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新約]강해/◆ 바울서신 강해-1

로마서 4-7

영국신사77 2020. 4. 11. 14:53

로마서 차례

제 4 장(21 ~ 25)

21) 아브라함의 의 (로마서 4장 : 1절 ~ 4절)

22) 은혜로 주시는 하나님의 의 (로마서 4장 : 4절 ~ 8절)

23) 믿음의 의로 나타난 하나님의 언약 (로마서 4장 : 9절 ~ 14절)

24) 믿음으로 이어 받은 하나님의 후사 (로마서 4장 : 15절 ~ 17절) 

25) 아브라함의 믿음 (로마서 4장 : 18절 ~ 25절) 


제 5 장(26 ~ 36)

26) 하나님과의 화평 (로마서 5장 : 1절 ~ 2절)

27) 성도의 환난과 소망 (로마서 5장 : 3절 ~ 4절) 

28) 사랑을 확증하신 하나님 (로마서 5장 : 5절 ~ 8절)

29) 구원받은 자의 생활 (로마서 5장 : 9절 ~ 11절)

31) 죄와 율법 (로마서 5장 : 13절)

32) 오실 자의 표상인 아담 (로마서 5장 : 14절)

33)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풍성한 은혜 (로마서 5장 : 15절 ~ 16절)

34) 한 사람 아담의 죄와 한 분 그리스도의 의 (로마서 5장 : 17절)

35) 아담의 불순종과 그리스도의 순종 (로마서 5장 : 18절 ~ 19절)

36) 죄와 은혜 (로마서 5장 : 20절 ~ 21절)


제 6 장(37 ~ 47)

37)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의 신분 (로마서 6장 : 1절 ~ 2절)

38) 그리스도와의 연합 (로마서 6장 : 3절 ~ 4절)

39) 연합이 의미하는 뜻 (로마서 6장 : 5절 ~ 7절)

40) 죄에서 벗어난 우리 (로마서 6장 : 6절 ~ 7절)

41) 주님의 부활의 참 의미 (로마서 6장 : 8절 ~ 10절) 

42) 승리적인 생활의 방법 (로마서 6장 : 10절 ~ 11절)

43) 성결 생활을 위한 그리스도인의 자세 (로마서 6장 : 12절 ~ 14절)

44) 불의의 병기와 의의 병기 (로마서 6장 : 12절 ~ 14절)

45) 순종과 소유권 (로마서 6장 : 15절 ~ 16절)

46) 거룩함에 이르라 (로마서 6장 : 17절 ~ 21절)

47) 죄의 삯과 하나님의 은사 (로마서 6장 : 20절 ~ 23절) 


제 7 장(48 ~ 55)

48) 율법의 기능 (로마서 7장 : 1절 ~ 4절)

49) 구원의 목적 (로마서 7장 : 1절 ~ 4절)

50)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는 생활 (로마서 7장 : 5절 ~ 6절)

51) 율법이 죄냐 (로마서 7장 : 7절)

52) 계명으로 드러난 죄의 권세 (로마서 7장 : 8절 ~ 9절)

53) 생명과 계명 (로마서 7장 : 10절 ~ 13절)

54) 육신에 속한 자 (로마서 7장 : 14절 ~ 20절) 

55) 육신에 속한 자의 탄식 (로마서 7장 : 21절 ~ 2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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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4장

◆ 밤중소리 01-13 | VIEW : 718


≈ 21 ≈ 아브라함이 얻은 의

(본문 : 로마서 4 : 1 - 4)


서 론 : 하나님의 의를 논함에는 아브라함을 등장시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최초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성경상의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의를 이해하지 못하면 구약에서 얻는 의와 신약에서 얻는 의가 전혀 다른 방법을 통해서 얻는 것으로 생각하기가 쉬운 것입니다. 구약시대에서는 율법으로 의를 얻고, 신약시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를 얻는다고 판단한다면 결국 구약시대에는 의를 얻어 구원받은 백성이 한 명도 없다는 결론이 나오게 됩니다. 율법으로 의를 얻을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구약에 등장되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구약이나 신약이나 영원히 변함이 없으며 그 방법은 오직 믿음으로 된다는 사실입니다.

1. 아브라함을 택하신 이유

하나님께서 의의 표준인물로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이유가 어데 있는 것인가? 구약시대에도 많은 인류가 땅에 살고 있었으며, 훌륭한 사람들이 살았지만 왜 아브라함을 인류의 대표자로 내세워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의를 얻는 방법을 보여주신 것인가? 우리는 성경에서 몇 가지 그 이유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아브라함은 유대인에게 있어서 결정적인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을 자신들의 아버지로 숭상하고 있었습니다. 다음에 아브라함은 원래가 도덕적으로 탁월한 인물이었습니다. 우리는 공자나 석가에 대한 인물에 대하여 도덕적으로 위대한 성현으로 여기지만 아브라함은 유대인들이나 하나님 편에서 볼 때 그의 인격이나 도덕적 성품이 그들보다 월등하다고 하나님이 인정하셨기 때문입니다. 로마서에서 아브라함을 예로 하여 하나님의 의를 등장시킨 이유는 다음 두 가지에 있다고 보겠습니다.

(1) 아브라함은 행위로 의를 얻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를 얻지 못했다면 이 세상에는 그 어느 누구도 행위로 의를 얻을 사람이 없다고 하는 증거로 그를 등장시킨 것입니다. 우리는 의롭다고 하는 의의 표준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이해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의롭다고 하는 말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완전한 자격을 말합니다. 전혀 마귀의 참소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완벽한 의인을 말합니다. 그리고 죄를 범한 일이 한번도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 역시 이 같은 의의 표준에는 미달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육신으로 얻은 것이 무엇입니까? 그는 기근이 왔을 때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애굽으로 피난 갔습니다. 애굽에 간 후에도 거짓말로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 바로 왕에게 빼앗겼습니다. 이 같은 아브라함의 육신을 따라 행한 그의 행실은 그의 행위로서는 절대로 의롭다 칭함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그의 행위로 의롭다함을 얻었다면 자랑할만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아브라함이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할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2) 아브라함을 등장시킨 다른 또 한가지 이유는 만약 아브라함 같은 위대한 인물이 행위로 의를 얻을 수 없었다면 이 세상에 있는 그 누구도 자신의 행위로서는 의를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 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존귀한 인격이나 도덕적 행실이 사람들에게는 존경의 대상이 되었겠지만 그것이 하나님 앞에는 의가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의를 주셨을 때 오직 믿음으로 주셨습니다. 만약 아브라함에게 믿음이 없었다면 아브라함은 절대로 의를 얻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이라 할지라도 그들에게 믿음이 없다면 그들은 어떤 방법으로도 의를 얻을 수 없으며 아브라함의 유업을 이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2. 아브라함이 나타낸 믿음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아름다운 면을 바라보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이 같은 순종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의 순종이 행위에서가 아니라 믿음에서 출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 아브라함이 갈데아 우르를 떠난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이 그의 본향 집을 과감히 떠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행위 자체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에게 축복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은 믿음에 있었던 것입니다(창12:1-3).

예수님은 자기를 따라야할 우리들의 신앙적인 자세에 대하여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고 하신 것입니다(마10:37,38).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이 같은 십자가를 질 수 있는 것입니까? 이것이 주님의 말씀이라 할지라도 이 말씀만으로는 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기쁜 마음으로 따를 수 있는 것은 이 말씀을 따르는 자에게 말할 수 없는 영광의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축복이 우리에게 확실히 약속되어 있음으로 우리도 아브라함과 같이 이 세상을 둥지고 주님을 따라 가나안(천국)으로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2) 다음에 아브라함은 아들을 주시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25년간이나 아들의 약속을 기다려야 했지만 그는 그 약속을 믿고 기다려 약속의 씨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시겠다고 언약하신 그의 아들 이삭은 누구를 의미하는 인물입니까? 그리고 아브라함이 그 아들에 대한 이 같은 그의 믿음은 어떤 믿음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오실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임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으로부터 인류의 구세주를 바라보았고 아브라함은 그 구주를 믿음으로 의를 얻은 것입니다. “이 약속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갈3:16).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그 자손에 대하여 약속하셨을 때 만민이 축복 받을 씨는 오직 구세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믿었으니 이것이야말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를 얻은 놀라운 근거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함께 믿음으로 얻는다고 말씀하신 축복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영생의 축복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갈3:6-9).

다음에 아브라함은 그의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 데려가 그곳에서 제물로 들이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순종한 일입니다. 아들을 제물로 드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한 아브라함의 순종은 도대체 무엇에 근거해 두고 순종한 것입니까? 아브라함의 순종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믿음에서 나온 것입니다(히11:37-19). 하나님이 이삭을 주셨을 때 그의 자손에 대하여 하신 말씀을 아브라함은 믿은 것입니다. 그의 이 같은 믿음은 이삭을 제물로 바쳐도 하나님은 반드시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것이라고 하신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 아들을 데리고 모리아산에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결 론 : 아브라함은 그의 믿음으로 의를 얻은 사람입니다. 우리도 그의 믿음을 따라 믿음으로 의를 얻은 사람들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활을 했던 것처럼 우리도 아브라함의 발자취를 따라 믿음으로 순종하는 생활을 통하여 아브라함의 믿음의 자손답게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 22 ≈ 은혜로 주신 하나님의 의

(본문 : 로마서 4 : 4 - 8)

서 론 : 믿음으로 의를 주실 수 있도록 하신 하나님의 방법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온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이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기 위하여 말할 수 없는 값을 치르셨습니다. 그의 아들로 속죄 제물로 삼으셨습니다. 우리에게 의를 주시기 위하여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의 그 은혜 안에는 아들의 피를 값으로 치르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이 깔려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를 믿는 자에게 의를 주시기로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의를 주신 일은 우리의 행위에서 나온 일이 아니기 때문에 율법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서 나온 것입니다.

1. 삯으로 비유된 하나님의 은혜

바울은 믿음으로 의를 얻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설명에 들어갑니다. 바울은 일과 값을 결부시켜 은혜의 참 의미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1) 일하는 자가 받는 삯은 은혜가 아닙니다. 우리는 4절-5절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가 어떻게 우리에게 오게 되었는가에 대하여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하나님의 의는 인간의 공로에서 오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값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일을 해서 얻는 임금은 은혜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일을 아니했음에도 불구하고 일한 것으로 여김을 받아 대가를 받는다면 이것이야말로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은 자신에게 값을 준 사람에게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일을 했다 혹은 아니했다고 표현된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말입니까? 그 일이란 우리 인간이 율법을 지켰다거나 자신의 어떤 행위적인 공로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의가 이런 사람에게 그 대가로 당연히 돌아갈 수 있다면 그같은 의는 하나의 값이지 은혜라고 말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을 지킨 일도 없고 의를 얻을만한 아무런 공로가 없는 죄인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의를 주신다면 이 같은 일이야말로 은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2) 일을 아니할지라도 의를 주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의로 여기신다고 하셨습니다. 인간 중에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해서 그 대가를 받을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의인은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은혜로 우리에게 의를 주시는데 이 의를 은혜로 받을 사람들에 대하여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의를 얻을만한 아무런 공로가 없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아들을 통하여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셨으니 이 같은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신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인들에게 의를 얻을 수 있는 길이 새롭게 열린 것입니다. 그 길은 일한 대가에서 오는 그런 방법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사 나를 위한 화목 제물로 십자가에 못 박으심으로 우리들에게 그의 의를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어찌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겠는가? 지금 이 은혜는 온 세상에 미치고 있으며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 하신 말씀대로 은혜로 구원받을 문이 활짝 열려져 있는 것입니다(고후6:2). 아브라함도 이 같은 믿음으로 의를 얻었으며 우리도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의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2. 공로 없이 의를 얻는 자의 행복

바울은 이 같은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성경에 나타난 위대한 인물인 다윗의 경우를 예로 들었습니다. 6절-8절에 나타난 말씀대로 다윗은 율법을 지킨 일이 없이도 하나님께 아무런 공로 없는 죄인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를 얻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시편 32편에서 하나님을 찬양했던 것입니다.

(1) 은혜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다윗을 그 증인으로 내 세운 이유는

다윗이야말로 이스라엘 역사의 중심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메시야의 조상에 대하여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고 할 만치 다윗의 위치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절대적인 존재였습니다. 아브라함을 아버지라 부른 유대인들은 장차 자기들에게 나타날 메시아야말로 다윗의 뿌리에서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가 다윗의 영원한 왕국을 건설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 다윗도 율법에서 의를 얻지 못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의를 얻었다면 누가 율법으로 의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여기서 바울은 다윗의 경우를 예로 들어 하나님의 은혜로 주시는 의에 대하여 증거한 것입니다.

(2) 참된 복은 불법의 사하심을 받고 죄의 가리우심을 받는 자에게 있다고 했습니다. 이곳에서 다윗은 자신의 죄과에 대한 사죄의 은혜의 경험을 말하고 있지만 아울러 모든 사람에게도 이 같은 사죄의 은혜가 미친다고 하는 사실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여기서 하나님께 받는 사죄의 은혜를 말하고 있는데 이 사죄에서 나온 다윗의 기쁨이나 행복은 다만 사죄에 그치는 것 뿐 아니라 사죄로 말미암아 미치는 하나님의 의를 언급하려고 하는데 그 목적이 있음을 알게되는 것입니다.

불법은 인간의 무법적인 행동, 죄는 율법의 정죄를 말하는 것이지만 이 둘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않는데서 온 것입니다. 죄란 ‘히마르티아’로 과녁(목표물)을 잘 못 맞춘 것을 말합니다. 인간의 과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므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는 일입니다. 그러나 아담의 범죄로 이 같은 과녁은 완전히 빗나가 버렸습니다. 우리 인간은 이 같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선고를 받았습니다. “정녕 죽으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행위로도 율법으로도 이 죄에서 벗어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야말로 복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하심이란 말은 ‘압히에미’로 상관치 않는다, 탕감하여 준다, 내어 보낸 다의 뜻이 함유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신다”는 뜻입니다(롬3:25). 우리의 모든 불법을 탕감하여 준다는 것입니다. 없었던 것처럼 전혀 상관치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또 가리우심이란 말은 ‘에피 칼립토’로 덮는다, 감춘 다의 뜻입니다. 우리의 불법적인 모든 행실에 대하여 아주 감추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도록 하나님의 손으로 덮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의 죄는 완전히 사하심을 받아 모두 탕감 받은 것입니다. 우리들의 그 많던 죄악이 그리스도의 피로 사하심을 받고 가리우심을 받아 하나님께서 기억도 나지 않게 모두 덮어 버리시고 감추신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감추시고 덮으신 것을 누가 들추어 낼 수 있겠는가?

(2)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유하신 죄는 하나님께서 그 죄를 죄로 인정치 아니하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율법의 정죄도 소용없습니다. 사단의 참소도 효력이 미칠 수 없습니다.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송사하리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롬8:33).

결 론 : 다윗은 이런 사람에게 복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다시는 그 죄로 인하여 정죄 함을 받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은혜로 받을 것입니다. 이 같은 하나님의 사죄의 은혜는 믿음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회개를 동반하기 때문에 사죄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게 되는 것입니다.

≈ 23 ≈ 믿음의 의로 나타난 하나님의 의

(본문 : 로마서 4 : 9 - 14)

서 론 : 유대인들은 할례 자들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의를 얻는 일에 할례의 비중이란 절대적입니다. 심지어 신실한 유대인 기독교인들 중에도 그리스도안에서 구원을 얻는 일에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의 할례 당마저 존재하고 있었습니다(골4:11).

바울은 로마서에서 믿음으로 의를 얻는 하나님의 언약을 증거 함에는 먼저 할례가 하나님의 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증거 해야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아브라함의 경우에 결부시켜 아브라함이 받은 하나님의 의와 할례와의 상호관계를 설명하면서 의를 얻는 일에 할례나 무 할례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시원하게 증거한 것입니다.

1. 사죄와 의의 행복자는 누구인가?

바울은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의 행복에 대하여 과연 이 같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시는 행복의 대상자가 누구냐에 대하여 반문법으로 묻고 있습니다.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 할례자에게뇨 라고 물었습니다. 할례자란 유대인을 말하고 무 할례자란 이방인을 말합니다.

(1) 할례자에게뇨라고 물었습니다. 유대인의 입장에서 보면 할례란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중대한 의미가 주어진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세우실 때 여 언약이 할례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양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창17:9-14).

그러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의가 할례가 없는 이방인들에게 돌아간다는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의를 주시는 일도 그것은 할례자인 자기 백성에 국한된 것인 줄로 알고 있었던 유대인 기독교 성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 같은 사상을 깨지 않고서는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전파될 수가 없었습니다.

(2) 바울은 다시 그러면 무 할례자에게뇨 고 물었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율법과 상관이 없으며 율법으로는 하나님의 의를 얻을 수 없다고 하니 그러면 유대인들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를 받을 수 없게 되었으니 이 같은 의의 행복은 무 할례자들인 이방인들에게만 돌아 갈 것이 아니겠느냐고 판단할 수도 있습니다.

(3) 바울은 다시 의를 주시게된 하나님의 은혜를 아브라함에게 거슬려 올라가 그 근원을 제시했습니다.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를 얻은 일은 할례나 무 할례와 상관이 전혀 없었음을 밝힌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유대인의 조상이요 그들에게는 가장 숭고한 인물이요 의의 상징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런 아브라함이지만 아브라함은 자기 행위로 의를 얻을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의를 받았을 당시에 아브라함은 할례가 무엇인지 무 할례가 무엇인지 조차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이 할례나 무 할례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를 받았다면 하나님의 의를 받는 행복에 할례나 무 할례가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바울은 이처럼 그의 논증에서 칼로 벤 듯이 분명하게 들어냈습니다.

2. 아브라함의 의와 할례와 무 할례

하나님의 의를 얻는 일에 할례와 무 할례와의 관계를 설명함에 아브라함의 경우를 그 예로 든 것은 할례의 언약도 아브라함에게 주셨고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의 언약도 아브라함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1) 아브라함이 의를 얻은 시기가 할례에 훨씬 앞섰다는 사실을 증거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은 시기는 99세시였습니다(창17:1). 이때 이스마엘도 아브라함과 함께 할례를 받았는데 이스마엘의 나이는 13세였다고 했습니다(창17:23-26). 그런데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고 믿음으로 의를 주신 시기는 아직 이스마엘이 잉태조차 되지 아니했을 시기였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시기와 할례를 받은 시기와의 시차는 적어도 14년간 이상이나 나있는 것입니다(창15:4-7).

그러면 아브라함이 왜 무 할례 시에 의롭다 하심을 얻었는가? 이에 대하여 바울은 감추어진 비밀을 들어내어 증거하기를 “이는 무 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무 할례자의 조상이 된다는 사실은 충격적인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그의 자손으로서의 씨를 언약하시고 그로 말미암아 그의 후손들에게 복을 주신다고 말씀하신 이 모든 언약이 무 할례자에게도 해당된다고 하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갈3:26-29). 이로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무 할례자의 조상이 되게 하시기 위해 아브라함으로 무 할례 시에 믿음의 의를 주셨다고 말씀하고있는 것입니다.

(2) 아브라함에게 주신 할례의 의는 무 할례 시에 받은 의의 인 침이라고 했습니다. 할례는 의의 선언이나 의의 조건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지 아니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아브라함이 이미 받은 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할례의 언약은 두 가지 뜻에서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믿음으로 의를 얻은 일에 대한 인 침이라는 사실입니다. 의의 인 침이기 때문에 의가 없는 사람의 할례는 아무런 효력이 없는 것입니다. 신약의 세례란 구약의 할례와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한 징표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없는 사람의 세례란 그것이 침례이건 세례이건 아무런 효력이 없습니다. 그리고 다른 또 하나의 의미란 의를 얻은 자의 성별된 생활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할례가 다만 남자들의 양피만을 베는 의식으로 마친다면 그 의식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할례에 대하여 하나님은 분명히 영적인 뜻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신10:16, 30:16, 레2641).

이런 면으로 볼 때 육체가 받는 할례나 무 한례는 아무 것도 아님을 알게 됩니다.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얻는 의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이 할례 받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사실을 부인한 것은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은 일은 또한 할례자들의 조상도 되기 위해서임을 명백히 하므로 할례를 쫓아온 유대인이나 무 할례로 하나님의 법 없이 살아온 이방인들이나 다 함께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있다고 하는 하나님의 진리를 천명한 것입니다.

(3)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시는 언약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율법을 통해서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셨다면 아브라함의 믿음은 헛것이요 믿음으로 의를 주시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도 아무 쓸모 없는 것이 되어 버리고 말게 될 것입니다.

결 론 : 믿음으로 의를 얻는 하나님의 언약은 신약시대에 와서 새삼스럽게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구원이나 의를 주시는 하나님의 계획이나 섭리에 있어서는 시대를 따라 연장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의를 얻는 일이라든가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대한 축복의 언약은 이미 아브라함을 부르신 그때부터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의와 구원의 은혜로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이 같은 하나님의 약속에 포함된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 24 ≈ 믿음으로 이어 받은 후사

(본문 : 로마서 4 : 19 - 17)

서 론 :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하나님의 언약은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임을 계속하여 강조합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이 의의 기준인줄로 알고 그 율법에서 의를 얻으려고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은 바로 이 율법으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이 같은 관념을 깨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아브라함에 대한 의를 증거 해야 했습니다. 바울은 아브라함이 율법이 있기 훨씬 이전, 할례의 법을 주시기 이전에 믿음으로 주시는 하나님의 의의 언약을 받았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율법은 그 이후에 주셨는데 이처럼 아브라함에게 믿음의 의로 언약하시고 그 후에 또 율법을 주신 이유는 율법으로 인간의 죄를 들어냄으로 인간들을 의의 언약으로 인도하시기 위함이요, 사람들로 율법으로는 하나님의 의를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십니다.

1. 진노를 이루게 하는 율법

율법은 인간에게 의를 이루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이 존재하는 목적은 진노를 이루는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죄를 죄로 들어내는데 율법의 직능이 있습니다. 율법은 의를 들어내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율법 그 자체는 의롭고 거룩하지만 그 의롭고 거룩한 율법이 우리 인간의 죄를 들어내는 역할만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이란 죄를 논고하는 검사의 직능과 같은 것입니다. 죄를 죄로 들어내기 위해서는 의롭고 거룩한 율법의 표준이 필요합니다. 율법은 우리의 죄를 비추어 주는 거울처럼 우리의 온갖 모든 죄를 들어내고야 마는 것입니다. 죄는 의롭고 거룩한 율법 앞에서 여지없이 자신의 정체를 폭로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울이 우리 몸의 더러움을 씻어주지 못하는 것처럼 율법도 우리의 죄들을 깨끗케 할 수 없는 것입니다.

(2) 율법은 죄를 정죄 하는데 그 직능이 있습니다. 율법은 죄를 죄로 들어내는 일에만 국한하지 아니합니다. 들추어낸 그 죄를 정죄하는 것입니다. 정죄란 죄를 죄로 확정짓는 재판 적인 선언이기 때문에 여기서 빠져 나올 길이란 전혀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 선언은 번복할 수도 없고 취하시킬 수도 없습니다. 다만 두려운 집행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 선언의 집행이란 영원한 지옥에 던짐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정죄함을 받지 않는다는 말씀은 이 같은 저주에서 해방이 된다는 뜻입니다.

(3)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범함도 없다는 말에는 두 가지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는 율법이 없으니 물론 율법을 범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법이 생기기 전에는 그 법에 저촉될 염려가 없는 것입니다. 만약 십계명이 존재치 아니한다면 우리가 혹 그 십계명에 명시된 죄를 범했다고 해도 율법이란 십계명이 존재치 아니하기 때문에 율법을 범했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른 한가지는 율법이 없다면 율법의 정죄란 것도 존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법이 없는데 어찌 재판이 성사될 수가 있는 것인가?

그렇다고 율법이 없다고 하여 인간의 죄가 존재치 않는다는 말은 아닙니다. 율법과는 상관없이 인간에게는 죄가 존재합니다.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한다”고 했습니다(롬2:12).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롬5:13,4).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롬5:20). 이 말씀의 뜻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를 죄로 세상에 들어낸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모든 인류를 죄 아래 가두어 둠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의를 주려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갈3:22, 롬3:19).

2. 후사가 되는 일은 은혜에 속해있다.

후사라고 하신 말씀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언약하신 하나님의 약속으로 하나님나라의 유업을 말합니다.

(1) 후사는 하나님의 은혜에 속해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버림받고 정죄 받은 존재입니다. 그런 존재가 하나님의 후사란 어림도 없는 말입니다. 오직 죄 값인 사망을 유업으로 받을 사람들이요 영원한 정죄로 이미 하나님의 선고를 받은 존재들입니다. 이 같은 인간은 이제 그 어떤 방법으로도 그같은 저주에서 회복할 추호 만한 가농성도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후사가 하나님의 은혜에 속하게 하시기 위해 인간의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방법으로 의롭다 하심을 주셨는데 그것이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언약하신 믿음으로 의를 얻는 언약인 것입니다.

(2) 율법은 은혜가 아닙니다. 율법은 구제 받을 길이 없는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주시기 위한 한 방편으로 주신 것에 불과합니다. 율법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은혜 안으로 몰아 들이기 위한 구원의 그물에 불과합니다.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롬3:19).

(3) 믿음으로 얻는 의가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율법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줄로 알고 있었습니다. “율법을 지키면 그 안에서 살리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율법을 주신 하나님은 분명히 선언하십니다.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하십니다(롬3:20). “그러나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롬3:21,22). 이 의는 행함이 따르지 아니하고 오직 믿음으로 사죄의 은총과 의의 부여를 받기 때문에 확실한 은혜인 것입니다. 아직 전혀 하나님의 의에 이르지 못했던 모든 인간들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공로 없이 의롭다 하심을 받게 되었으니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의를 얻어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하나님의 후사가 된 사람들입니다.

(4) 아브라함은 모든 민족의 조상으로 세우심을 받은 믿음의 조상이라고 밝혔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들의 조상이라”고 하신 말씀은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하나님의 약속과 그의 후손들에게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사실에 대하여 그 뜻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를 선명히 들어내신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은 유대인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육적인 유대인의 조상으로 선택하시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를 주시기 위한 믿음의 조상으로 부르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같은 사실은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그 말씀가운데 나타나 있음을 바울이 이곳에서 증거한 것입니다.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고 하신 말씀이라든가,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고 하신 말씀에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창12:3, 17:5)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주시는 은혜의 언약 자로 세우심을 받은 사람이요 결국 그의 육적인 자손들이나 할례 자들에게 언약의 후사가 되게 하시기 위해 세움을 받은 것이 아니란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갈3:28,29).

결 론 :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사람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고 하셨습니다(히11:6). 그러면 아브라함은 어떤 하나님을 믿었기에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얻을 수 있었나?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아들 이삭을 모리아 제단에 바칠 때 이 믿음으로 순종했습니다(히11:7-19). 그리고 하나님이 그를 부르실 때 그는 이 믿음으로 고향을 떠났습니다(히11:8). 우리도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져야 그의 후사가 될 것입니다.

≈ 25 ≈ 아브라함의 믿음

(본문 : 로마서 4 : 18 - 25)

서 론 : 바울은 로마서에서 아브라함이 얻은 의와 그의 후사에 관한 언약에 대하여 새로운 각도의 해석을 시도했습니다. 그는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언약하신 참 의미를 밝혀 놓았습니다.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아브라함을 선택하심으로서 그 실마리가 풀려져 나가는 사실을 명백하게 보여 준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를 얻은 최초의 사람이며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르는 후손들에게 그의 후사가 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란 육신적인 유대인을 지칭함이 아니요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고 증거한 것처럼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들”의 조상입니다. 의롭다하심을 받은 아브라함의 믿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다고 하는 말은 그의 언약에 대한 믿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그의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분”이십니다(롬4:17).

