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新約]강해/◆ 사복음서 · 사도행전 강해-1

요한복음 10-13장◆ 밤중소리

영국신사77 2020. 4. 12. 18:18


요한복음 차례(2)

제 10장(52-56)

52. 양과 목자(요한복음 10:1-6) 

53. 예수님이 오신 목적과 도적이 온 목적(요한복음 10:7-10) 

54. 선한 목자(요한복음 10:11-18) 

55. 그리스도와 그의 양(요한복음 10:19-29)

56.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한복음 10:30-40)


제 11장(57-61)

57. 마르다의 가정과 예수님(요한복음 11:1-4) 

58. 낮 열 두 시가 아니냐(요한복음 11:5-6) 

59. 마르다의 신앙고백(요한복음 11:17-27) 

60. 무덤에서 살아난 나사로(요한복음 11:28-46) 

61. 악인을 통해 이루시는 하나님의 뜻(요한복음 11:47-57) 


제 12장(62-68)

62. 옥합을 깬 마리아(요한복음 12:1-8) 

63. 나사로 까닭에(요한복음 12:9-11) 

64.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요한복음 12:12-19)

65. 한 알의 밀알(요한복음 12:20-26)

66. “이 때를 면케 하옵소서”(요한복음 12:31-33) 

67. 이 인자는 누구냐(요한복음 12:37-43) 

68. 아들과 아버지(요한복음 12:44-50) 


제 13장(69-74)

69. 끝까지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요한복음 13:1-11) 

70. 서로 발을 씻기라(요한복음 13:12-20)

7l. 주여 누구오니이까(요한복음 13:21-30) 

72. 주님이 얻으신 영광(요한복음 13:31-33)

73. 새 계명(요한복음 13:34-35)

74.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요한복음 13:3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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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0장 (52-56)

◆ 밤중소리 01-28 | VIEW : 596

52. 양과 목자(요한복음 10:1-6) 

53. 예수님이 오신 목적과 도적이 온 목적(요한복음 10:7-10) 

54. 선한 목자(요한복음 10:11-18) 

55. 그리스도와 그의 양(요한복음 10:19-29)

56.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한복음 10:30-40)


(52) 양과 목자

(요한복음 10:1-6)


서 론 : 예수님은 참된 목자와 참된 주님의 양이 누구인가에 대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는 모습을 가지고 비유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지방은 목축업이 예로부터 성행해온 곳입니다. 목축 중에도 특히 양을 기르는 일은 일반적인 생업으로 어디서나 목격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양에 대한 이야기가 성경에 많이 나옵니다. 양과 목자와의 관계는 마치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명하는데 있어 가장 적절한 비유로 활용되어 왔습니다.

1. 양의 우리

양의 우리는 양이 거처하는 장소입니다. 팔레스타인 지방의 양의 우리는 대개의 경우 지붕이 없으며 들판에 있는 돌로 담의 둘레를 쌓고 또 양이 출입하는 든든한 문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1) ‘우리’란 하나님의 교회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16절에서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교회는 먼저 이스라엘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이 복음은 이방인에게도 전해져서 하나님의 구원이 온 누리에 퍼져야 합니다. 이제 교회는 이 같은 ‘우리’의 구별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한 우리가 이루어진 것입니다(갈3:27-29).

(2) 양이란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말합니다. 시편 23편은 다윗이 하나님을 목자로 하여 자신을 양이라고 부르고 목자의 인도하심에 대하여 영감으로 기록한 시편입니다.

① 양은 길을 잃고 유리하기 쉬운 짐승입니다. 목자가 없는 양은 길을 잃고 유리합니다. 우리 인생들이 죄로 말미암아 양처럼 길을 잃고 방황했었습니다. 길이 되신 우리의 목자이신 예수님이 아니시면 우리는 영원히 길을 잃은 양이 되었을 것입니다.

② 양은 사나운 짐승에게 잡혀 먹히기 쉬운 짐승입니다. “목자가 없으므로 그것들이 흩어지며 흩어져서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되었도다”고 하셨습니다(겔34:5). 예수님은 그의 양떼들을 구원해 내시기 위하여 그의 목숨까지 버리셨습니다.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고 하셨습니다.

③ 양은 그릇 행하기 쉬운 짐승입니다. “우리가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고 말씀하셨습니다(사53:6). 이처럼 약하고 길을 잃으며 그릇 가기를 잘하며 사나운 짐승 떼들에게 잡아먹히기 쉬운 양은 반드시 목자의 인도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3) 문이란 바로 그리스도, 그분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8절에서 친히 “나는 양의 문이라”고 해석해 주셨습니다. 양의 문이란 말은 천국의 문을 가리키며, 구원의 문을 가리키며, 생명의 문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문이 되셨는가? 이에 대하여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히10:20).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십자가에서 그의 사명을 다 마치셨을 때 그는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과 함께 성소의 휘장 가운데가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져 하나님께로 가는 새로운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길의 문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2. 양의 목자이신 예수님

예수님은 양의 목자가 되시는 분입니다.

(1)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의 참 뜻을 예수님의 사역을 통하여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의 몸으로 휘장을 찢으심으로 친히 문이 되신 분이시지만 그가 또한 처음 그 문을 통과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참된 목자가 되십니다. 예수님이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라고 하신 말씀은 예수님이 친히 문이 되시고 예수님이 친히 그 문으로 처음 들어가셨기 때문에 예수님 이전에는 하나님께로 이끄는 목자, 생명을 주는 목자가 존재할 수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2) 양은 목자의 음성만을 듣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양은 그의 음성만을 듣습니다. 그 이유는 이 양들은 이미 아버지에게서 듣고 배웠기 때문입니다(요6:45). 예수님은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고 하셨습니다(요10:27).

(3) 목자는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낸다고 하셨습니다. 목자가 양을 인도하여 낸다고 하신 말씀은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 복된 양육을 표현하신 말씀입니다.

결 론 : 교회에는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오지 아니하고 담으로 넘어온 절도요 강도인 거짓 목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분명히 목자처럼 생겼지만 그의 입에서 용의 말이 나온다고 했습니다(계13:31). 하나님은 거짓 목자들을 대적하신다고 경종 하셨습니다(겔34:1-11). 이들은 사단의 종들로 회개 없이 교회에 들어온 자요, 예수 없이 목자가 된 자요, 생명 없이 일꾼으로 가장한 자요, 양들에게 쑥물을 먹이며 독을 마시우게 하는 주검의 사자들입니다. 양들은 이런 거짓 목자의 음성을 잘 분별하여 따르지 말아야 합니다.


(53) 예수님이 오신 목적과 도적이 온 목적

(요한복음 10:7-10)


서 론 :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양과 목자와의 관계에 있어서 자신을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내셨습니다. 혹은 “양의 문”이라고 하시고 “양의 목자” 또는 “문지기” “선한 목자” 등으로 비유하셨습니다. 이 여러 가지 비유는 예수님의 사역과 관계된 깊은 뜻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교회야말로 그리스도께서 불러모으시는 양의 “우리”입니다. 교회란 말 자체가 세상에서 불러모았다는 뜻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시며 자기 피로 사신 그리스도의 몸입니다(골1:18,행20:28). 이 세상에는 그리스도의 교회 이외에는 양의 ‘우리’가 없습니다.


1. 나는 양의 문이라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라고 하신 말씀은 예수님의 놀라운 폭탄적인 선언이십니다. 세상에 속한 많은 사람들은 왜 그리스도인에게만 구원이 있고 생명이 있느냐고 항변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누가 무엇이라 하든지 구원과 생명은 오직 그리스도 그 분, 오직 그 한 분 뿐에게만이 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믿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증거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1) 그리스도만이 양이 문이 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양의 문이 되신다고 하신 말씀은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 없다는 뜻입니다.

(2) 예수님은 이 길의 문이 되시는 분입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께로 가는 다른 문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요14:6).

(3) 이 문은 두드리는 자에게 열립니다(마7:7-8). 두드린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일입니다. 그 문을 두드릴 때, 문이 되시는 주님은 또 자신이 친히 문지기가 되시어 우리에게 문을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4) 이 문에 들어간 양들은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게됩니다. 양 무리들이 그들의 목자의 손에 인도되어 혹은 푸른 초장으로, 혹은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신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2. 나보다 먼저 온 자란 누구인가?

예수님은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이곳에서 “나보다 먼저 온 자”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1) 이 말씀은 오직 예수만이 인류의 구세주가 되신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사람이라면 이 같은 사실은 너무나도 자명한 진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인류의 역사이래 그 누구도 인류를 생명의 문으로 들여보낼 자란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그런 사람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분명히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다 절도요 강도들”입니다.

(2)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실 때 이스라엘 민족을 잘못된 길로 인도한 거짓 선지자들을 염두에 두셨습니다. 이스라엘에는 역대로 거짓 선지자로 말미암아 많은 하나님의 양떼들이 주검의 길로 오도되었었습니다.

