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新約]강해/◆ 사복음서 · 사도행전 강해-1

요한복음서 18-21 장 ◆ 밤중소리

영국신사77 2020. 4. 12. 18:20

요한복음(4) 차례

제 18장(94-97)

94. 아버지께서 주신 잔(요한복음 18:1-11) 

95. 베드로의 실패(요한복음 18:12-27) 

96. 내가 왕이니라(요한복음 18:28-38) 

97. 바라바를 선택한 무리들(요한복음 18:39-40) 


제 19장(98-101)

98. 예수를 넘겨준 빌라도(요한복음 19:1-16) 

99. 십자가 위의 죄패 (요한복음 19:17-22)

101. 장례를 치른 숨은 두 제자(요한복음 19:23-37) 


제 20장(102-105)

102. 막달라 마리아와 부활하신 예수님(요한복음 20:1-18) 

103. 주님이 주시는 평강(요한복음 20:19-20) 

104. 성령을 받은 자의 권세(요한복음 20:21-23) 

105. 도마의 신앙(요한복음 20:24-31) 


제 21장(106-108)

106. 디베랴 바다에 나타나신 주님(요한복음 21:1-14) 

107.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복음 21:15-17)

108. 베드로의 남은 생애(요한복음 21: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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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8장 (94-97)

◆ 밤중소리 01-28 | VIEW : 581

94. 아버지께서 주신 잔(요한복음 18:1-11) 

95. 베드로의 실패(요한복음 18:12-27) 

96. 내가 왕이니라(요한복음 18:28-38) 

97. 바라바를 선택한 무리들(요한복음 18:39-40)


(94) 아버지께서 주신 잔

(요한복음 18:1-11)

서 론 : 예수님이 잡히신 곳은 기드론 시내 저편에 자리잡고 있는 동산입니다. 이 동산은 감람산이라고 불리우는 겟세마네 동산입니다. 예수님이 습관을 따라 기도하러 다니셨던 곳이며, 마지막 밤에 자신이 마실 잔을 옮겨 주십사고 아버지께 기도하셨던 바로 그 산이기도 합니다. 그곳은 다른 사람이 찾아오기 힘든 그런 은밀한 장소였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자기 스승과 함께 몇 번인가 가 본 일이 있으므로 관속들을 거느리고 쉽게 찾아 올 수 있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그의 당하실 일을 이미 다 아셨다고 했습니다.


1. 가룟 유다의 배신

12제자 중 하나로 주님을 따르다가 그 주님을 배신한 가룟 유다는 비극적인 인물입니다. 가룟 유다의 배신은 주님을 따르는 우리에게 영원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이 말씀은 가룟 유다와 같은 사람들을 두고 주신 경종입니다(히6:4-6).

우리가 성경에서 가룟 유다에 대한 기사를 찾아 볼 수 있는 것은 그가 돈을 사랑한 사람이요, 어떤 때는 돈주머니에서 돈을 훔쳐간 도적이요, 그가 아주 거짓에 능한 이중 인격자 임을 알 수 있습니다(요22:1-6). 중생되지 못한 가룟 유다는 언제나 세상적인 생각에 사로잡혔고 신령한 영적인 일에 반감을 가졌었습니다.

마귀는 이 가룟 유다를 발견하고 쾌재를 불렀습니다. 마귀는 먼저 이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어 주었습니다(요13:2). 그리고 이어 27절에서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고 했습니다. 먼저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어준 마귀는 다음에는 자신이 직접 그 마음에 들어가 그 일을 진행해 나간 것입니다.

2.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유다를 앞세우고 군대와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보낸 하속들이 등과 홰와 병기를 가지고 주님에게로 가까이 오고 있었습니다.

(1) 예수님은 자신의 때를 아셨습니다. 이제는 십자가를 지셔야 할 그 때임을 아시고 그들에게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때가 이르기까지 여러 곳에서 피하기도 하셨으며 자신을 숨기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러하실 때가 아님을 아시고 자기 자신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2) 예수님은 내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를 찾느냐는 예수님의 물으심에 그들은 나사렛 예수라고 대답했습니다. 아직 날이 새지 않아 어두울 때라 그들은 주님을 잘 분별치 못했던 모양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내로라”고 자신을 나타내시면서 너희가 찾고자 하는 그 사람이 바로 나라고 하신 것입니다.

(3) 예수님은 끝까지 그의 제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칼과 몽치를 가지고 자신을 잡으러 온 그들에게 “이 사람들의 가는 것을 용납하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실 일은 주님이 하실 일이지 제자들의 분야는 아닙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이 어려운 형편에서 구해 주실 것을 기뻐하시고 그들에게 피할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3. 아버지께서 주신 잔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 어려운 국면에서 그 처신을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큰 용기를 내어 가지고 있던 검을 뽑았습니다. 베드로는 그 검으로 대제사장의 종인 말고의 귀를 베어버린 것입니다. 베드로의 이런 행동에 대해 예수님으로부터 즉각적인 책망을 듣게 되었습니다. “검을 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이때까지도 베드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인간의 힘으로 쟁취해야 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 같은 베드로의 행동은 만용에 속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검으로써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검으로 쟁취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권능으로 이 땅에 임하는 것입니다.

(1) 아버지께서 주신 잔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주어진 아버지의 사명을 잔, 또는 세례란 표현으로 나타내셨습니다. 잔이라고 나타낸 ‘포태리온’은 무엇을 담는 그릇으로 이것이 주님이 받으실 고난의 잔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그가 받으신 사명을 내게 주신 잔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2)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 바로 이 잔을 마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잔은 참으로 마시기 어려운 잔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 잔을 자신에게서 떠나게 하시기 위해 피나는 기도를 하시기도 하셨습니다(눅21:41-46).


결 론 : 우리들에게는 누구에게나 아버지께서 주신 잔이 있습니다. 물론 이 잔은 예수님처럼 십자가의 잔은 아닙니다. 그러나 때로는 이 잔을 마시기에 어려움을 당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잔을 우리에게 주시는 이유는 먼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 잔을 마심으로 인하여 우리에게 무한한 축복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는 우리에게 지워 주신이 잔을 마셔야 합니다.


(95) 베드로의 실패

(요한복음 18:12-27)

서 론 :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마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기로 결심하시고 대제사장의 하속들에게 끌려 안나스의 집 뜰로, 가야바에게로, 공회로, 빌라도의 뜰로, 헤롯에게로, 다시 빌라도에게로 이처럼 시달리시다가 드디어 빌라도의 뜰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는 사형언도를 받게 되신 것입니다. 더군다나 주님은 손이 결박된 채 끌려 다니셨으니 그 시달리심이야 이루 형용할 수 없으며, 하루 종일 굶으신 후라 그 시장하심이 얼마나 하셨겠는가?

1. 예수님의 뒤를 따라간 요한과 베드로

가룟 유다의 인도를 받아 칼과 몽치를 가지고 예수님을 잡으러 온 대제사장의 하속들은 예수님을 결박하여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갔습니다. 이때 주님의 제자들은 다 도망쳐 달아났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주님의 두 제자가 어디선가 나타나 먼 발길로 슬금슬금 결박된 채 붙들려 가시는 주님의 뒤를 따랐습니다. 이 두 명의 제자가 바로 요한과 베드로였습니다.

(1) 요한이 성공한 이유는 그의 담대함에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안나스의 집에 들어가실 때 주저하지 않고 그 뒤를 따라 자신도 그 안 뜰까지 들어갔습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자는 실족하지 않습니다. 사람이란 그의 신상에 어떤 결정적인 위기가 올 때 주님에 대한 사랑의 깊이를 알 수 있습니다.

(2) 요한이 성공한 이유는 그의 사랑에 있었습니다. 요한은 주님의 사랑을 받은 제자였습니다. 요한이 자신을 표현할 때에도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의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었는지라”고 했습니다(요13:23). 요한이 이처럼 주님의 사랑을 입은 것은 그가 주님을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는다”고 하셨습니다(잠8:17). 요한의 신앙과 주님을 향한 충성심은 이런 주님에 대한 그의 사랑에서 나왔던 것입니다.

2. 베드로의 실패

베드로는 12제자 중 주님의 수제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신앙고백과 그가 받은 사명과 그의 적극적인 성품에 힘입어 늘 다른 제자들 보다 앞장섰기 때문에 이런 칭호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베드로가 그의 평생에 한을 품게된 사건이 벌어졌는데 그 일이 대제사장의 뜰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1) 베드로는 문 밖에 서 있었다고 했습니다. 베드로에게 있어서 문안에 들어가는 일은 큰 모험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잘못하면 주님과 한패로 몰려 잡히게 될는지 모른다고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일에 대하여 주님은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10:28).

(2) 베드로는 요한에게 끌려 안 뜰로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대제사장과 아는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문 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왔더니”라고 했습니다(16). 끌려 다니는 신앙은 온전한 신앙이 되지 못합니다.

