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新約]강해/◆ 바울서신 강해-1

로마서 8-11장 ◆ 밤중소리

영국신사77 2020. 4. 11. 14:53

로마서 차례

제 8 장(56 ~ 70)

56) 결코 정죄함이 없는 그리스도인 (로마서 8장 : 1절)

57) 생명의 성령의 법과 죄와 사망의 법 (로마서 8장 : 1절 ~ 2절)

58) 하나님이 하신 율법의 일 (로마서 8장 : 3절 ~ 4절) 

59) 육신을 좇는 자와 영을 좇는 자 (로마서 8장 : 5절 ~ 8절) 

60) 내주 하시는 성령 (로마서 8장 : 9절 ~ 11절)

61) 그리스도인의 성화 (로마서 8장 : 12절 ~ 13절)

62) 양자의 영 (로마서 8장 : 14절 ~ 15절)

63) 후사의 영광과 고난 (로마서 8장 : 16절 ~ 18절)

64) 그리스도의 영광과 고난 (로마서 8장 : 18절 ~ 23절)

65) 구원의 과거, 현재, 미래 (로마서 8장 : 24절 ~ 25절)

66) 성령의 탄식과 간구 (로마서 8장 : 26절 ~ 27절) 

67)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 (로마서 8장 : 28절)

68) 효과 있는 부르심 (로마서 8장 : 29절 ~ 30절)

69) 택한 자들의 특권 (로마서 8장 : 31절 ~ 34절)

70) 끊을 수 없는 사랑 (로마서 8장 : 35절 ~ 39절)


제 9 장(71 ~ 76)

71) 바울의 큰 근심과 고통 (로마서 9장 : 1절 ~ 5절)

72) 약속의 자녀 (로마서 9장 : 6절 ~ 8절)

73)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 (로마서 9장 : 9절 ~ 13절)

74)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 (로마서 9장 : 14절 ~ 18절) 

75) 선택과 유기에 대한 권한 (로마서 9장 : 19절 ~ 29절)

76) 행위에 의지한 이스라엘 (로마서 9장 : 30절 ~ 33절)


제 10 장(77 ~ 82)

77) 율법의 마침이 되신 예수 (로마서 10장 : 1절 ~ 4절)

78)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로마서 10장 : 5절 ~ 8절)

79) 구원에 이르는 믿음 (로마서 10장 : 9절 ~ 11절)

80)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신 예수님 (로마서 10장 : 11절 ~ 13절)

81) 믿음의 구원 (로마서 10장 : 14절 ~ 17절)

82) 복음을 순종치 아니한 이스라엘 (로마서 10장 : 18절 ~ 21절) 


제 11 장(83 ~ 88)

83) 은혜로 택하심을 입은 자 (로마서 11장 : 1절 ~ 6절)

84) 아직 소망이 있는 이스라엘 (로마서 11장 : 7절 ~ 12절)

85) 자긍치 말아야 할 이방인 (로마서 11장 : 13절 ~ 18절)

86) 믿음과 접부침 (로마서 11장 : 19절 ~ 24절)

87) 이스라엘 회복의 비밀 (로마서 11장 : 25절 ~ 27절)

88) 후회 없는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 (로마서 11장 : 28절 ~ 3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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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8장

◆ 밤중소리 01-13 | VIEW : 695


≈ 56 ≈ 결코 정죄함이 없는 그리스도인

(본문 : 로마서 8 : 1)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서 론 : 우리는 이제 로마서 8장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7:18절 이하에서 한사람의 절망적인 탄식을 들으면서 

죄의 세력 아래에서 그 어떤 방법으로도 

헤어날 길이 없는 한 사람의 비참한 운명이 

모든 인류의 공통된 운명인 사실을 깨닫게 되어 

우리의 마음이 어두웠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8장에 들어서면서 

같은 어둠이 일시에 개이고 

밝은 생명의 약동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8장을 배우면서 깨닫게 되겠지만 

8장은 그리스도인들의 성화를 위한 

성령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장이 아닙니다. 


율법의 정죄와 죄악의 권세에서 

이기게 하신 성령의 역사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8장은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성화 되느냐는 문제에 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구원의 확실성을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1. 5, 6, 7장과의 연결관계

우리는 8장 서두에 등장하고 있는 “그러므로”란 말의 뜻을 잘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란 표현은 확실히 한 문장에서 다른 문장으로 이어지는 고리가 되는 말입니다. 


그런데 8장 서두에 나오는 “그러므로”란 말은 

7:25절에서 이어지는 문장의 연결을 의미하고 있지 않습니다. 


7장의 결론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을 그린 것이 아니라 

구원의 길이 전혀 없는 

한 절망적인 사람의 탄식을 그리고 있으며, 

그는 자신의 어쩔 수 없는 죄의 종의 상태를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8장 서두에 나오는 “그러므로”란 말은 

이 사람의 경우를 계속적으로 논술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I) 우리는 6장과 7장이 

5장과 8장 사이에 삽입되어 있는 장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로마서 5장에서 바울의 위대한 논증을 바라봅니다. 


한사람 아담으로부터 온 범죄와 

한 사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은혜에 대하여 

놀랍게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같은 복음의 증거에서 바울은 

유대인들의 공격을 예상했습니다. 


법에서 의를 얻는 줄로 알고 있는 유대인들이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죄를 조장하는 내용이 아니냐? 

율법의 거룩함을 부인하는 반 율법적인 것이 아니냐? 는 

오해를 사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해소하기 위하여 

6장과 7장을 다루게 된 것입니다.

6장의 내용은 

전자의 경우(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죄를 조장하는 내용이 아니냐?)요, 

7장의 내용은 

후자의 경우(율법의 거룩함을 부인하는 반 율법적인 것이 아니냐?)인 것입니다. 


바울은 6장에서 

그리스도인의 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온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어떻게 죄 가운데서 거하겠느냐고 반격하고 있습니다. 


7장에서는 

율법은 선하고 신령하고 의롭다고 유대인들의 율법관을 시인해 주면서 

그러나 인간의 지체 안에 있는 죄의 권세가 

이 거룩하고 선한 율법의 요구를 묵살할 뿐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이기고 

나로 하여금 더욱 죄의 법 아래로 사로잡아 가기 때문에, 

선한 율법으로도 

나를 죄 가운데서 구원해 줄 수 없다는 탄식을 토로함으로, 

사람을 구원하는 일에 

율법의 무력함을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5장에서 8장으로 이어나가는데 있어서 

율법주의자들에게 걸림이 되는 죄와 율법과의 관계를 

명쾌히 해결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2) 그러기 때문에 “그러므로”란 말은 

5장 끝에서부터 8:1절로 이어져야 할 문맥의 연속이 되는 것입니다. 

* 롬 5장 12-21

아담과 그리스도

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13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

15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16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17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19 한 사람이 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20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5:12절에서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고 논증하고

 

6장과 7장에서 죄와 율법에 대한 오해될 부분을 해소하고 

다시 5장의 마지막 부분이 이어지면서 

“그러므로”라고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뜻에서 8장은 

새로운 발견인 것이 아니라 

5장에서 논술되고 있는 바를 

더 자세히 강해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2.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

우리는 1절에서 또다른 위대한 선언을 듣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 말은 복음의 핵심을 들어낸 말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의 특성을 나타낸 말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선언이야말로 

인생의 궁극적이며 최종적인 문제해결의 결론이 되는 선언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다른 어떤 종교도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하는 말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란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로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를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안에 있다고 하는 말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구원받은 사람들도 

순종의 생활을 할 때는 그리스도안에 거하는 생활이지만, 

죄를 범했을 때는 마치 이 특권이 살아져서 

그리스도 밖으로 버림을 받은 것처럼 생각하는 오해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안에 들어온 것은 

영원한 옮김이 되는 것입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하셨습니다(요5:24). 

다시 사망으로 옮겨질 수 없는 몸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면 

우리가 어떤 처지에 놓여 있건 

그 사람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3.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정죄함이란 말은 

율법의 정죄를 말하는 것으로 

곧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에 아담 안에서 태어나는 인류는 

모두 이와 같은 율법의 정죄를 받을 것이기 때문에 

한 명도 소망이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1) 그런데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선언이야말로 인류의 소망입니다. 

우리는 이 정죄함이 없다는 놀라운 선언을 

액면대로 받아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일이 너무나도 놀랍고 엄청난 선언이기 때문에 

이 선언에 토를 부칩니다. 

‘그렇기는 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죄를 회개했을 경우에 해당되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죄를 범한 상태에서는 이 선언이 해당될 수 없다는 이론입니다. 


이같은 주장이나 생각은 대단히 잘못된 것입니다. 

만약 그러하다면 우리는 하루에도 여러 번씩 정죄함을 받았다가 

그 정죄에서 풀려나는 생활을 반복해야 할 것입니다.


(2) 이 정죄에서의 해방은 

그리스도인들의 과거, 현재, 미래의 죄를 초월한 

전 생애에 해당되는 선언입니다. 


이 놀라운 축복의 시발점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를 얻는 

그 시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그리스도인의 최종적 승리의 시점인 

하나님 앞에 가서 설 때까지 

결코 정죄함이 없는 것입니다. 

이 선언을 이루시는 분은 성령이기 때문에 

우리의 죄가 그 일에 장애물이 될 수 없습니다.


(3)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죄를 범하는 일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져야 합니다. 


이미 그리스도안에 들어 온 사람도 죄를 짓습니다(요일1:8).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의 죄는 

이미 율법에 대한 죄가 아닙니다. 

율법의 정죄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죄는 율법의 제재를 받지 아니합니다. 

그것은 사랑에 대한 죄일 뿐입니다. 

자식이 아버지에 대한 가족적인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죄에 대한 처리는 

율법의 정죄가 아니라 

사랑의 징계로 나타납니다(히12:7-9).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하여 

결코 율법적인 정죄감에 사로잡힐 사람이 아닙니다. 

사랑에 대한 부끄러움을 느끼고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죄는 

세상사람의 죄와 구별됩니다. 

율법적인 범죄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사랑과 인격적인 죄가 되는 것입니다.


결 론 : 그리스도안에 있는 우리는 

죄를 범했을 때 결코 정죄감에 사로잡혀서는 안됩니다. 

그 일에는 두려움만이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으시기까지 나를 사랑하셨는데 

그 사랑을 배반한 자신을 바라보고 

슬퍼하고 애통하며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죄를 우습게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과의 사랑과 인격적인 관계를 생각하고 

율법 아래 있는 사람보다 

더욱 죄를 미워하고 죄와 더불어 싸우게 되는 것입니다.


≈ 57 ≈ 생명의 성령의 법과 죄와 사망의 법

(본문 : 로마서 8 : 1 - 2)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서 론 :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에게는 정죄함이 없다고 하는 선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역사)이 

죄와 사망의 법(율법의 정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였기 때문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2절은 바로 1절의 해설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해방이란 말은 죄와 사망의 법의 속박에서의 벗어남을 말하며 

이 해방은 한정적이거나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해방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는 그 속박 안에 들어갈 수 없는 해방, 

그곳으로부터 영원한 자유를 누리는 그와 같은 해방입니다.


1. 그리스도인의 구원의 확신의 근거

구원은 단회적(單回的)입니다. 

그러면서도 그 구원은 영적이요 완전한 구원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이 

우리의 환경이나 어떤 조건에 따라 변경될 수 있다면 

하나님의 구원은 불완전한 구원이 아닐 수 없으며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은 불완전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사실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영원하고 확실하다는 것은 성경적인 증거에 기인합니다.


(1) 우리의 구원이 영원하다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에 

이미 하나님에 의하여 계획되고 하늘에서 성취되었다는데 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엡1:3,4).


(2)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행위(선악)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택하심을 따라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 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다”

고 했습니다(롬9:10-12).


(3) 우리의 구원은 우리 생애 전반에 걸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의 구원에 어떤 조건이 필수적으로 따라야만 한다면 

그런 구원은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계속적인 의의 실천이란 불가능하기 때문에 

언제 구원에서 떨어질는지 모른다면 

그 구원이 우리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 것입니까? 

하나님이 그같은 막연하고 실현 가능성도 불확실한 인간의 구원을 위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에서 대속의 피를 흘리셨다면 

하나님의 인류구원의 역사는 분명히 실패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이건 그리스도 밖이건 의를 행할 자란 한 명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원의 소식을 복음이라고 말하고 이를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는 것은 

그 구원이 우리에게 영원히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2. 정죄함이 없는 생애에서 오는 기쁨

정죄함이 없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기쁨과 감사의 원인이 되는 일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인에게도 정죄함이 있다고 한다면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기쁨 대신 언제나 불안이 깃들 것이며 

감사 대신에 회의 속에 잠기게 될 것입니다.


(I) 정죄함이 없는 생활로서만이 하나님과의 영원한 화평이 가능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이룬 사람들입니다. 

이 화평이란 다시는 깨어질 수 없는 영원한 화평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인에게 어떤 이유에서이건 또 정죄함이 오는 일이 있게 된다면 

이 화평은 그때까지만의 제한적 화평이 될 것입니다. 

이런 화평은 화평이 아닙니다. 

다시 진노를 받게 되거나 다시 깨어지는 화평이라면 아무 가치도 없는 화평입니다.


(2) 정죄함이 없는 생활만이 우리의 구원의 보증이 되기 때문에 

구원의 확신을 줄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어떤 경우에는 자신의 구원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죄라든가 여러 가지 시험으로 인하여 신앙이 침체될 때가 있습니다. 

이때 그 사람은 자신의 구원을 의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하는 믿음이야말로 

시험과 절망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이 되며 

구원을 의심하므로 더욱 깊은 죄악의 함정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위기에서 

자신을 건질 수 있습니다.


(3) 정죄함이 없다는 믿음만이 죄의 속박에서의 해방이 가능한 것입니다. 

이제 죄는 그리스도안에 있는 성도들을 지배하지 못합니다. 

자기 지배의 영역에서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죄가 나를 아주 떠나버린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아직도 지난날의 죄의 지배에 익숙해져 있는 지체가 있습니다. 

죄의 지배를 받아온 육신에는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는 옛 습성이 있습니다. 

죄는 이 습성을 이용하여 

우리들을 끊임없이 죄 가운데로 유도하며 지배를 꿈꾸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죄는 그리스도인을 다시 그의 종으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창세 전에 이루신 하나님의 선택과 그리스도의 흘리신 속죄의 피는 

우리로 죄의 종의 자리에서 영원히 해방시켜 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죄는 죄의 지배를 다시 받게되는 죄가 아니며 

율법의 정죄를 받는 죄인 것이 아니라, 

아들과 아버지와의 관계의 죄이며 사랑에 관한 죄입니다. 

우리는 그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야 하며 그 죄를 회개해야 할 것이지만, 

죄의 종으로 되돌아가게 되거나 

율법 아래로 다시 돌아가 정죄함이 없다는 이 진리를 깨닫게 될 때, 

우리는 평안을 되찾을 수 있으며 

믿음에 다시 굳건히 서서 죄를 이길 수 있는 담대한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생명의 성령의 법

이처럼 그리스도인을 정죄에서 영원히 해방시킨 일에 대하여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란 말은 

어떤 계명과 같은 것을 연상해 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사역을 

법이란 단어로 표현했을 뿐입니다. 

율법은 우리의 죄를 정죄합니다. 

그러나 성령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과 대조적인 견지에서 

이것을 성령의 법이란 말로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첫 언약을 행위언약으로 세우셨습니다. 

이 언약은 하나님의 법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두 번째의 언약 

곧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 언약을 세우실 때 

믿음으로 의를 얻도록 하셨습니다. 

이 언약 역시 하나님의 법인 것입니다. 

바울은 이 같은 은혜를 

“믿음의 법”이란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롬 3:27).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받는 하나님의 의는 “믿음의 법”입니다.


4. 죄와 사망의 법

죄와 사망의 법이란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롬7:23). 

바울이 7:23절에서 말하고 있는 죄의 법이란 

인간의 지체 속에서 율법을 거역하고 

우리로 죄 가운데로 사로 잡아가는 죄의 권세를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8:2절에 나와 있는 죄와 사망의 법이란 

사망을 주는 죄의 법이란 뜻으로 곧 율법을 의미해 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요약해서 풀이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영원히 해방시켜 주었다”

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에게 적용시키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율법의 정죄에서 온전히 해방시켜 주셨음으로 

영원히 결코 정죄함이 없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 같은 생명의 성령의 법을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약1:25).


결 론 : 믿음으로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생명의 성령의 법”입니다. 

이 법은 율법에 우선하고, 율법을 초월하고, 

율법의 속박을 받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법입니다. 

이런 법이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에 적용을 받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다시는 지난날 우리를 지배했던 율법의 통제를 받거나 정죄를 받지 않습니다. 

그 법으로부터 영원히 해방되었기 때문입니다.


≈ 58 ≈ 하나님이 하신 율법의 일

(본문 : 로마서 8 : 3 - 4)

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서 론 : 오늘 주신 로마서 8:3,4절 말씀은 

우리에게 두 가지 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연약하여 할 수 없는 율법의 일을 

하나님께서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4절에서 하나님께서 이처럼 우리가 할 수 없는 그 일을 해 주신 이유에 대하여 

그것은 우리로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하심에 있다고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마치 롬 7:4절에 있는 말씀과 동일한 뜻을 나타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이 두 가지 성경구절에 함축되어 있는 뜻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하시고 

죄에서 자유를 주시고 구원함을 주신 것은 

이제 다시는 지난날에 얽매었던 죄의 종노릇을 하지 않고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하심에 있다고 하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신 말씀이 

바로 그런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1. 율법이 할 수 없는 것

3절 초두에서 사도 바울은 “율법이 육신으로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에게 의를 주고 구원하시는 일에 율법이 할 수 없었다고 한 것입니다.

(1) 이것은 율법이 우리에게 원하는 바를 우리가 이룰 수 없다는 말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이 주신 계명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선하고 신령한 것입니다. 우리들이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이유는 결코 율법이 약해서가 아닙니다. 약한 쪽은 오히려 우리편입니다. 우리가 율법만 지키는 생활만 하면 그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약하기 때문에 율법을 지킴으로 의를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의를 주어야 할 율법이 우리의 연약함으로 말미암아 죄를 깨닫게 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고 정죄하는 구실을 하게된 것입니다(롬3:20, 갈2:16).

(2) 율법이 그 선하고 신령한 뜻을 우리에게 이룰 수 없는 것은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함” 때문이라고 밝혀주고 있습니다. 율법은 의롭고 선하고 강하지만 우리의 육체가 연약한 것입니다. 우리들의 육체가 율법의 요구를 감당치 못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부족함이 없고 모든 것을 다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육체가 연약함으로 인하여 우리에게 의를 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이 연약하다는 말은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우리가 이룰 능력이 없다는 뜻입니다.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죄가 우리에게 전가되어 우리는 태어남으로부터 죄에 팔린 몸, 곧 죄의 종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여러 가지로 이 같은 사실을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였다”고 했습니다(롬5:17). 우리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린 몸”들입니다(롬7:14). 이 모든 말씀은 우리들의 육신이 연약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이룰 수 없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은 하시나니

그런데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들은 육신의 연약함으로 인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이미 하나님이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이 일을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는가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셨다고 했습니다. 죄를 인하여란 말은 우리의 육신의 연약한 원인을 나타내고 있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 죄로 인하여 율법의 일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죄가 있는 이상 우리는 죄의 종이요 죄의 지배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율법의 의를 이룰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죄로 인하여 할 수 없는 것을 그 아들을 통해서 이루시기 위하여 그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2) 그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셨다고 했습니다. 결국 이 같은 문제는 하나님만이 해결하실 수 있는 문제인데 하나님은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그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셨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는 죄인 같은 모양만 취하셨지 죄인은 아니십니다. 이것은 그가 우리 죄인들과 똑같은 육신을 입고 오셨다는 뜻입니다(요1:14, 벌2:6-8).

(3) 하나님이 그 아들을 우리와 같은 죄인의 모양으로 보내셔야 활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연약하여 이룰 수 없는 율법을 우리를 대신하여 이루어 주시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진실하시고 공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그의 진실과 공의에 어긋나는 방법으로는 아무 일도 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로 하여금 우리의 죄로 인하여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 율법의 일을 이루게 하시기 위하여 그의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시어 십자가에서 그 일을 이루심으로 진실과 공의를 이루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절대로 죄인으로 오실 수 없는 분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율법을 이루시려면 율법을 지키셔야 하며 결코 추호만큼의 죄도 지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4) 그러면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이루셔야 할 율법의 일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그 한가지는 아직까지 우리들이 범한 죄에 대한 충분한 값을 치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죄 값은 사망이라고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은 그 일을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다음에 두 번째는 그는 우리가 이룰 수 없었던 율법의 의를 온전히 이루시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사실 동안 흠없는 율법적인 생활을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이 일을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으로 연합시킴으로 그가 하신 일을 우리에게 넘겨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가 육신의 연약함으로 할 수 없는 그 일을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5)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에게 죄를 정하사 이 일을 하셨습니다. 죄를 정하셨다는 말씀은 우리의 죄를 그에게 넘기시어 십자가에서 죄 값을 받게 하신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의 고난은 우리의 죄로 말미암은 것으로, 우리의 죄를 그에게 전가(轉嫁)시켜 대속의 제물로 심판을 받게 하신 것입니다.


3.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결국 하나님께서 이처럼 그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시어 우리가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 일을 하시도록 하신 것은 “육신을 쫓지 않고 영을 쫓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육신을 쫓지 않고 영을 쫓아 행하는 우리라고 하는 대상은 “우리가 연약하여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이 하여 주심으로 그 혜택을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을 의미해 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영을 쫓아 살아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간혹 어떤 때에는 육신의 미혹을 받아 곁길로 빠질 때도 있지만 이런 생활은 그리스도인의 정상적인 생활이 아닙니다.


결 론 : 우리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참으로 놀라우신 일을 그 아들을 통하여 이루신 일에 대하여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아들 안에서 이제 율법을 온전히 이루었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모든 일은 율법보다 더 온전하시며 더 거룩하시며 더 의로우시며 더 신령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소유한 의와 생명은 온전하고 완벽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일을 우리를 위해 이루어 주신 일에 대하여 우리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 59 ≈ 육신을 쫓는 자와 영을 쫓는 자

(본문 : 로마서 8 : 5 - 8)

5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서 론 : 우리는 지난 시간 우리 인간이 육신의 연약으로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로움을 이룰 수 없었던 그 일을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께서 대신 이루어 주신 일에 대하여 배웠습니다. 그 일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그의 육신에 정죄하사 그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심으로 우리의 죄 값을 치르게 하시고 그가 온전히 이루신 율법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의를 이루게 하시고 하나님은 그의 그 의를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에서 해방이 되었고 율법의 정죄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1. 육신을 쫓는 자

우리는 5절에서 육신을 쫓는 자와 영을 쫓는 자란 말을 듣고 있습니다.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이 말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두 종류의 사람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 중에 육신을 쫓아 살아가는 사람이 있고 영을 쫓아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는 뜻으로 표현한 말이 아닙니다. 여기서 육신을 쫓는 자란 그리스도안에서 육신에 속한 사람이란 뜻이 아니라 비 그리스도인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육신을 따라 난 사람들로 아담 안에서 태어난 모든 인류를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1) 여기서 바울은 그리스도인들과 비 그리스도인들의 근본적인 차이점올 지적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육신적으로 태어난 모든 사람들은 한결같이 영의 일을 생각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율법의 일은 신령한 일입니다. 선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육적인 사람은 그 일을 감당치 못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육신을 쫓는 육적 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우습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 일에 굴복하려고 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들은 육적인 일이 아닌 것에 대하여 무엇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신령한 일은 영적으로라야 깨닫게 되며 이 일은 오직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고전2:10-12).

