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新約]강해/◆ 바울서신 강해-1

★갈라디아서 1-6장 ◆ 밤중소리 민병석 목사

영국신사77 2020. 4. 13. 23:19

갈라디아서 차례

갈라디아서 1장 (1 ~ 6)

(1) 바울의 인사와 축도(갈라디아서1:1-3)

(2) 영광을 받으실 예수님(갈라디아서1:4-5)

(3) 다른 복음(갈라디아서1:6-9)

(4) 내가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갈라디아서1:10-13)

(5) 바울의 소명(갈라디아서1:13-17)

(6) 은혜의 부르심(갈라디아서1:13-24)


갈라디아서 2 (7 - 15)

(7) 바울의 달음질(갈라디아서2:1-2)

(8)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갈라디아서2:3-5)

(9) 외모로 사람을 보지 아니하심(갈라디아서2:6-10)

(10) 교회와 가난한 자(갈라디아서2:10)

(11) 베드로에 대한 바울의 책망(갈라디아서2:11-14)

(12) 유대인과 이방인(갈라디아서2:15-16)

(13) 하나님을 향항여 사는 새로운 생활(갈라디아서2:17-19)

(14) 십자가에 못 박힌 나(갈라디아서2:20-21)

(15) 그리스도인의 삶의 지표(갈라디아서2:20-21)


갈라디아서 3장 (16 - 25)

(16) 누가 어리석은 그리스도인인가?(갈라디아서3:1-2)

(17)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갈라디아서3:2)

(18)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려느냐(갈라디아서3:3)

(19) 성령의 역사가 믿음으로냐 행위로냐(갈라디아서3:4-5)

(20) 아브라함이 얻은 의(갈라디아서3:6-7)

(21) 아브라함에게 전한 복음(갈라디아서3:8-10)

(22) 율법으로 의를 얻지 못하는 이유(갈라디아서3:11-14)

(23) 율법보다 앞선 하나님의 언약(갈라디아서3:15-19)

(24) 율법이 약속을 거스리느냐(갈라디아서3:20-25)

(25) 믿음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된 우리(갈라디아서3:26-29)


갈라디아서 4장 (26 - 31)

(26) 때가 차서 여자에게서 나게 하신 아들(갈라디아서4:1-5)

(27)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시는 아버지의 영(갈라디아서4:6-7)

(28) 왜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려느냐(갈라디아서 4:8-11)

(29)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갈라디아서4:12-16)

(30) 두 가지 열심(갈라디아서4:17-18)

(31) 계집종의 자녀와 약속의 자녀(갈라디아서4:19-31)


갈라디사서 5장 (32 - 41)

(32)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라디아서5:1-4)

(33)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갈라디아서5:5-6)

(34) 적은 누룩의 위력(갈라디아서5:7-9)

(35) 요동케 하는 자는 심판을 받으리라(갈라디아서5:10-12)

(36) 사랑으로 종노릇하라(갈라디아서5:13)

(37) 율법과 사랑(갈라디아서5:14-15)

(38) 성령을 좇아 행하라(갈라디아서5:16-18)

(39) 육체의 소욕에서 나오는 인간의 죄(갈라디아서5:19-21)

(40) 성령의 열매(갈라디아서5:22-23)

(41)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그리스도인(갈라디아서5:24-26)


갈라디아서 6장 (42 - 48)

(42)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갈라디아서6:1)

(43) 각각 자기의 짐을 지라(갈라디아서 6:2-5)

(44) 가르침을 받는 자와 가르치는 자의 자세(갈라디아서6:6)

(45)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라디아서6:7-8)

(46) 선을 행하는 자의 약속(갈라디아서6:9-10)

(47)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이 없다.(갈라디아서6:11-14)

(48)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 뿐이니라(갈라디아서6: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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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1

◆ 밤중소리 11-06


(1) 바울의 인사와 축도

(갈라디아서1:1-3)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함께 있는 모든 형제와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서론 : 갈라디아서는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보낸 편지다. 갈라디아 교회는 바울이 1차 전도 여행시에 세운 교회로 그 당시 바울에 의하여 세례도 받았고 성령의 체험도 가졌던 교회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없는 기회를 틈타 유대 지방에서 온 유대인의 거짓된 교사들에 의하여 바울의 전한 은혜의 복음 대신 모세의 율법을 강조함으로 인간의 구원은 복음으로만 아니라 율법을 함께 지켜야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로 인하여 갈라디아 교회에는 복음과 율법을 혼돈 하는 일대 혼란이 일어났는데 바울은 이같은 소식을 듣고 이 서신을 써서 갈라디아 교회에 보내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구원은 율법의 행위와 상관없이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다고 강조함으로써 갈라디아 교인들이 당하고 있는 영적 혼미를 극복하고 믿음에 굳게 설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 서신은 바울이 3차 전도 여행 시인 주후 55년에서 58년 경, 마게도냐 지방에서 기록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 바울의 사도 직분

바울은 자신의 사도 직분에 대하여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하고 있다. 바울의 사명감은 이런 그의 확고한 신념에서 나온 것입니다. 바울이 이처럼 자신의 직분에 대하여 크나큰 권위를 세우는 이유는 유대인의 거짓 선생들이 바울의 사도권을 무시하고 바울이 전한 복음을 비방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이 사람들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또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거짓 선생들은 바울이 주님에 의해 사도 직분을 가진 적도 없고 예루살렘 교회에서 맛디아처럼 선출된 적도 없기 때문에 그의 사도 직분을 인정할 수 없다고 중상했기 때문에 바울은 견딜 수 없는 분노를 느꼈으며 자신의 사도 직분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가 되었음을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직분 자들에게 바울같은 확고한 믿음이 없다면 생명을 받쳐 복음을 증거 하는 사명을 감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


2. 직분을 주시는 아버지와 아들

교회의 직분은 아버지와 아들이 주십니다. 

이 사실은 복음에 있어서의 아버지와 아들의 상호관계를 살펴볼 때 명백히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그를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게 하신 일이 복음이기 때문에 이 놀라운 사역에는 삼위의 하나님이 함께 깊이 관여하시고 역사 하셨습니다.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이 일을 계획하시고 사랑으로 그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순종으로 자신을 낮추시어 사람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으며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 드렸습니다. (다 이뤘다. 성소의 휘장).


성령은 진리의 영으로 세상에 보내심을 받아 구원받기로 예정된 하나님의 백성들의 마음을 열어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고 죄로 죽은 우리를 영적으로 살아나게 하십니다. 이같은 살리시는 역사를 중생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직분은 결코 사람이 주는 것이거나 사람에 의해 부여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에 의해 주신 것이다. 우리의 직분을 소홀히 여기면 그 자체가 죄가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3. 바울의 축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에게 축도하는 일로 편지의 서두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종이 교회의 성도들에게 축복 기도를 해 주는 일은 영광스러운 직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축도는 바울이 하는 것이지만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 이름을 빌리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자로서의 권한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같은 기도에 대하여 하나님은 그 축복을 이루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민 6:24-26을 보면 제사장에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복을 빌면 내가 그들에게 그 복을 이루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바울이 기원한 축복 기도는 은혜와 평강을 위한 것이다. 은혜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이고, 평강은 구원받은 백성들의 마음의 평안입니다.


결론 : 그리스도인의 은혜 받은 증거는 마음의 평안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의 종으로부터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와 평강의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2) 영광을 받으실 예수님

(갈라디아서1:4-5)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서론 : 본문에서는 이 악한 세대에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께 세세토록 영광을 돌리는 바울의 송영을 듣게 됩니다. 모든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만 돌리게 되어 있다. 우주 만물에게서 영광을 받으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도 영광을 받으실 분으로 나옵니다. 이같은 사실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의미해 줍니다.


1. 하나님이신 예수님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란 분명한 증거가 성경에는 굉장히 많습니다. 그 대표적인 말씀이 요 1:1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그 존재 기원이 하나님과 동일하고 그 존재가 하나님과 동일하고 그 이름이 하나님과 동일하며 그 창조 사역이 하나님과 동일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혀 줍니다.

골 2 : 2에는 "하나님의 비밀이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연구하고 계시를 받는다고 해도 그의 비밀이 다 드러나거나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만 나타난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일하신 분이시며 하나님의 본체를 이루시는 성자 하나님이란 사실을 영적으로 깨닫고 그렇게 믿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신 그 분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을 마땅히 돌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요 8:54에서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라고 말씀하심으로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게 영광을 돌리시게 하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분에게 항상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2. 그리스도의 사역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셔야 할 이유에 대하여 간략히 설명해 줍니다.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표현함에 있어서 "우리 아버지"란 말을 쓰고 있습니다. 아버지란 육체적으로는 혈통적인 승계 관계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와 어떤 관계로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는가? 우리를 사랑하심에 지극한 사랑을 가지고 계시는데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시는 그 사랑으로 우리와의 관계를 맺고 계십니다.

또한 우리를 그 아들의 피로 값 주고 당신의 소유로 사셨습니다. 이것을 세상적인 표현으로는 법적인 관계의 아들로 양자란 말로 나타내고 있으나 육신적인 아버지의 관계보다 더 영원하고 더 끈끈하고 더 사랑이 깊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해서 "아버지의 뜻을 따랐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되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 위대한 사역을 이루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의 사역을 이루시는 과정에서 늘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셨으며,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는 일에 그의 생애를 바쳤습니다.

아버지의 뜻은 "그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구원을 얻는 것"이고 하셨다. 예수님은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음을 밝히고 있다. 악한 세대란 죄악의 세상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없는 세상, 하나님 없이 인간이 경영하는 세상은 악한 세상입니다. 아담 이후, 지금까지 이 악한 세대는 계속되어 왔습니다. 지금 이 세상은 죄가 인간을 지배하고 사망이 인간을 지배하는 세상이기 때문에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세대인 것입니다. 이같은 세대에서 구원을 받지 않으면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우리의 소망을 이루어 주시려고 이 악한 세대에 오셔서 그의 사역을 이루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이 희생은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로 인하여 자신의 몸을 드리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같은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 악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구원을 이루신 분은 그리스도이시니 우리는 그에게 세세토록 영광을 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파멸에서 구원으로, 지옥에서 천국으로 옮기게 하신 그 분에게 영광을 돌리는 일은 당연합니다.


결론 : 우리는 어떻게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생활를 해야 하는가?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생활, 주님께 순종하는 생활,주님을 예배하고 찬양하며 사랑하는 생활이 곧 그런 생활입니다.


(3) 다른 복음

(갈라디아서1:6-9)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서론 : 갈라디아 교회에서 순진한 교인들에게 바울이 전한 복음이 아닌 율법적인 복음을 전파한 거짓 선생들의 복음에 대해 바울은 "다른 복음"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같은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으라고 선언했다.


1. 복음이란 무엇인가?

복음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가 그 주체이시다. 복음의 요체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의 다시 살아나심'이다. 그의 죽으심에 대하여 4절에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다. 또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에 대해서는 고전 15:17에서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연합하여 우리의 죄가 용서받았으며, 그의 부활하심에 연합하여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 두가지 요소가 변형된 복음은 순수한 복음이 아니다. 바울은 이같은 복음을 다른 복음이라고 정죄했다. 다른 복음이란 가짜 복음이란 뜻이다.


2.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온 다른 복음

3 : 2에서 언급하고 있는 대로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 온 다른 복음은 복음에다 율법을 가미시킨 것이다. 구원을 얻는 일에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율법도 지켜야 한다는 주장이다. 말하자면 율법의 의와 복음의 의가 합해져야 구원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이같은 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무효화시키는 주장으로 복음을 대적하는 사탄의 무기인 것이다. 복음만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주장이니 간교한 사탄의 계략이 아닐 수 없다.

지금 우리들 주변에도 이같은 다른 복음이 많이 있기 때문에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들은 양의 생명을 노략질하는 도적들이다. 율법을 구원에 결부시키는 안식교, 문선명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통일교, 그리스도의 부활과 신성을 부정하는 여호와의 증인 등 허다히 많다.


3. 다른 복음이 나오는 이유

그러면 다른 복음이 왜 등장하는가? 7절에서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다. 요란케 한다는 말은 올바른 구원의 도리를 혼란시킨다는 뜻이다. 다른 복음은 영적 혼돈을 가져온다. 많은 사람들이 이 혼돈으로 말미암아 잘못된 이단에 미혹되었으며 구원의 길에서 떨어져 나간다. 어떤 사람들이란 대상은 사탄의 일꾼들을 의미한다.

사탄의 일꾼도 교회에서 활동할 때는 천사의 너울을 쓰고 다가오며 양의 탈을 쓴 모습으로 행동하기 때문에 구분하기가 어렵다. 다른 복음을 전하므로 전 세계 인류를 오도할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 자의 모습에 대하여 새끼 양같이 두 뿔이 있지만 그 입에서는 용의 말이 나온다고 했다. 이 자를 거짓 선지자라고 했다. 이처럼 다른 복음을 전파하는 목적은 사람들로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는 데 있다고 했다.


4.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받을 저주

바울은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 대해 무서운 저주를 내리고 있다.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고 선언하고 있다. 여기서 바울이 '우리나'라고 말한 대상은 사도들 중에 속한 어떤 사람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온 천사'란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란 뜻으로 비록 실제적으로 이런 존재가 왔다고 할지라도 만약 그들의 입에서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그들은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는 선고인 것이다.

바울이 어떻게 이처럼 담대한 믿음을 가질 수 있었는가? 그는 확고부동한 계시를 주님으로부터 받았기 때문이며 그것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다른 복음은 없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일은 이 세상에서 저주받을 가장 두려운 죄는 복음을 변질시키는 죄라는 사실이다.

결론 : 우리는 복음의 내용을 잘 알아야 한다. 그것이 구원의 진리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믿고 있는 복음에 다른 조건이 붙거나 이질적인 다른 요소가 가미된다면 그것은 다른 복음이다. 우리는 다른 복음을 관대히 받아 드려서는 안 된다. 우리가 말씀을 듣는 일도 중요하며 또 우리가 남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도 중요하다. 진리의 터전 위에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다른 복음을 분별할 수 있는 말씀의 지식과 영적 통찰력을 가져야 한다.


(4) 내가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갈라디아서1:10-13)

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바울이 사도가 된 내력

1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12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13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서론 : 바울은 10에서 자신이 복음을 전하는 자세에 대한 확고 한 신념을 고백하고 있다. 그는 복음을 전함에 사람들에게 좋게 보이려거나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려는 인간적인 방법을 단연 배척했다. 그래서 그는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고 말하고 있다.


1.사람들에게 좋게 한다는 뜻은 무엇인가?

교회에는 두 종류의 종들이 있다. 사람에게 좋게 하여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종들이 그들이다. 이들에 의하여 복음의 진실성이 희석한다. 이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거짓 선생들이다. 한편 하나님께 좋게 하여 하나님의 기쁨을 구하는 종들이 있는 것이다. 이들에 대하여 지혜 있고 충성된 종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다. 그러면 사람들에게 좋게 한다는 뜻은 무엇인가?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복음의 진실성을 등한히 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왜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는가? 인기를 얻는 일, 환영을 받는 일, 대접을 받는 일 때문이다. 인기에 편승하여 복음을 전하면 복음이 변질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종들은 양 무리들을 사랑해야 한다. 그러나 그 사랑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에 결코 앞설 수 없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어 보시고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인기를 얻고 환영을 받는 일로 사람에게 좋게 하거나 사람들을 기쁘게 해 주려는 생각에서 복음을 전하면 진정한 복음을 전하는 자의 자세가 될 수 없다. 또한 이런류의 종들은 견책을 하지 않고 칭찬만 늘어놓는다. 개는 도적과 타협하면 안 된다. 도적을 보면 짖어야 한다.

목자가 양들의 과오를 보고서도 바른 교훈으로 가르치지 못한다면 결국 짖지 못하는 개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하여 이스라엘의 파수군들에게 '능히 짖지 못하는 벙어리 개'라고 정죄 하셨다(사56 : 10). 이같은 종들은 또한 사람을 두려워한다.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양을 사랑해야지 양을 두려워하면 안 된다. 하나님의 종들이 뭇 사람들에게 기쁨을 선사한다는 일은 대단히 좋은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어겨 가면서 사람들에게 좋게 하거나 기쁨을 주는 일은 목회 방법이 아니다.


2. 하나님을 좋게 한다는 뜻은 무엇인가?

진실한 하나님의 종들은 하나님을 좋게 해 드리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이다. 고후 5:9에서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 쓰라"고 하셨다. 엡 5:10에서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해 보라"고 했다. 사람의 판단을 두려워 아니하고 복음을 전하는 종이 하나님께 좋게 해 드리는 종이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따라 처신하는 종이 하나님을 좋게 해 드리는 종이다. 하나님의 종들은 양을 사랑해야 하며 양들에게 좋게 해 주어야 한다.

그러나 그 모든 일들이 오직 하나님을 좋게 해 드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린다는 곳에 표적을 맞춰야 한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이같은 말을 한 것은 바울이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 거짓 선생들처럼 듣는 자들의 환심을 사거나 비위를 맞추려는 생각에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만을 따랐다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대서 나온 것이다. 예수님은 마 24 : 45에서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뇨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저에게 맡기리라"고 말씀하셨다.

양 무리들은 주인으로부터 맡겨진 주인의 소유인 것이다. 양에게서가 아니라 주인으로부터 칭찬을 들어야 한다. 양으로부터 보상을 받으려는 생각을 갖지 말고 주인으로부터 보상을 받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어떤 경우에도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하거나 사람에게 좋게 하려는 생각을 갖지 말고 하나님을 좋게 해 드리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목회를 해야 한다.


결론 : 바울은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고 했다. 사람 중심의 목회는 하나님의 종들의 태도가 아니다.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사람의 종으로 전락되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일에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아 나가야 한다.


(5) 바울의 소명

(갈라디아서1:13-17)

13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14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15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16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17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서론 : 바울은 자기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과정을 여기서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다시 들려 줄 필요가 있었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바울이 전한 복음을 견고히 붙들지 못하고 거짓된 선생들의 잘못된 교리에 미혹 받은 일은 그들이 바울의 사도권을 의심했기 때문이었다.


1. 소명전의 바울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소명을 받기 이전에는 유대교에 열심 있었던 자로 교회를 핍박했었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유대교에 열심 있었던 자신의 과거 경력을 밝히고 있는 이유는 유대교가 율법적인 유대인들의 종교로 율법을 지키는 일로 의를 얻어 구원을 받는 것으로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갈라디아 교인들이 바로 그 율법으로 인하여 복음에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율법을 열심히 지키는 생활을 한 유대인들은 사실인즉 하나님의 은혜도 모르고 성경도 모르는데서 온 잘못된 지식에서 율법에서 의를 얻으려고 노력한 것이었다.

율법을 주신 목적은 그 율법으로 의를 얻어 구원을 얻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히려 그 율법으로 자신의 죄를 깨달아 회개시키기 위해 주신 것이었다. 만약 하나님의 의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주시는 것이라면 하나님은 결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지 아니하셨을 것이다. 인간은 근원적으로 죄인이기 때문에 율법으로는 의를 얻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거룩한 생활을 한다고 율법 외에도 소위 장로의 유전이란 것을 만들어 지키는 생활을 해왔다. 이 장로의 유전은 율법에 부가시킨 것으로 수 백 가지가 넘는 규례로 자신들의 생활을 얽어매 놓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이단자로 낙인찍은 것이 이같은 장로의 유전에 의한 것이었다.

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을 고치며 죄인의 집에 초대를 받아 함께 식사를 들고 장로의 유전을 지키지 않는 일로 정죄 했던 것이다. 바울은 지나치게 열심을 가졌던 유대교인었다. 그의 입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고 잔해한 장본인이었다. 스데반 집사의 순교시에도 "가"타 하는 표를 던졌으며 증인으로 옷을 지킨 일까지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예루살렘 교회 교인들 집을 찾아다니며 성도들을 체포하여 옥에 가두었으며 대제사장의 명령서를 받고 다메섹 교회 교인들을 잡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데려가려고 부하를 거느리고 다메섹을 향하여 가다가 도중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됐고 그 자리에서 회심하여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된 것이다.


2. 하나님의 예정

바울의 결정적인 변화의 역사는 순전히 하나님의 예정에 있었다. 바울은 이에 대하여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 하셨다"고 말하고 있다. 주님은 마데섹에 사는 아나니아에게 이르시기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 신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건하기 위하여 태간 나의 그릇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이미 만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바울을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택정 하신 것이다. 바울은 15절에서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 하셨다"고 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 아니며 우연히 찾아오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경륜 가운데 이뤄진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 기간에 반드시 부르신다. 이같은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결코 후회하심이 없다고 하셨다.


결론 : 바울은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요 복음의 사역 자로 하나님의 택정 하심과 부르심을 받

아 복음의 일꾼이 됐기 때문에 그는 담대한 믿음으로 자신 있게 복음을 전했다. 우리의 경우 역시 바울과 동일하다. 우리의 택정 하심이나 부르심이나 사명에 있어서 바울과 다를 바 없다. 바울과 같은 사명감을 가지고 죽도록 충성하면 바울과 같은 상급을 동일하게 받을 것이다.


(6) 은혜의 부르심

(갈라디아서1:13-24)

13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14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15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16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17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18 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십오 일을 머무는 동안

19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20 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다

21 그 후에 내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

22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대의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는 알지 못하고

23 다만 우리를 박해하던 자가

전에 멸하려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24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서론 : 우리는 장로교의 교리를 하나님의 예정이란 말로 간단히표현한다. 그리고 이 예정 교리를 정립한 위대한 신학자가 '칼빈'이기 때문에 예정 교리를 '칼빈주의'란 말로 줄인다. 그러나 실인즉 이 예정 교리를 철저하게 믿고 주장한 사람은 사도 바울이다. 그리고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계시로 이 진리를 깨닫게 되었음을 알게 된다.


1. 은혜로 부르신 하나님

바울은 15절에서 이같은 하나님의 예정에 대하여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부르신 이'라고 표현하고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은혜로 부르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다. 은혜로 부르셨다는 말은 무엇인가?


