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新約]강해/◆ 사복음서 · 사도행전 강해-1

사도행전 1-7장◆ 밤중소리

영국신사77 2020. 4. 12. 18:26


사도행전 제목차례

사도행전 1장(1~4)

(1) 주님의 약속(사도행전1:1-5)

(2) 주님의 명령(사도행전1:6-8)

(3) 본 대로 오리라(사도행전1:9-11)

(4) 새로운 사명(사도행전1:12-26)


사도행전 2장(5~10)

(5) 오순절에 있었던 일(사도행전2 :1-4)

(6) 오순절에 나타난 방언(사도행전2 :1-13)

(7) 요엘 선지의 예언(사도행전2 :14-21)

(8) 요엘이 예언한 종말의 징조(사도행전2 :18-21)

(9) 다윗이 증거한 그리스도(사도행전2 :22 -36)

(10) 우리가 어찌 할꼬(사도행전2 :37 -41)


사도행전 3장(12~14)

(12) 예수 이름의 권세(사도행전3 :1-10)

(13) 베드로가 가진 세 가지 영적 무기(사도행전3 :1-10)

(14) 베드로의 전도 설교(사도행전3 :11-26)


사도행전 4장(15~17)

(15) 교회의 머릿돌이 되신 예수(사도행전4 :1-12)

(16) 보고들은 것을 말하노라(사도행전4 :13 -22)

(17) 사도들의 기도(사도행전4:23-37)


사도행전 5장(18~20)

(18)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사도행전5:1-11)

(19) 하나님을 순종함이 마땅하니라(사도행전5:12 -32)

(20) 능욕을 기뻐한 사도들(사도행전5:33 -42)


사도행전 6장(21~23)

(21) 하나님의 종들이 전무할 일(사도행전6:1-7)

(22) 집사의 자격(사도행전6:1-7)

(23) 전도자 스데반 집사(사도행전6:8-15)


사도행전 7장(24~25)

(24) 스데반 집사의 전도 설교(사도행전7:1-53)

(25) 스데반 집사의 순교(사도행전7:53-60)

============================================

 사도행전 1장

◆ 밤중소리 11-06 | VIEW : 5,328

(1) 주님의 약속(사도행전1:1-5)

(2) 주님의 명령(사도행전1:6-8)

(3) 본 대로 오리라(사도행전1:9-11)

(4) 새로운 사명(사도행전1:12-26)


(1) 주님의 약속

(사도행전1:1-5)


오늘 아침부터 우리는 사도행전을 배우게 됩니다. 사도행전은 복음서와 서신 서들을 연결시키는 일에 가교적 역할을 한 누가의 서신 서입니다. 본서는 초대 교회의 진실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큰 교훈을 주고 있으며 복음이 어떻게 전파되었으며 성령님이 복음 사역에 활동하시는 모습이 어떠했는가에 대하여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1. 디오빌로에게 보낸 누가의 서신

사도행전은 누가란 사람이 데오빌로에게 두 번째 보낸 편지입니다. 누가가 먼저 번 쓴 글이라고 한 것은 누가복음을 말합니다. 누가복음에서 누가는 데로빌로에게 보내는 글로 명시하고 있으며 그를 가리켜 '각하'라고 부른 것으로 보아 데오빌로는 이방인이기는 하나 신분이 꾀나 높은 사람으로 보여집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란 이름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제자는 아닙니다. 예수님 생존시에 그의 이름은 성경 어디에도 나타난 바 없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바울과 친숙한 동료 지간이었으며 바울의 복음 사역에 많은 도움을 준 사람입니다. 누가는 의사입니다. 그러므로 여러 계층의 많은 사람들과 교통하고 있었으며 인망이 좋았던 사람으로 높은 사람들과도 많은 교제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바울과의 교제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도 받았을 것으로 보이며 그리스도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한 것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가 기록한 누가복음이나 사도 행전을 볼 때 이런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그 제목이 말해 주는 바와 같이 사도들의 복음 전파를 위해 그 행한 일을 기록한 책입니다. 만약 이 서신이 아니었더라면 복음이 어떤 경로에 의해 어떻게 그토록 능력 있게 전 세계적으로 전파되었는가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책은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부터 시작하여 바울이 로마에 도착하여 복음을 전하는 데까지 사도들의 발자취를 따라 특별히 바울의 행적을 따라 복음 사역의 역사가 기록된 살아 있는 기독교의 역사 서인 것입니다. 이 기록은 아마 주후 61년경에 기록된 것으로 신학자들이 추측하고 있습니다.


2. 주님이 내리신 분부

누가는 1절과 2절에서 자신이 먼저 번에 보낸 서신의 내용이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고 밝히고 3절부터 그 다음부터의 복음이 전파되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는 '주님은 십자가에서 해를 받으신 후,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셨다'고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누가의 서신은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사실부터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임으로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그의 살아나심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나타내시고 그 부활을 본 모든 사람으로 주님의 부활의 증인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40일 동안 보이셨다는 것은 40일 간이나 부활하신 몸으로 이 세상에 머무시면서 제자들에게 나타내 보이셨다는 뜻입니다. 4절 말씀을 보면 부활하신 후, 제자들과 함께 모이셨을 때 그들에게 분부하시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이르시기를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주님이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하셨는데 그 약속이란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도성입니다. 교회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성령을 받기 전에 예루살렘을 떠나면 그의 신앙 생활은 성령이 없는 생활이 되며 그의 증거에도 하나님의 능력이 따를 수 없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복음의 일꾼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하려면 그들은 성령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성령을 받기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성령을 주시겠다고 하신 말씀은 주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약속입니다.

내가 아버지께로 가면 보혜사 성령을 너희에게 보내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세례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례라고 할 때 물 세례를 생각하지만 물세례는 성령 세례의 상징에 불과합니다. 물세례는 회개의 고백에 지나지 않지만 성령 세례는 중생의 증거인 것입니다. 물세례는 주님의 명령에 의해 하나님의 종들에 의해 주지만 성령 세례는 주님이 직접 주십니다.


결론 : 이같은 성령 세례의 약속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언약된 축복입니다. 우리는 과연 성령 세례를 받았는지, 받았

으면 성령 세례를 받은 성도답게 성령의 결실을 맺어야 하겠습니다



(2) 주님의 명령

(사도행전1:6-8)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어느 날 사도들과 자리를 함께 하셨을 때, 제자들은 그들이 가장 궁금히 여기고 있는 사실에 대하여 질문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질문의 요지는 이러했습니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 이스라엘의 회복이란 이스라엘의 독립을 말합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은 강대국 로마에 정복당하여 그들에게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소원은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이 독립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이 기다리는 메시야가 나타나면 이런 일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으며 예수가 바로 이 일을 행하실 분으로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같은 생각은 주님의 제자들도 똑 같았습니다.


1.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질문 속으로 한심스러우셨지만 이 문제에 대하여 크게 나무라지 아니하시고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만한 일은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의 생각을 전적으로 물리치지 아니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때와 기한은 아버지의 권한에 두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독립을 위해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이 아니시지만 이스라엘의 독립은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때와 기한은 아버지만이 아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회복할 시기가 역사적으로 온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그 시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그런 위대한 역사를 이루실 분은 자신들이 기다리는 메시야로 알고 메시야를 기다려 온 것입니다. 제자들의 질문은 이처럼 자신들이 기다려 온 메시야라면 이스라엘을 회복하셔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고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성경에서는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해 예언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롬11:25절에서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은 완악해지므로 복음을 배척하게 될 것임을 예언하고 그러나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는 그 날이 올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독립을 가리키고 있었지만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의미하셨으며 그날에 이스라엘이 온전히 회복될 것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2. 주님의 지상 명령

8절 말씀은 그 당시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 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큰 의미를 주시는 말씀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성령을 받고 거듭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지상 명령이십니다.

(1) 첫째로 '성령이 임하시면 우리가 권능을 받는다'고 하신 일입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권능을 주십니다. 권능이란 말은 '그 능력'이란 의미로 헬라어로 '뒤나민'( )인데 사도들이 증인으로서 필요로 하는 모든 능력을 의미합니다. 예수님도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과 능력으로 기름 부음을 받으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증인들 역시 능력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힘만으로는 이런 위대한 영적 사역을 감당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들을 진리로 이끄시고 우리들로 복음을 담대히 증거 하게 하는 능력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나타내시는 권능의 역사는 영적 능력으로 죄인을 회개시키시고 사람들로 진리로 이끄시고 믿는 자들을 거듭나게 하시고 그리스도를 세상에 전파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성령이 주시는 이 권능을 받지 못하면 그리스도를 전파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이 주시는 권능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권능을 받고 그리스도를 증거 할 수 있는 증인의 사명을 이루기 위해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

(2) 다음에 성령의 권능은 오직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에 나타납니다. 우리는 혹 잘못 생각하여 성령의 권능을 기적적인 역사로, 신유적인 권능으로 은사적인 능력으로만 나타나는 줄로 알고 있지만 이런 일은 성령이 하시는 일 중에 가장 미미한 일에 불과합니다. 성령이 하시는 가장 놀라운 권능은 우리의 입으로 세상을 향하여 복음을 전파하여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게 하는 일입니다.

(3) 다음에 주님은 '내 증인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내 증인이란 그리스도의 증인을 말합니다. 증인이란 말은 '마르튀스'( )로 영어로 순교자란 말(martyr)의 어원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증인은 순교적인 사명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거 해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 계 3자에서 라오디게아 교회에 나타나신 주님의 모습을 표현할 때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증인들은 순교를 각오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명감으로 복음을 전하는 성도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본 대로 오리라

(사도행전1:9-11)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시기 전 제자들에게 분부하신 말씀이 제각기 다르게 나와 있습니다. 마태복음에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는 말씀을 명령으로 주시고 세상 끝날 까지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마가복음에는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좇아 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자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같은 말씀은 여러 말씀을 하시는 가운데 제자들이 각기 자기가 들은 입장에서 강조하고 싶은 점에 대하여 간략히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별다른 이의가 없습니다.


1. 하늘을 쳐다 본 이유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도 제자들에게 이모저모로 하나님의 복음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에게 부쳐진 이름이 계 3장에서 '충성된 증인이시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복음을 자신의 생명을 버리시기까지 그 사명을 온전히 이루셨습니다. 주님이 이처럼 지상의 사명을 다 마치신 후, 하늘로 올라가실 때 제자들은 모두 하늘로 올라가시는 주님을 바라보려고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늘 어디로 가시는 것인가? 이런 점에 큰 관심을 가지고 쳐다보았을 것입니다.

마가복음에서는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고 했습니다. 이 보좌에 대하여 예수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에 말씀하시기를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대로 그는 이기심으로 하나님 아버지 보좌 우편에 앉으시는 영광을 누리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9장에서는 예수님이 하늘에 올라가신 일에 대하여 '그는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그의 피를 가지시고 단번에 손으로 짓지 아니한 하늘의 지성소로 들어가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 지상에서는 땅에서의 사명을 이루시기 위하여 죽기까지 순종하시며 우리를 위한 화목 제물로 희생되셨습니다. 그가 하늘로 올리우심을 받으신 후에는 우리의 대제사장으로서의 사명을 이루시기 위해 아버지께 간구 하신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2. 너희가 본 그대로 오시리라

제자들이 하늘을 자세히 쳐다보고 있을 때, 흰옷 입은 두 사람이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러면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해 준 이들은 누구였습니까? 이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들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제자들에게 들려 준 말 중에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라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주님의 재림의 모습에 대하여 밝히 밝혀 주고 있다는 점에 우리의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그러면 '본 그대로 오시리라'고 한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첫째로 예수님은 이 땅에 반드시 다시 오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재림에 대하여 수도 없이 증거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들 하늘의 증인들도 주님이 하늘로 올라가심을 보고 있는 제자들에게 그 사실을 밝혀 준 것입니다. 다음에 하늘로 올라가심을 본 그대로란 말은 그의 부활하신 몸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몸으로 내려오실 것입니다. 부활하신 몸으로 오신다는 의미하는 눈에 분명히 보이는 영광의 모습으로 오신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영광의 몸으로 면류관을 쓰시고 백마를 타시고 하늘의 많은 군대를 이끌어 이 땅에 내려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에 천사들의 이 말은 그가 재림하시는 장소에 대하여 바로 올리우심을 받은 그 자리가 될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12절 말씀을 보면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왔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감란산애서 하늘로 올리우심을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슥14:4말씀을 보면 '그 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동편 감람산에 서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때 주님을 맞이하는 모습에 대하여 계1:7절에서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 하리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결론 : 우리는 하늘로 올리가 지금 아버지 보좌 우편에 앉으사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주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소망도 우리의 구원도 그 분에게 있습니다. 그 분은 그곳으로부터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 날을 준비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4) 새로운 사명

(사도행전1:12-26)

예수님의 승천을 바라보고 그가 하늘로 올리우심을 받은 사실을 확실하게 믿게 된 제자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이제 새로운 사명을 받기 위해 한 곳에 모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감란원이라고 하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 왔습니다. 예수님은 감란산에서 승천하셨던 것입니다. 이들은 이 산에서 내려와서는 그들이 유하는 다락방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그 다락방에서 무슨 일을 한 것입니까?