1. 아브라함의 믿음

그러면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언약과 그 언약에 대한 아브라함의 믿음의 모습을 본문에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아브라함이 믿음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믿음으로 이 언약은 아들 이삭과 그의 후손에 대한 축복의 약속입니다. 이삭이란 누구인가? 오실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씨로서 언약된 사람입니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갈3:16). 말하자면 여자의 후손이 아브라함의 씨로 태어나실 일에 대한 언약을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입니다(창3:15, 마1:1). 물론 아브라함은 이 같은 메시아 탄생과 인류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그 오묘하신 섭리는 완전히 깨닫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을 믿음으로 얻은 의가 분명히 자기에게 언약하신 이삭과 메시야와의 관계에서 연유된 사실을 알 수 있는 근거는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라”고 하신 말씀에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나 우리들이나 믿음으로 얻는 의가 하나님의 은혜로 나온 것이라면 그 은혜의 근거는 하나뿐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는 것입니다.

(2) 아브라함의 선택은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시려는데 있다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씨가 이삭으로 말미암은 유대인이 아닌 분명한 사실은 그 씨로 형성된 민족이 어느 한 혈통적인 민족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많은 민족이 조상”이라고 하셨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처음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이름은 ‘아브람’이였습니다. 이 이름의 뜻은 존귀한 아버지, 높은 아버지란 뜻입니다(창12:1).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에 대한 분명한 언약을 하실 때인 그의 나이 99세시에 그에게 나타나시어 “이재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 내가 너를 심히 번성케 하리니 나라들이 네게로 쫓아 나리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하심으로 그에게 아브라함이란 이름을 주신 것입니다. 이 이름의 뜻은 열국의 아비, 많은 국민의 아버지란 뜻으로 여기서 그의 자손이 열국인 많은 국민임을 알 수 있습니다(창17:5-7).

2. 아브라함의 믿음의 성장

아브라함은 그의 의를 본문에서 밝혀주는 바와 같이 백세 때 얻은 것이 아닙니다(롬4:19-22). 이미 창세기 15:1절 이하에서 아브라함이 의를 얻게된 언약과 믿음이 나와 있습니다.

(1) 아브라함이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는 씨에 대한 언약이 없었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고 하시는 약속만 받았습니다(창12:2). 그래서 그 후에 하나님께서 이상 중에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어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고 말씀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고 대답했던 것입니다(창15:1,2). 이때까지 아브라함은 의롭다함을 얻지 못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그의 후사가 될 씨에 대한 약속을 주셨고 아브라함이 그 하나님의 언약을 믿음으로 그에게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고 하신 것입니다(창15:4-6).

(2) 아브라함은 99세시에 움직이지 않는 바른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나이 99세시에 그에게 다시 나타나시어 아브라함이란 이름을 주시고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고 다시 그의 언약을 확실하게 확인시켜 주신 것입니다(창17:19).

오늘 본문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 아브라함의 완숙한 믿음은 이때에 시작된 것입니다. 그는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아내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았지만 (창17:15-18),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히 섰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다고 했습니다.

3. 아브라함의 의에 동참할 자격자

우리는 본문 23절에서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얻은 의가 우리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 우리가 가진 믿음은 아브라함보다 더 구체화된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씨로부터 태어나실 메시야에 대한 언약을 믿었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의에 동참할 우리의 믿음은 어떤 믿음이냐?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라고 했습니다.

(2) 예수의 사역은 메시야의 확실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메시야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실 여자의 후손이기 때문에 그의 죽으심과 또한 그의 부활하심이란 그가 하셔야 할 절대적인 요건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예수를 믿을 때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은 것처럼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라 우리도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의 죽으심은 우리의 범죄 함을 위함이니 그의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의 사유하심을 받은 것입니다. 또한 그의 살아나심은 사죄의 증거로 반드시 있으셔야하는 것입니다. 죽으심으로 끝났다면 사죄의 근거가 없어집니다. 다시 살아나신 일은 의의 증거가 됩니다.

결 론 :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에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인내로 그 약속을 기다리게 하십니다. 그 후에 때가 이르면 반드시 결실케 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의 씨는 25년 후인 100세시에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그 후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약속된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통하여 지금 아브라함의 자손을 하늘의 못 별처럼 번성케 하셨습니다. 이제 아브라함에게 최종적으로 약속하신 축복으로 우리도 장차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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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5장

◆ 밤중소리 01-13 | VIEW : 1,190

≈ 26 ≈ 하나님과의 화평

(본문 : 로마서 5 : 1 - 2)

서 론 : 바울은 성도들이 믿음으로 의를 얻은 결과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한다고 했습니다. 의를 얻은 사람의 특권은 하나님과의 화평입니다. 그리고 의를 얻은 사람의 생활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은 후에도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리지 못한다면 율법아래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처럼 두려움과 정죄 의식에 사로잡히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후에도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생활을 못한다면 세상에 얽매인 생활 속에서 지난날의 육신의 정욕과 탐심에서 벗어날 길이 없을 것입니다.

1. 믿음으로 의를 얻은 우리

화평이란 말은 화목, 평안, 평강을 뜻합니다. 이 말씀이 많은 경우 화목을 누리게 되었다 란 말로 풀이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를 얻었다면 그것은 곰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I) 믿음으로 의를 얻은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를 얻기 전 까지는 하나님과 화목한 사이가 아니었습니다. 화목이 아니라 원수지간으로 하나님을 거역했으며 하나님을 멀리했습니다. 그런 우리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아 화목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은 먼저 하나님과의 원수의 담이 헐어져야 합니다. 원수의 담이란 말할 것도 없이 우리의 죄악을 말합니다. 이 죄악의 담이 무너지지 아니하고는 화목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 담을 허시는 화목 제물이 되심으로 이 같은 화목이 가능케 된 것입니다(엡2:14-18).

하나님과의 화평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새롭고 싼 길이 열려야 합니다. 이 길은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열어 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마지막 외치심과 함께 성소의 휘장 한 가운데가 찢어졌습니다. 그 찢어진 휘장 한가운데의 길이 하나님과의 화평을 위해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입니다. 이길 외엔 다른 아무런 길이 없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선 일이 없음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행4:12).

하나님과의 화평은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어야 가능합니다. 탕자가 입고 있었던 옷을 벗기고 아버지께서 준비하신 새로운 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이 새 옷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의의 옷입니다. 이 옷을 입지 못하면 하나님 앞에 나아 갈 때 화평은 고사하고 진노를 면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롬5:9).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게된 것은 이처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된 사람은 하나님과의 화평의 생활에 들어가야 합니다. 믿음으로 의를 얻

은 사람들은 어떻게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리느냐?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린 사람의 생활은 어떻게 나타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화평의 생활은 첫째로 하나님께 대한 예배로 나타납니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인 것입니다. 영이신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를 통해서 화평의 교재를 이루십니다(요4:23,24). 다음에 하나님과의 화평은 기도로 나타납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소원의 간구로 하나님과의 화평의 표시입니다. 진실한 간구는 언제나 하나님의 자비하신 손길과 응답이 나타납니다(시145:18,19).

다음에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는 생활에 들어간 성도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새로운 삶에 들어갑니다. 성경은 이에 대하여 분명한 말씀으로 하나님과의 화목이 이루어진 자들의 생활에 대하여 이처럼 말씀하고 있습니다.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20).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했습니다(고전10:31).

2. 믿음으로 은혜에 들어간 우리

믿음으로 은혜에 들어간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한다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서 있다는 말은 우리가 지금 서 있는 우리의 영적인 장소를 말합니다. 이 자리는 곧 은혜에 들어간 자리라고 밝혀 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는 다른 자리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자리인 것입니다. 믿음과 은혜란 말은 각기 다른 뜻을 나타내고 있기는 하지만 서로 연결된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 출발점이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하나님의 은혜 안에 들어갈 길이 없습니다.

(1) 그러므로 은혜 안에 들어갔다는 말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는 뜻입니다. 은혜의 문은 구원의 문인데 이 문은 믿음으로만 들어갑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들어감을 얻은 사람은 이미 영생을 얻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후사가 된 사람들입니다.

(2) 아무나 믿음으로 은혜 안에 들어 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나 은혜는 사람이 자기 힘이나 능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선물이란 모든 사람들에게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엡2:8 ; 요 4:10 ; 행 2:38).

믿음은 모든 사람이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살후3:2).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들이 있다고 하셨습니다(행13:48 ; 엡1:4).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주실 자들에게 성령을 주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고 의롭다 하심을 주시고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고전12:3 ; 롬8:9).

(3) 그리고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은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란다는 말은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소망을 말합니다. 믿음으로 의를 얻어 하나님의 은혜에 들어간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소망을 가지고 말할 수 없는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영광은 하나님의 후사의 영광인데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라고 했습니다(롬8:17,18). 우리는 아직 장래 우리에게 나타날 소망을 어떻게 누리게 될 것인가에 대한 분명한 해답을 얻을 수 는 없지만 장차 주님이 나타나심이 되면 그와 같이될 줄을 안다고 했습니다(요3:2,3). 이 같은 소망을 가진 자의 생활태도란 분명합니다. 즐거워하는 생활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현실에 즐거워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장차 나타날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고난 중에도 이 소망을 가지고 즐거워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난에 참여하는 일에 왜 즐거워해야 하는 것인가? 하나님의 영광에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할 수 있는 확실한 하나님의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결 론 :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일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들어가는 일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합니다. 의를 얻은 사람은 이미 하나님과의 화목이 이루어진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화목을 위한 모든 값을 다 치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화평을 누리게 된 사람들이니 화평을 누리는 생활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소망의 생활에 들어가야 합니다.

≈ 27 ≈ 성도의 환난과 소망

(본문 : 로마서 5 : 3 - 4)

서 론 : 그리스도인의 생애에 환난이 뒤따른다는 사실은 누구나 무시하거니 경히 여길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이 환난에 대하여 잘못 인식하고 환난에 성경적으로 대처하는 슬기로운 생활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은 신앙생활의 손실은 말할 수 없이 큰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환난으로 말미암은 유익을 깨달아 우리의 생활에 환난이 올 때 이를 지혜롭게 대처하여 손실이 아니라 유익을 가져오도록 해야 합니다. 환난은 신앙생활의 파탄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안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그의 생애에 찾아오는 환난을 통하여 놀라운 영적인 풍성한 결실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1. 환난 중에 즐거워하라

믿음으로 은혜의 자리에 들어간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며 즐거워하는 생활을 할 뿐 아니라 비록 우리 앞에 환난이 온다고 해도 오히려 즐거워한다고 했습니다. 참으로 중생한 성도들의 생활은 범사에 감사하는 생활이기 때문에 환난이 온다고 해도 즐거워하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환난이란 말은 ‘들립시스’로 억누른다. 괴롭힌다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 상태를 말합니다.

(1) 우리가 환난을 당하는 이유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환난이란 고통이 수반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자체를 받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 님께서도 필요 없이 아무에게나 환난을 주시지 아니하십니다. 처음에 인간 사회에 환난이 도래한 것은 죄로 말미암은 결과입니다. 아담이 이마에 땀이 흘러야 식물 을 먹고 살 수 있게 된 것이라든가 하와가 잉태하는 고통을 받은 것 등은 죄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우리들의 생애에 당하는 환난이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의 죄로 인한 것임을 가리켜 주고 있습니다(레26:14-20).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자신의 죄와는 상관없이 하나님이 허락하심으로 찾아오는 경우의 환난도 있습니다. 욥의 경우가 그러했습니다(욥1:11-12). 이 환난은 자신이 원하든 원치 아니하든 불가피하게 찾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환난에 동참하는 환난도 있습니다(계1:9). 이 환난은 그리스도인들이 기쁨으로 동참해야 할 환난입니다.

(2)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환난을 주시는 이유도 여러 가지입니다. 첫째로 우리가 범한 죄의 형벌로 주시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다윗 왕의 경우가 그러했습니다(삼하12:9-12).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죄는 사유함을 받지만 그 죄에 대한 형벌은 반드시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 형벌이 하나님의 징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히12:8). 다음에 그의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려고 환난을 주실 때가 있습니다(대하15:4). 탕자는 분명히 그 아버지의 아들이었습니다. 그가 비록 아버지 집을 떠나 방탕한 생애를 지내고 있었지만 그 아들의 지위는 살아지지 아니했습니다. 그가 흉년을 만나 돼지 치는 집의 목동으로 일하면서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를 먹기에도 주린 것은 그가 당한 환난을 통해서 아버지께로 돌아오게 하시게 위해서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눅15:11-24).

우리가 당하는 환난은 또한 믿음의 연단을 위해서 주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 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벧전1:7). 그리고 또한 우리들의 생활에 환난이 따르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대로 우리의 생애를 인도하시기 위해서입니다(신8:3).

(3) 그리스도인들이 환난을 당할 때 여러 가지 모습을 나타내 보입니다. 낙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잠24:10). 이런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일을 맡길 수 없으며 하나님의 사역 자로 쓸 수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주시는 환난을 거역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번번이 거역했다가 수다한 징계를 맞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에게 환난이 닥쳐왔을 때 하나님 앞에 불평합니다. 이 사람들에게는 그 환난이 더 오래 계속될 것입니다.

환난을 만났을 때에 성도들의 신앙적인 태도는 먼저 자신에게 온 환난에 복종하는 자세입니다(욥1:20,21). 다음에 성도들은 그가 당하는 환난의 날에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시18:6, 34:17). 그리고 환난 날에 성도들의 취할 태도는 하나님께 대한 의뢰입니다(시37:39, 46:1). 다음에 환난을 당한 성도들은 그 환난 중에 인내해야 합니다(롬12:12). 마지막으로 환난을 당한 성도들의 가장 높은 신앙적인 자세는 즐거워하는 자세입니다. 오늘 본문에 있는 말씀에서도 “즐거워하느니라”고 하셨고, 또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약 1:2-4).

그러면 누가 환난 중에 즐거워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아무나 즐거움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환난 뒤에 오는 결과를 바라 볼 수 있는 사람들만이 즐거움을 가질 수 있습니다.

2. 환난은 인내를 이룬다.

사도 바울이 환난을 즐거워하는 이유로 맨 마지막에 소망을 이루는 줄 알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는데 그 과정이 몇 가지 들어가 있습니다. 환난은 인내를 이룬다고 했습니다.

(1) 환난은 성도들로 어려움 속에서 인내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듭니다. 환난은 일정한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환난이 찾아오고 물러서기까지는 일정한 기간이 있습니다. 그 기간은 하나님만이 아시는 기간입니다. 우리가 그 환난의 기간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인내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져야 할 인내심을 하나님은 이처럼 환난을 통해서 공부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2) 환난 중에 인내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환난을 당했을 때 그 환난을 인내로 이길 사람들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눅8:15).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라보고 즐거워하는 자들입니다(롬5:2). 다음에 믿음의 시련으로 환난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약1:3). 하나님은 환난을 통해서 그의 자녀들에게 인내의 훈련을 시키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인내의 훈련을 통해서 소망의 경주에 승리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3. 인내는 연단을 이룬다.

연단이란 말은 ‘도키메’로, 이 말의 뜻은 인정된 성격이나 기질, 자격, 신분을 말합니다. 이 말은 어떤 정해진 목적을 위해서 맹렬히 연습시켜 순수한 것으로 증명되게 하는 것입니다. 연단은 시련과 다릅니다. 시련이 시작이라면 연단은 그 결과입니다. 환난은 인내를 이루고 그 결과 연단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그 사람은 이미 가장 순수한 것으로 증명되는 결실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인내는 반드시 결실합니다(눅8:15). 성도의 인내의 결과는 “너희로 온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여 주신다”고 했습니다(약1:4). 인내는 마치 불 풀무 속에 들어가 새롭게 만들어지는 쇠붙이처럼 사람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새로운 사람으로 연단 시키십니다.

결 론 : 바울은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안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기업의 후사가 되는 일입니다. 이 후사를 이루는 일에 있어서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얻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롬8:17). 이 같은 우리의 소망은 환난의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여러분들이 환난을 당할 때 온전히 인내를 이루시기 바랍니다. 그 인내가 연단이 되어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품은 그 위대한 영광의 소망을 이루는 원동력이 될 줄로 아시기 바랍니다.

≈ 28 ≈ 사랑을 확증하신 하나님

(본문 : 로마서 5 : 5 - 8)

서 론 : 우리는 우리의 소망을 무엇으로 말미암아 가지게 되었는가? 우리의 구원이 어떤 대가를 치러 받게 되었는가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는 경우가 매우 적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 적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나타나셨는가에 대한 영적 지식이 부족한데서 온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소망의 근거가 하나님의 사랑에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같은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을 인간의 이기적인 사랑과 비교해서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1.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그리스도인의 소망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에 대하여 모욕적인 언사로 부끄러움을 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천국을 가보고 왔느냐” “천국이 어데 있느냐” “천국을 보여 달라 그러면 우리도 그리스도를 믿겠노라” 등등의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우리들의 소망을 헛된 것이 아닐까?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소망이란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닐까? 하는 불신으로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께 대한 소망은 결코 우리를 부끄럽게 아니 한다고 하셨습니다.

(1)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아니한다는 말은 우리의 소망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란 뜻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소망은 너무나도 값진 것입니다.?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의 성취까지에는 많은 시련의 관문을 거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소망이 불확실하여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면 우리는 불행한 사람이라고 말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신기루처럼, 우리가 확실하게 소유할 수 있는 실체가 아니라 공허한 것으로 끝나버리는 것이라면 그리스도인의 소망이야말로 부끄러운 소망, 헛된 소망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2) 그러면 우리의 소망이 부끄러운 것이 아닌 증거는 무엇인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소망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확실한 것이라고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증거란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 부은바된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부은바 되었다는 말은 ‘엑케오’란 말로 쏟아져 나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폭포처럼 쏟아진 사실이야말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소망의 확실한 증거가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부은 바 된 것이기 때문에 변함이 없으며 거짓이 없는 확실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며 이 성령은 또한 우리 속에서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시기 때문에 움직일 수 없는 확신을 심어 주시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으로 나타나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아니한 자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은 여인의 후손으로 메시야의 언약을 주시고 아브라함을 그 언약의 조상으로 부르시고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자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류 구원의 속죄의 제물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은 우리가 연약할 때, 경건치 아니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연약함이란 몹시 약하여 힘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것은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그런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선고는 사형입니다. “죄 값은 사망이라”고 선언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경건치 아니한 자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영원한 생명과 하늘에 예비된 영광의 후사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소망에 대한 분명한 증거가 됨으로 우리의 소망은 그 어떤 경우에도 부끄러움이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이 같은 소망이 없는 사람들이야말로 부끄러운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2.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나타난 사랑의 확증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의 위대함을 알려주기 위하여 인간의 극치한 사랑과 비교했습니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같은 사랑의 확증을 논함에 있어서 인간의 죽음과 연결 시켰습니다. 가장 위대한 사랑은 남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버리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사랑이 없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5:13).

(1)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하여 지신의 생명을 회생하는 일에는 두 가지 경우가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의인을 위한 경우요, 다른 하나는 선인을 위한 경우입니다. 그런데 의인을 위한 경우는 쉽지 않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한 의인이란 ‘디카이오스’로 결백한 사람, 공의로운 사람, 무죄한 사람을 뜻합니다. 쉽지 않다는 말은 가까스로 있다는 말로 거이 없다는 뜻입니다. 베드로를 위시한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님께 자신들이 죽는 자리에까지 주님을 따를 것이라고 맹세했습니다. 베드로는 다른 사람은 다 주님을 배반할지라도 자기만큼은 주와 함께 죽을 것이라고 장담했습니다(마26:35). 그러나 그들에게 생명의 위기가 왔을 때에 그들은 한결같이 도망쳐 버렸고 베드로는 계집종 앞에서조차 세 번씩이나 부인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 그런데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선인이란 말은 ‘아가도스’로 좋은 사람이란 뜻입니다. 물론 이 선한 사람이란 말속엔 의롭다고 하는 뜻도 포함되어 있지만 그 보다 사랑에 비중을 더 두고 있는 말로 의로우면서도 사랑이 많은 사람의 경우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처럼 의롭고 선한 사람이 우리 가운데 있다고 해도 그를 위해 죽어줄 사람이 얼마나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혹 있다고 했습니다. 어쩌다 보면 있을 수 있는 경우가 있다는 말입니다. 아마 선한 남편을 대신하는 일이라면, 선한 자식을 위한 경우라면 혹 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바울이 이 같은 경우를 든 이유는 무엇입니까? 인간의 사랑은 아무리 고상해도 목숨을 바쳐가며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 것입니다. 인간의 사랑은 이기적인 사랑이며 대가 적인 사랑입니다.

(3)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의 사랑을 증명함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했습니다. 인간은 의인에게도, 선인에게도 베풀 수 없는 사랑을 우리 하나님은 죄인들에게 나타내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말씀하신 죄인이란 하나님을 대척하는 자를 말합니다. 마귀의 종이 되어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죄악을 행하고 있는 자를 말합니다. 의와 선이라고는 추호도 없는 죄인을 말합니다(롬3:10-18). 이 같은 죄인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이 말할 수 없는 은혜로 우리에게 나타나신 것은 인간의 사상과 사랑을 초월하신 신비적인 사랑이신 것입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안다”고 했습니다(요3:16).

결 론 : 이것은 하나님의 큰사랑이요 큰 구원입니다.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히2:3).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은 바로 이 같은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이 같은 사랑이 또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마음속에 부은바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소망은 절대로 헛된 것이 아닙니다.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이 소망을 견고히 잡고 믿음의 선한 싸움에 승리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 29 ≈ 구원받은 자의 생활

(본문 : 로마서 5 : 9 - 11)

서 론 :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 편에서 귀중한 대가를 치른 결과에서 온 것입니다. 그 아들의 피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아니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아무 것도 받을 것이 없으며 우리의 의나 구원이나 소망은 생각할 수조차 없는 일들입니다. 그러므로 이곳에서 바울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된 그리스도인들의 구원함을 얻은 이후의 생활에 대하여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같은 말씀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란 표현이 계속적으로 세 번씩이나 나타나 있음을 보게 됩니다. 9절에서 “그로 말미암아” 10절에서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11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라고 말함으로써 이 모든 일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은혜임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1. 그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은 우리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누리게 된 의에 대하여 로마서에서 특별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죄인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의는 순전히 은혜임을 밝히면서 이 같은 하나님의 은혜는 믿음으로 얻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믿음은 그 믿음자체에 의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의 피가 그 근원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1)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의는 그리스도의 피가 그 발생의 근원입니다. 그리스도의 피에는 사죄의 은총이 있습니다.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히9:22). 죄 값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이 사망은 곧 피 흘림을 말합니다. 그러나 죄인의 피 흘림으로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죄 없는 자의 피 흘림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율법을 따라 짐승으로써 피 흘림의 제물을 대신했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짐승의 피 흘림은 하나님의 어린양 되신 예수님의 피 흘리심임이 증거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피 흘리심으로써 정결함을 얻은 것입니다(히9:14, 22 ; 마26:28).

(2) 그리스도의 피는 그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의를 주십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사죄뿐 아니라 우리에게 깨끗함을 주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면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케 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요일 1:7-9). 그리스도의 피는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었고 율법의 정죄에서 벗어나게 하였으며 우리로 그리스도안에서 율법의 의를 이루는 일에 그리스도와 연합되게 하였습니다.

(3) 의롭다하심을 얻었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지니고 있는 의는 “얻을 것이라”가 아닙니다. “얻을 수 있다”가 아닙니다. “얻었느니라”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은 모두 과거적인 것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이 일은 그리스도께서 이미 다 이루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소유는 “그리스도께서 앞으로 하실 일에 대한 소망으로 가질 수 있을 것이다”가 아닙니다. 이미 다 이루어 놓으신 그 의를 이미 소유한 사람이 되기 때문에 “얻었느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공로를 보시고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은혜로 주셨기 때문에 아무에게나 부담이 없습니다. 넉넉히 소유할 수 있고 넉넉히 이길 수 있으며 넉넉히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같은 소유는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소유로 주셨기 때문에 조금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2.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결과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결과에 대하여 세 가지로 밝혀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란 것이고 둘은 하나님과 더불어 화목하게 되었다는 것이요 세 번째는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1) 그리스도께서 죽기 이전에는 모든 인류가 하나님과 원수된 자리에 있었습니다.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다는 말은 인간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그리스도안에 거하지 못하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과 원수된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목이 안되었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의 원수는 하나님이 진노아래 있게 됩니다. 진노란 말은 다시는 노여움에서 돌이킬 수 없는 마지막 격노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인내하심의 한계를 넘은 노여움이십니다(벧후3:8,9). 하나님은 이 노여움으로 인류를 심판하십니다. “한번 죽은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하셨습니다(히9:27). 이 심판은 사람이 죽은 후에 누구나 면할 수 없는 영적인 심판입니다(녹16:19-31). 그리고 이 같은 하나님의 진노는 인류의 종말에 흰 보좌심판대 앞에서 모든 인류에게 일시에 벌어질 것입니다(계20:12-15).

(3)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우리는 하나님과 더불어 화목 되었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은 사죄는 또한 하나님과의 화목과도 연결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가 된 일은 우리의 죄로 말미암은 것이었는데 그리스도의 피로 그 죄가 용서받았다면 하나님과의 화목은 자연적인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은 또한 화목제물로서의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골1:20). 그러면 하나님과의 화목의 뜻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났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원수된 자리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명분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 아버지의 기업의 후사가 되었다고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은 인간의 최대의 영광입니다.

(4) 다음에 바울은 하나님과 화목된 자의 당연한 결과로 구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화목된 자의 구원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3. 화목된 자로서의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생활

하나님과 화목된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은 어떠해야 하는가? 이에 대한 해답을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화목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즐거워한다는 말은 ‘카우카오마이’로 자랑한다. 뽐낸다는 뜻입니다.

진노에서 벗어났으니 두려워 할 필요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죄책에 눌려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구원을 얻었은즉 담대함으로 소망가운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 같은 은혜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확실하고 영원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겠느냐”고 말했습니다(롬8:35).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신 데 누가 정죄하겠느냐”고 했습니다(롬8:33).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느냐고 했습니다(롬8:31).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냐”고 했습니다(롬8:32).

결 론 : 그러므로 오직 즐거워하는 생활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전부가 되어야 합니다. 즐거움이 없는 생활은 아직 은혜가운데서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이 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성장하여 즐거워하는 생활가운데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과 화목된 이 한가지 사실을 우리가 깨닫는다면 우리의 생애는 새로운 단계로 들어가게 됩니다. 환난 중에도, 고난 중에도, 핍박 중에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주석 설교 \ 123

(본문 : 로마서 5 : 12)

서 론 : 한사람으로 말미암은 죄가 인류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에 대하여 안다는 것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의가 온 인류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에 대한 해답을 얻는 일에 중요한 열쇠가 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은 죄로 인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고 또 이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다는 사실은 성경해석과 인류의 구속사에 대한 바른 해답을 주는 길잡이가 되는 것입니다.

1. 죄가 들어오기 이전의 세상

우리는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는 말씀에서 죄가 들어오기 이전의 세상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죄가 들어오기 이전의 세상은 “좋았더라”의 세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만물을 엿새동안에 창조하신 후 이처럼 결론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하신 것입니다(창1:31).

