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차례
고후 8장 (26 - 28)
(26) 마게도냐 성도들의 진실한 사랑의 헌신(고린도후서8:1-8)
(27) 부요하신 자로서 가난하게 되신 이유(고린도후서8:9-15)
(28) 선한 일에 조심하라(고린도후서8:16-24)
고후 9장 (29 - 30)
(29) 적게 심는 자와 많이 심는 자의 차이(고린도후서9:1-7)
(30)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고린도후서9:8-15)
고후 10장 (31 - 33)
(31) 우리의 싸우는 병기(고린도후서10:1-6)
(32)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고린도후서10:7-1)
(33)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린도후서10:12-18)
고후 11장 (34 - 37)
(34)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열심(고린도후서11:1-4)
(35) 바울의 모범적인 목회(고린도후서11:1-4)
(36) 광명한 천사로 가장하는 사탄(고린도후서11:5-15)
(37) 복음을 위해 받은 바울의 고난(고린도후서11:16-33)
고후 12장 (38 - 41)
(38) 바울이 가 본 낙원(고린도후서12:1-6)
(39) 약한데서 온전해 지는 하나님의 능력(고린도후서12:7-10)
(40) 바울이 자기를 자랑하게 한 책임(고린도후서12:11-13)
(41) 바울이 두려워하는 것(고린도후서12:14-21)
고후 13장 (42 - 43)
(42) 바울의 엄한 경고(고린도후서13:1-4)
(43) 믿음에 있는가 시험하고 확증하라(고린도후서13: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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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후 8장 (26 -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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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마게도냐 성도들의 진실한 사랑의 헌신
(고린도후서8:1-8)
바울은 8:1절 이하에서 마게도냐 교회 성도들이 보인 놀라운 사랑과 주를 위한 헌신을 고린도 교인들에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마게도냐 지방은 아볼로냐로부터 빌립보에 이르는 지역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말하는 마게도냐 교회들은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릐아 교회들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바울이 이들 교회들이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헌금을 모으는 일에 지극한 정성을 기울인 사실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이런 마게도냐 지방의 교회들의 자극을 받아 고린도 교회에서도 헌금에 참여해 줄 것을 당부하기 위해서입니다.
1. 마게도냐 교인들이 받은 은혜
바울은 마게도냐 교인들이 바친 헌금에 대해 하나님이 주신 은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이 말은 대단히 주목할 만한 말입니다. 그들은 바울에게 자신들이 어려운 형편에 처해 있지만 헌금으로 성도들을 섬기는 일에 꼭 참여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울은 은혜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주의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이 뜨겁게 일어나 그 일을 하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은혜를 주셨기 때문에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은혜라고 말하는 것은 그 일에는 축복이 반드시 따르기 때문입니다.
2절에서 바울은 마게도냐 교인들이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한 원인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고 한 것입니다. 마게도냐 성도들은 환난의 많은 시련을 당하면서도 오히려 기쁨에 넘쳤다고 했습니다. 그들에게 찾아온 환난이 그리스도를 믿는 그들의 기쁨을 빼앗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환난 중에서 오히려 그들의 기쁨이 더욱 넘쳤던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받는 환난의 지극히 적은 것이 장차 큰 영광을 이루게 한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환난 중에 낙심하거나 좌절하는 신앙은 진실한 신앙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다음에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게 했다’고 했습니다. 바울의 이 말은 마게도냐 교인들이 극한 가난에 시달리는 생활을 하는 가운데서도 풍성한 연보를 넘치게 했다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들에게는 가난이 그들의 연보를 적게 만들거나 연보를 인색하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더욱 풍성한 연보를 내게 했다고 했습니다.
2. 섬기는 일을 자원한 마게도냐 성도들
바울은 마게도냐 교인들의 헌신적인 연보에 대하여 ‘내가 증거 한다’고 말하면서 그 실상을 말하고 있습니다.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했다고 했다’고 했습니다. 연보를 내는 성도의 자세는 자기에게 있는 힘대로 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원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9:7절에서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라’고 하면서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했다’고 했습니다. 자기들에게 연보 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구했다고 한 것입니다. 그들의 형편은 결코 좋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환난의 많은 시련 중에 있었고 극한 가난 가운데 있었다고 한 것입니다. 이런 중에서도 예루살렘 교회의 어려운 형제들을 돕는 일에 그들이 반드시 참여하겠다고 바울에게 간청하는 모습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바울은 이런 마게도냐 교인들의 헌신적인 태도에 대해 기대 이상의 일이라고 칭찬하면서 그들은 먼저 자기 자신을 주님께 드리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신들에게도 헌신했다고 한 것입니다. 이런 일로 인해서 바울은 디도에게 먼저 고린도에 가서 이미 시작한 그 은혜로운 일을 성취하라고 일렀노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모든 방면에 뛰어난 사실을 칭찬해 주면서 이 일에도 풍성한 결실을 맺을 수 있기를 바랬습니다. 7절에서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했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보기에 그들은 믿음도 훌륭했습니다. 말도 잘했습니다. 지식도 풍부했습니다. 열성이나 바울에 대한 사랑도 많았습니다. 바울이 이처럼 생각하는 대로 이 모금에도 풍성한 열매를 맺을 것을 권면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 말을 쓰면서 이런 자신의 권면은 명령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다만 이 일에 열심이 있는 마게도냐 성도들의 이야기를 그들에게 들려주고 고린도 교인들이 나타내는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하려는 것뿐이라고 했습니다.
결론 : 우리는 물질에 너무나도 인색한 사람들입니다. 극한 가난 중에도 형제를 도웁는 마게도냐 교회 성도들의 헌신과 연보를 본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27) 부요하신 자로서 가난하게 되신 이유
(고린도후서8:9-15)
바울은 9절에서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 할 말씀에 대하여 언급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신 말이 그것입니다.
1. 그리스도께서 가난하게 되신 이유
바울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부요하신 자로서 가난하게 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부요하시다는 것은 그의 영광과 권능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 분은 만물의 창조주로 만물의 주인이시며 그 소유주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지금도 모든 만물을 그의 손으로 붙들고 계십니다. 이런 분이 우리를 위해 가난하게 되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가 가난하게 되셨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이 같은 하나님이 사람의 몸으로 세상에 오신 것을 의미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신 그의 말할 수 없는 비하는 바로 그가 가난하게 되신 것을 가리킵니다. 하늘의 영광의 보좌를 버리고 세상에 오셔서 사람과 같이 되셨고 세상에서 온갖 고초를 겪으셨으니 머리조차 둘 곳이 없는 생애를 사셨고 끝내는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니 이런 그의 가난의 원인은 어디 있었던 것입니까? ‘너희를 위하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때문에 그렇게 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그 죄를 속죄하시기 위한 속죄 제물이 되시려고 스스로 가난하게 되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 같은 은혜를 힘입은 우리는 그 결과 어떻게 된 것입니까? 바울은 이에 대해 명쾌한 대답을 주고 있습니다.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가난해진 것이 우리들로 왜 부요케 된 것입니까?
첫째로 그리스도의 가난하심은 우리들로 믿음에 부요케 하셨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그리스도의 가난하게 되심에서 온 은혜인 것입니다. 그 분이 가난하게 되시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구원의 소망이 없었을 것입니다.
다음에 그리스도의 가난하심은 우리들로 소망에 부요케 하셨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세상의 물질로 생긴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 누구의 가르침으로 얻어진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가난하심이 우리들로 소망에 부요케 하셨으니 그 분으로 말미암아 천국을 소유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다음에 그리스도의 가난하심은 우리들로 하나님께 부요한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몰랐을 때는 우리의 생활은 하나님께 가난했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해 드릴 수 없었고 하나님께 드리는 일에 전혀 무관심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은 후, 우리는 하나님께 드리기를 기뻐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풍성한 것으로 거두게 하시는 것입니다.
2. 부족한 것을 보충 받게 하시는 우리의 연보
바울은 이런 구제 연보에 대하여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이미 1년 전에 이런 구제 헌금에 대해 스스로 결정한바 있다는 사실을 밝히고 그런 결정에 대해 책임을 지고 결실을 맺어야 할 것이 아니냐는 말로 그들의 마음에 호소하면서 만약 그들이 할 마음만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기꺼이 받으실 것이지만 없는 것을 받지는 않으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이 구제 헌금에 대하여 혹 짐으로 여길 것을 우려하여 다른 교회의 성도들에게는 이런 부탁을 하지 않으면서 자신들만 괴로운 부담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그것이 고린도 교인들에게는 공평한 처사가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왜 이런 일에 대하여 공평하다는 말을 하는가 하면 ‘후에 저희 유여한 것으로 너희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평균하게 하려 함이라’고 한 것입니다.
사람은 언제나 부요하게 살 수 있는 것만은 아닙니다. 언제인가 나도 남의 구제를 받아야 할 일이 있을는지 모릅니다. 이처럼 상황이 바뀌게 될 때 그들의 도움을 받는다면 이런 일은 평균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전11:1절 말씀에는 ‘너는 네 식물을 물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일곱에게나 여덟에게 나눠줄지어다. 무슨 재앙이 이 땅에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잠11:25절 말씀에도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 지리라’고 하셨습니다.