①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 우리의 지난날의 죄를 보지 않으셨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실 때, 지난날의 우리의 죄를 계산에 넣지 아니하시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바울이하나님께 감사하고 죽도록 충성할 수 있었던 것은 바울이 지난날 주님을 핍박하고 잔해하던 그 무서운 죄를 간과하시고말하자면 자기는 그처럼 무서운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그 죄를 전혀 묻지 아니하시고 사도의 직분을 주신 것이다. 이 일은 바울에게 너무나도 감격스러운 하나님의 은혜였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도 바울에 못지 않다. 지난날의 우리들의 죄과를 생각해 보라,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 같은 죄과를 한 마디라도 묻거나 책망하심이 없이 하나님의자녀로 받아 드린 것이다. 이것이 은혜가 아니고 무엇인가?


② 나의 공로를 전혀 보지 아니하신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은인간의 공로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바울이 드린 공로란 아무 것도 없었다. 우리 역시 우리의 그무엇을 하나님께 드려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을 대적하며 하나님의뜻을 거역했던 그 때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방은 것이니 이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다.


③ 바울은 하나님은 자기를 어머니의 태로부터 택정 하셨다고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처럼 이미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정 하신 자들에게 하나님의 뜻에 따라 주신다는 오묘한진리를 밝혀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택정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은혜가 아닐 수 없다. 이처럼하나님의 예정을 믿는 자가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생활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2. 바울의 결단

은혜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은 어떻게 그 은혜에 응했는가? 혈육과 의론하지 아니했다고 했다. 주님은 쟁기를 메고 뒤를돌아보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고 하셨다. 주님보다 부모나 형제를 더 사랑하는 자도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셨다. 혈육과 의론하지 않았다는 뜻은 주님을 따르는 일에 혈육의 의견을 따르지 아니했다는 의미다. 바울은 하나님을 기쁘시게해 드리기 위해 성령의 인도하심만을 따랐다. 바울은 예루살렘 지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의 회심은 놀라운 일로 그는 예루살렘 교회에 찾아가 자기를 나타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사도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했다고 말하고 있다. 바울이 사람도 없고 먹을 것도 없는 사막지대인 '아라비아'로 간 것은 자신을 부르신 이의 거룩하신 뜻을 깨달아 자신의 생애를 그 분에게 드리려는 의도에서였다. 바울은 아라비아에서 3년간이나 머무르면서 영적 훈련을 받았으며 자신이 전해야 할 복음에 대한 놀라운 계시를 받은 것이다.

바울이 이곳에서 이같은 사실을 밝히는 것은 그가 받은 복음의 계시가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나 어떤 사람들에 의해받은 것이 아니라 이처럼 주님에 의해 직접 받은 사실을 천명하려는데 있으며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서 전한 복음이야말로 참된 복음이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려는데 있었다. 이로써 바울은 주님의 12제자들 중에 하나는 아닐지라도 예수님에의해 임명된 사도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결론 :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가 나를택정 하신 일과 나에게 베푸신 그 크신 사랑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은 나를 은혜로 부르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그 은혜를 보답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 이것은 율법적인무엇에 얽매이는 생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는 생활인 것이다.



갈라디아서 2

(7) 바울의 달음질

(갈라디아서2:1-2)

할례자의 사도와 이방인의 사도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

계시를 따라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 

유력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서론 : 바울은 자신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복음의 계시를 예루살렘교회에 전파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올라가 유명한 자들에게사사로이 전했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바울이 지적하고 있는 예루살렘의 유명한 자들이란 아마도 사도들이나 교회를 지도하는 중진급 장로들로 볼 수 있다.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전파한 복음을 예루살렘 교회에 전파하여 이해시킨것은 교회의 인정을 받으려 함은 물론 바울이 전파한 복음이 결국 복음의 핵심으로 받아 드리려는데 있었다.


1. 헛되지 않은 달음질

바울은 2절 끝에 가서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 한 것이 헛되지 않게하려 함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가 이처럼 예루살렘 교회에까지 그가 받은 계시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하게 된 것은달음질하는 일이 헛되지 않게 하려는 것이라고 했다.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힘쓰는 그 일을 달음질로 비유하고있다. 왜 달음질이라고 했는가? 바울이 달리는 그의 생애의 목표가 천국이며 그는 그곳을 목표로 그의 생애를 달음질하는것처럼 살아갔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 달음질 경주에 극히 조심했다.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다름질 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말하고있다. 달음질하는 것이란 달음질하고 있는 현재의 수고를 의미하며 달음질 한 것이란 바울이 아직까지 달려온 수고를 말한다. 바울은 결코 이 달음질을 헛되게 하는 헛된 달음질을 경계했다. 그러면 어떤 수고가 헛된 수고인가? 딤후 2:5에서변대로 달라지 않는 경주라고 했다.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치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법을어기면서 뛰는 경주는 헛된 수고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불법의 경주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① 다른 복음을 전하는 경우를 말한다. 다른복음은 불법인 것이다. 법을 어기는 경주자인 것이다. 이 자들은 상은 고사

하고 저주를 받게 된다.


② 불법적인 경주를 하는 경우를 말한다. 무엇이 불법적인 경주인가? 죄 가운데서 달려가는 달음질이 그것이다. 이같은 경주는 헛된 경주인 것이다. 빨리 회개해야 바른 경주 자로 달려갈 수 있는것이다.


③ 육신의 정욕을 위해 달리는 달음질은 불법의 경주이다. 여기에는자기 자랑, 자기 영광이 앞서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수고하는 달음질이 그것이다. 이런 수고는 헛된 수고가 아닐 수 없다.


④ 성경을 가지고 어리석은 변론을 일삼는 경우다.


2. 바울의 조심

바울은 자신의 달려가는 달음질에 지극히 조심했다. 바울의 수고의 목표는 앞에 있는 하늘의 상급이었기 때문에 착실하게자신의 상급을 쌓아 올렸다.


① 바울은 자신이 받은 계시의 복음만을 전파했다. 그것을뛰어넘는 일은 다른 복음이기 때문에 경계한 것이다.


②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최고의 지식으로 삼았다. 그리스도와연관되지 않은 지식은 무익한 것으로 여기고 배척했다.


⑤ 바울은 자신이 달리는 달음질이 헛되지 않기 위해 자기 스스로가 모든 사람들의 본이 되었다.


⑥ 바울은 자신의 전 생애를 오직 그리스도를 위한 삶을 살아갔다. 그는그리스도를 위해 능욕을 받았으며 고난받는 일을 오히려 기쁨으로 여겼다. 그러면 바울에게 이같은 생활이 어떻게 가능했는가? 달음질하는 것이 헛되지 않으려는 그의 세심한 주의와 노력에서 엿본다. 바울이 이같은 달음질에 성공할 수 있었던것은 면류관을 바라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론 : 그리스도인들은 그의 달리는 달음질이 헛되지 않으려면 바울처럼면류관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을 바라볼 수있는 사람은 바울과 같이 주를 위한 생애를 살 수 있을 것이다.



(8)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갈라디아서2:3-5)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그들에게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


서론 : 초대 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을 형제라고 불렀다. 교회는형제들이 모이는 곳이다. 인종은 잡다하고 가문이 틀리고 혈통이틀리고 연령의 차이가 있지만 한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며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하나님의 자녀들이 됐기 때문에 형제들인 것이다. 그런데 교회에는 거짓 형제들도 있다는 사실을 밝혀 준다.


1. 누가 거짓된 형제인가?

① 거짓된 형제에 대하여 가라지로 나와 있다(마 13:24-30). 가라지는원수(마귀)가 심는다. 가라지는 알곡과 비슷하다.

구별이 어렵다. 가룟 유다의 경우, 다른 제자들도 몰랐다. 가라지를 뽑지말라고 하심. 뽑다가 다른 곡식까지 뽑히기 쉽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도 가라지를 최종 심판시까지 놔두시기 때문에 교회에가라지는 언제나 존재한다. 가라지의 운명은 분명하다. 지옥게 간다. 자신이 가라지가 아닌가 스스로 살펴볼 수 있어야 한다.


② 악한 누룩으로 나와 있다(고전 5:6).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퍼지게 된다. 누룩은 가루 속에 섞일 수 있지만 가루는 아니다. 악한 누룩은 거짓 형제를 의미한다. 가루로 부풀게 한다. 악한누룩이란 다른 복음, 이단, 잘못된 교훈, 죄를 조장하는 행위 등으로 나타난다. 교회에 이같은 누룩이 번지지 못하도록 조심해야한다.


③ 이들은 광명한 천사로 가장한다. 고후 11 : 14 사탄도 자기를 광명한 천사로 가장한다. 천사처럼 보이게 한다. 겸손하고 온유하게 보인다. 도덕적으로 거룩하게 보인다. 사랑이 많은 것처럼 보인다.


2. 거짓된 형제는 어떻게 들어오나?

4절에서 "저희가 가만히 들어 온 것은"이라고 했다. 결코 요란하게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가라지의 비유에서 사람들이잠을 잘 때 심었다고 말씀하셨다. 언제나 자기의 참모습을 숨긴다. 교회에 가라지가 번성하는 시기는 교인들이 기도에나태할 때, 교회에 회개가 없을 때, 교회가 영적인 생활에 등한히 하고 세상 풍조에 깊이 빠졌을 때 악하고 독한 병균처럼번지는 것이다.


3. 거짓 형제가 노리는 것

거짓 형제들은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본다고 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자유를가졌는데 이들이 엿보는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한다고 하신 말씀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참 자유를 주셨다. 죄에서자유를 주셨다. 죄의 종으로 죄에 사슬에 얽매인 생활이 아니라 이제 그 죄의 속박의 끈을 끊고 새로운 자유를 얻게되었는데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의 종으로 새로운 세계에 들어가 생활하고 있는 것이다. 사탄은 우리의 이같은 자유를 시기한다. 율법에서 자유를 주셨다. 율법에 얽매인 생활은 율법의 저주 가운데서 살아가는 생활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하셨다. 율법이 우리를 정죄 하지 못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말미암아 이미 율법의 의를 이루어 그곳에서 해방된 것이다. 사탄은 율법의 정죄로 우리에게 심판의 공포를 주고 그 쇠사슬에얽어맸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그 쇠사슬로부터 해방시켜 주셨다. 그런데 거짓 형제들은 우리들로 이같은 자유를 도로빼앗아 옛날 같은 종으로 되돌아가게 하려고 유혹하는 것이다. 그 중에서 갈라디아 교회에 나타나 이같은 유혹으로 갈라디아교인들의 자유를 시기하여 종으로 삼으려고 한 거짓 선생들은 이방인인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할례를 받게 하고 율법으로지키는 생활을 조장하므로 다시 죄의 종으로 율법의 종으로 얽어매려고 시도하였다.


결론 : 바울은 5절에서 "우리가 일시라도 복종치 아니하였다"고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같은 거짓 형제들의 그릇된 교훈에 복종하면안 된다. 복음의 진리가 우리 가운데서 역사 하려면 이런 거짓 형제들의 교훈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교회에서 거짓 형제를 살펴서 경계해야 한다. 거짓 형제를 살피는 방법은 언제나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고 그중심을 볼 수 있는 영적 통찰력을 가져야 한다. 영의 분별력을 가져야 한다. 이 영 분별은 진리의 말씀이 그 표준이된다. 다음에 진리에 굳게 서서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


(9) 외모로 사람을 보지 아니하심

(갈라디아서2:6-10)

유력하다는 이들 중에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저 유력한 이들은 

내게 의무를 더하여 준 것이 없고

도리어 그들은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이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은 것을 보았고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또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10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


서론 :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에 있는 유명한 사람들과는 상관할 바 없다고 언급하고 있다. 유명한 사람들이란 사도들과 또는 예수님의 생존시에 주님을 따랐던 다른 제자들을 의미하는데 바울은 원래부터 그들의 신앙적 지도를 받았거나 그들의 복음에 영향을 받아 복음을 전하게 된 것이 아니란 사실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그가 친히 주님으로부터 받은 계시에 의한 것으로 예루살렘 교회의 유명한 이들의 도움을 받은 것이 아니라고 말한

다. 이같은 바울의 말은 교만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가 전한 복음만이 참 복음이란 점을 분명히 하려는데 있었다.

바울이 1:7절 이하에서 다른 복음을 저주할 수 있었던 그의 담대함도 바로 이같은 그의 확고한 신념에서 나온 것이었다.


1.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심

6절에 나오는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신다"고 바울은 밝히고 있다. 바울은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 대하여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과 같은 의미에서 사도로 인정해 주려고 하지 않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그 같은 외모와는 상관없이 자신의 사도권을 인정해 주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사람을 보는 일에 외형적으로 보고 판단한다. 왜 그런가? 육신의 눈으로는 사람의 마음을 감찰할 수가 없는 것이다. 사람은 그 중심의 생각을 알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외모로 판단해 버린다. 바울은 외모로 판단을 받았기 때문에 그의 사도권에 많은 도전을 받았으며 유대교를 좇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2. 바울과 베드로의 사도권

바울은 그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전혀 예루살렘 교회의 지배를 받거나 지시를 받지 않았다. 예루살렘 교회의 유명한 자들은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복음을 전할 사명을 가지고 활동한 것처럼 자신이 이방인에게 복음 전함을 마치 베드로와 같이한 사실을 바라보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같은 일은 주님이 베드로를 할례 자의 사도로 삼으신 것처럼 자신을 이방인들(무 할례자들) 에게 복음을 전하는 이방인의 사도를 삼으신 증거라고 주장하고 있다. 바울이 사도의 직분을 맡은 일은 베드로가 사도의 직분을 맡아 복음을 전하는 것과 동일하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3. 기둥 같은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과의 악수

예루살렘 교회의 모든 사도들은 비록 바울과 깊은 교재는 없었고 그에게 어떤 지시를 내린 일은 없어도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은혜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다. 바울의 회심은 놀라운 사건으로 유대인 사회에 이미 그 소문이 일찍부터 번졌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자기들은 바울과 같은 놀라운 복음의 계시에 대하여 주님으로부터 받은 바 없었으며 바울같이 학식에 있어서도 뒤따를 수 없었기 때문에 주님이 바울에게 주신 은혜로 비취어 볼 때 바울의 사도권을 인정해 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 같은 야고보, 베드로, 요한 등 유명한 사도들이 바울에게 친히 교재의 악수를 청해 온 사실에 대하여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밝혀 주므로 바울의 놀라운 사역자로서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아마도 이 편지를 받아 본 갈라디아 교인들은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면서 바울에게 미안하게 여겼을 것이다.


결론 : 바울의 외모는 보잘 것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오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신다. 하나님이 사람의 중심을 보신다는 뜻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존재를 믿느냐? 하나님의 사랑을 믿느냐? 하나님의 상급을 믿느냐? 하나님을 진정으로 의뢰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됨을 살피시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에게 외형적 결함이 있어도 그것으로 판단의 기준을 삼으시거나 또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과 은혜를 그 같은 표준에 맞추시지 않으신다. 바울은 그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을 믿었으며 언제나 그 하나님께 중심을 바치는 생애를 살아 온 것이다.


(10) 교회와 가난한 자

(갈라디아서2:10)

10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


서론 :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가난한 자들을 생각하는 것을 부탁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바울에게 부탁한 것은 바울이 전한 복음의 내용이나 간섭이었던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성도들을 생각해달라는 부탁인데 이것은 구제 사업에 대한 협력을 말한다. 예루살렘 교회에는 구제를 받아야 할 가난한 형제들이많았다.

행 6:1을 보면 헬라파 성도들과 히브리파 성도들 간에 다툼이 잦았는데 그것은 헬라파 과부들이 교회에서 주는 구제에서 빠지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예루살렘 교회에 가난한 성도들이 많았던 이유는 유대교에서 출교된 형제들이 늘어나고 복음을 따르는 자들에 대한 핍박이 심했기 때문에 그들을 수용해야 했으며 의지할 곳 없는 고아와 과부들에 대한 구제 사업에도 손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각처에 흩어져 있는 교회에서 헌금하여 예루살렘 교회로보냈던 것이다.


1. 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생각하심.

가난한 자는 힘이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 편에서 가난한 자를 도와주신다. 만약 성도 중에 가난한 자가 있어 하나님께 간구하면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어주신다고 하셨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난한 자를 사랑하고 도와주라고 말씀하신다. 렘 22:16 - 하나님은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의 원한을 갚아 주신다고 하셨다. 잠 14:31 -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라고 하셨다.

시 35:10 - 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그보다 강한 자에게서 건진다고 하셨다. 시 9:12 - 하나님은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 아니하신다고 하셨다. 시 72:12 - 하나님은 도움이 없는 가난한 자를 건지신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가난한 자는 하나님을 의뢰해야 한다. 삼상 2:8 - 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신다고 하셨다. 가난한 자는 주님께만 소망을 두어야 한다.


2. 가난한 자를 어뗳게 생각해야 하는가?

(1) 물질로 도와주어야 한다. 요일 3:17,18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 물질이 아까워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없는 증거다.


(2) 가난한 자를 학대하지 말아야 한다. 잠 14:31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존경하는 자니라"


(3) 가난한 형제에게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 말아야 한다. 신 15:7, 8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강퍅히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쥐지 말고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 요구하는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 주라"


3. 도와 주는 자의 상급

가난한 자를 도와주는 일은 하나님께 꾸어 드리는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갚아 주신다(잠 19:17). 도움을 받는 사람은 반드시 자기를 도와 준 사람을 위해 복을 빌어야 한다. 하나님은 이처럼 도움을 받고 도움을 준 사람을 위하여 하나님께 복을 빌 때 하니님께서 복을 내리신다(신 24 : 13).


결론 :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남에게 도움을 주기도 하고 도움을 받기도 한다. 심은 것이 없이는 받을 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 나에게 무엇인가 있을 때, 다른 사람을 도와 줄 힘이 있을 때, 어려운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일로 심는 일을 해야 한다. 전 11:1 "너는 네 식물을 물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11) 베드로에 대한 바울의 책망

(갈라디아서2:11-14)

믿음으로 의롭게 되다

11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12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13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14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서론 :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자신이 베드로와 같은 사도들보다 못한 사도가 아니라 베드로에게도 책망할 수 있는 사도임을 안디옥에서 있었던 사실에 근거하여 언급해 주고 있다. 바울은 한때 베드도가 미혹 받아 바울의 책

망까지 듣게 된 외식적인 행위에 대해 들어 내놓고 밝히면서 사람의 구원이 율법에서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믿어 의롭게 되는 이신득의의 진리에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여 갈라디아 교인들이 미혹을 받았던 율법으로 말미암은 구원설에 대해 깨우쳐 주고 있는 것이다.


1. 베드로의 외식

문제의 발단은 베드로가 안디옥 지방에서 어떤 이방인들과 함께 먹게 된 일 때문이다. 베드로가 이들 이방인들과 음식을 먹은 일은 당연한 일이며 잘 한 일이었다. 유대인들은 율법의 관습에 의해 이방인들이나 죄인들과 자리를 함께 하여 음식을 먹는 일을 금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같은 율법적 행위는 성경적이 아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방인과 유대인들의 담이 허물어졌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고 둘 다 율법의 행위로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를 얻고 구원을 얻기 때문에 이같은 행동은 아무런 의미도 없을 뿐 아니라, 이미 폐해진 일이었다.

이같은 일은 행 15장에서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에 올라갔을 때, 베드로와 야고보에 의해 율법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공식적인 결정을 내린 이후의 일이다. 그분 아니라 베드로는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가서 이방인들과 함게 교제한 일도 이미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베드로는 바나바와 또 다른 성도들과 함께 이방인들과 음식을 먹던 중, 야고보로부터 온 어떤 사람들이 그곳에 당도했을 때, 놀랜 나머지 이방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던 그 자리를 떠난 것이다. 베드로가 황급히 그 자리를 피하여 숨은 것은 예루살렘으로부터 내려온 이 사람들로부터 책망을 들을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믿음에 앞서서 사람들에게서 받을 오해와 교회에서 받을지도 모를 책벌에 더 마음을 쓰게 된 것이다.

말하자면 베드로에게는 이방인들과 교제하며 함께 음식을 먹어도 죄가 아니라는 확고한 믿음이 없었던 것이다. 믿음이 없이 하는 일은 죄가 된다. 의심하면서 하는 일도 믿음이 아니다. 베드로는 또한 사람을 두려워했다. "그가 할례 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갔다"고 말하고 있다. 결국 베드로는 양쪽 모두에게 외식하는 자가 된 것이다. 베드로는 이방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의가 율법에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증거 하면서도 율법에서 벗어나지 못한 행동을 보여주었고 바나바 등 성도들에게는 베드로가 취한 행동으로 오직 믿음으로 의를 얻는 다는 의에 대한 회의를 주게 된 것이다.

베드로의 이 같은 행동은 외식이 아닐 수 없었다. 외식이란 믿음으로 하지 않고 남에게 보이려고 행하는 모든 행위가 외식인 것이다. 산상보훈에서 예수님은 외식하는 자들에 대하여 정죄 하셨다. 외식하는 자의 구제, 외식하는 자의 기도, 외식하는 자의 금식 등에 대하여 언급하셨다. 외식하는 자의 죄가 크기에 "먼저 네 눈 속의 들보를 빼라"고 하신 것이다.


2. 바울의 책망

이 일을 듣고 바울은 여러 사람들이 있는 공적 석상에서 베드로를 면책한 것이다.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하게 된 이유는 14절에서 언급해 주고 있는 것처럼 "저희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했다"는 데 있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 앞에 복음의 진리 가운데 굳게 서야 한다. 그러나 베드로는 복음의 진리는 알고 있었으면서도 사람을 두려워한 나머지 복음의 진리를 버리고 외식했던 것이다. 바울이 베드로에게 책망한 요지가 나오는데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을 좇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는 것이었다. 베드로의 행동은 복음적이 아니라는 책망인 것이다.


결론 : 그리스도인은 그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야 한다.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이 없는 생활을 해야 한다.

