 경륜이란 이 모든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권세를 뜻한다.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은 그 이루실 때가 있다. 그 때가 이르기 전에는 이루심이 없으시다. "천하의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다"고 말씀해 준다(전 3:1).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섭리하신 예정도 마찬가지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신 일은 때의 정함과 상관없이 무작정 아무 시기에나 오실 수 있는 것을 오신 것은 아니다.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실 하나님의 때가 찼으므로 보내셨다.
성경은 무엇을 가르쳐 주시는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는 일에 대한 하나님의 때를 보여주신 책이다. 예수님의 태어나시고 그가 고난을 받으실 일에 대하여 단 9장에서는 70 이레로 그 때를 말씀해 주셨다.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7이레와 62이레가 지난 69이레 시에 이스라엘의 왕이 기름 부음을 받을 것이란 말씀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태어나심의 때도 알려 주셨고 62 이레 후에 끊어진다고 말씀함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그의 죽으심에 관한 때에 대하여 예언해 주신다.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 구원의 계획을 예정하셨을 때,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이 계획을 이미 계획하시고 완성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그가 예정하신 것을 그의 뜻대로 때를 따라 성취하시는 것이다. 창3 : 15절에서 이미 아담에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죄인의 구원을 언약으로 보여 주셨다. 롬 5:14절에서는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갈데아우르에서 경건한 아브라함을 택하여 이스라엘의 12지파의 조상으로 삼으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기 위해 메사야의 혈통을 언약과 선택과 믿음으로 잇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셨음을 알게 된다.
2. 인간의 구원도 때를 역사 하시는 경륜이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바는 때가 찬 경륜으로 이루시는데 인간의 구원도 마찬가지다. 바울의 경우에서 이같은 경륜을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완악한 그대로 오랜 기간 놔 두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가 되심에 때가 찬 경륜을 따라 그를 부르시고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다. 때가 차매 내리시는 하나님의 경륜은 놀랍다. 한편 강도의 경우에 있어서 그 사람의 구원의 때를 십자가에서 괴로움을 당하는 그 때를 통하여 이루신 것이다.
오래 전 세상을 감짝 놀라게 했던 금당 (金堂) 살인 사건의 주인공 박철웅은 그 끔찍한 범죄 후에 살인범의 처지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구원을 이뤘다. 우리는 그 누구에 대해서도 '저 사람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만나지 못할 것이라'고 단언할 수가 없는 것이다. 예정하신 하나님이 자녀라면 그가 어느 시대에 태어났건 어떤 환경 속에 살아가건 때가 차면 하나님의 놀라우신 경륜에 따라 구원의 시기가 오는 것이다. 그런 일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따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인간은 판단할 수가 없다.
고전 1:26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고 말씀해 주고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부르심에서 우리는 몇 가지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예정하시되 지금 이 시대, 내가 맞고 있는 이 환경 속에서 나를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시어 때가 찬 경륜을 따라 나를 부르셨다는 사실이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나는 오직 나일 뿐 절대로 다른 사람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결론 : 지금 내가 지금 어떤 인간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건, 내가 어떤 환경 속에서 어떻게 살던 나라는 지금 나의 존재는 나를 구원함에 있어서 절대로 필요한 존재이기 때문에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무시하거나 자신의 존재를 무가치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내 모습 이대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성도가 되자.
(7) 그리스도 안에서의 통일
(에베소서 1:7-12)
서론 : 10절에 나오는 말씀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 만물의 모든 것들이 통일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뜻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만유의 주로 삼으시려는데 있으셨다.
1.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통일된 만물
그리스도께서 명실상부한 만유의 주가 되시려면 땅에 내려오셔서 하실 일이 있으셨다. 그가 땅에 내려와서 하실 일 중에 하나는 땅의 백성들을 사탄의 권세에서 벗어나게 하시어 그들의 왕권을 가지셔야 한다. 다른 하나는 사탄을 세상의 임금자리에서 내어쫓아야 한다. 그리고 이 자가 휘두르는 사망 권세를 파멸시켜야 한다. 예수님은 지상에서 바로 이 일을 완성하심으로 하늘에 있는 것과 땅에 있는 것을 통일시키셨다.
마 28:18에서 말씀하시기를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다"고 하셨다. 요 3:35절에서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다"고 말씀해 주셨다. 그러면 이런 그리스도의 권세는 어디서 온 것인가?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 순종하신 그 순종의 대가로 스스로 취하신 것이다. 이에 대하여 2:6-11절까지에 걸쳐 자세히 말씀해 준다. ( ).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지극히 높이시어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시고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셨다"고 말씀해 준다. 이 일은 주님의 영광스러운 부활로 이루신 것인데 그는 이 부활로 땅에 있는 것이나 하늘에 있는 것이나 모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 되게 만드신 것이다. 통일하신 것이다.
2. 우리는 기업의 예정을 입었다.
11절에서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다"고 말씀해 준다.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예정을 입은 일은 그 리스도 안에서 기업을 받기 위한 것이었다. 이 기업이 3절에서 말씀해 주시는 바,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이라고 했다. 이같은 놀라운 일은 왜 하시게 되었는가? 이에 대하여 11절에서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 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되었다"고 했다. 이 말씀의 뜻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섭리하시며 역사 하시는 모든 일은 오직 하나님의 원대로 그의 뜻을 따라 된 것임을 분명히 밝혀 준다.
그런즉 이 하나님의 뜻을 누가 거스리며 누가 그 뜻에 대적할 것인가? 하나님의 뜻이나 그가 이루시는 경륜을 사람의 표준에서 세우셨다면 공의가 상실되고 말할 수 없는 혼돈이 일어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인간은 원래가 죄인이며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 마음에 원하시는 일은 온전히 거룩하시며 공의로우시며 사랑이 무한하시며 추호도 오류가 없으시며 완전한 계획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감사하고 그 같은 하나님의 모든 섭리와 예정을 믿으며 의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을 이루시는 일에 그 분이 원하시는 목적이 있다고 말씀해 주고 있다.
12절에서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해 준다. "우리로 하나님이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신다"고 하신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은 모든 만물로부터 영광을 받으시기를 기뻐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를 예정하시고 우리에게 하늘의 신령한 모든 복을 주신 목적은 우리들로부터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와 사랑에 합당한 영광을 받으심으로 우리들로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시려는데 있다고 하신 것이다.
요 15:8절 이하에서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라고 하셨다. 우리가 어떻게 이같은 영광의 찬송이 될 수 있겠는가? 과실을 많이 맺는 일로 될 수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살면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될 수 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육신의 나는 죽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롭게 사는 생활은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될 수 있는 생활이다.
결론 : 우리는 우리의 생활 가운데서 우리의 생활이 과연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될 만한 것인가를 스스로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라고 하신 말씀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더욱 들어 내는 그 영광의 찬송이 되는 그리스도인이 되자
(8) 성령의 인 치심
(에베소서 1:13-14)
서론 : 에베소서 1:3-14절까지는 하나님의 예정에 의한 구원의 섭리에 대하여 그 비밀을 밝혀 주고 있는 말씀이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이 말씀 중, 3-6절에 나오는 말씀에는 만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하신 성부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가 나옵니다. 7-12절에는 성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이 나옵니다.
그리고 13 - 14절에는 믿음과 구원의 보증이 되신 성령의 은혜가 나오고 있습니다.
1. 구원의 완성
하나님의 예정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으로 우리의 구원은 실질적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이제는 이것을 그의 예정하신 택자 들에게 적용시키는 일만 남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미 그들의 구원이 창세 전에 확정되었지만 그들이 실질적으로 구원이 적용되려면 몇 가지 순서가 따라야 합니다. 첫째로 13절에서 이르는 것처럼 "진리의 말씀 곧 구원의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진리는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예정을 구원받을 죄인들에게 알려 주시는 메시지가 곧 하나님의 말씀이요 곧 진리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의 일점 일획이 떨어짐보다 천지가 없어지는 것이 오히려 쉬울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이미 우주 만물이 창조되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확실하게 예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같은 사실을 밝혀 주신 복음을 듣지 않으면 이 놀라운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에 참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아버지께 배운 자마다 다 내게로 온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는 일꾼을 예비해 두시고 이 복음을 전파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롬 1:13-15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구원 얻을 그의 백성들에게 말씀을 보내십니다. 고넬료의 가정에 베드로를 보내셨으며 빌립보 감옥의 간수에게 바울을 보내어 그들의 가정을 구원 얻게 하셨습니다.
2. 믿음으로 확증함
13절에서 또 말씀하시기를 "그 안에서 또한 믿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예정을 확증하는 증거인 것입니다. 내 이름이 하나님의 생명책에 있다는 사실을 무엇으로 확인할 수 있느냐? 하나님께서 나를 예정하신 사실을 무엇으로 알 수 있느냐? 그리스도의 피로써 구속받은 사실을 내가 어떻게 알 수 있는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면 오직 믿음으로만이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세상에서 불러내시는 확실한 방법을 사용하시는데 그것이 복음을 통한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예정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역사는 하나님의 택하신 자 이외에는 절대로 믿을 수 없게 만드셨기 때문에 불택자들은 믿음을 가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비밀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골 2:2). 요 10 : 26절에는 너희가 내 양이 아님으로 믿지 아니한다고 하심. 행 13 : 48절에는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행 16 : 31 주 예수를 믿으라고 하셨다.
다음에 13절에서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예정을 입은 자들이 실질적으로 구원에 이르는 단계가 세 단계인데 하나는 복음을 듣는 것, 두번째는 그 복음을 믿는 것, 다음 세 번째가 성령으로 인침 받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성령으로 인침을 받는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성령의 내주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이 내주 하시는 이유는 14절에서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시기 위해서"임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구원을 완전히 이루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결론 :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는 이처럼 놀라운 것입니다. 삼위의 하나님이 모두 이 일에 하나가 되시어 역사 하셨다는 사실은 이 일을 하나님께서 얼마나 중요한 일로 다루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14절에서 성령이 하시는 일이 한 가지 더 나타나 있습니다.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임재 하시는 이유로 우리들로 이같은 하나님의 크신 역사에 대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시려는데 있다는 사실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구속의 은혜를 알고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는 생활을 이루는 성도가 되자.
(9) 바울의 감사
(에베소서 1:13-14)
서론 : 에베소 교회는 창립 초기부터 신앙적 기초가 다져진 가운데 성장하고 있었던 교회였습니다. 웅변가 아볼로가 이곳에서 그리스도의 도리에 대하여 잘 가르쳤고 바울이 가서 안수하여 그들로 성령을 받게 하여 교회가 뜨거워지면서 부흥했습니다. 더군다나 바울이 그곳에 자리잡고 목회 하면서부터 훌륭한 교회를 이루어 놓았습니다.
이 모든 것들로 인하여 바울은 그의 마음에서 감사가 저절로 나와 "너희를 인하여 감사하기를 마지아니했다"고 했습니다.
1. 에베소 교회의 경우
계 2장에는 아시아 지역의 일곱 교회 중 에베소 교회가 제일 먼저 등장하는데 이 교회는 바울이 서신을 보낸 에베소 교회와 동일한 교회입니다.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가지고 있었던 믿음은 여러 가지 면으로 모범적이었습니다. 그들의 믿음에는 행위와 수고와 인내가 따랐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도 열심히 배워 폭 넓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로써 그들은 거짓된 복음을 전하는 거짓 사도들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했습니다. 다만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책망을 들었지만 이같은 책망은 이 서신을 보낸 시기보다 훨씬 나중의 일이었습니다. 바울이 목회 했던 그 시기에는 사랑이 넘쳤던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는 책망을 듣게 된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주님께 대한 처음 사랑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에베소 교회의 전임 목회자로써 자신이 그곳을 떠난 후에도 그들의 믿음이 향상되고 사랑이 풍성한 일에 대하여 감사와 기쁨에 벅찼던 것입니다.
바울은 비록 몸은 에베소 교회를 떠나 있었지만 그곳 교인들의 믿음을 소식 편에 전해 들었을 때 하나님께 감사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들이 가장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은 성도들의 믿음이 성장하고 신앙생활을 잘한다는 소식을 들을 때인 것입니다. 그러면 신앙의 장성은 무엇으로 나타나는 것입니까? 뭐니뭐니해도 교회 출석으로 나타납니다. 시간 시간마다 꾸준히 교회 모임에 참석하고 교회에 헌신하기 위하여 교회에 출석하는 일은 좋은 신앙의 첫 열매라고 볼 수 있습니다. 교회 출석에도 시험이 따릅니다.
친척의 결혼식이 주일에 있다든가, 사업이나 직장 문제 등으로 빠질 때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 위기를 잘 넘겨야지 그렇지 못하면 원점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다음에 믿음의 성장은 순종으로 나타납니다. 순종을 잘하는 믿음은 보나마나 아름다운 신앙인 것입니다. 순종이 따르지 못하는 신앙은 병들어 있는 신앙입니다. 그로 인해 언제인가는 큰 시험에 빠지게 되던가, 하나님의 간섭의 손길이 따끔하게 내려질 것입니다.
2. 성도를 향한 사랑을 가진 에베소 교회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는 성도를 향한 사랑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이 바울의 감사 조건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감사한 에베소 교인들의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성도의 사랑은 어려움을 당한 형제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에베소 교인들은 이런 사랑을 실천하는 일에 모범이 된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사랑은 죽은 사랑인 것입니다. 형제에 대한 사랑의 실천은 주님께 대한 사랑의 나타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다음에 성도에 대한 사랑은 그의 허물을 덮어 주는 일로 나타납니다. 우리가 형제들의 죄와 허물을 덮어 주어야 할 근거는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죄와 허물을 용서해 주셨다는 데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허물을 들추어내는 일은 시기와 다툼과 분쟁을 가져옵니다. 그러나 형제의 허물을 덮어 주는 일에서는 사랑과 화평이 넘쳐 교회의 덕을 세우게 되며 세상 사람들의 칭송을 듣게 되며 교회의 영적 부흥을 가져오게 됩니다.
결론 : 바울은 많은 교회를 세우고 많은 성도들의 믿음의 아버지로 사랑과 존경을 받았지만 특히 에베소 교회를 위해 기도할 때마다 감사했습니다. 하나님의 좋이 기도할 때 내 존재가 에베소 교회의 성도처럼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0) 지혜와 계시의 정신
(에베소서 1:17-19)
서론 : 본 절에는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에게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에게 주신 이 놀라운 축복을 알기를 원하면서 이같은 사실을 밝히 보여 주시는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받을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하는 그의 바람이 나옵니다. 특별히 17절에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지혜와 계시를 깨달을 수 있는 성령의 은혜가 에베소 교인들에게 임할 수 있기를 원한다는 말입니다.
1. 신령한 복을 바라볼 수 있는 눈
하나님이 준비하신 신령한 축복은 누구나 깨닫고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을 통한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지혜와 계시의 정신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정신이란 말은 영이란 말과 같은 뜻이라고 난하 주에 나와 있습니다. 말하자면 성령께서 우리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셔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에 대해 고전 2:10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배하신 모든 것은 오직 성령으로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오직 성령으로 우리에게 보이셨다고 했습니다. 인간의 지식이나 지혜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적인 것으로는 생각할 수도 없고 상상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면 이같은 성령의 지혜와 계시를 알 수 있는 것입니까?
① 첫째로 진리를 배우는 자가 알 수 있습니다. 시 11 : 2절에서 "하나님의 행사가 다 크시니 이를 즐거워하는 자가 다 연구하는 도다"고 했습니다. 뵈리아 교인들 중에는 진리의 말씀을 열심히 공부하는 가운데 믿는 자가 날로 많아졌고 부흥되었습니다.
② 다음에 진리를 얻기를 사모하는 자가 알 수 있습니다. 잠 8 :10절에서 "너희가 은을 받지 말고 내 훈계를 받으며 정금보다 지식을 얻으라 대저 지혜는 진주보다 나으므로 무릇 원하는 것을 이에 비교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③ 그리고 진리의 말씀을 하나님으로부터 듣는 자가 알 수 있습니다. 잠 8:32절에서 "내 아들아 이제 내게 들어라 내 도를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누구든지 내게 들으며 날마다 내 문 곁에서 기다리며 문설주 옆에서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2. 지혜와 계시의 영을 받으면 무엇을 알 수 있나?
그러면 이런 지혜와 계시의 영을 받으면 무엇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까?
① 하나님을 알 수 있게 됩니다. 17절 후 반절에서 하나님을 알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참 지식은 지혜와 계시이 영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영을 받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을 깨달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② 지혜와 계시의 영은 우리의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십니다. 18절에서 너희 마음 눈을 밝히신다고 하셨습니다. 신령한 눈은 어떻게 열립니까? 지혜와 계시의 영이 열어 주실 때 열립니다. 그러면 이처럼 신령한 눈이 열릴 때 우리의 눈에는 무엇이 보입니까? 첫째로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이 보입니다. 환상으로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이처럼 지혜와 계시의 영을 받아 마음 눈이 열려진 사람만이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을 믿음으로 확실히 바라보게 됩니다. 다음에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기업의 후사인데 그 영광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는 영의 눈이 밝히 열린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세번째로 하나님의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가를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자신의 강력한 힘으로 모든 일을 이루십니다. 그러면 그 하나님의 힘의 강령으로 나타나는 모든 축복이 누구에게 오는 것입니까? 믿는 우리에게 베풀어주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큰가를 바라볼 수 있는 것은 지혜와 계시의 영으로 마음의 눈이 밝히 열려진 사람만이 가능합니다.
결론 : 바울은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능력으로 이것을 다 바라보았기 때문에 답답한 심령으로 에베소 교인들에게 자기와 같이 알게 하시기를 간구하노라고 말해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지혜와 계시의 영으로 여러분의 마음의 눈이 열려 이같은 그리스도인의 영광의 소망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11) 그리스도의 영광
(에베소서 1:20-23)
서론 :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크신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 있음을 말씀해 줍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로 올리사 하나님 우편에 앉히셔서 모든 정사와 권세를 주관하게 하신 이 일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임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그리스도의 다시 살리심
죽은 자의 다시 살리시는 일은 하나님의 능력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으로 그의 능력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모든 성도들의 부활의 첫 열매이기 때문에 주님의 부활은 그리스도인 들의 산 소망이 된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의 능력이 죽은 우리의 몸을 다시 살리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전 15 : 22절에서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에 연합하여 부활할 그리스도인의 부활의 소망은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보여 주시는 것으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받아 마음 눈이 밝혀진 성도들만이 믿음으로 볼 수 있는 소망인 것입니다. 다음에 하나님의 능력은 다시 살리신 그리스도를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사람으로 낮아지시고 죽으사 무덤에까지 내려가셨던 그를 하나님이 다시 살리사 하나님의 보좌에까지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와 강력한 능력으로 이뤄진 것입니다. 이 모든 하나님의 기이하신 역사는 누구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혜와 계시의 영을 받아 마음의 눈이 밝히 열려진 사람만이 믿음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의 새로운 영광
이처럼 그리스도를 하늘에까지 높이 올리신 하나님께서 그 그리스도를 만물의 주관자로 삼으시고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다고 했습니다.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신 능력도 기이하거니와 그를 하늘 위에 올리시고 만물의 주관자, 만유의 주로 삼으신 일은 더욱 놀라운 일입니다. 이같은 일은 만세 전부터 감추어졌던 하나님의 비밀이신 데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현실화된 것입니다. 이것은 죄와 사탄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승리요, 이같은 하나님의 섭리를 모르고 애초부터 하나님을 대적했던 사탄의 결정적인 실패의 원인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와 영광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 하심으로 아루어진 것이니 이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을 믿음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축복된 사람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의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로 주셨으니 이 교회의 지체가 되는 우리는 만물 위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만물을 지배하게 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음에 마지막으로 바울은 증거 하기를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교회가 얼마나 영관스러운 존재인가에 대한 증거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시고 믿음으로 그 지체가 되어 그리스도와 성도는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받으실 모든 영광은 그의 교회도 함께 누릴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이 그리스도의 놀라운 영광에 함께 참여하는 축복 받은 자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을 일컬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기업의 후사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롬 8:18절에서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한 이 영광은 이같은 그리스도의 영광에 동참하는 영광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누릴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인 것입니다.
결론 : 여러분은 이 위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믿고 있습니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충만히 받아 이 놀라운 하늘의 영광의 축복을 깨닫고 그 소망 가운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에베소서 2장 (12 - 22)
◆ 밤중소리 01-31 | VIEW : 789
(12) 허물과 죄로 죽은 자
(에베소서 2:1-5)
서론 : 1절에서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이처럼 죽은 자란 말이 간혹 나옵니다. 이 말씀은 영적 의미를 기진 말입니다. 허물과 죄는 우리 인생을 파멸로 이끕니다. 실제로 모든 인생은 허물과 죄로 그의 영적 생명이 죽어 있는 것입니다.
1. 죽은 자들
그러면 죽은 자란 누구며 왜 죽었다고 하는 것입니까?
