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新約]강해/◆ 바울서신 강해-1

로마서 12-16장

영국신사77 2020. 4. 11. 14:54

로마서 차례

제 12 장(89 ~ 93)

89) 그리스도인 들의 영적 예배 (로마서 12장 : 1 ~ 2절)

90) 한 몸의 지체를 이루는 성도 (로마서 12장 : 3절 ~ 5절) 

91) 지체로서의 은사 (로마서 12장 : 6절 ~ 8절)

92) 사랑의 생활 지침 (로마서 12장 : 9절 ~ 13절)

93) 사랑의 사회 생활 (로마서 12장 : 14절 ~ 21절)


제 13 장(94 ~ 96)

94) 권세자들에게 복종해야 할 이유 (로마서 13장 : 1절 ~ 7절)

95) 율법을 완성하는 사랑 (로마서 13장 : 8절 ~ 10절)

96) 주 재림의 준비 (로마서 13장 : 11절 ~ 14절)


제 14 장(97 ~ 100)

97) 믿음이 연약한 자에 대한 태도 (로마서 14장 : 1절 ~ 4절)

98) 그리스도인의 날과 절기 (로마서 14장 : 5절 ~ 9절)

99)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강과 희락 (로마서 14장 : 10절 ~ 18절)

100) 화평과 덕을 세우는 생활 (로마서 14장 : 19절 ~ 23절)


제 15 장(101 ~ 105)

101) 하나가 되는 교회 (로마서 15장 : 1절 ~ 6절)

102) 서로 받아 드리는 사랑 (로마서 15장 : 7절 ~ 13절)

103) 로마 교회가 받은 칭찬 (로마서 15장 : 14절)

104) 바울이 받은 하나님의 은혜 (로마서 15장 : 15절 ~ 21절)

105) 축복의 사장 (로마서 15장 : 22절 ~ 33절)


제 16 장(106)

106) 바울의 문안과 마지막 부탁 (로마서 16장 : 1절 ~ 27절)

==========================================================

로마서 12장

◆ 밤중소리 01-14 | VIEW : 559


≈ 89 ≈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예배

(본문 : 로마서 12 : 1 - 2)


서 론 : 바울이 내 세우고 있는 이신청의(以信稱義)의 교리는 진리입니다. 그 안에는 놀라우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의 섭리로 채워져 있습니다. 신구약성경의 진리를 구원의 교리로 정리한 곳이 로마서이며 바울은 이 놀라운 작업을 완성했습니다. 혹자는 교리가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성경에 입각한 바른 교리는 이단의 정체를 폭로하고 바른 구원의 길을 제시해 주기 때문에 오히려 그 반대임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11장까지 걸쳐 기독교의 위대한 교리적 설명을 끝냈습니다. 그리고 12장부터 그 교리를 그리스도인들의 실생활에 적용하는 문제를 다루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참 생명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생활이 바른 교리의 토대 위에서 꽃을 피워야 합니다.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문제를 다룸에 처음 1, 2절에서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모든 근본적인 문제를 집약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드릴 영적 예배인데 그 영적 예배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1. 그리스도인들이 드릴 영적 예배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이 영적 생활이어야 한다는 말을 이곳에서 “영적 예배”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곳에서 지적한 영적 예배는 그리스도인들의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생활에 나타내야 할 영적 생활에 대한 태도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 바울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여기서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권하는 “너희 몸”이란 옛사람이 아닌 새사람이 된 너희 몸을 두고 한 말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거듭난 사람의 새로운 삶의 방법을 기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옛 사람과는 영원히 결별한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옛 사람이 십자가에서 죽었기 때문입니다. 죽었다는 말은 그저 말로만, 이론적으로만 죽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내 대신 그의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시고 나를 그와 연합시키셨기 때문에 이것은 움직일 수 없는 진실이요 진리인 것입니다. 누구든지 만약 이 사실을 부인한다면 그리스도께서는 헛되이 십자가를 지신 것이요 구원의 뿌리가 되는 대속의 은총이 무너지기 때문에 기독교에서 취할 것이란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2) 산 제사란 새로운 제사를 말합니다. 이 산 제사는 거룩한 산 제사입니다. 제사란 곧 제단에 바칠 제물을 말합니다. 우리는 지난날 죽은 제사를 드렸던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지난날 우리의 옛 몸을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려왔다”고 했습니다(롬6:13). 우리는 죄의 종이었기 때문에 우리의 몸을 죄에게 드려왔으며 이것이 곧 죽은 제사였습니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롬6:16). 그러나 산 제사란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거룩하게 드리는 제사입니다. 지난날의 죄의 병기에서 의의 병기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롬6:17,18).

(3) 바울은 이 제사를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영적 생활입니다. 지난날에는 육신으로 죄를 섬겨 왔습니다. 그러던 것이 지금은 그 육신의 사람은 이미 옛 사람으로 죽고 영적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죄는 육신으로 섬겼지만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육신으로 섬기지 않고 영으로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영으로 섬긴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때와 장소를 가릴 것 없이 마음으로건 몸으로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하나님께 드려져야 합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했습니다(고전10:31). 이것이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이런 생활은 곧 말씀에 순종의 생활입니다.

2. 새롭게 변화 받는 생활

바울은 2절에 가서 1절에서 밝힌 그리스도인의 영적 예배의 생활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밝혀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새롭게 변화된 생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생활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물론 이 대목에 와서 1절과 2절과의 연결 문제로 신학적인 많은 논란이 있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드리라”는 말씀에서 2절이 영적 예배를 해석해주고 있음이 분명한 것입니다.

(1) “너희는 이 세대를 본 받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 세대란 지난날 우리가 살아온 이 세상을 말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쫓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쫓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고 했습니다(요일2:16,17).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지금 하나님 나라에 속해 있으면서도 우리의 육신은 이 세상에 거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육신도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하나님 나라에 가기까지는 죽을 육신(무덤에 장사될)을 그대로 가지고 살아가고 있으므로 지난날에 우리를 지배해 온 죄의 습성이 우리 육체가운데서 역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죄의 잔여세력과 끊임없는 투쟁을 전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대를 본 받으려는 죄의 잔여습성과 싸우는 생활이 그리스도인의 영적 투쟁입니다. 마귀는 바로 우리 안에서 꿈틀거리는 죄의 잔여세력을 등에 업고 우리를 유혹해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엡6:10-17).

(2)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변화의 근원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새로운 행동은 새로운 마음에서 탄생됩니다. 마음의 변화 없는 영적 예배의 생활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면 마음의 새로운 변화는 어떻게 오는 것입니까? 이 변화는 근본적인 변화를 말합니다.

이 변화는 성령으로 거듭나기 전에는 불가능합니다. 죄와 허물로 죽은 사람은 변화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내주로 변화의 발판은 형성되었어도 그 변화가 당장에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죄에 대한 철저한 회개가 따라야 하고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성령의 감동을 소멸해서는 안됩니다. 성령의 감동하심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이루십니다. 성경께서는 말씀을 듣게 하시고 그 말씀 안에서 역사하사 먼저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시고 변화의 역사를 일으키십니다.

(3)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했습니다.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엡5:10). 우리의 생활은 무조건 세상 사람이 정당하게 보는 습관을 따라가거나 세상 풍습을 쫓거나 세상의 도덕적 윤리적 관념을 따라가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명심할 일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온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선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선하게 여기시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 같은 분별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기록된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이야말로 우리의 영적 생활의 지름길이 되며 이런 생활이 곧 그리스도인의 영적 예배입니다.

결 론 :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생활이 하나님께 드리는 영적 예배란 사실을 명심하고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도록 분별하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 90 ≈ 한 몸의 지체를 이루는 성도들

(본문 : 로마서 12 : 3 - 5)

서 론 : 성경에서는 교회와 그리스도인과의 관계에 있어서 몸과 지체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연합된 사람들을 말합니다(롬6:5). 그러므로 모든 근본은 오직 그리스도요 우리는 그곳에 연합된 지체에 불과한 것입니다.‘교회는 그의 몸이라고 하신 말씀이나’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고 하신 말씀 등은 교회에 있어서의 성도들의 위치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엡1:23, 골1:18). 바울은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줄을 알지 못하느냐고 했습니다(고전6:15). 지체에는 제각기 부여된 기능이 있으며 그 지체는 그 기능대로 움직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에서 성도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사입니다.

1. 그리스도인의 생각의 절제

우리들이 먼저 하나님의 교회에서 각기 받은 은사대로 충성하고 봉사하려면 가장 명심해야 할 일이 있는데 바울은 이 일에 대하여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사람이 지혜롭게 생각하지 못하면 생활에 파탄이 옵니다. 믿음이 파선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 지혜롭게 생각하는데는 두 가지 일이 전제됩니다.

(1) 하나는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라”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 있어서 동일하지만 생각의 비약은 실패의 직접적인 원인이 됩니다. 마음에서 떠오르는 자신의 생각을 절제하지 못하고 그 생각대로 움직이다간 말할 수 없는 낭패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는 누구에게나 다 똑같은 능력이나 지혜나 사업적인 역량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성공했다고 해서 자신도 성공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더욱이 생각은 그 생각 자체보다도 그 생각을 자아내게 한 마음의 동기가 중요합니다. 만약에 어떤 사업의 동기가 정욕에서 나왔다고 합시다. 그런 사람의 생각은 아무리 훌륭하고 이상적이라 할지라도 성사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약4:3).

(2) 다음에 바울은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점은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를 이루는 모든 성도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제각기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의 믿음의 분량은 자기가 자기 멋대로 정하는 것도 아니요 자기 생각대로 소유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일정한 분량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분량을 초과해서 생각하면 영적 교만에 빠지기 쉽고 이 분량에 미치지 못하면 믿음이 없는 자가 되어 버립니다. 자신의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이야말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의 생활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기 믿음의 분량을 바르게 판단하려면 우리는 기도로 ‘믿습니다’라고 결정을 내려 행동을 시작하기 이전에 몇 가지 집고 넘어가야 할 일이 있습니다. 첫째로 이 같은 자기의 생각은 과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냐? 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핵심적인 문제에 대하여 신앙적 양심의 거울에 비추어 거짓됨이 없어야 합니다. 자신의 정욕이나 탐심에서 나온 생각을 하나님의 영광에 억지로 맞추어 보려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다음에 두 번째로 자기가 품고 있는 그 생각이 어떤 일시적인 감정이나 자기 감정의 충동에서 온 것이 아닌가 깊이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믿음의 생각은 내 마음에서 끊임없이 샘솟는 성령의 역사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자라잡고 있는 믿음은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한가지는 자기 감정에서 생겨난 자기 생각의 믿음입니다. 다른 한가지는 성령께서 내 마음속에 심어 주시는 불가항력적인 믿음입니다. 이처럼 두 가지 모습으로 솟아나는 내 마음의 생각을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대처하여 절제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같은 믿음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욥이 그 어려운 시험 중에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시험을 이길 수 있는 욥의 큰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아무라도 욥처럼 어려운 시험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2. 지체와 직분과의 관계

바울이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의 생각을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말한 것은 이 같은 생각의 절제야말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로서의 사명을 감당함에 우선적으로 필수적인 일이기 때문입니다.

(1) 몸의 지체는 하나가 아니라 여럿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다”고 했습니다. 한 지체를 가진 몸이란 아메바와 같은 단순세포로 형성된 미생물뿐입니다. 성경에서 언급하고 있는 몸이란 사람의 몸을 비유한 표현이며 지체란 그 몸을 이루는 몸의 각 부분들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한 몸을 이루는데 있어서 한 지체 만으로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여럿이 한 몸을 이룰 때에 그 지체로서의 참 가치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몸의 지체는 언제나 다음 몇 가지 명심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지체는 어떤 경우에나 몸보다 더 클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지체를 떠나서 그 이상의 자리에 앉을 수도 없고 군림할 수도 없습니다. 또 지체는 자신이 아무리 중요한 부분을 맡아 있다고 해도 그 한 지체로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한 몸에 여러 지체가 불어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교회에는 여러 지체로써 이루어져 있습니다. 교회의 몸이 되신 주님은 각기 지체의 직분은 다르지만 모두 한 지체로서 똑같이 사랑하시고 돌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에서 자기가 교회를 움직이는 존재인양 자신을 높여서는 안됩니다.

