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新約]강해/◆ 바울서신 강해-1

★고린도전서 1-7장 ◆ 밤중소리

영국신사77 2020. 4. 13. 23:15

고린도전서 차례

고전 1장 (1 - 7)

(1) 바울의 인사와 감사(고린도전서1:1-7)

(2)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고린도전서1:8)

(3) 미쁘신 하나님(고린도전서1:9)

(4) 교회 분쟁의 원인(고린도전서1:10-16)

(5) 그리스도의 사신(고린도전서1:17)

(6) 십자가의 도(고린도전서1:18-25)

(7) 우리의 부르심(고린도전서1:26-31)

 

고전 2장 (8 - 10)

(8)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는 우리의 믿음(고린도전서2:1-5)

(9)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는 우리의 믿음(고린도전서2:6-10)

10) 하나님의 영을 주신 목적(고린도전서2:11-16)

 

고전 3장 (11 - 14)

(11)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고린도전서3:1-4)

(12)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고린도전서3:5-9)

(13) 우리가 세우는 집(고린도전서3:10-15)

(14) 성도 안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성전(고린도전서3:16-23)

 

고전 4장 (15 - 18)

(15)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고린도전서4:1-5)

(16) 대적하여 교만하지 말라(고린도전서4:6-8)

(17) 복음으로 인한 바울의 고난(고린도전서4:9-13)

(18) 사랑하는 자녀 같은 권면(고린도전서4:14-21)

 

고전 5장 (19 - 21)

(19) 용납 못할 음행죄(고린도전서5:1-5)

(20) 누룩 없는 떡(고린도전서5:6-8)

(21) 그리스도인의 사회 생활과 교회 생활(고린도전서5:9-13)

 

고전 6장 (22 - 24)

(22) 성도들간의 송사(고린도전서6:1-11)

(23) 주를 위해 존재하는 우리의 몸(고린도전서6:12-14)

(24) 값으로 사신 우리의 몸(고린도전서6:15-20)

 

고전 7장 (25 - 28)

(25) 그리스도인의 결혼 생활(고린도전서7:1-7)

(26) 남편과 아내의 결합과 이혼 문제(고린도전서7:8-16)

(27) 부르심을 받는 그대로 행하라(고린도전서7:17-24)

(28) 결혼에 관한 교훈(고린도전서7:2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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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1장 (1 - 7)

 

 ◆ 밤중소리  08-10 | VIEW : 5,685

 

 

 

 

 

 

 

 

 

(1) 바울의 인사와 감사

 

(고린도전서1:1-7)

 

 

 

우리는 고린도서에서 초대 교회의 내면 생활을 여러 가지로 많이 살펴 볼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에게 실제적으로 부닥친 신앙 생활에 관한 문제에 대해

자세히 언급해 주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실천적인 생활에 많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고린도서를 잘 공부한다면 성도들의 결혼, 은사, 절제 생활 등

다양한 삶의 문제의 올바른 지도를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본 성경은 바울이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에 보낸 서신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에 의해 개척된 교회로서

바울의 가르침에 의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이 서신을 보낸 것입니다.

이 서신은 주후 55년을 전후해서

바울이 에베소에 체류하고 있었을 때 써서 보낸 내용입니다.

 

 

1. 바울의 인사

 

바울은 다른 서신의 경우처럼 고린도에 보내는 편지 서두에 자신의 사도직에 대해 언급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도란 ‘아포스톨로스’란 헬라어로 이 말의 뜻은 ‘보냄을 받은 자’란 의미로 전권을 위임받은 특사란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사도란 직분은 원래 예수님에 의해 지명된 열 두 제자들에게만 해당되는 말로 사용되었는데 바울은 자신이 다메섹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실을 근거로 자신의 사도직을 변호하게 되었으며 다른 사도들에 의해 인정을 받게 된 것입니다.

 

바울이 편지 서두에서 자신의 사도 직분을 언급하고 있는 이유는 고린도 교회에 여러 당파들이 생겨나서 어떤 당파들은 바울의 사도권을 부인했기 때문에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에 대한 분명한 태도를 밝혀 주게 된 것입니다.

 

2절 3절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보내는 인사입니다. 바울은 1절에서 ‘소스데네’라는 형제의 이름을 거론하고 있는데 이 인물은 고린도의 유대인 회당의 회당장인 ‘소스데네’로 유대인들이 총독 갈리오에게 바울을 송사했을 때, 바울 대신에 매를 맞은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바울은 본문의 인사에서 하나님의 교회를 두 가지 표현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해 진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한 것입니다. 다음에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어느 곳에 있던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은 하나님의 교회를 이루는 그리스도의 지체들인 것입니다.

 

바울은 3절에서 이들에게 이 서신의 내용을 전달하기 전에 인사하는 일을 잊지 않았는데 3절에서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고 축원했습니다. 은혜와 평강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내려오는 영적 축복입니다.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은 구원을 의미하고 평강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마음속에 임재 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평안을 의미합니다.

 

 

2. 하나님께 감사하는 바울

 

바울은 4절에서 하나님께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주신 은혜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주셨다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5절에서 7절에서 몇 가지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케 되었다’고 했습니다. 구변이란 말은 진리에 기초한 교리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지식이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교리와 지식에 있어서 풍족했습니다. 성도들은 올바른 교리와 성경적인 지식을 가져야 그리스도의 증거가 견고케 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확실한 증거는 진리에 입각한 교리와 성경적인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에서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진리에 바탕을 둔 교리에 밝아야 하며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풍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2) 7절에서 바울이 감사한 것은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은사란 말은 ‘일반적인 하나님의 선물’ ‘성령이 주시는 특별한 능력’을 의미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에게는 성령의 여러 가지 은사가 나타났습니다. 이런 은사는 하나님의 교회를 위한 성령의 선물로서 바람직한 일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한때 이 은사로 인하여 분쟁이 일어나고 성도들간의 사랑에 금이 간 일이 있었기는 하지만 이런 일은 과도기적으로 일어난 일시적인 일이었습니다.

 

(3) 다음에 바울이 감사한 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린다’고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은 주의 재림을 의미합니다. 주 재림의 소망 가운데 살아갔다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결론 : 이런 바람직한 고린도 교인들이 받은 은혜에 대해 바울은 8절에서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고 격려해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오늘부터 강해하는 고린도서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실 주님의 은혜를 받아 주 재림의 소망 가운데 살아갈 수 있는 믿음의 성도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

 

(고린도전서1:8)

 

 

오늘 본문 8절에서 들려주시는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는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고 하신 말씀이 그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 주님이 우리의 믿음을 끝까지 책임져 주신다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분만을 의뢰하면서 우리의 생애를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날

 

8절에 ‘예수 그리스도의 날’이 나옵니다. 이 날은 ‘주의 날’이라고도 부르며 이 날은 7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의 날로 주의 재림을 가리킵니다. 신약 성경에서는 주의 재림에 대해 매우 강조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인의 신앙 생활의 목표점을 이 날에 둘 것을 여러 가지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재림이야말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의 마지막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은 이 세상에 대한 최종적인 심판의 날입니다. 그리고 그날은 구원이 완성되는 날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끝나면 이 땅에는 새로운 그리스도의 왕국이 건설되어 종말에 살아 있는 모든 성도들이 살아서 그곳에 들어가 천년왕국의 백성이 되는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날, 즉 주의 재림의 날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날은 반드시 올 것입니다. 모든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날이 언제인지는 몰라도 그날을 맞을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고 성경은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특히 예수님은 이 문제에 대하여 철저하셨습니다. 구약 시대의 믿음의 선진들이나 선지자들이 언제 메시야가 오실지 몰랐지만 그들은 메시야의 출현에 소망을 두고 살았습니다. 우리의 생애도 그러해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기약 없는 주의 날을 기다림에 지쳐서는 안됩니다. 왜냐 하면 우리의 생애는 대단히 짧기 때문에 우리의 생애가 끝나면 우리는 곧 주님 앞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주의 재림의 날은 우리의 육체가 살아서 주님을 만나는 날이요 우리의 생애가 마치면 우리의 육체가 죽어서 주님을 만나기 때문에 우리는 주의 재림의 날을 기다리는 일에 지치거나 지루하게 여겨서는 안됩니다. 육체를 떠나는 날도 역시 주의 날이 될 것입니다.

 

2.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주의 재림의 날에는 살아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주님 앞에 서게 됩니다. 이에 대하여 살전4:17절에서는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라’고 말씀해 주었습니다. 이 때 성도들의 모습은 의롭고 거룩한 모습이어야 합니다. 흠이 있고 추한 죄인의 모습으로는 주님을 영접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일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두 증인들을 보내시어 교회로 회개하게 하시고 정결케 하시는 것입니다.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고 하셨는데 이 일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이에 대하여 빌1:6절에서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는 말씀에도 똑같이 나와 있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분이 예수님인 것과 같이 우리의 구원을 온전히 완성하시는 분도 예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에 있어서 그 일을 계획하시고 이루시고 완성하시는 일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밝히신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로 그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는 방법이 여러 가지입니다. 첫째로 우리로 믿음에서 실족케 하시지 않으십니다. 요10:29절에서 예수님은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음에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정죄함을 당하지 않게 하십니다. 롬8:1절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세 번째로 우리를 송사 할 자도, 정죄 할 자도 없다고 했습니다. 롬8:33절에서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 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 하리요’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들로 견고케 하시기 위해 우리의 신앙을 연단 하십니다. 시험으로 징계로 연단하셔서 우리로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히12:11절에서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 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느니라’고 했습니다. 후3년 반에 떨어진 성도들에게도 그 가운데서 연달함을 받아 회개의 기회를 주심으로 계12:17절에 있는 말씀대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로 주님 앞에 세우시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주님 앞에 설 것이 아니라 오히려 칭찬 받을 자들로 서야 할 것입니다. 그 방법은 지극히 적은 일에 충성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마25:21절에서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온 생애를 주님 앞에 서는 소망 가운데서 우리의 생애를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3) 미쁘신 하나님

 

(고린도전서1:9)

 

 

바울은 오늘 본문 9절에서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미쁘시다는 말은 ‘믿음직스럽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미쁘신 분입니다. 믿음직스러우신 분입니다.

 

1.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

 

하나님이 미쁘신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다는 데 있습니다. 원래가 교회란 말의 헬라어는 ‘에클리시아’로 불러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불러 모으셨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이루신 것입니다. 부르심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친구가 불러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좋지 않은 친구의 부름이라면 악한 일에 동참시키는 일이기 때문에 이런 일에 합류하면 안됩니다. 그래서 시1:1절에서 말씀하시기를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쫓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고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이 미쁘신 이유는 세상에 흩어져 있는 그의 백성들을 부르시기 때문입니다. 이 백성들은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하시고 택정하신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복음으로 부르시는데 반드시 부르셔서 그의 자녀의 권세를 주시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은 왜 나를 부르셨나?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이유에 대해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기 위해서’임을 밝히시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그의 아들과 교제케 하시려는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1) 그의 아들과 교제케 하심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아들과 교제가 없으면 생명이 없습니다. 요일5:12절에서 말씀하시기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를 예정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예정을 이루시기 위해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로 우리의 구원을 위한 모든 사역을 이루게 하시고 그 아들을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시기로 하셨습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죄에 깊이 빠져 있으므로 이 진리를 깨닫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복음으로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로 그의 아들과 교제케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에 의해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그 아들과 교제하는 생애를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교제는 얼마나 돈독합니까? 이처럼 주님과의 교제를 위해 새벽에도 교회에 나오고 주일마다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교제는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이뤄진 것이므로 이처럼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은 미쁘신 분이십니다.

 

(2)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은 우리를 빛 가운데로 행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빛이 없는 생애를 살아 왔습니다. 어두움 속에서 살아온 것입니다. 어두움은 죄요 빛은 생명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과 교제하면 우리의 생활은 빛 가운데로 걸어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요 빛이시기 때문에 그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이야말로 빛으로 행하는 생활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를 불러내시어 빛으로 행하게 하시는 분이심으로 그 분의 부르심은 미쁘신 것입니다.

 

(3) 하나님은 우리들로 영생의 열매를 맺게 하시려고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아직까지 사망의 열매를 맺는 생활을 해 왔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열매를 맺는 사람이 받게 됩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 이전에는 생명의 열매 맺는 생활을 하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이에 대해 롬6:21절에서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없으셨다면 우리는 계속 이 같은 열매를 맺으므로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를 부르신 목적에 대해서 롬7:4절에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전에 부르심을 받기 이전처럼 육신의 열매를 맺는 생활을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 맺는 생활로 생명을 얻게 하시려고 그의 아들과 교제하셨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4)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우리들로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리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리는 일이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일인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생활을 못했습니다. 자기를 위한 생애를 살아왔으며 육신을 기쁘게 하는 생활로 하나님을 거역하는 생활을 해 온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죄악의 길에서 우리를 불러 내셨습니다.

 

결론 :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를 죄악의 함정에서, 멸망의 자리에서 그의 아들과 교제케 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부르심에 합당한 자가 되기 위해 힘쓰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4) 교회 분쟁의 원인

 

(고린도전서1:10-16)

 

 

바울이 이 서신을 고린도 교회에 보낼 당시, 고린도 교회에는 여러 가지 분쟁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아마도 바울의 이 서신은 그런 고린도 교회의 분쟁을 책망하고 그 해결의 방법을 제시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은 10절에서 권면하기를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교회의 분쟁을 원치 않으십니다. 교회가 온전히 하나가 되는 것을 원하십니다. 그런데 그 하나가 되는 길은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합하는 일’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1. 분쟁을 없애는 길

 

교회에서 분쟁을 없애려면 성도들 간에 세 가지 합할 것이 있습니다.

 

(1) 그 하나가 ‘다 같은 말’을 하라고 했습니다. 다 같은 말이란 교회에서나 성도들의 모임이 있는 곳이면 대화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첫째로 주님을 높이는 말입니다. 주님 말씀으로 위로하고 격려하는 말입니다. 이 같은 말로 하나가 되면 분쟁이나 파당이 생기지 않습니다.

