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新約]강해/◆ 바울서신 강해-1

고린도전서 8-16장 ◆ 밤중소리

영국신사77 2020. 4. 13. 23:15

고린도전서 차례

고전 8장 (29 - 30)

(29) 우상의 제물과 그리스도인(고린도전서8:1-6)

(30) 지식과 덕(고린도전서8:7-13)


고전 9장 (31 - 33)

(31) 바울의 자기 변호(고린도전서9:1-15)

(32) 복음을 전하는 바울의 정신(고린도전서9:16-23)

(33) 바울의 경주(고린도전서9:24-27)


고전 10장 (34 - 40)

(34) 이스라엘로 보여 주신 경계(고린도전서10:1-5)

(35)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고린도전서10:6-11)

(36) 감당할 시험과 피할 길(고린도전서10:13)

(37) 주의 잔과 귀신의 잔(고린도전서10:14-18)

(38) 남의 유익을 구하는 생활 태도(고린도전서10:19-24)

(39) 양심과 우상의 제물(고린도전서10:25-30)

(40)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고린도전서10:31-33)


고전 11장 (41 - 42)

(41) 그리스도인과 유전(고린도전서11:1-16)

(42) 성만찬에 임하는 그리스도인의 태도(고린도전서11:17-34)


고전 12장 (43 - 47)

(43) 하나님의 영의 두 가지 역사(고린도전서12:1-3)

(44) 성령의 은사(고린도전서12:4-7)

(45) 성령의 9가지 은사(고린도전서12:8-11)

(46) 그리스도의 몸과 지체의 관계(고린도전서12:12-27)

(47) 교회의 은사적인 직임(고린도전서12:28-31)


고전 13장 (48 - 51)

(48) 더욱 큰 은사(고린도전서13:1-3)

(49) 사랑의 결실(고린도전서13:4-7)

(50) 사랑의 결실 (2)(고린도전서13:4-7)

(51) 사랑의 우월성)(고린도전서13:8-13)


고전 14장 (52 - 56)

(52) 방언과 예언(고린도전서14:1-12)

(53) 방언의 사용법(고린도전서14:13-19)

(54) 지혜에 장성한 자가 되라(고린도전서14:20-25)

(55) 화평의 하나님(고린도전서14:26-33)

(56) 교회에서의 여자의 위치(고린도전서14:34-40)


고전 15장 (57 - 65)

(57) 바울이 전한 복음(고린도전서15:1-8)

(58) 바울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고린도전서15:8-11)

(59) 부활과 그리스도의 소망(고린도전서15:12-19)

(60) 부활의 순서(고린도전서15:20-28)

(61) 부활을 믿은 근거(고린도전서15:29-34)

(62) 부활의 형태(고린도전서15:35-44)

(63) 첫 사람 아담과 둘째 사람 예수(고린도전서15:45-49)

(64) 마지막 나팔에 일어나는 하나님의 비밀(고린도전서15:50-54)

(65)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린도전서15:55-58)


고전 16장 (66 - 67)

(66) 믿음에 굳게 서라(고린도전서16:1-14)

(67)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에 대한 저주의 선언(고린도전서16: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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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8장 (29 - 30)

◆ 밤중소리 01-30 | VIEW : 531


(29) 우상의 제물과 그리스도인

(고린도전서8:1-6)

고전8장에서 바울은 우상의 제물 문제와 그리스도인의 식물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는 그 당시 고린도 교인들에게 생활상의 절실한 문제점으로 대두되었었습니다. 고린도 지방은 우상 숭배의 도시였습니다. 이방신을 섬기는 수 10개의 신전이 있었으며 그 신전에 바쳤던 우상의 제물들이 시장에서 공공연히 매매되고 있었습니다. 이 일이 이방인들에게는 아무 문제될 것이 없었지만 우상 숭배를 금하는 교인들에게는 문제가 안 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을 시장에서 사 먹어도 되느냐, 안 되느냐는 문제로 논란이 많았던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바울의 견해는 간단하고 명료했습니다. 두 가지로 그의 견해를 밝혀 주었는데 하나는 원론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 자유하다고 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그러나 아직 믿음이 약한 그리스도인들은 우상을 실존하는 존재로 인식하여 그 제물을 먹을 때, 양심이 더루어진다고 여겨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을 죄악시 했기 때문에 그런 형제들을 위해 걸림이 되지 않도록 신중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한 것입니다. 자유보다는 덕을 세우라고 했습니다.

1. 우상의 제물은 무엇인가?

바울은 1절에서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덕은 사랑을 세운다’고 했습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는 두 가지 종류의 견해가 있었는데 하나는 율법주의를 따르는 유대인들로 이들은 율법에 따라 우상의 제물을 삼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또 하나의 지식은 고린도 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입니다. 이들은 우상의 제물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과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라는 하나님께 대한 지식입니다. 이들은 그 지식으로 우상의 제물을 꺼리며 먹기를 주저하는 자들을 비웃었습니다. 그들은 아직 연약한 형제들에게 사랑으로 덕을 세우지 못하였기 때문에 바울은 지식으로 교만하지 말고 사랑으로 덕을 세워야 한다고 했습니다. 사랑이 없는 지식은 교만하게 하기 때문에 모든 일에 사랑이 우선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4절에서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 말하기를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우상은 신이 아닙니다. 우상은 살아 있는 존재도 아니며 생명체도 아닙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단지 돌이나 나무나 놋으로나 철로 만들어 놓은 허수아비가 우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신이라 하여 그곳에 바쳤던 제물은 단지 음식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입니다.

2. 오직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5절에 나오는 말씀을 보면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칭하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한 하늘에나 땅에나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다는 말은 그런 신이 실존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우상을 가리킨 말입니다.

십계명 중 제 2계명을 보면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고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고 했습니다. 많은 신과 주는 사람들이 그들의 우상을 만들어 그렇게 불렀던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한 분뿐이십니다. 신이란 말은 창조주 되신 하나님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천사들이나 기타 하늘에 있는 존재들은 신이 아니라 신이신 하나님의 창조하신 영적 존재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반역하다가 하늘에서 내어 쫓긴 사탄과 그의 무리들 역시 악한 영적 존재에 불과합니다.

바울은 6절에서 ‘오직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 여호와 하나님외 다른 하나님은 존재치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외 신들이라고 불려지는 존재는 우상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배후에서 우상 숭배를 조장하는 자는 사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상을 숭배하여 그곳에 제물을 바치는 일을 정죄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32:17절에서 이방 신상을 만들어 우상 숭배에 빠졌던 이스라엘에게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하지 아니하고 마귀에게 하였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섬기며 공경하는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주이십니다.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한다’고 했습니다. 그를 위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창조물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예수님을 주로서의 존재, 하나님으로서의 존재로 높이고 있습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았다고 했습니다. 예수로 만물이 창조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함을 받았으며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가졌으며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유업을 받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에게는 우주 만물의 창조주 되신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성부와 성자가 보내신 성령 외에 다른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것이 우리의 신앙 고백인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을 가지고 다른 형제를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지식이 부족하거나 믿음이 연약한 형제들에게 덕을 세우며 사랑을 베풀기 위해 자신의 지식을 절제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상에 관한 성경적 지식을 배워서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우리의 신앙 생활에 유익이 되어야 합니다.


(30) 지식과 덕

(고린도전서8:7-13)

성경에 나오는 지식은 누구나 동일하게 받아 드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상의 제물에 관한 지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경우,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한 견해가 일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1. 식물과 우리와의 관계

우상의 제물에 관해 잘못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경우는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 중 많은 교인들이 믿기 이전에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그리고 우상의 제물에 대해 그것이 우상과 하나가 된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우상 숭배에서 떠나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오랜 기간 그들이 섬겼던 우상 숭배에 대한 강박 관념에서 벗어나기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상 숭배 시에 사용했던 제물은 우상에게 이미 더러워진 제물이기 때문에 그런 음식을 먹는 일은 우상 앞에 경배하는 일과 같은 것으로 여기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8절에서 바울은 ‘식물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바울의 이 말은 식물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신앙에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란 의미가 되겠습니다. 음식을 먹고 먹지 않는 일이 우리의 신앙에 문제 될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마15장에서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어 버려지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무엇을 먹든지 먹는 음식이 그 사람을 더럽힐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우상의 제물을 먹는 자가 우상의 제물로 인정하고 먹을 때에는 그 일로 인하여 그 사람의 양심이 더러워진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다’는 말은 그 음식을 우상과 연결시켜 불결하게 생각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그들에게는 우상의 제물을 그냥 하나님이 주신 단순한 음식으로 생각하지 못하고 우상의 제물로 알면서 먹기 때문에 양심이 더러워지는 것입니다. 이같은 일은 그들의 지식이 온전하지 못한데서 온 믿음의 연약함 때문에 있는 것입니다.

8절에 나오는 바울의 말이 이 일에 중요한 의미를 줍니다. ‘식물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아니하여도 부족함이 없고 먹어도 풍성함이 없으리라’고 한 말입니다. 우상의 제물을 먹지 않는 일은 결코 죄일 수도 없고 믿음이 약하다고 책망 받을 일도 아닌 것입니다. 자신의 믿음을 따라 먹지 아니하여도 부족함이 없고 그리고 자기의 믿음을 따라 먹어도 풍성함이 없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절제

바울은 우상의 제물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성도들에게 경계했습니다. ‘너희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한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자들은 믿음이 약한 자들 앞에서 그들의 행동에 조심하라고 한 것입니다. 특히 우상의 제물 문제 때문에 약한 형제들을 멸망케 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경종했습니다. 바울은 10절에서 한 가지 예를 들었습니다.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제물을 먹어도 된다는 지식) 우상의 집에 앉아서 (우상의 전당이나 초청한 장소에서)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자기 믿음을 따라 우상의 제물을) 그 약한 자들의 양심이 (우상의 제물 먹기를 주저하는 자들) 담력을 얻어 (믿음이 좋다는 형제가 우상의 집에서 제물을 먹는 것을 본다면 그들은 정죄 의식을 가지면서도 담대함으로 먹게 된다) 어찌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그들의 행동 때문에)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럴 경우, 지식을 가지고 믿음으로 우상의 제물을 먹은 연고로 믿음이 약한 형제가 스스로 정죄함에 이를 것이 아니냐)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그렇게 된 그 형제들도 너희와 같이 구원받은 형제)’ 라고 한 것입니다.

12절에서 바울은 교만한 자기의 믿음이 결국 형제들에게 죄를 범하게 한 것이기 때문에 그 형제에게 죄를 지은 것이 되며 결과적으로 주님께 짓는 죄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 지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상의 제물로 논란이 된 고기를 먹는 일이 형제에게 이런 해를 준다면 자기는 그 형제들을 위해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이 약한 형제들을 실족시키지 않기 위해 고기 먹는 일을 삼가겠다고 한 것입니다.

결론 : 그러면 아직까지의 논지로 보아 바울은 도대체 우상의 제물을 먹으라고 한 것이냐, 아니냐, 이에 대해 바울은 믿음으로 먹어야 한다고 한 것도 아니요 먹지 말아야 한다고 한 것도 아닙니다. 먹어도 되고 먹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 것이 구원에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습니다. 먹는 사람은 먹지 못하는 사람을 판단하지 말고 먹지 못하는 사람은 먹는 사람을 판단하면 안됩니다. 각기 자기 믿음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에 대해 베드로 사도는 벧후1:6절에서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고 한 말씀을 따라 덕을 세우면 사랑을 따라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고전 9장 (31 - 33)

◆ 밤중소리 01-30 | VIEW : 564

(31) 바울의 자기 변호

(고린도전서9:1-15)

바울은 본문에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사도로서의 자기 변명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는 바울에 대하여 힐문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의 사도직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바울을 비난하는 교인들이 있었는데 3절에서 바울이 ‘나를 힐문하는 자들에게 발명할 것이 이것이니’란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들에 대해 자신의 사도직을 방어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응당 누릴 수 있는 권리를 천명하고 그러나 바울이 이런 권리를 사용치 않는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1. 바울의 사도직

1절에서 항변하는 듯한 바울의 변호는 울분에 찬 모습을 볼 수 있으며 한편 처절하기조차 합니다.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고 힐문했습니다.

바울은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고 했습니다. 자유자란 율법의 속박에서 벗어나 진리 안에서 새로 얻은 자유를 말합니다. 바울은 율법에 얽매어 복음의 거침이 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형제들의 믿음을 위해 그 자유를 절제했습니다. 그는 진정한 자유자였습니다.

바울은 ‘내가 사도가 아니냐’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사도임을 확신하고 이 사실을 당당히 주장했습니다. 바울의 이 말엔 바울이 사도로서의 사명을 가졌을 뿐 아니라 사도로서의 권한도 행사할 것이란 의미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자신이 사도인 사실의 증거를 두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는 것입니다. 바울은 비록 생존시에는 주님을 보지 못했지만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하늘 보좌에서 바울에게 나타내신 주님의 부활의 모습을 밝히 보았습니다. 바울은 그 일로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믿게 되었고 그 부활의 사명자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사도란 바로 주님의 부활의 증인인 것입니다.

다음에 바울은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고 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들로 예수를 영접하게 한 장본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2절에서 ‘나의 사도 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고 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의 전도로 예수를 영접하게 되었고 교회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울 때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큰 권능을 주셨고 희한한 이적을 행하게 하셨기 때문에 그들은 바울의 사도직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것이 나중에 거짓 선생이 나타나 바울의 사도직에 이 의를 제기하고 배척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2. 사도로서의 바울의 권리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과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행하는 자세에 대해 힐문한 사실을 이곳에서 조목조목 따지면서 자기를 변명하고 있습니다.

① 첫째로 ‘우리가 먹고 마시는 권이 없겠느냐’고 했습니다. 다른 사도들은 바울처럼 자비량하는 목회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비량 목회를 하므로 사도로서의 권위가 없는 듯 보였습니다. 바울의 사도직을 부인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여기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우리가 먹고 마시는 권이 없겠느냐’고 물었습니다. 바울은 이 일을 변호함에 여러 가지 성경적 증거를 들었습니다. ‘누가 자비량하고 병정을 다니겠느냐’고 했습니다. 군인은 나라의 녹을 먹고 나라를 지킵니다. 자비량하고 병정을 다니는 사람은 없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을 바울은 군사들과 비교하고 있습니다. 다음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실과를 먹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 성도들을 포도로 비유하고 그들의 구원과 영적 성장을 실과와 비유해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성도들의 재정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밝혀 준 것입니다.

바울은 ‘곡식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그 수고의 대가를 받는 일과 연결된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11절에서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가족 관계에 있어서도 ‘우리가 다른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이 없겠느냐’고 했습니다. 자신도 다른 사도들처럼 아내를 데리고 다니면서 복음을 전할 수도 있다고 한 것입니다.

바울은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을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 보냐’고 했습니다. 아마도 고린도 교회에 나타나 교회를 소란케 하는 몇몇 무리들도 이런 권리를 행사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물며 우리일까 보냐’고 말하므로 바울의 위치가 고린도 교회 안에서 그들 거짓 선생보다 얼마나 대접을 받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 알기를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 : 바울은 12절에서 ‘그러나 우리가 이런 권을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라’고 했습니다. 바로 이 대목이 바울의 자기 변호의 목적이었습니다. 바울은 사도가 아니거나 사도로서의 권위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에 장애가 없기 위해 이런 권리를 쓰지 않고 범사에 참았다고 한 것입니다. 이 말에 바울의 위대한 목회자 상을 발견할 수 있으며 그의 진정한 사도로서의 면모를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바울의 믿음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32) 복음을 전하는 바울의 정신

(고린도전서9:16-23)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전하는 사도의 사명을 이루는 일에 대해 가장 겸손한 그의 자세를 본문에서 보여 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힐문하는 자들에게 자기 변명을 시도하면서, 자신이 왜 사도로서의 대접을 받지 아니하고 그리고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지도 않고 범사에 참고 충성한 이유에 대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은 왜 이처럼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였는지 이에 대한 그의 대답을 오늘 본문에서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1. 전해도 자랑할 것이 없는 복음

16절에는 복음을 전해 온 바울의 정신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는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 일에 대해 다음 몇 가지로 그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1) ‘내가 부득불 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부득불 했다는 말은 하지 않으면 안될 불가피한 처지에 있었기 때문이란 뜻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불가피하게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일은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었던 바울의 소극적인 이유 중에 하나입니다.

화가 있을 것이란 표현은 바울의 사명감에서 나온 말입니다. 사명자가 그 사명을 이루지 못했을 때 사명자로 부르신 분으로부터 책망을 들을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전하는 자로 부르심을 받은 것으로 믿고 있었기 때문에 그 사명에 등한히 한다면 당연히 화를 당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2)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일로 자기가 받을 상을 바라보았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의 전파로 상을 받을 것을 기대하지 아니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일을 자기 임의로 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했습니다. 자기가 복음 전하는 일을 임의로 선택해서 전했다면 이로 인하여 상을 받을 것이지만 자기는 직분을 맡아 부득불 전했기 때문에 이 일 때문에 상을 기대하지는 않는다고 한 것입니다. 여기서 그가 말한 직분이란 말은 청지기로서의 직분을 가리키는데 주인의 명령에 의해 움직이는 노예가 그 일을 수행했다고 어찌 상을 받을 수 있겠느냐는 뜻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18절에서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 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한 일은 청지기의 직분으로 한 일이기 때문에 상을 바라지 않지만 그러나 그 복음을 전할 때, 값없이 전한 일과 자기에게 있는 권한을 다 쓰지 않은 그 일 때문에 상을 기대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바울의 복음 전도자로서의 참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는 자는 마땅히 복음으로 살아갈 수 있지만 그는 그런 평범한 방법을 택하지 않고 자신이 직접 천막을 만들어 생활을 유지하면서 값없이 복음을 전했다고 한 것입니다. 그 일은 분명히 하나님으로부터 상을 받을 만한 일이라고 바울은 믿은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사도로서의 권위를 교회를 다스리거나 교회에 대한 권리로 사용하지 않고 겸손하며 순종하며 두려워 떠는 심정으로 일해 왔는데 그 일이 하나님께 기억하신 바 되어 상을 얻을 것으로 기대한 것입니다.

2. 바울의 처신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 자기가 얼마나 두렵고 조심스럽게 처신했으며 지혜롭게 처신했는가에 대해 19절 이하에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 했습니다. 더 많은 사람에게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하여 그들을 복음 안으로 이끌어 드리기 위해서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다고 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었다는 말은 사랑의 종을 뜻합니다.

(2) 바울은 또한 20절에서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유대인과 같이 되었다는 말은 율법 아래 있는 자와 같이 행동했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율법에서 자유한 자였습니다. 복음은 모든 사람들을 율법에서 자유케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율법 아래 있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율법이 없는 자처럼 처신 한 것이 아니라 율법이 있는 자처럼 행했습니다. 이 말은 바울이 율법을 지키는 생활을 통해서 의를 얻고자 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율법은 그곳에서 의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존중해야 할 하나님의 계명입니다.

(3) 또한 바울은 율법 없는 자에게는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율법에 대해서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율법이란 율법의 완성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율법이 없는 자와 같이 되었다는 말은 유대인의 율법적인 규약을 따르지 않으므로 마치 율법이 없는 자처럼 보였다는 것입니다.

결론 : 그리고 바울은 약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들을 얻기 위해서 자신도 약한 자와 같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런 바울의 고백은 ‘복음을 진하되 값없이 전하고 자기에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아니한 몇 가지 증거’로 제시한 것입니다. 바울의 이런 사명감에서 나온 그의 복음에 대한 뜨거운 열의를 본받아 전도인의 사명을 이룰 수 있기를 바랍니다.


(33) 바울의 경주

(고린도전서9:24-27)

바울이 복음의 일꾼으로 하나님 앞에 가서 받을 상에 대하여 얼마나 집착했는가에 대해 24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 인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상을 얻는 일에 일등만을 생각했습니다. 이 같은 바울의 표현은 자신이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아니한’ 자신의 처사가 바로 이런 상을 받으려는 욕망에서였음을 나타낸 것입니다.