1. 합심하여 기도한 제자들

제자들은 주님의 아우들까지 합하여 약 120명 가량 모여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썼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약속하신 성령을 받기 위해 합심 기도에 들어갔는데 그들이 어떤 자세로 기도했는가에 대해 몇 가지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1) 그들은 우선 기도하기 위해 한 곳에 모였습니다.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하신 그 성령을 받기 위한 목적으로 한 곳에 모이게 된 것입니다. 성령은 아무라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사람들에게만 은사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들이 모두 성령을 받은 것은 그들이 모두 주님의 약속과 명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2) 14절에 나오는 말씀을 보면 모인 주의 제자들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썼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모인 목적이 동일했고 기도의 제목도 동일했습니다. 그들은 금방 주님이 자기들 곁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심을 보았기 때문에 마음이 뜨겁고 간절했습니다. 이들의 기도에는 불이 붙었습니다. 분위기가 뜨거워졌습니다. 무엇보다 마음을 같이하는 기도는 응답을 받을 수 있는 기도입니다. 약속에 매달리는 기도에는 능력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기도하라는 명령을 친히 받은 것입니다. 그들은 약속을 믿고 기도할 수 있는 충분한 보장이 있었기 때문에 담대한 믿음으로 기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3) 전혀 기도에 힘썼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전혀 기도에 힘썼다는 말은 모든 일을 잊고 오직 기도하는 일에만 전념했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약속하신 성령을 주시라는 기도를 드렸기 때문에 기도에 흐트러짐이 없이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이들의 이런 기도는 급기야 2장에 가서 약속된 성령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2. 맛디아의 선출

기도회 도중에 베드로가 자리에서 일어나 한가지 제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제의란 배신자 유다의 자리를 채우는 한 명의 제자의 수효를 채우자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의 수효는 열 두 명이라야 합니다. 12이란 숫자는 하나님의 숫자이며 이스라엘의 12지파의 수효이기도 한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한 후, 목을 매어 죽었습니다. 그래서 한 명의 제자의 수효를 채워야 하는 것입니다. 원래 제자란 예수님에 의해 지명 받은 자로 구성되었는데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이 마당에 그런 방법은 어렵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제비를 뽑아 선출하자고 제의 한 것입니다. 원래가 제자(사도)란 예수님의 제자의 반열에 들어가 있는 자로 부활의 증인이라야 하는 것입니다. 이에 베드로는 말하기를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리워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을 증거 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고 하면서 유스도라 하는 '요셉'과 '맛디아' 중 하나를 선출할 것을 제의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을 선출하기 전에 기도하기를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의 택하신 바 되어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로 보이시옵소서 유다는 이를 버리옵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고 기도한 후, 제비를 뽑아 그 중에 '맛디아'를 뽑아 열 둘 중에 포함시킨 것입니다. 베드로는 16절 이하에서 가룟 유다에 대해 언급해 주고 있습니다. 그가 불의의 삯을 받아 그 돈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자에 대한 성경에 기록된 예언도 시편에서 인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가룟 유다가 결국 멸망의 도구로 쓰임 받았었다는 점에서 큰 경각심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 : 한 뜻을 가지고 한 마음으로 한 곳에 모여 기도하는 일은 교회의 부흥과 우리들이 주의 사역을 하는 일에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그 가운데는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나타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장

◆ 밤중소리 11-06 | VIEW : 2,311

(5) 오순절에 있었던 일(사도행전2 :1-4)

(6) 오순절에 나타난 방언(사도행전2 :1-13)

(7) 요엘 선지의 예언(사도행전2 :14-21)

(8) 요엘이 예언한 종말의 징조(사도행전2 :18-21)

(9) 다윗이 증거한 그리스도(사도행전2 :22 -36)

(10) 우리가 어찌 할꼬(사도행전2 :37 -41)


(5) 오순절에 있었던 일

(사도행전2 :1-4)

오순절 날은 우리 기독교 역사상 영원히 남아 있을 기념될 날입니다. 그것은 오순절 날에 예수님이 약속하신 성령이 처음 이 땅에 강림하셨으며 이 성령 강림으로 이 세상에 주님의 교ㅎ가 최초로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1. 오순절과 성령 강림

오순절은 유대인이 지키는 민족적 삼대 절기 중에 하나입니다. 삼대 절기란 유월절과 무교절과 오순절입니다. 오순절은 수장절 또는 칠칠절, 맥추절 등으로도 불려집니다. 이 절기는 처음 익은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는 날인데 그들이 추수한 밀 추수에 대한 축제의 날입니다. 왜 이날에 성령이 강림하셨는가에 대해서 우리는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내가 아버지께 가면 너희에게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셨고 너희는 약속한바 성령을 기다리라고 명하셨는데 주님은 이날 오순절에 이같은 약속을 이루실 것을 예정하셨던 것입니다. 오순절은 유대인들이 밭에서 밀을 거두어 처음 하나님께 드리는 날로 이날은 또한 처음 익은 열매들로 성령을 주셨다는 데 큰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임하신 모습에 대하여 몇 가지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바람 같은 소리로 표현했다고 정말 바람은 아닙니다. 성령이 하늘에서 급하고 강하게 내리신 것을 바람에 비유하고 있으며 또 바람처럼 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온 집에 가득했다고 했는데 이것은 온 집안이 성령의 임재 하심에 충만한 상태를 느낄 수 있었던 것을 의미합니다.

(2) 다음에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였다'고 했습니다. 이런 현상은 성령의 상징적인 임재를 보여 주신 것입니다. 저희에게 보였다는 것은 실제로 그들의 눈에 보이신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그의 머리에 비둘기 같은 성령이 머무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임재 하심은 이처럼 비둘기 같이도 임하시고 불의 혀 같이도 임하시는 것입니다.

이같은 표현은 성령의 본 모양을 나타낸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는 자신을 나타내실 때 이처럼 이렇게도 저렇게도 나타내시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성령은 하나님이심으로 그 분에게는 눈에 보이는 형체를 가지고 계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같은 성령께서 각 사람 위에 임하셨다고 했습니다. 성령은 120 문도 중 어느 몇 사람에게만 임하신 것이 아닙니다. 성령은 그 자리에 모여서 성령을 받기 위해 합심하여 기도한 모든 성도들에게 함께 임하신 것입니다.


2. 다 성령의 충만하심을 받은 제자들

4절 말씀을 보면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 하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들이 성령을 받아 충만함을 받았다는 말은 무슨 뜻인 것입니까? 이것을 우리는 두 가지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1) 하나는 성령의 세례입니다. 그들이 사도들로 부르심을 받았으며 오랜 기간 주님을 따르는 생활을 하며 그 말씀을 믿었지만 그들이 성령의 세례를 받았던 것은 아닙니다. 성령의 큰 감동을 받고 성령의 권능을 받아 주님과 함께 복음을 전하며 기사와 이적도 행했지만 이런 것은 모두 성령의 외적인 역사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아직 성령을 받아 중생은 안되었지만 생명책에 그들의 이름이 기록되었으며 주님으로부터 영생을 약속 받았습니다. 그런 것이 오순절 날 성령의 세례를 받으므로 이 모든 것에 인 치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날에는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으면 즉시 성령을 받으며 그 성령에 의해 거듭나는 것입니다.

(2)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이날 이들 주님의 제자들은 성령의 세례와 함께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것입니다. '다 성령의 충만을 받고'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성령의 충만이란 성령의 세례와는 구별된 것입니다. 성령의 세례는 믿을 때 임하시는 성령의 임재로 하나님의 임재 하심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충만은 임재한 성령의 능력으로 옷 입는 일을 말합니다. 충만이란 말은 채운다, 가득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거듭난 후,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고 성령의 능력 가운데 살기를 원하면 이런 우리의 간절함을 보시고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과 생활을 지배하시어 우리로 육신의 일을 벗어버리게 하시고 성령의 능력 가운데서 살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때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되는것입니다.


결론 : 예수님이 공생애에 들어가셔서 복음을 전하실 때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셨다고 했습니다 베드로도 오순절 날 설교를 할 때 성령에 충만했다고 했습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성령의 충만한 생활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6) 오순절에 나타난 방언

(사도행전2 :1-13)


방언 문제는 오래 전부터 시끄러운 논쟁이 되고 있습니다. 방언이 과연 성경적이냐 아니냐는 문제는 말이 많은 문제입니다. 우리는 이 방언에 대하여 성경에 나타나 있는 사실을 볼 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오순절 날 성령의 임하심과 함께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제자들, 120문도 전부에게 일제히 내려진 방언입니다. 다른 하나는 고전 12장에 나타나 있는 성령의 은사 중의 하나로 주신 방언이 그것입니다. 이 두 가지 방언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1. 오순절에 내린 방언

우리는 먼저 오순절에 임했던 방언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첫째로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랐다고 했습니다. 오순절에 내리신 방언은 성령의 은사로 주신 은사적인 방언이 아니었습니다. 은사는 그 말과 같이 받는 사람도 있고 받지 못하는 사람도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날 내려진 방언은 모든 사람에게 임한 것입니다. 은사로서의 방언은 교회의 유익을 위해 9가지 은사 중 하나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모든 사람이 다 방언을 하겠느냐고 말하므로 방언이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주시는 은사가 아님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순절에 내려진 방언은 그런 은사적인 것이 아닙니다. 성령 세례를 받은 모든 성도들에게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나온 강권적인 역사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서 복음을 전할 때 성령 세례와 함께 그들도 방언을 말했다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고넬료의 가정 사람들이 방언 말함을 듣고 그들에게도 성령을 부어 주심을 알게 되었다고 했습니다(행10:44-46). 그리고 에베소에 있었던 어떤 제자들의 경우도 그러했습니다(행19:1-7).이같은 방언은 성령 세례의 외적인 표로 그 당시 성령 세례를 받는 성도들에게 다 똑같이 임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방언은 은사 중 사람의 입에서 유일하게 말로 표현되는 은사이기 때문에 외형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하신 말씀이 오순절에 와서 말씀대로 성취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증거로 방언을 주심으로 그들에게 성령의 임하심을 실제로 체험 할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성령의 역사는 고린도 교회가 세워져서 은사 문제로 시끄러워졌을 때에는 이미 사라져 버리고 방언이 성령 세례의 외형적인 표시로서가 아니라 교회의 유익을 위한 성령의 은사로 필요에 따라 나눠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순절에 내린 방언이 고린도 교회에서 문제된 방언과 달랐던 것은 고린도 교회에 임한 방언은 우리 속에서 내 영이 하나님께 기도 드리는 것이지만 오순절 방언은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한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고전14:14).