 

(2) 다음에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했습니다. 이 마음은 주님의 마음을 가리킵니다. 빌2:5절에서 바울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겸손한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본체시지만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자기를 낮추시고 종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도 스스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하시고 나를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성도들이 이 같은 주님의 겸손한 마음을 가진다면 무슨 일을 하든지 분쟁이 있을 수 없습니다. 자기가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다른 사람을 대접하는 마음,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마음을 갖는다면 분쟁이 있어도 화합이 되고 다투다가도 화목해 질 것입니다.

 

(3) 다음에 ‘같은 뜻’으로 합하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오직 한 가지 뜻이 있을 뿐입니다. 그 뜻은 주님을 섬기는 일입니다. 주님을 위해 충성하는 일입니다. 주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는 일입니다.

 

2. 고린도 교회의 분쟁

 

고린도 교회에 있었던 분쟁은 각기 자기가 속한 ‘소속파’로 인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12절에서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라는 말씀에 나타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서는 끼리끼리 자신들의 소속파를 만들었습니다. 그 파가 네 파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하나는 바울 파라고 하는 분파입니다. 고린도 교회를 개척한 바울을 옹립하고 바울에게 남다른 호의와 사랑을 가지고 바울의 사도권을 주장하면서 다른 분파와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두 번째로 아볼로 파입니다. 아볼로는 학문이 많고 성경에도 능하고 웅변적인 설교로 많은 은혜를 끼치는 지도자였습니다. 아볼로는 고린도 교회에서 그의 특유한 설교로 많은 인기를 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를 옹립하는 파가 생겨난 것입니다. 다음에 등장한 파가 게바 파입니다. 게바란 말은 바위란 의미를 가진 아람어로 베드로의 아람어식 이름입니다. 게바가 고린도 교회 성도들간에 알려진 것은 아마도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급 사도이며 주님의 수제자 였으므로 게바 파라는 파당이 생겨났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파도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 파가 어떤 파인지는 판단하기 어렵지만 이 파는 사람을 중심으로 한 이상의 세 파를 비난하고 우리에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믿음의 대상이 된다고 하는 주장으로 교회 지도자들을 경히 여기고 예수만을 내세운 파였을 것입니다.

 

요즘도 큰 교회나 작은 교회나 파벌이 있는 교회가 많습니다. 유력한 인사가 장로로 있는 경우, 파벌을 좋아하는 권사나 집사들이 어떤 인물을 중심으로 파당을 조성하는 교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교회는 싸움이 그칠 날이 없습니다.

 

이런 일에 대하여 바울은 13절에서 고린도 교회의 이런 분쟁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고 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 그리스도가 머리요 성도들은 그 머리에 붙은 지체들입니다. 그리고 모든 성도들이 한 몸,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파당이 생기고 분쟁이 일어나면 그리스도가 나뉘인 것이나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고 나무라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믿음의 주가 되십니다. 바울이나 아볼라나 게바나 그 누구라도 결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아닙니다. 세례 역시 게바가 유명한 사도요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로 고린도 교회를 개척했어도 세례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는 것입니다. 세례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징표입니다.

 

결론 : 교회 안에서 파당을 짓고 분쟁하는 일은 하나님 앞에 큰 죄가 아닐 수 없습니다. 당을 짓는 자들은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파당으로 교회를 혼란하게 하기 때문에 정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그리스도만을 우리의 주로 믿고 순종하는 생활을 통해서 올바른 신앙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5) 그리스도의 사신

 

(고린도전서1:17)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화합하지 못하고 분쟁이 일고 있는 일에 대하여 심히 우려하면서 그리스도의 사신으로서의 자신의 위치에 대해 17절에서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바울의 이 같은 말은 복음을 전하는 모든 하나님의 종들에게 큰 교훈으로 들려주는 말이며 이런 바울의 자세로 그리스도의 복음의 사신으로서의 사명을 이루어야 합니다. 대개의 경우, 교회의 분쟁은 이런 사명을 망각한 교회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1. 바울의 사신으로서의 사명

 

바울은 복음의 사신으로서의 몇 가지 의미를 주고 있습니다.

 

(1)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은 후 제일 먼저 깨달아야 할 일은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세상에 보내노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똑같이 해당되는 말입니다. 바울은 이 사상에 철저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보내셨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사신이란 뜻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사신이 세상에서 할 일이 무엇입니까? 오직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2) 바울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서 ‘그리스보’와 ‘가이오’와 ‘스데바나’ 집 가족들에게 세례를 준 것이 원인이 되어 바울에게 세례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또 그 일을 큰 자랑으로 여긴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사실에 대해 냉혹하게 비판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려 하심이 아니라’고 한 것입니다. 바울에게 세례를 받은 일을 자랑으로 여겨도 안 되고 굳이 바울에게 세례를 받으려는 생각을 가져도 안 된다는 사실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신이 할 일이란 교인들에게 세례를 주는 일이 아닌 것입니다. 세례는 목회 사역 중 해야 할 일 중에 하나일 뿐 그것이 다른 일에 비하여 비중이 큰 것도 아니며 더욱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나 복음의 사역자들은 기엽적인 일을 사명인 줄 알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은사적이 면에서 볼 때도 신유의 은사를 받은 사람에게 있어서 다른 사람의 병을 고쳐 주는 일이 사명인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방편으로 주신 은사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3)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보내심은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신으로서의 사명은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내가 너희를 세상에 보내노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복음을 전케 하시려는 데 목적을 두고 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이 사실을 잊으면 그가 하는 일은 아무런 가치도 부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성령을 받는 일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성령께서 사명을 이룰 수 있는 권능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너희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는 권능을 받고’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모든 은사도 그 주신 목적이 이 일에 있는 것입니다.

 

2.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자세에 대해서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말하고 있는 말의 지혜란 인간의 지식이나 지혜에서 나온 말재간으로 복음을 전하지 아니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그 당시 자타가 인정해 주는 명문 대학에서 최고의 학문을 터득한 청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쓰레기처럼 버렸습니다. 그는 그가 가지고 있는 인간적인 지식이나 철학적 지식으로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철저하게 복음을 전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선택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의 부활하심을 말합니다. 이 두 가지 사건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하나님의 깊은 사랑이 깔려 있는 것입니다. 복음은 바로 이 사건을 전파하는 일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우리의 속죄와 구속이 있고 그의 부활에 우리의 소망과 새로운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철학에서 나온 지식이 아닙니다. 인간의 학문에서 나온 지식도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증거 하는 일이 복음인 것입니다. 복음에만이 이 진리의 지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학문이나 지식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이 누구라도 그리스도의 사신으로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게 해서는 안됩니다. 세례 문제로 떠드는 것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게 하는 일입니다. 나는 바울 파다 나는 아볼로 파다 나는 게바 파다는 등 파벌이야말로 교회에서 분쟁을 일으키는 악재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게 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며 그 십자가를 통한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의 사신임을 알아야 합니다.

 

 

 

 

 

(6) 십자가의 도

 

(고린도전서1:18-25)

 

 

바울은 18절에서 놀라운 말씀을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십자가이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한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란 구원의 도리란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구원의 도리가 십자가의 도입니다. 이 도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으심으로 인류의 죄를 사하시는 속죄 제물이 되게 하시고 그의 부활하심으로 새 생명을 주신 일’을 말합니다. 이 도는 세상에 그 허다한 종교 중에 오직 우리 기독교만이 가지고 있습니다.

 

1. 멸망하는 자들에게 미련한 십자가의 도

 

십자가의 도는 인류를 두 부류로 구분해 놓았습니다. 그 하나는 멸망하는 자요 그리고 두 번째는 구원을 얻는 자입니다.

 

(1)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십자가의 도가 미련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십자가의 도, 곧 구원의 도리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멸망하는 자들이란 하나님의 아들을 믿지 않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이 일에는 학식이나 재물이나 명예의 차별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를 거절하는 사람들은 멸망하는 자들입니다.

 

(2) 왜 미련하게 보는 것입니까? 십자가의 도가 도덕적 기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도덕적 기준으로 선행을 많이 해야 구원을 받는 줄로 믿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도는 인간의 도덕적 기준이나 선행이나 악행은 아무런 영향이 미치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도는 우리의 의나 선이나 공로를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공로를 힘입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런 방법의 구원을 믿으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십자가의 도는 인간의 이성으로 납득할 수 없는 방법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성적인 판단을 가지고 사물을 관찰합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도는 이성적인 판단으로는 이해가 안되며 납득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멸망하는 자에게는 십자가의 도가 미련한 것으로 보입니다. 세상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는 전혀 다릅니다. 20절에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셨다고 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인간의 구원의 방법을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법을 쓰셨다면 공평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의 지혜와 지식 있는 사람들만을 구원하신다면 세상에서 배우지 못해 지혜나 지식이 없는 사람들은 구원의 기회를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돈이나 명예나 가문으로 구원의 방법을 정하셨다면 돈이 없는 가난한 사람이나 명예가 없는 평민이나 가문이 없는 보통 사람들은 구원의 기회를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2. 구원을 얻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인 십자가의 도

 

그러나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십자가의 도야말로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십자가의 도로 하시는데 이 도는 그 어떤 사람에게나 적용될 수 있어야 합니다. 학식이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세상 지혜가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돈이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가문이 좋은 사람이나 나쁜 사람이나 누구에게나 일률적으로 적용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복음으로 그 일을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미련하게 보는 방법을 쓰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방법은 하나님의 지혜에서 나온 방법이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방법입니다.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누구든지 구원을 얻으리라’는 하나님의 방법으로 구원의 도리를 세우신 것입니다. 인간의 지혜로 판단해서 결정할 문제가 아닙니다. 인간의 선이나 의나 재물로 판단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믿음으로 결정 나는 것입니다. 이 방법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일 것입니다.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이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믿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십자가에 나타나 있습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는 이 비밀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을 입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성령께서 하나님의 지혜를 주심으로 십자가의 도가 하나님의 능력이심을 믿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십자가의 도를 학문이나 지식으로가 아니라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전하게 하셨습니다. 왜 전도를 미련하다고 하신 것입니까? 전도야말로 세상 사람들에게 있어서 미련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자랑하는 유대인들조차도 표적을 구하는 어리석음으로 십자가의 도를 미련하게 보았습니다. 헬라인은 지혜를 구하는 사람들로 이방인들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이들 역시 십자가의 도를 미련하게 보았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 십자가의 도를 전해야 하는 것입니까? 23절에서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한다’고 했습니다.

결론 : 이처럼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방법이 전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전하면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미련하게 보아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미련하게 보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이 지혜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7) 우리의 부르심

 

(고린도전서1:26-31)

 

 

복음은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만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부르심은 세상의 지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하시기를 기뻐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그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 누구인가에 대하여 밝혀 주고 있는 것입니다.

 

1. 너희의 부르심을 보라

 

바울은 26절에서 ‘형제들아 너희의 부르심을 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부류의 사람들을 부르셨는가에 대하여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1) 첫째로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다’고 했습니다. 육체를 따른 지혜란 세상 지혜를 의미합니다. 세상 지혜는 하나님의 지혜와 전혀 배치되는 지혜입니다. 세상 지혜로는 세상의 학문이나 다른 부문의 연구에는 필요하겠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필요치 않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지혜는 어디에 기준을 두고 있는 것입니까?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했습니다. 세상 지혜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길을 보여 주시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세상 지혜로는 하나님을 찾을 수도 없으려니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방법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철저히 배제하셨습니다. 그래서 세상 지혜에 미련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지혜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에 미련하게 하셨기 때문에 그들은 복음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경우 역시 그러한 것입니다. ‘너희의 부르심을 보라’고 한 것입니다.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않다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 지혜에 어두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신 것입니다.

(2) 다음에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고 했습니다. 능한 자란 세상일에 능한 자를 말합니다. 기능이나 예술이나 학문 등에 있어서 수준이 높은 사람이 우리 중에는 얼마 안 되는 것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그 능한 것을 믿고 의뢰하기 때문에 창조주를 멀리하는 것입니다.

 

문벌 좋은 자란 권세나 명문의 가정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의 도를 깨닫고 구원받는 일에 이들을 멀리하셨습니다. 우리의 경우를 보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 중에 이런 유에 속한 사람들이 많지 않은 것입니다.

 

2.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

 

27절에 있는 말씀은 세상에서 천시 받고 무식하고 소망을 가질 수 없는 사람들에게 소망적인 말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에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택한 자들을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십자가의 도를 믿게 하시고 구원의 은혜를 내리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미련한 것을 택하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미련하다는 말은 세상 지혜가 부족하여 세상에서 멸시를 받는 가난한 사람, 배우지 못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들을 택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세상의 지혜 있는 자들들 부끄럽게 하려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가서 심히 부끄러움을 당할 것입니다. 지금은 교만하지만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는 부끄러워 머리를 쳐들지 못할 것입니다.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세상의 약한 것이란 권세가 없어 짓눌리는 생애를 지내는 낮은 백성들을 말합니다. 돈이 없어 무시당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지혜를 주셔서 십자가의 도를 따르게 하심으로 구원의 은혜를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날에 세상에서 강하다고 뽐내는 사람들은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지만 세상에서 약했던 우리는 하나님 앞에 당당히 서게 될 것입니다.

 

다음에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매우 공평하신 분이십니다. 이 세상에서 지식이나 돈이나 명예나 권세로 호강하며 행복하게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축복에서 멀리하게 하시고 오히려 이 세상에서 소외당하면서 가난하고 무식하고 어렵게 살아온 사람들에게 부르심의 문을 넓게 여사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신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바울은 29절에서 이처럼 밝혀 주고 있습니다.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한 것입니다. 육체를 가지고는 하나님께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육체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 중심을 보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30절에서 매우 귀한 말씀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다’고 했습니다.

 

결론 : 우리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된 것입니다. 이 놀라운 은혜가 어떻게 우리에게 온 것입니까? 오직 믿음으로 왔습니다. 이 아름답고 귀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고전 2장 (8 - 10)

 

◆ 밤중소리 01-20 | VIEW : 512

 

 

 

 

 

 

 

 

 

 

(8)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는 우리의 믿음

 

(고린도전서2:1-5)

 

 

바울은 올바른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그의 생애 동안에 하나님의 능력의 장중 안에서 충성된 사명을 이룬 하나님의 종입니다. 그는 2절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했으며 5절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우리의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여’ 전심을 기울인 생애를 살았습니다.