요 5 : 25절 말씀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말씀하신 죽은 자란 영적으로 죽은 상태를 말합니다.
눅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에서, 돌아온 아들에 대하여 그 아버지가 이처럼 말했습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이 아들이 세상으로 나가 죄 가운데 지낼 때를 죽은 것으로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죽은 자입니까? 창조주 되신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사람,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난 자는 그의 생명이 죽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우리들로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지게 하는 것입니까? 그것이 허물과 죄라고 하신 것입니다. 죄는 불순종에서 나왔습니다. 하나님과의 계약을 스스로 파기하여 정녕 죽으리라고 하신 말씀대로 죽음을 선택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는 그 자체가 하나님과의 교통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아담이 죄를 범하자 생령이었던 하나님의 형상은 사라지고 직각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죄는 사망이라고 선언하셨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죄를 짓고도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사람은 한명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 아담의 후손인 죄인으로 태어나고서도 죽음을 면할 수 있는 사람도 한명도 없는 것입니다.
2. 누가 죄인인가?
누구나 자기를 죄인이라고 부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자기는 비교적 양심적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지옥에 가거나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만큼 악한 존재라고 여기지 아니합니다. 죄에는 선천성과 후천성이 있습니다. 선천적 죄를 원죄라고 하고 후천적 죄를 본죄라고 말합니다. 누구든지 태어날 때부터 죄인의 신분으로 태어납니다. 이 신분이 죄인인 것입니다. 죄는 전가되며 유전적입니다. 시 51 : 5절에서 다윗은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요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고 했습니다. 이 같은 원리를 잘 설명해 주고 있는 곳이 롬 5 : 12절입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했습니다.
아담의 후손은 이처럼 선친적으로 모두 죄인으로 태어납니다. 죄인은 죄를 속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죄가 전혀 없으신 독생하신 하나님을 죄인의 모습으로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죄의 후천성이란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범하는 죄를 말합니다. 인간은 죄인으로 태어나며 죄인은 죄에서 자유할 수가 없기 때문에 죄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롬 3 : 10절에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3 : 20절에서는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함을 받을 육체가 없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죄는 인생의 짐이요 빚입니다. 죄는 영원히 벗을 길이 없는 인생의 빚입니다. 주님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내게로 오라”고 하신 그 무거운 짐이란 죄짐을 말합니다. 주기도문에 나오는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한 죄란 빚을 의미합니다. 죄의 빚 값은 돈으로 탕감이 안됩니다. 피로 갚아야 하는데 죄인의 피가 아닌 정결한 피로 갚아야 합니다. 이 피를 어린양의 피라고 말하며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결론 : 요 8 : 34절에서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선천적으로 죄의 종인 아담에게서 태어나 종의 자식으로 죄에게 속한 자들로 태어난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후천적으로도 세상에서 죄를 범하므로 죄의 종으로 인침 받아 영원히 소망이 없는 존재들이 된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이 같은 자들을 일괄적으로 죽은 자들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 죽은 자들을 살리십니다.
(13)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의 은혜
(에베소서 2:1-5)
서론 : 본문 2절에는 허물과 죄로 죽은 자들의 삶이 나옵니다. 첫째로 세상 풍속을 좇는 자요, 다음에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르고 있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그 당시에는 이들처럼 우리의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냈으며 육체와 마음에 원하는 생애를 살아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 공중의 권세를 따라 살아가는 죄인
허물과 죄로 죽은 자의 상태는 어떠한가? 그들의 생애는 어떻게 살아가기에 이들을 향하여 죽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인가?
이들에 대하여 “이 세상 풍속을 쫓았다”고 했습니다. 세상 풍속이란 난하 주에 나온 헬라어를 보면 “이 세대”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생활 습성을 말합니다. 정욕대로 살며 하나님이 없는 생활의 모습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들에 대하여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다고 했습니다. 공중 권세 잡은 자란 곧 마귀를 말합니다. 마귀의 존재는 무엇이며 마귀는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가? 성경에는 이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습니다. 마귀의 첫 등장은 창 3장에서 뱀의 육체 속에 들어가 에덴에 나타난 것으로 그 모습을 보입니다. 원래가 마귀는 영적 존재이기 때문에 그 존재 자체를 우리는 볼 수도 없고 발견한다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그는 뱀 속에 들어가 자신을 나타냈고 그 이후로는 불신자들 속에 들어가 사람들로 진리를 따르지 못하게 하며 하나님을 대적하도록 미혹하여 왔습니다. 그래서 2절에서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 하는 영”이라고 말씀해 줍니다.
사 14 : 12절에 계시된 말씀을 보면 마귀가 “아침의 아들 계명성”으로 비유되었는데 그가 스스로 생각하기를 “내가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고 하는 자만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다가 타락한, 격이 높은 영적 피조물 중에 하나였음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자에 의해 미혹을 받아 함께 하늘에서 하나님께 대적한 일단의 천사의 무리들이 그를 쫓는 악령의 무리가 된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자를 당신의 구원의 섭리를 이루시는 일에 필요한 존재로 그들의 활동을 허락하셨다가 최후 심판에 가서 영원한 지옥에 멸망시키실 것을 게획하신 것입니다. 마 25 : 41절에서 예수님은 지옥에 대하여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해 예비된 영원한 처소”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마귀가 악령과 더불어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 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악령과 짝하고 있는 자의 상태
2절과 3절에는 악령의 역사를 받아 그 영향하에 있는 불순종의 아들들의 모습이 몇 가지로 나옵니다.
첫째로 이 세상 풍습을 좇는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좇는 생활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 풍습이란 돈, 명예, 음란, 술 취함, 투기, 분쟁, 당 짓는 일, 거짓말 등을 일상 생활화하는 사람들입니다.
다음에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낸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갑니다. 육체의 생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고 했습니다. 육신의 일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했습니다. 육체의 일은 정욕과 탐심이 그 발생 요인으로 이 같은 일은 마귀의 일입니다.
바울은 지금 우리의 형편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이 같은 사탄의 굴레에서 벗어난 일에 대하여 “은혜로 인하여 구원을 얻은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기 전, 우리 역시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라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처럼 살아 왔던 것입니다. 그 때 우리에게 무슨 소망이 있었던 것입니까?
4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이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긍휼이 풍성하신 분입니다. 긍휼이란 불쌍히 여기는 측은한 마음입니다. 그런데 이 같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주시는 것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결론 : 하나님의 이 크신 사랑은 너무나도 놀라운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풍성하신 긍휼에 따라 그 크신 사랑을 입어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은혜에 합당한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14)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심을 받은 그리스도인들
(에베소서 2:5-7)
서론 : 5절과 6절과 7절에 나오는 말씀은 모두 우리들의 영적 신분을 나타내고 있는 말씀입니다. 먼저 우리를 그리스도아 함께 살리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고 했습니다.
1.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은 우리
우리도 지난날에는 불순종의 아들들처럼 공중 권세를 잡은 마귀를 따라 세상 풍속을 쫓았으며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냄으로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다고 했습니다. 성경에서는 이런 사람들을 허물과 죄로 죽은 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죽은 자가 어떻게 살리심을 받은 것입니까? 5절에서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는 말씀에는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이 말씀은 첫째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을 전제해야 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죽은 자들을 살리시는 일에는 그리스도께서 먼저 그들의 허물과 죄로 인한 대속의 제물이 되시기 위해 죽으셔야 했습니다. 그의 죽으심은 우리의 죄 값으로 인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의 백성들의 대속 제물이 되셨다는 말은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그의 모든 백성들의 죽음이 그 안에 포함된 사실을 의미합니다.
다음에 그리스도를 살리신 일 곧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 안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그의 백성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는 죽으셔야 할 이유가 없으신 분입니다. 죽음은 죄 값으로 온 것인데 그 분에게는 죄가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인류의 죄를 담당시키시기 위해 죽으신 것이 그의 죽으심의 전부인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두 가지 역사를 동시에 이루신 것입니다. 하나는 죄 없이 죽으신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신 일입니다. 그리스도는 음부에 계실 수가 없으셨습니다. 음부의 권세가 그를 담당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음부의 권세는 오직 죄인에게만 죽음이 적용될 뿐인데 그리스도에게는 죄가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다른 또 한가지 역사는 그를 살리실 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가 대신 짊어지시고 죽으셔야 했던 모든 사람 곧 창세로부터 생명록에 기록된 모든 죄인을 함께 살리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는 죽으실 때 모든 그의 백성을 그 품에 안으신 채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살아실 때 그가 품으신 모든 그의 백성들도 그와 함께 살아나야 했습니다.
2. 우리가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는 뜻
그러면 우리가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는 뜻은 무엇입니까? 롬 5 : 10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지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우리를 위한 속죄 제물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속죄 제물로 인하여 죄의 사유함을 받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우리가 죄의 사유함을 받았으니 또한 그의 살아나심으로 우리는 그의 부활의 새로운 생명을 받아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얻은 새로운 생명은 하늘의 영원한 생멍인데 이 생명은 곧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음에 이 말씀 속에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필연적인 사실로 나타나는데 그렇다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의 살아나심에 연합되어 하나님과 화목되고 구원을 얻게 되었다면 또한 그의 승천으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것 역시 우리들과의 연합을 의미하기 때문에 바울은 6절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장차 우리가 하늘에 올라가 그리스도와 함께 말할 수 없는 영광을 누릴 수 있는 장래의 소망을 말한 것입니다. 이 소망은 너무나도 확실한 것이기 때문에 하늘에 앉히셨다고 하는 현재형으로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사실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가 살아나심으로 우리도 새로운 생명으로 새롭게 살아난 사람들, 다시 말하면 거듭난 사람임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께서 지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심 같이 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의 영광의 자리에 오를 것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할렐루야.
(15) 믿음과 하나님의 선물
(에베소서 2:8-9)
서론 :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것은 그 믿음에 구원의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8절에서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구원이 은혜에 속하는 이유
인간의 구원은 그리스도 안에서만이 가능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를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만이 그리스도의 부활에 연합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에 연합하여 영생을 얻게 됩니다. 그러면 구원이 왜 하나님의 은혜에 속한 것인가에 대하여 살펴보면 다음 몇 가지 사실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쨰 죄인은 죽음만이 있을 뿐, 구원의 소망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주신 일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둘째 죄인은 진노의 자녀로 하나님의 심판만을 받아야 하는데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일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에서 나온 것입니다.
세 번째로 죄인은 영원한 형벌만이 있을 뿐인데 우리가 천국의 후사가 되어 그 기업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2. 하나님의 은혜는 어떻게 받나?
그러면 이 같은 하나님의 은혜는 누구에게 미치게 되는 것인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방법은 오직 믿음입니다. 사람에게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구원에 이를 수가 없으며 그리스도인에게 믿음이 없다면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입니다. 믿음이란 곧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이 약속은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게 하신 일과 그를 다시 살리신 일을 믿는 일입니다. 이 믿음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능력이요 이적 적인 역사이기 때문에 거짓이 없습니다. 믿음에 거짓이 없는 이유는 믿음의 대상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만홀히 여기심을 받지 아니하신다고 했습니다.
믿음은 머리로 깨닫는 지식인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받아 드리는 진리임으로 자기의 마음을 속일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믿음은 사람의 인격과 생활을 변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잠시 잠깐은 남을 속일 수 있어도 그 거짓된 믿음이 오래 지속될 수는 없습니다.
3.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죄인인 인간은 원래가 복음을 받아 드릴 처지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믿음을 가질 만한 존재가 아닙니다. 누구든지 믿고 믿지 않는 것은 그 사람 자신이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적어도 인간의 눈엔 그렇게 보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자기가 거절하고 믿음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죽는 것이요, 믿는 사람은 자신이 그 믿음을 선택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여깁니다. 적어도 사람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믿음을 가질 만한 의가 없습니다. 믿음을 소유할 만한 지혜도 없습니다. 그러면 이 믿음은 무엇인가? 믿음은 어디서 생기는 것인가? 성경에서는 믿음에 대하여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해 줍니다. 9절에서 이르시기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라고 했습니다. 선물은 주는 이에게 선택의 자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구원의 선물을 주시는 유일하신 분입니다. 누구에게 이 선물을 주시는가?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예정을 받은 사람들에게 주십니다.
결론 : 그 순서는 먼저 그런 사람들에게 성령으로 감동하여 마음 눈을 밝게 하여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합니다. 그리고 그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도록 강권적으로 역사 하심으로 이 같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 수 없게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이 믿음의 선물을 받아 생명을 얻게 된 사람들입니다.
(16) 그리스도인과 선한 일
(에베소서 2:10)
서론 : 바울은 10절에서 하나님이 우리로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하시고 그 아들을 통해서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그 뜻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구원해 주신 것은 우리에게서 선한 일을 원하심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생애의 최대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영광을 나타내는 방법이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이란 사실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창작품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심에 있어서 두 번에 걸쳐 그 뜻을 이루셨습니다. 한 번 은 아담 안에서 이루신 육신적인 창조요,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영적인 창조이십니다. 우리는 고전 15장에서 놀라운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아담은 그리스도의 모형인데 모형으로서의 그 역할은 정반대로 나와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를 둘째 아담이라고 말하지만 이 같은 표현은 대단히 잘못된 표현입니다. 고전 15 : 45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첫 사람 아담은 ······ 마지막 아담은.” 여기서 첫 사람 아담이란 문자 그대로 아담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아담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둘째 아담이 아니십니다. 마지막 아담이십니다. 왜 이것을 엄격히 구별해야 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을 둘째라고 부른다면 예수님도 아담의 자손 가운데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나 아담은 마지막 아담으로 오셨습니다. 마지막 아담이란 첫 사람 아담이 실패한 것을 예수님이 오셔서 실패의 대가를 치루셨습니다. 그 분은 마지막 아담으로 오셔서 아담의 죄를 속한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사람으로 표현할 때는 어떻게 표현하는 것입니까? 4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예수님을 사람으로 표현할 때는 둘째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첫 사람인 아담과 분리하기 위해서입니다. 첫 사람이라고 부르는 아담은 땅에서 났습니다. 그는 그의 죄 값으로 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늘에서 나신 분이십니다. 아담과는 분명히 구별됩니다. 그의 생명은 땅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늘에 속해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처음에 첫 사람에게 속한 죄인으로 태어났습니다. 죄인이지만 이 역시 하나님의 만드신 바 하나님의 창조품입니다. 그러나 이 몸은 아담의 죄 값으로 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소망이 없습니다. 이 육체만 가지고 살아가는 인생은 아무런 소망도 없이 살아가다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두 번째 만드심
그러면 우리는 아무런 소망이 없이 죽게 된 것으로 끝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둘째 사람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롭게 태어난 둘째 사람의 자손이 된 것입니다. 이것 역시 하나님의 창조하신 바입니다. 그러나 처음 사람은 흙에 속한 피조물로 범죄하여 죽기에 이르렀지만,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새로운 생명은 하늘의 생명으로 덧입었기 때문에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의 자격을 가지게 하신 것입니다. 거듭났다는 말은 이처럼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창조함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첫 아담의 자손이 마지막 아담 안에서 그와 함께 죽지 않으면 죄의 속함을 얻지 못하여 영원히 살아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첫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둘째 사람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아 다시 그 안에서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결론 :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를 만드시는 두 가지 과정을 통해서 속죄와 구원을 이루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마지막 아담 안에서 대속의 속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둘째 사람인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은총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이유는 우리들로 선한 일을 이루게 하심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17) 선한 일은 무엇인가?
(에베소서 2:10)
서론 : 우리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바 하나님의 창조물인데 그 지으신 목적에 대하여 “선한 일을 위해서”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를 영적으로 거듭나게 하신 일에는 하나님의 분명하신 뜻이 계시다는 사실을 밝혀 주는 것입니다.
1.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고 말씀해 주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들이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으심을 받았기 때문에 그리스도 밖으로 나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한 일이란 무엇입니까? 첫째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거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말의 뜻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생활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늘 다음 몇 가지 사실에 대하여 분명한 해답을 내려야 할 것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내 생애의 소망으로 삼고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내 인생의 목표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두고 그 분 때문에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이런 것들을 늘 묵상하여 마음에 새기기 위하여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물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음에 선한 일을 위해 지으심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선한 일이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일을 말합니다. 인간 편에서 생각하는 것과 같은 도덕적 기준의 생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한 일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선행의 기준을 인간의 도덕 생활이나 양심적 생활에 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기준에 두고 그 기뻐하시는 일을 해야 합니다.
2. 그리스도인의 생활 기준
우리가 어떤 일을 하려 할 때, 우리는 먼저 이 일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일인가? 에 대하여 해답을 얻어야 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그의 사랑으로 주신 그리스도에 대한 선물을 거역하는 죄만큼 큰 죄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이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는 일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주시고 하나님의 기업의 후사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다음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일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일입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의 인도하심을 받으면 진리를 깨닫고 진리 가운데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는 성령께서는 아무 것도 하실 수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려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를 인도하시기 때문에 말씀으로 제재를 받고 말씀으로 교훈을 받으며 말씀에 순종하면 그 일이 성령이 나의 생활을 지배하며 인도하시는 생활인 것입니다.
선한 일은 당장에 하나님의 마음에 흡족하리만큼 많이 맺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가운데 우리의 한평생 동안 맺어야 할 일들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믿음에 합당한 열매를 맺을 때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일은 선한 일은 우리의 신앙생활이 어느 단계에 오르면 저절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애씀이 따라야 합니다. 노력이 없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하셨습니다. 게으른 사람, 열심이 없는 사람은 선한 일의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열심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간절한 마음을 가졌을 때 성령이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의 생활 가운데서 적어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기본적 자세는 갖추어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적어도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시고 거듭나게 하사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게 하시려고 우리를 만드셨다면 우리의 삶은 의당히 그 뜻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활 가운데서 이 같은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야 합니다.
결론 :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발걸음을 한 걸음씩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길로 걸어가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내 우편에서 내 오른손을 붙드시고 내 생애를 인도해 주십니다.
(18) 그러므로 생각하라
(에베소서 2:11-13)
서론 : 바울은 지난날의 우리의 신분에 대하여 생각해 보라고 말씀해 줍니다. 그리스도를 알기 이전의 우리는 과연 이스라엘과 비교할 때 어떤 상태에 있었던 것인가에 대하여 비교하면서 “그러므로 너희는 생각하라”고 권고하는 것입니다.
1. 그리스도를 알기 이전의 우리의 신분
그리스도인이 되기 이전 우리의 신분은 어떠했는가?
① 육체로 이방인이었다고 했습니다. 이방인이란 하나님을 모르는 백성, 하나님이 없는 백성, 소망이 없는 백성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택하여 그의 자손들을 번성케 하시고 그들을 나의 백성이라고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선택하셨기 때문에 선민이라고도 부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외의 모든 백성들에게는 이 같은 하나님의 섭리가 없으셨기 때문에 이방인으로 구분된 것입니다.
② 무 할례당이라 칭했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의 표로 낳은지 8일만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할례는 선민으로서의 이스라엘만의 특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할례가 없는 백성들에 대해 자기들은 할례 받은 백성이라고 하여 특권으로 여긴 것입니다. 그러나 이방인에게는 할례가 없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인들을 향하여 무 할례당이라고 멸시했던 것입니다.
③ 그리스도밖에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신약 시대에만 해당하는 구원의 대상이 아닙니다. 천하 인간 중에 예수로 말미암지 않고는 구원이 없는 것입니다. 이런 원리는 구약 시대에도 예외가 아닙니다. 구약은 오실 메시야에 대한 신앙, 신약은 오신 메시야에 대한 신앙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메시야에 대한 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것으로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구약에서 어린양을 잡은 것은 그리스도가 받으실 고난의 모형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브라함도 그리스도를 보았다고 하셨으며 모세는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능욕을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고 칭함 받기보다 더 영광스럽게 여겼습니다. 우물가에서 만난 사마리아 여인도 메시야를 기다린다고 말했습니다. 구약의 성도들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전케 되었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언약이 없었기 때문에 그리스도밖에 사람으로 소망이 없었습니다.
④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은 오직 하나 뿐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12지파 중에 소속한 민족을 말하는데 우리는 이러한 이스라엘과는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⑤ 세상에서 소망이 없는 자였다고 했습니다. 소망이란 언제나 미래와 관계된 것인데 특히 하나님이 유업으로 예비하신 하나님의 나라와 연관이 된 말씀입니다. 이방인에게는 그런 소망이 전혀 없었습니다.
⑥ 하나님도 없는 자였다고 했습니다. 한국 민족은 전부터 천지신명이니 하늘을 높이 숭상하였다느니 하면서 하나님과 가까웠던 것처럼 말하지만 이런 하나님은 그 어떤 형태이건 우상이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신 것입니다.