2. 다른 방언으로 말한 오순절 방언

4절에 나오는 말씀을 보면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했다'고 했습니다. 오순절에 임한 방언은 다른 방언으로 말했다는데 특이한 점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방언이란 말의 뜻은 지방의 언어란 뜻입니다. 계 7장에서 '언어'란 말을 표현하는 일에 있어서 '방언'이란 말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 중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방언이라고 한 말은 유대인들이 통상적으로 써온 히브리말이 아니라 다른 지역의 언어를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120 문도들이 받은 이같은 경험은 당장에 그 소문이 거리와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로 퍼져 나갔습니다. 그리고 이 소문을 들은 많은 유대인들이 이 기이한 형상을 보려고 몰려들었습니다. 이들은 경건한 유대인이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오순절을 예루살렘에서 지내기 위하여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유대인들과 유대교에 개종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다락방으로 몰려 왔을 때 그들은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다락방에 모여 있는 120 문도들의 입에서 제각기 자기들이 살고 있는 고장의 말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다락방에 있는 예수의 제자들이 모두 갈릴리 사람들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입에서 생전 가 보지도 못한 이방 나라의 말을 서슴없이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에서 보여준 방언은 다른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교회에서는 잠잠 하라고 경종 해주고 알아듣지 못할 방언으로 천 마디 방언 하는 것보다 알아들을 수 있는 한마디의 교훈이 더 소중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이처럼 오순절 날에 120 문도에게 임했던 방언과 오늘날 우리들에게 임하는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이 다른 것이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7) 요엘 선지의 예언

(사도행전2 :14-21)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따라 성령 강림을 기다리며 기도에 힘쓴 120문도 들에게 오순절 날에 약속의 성령이 임하자 그들의 입에서 방언이 나오며 여러 나라에서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모인 유대인들에게 자기가 온 각 고장 나라 말로 하나님의 크신 일을 전파하게 되자 예루살렘에 일대 소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 때에 그곳에 열 두 사도와 함께 있었던 베드로가 그 자리에서 일어나 문제가 이처럼 일어난 일에 대하여 구약의 요엘 선지가 예언한 말씀을 인용하면서 설명해 나갔습니다. 베드로의 이같은 일장 연설은 복음을 성령의 권능으로 증거하는 설교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신 말씀을 최초로 이룬 사도가 된 것입니다.


1. 성령 강림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다락방에 찾아온 유대인들 중 어떤 사람들은 제자들의 이런 일에 대하여 '새 술'에 취한 것이라고 비방했습니다. 베드로는 이런 일이 결코 술 취함에서 온 일이 아님을 강조했습니다. 베드로는 술에 취했다는 말에 대해 '때가 제 삼시니 취한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삼시란 오전 9시경을 말하는데 유대인들은 술을 마셔도 밤에나 마시지 낮에는 유전을 지켜 술을 마시는 법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새 술에 취했다는 그들의 주장을 반박하고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증거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성령 강림이나 성령 충만에 대한 지식이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오순절의 성령 강림의 큰 일을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성령 강림에 대한 성경적인 근거를 말해 주어야 했습니다. 베드로는 선지자 요엘로 하신 말씀을 인용하여 이 사실을 증거한 것입니다. 성령 강림은 하나님의 아무런 약속 없이 내려진 일이 아닙니다. 요엘로 일직 말씀하셨는데 그 응답인 것입니다. 베드로는 17절 이하에서 요엘서에 예언된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해서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엘에게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 부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세란 마지막 날을 의미하는 말인데 이 마지막 날은 인류의 최종적인 날을 가리킵니다.

베드로가 인용한 이 말씀에 의하면 성경에서 가르치는 말세란 오순절로부터 시작되어 주님이 다시 오시는 재림까지의 전 역사적 기간을 말세라고 표현했습니다. 내 영이란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말세에 이르러 모든 사람에게 부어 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 말씀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로서의 성령의 강림을 의미한 것입니다. 이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습니다. 죄 사함을 받는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시는 일은 오순절로부터 비로소 시작이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계속된 설교에서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 부어 주시는 역사'는 그 때 오순절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으며 이같은 일은 '해가 변하여 어두어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고 하신 주 재림의 날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2. 예언할 것과 환상을 볼 일

베드로는 성령이 오시면 '너희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예언이란 말은 '하나님의 계시를 선포한다' 또는 '미래를 말한다'는 말로 너희 중에 계시를 받아 말씀을 선포할 사명자가 많이 일어날 것임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이 말씀대로 성령을 받은 사람들 중에 하나님의 계시를 선포하는 일꾼들이 많이 일어나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하게 되었습니다. '너희 젊은 일들은 환상을 볼 것이라'고 했습니다. 환상이란 말은 비전을 뜻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소망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얻는 구원을 소망으로 얻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삶은 비전으로 살아가는 삶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늙은이들은 꿈을 꿀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삶의 의욕이 감퇴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새로운 인생의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길은 꿈이 있어야 합니다. 18절 - 20절에 이르는 예언은 같은 말세에 관한 예언이지만 주님이 재림하시는 그 시기의 종말의 징조를 의미해 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결론 : 누구든지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으며 그 권능은 주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권능으로 주의 복음을 증거하는 사명을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8) 요엘이 예언한 종말의 징조

(사도행전2 :18-21)


우리는 베드로가 인용한 요엘 선지의 예언에서 말세란 말의 기간이 오순절의 성령 강림으로부터 시작하여 주의 재림에 이르는 최후 신판의 날까지임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인용한 요엘 선지의 예언이 분명히 일부 중복된 듯한 표현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으며 또한 오순절에 나타나지 아니한 사건이 이 예언에 포함되어 있는 사실을 찾을 수 있습니다.


1. 늦은 비 성령의 역사

오순절 날 성령 세례를 받고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한 이 사건이 그곳에 모여 있었던 어떤 유대인들의 비방처럼 새 술에 취한 것이 아니라 요엘로 예언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응해진 것이라고 베드로가 일어나 말한 내용이 17 - 21절까지에 걸쳐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요엘의 예언이 오순절 날에 발생할 것과 또 앞으로 세상 종말에 있을 징조로 나타난 것 등으로 두 가지로 구분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17절에서 말씀하신 내용은 분명 오순절 날에 일어날 일에 대한 예언이지만 18절에서 '그 때에'라고 하신 그 때는 오순절을 의미하는 것인가? 아니면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를 때에 있을 것인가에 대하여 분별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18절에 나오는 말씀을 보면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라'고 하셨는데 17절에 모든 육체에 부어 주시겠다고 하신 모든 육체와 남종과 여종이 동일한 대상이냐 아니냐는 문제는 쉽사리 결론을 내리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리고 17절에서는 '너희 자녀들을 예언할 것'이라고 하셨는데 18절에서는 '남종과 여종이 예언할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오순절에 나타날 한 사건을 이처럼 짧은 구절에서 반복하면서 다른 말로 표현한 것인가? 여기서 우리는 성령의 역사를 두 가지로 나눠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는 오순절 날에 내려진 성령의 역사입니다. 이 역사는 성령 세례로 그 때로부터 지금까지 계속되어 오고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성령의 이른 비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요엘은 2장에서 종말에 관한 예언 중에서 이른 비와 늦은 비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2. 늦은 비의 역사

우리는 종말에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주시는 성령이 늦은 비의 역사로 생각해 볼때 몇 가지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1) 남종과 여종들이란 이미 성령 세례를 받은 성도들로 이들이 다시 성령의 부으심을 받는 일은 종말에 특별한 사명자로서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슥4:6-7절 말씀을 보면 '그가 내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큰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2) 그런데 이들 종말의 사명자들에 대하여 우리는 계11장에서 그 이마에 인 침을 받은 하나님의 종들이 다시 예언하는 사명을 가지고 예언하는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주의 영화로운 날'이란 주님이 재림하시는 인류의 심판의 말을 말합니다. 요엘은 그날의 징조에 대하여 '하늘에서의 기사와 땅에서의 징조'로 나누어 예언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기사에 대하여 엘2:31절에서는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여지리라'고 했습니다.

이런 요엘의 예언은 계6장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총담 같이 검어지고 온 달이 피같이 되며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선 과실이 떨어지는 것같이 땅에 떨어지며 하늘은 종이 축이 말리는 것 같이 떠나간다'고 했습니다. 이 예언은 주님의 재림의 날에 임할 징조에 대한 예언으로 종말의 심판의 두려움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땅의 징조로서는 19절에서 '피와 불과 연기'라고 했습니다.

피라고 나온 징조는 계16:3절에서 둘째가 대접을 바다에 쏟을 때에 바다가 죽은 자의 피같이 되는 일과 강과 물 근원에 쏟을 때 모든 물이 피로 변하는 일이 이에 해당합니다. 불은 넷째 대접을 해에 쏟을 때 해의 뜨거움으로 많은 사람이 타서 죽는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종말에 일어날 유브라데 전쟁은 핵전쟁으로 나타날 것이기 때문에 온 세상에 이 불로 뒤덮일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일곱째 대접 심판으로 이 세상이 불로 심판을 받는 지구 최후의 날을 맞이할 것입니다.


결론 : 그러면 이런 시기에 누가 구원을 얻을 것인가? 이에 대해 요엘 선지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로서만이 하나님의 심판에서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9) 다윗이 증거한 그리스도

(사도행전2 :22 -36)

22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2)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언하셨느니라

23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24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25 다윗이 그를 가리켜 이르되 

ㄴ)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었음이여 

나로 요동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26 그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혀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도 희망에 거하리니

27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28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셨으니 

주 앞에서 내게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므로

29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30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31 미리 본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되 

그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32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33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34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이르되 

ㄷ)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35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은 베드로는 요엘 선지의 예언을 들어 종말에 남종과 여종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심을 말하면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증거 했습니다. 그러면 요엘 선지가 말하는 이 주라고 하는 분은 누구냐의 문제에 들어가서 베드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 알고 있는 증거와 예언을 들면서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인 예수가 바로 그 주'가 되신 메시야 이심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같은 성경적인 정확한 증거와 성령의 크신 역사로 그곳에서 그 말씀을 듣고 있었던 많은 무리들의 마음을 찔러 회개케 한 것입니다.


1. 하나님께서 증거 하신 그리스도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 하셨느니라'고 말했습니다.

(1) 하나님은 큰 권능으로 그리스도를 증거 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에게 누구도 따를 수 없는 권능을 주심으로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권능으로 그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실 권세가 있다

는 사실을 그들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주님은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명하시니 그가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갔던 것입니다. 이런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던 유대인들은 '우리가 이런 일을 모두지 보지 못하였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2) 하나님은 기사로 그리스도를 증거 하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기사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의 오병이어의 기적을 바라본 유대인들은 '이는 참으로 오실 그 선지자라'고 놀라면서 억지로 잡아 자기들의 왕으로 세우려고 한 일도 있었습니다.

(3) 하나님은 표적으로 그리스도를 증거 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그 많은 표적은 이것을 바라보는 자들에게 그가 메시야이신 사실을 증거한 것이었습니다. 요10:41-42절에서 이르시기를 '많은 사람이 왔다가 말하되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치 아니하였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고 말하면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행하시는 많은 표적에 대하여 이런 표적이 자신의 메시야 되신 분명한 증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나의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거 하는 것이요 또한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거 하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요5:36-37).


2. 다윗이 증거한 그리스도

그리스도는 유대인들의 손에 의하여 많은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이같은 일이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 준바 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하나님의 정하신 뜻을 따라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고난은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대로 내어 주신대로 되었다고 했습니다. 유다가 은 30에 판 일도 미리 아신 대로 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오순절 날 성령의 임하심을 바라보고 있는 많은 유대인들 앞에서 이처럼 증거하고는 이런 예수를 너희는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다고 그들의 심령을 찔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신 예수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 했습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증거 하면서 유대인들이 잘 알고 있는 다윗의 시편 기사를 증거로 말해 주었습니다. 베드로가 예증으로 들고 나온 것은 다윗의 시편16:8-11절에 있는 말씀과 다른 또 하나는 시110:1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먼저 번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사건에 대한 것이요 두 번째 것은 부활하신 후, 하늘 보좌에 올라가 계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입니다.