 

1. 사도 바울의 결심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최상의 보화로 알았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에, 1절에서 말하기를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하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2절에서 이르기를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빌3:7-8절에서 바울은 말하기를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겼다’고 했습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지난날의 모든 것들은 그리스도를 섬기며 복음을 전하는 일에 유익이 되지 못하고 해로운 것으로 여겼다는 것입니다. 그는 참으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 버리고 배설물처럼 천히 여겼습니다. 왜 그렇게 여긴 것입니까?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고 소중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 지식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얻고 자기는 그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발견되려고 애쓰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은 언제나 자신의 모습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찾거나 헛된 소망 가운데서 찾으면 안됩니다. 그렇게 되려면 바울의 생활을 본 받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일이라면 자신에게 유익했던 모든 것을 해로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좋아하고 따랐던 세상의 모든 것을 그리스도를 위해 버릴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2. 바울의 참 목자 상

 

바울은 그의 목회 생활에서 참 목자 상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참 목자 상이란 예수님을 닮은 목자의 모습을 말합니다. 3절에서 이르기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였다’고 했습니다. 약하였다는 바울의 고백은 하나님 앞과 성도들 앞에 겸손했다는 뜻입니다. 참 목자는 겸손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목자는 양들에게 약합니다. 양들 앞에서 겸손한 것입니다. 호령이나 위엄이나 교만으로 양떼들을 인도하지 않고 온유와 겸손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런 자세로 목회를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깊이 알고 깨달을수록 나라는 존재가 얼마나 약한 존재인가를 알고 겸손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두려워했다’고 했습니다. 양의 생명을 맡았기 때문에 목자는 항상 두려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목자는 양떼들의 영혼에 대해 자신이 회계할 자인 것같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선한 목자는 예수님처럼 양을 위해 자신이 목숨을 버릴 수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때를 따라 양들에게 양식을 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양들로 영적인 기근과 기갈로 배고프고 목말라 하게 해선 안됩니다.

 

그리고 바울은 ‘심히 떨었노라’고 했습니다. 진실한 종은 하나님 앞에 두려움으로 떨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맡은 사역을 잘 감당했는가? 양을 실족시키는 일은 하지 않았는가? 두려움으로 떨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4절에서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철학에도 일반 학문에도 그리고 종교적인 지식에도 박식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설교를 할 때 자기의 이 같은 지식과 지혜에 근거하지 아니했습니다.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했습니다. 그가 전도할 때에도 자신의 지식이나 말재간으로 한 것이 아닙니다. 철학적 논쟁이나 종교적 논쟁으로 하지 아니했습니다.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했습니다.

 

왜 그렇게 한 것입니까? 그 이유는 믿음이 사람의 지혜나 말재간에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능력에 있기 때문입니다. 5절에서 바울은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바울의 위대한 설교와 놀라운 전도를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많은 열매를 거둔 일은 이처럼 사람의 지혜에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이런 방법의 전도는 놀라운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우리의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서지 아니하기 위함이라고 한 것입니다. 지혜로 배운 예수는 또 다른 지혜로 무너질 수 있습니다. 사람의 지혜로 얻은 구원은 잘못된 지혜로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받아 드려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의 능력 아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바울처럼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지신 십자가만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사람의 지혜로 세우지 말고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세워져야 든든한 믿음으로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9)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는 우리의 믿음

 

(고린도전서2:6-10)

 

 

바울은 본문에서 하나님의 지혜에 대하여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지혜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는 하나님의 속성으로서의 지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십자가에 숨겨 있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하시는 지혜로써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은사로서의 지혜를 가리킵니다.

 

1. 하나님의 지혜

 

바울은 하나님의 지혜에 대하여 이 세상의 지혜와 다르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란 말씀은 인간들이 본래 소유하고 있는 천부적인 인간 본능으로서의 지혜이거나 학문을 배우거나 터득해서 얻을 수 있는 그런 지혜가 아니란 뜻입니다. 이 세상의 지혜로는 깨들을 수도 없고 배울 수도 없는 지혜인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지혜는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관원이란 이스라엘의 최고 의결기관인 산해드린 공회를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최고 지성인이요 석학들이요 종교계의 거물급 인사들이 모여서 제반사를 의논하고 결의하는 기관입니다. 니고데모도 이 기관의 의원이었습니다. 이들의 지혜는 이 세상의 없어질 지혜인 것입니다. 그들은 결국 예수님의 재판에서 사형 판결을 내림으로 스스로 정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 바울은 7절에서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라고 했습니다. 비밀한 가운데 있다는 말은 세상에는 숨겨져 있었던 지혜란 뜻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세상에 알려진바 없습니다. 감춰져 있었습니다.

 

이 지혜가 왜 세상에는 감추어졌던 것입니까? 하나님의 지혜가 세상 사람들에게 공개되어 다 알 수 있고 가질 수 있다면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를 이룰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서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영광을 위한다는 말씀은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세상에 오심으로 시작된 것도 아닙니다.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이미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처럼 구원의 예정을 받을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지혜를 소유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십자가의 도를 깨달을 수 있는 하나님의 지혜도 그 때 미리 정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지혜 있는 자들이나 세상의 관원들이라 할지라도 미리 하나님이 주시기로 작정하신 택한 백성들이 아닌 이상 하나님의 지혜를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지혜가 없었기 때문에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어리석은 일을 한 것입니다.

 

2. 성령으로 보이신 하나님의 지혜

 

9절에 나오는 말씀은 놀라운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예비하신 것이 있습니다.

 

여기서 자기를 사랑한다는 말씀은 그의 택하신 백성을 일컫는 말씀입니다. 누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입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예정을 입은 그의 택한 백성들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는 하나님이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일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인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은 무엇을 예비하신 것입니까? 모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의 백성들에게 언약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의미합니다. 구원과 영생과 천국의 기업과 영광의 면류관 등 가장 귀하고 영광스러운 것들을 예비하신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세상 사람의 눈으로는 보지 못하고 세상 사람들의 귀로는 듣지 못하고 세상 사람의 마음으로는 생각해 낼 수도 없는 것들이라고 했습니다. 육의 몸으로는 아무 것도 깨달아 알 수 없도록 하신 것입니다. 눈은 떴지만 그 눈으로는 영생도 천국도 면류관도 보이지 않습니다. 귀는 열렸어도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들을 수 없습니다. 듣기는 들어도 깨달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생각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지성으로는 깨달을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10절에서 이르기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의 공급자는 바로 성령이십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지혜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이 모든 것을 깨닫게 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세상 사람은 성령을 모릅니다. 성령의 있음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지혜가 통용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세상의 학문이나 지식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보여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론 : 그리고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신다’고 했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영은 그 사람의 속마음이나 모든 사정을 모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하나님의 모든 것을 아시는 것입니다. 그런 성령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심으로 우리들로 하나님의 지혜를 주셔서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을 위해 예비하신 모든 것을 깨닫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10) 하나님의 영을 주신 목적

 

(고린도전서2:11-16)

 

 

바울은 본문 12절에서 대단히 중요한 말씀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을 주시지 아니하셨다면 우리는 절대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은혜를 받을 수 없었다는 말은 예수를 알지 못했고 그로 인하여 구원도 영생도 천국도 소유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세상 사람들의 지혜와 구별된 하나님의 지혜를 주심으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모든 것을 알게 하시어 우리에게 십자가의 도를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1. 우리가 받은 영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 영을 성령이라고 말합니다. 이 성령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아버지와 아들의 이름으로 보내신 영입니다. 이 영은 오직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사명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1) 11절에서 이 영은 하나님의 사정을 잘 아시는 영이라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그의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모든 섭리를 알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하나님을 온전히 계시하십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2) 12절에서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받은 사람입니다. 성령이 그리스도를 계시해 주시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주시고 구원을 이루어 주시기 때문에 구원받을 백성들에게 있어서 성령을 받는 일은 필수적인 일입니다.

 

(3) 성령을 주신 이유에 대하여 12절 하 반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에게 주신 모든 것은 세상의 지혜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1:27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하나님을 아는 일에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오직 성령으로만이 그가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 수 있게 하시기 위해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이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고 구속의 사역을 이루게 하시어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시기로 하셨는데 이런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은 세상 지혜로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백성들로 이것을 알게 하여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시려고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도를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 줄 알고 그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영생의 소망을 가지고 감사 생활을 하는 것

이런 생활이 가능한 것은 성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성령을 받은 증거를 어디서 찾아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성령은 눈으로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은사나 권능으로 알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은 오직 하나님의 지혜로서만이 알 수 있는데 이 하나님의 지혜는 성령이 주십니다. 세상 지혜로는 이런 것들을 알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 천국과 영생에 관한 믿음 이런 것들을 통해서 성령의 임재 하심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2. 신령한 일의 분별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모든 것은 신령한 것들입니다. 이 신령한 것들은 신령한 것으로가 아니면 분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에 속한 사람은 이런 것들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이 왜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을 위해 예비하신 이 신령한 것들을 모르는 것입니까? 14절에서 말씀하기를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한다’고 했습니다. 미련하게 보이는 일을 믿고 그곳에 소망을 둘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깨닫지도 못하는 일을 믿고 따를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신령한 축복에 대한 그 아무 것도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15절에 나온 말씀을 보면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신령한 자란 성령을 받은 사람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성령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것을 스스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영적 지혜로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는 것입니다. 판단한다는 말은 세상 것을 버리고 하나님의 것을 취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한다고 했는데 이 말은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의 판단에 의해 살아갈 것이 아니란 뜻입니다.

 

결론 :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구원을 얻게 하시기 위해 이처럼 성령을 보내시어 하나님의 지혜로 하나님에게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을 깨달을 수 있게 하셔서 우리는 지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이 있는 생애를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고전 3장 (11 - 14)

 

◆ 밤중소리 01-30 | VIEW : 552

 

 

 

 

 

 

 

 

 

 

(11)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

 

(고린도전서3:1-4)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대할 때 아직도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대했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은 받았으나 아직도 장성한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하고 어린아이들과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시기와 분쟁으로 교회를 어지럽혔으니 이는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장성한 자에게 먹이는 밥을 먹이지 아니하고 어린아이들에게 먹이는 젖으로 먹였다고 한 것입니다.

 

1. 육신에 속한 자

 

그리스도인들을 한 마디로 말해서 육신에 속한 자와 신령한 자로 나눌 수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1절에서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교인들에게 대하는 일에 차별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신령한 자들을 먹이는 일과 육에 속한 자들을 먹이는 일은 차별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신령한 자들이란 누구를 의미하는 것입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장성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신앙적으로 장성한 자입니다. 이들은 그리스도를 아는 초보적 단계를 지났습니다. 이들은 좀더 깊은 은혜의 단계에 들어간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신앙의 장성은 무엇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1) 그리스도를 아는 신령한 지식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세상 지식은 학교에서나 학문으로 배울 때 성장하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성장은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혜 가운데 자라 가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혜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주의 종들의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

 

(2) 다음에 말씀의 맛을 보는 가운데 성장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생명의 떡이라면 그 맛을 볼 뿐 아니라 먹어야 하는데 이 먹는 일이 곧 순종인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자기 생활에 적용시켜 체험해야 합니다. 이 같은 생활이 그리스도인의 은혜 생활인데 이 은혜 생활이 우리로 신령한 자로 성장케 합니다. 순종이 없는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유치한 자리에 머물러 장성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믿음과 순종이 함께 따를 때 장성한 그리스도인의 자리에 이르게 됩니다.

 

2. 육신에 속한 자

 

여기서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육신에 속한 자란 믿음이 없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을 말합니다. 그러나 구원은 받았지만 아직도 육신에 속하여 신령한 자란 이름을 듣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1) 이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의 티를 벗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들을 대할 때 신령한 자들처럼 대하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어린아이의 단계를 거쳐야 합니다. 중생이란 새로 태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어린아이의 기간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장성해야 할 시기에 이르렀는데도 어린아이의 자리에 계속 머물러 있는 다면 이런 그리스도인들은 문제아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들이 고린도 교회에 당파를 만들고 서로간 시기하고 분쟁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2) 이들은 젖을 먹여야 할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나이로 보아 분명히 밥을 먹여야 할 시기에 이르렀는데도 밥을 먹지 못하고 젖이나 먹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젖을 먹는다는 말은 기독교의 초보적인 지식이나 배워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아직도 말씀의 깨달음이 부족하고 들어도 생활에 적용시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생활에 적용시키지 못하기 때문에 말씀의 맛도 모르는 것입니다. 순종도 못합니다. 그들이 가진 특색은 시기와 분쟁을 일으키는 일입니다.

 

(3) 육신에 속한 자들은 특색이 있습니다.

 

이들은 신령한 일을 감당치 못하는 것입니다. 젖이나 먹으면서 애들처럼 육신의 일이나 하는 것이 고작입니다.

 

이들은 시기와 분쟁을 일으킵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은 교회에 화평이나 사랑을 가져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 대신에 시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시기의 특색은 미움이며 미움은 곧 분쟁을 가져옵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은 사람을 따라 행한다고 했습니다. 말씀을 따라 행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정상적인 신앙 생활이 것만 이들은 사람을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따라 행한다는 말은 사람에 이끌려 파당을 형성하고 분쟁을 일으키는 일을 말합니다. 그래서 그들 중에는 자기가 속한 파를 내세우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4절에서 이르기를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 라하고 다른 이는 아볼로에게 라 한다’고 했습니다.

