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차례
고린도후서 1장 (1 - 4)
(1) 위로의 하나님(고린도후서1:1-4)
(2) 환난에서 얻는 하나님의 위로(고린도후서1:5-9)
(3) 주 예수의 날에 얻을 자랑(고린도후서1:10-14)
(4) 예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고린도후서1:15-24)
고후 2장 (5 - 6)
(5) 고린도 교회를 위한 바울의 눈물(고린도후서2:1-11)
(6)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고린도후서2:12-17)
고후 3장 (7 - 9)
(7) 육의 심지에 새겨진 편지(고린도후서3:1-5)
(8) 의의 직분의 영광(고린도후서3:6-11)
(9) 이스라엘이 쓴 모세의 수건(고린도후서3:12-18)
고후 4장 (10 - 13)
(10) 영의 직분 자의 할 일(고린도후서4:1-4)
(11) 질그릇에 담긴 보배(고린도후서4:5-7)
(12) 우리 몸에 나타나는 예수의 생명(고린도후서4:8-11)
(13) 영원한 영광을 이루는 우리의 경한 환난(고린도후서4:12-18)
고후 5장 (14 - 19)
(14)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고린도후서5:1-5)
(15)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고린도후서5:6-10)
(16) 그리스도의 심판대(고린도후서5:10-12)
(17)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표(고린도후서5:12-15)
(18)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린도후서5:16-17)
(19) 화목케 하는 직책(고린도후서5:18-21)
고린도후서 6장 (20 - 22)
(20)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린도후서6:1-2)
(21)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바울의 각오(고린도후서6:3-10)
(22)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고린도후서6:11-18)
고린도후서 7장 (23 - 25)
(23) 이 약속을 가진 우리의 신앙적 자세(고린도후서7:1-4)
(24)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고린도후서7:5-10)
(25)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고린도후서7:11-16)
==============================================================
고린도후서 1장 (1 - 4)
◆ 밤중소리 01-30 | VIEW : 555
(1) 위로의 하나님
(고린도후서1:1-4)
고린도 후서는 바울의 자서전이라고 불립니다. 그 이유는 그의 서신서 중 특히 본 서신은 그리스도의 종된 바울의 인간적이 모습을 잘 그려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 서신은 바울이 마게도냐 지역에서 기록한 것입니다. 그 같은 근거는 7:5절에서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란 표현에서 보여 줍니다. 본서는 바울에 의해 AD 56년 가을 경에 기록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서신의 수신자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들이라고 1절에서 언급되어 있습니다.
1. 서신의 서두
바울은 이 서신의 서두를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이란 말로 자신의 사도 직을 변호하고 있습니다. 그가 자신의 사도 직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여 서신마다 변호하고 있는 것은 그가 실제로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예수님의 12제 중 한 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을 사도라고 부르려면 그에 대한 응당한 변명이 따르지 않을 수 없었든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의 사도권에 대해 주변으로부터 대적해 오는 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부득불 복음을 위한 자기 방어상 자신의 사도의 직분이 바울 자신의 독단적인 주장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되었다는 사실을 주장하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그가 복음을 전할 초기에 계시로 분명히 받고 이런 주장을 거리낌없이 펴고 있으며 이런 바울의 사도 직에 도전하는 자들을 반 복음적 거짓 선생으로 매도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지칭하여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라고 불렀습니다. 교회 앞에 ‘하나님의’란 소유격을 부친 것은 교회의 소유주가 하나님이란 사실을 나타낸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에 의해 세워졌지만 그리고 바울이 떠난 후에 여러 사람들에 의해 운영되어 오지만 그 소유주는 하나님이십니다. 아가야 지방은 로마가 헬라를 지배할 당시 헬라 전체를 마게도냐와 아가야 두 지역으로 구분해서 통치해 왔습니다. 아가야의 수도는 고린도였습니다. 바울은 이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고 축원하고 있습니다.
2. 환난 중에 위로하시는 하나님
바울은 3절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는 일에 독특한 표현을 여러 가지로 사용했습니다. ‘그리스도의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구약에는 대개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란 표현이 쓰여졌지만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의 하나님’으로 불려집니다.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이 더욱 은혜로우신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다음에 ‘자비의 아버지 시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모든 죄인이 그들의 죄로 죽는 참담한 모습을 보시기 어려워 그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는 우리들의 자비의 아버지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라’고 했습니다. 위로는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이 위로란 말은 ‘파라클레세오스’로 어떤 소송 사건에서 우리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부른 자인 변호인 혹은 변호사란 뜻입니다. 성령을 보혜사 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위로의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 이 같은 위로를 나타내시는 것입니까?
(1)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신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생애에 환난을 거쳐야 하고 또 환난을 당하는 처지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사람의 뜻을 따라 세상 방법으로 살아가다가 환난을 겪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의 위로는 위로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생애는 언제나 환난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어둠에 속한 세상은 복음을 배척하는 것입니다. 그런 세상에서 복음을 전하고 또 복음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항상 환난을 거치는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이런 경험을 많이 했습니다. 복음을 증거 하다가 환난을 겪었으며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 하나님의 위로를 받은 것입니다. 바울이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 12:10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은 복음을 인하여 받는 고난과 핍박과 환난이 크면 클수록 하나님의 위로가 컸기 때문입니다.
(2) 다음에 바울은 이 같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위로는 또한 우리들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생애 중에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위로는 우리에게 넘치는 힘과 능력이 되어 모든 환난 중에 있는 다른 성도들을 위로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신앙 단계에 이르면 어려움을 당하는 성도들에게 베푸는 우리의 위로에는 하나님이 내리시는 위로의 능력이 역사 하시게 될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우리가 당하는 고난이나 환난 중에 오직 하나님의 위로만을 바라며 우리를 위로하시는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2) 환난에서 얻는 하나님의 위로
(고린도후서1:5-9)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특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고난은 현세에 있어서는 우리에게 괴로움이 되고 지기 힘든 십자가가 되지만 그로 인하여 얻는 우리의 유익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바울이 스스로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의 삶을 고난의 불 속에 던져 넣을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상을 바라보고 그것을 소망하였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롬 8:17-18절에서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1. 우리가 환난 받는 것
바울은 남다른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5절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이 우리에게 넘쳤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 도다’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이런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고난이 크면 클수록 우리에게 내리시는 그리스도의 위로도 넘친다고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고난에는 그리스도의 위로가 언제나 따릅니다. 그리고 그 위로는 우리가 받는 고난에 비례하여 항상 넘치게 임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하셨는데 세상을 이기신 주님의 위로가 우리에게 넘치게 임하는 데 이로써 우리로 세상을 이기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6절에서 자신의 환난과 위로가 고린도 교인들에게 결코 무관하지 않음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바울이 그토록 큰 환난을 받은 일은 결국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위로와 구원을 받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지역에서 많은 환난을 당했습니다. 결국 그로 인하여 고린도 교회가 세워졌고 그 교회에 위로와 구원의 은혜가 임하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가 이런 환난을 인하여 위로를 받는 것도 그들의 위로를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받는 위로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들이 환난을 당할 때, 그들에게도 위로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이 위로가 그들의 심령 속에서 역사 하므로 바울이 당하는 것과 같은 고난을 그들이 당할 때, 그 고난을 견디게 한다고 한 것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이 겪는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고 또 위로에도 참여할 줄을 알고 있는 사실로 인하여 바울에게 있어 고린도 교인들에게 대한 소망을 더욱 견고케 한 것입니다.
2. 하나님을 의뢰하게 하시는 환난
8절에서 바울은 자신들이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는 특히 아시아 지역에서 많은 환난을 받았는데 이 사실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사형 선고를 받은 줄로 알았다’고 했습니다. 이런 바울의 고백이 언제 어느 곳에서 받았던 환난인가에 대해 다만 아시아란 지역으로 표현했을 뿐입니다. 그가 받은 환난이 어떤 것이었는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힘에 지나도록 당한 심한 고생은 감당하기 이려운 핍박이나 생명에 위협을 주는 일이 바울에게 닥쳐온 사실을 의미할 것입니다. 살 소망까지 끊어졌다는 말과 사형 선고를 받은 줄로 알았다는 말은 죽음 직전까지 이르렀다는 사실을 나타낸 말입니다.
바울이 이런 상황에서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위로가 넘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임하면 새 힘이 생깁니다. 환난을 받는 보람이 있게 됩니다. 행5:40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유대인들이 공회에서 사도들을 붙잡아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채찍질을 했을 때,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를 떠났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임하면 기쁨이 옵니다. 우리가 주의 이름을 위해 지금 받는 고난이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는 소망을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우리로 환난을 받게 하심은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이 왜 사형 선고를 받은 줄로 여기기까지 심한 고생을 하며 살 소망까지 끊어진 상태에 있었음을 말하는 것입니까? 이런 극한 상황에서 바울은 자기를 의뢰할 수 없었습니다. 다른 어떤 사람도 의뢰할 수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이런 환난 중에서 고생하는 자신을 구원해 주실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같은 하나님께 대한 의뢰는 하나님께 대한 간절한 기도로 나오는 것입니다.
결론 : 하나님은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분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께는 능치 못하심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려운 시련이나 환난을 만나도 이 분, 하나님을 의뢰하여 그 분께 부르짖어야 하는 것입니다.
(3) 주 예수의 날에 얻을 자랑
(고린도후서1:10-14)
바울이 복음을 전파하는 과정에서 그가 받은 모든 환난은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위로로 더욱 은혜가 넘치고 또 이런 모든 일은 ‘우리 주 예수의 날에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 자랑이 되는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능히 이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1.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라
우리 주님은 참으로 우리들의 의뢰할 분이십니다. 바울은 10절에서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위해 바울이 당한 환난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입니다.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사형 선고를 받은 줄로 알았을 정도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에게 이 같은 환난을 주신 일은 그로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시기 위함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망의 줄에서 바울을 건져내셨고 앞으로 그런 환난을 만난다 해도 건져 주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11절에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기도를 당부하고 있습니다.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 함으로 도우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기도가 자신을 도와주는 일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그 중에도 복음을 전하는 일꾼을 도와주는 일은 모든 성도들에게 반드시 있어야 할 일입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도움을 주는 방법이 물질이나 어떤 헌신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보다 더 아름답고 귀한 방법으로 돕는 길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기도로 도와주는 일입니다. 기도는 물질이 들어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돈이 없다는 핑계를 댈 수 없습니다. 육체적 헌신이 들어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병들고 약한 몸이란 변명도 댈 수 없습니다. 시간을 내서 간구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상인즉 이 방법의 도움이 가장 요긴하고 필요한 도움이란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기도는 많은 사람이 할수록 유익합니다.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많은 사람이 자신을 위해 기도해 준 일로 은사를 얻었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은사는 그가 복음을 위해 헌신하는 일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의미합니다. 특히 환난 중에서 건져내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나타난 것도, 병자들에게나 어려운 역경 속에서 나타난 이적 등도 성도들의 기도로 말미암은 은사로 나타난 것입니다.
행12:5절 말씀을 보면 복음을 위하여 베드로가 옥에 갇혔을 때에 교회가 그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옥에 갇혀 있는 베드로에게 천사가 나타나 그를 풀어 주고 옥에서 기적적으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성도들의 기도로 얻은 은사로 인하여, 기도한 많은 사람들도 바울을 위해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다고 한 것입니다.