1. 상을 얻는 자는 오직 하나

바울이 이곳에서 비유적으로 말한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경우는 그 당시 대단한 인기 리에 진행되었던 올림픽 경주를 의미합니다. 이 경기는 고린도 지역에서 2년마다 주기적으로 개최되었던 ‘이스미안 경기’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 경기는 ‘올림피안 경기’와 함께 그리스 사대 경기 중 하나였습니다.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 인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고 했습니다. 육상 경기 중 가장 영광스러운 우승은 면류관을 쓰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면류관은 오직 하나였습니다. 최우승한 선수만이 이 면류관을 쓸 수 있는 영광을 차지했습니다. 바울의 이 말은 구원을 얻는 자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전한 자들에 대한 상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상을 받는 감격을 이처럼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입니다. 운동장은 우리의 생애의 공간을 말합니다. 우리의 한 생애를 운동장에 비유한 것입니다. 그곳을 달음질한다고 했습니다. 이 달음질은 의미 있는 달음질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명예와 영광과 부요를 위한 달음질이 아닙니다. 복음의 달음질입니다. 이 달음질에서 얻는 상은 썩지 아니할 면류관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서 받을 상급을 의미합니다.

이 상은 최상의 영광이요 축복입니다. 이런 축복에 대해 예수님은 산상보훈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셨습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바울이 이 경주장에서 이 영광의 면류관을 쓰려고 그가 달음질 한 모습을 고전4:11절 이하에서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도다’고 했습니다.

2.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바울은 복음의 상을 받기 위한 자신의 경우를 언급한 후,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자기와 같은 심정으로 상을 얻기 위한 경주에 참여하라는 것입니다.

(1) 상을 얻는 자는 오직 하나라고 했습니다. 이 하나란 수효는 한 명이란 뜻은 아닙니다. 올림픽 경기의 경우, 우승의 면류관을 얻는 자가 하나인 것처럼 이 면류관을 쟁취하기 위한 하나가 되기 위해 달아나라고 한 말입니다. 우리의 경주는 육상경기와는 다릅니다. 우리는 맡은 직분을 따라 죽도록 충성하면 그 수효가 얼마이건 면류관을 받는 그 하나의 수효 중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2)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한다고 했습니다. 면류관을 바라보고 경기에 나가는 선수들은 비록 그들이 받을 면류관이 화관으로 만든 썩어질 것이지만 그 명예와 영광을 위해 오랜 기간 절제하면서 연습에 임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10여 개월간이나 훈련을 받았으며 음식이나 오락이나 수면이나 체중 조절 등에 있어서 말할 수 없는 극기 생활을 했습니다.

(3) 하물며 썩지 아니할 면류관을 바라보고 달음질하는 우리의 경우야 그들보다 얼마나 더해야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썩지 아니할 면류관이란 하늘에서 우리가 받을 영원한 면류관으로 각기 행한바 에 따라 받을 영광의 상급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면류관을 위해 자신이 절제한 일에 대하여 26절과 27절에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달리기 선수가 그 달리는 방향을 모르고 달린다면 어찌 면류관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까? 그는 목표 없는 경주를 달린 것이 아니라 분명한 목표를 세우고 달음질했습니다. 그가 결과적으로 승리한 원인이 여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히1:2절에서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할 때,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했습니다. 다음에 바울은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권투 선수가 허공을 친다면 점수를 딸 수 없습니다. 목표를 정하고 정확한 펀치로 쳐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 그리고 바울은 내가 내 몸을 쳐 복종케 했다고 했습니다. 육신의 사람을 영으로 죽이는 생활로 순종의 열매를 맺었다고 한 것입니다. 바울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했다’고 했습니다. 버림이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될까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달음질을 했다는 뜻입니다. 우리도 바울과 같은 이같은 자세로 복음의 일꾼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고전 10장 (34 -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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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이스라엘로 보여 주신 경계

(고린도전서10:1-5)

바울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 생활을 하는 중에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았으나 결국 그들은 스스로의 불신을 통해서 광야에서 멸망 받은 사실을 밝힘으로 고린도 교인들에게 경종을 주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비록 하나님의 은혜로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의 신령한 은혜를 받으며 그의 말씀을 듣고 생활을 하고 있지만 만약 그들이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범한 죄를 범한다면 그들 역시 하나님의 버리심을 받을 것이라고 하는 경계로 준 교훈의 말입니다.

1. 이스라엘이 받은 혜택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민이란 점에서 교회와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그들이 출애굽에서 보여 준 모든 일은 오늘날 교회에 경계가 되는 일들입니다. 고린도 교회 뿐 아니라 우리 모두도 이런 교훈에 귀를 기우려 조심스럽게 우리의 신앙 생활을 돌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은 마치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구출 받은 사실과 비교되는 예표적인 사건입니다. 원래 교회란 단어가 원어의 의미로 ‘세상에서 불러낸다’는 뜻입니다. 애굽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불러 낸 사건이 이스라엘의 출애굽이라면 복음으로 세상에서 그의 백성들을 불러낸 곳이 교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과 교회는 한 가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일에 대하여 바울은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다’고 했습니다. 이 재목의 해석은 좀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1)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었다’고 했습니다. 구름이란 하나님의 임재를 말합니다. 이스라엘을 이끄실 때 하나님의 영광이 구름 속에 나타나셨습니다(출19:9,16, 24:15). 하나님께서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셨습니다(출14:19). 구름이 성막을 덮었습니다(민9:15).

(2) ‘다 바다 가운데로 지났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권능으로 홍해가 갈라져 이스라엘로 육지처럼 바다 가운데로 지나게 하셨습니다.

(3) ‘모세에게 속하였다’고 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종이요 선지자요 이스라엘의 인도자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예표하는 인물입니다. 모세에게 속했다는 것은 모세의 말에 순종하고 모세를 의뢰한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신약 시대의 성도들이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실을 의미합니다.

(4)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한 세례란 물세례를 가리킨 것은 아닙니다. 세례의 어원적 의미를 나타낸 말입니다. 바다만 말한 것이 아니라 구름과 바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세례를 받은 곳이 구름과 바다란 뜻입니다. 세례란 원래가 구별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세례의 기원은 할례에서도 찾을 수 있는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인침의 역사를 의미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은 구름의 보호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홍해를 건넜습니다. 이 일은 애굽 사람들과의 완전한 구별을 나타낸 일입니다. 이 세례에 관하여 고전12:13절에서 바울은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또한 바울은 참 세례에 관하여 롬6:4절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름과 바다를 건너는 이 모든 과정을 통해서 그들로 지난날의 죄악의 사람이 죽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새롭게 태어난 상태를 영적인 의미에서 세례와 연결시킨 것입니다.

(5) 다음에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마셨다’고 했습니다. 이 식물은 하늘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의 음식으로 주신 만나를 의미합니다. 만나는 하늘에서 내려 온 떡인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만나를 주신 목적이 있으셨습니다. 이같은 말씀이 신8:3절에 나와 있습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으면서 이런 하나님의 신령한 뜻을 깨달았어야 했습니다.

(6) 그들은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음료에 대하여 설명하기를 반석으로부터 나와 그들이 마신 이 음료는 곧 그리스도시라고 했습니다. 이 반석의 물은 생명의 생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결론 :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은혜의 체험을 했건만 그들은 모든 일에 육신을 좇아 행하며 모세와 하나님을 거역하는 생활을 해 왔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다고 한 것입니다. 이런 일을 경계로 삼으라는 의미에서 바울은 이 같은 이스라엘의 경우를 이곳에서 예로 들고 있는 것입니다.


(35)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

(고린도전서10:6-11)

성경에는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들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올바른 신앙 생활의 지침을 위해 보여 주신 여러 가지 사건들이 있습니다. 바울이 1-5절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 출애굽한 후, 광야 생활을 한 이스라엘의 경험이 실인즉 신령한 의미가 들어 있는 뜻 깊은 사건들이었으며 그 일이 나중에 우리들 세대에 경계의 거울로 주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1. 광야에서 범한 이스라엘의 범죄

바울은 이스라엘이 당한 일을 거울로 삼아 지금 고린도 교회가 당한 악한 범죄에서 속히 떠날 것을 경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어떤 죄악을 즐겨 한 것입니까? 바울은 이 악에 대해 네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1) 7절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저희 중에 어떤 이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인용한 내용은 출32장에 나오는 사건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더디 내려온 일로 아론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귀에서 빼 낸 금고리로 송아지 형상의 우상을 만들어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고 선포한 사건인 것입니다. 아론은 이 날을 여호와의 절일로 선포하고 그날에 번제를 드리며 온 백성들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았던 것입니다.

이 일로 하나님께서 대노하사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고 하셨을 때, 모세가 하나님께 간구하여 그 진노를 거두게 하셨으나 이로 인하여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그 이웃을 도륙하게 하여 이 날에 3천명 가량이 죽인바 되었던 것입니다.

이 우상 숭배는 그 후 계속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저지른 죄악으로 그들의 최후 거점인 남 유다가 바벨론에 포로로 사로잡힘으로 이스라엘의 막이 내리게 된 이유 역시 이 우상 숭배로 인한 하나님의 응징이었던 것입니다. 이 일은 또한 인류의 종말에 적그리스도가 등장하여 자신의 우상을 세우게 하여 모든 인류들로 그 우상을 숭배하게 하는 일로 하나님의 최종적인 심판이 이 땅위에 내려질 일에 대한 경종이 됩니다.

(2) 8절 말씀을 보면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2만3천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간음하지 말자’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민25장에서 이스라엘이 모압 여자들과의 음해 사건을 인용한 것입니다. 발람이 하나님의 막으심으로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못하게 되자 발락 왕에게 이스라엘을 저주시킬 수 있는 방법을 궤계로 가르쳐 주었는데 그 일이 이스라엘 청년들로 모압 여자들과 음행을 저지르게 하는 일입니다. 이 일이 성공하여 이스라엘 중 바알브올에게 속하여 모압의 신들 앞에 절하고 모압 여인들과 음행한 자들이 수만에 이르렀는데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염병으로 쳐죽이셨습니다. 그 수가 2만4쳔명이였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음행하는 자들을 이처럼 심판하신다고 경종하셨습니다.

(3) 세 번째로 바울은 9절에서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자’고 했습니다. 이 사건은 민21장에 나오는 것으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시험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행로가 험하고 물도 없고 식물도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이 먹이시는 만나에 불만을 품고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기뻐하지 아니하사 그들 가운데 불뱀을 보내시어 원망하는 백성들을 물어 죽게 하셨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을 위하여 간구하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게 하시고 그 뱀을 쳐다보는 자마다 살게 하셨는데 이 일이 예수님에 의해서 그의 십자가를 지시는 일의 그림자였음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요3:14절에서 ‘모세가 광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라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시험하는 일에는 하나님께 대한 원망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믿고 의뢰하며 구하는 생활을 해야지 결코 시험하는 일을 해서는 안됩니다.

(4) 다음에 바울은 10절에서 ‘너희 중에 어떤 이들을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 일은 민14장에 나오는 사건으로 모세가 가나안 땅을 정탐하기 위해 정탐꾼들을 보내고 그들이 돌아와 이스라엘 앞에서 고했을 때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들 중 악한 자들이 이스라엘을 부추켜 두려운 마음을 품게 한지라 온 이스라엘 회중이 밤새도록 곡하며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면서 돌로 치려 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이 일로 전염병으로 그들을 쳐서 멸하시려고 하셨지만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들의 길을 40일간이면 들어갈 가나안을 40년으로 연장하시고 이 원망에 참여한 모든 백성들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게 하신 것입니다.

결론 : 이런 구약시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겪은 일은 그 당시 그들에게도 교훈이 되며 경계가 되는 일이었지만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올바른 신앙의 길을 가게 하시려는 경계로 주신 것임을 알고 그들이 걸어간 불신의 길을 결코 답습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36) 감당할 시험과 피할 길

(고린도전서10:13)

성경에는 우리를 격려해 주며 우리에게 힘을 얻게 하는 말씀이 많지만 오늘 본문에 나오는 13절 말씀은 우리가 반드시 마음에 깊이 새겨 우리의 생활에 적용해야 할 말씀인줄로 압니다. 이 말씀은 두 가지 대지로 나뉘어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당하는 모든 시험은 이미 우리가 감당할 시험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우리에게 어떤 시험이 불가피하게 올 경우, 하나님은 우리에게 피할 길을 내사 능히 감당하게 하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1. 감당할 시험밖에는 당할 시험이 없다.

우리가 당하는 시험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시련을 목적으로 오는 시험이 있습니다. 이 시험에 대해 야고보 사도는 약1:2절에서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 ‘이는 너희의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시험에 대해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라고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13절 이하에 나오는 시험이 있습니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일은 이 두 가지 시험이 모두 그리스도인들에게 유익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시련의 시험은 우리에게 인내를 만들어 내게 되고 그 인내의 결과는 놀라운 축복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약1:3절에서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앎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12절에서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주실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정욕으로 나오는 시험도 성도들에게는 사망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징계를 통해서 생명의 결실을 맺게 되는 것입니다. 히12:11절에서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본문에서 밝히기를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그 이유가 나오는데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신다’고 밝혀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시험하지 않지만 성도가 당하는 모든 시험은 하나님의 허락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이 같은 사실을 두 가지 경우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다윗의 경우요 하나는 요셉의 경우입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를 취하는 일에 정욕을 따랐습니다. 그는 인내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절제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그에게는 무서운 재앙이 찾아 왔습니다. 그의 집에 피 흘림이 계속되었고 그의 처첩이 백주에 아들에 의해 동침하는 부끄러움을 당했습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받았습니다. 하나의 큰 시험을 만난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이 시험을 인내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물리쳤습니다. 그에게는 이로 인하여 당분간은 어려움이 계속되었지만 결국 애굽의 총리가 되는 축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의 경우의 시험은 모두 하나님의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받는 사람의 경우에 따라 그것이 복이 되기도 하고 화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복이 되는 일은 말할 것도 없으려니와 화가 되는 시험의 경우도 결국은 그의 생애에 시련과 그 시험에 대한 징계로 화를 받기는 하지만 그의 영적 생활에는 크나큰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오는 시험은 어떤 시험이든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데 그 하나님은 미쁘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들로 능히 감당할 수 있는 시험만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들을 긍휼히 여기시어 시험으로 넘어지거나 화를 당하는 일을 원치 않으시는 것입니다.

2. 피할 길을 주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시험을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신다고 하셨습니다. 피할 길이란 시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당한 시험 중에서 죄를 범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그 시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시험을 당했을 때 진실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한다면 그리고 시험에서 벗어나 바른 길을 가기를 원한다면 그 길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또 그런 길로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 때 우리의 욕심이 강렬하여 그런 옳은 길 가기를 스스로 거부할 때 하나님이 그를 돌이키실 때까지 그는 얼마간 사망의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결론 :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마실 물과 먹을 양식으로 어려운 시험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주시고 부족함이 없도록 은혜로 그들을 인도하셨지만 도에 지나친 그들의 정욕은 결국 하나님의 진노를 자아내어 멸망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에도 시험을 만났을 때, 믿음으로 승리하여 요셉 같은 축복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37) 주의 잔과 귀신의 잔

(고린도전서10:14-18)

고린도 교회에는 여러 가지 영적인 문제점들이 있었습니다. 특히 파당의 형성과 은사의 자랑과 우상의 제물에 대한 문제는 심각했습니다. 그 중에도 우상 숭배와 우상의 제물에 관한 고린도 교인들의 잘못된 지식은 위험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본문에서 고린도 교인들의 우상 숭배와 그 제물에 대해 구약의 이스라엘이 제단에서 참여한 제물과 신약 시대의 주의 성찬과 연결시켜 좀더 깊이 있게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1. 우리가 참여하는 축복의 잔

바울은 16절 이하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참여하는 성찬과 지난날 이스라엘이 참여한 제단의 제물과 또 우상 숭배하는 자들이 참여하는 우상의 제물에 대해 서로 연결 지으면서 그리스도인들이 우상 숭배와 그의 제물에 참여하는 일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에 대해 경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1) 바울은 먼저 주의 성찬의 경우를 예로 들고 있습니다. ‘우리가 축복하는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이 말은 우리가 실시하고 있는 성찬의 의의가 어디에 있으며 왜 성찬을 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성찬에서 마시는 잔을 축복의 잔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하는 일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참여한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피로 죄 사함을 받은 그 은혜에 참여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마시는 잔은 바로 그 피를 기념하는 것으로 죄 사함의 은혜에 참여하는 축복의 잔인 것입니다.

다음에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고 했습니다. 떡은 그리스도의 몸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이란 십자가에서 찢겨진 주님의 몸으로 죄인과 하나님과의 화목 제물이 됩니다. 그러므로 성찬식에서 떼는 떡도 축복의 떡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목이 되어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가지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된 것입니다. 떡을 떼는 일은 바로 하나님과의 화목제물이 되시고저 십자가에서 찢기신 그의 몸을 기념하는 것으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주의 잔과 주의 떡을 먹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일은 연합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한다’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한다’는 말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그의 죽으심에 참여했으며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음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했습니다. 예수님이 요6:53절에서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고 하신 말씀의 뜻은 그리스도의 흘리신 피와 찢기신 살에 참여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17절에서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고 했습니다. 떡이 하나이라고 했습니다. 떡은 생명의 떡으로 오신 예수님을 말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분은 오직 예수 한 분이라는 뜻입니다. 잔도 하나입니다. 우리의 죄 사함을 위해 피를 흘리신 분은 오직 예수 그 분 한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 한 떡과 한 잔에 참여한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우리는 그리스도의 한 몸에서 새롭게 태어난 새로운 생명들이며 이처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한 떡에 참여하므로 우리는 한 형제가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성찬에 참여하는 일은 이토록 중요한 의의를 갖는 것입니다.

2. 이스라엘과 우상의 경우

바울은 18절에서 이스라엘의 경우를 들었습니다. ‘육신을 따라 난 이스라엘을 보라 제물을 먹는 자들이 제단에 참여하는 자가 아니냐’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절기 때나 하나님 앞에 제물을 드릴 때가 되면 제단에 제물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제물은 제단 위에 드리고 남은 고기는 제사장과 제물을 드리는 자들이 뜰에서 나누어 먹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제물은 제단 위에 드려지는 것이므로 제물을 먹는 자는 제물을 드린 제단에 참여하는 자가 된다는 사실을 밝혀 줍니다.

사람이 어느 제단에 속했느냐는 문제는 어느 제단의 제물을 먹었느냐로 판가름 나는 것입니다. 우상의 제단의 제물을 먹었으면 우상에 속한 자가 되고 하나님의 제단에 속한 제물을 먹으면 하나님께 속한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결론 : 고린도 교회의 지식이 있다고 하는 어느 교인들은 이방인들이 초청하는 우상의 제사에 거리낌 없이 참여하고 그들과 함께 그곳에서 그 제물을 먹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며 우상의 제물도 아무 것도 아니므로 신앙적으로 거리낌이 없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런 그들의 지식이 결국은 그들로 우상 숭배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였고 하나님 앞에 가증한 죄를 범하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형제들을 실족시킨 것입니다. 양심의 가책을 받으면서도 우상의 제물에 관한 잘못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이런 자들의 유혹을 받아 그들을 본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올바른 지식으로 우리의 생활을 이끌어 나가야 하며 덕을 세워 많은 사람들에게 본을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38) 남의 유익을 구하는 생활 태도

(고린도전서10:19-24)

그리스도인의 신앙 생활은 자기 하나만의 생활이 아닙니다.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라’고 했습니다. 많은 우리라고 하는 한 몸은 한 교회에서 함께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 형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들로 한 몸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지체들이 융화되고 온전한 사랑 가운데 하나가 되려면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서에서 바로 이런 점에 유의하여 우상 숭배 행위나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해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1. 귀신에게 하는 이방인의 제사

바울은 이방인들이 드리는 제사의 영적 배경을 여기서 밝혀 줍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일이나 우상의 제물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사실인즉 그 배후에는 귀신들이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20절에서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 당시 고린도 지역에서 섬기던 우상은 쥬피터(Jupiter) 아폴로(Apollo) 비너스(Venus) 등, 신화에 근거한 존재들로 실존하는 신이 아닙니다. 우상 그 자체는 나무나 돌이나 철로 만든 그 형상 자체일 뿐 다른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거나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우상을 만든 사람들이 우상을 신적 존재로 숭앙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신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으로 사탄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상은 비록 아무 것도 아니로되 그곳에 경배하거나 우상의 제물을 먹는 자들은 악한 영적 존재와 교제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러한 일은 사악한 일이며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길이 없는 죄악인 것입니다.