 

결론 : 이들은 이처럼 사람을 따라 행하며 움직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신령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신령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의 생활도 신령해야 하는 것입니다. 젖을 먹고 육신에 속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밥을 먹고 신령한 자의 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2)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고린도전서3:5-9)

 

 

바울은 8절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대단히 고무적인 말씀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심는 이와 물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에는 반드시 상이 있습니다.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 상을 바라보면서 신앙 생활을 하는 성도들은 복이 있습니다. 이런 성도들은 오직 자기의 생애 중에 이 상을 얻는 일에 전심전력을 다 할 것이며 그 결과가 곧 부르심을 입을 날, 천국에서 나타날 것입니다. 바울은 이 같은 상을 받을 일을 큰 영광의 소망으로 삼았으며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갔습니다. 그는 딤후4:7절에서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다’고 확신했던 것입니다.

 

1. 오직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

 

바울 파와 아볼로 파를 형성하여 교회 안에서 시기와 파쟁으로 시끄러운 고린도 교인들에게 바울은 자신들의 존재에 대하여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그들은 하나님 앞에 아무 것도 아닌 존재란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6절 말씀에서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고 했습니다.

 

아볼로나 바울의 존재는 고린도에 있는 성도들로 믿음을 갖게 한 사역자에 불과하다고 했습니다. 그런 사역자들을 붙들고 나는 아볼로 파다, 나는 바울 파다 하는 논쟁은 육신에 속한 자들의 분쟁에 지나지 않는 일이라고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볼로나 바울은 교회의 사역자요 고린도 교인들은 교회의 양 무리들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머리와 몸이 되시는 분입니다. 사역자와 성도는 은사적인 면에서 제각기 지체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그런 아볼로나 바울을 중심으로 파를 형성하는 일은 하나님 앞에 죄악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6절에서 사역자로서의 아볼로와 자신의 역할에 대하여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다’고 했습니다. 심었다는 말은 복음을 전하여 복음으로 그들을 낳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물을 주었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라게 했다는 뜻입니다. 이 바울의 표현은 바울과 아볼로가 맡은 역할의 분량이 다르다는 의미가 아니라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개척한 개척자로서 그들을 믿음을 갖게 했다는 것이요 아볼로는 그 후에 고린도 교회에서 말씀을 가르쳐 그들의 믿음을 성장케 하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하려는 말은 그 다음에 나옵니다. ‘오직 하나님은 자라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 뿐이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 그러면 자라게 한다는 뜻은 무엇입니까? 바울이 심는 씨앗에 생명을 주시고 아볼로가 뿌리는 물에 능력을 주셔서 참 포도나무로 성장케 하신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아무리 복음의 씨를 뿌려 봤자 하나님께서 그 씨에 생명을 주시고 믿게 하시는 은혜를 주시지 아니하시면 심는 바울의 노력은 허사에 불과하며 아볼로가 아무리 열심히 물을 주고 가꾸어도 능력으로 자라나게 해 주시지 아니하시면 아볼로의 수고 역시 헛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2. 제각기 일하는 대로 상을 주시는 하나님

 

바울은 8절에서 ‘심는 이와 물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교회에는 각 지체가 있는 대로 직분이나 맡은 사명들이 여러 가지입니다. 그러나 그 직분들은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일에 일반이라고 했습니다. 높은 것도 없고 낮은 것도 없습니다. 다 같은 사명을 제각기 맡은 것입니다. 문제는 맡은 사명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일하는 대로 상을 주시는 분입니다. 일하지 않는 자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일하는 자에게 주시는데 자기의 일하는 분량대로 주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심는 일이건 물을 뿌리는 일이건 각각 자기의 일하는바에 따라 상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적게 일한 자는 적은 상을 받게 됩니다. 많이 일한 자는 많은 상을 받게 됩니다. 바울이 복음을 위해 뜨겁게 일하고 열심을 낸 것은 각각 자기의 일한 대로 주시는 이 같은 상을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적게 일하고 많은 상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상은 내가 주의 일에 얼마나 수고했느냐에 따라 주시는데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원칙에 따라 주십니다. 이 상급을 받을 일에 대하여 우리에게 여러 가지로 격려해 주고 있습니다.

 

지극히 적은 일에 충성하라고 하셨습니다. 적은 일이라고 소홀히 하거나 나태하지 말 것을 경계하신 것입니다.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하셨습니다. 충성하는 성도가 상을 받습니다. 충성이란 말은 부끄러움이나 거짓이 없이 정성을 다하여 섬기는 일을 말합니다.

 

결론 : 여러분은 교회를 위해 어떤 직분을 맡으신 것입니까? 그 직분을 이루기 위해 심는 일과 뿌리는 일에 얼마나 정성을 기울이셨습니까? 세상에서 무시당하고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낙심치 마시고 이 상급을 바라보시며 충성하실 수 있는 믿음의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13) 우리가 세우는 집

 

(고린도전서3:10-15)

 

 

바울은 10절에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복음의 터를 닦아 둔 사람은 자기라고 바울이 말하고 있습니다.

 

1. 바울이 닦은 터

 

바울은 복음의 터를 닦아 둔 사람입니다. 이에 대하여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그 일을 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복음의 터를 닦을 수 있도록 은혜를 내리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고후12:7절에서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복음에 관한 놀라운 계시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가 받은 계시는 능히 복음의 터를 삼아야 할 그런 계시였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잘못된 복음을 전하는 갈라디아 교회의 거짓 선생들에게 갈1:8절에서 담대히 말하기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고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사명은 주로 이 터를 닦는 일입니다. 그는 이 터를 닦기 위해 특별 계시를 받아 성경을 기록하여 오늘날 구원의 교리적인 진리를 밝혀 놓은 것입니다. 바울이 닦아 둔 터는 복음의 터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 다른 터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른 이가 이 위에 세운다고 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이 닦아 놓은 이 터전 위에 자신의 신앙을 세우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 생활은 이 터 위에 집을 세우는 일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터 위에 집을 세울 때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조심하라는 말은 지혜롭게 세우라는 뜻입니다. 이 집은 믿음으로 세워야 합니다. 진리 가운데 세워야 합니다. 순종으로 세워야 합니다.

 

2. 공력이 그대로 있어야

 

바울이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닦아 놓은 터 위에 우리가 집을 지을 때 조심해야 하는데 그날에 공력이 이 일을 밝힐 것이라고 했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이 터 위에 집을 세우는데 그 재료에 대해 조심해야 합니다. 집을 세울 재료가 두 종류로 나옵니다. 하나는 금이나 은이나 보석처럼 가치 있고 든든하며 좀처럼 무너지지 않는 재료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세운 집으로 불에 쉽게 탈 연약한 재료입니다.

 

여기서 금은 믿음을, 은은 연단을, 보석은 지혜를 가리킵니다. 믿음으로 집을 세워야 합니다. 연단 가운데 온전한 신앙으로 집을 세워야 합니다. 지혜로운 청지기처럼 지혜롭게 세워야 합니다. 이 신앙은 확실한 소망을 바라보고 주님을 위해 자신의 생애를 살아가는 신앙입니다. 견고한 믿음을 가지고 흔들림이 없이 살아가는 신앙입니다. 주의 재림을 바라보고 그날을 준비하는 신앙입니다.

 

그러나 나무나 풀이나 짚은 집을 세울 수 없는 재료들입니다. 든든함이 없고 쉬 마르며 불에 타 버립니다. 이런 신앙은 세속적인 신앙을 말합니다. 세상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먹고 마시는 생활 본위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어떤 재료로 세웠는지 그 공력을 시험할 날이 이른다고 했습니다. 13절에서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고 한 것입니다. 바울은 공력을 밝히는 날을 그날이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그날이라고 한 날은 주 재림의 날을 가리킵니다.

 

주의 재림의 날은 우리들의 신앙의 공력을 시험하는 날입니다. 그날에 우리의 신앙의 공력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험이 불로 나타나서 각 사람의 공력을 시험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불은 종말에 하나님의 교회가 당할 환난을 의미합니다. 종말에는 하나님의 교회가 많은 환난을 받게 됩니다. 첫째 화의 환난은 황충이 화로 임하는데 성도들이 만날 큰 환난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다섯달 동안의 무서운 환난 기간이 계속되는데 이 때 형편에 대해 ‘그날에는 사람들이 죽기를 구하여도 얻지 못하고 죽고 싶으나 죽음이 저희를 피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계2:10절에서는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고 했습니다. 15절에서 이 시험에 공력이 그대로 남아 있는 성도들은 상을 받지만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평소에 주 재림에 소망을 가지고 자신을 잘 단장하고 그의 신앙 생활을 준비한 성도들은 이 날에 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요한은 계1:3절에서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고 했습니다. 공력이 불타지 않으려면 예언의 말씀을 듣고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인내의 말씀을 지켜야 시험의 때를 면케 하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결론 : 그런데 이 불의 시련에서 타 버리면 해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이 해는 후 3년 반에 들어가 받을 무서운 대 환난을 의미합니다. 구원은 얻을 것이지만 그러나 불 가운데서 얻는 것 같은 괴로움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날 공력을 밝힐 때 여러분은 상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상은 주와 함께 천년왕국에 들어가는 축복입니다.

 

 

 

 

 

 

(14) 성도 안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성전

 

(고린도전서3:16-23)

 

 

바울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성전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16절에 나오는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놀랄 만한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라고 하신 말씀이 그것입니다.

 

1. 그리스도인과 하나님의 성전

 

16절에서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이란 말과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은 이란 같은 의미의 말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이시며 그 성령이 거하시는 곳이라면 그곳은 하나님의 성전이 될 것이기 때문에 성령이 임재하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을 알지 못하느냐’는 말씀은 지극히 당연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성령이 계십니다. 성령은 우리의 심령을 그의 거처로 삼으시고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가 우리와 함께 계시는 이유는 주님의 약속에 의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14:16절에서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은 우리의 생명을 거듭나게 하사 영생을 주십니다. 우리들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십니다. 우리를 세상의 모든 악한 것들로부터 지켜 주시고 우리의 생명을 성장케 하시며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내려 주십니다. 이런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사실은 얼마나 놀랍고 감격스러운 일입니까?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17절에서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고 경종해 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만약 우리가 성령이 거하시는 처소로서 부적격한 처소를 만들면 하나님께서는 그 처소를 멸하실 것이라는 경종입니다. 더럽힌다는 말은 성령이 계시지 못할 장소로 만드는 일을 말합니다. 이 일에 대하여 성경은 여러 가지로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요15:2절에서 예수님은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제해 버리신다’고 하셨습니다.

 

달란트의 비유에서도 한 달란트 받았던 자에게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좇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히6:4절에서 말씀하시기를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다’고 경종하고 있습니다. 요한 사도는 요일5:16절에서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그 사람을 멸하신다는 말씀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징계로 그 사람으로 회개케 하여 다시 거룩한 처소로 만드시는 일이요 다른 하나는 그 몸을 멸하여 이 세상에서 데려가시는 일입니다.

 

2.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하나님의 성전이 거룩하다는 말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의로우심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기 때문에 거룩합니다. 그러므로 그 성전을 이루는 우리는 하나님이 계시기에 합당한 처소가 되기 위해 거룩해야 하는 것입니다.

 

거룩함을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죄와 상관이 없어야 합니다. 죄와 타협하지 말고 죄와 싸우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혹 죄를 범했다면 곧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죄에서 정결케 되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다음에 우리의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이란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새 사람으로 변화 받는 일입니다. 이런 생활은 순종에서 나옵니다.

 

바울은 18절에서 ‘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속인다는 말은 누구든지 자기가 세상에서 지혜 있는 자로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자신의 지혜를 의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지혜를 최상으로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미련한 자가 오히려 하나님의 지혜로 참으로 지혜로울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지혜를 따라야 합니다.

 

세상 지혜에 대하여 19절에서 그 이유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 지혜는 하나님께 미련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미련한 지혜를 가지고서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지혜 있는 자들로 자기 궤계에 빠지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세상에 지혜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자기 지혜로 자기 궤계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고 했습니다.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이 결국은 자기 파멸의 지름 길이 되는 것입니다.

 

결론 : 바울은 그러므로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사람을 자랑하는 일은 무익한 일입니다. 말하자면 바울을 자랑하는 일이나 아볼라를 자랑하는 일은 우리의 신앙에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교회에 시기와 분쟁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사람을 자랑하여 분쟁을 일으킬 일이 아니라 그리스도만을 자랑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고전 4장 (15 - 18)

 

◆ 밤중소리 01-30 | VIEW : 374

 

 

 

 

 

 

 

 

 

(15)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

 

(고린도전서4:1-5)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신앙 생활에 있어서 한 가지 철측 같은 귀한 말씀을 들려주었습니다. 2절에 나오는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1. 하나님의 종들에 대한 인식

 

바울은 1절에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기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의 이 말은 성도들은 하나님의 종들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가리킨 것입니다.

 

먼저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여기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일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일꾼입니다. 이 말은 주님께서 하나님의 종들에게 주신 사명이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의 사명을 주신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일꾼이란 말은 사자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주님의 명령에 의해서 주님이 보내신 일꾼이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의 종을 대할 때 그리스도의 사자로 알고 그 앞에 겸손하고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음에 하나님의 종들을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비밀이란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에서 비밀입니다. 세상 지혜로는 배울 수도 없고 깨달을 수도 없으며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왜? 비밀이기 때문입니다. 이 비밀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영생과 천국의 기업을 주시기 위해 그들에게만 주신 말씀이기 때문에 비밀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같은 비밀을 하나님은 그의 종들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들은 이 비밀의 말씀을 성도들에게 가르침으로 그들을 영생의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들은 이처럼 막중한 사명을 맡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의 종들을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2.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

 

바울은 2절에서 ‘그리고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 했습니다. 맡은 자란 말은 하나님의 교회에서 맡은 직분을 말합니다. 직분을 맡은 자에게 하나님은 무엇을 구하시는 것입니까? 무엇보다도 충성입니다. 하나님은 교회에 세우신 직분자들에게 충성을 구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두 달란트와 다섯 달란트 맡은 종에게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충성된 종은 지극히 작은 일까지라도 충성합니다. 모든 일에 충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작은 일에 충성하는 자가 큰 일에도 충성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서머나 교회가 장차 받을 고난에 대해서 그들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이처럼 가르쳐 주셨습니다.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충성은 그 한계가 정해져 있습니다. 주님을 위해 죽기까지 충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3절에서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일에 대해 경계했습니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을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사람으로부터 판단을 받는 일을 큰 일로 여기지 아니했습니다. 그 판단에 구애 받아 위축되거나 그 판단이 옳다고 여기지 아니했다는 뜻입니다. 대개의 경우, 사람의 판단은 하나님의 판단과 다릅니다. 사람은 자기 기준에 의해 판단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기준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사람에 대한 판단은 최종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시기 때문에 사람을 판단하는 어리석은 일을 해서는 안됩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바울을 옳지 않게 판단하는 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일에 관심을 두지 아니했습니다.