(2) 그러므로 육신을 쫓는 자는 육신의 일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이치는 너무나도 평범하고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우리들도 지난날에 그러했습니다. 이 일은 그리스도인들이 살아나가는 과정에 어쩌다가 오류에 빠지거나 육신의 생각에 잠기는 그런 일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육신을 쫓는 자는 언제나 그들의 생활가운데서 100% 육신의 일만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기 개인적인 일에 있어서도, 자기 가족의 일에 있어서도, 자신이나 자신의 자녀들의 장래문제에 있어서도, 사업적인 일이나 학문적인 일이나 사업적인 일이나 국가적인 일이나 그 모든 매사에 그들은 육신의 일만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란 쉽게 말해서 그의 모든 생각 속에 하나님이 전혀 없는 그런 인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께 대하여 죽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교회에 나올 수도 있습니다. 교회행사에 참석할 수 도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 중심에는 전혀 하나님께 대한 영적 감각이나 책임감이 없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 생활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영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없는 사람입니다.

(3)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육신의 생각이라 하면 탐심이라든가 거짓말이라든가 간음이나 도적질 등 파렴치한 범죄, 반 율법적인 범죄 등으로 규정하기 쉬우나 그런 것이 아닙니다. 고상하고 품격 있는 인격자중에도 육신에 속한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을 소유하지 못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성경에서는 육신에 속한 사람, 육신을 쫓는 사람, 육신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아무리 사회에서 존경받는 훌륭한 인품의 소유자라 할지라도 그 사람이 하나님의 영을 받지 못한 사람이라면 그는 하나님과 원수 된 사람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사람이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존재가 필요치 아니합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생활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그런 그들의 생활이 바로 하나님과 원수 된 증거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없는 분명하고 명확한 증거인 것입니다.


2. 영을 쫓는 자

다음에 영을 쫓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이야기한 육신을 쫓는 경우와는 전혀 상반된 말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을 쫓는 자와 영을 쫓는 자와의 차이는 하늘과 땅보다 더 현격합니다. 이 말을 예수님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일이라고 하셨습니다(요5:24). 육신을 쫓는 인간과 영을 쫓는 이 두 인간은 완전히 다른 인간입니다. 완전히 결별된 인간입니다. 완전히 변화된 인간입니다. 영을 쫓는 자란 바로 그리스도인들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과 비 그리스도인과는 전혀 다른 인간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1)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지배를 받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이전에는 그들 중에 하나님의 영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저 평범한 육신을 쫓는 인간들이었고 육신의 생각만으로 그들의 인생을 계획하고 꾸려갔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 하나님의 영을 받은 이후로는 그 영이 그의 인생을 지배하고 그의 생활을 지배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이상할 정도로 자기 생애를 주장하고 있는 새로운 생명의 움직임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생명의 움직임이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리스도의 영이 없기 때문입니다.

(2) 그리스도인에게는 자신을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신 생명의 성령의 법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이 성령이 내 안에서 그의 생명력으로 내 인생을 새롭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은 이미 이 같은 생명 안에 들어가 그 생명의 지배를 받고 있는 사람이요, 그 지배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성령께서 나로 그리스도인다운 생애를 살아가도록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는 것입니다.

(3) 이처럼 영을 쫓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영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만약 자기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도 영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있다면 그는 이름만의 그리스도인이요 결코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러면 영의 일이란 무엇을 의미해 주는 것입니까?

영의 일이란 곧 성령의 일로 하나님의 일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범사에 하나님의 일을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기 영혼에 깊은 관심을 갖습니다. 자신의 영혼의 궁극적 운명에 대해 생각합니다. 그의 생활 중에서 자신의 영적인 생명을 해롭게 하는 행위에 대하여 스스로 제동을 거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로운 그 모든 것들을 알기를 사모합니다. 그의 그 놀라우신 사랑을 깨닫기를 원하고 나를 구원해 주신 그 사랑의 놀라움을 좀더 자세히 알기를 원하며 예수님이 나를 위해 당하신 그 모든 고난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며 그 말씀을 묵상하며 그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과 뜻을 깨닫기를 기뻐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인에게 이 같은 영의 생각이 없다면 그는 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육신에 속한 사람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결 론 : 바울은 결론적으로 6절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고 했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그 생각이 노벨상을 받을 만큼 인류에 공헌할만한 것이요 사회적으로 도덕적으로 모든 사람의 흠모를 받을 만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 결과는 사망입니다. 그에 대한 보상이 사망입니다. 그러나 영의 생각은 그와 정반대입니다. 영으로 생각하는 모든 생각과 그의 열매는 생명의 결실을 가져오며 언제나 그 마음에 평안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역사 하시기 때문에 그 안에서 생명의 결실과 참 평안한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령을 받은 사람으로 평안을 누리시는 생애를 보내시기 바랍니다.


≈ 60 ≈ 내주 하시는 성령

(본문 : 로마서 8 : 9 - 11)

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서 론 : 그리스도인에게 성령이 거하시는 일이 왜 필요한가? 이에 대한 해답은 교리적으로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육신을 쫓는 사람과 영율 쫓는 사람의 차이에 있어서 그리스도안에 있는 사람들을 양분해서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안에서 아직 육신을 쫓는 생활을 하고 어떤 사람은 신앙이 장성하여 영을 쫓는 생활을 한다는 것으로 여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이 지적하는 바로는 그리스도인은 육신을 쫓는 사람인 것이 아니라 영을 쫓는 사람들이며 육신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영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이란 사실을 단정적으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육신을 쫓는 사람은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으며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9월에 와서 바울은 성령이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말씀해 줌으로 그리스도인과 성령의 임재와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음을 분명히 밝혀주고 있는 것입니다.


1.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는 사람

바울은 9절 초두에서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은 그 어떤 경우에건 육신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영이 그 안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1)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다는 말은 그리스도인이 속해 있는 하나의 영역을 의미해주고 있습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하신 말씀도 그리스도인의 삶의 영역을 의미해 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도 이전에는 육신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 왔고 그 육신은 언제나 죄의 지배아래 있었으며 율법의 정죄를 받아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그런 옛사람의 지배를 받는 영역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의 영의 지배를 받는 자리로 옮겨졌습니다. 우리는 이전과는 달리 육신의 지배를 받으면서 살아가야 할 사람이 아니라, 성령의 지배를 받아가며 그의 명령을 쫓아 영적인 삶을 살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이 같은 성령의 지배나 인도하심이 없다면 그는 성령이 없는 사람이며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인이 영에 있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이 함께 있다는 밀입니다. 그리스도인 안에는 성령이 함께 거하십니다. 바울은 고전6:19에서 우리의 몸에 대하여 이르기를 “너희 몸은 너희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 인줄을 알지 못하느냐”고 했습니다. 함께 계신다는 말은 잠시적인 정유가 아니라 영원한 거주를 의미합니다.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고 하셨습니다(요14:23). 성령이 우리 안에 우리와 함께 거하신다는 말씀은 대단히 신비적인 말씀입니다. 9절에서 이 성령에 대하여 세 가지 이름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 ‘영’ ‘그리스도의 영’ 등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나타내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요 10장에서 “우리가”라고 말씀하심으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이에 대해 이처럼 삼위 되시는 하나님을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입니다. 이 말씀은 아버지께서 보내시고 아들도 보내신다는 뜻이요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시고 그리스도를 나타내시는 일을 하심을 의미해 주는 표현입니다.


2.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우리는 10절에서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몸 안에서 일어난 두 가지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1)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몸이란 우리가 지금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실제적인 육체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몸이라고 할 때 이 몸이란 보이는 육체적 몸과 보이지 아니하는 영혼을 의미합니다. 인간에게는 영혼이 있습니다. 이 영혼은 양면적인 역할을 합니다. 하나는 하나님과의 관계로 이어집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교통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경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일은 우리에게 영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가지면은 이 영혼이 사람의 목숨이나 이 세상의 생애에 필요한 면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범죄 함으로 그 영혼이 죽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영혼이 죽었다고 하는 말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두절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어온 모든 일은 완전히 죽었습니다. 범죄 함으로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회복할 수 없는 자리로 떨어져 버렸습니다.

이것은 전적 타락입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이 영혼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서만이 회복됩니다. 그 이후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것은 이 세상에서 살아나가는 일에 필요한 부분만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 같은 생명은 다른 피조물에게도 있습니다. 다른 피조물과 다른 것은 인간의 생명은 고도로 우수하고 그 마음에 양심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계명이 새겨진 존재라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참 생명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영혼에 있는 것입니다. 이 영혼이 죽은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함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이 영혼의 살아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 인간의 구원은 엄격히 말해서 두 가지 면으로 구분해야 합니다. 하나는 영혼의 구원으로 이 구원은 믿는 즉시 얻습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내 죽은 영 안에 새로운 생명을 심어 주십니다. 우리는 성령이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을 제공해 주시는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없으면 누구나 영생의 생명을 공급받을 수 없습니다. 성령은 이처럼 우리에게 참 생명을 주심으로 우리의 죽었던 생명을 살려 주시되 영원한 생명의 씨로 살려주십니다.

그뿐 아니라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이유는 그리스도인의 성화와 세상 끝날까지의 보호와 위로하심에 있는 것입니다. 한편 우리의 몸은 죄로 인하여 죽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같은 우리의 몸이 죽기까지 이러한 죄의 요소를 지니고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죄와 끝임 없이 싸우는 생활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은 그리스도가 이루신 의를 인하여 살아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죽었던 생명이 살아났으므로 육신을 쫓아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영을 쫓아 살아가는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3. 부활의 소망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비록 그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지만 (후패하여 장차 죽을 것을 의미함) 우리는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은 온전한 구원이십니다. 온전한 구원에는 몸의 구속도 포함되는 것입니다. 이 몸의 구속이 곧 부활입니다. 지금 우리의 몸은 이 세상에서 죽음의 씨앗으로 죽은 상태에 있지만 그러나 성령의 능력으로 언제인가 이 죽음을 이기고 부활의 몸으로 살아날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벌거벗은 영으로가 아니라 영화로운 몸인 새로운 옷으로 단장한 영광된 부활 체가 되어 하나님 나라에서 살아 갈 것입니다.

이날이 우리의 구속이 완성되는 날입니다. 이것은 이미 우리에게 이루어진 것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증으로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으로 감사하고 있습니다.

결 론 : 우리의 이 몸은 아직은(부활 때까지) 죽어 있는 상태에 있습니다. 죄는 이제 내 영혼은 건드리지 못하고 이 몸 안에서 나를 지배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죄가 내 몸 안에서 나를 사로잡아 왕 노릇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죄의 시도를 물리치고 싸워 이겨야합니다. 우리 안에는 이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는 성령이 내주하고 계십니다. 이 성령을 쫓아 행하는 생활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려야 합니다.



≈ 61 ≈ 그리스도인의 성화

(본문 : 로마서 8 : 12 - 13)

1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서 론 : 오늘 주신 로마서 8:12,13절 말씀은 죄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투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 갈 것인가? 하는 문제는 우리의 생활에 직접 부닥치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나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지 못합니다.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생활인 것입니까? 이 같은 질문을 목회자들은 교인들로부터 듣게 됩니다.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세 가지로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1) 첫 번째의 해답은 육신에 지는 생활을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2) 그리고 두 번째 해답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3) 그리고 세 번째 해답은 영으로써 육의 행실을 죽이라고 했습니다.


1. 빚진 자인 우리

우리는 로마서 8장 초두에서 그리스도인들의 특권적인 선언을 듣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의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믿는 자에게 들어오신 성령에 내주에 의하여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의 영적 생명을 영원히 살려주신 일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성령이 우리의 생애 속에서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한다는 사실도 함께 포함되어 있습니다.

(1)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빚진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곳에서 말하고 있는 빚이란 죄의 빚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빚졌다고 하는 말은 종의 위치를 말해줍니다. 우리는 지난날 죄의 종으로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죄의 빚진 자의 입장에 있었습니다. 종들은 언제나 그 주인에게 빚진 자의 입장에서 종신토록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기 이전에는 바로 그런 생활을 해 왔었습니다. 이 빚은 죽음으로써 비로소 다 갚아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무서운 이 빚을 예수님이 다 갚아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죄에 대한 채무는 다 갚음이 되었습니다. 더 갚을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제 완전히 그 죄에서 벗어났습니다. 우리는 다시는 죄에게 얽매일 필요나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빚을 다 갚았는데도 종노릇을 한다면 얼마나 한심한 일입니까?

(2) 그러므로 이 빚은 죄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죄의 빚은 갚았지만 새로운 빚을 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 빚은 너무나도 은혜로운 빚이며 감격스러운 빚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빚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피로 값 주고 당신의 소유로 사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소유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빚이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소망과 영광은 바로 이 빚으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빚을 채무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의 종의 자리에서 의의 종이 되었다는 이 사실은 종의 위치나 빚의 종류로 볼 때 너무나도 판이한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바울은 이처럼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고 했습니다(롬6:22)


2 육신에 져서 육신의 원대로 살면 안 된다고 함

바울은 이처럼 하나님께 빚진 우리는 육신에 빚진 자처럼 육신에 져서는 안 된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육신에 진다는 말은 우리 몸 안에 있는 정욕과 탐심으로 곧 죄를 의미해 주고 있습니다.

(1) 죄는 아직 우리들의 죽을 몸 안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죄에서 해방되었고 죄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러나 아직 우리들 몸 안에는 죄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 죄는 무장 해제된 존재입니다. 아무런 권능도 권세도 못 가진 존재로 기회만을 엿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인의 자리에서 떨어졌을 뿐 아니라 우리를 지배할 권리를 상실했기 때문에 우리와는 상관이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몸은 아직 영화로운 몸으로 구속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와 허물로 죽은 영이 살았습니다. 우리의 참된 생명이 살아났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몸은 아직 살아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몸은 우리 몸의 완전한 구원이 이루어지는 부활의 날까지 죽을 수 밖에 없게 되어 있습니다.

죄가 무장해제 당한 채 바로 이 죽을 몸에 자리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죄는 우리의 영적 생명에는 손도 못 대지만 우리의 죽을 몸을 유혹하여 죄를 유발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인들의 성화는 바로 이 육체에 자리잡고 우리의 몸을 죄로 유혹하는 남은 죄의 세력과 싸우는 일을 말합니다. 이 싸움이 그리스도인의 성화과정이며 그리스도인들의 당면한 믿음의 싸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중적인 갈등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육신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그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들이 되기 이전엔 성령의 소욕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오시게 됨으로부터 성령의 소욕이 생겨난 것입니다. 죄는 우리의 육신의 소욕을 따라 역사하기 때문에 육신의 소욕대로 살아가면 안돼는 것입니다. 육신에 진다는 말은 육신의 소욕대로 산다는 뜻입니다.

(3) 그런데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셔 죽는다는 말은 죄 값으로 말미암은 죽음으로 영원한 죽음을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성경은 항상 그의 백성들에게 진실한 믿음을 가지기를 원합니다. 진리를 깨닫기를 원하며 그 안에서 참 생명을 얻기를 원하며 거짓에 미혹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육신대로 살면 죽는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육신대로 산다는 말은 계속해서 그렇게 살아가면 이란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계속해서 육신대로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언제까지나 육신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영적 생명이 없는 사람으로 중생치 못한 사람입니다. 육신대로 계속 살아 나간다는 말은 그에게 성령이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결코 이 같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3. 영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

바울은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성화의 실질적인 방법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언제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는 생활입니다.

(1) 그리스도인은 중생치 못했을 때와 같은 연약한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약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다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이 같은 생각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성경에서는 죄와의 싸움은 맡기라고 하지 않고 순종하고 의지하라고 하셨습니다. 의지한다는 말은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고 그 말씀만을 따르라는 뜻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우리들이 해야 할 일에 대하여 명령하십니다. 주님은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킬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죄를 이길 수 있고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 안에는 이제 새로운 하나님의 능력이 나와 함께 존재하십니다. 새롭게 살아난 우리의 영적 생명도 능력이 되거니와 그 보다 더 강력한 능력은 바로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이십니다.

(2) 몸의 행실을 죽이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죄가 조종하는 육체의 일을 따르지 말라는 뜻입니다. 우리들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육체의 일을 도모하지 말아야합니다. 첫 번째로 우리에게 닥쳐오는 일차적인 죄의 유혹을 이겨야 합니다. 마음으로 죄의 유혹에 동의치 말아야 합니다. 그 유혹을 마음으로 받아 드리지 말아야 합니다. 두 번째로 육신의 생각을 버리고 이제 성령을 쫓아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같은 죄악의 생각을 버리고 성령을 쫓아 행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결 론 : 그리스도인의 성결 생활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 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구원해 주신 이유도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롬7:4). 이 열매란 그리스도인의 성결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성화는 저절로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는 생활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 62 ≈ 양자의 영

(본문 : 로마서 8 : 12 - 15)

1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서 론 : 성화교리(聖化敎理)와 영화교리(榮華敎理)는 다릅니다. 성화는 영화의 한 과정일 뿐 영화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너무 성화교리에 얽매일 때 그의 생활이 행위 면에 치우치게 되고 멀리 소망을 바라보는 생활에 등한하기 쉽습니다. 성화는 그 과정이 쉽고 단순치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적 시야는 마땅히 우리의 영화에 두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영화롭게 됩니다. 우리는 그 날을 소망으로 바라보고 살아가면서 성화의 과정을 밟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우리의 영화에 우리 신앙생활의 표적을 둘 때 우리의 생활이 활기차게 되며 성화도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성화나 영화나 우리 가운데서 이루시는 이는 오직 성령이십니다. 성령이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해 주셨고 성령이 내 안에서 주님의 새 계명을 이루어 주심으로 성화로 인도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주신 15절에서는 이 성령을 양자의 영이라고 말씀하였고 우리는 이 영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1.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리스도인들

성경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님의 이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두 단어는 한가지 뜻을 가지고 있는 같은 말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그러면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는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1)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진리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성령께서 진리로 인도하십니다. 진리란 무엇이냐? 이에 대한 해답은 예수님이 친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요17:17절에서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기록된 성경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오직 성경만이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책입니다(딤후3:16,17). 성령은 언제나 우리들을 오직 성경 안에서만 가르치십니다. 그 안에서만 감동을 주십니다. 그 안에서 살아가도록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기록된 말씀 외의 것으로 우리를 인도하려는 영이 있다면 그 영은 성령이 아니십니다. 천주교인들은 마리아나 다른 사도들이나 성자들로 인정하는 거룩한 생애를 살아간 사람들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마리아의 동상 앞에 기도하고, 마리아가 무죄로 잉태되었고, 그녀는 죽지 않고 부활 승천했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기록된 성경에는 그런 말씀이 전혀 없습니다. 그것은 결코 진리로 인도하시는 성령의 가르침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들의 신앙적인 모든 것을 오직 성경에 기록된 진리의 말씀의 관점에 결부시켜 판단해야 합니다.

(2) 성령은 그리스도의 지식과 지혜로 인도하십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하시는 일은 오직 그리스도를 높이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높이심에 대하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두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끓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빌2:10,11). 성령께서는 그리스도를 하늘 보좌 하나님의 우편에까지 높이십니다. 성령의 증거는 예수는 곧 하나님이시라고 하십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증거해 주시는 것입니다(요1:1). 그러므로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들은 그리스도만을 높이고 그를 아는 자식을 기뻐하고 그의 말씀에 소망을 두는 것입니다.

(3)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을 심어주십니다. 우리의 믿음은 어디서 나오는 것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그 믿음은 어디서 생긴 것입니까? 만약 그것이 우연히 혹은 자동적으로 생겨났다고 한다면 그러면 우리가 예수를 알기 이전에는 왜 그런 일이 전혀 불가능했던 것입니까? 우리가 지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은 그 말씀에 대한 믿음을 주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서인 것입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기 때문”에 성령께서 그를 아는 자식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입니다(요17:3).


2.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은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생활은 죄를 따라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과는 확실히 다릅니다.

(1)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려고 하는 새로운 생애를 발견하고 그 길을 가기를 원하고 그 길을 가는 일을 기뻐합니다. 예수를 영접하기 이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입니다. 지금 우리의 신앙이 좀 미약해도 이런 생명의 싹이 분명히 내 안에서 꿈틀거리고 있으며 우리의 신앙이 좀더 장성하면 우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2) 이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알기를 사모합니다. 이전에는 성경을 전혀 가까이 한 일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귀하고 그 말씀을 배우기를 좋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일에 많은 시간을 바쳐도 아까울 것이 없고 마음이 편안합니다. 성령은 우리로 그리스도의 말씀을 좋아하게 만드십니다.

(3)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했을 때 마음의 큰 고통을 받게되고 근심에 쌓이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성령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라고 했습니다(고후7:10). 우리의 회개는 바로 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의 결과에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내 안에서 성령이 하십니다.


3. 양자의 영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15절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씀해 주고 있는 아바 아버지란 말의 아바란 말은 아람어로 아버지란 뜻으로 ‘아버지 아버지’란 의미입니다. 이것은 아버지의 이중적인 중복표현으로 아버지를 정답게 부르는 그 당시의 하나의 표현법이기도 합니다.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이 같은 표현을 쓰셨습니다.

(1) 하나님의 자녀들은 양자의 영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양자의 영이란 곧 성령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성령이 이 세상에서 하시는 사역이 많으시기 때문에 그 하시는 사역에 따라 여러 가지 이름이 부쳐지고 있습니다. 혹은 보혜사, 진리의 영,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그리고 이곳에서는 양자의 영이라고 하셨습니다. 양자란 법적으로 아들로 삼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오직 독생 하시는 하나님이신 예수님 한 분뿐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가진 아들들로 말하자면 양자들입니다. 그러나 법적으로는 아들이신 예수님과 똑같은 신분의 대우를 받는다고 약속되어 있습니다. 성령이 우리를 양자로 삼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아들로 우리를 양자로 삼으시고 성령으로 인쳐 주셨다는 뜻입니다.

(2) 이 양자의 영이 우리로 하나님을 향하여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는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이처럼 하나님을 향하여 아바 아버지라고 외쳐 댈 수 있는 것은 양자의 영이신 성령께서 내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영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께 이 같은 호칭으로 부르짖을 수 없습니다. 한두 번 어쩌다 흉내 낼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참 마음과 감사하는 마음과 믿음으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결 론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무서워하는 영이 아니라 양자의 영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하나님을 향하여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게 된 일에 대해 이 시간 감사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63 ≈ 후사의 영광과 고난

(본문 : 로마서 8 : 16 - 18)

16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모든 피조물이 구원을 고대하다

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서 론 : 로마서 8장은 그리스도인의 구원의 확신에 대한 서술이며 내주 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사역에 대하여 증거 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15절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양자의 영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하여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고 하시는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른다면 그는 곧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16절에서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 하신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 같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고 있습니다. 자녀라면 후사의 자격자요 하나님의 후사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후사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의 후사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마땅히 하나님의 후사가 된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후사란 말은 대를 잇는 자란 뜻인데 원문에는 ‘클레로노모스’로 나오는데 이 말은 상속자란 뜻입니다. 곧 하나님의 재산상속권자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의 후사는 오직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만 국한됩니다.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는 이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유업으로 주시기 위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성경은 증거 해 주고 있습니다. 천국은 천사들이나 다른 하늘의 영적인 피조물을 위한 곳이 아닙니다. 천사들은 장차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하나님의 후사들을 위한 봉사자이지 그들이 천국의 주인공이 아닙니다.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고 말씀해 주 고 있습니다(히1:14).

(2) 천국의 모든 생활과 모든 구조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을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신다”고 하셨습니다(계21:3). 하늘에서 내려오는 이 새 예루살렘은 성곽의 문이 열둘이요 열 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는 어린양의 12사도의 이름이었더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오직 어린양의 생명 책에 기록된 자들이 그 성의 영원한 거주자가 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혀주고 있습니다. 천국은 하나님이 성도들을 위해 예비하신 성임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하니 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히11:16).

(3)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시기 위해 예비하시고 약속하심으로 이 같은 일이 곧 하나님의 후사로 그리스도인의 소망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일이 히브리서에는 더욱 분명히 밝혀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 하셨나니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히6:17,18).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말은 하나님의 후사인 그의 백성들이 후사로서의 약속, 곧 천국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다고 말씀하심으로 그 뜻이 변치 아니하심을 충분히 나타내신 것입니다.

이 같은 하나님의 약속을 이을 자의 자격이 그리스도께 속한 자로 나와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말씀했습니다(갈3:29).

(2) 하나님은 이 약속을 예수 그리스도로 성취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같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이미 창세 전에 그리스도안에서 예정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이미 창세 전에 그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예정하시고 세상에 보냈으며 그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자신 것입니다. 그가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나님의 후사가 될 많은 아들들을 만드셨습니다(사53:20).