(3) 예수님의 이 말씀은 양들에게 쑥물을 먹이는 이단자들을 향하여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라”라고 하셨습니다.


3. 도적이 오는 목적

도적이 오는 목적은 너무나도 분명합니다.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도적은 “생명의 도적떼”들을 말합니다.

(1) 인간의 의로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자들이 이런 자들입니다. 중생되지 못한 영혼들에게는 가장 타당하게 보여집니다.

(2) 도덕적 선행으로 구원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자들입니다. 인간의 양심은 이런 방법이 가장 생명을 얻는 일에 가까운 줄로 알게 합니다.

(3) 거짓 진리로 유혹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성경에서 바른 구원관, 바른 예수관을 발견하지 못하고 잘못된 지식으로 사단의 종이 된 자들이며 이들의 손길이 늘 믿음이 연약한 자에게 손을 뻗치고 있습니다.


4. 주님이 오신 목적

예수님은 그가 오신 일에 대하여 스스로 증거 하시기를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1)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시는 일이란 그가 양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신 일을 말합니다.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고 하셨습니다.

(2) 양으로 더욱 풍성히 얻게 하려는 일이란 그를 목자로 따르는 양떼들에게 주시는 약속된 모든 축복을 말합니다. 그는 그의 양떼들에게 구하는 것을 주십니다(요15:7). 그는 또한 자기 양들로 많은 열매를 맺게 해주십니다(요15:5). 하늘의 놀라운 상급을 주십니다(마5:10-12).


결 론 : 우리는 그리스도의 양 무리들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목자이신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가 인도하는 대로 그를 따라가는 생활을 한다면 이 같은 축복,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는 축복을 받게 됩니다.


(54) 선한 목자

(요한복음 10:11-18)

서 론 :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나는 선한 목자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 스스로 자신에 대하여 “나는 선한 목자”라고 말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분뿐이십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증거 하셔야 할 분이시기에 자기의 신분에 대하여 스스로 말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의 자격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목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목자는 “예수” 뿐이심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1. 선한 목자의 자격

예수님은 선한 목자이십니다. 주님은 자신이 “선한 목자”가 되시는 이유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하셨습니다.

(1) 예수님께서 자기 목숨을 버리신 것은 양들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양들은 하나님을 떠나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죄로 스스로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죄 값은 사망인데 이 죄 가운데서 구원해 줄자가 이 세상에는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비참하게 된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릴 수 있는 분이 양들의 참 목자이십니다. 예수님은 그런 목자이십니다. 예수님은 그의 몸을 십자가에서 찢으심으로 우리와 하나님과의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 길을 잃은 우리에게 “새롭고 산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이분, 예수야말로 진실로 우리의 진정한 목자이시며 이 같은 양의 목자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십니다.

(2) 예수님이 자기 목숨을 버리신 것은 오직 자기 양들을 위해서이십니다. 이 세상에는 주님의 양이 아닌 무리들도 많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일단의 유대인을 향하여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 도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10:27). 예수님이 양들을 위한 제물이 되신 것은 자기 양들만을 위하신 제한 속죄제물이심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2.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양

예수님은 자기 양들을 언급하시는 말씀 중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다”고 하셨습니다.

(1) 이 ‘우리’란 좁게는 그곳에 있었던 제자들이나 그의 추종자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들어가 있는 양들은 이미 신앙고백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양이 되어 그리스도안에 거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이 해석은 아직도 많은 양들이 이 우리 안에 들어와 있지 않으며 그 양떼들도 역시 예수님의 소유로 그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할 다른 양들입니다.

(2) 또한 이 우리란 이스라엘을 상징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란 특권이 주어진 민족입니다. 그리고 인류의 구원도 이스라엘에게서 나온 것이기도 합니다(요4:22). 그러므로 예수님이 “다른 양”이라고 표현하신 양은 이방인 중에 있는 주님의 양들을 가리킨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로는 유대인이나 유대교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안에서 양의 우리가 형성되므로 육적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백성된 특권은 이미 그 의의가 상실되어 버렸습니다. 복음은 역사에, 지역에, 종교에, 인종에, 국가에 매여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3. 삯군 목자

예수님은 12절에서 삯군 목자에 대하여 교훈해 주셨습니다. 여기서 삯군이라고 말씀하신 거짓 목자는 절도나 강도와는 좀 다른 유에 속하는 거짓된 종들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목자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의 우리 안에 자기 양들을 키우고 보살피시기 위해 양들을 돌보는 목자들을 세우셨습니다. 이 땅위에 주님으로부터 세우심을 받은 교회의 목자는 마땅히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올 닮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목자들 가운데는 바르게 양떼들을 돌보지 않는 거짓 목자들이 있는데 주님은 그들을 삯군이라고 힐난하셨습니다.

(1) 삯을 위해 일하는 목자들을 가리켜 주님은 삯군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나 양떼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것은 그들이 일하는 목적이 삯에 있기 때문입니다.

(2) 삯군 목자는 양들을 돌보지 아니한다고 하셨습니다. “저가 삯군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돌아본다는 말은 ‘멜레이’로 관심을 가지고 염려하며 근심 걱정하는 마음의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나 삯군에게는 이런 목자의 심정이 있을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같은 삯군 목자의 정체는 언제 나타나는가?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난다”고 하셨습니다. 이리가 온다는 말씀은 자기 몸의 위험이나 교회에 오는 시련이나 양 무리가 당하는 환난을 의미합니다. 이때 진실한 주님의 종들은 양떼들을 위하여 자기 소임을 다하며 자기 생명을 바쳐 양들을 지킬 것이지만 삯군은 그러하지 못하고 달아난다고 하셨습니다.

결 론 : 목자는 자기 양을 알고 양은 또한 자기 목자를 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다 주님의 양 무리들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목자이신 예수님의 음성만을 듣고 그만을 따라가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선한 목자로 오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되 더 풍성히 주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목자이신 주님만을 따를 때 이런 풍성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55) 그리스도와 그의 양

(요한복음 10:19-29)


서 론 : 빛은 어둠을 들어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에 언제나 분쟁이 따릅니다. 예수님께서 선한 목자에 대한 말씀을 그들에게 들려 주셨을 때 이 말씀을 인하여 그들 서로간에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있는 사람 중 많은 무리들이 “저가 귀신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고 핀잔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또 하나의 무리들은 이것은 귀신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고 논박했습니다. 비록 그 말씀을 깨닫지는 못했어도 그가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의 눈을 뜨게 하신 일을 본 까닭에 “귀신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고 반문했습니다.

1. 그리스도의 양이 아닌 무리들

주님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 “너희가 내 양이 아님으로 믿지 아니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양이 아닌가?

(1) 그들은 끝까지 믿지 아니합니다. 믿음을 끝까지 가질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님이 자기 양이 아니기 때문에 허락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일에 대하여 예수님은 이사야로 예언하신 말씀이 응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마13:14-15). 그들이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영적인 귀를 열어 주시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의 신령한 눈이 감겨져서 신령한 말씀의 세계를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그리스도의 양이 되지 못하게 하심에 있음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2) 그들은 끝까지 깨닫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일은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마음이 완악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지혜를 주시지 않기 때문에 끝까지 깨닫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씨 뿌리는 비유에서 좋은 땅에 떨어진 씨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이들만이 말씀의 열매를 30배로, 60배로, 100배로 맺는다고 하신 것입니다.

(3) 그들은 끝까지 순종치 못합니다. 순종은 오직 깨닫는 심령만이 가능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4) 그들은 끝까지 회개치 못합니다. 회개는 그리스도의 양들에게만 주시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양이 아닌 무리들은 회개할 수 없습니다. 회개란 그리스도를 믿지 않든 죄를 뉘우치고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일을 말합니다. 이런 역사는 성령이 하신다고 하셨습니다(요16:7-11).

그들도 어떤 경우에는 교회에 오랜 세월 다닐 수는 있습니다. 그들도 주님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그날에 있을 그들의 형편을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진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2-23).

2. 그리스도의 양 무리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그리스도의 양은 목자이신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으며 목자는 그의 양을 알고 양은 또한 목자이신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하셨습니다.

(1) 내 양은 내 음성을 듣는다고 하셨습니다. 누가 그리스도의 양이냐? 누가 그의 양이 아니냐는 오직 목자의 음성을 듣는 것으로 구별됩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양이 목자의 음성을 알고 그 음성을 듣고 목자를 따르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양 무리들은 오직 그의 말씀을 통해서만 그들의 목자를 알아보고 목자를 따르는 것입니다.

(2) 내 양은 나를 따른다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양들은 다른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다른 곳에 귀를 기울이거나 다른 사람을 따라가지 아니합니다(4,5절). 그리스도의 양들은 오직 그리스도의 음성밖에 모르기 때문에 그만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양들이 목자의 음성만 따르는 이유는 그 음성을 따르지 않으면 잃은 양이 되기 때문입니다.