 

바울은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겠다’고 했습니다. 자신에 대한 자기의 판단도 옳은 것은 아닙니다. 자기는 늘 자신에 대하여 보호하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가 지은 죄를 과소평가 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에 대한 모든 일은 하나님의 판단에 따라야 합니다.

 

바울은 4절에서 자기에게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자책할 것이 없다는 바울의 생각이 결코 자신의 의로움의 증거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이 가지고 있는 의는 자기가 생각하는바 자기에게는 자책할 아무 것도 없는 그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에 있다는 사실을 밝히려고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다른 사람을 판단할 것도 없고 자기를 섭불리 자기가 판단할 필요도 없이 맡은 일에 충성하면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날, 각 사람에게 행한 대로 칭찬이 있고 하나님의 판단에 따른 상급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우리에게 맡겨 주신 직분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으로 충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도 말려니와 자신에게 혹 자책할 아무 것도 없다고 해도 그 같은 자신의 판단에서가 아니라 주님이 주신 의로움이 자신의 의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언제나 주님만을 의지하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16) 대적하여 교만하지 말라

 

(고린도전서4:6-8)

 

 

고린도 교회에는 문제가 많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존귀히 여겨 그 말씀 안에서 생활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스스로 배부르며 부요하며 교만하여 대적하므로 교회의 분쟁을 초래했습니다. 이 일에 대하여 바울은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부요하며 우리 없이 왕 노릇하였도다’고 책망했습니다.

 

1. 기록한 말씀밖에 넘어가지 말라

 

바울과 아볼로는 고린도 교회에서 고리도 교인들의 신앙 생활에 본을 주기 위해 애썼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6절에서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다’고 했습니다. ‘이 일’이란 그들이 기록한 말씀을 무시하고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한 일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 일에 바울이나 아볼로의 본을 따른 것이 아니라 스스로 왕 노릇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받은 은사를 교회의 화평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지 못하고 교회 안에 파당을 형성하고 분쟁을 일으키는 일에 사용한 것입니다. 그들에게 내린 큰 은사는 그들의 신앙으로 능히 감당하지 못하므로 사탄에게 틈을 주게 된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그 안에서 생활해야 하나 그들은 기록한 말씀밖에 넘어가는 일로 인하여 부작용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말씀 안에서 그 말씀대로 살아갈 사람들입니다. 이 일에 예외가 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말씀밖에 넘어간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1)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이런 행동은 영적 교만에서 나옵니다. 사울 왕은 자기 직분도 아닌 제사장 직분에 속한 일을 하려다가 하나님께 버림을 당했습니다. 사람이 받은 은혜가 커서 영적 교만에 빠지면 종종 자기가 받은 은혜와 은사 본위로 하나님의 일을 처리하려 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말씀보다 우위에 있는 은사나 은헤는 존재할 수 없으므로 조심해야 합니다.

 

(2) 말씀밖에 넘어간다는 말은 말씀의 굴레에서 벗어난 생활을 말합니다. 사람이 교만하면 말씀에서 벗어난 생활을 하면서도 그 일에 대해 잘못을 잘 인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3) 다음에 말씀밖에 넘어간다는 말은 자기가 받은 지혜와 은사를 과신하여 말씀을 무시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 뜻이 곧 하나님의 뜻이요 자기 생각이 곧 하나님의 생각인 줄로 착각하고 임의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처럼 사람이 말씀밖에 넘어갈 때 어떤 부작용이 나오는 것입니까? 6절 끝절에 나오는 말씀을 보면 ‘서로 교만해 진다’고 했습니다. 교만한 자의 특징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한다는 사실입니다. 다음에 서로 대적한다고 한 것입니다. 대적이란 분쟁을 전제하고 파당을 전재한 말입니다. 그러므로 고린도 교회가 큰 영적 혼란을 초래하게 되었고 이런 상황에서 바울은 이 편지를 써서 고린도 교회에 보내게 된 것입니다.

 

2.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바울은 7절에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들이 교만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고 있습니다.

 

(1)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냐’는 말은 너를 세상에서 구별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신 분이 누구냐고 묻는 말입니다. 그들로 은혜를 받게 하시고 은사를 주시어 하나님의 교회의 일꾼으로 삼으신 분이 누구이신 데 왜 교만하느냐는 책망인 것입니다.

 

(2)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지혜와 은사와 능력에 있어서 많은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이 마치 자신들에게서 나온 것처럼 자랑하며 교만하며 시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자랑하며 교만한 모든 것들 중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지 않은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그들의 인생자체도 그들의 생애에 누리는 모든 것들도 모두 하나님께로 나온 것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가지고 자신의 것인양 자랑했습니다.

 

(3) 바울은 8절에서 고리도 교인들의 교만에 대하여 심히 꾸짖기를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부요하며 우리 없이 왕 노릇하였도다’고 했습니다. 배부르다는 말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영적 교만으로 이만하면 만족스럽다고 자위하는 모습입니다. 부요하다는 말은 나에게 있는 이 모든 은사로서 족하며 이 이상 더 무슨 은혜나 은사가 필요할 것인가고 여기는 마음입니다. 우리 없이 왕 노릇했다고 했는데 교회에서 하나님의 종을 제쳐놓고 자기들 멋대로 교회를 좌지우지했습니다.

 

결론 : 바울은 안타까운 심정으로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의 왕 노릇하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현세에서 교회의 교권을 휘잡아 왕 노릇하려고 하지만 우리의 왕권은 하나님 나라에서의 왕권이어야 합니다. 주의 재림 시 이 땅에는 ‘그리스도와 그의 왕국’이 건설될 것입니다. 그 때 정말로 충성한 성도들은 순교자의 반열에서 왕 노릇하게 될 것입니다. 그 왕권에 바울과 함께 동참하는 소망을 가지고 충성해야지 교만함으로 교회에 파당을 조성하고 분쟁을 일으키는 일은 결코 하나님이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17) 복음으로 인한 바울의 고난

 

(고린도전서4:9-13)

 

 

바울은 사도인 자신이 복음을 위해 받은 고난에 대해 그 고난의 도가 얼마나 심한 것인지 이에 대하여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런 바울의 고백은 이 같은 고난으로 교회를 위해 십자가를 지는 하나님의 종들을 무시하고 이런 고난의 토대 위에 세운 고린도 교회에서 파당을 조성하며 분쟁을 일으키고 스스로 왕 노릇 하는 일에 대하여 개탄하고 있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종들이 복음을 위해 겪는 고난

 

하나님께서 바울이나 다른 사도들을 어떻게 처우하셨는가에 대하여 바울은 9절에서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고 했습니다. 죽이기를 작정한 자 같다는 말은 바울이 겪은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말합니다. 그는 죽을 고비를 수도 없이 넘긴 것입니다. 그는 11절에서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 같은 일을 당한 일은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고 탄식했습니다. 마치 운동 경기장에서 사력을 다해 경주하는 선수처럼 관중들의 구경거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관중들은 천사와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천사들과 사람들은 사도들의 이 같은 고난을 재미 있게 보는지는 몰라도 자신들은 사력을 다하는 일임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경기를 끝까지 달려갔습니다. 바울은 딤후4:7절에서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고 했습니다. 그는 왜 이런 경주를 달린 것입니까? 그런 자에게 주시는 ‘의의 면류관’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 많은 상급을 받으려면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할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마5장에서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도들은 요한 사도만 빼놓고 모두 복음을 위해 순교의 제물이 된 것입니다.

 

2. 고린도 교인과의 비교

 

10절부터 바울은 자신의 경우를 고린도 교회의 선생들이 누리는 영광에 비교하여 그들의 교만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1)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지 않느냐’는 반문법으로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다는 말은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세상 지혜를 버리고 하나님의 지혜로 인하여 세상에서 어리석다는 놀림을 받아 온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 있는 사람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역설적인 말로써 너희는 그리스도를 믿는 까닭에 지혜롭고 강하며 존귀한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그들이 교회를 하나님의 지혜로 봉사하지 못하고 인간의 지혜로 교만하여 교회에 여러 가지 분쟁을 가져 온 일에 대한 비난인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다’고 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에 바울은 약했으며 비천했습니다. 복음은 전하는 자가 약해질 때, 강하게 나타나며 복음을 전하는 자가 비천해 질 때 그리스도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의 선생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왕 노릇할 수 있을 정도로 강했습니다. 파당을 조성하여 교회의 교권을 장악할 수 있을 정도로 존귀했습니다.

 

바울이 약하다고 표현했을 때 하나님이 약하게 보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바울을 그렇게 보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약한 것으로 강하게 역사 하십니다. 바울이 그의 육체에 떠나지 않은 질병이 있을 때 이것이 자기에게서 떠나기 위해 세 번이나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응답은 어떻게 내린 것입니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높이고 자신을 낮추는 일, 육체로 헌신하는 일 등은 사람에게 약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바울은 11절에서 자신의 비천하고 약한 일에 대한 연유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도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했다’고 했습니다. 바울의 사도 직분은 사람들로부터 대접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주리는 생활을 했다고 했습니다. 목마른 고비를 넘겼습니다. 입을 것이 없어 헐벗기조차 했습니다. 머물 곳이 없어 정처가 없었습니다. 손으로 일을 하며 그 수고 한 삯으로 복음을 전하는 비용으로 썼습니다. 바울의 간증은 그뿐만이 아닙니다.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했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다른 이로부터 욕을 먹을 때에는 도리어 축복해 주는 자세를 취했습니다. 핍박을 당했을 때에는 대항하지 않고 핍박을 참았습니다.

 

결론 :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자신들의 처참한 모습을 이처럼 고린도 교인들에게 전한 이유는 그들이 좀더 겸손한 가운데 서로 용납하고 이해하며 교회를 세우는 일에 자신을 희생하고 헌신할 것을 권면하기 위해서입니다. 바울처럼 헌신적으로 교회를 섬길 때 바울과 같은 상급을 받는다는 사실을 깨다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18) 사랑하는 자녀 같은 권면

 

(고린도전서4:14-21)

 

 

바울은 아직까지 고린도 교인들에게 부끄럽게 여길 정도로 심한 꾸지람을 주었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위로하는 말투로 14절에서 이처럼 말씀해 줍니다.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바울이 그들을 자녀 같이 사랑하였기에 책망한 것입니다. 잠6:23절에서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이 같은 책망은 고린도 교인들로 능히 자기 자신을 돌이켜 볼 수 있게 하였고 그들로 회개의 기회를 가질 수 있게 한 것입니다.

 

1. 복음으로 너희를 낳았도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자녀처럼 대했고 자녀처럼 사랑했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여러 가지 어려운 여건 아래서 고린도 교회를 개척하였고 개척 초기에 함께 눈물을 뿌리며 복음의 터를 닦고 씨를 부렸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적어도 자기가 복음으로 그들을 낳았다고 하는 자부심입니다. 15절에서 바울은 그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그들을 거듭나게 했거나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들로 새로운 생명을 얻게 했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아비의 입장에 있다면 그는 자녀들에게 당연히 책망과 권면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많은 스승이 있습니다. 말씀의 가르침을 받을 때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이 스승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여 예수를 영접하게 하는 일은 여러 명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그런 역할을 그들에게 했다고 한 것입니다.

 

바울은 16절에서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 받는 자 되라’고 말씀해 줍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교회 앞에서 부끄러운 행실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모든 일에 본을 보여주기 위해 힘썼습니다.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지 않기 위해 모든 일을 삼가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담대하게 ‘너희는 나를 본 받는 자 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선생에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바울처럼 교인들을 향하여 ‘너희는 나를 본 받는 자 되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자신은 아무런 짐을 지지 않고 교인들에게만 호령 치고 짐을 지우는 일은 바리새인의 태도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자들에게 눅11:46절에서처럼 책망하셨습니다. ‘너희 율법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 도다’고 하셨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이처럼 권면해 주고 있습니다.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2. 말에 있지 아니하고 능력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

 

바울은 20절에서 중요한 말씀을 들려주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 한 말이 그것입니다. 신약 성경에는 이 ‘하나님의 나라’라는 단어가 많이 등장하는 데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의 영원한 기업의 땅인 하나님의 나라로 천국을 의미하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께서 말씀으로 다스리시는 현세적인 하나님의 나라인데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후자에 속한 것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이 저적한 대로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지 못했습니다. 교만했고 파당을 조성했으며 분쟁을 일으키고 교권을 위해 싸웠습니다. 그들에게 주신 영적 은사에 있어서도 교회의 유익을 위해 활용한 것이 아니라 자기 교만과 자랑을 나타내는 일에 사용되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 한 것입니다.

 

여기서 말이란 표현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 적용 될 수 없는 허황된 말을 의미합니다. 그들의 말은 구원이나 믿음이나 은사 면에 있어서 미사여구로 듣기는 좋았지만 실인즉 아름답게 포장된 헛된 말일 뿐, 하나님의 나라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 이 같은 허황된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능력이 있다’고 했습니다. 실천력이 없는 언어의 구사는 시끄러울 뿐이요 교회로 요란하게 하여 분쟁을 일으킬 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굳게 서야 합니다. 소망 가운데 살아가야 합니다. 이 모든 것들은 말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능력에서 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하여 그들이 능력 가운데 살아가는 믿음을 보시고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고 칭찬하셨습니다.

 

결론 : 교만한 자들은 말로만 한목 봅니다.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여 그들의 말을 들을 것이 아니라 능력을 볼 것이라고 했습니다. 순종하여 열매를 맺는 일, 겸손하여 자기를 낮추는 일, 교회를 사랑하고 헌신하는 일은 능력에서 나옵니다. 이런 능력을 받기 위해 기도하고 이런 능력 가운데서 신앙 생활을 할 때 주님의 칭찬을 들을 수 있습니다.