땅에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들이 무성하여 인간의 충족한 식물로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지면에는 육축과 여러 종류의 짐승들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온 지면에 깔려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바다에는 각종 물고기들로 채워져 넓고 깊은 바다 속을 마음껏 헤엄쳐 놀고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특히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은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그들의 거처인 에덴에서 그곳에서 탐스럽게 결실하고 있는 여러 나무의 과실을 먹으면서 행복스럽게 살아나가고 있습니다.

죄가 들어오기 이전의 세상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 찬 세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좋았더라”의 결실이었기 때문에 그 창조 가운데는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했습니다.

2.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죄

이 같은 세상에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들어온 것입니다.

(1) 아담은 생명 언약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명하신 생명언약은 이러했습니다.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창 2:16,17). 언약이란 인격체로 창조된 인간에게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사실은 그가 하나님과 같은 인격체로 지움을 받은 사실을 의미해 주는 것입니다. 아담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의 조건으로 그가 순종해야할 한가지 언약을 받은 것입니다.

이 언약은 아담이 능히 지킬 수 있는 합리적인 언약이었습니다. 우리는 모세에게 주신 율법을 인간에게 주는 다른 또 하나의 생명언약인줄로 잘못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율법은 생명언약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선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롬3:20, 갈2:16, 2:21). 율법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에 있어서 그 구원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해 주신 것입니다.

(2) 아담의 죄에 뱀이 가담한 것은 죄의 기원을 가르쳐 줍니다. 아담의 범죄는 인간을 죄의 종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롬6:17,20). 죄의 종이란 말은 사단의 종이란 말과 같은 뜻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사단으로부터 죄가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3장에서 밝혀주고 있는 죄의 기원은 뱀으로부터 시작이 되기 때문에 그러면 뱀이 사단이었느냐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고 했습니다(창3:1). 뱀은 하나님의 창조물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뱀의 창조 역시 “심히 좋았더라”고 하신 하나님의 선하심에서 예외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창1:31). 그러면 어찌하여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했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인가? 간교하다는 말은 간사하고 교활한 성품을 나타낸 말입니다. 이것은 간교한 사단이 뱀을 이용하여 하와를 미혹했기 때문에 뱀이 간교한 존재로 등장한 것입니다. 뱀에게는 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뱀이 하와에게 말을 건넨 것입니다. 그리고 뱀은 하와를 하나님과 같이 되게 한다는 유혹으로 선악과를 먹게 했습니다. 이 같은 간교한 지혜는 들짐승 중에 하나님께서 주신 일이 없었습니다. 사단이 뱀 속에 들어가 뱀을 이용하여 하와를 죄로 인도한 것입니다.

(3) 죄를 지은 장본인은 하와였지만 아담이 모든 책임자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담도 그 실과를 먹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생명 언약을 주셨습니다. 아담은 아내인 하와에 대한 책임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눈이 밝아진 것은 하와가 그 실과를 먹은 후인 것이 아니라 아담이 먹은 후였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 지라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로 알았다”고 했습니다(창3:6,7). 우리는 여기서 죄가 무엇인가? 이에 대한 해답을 내릴 수 있게 됩니다. 죄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에는 경중이 없습니다. 단지 실과를 먹은 일이 사망에까지 이르게 된 죄가 되느냐? 어떤 사람들은 이처럼 반론을 제기합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안 먹은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요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다는 그 사실이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아담과의 언약은 불순종에 대한 대가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신 사망선언이기 때문에 이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피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4) 불순종의 결과는 아담에게 결정적인 것이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실 때 아담은 이처럼 말했습니다.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3:9,10).

아담과 하와는 그들의 벗은 몸을 부끄러워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벗었으므로”라고 말한 아담은 실과를 먹기 이전에도 벗은 몸이었습니다. 그런데 새삼스럽게 벗은 몸에 대하여 두려워하고 부끄러워하게 된 것은 선악을 알게 되었고 눈이 밝아졌기 때문입니다. 뱀이 하와에게 유혹한 말이 정말로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모든 것이 선한 에덴에서 그들은 악을 알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알게되었을 뿔 아니라 그 악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 악의 종이 된 것입니다. 그들의 눈은 악을 바라보는 일에 밝아졌습니다. 그 결과 심히 좋고 선한 모든 것에 대하여 정욕과 탐심과 음욕을 품고 바라보는 눈이 새롭게 열린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가 끊어지게 된 것입니다.

3.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죄의 결과

아담 한 사람의 죄는 인류사회에 다음 두 가지 중대한 사실을 들어냈습니다.

(I) 죄가 세상에 들어 왔다고 했습니다.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하신 이 세상에 악한 죄가 들어 온 것은 아담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아담은 이 세상에 죄를 들여 온 최초의 죄인이 된 것입니다. 아담이 들여 온 이 죄는 심히 좋았던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저주를 가져왔습니다. 인간의 고난도, 만물의 탄식도, 땅의 저주도 아 아담의 죄로 인한 것입니다.

(2) 사망이 왔다고 했습니다. 사망이란 육신의 주검을 말합니다. “정녕 죽으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선언에 따라 흙으로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사망의 선고는 당장 실현되는 주검의 선고가 아닙니다.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라”는 선언이었기 때문에 아담은 땅에서 삶의 제한된 지속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 같은 아담의 저주는 그 자손들에게도 적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주검의 선언은 신약시대에 와서 영원한 주검인 영적인 주검까지 포함된 뜻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계20:14,15).

결 론 : 이처럼 한 사람 아담의 죄는 전 인류에게 죄와 사망을 선사했습니다.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고 했습니다. 아담은 최초의 죄인이 되었고 그 결과 죽게 되었습니다. 죄인인 아담은 자기 형상을 따라 자기와 같은 죄인을 생산하게 되었으며 그들도 역시 아담과 같은 죄인으로 사망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 죄에서 건지심을 받고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되며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어 아담의 죄 값을 치르게 하심으로 우리에게 새로운 소망을 주신 것입니다.

≈ 31 ≈ 죄와 율법

(본문 : 로마서 5 : 13)

서 론 : 죄가 율법이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그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죄와 율법과의 관계를 살펴본다면 죄가 율법보다 훨씬 앞서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증거로 사망을 들 수 있습니다. 사망은 죄 값으로 온 것이기 때에 비록 죄가 율법으로 죄로 드러나 정죄 받기 이전이라 할지라도 인간에게 사망이 계속되어 왔다는 것은 죄가 있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년 죽으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선언에 따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은 아담과 하와는 죽게 되었으며 이것이 죄 값으로 인한 사망이라고 성경에서는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롬5:12).

1. 율법이 있기 이전의 죄

율법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명을 말합니다. 이처럼 모세가 계명을 받기 전에도 이 세상에는 많은 인류들이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 당시에는 율법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왔건 죄가 아니지 않느냐는 의문이 생겨나게 됩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아담의 범죄로 인한 죄가 존속하고 있었습니다. 아담은 그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죄인이 되었습니다. 이 아담의 죄는 아담의 죽음으로 아담과 함께 매장된 것이 아닙니다. 아담의 자손들에게 그의 죄가 그대로 계속되어 내려왔습니다. 왜냐하면 아담과 같은 죄가 이 세상에 계속하여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아담이 범한 죄의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아담과 똑같은 죄로 말미암은 환경 속에서 살아가다가 나중에는 아담에게 내려진 저주의 주검을 아담처럼 받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 죄는 율법과는 상관없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2) 다음에 마음에 새겨진 율법을 거슬린 죄가 있습니다. 인간은 다른 피조물과는 달리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 하나님의 거룩하심, 하나님의 지혜로 우심 등 하나님의 이 같은 형상이 인간에게 어느 정도 심겨졌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담이 창조하심을 받은 후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가 가능했던 것입니다. 아담이 범죄 한 후 이 같은 하나님의 형상은 살아졌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인간의 타락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타락은 안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그의 인격가운데 나타낼 수 있는 능력은 상실했지만 그 그림자는 그대로 살아 남아 있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양심이라고 말합니다.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롬 2:14).

(3) 아담에게는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아래 서 있는 하와에게 뱀은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고 유혹했습니다(창3:5). 사단의 이 같은 유혹은 겉으로는 사실로 나타날 수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단이 하와를 유혹했을 때에 하와에게 한 말은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와가 선악과를 먹었을 때에 하와는 하나님처럼 선악을 알게 되는 눈이 밝아진 것이 아니라 사단의 악을 받아 드리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 것입니다. 에덴에는 악이 존재치 아니했으며 아담에게는 악의 그림자마저도 없었기 때문에 악을 알 필요가 없었으며 또한 선악을 대조하는 지각도 필요 없었습니다. 아담의 밝아진다는 눈은 육신의 눈이었고 이 눈이 사단의 말처럼 밝아지자 그의 몸에 정욕과 탐심과 시기와 투기와 부끄러움이 들어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선악으로 갈라지게 된 것입니다. 아담은 이제 선을 알고는 있었지만 행할 능력은 상실해 버렸고 악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함인 줄 알았지만 이 악을 물리치고 그 악을 이길 수 능력을 상실해 버린 것입니다(롬7:23).

2.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했다는 말은 무엇인가?

율법이 있기 전에도 죄가 세상에 있었지만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했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말인가?

(I) 이것은 죄가 아니란 말이 아닙니다. 여기지 아니했다는 말은 인정치 아니했다는 말인데 이것은 율법적인 정죄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 죄인들입니다. 이 같은 증거는 양심의 율법이 인간의 마음속에서 서로 송사 함으로 결국은 자기 자신을 죄인으로 들어내 놓고야 마는 것입니다.

(2) 죄에 대한 어떤 형벌을 제정치 아니했다는 말입니다. 율법은 나타난 죄에 대한 보응과 형벌이 가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이 말은 율법이 밝혀주고 있는 죄에 대한 응징입니다(마5:38). 죄에 대한 응징이 없는 율법은 무의미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율법이 없을 때에도 분명히 죄는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그 죄에 대한 응징이 없었습니다. 법 조항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법률에 기록되어 있지 않고 있는 죄는 법으로 다스리지 못하고, 죄임에는 틀림없지만 형벌은 면죄되는 경우가 많이 있는 것입니다. 나중에 이 같은 미비한 점을 보충해서 법을 개정합니다. 일단 법이 개정되어 그것을 죄로 다스리게 된다면 당연히 응징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3) 죄를 죄로 들어내지 아니하였을 뿐이란 뜻입니다. 율법의 가장 뚜렷한 사명 중에 하나는 죄를 죄로 들어내 놓는데 있습니다. 인간은 세상에 죄악이 관용 될 수록 그 마음의 율법인 양심이 더럽혀 가기 때문에 죄를 죄로 인정치 아니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의 종으로 타락한 인간의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인간들에게 그들의 죄를 분명히 나타내기 위하여 범죄하여 타락한 인간의 마음이 아니라 영원히 지을 수 없고 변경시킬 수 없는 돌비에 죄를 죄로 들어내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법을 새겨 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의 없어짐이 쉬우리라”고 주님이 말씀하신 것은 율법의 영원성을 나타내신 것입니다(눅16:17). 그러므로 율법이 존재하는 한 인간의 죄는 영원히 숨길 수 없으며 율법에 의한 정죄를 면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3. 율법이 있은 후의 죄

인간 세상에 율법이 필요한 이유는 인간의 죄와 깊은 관계에서인 것입니다.

(1) 율법이 인간의 죄를 들어냈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죄를 범하고 있으면서도 그리고 그에 대한 보응에 대하여 알고 있으면서도 좀처럼 그 죄를 시인치 않고 있으며 죄에 대한 두려움을 외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 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롬12:28-32). 그러나 율법이 존재한 후로는 사람들이 자신의 죄에 대하여 핑계할 수 없게 되었으며 그 죄의 대가에 대한 하나님의 선언을 외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2) 율법이 인간의 죄를 정죄 합니다. 율법은 인간에게 무엇이 죄인가에 대하여 제시해 주며 또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보여줍니다. “무릇 율법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갈 3:10).

결 론 : 율법은 인간의 죄 때문에 주신 것입니다. 그 율법은 죄에 대한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하시게 하려는 목적에서가 아니라 죄를 죄로 드러나게 하시려는 목적에서 주셨습니다. 인간은 이처럼 하나님의 완전하신 율법에 비추어 자신의 죄를 바라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를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생명을 얻고 소망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깊이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 32 ≈ 오실 자의 표상인 아담

(본문 : 로마서 5 : 14)

서 론 : 아담은 그리스도의 상징적인 존재로 등장합니다. 아담은 인류에게 죄와 사망을 가져왔고 그리스도는 인류에게 의와 생명을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표상이란 말은 보통 상징이란 말로 해석하지만 헬라어의 뜻은 ‘튀포스’로, 어떤 자국을 의미합니다. 무엇에 얻어맞은 것처럼 그 자국이 나타난 현상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담을 볼 때 필연적으로 그리스도를 필요로 함을 알게 됩니다. 아담과 그리스도와의 두 존재는 얻어맞은 자국처럼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연관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담의 죄를 바라볼 때 속죄의 제물로 오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1. 사망이 왕 노릇한 모세 때까지의 세상

지금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왜 죄인이라고 하는가? 에 대한 바른 이해를 못하고 있습니다. 내가 왜 아담과 똑같은 죄인이 되어 아담이 선언 받은 사망을 받아야 한다고 하는가? 이에 대한 해답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담의 대표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은 아담을 인류의 대표자로 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사람 아담을 창조하신 후 그에게 축복하셨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하셨습니다(창1:28). 이 축복의 선언은 아담 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와 그의 자손들에게까지 미치는 축복의 선언입니다. 이와 똑같이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신 선언에서 죽는다고 하신 말씀은 아담이 먹었을 때 비록 아담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생산할 그의 자손들까지 포함시킨 언약으로 아담이 인류의 대표자의 자격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같은 아담의 대표성을 깨달아 인정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대표성을 깨달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와 생명의 역사가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미친다고 하는 진리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2) 그러면 이 같은 증거는 무엇으로 알 수 있는 것이냐?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하였다”는 것으로 그 증거가 나타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인간 사회에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비록 인간의 죄가 율법에 의하여 정죄 받지는 아니했지만 인간사회에 여전히 죄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은 모든 인류에게 찾아온 사망으로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망이란 반드시 죄의 대가로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2. 오실 자의 표상인 아담

예수 그리스도는 반대적인 의미에서 아담의 상징적인 인물입니다. 아담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1) 아담의 불순종은 하나님의 심판을 보여 주셨습니다. 생명이 넘치는 세상에 아담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심판이 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죄에 대한 응징으로 사망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의 생활에도 죄로 인한 저주가 임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아담의 죄를 바라볼 때에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그 죄에 대한 심판에서 찾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공의로우심을 인간들에게 율법으로 나타내셨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롬3:19). 예수님은 이처럼 우리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하나님의 심판을 대신 받으시므로 우리에게 마지막 아담이 되어 주셨습니다.

(2) 아담의 범죄는 하나님의 의를 보여 주셨습니다. 아담에게는 율법이 필요 없었습니다. 에덴에는 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오직 죄가 있는 곳에만 필요하며 율법의 임무는 그 죄를 정죄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범죄한 후에는 그가 죄로 인하여 타락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를 알아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으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셨습니다. 인간은 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어야 지난날의 영광의 자리를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죄에 팔린 인간은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의를 이루시어 인간에게 의를 주시는 의의 조상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3) 아담의 주검은 하나님의 영생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죽은 자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엡2:1). 죽은 자는 살아날 소망이 없으며 영생을 누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소망이 없는 인간들에게 영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심으로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요5:24).

(4) 우리가 여기서 결론 지을 수 있는 것은 아담의 실패는 완전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게 된 동기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담의 실패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더욱 크신 사랑을 받게 했습니다. 아담의 실패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더욱 크신 은혜를 나타내 보이시게 했습니다. 아담의 실패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더욱 풍성한 축복을 받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아담의 죄가 이 같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아담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사랑과 긍휼하심이 죄인들에게 이처럼 나타나셨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3. 아담과 그리스도의 대조

우리가 아담과 그리스도를 대조할 때 아담은 분명히 오실 자의 표상임을 알게 되는데 이 경우의 표상은 반대적인 의미에서의 상징인물로서의 표상인 것입니다.

(1) 아담은 첫 아담이요 그리스도는 마지막 아담이 되십니다(고전15:45) 첫 아담은 죄를 범한 사람이요, 그리스도는 이 첫 아담이 범한 죄 값을 치르시기 위해 마지막 아담으로 오신 분이십니다. 첫 아담의 허물을 마지막 아담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갚아 주심으로 죄를 범한 인류의 빚을 청산해 주셨습니다.

(2) 아담은 산영이 되었지만 그리스도는 살려 주는 영이 되었습니다(고전15:45). 산영이란 생령을 의미하며 이 영은 살아 있기는 했지만 죽을 수 있는 영이기도 했습니다. 아담이 범죄함으로 자신의 산영이 죽게 되었을 뿐 아니라 그의 후손의 영까지 죽게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살려 주시는 영으로 오셨는데 이처럼 아담으로 인해 죽은 우리의 영을 살려 주는 생명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살리심을 받은 영은 영원히 죽지 아니합니다.

(3) 아담은 육이 있는 자지만 그리스도는 신령한 자로 오셨습니다(고전15:46). 인간의 육은 흙으로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후패할 요소가 있으며 다시 흙으로 돌아갈 요소가 있습니다. 아담이 그 육신이 늙고 후패하고 결국 흙으로 돌아가게 된 원인이 여기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신령한 자이시기 때문에 그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은 자는 다 그의 형상을 본 받아 신령한 생명을 가지게 됩니다.

(4) 아담은 땅에서 났고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나셨습니다(고전15:47). 아담이 땅에서 났기 때문에 땅에서 난 모든 인류는 흙에 속한 아담을 닮게 되어 한결같이 죄인이요 사망아래 있지만 그리스도는 하늘에 속한 자이심으로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은 다 하늘에 속한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결 론 : 아담은 첫 사람이요 그리스도는 둘째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고전15:47). 첫 사람 아담은 실패하므로 죽었으며 그의 자손들도 다 죽을 수밖에 없지만 그리스도는 둘째 사람으로 새로운 인류의 표상으로 오신 분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첫 사람 아담의 죄나 사망과는 상관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지막 아담인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아담의 죄의 빚을 다 갚았고 둘째 사람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가진 새로운 사람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을 보고 거듭난 사람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 33 ≈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풍성한 은혜

(본문 : 로마서 5 : 15 - 16)

서 론 : 로마서 5장에서는 아담과 그리스도의 대표성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담은 인류사회에 범죄를 가져 온 대표자로 나타나 그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이 들어왔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으며 그리스도는 그와 대조적으로 인류사회에 의를 가져와 그로 말미암아 생명을 공급한다는 사실에 대하여 변증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곳에서 의와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라고 말씀하고 이 선물은 범죄 함으로 인간사회에 정죄를 가져온 것과 같지 아니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1.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은 선물

바울은 본문에서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은 죄와 사망을 선물이란 말로 표현하지는 아니했지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선물과 비교하는 의미에서 아담이 준 선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죄의 기원은 사단을 그 시발점으로 하고 있습니다. 에덴동산에는 죄가 없었고 아담에게도 죄의 품성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에덴동산에 사단이 등장하면서부터 사단의 유혹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단은 뱀을 그의 활동의 발판으로 하여 하와를 유혹하였고 아담과 하와는 이 사단의 유혹으로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의 죄를 범하게 된 것입니다.

(2) 그러나 그 불순종의 결과적인 책임은 아담에게 있었습니다. 아담은 사단이 동장하기까지는 불순종에 대하여 생각해 본 바조차 없었습니다. 선하기 만한 아담과 하와에게 불순종이란 상상할 수조차 없었던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신 명령은 이미 사단의 유혹을 바라보시고 하신 말씀이셨던 것입니다(창2:17). 아담의 참 순종은 사단의 유혹이 전제되었기 때문에 아담의 불순종은 사단의 유혹으로 말미암은 것일지라도 결과적으로 책임은 아담에게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3) 불순종을 택한 아담은 죄에 팔린 몸이 되었습니다. 이제 아담은 하나님과의 교통이 끊어졌기 때문에 아담에게 있어서 선은 하나의 환상이 되었고 죄의 세력이 아담을 지배하게 된 것입니다. 아담은 죄에 팔린 죄의 종이 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이처럼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치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고 바울은 고백하고 있습니다(롬7:14,15).

(4) 이 같은 아담의 신분은 그의 후손인 모든 인류에게 동일하게 나타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계약하셨고 아담에게 선언하셨지만 아담은 인류의 대표자로서 세우심을 받은 존재였기 때문에 아담 이후 모든 인류는 아담과 같은 동일한 운명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뚜렷한 증거가 인류에게 나타났는데 모든 사람들에게 왕 노릇 하는 죽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모든 사람이 죽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

14절에서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고 말씀하므로 허상인 아담은 물러가고 이제 실체이신 오실 자가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오실 자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1) 하나님은 아담의 범죄 전에 이미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아담으로 말미암은 죄와 사망에서 건져내고 의와 생명을 주실 예수 그리스도롤 예비하셨습니다. 아담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이 선하셨기 때문에 아담에게는 하나님의 섭리대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의 타락을 바라보시고 이미 그 죄를 소멸하고 의를 주실 뿐 아니라 참 생명까지도 주실 수 있는 놀라운 섭리가 서 계셨던 것입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고 바울은 탄성을 쳤습니다(롬11:33). 그러므로 우리는 그 어떤 경우에도 결코 실망하거나 낙심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아주 선하신 뜻에 의하여 우리를 그리스도안에서 예정하셨기 때문에 언제나 그 결과는 아름답고 좋은 것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처럼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하나님께서 뱀을 저주하실 때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하신 말씀은 이 같은 하나님의 섭리를 이때 밝히신 것입니다(창3:15). 이에 대하여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벧전1:20).

(2)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새 언약을 약속하셨습니다.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고 했습니다(사55:3). 이 같은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새 언약으로 성경은 이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으로 꽉 차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언약에 대하여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눅22:20).

아담의 언약은 그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생명대신에 죄와 사망을 가져왔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은 죄를 사유하고 사망을 승리하며 의와 생명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말미암은 값진 대가인 것입니다.

(3)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다고 했습니다. 이 선물은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입니다. 선물이란 아무런 대가없이 그저 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의 선물을 대가없이 그저 받았습니다. 다만 이 선물이 예수 그리스도이심과 하나님께서 이 선물을 주신다는 사실을 믿고 받으면 누구든지 이 선물의 수행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선물을 받은 사람이 그 내용이 무엇인지 조차 모르고 누가 왜 주신 것인지도 모른다면 이미 선물로서의 가치를 상실한 것입니다.

(4) 많은 사람이란 믿는 모든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은 그를 믿는 자에게 주시는 의와 생명입니다. 이 같은 선물을 주심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차별을 두지 아니하셨습니다. 인종의 장벽이 없습니다. 가문이나 지식의 장벽이 없습니다. 빈부나 신분의 차별이 없습니다. 수효의 다수의 장벽이 적용이 안됩니다. 그리스도안의 은혜를 받는 일에 아무런 요소도 장애 됨이 없습니다.

(5) 넘쳤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측량할 수 없이 풍성한 은혜라고 하셨습니다(엡3:8).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과 십자가위에서 자신을 속죄 제물로 드린 그리스도의 은혜는 그 풍성함이 측량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같은 풍성한 은혜가 강처럼 넘칩니다. 넘쳤다는 말은 넉넉함을 표현한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누구에게나 넉넉합니다. 구원 얻기에 넉넉하고 의를 얻기에 넉넉하고 생명을 얻기에 넉넉한 것입니다.

결 론 :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하심에 이름이니라”고 했습니다. 아담 한 사람으로 이 아담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심판은 결과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정죄에 이르게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선물은 그렇지 아니합니다. 많은 범죄란 인류의 범죄를 뜻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인류의 범죄로 인한 하나님의 은사는 모든 사람으로 의롭다 하심에 이르렀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사는 인류의 범죄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의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 34 ≈ 한 사람 아담의 죄와 한 분 그리스도의 의

(본문 : 로마서 5 : 17)

서 론 :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보여주고 있는 말씀은 죄와 의의 전가에 대한기독교 교리의 진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담과 그리스도를 비교하여 우리에게 오게 된 사망과 생명의 역사에 대한 교리적인 진리를 횃불처럼 밝혀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망이 왜 이 세상에 오게 되었으며 그 사망이 우리들 가운데서 어떻게 역사하고 있는가에 대하여, 그리고 생명이 우리에게 어떻게 왔으며 이 생명이 어떻게 역사하고 있는가 대하여 영적으로 완벽하게 설명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1. 한 사람으로 인한 범죄와 사망

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사망과 생명, 죄와 의에 대하여 매우 대조적으로 비교하면서 인간의 타락과 구원의 교리를 풀어가고 있습니다.

(1)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였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곳에서 특별히 이 “한 사람”에 대하여 강조 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는 “한 사람”의 범죄라고 했습니다. 여러 사람이 아닙니다. 18절에서 인간의 범죄에 대해서도 “한 범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9절에서도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이 같은 주장에 따르면 인간의 사망이나 인간의 정죄나 인간의 죄인 된 것은 오직 한 사람의 죄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아담의 자손으로 태어난 우리 인간들로 말미암아 사망이나 정죄나 죄가 오게 된 것이 아니라 오직 한 사람 아담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논리는 비록 아담의 자손 중에 선하고 의롭고 완전한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 역시 한 사람 아담의 죄로 사망과 정죄와 죄인 됨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2) 우리는 아담 안에서 무조건 죄인이 되었고 정죄를 받았고 사망의 지배를 받게 된 것입니다. 아담은 인류의 대표자로 하나님의 언약자가 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세우신 언약은 그를 대표자로 한 그의 모든 자손에게 미치는 것이었습니다. 아담은 이처럼 자기 자손들의 법적 대리인의 자격까지 겸해서 언약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한 나라를 대표하는 왕이 다른 나라와 조약을 체결했다면 그리고 그 조약의 조건에 의해 그 왕이 책임을 지게 되었다면 그 왕의 지배아래 있는 모든 백성들이 왕과 똑같은 운명에 쳐해 진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명백한 일로 아담이 바로 이 같은 입장에 서 있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담 때문에 모든 인류는 무조건 아담의 범죄에 동참자가 되었고 아담의 정죄에 동참자가 되었고 아담의 사망에 동참자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아담과의 동참자는 그의 혈통적 지손 들을 말합니다.

(3) 사망이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였다고 했습니다. 왕 노릇하였다는 말의 왕은 ‘바실류오’로 통치권이나 지배권을 의미합니다. 사망이 우리를 통치한다는 뜻입니다. 인류 중에 누가 이 사망의 통치에서 벗어날 자가 있는 것인가? 사망은 완전한 권세로 인간을 지배하므로 왕 노릇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망권세는 바로 마귀의 권세이기 때문에 인간은 마귀의 권세아래서 그의 지배를 면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이제 이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이 같은 사망에서 벗어날 존재란 전혀 있을 수 없습니다. 누구를 보아도 어디를 보아도 어느 곳에 가도 소망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2.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의와 생명

그런데 인간들이 전혀 예견치 아니한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아담이 아닌 다른 한 사람이 등장했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1) 이 사람은 아담과 다른 사람입니다. 첫째로 아담의 혈통에 속하지 아니했습니다. 아담의 자손은 남녀간의 결합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남녀의 결합으로 태어나신 분이 아니라 성령의 권능으로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나신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성경에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요1:14). 하나님 품속에 계셨던 영원히 독생하신 하나님이 성령의 권능으로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시어 그 분이 사람으로 태어나셨기 때문에 아담의 자손이 아니십니다. 이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생명 곧 하늘의 생명을 가지고 오신 분입니다.