(2) 모든 지체가 한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지체가 제각기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따로 따로 있습니다. 모든 지체가 한가지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교회의 지체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도 각기 맡은 직분이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에서 어떤 직분을 맡았던지 그 직분을 주신 이유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한 지체를 이루게 하시기 위해서임을 알고 교회를 바로 섬기고 자기 사명을 충성스럽게 이행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같은 일을 잘 명심하여 우리들이 교회에서 맡은 일에 성실하지 못하고 그 책임을 다 하지 못할 때 몸 전체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결 론 : 사람의 구조는 지극히 신비적입니다. 맹장이란 것은 아직도 그것이 왜 우리 몸에 붙어 있는지에 대하여 밝혀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필요 없게 여겨지는 필요악의 맹장이라도 그 지체가 고장이 나면 맹장염이 되고 그것이 확산되면 복막염이 되어 생명의 위험까지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모든 지체들을 귀히 여겨야 하며 자기 지체만을 제일로 알고 자신을 나타내는 일을 삼가야 하는 것입니다. 지체는 오직 몸을 위해 존재하며 지체의 사명은 그 몸을 영화롭게 하는 일에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 91 ≈ 지체로서의 은사

(본문 : 로마서 12 : 6 - 8)

서 론 : 하나님의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요 성도들은 그 몸을 이루는 지체임을 밝힌 바울은 교회에서의 그리스도인들의 지체로서의 사명이 은사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이곳에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한 몸의 지체가 여럿인데 그 여럿의 지체들이 제각기 하는 직분이 다른 것처럼 교회의 몸을 이루는 그리스도인들의 은사 역시 다른 것입니다. 이처럼 각인에게 제각기 다른 은사를 주심으로 하나님의 교회의 몸을 이루는 일에 지체로서의 사명을 다 해야한다는 것이 바울의 논리입니다.

1. 은사는 어떻게 주시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에서 여러 가지 은사의 직분을 받아 지체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는데 그러면 이 은사는 어떻게 받는 것입니까?

(1)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받는 직분의 은사는 자기가 원한다고 받을 수 있거나 자기 뜻에 의해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교회에서 직분으로 받는 은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주신 것입니다. 내가 교회에서 아무리 미미한 듯한 은사(직분)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이 은사야말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대로 받은 것이기 때문에 너무나도 귀한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는 자기가 받은 은사에 대하여 하찮게 여기며 소홀히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같은 생각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은혜를 업신여기는 망령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2) 모든 성도들은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다고 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 똑같은 은사나 은혜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은혜는 동일하지만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는 일에 있어서의 은혜의 분량은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의 믿음을 따라,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또 이와 같은 것들과 조화시킬 수 있는 그 사람의 재능이나 지식을 따라,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일에 유익한 방법으로 각각 은사를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에게 주신 은사로서의 직분은 이처럼 제각기 자기의 은혜의 분량대로 주신 것입니다. 우리들 몸에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지체들이 있지만 어느 것 하나 쓸모 없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 하나 하나가 다 자신에게 주어진 직분에 충실할 때 우리의 몸은 정상적인 건강을 누릴 수 있는 것처럼 교회도 이와 같은 원리가 적용되는 것입니다.

2. 은사의 분별과 활용

바울은 우리에게 주신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의 직분에 대하여 몇 가지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예언의 은사, 섬기는 은사, 권위의 은사, 구제의 은사, 다스리는 은사, 긍휼의 은사 등입니다. 바울이 지적한 이 은사는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의 한 부분을 열거한 것입니다. 바울이 이곳에서 강조하려는 바는 이 같은 은사적 직분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교회에서 어떤 자세로 교회를 섬겨야 하는 것이냐? 하는 것을 교훈 해 주려는데 있는 것입니다.

(1) 받은 은사가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하라고 했습니다. 사도시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직분이 예언의 은사였습니다. 이 예언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구약적 표현입니다. 구약시대에 있어서 선지자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예언이라 하였고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이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이처럼 선지자들의 예언이 기록된 것이 구약성경입니다. 신약시대에 와서도 신약성경이 완성되기까지 얼마간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 선지자적인 사명을 가진 사도들이나 하나님의 종들에게 은사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주시고 그 말씀을 전파하도록 하셨는데 그것이 예언의 은사입니다.

그러므로 이 예언은 초대교회에서 은혜를 따라 은사로 받은 사람들에 의하여 하나님의 말씀으로 선포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예언의 은사는 성경이 다 기록된 이후, 목사나 교사직분으로 바뀌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므로써 이 예언의 은사적인 직분은 변경되었고 온전해졌습니다. 오늘날 혹 어떤 사람들은 지금도 이 은사의 직분이 있어서 예언이 계속된다고 주장하므로 계시의 계속성을 내 세우기도 하지만 이 같은 생각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는 죄를 범하게 됩니다(계22:18,19). 이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교회에서 믿음의 분수대로 하라고 했습니다. 예언이 믿음의 분수를 넘으면 그 예언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만을 깊이 연구하고 그 말씀에 따라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하나님의 종들이 참 예언자들입니다.

(2)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하라고 했습니다. 교회에는 섬김의 온사적인 직분이 있습니다. 아마 이 직분은 은혜의 분량이 많은 사람들에게 주어지기도하며 또 교회에서 존경받을만한 직분자에게 주시는 은사로 볼 수 있습니다. 섬긴다는 말은 다른 사람을 받든다는 뜻입니다. 이 은사에 대하여 예수님은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하셨습니다(마20:26-27). 다른 형제를 대접하고 섬기는 일에 보람을 느끼고 남을 위해 회생하는 일에 기쁨을 가지며 다른 이를 자기보다 높이어 존경하는 일은 보통 은사가 아닌 것입니다.

(3) 다음에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하라고 했습니다. 이 은사는 교사의 직분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배우는 일이 계속되어야 할 곳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말씀으로 은혜를 주시고 말씀으로 그의 뜻을 나타내시고 말씀으로 우리를 교훈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은사는 교회에서 가장 귀한 은사적 직분입니다.

(4) 권위(勸慰)하는 자면 권위 하는 일로 하라고 했습니다. 이 권위의 은사는 성도들을 권면하고 위로하는 직분자를 말합니다. 오늘날 각 교회에서는 이 같은 직분을 위해 권사 직분을 두고 있습니다.

(5)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하라고 했습니다. 남을 구제한다는 일은 보람된 일이며 또한 이 은사를 받은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구제는 두 가지로 나타나는데 한가지는 교회의 재정으로 가난한 형제를 구제하는 일이요, 다른 하나는 자신의 재물로 도와주는 일입니다. 구제는 사회사업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입니다. 어데 까지나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하며 선한 청지기의 사명을 가져야 하기 때문에 성실함으로 수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결 론 : 다음에 다스리는 은사에 대하여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하라고 했습니다. 이 은사는 교회의 치리를 말하는데 오늘날 교회에서 이 직분 자를 위해 치리장로를 피택하여 세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긍휼을 베푸는 은사가 있습니다. 이 은사를 받은 사람은 형제를 불쌍히 여기는 따뜻한 마음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즐거움으로 이 일을 감당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하여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지체적 사명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 92 ≈ 사랑의 생활 지침

(본문 : 로마서 12 : 9 - 13)

서 론 : 바울은 12장 초두에서 그리스도인들의 하나님께 드릴 영적 예배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일”이라고 말씀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이 같은 생활은 “이 세대를 본 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생활”임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이런 생활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교회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지체로서의 은사적인 직분을 잘 감당하는 일이라고 말하면서 9절 이하에서 바울은 이것을 결론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실천적인 생활 면과 연결시켜 주었습니다.

1.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사랑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사랑으로 출발해서 사랑으로 끝을 맺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1) 사랑은 하나님의 은사입니다. 성경에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는 사랑이란 말은 하나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이 사회에서 인간간에 연결된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아서 그 사랑을 세상에 나타내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소유해야 할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하나님의 은사입니다. 교회에서는 여러 가지 지체로서의 은사적 직분이 있지만 그 모든 직분 위에 이 하나님의 사랑의 은사가 덮여져 있어야 합니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 하라 이는 온존하게 매는 띠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골3:14).

(2)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는 사람들에게 더욱 풍성하게 공급되는 은사입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 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요일4:10,11). 독생자를 보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2. 사랑의 본질

바울이 9절에서 지적한 말씀에서 사랑에는 세 가지 본질적인 요소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1) 첫째로 사랑엔 거짓이 없다고 했습니다. 사랑의 참 모습은 언제나 진실합니다. 하나님은 진실하신 분입니다. 우리에게 나타내신 하나님의 사랑이 진실하시기 때문입니다. 진실한 사랑은 입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속 깊은 인격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사랑에 거짓이 없다는 말은 처음 사랑의 출발과 마지막 사랑의 끝이 한결같다는 의미입니다. 처음에는 사랑을 쏟다가 그 사랑이 얼마안가 끊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이익이 따를 때는 사랑이 가고 손실이 있을 때는 사랑을 거두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사회에서 통용되는 보편적인 사랑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높으면서도 깊고 그리고 일직선으로 끝없이 이어 가는 사랑입니다. 사랑에 거짓이 없다는 말은 사랑을 행하므로 그 아름다움이 밖으로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행함이 없는 사랑은 죽은 사랑으로 사랑이란 말로 불려질 가치조차 없는 사랑입니다.

(2) 다음에 사람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시편 1편에서 복 있는 사람의 삶을 바라보게 됩니다. “복이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쫓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고 했습니다. 사랑은 악한 일에 적용될 수 도 없고 활동할 수 도 없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악한 일을 도모하는데 사랑을 쏟았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일에나, 불의한 일, 덕을 세우지 못하는 일에 사랑이 나타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언제나 악과 병존할 수 없으며 오히려 악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악을 미워한다는 말은 사랑을 가진 그리스도인은 악한 일을 도모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악이 들어가 있는 모든 일에는 오직 흑암의 권세만이 활개치기 때문에 그런 곳에 사랑이 개입될 수 가 없는 것입니다.

(3) 다음에 사람은 선에 속한다고 했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선한 일에 개입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있는 곳에는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선한 열매가 있는 곳에는 사랑이 넘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서로 선한 일에 관심을 가지고 열심을 내야 합니다. 선한 일에 성도들이 마음을 함께 하여 힘써야 합니다. 그곳에서 형제간의 참 사랑이 싹트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사랑의 세 가지 본질을 잘 알고 모든 일에 거짓을 버리며, 악을 미워하고, 선을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3. 형제에 대한 사람과 봉사의 방법

10절 이하에 나오는 말씀은 교회에서 형제들간에 이루어 나갈 사랑에 대한 권면입니다.

(1) 형제를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형제간의 사랑이 두 가지로 나와 있습니다. 하나는 서로 우애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존경하기를 먼저 하라고 했습니다. 형제간의 사랑은 우애와 존경입니다. 우애란 말은 친구간에 나타내는 최고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형제간의 사랑엔 존경이 필수적입니다. 존경이 없는 곳에 사랑이 설 곳이 없습니다. 존경의 반대말은 멸시와 천시가 됩니다. 멸시와 천시가 있는 곳에 사랑이 발 부철 곳이 없습니다. 형제들과 바른 사랑의 관계를 유지하려면 반드시 존경이 따르는 것입니다.

(2) 11절에서 봉사의 방법이 나옵니다. 첫째로 교회에서 봉사는 일에 부지런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게으른 사람은 교회에서 사랑의 봉사의 일군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교회를 봉사하는 일에 부지런해야 합니다. 다음에 게으르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게으름은 하나의 죄악입니다. 게으른 사람에게 이르기를 개미에게 가서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다음에 기도에 항상 힘쓰라고 했습니다. 힘쓰라는 말은 할 시간이 없어도 노력하라는 뜻입니다. 하기 싫어도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오는 모든 시험은 우리의 기도가 나태할 때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기도에 항상 힘쓰는 일은 모든 일에 우선적임을 알아야 합니다. 다음에 성도들의 쓸것을 공급하라고 했습니다. 교회 형제들에게 필요한 일을 내가 채워준다는 일은 보람있는 일입니다. 성도들간의 사랑의 교통은 이런 곳에서 싹트는 것입니다. 그리고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고 했습니다. 자기 집에 찾아오는 형제를 후히 잘 대접하는 일은 진실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고했습니다(히13:2).

결 론 : 우리는 무슨 일에나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각 지체마다 조화 있게 움직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이루는 일 이상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사랑을 따라 여러분의 지체를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여러분은 가장 아름다운 지체로서의 사명을 이루실 것입니다.

≈ 93 ≈ 사랑의 사회생활

(본문 : 로마서 12 : 14 - 21)

서 론 :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사회생활은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일찍 이 그리스도인들의 사회생활의 방법에 있어서 두 가지 대 전제를 말씀하신 일이있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뿔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동리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 앞에 비취느니라”고 하셨습니다(마5:13-15). 오늘 주시는 14절 이하의 말씀에는 그리스도인들의 사회생활 방법이 나와 있습니다. 사랑을 실천해야 할 그리스도인들이 우리의 이웃과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 원수에 대한 생활방법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나갈 때, 우리 생활에 부딪치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우리의 형제들이요 다음은 우리의 대적들입니다. 그런데 원수에 대한 우리의 생활 태도에 대해 축복하라,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 원수를 갚지 말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1) 우리가 우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해 주어야 할 일은 우리가 받는 핍박은 우리의 상급의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말씀하시기를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5:10-12).