(3) 나는 내 양을 안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그의 양을 안다는 일은 너무나도 당연하십니다. 그의 양 무리들은 이미 창세 전에 그리스도께서 친히 선정하셨기 때문입니다(엡1:3-5). 그 뿐 아니라 주님은 자기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셨습니다(15절). 자기 생명까지 아끼지 아니하시고 버리셨다면 어찌 자기 피로 값 주고 사신 그의 양 무리들을 모를 수 있겠느냐?

다음에 당신의 양은 단 한 마리라도 아무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아니할 것이라고 보장해 주셨습니다.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결 론 :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처럼 말씀해 주십니다.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사43:1). 내가 하나님을 알기도 전에 하나님은 나를 지명하여 불렀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너는 내 것이라고 그의 소유권 안에 있음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목자의 음성을 듣고 그만 따르는 양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56)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요한복음 10:30-40)

서 론 : 예수님은 언제나 하나님과 자기와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이란 이름으로 깊이 있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예수님은 유대인들로부터 배척을 받으시고 핍박을 받으셨지만 그런 일에 구애받으심이 없으셨습니다. 양과 목자와의 관계를 천명하시면 서도 28절 말씀에서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를 풀이하시는 중에 오묘하신 삼위일체에 관한 전리를 밝혀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30절에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는 말씀으로 요한복음 1:1말씀에 대한 진리를 친히 풀어주셨습니다.

1.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예수님께서 유대인들 앞에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하신 말씀은 그들의 마음을 격동케 한 하나의 폭탄선언이 되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유대인들은 돌을 들어 예수님을 치려했습니다.

(1) 이 말씀은 본질에서 아들은 아버지와 하나라는 뜻입니다. 아들과 아버지는 한 본질 말하자면 한 본체가 되십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셨다”고 하셨습니다(빌2:6). 한 하나님의 본체는 그 안에 세 인격적인 위가 계십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십니다.

(2) 이 말씀은 권능에서 아들은 아버지와 하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돌로 치려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찌라도 그 일은 믿으라”고 하신 말씀에서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모두 아버지의 일이심을 분명히 하심으로 그가 행하시는 모든 권능은 아버지와 동등이심을 밝히신 것입니다.

(3) 이 말씀은 또한 그의 위치에서 아들은 아버지와 하나라는 뜻입니다. 아들과 아버지는 한 본체이시기 때문에 모든 면에서 동등하십니다. 그러므로 그의 위치에서도 동등하십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 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셨다”고 하신 말씀에서 아들의 위치가 아버지와 동등하심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는 주님의 말씀이 “나와 하나님은 똑같은 분이시다”는 말로 그들은 듣게 된 것입니다. 그들이 이처럼 듣기는 잘 들었지만 이 말씀을 영적으로 소화시키지 못했으므로 이로 인하여 예수님을 죽이려고 손에 돌들을 들었습니다. 그들의 말은 이러했습니다.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다”고 했습니다.

2. “하물며”

예수님은 참람하다고 하여 돌로 치려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그들의 판단의 불합리성을 성경을 들어 공격하셨습니다. “너희 율법에 기록한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셨거든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이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참람하다 하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시편 82:6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1)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율법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재판하는 재판장들에게 신들이란 칭호를 부쳐서 부르셨습니다. 물론 이 말씀은 그들이 하나님이란 뜻으로 하신 말씀은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권한 대행자로써 백성들을 재판하고 있었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신이 그들을 주관하셨기 때문입니다.

(2)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을 신이라 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다 지존자의 아들이라”고 하신 의미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왜 신이라고 하셨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은 곧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받은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들에게는 모두 하나님의 이들의 권세가 주어져 있습니다. 이들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생명에 연합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말씀 그 자체이실 뿐 아니라 하나님의 독생자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하물며 이런 분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말했다고 하여 참람되다고 정죄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3) 재판장이건 지존자의 자녀들이건 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피조물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창세 전에 선택하신 분이요 그들의 창조주가 되시는 분입니다. 그런 분이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했다고 하여 어찌 참람 되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참람 되다고 공박하는 유대인들에게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찌라도 그 일은 믿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아버지의 일을 행한다고 인정한다면 결국은 사람은 못 믿더라도 그 일만큼은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예수님이 하신 일이 아버지의 일이라는 사실을 믿는다면 그 사람은 예수야말로 하나님이 아들이심을 믿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결 론 : 예수님은 그곳에서 벗어나 사 다시 요단강 저편에 이르러 거하시니 많은 사람이 주님이 계신 곳에 왔다가 요한이 예수를 가르쳐 증거한 것이 다 참이라고 말하면서 예수를 믿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세례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를 바라봅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증거를 가지고 그를 믿으며 그를 영접해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 (57-61)

◆ 밤중소리 01-28 | VIEW : 551

57. 마르다의 가정과 예수님(요한복음 11:1-4) 

58. 낮 열 두 시가 아니냐(요한복음 11:5-6) 

59. 마르다의 신앙고백(요한복음 11:17-27) 

60. 무덤에서 살아난 나사로(요한복음 11:28-46) 

61. 악인을 통해 이루시는 하나님의 뜻(요한복음 11:47-57) 


(57) 마르다의 가정과 예수님

(요한복음 11:1-4)

서 론 : 우리는 한 아름다운 가정을 바라봅니다. 신약성경에 묘사 된 가정 중에 마르다의 가정만큼 아름답게 보이는 가정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 가정이 부유해서가 아닙니다. 베다니라고 하는 적은 마을에서도 가장 가난하게 지내고 있는 가정이 그들의 가정이었습니다. 그 가정에 남다른 행복할 조건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단지 삼 형제가 서로 의지하며 고아처럼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가정이 복된 가정으로 묘사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어디 있었겠습니까? 그 가정을 이루고 있는 그들 삼 형제가 한결같이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며 그들 또한 주님의 큰사랑을 입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 나사로의 가정

우리는 여기서 나사로의 병이 어떻게 해결을 보게 되었는가에 대한 해답에 앞서 그들이 어떻게 주님을 섬겨 왔는가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이들은 없는 중에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정성껏 영접하고 대접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약 오리쯤 떨어져 있는 이들의 가정에 자주 들르셨습니다. 그것은 이들이 정성어린 마음으로 주님을 영접했기 때문입니다.

(2) 이 가정의 가장 나이 어린 동생인 마리아는 값진 향유를 예수님에게 붓고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씻기던 여자였습니다. 이 마리아는 예수님이 자기 집에 오시는 날이면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 말씀을 듣는 일을 큰 기쁨으로 여겼던 여자였습니다.

(3) 마르다란 언니는 봉사와 신앙에 있어서 대단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자기 집을 찾아오실 때마다 좋은 음식을 마련하느라 분주했습니다.

(4) 예수님은 나사로를 부르실 때 “우리 친구”라고 다정하게 부르셨습니다. 이 나사로는 그의 행실이나 신앙에 관한 이야기가 별로 나온 것이 없지만 그를 가리켜 우리 친구라고 부르신 것을 볼 때 그의 신앙이나 주님에 대한 사랑에 특별한 은혜를 입은 사람이었다고 믿는 것입니다.

2. 병든 나사로

나사로가 병이 들었습니다. 고아처럼 서로 의지하며 지냈던 마르다의 가정에 기둥 같은 가장이 병들어 죽게까지 이른 일은 그들에게 있어서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 이럴 때 그들은 과연 어떻게 이 일을 처리했느냐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1) 그 누이들은 먼저 사람을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급히 보냈습니다. 그들은 나사로의 병은 예수님이 계셔야 살릴 수 있는 병인 줄로 믿었습니다. 이것은 마르다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의 입의 말에서 알 수 있습니다.“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21).

(2) 그들은 문제가 있을 때 먼저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야 말로 우리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에 유일하신 문제 해결자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3)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 문제를 아뢰었습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우리의 기도가 논리적으로 예수님을 이해시키려는 말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로부터 긍휼히 여기심을 받도록 있는 그대로를 아뢸 뿐입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마르다는 이 간구만을 전하고 나머지 이 일의 처리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예수님께 맡겨 버린 것입니다.

3. 예수님의 응답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나사로는 그후 며칠 지나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을병이 아니라고 하신 말씀은 최종적인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나사로는 죽음을 이기고 살아났기 때문에 그의 죽음은 최종적인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2)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하신 모든 일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었습니다. 그가 이제 나사로를 다시 살리시는 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인 것입니다.

(3) 이는 또한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함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그 근본이 하나님의 본체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과 똑같이 영광을 받으실 분이십니다. 이 같은 일은 하나님의 아들로 자기를 나타내시는 일이기 때문에 그는 아들로 영광을 받으시게 되는 것입니다.


결 론 : 마르다의 가정은 예수님이 안 계시면 안돼는 가정으로 언제나 주님과 가까운 교제를 가졌습니다. 우리들의 가정도 마르다의 가정처럼 예수님을 제일로 삼고 살아가는 가정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무슨 일이 있든지 문제 해결의 근본자를 예수님으로 알고 예수님을 문제해결의 핵심으로 초청해야 합니다. 우리가 당하는 모든 일에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내도록 해야할 것입니다.