결론 : 바울은 이 일을 출16:18절에서 인용하여 증거 했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만나를 거둘 때에 많은 거둔 자도 남음이 없었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도와주고 나누며 구제하는 생활은 부유해지는 생활이요 복 받는 생활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28) 선한 일에 조심하라
(고린도후서8:16-24)
바울은 21절에서 ‘이는 우리가 주 앞에서만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선한 일에 조심하려 함이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의 일을 하면서 하나님 앞에서는 조심합니다. 그리고 주 앞에서 한 점의 부끄러움이 없으면 그것으로 거리낌이 없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일에 대하여 ‘주 앞에서만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선한 일에 조심하려 했다’고 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만 할 도리를 다 한 것으로 잘했다고 생각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람 앞에서도 덕을 세우며 인정을 받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1. 아무도 훼방하지 못하게 하려 한 바울의 배려
바울은 고린도 교회로부터 연보를 거두기 위해 디도와 더불어 다른 또 한 명의 형제를 함께 보낸 일에 대하여 20절에서 ‘이것을 조심함은 우리가 맡은 이 거액의 연보로 인하여 아무도 우리를 훼방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에 보내려는 의연금은 그 모금 액수가 대단히 큰 단위인 것입니다. 20절에서 ‘거액의 연보’라고 했습니다. 이런 일을 행함에 바울은 사람들로부터 오해나 혹은 반대하는 편으로부터 훼방을 받지 않기 위해 지극히 조심한 것입니다. 바울이 가장 신임한 디도와 복음의 일꾼으로 모든 교회로부터 인정받은 형제를 함께 고린도 교회에 보내기로 한 것입니다.
디도는 바울과 같은 심정으로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간절함을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속에 주신 일에 대하여 바울은 감사하면서 다도가 바울의 권고함을 받고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자원하여 고린도 교회에 간 것이라고 했습니다. 주의 일을 함에는 디도나 복음의 칭찬 듣는 한 형제처럼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자원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특히 교인들의 연보를 취급하는 일에 부정의 의심을 받는다면 대적 자들로부터 훼방을 받을 일은 뻔한 일인 것입니다.
바울은 21절에서 우리가 주의 일을 하면서 반드시 명심해야 할 일에 대하여 ‘주 앞에서만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선한 일에 조심’하려는 그의 배려에서 나온 것입니다. 선한 일이란 물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주의 일입니다. 우리가 이처럼 주의 일을 수행함에 있어서 바울과 같은 심정으로 조심하는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2. 우리 자랑의 증거를 보이라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두 형제들에 대한 신뢰감을 주기 위해 간절함으로 그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한 형제에 대해서는 바울이 그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시험해 본 결과 모든 일에 크나큰 열성을 가지고 바울을 도운 형제로서 이제 그는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신뢰를 가지고 간절함으로 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디도에 대해서는 나의 동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디도를 동무라고 한 말은 주의 일을 하는 데 둘이 없어서는 안될 짝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디도는 복음 사역에 있어서 뜻을 함께 한 동지로 마음이 하나가 된 사이였습니다. 그리고 그로 더불어 함께 가는 형제들은 여러 교회에서 선택된 대표들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들어 낼 사람들이라고 소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처럼 좋은 일꾼들을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일에 있어서 고린도 교인들이 반드시 해야 할 일에 대하여 큰 기대를 가지고 부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24절에서 ‘그러므로 너희는 여러 교회 앞에서 너희의 사랑과 너희를 대한 우리 자랑의 증거를 저희에게 보이라’고 한 것입니다.
바울의 당부는 두 가지로 나와 있습니다. 하나는 그들을 사랑으로 대하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주의 선한 일을 위해 뽑혀 교회의 사자의 자격으로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니 고린도 교회에서는 그들에게 각별한 사랑을 나타내야 한다고 했습니다. 연보를 받으러 온 사람들이라고 부담스럽게 생각하여 그들의 대접에 소홀히 하지 말고 정성을 기우리라고 한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바울이 그들에게 고린도 교인들을 자랑한 그 자랑의 증거를 그들에게 보여 주어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가는 곳마다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자랑을 서슴지 아니했습니다. 그들의 믿음과 순종과 사랑과 연보에 대해 그들의 모범을 따를 것을 말해 온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두려워하는 것은 이들 바울이 고린도에 파송하는 주의 일꾼들이 바울이 칭찬한 면을 찾지 못하고 오히려 실망할까 보아 그 일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자랑의 증거를 보이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 : 주의 일꾼들은 언제나 사람 앞에서도 선한 일에 조심해야 하며 훼방을 받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형제들에게 실망을 주지 않도록 사랑의 증거를 보여 주어야 합니다.
고후 9장 (29 - 30)
◆ 밤중소리 01-30 | VIEW : 526
(29) 적게 심는 자와 많이 심는 자의 차이
(고린도후서9:1-7)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예루살렘으로 보낼 연보에 대하여 더 적극적인 자세로 권면하고 있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이번에 이처럼 여러 교회가 동원하여 예루살렘 교회에 구제 연보를 보내게 된 일은 AD 41년경부터 45년경까지 글라우디오 황제 때 임한 극심한 기근으로 인해 그들의 생활이 어려워지자 그들의 고통을 덜어 주려는 의도에서 각처의 교회들에게 부탁하게 된 것입니다.
1. 바울의 깊은 배려
바울은 1절에서 성도를 섬기는 일에 대하여 고린도 교인들에게 더 부연해서 말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밝히고 그것은 오히려 그들이 그런 연보를 자원했기 때문이라고 한 것입니다. 특별히 아가야 지방에서는 벌써 1년 전부터 연보를 예비하므로 바울은 이런 일에 대하여 마게도냐 성도들에게 자랑해 놓었고 이 같은 일로 인하여 많은 교회들에게 구제 연보에 대한 열의를 뜨겁게 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러면서도 불안한 마음을 씻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그 후 여러 가지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거짓 선생들의 침투로 인한 방황과 바울의 사도 직에 대한 의구심 등이 이 일을 계속 뜨겁게 진척되지 못하게 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 일을 염려하여 아직까지 준비하지 못하고 있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들이 처음에 낸 열심을 상기케 하여 자신이 마게도냐 교회 성도들과 함께 고린도 교회에 들렸을 때 마게도냐 교인들로 실망하여 바울에 대한 신임에 상처를 입고 바울 자신도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실망으로 마음이 괴로움을 당하지 않을 것을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일을 사전에 막기 위해 디도와 신임을 얻는 다른 형제를 그곳에 보내어 준비케 하려 한다고 했습니다. 약속한 헌금을 준비케 하는 일은 좋은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준비를 통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에 억지가 없도록 한 것입니다.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고 했습니다.
2. 적게 심는 자와 많이 심는 자의 차이
바울은 6절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의 법칙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고 했습니다. 바울의 이 말은 잠11:24절을 생각하면서 교훈으로 준말이라고 여겨집니다.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혹 인색한 마음으로 적은 연보로 바울을 실망시킬 것을 염려하여 ‘적게 뿌리는 사람은 적게 거두고 많이 뿌리는 사람은 많이 거둔다’고 권고하는 말로 연보에 적극적이기를 바랬습니다. 바울은 헌금을 씨앗을 뿌리고 그 결실을 거두는 일과 비교해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씨앗을 적게 뿌리는 자는 그 씨앗으로부터 적은 것을 거둘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자연의 순리요 하나님이 정하신 법칙입니다. 그와 반대로 많이 뿌렸다면 그 씨앗으로부터 많은 것을 거둘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바울은 이런 원칙을 헌금과 연결시킨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6:20절에서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저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이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은 축복의 씨앗을 심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이 씨앗의 열매로 주시기 때문에 심는 것이 없이는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을 생각을 가지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헌금을 바치는 자세에 대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헌금은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인색한 헌금이나 억지 헌금은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부담스러워 하시는 것입니다. 헌금은 즐거운 마음으로 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즐겨 낼 수 있으려면 헌금에 대한 소망이 있어야 합니다.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상이 따른다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헌금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일이란 사실을 알아야 감사함으로 바칠 수 있는 것입니다. 진실한 헌금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마음에서 나올 수 있기 때문에 은혜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 바울은 8절에서 헌금을 즐겨 내는 자들에게 왜 축복해 주시는가에 대한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은혜를 넘치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많은 헌금을 할수록 은혜를 넘치게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모든 일에 항상 넉넉하게 주십니다. 그리고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할 수 있도록 그래서 그런 일로 영광을 받으시려고 복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인색한 성도가 아니라 헌금에 넉넉하고 풍성한 성도가 되어 이런 복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30)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
(고린도후서9:8-15)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에는 원칙과 약속이 있습니다. 원칙으로는 각각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란 것과 인색함이나 억지로 하지 말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헌금은 마음으로 결정해야 합니다. 누구의 눈치를 보는 것도 아니요 누가 시켜서 하는 것도 아닙니다. 자기 마음에 정한대로 하는 것입니다. 강요에서가 아니라 자원하는 심정으로 헌금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인색한 헌금이란 자기 형편에 비해 너무나도 적은 액수의 헌금을 의미합니다. 억지 헌금이란 마지못해서 따라 하는 헌금입니다. 이런 헌금이 좋지 않은 이유는 헌금하는 자신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뜻입니다.