2.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

하나님의 후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입니다. 그리스도가 없이는 우리는 후 사의 자격을 획득할 수가 없습니다.

(1) 왜냐하면 하나님의 후사는 한 분, 예수뿐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히1:2). 이 아들이 자기와 함께 하나님의 후사가 되기 위한 많은 아들을 아버지께로 이끄시기 위해 고난을 당하셨다는 사실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히2:10).

(2)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아들이 된 일은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장사까지 지냈습니다(롬6:4). 그뿐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자가 되었습니다(롬6:5). 이 같은 사실을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고 부릅니다. 바울은 로마서 6장에서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자가 되리라”고 했습니다. 연합이란 말은 물이 하나가 된 상태로 영원한 결합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인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가 된 것입니다.


3. 그리스도와 함께 받아야 할 고난

하나님의 후사는 정말로 크나큰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이 보다 더 큰 영광스러운 약속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영광을 소유한 하나님의 후사들은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에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도 받아야 될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소망이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있어서 이 세상은 본향이 아니라 나그네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나그네 세상에 소망을 두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고난이 없다고 하는 말은 비 성경 적입니다. 성경에서는 고난에서 우리를 건져주시겠다는 말씀은 있으나 고난을 유월해 주신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핍박에서 지켜 주신다는 약속은 있어도 핍박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보장해 주신 일은 없습니다. 시험이나 고난 중에서 인내하라는 말씀은 있어도 우리 생애 중에서 그런 것을 제하여 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은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고 했습니다(빌1:29).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쫓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했습니다(딤후1:8).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고 했습니다(벧전4:13).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마5:10).

우리는 이런 고난이나 핍박이나 환난이외에도 우리들 스스로의 범죄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그 징계가 어떤 방법과 모양으로 나에게 온다고 해도 이로 말미암아 연단을 받으면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게 된다고 했습니다(히12:11). 우리는 예수를 믿는 일이 우리의 현실 세대에서의 고난의 탈출이나 시련이나 환난에서의 모면에서 출발하면 안됩니다. 그런 목적으로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지 아니하셨으며 그같은 육신의 썩어질 일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그 고귀하신 피를 흘리신 것이 아닙니다.


결 론 : 하나님은 우리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온전케 양육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의 후사가 될 하나님의 자녀답게 온전케 양육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의 후사가 될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을 순종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시련으로 온전케 하시고 징계로 하나님의 자녀답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후사, 곧 그리스도와 함께 후사가 될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가 누릴 하나님의 유업 자로서의 영광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고 위대합니다. 이 소망을 견고히 잡으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 64 ≈ 그리스도인의 고난과 영광

(본문 : 로마서 8 : 18 - 23)

모든 피조물이 구원을 고대하다

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19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20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23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서 론 : 우리가 하나님의 후사가 되었다는 이 사실은 우리들에게 너무나도 감격스럽고 영광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같은 영광스러운 일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가 된 것입니다. ‘함께 한 후사’란 말은 우리들이 그 일을 위하여 무엇을 함께 했다는 뜻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로 인하여 성취된 일에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놀랍고 신비스러운 비밀로 이루어진 것인데 이 일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하여 가능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일을 위하여 양자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계셔서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 하신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18절부터 23절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인들의 고난과 탄식이 나오면서 그러나 이 같은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현재의 고난과 장차 나타날 영광

18절에서 이르시기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누구에게나 현재의 고난이 있습니다.

(1) 하나님이 창조하신 최초의 세계는 고난이 없는 세계였습니다. 그곳에는 모든 창조세계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하셨고 썩음이나 쇠함이나 죽음이나 탄식이 전혀 없었습니다. 고난은 인간의 죄로 인하여 오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범죄한 아담에게 하신 말씀이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창3:17,18). 이 같은 피조 세계의 저주는 새로운 세계가 조성되기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2) 이 세상은 하나님의 자녀들까지도 속으로 탄식하며 지내야 하는 세계임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23절에 기록된 말씀을 보면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한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 중에는 탄식이 없는 생활로 한 생애를 살아갈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 나가 다 저주받은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궁극적인 구원은 하나입니다. 영과 육의 완전한 구원입니다. 영적 구원은 그리스도를 영접했을 때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육신의 구원은 장차 나타날 소망 중에 있는 것입니다. 그 나타날 날이 부활의 날입니다. 이때까지는 인간의 죄로 말미암은 저주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모든 피조물에게 미치기 때문에 우리도 그 안에서 벗어날 길이 없는 것입니다.

(3) 그러나 우리들에게 장차 나타날 무한한 영광의 세계가 있습니다. 이 세계는 이 세상의 모든 저주에서 완전히 해방된 세계입니다. 이 세계는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기쁨과 영원한 안식이 계속되는 세상입니다. 이 같은 영광에 대하여 요한계시록 21장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니라”고 했습니다(계21:3,4).

우리 그리스도들에게는 이 같은 영광의 나라가 약속되어 있습니다. 이 나라를 상속으로 받는 일이 곧 하나님의 후사인데 이 영광에 대한 소망이야말로 현재 우리가 이 땅에서 당하는 모든 탄식이나 고난에 비할 바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소망이 있는 사람마다 세상을 이기는 삶을 살아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4) 현재와 장차의 세계는 밀접한 연결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들의 세계가 이 세상만으로 끝난다면 우리의 생애는 가장 비참한 생애가 될 것입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만일 그리스도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금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고전15:19).

그리스도이건 아니건 모든 인류는 현세와 내세와 완전히 분리시킬 수 없는 생애를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는 하나님의 최종적인 인류의 심판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그들에게 예비 된 영원한 나라가 있습니다. 이 나라를 물려받는 일이 하나님의 후사가 되는 일입니다. 그리고 다른 또 일단의 무리들에게 내리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 무리들이란 하나님을 거역하고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은 무리들입니다. 그들에게 이르시기를 “또 왼편에 있는 자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이 소망을 가지고 장차 나타날 영광의 나라를 생각하면서 소망가운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2. 피조물들의 탄식과 기다림

사도 바울은 이 같은 탄식이, 인간의 죄로 인하여 함께 고난을 당하고 있는 모든 피조물에게까지 미치고 있다고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1)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함에서 해방되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허무한데 굴복하고 있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라고 밝혔습니다. 하나님이 이들로 이처럼 탄식하며 고통을 당하게 하신 것은 인간의 죄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도 하나님의 후사로서의 영광을 누리는 그런 시기가 빨리 오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회복은 곧 만물의 회복이 따를 것이기 때문에 그날에는 모든 피조물들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22절에서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 하는 것을 우리가 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우리도 그들과 함께 탄식하는 존재로써 다른 피조물들의 탄식함도 능히 깨닫게 된다고 하는 표현입니다.

(2) 그리스도인들은 양자 될 것을 기다린다고 했습니다. 피조물의 탄식에 대하여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그 속에 포함시켜 이처럼 말했습니다.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며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15절에서 양자의 영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양자로서의 완전한 신분을 소유한 것은 아닙니다. 후사로서의 지위에 오르면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우리가 양자 된다는 말은 곧 몸의 구속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몸의 구속이란 이 땅에서 지금 탄식하고 고난을 당하고 있는 우리의 육신적인 몸의 완전한 구원으로 곧 그리스도인의 부활을 의미해 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후사로서의 영광의 날이 속히 오기를 간절히 사모하고 있는 것을 의미해 주는 말입니다.


결 론 : 그리스도인들은 이 같은 영광의 소망이 있기 때문에 말할 수 없는 탄식이나 고난 중에도 인내로 능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당하고 있는 현재의 고난은 그 고난이 어떤 것이건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소망은 범사에 감사하는 생활을 가능하게 만듭니다. 항상 기뻐할 수 있는 생애를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 어떤 환경 속에서도 그리스도께서 주신 참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 65 ≈ 구원의 과거, 현재, 미래

(본문 : 로마서 8 : 24 - 25)

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서 론 : 바울은 아직까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무한한 영광에 대한 일을 논증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한 하나님의 후사로서의 영광, 장차 나타날 그 영광에 대한 아름다움, 그리고 모든 피조물들도 하나님의 자녀들의 그 같은 영광의 날이 오기를 탄식하며 기다림은 물론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의 몸의 구속의 날을 기다린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바로 이 날에 이루어지며 그 약속이 성취되는 그날이 바로 우리의 소망이 이루어지는 날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1. 소망으로 구원을 얻은 그리스도인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줄 안다”고 했습니다(갈2:16).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게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로냐 듣고 믿음으로냐”고 했습니다(갈3:2).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자”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요일5:1).

(1) 우리가 받은 구원은 소망 안에서 받은 것입니다. 구원이란 말은 영생이란 말과 같은 말입니다. 성경에서 구원이란 뜻이 영생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구원을 받았지만 아직 영생은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아나는데 이 일은 그리스도인들의 부활을 의미해 주는 것으로 이것은 장래의 일입니다.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신 말씀은 우리의 영적인 생명을 의미해 주는 것으로, 이 생명 역시 우리의 몸을 떠나야 그 영화를 누리는 시간적 제약아래 있기 때문에 실체적으로 그 생명의 향유 역시 미래에 속한 것으로 이것 또한 우리의 소망 안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영적인 구원은 확실합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 안에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의 생명이 예수를 믿음으로 살아났습니다. 이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이 믿는 자 안에 들어오시는 이유는 바로 이 생명을 살리시려는데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이 같은 사실을 중생, 거듭남이라는 말로 표현해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우리의 영원한 생명은 지금 우리 안에서 그 영화를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육신의 몸에서 벗어날 때 온전히 영화로운 생명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우리 육체가 죽을 때 우리 안에 있는 이 생명은 하나님께로 가서 영원히 죽지 아니하는 생활을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고 했습니다(고후5:8). 그리고 우리의 이 육적인 몸의 구원은 부활의 날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우리는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는 것입니다(롬8:23).

(2) 보이는 것이 소망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소망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소망은 공허한 것이 아닙니다. 신기루 같은 허망 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해 주는 바요,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의 증거로 우리 마음속에 깊이 새겨진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의 선진들은 이 소망을 바라보고 기쁨으로 순교의 자리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에 소망을 두었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일 것이라고 했습니다(고전15:19). 그리스도인들은 장차 나타날 소망을 바라보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 있는 것을 바라보고 살아갈 것이 아니라 위에 것을 바라보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했습니다(히12:2).


2. 구원의 삼중 성

우리의 구원이 이처럼 미래에 속한 소망 적이긴 하지만 이 구원에는 삼중 성이 동시적으로 적용되고 있습니다. 과거에 속한 구원, 현재에 속한 구원, 미래에 속한 구원으로 나뉠 수 있는 것입니다.

(1) 우리의 구원은 분명히 과거에 속해 있습니다. 과거에 속해 있다는 말은 우리의 구원은 이미 받았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이미 구원받은 사실에 대해 분명히 알아야 한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일에 대하여 사도 요한은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요일 5:13).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도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하신 것입니다(요5:24). 이 같은 구원에 관한 표현은 우리는 이미 구원을 얻었다고 하는 사실을 밝혀주는 것으로 우리에게 있어서 구원은 과거에 속한 일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이 과거에 속해 있다는 증거는 구원의 확실성과 영원성을 증거 해 주는 것입니다. 구원은 이미 이루어진 사질입니다. 그리고 이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예정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미 이처럼 이루어진 우리의 구원은 절대로 변함도 없고 빼앗길 수도 없으며 변질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요6:38,39).

(2) 다음에 우리의 구원은 현재에 속해 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했습니다(빌 2:12).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이미 지난날에 확실히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구원은 소망의 날까지 진행 중에 있기 때문에 지금 우리는 그 구원을 이루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이 땅에서 삶을 살아가고 있는 동안 언제나 우리의 현재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과거에 속한 것이라고 방심하면 안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같은 일에 대하여 빌립보서에서 이렇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쫓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쫓아가노라?고 했습니다(빌3:12-14).

(3) 그리고 우리의 구원은 미래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말씀했습니다(24절). 물론 소망이란 장래에 우리에게 나타날 것이기 때문에 지금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은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소망으로 기다림으로 얻은 구원이란 어떤 구원인가? 23절에서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구원이란 우리의 구원의 완성으로 몸의 구속 곧 부활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날을 우리의 소망의 실현의 날로 믿고 소망 중에 기다리는 것입니다.


결 론 : 바울은 25절에서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이 세상에서 말할 수 없는 영광의 소망을 바라보며 살아가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자세입니다. 그리스도인들 역시 이 세상에서 고난도 받습니다. 환난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불같은 시련을 만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속으로 탄식하며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이 같은 고난으로 말미암은 탄식은 그 탄식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하신 말씀을 믿는 우리는 이 모든 시련과 환난을 능히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일5:4,5).


≈ 66 ≈ 성령의 탄식과 간구

(본문 : 로마서 8 : 26 - 27)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서 론 : 성령은 우리를 도우시는 영이십니다. 26절에서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보혜사로 비유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라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고 하셨습니다(요14:16-18). 예수님은 이곳에서 성령과 보혜사와 자신과를 연결시켜 말씀해 주셨으며 그가 우리에게 오시는 이유는 우리로 고와와 같이 버려 두지 않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1. 성령의 탄식과 간구

우리는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가졌으며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고 있지만 연약에 싸여 속으로 탄식하며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이 우리 몸의 연약함을 도와주시기 위해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 것입니다. 이 같은 연약은 예수님도 이 세상에 계실 때에 가지고 계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저가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싸여 있음이니라”고 하신 것입니다(히5:2).

(1)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육적인 연약 뿐 아니라 영적인 연약함도 지니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기도의 연약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제대로 할 수 없는 영적인 연약에 싸여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참 뜻을 분별함에 너무나도 무식합니다. 우리들 앞에 어떤 돌변적인 사태가 벌어졌을 때 우리의 어떤 기도가 하나님께 합당한 기도인지 알 수 없어 고민할 때가 너무나도 많은 것입니다. 모세의 경우가 그러했습니다(신3:23-27). 사도 바울의 경우도 그러했습니다(고후12:1-10).

(2) 이 같은 우리의 연약함에 성령이 탄식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성령의 탄식은 우리의 탄식과 다릅니다. 우리의 탄식은 육체의 연약함으로 말미암은 괴로움의 발로지만 성령의 탄식은 우리의 이 같은 괴로움에 동정하시고 마음 아파하시는 성령의 사랑과 긍휼히 여기심의 탄식이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들의 연약함을 불쌍히 여기시며 탄식하십니다. 우리의 죄악된 행실을 안타까이 여기시며 탄식하십니다. 우리의 기도의 부족과 마땅히 간구할 바를 알지 못하는 일에 대해 탄식하십니다. 우리를 위한 성령의 사역은 바로 이 탄식이 그 시발점이 되는 것입니다.

(3) 성령께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 대한 해석에 어려움을 당하게 됩니다. 그것은 이곳에서 밝혀주고 있는 성령의 간구가 어떤 형태의 것이냐는 것에 대한 의견이 여러 갈래이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는 성령께서 우리의 기도에 도움을 주신다는 해석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의 기도와는 별개의 성령자체의 기도라고 하는 견해입니다. 우리가 성경의 난해구절을 해석할 때 주의할 점은 먼저 본문에 기록된 말씀의 문장을 철저히 파헤치는 일입니다.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 하시느니라”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 하심이니라”고 하신 말씀이 가르쳐 주는 것은 우리의 기도에 성령의 어떤 도우심을 주신다는 뜻보다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시기 위하여 성령께서 친히 간구 해 주신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친히 간구 하시느니라의 ‘친히’란 말은 ‘아우토 토프뉴마’로 성령자신이란 의미로 성령이 나를 대신하여 친히 간구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혹 죄악 중에 방황할 때에도 이 성령의 탄식 어린 간구로 우리의 마음에 회개하고자 하는 감동을 받아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불의의 사고를 당할 때에도 우리는 전혀 그런 사고의 발생을 모르지만 이 모든 것을 아시는 성령의 탄식 어린 기도로 우리가 알지 못하고 지나쳐 버린 위험한 일들이 수다히 많은 것입니다.

(4) 성령의 이 같은 탄식 어린 간구는 우리로 기도하고자 하는 강한 영적 의욕을 일으켜 주기도 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는 그 간구로 인하여 우리로 성령의 능력으로 기도할 수 있는 힘을 공급해 주기도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탄식 어린 간구는 우리의 심령을 뜨겁게 하여 우리의 영적 잠을 깨게 하시며 우리의 기도에 불을 부쳐주게 될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뜻대로 간구하시는 성령

우리는 27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간구 하시는 성령의 간구를 바라보게 됩니다.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 하심이니라”고 하셨습니다.

(1)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신다고 하셨습니다.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와 성령은 한 본체를 이루고 계시는 한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생각을 아시고 하나님은 또한 성령의 생각을 아십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고전2:10).

(2) 성령은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들을 위해 간구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핵심은 성령이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 하실 수 있는 것은, 성령의 간구 하심이야말로 하나님의 뜻대로 간구 하심이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 같은 성령의 생각을 이미 알고 계시기 때문에 성령의 간구를 들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성령의 사역을 회의적으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예수님은 지금 하늘의 지정소에서 대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하심에 있어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고 계심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 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 하시는 자시니라”고 하셨습니다(롬8:34). 그런데 성령께서는 우리들 안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친히 간구 해 주시는 보혜사이십니다.

(3)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바른 기도생활에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성령이 탄식으로 간구 하시는 일은 우리들의 바람직한 생활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언제나 인간적인 지혜나 육신의 생각에 사로잡힐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도하는 일이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그의 말씀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의 말씀을 따라 그의 뜻을 잘 살펴서 기도하는 기도가 하나님께 합당한 기도입니다. 다음에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이 같은 기도는 언제나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육체의 연약을 위한 기도, 죄를 이길 수 있는 생활의 기도, 육신의 정욕이나 탐심이나 교만에서 벗어나기 위한 기도 등은 언제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기도에 성령의 도우심을 간절히 바라면서 기도하는 일입니다. 성령께서 내 안에서 나의 연약함을 인하여 말할 수 없는 탄식함으로 간구 하시는 그 기도를 내가 영감으로 들으면서 성령의 그 탄식을 내가 안고 기도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고 하신 말씀은 이 같은 자세의 기도를 의미해 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엡6:18).


결 론 : 우리는 성령의 이처럼 놀라운 사역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같은 성령의 탄식 어린 간구는 우리들에게는 말할 수 없이 은혜로운 하나님의 사랑이시지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일은 아니란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엡4:30). 우리는 또 우리 자신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이처럼 성령의 탄식 어린 기도를 마음 아프게 여기면서 성령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의의 열매를 맺어야 할 것입니다.


≈ 67 ≈ 합력 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

(본문 : 로마서 8 : 28)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3)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서 론 : 28절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택정함을 받은 성도들의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짤막한 말씀 가운데는 하나님의 예정과 성도들의 견인(堅忍)과 최종적으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여주는데 이 말씀의 결론은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은 하나님에 의하여 그의 생애를 지배받으며 이 모든 결과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지극히 선한 결실을 맺게 된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이 같은 모든 하나님의 역사는 필연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또 이루어질 것인데 이런 놀라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알려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

그리스도인은 무슨 일을 만나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경우에도 낙심하거나 절망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합력 하여 선을 이루신다고 약속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하나님의 놀랍고 위대한 섭리를 깨닫고 있는 성도들의 삶이 얼마나 아름다울 것입니까? 아마도 이 진리를 참으로 이해하고 있는 성도라면 그의 마음은 언제나 평안에 젖어 있을 것이며 그의 생활은 언제나 감사로 충만할 것입니다.

(1) 바울은 이 같은 하나님의 섭리를 논함에 앞서 “우리가 알거니와”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지적하고 있는 우리란 어느 정도 믿음으로 장성한 그리스도인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생애를 통해 하나님의 손에 의해 지배를 받아 온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그는 우리가 알거니와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의 성장이란 그의 생애에 나타나 있는 체험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이 체험이란 물론 자신의 계획이나 자신의 노력에서 얻어진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의 부단한 간섭에 의해 인도되는 자신의 신앙적인 체험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안다는 말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백성들의 생애를 통해서 한결같이 이와 같은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2) 다음에 이 같은 하나님의 섭리의 범주에 들어갈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들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은 너무나도 광범위한 표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때 그 사랑이 현재적인 사랑이라는 전제조건하에서 해석을 시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고 있는 자들은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수가 없는 것이냐?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란 무엇을 말하며 누구를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까?

(3)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란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이 말씀은 참으로 의미 심장한 말씀으로 여기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란 단어의 뜻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말하고 있는 사랑이란 과거에 속한 것이거나 현재에 속한 것을 의미해 주고 있는 것이 아니라 결과적인 것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지난날에는 어떤 형편에 있었던지, 지금은 어떤 상태에 처해 있던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가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느냐? 하는 이 문제가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 남게 되느냐? 이에 대하여 바울은 증거하기를 “그 뜻대로 부르심을 업은 자들”이라고 못 박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된다는 사실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얼마나 은혜로운 진리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란 하나님의 예정가운데 들어가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가장 큰 뜻은 그의 예정입니다. 하나님은 창세 전에 하나님을 사랑할 자를 이미 예정하셨다는 사실은 성격적인 증거요 움직일 수 없는 진리인 것입니다.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엡1:4). 하나님의 예정은 하나님에 의해 구원받을 백성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이미 창세 전에 구별해 놓으셨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 같은 예정교리는 많은 사람에 의해 도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예정교리는 성경의 움직일 수 없는 진리입니다. 예정교리는 심오하기 이를 데 없는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 의해서 이 예정교리가 비판받아서는 안돼는 것입니다. 그리고 참된 회개와 칭의에 대한 믿음 없이는 이 예정교리란 영원히 정답을 가져 올 수 없는 난제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예정교리는 불신자들이나 예정에 없는 사람들을 매도하거나 그들에게 공격의 여지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의 감사를 위해 주신 진리이며 이로 예정가운데 들어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크나큰 위로와 격려를 공급해 주고 있으며 또 그렇게 하시려는데 목적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었다는 말은 효과 있는 부르심을 의미합니다. 복음은 효과 있는 부르심의 방편이기는 하지만 복음을 들은 모든 자가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아닙니다. 우리는 세계만방에 나가 만민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복음을 듣는 자 중에 오직 목자이신 예수님의 양들만이 효과 있는 부르심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들만을 그의 자녀들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위해 모든 것을 합력 하여 선을 이루어 주시는 귀한 역사를 하시는 것입니다. 요셉의 경우를 보면 그는 하나님께 대한 지속적인 사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요셉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탕자처럼 얼마간 하나님을 떠나고 하나님의 사랑을 거역하고 하나님을 사랑치 아니했던 그리스도인들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결과적으로 아버지의 자비하심으로 더욱 큰사랑으로 아버지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의 경우에도 합력 하여 선을 이루시지만 탕자의 경우에도 합력 하여 선을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2. 모든 것을 합력 하여 선을 이루심

이처럼 예정을 입은 택자들의 생애에 있어서 그들의 생애에 오는 그 어떤 사건일지라도 그 일이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합력 하여 선을 이룬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일에는 제한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1) “모든 일”에는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이전의 사건까지도 포함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모든 피조물들에게 미칩니다.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일까지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 효과 있는 부르심으로 그의 백성의 반열에 들어오기까지의 그의 생애를 하나님께서 주장하신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가 그러했습니다. 주님은 아나니아에게 바울에 대하여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하신 것입니다(행9:15). 모든 일을 합력 하여 선케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시면 그의 택한 백성들이 이 구원의 은혜를 받을 기회가 전혀 주어지지 아니 할 것입니다.

(2) 모든 일이 합력 한다는 말에는 하나님의 징계까지도 포함됩니다.?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히12:11).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징계의 결과가 언제나 선하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3) 모든 일이 합력 한다는 말은 우리의 잘못된 범죄까지도 포함됩니다. 물론 모든 죄는 악합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심판하십니다. 죄는 자기 생애에 말할 수 없는 손실을 초래하게 되고 불행과 파탄을 가져오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는 죄로 끝맺는 것이 아닙니다. 그로 인하여 자신의 비참한 모습을 바라보게 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죄는 결과적으로 회개를 이루게 됨으로 그들의 생애에 무한한 축복을 가져오게 되며 세상 줄을 끊을 수 있는 계기로 제공되는 것입니다.