다윗이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임이라'고 한 말이 다윗에 관한 것이 아니라 다윗이 자기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의 왕위에 앉게 하심을 알았고 그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일을 미리 본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한 것이라고 증거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결과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히셨고 그가 하늘에 올라가셔서 지금 너희가 보고 듣는 바 성령을 약속대로 보내셨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순절에 임한 성령은 이상한 일이 아니며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의 일은 오히려 하나님이 명하시는 복음의 사역임을 강조한 것입니다.


결론 : 베드로가 증거한 하나님의 말씀은 이를 듣는 모든 유대인들의 마음을 크게 찔렀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마음을 찌르는 무기로 사용하여 복음을 전해야 할 것입니다.


(10) 우리가 어찌 할꼬

(사도행전2 :37 -41)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베드로의 일장 설교는 듣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찔림을 받게 했습니다. 말씀을 듣고 보니 자신들이 소망으로 기다려 온 메시야가 바로 예수, 그 사람이란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그 메시야를 바로 자신들의 손으로 십자가에 못 박은 사실에 양심에 가책을 받았으며 이로 인해 큰 근심에 잠기게 되었고 마음에 견딜 수 없는 죄책감으로 충격을 받게 되어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 할꼬'하는 틴식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들의 이런 외침은 우리들이 알지 못하고 우리의 메시야를 죽였으니 이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후회요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어떻게 용서를 받아야 할 것인가 하는 두려움의 표현이었습니다.


1. 너희가 회개하여

베드로가 전하는 말씀에는 큰 위력과 담력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의 입에서 나온 말은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한 성령의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전한 말씀과 그 결과에 대해 몇 가지로 살펴보면 이런 것입니다.

(1) 베드로가 전하는 말을 듣고 있었던 유대인들은 그 말씀을 마음으로 들었습니다. 마음에 찔림을 받은 것은 그 말씀이 마음에 전달되었기 때문입니다. 스데반 집사의 설교를 듣던 무리들은 오히려 분이 가득하여 돌을 들어 스데반을 쳐죽인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은 마음을 찔리게 합니다. 찔리게 한다는 말은 양심에 말할 수 없는 고통과 두려움을 주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것은 말씀을 들을 때, 생기는 순간적인 성령의 역사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한다'고 했습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은 그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에게 '어찌할꼬'하는 외침이 나오게 하는 것입니다. 이찌할꼬? 라고 하는 외침은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하는 다급한 절규인 것입니다. 이 절규야말로 얼마나 고귀한 마음인 것입니까?


2.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베드로는 지혜로운 전도자였습니다. 그는 말씀을 듣는 무리들의 입에서 이처럼 애통하는 양심의 외침을 듣자 그들에게 그 죄를 용서받고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생명의 길을 곧 전해 준 것입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고 말했습니다.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고 한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몇 가지 사실을 알고 넘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1) 베드로는 먼저 그들에게 '회개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회개란 말은 메타노에사테( )로 마음을 바꾸라는 뜻입니다.

아직까지 너희가 가졌던 그 불신적인 마음을 신앙으로 바꾸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예수를 찌른 그 일에 대하여 진실한 마음으로 그 죄를 자복하고 그 마음을 그리스도에게로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2) 다음에 베드로는 각각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했습니다. 세례란 말은 팝티조( )로 잠긴다 적신다 씻는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베드로가 말한 것을 분석하면 베드로는 먼저 회개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회개는 세례에 앞서 반드시 있어야 할 전제조건입니다. 다음에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세례란 구약의 할례의 신약적 의식으로 하나님의 백성된 표입니다. 구약에서 신약으로 상징적으로 넘어온 의식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유월절 행사로 이것은 성만찬으로 대체되었습니다. 다음에 할례인데 이 할례는 세례로 대체된 것입니다.

(3) 다음에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잘못 판단하기 쉽습니다. 사람의 죄 사함은 세례의 결과에서 온 것이 아닙니다. 회개에서 오는 것입니다.


3.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베드로는 '어찌 할꼬'하며 애통해 하는 많은 유대인들을 향하여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라고 했습니다. 성령을 선물로 받는다는 말은 구원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성경에는 성령을 받는다는 말이 여러 가지 모양으로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에 대하여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변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은 구하는 자에게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결론 : 베드로는 이런 성령의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 언약에 들어가 있는 백성으로 성령을 선물로 받은 사람임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 3장

◆ 밤중소리 11-06 | VIEW : 3,541

(12) 예수 이름의 권세(사도행전3 :1-10)

(13) 베드로가 가진 세 가지 영적 무기(사도행전3 :1-10)

(14) 베드로의 전도 설교(사도행전3 :11-26)


(12) 예수 이름의 권세

(사도행전3 :1-10)

주님의 약속하신 대로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하자 사도들과 제자들이 모두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복음이 능력 있게 전파되기 시작되었습니다. 사도들은 날마다 증가하는 성도들에게 말씀을 가르치는데 사도들에 의하여 가지가지 희한한 기적들이 일어나서 그들은 권위와 위엄을 가지고 교회를 다스리기 시작했습니다. 행3장에는 베드로와 요한에 의하여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기적이 나오는데 이것은 예루살렘 교회에서 날마다 일어나는 기적 중에 하나로 이 사건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놀라운 반응을 일으켰으므로 특별히 이 문제를 중요시하여 자세히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앉은뱅이를 일으킨 예수의 이름

이 사건이 일어난 시간이 제9시라고 했습니다. 9시면 오후 3시를 가리킵니다. 이 시간은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기 위해 성전으로 올라가는 그 때였습니다. 미문이라고 하는 성전 문에서 구걸하는 거지가 있었는데 이 사람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성전에 들어가려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구걸을 하게 된 것입니다. 저가 이들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았다고 했습니다. 이 때 성전으로 들어가려는 발걸음을 멈춘 베드로는 그 거지를 향하여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셋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말하면서 그의 오른 손을 잡아 일으킨 것입니다.

그런데 그 순간 그가 발과 발목에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성전으로 들어가 하나님을 찬미했다고 했습니다. 베드로에게는 은과 금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베드로는 담대한 믿음으로 예수의 이름으로 명령했더니 그 명령대로 앉은뱅이가 그 자리에서 일어선 것입니다. 베드로는 어떻게 이처럼 명령할 수 있었던 것입니까? 그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그리스도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1) 예수의 이름에는 그의 권능이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은 곧 예수의 인격이 따르기 때문에 그 이름에 합당하게 사용하면 그리스도의 권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일은 베드로가 행한 일이 아닙니다. 성령의 권능으로 나타난 기적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4:12).

(2) 그리스도의 이름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 그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을 이루어 주십니다.

(3) 그리스도의 이름에는 창조적 권능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시며 지금도 그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들고 계십니다. 우리가 참으로 예수를 의지하고 그의 영광을 위하여 무엇인가 행하면 이같은 일에 우리 주님의 창조적 권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2. 예수의 이름의 권세

베드로는 자기에게 있는 예수의 이름으로 이 앉은뱅이에게 무엇을 해 준 것입니까? 베드로는 분명히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준다고 했는데 그가 준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1) 베드로는 예수의 이름으로 앉은뱅이를 걷게 했습니다. 베드로가 그를 향하여 '걸으라'고 한 말은 베드로의 입에서 나온 베드로의 말이었지만 예수의 이름으로 나왔기 때문에 베드로가 말한 대로 시행해 주신 분은 바로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2) 베드로는 예수의 이름으로 앉은뱅이를 하나님의 성전으로 들어가게 했습니다. 이 앉은뱅이는 베드로에 의하여 일으킴을 받기 전 까지는 성전에 들어가지 못하고 다만 성전 밖 미문이란 곳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는 성전까지는 갔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한번도 들어가 본 일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의 이름으로 일으킴을 받자 하나님의 성전 안에 들어가 걷기고 하고 뛰기도 했습니다. 이 앉은뱅이는 성전 밖 마당만 밟고 교회에 나오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는 하나님의 전에는 나왔지만 전혀 변화 받지 못했습니다. 새로운 삶을 살아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이름으로 걷게 되자 기뻐 뛰면서 하나님의 성전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3) 베드로는 예수의 이름으로 앉은뱅이의 입에서 찬미를 나오게 했습니다. 이 앉은뱅이는 성전 미문에서 동냥질만 할줄 알았지 하나님을 찬양할 줄은 몰랐습니다. 그의 입술은 구걸하는 일에만 능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이름으로 걷게되자 그의 입에서 찬양이 나온 것입니다. 그는 예수의 이름으로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결론 :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는 믿음은 은혜로운 신앙생활을 할 수 없는 신앙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그 자리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그리하여 뛰기도 하며 걷기도 하면서 성전을 출입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13) 베드로가 가진 세 가지 영적 무기

(사도행전3 :1-10)

1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2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4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5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10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베드로가 성전 미문에서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로 태어난 거지를 그 자리에서 일으킨 기적은 그것을 바라보는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사람들은 베드로가 가지고 있는 어떤 신통력으로 이런 기적이 나타난 것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가지고 있었던 영적 무기는 세 가지인데 

하나는 기도의 무기요, 

하나는 예수 이름의 무기요, 

다른 하나는 그의 믿음의 무기였습니다.


1. 베드로가 가지고 있었던 첫 번째 무기

베드로는 주님의 약속을 따라 간절히 기도함으로 오순절 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그 이후에도 베드로는 시간을 정하여 성전에 올라가 기도 생활을 해왔습니다. 그날도 성전에 올라간 목적이 바로 기도하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제9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 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기도는 우리에게 성령께서 그의 영적 능력을 공급해 주시는 원천이 되는 것입니다. 비록 베드로에게 은과 금은 없었지만 기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응답 받는 기도의 유형을 세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1) 엘리야의 능력 있는 기도는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엘리야의 기도가 응답 받은 것은 

그 기도가 간절한 기도였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3년 6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약5:17,18).


(2) 히스기야 왕의 기도는 하나님 앞에 통곡하는 기도였습니다. 

마음을 토하는 기도는 때로는 통곡의 기도로 나옵니다.

히스기야 왕이 그의 죽음의 선고를 받고 

하나님 앞에서 통곡하면서 그의 심정을 토로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자비하신 배려로 15년간이나 생명의 연장을 받은 것입니다.


(3) 담대한 기도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습니다. 

모세나 여호수아의 기도가 이런 기도였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담대한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까? 

사도 요한은 요일3:21절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고 했습니다.


(4)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는 기도는 응답을 받습니다. 

기도의 응답을 받은 사람들은 

그의 기도가 한결같이 하나님의 뜻대로 구한 기도였다는 사실입니다.


(5) 받은 줄로 믿는 기도는 응답을 받습니다. 

주님은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그대로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6) 강청하는 기도는 응답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눅11장에서 강청하는 기도에 대한 비유의 말씀에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찌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소용대로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2. 베드로의 두 번째, 세 번째 무기

베드로는 말하기를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걸어라'고 했습니다. 두 번째로 베드로에게는 예수의 이름이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그 이름이 너희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예수의 이름을 가졌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의 생애가 예수의 이름으로 충만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오직 예수를 위한 삶을 자기 인생의 최대 목적으로 살아가는 삶이야말로 그의 이름을 소유한 사람의 생활인 것입니다. 베드로에게는 은과 금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직 예수로 말미암은 그의 생애는 예수가 있었으며 그 예수의 이름을 가장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이 말씀의 응답을 받은 것입니다. 세 번째로 베드로에게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선언한 베드로의 명령은 그의 위대한 믿음의 선언이었습니다.

이 믿음은 앉은뱅이의 믿음이 아닙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예수의 이름을 믿는 그의 믿음 때문에 예수의 이름이 이 사람을 성하게 하신 것입니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가까운 생활, 그를 영화롭게 해 드리는 생활을 하면 그가 이런 믿음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주신 이런 믿음으로 앉은뱅이를 일으켰습니다.