(2) 이 분은 그의 백성들에게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주시는 분이십니다. 넘친다는 말은 넉넉한 여분을 수반하고 있는 상태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넘치다의 ‘페릿세이아’란 말은 과다하다, 여분이 있다. 더욱 이란 뜻을 함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와 의의 선물은 이처럼 우리에게 과다하도록 넘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같은 은혜와 의의 선물을 받았기 때문에 생명 안에서 왕 노릇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같은 은혜와 의의 선물은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이기 때문입니다(요1:16).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그리스도로부터 받는 모든 선물은 넉넉하도록 넘치는 것입니다.

(3) 이 선물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한 사람”과 “한 분”에 대하여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범죄와 정죄와 사망은 한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이와 똑같이 의와 생명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입니다. 이곳에는 다른 요소란 전혀 개입될 수가 없습니다. 오직 한 분 예수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못 박고 있습니다. 의와 생명을 얻는 일에 우리에게 어떤 공로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것을 받을만한 의로움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단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오직 그분 때문에 값없이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이 선물을 받을 사람은 아담의 자손이 아닙니다. 아담의 혈통적인 자손은 그 아담 한사람 때문에 모든 것이 절망적입니다. 이 같은 범죄한 자, 정죄 받은 자, 사망이 왕 노릇하는 자들이 어떻게 의와 은혜의 넘치는 선물을 받을 수 있겠는가? 이 선물은 오직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만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러면 누가 하나님의 자녀인가? 하나님은 아담처럼 육의 사람이 아니시기 때문에 그의 자녀들을 태어나게 하시는 방법이 영적이십니다. 이 영적인 하나님의 자녀의 탄생에 대하여 성경은 분명하게 밝혀주고 있는 것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요1:12,13 ; 요5:13). 여기서는 아담의 경우와 똑같이 이유나 단서가 있을 수 없습니다. 무조건적입니다.

(4) 이들은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문맥을 한번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담의 경우는 사망이 우리 가운데서 왕 노릇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의와 은혜의 선물을 받은 경우는 그것을 받는 자들이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 가운데서 왕 노릇해 온 사망은 영원히 쫓겨났습니다. 사망대신에 그것을 이기신 주님의 생명이 나에게 영원한 선물로 수여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생명 안에서 이 생명으로 말미암아 모든 범죄와 모든 정죄와 모든 사망을 능히 이기는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곧 왕 노릇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결 론 : 이전에 아담이 가졌던 의는 자신이 소유한 의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의는 사단의 공격에 넘어졌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의는 우리의 것이나 아담의 소유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의는 우리에게 다시는 정죄나 사망을 가져다주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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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6장

◆ 밤중소리 01-13 | VIEW : 622

≈ 35 ≈ 아담의 불순종과 그리스도의 순종

(본문 : 로마서 5 : 18 - 19)

서 론 : 우리는 로마서에서 바울이 무엇인가 우리들에게 강조하고 확신시키려는 부단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음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들의 구원의 확신입니다. 바울은 이 같은 구원의 확신을 모든 그리스도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주지시켜 주기 위하여 아담의 죄와 그리스도의 의의 행동에 대하여 비교해 나가고 있습니다. 로마서 5, 6, 7장안에 있는 진리는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들에 대한 확실한 구원에 대한 증거입니다. 5:15부터 17절까지의 논술을 보면 아담 안에서의 신분과 그리스도안에서의 신분의 분명한 차이를 증거해 주며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주시는 하나님의 의와 생명에 대한 확실한 증거로, 아담으로 말미암은 죄와 사망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보여 주시는 18, 19 절 말씀은 이 같은 바울의 논증의 결론이 되겠습니다.

1. 한 사람 아담의 범죄와 그리스도가 행하신 의의 한 행동

우리에게 있어서 아담이 무엇을 했느냐? 하는 문제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모든 인류가 지금 당하고 있는 죄와 사망이 오직 이 한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1) 인간의 정죄는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왔습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수많은 사람가운데 한 사람의 의인도 존재할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모든 인류가 아담의 영향을 받아 죄를 범하기 쉬운 위험한 존재로 태어났기 때문인가? 이 세상에 존재해 있었던 죄에 물들기 쉬운 상태에서 태어났기 때문인가? 성경은 이 두 가지 사실에 대하여 아니다라고 말씀해 줍니다. 그러면 어떤 해답을 주고 있는가? “아담 한 사람 때문”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2) 아담 안에 있는 나를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자기가 행하는 선이나 의로움을 바라보고 그것에 어떤 가치를 두려고 합니다. 그러나 진실한 자기를 바라보려면 아담 안에 있는 자기를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신뢰나 불의 때문에서가 아니라 오직 한 사람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이미 하나님의 정죄 하심을 받고 있다고 하는 이 사실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미 아담 안에서 죄에 팔린 폼이 되었습니다(롬7:14). 나는 이미 아담 안에서 사망에 처한 사람이 되었습니다(롬5:12). 이 같은 신분은 영원히 변함이 없습니다.

(3) 바울은 이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은 그리스도의 행동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에 대하여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아담이 범한 죄와 그에게 내려진 정죄와 사망에 대해 특히 강조하고 이 강조를 반복하고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같은 적용이 똑같이 그리스도의 의로운 행동에도 미친다는 사실을 증거 하려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아담 한 사람이 그의 혈통적인 자손들에게 미친 영향은 결정적입니다. 아담의 자손 중에 비록 아담보다 의롭고 아담보다 도덕적이며 아담보다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가 있다고 해도 그것이 이유가 되어 의를 얻거나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든 다만 아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인이 되었고 사망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똑같은 원리가 그리스도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한 사람의 의의 행동 때문에 그리스도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의로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달라져서가 아닙니다. 내가 이전보다 선해졌거나 의로워져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아담 안에 있었을 때에 오직 한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인이 되어 정죄함에 이르고 사망에 이르렀던 그 원리대로,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다만 한 사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로워지고 생명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곳에서 강조하려는 요점은 한쪽이 확실하다면 다른 한쪽도 그와 똑같이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정죄를 받아 사망에 이르렀다고 하면 그리스도안에서 모든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게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기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밖에 있는 자기는 언제나 죄인의 모습을 지니고 있습니다. 정죄 받은 죄인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2) 한 사람의 순종하심은 그리스도의 순종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순종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명령을 따른 사실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주신 명령은 무엇인가? 그의 목숨을 죄인들을 위한 희생 제물로 십자가에서 바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아버지의 명령에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골2:6-10). 여기서 우리는 좀 더 깊은 영적 지각을 사용해야 합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정죄 하심을 받아 사망에 이르렀다면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그리스도안에서 모든 사람이 의로움을 받아 생명에 이르는 일은 얼마나 당연한 일이며, 아담의 불순종이 사망을 가져왔다면 그리스도의 순종은 보다 더 풍성한 의로움과 생명을 줄 것이 아니겠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결 론 : 바울은 바로 이 같은 원리에 입각하여 그리스도안에서 우리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를 설명해 주려고 시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사람 그리스도의 순종에서 우리가 그 안에서 이 놀랍고 엄청난 축복을 지금 받아 누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인 것입니다.

≈ 36 ≈ 죄와 은혜

(본문 : 로마서 5 : 20 - 21)

서 론 :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는 일에 있어서 바울은 5:12절부터 계속해서 독특한 방법으로 논증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 아담의 범죄와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한 행동은 현격한 대립 점을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극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같은 사실을 논리적으로 전개해 나가면서 결과적으로 의와 은혜의 승리에 초점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이 같은 대조는 바울이 증거 하려는 하나님의 의와 은혜의 다시없는 설명 이 되기 때문에 비슷한 이론을 계속적으로 반복하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결론적으로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1. 율법이 가입한 이유

바울의 율법론은 많은 유대인들에게 반론을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유대인들 중 많은 그리스도인들까지 바울이 말하는 율법에 대하여 이해할 수 없는 의문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로 바울이 말하고 있는 의의 논리에 있어서 바울의 주장은 율법무용론이 아닌가하는 이론이 제기된 것입니다. 그 이유로 바울은 율법이 사람에게 의를 줄 수 없다고 말할 뿐 아니라 그 율법이 사람을 (그리스도인) 정죄 할 수도 없다고 하니 그러면 율법은 무용한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1)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처음에는 언뜻 이 말씀이 가리키는 뜻을 헤아리기 어려운 것처럼 생각됩니다. 가입했다는 말은 들어왔다는 뜻입니다. 이 가입은 뒤따라 들어온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율법은 무엇을 따라 들어온 것인가? 율법이 가입했다는 것은 율법이 죄를 따라 들어왔다는 말입니다. 율법은 죄나 은혜처럼 그 자체가 어떤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죄를 따라 들어 온 존재임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은 그 자체가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죄와 관련된 존재로, 죄 때문에 죄에 따라 가입된 존재가 바로 율법인 것입니다.

(2) 가입하였다는 말은 율법이 있기 전에도 죄가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뜻입니다. “죄가 율법이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롬5:13). 여기서 우리는 율법과 죄와의 관계에 있어서 두 가지 엄연한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죄란 존재는 율법이 있기 때문에 새롭게 생겨난 것이 아니라 율법이 있기 전에도 이미 세상에 존재했었다는 사실입니다.

(3) “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고 한 말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가 넘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더 하다는 말은 ‘플레오나조’로 풍성하다란 의미로 사용되는 말입니다. 율법이 있기 전에는 죄를 죄로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에 죄가 있었으면서도 죄가 없는 상태였던 것입니다. 그러던 것이 율법이 들어오자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았던 죄가 일시에 터져 나오게 되었습니다. 아직까지 숨겨졌던 죄가 폭로되었습니다. 이 같은 죄는 인간사회에 풍성할 정도로 넘치게 된 것입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되었고, 이 세상이 죄악 세상임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고, 죄가 인간세상에서 왕 노릇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 율법으로 의를 얻거나 죄를 감소하거나 죄에서 떠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죄가 왕 노릇하고 있으므로 더욱 깊은 죄악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은 의롭고 선하고 거룩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정죄의 기준이며 심판의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사정없이 인간의 죄악을 들추어내고 그 죄악을 정죄 합니다. 율법의 기능은 사람을 의롭게 하려는데 있는 것이 아니요 바로 인간의 죄를 들추어내어 그 죄를 정죄 하려는데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에게는 율법에서 정죄하고 있는 바와 같은 죄인이 아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말하고 있는 사람들의 선행과 의로운 행실은 그 목적을 하나님의 영광에 두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오직 자신의 영광에 두고있기 때문에 그 자체가 정죄 받기에 합당한 죄악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이 필요치 않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그들의 구주로 영접치도 아니 하는 것입니다. 죄인을 위해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의 효력과 공로를 인정치 않는 일은 그 무슨 죄보다도 더 정죄 받아 마땅한 죄악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이들에게 임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요3:18).

2. 넘치는 은혜

바울은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다”고 했습니다. 율법이 있기 전에는 범법함이 없었기 때문에, 죄는 있었지만 그 죄가 죄로 인정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것이 율법이 개입하므로 율법에 의하여 죄가 그대로 드러나게 되자 인간의 죄가 이 세상에 넘치도록 풍성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모든 사람은 자신의 죄에 대하여 핑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 율법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죄인임을 알게 되었고 의인이 하나도 없음이 드러났습니다. 이것이 율법을 개입시키신 하나님의 의도십니다. 이 일에 대하여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갈3:22).

(1) 그러나 하나님은 그 율법과 함께 은혜를 개입시키신 것입니다. 율법을 개입시키신 일은 오직 은혜를 개입시키시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요 방편에 불과하셨습니다. 율법은 인간에게 의를 주실 목적으로 주신 것이 아니라 그 율법으로 인간의 죄를 정죄 하심으로 죄의 모습과 그 정죄의 두려움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의와 영생에 이르게 하시기 위해 주신 것입니다.

(2) 그런데 그 은혜는 죄보다 더욱 넘쳤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넘쳤다는 말은 죄를 삼켰다는 뜻이 됩니다. 그리고 죄를 덮어 그 위에 넘친 상태를 의미해 주기도 합니다. 그 이유와 증거는 죄는 아담으로부터 온 것이지만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그리스도의 비교는 흥미로운 비교이기는 하지만 사실인즉 비교조차 될 수 없는 상대인 것입니다. 아담은 땅의 생명을 가진 자요, 그리스도는 하늘의 생명을 가진 자이시며, 아담은 피조물이요 그리스도는 창조주이시며, 아담은 범죄자요 그리스도는 속죄 자이시며, 아담은 산영이요 그리스도는 살려 주는 영이라고 하신 것입니다(고전15:45). 그뿐 아니라 그리스도에게는 모든 죄를 이기고 소멸할 수 있는 충만한 은혜를 소유하고 계십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했습니다(요1:14 ; 엡2:7). 주님의 그 풍성하고 넘치는 은혜는 죄인들에게 영생을 얻게 하셨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게 하셨습니다(요5:24).

결 론 : 율법은 죄를 행하면서도 죄로 알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죄인으로 만들어 하나님의 정죄의 사슬에 메이게 했습니다. 이제 모든 사람들은 죄 값인 사망에서 헤어나올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절망 속에 잠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율법과 함께 은혜의 선물을 내려주셨습니다. 이 은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순종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불순종에서 나온 죄의 권세를 능히 이기고 정복할 수 있으므로 죄의 세력보다 더욱 넘쳤습니다. 이것은 마치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한 것처럼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게 된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죄 값은 사망이기 때문에 죄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인간을 정죄하면서 사망 안에서 왕 노릇하므로 인간의 생명을 정복해온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그리스도안에서 모든 사람에게 의를 주시기 때문에 이 의로 말미암아 인간을 지배하는 왕의 자리에 서게 된 것입니다. 은혜가 주시는 하나님의 의는 율법의 정죄를 이깁니다. 사망의 권세도 이깁니다. 이 같은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는 우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는데 목적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할렐루야 !

≈ 37 ≈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의 신분

(본문 : 로마서 6 : 1 - 2)

서 론 : 바울의 구원교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이 같은 이론은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아담의 죄로 인하여 죄인이 되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안에서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의 의로 인하여 의인이 되어 생명에 이르게 되었다는데 그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다른 그 무엇이 개입될 수 없는 것입니다. 율법이 가입한 것도 그 율법으로 의를 얻게 하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죄를 죄로 드러나게 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게 미치게 하려는데 목적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같은 바울의 논증에 있어서 영적인 깨달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두 가지 반론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바울의 이 같은 논증은 인간으로 죄를 더 조장하려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구원이 우리의 죄와는 상관이 없는 것으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가지는 그러면 율법이 소용없는 것이 아닌가? 왜냐하면 인간에게 의도 줄 수 없고 정죄 할 수 도 없는 것이라면 그런 율법이야 없는 것이나 무엇이 다를 것이냐는 것입니다. 바울은 6장과 7장에서 이 반론에 대한 확실한 답변을 제시해야 했습니다. 그래야 8장에 들어가 보다 심오한 구원의 교리를 펼쳐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1. 은혜에 거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바울은 1절에서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란 말로 서두를 꺼내고 있습니다. 이 같은 바울은 자기가 주장하는 이신칭의(以信稱義)의 메시지는 위대한 진리요 놀랄만한 발견이지만 그 안에는 오해의 위험한 요소가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첫 번째로 등장할 오해의 요소에 대해 1절에서 “은혜를 더 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라고 예상되는 문제를 제시했습니다. 바울의 구원론은 마치 죄는 은혜의 방편인 것처럼 들려지고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다고 말하고 있으니 은혜를 받으려면 우리는 언제나 죄 가운데서 살아가야 할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I) 이렇게 주장하는 그들은 그리스도의 의는 우리의 죄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 아니냐고 하는 이론을 세웁니다. “일을 하지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라고 하신 말씀은 경건치 아니한 자(죄인)에게 의를 주셨으니 우리가 죄악의 생활을 계속한다한들 구원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 같은 사람들에게는 믿음이나 의의 존재란 얼마나 편리한 존재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만 받으면 앞으로 계속적으로 범하는 죄악은 그들의 구원과는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죄를 지어도 아무런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구원은 죄와는 상관이 없이 보증수표처럼 맡아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의 ‘구원파’라고 하는 이단교파의 주장이 이들과 같은 주장입니다. 초대교회의 니골라당의 교훈도 이 같은 주장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계2:15).

(2) 이들의 주장은 우리의 의는 우리의 어떤 의로운 행위로 얻은 것이 아니라 다만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 받은 것이므로 우리가 짓는 죄와는 상판이 없이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를 소유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3) 또 한가지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율법의 정죄를 받지 아니하니 죄를 범해도 괜찮다는 것이 아닌가? 라는 주장입니다. 이 같은 주장은 두 가지 면에서 문제가 제기되는데 하나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죄를 범해도 구원과는 상관이 없으니 죄를 범하는 일에 대하여 오히려 더 은혜를 받는 수단으로 알고 감사해야 할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율법을 초월한 자들이니 그리스도인들과 율법은 아무런 연관이 없다면 율법은 무용지물인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율법의 완성이요 율법의 성취이기 때문에 율법을 떠나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존속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율법이 없는 곳엔 죄가 없기 때문에 그런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들은 율법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배워 그 은혜에 대한 감사생활이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규범을 배워 그 기뻐하시는 뜻을 이루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일은 율법에 얽매이는 생활이거나 율법에서 의를 얻고자 하는 생활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자 하는 감사에서 나오는 결실인 것입니다.

2.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서 더 살리요.

이 같은 반론들에 대하여 바울은 “그럴 수 없느니라”고 강력하게 거부했습니다. 우리들이 바울이 주장하고 있는 이신청의의 구원교리를 설교하다보면 바울이 예상했던 이 같은 반론이 반드시 제기되는 것입니다. 이런 무리들에게 우리는 단연“그럴 수 없느니라”고 못을 박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바울의 반론은 “죄에 거하는 일은 은혜를 더하게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1) 죄는 사망 안에서만이 왕 노릇 하는 존재지 은혜 안에서는 발 부칠 곳이 없는 존재입니다. 은혜는 죄 안에서 역사 하지만 죄와 손을 잡거나 죄와 공동보조를 취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죄인이 은혜 안에 들어서면 이미 그의 죄는 은혜 안에서 죽어버리고 은혜 안에서 왕 노릇 하는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죄의 종인 것이 아니라 의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그 신분이 완전히 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요5:24).

(2) 바울은 죄에 대하여 우리는 죽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라고 반격했습니다. 바울의 이 말은 그리스도인의 성화를 뜻하거나 성화의 과정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신분을 밝혀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신분은 죄로 죽었다는 것과 의로 인하여 살았다는 이것입니다. 죄로 죽었다는 신분이 없으면 의로 살았다는 신분을 가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그리스도인의 신분은 영적인 신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신분이나 모든 언약은 하나님의 말씀에 그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로 죽었다고 말할 때 이 사실은 영적인 신분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있어서 육은 무익합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영적인 신분이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이 같은 신분은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에 있어서 법적인 선언입니다. 이 하나님의 법적인 선언은 그 무엇으로도 취소할 수 없고 무효화시킬 수 없습니다. 이 같은 그리스도인의 신분은 너무나도 확실하기 때문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 살아지면 우리의 믿음은 파선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같은 신분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이 믿음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신분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죄와 의에 대한 공동 운명을 말함인데 그리스도가 내 죄를 속죄해 주셨기 때문에 그와의 연합은 죄에 대하여 죽은 자의 신분이 되며,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의롭다하심을 주시기 위해 다시 살아나셨음으로 그와의 연합은 의로 새로운 생명을 얻은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사실에 입각한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의에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롬6:11). 그럴 때 우리의 생활은 은혜 안에서 의가 왕 노릇하여 의의 열매를 맺는 생활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결 론 : 바울이 로마서 6장에서 제시한 반론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는 자들의 악의적인 비방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우리의 영적인 분명한 신분을 알아서 그 신분에 합당한 생활을 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 38 ≈ 그리스도와의 연합

(본문 : 로마서 6 : 3 - 4)

서 론 : 로마서 6장에는 세례란 말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명심해야 할 일은 바울이 이곳에서 말하고 있는 세례란 단어는 우리가 교회에서 시행하고 있는 물세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란 사실입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신청의의 구원교리를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이신칭의의 근거는 바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6장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세례란 말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세례란 말의 의미를 세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물세례입니다(마28:19). 두 번째는 성령세례가 있습니다(행1:5). 다음 세 번째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의미하는 세례인데 바울은 이 로마서 6장에서 바로 이 세례를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1. 그리스도와의 연합

바울은 3절에서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합한다고 말한 표현은 그 뜻이 세례를 의미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례는 그리스도와 합하는 표가 아닙니다. 세례는 이미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자신에게 일어난 일에 대한 인 침을 말하고 있습니다. 세례는 그리스도와 생명의 연합이 된 사람이 그 진리를 깨닫고 그후에 이 사실에 대한 고백적인 인 침입니다. 그러나 이 경우 세례는 눈에 보이는 의식이기 때문에 실제로 그리스도와 생명의 연합이 이루어진 경우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받을 수 있는 경우도 있으므로 완벽한 의식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로마서 6장에서 말하고 있는 세례는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루는 온전한 세례를 말하고 있습니다.

(1) 구원교리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있습니다. 연합이란 말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현재의 자신의 신분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란 말은 우리가 그리스도안에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들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모든 소유가 자기의 소유가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들을 함께 소유케 하시기 위해 우리로 그리스도와 연합되게 하셨습니다. 아담 안에서 우리는 아담의 모든 것을 소유하게 되었었습니다. 그가 지은 죄에 동참하게 되었고 그 죄 안에서 함께 정죄 받게 되었고 그 죄로 인하여 아담과 함께 죽게 되었습니다. 이 같은 지난날의 우리의 신분은 단지 우리가 아담 안에 있었다는 그 이유만인 것입니다.

그러한 우리가 이제는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어 그리스도안에서 거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사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속죄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구원을 주셨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하늘에 있는 모든 신령한 축복을 주셨습니다. 이 같은 일은 다른 어떤 이유에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지난날 아담 안에 있었기 때문에 그 한가지 사실 때문에 아담의 모든 소유가 내 것이 되었던 것처럼, 내가 그리스도안에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이루시고 소유하신 그 모든 것이 나의 것으로 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구원의 근거요 그리스도인들의 칭의의 근거입니다. 이 같은 근거에 우리의 믿음의 뿌리를 내려야 구원의 확신, 칭의의 확신, 사죄의 확신을 가지고 승리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체험적이거나 주관적인 판단에 기인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를 내린 객관적 사실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아담 안에서 우리의 신분을 보아도 우리가 언제 아담의 죄에 동참했으며 우리가 무엇 때문에 아담의 정죄를 함께 받아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체험적으로 객관적으로 찾아 낼 도리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그것은 사실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실은 인간의 주검으로 그 실질적인 증거나 나타난 것입니다.

그리스도안에서의 일도 동일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죽은 일이 없습니다. 그와 함께 부활한 일도 없습니다. 그런 일들이 우리에게 체험적으로 객관적으로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안에서 이 모든 일이 우리가 단순히 그리스도안에 있다는 이 한가지 사실 때문에 그가 하신 모든 일이, 그의 가지고 계시는 그의 모든 소유가 나의 것이 된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이 사실을 무시하고 체험적인 면에서, 객관적인 입장에서 구원을 찾고 사죄를 찾는다면 그에게 돌아올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에 따라서 자신의 환경과 형편에 따라서 하루에도 수 차례씩 구원과 멸망, 의와 죄악사이를 들락날락하게 될 것입니다.

(3)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고 하는 이 세례는 칭의 후의 인 침이나 상징이나 회개의 표시가 아닙니다. 이것은 나와 그리스도와의 전 인격적인 연합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어느 한가지가 아닙니다. 어느 두 가지도 아닙니다. 가지고 있는 그 모든 것, 전부를 의미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이처럼 전 인격적인 연합이 이루어졌다면 다른 이유에서나 다른 구실로 말미암아서가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었다고 하는 이 한가지 사실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에 칭의에 있어서 만약 다른 그 무엇을 요구하거나 다른 조건을 바란다면 이것은 이미 하나님의 은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안에 있는 이 모든 것의 소유는, 지난날에 아담 안에서 아담의 소유를 가졌던 원리와 똑같은 원리에서 내가 믿음으로 그리스도안에 있기 때문에, 그와의 연합이란 현재의 내 처지에서 당연히 나의 소유가 된 것입니다. 이외에 다른 이유가 없음을 알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감격할 일뿐입니다.

2.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살아나심의 연합

사도 바울은 4절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다”고 확인하고 있습니다. 어떤 침례교인들은 이 같은 바울의 표현을 그들이 교리 적으로 주장하는 침례와 연관시킵니다. 침례 시 사람이 물 속에 잠기는 이유는 바로 그리스도의 죽으시고 장사지내신 그리하여 무덤에 들어가신 일에 대한 상징이라고 말합니다만 물 속에 침례로 잠기는 일과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의한 연합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고 또 그런 의미를 부여해 주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바울은 지금 이곳에서 물세례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우리에게 부여된 칭의를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1)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강조 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 이 기정사실인 것처럼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의 죽음 역시 기정사실화 된 것으로 강력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죽으신 것처럼 우리도 그와 함께 죽어야 한다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죽으신 것처럼 우리도 그와 함께 이미 죽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죽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지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연합입니다. 연합이라면 공동운명체이기 때문에 그가 죽었으면 연합된 나도 그와 함께 죽었어야 합니다.

(2)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성화의 과정이나 그 필요성을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곳에서 그리스도인의 칭의에 대해 논하고 있는 것이지 성화의 과정을 절명해 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장사되었다고 최종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장사되었다는 말은 그 죽음의 확실성에 대한 더 어쩔 수 없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죽었을 뿐 아니라 이미 장사까지 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강조인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죽으신 후 장사되어 죄에서 끊어졌습니다. 완전한 단절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와 연합한 우리들 역시 그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모든 일에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었다는 주장입니다.

결 론 : 그리스도와 연합이 된 사람은 이처럼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장사 지내심 뿐만 아니라 그의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그의 부활에도 연합이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죄의 권능을 이기신 산 증거이며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생명으로 탄생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고후5:17 ; 빌3:20 ; 엡2:6). 하나님께서 이처럼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신 것은 새 생명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일이 우리에게 필요한 성화의 과정이며 이 성화는 온전한 칭의의 토대 위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 39 ≈ 연합이 의미하는 뜻

(본문 : 로마서 6 : 5 - 7)

서 론 : 바울은 6장에서 연합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연합은 우리로 그리스도안에 있게 만든 요소입니다. 아담 안에 있었던 우리는 아담과 연합한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아담이 가지고 있었던 모든 것이 그와 연합된 우리에게 그와 함께 있었던 것처럼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그리스도안에서 의와 생명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왜 이곳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강조하고 있는 것인가? 우리는 이에 대한 정확한 해답을 얻어야 합니다. 4절 마지막 절에서 이처럼 밝혀주고 있습니다.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함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들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의 부활하심과 연합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려는 이유는 이 진리 위에 우리의 믿음의 터를 세워야 우리의 생애가 그리스도의 새로운 생명가운데서 성장할 수 있겠기 때문입니다.

1. 그리스도의 죽으심과의 연합과 부활과의 연합

바울은 5절에서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여기서 왜 만일이라고 하는 낱말을 사용하였을까? 이 말은 바울이 어떤 가정을 전제로 한 말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것이 사실이라면”이라는 뜻으로 하나의 강조 점을 부친 말입니다.