(3) 베드로는 첫 관문에서 그의 두려워했던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17절에서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하니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 하고” 말했습니다. 베드로에게는 올 것이 왔습니다. 그가 염려하고 두려워한 일이 그 앞에 찾아 온 것입니다. “너도 이 사람의 제자중 하나”라고 지적하는 문지기 계집종의 물음에 베드로는 생각할 필요도 없이 즉각적으로 아니라고 부인했습니다. 베드로는 이제 사람의 올무에 걸렸습니다(잠29:25). 하나님을 의뢰하지 못하고 사람을 두려워한 베드로는 하나님에 의해 사람의 올무에 걸린 것입니다.

(4) 베드로는 그 집 종들과 하속들이 쬐는 숯불 있는 곳으로 가서 그들과 함께 그 불을 쬐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 때가 추운고로 종과 하속들이 숯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고 했습니다(18). 베드로는 하나님의 불, 성령으로 충만해야 할 사람인데 사람의 불을 찾아갔습니다. 계집종에게 지적 당한 위기에서 벗어나려고 자신의 태연함을 가장하기 위하여 사람들이 쬐고있는 숯불 있는 곳으로 가 함께 쬐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이 곳에서도 자신의 신분을 숨길 수 없었습니다. 잠시 후 대 제사장의 다른 종 하나가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고 다그쳐 물었습니다. 이렇게 지적한 이 종은 하필이면 베드로의 칼날에 귀를 베임바된 말고의 일가였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역시 두려움에 사로잡혀 또 부인했습니다. 이 때 “곧 닭이 울더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이처럼 세 번씩이나 주님을 부인했습니다. 마지막에 나타낸 베드로의 부인의 소리는 절규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저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마26:74).

결 론 : 베드로가 이처럼 주님을 부인하고 있을 때 예수님은 그들로부터 심문을 받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하속의 손바닥에 의해 맞으시는 수모를 당하고 계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베드로를 측은히 보시고 그에게 피할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이때 닭의 울음소리를 듣고 밖으로 나가 통곡한 것입니다. 이 일이 베드로에게는 오히려 큰 유익이 되었습니다. 그는 이 일로 한 평생 주님 앞에 머리를 들지 못하고 순교의 자리에서도 십자가를 거꾸로 짊어졌습니다.


(96) 내가 왕이니라

(요한복음 18:28-38)

서 론 : 예수님은 식민지를 통치하는 유대의 총독에게 끌려갔습니다. 그 당시 총독은 ‘빌라도’였습니다. 이 발라도는 주전 26년경 디베료 황제에 의해 유대의 제5대 로마인 총독으로 임명된 사람입니다. 이 빌라도 총독의 관할 구역은 사마리아, 유대, 및 가사와 사해까지 미치는 여러 지역이었습니다. 로마에서는 유대인들에게 종교적인 문제나 율법적인 문제에 대한 어느 정도의 자치권을 허용하였으나 사형집행에 관한 판결은 총독에 의하여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가장 잔혹한 방법으로 죽이려고 음모하는 유대인들은 십자가 위에서 죽일 수 있는 법적 최종집행자인 빌라도에게 끌고 간 것입니다.

1. 빌라도의 심문

빌라도는 솔직한 심정으로 예수라고 하는 이 젊은이에 대하여 재판하기를 꺼려했습니다. 그리고 그를 정죄 하는 일에도 가담하기 싫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처럼 수모를 당하고 배척을 당하는 일이 그의 범죄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유대인들의 시기에 기인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마17:18).

(1) 빌라도는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고 예수의 대한 재판을 거절하려고 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를 잡아온 유대인들을 향하여 “너희가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소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이에 그들은 빌라도에게 자기들의 고소는 이 사랑의 행악에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행악자란 ‘카코포이오스’로 악을 행하는 자란 뜻으로 이런 악은 사회 안녕 질서나 국가적인 질서를 무너뜨리는 최대의 범죄행위를 의미하고 있었습니다. 아직까지의 로마 법정의 재판통념상 이런 죄인들에게는 십자가에서의 중한 형벌을 선고해 왔던 것입니다.

(2) 빌라도는 예수께 대하여 그 첫 심문에서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물었습니다. 빌라도는 왜 예수님을 향하여 이 같은 심문을 시도한 것일까? 예수님이 사형에 해당된다고 벌라도에게 고소한 유대인들의 고소내용이 이 일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리가 일어나 예수를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고소하여 가로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는 내용이 그들의 소송 내용이었습니다(눅23:1-2).

빌라도는자기 앞에 묵묵히 서있는 이 청년이 유대인들에게 말할 수 없는 핍박을 받으면서도 왜 자신을 왕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이에 대하여 가장 궁금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입으로부터 친히 이 같은 대답을 듣기로 한 것입니다.

2. 내가 왕이니라

예수님은 빌라도의 심문에서 분명한 어조로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고 대답하셨습니다.

(1) 예수님은 먼저 빌라도에게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뇨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하여 네가 한 말이뇨”라고 되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이와 같이 되물으신 이유는 빌라도의 말의 올무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유대인의 왕”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누구냐“고 물으심으로 자신의 왕권이 세상의 왕권에 도전하는 반란죄가 아님을 빌라도에게 명시하실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2) 빌라도는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고 대답하셨습니다.

(3) 예수님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 권세를 잡고 다스리는 세력은 사단으로, 이자를 가리켜 예수님은 이 세상 임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2:31, 14:30, 16:11). 예수님은 이런 세상 권세를 쟁취하여 그들의 왕이 되시려는 의도에서 오신 것이 절대로 아닌 것입니다. 이 세상 정권은 싸워서 이기는 자가 지는 자의 손에서 빼앗는 것이기 때문에 만약 예수님의 사역이 이 세상에서 그의 왕권을 이루시는 일이었다면 그들과 싸워서 그 의도하는 바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2) 예수님은 메사야로 약속된 유대인의 왕이십니다. 유대인들이 생각한 메시야는 이 세상에 속한 왕국의 왕이었지만 이 같은 그들의 생각은 잘못된 메시야관에서 나온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야는 인류의 죄를 지시고 고난을 받으실 메시야, 그리고 주검을 정복하시고 온 인류에게 참 생명을 주실 메시야, 그리고 그 백성들을 영원토록 다스리실 메시야가 참 메시야의 모습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결코 죄로 더러워진 이 세상의 정권을 잡고 왕이 되실 분이 아닙니다. 이 세상은 예수님의 심판으로 멸망 받을 땅인데 예수님이 이런 세속적인 땅위에서 왕 노릇을 할 것이란 생각은 큰 오류가 아닐 수 없습니다.

(3) 예수님은 진리에 속한 왕이십니다.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진리가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에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었고 이 해답을 얻지 못하였으므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판결을 내리게 된 것입니다.

결 론 : 예수님은 바로 이를 위해 세상에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이 일을 하는 단계에서 빌라도의 심문대 앞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얼마 후에 세상을 심판하시는 만왕의 왕으로 오실 것입니다(계19:11-16). 그는 이 세상의 심판을 마치신 후 새 하늘과 새 땅의 천년왕국에서 하나님 나라의 왕이 되실 것입니다(단2:34, 계 20:6).


(97) 바라바를 선택한 무리들

(요한복음 18:39-40)

서 론 : 빌라도는 피고로 자신의 재판석에 서 있는 예수란 청년에 대하여 가부간 어떤 결정을 내려야 했습니다. 예수에게는 죄가 없다고 마음으로 결정을 내린 빌라도는 이제 예수를 살려 보려는 최종적인 시도를 꽤했습니다. 유대인의 민족적인 절기인 유월절이면 죄수 한 명을 특별사면 하는 관례가 있었습니다. 빌라도는 이 같은 관례를 이용하여 옥에 갇혀 있는 가장 흉악한 범죄자인 바라바를 등장시켜 예수와 바라바 이 두 사람 중에 어떤 사람을 석방시키는 것이 좋을 것인가를 묻는다면 그들은 필연 바라바는 재판의 결과대로 십자가에서 죽이고 예수를 놓아주라고 외쳐 댈 줄로 알았습니다.


1. 유대인들이 찾은 두 가지 죄

유대인들은 예수를 잡았지만 그에게 적용시킬 죄명이 분명치 못했습니다. 적어도 빌라도의 법정에서 사형언도를 받아 내려면 그에 해당되는 죄목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겨우 찾아낸 죄라고 하는 것이 예수님이 자칭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말했다는 사실과 다른 하나는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든 자들을 고쳐 주었다는 구실입니다.

(1) 안식일에 병든 자를 고치신 것이 안식일을 범한 죄가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사형에 해당되는 죄가 될 수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그들의 규례에 얽매어 외식적으로 지켜 왔지만 예수님은 안식일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뜻을 아시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도록 안식일을 지키신 것입니다.