하나님을 사람보다 더 두려워할 줄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12) 유대인과 이방인

(갈라디아서2:15-16)

15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서론 : 바울은 15절에서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아니로되"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그리스도안에서 의를 얻을 수 있다는 복음적 진리를 개진하기 위해 서론적으로 유대인들이 생각하고 있는 그들의 우월감을그대로 인정하고 있는 말이다.


1. 유대인들의 유월감

유대인들은 자기들 스스로 의로운 백성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그들에게 율법을 주셨고 자기들은 온 세계 백성 중 유일하게 그 율법을 지키는 민족으로 자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율법이 없으며 하나님도 없는 이방인들은 죄인들일 수밖에 없다.


① 유대인은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다.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하나님에의하여 선택되었으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약속 받았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 아래 있다. 그러나 이방인들에게는아무런 약속도 주신 일이 없다.


② 하나님께서 오직 이스라엘에게만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주셨으며 그 율법을통해서 의와 생명을 약속해 주셨다. 그러나 이방인에게는 율법을 주신 적도 없고 구원이나 생명의 약속을 주신 일도없다.


③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할례의 규례를 주심으로 오직 이스라엘에게만 할례가주어졌으며 이 할례를 통해서 이스라엘은 거룩한 백성으로 성별된 것으로 믿고 있었다.


④ 하나님께서 영광의 메시야를 자기 땅에 보내심으로 종말에 이스라엘을 중심으로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며 그 때 이스라엘은 세계의 지도 국가, 중심 국가가 되어 세계를 지배할 것으로 알고있다.


2. 유대인들의 이방인 관

유대인들은 대단히 편협적인 이방인 관을 가지고 있다.

①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다. 하나님께서아브라함을 통해서 그의 자손에게 약속해 주셨기 때문에 이방인은 하나님의 약속이 없는 백성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때 아브라함의 육신적인 자손들과 함께 믿음의 자손을 약속하셨는데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진 모든 사람들이다 아브라함의언약에 동참할 자격이 있다는 사실을 밝혀 주고 있다(갈 3 : 28-29). 그리고 육신적인 자녀로서의특권은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시기까지요, 그 이

후에는 믿음으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한 아브라함의 자녀의 자격을 갖추는것이다.


②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에 대하여 아무런 소망이 없는 백성으로 단정짓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구원의 사역에 있어서 원래 아브라함의 육신적 자녀들인 유대인들을 섭리하셨던 것이 아니라이미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자녀들을 택정 하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소망은 그 백성에게 있는 것이다. 아무리 유대인들이라 해도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망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3. 사람이 의롭게 되는 일

바울은 율법이 사람을 의롭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하나님 앞에는할례, 무할례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율법이 있고 없고가 문제가 아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차이가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의가 문제일 뿐이다. 할례나 율법이나 유대인의 혈통이 의의 표준이나 조건이 될 수 없다. 의의기원에 대해 바울은 아브라함에게까지 올라갔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로 여기심을 받은 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을의로 상속받을 우리의 의를 위함인데 이같은 성경적인 증거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그믿음을 의로 여기시는 것이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다.


결론 : 바울은 두 가지 사실을 분명히 한다. 하나는 율법으로는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는 주장이다. 율법의 직능은 의를주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정죄하는데 있다. 다른 하나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사실이다. 누구에게도 예외가없다. 우리는 유대인이 아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유대인들이 율법에서 얻을 수 없는 의를 얻은 것이다.


(13) 하나님을 향항여 사는 새로운 생활

(갈라디아서2:17-19)

17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18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서론 : 바울은 오늘 본문 말씀에서 그리스도인이 죄를 범했을 때의 경우를 예를 들어, 그 책임 소재를 밝히면서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삶의 방향을 제시해 주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의 의와 죄와의 관계는 교리상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이 문제에 대한 분명한 해답을 얻지 못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를 얻는 하나님의 방법에 대하여 회의를 갖게 되며 구원의 도리가 흔들리게 된다.


1. 의와 죄의 관계

17절에서 바울은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범하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다. 바울의 이 말은 율법적인 의를 주장하는 자들의 믿음으로 의를 얻는다고 주장하는 바울의 구원관을 공격하는 모함에 대한 반론이다. 그들은 만약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는 것만으로 의를 얻는다면 그가 의를 얻은 후에 죄를 범했다고 하자. 그러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의를 얻었으며 또 정죄에 이르지 않으니 그러면 그 죄는 그리스도께서 짓게 하신 것이냐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의를 얻는 일에 대한 오해는 의를 얻은 후에 범하는 그리스도인의 죄는 어떻게 처리 되느냐 하는 것이다. 그 죄가 정죄에 이르지 아니한다면 그리스도는 인간의 죄를 조장하는 분이 아니냐는 것이다. 의를 얻은 후에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이 어떠해야 하느냐는 문제는 대단히 중요하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오히려 죄를 범하여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의를 주셨으니 그리스도에게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같은 율법주의자들의 반론에 바울은 "결코 그럴 수 없다"고 단정적으로 말하고 있다.


2. 그리스도인의 죄의 책임은 그리스도인에게 있다.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하여 18절에서 그 책임 소재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고 한 것이다. '헐었다'는 말은 우리의 죄가 용서받았다는 뜻이다. 이같은 용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어졌다. 그런데 그 후, 내가 그 헐었던 것을 내 스스로 다시 세운다면 그것은 헐었던 분의 책임이 아니라 다시 세운 나의 책임인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런데 그 책임이 율법적인 책임이 아닌 것이다. 율법의 정죄로 책임지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하셨다. 그리스도인이 범하는 죄는 율법이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책임을 하나님이 묻는 것이다. 이 책임은 정죄가 아니라 징계로 나타난다.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료 ... "라고 말씀해 주고 있다(히12:7-9).


3.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그리스도인의 생활

바울은 19절에서 율법과 그리스도인의 생활과의 관계를 밝혀 주고 있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다"고 했다.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스도인은 율법을 향하여 죽었다는 뜻이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이미 죽은 존재란 사실을 말하고 있다. 율법은 죄인들에게만 필요한 법이다. 죄인들을 정죄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죄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에 이미 율법을 향하여 죽은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일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의미하기 때문에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로 인하여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 안에서 율법을 향하여 죄에 대하여 이미 죽은 것이다. 왜 하나님께서 이처럼 율법데 대하여 죽게 하신 것인가? 그것은 그 다음 말씀이 밝혀 주는 대로 "하나님을 향하여 살게 하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를 얻고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난 그리스도인들은 죄를 범하는 생활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새로운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결론 : 그리스도의 의를 입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세 가지 사실에 대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 

첫째, 죄 가운데서 살아가면 안 된다. 

둘째, 우리가 범하는 죄가 소멸되어야 한다(회개). 

셋째, 하나님을 향하여 새로운 의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14) 십자가에 못 박힌 나

(갈라디아서2:20-21)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서론 : 그리스도밖에 있었을 때의 나와 그리스도 안에서의 나는그 존재가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 밖의 나는죄와 허물로 죽은 인간이요, 그리스도 안에 나는 새로운 생명을 받아 새 피조물로 새롭게 태어난 별개의 나인 것이다. 우리는 옛사람을 벗어버리자, 또는 옛사람으로 살아가면 안 된다는 말을 자주 한다. 그러나 이같은 표현은 잘못된표현이다. 우리의 옛사람은 이미 죽었고 옛사람과는 그 어떤 형태로든 관계가 끊어져 있다. 이 사실을

분명히알 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새로운 신분을 알게 되며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살아가는 일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는것이다.


1. 나의 옛사람

성경에서 나의 옛사람은 죄의 사람, 정욕의 사람,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사람,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는 사람, 사탄의 종으로 죄에 매어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 옛사람이란존재를 처리하지 않으면 구원도 없고 영생도 없으며 소망도 없는 것이다. 만약 내가 옛사람의 형태를 가지고 살아가고있다면 나는 아직 죄 가운데서 살아가는 죄인이기 때문에 구원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이미 옛사람을 완전히 처리한 사람들을 의미한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옛사람을 처리하였는가? 바울은 20절 초두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고 말하고 있다. 바울의 이같은 표현은 대단히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말은 나라고 하는 옛사람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십자가에서 죽어 버렸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옛사람과 새사람은 완전히 다른 별개의 사람이다.


그러므로 옛사람을 처리하지 않고는 절대로 새사람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자신의 옛사람의 처리를 잘 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도 그 옛사람을 짊어지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다. 옛사람은 죄의 사람을 말하기 때문에 이 죄의 사람을 처리 하지 않으면 정죄 의식이 떠나지 않으며 왜 의롭게 살아야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해답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죄 가운데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2.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죽은 옛사람

의인은 하나도 없다고 말씀해 준다. 죄인은 율법의 정죄를 받아야 하며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 죄인은 그 어떤이유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유럽으로 받을 수 없다. 이같은 원은 그리스도인에게도 동일하다.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은 이문제를 어떻게 처리했는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므로 처리되었다는 사실을 성경은 계속하여 가리켜 주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그 자신의 죄로 인함이 아니라 우리의 죄로 인함이라고 말씀해 준다. 그는 내가 당해야할 죄로 인하여 율법의 저주를 받으셨으며 죄의 심판을 십자가에서 온전히 받으셨다.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이다. 이 죽음으로나는 나의 죄 값을 치렀다. 나의 죽음은 율법의 정죄로 인함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나에게는 옛사람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이다. 무덤에 장사지낸바 된 것이다. 다시 살아날 수도 없고 내 생애에 나타나나를 지배할 수는 더군다나 없는 것이다. 이같은 나에게는 다음과 같은 놀라운 사실들이 실제적으로 나에게 나타나게 된것이다.


① 나는 죄 값의 심판을 이미 받았으니 다시는 죄 값인 사망을 치를 필요가 없다.


② 마귀에게 사로잡혀 죄의 종이 되었던 나는 

이미 죄에 대하여 죽었으니 

이제는 마귀의 지배를 받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③ 아담의 혈통으로부터 이어 온 나는 죽고 

나는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가진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결론 : 그러면 지금 살아가고 있는 나는 누구인가? 옛사람과는완전히 결별한 새로운 존재로서의 나인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의 새로운 생명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그러나 이미 죽어 버려 흔적도 없어져 버린 옛사람을 따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들의 생활은 완전히 잘못된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난 우리는 죄와는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 되었으니 하나님을 향하여 열매를 맺는 새사람의 생활로 새로운 생애를 살아가야 하는것이다.


(15) 그리스도인의 삶의 지표

(갈라디아서2:20-21)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서론 : 20절에서 바울은 자신의 새로운 인생관을 고백하고 있다. 그는 "내가 이제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바울이 육체 가운데 산다고 하는 말은 육체를 위한 삶이 아니라 육체는 하나의 삶의 수단이란 점을 강조한 말이다.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생명은 자신의 육체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육체는 의로워질 수 없으며 육체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육체는 다만 우리의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그릇으로 필요할 뿐이다.


1. 내가 산 것이 아니라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했다. 바울이 '내가'라고 말하고 있는 존재는 바울의 옛사람을 의미한다. 바울은 자기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고 했다. 바울은 죄에 대하여 죽은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에 대하여 롬 6:2에서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이 죄와 결별해야 할 이유가 죄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바울을 비방하는 자들이 모함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죄의 멍에를 벗었으니 죄를 지어도 괜찮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은 죄에 대하여 이미 죽은 몸이 되었기 때문에 죄 가운데서 더 살아갈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해 주신 목적은 우리들로 죄를 범하게 하려 하심이 아니라 다시는 죄의 지배를 받는 생활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향하여 의롭게 살게 하시려는데 그 목적이 있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밝힘으로 그들의 입을 다물게 했다. 


바울이 죄 가운데서 살 수 없다고 한 

그 죄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첫째로 세상 소망을 위해 사는 것을 의미하고, 

두 번째 육신의 정욕을 위해 사는 것이며, 

세 번째는 하나님이 없이 살아가는 생애를 말한다. 


이런 생활은 모두 하나님께 심판을 받을 죄악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같은 죄를 범할 수 있는 능력을 이미 상실한 사람들이다. 

이런 죄 가운데서 더 생활할 수가 없는 것이다.


2. 내가 산 것이 아니라

바울은 "내가 산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바울이 이곳에서 말하는 나 역시 옛사람, 육신의 사람을 의미하고 있다. 바울은 나는 이미 십자가에서 죽었는데 옛사람이 어찌 내 생애를 주장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했다. 이 말은 바울의 새로운 생명의 공급자는 그리스도시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그와 함께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하셨을 뿐 아니라 나의 옛사람을 대신하여 새로운 생명을 공급해 주심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이처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내 생명은 그리스도의 생명과 일치가 된다. 그의 생명이 나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생명은 그리스도를 위한 새로운 생애를 살아가도록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이다. 여기서 그리스도인들의 하나님을 향한 새로운 생활이 나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지난날 죄의 종으로 죄 가운데서 살아간 것처럼 지금은 의의 종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죄의 종이란 죄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없는 신분인 것처럼 의의 종이란 의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없는 신분을 의미한다.

여기서 의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살 수 있는 터전이란 어디에도 없다. 의의 종으로 살아야 할 표준으로 바울은 두 가지를 지적하고 있는데 19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가는 생활'이요 20절에서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을 의미한다.

결론 :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삶의 목표는 뚜렷하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임을 알고 

 다시는 육체의 정욕대로 살려는 유혹을 물리쳐 

죄의 종의 자리에 되돌아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성도가 되자.



갈라디아서 3장 (16 - 25)

◆ 밤중소리 01-30 | VIEW : 730


(16) 누가 어리석은 그리스도인인가?

(갈라디아서3:1-2)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호소하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서론 : 바울은 1장과 2장에서 자신의 사도직분의 권위와 자기가 전한 복음의 확실성을 논증한 후, 3장에서 다른 복음을 용납한 갈라디아 교인들을 책망하면서 믿음으로 의를 얻는 구원의 도리에 대하여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경우를 예로 들어 증거해 주고 있다.


1. 어리석은 갈라디아 교인들

우리는 바울이 2 : 21에서 말한 의가 왜 믿음으로 와야하느냐에 대해 아주 중요하게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고 하신 말씀이 그것이다. 이 말은 율법으로 의를 얻을 수 있었다면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필요가 전혀 없다는 말이다. 왜냐 하면 만약 율법으로 단 한명이라도 의를 얻을 수 있었다면 하나님은 율럽을 통해서 우리에게 의를 요구하셨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율럽으로도 구원의 의르 얻을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이유가 있었겠느냐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일은 율법으로서는 아무도 의를 얻을 수도 없고 구원에 이를 수도 없기 때문이다. 만약 그리스도가 없이도 사람이 의를 얻을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리스도야말로 십자가에서 헛되이 죽으신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3 : 1에서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눝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고 책망하고 있는 것이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어리석은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바힌 것을 밝히 보았으면서도 거짓선생들의 꾐에 넘어간 사실에 있었던 것이다.


2.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밝히 보이 것은 무엇이었나?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힌 사실도 모르고 예수를 믿는 사람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 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에 대하여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려주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거짓 선생들의 꽴에 넘어가 그리스도께서 지신 십자가의 도리를 잊어버린 것이다.


우리는 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밝히 보아야 하는 것인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밝히 볼 수 있어야 참 신앙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십자가의 도리를 잊어버리면 신앙도 함께 잊어버린다. 사탄이 미혹하는 다른 복음에 넘어가지 않으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밝히 보아야 한다. 십자가를 놓치면 복음이 변질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에 굳게 서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밝히 볼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믿음을 굳게 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밝히 보려면 네 가지 할례를 받아야 한다.


① 마음의 할례를 받아야 한다. 이 할례를 받은 사람만이 그리스도를 마음에 영접할 수 있는데 그 할례는 하나님 앞에 진실한 회개를 통해서 받게 된다.


② 귀의 할례를 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져야 한다. 이 할례 받은 귀는 중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받을 수 있게 된다.


③ 입의 할례를 받아야 한다.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입을 말한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기쁨과 소망이 충만할 때, 할례 받은 입이 되어 복음이 전파되고 하나님께 대한 찬송이 나온다.


④ 눈의 할례를 받아야 한다. 소망의 눈으로 천국을 바라보고 하늘의 상급을 바라 볼 수 있는 눈이다. 이 눈의 할례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때 그 맏음이 신령한 것을 볼 수 있게 한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을 보려면 이 같은 네가지 할례를 받아야 하는데 이 할례를 통해서 그리스도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소유하게 된다.


결론 :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밝히 볼 수 있는 자의 축복에 대하여 

성경에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나? 

사죄의 확신, 사죄에서 오는 평안과 기쁨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사가 생기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꾐에 넘어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잊어버려 

변질된 복음을 받아 드리는 일은 어리석은 일이다. 

갈라디아 교인처럼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자.


(17)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갈라디아서3:2)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서론 :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결정적인 하나의 질문을 던지고 있다.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는 것이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거짓 선생들에게 미혹을 받기 이전에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서 목회하고 있을 때에 이미 성령을 받은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아마 성령을 체험할 때 방언도 하고 예언도 했을 것이다. 아직 성경이 완성되지 못하고 구원의 교리가 성경적으로 확립되지 못한 시대에는 대개의 경우, 방언이나 예언이나 다른 체험적인 다른 은사를 주심으로 그들로 성령 받은 사실을 믿을 수 있도록 하셨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서냐 아니면 듣고 믿음으로서냐고 한 것이다.


1. 갈라디아 교인과 율법

갈라디아 교인들은 이방인들로 율법에 대하여는 아는 것도 없었고 지키는 생활도 하지 못했었다. 바울은 율법적인 의롸 그리스도의 의에 대해 분명한 한계를 그들에게 가르쳤다. 율법은 그 어떤 방법으로도 의에 이를 수 없다는 사실을 철저히 강조했을 것이다. 그들은 율법적인 생활을 하지 않았고 율법으로 의를 얻고저 힘쓰는 생활도 하지 않았지만 바울이 전한 복음을 믿음으로 성령을 받아 구원을 받았으며 기쁨과 감사의 생활를 해 온 것이다.

바울이 왜 여기서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성령을 받은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무엇으로 그 성령을 받았느냐고 다구쳐 묻고 있는 것인가? 성령을 받는 일은 구원의 모든 일이 완성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그 마음에 성령의 임재하심으로부터 그의 그리스도 안에서의 생활이 시작된다. 성령은 구원의 표로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시다. 그 성령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신다. 성령의 임재는 곧 새사람의 증표인 것이다. 성령은 믿는 사람 안에 들어 오셔서 우리의 허물과 죄로 죽은 영을 하나님의 새로운 생명으로 살리신다. 이 같은 살리심이 거듭나는 일인데 우리의 거듭남은 곧 우리를 구원하시는 성령의 일차적인 역사이시다.


2. 그리스도인과 율법

롬 8 : 9 말씀은 이런 사실을 웅변으로 증거해 주신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로부터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갈라디아 교인들은 성령을 받은 것이다. 그들은 성령을 받은 일이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바울에게서 복음을 듣고 그것을 믿음으로 인한 것임을 너무나도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거짓 선생들의 꾐에 빠져 잘못된 신앙의 길을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을 폐기하거나 율법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율법은 영원히 존재해야 할 하나님의 의의 표준으로 죄인들을 심판하시는 일에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에 율법이 폐기되어서는 안 된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율법으로 정죄를 받아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 그러면 믿는 사람들은 율법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것인가? 율법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인가?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 더 온전하고 존귀한 하나님의 율봅이 있는데 그 온전한 율법이 곧 사랑이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간다. 이 같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율법을 없애거나 율법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을 존귀히 여기는 이이 된다. 예수님께서도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다만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의 행위로 의를 얻으려는 생각은 의의 표준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거역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저주 받을 일임을 믿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도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율법에서 의를 얻으려는 복음, 곧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저주를 받으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결론 : 만약 우리가 율법에서 의를 얻으려는 생각으로 그것을 지키는 생활을 한다면 율법으로는 구원을 얻을 사람이 없다고 선언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죄인이 되며 하나님께서 율법에서 얻을 수 없는 의를 주시기 위하여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어 십자가에서 죽게 하신 그 크신 사랑에 도전하는 일이 된다. 우리는 이 믿음의 도리를 굳게 잡아야 한다.


(18)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려느냐

(갈라디아서3: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서론 :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최종적으로 다구친다. “너희가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고 반격을 가한다. 여기서 육체는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다. 하나는 할례를 자랑으로 여기는 어떤 유대인들이 말하는 성별된 육체의 자랑이고, 다른 하나는 성령이 하시는 일과 대조를 이루는 육체로 정욕과 자랑으로 옛사람의 삶의 방식을 의미한다. 바울이 본 절에서 주장하는 바는 자신의 육체를 이미 십자가에 못 박은 내가 어떻게 다시 육체적인 자아로 돌아갈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분명 성령으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새로운 생애를 시작했지만 그들은 이제 거짓 선생으로 말미암아 이미 십자가에 못 박아 죽어버린 옛사람의 자리로 되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1. 처음에 성령으로 시작한 갈라디아 교인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출발은 성령으로 시작한다.


① 하나님의 부르심이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보내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라고 하셨는데 이 같은 하나님의 부르심은 성령의 역사인 것이다. 성령이 오시면 그가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하셨다. 성령이 오시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시작은 성령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신 말씀들이다.


②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는 것은 성령의 역사이다. 성령께서 지혜를 주심으로 하나님의 비밀을 깨닫게 하신다. 인간의 지식이나 체험이나 학문으로는 한평생 영생에 대하여 연구해도 예수 그리스도를 깨달아 알 수 없는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다. 그리스도를 깨달았다고 하는 것은 분명 성령의 역사이신 것이다.


③ 우리가 믿음을 갖는 일도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다. 믿음은 모든 사람들의 것이 아니라고 말씀헤 주고 있다.믿음은 인간의 지혜에서 나온 것도 아니오 학문에서 얻어지는 것도 아 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선물이다. 내게 믿음이 있다는 것은 내게 성령이 있다는 의미와 동일하다.