이방인들이 드리는 제사는 결과적으로 귀신에게 하는 일이 됩니다. 그리고 그 제사에 참여하는 자는 귀신과 교제하는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귀신이란 다이몬(δαἰμων)으로 악령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악령이란 사탄의 지배를 받고 있는 저급한 이방신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21절에서 우상 숭배에 참여하고 그들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담한 고린도 교인들에게 경종하기를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상과 귀신의 상에 겸하여 참여하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주의 잔은 성찬을 의미하고 귀신의 잔은 우상의 제물을 말합니다. 주의 상과 귀신의 상도 동일한 의미를 나타내고 있는 말입니다. 인간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겸하여 귀신을 섬길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이런 잘못된 신앙적 태도를 가지고 하나님을 섬긴다면 그런 일은 하나님의 질투를 유발하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22절에서 ‘우리가 주를 노여워하시게 하겠느냐’고 했습니다. 바울의 이 말은 우리가 이런 일을 하므로 주님을 격노케 할 이유가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냐’고 물었습니다. 이 물음은 우리의 존재가 하나님 앞에 티끝만도 못한 존재요 그의 피조물에 지나지 않거늘 어찌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그런 행동을 취할 수 있겠느냐는 책망인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인의 절제 생활

바울은 23절과 24절에서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미덕으로 절제 생활에 대해 권면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 말씀해 줍니다.

바울의 이 말은 이미 6:12절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을 되풀이하는 말입니다. 모든 것이 가하다는 말은 믿음으로 행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말합니다. 죄의 속박에서 벗어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 자유는 진리 안에서의 자유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자유가 무엇인지 그 길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우상의 제물에 관한 문제도 우상 그 자체는 아무 것도 아니므로 그 제물 역시 하나의 음식에 불과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음식에 대하여 제한을 받음이 없이 자유한 생활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개인적인 자유가 공동 생활에 제재를 받아야 할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 이 제재는 속박인 것이 아니라 덕을 세우는 일로 절제에 속합니다. 교회 안에는 믿음이 연약한 형제들이 함께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아직 우상 숭배나 그의 제물에 대하여 자유할 수 있는 믿음이 없습니다. 그런 형제들 앞에서 자신의 자유를 과용한다면 그들을 실족시킬 염려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말하는 의도는 그들이 가졌다고 하는 자유도 잘못된 지식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좀더 성숙한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결론 : 바울은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신앙적인 자유함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덕을 세우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덕을 세우기 위해 자신에게 부여된 신앙적인 자유를 유보하는 일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바울은 덕을 세우는 일에 대하여 ‘남의 유익을 구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곧 사랑을 말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함이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사용될 수 있다면 그것은 사랑을 실천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생활을 이런 차원 높은 곳에 둘 수 있기를 바랍니다.


(39) 양심과 우상의 제물

(고린도전서10:25-30)

바울은 25절로부터 우상의 제물을 대하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적 태도에 대하여 언급해 주고 있습니다.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양심을 위해 묻지 말고 먹으라고 말하고 그러나 누가 우상의 제물이라 말하면 그것을 알게 한 자와 그의 양심을 위해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1. 우상의 제물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바울은 먼저 시장에서 파는 음식에 대하여 그리스도인의 태도를 말씀해 줍니다. 25절에서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고 했습니다. 그 당시 고린도 지역 시장에서는 우상 앞에 제물로 바쳐진 음식(고기)를 식용으로 팔고 있었습니다. 이교도들이 상품으로 시장에 내다 팔 고기를 먼저 우상 앞에 제물로 바친 후에 상품화 시켰기 때문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고린도 교인들은 시장에서 장사꾼에게 사려는 고기가 혹 우상의 제물로 바쳐졌던 것이 아니냐고 묻고는 아니라고 다짐받고야 마음놓고 사 갔습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묻지 말고 먹으라’고 했습니다. 시장에서 음식을 살 때 ‘우상의 제물이냐 아니냐’의 여부를 묻지 말고 그냥 돈을 내고 사면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음식이든지 음식 그 자체는 부정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 일에 대하여 두 가지 사실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양심을 위하여’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양심의 거리낌이 없게 하기 위해서란 의미입니다. 우상의 제물인지 아닌지 아무 것도 모르고 먹으면 믿음이 약한 자라도 양심에 거리낌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한 가지는 26절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 대로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우상이나 귀신의 소유란 없습니다. 천지에 충만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유인 것입니다. 비록 우상의 제물이라 할지라도 그 제물이 우상의 소유인 것이 아니고 우상이 그 음식을 더럽힌 것도 아닙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한 것이기 때문에 우상의 제물이 믿음과 감사함으로 먹는 사람을 더럽힐 수는 없는 것입니다.

2. 우상의 제물을 먹지 말아야 할 경우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것이 믿음으로 가하고 자유하나 우상의 제물인 경우, 조심해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바울은 27절 이하에서 그리스도인이 어느 불신자의 가정에 초청을 받아 음식을 대접 받았을 때의 경우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1) 먼저 초청한 집에 들어가 그가 대접하는 음식을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고 했습니다. 양심을 위해서란 말은 ‘양심을 따지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 음식이 우상의 제물이 아닐까? 먹어도 되는 것인가? 혹 우상의 제물이라면 어떻게 하나? 이런 등등의 양심의 갈등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2) 다음에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및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만약 음식을 먹는 중이든, 먹기 이전이든 그 음식에 대해 ‘우상의 제물’이라고 말하거든 그 음식을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런 음식을 먹지 말아야 할 이유에 대해서 ‘알게 한 자와 및 양심을 위해’라고 했습니다. 알게 한 자란 우상의 제물이라고 말한 자를 가리킵니다. ‘양심’이란 그렇게 말한 사람의 양심을 의미합니다.

우상의 식탁에 그리스도인을 초청한 이방인이 이웃인 경우도 있고 친척인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초청 받은 그리스도인에게 ‘우상의 제물’이라고 말하는 경우는 아마 두 가지일 것입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인들도 우상의 제물을 먹을 수 있는가? 하는 의구심과 이 음식이 우상의 제물인데 이 사람이 과연 먹어도 되는 것인가? 하는 생각입니다. 어떤 경우이건 이 경우에는 먹지 말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그 사람의 판단을 받아야 할 이유가 없다고 했습니다. 초청한 사람은 그리스도인인 이 사람이 우상의 제물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질 것인가에 대해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주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같은 이방인들의 판단의 대상이 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 사람의 양심을 위해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 사람은 그의 양심으로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우상의 제물을 먹는구나고 하는 양심의 판단을 내리는 것입니다. 그들은 너도 이제 우리의 상에 참여한 자가 되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믿음이 거짓이 아니냐는 판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판단을 받으리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뿐 아니라 ‘30절에서 ’만일 내가 감사함으로 참여하면 어찌하여 내가 감사하다 하는 것에 대하여 비방을 받으리요‘라고 했습니다. 나는 우상의 제물에 대한 지식으로 아무 거리낌없이 그 제물을 먹었습니다. 이 같은 일은 그리스도인의 당연한 자유입니다. 그러나 이런 자유로 인해서 무엇 때문에 감사하다는 일에 대하여 이방인들의 비방을 받겠느냐? 그럴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바울이 23절에서 말한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내가 행사하려는 자유 때문에 다른 사람의 비방을 받거나 그들의 양심에 판단을 받는 일을 삼가고 덕을 세우고 사랑을 나타내는 일에 자기에게 주어진 자유를 절제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40)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

(고린도전서10:31-33)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다른 사람의 판단을 받거나 다른 사람의 양심에 상처를 주는 일을 원치 아니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웃이나 불신자들의 관심 밖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이나 어떤 습관적인 생활 양식에 대해 그들을 전혀 안중에 두지 않고 자기에게 주어진 자유를 좇아 살아가는 일이 바람직한 일이 아닌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생명의 길에 인도하기 위해서는 덕을 세우고 사랑 가운데서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덕과 사랑으로 자기 자유를 절제하는 일은 이방인의 생활 습관을 따라가는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런 일로 이방인들의 판단을 받는 일이 복음을 위한 핍박을 받는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근원적인 삶의 방향을 31절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한 것입니다.

1.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그리스도 안에서는 먹고 마시는 일이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사업을 성공시키느냐 못시키느냐 하는 문제도 아닙니다. 자기 생애를 살아가는 동안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얼마나 일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생활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첫째 과제입니다. 이것을 제쳐놓고는 아무리 좋은 일을 하고 놀라운 성과를 거뒀다고 해도 그 일로 아무런 상급이 따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는 것은 첫째로 순종의 생활로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의 근본적인 방법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어떤 피조물에게도 준 일이 없는 순종의 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사탄의 계략에 빠져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 불순종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죄 값으로 죽는 가장 비참한 자리로 떨어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일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생활입니다. 누구나 어떤 문제에 부닥쳤을 때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일을 만났을 때 최선의 방법은 이 일에 대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 어디 있을 것인가를 알고 그 뜻에 따르는 일입니다. 자기의 뜻은 육신의 생각에 치우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찾아 낼 수 있는 방법은 그의 말씀을 통해서입니다. 우리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을 배우면 내주 하시는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을 가리켜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은 덕을 세우는 일과 사랑으로 행하는 일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2. 거치는 자가 되지 말라

바울은 32절에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라’고 했습니다. ‘유대인이나’란 표현은 잘못된 신앙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헬라인에게나’란 말은 이방인을 뜻하며 ‘하나님의 교회에나’란 교회나 또는 믿음의 형제들을 일컫습니다.

여기서 ‘거치는 자’란 ‘걸려 넘어지게 한다’는 말로 상대방으로 실족케 하는 일을 말합니다. 바울이 여기서 거치는 자라고 한 말은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들을 걸려 넘어지게 해서는 안되며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들로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만드는 사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일을 위해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결코 거치는 자가 되어 그들로 그리스도 앞으로 나오는 길을 막으면 안됩니다.

바울은 결론적으로 33절에서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이처럼 간곡하게 고린도 교인들에게 교훈애 주는 목적은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 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까지라도 유보하고 당연히 누릴 수 있는 권리를 절제하는 것은 우리가 약해서도 아니오, 이방인들이 두려워서도 아니라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려는 데 있는 것입니다. 하나의 생명을 구한다는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유나 권리보다 더 중요한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나와 같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런 일에 모범을 보여 주고 있는 바울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9:18절 이하에서 자신이 자기에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고 절제하고 자신의 자유를 속박한 것에 대하여 언급해 주고 있습니다. 그는 유대인을 구원하기 위해 유대인과 같이 되었고 율법 없는 자들을 구원하기 위해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되었으며 약한 자들에게는 약한 자와 같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같은 바울의 생활은 그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간절했기 때문이며 그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뜨거운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론 : 우리가 자기와 같이 한 생명이라고 구원하기 위해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생활을 할 것을 권면하고 있는 바울의 교훈을 거울삼아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우리의 모든 정성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고전 11장 (41 - 42)

◆ 밤중소리 01-30 | VIEW : 574

(41) 그리스도인과 유전

(고린도전서11:1-16)

바울은 1절에서 아직까지 자신이 말한 우상의 제물에 관한 교훈에 있어서의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우리에게 ‘나를 본 받으라’고 한 말은 실인즉 ‘그리스도를 본 받으라’는 말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본받는 생활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11장에서 예배 시 여자들이 머리에 쓰는 일과 주의 만찬에 대해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교회에서 지켜야 할 유전

바울은 교회에서 남자와 여자와의 차이점을 두고 있습니다. 여자가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때 머리에 수건을 써야 할 일에 대해 남녀의 구별을 두고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3절에서 남자나 여자나 그리스도나 교회에 있어서 서로간의 머리에 해당하는 구별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고 했습니다.

(1)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란 말은 교회를 주관하며 대표하는 위치에 있는 남자란 뜻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있어서 남자나 여자는 모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피조물입니다. 그러나 남자를 먼저 창조하셨고 그 남자의 몸에서 여자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창조의 순서는 남자가 먼저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남자는 여자의 주관자로서의 책임이 있으며 하나님 앞에 대표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남자의 머리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되심과 같다는 뜻입니다.

(2) ‘여자의 머리는 남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에 있어서 남녀간의 관계는 순종과 사랑에 있습니다. 여자는 남자에게 순종하는 것이 미덕이요 남자는 여자를 자기 몸 사랑하는 것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인류 역사의 지배자는 여자가 아니라 남자들입니다. 가정의 지배자도 남자인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근래에 이르기까지 남자에 의해 운영되어 왔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여자의 머리는 남자인 것입니다.

(3)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리스도는 곧 하나님이십니다. 그 권세도 영광도 거룩함도 동일하십니다. 그러나 그가 육신의 몸을 입고 종의 형상으로 세상에 오신 후로는 그리스도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버지와 아들과의 새로운 관계를 갖게 되었으며 그리고 그리스도는 우리의 대언자로 아버지께 간구하시는 중보자로 계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러면 교회에서는 남녀 동등권이 무시되는 것이냐는 문제가 제기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12절에서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으나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고 말씀해 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의 기본 권리는 남녀간 동등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믿음, 믿음으로 얻는 구원이나 인간의 기본적 자유 등 모든 것이 동등인 것입니다.

2. 여자가 머리에 수건을 쓰는 일

바울이 이 같은 논리를 편 것은 고린도 교회에서 있었던 유전적인 어떤 문제에 대해 교훈해 주기 위해서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세울 때 그 지방에 고유한 유전이 있었습니다. 여자들의 머리에 수건을 쓰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습관은 여자들이 남자에게 속했다는 징표로 혹은 순종의 표시로 유전되어 왔습니다. 이런 습관이 교회에까지 들어와 여자들이 머리에 수건을 쓰고 예배에 참석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습관을 좋게 여겨 그것을 유전으로 지키라고 권면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리하여 고린도 교회에서는 바울의 이 같은 권면을 따라 유전으로 그런 일을 해 왔습니다. 바울은 이런 일을 칭찬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남자들도 이 일을 좋게 여겨 머리에 수건을 쓰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 일에 대해 ‘무릇 남자로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책망했습니다. 바울은 그 이유에 대해 7절에서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에 마땅히 쓰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고 했습니다. 머리에 쓰는 일은 남자에 대한 복종을 의미하는 유전으로 내려오는 것이기 때문에 남자들에게는 마땅한 일이 못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여자들의 머리에 수건 같은 것을 쓰는 일에 대해 15절에서 ‘만일 여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영광이 되나니 긴 머리는 쓰는 것을 대신하여 주신 연고니라’고 했습니다. 옛날부터 여자들이 긴 머리를 가지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법칙으로 자기에게 영광이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자들에게 긴 머리를 주신 이유는 여자에게 있어서 머리를 깎거나 미는 일은 큰 부끄러움이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결론 : 그러나 바울의 이런 논리는 고린도 교회에게 주는 유전에 관한 자신의 견해와 권면에 입각한 것입니다. ‘긴 머리는 쓰는 것을 대신하여 주신 연고니라’고 한 말씀대로 여자들에게 긴 머리가 있다면 쓰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천주교에서는 그들 나름대로의 유전을 통해서 여자들이 수건을 쓰고 예배를 드리지만 지금 우리는 그 당시 고린도 지방의 그 같은 습관을 유전으로 살아가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지 아니합니다. 여자는 그의 긴 머리로 얼마든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42) 성만찬에 임하는 그리스도인의 태도

(고린도전서11:17-34)

바울은 교회에서 여자들이 머리에 쓰는 일에 대해 고린도 교회가 바울이 일러준 대로 그 지방의 유전을 따라 시행하는 일에 대해 칭찬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교회에 그들이 모여서 행하는 주의 성만찬에 대해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한다고 말하면서 유익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해가 되는 그들의 잘못된 태도를 크게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1. 교회를 없신 여긴 성만찬

교린도 교인들이 교회에 모일 때에 분쟁이 있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분쟁은 성만찬으로 인한 분쟁으로 비취고 있습니다. 바울은 19절에서 교회 안의 파당에 대해 인정해 주는 듯한 언질을 주고 있으나 편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는 말은 당파가 있어서 서로 분쟁해서 그 일을 통해서 옳다 인정함을 받아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바울의 이 말은 파당적 행위나 분쟁이 교회에 결코 유익이 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한 말입니다.

바울은 성만찬이 그들에게 유익이 되지 못한 이유를 몇 가지로 들고 있습니다. 이들은 주의 만찬을 먹을 때에 먼저 자기의 만찬을 가지고 와서 먹었다고 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아마도 주의 성만찬을 시행할 때, 집에서 푸짐한 먹을 만찬을 차려 교회에 가지고 와서 주의 성만찬이 시작되기 전에 먹은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에 큰 폐단이 생긴 것입니다. 그것은 두 가지로 나타났는데 어떤 이는 시장하고 또 어떤 이는 취함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자기가 먹을 만찬을 가지고 오지 못한 가난한 성도들은 먹지 못하여 시장 끼를 참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한편 포도주를 가지고 온 어떤 교인들은 정도에 지나치게 마셔 주의 성만찬을 들기도 전에 벌써 취한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일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긴 일이요 주의 성만찬을 더럽힌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20절에서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다’고 견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는다는 핑계로 결국 가난한 자를 부끄럽게 하고 술에 취하는 추태를 연출하기 때문에 그런 일을 금지시킨 것입니다. 바울은 계속하여 그들을 부끄럽게 나무랍니다.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고 했습니다.

1. 합당한 주의 만찬

바울은 23절부터 주의 만찬에 대한 교인들의 태도와 만찬의 의의에 대해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바울은 만찬의 동기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성만찬은 주의 잡히시던 날 밤에 있었던 일로 먼저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하신 말씀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주의 성찬은 먼저 떡을 떼는 것으로 시작하는 데 이 떡을 떼는 의미는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라고 하신 것처럼 십자가에서 찢기신 주의 몸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음에 주의 잔에 대해서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주의 만찬 시에 마시는 잔은 십자가에서 흘리신 주의 피를 의미하는 것으로 주님의 피로 세운 새 언약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이 흘리신 피를 기념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36절에서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에 양을 잡고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는 의식을 통해서 지난날 애굽에서 그들의 조상이 종살이 할 때 하나님이 구원해 주신 그 큰 이적을 기념한 것처럼 교회는 이런 주의 만찬을 통해서 그가 십자가에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행하신 그 은혜를 기념하고 기리기 위해 그의 오실 때까지 이런 행사를 하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주의 만찬은 이처럼 엄숙하고 거룩한 행사인데도 그들은 먼저 자기 만찬에 배부르고 자기 술에 취한 몸으로 주의 성만찬에 참여하여 주의 만찬을 더럽혔던 것입니다.

(2) 바울은 27절에서 주의 만찬에 합당치 않게 참여하는 자의 죄에 대하여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다’고 했습니다. 이 죄에 대하여 29절에서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몸이 의미하는 바를 깨닫지 못하고 떡을 먹는 자에 대한 죄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 죄는 주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원의 은혜를 만홀히 여기는 죄가 되는 것입니다.

(3) 다음에 바울은 28절에서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잔을 마시라’고 했습니다.

결론 : 30절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와 혹은 죽은 자들이 있는 것은 다 이런 연유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경종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자기 몸을 살핀 후에 주의 만찬에 참여해야 합니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려는 의도는 자기의 만찬과 주의 만찬을 혼돈하지 말고 시장한 사람은 자기 집에서 음식을 먹고 교회에서는 주의 만찬에 합당하게 참여해야 한다는 사실을 교훈해 주려는 데 있는 것입니다.