그런데 13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고 한 것입니다. 이제는 이란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이후의 우리의 처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방인들로 이스라엘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었으며 이방인은 전혀 구원의 소망도 내세의 소망도 없었던 우리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피로 가까워졌습니다. 여기서 가까워졌다는 말은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나타낸 말입니다. 이스라엘보다 더 가까워진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주셨던 이 모든 것들은 실인즉 하나의 그림자였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실질적으로 주셨던 것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다만 약속이 주어졌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를 불순종함으로 이 약속을 이을 백성이 되지 못하고 이방인이었던 우리가 오히려 하나님의 자비로 약속의 자녀 자리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이방인이었지만 오직 믿음으로 그리스도으 피 공로로 인하여 이 모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놀라운 자격을 얻을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축복을 빼앗겨서는 안됩니다. 견고히 지켜 나가야 합니다.
(19) 둘로 하나를 만드심-1
(에베소서 2:14-18)
서론 : 바울은 이처럼 전혀 소망이 없었던 이방인인 우리에게
어떻게 소망이 있게 하였는가에 대한 해답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이방인과 유대인간의 화평이 되셔서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둘로 하나를 만드신 일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그리스도가 이루신 화평
14절에서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화평을 위해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의 고난을 통해서 원수된 것을 폐하심으로 화평이 이뤄졌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어떤 화평을 이루신 것입니까?
① 하나님과 죄인들과의 화평을 이루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므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리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인 인간에게 율법을 주심으로 이 율법으로 인하여 더욱 죄인 되게 하셨습니다. 율법의 정죄를 받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심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사람과 하나님과의 화목이 깨어진 증거인데 이처럼 죄인과 하나님간의 원수된 이것을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소멸하셨다고 했습니다. 이로써 그리스도는 하나님 앞에 우리의 영원한 속죄 제물이 되셔서 우리들로 하나님과 영원히 화평하게 만드셨습니다.
② 다음에 이방인과 유대인간의 화평입니다. 14절에서 “둘로 하나를 만드셨다”고 했습니다. 이 둘이란 이방인과 유대인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이들 이방인들과 유대인들간에는 막힌 담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언약이 있었지만 이방인들에게는 이 언약이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율법이 있었고 할례도 있었고 소망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에게는 이런 것이 없었습니다. 이 같은 막힌 담을 헐지 않으면 이방인과 유대인들간의 화평을 이룰 수 없습니다. 이들의 화평이란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를 의미합니다. 오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함께 누릴 수 있는 구원의 은혜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육체로 율법을 폐하심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를 만드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하나입니다. 아직도 율법을 따르고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유대인들과 하나가 되었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들은 아직도 율법에 얽매어 하나님의 은혜를 거역하고 있는 것입니다.
16절에서 말씀해 주는 바,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가 된 것은 십자가로 말미암은 것인데 이로써 하나가 되어 한 몸인 하나님의 교회가 형성된 것입니다. 이제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이 같은 담이 무너지고 한 몸을 이루는 한 형제가 된 것임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③ 그리스도의 희생은 인간과 인간과의 화평을 가져왔습니다. 인간은 서로의 죄를 정죄해 왔습니다. 하나님과 화목되지 못한 인간관계는 서로간의 죄를 용서해 줄 근거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화평을 통해서 우리들 서로간의 화평을 이룰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받았으니 우리도 내 형제의 죄를 용서해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새로운 계명으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문에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했습니다.
2. 육신으로 율법을 폐하심
예수님은 율법을 자기 몸으로 폐하셨다고 했습니다. 15절에서 “원수 된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다”고 했습니다. 율법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가르는 담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 하면 율법은 원래가 선민의 표로 주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죄를 정죄하기 위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있는 죄를 죄로 드러나게 하려면 그 죄를 정죄하는 어떤 법규가 있어야 했습니다. 그 법규가 곧 율법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지금도 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 중에 법규가 없으면 분명 죄인 것도 죄로 다스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 : 예수님은 이 율법을 그의 육체로 폐하셨다고 했습니다. 율법을 폐했다는 말은 율법의 정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셨다는 뜻이며 이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구원을 이루신 사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종의 구별이 없이 가문이나 학식의 차별이 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들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용납하고 사랑하며 애써 화평을 지켜 나가야 합니다.
(20) 둘로 하나를 만드심-2
(에베소서 2:14-18)
서론 :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그가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속죄 제물이 되신 일이요 다른 하나는 그가 십자가에서 살을 찢기심으로 화목 제물이 되신 일입니다. 이 일로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와 의 화평을 이루어 주신 것입니다.
1. 하나님과 우리와 막혔던 담
하나님과 우리와의 사이에는 높은 담이 싸여져 있었습니다. 그것이 죄악의 담입니다. 구약 시대의 성소의 휘장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사이에 죄로 막혀진 담을 상징합니다. 성전과 지성소 사이에 휘장이 내려져 있었습니다. 누구든지 그 안에 들어가면 죽임을 당했습니다. 다만 대제사장만이 1년에 한차례, 그것도 송아지의 피로 자신의 죄를 속죄하는 의식을 치른 다음에야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죄인은 절대로 하나님께 나갈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땅의 지성소는 하늘의 지성소의 모형입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은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그리스도는 영원한 제사장으로 불리우는 멜기세댁의 반열을 따라 대제사장의 직분을 가지시게 된 분입니다. 그러나 그는 땅에 있는 지성소의 대제사장이 아니라 하늘의 지성소의 대제사장으로 하늘의 지성소에 올라가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가 어떻게 하늘의 지성소에 올라간 것입니까? 그는 죄가 없으시기 때문에 자신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 필요 없으셨습니다. 그는 다만 우리의 속죄 제물만 가지고 하늘의 지성소에 들어가시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속죄 제물을 땅의 제사장들이 지성소에 가지고 들어간 염소나 양의 피로 아니하시고 흠도 없고 점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의 피를 가지고 올라가신 것입니다. 하늘의 지성소에 가지고 올라갈 속죄 제물은 영원한 제물이어야 하기 때문에 당신의 피를 가지고 올라가셨으며 그 후로는 다른 제물이 필요 없기 때문에 속죄 제물을 위한 땅의 제사는 영원히 폐해졌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일만 남은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히 9 : 11절에서 이처럼 말씀해 줍니다.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다”고 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피만이 우리의 영원한 속죄 제물이 되시는 것입니다.
2. 영원한 속죄 제물이 되신 그리스도의 피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영원한 속죄제물이 되시는 이유와 그 속죄제물이 하나님과 우리와의 화평을 이루신 일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① 그리스도는 죽지 아니하시는 제사장으로 절대 그 직분이 갈리지 아니하시기 때문입니다. 땅의 제사장은 죄인된 인간임으로 죽을 수밖에 없으므로 자주 갈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원히 살아 계시는 대제사장이심으로 영원히 대제사장 직을 가지실 수 있습니다.
② 그리스도의 피는 죄를 지을 적마다 드려야 하는 양이나 염소의 피가 아니라 영원한 속죄로 드리신 제물이기 때문에 우리의 죄는 영원히 속죄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죄를 범해도 그 죄를 속죄하기 위한 새로운 제물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미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영원한 속죄 제물이 되셨기 때문에 무슨 죄든지 죄인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징계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잘 깨닫는 일은 우리의 구원의 확신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성경적 진리임을 알아야 합니다.
③ 그리스도는 지금도 대제사장의 자격으로 그가 흘리신 속죄 제물을 가지시고 우리를 위해 간구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결코 정죄함이 없는 것입니다. 욥 22 : 21절 말씀에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결론 :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 “다 이뤘다”고 하시는 말씀과 함께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찢어졌다고 했습니다. 죄의 담이 무너지고 하나님과의 막힌 장벽이 제거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의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화목이 이루어짐으로 평안의 복, 영생의 복, 천국의 복,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21) 이제부터 변화된 우리의 신분
(에베소서 2:19)
서론 :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된 우리의 신분은 어떻게 변했는가? 이에 대하여 바울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고 했습니다.
1.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된 우리의 신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화평을 이룬 우리의 신분은 다음 몇까지로 구분됩니다.
① 외인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외인이란 밖에 버리운 사람을 말합니다.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는 세상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한 사람은 외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로 안에 있다는 말은 대단히 소망적인 말입니다.
② 손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손이란 영원한 기업의 유업자로서의 아들이 아니라 잠시 머물다가 떠나는 나그네 같은 신분을 말합니다. 말하자면 손이 아니란 말은 하나님의 집의 종의 신분인 것이 아니라 아들의 신분임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손은 택자가 아닙니다. 예복을 입지 않고 혼인 잔치에 참여한 불청객이 손입니다. 이 손은 얼마 후에 제 스스로 나가거나 주인에 의해 내쫓길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아니한 자는, 말하자면 그리스도로 옷입지 않고 교회에 들어와 있는 무리는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가 아닙니다. 이들은 다 손에 불과한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그 아들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하나님의 후사지 결코 손이 아닌 것입니다.
③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라고 했습니다. 성도란 거룩한 무리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 속한 무리들을 성도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들은 거룩합니다. 그 하나하나가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의 몸을 형성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영접하므로 믿음으로 성도의 무리 중에 들어간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시민이란 하늘의 시민권을 소유한 천국 백성들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신분은 그리스도를 믿는 그 시간부터 하늘의 시민권의 소유자가 됩니다. 땅에 속한 자가 아니요 하늘에 속한 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처럼 성도들과 동일한 하늘의 시민이 된 것은 우리 자체에 어떤 거룩한 요소가 있어서나 의로움과 선함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죄인 중에 괴수지만 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속한 존재가 되었으니 내게 이 같은 은혜를 주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거룩한 성도, 하늘의 시민이 된 것입니다.
양의 십분의 일을 십일조로 하나님께 바칠 때 열 번째 돌아오는 양이 아무리 못생겼어도 하나님의 소유물이라 거룩한 존재가 되며 사람이 그것을 임의로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추한 인물이라도 한국인이라면 그는 한국인으로서의 권리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죄를 범해도 그 거룩한 성도의 자리에서 내어쫓기지 않습니다. 다만 추악한 성도란 불명예 자로서 하나님의 손에 의해 징계를 받아 회개하므로 새로워지게 할뿐입니다.
④ 하나님의 권속이라고 했습니다. 권속이란 말은 한 단위를 이룬 한 가족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가정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그 가정의 가장이 되심으로 영광과 경배를 받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 집안의 맡아들인 머리가 되시어 온 집안을 통솔하시며 한 가족의 절대적인 화목을 이루십니다. 우리들은 그 아들로 말미암아 그 아들과 함께 그 기업을 누릴 수 있는 양자의 자격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양자는 당당한 그 집의 한 권속이며 우리는 하나님의 집의 구성원을 이루는 권속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외인이 아니면서도 외인들처럼 하나님도 없고 소망도 없이 다만 이 세상의 영광만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나도 그런 무리 중에 들어간 이름만의 성도가 아닌가 자기 자신을 잘 판단하여 외인처럼 세상을 위해 살아가는 생활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당당한 성도들이요 하늘의 시민권을 소유한 하나님 나라의 시민들입니다. 왜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맛을 내지 못하므로 추악한 성도,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가장이신 아버지의 성품도 닮고 형님이신 그리스도의 성품도 닮아 부끄러움이 없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22) 신령한 성전 건축
(에베소서 2:20-22)
서론 : 바울은 두 종류의 성전 건축에 대하여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20절, 21절에서는 교회라고 하는 성전과 22절에서는 심령 성전이라고 하는 성전 건축에 대하여 언급해 줍니다.
1. 교회
교회란 말은 원어적으로 볼 때 불러냈다는 뜻입니다. 세상에서 불러내어 하나님의 무리 가운데 속하게 하였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에서 불러내심으로 성도의 반열에 들어가게 하신 것입니다. 교회라고 말할 때 우리는 눈에 보이는 건물 인줄로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건물은 예배 드리는 처소로 성전이라고 부릅니다. 교회란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의 총칭입니다. 신생교회라고 말할 때 이 성전에서 와서 하나님께 경배 드리는 모든 성도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즉 나는 신생교회를 구성하는 한지체이며 적은 의미로는 나는 곧 신생교회 그 자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같은 교회는 어떻게 이루어진 것입니까?
첫째로 20절에서 말씀해 주는 대로 교회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전 3 : 10절에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었다”고 했습니다. 사도란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선지자란 구약의 예언자들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는 오실 메시야의 증거 자임으로 그 증거가 곧 교회의 터전이 되었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들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직접 목격한 증인들로 교회의 터가 된 것입니다. 교회의 터는 이밖에 다른 것은 절대로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이단자들이 자신의 터 위에 교회를 세우려고 하지만 그 같은 터는 교회의 터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다음에 그리스도께서 모퉁이 돌이 되셨다고 했습니다. 모퉁이 돌이란 그 건물을 떠받드는 중심이 되는 힘입니다. 주님은 자신에 대하여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고 증거하셨습니다. 모퉁이 돌은 그 건물의 머릿돌인데 예수님은 교회를 떠받치는 돌이 되었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가리켜 교회의 머리, 또는 교회의 몸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다음에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안에서 성전이 되어 간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모퉁이 돌이 되시고 선지자들이나 사도들은 교회의 터전이 되고 그 위에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연결되어 주 안에서 성전을 이루어 나간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곧 교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처럼 주님을 머리와 모퉁이 돌로 삼고 사도들과 선지자들로 그 터전으로 삼아 지체로 연결되어 한 신령한 몸을 이룰 때 그것이 곧 교회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이렇게 세워지는 것입니다.
2. 심령 성전의 건축
성전이란 하나님이 계신 곳이기 때문에 우리의 심령은 성령의 전으로 곧 하나님의 성전인 것입니다.
눅 19 : 20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고전 3 : 16절에서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했습니다.
롬 8 : 9절에서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는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말씀해 줍니다.
오늘 본문 22절에 나오는 말씀에도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심령은 분명히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성전이란 사실을 명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우리의 심령 속에 하나님이 거하실 만한 처소를 만들어 드려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죄를 품고 있으면 안됩니다. 그것을 버려야 합니다. 회개는 죄를 버리고 깨끗해지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해야 합니다. 내 심령에 계시는 성령을 근심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이 같은 생활로 내 안에 거하시는 성령을 기쁘시게 해 드릴 때 그 일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며 그리스도인의 생활 태도인 것입니다.
에베소서 3장(23 - 30)
◆ 밤중소리 01-31 | VIEW : 582
(23) 바울에게 주신 복음의 계시
(에베소서 3:1-6)
서론 : 바울은 본문 3절에서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비밀이라고 했습니다. 이 비밀은 오직 계시에 의해서만 드러납니다. 바울은 그 계시를 받아 복음의 비밀을 성경에 밝혀 놓은 것입니다.
1. 바울이 받은 계시
바울은 1절에서 복음을 위해 받고 있는 자신의 고난에 대하여 먼저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고난을 기쁨으로 여겼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이 없으면 영광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해 죽기를 원하는 고난의 생을 이어갔습니다. 이 에베소서를 쓸 때, 그는 복음을 위해 옥에 갇힌 몸이 된 처지였습니다. 왜 바울이 이런 생활을 스스로 취한 것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의 면류관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사도들 중에서도 더 많은 계시를 받은 사람입니다.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의 전달자로 쓰여진 사람들입니다. 바울이 쓴 서신은 그리스도의 계시에 의한 서신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계시로 복음의 모든 비밀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그의 서신을 통해서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2. 계시의 시효성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에 있어서 두 가지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는 복음의 비밀을 나타낸 사도적 계시입니다. 이 같은 계시의 전달자는 선지자 또는 사도들로 한정되어 있으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성령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이 계시는 사도 시대에 이르러 완성되었고 그 후로는 이 같은 계시를 아무에게도 주신 일이 없으십니다. 이 계시가 오늘날 우리에게 성경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다른 한 가지는 기도하는 사람이나 어떤 특정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이나 지시를 전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일은 성경을 이루고 있는 계시와 같은 권위가 있는 계시가 아닙니다. 이 같은 일은 그 사람에게만 필요로 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을 위해 모든 사람들에게 전파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으로 주신 것이 아닙니다. 5절에서 바울은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게 하지 아니하셨다”고 했습니다.
복음적 계시는 역사상 어느 시대이건 성경 외 다른 아무 계시도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우리에게 구원을 위한 비밀이나 분명한 하나님의 뜻을 다른 계시로 보여 주시지 않습니다. 이미 선지자들이나 사도들에게 계시된 말씀을 통해서 말씀하시고 그 뜻을 나타내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신비스러운 기도나 다른 방법을 택할 것이 아니라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여 그 말씀 안에서 찾아야 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받은 계시에 대한 특이점을 몇 가지로 밝혀 주고 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담을 헐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일입니다. 이 일은 대단히 어려운 문제였지만 바울은 받은 계시에 의하여 그 비밀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복음의 근본적 본질을 계시로 밝혀 놓았습니다. 그리스도가 죽으셔야 하셨던 일, 그의 부활이 복음의 핵심적 사건인 사실을 밝혔으며 그를 믿는 자에게 연합되는 놀라운 비밀을 분명히 들어낸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받은 계시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복음을 정죄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이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이신득의’의 구원의 진리를 그가 받은 계시를 그의 해박한 지식으로 설파한 것은 장쾌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특히 바울이 로마 교인들에게 보낸 서신인 로마서는 성경 전체의 구원의 도리를 질서 정연하게 밝혀 준 말씀으로 만약 이런 구원의 도리가 바울에 의해 계시를 받지 못했다면 복음을 전하는 일에 많은 차질이 있었을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어떤 새로운 계시를 받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미혹에 조심해야 합니다. 언제나 새로운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성경에 나타난 진리를 소홀히 하며 자신이 받은 계시를 성경보다 더 우위에 올려놓는 것입니다. 모든 이단은 기존의 계시를 무시하고 새로운 계시를 추구하는데서 발생합니다. 우리는 성경에 계시된 분명한 구원의 도리와 하나님의 뜻을 배워 올바른 신앙생활로 성장해 나가야 합니다.
(24) 복음의 일꾼이 된 바울
(에베소서 3:7)
서론 : 바울은 자신이 복음의 일꾼이 된 것이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라고 말했습니다. 7절에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 복음을 위해 일꾼이 되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모든 사람이 다 복음의 일꾼이 되는 것입니다. 행 1 : 8절에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는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신 말씀에서 그런 사실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여기서 자신을 복음의 일꾼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그런 일반적인 일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위해 자신의 전 생애를 바치는 일꾼을 말합니다. 바울의 생애은 이런 의미로 볼 때 복음의 일꾼으로서의 사명을 이룬 사람입니다.
① 바울이 복음의 일꾼으로 그의 생애를 바친 것은 바울은 자신이 이 복음을 위해 하나님의 택정함을 입은 것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롬 1 : 1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② 바울은 복음과 고난을 즐겨 받았습니다. 그는 디모데에게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가 고난을 받기를 마다하지 아니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목적이 우리로 예수를 믿게만 하신 것이 아니라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시려는데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이 같은 뜻을 세우셨습니까? 그것은 그를 믿는 자들로 그와 함께 영광을 누릴 수 있게 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은 것도 하나님의 은혜에 속한 것입니다.
③ 바울은 그의 온 생애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생애를 보냈는데 그 일이 복음의 일꾼으로 이룬 것입니다. 바울은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하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랴 내가 만일 사람을 기쁘게 하면 하나님의 종이 아니니라”고 담대히 말하고 있습니다.
④ 바울은 복음을 위하여 옥에 갇히는 일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중국에서 복음을 전했던 어떤 교단의 선교사가 북한에 납치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이 얼마 후에 테레비죤에 나와 김정일을 하나님으로 찬양하는 방송을 했습니다. 목숨이 두려워 신앙의 정조를 저버리는 일은 복음의 일꾼이 아닙니다.
⑤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자기에게 화가 미칠 것으로 두려워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빚으로 여겼습니다. 자신이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은 일은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의 빚 진 것으로 여기고 그 빚을 갚기 위해 복음의 일꾼이 된 것입니다.
2. 그의 능력이 역사 하시는 대로 일한 바울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일에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 하심을 따라 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 하십니다. “십자가의 도가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씀해 줍니다. 복음은 그 자체가 능력이기 때문에 복음의 일꾼은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 하시는 대로 자기에게 맡기신 사명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복음은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르게 하는 능력’입니다. 복음은 가루 서말을 부풀게 하는 누룩과도 같은 번식력으로 전파됩니다.
바울은 이것을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라고 감사하게 여겼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곧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지만 그 그리스도를 전파하도록 사명을 주신 일은 더욱 큰 은혜인 것으로 여기고 감격하며 그 사명을 이룬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은 왜 자기를 복음의 일꾼으로 부르신 일을 은혜의 선물로 생각한 것입니까?
① 너무나도 감격스러운 직무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영광스러운 직분이나 명예스러운 직업도 많지만 복음의 일꾼된 직임 만큼 영광스러운 것은 없다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이 같은 확신은 복음의 일꾼이 될 첫째 요건이 되는 것입니다.