(58) 낮이 열 두시가 아니냐?

(요한복음 11:5-6)

서 론 : 나사로를 사랑하신 주님은 그가 병들었다는 전갈을 받으시고도 나사로가 있는 곳에 가지 아니하시고 계시던 곳에 이들을 더 유하셨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나사로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심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방법으로 나사로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인가를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방법대로가 아니라 가장 온전하시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는 그의 방법에 따라 처리하십니다. 이 같은 일이 나사로의 가족들에게는 일시적으로 큰 슬픔과 어려움을 안겨 주었지만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더욱 큰 기쁨과 즐거움을 주었으며 이 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 것입니다.

1. 이틀을 더 유하신 예수님

우리가 보편적으로 생각할 때에는 나사로가 병들었다고 하는 말씀을 들으셨다면 예수님은 즉시 나사로에게 달려가셨어야 했습니다.

(1) 주님은 이런 전갈을 들으신 후에도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시각이 급하셨다면 구태여 베다니까지 가시지 않고서도 다만 말씀으로 병든 나사로를 고치실 수 있으셨습니다. 가버나움에 사는 한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을 그같은 방법으로 고쳐 주셨습니다. 딸이 흉악하고 귀신 들린 가나안 여인의 경우도 그러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이런저런 방법을 쓰시지 않으시고 이들을 더 유하셨던 것입니다.

(2) 나사로에 대한 예수님의 응답은 하나님의 영광에 있으셨습니다. 그리고 이 응답은 나사로가 죽은 후 무덤에서 살려내시는 일이셨습니다. 이 같은 주님의 의중을 어느 누가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다윗은 이처럼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시135:17).

2. 낮이 열 두 시가 아니냐?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유대로 가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나사로를 살리시기 위하여 그곳을 떠나 유대로 가시기로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얼마 전까지 유대에서 바리새인들에게 돌로 침을 당할 뻔하였는데 왜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고 물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낮이 열 두 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아 세상의 빛을 봄으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낮 열 두시란 정오를 의미합니다. 이 시간은 이 세상에서 가장 밝은 빛을 나타내는 시간입니다. 여기서 낮 열 두 시를 가리키는 가장 밝은 빛은 바로 예수님 자신을 가리킨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다음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1) 하나는 예수님 자신의 사명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빛으로 오신 분이시므로 그 어떤 경우에도 실족하실 수가 없으십니다. 예수님은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습니다(요8:12). 그리고 또 요한은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하기를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요1:9). 예수님은 빛 바로 그 자체이시기 때문에 누구든지 이 빛을 해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빛으로 오셔서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 계시는 것입니다.

(2) 다른 하나는 우리로 빛이신 예수님과 동행하면 빛을 봄으로 실족하지 않을 것이란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정오의 빛과 같은 예수님과 함께 있으므로 그 빛을 따라 다니는 이상 실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그 마음에 모신 사람은 언제나 그의 인생이 낮입니다. 그가 빛으로 걸어가는 길을 막을 장애물이 없습니다. 어떤 일을 만나도 두려움 없이 빛을 따라 사명을 이룰 수 있습니다. 주님의 빛은 우리로 우리의 소망의 나라에까지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시43:3).

3.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예수님은 여러 가지로 궁금해하는 제자들에게 실상을 이야기 주시기 위해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고 말씀해 주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잠들었다고 표현하셨지만 제자들은 이 말씀의 참뜻을 깨닫지 못하고 병자가 병상에서 잠들어 쉬고 있는 상태를 가리킨 것인 줄 알고 있었습니다.

죽음의 잠을 자고 있는 나사로를 깨우는 일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될 뿐 아니라 한편 제자들에게는 큰 믿음을 주게 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고 하신 말씀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권능을 제자들로 보게 함으로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실히 믿게 하시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때 디두모라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가”고 말했습니다. 의심 많은 제자로 이름 있는 도마는 그 이름이 아랍어이고 헬라어로는 디두모입니다. 그는 비장한 각오로 예수님올 따라 유대로 갈 것을 결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제자들의 결심은 실제로 그들 앞에 위기가 왔을 때 스승을 버리고 도망하는 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빛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결 론 : 이 세상에 빛으로 오신 예수님올 모시고 살아가는 생활은 우리에게 기쁨과 축복과 소망을 줍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실족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빛이 우리의 마음에서 떠난다면 실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59) 마르다의 신앙고백

(요한복음 11:17-27)

서 론 : 성경에는 여러 사람들의 신앙고백이 나옵니다. 그러나 그 중에도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베드로와 마르다의 신앙고백을 꼽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는 고백으로 주님의 칭찬을 받았고 그의 이름이 반석인 베드로라 불려졌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향하여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고 고백했습니다. 이 마르다의 신앙고백은 분명히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비하여 수준이 높은 신앙고백이라고 보겠습니다.

1.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마르다는 슬픔 중에도 예수가 오신다는 말을 전해듣고 곧 나가 맞았습니다. 마르다가 예수님을 맞으러 나간 일은 자신이 어떤 환경에 있다고 할지라도 예수님께 대한 사랑의 불변을 말해 주는 일입니다. 그녀는 그 어떤 역경이나 어려움 속에서도 주님에 대한 믿음이나 의뢰는 여전했습니다.

(1) 마르다는 예수님이 자기 오라비의 죽을병을 고쳐주실 분임을 믿었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고 말한 마르다의 원망 섞인 말은 예수님은 그 어떤 병도 그의 권농으로 고칠 수 있다고 하는 믿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 다음에 마르다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고 말했습니다. “이제라도”라고 한 마르다의 말은 “이미 나사로는 죽었지만”이란 뜻입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릴 수 있는 권능이 예수님께 있음을 마르다는 믿는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같이 말한 마르다의 심정을 두 가지 면으로 고찰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마음으로는 이 일을 믿으면서도 너무나도 엄청난 그런 기적이 참으로 자기 앞에 나타날까? 하는 의문을 품었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3) 예수님은 이렇게 말하는 마르다에게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말씀에 마르다는 즉각적으로 이처럼 대답했습니다. “마지막 날 부활시 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① 마르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나사로의 최후의 부활에 관한 말씀인줄로 잘못들은 나머지 답변한 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의 더 결정적인 답변을 듣기 위한 마르다의 지혜에서 나온 말일 것입니다.

② 그리고 다른 견해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분명한 뜻을 잘 깨닫지 못한 나머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 지금 살리시겠다는 말씀인지 아니면 마지막 부활 시에 있을 일을 말씀하시는지 그 분명한 해답을 듣기 위하여 마르다가 마지막 부활의 이야기를 끄집어냈을 것이라고 하는 견해입니다.


2.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마지막 부활 시에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것을 믿는다고 말하는 마르다에게 예수님은 놀라운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아마 이 말씀을 성경에 기록하게된 것만도 나사로의 죽음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나는 부활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나는 부활이라고 하신 말씀은 예수님이 바로 부활의 근본(원인자)이 되신다는 뜻입니다.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다”고 하신 말씀대로 모든 부활의 근원이 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고전15:45).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와 연합이 된 자는 부활이신 예수로 말미암아 부활의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부활이라고 하신 말씀은 자기자신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는 사실을 밝히신 말씀입니다.

(2) 나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나는 생명이라고 하신 말씀은 이 역시 생명의 근원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모든 생명의 근원자는 예수님이십니다. 그것은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요일1:1).

(3)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육신의 구원을 의미합니다. 죽어도 라고 하신 이 주검은 육신의 주검을 말합니다. 그리고 산다고 하신 말씀의 뜻은 부활을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삽니다. 그것은 마지막날에 이렇게 말씀하신 예수님이 살려주시기 때문입니다.

(4)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죽어도 산다고 하신 이전의 말씀과 모순되는 말이 아닙니다. 여기서 주님이 죽지 않는다고 하신 말씀은 육신의 생명을 가리킨 것이 아니라 영적인 생명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우리가 가진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므로 영원히 죽을 수 없는 것입니다(요6:54).


결 론 : 주님의 이 같은 말씀에 마르다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내가 믿나이다”고 하는 고백을 하였습니다. 그러면 마르다는 어떻게 이런 신앙을 가질 수 있었습니까? 주님을 가까이 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진심으로 영접했기 때문입니다.