(2)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참람되게 하는 죄가 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내셨지만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에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돌을 들어 예수님을 치려했습니다(요10:30-33).

예수님을 결박하여 잡아 온 유대인들은 그들의 재판에서 여러 가지 증거를 댔지만 서로 합하지 못하여 고민하고 있었던 차에 대제사장이 예수님께 다시 묻게 되었습니다. “네가 찬송을 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그간의 침묵을 깨치고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 같은 말씀을 들은 대제사장은 자기 옷을 찢으며 외쳐댔습니다. “우리가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그 참람한 말을 너희가 들었도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뇨” 이때 유대인의 무리들은 “다 예수를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 했다고 했습니다(막14:61-64).


2. 바라바냐? 예수냐?

언도를 앞에 놓고 빌라도는 심한 고민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 예수는 유대인의 무고에 의하여 희생된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빌라도가 최종적으로 할 수 있었던 양심적인 그의 행동은 유월절이면 전례에 의하여 옥에서 내 주는 사례를 이용하여 이 의로운 청년을 석방시켜 줄 것을 생각해 냈습니다.

(1) 빌라도는 군중들 앞에 나와서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주랴”고 물었습니다. 빌라도는 그 전에 물론 “내가 바라바를 놓아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었을 것입니다. 바라바는 강도로 붙잡혀 이미 십자가 형틀의 사형언도를 받은 기결수였습니다. 그러나 빌라도의 생각은 적중하지를 못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일제히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2) 이처럼 된 일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예언을 응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일에는 선한 사람들의 손만을 쓰시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악인을 통해서 그의 일을 성취하시는 것입니다(잠16:4). 이미 모든 인류 구원의 시나리오는 작성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 예수를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속죄 양으로 역사의 무대 위에 올려놓으셨습니다. 대제사장들도 바리새인들도 유대인들도 그리고 빌라도까지라도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속죄 양으로 십자가에 못박는 연기를 연출해야 했습니다.

(3) 바라바를 선택케 하신 일은 그들의 완악함을 드러내 놓으신 일입니다. 하나님은 완악한 자를 악한 일에 사용하실 뿐 아무 일에나 절대로 불의 하심이 없으십니다. 그들이 불의를 저지른 일에 쓰임 받은 일은 그들 스스로가 불의해서이며 그들이 그 일을 좋아하여 그들 자신이 선택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계획에서 제외된 무리들임에 틀림없습니다.

(4) 우리의 생활에서 우리는 바라바를 택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선택을 잘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택하느냐? 바라바를 택하느냐? 하는 문제가 생겨납니다. 바라바란 존재는 십자가 위에서 마땅히 죽어야 할 우리들의 육신적인 죄악들을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고 했습니다(갈5:24). 우리들 몸 안에서 언제나 그리스도의 생명을 죽이려는 강도 같은 바라바가 자리잡고 있어서, 우리들에게 자신을 택해 줄 것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나는 십자가에서 죽고(롬6:6), 그리스도는 내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갈2:20).

결 론 : 유대인들은 생명의 주를 버리고 강도범인 바라바를 선택함으로 그들의 생애에 천추의 한을 남겼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육신의 사람 바라바를 버리고 내 속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택하는 올바른 신앙생활올 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19장 (98-101)

◆ 밤중소리 01-28 | VIEW : 535

98. 예수를 넘겨준 빌라도(요한복음 19:1-16) 

99. 십자가 위의 죄패 (요한복음 19:17-22)

101. 장례를 치른 숨은 두 제자(요한복음 19:23-37)


(98) 예수를 넘겨 준 빌라도

(요한복음 19:1-16)

서 론 : 빌라도는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제 이 예수를 자기 힘으로 건져낼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하는 소리가 빌라도의 법정 안에 함성처럼 메아리쳤습니다.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라” 군중들의 이 같은 소리가 빌라도의 귀를 따갑게 하여, 자신이 가이사의 반역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부득불 이 피고를 그들의 손에 넘겨 줄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저희에게 넘겨 주니라”고 했습니다.

1. 빌라도의 석방노력

빌라도에게는 사태를 파악하는 눈이 있었습니다. 예수가 이처럼 재판자리에 까지 이르게된 것은 죄로 인함이 아니요 그들의 종교적인 시기심 때문임을 알았습니다. 빌라도는 무죄한 사람의 피를 흘리고 싶은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토록 끈질긴 고소에도 여전히 예수의 무죄를 주장했습니다.

(1) 빌라도가 생각해 낸 한가지 지혜는 예수를 고문한 후에 군중들의 동정을 얻고자 했습니다. “이에 빌라도가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하더라”고 했습니다. 채찍질은 죄인들에게 가하는 무서운 고문 방법 중에 하나입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채찍한 것은 이 같은 고문으로 예수의 모습을 사람들이 보기에 처참하게 만들어 그들이 동정심으로 마음을 돌이키게 하려는데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빌라도가 모진 채찍의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예수를 그들 앞에 데리고 나와서 그들에게 그 모습을 보여주며 “보라 이 사람을 데리고 너희에게 나오나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고 다시 무죄를 선언한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이 그들 앞에 나타나신 모양은 “가시 면류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나오셨다”고 했습니다. 주님의 이런 모습은 로마 군병들이 예수님을 희롱했기 때문입니다. 빌라도는 피고에게 채찍질의 고문을 지시하고는 안에 들어갔습니다. 이에 군병들은 “가시로 면류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웠다”고 했습니다. 가시와 엉겅퀴는 인류의 죄 때문에 번식된 저주의 식물입니다(창3:18). 예수님은 이처럼 죄와 저주로 말미암은 가시면류관으로 왕의 면류관을 대신했습니다. 로마군병들은 이 낯선 청년의 몸에 자색 옷을 입힘으로 왕의 우스운 모양을 꾸며 희롱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손바닥으로 예수님의 얼굴을 때리며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찌어다 하며 그 앞에서 희롱했습니다.

빌라도는 처참한 모습으로 군중들 앞에 선 피고를 가르키면서 “보라 이 사람이로다”고 지적했습니다. 이로써 빌라도는 예수의 유죄 여부를 엄밀히 취조했다는 사실상의 증거를 삼으려고 했지만 그러나 유대인들의 반응은 오히려 그가 기대한 반대였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이들은 마치 먹이를 본 사자가 사정없이 물어뜯기 위하여 달려드는 자세로 아우성쳤습니다.

(2) 유대인들의 내세운 예수님의 죄는 “자기를 하나님 아들이라 함이라”고 했습니다. 이제는 그들이 증거한 여러 가지 죄는 수용이 되 수 없었습니다. 증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실로 유대인에 의해서도 아무런 죄를 찾아 내지 못했으며 빌라도의 재판에서도 무죄가 증명되었습니다. 이제 유대인들이 내 세우는 죄는 “저가 자기를 하나님이 아들이라고 함이니라”고 한 바로 이 한가지 죄임이 분명히 밝혀졌습니다.

2. 예수를 넘겨준 빌라도

빌라도는 무리들의 고함 속에서 “저가 지기를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는 죄가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하는 이유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빌라도는 더욱 두려워했다고 했습니다. 정말 이 청년이 신의 아들일는지 모른다고 하는 생각이 들게 된 것입니다. 이방인들조차도 신의 아들에 관하여 알고 있었으며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제 빌라도의 우유부단한 태도에 노골적인 협박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이같이 빌라도에게 협박한 무리들의 공격은 제대로 먹혀 들어갔습니다. 가이사란 그 당시 로마 황제인 디베료를 가리킨 말입니다. 만약에 이 무리들이 이 사건으로 황제에게 탄원을 하거나 혹 고소를 제기한다면 빌라도는 엉뚱한 피해자가 될는지 모르는 일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총독의 자리를 박탈당할는지도 모릅니다. 빌라도는 이제 이쯤해서 자신의 손을 때는 것이 현명한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결 론 : 빌라도는 드디어 분개한 듯한 그의 말투로 “보라 너희 왕이로다”고 말하면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저희에게 넘겨주었다”고 했습니다. 빌라도는 자신의 명예와 권세를 빼앗길 두려움 때문에 양심과, 나타난 사실을 외면한 판결을 내린 것입니다. 그는 역사에 씻지 못할 무서운 죄를 범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죄는 유대인의 죄에 비하여 가벼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니라“고 하셨습니다. 빌라도는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이었기 때문에 그의 판결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고 해도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는 우리의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어야 합니다(마11:37-39).


(99) 십자가 위의 죄패

(요한복음 19:17-22)

서 론 : 빌라도 총독은 어쩔 수 없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판결을 내리고는 그를 십자가에 못 박을 때 그 십자가 위에 패를 써 붙여 놓았다고 했습니다. 패란 말은 라틴어에서 기원된 ‘티롤로스’란 말로 표제 혹은 제목을 뜻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패는 죄인들의 그 죄목을 가리키고 있으므로 죄패라고 불려졌습니다(마27:37). 예수님의 죄패에 기록된 죄목은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었습니다. 이 죄목은 빌라도가 그렇게 쓰게 한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유일하신 죄목입니다.