(2)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자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에 대하여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은 무리들을 위하여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진리를 알지 못하므로 우리를 핍박하는 자들에게 저주하면 안됩니다.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축복하라고 한 말씀은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그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그들로 진리를 깨달아 구원을 얻게 해 달라는 뜻입니다.

(3) 우리를 핍박하는 자를 저주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하나님도 그들에게 관대하시다 는 데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가지 사실을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벧후3:9). 하나님은 악인이 그들의 죄악으로 죽는 일을 기뻐하지 아니하신다고 하셨습니다(겔18:31,32). 그 뿐 아니라 악인들에게도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소망이 있습니다. “만일 악인이 돌이켜 그 악에서 떠나 법과 의대로 행하면 그가 그로 인하여 살리라”고 하셨습니다(겔 33:19).

(4) 우리가 그들을 정죄치 말아야 할 또 하나의 이유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저주나 정죄의 사명을 주신 것이 아니라 용서와 사랑의 직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하여 준 비유를 들려주시면서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고 경종 하셨습니다(마18:22-35).

2.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 하라

바울은 18절에서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 하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먼저 형제에 대하여 몇 가지로 교훈 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형제의 즐거움에 동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심기가 좀 상해 있어도 형제의 즐거운 일을 들으면 그와 함께 즐거움을 나눌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우는 자의 고통을 함께 지라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위로해 주고 도울만한 일을 찾아서 스스로 도움이 되고 함께 그 짐을 져주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서로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들이기 때문에 지체로서의 고통을 함께 나누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고 했습니다. 형제의 사랑은 겸손에서 그 잎이 솟고 그 뿌리가 내려집니다. 형제는 서로 마음을 같이 해야 합니다. 사람이 교만하면 한 마음이 될 수 없습니다. 도리어 자신을 형제보다 낮은데 처할 때 하나의 마음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지혜를 내세우는 자는 융합이 어렵습니다. 참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인데 이런 사람은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할 수 있습니다.

(2) 다음에 원수와의 화평에 대하여 몇 가지로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악은 그 모양이라도 버려야 합니다(살전5:22). 악을 대항하기 위하여 악을 사용하는 일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악은 그 어떤 일에나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하려면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해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원수를 갚지 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치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5:38-45). 원수 갚는 분은 하나님이시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원수를 갚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권한을 침해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원수들에게 할 일에 대하여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결 론 : 우리는 무슨 일에나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우리의 이 같은 삶이 한없이 미련스러운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이런 방법대로 살아가는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습니다. 이런 생활이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의 생활임을 알고 이 같은 생활을 통해서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 하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PREV : 로마서 13장 밤중소리

NEXT : 로마서 11장 밤중소리

LIST WRITE REPLY

Copyright 1999-2020 Zeroboard / skin by GGAMBO

*

로마서 13장

◆ 밤중소리 01-14 | VIEW : 566

≈ 94 ≈ 권세 자들에게 복종해야 할 이유

(본문 : 로마서 13 : 1 - 7)

서 론 : 성경에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신분에 대하여 세상에 속하지 않고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않음같이 너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나라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영적인 신분을 말한 것이지 우리들의 육신적인 삶까지를 의미해 주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분명 아니지만 그러면서도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후에도 여전히 이 사회의 한 구성원어 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사회생활이나 사회법규의 치외법권 자가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인들과 국가 또는 권세 자들과의 관계가 설정되는 것입니다.

1.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바울은 13장 초두에서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씀해 주고 있는 권세란 국가권세를 의미해 주는 말입니다.

(1)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다고 했습니다. 국가와 교회는 별개의 것이지만 이 모두를 세우신 분은 한 하나님이십니다.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열방의 대 주재 심이로다”고 말씀했습니다(신22:28). 모든 권세란 표현은 선악의 구별을 둔 것이 아닙니다. 선정을 베푸는 권세이든 폭정을 베푸는 권세이든 이 땅 위에서 세워진 권세는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지 않음이 없는 것입니다. 애굽, 바벨론, 헬라, 로마 같은 나라의 존립도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진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나라의 주관자들도 오직 하나님에 의하여 세워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니엘은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에게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아시리이다”고 말해 주었습니다(단4:25).

(2) 권세 자들에게 굴복해야 활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바를 거역하는 일은 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재판한 빌라도는 분명 악한 통치자였습니다. 물론 예수를 빌라도에게 넘겨준 자들도 악한 무리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판결에 따라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권세가 위로부터 주어진 것이었기 때문입니다(요9:11). 2절을 보면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지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라”고 정죄하고 있는 것입니다.

(3) 바울이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권세 자들의 권위는 주로 도덕적인 차원의 법을 의미해 주는 것입니다. “관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된다”고 한 말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아무리 포악한 권세자라 할지라도 사회생활의 안정과 평안을 위한 선한 법규는 시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누구든지 이것을 파괴하려고 한다면 사회질서가 무너지고 모든 인류의 안정된 생활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2. 양심을 인하여 굴복하라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권세 자들에 대하여 굴복하는 일에 대하여 “노를 인하여만 할 것이 아니요 도한 양심을 인하여 할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같은 표현에는 다음 몇 가지 뜻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1)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선한 양심이 있습니다. “선한 양심을 가지라”고 하였고 세례의 뜻은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벧전3:16,21). 그리스도인의 양심은 하나님께서 세상 권세 자들에게 이 같은 통치권을 주신 사실을 인정하고 따르는 것입니다. 아무리 독재 정권 하에 있는 국가라 하더라도 인간의 양심에 의한 도덕적 규범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2) 그러나 종교적인 문제가 야기될 경우가 있습니다. 어느 권세자가 기독교를 법령으로 금지시키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하는 경우에 있어서 우리의 취할 태도는 명백합니다. 예수님이 친히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마22:21). 가이사의 권세는 일반적인 세상적 권세를 상징합니다. 가이사의 권세는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역이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거역하는 어떤 권세 자들의 명령에도 굴복할 수 없습니다. 인류의 마지막 시대에는 적그리스도가 등장하여 온 인류로 우상 앞에 경배케 한다고 했습니다. “저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고 했습니다(계13:15). 이런 경우의 해답을 다니엘서 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 아니 하실 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3:17,18). 이 같은 대답은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이 두라 평지에 세운 왕의 신상에 경배하지 않는다고 극렬히 타는 풀무 불에 던져 넣음을 당하게 되었을 때 다니엘의 세 친구인 사드락, 메삭, 아뱃느고가 왕에게 대답한 말입니다. 사람의 양심보다 우선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명입니다. 양심은 도덕적 선을 추구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그 보다 더욱 차원이 높은 절대적인 선을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3) 공세와 국세에 대해서도 마땅히 바쳐야 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이 사회에 살아가고 있는 이상, 사회인으로서의 의무에 속한 일입니다. 공세나 국세가 없이는 국가 권세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라고 하신 말씀은 국가기관이나 지방 자치기관이나 일반 국민으로서 바쳐야할 공과금에 대하여 그 의무를 이행하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이런 것들은 가이사의 것들이기 때문에 가이사에게 주라고 하신 것입니다.

결 론 : 이 세상 모든 나라의 존망은 오직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렘18:5-10). 이 사회는 하나님에 의하여 섭리되면서 마지막 심판의 날까지 지속되어 나갈 것입니다. 이 세상의 존속 목적은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나님의 구원을 받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된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원을 완성하면 그때 인류의 종말이 올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인간사회에 안녕 질서와 평강을 기뻐하시는 이유는 그 안에서 생활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평안한 생활을 위해서입니다(딤전2:2).

≈ 95 ≈ 율법을 완성하는 사랑

(본문 : 로마서 13 : 8 - 10)

서 론 :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빚에 대한 말씀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고 명했습니다. 빚이란 무서운 존재입니다. 성경에는 빚에 대한 교훈이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빚진 자는 채주의 종이 된다”고 했습니다(잠22:1). 갚아야 할 것은 하나의 빚의 성격을 지녔기 때문에 갚지 않을 때에는 어려운 곤혹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남편이 죽은 어느 선지자의 아내의 경우를 보면 남편이 진 빚 때문에 어린 두 아들이 그 집 종으로 팔려 가는 딱한 사정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왕하4:1-7). 빚은 대로 물려가도 갚지 않으면 안돼는 성격을 띄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빚에 대하여 저야 할 것이 있고 지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1. 우리가 져야 할 사랑의 빚

여기서 바울이 사랑의 빚이라고 말하고 있는 바는 사랑의 빚을 진 사람은 그 빚을 갚아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처럼 내가 빚을 진 입장에서, 그 빚을 갚아야 하는 것처럼 사랑을 갚아야 할 빚진 자, 곧 사랑의 채무자로 알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해 주는 것입니까?

(1) 우리에게는 누구에게도 남에게 반드시 갚아야할 사랑의 빚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사랑의 빚은 하나님께 진 복음의 빚입니다. 이 빚이 일만 달란트로 나와 있는데 이 빚은 사람이 한 평생 노력해도 벌 수 없는 거액입니다. 이 빚을 탕감 받은 한 종이 자신에게 빚진 동관의 지극히 적은 빚 때문에 옥에 가두게 한 일에 대하여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하여 준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에게 불이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마18:24-35). 바울은 이 빚을 복음의 빚이라고 말하면서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롬1:14).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일만 달란트의 빚이란 그의 독생자를 보내신 사랑을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의 자리에 있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보내사 화목 제물로 십자가에 못박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베푸신 그의 이 사랑을 “네 이웃에게 베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2) 사랑의 빚은 먼저 복음으로 이웃에게 갚아야 할 빚입니다.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이웃에게 전하는 일이 이 빚을 갚는 길입니다. 바울은 이 빚을 갚기 위하여 자기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진 자의 사명을 다 감당했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복음을 전하는 일은 하나님의 사랑의 빚을 갚는 일이기 때문에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고, 빚진 자가 빚을 갚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부득불 전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빚을 갚지 않으면 응당 그 책임을 져야 하는 것 차렴 복음의 빚을 갚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그 책임을 져야 하는 것입니다.

(3) 다음에 사랑의 빚은 용서로 갚아야 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의 비유는 자신이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으면서도 형제의 적은 죄를 용서치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경종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탕감 받은 죄는 반사적으로 우리형제의 죄를 용서해 주므로 갚아지는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죄의 용서는 어느 한계가 없습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마18:21,22). 예수님이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은 주님이 우리에게 나타내신 그 사랑을 갚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4) 다음에 가난한 이웃을 도와주는 일이 이 빚을 갚는 일입니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고 하셨습니다(잠19:11). 사랑에는 행함과 진실함이 따라야 합니다.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고 했습니다(요일3:17). 마태복음 25장에는 양과 염소를 가르는 최종적인 심판의 모습이 나옵니다. 주님은 천국을 소유할 양떼들에게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내가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너희가 마시게 하였고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내가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혀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나를 돌아보았고 내가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25:34-36).

이 같은 말씀에 그들은 놀라면서 우리가 언제 주님께 대하여 그같은 일을 베풀었나이까? 고 물었을 때에 주님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내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할 수 없는 자가 어찌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 하나님의 엄중한 질문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 같은 원리에 입각하여 우리들의 주님에 대한 사랑의 깊이와 진실함을 저울질하는 것입니다.

2. 사랑은 율법을 다 이룬다.

성경은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는 말씀은 참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시험하려는 율법사의 물음에 대하여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을 이처럼 말씀해 주신 일이 있으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

(1) 율법은 인간이 마땅히 행해야 할 본분입니다. 그 내용인즉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하지 말라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 율법의 계명은 모두 인간이 갖추어야 할 사랑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랑은 이런 율법적인 계명을 능히 이기고 오히려 이웃에게 보다 차원이 높은 선을 공급해 줍니다. 이 모든 율법적인 계명은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통하여 얻고자 한 의는 외식적인 것으로 주님의 정죄를 받았습니다.

(2) 사람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사랑에 대하여 적절하게 정의해 주고 있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 했습니다(고전12:4-6). 이런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할 수가 없습니다. 참으로 이 같은 사랑이야말로 율법의 완성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결 론 : 예수님은 그의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시키신 분입니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오신 분이시며 그 사랑을 십자가에서 온전히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은 이같이 우리를 귀히 보시고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 위해 뜨거운 사랑으로 사랑하셨는데 우리는 어떤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이 사랑의 빚을 갚는 아름다운 사랑의 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 같은 생활은 우리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주는 생활이 될 것입니다.