고전 12장 (43 -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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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하나님의 영의 두 가지 역사

(고린도전서12:1-3)

고린도 교회에는 문제점들이 많았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대두된 이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그들의 그릇된 신앙을 올바로 잡아 주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의 당파의 조성이나 분쟁에 관한 문제, 성적 부도덕에 관한 문제, 결혼이나 이혼에 관한 문제, 예배 시에 유전으로 여자들이 머리에 쓰는 문제와 성만찬에 관한 그릇된 관행을 책망하고 12장부터 영적인 문제에 관해 여러 가지 교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1. 신령한 것에 대한 바울의 견해

고린도 교인들은 신령한 문제에 대해 많은 혼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에 대한 바울의 견해를 묻게 되어 바울이 이곳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신령한 것이란 그 후의 논진이 은사로 나오기 때문에 성령의 은사를 의미한다고 보겠습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복음을 받아 드리기 전에는 이방인으로 우상을 숭배했던 사람들입니다. 이방인들이 우상을 숭배하는 일은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바울은 우상에 대하여 ‘말 못하는 우상’이라고 표현하므로 우상의 허위성을 폭로하고 있습니다. 우상은 사람들의 숭배는 받지만 그 자신은 아무 존재도 아닌 것입니다. 말을 못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고 움직일 수도 없다는 뜻입니다. 너희가 이전에는 그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갔다고 했습니다. 공허한 우상 숭배를 당연히 여기고 그 우상을 따르는 생활을 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2.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의 열매

바울은 3절에서 허망한 우상 숭배에서 빠져나와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된 고린도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란 하나님의 성령을 받아 말하는 자로 곧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킵니다. 사람의 입은 그 사람의 인격의 표현이며 그 마음의 나타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변화 받으면 먼저 그의 입이 변화 받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의 입이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들이 된 사람들입니다. 성령이 그 사람의 마음에 임재하시어 그 사람의 인격을 주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표현은 겉치레 믿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 예수 그리스도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을 지칭한 말입니다.

(1) 이런 사람들은 첫째로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저주할 자’란 헬라어는 아나데마(ἀνἀθεμα)로 ‘신의 저주 아래 놓인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영을 받은 사람은 예수에 대해 결코 ‘저주할 자’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 같은 표현은 유대교를 따르는 유대인들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가 저주를 받아 십자가에 못 박힌 것으로 알고 있었으며 예수를 믿는 무리들을 저주받은 자로 규정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오순절 날, 성령이 충만하여 성령으로 방언을 말하는 주의 제자들을 기이히 여기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고 외쳤을 때 그들은 마음에 찔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통회하면서 그리스도를 영접했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은 성령을 받기 이전에는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여 십자가에 달아 죽게 했지만 성령을 받은 후로는 ‘주와 그리스도’로 영접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는 자’는 어떤 주장을 펴는 자들입니까?

이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합니다. 유대인들은 예수가 하나님과 동격으로 자기를 나타내시는 일을 망령되다고 정죄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죄목으로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성령으로 말하는 사람은 결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성령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증거하시며 예수를 하나님으로 높이시는 것입니다.

다음에 이들은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부인합니다. 성경은 예수의 탄생에 대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가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말은 하나님이 사람의 몸으로 세상에 오셨다는 뜻으로 그 분은 결코 아담의 자손이 아니란 의미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으심을 부인합니다. 예수로부터 대속의 죽으심을 빼면 우리에게는 그가 필요치 않은 것입니다. 그가 우리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대속하셨기 때문에 그 분이 우리의 구세주가 되는 것입니다.

이들은 또한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인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인하면 그리스도의 모든 것을 부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를 저주할 자라 하는 자들은 이런 주장들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배격하는 것입니다.

(2) 바울은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주시란 말은 우리의 하나님이시란 뜻입니다. 베드로의 유명한 신앙고백이 이 신앙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결론 : 성령을 받은 사람과 받지 못한 사람의 구분은 은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그의 신앙 고백에 있는 것입니다.


(44) 성령의 은사

(고린도전서12:4-7)

성령의 은사는 그 당시 고린도 교회 뿐 아니라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문제점들을 안고 내려오고 있습니다. 아직 성경이 완성되지 못한 상태에서 교회를 운영해 온 그 당시 초대 교회 시대에는 성령의 은사에 의해 교회 예배가 진행되다시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서 말썽이 된 은사적 문제는 어떤 은사가 우위에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시끄러웠던 은사가 방언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방언의 은사는 다른 은사와 달리 은사 받은 사람이 체험할 수 있고 자신이 그 은사를 나타낼 수 있다는 점에서 가장 우위적인 은사 인줄로 알고 교만했습니다. 바울은 이 일에 대해 많은 교훈을 주면서 교회에서 은사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느냐에 대해 교훈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1. 은사와 성령

바울은 이 문제 있어 4절에서 7절에 이르기까지 몇 가지 기본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1) 4절에서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다’고 했습니다. 은사란 말은 헬라어로 카리스마(Χαρισμἀ)로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선물을 뜻합니다. 이 은사는 구원과 연결된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은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성령을 통하여 값없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이 은사에 대하여 바울은 은사는 여러 가지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성령의 은사가 한 두 가지인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로 다양성을 지니고 있음을 의미해 줍니다. 비록 성령은 이처럼 다양한 은사를 교회에 주시지만 은사를 주시는 성령은 같다고 했습니다. 성도들은 먼저 성령의 은사가 어떤 틀에 메어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이 8절 이하에서 열거하는 아흡가지 은사 외에도 더 많은 다양한 은사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은사를 주시는 분은 오직 한분, 성령이십니다. 아무 은사라도 그 은사의 발원지는 성령이시며 성령은 곧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은사라도 그 우월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은사를 주신 분이 각기 다른 분이신 것이 아니라 오직 한분, 성령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올바로 인식해야 교회 안에서 은사로 말미암은 분쟁이 사라질 것입니다

(3) 바울은 5절에서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다’고 했습니다. 직임이란 말은 디아코니아(διαχια)로 봉사한다 섬긴다는 뜻입니다. 교회에는 여러 가지 직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직임을 주시는 주는 같으십니다. 각자가 맡은 직임에는 우열이 없습니다. 교회의 머리가 되신 주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직임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모두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두 이 직임에 충실해야 하는 것입니다.

(4) 6절에서 바울은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은 같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은사를 주시는 성령, 직임을 주시는 주님, 역사 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말씀함으로 교회에서 분담하시는 삼위의 사역에 대해 언급해 주고 있습니다. 역사란 말은 에네르게마(ἐνερϓημἀ)로 효과, 작용, 작업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역사란 말은 하나님의 능력이나 권능이 사람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가리킵니다. 사람에 따라 나타내는 하나님의 역사가 제각기 다르지만 그것을 이루시는 분은 오직 한 하나님이십니다. 바울의 이 말은 은사건 직임이건 역사건 교회의 유익을 위해 서로 협력하여 조화 있게 사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교훈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2.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시는 이유

바울은 7절에서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심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성령의 나타남이란 성령의 은사를 말합니다.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성령의 은사를 주신 이유를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성령이 은사로 자기를 나타내시는 것입니까? 그 이유에 대해서 바울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유익이란 말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은사를 받은 사람의 신앙적인 유익이요 다른 하나는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유익입니다. 은사를 받은 사람의 유익은 은사를 통해서 더욱 견고한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은사가 어떤 것이건 은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살아 계시는 능력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에 말할 수 없는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은사는 그 당시 교회의 유익이 되었습니다. 예언이나 방언의 은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전달받기도 하며 성령께서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에서는 예배 순서를 은사 중심으로 진행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고전14:26절 말씀에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고 했습니다.

결론 : 성령의 은사는 그 당시에도 받는 사람의 신앙적 유익과 교회의 유익을 위해 주셨고 지금도 유형은 좀 달라졌지만 그 때와 다름없이 성도와 교회의 유익을 위해 주십니다. 다만 우리는 은사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가지고 은사를 받거나 사용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45) 성령의 9가지 은사

(고린도전서12:8-11)

사도 바울은 8절부터 성령이 주시는 다양한 은사의 종류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성령의 은사를 아흡가지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은사는 틀에 메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때 그 때 믿는 성도와 교회의 유익을 위해 혹은 이렇게도 주시고 혹은 저런 양상으로도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은사에는 어떤 우열의 기준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모두 성도들과 교회의 유익을 위해 필요한 것들입니다. 다만 우리는 이 모든 은사를 다 받을 수는 없습니다. 성령의 은사는 각자이 필요에 따라 성령이 나눠주시기 때문에 성령이 주실 때 비로소 나는 그 은사를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뜻에 따라 각자에게 필요한 은사를 필요한 대로 주시기 때문에 전적으로 성령께 의존하며 의뢰해야 하는 것입니다.

1. 성령의 아흡가지 은사

바울은 성령의 은사의 종류를 말함에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고침, 능력 행함, 예언, 영 분별, 각종 방언, 방언 통역 등으로 나열하고 있습니다.

(1) 지혜의 말씀 : 여기서 지혜는 소피아(σοφἰα)로 지식과 구별짓고 있습니다. 지혜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 내재해 있는 비밀을 깨달을 수 있는 은사로 볼 수 있습니다. 잠언은 성령의 지혜로 주신 말씀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은사를 받으면 그리스도를 아는 깊은 지혜를 가질 수 있으며 은혜로 주신 것들을 지혜로 깨닫게 되어 신앙 생활에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지혜의 말씀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게 하는 말씀을 전하므로 신앙적인 유익을 주는 것입니다.

(2) 지식의 말씀 : 지식이란 그노시스(ϓνώσι?)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말합니다. 이 지식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일에 필수적인 지식이기 때문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어느 정도 이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 지식의 말씀은 특별히 신학자들이나 말씀을 증거 하는 목회자들에게 주시는 은사가 되겠습니다. 이 지식의 말씀의 은사를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뿐 아니라 그 말씀을 은혜롭게 전달할 수 있는 교사 직에서 봉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믿음 :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은사로 주신다고 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누구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으며 구원이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성령의 은사로 언급되고 있는 믿음은 이 같은 일반적인 믿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은사로서의 특별한 믿음을 의미합니다. 이 은사를 받으면 말씀에 대한 믿음이 남달리 강하기 때문에 그의 신앙 생활이 대단히 능력이 있으며 구하는 기도에도 능력이 따르는 것입니다.

(4) 병 고치는 은사 : 다음에 병고치는 은사에 대해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들에게 물론 병 고치는 능력도 따릅니다. 그러나 이런 일반적인 능력인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은사로서의 신유의 능력을 나타내는 것을 말합니다. 초대 교회 사도들에게는 이런 은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이런 은사는 즉각적이며 온전한 것으로 나타났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경우는 드물고 점진적으로 나타나며 하나님의 권능의 나타나심을 보여주시면서 치료해 주십니다.

(5) 능력 행함의 은사 : 10절에서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은사로 주신다고 했습니다. 권능이나 능력이 나타나는 은사입니다. 남다른 능력을 받아 기적적인 역사도 일으키며 하나님의 권능 행하심을 보여 주는 은사입니다. 그러나 이런 은사가 지금 어떤 형태로 나타나는지 잘 알 수 없는 것입니다.

(6) 예언의 은사 : 다음에 예언의 은사에 대해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예언의 은사는 프로페테이아(προφητεἰα)로 하나님의 계시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은사입니다. 그 당시 이 예언의 은사은 하나님께서 교회를 가르치시기 위해 주신 큰 은사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은사가 성경이 없었을 당시,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역할로서의 은사인지 다른 사람의 장래에 관한 어떤 계시를 전달하는 은사인지 분명한 구분을 두지 않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 이 은사에 많은 혼돈을 가져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예언의 은사는 개인적인 신상의 길흉(吉凶)을 예고해 주는 그런 의미에서의 은사가 아님은 분명합니다.

(7) 영들 분별함의 은사 : 다음에 언급된 은사가 영들 분별의 은사입니다. 성령의 역사와 악령의 역사에 대한 올바른 분별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특히 초대 교회 시대에는 성경이 없었기 때문에 이런 은사가 필요로 했습니다. 지금은 이 은사가 말씀을 통해서 말씀의 기준에 의해 분별할 수 있습니다.

(8) 각종 방언 말함 : 다음에 방언의 말함의 은사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각종 방언이란 방언이 여러 가지로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방언은 성령의 말씀하시게 됨을 따라 내 영이 하나님께 간구하는 기도라고 했습니다.

(9) 방언들 통역함의 은사 : 방언은 통역되어야 그 내용을 알 수 있습니다. 방언은 영의 언어이기 때문에 육신의 귀로는 깨달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통역하는 은사를 받은 사람이 해석해 주어야 그 내용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 : 개인이나 교회나 성령의 은사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가지고 서로간 유익함이 되도록 사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46) 그리스도의 몸과 지체의 관계

(고린도전서12:12-27)

바울은 11절에서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에 대한 결론으로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시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12절부터 나오는 본문에는 교회를 이루는 각 지체로서의 성도들의 역할에 대해 언급하므로 유기체로서의 교회의 존재 의의에 대해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1. 한 몸과 많은 지체

바울은 12절에서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몸과 몸의 지체는 하나의 유기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하나이면서도 실인즉 여럿이며 여럿이면서도 실인즉 하나인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와 교회는 하나의 유기체로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밝혀준 말입니다. 그리스도와 교회는 신비적인 결합으로 하나가 되어 있습니다. 교회가 그 하나의 모습으로 나타나 있으며 이 교회는 많은 지체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형성되어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13절에서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한 몸을 이루는 일에 혈통의 구분이나 신분의 차별이 아무런 장애 요인이 되지 않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요는 혈통이나 신분이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것이 이 모든 일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요1:12, 13절 말씀을 보면 예수의 이름을 믿는 자는 누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말씀하시고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하나님께로서 났다는 말과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고 말은 같은 의미를 가집니다. 여기서 세례는 예수를 믿는 자에게 부어주시는 성령의 세례를 의미하며 이 세례로 우리는 한 몸이신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었고 우리의 지체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룬 것입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몸이란 교회를 가리킵니다.

2. 몸과 지체와의 관계

바울은 14절 이하에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그 지체를 이루고 있는 성도와의 관계를 몸과 지체와의 유기적인 관계를 예로 들어 설명함으로 교회에 있어서 지체로서의 성도들의 역할에 대해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몸은 한 지체뿐 아니라 여럿이라고 했습니다. 몸이 한 지체뿐인 존재는 아마 단순 세포인 ‘아메바’ 종류밖에 없을 것입니다. 모든 존재는 몸이 하나입니다. 그러나 그 몸을 이루는 지체는 하나인 것이 아니라 다양성을 띠고 있습니다. 그 몸을 제대로 활동하여 유지시킬 수 있는 지체들이 여러 곳에서 제각기 자기에게 주어진 기능에 따라 활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2) 바울은 이런 이치에 대해 발과 손과의 관계, 귀와 눈과의 관계를 예를 들었습니다. 몸에는 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발도 있습니다. 이 양자는 물론 하는 역할이 다릅니다. 그렇다고 어느 하나가 자기의 우위를 내세우고 다른 지체의 역할에 제동을 건다면 그 몸은 이미 제 기능을 상실해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17절에서 바울은 ‘만일 온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뇨’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만일 온몸이 눈만 달려 있다면 이런 사람은 괴물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이런 괴물은 생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듣는 곳도 없고 냄새 맡는 곳도 없으며 손으로 잡을 수도 없고 발로 걸어다닐 수도 없다면 이런 지체를 가진 몸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까?

그리고 바울은 18절에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 몸의 여러 지체들은 하나님의 창조물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만드시어 각각 몸에 두셨습니다. 눈이 있을 곳에 눈을 두시고 귀가 있을 곳에 귀를 두셨으며 손이 있을 곳에 손을 두신 것입니다. 우리 몸의 모든 지체는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며 또 있어야 할 곳에 있을 뿐 필요 없는 곳에 있는 지체는 하나도 없습니다. 이 말씀은 모든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몸인 하나님의 교회에 지체로써 반드시 필요한 존재들임을 밝혀 주는 교훈입니다.

이 말씀의 뜻은 성령께서 각자의 유익과 교회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의 교회에 성령의 나타남으로 여러 가지 은사를 주셨으며 모든 성도들은 이 은사로써 지체로서의 사명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사의 우위나 자랑이나 멸시는 있을 수 없습니다. 각기 필요 한대로 성령께서 각자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결론 : 우리 몸의 경우를 보아도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오히려 더 존귀한 역할을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지체가 한 몸의 공동운명체인 사실은 어느 지체건 하나가 고통을 받으면 온몸의 지체가 똑같은 고통을 받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또 영광을 얻으면 함께 영광을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 눈이 좋다’고 할 때 그 영광이 눈에게만 아니라 온몸에 함께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존귀하게 여기며 겸손한 가운데 협력하여 그리스도의 몸이신 교회를 세워야 합니다.


(47) 교회의 은사적인 직임

(고린도전서12:28-31)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교회의 은사적인 직임에 대해 언급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바울은 일반적인 직임과 은사에 대해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제한적인 직임과 은사에 대한 것을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운 직임에 대해 사도와 선지자와 교사로 국한 시켰습니다. 이들 외에도 많은 직분자들이 있지만 그리스도의 지체로서의 교회의 대표적인 직임자로 이들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은사에 있어서도 9절 이하에 나오는 9가지 성령의 은사를 지적한 것이 아니라 능력, 병고치는 은사, 서로 돕는 것, 다스리는 것, 각종 방언을 하는 것 등을 들고 있습니다.

1. 교회에 세우신 직임

하나님이 교회에 세우신 직임은 다양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 당시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직임자로 지목되었던 사도와 선지자와 교사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1) 사도란 ‘아포스톨루스’ (ἀποστὀλουϚ)로 보내심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사도들은 주님에 의해 직접적으로 임명 받았기 때문에 그 권위가 절대적이었으며 이들에 의해 성경이 기록되었고 초대 교회가 운영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사도직에 대해 알아야 할 일은 이 직임은 단회적이란 점입니다. 다른 모든 직임은 교회에 의해 선출되면서 계속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사도직만은 그들이 세상에 생존해 있을 동안만 그들에게 부쳐진 이름일 뿐 그들이 죽은 이후에는 다시는 이 직분이 세워진바 없는 것입니다.

(2) 다음에 선지자를 들었습니다. 선지자란 ‘프로페타스’ (προφἠταϚ)로 대변자, 대리자란 뜻입니다. 선지자란 말은 오늘날 목사들에 대한 구약적 표현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사명을 가진 하나님의 일꾼을 선지자라고 했습니다. 일종의 예언자적 사명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던 직임자로 볼 수 있습니다. 초대 교회에서는 아직 성경이 완성된 상태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교인들에게 말씀을 증거 하려면 예언의 은사자 중, 선지자적 사명을 가진 직임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했을 것입니다.

(3) 다음에 교사를 들었습니다. 교사란 사도나 목사가 아니지만 말씀을 가르치는 은사가 주어져서 효과적으로 교인들을 교육시키는 직임자입니다. 이들이 교회에서 차지하는 지중은 대단히 크며 중요합니다.

2. 은사적 역할

초대 교회 시대에는 교회에서 성령의 은사의 역할이 컸습니다. 말씀으로 복음이 효과적으로 전달되지 못했기 때문에 말씀을 통한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나타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교회 중에 몇을 세우신 일에 은사 받은 성도들이 포함된 것입니다.

(1) 능력의 나타남을 맨 처음에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일은 은사에 속하는 일입니다. 이 능력은 보편적인 능력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밝히 보일 수 있는 권능으로서의 능력을 가리킵니다. 이 능력을 보고 교회로 돌이키는 이방인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2) 그 다음은 병고치는 은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많은 병자들이 예수님을 찾아 나와 고침을 받았습니다. 특별히 초대 교회 시대에는 이런 신유의 은사가 강하게 나타났습니다. 베드로는 죽은 과부를 살리기도 했으며 바울은 손수건을 만지는 것만으로도 어떤 병자든지 치료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이 은사는 하나님의 권능을 보이고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일에 대단히 효과적입니다.

(3) 서로 돕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구제와 헌신을 말합니다. 그 당시 사회는 식량이 핍절하고 생활이 궁색했기 때문에 교회에서 구제하는 일은 필수적인 사업이었습니다. 서로 돕는 일은 사랑의 실천으로 사람들을 그리스도 앞으로 이끄는 일에 효과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4) 다스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스리는 것은 교회를 다스리는 일을 말합니다. 교회는 많은 지체들이 모여 한 몸을 이루고 있는 곳이기 때문에 효과적인 유기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다스리는 직임자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목사나 장로를 세우고 이들로 교회를 치리하게 했습니다.