④ 인간의 구원도 성령의 역사이시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사죄와 구원의 은혜를 받는데 우리가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리스도를 믿을 때 성령께서 내 심령 속에 새 생명을 주시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이 성령으로 시작하며 성령으로 지속되는 것이다.


2. 육체로 마치겠느냐?

성령으로 시작했다면 성령으로 끝맺어야 한다. 성령으로 마친다는 말은 무엇인가? 성령의 결실을 의미한다. 성령으로 생명을 얻어야 하고 의의 열매를 맺어야 하며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어야 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한다. 그러나 갈라디아 교인들은 육체의 일로 인하여 성령의 은혜를 소멸했으며 성령의 역사를 거역하기에 이른 것이다.


바울이 여기서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육체로 마치겠느냐고 한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갈라디아 교인들이 믿음으로 얻는 의의 길을 버리고 율법으로 되돌아간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은 의를 율법을 지키는 생활로 유지하려고 한 것이다. 이런 일이 왜 그토록 나쁜 것이냐?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가 무효화되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죄는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죄인들을 위해 흘리신 그 보혈을 무가치한 것으로 돌리는 일이다. 우리로 구원을 얻게 하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의를 무시하고 죄인으로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할 율법으로 의를 얻으려는 사람들은 의를 얻기는 고사하고 심판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결론 : 그리스도인은 처음 그 출발점도 성령이며 믿음도 성령의 선물로 받는다. 그리스도인의 소망 역시 성령이 주신다. 인생의 최종적인 소망은 천국인데 이 천국의 소망은 오직 성령으로만이 얻게 된다. 성령의 역사는 우리로 그리스도만 믿게 하며 그의 십자가 공로만 의지하게 한다. 그리스도인의 생애는 성령이 처음이 끝인 것이다. 우리는 분명 성령으로 시작한 사람들이다. 결코 육체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


(19) 성령의 역사가 믿음으로냐 행위로냐

(갈라디아서3:4-5)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


서론 : 갈라디아 교인들은 처음 복음을 받아 드렸을 떄, 바울과 함께 율법주의자들, 유대인들로부터 많은 괴로움을 받은 것이다. 유대인들이 복음을 배척하고 복음과 원수가 된 것은 복음이 주장하는 의가 율법을 배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처음 갈라디아 교인들은 성령을 받았으며 성령이 주시는 여러 가지 은사를 받아 기쁨과 감사로 충만한 신앙생활을 해 온 것이다. 그들은 성령의 능력 가운데서 살아갔다. 그래서 5절에서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1.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갈라디아 교인들은 이 같은 유대인들의 핍박으로 많은 괴로움을 당하면서도 구원의 기쁨으로 모든 것을 참았다. 오히려 감사함으로 이겨냈다. 그렇다면 지금 거짓 선생들의 꾐으로 구원의 조건으로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믿는다면 지난날에 그들이 믿음으로 의를 얻는 구원의 도리로 인하여 핍박을 받은 그 모든 일들이 아무런 가치가 없었던 것이 아니었겠느냐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 같은 괴로움은 결국 헛된 것이 아니었느냐고 질문함으로 그 당시 그들이 지니고 있었던 순수한 믿음을 회상시키고 있는 것이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바울이 그들의 손에 안겨 준 참 보화를 거짓 선생들의 거짓된 보화와 맞바꾼 것이다. 그들은 참 보화를 소유했을 때 그 보화로 인하여 기뻐했으며 그 보화를 시기하고 빼앗으려는 무리들로부터 많은 어려움을 당하면서도 그 보화를 지키는 일에 보람을 느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은 그런 것도 잊고 참 보화를 빼앗긴 채 거짓된 보화를 가지고 기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고 나무라고 있는 것이다.


2.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신다.

바울은 5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일과 또 우리 가운데서 행하시는 이의 능력에 대하여 언급해 주고 있다.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바울은 너희에게 성령을 주신 일이 율법의 행위냐 아니면 믿음으로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다. 성령을 주시는 일을 성령을 선물로 주신다고 말씀해 주고 있다. 왜냐 하면 성령을 주실 때 아무런 대가나 공로가 없이 값없이 주시기 때문이다. 결코 율법을 행하므로 준 것이 아니란 것이다. 그리고 성령을 받은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른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씀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성령을 누구에게 주시느냐는 것이 문제가 된다. 문제의 해결점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에서 풀려진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성령을 주신 일이 율법의 행위로서냐 아니면 듣고 믿음에서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행 2 : 38절에서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어찌할꼬? 하고 묻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고 했다.

이처럼 성령을 받는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선물로 받는 것이지 율법이 행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다.


3.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신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다. 물론 이 능력은 성령이 행하시는 능력이시다. 믿음 가운데 행하게 하시는 능력, 치료하시는 능력,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능력, 사탄의 권세를 물리치시는 능력 등이다. 이 하나님의 능력은 무한하시며 하나님의 권능에 의하여 이루어 주신다. 그러면 그 같은 능력은 우리가 율법을 행하기 때문이냐 아니면 듣고 믿기 때문이냐?


결론 : 갈라디아 교인들은 바울의 이 질문에 무엇이라고 대답할 것인가? 그들의 대답은 분명하다. 듣고 믿기 때문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것이 그들의 체험적인 믿음이요 복음의 진리이기 때문이다. 이로써 그들은 거짓 선생들의 율법주의적 복음이 ‘다른 복음’이란 사실을 깨달아 알게 되었을 것이다.


(20) 아브라함이 얻은 의

(갈라디아서3:6-7)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서론 : 사람이 어떻게 의를 얻느냐 하는 문제에 대하여 성경은 아브라함을 그 거울로 보여 준다. 바울은 5절에서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는 물음을 던지고 율법의 의를 주장하는 유대인들도 인정하는 아브라함의 경우를 6절에서 제시하면서 만약 아브라함이 율법으로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를 얻었다면 율법으로 의를 얻을 수 있다고 하는 유대인들의 주장은 거짓임이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아 바울이 전한 복음은 너무나도 성경적이기 때문에 갈라디아 교인들 뿐 아니라 유대인들의 입도 다물지 않을 수 없게 만든 것이다.


1. 아브라함이 얻은 의의 방법

바울은 6절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고 논증하므로 아브라함이 받은 의의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성경에는 의인으로 불리우는 몇몇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아벨도 의인이었고, 에녹도 의인이며, 노아도 의인이라고 말해 준다. 그러나 그 의가 어떻게 주어졌느냐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그러나 아브라함만큼은 그가 받은 의에 대하여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모든 믿는 자들의 조상이 된 것이다. 하나님의 의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전혀 변함이 없다. 양심으로도 아니오 율법으로도 아니다. 아브라함이 의를 얻은 의의 조상으로 제시해 주고 있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무엇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는 인정을 받게 된 것인가? 하는 것을 알면 답이 나오는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바로 그 방법을 가지고 모든 사람에게 의를 주심으로 이 문제는 대단히 중요하다.


롬 4 : 18절 말씀을 보라.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자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 22절에 와서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믿은 것은 무엇이었나? ”네 자 손이 이같으리라“는 말씀대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자손의 약속을 주셨는데 그 약속을 믿은 것이다. 그 자손은 혈육으로 낳은 이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여자의 후손으로 약속된 메사야를 의미하며 그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여자의 후손을 태어나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는데 아브라함은 이 같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것이다. 그리고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고 하셨는데 여기서 말씀해 주는 많은 민족이란 하늘의 별같이 번성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그리스도인을 의미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이 약속을 받았을 때 그 나이가 75세였다. 그리고 그의 아내는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여자였다. 그리고 그의 나이가 100세가 되었지만 그래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자기에게 주실 아들 이삭의 씨를 통해서 여자의 후손으로서의 메시야를 보내 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에 그 믿음을 의로 여기신 것이다. 우리가 아브라함처럼 말씀이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어 태어나시고 그가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실을 믿으면 그 믿음을 아브라함처럼 의로 여기시는 것이다.


2. 아브라함의 아들

바울은 7절에서 의미심장한 말씀을 주고 있다.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 인줄 알지어다”고 한 말씀이 그것이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선택이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약속하신 모든 언약을 육신적으로 생각해 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아브라함에게 의를 주실 때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라 모든 것을 계획하시고 섭리하신 사실을 알아야 한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자손은 이삭인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그로부터 번성하는 아브라함의 자손은 육신적인 유대인을 가리킴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의를 얻는 모든 믿는 자를 의미하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아들은 실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인 것이다.


결론 :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그 아들에 관한 약속과 그 아들로 말미암은 의와 구원을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브라함의 의를 가진 자들이며 아브라함의 아들로 아브라함이 약속 받은 유업을 아브라함과 함께 받을 자들인 것이다.


(21) 아브라함에게 전한 복음

(갈라디아서3:8-10)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서론 : 성경에서는 복음의 시작을 아브라함까지 거슬려 올라간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실 때 그 복음이 이방에게 전파되어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하신 사실을 말씀해 주고 있다.


1. 복음의 언약

성경에 나오는 최초의 복음은 사람이 타락한 후, 뱀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선고에 나타난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르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는 말씀이 그것이다. 여기서 여자란 ‘하와’를 의미하는데 하와는 실상인즉 교회의 상징적 존재이다. 엡 5 : 25절에서 남편들에게 당부하기를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고 말씀해 주고 있다.


여자와 교회와는 밀접한 영적 의미가 주어져 있으며 특히 창세기에 나오는 메시야의 언약은 영적 의미를 주고 있기 때문에 하와의 이름의 뜻이 “모든 산 자의 어미”라고 나오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교회를 상징해 준다. 그리고 그 후손이란 하나님께서 교회의 머리로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뱀의 후손이란 불신자들을 의미하기 때문에 불신자들은 교회와도 대적 관계에 있으며 여자의 후손인 그리스도와도 끊임없이 원수 관계에서 대적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 같은 뱀의 후손들에 의해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당함으로 발꿈치를 상하셨다.

이 복음을 맨 먼저 받은 사람이 바로 아브라함이다. 8절에서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라고 말씀해 주고 있다. 하나님은 여자라고 말씀하신 교회를 이 아브라함부터 시작하셨다. 구약적 교회로써 이스라엘을 형성하시고 이 이스라엘에서 여자의 후손을 탄생시키시고 그를 통해서 온 이방에 이르기까지 복음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셨다.


2. 아브라함의 생애에 나타난 복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실 때, 아브라함 자신을 중심 인물로 선택하시고 그로 인하여 모든 이방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복이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 즉 영생의 복을 의미한다.


아브라함은 이삭의 씨에서 메시야가 태어나실 것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다. 예수님은 요 8 : 56절에서 당신을 무시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아브라함이 복음으로 전하신 하나님의 언약을 믿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이삭을 모리아 산에 데려가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려고 했을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은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이삭을 살리실 수 있다고 하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믿음으로 이삭을 제단에 드리게 된 것이다. 이 사실은 히 11 : 17절에서 말씀해 주고 있다. 이 같은 아브라함의 믿음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실 부활에 대한 그의 믿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이런 믿음을 보시고 그에게 의롭다 하심을 주신 것이다.


9절에서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고 말씀해 준다. 이 복은 무슨 복인가? 히 11 : 10절 말씀을 보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라보았다”고 했다. 이것은 천국의 유업으로 이 유업은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이같은 복은 율법으로 받게 된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경우처럼 믿음으로 받게 된 복이다.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다고 했는데 왜냐 하면 율법으로 의를 얻고저 하는 자들은 율법 책에 기록된 모든 게명을 지켜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율법의 저주를 받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은 누구나 율법을 지킬 수 없으므로 율법의 저주 아래서 살게 되는 것이다.


결론 : 우리 인간은 율법으로는 의를 얻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율법적인 의를 요구하지 않으신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 의를 주시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의를 견고히 잡아야 한다.


(22) 율법으로 의를 얻지 못하는 이유

(갈라디아서3:11-14)

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12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ㅂ)신 21:23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서론 : 바울은 본 절에서 율법이 의를 얻지 못하는 이유를 밝히고 있는데 의는 믿음에서 나오는 것인데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1. 율법은 의를 주는 것이 그 목적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라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고 했다. 왜 그런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고 선포하셨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구약 하박국 선지를 통해서 주신 말씀인데 합 2 : 4절에서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말씀해 주고 있다. 이 말씀은 또한 아브라함의 경우를 인용하여 하박국 선지로 예언케 하신 것인데 창 15 : 6절에서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란 말씀이 그것이다. 믿음으로 살리란 말은 하나님의 의는 믿음으로 얻는다는 뜻이다.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의를 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것이다.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고 말씀해 주고 있기 때문에 10절에 있는 말씀대로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해야”하는 의무 조항이 따르므로 율법으로 의를 얻을 수 있는 인간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을 주신 목적이 인간에게 의를 주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죄를 깨닫게 하심에 있다는 사실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이다. 21절 말씀을 보면 율법이 하나님의 의와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다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 말씀을 뒷받침 해주는 말씀이 2 : 21절에 나오는데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고 했다. 2 : 16절 하반 절을 보면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고 했다. 그러면 율법을 주신 이유는 무엇인가? 롬 3 : 20절에서 이처럼 말씀해 준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이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한 것이다.


2. 그리스도인이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난 이유

13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고 말씀해 준다. 속량이란 말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값을 치루심으로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시켜 주셨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우리를 대신하시어 율법의 저주를 받으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속량의 대가를 치루신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오직 예수님 한 분만이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의 저주를 받으실 자격이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은 모두 죄인들이므로 그들은 자신의 죄 값으로 율법의 저주를 받을 뿐이기 때문에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 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 주셨다는 뜻은 무엇인갸?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율법의 저주에서 오는 모든 정죄와 형벌에서 벗어나게 하심으로 우리는 그런 저주에서 완전히 벗어났고 또 그 아래서 살아갈 이유가 없게 된 것을 의미한다. 율법은 모든 죄인들을 정죄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런 정죄와 심판이 미치지 못한다. 그리스도께서 대신 그 저주를 받으셨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이 성경에서는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났다, 혹은 해방되었다는 표현으로 나타내 보인다.

우리가 혹 죄를 범해도 우리는 율법의 정죄나 저주를 받지 않는다. 이것이 복음이다. 롬 8 : 1에서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말씀해 준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이 죄를 지어도 되는 것인가?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죄에 대하여 죽은 자들이 되었기 때문에 율법의 정죄를 받는 죄를 범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범하는 죄는 율법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죄로 이 죄는 율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새로운 법으로 다스림을 받는다. 이 법이 하나님의 징계인 것이다. 그리고 그 죄에 대한 회개로 정결함을 얻게 된다.

결론 : 하나님께서 이처럼 그리스도로 하여금 우리의 죄로 인하여 율법의 정죄를 받아 십자가에서 죽게 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율법으로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아브라함의 믿음의 후사로 하나님의 약속을 받게 하시려는데 있는 것이다.


(23) 율법보다 앞선 하나님의 언약

(갈라디아서3:15-19)

율법과 약속

15 형제들아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도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17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18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이라

19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서론 : 하나님은 인간에게 율법을 주시기 훨씬 이전에 아브라함을 통해서 복음의 언약을 주셨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율법보다 복음의 약속을 먼저 주신 것일까? 그러면 이 둘 중 어느 것이 더 우선적인 하나님의 법인가? 이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바울은 계시를 통해 19절에서 밝혀 주고 있다. 하나는 “범법함을 인하여” 주셨으며, 다른 하나는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만 존재할 것임을 말씀해 주고 있다.


1.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

15절에서 바울은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나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고 했다. 언약이란 하나의 계약이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폐할 수도 없고 그 내용을 더하거나 덜할 수도 없는 것이다. 바울은 여기서 왜 이 같은 말을 하는 것인가?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의 중대성을 강조하기 위해 이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

하나님은 율법이 세상에 나오기 430년 전에 이미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의에 관한 언약 관계를 세우셨다. 이 언약의 내용이 창 12 : 1 - 3절에 나오고 있다. 특히 2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고 하신 말씀이 그 언약의 내용이다.

하나님께서 왜 이 같은 언약을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일까? 16절에서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이고 밝혀 주면서 그 이유로 아브라함에게 “네 자손”이라고 말씀하실 때 “네 자손들”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고 하셨는데 이는 이삭을 의미함 이 아니요 그리스도를 가리킨 것이라고 밝혀 주고 있다. (창 26 : 1 - 4). 이 같은 약속을 아브라함에게 주신 일에 대하여 14절에서 밝혀 주고 있는데 이 말씀이 곧 창 3 : 15절에서 처음 밝히신 메시야의 언약을 확실히 하신 것이다.

14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 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복음의 언약으로 이 언약은 이미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언약이 그 근원이 되고 있는 것이다.


2. 율법이 약속을 폐할 수 없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절대로 폐해 질 수 없는 언약이다. 그리고 그 내용도 절대로 변경 될 수 없는 언약이다. 이 약속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믿음의 의’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모든 믿는 자들에게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시려는데 있기 때문에 영원히 변경될 수 없는 약속인 것이다. 하나님은 이 약속을 따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고 또 복음을 통해서 이방 세계에까지 구원의 은혜를 내리신 것이다. 성령의 약속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로, 영생을 의미하는 말이다.

율법은 이런 하나님의 약속이 있은지 430년 후에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것이다. 율법이 모든 사람을 죄 가운데 가두고 모든 인간들을 정죄하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의 법을 폐하게 할 수는 없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실 때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을 무효화시키기 이해 주신 것이 아니라 더욱 견고히 하기 위해 주셨다는 사실을 밝혀 주고 있는 것이다.

율법은 약속으로 주신 것이 아니라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고 말씀했다. 더 했다는 말은 하나님의 약속에 덧부쳐 주셨다는 뜻이다. 그것은 범죄하는 이스라엘에게 자신들이 범죄하는 죄를 율법을 통해서 꺠닫게 하시기 위해서 주신 것이다. 율법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음에 하나의 첨가물로 주신 것에 불과할 뿐, 결코 의를 얻을 수 있는 약속으로 주신 것이 아니란 사실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결론 : 율법은 인간에게 자신의 죄를 보여 주는 하나의 거울에 불과하다. 이 거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만 필요한 것이다. 율법은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의 존재로 필요했지만 신약 시대에 와서는 복음을 통해서 모든 세계에 회개의 복음이 전파되기 때문에 율법이 복음을 믿게 하는 수단이 되지 못한다. 복음은 아브라함의 약속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온 것이며, 이 언약은 아브라함에게 주셨고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방까지 복이 미칠 것임을 보여 주신 것이다.


(24) 율법이 약속을 거스리느냐

(갈라디아서3:20-25)

20 그 중보자는 

한 편만 위한 자가 아니나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21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하나님의 아들

23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25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


서론 :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시기 430년 전에 아브라함에게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의의 약속을 주셨는데 그렇다면 모순되는 일이 아닌가? 아브라함에게 약속만을 주시던가 아니면 율법만을 주시던가 할 것이지 상반된 두 가지를 주셨다면 어느 것이 더 중요한 것이며 둘 중 한 가지는 폐해져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바울은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고 밝힘으로 이 둘은 결코 상반되거나 모순된 것이 아니란 사실을 강조한다.


1.율법은 약속의 보조 역할을 한다.

바울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은 율법을 거스리는 것이 아니며 또 율법은 아브라함의 약속을 무효화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성경적으로 증거하고 있다. 율법으로 의를 주시려고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주셨다면 왜 아브라함에게 믿음으로 의를 얻는 약속을 주셨겠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21절에서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고 언급하므로 율법은 결코 의를 주시려고 주신 것이 아니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면서 바울은 율법이 복음의 약속에 반드시 필요한 존재임을 22, 23절에서 논증하고 있다. 율법은 모든 사람을 죄아래 가두었는데 이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고 했다. 율법의 직능은 모든 인류를 죄 아래 가두는 일이다. 세상에는 의인이 하나도 없으며 아담의 후손인 모든 인간이 죄인들인데 이 같은 사실을 깨닫게 해 주는 역할을 율법이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이 아니고서는 죄를 깨달을 수가 없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왜 이처럼 율법으로 모든 인간을 죄 아래 가두어 둔 것인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고 한 것이다. 말하자면 죄 인인 모든 인간은 그 죄로 율법의 정죄를 받아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이게 되어 아무런 소망이 없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약속의 후사가 되어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얻게 되어 구원에 이르게 하신 것이라고 풀고 있는 것이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하는 롬 5 : 12절의 말씀을 거울로 보여 주는 것이 바로 율법이며 율법의 직능은 바로 이 같은 목적을 이루는데 있다고 거듭거듭 강조하고 있다.


2. 그리스도의 중보적 위치

20절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 그리스도의 중보직의 언급은 비록 짧지만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시는 일에 그리스도를 중보적 위치에 올려놓으신 사실을 말씀해 준다. 그러면 그리스도는 어떻게 중보의 직분을 이루심으로 우리들로 율법에서도 얻을 수 없는 의를 믿음으로 얻게 하신 것인가? 첫째로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 값을 하나님께 갚아 드림으로 중보자가 되셨다. 죄인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세워 드린 것이다. 하나님은 죄인의 죄를 그리스도에게 넘겨시어 우리를 대신하여 심판하셨기 때문에 죄인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시게 된 것이다. 한편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셨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를 주시는 일에는 이처럼 그리스도의 중보자적인 역할이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이 같은 중보자적인 사역을 이루신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은 모든 인류를 죄인으로 규정하므로 소망이 없음을 보여 주고 죄인들이 하나님의 약속이 아니고서는 구원에 이를 길이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혀 놓은 것이다. 율법은 바로 이 일 때문에 인간들에게 필요 불가결하게 존재하게 된 것이다.

결론 : 이처럼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의 존재로 필요했으며 우리는 이 몽학 선생의 인도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 선생 아래 있을 필요가 없어졌다. 더 좋은 약속을 받았기 때문이다.