1.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1)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시간은 유대시간으로 제 삼 시경인 오전 9시경입니다. 그리고 제 육 시(12시)에 세상이 어두워졌고, 제 구 시(3시)에 최종적인 운명을 마치셨습니다(막15:25-37, 마27:45-46). 로마시간으로 제 육 시라면 오전 여섯 시를 전후한 아침을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을 더럽히지 않기 위하여 예비일에 이 일의 완결을 보려고 부지런히 서둘러 날이 새어갈 즈음 공회에서 자기들 나름대로의 재판을 마치고 총독 빌라도에게 끌고 갔으며 이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어간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침 6시경에 빌라도의 사형언도를 얻어내고 골고다까지 올라가 9시경에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2) 십자가 형틀이 어떤 모양이었나에 대해서 여러 가지 견해들이 있습니다. 십자가란 말은 ‘스타우로오’로 이 말은 ‘스타우로스’란 말에서 기원된 것인데 “곧추선 말뚝”이란 뜻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이 말이 뜻해 주는 대로 십자가 형틀을 말뚝처럼 생긴 일자형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이 말은 다만 십자가란 말의 기원일 뿐 그 형태를 의미한 것이 아니며, 아직 나타난 고고학적인 견지에서도 말뚝형의 십자가는 입증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개의 경우 십자가 형틀의 모양을 X자형, T자형, 그리고 十자형 등으로 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메고 간 일이라든가, 십자가 위에 죄패를 붙였다는 사실 등으로 미루어 보아 우리들이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十자형 틀이라고 많은 학자들이 말하고 있습니다.

(3) 십자가 처형은 그 자체가 하나의 무서운 저주에 속한 사형방법입니다. 율법에는 돌로 쳐서 죽이는 사형방법은 있어도 십자가에 매 달아 죽이는 사형 법은 없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사형수는 벗은 몸으로 그곳에 달리기 때문에 하나의 큰 치욕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못이 박힌 상처로 인한 심한 고통을 견뎌내기 어려웠으므로 신 포도주를 먹도록 허락했습니다.

2 세 십자가가 말해 주는 것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이라 하는 곳에 나오시니 저희가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 새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 편에 못 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고 했습니다(17,18).

(1) 다른 두 사람의 십자가는 우리 모두의 저주를 말합니다. 두 사람은 아담의 후손들인 온 인류를 상정해 주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모든 인류는 이 두 사람들처럼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모두 저주의 심판을 받아야 할 죄인들입니다. 우리 인생들은 모든 것이 절망적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이 아니셨다면 한결 같이 모두 멸망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2) 그런데 그중 하나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가 받은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가 사람으로 행한 일은 하나님 앞에 범죄 한 것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죽는 그 시간까지도 절망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의 자비로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주님과 함께 천국에 들어간 사람으로 우리에게 확인되었습니다. 이 한편 강도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함을 받은 우리들을 상정해 줍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고 그 은혜에 감사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3) 가운데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대속의 십자가로 우뚝 섰습니다. 그가 받으신 저주는 우리의 죄로 인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한 가운데 서 계시는 것입니다. 이제 인류는 이 예수, 한 가운데 서 계시는 이 예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3:14). 그를 바라보는 사람은 한편 강도 모양 구원을 얻지만 그를 외면하는 사람은 다른 한편 강도모양 영영히 버림받게 되는 것입니다.

(4) 빌라도가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 위에 붙인 죄패에는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고 씌어져 있었었습니다. 이 패를 히브리와 로마(라틴어)와 헬라말로 기록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각처에서 모여든 모든 유대인들이 이 패를 읽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이 죄패로 인하여 유대인들은 빌라도에게 항의하기를 그 서두에 “자칭”이라는 말을 써넣어 달라고 부탁했지만 이에 대하여 빌라도는 단연 거절하면서 “나의 쓸 것을 썼다”고 했습니다.


결 론 : 이 예수님의 십자가 위의 패는 영원히 지워짐이 없이 그 글에 나타난 뜻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왕을 죽였으며, 빌라도 역시 유대인의 왕을 죽이도록 내어 준 장본인이 되었으며, 우리는 대속의 주이신 그를 믿음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100) 십자가에서 있었던 일

(요한복음 19:23-37)

서 론 :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시간은 세상시간으로는 짧은 시간입니다. 단지 여섯 시간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고난을 당하시는 주님에게는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를 외치셔야했을 정도로 참기 어려운 시간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류의 심판을 받는 인류 구속사의 역사적인 장면이 이 시간에 골고다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이 시간은 우리의 옛사람이 영원히 죽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로 새 사람으로 탄생되는 해산의 시간이기도 한 것입니다.


1. 예수님의 옷을 제비 뽑은 로마군병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 그의 옷을 벗겼습니다. 로마군병들은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는 주님이 입으셨던 옷을 취하기 위하여 주님의 십자가 밑에서 도박을 벌렸습니다. 속옷까지 벗기우신 주님은 몸에 아무 것도 걸치신 것이 없으셨을 것입니다. 참으로 이 같은 일은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수모를 당하시면서 까지 우리를 위하여 그 고난의 잔을 마신 것입니다. 로마군병은 이 옷을 제비 뽑아 나누어 가졌는데 이 일에 대하여 성경은 증거하기를 이런 일은 성경에 있는 예언의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시22:18). 이것은 바로 예수님이 당하실 일에 대한 예언으로써 주님이 당하시는 고난이 성경대로 이루어지는 사실을 증거해 준 것입니다.


2. 어머니를 제자에게 부탁하신 일

예수님은 그의 육신의 어머니가 계셨습니다. 그가 바로 성령으로 잉태하여 예수를 해산한 마리아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어머니 마리아를,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부탁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이 말씀은 일곱 마디 말씀 중 세 번째 말씀입니다. 요한은 이 복음서에서 일곱 말씀 중, 세 말씀만을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요한과 모친을 번갈아 보면서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아들이라고 지칭한 사람은 예수님이 아니라 요한을 가리킨 말입니다. 예수님이 모친을 “여자여”라고 하신 말씀에 여러 가지 의미를 달고 있지만 이 말씀을 우리는 다음 몇 가지로 분석할 수 있습니다.

(1) 모친 마리아로 자신을 육신의 아들로 생각하지 말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여자란 말의 ‘귀네’는 평범한 여인을 지칭하는 것으로 존칭어는 아닙니다. 아들이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고 계시는 그 모습을 바라보는 마리아의 심정은 시므온이 말한 대로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고 예언한 그 고통을 지금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눅2:35).

(2) 이 말씀은 또한 마리아의 잉태 시에 그에게 계시한 천사 가브리엘의 전한 말을 상기시켜 주신 말씀입니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고 전해주었습니다(눅1:35).

(3) 예수님이 이 말씀하시는 순간은 구세주의 위치에서 죄인의 대속 제물이 되시는 때이심으로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당하고 계시는 위치는 아들과 어머니가 아닙니다. 십자가 아래에 있는 모든 인간들은 오직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받아야 할 죄인들입니다.

사람이 가장 참기 힘든 일의 하나는 갈증을 참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내가 목마르다”고 하신 말씀은 십자가에서 겪으신 그의 참기 어려운 고통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목마르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에는 다음 몇 가지 뜻이 있습니다.

(1) 그가 우리를 위하여 그 몸의 모든 것을(피와 물) 다 흘리신 것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는 십자가에서 그의 몸의 피와 물을 다 흘리셨습니다.

(2) 28절 말씀에서 이르시기를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고 하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지상에서 하셔야 했던 모든 시련은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 하심에서였습니다. 그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시는 중에도 길이 인내로 참으신 것은 성경으로 응하게 하시려는 뜻에서였습니다.


3. 다 이루었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의 일곱 말씀중 

“다 이루었다”는 말씀을 마지막으로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고 하시는 기도로 운명하셨습니다.


(1) 다 이루었다고 하신 말씀은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었다는 뜻입니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빌2:8).


(2) 다음에 다 이루었다고 하신 말씀은 

메이야적인 사명을 다 이루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하신 모든 일은 

성경에 기록된 예언을 이루시는 일입니다. 

우리는 무엇으로 

예수님이 메시야 되신 확실한 증거를 가질 수 있는가? 

구약에 예언된 모든 선지자들의 예언이 

예수님의 고난에서 일치된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습니다.


결 론 : 예수님은 로마 군병들에 의하여 창으로 옆구리를 찔리셨습니다. 

예수님의 좌우 편에 있었던 죄수들은 발을 꺾었지만 

예수님은 이미 운명하셨으므로 창으로 옆구리를 찌른 것입니다. 

이 같은 일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찌른 자들로 정죄받기 위한 예언적인 표적이었습니다(계1:7).