 

 

 

 

 

 

 

 

 

 

 

 

 

 

 

 

 

고전 5장 (19 - 21)

 

◆ 밤중소리 01-30 | VIEW : 374

 

 

 

 

 

 

 

 

 

(19) 용납 못할 음행죄

 

(고린도전서5:1-5)

 

 

바울은 아직까지 고린도 교회가 얼마나 타락했으며 교만하여 교회를 돌보지 아니하고 오히려 파당을 만들어 분쟁을 일삼는 일에 대해 통분해 하며 그들을 책망했습니다. 이제 바울은 5장에 들어와 그들 가운데 얼마나 무서운 죄악이 있으며 그런 죄를 범한 교인이 있는데도 그에 대해 교회에서 아무런 제재를 가하지 아니하며 오히려 교만해져서 그들 중에서 그 죄인을 물리치지 아니한 일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1. 무서운 음행죄

 

바울이 지적한 죄인은 음행을 저지른 자입니다. 바울이 통탄한 것은 이 죄인은 이방인인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고린도 교인이 된 성도란 사실입니다. 이 자가 지은 범죄에 대하여 ‘누가 그 아비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 아비의 아내라면 아버지의 부인으로 엄밀히 말하면 자기 어머니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아비의 아내라는 표현을 쓴 것은 아버지의 다른 아내란 뜻으로 계모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모든 죄는 몸밖에 있지만 음행은 몸 안에 머무는 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부에게 ‘두 몸이 한 몸을 이루라’는 축복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남녀의 몸은 둘인 것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한 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창기와 음행하는 자는 창기와 한지체가 된다고 말씀했습니다.

 

(1) 고린도 교인들은 이 같은 죄인에 대해 통한히 여기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통한히 여긴다는 말은 ‘죽은 자로 인하여 슬퍼한다’는 뜻으로 말할 수 없는 탄식과 통분을 동반한 슬픔을 말합니다. 그들은 이런 죄가 악한 누룩처럼 교회에 퍼지지 않을까 통한히 여겼어야 했습니다. 혹 이방인들이 알고 하나님을 만홀히 여길까 통한히 여겼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런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이 같은 생각은 아마 두 가지 의미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육신의 음행이 그 당시 사회에 만연되었었기 때문에 대수럽지 않게 여겼거나 아니면 육신의 죄는 구원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이단적인 구원관을 가지고 있었거나 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하려 하지 아니하고 그런 죄까지라도 사랑으로 용납해야 할 것이란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2. 바울의 조치

 

바울은 이 같은 추악한 범죄에 대하여 3절에서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같이 이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몸은 그들과 멀리 떠나 있었지만 심령으로는 거기서 이런 사실을 목격한 것같이 죄악을 행한 자에 대해 이미 판단을 내렸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4절과 5절에서 그 자에 대해 주의 이름으로 정죄할 것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아직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견실한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일을 부끄럽게 여기며 통한히 여기는 교인들이 얼마간 있었습니다. 바울은 자기 육체는 멀리 떨어져 있어 그들과 함께 모일 수는 없으나 자신의 영이 그들과 함께 있어 이런 자에 대한 정죄를 선언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5절에 나오는 말씀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어 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고 한 말씀이 그것입니다. 사탄에게 내어 주었다는 말은 사탄에게 그 자의 죄에 대한 응징을 임의로 맡겼다는 뜻입니다. 욥2:6절에는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를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지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욥에게는 그의 생명을 해하지 말 것을 명하셨지만 이 자의 경우, 그의 생명까지 해 할 것을 허락하셨을 것입니다.

 

문제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라’는 말에 있습니다. 육신이 멸한다는 말은 그의 죄값으로 사탄에게 내어 줌으로 그의 육신의 생명이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육신이 죽는 일은 혹 죄로 인하여 오는 경우도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고전11:30절에는 성찬에 경망스럽게 참여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에 대해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잠잔다는 말은 죽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런 자의 경우도 그의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얻는다’고 했는데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 음행자는 이미 주 예수의 이름으로 구원을 얻은 자임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육체는 사탄에게 내어 주어 죽지만 그의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입니다. 주 예수의 날이란 ‘죽어서 주님 앞에 가서 그 앞에 서는 날’을 의미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비슷한 경우의 사건은 벧전3:19절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노아 홍수 당시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방주에 들어가지 못하고 홍수로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영은 특별한 처소(영)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주님의 복음을 들었습니다.

 

결론 : 우리는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라 해도 고린도 교회 교인의 경우처럼 무섭고 가증한 죄를 범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죄인일지라도 비로 그의 육체의 생명은 빼앗아 가셔도 그의 영의 구원은 보장해 주신다는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알고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20) 누룩 없는 떡

 

(고린도전서5:6-8)

 

 

바울은 죄에 대하여 무감각하며 방임하는 고린도 교회의 태도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에 대해 6절에서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는 질책으로 경종해 주고 있습니다. 죄를 누룩으로 비유해서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처럼 방치된 적은 죄가 하나님의 교회로 타락시키며 성도들로 죄의 함정에 빠지게 한다는 사실을 경계해 준말입니다.

 

1. 누룩을 버리라

 

바울은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무엇을 자랑한 것입니까? 그들이 형성한 파당을 자랑했습니다. 그들이 받은 은사를 자랑했습니다. 그보다 더 두려운 일은 그들은 교회 안의 죄를 관용하고 방임한 것을 자랑한 것입니다. 아마도 그들은 구원은 이미 확정적이기 때문에 각자의 죄에 대해 제재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폭넓은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신들의 그 같은 관용하는 태도에 대해 자랑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의 이 같은 자랑에 대해 ‘옳지 않다’ 고 했습니다. 그들의 자랑은 쓸모 없는 허탄한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처럼 죄를 방관하며 방치하는 일은 결코 자랑할 일이 아니요 오히려 옳지 않다고 나무랐습니다. 악한 이유에 대해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한 것입니다. 누룩의 역할은 적은 량으로 많은 것을 부풀게 하는 데 있습니다. 이처럼 죄의 본성도 적은 것으로부터 많은 것으로 번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약1:15절에서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죄는 회개하여 소멸해 버려야 사라져 버립니다. 그 죄를 마음에 그대로 간직해 두면 그 적은 죄가 누룩이 되어 온몸을 더럽히게 되고 다른 덩어리에까지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죄악을 용납하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죄를 소멸하는 곳이요 죄의 사유함을 받는 곳이며 죄를 회개하여 버리는 곳입니다. 그래서 죄악을 행하는 자가 있으면 권고하여 회개케 해야 하며 경계하여 그 악한 누룩이 다른 곳으로 번지지 않도록 조처를 취해야 하는 것입니다.

 

2. 누룩 없는 떡으로 하라

 

바울이 7절에서 말하고 있는 누룩에 관한 교훈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1) ‘너희는 누룩 없는 자’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속죄를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속죄함을 받았습니다. 이 속죄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의 원죄에 대한 속죄입니다. 아담으로부터 그 자손에게 내려오는 원죄는 속죄 받을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의 피로 그 속죄 제물이 되시므로 의롭다 함을 얻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한 속죄입니다. 원죄의 속죄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은 그가 지은 죄를 하나님 앞에 회개하므로 속죄함이 되는 것입니다. 이같은 속죄는 우리 속에 내재해 있는 누룩을 없앤 것입니다. 지난날의 우리를 더럽게 하고 우리로 정죄함을 받게 하며 하나님의 심판대 앞까지 이끌어 간 누룩이 사라진 것입니다. 누룩 없는 자가 되었습니다.

 

(2) 다음에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누룩이 없는 자입니다. 떡덩이에서 누룩이 없어졌으면 새 덩어리가 되어야 합니다. 새 덩어리란 새 사람을 말합니다. 죄를 벗었으니 새사람으로 옷 입어야 합니다. 엡4:22절에서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묵은 누룩’이란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입니다. 묵은 누룩은 이미 누룩의 효능이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로 올바른 믿음을 갖는 일에 장애가 될 뿐입니다. 이것을 내어버리라고 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미 우리의 어린양 곧 그리스도께서 회생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누룩이 없어졌으니 묵은 누룩을 가지고 있으면 안됩니다. 반면에 이제는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해야 합니다. 이 떡은 생명의 떡입니다. 이 떡에는 누룩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제 묵은 누룩을 버리고 누룩 없는 떡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 떡에 대해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이라고 했습니다. 이 떡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생활과 생애에 새로운 떡이 되어 생명의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8절에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명절이란 유월절을 말합니다. 명절을 지키자는 말은 그리스도인들의 새로운 신령한 생활을 말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유월절을 지키는 생활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린양의 피가 우리를 속죄하셨고 우리의 생활을 정결케 하기 때문입니다.

 

결론 : 우리는 누룩 없는 자들임을 알아야 합니다. 죄악을 가지고 살아갈 사람들이 아닙니다. 회개로 그 누룩을 제하고 누룩 없는 떡으로 누룩을 대신하여 새로운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진실한 믿음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21) 그리스도인의 사회 생활과 교회 생활

 

(고린도전서5:9-13)

 

 

그리스도인의 생활에는 두 가지 구분이 있습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인의 사회 생활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인의 교회 생활인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범죄자와의 관계나 교제는 그것이 일반 사회 생활을 하는 일에 믿지 않는 이웃들과의 관계가 아님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밝혀 주고 있습니다.

 

바울이 범죄자와 교제하지 말라는 일에 대하여 10절에서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과 토색하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라’고 한 것입니다.

 

1. 그리스도인의 사회 생활 적응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의 영적 소속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밖에서 생활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이 세상을 따라가거나 이 세상 풍습을 다라 살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세상은 어둠에 속해 있습니다. 어둠에 속해 있다는 말은 죄 가운데 있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서 죄를 뺀다면 이 세상은 존재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빛이면서도 죄악 세상 가운데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은 범죄자의 소굴이기 때문에 음행하는 자, 탐하는 자, 토색하는 자, 우상 숭배하는 자 등 이런 류의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곳이 세상입니다. 우리들도 세상에 속했을 때에는 그런 생활을 해 온 사람들입니다. 지금 우리 이웃들이나 혈육에 속한 형제들이나 친척들이나 학교나 직장의 동료들은 아직도 이런 세상 죄악 가운데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그런 사람들과 매일 인사하면서 살아가야 하고 친분을 가지고 살아가며 교제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육신적으로 살아가는 사회 생활에서 이런 불신자들과의 교제는 불가피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이들과의 관계를 끊어야 한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고 말씀해 주므로 그런 일이 불가능한 일임을 인정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인의 형제들과의 교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도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한 사회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이 특수한 사회가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이곳에서의 생활은 빛의 생활이요 의로운 생활이어야 합니다. 어둠의 생활이 용납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속죄함을 받은 사람들이 한 지체가 되어 이 사회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11절에서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람하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후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토색하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 가운데 좀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가 몇 개 나오는 데 탐람이란 말은 재물이나 음식에 지나친 욕심을 내는 사람을 말합니다. 후욕이란 말은 형제를 중상하고 비방하는 사람들을 말하고 토색한다는 말은 약탈하거나 노략질 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자들은 교회에서 악한 누룩들로 아무런 제재를 하지 않으면 온 덩어리에 번져 교회를 타락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경계하는 것은 바로 이런 사람들에 관한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한 형제가 된 성도들 중에 아직도 이 같은 죄 가운데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런 사람들과는 교제하지 말라는 권면인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일은 그렇다고 이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란 말은 아닙니다. 이들은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그 은혜를 저버리고 죄에 유혹되어 범죄자가 되었고 죄를 버리지 못하고 그 죄 가운데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이같은 자들을 버리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들에게 권면해야 할 것입니다. 회개 할 것을 권유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의 정해진 법에 따라 그들을 처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여전히 죄 가운데서 떠나지 아니하고 계속적으로 죄악 생활을 계속할 때 교회에서는 이들에 대해 응당 조치를 취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주님은 마18:15절 이하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셨습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런 사람들과는 사귀지도 말고 함께 먹지도 말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함께 먹지도 말라는 말은 성찬에 참여시키지 말라는 뜻입니다.

 

결론 : 바울은 교회의 권위에 대하여 12절에서 ‘외인들을 판단하는데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 마는 교중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치 아니하랴’고 했습니다. 외인들의 판단 즉 세상 사람들의 판단은 세상 사람들이 할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에 속한 사람들에 대해서 ‘너희가 판단치 아니하랴’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13절에서 결론적으로 ‘외인들은 하나님이 판단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들은 너희 중에서 내어 쫓으라’고 했습니다.

 

 

 

 

 

 

 

 

 

 

 

 

 

 

 

 

고전 6장 (22 - 24)

 

◆ 밤중소리 01-30 | VIEW : 391

 

 

 

 

 

 

 

 

 

(22) 성도들간의 송사

 

(고린도전서6:1-11)

 

 

고린도 교회에는 바울이 지적하고 책망한 대로 또 하나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 문제는 바로 교인들 간의 소송 문제입니다. 그들은 교회에서 충돌이 잦았습니다. 시기와 분쟁이 계속해 일어나고 각가지 죄악이 범람한 가운데서 혼란을 거듭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 문제를 교회 안에서 지혜롭게 해결하지 못하고 세상 법정으로 끌고가 세상 사람들 앞에서 교회의 수치를 드러내 놓았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이런 처사에 대해 질책하면서 2절에서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치 못하겠느냐’고 말했습니다.