1. 헌금하는 자에게 주시는 두 가지 축복
바울은 10절에서 ‘심는 자에게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심는 자에게 양식을 주시는 분입니다. 사람이 심은 것이 없이는 어디서든 양식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이 너희 심을 것을 풍성히 주신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미 6절에서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고 하는 말씀을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너희 심을 것을 주신다는 말씀은 물질의 축복을 의미하며 풍성히 주신다는 말씀은 많이 심는 자에게 주시는 풍성한 축복을 의미합니다. 심을 것이란 헌금을 말하는 것입니다. 더욱 많이 헌금할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에 어떤 대가를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헌금에 대가를 지불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심는 자는 심을 것을 풍성히 주시고 그 뿐 아니라 풍성하게 주십니다. 그리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더욱 풍성한 헌금을 통해서 의의 열매를 더욱 많이 맺게 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은 그리스도인으로는 반드시 들여져야 할 헌신이며 이로 인하여 더욱 큰 은혜와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11절에서 연보의 유익에 대하여 한 가지 첨가해서 더 말해 주고 있습니다. ‘저희로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저희’란 이 헌금으로 인하여 혜택을 받을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들이 고린도 교인들의 연보로 인하여 혜택을 받으면 고린도 교인들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의 감사에는 도움을 준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축복 기도도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이 같은 기도를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이들의 축복의 간구를 응답하여 고린도 교인들에게 축복해 주시는 것입니다.
2. 후한 연보로 인한 감사
고린도 교인들이 드리는 연보에 대하여 바울은 봉사의 직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그들의 봉사의 직무는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의 부족한 것만 채워 줄 뿐 아니라 그들이 이로 인하여 하나님께 대한 감사로 넘칠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일로 인하여 고린도 교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되게 믿는 증거를 보여 주고 순종하는 일과 형제를 섬기는 후한 연보를 보내 준 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고린도 교인들이 예루살렘 교인들을 헌신적으로 섬긴 일은 그들로 위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했으며 고린도 교인들로서의 예루살렘 교인들의 중보 기도를 받을 수 있게 한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인들은 이미 고린도 교인들의 이런 봉사에 대하여 알고 있었으므로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지고 그리워하고 있었습니다. ‘지극한 은혜를 인하여 너희를 사모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15절에서 ‘말할 수 없는 은사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연보로 예루살렘 교회를 돕는 일은 그들 스스로의 결정에서라기보다 하나님의 은사라고 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에게 어려운 다른 형제들을 돕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고 풍성한 연보를 자원하는 마음으로 낼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살 본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하나님의 은사로 여겨 하나님께 감사를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 : 헌금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표시로 하나님께 바치는 물질을 의미합니다. 헌금이란 말의 뜻은 율로기아(εὐλοϒἰα)로 축복이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에서는 예루살렘의 가난한 형제를 돕기 위한 헌금으로 거 교회 적으로 실시되었고 부의 공유를 위한 재산의 헌납 등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오늘 날 헌금은 예배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로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고후 10장 (31 - 33)
◆ 밤중소리 01-30 | VIEW : 510
(31) 우리의 싸우는 병기
(고린도후서10:1-6)
1절에서 바울은 ‘너희를 대하여 대면하면 겸비하고 떠나 있으면 담대한 나 바울’이라고 자신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이 말은 자신에 대하여 평하는 어떤 사람들의 말을 인용한 말입니다. 바울은 자신에 대하여 그가 대면하는 자리에서는 겸비하지만 떠나 있으면 그와는 반대로 강경하다는 말을 듣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에 대한 이 같은 평은 옳은 것이 아닙니다. 바울의 강경한 어조나 책망은 바울을 육체로 대하는 자들에 대한 바울의 태도였지 결코 주의 일에 열심이 있고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대한 태도가 아닌 점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에 대해 잘못된 판단을 하는 자들은 바울을 육체대로 행하는 자라고 비방했습니다. 이 같은 모함을 하는 사람들은 바울이 세상적인 기준에 의하여 행동을 하며 어떤 이기적 욕망에서 행동한다는 비방을 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자들에 대해 담담하게 대하였기 때문에 마치 바울을 사람 앞에서는 겸비하고 떠나 있으면 강경한 태도를 취하는 비열한 사람으로 비방을 듣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어떤 사람들이 자신에 대하여 비방하는 바와 같은 담대한 태도로 대하게 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는 그리스도인의 싸움
바울은 3절에서 ‘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바울의 이 말은 우리들이 비록 이 세상에서 육체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는 그 육체가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란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들은 결코 육체를 따라 살아갈 사람들이 아닙니다. 바울은 롬8:9절에서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4절에서 그리스도인의 싸우는 병기에 대하여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이 말은 우리는 육체의 병기를 가지고 싸우는 사람들이 아니란 뜻입니다. 복음은 육신을 가지고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 싸움은 육신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2. 견고한 성을 파하는 강력
그러면 어떤 무기를 가지고 싸우느냐? 이에 대하여 바울은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성을 파하는 강력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무기는 영적 무기로써 아무리 견고한 성이라도 능히 파할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한 것입니다.
육체에 속하지 아니했다는 말은 복음은 인간의 지식이나 지략이나 어떤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란 뜻입니다. 바울을 비방하는 거짓 선생들은 이런 인간적인 육체의 무기를 가지고 바울을 대적하지만 이런 무기는 바울을 넘어뜨릴 수 없는 것입니다. 바울이 가진 무기는 이런 무기보다 차원이 훨씬 높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런 방법을 세상의 초등 학문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미 이런 것들을 오예물로 여겨 버렸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만을 가장 고상한 것으로 취했기 때문에 바울의 대적자는 바울을 이겨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강력한 능력은 ‘모든 이론을 파한다’고 했습니다. 모든 이론이란 성도들을 잘못된 길로 오도하는 거짓된 복음으로 바울은 이것을 ‘다른 복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 그 당시 기독교를 반대하는 철학적 이론들도 바울이 싸운 이론 중에 하나였습니다.
다음에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한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을 아는 일을 방해하는 인간의 오만을 가리킵니다. 인간의 교만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리에까지 이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강력한 능력은 이런 인간의 오만과 교만을 물리치는 것입니다.
다음에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인간의 계략이나 모든 지식을 온전히 사로잡아 결국은 그리스도에게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지식인들이 그리스도에게로 돌아 왔으며 얼마나 교만한 인간들이 그리스도의 권위 앞에 굴복하여 복음을 받아 드린 것입니까?
결론 : 바울은 6절에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주에 있다’고 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 중에는 바울에게 불복종하는 교인들이 있다는 사실을 의미해 주는 말로 그러나 바울은 그들이 회개하여 복종할 때까지 참아 기다리다가 그 때까지도 복종치 않는 자들d에게는 벌할 것이란 계획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바울이 가지고 있는 강력한 하나님의 권능을 가지고 우리의 육체의 사람과 우리의 생애에 오는 모든 육체의 정욕과 싸워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32)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
(고린도후서10:7-1)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와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자신을 모함하는 대적 자들에게 분노에 찬 말을 던지고 있습니다. 바울을 대적하는 거짓 선생들은 자신들만이 그리스도에 속한 참 일꾼임을 내세웠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높은 인사의 추천서도 받았으며 그들의 언변과 지식과 엄장한 외모를 가지고 자랑하면서 자기들만이 고린도 교회에 파송된 진실한 일꾼임을 믿어 달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은 그들의 이런 얄팍한 간교에 넘어가 한 때 바울을 오해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7절에서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고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1. 주께서 주신 권세
바울은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사도적 권위에 손상을 주거나 자기가 전하는 복음에 이의를 제기하는 자가 있으면 결코 용납하지 아니했습니다. 바울의 사도직은 사람들의 투표에 의하여 받은 것이 아니라 다메섹에서 부르실 때 주님으로부터 친히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받은 여러 계시를 통해서 사도 중에 사도임을 증거 했습니다. 그는 편지 서두마다 그의 사도직과 자신이 맡은 사명에 대하여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롬1:1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 함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복음을 가지고 몰래 들어와 고린도 교인들의 믿음을 손상시키며 하나님의 교회를 뒤흔드는 이들 거짓 선생들에 대해 바울은 단호한 태도를 가지고 맞섰던 것입니다.
바울은 8절에서 이르기를 ‘주께서 주신 권세는 너희를 파하려고 하신 것이 아니요 세우려고 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주님이 자신에게 권세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의 권세는 말의 권위로 나타나 그의 말에는 엄위 함이 있었고 사람들로 두려워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권세는 복음으로 나타났습니다. 복음으로 나타내는 권세는 바울을 따를 자가 없었습니다. 그의 복음은 주님으로부터 친히 받은 계시에 의한 것이며 성령의 능력이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울의 권세는 그의 행하는 이적에 나타났습니다. 그는 많은 이적을 행하지는 아니했지만 그의 손과 말에서 나오는 이적은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 그가 하나님의 진실한 일꾼임을 증명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런 권세를 가지고 있는 사실에 대하여 ‘너희를 파하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 세우려고 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 이런 주님의 권위를 가지고 고린도 교인들에게 질책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주님의 권위로써 고린도 교회를 해치려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는 그의 권위로 오히려 고린도 교회를 믿음과 성령으로 바로 세워서 그리스도의 신부의 단장을 시키려는 것이란 점을 강조하므로 고린도 교회를 영적으로 파멸하고 사망의 쓴 물을 먹이는 거짓 선생들의 권위와 대조시킨 것입니다.
2. 편지를 쓴 자가 바울이 아니냐?