≈ 96 ≈ 주 재림의 준비

(본문 : 로마서 13 : 11 - 14)

서 론 : 사도 바울은 로마서를 거이 마무리 지으려는 끝머리에 가서 주 재림에 관한 성도들의 태도를 밝혀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왜 바울이 이곳에서 이 말씀을 들려주고 있는가에 대하여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재림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이며 어느 시대에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이라 해도 이 소망을 소홀히 할 수 는 없기 때문입니다. 주 재림에 대해서는 사도시대로부터 끊임없이 강조되어 오고 있는 경종이기 때문에 그 시대의 성도들에게 필요했던 말씀이라면 정말로 인류의 종말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 시대에 있어서는 더 말할 나위 없습니다.

1. 주 재림의 시기는 언제인가?

예수님의 재림의 시기는 물론 인류의 종말임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인류의 종말이 언제냐는 문제는 성경에서조차 하나의 커다란 숙제로 미루고 있습니다.

(1) 성경에서는 주의 재림이 곧 있을 것으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종말의 예언은 어느 시기를 가르치심이 없다는 것과 그 시대가 어느 시대 사람이건 그 사람들에게 있을 것으로 예견되는 표현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그 당시 모든 교회들이 주 재림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가지고 기다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고 하신 말씀은 그들로 영광스러운 메시야의 출현인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마16:28).

더욱이 예수님의 비유 중에 왕위를 가지고 돌아오는 어떤 귀인에 대한 말씀은 사도들이 그들의 세대 중에 주의 재림을 기다릴 만 했던 것입니다(눅19:12-27). 이 같은 견해는 바울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서신 서에 밝히고 있는 바울의 종말관은 먼 훗날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자신이 개척한 여러 교회에서 임박한 인류의 종말을 주장하였고 주 재림에 대한 소망을 가질 것을 강조했습니다(고전 1:7. 빌3:20. 딛2:13).

(2) 하나님은 모든 성도들로 주 재림을 소망으로 신앙생활을 할 것을 원하셨습니다. 그 증거는 주 재림에 대하여 철두철미하게 비밀에 부쳐 두셨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 같은 하나님의 섭리는 모든 성도들로 재림의 소망을 바라보게 하시려는데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 재림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의 실현시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메시야 왕국도, 부활도, 변화도, 영원한 천국도, 그때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소망의 종점을 바라보고 경주한다는 일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3)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은 그리스도를 맞이하는 신부단장에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끊임없이 신부단장에 대한 경종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나타나실 때까지 점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라고 하셨습니다(딤전6:14,15). 이 세상에서 가장 복된 성도는 바로 주 재림을 맞이하는 성도들입니다. 그들은 살아서 모든 소망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위대한 소망을 목표로 우리의 신앙 생활을 단장하는 일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4) 그러나 성경에는 절대로 그 시기와 때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 시기나 때에 대한 언급에 대하여 경종 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때는 아무도 모르고 하늘의 천사도 아들도 모른다”고 하셨습니다(마24:36). 바울은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쉬 동심하지 말 것에 대하여 이처럼 경종 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 혹 영으로나 혹 말로나 혹 우리에게서 받았다고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쉬 동심하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경종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살후2:1-3). “영으로나 말로나 편지로나”라고 말씀해 주시는 바는 어떤 경우에도 주의 날에 대한 언급이 금지되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2. 깰 때가 된 이 시기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고 했습니다.

(1)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잠은 영적인 잠을 의미합니다. 만약 주 재림의 시기에 우리가 영적인 잠에서 깨여나지 못하면 주님의 재림을 맞이할 수 없다는 것을 경종한 말입니다. 이 세대는 언제나 악합니다. 그 당시 사도 바울이 생존하고 있었던 그 세대도 악했고 지금 이 세대도 악하고, 주님의 재림의 때에도 악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잠은 이 악한 세대에 물들었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상태에 대하여 예수님은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날이 몇과 같이 임하리라”(눅21:34).

(2)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다고 했습니다. 밤이 깊었다는 말은 영적인 밤은 점점 어두워 간다는 말입니다. 낮이 가까웠다는 말은 이와는 반대로 그리스도의 재림의 시기를 말합니다. 종말에 갈수록 영적인 밤은 자꾸 깊어져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인즉 그리스도의 재림을 상징하는 낮은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곧 다가오는 낮을 바라보고 밤의 일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3) 빛의 갑옷을 입자고 했습니다. 이 옷은 어두움의 일을 벗을 때 입을 수 있는 옷입니다. 여기에 어두움의 일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몇 가지 나왔습니다. 방탕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방탕이란 탕자가 즐겼던 생활입니다. 재물을 가지고 인생을 즐기는 생활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으로 더불어 즐거워하는 생활을 버리고 세상과 짝하는 생활로 즐기는 생활입니다. 노아의 때의 사람들, 롯의 때의 사람들이 즐기던 생활입니다.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었다”고 했습니다(마24:38).

그들은 하나님이 없는 생활을 즐긴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생활이 아니었습니다. 술 취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 술은 영적인 의미가 아닌 것입니다. 정말로 지금 각 교회에는 술에 취하고 있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술을 좋아하고 술을 즐겨 찾는 그런 시대 속에서 함께 술에 취하는 자리에 이르러서는 안됩니다. 음란과 호색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종말의 시대상이 바로 음란과 호색하는 시대이기 때문에 교회도 이 물결에 물들게 되는 것입니다. 쟁투와 투기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쟁투란 싸우는 일로 교권을 위한 싸움, 교회 안의 파벌을 위한 싸움, 정치운동으로 싸우는 경우를 말합니다. 이 싸움은 주로 하나님의 종들이 범하는 죄로 주님은 이들에게 악한 종이라고 정죄하셨습니다(마24:48-51).

결 론 : 바울은 종말에 살아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결론적인 권면으로 “오직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는 생활은 그리스도안에서의 열매 맺는 생활을 말합니다.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이 세대야말로 주 재림의 시기에 매우 가까운 시대입니다. 지금은 깰 때가 벌써 지난 때입니다.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깨어 기도하라”고 하신 말씀을 우리는 지금 우리의 이 시대에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녹21:36).

PREV : 로마서 14장 밤중소리

NEXT : 로마서 12장 밤중소리

LIST WRITE REPLY

Copyright 1999-2020 Zeroboard / skin by GGAMBO

*

로마서 14장

◆ 밤중소리 01-14 | VIEW : 484

≈ 97 ≈ 믿음이 연약한 자에 대한 태도

(본문 : 로마서 14 : 1 - 4)

서 론 : 한 교회의 지체를 이루고 있는 성도들 중에는 여러 가지 형태의 믿음들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큰 믿음을 소유하기도 하며 또 어떤 사람은 연약한 믿음을 소유하고 있기도 합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이들의 신앙적인 충돌이 빈번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일상생활에 부닥치는 음식문제는 심각한 대립상태에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해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권면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여기서 믿음이 연약한 자들이란 우리가 취하는 일부 음식에 대하여 양심에 거리낌을 받아, 먹지 못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반면에 이 같은 음식문제에 율법적인 견해를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무시하면서 음식에 대하여 자유로운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런 사람들은 “모든 것을 먹을만한 믿음”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1. 음식에 관한 것이 문제가 되는 이유

우리들이 그리스도밖에 있었을 때에는 음식에 대하여 자유 했습니다. 자기 기호에 맞는 대로 먹으면 되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교회생활에 들어가면서부터 문제점이 제기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된 대로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된 여러 가지 음식에 대한 규제가 로마교회의 문제점으로 제기된 것입니다.

(1) 구약에는 정결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에 대한 엄격한 구별이 있습니다. 레위기 11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먹어야 할 음식과 먹으면 안될 음식에 대하여 분명히 갈라 놓으셨습니다. 정결한 음식의 표준은 육지에 있는 짐승은 ‘굽이 갈라져 쪽발이 되고 새김질’하는 것으로 제한되었고, 물에 있는 물고기 중에는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 것으로 규제되었습니다. 그 외에 것들은 가증한 것으로, 이런 것을 먹으면 그 사람은 부정하여 질 것이라고 정죄 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을 중요시하는 사람들은 이 말씀이 걸림이 되어 지금까지도 음식을 가려먹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2) 다음에 문제로 제기된 것이 우상의 제물에 관한 것입니다. 우상에 제물로 드렸던 음식을 먹어도 되느냐? 하는 문제는 그 당시나 지금이나 논란의 여지가 많은 것입니다. 특히 로마교회에서 먹는 자와 먹지 아니하는 자의 분쟁의 원인이 되었던 음식은 우상의 제물이었습니다. 우상의 제물이 문제된 원인은 그 당시 로마를 비롯한 이방인의 도시들은 우상숭배가 극심했던 그런 시대였습니다.

로마는 황제를 살아있는 신으로 섬겼기 때문에 문제가 심각했었습니다. 이런 종교적 관습에 따라 그 지역사람들은 음식으로 먹을 짐승을 잡으면 먼저 우상 앞에 제물로 드렸다가 시장에 내다 팔아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장에서 고기를 사 먹는 사람들은 좋건 싫건 우상 앞에 드려졌던 물건을 사 먹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이 양심에 걸려서 어떤 사람들은 아예 고기를 먹지 않고 채소만 사 먹고 또 어떤 이들은 우상의 제물은 아무 것도 아니니 먹어도 상관이 없다는 믿음으로 시장에서 사 먹었습니다. 이것이 논쟁이 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이해하고 넘어가야 할 일은 바울이 이 로마서를 썼을 때에는 아직 신약성경이 완성된 시기가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복음서의 내용도 몰랐고 예수님이 하신 여러 가지 교훈적인 말씀도 아직 듣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로마교회에 ‘믿음이 연약한 자’와 ‘의심하는 자’들이 많이 있었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입니다.

2.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으라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해 아주 명쾌한 답변을 주고 있습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1) 믿음이 연약한 자란 그리스도를 믿기는 하지만 아직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아직까지 율법적인 생활올 해 온 유대인의 경우, 그들은 그들의 생활에 깊이 스며들어 있는 율법적인 생활에서 탈피하기가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방인들과의 성별된 생활을 위해 이방인들과 다른 생활 방법을 제시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 와서는 유대인과 이방인과의 담이 무너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두 거룩해 졌습니다. 부정한 음식이 그들을 더럽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새로운 계명을 받았습니다. 이제는 음식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성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음식을 가지고 거룩한 생활의 방편으로 삼지도 않습니다.

(2) 믿음이 연약한 자란 신앙의 양심을 구약적 지식에 둔 사람을 말합니다. 사람은 어느 한가지 틀 속에서 오래 있다보면 그 생활습성이 하나의 선의 표준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습관이 우리의 양심 속에 깊이 자리잡게 될 때 신앙양심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여기에 새로운 어떤 지식이 침투해 들어 올 때 단연 저항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먹는다는 문제는 그들의 신앙적 양심이 허락하지 아니하고 그 이론에 선뜻 양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3) 어떤 사람에게는 모든 것을 먹을만한 믿음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모든 것을 먹을만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물론 맹목적인 믿음을 가리킨 것은 아닙니다. 믿음이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말씀의 근거에 의하여 가진 믿음이라야 참 믿음인 것입니다.

이 같은 믿음을 가지려면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서 그 근거를 찾고 그 말씀에 의하여 확고한 믿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14절에서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율법에 대한 엄청난 도전입니다. 이 같은 믿음은 그리스도의 속죄의 사역과 그 복음적인 뜻을 깨달을 때 진리에 대한 지식에서 가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모든 식물은 다 깨끗하다”고 하셨습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막7:18).

(4)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판단이란 말은 정죄란 말과 같은 뜻으로 해석이 됩니다. 믿음으로 무엇이나 먹는 자는 양심의 거리낌으로 먹지 못하는 사람들을 업신여기기 쉽습니다. 그리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에 대하여 구약적 계명을 가지고 판단하기 쉬운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업신여김이나 판단이 잘못된 것은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음식은 하나님의 일을 무너지게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른 지식을 가지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이 장성하여 바른 진리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결 론 : 바울은 남에 대한 판단이 죄가 된다는 사실에 대하여 “남의 하인이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다”고 결론적으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주인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먹고 마시는 일이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하셨습니다(고전10:31). 우리들의 생의 목표가 이처럼 뚜렷합니다. 먹는 일로 내 형제를 업신여기거나 판단하거나 거쳐 넘어지게 해서는 안됩니다. 사도 바울처럼 사랑으로 내 형제 앞에 덕을 세우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 98 ≈ 그리스도안의 날과 절기

(본문 : 로마서 14 : 5 - 9)

서 론 : 초대 교회시대에 있어서 먹는 문제와 절기를 지키는 문제는 교리적 논쟁의 중심문제였습니다. 이 문제로 인하여 서로가 서로를 판단하기에까지 이르게 되었고 교리적인 혼선을 빚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신약적인 교훈이 필요로 했습니다. 바울은 이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시를 근거로 이 문제를 이곳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바울의 증거는 하나님의 나라에 있어서 먹는 일과 날을 지키는 문제는 어떤 법에 얽매일 것이 아니라 각기 신앙적 양심에 비추어 자기 마음에 확정할 문제라고 밝혔습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법에 얽매인 생활이 아니라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 삶”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교회에서의 날과 절기

교회의 초기에는 아직 계시의 미비로 여러 면에서의 교회의 질서가 정돈되지 못했었습니다. 초대교회엔 자연히 구약적인 교훈이 강력히 머리를 쳐들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도 이 같은 풍조가 만연되어 있었습니다. “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고 했습니다. 이런 논쟁은 하나님의 교회에서의 율법적인 적용문제가 심각했었음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행15:1-5).