결 론 : 합력 하여 선을 이루신다고 하신 ‘선’이란 하나님의 뜻을 의미합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참으로 선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우리를 예정하신 이유는 “그리스도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복 주시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엡1:3). 우리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나님 나라의 영광의 기업을 차지하게 하시며 영원한 생명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하시려는데 하나님의 궁극적인 선이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


≈ 68 ≈ 효과 있는 부르심

(본문 : 로마서 8 : 29 - 30)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서 론 : 우리는 28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라는 말씀을 대하게 됩니다. 그의 생애에 있어서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이 이루어지는 자”는 교회에 나오는 모든 사람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란 결과적인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결과적인 사랑은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 뿐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29절과 30절에 와서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 누구인가에 대하여 분명한 해답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1. 미리 아신 자로 미리 정하셨다.

하나님의 예정은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미리 정하셨다”고 하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예정은 미리 아신 자들로 이루십니다, 하나님 앞에는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모르심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가에 대해 하나님은 이미 미리 알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전혀 모르고 있다가 그 사람이 예수를 믿을 때 그때 비로소 예정하신 것이 아닙니다. 또 여기서 아신 자들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은 어떤 사람이 장래에 예수를 믿을 것을 아시고 그 사람을 예정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가 구원하시기로 예정한 사람들을 미리 알고 계셨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이미 내 얼굴을 보셨습니다. 하나님의 예정에는 하나님이 미리 알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한 명도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예정은 이처럼 미리 아신 자들로 정하셨습니다. 이 아심과 정하심은 거이 동시적일 수 도 있습니다. 정하셨다는 말은 예정의 확정을 말합니다. 이 같은 예정은 그 시기가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창세 전에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셨다”고 밝혀주고 있습니다(엡1:4,5). 창세 전이라 함은 아담이 범죄하기 이전, 그 보다 훨씬 앞선 시대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사역이 아직 이 세상에 나타나기 전이란 뜻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그가 택하실 그의 백성들에 대하여 미리 알고 계셨으며 그 사람들로 그 기쁘신 뜻대로 예정하셨습니다.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 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 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고 말씀했습니다(계 13:8).

(3) 우리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내 세우는 알미니안 주의에 조심해야 합니다. 알미니안 주의는 화란 신학자인 ‘알미니우스’(1560-1609)에 의하여 주장된 교리인데 이들의 주장은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예견된 믿음에 의해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만이 구원을 받기는 하지만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에 저항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들의 자유의지로 예수를 믿을 수도 있고 거역할 수도 있다는 것으로 하나님은 우리의 이 같은 일을 미리 아셨기 때문에(예정하신 것이 아니고) 선택하신 것이지 은혜로 무조건적으로 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같은 알미니안 주의는 성경해석에 많은 모순을 내포하고 있으며 구원론에 차질을 초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4) 우리가 다른 또 한가지 유의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보편 구원론이라고 하는 만인 구원 설입니다. 이 설은 하나님의 사랑이란 미명아래 뿌리를 박고 있기 때문에 대단히 매력적입니다. 이 같은 구원 설을 주장한 사람 중에 가장 유명한 사람은 ‘오리겐’(254년에 사망)인데 그는 영원한 형벌의 개념을 거부하고 악인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는 마귀까지 얼마간의 지옥의 고통을 받은 후에는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고 했습니다. 이 같은 주장을 하는 자들 중에는 우리가 죽은 내세에도 회개의 기회가 주어진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들의 주장은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그의 피조물인 인간들을 지옥에 영원히 파멸시킨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주장은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에 큰 의문을 던져 주며 성경을 비 진리로 오도하는 사단의 계략인 것입니다. 이 같은 주장은 성경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철학적 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비 그리스도인들이나 구원의 은혜에서 제외된 사람들에게 인기와 매력을 주는 것이지만 우리는 이런 사단의 간계에 넘어가면 절대로 안돼는 것입니다.


2.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이 같은 예정의 뜻은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아들의 형상이란 우리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는 일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예정하신 자들로 하나님의 아들로 삼아 그로부터 영광을 받으시기 위하심입니다. 하나님께는 그의 참 아들이 한 분이시지만 그 아들로 많은 아들들을 삼으셨는데 하나님께서는 이같이 우리로 당신의 아들로 삼으시기 위해 창세 전에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를 예정하신 것입니다.

(2) 아들의 형상이란 그 아들과 함께 하나님의 후사로 삼으시는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를 예정하신 이유에 대하여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기 위해”택하셨다고 했습니다(엡1:3).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아들의 이름을 주신 것은 이처럼 그리스도에게 주신 유업을 우리들로 함께 누리게 하시려는데 있다고 하신 것은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지요? 이 일에 대하여 바울은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롬8:17).

(3) 이 일은 또한 예수님으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 중에 맏아들은 최상의 영광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미 그가 얻으신 최상 최고의 영광을 의미합니다. 그는 하나님으로써 당연히 이 같은 영광과 존대를 받으셔야 하지만 예수님이 친히 그같은 공로를 세우시고 스스로 그런 지위를 차지하신 것입니다.


3. 효과 있는 부르심

30절에 와서 바울은 하나님의 효과 있는 부르심에 대하여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I) 하나님은 이처럼 예정하신 그의 백성들을 부르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부르심은 목자의 음성으로 들려주십니다. 이 음성은 주의 복음으로 온 세계에 펼쳐집니다. 이 음성을 듣고 그의 양들이 목자를 따르게 되는데 이 음성은 그의 양 무리들에게 불가항력적인 부르심으로 작용합니다.

(3) 이 하나님의 부르심이야말로 효과 있는 부르심입니다. 이 부르심에는 창세 전에 그리스도안에서 예정된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 포함됩니다. 효과 있는 부르심에는 한 명의 누락자나 탈락자도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요6:37). 그리고 예수님은 “내게 주신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 버러지 아니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요6:39).

결 론 : 이 같은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께 나온 자는 복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제 영원히 버려진바 되지 아니하며 잃어버린 바도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그의 자녀들에게 의롭다 하심을 주십니다.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의가 그의 의가 되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신분은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가진 영화로운 몸입니다. 그리고 그 몸은 또한 장차 그리스도와 같은 부활의 영화로운 몸으로 다시 사는 약속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 69 ≈ 택한 자들의 특권

(본문 : 로마서 8 : 31 - 34)

그리스도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

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33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서 론 : 사도 바울은 31절로부터 마지막 39절에 이르기까지 로마서 8장의 마무리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그리스도인의 여러 가지 특권적인 위치와 장차 나타날 영광에 대하여 논증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한 하나님의 후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는 소망” “성도를 위한 성령의 간구” 그리고 “합력 하여 선을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의 뜻” “예정하신 자를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등을 서술했습니다. 바울은 31철에서 이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이 모든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우리는 더 이상 할말을 잊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너무도 심오하고 신비로우며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이 일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과 마음은 경이롭고 감격스러움에 가득 찰 뿐입니다.


1.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겉으로 보기엔 대적자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만일 이란 말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신다면 우리의 대적자가 어디 있겠느냐’는 강조 적인 표현입니다. 바울이 지금까지 논술한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대적자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우리를 대적하는 존재들이 많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인즉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이미 패배한 존재들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그리스도인들의 대적자는 없는 것입니다.

(1) 육신의 생각이 우리의 대적자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세대를 본 받으려고 하는 생각이 우리를 괴롭힙니다. 정욕과 탐심을 불일듯 일으키는 육신의 생각이 우리의 영적 생활을 어지럽힙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롬8:7,8). 그러나 이 같은 육신의 생각은 결과적으로 우리를 넘어뜨리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육신에 속한 자들이 아니요 영에 속한 자들이기 때문에 우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영이 승리를 안겨주십니다(롬8:9).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그의 그 영으로 말미암아 궁극적인 승리를 보장받는 것입니다(빌1:6).

(2) 죄가 우리의 대적자로 우리 생활 속에 깊숙이 침투하여 우리의 영적 생활을 얼룩지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고 난 후 죄로 인하여 고민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으며 죄 때문에 슬퍼하고 괴로워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는 것입니까? 그러나 이 죄는 우리를 사망가운데로 이끌어 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죄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에 죄가 우리를 지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의 영역밖에 있기 때문에 죄의 지배를 받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아래 있음이니라”고 했습니다(롬6:14). 죄는 다만 우리를 괴롭히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이 죄는 결과적으로 우리 안에서 점점 쇠패하여지며 성령의 능력으로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죄라고 하는 대적자를 근원 적으로 이길 수 있는 위대한 방패를 주셨는데 그것이 회개라고 하는 그리스도인의 특권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라”고 보장해 주셨습니다(요일1:9).

(3) 율법이라고 하는 존재가 우리를 간섭하려고 우리를 넘나보고 있습니다. 율법은 과연 우리의 영적 생활을 쓰러트리려고 우리를 대적하는 두려운 존재임에 틀림없습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율법적인 의를 강요합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범죄 했을 때 우리를 여지없이 정죄 합니다. 이 대적자의 모습은 엄위하고 두렵지만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나의 허수아비에 불과합니다. 이 율법은 이미 십자가에서 완전히 판정패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의는 모든 율법의 요구 사항을 완벽하게 이룬 의이기 때문에 더 이상 요구할 것이나 정죄 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 그리스도의 의를 소유한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의 요구를 이루었고 그 저주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못박고 있습니다(롬8:1).

(4) 우리의 대적자로써 우리에게 엄위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존재가 있습니다. 그 자가 바로 사단입니다. 그러나 사단은 이미 완전한 패배자가 된 존재입니다. 사단은 사망의 권세를 가진 자로써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었지만 우리는 이미 그같은 권세에서 완전히 해방된 사람들입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사망의 세력을 잡은 마귀는 이미 없이한바 되었으며 우리를 주검의 종노릇한데서 놓아 주셨다고 하셨습니다(히2:14,15). 그리스도의 생명 이 우리 안에 있고 성령의 권능이 우리를 지키고 계시기 때문에 사단의 모든 권세는 그 하나도 우리에게 미칠 수 가 없는 것입니다.


2. 모든 것을 은사로 주시지 않겠느냐?

다음에 두 번째로 바울은 이처럼 말했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풍족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 아들은 오직 한 분뿐이십니다. 그 아들은 바로 아버지와 한 본체를 이루어 계시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것입니다(요1:18).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분을 우리를 위해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 주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 분이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이시라면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은사로 주시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 중에 가장 소중한 것은 그 아들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신 위대한 선물, 곧 영생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에게 하나님의 후사로 약속하신 하늘나라의 영원한 축복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육신 적인 생활에 관한 일까지라도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고 하시고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마6:32,33).


3. 누가 택하신 지를 송사 하리요

33절에 있는 송사와 정죄는 같은 맥이요 같은 뜻입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 하겠느냐”고 하신 말씀은 아무라도 이 세상에서는 그리고 하늘 위에 있는 존재나 하늘 아래 있는 존재나 그 어떤 존재라도 감히 하나님의 택한 자들을 송사 하거나 정죄할 자가 없다는 뜻입니다. 만일 그런 자가 있다면 하나님께 대한 도전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정죄에서 해방시켜 주셨고 의롭다고 인 치셨거늘 어느 누가 송사 하거나 정죄할 자가 있을 것입니까?

우리를 송사 하거나 정죄하지 못할 이유 중에 또 다른 하나로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의 죽으심과 그의 살아나심은 그리스도인의 모든 특권적인 위치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요소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의 죽으심이나 살아나심이 없으셨다면 우리들에게는 그 아무 것도 소유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소유와 특권은 전부 그 근원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 하신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그리스도의 간구는 그의 대제사장 직분을 의미해 주는 것이기 때문에 큰 의의가 주어져 있습니다. 그가 지금도 하늘의 지성소에 들어가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우리를 위해 간구하고 계신다면 송사 하거나 정죄할 자가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결 론 : 그리스도인의 특권은 이처럼 놀라운 것입니다. 이 귀한 것들을 우라는 어디 가서 무엇으로 살 수 있을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아름다운 것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우리를 창세 전에 그리스도안에서 예정하셨고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이 감격을 마음에 뜨겁게 간직하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 70 ≈ 끊을 수 없는 사랑

(본문 : 로마서 8 : 35 - 39)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 바 

ㄱ)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ㄱ)시 44:22[고라 자손의 마스길,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22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서 론 : 우리는 오늘 본문 로마서 8:35-39절에서 바울의 놀랍고 위대한 논증을 듣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의 논증은 너무나도 강렬하고 뜨거운 확신에 차 있습니다. 그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위험이나 칼이겠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어떻게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 자들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단정했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구원교리에 있어서의 결론입니다. 이 장엄한 바울의 확신에 찬 기술은 성경전체에도 도도히 흐르는 하나님의 사랑의 결론입니다. 이 사랑으로 우리를 예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셨으니 누가 우리를 대적하며 누가 우리를 송사하며 누가 우리를 정죄 할 것입니까?


1 누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0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사도 바울의 이 말은 성경전체의 결론입니다.

(1)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람에서 누가 끊겠느냐? 했습니다.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사랑으로 맺어진 관계입니다. 이 사랑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바치는 사랑은 불확실합니다. 우리의 사랑은 희생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사랑의 모든 근원이 오직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사랑이란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사랑,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의미해 주고 있습니다. “사랑은 여기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 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요일4:10).

(2) 이 사랑은 이미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부터 가지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를 예정하셨다는 말씀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이미 창세 전부터 가지고 계셨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 무슨 악이나 선을 행하기 이전에 하나님은 이 사랑으로 나를 그의 백성으로 예정하셨다는 것은 너무나도 놀라운 일이며 그러므로 우리 생애에 우리에게 닥쳐오는 그 어떤 것이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막거나 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어떤 사람들은 구원의 표준을 자신이 주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에 두고 있기 때문에 그 구원이 불확실하며 자주 흔들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구원의 표준을 맞추어야 합니다. 이 사랑은 그 어떤 존재라 할지라도 끊을 수 없는 사랑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하나님이 나를 구원해 주신 그 구원관계에 대해 그 어떤 경우에도 요지부동합니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의 사랑을 그 누가 그 무엇으로 끊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2. 무엇이 끊겠느냐?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린 후 모든 인간적인 사랑을 끊을만한 악 조건들을 나열해 놓았습니다.

(1) 바울은 첫째로 환난이냐고 물었습니다. 사람이 환난을 만날 때 과연 그 사람의 참 인품을 알만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가기 스승이 환난을 만났을 때 모두 도망쳤습니다. 베드로도 자신이 받을지 모를 환난 앞에서 비겁해 져서 예수님을 센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는 환난을 만났을 때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진다”고 하셨습니다(마13:21). 그러나 이 환난이 혹 그리스도인들을 잠시 넘어뜨릴는지 모르지만 그리스로의 사랑에서 끊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환난 중에도 우리를 붙드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도와주시고 결코 떠나지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2) “곤고냐”고 물었습니다. 곤고란 우리의 생애 중에 질병 또는 정신적 번민, 갈등, 어려움으로 말미암은 괴로움을 뜻합니다. 사람이 이 곤고한 밤을 만났을 때 앞이 캄캄해집니다. 사람의 위로도 거절합니다. 살아 있는 목숨이 한스러울 정도의 괴로움이 그의 생애를 움켜쥐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곤고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반드시 우리를 이 곤고한 밤에서 건져내실 것이며 우리의 곤고한 생애에 들어 오셔서 우리와 함께 그것을 맛보시며 급기야 영광으로 우리를 맞이하시는 것입니다.

(3) “핍박이냐”고 물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위해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핍박에 대하여 이처럼 말씀해 주셨습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마5:11,12). 사도들은 복음을 전하다가 능욕 받은 일에 기뻐했습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했다”고 했습니다(행5:41).

(4) “기근이냐”고 물었습니다. 기근은 사람의 생명과 직결되는 무서운 재앙입니다. 아람 왕 벤하닷이 사마리아를 에워쌌을 당시, 성중 사마리아인들이 기근에 허덕일 때 아들을 삶아 먹는 일로 두 여인의 싸우는 모습이 나옵니다. 이처럼 기근은 처참한 것입니다(왕하6:28,29). 그러나 이 같은 기근일지라도 그것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보다 더 더욱 강한 것입니다.

(5) “적신이냐”고 물었습니다. 적신이란 벌거벗은 몸을 말합니다. 이 같은 표현은 모든 자신의 소유가 다 없어지고 단지 자신의 육신만 남아 있는 상태의 표현입니다. 지난날의 욥이 그러했습니다. 욥이 사단의 궤계로 인하여 모든 것을 다 상실하고 오직 그의 몸만 남았을 때 그는 이처럼 기도했습니다.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은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고 했습니다(욥 1:21). 사업에 실패하고, 또 여러 가지 재앙을 만나 비록 우리의 처지가 적신이 되었다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6) “위험이냐 칼이냐”고 물었습니다. 위험이란 공포나 협박, 칼이란 순교를 의미합니다. 바울은 때마다 위험을 무릅썼다고 했습니다(고전15:30). 믿음의 선진들은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려 하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히11:35). 이런 것들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는 것입니다.


3. 넉넉히 이기는 승리

바울은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바울의 자신에 찬 확신입니다. 성경이 증거해 주는 바요, 자신이 체험한 바에서 나온 확신입니다. 바울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는 존재로 몇 가지를 예로 들었습니다. 사망이란 인생이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으로 이 권세를 가진 자는 사단입니다. 생명이란 우리가 소유한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귀한 선물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까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에 비교할 바가 아닌 것입니다. 천시들이란 하나님이 부리시는 영입니다. 그들까지라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결 론 : 바울은 이곳에서 하나님을 제외한 모든 권세 있는 자나 피조물을 전부 예로 들었습니다. 그들이 결코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약하고 넘어지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붙들어 주심으로 우리는 결과적으로 이기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9장

◆ 밤중소리 01-13 | VIEW : 573


≈ 71 ≈ 바울의 큰 근심과 고통

(본문 : 로마서 9 : 1 - 5)

약속의 자녀 약속의 말씀

1-2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4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5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1)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서 론 : 바울은 아직까지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란 이신득의(以信得義)의 기독교 대 교리를 갈파했습니다. 이 교리는 또한 8장에서 내주 하시는 성령의 역사와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그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를 정죄 할 다른 아무런 법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의 생애에서 체험되고 맛보는 모든 일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루게 됩니다. 그뿐 아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느냐고 했습니다. 그의 기쁨과 감격은 하늘에 뛰어 오를 듯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바울에게도 근심과 고통이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 한다”고 했습니다.


1. 바울의 근심과 마음의 고통

바울은 1장에서 8장까지의 논술에 그의 시선과 그의 마음을 우주적으로 넓혔었습니다.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하고 놀라우신 구원의 역사에 모든 초점을 맞추어 율법과 유대인위에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하나님의 법칙”을 증거 해 왔습니다. 그러나 9장에 와서 바울은 갑자기 그의 마음에 있는 괴로움을 털어놓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 동족 유대인에게로 그의 시선을 돌린 것입니다. 이 같은 하나님의 크신 구원의 은총이 주어졌는데도 불구하고 왜 유대인들에게는 그 혜택이 미치지 못하고 있는가에 대하여 바울은 심히 안타까울 뿐 아니라 그에게 있어서 큰 근심이 되고 마음에 그치지 아니하는 고통이 되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1) 이것은 바울의 자기 동족에 대한 사람의 표현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에는 본능적인 사랑이 있습니다. 자녀들에 대한 사랑, 부모에 대한 사랑, 친구에 대한 사랑, 그리고 동족에 대한 사랑 등입니다. 후자의 경우, 어떤 경우에는 친구나 가족에 우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우주적인 사랑을 깨달았다고 할지라도 그리고 그 하나님의 구원의 보편적인 진리를 깨달았다고 할지라도 바울의 마음속에는 자기 민족에 대한 사랑이 작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 유대인들이 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서 빠지게 되는가에 대하여 그는 안타까웠고 동족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견딜 수 없었습니다.

(2) 바울은 이방인들까지 참여하게 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왔고 선민으로 인정되어온 유대인들이 누락된 사실에 대하여 그는 시기하는 마음이 불일듯 일어난 것입니다. 물론 그의 사도적 직분을 잊어서가 아닙니다. 그도 유대인으로 태어난 유대인이란 동족의 혈연적인 관계에서 그의 마음은 아팠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처럼 괴로워하는 바울의 심정은 그들이 정말로 모두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참여하게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심정으로 괴로워했습니다.


2. 저주를 받아 끊어질지라도 원한 바울의 심정

바울은 자신의 이 같은 고통이 진실하다는 사실을 심도 있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양심은 성령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의 진실성을 이 같은 표현으로 나타냄으로 자기가 유대인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가에 대하여 자기 심정을 애써 나타냈습니다. 자신을 오해하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자신의 진심을 나타내기 위함이었습니다.

(1) 바울이 말하고 있는 바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란 말은 그들의 구원을 얻는 일이라면 이란 뜻입니다. 바울은 이처럼 자기 동족인 유대인의 구원을 얻는 일이라면 자신이 차라리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 같은 일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바울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롬8:38,39). 바울이 이렇게 말한 것은 다만 그의 거짓이 없는 진실과 그가 참으로 원하는 간절함의 마음의 표현인 것입니다.

바울은 이 근심과 마음의 고통 때문에 자신을 이방인의 사도라 지칭하면서도 유대인들을 상대로 복음을 전하였고 동족의 구원을 위한 바울의 눈물어린 기도로 그는 최종적으로 남은 자를 구원하시는 유대인의 궁극적인 구원의 계시를 받으므로 유대인들에게 소망을 줄 수 있었습니다(롬11:25-27). 바울의 이 번민은 베냐민으로 말미암은 유다에게서도, 이스라엘 백성들로 인한 모세의 기도에도, 압살롬의 죽음으로 인한 다윗의 눈물에서도 찾아 볼 수 있는 것입니다(창44:33. 출32:32, 삼하18:33).


3. 바울이 지적하는 유대인의 특권

바울은 유대인들의 불신으로 말미암은 버림받음에 대하여 심히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리고 왜 그들이 그렇게 되어야 하는가에 대하여 슬퍼하면서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특권에 대하여 몇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1)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유대인들을 가리켜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바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란 뜻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은 그의 혈통이 뚜렷합니다. 한 조상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번성한 민족입니다. 그리고 그 아브라함은 하나님에 의하여 특별한 언약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태어난 유대인의 자존심과 명예는 대단한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은 메시야의 언약이 있었으며 몇 가지의 축복이 있습니다.

(2) 저희는 양자 됨의 축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구약에서는 유대인들에 대하여 특별한 신분을 부여해 주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고 하셨습니다(출4:22).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라”고 하셨습니다(출19:5). ‘내 아들’이라고 부르셨습니다(호11:1).

(3) 그들에게는 영광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 영광이란 그들의 신분적인 영광과 약속으로 말미암은 영광입니다. 이 같은 영광은 일직이 아무 민족에게도 주신 일이 없었으며 오직 유대인들에게 뿐이었습니다.

(4) 그들에게는 언약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은 이 세상에서 이스라엘과의 언약이 있었을 뿐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다윗, 그리고 그 수많은 선지자들로 말씀하신 언약은 모두 이스라엘에게 유효한 것들이며 그들은 마땅히 그 언약을 믿고 그 언약을 따라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했습니다.

(5) 그들에게는 또 예배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예배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하나님께 대한 경배를 말합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린 민족이란 오직 이스라엘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만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는 예배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6) 그들에게는 약속들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주시는 약속은 엄청나게 많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약속을 스스로 폐기해 버렸습니다.

(7)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 나셨다고 했습니다. 유대인의 조상들은 어떤 존재입니까? 아브라함이 그들의 첫 조상이요 이삭과 야곱이 그들의 조상들입니다. 이들은 모두 위대한 족장들로 하나님의 언약을 받았고 그 언약에 의하여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았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까지도 육신적으로 보면 저들과 함께 유대인으로 나셨습니다. 이 예수님이야 말로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결 론 : 이 같은 경로로 보건대 유대인들이야말로 이 세계 인류 중 가장 복된 민족이요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거나 구원의 은총에서 제외될 리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서 떨어져 나간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바울은 안타까워했고 큰 근심과 마음의 고통으로 괴로워했습니다.