(5) 다음에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방언은 그 당시 교회에서는 반드시 있어야 할 성령의 은사 중에 하나였습니다. 방언은 그 통역으로 그 말하는 바를 알 수 있으며 그럴 때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29절에서 바울은 아직까지 자기가 말한 교회의 직임이나 은사적인 역할에 대해 언급한 후, 이런 직임이나 은사는 어떤 개인에 의해 활용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위해 하나님이 친히 세우심으로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고 말하면서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직임과 은사에 충성해야 할 것을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결론 : 몸을 이루려면 지체가 고루 분배되어 있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비록 나타난 은사는 없어도 교회의 지체로서 나타나지 않은 은사를 주셨다는 사실을 믿고 지체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바울은 31절에서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말하면서 ‘내가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 했습니다.


고전 13장 (48 - 51)

◆ 밤중소리 01-30 | VIEW : 504

(48) 더욱 큰 은사

(고린도전서13:1-3)

바울은 고전 12:31절에서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말씀하고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 말하면서 13장에 와서 그 큰 은사가 곧 사랑임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12장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교회의 지체로서의 직임과 은사의 역할을 말하면서 이 모든 것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직임이나 은사는 결코 교회의 분쟁을 일으켜서는 안됩니다. 서로 협력하여 생명적 유대를 가져야 한 몸을 이루어 제 기능을 나타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직임이나 은사가 교회에서 자랑거리가 될 때 오히려 그리스도의 몸을 해치게 된다고 경종해 주었습니다. 발이 손더러 나는 손이 아니니 너와 상관이 없다고 하거나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할 때 지체들끼리 분쟁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지체는 어떤 지체건 서로간 생명적인 유대를 가지고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다른 지체도 함께 고통을 당해야 하며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다른 지체도 함께 영광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1. 바울이 큰 은사라고 말하는 사랑

그런데 바울이 13장에서 사랑의 은사에 대하여 자랑하고 있습니다. 이 은사에 대해 바울은 더욱 큰 은사라고 했고 제일 좋은 길이라고도 했습니다. 바울은 13장에서 사랑에 대한 가치를 높이고 있습니다.

(1) 바울은 1절에서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된다’고 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선호하는 은사가 방언이었고 방언의 은사를 받은 성도들이 다른 은사를 받은 사람들보다 우월감을 가지고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방언이라도 사랑이 없다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만도 못하다고 한 것입니다. 바울의 이 말은 사랑이 없는 교인이 방언의 은사를 받아 방언을 말하는 일은 무익할 뿐 아니라 오히려 교회를 해롭게 한다는 것을 경종한 것입니다. 은사는 자기에게나 교회에게나 유익을 주어야 합니다. 그런 목적으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랑이 없는 방언은 그런 유익을 줄 수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해를 주게 되는 것입니다.

(2) 바울은 2절에서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예언은 하나님의 비밀과 지식을 전달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참으로 놀라운 은사에 속하며 이런 사람들은 교회에서 대단한 귄위를 가지고 말씀을 전하기 때문에 존경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에게 만일 사랑이 없다면 그들이 가지고 있는 그런 예언의 은사가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것을 밝혀 주고 있는 것입니다.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의 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리킨 것이 아닙니다. 교인에게 주신 은사적인 믿음입니다. 그러나 이런 믿음 역시 사랑의 바탕 위에 세워져야지 사랑의 기초 없이 사용된다면 유익은커녕 오히려 해가 되는 것입니다.

(3) 바울은 3절에서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다’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돕는 은사도 사랑에서 출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런 구제가 자랑이 되고 자신에게 영광이 되기 때문에 이미 상급을 받았으므로 하늘의 상급에서 제외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 구제에 대하여 조심해야 할 것이라고 산상보훈에서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구제는 참으로 좋은 하나님의 사업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그 동기가 사랑에서 출발하지 않았다면 그 일이 유익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이 말은 그리스도인이 주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회생을 의미한 말입니다. 혹 순교의 자리에 이른다 해도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 자기 몸을 불사르는 위험한 자리에 내어 던진다 해도 그것이 사랑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면 무슨 유익이 될 것이냐는 것입니다. 바울이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바 는 사랑이 없는 모든 행동은 진실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겉치레가 되는 외식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그 가치가 손상된다는 뜻입니다.

엡3:12절 이하에서 사랑에 대해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결실을 온전케 하는 생명의 원동력임을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고 했습니다.

결론 : 그리스도인의 은사는 사랑이 그 출발점이 되고 추진력이 되어야 은사로서의 가치가 있습니다. 사랑의 밭에서 은사의 씨가 자라야 그 은사가 자기와 교회에 유익이 되고 하나의 유기체로서의 지체의 사명을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49) 사랑의 결실

(고린도전서13:4-7)

바울은 4절 이하에서 사랑이 무엇인가에 대해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여기 나오는 15가지 항목에 이르는 사랑에 관한 해설은 사랑의 정의인 것이 아니라 사랑의 특징적인 요소를 시적인 표현으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사랑은 그 기원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요일4:7절에서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사랑에 대해 맹목적이었습니다. 혈육에서 나온 사랑, 동포애 적인 사랑, 불우한 이웃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있지만 이 사랑은 그 동기나 그 결실이 하나님의 사랑과는 판이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에 바탕을 두어야 하며 결과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야 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해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1. 사랑은 무엇인가?

사랑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수적인 것이지만 이 사랑에 대한 은사가 있습니다. 이 은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받기를 사모하며 원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자랑이 될 수 없고 교만과 자리를 함께 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랑의 은사를 받기만 하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직임이나 은사가 자신뿐 아니라 교회를 위해서 덕이 되며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1)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랑의 은사는 오래 참는 것으로 출발합니다. 인내가 없이는 사랑이 결실 할 수 없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나를 대적하는 자, 나를 미워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사랑은 오랜 기간 인내가 계속되어야 결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도 오래 기다림이 있는 사람이 받을 수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선을 행한 후에도 오래 참아 기다릴 수 없다면 낙심하여 결실을 거둘 수 없는 것입니다. 상대방으로부터 모욕을 받아도 참아야 사랑이 이룰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생애 동안에 이런 사랑을 위해 오래 참으시고 끝까지 참으셨습니다.

(2) 사랑은 온유하다고 했습니다. 온유하다는 말은 부드러운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사랑은 부드러운 마음으로 나타납니다. 마음이 부드럽지 못한 사람은 온유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에게서 사랑의 결실을 맺기란 어려운 것입니다. 주님은 마5:5절에서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온유한 마음은 주님의 마음입니다. 그 속에 복수심이 없고 악이 없고 조급함이 없고 어떤 환경에서도 적응할 수 있습니다. 쉬 분노하지 않으며 다투기를 좋아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은 온유한 마음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알고 온유한 마음을 갖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3) 사랑은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투기란 강새암으로 일종의 질투를 말합니다. 투기는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삼켜 버립니다. 인격까지도 양심까지도 투기 앞에서는 설자리가 없는 것입니다. 잠27:4절 말씀을 보면 ‘분은 잔인하고 노는 창수 같거니와 투기 앞에야 누가 서리요’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잔인한 분도, 그리고 창수 같은 노도 투기 앞에서는 설 자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투기하는 자는 사랑을 가질 수 없습니다. 사랑을 나타낼 수도 없는 것입니다.

(4)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자랑은 자기 과신에서 오는 자기 선전입니다. 자랑하는 사람은 자기 피해 의식에 사로잡혀 있으며 이런 의식에서 벗어나려는 의도적인 행동으로 자기 자랑을 하는 것입니다. 자랑은 자기를 알아 달라는 나팔이기 때문에 이 나팔은 불면 불수록 효과가 적어지며 자신에게 돌아갈 명예나 보상도 삭감되는 것입니다. 자랑하는 사람들은 대개 허탄한 것을 자랑합니다. 돈이나 미모나 명예나 권세나 선행에 대한 자랑들입니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야고보 사도는 세상에 보이는 것으로 자랑하는 일은 허탄한 자랑이라고 말하면서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5) 사랑은 교만하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미워하시는 데 그 이유는 교만은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과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사탄이 이 교만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다가 하나님의 동산에서 내어 쫓겼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낮추시고 겸손한 자를 높이신다고 하셨습니다. 왜 교만이 오는 것입니까? 다른 사람보다 자신을 높이려는데 서 교만이 옵니다. 다른 사람을 시기하는데서 교만이 옵니다. 교만에는 상대방을 멸시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기 때문에 분쟁을 가져옵니다.

자기가 받은 은사가 제일인줄 아는 사람, 자기 믿음이 제일 인줄 아는 사람들이 영적 교만을 가지고 신앙 생활을 합니다. 교만은 누구도 말릴 재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내가 낮추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특별히 교만한 하나님의 종들은 반드시 하나님이 낮추시는 데 이런 낮추심에는 큰 모욕과 수치를 주는 방법을 취하시는 것입니다.

돈으로 교만한 사람은 돈을 회수하십니다. 명예로 교만한 사람은 명예를 불명예로 만드십니다. 권세로 교만한 사람은 그 권세로 인하여 부끄러운 자리에 내려 앉게 하십니다.

결론 : 오늘은 본문에 나오는 사랑의 15가지 결실 가운데 다섯 가지만 말씀드렸습니다. 사랑은 그리스도인이면 누구에게나 반드시 소중하게 필요한 것입니다. 이 은사 위에 직임과 다른 은사를 받을 때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좋은 지체의 구실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50) 사랑의 결실 (2)

(고린도전서13:4-7)

바울은 본문에서 사랑이 무엇이냐에 대한 해설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은 어떤 마음과 행동으로부터 이루어지는 것이냐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4절 이하에서 사랑이 무엇인가에 대해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사랑이란 어떤 특별한 성격이나 노력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바울이 본문에서 언급해 주고 있는 15가지 요소로 인하여 비로소 사랑이라고 하는 결실을 맺을 수 있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나머지 사랑의 요소

지난 시간까지 사랑의 다섯 가지 면을 살폈습니다. 오늘은 그 나머지 부분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6)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무례히 행하는 것은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랑은 무례히 행하는 사람에게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사랑의 결실을 맺으려면 무례히 행하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무례히 행한다는 말은 예의에 벗어난 일을 다른 사람에게 행하는 일로 자랑이나 교만한 것도 무례히 행하는 종류의 사람들입니다.

(7) 다음에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자기의 유익이란 이기적인 생각이나 행동을 말합니다. 무엇에나 이기적인 사람은 결코 사랑을 나타낼 수 없습니다. 만약 이런 이기적인 사람이 사랑을 나타낸다면 그 사랑 자체도 이기적인 사랑으로 가면적인 사랑에 불과할 것입니다. 사랑에는 자기 희생이 따라야 합니다. 희생이 없이는 사랑의 결실을 맺을 수 없는 것입니다.

(8) 사랑은 성내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분노는 사랑의 반대말입니다. 성을 내는 사람은 사랑을 말할 자격조차 없는 사람입니다. 사람에게 사랑이 없을 때 쉽게 나타내는 것이 성내는 일입니다. 사랑을 나타내려면 자기 감정을 억제하고 성을 내려는 육정을 억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9)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악한 것이란 자기 앞에 놓여져 있는 일에 대한 저속하고 비열한 행위를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앞에 벌어지는 일에 대해 늘 선한 마음과 생각을 가지고 대처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산상보훈에서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악한 것을 생각하는 마음에서는 사랑이 결실 할 수 없습니다.

(10)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불의에서 사랑이 싹틀 수 없습니다. 불의한 일을 하면서 동시에 사랑을 나타낼 수 없습니다. 사랑은 의롭지 않은 일과 곁코 손을 잡지 않습니다. 불의한 일에 동조하지 않을 뿐 아니라 불의한 일을 미워합니다.

(11)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진리란 불의와 반대적 표현으로 사랑을 나타내는 사람은 언제나 진리와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불의를 보고 기뻐하거나 옳지 않은 일에 마음이 끌린다면 그런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바랄 수 없는 것입니다. 언제나 진리 편에 서서 비록 그 진리로 인하여 핍박을 받는다 해도 진리 안에서 기뻐하는 생활이 사랑을 가진 사람의 삶의 태도인 것입니다.

(12) 사랑은 모든 것을 참는다고 했습니다. 참는다는 말은 자신에게 불 유익한 경우에도 잘 참아 내는 마음을 가리킵니다. 다른 사람과 능히 다툴 만한 일이라도 그것을 잘 참아 내는 마음을 가리킵니다. 이 같은 참음이 없다면 사랑의 결실은 맺을 수 없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오는 모든 것들에 대해 인내할 수 있는 사람이 온전한 사랑을 나타낼 수 있는 것입니다.

(13) 사랑은 모든 것을 믿는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를 가리킵니다. 사랑의 사람은 그 근거를 하나님의 말씀에 둡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능히 우리들로 사랑을 나타낼 수 있도록 격려해 주시고 그 상급에 대해 약속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그 생활에 나타내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그 마음의 바탕에 깔려야 하는 것입니다.

(14) 다음에 사랑은 모든 것을 바란다고 했습니다. 바란다는 말은 소망을 의미합니다. 모든 것을 바란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소망을 의미합니다. 사랑은 소망에 근거합니다. 사랑을 나타내는 사람은 소망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15)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딘다고 했습니다. 참는다는 말과 견딘다는 말은 차이가 있습니다. 참는 것은 자기 감정적인 것이지만 견디는 일은 자신이 당하고 있는 어려움을 이겨 나가는 일입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서 자신이 당하는 어려움을 잘 견뎌 냈습니다. 그 결과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견딤이 없는 사람은 어려운 일에서 헤어 나오기가 어렵습니다. 견딤의 원동력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에서 옵니다. 믿음이 견딤을 이루게 하고 이런 견딤이 그 사람으로 사랑의 사람을 만듭니다.

결론 : 사랑은 완숙한 신앙의 결정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사랑이 없습니다. 그리고 믿음에서 나오는 모든 결실이 없이는 사랑의 결실을 맺을 수 없습니다. 사랑은 모든 지체를 하나로 잇게 하는 은사 중에 은사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바울이 12장에서 언급한 성령의 은사를 사모하며 받기를 원해야 하겠지만 그보다도 사랑의 은사를 사모하라고 했습니다. 이 은사를 받기를 위해 기도한다면 이런 기도는 가장 값진 기도로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것입니다. 사랑의 은사를 받아 교회에 덕이 되고 자기 신앙에 유익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51) 사랑의 우월성)

(고린도전서13:8-13)

바울은 본문에서 사랑의 영원성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사랑이 위대한 것은 사랑은 한시적인 것이거나 세상에서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영원까지 지속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이런 점에서 그 당시 고린도 교회에서 은사로 활용하고 있는 여러 은사들과 비교하여 그 우위성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않는 사랑

8절 말씀에서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떨어지지 아니한다는 말은 은사로서의 가치가 사라지거나 소멸되는 일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사랑의 속성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사랑은 이 세상뿐 아니라 천국에서도 필요하며 영원토록 우리의 생애에 계속되는 필수적인 은사란 뜻입니다.

(1) ‘예언도 폐한다’고 했습니다. 예언은 성취되면 예언의 완성이기 때문에 예언으로서의 중요성이 없어집니다. 성경에는 앞으로 성취될 예언이 많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런 예언도 모두 성취될 날이 오는 것입니다. 주의 재림으로 이 세상이 심판 받고 새로운 세계가 탄생되면 지금 우리가 소망으로 삼고 있는 예언은 폐해지는 것입니다. 이 예언은 초대 교회 시대에만 존재했던 잠정적인 은사로서의 예언을 가리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나타난 전반적인 예언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2) ‘방언도 그친다’고 했습니다. 방언도 교회나 받는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주었습니다. 앞으로 방언이 은사로써 필요치 않을 시기가 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 방언의 은사가 그 당시에만 존재했고 지금은 필요치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은사는 교회가 이 땅위에 존속하는 한, 존재할 것입니다. 성령이 자기 뜻에 따라 교회의 유익을 위해 주신다고 말씀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천년왕국이나 천국에서는 이런 방언이 필요 없습니다. 우리의 언어가 하나가 되어 모두 통용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때는 영으로 기도할 필요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3) ‘지식도 폐하리라’고 했습니다. 이 지식이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의미합니다. 이런 지식도 부분적이기 때문에 온전한 것이 올 때는 사라져 버리게 될 것입니다. 온전한 것이 올 때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여호와를 경외하는 지식이 충만할 것이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있는 지식은 폐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9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지식이나 은사에 대하여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도 아무리 성경을 많이 연구한 신학자의 경우일지라도 부분적으로 아는 지식에 불과한 것입니다. 예언에 있어서도 2절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 대로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있어도 사실인즉 그 범위가 제한적이어서 적은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온전한 것이 온다는 그 시기를 어떤 시기, 어떤 때로 보느냐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는 것입니다. 대개의 경우, 둘로 나뉘어집니다. 하나는 성경이 완성된 시기를 말한다고 주장하고 다른 하나는 모든 성경이 성취되는 시기로 주의 재림의 시기를 의미한다고 주장합니다. 아마도 후자의 경우로 보는 것이 타당성이 있다고 할 것입니다. 12절에 나오는 말씀이 이런 주장을 뒤바침해 주고 있습니다.

2. 제일은 사랑이라

바울은 은사의 한시 성과 사랑의 영원성을 설명하기 위하여 두 가지 비유를 들고 있습니다. 어린아이의 경우와 장성했을 때의 경우를 비교하면서 우리가 어렸을 때는 생각하는 것이나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았지만 장성한 사람이 되면 그 어린아이 때의 일을 버리는 것처럼 지금 우리의 믿음의 생활은 마치 어린아이의 시기와 같이 깨닫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이 온전치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어린아이의 일을 버릴 때가 오는데 이 때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을 버리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거울의 비유에서도 지금 우리가 바라보는 하나님이나 천국이나 우리의 소망은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한 것이지만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때에는 모든 것이 확실하여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예언이나 방언이 필요치 않다고 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 모든 사실을 미루어 볼 때 사랑이 가장 요긴한 은사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13절에서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결론 :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 요건은 반드시 갖추어야 할 것들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소망이 없는 생애도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생활에 사랑이 있어야 열매를 맺으며 교회가 융화되고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일에 일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바울은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강조하므로 사랑의 소중함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고 있는 것입니다.


고전 14장 (52 - 56)

◆ 밤중소리 01-30 | VIEW : 602

(52) 방언과 예언

(고린도전서14:1-12)

12장에서 성령의 은사를 말한 바울은 13장에서 가장 우월한 은사로 사랑을 천거하고 사랑이 결여된 은사란 무익한 것이며 교회에 유익이 없다는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다시 14장에 와서 바울은 1절에서 ‘사랑을 따라 구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여기서 구하라고 한 대상은 물론 은사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은사가 좋은 것이긴 하지만 그것이 교회에 유익이 되고 은사를 받는 사람에게 유익이 되려면 사랑의 기반 위에서 은사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은사에 대하여 구하라고 했습니다. 모든 은사는 성령의 뜻대로 각기 필요한 사람에게 나눠주시는 것이지만 성도들의 입장에서는 은사를 사모하고 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은사의 구함에 있어서 ‘사랑을 따라 구하라’고 했습니다. 사랑을 따라 구하라는 말은 사랑 안에서, 또는 사랑으로 말미암아 구하라는 의미로 구하는 자의 자세에 사랑이 깔려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입니다.

1. 신령한 것을 사모하라

바울은 ‘신령한 것을 사모하라’고 했습니다. 신령한 것이란 문맥으로 보아 성령의 은사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본문에서 예언과 방언을 대비시켜 예언에 더 비중을 두었습니다.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 했습니다.

예언을 하려고 하라는 말씀은 예언의 은사를 다 사모하라는 뜻이며 ‘하려고 하라’는 말에서 예언의 은사를 구하기를 사모하라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방언보다 예언의 은사를 받는 일이 더 중요한 의의가 있는 사실에 대하여 방언은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이 알아듣는 자가 없다는데 그 이유를 들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방언은 그 영으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 영이란 말은 방언을 말하는 사람의 영을 가리키며 방언은 그 사람의 영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그 비밀을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 비밀이란 방언의 내용으로 방언은 그 사람의 영이 자신의 비밀을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그 비밀한 말의 내용을 알 수가 없기 때문에 방언은 자신에게도 특히 그 방언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유익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언은 그렇지 않다고 했습니다. 3절에서 예언의 유익에 대하여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언의 은사는 하나님께 말하는 비밀한 내용인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들려주려는 통상적인 말이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뜻과 그가 알려주려는 바 하나님의 비밀한 것을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의 입의 말로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십니다. 그러므로 그곳에 모여 있는 모든 사람들이 예언하는 사람의 말을 듣게 되며 그 예언이 자신들에 대한 하나님의 권면과 안위 등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교회의 덕을 세우게 되는 것입니다.