바울은 여러 번 고린도 교인들에게 편지를 보낸바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사랑했기 때문에 면전에서는 유하게 대했어도 오히려 편지를 통해서 많은 교훈과 권면과 질책을 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오해를 일으켰고 어떤 대적자들에 의해 비방을 받게 되었습니다. 10절에서 이르기를 ‘그 편지들은 중하고 힘이 있으나 그 몸으로 대한 때는 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다’는 것입니다. 이런 그들의 모함은 바울은 비열하고 겁이 있고 별 볼일 없는 사람이라고 선전하려는데 목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이들의 모략처럼 바울은 그의 외모가 별로 볼 것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바울에게는 고질적이고 만성적인 질환을 지니고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결국 바울을 잘못 판단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일에 대하여 정면으로 돌파하는 논리로 대항하고 있는 것입니다. 11절에서 ‘우리가 떠나 있을 때에 편지들로 말하는 자가 어떠한 자이면 함께 있을 때에 행하는 자도 그와 같은 자인 줄 알라’고 한 것입니다. 편지를 써서 보낸 사람도 바울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만나 대면할 때 그들에게 말을 하는 사람도 바울입니다. 편지를 보내는 사람이나 대면하여 말을 하는 사람이 똑 같은 바울이라면 구별해서는 안돼는 것입니다. 같은 사람이라면 같은 권위를 가진 사람임에 틀림없는 것입니다.
결론 :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아끼고 사랑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에게 좋은 말로 대하고 권면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바울의 태도를 나무란다면 이런 일이야말로 잘못된 판단인 것입니다. 우리는 주의 종들을 대할 때 주님이 주신 권위를 보고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33) 주 안에서 자랑하라
(고린도후서10:12-18)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자기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자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하면서 자기가 자랑하는 자랑은 고린도 교회에 나타나 바울을 비방하는 그런 무리들의 자랑과는 가치가 다르며 주님으로부터 인정받은 자랑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이처럼 자신의 자랑에 대하여 변명하는 것은 거짓 선생들이 말하는 자랑과 구별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1. 분량의 한계를 따른 바울의 자랑
바울은 거짓 선생들이 자랑하는 자랑을 고린도 교인들이 용납해 주는 일을 묵과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12절에서 ‘우리가 어떤 자기를 칭찬하는 자로 더불어 감히 짝하며 비교할 수 없노라’고 단호하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을 대적하는 자들의 자랑에는 허황 됨이 있었습니다. 자기로서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서 자기를 비교하는 자랑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의 자랑의 표준은 자기들 생각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들이 하는 일이나 주장이야말로 가장 자랑스러운 것이 안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척도를 따라 자랑의 기준을 삼았기 때문에 자신이 인정할 수 없는 자들은 어떤 경우에도 자랑할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바울은 이들과 ‘더불어 감히 짝하며 비교’하는 일에 대하여 참을 수 없는 모욕감을 느꼈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들에 대하여 한마디로 ‘지혜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어리석다는 뜻입니다. 자기들의 기준에 의해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자기들 스스로 자기들을 평가하는 일은 어리석은 일인 것입니다.
바울은 ‘그러나 우리는 분량 밖의 자랑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분량으로 주신 그 분량의 한계를 따라 한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분량이란 하나님이 허락하신 범위란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그가 일할 수 있는 범위를 주셨고 자기는 그 범위에 따라 일을 하며 그의 자랑도 그런 일에 대한 자랑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이 주신 복음의 분량을 바울은 고린도에 이르게 되었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주 안에서 자랑하라
바울은 다른 사람이 복음의 씨를 뿌린 곳에 가서 복음 사역을 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고린도 교회가 다른 사람들에 의해 세워진 교회라면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그토록 미련을 두지도 않았을 것이며 그곳에 방문할 이유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전한 복음에 의해 세워졌으며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이 복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낳은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고린도 교회에 대한 간섭은 결코 지나친 것이 아니며 무리에게 손을 뻗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5절에서 이 같은 사실을 밝혀 주기를 ‘우리는 남의 수고를 가지고 분량 밖의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수고해서 세워 놓은 교회에 가서 자기들이 해 놓은 양 생색을 내려는 것이 아니라고 한 것입니다. 이런 일은 얄팍한 간교에서 나온 일이며 온당치 못한 일인 것입니다. 바울의 이 말은 바울이 터를 닦아 둔 고린도 교회에 들어와 복음을 흐려 놓고 오히려 바울을 배척하면서 자신의 기준에 따라 자기를 자랑하는 거짓 선생을 향하여 비난한 말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바라는 바는 ‘오직 너희의 믿음이 더할수록’ 즉 그들의 믿음이 더욱 성장할수록 그들로 인하여 복음 사역이 더욱 확장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이처럼 소원하는 것은 바울이 전한 복음의 지역이 확장되므로 그것으로 자랑하기를 원하지만 다른 사람이 복음의 씨앗을 심은 그런 곳에서 활동하는 일로 자랑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17절에서 바울은 아주 귀한 말씀을 주고 있습니다.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고 한 말이 그것입니다. 바울의 이 말은 어떤 번역처럼 주님을 자랑하라는 말이 아니라 말 그대로 자랑하려거든 주 안에서 자랑하라는 뜻입니다. 물론 우리는 주님을 자랑하는 생활을 제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이곳에서 강조하는 바는 자랑할 일이 있으면 주님으로 말미암아 자랑할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결론 : 주님께서 자기에게 나타내신 은혜에 대하여, 자기를 통하여 주의 복음을 전하게 하신 일에 대하여, 주님을 찬양하고 그런 일을 주신 일에 대하여 자랑하는 일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바울이 본문에서 자신의 대하여 자랑함이 그런 의미에서인 것입니다. 그는 오직 주님에 의해 칭찬을 들은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고후 11장 (34 - 37)
◆ 밤중소리 01-30 | VIEW : 686
(34)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열심
(고린도후서11:1-4)
바울은 드디어 본문에서 고린도 교인들을 꾸짖고 있습니다. 바울이 정성을 쏟아 고린도 교인들을 영적으로 양육하였거늘 거짓 선생들이 나타나 다른 복음으로 그들을 미혹했을 때 그들은 그 같은 미혹에 현혹되어 오히려 그들의 그런 행동을 용납하였던 것입니다.
1. 고린도 교인들을 그리스도에게 정결한 처녀로 중매한 바울
바울은 1절에서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서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의 뜻은 이제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쓰려는 말이 결코 어리석은 말이 아니니 귀담아 잘 들으라고 한 것입니다. 바울이 지금 언급하려는 말은 그들에게 충격적인 말이 될는지 모르므로 미리 이해를 이로 인하여 다른 시험에 들지 않게 하려는 바울의 배려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2절에서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낸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고린도 교인들을 지극히 사랑하시고 그들을 위해 열심을 내시는 것처럼 자기도 그런 열심으로 고린도 교인들을 대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열심은 그들을 위한 구원의 역사와 그들을 온전히 구원하시는 일에 쏟으시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바울 역시 그런 사랑과 열심으로 그들을 대하고 그들을 위해 헌신해 왔음을 진실한 마음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은 어떤 일에 그처럼 정성을 쏟은 온 것입니까? 바울은 이에 대하여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염원은 그들을 그리스도에게 중매하는 일이며 이로 그들이 온전한 그리스도의 신부의 자격을 구비케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에게 중매하려면 정결한 처녀라야 합니다. 정결한 처녀란 말은 다른 남자를 모르는 처녀를 가리킵니다. 순결한 믿음의 사람을 의미합니다. 믿음은 순결해야 합니다. 신앙의 정결함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진리로 속 사람을 단장하고 그 가운데 행하는 믿음이 정결한 처녀의 신앙 생활인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로 이런 아름다운 믿음으로 성장케 하여 그리스도에게 온전히 바쳐지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원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3절에서 고린도 교인들을 위해 염려했던 바가 무엇이었는가에 대해 말하기를 ‘뱀이 그 간계로 이와를 미혹케 한 것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고 했습니다. 뱀이 나타나기 이전의 에덴 동산은 평화로웠습니다. 그러나 뱀이 그 곳에 나타나 그의 간계로 이와를 미혹한 일에서부터 에덴 동산은 하나님께 대한 순결을 잃게 되었고 죄가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미혹이란 말은 ‘엑세파테센’이란 말로 상대방을 속인다는 뜻입니다. 사탄이 왜 우리를 미혹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게 하려는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까? 속이는 말로 하는데 이것이 거짓말입니다. 그러므로 사탄은 거짓말이 그의 무기이며 사탄의 사자들인 거짓 선생들도 사탄으로부터 거짓말을 배워 그 속이는 말로 미혹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게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거짓 선생들이 고인도 교회에 들어와 이미 거짓말로 그들을 미혹하여 어느 정도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케 한 것입니다. 바울이 바라는 바는 고린도 교인들을 정결한 처녀로 장정케 하여 결국은 그리스도의 신부로 온전케 하려는 것이었는데 이들 거짓 선생들로 인하여 그런 바울의 계획에 차질이 생긴 것입니다. 바울은 분통이 터졌고 그들 거짓 선생들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쉽게 따른 고린도 교인들에게도 결코 허물이 없다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1.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
사탄이 에덴에 침투하여 이와를 미혹한 것처럼 이들 거짓 선생들이 고린도 교회에 침투하여 한 일은 그들에게 거짓말을 하여 속이는 일이었는데 그 방법으로 다른 복음, 다른 영, 다른 예수를 전하여 그것을 믿도록 하려고 한 것입니다.
다른 예수란 그리스도의 본질을 다르게 해석하여 예수가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를 변질시키는 일을 말합니다. 예수는 신성과 인성을 겸비하신 분입니다. 그 분은 우리 대신 속죄 제물이 되셨고 우리의 의를 위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습니다. 그런데 다른 예수란 이런 성경적인 진리에서 떠나기 때문에 그런 예수로는 그가 우리의 구주가 되실 수 없는 것입니다. 다른 영, 다른 복음도 그런 의미에서 나온 말입니다.