≈ 72 ≈ 약속의 자녀

(본문 : 로마서 9 : 6 - 8)

6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7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ㄱ)오직

창 21:12

12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8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서 론 : 바울이 논증한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많은 특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보면 이스라엘의 선택과 우위성에 대하여 의의를 제기할 수가 없을 정도로 분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에서 제외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일에 대하여 가슴이 아픈 나머지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는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고 토로했습니다. 이처럼 말한 바울은 다른 오해를 불러일으킬 위험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이 아니냐”는 의문의 제기입니다. 이스라엘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은 폐하여졌고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목적은 좌절된 것이 아니냐? 바울은 여기서 이스라엘과 아브라함과 이삭의 관계를 파헤쳐 하나님의 오묘하신 구원의 섭리, 곧 하나님의 예정과 유기의 역사에 대하여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1. 폐하여지지 아니한 하나님의 말씀

4,5절에서 바울이 증거한 이스라엘의 특권이 그들의 불 신앙으로 상실되어 버렸다해도 그 이유로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이 아니라고 바울은 주장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이 참으로 선택한 이스라엘이 누구인가? 하나님이 그들의 구원을 약속한 하나님의 백성이 누구인가에 대하여 성경적으로 논증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1)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씨가 이스라엘을 이루었습니다. 그들은 곧 유대인들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선민으로 자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같은 유대인들의 생각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바울은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이스라엘의 조상으로 선택하신 이유는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의 자녀를 얻기 위하심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육신으로 태어난 아브라함의 자손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자손인 것으로 생각해 왔습니다. 아브라함의 육적 자손이 무익하다는 사실에 대하여 세례 요한은 이처럼 증거 했습니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고 말했습니다(마3:8,9).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향하여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님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어늘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 도다”고 나무라셨습니다(요8:39,40).

(2)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깊은 지식이 없었습니다. 구약에 언급된 말씀은 영적인 깊은 뜻이 드러날 때 비로소 그 참 모습을 들어내 놓는 것입니다. 구약에 기록된 말씀의 영적인 뜻이 신약에 와서 새로운 계시로 그 모습이 완전히 드러났습니다. 이스라엘은 아직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얼굴에 수건을 쓴 채 얽는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 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고 했습니다(고후3:14-16).

그리스도를 배격한 유대인들은 그들의 마음이 회개치 못한 완고한 마음 때문에 구약을 읽을 때에 수건을 쓴 채 읽기 때문에 구약성경에 있는 말씀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주께로 돌아서면 그 수건이 벗겨져 그 뜻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호세아는 완고하여 회개 할 줄 모르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내 백성이 지식이 없음으로 망하는 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호4:6).


2. 씨로 여기심을 받는 약속의 자녀

바울은 이곳에서 육신의 자녀와 약속의 자녀란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을 아브라함의 씨에게 적용시켰습니다.

(1)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자라야 아브라함의 씨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이삭에게서 난 자라야 네 씨라 청할 것임이니라”고 하신 말씀에 대한 해석입니다{창21:12). 이 말씀을 하실 때 아브라함에게는 사라의 몸종인 하갈에게서 태어난 이스마엘이란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아들은 하나님의 약속과는 전혀 무관한 아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라에게서 태어날 이삭이란 아들만을 아브라함의 씨로 언약하셨던 것입니다(창17:19).

(2) 그러면 이삭으로부터 난 자란 누구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고 하신 말씀은 이삭으로부터 태어난 육적 이스라엘을 가리킴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당시나 지금이나 모든 이스라엘은 다 바로 이삭의 씨로부터 태어난 혈통적 유대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곧 약속의 자녀란 영적 의미를 나타내고 있는 말입니다. 약속의 자녀란 영적 의미는 바로 하나님의 약속의 백성을 말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하여 예정된 참 이스라엘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오묘하신 구원섭리를 간략하게 이처럼 말할 수 있습니다. 곧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그 부르심에는 두 가지 뜻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는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야의 조상으로 그를 부르셨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진 자들로 아브라함의 약속의 자녀로 삼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이삭으로 약속의 자녀로 삼으신 것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사람만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약속의 씨로 여기심을 받는다는 사실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바울은 이에 대하여 갈라디아서에서 이렇게 증거 해 주고 있습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 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했습니다(갈3:28,29). 이 같은 일은 신약에 와서 새삼스럽게 나타난 일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택하실 때부터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이 그러하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다만 그같은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를 깨닫지 못했을 뿐입니다.

(3) 이스라엘에게는 물론 바울이 지적한대로 이방인보다 우월한 특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같은 그들의 특권이 결코 그들이 모두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란 보증은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나타난 율법으로 인하여 교만했기 때문에 그들의 눈이 소경이 되어 참 지식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이 같은 놀라운 특권 위에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졌더라면 그들이야말로 참 아브라함의 약속의 씨로 여기심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 스스로 그같은 영광스러운 일을 걷어차 버렸습니다. 그들이 이처럼 믿음에서 떨어져 나갔다고 할지라도 바울의 증거처럼 결코 하나님의 말씀이 폐해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욱 견고해진 것입니다.

결 론 : 이스라엘은 분명히 모든 사람들보다 더욱 우월하고 아름다운 특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이 같은 특권의 뜻을 잘 이해하고 선용했었다면 그들이 결코 버림 바 되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로서의 축복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믿지 아니함으로 버림받았고 이방인인 우리는 믿음으로 약속의 반열에 들어갔습니다. 이런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폐한 것이 아니라 더욱 굳게 세워진 것입니다.


≈ 73 ≈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

(본문 : 로마서 9 : 9 - 13)

9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니 

ㄴ)명년 이 때에

 창 18:10

10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심이라

10 그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2 ㄷ)리브가에게 이르시되

 창 25:23

23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13 기록된 바 

ㄹ)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말 1:2, 3

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3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폐하게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이리들에게 넘겼느니라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서 론 : 지난 시간에 우리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거역함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고 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폐해진 이유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바울의 논증을 통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육신적인 씨를 통하여 그들에게 아브라함의 축복을 약속해준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는데 이 말씀은 하나님이 육신의 자녀를 가리킨 것이 아니라 약속의 자녀를 말씀하신 것임을 밝힌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이삭이 약속의 씨로 약속 받은 일과 야곱과 에서의 경우를 예로 들어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의 교리적인 문제를 깊숙이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1. 이삭의 경우

이삭이 아브라함의 아들이기 때문에 그가 약속의 자녀가 된 것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에 의하여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자녀이기 때문에 씨로 여김을 받았다는 사실을 증거 해 주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오직 이삭을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아들들이 많았습니다. 이삭이 태어나기 이전에 이미 이스마엘이 있었고 사라가 죽은 후 후처인 그두라로부터 낳은 아들들이 여섯이나 되었습니다(창25:1,2). 이들은 혈연적으로는 의당히 아브라함의 씨임이 분명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아브라함의 씨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첩의 아들이거나 서자였던 관계 때문이 아닙니다. 다만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없었기 때문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을 약속하신 이유는 아브라함의 아들 중에는 오직 이삭만이 하나님의 생명 책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의 씨를 이미 창세 전에 생명 책에 기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이처럼 생명 책에 기록하셨을 때 첫째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라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주시기 때문에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셔서 약속의 자녀로 그의 씨로 여기신 것입니다.

(2) 하나님은 아브라함이나 사라가 인위적으로 임신이 불가능했을 때 그의 약속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9절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라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어떻게 생각했는가?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90세니 어찌 생산하리요”(창17:17). 사라는 어떻게 생각한 것입니까?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라고 말했습니다(창18:12).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는 인간의 방법으로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실을 아브라함에게 보여주시기 위해 그들의 몸이 노쇠하고 경수가 그치고 아브라함이 죽은 자처럼 되었을 때 이삭을 주심으로 이삭이야말로 하나님의 약속의 씨인 것을 믿게 하셨던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백성들도 이삭처럼 약속의 씨로 태어나는 사람들입니다. 이삭이 아브라함의 씨로 태어났기 때문에 약속의 자녀가 된 것이 아닙니다. 이삭이 아브라함의 씨로 인정을 받는 것은 그는 하나님의 약속에 의하여 태어난 약속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육신적인 자손들이 아닙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약속의 씨로 태어난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아브라함의 약속의 자녀들입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 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갈3:28,29).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은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이삭처럼 약속을 따라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2. 야곱의 경우

하나님의 이 같은 약속의 씨는 이삭과 이스마엘의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야곱과 에서의 경우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1) 야곱과 에서는 이삭의 쌍둥이 아들들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약속의 씨인 이삭의 경우에도 그 쌍둥이 아들들 가운데 하나는 약속의 씨요 하나는 버림받은 아들이었음이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아브라함의 혈연적인 자손들이 약속의 자녀들이라면 이삭의 두 아들의 경우는 마땅히 야곱보다 에서가 그 순위가 더 앞설 것이며 두 아들 모두가 아브라함의 약속의 씨로 인정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그렇지 아니했습니다. 야곱은 택함 받은 약속의 씨로, 에서는 버림받은 불택자로 태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두 아들이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에 이미 그들의 운명에 대하여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고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2) 야곱과 에서의 경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택하심은 인간의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기 이전에 결정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의 선이나 악으로 표준삼은 것도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약속에 의하여 이루어진다고 하는 사실을 밝혀놓은 것입니다. 이같이 행하시는 모든 근거는 무엇인가?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셨다고 했습니다. 이 같은 역사는 하나님의 주권 적인 역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

우리는 여기서 심각한 교리적인 문제에 부딪치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라는 문제입니다. 이삭은 분명히 선택받은 약속의 씨이지만 이스마엘은 분명히 버림받은 유기자인 것입니다. 야곱은 선택받은 자이지만 에서는 버림받은 불택자인 것입니다.

(1) 선택자란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선택을 받은 자란, 하나님의 영원하신 예정 가운데서 어떤 특정한 사람들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기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특별한 은총을 받게 하신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들을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라고 하셨고 이들 중에 단 한 명도 잃은바 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2) 유기자란 이 같은 영광스러운 자리에서 떨어져 버림받을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이런 특별한 하나님의 작정에 들어오지 못한 사람들로 그들은 다만 그들의 죄로 인하여 영원히 버림받을 수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결 론 :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의문이 일어납니다. 왜 하나님이 인간의 타락을 허락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우리는 성경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오묘하신 비밀에 속한 일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우리는 장차 하나님 나라에 올라가 그 참 뜻을 알게 될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지금 감사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타락은 불가피했다는 것과 그 타락이 오히려 우리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크나큰 복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그로 인하여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있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를 가지게 되었고 영생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왜 하나님이 어떤 인간을 타락 상태에 그대로 두기로 작정하셨는가하는 문제입니다. 이것도 우리는 모릅니다. 다만 우리가 감사할 것은 이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영원히 돌릴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 74 ≈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

(본문 : 로마서 9 : 13 - 18)

13 기록된 바 

ㄹ)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말 1:2, 3

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3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폐하게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이리들에게 넘겼느니라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1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15 모세에게 이르시되 

ㅁ)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출 33:19

19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17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ㅂ)내가 이 일을 위하여 

출9:16

16 내가 너를 세웠음은 

나의 능력을 네게 보이고 

내 이름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려 하였음이니라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1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서 론 : 이삭과 야곱의 선택에 관한 바울의 증거는 유대인들에게 몇 가지 의문을 던져 주게 되었습니다. 그 하나가 인간의 구원이 전혀 하나님의 예정된 선택에 의한 것이라면 아브라함의 육적 자손인 자신들의 유익이 무엇이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선택이 인간의 선이나 악에 기준을 둔 것이 아니라면 결국 이같이 행하시는 하나님이야말로 불의 하신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고 말하면서 그 이유로 출애굽에 나타난 바로의 경우를 예로 들어 증거하고 있습니다.


1.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에 대한 문제는 어느 시대에나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었었습니다. 지금도 이 문제 때문에 신학자들간의 열띤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같은 진리를 바탕으로 성경을 교리적으로 정리한 것이 칼빈의 기독교 강요라고 하는 책이며 이 책에서 주장되고 있는 성경의 핵심적인 교리가 오늘날 전 세계 장로교회의 교리가 되고 있습니다. 이 교리가 곧 ‘칼빈주의’라고 통칭되고 있으며 이에 반하는 교리로써 ‘알미니안주의’라고 하는 인간자유 의지의 구원론이 등장한 것입니다.

(1)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하여 확고한 입장을 취했습니다.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릴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인간을 구원하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전권 적인 주권이 작용한다고 해서 그리고 이 같은 하나님의 주권이 인간의 이해와 의지를 무시한 것이라 하여 하나님께 불의가 있다고 생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견해는 하나님께 불의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바울처럼 그렇게 주장한다면 결국 하나님을 불의 하신 분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곳에서 전개하는 그의 논증에서 인간의 선택과 유기와 같은 하나님의 예정이나 선택 문제는 그 권한이 우리 인간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전혀 하나님께만 속한 것임을 증거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출애굽기 33:19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다”는 말씀을 인용했습니다.

(2) 바울은 구원받을 자의 선택은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원하는 자란 말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의미해 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는 뜻에서 말한 것은 아닙니다. 인간 중에는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6:44). 인간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자유의지는 불가능합니다. 그 이유는 이미 인간은 죄로 하나님과 원수가 된 사이이며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가 완전히 두절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에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라고 한 것은 인간의 노력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도덕적인 선이나 죄를 벗어버리기 위한 고행이나 생명을 얻기 위한 선행을 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이 같은 일은 자기가 행한 자신의 의로 구원을 얻으려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와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인간이 의로워질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지 인간의 달음박질하는 애씀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유대인들이 얻기를 노력한 의에 대하여 이처럼 말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고 한 것입니다(롬10:3).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바른 지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다면 하나님의 예정이나 선택이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에 속한 것임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2. 바로에게 보이신 경우

바울은 애굽 왕 바로의 경우를 예로 들어 인간구원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에 대하여 논증했습니다. 그는 17철에서 출9:16에 나타난 말씀을 인용하였습니다.

(1) 바로란 인물은 우연히 애굽에 태어나 자기 자신의 능력으로 왕의 지위에 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란 인물은 이미 창세 전부터 하나님의 선택에 있어서 유기 된 자로, 이스라엘의 구원과 하나님의 권능을 만방에 전파하게 하시려는 목적에서 애굽 왕의 자리에 서게 되었다고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같은 일에는 이론이 제기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확실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이 일에 대하여 하나님과 쟁론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같은 쟁론이 인간에게 아무런 유익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2) 바로를 이 일을 위하여 세웠다고 하신 말씀은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시어 애굽 땅에 재앙을 내리신 사건을 가리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대로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는 이스라엘을 이끌어 내시어 가나안 땅으로 들이시기 위하여 모세를 바로 왕에게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세에게 바로 왕 앞에서 이적을 행할 하나님의 권능을 주셨습니다.

모세는 이 권능으로 바로 앞에서 열 가지 재앙을 내렸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단 한가지 재앙만으로도 바로 왕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보내시게 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아니하셨습니다. 열 가지 재앙을 다 내리시기까지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심으로 그 재앙을 다 받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 같은 일은 바로 왕에게 너무나 무자비한 일일 수 있습니다. 애굽 사람들에게 잔인한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이 계획하신 섭리를 위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 섭리란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하심”에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이루신 것입니다.

(3) 그때 나타내신 하나님의 능력은 그 이후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증거 하는 역사적 사건이 되었으며 지금도 우리는 그 당시의 사건을 통해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하나님의 능력이 바로나 애굽 사람들에게 아무런 효과를 줄 수 없었던 것처럼 그 이후의 세대에 가서 이런 하나님의 능력을 친히 목격하고 그 능력으로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을 받은 이스라엘까지라도 그들의 마음이 강퍅함으로 광야에서 죽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 일이 또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에게도 해당되어 그들의 마음의 완악함으로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여 스스로 멸망의 길을 택했던 것입니다.

(4) 바울은 결론적으로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바로의 강퍅함이 자신의 자유의지와 결단에 의한 것으로 자기 자신은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하셨느냐? 그것은 하나님께 속한 비밀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만이 가지고 계시는 고유한 주권적 권능이신 것입니다.

결 론 : 우리는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권한을 우리 인간들은 침해할 수 없고 또 침해당하지도 아니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같은 죄인들을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정하시되 하늘에 예비된 모든 신령한 축복을 주시기 위해 선택하셨다고 하는 이 한가지 사실만 가지고서도 한 평생 감격하고, 한 평생 감사하고, 한 평생 그 은혜를 찬미해도 부족하다는 이 사실을 명심하고 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75 ≈ 선택과 유기에 대한 권한

(본문 : 로마서 9 : 19 - 29)

하나님의 진노와 긍휼

19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20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22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23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24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25 호세아의 글에도 이르기를 

ㅅ)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호 2:23

23 내가 나를 위하여 그를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그들은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하시니라

내 백성이라, 

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26 ㅇ)너희는 내 백성이

 호 1:10

10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 같이 되어서 

헤아릴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을 것이며 

전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할 것이라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27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ㅈ)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사 10:22이하

22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파멸이 작정되었음이라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니

28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고 

속히 시행하시리라 하셨느니라

29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ㅌ)만일 만군의 주께서 

사 1:9

9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생존자를 

조금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으리로다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서 론 : 사도 바울은 이곳에서 예상된 반론에 대하여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강력하게 변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반론은 여러 가지로 예상되기도 하며 또 많은 사람들이 반격해 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같은 일에 대한 변명이 그들에게 순리적으로 받아 드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하나님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인간의 입장에서 인간이 생각하고 있는 타당성에 기초를 두고 자기들에게 비이성적으로 여겨지는 하나님의 섭리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런 자들에게 결론적으로 한 말은 이 모든 일은 그 일을 당하는 인물과는 아무런 상판이 없는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이란 사실을 밝혀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언적 결론입니다.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에 관한 논쟁에는 이 이상 더 명쾌한 대답과 더 확실한 결론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1. 누가 그 뜻을 대적하리요?

바울은 18절에서 선택과 유기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에 대하여 언급한바 있었습니다.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일에 대하여 도전하는 무리들이 많이 있습니다. 세상엔 말할 것도 없고 교회 안에도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내세우는 이론은 많은 사람들에게 굉장한 호소력이 있습니다. 아직까지 이런 그들의 주장은 성경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진리를 매도하는 무기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1) 그 첫째 반론이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 하실 수 있으시냐”는 것입니다. 이 말은 만약 하나님께서 그의 자의대로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강퍅케 하실 자를 강퍅케 하신다면 하나님이 그의 소견대로 그렇게 하셨을진대, 그리고 만약 강퍅케 한자의 경우라도 그 사람과는 상관이 없이 하나님이 그의 소견대로 그렇게 하셨다면, 그런 하나님께서 어찌 자신이 강퍅케 하신 그 사람을 허물 하실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토록 만들어 놓으시고 또 하나님이 그 사람을 허물 하신다면 그 일이 어찌 합리적이겠느냐는 것입니다.

(2) 그 두 번째 반론이 “누가 이런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 권자이십니다. 아무도 하나님이 정하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정하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 수 있는 존재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나에 대해 이미 그처럼 예정하셨다면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그 예정을 대적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나는 다만 피동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강퍅해 질 수밖에 없을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 같은 이론은 많은 사람들에게 굉장한 호소력이 있습니다. 아직까지 이런 주장은 성경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진리를 매도하는 무기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2. 토기장이의 권한

바울은 이 같은 반론에 대하여 다른 변론을 사용치 아니하고 하나님께 모든 주권을 돌리는 날카로운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1) 바울은 그 첫째 대답으로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하나님을 힐문하느뇨”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공격은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하는 일입니다. 바울이 이곳에서 사용한 힐문이란 말은 잘못을 꾸짖으면서 질문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그같은 질문을 할 수 있는 처지에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바울은 네가 뉘기에 ‘감히’ 란 말을 썼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주재를 알아야 합니다. 그 자신의 위치와 존재가치를 인식치 못하고 하나님께 힐문하는 일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신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그로부터 창조하심을 받은 피조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두 존재의 차이란 너무나 엄청난 것입니다. 우리는 그 어떤 경우에도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향하여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고 물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렇게 하시는 일은 나를 지으신 창조주의 임의적인 권한인 것입니다.

(2) 바울은 그 두 번째 대답으로 토기장이의 경우를 들었습니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고 했습니다. 토기장이의 손에 한 줌의 진흙이 쥐어져 있습니다. 그 토기장이는 그 한줌의 흙 중에서 얼마인가를 가지고 귀히 쓸 아름다운 그릇을 만들었습니다. 그 토기장이는 그 남은 흙으로 또 하나의 그릇을 만들 것을 생각했습니다. 이제는 이전 것과는 전혀 상반된 천하고 값싼 그릇을 만들어 냈습니다. 토기장이는 그 그릇을 손에 들고 만족했습니다. 이런 경우 그러한 그릇이 이 토기장이에게 왜 당신은 둘 다 귀한 그릇을 만들지 아니했소? 하고 항의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면 그 토기장이의 답변은 그것은 내 권한에 속한 것이고 그렇게 한 것은 내 뜻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바울이 여기서 하나님을 토기장이로 비유한 것은 깊은 뜻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은 사실상 흙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3. 진노의 그릇과 긍휼의 그릇

바울은 토기장이의 경우를 예로 들은 후 천히 쓸 그릇과 귀히 그릇을 진노의 그릇과 긍휼의 그릇으로 연결시켜 논증했습니다.

(1) 진노의 그릇에 대하여 오래 참으심의 뜻이,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려 하심에 있다고 했습니다. 이 경우는 애굽의 바로 왕의 경우를 말합니다. 바로는 분명히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입니다. 그러나 그 진노의 심판을 속히 아니하시고 오래 참으심으로 그에게 하나님의 진노를 보이시고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 알게 하셨습니다. 이 같은 일은 바로에게는 하나의 관용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회개의 기회가 될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일은 하나님의 권한에 속한 일입니다.

(2)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신다해도 무슨 말을 하겠느냐고 했습니다.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긍휼의 그릇이란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그릇에 대하여 영광 받기로 예비하셨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선택을 받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또한 그의 영광에 동참하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택하신 백성들에게 그들이 받을 무한한 영광의 부요함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 같은 일은 토기장이의 경우처럼 하나님의 단독적인 권한에 속한 일입니다. 우리는 그런 일에 아무 말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실인즉 이 문제는 각 사람들에게 그렇게 심각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멸하기로 준비된 그릇은 끝까지 하나님을 대적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며 관용을 베푸시나 그들의 결국은 하나님의 진노와 능력가운데서 멸망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긍휼의 그릇은 하나님께서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시기 때문에 그의 생애 중에 그의 선택하심에 감사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결 론 : 이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바울은 우리라고 지칭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이 말씀을 믿는 우리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우리란 범위는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예정을 입어 선택을 받아 부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유대인이라고 하나님의 선택에 어떤 특권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인류의 종말에도 모든 유대인들이 다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남은 자들만 구원을 받게 됩니다. 남은 자란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예정을 입어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 됨을 감사하면서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 수 있기를 바랍니다.


≈ 76 ≈ 행위에 의지한 이스라엘

(본문 : 로마서 9 : 30 - 33)

믿음에서 난 의

30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31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32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

33 기록된 바 

ㅋ)보라 내가 걸림돌과

 사 28:16

16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촛돌이라 

그것을 믿는 이는 

다급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서 론 : 바울이 로마서에서 중심적으로 강조하는 바는 하나님의 구원이 이스라엘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만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란 사실의 논증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참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육적 자손들인 이스라엘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약속의 씨인 영적 이스라엘이 참 이스라엘임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만약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복음은 헛것이 되어 버리며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고난은 아무런 의미도 부여할 수 가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의 고민은 자기 동족 때문에 극치에 달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울의 동족인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육적인 자손들이요 하나님이 자기들에게 주신 의의 표준인 율법으로 말미암아 구원에서 떨어져 나가기 때문입니다.