 

1. 성도의 송사에 대한 경고

 

바울은 1절에서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로 더불어 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송사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고 했습니다. 그들은 분쟁이나 다툼이 있을 때 그 송사를 세상 법정으로 가져갔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의 판단에 따라 살아갈 사람들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판단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1)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고 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판단을 받을 사람들이 아니요 오히려 세상을 판단할 사람들입니다. 그 판단의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으며 그 말씀으로 살아가는 우리는 능히 그 말씀을 가지고 세상을 판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판단은 하나님의 판단과 일치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실 때 그의 말씀으로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2) 성도는 천사들도 판단한다고 했습니다. 3절에서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고 했습니다. 여기서 판단한다는 말은 그들을 우리가 심판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천사의 행위까지도 판단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들 천사들은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자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으로 정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그들의 행실에 대하여 판단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정죄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3) 우리들이 이처럼 세상을 심판할 수 있는 자리에 있거늘 하물며 교회 안에서 세상에 관계된 사건이 있을 때에, 그 문제를 교회안에서 해결하려하지 않고 교회에서 경히 여기는 자들, 구원에 이르지 못하였고 속죄도 받지 못하였으며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 받을 그런 자들의 판단을 받기 위해 세상 법정으로 끌어가느냐고 책망한 것입니다.

 

(4) 형제간의 송사에 대해 바울은 7절에서 ‘너희가 피차 송사 함으로 너희 가운데서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같은 형제를 세상 법정에 송사 하는 일은 그 자체가 완연한 허물이라고 나무랐습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 재판에 송사 하여 이기기보다는 불의를 당하는 편이 오히려 낫다는 것입니다. 불의를 당한다는 말은 불이익이나 손실을 말합니다.

 

2.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자

 

바울은 8절에서 형제를 송사 하는 일은 서로 속이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불의를 행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런 일에 미혹을 받지 말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1)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곳에서 불의한 자에 대해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2) 그런데 다음 11절에 나오는 말씀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 이런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고 했습니다. 너희 중에 이런 자들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믿기 이전에는 어둠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이같은 죄 가운데서 살아갔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런 죄악에 물든 생활을 해 온 것입니다.

 

바울의 이 말은 두 가지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하나는 교회에서 성도들간의 송사를 이런 세상 사람들의 판단에 맡겨서야 되겠느냐는 뜻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우리가 지난날에 이처럼 죄안 가운데 살아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형제들의 죄에 대해 관용하고 사랑을 베풀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형제의 허물을 정죄하거나 법적인 심판을 내려 그 사람으로 파멸에 이르게 할 것이 아니라 사랑을 베풀어 회개의 기회를 주라는 것입니다.

 

결론 : 이런 사람들도 우리의 지난날과 같이 회개하여 돌이키면 새롭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능히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지난날에 하나님을 모르고 범죄했을 때의 일을 생각하고 그리고 그 후 그리스도를 영접하므로 의롭다함을 받은 것처럼 범죄한 형제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고 그들로 죄에서 돌이킬 수 있도록 교회에서 권면하고 징계해야지 사회 법정에서 심판을 받도록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23) 주를 위해 존재하는 우리의 몸

 

(고린도전서6:12-14)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그리스도인들의 몸의 사용에 대하여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몸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결론적으로 ‘몸은 주를 위하여 있다’고 말씀해 줍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그의 몸을 사용하는 일에 있어서 몸을 죄악의 도구로 사용하지 말고 주를 위한 존귀한 것으로 사용해야 할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바울은 롬6:12, 13절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1. 몸의 사용

 

12절에서 바울은 ‘모든 것이 내게 가하다’고 했습니다. 내게 가하다는 말은 내 몸을 가지고 내가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죄의 도구로도 쓸 수 있고 의의 병기로도 쓸 수 있는 것입니다. 악한 일도 할 수 있으며 다른 이에게 해를 끼치는 일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다’고 했습니다. 유익하지 않은 일에 자기 몸을 사용하는 일은 자기의 생명을 해치는 일입니다. 이성이 없는 행동은 짐승과 다를 바 없고 그리스도인이 믿음을 저버리는 행동은 영적 큰 손실을 자초하는 일입니다.

 

사람은 그의 생애에 자기가 심는 대로 거둔다고 했습니다. 자기 몸을 가지고 육신을 위해 심는 자는 그 육신으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해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둔다고 했습니다. 전11:9절에서 경종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과 네 눈이 보는 대로 좇아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고 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다고 행한다면 그 행위를 감찰하시고 나중에 그로 인하여 심판하실 하나님이 계시다는 두려운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아무에게든지 제재를 받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우리에게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자유가 있지만 자기는 누구에게도 속박 받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속박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뿐입니다. 죄악에 속박 받는 생활은 죄의 종으로 전락되는 일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얻은 귀중한 자유를 세상일에 속박 받으면 그 자유를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2. 우리의 몸은 주를 위해 있다.

 

13절에서 바울은 ‘식물은 배를 위하고 배는 식물을 위하나 하나님이 이것 저것 다 폐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식물은 배부름을 위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배는 식물을 먹는 일에 소용됩니다. 이런 것들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모두 폐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식물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은 짐승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몸은 ‘음란을 위해 있지 않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고전5:1절에서 지적한 대로 아비의 아내를 취한 자들과 같은 정죄 받을 자들처럼 몸을 음란으로 욕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처럼 몸을 사용하는 일에 지극히 조심해야 할 일을 말하고는 우리의 몸은 ‘주를 위해 있다’고 했습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의 몸은 의의 병기로 쓰여질 몸입니다. 주를 위해 살아가야 할 몸입니다. 우리가 새 사람이 된 것은 우리의 영 뿐 아니라 우리의 육체까지도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죄를 위해 쓰여질 몸이 아니라 주를 위한 몸입니다.

 

먹는 일도 마시는 일도 육신으로 하는 모든 일이 오직 주를 위해 사용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를 죄악에서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전10:31절에서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해 줍니다. 성경에서 우리에게 권면하는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과 몸을 거룩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영은 믿음으로 거룩해졌습니다. 몸은 주님께 드리는 생활을 통해서 거룩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몸이 주님께 드려 지려면 먼저 그 마음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새로운 마음으로 몸을 다스릴 때 우리의 몸이 거룩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몸으로 주님께 영광 돌리려면 영으로 육의 행실을 죽여야 합니다. 우리의 육신은 지난날 악의 병기로 쓰여졌기 때문에 악에게 길들여져 있습니다. 이제 영으로 육을 다스려야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결론 : 14절에 있는 말씀은 우리의 몸이 왜 소중한가에 대해 말씀해 줍니다.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님을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살리신 그 권능으로 우리의 몸도 다시 살리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부활의 소망인 것입니다. 다시 부활하는 몸은 신령한 몸이지만 이 몸으로 살아나기 때문에 그런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 받을 우리의 몸을 소중히 다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는 몸이 되도록 힘쓰는 생애를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24) 값으로 사신 우리의 몸

 

(고린도전서6:15-20)

 

 

오늘 본문 20절에 나오는 말씀은 우리가 깊이 새겨야 할 말씀입니다.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하신 말씀이 그것입니다. 바울은 15절에서 그리스도인의 몸을 그리스도의 지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몸이라고 한 말은 영적인 의미에서의 몸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우리의 육체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지체인 우리의 몸을 가지고 함부로 죄악과 연합하거나 불의한 일에 도구로 쓰여진다면 이미 그 육체는 그리스도의 지체로써 굉장한 손상을 받은 것이 됩니다.

 

1. 그리스도의 지체인 우리의 몸

 

바울은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육신이지만 우리의 이 육신 안에 성령이 거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육체는 성령의 전이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육체가 장차 썩어질 존재라고 학대해서는 안됩니다. 아무 쓸모 없는 것으로 치부하여 함부로 팽개쳐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육체는 비록 죽지만 두 가지 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하나는 우리의 몸은 우리가 죽기까지 우리의 생명의 그릇으로 우리를 존귀하게 하고 우리로 하나님을 섬기게 하며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일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들로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며 우리들로 하늘에서 상급을 받을 수 있게 합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우리의 몸은 죽은 것으로 끝나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살아나는 부활의 영광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생존에 우리의 몸을 지극히 영화로운 몸으로 부활시키기 위한 소망을 가지고 우리의 몸을 훈련하고 연단하며 새롭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기 위해 우리의 생애를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생활을 할 때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15절에서 바울은 ‘너희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고 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창기와 합하는 자는 저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 했습니다.

 

지체는 언제나 연합하는 존재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창기와 연하면 창기와 한 지체가 된다고 한 것입니다. 도적과 연하면 우리의 지체가 도적과 한 지체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 중에서도 가장 피해야 할 죄악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 죄가 곧 음행이라고 했습니다. 음행하는 자는 그 몸 자체에 죄를 범하기 때문에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짓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른 죄는 몸으로 짓는 죄인 것이 아니라 몸밖에 있는 죄입니다. 몸으로 지은 죄지만 그 죄는 몸밖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음행은 그 몸을 가지고 짓는 죄이며 몸 안에 머무르는 죄이기 때문에 몸 자체에게 죄를 범하는 행위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19절에서 바울은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자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 했습니다. 성령의 전인 우리의 몸을 죄악의 도구로 사용하여 그 몸으로 죄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지체로서의 그리스도인은 다른 것과 연합하면 안됩니다. 특히 음란의 도구로 쓰면 안돼는 것입니다. 오직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몸을 이루고 있는 그리스도만이 연합의 대상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15:4절에서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않으면 그러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그리스도의 지체들이기 때문에 다른 지체와 연합하는 어리석은 일을 해서는 안됩니다.

 

2. 우리의 몸의 주인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의 존재가 이미 자신의 것이 아니란 사실을 인정하는 일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신앙생활이 이 사실을 인정하는데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값주고 산 것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의 피로 값주고 우리를 당신의 소유로 삼으셨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고귀한 대가를 치루시면서까지 우리를 당신의 소유로 삼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새롭게 살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천하보다 더 값진 값을 치루시고 우리를 자기 소유로 삼으신 것입니다. 이처럼 귀중한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그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아니하십니다. 우리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그리스도의 지체로 만드시어 우리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결론 : 우리를 값 주고 사신 목적에 대하여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하나님의 소유된 몸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몸을 가지고 죄악의 도구로 삼고 창기와 연합하거나 도적과 연합한 생활을 한다면 어찌 하나님의 진노를 면할 수 있을 것입니까? 우리는 어떤 생활이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생활인가를 잘 깨달아 우리의 몸을 그리스도의 지체로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고전 7장 (25 - 28)

 

◆ 밤중소리 01-30 | VIEW : 479

 

 

 

 

 

 

 

 

 

(25) 그리스도인의 결혼 생활

 

(고린도전서7:1-7)

 

 

바울은 1절에서 ‘너희의 쓴말에 대하여는’ 이란 말을 통해서 아마도 고린도 교인들이 음행의 문제와 부부간의 성생활에 대해 질문한 일이 있었던 것으로 시사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고린도 지역에는 남녀간의 성생활에 대해 극단적으로 대립되는 두 종류의 부류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영지주의 라고 하는 금욕주의자들이 있어서 부부간의 성생활을 금기시 했습니다. 다른 한편, 성으로 인한 쾌락주의 자들이 있어서 성생활에 방종한 부류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특수한 환경 속에서 교인들은 과연 어떤 생활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이 문제를 바울에게 서신을 통해 질문한 것입니다.

 

 

1. 남녀간의 결혼의 원칙

 

(1) 첫째로 그들의 질문에 대해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라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바울의 말은 어떤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준말인지 질문의 내용이 없어서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바울의 이 말이 결혼을 하지 말라거나 부부간의 성생활에 대해 절제해야 한다는 것을 권면한 말은 아닙니다. 불륜한 관계의 접촉의 위험성을 경계하는 말입니다.

 

(2) 다음에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이 말은 음행을 하지 않기 위해 결혼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결혼은 음행죄가 퍼지기 이전에 생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결합시키신 일은 음행의 연고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에 대하여 마19:4절에서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남자와 여자를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고 하셨습니다.

 

만약 사람이 결혼하지 않으면 그의 생리적 구조로 미루어 볼 때 음행 할 수 있는 여지가 많은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으로 정상적인 생애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남녀의 결합으로 결혼을 해야 하며 정상적인 성생활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밝혀 주신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자녀가 생산되며 그 자녀들 중에는 이미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도 있을 것이기 때문에 남녀간의 결합으로 인한 결혼은 필수적인 것입니다.

 

만약 사람이 결혼을 기피하여 성적 욕구를 채우지 못했을 때 음행죄를 범할 가능성이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본문에서 ‘음해의 연고로’ 남녀간 결혼하는 일이 당연하다는 의미로 이 말씀을 준 것입니다.

 

(3) 바울은 또 4절에서 ‘아내는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결혼한 부부는 자기 몸을 자기가 주장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교훈은 상대방을 무시하거나 상대방의 경우를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자기 자신이 부부 관계를 독선적으로 주장하려는 자세를 취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아내나 남편은 서로간 인격을 존중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부부 생활에 있어서도 서로 존중하는 가운데 서로간 만족할 만한 부부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일방적인 만족이나 상대방을 무시한 자기 욕구 충족으로 만족하는 행위는 잘못된 처사입니다. 특히 동양 남성들은 여자를 자기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삼는 비인격적 처사를 일삼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이런 일에 대해 성경은 잘못된 일임을 교훈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2. 분방으로 인한 사탄의 시험을 조심하라

 

5절 말씀에서 바울은 부부간 ‘서로 분방하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분방이란 말은 한문으로 각기 다른 방을 쓴다는 뜻인데 헬라어에 나타난 이 말의 뜻은 ‘의무를 빼앗지 말라’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요구를 거절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여자들은 성에 대해 부끄럽게 여겨 남편에게 먼저 요구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남자의 일방적인 행동으로 부부 생활을 이루게 되기 때문에 가정의 사랑과 행복에 금이 가는 것입니다. 부부 생활은 일방적인 자기 생각만으로 멀리해서는 안됩니다. 금욕이 그리스도인의 미덕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에서는 금욕을 금하고 있습니다.

 

분방에 대해서 바울은 한 가지 허용하는 언질을 주고 있습니다.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기도 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어떤 목적을 위해 간절히 기도할 때 그 기도 기간에는 얼마 동안의 부부 생활의 근신은 있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합의상’ 하라고 했고 ‘얼마 동안’만 하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권면하는 일은 ‘사단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사탄은 우리를 시험하는 자입니다. 예수님이 금식하신 후, 가장 어려울 때 나타나 ‘돌로 떡을 만들라’는 유혹을 준 것처럼 우리에게 시험의 기회가 있을 때 그 틈을 이용하여 시험하는 것입니다. 오랫동안의 부부 생활의 절제는 마귀로 그런 시험의 기회를 줄 수 있기 때문에 기도 기간이 끝나면 곧 정상적인 부부 생활로 돌아가야 합니다.