2. 주의 날에 얻을 피차의 자랑
바울은 12절에서 자신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얼마나 진실하게 행했는가에 대해 변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했다고 했습니다. 육체의 지혜란 인간적인 지혜로 일종의 꾀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바울은 그런 가식적이요 위선적인 잔꾀로 고린도 교인들을 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거룩하고 진실하게 살아온 것에 대해 양심이 증거 하는 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런 일에 대하여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에게나 성도들에게나 진실했습니다. 그의 말이나 그의 행실에 있어서 이 진실함과 거룩함을 좇아 살아 왔으며 이런 일은 양심이 증거 하는 바요 이런 일이 바울의 자랑이라고 한 것입니다. 자랑에는 진실함과 거룩함이 따라야 하고 그런 일들이 양심의 증거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근거로 바울은 ‘오직 너희가 읽고 아는 것 외에 다른 것을 쓰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아는 그대로 사실을 사실대로 썼으며 알지 못하는 것이나 사실이 아닌 일에 대해 쓴 것이 없으니 그대로 알아 줄 것을 당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14절에서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에 대하여 대강 알고 있는바 대로 우리 주 예수의 날에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 앞에 내 놓을 자랑에 대해 그것이 고린도 교인들이 대강 알고 있는 대로 자신이나 고린도 교인들에 있어서 자랑이 된다고 했습니다.
주의 날이 오면 너희는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는 또한 너희의 자랑이 될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바울이 복음으로 낳은 자녀들로서의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에게 있어서 큰 자랑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고린도 교인들 역시 바울로 인하여 복음을 듣고 구원에 이르게 되었으니 바울이 자기들의 자랑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결론 : 예수의 날이란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을 의미합니다. 그 날에 이런 일이 드러날 것이며 하나님께 피차에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4) 예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고린도후서1:15-24)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사랑하는 나머지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는 계획을 세우고 저들에게 알려주었으나 그대로 실행되지 못한 일에 대하여 변호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계획은 고린도 교인에게 다시 한번 은혜를 주려는 목적으로 먼저 고린도에 둘렀다가 마게도냐로 해서 다시 고린도로 돌아와 그곳에서 고린도 교인들의 송별을 받으며 유대로 가기를 경영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런 계획을 실천하지 못하게 되었는데 이로 인하여 고린도 교인 중 바울을 싫어하는 자들이 바울의 이같은 변덕스러운 행동에 대해 비방했었던 것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1.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바울은 이 같은 계획의 변경에 대하여 변명하기를 자신이 고린도 교회에 들릴 일에 대한 계획을 세울 때 어찌 경솔히 했겠는가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육신의 편의를 따라 일을 계획했거나 그런 육신의 생각을 따라 이랬다 저랬다 한 일이 아님을 말하면서 그런 일이 어찌 자신에게 있었겠느냐고 했습니다. 바울의 선교 계획은 결코 일시적인 목적이나 육신의 이해타산에 따라 변경시키는 일이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주장하면서 하나님의 뜻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바울은 18절에서 ‘하나님은 미쁘시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미쁘시다는 말의 피스토스(πιστὀϚ)는 ‘신실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미쁘신 분이라면 ‘하나님은 신실하시다’는 의미가 됩니다. 하나님은 그의 말씀이나 언약에 있어서 아주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바울은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이 말은 ‘하나님은 미쁘시느니라’는 말씀과 연결되는 것으로 바울이 ‘내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두고 이르노니 나는 결코 이랬다 저랬다 하지 않는다’고 한 말입니다.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는 말은 ‘예’하면서 동시에 ‘아니오’한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19절에서 자기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고린도 교회에 복음으로 전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다’고 했습니다. 긍정을 뜻하는 말이며 동조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예란 말은 진실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곳에는 아니오 란 말이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에게는 예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진실하신 분이시므로 예 만 통용되는 것입니다. 그 분은 표리부동(表裏不同)한 분이 아니시며 이중성이 없는 분이십니다.
2.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는 하나님의 약속
바울은 20절에서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된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서 주셨으며 그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된다는 말은 그리스도 안에서 진실하게 성취하신다는 뜻입니다. 이미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구주로 세우시고 그를 세상에 보내심으로 하나님의 신실하신 뜻을 모두 이루셨습니다. 하나도 아니오가 없이 모두 예로써 성취된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우리는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 했습니다. 아멘(ἀμἠν)이란 말은 ‘진실로 그렇습니다’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아멘은 구약 시대에도 사용되었고 신약 시대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진실한 말씀에 참으로 동의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진실하게 이루시는 하나님의 약속이 예가 되기 때문에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찬양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진실한 말씀에 ‘진실로 그렇습니다’고 동의하는 노래가 찬양이며 그 말씀에 ‘아멘’으로 화답하여 하나님께 경배하는 일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21절과 22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너희를 믿음으로 견고케 하신 분은 하나님이심을 밝히고 하나님이 또한 교회의 직분 자로 우리에게 기름 부어 주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기름을 붓는다는 말은 그 어원이 그리스도란 말에서 나왔는데 그리스도란 기름 부음을 받은 자란 뜻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에게 기름을 부었으며 하나님께서 교회 직분 자에게 기름 부으심을 주심은 그리스도의 소명에 동참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 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고 말씀해 주었습니다. 인은 소유권의 표시입니다. 어떤 문서의 효력을 보장해 준다는 뜻이 들어가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구원과 연결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된 것을, 영생을 주신 약속을 보증하신 표로 인 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확실한 보증으로 성령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결론 : 하나님의 신실하신 모든 약속의 보증은 바로 성령이십니다.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누구에게나 이 성령을 주시므로 구원과 영생에 관한 하나님의 진실한 약속을 보증하셨습니다.
고후 2장 (5 - 6)
◆ 밤중소리 01-30 | VIEW : 581
(5) 고린도 교회를 위한 바울의 눈물
(고린도후서2:1-11)
본문에는 고린도 교회를 향한 바울의 사랑이 뜨겁게 나타나 있습니다. 성도들에 대한 사랑과 그들의 과오에 대한 슬픔과 눈물에 얽힌 권고는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얼마나 사랑했으며 크나큰 관심을 가지고 살폈는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바울의 참 목자 상을 찾을 수 있으며 성도들이 목자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에 대한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1. 바울의 고린도 교회를 향한 넘치는 사랑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방문치 않기로 결단한 이유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2절에서 그런 이유를 설명해 주고 있는데 ‘내가 너희를 근심하게 하면 나의 근심하게 한 자 밖에 나를 기쁘게 하는 자가 누구냐’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문체는 좀 이해하기가 어렵게 쓰여져 있는데 공동 번역본에는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나를 기쁘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여러분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여러분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면 나를 기쁘게 해 줄 사람에게 슬픔을 안겨 주는 셈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를 기쁘게 해 주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마음을 아프게 주는 일을 피하려고 한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들르려고 한 이유는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가면 벌을 주어야 할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바울의 그런 책벌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할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는 대신, 편지를 써서 보낸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이 편지가 바로 고린도 교회 안에 바울의 마음을 아프게 한 범죄자들에 대한 견책으로 보내진 것인데 이 편지를 보낸 후에 다시 이 고린도 후서를 써서 보내게 된 것입니다.
4절에서 바울은 ‘내가 큰 환난과 애통한 마음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편지는 고린도 전서를 의미하는 표현은 아닙니다. 고린도 전서를 보내고 후서를 보내기 전, 기록에 남기지 않은 다른 서신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환난이란 말은 들맆세오스(θλἰΨεως)로 괴로움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는 심히 괴롭고 애통하는 마음으로 서신을 보냈는데 그것은 그들이 회개하여 올바른 신앙으로 돌이킬 수 있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바랬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만나서 슬퍼하는 사람이 아니라 기뻐할 수 있는 사람들과 만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바울이 기쁜 마음을 가지고 가서 고린도 교인들을 만나야 고린도 교인도 바울을 보고 기뻐할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직접 몸으로 가지 않고 편지를 써서 보냈던 것이라고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처럼 괴롭고 애통하는 마음으로 편지를 써 보냈던 일은 고린도 교인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려는 의도에서가 아니라 그들을 향한 바울의 사랑이 얼마나 극진했던가를 알려 주려고 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히12:8절에서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고 하신 말씀대로 바울은 고린도 교회 안에 범죄한 자들에 대한 사랑과 고린도 교회를 아끼는 마음으로 그 편지를 보냈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저를 용서하고 위로하라
5절에서 고린도 교회에서 바울을 근심하게 한자가 있지만 사실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해 준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들로 인하여 고린도 교회의 신실한 성도들이 근심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 잘못된 길을 가는 형제가 있거나 이단적인 복음을 따르는 사람 있을 때 모든 성도들의 근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제 그들을 용서하고 위로해 주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들에 대해 대단히 안타깝게 여기며 가슴 아파하는 것으로 보아 교회 안에서 어떤 징계나 제재를 받아야 할 범죄일 것입니다. 그런데 6절에서 이들이 이미 ‘많은 사람에게서 벌받은 것이 족하도다’고 말해 주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바울을 반대하는 파당이 있고 거짓 선생들의 유혹이 있었지만 그러나 많은 성도들이 바울을 지지하고 바울의 복음을 따랐습니다. 바울을 따른 이 성도들은 이처럼 바울의 마음을 아프게 한 그들에게 어떤 제재나 징계를 내린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이제 족하니 차라리 그들을 용서하고 위로해 주어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마 그들의 기세가 꺾기고 회개하는 기미가 보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더 이상 다그치면 그들이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고 했습니다. 낙심하여 믿음에서 떨어지거나 더 심판 죄 가운데 빠질 수도 있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결론 : 바울은 그들이 너무 낙심하거나 실망에 빠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사랑을 나타내라고 했습니다. 그들을 참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붙들어 주고 올바른 믿음으로 이끌어 주기 위해서는 사랑의 손길이 가장 위대한 힘이 되는 것입니다.
(6)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
(고린도후서2:12-17)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슬픔이 되고 자신의 슬픔이 될 고린도 교회 방문을 포기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려고 드로아에 갔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드로아에 당도하니 과연 복음의 문이 바울에게 열려 바울이 이 일을 감당하려고 했으나 뜻하지 않은 일이 생긴 것입니다. 바울은 두 가지 고민에 잠기게 된 것입니다. 하나는 바울이 얼마 전 슬픈 방문을 마치고 두 번째 방문하려 든 계획을 포기하고 디도편에 ‘눈물의 편지’를 보냈는데 이에 대한 불안한 마음이고 또 하나는 디도의 도착이 지연되고 있는 일로 디도가 혹 신변에 어떤 일이 생긴 것이 아닌가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염려는 바울로 하여금 드로아에서 복음을 전하려 든 계획을 취소하고 그들과 작별하여 마게도냐로 가게 된 것입니다.