(60) 무덤에서 살아난 나사로

(요한복음 11:28-46)

서 론 : 언니 마르다의 전갈을 듣고 마리아는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급히 달려갔습니다. 예수님은 아직 마을로 들어가시지 않고 마르다를 맞았던 그 곳에 서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우는 모습과 그의 말할 수 없는 슬픔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사 자신도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의 눈물에는 인간의 죽음을 불쌍히 보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이 깃들여 있으십니다. 이처럼 죄인을 불쌍히 보신 하나님의 사랑이 그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으로 나타난 것입니다(롬5:7-8). 이 예수님의 눈물은 잠시 후에 주검의 권세를 말씀으로 이기심으로 무덤에서 나사로를 살려내신 일로 인하여 큰 기쁨을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1. 통분히 여기신 예수님

우리는 마르다가 왜 집으로 돌아가 가만히 마리아를 불러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는 말을 전달했을까하는 의문을 안게 됩니다. 이 일은 기록된 문맥을 잘 살펴볼 때 자명해집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으로부터 죽은 오라비 나사로가 다시 살 수 있다고 하는 놀라운 힌트를 받았습니다. 이에 마르다는 이 일을 마리아로 하여금 더욱 주님께 부탁하기 위하여 평소에 지극히 주님의 사랑을 받는 동생 마리아를 예수님께 보낸 것입니다. 과연 마르다의 예상했던 것처럼 마리아의 말에는 더욱 큰 호소력이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발 앞에 엎드리어 슬퍼하면서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고 울었을 때 예수님은 그 마리아의 슬퍼하며 우는 모습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시며 무덤에 따라가시면서 눈물을 흘리시며 우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눈물의 간구에는 호소력이 있습니다.

(1)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시며 우신 일은 그의 온전한 인성을 드러내신 일입니다. 예수님은 어느 면으로 생각하시면 우실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잠시 후에 죽은 나사로를 자신이 살려내실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나사로의 살리심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보여 주시지만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우신 일은 사람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신 일입니다.

(2) 예수님의 눈물은 나사로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죄로 죽게 된 모든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슬픔의 표시입니다. 세상에 죄악이 관용했을 때 하나님은 사람 지으셨음을 근심하시고 한탄하셨습니다(창6:5-7). 그 결과가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같은 사망권세에서 우리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의 독생자를 보내신 것입니다.

(3) 또한 예수님의 통분은 사망권세를 가지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히는 사단에 대한 공의의 분노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망 앞에서 죽음의 슬픔과 이 권세를 휘두르는 사단에 대한 증오심이 더욱 강렬하게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2. 예수님의 기도

예수님은 마리아의 안내로 나사로가 묻혀있는 무덤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돌로 막아놓은 무덤 앞에서 돌을 옮겨 놓으라고 명하셨습니다. 이때 뒤를 따라온 마르다가 주님을 향하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고 말했습니다. 사람은 확실히 믿었다가도 너무나도 절망적인 상태를 눈으로 바라보게 되면 그의 믿음이 흔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인자하신 예수님은 그의 흔들리는 믿음을 다시 붙들어 주시기 위하여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나무라셨습니다. 이때 마르다는 즉시 불 신앙을 뉘우치고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하는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무덤의 돌을 옮겼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아버지를 향하여 기도하셨습니다.

① 주님은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고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는 일을 그의 최상의 목표로 삼고 계시는 예수님은 이미 주님의 기도를 들으셨다고 하시면서 감사하셨습니다.

② 예수님은 다음에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늘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한 간구였기 때문에 항상 들어주셨고 주님은 그같은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시는 것입니다.

③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하시려는 일도 오직 아버지의 영광을 위함이심을 나타내셨는데 그곳에 둘러선 무리들로 이 일로 인하여 아버지께서 그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을 믿게 하시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을 믿는 일이야말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방법이며 영생을 얻는 비결입니다(요6:28-29).


결 론 : 예수님은 무덤을 향하여 큰소리로 외치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이 예수님의 음성은 만물을 창조하실 때에 나타내셨던 그 창조적인 선언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 눈에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나 모든 만물이 창조되었거늘 어찌 죽은 나사로가 살아나지 않겠는가? 나사로가 무덤에서 살아나 무덤 밖으로 나온 것입니다. 이 주님의 음성은 지금도 들려와서 죽은 많은 심령들을 살려내고 있습니다(요5:25). 그리고 무덤 속에 있는 자들에게도 이 음성이 들려올 때가 올 것입니다(요5:28).


(61) 악인을 통해 이루시는 하나님의 뜻

(요한복음 11:47-57)

서 론 : 예수님이 나사로를 무덤에서 살려내셨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온 예루살렘에 번졌습니다. 죽은지 사흘이 지난 냄새나는 송장이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로 무덤에서 걸어 나왔다고 하는 사실은 너무나도 충격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유월절을 당하여 예루살렘으로 모인 군중 가운데 여기 저기서 수군거림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습니다. 이 일에 더욱 당황한 무리는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사건으로 긴급 회의를 모았습니다. 이 회의에서 그들은 예수를 죽이는 일에 완전 합의를 보고 구체적인 모의로 들어갔습니다.

I. 나사로를 살리신 표적이 미친 영향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표적은 많은 파문을 던져주었습니다.

(1) 나사로의 가정에 말할 수 없는 기쁨을 안겨주게 되었습니다.

(2) 많은 무리들로 예수를 믿게 했습니다.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의 표적은 유대인들로 예수를 다윗의 자손이요, 오실 그 메시야로 믿기에 충분한 근거가 된 것입니다.

(3) 이 소문이 순식간에 온 예루살렘에 퍼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민심이 이 일로 예수께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이 일로 심히 당황한 나머지 그들은 공회를 소집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2. 종교지도자들의 모의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소집했습니다. 공회는 중대한 종교적인 재판이나 어떤 긴요한 일이 있을 때에 수시로 모일 수 있었습니다. 산혜드린 공회는 그 당시 72명으로 구성되었으며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 장로, 제사장들로 구성되었고 대세사장이 주관하여 이 회의를 이끌어 나가는 유대인들의 절대적인 결의 기관입니다. 그들이 다급한 나머지 모이기는 했어도 예수에 대하여 고소하거나 재판할만한 사유가 없었습니다. 그날 그들이 모여 의논한 긴급한 안건이 고작 “예수가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할 것이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피고 없는 재판은 결론이 나지 아니했습니다. 이때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일어나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도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 도다.”

이날 산혜드린 공회에서 논의된 이야기는 세 가지 문제점이었습니다.

(1) 이 사람이 이처럼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2) 만약 이 일을 그냥 내버려두면 모든 사람들이 그를 믿을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예수의 손에서 큰 표적이 자주 일어나고 있는 이 마당에서 그를 방치해 둔다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고 따를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3) 만약 예수를 중심으로 종교적인 소요가 일어난다면 로마정부에게 새로운 핍박의 구실을 줄 위험성이 있으며 만약 그렇게 된다면 자기들은 망할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결국 가야바의 결론이 공회에서 채택하게 되었습니다. ⓐ 예수를 죽이는 일은 이스라엘이 사는 길이다. ⓑ 한 사람이 죽음으로 이스라엘이 망하지 않게 하는 일은 옳은 일이다. ⓒ 우리는 온 백성들이 살 수 있는 유익한 길을 택해야 한다.

3. 하나님의 뜻

그런데 가야바가 말한 말끝에 놀랍게도 이런 말씀이 첨가되어 있음을 볼 수 있게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스스로 힘이 아니요 그 해에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이것은 악인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참으로 오묘하신 하나님의 섭리이십니다. 사단은 가룟 유다로 예수님을 팔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은 결국 하나님의 예언을 이루시는 일이 되었으니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이었습니다. 요나를 태운 배의 선장과 선원들은 이방인들이 하는 대로 누구 때문에 바다에 풍랑이 이는지 알기 위하여 제비를 뽑았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그들의 미신적인 일은 결국 하나님의 뜻이었으니 이로써 요나가 뽑혀 바다에 던져짐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되었던 것입니다.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다”고 하신 말씀은 악인도 하나님의 뜻올 이루기 위해 쓰임 받을 때가 있다는 뜻입니다(잠16:4).

대제사장 가야바는 그의 완고와 교만과 시기로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고 예수가 반드시 죽어야 한다고 강력히 발언했지만 이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일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같은 모든 일의 작정 속에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십자가를 질 수 있도록 섭리하셨습니다.


결 론 : 예수님은 당신을 핍박하여 희롱하는 무리들을 향하여 내 아버지께서 주신 바 되지 아니하셨다면 너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가 당하셔야 할 일은 모두가 아버지께서 주신 잔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잔을 마시려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악인들이 예수님의 이 여러 잔을 만들었지만 그것은 우연히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이루어진 일들입니다. 하나님께만 의뢰하면 언제나 무슨 일에나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2장 (62-68)

◆ 밤중소리 01-28 | VIEW : 542

62. 옥합을 깬 마리아(요한복음 12:1-8) 

63. 나사로 까닭에(요한복음 12:9-11) 

64.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요한복음 12:12-19)

65. 한 알의 밀알(요한복음 12:20-26)

66. “이 때를 면케 하옵소서”(요한복음 12:31-33) 

67. 이 인자는 누구냐(요한복음 12:37-43) 

68. 아들과 아버지(요한복음 12:44-50) 


(62) 옥합을 깬 마리아

(요한복음 12:1-8)

서 론 :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님이 베다니에 이르셨습니다. 얼마 전 나사로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곳이라 그를 대접하는 자리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예수님을 주빈으로 하여 잔치하는 이 자리에서 마르다는 대접하는 일에 봉사하고 있었고 나사로는 예수님과 함께 앉아 담화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마리아는 값비싼 나드 향유를 가지고 와서 주님의 머리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흘러 내려오는 향유를 씻어냈다고 했습니다.