1. 이방인들이 얻은 의

바울은 30절에서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라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하나님의 의를 얻는 일에 아무런 차별이 없다는 사실을 누누이 증거하고 있으며 이런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은 하나님의 주권적 권능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이 같은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감히 힐문할 수 없다고 결론짓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곳에서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에 있어서 그 결론을 믿음과 행위에 결부시키고 있습니다.

(1) 의를 쫓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다고 했습니다. 의를 쫓지 아니했다는 말은 율법적인 생활을 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이방인들에게는 율법이 없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주신 법입니다. 이 율법은 이방인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이방인들은 율법의 의를 전혀 알지 못했고 율법으로 의를 얻으려는 생각은 전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율법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었던 이스라엘에게 과연 율법의 의가 주어졌는가? 하면 그런 것이 아닙니다.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롬2:12). 이 말씀에 따르면 이방인은 율법 없이 망하게 되어 있고 이스라엘은 율법 때문에 망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말씀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롬3:20).

(2) 의를 쫓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은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원래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율법이나 양심이나 그 무엇으로도 의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주신 일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말씀은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하신 것인데 이 말씀은 율법으로 의를 얻을 수 있다거나 율법으로 의를 얻으라는 뜻이 아니십니다(롬10:5). 이 율법의 의는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하나의 그림자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그 율법의 의를 온전히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므로 그리스도가 이루신 율법의 의, 그 보다 더 온전한 그리스도의 의를 선물로 받아 우리가 의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복음을 받아 드림으로 쉽사리 이 같은 하나님의 의를 얻게 된 것입니다.

(3)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도 이 믿음으로 의를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의롭다하심을 받은 첫 번째 사람으로 성경에 등장합니다. 그러면 그의 의는 무엇으로 얻은 것입니까? 아직 그때는 율법도 없었습니다. 아브라함도 행위로서는 의를 얻을 수 없었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롬4:2,3). 이것은 아브라함의 씨가 혈통이나 율법의 행위로서가 아니라 믿음의 후사 곧 언약의 씨라는 사실을 의미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고 했습니다(롬4:23,24). 그러므로 율법이 없는 이방인이지만 그들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를 얻은 일은 하나님의 뜻이며 성경적입니다.


2. 이스라엘이 의를 얻지 못한 이유

바울은 이방인이 의를 얻고 이스라엘이 의를 얻지 못한 일에 대하여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고 했습니다.

(I) 그들이 실족한 첫째 원인이 믿음에 의지하지 아니한데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의의 소재가 율법에만 있다고 확신한 나머지 믿음을 배척했습니다. 율법은 행위가 따르는 하나님의 거룩한 법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다만 그리스도를 믿는 이 한가지 일에 있습니다. 이것은 결코 행위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처럼 율법의 관습에 젖어온 이스라엘은 행위가 개입되지 않고 다만 믿음으로 의를 얻는 일에 찬성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판단에 ‘대단히 잘못된 이단’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을 소송했던 일단의 유대인들은 벨렉스 앞에서 바울을 지칭하여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고 말했습니다(행24:5).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긴 했지만 아브라함의 믿음이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사는 육신을 따라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따라 되는 것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했습니다(갈3:29). 이스라엘은 율법에 그들의 얼굴이 가려져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2) 유대인들은 믿음이 아니라 행위에 의지했다고 했습니다. 율법의 의는 행위로 나타난 의여야 함으로 그들은 의를 얻으려고 그들의 행위에 의지한 것입니다. 그러면 행위에 의지한 그들의 결과는 어떤 것입니까? 그들의 행위는 하나님의 의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롬5:12).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모두 한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를 유산으로 받은 죄인들입니다. 죄인들은 절대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킴으로 의를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의지하여 의를 얻으려고 했고 끝까지 복음을 배척했기 때문에 의에서 떨어져 버리게 된 것입니다.

(3) 그들은 결국 부딪칠 돌에 부딪혔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를 믿는 자들에게는 구원의 반석이 되십니다. 영생을 주십니다. 이 영생이 영원히 보장됩니다. 그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아니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원한 의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거치는 반석이 되십니다. 그들에게는 오직 심판이 있을 뿐입니다. 그것도 그들이 의지하고 의를 얻으려고 표본으로 삼았던 그 율법이 그들의 심판의 공정한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애석하게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의 의를 버리고 자신들의 행위를 의지하여 힘써 의를 얻으려고 했기 때문에 부딪칠 돌에 부딪치고만 것입니다.


결 론 : 율법은 결코 이스라엘에게 의를 보장해 주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율법에서 오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로 의의 기준을 삼으시고 그 아들에 대한 믿음으로 의를 주시기로 애초부터 섭리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이 하나님의 지식을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의 버리심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 믿음을 견고히 잡아 우리의 의를 확실히 하여 구원의 증거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로마서 10장

◆ 밤중소리 01-14 | VIEW : 755


≈ 77 ≈ 율법의 마침이 되신 예수

(본문 : 로마서 10 : 1 - 4)

1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2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서 론 : 사도 바울은 스스로 자신을 이방인의 사도로 여겼습니다.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라”고 했습니다(롬11:13). 그럼에도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원에 많은 관심을 가졌으며 이스라엘을 위하여 하나님께 늘 기도하는 생활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바울의 한 혈육이요 형제였습니다. 그들은 다 함께 하나님의 언약이 있는 백성이었고 아브라함을 한 조상으로 가졌으며 예수도 그들과 한 혈통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고 그와 반면에 이방인들이 오히려 구원을 얻는 일에 대하여 바울의 마음이 편할 순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불신의 자리에서 하루 속히 깨어나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바라고 있었지만 계시를 통하여 하나님의 비밀을 알고 있는 바울로서는 심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바울은 오늘 말씀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버림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천명하고 율법과 그리스도와의 새로운 관계를 설명하므로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를 밝히고 있습니다.


1. 이스라엘이 구원에서 떨어진 이유

바울은 이스라엘이 구원에서 떨어진 일에 대하여 분명한 이유를 밝혀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한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1)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열심은 있었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지나칠 정도로 하나님께 열심이 득심 했습니다. 실인즉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은 일도 하나님께 대한 열심에서였습니다. 예수님이 그의 최종적인 심문에서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증거 했을 때 주님을 심문한 대제사장의 말에서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에 의하여 구금되었을 때 천부장으로부터 언권을 얻어 자신을 변명하면서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하는 자라”고 했습니다(행22:3). 바울의 경우는 다만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이미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에 이스라엘에 대한 그의 구원의 바람과 하나님의 긍휼하심의 간구는 더욱 간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2) 그런데 그들의 이 열심이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지식의 하나님이십니다. 물론 그 하나님의 지식은 사람의 지식과는 전혀 판이한 지식입니다. 하나님의 지식은 창조주의 지식이요 영적 지식이요 사랑의 지식이요 구원의 지식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지식은 육적인 지식이요 땅의 지식이요 정욕과 탐심과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한 지식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 일정한 지식을 정하셨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이 정하신 그 지식을 따라 하나님을 섬겨야 그 섬김이 올바른 섬김이 되는 것입니다.


(3)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이 하나님을 섬기는 도리인줄로 잘못 알고 하나님을 섬겨왔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잘못된 지식으로 이 지식은 하나님의 지식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열심은 율법에서 나온 열심으로 그들은 이 율법으로 의를 얻으려고 열심을 품어 하나님을 섬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 죄인 됨을 증거하여 이 세상에 의인이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시고 인간이 율법으로는 의를 얻기는 고사하고 저주를 받을 존재임을 분명히 하시고 율법 외의 하나님의 의를 얻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습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으며”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얻을 자가 없다”는 것이 하나님의 바른 지식인 것입니다(갈3:10, 롬3:20). 그런데 이 하나님의 지식을 그들은 버리고 율법을 인간적인 지식으로 바꾸어 그 율법을 따라 열심히 하나님을 섬김으로 의를 얻고자 했던 것입니다.


(4) 이처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그들의 큰 허점은 하나님의 의를 몰랐다고 하는 사실에 있었습니다. 율법에는 물론 하나님의 의가 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의의 표준입니다. 그런데 이 율법은 인간에게 하나님의 의를 주시려고 준 것이 아니란 사실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율법에 있는 하나님의 의는 너무나 높아서 우리의 힘이 도저히 미칠 수 가 없는 것입니다. 그 율법으로는 하나님의 의에 이를 자가 한 명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애써 율법에서 의를 얻으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지식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직 자기 아들로 이 의를 이루게 하시고 그 아들을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의를 주시기로 하신 것입니다(갈2:16).


2. 율법의 마침이 되신 예수

사도 바울은 4절에서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고 했습니다. 바울의 이 말은 율법과 복음과의 관계를 잘 밝혀준 논증입니다. 바울은 이 짧은 말에서 그리스도의 의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율법의 의를 줄 수 있는가에 대하여 분명한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1) 율법의 마침이란 율법이 폐해진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는 뜻입니다. 율법은 언제까지나 존재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이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모든 사람을 죄 가운데 가두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율법은 그 사람들을 심판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율법의 마침이 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안에 있는 사람들은 율법의 제재를 받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다 이루셨을 뿐 아니라 십자가에서 그 율법이 요구하는 저주와 심판을 다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율법이 예수님께 요구할 것이 없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율법의 마침이 되신 것입니다.


(2) 이 같은 일은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한 것이라고 말씀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율법에서 이룰 수 없는 하나님의 의를 그리스도안에서 이룰 수 있도록 만드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애초부터 이런 의를 작만 하시고 이 의로서 죄인들을 구원하시기로 섭리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계획이 율법이 있은 후 에 세워진 것이 아니요 신약시대에 와서 새롭게 구상된 것도 아니며 이미 만세 전부터 세워졌든 것입니다(엡1:3-5).

그리스도께서 율법으로 말미암아 받으신 저주는 그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요 우리를 위한 속죄제물로써 그로 인하여 우리를 속량하신 것입니다(갈3:13). 하나님의 선물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로 율법도 이루어 놓으시고 우리의 죄의 속량도 이루어 놓으시므로 하나님의 의를 소유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완전히 갖추신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다”고 하셨습니다(마22:1-4). 우리의 할 일은 이 일을 이루신 예수를 믿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믿음으로 이 선물을 은혜로 주시기로 하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또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롤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고 했습니다(갈2:16).

결 론 : 하나님께 대한 바른 지식이 없으면 사람이 그 어떤 방법으로도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리고 바른 신앙생활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기 위해서도 하나님의 지식을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여 하나님의 지식 갖기에 힘쓰는 성도가 이기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 78 ≈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본문 : 로마서 10 : 5 - 8)

5 모세가 기록하되 

ㄱ)율법으로 말미암는 

레 18:5

5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6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ㄴ)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신 30:12 이하

12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이 아니요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7 혹은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8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ㄷ)말씀이 네게 가까워 

신 30:14

14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서 론 :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율법으로 말미암아 얻는 의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는 의에 대하여 그 현격한 차이점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율법으로 의를 얻으려는 그릇된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겼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거역함으로써 아무 공로 없이 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참된 의를 스스로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의의 조건은 인간적인 경험이나 증거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1.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증거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와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의 차이는 행함과 믿음에 있는 것입니다.

(1)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율법을 주실 때 그것을 지키는 자가 의를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너희는 나의 법도를 쫓으며 나의 규례를 지켜 그대로 행하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너희는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고 하셨습니다(레18:4,5). 이스라엘의 오해는 바로 여기서 나온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율법을 주셨기 때문에 자기들은 그 율법을 지킬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율법을 지키므로 의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하나님의 자식이 아닙니다. 그들의 영광스러운 조상인 아브라함까지라도 행함으로 의를 얻지 못했다고 성경에서는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롬4:1,2). 하나님께서 만일 이스라엘에게 능히 의를 얻을 수 있는 율법을 주셨다면 하나님의 의의 표준은 율법이외에 존재할 수 없으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은혜의 구원이란 있을 수 가 없는 것입니다. 만약 율법으로 의를 얻을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실 필요가 없으십니다. 그러나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하셨습니다(롬3:20).

(2) 바울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에 대하여 오직 그것이 믿음으로 얻는 것이라고 증거 했습니다. 바울은 이곳에서 아주 독특하고 묘한 방법으로 이 의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의 부활하심에 근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죽으심과 그의 부활하심은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신 것이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예수님과 같은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이 같은 사실에 그 반대자들이 이의를 제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같은 사실을 누가 어떻게 확인할 수 있다는 말이냐? 하늘에 올라가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확인할 수 있단 말이냐? 아니면 음부(무덤)에 내려가서 그의 죽으심을 확인할 수 있다는 말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런 반론은 물론 율법주의자들의 억지요 복음을 배척하는 자들의 한결같은 주장이지만 복음은 혹은 하늘에 올라가 확인하거나 혹은 음부에 내려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것임을 증거한 것입니다.

바울은 율법을 주창하는 유대인들에게 이르기를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라고 반박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하늘에 올라가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를 확인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같은 말은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말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만약 누가 그처럼 하늘에 올라가 확인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거를 삼으려고 한다면 그를 다시 이 세상에 모셔 오시게 하는 일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에게 증거 되기 위해서는 그를 모셔 내려와서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 주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이들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하여 “혹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음부란 사망 혹은 무덤을 의미하는 말인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실을 확인하려면 음부에 내려가 보아야 할 것이 아니겠느냐는 말에 바울은 그런 말을 하지 말라고 반격했습니다. 그렇게 말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려서 모든 사람에게 확인 시켜야 할 것이니 과연 그같은 일이 합당하겠느냐? 는 것입니다.


2.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그러면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 고 했습니다. 즉 복음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 고 되 묻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8절에서 이처럼 말했습니다.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는 하늘에 올라가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확인하거나 음부에 내려가 그의 죽으심을 확인하는 것으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세상 사람의 지식이나 지혜는 이성으로 이해하고 상식으로 납득할 수 있는 확인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그같은 확인으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1)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 논증을 할 때에 그는 신명기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믿음의 말씀을 증거 하려고 했습니다.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할꼬 할 것이 아니요 이것이 바다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할꼬 할 것도 아니라 오직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와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신30:11-14). 하나님의 명령을 받기 위해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에 올라갈 필요가 없으며 바다 건너편 멀리까지 찾아 갈 이유도 없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네게서 심히 가까운 곳에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모세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입에 있었고 그들의 마음에 있었습니다.

(2)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 외는 우리에게 믿음을 줄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힌 것입니다. 하늘에 올라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도, 그리고 음부에 내려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확인해도 그런 것이 믿음의 근거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자색 옷 입은 부자가 “나사로를 내 아버지 집에 보내어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라고 호소했을 때 아브라함이 그에게 이르기를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으라고 일러주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그 부자는 모세나 선지자들의 말로는 회개치 아니할지라도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할 것이라고 말했을 때 예수님은 이처럼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듣지 아니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눅16:27-31).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바울은 그 말씀이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결 론 : 바울이 전파한 믿음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분명히 어리석은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다”고 했습니다(고전1:21) 이 믿음의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으며 그 말씀으로 예수를 믿을 때 하나님의 의를 율법과는 상관없이 아무 공로 없이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 79 ≈ 구원에 이르는 믿음

(본문 : 로마서 10 : 9 - 11)

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11 성경에 이르되 

ㄹ)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28:16

16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촛돌이라 

그것을 믿는 이는 

다급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서 론 : 바울은 인간의 구원이 초인적인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 앞에 가까이 있는 말씀으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이곳에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율법으로는 의를 얻을 수 없습니다.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율법을 행함으로 의를 얻을 자가 하나도 없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하늘에 올라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확인하는 노력이 필요한 것도 아니요 음부에 내려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확인할 필요도 없다고 했습니다. 믿음은 그런 식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확인인 것이 아니라 말씀에 대한 믿음인데 그 말씀은 하늘에 있는 것도 음부에 감추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하였으니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1. 구원에 이르는 믿음

바울은 9절에서 구원에 이르는 믿음에 대한 중요한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비록 여기에 있는 이 말씀 뿐 아니라 바울의 서신 중에 나타나 있는 모든 구원 교리에 대한 진술은 주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계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받은 계시에 대하여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다”고 말하고 있습니다(고후12:7).

기독교의 진리는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일입니다. 그를 믿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사죄의 문제, 구원의 문제, 영생의 문제, 천국의 문제 등이 해결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하고 있는 그 믿음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바울은 간략하면서도 그 모든 믿음의 참 진리를 이곳에서 보여 주고 있습니다,

(1)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라고 말씀했습니다. 먼저 우리의 입으로 예수의 주되심에 대한 시인이 전제조건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중심은 그리스도에 대한 주되심의 진실한 고백에 있습니다. 이 고백이야말로 구원의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예수를 주로 시인하는 주란 말은 하나님을 뜻하는 말입니다. ‘퀴리오스’란 헬라어는 두 가지 의미에서 해석해야 합니다. 하나는 세속적 의미에서 사용되는 주란 말의 뜻입니다. 세속에서 일반화된 ‘퀴리오스’란 말은 노예와 반대위치에 있는 신분의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래서 소유자, 고용주 등을 지칭하며 아내에게 있어서 남편의 위치도 퀴리오스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이 성경에서는 하나님께 대한 지칭으로 평범하게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70인 역에 의하면 이 퀴리오스를 하나님으로 지칭하고 있습니다.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서 퀴리오스가 되시는 분은 오직 그 창조주가 되시는 하나님뿐이십니다. 그런데 이 말이 또 신약에 와서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어느 날 예수님이 바리새인들과의 성경적인 토론에서 시편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시어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고 하셨습니다(마22:45). 이 말씀은 다윗이 말한 주란 칭호를 예수님이 분명히 하나님과 결부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주되심의 증거는 비록 신약성경에서 만의 일이 아닙니다. 구약 이사야에 있는 임마누엘이란 말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한 아들의 이름에 대하여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한 말 등에서 예수의 주되심이 증거 되는 것입니다. 교회사에 나타나 있는 모든 이단을 볼 때 한가지 공통점은 예수의 주되심을 부인하는 사실입니다. 유대인들이 구원에서 제외되어 있는 일도 그들이 예수의 주되심을 인정치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2) 다음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의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는 믿음의 원인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는 말은 예수의 속죄의 죽으심과 그의 부활을 가리킨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의 죽으심과 그의 다시 살아나심을 믿으려면 그가 주되심의 사실을 믿지 아니하면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이런 믿음은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에 관한 더 깊은 지식을 가지지 아니하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그것을 깨닫지는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진리로 이끄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얻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깨달음이 있는 사람은 십자가의 도가 구원의 도리가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고전1:18).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고 또 우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고전2:12).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죄인에 대한 속죄의 죽으심이란 사실은 그의 부활로서 확인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부활에 대한 믿음은 구원에 절대적인 요소입니다.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나셨다고 하는 그의 부활에 대한 믿음은 인간의 지식이나 지혜나 상식이나 경험에서는 절대로 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믿음은 그 발생원인이나 근원이 하나님의 말씀에 있지만 그 말씀이 심겨져서 믿음을 소유하게 되는 곳은 마음입니다. 이처럼 마음에 심겨진 믿음은 그의 입으로 부인할 수 없습니다.


2. 마음의 믿음과 입의 시인

바울은 10절에서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이처럼 마음의 믿음과 입의 시인을 구분 한 것은 특별한 의미가 부여된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온전한 믿음에 대한 양면적인 설명입니다.

(1) 믿음의 지식을 간직하고 저장하는 곳은 마음입니다. 말씀의 씨가 마음의 밭에 떨어진다고 하셨습니다(마13:19). 그리스도의 의는 입으로 시인하는 것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이 구원은 그리스도의 의와 같은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의를 받는 것이 곧 우리의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의는 복음을 마음으로 믿는데 있습니다. 우리가 비록 벙어리가 되어 그 입을 통하여 말로 시인할 수 없다고 해도 그가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른 그 믿음은 그의 구원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2) 사람이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했습니다.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른 사람은 그 신앙을 입으로 반드시 시인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입으로 시인한다는 말은 세 가지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이 말이 전도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11절 이후에 전파하는 신앙이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신앙의 고백입니다.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른 사람은 그리스도를 부끄럽게 여기지 아니합니다. 누구에게나 예수 믿는 일을 고백하는 것을 큰 자랑과 기쁨으로 여깁니다. 그리고 다른 또 한가지는 그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버리는 일을 말합니다. 지난날에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인하는 일을 거부하므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결 론 : 구원은 율법을 지키는 일처럼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으로 주어집니다. 이 말씀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요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믿으면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이 놀라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구원의 사실을 의심하거나 다른 그 어떤 것으로 구원을 이루어 보겠다고 하는 잘못된 지식을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 80 ≈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신 예수님

(본문 : 로마서 10 : 11 - 13)

11 성경에 이르되 

ㄹ)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28:16

16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촛돌이라 

그것을 믿는 이는 

다급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12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13 ㅁ)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2:32

32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구원을 받으리라


서 론 : 바울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원리에 대하여 구약적인 근거를 이곳에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같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지극히 보편성을 띄고 있으니 인종의 차별이 없음을 밝혔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고 증거 했습니다. 과거에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법은 이방인과 유대인들과의 사이에 간격을 두고 있었습니다. 율법자체가 이방인이 아닌 이스라엘에게 주셨고 이방인들에게는 이런 것을 주신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믿음 안에서 이 같은 장벽은 여지없이 무너져 버렸습니다. 복음은 모든 인류를 율법의 속박과 저주에서 해방시키는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에 율법을 받았으나 그 율법의 정죄로 망하는 유대인들이나 율법 없이 망하는 이방인이나 차별을 두지 아니하신 것입니다.


1.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고 바울이 성경에서 인용한 말씀은 로마서 9:33에서도 밝혀주고 있는 것처럼 이사야 28:16에 있는 내용이 되겠습니다.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1)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은 율법이나 양심 앞에서의 자책을 말합니다. 모든 죄인은 율법의 정죄 앞에서 그 부끄러움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이방인이라도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기록해 두신 마음의 율법, 곧 양심이 있습니다. 죄인들은 이 양:심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언제나 그 앞에 부끄러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이 같은 부끄러움이 없는 것입니다. 정죄 의식에서 해방되어 지유함과 마음의 평안을 얻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그의 의가 내 것이 되며 그의 피로 나의 죄가 사유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2)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은 주의 재림 때 그 앞에서의 입장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 앞에 부끄러움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홈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고 했습니다(벧후3:14).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 같은 준비가 안되어 있기 때문에 심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요한계시록에서는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가 굴과 산 바위틈에 숨어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그들의 진노의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계6:15-17).

(3)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은 백보좌 심판대 앞에서의 부끄러움도 포함됩니다. 주님은 이 백보화 심판대에서 왼편에 둔 염소들에게 이같이 선언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는 선언입니다(마25:41). 이 주님의 선언은 믿지 아니한 자들의 영원한 부끄러움인 것입니다.

(4) 이 부끄러움은 영원한 지옥에까지 연장될 것입니다. 자색 옷을 입고 한 평생 연락하며 지낸 어느 한 부자는 죽은 후에 음부에 내려가 이 부끄러움을 영원히 당해야 했습니다. 이 부끄러움의 두려움에 대하여 예수님은 “만일 네 오른 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 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고 하셨습니다(마5:30).


2.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신 주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 같은 믿음의 축복은 결코 어느 한정된 사람들만의 특권이 아닙니다. 유대인들만이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이방인들만이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1)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셨다고 했습니다. 한 주이신 예수님은 그를 믿는 모든 사람의 주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이나 헬라인들만을 구원해 주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분이 아니십니다. 창세 전에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시어 그들의 주가 되시려고 오신 분입니다. 창세 전에 그리스도안에서 예정을 입은 주의 백성들은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알처럼 많습니다. 유대인들에게만 있는 것도 아니요 헬라인에게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일에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2)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부요하신 분입니다. 그리스도의 풍성은 측량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엡3:8). 그의 은혜의 선물도 풍성하십니다(엡3:7).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채워져 있다고 하셨습니다(엡3:19). 세상을 창조하신 그 모든 것이 그의 소유이시기 때문에 천지에 존재하는 모든 것으로 부요하신 분입니다. 그러면 그가 부르신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다고 하는 그 부요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그 부요로서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주심으로 그 부요를 공유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그 부요란 무엇인가? 그의 영광을 의미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교회들에게 이처럼 말씀하심으로 모든 믿는 자들이 그의 영광에 동참할 수 있음을 증거해 주셨습니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고 하셨습니다(계3:21). 바울은 로마서8장에서 이처럼 말했습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 다음에 그리스도의 생명이십니다. 생명은 그에게 부요하십니다. 우리는 그를 믿음으로 이 생명을 함께 누리는 것입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다”고 했습니다(요일5:12).