② 하늘의 천사에게도 맡기지 아니하시는 특별한 사명인줄로 믿었습니다. 만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정함을 받은 성도들만이 이 사명을 받으니 말할 수 없는 은혜인 것입니다.
결론 : 바울은 이 같은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여 복음의 일꾼으로 전 생애를 바쳤습니다. 우리도 그와 같은 사명감을 가지고 복음의 일꾼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5) 바울의 겸손
(에베소서 3:8-11)
서론 : 본문 8절에는 바울의 겸손이 나옵니다.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란 말은 바울의 겸손함을 나타낸 자기 낮춤이하라고 보겠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겸손이야말로 은혜 중에 은혜입니다.
1. 바울의 위대성
바울은 원래가 교만한 자 중에 교만한 자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후에도 교만할 수 있는 요소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끝까지 자신의 겸손을 지켜 온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① 바울은 학문에 있어서 당대의 명문인 가말리야의 문하생으로 학문을 공부한 사람이었습니다. 바울로부터 복음을 들은 베스도가 바울에게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하였다”고 말할 만치 바울의 학문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습니다.
②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노중에서 하늘 문이 열린 가운데 하늘 보좌에서 말씀하시는 주님을 친히 만났으며 친히 사명을 받은 사람입니다. 사도 중에 누가 이 바울처럼 직접적으로 사명을 받은 것입니까?
③ 바울은 주님으로부터 받은 복음의 계시가 너무 컸습니다. 다른 사도들보다 더 많은 계시를 받았을 뿐 아니라 바울이 받은 계시가 아니면 구원의 도리를 정립할 수 없을 정도로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그의 그 해박한 지식과 지혜로 그것을 정리했습니다.
④ 그뿐 아니라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생명을 아끼지 아니했습니다. 바울은 혹은 예루살렘에서 혹은 로마에서 혹은 아시아에서 혹은 감옥에서 혹은 돌무덤 속에서 살아 나왔으며 혹은 독사에게 물리기도 했으며 혹은 물에 빠져 생명의 위협을 받기도 하는 체험이 그의 온 생애를 통해서 계속되었습니다.
⑤ 바울은 가는 곳마다 교회 성도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처럼 하늘의 천사와 같이 바울을 받들고 수종들었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그들의 눈이라도 빼서 바울에게 줄 정도였다고 바울 자신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자신을 높이거나 높아지려고 하지 않고 자기는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2. 바울의 온유와 겸손은 어디서 왔나?
그러면 바울은 어떻게 이처럼 온유한 마음과 겸손함을 가질 수 있었습니까? 바울은 주님을 핍박했던 지난날의 자신의 죄를 늘 마음에 새겨 아프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죽어 마땅한 죄인이 사도의 직분’을 받은 것에 대하여 너무나도 황공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바울은 자신의 속에 잠재해 있는 죄를 바라보았을 때 참으로 자기는 지금도 죄인인 사실을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의롭다하심을 받은 죄인들입니다. 우리가 받은 의는 법적인 문제요 하나님 앞에 우리는 언제나 죄인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교만하지 않고 겸손한 생애를 보낼 수 있었던 원인은 물론 이 같은 바울의 처신에도 있었지만 그러나 근본적인 원인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온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어떤 은혜를 받았기에 그토록 겸손한 생애를 살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까? 이에 대하여 바울 자신의 말을 들어보도록 합니다. 고후 12 : 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 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 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자고 란 말은 스스로 자기를 높이는 교만을 말합니다. 사탄의 사자란 사탄이 바울의 몸에 심어준 못된 질병을 말합니다. 바울은 희한한 능력과 권능을 행하여 죽은 자도 살리며 병든 자도 일으켰지만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몹슬 병은 암만 기도해도 하나님께서 고쳐주시지 아니한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바울의 몸을 치셨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그 이유를 깨달았는데 8,9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바울로 하여금 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그의 몸에 그를 괴롭히는 사탄의 가시로써 병을 짊어지게 하신 것입니다.
결론 : 천국은 자기를 낮추는 가 들어갑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높이시고 교만한 자를 낮추십니다. 바울은 이런 하나님의 원리를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모두 교만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혹 우리의 몸에 질병이 있어서 고통을 당한다해도 나로 겸손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은혜인줄 알고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6) 은혜를 주신 목적
(에베소서 3:8-13)
8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9 1)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10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11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12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
13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
서론 : 바울은 자기와 같은 쓸모 없는 지극히 작은 자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들에게 전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구원의 비밀을 드러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구원의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영원부터 감추었던 비밀의 경륜, 곧 구원의 계시를 보여 주시기 위함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 그리스도의 풍성
바울은 자기가 이방인에게 전한 복음에 대하여 8절에서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이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생각이나 상상력으로서는 도저히 측량할 수 없는 인생의 풍성함을 그리스도 안에서 누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누리게 된 풍성함이야말로 참으로 측량할 길이 없는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구원의 오묘하신 진리를 어떻게 측량할 수 있는 것입니까?
영원한 생명의 신비를 어떻게 측량할 수 있을 것입니까?
하나님의 그 깊으신 사랑의 놀라움을 어찌 측량할 수 있습니까?
하늘에 쌓아두신 천국의 비밀을 누가 측량할 자 있을 것입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누리고 있는 기쁨과 평안과 소망을 어느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 것입니까? 이런 것들은 영원 전부터 감추었던 하나님의 비밀이신 데 바울이 이 놀라운 경륜의 계시를 받아 이방인에게 복음으로 전하게 된 일에 대하여 바울은 말할 수 없는 감사와 감격으로 이 일이야말로 자기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은혜인 것으로 확신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도 이 같은 바울과 같은 믿음을 가지면 바울과 같은 생애를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2. 하늘에 있는 정사나 권세들에게 숨겨진 비밀
바울은 10절에서 이런 비밀은 “하나님 속에 감추었던 비밀”이었기 때문에
하늘에 있는 정사나 권세들에게조차 숨겨져 온 것이었다고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놀라운 하나님의 복음의 비밀을
하늘에서 지상에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상의 하나님의 교회에서 천상에 있는 정사나 권세들에게
이 같은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하나님의 교회에 내리신 사랑과 은혜가 큰 것입니다.
바울은 그 자신이 그 같은 은혜의 참여자가 된 일에 대하여 무한히 감격스러워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나 지혜의 비밀에 있어서는
하늘에 있는 천사들이나 영적 권세 자들보다
하나님의 교회인 우리가 더 잘 알고 그 비밀을 깨닫고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러면 하나님은 왜 그리 하신 것입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 복음의 비밀을
천사를 통해서 그의 백성들에게 전하게 하려 하심이 아니라
우리들에게 전하도록 복음 전파의 사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비밀하신 경륜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자로 우리를 선택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말할 수 없는 은혜의 비밀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우리들도 이 같은 하나님의 섭리하신 뜻 안에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12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 ). 담대함이란 하나님의 풍성하신 축복의 언약을 내 것으로 받아 드리는 믿음을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이 같은 담대함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다는 사실을 어떻게 확신하고 그런 믿음을 가질 수 있는 담대함의 소유자가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으로 담대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 있다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은 확실하게 가질 수 있으며 그러므로 담대함으로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간다는 말은 하나님의 축복과 약속을 받는 일에 아무런 장애물이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의 약속을 받았으니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일에 거리낄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화목제물이 되어 주셨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에 걸림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당당히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기업의 후사가 된 사실을 믿을 수 있기 때문에 당당히 나아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 :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는 이런 축복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믿음을 가지고 이 축복을 받기 위해 하나님 앞에 담대함과 당당함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27) 바울의 간구
(에베소서 3:14-19)
서론 : 본문에 나오는 14절로 19절까지는 에베소 교회 교인들을 위한 바울의 간절한 기도가 나옵니다. 바울이 하나님께 간구한 내용은 에베소 교인들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믿음이 성장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놀라운 경륜에 대한 비밀을 깨닫게 되기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1. 속 사람의 강건
15절에 바울의 기도의 자세가 나옵니다. “무릎을 꿇고 비노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기도의 참 자세는 무릎을 꿇는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기도의 자세도 무릎을 꿇는 기도였습니다. 눅 22 : 41절 말씀을 보면 “저희를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기도는 너무나도 안이합니다. 의자에 앉은 체로 기도하기 때문에 무릎을 꿇을 기회가 좀처럼 없습니다. 어쩌다가 방바닥에서 기도할 때에도 단 5분을 무릎을 꿇는 기도를 못하고 무릎을 꼬고 앉아 기도합니다. 부모님 앞이나 어른 앞에서도 결례가 되는 일인데 그런 기도마저도 기피하는 우리의 세대가 된 것입니다.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을 위한 기도는 첫째로 그들의 속 사람의 강건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16절에서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간건하옵시며”라고 간구했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간구한 속 사람의 강건이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① 속 사람이 새로워지는 일을 말합니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심령은 점점 새로워진다는 데 있습니다.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 사람은 날로 새로워진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의 심령이 새롭게 되는 변화의 거듭되는 역사가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② 속 사람이 성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겉 사람은 후패하는 대신에 새사람인 속 사람은 성장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릴 적에는 젖을 먹지만 성숙할수록 단단한 음식을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단단한 음식에 대하여 의의 말씀을 경험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말씀에 대한 경험은 말씀 안에 들어가는 생활로 말씀에 대한 순종을 뜻합니다. 순종이 없이는 신앙의 성장이 없습니다. 신앙의 성장이 없이는 속 사람이 강건해 질 수 없습니다.
속 사람이 강건치 못한 상태는 영적으로 병들어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속 사람이 병드는 이유는 죄의 줄에 결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앞만 무성한 상태의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 영적 건강을 해치는 것입니다. 세상에 안주하고 있는 상태는 영적으로 병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세상일에는 잘 달려가는데 영적인 일에 부닥치면 반신불수처럼 부자유스럽게 움직여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2. 성령의 능력
속 사람의 강건함은 성령의 능력으로 가능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성령께 의지해야 합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라는 바울의 간구가 나옵니다.
“너희는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성령의 충만은 말씀에 대한 믿음으로, 순종으로, 의뢰로, 기도로 얻게 됩니다. 특히 이 모든 일의 근본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속 사람의 양식은 말씀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고 하신 말씀은 말씀을 영적 생활의 양식으로 삼으라는 뜻입니다. 사람이 양식을 먹으면 힘을 얻고 온 육체를 움직일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으로 힘을 얻고 그 힘의 능력 가운데서 자기 생애를 살아가는 것이 말씀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인 것입니다.
성령은 내 속에 임재 해 계시는 하나님의 영으로 곧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나의 생애 가운데서 능력으로 역사 하시고 작용하시며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영접할 그 때에 성령은 나에게 그리스도의 새로운 생명을 공급해 주시기 위해 들어오십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성령 세례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내가 내 안에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의 임재 하심을 믿고 그 성령을 의뢰할 때 성령은 나의 의뢰자가 되시어 나에게 능력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내가 말씀에 대한 순종을 원하고 기뻐할 때 성령은 순종할 수 있도록 능력을 베푸시고 말씀대로 이루어 주십니다.
결론 : 우리는 성령의 감동을 소멸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을 근심시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말씀의 길을 떠나고 육신의 길을 걸을 때 성령은 근심하십니다. 내가 죄를 범하고도 회개치 않을 때 성령은 탄식합니다. 우리는 성령께서 항상 그 능력으로 우리의 속 사람을 강건케 하시도록 회개하고 기도하며 의뢰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28) 우리 마음에 계시는 주님
(에베소서 3:14-19)
서론 : 바울은 17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란 간구를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 우리의 마음을 거처로 하여 우리와 함께 거하시며 우리와 함께 우리의 인생에 동행자가 되시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1.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말씀의 뜻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것은 주의 영이 우리와 함께 거하신다는 말씀이며 주의 영이란 바로 성령을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성령을 혹은 하나님의 영, 혹은 그리스도의 영, 혹은 보혜사, 혹은 성령 등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표현은 모두 같은 성령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삼위일체 되시는 하나님의 본체이시기 때문에 삼위 중 어느 분이라도 성령 안에서 자신을 나타내실 수 있는 것입니다. 삼위의 세 분이 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바울은 이미 그들 에베소 교인들에게는 성령이 임재하고 계시는데 주님께서 그들의 마음에 계시기를 원하는 간구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까? 주님은 분명 성령 안에서 우리와 함께 우리의 마음에 거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 마음에도 마음 안에와 마음 밖으로 구분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의 믿음 여하에 따라 주님을 마음 안에 거하게 하실 수도 있고 마음 밖으로 내쫓으실 수도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상태는 주님이 그 사람의 마음을 떠나신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 분은 어떤 일이 있어도 나를 떠나지 아니하십니다. 다만 주님은 우리들 마음의 중심에서 나를 지배하는 생활을 포기하시고 방관하시는 경우가 있으신 것입니다. 이런 경우를 마음문밖에 계신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2. 마음밖에 계시는 사람
그러면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을 마음밖에 거하게 하고 있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라오디게아 성도들을 향하여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은 주님을 그들의 마음 문밖에 둔 상태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주님의 영이 그들에게 계시기는 했지만 그들의 마음 중심에 모시는 생활을 못한 것입니다. 주님으로 그들의 생애의 중심에서 그들을 주관하시고 인도하시는 일에서 손을 멈추고 계시는 상태에 계시다는 뜻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주님이 자기 안에 계시면서도 주님과의 동행, 그리스도와의 실질적인 연합의 신앙생활이 불가능한 사람들입니다.
이혼은 하지 않았지만 별거생활의 부부들처럼 주님과 나와 따로 따로의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이 같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우리 주님에게 고통을 주십니다. 아 5장에는 이런 주님의 고통의 모습을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이슬이 가득하였다”고 하셨습니다. 마음문 밖에서 밤새도록 밤이슬을 맞고 계시는 주님의 모습을 이처럼 표현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 문을 열어달라고 간청하시지만 이 미련한 신부는 신랑의 괴로운 호소를 듣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때에 주님이 이처럼 마음 밖에서 밤이슬을 맞으시며 마음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시는 것입니까?
① 우리가 주님과 가까이 아니하고 세상과 더불어 짝했을 때 그런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주님을 멀리하는 일은 세상과 간음하는 일입니다.
② 우리가 주님보다 물질을 더 사랑할 때 그런 것입니다. 주님보다 물질을 더 사랑하는 일은 우상 숭배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③ 우리의 마음속에 죄가 들어 왔을 때와 그 죄를 버리지 않았을 때와 회개할 줄을 모를 때 주님은 우리 마음속에서 견디실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주님을 마음에 계시게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주님을 우리 마음에 함께 계시게 하는 방법은 믿음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믿는 다는 말은 나를 위해 주님이 고난 당하심을 믿고 그 고난에 동참하는 생활을 마다 아니하는 일입니다. 나를 그의 피로 사셔서 그의 소유로 만드신 사실을 믿는 일입니다. 주님이 내 생명의 구주이시며 나에게 무엇보다도 귀중한 분이심을 믿고 그 분을 위해 자신의 생애를 살아가는 일입니다.
결론 : 이 같은 믿음은 내 마음을 여는 영적 열쇠가 됩니다. 밖에 나가셨던 주님도 이 열린 문으로 다시 들어오십니다. 여러분은 이 마음을 가지시고 주님이 여러분의 밤 속에 계셔서 여러분의 생애를 주장하시고 여러분의 생애 속에 하나님의 축복이 끊임없이 내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29)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라
(에베소서 3:14-19)
서론 : 에베소 교회를 위한 바울의 기도는 18절과 19절에서 절정에 달하고 있습니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는 것입니다.
1. 그리스도의 사랑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나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거하는 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등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① 17절 말씀에서 우리의 믿음이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혀야 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내 마음속에 그 뿌리가 박혀야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보통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주님에 대한 사랑은 수박 겉할끼식 사랑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쓴 일이 생기면 뱉을 수밖에 없습니다. 뿌리가 박힌 사랑은 깊은 사랑을 말합니다. 목숨을 다하고 몸을 다하고 마음을 다하여 받치는 사랑은 뿌리가 깊이 박힌 사랑에서 나옵니다. 이처럼 뿌리가 깊이 박힌 사랑은 주님의 사랑을 참으로 깨달을 때, 그 뿌리가 내 마음에 더욱 깊이 박혀지게 되는 것입니다.
② 다음에 17절 말미에 보면 “터가 굳어져서”라고 말씀해 줍니다. 이것은 주님의 사랑이 내 마음속에서 터가 굳어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사랑의 터가 단단하지 않으면 엷은 사랑, 변질되는 사랑이 되기 쉽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덥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한 사랑은 터도 든든치 못하고 뿌리도 깊지 못한 세속적인 신앙에서 나온 사랑입니다. 터를 굳히는 일은 농부가 씨앗을 심고난 후, 발로 밟아 주는 일처럼 순종으로 잘 다져져야 하는 것입니다.
③ 그리고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지식으로 알아야 합니다. 18절에서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지식은 우리들로 하나님의 사랑을 넘치게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어떻게 알게된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의 지식을 통해서 알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멀리하는 성도는 말씀에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지식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주님에 대한 사랑이 뜨거울 수도 없고 그 뜨거움이 지속될 수도 없습니다.
④ 17절에서 말씀해 주는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란 말씀에 나오는 너희란 대상은 성도들끼리의 사랑의 생활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서로 사랑하는 생활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는 비결이기도 하며 우리 안에 깊이 내려진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새 계명은 무엇입니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은 우리들 성도들 간의 사랑을 보고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임을 알게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2. 충만하신 주님의 사랑
주님의 사랑에 대해 바울은 19절에서 “그 넒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알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주님의 사랑은 무한한 사랑, 인간의 언어적 표현으로는 나타낼 수 없는 한량없는 사랑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넒이, 길이, 높이, 깊이 등의 사랑은 4각형 형태의 사랑을 의미하는데 우리는 이 사랑을 한없이 크고 넒은 보자기에 비할 수 있습니다. 그 어떤 죄나 허물이라도 감싸 줄 수 있는 놀라운 사랑, 아무리 무서운 죄라도 능히 덮어 줄 수 있는 사랑을 보여 주는 표현인 것입니다. 이 보자기는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보혈로 짜진 것이기 때문에 온 인류의 죄를 덮고도 넉넉할만한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의 사랑인 것입니다. 주님의 곁에서 죽은 한편쪽 강도도 이 보자기로 싸 메이심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나의 허물도 이 주님의 사랑의 보자기로 덮어졌습니다. 이 사랑의 보자기가 이처럼 크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죄를 보지 말고 주님의 그 크신 사랑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에 비하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랑의 보자기는 너무나도 보잘 것이 없습니다. 그 규모가 짧고 좁고 얕으며 깊지 못합니다. 조금만 다쳐도 찢어지고 갈라져서 조그마한 형제의 죄나 허물도 덮어주기에 부족합니다. 덮어 주노라고 해도 옆으로 빠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는 일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우리가 이 주님의 사랑만 깨닫는다면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내게 충만하게 채우심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사랑을 나타내시고 주님이 그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어떻게 보여 주셨는가를 잘 배우고 깨달아 그 충만하신 주님의 사랑 가운데서 충만케 되시기를 바랍니다.
(30) 우리 중에 행하시는 하나님의 능력
(에베소서 3:20-21)
서론 : 바울의 간구는 20절과 21절에서 절정을 이루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송영을 보내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송영에서 하나님께 대하여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라고 말씀해 줍니다. 여기서 바울은 우리의 생애 가운데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 온 사실을 바라보게 됩니다.
1. 성경이 밝혀 주는 하나님의 능력
바울은 20절에서 하나님의 말할 수 없이 크신 능력이 우리 가운데서 역사 하시는 사실에 대하여 밝혀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말씀으로 우리 가운데서 그의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그러나 이 같은 능력이 누구에게도 다 동일하게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말씀을 믿는 자에게 나타나시고 그 말씀 안에서 살아가면서 순종하는 자에게 그대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의 모든 능력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리스도로 그의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그가 말씀으로 풍랑을 잔잔케 하신 일, 5병 2어의 기적을 나타내신 일,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일, 죽은 나사로를 무덤에서 살려 내신 일 등은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내신 하나님의 능력이신 것입니다. 지금도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에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와 같은 능력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이 같은 그의 능력을 우리에게 나타내시는 것입니까? 이에 대하여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해 주시기 위해서임을 말씀해 주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그의 능력을 나타내시는 목적은 우리의 유익을 위함이신 데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는 데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끝까지 이루심에는 이 같은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가운데서 역사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한편 기엽적인 요소도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최종적인 구원을 이루는 그 시기까지 우리의 생애를 돌보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나타내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생활을 돌보시고 우리가 원하는 온갖 소원을 이루어주시는 일에 하나님은 그 같은 능력을 역사 하시는 것입니다.
1. 구하는 것을 넘치도록 능히 이루심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는 모든 것을 능히 이루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는 모든 것을 넉넉히 주시는 분이심을 안다는 이 사실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생활을 풍요롭게 할 수 있는 비결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구하는 이가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받지 못함은 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하나님께 무엇을 구할 때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면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구해야 합니다.