1. 옥합을 씬 두 여인의 경우

예수님을 사랑하는 여인이 나드향이 든 옥합을 깨어 주님의 머리에 부어 드린 사건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깨닫게 해 줍니다. 그런데 이 사건이 4복음서에 다 나오기는 하지만 누가복음에 나온 여인의 경우는 베다니에 살고 있는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가 아니라는 사실을 쉽게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께 나드향이 든 옥합을 깬 여인은 마리아만이 아니라 다른 또 한 명의 여인이 있었다는 것을 찾을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의 경우(눅7:36-50), 예수님을 초대한 사람은 한 바리새인이라고 했습니다. 이곳에는 예수님을 초대한 목적이 없습니다. 집주인이 예수님에게 발 씻을 물도 드리지 않은 점으로 미루어 보아 지극히 호의적인 대접은 아니라고 보여집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경우는 베다니에서 예수님을 위하여 잔치했으며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께 있는 정성을 다 기울였습니다. 누가복음의 경우는 기름을 부은 여인은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인”으로 나와 있으며 예수님을 이곳에서 처음 만난 여인으로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경우는 이 여인이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여인으로 죄인이라고 비췬 곳이 한곳도 없습니다. 그러나 어느 경우이건 이 사건은 주님의 마음에 큰 위로와 기쁨을 드렸습니다. 이로 인하여 한 여인은 죄 사함과 구원의 은혜를 받았고 한 여인은 말할 수 없는 칭찬을 받았습니다.

2. 마리아의 옥합

마리아가 주님의 머리에 부은 나드향은 티베트와 인도사이 히마리아 산맥의 고지에서 자라나는 회귀한 나무에서 짜낸 비싼 향유입니다.

(1) 마리아가 옥합을 깬 것은 사람의 표시입니다. 마리아는 가난한 가정에서 살아가고 있는 여인이었습니다. 그에게 가장 값진 것이 있다면 옥합에 든 나드향 밖에 없었습니다. 이 향유의 값은 무려 300 데나리온으로 이 돈은 노동자 임금이 300일분입니다. 마리아가 이것을 능히 송두리째 주님께 부어드릴 수 있었다는 것은 주님께 대한 그의 사랑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2) 마리아가 옥합을 깬 것은 자기 헌신의 증거입니다. 물질과 마음은 서로 통용합니다. 마리아는 그의 사랑의 마음과 함께 자기에게 있는 가장 소중한 것 중의 가장 귀한 것을 드렸습니다.

(3) 마리아가 옥합을 깬 것은 은혜의 보답입니다.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은 그 은혜를 갚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 불일 듯 일어나며 그 무엇을 주어도 아까울 것이 없는 것입니다. 마리아에게는 예수님의 특별하신 사랑을 받아온 은혜, 구원을 받은 은혜, 자기 오라비의 생명을 살려주신 은혜, 이런 것들이 그의 마음을 뜨겁게 사로잡았던 것입니다.


3. 옥합을 깬 사건의 여파

마리아가 이처럼 주님께 향유를 부은 사건은 즉시 제자들 간에 반응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가 마리아에게 공격의 화살을 부었습니다.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고 한 것입니다. 이 일로 마리아가 어찌할 줄을 몰라 하고 있을 때 예수님은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 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장사 할 날”이란 예수님이 죽으실 일에 대한 예언인데 예수님은 마리아가 그에게 나드향을 부은 일을 장사할 날을 위한 일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일에 대하여 마태복음에서는 이처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위하여 함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며 저를 기념하리라”(마26:6-13).


결 론 : 마리아가 깬 옥합에서 순전한 나드향이 흘러 나왔으며 이 향은 온 방안에 아름다운 향기로 가득 채웠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영적인 교훈 두 가지를 든다면 ⓐ 하나는 옥합 속에 들어 있는 나드향은 바로 우리 속에 계시는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우리의 몸은 질그릇이요 그 속에 담겨진 주님은 보화이십니다(고후4:7). 우리의 옥합인 이 육의 사람을 깨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향기를 밖으로 내 놓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육신에 대하여 죽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 다른 또 한 가지 교훈은 이 향내가 예수님이나 다른 제자들에게는 값진 향기로 맡아졌지만 멸망한 가룟 유다에게는 그러하지 못한 일입니다. 이것은 같은 복음이라도 구원 얻을 사람파 멸망 받을 사람들과는 풍기는 냄새가 각기 다르다는 사실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고후2:15-16).


(63) 나사로 까닭에

(요한복음 12:9-11)

서 론 : 무덤에서 다시 살아난 나사로는 중생한 그리스도인의 한 모형입니다. 나사로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는 이 분명한 증거를 스스로 가지고 있었으며 많은 사람들에게도 그 사실을 보여 주었기 때문에 그가 죽었다가 살아난 일로 인하여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나사로를 보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나사로 까닭에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고 그가 대제사장들의 무리에게까지 주목을 받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1. 죽은 증거를 가진 나사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말미암아서 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두 가지 사실에서 비롯됩니다. 하나는 그의 죽으심에 연합하는 일이요 다른 하나는 그의 다시 살아나심에 연합되는 일입니다(롬6:2-5). 나사로는 죽어서 무덤에 장사되어 이제 다시 소생할 길이 전혀 없는 절망적인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의 육체가 이미 썩어 냄새까지 풍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나사로처럼 우리의 옛사람이 죽어야 합니다.

(1) 옛 사람이 죽는 다는 말은 율법에 대해 죽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율법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영생이 아니라 영원한 저주요 정죄이기 때문에 사람이 이 율법에서 의를 얻으려고 하거나 율법적인 생활로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일을 완전히 포기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뿐입니다.

(2) 옛 사람이 죽었다는 말은 우리는 우리의 죄로 인하여 이미 심판 받은 사실을 말합니다.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롬 8:10).

(3) 또 옛 사람이 죽었다는 말은 옛 사람과 그 행실을 벗어버리는 일을 말합니다. 성경은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골3:9-10). 우리는 육신에 속한 사람이, 우리의 바른 신앙 생활을 저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며 이 같은 사람이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2. 살아난 증거를 가진 나사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죄에 죽은 그리스도인들은 그의 부활에 연합하여 새롭게 살아날 때 새 사람이라 일컬어지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이요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에 연결된 사람입니다. 나사로가 무덤에서 살아난 확실한 증거를 가진 것처럼 우리도 옛 사람은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살아난 확실한 증거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승리의 비결인 것입니다. 나사로가 죽은 것으로 끝났다면 장래를 치른 후에는 찾아 올 사람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기 때문에 이 나사로를 보려고 많은 사람이 그를 찾아 왔습니다.

(1) 우리가 새롭게 살아난다는 말은 성령으로 거듭나는 일을 말합니다. 사람이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도 없고 들어갈 수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연합을 실질적으로 이루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의 부활하심에 연합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새로운 생명으로 새롭게 태어난 사람입니다.

(2) 우리가 새로운 생명을 가졌다는 말은 의에 대하여 살아가는 능력을 말합니다. 이전에는 우리들이 죄의 종이 되어 살아 왔으므로 의에 대하여 자유 했습니다. 그리고 의를 이룰 아무런 능력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새로운 생명을 가진 후로는 의의 종이 되어 의의 지배를 받는 몸이 되었고 죄에 대해서는 죽은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3) 그리스도인들의 새로운 삶은 성령 안에서의 삶을 말합니다. 우리가 지난날에는 육신의 소욕대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새로운 생명과 연합된 우리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육신을 쫓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쫓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 8:5-8). 성령의 지배를 받는 생활이 성령 안에서의 새로운 삶이요 영생의 열매를 맺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생활입니다(갈6:7-8).

(4) 그리스도인들이 새 생명 가운데서 살아간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나이다”고 말씀했습니다(시119:105)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는 일은 그 힘과 능력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생명의 길, 영생의 길, 천국에의 길은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쳐주시는 길이요 그 말씀을 따라가는 길입니다.


결 론 : 나사로가 죽었다가 살아난 일은 주님을 영화롭게 해 드렸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새로운 생명을 받아 새롭게 살아났다면 우리의 생활은 우리 주님을 영화롭게 해 드릴 것입니다. 나사로가 살아나 많은 사람이 그를 만나보려고 찾아왔던 것처럼 우리들이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생활을 하면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습니다. 11절 말씀을 보니 “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었다”고 했습니다. 나사로는 그의 새로운 삶을 통하여 예수를 전도했습니다. 나사로 까닭에 많은 사람을 주님께 인도한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64)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요한복음 12:12-19)

서 론 : 예수님은 유월절 명절에 어린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게 되었습니다. 이 같은 예수님의 입성은 스가랴 선지에 의하여 예언된 일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는 이미 세계 각처에서 모여든 무리들로 붐벼대고 있었습니다. 그들 중 사람들이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맞으려고 성문으로 나온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자 입으로 찬양을 외쳤습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그들의 손에는 종려나무 가지가 들려져 있었습니다.