2. 방언의 유익과 무익

바울은 본문에서 방언에 대해 많은 말씀을 주고 있습니다.

(1) 첫째로 방언은 방언을 말하는 사람의 영으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방언은 알아듣는 자가 없다고 했습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지 않으면 교회의 덕을 세울 수 없으며 예언하는 자만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예언하는 자만 못하리라고 한 말은 은사의 우월성을 의미한 것이 아니라 그 은사의 효과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 교회에서 만일 방언만을 말한다면 너희에게 유익이 무엇이겠느냐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물론 방언을 할 줄 알았습니다. 18절에서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에게 방언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들어도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을 그들에게 들려 줄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 어떤 방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며 그들을 권면한 것입니까? 6절에서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이나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계시를 받은 것을 말했습니다. 지식을 전했습니다. 예언하여 그들에게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를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로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고 구원의 은혜를 받게 했습니다. 바울은 7-11절에 이르기까지 소리를 내는 비유를 통해서 방언의 은사에 대해 올바른 지식을 가질 수 있기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는 듣는 사람에게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습니다. 특히 나팔의 경우 분명치 못한 소리를 내면 그 나팔 소리가 전쟁을 예비하는 소리인지 취침을 알리는 소리인지 알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결론 : 소리의 뜻이 분명치 못하면 소리를 내는 자가 야만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주신 은사를 야만이 되는 방법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밝혀 주면서 방언을 받은 사람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느냐에 대해 교훈해 주려는 것이 본문에 나타난 바울의 생각입니다.


(53) 방언의 사용법

(고린도전서14:13-19)

바울은 방언의 은사에 있어서 방언은 통역이 없으면 유익이 없다는 사실을 거듭거듭 말하면서 방언을 하는 자들이 방언을 교회를 위해 유용하게 사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길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1. 방언으로 덕을 세우는 방법

바울은 은사의 사용에 있어서 모두 성령이 주시는 은사로써 교회에 필요한 것이지만 반드시 덕을 세워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1) 14절에서 말하기를 ‘내가 만일 방언으로 가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방언은 나의 영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기도를 하면서도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듣는 사람들도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방언의 기도는 방언으로 기도하는 그 사람도 그 마음의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한 것입니다. 여기서 마음과 영을 구별시켰습니다. 방언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영으로 하는 말이기 때문에 그 사람의 마음까지라도 알아 둘을 수 없어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열매란 그 기도의 내용에 대한 마음의 응답으로 그 기도의 내용을 마음으로 깨달아 하나님께 마음으로도 같은 심정으로 간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2) 방언의 내용을 모르고 방언을 말하게 되면 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에게 야만이 되고 듣는 사람도 말하는 사람에게 야만이 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한 야만(野蠻)이란 단어는 미개 족들의 생활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그 당시 타민족에 비교한 헬라 민족의 우월성을 자랑하는 단어로 쓰여졌습니다. 유대인들이 유대인이 아닌 사람을 이방인이라고 말하고 심한 경우에는 ‘개 같은 자’로 멸시되었던 것과 같은 뜻입니다. 헬라 말을 모르는 사람을 야만인으로 취급했던 것처럼 방언을 말하면서 그 뜻을 모른다면 야만이 되는 것이 아니냐는 의미로 바울이 이곳에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3) 바울은 12절에서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사람이라면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풍성하기를 구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은사를 사모하는 간절한 마음은 칭찬 받을 만한 일이지만 교회의 덕을 세우는 일이 중요하기 때문에 기왕에 은사를 원한다면 풍성하기를 구하라고 한 것입니다. 바울의 이 말은 방언의 은사만은 말하는 자도 듣는 자도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에 온전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풍성한 은사로서의 방언을 위해 통역하기를 기도하라고 한 것입니다.

방언을 말하는 은사도 있지만 그 방언을 통역해서 그 내용을 밝히 알려 주는 은사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방언의 은사를 받았다면 통역의 은사마저 받아야 하므로 이를 위해 기도하라고 한 것입니다.

2. 풍성한 은혜에서 오는 온전한 방언

15절에서 바울은 방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겸하여 통역의 은사까지 받는다면 그 은사가 교회의 덕을 위해 어떻게 활용되어야 할 것인가에 대해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한다’고 했습니다. 이전에는 영으로만 기도했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은 그 내용을 모르기 때문에 그 마음의 열매마저도 맺지 못했습니다. 알아들을 수 있는 자도 없으므로 말하는 나도 듣는 사람에게 야만이 되고 듣는 사람들도 말하는 내게 야만이 되어 왔기 때문에 덕을 세울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통역하기를 기도하여 은사를 받으면 영으로 기도한 방언의 기도가 마음의 열매를 맺어 마음으로도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의 기도의 내용을 몰랐기 때문에 마음으로 아멘으로 화답하지 못했지만 이제 그 내용을 마음으로 깨닫게 되었으니 마음으로도 기도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또 ‘영으로 찬미하고 마음으로 찬미하리라’고 했습니다. 방언은 영의 찬미로도 나온다는 사실을 밝혀 준말이 됩니다. 영으로 찬미한 찬미의 내용을 마음으로 깨닫게 되었으니 또한 마음으로 찬미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처럼 방언에는 통역이 반드시 따라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그렇지 않으면 영으로 축복할 때 그 축복의 뜻을 모르기 때문에 축복을 받는 자가 어떻게 아멘 하겠느냐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말씀 중에서 영이 말하는 것을 알아들을 수 없는 사람에 대하여 16절에서 ‘무식한 처지에 있는 자’라고 말했는데 여기서 무식하다는 말은 ‘이디오테스’ (ὶδιὠ τη?) 로 ‘이해하지 못하는 자’란 뜻입니다. 알아 들을 수 없으니 이해할 수 없다는 의미가 됩니다.

바울은 19절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이 교회에 결코 유익이 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하여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리라’고 했습니다.

결론 : 통역이 따르지 않는 방언은 마치 분명치 못한 나팔을 부는 격이기 때문에 아무리 많은 방언을 해도 그 유익이 몇 마디 깨들을 수 있는 말을 전하는 것보다 못하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늘 남에게 덕을 세우며 교회에 유익한 은사로 헌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54) 지혜에 장성한 자가 되라

(고린도전서14:20-25)

바울은 20절에서 ‘지혜에 장성한 자’가 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지혜에 장성한 자가 되는 방법으로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고 했습니다.

1.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고 한 바울의 말은 한 마디로 방언을 자랑하지 말고 절제하라는 의미의 권면입니다. 그러면 왜 바울이 여기서 악과 어린아이를 연관시킨 것입니까? 어린아이는 악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린아이들에게는 교만이나 자랑이 없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은 방언의 은사를 으뜸가는 은사로 오해해서 방언을 강조했고 방언을 받지 못한 사람들의 신앙을 무시할 정도로 자랑을 하면서 교만했던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 같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바울은 어린아이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이 어린아이와 같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지혜에 장성한 자가 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장성한 자란 말은 ‘어떤 목표점에 도달하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지혜가 장성하지 못하면 믿음이 성장할 수 없습니다. 성장하지 못하는 믿음은 여러 가지 부작용을 일으킵니다. 고린도 교회의 영적 혼란은 지혜가 장성하지 못한데서 온 것입니다. 은사를 교회에 주신 목적을 안다면 결코 그 은사로 자랑하거나 교만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은사를 사용하는 일에 사랑과 덕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안다면 방언의 은사가 자랑거리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절제 없는 방언과 통역 없는 방언으로 길게 말하는 것을 자랑했기 때문에 바울은 이 일에 대하여 야만이란 말로 나무라고 통역 없는 방언에 대해 절제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21절에서 구약 이사야서에서 인용한 말씀을 가지고 방언이 이스라엘에게 유익되지 못했던 사실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사28:11-12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그들이 선지자들을 통해 들려주신 말씀을 듣지 않았으므로 하나님께서 앗수르 사람들로 그들을 핍박케 하셨는데 그들의 말이 이스라엘에게는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이었지만 이런 하나님의 징계를 받으면서도 이스라엘은 깨닫지 못했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2. 방언과 에언

22절에서 바울은 다시 한번 방언과 예언에 관한 은사를 비교하면서 교회에서 예언을 권장하고 방언을 절제해야 할 이유를 밝혀 주고 있습니다.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표적이란 말은 표적이 된다는 말로 아직까지 들어보지도 못했고 알아들을 수도 없는 이상한 말을 하게 하므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표적으로 작용된다는 뜻입니다.

그런아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입니다. 구원의 도리를 밝히고 그리스도의 구주 되심을 선언하며 회개하기를 권면합니다. 예언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말로 예언을 합니다. 그러므로 이 예언을 듣는 자는 교회 성도들이며 성도들이 이 예언의 말씀을 듣고 올바른 믿음을 가지게 되며 죄를 지적받아 회개하게 되고 신앙이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라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의 표현이 됩니다.

23절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무식한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고 했습니다. 무식한 자란 은사를 받지 못한 자들을 말합니다.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이란 표현은 고린도 교회가 모두 방언의 은사를 자랑하고 방언을 가장 우월한 은사로 여기는 나머지 모든 교인들이 알아듣지도 못한 방언으로 말한다면 결과적으로 미쳤다는 평가를 받지 않겠느냐는 말입니다. 본인도 모르고 듣는 이들도 모르는 말을 온 교회가 떠드니 미친 사람이 아니고서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바울은 이런 방법으로 나무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언을 하면 그 권면하거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는 그 말씀을 알아듣고 회개하고 하나님께 경배하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 이 말은 19절에서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남을 가르치기 위해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낳다’고 하는 말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이처럼 훌륭한 예언의 은사를 멸시하고 방언의 은사를 우위로 세워 혼란을 가져온 일에 대하여 이처럼 교훈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언제나 교회의 덕을 세우며 성도들 간에 사랑으로 화목하여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결코 고린도 교인들처럼 은사를 가지고 자랑하고 교만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책망을 받게 되며 교회를 혼란케 하는 죄를 저즈르게 되는 것입니다.


(55) 화평의 하나님

(고린도전서14:26-33)

바울은 방언과 예언을 교회에서 어떻게 사용해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본문에서 교훈 하면서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 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고 말하므로 은사가 교회에서 화평하게 활용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모일 때에 있는 일

26절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모일 때에 그들이 해야 할 일에 대하여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고 권명하고 있습니다. 모일 때란 하나님께 예배 드리기 위해 모임을 가질 때를 가리킵니다. 우리는 바울의 이 같은 권명으로 그 당시 교회의 예배가 어떤 형식으로 진행되었는가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찬송시도 있다고 했습니다. 찬송 시란 지금 우리가 예비 시 부르는 찬송가를 의미합니다. 가르치는 말씀도 있다고 했습니다. 지금의 설교에 해당하는 것으로 교회의 장로들이나 교사 직을 맡은 직분 자들이 이 일을 담당했을 것입니다.

계시도 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계시나 방언이나 예언은 구별하기가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비슷한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원래가 계시란 말은 나타나지 않은 것을 나타내 보이신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비밀한 것을 나타내심으로 듣는 자들로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방언도 있다고 했습니다. 방언도 그 당시 교회에서 예배 순서에 들어가리 만치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통역도 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통역이란 방언에 대한 통역을 가리킵니다. 방언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통역의 은사를 주심으로 덕을 세우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덕을 세우란 말은 첫째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며 그로 인하여 분쟁이나 시기가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비난의 대상이 돼서도 안되며 사랑이 결여 돼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2. 은사의 사용법

바울은 27절 이하에서 예배 시에 사용되는 은사에 대하여 순서와질서를 지키며 화평을 좇아 사용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1) 방언에 대하여 차서를 따라 다불과 세 사람이 말하라고 했습니다. 다불과란 말은 방언을 할 사람이 많다 할지라도 세 사람 이상을 시키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방언은 그 중에 한 사람이 통역하라고 했습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은 반드시 통역으로 모든 사람들로 알아들을 수 있게 하라고 한 것입니다. 만일 그 중에 통역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통역이 없는 방언의 사용을 교회 안에서 철저히 막았습니다.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피차에 야만이 되고 덕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득보다 실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통역이 없을 경우, 방언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어떤 방법으로 그 은사를 활용하느냐에 대해 28절에서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자기 험자서 방언을 하거나 하나님을 향하여 하라고 한 말입니다. 다른 사람이 들을 수 없게 조용히 자기 험자 하거나 다른 사람이 듣지 않는 곳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할 것이라고 하는 의미인 것입니다.

(2) 다음에 예언하는 사람에 대해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예언할 사람도 둘이나 세 사람이 말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그 예언의 말씀을 듣고 마음에 잘 새겨 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만일 곁에 앉은 사람에게 계시가 있거든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예언과 계시를 구분 짓지 아니했습니다.

예언은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며 권면을 받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예언을 할 때면 그 예언으로 다른 사람들로 배우게 하고 권면을 받게 하라고 했습니다.

(3) 바울은 32절에서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그의 영이 예언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 영은 마땅히 예언하는 사람의 제재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언을 하거나 방언을 말하거나 계시를 받아 말하는 사람들은 주어진 환경이나 경우에 따라 절제해야 할 시기도 있으며 어떤 경우에는 말하지 말아야 할 처지도 있는 것입니다. 그 때 그가 가지고 있는 은사가 성령이 주신 은사라면 당사자의 제재를 받는 것입니다. 절제가 불가능한 은사는 성령의 은사가 아닙니다.

결론 : 하나님은 결코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절제 없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떠들거나 질서를 무시하고 혼란을 초래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란 사실을 밝혀 주고 있는 것입니다. 화평의 하나님이심을 명심하여 화평을 좇아 덕을 세워야 합니다.


(56) 교회에서의 여자의 위치

(고린도전서14:34-40)

바울은 본문 34절과 35절에서 교회에서의 여자들의 위치를 밝혀 주고 있습니다. 바울의 말은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런 일이 일시적인 방편으로서의 말이 아니라 37절에서 밝혀 준 말씀대로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줄 알라’는 말씀에서 이런 규례는 어느 교회에서나 어느 때에나 지켜야 할 주의 명령이란 사실을 밝혀 주고 있는 것입니다.

1. 교회에서 여자는 잠잠하라

‘교회에서 여자는 잠잠하라’고 명하고 또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임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이 같은 말은 교회에서 여자의 인격을 비하시키거나 무시하거나 한 일이 아님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다만 교회 안에서의 여자의 위치를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당시 고린도 교회는 영적으로 혼미한 중에 은사로 인해 많은 분쟁과 분파가 생겨나서 매우 떠들썩했습니다. 그런데 그 주역이 바로 여자였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예언의 은사나 방언의 은사를 받은 여자들이 절제 없이 차서를 무시하거나 자신의 우월성을 나타내기 위해 많은 말을 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심지어는 교회에서 자기가 받은 은사로 인하여 남자들을 주관하고 가르치려는 자세를 가지고 호둘갑을 떨었던 것으로 보아집니다. 고린도 교회에서 문제된 모든 말썽의 근원이 이들 여자들에 의해 저지러 지고 있다는 사실을 바울이 듣고 그들에게 이처럼 경종한 것입니다.

이런 일은 부끄러운 일임에도 고린도 교회 여자들은 그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교회 안팎을 시끄럽게 한 것입니다. 바울은 여자의 역할에 대하여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한 저희의 말하는 것이란 여자들이 교회에서 말씀을 가르치려는 태도를 가리킨 것입니다. 여자는 교회에서 말씀을 가르치는 위치에 있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오해해서 모든 여자들에게 적용시키지는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경우에 여자 선지자를 들어 쓰시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옛날 드보라는 여자였었는데도 선지자로 혹은 사사로 활약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특별한 훈련을 받고 주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았다면 전도사나 목사로 활동하면서 말씀 을 전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경우를 말한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사실을 밝혀 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자가 교회에서 조용해야 할 이유에 대하여 딤전2:11절에서 ‘여자는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치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가정에서의 여자의 위치를 밝히면서 이런 여자의 위치는 교회에서도 지켜져야 한다는 사실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여자가 가르칠 수 없는 이유로 두 가지를 들었습니다. 딤전2:13절에서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고전11:8절에서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해 지음 받았다’고 했습니다. 다른 한 가지를 더 든다면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않고 여자가 꾀임을 얻어 죄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36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고 고린도 교회 교인들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에게 내린 풍성한 은사로 인해 복음의 비밀과 구원의 은혜가 마치 자기들에게만 내려진 것으로 오해하고 교만하며 자랑했던 것입니다. 이런 경향이 여자에게 더 많았기 때문에 조용해야 할 여자들로 인하여 교회가 소란해 지고 질서를 잃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37절에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자기를 선지자나 혹 신령한 자로 생각한다면 이처럼 권면하는 바울의 말이 주의 명령 인줄 알아야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바울은 39절에 가서 결론적으로 가장 시끄럽고 말씀이 많은 예언과 방언의 은사에 대하여 예언하기를 사모하고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예언의 은사 받기를 원하라고 한 것입니다. 덕이 되고 구원의 도리를 전하는 일에 유익한 은사를 사모하라고 한 것입니다.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는 말은 통역이 있는 방언을 말하는 것입니다. 통역이 없는 방언은 개인적으로 은밀히 하거나 하나님께 향하여 하거나 덕을 세우는 방법을 쓰라고 했습니다.

결론 : 바울은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고 했습니다. 적당하게 하라고 한 말은 지나치지 말라는 말로 아무리 좋은 은사라도 도가 지나치면 덕이 안 된다고 한 말입니다. 그리고 질서를 지키면서 은사를 사용하므로 교회의 유익을 가져오도록 해야 할 것을 당부한 것입니다.


고전 15장 (57 - 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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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바울이 전한 복음

(고린도전서15:1-8)

고린도 교인들은 복음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고 또 성령의 은사도 받아 성령의 체험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들이 가지고 있는 구원관은 바울이 보기에 시원치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본문에서 복음의 진수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 중에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믿고 그로 인해 구원을 받는 것으로 알고 있으면서도 부활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고전15장에서 그리스도의 대속의 사역에서의 부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부활에 관한 중요한 비밀을 밝혀 주므로 고전 15장은 부활 연구에 결정적인 지식을 제공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1. 바울의 구원관

바울은 1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대로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로부터 복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복음의 터전 위에 서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복음에 대한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덕이 있는 믿음의 생활을 못했으며 하나님이 주신 은사로 오히려 교회가 소란했습니다. 바울은 이들의 이 같은 모순을 해소하고 올바른 신앙을 갖게 하기 위해 복음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시키려고 시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2절에서 복음과 구원과의 관계에 대해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구원을 얻는 일에는 복음을 굳게 지키는 일이 따릅니 다. 복음에 흔들리면 안 됩니다. 흔들리는 복음에는 구원의 능력이 없습니다. 굳게 지킨다는 말은 견고히 마음에 간직한다는 뜻입니다. 복음은 값진 보화입니다. 영생과 천국을 보장하는 보화입니다. 사탄은 이 보화를 빼앗아 가기를 노립니다. 어떤 경우에도 흔들림이 없이 복음의 기초 위에 자기 인생을 굳게 세워야 합니다.

다음에 구원을 얻는 일에는 헛되이 믿으면 안됩니다. 헛되다는 말은 수고한 대가가 공허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믿는 것이 헛되게 믿는 일입니까? 복음을 받아 드린 후에도 세상을 따라가는 생활을 하면 헛되이 믿는 것입니다. 복음을 믿은 후에는 그의 생활이 새로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으로 걸어가든 발걸음이 이제 하나님께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순종하는 생활 은 구원을 헛되게 하는 것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을 향하여 새로운 열매를 맺는 능력이 따릅니다. 그런데 복음을 받아 드린 후에도 그의 생활이 육신에 속한 생활로 일관된다면 헛되이 믿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2.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정의

바울은 본문 3절과 4절에서 복음의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복음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일에 대단히 중요한 말씀이 되겠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 교회에 전한 복음에 대하여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라’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의 부활하신 일을 언급하면서 성경대로 란 말씀을 쓰고 있습니다. 여기서 성경 대로란 말은 구약에 언약된 하나님의 약속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말씀대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일로 우리의 대속 제물이 되셔서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셨으니 이 사실이 복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정의하는 복음은 첫째로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이 같은 속죄의 사실이 확실하지 않거나 이 사실을 믿음의 뿌리로 받아 드리지 않는다면 그런 메시지는 결코 복음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복음이란 우리 죄의 속죄에 근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의 속함이 없이는 아무런 소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를 속하시기 위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죽게 하신 것입니다.