우리의 구원의 유익을 위해서 구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의 범위 안에서 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같은 하나님의 능력은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 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내 안에 거한다는 말은 순종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순종이 기도 응답의 기본 요건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의 순종에서 비롯됩니다. “무엇이든지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라”는 말씀은 우리의 담대한 기도를 가리킵니다. 이런 우리의 담대한 기도는 어디서 나오는 것입니까? 요일 3 : 21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생활이 주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다면 바로 그런 우리의 생활에서 우리의 기도가 담대해 질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욱 넘치도록 능히 이루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내 마음을 감찰하시며 내 맘의 소원이 무엇인가를 알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의 뜻대로 살면 우리의 생각하는 것 그 이상으로 넘치도록 응답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이런 분과 함께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아무리 험준하고 살아가기가 어려워도 이런 능력을 나타내시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심을 알 때, 우리는 낙심하지 않고 그 분을 의뢰함으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31 - 40)
◆ 밤중소리 01-31 | VIEW : 693
(31) 부르심에 합당한 생활
(에베소서 4:1-3)
서론 : 오늘 본문에는 바울의 간곡한 권면이 나옵니다. 그의 권면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인다운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
부르심이란 주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부름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의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이 부르심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성령에 의해서 우리가 주님께 인도함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내게 보내주시지 않으면 내게 올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또 “내 양은 내 음성을 듣고 나를 따른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예정된 택자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택하심과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실수가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생명책에 기록된 그의 모든 백성들을 하나의 누락자도 없이 부르시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은 이처럼 부르신 그의 백성들을 그의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열매를 맺게 하시려는데 있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 우리을 부르실 때 우리가 한 모든 죄악을 간과하셨습니다. 혹은 우리가 복음의 대적자로 있을 당시에 부르심을 받은 것도 혹은 도적이나 살인자라 할지라도 이런 죄가 문제시되는 것은 아닙니다. 부르심을 받은 이후의 생활에서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무리들에게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만드시기 위해 연단 하십니다.
먼저 우리들로 피나는 회개를 이루게 하십니다. 주님 옆 십자가에 못박힌 한 강도는 회개하기에 합당한 자로 만드시기 위해 큰 고통 중에 회개하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합당한 그릇으로 만드시기 위해 어떤 경우에는 은같은 연단을 하십니다. 은을 불 도가니에서 녹여 찌끼를 가라앉혀 순수한 은을 걸러내듯 죄악의 찌끼를 걸러내시기 위해 우리들로 불 가마에 집어넣는 연단을 하시는 것입니다. 또 어떤 경우는 우리들로 하나님이 쳐 놓으신 시험의 그물에 끌어들여 그 시험 중에 인내를 배우게 하시고 올바른 선택을 배우게 하심으로 우리들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그릇으로 만드십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 우리로 징계를 통해서 죄악을 버리게 하시고 의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이 모든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새로운 변화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들의 중생하는 영적 변화는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영접하는 그 시간에 즉시 이루어지지만 거룩함과 의로움에 이르는 인격적 변화는 평생을 두고 변화의 과정을 통해서 성령께서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2. 부르심의 합당한 열매
바울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는 일에 대하여 첫째로 모든 온유와 겸손으로 하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의 생활전체가 하나의 틀에 잡혀야 합니다. 그 틀이 온유와 겸손인데 이 틀은 바로 그리스도의 마음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온유해지고 겸손해졌다면 나는 점점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닮아져 가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오래 참음으로 하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생활은 인내에서 출발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소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소망이란 장차 나타날 일이기 때문에 소망의 생활에는 참음이 필요합니다. 다음에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라고 했습니다. 용납이란 말은 용서하여 받아 드리라는 말입니다. 이 같은 용납은 사랑 가운데서 이뤄져야 합니다. 사랑이란 말은 원래 용서한다는 말과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는 그 사랑은 우리의 죄와 연관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증거도 죄를 용서해 주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일곱 번이 아니라 이른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다음에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했습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나하나의 지체를 그리스도 안에서 연결시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교회를 이루는 일에는 이처럼 하나가 되어야 하는데 이 하나의 연결고리는 평안의 매는 줄입니다. 교회의 평안을 위해 자신이 희생하고 봉사하며 서로 도와주고 충성하는 성도의 생활로 연결되어 하나가 되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같은 열매를 반드시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로 이런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하나님의 손에 의해 합당한 연단을 시키시는 것입니다.
(32) 하나인 교회
(에베소서 4:4)
서론 : 바울은 4절에서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고 말씀해 줍니다. 이 말씀을 쉽게 풀이하면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언약하신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은 자들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한 몸인 교회를 이뤘다는 것입니다.
1. 몸이 하나이요.
몸이란 말은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하는 하나님의 교회를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이상, 한 머리에 둘이나 셋이 되는 몸이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몸이 하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그리스도와 연합한 모든 무리들은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데 그 몸이 곧 교회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라고 말할 때, 대단히 광의적인 데 크게는 온 우주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가이샤라 빌립보 지방에 이르렀을 때 주님은 제자들에게 자기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는 고백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고백을 들으시고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신앙고백이 교회의 반석 곧 기초석이 된 것입니다. “주”는 구약적 의미에서 하나님이란 고백입니다. 그리스도란 기름 부음을 받은 자란 뜻으로 메시야 곧 구세주란 의미가 됩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란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육체을 입고 자신을 낮추시어 종의 형상으로 세상에 오신 사실을 믿는다고 하는 신앙 고백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온 세상에 많은 교회들이 널려 있지만 이 신앙 고백 위에 세워진 교회만이 진실한 교회인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사실을 믿지 않는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것을 믿지 않는 교회도 교회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고 그리스도께서 내 죄를 속해 주셨다는 대속의 은혜를 부인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그리스도의 지체가 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세 가지로 구분됩니다. 하나는 성령이 임재하신 곳이 곧 교회입니다. 구속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곧 교회인 것입니다. 그 사람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성령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로 연결 지어 거대한 그리스도의 몸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지역교회가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지역적 모임을 말합니다. 지역 교회는 눈에 보이는 회중들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모임입니다. 이 모임에도 거듭난 사람만이 신령한 교회를 이루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넓은 의미의 거대한 교회가 있습니다. 이 교회를 만국 교회라 부릅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사신 모든 성도들이 이 범주에 들어갑니다. 이들이 온전한 교회인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교회는 오직 하나입니다.
2. 성령이 하나이니
“성령이 하나이니”라고 한 말은 오직 한 분이신 성령의 역사를 의미합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이십니다. 이 영은 절대로 갈라질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 내재하시는 성령은 모두 한 성령이시며 그 성령 안에서 교회의 지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지체는 제각기 다릅니다. 그 역할도 동일하지 않습니다. 남녀가 다르며 가문이 다르고 족속이 다르며 인종이 다릅니다. 언어가 통하지 않고 생활 습성도 다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들로 한 몸을 이루시기 때문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한 몸을 이루는 지체로 한 형제들인 것입니다.
성령이 하시는 최대의 사역은 바로 하나님의 교회를 이루시는 일인데 성령께서는 이 일을 복음을 통해서 이루십니다.
성령은 오직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영이십니다. 성령은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성령은 잃은 양들로 목자의 음성을 듣게 하십니다. 복음으로 마음을 밝히시는 것입니다. 성령은 복음을 통해서 회개하게 합니다. 성령은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임재하시어 거듭나게 하십니다. 성령은 이들로 하나의 교회를 형성하시면서 지체 하나하나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시켜 그의 신부 된 몸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이와 같이 한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기 위하여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한 소망을 가지고 그 안에서 살아갑니다. 이 부르심의 소망에 합당한 성도가 되기 위해 힘쓰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33) 하나이신 하나님의 역사
(에베소서 4:5-6)
서론 : 바울은 5절에서 하나님의 모든 사역의 역사가 오직 하나로 시작되고 하나로 끝남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 시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일은 오직 하나의 역사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갈라진다면 이미 하나님의 역사가 아닙니다.
1. 주도 하나이요
주도 하나라고 했습니다.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님이 두 분이 실 수 없습니다. 예수도 구주가 되시고 석가도 구주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예수도 중보자이시고 마리아도 중보자일 수 없습니다. 구원 사역에 있어서 하나가 아니면 하나님의 모든 구원 사역은 깨어지게 됩니다. 우리의 구세주가 하나란 사실은 간단한 진리이면서도 반드시 명심해야 할 신앙입니다. 예수 외에 구세주를 등장시켜 예수의 이름을 제외시키거나 예수와 함께 구세주의 자리에 올라앉게 되면 이미 예수가 하나가 아니요 둘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이단자들이 바로 이런 자들입니다.
히 12 : 2절에서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한 분이신 그 분만이 우리의 구주이십니다. 그 분께만 소망을 두며 그 분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아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 분 한 분뿐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께만 있습니다. 그런데 가짜 주가 나타나 자신을 구주라고 말합니다. 자기에게 생명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주는 오직 한 분 예수님 뿐이십니다. 그 분 외 어느 누구도 주의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2.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믿음도 하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한 믿음 안에서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들인 것입니다. 구원의 믿음은 나뉠 수가 없습니다. 믿음의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요, 믿음이란 바로 그 분을 믿는 일을 말합니다. 거기에는 마리아도 개입이 안되며 문선명 이도 개입 될 수 없습니다. 고전 15장에서 복음에 대하여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로 인하여 죽임을 당하시고 장사 지낸바 되어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신 사건”이라고 했습니다. 이 사건을 복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이 사건에 대한 믿음인 것입니다. 이 믿음은 이 세상이 심판으로 소멸될 때까지 오직 하나일 뿐입니다. 믿음이 시대를 따라 변화한다면 큰 일입니다.
다음에 세례도 하나라고 했습니다. 세례에 대하여 근간에 침례라 하여 많은 사람들이 현혹 받고 있습니다. 세례의 방법이 물 속에 잠기는 것이냐? 아니면 물을 떠서 머리 위에 쏟는 것이냐? 성경에는 이 문제에 대해 해답을 내리지 않고 있습니다. 세례에 대하여 알 것은 세례는 구원과는 관계가 없는 하나의 의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이 받은 복음의 계시에는 세례에 관한 것이 없었습니다. 한편 강도도 세례를 받고 죽은 것이 아닙니다. 침례를 주장하는 교단에서 세례의 방법을 침례로 절대시하는데 이는 모순입니다. 천주교에서도 세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 것으로 알고 죽어 가는 사람에게 세례를 주려고 신부가 세례 물통을 들고 달려가는 우스운 경우를 목격하기도 합니다.
세례의 유례는 구약의 물로 씻는 성결 의식에서 나온 것입니다. 정결케 하는 의식으로 흐르는 물에 씻었는데 이것을 우리의 죄를 씻는 외적인 표로 삼게 된 것입니다. 비록 구약적 의식에서 나온 것이지만 예수님이 명하신 것이기 때문에 신약 시대에도 그 명령을 받들어 세례를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례를 받는 이유는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새 생명을 얻었다는 외적인 신앙고백입니다. 이 같은 사실은 세례를 받지 못했다고 하여 구원이 무효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한 분이 시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하나라면 세례도 하나인 것입니다. 그런데 침례를 세례로 주장하는 교단에 속한 교회에 들어갔다고 하여 다시 한 번 침례를 받는 일은 그가 침례를 받기 이전까지는 잘못된 그리스도를 믿었고 잘못된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고백이 되기 때문에 절대로 있어서는 안돼는 일인 것입니다.
결론 : 다음에 하나님도 하나이시라고 했습니다. 결론적으로 이 모든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께 대하여 언급하기를 그 하나님도 한 분이심을 분명해 했습니다. 그 하나님은 바로 만유의 아버지요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는 분이십니다.
(34)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
(에베소서 4:7-10)
서론 : 바울은 7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바울의 이 같은 표현은 우리가 그리스도로부터 한량없이 풍성한 은혜의 선물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1. 선물과 은혜
8절에서 바울은 시 68 : 18절에 나오는 말씀을 인용하여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하여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선물이란 그리스도가 주시는 은혜를 말합니다. 은혜란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에게 베푸시는 모든 구속적인 역사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구속의 은혜를 선물로 주시기 위해 그가 세상에 오셔서 구속의 사역을 이루신 것입니다.
그를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은 한이 없으십니다. 그의 사역에서 얻으시고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의 선물은 만물을 충만케 하실 수 있는 놀라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은혜의 주체는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그로부터 생수의 강 같은 은혜가 넘치게 흐릅니다. 계 22 : 17절에서 원하는 자에게 주시는 그의 은혜의 선물에 대하여 이처럼 말씀해 줍니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 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이 생명수가 은혜의 강수인 것입니다. 이사야는 사 55 : 1절에서 목마른 자들은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했는데 이 포도주와 젖은 죽은 생명을 살리는 그리스도의 은혜의 선물입니다.
2. 그리스도인과 은혜
그리스도인이란 이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받은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받은 은혜의 선물의 분량은 한없이 많은 것입니다. 고후 6 : 2절에서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 했는데 신약시대를 은혜 시대라고 부르는 것은 모든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넘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풍성하신 그리스도의 은혜에 혹 이르지 못할까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히 12 : 15절에서는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할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라”고 말씀해 줍니다. 아무리 그리스도의 은혜의 분량이 넘치고 충만해도 하나님의 사랑을 거역하는 자에게는 이 선물이 해당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은혜가 이처럼 넘쳐도 우리는 이 은혜를 결코 헛되이 받으면 안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고후 6 : 1절에서 “그리스도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헛되이 받는다는 말은 가치 없게, 허탄하게 받는다는 의미로 하나님의 은혜를 경멸이 여기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너무나도 귀하고 소중합니다. 내 인생, 내 생애의 근본이 되므로 이 은혜를 받은 사람은 그 은혜 가운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쾌락 때문에 이 은혜가 뒷전으로 밀려가서는 안됩니다. 재물 때문에 내 생애에서 소홀히 여겨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은혜 가운데서 성장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각자 은혜를 간직하는 그릇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제각기 그 그릇에 은혜를 담기 때문에 자기에게 해당되는 은혜의 분량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은혜의 그릇을 크게 넓혀서 보다 많은 은혜를 담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 은혜의 그릇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좀더 깊이 깨닫게 될 때 커지고 넓어집니다. 우리의 감사생활은 이 그릇을 크고 넓게 만드는 비결입니다. 감사할수록 더욱 넘치는 은혜를 받아 은혜가 넘치는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은혜를 사모하는 갈급한 심령을 가질 때, 이 은혜의 그릇이 커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그릇 속에 가득히 채워주셔서 은혜 가운데 살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성품이 겸손해 질 때 그 겸손 중에 은혜의 그릇이 커지는 것입니다. 사람이 겸손하면 겸손할수록 더욱 충만한 은혜의 생활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 : 그리스도의 은혜의 선물이 얼마나 놀라우며 충만하신가 에 대하여 9, 10절에서 말씀해 주십니다. 이 은혜의 선물을 주시기 위해 하늘 보좌에서 이 세상에 오셔서 죽기까지 순종하는 생애를 보내시고 하늘에 오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은혜가 나왔습니다. 이 같은 은혜를 내리신 예수는 만물 위에서 만물을 지배하시며 섭리하시는 놀라운 권세를 가지신 분입니다. 이 은혜를 넘치게 받아 은혜 가운데 남은 생애를 보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35) 교회의 직임
(에베소서 4:11-12)
서론 : 바울은 본문 11절과 12절에서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각 직임을 주신 일은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시는 일을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사도직과 선지자직
교회를 세우시기 위해 주신 직분 중에 첫째로 사도직을 들었습니다. 사도들은 교회의 터전이 된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누구를 사도라 하느냐 하는 문제에 대하여 물론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이 친히 부르신 12명의 제자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사도의 요건이 있습니다. 사도가 될 수 있는 첫째 요건은 친히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람이어야 합니다. 왜냐 하면 사도의 직분이 바로 부활하신 주님을 전파하는 부활의 증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지 못하고서는 부활의 증인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도는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서신과 그들이 남긴 유필은 모두 성경이 되었습니다.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아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기록들을 모아 성경으로 삼게 하셨습니다. 사도직은 단회 직입니다. 단회 직이란 그 직분이 계속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넘겨 줄 수 없고 또 다른 시대에 다른 사람들이 사도란 이름의 직분을 주시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 시대 이후의 시대는 이미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는 시대이지 결코 다른 계시를 받아 계속하여 성경을 만드는 시대가 아닌 것입니다.
다음에 혹은 선지자로 세움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선지자란 말은 주로 구약성경에 많이 나오는데 신약의 경우는 구약의 선지자의 경우와 좀 다릅니다. 구약의 선지자 직은 세례 요한의 때까지입니다. 그리고 구약의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왕이나 권세자나 종교 지도자들에게 책망하고 경종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국가의 흥망성쇠에 대한 예언을 많이 했으며 특별히 메사야의 예언을 체계적으로 했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사명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속죄 사역을 완성하심으로 끝났습니다. 그러면 신약의 선지자는 누구인가? 행 11 : 27,28에서 아가보를 선지자로 불렀고 행 15 : 31절에서 유다와 실라를 가리켜 선지자라 했습니다. 신악 시대의 선지자는 예언자적인 사명자로서의 활동을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교회의 덕을 세우며 성도들을 권면하며 안위하기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소식을 전하는 사명자들로 활동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사명은 사도적인 계시의 설명이나 이해나 해석에 불과하며 그들의 전하는 말씀이 사도들이 받은 것 같은 계시는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이들 선지자들의 존속기간도 성경이 나오기까지의 기간 동안만 필요했던 직분이었으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직분은 아닙니다.
2. 복음 전하는 자와 목사와 교사
다음에 복음 전하는 자의 직임을 주셨습니다. 교회에는 복음 전하는 자의 직임이 최상위에 올라가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교회의 최상의 목표는 복음을 전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디모데나 바울 역시 이 복음 전하는 자의 사명자로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이르기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너는 말씀을 전하라”고 일렀습니다. 바울 자신도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자신에게 저주가 임할 것”으로 알고 복음을 전하는 사명자로서의 이방인의 시도직분을 충실히 수행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복음 전하는 자의 사명을 가장 높이 평가하십니다. 그리고 이들이 맺는 열매인 전도의 결실을 가장 큰 열매로 인정해 주십니다. 또한 이들이 받을 상급에 대하여 하늘에 별같이 빛나는 상급으로 다른 직분의 상급보다 높이셨습니다. 이 직임은 성령이 임하시고 그 능력만 받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직임입니다.
다음에 목사하고 했습니다. 이 목사에 대하여 헌법에는 그리스도의 사자, 하나님의 종, 복음의 사역자, 양의 목자, 교사 등으로 그 이름이 나와 있습니다. 오늘날 목사의 직임이란 구약의 제사장 직임과 같이 교회의 의식을 집례하고 선지자적인 사명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며 책망하고 사도적 권위로 교회를 치리하며 교사적인 사명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을 합니다. 교회 시대를 구분하면, 사도시대, 속사도 시대(교부), 감독 시대, 천주교의 사제 시대, 목사 시대로 구분됩니다. 교사는 말씀을 교회에서 가르치는 직임입니다. 오늘날 교회에는 많은 교육기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각 분야에서 활동하는 교사 직임은 참으로 귀한 것입니다.
결론 : 이 같은 직분으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신 이유는 성도를 온전케 하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봉사의 일을 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36) 그리스도 안에 온전한 사랑
(에베소서 4:13-14)
서론 : 바울은 본문 13절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의 성장을 강조하면서 그 성장을 교회의 성장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그 같은 신앙의 성장에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한 데까지 이르러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 교회의 성장은 그리스도인의 신앙 성장에서
바울은 13절에서 우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라고 한 말은 그리스도인의 모임을 말하며 교회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교회의 성장은 그 지체가 되는 성도들의 신앙적인 성장으로만이 이룰 수 있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성장해야 합니다. 그러면 교회의 성장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교인의 수효가 많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수효는 교세의 성장이지 교회의 성장은 아닌 것입니다. 교회 건물의 웅장함도 교회의 성장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는 이상한 방법으로 교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교회가 부흥하려면 자리가 좋아야 한다고 한결같이 말합니다.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지 모릅니다. 다음에 좋고 크고 웅장한 교회 건물을 세워야 부흥이 된다는 생각으로 멀쩡한 교회 건물을 허물고 빚을 내면서까지 매머드 교회를 건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방법의 교회 운영은 결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목회 방법도 아니려니와 정상적인 복음의 전파 방법도 아니라고 여깁니다.
교회의 성장의 표준이 나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한 데까지”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장성해야 하는데 그 분량이 모자라지 않도록 힘써야 합니다. 교회의 목표는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에 지체가 되는 성도들의 신앙이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의 충만한 분량에 이르러야 하는 것입니다.