결론 : 그런데 이런 위험한 거짓 선생들의 가르침을 고린도 교인들이 용납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사랑과 관용을 베풀었으면서도 바울에 대한 사도 직과 그의 복음의 사역에 대해서는 의문을 품었던 것입니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뱀의 간교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에게서 떠나게 하려는 사탄의 일꾼으로 일하기 때문에 우리는 조심해야 하며 진리의 말씀에 굳게 서야 하는 것입니다.
(35) 바울의 모범적인 목회
(고린도후서11:1-4)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쏟은 자신의 헌신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이런 자랑은 거짓 선생들의 간계에 쉬 넘어간 고린도 교인들에게 고린도 교회를 위해 복음으로 헌신한 자신의 참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1절에서 ‘나의 어리석은 것을 좀 용납하라’는 말로 이해를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1. 바울의 목자 상
5절에서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사역 자로써 하나님 앞에서 ‘내가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는 줄 생각하노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자신과 비교하고 있는 지극히 큰 사도란 예루살렘 교회에서 존경받는 사도들로 예수님에 의해 사도 직을 받은 사도들을 가리킨 것입니다. 바울이 이들보다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다는 말은 그들보다 우월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같은 수준의 사도인 것을 강조하려는 표현입니다. 바울도 주님에 의해 친히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요 그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도로서의 권능이나 계시는 오히려 더 권위가 있으면 있었지 모자람이 없다는 의미로 자기를 변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1) 바울은 사도 직을 수행하는 일에 있어서 비록 말에는 부족할지 모르지만 지식에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졸하다는 말은 ‘이디오테스’(ἰδιὠτη?)로 ‘평범한’이란 의미를 가진 말입니다. 그는 특별히 훈련받은 웅변술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므로 이런 웅변술에 뛰어난 거짓 선생들과 비교한 것입니다. 바울이 스스로 자신의 언변에 대하여 부족하다고 말하는 것은 바울의 겸손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그 당시 말에 능한 능변가들이 많았으며 거짓 선생들 중에도 그런 인물들이 더러 있었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고 한 바울은 복음 전파를 말에 의지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자신하고 있는 지식은 세상 학문에서 얻은 지식을 가리킨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존귀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 존귀한 지식에 대하여 그가 받은 계시와 그의 연구를 통해서 터득했으며 이런 지식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우위에 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신의 자랑 때문에 1절에서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2. 바울이 낮아진 것이 죄였느냐?
바울은 아마도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을 높이 평가하지 않은 일 중에 하나가 고린도 교회에서 겸비하여 최대의 너그러움으로 교인들을 대했고 다른 하나는 바울이 고린도 교회로부터 일절 사례금을 받지 않았다는 일에 기인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7절에서 ‘내가 너희를 높이려고 나를 낮추어 하나님의 복음을 값없이 너희에게 전함으로 죄를 지었느냐’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짓 선생들은 스스로 바울보다 자신들을 더 높여 권위 있는 사도로 인정받으려 했고 좋은 대우를 받으며 일을 해 온 것입니다. 그 반면에 바울은 지난날 고린도 교회에서 복음을 전할 당시, 그들로부터 사례금을 받지 아니하고 어떤 금전적인 피해도 주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이 일이 말썽이 된 듯 싶습니다. 바울은 사도적 권위가 없음으로 그렇게 한 것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 값없이 복음을 전할 때, 바울이 사용하는 경비는 이미 신앙이 장성하고 바울의 선교 사업에 자진해서 협력하는 다른 여러 교회 성도들로부터 도움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에 대해서 바울의 대적 자들은 바울의 그 같은 행위는 성도들의 헌금을 탈취한 것이라고 모함한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서 목회 할 때 물질적으로 부족한 것이 많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어떤 만족을 채우는 일에 사용하려는 것이 아니었고 복음이 그들 가운데서 왕성해지고 이 복음으로 인해서 구원받는 무리들을 더 많게 하기 위해서는 많은 비용이 들어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비용에 대해서 교인들에게 손을 내밀지 아니했습니다. 바울은 아직 신앙이 연약한 그들로 이로 인하여 시험에 들것을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목회자가 교회에서 급료를 받는 일에 대하여 당연하다고 말했습니다. 고전 9:7절에서 ‘누가 자비량하고 병정을 다니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실과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떼를 기르고 그 양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 앞에 자기의 자랑을 내 세우기로 했습니다. 그 자랑이란 것이 값없이 복음을 전하는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있는 재정을 자신의 급료를 위해 하나도 쓰지 않은 일을 밝히면서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그런 일을 원치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고전9:15).
결론 : 바울의 선교 자금은 주로 마게도냐 교회에서 모금하여 바울로 복음을 전하도록 했습니다. 바울은 성도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조심하는 생활을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36) 광명한 천사로 가장하는 사탄
(고린도후서11:5-15)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자기 속에는 진리가 있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진리와 더불어 살았습니다. 바울이 진실한 주의 일꾼이란 사실과 그의 복음이 진실하다는 것은 그가 진리와 함께 하고 진리 안에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보수 없이 복음을 전한 이런 일이 하나님 앞에서 자랑스러운 일이기 때문에 아무도 그런 일을 막지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1. 어떤 연고뇨?
바울은 11절에서 그 이유에 대하여 변명하기를 ‘어떠한 연고뇨’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어떤 연고뇨 란 의미는 바울이 마땅히 받아야 할 보수를 받지 않는 일이 무슨 연고로 말미암은 것이냐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이유를 두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내가 너희를 사랑하지 아니함이냐’고 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사랑하지 않는 이유로 그들에게서 보수를 받지 않는 것인 줄 아느냐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의 생각은 바울이 자신들을 사랑했었다면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하는 일에 쓸 비용을 왜 다른 교회로부터 받았겠느냐는 의문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에 대한 변호를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사랑했기 때문에 그들의 심려를 끼치지 않고 그들 가운데서 자유롭게 복음을 전하므로 그들로 온전한 믿음에 이르게 하고 고린도 교회로 더욱 성장케 하려는 배려에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그처럼 오해하는 일에 자신의 심정을 자기가 고린도 교인들을 사랑하는 일을 ‘하나님이 아시느니라’는 말로 변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 앞에 진실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에 그가 하나님이 아신다고 한 말은 그의 진실을 증거 해 주는 말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다른 또 한가지의 이유는 12절에서 밝혀 주는 대로 바울이 거짓 선생들과 차별화 함으로써 자기들을 자랑할 수 있는 구실을 주지 않으려는데 있다고 했습니다. 이 일에 대한 바울의 생각은 단호했습니다. 자신이 아직까지 해 온 방식대로 고린도 교회을 위해 헌신할 것임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에 은밀히 침투한 거짓 종들은 바울이 은근히 자신들처럼 고린도 교인들로부터 보수를 받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자신들이 보수를 받는 일에 대한 정당성을 나타내려고 한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의 저의를 알았기 때문에 그들에게 그런 구실을 줄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으려고 한 것입니다.
2. 거짓 사도들의 가면
바울은 13절에서 고린도 교회에 들어와 그들을 미혹하는 거짓 선생들에게 정면으로 도전하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이 말은 그들의 정체를 정면으로 들어 낸 말이며 고린도 교인들로 그들을 경계하고 그들의 교훈에 가까이 하지 않을 이유를 분명히 제시해 주는 말입니다.
거짓 사도라고 한 말은 그들이 사도 직을 가장하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진실한 그리스도의 일꾼처럼 자신을 위장하고 있는 모습을 그렇게 지칭한 것입니다. 그리고 궤휼의 역군이라고 했는데 이 말은 고린도 교인들을 속여먹는 일꾼이란 뜻입니다. 그들은 진실한 척 자신을 위장하고 있지만 실인즉 속여먹는 삯군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가리켜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을 그리스도의 진실한 일꾼으로 그들 앞에 서서 활동하지만 바울은 이미 그들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한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14절에서 아주 놀랄 만한 말씀을 들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다’고 했습니다. 사단의 특징은 처음엔 자신의 정체를 감추고 타락시킨 후에 죄의 종으로 얽어맨다는 사실입니다. 하와의 경우가 그러했습니다. 하와가 뱀과의 대화에서 뱀이 사단의 화신인 줄 모르고 그와 대화하고 그의 제의에 동의한 것입니다. 그 후에 그는 사탄에게 얽매인바 되어 죄의 종이 된 것입니다.
종말에 등장할 적 그리스도 역시 광명한 천사의 너울을 쓰고 등장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입에서는 용의 말이 나온다고 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나타난 이들 거짓 선생들 역시 광명한 천사의 모습으로 나왔지만 그들의 입에서는 용의 말이 나온 것입니다.
결론 : 그들은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여 자신을 가장하고 활동하지만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될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들의 결실은 생명을 노략질하는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으로 바쳐질 것입니다.