1.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
바울은 14절에서 ‘항상 우리를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 했습니다. 이기게 하신다는 말은 드리암뷰오(θριαμβεὐω)로 로마군이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올 때 벌이는 개선 행진을 의미합니다. 우리로 그리스도 안에서 이처럼 개선 행군에 참여케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바울이 비록 어려운 여건에서 복음을 전하며 마음에 슬퍼함과 애통함이 있어도 하나님은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를 주신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또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그리스도를 전하는 복음을 냄새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가는 곳마다 이 냄새를 풍겼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냄새를 나타내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바울을 복음의 도구로 그리스도를 전하게 하심으로 구원을 얻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로 이기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환난이나 핍박이나 시련이 있다 해도 이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활은 어디서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냄새를 풍겨야 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
바울은 15절에서 ‘우리는 구원 얻는 자에게나 망하는 자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는 구원을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똑같이 향기가 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향기란 말은 유오디아(εὐωδἰα)로 이 말의 뜻은 구약에서 희생 제사를 가리킬 때 사용되는 말입니다(레1:9). 이 희생 제사에는 향기가 나는데 하나님은 이 향기를 기뻐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속죄 제물도 되시고 화목 제물도 되십니다. 그의 제물로 부터는 향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 향기가 곧 복음입니다. 복음은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그런데 이 향기는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구원의 향기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이 향기를 맡고 그리스도를 영접하므로 영생을 얻습니다. 그러나 망하는 자들에게는 전혀 이런 향기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 상실한 마음 그대로 두시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사망의 향기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16절에서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선포한 설교는 복음입니다. 그런데 이 복음은 듣는 사람에게 똑같이 작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 생명의 복음이 사망의 향기로 맡아지는 것입니다. ‘사망의 형기’란 말은 죽음의 악취를 말합니다. 복음에서 죽음의 악취를 맡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비극적인 일입니까? 그래서 그들은 복음을 배척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로 맡아지게 되어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 냄새가 그에게는 생명이 된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부르십니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을 부르시는 음성은 바로 복음의 소리입니다. 이 복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창세 전에 예정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구원에 이르는 향기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지 자들은 그 향기가 죽음의 악취가 되어 절대로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그리스도의 향기의 구실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역은 인간적인 능력이나 지혜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그의 인도하심으로만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 :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 한다고 했습니다. 혼잡이란 말은 순수함이 결여된 상품을 말합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그런 가짜인 것이 아니라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을 전하는 진리의 메시지입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진실한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고후 3장 (7 - 9)
◆ 밤중소리 01-30 | VIEW : 513
(7) 육의 심지에 새겨진 편지
(고린도후서3:1-5)
바울이 복음을 전할 당시, 거짓 선생들은 유명 인사의 천거 서를 지참하고 다님으로 신임을 얻으려고 했습니다. 이들은 고린도 교회에 침투한 거짓 선생들로 예루살렘 교회의 유력한 자들의 추천서를 가지고 다녔습니다. 그 당시 바울이 가장 경계했던 거짓 선생은 예루살렘 교회에 도사리고 있었던 유대교 적 인사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해도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구원을 이룰 수 없다는 주장을 펴고 있었습니다.
1. 바울의 천거서
이들이 전하는 복음은 구원에 이르는 의는 예수를 믿는 것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율법도 지켜야 한다고 한 것입니다. 이들의 이런 주장에 대해 바울은 갈2:21절에서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고 단언함으로 이들에 대하여 다른 복음’의 전달자로 규정하고 갈1:7절 이하에서 이처럼 정죄 하고 있습니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고 한 것입니다.
‘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고 했습니다. 바울이 그토록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으며 그들에게 정성을 기울여 가르친 것으로 이미 바울의 진실성과 그의 참 사도 됨을 증거한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의 어떤 이들은 바울이 스스로 자신을 자랑하며 자화자찬한다고 비방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그들에게 하는 말이 자화자찬처럼 들리는 것이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우리가 어찌 어떤 사람처럼 천거 서를 너희에게 부치거나 혹 너희에게 맡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바울을 비방하는 자들은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이나 장로들로부터 신임을 얻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추천서조차 보내지 못하고 있다고 하는 비난을 받은 것입니다. 이에 대해 내가 과연 고린도 교회에게 그런 추천서를 보내야 할 필요가 있느냐고 한 것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에 대하여 2절에서 ‘너희가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쉽게 풀이해서 ‘여러분 자신들이 바로 우리의 마음에 새겨져 있는 소개장이 아닙니까 그것은 누구에게나 다 통하고 누구든지 읽을 수 있는 소개장입니다’고 하는 뜻입니다. 바울과 고린도 교회와의 관계는 다른 어떤 유명 인사의 소개장으로 연결된 것이 아니라 고린도 교회 성도들 자신이 바울의 마음에 새겨져 있는 소개장으로 이 소개장이야말로 누구에게나 통하고 누구든지 읽을 수 있는 소개장이라고 한 것입니다. 바울의 복음의 진실성과 바울의 사도 직에 대한 증인은 바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기 때문에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야말로 바울의 마음에 새겨져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대해 누구든지 통하고 읽을 수 있는 소개장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을 향한 바울의 확신
바울은 3절에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바울의 소개장이 된다는 사실에 대하여 좀더 자세히 언급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교인들에게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했습니다. 왜 바울은 이런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까? 고린도 교회를 세운 사람은 바울입니다. 그리고 고린도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복음으로 고린도 교인들은 구원을 받았으며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린도 교회야말로 바울에게 있어서 자기의 생명을 걸고 복음을 전하여 결실을 본 목장이었으므로 바울은 그들을 향하여 너희가 바울의 복음과 그의 하나님의 종 됨과 사도 됨을 보여 주는 추천서가 된다고 장담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추천서는 ‘목으로 쓴 것이 아니라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령으로 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거짓 선생들은 목으로 쓴 추천서를 들고 와서 고린도 교인들의 신임을 얻으려 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 교인들을 다른 복음으로 미혹하면서 바울을 공격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추천서는 그들처럼 목으로 쓴 자랑거리가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령’으로 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였습니다. 그리고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받아 드린 복음 역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로 된 것입니다. 이 추천서는 성령이 인정해 주시고 성령이 인쳐 주신 것이기 때문에 바울에게는 다른 천거서가 필요치 않았던 것입니다.
결론 : 바울의 천거서는 낡고 없어져 버릴 돌 비에 새겨진 것이 아니라 즉 사람의 쓴 쓸모 없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살아질 수 없는 마음 비에 새겨진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향하여 이 같은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로서 난 만족을 가지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8) 의의 직분의 영광
(고린도후서3:6-11)
바울은 본문에서 신약 시대에 우리가 받은 의의 직분의 영광에 대해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5절에서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다고 했습니다. 이 만족이 무엇인가에 대해 바울은 ‘우리로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케 하셨다’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새 언약은 율법과 대비되는 복음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율법아래서 하나님의 일꾼이 된 사람들이 아닙니다. 새 언약인 복음 아래서 일꾼이 되었습니다. 이런 일꾼은 영광스러운 직분이며 우리에게 만족을 주는 것으로 이런 만족이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바울은 6절에서 새 언약의 성격을 말하면서 구 언약과 비교하여 얼마나 우위에 있는가에 대해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 라고 했습니다.
의문이란 그람마(ϓρἀμμα)로 본래 헬라어의 알파벳의 ‘문자’를 나타내는 것이었는데 이것이 점차 ‘기록된 것’ 즉 ‘문서’ 나 ‘책’ 을 의미하는 말로 발전되었습니다. 본문에서 의문이라고 한 말은 문서로 나타난 율법을 의미합니다. 바울의 이 말은 새 언약의 성격을 밝히는 말입니다. 새 언약은 문자로 된 것이 아니라 영으로 된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영이란 돌에 새겨지는 율법과 비교하는 말로 생명을 의미하며 성령을 뜻하는 말입니다. 즉 새 언약은 율법처럼 돌비에 새긴 것이 아니라 영으로 우리의 마음에 새겨진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전한 복음은 이 영의 역사이며 거짓 선생들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가르치는 다른 복음은 의문의 역사란 사실을 암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라’는 말로 하나님의 영적 역사로 나타난 복음이 율법보다 얼마나 우월한가에 대해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의문에 속하는 옛 언약은 죽음에 이르는 언약입니다. 그 언약 자체는 거룩하고 선하지만 그 언약을 이룰 수 없는 인간들에게는 정죄의 기준이 되기 때문에 우리에게 생명을 주지 못하고 정죄로 인한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새 언약은 영으로 이룬 것입니다. 의문에 기록하여 우리를 정죄하는 율법과는 달리 우리의 마음에 기록하여 우리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육신을 정죄했지만 복음은 영을 살리게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역은 율법의 사역이 아니요 영의 사역이십니다. 그의 대속의 죽으심으로 우리의 영이 살리심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적 사역은 우리를 율법의 정죄에서 벗어나게 하셨고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그리스도의 의를 주셨습니다.
2. 영광스러운 영의 직분
바울은 율법과 복음의 영광의 차이점을 전개해 나가면서 7절에 와서 그 직분에 대한 영광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으로 돌 판에 새겨진 것입니다. 이 돌 판에 대해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이라고 했습니다. 율법은 결국은 모든 사람의 죄를 정죄하는 그 역할로 인하여 죽이는 일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생명에 이르게 할 법이 사망에 이르게 했다’고 했습니다. 물론 그 책임은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인간에게 있지만 원래가 하나님께서는 이 율법을 생명을 주시기 위한 은혜의 선물로 주신 것이 아니라 율법을 통해서 죄를 깨달아 복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시기 위한 방편으로 주신 것으로 이것을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돌 비를 받아 그것을 이스라엘에게 선포하는 직분을 받은 모세의 얼굴에 광채가 빛났던 것입니다. 이 광채가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모세의 얼굴을 주목할 수 없어 모세는 그 얼굴에 수건을 써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의 영광은 얼마 후에 사라져 버렸지만 이처럼 율법의 직분 자에게도 영광을 주셨거든 하물며 새 언약의 작분 자들이 받을 영광이야 얼마나 더 하겠느냐는 것이 바울의 지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뿐 아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복음의 사역자로 부르심을 받은 복음의 직분 자들의 영광은 모세보다 더 영광스럽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고 했습니다. 구약 시대 율법 아래, 많은 직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그들의 그 영광스러운 직분보다 더욱 영광스러운 직분 자들인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벧전2:9절에서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라’고 했습니다.
결론 :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죄를 속죄해 주므로 우리로 율법의 정죄에서 벗어나게 했으며 율법의 정죄에서 오는 사망을 이기게 했습니다. 우리는 그런 복음의 일꾼들입니다. 이 직분에는 놀라운 영광이 따릅니다. 이 영광의 직분을 소홀히 여기지 마시고 맡은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9) 이스라엘이 쓴 모세의 수건
(고린도후서3:12-18)
바울은 이제 구약과 신약의 영광의 차이점을 지적하는 일에 담대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12절에서 ‘우리가 이 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한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소망은 율법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복음으로 인한 소망으로 이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그는 담대히 말할 수 있다고 한 것입니다.
1. 모세가 쓴 수건
13절에 나오는 말씀은 정확한 해석을 내리기가 좀 어렵습니다.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같이 아니하노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출34:29-35절에 나오는 말씀에 근거한 것으로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금식하면서 하나님 앞에 있었을 때, 하나님께서 기록하신 언약의 말씀을 모세가 손에 들고 시내산에서 내려오게 된 것입니다. 이 때 모세는 하나님과 말씀한 것을 인하여 그 얼굴에서 광채가 났기 때문에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를 뵙기를 두려워했습니다. 모세는 아론과 이스라엘 회중에게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그들에게 명하기를 마치고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리웠다고 했습니다.
이 일에 대하여 바울은 본문에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쓴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말인가 하는 것입니다. 모세의 얼굴에 있는 영광이 사라질 것이란 뜻인지, 아니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볼 자격이 없어서 수건을 쓴 것인지, 해석이 애매한 것입니다. 그러나 내용의 전개로 보아, 이 말씀은 모세가 받은 율법과 연결되는 말임에 틀림없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받은 언약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너는 이 말들을 기록하라 내가 이 말들의 뜻대로 너와 이스라엘과 언약을 세웠음이니라’고 하셨습니다(출34:27). 이스라엘은 이 언약을 생명의 언약으로 알고 그 말씀을 준행하면 의를 얻고 생명에 이를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 언약은 영원히 계속될 것이 아니라 ‘장차 없어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모세의 얼굴의 광채는 율법을 의미하는 것으로 얼마 후에 모세의 얼굴에 있는 광채가 사라져 버림 같이 율법도 결국 사라지고 새로운 언약이 나타날 것임을 의미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사라져 버릴 영광을 보여 주지 않으려고 한 것입니다. 장차 나타날 새 언약은 율법 속에 숨겨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새 언약은 이스라엘에게는 아직 비밀이었습니다. 그래서 곧 사라져 버릴 모세의 얼굴의 영광의 광채를 수건으로 덮은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수건으로 감추어진 영광의 광채가 이미 사라져 버렸지만 그들은 지금까지도 그대로 모세의 얼굴에 있는 것으로 착각하므로 아직도 율법이야말로 생명의 언약인 줄로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증거 하는 새 언약은 율법과는 달리 수건을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새 언약은 살아질 영광이 아닙니다. 수건이 필요 없는 것입니다.