2. 성장의 방법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우리의 신앙을 그리스도의 충만한 분량에까지 이르게 하여 교회를 성장시킬 것입니까? 13절에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일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주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몸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니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아는 일에도 하나가 되어야 교회가 성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말은 모든 성도들이 그렇게 되어야 성장하는 교회가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들의 신앙의 성장에는 믿음과 지식의 일치가 따라야 합니다. 믿음과 지식이 하나가 되는 신앙은 급속도로 성장합니다. 히 3 : 14절에서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고 했습니다. 우리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 우리의 교회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확실합니다. 그의 살아나신 부활도 확실합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내 죄를 사하여 주신 일도 확실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새로운 영생의 생명을 주신 일도 확실합니다. 천국의 소망도 확실합니다. 우리는 이 처음에 확실하게 붙잡은 믿음을 한평생 굳게 견고히 잡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이 같은 지체들이 모여 한 몸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중에 몇몇이 이런 믿음으로 성장하지 못하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는 불 화음이 생기고 상처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 중에 어느 지체이건 흔들리면 교회가 흔들리게 됩니다. 우리들이 우리의 구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일은 언제나 우리에게 소망과 기쁨을 줍니다. 그를 참으로 아는 일은 우리에게 풍성한 생명을 가져다줍니다. 이처럼 믿음과 지식이 있는 교회가 성장하는 교회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배우는 공부를 등한히 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호 14 : 2절에서 “너희는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호 6 : 6절에서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호 6 : 3절에서 “여호와를 알자 힘써 알자”고 하셨습니다.
14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말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어린아이의 일은 무엇입니까? 히 5 : 13절 젖을 먹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다음에 “사람의 궤술에 넘어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간사한 유혹에 빠져서도 안 된다고 했습니다. 세상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해도 안 된다고 했습니다.
결론 : 그리스도인은 어린아이의 자리에서 일어나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믿음과 지식으로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성장시켜야 합니다. 우리는 서로가 한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그 공종체를 이루는 지체임을 명심해서 모든 일에 하나가 되는 사랑과 믿음과 지식을 가지고 성장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37) 사랑으로 연결되는 지혜
(에베소서 4:15-16)
서론 :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데는 사랑의 역할이 큽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심을 밝히고 그리스도인들은 사랑 안에서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야 한다고 말해 줍니다. 지체가 그리스도의 분량에 이르러야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성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1. 믿음의 성장을 가져오는 사랑
바울은 15절에서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성장은 사랑 안에서 참된 생활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받는 원천이 있고 주는 대상이 있습니다. 받는 원천은 하나님이시고 주는 대상은 각 지체를 이루는 형제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생활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는 사랑의 생활입니다. 사랑을 떠나서는 신앙의 성장이 없으며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랄 수가 없습니다. 사랑은 인체에 있어서 각 지체 지체를 연결시키는 신비한 작용과 같습니다. 지체들이 각기 별개로 떨어져 있다면 살아 있는 몸을 이룰 수 없습니다. 수천만 개의 미세한 세포가 신비한 연결로 한 몸을 이루듯이 교회라는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려면 지체끼리 서로 연결되어야 하는데 그 연결 고리가 사랑인 것입니다.
용서도 사랑으로 합니다. (우리가 우리 죄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이해도 사랑으로 합니다. (사랑은 허물을 덮어 준다)
교제도 사랑으로 합니다. (진실과 도와줌으로)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라고 했습니다. 참된 것이란 진실한 생활을 말합니다. 진실한 생활은 우리의 신앙을 성장시키며 교회를 성장시키는 열쇠가 됩니다.
참된 생활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거짓이 없는 생활을 말합니다. 말에 거짓이 없고 행동에 거짓이 없고 생활에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거짓은 우리의 진실한 신앙을 무너뜨립니다. 참된 생활이란 믿음에 뿌리를 내린 생활입니다. 믿음으로 생각하고 계획하고 믿음으로 추진합니다. 참된 생활이란 소망을 향하여 살아가는 생활입니다. 현실에 집착하지 않고 먼 장래의 소망을 바라보면서 살아갑니다. 참된 생활이란 말씀을 따라가는 생활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생활의 빛과 등이 되는 것입니다.
2. 교회의 머리가 되신 그리스도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가 되십니다. 머리가 온 몸을 지배하고 통솔하는 총사령부인 것처럼 주님은 교회의 머리로 교회를 다스리십니다. 그러면 주님은 어떻게 교회의 머리되신 일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까?
① 성령을 통해서 하십니다. 교회는 성령 안에서 존재하고 성장합니다. 성령은 교회를 구성케 하고 교회를 성장시키며 인도해 나갑니다.
② 주님은 말씀을 통해서 머리의 역할을 하십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립되고 운영되는 기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는 하나님의 교회가 성립될 수 없습니다. 교회 안에는 주님의 말씀이 능력으로 역사 하심으로 교회가 성결하고 거룩하게 유지되고 보호됩니다.
③ 주님은 그의 사자들을 통해서 교회의 머리된 사역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그의 사자들을 오른손으로 붙잡고 계십니다. 교회에서 말씀을 선포하고 치리하며 다스리는 하나님의 종들은 눈에 보이는 교회의 머리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종들에게는 크나큰 의무와 책임이 따릅니다. 참된 교회, 거짓된 교회의 구별은 주의 종들의 진실성에 따라 구별됩니다. 주의 종이 이단적인 설교와 교리로 교회를 운영한다면 그 교회는 이단적인 집단이 됩니다. 만약에 천주교의 신부가 교회에 와서 교회를 운영한다면 그 교회는 이미 천주교회가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통일교의 문선명은 목사들을 유혹하기 위해 고급 호텔로 초청하여 세마나도 개최하고 비용을 부담하고 외국 여행도 시켜 왔습니다. 이 올무에 걸려 통일교로 넘어간 목사의 수효가 대단히 많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자에 대해 주님은 삯군 목자와 선한 목자를 구분하셨습니다.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지만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님으로 이리가 오면 양을 버리고 도망간다고 했습니다. 또 충성된 종과 악한 종으로 나누셨습니다. 충성된 종은 때를 따라 양식을 먹이는 목사요, 악한 목자는 주인이 오는 일에는 관심을 쓰지 않고 친구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는 목회를 한다고 하셨습니다.
결론 : 그리스도인 들에게는 각기 지체로서 분량이 주어졌습니다. 그 분량대로 역사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눈은 눈의 분량을 잘 감당해야 몸이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게 주신 지체의 분량을 알고 그 분량대로 사랑 안에서 성장하여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자라게 해야 합니다.
(38) 이방인과 같이 행하지 말라
(에베소서 4:17-20)
서론 :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성도들은 이방인처럼 행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이방인들은 저희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하므로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다고 했습니다. 이방인들은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지만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처럼 배우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배우고 배운 대로 살아야 합니다.
1. 이방인들이 행하는 것
이방인들은 그들의 생활에 표준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한다”고 한 것입니다. 허망이란 말은 헛된 소망이란 뜻입니다. 이방인들은 헛된 소망 중에 살아갑니다. 이 헛된 소망은 그리스도가 없는 사람들의 생활의 표준입니다. 그리스도가 개입 안 된 계획, 그리스도가 없는 생애는 모두 헛된 소망으로 허망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이방인들처럼 이 같은 허망한 마음의 생각대로 생활한다면 어떤 결과가 올 것입니까?
㉮ 총명이 어두워진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총명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혜에서 나옵니다. 그러므로 허망한 마음을 가지면 소망을 바라보는 신령한 눈이 어두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판단력이 어두워집니다.
㉯ 무지해 진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지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소유해야 하는데 허망한 마음속에는 말씀이 없으므로 무지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 마음이 굳어진다고 했습니다. 마음이 굳어지는 원인은 죄로 말미암아서입니다. 굳어진 마음은 완악해집니다. 완악한 마음은 죄로 굳어져 있기 때문에 회개를 못합니다. 우리가 잠시 동안이라도 세상과 더불어 짝하면 이 세 가지 징후가 우리의 생활에 즉각 나타나게 됩니다. 총명이 어두워지고 무지해 지고 마음이 굳어지는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게 된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이방인들의 마음인데 우리가 이들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면 안됩니다.
2, 이방인의 생활을 따르지 말라
사랑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참된 생활을 못하면 이처럼 세상 사람의 퐁조에 따라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의 심령 상태가 타락하게 되고 그 행하는 일과 몸으로 이루는 일이 처음보다 더 악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 저희가 감각 없는 자가 된다고 했습니다. 영적 감각을 상실한 사람들은 언제나 허망한 가운데 살아갑니다.
㉯ 자신을 방탕에 방임한다고 했습니다. 자기자신을 더러운 세상의 흙탕물 속에 내어 맡긴다는 뜻입니다. 방탕은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의 생활 속에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타락한 생활 양상입니다. 집을 나간 탕자의 생활이 허랑 방탕했다고 했습니다.
㉰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한다고 했습니다. 더러운 것은 거짓말, 거짓 증거, 모함, 행패, 음란 등의 악한 행실로 이들은 이 같은 욕심을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에 더러운 것들을 가까이하며 그 가운데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고 말해 줍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배운 사람들이며 배우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온유와 겸손을 배우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서 진리를 배우고 진실을 배우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생활을 배우는 사람들입니다. 늘 육신의 욕심을 죽이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배운 대로 살아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신 17:19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평생 자기 옆에 두고 읽어서 그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배우기 위해 교회에 나옵니다. 특별히 말씀을 듣는 일, 성경을 배우는 일은 그리스도를 배우는 일의 기본이 되는 것입니다.
딤후 3:14절에서 너는 배우고 확실한 일에 거하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배운 일에 믿음을 가지고 그 일에 거하는 생활을 하며 자기 인생을 경영해야 합니다.
결론 : 우리의 마음은 사랑과 은혜와 진리로 굳게 하고 산성 같은 방어진을 쳐서 세상 풍조나 유행이나 미혹이나 꾐이 감히 침노하지 못하도록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자기의 때가 얼마 안 남은 것으로 알고 택한 자라도 미혹하려고 역사 하려고 한다고 했습니다. 마귀를 대적하여 승리하려면 그리스도를 배워서 확실한 일에 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39) 새 사람을 입으라
(에베소서 4:21-24)
서론 :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듣고 그리스도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진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로 새로워져야 한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요 17 : 17절 “진리로 저희를 거룩하게 하옵소서” 진리는 죄인을 거룩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엡 1 : 13절 “진리의 말씀을 듣고 그 안에서 성령의 인침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요 8 : 32절 ”절에서 진리는 죄인을 자유케 한다고 하셨습니다.
1. 진리를 받은 그리스도인의 벗어야 할 옛 사람
진리는 옛사람을 용서하지 않습니다. 진리는 옛사람과 함께 거할 수 없습니다. 진리는 옛사람과 타협하기를 거부합니다. 진리는 거룩하게 하는 능력이 있고, 죄로부터 자유를 주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진리가 그 속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옛사람은 그 모습을 들어내 놓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진리를 소유하던가 옛사람을 소유하던가 한 가지만을 선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진리가 용서치 않는 옛사람이란 어떤 사람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23절에서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옛사람이란 유혹의 욕심을 따라 사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진리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옛 사람이 죽었다는 말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의 옛 사람은 법적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죽었습니다. 이 사람은 다시는 살아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영원히 죽었기 때문에 우리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러나 한편 우리는 옛 사람의 지배아래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현실적인 우리의 생활에서 우리에게 직접 부닥치는 일입니다. 아직 우리의 육체 속에 남아있는 옛 사람의 습성이 나를 다시 지배하려고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옛 사람은 죽었지만 그 습성은 아직 우리들 육체 가운데 남아서 우리를 괴롭히는 것입니다. 영적인 생활을 못하게 방해하는 못된 존재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유혹은 외부에서 오는 것인데 그 유혹이 내 속에 아직 남아있는 옛 사람의 습성을 자극하여 우리로 죄를 범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옛 사람을 단연히 벗어버려야 합니다. 벗어버린다는 말은 성령의 능력으로 육신의 정욕을 이기는 생활을 말합니다. 옛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절대로 이 사람을 다시 맞아 드리거나 그의 습성을 따라 살아가면 안됩니다.
육신으로 심는 자는 썩어질 것으로 거둔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옛 사람을 벗어버리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생활이 믿음의 선한 싸움입니다.
2. 그리스도인이 입어야 할 새 사람
옛 사람을 벗어버렸으면 이제 새로운 것으로 입어야 합니다. 입어야 할 사람이 새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매일 매일의 생활은 옛 사람은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는 생활입니다. 그러면 이 새 사람은 어떻게 입을 수 있는 것입니까?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라고 했습니다. 마음이 새로운 변화를 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새로워지는 일은 마음이 새로워지는 일입니다. 마음은 말의 출구요 행동의 사령부요 인격의 산실입니다. 사람의 근본적인 변화는 마음의 새로운 변화에서 오는 것입니다. 마음은 그대로 놔두고 행동만 변하면 그런 변화는 일시적입니다. 이 마음의 온전한 변화는 성령의 임재로서만이 가능합니다. 성령을 맞아 드리고 그 성령께 의지하며 성령께 순종하면 우리의 마음이 새로워집니다.
사람이 새롭게 되면 하나님의 형상을 본 받게 됩니다. “하나님을 따라”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아담이 범죄함으로 상실해 버린 하나님의 형상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회복이 되는 것입니다. 이 형상은 하나님이 소유하고 계시는 절대 거룩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것을 의미합니다. 의와 진리와 거룩은 하나님의 속성이시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이 하나님의 속성에 따라 창조된 존재인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회복된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이 옷을 입어야 합니다. 우리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는 이 영적 투쟁을 계속하여 우리로 온전한 새 사람 가운데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어나가야 합니다.
(40) 벗는 싸움과 덧입는 싸움
(에베소서 4:25-31)
서론 : 바울은 25절부터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는” 싸움을 우리가 어떻게 싸워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으로 그 방법을 제시해 줍니다.
1.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나타내야 할 새 사람의 행동지침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생활에 나타내야 할 행동지침으로 몇 가지 사항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거짓을 버리고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고 했습니다. 거짓말이나 거짓된 행위를 버리고 진실한 대화를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는 그 지체들입니다. 만약 지체가 서로 진실하지 못하고 서로간 거짓으로 속이는 역할을 한다면 그 몸은 지탱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거짓을 버리고 참된 것을 말하라고 한 이유에 대하여 “우리는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고 했습니다.
다음에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라”고 했습니다. 분은 공의에서 나오는 분이 있고 혈기에서 나오는 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혈기에서 나오는 분은 일직선으로 죄와 연결됩니다. 그 분을 빨리 버리지 않으면 그 분 때문에 무슨 죄를 짓게 될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활에서 혹 분을 품거나 품은 분을 내 놓을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 같은 일은 어쩔 수 없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성경은 죄를 짓지 말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한 가지 방법을 말씀해 주고 있는데 “해다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고 한 것입니다. 분을 어쩔 수 없이 품는 경우에도 결코 그 분을 오래 마음에 품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귀는 바로 우리의 분을 절호의 기회로 삼아 유혹의 손길을 뻗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며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도적질이라고 한 말은 다른 범죄에도 해당되는 말입니다. 그리고 죄는 회개 뿐 아니라 회개에 합당한 열매까지 맺어야 한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도적질하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는 자를 말합니다. 이런 자는 다시는 그런 죄를 범하지 말고 도리어 선한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회개에는 이처럼 회개의 열매가 따라야 합니다. 회개란 죄에서 돌아서는 일을 말합니다. 죄에서 돌아서면 죄에서 떠나 이제는 의에 속하여 의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네 번째로 29절에서 그리스도인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대하여 교훈해 줍니다. 더러운 말은 입밖에 내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더러운 말이란 깨끗지 못한 생각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거짓된 말,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말, 그리스도인의 품위를 손상시키는 말 등을 말합니다. 그런 것들은 입밖에도 내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 대신 덕을 세우는 말을 하고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칠 수 있는 말을 하라고 한 것입니다. 덕을 세우는 말이란 듣는 사람으로 도덕적 교훈이 될 수 있는 말, 또는 듣는 사람에게 유익이 되는 말입니다. 은혜를 끼치는 말이란 주의 이름을 높이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 하는 말입니다.
2.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바울은 30절에서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시키지 말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죄된 행실은 성령을 근심케 합니다. 우리 마음에 품은 악한 생각도 이로 인하여 성령은 슬퍼하시며 근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활에서 얼마나 많이 성령을 근심시키는 일을 해 온 것입니까?
근심 대신에 “너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성령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생활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옛 사람의 생활은 성령을 근심시키십니다.
거짓된 생활을 하면 성령이 근심하십니다.
분을 품고 오랫동안 버리지 않으면 근심시키게 됩니다.
범죄하는 일은 적극적으로 피해야 하며 죄를 범했으면 곧 회개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령을 근심시키게 됩니다.
바울은 31절에서 우리가 벗어야 할 옛 사람의 행실에 대하여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것들은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한 것입니다.
결론 : 옛 사람의 습성은 때때로 유혹의 욕심을 따라 우리 마음속에 파고 들어와 우리로 죄를 범하게 하고 그 죄로 넘어지게 함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벗어 버리는 싸움과 덧입는 생활을 게을리 해서는 안됩니다.
에베소서 5장 (41 - 48)
◆ 밤중소리 01-31 | VIEW : 561
(41)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
(에베소서 5:1-2)
서론 : 바울은 5 : 1절에서 엄청난 말씀으로 우리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본받으라는 말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라는 의미가 됩니다.
1. 우리는 하나님의 어떤 사랑을 입은 자녀인가?
나라고 하는 존재는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예정을 입어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지금 이 세상에서 살아간다고 하는 이 사실은 이 같은 하나님의 사랑에 연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세상에 그의 사랑하시는 아들을 보내시어 그로 고난을 당하게 하신 일은 이 같은 나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에서인 것입니다. 요일 4 : 10절에서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롬 5 : 8절에서 “우리 죄를 위하여 그 아들을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했습니다.
2. 하나님을 본받는 자 되라
바울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고 했는데 그러면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고 한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이 일에 관하여 우리는 다른 말씀을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내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같이 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누구도 하나님과 같이 될 수는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그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원래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로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생활이 곧 하나님을 본받는 일인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롬 12 : 2절에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중에 하나님을 본받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3.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바울은 2절에서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고 말씀해 줍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본받는 일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받는 일이란 사실을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는 우리를 어떤 사랑으로 사랑하신 것입니까?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라고 부르는 대상은 다른 사람이 아닌 나임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어느 한 집단 체를 이루는 우리를 위해 자신을 버리신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 고난을 당신 것입니다. 이 내가 너도 나, 나도 나가 되어 우리라고 하는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위해 자신을 버리셨으며 나로 인하여 십자가를 지셨고 나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버리신 것입니다. 이 보다 더 놀라운 사랑이 어디 있는 것입니까? 그래서 성경에서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는 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받아 사랑 가운데서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는 말은 우리의 전 생활 속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넘치게 하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다른 지체들인 형제들에게 베풀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생활을 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이 되셨다고 했습니다. 제물이나 생축은 죄인이 하나님께 드리는 짐승을 가리킵니다. 향기로운 제물이란 하나님이 기쁘시게 열납하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내 죄를 속하시기 위한 제물이 되어 짐승처럼 하나님 앞에 분향히 된 것입니다. 이 세상에 어느 누가 나를 위해 짐승처럼 회생의 제물이 될 것입니까?
결론 : 바울은 이 기이하신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 가운데서 행하는 생활을 하면서 우리에게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성장은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사랑 가운데서 행하는 생활로 이루어짐을 알아야 합니다.
(42) 성도의 생활지침
(에베소서 5:3-7)
서론 :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어야 하고 그리스도의 사랑 가운데서 행해야 한다고 말한 바울은 3절부터 그리스도인들이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생활을 해야 할 일에 대하여 몇 가지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행위에서 나오는 죄
3절에서 바울은 옛 사람의 행위에서 나오는 죄에 대하여 “음행과 더러운 것과 탐욕”이라고 말하고 이에 대한 처신을 말해 줍니다.
㉮ 음행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음행은 몸으로 행하는 죄 중에서 가장 중한 죄로 여기고 있습니다. 음행죄가 왜 부도덕하고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죄인가? 부부관계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과의 신비한 연합관계를 보여 주는 그림자입니다. 음행은 둘이 한 몸을 이룬 신비적 연합을 파괴하는 행위가 됩니다. 이런 자는 부부 관계 뿐 아니라 자신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있어서도 손상을 주게 됩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은 이런 행위를 버리지 않으며 그 같은 일을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그러나 이런 음행은 우리의 옛 사람 중에서 가장 먼저 버려야 할 악한 행위이며 그리스도인들은 그 이름이라도 부르면 안돼는 것입니다.
㉯ 온갖 더러운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더러운 죄란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을 때 행했던 육신의 모든 행실을 의미합니다. 도박이나 사기나 도적질 거짓말 등등입니다. 이런 일도 이제는 버려야 할 뿐 아니라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아야 합니다.