(25) 믿음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된 우리

(갈라디아서3:26-29)

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29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서론 : 이제 바울은 아직까지 여러 가지로 밝힌 율법과 약속과의 관계를 최종적으로 정리할 단계에 이르렀다. 바울은 26절에서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것과 28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인류가 하나가 되었다는 것과 29절에서 그리스도께 속한 자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란 사실을 밝히고 있다.


1. 믿음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

26절에서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고 말해 준다. 믿음의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의미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 우리도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 그러면 그 믿음이란 무엇인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다. 이 믿음이 아브라함이 받은 믿음과 차이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믿음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믿는 일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잇는 믿음의 후사며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유업을 받을 믿음인 것이다.


2. 그리스도로 옷 입는 믿음

27절에서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다.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는 말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다는 뜻도 되고 그의 의를 소유했다는 뜻도 된다.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라고 했다. 여기서 말씀하는 세례는 단순한 물세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와의 영적인 연합을 의미하는 세례로 영적 세례, 즉 성령 세례를 말한다. 성령 세례는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는 표식이다. 이 세례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뤄진다. 이 세례에 대해서 롬 6 : 1 - 5절에 이르러 상세히 말씀해 주고 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고 했다. 그리고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고 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함께 세례를 받았다는 말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의미하며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있는 자만이 그리스도로 옷 입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만이 하나님의 약속에 동참자가 되어 그의 생명을 받을 수 있고 그의 의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3.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 하나님의 의

바울은 28절에서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 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고 말하고 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인종이나 남녀의 차별이 없다는 것으로 유대인과 이방인의 담이 무너졌다는 사실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복음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 이 말은 유대인들에게는 치명적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만 율법을 주시고 그 율법을 통해서 의를 주셨기 때문에 자기 백성만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그들의 성별 됨과 우월성을 자랑하고 있지만 실인즉 이 같은 담벽은 복음을 통해서 이미 무너진 것이다. 이 같은 일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고 하신 말씀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된 것을 의미한다.


결론 : 바울은 29절에서 누가 아브라함의 자손인가에 대한 성경적인 답을 내리고 있다.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를 자니라”고 했다.

원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 자손에 대한 약속을 하실 때, 이삭으로부터 시작하여 번성할 이스라엘 민족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 아니다. 유대인들은 다만 표면적인 혈통만을 주장했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표면적 약속이 아니라 이면적, 즉 영적 약속이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을 받은 모든 사람들을 가리킨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그가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유업을 이을 자격자인 것이다.


갈라디아서 4장 (26 - 31)

◆ 밤중소리 01-30 | VIEW : 889


(26) 때가 차서 여자에게서 나게 하신 아들

(갈라디아서4:1-5)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그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나니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 노릇 하였더니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서론 : 바울은 본문에서 율법이 필요했든 일과 때가 차서 여자에게서 아들을 보내시어 그 아들로 구속의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언급해 준다.


1. 후견인으로서의 율법

바울은 1절에서 약속을 받을 자들의 어렸을 때의 위치를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후견인이란 어린아이를 책임지는 자를 말하고 청지기란 가문의 재산을 관리하는 자를 말한다. 말하자면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까지의 모든 일을 어렸을 때의 일이라고 말하고 어렸을 때에 후견인과 청지기의 관리 아래 있었던 것처럼 율법 아래 있었다고 했다. 로마 시대의 관습법상 미성년자는 14세에 이르기까지 그의 아버지가 의뢰한 후견인 아래 있었으며 재산권은 25세가 될 때까지 청지기가 대신 관리했다.

유업을 이을 자들이 모든 일의 주인이기는 하지만 성년이 되기까지는 이처럼 후견인과 청지기의 돌봄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종과 다름이 없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말하자면 율법은 인류에게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구실을 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종의 기간은 무작정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성년이 되기까지 즉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에 한한다고 말한다. 아버지의 정한 때란 하나님의 약속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태어나실 그 때를 의미한다.

그러면 바울은 왜 율법을 후견인이나 청지기로 비유한 것일까?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시기 전까지 모든 인류는 자유함을 누리는 사람이 한사람도 없었다는 사실을 의미하며 율법으로 의를 얻을 수 있다고 하는 유대인들도 실인즉 후견인과 청지기에게 매인 자로 자유를 누리거나 의를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음을 강조하는 비유가 된다.

바울은 3절에서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하였더니”라고 말한다. 세상 초등 학문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의 약속에서가 아닌 다른 모든 인간적인 의의 방법을 의미하는데 율법도 이 초등 학문 중에 하나요, 선행으로 의를 얻을 수 있다거나, 또 다른 어떤 방법으로 의를 얻을 수 있다고 하는 종류, 인간의 철학이나 이방 종교 등을 의미하는 말이다. 모든 인류는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시기 이전까지 바로 이 같은 초둥학문에 얽매어 그 종노릇을 해 왔던 것이다.


2. 때가 차매 그 아들을 보내심

4절에서 “때가 찼다”는 말씀을 하고 있다. 범사에는 때가 있으며 하나님은 그 때를 따라 역사 하신다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실 시기가 된 것이다. 이처럼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이 언약의 자손으로 보내시는 메시야는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남이 아니라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말씀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사람이 되셨다.는 뜻이다. 여자란 동정녀 마리아를 의미하며 이 여인은 요셉과의 사이에 태어난 아들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을 잉태한 것이다. 이 같은 표현은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아울러 보이신 것이다.

하나님은 그 아들을 율법 아래 나게 하셨다. 율법 아래 나셨다는 말씀은 율법이 지배하는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음을 의미한다. 그러면 그리스도는 왜 율법이 지배하고 있는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것인가? 그 이유에 대하여 “율법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해석해 준다. 하나님의 아들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셔야 한다. 그래야 그 율법에서 해방할 수 있고 율법이 아닌 하나님의 언약의 자녀로 아브라함의 복을 받게 되는 것이다. 속량이란 말은 우리가 갚아야 할 대가를 대신 갚아 주므로 우리를 율법의 종의 자리에서 자유케 하는 일을 말한다.


결론 : 그리스도는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의 정죄와 저주를 받으사 우리로 그 율법에서 벗어나게 하셨다. 그리고 우리들로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셨으며 함께 하나님의 유업의 후사가 되게 하신 것이다.


(27)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시는 아버지의 영

(갈라디아서4:6-7)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서론 : 하나님의 약속은 율법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원래가 그 신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다. 창세 전에 이미 택정 하셨을 때부터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을 가진 것이다. 그러나 때가 이르기까지 후견인과 청지기인 율법 아래서 지내게 하시고 때가 이르매 아들의 명분을 주시고 아들로서의 유업을 이을 자로 결정하셨다.


1. 아들의 영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받은 그의 백성들에게 아들의 영을 보내시어 그의 신분에 알맞은 호칭을 받으신다. 하나님은 약속을 받은 백성들로 자신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다고 말씀해 준다. “아바 아버지”에 있어서 아바란 말은 구약에는 나타나 있지 않은 생소한 말이다. 이 말은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처음 사용하신 말이다(막 14 : 36).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아바’란 말은 ‘압바’라고 읽는 아람 말인데 아버지와 아들과의 가장 친밀한 관계를 나타낸 말이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이처럼 부자 지간의 가장 친밀한 관계를 의미하는 ‘아바 아버지’란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 것인가? 세상 사람들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는 한다. 그러나 그들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정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아바 아버지’란 감격스러운 말로 부르는 일은 전혀 없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것은 내 속에 아들의 영이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신분이 하나님의 아들 인고로 하나님께서 그 아들의 영을 보내 주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다.

아들의 영이란 성령을 의미한다. 성령은 아들을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신 데 이 성령이 아들에게 주시는 그리스도의 영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전혀 성령의 역사이기 때문에 아버지와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아들의 영이신 성령이 임재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님께 대한 바른 신앙고백을 한 베드로를 향하여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하셨다. 우리에게 영적인 깨달음을 주시고 영적인 지식을 주시는 이는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은 아들의 영이신 성령을 통하여 알게 하신다.


1. 종이 아니라 아들된 우리

7절에서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말씀해 준다. ‘이 후’라는 말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아들이 된 후를 말한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법적인 언약 관계로 성립되었다. 그리스도와 하나님과의 관계와는 다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대하여 하나뿐이신 아들로 이를 독생자로 표현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아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된 신분으로 이 법적 신분을 양자라고 말한다. 그러나 양자도 법적으로 유업을 이을 상속권의 자격이 주어져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난날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하고 있었다. 율법의 종, 양심의 종, 세상 풍습과 세상 지식의 종노릇을 해 왔었다. 이 종의 멍에는 인생의 무거운 짐이 되었고 그 결과는 오직 사망뿐이었지만 그 짐을 벗을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아들로 인하여 그 짐을 벗게 된 것이다.

결론 : 예수님께서는 마 11 : 28절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셨는데 이처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종의 멍에의 짐을 벗은 우리는 또 그 아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가지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제 후로는 종이 아니라 아들이라고 말씀해 준다. 우리가 종의 멍에를 벗었으니 이제는 율법에 메어 살 자들이 아니다. 율법의 정죄 아래서 율법의 종노릇이나 하여 율법에 끌려 다닐 자들이 아닌 것이다. 율법도 주관하시고 양심도 주관하시고 인생의 생사 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를 소유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라고 말씀해 준다.


(28) 왜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려느냐

(갈라디아서 4:8-11)


서론 : 우리는 본문에서 유대교에 열심인 거짓 선생들이 갈라디아 교회에 나타나 순박한 믿음의 갈라디아 교인들로 유혹을 받게 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된다. 10절에서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란 말씀에서 율법적인 절기를 지키는 일을 다시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 하나님을 알았을 때와 몰랐을 때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그 때’란 시기는 우리가 아직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얻지 못했을 때를 말한다. 그 때에 우리는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을 해 왔었다. ‘하나님이 아닌 자들’이란 양심이나 율법이나 인간 사회와 인간의 마음을 지배하는 지식이나 철학이나 습성을 가리킨 말이다. 우리는 모두 그 아래서 종노릇하는 생애를 보내 온 것이다. 율법이나 양심이나 어떤 종교적 경전에 끌려 다녔다.

그러나 바울은 9절에서 “이제는”이란 말로 이제 새로운 생애를 살아가게 된 사실을 말하고 있다. 이제는 이란 말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된 새로운 우리의 위치를 의미한다. 갈라디아 교인들도 그 같은 인간의 본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을 하였었는데 바울이 그들에게 전한 복음으로 그런 것들로부터 벗어나게 된 것이다. 이제는 그들이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그뿐 아니라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다는 사실을 밝혀 준다.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는 말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아들로 삼으시려고 그의 아들을 보내사 우리의 죄를 대속시키신 그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안다고 자랑하지만 그들은 아들이 없는 하나님을 알 뿐 아들을 인정하지 않는다. 성경에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가? 요일 2 : 23절에서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며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고 말씀해 준다. 하나님의 아신바 되었다는 말은 하나님의 아들로 인치심을 받은 것을 의미한다.


2. 왜 초등 학문에 얽매어 종노릇하려느냐?

갈라디아 교인들은 이상과 같은 바울의 복음적인 논증으로 그들의 위치가 분명해 졌는데도 그들은 아직도 믿음에 굳게 서지 못하고 거짓 선생들의 꾐에 그들의 믿음이 흔들리고 있었던 것이다. 바울은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하려 하느냐”고 책망하고 있다. 그들은 이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에 얽매어 그들의 종노릇이나 하고 있을 그런 위치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다. 왜 다시 율법을 지키려는 생활을 통해서 다시 율법의 지배 아래 들어가 죄의 종노릇을 하려는 것이냐고 책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갈라디아 교인들이 따랐다고 하는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이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인가? 10절에서 밝혀 준다.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라는 말씀에서 유대인들이 율법에서 지키는 구약적인 율법적 의식을 지키는 생활을 시도한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날이란 금식일과 안식일을 지키는 문제로 금식일과 안식일을 지키는 일에 장로의 유전과 같은 율법적인 조항들을 가미한 것으로 보인다. 달이란 달마다 반복되는 여러 가지 율법적 행사를 의미하고 절기란 율법에서 지키는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 등을 말한다. 해란 7년마다 돌아오는 안식년, 50년 만에 돌아오는 희년 등을 말하며 이 같은 행사에는 자세한 율법적 규례가 따랐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일에 대한 그림자로 이미 모두 성취되어 사문화뒨 것들이다.


결론 : 이 같은 일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전한 것을 받았으며 그런 것들로부터 완전히 자유함을 얻은 그들이 그런 율법적 규례를 따르는 일은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는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복음에는 율법이나 양심보다 우월한 생명의 길이 있고 하나님의 의가 있다. 그리스도인은 오직 복음만을 믿는 믿음에서 한치도 양보해서는 안 된다.


(29)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갈라디아서4:12-16)

12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13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14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15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언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

16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서론 : 바울은 본문에서 갈라디아 교인들이 자신에게 대접해 준 후의를 상기시키면서 복음으로 맺어진 바울과 갈라디아 교인들과의 끈끈한 사랑을 언급하고 있다. 바울이 이곳에서 이 같은 말을 하는 것은 그들이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그것을 액면대로 받아 드림으로 그들에게 감사가 있었으며 바울에 대하여 마치 천사와 같이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한 사실을 생각해 보라는 뜻에서이다.


1.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바울은 12절에서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고 말하고 있다. 바울은 유대인이요 율법을 숭상하는 바리새인이며 학식이 많은 사람이었지만 그는 이방인과 유대인을 구별하지 않고 그들과 함께 지냈으며 그들의 생활에 함께 어울려 형제로서의 교제를 가졌던 것이다. 바울이 유대인이라고 하는 특권 의식도 아무 것도 아니며 율법도 의로움을 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이런 것들을 모두 버리고 갈라디아 교인들과 더불어 믿음의 생활을 해 온 것이다.

바울이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고 한 말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바울의 입장을 이해해 달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바울이 유대인이었음에도 그가 율법에서 자유를 얻고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것처럼 세상의 초등 학문인 율법으로 돌아가지 말고 자기처럼 그런 것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으라는 권면이다. 유대인들조차 질 수 없는 힘겨운 율법을 지려는 생각을 버리고 우리로 자유케 하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의를 얻는 참 이스라엘이 되라는 권고인 것이다.


2. 갈라디아 교인들이 바울을 대한 태도

지난날 갈라디아 교인들은 바울에게 최상의 예우로 대접했다. 그것은 그들이 바울이 전한 복음을 믿었기 때문이며 복음의 사자를 대접하는 예우에서였다. 바울이 12절 하반절에서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고 말했는데 그것 그런데도 그들이 지금은 바울의 마음을 아프게 하며 자기를 해롭게 하는 이유에 대하여 묻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처음 갈라디아 교회를 개척했을 당시, 그의 몸에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었다”고 했다. 이 말은 바울을 오랫동안 괴롭힌 바울의 지병을 말하는데 바울은 이 병을 사탄의 사자로 표현하고 있으며 고후 12 : 7절 이하에서 이 병을 고쳐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한 사실을 고백하고 있다. 바울은 세 번씩이나 간절히 간구했지만 그가 받은 응답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는 말씀이었다. 바울은 이 응답으로 인하여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기뻐했노라고 했는데 갈라디아 교회에서 복음을 전할 때에도 이 같은 사탄의 사자가 바울의 몸에 있었든 상태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바울의 이 같은 연약함을 업신여기지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했다고 말하면서 오히려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했다는 사실을 회상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주의 종에 대한 사랑과 신뢰가 얼마나 두터웠는지 할 수만 있었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주었으리라”고 말한다.


바울은 그것이 그들의 복이라고 말하고 그 때 베풀었던 그들의 그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16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고 질문하고 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이처럼 지난날 바울에 대하여 선히 대접한 사실을 잊고 지금은 어리석게도 마치 복음의 원수인 것처럼 거리를 두고 있으니 이런 일이 어찌 된 일이냐고 따져 묻고 있는 것이다. 교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 생활을 하고 있을 때는 하나님의 종과의 관계가 사랑 가운데 원만하다. 그들이 바울의 말에 순종하고 바울의 허물을 감싸주고 눈이라도 빼어 줄 수 있을 정도로 사랑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잘못된 교리에 미혹되고 시험이 들었을 때는 그 사랑이 사라지고 오히려 원수처럼 여겨 싫어하고 떠나며 경원하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결론 :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은혜 생활을 할 때에는 이처럼 목자의 허물을 사랑으로 덮어 주고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대접한 사실을 돌아보면서 이 같은 일은 그들에게 복이 된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가라라디아 교인들처럼 어리석은 길을 택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지 말자.


(30) 두 가지 열심

(갈라디아서4:17-18)

17 그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시켜 

너희로 그들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

18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서론 : 열심을 낸다고 모두 좋은 일이 아니다. 잘못된 복음을 전하는 이단자들의 열심은 사람의 영혼을 지옥에 집어넣는 열심이기 때문에 잘못된 열심에 미혹 받지 말아야 한다.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와 갈라디아 교인들을 꾀어 세상의 초등학문으로 돌아가게 한 거짓 선생들의 열심은 대단한 듯 하다. 그들의 열심에 마음이 끌려 그들이 전하는 다른 복음에 미혹 받아 결국 바울의 수고에 큰 손상을 주었고 바울의 분노를 사기에 이르렀다.


1. 나쁜 일의 열심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나쁜 일에 열심 있는 자들의 그 열심을 경계할 것을 말해 준다. 바울은 거짓 선생들의 열심 있는 행동에 대하여 “저회가 너희를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이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 붙여 너희로 저희를 대하여 열심 내게 하려 함이라”고 했다.

우리는 다른 열심만을 보면 안 된다. 사탄의 일꾼들은 양의 너울을 썼을 뿐 아니라 열심도 대단하다. 여호와의 증인들의 전도의 열심을 보라, 기성 교회가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열심이 득심하다. 그들의 그 열심이 어디서 나온 것일까?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

나는 엊그제 발행한 들소리 신문이라고 하는 교계 신문을 보고 깜짝 놀랐다. 통합측 교회의 김경선 장로란 분이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책을 썼는데 그와의 대담에서 안식교는 이단이 아니라 우리들보다 더 열심 있고 경건한 교리를 가진 교단으로 그들을 이단 시 하지 말고 한 형제처럼 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 뜻에서 이 책을 쓰기도 했다는 것이다. 안식 교회에서는 율법에 있는 토요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는 주장으로 기성 교회의 주일 안식일을 매도하며 토요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면 구원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뿐 아니라 종말에 우상 앞에 경배하는 것이나 짐승의 표를 받는 일이 모두 일요일을 주일로 지키는 사람들에게 주어진다고 협박하면서 기성 교회에 파고 들어와 많은 성도들을 현혹시켜 안식교로 유인하고 있다.

그들의 열심은 바울이 말한 대로 좋은 뜻의 열심이 아니며 진정한 복음, 구원의 성경적 도리를 흐리게 하려는 미혹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경계해야 하며 제칠일 안식일에 미혹 받아서는 안 된다. 이단자들의 열심이나 경건은 위장된 것으로 겉으로가 아니라 진리의 말씀으로 분별해야 한다.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전한 율법주의 신봉자들의 다른 복음은 두 가지의 숨겨진 뜻이 있었다. 하나는 “오직 너희를 이간 붙이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너희로 저희를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함이라”고 한 것이다. 이단자들의 침투는 하나님의 교회로 이간시키는 일을 하므로 분열을 조장한다. 그리고 이 같은 이간은 갈라디아 교인들과 바울과의 사이에도 선을 그어 놓았다. 그리고 이처럼 갈라디아 교인에게 열심을 내게 한 그 열심을 이제는 자신들에게 내게 하려는 것이다. 이단에 빠져 들어간 사람들을 보면 결국은 열심을 내어 그들의 충실한 종노릇을 하게 되는 것이다.


2. 성도의 열심

바울은 18절에서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언제든지 좋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을 품어야 한다. 그러면 바울이 말한 좋은 일이란 무엇인가? 성경적 진리를 말한다.


㉠ 고린도 교인들은 성도들을 섬기는 일에 얼마나 열심이었던지 많은 사람들을 격동시켰다고 말해 준다(고후 9 : 2).


㉡ 딛 2 : 14절에서 우리를 구속해 주신 것은 우리들로 “선한 일에 열심 있는 친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해 준다. 그리스도인은 열심을 다하여 과실을 많이 맺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 딤후 4 : 2절에서 말씀을 전파하는 일에 항상 힘쓰라고 하셨다. 하늘의 상급을 바라볼 수 있어야 전도에 힘 쓸 수 있다.


결론 : 성도들의 이 같은 열심은 좋은 열심으로 권장할 만하다. 

좋다는 뜻은 하나님이 인정해 주신다는 것.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 

성령의 열매라는 의미다. 

좋은 일에 열심을 내는 성도가 되자.


(31) 계집종의 자녀와 약속의 자녀

(갈라디아서4:19-31)

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20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언성을 높이려 함은 

너희에 대하여 의혹이 있음이라

 

하갈과 사라

21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22 기록된 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23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2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25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 노릇 하고

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27 기록된 바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28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29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30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31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


서론 :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복음과 율법과의 관계를 이해시키기 위해 온 정성을 쏟고 있다. 그는 아브라함의 두 아들의 경우를 계집종에게서 난 아들의 경우와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난 아들의 경우를 대조시켜 비유적으로 해석해 준다.


1. 다시 해산하는 수고를 해야 할 바울

바울은 19절에서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까지 다시 너희를 해산하는 수고를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에 의하여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한 해산하는 수고란 그들의 중생을 위한 노력이 아니라 그들의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그들을 양육하는 일을 의미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는 일로 구원의 모든 것이 성취되었다고 여기면 안 된다. 갈라디아 교회의 경우, 그들은 거짓 선생들에 의해 유혹을 받아 잠시 동안 진리에서 떠나 있게 되었으며 주님의 마음을 슬프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주의 종들에 의해 끊임없이 양육 받아야 하며 자기 마음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신앙과 은혜의 자리에서 잠시 동안 떨어진 상태에 있었다. 바울은 그들을 다시 신앙적으로 일으켜 세워야 한다. 그런 일에는 하나님의 종의 해산의 수고가 따르는 것이다. “해산의 수고”란 복음으로 양무리들을 양육하는 일에 대한 어려움을 표현한 말이다. 하나님의 종들은 그들을 위해 바울과 같은 심정으로 수고해야 하는데 기도로 수고하고 올바로 인도하기 위하여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정성을 쏟아야 한다.