(101) 장례를 치른 숨은 두 제자

(요한복음 19:38-42)


서 론 : 이제 해가 기울면서 그렇게도 요란했던 골고다 언덕은 정막이 깃들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 좌우 편에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두 강도들은 이미 숨을 거두었습니다. 예수님도 그의 죽음이 확인되었습니다. 구경하러 올라온 백성들도 머리를 흔들며 예수님을 모욕했던 무리들도, 대제사장들, 서기관들, 장로들도 다 흩어졌습니다. 십자가 밑에서 주님의 옷을 제비 뽑아 나누던 로마군병들도 내려갔습니다. 끝까지 골고다에서 되는 모든 일을 바라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고 고백한 백부장과 예수를 지키던 자들도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다만 두려움에 떨면서 예수님의 시체를 염려했던 몇 명의 여인들만이 사태의 추이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때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밤에 예수님께 나왔던 니고모데가 어둠이 깔려 가는 적막한 골고다 언덕 위로 올라온 것입니다.


1. 요셉과 니고데모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면 언 듯 열 두 제자들을 연상합니다. 그러나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나 니고데모와 같은 사람들도 알려져 있지 아니한 제자들입니다.

(1) 아리마데 사람 요셉은 이스라엘의 존경받는 존귀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의 신분에 대하여 성경에는 부자라고 했습니다(마25:27). 이 사람은 또한 경건한 자라고 했습니다(눅23:51). 이 사람은 하나남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막25:43). 요셉은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 진리를 따른 참 제자였지만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제자임을 은휘해 왔다고 했습니다. 그가 예수의 제자임을 이처럼 숨긴 이유는 유대인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은 이미 산헤드린 공회에서 공식적으로 결의한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요9:22).

그러나 그는 공회에서의 재판과정에서 가타고 하는 찬성표를 던지지 아니했습니다. 이 일은 대단한 용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의 신앙의 진실함을 보여 주는 일입니다. 요셉은 골고다에서 되어진 모든 일을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그는 신앙적인 용기를 가지고 빌라도를 찾아갔습니다. 이제 그는 혹시 공회에 알려져서 이로 인하여 출교 당하면 당하리라고 하는 결심을 한 것입니다.

(2) 니고데모는 주님으로부터 이스라엘의 선생이라고 인정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 사람 니고데모 역시 요셉과 함께 산혜드린 공회의원이었습니다. 이 니고데모는 이날 밤 이처럼 예수님을 만난 이후 예수님을 믿었고 주님의 제자가 된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잡고자 하여 공회에서 이 문제에 대하여 토의할 때, 예수님을 무조건 정죄하려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담대하게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판결하느냐”는 발언을 하는 일로 인하여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고 하는 핀잔을 받았습니다(요7:45-52).

이 니고데모는 십자가에 달려 있는 주님의 시체에 대하여 요셉과 협의하여 제각기 자신들이 할 일을 분담하기로 한 것입니다. 니고데모가 분담한 일은 시체에 바를 몰약과 침향이였는데, 그는 이것을 백근쯤 가지고 주님의 시체가 있는 요셉의 무덤으로 갔습니다(몰약이나 침향 100근은 72파운드에 해당됨).

2. 진실한 두 제자들의 모습

이들이 시체를 처리해야 할 시간은 안식일 전 예비일이었습니다. 이 날은 안식일을 위해 예비하는 금요일로 대단히 분주한 날입니다. 그들은 부지런히 유대인들의 장례법대로 예수님의 시체를 처리했습니다.

(1) 이들이 주님께 바친 사랑은 거짓이 없는 사랑입니다. 주님께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은 주님을 위해 핍박을 당할 때, 그때 나타나는 것입니다.

(2) 이들의 사랑은 물질을 드린 사랑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입으로는 주님을 잘 섬기지만 물질로 섬기는 일에는 너무나도 인색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네 보물이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6:21).

(3) 두 제자의 사랑은 실천적인 사랑이었습니다. 실천이 따르지 아니한 사랑은 위선입니다. 말로만 보내는 사랑은 가치 없는 사랑입니다(약2:18).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술만의 사랑에 대하여 깊이 탄식하시면서 이사야로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마15:8, 사39:13).


결 론 : 요셉이 자신의 무덤에 주님을 장례한 일은 영적으로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요셉이 주님의 죽으심에 연합하여 죽은 것입니다. 자신의 죽을 몸 대신 예수님의 죽으신 몸이 들어갔으니 예수님은 요셉을 위해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요셉은 또한 이 주님의 죽으심에 연합하여 육신의 사람이 죽은 것입니다(롬6:4-9). 그뿐 아니라 주님은 요셉의 무덤에서 다시 살아 나셨습니다. 부활하신 것입니다. 이는 또한 요셉이 그리스도와 함께 그의 부활에 연합되는 사실을 의미해 주고 있습니다. 이 두 제자들의 주님께 대한 사랑의 장례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남이 두려워 할 때 자기가 나타나고, 남이 기피할 때 스스로 위험한 일을 담당하며, 남이 주저하는 일을 자신이 선 듯 나서는 일은 주님께 대한 진실한 사랑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주님께 거짓이 없는 사랑, 이들처럼 희생적인 사랑을 드릴 수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20장 (102-105)

◆ 밤중소리 01-28 | VIEW : 491

102. 막달라 마리아와 부활하신 예수님(요한복음 20:1-18) 

103. 주님이 주시는 평강(요한복음 20:19-20) 

104. 성령을 받은 자의 권세(요한복음 20:21-23) 

105. 도마의 신앙(요한복음 20:24-31) 


(102) 막달라 마리아와 부활하신 예수님

(요한복음 20:1-18)


서 론 : 우리는 본문에서 막달라 마리아와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복된 만남의 장면을 바라보게 됩니다. 이 만남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있어서는 그의 생애의 최대의 기쁨이요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는 이 영광을 마음속 깊이 길이 간직하는 가운데 그의 평생의 남은 생애의 전부를 주님을 위해 바쳤을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잠8:17). .

1. 예수님에 대한 마리아의 사랑

마리아의 신분에 관하여 성경에서는 “그가 전에 일곱 귀신 들였던 여인”이라고만 알려 주고 있습니다. 일곱 귀신이나 들려 정신이상이 된 이 여인에게 획기적인 그의 인생의 전환점을 가져온 것은 그가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1) 마리아는 평생 주님을 섬기는 일을 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섬긴 일은 주님의 복음전도 초기부터였습니다(눅8:2-3). 오늘날에도 주님을 섬기는 여인들은 일곱 귀신 들렸던 천한 여인, 마리아와 같은 여자들입니다.

(2) 이 마리아는 주님이 십자가에서 당하시는 모든 괴로움을 함께 맛 본 여인입니다. 마리아는 주님이 어려움을 겪으실 때 그 자리에 늘 함께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실 때에 그 곁을 울며 따랐습니다. 마리아는 골고다에 끝까지 남아서 주님의 모든 괴로움을 지켜보면서 자신도 마음으로 그 괴로움을 나누었습니다.

2. 무덤에 찾아 간 마리아

이른 아첨에 주님의 무덤을 찾은 사람들은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신 것은 아닙니다. 오직 막달라 마리아에게만 나타나셔서 그 몸을 친히 보여 주셨습니다.

(1) 마리아는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무덤을 찾아 왔다고 했습니다.

(2) 마리아가 무덤에 당도해 보니 무덤을 막고 봉해져 있어야 할 돌이 무덤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져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단숨에 제자들이 묵고 있는 집으로 달려가 이 사실을 보고한 것입니다.

(3) 다른 제자들이 다 간 후에도 마리아는 홀로 그곳에 남아서 울고 있었습니다. 마리아의 울음은 가슴이 터지고 마음이 찢어지는 울음입니다. 그녀는 울면서 구부려 무덤 속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무덤 안에는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은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4) 천사는 슬피 울고 있는 이 여인에게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마리아에게 질문한 말은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울 필요가 없는데 왜 울고만 있느냐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5) 마리아는 천사의 이 같은 물음에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다”고 대답하고는 뒤를 돌이켜 바라볼 때에 예수님이 그의 뒤에 서신 것을 보았습니다. 마리아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은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마리아는 그가 그 동산을 지키는 동산지기인줄로 알고 “주여 당신이 옮겨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고 말했습니다. 이때 그분은 마리아야 하시면서 막달라 마리아를 쳐다보았습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음성에 깜짝 놀라 주님께 의지하면서 “랍오니여”라고 불렀습니다.