(37) 복음을 위해 받은 바울의 고난
(고린도후서11:16-33)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위해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적어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만은 자랑할 것이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에 대한 참 모습을 바라보지 못하고 거짓 선생들의 자랑에 매료되어 바울로부터 거리가 점점 멀어져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 자랑이 어리석은 일 인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거짓 선생들의 자랑에 현혹되어 쉽사리 미혹에 넘어가는 고린도 교인들을 위해 부득불 자신의 자랑을 말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1. 육체로 자랑하는 바울의 자랑
18절에서 바울은 ‘여러 사람이 육체를 따라 자랑하니 나도 자랑하겠노라’는 말로 자신의 자랑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 앞에 나타난 거짓 선생들은 자신들의 육체적 조건을 자랑했습니다. 바울은 이런 자랑이 사도로서 할 바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지금 형편으로는 부득불 해야 할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기탄 없이 자랑하노라 는 말로 자랑을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거짓 선생들에게 보여 준 관용에 대해 그 잘못을 먼저 책망하고 있습니다. 20절에서 ‘누가 너희로 종을 삼거나 잡아먹거나 사로잡거나 자고하다 하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 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처럼 거짓 선생들로부터 여러 가지 수모를 당해도 참아 주는 일로 그들을 너그럽게 대한 일에 대하여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책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종을 삼았다는 말은 고린도 교인들로 자신들에게 맹종하게 한 것을 의미합니다. 한편 그들은 고린도 교인들로 실인즉 율법의 종으로 만들기도 한 것입니다. 잡아먹거나 란 말은 착취를 뜻하는 표현입니다. 그들은 고린도 교인들로부터 재물을 착취했습니다. 실인즉 복음의 씨앗은 바울이 뿌렸지만 그 대가는 거짓 선생들이 거둬 드린 것입니다. 다음에 사로잡거나 라고 한 말은 고린도 교인들을 비 진리의 함정에 빠뜨린 일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들은 거짓 선생들의 특유인 수사학적 달변으로 잘못된 미혹의 함정에 빠뜨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고하다 하거나 뺨을 칠지라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고 란 말은 스스로 자신을 높이는 교만의 표현인데 그들은 고린도 교인들 앞에서 그런 교만한 태도를 취했지만 그들의 이런 자고를 그냥 보아 준 것입니다. 뺨을 쳤다는 말은 거짓 선생들로부터 받은 수모나 억울한 일을 그냥 참아 온 사실을 의미합니다.
2. 바울이 말하는 자기 자랑
바울은 자기 자랑을 늘어놓기에 앞서 자기는 너무 약해서 그런 일까지는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누가 자랑을 한다면 자기도 자랑해야 하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 바울이 첫 번째로 들고 나온 자랑은 거짓 선생들이 육체로 자랑한 그 자랑을 들었습니다. 바울의 자랑은 이러했습니다. ‘그 사람들이 히브리 사람들이라고 자랑했습니까? 나도 히브리 사람입니다. 그들이 또한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했습니까? 나도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그들이 자신들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자랑했습니까? 나도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또한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라고 자랑했습니까? 나도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그들보다 훨씬 훌륭한 사람입니다’고 한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에 나타난 거짓 선생들은 예루살렘에서 온 자들로 육적 유대인들임을 자랑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야말로 정말로 그리스도의 진실한 일꾼이라고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의 자랑은 부질없는 일임을 밝히면서 그런 자랑이라면 자기가 그들보다 더 우월하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2) 바울이 정말로 고린도 교인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자랑에 대해 계속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았다’고 했습니다. 이제 바울은 거짓 선생들에게 없는 진실한 바울의 자랑을 그들에게 들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위해 수고를 넘치도록 했으며 옥에 갇히기도 했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번한 고비도 넘겼다고 한 것입니다.
바울이 겪은 고난은 그뿐만이 아닙니다. 배가 파선되어 바다에서 죽을 고비를 넘겼으며 많은 위험을 겪었다고 했습니다. 27절에서 고백하고 있는 바울의 자랑은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처절한 부르짖음이었습니다.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28절에서 이런 일은 고사하고 자신은 여러 교회에 대한 생각에 눌려서 고통을 당한다고 한 것입니다.
결론 : 바울은 자신이 아직까지 고린도 교인들에게 밝힌 일에 대하여 그 일이 진실이라는 사실을 하나님이 아신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 같은 바울의 생애를 볼 때 그가 얼마나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며 복음을 위해 자신을 헌신했는가에 대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고후 12장 (38 - 41)
◆ 밤중소리 01-30 | VIEW : 493
(38) 바울이 가 본 낙원
(고린도후서12:1-6)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자신이 자랑할 여러 가지를 자랑했지만 바울이 12장에 와서는 정말로 자랑해야 할 하늘의 계시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아마도 고린도 교회에 나타난 거짓 선생들은 환산이나 계시나 이상에 대해 많은 자랑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자랑은 바울에 비하여 자랑할 바가 못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자랑은 잘못된 것이요 바울의 자랑은 진실하기 때문입니다.
1. 셋째 하늘에 올라간 간증
바울은 2절 이하에서 놀라운 영적 체험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체험담은 이미 14년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이 때라면 주후 약 43년경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그의 이 놀라운 체험에 대하여 그때까지 침묵하고 있었다는 것은 그가 받은 계시에 대해 결코 자랑으로 나타내지 않았다는 사실과 하늘의 비밀에 대한 바울의 조심성과 겸손함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한 경험을 그 대상을 제3자로 돌려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안다’는 말로 표현한 이 사람은 7절에서 자신임을 간접적으로 나타내고 있으므로 바울이 자신의 경험을 말하고 있음이 분명한 것입니다.
그는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갔다고 했습니다. 셋째 하늘이란 4절에서 밝혀 준 낙원이란 말과 같은 곳을 의미하는 것으로 우리는 이곳을 천국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 하늘이란 말은 하늘 위에 하늘이란 의미로 볼 수 있는데 엡4:10절의 ‘모든 하늘 위에’란 말과 상통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외경에 나오는 것을 보면 의롭게 죽은 자들이 머무는 처소로 세 번째 하늘을 말하고 있습니다(에녹서 8:13).
바울은 이 신비한 체험을 말하면서 이 같은 이상이 몸 안에서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몸을 떠나 영적으로 체험한 것인지는 잘 모른다고 했습니다. 바울의 이런 표현은 자신이 본 셋째 하늘의 모습이 그가 생각하기로는 실제로 자신의 몸이 올라가 체험한 것으로 느껴진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혹이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겸손한 생각에서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갔다’는 말을 두 번씩이나 나타냄으로 자기 생각에는 몸으로 올라갔다는 것을 믿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가 올라간 곳은 낙원이라고 했습니다. 낙원이란 헬라어 ‘파라다이손’(παρἀδεισον)으로 ‘동산’을 뜻하는 말입니다. 성경에서 이 낙원은 아담이 거주했던 에덴 동산을 가리키는데 사용되었으며 하나님이 계신 곳을 가리키기도 했습니다(겔28:13). 예수님도 회개한 강도에게 약속한 곳으로, 계2:7절에서는 이기는 자가 얻을 영생의 장소로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표현으로 보아 낙원이란 곧 천국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2. 바울이 낙원에서 들은 말
4절 말씀에서 바울은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고 했습니다. 그가 셋째 하늘인 낙원에 올라가 본 일만도 대단한 비밀인데 그곳에서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을 들었다고 한 것입니다. 이 말이 누가 한 누구의 말인지는 밝히지 않고 있지만 주님을 친히 만나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들은 사실을 의미하는 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란 뜻은 사람의 말로 가히 표현할 길 없는 이상이었다는 의미도 되고 바울에게 만 보여 주신 특별한 계시를 나타내면 안 된다고 하는 지시를 받았으므로 밝힐 수 없다는 의미도 되는 것입니다. 여하튼 바울은 그곳의 광경이나 그곳에서 들은 이야기가 자칫 신비적인 오해를 일으킬 수 있고 그런 것을 듣는 일이 유익이 되는 일이 아닐 것이기 때문에 바울은 말하기를 삼간 것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근래에 천국에 갔다 왔다는 간증을 하는 사람들이 심심지 않게 나타나 혼란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친히 낙원에까지 이끌려 갔다 온 바울마저 그곳 이야기에 대해 삼가 했거늘 확실히 천국에 다녀 온 것으로 믿어지지도 않는 사람들이 천국에 대한 간증을 하는 일은 잘못 받은 계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분명히 자신의 경우를 말하면서도 제3자를 개입시켜 말하고 있는 것은 이 놀라운 체험의 이야기가 혹 자신의 자랑처럼 비춰지고 자기 스스로 자랑한 것으로 생각할까 염려하여 그렇게 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 언급하면서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치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결론 : 바울에게는 약한 것들이 많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는 한없이 약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 교인들 앞에서도 약했습니다. 그가 당한 모든 어려움이 그의 약한데서 온 것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 앞에는 가장 강한 것이라고 바울은 믿었습니다.
(39) 약한데서 온전해 지는 하나님의 능력
(고린도후서12:7-10)
바울은 7절에서 자기 몸을 찌르는 가시와 같은 병이 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병을 바울을 위해 은혜로 주신 병이란 사실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바울은 이 같은 사실을 받아 드려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세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그리스도인 들이 바울로부터 배워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1. 바울로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은혜
바울은 7절에서 말하기를 자신이 받은 계시가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자기 몸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1절 이하에서 말한 첫째 하늘에 올라간 어느 한 사람이 바로 자신임을 간접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계시는 지극히 큰 계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바울도 인간인 이상, 이런 계시를 받으면 교만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종들이 큰 은혜를 받거나 능력이나 권능을 받은 후, 자고하여 스스로 넘어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것입니까?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의 복음을 전하는 사역 자로 쓰시기 위해 바울로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미리 예방하셨는데 그의 몸에 견디기 어려운 질병을 짊어지게 한 것입니다. 어떤 병인지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가시라고 표현한 말에서 가시처럼 바울의 육체를 아프게 찌르는 견디기 어려운 질병임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구전에 의하면 바울에게는 심한 눈병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하여튼 몸에 가시 같은 질병이 있었다면 아무리 큰 계시를 보았다 해도 교만한 마음으로 자고해 질 수는 없습니다. 사람의 교만을 꺾는 방법은 사람으로 큰 실패를 당하게 하던가 몸에 견디기 어려운 병을 주심으로 괴로움을 당하게 하는 방법을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사탄의 사자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바울의 표현은 그로 인한 자신의 괴로움을 큼을 말하고 있으며 또한 그가 괴로움을 당하는 일이 사탄으로 말미암은 역사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탄을 통해 욥을 연단케 하셨던 것처럼 바울의 교만을 꺾기 위해 그를 사용하실 수도 있는 것입니다.