2. 구약을 읽을 때에 수건이 마음을 덮었다.
14절에서 바울은 이스라엘이 복음을 배척하는 이유와 유대인들 중에 있는 그리스도인 가운데서도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에 대하여 그들의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완악하다는 말은 율법에 집착하여 은혜와 생명의 복음을 배척하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바울은 그들이 복음을 배척하는 이유에 대하여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모세의 얼굴을 가리운 수건을 벗기면 율법을 받았을 때 모세의 얼굴에 있었던 광채는 사라져 버렸을 것입니다. 이미 율법이 필요로 한 시대는 사라지고 복음으로 생명을 얻게 하는 새 언약의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율법을 받은 모세는 이제 그의 사명을 다 이루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율법이 아니라 복음으로 광채가 대체된 것입니다. 율법의 광채는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완고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얼굴에 있는 수건이 그들의 마음을 덮고 있었습니다. 율법에 가리워 복음이 보이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고 했습니다. 주께로 돌아온다는 말은 율법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회개하면 그들의 마음을 덮고 있는 수건이 벗겨져 새 언약을 받아 드리게 될 것입니다.
결론 :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주는 영이십니다. 그러므로 율법에 얽매이게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모두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처럼 주의 영광을 바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광에 이를 수 있는 것은 이런 일은 주의 영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고후 4장 (10 - 13)
◆ 밤중소리 01-30 | VIEW : 483
(10) 영의 직분 자의 할 일
(고린도후서4:1-4)
바울은 1절에서 ‘이러하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직분은 영광스러운 직분입니다.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영광을 수건으로 가리운 직분이 아닙니다. 그 영광을 들어낸 직분으로 우리는 복음에서 주의 영광을 보기 때문에 모세처럼 얼굴에만 잠깐 광채가 비치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1. 이 직분을 맡은 우리가 할 일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를 힘입어 이 직분을 맡았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받은 교회의 직분이 이처럼 영광스러운 것인데 이처럼 영광스러운 직분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긍휼 하심을 입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물론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되나 특히 바울은 자신의 경우를 견주어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를 만나기 이전에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며 교회를 잔멸하고자 자원해서 활동했던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런 죄인인 자신에게 하나님께서 말할 수 없는 자비를 베푸사 복음을 증거 하는 영광스러운 직분을 주셨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 바울은 낙심하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복음은 정죄의 율법을 전하는 일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생명을 주며 속죄함을 주며 구원을 주는 일이기 때문에 그 복음을 전하면서 아무리 어려운 시련과 핍박과 환난을 당해도 낙심하지 아니한 것입니다.
(2) 바울은 2절에서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렸다’고 했습니다. 바울의 이 말은 지난날 예수를 알기 이전에 살았던 들어 내지 못할 창피스런 일들을 버렸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킨다는 바리새인들이나 거짓 선생들은 실인즉 율법을 지키는 생활을 못하고 속으로 숨겨 둔 부끄러운 일들이 많이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도 지난날 율법 아래서 그런 생활을 해 온 일이 있었으나 이제 그는 그런 일을 버렸다고 했습니다.
(3) 바울은 또 ‘궤휼 가운데 행하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궤휼이란 말은 교활, 속임수란 뜻입니다. 이 말은 또 11:3절에서 ‘간계’(奸計)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케 한 일에 사용된 말입니다. 어떤 자들이 바울에 대하여 그는 ‘궤계’로 사람들을 미혹한다는 비난을 받은 일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은 이 같은 궤휼 가운데 행하지 아니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고후112:16).
(4) 다음에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혼잡케 한다‘는 말은 불순물을 섞었다는 의미가 됩니다. 바울은 결코 복음에 다른 어떤 불순물도 섞지 아니하고 진리 그대로 증거 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천거하노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다른 어떤 사람들의 천거보다도 하나님 앞에서나 각 사람의 양심 앞에서 부끄러움 없이 자기를 떳떳하게 내 세울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복음
바울은 3절에서 중요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고 한 말이 그것입니다. 복음은 그 진실이 가려져 잘못 전해질 수도 있습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복음을 듣는 사람이 복음의 진실을 외면하고 배척하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 아니라 ‘망하는 자’들에게 그렇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 말은 이미 2:15절에서 밝힌 바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 얻는 자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망하는 자들에 대한 설명에서 4절에서 말하기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 했습니다.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는 ‘이 세상 신’ 이란 이 세상의 죄악을 주관하고 죄로 인간을 지배하는 사탄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사탄은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사람들의 마음속에 들어가 어둠을 물리치고 구원을 얻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복음을 받아 드리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혼미케 한다’는 말은 에튀플로센(ἐτὐΦλωσεν)으로 ‘눈을 멀게 하였다’는 뜻입니다. 마음의 눈,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는 영적 눈을 소경 되게 하여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알 수 없도록 역사 하는 것입니다.
결론 :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복음에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비취는 것입니다. 사탄은 철저하게 이 광채를 차단하려고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는 것입니다.
(11) 질그릇에 담긴 보배
(고린도후서4:5-7)
바울은 그가 복음을 떳떳하게 전하고 누구의 비판이나 비방까지도 개의치 않고 결코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일에 대하여 5절에서 그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 우리의 전파하는 예수
바울의 복음은 오직 예수였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는 예수 외 다른 불순물은 전혀 개입될 수 없었습니다. 많은 이단자들이나 잘못된 거짓 선생들은 바울의 복음을 비난하고 중상했지만 바울은 이들을 부끄럽게 하려고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고 반박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개의 경우, 잘못된 이단자들이 자기들이 전파하는 다른 복음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자기 자랑을 늘어놓으며 자기를 전파하는 경우가 있지만 바울은 결코 자신을 전파하거나 자기의 학식이나 지식을 자랑하지 아니한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 드린 후, 복음에 비하여 자신의 학문이나 지식이 얼마나 천박한지 깊이 깨닫고 빌3:7절 이하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어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 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주되신 것’을 증거 했다고 했습니다. ‘주’란 말은 퀴리온(χὐριον)으로 예수가 하나님과 동일한 신분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초대 교회의 사도들이 복음을 전파하는 중요한 메시지는 예수가 하나님이시란 사실을 전하는 일이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말이 그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하는 일도 그가 하나님이심을 나타내는 증거로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있어서 너희의 종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 말은 복음의 빚진 자의 자세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롬1:14절에서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고 했습니다. 빚진 자는 언제나 종의 자리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 울은 스스로 기쁜 마음으로 이 종의 멍에를 지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복음이 정죄를 주는 것이 아니라 사죄의 은혜를 주며 사망을 주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비록 종의 멍에를 메고 복음을 전한다고 해도 보람이 있는 일이 아닐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을 잘 감당할 때 그는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을 듣고 상을 받을 수 있다는 소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한다’고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질그릇에 가진 보배
바울은 6절에서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하신 말씀은 빛의 창조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빛을 비취라고 하신 것으로 없는 빛을 창조해서 비취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소유하신 빛을 세상에 비취게 하신 것으로 이것을 창조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빛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신 것으로 예수님은 빛으로 세상에 오셨으며 복음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7절에서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곳에서 복음을 보배라고 말하고 자신의 육신을 질그릇으로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천한 것, 보잘 것 없는 것, 바라볼 것이 없는 존재란 뜻입니다. 원래가 인간은 죄인이며 그 마음이 만물의 찌끼만도 못한 더러운 존재로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기 때문에 사실인즉 질그릇만도 못한 인간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속에 이처럼 귀한 보배를 간직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은혜요 축복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릇이란 그 안에 담겨진 물건에 따라 가치가 좌우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질그릇이라도 그 속에 값진 보배가 담겨져 있다면 그 질그릇은 보배 그릇으로 귀한 가치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 : 이처럼 천하디 천한 인간에게 이 귀중한 복음은 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안에 이 같은 귀한 보배를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사하면서 이 귀중한 보배의 영광을 비췰 수 있는 성도가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12) 우리 몸에 나타나는 예수의 생명
(고린도후서4:8-11)
바울은 그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얼마나 큰 고난과 핍박을 당한 일에 대하여 말하면서 그런 모든 일이 예수의 생명을 우리 몸에 나타내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늘 예수의 죽음을 몸으로 겪으면서 살아가지만 그 일로 드러나는 것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생명이 우리를 위기에서 혹은 핍박에서 건져 주시고 그 생명의 능력이 우리의 연약함을 통해서 역하시어 많은 사람들을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뜻입니다.
1. 버린바 되지 아니한 바울의 시련
바울은 8절에서 ‘우리가 사망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우겨 쌈을 당한다는 말은 들리보네노이(θλιβὀμενοι)로 ‘즙을 짜기 위해 포도를 짓누른다’는 의미의 말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당하는 고난이 얼마나 큰 것인가에 대한 것인데 복음을 핍박했던 그 당시의 경우를 말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런 우겨 쌈을 당하는 가운데서도 결코 ‘싸이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짓눌림을 당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그런 일로 말미암아 결코 복음을 전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으며 그런 일을 두려워하지도 아니한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다음에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여기서 말한 ‘답답한 일’이란 빠져 나올 길이 없는 궁지에 몰려서 어쩔 도리가 없는 막막한 상황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를 만나도 낙심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빠져 나올 길을 열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9절에서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고 있을 당시는 복음을 전하는 일이 곧 핍박을 받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이방인들로부터 오는 핍박은 말할 것도 없고 유대인들의 핍박 또한 극심했으며 같은 그리스도인 이면서도 다른 복음을 전하는 거짓 형제들로부터의 핍박 역시 어려운 시련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가운데서도 버린바 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복음을 전하는 그의 사역 자들을 버리시지 않습니다. 사람들로부터는 버림을 당해도 주님으로부터는 버린바 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이 붙들어 주시고 그 핍박으로부터 이끌어 내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맞아 넘어져도 죽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이런 말을 한 배경이 있는데 그가 루스드라에 있었을 때, 유대인들이 바울을 잡아 돌로 쳤는데 이 때 바울이 죽은 줄로 알고 성밖에 끌어 내쳤지만 하나님께서 바울을 일으켜 다시 복음을 전하게 하셨던 것입니다(행14:19). 원수의 무리로부터 이처럼 죽게 되는 위험에 처해도 하나님께서는 망하게 하지 않으십니다. 망하게 아니하신다는 말은 헛되이 죽음에 이르지 아니하신다는 뜻입니다.
2. 우리 몸에 나타나는 예수의 생명
바울은 10절에서 그리스도인이 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죽은 것을 몸에 짊어진다는 말은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음을 몸으로 체험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그의 남은 고난을 교회를 위해서 주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위해 그가 받으실 고난을 남겨 두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고난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게 하시려는 배려에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롬8:17절에서 ‘자녀이면 또한 후사요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얻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런 경험이 많으면 많을수록 크면 클수록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살아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십니다. 그 생명이 나를 변화시키시며 나로 주의 복음을 위해 주님의 고난에 동참케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질그릇 같은 나를 통해 영광을 들어 내시고 그뿐만 아니라 나로 그리스도의 영광에까지 동참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로 볼 때 그리스도인이 당하는 고난과 핍박과 시련은 패배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광의 승리에 동참하는 일이며 그로 인하여 더욱 큰 영광의 상급을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자신의 생애를 마치면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다’고 한 것입니다.