 

 

결론 :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일에 하나님의 말씀의 지혜를 따라 생활해야 합니다. 부부 생활도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여 지식에 따라 아내를 취하고 남편을 취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일에 하나님의 말씀과 지식을 기준으로 삼아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26) 남편과 아내의 결합과 이혼 문제

 

(고린도전서7:8-16)

 

 

바울은 과부들의 처신과 결혼한 남녀들과 그들의 처신 문제에 대해 몇 가지로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믿지 않는 자와 헤어질 경우, 그 일이 합당하냐는 문제에 대해 여러 가지로 해석을 가하고 있지만 바울은 15절에서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우리를 부르실 때 하나님은 화평 중에 부르셨기 때문에 화평 가운데 살아갈 것을 권면하기도 했습니다. 이 말씀은 음행한 연고 외의 이혼 문제이기 때문에 이혼이 불가하다는 견해도 있지만 예수님이 음행한 연고의 이혼에 대해서는 버리는 것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표현된 이혼은 음행한 연고 외에 다른 죄목을 부쳐 아내를 버리고 다른데 장가드는 경우를 말씀하셨지만 바울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고 한 것입니다. 자신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갈리기를 원하거든 그렇게 해도 된다는 의미입니다.

 

1. 혼인하지 아니한 자와 과부들의 처신

 

바울은 8절에서 혼인하지 아니한 자들과 과부들에게 말하기를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혼인하지 아니한 자들이란 과부에 비교한 말로 남자들을 가리킵니다. 이 말은 미혼자 다시 말하면 총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한번 결혼한 후, 혼자 지내고 있는 홀아비를 뜻합니다. 바울이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다’는 말은 바울이 결혼한 일이 있는 홀아비라는 말인 것이 아니라 자기처럼 독신으로 살아가는 편이 좋을 것이라는 권면에서 나온 말입니다. 바울이 결혼한 경험이 있는 홀아비인지, 아니면 결혼 경험이 없는 총각이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그가 비록 결혼의 경험이 있었다고 해도 자식이 없이 아내가 죽었다면 혈연이 아무도 없는 독신자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냥 지내는 것이 좋다는 말은 ‘주님만을 섬기는 일에 온 생애를 바치는 일이 보람있는 생애를 살아가는 방법’이라는 의미에서 나온 말입니다. 다시 결혼을 하게 되면 아내를 가져야 하고 남편을 가져야 하며 가족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면 다시 생활과 가족에 얽매인바 되며 아직까지 홀몸으로 주님을 위해 살아온 생애에 흠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그런 점을 안타깝게 여겨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다’는 권면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9절에서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혼인하라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나으니라’고 말씀해 줍니다. 젊은 남녀들이 혼자 살아간다는 일은 어려운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몸을 결혼 생활에 알맞게 만드셨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성욕이 발동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때 홀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절제해야 하는 것입니다. 절제를 못하면 음행죄를 범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절제하기가 힘들거든 차라리 결혼을 하라고 했습니다. 과부나 홀아비들도 결혼하는 일을 성경은 금하지 않고 있습니다.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절제하지 못하므로 괴로워하느니 차라리 결혼하여 가정을 갖는 편이 훨씬 좋은 일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2. 결혼한 자들에게 주는 교훈

 

그러면 결혼한 후, 우리는 어떤 신앙적인 자세로 아내에게 또는 남편에게 대해야 하는 것입니까? 그 결혼에 어떤 장애가 생겼을 때 우리는 어떻게 그것을 극복해 나가며 처리해야 하는 것입니까? 이에 대해서 바울은 10절 이하에서 몇 가지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혼을 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도 음행의 연고외 아내를 버리면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11절에서 바울은 만일 부부간에 갈등이 생겨 갈라질 경우에 대해 ‘그냥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남자와 갈렸을 때 그냥 험자 지내라고 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다시 기회를 보아 그 남편과 화합하여 다시 결합하라고 한 것입니다. 혼자 살아가다가 하나님께서 결합할 기회를 주시면 화합하여 결합하는 것이 좋다고 한 것입니다.

 

(2) 다음에 바울은 믿지 않는 상대편의 경우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교훈해 줍니다.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그대로 그 남편과 살기를 좋아 할 때는 남편은 아내를 버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여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이유에 대해 14절에서 말씀해 줍니다.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나 아내가 믿는 그 남편이나 아내로 인하여 거룩하여 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신앙적인 영향으로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되며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만약 그런 일이 생기지 않으면 그 자녀들도 결코 깨끗지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깨끗지 못할 것이란 말은 한 쪽이 믿지 않는 가운데 태어난 자녀들이기 때문에 신앙적으로 온전한 감화를 줄 수 없다는 뜻입니다.

 

결론 : 그러나 바울은 이런 일, 즉 상대편이 믿지 않는 경우, 남편이든 아내든 한편이 이혼할 것을 요구하면 갈리게 하라고 했습니다. 이 경우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합법적 이혼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할 수 있으면 갈리지 말고 화평 중에 부르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상대방의 구원을 위해 화합하는 것이 온당한 일이라고 권면해 주고 있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27) 부르심을 받는 그대로 행하라

 

(고린도전서7:17-24)

 

 

17절에서 바울이 말한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고 한 것은 부르심을 받기 전의 그리스도인과 받은 후의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처지가 어떠해야 하느냐의 교훈입니다.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는 말씀은 부르심을 받았을 당시의 형편에 따라 행하라는 뜻입니다.

 

1. 할례와 무 할례

 

바울은 이 문제를 먼저 할례자와 무 할례자의 경우에 적응 시켰습니다. 그 당시 고린도 교회는 원래가 이방인의 교회로 헬라계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얼마간의 유대인들도 있었습니다. 헬라인들의 경우는 이방인으로 개종한 사람들이요 유대인들의 경우는 유대인으로 개종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헬라인의 경우는 무할례자가 많았고 유대인의 경우는 할례자가 많았습니다. 이런 경우, 이방인들은 바울의 영향을 받아 할례를 받기를 꺼려했으며 받은 사람들은 그 흔적을 지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할례에 중요한 의미를 두고 그리스도인들은 응당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바울은 이에 대해 대답해 준 것입니다. ‘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할례자는 유대인들입니다. 유대인들은 대개의 경우, 낳은지 여드레만에 할례를 받았기 때문에 그들이 복음을 받아 드릴 때에는 할례 받은 자로 부르심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받은 할례를 부끄럽게 여길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할례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결코 장애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유대인으로 태어나 할례를 받은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길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들이 전혀 모르고 살아온 율법을 지켜 온 사실도 칭찬 받을 만한 일입니다. 이런 그가 부르심을 받은 일은 너무나도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그리스도에게로 이끄시는 몽학 선생으로 주셨으며 할례 역시 이방인들과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의 표식으로 준 것이기 때문에 그가 복음을 받아 드린 일은 이 같은 하나님의 섭리를 성취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다음에 바울은 또 말하기를 ‘무 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무 할례자란 이방인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들에게는 율법도 없었고 할례가 무엇인지 조차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들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들이 유대인들과는 달리 할례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부르심을 받았으니 할례를 받아야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할례를 받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할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할례는 부르심을 받기 이전의 유대인들에게는 필요한 것이었지만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할례의 유익이 없는 것입니다. 무 할례는 이방인들이 부르심을 받기 이전에 그들의 신분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요 그들의 생활에 율법이 없다는 증거가 되지만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할례의 유익이 없기 때문에 무 할례자가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어서 19절에서 말하기를 ‘할례를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를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담을 헐었습니다. 할례도 의의 조건이 아니요 무 할례도 의의 조건이 아닙니다. 다만 믿음으로 의를 얻을 것이기 때문에 할례도 무 할례도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다만 이제부터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 계명은 사랑의 계명을 말합니다.

 

2. 부르심을 받은 대로 지내라

 

바울은 20절에서 ‘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지내라’고 했습니다. 종으로 있었을 때, 부르심을 받았다면 부르심을 받은 후에도 종의 신분으로 살아가도 되는 것입니다. 차라리 자유할 수 있다면 자유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자유할 수 없는 신분이라고 구원에 이를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주안에서 부르심을 입은 자라면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인 것입니다. 이 말씀은 또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다른 사람의 첩으로 살아가고 있었다면 그런 위치에서 속히 빠져 나와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그에게 구원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부르심을 받을 당시의 자기 신분으로 그대로 지내라고 한 것입니다. 24절에 있는 말씀 ‘형제들아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고 했습니다.

 

결론 : 그러나 바울은 사람들의 종이 되는 일을 금했습니다.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의 종의 위치에서 처신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자기가 어떤 형편에 놓여 있던 그리고 어떤 신분에 처해 있건 오직 그리스도의 종으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생활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우리의 환경이 당장에 변화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그 환경 속에서 당장에 빠져 나올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세상에서는 자신의 처지와 신분과 직업을 초월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생활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28) 결혼에 관한 교훈

 

(고린도전서7:25-40)

 

 

바울은 그가 살아간 시대를 종말적인 면에서 바라보면서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이 주의 재림을 준비하는 생활이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실 바울은 종말적인 징조에 대해 여러 가지 계시를 받았지만 계시를 받은 것만으로 종말의 시기를 알거나 주 재림의 전모를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다만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의 전 생애를 주의 재림을 소망으로 살아가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의 생활은 마땅히 그날을 대비하는 생활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처럼 두려워하거나 동심해서가 아니라 올바른 신앙적 자세인 것입니다.

 

1. 남녀의 결혼 문제

 

바울은 겸손한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처녀들에 대한 혼인 문제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바울 자신의 의견이라고 전제하고 있습니다. 처녀에 대해서 그는 26절에서 ‘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곧 임박한 환난을 인하여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임박한 환난이 무엇을 의미하느냐는 문제가 있지만 임박한 환난이란 주의 재림을 앞두고 이 세상에 임하는 대 환난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런 환난의 징조는 바울 당시에도 여러 가지로 보였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회복도 유대인들에게는 곧 이뤄질 것으로 믿었을 것입니다. 그 당시 로마 정부의 반 기독교 정책이나 세계 제패 야망은 능히 적그리스도가 등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가지고 있는 종말관이 잘못 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에 계시된 종말적 사건에 민감해야 합니다. 그리고 시대의 추이를 잘 살펴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우리의 시대를 인류의 종말에 이르렀다고 믿고 있는 이유는 이런 관점에서가 아닙니다. 그 당시에는 종말의 결정적 증거인 이스라엘의 회복이 성취 안 된 시기였지만 지금 이 세대는 1948년도에 이미 이스라엘이 역사적으로 회복된 상태이기 때문에 우리가 바라보는 종말은 바울의 당시보다 더 정확한 성경적 관점에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처녀들의 혼인에 대해 이런 임박한 환난을 인하여 그냥 지내는 것이 좋다고 한 것입니다.

 

바울은 모든 혼인 문제는 본인 당사자의 문제로 귀착시키면서 그러나 자기 생각은 이렇다는 견해를 조심스럽게 밝혀 주고 있는 것입니다. 27절의 말씀이 그런 내용입니다. ‘네가 아내에게 매였느냐 놓이기를 구하지 말며 아내에게서 놓였느냐 아내를 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아내에게 매였느냐는 것은 아내와의 결합으로 한 몸이 된 상태를 표현한 것입니다. 두 몸이 하나가 되었을 때는 한 몸으로 있을 때보다는 더 매여 있는 처지이기 때문에 메였느냐고 한 것입니다. 놓이기를 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혼의 불가함을 강조한 말입니다. 아내에게서 놓였느냐고 했습니다. 이 말은 하나는 상대편이 먼저 죽은 경우와 다른 하나는 혹 이혼했을 경우를 말합니다. 이혼은 음행의 연고와 믿지 않는 상대편이 이혼을 요구하면 갈리게 하라고 한 말씀대로 두 가지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한번 결혼한 후, 그 결혼에 실패했을 경우, 재혼을 삼가라는 권고라고 볼 수 있습니다.

 

2. 재혼 문제

 

바울은 혼인 문제에 대해 대단히 신중히 그리고 융통성 있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혼한 경우나 혼인을 하지 않았을 경우, 자기처럼 혼자 지내는 것이 주의 일을 하는데 좋을 것이란 의견을 제시하면서도 그러나 그런 자기의 권면을 따르지 않아도 결코 죄가 되거나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8절 말씀을 보면 ‘그러나 장가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로되’라고 말하면서 바울이 그들에게 그처럼 권면하는 이유로써 ‘이런 이들은 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니’란 말씀으로 그들이 주님을 섬기는 일에 육신적인 고난이 따를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32절부터 자기가 혼자 살기를 권면하는 이유에 대하여 몇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장가가지 않은 자와 시집가지 않은 자는 그의 온 생애를 주님만을 위해 헌신할 수 있지만 장가가거나 시집간 여자들은 아내와 남편을 기쁘게 해야 할 세상일을 염려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39절에서 주목할 만한 말씀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아내가 그 남편이 살 동안에 매여 있다가 남편이 죽으면 자유하여 자기 뜻대로 시집 갈 것이라’고 했습니다. 비록 ‘그냥 지내는 것이 더욱 복이 있다’고 했지만 시집가는 일도 주 안에서 할 경우 자기 뜻대로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시한 것입니다.

 

 

결론 : 바울은 29절 이하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생활 태도에 대하여 주의 재림이 가까운 시기에 살아간다는 경각심을 가지고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 · ·’라고 했습니다. 세상에 집착하여 주의 일에 등한하지 말고 혼인에 관한 모든 문제에 있어서 자유롭게 하되 세상을 초월하여 주를 위해 살아갈 것을 권면한 것입니다. 우리의 생활이 바울의 권면처럼 자유하되 주의 뜻을 따라 남은 생애를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