2. 약한 데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능력
바울은 이런 사탄의 사자로 인한 괴로움 때문에 참기 어려웠습니다. 그는 이런 자신의 질병이 나가기 위해 하나님께 세 번씩이나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바울의 기도는 그의 괴로움만큼이나 간절했습니다. 그는 한 문제를 가지고 세 번씩이나 기도한 것입니다. 이 같은 기도는 자신에게 가시 같은 질병을 위해 얼마나 괴로움을 당하였었는가에 대해 짐작할 수 있는 일이며 바울은 이런 일이 자신에게 육체적 괴로움을 주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보다 바울의 마음을 더 안타깝게 한 것은 이로 인해 사람들로부터 바울이 무시를 당할 때 자신의 사도직의 권위와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지지 않을까 염려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런데도 응답이란 것이 바울이 기도한 내용과는 전혀 상반된 것이었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그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반드시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방향으로 나타나는 것만은 아니란 사실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 문제를 그대도 놔두시는 방법으로 응답해 주시는 경우도 있다는 사실을 이 바울의 경우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때 우리는 우리의 기도의 자세를 고쳐야 합니다.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고 결론을 맺으신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인 것입니다.
바울은 이 같은 기도 중에 주님의 뜻을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하신지라‘고 하신 주님의 뜻을 음성으로 들었는지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깨닫게 됐는지는 몰라도 그 어떤 방법일지라도 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자기가 주님의 뜻을 정말로 알게 됐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이 일에 대하여 도리어 크게 기뻐했다고 했습니다. 바울의 이 말은 자신에게 주어진 가시로 인한 괴로움이 자신의 교만을 없앨 수 있는 하나님의 방법이시라면 차라리 괴로운 병을 택하겠다는 신앙적 자세인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해 바울은 새로운 은혜를 받았는데 자신의 자랑거리가 새롭게 생긴 것입니다.
10절에서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 : 바울에게는 육신으로는 괴로움을 당하지만 그로 인해 영적 유익을 얻으며 그리스도를 위해 보람있게 일 할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반드시 본 받아야 할 신앙적 자세라고 믿는 것입니다.
(40) 바울이 자기를 자랑하게 한 책임
(고린도후서12:11-13)
바울은 주님으로부터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시는 응답의 말씀을 듣고 새로운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약함이 결국 주의 일을 위해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타날 것임을 믿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까지 괴롭게 여겼던 자신이 겪었던 시련에 대해 그런 것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힘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10절에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니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의 약한 것들에 대해 기뻐할 수 있다는 것은 모범적인 믿음인 것입니다.
1. 바울로 자랑하도록 한 고린도 교인들의 책임
11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결국 어리석은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에 대해 스스로 탄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책임에 대해 고린도 교인들에게 ‘여러분이 억지로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에 대하여 바울은 그들은 바울이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자신의 자랑을 말하기 이전에 먼저 바울의 사도 직과 그의 진실한 주의 사역 자로서의 위치를 인정해 주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고린도 교회에 들어온 거짓 선생들에게 미혹되어 그들이 바울을 공박하고 그를 비방했을 때, 바울의 변호인이 되지 못하고 침묵하고 있으므로 묵시적으로 그들을 동조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울의 마음을 서운하고 안타깝게 했던 것입니다.
바울에게는 사도로서의 표적을 가지고 있었으며 고린도 교인들에게 분명히 보여주었습니다. 바울은 그 표적에 대하여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참음은 바울이 어려운 조건을 이기며 복음을 전한 그의 인내를 말합니다. 그리고 표적은 주님이 복음을 전하는 바울에게 복음과 함께 많은 표적을 보여 주신 것을 말합니다. 기사는 바울에게서 나오는 기이한 일들로 이런 기사는 성령의 능력으로 나타났습니다. 능력이란 바울을 통해서 나타내신 하나님의 권능을 가리킵니다. 이런 것들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 행했고 그들은 바울의 이런 행적을 보고 마땅히 바울을 사도로 인정하고 어떤 거짓된 선생이 등장하여 ‘다른 복음’을 전할지라도 바울을 배신하거나 바울이 전한 복음을 경히 여겨서는 안되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바울이 기대하는 것처럼 올바른 태도를 취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울의 심정을 상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의 그런 행동 때문에 부득불 자기가 자기를 자랑하는 어리석은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바울은 자기는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조금도 부족하지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지적한 ‘지극히 큰 사도들’이란 고린도 교회에 나타난 거짓 선생들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주님의 제자들과 비교하면서 ‘내가 그들보다 무엇이 부족한가?’ 고 반문하는 것입니다.
2. 공평치 못한 것을 용서하라
바울은 13절에서 ‘내 자신이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한 일밖에 다른 교회보다 부족한 것이 무엇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로 하여금 그들이 바울에 대하여 한번 더 깊이 생각할 수 있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이런 물음을 던진 것입니다. 바울이 정성 드린 교회는 비록 고린도 교회뿐이 아닙니다 그가 세운 교회 수만 해도 수다하며 그 모든 교회에 그는 있는 정성을 쏟아 섬겼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대해 더욱 큰사랑을 가지고 돌보았다는 사실을 숨기려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한 일밖에 부족한 것이 무엇이냐’고 한 것입니다. 그가 폐를 끼치지 아니했다는 말은 그들에게 어떤 물질적인 도움을 청했다거나 그들의 물질로 교회를 섬긴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바울이 그들의 물질을 사용치 아니한 것은 그들은 아직 물질을 자원해서 내 놓을 만큼 믿음이 성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그 지방의 인심이나 경제적 요건이 부적격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덕을 세우고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 다른 교회에서 협조해 주는 도움으로 헌신해 왔었습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부족한 일이 있었다면 이런 그들의 재정적 도움을 받지 않은 일 외 무엇이냐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나의 공평치 못한 것을 용서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바울의 하나의 풍자적인 표현으로 볼 수 있는데 이 말 가운데는 그들이 바울에게 적극적으로 물질의 도움을 줄 의욕을 가지고 협력해 주지 않은 일에 대해 나무라는 면도 있는 것입니다.
결론 : 바울은 자기가 고린도 교회에 쏟은 애씀이 거짓 선생들로 인하여 허사로 돌아갈 것을 크게 염려하여 이처럼 간절한 심정으로 그들을 대한 것입니다. 바울의 사려 깊은 아름다운 면을 찾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41) 바울이 두려워하는 것
(고린도후서12:14-21)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세 번째 갈 준비를 하면서 이 편지로 단단히 준비를 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가서 할 말을 편지로 써서 바울이 갔을 때에 그로 고린도 교인들 앞에서 평안한 마음을 얻고 그들에게 엄한 말로 꾸짖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여러 가지로 교훈하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1. 내가 뉘 것을 착취했느냐?
바울은 14절에서 자신이 고린도에 갈지라도 고린도 교인들의 신세는 지지 않을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구하는 것은 재물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혹 바울이 자신들의 재물을 원하지나 않을까 걱정할 것 같아 재물에 관한 일에 염려를 갖지 않도록 사전에 언급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원하는 것은 재물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들을 얻는다는 말은 그들로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는 일’입니다. 그들에게 온전한 구원을 이르며 더 나아가 복음의 일꾼으로 하나님께 쓰임 받기를 원하는 일입니다. 바울은 그들의 재물을 원치 않는다는 하나의 비유를 자식에게 물려주는 재물의 경우를 들었습니다. 자식이 부모에게 재물을 물려주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오히려 자녀들에게 재물을 물려주는 것처럼 자신은 그들의 재물에 욕심이 없고 오히려 자신의 재물로 그들을 섬길 것이라는 말입니다.
15절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영혼을 위해 기뻐하는 마음으로 여기저기서 보내 온 재물로 그들을 섬겼고 또 자기 자신까지도 그들에게 줄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너희를 더욱 사랑할수록 나는 덜 사랑을 받겠느냐’고 물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위해 재물도 바치고 자기 몸까지도 바치기를 기뻐하는데 그래도 당신들은 나를 덜 사랑하겠느냐? 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 같은 표현은 자신이 그들을 위해 온갖 사랑을 바치거늘 왜 당신들은 자신에 대해 그렇게도 몰라주며 거짓 선생들의 모함에 쉬 넘어가 자신을 의심하며 그들에게 동조하는 것이냐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 바울이 두려워하는 것
바울을 모함하는 자들은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비록 공교한 자가 되어 짐은 지우지 아니했어도 간교한 속임수로 그들을 사로잡았다고 비난했습니다.