결론 : 바울은 11절에서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언제나 주를 위해 죽음의 위험을 겪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우리의 죽을 몸에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게 하시려는 것이기 때문에 담대한 믿음으로 복음의 일꾼으로 부끄럽지 아니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13) 영원한 영광을 이루는 우리의 경한 환난
(고린도후서4:12-18)
바울은 그가 살아 있는 동안 늘 죽음의 위협 속에서 환난을 겪는 것이 결국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바울 안에서 나타남으로 복음 사역에 커다란 유익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신이 사망의 골짜기를 지나는 것 같은 환난을 받는 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생명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12에서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 믿는 고로 말하노라
바울이 복음을 담대하게 전하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지만 그 가운데서도 부활에 관한 바울의 믿음은 진지했습니다. 13절에서 바울이 ‘내가 믿는 고로 말하였다’는 말의 인용은 시116:10절에 나오는 것입니다. 바울은 어려운 역경이나 절망적인 위기에 처했을 때에도 하나님께 대한 믿음은 견고했습니다. 특히 바울의 믿음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여 그의 영광에 동참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14절에서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안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음이 두렵지 않은 이유는 죽은 후에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부활인데 이 부활에 대한 믿음은 그리스도인의 절대적인 믿음이며 부활을 제해 버리면 그런 복음은 죽은 복음으로 죄 값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는 세속적인 종교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예수와 함께 우리도 살리십니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도의 부활은 서로 밀접한 연결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일에 대하여 바울은 고전15장에서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목적은 그를 믿는 자를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시려는데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16절에서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 혼자 만의 부활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한 것입니다. 죽은 자의 부활이 있을 때 비로소 그리스도의 부활의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17절에서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부활은 절대적인 요소입니다. 부활이 없는 예수를 생각할 수 없는 것처럼 부활이 없는 복음을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가 하는 모든 것들이 오직 고린도 교인들을 위해서 한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바울의 이런 일은 더 많은 사람들이 바울이 애써 전하는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그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는데 있다고 했습니다.
2. 낙심하지 아니하는 바울
바울이 어려움 속에서도 소망을 가지고 낙심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겉 사람은 후패 하지만 반면에 속 사람은 나로 새로워지기 때문에 우리가 육체를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의 육체는 쇠퇴하고 늙고 낡아지지만 우리는 그런 육체에 연연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살아 계신 예수의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속이란 속 사람으로 육체의 사람과는 대조적인 존재로 거듭난 새 사람을 의미합니다. 이 사람은 늙는 법도 없고 쇠하는 법도 없으며 사라지지도 않습니다. 오리려 날로 새로워진다고 했습니다. 새로워지는 이유는 육신의 연령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을 받으며 자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점점 그리스도의 분량에 이르는 자리에까지 오르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겉 사람으로 인하여 오는 것이 아니라 속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속 사람이 성장할수록 소망이 더욱 분명하여 소망의 실현이 더욱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17절에 이어지는 말씀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마음에 깊이 새겨 두어야 할 말씀입니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생존시에 받는 환난은 잠시 받는 환난입니다. 그리 오래지 아니합니다. 그리고 그 환난은 중한 것이 아니라 경한 것입니다. 왜 경하다고 한 것입니까? 그 다음에 나오는 말씀에 그로 인한 보상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결론 :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것인데 보이는 이 세상은 잠깐 동안이요 보이지 않는 우리의 소망은 영원한 것입니다. 이 영원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고후 5장 (14 - 19)
◆ 밤중소리 01-30 | VIEW : 1,072
(14)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
(고린도후서5:1-5)
바울은 5장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누릴 영광과 영생에 관한 실제적인 증거에 들어갑니다. 우리는 바울이 4:17절에서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라’고 했는데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이 무엇인가를 1절에서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4:18절에서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했는데 우리가 돌아보는 ‘보이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1.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바울은 1절에서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안다’고 했습니다.
(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이 말은 ‘우리의 육신의 생명이 다하여 죽으면’ 이란 뜻입니다. 육신은 죽게 마련입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누구든 흙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 뿐 아니라 혈과 육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할 것을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몸은 혈과 육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런 몸으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장막이란 스케누스(σχἠνους)로 천막이란 뜻입니다. 천막은 고대 유목민들의 일시적인 거처로 이 천막을 인체로 비유한 것은 인간의 육신이 영구적이지 못하고 일시적이란 뜻으로 한 말입니다. 우리는 땅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땅의 장막처럼 만들어진 육신 죽으면’ 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2)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안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왜 여기서 사람의 몸을 장막으로 표현하고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을 이 장막과 비교하여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땅에서 살아갈 동안은 우리의 생명의 장막이 우리의 육신에 있지만 하늘에는 참 생명이 들어가 사는 곳이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장막이 필요 없고 천국 그 자체가 우리의 장막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삶의 거처가 되는 천국은 이 세상과는 다릅니다. 이 세상의 집은 인간의 손으로 지은 것이요 시일이 지나면 낡아지고 쇠하여지지만 하늘에 있는 거처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입니다. 그런 집은 영원한 집입니다. 다시는 우리의 생명이 무너지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집이 있는 줄 바울은 안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어떻게 알았을까요? 그는 주님의 계시를 통해서 확실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셋째 하늘인 낙원에까지 올라가 사람의 말로 이루 형용할 수 없는 말까지 들었다고 했습니다.
2. 덧입기를 사모하는 우리들
바울은 2절에서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한다’고 했습니다. 덧입는다는 말은 썩어질 것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옷으로 입는다는 뜻입니다. 바울의 이 말은 우리의 썩을 이 육신이 죽고 새롭게 만들어진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것을 소망하는 말입니다. 헌 옷을 벗으면 새 옷을 입어야 합니다. 이것을 바울은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또한 이 바울의 말은 궁극적으로는 부활의 몸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부활은 덧입는 그리스도인의 영원한 옷입니다. 이 옷을 입기까지 우리는 부득불 썩어질 옷을 입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간절한 소망은 이 육신의 사람이 이 땅에서 오래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다시는 벗지 아니할 옷으로 덧입기 위한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 처소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이며 이 소망 가운데서 우리는 살아가면서 육신의 장막 집이 무너지는 우리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3절에서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만약 육신의 장막 집이 무너져 버려도 벗은 몸으로 드러나지 않을 것이란 말입니다. 여기서 벗은 몸이란 말은 부끄러운 몸으로 하나님께서 지으신 처소로 덧입지 못한 몸을 의미합니다. 이 몸은 구원의 소망이 없는 몸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진 몸입니다.
이런 자들에 대하여 계22:15절에서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밖에 있으리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성밖에 머무르는 몸은 하늘의 처소로 덧입지 못한 몸인 것입니다.
바울은 이 일에 대한 확증을 말하고 있습니다. 5절에서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고 한 것입니다.
결론 : 이런 일을 누가 이루게 하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보증으로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성령이 이 모든 일에 대한 믿음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15)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
(고린도후서5:6-10)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최종적으로 소망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놀라운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바울은 6절에서 이렇게 말씀해 줍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담대한 믿음으로 내린 결론입니다. 몸에 거할 때에는 이란 말은 우리들이 육신의 장막에 살아가고 있는 동안이란 뜻입니다.
1. 주와 따로 거하는 이 세상에서의 생활
그리스도인들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을 살아갈 동안은 주님과 따로 거한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영적인 연합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들과의 연합은 영적 관계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와 항상 함께 하시는 이 일은 영적인 연합이지 별개의 인격체로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동거가 아닌 것입니다. 실제적으로 예수님은 천국에 계시고 우리는 지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날에는 영적 연합 관계에서 실제적 동거 관계로 바뀔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계21:3절에서 이르시기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런 관계로 승화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7절에서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바울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의 생활은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지 눈에 보이는 것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밝혀 주는 말입니다. 말하자면 우리의 구원이나 영생이나 그리스도와의 생명적 연합이나 이 모든 문제들은 눈에 실제로 보이는 것들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영적인 문제는 믿음으로 행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런 우리의 믿음이 현실로 우리 앞에 나타나는 날이 오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대로 이루어질 때가 오는 것입니다. 그 때가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육신의 장막이 무너지고 하늘에 영원한 집에 들어가는 싯점이 될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인의 담대한 믿음
8절에 나오는 바울의 믿음의 증언은 너무나도 우리에게 소망을 주며 천국을 사모하는 믿음을 심어 주는 말입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고 말씀해 줍니다. 바울은 왜 이런 말을 하면서 “담대하여 원하는 바”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육신의 생명이 죽는다는 문제는 그리 쉽게 받아넘길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사람들에게는 자기 생애에 대한 애착이 있습니다. 죽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습니다.
바울은 언제나 담대하여 원했습니다. 확실한 믿음으로 진심으로 원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이처럼 담대하여 원한 바가 무엇이었습니까?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주와 함께 거하는 그 생활은 살아서 주와 함께 영적으로 살아가는 경우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차라리 몸을 떠난다’고 했습니다. 이 바울의 말은 1절에 나오는 말씀과 연결시켜야 할 말입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안다’고 한 그 집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집에 들어가면 주님과 실질적인 대면이 이뤄질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는 생활이 실제로 이뤄질 것입니다. 이 집에 들어가서 주님을 만나고 그 주님과 함께 살아가려면 우리의 육신의 장막이 무너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담대하여 원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정말로 이 세상에서 더 오래 살아가려는 의욕보다도 속히 죽을 몸을 벗어버리고 다시 말하면 육신의 장막이 무너지는 죽음의 과정을 지나 천국에 갈 수 있기를 간절히 사모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의 이런 확신에 찬 담대한 말을 듣고 천국에 대한 더욱 큰 소망이 생기는 것입니다. 바울처럼 차라리 몸을 떠나 주님과 함께 거할 수 있는 천국에 갈 수 있기를 바라는 믿음만 가진다면 우리의 생애는 얼마나 홀가분할 것입니까? 죽음에 대한 두려운 부담보다는 주님과 함께 거할 수 있는 소망이 더욱 넘칠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처럼 자기 생각에는 차라리 몸을 떠날 수 있기를 원했지만 그러나 바울은 복음에 빚진 자로써 자기의 맡은 사명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생애를 주님을 위해 헌신했던 것입니다.
결론 : 바울의 9절에 나오는 말씀은 바울이 생존 동안 주를 위해 자신의 생애를 바친 목적이 어디에 있었는가에 대해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라고 한 것입니다. 이런 생애는 하늘의 상급이 보장되어 있기 때문이며 이런 상급을 많이 받을 수 있는 생애를 살다가 주님께 가야 보람이 있다는 사실을 밝혀 주고 있는 것입니다.