(1)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라고 한 본 받는다는 말은 헬라어로 ‘호모이오스’로 같게 만들어진 것이란 의미가 둘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참뜻을 타나내 주고 있는 말입니다. 우리와 그리스도의 연합은 체험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우리는 전혀 모르는 사건이며 지난날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을 우리는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알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그렇다고 말씀하시는 그 말씀을 믿음으로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에서 온 영적인 지식이지 실질적으로 우리가 체험한 사건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내시는 모든 은혜와 구원의 역사는 모두 영적인 사역으로 이루시는 것입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6:63). 그러므로 우리의 죽음이나 우리의 살아남의 역사는 그리스도를 본 받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가 행하신 모든 일이 나에게 적용되었기 때문에 이 같은 사실이 본 받는다는 표현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2) 그리스도와의 죽으심과의 연합은 죄에 대한 완전한 청산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죄에 대한 모든 문제가 영원히 해결되었음을 선포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죄는 영원히 청산된 것입니다.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와 연합하여 죄에 죽은 우리이기 때문에 죄에 대한 문제인 이상 영원히 해결되었고 청산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나는 그런 주님의 그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기 때문에 이제 죄의 속박아래서 영원히 벗어난 것입니다.

(3) 그리스도와의 부활의 연합은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그와 함께 살아났다는데 의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죽음에서 살아 나셨습니다. 이 엄연한 사실에 우리는 연합이 된 것입니다. 옛 생명이 죽고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난 것입니다. 나사로의 살아남이나 나인성 과부의 아들의 살아남은 옛 생명의 다시 살아남이었지만 그리스도의 살아나심은 새로운 생명으로 말미암은 부활이십니다. 그는 아담의 생명으로 죽으셨고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아나신 것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신 새 생명은 영원한 하나님의 생명이십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우리의 죽음과 살아남은 옛사람이 죽었고 새사람으로 살아났기 때문에 이 둘간에는 아무런 연결이 없습니다. 옛사람과는 완전히 두절된 것입니다. 바로 이 자리에서 아담 안의 나의 생명과 그리스도안의 나의 생명이 갈라서게 된 것입니다.

다시는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자리로 우리가 옮겨진 것입니다. 이 사실을 성경에서는 성령으로 거듭났다고 말합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처럼 다시 살아나심을 본 받아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신분은 이제 그 어떤 방법으로도 아담 안으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게 되었고 영원히 그리스도안에 거할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2.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힌 이유

바울은 6철에서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합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라고 초두에 말하고 있는 것은 아직까지의 바울의 논증을 통하여 우리의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1) 우리는 여기서 우리의 옛사람이 누구인가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옛사람이란 그리스도안에 들어오기 이전 아담 안에 있었던 나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옛사람은 우리의 죄악성, 도덕성, 타락성, 하나님을 거역했던 죄성을 의미하는 말이 아닙니다. 옛사람이란 옛날 내 안에 있었던 부패한 성품을 지적하는 표현인 것이 아니라 지난날 아담 안에서 살아 온 나라고 하는 전인격을 말합니다. 아담 안에서 아담과 연합함으로 정죄 받은 인간, 지옥 갈 인간, 이런 내 인간의 전체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일은 이런 나, 지금 그리스도안에 있는 나와는 분리된 옛사람인 나는 십자가에 못 박힌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하는 말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뜻입니다. 이제는 나와 이 옛사람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2) 나는 이제 옛사람이 아닙니다. 어떤 분은 우리에게는 아직 옛사람이 존재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옛사람과 싸우는 생활을 해서 승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할 일은 우리의 옛사람은 지금 우리에게 어떤 형태로든 존재치 아니한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옛사람은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죽은 사람이 우리에게 어떻게 존재하는 것입니까? 아담 안에 있었던 사람이 옛사람인데 지금 나는 그리스도안에 있는 사람인데 어떻게 옛사람이 나에게 존재할 수 있을 것입니까?

나의 옛사람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십자가에서 죽었는데 그 죽은 사람이 어떻게 나에게 올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는 “나에게는 옛사람이 절대로 존재치 않는다”고 확신을 가지고 믿을 수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은 것인데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이 옛사람이 지금 자기에게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이 옛사람을 벗어버리려고 노력하는 일은 어리석고 헛된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결 론 :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처리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해답은 6절 하반부에서 명확히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이곳에 나와 있는 죄의 몸이란 우리의 옛사람을 지칭하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죄와는 상관이 없는 새로운 생명으로 새롭게 태어나 그리스도안에 거하게 되었지만 이 새 생명의 몸은 온전히 성화 된 몸이 아니라 아직도 죄의 유혹을 받을 수 있는 몸, 죄의 지배를 받을 수 있는 몸입니다. 우리의 몸은 아직도 죄가 들어올 수 있고 죄의 유혹을 받아드릴 수 있는 연약한 그릇입니다. 우리는 이 같은 우리의 몸을 멸하여야 죄에게 속아 종노릇하는 일을 모면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멸한다는 말의 ‘카타르게오’란 말로 효력이 없게 하다, 헛되게 한다는 뜻으로 기회를 틈타 유혹하는 죄의 효력을 헛되게 할 수 있으려면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진리를 믿고 이 사실을 우리의 실 생활에 적용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은혜에 거하려고 죄에 거할 수는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죄에 죽은 사람들이며 우리의 육체에는 비록 죄의 유혹을 받아 드리는 악한 요소들이 잠재하고 있다고 해도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새로운 생명으로 연합된 사실을 깨달아 죄의 유혹을 받는 우리 몸의 욕구를 헛되게 하여 다시는 죄의 종노릇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바울의 강조점인 것입니다.

≈ 40 ≈ 죄에서 벗어난 우리

(본문 : 로마서 6 : 6 - 7)

서 론 : 사도 바울은 로마서 6장에서 새로운 탄생으로서의 그리스도인의 존재,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가치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같은 일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란 엄연한 사실로 실질적이고 현실적임을 거듭 주장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처럼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우리의 새로운 존재를 강조하는 이유는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라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새로운 지침을 주장하려는데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맥락에서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난 일”에 대한 말씀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1.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은 자의 두 가지 결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이라고 언급하고 있는 것은 바울이 말하고 있는 대로 우리가 아직까지 배운 말씀을 통해서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이 사실을 이미 알고 있을 것을 전제로 해서 다시 언급을 시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1)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죄의 몸”이 멸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우리의 옛사람”이란 말과 “죄의 몸”이란 말에 대한 차이점을 분명히 알고 넘어가야 합니다. 옛사람이란 아담 안에서 있었던 나의 전부를 말합니다. 죄의 전체적인 지배를 받았던 나, 율법의 정죄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나, 이 같은 나의 전 인격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죄의 몸이란 그런 우리의 옛사람과는 판이한 존재입니다. 우리의 전체적인 인격을 표현하는 죄악된 우리의 인격적인 몸이 아닙니다. 아담 안에서 있었던 우리의 옛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지만 그리하여 지금 우리는 그때와는 상관이 없는 전혀 다른 인격, 의롭다하심을 선언 받은 몸을 가지고 있지만 이 같은 우리의 몸이 죄의 지배에서는 벗어났고 율법의 정죄에서는 해방되었지만 죄악성에서조차 벗어날 수 있는 몸이 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이 몸에는 그 옛날 옛사람이 가지고 있었던 습성, 죄악성 등이 완전히 배제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죄가 유혹하여 범죄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죄악성을 지녔다고 하는 말은 죄의 지배와 영향을 받을 수 있는 몸이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를 범해도 그 죄는 내가 한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내가 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나란 말은 그리스도안에서 새 생명으로 태어난 나를 가리킨 말입니다. 지금 우리가 저지르는 죄는 내 속에 죄가 하는 짓이요 나는 다만 그 죄에게 미혹을 받아 죄를 짓는 장소로 제공했을 뿐입니다. 바울은 이런 원리를 이처럼 증거하고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을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 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고 했습니다(롬7:19,20).

지금 우리의 몸에는 머물러 있어서는 안될 옛사람의 습성이 머물러 있습니다. 죄의 지배를 받을 수 있는 죄악성이 머물러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물리쳐야 합니다. 이 죄의 몸이 멸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어 옛사람이 죽은 것은 바로 이 같은 죄의 영향에서까지 벗어나게 하려는데 있다는 것을 바울은 강조하려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성화(聖化)를 이루는 과정이기도 한 것입니다.

(2) 또 다른 이유로 바울은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라고 밝혀 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분은 죄의 종이 아닙니다. 죄의 종으로서의 우리의 신분은 옛사람으로, 이 같은 신분을 가진 나는 이미 죽었습니다. 그런데도 나는 지금 내 몸에 죄를 허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죄를 범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우리가 이미 우리의 옛사람이 십자가에서 죽어 장사까지 지낸바 되었으므로 죄의 지배를 받을 필요가 없는데도 쉽게 죄의 영향력을 받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우리의 옛사람을 죽게 하신 것은 다시는 옛사람처럼 죄의 종노릇을 하지 않게 하시기 위해서란 뜻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2. 무리가 멸해야 할 죄의 몸

죄의 몸이 멸한다는 말을 우리는 우리의 옛사람이 죽어야 한다는 말로 착각하기 쉽습니다. 우리들 옛사람은 이미 죽은 것입니다. 죽은 우리의 옛사람이 또다시 죽어야한다는 말은 이상한 표현이 되겠습니다.

(1) 우리의 죄의 몸은 죽어져야 합니다. 나의 옛사람은 완전히 죽었습니다. 장사까지 지낸바 되었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옛사람을 무덤에서 끄집어내어 다시 죽일 수는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죄의 몸이란 이런 우리의 옛사람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땅을 정복한 후에도 하나님께서 과연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가의 여부를 시험해 보시려고 얼마간의 가나안 족속을 남겨 주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로 죄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율법의 정죄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영원한 의를 주셨지만 우리들 몸 안에 죄의 영향력을 남겨 두신 것입니다.

(2) 우리의 죄는 내 안이 아니요 내 지체 속에 역사하고 있는 존재입니다. 나라고 하는 나의 전인격은 죄에서 벗어난 몸이요 의롭다 하심을 선언 받은 온전한 몸입니다. 죄는 내 안에서 행동할 수는 없습니다. 죽을 우리의 몸 안에서 곧 우리 몸의 지체 안에서만 역사 하는 것입니다. 이 몸은 우리의 구원받은 몸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이 몸은 우리의 몸이 그리스도와 같은 영광의 몸으로 변화 받을 때 죽을 지체이기 때문에 구원이나 정죄에 영향력을 미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몸의 지체는 우리의 생명이 머무르고 있는 곳이 아니라 옛 나의 습성이 머물고 있는 곳입니다.

3. 그리스도인들이 죄를 지었을 때의 신앙적인 태도

위와 같은 사도 바울의 논리에 따르면 거듭난 우리들에게도 옛사람에게 있었던 죄의 본성이 머물러 있기 때문에 죄의 유혹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유혹에 따라 그 죄를 범할 수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경우 이때 자기는 이제 죄의 종이 되었다, 나는 이제 죄인이 되었으니 구원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냐? 나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이냐? 이 같은 상념에 사로잡혀 낙심하고 타락하고 교회를 등질 때가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바른 진리의 말씀을 가지고 바른 신앙적인 자세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1) 내가 범한 죄는 내가 한 것이 아니라 내 지체 속에 있는 죄가 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나의 옛사람이 십자가에서 죽은 이유는 다만 의롭다 하심을 받을 뿐 아니라 우리의 몸에서 우리를 다시 지배하려고 죄로 유혹하는 이것까지도 이기게 하시기 위해서 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에 다시는 죄와 상관해서는 안 된다고 한 것입니다.

(2) 그러면 우리가 죄를 범했을 때 우리는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지금 죄의 종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의 지체를 죄에게 드릴 필요가 절대로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의의 종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지체를 마땅히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자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롬6:12,13).

우리는 우리의 몸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쓰지 못하고 죄의 종으로 다시금 죄에게 드린바 되었으니 이일이야말로 얼마나 한심스럽고 탄식할만한 일입니까? 나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목적을 저 버리는 생활을 했음을 뼈저리게 통회하는 회개가 마땅히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의의 종으로 돌이키는 생활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결 론 : 사도 바울이 이곳에서 강조하는 바는 죄의 종노릇했던 옛사람은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는데 어찌하여 아직까지 죄의 유혹을 받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에서 벗어났을 뿐 아니라 의롭다 하심을 받은 의의 소유자들이기 때문에 더군다나 죄의 종노릇을 해서는 결코 안 된다고 하는 경종이 되는 것입니다.

≈ 41 ≈ 주님의 부활의 참 의미

(본문 : 로마서 6 : 8 - 10)

서 론 :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을 통하여 철저하게 복음의 진수를 밝혀 주고 있는데 그는 복음을 두 가지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의 살아나심입니다(고전15:3-4). 바울은 이제 로마서 6장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그 일이 그리스도안에 있는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되는가에 대한 진리의 설명을 풀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본문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참 뜻을 되새겨 주고 있는 것입니다.

1.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바울은 8절에서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처럼 말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에 연합한 자들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죽었다고 하는 사실은 의미가 매우 크며 그 사실의 토대 위에서 그리스도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죄의 처리가 결정되는 것임을 밝혀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5절에서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고 말한 그 진리를 더 자세히 설명해 주기 위하여 이곳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사건을 재차 설명하고 있습니다.

(1)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은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의 죽으심에 확실히 연합되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강조해 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사람들입니다. 아담 안에 살아가고 있었던 사람, 죄의 체제 아래서 그 종으로 지배를 받아 온 옛사람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여 죽은 사람들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절대로 그리스도안에 있는 사람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는 말은 자칫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의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쉬운 것입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고 하니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할 수 있지 않느냐”는 반론이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롬5:20, 6:1). 이 같은 반론은 그리스도인은 죄를 지어도 될 것이 아니냐는 결론이 나오기 때문에 바울은 이 같은 잘못된 오해를 반격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합하여 함께 죽었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죄 가운데서 살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롬6:2).

(2)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와 함께 살 줄 을 믿는다고 한 말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연합한 자가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합하여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의 부활에도 연합한 자가 된다고 하는 이 사실은 너무나도 분명하고 당연한 일입니다.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는다고 하는 표현은 장차 우리가 누릴 영광의 부활을 뜻하는 미래적인 사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광범위한 해석에는 그것도 포함시킬 수 있겠지만 이곳에서 바울이 강조하려고 하는 바는 그리스도안에서 이미 완성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재확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죽음과 부활과는 계속된 생명이 아닙니다. 아담 안에서 살아 온 옛사람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여 완전히 죽었습니다. 그 생명은 이제 그 어느 곳에도 존재치 아니합니다. 장사까지 지내버렸기 때문에 다시 살아날 수도 없습니다. 영원히 결별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에 연합된 우리의 생명은 전혀 새로운 생명입니다. 아담에게 물려받은 생명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서 난 생명입니다. 무덤 안에 장사지낸 바 된 그 생명이 다시 살아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으로 새롭게 살아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사람으로 죽은 나와 새 사람으로 살아난 나와는 아무런 연관관계가 없는 전혀 별개의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합하여 새롭게 태어난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이전의 죄 가운데서 살아온 그 옛사람과는 상관이 없고 그리스도안의 새 생명가운데서 새롭게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서 6장에서 강조하고 있는 바는 이 같은 구원의 도리를 분명히 하려는데 있습니다.

2.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다.

우리는 이제 9절에 있는 말씀에 접하게 됩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연결된 사건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에게 국한된 사건만을 언급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처럼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살아나심의 사건을 철저하게 다루는 이유는 그의 죽음과 부활사건이 그리스도교의 전체적인 교리를 포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사시는 사건이 있기 전에 죽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에게는 죽기 이전의 삶이 있으셨습니다. 주검이전의 그리스도의 삶은 죄의 지배아래에서의 삶이었습니다. 죄의 권세아래서 살아가는 생애였습니다. 그에게는 죄는 없으셨지만 스스로 죄와 율법 아래 태어나셨습니다. 자신의 선택을 따라 죄와 율법아래 있는 세상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것은 전혀 우리를 위해서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히2:14,15). 그리스도는 그의 죽으심으로 이 일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신 것입니다.

(2) 그리스도는 이제 다시 죽지 아니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다시 죽으실 수 없습니다. 그는 죽음의 사역을 이미 완성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죽음으로 모든 문제를 다 이루었습니다. 그는 다시 죽으시려고 오실 필요도 없고 죽으실 수도 없습니다.

(3)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셨습니다. 이것은 그의 영광스러운 부활을 의미합니다. 부활은 사망을 이긴 증거입니다. 새롭게 살아나신 그리스도에게 다시는 사망의 권세가 주장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율법을 이루신 일을 증거 해 줍니다. 그는 죽으심으로 모든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켜 주었습니다. 율법은 정죄에 있고 정죄는 곧 죽음인데 그리스도는 이 같은 모든 요구를 충족시켜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제 죄와는 상관이 없는 새로운 생명, 의로우심으로 살아 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원래 자신이 창세 이전부터 가지고 계셨던 그 의로우심을 회복하셨습니다. 그는 다시 살아나시지 아니하셔도 역시 그의 영적인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고 계시며 하나님의 위치에 돌아가실 수 있으십니다. 그런데 그가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신 것은 전혀 우리를 위하신 일입니다. 우리에게 의를 주시기 위해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롬4:25). 우리는 범사에 그리스도와 연합되기 때문에 그가 부활하셔야 우리들이 새로운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합이 되고 그리스도의 의에 연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의 참 의미는 오직 우리와의 연합에 그 뜻이 있는 것입니다.

(4)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신 사건입니다. 그는 죄로 말미암아 죽으실 필요가 없는 분입니다. 그에게는 죄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우리를 위하여 죄 아래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그 죄의 지배아래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죄로 인하여 죽으셨습니다. 물론 우리의 죄를 대신한 죄를 말합니다. 단번의 죽으심이란 오직 한번만의 죽으심이란 뜻입니다. 그의 죽으심은 한번만으로 족하십니다. 누구에게나 죽음은 한번뿐입니다. 그 한번뿐인 죽으심으로 마지막 아담으로 오신 그의 사역을 다 완성하셨습니다. 이제 그가 부활하심으로 살아나신 것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이전의 영광의 보좌에로의 복귀를 의미하시는 말입니다.

결 론 : 바울은 왜 이처럼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대해 보다 확실하고 분명하게 거론하고 있는 것입니까? 이것이 확실해야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오는 진리가 분명해 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 42 ≈ 승리적인 생활의 방법

(본문 : 로마서 6 : 10 - 11)

서 론 : 바울은 11절에서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아직까지 바울이 그토록 간절히 증거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이 그리스도인들의 신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결론입니다. 바울은 이 진리를 깨닫게 하기 위해 아직까지 그리스도와의 연합한 자의 그 연합의 효과에 대하여 증거 했던 것입니다.

1.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여기라

바울이 10절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의 살으심에 대한 해석을 마무리함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이 같은 모든 사건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신분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11절에서 “이와 같이”라고 표현된 말에서 그것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1) “여길지어다”의 여기라는 말은 어떤 가정적인 말에 동의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은 ‘로기조마이’로 원래가 ‘로고스’에서 유래된 말로 세다, 계산하다의 뜻입니다. 이것은 확실히 계산된 말씀으로 그대로 믿으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생활은 믿음에서 시작하여 믿음으로 마쳐집니다. 그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믿는다면 그 연합이 우리의 신분에 미친 사건 그 자체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즉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죄에 대한 것이요 그의 살으심이 하나님을 대하여 하신 것 같이, 너희 자신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믿으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인이 이 사실을 믿을 수 없다면 그리스도의 죽으심이나 살아나심의 의미가 전혀 없으며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한 뜻도 찾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2) 여기라는 말은 믿으라는 말로써 체험을 의미하는 말이 아닙니다. 믿음에는 체험이 수반하지 아니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 전부입니다. 믿음에 육신적인 체험이 따라야 한다면 이미 그것은 믿음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죄에 대하여 죽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체험이거나 그 결과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대하여 산 자란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여기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체험의 토대 위에서 출발한다면 그에게서 아무런 결실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믿음의 토대 위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3)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로 여기라는 말입니다. 이 사실을 체험 속에서 찾으려고 한다면 그 해답이 불가능해 집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어야 하는데 우리의 믿음의 근거는 바로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분명히 죽으셨습니다. 그는 분명히 죄에 대하여 죽으셨습니다. 자신의 죄로 인하여 죽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죄에 대하여 죽으셨습니다. 죄에 대하여 죽으신 그리스도의 체험은 바로 우리의 체험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로 인하여 죽으셨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연합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육신은 이전과 다를 바 없이 그 때 그 몸을 그대로 소유하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체험적으로는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곧 나를 위한 죽으심이기 때문에 나의 죽음이 그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줄로 여기고 그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누구라도 이 같은 믿음을 가질 수 없다면 그런 사람은 실상인즉 예수가 나의 구주이심도 믿지 못할 사람들입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로 인하여 죽으셨으니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면 우리는 마땅히 죄를 버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죄를 끊어야 한다는 의미의 말이 아닙니다. 죄가 내 안에서 죽었다는 뜻도 아닙니다. 나는 이제 아담 안에서 죄의 지배를 받아 온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기 때문에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입니다. 또한 이 말은 죄는 이제 죄에 대하여 죽은 나에게 명령하거나 지배할 권능을 상실했으며 나는 완전히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 죄에서 자유로운 몸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4) 이제 죄는 그리스도인에게 아무런 권능도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한 죄의식이 있고 죄의 욕망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옛사람에게 있었던 그 습성이 아직 청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습성의 완전한 청산은 아마 우리의 육신이 죽을 때 가능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옛사람이 아직 어디인가에 살아 남아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완전히 죽은 사람들입니다. 죄의 기능도 우리에게 작용될 수 없으며 죄의 권능도 우리를 지배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우리에게 비 체험적인 사실에 대하여 여기는 일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성결 생활이 바로 이 시점에서 출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기라

다음에 그리스도는 죽으심으로 끝나신 것이 아닙니다. 그는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살아나심은 이전 옛사람의 연장이 아닙니다. 이전 죄 아래로 들어오셨던 육신의 옛사람은 죽으시고 장사되심으로 끝장이 났습니다. 이제 더 이상 죄의 지배 아래로 들어가실 수 없는 것은 이미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 나셨습니다. 우리의 옛사람은 그 어떤 방법으로도 사망의 권세를 이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생명이 사망의 권세를 이기어 다시 살아나게 하신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하나님을 대하여 살아 계십니다. 그분은 이전에 세상에 살아 계실 때에도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 계셨지만 우리로 인하여 죄의 영역 안에서 사셨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으심은 그를 다시 이 영역으로 들어오실 수 없게 하셨습니다. 그분은 이제 다른 영역에서 살아가시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오시기 그 이전의 영역으로 돌아가셔서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십니다.

(1) 그리스도인은 이제 새로운 영역에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연합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새로운 영역에서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가신다면 우리도 그리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경험은 모두가 우리의 경험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참된 연합이란 말속에 함유된 뜻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가 되었기 때문에 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게 되었으며 죄의 종도 아니요 죄의 지배를 받아야 할 신분도 아닙니다. 우리의 신분은 새로운 영역으로 옮겨졌습니다.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대하여 살아야 하는 영역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우리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신분을 의미하는 말이며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삶의 위치를 말해 주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을 향하여 살았다는 말은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삶의 방향을 제시해 주는 말입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라고 밝혀주는 말씀처럼 그리스도인은 지금 그리스도께서 살아가고 계시는 삶의 영역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 살아가야 한다는 말입니다(롬6:2). 이 같은 삶은 그리스도인들의 적극적인 삶의 방향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분이 이처럼 죄의 종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대하여 살아가야 하는 새로운 삶의 신분으로 바뀐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3) 그리스도인의 이 같은 새로운 삶은 실질적으로 가능케 되었습니다. 그것은 아직까지 우리는 죄의 법에 얽매어 살아왔지만 이제는 그리스도안에서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다스림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을 향하여 살수 있도록 하나님의 능력을 공급해 주십니다.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의를 행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십니다(빌1:6 ; 엡3:20,21). 그리스도안에서의 새로운 생명이 바로 이런 능력으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결 론 :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죄와 접촉하는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죄의 종으로 죄의 지배를 받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죄의 영향은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배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죽음을 통과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그 주검이 나를 주장치는 못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주검은 육신의 잠에 불과합니다. 그의 생명은 하나님같이 영원히 살아있으며 잠자는 우리의 몸도 그리스도의 영화로운 부활의 몸으로 살아날 것입니다.

≈ 43 ≈ 성결 생활을 위한 그리스도인의 자세

(본문 : 로마서 6 : 12 - 14)

서 론 : 사도 바울은 11절까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신분에 관한 교리적인 논술에 주안점올 두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교리적인 지식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에 입각한 교리적인 지식은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의 근본적인 뿌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잘못된 신앙에 빠지기 쉬운 것입니다. 그러나 교리는 언제나 지식에 머물러 있을 뿐 그것이 우리의 생활을 성결케 하거나 성화 시키지 못합니다. 교리적인 지식에는 그 교리에 명시된 대로 살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그러면 그리스도인은 죄에 대하여 어떤 자세를 가지고 생활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12절에서부터 시도하고 있습니다.

1. 죽을 몸에서 왕 노릇 하려는 죄

바울은 11절에서 12절을 잇는 말씀의 연결에 있어서 “그러므로”란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러므로”란 말을 쓰기 이전의 논술에서는 교리적인 이론을 선명히 밝혔습니다. 그런데 12절로부터는 자신이 논술한 교리적인 지식의 바탕에서 그리스도인의 실제적인 생활의 영역 안으로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그 징검다리 격으로 “그러므로”란 말을 중간에 걸쳐놓은 것입니다.

(1)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죄로 너희 죽을 몸이란 표현을 “죄로 인하여 죽게된 너희 몸”이란 식으로 해석을 부치면 안됩니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은 사람들이 되었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죄로 죽게된 몸이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너희 죽을 몸에 죄로 다시는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너희 죽을 몸”이란 말을 듣게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연합하여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왜 이곳에서 “너희 죽을 몸”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2) “죽을 몸”이란 그리스도인의 인격적인 표현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아담 안에 있었던 옛사람은 온전히 죽었을 뿐 아니라 장사까지 지낸바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죽을 몸이란 그리스도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거듭난 사람을 의미하고 있는 말이 아닙니다. 죽을 몸이란 우리의 육신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우리의 육신은 불가불 죽을 몸입니다. 우리의 참 생명은 지금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 보좌에 있습니다(엡2:6). 그리고 우리의 이 육신(몸)도 장차 실제적으로 그리스도의 그 영화로운 몸으로 연합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탄식함으로 그 날을 기다립니다(롬8:23). 그러나 그날까지는 우리의 육체는 후패하여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우리의 이 육신은 죽을 것입니다. 장차 나타날 부활의 영광을 위한 잠을 자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죽을 몸”이란 이름이 부쳐진 것입니다.

(3) 그런데 그리스도인에게 있는 이 죽을 몸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옛사람과 구분되기는 하지만 죽을 몸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옛사람처럼 소망이 없는 몸이 아닙니다.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고 했습니다(고전15:53). 이 죽을 몸은 분명히 옛사람과 구분된 전혀 별개의 새로운 것이기는 하지만 그 안에는 옛사람의 습성이 남아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인간적인 본능이 그대로 있는데 이 본능 이 죄의 유혹을 받아 죄의 지배아래 놓여 있을 수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물론 우리의 죽을 몸만 가리키는 말입니다. 구원을 얻은 우리의 생명이나 우리의 인격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성결된 생활을 이루기 위해 남아 있는 중요한 과제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우리의 죽을 몸 때문에 우리의 생명이 파멸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비록 이 세상에서 살아갈 동안에 죄의 유혹을 받을 수 있고 죄의 종처럼 죄의 이끌림을 받을 수 있지만 그러나 그 몸은 이미 그리스도의 생명과 연합된 몸이기 때문에 버린바 될 수 없습니다.