바울은 이 날과 절기 문제에 대하여 “혹은 이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 지니리”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바울이 말한 이날과 저 날은 그 당시 교회에서 지켜오고 있는 여러 날들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아마 유대교에 오랫동안 몸담아 온 유대교인들은 좀처럼 율법적인 안식일의 관념에서 빠져 나올 수 없었을 줄 압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영원한 규례로 주신 민족적 절기도 하나님의 교회에서 마땅히 지켜야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들 중 교회에 들어 온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날과 절기 등이 율법에 구속받을 것이 아니라 새로운 날을 정하여 지켜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마다 제각기 이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는 경향이 있지만 바울은 이 같은 날과 절기는 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중요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밝히고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2) 날 중에 큰 문제로 부각된 날은 바로 안식일을 지키는 일이었습니다. 지금도 이 안식일을 고수하는 교파가 있어서 구약의 안식일의 준수를 구원문제와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안식일은 신약이나 구약의 시대적 차별을 초월한 하나님의 영원한 규례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율법을 주시기 이전 창세기에도 분명히 나타나 있고 십계명에 분명히 명시되어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재론의 여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7일 중 하루를 지칭한 날입니다. 이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율법을 주실 때 이스라엘에게 율법적 규례로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사실인즉 신약시대에는 안식일이 존재치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안식일은 율법에서 나온 것이며 신약시대에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그 율법에서 벗어났습니다. 십계명은 그 모두가 그리스도인들의 영원한 규례가 아닙니다. 그 중에 안식일은 율법에 속한 절기에 관한 문제이므로 포함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다음과 같은 말씀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골2:16-17).

안식일은 그 안식일 자체만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증거 해 주고 있습니다.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뇨 곧 순종치 아니하던 자에게가 아니냐 이로 보건대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히3:18,19). 안식일은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는 것을 근본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안식일을 잘 지켰지만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실질적 자격요건인 순종에 불합격자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안식에 실격자가 된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참 안식의 뜻을 이처럼 명백히 밝혀 주고 있습니다. “제 칠일에 관하여는 어디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 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또 다시 거기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면 거기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치 아니함을 인하여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이 말씀은 복음에 순종하는 자가 안식일을 지키는 자요,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자임을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히4:1-11).

2.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

이런 문제에 대하여 바울은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율법적 안식일을 지킬 수 없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사람이 만약 안식일을 율법적으로 지키려 할 때 율법적인 저주를 피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율법에 따라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면 구약전체에 있는 안식일에 대한 조항을 지켜야할 것입니다. 그리고 안식일 뿐 아니라 율법 전체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으며 만약 그것들을 지키지 못할 때는 율법의 저주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안식의 성취입니다. 주님과 연합된 그리스도인의 부활은 장차 우리의 온전한 안식의 소망인 것입니다. 주님의 완성된 안식, 우리의 안식의 실현이 될 부활을 소망하면서 주의 부활의 날을 우리는 ‘주의 날’로 정하고 이 날에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구약적인 절기문제 역시 동일한 각도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유대인들이 구약에서 민족적인 절기로 지켜 온 삼대절기(유월절, 오순절, 초막절)를 보아도 이 절기가 단순히 구약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유월절은 예수님이 유월절 어린양으로 회생제물이 되심으로 이미 성취된 일입니다(고전5:7). 하나님 앞에 첫 열매를 드리는 오순절 역시 그날에 성령이 임하시므로 그 첫 열매로 하나님의 교회가 탄생되었습니다(행2:1-4). 초막절은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신 일을 기념하는 절기인데 우리는 지금 성령의 내주 하심으로 은혜의 초막절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같은 구약적 절기는 신약시대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대한 그림자입니다. 우리는 지금 실체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림자를 벗어 버려야 함은 당연한 일입니다(골2:16,17).

그리스도인의 생의 목표는 분명합니다. 바울은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리라”고 말했습니다. 안식일 문제나 절기 문제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런 것이 우리에게 생명을 준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이 우리의 소망을 이루어 주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삶의 최선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를 위하여”인 것입니다. 이 같은 삶의 푯대가 분명하다면 지엽적인 안식일이나 절기나 음식문제로 하나님의 교회를 시끄럽게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결 론 : 바울은 주님께서 “이를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이를 위하여’란 말씀의 뜻은 “우리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으로 드리는 생활을 위하여”란 의미입니다. 그의 죽으심으로 죽은 자에게 주가 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죽어도 주님은 여전히 우리의 주가 되십니다. 그의 살아나심은 산 자의 주가 되시기 위해서라고 하셨는데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의 주가 되신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인의 복된 소망이 아닐 수 없습니다.

≈ 99 ≈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강과 희락

(본문 : 로마서 14 : 10 - 18)

서 론 : 그리스도인의 일반적인 생활은 어떤 규범에 얽매인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의 양심적 판단에 따를 것을 바울은 권면하고 있습니다. 구약에 있는 날이나 절기나 먹는 문제는 신약시대에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될 수 없음을 바울은 조심스럽게 밝혀 주고 있습니다. 이 같은 바울의 권면은 탈 율 법적인 사상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실질적으로 날이나 절기나 음식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그리스도인을 결코 속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신약적인 성도들의 생활의 궁극적 목적에 대하여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는다”고 말해 줌으로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따르는 이런 부수적인 것들이 우리를 얽매일 수 없다고 주장하고 또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의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밝혀 줌으로 절기 문제나 음식문제는 판단을 받을 만한 문제가 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심판대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에 한 지체를 이루고 있는 형제들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엄한 경종을 받고 있습니다.

(1) 판단한다는 말은 율법적인 정죄 행위를 의미합니다. 이 일에 대하여 야고보 사도는 이처럼 경종해 주었습니다.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니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고 했습니다(약4:11). 이 일이 죄가 된다는 것은 우리들 자신도 연약에 싸여 있기 때문에 우리가 판단하는 그같은 죄를 우리도 하나님 앞에 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일에 대하여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고 하셨습니다(마7:3). 우리가 형제의 죄를 율법자의 입장에서 판단하면 율법의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에 대하여 준엄한 판단을 내리실 것입니다.

(2) 바울은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여기서 밝힌 하나님의 심판대란 ‘흰 보좌 심판’을 말합니다. 이 심판은 천년왕국이 지난 후 신자들은 그리스도안에서의 변화 받고 죽은 자들은 무론 대소하고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로 살아난 후 하늘의 보화 앞에서 베풀어주는 최종적인 심판을 가리킵니다. 이때 하늘의 보좌 앞에 벌어지는 심판대는 두 가지 모습을 나타낼 것입니다.

하나는 불신자들의 심판입니다. 이들은 모두 저주받은 자들로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해 예비된 영영한 불로 들어갈 자들입니다. 주님은 이 같은 심판에 대하여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해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는 명령을 내리신다고 하셨습니다(마 25:41). 이들이 받을 심판은 행위책에 기록된 대로 조금도 어긋남이 없을 것입니다.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계20:12).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의 상급 심판도 아울러 전개됩니다. 바울이 여기서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고 말하고 있는 우리란 불신자들을 의미하고 있는 말이 아닙니다. 이 일에 대하여 바울은 분명히 믿음을 가지고 이처럼 말해 주었습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 했습니다(고후5:8-10). 그리스도인들의 상급을 위한 책은 행위책이 아니라 생명책입니다(계2:12). 이 책을 선지자 말라기는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이라고 했습니다(말3:16). 그리스도 안에서의 모든 수고가 결코 헛되지 않다고 하신 것은 우리의 일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이 ‘기념 책’에 기록되어 조금도 가감됨이 없이 상급으로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고전15:58). 예수님이 냉수 한 그릇의 상도 잃지 않으리라고 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마 10:42).

(3) “그 날에는 모든 무릎이 내게 끓고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모든 무릎이란 주님 앞에서 심판 받는 모든 죄인들의 모습입니다. 그 앞에서는 인간세상에서 누렸던 권세도 영광도 학식도 재물도 마치 썩은 짚만도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이십니다.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끓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빌2:9,10). 하나님 보좌 앞에 있는 행위책에 기록된 대로 자기 혀로 자기의 죄를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인간의 머리 속에는 세미한 뇌 세포조직이 있는데 이 조직이야말로 하나님의 컴퓨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 함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마13:36).

2. 바울의 확신

바울은 여기서 계시로 받은 믿음에 대한 확신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이 날과 절기와 먹는 일이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에 중요한 일이 아니며 또 이 일에 형제들을 판단할만한 일이 아니란 사실을 여기서 밝혀 주고 있는 것입니다.

(1)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속된 것이란 ‘부정한 것’을 의미해 주는 말입니다. 모든 식물은 스스로 부정한 것이 없습니다. 율법에서 어떤 식물에 대하여 부정하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은 이방인과 하나님의 백성들과의 성별된 생활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구별해 놓으신 것으로 이 같은 하나님의 구별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 거룩함과 부정함이 새롭게 성별 되었으므로 율법적인 구별이 무효화된 것입니다.

(2) 그럼에도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고 했습니다. 스스로 속된 것이 없다고 하는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부정한 식물을 대할 때 양심에 가책을 받게 됩니다. 그 사람에게는 그 식물이 속되다고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식물이 그에게는 부정한 식물이 되기 때문에 먹으면 스스로 정죄에 이르는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형제들에게 이 같은 진리를 잘 가르치므로 ‘스스로 부정한 식물이 없다’는 믿음을 가지게 해야하며 억지로나 양심에 가책을 받게 하면서 그 식물을 먹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안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자유가 무한히 보장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누리는 선한 것들입니다. 이런 선한 일들이 우리의 부주의나 사랑의 결여로 내 형제들을 판단하는 수단이 되거나 다른 이의 비방을 받게 되면 안됩니다.

결 론 : 바울은 결론적으로 이르기를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먹는 일과 마시는 일이 하나님의 나라에 중요한 일 일수 없습니다. 먹는 일과 마시는 일은 우리의 육신적인 생활을 이루어 나가는 일에 필요한 것뿐입니다. 그 이상도 아니요 그 이하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중요한 일은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이루는 일입니다.

≈ 100 ≈ 화평과 덕을 세우는 생활

(본문 : 로마서 14 : 19 - 23)

서 론 : 바울은 식물에 대한 논쟁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형제들의 신앙에 손상을 주므로 이런 일로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는 일이 합당치 않다는 사실에 대하여 누누이 설명하고 거듭 거듭 경종 해 주었습니다. 이것은 그 당시 로마교회에 있어서 식물에 관한 문제가 얼마나 절박한 일이었나를 잘 설명해 주는 근거가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고 사람들에게도 칭찬을 받는 생활은 날이나 절기나 먹는 일에 대한 논쟁이나 이로 인한 분쟁이 아니라 “오직 성령 안에서의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화평의 일과 덕을 세우는 일에 힘쓰라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모든 일에 있어서 화평의 일과 덕을 세우는 일이 중요합니다. 이 두 가지 요소가 결여된다면 하나님의 교회는 아무리 훌륭한 교리가 있고 완벽한 규범이 있다고 해도 무너져 버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1) 화평의 일이란 사랑에서 나온 이해와 용서를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 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화평의 근거는 십자가에서 나온 사랑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으로 화평을 이루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골1:20). 하나님은 십자가의 사랑으로 우리의 지난날의 죄를 간과해 주시고 용서해 주셨습니다(롬3:25,26). 예수님이 내가 너희를 사랑함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은 이해와 용서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거짓이 없는 진실한 화평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식물문제나 절기나 안식일 문제로 형제를 판단하는 일은 교회의 화평을 깨는 일입니다.

(2) 다음에 바울은 덕을 세우는 일에 힘쓰라고 했습니다. 덕이란 말은 마음과 행실이 겸손한 인격의 나타남을 의미해 주는 말입니다. 일반적으로 정의한다면 ‘옳고, 착하고, 빛나고, 아름답고, 따스하고, 부드러운 마음씨나 행실’이 덕입니다. 그러므로 이 덕이란 말은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에 필수적인 요소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열매는 바로 이 덕으로부터 시작해야 하며, 또 덕의 결실로 과실을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덕을 세우는 사람은 남의 판단을 받지 않도록 자기 행실에 조심합니다. 남에게 판단을 받는 일은 덕의 부족에서 나옵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할지라도 덕이 있는 사람은 다른 이의 판단을 받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처신을 합니다.