(6)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제자들에게 일러주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의지하려는 마리아에게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고 하신 말씀은 부활하신 몸을 가지시고 올라가지 못하셨음을 가리킵니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고 하신 마지막 기도와 함께 주님의 영은 이미 하나님 나라에 올라가신 것입니다(눅23:46).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다른 몇몇 제자들의 경우를 잠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리아의 보고를 받고 급히 무덤으로 달려간 제자는 베드로와 요한입니다. 베드로는 무덤에 들어가 세마포가 놓인 것과 딴 곳에 개켜 있는, 머리를 썼던 수건도 발견했습니다. 그 후 요한도 무덤 속에 들어와서 이 모든 사실들을 보고 난 후 믿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믿었다고 하는 말은 예수님의 부활을 의미합니다. 9절에서 그 해답이 밝혀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육안의 통찰력이 뛰어났지만 요한은 영안의 통찰력이 뛰어나 주님의 부활하신 사실을 믿기에 이른 것입니다. 이 두 제자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아마 요한의 마음에는 설렘과 기대가 교차되는 가운데 집으로 갔을 것입니다.


결 론 : 마리아는 주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친히 보고 그리고 제자들에게 전하라는 명령을 받고 기쁜 마음으로 제자들에게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주를 보았다고 말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일러주었습니다. 우리도 마리아처럼 주님을 사랑하고 사모하면 그의 임재하심을 알게 되며 그의 뜻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103) 주님이 주시는 평강

(요한복음 20:19-20)

서 론 :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 날 새벽 일찍 무덤을 찾아 온 막달라 마리아에게 그 처음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베드로나 요한도 무덤까지는 찾아갔으나 빈 무덤을 보고 집으로 돌아감으로 주님을 만나 볼 수 없었습니다. 주님의 시신을 끝까지 찾아보려고 남아 있었든 마리아에게 주님이 그의 부활하신 모습을 보여 주신 일은 마리아의 사랑을 귀히 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그들에게 평강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1.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주님

성경은 자기들의 선생님이 잡혀가실 때 등을 돌리고 도망가 버렸던 제자들에 대하여,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무덤에 장사지내며 이제 안식일이 지난 첫날이 될 때까지 잠잠하고 있음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날 저녁때에 가서야 한 곳에 모인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무덤에 달려갔던 베드로와 요한으로부터 무덤에서 일어난 이상한 일에 대한 소식을 들었을 것입니다. 특히 마리아가 무덤에서 돌아 온 후 그가 제자들에게 찾아가 자신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실과 주님의 분부를 전해 준 것으로 인하여 그들은 하나 둘 씩 늘 주님과 자주 모인 그 장소로 모여들기 시작했을 것입니다(행12:12). 그곳에 예수님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1) 주님은 두려움 중에 있는 제자들을 찾아 오셨습니다. 제자들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밖에는 얼씬도 못했습니다. 제자들은 저녁때에 모였지만 두려옴으로 문단속을 단단히 하고 숨어 있었습니다. 이때에 주님이 그곳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그 어떤 경우에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앞에는 흥해요 뒤에는 바로의 군병들이 쫓아 올 때 큰 두려움으로 떨고 있었을 때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이르시기를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찌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출14:13-14).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두려움이 없어야 하겠지만 두려워 할 일이 있어도 그때에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심을 믿고 두려움을 물리쳐야합니다(시23:4).

(2)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십니다. 누가 자기는 온전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난다”고 하셨습니다(잠24:16). 주님이 일으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그들의 육신의 연약함으로 자주 넘어졌지만 주님은 그들을 버리신 것이 아니라 계속 일으켜 주시며 붙들어 주셨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그의 피를 흘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에게는 우리의 존재가 너무나도 귀한 것입니다. 주님은 그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 찾아오십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8:20). 제자들은 비록 두려움에 떨고 있었으나 그들의 모임은 주님의 이름을 위한 모임임에는 틀림없었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다는 일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곳에는 우리 주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2. 평강을 주시는 예수님

예수님이 제자들이 문을 닫고 숨어 있는 곳에 들어 오셔서 제일 먼저 그들에게 주신 말씀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평강이란 말은 ‘에이레네’로 이 말은 다양한 뜻을 함유하고 있습니다. 평안, 화평, 평화, 화목, 염려 등등입니다. 그 어느 쪽 말이건 이 말이 가리키는 뜻은 하나님에 의하여 인간의 마음속에 확립되는 질서를 의미합니다. 이 마음의 질서가 파괴될 때 우리는 바른 정서를 잃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큰 영적인 마음의 선물은 이 평강입니다.

(1) 주님이 주시는 평강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평화로운 마음속에는 두려움이 있을 곳이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평강은 영원한 생명에서 샘솟는 깊은 마음속의 평화입니다. 모든 정죄에서 벗어난 확실한 의에서 나오는 영원한 평강입니다(롬8:31-34).

(2) 주님이 주시는 평화는 우리로 하나님과 교통케 합니다.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욥22:21). 인간에게는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평화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인간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와 하나님과의 중재자로 오셔서 그 회목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골1:20).

(3) 주님이 주시는 평강은 우리로 소망 중에 살아가게 합니다. 우리 인생 길에는 가난, 실패, 질고 등 많은 괴로움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 인생 길을 파멸의 길로 안도합니다. 그러나 이 주님의 평강을 누리는 사람들은 이 모든 것들로부터 해방됩니다. 그보다 위대한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결 론 :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고 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 본 제자들은 이제 두려움은 살아지고 예수로 말미암은 기쁨이 충만했습니다.우리는 이 주님의 평강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평강으로 주 안에서 기뻐하는 생애를 보내야 합니다.


(104) 성령을 받은 자의 권세

(요한복음 20:21-23)

서 론 :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한 곳에 모여 있었던 제자들은 그들 가운데 갑자기 나타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고 하시는 예수님을 바로 보았을 때 몹시 놀랬습니다. 잠긴 문에 장애를 받으심이 없이 그들 앞에 나타나 그 모습을 보이셨으니 아마도 제자들은 유령이 아닌가? 놀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손과 옆구리를 보이셨습니다. 이처럼 손과 옆구리를 보이신 일은 예수님이 그곳에 다만 영적인 존재로서만 아니라 이전에 지니고 계셨던 몸으로 서 계심을 그들에게 보이심으로 두려움을 쫓고 마음의 평안을 주시려는데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앞으로 그들이 성령을 받을 일과 그 책임에 대하여 교훈적인 말씀을 들려 주셨습니다.


1.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고 하신 아버지의 뜻은 무엇인가? 보내심을 받으신 예수님의 사명이 무엇인가? 예수님은 이 일에 대하여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고 하선 것입니다(요6:39-40). 아들을 향하여 보이신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2) 예수님은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온전히 이루신 구원사역에 있어서 영광스럽게도 그의 교회들에게 동역자적인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같은 사역은 교회가 하는 일이 아닙니다. 주님이 온전히 이루신 일이요 그가 책임지시고 끝까지 성취하실 일이지만 그러면서도 이런 사명을 교회인 우리에게 맡기셨다는 사실은 우리들에게 있어서 참으로 감격스러운 일입니다.

① 예수님이 우리를 보낸다는 뜻은 복음 전도자의 사명자로 보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로 승천하시면서 그의 제자들을 향하여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 되리라”고 하셨습니다(행1:8).

② 보내심을 받은 자는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어 드려야 합니다. 주님은 이 일을 겸손과 순종으로 이루셨습니다(빌2:6-8).

③ 보내심을 받은 자는 보내신 분의 교훈을 명심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전도자들에게 의식주에 대하여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마10:10). 그리고 전도자들은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10:16). 여기서 주님이 뱀을 인용하신 것은 마귀를 상징한 것이 아닙니다. 실질적으로 뱀의 경우를 말씀하신 것인데 뱀은 공격하는 경우와 물러서는 경우를 지혜롭게 잘 판단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당시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해서는 이런 뱀 같은 지혜의 처신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2. “성령을 받으라”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왜 예수님이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하신 것입니까?

(1) 예수님이 숨을 내쉬신 일은 성령이 우리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생기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만드신 후 그의 생기로 코에 넣으심으로 사람이 생령이 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창2:7). 생기는 성령을 상징해 주기도 합니다.

(2) 예수님이 숨을 내쉰 일은 성령을 보내실 분이 예수님이심을 나타내신 뜻입니다. 성령을 보내시는 이는 예수님이십니다(요15:7).

(3) 이같은 일은 제자들이 앞으로 성령을 받을 일에 대한 하나님의 실제적인 교육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사실 이때 성령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오순절 날에 약속하신 성령을 받은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행1:4-5).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 중에서 다시 한번 놀라운 말씀을 듣게 됩니다. “너희가 뒤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말씀은 베드로에게 주신 말씀 중에도 나타나 보이고 있습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죄의 사유는 복음으로 말미암은 것으로 복음 전도자의 전도로서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죄에 대한 사유함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밝히신 말씀입니다.