(16) 그리스도의 심판대
(고린도후서5:10-12)
바울은 10절에서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 드러나는 이유는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9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의 삶의 자세에 대해 ‘우리가 몸 안에 머물러 있든지 몸을 떠나 있든지 우리가 바라는 것은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했습니다. 그리고 10절에 와서 그런 보상이 반드시 있다는 사실을 밝히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선악간에 자신이 행한바 에 따라 받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 그리스도의 심판대
우리는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심판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혹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 자리를 의미하는지, 아니면 그리스도인 만의 상급 심판을 가리키는지 구별하기가 대단히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바울이 ‘우리가 다 반드시’라고 한 말을 볼 때 우리 란 말은 불신자를 가리킨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 만을 가리키며 이 가운데 불신자가 들어간다고 생각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심판대’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심판대란 말은 구원과 멸망의 최종적인 판가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들이 행한 모든 선악간의 최종적인 판결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들의 생활에도 선과 악이 있습니다. 선은 순종의 생활이요 악은 불순종의 생활입니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인 들의 불순종의 생활이 지옥의 심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상태에서 지은 죄악이기 때문에 정죄의 대상에서 제외된 죄입니다. 그러나 이 죄악이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 들의 상급에 결정적인 치명타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심판대란 바로 이런 그리스도인 들만의 상급의 표준을 최종적으로 선고받는 대단히 중요한 자리인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 들은 다 이 자리를 거쳐 자신의 선악의 행실을 따라 하늘에서 받을 면류관이 결정되기 때문에 이 자리를 거치지 않을 그리스도인 들은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바울은 딤후4:7,8절에서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 에게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그리스도의 심판대’에는 재판장에 의하여 상급 심판이 진행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재판장은 바로 우리 주 예수님이 되시어 그 자리에 앉아 판단하실 것입니다. 이 자리는 천년왕국이 지난 후, 곧 있을 하늘에 베풀어질 ‘흰 보좌 심판’ 때에 있을 것입니다.
이 때 불신자들은 ‘흰 보좌 심판대’에서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들에 대하여 예수님은 염소로 비유하시고 왼쪽에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그리스도인 들은 양으로 비유하시고 오른쪽에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양들에게는 이처럼 언도하십니다.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고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왼쪽에 있는 염소들에게는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많은 상급을 얻기 위해 우리의 생애 동안에 주를 위해 헌신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바울은 고전15:58절에서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의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2. 하나님께 알리어진 바울
바울은 11절에서 ‘우리가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을 권한다’고 했습니다. 두렵다는 말은 그리스도인 들에게는 그에 대한 경외심을 말하고 불신자들에게는 심판주로서의 두려움을 경종하는 말입니다. 바울은 이 같은 하나님의 두려우심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이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려 주기를 원했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그 하나님 앞에 알려졌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복음의 일꾼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자부심이 그의 마음에 넘쳤습니다. 그럼에도 고린도 교인 중에는 바울에 대해 오해하고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너희의 양심에도 알리어졌기를 바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결론 : 바울이 이런 말을 한다고 스스로 자기를 자랑하거나 천거하려는 것이 아니라 바울로 인하여 자랑할 수 있는 근거를 그들에게 가질 수 있게 하여 사실은 아무 것도 자랑할 것이 없으면서도 외모로만 자랑하는 자들의 말을 반박할 수 있게 해 주려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상금에 대한 심판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심판에 대비하여 많은 공력을 쌓아 그 날에 영광의 면류관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17)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표
(고린도후서5:12-15)
바울은 15절에서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살아나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의 이 말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며 어떤 삶의 목표로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가리키는 말입니다.
1. 우리를 강권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바울은 13절에서 ‘우리가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잘못된 복음을 가지고 고린도 교인들 앞에 나타난 거짓 선생들은 바울에 대하여 미쳤다고 비방했습니다. 아마 그들의 눈에 바울의 열정적인 복음에 대한 열의와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그의 복음이 잘못된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바울을 미친 사람으로 매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만일 자신이 미쳤어도 그것은 하나님을 위해서 미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바울의 마음을 휘어잡았고 그로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 미치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열정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그의 불가항력적인 열의에서 나온 것으로 하나님을 위하여 그렇게 된 것이기 때문에 바울로서는 오히려 영광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반면에 바울은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어떤 사람들에게 미친 사람처럼 보였지만 그런 일은 자신이 하나님께 대해 미친 것이라고 위안을 받았으며 그러나 자신은 미친 것이 아니라 온전한 정신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고 있는데 이런 일은 너희를 위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왜 이처럼 미친 사람으로 조롱을 받으며 복음을 전하는 일에 열심을 갖고 있는 것입니까? 이 일에 대하여 바울은 14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기 때문이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나타난 그리스도의 사랑이 바울로 그토록 복음에 미친 사람으로 만들어 핍박과 조롱과 고난을 받으면서도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게 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2.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신 그리스도
14절과 15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와의 생명적인 연합 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으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다고 했습니다. 한 사람은 물론 그리스도이시며 모든 사람은 그의 죽으심으로 구원을 받은 그리스도인 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왜 죽어야 합니까? 그것은 죄로 인한 보응입니다. 죄 값은 사망이라고 말씀해 줍니다. 그런데 그 모든 사람의 죽음을 한 사람,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어 주신 것입니다. 여기서 대신했다는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죄 없는 사람이어야 하며 의로운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아담 이후, 한 명도 없었습니다. 모두 죄인의 혈통으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신 분이시기 때문에 죄와는 상관이 없는 분이며 완전한 의인이십니다. 그러면서도 사람의 모양으로 오셨기 때문에 우리를 위한 대속의 제물로 죽어 주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그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죄 값으로 죽었기 때문에 다시는 죄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게 된 것입니다. 죄 값을 치루기 위해서는 누구든 죽어야 합니다. 누구에게나 예외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들은 사실상 죽음의 과정을 통과한 사람들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구원을 얻을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우리들의 죽으심을 대신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죽으심 안에서 이미 죽은 사람들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런 논리가 적용되지 않으면 구원을 얻을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한 단계 더 나아가 그러면 왜 그리스도께서 이처럼 우리를 대신하여 죽어 주셨는가에 대한 해답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15절에서 구원받은 모든 그리스도인 들로 다시는 자신의 생애를 위하여 살지 않고 대신 죽어 주신 분을 위해 새로운 삶을 살게 하시려는 뜻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신을 위한 삶을 살아서는 안됩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그리스도로 죽게 하신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이제 죽었으니 이제는 이미 죽은 옛사람을 위한 삶에서 벗어나 그리스도를 위한 새로운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밝혀 주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 : 그리스도는 우리를 대신하여 죽어 주신 분입니다. 우리는 그 분 때문에 영원한 멸망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마땅히 우리의 남은 생애를 그 분을 위해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해 주신 목적이 그곳에 있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18)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린도후서5:16-17)
바울은 17절에서 놀라운 선언을 했습니다. ‘그런즉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 한 말이 그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란 새롭게 만들어진 새로운 창조물을 말합니다. 아직까지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아담의 죄로 오염된 것도 아니며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된 것도 아닙니다. 성경에서는 그리스도인을 이처럼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1. 육체대로 판단하지 말라
육체의 판단은 위험한 결과를 초래합니다. 바울은 16절에서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판단 기준을 자신의 육적 기준에 둔다면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복음은 영적 은혜에 속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 들은 영적 사람들입니다. 믿음도 구원도 영생도 천국도 모두 영적 실체들입니다. 만약 다른 그리스도인을 자신의 육체의 경험이나 지식에 따라 판단하려 한다면 그런 판단 기준은 올바른 방법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거짓 선생들이 바울을 판단하는 방법이 그러했기 때문에 바울이 하나님의 진실한 복음의 사역 자란 사실을 올바로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사실에 입각하여 아무라도 육체대로 판단하지 않을 것임을 밝혀 주고 있는 것입니다.
16절 하 반절에서 바울은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아니하노라’고 했습니다. 바울도 이전에는 육체의 잣대로 그리스도를 이해했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육신적인 생각은 올바른 그리스도의 지식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는 영적 지식으로만이 가능합니다. 그리스도를 이해하려는 일에 인간적인 지혜나 논리가 들어간다면 그리스도는 우리의 대속자가 되실 수 없는 것입니다. 그의 구세주로서의 증거는 오직 영적 지식에서만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17절에 나오는 말씀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주는 말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 했습니다. 그런즉 이란 말은 ‘아직까지 바울이 증거한 바에 따르면’이란 뜻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은 일이 우리의 죽으심을 대신 하신 것이기 때문에 곧 우리의 죽음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죽었습니다. 지금 살아 있는 우리의 생명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생명입니다. 이 같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우리의 존재에 크다란 새로운 의미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란 말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란 말은 아직까지의 존재와는 전혀 다른 의미에 있어서의 새로운 존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예수님은 거듭난다는 말씀으로 니고데모를 이해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의 거듭나야 한다는 말에 니고데모는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고 물었습니다. 이 말은 ‘다 자란 사람이 어떻게 다시 날 수 있다는 말입니까 다시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가 나올 수야 없는 것이 아닙니까’고 묻는 말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들은 정말로 하나님에 의해 다시 창조되는 것입니다. 물론 육적 존재로서의 재창조가 아닙니다. 육적인 존재의 창조는 아무리 만들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육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란 말은 영적 창조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 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분명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부활에 연합하여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난 것입니다. 이런 일은 바로 성령이 하십니다. 그러므로 거듭나는 일에 있어서 ‘성령으로 난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 새로운 피조물은 육신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살아갑니다. 어떤 경우에는 그 육신을 가지고 죄를 범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난 그의 생명은 정죄 받지 아니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아니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천국을 유업으로 받습니다. 이것이 새로운 피조물인 그리스도인의 특권입니다. 이런 권세를 가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가졌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결론 : 이전 것은 지나갔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미 지나간 것을 찾으면 안됩니다. 지나간 죄악의 사람을 따라 살아가지 말아야 합니다. 죄도 지나갔고 심판도 지나갔습니다. 이제는 죽을 육신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대신 죽어 주신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 가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19) 화목케 하는 직책
(고린도후서5:18-21)
바울은 18절에서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다’고 했습니다. 모든 것이란 구원 사역에 있어서의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속의 사역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이 모든 하나님의 역사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나온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구원 사역을 이루신 하나님께서 우리들로 화목케 하는 직책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1. 화목케 하는 직책
하나님은 그리스도로 우리를 대신하여 화목 제물로 죽게 하사 우리들로 하나님과 화목케 하셨습니다. 우리는 원래가 하나님과 원수의 관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후 인간은 죄의 종이 되어 사탄 편에서 하나님을 대적해 왔습니다. 그러던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그의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죽어야 할 죄값을 그리스도로 대신 지시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값을 갚았으며 이로 인해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로 하나님과 더불어 화목케 하신 것은 우리들로 화목케 하는 직책을 주시기 위해서임을 밝혀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화목케 하는 직책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과 화목케 된 이 사실을 전파하여 다른 사람들로 우리처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 시키도록 하는 직분을 의미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바로 하나님과 화목케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복음을 전함으로 죄인과 하나님과 화목케 하는 일을 천사에게 맡기신 것이 아니라 먼저 화목함을 받은 우리들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해 예수님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이 사명감에 철저했습니다. 그의 서신 서를 보면 모든 사람들로 하나님과 화목케 하려는 직책을 수행하기 위해 그가 그토록 어려움을 겪으며 복음을 전한 사실을 찾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롬1:14절에서 이런 사명감에 대한 표현으로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하면 소망이 없습니다.
영원히 하나님과 원수의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으므로 구원의 여망이 없는 것입니다.
2. 화목케 하는 말씀을 부탁하신 하나님
19절에 나오는 말씀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다시 한번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란 말씀은 인간의 죄를 인간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그리스도에게 대신 짊어지게 하셨다는 사실을 밝혀 주신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내세워 우리와 당신과 화목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에게 죄를 묻지 아니하십니다.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처리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처리하시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야말로 놀라운 복음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로 그 이치를 깨닫게 하시어 이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우리를 통해서 세상과 하나님과 화목케 하는 직책을 주신 것입니다.
바울은 이 같은 사명을 가진 그리스도인의 특권에 대해 20절에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대신한 사신입니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직책입니까? 사신이란 보내심을 받은 사람을 대신해서 일을 처리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사신이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화평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과 화평할 것을 간곡히 부탁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부탁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화해하라는 것입니다. 그 길만이 죄인들의 살길입니다. 멸망에서 영생으로 살아날 수 있는 단 한 가지 길입니다.