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바울은 이처럼 증거 한 후 결론적으로 다시 한번 구원의 보편성에 대하여 증거 했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누구든지 입니다. 유대인에게 국한된 특권이 아닙니다. 헬라인들에게 주어진 특권도 아닙니다. 누구든지 인 것입니다.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말은 신앙의 시인을 의미해 주는 말입니다. 바울은 구원의 도리에 대하여 이미 9절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었습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했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말은 그 마음에 믿는 주의 이름을 그의 입으로 시인하는 신앙의 표현을 말하며 이 일이 주의 이름의 시인으로 인한 구원의 확신과 주의 이름을 전파하는 전도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결 론 : 우리 예수님은 모든 것에 부요하신 분입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두 사람에게 능히 영생도 구원도 하늘의 영광도 천국도 누리게 하시는 분입니다. 이 구원은 그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은혜로 주신다는 사실은 얼마나 귀하고 은혜로운 일입니까? 그 은혜에 참으로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81 ≈ 믿음의 구원

(본문 : 로마서 10 : 14 - 17)

14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ㅂ)아름답도다 

 52:7

7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믿음과 들음과 그리스도의 말씀

16 그러나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이르되 

ㅅ)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53:1

1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서 론 : 오늘 봉독해 드린 14-17철까지의 말씀은 13절에서 밝힌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에 대한 영적인 해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14절에서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라고 설명을 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 이 말씀은 실인즉 구약에 있는 요엘2:32에서 인용한 말입니다. 요엘은 2장에서 주의 재림을 전후한 인류의 종말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날 즉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심판 날’에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란 말씀을 들려 주신데 서 비롯된 것입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은 복음의 요체입니다. 주의 이름이란 곧 예수의 이름인데 그의 이름을 부른다는 말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입의 시인이기 때문에 훌륭한 신앙고백이 되는 것입니다(롬10:9-10).


1. 믿음의 과정

14-I5절에는 주를 입으로 시인하기까지의 과정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1)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라고 했습니다. 입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행위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9-10절에서 바울은 이처럼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지 못한 입의 시인은 구원이 따를 수 없습니다. 그같은 시인은 거짓된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부른다는 말은 진실된 믿음의 시인이며 고백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2)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믿음은 그 마음에서 형성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자연발생적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씨 뿌리는 비유에서 사람의 마음에 믿음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이처럼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리운 자요”라고 말씀하시므로 밭인 사람의 마음속에 씨가 뿌려져야 말씀의 열매가 맺어지는데 그 씨란 곧 하나님의 말씀임을 밝히신 것입니다(마13:18-23. 눅8:11-15).

(3)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믿음이 들음에서 생겨나는 것이라면 밭에 씨를 뿌리는 자가 있어야 하는 것처럼 믿음의 말씀을 들려주는 전파자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파하는 자가 있어야 그 전파를 통하여 듣게 되며 그 들음을 통해서 믿음을 가지게 되며 그 믿음을 통해서 입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파하는 자의 위치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의 믿음은 전파하는 자에 의해 그들로부터 말씀을 듣고 믿음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4)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라고 했습니다. 만약에 복음을 전하는 자가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지 아니했다면 그 전파는 복음이 될 수가 없습니다. 단순히 인간의 교훈이요 인간의 종교일 따름입니다.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모든 선지자들도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 많은 선지자중에 단 한 명의 예외자도 없습니다. 복음의 주체이신 예수님도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분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리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눅4:43). 예수님은 그의 복음을 전할 우리에게 이처럼 선언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20:21).

여기서 너희를 보내노라고 하신 말씀은 복음전파 자로 보내신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 복음전파 자로 이미 택정 함을 입은 자들이란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같은 사상에 철저하였음으로 복음전파 자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란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본 로마서 초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 함을 입었다”고 단정하고 있습니다(롬1:1). 우리는 교회에서 여러 가지 직분들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직분은 그 형태가 어떤 것이건 복음을 전파하게 하시기 위해 주신 것입니다.

(5)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라고 했습니다. 좋은 소식이란 난하 주에 기록된 대로 복음을 말합니다.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그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 아름답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발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움직이는 발입니다. 우리들은 복음을 온 천하에 다니며 전하라고 명령을 받은 주님의 심부름꾼입니다. 심부름꾼은 그 주인의 명령을 제대로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름답다고 하신 말씀은 그에게 주실 축복을 의미해 주고 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의 생애에는 기쁨이 있고 소망이 있고 즐거움이 있고 평강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상급 또한 놀라운 것입니다. “많은 사람을 옳은 대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단12:3).

바울은 16절에서 이스라엘의 불 신앙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지적하고 있는 저희란 이스라엘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상세한 해석이 18절 이하에 나오는데 이스라엘이 복음을 듣지 못해서 불 신앙에 빠진 것이 아니라 순종치 아니했기 때문이라고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복음을 순종치 아니한 큰 이유 중에 하나는 그들이 하나님의 의를 버리고 율법으로 말미암은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썼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율법이 복음을 순종치 못하게 한 원인이 된 것입니다. 이사야는 이 일에 대하여 이미 오래 전에 예언했습니다.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고 탄식했습니다(사53:1).

바울은 여기서 이스라엘의 불순종의 경우를 비추어 믿음에 대한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했습니다(17).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 들음이란 곧 말씀에 대한 순종이 따라야 합니다. 말씀을 들어도 순종이 따르지 아니하면 믿음이 생겨날 수 없습니다. 단단한 길가에 떨어진 씨앗이나 돌이 많은 밭에 떨어진 씨앗이나 가시밭에 떨어진 씨앗은 결실 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율법이라고 하는 단단한 길가와 같은 밭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복음에 순종할 수 가 없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들음이란 곧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곧 복음을 말해줍니다. 세상의 철학적인 지식이나 인간의 지혜나 경험에서 고안해 낸 말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말씀이 복음인 것입니다.

결 론 : 우리는 이 복음을 전파하는 자로 보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우리의 발을 좋은 소식을 전하는 아름다운 발로 사용해야 합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중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 82 ≈ 복음을 순종치 아니한 이스라엘

(본문 : 로마서 10 : 18 - 21)

18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냐 

그렇지 아니하니 

ㅇ)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19:4

4 그의 1)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

19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냐 

먼저 모세가 이르되 

ㅈ)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32:21

21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것으로

내 질투를 일으키며

허무한 것으로 내 진노를 일으켰으니

나도 백성이 아닌 자로

그들에게 시기가 나게 하며

어리석은 민족으로

그들의 분노를 일으키리로다

너희를 시기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하였고

20 이사야는 매우 담대하여 

ㅌ)내가 나를 찾지 아니한 자들에게

 65:1

1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

찾은 바 되고 

내게 묻지 아니한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말하였고

21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르되 

ㅋ)순종하지 아니하고

 65:2

2 내가 종일 손을 펴서 

자기 생각을 따라 

옳지 않은 길을 걸어가는 패역한 백성들을 

불렀나니

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였느니라


서 론 : 이스라엘의 불신으로 말미암은 버림받음은, 바울이 설명하기 어려운 난제 중에 하나가 아닐 수 없습니다. 복음의 뿌리는 바로 유대인들에게 박고 있습니다. 복음의 주체가 되시는 예수님도 유대인의 혈통에서 세상에 오신 분입니다. 이 복음은 또한 하나님께서 모세 시대로부터 여러 세기에 걸쳐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해 오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들 이스라엘 백성인 유대인들은 그 메시야를 십자가에 달았고 복음을 배척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10장에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증거 했습니다(롬10:17). 그러면 유대인들은 분명히 이 복음을 들었을 터인데 어찌하여 복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기는 고사하고 버림을 받는 자라에 이르게 되었는가하는 것입니다.


1. 저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뇨?

믿음은 들음에서 나는 것이라면 그들이 믿지 아니함은 듣지 못했기 때문이냐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은 성경의 증거를 인용하여 명쾌하게 대답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시19:4절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고 증거 했습니다.

(1) 복음은 은밀한 곳에서 남몰래 전파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다는 말씀은 장차 전파될 복음의 범위가 어는 한곳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범세계적인 것임을 의미해 주는 예언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복음이 이스라엘을 제외하고 이방인들의 구원을 위해 이방인들에게만 전파된 것이 결코 아닙니다.

(2) 이 복음은 먼저 유대인에게 전해졌습니다. 예수님이 복음을 전하신 활동무대는 유대 땅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공생애 동안에 온 유대 땅을 두루 다니시면서 이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바울도 이 복음이 유대인들에게 첫째 번으로 전해졌다고 이처럼 말했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 게요 또한 헬라인에 게로다”고 했습니다(롬1:16).

(3) 이 복음은 유대인의 본거지인 예루살렘으로부터 발단이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이 임하심으로 예루살렘이 복음전파의 근원지를 이루었고 복음전도의 총사령부 격인 예루살렘교회가 형성되었습니다(행1:8, 2:1-4). 그리고 이 복음은 땅 끝까지 이르러 증거 되었습니다.


2. 그러면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뇨?

바울은 여기서 이론을 발전시키면서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뇨”고 묻고 있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그러면 이스라엘이 이 복음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없었느냐? 는 말이 됩니다. 그들이 복음을 듣고도 믿지 아니했다면 그 복음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는 것이 아니겠느냐? 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곳에서 신명기에 나타난 예언의 말씀을 통하여 그런 것이 아니라고 이처럼 그 말씀을 인용했습니다.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 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고 증거 했습니다. 그러면 바울은 왜 이 같은 신명기에 예언된 말씀을 이곳에서 인용한 것입니까?

(1) 유대인들이 복음을 듣고도 믿지 아니한 것은 그들이 깨달을 수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배신한 그들의 죄 값으로 인한 것임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신명기 32장은 모세의 마지막 노래로 장차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그들의 생활이 부요하고 윤택할 때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길 것을 예언하시고 이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에게 돌아갈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이 아닌 다른 이방인들에게 돌아 갈 것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울이 이곳에 인용한 신명기 32:21말씀을 보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아닌 것으로 하나님으로 섬겨 나의 질투를 일으키고 그들이 허무한 우상으로 나로 진노케 하였으니 나도 그들에게 갚으리니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인들로 나의 백성이 되게 하고 어리석은 민족으로 내 백성으로 삼아 유대인들로 시기가 나게 하며 이스라엘로 그 분노를 격발시킬 것이라”고 하는 내용의 예언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모세의 이 예언대로, 돌아 올 것이 그들의 머리 위에 돌아온 것입니다.

(2) 이스라엘은 예수가 메시야이신 사실을 알 수도 있었지만 그들이 고의적으로 애써 거역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왕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줄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곳에서 메시야가 태어난 소식을 듣고서도 찾아가지 아니했습니다(마2:2-6).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권위 있는 말씀도 들었고 그의 놀라운 이적도 수 없이 보았습니다(요10:37,38). 빌라도 마저도 유대인들이 송사 하는 예수님의 고소내용올 무혐의로 단정하고 무죄 석방하려 했음에도 그들은 없는 죄명을 무고하여 십자가에 달리게 했습니다. 그들이 이처럼 하나님 앞에 완악함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마땅히 그들이 믿고 구원받아야 할 복음을 이방인들로 믿게 하심으로 이스라엘로 시기 나게 하신 것이라고 바울은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3) 바울은 이 일에 대하여 이사야의 담대한 예언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내가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찾은바 되고 내게 문의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나타났노라”고 하였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이사야65:1에서 인용한 예언입니다. 내가 구하지 아니한 자들에게 찾은바 되었다고 한 말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 기도하지 아니한 이방인들에게 찾은바 되셨다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하나님께 기도한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에게 긍휼과 자비를 베푸셔서 복음으로 부르셨고 그리스도안에서 그들을 그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내게 문의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나타났노라”고 하신 말씀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에게 내가 여기 있다고 그의 임재 하심을 알려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일을 복음을 통해서 하셨습니다.

(4) 그렇다고 이스라엘에게 가만히 계셨던 것은 아닙니다. “순종치 아니하고 거스려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자기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순종치 아니하고 배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하루종일 그의 손을 벌리셨노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신하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두 손을 벌려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의 품안에 돌아 올 것을 기다리셨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같은 하나님의 사랑의 인내를 멸시하여 끝까지 거역함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키므로 결국은 복음의 은총에서 낙오자가 되게 된 것입니다.


결 론 : 지금도 복음은 온 땅에 퍼져가고 있으며 땅 끝까지 전파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복음을 듣지 못함으로 구원에 이르지 못했다고 핑계치 못합니다. 우리는 이 복음을 온 세계에 울려 퍼지게 하라는 명령을 받아 보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로 영광스러운 복음의 사자인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의 특권은 대단합니다.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 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고 하신 말씀대로 복음에는 죄 사함의 은총이 있습니다. 이 영광스러운 전도자의 대열에 설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로마서 11장

≈ 83 ≈ 은혜로 택하심을 입은 자

(본문 : 로마서 11 : 1 - 6)

이스라엘의 남은 자

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2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고발하되

3 ㄱ)주여 그들이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왕상 19:10

10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주의 제단들을 헐어 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4 그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냐 

ㄴ)내가 나를 위하여

왕상 19:18

18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5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6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서 론 : 바울이 말한 10장까지의 논증을 들으면 큰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셨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바울이 증거한 말씀으로 비취어 본다면 어느 면으로 이스라엘은 복음으로 완전히 버림받은 사람들로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결론적으로 선언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백성을 버리셨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에게도 이방인들처럼 복음적인 소망이 있다고 단정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것은 이스라엘에게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1. 그럴 수 없느니라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라고 말한 바울의 자기백성이란 말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정한 영적 이스라엘을 의미해 주는 말이 아닙니다. 육적으로 선택받은 이스라엘을 말합니다.

(1)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혈통적인 자손으로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민족입니다. 그들의 선택은 많은 민족가운데서 유독 그들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선택임으로 중요하고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태어나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소유하게 되었다고 하는 사실만으로도 놀라운 축복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면서 살아오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율법을 받았고 그들에게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주셨다는 사실은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뿐 아니라 인류의 메시야가 그들의 혈통에서 태어나신 사실 역시 크나큰 축복입니다.

(2) 그러나 이 같은 이스라엘의 택하심은 결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택하심은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태어난 육신의 자녀가 자녀가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롬9:8). 이스라엘이 복된 것은 이방인들에게는 전혀 상상할 수조차 없는 하나님의 계시인 말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같은 특권적인 민족적 우월성을 스스로 버리고 육신적인 자손의 위치에 머무르는 것으로 만족해 왔습니다. 이 일이 이스라엘이 복음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원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3) 바울은 자신의 경우를 예로 들었습니다.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이처럼 자신의 신분을 밝힌 것은 만약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버리셨다면 자기도 그의 백성인데 어찌하여 사도의 직분까지 주셔서 복음의 일꾼으로 삼았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고 말한 것은 그러면 이스라엘 중에는 복음으로 구원받을 자가 전혀 없다는 말이냐는 의미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자기 백성들이기 때문에 특별한 배려를 할 것이란 말이 아닙니다.

(4) 바울은 다시 이 사실을 역사적으로 거슬려 올라가 엘리야 시대에 있었던 사실에서 증거 했습니다. 엘리야가 아합 왕과 이세벨에 의하여 그의 생명이 심히 위태한 처지에 놓여 있었을 때 그는 하나님을 향하여 송사 하는 기도를 드렸을 때,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끓지 아니한 사람 7천을 두었다”고 하셨습니다. 엘리야가 보기엔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7천명이나 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숨겨 두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바울의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해 주는 것입니까? 이스라엘 백성 중에 복음을 따라 구원을 얻을 백성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중에도 남겨두신 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

바울은 5절에서 이 남겨 두신 자가 누구인가에 대한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1)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은혜로 택하심을 따랐다”는 말에 관심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백성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이스라엘의 택하심은 은혜가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혈통을 따른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혈통을 따라 태어난 사람이라면 그가 누구이건 이스라엘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은혜로 말미암은 택하심이 아닙니다. 이방인이건 이스라엘이건 구원은 은혜로 말미암은 택하심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이 이스라엘의 걸림돌이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은 이스라엘의 선택을 구원의 선택인줄로 착각한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도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를 두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다 불순종하는 것 같고 다 복음을 거역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은혜로 하나님의 선태 받은 사람들이 남이 있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3) 이 같은 일은 은혜로 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중에 택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행위로 보아서는 구원 얻을 자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바울이 10장에서 밝혀 준대로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쫓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 하였느리라”고 했습니다(롬10:2,3). 이 같은 그들은 마땅히 복음에서 떨어질 자들이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그 가운데도 구원받을 그의 백성들을 선택해 놓으셨던 것입니다.

바울이 6절에서 행위로 말미암지 않았다는 말은 두 가지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택하심을 받은 이유는 그들이 육신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었기 때문이 아니란 것입니다. 다른 한가지는 그들이 또한 율법을 지키는 대가도 아니란 것입니다. 만약 육신적인 어떤 조건이 선택의 기준이 될 수 있다면 이는 결코 은혜일 수가 없습니다.

(4) 은혜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주시는 구원의 은총을 말합니다. 은혜엔 인종이나 지식이나 학식이나 빈부나 사회적 신분에 차별이 없어야 합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 한가지 사실만으로 생명을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이 같은 하나님의 은혜는 이미 창세 전에 그리스도안에서 예정해 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백성들에게는 모든 것이 은혜의 역사에 속합니다.

결 론 : 바울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요 모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좋은 입장에 있었으면서도 복음을 거슬림으로 구원의 은혜에서 떨어진 사실에 대하여 심히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는 이방인들의 많은 수효가 복음으로 돌아옴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그 복음을 거역하는 사실에 대하여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이스라엘의 불순종이 절망적이 아님을 알고 이스라엘로 복음으로 돌아오게 하려는 간절한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에게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다는 계시를 받고 동족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 남은 자, 잃은 양을 찾아야 할 사명에 불탔습니다. 여러분 주변에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습니다. 그들의 구원을 위해 바울의 심정으로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84 ≈ 아직 소망이 있는 이스라엘

(본문 : 로마서 11 : 7 - 12)

7 그런즉 어떠하냐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우둔하여졌느니라

8 기록된 바 

ㄷ)하나님이 오늘까지

사 29:10, 

10 대저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사 

너희의 눈을 감기셨음이니 

그가 선지자들과 너희의 지도자인 선견자들을 

덮으셨음이라

신 29:4

4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까지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그들에게 혼미한 1)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

9 또 다윗이 이르되 

ㄹ)그들의 밥상이 

시 69:22 

22 그들의 밥상이 올무가 되게 하시며 

그들의 평안이 덫이 되게 하소서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시옵고

10 그들의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그들의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 하였느니라

1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12 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며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함이 되거든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이리요


서 론 : 유대인들 중의 그리스도인들이나 이방인들 중의 그리스도인들 중에 가장 궁금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장차 이스라엘은 어찌 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왜 복음으로 넘어졌으며 이방인들이 오히려 구원을 얻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 바울은 그 이유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으로 이스라엘로 시기 나게 함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이스라엘이 넘어짐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이스라엘이 얻지 못한 이유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1) 약속된 메시야를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오래 전부터 메시야를 약속 받았습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가 전도한 말을 보면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 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고 했습니다(요1:45). 안드레가 자기형인 시몬 베드로를 찾아가 예수를 소개할 때도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말했습니다(요1:41). 메시야의 약속에 대하여는 다니엘 9장에 나타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종말에 관한 예언을 계시 받은 다니엘은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62이레가 지날 것이요… 62이례 후에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단9:25,26)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기름 부은 자란 이스라엘의 메시야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약속된 구원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메시야로 말미암은 구원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한 구원은 메시야를 믿음으로 얻는 영원한 생명을 의미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이스라엘의 회복이나 메시야 왕국을 이루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구원을 생각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들이 구해 온 이 같은 일을 이루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이처럼 자신들이 구해 온 것을 얻지 못한 이유는 다른데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잘못된 지식에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말씀 속에 깊숙이 감추어진 하나님의 비밀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정죄하는 율법의 의만 알았지 죄에서 벗어나게 하며 완전한 의를 얻게 하는 하나님의 의를 몰랐습니다.

그들은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어지지 아니한 상태에서 읽었다고 했습니다(고후3:14,15). 구약은 수건으로 덮어져 있는 글입니다. 그 수건이 벗겨져야 진리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수건은 오직 그리스도안에서만이 벗겨지는 것입니다. 이 같은 이스라엘의 성경지식은 메시야에 대한 지식의 오류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바라고 원한 메시야는 영광 중에 나타나는 정치적인 메시야였습니다. 그들이 대망해 온 메시야는 죽지 아니하는 메시야로 그 메시야를 통하여 이스라엘이 회복되고 이 땅위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메시야였습니다.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고 공박했습니다(요12:34). 예수님의 제자들까지라도 부활하신 주님의 영광의 모습을 바라보고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고 물었습니다(행1:6).


2.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는 이유

바울은 7절에서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택한 자와를 구별했습니다.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일은 이스라엘은 분명히 아브라함의 육적 자손으로서의 하나님의 백성된 영광을 얻기는 했지만 그러나 그들 모두가 은혜로 택하심을 입은 자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여러 곳에서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고 했습니다(롬9:6-8). 여기서 밝히고 있는 육신의 자녀란 혈통적인 아브라함의 자손인 이스라엘을 말하고 약속의 자녀란 은혜로 택하심을 입은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1) 택하심을 입은 자란 창세 전에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을 입은 하나님의 백성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육신적인 이스라엘을 그의 택하신 백성으로 예정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이전에 이미 예수 그리스도로 구원받을 그의 백성들을 예정해 놓으셨기 때문에 예정된 백성 외에는 아무런 특권도 주어질 수 없습니다. 육신적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육신적 자손으로 태어난 특권, 하나님이 그들의 역사를 주장해 오신 사실, 그들에게 선지자들을 보내시어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신 일, 제사제도를 주셔서 사죄의 길을 주신 일 등에 대한 축복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그같은 특권도 은혜로 택하심을 받은 자 외에는 아무런 혜택도 받을 수 없었습니다.

(2) 택하심을 입은 자란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구원 얻을 약속의 자녀들을 말합니다. 아브라함의 육신적인 자녀가 아닙니다. 그의 믿음의 자손들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자손이란 누구인가에 대한 해답이 성경에 참으로 많이 나옵니다.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갈3:28,29). 이스라엘이 완악하여 믿음에서 떨어진 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아닙니다. 은혜로 택하심을 입지 못한 자들이라고 바울은 밝혔습니다.


3.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뇨?

바울은 11절에 와서 이스라엘이 실족한 사실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저희가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는 것입니다. 바울의 대답은 “그럴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이미 5절에서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다”고 말한 것처럼 이스라엘 중에도 하나님이 은혜로 남겨 놓으신 그의 백성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1) 바울은 이스라엘의 넘어짐의 하나님의 섭리의 배경에 대하여 저희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 나게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명심할 일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구원받을 백성들이 있는데도 고의적으로 그렇게 하셨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애초에 하나님은 그처럼 예정하셨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의 구원받은 백성은 은혜로 택하신 대로 계속해서 진행되어 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시는 일에 무거운 십자가를 지어 주신 것입니다.

(2) 이스라엘의 시기는 아직 그 때가 이르지 아니했습니다. 아마 주님의 재림 시에 그들의 시기심이 격발되어 그들로 재림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민족적인 회개의 역사가 이루어질 것입니다(슥12:10). 바울은 이 같은 이스라엘의 완악함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시편 69편의 말씀을 인용하여 그들의 죄과에 대한 보응임을 예언했습니다.