결 론 : 우리는 예수의 보내심을 받은 사명자들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이처럼 한 생명을 구하는 일이며, 반대로 전하지 않는 일은 그의 생명을 버리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겔3:17-19). 우리는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으신 예수님처럼 주님의 뜻을 이루는 일을 우리 인생의 최대 목적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105) 도마의 신앙

(요한복음 20:24-31)

서 론 : 도마라고 하면 우리는 에수님의 12제자 중 가장 의심이 많은 회의주의자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 까닭은 제자들의 증언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부활의 사실을 믿지 아니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처음으로 문이 잠긴 집에 들어오셔서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고 말씀하셨을 때 그 자리에 한 명의 제자가 빠져 있었는데 그가 바로 도마였습니다. 이같은 일이 있은 후 도마가 그들 앞에 나타났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던 제자들은 도마에게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고 말했습니다. 이때 도마는 그들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십자가에 분명히 못 박혀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서 그들 앞에 나타났다고 하는 말은 어느 모로 보든지 믿을 수 없는 말입니다.

1. 도마의 확인적인 신앙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 그들 앞에 나타났다고 하는 사실은 너무나도 엄청난 사건이기 때문에 도마가 다른 제자들을 향하여 나는 믿을 수 없노라고 한 말은 크게 나무랄만한 일이 못됩니다.

(1) 도마가 보지 못한 것을 믿지 않은 일은 당연한 일입니다. 믿음이 없는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말하는 이 부활에 대하여 믿을 수 없는 거짓말이라고 말합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은 성령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2) 도마가 이처럼 확실한 일에 근거하여 부활을 믿으려고 한 일은 잘 한 일입니다. 믿음의 근거는 언제나 확실해야 합니다. 사도들의 신앙은 다 이같은 믿음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요일1:12). 성경은 우리에게 확실한 것을 잡으라고 말씀합니다(히3:14).

(3) 도마의 신앙은 순교적인 신앙임을 알 수 있습니다. 베다니에 살고 있는 나사로가 죽게되어 주님이 제자들에게 유대로 다시 가자고 하셨을 때 다른 제자들은 유대인들로부터 해를 당할 일을 두려워하여 반대했습니다(요11:7-8). 그러나 이때 도마는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용기 있게 나셨습니다(요11:16). 이같은 도마의 믿음은 귀한 믿음입니다.

2.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이런 일이 있은 후 다시 여드레가 지났습니다.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입니다. 이때는 도마도 함께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 자리에 주님이 다시 들어오셨습니다. 주님의 인사는 이때에도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고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도마를 주목하시고 그를 향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1) 예수님은 우리의 신앙을 확인시키시기를 원하십니다. 도마의 불 신앙적인 신앙을 주님은 그대로 놔두신 것이 아닙니다. 그간에도 도마는 많은 갈등 속에서 제자들이 말한 주님의 부활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보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도마에게 그의 부활의 모습을 확인시키시기 위하여 다시 이곳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2)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이 믿음 없는 자가 되는 것을 원치 아니하십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신실치 못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에 신실성이 없다면 그 믿음은 얼마 안가 파선이 되고 말 것입니다.

3. 보지 못하고 믿는 자의 복

도마는 눈앞에 나타나신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1) 도마는 주님께 대한 새로운 신앙고백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이 도마의 고백은 사도들 중에서 도마가 제일먼저 예수님과 하나님을 동일시한 위대한 신앙고백이었습니다. 나의 주라고 한 주는 ‘큐리오스’로 주, 주인, 소유자란 뜻입니다. 이것은 자기 인생의 주를, 자기 인생의 소유자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에 적용되어 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의 하나님이시라고 말한 하나님은 ‘데오스’로 창조주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도마의 이같은 신앙고백을 들으신 주님은 도마의 고백을 그대로 인정하셨고 오히려 칭찬하신 듯한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2) 도마의 이같은 고백을 들으시고 주님은 보지 못하고 믿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여기서 보지 못하고 믿는 자란 사도들 이후세대들의 사람들을 말합니다. 우리들도 이 무리들 중에 들어가 있습니다. 이같은 믿음은 사도들의 증거를 통해서, 주님이 친히 보이신 증거를 통해서, 그리고 성경의 예언을 통해서 밝히 들어내시는 데, 성령께서 이같은 사실을 증거해 주시는 것입니다(고전2:10-12). 여기서 믿는 자라고 하신 말씀은 ‘피스튜오’로 깨닫고 의탁하는 믿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계속적인 믿음을 가리킵니다. 복이 있다고 하신 말씀도 ‘마카리오스’로 영적인 축복, 행복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결 론 :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부활의 증거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놀라운 복음인 것입니다(롬1:4, 행9:39-43).


요한복음 21장 (106-108)

◆ 밤중소리 01-28 | VIEW : 706

106. 디베랴 바다에 나타나신 주님(요한복음 21:1-14) 

107.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복음 21:15-17)

108. 베드로의 남은 생애(요한복음 21:18-25)


(106) 디베랴 바다에 나타나신 예수님

(요한복음 21:1-14)


서 론 : 주님이 부활하신 후 여러 번 제자들에게 나타났으나 제자들은 늘 고아와 같은 허전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을 향하여 “나는 물고기를 잡으러 가노라”고 말하고는 그물을 가지고 디베랴 바다로 향했습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알지 못하여 옛날의 직업인 어부의 자리로 되 돌라갈 심산이었습니다. 베드로의 이런 말을 들은 다른 제자들 역시 “우리도 함께 가겠다”하고 그의 뒤를 따라 나섰습니다.

1. 나는 물고기를 잡으러 가노라

베드로가 다른 제자들을 향하여 “나는 물고기 잡으러가노라”고 한말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로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1) 하나는 사명자가 그 사명을 상실하면 세상으로 되돌아간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누가 이 사명을 상실하는 것인가? 게으른 종입니다. “자기의 일을 게을리 하는 자는 패가하는 자의 형제”라고 했습니다(잠 18:9). 주의 일을 하는 데 있어서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으라”고 말씀했습니다(롬12:11). 우리는 언제나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일이 무엇인가를 살펴 부지런히 그 일을 해야 하며, 무엇이나 맡은 일에 충실해야 하는 것입니다.

(2) 다음에 지도자가 타락하면 그 밑에 양 무리들이 함께 타락한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할 때 이 말을 들은 다른 제자들은 어떤 태도를 가진 것인가?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고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습니다. 다른 사람을 주 앞으로 인도한 사람은 특히 신앙적인 바른 자세를 가지고 전도 받은 다른 사람에게 본을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전도했으면 그를 바른 생명의 길로 인도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전도함을 받은 사람은 언제나 신앙적인 표본을 전도한 사람의 기준에 두는 것입니다. 나는 고기 잡으러 가노라고 말한 베드로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다른 제자들도 베드로와 함께 고기 잡으러 가게된 것입니다.

2. 고기를 잡으러 간 결과

베드로가 고기를 잡으러 가게된 것은 그가 실의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주님을 잃어버렸습니다. 주님이 어데 계시는지? 그들의 마음은 공허했고 지난날에 가지고 있었던 소망이 살아져 버렸습니다. 주님을 잃으면 소망도 상실해 버립니다. 우리는 늘 주님과 함께 하는 생활, 주님과 동행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 비결은 주님을 우리 안에 모셔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우리의 생활이 늘 성령 안에서 성령으로 충만한 생활이 아니면 주님을 잃어버린 생활, 실의에 빠지는 생활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면 이들이 베드로를 따라 디베랴 바다로 고기를 잡으러 간 결과 어떤 일을 만나게 되었는가?

(1) 고기률 잡으러 간 시점이 밤이었고 했습니다. 밤이란 인생이 맞는 어두움을 말합니다. 이 밤을 맞이한 인생은 고통과 환난을 겪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심령에서 떠나시면, 우리는 이 인생의 밤을 맞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낮에 다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밤에 다니면 실족하게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 두 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요 11:9). 세상은 어둡지만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시기 때문에 이 빛을 따라 낮에 다니는 생애를 살아야 합니다.

(2) 그들은 아무런 소득도 올리지 못했습니다. “이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되는 일이 없습니다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5:l5). 주님을 떠난 생활은 아무 곳에서도 환영을 받지 못합니다.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5:13).

(3) 그들에게 주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그의 피로 값 주고 사신 백성들을 절대로 버리지 아니하십니다. 이들이 비록 옛날 직업으로 되돌아갔지만 주님은 다시 그들에게 나타나시어 소망을 주시며 용기를 주셨습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물어 보신 말씀은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너희가 나를 떠나서 무엇을 할 수 있었느냐는 뜻입니다. 너희가 세상에 나아가 얻은 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들의 대답은 “없나이다”였습니다.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떠난 생활로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고 명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이 명령을 따랐더니 고기가 심히 많이 잡혔다고 했습니다. 축복은 순종에서 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같은 실제적인 교훈을 통해서 순종에 따르는 축복을 다시 한번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결 론 : 예수님은 밤새도록 고기잡이에 지친 제자들올 부르시고 그들에게 와서 조반을 먹으라고 조반 먹기를 권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측은히 여기시고 그들의 양식을 미리 준비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혹 밤중에 디베랴 바다로 물고기 잡으러 나온 사람들은 아닙니까? 주님의 음성을 듣고 배 오른 편에 그물을 던져 새로운 순종의 생활에 들어가시기를 바랍니다.