21절에 나오는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희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우리 때문에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그리스도를 죄 있는 분으로 여겨 그에게 우리의 죄를 담당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일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입니다.
결론 : 우리가 가진 의나 우리가 가진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로부터 얻은 선물입니다. 이 선물을 우리가 잘 간직하는 일은 모든 사람들로 하나님과 화목케 하는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6장 (20 - 22)
◆ 밤중소리 01-30 | VIEW : 533
(20)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고린도후서6:1-2)
바울은 5장에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위하여 대신 죽게 하신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말한 후, 고린도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결코 헛되이 받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위해 그 아들을 보내시어 죄인들을 대신하여 죽게 하심으로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신 그 은혜를 헛되이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1. 헛되이 받는 것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는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1) 하나님의 은혜를 경히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경히 여기는 일은 하나님께 망령된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최선의 방법으로 그 아들을 통해서 은혜를 주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롬5:8에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같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히 여기는 일은 곧 하나님의 아들을 거역하고 부인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는 더 이상 구원의 여망이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고 사랑의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보다 더 끔찍한 죄는 없는 것입니다. 이런 죄는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성령을 거역하는 죄이기 때문에 현세는 물론 내세에서도 용서받을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는다는 말은 하나님의 은혜를 공허한 것으로 만들지 말라는 뜻입니다. 헛되이 란 말은 헬라어 에이스 케논(είςχενὀ)으로 ‘빈’ 또는 ‘공허한’의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의 생활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등질 때 하나님의 은혜가 공허한 것이 되어 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았으면 받은 은혜를 존중히 여겨야 하는데 이런 생활은 곧 은혜에 합당한 생활을 하는 일입니다. 이 일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생활로 곧 순종의 생활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생활은 곧 하나님의 은혜를 공허한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생활을 한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하는 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2. 구원의 때와 구원의 날
바울은 2절에서 이사야를 통해서 하신 말씀을 인용하여 하나님의 은혜는 받을 만한 때가 있고 구원의 날도 받을 만한 시기가 있다는 사실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베푸시는 은혜에 대하여 이처럼 말씀하셨는데 바울은 이를 인용하여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은혜 받을 때에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들이 허탄한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 왔을 때에 은혜를 내리셨습니다.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의 경종을 듣고 회개했을 때에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속죄 제물로 희생하시고 우리의 죄 값으로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고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겠다고 하셨으니 이런 일이야말로 은혜 받을만한 일이며 이 일이 지금 우리 가운데서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복음이 전파되는 한 지금이야말로 은혜 받을 만한 때인 것입니다. 이 은혜 받을 만한 때를 놓치고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한다면 얼마나 애석한 일일 것입니까? 다시는 은혜 받을 만한 때를 만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또한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고 그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지금은 구원의 날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에 따라 구원의 날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합니다. 은혜의 시기에 은혜를 받는 사람에게는 지금은 구원의 날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은혜를 거역하고 받기를 거절한다면 그에게는 구원의 날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구원의 날이기는커녕 멸망의 날이 될 것입니다. 지금 온 세상에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이 은혜의 날을 놓치면 그 어디서도 은혜의 날을 찾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으면 누구든 구원의 날이 되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대는 은혜의 시기요 구원의 날입니다. 이 날에 은혜에서 떨어지지 아니하고 구원에서 낙오되는 낙오자가 되어 영영히 버림을 받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은 받을 시기와 때가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21)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바울의 각오
(고린도후서6:3-10)
바울은 2절에서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는 말로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 얼마나 귀한 일인가에 대하여 제삼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5:13절에서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라’는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고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일이 있어서 지금이 그 은혜를 받을 만한 때요 지금이 그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날이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자신의 직분을 자랑스럽게 여겼던 것입니다.
1. 이 직책이 훼방을 받지 않기 위해
바울은 이 같은 자신의 직책이 훼방 받는 일을 원치 않았습니다. ‘훼방’이란 말은 헬라어로 모메데(μωμηθῇ)로 ‘조롱을 받는 자’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실제로 이 직책에 많은 조롱을 받아 왔습니다. 미쳤다는 조롱은 수도 없이 받았고 율법을 무시하는 이단자란 조롱도 받았습니다. 그는 거짓 교사들로부터 말할 수 없는 인신공격을 받아 왔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런 조롱을 받는 가운데 핍박을 당해도 참았고 궁핍과 고난 중에도 견뎌 낸 것입니다. 그것은 그렇게 하므로 자신의 복음을 전하는 직책에 이런 훼방을 받지 않으려는 마음에서 한 것입니다.
바울은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했다고 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 교회의 유명한 사도들이나 유명 인사들의 추천을 받거나 추천서를 가지고 다니지 아니했습니다. 그 이유는 직책은 추천서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과 바울의 뜨거운 사랑이 말해 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자신을 하나님의 일꾼 된 증거로 삼았습니다.
2. 바울이 당한 환난
복음을 전하는 일에 스스로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한 바울은 그 대가를 톡톡히 치렀습니다.
(1) 많이 견뎠다고 했습니다. 그가 복음을 위해 당한 고난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이 견딤의 힘 곧 ‘인내’의 힘이었습니다. 아마 바울은 예수님의 말씀을 위로 삼는 힘으로 삼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5:10절 이하에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복음의 직책을 가지고 일하는 성도들에게 무한한 용기와 담력을 제공해 주는 확실한 상급의 약속이신 것입니다.
(2) 바울은 자신이 겪은 고난에 대하여 4절에서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곤란과 매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이라고 했습니다. 대개 비슷한말이지만 그가 당한 어려움을 이처럼 처절하게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옥에 갇히는 일을 많이 겪었고 그곳에서 태장도 맞았으며 돌에 쳐죽임을 당할 번한 일도 있었습니다.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바친 그의 수고는 자신의 생명을 바쳐도 부족하리 만치 많았습니다. 그 중에서도 아마 그가 괴로움을 받은 일은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한 일일 것입니다.
(3) 그러나 바울은 6절에서 이 모든 난관 속에서도 그가 이 직책에 훼방을 받지 않으려는 그의 위대한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인격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언제나 인품의 깨끗함을 지켰습니다. 복음의 깨끗함을 나타낸 것입니다. 이런 중에도 그는 자비함을 잊지 아니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용서하고 회개하는 자들을 너그럽게 받아 주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어떤 경우에나 육신적으로 대적하거나 공격을 시도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복음 사역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4) 바울은 자신의 직책을 수행하는 일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훼방을 받을 만한 많은 조건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밝히면서 그러나 자신은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의 도리를 전하는 진실한 하나님의 사람임을 자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은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라고 했습니다. 징계를 받는 자 같으니 실상은 하나님께서 그의 생명을 건져 주시며 근심하는 자 같지만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지만 많은 사람을 부요케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지만 모든 것을 가진 자라고 했습니다.
결론 : 이 얼마나 놀라운 바울의 사명감입니까? 복음을 전하는 모든 그리스도인 들은 이런 바울의 삶의 태도를 본 받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도 그와 같은 사명감을 가지고 우리에게 맡겨진 복음의 직책을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22)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고린도후서6:11-18)
바울은 11절에서 모든 것을 솔직하게 말한 사실을 밝히면서 자신의 마음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활짝 열려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바울의 마음은 열려진 마음이었습니다. 숨김 것이 없이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모든 것을 그들에게 전달했습니다. 12절에 나오는 말씀은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바울의 생각이 좁은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자신들의 마음을 스스로 옹색하게 만들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책망도 하고 그들의 죄를 회개할 것을 권고도 했었는데 이런 일에 대하여 그들은 바울의 생각이 옹색한 것으로 판단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자신이 아니라 오히려 너희들의 마음이 옹색했기 때문에 너희들 스스로가 잘못된 판단을 내린 것이라고 아무라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을 대하는 바울은 마치 자녀에게 대하듯 따듯한 마음과 사랑으로 그들에게 말해 왔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너희도 자신과 같이 마음을 열어 바울의 권고를 들으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 믿지 않는 자와의 멍에
바울은 14절에서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원래 멍에란 말은 말이나 소의 목에 얹어 놓는 기구를 말합니다. 말이나 소가 이것을 메면 힘든 생애를 살아가야 합니다.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면 소나 말의 목에 멍에를 메인 것처럼 어려움을 겪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 말은 둘이 짝을 짓는 생활을 의미하는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와의 짝짓기를 의미합니다. 짝짓기란 말은 단지 결혼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사업이거나 어떤 일을 경영하는 일에 있어서 믿는 사람이 믿지 않는 사람과 동업하는 일 등은 모두 함께 멍에를 메는 일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인이 이처럼 불신자와 멍에를 같이 메면 그때로부터 멍에를 멘 그리스도인 들은 멍에를 멘 소나 말처럼 고통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신자가 불신자와 멍에를 메지 말아야 할 일에 대하여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베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라고 말했습니다. 복음은 의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으면 의의 소유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거역하는 자는 하나님 앞에 불법한 자인 것입니다. 의로운 자는 불법한 자를 심판할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의가 불법과 손을 잡고 같은 멍에를 멘다면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빛은 그리스도요 어두움은 죄악인 것입니다. 빛은 어두움을 쫓아내야 합니다. 그런데 빛과 어두움이 함께 어울린다면 이런 멍에는 고통이 따르게 됩니다. 그리스도와 벨리알은 결코 조화될 수 없습니다. 벨리알이란 사해 사본에서는 ‘악마의 왕’을 뜻하는 말로 나타나 있습니다. 악마의 왕이란 곧 사탄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사단이 어떻게 조화 될 수 있을 것입니까?
이처럼 바울은 믿지 않는 자와 함께 메는 멍에에 대해 엄중하게 경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데 어떻게 우리가 믿는 않는 자들과 인생의 멍에를 함께 멜 수 있는 것입니까?
2.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오라
바울은 17절에서 사52:11절에 나오는 말씀을 인용하면서 두 가지로 그 방법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오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들의 소속해 있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계18:4절에서 하나님은 바벨론에 속한 당신의 백성들에게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 들은 불법한 자나 어두움이나 벨리알에 속한 자들이나 우상을 섬기는 자들 가운데서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다음에 ‘따로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들과 따로 있으란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불러 그의 양 우리에 넣으시는 것입니다. 이 양 우리가 오늘날의 교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의롭고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부정한 세상 무리들과 구별하여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또 한가지는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부정한 것이란 하나님께 드릴 수 없는 것을 말합니다. 이 말씀은 세상과 더불어 짝 짓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결론 :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영적 신분에 대하여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결코 세상과 멍에를 메지 말아야 합니다. 구별하여 성별된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7장 (23 - 25)
◆ 밤중소리 01-30 | VIEW : 558
(23) 이 약속을 가진 우리의 신앙적 자세
(고린도후서7:1-4)
바울은 7:1절에서 그리스도인 들이 거룩함을 이루어야 할 일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이 약속’이란 말은 6:16절에서 언급해 준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란 말과 연관된 것으로 하나님이 성령으로 친히 우리 가운데 계시고 우리를 그의 백성으로 삼으셨다는 것을 가리킨 것입니다.