2. 죄로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죄가 왕 노릇 한다는 말은 “죽을 몸”에 국한된 말입니다. 죄는 우리를 지배하거나 우리의 인격이나 생명을 지배하는 우리의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와 죄와의 주종 관계는 이미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하여 완전히 끊어져 없어졌습니다. 우리는 바울의 이 같은 권고가 우리의 “죽을 몸”에 국한시킨 것이란 사실을 이해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1) 죄로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죽을 몸 안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죄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죄가 우리 육신(죽을 몸)의 사욕을 건드리고 유혹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거듭난 이후에도 죄로 인한 심각한 문제가 계속 머물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가 우리의 몸에서 왕 노릇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죄에 대하여 죽은 자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의 죽을 몸이 죄가 우리 안에서 왕 노릇하도록 허락하기 때문에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 같은 그리스도인들은 응당 자기를 지배해야할 의와 은혜의 생명의 역사를 스스로 거역하고 육신의 정욕에 이끌려 이미 관계가 영원히 끊어져 버린 죄를 다시 이끌어 드리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죄는 우리의 육신 안에서 가짜 왕 노릇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 가짜 왕은 잠정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죽을 몸을 마음대로 지배 하지만 조만간 하나님의 간섭의 손길이 나타나 하나님의 권능의 손안에서 강권적으로 성결된 생활로 이끄심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우리로 이 같은 죄로 우리의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죄로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는 방법은 몸의 사욕을 순종치 않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라”고 했습니다 죄가 그리스도들을 유혹하는 무기는 몸의 사욕입니다. 몸의 사욕이란 인간의 선한 본능을 하나님 뜻대로가 아니라 자기 육신의 뜻대로 쓰려는 욕심입니다. 죄는 그리스도인의 욕심을 그 유혹의 미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물질적인 욕구를, 돈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유혹합니다. 인간의 성적인 욕구를, 음란으로 유혹합니다. 인간의 명예에 대한 욕구를, 교만으로 유혹합니다. 우리가 할 일은 이 같은 죽을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순종치 말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이 말은 우리는 그같은 사욕에 순종 아니할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옛날 같으면 죄의 종이었기 때문에 죄의 요구에 불순종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아니합니다. 그것은 이제 우리 안에서 그것을 이길 수 있는 결정적인 힘이 있는 것입니다. 죄를 이긴 그리스도의 새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죄의 모든 권세에서 우리를 지켜주시고 이길 수 있게 하시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의 생애를 주장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사욕을 이기려고만 한다면 모든 것을 이기게 하시는 분의 능력으로 우리는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약1:14). 우리에게는 이 같은 자기 욕심을 이기고 우리의 육신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빌1:6; 고전1:8).

결 론 :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죄가 죽었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죄가 죽은 것이 아니라 내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입니다. 나는 죄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나는 이제 죄의 지배권밖에 있습니다. 죄는 이제는 나의 주인으로 나를 종처럼 부려먹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 죄는 나의 죽을 몸 안에 있는 본능에 의한 각종 욕구를 사욕으로 유혹하고 있습니다. 이 죄는 나의 이 죽을 몸이 죽기까지 끊임없이 유혹하므로 나를 그의 종으로 지배하려고 시도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같은 죄의 유혹을 이겨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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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7장

◆ 밤중소리 01-13 | VIEW : 622

≈ 44 ≈ 불의의 병기와 의의 병기

(본문 : 로마서 6 : 12 - 14)

서 론 :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죄에 대하여 죽었고 의에 대하여 살았다는 사실을 여러 번 들어 왔습니다. 죄로 멸망 받을 아담 안에서의 우리의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십자가에서 죽어 장사 지냈다고 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에 연합한 우리는 또한 그를 살리신 하나님의 생명이 나를 살려, 나는 이제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났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수차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죽을 몸”이 존재하고 있으며 죄의 세력은 이 죽을 몸 안에서 우리의 육신을 끊임없이 유혹하고 있으며 우리는 우리의 사욕을 쫓아 유혹하는 이 죄와 더불어 싸워야 할 사람들임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육신의 사람은 비록 죽을 몸이지만 죄의 종은 아닙니다. 죄의 지배를 이길 수 있는 새사람의 권능아래 있다는 사실도 들었습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우리들을 향하여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라”고 권면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 그리스도인의 성화

우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성결된 생활이나 성화에 대한 올바른 성경적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지식 위에 자신의 생활 지침을 세워 자신의 생활을 실질적으로 성결한 생활로 성화의 과정을 통하여 앞으로 전진해 나가야 합니다.

(1) 성화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순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혹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의 성화에 대하여 어떤 순간, 즉 성도가 은혜를 받는 그 어떤 순간에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같은 은혜를 받으려고 부단히 노력할 것이나 매번 실패로 끝나 버릴 것입니다. 그것은 성화가 그처럼 순간적으로 단번에 이루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이 같은 체험은 평생가도 불가능합니다.

믿음으로 성화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믿음으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의로움과 구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궁극적인 성화는 우리의 몸이 그리스도의 몸처럼 영광의 몸으로 변화 받을 때 온전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어떤 분은 모든 것이 믿음으로 되니 죄를 이길 줄로 믿고, 성결된 생활을 이룰 줄로 믿고, 그 믿음 안에 있으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무리 믿음에 서 있어도 우리의 사욕을 따라 유혹하는 죄의 권능은 우리의 죽을 몸에 침투해 들어오는 것입니다.

(2) 성화는 그리스도인들의 적극적인 생활입니다.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라”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라”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라”고 하는 이 모든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적극적인 생활을 권면해 주는 말씀이 됩니다. 이것은 하나의 투쟁을 의미하는 명령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성결 생활은 하나의 투쟁입니다. 이 투쟁이야말로 바울이 말한 “믿음의 선한 싸움”입니다(딤전6:12, 딤후4:7). 그리스도인의 성화는 기나긴 인생의 전 과정에서 이루어 나가야 할 전 생애의 투쟁입니다. “죽을 몸”이 죽을 때까지 이 싸움을 싸워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인의 성화의 동기

우리는 왜 성결된 생활을 하므로 성화가 되어야 하는 것인가?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이 성화가 되어야 하는 동기는 무엇인가?

(1) 그리스도인의 성화의 목적은 바로 “하나님을 대하여 산자”으| 생활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는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생활입니다. 죄는 우리를 하나님과 원수로 만든 악한 존재입니다. 이 죄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갔고 심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같은 우리의 죄를 속죄하기 위한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이 세상에 오셨고 십 자가에서 그 일을 이루셨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우리는 다시 그 죄 가운데 거하는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고 바울은 반문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서 살겠느냐”고 반박했습니다(롬6:1,2).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은 죄 가운데서 더 살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그 죄를 버리고 앞으로 그 죄에 동참하지 말고 오히려 의의 열매를 맺게 하시려는데 있는 것입니다. 이 같은 생활은 바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는 생활이 되는 것입니다(롬7:4).

(2)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는 생활은 순종입니다.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는데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일을 순종으로 아담에게 언약하셨습니다(창2:16,17).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는 일은 원상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곧 순종의 생활입니다. 이 순종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됩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 그의 아들을 믿는 일과, 그 아들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생활입니다.

3. 그리스도인의 성화의 실제적인 방법

우리는 바울의 권면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그의 생활에 나타내야 할 성결 생활의 방법을 찾아보게 되는 것입니다.

(1)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죄가 다시 우리 몸에서 왕 노릇해서는 안됩니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죄는 우리에게 다시 찾아 와서 왕 노릇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죄에 대하여 죽었고 장사까지 지낸바 되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들 스스로가 죄를 우리들 몸에 불러 드려 왕 노릇할 수 있도록 나의 죽을 몸을 죄에게 스스로 제공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때 죄는 우리의 몸을 월권적으로 지배하는 거짓된 왕이며, 우리의 죽을 몸 역시 실제적인 왕이 아닌 거짓된 왕 앞에 자신을 굴복시키는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일을 막아야 합니다. 우리가 바울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한 교리적인 지식을 구비했다면 우리는 이 진리의 말씀을 가지고 죄로 왕 노릇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하는 것입니다.

(2)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라고 했습니다. 몸이란 죽을 몸을 가리킵니다. 이 몸엔 인간이 살아나가는데 필요한 본능적인 제반 요소들이 있습니다. 이런 요소들은 선용하면 버릴 것이 없으며 선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몸의 사욕을 위해 쓰면 죄가 되는 것입니다. 죄는 우리의 본성에서 사욕을 충동질하여 우리로 죄 가운데 빠지게 하려고 유혹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몸의 사욕을 따라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3) 우리의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몸은 하나의 병기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불의를 위해 사용할 때는 불의의 병기가 되어 우리의 몸이 죄에게 드려지는 바가 되고, 의를 위해 사용될 때는 의의 병기가 되어 하나님께 드려지는 바가 되는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죄의 종이었을 때는 우리의 몸은 전적으로 불의의 병기로 사용되었고 죄에게 드려지는 생활을 해 온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안에 들어온 이후로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었기 때문에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려질 수 없는 몸이 되었습니다. 그 반면에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을 향하여 새로운 열매, 의의 열매를 맺도록 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아직도 불의의 병기노릇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 론 :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신분적인 위치를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죄에 대하여 완전히 죽었다는 것,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새 사람이 되었다는 것,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열매를 맺어야 할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생활을 할 수 있는 힘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지금 은혜아래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임을 알아야 합니다.


≈ 45 ≈ 순종과 소유권

(본문 : 로마서 6 : 15 - 16)

서 론 :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은 그의 몸을 다시는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려서는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13). 그 이유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아래 있음이니라”고 강조합니다(14). 법 아래 있는 신분과 은혜아래 있는 신분과는 하늘과 땅만큼 거리가 있습니다. 법 아래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아래 속한 사람으로 그들이 최종적으로 갈곳이 지옥이요 은혜아래 속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가진 사람으로 그들의 최종적인 거처는 천국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이 둘 사이에는 엄청난 거리가 있는 만큼 그들의 생활양식이나 의식구조에도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는 것입니다.

1. 그런즉 어찌 하리요

바울이 14절에서 밝힌 말씀은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어떤 많은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날카로운 항변입니다.

(1) 하나는 “은혜아래 있고 죄가 주관치 못한다고 하니 죄를 져도 상관이 없다는 말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들은 그리스도인들을 율법의 궤도에서 벗어난 무 율법주의자들이라고 비난합니다. 율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아래 있다고 하니 그리고 죄의 세력이 그들을 주관치도 못한다고 하니 그리스도인들이 죄를 범하는 일은 그 아무 누구도 정죄 할 수 없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러니 결과적으로 그리스도교는 기존의 도덕적인 인간의 생활을 허물어 버리는 것이라고 비방하는 것입니다.

(2) 다른 하나는 “율법적인 제약을 전혀 받을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생겨났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들의 주장은 사람이 한번 구원받았으면 모든 것이 완성된 것이니(종국적 구원이 이루어진 것이니) 그 후에 그에게 일어 나는 모든 일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율법의 정죄나 하나님의 심판의 두려움이 없이 아무 일이나 할 수 있다는 결론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생각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악용하고 색욕거리로 이용하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3)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현재적인 신분에 대한 바른 인식이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공로로 구원받았다고 하는 자신의 확고한 신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사실과 그리스도인은 죄의 지배에서 벗어났을 뿐 아니라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죄를 이기고 물리철 수 있다고 하는 분명한 자기 신분을 확인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안에 있는 우리의 현재적인 생애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는 신분이란 사실을 인식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지식과 믿음의 터 위에서 자신의 삶을 이룩할 때 그리스도안에서의 승리가 보장되는 것입니다.

2. 죄를 지으리요?

바울은 이 같은 두 가지 면에서의 잘못된 견해에 대해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란 말로 공격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의 정죄도 받지 아니하고 제재도 받지 아니하는 신분이 아니고 모든 것을 은혜로 처리 받는 은혜아래 있게 되었으니 그러면 얼마든지 죄를 지어도 상관이 없다는 말이냐? 는 뜻입니다. 14절에 나타난 말씀을 보면 그리스도인들이 죄를 지어도 상관이 없다는 뜻으로 보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1) 우리는 여기서 먼저 죄를 지으리요 라고 한 바울의 말의 참 뜻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들은 절대로 죄를 지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한 말은 아닙니다. 우리가 성경에 나타나 있는 어떤 구절을 보면 그리스도인들은 죄와는 전혀 관계가 없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되어지는 말씀이 더러 있습니다(요일3:8, 9).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죄를 짓는다는 말은, 죄를 이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의적으로 지었을 때와 자신이 지은 죄 가운데서 빠져 나오지 않고 그 자리에 안주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 같은 행위의 이유가 자신들이 은혜아래 있으니 괜찮다는 뜻이 함유되어 있는 경우를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경우 그가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이 같은 생각에서 죄를 지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2) 법 아래 있지 아니하다는 말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정죄와 구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법 아래란 말은 율법아래란 뜻으로 율법의 의로 구원을 얻는 일이나 율법의 정죄로 심판을 받는 일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이 같은 법 아래 속해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절대로 적용되지 아니합니다.

(3) 그리스도인들은 법 아래 있는 사람들은 분명 아니지만 그 법을 버린 사람인 것이 아니라 법을 온전히 이룬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 밖의 사람들은 율법의 정죄 아래서 그 율법을 이루려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의 저주와는 아무런 관계없이 그들 안에 계시는 하나님의 새로운 생명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그 뜻을 이룰 수가 있는 것입니다.

3. 그럴 수 없느니라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다고 죄를 지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럴 수 없느니라”고 단정적으로 말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아래 있지 않다는 사실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합니다.

(1)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적인 생활을 버려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는 율법에 대하여 죽은 사람들입니다.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율법의 정신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아닙니다. 우리가 율법의 정죄에서 벗어난 일은 율법을 버리려 함이 아니요 율법을 이루려 함임을 알아야 합니다(마5:17, 18). 이 같은 사실은 어느 율법사와의 대화에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마22:34-40). 예수님은 율법을 두 계명으로 나누셨는데 첫째 되는 계명을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요 둘째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대하여 산 자로 여기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인 것입니다.

(2)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죄의 종이 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종이란 죄의 지배를 받는 상태의 사람들을 말합니다. 죄 짓기를 스스로 즐기며 그 죄 가운데서 계속 머물러 있는 사람은 분명히 죄의 종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같은 일이 불가능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의 죽을 몸에 죄의 습성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인간적인 본능을 유혹하는 죄의 공격을 받아 잠시동안 죄 아래 머물러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일은 계속적인 일이 될 수 없습니다. 그 안에 계시는 성령의 탄식하심으로 회개하게 됩니다(롬8:26). 그리고 이 같은 일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징계에 의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히12:5-11).

결 론 : 은혜 아래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그들 안에 의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빌 1:6). 만약 우리들이 그리스도안에 있다고 하면서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의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이 같은 능력이 없다면 그 사람은 은혜아래 있는 사람인 것이 아니라 죄의 종 아래 그대로 있는 사람이라고 밖에 볼 수 없을 것입니다.


≈ 46 ≈ 거룩함에 이르라

(본문 : 로마서 6 : 17 - 21)


서 론 :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죄의 종으로부터 해방되어 의의 종이 된 그리스도인들의 신분에 대하여 이 같은 사실을 납득시키기 위하여 계속적으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사실을 깨달았을 때 자신의 신분에 따른 생활을 통하여 의의 종으로서의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요8:31,32). 그리스도인들이 진리를 모르고서는 구원에 이를 수도 없고 의의 열매를 맺는 생활도 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의의 종으로서의 새로운 출발점이 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하여 정성을 기울여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1. 죄의 종이었을 때의 지체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라고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 말은 로마 교인들의 건강에 관한 언급이 아닙니다. 우리의 육신이 아직도 죄에 의하여 지배되고 잘못 인도를 받고 있는 육신의 사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의의 종으로 연단 받지 못하고 지난날의 구습에 따르는 생활환경으로 쉬 빠져 들어갈 수밖에 없는 우리들 육신의 영적인 연약함을 뜻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의를 행하기에 적합한 몸, 의의 종으로 익숙한 상태에 있는 그런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말씀을 들려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죄의 종의 자리에서 빠져 나온 지 얼마 안된 의의 종들을 향하여 이 말씀을 강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육신은 얼마 전까지 죄를 행하기에 아주 숙달했던 몸입니다. 의를 행한 경험이 전혀 없으며 의를 행하기에 전혀 익숙지 못한 육신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진리를 들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인간사회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사람의 예대로 알기 쉬운 예화를 통하여 다시 설명해 주겠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 전에 우리의 지체는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르렀었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19절에서 계속적으로 말하고 있는 너희 지체란 말은 한 사람의 전인적인 모든 육신에 관한 전부를 말합니다. 한 사람의 지식, 재능, 성품뿐 아니라 그의 제반 활동력전부를 의미해 주는 말입니다. 우리는 지난날에 이 지체를 가지고 불법과 부정에 드려 왔습니다. 드렸다는 표현을 쓰고 있는 이유는 그때 우리의 몸은 죄의 종이었기 때문에 종의 입장에서 죄에게 드리는 생활을 하여온 까닭입니다.

우리의 온 지체는 죄의 종이 되어서는 안될 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죄로 말미암아 죄에게 팔린 몸이 되어 하나님이 주신 자신의 모든 것을 죄에게 드리는 생활을 해 온 것입니다. 원래가 하나님이 주신 우리 인간의 모든 선물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은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죄에게 팔려 죄의 종이 되면서 이 같은 아름다운 하나님의 형상이 전적으로 타락하여 죄의 종의 몸으로 바뀐 것입니다. 하나님을 따라 거룩해야 할 몸이 부정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순종하고 헌신해야 활 우리의 몸이 향락의 도구가 되었으며, 의로운 성품이 죄악의 도구가 되어 버렸으며, 지혜가 간교가 되었고, 하나님을 알아야 할 지식이 인본주의로 타락해 버렸습니다. 우리의 지체를 이처럼 죄의 종의 도구로 전적으로 드리는 생활을 하므로 불법에 이르렀었다고 사도 바울이 깨우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옛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기 이전의 우리의 신분이었습니다. 이 같은 상태에서의 예외자란 우리 인류사회에 한 명도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2) 바울은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란 말은 이전에서 새로운 상태로 돌아온 의의 종으로서의 우리의 신분을 의미해 주는 말입니다. 이전과는 그 위치가 분명히 달라진 상태요, 이전의 죄의 종의 생활에서 의의 종의 생활로 방향 전환된 지금 우리의 새로운 위치를 말해 주는 표현입니다.

그리스도를 믿기 이전의 우리의 신분은 죄의 종이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그리스도를 믿은 후의 우리의 신분은 의의 종이 된 것입니다. 이제란 말은 의의 종이 된 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들려주는 말입니다.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죄의 종으로 드렸던 우리의 지체와 지금 의에게 종으로 드리라고 하는 너희 지체는 어떻게 다른 것인가?

우리들이 이제 의에게 드리게 된 우리의 지체가 죄의 종으로 사용되었던 이전의 그 지체가 아니라 전혀 다른 지체란 뜻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지체는 죄의 종으로 있었던 이전이나 의에게 종으로 된 지금이나 하등 변함이 없는 그 지체입니다. 다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누구에게 드려지느냐에 대한 대상이 달라졌을 뿐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 우리의 모든 것이 근본적으로 새로워져야 하는 것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었다고 개성의 근본적인 변화가 따라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각 개인이 제각기 가지고 있는 개성은 잘만 쓰면 아름다운 것입니다. 우리의 성격의 근원적인 변화를 의미하는 말도 아닙니다. 급한 성격의 사람이 예수 믿었다고 느릿해져야 한다거나 다혈질적인 사람이 예수 믿었다고 근본적으로 변화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도 그들이 구원을 받고 성령을 받고 위대한 사도의 직분을 받고 온 세계를 향하여 복음을 전하는 사명자로 선택을 받았지만 바울은 바울 대로 베드는 베드로대로 요한은 요한 대로 제각기 자신의 성품과 개성의 특성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다른 것이냐? 드리는 대상이 달라졌습니다. 이전에는 죄에 드려졌던 것이 이제는 의에게 드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이 (지체들이) 선한 본성으로 하나님께 드려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문장력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해석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지혜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을 깨닫는 일에 사용되어져야 합니다. 우리의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아낌없이 쓰여져야 합니다. 우리의 말의 재능이 복음을 전하는 수단으로 쓰여져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모든 인격이 온전히 의의 병기로 바뀌어지는 일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그대로의 지체가 이제는 죄의 종으로서 불법에 드려지는 것이 아니라 의의 종으로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2. 의에게 종으로 드리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드리란 말은 명령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성결 생활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하나님께 드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1) 자동적으로 드려진다고 생각하면 아무 것도 드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은혜를 받았다고 우리들의 지체가 힘 드림이 없이 자동적으로 의의 종으로 드려진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은혜를 받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고 해도 우리의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리는 일에 스스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애씀이 없이, 아무런 힘도 드림이 없이 의로운 생활을 하거나 의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2) 드리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종의 입장에서 주인을 향하여 주인의 요구에 따르는 일을 말합니다. 죄의 종으로 있었을 때에 죄에게 드렸던 것처럼 의의 종이 되었으니 자기가 원하든 원치 않던 주인의 요구에 따라야 하기 때문에 우리의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야 할 의무와 책임이 의의 종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변화는 믿음으로 저절로 얻어지는 선물이 아닙니다. 의의 종이 되었으니 의에게 순종함으로 자기 스스로 만들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결 론 : 그리스도인들이 의의 열매를 맺는 생활은 믿음으로 얻은 체험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우리의 생활에서 이루어야 할 우리의 책임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육신이 아직 연약하므로 의의 종으로 합당한 생활을 못하고 있지만 우리의 신분이의에게 종이 되었으므로 의를 행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열심을 내야 합니다. 종들 처럼 순종하고 드려져야 합니다.


≈ 47 ≈ 죄의 삯과 하나님의 은사

(본문 : 로마서 6 : 20 - 23)


서 론 : 우리는 로마서 6장에서 많은 진리를 배웠습니다. 주로 죄의 종과 의의 종에 대한 교리입니다. 우리가 원래는 죄의 종이었다는 사실을 밝혀줍니다. 그러던 것이 의의 종의 신분으로 바뀐 사실에 대하여 자세하게 배웠습니다. 종이란 완전한 노예의 신분을 가리킵니다. 노예의 이동은 매매의 수단으로 됩니다. 하나님이 충분한 대가를 치르시고 사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물인 하나님의 종이 된 것입니다. 이 같은 이전은 완전한 것입니다.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소유권의 이전입니다. 이 일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의 종에서 의를 종의 자리로 옮기게 하시는 일을 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셔서 그의 사역을 통해서 이루신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우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이루어져 하나님의 은혜로 죄의 종에서 의의 종으로 된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로마서 6장의 결론이 되겠습니다.


1. 죄의 종이 되었을 때의 열매

바울은 우리로 다시 죄의 종이 되었을 때의 상황을 돌이켜 보도록 유도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 하였느니라 너희가 그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 하였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날 죄의 종으로 있었을 그때에 의에 대하여 자유 하였다는 말은 노예 로마서가 아닌 상태를 의미해 줍니다. 의의 종이 되기 이전임으로 의에 대해서는 노예상태가 아니라 온전히 자유로운 상태입니다. 의의 종이 아닌 신분이었기 때문에 의에 순종해야 할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의에 속박 받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다만 죄가 그를 폭군처럼 지배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죄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다시 한번 음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죄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지 못하는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곧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입니다. 아담이 불순종으로 최초의 죄인이 되었고 우리는 이미 죄인이 된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죄인이 된 것입니다. 이 같은 상태를 원죄(原罪)란 말로 표현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성현들이라고 말하고 있는 매우 도덕적인 사람이라도 그들이 절대로 의인이 될 수 없는 것은 죄인으로 태어났을 뿐 아니라 그의 모든 도덕적인 행위가 결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기 위해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2)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곳에서 말하고 있는 열매란 성결에 대한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육신에 속한 열매인 것입니다. 바울은 죄의 종들이 맺는 육신의 열매에 대하여 이처럼 열거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 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고 말씀했습니다(갈5:19-12). 죄의 종으로 있을 때에 우리가 얻은 열매란 거룩함에 이르는 것이 못되었습니다.

(3)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이제란 말로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단절시키고 있습니다. 이제는 이라고 한 말은 죄의 종의 자리에서 빠져 나와 새로운 자리에 서 있는 나를 의미해 주는 말입니다. 이제는 우리는 죄의 종이 아닌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는 의의 종인 것입니다. 우리는 죄의 종과 의의 종과의 분계선을 분명히 넘어 온 사람들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는 그 일을 부끄러워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지금 의의 종의 자리에 서 있으면서 죄의 종으로 있었던 그 때를 회고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때는 즐거움으로 아무런 부끄러움이 없이 그같은 육체의 일을 행했지만 이제는 그 일을 부끄러워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만약 지금 우리들이 그리스도안에서 생활하고 있다고 하면서 지난날의 일에 대하여 하등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고 오히려 아직도 그런 일을 버리지 못하고 계속하고 있다면 이 사람은 죄의 종의 자리에 그대로 있는 사람이지 의의 종의 신분으로 바뀐 사람이 아닙니다.


2. 하나님께 종이 되었을 때의 열매

바울은 22절에서 다시 이제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의 현재적인 신분을 의미해 주는 표현입니다.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이 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거룩한 열매를 얻었다고 했습니다.

(1) 죄에게서 해방되었다는 말은 다시는 죄의 지배를 받지 않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지난날의 죄의 종의 자리에서 완전히 벗어났습니다. 다른 영역으로 지역적으로 옮겨졌을 뿐 아니라 우리의 지배자도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노예는 팔려 가면 장소도 주인도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노예들은 이 주인에게서 다른 주인에게로 팔려가며 팔려간 그 주인의 소유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죄의 종에게서 하나님의 종으로 팔려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된 사람들입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는 죄에게 팔려갈 수 없는 신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죄가 우리에게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죄는 우리들의 이 죽을 몸에 아직 남아서 우리에게 영향력을 끼치고 있지만 우리를 지배하거나 주장하는 일에 왕 노릇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들의 이 죽을 몸에서 이 죄가 왕 노릇하지 못하도록 의식적으로 힘써야 하며 우리의 몸을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기를 힘써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성결 생활입니다.

(2) 우리는 이제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의 성결 생활의 열매를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성결 생활은 세상사람들의 도덕적인 기준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따른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열매는 성결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 하라고 하시는 말씀에 따른 하나님의 거룩에 참여하는 생활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반드시 이 열매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성결 생활은 두 가지 뜻으로 해석이 됩니다. 하나는 이전의 죄의 종으로 있었을 때의 육체의 일을 끊는 일이요, 다른 하나는 이제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바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 바쳐지지 않는 생활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가치도 없습니다. 거룩이란 말은 ‘하기아스모스’로 봉헌한다는 뜻입니다.

(3)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고 했습니다. 영생이란 그리스도인들의 종국적인 목표점입니다. 우리는 이 영생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을 때 이미 영생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영생의 실제적인 실현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갈 때에 이루어집니다.

결 론 : 바울은 본문의 말미에서 “죄의 값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고 했습니다. 값이란 말은 일한 임금(賃金)의 배당을 의미해 주는 말입니다. 죄로 말미암은 배급, 배당을 말합니다. 죄의 종으로 죄를 위해서 노예로 일한 사람은 응당 그 임금을 배당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같은 배당의 규정은 율법이 정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망이란 영원한 죽음을 의미합니다. 둘째 사망입니다. 그런데 이와는 반대로 하나님의 은사는 영생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종의 임금은 값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종으로 사신 일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려는 선하심에서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우리의 공로나 의가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로 된 것이기 때문에 은사 곧 은혜로 주신 것입니다. 이 대가는 놀랍게도 영생이라고 하셨습니다.