결론 :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소중한 재산은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그의 이름은 우리의 생활에 놀라운 변화를 주며 새 힘을 주며 기적을 주십니다. 이 이름을 갖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14) 베드로의 전도 설교

(사도행전3 :11-26)

베드로가 성전 미문에서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로 태어난 거지를 그 자리에서 일으켜 온전케 한 사건은 굉장한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이런 일을 본 유대인들은 이 앉은뱅이를 붙잡고는 그를 데리고 솔로몬 행각이란 이름이 붙은 행각에 모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따라 많은 군중들도 그곳에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베드로는 이곳에서 이 행각에 모인 많은 군중들을 향하여 일장 전도 연설을 하게 된 것입니다.


1. 베드로가 포착한 유대인들의 잘못된 신앙

베드로는 그들을 향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능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범하기 쉬운 잘못된 신앙을 그들의 행동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1) 그들은 이 일을 기이히 여겼습니다. 그들이 놀란 일은 어떻게 사람이 저런 능력을 행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능치 못하심이 없는 하나님은 보지 못하고 사람만 보았기 때문에 기이히 여긴 나머지 베드로나 요한을 마치 신처럼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예수의 이름의 권능을 상상치도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능을 믿음으로 받아 드리지 못하고 기이히 여길 때 잘못된 신앙으로 빠져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2)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주목했습니다. 주목한다는 말은 아테니조( )로 기이한 눈으로 유심히 본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베드로가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런 일을 행한 줄로 알고 기이히 여기면서 주목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들은 성도들의 눈을 누님께로 돌리게 하여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신앙을 갖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교회에서나 어떤 집회에서 우리가 가진 은사나 능력을 통해서 외적으로 나타나는 기이한 일에 사람들로 놀라게 하여 그들의 눈을 주님께로 행한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쏠리게 한다면 거짓 선지자가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믿음의 권능

베드로는 이들에게 예수를 믿는 그 예수의 이름의 권능으로 이같은 기적이 일어난 일에 대하여 인식시켜 줄 좋은 기회로 삼고 그들이 얼마 전에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 그리스도를 상기시키고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서 죄 없이 함을 받으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1) 그리스도를 죽인 이스라엘의 죄에 대하여 베드로는 담대하고 신랄하게 책망한 것입니다.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고 했습니다. 구원에 이르는 회개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나오게 됨으로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죄로 인하여 죽으신 예수를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예수를 죽인 죄에 대하여 베드로는 세 가지를 지적했습니다.

하나는 그리스도를 이방인에게 넘겨 준 것이라고 했습니다. 너희가 저를 넘겨주었다고 했습니다. 빌라도의 손에 넘겨주어 죽는 자리에 이르게 한것입니다. 다음에 빌라도가 그리스도에 대하여 무죄를 선고하려 했으나 이것을 그들은 반대했습니다. 빌라도는 무죄로 석방하려 했으나 유대인들은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쳐 그들의 목소리가 이겼다고 했습니다. 이 일이야말로 무서운 죄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세 번째의 죄는 명절이면 죄수 하나를 놓아주는 선례가 있기 때문에 빌라도는 예수를 놓아주려고 제의했으나 유대인들은 도리어 살인자 바라바를 놓아 달라고 요청함으로 생명의 주를 죽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 예수를 다시 살리셨고 베드로나 요한은 이 일에 증인이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앉은뱅이가 자리에서 일어난 근본 원인을 밝혀 준 것입니다.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고 증거 했습니다.

베드로는 그들에게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함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이같은 베드로의 권고는 무서운 죄책감에 떨고 있는 그들에게 도피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 같은 회개에서 오는 축복에 대하여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며 다시 오시는 주님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이스라엘은 모세가 증거한 그리스도에 대하여 이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베드로의 말에 마음이 크게 찔림 받은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예수가 바로 그 선지자, 메시야임을 말하면서 예수에 대해 성경적으로 증거한 것입니다.


결론 :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복을 주시려고 선지자들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증거 하셨지만 그들은 무지하여 생명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들에게 회개할 것을 강력히 권고하여 그들의 마음을 열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4장

◆ 밤중소리 11-06 | VIEW : 2,856

(15) 교회의 머릿돌이 되신 예수(사도행전4 :1-12)

(16) 보고들은 것을 말하노라(사도행전4 :13 -22)

(17) 사도들의 기도(사도행전4:23-37)


(15) 교회의 머릿돌이 되신 예수

(사도행전4 :1-12)

오순절 날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이후, 사도들의 말에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말에는 하나님이 권능이 따랐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점점 많아졌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큰 반감을 가지고 대적하는 자들도 많았습니다. 그들은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과 서기관들이며 백성의 장로들이었습니다. 사단은 언제나 부활의 도리를 싫어합니다.

사도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이런 사실을 증거 하기 때문에 사탄은 이들을 통해서 복음을 막으려고 시도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사도들을 잡아 가두었습니다. 그러나 이 도리를 따르는 무리들은 날로 번성하여 남자만 5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당국자들이 이처럼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하지 못하도록 사도들을 핍박하고 복음을 막아도 부활의 진리는 그 어떤 방법으로도 막을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1. 붙잡힌 베드로와 요한

사도들이 백성들에게 말씀을 전할 때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베드로와 요한을 잡았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사도들을 싫어한 이유는 사도들이 백성들을 가르치는 일이었습니다. 원래가 백성들을 가르치는 일은 서기관들이나 율법사들이 할 일입니다. 그리고 다른 또 하나의 이유는 사도들이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났다고 하는 말로 자기들에게 도전하는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이튿날 관원들과 제사장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을 때에 잡은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심문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제사장은 '가야바'란 사람인데 이 자는 '안나스'의 사위였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두 가지 사실을 질문의 초점으로 사여 재판을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첫 심문은 '너희가 무슨 권세로 이 일을 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이런 질문을 한 것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을 일으킨 사건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도 그 당사자가 그 자리에 서 있었기 때문에 그 같은 사실을 부인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행한 이런 기적은 무슨 권세로 나온 것이냐고 따진 것입니다. 아마도 그들은 사도들의 이런 권세를 마귀의 권세와 연결시켜 매도하려는 음모를 가지고 심문을 시작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런 일을 누구의 이름으로 행했느냐는 것입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입에서 이런 일이 예수의 이름으로 행했다는 사실을 자백 받기 위해 이런 질문을 한 것입니다. 예수는 이미 정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거늘 이 사람의 이름으로 이적을 행하는 일은 필경 잘못된 일이란 사실을 밝히고 이같은 가르침이나 교훈으로 민심을 소요케 하는 일에 대해 법적으로 처벌하려는 음모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2. 베드로의 답변

이 때 베드로에게 성령이 충만히 임했습니다.

(1) 베드로는 그들의 심문 내용을 받아 되풀이해 군중들에게 들려주는 방법으로 자신들이 한 일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일임을 증거 했습니다.

(2) 베드로는 이 병인이 구원을 얻은 일은 바로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건강하게 되어 지금 너희들 앞에 서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의 답변은 담대했습니다. 그리고 이 병인을 구원한 나사렛 예수는 바로 너희들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그 예수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예수는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다고 했습니다. 또한 자기들은 이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이 사람을 건강하게 하여 지금 이 자리에 너희 앞에 섰다고 말했습니다.

이같은 베드로의 설교는 그들의 입을 다물게 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제 그의 답변의 최 절정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이 잘 알고 있는 시118편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예수의 메시야 되심을 증거 했습니다.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는 일에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다윗의 자손 중에서 머릿돌을 예비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들이 건축할 메시야 왕국의 머릿돌 되신 예수를 쓸모 없는 것으로 여기고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버린 예수를 다시 살리심으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집이란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는 교회의 머릿돌이 되신 것입니다. 머릿돌이란 건물의 중심된 요

긴한 돌을 말합니다.


결론 : 베드로는 결론적으로 그들에게 예수의 이름이 이 병자를 고치는 일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그의 이름의 권능은 사람을 구원하는데 있음을 밝혔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 예수를 증거하는 예수의 증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16) 보고들은 것을 말하노라

(사도행전4 :13 -22)

베드로는 두려움이나 주저하는 일없이 놀라운 권위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하고 고침 받은 병자에 대한 구원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임을 증거 했습니다. 베드로가 이처럼 대제사장이나 바리새인들 앞에서 담대할 수 있었던 것은 베드로를 통해서 성령께서 역사 하셨기 때문입니다.


1. 부인할 수 없는 표적

베드로와 사도들을 정죄 하려던 그들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베도로의 입에서 말이 나오면 나올수록 그들은 빠져 나올 길 없는 궁지로 몰리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여하튼 예수의 이름으로 유명한 표적 나타난 일이 이미 예루살렘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대제사장들이나 서기관의 말보다는 베드로의 말에 더욱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1) 그 자리에는 피고로 잡혀 와서 심문을 받는 베드로와 요한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의 제자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입에서도 확실한 언질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들 피고인들에 대해 어떻게 처리할 수가 없었습니다. 백성들이 그들에게 동조할 뿐 아니라 베드로의 설교로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2) 그 자리에는 또 병을 고침 받은 사람이 증인으로 서 있었습니다. 선천적으로 앉은뱅이로 태어난 사람이 온전케 된 일은 듣는 모든 사람들을 놀라게 했으며 확실한 증인과 증거 앞에서 아무라도 부인하거나 비방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룬 기적이기 때문에 대제사장들은 심히 난감했습니다.

(3) 그들은 사도들의 증언을 듣고는 우리들도 부인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15절 말씀을 보니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사도들에게 힐난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당장 시급한 문제는 이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는 것이었습니다. 자신들이 문제 삼으려고 한 것에 대하여 증인들도 있고 백성들도 사도들의 주장에 따르고 자기들도 그 사실을 확인했으니 이 문제의 처리에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공회원들은 한 가지 방책을 세우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누구에게나 말하지 말게 하자는 합의였습니다.

2. 어느 것이 옳은가 판단하라

그들이 사도들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자고 한 이유는 세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의 이름으로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는 일에 당황하면서 자꾸 이런 일이 일어나면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이 올 것을 염려했던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사도들이 죽은 예수의 다시 살아나심을 전파하는 일은 그들에게 말할 수 없는 두려움을 안겨 주었기 때문에 그런 말을 금하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만약 이 도리가 공공연히 널리 퍼져서 예루살렘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져 사실로 판명된다면 자신들은 메시야를 죽인 장본인이 될 것이 확실했기 때문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것만은 막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들은 드디어 판결을 내렸습니다. 그 내용은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한 것입니다. 이런 판결은 너무나도 우스꽝스러운 판결로 그들의 비참한 패배를 자인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이처럼 그들이 내린 판결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고 반박한 것입니다. 그들은 생명의 도리를 말살하려는 사탄의 음모로 이 같은 판결을 내렸지만 사도들은 우리가 어찌 그 같은 너희들의 말을 들을 수 있겠느냐고 항의한 것입니다. 사도들은 '너희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옳은 일이 아니냐'고 주장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의 부활을 전하지 말라는 그들의 명령에 대하여 '우리는 보고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가까이서 보고들은 산 증인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우리가 보았다'고 했습니다. 눈으로 보고 확인한 사건은 그 어떤 방법으로도 숨길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우리가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들었다고 하는 말은 주님의 생명의 말씀입니다. 공회의 재판은 유대인의 지도자들에게 말할 수 없는 부끄러움을 주었습니다. 명백한 증거 앞에서 그들은 더 이상 사도들을 힐난할 아무런 정당성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을 불법적으로 처리할 수는 있었지만 백성들이 두려워 그렇게 할 수도 없었습니다.


결론 : 예루살렘 주민들은 베드로가 한 일에 대한 목격자들이며 베드로가 한 일은 벌을 받을 일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한 일이었다는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확실한 믿음은 이처럼 담대한 전도인이 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베드로처럼 담대한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7) 사도들의 기도

(사도행전4:23-37)

사두개인들과 제사장들에 의해 붙잡혀 갇힌바 된 베도로와 요한은 결국 이들을 처벌할 만한 증거를 찾지 못하여 그들의 위협을 받은 후, 풀려나게 되었습니다. 두 사도가 다른 제자들이 모인 곳에 이르러 그들이 당한 모든 일을 고하니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의 말을 듣고 이 일로 인하여 하나님께 소리 높여 통성으로 기도했습니다. 이 기도로 사도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고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능력을 받았습니다.