1.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라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공의로우신 하나님과 죄악을 심판하시는 분으로서의 하나님을 두려워함은 물론 하나님께 대한 무조건적인 두려움,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의미해 주는 말입니다. 이러한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은 성도들이 성결한 삶을 살게 해 주는 기본적 바탕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같은 두려움이 없는 자는 은혜를 쉬 잊으며 하나님을 만홀히 여길 수 있는 것입니다.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거룩에 대해 약간의 성경적 지식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거룩이란 말은 의롭다는 말과 같은 뜻을 가진 말인데 그리스도인 들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믿음으로 얻는 의롭다 하심은 일회적이요 단회적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들은 그의 생활이 의로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믿음의 생활에 실천 상황입니다. 이 같은 거룩은 단회적으로 이룰 수 없습니다. 우리의 온 생애를 통해서 이루어 나가야 할 생활의 거룩입니다. 바울은 이런 거룩을 우리의 생활에 이루어야 할 것이라고 권고하는 것입니다. ‘이루어’란 말은 원어로 볼 때 계속 반복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 들이 그의 생활에 이처럼 온전한 거룩함을 이루어 나가는 방법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바울은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고 말함으로써 죄악에서 자신을 지키는 일임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육과 영이란 말은 육적으로나 영적으로나 거룩함을 이루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 들은 영적으로도 순결하고 거룩해야 합니다. 진리에 굳게 서야 하며 비 진리나 이단적인 다른 복음에 감염되어서는 안돼는 것입니다.
2.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
바울은 마음이 좁아진 고린도 교인들에게 2절에서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옹색해 진 것은 그들이 거짓 선생들의 영향을 받아 바울에 대한 오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런 이들에게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간략히 말한다면 ‘마음속에 바울이 들어갈 수 있는 자리를 만들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로부터 하나님의 일꾼으로서의 합당한 영접을 받기를 원하면서 자신을 그런 자로 인정해 줄 것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울을 이처럼 영접해야 할 일에 대하여 ‘우리가 아무에게도 불의를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해롭게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속여 빼앗은 일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의 복음 사역을 감당함에 자기를 중상하는 자들의 거짓말처럼 결코 불의를 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해롭게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속여 빼앗은 일도 없다고 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의 이런 진실한 마음을 이해할 때 그들의 마음이 열려 마음으로 바울을 영접하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결코 고린도 교인들이 자신에 대해 잘못된 판단을 하고 있는 고린도 교인들을 정죄하거나 책망하려는 의도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밝히면서 이전에 말한 것처럼 고린도 교인들로 바울의 마음에 있어서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려는 마음에서 이런 권고를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담대하게 말해 주고 싶은 것이 많다고 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자랑거리도 많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사랑했기 때문에 어디 가서든지 그들에 대한 자랑을 아끼지 않았던 것입니다.
결론 : 바울이 여러 곳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많은 고난을 겪었지만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에게 나타낸 깊은 사랑으로 인하여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친다고 했습니다. 이런 바울의 고백은 디도가 고린도에서 바울에게 가져온 소식을 듣고 고린도 교인들의 바울에 대한 사랑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주의 종들의 위로는 그들이 주의 일을 하면서 당하는 모든 고난을 이기게 하고 그런 가운데서도 기쁨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24)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
(고린도후서7:5-10)
바울은 5절 이하에서 마게도냐에서 겪었던 환난에 대하여 회고하면서 그 때 고린도 교회에서 바울에게 보여준 위로가 환난을 당했던 바울에게 큰 기쁨이 되었다는 사실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로 인해 근심하게 했지만 오히려 그로 인해 그들이 후회할 것이 없는 회개에 이르게 되었다는 사실에 대해 만족한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1.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에게 준 기쁨
바울은 본문에서 이 편지를 쓰기 얼마 전까지 마게도냐 지방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었을 때의 자신이 받았던 환난과 고린도 교인들로 인한 위로와 기쁨에 대한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려고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편치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는 이교도들로부터는 말할 것도 없고 이미 거짓 선생들의 영적 영향을 받은 교회들로부터도 어려움을 겪었던 보입니다. 이로 인해 바울에게는 세 가지 일이 생겼는데 ‘육체가 편치 못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육신적으로 겪어야 했던 시련을 말합니다. 그리고 밖으로는 다툼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 다툼은 교리의 논쟁이 될 수도 있고 거짓 선생들이 이미 흔들어 놓은 무리들과의 험악한 싸움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안으로는 두려움이라고 한 것은 바울은 이로 인하여 그 마음에 두려움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두려움은 죽음이나 핍박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불안에서 온 심적 고민이나 고통을 나타낸 말입니다.
그에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로 디도를 보냈으나 약속된 기한까지 돌아오지 않자 심리적으로 불안한 마음을 떨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디도 편에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보낸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편지는 고린도 교인들로 근심하게 하는 내용으로 아마도 자신에 대한 그들의 잘못된 태도와 거짓 선생들을 영접하고 그들의 교훈을 들고 미혹 받은 일에 대해 책망했을 것으로 생각되는 것입니다.
2. 비천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
이런 형편에서 거이 절망 상태에 빠져 있었던 바울은 기다렸던 디도를 통해서 큰 기쁨을 얻게 된 것입니다. 디도가 돌아 온 것도 반가운 일이지만 디도는 고린도 교회로부터 좋은 소식을 한아름 안고 온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비천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위로’라고 말씀했습니다. ‘비천한 자’란 원래가 헬라어로 타페이누스(ταπεινοὐ?)로 지면상 낮은 위치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바울이 이런 말을 사용한 것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 다른 어떤 방법을 택할 길이 없고 오직 하나님께만 의뢰할 수밖에 없는 자들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이 어려운 곤경 속에서 안과 밖으로 시달림을 받고 있었을 때 디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하나님만 바라볼 수밖에 없는 비천한 자들을 반드시 위로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그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디도를 통해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준엄한 책망의 편지를 보냈는데 이에 대하여 고린도 교인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에 대한 걱정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7절에서 이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저의 온 것뿐 아니요 오직 저가 너희에게 받은 그 위로로 위로하고 너희의 사모함과 애통함과 나를 위하여 열심 있는 것을 우리에게 고함으로 나로 더욱 기쁘게 하였느니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의 책망의 편지가 어떻게 고린도 교인들로 하여금 바울에 대한 ‘사모함과 애통함과 바울을 위한 열심’을 가지게 되었는가에 대해 그들이 그 편지를 받아 보고 회개함에 이르게 되었기 때문임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9절에서 바울은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바울이 보낸 책망의 편지를 받고 자신들이 한 일이 잘못된 일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이로 인해 그들은 회개하고 다시 바울에게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고린도 교인들의 근심이 어떻게 이처럼 그들의 생각을 변화시켜 진리에 다시 돌아오게 하고 바울을 위로하고 사모하며 바울에 대해 열심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입니까? 이에 대하여 바울은 10절에서 그 해답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결론 : 바울은 근심이란 단어를 사용하면서 이 근심을 두 가지 면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세상 근심으로 이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듣고 늘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으로 회개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25)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
(고린도후서7:11-16)
고린도 교인들은 디도 편에 보낸 바울의 서신을 받은 후, 놀라움과 큰 근심에 사로잡혔습니다. 이로 인해서 그들은 자신들의 위치를 알게 되었고 영적 경각심을 가지고 새로운 다짐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1. 고린도 교인들의 영적 유익
바울은 11절에서 자신이 보낸 편지로 고린도 교인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으로 인한 영적 효과에 대해 몇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 효과가 일곱 가지로 나와 있습니다.
(1) ‘얼마나 간절하게 하였는가?’ 고 했습니다. 여기서 간절하게 했다는 말은 바울의 서신을 읽은 고린도 교인들이 잘못된 일에 대하여 그 심각성을 인식하고 그것들을 바로잡고자 하는 열심을 가지게 된 것을 가리킨 것입니다.
(2) 두 번째로 ‘얼마나 변명하게 하였는가?’ 고 했습니다. 이 말은 고린도 교인들이 자신들의 잘못이 거짓 선생들로 말미암은 것임을 깨닫게 되었고 이로 인해 그들은 바울에게 여러 가지로 변명하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생각했던 오해는 실인즉 거짓 선생들의 교훈 때문이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3) 세 번째로 ‘얼마나 분하게 하였는가’고 했습니다. 이것은 자신들을 미혹하여 하나님의 신실한 종인 바울을 오해하고 공격했던 자신의 일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었던가에 대한 통분한 마음을 이처럼 표현한 것입니다.
(4) 네 번째로 ‘얼마나 두렵게 했는가?’ 고 했습니다. 자신들이 거짓 선생들에 의해 참된 복음을 변질시키고 바울을 배신했던 일이 얼마나 두려워해야 할 일이었는가에 대하여 새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 같은 그들의 두려움은 바울의 엄한 책망을 준 서신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5) 다섯 번째로 ‘얼마나 사모하게 하였는가?’ 고 했습니다. 여기서 사모하게 된 대상은 바로 사도 바울을 가리킨 것입니다. 그들이 바울의 간곡한 책망을 듣고야 바울이 자신들에게 전해 준 복음이 진리였음을 알게 되었고 그로 인해 바울에 대한 사모함이 더욱 뜨거워졌던 것입니다.
(6) 여섯 번째로 ‘얼마나 열심 있게 하였는가?’ 고 했습니다. 이 열심은 바울이 전해 준 진실한 복음에 대해 다시 한번 열심의 불이 붙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을 섬기려는 열심도 아울러 일어났을 것입니다.
(7) 마지막 일곱 번째로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고 했습니다. 여기서 고린도 교인들이 벌한 대상은 물론 바울을 공격했던 대적 자들로 거짓 선생들을 가리킵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진실에 눈을 뜨게 되었고 영적으로 곧 회복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거짓 선생들을 교회에서 축출하게 되었고 진리를 수호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결과로 미루어 볼 때 고린도 교회에 나타났던 잘못된 일들에 대한 모든 책임이 고린도 교회에 몰래 들어와 교인들을 미혹한 거짓 선생들에 있었다는 사실이 증거 되었다고 고린도 교인들을 위로해 주었습니다.
2. 바울이 준엄한 편지를 보낸 참 이유
12절에서 바울은 ‘그런즉 너희에게 쓴 것은 그 불의 행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그 불의 당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불의를 행한 자란 고린도 교회에 나타나 바울이 가르친 복음을 배척하고 새로운 교훈을 주면서 바울을 대적한 거짓 선생들의 무리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불의를 당한 자란 그들에게 피해를 받은 당사자로 바울 자신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거짓 선생들을 대적하여 바울을 옹호해야 했지만 그들은 바울의 복음을 전적으로 옹호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바울에 대하여 의심하며 바울의 사도적 권위를 무시하는 태도를 취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 편지를 보낼 때 고린도 교인들이 원래의 위치로 돌아가서 바울을 향한 간절함이 나타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써 보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 같은 바울의 의도가 적중하여 디도에 의해 보내 온 소식을 듣고 위로를 받게 되었고 그 뿐 아니라 디도의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바울은 더욱 많은 기쁨을 가지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평소에 디도에게 고린도 교인들에 대해 많은 자랑을 해 왔었다는 사실을 밝히면서 이번 일로 그 자랑이 거짓된 것이 아님이 증명되었다고 했습니다.
결론 :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거리낌없이 더욱 신뢰할 수 있게 된 것은 디도가 고린도에 갔을 때 고린도 교인들이 디도를 두려운 마음으로 영접하였고 순종한 것을 생각하고 그가 고린도 교인들에게 더욱 큰 애정을 품은 일이라고 했습니다.
'▣ 신약[新約]강해 > ◆ 바울서신 강해-1'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갈라디아서 1-6장 ◆ 밤중소리 민병석 목사 (0) | 2020.04.13 |
---|---|
고린도후서 8-13장 ◆ 밤중소리 (0) | 2020.04.13 |
고린도전서 8-16장 ◆ 밤중소리 (0) | 2020.04.13 |
★고린도전서 1-7장 ◆ 밤중소리 (0) | 2020.04.13 |
로마서 12-16장 (0) | 2020.04.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