로마서 7장 

≈ 48 ≈ 율법의 기능

(본문 : 로마서 7 : 1 - 4)

혼인 관계로 비유한 율법과 죄

1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그 법이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2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느니라

3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녀라 

그러나 만일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롭게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4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서 론 : 우리는 로마서 7장을 해석함에 있어 

여러 가지 해석하기 어려운 문제들 앞에 당도하게 됩니다. 

그래서 로마서 7장을 난해 장이라고도 하여 

진리에 대한 이해에 매우 큰 어려움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로마서 7장을 자세히 읽어보면 

성령에 관한 언급은 한마디도 없고 

율법에 대한 언급으로 일관되어 있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1-6절에는 율법과의 결혼관계, 

7-12에는 율법의 옹호, 

13-25에는 율법으로 인한 탄식 어린 호소 등으로 이어 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7장을 기록한 목적은 

율법의 기능과 그 목적을 우리에게 보여 주려는데 있습니다. 

바울이 7장에서 밝혀주려고 애쓴 일은 

율법을 통한 칭의가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그뿐 아니라 율법에 의한 성화도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7장 서두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율법과의 결별과 그리스도와의 결합에 대한 문제를 

남녀간의 혼인관계를 예로 하여 

깨닫게 해주려고 논리를 전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1. 율법과 혼인관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의 그리스도와의 새로운 관계를 설명하는 일에 있어서 가장 효과적인 비유를 혼인관계에서 예를 들고 있습니다.


(1) 율법이 사람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율법은 살아있는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하나님의 법입니다. 죽은 사람들은 이 율법이 적용될 수 없습니다. 인생은 죽음으로 모든 일이 끝나버립니다. 율법이 사람을 정죄하는 권능이 있다고 해도 죽은 사람들을 정죄하지 못합니다. 죽음은 율법의 마침이 됩니다. 율법이 그리스도인을 정죄치 못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인은 율법에 대하여 죽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롬6:2,4,6).

(2) 바울은 이 원칙을 남편 있는 여인의 경우와 결부시킴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율법과의 관계가 끊어졌으며 그리스도와의 새로운 관계를 가지게 되었는가에 대하여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남편 있는 여인은 자유로운 신분이 못됩니다. 남편은 그의 머리가 되어 있으며 그는 범사에 남편에게 순종해야 할 입장에서 있기 때문입니다(엡5:23,24). 사람은 세상에 태어나서 율법의 지배아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것은 한 가지 뿐입니다. 율법에 대하여 죽어버리는 일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남편의 지배아래 있는 여인이라 할지라도 그 남편이 살아 있을 동안만 입니다. 죽으면 남편의 법 아래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만약 사람이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면 그 사람은 그 율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 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남편의 법에서 자유 함을 얻은 여자는 다른 남자에게 합법적으로 시집갈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같은 일은 법을 어기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음부가 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바울의 이런 비유적인 해석은 4절에 가서 그 의도하는 뜻을 분명히 나타내주고 있는데 그리스도인들이 율법과 결별하여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하며 그 일이 어째서 하나님 편에서 합법적인가에 대한 해석이 되는 것입니다.

(3) 바울의 이런 설명은 그리스도인과 율법과의 오해의 위험성을 분명히 밝혀 두려는데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때로는 죄에 빠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때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을 다시 율법 아래로 잡아 끌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스스로 자신을 율법의 정죄 아래 묶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그리스도인들은 하루에 몇 번씩이건 율법과 그리스도와의 사이를 왕래하면서 방황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일은 전혀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 같은 일은 다만 자기와 율법과의 관계를 모르는데서 나온 잘못된 지식으로 말미암아서 입니다. 바울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런 관계를 명확하게 가르쳐 주려고 혼인관계의 비유를 들고 있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혼인관계

바울은 4절에서 아직까지의 혼인관계의 비유에 대한 실체를 들어내놓고 있는 것입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 그리스도인은 첫 번째 것이 해소되어야 다음 일이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사람이 율법에 대한 처리를 분명히 하지 않고는 그 어떤 방법으로도 하나님을 향하여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율법과의 관계를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 또 다른 주인을 섬길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음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맺으려면 율법과의 관계가 해소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해소의 방법이 우리가 율법에 대하여 죽는 일입니다.

(2) 우리가 율법과의 혼인관계가 해소된 것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함으로 우리가 율법의 얽매임에서 벗어나게 되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이루신 그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평생을 지내도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도 없고 율법의 지배아래서 빠져 나올 수도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죄로 더럽혀 진 우리의 육신의 연약에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그리스도께서 이루셨습니다(롬8:3). 하나님은 자기 아들로 이 일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이 율법의 정죄함을 받아 십자가에서 죽어 주심으로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셨습니다. 그러나 그뿐이면 아무 것도 우리에게 올 것이 없고 그렇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새로운 생명의 능력을 힘입어 살아나셨습니다. 이 생명은 율법의 지배를 받는 생명이 아닙니다. 죄의 권세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생명,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그가 이처럼 살아나신 것은 우리에게 그의 새로운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중생은 이 생명으로만이 가능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이 같은 사역을 믿을 때 우리는 그 순간 그와의 새로운 연합관계가 이루어짐으로 그 순간부터 우리는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한 자가 되어 율법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것입니다.

(3) 이렇게 하여 우리는 율법이 아닌 새로운 남편과 혼인관계를 이룰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와의 결합은 하나의 혼인관계입니다. 이 새로운 혼인관계는 율법과의 혼인관계를 청산하지 아니하면 안됩니다. 그 길은 죽음밖에 없습니다. 이 일은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하여 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에게로 가서 새로운 혼인관계를 성사시킨 것입니다.

결 론 :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왜 이처럼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에 대하여 죽어주셨는가에 대한 해답을 얻어야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새로운 혼인관계를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일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당신의 신부로 맞이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율법에서 벗어남을 얻은 사람은 필연적으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하여 그의 신부가 되는 것입니다. 다음에 하나님께서 이같이 하신 이유는 “우리로 하나님을 향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함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으로부터 이 열매를 원하시는 것입니다(요15:1,2 ; 눅13:6-9 ; 벧후1:8).


≈ 49 ≈ 구원의 목적

(본문 : 로마서 7 : 1 - 4)



서 론 : 바울은 로마서 7장 초두에서 율법과 그리스도인들과의 관계를 폭군적인 남편과의 혼인관계로 비유하고 우리가 어떻게 그 가운데서 벗어났으며 또 어떻게 새로운 신랑을 남편으로 맞이할 수 있게 되었는가에 대한 설명을 시도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의 설명은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이 죽으면. 그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우리가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에서 완전히 벗어나 자유 함을 얻었으므로 다른 이에게 혼인올 해도 그 일은 결코 불법이 아님을 밝혀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이처럼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한 것은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그 목적이 분명히 있는데 그 목적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고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1. 바울의 변명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혹은 구원의 진리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유대인에게 오해를 살만한 소지를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많은 대적자가 있었고 그들과 진리에 대하여 끊임없는 투쟁을 계속해야 했습니다. 바울의 대적 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에서 벗어났다는 바울의 해석을 ‘무 율법주의’ ‘반 율법주의’ ‘탈 율법주의’라고 매도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제일 안타깝게 여긴 것은 그리스도인이 율법에 대하여 죽었고 벗어났다고 하면서 어떻게 그리스도인의 의로운 생활을 설명하며 이해시킬 수 있느냐는 문제였습니다.

(1) 율법으로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하였으니 그러면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말이 아니겠느냐는 반론입니다. 바울은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못박았습니다(롬3:20). 바울이 주장한 그 단면만 본다면 바울의 말은 분명히 ‘율법 폐기론 자’의 말임에 틀림없습니다.

유대인들의 이 같은 반론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참 목적을 이해하지 못한데서 온 오해인 것입니다. 율법의 목적은 인간에게 의를 주는 것이 아니라 정죄에 있으며 이 정좌는 사람으로 죄를 깨달아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게 하시려는데 있으신 것입니다.

(2) 다른 또 하나의 악의적인 비방은 사람이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으니, 그리고 죄가 많은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넘쳤다고 하였으니 은혜아래 있는 사람들은 죄를 범해도 상관이 없다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 율법주의를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의 정죄를 받지 않는다면 죄 가운데 살아가도 될 것이 아니겠는가?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칠 것이 아니겠는가? 이 같은 반론인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단호하게 그들의 주장을 부정합니다. “은혜를 더 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라고 반격하고 있습니다.

(3) 바울의 이 같은 문제가 7장에 와서 혼인관계를 비유로 하여 강력한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한 이유는 무 율법이나 폐 율법적인 생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고 밝혀 주고 있는 것입니다.


2.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뜻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다는 뜻은 율법을 버렸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율법을 버렸다는 것은 양심을 버렸다는 뜻이 되기 때문에 율법이 없는 생활은 인간의 생활이 아니라 금수의 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은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거룩은 바로 율법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리고 율법이 없는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양심이 율법이 된다고 하셨습니다(롬2:14).

(1)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은 우리가 율법의 정죄 아래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율법은 죄인을 정죄 합니다. 율법의 정죄는 피할 곳이 없습니다. 율법의 정죄는 죄 값을 요구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선언되고 있습니다(롬6:23). 이 같은 사망의 선언은 율법의 정죄에서 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 율법의 정죄 함이 없는 것입니다(롬8:1).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은 이처럼 율법의 정죄를 받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2)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은 우리가 율법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율법은 모든 죄인들을 지배합니다. 죄의 종들을 지배하는 역할을 율법이 합니다. 율법은 율법아래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 같은 율법의 지배에서 자유 함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율법의 명령과 그 지배아래서 생활하고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율법에 대하여 죽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율법의 명령과 지배에서 벗어났습니다.


3.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을 받은 목적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이루지 못하는 율법을 이루셨을 뿐 아니라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의 정죄를 받아 죽어 주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이처럼 논증하고 있습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롬8:3,4).

(1)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뚜렷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율법을 폐하기 위해서가 아니요 죄 가운데서 살아가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하심”에 있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은 실인즉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얻은 목적에 위배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는 찍혀 버린다고 하셨습니다(요15:2).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약2:26).

(2) 하나님을 위하여 맺는 열매란 율법을 온전히 이루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어느 날 율법사에게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을 말씀하셨습니다(마22:34-40). 이 강령은 율법을 이루는 그리스도인들의 하나님을 향한 열매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대한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새 율법으로 사랑의 계명을 주신 것입니다(요13:34).

결 론 : 하나님을 위한 가장 위대한 열매란 우리의 전 생애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일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고전10:31). 이 일은 그리스도인들이 그의 한 평생에 이루어야 할 계속적인 열매여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받은 새로운 생명으로 말미암은 아름다운 열매가 있습니다. 이 열매야말로 하나님을 위하여 맺어야 할 열매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갈5:22, 23). 이런 열매들은 율법아래에서의 열매보다 차원이 높을 뿐 아니라 율법을 온전히 이룰 새로운 계명의 열매입니다.


≈ 50 ≈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는 생활

(본문 : 로마서 7 : 5 - 6)


서 론 : 사도 바울은 우리들이 육신에 있었을 때와 율법에서 벗어났을 때의 생활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육신에 있을 때 에란 그 시기는 우리가 아직 성령을 받지 못했을 때, 곧 아직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이루어지지 아니했을 때의 시기, 중생 이전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때는 우리 지체 중에서 역사하는 죄의 정욕으로 말미암아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얽매였던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는 지난날 거듭나지 못했을 때처럼 의문의 묵은 것으로가 아니라 영의 새로운 것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할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육신에 있었을 때의 생활

우리가 지난날 육신에 있었을 때의 생활을 돌이켜 보면 우리 지체 중에서 불가항력적으로 역사 했던 하나의 놀라운 세력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 세력이 바로 죄의 정욕입니다.

(1) 육신에 있을 따란 죄의 정욕의 권능이 나를 사로잡고 있었을 때를 의미합니 다. 사도 바울은 우리 안에서 권능을 가지고 무섭게 역사하는 죄의 정욕을 “율법으로 말미암은 죄의 정욕?이란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율법이 우리들 마음속에 죄의 정욕을 심어주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공의로우심을 나타낸 것이기 때문에 결코 인간의 마음속에 죄라든가 정욕을 심어 주는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범죄한 우리 인간의 마음속은 온통 불의와 탐욕과 정욕과 음란으로 들어 차 있습니다(롬1:28-31 ; 마15:19,20). 그런데 이것들이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발동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율법이 나타나자 그 율법을 대항하여 싸우기 시작한 것입니다. 율법은 잠자는 우리 마음속의 죄를 깨웠습니다. 그 죄로 우리 가운데서 활발하게 움직이도록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 하게 하려함이라”고 했습니다(롬 5:20). 더 한다는 말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존재했던 죄가 밖으로 자꾸 드러나는 상태를 말하는 표현입니다.

(2)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을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의를 줄 수 없습니다. 우리 안에 존재하고 있는 죄의 세력은 율법의 권능보다 더 강합니다. 강하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죄의 종으로 죄에게 팔린 몸이기 때문에 우리 안에 있는 죄를 정죄하는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뜻입니다.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갈3:11). 우리는 율법이 없었을 때에도 많은 죄를 행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그런 죄를 행하면서도 인간들은 그것이 죄인 줄 몰랐습니다. 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율법이 나타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거룩하지 못한 우리의 모든 행위에 대해 정죄 했습니다. 우리는 그 율법의 정죄함을 바라보고 비로소 우리의 행실이 하나님 앞에 무서운 죄란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율법은 결코 우리의 범죄행위를 도저히 막을 수 없었습니다. 율법이 우리에게 주어진 이유는 그 율법으로 죄를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롬3:20). 그리고 율법은 믿음의 의를 보여줍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고 했습니다(롬3:21).

(3) 이처럼 우리가 육체에 있었을 때에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서 역사함으로 말미암아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했다고 했습니다. 우리 안에서 역사 하는 죄의 세력은 말할 수 없이 강력합니다. 율법도 그 가운데서 우리를 구원치 못합니다. 양심도 그 앞에서 무릎을 꿇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죄는 하나님 다음으로 강력한 세력으로 인간사회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사망을 위한 열매란 인간의 모든 열매를 말합니다. 인간에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열매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는 모든 일”이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롬1:21). 사람이 선하고 도덕적이라 하더라도 성령 안에 있지 아니하면 육신에 속한 자이기 때문에 그들도 역시 죄의 정욕이 그 지체 중에서 역사하여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는 생애를 보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살아가고 있는 모든 인간은 모두 율법을 이룰 수 없기 때문이며 율법의 정죄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2. 율법에서 벗어난 자의 생활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의 새로운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생활이 거듭난 사람, 율법에서 벗어난 자의 생활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이제는 이란 말은 매우 중요한 뜻을 지니고 있는 말입니다. 이 말은 하나의 분기점을 말해 줍니다. 육신에 있을 때의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경지에 들어선 사람의 경우를 말합니다. 이 선은 그리스도인과 비 그리스도인과의 분명한 경계선입니다. 우리는 다 이 경계선을 넘어선 사람들입니다.

(2)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다고 했습니다. 얽매였던 것이란 죄를 말합니다. 우리는 죄에 얽매여 왔습니다. 우리는 죄에 팔린 몸으로 죄의 노예이기 때문에 그 얽매임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습니다. 인간은 양심과 율법을 통해서 놓임을 받으려고 했지만 오히려 율법으로 인하여 죄의 세력이 더 강력해 질뿐 아니라 정죄까지 하게 됨으로 율법은 더욱 죄에 얽매이게 하는 매개체가 되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이 얽매였던 죄에 대하여 죽은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로 인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의 죽으심은 우리 죄로 인한 죽음이기 때문에 곧 우리의 죽음이 되는 것입니다. 죽음은 모든 일의 마지막입니다. 우리의 죽음은 죄에 얽매임에서 풀려났으며 해방된 것입니다. 이 일은 또 율법에서 벗어났다고 했습니다. 율법에서 벗어났다는 말은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났다는 뜻으로 율법의 저주가 미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율법은 살아 있는 사람에 대한 정죄의 구실을 합니다. 살아있는 사람만이 죄의 지배를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는 이제 그 죄를 정죄하는 율법으로부터도 벗어나게 된 것입니다.

(3) 율법에서 벗어난 자의 생활은 새로운 생활입니다.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가 율법에서 벗어난 것은 죄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입니다. 이 일은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을 통해서 우리를 거룩하게 할 수 없는 율법의 무능력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하신 이유는 우리로 다른 이 곧 하나님을 섬기게 하시기 위해서임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생활은 율법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율법의 영역 안에서 하는 생활이 아닙니다. 새로운 영역 안에서의 생활을 의미해 주는데 이 영역이 바로 성령 안에서의 생활입니다. 이것은 지난날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삶의 형태입니다.

(4) 의문의 묵은 것은 이제 쓸모 없어졌습니다. 의문의 묵은 것이란 글로 쓴 율법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 같은 율법에서 벗어난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다시 그 법 아래에서 새로운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의 새로운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 영의 새로운 것이란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말미암아 받은 부활의 생명, 새로운 영원한 생명을 말합니다. 이 생명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생활입니다. 이 생명 안에는 의를 이루는 하나님의 권능이 있습니다.

결 론 :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제 단순히 율법적인 의를 이루려는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기뻐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해 드리기 위한 삶입니다. 이 같은 삶의 자세가 죄에 대하여 죽고 율법에서 벗어난 우리의 진실된 삶의 자세임을 알고 이 목적을 위하여 우리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 51 ≈ 율법이 죄냐?

(본문 : 로마서 7 : 7)



서 론 : 바울은 로마서에 와서 같은 내용에 대한 반복법을 서슴없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설교자들이 로마서 강해에 좀 서먹한 것은 같은 내용의 반복 구절이 너무 많이 있기 때문에 같은 내용이 중복되는 반복적인 설교를 해야 하는 일입니다. 이런 일이 부담이 되기는 하지만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중요한 강조 점에 가서는 바울처럼 반복적인 설교를 대담하게 시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드디어 이곳 에 와서 “율법이 죄냐”고 물었습니다. 바울의 이런 언어의 구사법은 하나의 반문법의 형태로 나타내면서 자신의 강조하려는 점을 더욱 깊이 있게 부각시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을 스스로 “그럴 수 없느니라”고 답하고 있습니다.


1. 율법과 죄와 나와의 시나리오

우리는 바울이 7절부터 25절까지 전개하고 있는 말씀에서 바울이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는 의도가 무엇인가에 대한 바른 해답을 얻어야 합니다. 바울은 여기서 율법을 준수하고 죄를 미워하는 한 사람이 율법과 죄와 자기와의 상호 관계를 적나라하게 밝혀 주는 하나의 ‘시나리오’를 만들고 있습니다. 바울은 5절과 6절에서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죄의 권세로 말미암아 율법의 정죄를 받아 사망을 위해 열매를 맺는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으나 이제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의 정죄에서 벗어났으니 율법으로 하나님을 섬길 것이 아니라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겨야 할 것임을 말씀해 주었습니다.

바울은 7절에서 “그런즉 율법이 죄냐”고 묻고 있습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이길 수도 없고 의를 얻을 수도 없고 결과적으로 정죄를 받을 수밖에 없으니 그렇다면 율법이 죄냐? 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다음 말씀에서 “그럴 수 없느니라”고 말하면서 “율법”과 “죄”와 “나”와의 관계를 밝힘으로 인간의 구원이 율법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것임을 명백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나리오에는 세 존재가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하나는 “율법”이고 다른 하나는 “죄”이며 나머지 하나는 “나”라고 하는 인물입니다. 여기서 율법은 선하고 거룩하고 의로운 존재로 등장합니다. 이 율법은 “나”에게 감동도 주고 그 법을 지켜야 할 것이라고 하는 의무감도 줍니다. 그리고 그 율법은 “나”에게 자신의 법을 지킬 것을 강요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율법에는 그런 것을 “나”에게 이루어 줄 능력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말하자면 종이 호랑이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율법”대로 살려고 하는 “나”에게 나의 육신을 지배하고 있는 “죄”라고 하는 또다른 존재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죄”는 매우 악한 존재입니다. 그 죄는 “나”에게 번민을 주고 괴로움을 줍니다. 나는 “죄”로부터의 탈출을 시도하지만 번번이 실패합니다. 그 이유는 내가 원하지도 않고 있는 이 “죄”에는 권세가 있습니다. 그 권세로 나를 사로잡는 것입니다. “나”는 율법은 선하고 “죄”는 악한 것인 줄 알면서도 죄의 권세에 이끌리어 “죄”를 범하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나”는 이런 생애에서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런 “나”에게 복음을 들려주는 것으로 “율법”과 “죄”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는 외침이 “율법”으로 의를 얻으려는 “나”에게 들려주는 승리의 함성인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바울이 등장시키고 있는 “나”라고 하는 존재는 누구냐는 것입니다. 7절부터 25절까지 “나” “내”라고 지칭하는 인물이 무려 31번이나 나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 “나”라고 하는 인물이 바울 자신을 가리키고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중생한 사람을 상징하거나 중생하지 못한 사람을 상징하거나 중생은 했지만 믿음이 연약한 사람의 경우를 말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바울은 여기서 율법을 의롭게 여기고 율법대로 살기를 원하는 철저한 율법주의자를 “나”로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율법주의자가 어느날 자신이 의롭게 여기고 거룩하게 여기는 율법이 자신이 원치도 않는 죄의 세력 앞에 무력하게 무너지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바울이 이처럼 “나”라고 하는 이 율법주의자가 율법과 죄가 자기 속에서 서로 견제하고 싸우는 모습을 이 모든 관계를 잘 알고 있는 바울의 입장에서 쓴 글입니다.

우리는 이 같은 바울의 논법을 바울 자신이 자기의 신앙 생활에서 체험한 갈등이라든가 죄 앞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던 자신의 경험담으로 해석해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바울은 단순히 율법은 의롭고 거룩하지만 죄의 세력 앞에 무력할 수밖에 없으며 율법을 지키려는 자는 결과적으로 죄 앞에 굴복하여 율법의 정죄를 받게 된다고 하는 그의 율법 관을 밝히려는데 목적을 두고 이런 시나리오를 썼던 것입니다.


2. 탐심과 죄

바울은 율법의 기능을 죄와 연결시켜 설명함에 있어서 특별히 ‘탐심’과 연결시키고 있는 일은 매우 주목할만한 일입니다.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하지 아니 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고 밝혀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바울은 탐심에 관해 율법이 지적하는 죄의 목표로 삼은 것인가?

(1) 탐심이란 말은 인간의 마음속에 숨겨있는 강한 욕망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탐심이란 말의 헬라어 원어를 살펴보면 그 뜻이 중성으로 나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말은 악한 뜻으로만이 아니라 선한 뜻으로도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지내시기 위해 예비된 다락방에 오르셔서 말씀하실 때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고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눅22:15). 여기서 원하였노라고 하신 말씀이 ‘에피뒤미아’인데 이 말은 이곳 로마서 7장에 나오는 탐심에서도 같은 단어를 사용되고 있는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유대인들을 책망하셨을 때에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 나오는 ‘욕심’역시 원한다고 하는 같은 단어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타락한 인간의 마음에 있는 모든 욕망은 예수님이 가지고 계셨던 것처럼 선한 욕망인 것이 아니라 악한 욕망이기 때문에 이 같은 인간의 마음의 상태를 탐심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욕망은 갖아서는 안될 욕망이며 가지면 가질수록 더 무서운 죄의 분출구 구실을 하며 크다란 폭발력을 나타낸다고 하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3) 이 같은 인간의 탐심이 죄라고 정죄한 것이 하나님의 율법입니다. 인간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이 탐심의 지배권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한평생 탐심에 젖어서 그 속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마음에 품고 있는 생각, 상상력, 풍부한 공상 등 이런 것 등이 어찌 죄가 될 것인가 고 되묻습니다. 그래서 지금 어느 사회이든 실정법 상으로 마음의 상상이나 생각은 자유입니다. 그런 것을 책하고 벌하는 규정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도 어떤 죄악된 일을 마음의 생각으로 상상으로 즐겨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런 일이 무서운 죄인 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육체로 짓는 다른 범죄와 똑같은 죄이다”라고 정죄한 것이 바로 율법인 것입니다.

(4) 이 탐심은 십계명의 마지막 계명으로 나와 있습니다.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출20:17). 유대인들은 이 열 번째 계명을 중요시하지 아니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 안에 수록된 내용이 다른 계명 둥에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도적질하지 아니했으면 8계명을 범하지 않은 줄로 여기게 되었고 몸으로 간음하지 아니하면 간음죄와는 거리가 먼 줄로 생각해 왔었습니다.

그러나 이 탐심에 관한 계명이야말로 전 계명의 중심이 되는 계명인 것입니다. 다른 계명을 다 지킨다고 할지라도 탐심에 관계된 이 계명을 범하면 그 역시 다른 모든 죄에 대한 정죄를 받게 된다고 하는 계명의 참 뜻을 알아야 했는데 유대인들은 율법은 지킨다고 하면서도 이 탐심의 죄만은 죄로 여기지 아니했습니다. 이 사실을 예수님은 밝혀주시고 계명의 참 뜻을 말씀하셨습니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5:21-28). 이것이 율법이 가르치는 참 뜻입니다.

(5) 이 탐심은 죄의 뿌리요 근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이 탐심으로 인간의 내면에 있는 그 무서운 죄를 보여 주시기로 하신 것입니다. 인간이 저지르는 모든 죄는 바로 이 탐심에서 파생되는 가지들입니다. 가지만을 아무리 쳐 대도 그 뿌리가 튼튼한 이상 인간의 죄란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자신이 아무리 선한 인간이 되어 보려고 노력해도 마음속에서 충동적으로 일어나는 이 탐심은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바울이 율법으로는 홈이 없는 자라고 자랑하면서도 자신을 죄인중의 괴수라고 고백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이 탐심에서 나오는 끊임없는 죄의 욕망 때문입니다. 바울이 24절에서 탄식 어린 자폭적인 선언을 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라”고 한 말도 이 탐심의 죄에서 벗어날 길이 없는 외침이었습니다.


결 론 : 우리에게 반드시 구주가 필요한 이유가 인간의 벗어버릴 길이 없고 씻을 길이 없는 탐심 때문입니다. 이 죄를 밝혀 보여준 것이 바로 율법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지키는 일 보다 율법에서 이 탐심의 죄를 발견했었던들 그들은 그들에게 구주가 되시는 예수님을 영접했을 것입니다. 이 같은 탐심을 이길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영을 통한 마음의 변화로서만이 가능한 것입니다(롬12:2).


≈ 52 ≈ 계명으로 드러난 죄의 권세

(본문 : 로마서 7 : 8 - 9)


서 론 : 죄는 자기를 숨기고 자기를 미화시키고 자기를 정당화시키는 일에 간교하며 매우 익숙합니다. 죄가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탐심 때문입니다. 죄는 언제나 우리 인간의 본래의 죄악의 본성인 탐심과 손을 잡는데 숙달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탐심은 죄의 속삭임에 쉽게 미혹을 당하고 양심을 무너뜨립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하나님의 계명이 오게 되자 그 계명이 이 같은 무서운 죄의 정체와 권세를 들어냈습니다. 바울의 탄식 어린 호소인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고 한 말이 이런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1. 계명으로 각양 탐심을 일으키는 죄

바울은 말하기를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죄의 성격과 죄의 권능을 잘 나태내 주고 있습니다.