1. 일심으로 드린 기도

사도들은 이제 복음의 위기가 온 것으로 알았습니다. 앞으로 이같은 유대인들의 핍박을 이기고 복음을 전하려면 하나님의 새 능력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1) 일심으로 외친 통성 기도였습니다. 그들이 일심으로 기도를 드렸다는 말은 그들의 마음이 전혀 하나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같은 기도에는 하나님의 강한 응답이 따르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예언이 응해진 사실을 아뢴 기도였습니다. 사도들은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유대인들의 분노라 이미 성경에 예언된 바와 같이 허사를 경영함임 줄 알고 이 일에 하나님의 크신 권능이 임하시어 성경대로 이루어지기를 기도한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 할 때 사도들처럼 성경에 알맞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께 아뢰는 기도는 능력이 있고 힘이 있게 됩니다.

(3) 사도들은 자신들의 어려움을 아뢰었습니다. 그들은 '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자신들이 당하고 있는 시련이나 고난을 살펴 달라는 호소인 것입니다. 우리가 연약할 때 하나님께 이같은 기도를 드려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믿음을 가지고 주님만 의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4) 그들은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해 달라고 간구 했습니다. 사도들의 사명은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하는 이 일이야말로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긴급하고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는 바리새인들이나 제사장들의 핍박이 따릅니다. 그러므로 담대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5) 그들은 또한 병자를 낫게 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표적과 기사가 이루어지기를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사도 시대나 핍박이 일어나는 시대에는 많은 표적을 보여 주셨습니다. 복음을 확산시키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에게 담대함을 주고 열심을 주는 일에 기적은 놀랄 만한 효과가 따르는 것입니다.


2.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도들

사도들은 이처럼 분명한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일심으로 소리를 높여 기도했습니다. 그 결과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의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방금 유대인들의 손에서 풀려 나온 후 합심으로 기도했기 때문에 그들의 기도는 절박하고 뜨거웠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성령으로 뜨거워져서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강력한 충동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무슨 일을 한 것입니까?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 했습니다. 그랬더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진실한 은혜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할 때 나타납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은 무리들은 한 마음과 한 뜻으로 사랑의 교제를 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일에 복음을 전하는 일에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일에 하나가 되는 일은 성령의 충만함을 얻을 때인 것입니다.

(1) 그들은 물건을 서로 통용했습니다. 서로간에 필요한 것을 나눠주고 또 나눠 썼습니다. 그들은 형제들이 소용되는 물건들을 나눠주고 나눠 쓰는 일에 인식하지 않았습니다.

(2) 그들은 자신의 물건을 제 것이라고 하는 자가 없더라고 했습니다. 이 말의 뜻은 자기들의 모든 재산을 하나로 만들어 공동으로 사용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 물건을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나눠 쓰는 일에 인식하지 않고 헌신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이런 일은 가난한 형제들을 구제해 주는 일에 나타난 것입니다. 이런 그들의 사랑과 헌신을 인하여 그들 가운데 핍절한 자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들 중에는 은혜를 받으면 자신들의 밭과 집을 팔아 복음을 전하는 일과 가난한 형제들을 구제하는 일에 아낌없이 사도들 앞에 바쳤습니다.


결론 : 이같은 성도들의 생활은 은혜 생활의 극치인 것입니다. 온 교회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 할 때 큰 은혜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도들의 기도와 초대 교회 성도들의 헌신을 배우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 5장

◆ 밤중소리 11-06 | VIEW : 4,766

(18)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사도행전5:1-11)

(19) 하나님을 순종함이 마땅하니라(사도행전5:12 -32)

(20) 능욕을 기뻐한 사도들(사도행전5:33 -42)


(18)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

(사도행전5:1-11)

예루살렘에 세워진 초대 교회에서는 성도들이 모두 성령의 충만한 가운데 한 마음과 한 뜻으로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는 생활을 해 왔습니다. 요셉이라고 하는 바나바는 자기의 소유물인 밭을 팔아 그 판 값을 사도들의 발 앞에 바쳤습니다. 이처럼 많은 성도들이 밭과 집을 팔아 교회에 바쳤으므로 사도들은 이것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눠주므로 그들 가운데 핍절한 사람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니니아 라고 하는 사람이 이같은 일에 그의 아내와 더불어 유혹을 받았습니다.

1. 아나니아 부부의 잘못된 욕망

사람의 욕망이 물질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명예와 자랑에도 따른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허황된 명예심에 사로잡히면 거짓이나 속임수도 불사하는 것입니다. 아나니아 부부의 경우가 그러했습니다.

(1) 아나니아는 교회에서 자랑하고 칭찬을 받으려는 욕망에 사로잡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밭과 집을 팔아 사도들 발앞에 내어놓았을 때 교회에서 그들에게 주는 칭찬에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바나바란 사람도 밭을 팔아 내 놓은 것입니다. 그들에 대한 칭송이 대단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밭과 집을 팔아서 바쳤는데도 그들의 마음은 기쁨과 감사에 가득 찼습니다. 이 때 아나니아는 자신도 칭찬을 받고 자랑하고 싶은 욕심이 생긴 것입니다.

(2) 아나니아는 간교한 사탄의 시험에 넘어갔습니다. 사탄은 그들에게 속삭였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칭찬만 들으면 된다. 밭을 파는 척하고는 사도들을 속여 그 중에 얼마간만 바치면 되지 않느냐'는 유혹을 받은 것입니다.

(3) 아나니아는 돈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며 반면에 명예심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밭을 팔아 그 중에 얼마의 돈은 감추고 나머지 돈만 바치기로 작정했습니다. 성경에는 돈을 사랑함이 일 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돈을 사랑함이 일 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돈을 사랑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결과적으로 믿음에서 떠나 근심으로써 자기를 찌르는 비극을 가져온 것입니다.

(4) 아나니 부부의 봉헌은 믿음과 사랑에서 드린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자신의 믿음에 따라 처신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나니아는 자신들의 믿음을 훨씬 넘어 일시적인 명예욕에 사로잡혀 밭을 팔아 바치기로 했지만 인색한 마음이 들어 결국 나중에 후회하게 되어 이들 아나니아 부부는 땅을 판 후, 그 값을 얼마를 감추고 그 나머지만 가지고 사도들 앞에 내 놓은 것입니다.


2. 베드로의 책망

베드로는 땅을 팔아 그 값을 사도들 앞에 내 놓은 아나니아에게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었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이처럼 준엄한 책망을 내렸습니다. 이 책망에 나타난 몇 가지 사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아나니아에게는 그 마음에 사탄이 가득했습니다. 자랑과 자신의 명예와 남에게 자신을 과시하려는 사람들은 시험에 들게 되고 사탄이 그 마음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동기부터 불순하고 거짓된 행동을 시작한 아나니아의 마음에는 이미 사탄이 가득하여 사탄이 이끄는 대로 이끌려 갔습니다.

(2) 아나니아는 성령을 속였습니다. 아나니아는 땅을 판 돈 중에 얼마를 감춘 후, 마치 땅을 판 값 전부를 바치는 것처럼 가장하여 거짓으로 바친 것입니다. 이런 일은 성령을 속이는 일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3) 하나님은 개인의 정당한 소유를 인정하십니다. 베드로는 아나니아에게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 없더냐'는 말에서 차라리 아나니아가 땅을 판 후에라도 바치지 말거나 솔직하게 판 돈 중에 얼마만 바치는 것이라고 말했더라면 칭찬을 들었을 것입니다. 베드로의 책망을 들은 아나니아는 엎드려져 혼이 떠났다고 했습니다. 그는 죽은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 지냈습니다. 이런 일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는 그의 아내가 들어왔습니다. 그 아내 삽비라 역시 사도들 앞에 남편과 짠 대로 거짓말로 속였습니다. 그 역시 죽었습니다.


결론 :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죽음은 너무나도 두려운 일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바라보고 하나님 앞에 속이는 거짓된 일이 얼마나 악한 일인가를 알고 하나님 앞에 진실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19) 하나님을 순종함이 마땅하니라

(사도행전5:12 -32)

예루살렘 교회 초기에는 사도들에 의해 많은 표적과 기사가 일어났습니다. 그 결과 믿는 사람들이 마음을 함께 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여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 받으며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고 하는 부활의 복음을 싫어하는 유대인들은 이들을 다시 옥에 가두게 되었고 그들은 천사에 의해 다시 풀려 나와 성전에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다시 공회 앞에 섰을 때 베드로는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말하고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 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다'고 증거한 것입니다.


1. 표적을 나타낸 사도들의 권능

예루살렘 교회는 날로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 이유는 사도들의 손에 의해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사도들 가운데서도 베드로가 행한 이적은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심지어는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누이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 그림자라도 누운 사람에게 덮이기를 원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초대 교회에는 왜 이처럼 놀라운 이적이 일어난 것입니까?

(1)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 함에는 이런 표적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습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출애굽 당시 표적으로 자신을 나타내셨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표적으로 판단하는 습관이 생긴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놀라운 표적 중에 하나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믿지 못하는 유대인들에게 이 사실을 증거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표적이 따라야 했습니다.

(2) 유대인들이 율법에서 벗어나 복음을 받아 드리게 하려면 그들의 완고한 고집과 율법에 얽매인 관습을 타파할 만한 하나님의 기적이 따라야 했습니다.

(3) 복음이 능력 있게 증거 되기 위해서는 이같은 놀라운 기적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지금도 복음이 증거 되는 곳에 하나님의 기적이 따릅니다. 그러나 그 당시 사도들에게 주셨던 기적과는 많은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증거하는 말씀과 함께 직접적으로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 기적은 즉각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은사적인 성령의 역사로 주시며 그 효과도 즉각적인 것이 아니라 오래 기다리거나 점증적으로 나타나는 기적입니다.


2. 옥에서 일어난 일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며 표적과 이적이 일어나며 많은 백성들이 그들을 따르는 것을 본 대 제사장과 사두개인들의 무리는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사도들을 잡아 다시 옥에 가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밤에 하나님의 사자가 사도들에게 나타나 갇혀 있는 옥문을 열어 사도들을 옥에서 풀려나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는 사도들에게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고 명했습니다. 옥에서 주의 사자들에 의해 풀려 나온 사도들은 즉시 성전에 올라가 백성들에게 말씀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대제사장들은 공회를 열고 재판을 받게 하려고 옥에서 사도들을 잡아오라고 명했습니다.

그러나 옥에 보낸 관속들이 옥에 다녀와서 보고하기를 옥문은 든든히 잠긴 채로 있고 옥에서 옥문을 지키던 옥졸들은 여전히 보초를 서고 있는데 사도들은 옥안에 없었다고 보고했습니다. 그리고 곧 옥에 있었던 사도들이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치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것입니다. 그들은 이런 보고를 듣고 놀라고 걱정스러워 하면서도 성전으로 달려가 사도들을 잡아 왔습니다. 사도들은 다시 그들에 의해 심문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심문 내용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왜 금했는데도 백성들을 가르쳤느냐는 것이요 하나는 예수를 죽인 피를 자기들에게로 돌리게 하려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베드로는 담대함으로 그들 앞에서 그들을 책망했습니다. 베드로는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 하니라고 대답했습니다. 베드로는 부활의 증인으로서 그들에게 예수의 그리스도이심을 주장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결론 : 우리는 무엇이 하나님 앞에 마땅한가에 대해 잘 판단해야 합니다. 우리는 순종함으로 성령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순종이라고 한 말씀은 그의 아들을 믿으면 영생을 주실 것이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 하시는 영이십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성령의 권능으로 그리스도를 증거 해야 합니다.