다음에 복음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속죄의 사건이라면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은 우리 그 속죄에 대한 하나님의 증거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연합이 된 사람들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의 살아나심에도 연합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로 인하여 죽게 되었고 그리스도의 의로 인하여 새로운 생명을 가지고 살게 된 것입니다.

이 사실을 전하는 메시지가 복음이며 이 사실을 믿는 것이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일입니다. 이로써 우리의 구원이 확정되며 확증되는 것입니다.

결론 : 이 복음에는 죄인의 죄를 속죄하며 사망에서 옮기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들어 있습니다. 성령이 복음을 통해서 이런 생명의 역사를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같은 복음의 의미를 깨닫고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58) 바울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

(고린도전서15:8-11)

바울은 복음의 확실성을 여러 증인들을 들어 증거하고 있으며 자기 자신이 부활한 주님을 만난 사실을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아무도 모르게 하늘로 올리우심을 받은 것이 아니라 사도들 중에 베드로에게 보이시고 그 다음에 열 두 제자에게 보이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500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승천하실 때 본 제자들과 많은 무리들을 가리킨 말입니다. 이처럼 많은 무리들이 전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증인들이며 이들은 또한 잠든 몇을 빼고는 모두 생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1. 바울의 증거

바울은 이 모든 사람들보다도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므로 고린도 교인들에게 복음의 진실성을 확증하려고 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 모든 사람들 보다 나중에야 증인의 대열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8절에서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바울이 예수를 믿는 성도들을 핍박했던 지난날의 자신의 과오에서 돌이켜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있었던 경위를 간략히 말한 것입니다. 바울은 다메섹에 있는 성도들을 체포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고 가는 길에서 하늘의 빛에 의해 눈이 감겨졌고 하늘 보좌에서 바울을 부르시는 부활하신 주님의 모습을 직접 바라보았을 뿐 아니라 복음 사역자로서의 소명을 친히 받은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표현함에 있어서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라고 했습니다. 이런 바울의 말은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뼈저리게 느끼고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보여 준 것입니다. 바울은 당대의 명문 대학을 나온 지식인이요 학식이나 율법에나 뛰어난 학자로서 유대인들의 인정을 받고 있었던 처지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처럼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자기를 낮춘 것은 하나님 앞에서 그렇다는 것을 나타낸 것입니다.

바울은 분명 사도의 사명을 받았으며 주님의 제자들로부터도 사도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일찍이 교회를 핍박한 경력이 있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 바울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

바울은 10절에서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한 말, ‘나의 나 된 것’이란 말은 교회의 핍박자였던 자기가 주의 사도가 된 사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바울은 전혀 반대의 생애로 돌아선 것입니다. 바울 자신조차 상상할 수 없었던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를 이단의 괴수로 정죄하고 그 믿는 자들을 죽이려는 음모를 가지고 살기가 등등했던 바울의 생애가 바로 그 예수를 증거 하는 사명자로 부르심을 받게 되었으며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큰 영광을 드러낼 수 있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일이 어찌 인간의 생각이나 계획으로 될 수 있는 일입니까? 그래서 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바울의 이 일에는 자신의 공로가 하나도 없습니다. 자기가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미 그렇게 예정하시어 강권적으로 이끄신 일입니다. 우리의 생애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이같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으며 지금 교회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영광의 직책을 받아 일 할 수 있을 것입니까?

바울은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기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아니했습니다. 성경에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경종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는다는 말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역하는 일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자기 생각을 따라 살아가는 일을 말합니다. 바울은 이런 일에 철저했습니다. 그는 갈2:20절에서 고백하기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은헤를 헛되지 않게 위해 어떻게 살아온 것입니까?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맡겨진 일에 대해 충성했습니다. 누가 충성할 수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성도만이 충성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이었습니까? 그것은 바울이 하늘의 상급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많은 사람이 얻는 상을 원치 않았습니다. 모든 사람들 보다 더 뛰어난 상을 원했습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 했습니다.

결론 : 우리가 믿는 복음은 결코 허황된 것이 아닙니다. 증거가 불확실한 것이 아닙니다. 이런 사실을 친히 체험한 주의 제자들과 바울이 생명을 걸고 증거한 진리입니다. 지금도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증거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 진리를 확실히 잡고 바울과 같은 믿음을 가지고 충성된 생애를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59) 부활과 그리스도의 소망

(고린도전서15:12-19)

고린도 교회 성도들 중에는 성경의 교리적인 면에서 잘못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 중에도 부활에 대하여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미 지나갔으며 성도들의 부활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12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고 나무라고 있는 것입니다.

1. 그리스도의 부활이 의미해 주는 부활

바울은 15장에서 이 부활에 관한 고린도 교인들의 잘못된 교리를 바로 잡아 주고 올바른 구원관을 갖게 하려고 말문을 열었습니다.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 부활이 없다 하느냐’는 말로 부활 문제를 유도하고 있습니다.

(1) 바울은 13절에서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고 말했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과 그리스도의 부활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연관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며 모든 성도들은 이 그리스도의 부활에 연합하여 부활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을 것이면’ 그리스도의 부활이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에 그도 부활하지 못하셨을 것이라고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필연적입니다. 그의 부활은 그의 죄 없으심을 증거 하는 유일한 증거가 되며 그가 죄가 없이 의로우셨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죄가 없으시다면 그 분이 죄 값인 사망에 얽매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롬1:4절에서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2) 바울은 14절에서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이 말은 그리스도인들이 부활에 대한 지식을 정확히 가져야 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란 말은 만약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복음이 아무 쓸모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만으로는 우리를 속죄하고 생명을 주는 복음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부활이 없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이유는 그런 죽음은 죄 값으로 말미암은 죽음으로밖에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후에 다시 사신 부활이 있으므로 그의 무죄함이 증거 되었고 그의 죽으심이 우리 죄로 인한 대속의 속죄 제물이셨다는 사실이 증거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는 복음은 복음이 아니며 부활에 근거하지 않은 믿음은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한 놀라운 축복

부활의 믿음이 없는 믿음은 헛된 믿음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진실한 증인이 못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15절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이 복음을 전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복음을 전하는 방편으로 증거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부활의 믿음이 없이,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부활의 확신이 없이 복음을 전하는 일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잘못된 방법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1)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죽은 자의 부활을 같은 맥락에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 말을 다시 17절에 가서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성도)은 반드시 있습니다. 그 증거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했습니다.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부활이 없다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살리시지 아니했을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도들의 부활에 있어서 필수적인 사건인 것입니다.

(2) 만약 그리스도의 부활이 부정적이라면 우리의 믿음도 헛되고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뿐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모든 성도들도 망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왜 우리의 믿음이 헛된 믿음이 되는 것입니까?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에게는 구원의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속죄의 믿음을 가질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로 속죄가 확증되기 때문에 부활이 없다면 우리는 죄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주 안에서 잠자는 자들도 망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속죄의 은혜를 받지 못한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천국에 올라가 안식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까? 그러나 우리가 믿음으로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으심과 그의 죽은 자 가운데서의 부활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결론 : 바울은 19절에서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생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영생의 소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믿음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에 부활에 대한 믿음은 참으로 중요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60) 부활의 순서

(고린도전서15:20-28)

바울은 본문에서 부활의 원리와 부활의 순서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여기 나오는 부활의 순서는 부활을 이해함에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부활의 모든 비밀이 이 부활의 순서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종말론에 있어서 이 문제는 반드시 규명되어야 할 난제인 천년기 설에 대한 올바른 해석을 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1. 부활의 원리

20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은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는 점을 언급하면서 21절에서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아 오게 된 것처럼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아 온다는 원리를 대조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아담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죄가 들어 왔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첫 사람 아담이 실패하므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죽게 되었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원리로 죽은 자의 부활은 의로우심으로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다고 했습니다. 아담은 죄로 모든 사람들로 죽음에 이르게 하였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부활하심으로 죽은 사람들로 생명에 이르는 부활을 이루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인간의 역사는 죄도 한사람, 의도 한사람으로 인간의 사망과 생명을 판가름한 것입니다.

아담이 죄를 가져와 그 후손에게 사망을 주었고 예수가 의를 가져와 그를 믿는 자에게 생명을 주었습니다. 첫 아담은 우리에게 죄를 선사했지만 마지막 아담은 우리에게 속죄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죄와 사망은 아담으로 온 선물이요 속죄와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로 온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2. 부활의 순서

23절로부터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부활의 순서를 말해 줍니다. 부활은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이 있지만 심판의 부활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부활입니다. 결국은 지옥에 던져지는 심판이기 때문에 부활의 중요성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리스도인의 부활에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부활의 순서를 말하기에 앞서 22절에서 이처럼 말씀해 줍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지금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부활은 그리스도와 성도들의 부활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는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부활을 말하는 것이지 여기에 불신자들의 부활이 개입된 것이 아니란 사실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1) 바울은 부활의 순서에 있어서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된다’고 했습니다. 부활은 차례가 있습니다. 모든 성도가 일시에 함께 부활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차례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과연 어떤 차례에 속한 부활 자인가에 대하여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부활에 있어서 첫 순서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라’입니다.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들의 부활의 순서에 있어서 첫째번 부활이 됩니다. 그 첫열매인 것입니다. 부활의 뿌리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은 나는 부활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부활은 그 뿌리로부터 파생된 것입니다. 그리스도 이전에는 부활이 없었습니다.

(2) 두 번째의 차례가 나옵니다.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 그에게 붙은 자’라고 했습니다. 이들이 첫째 부활 자들입니다. 첫째 부활이란 성도들의 부활에 있어서 첫열매란 뜻입니다. 이에 대해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라고 했습니다. 구속이란 부활을 의미하며 처음 익은 열매란 첫째 부활 자들이란 뜻입니다. 이들이 계20:4절에 나오는 순교자들의 부활입니다. 이들은 백마를 타고 주의 재림 시, 하늘 군대로 아마겟돈에 내려옵니다. 이들은 전체 성도들을 가리킨 것이 아닙니다. 부활의 순서에 있어서 두 번째 순서에 속한 성도들인데 이들이 순교자들로 이들의 부활을 첫째 부활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3) 다음 세 번째의 부활이 나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부활은 그 순서가 세 번으로 나뉘입니다. 맨 나중에 부활할 성도들에 대해 24절에서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그 후에란’ 말은 두 번째 부활 후로 세 번째 순서에 해당하는 부활이란 뜻입니다. 이들의 부활은 ‘나중’이라고 했습니다. 나중이란 말은 두 번째 부활자보다 뒤에 있을 것이란 의미로 그 시기에 있어서 그리스도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그 때라고 한 것입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의 왕국의 끝에 가서 그리스도가 가지고 있었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칠 그 시기에 이들 세 번째 성도들의 부활이 있을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들이 계20:5절의 괄호 안에 있는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의 부활인 것입니다. 이들은 천년왕국 후에 부활하게 됩니다. 이들은 결코 불신자의 부활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삶을 얻을 부활의 순서라고 했습니다.

결론 : 부활의 순서는 성경 가운데 오직 이곳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순서를 무시하면 부활에 대한 올바른 해석이 나올 수 없습니다. 25절에서 주님이 불가불 왕 노릇하시는 기간이 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으며 주님이 사망을 심판하실 때 이런 세 번째 성도들의 부활이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때는 천년왕국이 지나고 흰보좌 심판이 이루어질 시기인 것입니다.


(61) 부활을 믿은 근거

(고린도전서15:29-34)

바울은 부활의 차례에 대하여 세 가지로 구분한 후, 부활의 첫열매로 주님의 부활을 말하고 두 번째 부활할 자의 차례로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 그에게 붙은 자’라고 말하고 세 번째 부활할 차례로 천년왕국 후에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삶을 얻는 부활은 이처럼 세 차례에 걸친 부활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재림 시에 있을 부활은 그리스도에게 붙은 자들로 순교자들의 부활입니다. 이들의 부활을 첫째 부활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바울은 29절에서 부활에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두 가지 이유를 묻고 있습니다. 하나는 ‘만일 죽은 자들이 다시 살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30절에서 부활이 없다면 ‘또 어찌하여 우리가 때마다 위험을 무릅쓰리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 죽은 자들을 위하여 받는 세례

29절에서 말씀해 주는 내용은 해석하기가 대단히 어려운 문제 중 하나입니다.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 자들’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느냐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따르면 고린도 교회에는 세례를 받지 못하고 죽은 성도들 중 그 가족이 대신하여 세례를 받은 사례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세례는 초대교회 시대부터 교회의 중요한 의식 중에 하나로 내려 왔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세례 줄 것을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교파에서는 세례를 절대시하여 세례와 구원과 연결시키는 일까지 있는 것입니다. 세례 때문에 생긴 교파도 있습니다. 침례교회 또는 재세례파 등이 그것입니다. 천주교에서도 세례를 절대시하여 숨이 끊어지려는 환자에게 급히 달려가 세례를 주는 경우도 많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는 구원에 절대적인 전제 조건도 아니며 세례를 받아야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에서는 세례에 큰 뜻을 두고 미쳐 세례를 받지 못하고 죽은 성도들을 위하여 그의 가족이나 친척들이 대신 세례를 받는 관행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바울은 여기서 이들의 이 같은 일에 대하여 잘했다거나 잘못했다는 의미에서 이 문제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만일 죽은 자들이 살지 못할 것이면 그런 일을 할 필요가 무엇이겠느냐’는 의미로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나는 부활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려는데 목적을 두고 이런 사례를 인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도 헛되고 우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기 때문에 소망이 없는 사람을 위해 세례를 베풀 의미가 무엇이겠느냐는 것입니다. 만약 죽은 자들에게도 소망이 있다면 부활은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란 바울의 역설적인 주장인 것입니다. 부활이 없이 그리스도인에게 소망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30절에서 ‘또 어찌하여 우리가 때마다 위험을 무릅쓰리요’라고 했는데 이 말은 바울이 자신의 생명을 걸고 전한 복음은 부활의 복음이었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했고 이 부활로 말미암은 속죄와 의로움과 영생의 소망을 전한 것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에게도 부활이 없었고 부활이 이미 지나가 그리스도인들의 부활이 남아 있지 않다면 바울은 그런 복음을 전하지 아니했을 것이란 말이 되는 것입니다.

2. 부활이 없는 믿음은 소망이 없는 믿음이다.

바울은 31절 이하에서 부활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말하고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을 악한 동무들로 정죄하고 있습니다.

(1)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 말을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날마다 죽는 생활을 했습니다. 이런 바울의 생활은 부활에 대한 소망을 가젔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빌3:10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런 영광스러운 부활을 소망으로 살아갔기 때문에 그의 생활은 ‘날마다 죽는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의 이 말은 소망을 위해 육신의 모든 소욕을 죽이는 생활을 말합니다. 우리의 육신은 세상의 정욕과 영광과 부귀를 원합니다. 바울은 이런 탐심과 싸웠습니다. 바울은 롬12:2절에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이 생활이 바울처럼 날마자 죽는 생활인 것입니다.

(2) 바울은 32절에서 ‘내가 범인처럼 에베소에서 맹수로 더불어 싸웠으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느뇨’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바울이 에베소에서 복음을 위해 싸운 일은 마치 맹수로 더불어 싸운 것과 같이 치열하고 전투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자신의 모험이 인간적인 동기에서 한 일이라면 자신에게 무슨 유익이 있었겠느냐는 것입니다. 바울은 오직 부활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그 같은 핍박과 환난을 마다하지 않고 겪었던 것입니다. 만약에 바울에게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부활의 믿음이 없었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하는 생활을 하지 않았겠느냐는 것입니다.

결론 : 바울은 부활에 회의를 갖고 의심하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런 자들의 가르침이나 유혹에 속지 말라고 했습니다. 부활의 소망을 가진 자의 생활은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아니하는 생활이기 때문에 이런 점을 바울은 가르친 것입니다.


(62) 부활의 형태

(고린도전서15:35-44)

바울은 부활이 없다고 하는 자들을 가리켜 어리석은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부활에 회의를 품으면서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고 묻는다고 했습니다.

1. 부활의 어리석은 질문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한 사두개인은 예수님을 곤혹스럽게 만들기 위해 희한한 질문을 했습니다.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들어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장가들었다가 죽어 후사가 없으므로 그의 아내를 그 동생에게 끼쳐두고 그 둘째와 셋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그런즉 저희가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부활을 믿지 못하는 그들에게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다고 아무라시고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며 천사와 같은 형태로 살아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린도 교회에서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었던 사람들은 마치 사도개인들과 같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어리석은 자라고 불렀는데 어리석다는 말은 ‘깨달음이 없다’ ‘하나님의 지혜가 없는 자다’ ‘신령 일에 무식하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잘 배우고 죽은 자들도 능히 살리실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도 알아서 어리석은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바울은 먼저 부활의 형체에 대사여 37절 이하에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씨앗과 비유해서 설명했습니다. 사람이 씨를 뿌릴 때는 형체가 없는 것입니다. 단지 한 개의 ‘알갱이’ 뿐입니다. 이 알갱이뿐인 씨앗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다시 살아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의 죽음도 마치 한 알의 씨앗이 땅에 떨어져 죽음 같이 죽음이 있어야 다시 살아나는 부활이 있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알갱이에는 형체가 없지만 하나님께서 그 종자대로 형체를 주심으로 씨앗이 땅에 떨어져 썩을 때 새로운 형체를 가지고 싹이 나고 자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39절에서 육체의 다양한 형체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육체도 있고 짐승의 육체도 있고 새의 육체도 있고 물고기의 육체도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라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지금 아직까지 열거한 여러 형체의 부활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짐승이나 새나 물고기의 부활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부활의 형체에 대한 하나의 비유로 42절에서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란 말씀에서 그 비유의 의도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불신자들에 관한 부활은 언급하지 않고 다만 믿는 성도들의 부활에 대해서만 언급해 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2. 죽은 자의 부활의 영광과 모양

바울은 43절부터 그리스도인의 부활에 대한 실상을 언급해 주고 있습니다.

(1)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사는 것이 부활입니다. 부활은 먼저 심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육체라고 하는 썩어질 것을 말합니다. 사람에게 죽음이 없이는 부활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죽음은 이미 죄의 저주이거나 죄값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모두 갚으셨습니다. 죽음이 없이는 부활이 없기 때문에 천국에서의 생활이 불가능합니다. 천국의 궁극적 생활은 오직 부활체만이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한 가지 예외는 있습니다. 그것은 백보좌 심판 시에 살아 있는 성도들의 변화인 것입니다.

(2)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사는 것이 부활입니다. 우리는 지금 욕된 몸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몸의 연약과 죄악성을 말합니다. 그러나 부활은 이런 우리의 몸이 영광스러운 몸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3)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이 부활입니다. 우리는 질병과 연약함에 싸여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 때에는 모든 것이 강해집니다. 질병도 없으며 연약함도 없으며 눈물도 탄식도 없는 생애를 살아갈 수 있는 몸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4)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이 부활입니다. 육의 몸은 영원한 몸이 아닙니다. 그러나 부활할 때는 신령한 몸이 됩니다. 이 몸은 영생 할 수 있는 몸입니다.

(5) 바울은 육의 몸이 있은즉 신령한 몸이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지금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이 사실이 우리에게 또다른 몸을 가질 수 있다고 하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육의 몸이 있다면 반드시 신령한 몸도 있는 것입니다.

결론 : 부활에 대한 바울의 믿음은 철저했습니다. 부활에 대한 확신이 없이는 소망이 있는 생활을 못합니다. 영생의 소망과 천국의 확신을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흔들리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63) 첫 사람 아담과 둘째 사람 예수

(고린도전서15:45-49)

바울은 부활의 당연성을 둘째 사람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예수는 하늘의 형상을 가지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그리스도인들은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하늘에 속한 자는 신령한 자인 것같이 우리도 신령한 자들인데 부활로 그 신령체를 입는다고 한 것입니다. 49절에서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고 한 말이 그것입니다. 이 형상이 곧 부활체인 것입니다.