㉰ 탐욕이라고 했습니다. 탐욕은 육신의 소욕을 만족시키려는 욕심입니다. 이 탐욕은 사람이 자신의 인생의 비중을 하나님보다 물질을 더 사랑하고 섬기는 마음을 가리킵니다. 돈을 사랑하는 마음이 하나님보다 앞서기 때문에 우상 숭배가 되는 것입니다.
2. 입으로 나오는 죄
입으로 나오는 죄에 대하여 4절부터 말씀해 줍니다.
㉮ 누추한 말이 마땅치 않다고 했습니다. 누추한 말이란 더럽고 지저분한 말을 의미합니다. 입에서 누추한 말이 나오면 그 마음이 이미 더럽고 지저분한 증거인 것입니다.
㉯ 어리석은 말이 마땅치 않다고 했습니다. 어리석은 말이란 어리석은 대화를 의미합니다.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은 어리석은 말입니다.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그 말속에 나오는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지 못하는 말은 어리석은 대화입니다.
㉯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않다고 했습니다. 작난끼로 하는 말을 가리킵니다. 농으로 거짓말을 하거나 듣는 사람에게 덕을 주지 못하는 말은 삼가야 하는 것입니다. 심심풀이로 주고받는 말은 그 말속에 실수가 많이 있게 마련입니다. 말하고도 곧 후회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처럼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회롱의 말은 마땅치 않다고 했습니다. 마땅치 않다는 말은 삼가라는 말입니다. 다윗은 시 141 : 3절에서 “여호와여 내 입 앞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왜 이런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까? 주님은 사람이 무슨 말을 하든지 마지막 날에 그로 인하여 심문을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야고보는 약 3 : 10절에서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 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뇨”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의 입에서는 어떤 말이 나와야 하는 것입니까? 바울은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입은 원래가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를 드리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그것이 범죄로 인하여 더러워졌으며 자신의 정욕과 마음의 더러움을 토로하는 통로로 전락된 것입니다.
감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립니다. 그래서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셨습니다.
감사는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제사입니다. 시 50 : 14절에서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감사하는 기도에는 응답이 따릅니다. 빌 4 : 6절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5절 이하에서 정녕 알아야 할 경종을 들려줍니다.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현재적인 범죄자, 그 죄에 안주하고 있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결론 : 헛된 말로 속이는 자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들에게 속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과 함께 참여하는 자가 되어서도 안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받지 못할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들 가운데서 나와야 합니다. 그들의 일에 참여하지 말아야 합니다.
(43) 빛의 열매
(에베소서 5:8-9)
서론 : 바울은 8절에서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빛 되신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전에는 어두움이었습니다. 빛이 생명이라면 어두움은 사망입니다. 빛이 진리라면 어두움은 죄악입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었다는 말은 그리스도를 알기 이전에 우리는 어두움 가운데서 살아갔다는 것입니다. 죄의 종이 되어 하나님을 거역해 온 지난날의 우리의 생활을 말합니다.
1.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성경에서는 세상을 어두움이라고 말합니다. 요 9 : 39절에는 의미 심장한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 함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세상에 소경된 사람은 눈을 뜨게 하여 빛을 보게 하고 세상 것을 보는 눈 뜬 자들은 그대로 눈을 감겨 빛을 보지 못하게 하신다고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어둠에서 보는 눈도 뜨고 빛을 보는 눈도 둘 다 함께 뜰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주 안에서 빛을 보는 눈을 떴으니 세상 어두움을 보는 눈은 감겨져야 하는 것입니다. 요 1 : 45절에서 “빛이 어둠에 비취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했습니다. 어둠을 보는 눈으로는 빛을 바라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빛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어둠을 보는 눈이 떠 있기 때문입니다. 요 12 : 46절에서 주님은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어둠은 사탄의 세력이요 빛은 그리스도의 생명인 것입니다.
어둠에는 소망도 없고 생명도 없습니다. 어둠의 결실은 오직 심판과 멸망뿐입니다. 우리들이 이전에 이런 어둠에 속했던 사람들입니다. 갈 5 : 19절에서 “유체의 일은 현저하니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신분의 변화를 받았습니다.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빛이 된 것입니다. 빛이 되었다는 말은 빛되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 나가는 우리의 새로운 생애를 말합니다.
2. 빛의 자녀들처럼 생하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마 5 : 14절에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빛은 무슨 역할을 하는 것입니까?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여 그 어둠을 쫓는 일을 합니다. 이 빛의 발산지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어둠의 거처도 마음입니다. 먼저 우리는 빛으로 우리 마음의 어둠을 쫓아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죄의 어둠을 하나님의 빛으로 쫓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9절에는 빛의 열매가 나옵니다. 어둠이 우리의 죄를 말한다면 빛은 말씀의 열매를 말합니다. 어둠에 열매가 있는 것처럼 빛에도 열매가 따릅니다. 그러면 빛의 열매는 어떻게 나타나는 것입니까? 이 빛의 열매에 대하여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빛을 받으면 그 빛의 열매가 우리의 행실에 나타나는데 먼저 착한 일로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착한 일에는 의로움과 진실함이 따르는 것은 물론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착한 일이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의로움이란 우리가 받은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의 생활에 나타내는 일입니다. 진실함이란 거짓이 없는 말과 행동입니다. 빛을 받은 사람은 그 빛을 받은 증거로서 이 세 가지 열매가 그의 생활에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처음부터 뚜렷하게 빛을 비췰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들 앞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의 빛을 비취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빛의 강도는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의 열매는 반드시 맺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빛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지난날 우리가 어둠에 거했을 당시의 온갖 더러운 행실을 버리고 이제 빛의 자녀들처럼 빛을 비취어야 합니다. 우리들 주변에 이 빛으로 비췰 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44) 살리시는 빛의 역사
(에베소서 5:10-14)
서론 : 바울은 11절에서 그리스도인의 생활 자세에 대하여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참여하지 말라고 한 말은 자신에게 해당되는 소극적인 자세요, 책망하라는 말은 어두움의 일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회개를 권고하라는 말로 적극적인 자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생활에 이 두 가지 면을 갖추고 살아가야 합니다.
1. 그리스도인의 생활 자세
어둠은 죄악이기 때문에 그곳에는 열매가 없습니다. 여기서 열매라고 말하는 것은 생명의 열매를 가리킵니다. 이처럼 어둠의 일에 참여하는 일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혀 유익이 없으므로 이런 일에는 참여하지 말아야 할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유혹도 받지 말아야 합니다. 어둠에 속했던 지난날의 친구들은 주 안에서만 가까이하되 세상일로부터는 멀어져야 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생활 자세로 두 가지를 들고 있습니다. 하나는 10절에서 말씀해 주시는 대로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고 한 말씀대로 주님께 기쁘시게 해 드릴 일을 생활화시키는 일입니다. 다른 하나는 “어두움의 일에 참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미 죄에 대하여 죽은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롬 6 : 2절에서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라고 말해 줍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죄 가운데 살아가는 일은 비정상적인 일입니다. 우리는 이미 그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2. 도리어 책망하라
그리스도인이 어두움에 대처할 태도는 참여하는 일이 아니라 책망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책망이란 빛으로 어둠을 내 쫓는 일입니다. 어둠은 빛 앞에 견디지 못합니다. 빛은 어둠을 내 쫓게 되어 있습니다. 빛이 없거나 희미하게 되면 어둠이 그 빛을 삼키게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빛을 소유한 그리스도인들은 그 빛으로 어둠을 물리칠 수 있는 것입니다. 동조하지 말고 책망하여 물리치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13절에서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어둠의 일이 책망을 받는 일로 인하여 어둠의 일로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어둠의 일을 책망하는 일로 어둠의 실상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책망은 빛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이 어둠의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의 행실이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하므로 빛을 들어내면 어둠은 설자리가 없게 되며 어두웠던 자리에 빛으로 채우심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가정에 이 빛을 들어내면 어둠은 설 곳이 없게 되어 물러가게 되고 그 가정에는 빛으로 채워지는 것입니다.
책망은 사랑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책망이 없는 사랑은 참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의 아들을 주시므로 놀랍게 나타났지만 그러나 아들을 거역하는 자들에게는 심판을 내리시는 분입니다. 히 12장에서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신다”고 했습니다. 시 92 : 12절에서 “여호와여 주의 징벌을 당하며 주의 법으로 교훈 하심을 받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둔 일을 책망함에는 먼저 자신의 올바른 행실로 빛을 발산해야 합니다. 다음에 어둠의 일을 벗고 새로운 생명을 주려고 하는 간절한 마음, 사랑이 앞서야 합니다. 다음에 두려움과 온유하므로 책망해야 합니다.
3. 잠자는 자여 깨어라
바울은 14절에서 이사야서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고 했습니다. 세상 죄악의 어둠 속에서 잠자는 자들은 그 잠에서 속히 깨어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는 자들은 죽은 자들입니다. 우리들 주변에는 모두 이런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 가운데서 속히 깨어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어나야 합니다. 요 5 : 25절에서 예수님은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어둠에 사로잡힌 마음속에 들어가 비췸으로 내 속에 있는 어둠은 물러나게 되고 생명의 새로운 싹이 트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빛이 우리에게 비취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그리스도의 빛으로 비취게 하여 어둠을 책망하여 빛으로 내 주변을 드러나게 해야 합니다.
결론 : 우리는 어둠에 참여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오히려 그 어둠을 빛으로 책망하여 어디든지 우리가 머무는 곳에는 그리스도의 빛으로 채워야 하는 것입니다.
(45) 세월을 아끼라
(에베소서 5:15-17)
서론 : 본문에서 바울은 지혜 있는 자 같이하여 세월을 아끼라는 말씀과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는 말씀으로 악한 때에 그리스도인들의 처신에 대하여 특별히 권고해 주고 있습니다.
1. 지혜 있는 자 같이 행하라
바울은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있는 자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지혜란 하나님의 지혜를 말합니다. 우리에게 지혜를 공급하는 곳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특별히 잠언은 우리에게 삶의 지혜를 주는 책입니다. 우리는 또한 십계명을 통해서 우리의 생활에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의와 생명과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줍니다.
지혜 있는 자는 자신이 행하는 일에 어떻게 행할 것인가를 자세히 주의합니다. 왜 자세히 주의해야 하는 것입니까? 어떤 일을 행하려 할 때 그 일이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를 분별하기 위해서입니다. 지혜 없는 사람은 자신의 할 일에 대하여 주의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지혜 없이 육신의 생각과 인간의 지혜의 가르침을 따라 행하기 때문입니다.
다음에 지혜 있는 사람은 세월을 아낍니다. 세월을 아끼라는 말은 기회를 충분히 활용하라는 뜻입니다. 미련한 사람은 기회를 이용하지 못합니다. 세월은 흘러가는 시간인데 이 시간은 하나님께서 주의 뜻을 이루라고 주신 하나님의 기회인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맞는 세월을 주의해 십분 활용해야 후회 없는 생애를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세월을 허비한다는 말은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시간을 세상일에 바치는 생활을 말하고 아낀다는 말은 주를 위해 받치는 생활을 말합니다.
2. 주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라
바울은 17절에서 “주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일에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생각해야 할 일차적인 일은 무엇입니까? 주의 뜻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일입니다. 가령, 나에게 어떤 중대한 문제가 생겨서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우리가 어떤 자세로 이 문제를 대할 것입니까? 이 일을 왜 하나님이 나에게 주셨는가? 이 일에 대하여 하나님은 나에게 어떻게 행할 것을 원하시는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분명히 찾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내게 오는 모든 일은 빛의 아버지로부터 오는데 지극히 작은 일에 이르기까지 원인이 없는 결과는 없는 것입니다. 무슨 일에 대한 결정을 내릴 때나 그 일을 처리할 때 어리석은 자와 지혜로운 자는 생각하는 것이나 대처하는 것이 판이하기 때문에 그 결과에서 오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먼저 어리석은 자의 경우를 보면 이 사람은 그 일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찾지 못합니다. 모든 일이 우연히, 어쩌다가 발생한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지혜와 인간적인 자신의 능력으로 해결하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어떤 일이 일어나도 하나님을 염두에 두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문제에서 제외시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어려움이 가중되고 문제의 실마리가 풀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의 경우를 보면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생활을 합니다. 무슨 일이 자신에게 와도 하나님이 주신 일 인줄 알고 감사하며 헌신하며 정성을 쏟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어떤 어려운 문제에 부닥칠 때 먼저 그 원인을 하나님과 결부시켜 분석하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문제 앞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가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요나가 풍랑 중에 바다에 던져져 고래 뱃속에 들어갔지만 그 안에서 그는 회개하면서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대하여 생각한 것입니다. 그가 이처럼 새로운 결정을 내렸을 때 하나님께서 고래로 하여금 요나를 다시 토하여 내게 하셔서 그의 뜻을 이루게 하신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인내로써 하나님의 뜻을 기다립니다. 우리에게 오는 모든 시험이나 환난은 찾아 올 때가 있고 물러 갈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내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지혜 있는 자가 되어 지혜롭게 처신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월을 아끼는 생활을 통해서 주의 일에 열심을 품어야 합니다. 세상일에 분요한 생활은 세월을 허비하는 생활입니다. 우리는 지금 악한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의 뜻이 무엇인가를 이해하여 지혜롭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46) 성령 충만한 생활
(에베소서 5:18-21)
서론 :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성령으로 충만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18절에서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생활입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으며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생활은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얻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1. 성령의 이중 역사
성령의 충만함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우리 가운데서 행하시는 성령의 이중 역사에 대하여 알아보아야 합니다. 성령의 하시는 일 중에 첫 번째는 성령의 세례입니다. 이 성령의 세례에 대해서 혹은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라고도 합니다. 성령의 세례란 그리스도와의 영적인 연합관계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우리 구원에 필수조건입니다. 이 사실은 롬 6 : 1 - 5절에서 밝혀 주고 있습니다. 요일 2 : 20절을 보면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기름 부음이 성령의 내주이신데 이 일에 대하여 롬 8 : 9절에서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말씀해 줍니다.
그리고 다음에 성령의 충만함이 있습니다. 성령 세례는 사람이 구원을 얻는 일에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충만함은 구원받은 사람의 열매에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갈 5 : 22절 이하에는 그리스도인들이 맺어야 할 열매에 대해 언급해 주시는데 성령의 열매라고 말씀하면서 9가지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면 성령의 열매는 어떻게 맺게 되는 것입니까? 롬 8 : 13절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십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라고 했습니다. 육신대로 살려고 하는 몸의 행실을 성령으로 죽이는 생활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의 행실을 죽이게 하는 일이 성령이 하시는 일인데 이런 일의 실효를 거두려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이란 성령의 강력한 감동에 따른 권능의 나타남을 의미합니다. 이 같은 권능과 감동에 의해서만이 우리의 육신의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일에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성령의 감동을 강하게 받아 드려야 합니다. 그 감동을 소멸시키면 안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 말씀대로 살아갈 때 육신의 사람을 죽이고 영적인 열매를 맺게 하시는 성령의 능력이 내 생활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 성령의 능력 가운데 살아가는 일이 성령의 충만한 생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같이 성령세례를 받아 구원을 받았다고 해도 어떤 사람은 아직까지 육신 가운데서 살아가는 사람이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성령의 능력 가운데 살아가므로 성령의 충만한 생활을 경영하고 있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2. 성령 충만한 생활에 따르는 생활의 열매
바울은 18절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말씀한 후, 19절부터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성도들의 생활에 대하여 몇 가지로 말씀해 줍니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찬미하는 일은 하나님께 노래로 올리는 기도입니다. 찬송 시를 쓴 사람들을 보면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이며 영감이 있고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들입니다. 그 시로 노래를 부르면서 내 마음으로 기도하면 내 기도는 그 시에 나오는 고백처럼 하나님께 드리는 위대한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다음에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은 사람의 생활에는 바울이 20절에서 말씀해 주는 것처럼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다음에 21절에서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고 했습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으면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생활을 하게 됩니다. 경외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두려움과 큰사랑으로 섬기는 일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일이 그리스도인의 몸에 깊이 배어 인격을 형성해야 합니다. 다음에 서로 복종하라고 했는데 서로가 서로에 복종하는 일은 교회를 세우는 일에 필수적입니다.
결론 : 성령 충만은 주시는 분에게 구하여 받아야 합니다. 성령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성령을 충만히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리스도인으로써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생활을 하려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활을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47) 부부와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
(에베소서 5:22-27)
서론 : 아내와 남편이 결합된 관계를 부부라고 부릅니다. 이 부부관계는 신비적인 관계로 인간 사화와 가정을 유지시켜 왔습니다. 그런데 이 같은 부부관계의 신비적인 비밀이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와 연관이 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기이하고 놀라운 섭리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1. 아내에게 주는 권면
바울은 아내들에게 말하기를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하여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고 말씀해 주었습니다. 아내들은 자기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복종의 거울로 교회가 주님께 하듯 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교회란 알아 듣기 쉽게 말하면 그리스도인들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주님께 대한 복종은 절대적입니다. 이처럼 아내가 남편에 대한 복종은 절대적이 여야 합니다. 그 이유는 교회의 머리가 그리스도이심으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머리되신 그리스도에게 복종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 원리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이기 때문에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한다는 것은 시대나 사회나 문명의 변화에 따르지 않습니다.
2. 남편에게 주는 권면
두 몸이 한 몸을 이루는 부부간의 신비적 연합 관계는 아내가 그 몸의 머리 되는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만으로 유지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내에 대한 남편의 절대적인 사랑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머리되신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이유는 다른 아무런 조건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어떻게 사랑하신 것입니까? 25절에서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교회에 대한 사랑은 교회를 위해 자신의 몸을 주신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롬 5 : 8절에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같은 확실한 사랑의 증거야말로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연합관계를 확실하게 유지시키는 원동력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랑이 없었다면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부부간의 연합도 아내가 남편에 대한 복종만으로 유지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부부간의 원만하고 아름다운 연합이 계속 이루어지려면 아내의 복종과 남편의 사랑이 함께 작용해야 가능한 것입니다. 그 증거로 우리는 교회를 이루는 신비적인 힘은 그리스도인의 주님께 대한 복종에 있다기보다 교회를 사랑하시는 머리되신 주님의 그 사랑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도 이 두 가지 관계로 신비적인 연합이 이루어지며, 부부도 이 두 가지 관계로 그 신비적인 연합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바울은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해야 하는 기준을 보여주었습니다. 교회가 주께 하듯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기준도 보여주었습니다. 주께서 자신의 몸을 교회를 위해 주시듯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폭군처럼 복종만 요구할 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먼저 교회를 사랑하시듯 먼저 아내에 대한 사랑이 선행되어야 올바른 부부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26절과 27절에서 주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목적에 대하여 말씀해 줍니다. “이는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교회를 지극히 사랑하사 물로 씻었다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들로 회개케 하사 정결한 신부로 만드신 것을 말합니다. 말씀으로 깨끗케 하셨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말씀으로 깨끗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진리가 자유케 하며 진리가 죄에서 정결케 합니다. 주님이 그리스도인들로 이렇게 하신 목적은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시기 위해”서였다고 했습니다.
결론 : 우리는 우리의 부부간이 단순히 남녀간의 만남으로 이루어졌다고 하는 관계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에서 이루어졌다고 하는 이 놀라운 사실을 알고 복종하는 아내의 자세와 사랑하는 남편의 자세로 두 사람으로 한 몸을 이루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잘 이행하여 조화 있는 부부의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이 일이 또한 주님께 복종하는 생활과 연결이 되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로서의 직분을 잘 감당할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48) 육체를 미워하지 말고 양육하여 보호하라
(에베소서 5:28-33)
서론 : 바울은 본문에서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부관계는 둘이 한 육체가 되는데 이 비밀이 크다고 말씀해 주는 것입니다.
1. 부부와 교회
28절에서 바울은 남편들이 아내를 사랑하는 기준을 자기 몸처럼 사랑할 것을 말하고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부부는 원래가 한 육체에서 기원되었습니다. 아담이 깊이 잠든 후, 하나님이 그의 갈비뼈로 다른 또 하나의 아담을 만드셨는데 그가 곧 아담의 아내가 된 하와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둘은 원래가 둘이 아니오 하나이기 때문에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자기 몸을 사랑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둘이 하나이기 때문에 사람이 이 관계를 가를 수 없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이혼 문제를 가지고 시험한 일이 있었습니다. 모세는 이혼증서를 주어 내어버리라 명하였는데 왜 선생은 이혼을 금하느냐는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시고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데 장가들면 그 자체가 간음죄에 해당된다고 나무라신 것입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이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심으로 그리스도와의 연합관계를 예정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그의 신부인 우리를 위하여 크신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당신의 몸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분에게 절대적인 순종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와 교회는 영원히 한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 관계에는 분리란 있을 수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와의 부부 관계에는 이 같은 하나님의 섭리가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2. 육체를 양육하라
29절에서 바울은 “누구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제 육체란 부부의 연합을 이룬 한 몸을 가리킨 것입니다. 미워한다는 말은 학대한다는 뜻입니다. 부부가 하나가 된 그 한 몸을 학대하는 일은 그 몸을 불행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불순종하면 그것은 그 몸을 학대하는 일이 됩니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지 않으면 그것 역시 그 몸을 학대하는 일입니다. 양육한다는 말은 ‘길러주며 어루만져 준다’는 의미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존경하며 위로하고 이해해 주며 성장해 나가라는 말입니다.