1. 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님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모습은 어느 개선장군에 못지 않은 장관이요 환영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무나도 초라한 모습으로 입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개선장군보다 더 크고 위대한 승리의 영광을 안고 입성하셨지만 이것은 바로 그의 말할 수 없는 고난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 같은 사실을 알고 예수님을 맞이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던 것입니다.

(1)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신 것은 겸손한 왕이심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겸손하다는 히브리말 ‘아니’는 곤고하다, 초라하다는 뜻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어린 나귀새끼를 타신 것은 그의 겸손에서 나온 것인데 그는 왕으로써 곤고를 겪으셨으며 가난하고 초라하셨습니다. 그는 스스로 종의 자리로 낮추시기까지 겸손하셨습니다(빌2:6-10). 그는 우리를 위하여 가난해 지시기까지 겸손하셨습니다(고후8:9). 그는 원수의 무리를 위해서 간구하시기 까지 겸손하셨습니다(눅23:24).

(2)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신 것은 평화의 왕이심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원수를 무찌르는 칼을 가지고 입성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는 평화의 왕으로 오신 분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고 했습니다(눅2:14). 이사야는 이처럼 말했습니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53:5).

(3)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신 것은 그에 대하여 예언하신 말씀의 성취입니다. 스가랴의 예언은 바로 예수님에 대한 예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조차 예수님의 이 같은 입성에 대하여 그 뜻을 잘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야 이 일이 스가랴가 예언 한 예언의 성취임을 알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2. 호산나를 외친 무리들

예루살렘에 있었던 많은 무리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소문을 듣고 종려나무가지를 가지고 마중 나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자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하면서 외쳐댔습니다. ‘호산나’는 히브리어 ‘호시아나’의 헬라어 음역입니다. 이 말은 ‘구원하소서’ ‘이제 구원하소서’ ‘우리들을 구원하소서’란 뜻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기쁨의 갈채 또는 찬양의 송영으로 사용되어 온 말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호산나를 외친 것은 다만 유월절 행사 때문에 습관적으로 부른 찬송은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를 이 찬송의 주인공으로 여기고 그를 맞이하는 태도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들은 이재 그들의 조국이 로마의 지배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런 일을 자신들이 기다리는 메시야에 의하여 이루어질 것이라고 기대해 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번 예루살렘에 와서 예수에 대한 희망에 부푼 소문을 듣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무덤에서 살려내신 소문도 들었습니다. 그가 이제 유월절을 앞두고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은 몹시 흥분했습니다. 어느 누구인가의 업에서 ‘호산나’의 찬송이 나오자 그들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이 암송 시를 다 함께 합창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이 같은 환영은 적중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바라고 기대했든 정치적 메시야는 연약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잡히고 빌라도의 재판에서 사영언도를 받고 골고다의 사형장에서 무력하게 죽어간 것을 바라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1) 예수님은 정치적 메시야가 아니십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정치적으로 이스라엘을 로마의 손에서 구원하심이 목적이셨다면 그 일이 그의 생전에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2) 예수님은 표적으로 자기를 믿게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을 따른 무리들은 그가 행하시는 표적에 의해 그에 대한 믿음을 가지려 했습니다. 예루살렘 성문에서 예수님을 맞이한 무리들은 나사로를 죽음에서 살리신 표적 때문에 모인 무리들이었습니다.


결 론 : 이 날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마치 혁명의 가치를 들고 입성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선동하거나 이스라엘의 회복을 부르짖지 아니하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행동은 그들 군중들에게 큰 실망을 안겨 주었으며 그가 과연 메시야인가? 하는 의문을 던져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많은 무리들은 빌라도의 재판정에서 대제사장의 선동을 받아 예수대신 바라바를 요구하고 예수에 대해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고 소리를 질렀습니다(마27:20-24).


(65) 한 알의 밀알

(요한복음 12:20-26)

서 론 :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자 많은 군중들은 그의 입성으로 인하여 과연 어떤 변화가 일어날 것인가? 많은 기대를 가지고 예수님을 주목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은 당장에 어떤 변화를 바라는 군중들에게 아무런 흥미를 주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그들이 상상하지도 못하는 밀알의 비유를 말씀하심으로 그들을 실망시키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대하여 ‘호산나’를 외쳤던 그들의 기대가 일시에 무너져 버리게 된 것입니다.

1. 한 알의 밀알이 열매를 맺으려면

예수님은 그가 영광을 얻으실 때가 온 것을 아셨습니다. 주님이 “그러면 너희가 인자의 이전 있던 것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어찌 하려느냐”고 하신 말씀대로 주님은 하늘에 올라가셔야 할 분이십니다(요6:62). 그런데 예수님이 이처럼 영광을 얻으시는 길은 그의 죽으심의 고난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빌2:8-11). 예수님은 그의 죽으심의 고난만 바라보신 것이 아니라 그 뒤에 오는 말할 수 없는 영광도 바라보셨습니다(히12:27).

(1) 예수님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자연의 원리입니다. 밀이 씨앗으로 심겨지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밀이 심겨지는 일은 마치 그 자신의 생명을 죽이는 일과 같은 것입니다. 자신이 썩고 온전히 회생하기 때문입니다.

(2) 예수님은 이 말씀은 하시고 즉시 그 해석을 가해 주셨습니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두 가지 뜻이 함유되어 있습니다.

① 하나는 이 말씀이 바로 예수님의 죽으심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자기 생명이라고 표현하신 생명은 인간의 육신적인 생명을 말합니다. 이 생명은 헬라어로 ‘프쉐’인데 이것은 혼으로써 자연적 생명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고 하신 생명은 ‘조에’로 이 생명은 주님께 받은 영원한 생명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육신적인 생명을 버리시는 일을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지는 것으로 비유하신 것입니다.

② 다른 하나의 뜻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참 생명을 얻는 생활 태도를 밝히신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은 바로 주님을 섬기는 생활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섬기기 위하여 주님을 따르는 생활이야말로 영원한 생명을 얻는 생활인데 이런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자신의 육신적인 생명을 버려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생활은 죄에 대하여 죽는 생활을 말합니다(롬6:11). 이런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육신의 일을 벗어버리고 영을 쫓는 생활을 말합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롬8:13-14). 그리스도인의 이런 생활은 지난날의 옛사람을 벗어버리는 생활을 말합니다.

2. 주님을 섬기는 자의 축복

예수님은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들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주님의 말씀을 우리의 신앙생활의 거울로 삼아야 합니다. 주님을 섬긴다는 말과 주님을 믿는다는 말은 같은 말입니다. 그를 믿으면서 섬기기를 원치 않는다면 그 사람은 과연 믿음을 가진 사람일 것인가? 성경은 주를 섬기는 그리스도인들의 태도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했습니다(롬12:11).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기라”고 했습니다(히12:28).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는다”고 했습니다(롬14:18).

(1) 예수님은 이들에게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계신 곳은 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고 하셨습니다(요14:2). 이곳은 주님을 섬기는 모든 성도들을 거하게 하실 충분한 장소이기 때문에 누구라도 염려 할 것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거지로 살아 왔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생활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진 나사로도 있습니다. 예루살렘 여인 중에 가장 미천하고 일곱 귀신이 들렸던 여인이었지만 주님을 섬기는 생활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막달라 마리아의 경우도 있습니다.

(2) 예수님은 주님을 섬기는 이들에게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고 하셨습니다. 귀히 여기신다는 말씀은 지극히 사랑하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귀히 여기시는 그리스도인이야 말로 얼마나 놀라운 축복의 사람이겠는가? 하나님께 귀히 여기심을 받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주님을 성심을 다하여, 있는 정성을 다하여, 열심으로 섬기면 되는 것입니다.


결 론 :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땅에 떨어져 죽으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내 육신의 생명이 썩을 때 그 때 비로소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며 하나님의 귀히 여기심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밀이 땅에서 썩듯이 육신이 원하는 생활을 버리고 주님을 섬기는 생애를 보내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66) “이 때를 면케 하옵소서”

(요한복음 12:31-33)

서 론 :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실 일을 앞에 두시고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이 기도하시는 모습에서 그가 지실 십자가에 대한 어려움을 다시 한번 절감하게 됩니다. 이 인류의 죄를 담당하시는 일은 연약한 사람으로서는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기 위하여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빌2:8).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두시고 마음에 갈등이 일어나거나 심히 답답하셨을 때 아버지께 기도하셨고 이 기도로 그는 골고다로 올라가고 계셨습니다.

1. 십자가를 지실 주님의 마음

예수님은 그가 육신을 가진 사람이시란 점에 있어서 우리와 하등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고 하셨습니다(히4:15). 예수님께는 우리와 같은 죄만 없으실 뿐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히5:2).