바울은 20절에서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음성을 변하려 함은 너희를 대하여 의심이 있음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 말의 뜻은 바울은 아직도 갈라디아 교인들의 중심을 잘 모르고 있는 형편이며 또 그들이 바울의 권고와 책망의 말을 어떻게 받아 드릴는지 모르기 때문에 지극히 조심스럽게 처신해야 할 입장에 있다는 것을 말한다. 바울은 마땅히 책망할 일을 책망해야 하겠지만 그러나 그들이 받을지 모를 상처를 인하여 책망하고 싶으나 참고 권면 할 때도 조심성 있게 하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다. 교인들은 주의 종으로 목소리를 변케 해서는 안 된다. 주의 종이 무슨 말을 해도 믿음으로 받아 드릴 수 있어야 한다. 주의 종이 무슨 말을 할 때, 받아 드리기를 싫어한다면 나에 대하여 그의 목소리를 변하려 할 것이다.


2. 비유로 설명하는 두 언약

바울은 21절에서 이제 복음을 멀리하고 율법을 따르려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는 서두로 아브라함의 두 아들의 경우를 비유로 들어 해석해 주고 있다.


아브라함에게 있는 두 아들이란 이삭과 이스마엘을 가리킨다. 아브라함에게는 이들 외에도 더 많은 아들이 있었지만 이들만을 등장시키고 있는 것은 이들의 출생이 하나님의 언약과 싶은 관계기 있기 때문이다.


이스마엘의 경우는 계집종인 하갈에서 출생했다. 그런데 이 아들은 육체를 따라 태어났다고 말씀해 준다. 육체를 따라 났다는 말은 하나님의 약속이 없이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선택된 아들이 아니란 뜻이다. 이 아들은 바로 시내 산에 속한 아들로 율법 아래 속한 자란 뜻이다. 이들은 율법의 종으로 평생을 지내야 하기 때문에 소망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삭의 경우는 다르다. 그는 사라나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주셨고 그 약속에 따라 세상에 태어난 아들이다. 그래서 이들은 이스마엘과 같은 시내산에 속한 아들인 것이 아니라, “오지 위에 있는 예루살렘”에 속한 아들이라고 하신 것이다. 율법에 속한 자가 아니라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께 속한 자로 약속의 아들로 하늘의 약속의 유업을 이을 자인 것이다.


결론 : 바울은 결론적으로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고 말해 준다. 

그러므로 너희는 율법에 속한 이스마엘처럼 종의 자녀가 되지 말고 

약속의 아들 이삭처럼 유업을 이을 자임을 알라는 것이다. 

또한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들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니 

그런 자들의 핍박을 진리의 말씀으로 이겨야 할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갈라디사서 5장 (32 - 41)

◆ 밤중소리 01-30 | VIEW : 649


(32)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갈라디아서5:1-4)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사랑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서론 : 바울은 1절에서 말하기를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했다. 성경에서 자유란 말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죄에서의 자유, 율법에서의 자유 등, 그러면 이 자유란 무엇을 의미하는 말인가?


1. 주님이 주신 자유

바울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 분은 그리스도라고 했다. 이 자유란 말은 우리에게 새로운 생활의 방향을 제시하는 의미 있는 말이다. 이 자유란 첫째로 율법에서의 자유를 말한다. 왜 율법에서의 자유란 말을 사용하고 있는가? 그것은 사람들은 모두 율법 아래 태어났기 때문에 율법의 종의 신분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종의 자리에서 절대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율법 아래에서 우리를 자유케 하셨는가? 이에 대하여 4 : 4-5절에서 이처럼 말씀해 준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 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다.

율법에서 자유케 하셨다는 말은 율법의 속박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하셨다는 말이며 율법에서 벗어남으로 율법의 정죄에서 해방된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자유인 것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면 율법의 메임에서 자유를 누린다. 그러면 이 같은 자유는 어떻게 얻게 되었나?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사 속량 하셨다고 했다. 속량이란 말은 율법의 종으로 율법에 메인 우리들을 속전을 주시고 사셨다는 뜻이다. 그 속전은 곧 그리스도의 피로써 이루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피로 값 주고 우리를 율법의 종의 멍에를 벗겨 주셨다. 그래서 1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이 자유는 대단히 값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피로 쟁취하여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 귀중한 자유를 어떻게 간수하라고 했나? “그러므로 굳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한 것이다. 굳세게 서란 말은 믿음에 굳게 서란 뜻이다. 믿음에 서 있을 때만이 율법의 멍에를 메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2. 할례의 무익

2절에서 갈라디아 교인들이 율법의 종의 멍에를 멘 일 중의 하나가 할례였다. 그래서 바울은 2절에서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고 말한다. 유대인들이 할례를 받는 이유가 무엇인가? 할례란 성별 된 백성의 표로 받는 율법적 의식이다. 이 의식은 아브라함에게 명하심으로 시작되었다. 유대인들은 이 할례를 통해서 자신들이 율법이 없는 이방인과 구별된다고 하는 확고한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갈라디아 교회에 나타난 거짓 선생들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할례를 받아야 하나님의 백성으로 성별 된다고 가르쳤으며 갈라디아 교인들은 그 가르침을 받아 드려 그들 중에 많은 성도들이 할례 의식을 치렀다는 사실을 바울은 소식을 듣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바울은 이 할례에 대하여 단호하게 공격한다.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다고 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유인이 없다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믿음이 무용지물이 된다는 뜻이다. 복음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이 이루어지며,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말씀해 준다. 할례가 하나님의 백성된 표인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이 표가 되는 것이다. 만약 갈라디아 교인들이 할례를 받는다면 그들은 마땅히 율법을 지켜야 할 의무가 주어지게 된다. 왜냐 하면 할례는 믿음이 아니라 율법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할례를 받는다면 그 사람은 율법 전체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다시 율법의 종이 되어 율법의 정죄아래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론 : 바울은 4절에서 결론적으로 이처럼 말해 준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고 했다. 율법을 지키려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은혜밖에 있는 자들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 자요 은혜의 자리에서도 떨어진 자가 아닐 수 없다.


(33)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갈라디아서5:5-6)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서론 :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할례나 무 할례가 효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역사 하는 믿음뿐임을 사도 바울은 강조한다.


1. 의의 소망을 기다리는 그리스도인

바울은 5절에서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린다”고 말씀해 준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소유자가 된 신분이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되는데 이 연합은 그리스도의 모든 소유가 믿음을 통해서 내 소유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의의 소망을 기다린다”고 했다. 바울이 소망으로 기다리는 이 의의 소망이란 우리가 온전히 의인을 이루게 되는 소망으로 이 소망은 부활로 성취된다. 그리스도인은 율법 앞에서는 죄인이다. 육체의 몸으로는 죄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의인인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게 된 자유다. 그리스도는 이 자유를 주시기 위해 우리를 죄와 율법의 종의 자리에서 속량해 주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늘 탄식하는 생활을 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지 못하기 때문이요 우리의 육체가 죄의 습성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우리를 죄 가운데로 이끌어 가기 때문이다. 아마 이 같은 현실에서 오는 우리의 탄식은 이 땅에서 삶이 계속되는 한, 그칠 날이 없을 것이다. 우리는 법적으로는 분명히 율법이나 양심이나 죄악에서 벗어나 의인이 된 사람들이지만 하나님 앞에는 날마다 죄인의 모습으로 고민하고 번뇌하며 탄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멍에를 벗고 온전한 의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그날을 소망으로 살아가는 생활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인 것이다.


2. 효력이 없는 할례나 무 할례

바울은 6절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 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서 역사 하는 믿음뿐이니라”고 말하고 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거짓 선생들의 꾐에 빠져 할례를 받은 일에 대하여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다”고 단정하고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고 말하므로 할례는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도 효력도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혔다. 그러면 무 할례가 효력이 없다는 말은 무엇인가?

그리스도 안에서는 할례를 받는 일도 구원을 얻는 일이나 의롭다 함을 얻는 일에 아무런 효력을 줄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율법의 종으로 율법을 지켜야 하며 율법의 멍에를 메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무 할례가 효력이 있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여기서 왜 무 할례를 언급하고 있는 것인가? 무 할례란 할례를 받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이 할례를 받지 않는다고 그 사람에게 의롭게 하는 일에 효력이 있는 것이 아니란 의미다. 바울이 할례 받는 일을 공격했다고 해서 바울이 무 할례자냐? 무 할례가 할례보다 더 의롭다는 것인가? 아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일에 할례나 무 할례나 똑같이 아무런 효력이 없다는 뜻이다. 할례를 자랑하는 자는 율법의 종으로 멸망 받지만 그렇다고 무할례가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믿음이 없다면 무 할례자나 할례자나 율법의 정죄를 받아 멸망하기는 마찬가지다.

바울은 “사랑으로써 역사 하는 믿음뿐이니라”고 했다. 우리에게 의롭다 함을 주며 구원의 효력을 주는 것은 오직 “믿음” 뿐인데 바울은 6절에서 이 믿음에 대해서 “사랑으로써 역사 하는 믿음”이라고 언급한다. 믿음은 사랑으로 역사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소유한 믿음의 뿌리는 사랑에 있다. 사랑이 믿음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그의 아들을 보내시어 십자가에서 속죄케 하심으로 우리에게 믿음을 가지게 하셨다. 이 같은 사랑이 없다면 믿음이 역사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사랑을 전함으로 많은 사람들로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결론 :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새로운 계명도 이 사랑이시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나타나지 않았다면 우리에게 믿음이 존재할 수 없으며 또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은 계속하여 소유할 수 없을 것이다.


(34) 적은 누룩의 위력

(갈라디아서5:7-9)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하더냐

그 권면은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니라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서론 : 갈라디아 교인들이 진리에서 떠나게 된 것은 갈라디아 교회에 몰래 들어온 “적은 누룩”으로 말미암아서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처음에 달음질을 잘 하였었다. 그러나 적은 누룩이 그들의 길을 막아 진리를 순종치 않게 한 것이다.


1. 달음질을 막은 자는 누구냐?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7절에서 “너희가 달음질을 잘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치 않게 하더냐”고 묻고 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달음질을 잘 하고 있었다. 달음질을 잘 했다는 말은 소망 가운데 올바른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바울은 우리의 신앙생활을 하나의 다름질에 비유해서 말해 준다. 고전 9 : 24절에서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 했다. 누가 달음질을 잘 하는 자냐?


① 올바른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는 달음질이 잘하는 달음질이다. 달음질에는 목표점이 있게 마련이다. 달음질하는 사람이 그 목표점이 아닌 다른 길로 달음질 한다면 그것은 헛된 달음질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한다”고 했다. 이 길은 믿음의 길이다. 믿음의 길이 아닌 길은 아무리 잘 달려도 향방 없이 달려가는 달음질이요 허공을 치는 것 같은 달음질이다. 예수님이 내가 길이라고 하신 말씀은 우리가 달려갈 믿음의 길이 되신다는 의미가 된다.


② 진리를 굳게 잡고 달려가는 달음질을 잘해야 한다. 믿음의 길은 진리의 길이다. 진리가 믿음의 길을 밝게 비취어 준다. 진리를 떠나면 이미 믿음의 길에서 떠난 달음질이 된다. 엡 6 : 14절에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라”고 말씀해 주고 있다. 우리의 속사람의 허리를 진리의 띠로 단단히 동일 때, 달음질을 잘 할 수 있는 것이다.


③ 상을 바라보면서 달려가야 달음질을 잘 할 수 있다. 바울의 달음질은 이 상을 좇아가는 일로 그의 달음질을 달려갔다고 말씀해 준다. 빌 3 : 13,14절에서 이처럼 말씀해 준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표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고 했다. 바울이 이 달음질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같은 위의 상을 바라보면서 달려갔기 때문이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처음에 이 같은 달음질을 잘 했으므로 바울이 그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그런데 그들의 이 달음질을 막는 자가 나타난 것이다. 그 결과 그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진리를 순종치 않게 하였다”고 했다. 우리의 달음질에 고장이 난 것을 진단할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진리를 순종치 않게 된 사실을 보아야 한다. 잘못된 가르침은 언제나 우리들로 진리를 거스리게 한다. 그들의 목적이 바로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사탄은 언제나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값진 보화인 진리를 빼앗기 위해 거짓된 교훈으로 가까이 온다. 갈라디아 교회에 나타난 거짓 선생들은 할례를 가지고 들어가 갈라디아 교인들로 다시 율법의 종으로 삼기 위해 미혹했다.


2. 온 덩이에 퍼지게 하는 적은 누룩

거짓 선생들의 가르침을 바울은 권면이라고 말하면서 그런 권면은 그리스도에게서 난 것이 아님을 분명히 밝혀 준다. 우리를 부르신 그리스도에게서 난 것이란 곧 믿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이 믿음만을 주셨다. 믿음 외에 다른 가르침은 잘못된 교훈으로 우리의 자유를 빼앗아 다시 율법의 종으로 만들려는 사탄의 간계에서 나온 것이다.


결론 : 처음에 교회에 들어오는 다른 복음은 적은 것으로 대단치 않게 생각하기 쉽니다. 그러나 바울은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진다”고 경종해 주고 있다. 악은 언제나 누룩과 같은 역할을 한다. 가루를 부풀게 하는 누룩은 그 덩이가 큰 것이 아니다. 언제나 적은 소량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안에는 온 덩이를 능히 부풀게 할 만한 악의 능력이 들어 있는 것이다. 이 누룩에 감염되면 우리의 마음에서 평안을 빼앗고 순종을 빼앗고 소망을 빼앗는다. 우리의 마음에서 교회에서 누룩을 제하자.


(35) 요동케 하는 자는 심판을 받으리라

(갈라디아서5:10-12)

10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하게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11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박해를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걸림돌이 제거되었으리니

12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은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


서론 : 갈라디아 교인들이 비록 바울이 전한 복음을 떠나 잠시나마 거짓 선생들의 교훈에 빠지기는 했어도 “다른 마음을 품은 것”은 아니라고 위로해 주었다.


1. 다른 마음

바울이 말한 다른 마음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아닌 다른 마음을 가리킨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형상이 사라져 완진히 회복 할 수 없는 자리에까지 이른 것은 아니란 뜻이다.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성령이 그 마음에 임재하시어 우리의 생을 주관하신다. 우리가 비록 성령의 뜻을 거역하고 잘못된 길을 잠시나마 걷는다 해도 그 이유로 성령이 우리를 영원히 떠나시는 것은 아니다. 이에 대하여 주님은 라도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승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고 하셨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미지근한 믿음으로 주님을 그들의 마음에서 쫓았지만 주님은 문밖에 서서 두드리신다고 하신 것이다. 이 말씀은 성령의 탄식하심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성령이 내재하고 계시기 때문에 성령의 권고하심과 그의 간구를 통해서 우리들로 회개케 하시어 다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생애를 살아가게 하신다. 누룩은 그리스도인을 썩게 할 수 없다. 잠시 더러워질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를 요동케 하는 자들은 반드시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받게 된다. “너희를 요동케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고 한 것이다. 요동이란 뒤흔드는 일을 말한다. 그리스도가 계시는 우리의 마음을 누룩으로, 거짓말로 뒤흔드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흔듦은 겨를 날려보내는 채같이 가라지들만 데리고 갈 뿐, 그리스도인들을 타락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어느 시대나 어느 교회건 이 같은 누룩은 존재한다. 그러나 이 누룩은 하나님의 교회를 정화시키는 작용을 할 뿐, 하나님의 교회를 넘어지게는 못한다.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잠정적으로 거짓 선생들의 미혹에 빠져 율법적인 복음을 받아 드리기는 했지만 그러나 그들의 마음까지 빼앗은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이 일에 대하여 무엇이라 하셨나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내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한때 이들에게 미혹받아 잠시 진리에서 돌이킨 일은 하나님께서 다시 돌이켜 더 나은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시켜 주시고 은혜를 주시겠지만 그들의 달려가는 길을 막고 다시 죄의 종의 멍에를 메게 하려고 갈라디아 교인들을 뒤흔들어 놓은 자들에게는 오직 심판만이 있을 뿐임을 강조한다.


2. 할례 때문에 핍박을 받은 바울

바울은 11절에서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하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핍박을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그쳤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할례를 자랑하고 누구나 할례 받는 일을 영광스럽게 생각하며 복음을 받아 드린 이반인에게 조차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을 것임을 주장하였었다.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온 거짓 선생들의 정체가 바로 이 같은 자들이었다. 바울이 가는 곳마다 유대인들에게 핍박을 당하고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된 이유가 어디 있었는가? 그것은 할례가 구원에 아무런 역할를 하지 못하며 할례를 받고자 하는 자는 오히려 율법의 종으로 다시 들어가 죄의 종노릇한다는 사실을 밝힌다.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전하고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으며 믿음으로 외롭다하심을 받으며 믿음으로 아브라함과 같은 약속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것이라고 바울은 전했다. 그러나 할례를 전하는 자들은 모든 사람들을 율법 아래로 끌어드려 율법의 노예로 만들기 때문에 복음과 할례는 융합이 될 수 없다. 만약 바울이 그들처럼 복음을 믿지만 할례도 받아야 한다는 “다른 복음”을 전했다면 바울이야말로 유대인들에게 핍박을 받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결론 : 바울은 12절에서 “너희를 어지럽히게 하는 자들이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고 말했다. 이 말은 할례를 하느니 차라리 어느 이방인의 습성대로 거세하는 편이 낳지 않겠느냐는 뜻이다. 오히려 그 편이 더 의로워질 수 있을 것이란 풍자적인 말이다.


(36) 사랑으로 종노릇하라

(갈라디아서5:13)

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서론 : 우리는 자유한 자가 되었다. 그리스도는 이 자유를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우리를 부르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없는 자들은 이 자유를 방종한 것으로 오해하며 육체의 기회로 삼는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소중한 자유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13절에서 말씀해 준다.


1. 자유를 위해 부르심을 입은 성도들

바울은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니”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자유를 위해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다. 율법의 속박에서 정죄함을 받고 심판을 받아야 할 그런 종의 자리에서 우리를 건져 주시고 자유를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 자유를 소중히 간직해야 하며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유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잘 이해해야 한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자유를 악용하면 더 무서운 죄악 가운데 빠지게 되며 방종한 생활로 돌아가게 된다.


바울은 여기서 왜 새삼스럽게 자유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것인가? 이 자유를 악용하는 자들이 있어서 교회를 어지럽히기 때문이다. 초대 교회 시대에 버가모 교회에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어서 주님의 책망을 들었다. 니골라는 소위 신앙적인 자유를 육체의 자유와 혼돈하여 성도들에게 주신 참 자유를 오히려 파괴한 장본인이다. 니골라는 이방 교도로써 그리스도교로 전입한 자인데 처음엔 예루살렘 교회의 인정을 받아 7집사 중에 한 명으로 피택되었었다. 그러나 그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교리에 대해 사탄의 함정에 빠지게 되었는데 그것은 믿음으로 한 번 구원받은 사람은 그 후 어떤 죄를 짓든지 죄로 인정되지 않는다는 새로운 교리를 펴냄으로써 초보적인 순박한 교인들을 유혹한 것이다. 이제 우리는 구원을 받았으니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 함을 얻었다는 것이다. 죄의 속박에서도 벗어났으니 죄를 범해도 죄가 안 된다는 것이다. 오늘날 기성 교회 성도들을 미혹하고 있는 구원 파와 비슷한 교리를 가지고 악한 누룩의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롬6장에서 바울은 이 같은 자들에 대하여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라고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분명히 율법의 종의 자리에서 죄의 종의 자리에서 자유를 얻었지만 이 자유는 또한 새로운 종의 신분을 가지게 되었다는 의미가 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롬 6:15절에서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고 말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고 밝혀 주고 있다. 우리가 가진 자유는 의안에서 누릴 자유이기 때문에 의에 대해서는 순종해야 함으로 의의 종이라고 말해 주고 있다.


2. 자유로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바울이 말한바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라”고 한 말은 무엇인가? 육신의 일을 도모하는 일에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자유를 쓰면 안 된다는 뜻이다. 죄와 손잡은 자유, 자기 육체의 정욕과 타협하는 자유는 이미 죄의 종의 자리에 되돌아가는 일이지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생활이 아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이 누릴 참된 자유는 어떠해야 하는가? 바울은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고 말해 준다. 그리스도인의 최고 최선의 자유는 사랑과 연계된다. 사랑은 하나님의 최고의 법이며 자유의 목표인 것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누리는 자유는 성도들간의 사랑인데 서로 사랑으로 종노릇하는 일이야말로 자유의 극치인 것이다.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는 말은 사랑의 종이 되라는 뜻이다. 중생한 그리스도인은 사랑의 법에서 벗어날 수 없다.


결론 : 그리스도는 사랑이시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가 없다. 우리는 모두 사랑의 줄에 얽매어 사랑 안에서 가치 있는 자유를 누리는 생활을 해야 한다.


(37) 율법과 사랑

(갈라디아서5:14-15)

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15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서론 : 바울은 14절에서 율법은 사랑을 이뤘다고 말하고 있다. 바울의 이 말은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율법의 대 강령은 곧 사랑이란 뜻이며 다른 하나는 예수님은 사랑으로 율법을 성취하여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시켜 주셨다는 뜻이다.


1. 사랑으로 율법을 이루신 예수님

사람들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참뜻을 오해하고 있다. 율법에서 의를 얻어야 할 것으로 알고 율법을 지키려다가 결국은 율법의 종이 되어 버린다. 율법의 뿌리는 사랑에 박고 있다. 사람이 사랑을 떠나서는 율법의 뜻을 이룰 수 없는 것이다. 어느 날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시니이까고 질문을 했다. 이에 예수님은 율법을 둘로 나누어 첫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둘째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율법은 하나님이 이스라엘로 사랑을 가르치시는 거울로 주신 것이다.