덕을 세우는 사람은 형제들에게 신앙적 본을 보이도록 힘씁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비 신앙적인 일은 덕을 상실하게 되어 형제들을 거쳐 넘어지게 합니다.

덕을 세우는 사람은 인격적인 신앙 인이 되기 위해 힘씁니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에게 인격적인 품위를 나타내야 합니다. 그의 말이나 행실이 그리스도안에서 자라납니다. 말하자면 그의 인격이 그리스도화 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그리스도인의 성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3) 바울은 식물을 인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지 말라고 경종 했습니다. 이 같은 일은 화평의 일이 아닙니다. 덕을 세우는 일도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출발 단계는 언제나 믿음이 연약하게 마련입니다. 이처럼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사랑으로 품고 이해하고 용납해 주어야 할 화평의 책임이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입니다.

2. 거리끼게 하는 일을 삼가라

하나님의 교회에서 화평을 기하고 덕을 세우려면 “네 형제로 거리끼게 아니하는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거리끼게 하는 일이란 걸려 넘어지게 하는 일을 말합니다.

(1) 바울의 교회생활이 이런 생활이었습니다. 바울은 큰 믿음을 소유한 사도요, 주님으로부터 많은 계시를 받은 사람으로 그리스도안에서 믿음을 쫓아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교회의 화평과 덕을 세우기 위해 모든 일에 스스로 절제하는 생활올 해 왔습니다. 바울은 식물에 대하여 자유 했지만 그러나 그의 생활은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위해 스스로 절제하는 생활을 하였는데 이것이야말로 교회의 화평과 덕을 세우는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바울은 이처럼 자신의 절제생활을 밝히고 있습니다. “만일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고전8:13). 바울의 이 같은 생활은 우리가 본 받을만한 아름다운 일입니다.

(2)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아니한 자는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자기의 옳다 하는 바는 그 뿌리가 믿음에 내려져 있어야 합니다. 바른 믿음의 판단에서 나온 결과여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어떤 경우에라도 자신을 책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한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젖이나 먹는 어린아이의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안됩니다. 우리는 모든 일에 믿음이 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믿음이 있는 자로서 교회의 화평을 기하고 덕을 세우는 입장에 서 있어야지 믿음의 후견인으로 언제나 돌봄을 받는 처지에 있어서는 안됩니다. 형제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덕을 세움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 나가는 성숙한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담대한 믿음은 바른 믿음의 산물입니다. 믿음은 마음의 맑은 유리 같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그의 양심의 증거를 받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도 양심이 책망을 듣거나 후회치 아니합니다.

(3) “믿음으로 쫓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표준은 오직 믿음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으로서 믿음이 없는 생각, 믿음이 없는 행동은 모두 죄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는 믿음을 떠난 모든 것이 죄가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쫓지 못하는 이유는 의심이 그 사람을 유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식물에 대한 일도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 되었다’고 단정적으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어떤 음식이든 의심이 된다면 그 식물을 먹지 말아야 합니다. 의심하고 먹는다는 말은 양심의 정죄의 소리를 듣고도 그 일을 행하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 상태에서 먹는다면 먹는 그 자체는 죄가 아니라도 그가 스스로 마음으로 자신의 행동에 대하여 정죄 하면서도 그것을 먹었기 때문에 죄를 범한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결 론 : 우리는 우리의 믿음의 상태를 한번 정검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특별히 날이나 절기나 식물에 대한 지식과 믿음에 있어서 믿음이 연약한 자리에서 다른 이의 이해와 용서를 받는 대상의 사람인가? 아니면 그런 사람들을 위해 화평의 일과 덕을 세우는 일에 힘쓰는 사람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책망 받을 것이 없는 믿음을 가지고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의 생활을 이루어 나간다면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을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칭찬을 듣는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PREV : 로마서 15장 밤중소리

NEXT : 로마서 13장 밤중소리

LIST WRITE REPLY

Copyright 1999-2020 Zeroboard / skin by GGAMBO

*

로마서 15장

◆ 밤중소리 01-14 | VIEW : 665

≈ 101 ≈ 하나가 되는 교회

(본문 : 로마서 15 : 1 - 6)

서 론 :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요, 성도는 하나님의 집에 속한 한 가족입니다. 우리는 한 하나님을 똑같이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처럼 한 분을 함께 아버지라고 부른다면 그 아버지의 자녀들은 한 형제요 한 자녀들임에 틀림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라고 부릅니다. 이 말은 그저 빈말로 적당히 부르는 형용사가 아니요 정말로 한 아버지의 형제들이 된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한 가정이 잘되고 평안하려면 그 가정이 하나 되어야 합니다. 거기에는 가족의 이해와 관용과 사랑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하나가 되는 교회에 대하여 교훈 해 주고 있습니다.

1. 자기를 기쁘게 하지 말라

한가정의 평강과 행복은 가족들간의 화목에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집인 교 회의 화목에 대하여 첫 번째로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기쁨은 자기 마음속에 깊숙이 간직하고 있어야 합니다. 자기를 기쁘게 하지 말라고 한 바울의 교훈은 자신의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기쁨까지 포기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기쁨이 충만해야 하며 그것이 우리의 생활 속에 샘솟듯 솟구쳐 나와야 합니다. 이 기쁨은 그리스도인의 소망과 평안입니다. 소망이란 우리의 영생과 천국에 대한 것입니다. 이 같은 기쁨은 그 어떤 경우에도 그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으며 절제할 수도 없는 기쁨입니다.

(2) 자기를 기쁘게 하지 말라고 한 의미는 다른 형제들의 신앙생활에 시험이나 유혹이나 나쁜 영향을 줄 수 있는 경우를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연합된 공동체 안에서의 자기의 위치를 스스로 과대평가 하여 자신의 믿음을 으뜸으로 내세우기도 하며 누가 무엇이라 하든 자신의 믿음을 고집하는 생활에 만족하며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이 사람들은 결국 독단과 교만에 빠지게 됩니다.

(3) 그리스도인의 신앙 자세는 마땅히 연약한 자의 그 약점을 담당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는 ‘강한 자와 연약한 자’가 있습니다. 강한 자로 표현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믿음이 성장한 신자로 모든 일에 믿음으로 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 사람들은 교회의 중직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이 사람들에 의해 운영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반면에 교회에는 많은 약점을 들어내놓을 수밖에 없는 믿음이 연약한 자들도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더 오랜 세월, 믿음의 연단과 시련과 신앙적인 체험을 통해서 앞으로 강한 자가 될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의 초기에 연약한 자의 과정을 걸어야 합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들은 믿음이 장성하여 강한 자에 이르기까지 ① 믿음이 견고치 못하여 혹 날이나 절기나 식물에 관한 문제에 대하여 자신의 알고 있는 지식이나 양심의 거리낌으로 갈등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② 다음에 아직 세상적 습성을 완전히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는 형제들로, 이들은 양심의 갈등 속에서도 술이나 담배에 대하여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③ 그리고 성품 적으로 쉬 넘어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④ 말씀의 지식이 부족하여 교리적으로 밝지 못하여 실수할 수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 우리는 그들의 연약한 부분을 친히 담당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담당한다는 말은 그 짐을 내가 진다는 뜻으로 그들에게 덕을 세우고 사랑으로 용서하고 이해해 주며 화평의 일을 도모하므로 양육자의 입장에 서서 강한 자가 되기까지 돌보아 주라는 뜻입니다.

2.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라

바울은 자기를 기쁘게 하는 생활로 다른 형제들에게 신앙적 손상을 주는 생활로부터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해 주는 적극적인 생활’로 돌이켜야 한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내 이웃에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는 일은 이웃을 기쁘게 하는 생활입니다. 이웃에 대한 선은 그 이웃의 유익을 말합니다. 이 같은 이웃에 대한 선은 사랑의 생활에서 나옵니다(고전13:4-7). 또한 자신의 견해나 입장이 옳고 자기 행위가 타당하다고 해도 이로 인하여 이웃과 다투는 일이 없도록 덕을 세우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2) 우리는 주님의 생활을 본 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맏 형님이 되시는 예수님의 모든 행실은 우리의 모범이 되는 생활이기 때문에 바울은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오신 일은 그의 온유하심과 겸손하심의 본을 보여주신 일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 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고 했습니다(빌2:6-8). 그는 우리의 허물을 인하여 희생이 되셨고 우리의 죄로 인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에게 영원한 기쁨을 선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나는 나의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오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 함이라 내 아버지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날에 살리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3) 성도들은 성경에 기록된 바를 우리의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이 같은 생활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믿음의 선진들의 생활을 살펴보고 교훈으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그리스도인의 생활에는 상급이 따릅니다. 그러므로 어려움이 있다고 할지라도 인내와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4)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다 똑같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뜻이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의 일치는 어려운 일입니다. 세상의 잡다한 모든 사람들이 제 각기의 성품과 습성을 가지고 한 우리 안에서 생활해 나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움직일 수 없는 공통적인 위대한 공동목표가 있습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존재하는 웬만한 문제점은 이 목적의 그늘아래 깊숙이 파묻히게 됩니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는 이 절대적인 삶의 대 명제를 소홀히 해서는 안돼는 것입니다. “강한 자와 연약한 자”가 모여 하나를 이룰 수 있는 비결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생활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뜻을 같게 해 주십니다.

결 론 : 하나님의 교회가 성장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은 그리스도안에서 교회가 하나가 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 이해하고 사랑하며 용서하고 선한 일과 덕을 세우는 일로 한 가족관계를 이루어야 합니다. 자기의 기쁨을 나타내려는 생활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의 기쁨을 공급해 줄 수 있는 아름다운 생활로 하나가 되어야합니다. 주님이 보이신 남을 위한 희생 생활을 본 받아 내 형제를 위해 회생하는 생활로 서로를 아끼며 섬겨야 합니다.

≈ 102 ≈ 서로 받아 드리는 사랑

(본문 : 로마서 15 : 7 - 13)

서 론 :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그의 사랑과 은혜를 여러 가지로 우리에게 보여 주십니다. 그 나타내시는 각도에 따라 혹은 안위의 하나님, 혹은 인내의 하나님, 혹은 소망의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평강의 하나님(롬 15:33), 모든 위로의 하나님(고후1:3), 모든 은혜의 하나님(벧전5:10)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같은 아름다운 용어들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의 역사를 나타내 주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런 하나님이 우리로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 너희도 서로 받으라

그리스도인의 삶의 최대의 목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는 잡다한 인종, 여러 가지 성품의 사람들이 모여 있지만 흩어지거나 무너지지 않고 성장과 부흥을 이루고 있는 이유는 바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궁극적인 삶의 목적이 이처럼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의 교회에서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서로 받아 드림으로 그리스도안에서 하나가 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1) 우리가 서로 받아 드릴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 데 우리를 받아드리신 것입니까? 그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신 그가 하늘의 영광을 버리시고 우리와 같이 죄인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를 받아드리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세상에서 약한 자로서의 시험을 받으심으로 시험을 받는 우리의 본이 되셨습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배척받으시면 서도 그들을 배척하지 아니하심으로 우리의 본이 되셨습니다. 그는 고난 중에 인내하심으로 고난을 받는 우리의 본이 되셨습니다. 이 같은 예수님의 본은 우리들로 예수를 배우게 하심으로 그 아들의 형상을 이루시려는데 있습니다(롬8:29, 갈4:19). 바울은 우리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받아 드리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2) 바울은 여기서 주를 본받아 너희도 서로 받으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서로’라고 말한 대상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말하는 것으로 이들이 하나님의 교회에서 서로 ‘받으라’ 곧 서로 영접하라는 것입니다. 로마교회에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간에는 많은 갈등을 자아내고 있었습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로운 생활,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의 선민의식 등이 갈등을 빚어내 ,교리적인 충돌이 잦았습니다. 서로 받아 드리지 아니하므로 그리스도안에서 하나가 될 수 없었습니다.

① 여기서 서로 받아드리는데는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넓은 마음이 필요합니다. 다툼이나 판단은 교만이나 자기 우위에서 나옵니다. 그러므로 형제를 이해하고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해 주려면 먼저 자기보다 다른 이를 낫게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용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했습니다(빌2:3). 예수님도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하셨습니다(마20:27). 다른 사람을 자기보다 나은 사람으로 대우해 준다는 일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경우를 본받아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는 차원 높은 믿음의 생활을 해야 합니다.