이 일은 마치 그리스도가 교회를 양육하여 보호함 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교회를 변함없이 사랑하십니다. 그 분은 세상 끝날 까지 함께 하시며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악의 세력으로부터 보호해 주십니다. 당신 앞에 온전한 신부로 세울 수 있도록 보살펴 주십니다. 우리는 교회를 이루는 지체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그리스도의 몸인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이처럼 큰사랑을 이처럼 우리에게 베풀어주십니다.
바울은 이 비밀이 크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 비밀이란 부부간의 결합을 의미합니다.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되는 일”이 부부의 결합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으로 이뤄진 일입니다. 그러면 이 비밀은 무엇을 말해 줍니까? 32절에서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밝혀 주고 있는 부부간의 신비한 결합관계의 목적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았으니 세상을 떠나서 오직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생활입니다.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입니다. 부부관계의 아내처럼 그에게 순종하므로 연합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 같은 큰사랑을 받았으니 이 사랑을 떠나서는 살 곳이 없습니다. 부부처럼 하나님이 두 몸으로 한 몸을 이루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으로 하나님이 얽어맨 사랑이기 때문에 불가분의 관계인 것입니다.
결론 : 우리가 그리스도께 순종해야 이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불순종은 우리의 몸을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가고 생명에서 끊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신 그 사랑을 입었으니 우리는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듯 그리스도에게 순종하여 하나님이 세우신 신비적인 관계를 유지한다면 우리는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에베소서 6장 (49 -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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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가정의 질서
(에베소서 6:1-3)
서론 : 십계명을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계명부터 4계명까지는 하나님께 대한 계명입니다. 그 계명의 요지는 “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생명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5계명부터 십계명까지는 대인관계에 관한 계명입니다. 그 계명의 요지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십계명의 근본은 사랑에 있습니다. 율법은 복음과 모순되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의 정신은 복음과 하나인 것입니다. 사랑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새 계명을 주신 그 새 계명 역시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1. 그리스도인의 효도
바울은 1절에서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부모를 공경하는 일은 약속 있는 첫 계명으로 이 계명을 지키면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부모와 자녀는 인간의 대인 관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계명이기 때문에 대인 관계의 첫 계명으로 부모에 대한 것이 나옵니다.
네 부모를 순종하고 공경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이십니다. 부모를 소홀히 하거나 불효하거나 불순종하는 죄는 모든 죄보다 더 악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를 평하기를 기독교는 조상을 소홀히 여기는 불효한 종교라고 나무라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만큼 효도를 강조하고 있는 종교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실질적인 생활에서 기독교 이상 부모님께 대한 효도를 강조하고 그것을 대인 관계의 가장 중요하고 요긴한 계명으로 제일 먼저 내 세우고 있는 종교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부모님께 불효한 자녀들에게 저주를 선언하셨습니다. 잠 30 : 17절 말씀에서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효도에는 두 가지 면이 있습니다. 하나는 순종이요 다른 하나는 공경입니다. 순종이란 부모님의 뜻을 따르는 일이며 부모님의 말씀에 복종하는 자세를 말합니다. 공경이란 부모님을 받들어 드리는 일입니다. 두려움과 사랑으로 부모님을 섬기는 일이 공경입니다. 그런데 부모님을 공경하는 일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 약속은 놀라운 축복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네가 잘 된다는 말은 우리의 생애가 형통한다는 뜻입니다. 자고로 부모님을 잘 공경한 자녀들의 생애를 보면 잘 되는 축복을 받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같은 계명은 비록 불신자의 경우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 자손에게 잘 되는 복을 내려 주신다는 사실을 역사적 인물을 통해서 주변의 이웃을 통해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사례입니다. 다음에 장수의 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이 땅에서 오래 살 것을 소망합니다. 그런데 효도하는 자녀는 장수하리라는 약속을 받고 있습니다. 이처럼 잘 되고 장수하는 축복이야말로 바라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부모에게 순종하고 공경하는 자녀들에게 주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2. 부모님께 대한 순종과 하나님께 대한 공경
사람이 부모님을 공경하는 일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속에 부모님께 대한 공경심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실인즉 이 부모님께 대한 공경이나 순종에 대해서 “주 안에서”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부모님이 중요한 분이지만 더 중요한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히 12 : 9절에서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하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부모님보다 더욱 두려움으로 복종하며 공경해야 할 분이십니다. 우리는 공경하고 순종해야 할 일에 이 두 분께 대한 순서를 바꿔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부모님께 대한 순종에는 한계가 정해져 있습니다. 주 안에서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부모님께 순종하기 위해 하나님의 계명을 어길 수 없습니다. 부모님을 공경하기 위해 하나님께 대한 공경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네 부모나 처자나 형제를 나보다 더 사랑하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결론 : 부모님께 대한 순종이나 공경은 하나님의 명령이십니다. 우리는 주 안에서 이 명령을 잘 지키는 효도의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이 언약하신 이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는 축복을 받아 누려야 합니다. 우리의 자녀들로 이 같은 가정 교육을 잘 시켜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자녀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50) 가정의 질서(자녀에 대한 교육)
(에베소서 6:1-4)
서론 : 가정에는 자녀들이 있습니다. 이 자녀들에 대한 교육문제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의 가정에서는 이들 자녀들에 대한 교육에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자녀에 대하여 많은 교훈과 경종을 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1. 부모의 자녀관
부모들은 자기 자녀들에 대하여 그 소유권에 대한 분명한 한계를 알아야 합니다. 자녀는 내 소유가 아니란 사실입니다. 나는 내 자식을 낳았지만 나와 내 자녀를 창조하신 창조주가 따로 계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창세 전에 이미 하나님은 나를 택하시고 나를 아셨으며 나를 보셨고 내 이름을 하나님의 생명록에 기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출생은 부모에게서 비로소 유래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에 의해 창조된 존재입니다. 우리들의 자녀는 내 자녀이기에 앞서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창조하셨나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영의 아버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 자녀를 기르는 세 가지 원칙
자녀들을 기르는 일은 누구에게나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면 성경에서는 자녀를 어떻게 기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인가? 우리는 4절에 나온 말씀을 명심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의 자녀들을 주 안에서 잘 키워야 할 것입니다.
㉮ 노엽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자녀들로 노여움을 품도록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자녀들의 노여움은 그 자녀들로 탈선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기 육신의 뜻을 따라 자녀를 권위로 지배하려는 데서 자녀들에게 노여움을 품게 하는 것입니다.
지나치게 가혹할 때
지나치게 엄격히 다룰 때
지나치게 성급할 때
이럴 때 자녀들은 노여움을 사게 됩니다. 노여움에는 곧 반발이 나옵니다. 마음을 더욱 굳게 하여 완악해 집니다.
㉯ 다음에 주의 교양으로 하라고 했습니다. 교양은 인격적인 감화입니다. 주의 교양은 그리스도인이 갖추어야 할 인격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의 부모들에게는 그리스도인 다운 품격이 있어야 합니다. 자녀들이 이런 가정에서 좋은 교양을 받고 자랄 때 장성해도 인격적인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들에게 일상 생활 가운데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본을 보여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자녀들의 교양은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잘 가르치고 순종시키는 생활에서 실질적인 열매를 맺게 됩니다. 신 6 : 6절에서는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주 안에서 인격적으로 키우는 일이야말로 그리스도인 가정에 있어서 자녀 교육의 기본 원칙이 되어야 합니다.
㉰ 다음에 주의 훈계로 하라고 했습니다. 훈계란 육신의 인정이나 혈육의 사랑을 떠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버릇을 고쳐 주는 일을 말합니다. 육신의 사랑은 자녀들의 영적 생명을 죽이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삼상 2장에 나오는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의 경우를 보면 이들은 불량했지만 아버지는 주의 훈계로 그 아들들을 다스리지 못하므로 그들의 가정이 하루아침에 망하는 자리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잠 6 : 23절에서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고 했습니다.
잠 23 : 13절에서 “아이를 훈계치 아니치 말라 채찍으로 때릴지라도 죽지 아니하리라 그를 때리면 그 영혼을 음부에서 구원하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다 같이 하나님의 청지기들입니다. 자녀를 키우는 일도 하나님의 소유물인 자녀들로 나에게 맡기신 일이기 때문에 이도 청지기의 일인 것입니다.
결론 : 우리의 자녀들은 곧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키워야 합니다. 이렇게 가정 질서가 가정에서 이뤄져야 복 있는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51) 고용 관계의 질서
(에베소서 6:5-9)
서론 : 인간이 살아가는 이 사회는 여러 가지 복잡한 구조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가정에나 사회에나 고용관계가 있게 마련입니다. 고용관계의 질서는 가정의 경제적인 안정이나 사회의 고용관계의 안정과 밀접한 상호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노예제도가 공인되었기 때문에 바울은 이곳에서 종과 상전과의 관계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원칙은 오늘날에 와서도 기업주와 고용인간의 관계에 있어서 변함이 없이 유지되어오고 있습니다. 오늘날 자본주의적 경제 체제는 성경적인 체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1. 고용인의 태도
바울은 고용을 당하고 있는 고용인들에 대하여 자기가 헌신하고 있는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주님께 하듯 하라고 했습니다. 물론 이것은 노예와 상전에 관한 언급이기 때문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지만 노동자가 육체의 고용주에게 순종을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 질서가 깨어지면 모든 생산 체의 질서가 파괴하게 되고 기업은 그날로 쓰러지게 될 것이며 노동자들의 생활의 터전도 상실해 버리게 될 것입니다. 고용주들은 자본을 대고 운영하는 권리를 가지지만 노동자는 실질적으로 생산하는 중요한 부분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만약 노동자가 움직여주지 않는다면 기업은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노동자가 성의를 다하여 일하지 않는다면 그 기업은 많은 손실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며 누구 밑에서 일한다고 해도 언제나 그 고용주에게 순종하는 자세를 가지라고 한 것입니다.
다음에 바울은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고용되어 일하는 일도 하나님의 뜻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눈가림만 하는 식으로 일하지 말고 그리고 얄팍한 마음, 겉모양으로 사람만 기쁘게 하는 행실을 하지 말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행하라고 한 것입니다.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라”고 했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고용주를 섬기며 즐거움으로 섬기는 일은 일에는 능률이 오르고 고용주에게도 많은 이익을 안겨주며 그 결과 자신에게도 유익이 오게 됩니다.
2. 고용주의 태도
바울은 결코 고용주 편에서만 문제를 다룬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고용주보다 오히려 고용인 편에 서 계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이 두 문제가 상호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야 사회질서와 생활의 복지 문제가 해결을 볼 수 있으며 평화와 안정과 질서가 지속될 수 있기 때문에 이 둘의 관계에 대해 분명한 뜻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9절 이하에서 바울은 “상전들아 너희들도 저희에게 이와 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상전들도 그의 고용인들에게 고용인들이 자신에게 하듯 하라고 한 것입니다. 성실하게 그들에게 대해 주어야 합니다. 단 마음에서 나오는 사랑을 고용인들에게 베풀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고용하고 있는 대상을 하나의 착취의 대상으로 여기거나 자기 개인적인 치부의 수단으로 알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고용주들이 고용인들에게 “공갈을 그치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고용인들은 고용주의 손에서 나오는 식물을 먹으면서 생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경제적으로 얽메이면 결과적으로 그들의 노예처럼 절대적인 종속관계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일이 이렇게 될 때 고용주들은 고용인들에게 혹은 협박도 하고 공갈도 하면서 적은 보수를 주면서 많은 노동력을 착취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경종한 것입니다. 바울이 이미 2천여 년 전에 이 같은 노사관계의 경제 질서를 밝힌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울은 고용주가 고용인들에게 공갈하고 횡포해서는 안 될 이유를 몇 가지로 들고 있습니다. “9절에서 너희와 저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다”고 했습니다. 상전들은 현세에서의 자신이 상전의 위치에 있다는 사실에 안주해서는 안돼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시는 상전은 고용인이나 고용주에게나 동일하신 분이시며 그 분은 결코 어느 누구에게 편벽 되이 판단하시는 분이 아니라 공정하게 판단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비록 고용주의 자리에 앉아 있다고 해도 고용인과 동일한 상전이 위에 계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종이거나 자유하는 자이거나 사람이 무슨 선한 일을 하든지 하나님으로부터 그가 행한 대로 보답을 받을 줄을 알기 때문에 하늘에 계신 주인을 생각하여 올바른 처신을 해야 할 것이라고 말씀해 줍니다.
결론 : 사람은 그가 어떤 위치에 있건 자기에게도 상전이 있다고 하는 이 원리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상전은 하늘에 계시는데 그 분은 공정하신 분이시며 누구든지 그가 행한 그대로 보응하시며 상을 주시는 분이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52) 그리스도인의 싸움
(에베소서 6:10-13)
서론 : 10절부터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바울의 서신이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종말로”라는 말이 이를 시사합니다. 바울은 결론적으로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했습니다.
1.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할 이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세상에서 싸워야 할 대상이 있습니다. 12절에서 바울은 우리의 싸움에 대하여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싸움의 대상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한 혈과 육은 인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말하면 인간과의 싸움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인간간의 원수에 대하여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이 회개했을 때 그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우리에게 이르시기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 주라고 하셨습니다. 요는 그 죄의 배후에서 그 죄를 조종하고 그 죄로 죄를 짓는 인간을 멸망시키려는 악한 존재가 있는데 그자와 대적하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배후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며 성도들을 괴롭히는 영적인 존재가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들과의 싸움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이처럼 혈과 육이 아니라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라고 했습니다.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란 누구를 지창하는 말입니까? 이 세상의 정사(政事)와 권세와 또 세상의 어두움을 실제적으로 주관하는 자를 의미합니다. 세상의 정사와 권세는 그 배후에 어둠의 세력이 있어서 주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어두움이란 세상의 죄악을 의미합니다. 이 모든 것들을 주관하는 자가 존재하고 있는데 이 자가 곧 사탄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자의 명령에 의해 움직이는 하늘의 악의 영들이 있는데 이들이 악령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싸움의 대상은 바로 이 자들이기 때문에 바울은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했습니다.
싸움이란 언제나 맞상대하여 가까이서 싸우게 마련입니다. 이들은 영적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들 악령의 존재를 바라볼 수 있는 신령한 눈을 가져야 합니다. 에덴동산의 하와는 뱀은 보았지만 뱀 속에 들어가 뱀을 조종하며 유혹하는 그 배후의 악령의 존재를 보지 못하므로 넘어졌습니다.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우리를 유혹하는 많은 이단들을 봅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 그것들을 통해서 내 생명을 노리는 악한 영의 역사를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귀에게 틈을 보여서는 안됩니다. 해이한 정신, 기도가 없는 생활, 말씀 무장이 없는 생활에서 사탄은 우리를 넘어뜨릴 틈을 엿보는 것입니다.
씨름의 승패는 오래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전신갑주만 취하면 그들과의 싸움에서 곧 승리할 수 있습니다. 승리에는 기쁨과 평안과 영광과 상급이 따릅니다. 그러나 실패에는 불안과 낙심과 두려움과 하나님의 징계가 따릅니다.
2. 강건해야 한다.
마귀와의 씨름에는 마귀보다 강해야 합니다. 넘어지는 사람은 왜 넘어지는 것입니까? 상대보다 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자기 힘만 의지하고 마귀와 상대하면 열이면 열번 다 패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해야 강건해 질 수 있는 것입니까? “주안에서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해 지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주안에서만이 강건해 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귀를 이기신 분이십니다. 마귀를 이기신 분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귀와의 싸움에 이기려면 마귀를 이기신 주님의 힘을 얻어야 합니다. 내가 그 분 안에 거할 때 나는 강해지는 것입니다. 그 분이 내 안에 계실 때 나는 강해지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 안에 거하는 일도 예수님이 내 안에 거하시는 일도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우리의 세상을 이기는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약한 그리스도인이라 해도 주안에만 있으면 사탄을 이길 수 있습니다.
다음에 그리스도의 힘의 능력으로 강건해 진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힘의 능력은 어떤 존재라도 이길 수 있습니다. 그 능력이 바로 내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의 주변에는 악한 존재들이 많습니다. 이 악령들은 우리의 틈만 노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한순간도 한눈을 팔면 안됩니다. “주 안에서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해 지고 마귀의 계궤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시기 바랍니다.
(53) 하나님의 전신갑주
(에베소서 6:14-20)
서론 :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어두움의 주관자들과 싸우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 하나님의 전신갑주에 대하여 14절부터 해석해 주기를 영적 속 사람의 무장임을 말해 줍니다.
1.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전신갑주
그리스도인들이 악한 날에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해서 해야 할 일에 대하여 몇 가지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종말에 이들 악령들의 공격을 당하게 되는데 이런 날에 사탄을 대적하기 위해, 그리고 모든 일에서 승리하여 주님 앞에 서기 위해서는 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할 것을 강조합니다.
첫째로 서서 진리로 허리띠를 띠라고 했습니다. 서서란 말은 군인들의 전투태세를 말합니다. 마귀와의 투쟁은 앉아서 안일하게 싸울 일이 아닙니다. 임전태세를 갖추어야 합니다. 사람의 인체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이 허리입니다. 사람이 허리에 띠를 띠지 않으면 몸에 힘을 쓰기 어렵습니다. 진리란 사탄과의 투쟁에서 가장 중요한 무기입니다. 사탄은 진리를 대적하는 자이기 때문에 진리가 아니면 사탄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사탄과의 투쟁에 이 진리의 무기를 사용해야 합니다. 그래서 진리로 허리띠를 띠라고 했습니다. 갑주란 말은 갑옷과 투구를 말하는데 진리는 갑옷에 중심이 되는 부분으로 이것으로 허리를 든든히 세워야 사탄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의의 흉배를 부치라고 했습니다. 의를 인체에 비하면 심장과 같은 것입니다. 심장이 멎으면 사람이 죽습니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에게 의가 보장되지 못한다면 그리스도인의 생명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의란 물론 그리스도의 의를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로 구원을 받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은 것은 우리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의를 가슴의 띠로 삼아야 사탄의 공격을 막을 수 있습니다. 사탄은 우리의 의를 공격하고 참소 할 수 있지만 그리스도의 의 앞에서는 꼼짝할 수 없습니다.
세 번째로 복음의 신을 신는 일입니다.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으라”고 한 것입니다. 신이란 우리의 발로 걸어가게 하는 일에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의 발에는 복음의 신을 신어야 합니다. 복음의 신이란 우리의 발걸음이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부지런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복음의 합당한 걸음을 걸어야 합니다. 어디 가던지 복음을 전하는 발이 되는 것입니다. 복음의 기쁜 소식을 가는 곳마다 전하는 발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신을 우리가 신을 때 사탄은 우리로 잘못된 죄악의 길로 이끄는 일에 실패할 것입니다.
다음에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라”고 했습니다. 믿음의 방패란 우리의 믿음이 사탄의 화전으로부터 지킬 수 있는 갑주가 된다는 뜻입니다. 화전이란 불이 담긴 화살로 이 화살에 한방 맞으면 여지없이 쓰러지고야 말 것입니다. 사탄은 여러 가지 무기로 화전을 삼아 우리를 겨냥해 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화전을 막을 수 있는 신령한 무기가 있습니다. 그 무기가 믿음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있다면 사탄이 아무리 결정적인 화전을 쏘아대도 그것을 능히 막을 수 있는 방패가 되는 것입니다(방패- 모순이란 말의 기원, 이 칼은 어떤 방패라도, 이 방패는 어떤 칼이라도)
다음에 우리가 갖추어야 할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이한 검인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고 했습니다. 투구란 머리에 받을 상처를 방비하기 위해 갑주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구원의 투구를 써야 합니다. 구원에 확실한 믿음으로 투구로 삼으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구원의 확신을 가진다는 일은 머리에 결정타를 막을 수 있는 무기가 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는 구원의 확신이 중요합니다. 이 확신이 없으면 사탄의 공격으로 머리에 치명상을 입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 검으로 사탄의 줄을 끊는 것입니다. 이 검으로 사탄이 더 이상 공격해 올 수 없도록 공격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탄의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결론 : 다음에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라고 했습니다. 성도들의 기도는 사탄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보장할 수 있는 결정적인 무기입니다. 기도를 게을리 하면 하나님의 전신갑주는 무장해제 되어 버립니다. 이 같은 무장은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취해야 할 영적인 신령한 무장입니다. 이 무장에 게을리 하면 사탄에게 패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이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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