(1) 죄는 하나의 세력입니다. 죄는 그 출처가 마귀로부터 온 것입니다. 죄의 시초는 에덴에서 마귀로부터 아담과 하와에게 왔습니다. 그후 이 죄는 인간의 육체 안에서 인간의 탐심을 휘어잡고 우리로 죄로 이끄는 한 큰 세력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울은 23철에서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라고 한 말에서 죄를 마음속에 실존하고 있는 죄의 법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죄는 타락한 인간의 본성 안에서 역사하고 있는 분명한 세력이기 때문에 우리의 육체 안에서 권능을 행하는 것입니다.

(2) 죄는 율법의 명령도 거역하는 세력입니다. 죄는 율법의 두려움을 잘 압니다. 자기를 정죄하는 권세가 율법에 있음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죄는 그 율법에 굴복하여 순종치 아니합니다. 율법이 하지 말라고 할 때 죄는 해도 된다고 우리를 기만합니다. 죄는 율법까지라도 정면 도전하는 무서운 존재입니다.

(3) 죄는 기회를 타서 역사 합니다. 죄는 그가 활동할 수 있는 기회를 잘 알고 있습니다. 죄는 우리에게 그 기회가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일단 그 기회가 주어지면 여지없이 공격을 가합니다. 죄가 다윗을 공격하여 살인죄와 간음죄를 범하게 만들었을 때, 우리아의 아내가 벗은 몸으로 목욕하는 것을 바라보는 그 기회를 포착했습니다. 죄는 자신이 역사할 기회를 포착하면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모든 간교와 위장과 권능을 총동원하여 우리를 공격하여 그 죄 앞에 굴복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2.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바울은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고 밝혀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한 ‘죽었다’는 말은 죄가 없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죄가 죄로 드러나지 아니했기 때문에 마치 죽은 것 같다고 한 말입니다. 죄를 죄로 알지 못하고 죄를 범하는 일은 실상인즉 그 죄는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1) 율법이 있기 전에도 죄는 있었습니다. 인간의 마음속에 양심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율법이 우리에게 죄를 보여 주었습니다. 양심이 우리에게 죄를 보여주건 안 주건 하나님은 이미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모든 사람을 정좌하시기 때문에 율법이 이 세상에 없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용했다”고 하셨습니다(창6:5). 하나님은 이 인간의 죄악을 한탄하셨지만 인간은 그것을 죄로 알지를 못하였기 때문에 그 세력이 점점 퍼져 죄에 대해 관용해 진 것입니다.

(2) 율법이 들어 온 후, 그 율법으로 말미암아 무엇이 죄인가를 우리에게 보여 주게 되었습니다. 율법은 우리 안에 숨겨 있는 죄의 정체를 여지없이 들어내 놓았습니다. 그러나 죄는 오히려 계명에 나타나 있는 죄의 종목까지라도 이용하여 우리들 마음속에 죄악의 욕구를 심어 줍니다. 이것은 결코 계명이 거룩하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계명에는 죄를 이길만한 권능이 부여되어 있지 못합니다. 계명의 사명은 죄를 이길 권능을 인간에게 부여해 주는 일이 아니라 죄를 죄로 들어내고 그 죄를 정죄하는 사명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양심이 그 계명을 따르고자 하지만 육신이 약하여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과 양심까지 지배하고 있는 죄의 세력이 우리로 율법을 지키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죄의 세력 밑에서 종노릇을 하고 있기 때문에 율법의 요구를 이룬다는 일은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갈2:16). 율법은 우리 인간에게 이룰 수 있도록 하는 권능이 없는 반면 죄는 인간으로 자신 앞에 굴복케 할 수 있는 주인의 입장에 있으므로 율법이 금지하는 죄의 각 조항은 오히려 죄에게 그것까지도 범하게 만드는 호 재료로 작용하기에 이르는 것입니다.


3. 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

바울은 “전에 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1) 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란 계명의 의문만 알고 있었지 그 계명이 주신 하나님의 참뜻을 모르고 있었을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주님을 영접하기 이전에는 단순히 계명을 지키는 생활이 계명을 바로 지키는 생활인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믿음을 갖기 이전에는 바울도 율법으로 홈이 없는 자로 자부하고 있었고 그리스도인들을 율법이 없는 자로 매도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유대인들은 율법을 외형적으로 지키는 생활을 해 오면서 자기들은 율법의 의를 이루고 있는 사람으로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율법의 참 뜻을 알고 계시는 (예수님은 율법의 창시자이시기 때문) 예수님은 그들을 가리켜 외식하는 자라고 정죄 하셨습니다.

(2) 바울은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자기는 죽었다고 했습니다. 계명이 이르렀다고 한 말은 그 계명의 참 뜻을 깨닫게 된 자신의 지금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계명은 우리에게 의를 줄 능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정복당하여 인간에게 그 계명 때문에 탐심을 일으키게 할 뿐 아니라 그 계명이 자신의 모든 죄를 들추어냄으로 죄는 살아나게 되었고 자기는 죽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명심해야 할 것은 바울은 여기서 자기가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아니했을 때의 자신의 체험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란 사실입니다. 그는 다만 계명과 죄와의 관계를 밝히는 일에 있어서 이 모든 사실을 깨닫고 있는 상태에서 “나”라고 등장시킨 사람이 체험할 수 있는 사실을 가상적으로 진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 론 : 바울이 내가 살았다고 한 말은 율법의 참 의미를 몰랐을 때의 자신의 형편입니다. 사실 바울은 자신이 계명으로 죽어 있는 상태에 있었으면서도 그 계명의 참 뜻을 몰랐기 때문에 자기가 살아 있는 줄로 알고 있었습니다. 율법의 의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알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가 율법의 직능을 깨닫게 되었을 때, 율법으로 자신의 죄가 드러나게 되었고 그 죄를 정죄하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자기가 죽게 된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율법을 주신 이유가 바로 인간들로 율법을 통하여 이런 사실을 깨달아 양심이나 율법에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하시려는데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갈2:24절에서 이처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 53 ≈ 생명과 계명

(본문 : 로마서 7 : 10 - 13)


서 론 : 바울은 10절에서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되었도다”고 깊은 탄식을 합니다. 이 탄식은 바울이 체험하고 있는 탄식이 아닙니다. 율법을 지키려는 어떤 사람이 그 율법에서 의를 얻지 못하고 오히려 정죄를 받는 원리를 깨닫게 된 “나”라고 하는 사람의 탄식입니다. 율법은 분명히 인간에게 생명이 약속되어 있는데 그것이 오히려 인간에게 사망에 이르게 하는 매개체가 되었다니, “나”라고 등장한 이 사람은 율법에 대한 참뜻을 깨달은 이후에 그 율법과 생명과의 관계에서 하나의 큰 모순을 발견하게 되면서 갈등과 번민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I. 도리어 사망을 주게 된 계명

바울은 로마서에서 율법과 계명을 나누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표현은 근원적으로는 한가지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율법이란 하나님이 주신 전체적인 광의의 법을 말하는 것이요 계명이란 그것을 세분한 구체적인 조항으로 이것을 십계명으로 부를 수 있습니다.

(1)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란 그 계명자체에 있는 뜻을 나타낸 말입니다. 이 말의 뜻은 계명이 인간에게 생명에 이르게 하려고 주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만약 사람이 그것을 지키면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해석입니다. 그 이유는 계명은 그것을 지키는 자에게 생명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레18:4-5, 신6:25, 눅10:25-28). 이것은 결코 하나님의 약속을 거슬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을 거스리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다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갈 3:21). 우리는 율법의 목적과 한계를 다시 한번 분명히 집고 넘어가야 합니다.

율법은 인간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 주신 하나님의 약속인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인간들에게 만약 너희가 율법을 지킨다면 그 율법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뜻으로 주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생명을 주신다고 하는 하나님의 언약은 결코 율법에 위배되는 것도 아니요 율법자체도 하나님의 이 같은 약속을 거스리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2) 바울은 그 계명이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 계명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지는 못할망정 왜 사망에 이르게 하였는가? 이 일에 대한 설명은 죄와 율법과의 관계를 더 자세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 일은 세 가지로 살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계명이 오게 되자 인간의 죄가 그 계명 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사단에게 있어서 대단히 좋은 기회인 것입니다. 사단이 인간의 죄악성(탐심)을 자극하여 그 계명을 범하도록 역사하게 된 것입니다. 인간은 죄의 종으로 죄에 팔린 몸이기 때문에 그 사단의 공격을 따라 계명을 어기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둘째로 나라고 하는 인간은 육신이 연약하여 그 계명을 이룰 수 없기 때문에 계명은 결국 나로 하여금 더욱 죄인 되게 만들게 되었습니다. 다음 셋째로 그 결과 계명은 나에게 생명은 고사하고 그 계명으로 말미암아 사망에 이르게 되는 촉매제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2. 기회를 타서 나를 속이고 나를 죽이는 죄

사단은 언제나 자신을 광명한 빛으로 우리 앞에 나타납니다. 그리고 죄는 자기를 숨겨서 가장하는 수법으로 우리를 속이는 것입니다. 이 같은 사실은 창3:1-5에서 아담과 하와가 겪은 경험을 통해서 우리 앞에 명백하게 밝혀지고 있습니다. 죄가 우리를 속이는 방법은 여러 가지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I) 죄는 나로 하여금 행동으로가 아니라 마음으로 짓는 것은 괜찮다고 속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은 이처럼 마음으로 범하는 죄에 대하여 제 10계명으로 정죄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죄가 어느 기회를 엿보아 우리 앞에 나타날 때 자신의 모습을 정당화시키는 것입니다. 죄의 모습은 인간에게 매력을 줍니다. 그 매력의 충동을 강하게 함으로 다만 우리의 눈으로 죄를 바라보게 하고 그것을 받아 드리게 하는 것입니다.

(3) 죄는 이것을 해도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고 속입니다. 하와에게 들려 준 뱀의 말이 그러했습니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창3:4). 죄는 자신의 모습을 인간으로 하여금 탐심으로 바라보게 하기 때문에 하와에게 보였던 것처럼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로 보게 한 그 방법으로 죄를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4) 다음에 죄는 너는 죄를 범했지만 걱정하지 말라고 안심시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정죄 함이 없기 때문에 죄로 걱정하는 일은 무의미한 일이라고 속삭이면서 안심시킵니다.

(5) 죄는 우리에게 한번쯤이면 아무 상관이 없으니 한번하고 그만 두면 된다고 속이는 것입니다. 이때 인간은 죄의 무서운 결과를 생각하는 이성을 상실해 버리고 그 함정에 빠져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의 이와 같은 속성을 깨닫고 죄를 멀리하고 죄와 더불어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3. 죄와 사망을 선사한 것이 과연 율법인가?

이런 면으로 볼 때 계명은 결코 악한 것도 불의한 것도 아닙니다. 율법이야말로 거룩합니다. 죄인을 정죄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의 표준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이 온 율법에 반영되어 있는 것입니다. 계명이야말로 의롭습니다. 지키는 자에게 의를 주는 하나님의 의의 표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선합니다. 율법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에 절대 선합니다. 다만 우리 인간이 악하기 때문에 율법이 우리에게 선한 판결을 내려 줄 수가 없을 뿐입니다. 우리 인간들이 그 율법으로 말미암아 모두 죽게 된다고 해도 그 율법은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한 것입니다.

(1) 그런데 여기서 바울은 “이처럼 선한 것이 나에게 사망이 되었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이 해답은 바울 스스로가 간단히 내리고 있는데 “그럴 수 없느니라”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사망이 오게 된 것은 죄를 죄로 드러나게 한 율법 때문이 아닙니다. 율법이 있기 이전에도 죄가 우리 인간에게 있었고 이 죄로 이미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할 운명에 처해 있었습니다. 율법은 다만 인간에게 존재하고 있는 기존의 죄를 죄로 들추어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우리에게 사망을 가져 온 것은 절대로 아닌 것입니다.

(2) 사실인즉 우리 인간에게 사망을 가져온 것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우리의 악한 죄가 선한 율법을 매개로 하여 주검을 선언하게 한 것입니다. 율법이 있기 이전에는 우리는 죄 가운데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죄인인줄을 몰랐고 그 죄 값이 사망이란 사실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율법이 인간사회에 개입됨으로 인간의 죄가 죄로 드러나게 되었고 그 죄 값으로 우리가 다 죽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죄가 율법을 통하여 우리가 심히 죄인 된 사실을 보여 주었고 죄인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는 죄에 대한 정죄함을 밝혀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우리 인간들에게 악을 행하는 존재로 군임 한 것도 아니요 죽음을 선사하는 존재로 찾아온 것도 아닙니다. 그것을 밝혀 냈을 뿔입니다. 우리에게 경종 했을 뿐입니다.

결 론 :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이 죄의 세력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롬6:12). 우리의 옛사람은 죽었지만 그 옛사람의 습성은 아직 우리의 죽을 몸(육신)에 남아 있습니다. 이 세력은 주인의 자리에서 떨어져 나갔기 때문에 우리를 속여서 지배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이 힘을 우리의 새로운 생명의 힘으로 물리쳐야합니다.


≈ 54 ≈ 육신에 속한 자

(본문 : 로마서 7 : 14 - 20)


서 론 : 로마서 7장에서 우리를 당황케 하고 그 바른 해석에 골치를 아프게 하는 것은 사도 바울이 7장에 등장시키고 있는 대상 인물이 누구냐는 것입니다. 특히 14절부터 ‘나는’ 혹은 ‘내가’ 또는 ‘나의’ ‘내게’란 말이 등장하는데 이처럼 나라고 지칭하는 주인공이 과연 누구냐는 것입니다. (1) 중생치 못한 사람의 경우냐? (2) 중생한 사람의 경우냐? (3) 중생은 했지만 초기 신앙생활 단계에 있는 사람의 경우냐? (4) 아니면 바울 자신의 경험이냐?


1. 로마서 7장을 바로 해석하려면

사도 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의에 대하여 진술했습니다. 아담 한 사람의 죄가 그리스도 한 사람의 의로운 행동으로 말미암아 의를 가져왔다고 논증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6장에 와서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의 의로운 생활에 대하여 논증합니다. 그리고 7장에 와서 바울은 율법의 직능에 대하여 자세히 진술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복음을 듣는 유대인들은 바울의 복음은 무 율법주의가 아닌가? 하는 의아심을 자아냈으며 바울은 이런 유대인들의 공격의 화살을 받았습니다. 율법과 복음에 관한 바른 관계를 깨닫게 해주는 일이란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바울은 그 어려운 일을 로마서 7장에서 시도한 것입니다.

(1) 로마서 7장은 율법이 무엇이냐? 하는 율법의 본연의 모습을 보여 주려는데 진술의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바울이 자신을 지배하려는 죄의 권세와 그 세력 사이에서 번민하는 자기의 체험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죄의 지배아래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바울은 율법을 지키려고 애쓰고 있는 “나”라고 하는 사람을 통하여 율법이 모든 인간에게 적용하는 이치를 선명하게 진술하기 위해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이 7장에서 나타내려고 한 그의 진술은 율법이 인간에게 미치고 있는 영향과 그 결과 인간이 받아야 할 고뇌에 대해 밝혀 주고 있는 것입니다.

(2) 바울이 이곳에 등장시킨 “나”라고 하는 인물은 바울 자신이 아닙니다. 바울은 물론 거듭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는 신앙의 어린 아이 즉 초보자의 자리에 있는 사람도 아니합니다. 그는 위대한 사도요 그리스도안에서 모든 교회의 스승으로써 장성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며 모든 그리스도안들에게 자기를 본 받기를 권면하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7장에 나타나 있는 사건이 그가 당하고 있는 영적인 갈등이거나 그의 인격의 양면성의 표출로 보아서는 안돼는 것입니다.

(3) 7장에서 “나”라고 표현한 인물은 중생한 사람이나 중생치 아니한 사람과 연결시킬 필요가 없습니다. 바울이 의도하는 바는 중생한 사람이나 중생치 못한 사람의 경우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미치는 율법의 영적인 의미와 죄의 권능을 파헤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곳에서 “나”라고 하는 사람이 중생한 사람이냐? 아니냐? 하는 그 시기를 따지거나 나타내려 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초월해서 죄의 권능도 율법의 직능도 깨달은 한사람의 입장에서 인간에게 미치는 율법과 죄의 역할을 밝혀 주려는데 목적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문장를 기록하는데 있어서 “나” “내 죄” “내가” “내 속에서” “나는” “나에게”란 표현을 사용했을 뿐입니다.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그 “나”라고 한 인물을 사도 바울이라고 지적하기도 하고 중생한 그리스도인이 죄와 싸우는 모습이라고도 말하지만 실인즉 그런 것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입니다.


3. 육신에 속하여 죄에 팔린 몸

바울은 14절에서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고 자탄하고 있습니다. 죄 아래 팔렸다고 한 진술은 죄의 종이란 뜻입니다. 사람이 율법을 올바로 깨닫게 될 때, 자기는 죄의 종의 신분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1) 바울은 14절에서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율법의 영적 역할을 말해 줍니다. 율법은 지키기만 하면 생명에 이릅니다. 예수님께서 한 율법사에게 대답하신 말씀에서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하셨습니다(눅10:28). 율법은 그것을 행하면 생명을 얻는 것이기 때문에 배척할 것이 아닙니다. 다만 바울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기 때문에” 율법을 지킴으로 생명에 이를 수 없다고 한 것입니다.

(2) 바울은 15절에서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치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고 자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원하는 것과 미워하는 것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원하는 것은 율법의 신령한 요구를 의미합니다. 율법을 지키려는 사람들은 율법의 신령한 요구를 알고 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율법의 선함을 진정으로 인정하지만 그래도 죄의 지배를 벗어나지 못한 “나”는 그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없다고 밝혀 주고 있습니다.

(3) 바울은 16절에서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내가라고 말하고 있는 이 사람은 자기는 그 율법대로 살기를 원하지만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린 몸”이기 때문에 그것을 지키지 못하고 오히려 원치 아니하는 것을 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4) 바울은 17절에서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데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참으로 중요한 말이며 20절에서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이 논증은 무 율법주의자들의 주장과 같이 우리들이 육신적으로 행하는 죄는, 내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다. 죄 그 자체에 있기 때문에 괜찮다는 그런 논리가 아닙니다. 죄 아래 팔려 있는 사람은 아무리 힘쓰고 노력해도 율법의 선을 이룰 수 없고 율법이 미워하는 것을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은 결과적으로 죄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5) 바울은 18절에서 자기 육신에 선한 것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로써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이 이런 사실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임을 바울은 수도 없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율법 관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탄식하기를 그것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고 했습니다. 즉 율법을 행할 능력이 없다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19절에서 내가 원하는 율법의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악을 행한다는 사실을 밝혀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으로 의를 얻으려는 사람들의 모순된 생활입니다. 이런 이유로 유대인들은 율법대로 산 것이 아니라 그 율법을 외식으로 지키는 생활을 해 온 것입니다. 이런 생활의 대표적인 인물은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의 외식을 정죄하셨던 것입니다.

(6) 바울은 20절에서 다시 결론적으로 17절의 말씀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이 같은 고백은 “나”라고 하는 등장 인물이 율법의 선한 것을 깨닫기는 했지만 다른 도리가 없기 때문에(다른 구원의 도리가 없기 때문에) 아직도 그 율법을 지키려는 죄와의 싸움을 계속해야 하는 자신의 참담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결 론 : 우리는 결론에 와서 다시 한번 7장을 기록한 바울의 의도를 파악해야 합니다. 이 7장은 중생치 못한 사람의 고민을 말하거나 중생한 사람이 죄와 더불어 싸우는 영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의도가 아닙니다. 율법의 신성함과 선함을 증거 하려는데 있으며 그러나 그것이 그 본래의 뜻인 의나 구원을 이루지 못하는 이유가 죄의 권세 때문임을 밝혀주려는데 있는 것입니다.


≈ 55 ≈ 육신에 속한 자의 탄식

(본문 : 로마서 7 : 21 - 25)


서 론 : 바울은 7장의 결론에 이르게 되면서 마음의 법으로서의 율법과 지체 속의 법으로서의 죄와의 대결 상황을 극적으로 표현하면서 언제나 지체 속에서 역사 하는 죄의 법에 의하여 점령당하는 자신의 무력함에 절망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울이 7장의 결론에서 강조하려는 교리적 교훈은 사람이 중생하지 않고는 비록 율법의 선함과 거룩함과 의로움을 깨닫고 그 율법을 이루고자 힘쓴다고 해도 결코 죄의 세력을 이길 수 없으며 사망가운데서 헤어날 수 없으며 그 어떤 방법으로도 구원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밝혀주고 있는 것입니다.


1 바울이 깨달은 한 법

바울은 율법에 도전해 오는 자기 자신 안의 한 세력을 바라보면서 괴로워하는 “나”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이 같은 세력이 자기 자신 속에서 자기의 인격을 완전히 지배하고 있는 상태를 바라보면서 깊은 탄식을 금치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이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바울은 20절에서 죄와 자기와를 분리시키고 있습니다. 이 분리는 죄는 자기와 상관이 없는 존재라고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과 하나님의 계명의 선함과 거룩함을 깨달은 사람이 자신의 끊임없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원하는바 선은 행치 못하고 악을 행할 수밖에 없다면 그 악과 자기와는 구별될 수밖에 없다고 하는 탄식조의 자백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탄식은 바울이 중생한 자의 입장에서 “나”라고 하는 인물을 등징시켜 율법과 좌와의 갈등을 가상적으로 표현한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그 어떤 경우에도 죄와 자기와 상관이 없는 것으로 여긴다면 이 같은 판단은 대단히 위험한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1) 바울은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곳에서 선을 행하기 원하는 자신을 내세웠습니다. 바울이 자기라고 내 세운 이 대상자는 율법이 거룩한 줄 아는 “나”라고 하는 사람입니다(12절). 그리고 율법이 신령한 줄도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14절) 율법의 선한 것도 안다고 했습니다(16절). 그러므로 바울이 등장시킨 이 사람은 율법의 의로움을 잘 깨닫고 그 율법에서 의를 얻고자 힘쓰지만 죄가 자신을 지배하여 율법을 이룰 수 없을 뿐 아니라 죄에게 이끌리어 율법에서 의를 얻으려는 자신은 오히려 죄의 종으로 전락하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고 자기가 지키려는 율법이 자기를 정죄하는 모습을 보고 고민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구원받기를 원하지만 아직 구원의 도리를 깨닫지 못하므로 율법 안에서 율법으로 의를 얻으려는 한 사람의 안타가운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한 인간 안에서 역사하는 율법과 죄와의 관계를 갈파하고 있으며 이로서 율법의 정죄에서 해방케 하시고 죄의 종의 멍에를 벗어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밝히려는데 그 표적을 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2) 바울은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다른 법이 그것과 싸우는 것을 보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속 사람이란 거듭난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나라 율법을 따르기를 원하는 자신의 내면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기에게 있는 이 같은 속 사람이 아닌 존재가 자기 지체 속에서 이와는 정반대의 현상을 보이고 있는 다른 법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 법은 자신의 마음의 법과 싸워서 그 마음의 법을 내 생활에 이루지 못하게 하는 사실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 법이 “나”를 사로잡아 “나”를 죄의 법 아래로 이끌어 오는 것을 본 것입니다. 이것이 “내”속에서 역사하는 죄의 권세입니다.


2.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드디어 “나”는 이 같은 자신의 어쩔 수 없는 운명적인 죄의 종의 상태를 바라보고 탄식하는 처절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외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같은 바울의 탄식 어린 외침을 바울의 그의 신앙 생활에서 체험한 신앙적인 갈등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신앙의 어린 단계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런 신앙적인 갈등을 체험하는 단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이곳에서 말하고 있는 이 사람은 바울 자신의 체험적이 간증이나 중생의 초기단계에서 느끼고 있는 갈등의 표현이 아닙니다.

(1)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곤고란 말은 실의 속에서 전혀 빠져 나올 수 없는 절망적인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 사람은 어쩌다가 이따금 이 같은 일이 반복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간단없이 이 같은 일만이 연속적으로 계속된다는 말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전 생애에 걸쳐서 이런 질곡 속에서 도저히 빠져 나올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자신의 자포자기적인 상태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이 사망의 몸”이라고 했습니다. 사망의 몸이란 사망 속에 갇혀 있는 몸을 말합니다. 이 사람은 아직 사망 안에 갇혀 있는 사람입니다. 그곳에서 빠져 나오려고 무던히 애는 쓰고 있지만 도저히 불가능한 상태에서 발버둥치는 사람입니다. 바울이 여기 등장시킨 “나”는 율법에는 열심이지만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있지만 아직 자기를 율법의 저주와 죄의 권능에서 구원할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3)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했습니다. 이 말은 사망 안에 갇혀 있는 절망적인 자기를 건져낼 자가 없다는 호소입니다. 율법이 선한 것임을 알고 그 율법을 따르려고는 하지만 자기 안에 더 강한 죄의 세력이 자기를 지배하기 때문에 이런 처지에 있는 자기를 건져낼 수 있는 자가 누구냐? 고 자신의 구속자를 찾는 모습입니다. 바울의 이 같은 논법은 이런 사람을 등장시켜 율법과 죄에서 해방시켜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하려는데 이 글의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관점에서 로마서 7장을 연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4) 그런데 바울은 “나”라고 하는 한 구도자(求道者)의 안타가운 처지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자기에게(바울 자신) 승리를 안겨다 주신 그리스도를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고 외쳤습니다. 우리가 주의할 점은 바울의 이 외침은 “내”가 이런 생활 가운데서 스스로 그리스도를 발견하여 이 문제를 해결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런 가련한 “나”란 사람을 바라보았을 때,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한 우리야말로 이런 문제의 해결을 받은 사실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할 것이 아니냐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고 고백한 바울의 말은 바울이 롬7장에 등장시킨 “나”란 사람과 연결시킬 부분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그 다음에 나오는 말,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는 말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기까지는 아마도 율법을 지키려는 노력을 계속할 것이며 또한 죄의 지배 아래서 율법의 정죄를 의식하면서 살아갈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려는 이 사람은 마치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와 같은 구도자의 입장에서 그 마음으로는 영생을 바라는 간절한 심정을 갖고는 있지만 그러나 율법의 굴레에서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하는 한 “나”의 생활은 언제나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라고 하는 탄식의 생활이 계속될 것이며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그러나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지 않을 수 없는 “곤고”한 생활에서 벗어날 길이 없을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비로소 이 같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율법을 따르는 유대인들에게 바로 이 같은 위대한 진리를 깨닫게 하기 위해 이런 논리를 전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논증하려는 그의 의도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5) 그러므로 바울이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고 한 말은 육신에 속하여 율법과 죄악의 사이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의 결론적인 처지를 밝혀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의 어쩔 수 없는 삶의 자세인 것입니다. 어느 누구든지 율법에서 벗어나지 않고는 이 같은 상태에서 헤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결 론 : 이제 매우 어렵고 심각한 로마서 7장의 막이 내려지고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바울의 로마서 7장에서의 이런 논증은 바울 자신의 거듭나기 전이나 거듭난 후의 신앙적인 경험담이나 갈등을 기록한 말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죄와의 싸움에서 경험해야 하는 탄식도 아닙니다. 이 같은 바울의 논술은 바울이 율법과 죄의 권능을 비교하면서 그것이 인간에게 역사하는 면을 유대인들에게 보여 주려는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율법에 얽매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비참한 실패를 드러냄으로써 율법으로는 죄의 종의 상태에서 영원히 벗어날 길이 없다는 사실을 밝혀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바울은 율법에서 의를 얻으려고 율법을 고수하고 복음을 오해하는 유대인들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서만이 이 같은 결박에서 우리를 풀어 주시고 해방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려고 한 것입니다.


 출처: http://www.bamjoongsori.org/bbs/view.php?id=board42&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