바울은 이에 동조하는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 공박하는 말로 따지고 있는 것입니다. 17절에서 바울은 ‘내가 너희에게 보낸 자 중에 누구로 너희의 이를 취하더냐’고 물었습니다. 디도나 디도와 함께 보낸 형제가 고린도에 가서 성령으로 행하며 동일한 보조로 하지 않더냐고 말했습니다.
바울이 이처럼 그들에게 말하는 이 일이 ‘너희에게 변명하는 줄로 생각하는 일’이 아니란 사실을 말하고 자기 방어를 위한 변명인 줄 알지 말 것을 말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20절에서 바울은 그가 고린도 교회에 갔을 때에 두려워하는 바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혹시 바울의 기대에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 교인들이 원치 않는 모습으로 보일까 두려워한다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들 가운데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중상함과 수군수군하는 것과 거만함과 어지러운 것이 있을까 두려워’한다고 했습니다.
바울의 이 같은 말로 살펴 볼 때, 고린도 교인들은 모범적인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 성도들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싸우기도 잘하고 시기나 분내는 일도 잘하며 편당도 짓고 서로간 중상하는 일도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바울은 21절에 와서 심각한 말을 토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다시 갈 때에 내 하나님이 나를 너희 앞에서 낮추실까 두려워한다’고 한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가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하나님 앞에서의 책임을 질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아직 부끄러운 가운데 행한다면 그 일로 자신이 하나님께 부끄러움을 당할 일에 대해 염려한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다른 한 가지 사실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전에 죄를 지은 여러 사람의 그 행한바 더러움과 음란함과 호색함을 회개치 아니함을 인하여 두려워하노라’고 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이처럼 죄로 더럽힘을 받은 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아직도 그런 일에 대해 회개치 아니했을 때 바울이 받을 실망에 두려워한 것입니다.
결론 :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신앙적인 생활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올바른 신앙 생활로 주님과 함께 할 수 있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고후 13장 (42 - 43)
◆ 밤중소리 01-30 | VIEW : 521
(42) 바울의 엄한 경고
(고린도후서13:1-4)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내는 이 편지를 마무리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그들에게 회유를 겸해서 한편 엄중한 경종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2절에서 바울은 죄를 회개하지 않은 자에 대하여 ‘내가 다시 가면 용서하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10절에서 자신이 고린도 교회에 가면 ‘내게 주신 그 권세를 따라 엄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하므로 그들이 바울이 세 번째 방문으로 그곳에 당도하기 전에 모든 죄에서 돌이켜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바라볼 수 있기를 원했습니다.
1. 바울의 세 번째 방문
바울이 곧 방문하기로 계획된 고린도 교회는 바울에게 있어서 세 번째의 방문이 됩니다. 바울이 이처럼 세 번째로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는 목적은 거짓 선생들에 의해 교리가 흐트러지고 교인들의 신앙생활이 바로 서지 못하고 이전에 지은 모든 죄에 대해 회개치 아니하며 그대로 죄에 안주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이 그토록 정성 드려 세워 놓은 고린도 교회를 바로 세워야겠다는 신앙적 결단으로 방문을 굳혔던 것입니다.
2절에서 바울은 엄한 어조로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자신의 결심을 피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들을 두 번째 대면했을 때, 고린도 교회 안에는 ‘음란하고 호색함’을 회개치 않는 자들이 있었으며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도 각가지 죄가 있었다고 말하면서 그러나 그 당시 바울은 어떤 사정으로 어쩔 수 없이 지나쳐 왔지만 ‘내가 다시 가면 용서하지 아니하리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치리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정하리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이 말은 율법에서도 두세 증인의 증언이 있어야 그 재판이 성사되고 정죄를 내릴 수 있는 것처럼 이런 원칙에 입각하여 범죄자들에 대한 증인들을 세워서 그들에게 사도의 권위로 벌을 내릴 것임을 경종해 주고 있습니다.
2. 그리스도의 약하심과 강하심
고린도 교인들은 그들 앞에 거짓 선생들이 나타나 미혹했을 때, 영적으로 방황했습니다. 누구를 따를 것인가에 대해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무조건 바울 편에 서서 바울을 도와주고 격려해 주며 바울의 복음을 따랐어야 했지만 그들은 미혹에 약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바울에게 사도된 증거를 찾기에 이른 것입니다. 이런 일은 바울이 3절에서 밝힌 대로 ‘이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증거를 너희가 구함이니’란 말씀에 나타나 있습니다.
아마 그때 바울은 그들에게 사도된 분명한 증거를 눈에 보이게끔 보일 수 없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단호하게 말하기를 ‘그 때 보여 달라고 한 그 증거를 이제 내가 세 번째로 너희에게 가면 분명히 보게 될 것이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무엇으로 어떻게 그런 증거를 보여 줄 것인지에 대해서는 말이 없지만 그는 분명히 주님으로부터 이 문제에 대한 계시를 받았으며 바울은 이제 확신을 가지고 자신 있게 그들 앞에 나타날 것임을 표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3절과 4절에서 그리스도는 약한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약하신 분이 아니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이 말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바울은 약하지 않고 강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나타내 주는 말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약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바울이 스스로 언급한 대로 편지로는 강하나 대면하면 우유부단하고 결단력도 없다는 비난을 받은 적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도 육체적으로 약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있는 사탄의 가시를 위해 세 번씩이나 기도했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바울은 그런 질병이나 다른 외모적 악조건 때문에 무시를 당할 수도 있는 처지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과 바울에게 있는 사도적 권위와는 별개의 문제인 것입니다. 지금 바울은 자신에게 부여된 사도 직에 의해 부여받은 주님의 권위로 그들에게 엄하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4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경우를 자신의 경우와 결부 시켰습니다. 그리스도도 육체로 계실 때에는 약하셨기 때문에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죽음에서 살려내신 것입니다. 우리들도 육신적으로는 약하나 죽음에서 살려내신 하나님의 권능으로 우리도 강하게 될 것이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결론 :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결코 약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약한 것 때문에 더 강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약했을 때 그 약한데서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날 수 있었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43) 믿음에 있는가 시험하고 확증하라
(고린도후서13:5-13)
바울은 고린도 교인이 과연 믿음에 있는가 스스로 판단해 볼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5절에 나오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시험하고 확증하라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준 이 말은 그들 스스로가 자신의 믿음을 잘 지키고 있는지 잘 살펴보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스스로의 신앙을 정검해 볼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거짓 선생들의 미혹에 쉬 넘어간 일이라든가 바울에 대한 사도 직의 의심과 바울의 연약함을 비방한 일에 대한 동조 등은 그들이 과연 올바른 신앙에 서 있느냐는 문제에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을 깨우치기 위해 이처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문제로 바울이 그들에게 제기한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사실은 구원의 교리의 첫걸음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영접하면 그 시로 성령이 우리 안에 내재하심으로 주님이 성령 안에서 나와 함께 거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의 믿음의 생활이나 그들이 죄 가운데서 회개치 못하는 일이나 바른 복음을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일을 볼 때 그들에게 과연 그리스도께서 계시느냐는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그리스도가 없다는 것을 전제해서 한 말은 아닙니다. 그들로 이 바울의 말을 듣고 자신을 살피는 가운데 깨달아 올바른 믿음에 서라는 의미에서 이처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만약 그리스도께서 자신과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믿음에서 파선된 사람입니다. 이런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서 믿음의 생활을 한다면 그 사람은 믿음에 실패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임재에 대한 믿음 없이 올바른 신앙생활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그의 신앙이 성장하지 못하고 언제나 죄 가운데서 헤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6절에서 '우리가 버리운 자 되지 아니한 것을 너희가 알기를 내가 바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복음을 받아 드리고 이미 구원에 이른 사실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예수께서 임재 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알기를 바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목회자들은 아직 믿음이 연약한 성도들에게 이런 사실을 반복적으로 알려줘 그들로 그리스도의 임재를 믿고 그 안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영적으로 지도해 주어야 합니다.
2. 바울이 바라는 것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으로 그들이 참으로 진실한 믿음 가운데서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바울의 바람을 말하기를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로 조금도 죄악에 물들지 않고 그들로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열매를 맺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바울은 자신이 진실한 일꾼임을 인정받기를 원해서가 아니며 혹 거짓 선생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버리운 자처럼 인정받더라도 고린도 교인들만큼은 올바른 신앙생활로 선을 행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위한 일이라면 비방 받기를 주저치 않았으며 어떤 고난도 시련도 견딜 수 있다는 자기의 생각을 이처럼 간절히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 들의 생활의 원칙에 대하여 말하기를 '우리는 진리를 거슬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소원은 비로 자기는 모든 면에서 약해도 고린도 교인만큼은 강하기를 원했습니다. 바울은 참으로 이런 것을 위해 기도했으며 그들이 신앙으로 성장하여 그들의 생활이 그리스도다운 인격을 이룰 수 있기를 바란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바울은 그들과 떠나 있을 때 이처럼 간곡히 부탁하는데 그 이유는 다시 만날 때, 바울이 실망치 않고 그들에게 자신의 엄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는데 있다고 한 것입니다.
바울은 11절에서 마지막 헤어짐의 인사를 아쉽게 남기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헬라어 법에 따른 일반적인 인사로 '안녕히 계십시오'라는 인사입니다. 그리고 온전케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 하며 평안 하라고 했습니다.
결론 : 바울은 그들의 평안을 빌고 평강의 하나님이 함께 계실 것임을 말하고 13절에서 성삼위의 이름으로 축복기도를 하는 것으로 편지를 마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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