(20) 능욕을 기뻐한 사도들

(사도행전5:33 -42)

성령이 충만하여 복음을 담대히 전하는 사도들에게는 두려울 것이 없었습니다. 옥에서 풀려 나와도 다시 예수의 부활의 복음을 증거 하므로 다시 옥에 들어가는 등 반복된 옥살이를 한 것입니다. 사도들은 이들 불법한 자들에 의해 공평치 못한 재판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 앞에서도 거침없이 복음을 증거 했습니다.

그들이 채찍질 당하여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지 당했을 때 오히려 주의 이름을 위해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받은 일을 기뻐했습니다. 이런 사도들의 역사는 그들의 근본적인 변화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성령의 권능을 받으면 이처럼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의 생애를 바치는 일을 가장 보람있게 여기는 것입니다.


1. 가말리엘의 지혜

사도들이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많은 기적을 나타내는 일에 시기와 두려움을 느낀 대제사장이나 바리새인들은 사도를 옥에 가두고 때리며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 하는 일을 금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이 복음은 예루살렘 전역에 퍼져 나갔던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사도들을 죽이고자 결심하고 최종 판결을 내리려고 의논했습니다. 이 때 공회원 중에 모든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는 교법사가 있었는데 그 사람의 이름이 가말리엘이었습니다. 이 가말리엘은 산헤드린 공회원 72명 중에 한 명이었습니다.

이들이 속한 공회는 사두개인, 바리새인, 제사장들, 장로들, 서기관들로 구성된 유대인의 최고 의결 기관입니다. 이 공회의 의장은 대제사장인데 예수님도 이들의 재판에 의해 사형이 언도되었고 빌라도에 의해 확정된 것입니다. 로마의 통치권자들은 자신들의 국익에 침해를 받지 않는 한 그들의 권위와 결정을 인정해 주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손에는 굉장한 권한이 주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이 가마리엘은 지혜로운 사람으로 이미 사도들의 모든 일이 하나님의 권능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고 있었으며 예수의 부활에 대해서도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인정하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는 공회에서 사도들을 무고히 죽이려는 의안에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공회원들이 이미 잘 알고 있는 두 사건의 경우를 예로 들어 그들의 결정에 제동을 걸었습니다. 그는 사도들이 하는 일이 혹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일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느냐고 말하면서 일의 처리에 신중할 것을 권면한 것입니다. 사도들이 생명을 바쳐 복음을 전하는 일과 그들이 친히 복음을 통해 기적이 무수히 일어나는 일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가마리엘의 이같은 말이 그들의 마음을 찌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가멜리엘은 사도 바울의 스승으로 바울은 그의 문하에서 높은 학문을 터득하여 예루살렘의 유명한 인사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있었습니다. 공회원들은 애당초의 계획에서 후퇴하여 사도들을 불러 들여 채찍질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할 것을 명하고는 풀어 주게 된 것입니다.


2. 핍박받은 사도들의 태도

사도들은 가말리엘의 변호로 죽음은 면했지만 공회 앞에서 채찍질 당하며 많은 고초를 받았습니다. 이럴 때 사도들은 과연 어떤 태도를 보인 것입니까?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했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능욕이란 말은 아티마( )로 굴욕, 수치, 불명예, 망신이란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을 위하여 자기 개인이 망신을 당한 일에 굴욕이나 수치를 당한 일에 오히려 기뻐한 것입니다.

그리고 합당하게 여겼다는 말은 카타시오( )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이처럼 수치와 망신을 당한 일이야말로 오히려 가치가 있는 일로 여겼다는 말입니다. 이같은 생각은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성령에게 사로잡혀 있는 사람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인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어떻게 이런 능욕을 기뻐할 수 있었습니까?

(1) 그들은 하늘의 상을 바라본 것입니다.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다'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2) 그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는 일이야말로 복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3) 그들은 항상 기뻐하라고 말한 바를 스스로 실천했습니다. 우리가 항상 기뻐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의 생애가 주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결론 : 사도들이 승리를 안고 공회 앞을 나올 때 그들의 마음속에는 좀 더 주를 위해 힘있게 일할 것임을 다짐했습니다.

우리들도 이들 사도들처럼 주를 위한 고난을 기뻐할 수 있는 믿음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도행전 6장

◆ 밤중소리 11-06 | VIEW : 3,181

(21) 하나님의 종들이 전무할 일(사도행전6:1-7)

(22) 집사의 자격(사도행전6:1-7)

(23) 전도자 스데반 집사(사도행전6:8-15)

(21) 하나님의 종들이 전무할 일


(21) 하나님의 종들이 전무할 일

(사도행전6:1-7)

예루살렘에 세워진 교회는 아직 교회의 초기라 교회 운영에 미숙한 점이 많았습니다. 조직도 완전하지 못했고 교회 운영면에서도 손발이 맞지 아니했습니다. 충돌과 불평이 생기는 가운데 사도들에 의해 한 가지 한가지 시정되어 갔습니다. 집사들이 선택되고 사도들이 할 일이 정해지는 등 교회 조직이 한 걸음씩 틀에 잡혀가게 된 것입니다.


1. 교회 안에 일어난 문제

성도들의 수효가 많아지고 교회가 부흥되어 나가자 교회 안에 문제점들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생긴 최초의 문제는 구제하는 일이었습니다. 이 일은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구제하는 일에 매일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한 일'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헬라파 유대인이란 헬라 지역에 거주하면서 그곳 언어인 헬라어를 사용하고 있는 유대인들로 헬라에 살고 있는 유대인 교포들입니다. 히브리파 사람이란 아람어를 사용하는 유대인들로 본토박이 유대인들입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구제하는 일에 이 헬라파 유대인들이 번번이 빠지게 되어 원망의 소리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만약 이 일이 더 크게 번지면 교회 안에 헬라파와 히브리파로 파당이 생겨 내분이 일어날 위험성마저 있었습니다. 이에 사도들이 모든 제자들을 불러 중대한 제안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 제안은 하나님의 종들이 말씀을 제쳐놓고 공궤를 일삼는 일이 마땅치 아니하다는 것과 그러니 교회의 구제 사업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들에게 맡기고 이들을 위해 일곱 명의 집사를 선택할 것과 하나님의 종들은 오직 말씀을 전하는 일과 기도하는 일에 전무하리라고 하는 제안이었습니다.


2. 하나님의 종들의 최고의 사명

여기서 사도들은 '우리가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 하나님의 모든 교회가 어떻게 조직되어야 하며 운영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이 되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에서의 사도들의 사명과 권위는 그 후 사도들에 의해 안수하여 각 교회에 세워진 하나님의 종들에 의해 계승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을 사도들이 했던 것처럼 교회의 최고 직분은 말씀을 가르치는 직분입니다. 이 직분은 교회의 구제나 다른 어떤 직분보다 중요한 직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종들이 교회의 구제나 공궤하는 일에 얽매인다면 말씀을 전하는 일과 기도하는 일에 많은 지장을 초래할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종들이 해야 할 일은 기도에 전무하는 일입니다. 사도들이 기도한 결과 세 가지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기도한 사도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것입니다. 그들은 무식한 어부 출신이요 남달리 겁이 많은 졸장부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어떻게 그토록 담대한 믿음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까? 이에 대한 올바른 해답은 그들은 기도함으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다음에 사도들의 능력은 기도에서 나왔습니다. 기도가 없이는 능력이 나올 수 없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능력의 충전기와 같은 것입니다. 기도한 종과 기도가 없는 종과의 차이점은 그로부터 나가는 능력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기도하므로 많은 표적과 기적을 나타냈습니다. 하나님의 종들이 기도하지 않고도 표적이나 이적을 나타낼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표적이 아닐 것입니다. 기도만이 놀라운 표적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들은 부단히 기도하는 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종들이 해야 할 일은 말씀을 전하는 일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일이란 말씀의 봉사로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을 말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써 그의 부활을 증거 하는 일이요 그리스도는 바로 우리의 구주 되심을 증거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전무하는 일이란 말씀의 봉사자로 말씀을 연구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종들은 말씀을 깊이 연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종들이 연구해야 전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연구와 준비가 없는 설교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올바른 말씀의 전달 방법이 아닌 것입니다.


결론 :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종들로 기도하는 일과 말씀을 전하는 일에 전무할 수 있도록 분쟁이 없어야 하며 교회를 운영하는 일에 주의 종으로 심려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직분자들이 세심하게 배려하며 헌신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교회의 목사가 기도하는 많은 시간을 가짐으로 능력 있는 목회자가 되며 말씀을 연구하고 말씀 전하는 일에 전무할 수 있도록 교인들이 힘쓰면 그런 교회는 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22) 집사의 자격

(사도행전6:1-7)

사도행전 6장에는 교회의 집사 직분이 최초에 어떻게 세워졌는가에 대해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사도들이 말씀 전하는 일과 기도하는 일에 전무하게 되자 공궤하는 일과 구제하는 일 등 교회의 제반 살림살이를 맡아야 할 직분자가 필요했습니다. 이 일에 대하여 사도들이 제자들을 향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다땅치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 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는 일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고 했던 것입니다.


1. 교회의 집사직

집사란 말은 원어적으로 볼 때 구제란 말과 같은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집사는 디아코니아( )인데 이 말은 구제란 말과 동일한 뿐 아니라 봉사, 섬기는 일과도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말입니다. 그래서 옛날에도 잘 사는 집안에서는 관리인 비슷한 청직이를 두었는데 이들을 집사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사도들은 일곱 명의 집사직을 선택하는 일에 있어 그 자격 기준을 말하고 제자들의 손에 의해 선출하도록 했습니다. 3절에서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고 한 것입니다.

집사 직분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의 첫 번째 요건은 '성령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사도행전 2장 이하에서부터 성령 충만이란 말을 자주 듣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성령의 충만과 성령의 세례와를 혼돈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성령 세례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했을 때 그 마음에 임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거듭난 사람은 누구에게나 성령이 임재 하시는데 이 성령의 임재 하심을 성령의 세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함은 성령의 능력 가운데서 그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갈 수 있는 성령의 역사를 말합니다. 성령의 주장하심을 받아 살아갈 때 그런 사람을 성령의 충만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지 않고도 예수를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육신의 생활에 얽매이게 되며 성령으로 생활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기 때문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지 않고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능력이란 곧 성령이 베푸시는 성령의 능력을 의미합니다. 충만이란 말은 프레레스( )란 말로 그릇에 꽉 차서 다른 것이 전혀 들어갈 수 없는 상태를 가리킨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충만하다는 말은 성령 속에 잠겼다는 말이며 그 성령 안에서 헤어나올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성령의 일을 생각합니다.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는 생활을 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입니다. 성령이 내 안에서 내 인격을 지배하고 내 생활을 지배하고 있는 상태가 성령의 충만한 상태인 것입니다.


2. 집사는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어야 한다.

5절 말씀에서 집사로 선출된 사람들은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며 말씀에 대한 믿음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두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대속의 은혜를 믿는 믿음입니다. 이것은 죄사함을 믿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으심을 믿는 믿음입니다. 다른 하나는 부할에 대한 믿음입니다.

대속에 대한 믿음은 속죄에 확신을 주고 부활에 대한 믿음은 의로움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신을 줍니다. 이 믿음이 우리의 구원에 확신을 주며 우리들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는 능력을 줍니다. 다음에 집사는 지혜가 충만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지혜란 소피아( )로 이 말의 뜻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식을 말합니다. 이 지혜의 특성은 성결하고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다고 했습니다(약3:17).

다음에 집사는 칭찬 듣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칭찬을 듣는다는 원어 말투루메누수( )로 모든 사람에게 인정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교회의 일꾼은 먼저 사람에게 인정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의 중직을 맡는 일에 모든 성도들에 의해 선출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의 충성스러움이 모든 사람에게 인정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같은 사도들의 권고에 모든 사람들이 기뻐하여 7명의 집사가 선출된 것입니다. 선출된 이들에게 사도들이 기도하고 안수하므로 집사 직에 오른 것입니다.