이 하나님의 사랑이 신약에 와서 예수님에 의해 밝히 들어내었다. 요 13 : 34절 말씀에서 이처럼 말씀하셨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이 계명을 온전히 지키신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심으로 죽기까지 순종하셨고 이웃인 우리를 사랑하사 자기 생명까지 주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새 계명으로 사랑의 계명을 주신 것이다. 이 계명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대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인데 이 사랑의 새 계명에는 정죄가 없고 오직 상급만이 있을 뿐이다. 율법의 의문에 의한 계명은 우리를 종으로 만들고 우리에게 정죄를 주는 역할을 하지만 사랑의 계명은 율법을 훨씬 뛰어넘은 온전한 계명으로 우리에게 자유를 선사한다.


2.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한다.

바울은 15절에서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고 경종하고 있다. 물고 먹는다는 표현은 사랑과는 정반대 되는 행위로 시기, 다툼, 모략, 이간질 등의 사악한 인간의 본성을 드러낸 말이다. 문다는 말은 남에게 상처를 입히고 고통을 주는 동물적인 행동의 표현이며 먹는다는 말 역시, 야수들이 먹이를 잡아 잔혹하게 먹는 모양을 나타낸 표현이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왜 이 같은 경종을 주는 것인가? 아마 그들 중에는 거짓 선생을 따르는 무리들과 바울의 순수한 복음을 사수하려는 성도들 간에 감정적인 대립이 노골적으로 표면화되어 교회 분열에 위험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성령은 교회에서 사랑으로 역사 하지만 사탄은 교회를 분열시키기 위해 다툼을 조성하는데 교회 안에 가만히 들어오는 거짓 선생들은 쑥물과 누룩을 통해서 이 같은 일을 일으킨다. 성령은 사랑으로 화합시키고 덕을 세우며 생명을 얻게 한다. 그러나 사탄은 미움과 다툼으로 화합을 깨고 혼란을 가져온다. 그래서 바울은 오직 성령을 따라 모든 일을 할 것을 본문에서 강조하고 있다.


결론 : 교회 안에서 의견의 차이가 있다고 감정의 대립으로 다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어떤 경우에도 다툼은 피차에 멸망을 가져 올 뿐이다.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고 하신 말씀대로 사랑으로 화평을 이루며 사랑으로 모든 불의와 거짓 진리에 맞서 싸워야 한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로 그 중 몇은 비록 거짓 선생에게 미혹되어 다른 복음을 따르고 있지만 영적 대적자는 거짓 선생들이지 같은 교회의 형제들이 아닌 것이다. 사랑으로 역사 하는 성령을 힘입어 먼저 우리들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시기와 정욕과 파당적인 생각들을 소멸하고 성령으로 하나님의 교회에 유익을 가져 와야 한다.


(38) 성령을 좇아 행하라

(갈라디아서5:16-18)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 

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서론 :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육체의 욕심이 있다. 그리스도인은 영육간의 모든 것이 회복되어 새롭게 되었다. 그러나 육체는 의롭다는 선언과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약속만 받았지 실제로 의로워진 것은 아니다. 우리의 육체가 완전히 의로워지려면 우리 몸의 구속의 날이 이르러야 한다. 이에 대하여 롬 8 : 23절에서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린다”고 말씀해 준다. 이처럼 육체의 온전한 구속의 날인 부활의 소망이 이르기 까지는 우리의 육체는 세상의 유혹을 받기도 하고 정욕과 시기와 탐심으로 인하여 시험을 당하기도 한다.


1.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스도인들은 죄에 대하여 이미 죽었지만 육체를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에 지난날의 내 몸을 종으로 부렸던 죄의 끊임없는 유혹을 받는다. 이 유혹이 우리로 탐심을 일으키고 죄와 손을 잡게 되며 죄를 범하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육신의 욕심과 싸워야 한다. 바울은 이 싸움을 ‘믿음의 선한 싸움’이라고 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싸움을 통해 성화의 과정을 걸어가게 된다. 우리가 성령을 의지하지 않고 방심할 떄 이 싸움에서 지게 되며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징계를 받게 된다.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을 바라보면서 늘 탄식한다. 누가 자기는 이제 의를 행하는 일이나 죄를 짓지 않는 일에 자신이 있다고 자신할 수 있는 것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지으면 안될 줄 알면서 죄를 짓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그럴 때마다 탄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왜 이 같은 일을 자꾸 반복하는 것인가? 그것은 육신의 애씀으로 이겨 보려고 힘쓰기 때문이다. 육신의 정욕이나 탐심은 육체에서 나오는 힘으로는 막아낼 도리가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바울이 그 해답을 준다. 16절에서 이르기를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소욕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고 했다.

그러면 성령을 좇아 행한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령을 의지하여 성령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삶을 의미한다. 성령은 우리의 삶을 도와주시기 위해 우리 안에 계신다. 성령은 우리 육체의 연악함을 아시고 능력으로 붙들어 주신다. 성령은 우리의 삶에서 죄를 떠나게 하시고 착한 열매를 맺게 하신다.


2.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

바울은 17절에서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다. 육체의 소욕은 죄를 따라가려는 본능적인 욕망을 의미한다. 우리에게는 이런 소욕이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소욕은 성령을 거스린다. 성령의 감동을 소멸하려고 하며 마음속에서 들려주시는 성령의 책망을 듣지 않으려고 한다. 이 같은 유혹에 깊이 빠지면 아무리 신앙이 좋은 사람이라도 곧 넘어진다.


그런데 성령의 소욕은 또한 육체의 소욕을 거스린다고 했다. 성령은 거룩한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 마음에 더러운 정욕이나 탐심을 품고 있는 것을 참지 못하신다. 거부 반을을 일으키시고 우리에게 책망하신다. 이처럼 두 가지 소욕이 모두 우리 안에서 서로 견제하며 우리의 생활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만약에 우리 가운데 육체의 소욕을 거스리는 성령의 소욕이 존재치 아니한다면 우리는 구제 불능한 죄인이 되어 버릴 것이다. 그리고 성령의 소욕만 있고 육체의 소욕이 없다면 우리는 이미 완벽한 의인으로 살아갈 것이다. 그러므로 육체의 소욕을 따르려는 사람들은 자연히 성령의 소욕을 거스려 육체의 열매를 맺게 된다. 그러나 성령을 의지하면 성령께서는 우리로 육체의 소욕을 거스려 모든 불의에서 승리하게 하시는 것이다.


결론 : 바울은 18절에서 결론적으로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해 준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임도하심을 받는 생활을 해야 한다. 누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게 되는가? 성령의 충만함에서 온다. 성령의 충만은 성령의 지배를 받는 생활인데 이 같은 성령의 지배를 받으려면 먼저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있어야 한다. 육체의 소욕으로 성령을 거슬렸을 떄 곧 회개하도록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한다.


(39) 육체의 소욕에서 나오는 인간의 죄

(갈라디아서5:19-21)

19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서론 : 바울은 18절에서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고 했는데 우리가 율법의 종의 자리에서 자유함을 얻은 증거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셨다.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며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성령이 우리에게 적용시켜 주신다. 그러므로 성령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는 것이다. 우리가 만약 성령 안에 거하지 못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살아가지 못한다면 율법에서 자유한 몸이 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가 율법에서 자유를 얻었다고 하는 확실한 증거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생활을 통해서 알 수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생활이란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1. 육체의 소욕

바울은 19절 이하에서 육체의 일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자세히 열거해 주고 있다. 이 육체의 일은 결과적으로 우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하여 21절 하반절에서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라고 경종해 준다. 육체의 욕심이란 인간의 본능적인 욕망에 속한다. 인간이 범죄하므로 하나님의 형상이 사라진 후. 타락한 인간의 본능적 욕심으로 생겨난 것이다. 물론 인간에게는 그 마음속에 하나님께서 새겨 주신 마음의 율법이라고 하는 양심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 양심은 죄로 인한 타락 앞에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할 무용지물이 되어 버린 것이다. 말하자면 양심도 죄 앞에 무릎을 끓을 수밖에 없는 것이 죄 앞에 다만 그것이 죄라고 하는 양심적 고통만 줄 뿐 막을 수 있는 능력이 상실된 것이다. 혹 죄를 범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마음 속에 품고 있는 죄의 소욕 자체를 버리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 육체의 욕심이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이라고 했다. 이 세 가지는 모두 한 가지 사건을 의미하는데 음란에 속한 죄악들이다. 인간이 범하는 죄 중에서도 가장 죄질이 나쁜 죄가 바로 음란이란 사실을 알 수 있다. 다음에 우상 숭배를 들고 있다. 하나님 이외에 다른 피조물을 하나님처럼 섬기는 가증한 일을 우상 숭배라고 하는데 하나님 앞에 나가기까지는 누구나 이 우상 숭배 의 죄악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2. 유업으로 받지 못할 하나님의 나라

바울은 21절 하반 절에서 육체의 욕심 가운데 살아가는 자들에게 경종해 준다.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란 말할 것도 없이 천국을 말한다. 그러면 왜 이들이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를 못하는 것인가? 육체의 욕심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령이 내주하고 있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고 있다. 성령은 약속의 자녀들 가운데서 성령으로 인도해 주심으로 성령의 소욕 가운데 살아가게 하신다.

성령께서 그 사람의 마음속에서 성령의 소욕(능력)으로 육체의 욕심대로 살려는 그리스도인에게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못하게 하시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언제까지나 죄 가운데서 살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반드시 하나님의 징계가 나타나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하여 회개케 하시고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살아가도록 인도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롬 8 : 6절에 있는 말씀,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고 하신 말씀을 깨닫고 육신이 원하는 생각대로 살아가지 말고 성령의 소욕대로 살아가야 한다. 다음에 롬 8 : 8절에서는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했다. 또란 롬 8 : 13절에서도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산다”고 했다.


결론 :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고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그러나 이 일을 가볍게 생각하면 안 된다. 믿음은 육신의 욕심과 싸우는 성령의 역사이기 때문에 우리는 성령이 내 안에서 나에게 성령 안에서의 자유를 주시는 그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육체의 정욕된 생활에서 정말로 벗어나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생활의 열매를 맺을 때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실을 확신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40) 성령의 열매

(갈라디아서5:22-23)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서론 : 바울은 19절부터 육체의 욕심에 대하여 그 죄악상을 여러 가지로 열거했다. 이 같은 육체의 일이란 곧 육체의 욕심으로 말미암아 맺게 되는 열매를 의미한다. 악을 뿌리는 자는 악을 거둔다고 하신 말씀처럼 육신의 소욕은 악의 씨앗으로 우리의 생활에 뿌려지게 되며 그 열매는 하나님의 심판에 이르게 되는 악의 열매인데 바울은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해 주고 있다. 그런데 바울은 22절과 23절에 와서 그와 정반대가 되는 열매로써 성령의 열매를 열거해 준다.


1. 심는 대로 거두는 하나님의 법칙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두 가지 열매는 그 결과에 있어서 엄청난 차이를 나타내는데 이에 대하여 갈 6 : 8절에서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는 말씀에 잘 나타나 있다. 육으로 심는 일이란 하나님이 없는 인간의 모든 계휙과 그곳에서 나오는 모든 결과를 의미한다. 비록 그런 것들이 명예와 영광을 자신에게 안겨 주고 또 사회와 인류에게 많은 공헌을 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추앙을 받게 된다고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썩어질 것으로 거두게 되며 결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

그러면 성령으로 심는 일이란 무엇인가? 육신의 소욕을 성령으로 죽이는 생활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것은 이 성령을 의지하여 그 능력으로 우리들의 육신의 소욕을 죽이는 생활을 하여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시기 위해서다. 성령은 우리의 생애와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주신다. 우리로 죄에서 떠나게 하며, 우리가 죄를 범했을 때 회개하게 하며, 우리의 생활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게 인도하시고 감동을 주신다. 성령은 순종이 축복 받는 생활임을 체험케 하신다. 성령은 이런 생활을 천국에 이르기까지 우리들 마음속에서 역사 하신다. 그리하여 우리로 영생에 이르게 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성령의 소욕을 뿌리치지 말아야 하며 그 감화하심과 감동하심을 소멸하면 안 된다.


2. 성령으로 행하는 자의 열매

바울은 22절에서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라고 밝힌다. 성령의 열매라는 표현은 우리가 성령의 소욕을 따라 육체의 소욕을 이기는 생활을 할 때 우리의 생활에 나타나는 결실을 말한다. 그런 결실이 곧 성령의 열매로 9가지에 이른다.


① 사랑 = 주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다. 허물을 덮어 주는 것이 사랑이다. 불쌍히 여기는 것이 사랑이다.


② 희락 =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가 누릴 즐거움과 기쁨을 말한다. “항상 기뻐하라”고 하셨다. 그 마음에 그리스도를 모시고 그의 사랑 가운데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는 그의 생애에 희락이 있다.


③ 화평 = 화평이란 사랑의 교통을 말한다. 화평이란 분쟁이나 질투의 반대말로 화평이란 화합과 이해 등 사랑에서 나온다.


④ 오래 참음 = 인내를 말한다.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는 일에 인내가 필요하다. 그뿐 아니라 성도들 서로간의 교제에도 오래 참음이 필요하다. 이런 인내는 성령의 열매로 나타난다.


⑤ 자비 = 상대방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말한다. 육체의 소욕에는 자비 대신 멸시와 교만이 있다.


⑥ 양선 = 착하고 선한 일에 마음을 두고 형제들에게 이 같은 마음으로 대하는 사랑의 자세를 말한다.


⑦ 충성 = 주님께 대한 충성된 믿음을 의미한다. 주님께 누구나 충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충성은 그리스도와 우리를 연합시킨 성령의 열매이다.


⑧ 온유 = 그리스도의 마음을 의미한다. 교만한 마음이 낮아져서 주님의 마음을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의 열매이다.


⑨ 절제 = 육신의 소욕의 절제로 

성령의 소욕으로 이길 때만이 절제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


결론 :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감동과 감화를 따를 때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된다. 

성령의 열매는 그리스도인들의 성화의 과정에 반드시 있어야 할 결실이기 때문에 

성령의 뜻에 순종하여 그 열매를 맺는 생활을 해야 한다.


(41)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그리스도인

(갈라디아서5:24-26)

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26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서론 : 24절에 나오는 말씀은 사도 바울이 그의 서신에 잘 인용하는 말이다. 이 말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에 대한 성경적인 해답을 주는 말인데 그리스도인들이 왜 죄 가운데서 살아갈 수 없는가에 대한 해답이 된다.


1. 십자가에 못 박힌 정욕의 사람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육체의 욕심으로 살아갈 수 없는 이유가 분명히 있다. 그것은 육체와 함께 그 정와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와 연합된 사람을 의미하며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두 가지로 나타난다.

그 하나는 죽음에 대한 연합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므로 그를 믿으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역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으로 간주된다. 하나님이 그렇게 인정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죄인의 심판을 갈보리에서 예수님과 함께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생활 가운데서 우리의 옛사람이 십자가에서 죽었으니 다시는 죄 가운데 살아가서는 안 된다. 우리의 육체인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우리는 그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도 함께 못 박힌 것이다. 정욕의 사람과 욕심의 사람이 우리의 육체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으니 어찌 그리스도인들이 옛 사람으로 돌아가 육체의 일을 할 수 있겠는가?

다른 하나는 부활에 대한 연합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셨다.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에만 연합된 것이 아니라 부활에도 함께 연합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를 살리셨다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다. 이 살리심의 역사는 바로 성령이 하신다. 성령은 우리가 죄와 허물로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그 자리에서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살리셨다. 우리는 육체와 함게 정과 욕심의 사람은 십자가에서 죽었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로운 사람으로 살리심을 받은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난날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아갔던 것처럼 지금은 그 육체의 사람이 죽었으니 육체의 욕심대로 살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살리셔서 우리로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하시는 성령 안에서 살아야 하는 것이다.


2. 성령으로 살면 성령으로 행하라

그리스도인들은 육체로 살 사람이 아니요 성령으로 살아야 할 사람들이다.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신 분이 성령이시기 때문이다. 성령을 통해서 새롭게 태어난 사람을 거듭난 사람이라고 말한다. 성령의 전으로 성령이 거하시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이처럼 성령은 새로운 생명의 공급자, 그 생명의 유지자로 우리의 생애와 생활을 주관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으로 살아가야 한다.

바울은 25절에서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성령으로 행할지니”라고 말해 준다. 우리들이 성령으로 사는 것이 분명하다면 성령으로 행하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응당 성령으로 살아야 한다. 성령은 우리의 생명이 되셨으며 우리의 생애를 주관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오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성령으로 살아가야 할 사람들이다. 바울은 여기서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성령 안에서 살아가야 할 것을 더욱 강력히 권고한다. 성령으로 살면 성령으로 행하라고 한 것이다. 성령으로 행하라는 말은 성령의 열매를 맺으라는 뜻이다. 성령을 받았으며 성령으로 새롭게 살리심을 받았으며 성령이 내 안에서 내 인생을 주관하시는데 우리의 생활은 엉뚱하게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욕심을 이루게 된다면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결론 :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라”고 권고하고 있다. 성령으로 행하는 사람들은 결코 헛된 영광을 구하지 않는다. 헛된 영광이란 이 세상에서 인간들이 추구하는 자신의 명예를 의미하며 이 같은 명예를 구하기 위해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는 것이다. 이것은 절대로 성령의 역사가 아니다. 오히려 육체의 욕심을 이루는 일이다. 우리는 매일매일 우리의 육체를 정과 욕심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는 생활을 해야 한다.


갈라디아서 6장 (42 - 48)

◆ 밤중소리 01-30 | VIEW : 1,484


(42)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갈라디아서6:1)

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서론 :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생활을 하는데 교회의 화평과 자신의 신앙적인 유익을 위하여 명심해야 할 일이 몇 가지 있다. 바울은 이에 대하여 어떤 형제가 범죄한 일이 있어서 그 형제에게 권고하려면 먼저 자신이 신령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리고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 잡아 주라고 했다. 그리고 그런 일을 거울삼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고 경종한다.


1. 범죄에 대한 권고

교회에는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면서 한 울 안에서 신앙 생활을 하고 있다. 이들을 성경에서는 형제라고 부른다. 그러면 그들 중 혹 육신의 욕심에 이끌리어 범죄한 자가 있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이 문제는 집고 넘어설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은 방관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으라”고 했다.

① ‘신령한 너희’라고 말하고 있는 대상은 누군가? 범죄한 자를 권고하거나 바로잡는 일에는 신앙적인 덕을 갖추었으며 적어도 성령의 능력으로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는 사람, 믿음을 인정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이런 사람은 형제가 범죄 했을 때 한 지체로써 정말로 고통을 느낀다. 그러므로 이 같은 고통을 함께 짊어지는 사랑이 있어야 한다. 사랑의 권고가 아니면 범죄한 형제에게 결코 감화를 줄 수 없을 것이며 그 행실을 바로잡게 할 수 없을 것이다.

②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으라고 했다. 온유한 심령이란 곧 온유한 마음을 의미하며 이것은 겸손을 뜻한다. 권고를 교만한 마음에서 한다면 상대방에게 오히려 반감을 사게 될 것이며 그 반감은 오히려 반대의 효과를 가져 올 것이다. 상대방을 책망하려는 마음으로 하면 안 된다. 권고는 결실이 있어야 권고 한 보람이 있게 된다. 교만한 자세로 책망하려 든다면 효과를 가져 오지 못할 것이다. 온유한 마음은 사랑에서 나온다. 허물을 덮어 주려는 마음과 이미 용서한 마음으로 자신의 뼈를 깎는 아픔을 가지고 권고해야 한다.

③ 그런 자를 바로 잡으라고 했다. 바로 잡으란 말은 바른 길로 인도하라는 뜻이다. 어떻게 하든 범죄한 자로 하여금 그 죄악의 길에서 떠나 바른 길을 걷게 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그 목적을 이루도록 해야 한다. 죄인을 바로 잡는 일에는 자기의 힘으로는 안 된다. 성령을 의지해야 한다. 먼저 마음을 변화시켜야 하는데 이 마음의 변화는 성령만이 하실 수 있으므로 권고하는 자는 성령께 간구하여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어야 한다.


2. 너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1절 하반 절 말씀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고 한 말씀은 누구나 마음에 깊이 새겨 두어야 한다. “너 자신을 돌아 보라”고 한 말씀은 다른 사람의 범죄 사실을 보았을 때는 자기가 자기 자신을 돌이켜 보라는 의미다. 자신은 지금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는가? 자신도 범죄한 형제와 같은 육체의 욕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신의 마음의 상태를 점검해 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고후 13 : 5절에서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 말씀해 주고 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하여 자신의 연약함을 알아야 한다. 자기도 범죄한 형제와 똑같이 그런 죄를 범할 수 있는 육체의 소유자임을 인정해야 한다. 나도 그 사람의 처지에 있었다면 그 같은 죄를 범할 수 있었을 것이란 생각을 가지고 그런 환경에 놓이지 않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나도 그런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나도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아갈 때는 그런 시험에 빠져 들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리하여 시험에 드는 일이 얼마나 두려운가를 새삼 깨달아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 항상 깨어 기도하는 생활에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결론 : 우리는 언제나 나도 죄를 범하고 있는 죄인이며 또 영적 생활에 게을리 하여 육신의 욕심을 따라가면 그 사람보다 더 두려운 시험에 빠진다고 하는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그 사람이 경우를 거울로 삼아야 할 것이다.


(43) 각각 자기의 짐을 지라

(갈라디아서 6:2-5)

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3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4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5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


서론 : 바울은 1절에서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고 했으며 5절에서는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니라”고 했다. 그리고 이 짐을 서로 지는 일은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일임을 말하고 있다.