② 서로 받아 드리는 일에는 서로의 약점을 서로가 짊어질 수 있어야 합니다. 약점을 판단하면 그곳엔 분쟁이 생기고 파벌이 생깁니다. 상대편의 약점을 자신의 약점으로 이해하고 그것을 짊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폭 넓은 이해가 필요합니다. 그 약점을 덮어 줄 수 있는 사랑의 보자기가 필요합니다.

③ 서로 받아 드리는 일에는 서로가 신앙의 협력자가 되어야 합니다. 다양한 사람이 한 가족으로 한 울에서 행복스럽게 살아가는 이유가 어디 있는 것입니까? 서로의 협력에 있는 것입니다.

(3) 바울은 주님께서 할례의 수종자가 되신 이유에 대하여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할례의 수종자가 되셨다는 말씀은 예수님이 율법의 준행자가 되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에 얽매이실 필요가 없는 분이지만 그가 친히 율법의 준행자가 되신 이유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함께 위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안에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구별함 없이 서로 받아 드려야 할 것을 의미해 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을 위하심이란, 그렇게 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유대인의 조상들에게 주신 언약을 견고케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에게 약속된 메시야이십니다. 이 같은 약속은 그의 조상들에게 언약으로 수도 없이 주셨습니다. 그 일을 견고케 하시기 위해서는 그가 유대인으로 태어나셔야 했으며 율법 아래에 태어나 그 율법을 준수해야 했습니다. 다른 한편 예수님은 이방인에게도 약속된 구주가 되십니다. 창세기 3:15절의 ‘여인의 후손’의 약속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구별이 없는 약속입니다. 유대인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에도 하나님의 약속은 유대인들에게 국한시킨 약속이 아니었습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라”고 하신 것은 이방인들도 그 약속에 포함된 사실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창12:3). 이 일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들도 이방인파 유대인의 담을 헐어버리고 서로 받아 드리므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바울이 인용한 구약은 이 사실을 뒷받침해 주는 성경적 근거로 제시해 주었습니다.

2. 소망의 하나님

하나님은 소망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소망의 사람들입니다. 소망을 품고, 소망을 바라고, 소망가운데 살아가는 생활이 우리의 생활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인간이 만들어낸 소망이 아니라 ‘소망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확실한 소망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의 사죄를, 그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 영생을, 그의 부활을 통해 우리의 부활의 소망을 확실히 소유하게 하셨습니다.

이곳에서 하나님을 소망의 하나님이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은 우리에게 소망을 소유하게 하셨을 뿐 아니라, 그 소망을 친히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증하신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결 론 : 13절에서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는 모든 기쁨과 평강이 성령 안에서 충만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의 소망이 넘쳐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우리는 이 기쁨과 평강과 소망 안에서 살아가도록 항상 힘써야 하며 그리하여 서로가 서로를 받아 드리는 생활을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 103 ≈ 로마교회가 받은 칭찬

(본문 : 로마서 15 : 14)

서 론 : 로마교회는 이방인 교회 중에 가장 규모가 큰 교회요 세계적으로 복음을 전파할 중요한 위치에 있는 교회였기 때문에 로마교회에 대한 바울의 관심이 컸습니다. 로마교회에 커다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바울은 교회성장에 장애가 되는 약간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권고하였는데 14절에 와서 바울은 로마교회가 가지고 있는 선한 면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로마교회에 대한 바울의 칭찬은 세 가지로 나와 있는데 첫 번째는 그들에게 선함이 가득했다고 했습니다. 두 번째는 지식이 가득했다고 했습니다. 세 번째는 로마교인들은 서로 이 지식으로 권면하는 일을 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 스스로 선함이 가득했다.

로마교회가 칭찬들은 일은 그들에게는 선함이 가득했다는데 있습니다. 그들에게 가득한 선함이란 그들의 신앙생활 가운데서 맺는 열매를 말합니다.

(1) 그리스도인의 열매란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성령의 열매요, 하나는 육신의 열매입니다. 이 두 가지는 열매란 면에서 볼 때는 비슷한 것 같지만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가치란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로마교인들이 맺었다고 하는 열매란 성령의 열매를 의미합니다. 어떤 사람에게 도덕적인 선함이 가득하고 인간적인 사랑이 많다고 해도 그것이 성령으로가 아니라 육신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라면 그같은 일은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 없는 열매입니다. 육신의 열매는 그것이 아무리 훌륭하고 놀랍게 보여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없고 하늘의 상급도 받을 수 없으며 그 일로 하나님의 나라의 유업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육신의 열매를 맺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성령의 열매인줄로 잘못 알고 있으면 안됩니다.

(2) 선한 열매란 언제나 주의 이름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선한 열매에는 언제나 뚜렷한 목적 의식이 수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목적 의식이란 이 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는 간절한 바람입니다. 주님께서 냉수 한 그릇에 대한 상급을 말씀하시는 가운데서 이 같은 사실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누구든지 너희를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가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막9:41). 이 말씀 중에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 주의 이름으로, 주의 이름 때문에,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목적으로, 주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라는 단서가 반드시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3) 선한 열매를 맺으려면 먼저 내가 죽는 일이 따라야 합니다. 주님은 “한 알의 밀 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많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육신의 사람이 죽지 아니하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밀 알 안에는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무한한 생명이 잠재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밀 알이라고 하는 껍질 때문에 그 생명이 밖으로 뻗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껍질을 땅에 묻어 썩혀야 합니다. 우리 안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잠재해 있습니다. 그 생명 안에는 무한한 하나님의 능력으로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생명력은 우리들의 육신의 껍질 때문에 밖으로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생명이 우리들 몸밖으로 나오기 위해서는 우리의 육신이 죽어야 합니다. 그러면 육신이 죽는 다고 하는 이 말은 어떤 뜻인가? 이 일에 대하여 바울은 이처럼 말씀해 주었습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생실을 죽이면 살지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8:13).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일지라도 육신을 입고 이 땅위에 살아가고 있는 한, 우리의 생활 중에서 두 사람의 격렬한 싸움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의 겉 사람인 육의 사람은 육신의 소욕을 이루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속 사람은 영적인 일을 갈망합니다. 이 두 사람의 싸움에서 우리는 보통 곁 사람인 육신의 사람에 의하여 속 사람인 영의 사람이 판정패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육신의 사람의 소욕이 아무리 강렬하게 작용하여도 성령으로 이런 생각을 죽이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순종하는 생활을 통해 선한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2. 모든 지식이 가득했다.

다음에 바울은 로마교회에 칭찬하기를 ‘모든 지식이 찼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지식이란 그들이 영적으로 무장하고 있는 진리의 말씀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식이란 마치 농사꾼들이 추수기에 곡간에 양식을 쌓아 두는 일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지식이 빈약하면 곡간에 양식이 빈 농부의 경우처럼 영적으로 가난하고 굶주리는 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1) 그리스도인들에게 지식이 중요한 것은 이 지식이 우리를 자유케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는 원동력은 지식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한다”고 하셨습니다(요8:32). 지식이 없는 사람은 자신의 구원에 확실성을 가질 수 없습니다. 은혜 받았다고 좋아하고 은사 받았다고 기뻐했던 많은 사람들이 쉽게 넘어지는 원인은 다른 것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진리의 지식이 부족해서인 것입니다.

(2) 주님은 성령이 오시면 너희를 진리가운데로 인도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성령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우리들을 진리가운데로 인도하시는 일입니다. 말씀으로 구원의 확신도, 말씀으로 확실한 소망도, 말씀으로 하나님의 약속도 분명하게 소유한 신앙이 환난에도, 시험 중에도, 궁핍 중에도 넘어지지 아니하는 굳건한 믿음의 터전이 되는 것입니다.

3. 서로 권면하는 교회로

바울은 로마교회가 서로 권면하는 교회임을 칭찬했습니다. 이들의 이 같은 권면은 그들의 지식에서 나왔다고 했습니다. 지식이 없는 사람은 다른 이를 권면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권면은 말씀의 권면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골로새 서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의 풍성한 지혜로 서로 가르치며 서로 권면하라”고 했습니다(골3:16).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그 마음속에 어떤 문제라도 말씀으로 해결할 수 있는 지식을 풍성히 간직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도 스스로 그 말씀으로 권면을 받고 다른 사람도 피차에 권면 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서로란 말을 사용하고 있는데 우리는 피차에 이 같은 권면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들은 서로간의 권면을 들을 수 있는 겸손한 자세를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미련한자와 지혜로운 자의 차이가 이 권면을 듣는 일로 분별이 되는 것입니다.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기나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느니라”고 했습니다(잠13:15).

결 론 : 언제인가 어느 성도가정에 심방을 간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 앞마당에 심겨진 감나무에 먹음직스러운 감이 정말로 탐스럽게 주렁주렁 열려 있었습니다. 그 감나무는 그 집주인의 마음을 기쁘게 해 주었을 뿐 아니라 손님이 대접받았을 때 칭찬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하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요15:1,2)

≈ 104 ≈ 바울이 받은 하나님의 은혜

(본문 : 로마서 15 : 15 - 21)

서 론 : 바울은 그가 하는 모든 복음의 사역을 그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대로 했습니다.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가 너무나도 컸기 때문에 그가 주를 위해 한 일도 매우 컸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로 인하여 더욱 담대히 썼노니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로마교회 역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교회로 믿음으로 잘 성장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바울은 그들로 ‘더욱 생각나게 하려고’ 이 로마서를 담대히 썼노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1. 바울에게 은혜를 주신 하나님

바울은 15절에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은혜를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은혜를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라고 말했습니다.

(1) 바울이 자랑하고 감격하는 은혜란 하나님께서 바울을 ‘사도’로 택정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다”고 했습니다(롬1:1). 바울은 자신이 지난날에 주님을 대적해 온 무서운 죄과를 깊이 생각하면서 지금 자신이 받고 있는 주님의 그 무한하신 사랑에 너무나도 감격하여 이것을 그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 바울은 이처럼 은혜를 주신 일은 자기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이 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을 때에 그 은혜가운데서 또한 영광스러운 소명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로 “이방인을 위한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자신을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그것입니다(롬11:13).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을 쓰심에 있어서도 각기 가지고 있는 달란트의 사명대로 쓰셨습니다. 이방인으로서의 사도 직은 베드로보다도 요한 보다도 바울에게 적격이었습니다. 바울은 그가 받은 은혜대로 이방인을 위한 그리스도의 선한 일꾼으로서의 맡은 사명을 온전히 이루었습니다.

(3) 바울은 그의 직분에 대하여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셨다”고 말해 주고 있습니다. 제사장 직무는 하나님께 받으실만한 제물을 드리는 것인데 이에 대하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 직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이방인을 하나님께 거룩한 제물로 드리는 사명을 바울은 자신이 받은 ‘복음의 제사장 직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종들을 제사장의 사명을 받은 자들이라고 표현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바울의 말을 빌린다면 하나님의 종들은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들입니다. 복음의 제사장들이 하는 일이란 신약적 제물을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는 일입니다. 바울은 그의 제사장 직분을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일로 수행했습니다. 하나님의 종들은 자기 교회 성도들을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하나님의 받으실만한 제물로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제물은 제사장의 책임인데 그들을 위한 기도의 제물을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야 하며 그들의 사죄를 위한 눈물의 탄식을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야 합니다.

(4) 하나님께서 바울이 이 이방인을 위한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이행함에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 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복음의 제사장들에게 바울처럼 그의 하는 사역에 능력을 나타내시는데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 하시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에 나타나신 주님의 모습은 ‘오른손에 일곱별로 불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로 나타내고 계십니다(계2:1). 주님은 그의 종들을 그의 오른 손으로 꽉 불잡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종들의 “말이며 일등에 표적과 기사의 능력”을 나타내시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2. 누가 은혜를 받은 사람인가?

은혜란 말의 헬라어는 ‘카리스’로 이 말의 뜻은 아무런 대가나 보상을 바라지 않고 상대방에게 혜택을 주는 일을 말합니다. 특히 은혜란 말이 성경적으로 사용할 때에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구원에 대하여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우리의 죄가 용서받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무런 대가없이 그의 아들의 피로 그를 믿는 자의 죄를 무조건 사유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2)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를 얻은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율법의 의를 얻기에도 불가능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율법의 의보다 월등한 그리스도의 의를 다만 믿음으로 주셨습니다. 우리는 의롭게 되기 위하여 율법의 종이 될 필요도 없으며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고행할 필요도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의를 이룰 능력도 없고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선함도 없지만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준비하시고 우리에게 그리스도안에 들어 와서 거저 가져가라는 것입니다.

(3) 우리가 영생을 얻은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영생을 얻을만한 티끌 만한 자격도 조건도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만 믿음으로 이 영생을 나에게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믿음을 조건으로 여기면 안됩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하나님의 위대하신 선물을 조건 없이 가져가라는 것이기 때문에 믿음은 결코 의를 얻거나 죄의 용서를 받는 대가가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믿음 자체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셨습니다.