결론 : 집사직에 임직한 사람은 스데반, 빌립, 보로고로, 니가노르, 디몬, 베나나, 니골라 등입니다. 이처럼 집사를 세운 후부터 하나님의 말씀이 더욱 왕성하여 제자의 수효가 많아져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들까지 복음에 복종했다고 했습니다.



(23) 전도자 스데반 집사

(사도행전6:8-15)

스데반은 사도들에 의해 예루살렘 교회에서 최초로 선출되어 안수 받은 일곱 집사 중 한 명입니다. 스데반이란 이름은 면류관이란 뜻입니다. 그는 자기 이름처럼 아름답게 순교한 최초의 순교자가 된 사람입니다. 스데반은 지혜가 많은 사람으로 복음에 대하여 유대인들과 뜨거운 변론을 해 왔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핍박하는 유대인들이 스데반과의 변론에 이기지 못하자 그를 거짓으로 모함하여 공회에 고발하여 재판을 받게 했습니다. 그 결과 스데반은 무법한 자들에 의해 순교를 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1. 스데반 집사의 인물됨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교회에서 스데반 집사를 선택하신 이유는 하나님 앞에서 그가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믿음 때문입니다. 그가 영광스러운 순교자가 된 일에 대하여 사도행전에서는 자세히 언급해 주고 있습니다. 먼저 그의 인물됨에 대하여 몇 가지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그는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5절에서 믿음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확실한 믿음으로 충만했습니다.

(2) 스데반 집사는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역시 5절에서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이 충만한 사람은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성령이 지배하고 성령에 의해 살아가기 때문에 그가 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3) 스데반 집사는 은혜가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8절에서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행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성경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스데반 집사도 은혜가 충만했던 것입니다.

(4) 스데반 집사는 권능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나타낸 기사와 표적은 그의 충만한 권능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가 권능이 충만한 사람이 되었던 것은 믿음이 충만하고 성령이 충만하고 은혜가 충만한데서 필연적으로 나온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2. 스데반 집사에 대한 모함과 그의 변론

유대인들은 스데반 집사에 대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였다고 모함했습니다.

(1) 모세에 대한 참람한 말이란 율법에 대하여 오해한 데서 나온 말입니다. 스데반은 그들에게 사람의 구원은 율법으로가 아니라 복음으로 얻을 수 있다고 말한 일에 대해 그 같은 모함을 한 것입니다.

(2) 다음에 그들이 하나님께 대하여 모독했다고 한 것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거한 말을 전한 것으로 모함 받은 것입니다. 단일 신을 주장하는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란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를 의미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 참람된 말을 했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더군다나 스데반은 아들과 아버지는 하나라고 증거 했을 때 그들은 이 같은 참람한 말을 들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3) 더군다나 사람의 죄는 오직 그리스도의 피로서만이 사함 받을 수 있다는 복음은 율법을 존중히 여기는 그들에게는 용납할 수 없는 망언이었던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는 율법에 능통한 유대인들을 상대로 어떻게 변론하여 그들을 이길 수 있었던 것입니까? 


이에 대하여 10절에서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했다'고 했습니다. 복음의 지혜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그 말씀에 무식한 사람은 복음의 지혜를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상 지혜가 부족한 것은 부끄러울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에 부족하다면 안되는 것입니다. 

다음에 스데반 집사는 성령으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성령으로 전한다는 말은 성령의 권능으로 전한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좌우에 날선 검처럼 사람의 마음을 찌르려면 성령의 능력으로 증거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전달될 때 그 말씀이 성령의 날선 검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권능으로 말씀을 전할 때 그 말씀이 머리에가 아니라 마음에 깊이 새겨지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언제나 성령의 충만한 상태에서 말씀을 전했기 때문에 백성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고 믿는 자의 수효가 날마다 더 했던 것입니다.


결론 : 스데반 집사의 토론의 주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는 구약 성경에서 그 많은 메시아에 대한 증거를 끄집어내어 예수에게 적응시킴으로 유대인들을 꼼짝 못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토론을 할 수 없게 되자 이제 발광에 가까운 비 이성적인 폭도처럼 돌변하여 스데반을 체포하여 공회에 넘겨주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스데반 집사를 본받아야 합니다.


사도행전 7장

◆ 밤중소리 11-06 | VIEW : 4,614

(24) 스데반 집사의 전도 설교(사도행전7:1-53)

(25) 스데반 집사의 순교(사도행전7:53-60)


(24) 스데반 집사의 전도 설교

(사도행전7:1-53)

성령을 충만히 받아 성령의 지혜로 충만했던 스데반 집사는 복음을 전하려는 뜨거운 마음으로 불타 있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이 모이는 여러 회당을 찾아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오순절 행사로 예루살렘에 모여 있는 유대인들을 찾아 그들과 더불어 변론을 전개했습니다. 

이때 변론한 요지는 예수의 메시야 되심과 그의 죽음에서 살아난 부활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성령의 지혜로 변론하는 스데반을 당해 낼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스데반을 죽이기 위해 산헤드린 공회에 모함으로 고소한 것입니다. 스데반은 결국 그들에게 체포되어 공회의 재판석에 서게 된 것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높은 고위층 인사들이 모인 그 재판석에서 일장의 전도 연설을 하게 되었습니다. 스데반의 전도 설교는 이스라엘이 잘 알고 있었던 그들의 민족적인 역사였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와 이스라엘 역사와는 한 줄기에서 뻗어 나온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는 이 설교로 그들의 패역한 불신앙을 신랄히 공격하면서 복음을 증거 했습니다.


1.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

스데반 집사는 그의 설교를 아브라함대로 올라갔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약속된 메시야였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 일에 대하여 스데반은 하나님의 언약은 아직 자식도 없는 그의 씨에게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약속의 씨를 25년 후에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애굽으로 건너가서 그곳에서 400년간 종살이를 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고 사대만에 돌아올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과연 그 말씀대로 이루신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의 언약은 비단 아브라함에게만 주신 것이 아닙니다. 요셉을 통해서, 모세를 통해서도 주셨습니다.

(1) 스데반은 요셉에 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으로 보내신 일에 야곱의 열 한번 째 아들인 요셉을 통해서 이루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형제들에게 배척받은 요셉으로 애굽에 건너가 총리직에 오르게 하심으로 그들의 주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스데반이 요셉의 이야기를 끄집어낸 것은 하나님의 메시야 언약을 이루시는 일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모두 이스라엘의 배척을 받은 사실을 강조하려고 한 것입니다.

(2) 다음에 등장시킨 인물은 모세입니다.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인도하는 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 이 모세입니다. 스데반 집사는 이에 대하여 37절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대하여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고 말했습니다. 이 모세의 말을 이스라엘은 모세와 같은 선지자로 오해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메시야에 대하여 모세와 같은 이적을 행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모세와 같은 이적을 보여 달라고 하면서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고 표적을 구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버린 모세를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미디안에서 다시 애굽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모세의 인도를 받아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은 사사건건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들은 우상을 만들고 이방 신을 섬겼습니다. 이 일이 그들의 올무가 되어 과연 선지자들이 예언한 대로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가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모세를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높이는 것처럼 말하지만 그들의 조상은 이 모세를 따르지 아니했고 오히려 핍박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 그들에 의해 핍박을 받으며 고난을 당하신 예수야말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통해서 메사야의 언약을 이루시는 분이심을 나타낸 것으로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은 동족에게 버림받고 핍박을 당한 하나님의 사람들로 그 언약을 성취케 하셨다는 사실을 증거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패역 했던 일은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계시지 아니했기 때문이었나? 그런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광야에 성막이 있었고 가나안 땅에 들어온 후에도 하나님의 성전이 있었던 일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셨던 증거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하나님께 패역 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그들의 조상을 따라 메시

야를 핍박하였고 끝내는 죽이기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예수를 하늘보다 더 높이 드셔서 주와 그리스도로 삼으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결론 : 스데반 집사의 설교는 매우 길었지만 그 설교가 유창했으며 듣는 이의 심혼 골수를 찔려 쪼개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이 스데반의 말을 들은 공회 의원들은 찔림을 받기는 했지만 회개한 것이 아니라 이를 갈았습니다. 우리는 스데반과 같은 증인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5) 스데반 집사의 순교

(사도행전7:53-60)

스데반 집사의 긴 전도 설교를 듣고 있었던 공회원들과 그 자리에 모여 있었던 유대인들은 스데반을 향하여 이를 갈았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기대 해온 메시야를 그들이 십자가에서 죽인 사실을 지적 받자 그들은 회개하는 대신 이를 갈았던 것입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 도다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치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 하였도다'고 말했을 때 그들은 더 이상 그의 말을 들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1. 마음이 찔린 공회원들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두 가지 현상이 일어납니다. 하나는 그 말씀이 자기의 심혼골수를 쪼개어 회개하는 역사의 경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제대로 찔림을 받게 되면 오순절 날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회개했던 무리처럼 회개에 이르러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공회원들은 그 마음이 더욱 완악 해져서 마음에 찔림을 받은 그 상태에서 미움으로 이를 가는 자리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1) 그들은 그리스도를 죽인 일이 양심상 잘못된 일인 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도 예수님에게 죄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다만 예수께서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신 말씀에 올무를 걸어 참람하다고 정죄하게 된 것입니다.

(2) 그들은 예수를 죽인 일이 선지자들의 증거하고 모세가 증거한 메시야를 죽인 일이며 자기들이 그 장본인이란 지적에 몹시 당황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경우 두 가지 태도 중에 하나를 취해야 했습니다, 하나는 그 자리에서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든가, 아니면 지금 그들의 행동처럼 이를 갈며 분노하던 가입니다 그들은 물론 후자를 선택했던 것입니다.


2. 스데반의 최후

증언과 순교 이 때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습니다.

(1) 스데반은 끝까지 성령의 충만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에게 두려움이 없고 담대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된 것은 그는 자기를 의지하거나 자신의 지혜에 따르지 않고 오직 성령의 능력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2) 스데반은 그의 신령한 눈이 열려졌습니다. 그는 하늘의 보좌에 계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았고 그 우편에서 계시는 예수님을 바라본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 놀라운 광경을 그들에게 증거 하기를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고 외쳐 댔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스데반의 장엄한 순교를 앞두고 그에게 새 힘과 위로를 주시려고 보좌에서 일어선 모습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런 스데반의 증언을 듣고 있었던 유대인들은 이제 더 이상 참을 수 없었습니다.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죽인 예수가 하나님 우편에 계시다는 스데반의 증거를 더 이상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끝내 비이성적으로 스데반을 공회의 재판 자리에서 이끌어 내어 성밖으로 끌고가 돌로 친 것입니다. 귀에 할례 받지 못한 사람들이 자기를 책망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그들이 하는 특징은 귀를 막는 일입니다,

밖으로 끌려간 스데반 집사는 그들이 일심으로 내려치는 돌에 맞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예루살렘 교회의 첫 번째 순교자가 된 것입니다. 이것은 스데반으로서는 크나큰 영광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때 스데반을 돌로 치는 증인들이 그들의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기독교 사상의 위대한 공헌자 바울이 스데반 집사를 죽이는 자리에 아주 중요한 인물로 등장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사울이라고 한 이 청년은 나중에 바울로 이름을 바꿨는데 이 바울이 공회원 중에 한 사람으로 스데반을 죽인 사람들 중에 하나요 증인들의 옷을 맡은 율법 상의 증인의 구실을 한 인물이 된 것입니다. 비오듯 내려 쏟아지는 돌에 맞아 이제 죽음 직전에 이른 줄로 알게 되었을 때 스데반은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는 돌을 맞아 죽어 가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무릎을 꿇었다고 했습니다.


결론 : 스데반은 두 가지 내용의 기도를 간단히 드렸습니다. 하나는 자신의 영혼에 관한 기도로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하는 내용의 기도였고 다른 하나는 자기를 돌로 치는 원수의 무리들을 위한 기도로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는 기도을 드린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의 믿음을 본 받는 성도가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