결 론 : 바울은 이스라엘의 특별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믿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이방인들의 구원을 위해 받는 십자가에 대하여 종말에 가서 넘치는 은혜의 축복이 있을 것임을 밝혔습니다. 장차 이스라엘에게 내리실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의 역사가 나타날 때에는 그들의 그 역사로 인하여 온 세계가 축복 받을 것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축복이란 선지자로 예언하신 것인데 그리스도의 왕국의 축복입니다. 이 땅에 세워질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인 천년왕국입니다.


≈ 85 ≈ 자긍치 말아야 할 이방인

(본문 : 로마서 11 : 13 - 18)

이방인의 구원

13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14 이는 혹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하게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15 그들을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

16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17 또한 가지 얼마가 꺾이었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

18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 

자랑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서 론 : 사도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분에 대하여 이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에게 사도로 삼으셨느니라”고 했습니다(갈2:8).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골육의 형제들인 유대인들에 대한 구원에 대하여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있어서 견딜 수 없이 마음에 분함을 안겨준 것은 그리스도안에 들어온 이방인들의 자긍이었습니다. 로마교회는 이방인 교회의 표본입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는 불신적인 유대인들을 향하여 교만하고 자긍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 일에 대하여 구원의 뿌리를 밝히면서 자긍치 말아야 할 것을 경종 했습니다. 이 같은 경종은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 교회들로 하여금 유대인들에게 호감을 갖게 하고 그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 할 수 있게 한 힘이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1. 이스라엘이 버림당함으로써 세상이 화목된 복음

바울은 15절에서 참으로 의미 있는 말씀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저희를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복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사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에 있어서의 구약적인 섭리의 구분을 의미해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I)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에 있어서 분명히 이스라엘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것은 적어도 구약시대에는 이스라엘에게만 적용된 사건이었습니다. 물론 아브라함의 모든 육적인 자손이 구원의 혜택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고 하셨습니다(롬9:6-8). 물론 이 약속의 자녀가 신약시대에 와서 아브라함의 믿음의 후손들인 그리스도안에 있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을 말하고 있지만 복음이 이방에 전파되기 이전까지는 이 약속의 자녀가 이스라엘 중에 있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2) 그런데 바울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저희를 버렸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제 구원의 은혜가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인에게 미치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구원이 구약시대에 이미 그 수를 채우셨습니다. 이제는 그 구원의 은혜가 이방인에게 미쳐야 할 시기가 된 것입니다. 이것은 인류구원의 하나님의 섭리이심을 바울은 밝혔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것은 이스라엘만의 선택이나 구원을 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일차적인 구원은 이스라엘에게로 돌아갈 것이지만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참 씨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예정된 모든 백성들에게 적용하시려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 같은 하나님의 구원섭리가 복음으로 나타나는 사실에 대하여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구약을 읽을 때 모세의 얼굴에 씌운 수건을 벗기지 않은 채 읽었기 때문에 율법에 숨겨져 있는 복음의 비밀을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 구원의 자리에서 떨어져 나가게 된 것입니다.

(3) 바울은 이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복음은 세상과 하나님과의 화목을 가져 왔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기 전에는 모든 세상이 하나님과 원수된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세상과 하나님과의 화평을 가져온 것입니다(엡2:16-18.)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심으로 언제나 공평하시며 모든 사람들에게 기회가 균등하게 부여되는 것입니다.


2. 이스라엘의 받아드림으로 소생하는 역사

바울은 이스라엘의 버림당함과 함께 그들이 다시 받아드려질 일에 대해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저희를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 드리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사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이스라엘은 영원히 버려진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스라엘이 장차 회복될 일에 대하여 19절 이하에서 여러 가지로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이 증거한 바로는 이스라엘의 구원은 두 가지 모습으로 보여줄 것입니다. 하나는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의 구원”입니다. 바울은 모든 이스라엘이 버림당한 것 같은 이제도 “그런즉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롬 11:5). 바울의 뜨거운 염원은 바로 이 같은 유대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키게 하여 저희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고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롬11:14).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 전체의 구원의 시기입니다. 바울은 이 시기가 반드시 있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2) 이스라엘은 받아 드려질 때가 있습니다. 이 일에 대하여 바울은 25절에서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 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복음으로 말미암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 가 그리스도안에 들어와야 그 시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 시기가 바로 예수님의 지림 때이며 이때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의 마지막 추수의 구원이 있을 것입니다(슥12:10).


3. 자긍하지 말라

하나님의 구원은 이처럼 공평하십니다.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방인중에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그의 택한 모든 백성들을 한 명도 상실함이 없이 모두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바울은 이 같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일과 그 순서에 있어서 이방인보다 이스라엘을 우위에 두었습니다.

(1)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적용한 이 말은 처음 익은 곡식가루의 떡을 하나님께 드리라는 명령에 근거를 둔 것인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제물을 드림으로 그들이 수확한 곡식 전체를 드린 것으로 간주했던 것입니다(신15:17-21). 제사하는 처음 곡식가루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조상으로 처음 선택한 아브라함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나 이식이나 야곱 등은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있어서 다분히 처음 익은 곡식 가루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이 말은 이방인에게 보다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우위를 둘 수 있습니다.

(2) 이방인은 꺾여진 가지에 접부침을 받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꺾여졌다는 것은 그들의 불신을 말합니다. 사실인즉 유대인의 불신이 이방인에게 구원을 가져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을 접부치기 위하여 그 가지를 꺾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이방인들은 그 참 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된 것입니다.


결 론 : 바울의 이 같은 경종은 바울이 자신의 골육의 형제들에 대한 사랑에서 나온 울분이며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그 어떤 경우에도 교만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으로서의 생명이 완전히 끊어진 것이 아니라 반드시 회복될 날이 올 것임을 바라보고 이스라엘에 대한 소망을 버리지 아니했습니다.


≈ 86 ≈ 믿음과 접붙임

(본문 : 로마서 11 : 19 - 24)

19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인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

20 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21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22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23 그들도 믿지 아니하는 데 

머무르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받으리니 

이는 그들을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24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슬러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으니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받으랴


서 론 :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과의 차이점을 참 감람나무와 돌 감람나무와의 경우에 비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있어서 구원의 나무는 참 감람나무뿐입니다. 돌 감람나무는 구원의 여망이 전혀 없습니다. 돌 감람나무인 이방인이 구원을 얻은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과 은혜입니다. 돌 감람나무가 참 감람나무 의 열매를 맺게 된 것은 참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돌 감람나무인 이방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참 감람나무의 얼마간의 가지를 꺾으시고 돌 감람나무 가지인 이방인들을 그 꺾이운 참 감람나무에 접붙이셨음을 명심하라고 바울은 모든 교회들에게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원가지로 비유된 이스라엘이 꺾이운 이유는 그들의 불 신앙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이 믿음으로 참 감람나무에 접붙임 받으므로 원 가지와 같이 열매를 맺게 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 원 가지가 꺾이운 것은 이방인으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돌 감람나무와 참 감람나무의 예를 들어 버림받은 유대인과 구원을 얻게된 이방인의 경우를 비교하는 논리를 펴고 있기 때문에 이 같은 바울의 논리를 들은 로마교회 교인들은 자연히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들이 꺾이운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 아니냐? 유대인은 불 신앙으로 꺾인바 되었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왜 꺾인바 된 것인가? 물론 그들의 불 신앙이 이유이지만 그것은 또한 하나님이 영원한 구원섭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들이 꺾이운 것은 이방인으로 하여금 그 참 감람나무에 접붙이려는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논리에 질문할 로마교회 교인들의 물음을 스스로 질문하면서 또 이에 대한 명쾌한 답변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음으로 섰느니라”고 했습니다.


(2) 그러면 참 감람나무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바울이 비유로 들고 있는 참 감람나무란 하나님의 구원의 줄기를 의미해 주는 말입니다. 참 감람나무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해 줍니다. 그리고 이것은 아브라함을 통한 언약으로 비로소 세상에 그 비밀을 들어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나무의 뿌리는 아브라함으로 그 뿌리로부터 줄기가 뻗어나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일은 구약시대에 있어서 이 나무는 오직 이스라엘에게만 해당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돌 감람나무인 이방인들은 이 나무에 전혀 관여할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이방인중에도 혹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어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었겠지만 여기서 바울이 다루고 있는 문제는 그같은 개인적인 구원문제인 것이 아니라 이방인과 이스라엘을 포괄적으로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으로 참 감람나무의 뿌리가 되게 하시고 이스라엘로 그 줄기로 하신 일은 이스라엘만을 위한 것이 아니요 실로 이방인들도 그 나무에 접붙이어 구원에 이르게 하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언약한 약속은 그의 혈통적인 이스라엘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요, 땅의 모든 족속과 연관된 것입니다. 바울은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 라”고 말했습니다(롬4:16).


(3) 열매를 맺는 나무는 오직 참 감람나무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모든 사역을 때를 따라 역사 하시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태어나심을 기점으로 하여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방인에게 전파하게 하셨는데 이것이 복음입니다. 육신적으로 말하면 아브라함과 이방인과는 아무런 관련성이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방인과 아브라함과 이어지게 되었으며 아브라함의 약속이 전체 이방인에게 미치게 된 것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했습니다(갈3:29). 처음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혈통적인 자손들을 통하여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사역을 이루셨습니다. 그때가 세례 요한의 때까지입니다. 그 후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여 구원의 사역을 이루시는데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하심에 참 감람나무의 원가지를 꺾으시고 그곳에 돌 감람나무 가지들을 접붙이심으로 이 일을 이루셨습니다.


2. 높은 마음을 품지 말라

바울은 이방인 교회들에게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고 경종해 주고 있습니다. 참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은 이방인들이 높은 마음을 품지 말아야 할 이유가 몇 가지 있습니다.

(1)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잠정적으로 버리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원 가지들을 아끼지 아니하신 것은 그들의 불신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우리들도 그들처럼 불신 중에 처하면 버린바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식을 버리고 인간의 지식으로 의를 얻고자 하면 꺾이운 바 될 것입니다. 만약 우리들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맺지 못하면 우리를 버리시는 일에 있어서 이스라엘처럼 아끼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해야 하는 것입니다.

(2) 우리가 높은 마음을 품지 말아야 할 일은 우리는 돌 감람나무의 처지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참 감람나무의 뿌리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 가지들도 아니었습니다. 아무 쓸모 없는 돌 감람나무였습니다. 하나님과 원수된 자리에서 아무짝에도 쓰지 못할 돌 감람나무 열매를 맺어온 가지였습니다. 이 가지가 참 감람나무에 접붙인바 된 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요 긍휼히 여기시는 사랑에서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이전에 그 원 가지였던 이스라엘을 향하여 자긍하며 높은 마음을 품을 수 있다는 것입니까?

(3)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넘어지는 자에게는 엄위가 있으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이나 사랑에는 언제나 공의가 있으며 엄위가 그것을 지탱해 주고 있습니다. 복음에 넘어지는 자에게는 사랑과 긍휼 대신에 엄위가 그를 다스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는 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열매를 맺는 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 하심을 얻으려면 죄를 멀리하고 회개하는 생활을 철저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돌 감람나무인 이방인의 경우에 비취어 참 감람나무 가지였던 이스라엘이 불신에서 돌이킬 때 그들의 접붙임이 얼마나 확실하겠느냐고 강조하므로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한 바울의 소망을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24절에서 “네가 원 돌 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스려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얻었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데 실인즉 우리가 참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은 것은 우리의 본성을 거스린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돌 감람나무에서 찍으시고 참 감람나무에 접붙여 주셨습니다. 하물며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고 있으며 하나님을 섬겨 온 이스라엘이 회개하는 날, 이 참 감람나무에 접붙이시는 일이야 하나님께 얼마나 쉬운 일이며 당연한 일이겠느냐는 것입니다.


결 론 : 우리는 돌 감람나무에 속한 가지들로 하나님의 구원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이방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아무 쓸모 없는 이 같은 존재를 참 감람나무에 접붙여 주심으로 생명에 이르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광을 돌려야 하겠습니다.


≈ 87 ≈ 이스라엘 회복의 비밀

(본문 : 로마서 11 : 25 - 27)

이스라엘의 구원

25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26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기록된 바 

ㅁ)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사 59:20 이하

20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구속자가 시온에 임하며 

야곱의 자손 가운데에서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임하리라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27 ㅂ)내가 그들의 죄를 없이 할 때에

사 27:9 이하

9 야곱의 불의가 속함을 얻으며 

그의 죄 없이함을 받을 결과는 이로 말미암나니 

곧 그가 제단의 모든 돌을 부서진 횟돌 같게 하며 

아세라와 태양상이 다시 서지 못하게 함에 있는 것이라

그들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


서 론 :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성경전체에 걸쳐 실로 많이 나타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중에서 대표적인 예언으로 이사야로 말씀하신 내용을 들었지만 그의 문제는 이스라엘 회복에 관한 여러 예언을 함축 있게 종합적으로 기록해 놓았습니다. 바울은 이 같은 예언을 하나님의 약속으로 하여 이 예언이 성취될 시기의 비밀을 이곳에서 밝혀 주었습니다.


1. 이스라엘이 언제 회복될 것인가?

바울이 이곳에서 왜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하여 특히 강조하려는 것인가? 이스라엘이 참 감람나무 줄기에 반드시 접붙임을 받는다는 사실을 이방인 교회에게 밝혀 주므로 이스라엘에게 교만한 이방 교회의 교만을 꺾으려는 의도에서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자만하려는 이방교회는 이 같은 하나님의 오묘하신 진리를 깨달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1)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완악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방인들의 구원을 위해 이스라엘이 불가불 완악한 자리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참 감람나무 가지 얼마가 꺾이운 바 되었고 그곳에 이방인인 돌 감람나무 가지가 접붙임을 받아 참 감람나무의 열매를 맺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시기는 무한정이 아닙니다. 이방인의 때가 있습니다.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면 이제 버림받은바 된 원 가지들이 다시 참 감람나무에 접붙인바 되는데 이때 이루어질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하여 바울은 이처럼 확실히 언급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2) 그러면 이방인의 충만한 수는 언제 채워지는 것입니까? 이스라엘의 완악하게 되었다는 바울의 말은 이스라엘이 율법적인 의를 고집하므로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의를 저버렸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은, 율법적인 의야말로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만 주신 은혜의 선물인줄로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그 의만이 구원의 의인 줄로 고집했습니다. 이런 그들의 고집은 결과적으로 하나님 앞에 완악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이 배척한 이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전파하게 된 것입니다. 이방인이 받을 구원의 수효도 정해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으로 그 수효를 채우시는 것입니다. 복음은 그때까지 온 이방세계에 힘있게 전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복음전파의 문이 닫혀질 날이 반드시 옵니다. 바로 그때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하나님의 자비에 의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바울은 여기서 그 비밀을 밝혀주고 있는 것입니다.


2.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시는 날

바울이 말한 이스라엘의 완악한 마음이 돌이킴을 받고 구원에 이르는 시기에 대하여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신다”고 말했습니다.

(1)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신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의미해 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하늘의 보좌인 시온에서 내려오실 때가 있습니다(계19:11-21). 이때 이 구원자는 이스라엘의 메시야로 오셔서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회복하시고 새로운 메시야 왕국을 이 땅 위에 건설하실 것입니다. 그 왕국이 계시록 20장에서 밝혀주고 있는 천년왕국입니다.

이스라엘은 옛날부터 메시야를 대망 해 온 민족이었습니다. 특히 그들의 나라가 어려움을 당하고 있을 때 그들은 메시야를 고대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메시야 관은 메시야가 나타나면 이스라엘이 회복되고 이 땅위에 메시야 왕국이 건설된다고 하는 사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예수란 그들의 메시야일 수가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빌라도의 사형판결로 십자가에 못 박히는 나약한 무명 청년을 배척한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언제인가 시온에서 내려오시는 진짜 메시야를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메시야가 다른 분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이시란 사실을 알고는 가슴을 찢는 민족적인 회개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2) 구원자가 오시면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신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에 대한 최종적인 구원도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질 것임을 의미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불신의 자리에서 돌이키시는데 그 일도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이 일에 대하여 스가랴는 이처럼 예언해 주고 있습니다.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슥12:10).

(3)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메시야 왕국을 건설하시는 일에 메시야의 초림과 재림에 관한 분명한 약속을 주셨지만 그들은 그 비밀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다니엘 9장에는 메시야로 말미암아 세워지는 왕국에 대하여 70이레의 비밀로 밝혀주셨습니다.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70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여기까지는 분명히 메시야가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새로운 왕국을 세우는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하에 나오는 25절과 26절에서 이런 왕국이 건설되기 이전에 기름부음 받은 자인 메시야가 고난을 당하여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하는 말씀을 그들은 간과해 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이레와 62이레가 지날 것이요… 62이레 후에 기름부음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라고 말씀하신 초림의 메시야를 무시했던 것입니다. 이들이 만약에 이 메시야의 예언을 이사야 53장에 나와 있는 고난받는 종과 연결시킬 수만 있었다면 그들의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을 하지 아니했을 것입니다.

(4) 바울이 온 이스라엘이라고 말한 이스라엘은 끝까지 남은 자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아직도 많은 십자가를 지고 인류 역사의 종점에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물론 예수님의 재림을 전후하여 이방인 교회들도 많은 환난을 겪고 통과해야 하지만 이스라엘이 겪어야할 환난은 더욱 큰 것입니다. 이 시기를 예레미야는 ‘야곱의 환난의 때’라고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렘30:7). 그들이 시온에서 오시는 메시야를 바라볼 때 그들의 형편이 어떠한지 스가랴는 이처럼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날이 이르리라 그 날에 네 재물이 약탈되어 너의 중에서 나누이리라 내가 열국을 모아 예루살렘과 싸우게 하리니 성읍이 함락되며 부녀가 욕을 보며 성읍 백성이 절반이나 사로잡혀 가려니와 남은 백성은 성읍에서 끊쳐지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슥14:1,2). 그리고 이때 이스라엘의 남은 자의 수에 대하여 이처럼 예언해 주고 있습니다.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온 땅에서 3분지2 는 멸절하고 3분지1은 거기 남으리니 내가 그 3분의1을 불 가운데 던져 은같이 연단하며 금같이 시험할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슥13:8,9).


결 론 : 지금 이방인의 때의 문이 점점 닫혀져 가고 있습니다. “이 천국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 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24:14). 복음이 온 땅에 전파되어 이방인의 수가 채워지면 이제 인류의 종말이 올 것입니다. 이때에는 구원의 은혜가 이방인에게서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가는 시기이기 때문에 복음을 거역하는 모든 인류에게 긍휼이 없는 하나님의 심판이 내려질 것입니다. 우리는 주어진 이 구원의 시기에 열심히 복음을 전해야 하겠습니다.


≈ 88 ≈ 후회하심이 없는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

(본문 : 로마서 11 : 28 - 36)

28 복음으로 하면 

들이 너희로 말미암아 원수 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로 말미암아 사랑을 입은 자라

29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30 너희가 전에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31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그들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32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33 깊도다 

하나님의 3)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34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35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서 론 : 그리스도안에 있는 이방인과 이스라엘은 실인즉 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리고 이들 둘이 다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은 하나님의 긍휼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 교회와 복음을 배척하고 있는 이스라엘이 어떤 면으로 보면 서로간에 원수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이 일은 구약시대에는 이방인들을 순종치 아니하는데 가두어 두심으로 이스라엘로 긍휼을 얻게 하시고 신약시대에는 이스라엘로 불순종 가운데 가두어 두심으로 이방인들에게 긍휼을 얻게 하시는데 이제 앞으로 이스라엘은 이처럼 이방인들에게 베푸시는 긍휼을 저희도 다시 얻게 될 것이라고 밝혀 주므로 종국에는 모두가 하나님의 긍휼로 구원함에 이르게 된다는 논리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있는 이스라엘

바울은 28절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양면적인 관계를 ‘원수 된 자’와 ‘사랑을 입은 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1) “복음으로 하면 저희가 너희를 인하여 원수 된 자”라고 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원수 된 자리에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받아 드리지 않고 하나님의 의를 거역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같은 일에 대하여 바울은 “너희를 인하여”란 토를 달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 말은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안에서 이스라엘과 함께 이방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스라엘로 그 심령을 어둡게 하시고 복음으로 이방인들을 불러 드리심으로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원수지간이 되었다고 밝혀주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복음이 아니었다면 이스라엘은 지금도 계속적으로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의 은혜를 받는 자리에 있었을 것임을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이 말은 혈통적인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그들이 구원에 이르렀다는 것이 아니라 구약시대 아래에서는 오직 아브라함의 혈통적인 지손 중에 씨로 여기심을 받는 약속의 자녀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해 주는 말입니다.

(2) “조상들을 인하여 사랑을 입은 자”라고 했습니다. 사랑을 입었다고 하는 대상은 물론 이스라엘을 말합니다. 바울의 이 말은 이스라엘이 복음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원수 된 자리에 있지만 그러나 이스라엘은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논리가 되겠습니다. 바울이 여기서 택하심이란 말을 사용한 것은 이스라엘의 특수한 경우를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선택을 두 가지 견지에서 살펴 볼 수 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선택입니다(엡1:3-5). 이 같은 선택에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장벽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이 선택에 의해서 그의 구원의 사역을 이루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또 한가지의 선택을 언급한다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의 선택입니다.

이스라엘은 혈통적인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여인의 후손으로 언약하신 메시야의 탄생을 계획하시고 만인 중에서 이스라엘을 그같은 백성으로 선택하신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이스라엘에게는 이 한가지 사실만으로도 크나큰 영광을 지닌 민족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비록 지금은 복음을 거스리므로 하나님과 원수 된 자리에 있지만 이 같은 택하심은 지금도 유효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사랑은 그 조상들에게 언약하신 말씀대로 이스라엘의 회복을 가져 왔으며(1948년 8월 15일에 독립을 선포했다). 또 앞으로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대로 인류의 종말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의 구원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처럼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있고 그 거역하는 기간이 심히 오래 계속되고 있는데 그렇다고 하나님은 그들의 택하심에 대하여 후회하시는 것이냐? 이에 대하여 바울은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므로 결코 그의 하시는 일에 후회하심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고 말씀하셨습니다(민23:19).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신 일에 대하여 그의 뜻을 거스려 잘못된 점이 조금도 없는 것입니다. 애초에 이루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대로 성취되기 때문에 하나님께는 추호도 실패가 있을 수 없으며 따라서 후회하실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도 이 모든 일들이 오직 하나님의 영광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의 영원하신 섭리대로 성취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2. 모든 사람에게 긍휼 하심을 베푸시는 하나님

바울은 30절부터 32절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불순종과 하나님의 긍휼하심의 관계를 매우 조화 있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순종치 아니한 이방인들이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이방인들은 죄로 버려진 상태 그대로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도 몰랐고 그 말씀에 대한 순종도 몰랐습니다. 그러던 것이 이스라엘의 불순종 때문에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어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받아 구원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불순종은 결과적으로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게 하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바울의 말을 들어보면 이렇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는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고 말했습니다(행13:46).

(2) 그러나 이스라엘의 이 같은 불순종은 결국은 이방인에게 나타내 보이신 긍휼을 그들에게도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불순종은 마음의 완악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이처럼 인간의 불순종에 대하여 길이 참으심은 그 불순종 가운데서 그들로 하나님의 긍휼을 힘입게 하려는 것이라고 갈파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지금 불순종가운데 있는 것은 이제 그들로 하나님의 긍휼을 힘입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뜻이 계시는데 이스라엘은 이런 긍휼을 통해서 지금 그들의 불순종한 가운데서 이스라엘의 남은 자의 구원이 이루어지게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3) 바울은 여기서 이 같은 결론을 내렸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고 했습니다.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인간의 타락은 회복할 수 없는 무서운 죄를 가져오게 되어 모든 인간이 사망 중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인간에게 의를 얻을 수 있는 어떤 길도 열어 주지 아니하셨습니다. 모세에게 주셨던 율법도, 인간의 마음속에 새겨진 양심도 의의 도구가 될 수가 없었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을 불순종 중에 얽매어 놓아 두셨는데 그 이유는 때가 되면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크신 긍휼을 베풀어주시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결 론 : 바울은 너무나도 갚고 오묘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는 놀라운 찬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고 했습니다. 만물이 하나님에게서 나오고 하나님에게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세세토록 영광을 받으실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그에게 영광이 세세토록 있으리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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