(4)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목적에 대하여 몇 가지로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그 은혜 안에서 살아가려면 은혜의 다른 면을 바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①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고 했습니다(빌1:29). 그리스도를 믿는 일에는 고난도 따릅니다. 우리는 그 고난을 피하지 말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아야 합니다.

②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쫓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했습니다(딤후 1:8).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에 빚진 자들이기 때문에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는 고난이 따릅니다.

③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마5:11). 그리스도를 믿는 일에는 욕과 핍박이 따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이 같은 모든 어려움을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결 론 : 바울은 이 같은 하나님의 은혜를 감당하기 위해 어떤 생활을 한 것입니까? 그는 그리스도를 믿는 일 외에는 모든 지식과 온갖 일에 대하여 더러운 배설물로 여겼다고 했습니다(빌2:7,8).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깨닫는 은혜부터 받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신앙이 더 높은 차원으로 올라가서 그 은혜에 감사하는 열매를 맺는 생활을 하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것입니다.

≈ 105 ≈ 축복의 사자

(본문 : 로마서 15 : 22 - 33)

서 론 : 사도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가지고 다니는 축복의 사자로 여겼습니다. 그는 로마교회를 방문할 것을 전해 주면서 “내가 저희에게 나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종들은 사도 바울 뿐 아니라 누구이든 축복의 사자들입니다.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종말에 이루어질 일에 대한 계시를 받은 후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그 편지를 받는 대상을 ‘교회의 사자’란 이름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자란 말은 보내심을 받은 전권대사란 뜻인데 이처럼 바울은 다른 사람 아닌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전권대사로 그가 보내심을 받았을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함께 받는 것입니다.

1. 바울의 선교적 사명

바울은 언제든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전하는 그리스도의 사자임을 자부하면서 하나님이 보내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찾아갔습니다.

(1) 바울은 3차 전도여행의 종착지인 고린도에 머물고 있으면서 로마교회에 보내는 이 서신을 썼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지방에서 복음을 편만하게 전한 터라 이제 그는 로마를 거쳐 서바나(지금의 스페인) 끝까지 복음을 전파할 새로운 의욕에 불탔습니다. 바울이 다메섹 가는 길에서 회심한 후에는 복음전파의 사신이 되어 아시아 지방을 전도 활동지역으로 하여 그의 생애를 보내 왔습니다. 그는 1차 전도여행으로 45년부터 48년까지 3년간을 갈라디아 지방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다음에 그는 2차 전도여행으로 50년부터 53년까지 헬라에서 지냈습니다. 그후 바울은 3차 전도 여행지로 에베소에 가서 54년부터 57년에 이르도록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라고 고린도에서 겨울동안 3개월 머무는 동안 이 로마서를 쓰게 된 것입니다.

(2) 바울이 이처럼 자신의 생애를 복음의 전도의 사명자로 스스로 바친 것은 빚진 자의 책임감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복음에 빚진 자임을 이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롬1:14). 누구든지 먼저 복음을 받아 드린 사람은 아직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빚진 자의 입장에 있다고 성경은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내 주변에는 아직 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한 많은 영혼들이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그들에게 내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 해 주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이것을 바울은 빚이란 말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빚은 반드시 갚아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갚지 아니하면 화가 임합니다. 복음의 빚은 그 책임이 더 무겁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 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케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요”라고 말씀 하셨습니다(겔3:17,18). 그러므로 바울은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임할 것이라”고 두려워했던 것입니다(고전9:16).

(3)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를 섬기려는 바울의 열심을 여기서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를 거쳐 서바나로 가기에 앞서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을 섬기는 일로 빌립보 교회와 고린도 교회의 연보를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떠나는 길이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그 당시 모든 교회의 모교회로 볼 수 있었습니다. 복음이 유대인으로부터 나왔으며 오순절의 성령강림 하심으로 가장 먼저 세워진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때 예루살렘에 큰 흉년이 들어 그곳 성도들이 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교회에서 이들을 위하여 헌금하고 바울의 손에 의탁하여 그 돈을 예루살렘교회로 보내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이 같은 일을 마친 후에 로마를 거쳐 서바나로 갈 것을 말해주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울로 하여금 그의 계획대로 이루게 하신 것이 아니라 그는 그 후 예루살렘에서 유대인의 모함으로 체포되어 한 죄수의 몸으로 로마로 호송되어 갔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2. 충만한 축복의 사자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비록 가난했지만 그에게는 그리스도안에 있는 충만한 축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처럼 말했습니다.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고후6:9). 하나님의 종들은 적어도 바울이 가지고 있는 이 같은 사자로서의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성도들의 가정을 심방 해야 할 것입니다.

(1) 바울이 말한 축복의 사자란 천국의 비밀을 전달하는 축복의 사자를 말합니다. 복음전도의 사명자는 바로 천국비밀의 전달자입니다. 천국의 비밀은 복음으로 밝히 열려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 비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복음전도의 사명자가 되는 것입니다. 천국의 가치는 온 세상의 소유보다 더 위대하고 소중합니다. 축복의 사자인 하나님의 종들은 이 천국의 비밀을 가지고 모든 사람에게 나눠주는 사명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2) 바울이 말한 축복의 사자란 평안을 전달하는 평안의 사자임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전도대로 내 보내시면서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치 아나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 올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종들의 축복이 심방하는 가정에 그대로 머물러 그 가정에서 주님의 평안이 임할 것이라고 하신 말씀은 얼마나 놀라운 약속입니까?

(3) 바울이 말한 축복의 사자란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할 수 있는 말씀의 사자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사르밧에 이르러 한 과부가 나뭇가지를 줍는 것을 보고 그 과부에게 이처럼 말했습니다. “두려워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하나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그날까지 그 통에 가루는 다 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고 전했습니다. 엘리야의 입에서 나온 이 말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종의 입에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 하나님은 그 말씀에 책임을 져 주십니다.

결 론 : 바울은 15장을 마감함에 로마교회 성도들의 기도를 부탁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자기 목자를 위해 많은 기도를 하면 그 종은 영력과 능력의 종으로 역사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종들에게 은과 금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가지고 있는 축복의 사자입니다. 그를 축복의 사자로 영접하고 순종할 때 그 축복과 평안이 그 집에 임할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PREV : 로마서 16장 밤중소리

NEXT : 로마서 14장 밤중소리

LIST WRITE REPLY

Copyright 1999-2020 Zeroboard / skin by GGAMBO

*

로마서 16장

◆ 밤중소리 01-14 | VIEW : 1,505

≈ 106 ≈ 바울의 문안과 마지막 부탁

(본문 : 로마서 165 : 1 - 27)

서 론 : 로마서는 로마교회에 대한 바울의 문안과 마지막 부탁으로 마쳐집니다. 로마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읽고 연구해야 할 위대한 기독교 교리서입니다. 로마서는 이처럼 교리적인 면에서 문장을 다루었기 때문에 딱딱한 맛이 나서 흥미를 갖기가 어려우며 좀처럼 소화시키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 로마서는 하나님의 교회에서 하나님의 종들로부터 부지런히 배워야 하며 그리스도인의 실 생활에 적용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구원에 확신을 가지고 소망 있는 믿음의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1. 뵈뵈의 천거

1절부터 16절까지는 바울의 복음 안에서의 친구 이름이 다정하게 불려지고 있습니다. 그 처음 이름으로 등장하는 사람이 ‘뵈뵈’라고 하는 여자 성도입니다. 바울은 그를 자매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뵈뵈 자매는 바울이 쓴 로마서를 고린도에서 로마까지 가서 전달한 일꾼입니다. 그는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이라고 했습니다. 뵈뵈는 이곳 교회에서 교회를 섬겨온 일꾼으로 그가 하나님의 교회를 섬겨온 내용이 두 가지로 크게 나뉘어 있습니다.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를 볼 때에 뵈뵈 자매가 바울을 위해 그의 복음사역이나 그의 생활을 섬세하게 돌보아 주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뵈뵈를 로마교회에 보내면서 그를 주안에서 합당한 예절로 영접하라고 권고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다 똑같이 뵈뵈와 같이 주의 일에 전념하거나 힘겨운 일을 감당해 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은 주안에서 이토록 수고하는 성도들을 위해 주의 이름으로 합당한 대접을 베풀 수 있어야 합니다.

2. 바울의 문안을 받은 로마교회의 성도들

3절부터 16절에 이르도록 21명의 성도들이 바울의 문안을 받고 있습니다. 로마교회는 바울에 의해 세워진 교회는 아니었지만 예루살렘교회나 바울이 전도 여행시 세운 교회성도들이 로마교회에 많이 있었습니다.

(1) 먼저 바울은 아글라와 브리스가 내외에게 문안했습니다. 이들은 고린도에서 바울과 함께 장막장사를 하면서 복음을 전했던 바울의 복음 동역 자들입니다. 이들 부부는 부부가 합심하여 바울의 복음사역을 도와주었으며 바울을 위하는 일이라면 자기들의 목이라도 내 놓을만한 뜨거운 사랑으로 협력했다고 칭찬해 주고 있습니다.

(2) 다음에 바울은 에베네도에게 문안하라고 말하고 너희를 위하여 많이 수고한 마리아에게 문안하라고 일렀습니다. 에베네도는 바울에 의하여 회심한 성도로 아시아에서 처음 익은 열매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많이 수고했다고 말하고 있는 마리아는 봉사의 일꾼입니다.

(3) 다음에 바울은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문안했습니다. 이 두 사람은 바울의 친척일 뿐 아니라 복음을 위해 바울과 함께 옥에 갇혔던 사람이요 사도들에게까지 유명히 여김을 받은 사람이라고 소개했습니다.

(4) 바울은 암볼리아에게 문안하라고 했습니다. 이 암볼리아는 특별히 주안에서 바울의 사랑을 받은 성도라고 했습니다. 주의 종의 사랑을 받는 일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주의 종과 등지고 하나님과 가까이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5)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동역자인 우르바노와 스다구에게 문안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인정을 받는 아벨레에게 문안하라고 했습니다. 이 아벨레란 사람은 주안에서 인정을 받고 있는 형제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그리스도안에서 인정을 받는 일은 중요합니다. 어디를 가든지 누구에게나 인정을 받는 일은 어려운 일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부끄러움이 없는 생활을 하려고 힘쓰는 사람이 끝까지 인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

(6) 바울은 또 아리스도볼로의 권속에게와 바울의 친척 헤리디온에게와 나깃수의 권속 중 주안에 있는 자들에게 문안할 것과 주안에서 수고한 드루베나와 드루보사와 버시에게도 문안을 부탁했습니다.

(7) 바울은 13절에서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루포의 존재에 대하여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고 골고다에 올라간 구레네 사람 시몬의 아들일 것이라고 말합니다(막15:21). 이 외에도 많은 성도들에게 문안 할 것을 전했습니다.

3. 거스리는 자들에 대한 바울의 경고

바울은 마지막으로 교회를 거스리는 자들에 대한 엄한 경종을 잊지 아니했습니다. “너희 교훈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멀리하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의 법도를 무시하거나 주의 종의 경종을 경히 여기면 안됩니다. 그리고 바른 교훈을 거스려도 안됩니다. 이들로 인하여 교회에 분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자들이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인가? 이에 대하여 18절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의 배만 섬기나니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한다”고 했습니다. 이들에게는 주님에 대한 사랑이 없습니다. 이들은 자기 배를 섬기는 일에 열심을 품습니다.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진리의 복음도 아니고 바른 계명의 가르침도 아닙니다.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로 미혹한다고 했습니다. 공교란 말은 교묘하게 꾸며낸 것입니다. 이들은 교회 안에서 자라나는 가라지 들입니다. 우리는 이 같은 자들을 잘 살펴서 저희로부터 떠나야 합니다. 떠난다는 말은 격리란 말로 그들에게 가까이 하지 말고 그들과 교제하지 말며 그들의 일에 동참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19절에서 “너희가 선한데 지혜롭고 악한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선한데 지혜로우란 말은 선을 배우라는 말입니다. 악한데 미련 하라는 말은 악을 바라지도 말고 악과 타협하지도 말고 악에 접근하지도 말라는 뜻입니다.

결 론 : 25절로 27절까지는 바울의 송영사입니다. 바울은 25절에서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취었던 것이었다”고 했습니다. 그 감취었던 것이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다고 했습니다. 바울에게 주신 복음의 계시는 놀라운 것입니다. 바울은 ‘나의 복음’이란 말로 담대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놀라운 복음으로 소망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로 끝까지 믿음으로 견고히 하실 것입니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토록 있을 지어다.” 아멘.


  http://www.bamjoongsori.org/bbs/view.php?id=board42&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