1.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일

바울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도들이 짐을 서로 지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고 한 것이다. 그러면 짐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죄로 인한 책임을 짐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다. 죄에는 책임이 따른다. 죄에는 그로 인한 열매가 찾아오기 때문이다. 특히 그리스도인의 죄에는 하나님의 손길이 와 닿는다. 하나는 죄로 인한 말할 수 없는 번민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죄를 범했을 때 그로 인한 근심이 그 사람의 생애에 크나큰 고통을 안겨 준다. 물론 그리스도인은 이 고통으로 인하여 회개하기에 이르게 되고 새로운 순종의 길을 걷게 된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징계로 나온다. 그리스도인은 이 같은 형제의 짐을 함께 지라고 한 것이다.

번죄한 형제들에 대한 권고는 바로 그로 인해 고민하고 고난의 짐을 지고 괴로워하는 그와 함께 그 고난의 짐을 함께 지는 심정에서 나와야 한다는 뜻이다. 누가 시험을 당하여 괴로워할 때 우리는 그 괴로움을 함께 지는 마음으로 그를 위로해 주고 그 괴로움에 동참하고 그리고 그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는 일에 해산의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어느 형제가 범죄함으로 옥에 갇혔다고 할 때 옥에 갇혀 있는 그 사람의 괴로움의 짐을 함께 져야 한다. 예수님은 이에 대하여 마 25 : 35절 이하에서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는 말씀에서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이처럼 내 주변에 있는 형제들 중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의 짐을 져 주는 일이야말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일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그리스도의 법이란 주님이 우리에게 새롭게 주신 온전한 율법으로 사랑의 법을 의미한다.


2.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교회에는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는 사람들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법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들은 영적으로 교만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주는 사랑을 원치 않고 받는 사랑을 원한다. 자신은 다른 사람의 사랑을 받을 사람이지 사랑할 입장에 있는 사람이 아닌 것으로 착각한다. 그래서 그는 형제를 돕는 일, 짐을 함께 지는 일에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일을 막으려 한다. 그들의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마땅히 받아야 할 것으로 여기면서 멸시한다. 그러나 이 같은 사람은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그들의 눈에는 들보가 있으면서 남의 눈의 티를 빼려 한다고 책망하셨다.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기에게는 죄가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의인인 채 자기를 보이려 하지만 그 같은 일은 스스로 속이는 일인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고 했다. 자기를 올바로 바라보라는 뜻이다.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좀더 깊이 헤아려 보라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 대하여 정확히 판단해 보라는 것이다. 그리하면 자랑 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고 남에게는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자기가 기도생활을 많이 한다고 해도 그 자랑이 자기에게는 자랑할 일이 될 수 있겠지만 그 일이 다른 사람에게는 자랑거리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려고 과장하고 의도적으로 나타내려고 하는 일은 스스로 속이는 일이요 교만에서 나온 외식이 아닐 수 없다.


결론 : 바울은 5절에서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니라”고 했다. 이 말씀은 각기 자기에게 맡겨 주신 일에 대한 책임을 감당하라는 뜻이다. 그리고 자기가 한 행위에서 온 모든 결과에 대한 짐을 져야 할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우리의 져야 할 모든 짐을 스스로 져야 하며 다른 형제의 짐에 대해서는 그와 함께 져 주는 사랑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44) 가르침을 받는 자와 가르치는 자의 자세

(갈라디아서6:6)

6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서론 : 바울은 6절에서 가르침을 받는 자와 가르치는 자와의 상호 관계를 말씀해 준다. 여기서 가르치는 자와 가르침을 받는 자의 한계와 대상이 분명치 않다. 그러나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의도는 각 교회에서 복음을 전하는 주님의 사역자를 염두에 두고 한 말로 이해하게 된다. 즉 교회의 일반적인 성도들과 그들을 복음으로 약육하는 복음의 사역자로 목회자를 뜻한다.


1. 가르치는 자의 위치

가르치는 자나 가르침을 받는 자나 모두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교회의 지체들로 한 형제들이지만 직분상 분명한 구분이 그어져 있다. 가르치는 자는 가르침을 받는 자들보다 영적 우위에 있다. 가르침을 받는 양 무리들을 양육할 책임이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이처럼 양 무리들을 가르치는 자의 명칭에 대하여 다양하게 기술하고 있다.

① 하나님의 종이라고 부르고 있다. 바울은 롬 1 : 1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이고 했다. 갈 1 : 10절에서도 “내가 지금까지 사람에게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고 말했다. 바울이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부른 것은 일반적인 그리스도인과 구분한 특별한 사명자로서의 자기를 나타낸 말이다.

② 양의 목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말씀을 하시면서 그에게 “내 양을 먹이라”는 말씀을 주셨다. 이 말씀은 베드로에게 그리스도의 양 무리를 먹이는 목자의 사명을 주신 것임을 의미한다.

③ 하나님의 청지기라고 부른다. 딛 1 : 7절에서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라고 말씀해 준다. 여기서 청지기란 선한 청지기를 말하며 이 청지기는 주의 집의 모든 일을 충성 되이 보살펴야 한다.

④ 복음의 일꾼이라고 했다. 골 1 : 23절 하반 절에서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고 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위해 이 같은 사역자들을 이미 만세 전에 예정해 놓으셨다. 이들은 교회에서 일반 성도들보다 무거운 짐을 지고 주의 일을 하는 사역자들이다. 이 짐은 죄짐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짐이지만 지기에 힘겨운 짐이다. 이 짐을 지는 주의 사역자들은 이 짐을 잘 지는 자에게 주시는 상급을 소망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바울은 또한 교회의 성도들에게 이 같은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의 짐을 함께 져야 할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밝혀 주면서 그 방법을 제시해 준다.


2.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바울은 성도들에게 이처럼 자신을 가르치는 사역자들에게 감사하고 그들이 진 짐을 함께 지는 심정으로 그들과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여기서 바울이 권면하고 있는 모든 좋은 것이란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이 있다.

① 말씀을 가르치는 자는 복음으로 사는 하나님의 사역자들임을 알아야 한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일꾼이 그 삯을 받음이 마땅하다고 하셨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자는 복음으로 살리라고 했다. 성도는 목자에 대한 물질적 생활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② 다음에 성도는 주님의 일꾼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그 사역을 감당할 수 있게 해 줘야 한다. 히 13 : 17절에서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다.

성도들이 목회자들로 즐거움으로 그 사역을 감당하게 하려면 믿음으로 살고 진리 가운데 행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존재가 목자에게 근심거리가 되지 않도록 자기 자신을 살피는 생활을 해야 한다. 자기 가정에 좋은 일이 있을 때는 목회자와 함께 그 기쁨을 나눌 수 있는 배려를 해야 한다. 그리고 언제나 목자에게 순종하여 그 목회 방침에 잘 따르는 생활을 해야 한다.


결론 : 양과 목자는 서로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는 존재다. 이 둘이 하나가 될 때 그 교회는 화목하고 사랑이 있고 신앙적으로 성장한다. 서로간 맡은 본분을 잘 지키고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협력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45)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갈라디아서6:7-8)

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서론 :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법칙이다. 이 법칙은 자연계에 나타나는 법칙인데 하나님께서 인간에게도 적용시키셨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이런 법칙대로 보응과 상급을 받게 하시는 하나님을 결코 만홀히 여기는 죄를 범해서는 안 된다.


1.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지 말라

바울은 7절에서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신다”고 했다. 만홀히 여긴다는 말은 ‘바보 취급을 당한다’ 또는 ‘무시당한다’ 업신여김을 받는다‘는 의미로 사람들이 그럴듯한 변명이나 외식으로 하나님을 속이려는 거짓된 마음가짐을 가리킨다. 그러면 누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자들인가?

① 자신의 잘못이나 과오를 하나님께 전가시키는 자들을 의미한다. 주일을 지키는 생활을 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은 내 사정을 아시고 이해하실 꺼야’라는 식으로 책임을 하나님께 넘기고 지난날의 악한 생활에서 발을 뺴지 못하면서 그런 자신의 연약함을 다른 탓으로 돌려보내는 자들의 경우다.

② 어떤 사람들은 ‘이런 경우는 하나님도 눈감아 주실 꺼야’하는 식으로 자신의 악한 생각을 하나님의 생각과 연결시켜 자신의 잘못을 희석시키려 한다. 이 같은 일을 몇 번인가 되풀이하면 아주 습성이 되어 버리게 된다.

③ 어떤 경우에는 ‘나 같은 경우라면 하나님이신 들 어쩔 수 없으실 꺼야’라는 식으로 자신이 범한 범죄 사실을 정당화시키려 한다. 그러면 이들은 왜 이 같은 변명, 자기 변호, 자기 방어에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는 것인가? 그것은 그들이 지금 자기가 앉아 있는 그 죄악의 길에서 떠나기가 싫기 때문이다. 그 마음이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떠난 자요, 돌같이 굳은 자이다. 이들은 곧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자들인 것이다.

하나님은 불의를 미워하시고 공의와 진리를 기뻐하시고 언제나 거룩한 표준으로 판단하신다. 하나님을 거짓되고 패역한 자기의 수준의 분으로 끌어내려 그런 분으로 알고 신앙생활을 하는 일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행위가 아닐 수 없다.


2.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말씀해 준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중, 그들의 모든 행실을 무엇으로 비유하시는가 하면 마치 씨앗을 심는 것으로 하셨다. 땅에 심는 씨앗은 결과적으로 아무라도 속일 수 없는 것이다. 눈에 보이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무엇을 어떻게 심는 생애를 살아가는 것일까? 바울은 8절에서 간략하게 둘로 나누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고 말씀해 준다.

그러면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란 누구를 말하나? 하나님이 없이 자기 인생을 계획하고 운영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육신의 소욕과 정욕을 위해 생각하고 행동한다. 이들은 비록 세상에서는 칭찬을 듣고 영광을 얻을는지 모르지만 결과적으로는 썩어진 것을 거둔다고 하셨다. 썩어진 것이란 자기 인생의 영원한 파멸을 의미한다. 영생을 얻지 못하는 인간들은 모두 이 썩어질 것을 거두게 될 것이다. 이들이 심는 씨앗에 대하여 바울은 갈 5 : 19절 이하에서 명백하게 지적하고 있다.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고 말씀해 주고 있다.

그러나 성령을 위해 심는 자의 결실은 놀랍다.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둔다”고 했다. 성령을 위해 심는 일이란 무엇인가? 성령의 열매를 맺는 생활을 의미한다. 이 또한 갈 5 : 22절 이하에서 성령의 아흡가지 열매로 우리에게 보여 준다. 이 열매는 성령이 맺어 주신다. 우리가 평소에 성령을 힘입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생활을 하면 그것이 이런 생애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영생으로 거두는 축복이 약속되어 있는 것이다.


결론 : 하나님은 절대로 인간으로부터 만홀히 여기심을 받지 아니하신다. 그분의 심판의 날에 그가 만홀히 여기심을 받으신 대로 그들에게 진노의 심판을 내리실 것이다. 하나님을 진실한 마음으로 사랑하자, 그의 말씀을 순종하는 가운데 성령으로 심는 생애를 살아가자.


(46) 선을 행하는 자의 약속

(갈라디아서6:9-10)

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10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서론 : 바울은 9절에서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라”고 이르고 있다. 왜 낙심치 말라고 한 것일까? 선은 거두는 일이 늦어질 때가 있다. 선행의 결실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축복인데 이 축복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을 때도 있고 아니면 하나님 앞에 올라가 하늘의 상급으로 받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 어느 경우에도 반드시 있다고 하는 사실을 믿고 선행에 대한 소망을 가져야 한다.


1.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라

육체를 위하여 심믄 일은 선행이 아니다. 선을 행하는 일은 첫째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일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따라야 한다. 세상 사람들이 행하는 선행은 그 일이 아무리 엄청난 것처럼 보여도 그것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들이거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선행이라고 볼 수 없다. 선을 행하는 일은 성령의 열매로 나타난다. 성령의 감동과 인도하심으로 맺는 열매가 선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요 15 : 8절에서는 이 선행이 과실로 나타난다.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내 제자가 되리라”고 하셨다.

① 형제의 짐을 서로 져 주는 일은 선을 행하는 일이다. 그리스도의 몸을 함께 이루고 있는 한 지체인 형제가 시험이나 범죄나 환난 중에 어떤 번민과 고통을 당할 때 그가 당하는 고통의 짐을 함께 져 주는 일은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행이다.

② 은밀한 중에 모든 이에게 주의 이름으로 착한 일을 하는 일은 선을 행하는 일이다.

그런데 이 같은 선을 행하는 생활을 하는 중에 혹 낙심하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왜 낙심하게 되는가?

세상에는 자기가 베푼 선에 대하여 악으로 갚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에 자신이 애써 베푼 선이 쓸데없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때가 있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세상에는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이런 경우 사람들은 낙심하게 된다.

어떤 경우에는 자기는 다른 이를 성심껏 도와주는데 자기에게는 좋지 않은 일만 돌아오는 경우도 있다. 이때 사람들은 낙심하게 된다. 그리스도인들도 역시 사람인지라 이런 일을 만날 때 낙심하게 되는 것이다. 자신은 지금 무익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런 생각에 잠길 때 낙심하게 된다. 그러나 그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은 기억하시고 그에 대한 응당한 보상을 계획하고 계시기 때문에 낙심하지 말라고 격려하고 있다.


2. 피곤치 않으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바울은 이에 대하여 “피곤하지 않으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말씀해 주고 있다. 피곤하지 않는다는 말은 무엇인가? 선행은 피곤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선행을 피곤하게 여기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선행은 성령의 능력으로 하기 때문에 여호와의 새힘을 얻는다. 그것을 억지로 하거나 힘들게 하게 되면 중도에 포기하는 경우가 생기게 된다.

선행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다. 주님의 이름으로 하는 일에는 냉수 한 그릇에도 상급이 따른다고 말씀하셨다.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하셨다. 잠 3 : 33절에서 이르시기를 “악인의 집에는 하나님의 저주가 있거니와 의인의 집에는 복이 있다”고 하셨다. 하나님의 약속에는 때가 있다. 봄철에 심고 가을철에 거둠같이 선행은 심는 것이다. 그리고 참고 기다리면 결실의 때가 찾아오는 것이다.

바울은 10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누구에게 어떤 때에 선행을 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간략히 말씀해 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라”고 했다. 선행은 베풀 기회가 있다. 그 기회를 상실하면 선행은 가치가 없게 된다. 자기에게 선행의 기회가 주어질 때 그 기회를 잘 잡아야 한다. 다음에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하라”고 했다. 모든 이에게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하라고 한 것이다.


결론 : 그리스도인의 생활에는 선행의 기회가 많이 주어진다. 이 기회가 모두 우리에게 복을 내리시는 하나님의 기회 인줄로 알고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고 피곤하여 중도에 포기하지 말고 계속적으로 해야 한다.


(47)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이 없다.

(갈라디아서6:11-14)

할례와 그리스도의 십자가

11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12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13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서론 :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율법에 따른 할례를 받게 하는 자들은 할례를 받게 한 일에 대해 자랑하는 자들임으로 그 같은 자랑은 허탄한 자랑임을 밝히고 자기에게는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없다고 말하고 있다.


1. 할례를 받게 하려는 자들의 자랑

바울은 원래가 눈이 좋지 않아 여러 교회로 글을 보낼 때 입으로 말하는 것을 대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갈라디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는 바울이 친히 쓴 것을 밝힘으로 그가 갈라디아 교회를 염려하는 마음이 얼마나 큰가를 보여주었다. 그는 시력이 나쁜 관계로 큰 글씨로 써서 보낸다고 말해 준다.

갈라디아 교회에 나타난 거짓 선생들은 실상인즉 복음의 일꾼인 것이 아니라 복음을 무너뜨리는 자들인데 그들이 할례를 주는 일은 다음 세 가지 사실에 근거한 것이라고 말한다.


첫째로 12절에서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라고 했다. 그들은 할례를 선민의 표로 받게 한다. 이것은 지극히 외식적인 행사로 육체의 모양으로 자신을 선민으로 나타내려고 하는 행위다. 복음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 약속의 자녀가 된다. 그곳에는 육체의 모양이 필요 없다. 그러나 율법주의자들은 그리스도 안에 들어와서도 율법을 따라 육체의 모양을 갖추려고 했다.


두 번째로 그들이 할례를 받게 하는 이유는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 뿐이라”고 했다. 복음이 유대인 사회에서 핍박을 받는 이유는 십자가 때문이다. 십자가가 의미하는 바는 믿음으로 온전한 의를 얻는 것이기 때문에 그곳에는 율법이나 할례가 개입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모세 때부터 율법을 지키는 일이나 할례를 행하는 일에 젖어 왔기 때문에 복음이 그들에게 배척을 받게 된 것이다. 이 같은 핍박을 받지 않으려는 생각에서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많은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는 일과 할례를 행하는 일에 열심을 냈다. 갈라디아 교회에 나타난 거짓 선생들은 이들 무리 가운데 속하는 자들로 순수한 복음을 율법적인 복음, 곧 다른 복음으로 변질시킨 것이다. 다음 세 번째는 그들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할례를 받게 하는 것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할례를 받음으로 그 육체에 할례를 준 그 사실을 자기들의 자랑거리로 삼으려는 의도에서였다고 말하고 있다.


2. 자랑할 것은 십자가다.

14절에서 바울은 “그라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단정적으로 말한다. 율법을 지키는 일이 자랑할 것이 아니며 할례를 받는 일이 자랑할 일이 아니라 정말로 자랑할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것이다. 그러면 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이처럼 우리의 자랑거리가 되는 것인가?

① 그리스도인의 죄는 십자가에서 소멸되었다. 우리의 무거운 죄 짐은 주님의 십자가에서 벗겨졌다. 내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내가 받을 심판을 받으셨기 때문이다.

②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나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셨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그의 살아나신 그 생명이 믿음으로 내 생명이 되어 나는 그 새 생명 가운데서 살아가게 된 것이다.

③ 그리고 십자가에는 죄인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가장 고상한 것으로 알고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모든 것을 오예물 처럼 여긴다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십자가에서 시작되고 십자가가 중심이 되며 십자가에서 풀리게 되는 것이다.


십자가가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바울의 고백처럼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나도 세상에 대하여 그러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십자가로 인하여 두 가지 사실이 적용되는데 

하나는 세상이 나에 대하여 못박힌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나 역시 세상에 대하여 못박힌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연합하여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 세상은 나에 대하여 죽은 것이요, 

나는 이 세상에 대하여 죽은 것이다.


결론 :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이 없다. 있어서도 안 된다. 

그리고 세상이 나에 대하여 못 박혔으니 

이제 나는 세상에 소망을 두지 말고 

세상과 더불어 짝하는 생활을 하지 말아야 한다. 

나도 세상에 대하여 죽었으니 새로운 소망으로 살아가야 한다.


(48)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 뿐이니라

(갈라디아서6:15-18)

15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16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18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


서론 : 오늘 새벽은 갈라디아서 강해를 마감하는 시간이다. 바울은 본 절에서 갈라디아서 전체의 결론적인 말로 매듭 짓는다. 사람의 구원에 있어서 할례나 무 할례는 아무 것도 아니며 오직 새로운 피조물로 탄생하는 이 일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1. 할례나 무 할례는 아무 것도 아니다.

할례가 구원에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처럼 무 할례도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다. 바울은 아직까지 할례의 무용론을 주장했지만 그렇다고 사람이 구원을 얻으려면 할례를 받으면 안 된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이 둘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일에 아무 것도 아니란 사실만을 밝힌 것이다.

우리에게는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 뿐”이라고 했다. 새로 지으심을 받는 일은 가장 중요하고 귀한 일이다. 기독교에서 새로 태어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 이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믿음으로 약속의 자녀가 되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성령 안에서 경영하는 새로운 생활을 의미한다. 새로 지으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만 성령이 임재하시어 그 열매를 맺게 하시는 것이다. 바울이 여기서 주장하는 핵심은 의식이나 제도, 할례나 무 할례나 학식 등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것들이고. 가장 중요한 일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지으심을 받는 일임을 강조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중생, 또는 거듭나는 일이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와의 대화를 통해서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하셨다. 물은 정결케 하는 의식에 사용된 것으로 회개를 뜻하고 성령은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영이시다. 바울은 16절에서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 지어다”고 축복하였다. 이 규례란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밝힌 모든 구원의 도리를 말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일이며 성령 안에서 새롭게 살아가는 영적인 생활을 의미한다. 바울은 이 같은 규례를 행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란 말로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란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란 뜻이다. 언약의 백성만이 하나님의 백성이다. 에서는 장남이요 이삭의 아들로 태어나 유업을 이을 자로 보였지만 그러나 그에게는 하나님의 언약이 없었고 오히려 야곱에게 언약이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유업의 후사가 될 수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육체적인 아브라함의 씨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뤄진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다.


2. 나를 괴롭게 말라 나는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바울은 거짓 선생들이나 율법에 열심인 유대인들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아 왔다. 그러나 바울은 그보다 더 그를 괴롭힌 일은 그들의 교훈을 따르므로 구원의 은혜를 잃어버리고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 갈라디아 교인들로부터 더 큰 괴로움을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 서신을 보내면서 한가닥 큰 기대를 걸면서 “이제 후로는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고 간곡히 권고한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의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음을 말하고 있다. 그러면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자기 몸에 가지고 있다는 예수의 흔적은 무엇인가? 어떤 신비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십자가의 흔적이 바울의 몸에 생긴 것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받은 핍박으로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 능욕, 매맞음, 배곺음 등이 그의 몸에 예수의 흔적으로 남아 있다는 뜻이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마 5 : 11절에서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고 하셨다. 베드로 사도는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고 했다.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이 가졌다고 하는 예수의 흔적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이 흔적이 많을수록 하늘의 상급이 많을 것이다.


결론 : 마지막으로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축도를 보내 주고 있다. 

이 바울의 축도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축복 기도이다. 

그러므로 주의 종이 성도들에게 예배 마지막에 보내는 축도는 

받을 만한 사람들에게 큰 축복이 된다.

 

출처 : http://www.bamjoongsori.org/bbs/view.php?id=board56&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9[밤중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