(107)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복음 21:15-17)

서 론 : 디베랴 바다는 베드로의 생애에 잊지 못할 곳입니다. 베드로의 마음에 영원히 간직할 예수님과의 대화가 이곳에서 마지막으로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고기를 잡으러 디베랴 바다로 나간 제자들을 찾아 세 번째로 그들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실의에 찬 채 자신들의 할 바를 알지 못한 그들은 시몬 베드로를 따라 바닷가에 갔으나 고기를 잡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그들에게 모습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하여 조반을 준비하시고 그들에게 와서 조반을 먹으라고 부르셨습니다. 조반 먹은 후 주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물음을 세 번째 주셨습니다.

1.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여러 가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1) 예수님은 그의 첫 번째 물으심으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먼저 그 자리에는 다른 여러 명의 제자들도 함께 있었을 터인데 유독 베드로를 향하여 매우 난처한 질문을 똑같이 세 번씩이나 하셨는가에 대하여 의문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의 이런 일은 베드로에 대한 특별하신 사랑과 그에게 주시고자 하신 목자로서의 사명을 깨닫게 하시려는데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에서 보여 주고 있는 사랑이란 말이 헬라어 원어에는 두 가지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물으신 사랑은 ‘아가파오’고 베드로가 대답한 사랑은 ‘필레오’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첫 번째 질문은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하신 사랑을 ‘아가파오’란 단어로 표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는 ‘아가페’의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그의 독생자를 보내시기까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랑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 인간들에게 나타내신 사랑이십니다. 그러면 이처럼 말할 수 없는 사랑을 받은 우리들은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느냐에 대한 문제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한 율법사와의 대답에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22:37). 그러므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물으신 사랑은 이런 사랑의 표준에서 “네가 나를 사량하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이 질문에 베드로는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대답한 사랑은 주님이 물으신 아가파오의 사랑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말한 사랑은 ‘필레오’란 단어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인간관계의 고상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친구로써 나타내는 사랑입니다.

(2) 예수님은 두 번째 다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두 번째 물으심에도 아가파오란 단어를 쓰셨습니다. 이곳에서 빠진 것은 “이 모든 사람들보다”란 말입니다. 베드로의 자신 없는 대답을 들으신 예수님은 그렇다면 다른 제자들보다 뛰어난 사랑은 아닐지라도 “너는 나를 아가파오하고 었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물으심에 베드로는 이전과 똑같은 답변을 드렸습니다. 베드로는 이때에도 아가파오로서의 사랑에서가 아니라 필레오로서의 사랑을 지니고 있음을 주님이 아신다고 대답한 것입니다.

(3) 예수님은 마지막 세 번째 질문에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 물으심에서 사용하신 사랑이란 표현은 아가파오가 아니라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표현한 필레오란 단어입니다. 주님은 여기서 그러면 너는 나를 친구로서의 사랑으로 사랑하고 있느냐고 물으시는 말씀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이같은 사랑에 대한 질문을 받고 근심했다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사실상 친구로서의 사랑도 주님께 갖지 못한 사실을 회상하면서 마음이 아팠던 것입니다.


2. 내 어린양을 먹이라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질문한 이 사랑의 물으심은 또한 베드로에게 목자로서의 사명을 주시기 위한 사랑의 확인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1)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자에게는 자기의 양을 맡기시지 아니하십니다. 주님이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량하느냐”고 물으신 후 베드로의 확인을 들으시고 “내 어린양을 먹이라”는 말씀을 주신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의 양떼들은 바로 주님의 양들입니다. 그가 피로 값 주고 사신 귀한 양들입니다. 이들을 먹이고 치는 목자들이라면 무엇보다도 먼저 양의 목자이신 예수님을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2) 양들에 대한 사랑은 먼저 그 주인이 되신 주님에 대한 사랑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가리켜 주고 있습니다. 목자들이 양을 사랑하는 이유는 그 양이 예수님의 어린양이기 때문입니다. 이 양을 사랑함에는 주님에 대한 사랑이 앞서야 합니다. 주님은 이 사랑을 확인하신 후 그의 양떼를 맡기시는 것입니다.


결 론 : 우리는 주님을 아가파오로 사랑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주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은 베드로처럼 필레오의 사랑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찌어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고전16:22).


(108) 베드로의 남은 생애

(요한복음 21:18-25)

서 론 :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하시는 예수님의 세 번째의 물음을 통하여 베드로는 그의 마음이 깨여졌습니다. 베드로가 근심하였다고 하는 것은 자신의 혈기와 교만에 대한 부끄러움으로써 이때 자기의 연약함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사건을 계기로 이전에는 강했지만 지금은 약해졌습니다. 영적으로 강해지려면 육적으로 약해져야 합니다. 베드로가 이전에 육에 강했을 때에는 자신과 신념에 꽉 갔었지만 실제로 영적인 어려움을 만났을 때는 넘어졌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영적으로 강하게 무장된 사람들에게만 부여되는 새로운 사명을 받은 것입니다.


1. 주님의 어린양을 치는 목자의 자세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하신 그의 양 무리에 대한 부탁의 말씀은 오늘날 목자들에게 들려주시는 명령이십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내 어린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이처럼 세 번에 걸쳐서 계속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어떤 사명을 가리키는가에 대한 해답은 헬라어로 나타난 뜻을 살펴 볼 때 명백해 집니다. “먹이라”고 하신 말씀은 ‘보스코’로 먹이다, 치다, 치게 하다의 뜻입니다. 또 “치라”고 하신 말씀은 ‘포이마이노’로 기르는 목자 또는 목자 노릇을 하라는 뜻으로 이 말의 어원은 양을 치는 사람, 목자에게서 유래되었습니다. 이 말씀에 비추어 볼 때에 베드로에게 맡겨 주신 주님의 사명은 예수님의 양 무리들을 맡아 기르는 목자로서의 사명인 것입니다.

(1) 목자는 지혜롭고 충성된 종으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세 번씩이나 계속적으로 부탁하신 일은 그 사명의 중요성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목자장 되시는 주님을 대신하여 주님의 양 무리들을 다스리는 사명을 받은 것은 지극히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2) 목자는 청지기의 사명을 받은 사람으로 주인의 뜻을 잘 이루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불의한 청지기의 경우를 비유로 들으시면서 주인의 소유를 허비하는 악한 종에 대하여 “네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는 선언을 내리셨습니다(눅16:1-10).

(3) 목자는 달란트의 사명을 받은 종들이기 때문에 부지런히 장사하여 많은 이익을 남겨야 합니다. 예수님이 마태복음 25장에서 말씀하시는 달란트를 받은 세 명의 종의 경우는 분명히 목자들에게 주시는 경종으로 보여 집니다. 세 명중 두 명은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써 칭찬을 들었고, 하나는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을 들었습니다(마25:26-30).


2. 띠 띠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예수님은 베드로의 종말에 일어날 생애에 대해 의미심장한 예언을 들려 주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띠를 띤다는 말은 허리띠를 졸라맨다는 말로 이같은 자세는 일하는 종의 자세를 의미해주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대로 베드로는 아직까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습니다. 이것은 자기 인생의 계획을 자신이 세우고 자신이 원하는 방법으로, 자신의 계획에 따라 복음도 전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말년, 늙어서 그의 생애를 마치는 일만큼은 자신의 뜻에서가 아니라, 다른 이(핍박자)들에 의해 좌우될 것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 팔을 벌린다”고 하신 것은 장차 그의 주검이 십자가에서 순교해야 할 일에 대한 예언으로 보겠습니다.


3. 네게 무슨 상관이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언 듯 듣기에 주님이 지금 향하시는 그 길을 따르라는 말씀으로 들려지지만 그 후에 다시 “나를 따르라”고 하시는 말씀에서 주님의 이 말씀은 베드로가 그의 생애를 주님을 따라 가는 생애여야 한다고 하는 뜻임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또 다른 제자(요한)가 자기와 함께 주님을 따르는 사실에 대하여 평소에 그 제자가 주님의 사랑을 받아 온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주님의 생각은 어떠하신 지 매우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고 묻게 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다른 사람에 대한 주님의 생각이나 뜻을 알 필요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시고 이 일이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는 말씀을 들려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어떤 사람은 이렇게 쓰시기도 하시며 또 어떤 사람은 저렇게 쓰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모두 다 똑같은 방법으로 사용치 아니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주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다른 이를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결 론 :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다만 주님이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해 주시고 주님을 위한 일군으로 사용해 주신데 대한 고마움과 감격으로 우리의 생애가 충만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베드로에게 들려주신 “나를 따르라”고 하신 말씀을 듣고 우리의 남은 생애를 그리스도의 고난의 짐을 지고 주님을 따르는 생애로 만족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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