1. 첫사람 아담과 마지막 아담 사람 예수

예수님을 아담으로 표현할 때는 반드시 ‘마지막 아담’이라고 불러야 하며 사람으로 표현할 대는 ‘둘째 사람’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입니다. 첫 사람 아담은 땅에서 났습니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빚어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신 것입니다. 영이 살아 있는 상태의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그대로 남아 있는 온전한 창조 상태의 사람이 산영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산영으로서의 아담의 존재는 얼마 안가 불순종의 대가로 그 영이 죽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이런 영적 상태로 태어났습니다. 이런 류의 사람은 그 몸이 땅으로 돌아가야 할 뿐 아무런 소망도 없습니다. 인간은 아담으로부터 이런 유산을 받고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예수님을 아담으로 표현할 때는 ‘마지막 아담’이라고 한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둘째 아담이 아니라 마지막 아담이십니다. 이 말의 뜻은 예수님이 아담이 지은 죄를 모두 갚으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아담으로 오셔서 아담이 지은 모든 죄로 인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로 다시는 아담의 죄와 사망의 유산을 물려받지 않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로 인하여 대속의 죽으심을 하셨을 뿐, 그 자신은 죄가 없으시기 때문에 죽음에 얽매이실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만 살아나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을 다시 살리시기 위해 살아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살려 주는 영’이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는 부활이라고 하신 말씀은 곧 그가 살려 주는 영이시란 사실을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살려준다는 말은 부활을 말하며 살려 주는 영이 되셨다는 것은 우리를 부활케 하신다는 뜻입니다.

(2) 46절에서 바울은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라고 했습니다. 아담은 육 있는 자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신령한 자로 오셨습니다. 육 있는 자는 그 마지막이 죽음입니다. 그러나 신령한 자는 죽음이 그를 이길 수 없었고 결국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셨습니다. 우리는 육 있는 자에 속한 자가 아니라 신령한 자에게 속한 자들이기 때문에 신령한 자이신 예수의 부활에 연합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47절에서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다’고 했습니다. 사람은 첫 사람과 둘째 사람으로 구분됩니다. 첫 사람 아담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입니다. 그는 흙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마쳐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둘째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그 분은 아담의 자손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나신 분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입니다. 그의 생명은 땅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죽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인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우리도 함께 죽었습니다. 아담과의 연합은 여기서 끝났습니다. 흙에 속한 자의 마지막을 죽음으로 마쳤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늘의 생명을 가지신 그리스도의 부활에 연합하여 새로운 하늘의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아담과 결별한 우리는 그리스도와 새로운 연합이 이뤄진 것입니다.


2. 우리가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바울은 48절에서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다’고 했습니다. 인류는 그의 소속이 둘로 나뉘어지게 되었습니다. 흙에 속한 자가 있고 하늘에 속한 자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는 하늘에 속한 자들이요 아담에 속한 사람들은 흙에 속한 자들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49절에서 그리스도인의 부활에 대한 결론을 내렸습니다.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고 있습니다. 즉 아담의 모습을 닮은 대로 살아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형상(形狀)이란 말은 겉으로 나타난 생긴 모양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아담의 생김새대로 우리도 생겼다는 뜻입니다. 이 모양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갈 동안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하늘의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고 하신 말씀대로 그리스도의 부활 체로 옷 입을 그 날이 오는 것입니다. 하늘의 속한 자의 형상은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몸을 가리키며 우리도 그 부활의 모양을 닮은 몸으로 부활한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결론 : 우리는 아담의 형상으로 살아가고 있기는 하지만 그의 생명으로부터는 떠나 있습니다. 우리는 땅에 속한 자가 아니요 흙에 속한 자도 아닙니다. 우리는 언제인가 그날에 하늘에 속한 그리스도의 몸의 형상을 입게 될 것입니다.


(64) 마지막 나팔에 일어나는 하나님의 비밀

(고린도전서15:50-54)

바울은 50절 이하에서 마지막 부활에 관한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결론을 내리면서 부활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하나님의 비밀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 말씀을 공부하면서 주의할 점은 이 말씀에 나오는 부활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때 생기는 마지막 부활에 관한 하나님의 비밀이란 사실입니다. 우리는 부활이 세 가지 차례에 따라 이뤄진다는 사실을 22절-28절에서 배웠습니다. 첫째는 부활의 첫열매로서의 그리스도의 부활, 두 번째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 그에게 붙은 자로 내려올 첫째 부활자로서의 순교자의 부활, 세 번째 순서는 천년왕국 후에 이루어질 마지막 부활로 하나님의 나라를 최종적으로 유업으로 받을 때 있을 부활인데 이곳에 나오는 부활은 바로 이 부활에 관한 바밀을 바울이 계시를 받은 대로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혈 육과 썩은 것

바울은 50절에서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고 했습니다.

(1) 우리는 먼저 여기서 말씀해 주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나라를 의미하고 있는가에 대한 해답을 얻어야 할 것입니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부활한 몸으로 들어가 살아갈 나라를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나라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최종적인 나라입니다. 우리가 살아갈 장래적인 하나님의 나라는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라고 불리우는 천년왕국입니다. 다른 하나는 영원한 천국으로서의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런데 50절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 나라는 그 논지의 전개로 보아 천년왕국인 것이 아니라 천국임이 명백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재림의 시기건 천년왕국이 끝난 시기건 여하튼 그리스도인들이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시기를 말하고 있기 때문에 적어도 전 천년 설을 주장하는 입장이라면 이 시기가 천년왕국 이후란 사실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2) ‘혈과 육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혈과 육이란 표현은 혈과 육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로 육신을 가지고 살아 있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혈과 육은 흙에 속한 형상이기 때문에 하늘에 속한 형상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몸을 가지고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으므로 불가불 부활한 몸을 가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3) 또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썩은 것이란 이미 혈육이 흙으로 돌아간 상태로 죽은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죽은 사람들은 흙에 속한 자로서의 마지막을 고했습니다. 그런 상태로는 절대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습니다. 썩은 시체로 어떻게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까? 그러므로 죽은 사람들이 천국에 들어가려면 불가불 썩지 아니할 몸으로 다시 살아나야 하는 것입니다.


2. 마지막 나팔에 일어날 놀라운 사건

바울은 이 문제에 관한 결론을 내려야 했습니다. 그래서 51절에서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비밀이 두 가지로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는 이미 죽어서 썩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최종적인 마지막 부활입니다. 다음에 ‘우리도 변화하리라’고 했습니다. 우리란 표현은 그 때까지 살아 있는 성도들을 말합니다. 여기서 변화한다는 말은 신령한 몸으로 바뀐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1) 바울은 51절에서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홀연히 다 변화한다는 말은 죽은 자의 부활과 살아 있는 자의 변화를 동시에 표현한 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나팔은 셋째 화에서 나오는 일곱 번째 나팔이 아닙니다. 최종적으로 부는 부활의 나팔을 말합니다.

(2) 이 마지막 나팔 소리가 날 때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산다’고 했습니다. 이들은 계20:5절에 나오는 ‘그 나머지 죽은 자’들입니다. 이 때 모든 믿는 자들의 생명의 부활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 부활과 함께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될 것입니다.

(3) 이 마지막 나팔 소리가 날 때 ‘우리도 변화하리라’고 했습니다. 이 변화는 흙에 속한 육신의 몸이 하늘에 속한 신령한 몸으로 홀연히 변화 받는 하나님의 역사를 말합니다. 그래서 53절에서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함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일어날 사건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일어날 사건은 순교자들의 첫째 부활과 성도들의 공중 휴거뿐입니다. 이 사건이 언제 일어날 사건인가에 대해 54절에서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는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 시기는 천년왕국이 지난 후임이 계20:13-14절에서 보여 주고 있습니다.


결론 : 부활은 대단히 중요한 교리 문제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소망에 흔들리면 그 믿음도 헛것이요 우리가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이리라고 했습니다. 부활의 약속을 믿는다면 그 확실한 진리를 깨달아야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65)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고린도전서15:55-58)


바울은 55절 이하에서 사망의 조종(弔鐘)울 울리고 있습니다. 사망은 결국은 망합니다. 사망은 죄로 말미암아 왔으며 죄는 사탄으로부터 왔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나팔을 불 시기에는 이 모든 일이 끝이 나는 것입니다. 사망으로 권세를 휘두른 사탄이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게 됩니다. 이 때 사망도 함께 둘째 사망에 던지운다고 했습니다.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 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 못이라’고 했습니다(계20:13). 예수님은 부활로 사망 권세를 이기셨습니다. 우리도 이 사망 권세를 이길 것입니다. 그날이 우리의 부활의 날입니다. 썩은 것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사는 날이 오는데 이 날이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는 날이 될 것입니다.


1.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바울은 55절에서 사망을 향하여 담대히 외쳐 댔습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 한 것입니다. 사망은 인간에게 폭군처럼 군림하여 두려움을 주면서 지배해 왔습니다. 인간은 사망 앞에 무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만 그리스도인들은 사망이 멸망이 아니요 부활의 소망이 있었기 때문에 잠을 자는 상태에 있었지만 사망은 큰 권능으로 인간에게 군림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망의 이기는 대상이 사망보다 더 강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사망을 이긴 존재가 등장했는데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부활인 것입니다. 사망은 결국 부활 앞에 두 손을 든 채 패배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과 연합되었으므로 그 권세가 우리를 삼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최후의 승리는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다음에 또 바울은 사망을 향하여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 했습니다. 사망은 우리를 쏘았습니다. 뱀이 독을 뿜듯 사망의 독을 뿜어 댔습니다. 벌의 침처럼 인간을 쏘아 댔습니다. 아무도 그 대상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젠 쏘는 권능을 상실했습니다. 주님이 그 사망의 독침을 빼 버리셨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최종적으로 부활을 할 때 이제 더는 쏘아 댈 수 없을 것입니다.

바울은 56절에서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을 율법이라’고 했습니다. 사망이 어떻게 우리에게 죽음의 독침을 놓는 것입니까? 사망의 쏘는 것은 죄라고 했습니다. 사망은 죄로 인간을 쏘는 것입니다. 이 죄는 결국 사망의 독을 받아 죄인들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죄와 떨어져 살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죄는 우리를 지배할 권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죄의 권능이 율법이라고 했습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죄가 무엇인지 가리켜 줍니다. 그러나 그 율법은 우리를 죄에서 벗어나게 할 능력은 없는 것입니다. 죄만 가리켜 주고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인간은 원래가 죄의 종이 된 처지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에서 벗어나 살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율법이 우리에게 죄를 가리켜 주면 우리는 그 죄를 범하게 되고 결국 율법의 정죄함을 받아 사망의 독에 찔림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2.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나 사망의 이기는 것도 사망의 쏘는 것도 이제는 두려울 것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것들을 이기는 이김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1) 첫째로 사망이 쏘는 죄에서 이김을 주셨습니다. 죄를 이겼다는 말은 죄로 인하여 정죄함을 받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죄를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에서 이긴 바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로 우리의 모든 죄가 속죄함 받았습니다. 지난날의 죄로 인하여 우리는 죄로 쏘임을 받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영원한 우리의 대속제물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2) 다음에 죄의 권능인 율법에서 이김을 주셨습니다. 율법은 죄를 가리켜 주고 그 죄를 정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의 저주를 받으사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기 때문에 율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법을 따르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죄인들을 정죄하는 율법의 정죄가 미칠 수 없는 것입니다. 죄의 권능이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고 율법의 정죄함이 우리에게 미칠 수 없으니 우리는 이 같은 이김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3) 다음에 바울은 58절에서 이 같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았으니 우리의 생활이 어떠해야 하느냐에 대하여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견고한 믿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에서 흔들려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다음에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생애 중 구별 없이 항상 주의 일에 힘쓰되 더욱 힘쓰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우리의 생활 태도는 반드시 결실하는데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 했습니다.


결론 : 주님을 위한 우리의 생활은 주안에서 헛됨이 없습니다. 반드시 그에 상응한 상급이 따릅니다. 부활의 날에 가장 영광스러운 상급의 면류관으로 우리에게 씌워질 것입니다.


고전 16장 (66 - 67)

◆ 밤중소리 01-30 | VIEW : 491

(66) 믿음에 굳게 서라

(고린도전서16:1-14)

바울은 15장까지 고린도 교회에 전할 모든 말을 거의 매듭짓고 16장에서는 기근과 핍박으로 인하여 어려움에 처한 예루살렘 교회를 돕는 연보에 관한 것과 고린도 교회에 대한 바울의 앞으로의 계획과 고린도 교회에 대한 마지막 부탁에 관한 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곳에 매주일 첫날에 관한 문제가 나오고 있어 초대 교회 시대에 주일을 어떻게 지냈는가에 대한 해답이 되고 있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주고 있습니다.


1. 매주일 첫날에 드린 연보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갈 연보에 대한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연보란 말은 로게이아(λογὶα)로 ‘구제를 위해 모은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예루살렘 교인들이 비참한 곤궁에 빠져 있음을 여러 교회에 통보하고 각 교회마다 예루살렘 교회에 보낼 연보를 당부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2절에서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매주일 첫날은 안식 후 첫날로 주일을 가리킵니다. 이 날을 주의 날이라고 부르는 것은 예수님이 이 날에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초대 교회 시대에는 이처럼 안식 후 첫날에 정기적인 모임을 가졌습니다. 행20:7절에서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교회 초기에는 안식일에도 모이고 그 다음날인 안식 후 첫날에도 모여서 떡도 떼고 연보도 한 것으로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교인들의 심한 박해로 안식일의 모임이 사라지고 AD 4세기경부터는 주일을 교회의 정규적인 예배일로 정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안식일의 모임은 율법에서 나온 것인데 교회가 차차 질서를 잡고 교리 면에서 정돈되면서 안식일은 주일에 하나의 그림자일 뿐 안식일에 얽매이는 집회는 비 성경적이란 사실을 알면서부터 주일을 하나님께 대한 예배일로 결정한 것입니다. 골2:16절에서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 등은 장래의 일의 그림자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런 일로 폄론하지 말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2. 깨어 있어 믿음에 굳게 서라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에 들를 뜻을 전하면서 마게도냐를 거쳐 고린도에 가서 그곳에서 겨울을 날 때까지 지낼 수 있을 것이란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가려는 곳으로 그들이 안내할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지나는 길에 잠시 동안만 고린도에 머물러 있으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허락하시면 얼마간 함께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에 머물려 함은 그곳에 대적하는 자들이 있지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넓은 문이 열려져 있기 때문에 오순절까지 있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다음에 고린도에 보낼 디모데에 대해 주의 일에 힘쓰는 자이니 그를 멸시하지 말고 두려움이 없이 그곳에 머물게 하다가 평안히 자신에게로 보내 줄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13절에서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고 하고 다시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깨어 있는 생활이어야 합니다. 깨어 있으란 말은 영적 잠에 빠지지 말라는 말입니다. 영적 잠이란 술취함이나 방탕함이나 생활의 염려 등입니다. 왜 이 같은 영적 잠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까?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의 일에 힘쓰지 않기 때문입니다. 소망 가운데 살아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음에 믿음에 굳게 서라고 했습니다. 흔들림이 없는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좌우로 치우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믿음에 굳게 서러면 하나님의 말씀에 굳게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반석입니다. 그곳에 굳게 설 때 시련이나 시험의 태풍이 불어와도 끄떡없습니다.

다음에 남자답게 강건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강건함이란 영적인 건강을 의미합니다. 남자답다는 말은 굳은 의지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리고 박력 있는 믿음과 추진력 있는 노력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인은 신앙적으로 넘어짐이 없어야 합니다. 핍박을 받는다고 두려워하거나 시련이 온다고 물러서는 일은 남자답게 강건한 자세가 아닙니다.

바울은 에베소에 자기를 대적하는 자가 많았지만 그러나 ‘광대하고 공효을 이루는 문이 열려 있기 때문에’ 그곳에 머물러 있기를 원했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처럼 남자답게 강건치 못하면 때로는 믿음을 저버리는 자리에 떨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다음에 바울은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온전하게 매는 띠로 모든 일에 완성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천사의 말을 해도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된다고 했습니다.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결론 : 우리는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는 생활을 통해서 온전한 믿음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67)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에 대한 저주의 선언

(고린도전서16:15-24)

바울은 15절로부터 마지막 인사를 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인사는 대개의 경우 자신이 알고 있으며 복음과 교회를 섬기는 일에 수고하는 교우들에 대한 문안으로 시작되는데 그의 이 같은 문안은 자세하고 꾸밈이 없는 정성이 들어 있기 때문에 읽는 자들의 마음에 큰 감동을 줍니다.


1. 수고하는 자에게 복종하라

교회에는 주의 일을 위해 특별히 수고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바울이 말하고 있는 스데바나의 집은 그리스도를 영접한지가 얼마 안되었지만 그들은 받은 은혜대로 성도들을 섬기기로 작정하여 이 일에 전념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권하는 바는 이 같은 자들에게 복종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함께 일마며 수고하는 모든 자에게 복종하라고 한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복종하라는 말은 이런 사람의 뜻을 따르고 그들이 하는 일에 적극 협력하라는 뜻입니다. 그들도 스데바나가 교회를 섬기는 그 섬김의 도를 본 받아 교회와 성도들을 섬기기에 힘쓰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이 스데바나는 보드나도와 아가이고와 함께 바울에게로 가서 고린도 교회의 소식을 전해 주므로 바울에게 큰 기쁨을 주었고 바울의 마음을 시원케 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너희는 이런 자들을 알아주라고 했습니다. 알아주라는 말은 인정해 주라는 말로 그들의 수고에 대하여 고맙게 여기고 위로해 주며 칭찬을 아끼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에게 좋은 소식을 전해 주며 또 하나님의 종의 말을 교회에 전달하는 일은 하나님의 종의 마음을 시원케 해 주는 일로 이런 자를 교회에서는 알아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2.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들에게 대한 경종

바울은 22절에서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왜 주님을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까? 주를 사랑하는 일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리는 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만약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위배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다음에 주님은 우리의 구속주가 되시는 분입니다. 주님이 아니시면 우리의 구원은 영원히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주님이 하늘의 영광을 버리시고 이 땅위에 오셔서 우리의 대속제물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분을 사랑하는 일은 마땅한 일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주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까? 무엇보다도 주님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을 알지 못하고는 주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복음은 바로 이 지식을 모든 사람에게 전해 주는 일입니다. 이 지식이 아니면 아무도 속죄함을 받을 수 없으며 구원의 은혜를 받을 길이 없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가장 소중한 것으로 여겨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모든 지식을 버리면서까지 이 지식을 사모하고 이 지식을 따랐습니다.

그러면 주님을 사랑하는 증거를 어떻게 나타낼 수 있는 것입니까?

(1) 주님을 사랑하는 증거는 순종에 있다고 했습니다. 요14:23절에서 예수님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지킨다는 말은 두 가지 의미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주로 영접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사랑하지 않고는 그를 우리의 인생에 영접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음에 그 분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지키는 일입니다. 생명의 길은 주의 말씀에 있습니다. 주님을 영접하고 그 분을 믿는 증거는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2) 다음에 주님을 사랑하는 증거는 형제를 사랑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요일4:20절에서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않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형제를 사랑한다는 말은 한 지체를 이루고 있는 교회 성도들에 대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이 사랑은 죄를 용서해 주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허물을 덮어 주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행함과 진실함으로 나타납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주께서 임하시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곧 임박한 주의 재림을 의미합니다. 주님이 임하시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임하게 됩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들을 모두 심판하시게 될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치 않는 자는 7년 환난 기간에 짐승의 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들은 음녀가 마시우는 음행의 포도주를 마시고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대적하기에 이르고 적그리스도를 추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하는 무리들은 공중으로 이끌어 올리는 하나님의 최종적인 보호로 일곱째 대접 심판에서 건짐을 받고 천년왕국의 축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주님을 사랑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순종으로 사랑으로 그 증거를 보이는 생활로 확실한 믿음을 소유한 성도가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