(1) 주님은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십자가를 지실 일을 앞에 두시고 예수님의 마음에 소용돌이치는 갈등을 표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무슨 말을 하리요”라고 하신 말씀은 그가 앞으로 당하실 모든 고난에 대하여 낱낱이 알고 계신데서 나온 괴로움을 나타내신 표현입니다. 주님은 내 마음이 민망하시다고 하셨습니다. 민망한 마음은 답답하고 걱정스러운 마음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의 배신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이 도망가고 한 명도 그의 고난에 동참하는 자가 없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받으실 재판의 과정을 이미 아셨고 로마 군인들이 그에게 가할 모욕적인 학대를 이미 바라보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달리셔서 여섯 시간 동안 고통을 받으실 일, 그가 그 괴로움 중에서 아버지의 버리심을 받으신 일까지 알고 계셨습니다. 이 어찌 답답하고 걱정스러운 일이 아니었겠습니까.

(2) 예수님은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 드렸습니다. 주님이 “이 때를 면하게 해 달라”고 하신 이 때란 십자가를 지실 고난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주님의 인간적인 갈등과 고민을 아버지께 솔직히 아뢴 기도였습니다.

(3) 그러나 주님은 즉시 이처럼 그의 기도를 수정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자기 사명에 대한 확인입니다. 예수님께도 자기 사명의 수행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지만 그러나 그는 한 알의 밀알로서의 그의 사명을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 온전히 이루신 것입니다. 언제나 기도의 결론은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주님의 위대하심은 육신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신 일입니다.

2.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예수님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아들이 이 세상에서 하신 일은 모두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해 드리는 일이었습니다. 이 같은 예수님의 기도에 하늘에서 아버지의 응답이 음성으로 들려왔습니다.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다”고 하신 말씀은 그 아들로 인하여 아버지께서 이미 영광을 받으셨다는 말씀입니다. 아들은 이 땅에서 수도 없이 아버지의 영광을 들어내셨습니다. 그리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구속사업의 완성으로 얻으실 영광으로, 모든 죄인을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의 복음은 하나님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해드린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3. 내가 땅에서 들리면

예수님은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고 하셨습니다.

(1) 이 말씀은 복음으로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믿게 될 일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류 구원의 역사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들리심으로 완성되어 복음이 형성되었습니다.

(2) 예수님은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이 말씀을 특히 그의 죽으심과 연결시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이 세상 심판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의 선언이 되기 때문입니다.

(3) 예수님은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 임금이란 마귀를 말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승리는 마귀로부터 사망의 권세를 빼앗았습니다. 마귀가 정죄의 수단으로 이용한 율법의 정죄에서 모든 믿는 자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음부의 권세가 그의 교회에 미칠 수 없게 하셨습니다.


결 론 : 예수님은 그가 지실 십자가의 어려움을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기쁘게 지셨습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말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십자가를 질 때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롬8:17, 벧전4:13-16).


(67) 이 인자는 누구냐?

(요한복음 12:37-43)

서 론 : 예수님은 인자가 들려야 할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들려야 한다는 말은 십자가 위에 달리셔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같은 말씀은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도 나온 일이 있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요3:14). 그런데 유대인들은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고 하신 말씀에 대하여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말인지 몰랐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율법에서 그리스도는 영원히 계신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 인자는 누구냐”고 되물었던 것입니다.


1. 율법의 그리스도를 찾는 유대인들

유대인들은 한결같이 율법이 말해 주는 그리스도를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기다리는 메시야는 율법에서 가리켜 주시는 그리스도를 의미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기다린 그리스도, 율법이 가리킨 그리스도란 어떤 존재인가?

(1) 모세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나 같은 선지자”라고 예언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찌니라”고 했습니다(신18:15).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오실 그리스도는 모세와 같은 존재,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자로 알고 있었습니다(행1:6). 이로 인하여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향하여 메시야된 증거를 하늘에서 만나를 머게 한 모세처럼 명백하게 보여줄 것을 요구했습니다(요6:30-31).

(2)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다윗의 위를 이은 영원한 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난 한 싹은 분명히 그리스도를 예언하는데 이곳에 나타나 있는 그리스도는 “그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이시는 자”로 나와 있는 것입니다(사11:1-4). 그리스도가 고난을 당한다거나 십자가를 져야 한다거나 하는 일은 그들로서는 상상치도 못할 일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스가랴의 글에 있는 메시야의 예언이 바로 이 같은 큰 권능으로 임하시는 그리스도인줄로 믿었으며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올 이런 그리스도로 영접했던 것입니다(슥9:9).

이처럼 예수를 그 대망의 그리스도인줄로 믿고 환영을 했는데 그들 앞에 서신 예수님은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고 하시니 그러면 이 인자란 도대체 누구냐고 따져 물은 것입니다.

(3)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야말로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로 믿었습니다. 동방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고 물었을 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이 그리스도에 대하여 주저 없이 미가서에 있는 말씀을 찾아 왕에게 그의 태어나실 곳을 알려 주었습니다(미5:2). 이 말씀에 나온 것처럼 그리스도는 영광의 왕으로 이스라엘을 실제로 다스릴 왕으로 오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4)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야말로 그들을 다스리는 목자가 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겔34:24). 이런 까닭에 유대인들이 예수를 이런 메시야로 기대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또한 예수님이 놀라운 기적을 행하시고 권능의 말씀으로 무리들을 가르치시므로 그를 메시야로 믿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성 입성을 환영한 일은 바로 이런 뜻에서였는데 그리스도라고 자기들이 환영한 예수로부터 들림 받아야 하리니, 인자가 고난을 받아야 하느니 하는 말을 들었을 때 그들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릴 사람이 그들의 메시야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들의 태도는 돌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이 인자는 누구냐” 왜 성경과 다르냐? 이제 그들은 그리스도라고 말하고 있는 예수를 배척할 태세를 갖추게 된 것입니다.


2.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서 숨으시니라”고 했습니다. 기대에 어긋난 것을 안 그들은 예수께 호감을 갖지 못했습니다. 주님이 그들의 낯을 피하여 숨으셔야 하시리 만치 형세가 바뀌어진 것입니다. 많은 표적도 그들에게는 믿음의 근거가 되지 못했습니다.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그의 속죄에 대한 믿음에 있기 때문에 겉으로 나타난 주님의 표적으로는 그들에게 이 같은 믿음을 줄 수가 없었습니다.

주의 팔이 분명히 그들에게 나타났건만 그러나 그들은 그 들은 바를 믿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외식으로 섬기며 율법을 외식으로 지키며 사랑과 공의를 버리고 있는 그들은 그들의 마음이 이미 돌같이 단단히 굳은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예수를 영접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된 것은 분명하신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요한 사도는 이사야의 예언을 벌어 증거한 것입니다.


결 론 :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외식으로 섬기며 순종을 버리면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완고하게 하시고 그 눈올 소경 되게 하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저주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마13:16). 우리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우리의 죄를 씻고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우리의 눈이 열리고 귀가 열리면 주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가 되며 눈이 열려 그 나라를 바라볼 수 있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68) 아들과 아버지

(요한복음 12:44-50)

서 론 : 예수님은 오늘 말씀에서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나를 보는 이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논하지 않고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우리의 신앙에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는 둘이 아니라 하나이란 사실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하신 말씀은 바로 이 같은 사실을 가리키신 것입니다(요10:30).

1. 아들과 아버지와의 영적인 관계

우리가 예수님의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먼저 이틀과 아버지와의 영적인 바른 관계를 알아야 합니다.

(1) 아들과 아버지는 원래가 한 본체이십니다. 한 본체란 한 몸을 의미합니다. 아들과 아버지는 각기의 인격을 지니고 계십니다. 아들로서의 인격, 아버지로서의 인격을 가지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인격의 분립은 하나님의 본체의 분립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본체는 나눌 수가 없습니다. 이 본체는 영원히 하나이십니다. 그런데 그 한 본체 안에 아들의 인격과 아버지의 인격과 성령의 인격이 계시며 이 세분의 인격이 오직 한 하나님의 본체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2) 그러므로 아들과 아버지는 그 근원이 똑 같으십니다. 한 본체의 존재가 나누일 수는 없으며 그 기원도 어느 것이 먼저고 어느 것이 나중이고 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의 존재의 근원을 아버지와 동일하다는 사실을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요1:1-2). 이 삼위 하나님은 다 똑같은 만물의 창조자이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이 삼위로 이루어져 계시는 한 본체이시기 때문입니다. 거룩하심이 똑같으시고, 그 영광이 똑같으시고, 그 하시는 일도 똑같으십니다.

(3) 예수님이 아들로 불리심을 받은 것은 그가 이 세상에 사람의 모양으로 태어나심에서 부쳐진 이름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심으로 그는 인자의 모습을 지니게 되셨고 이로써 그는 아들로 불려진 것입니다. 그는 스스로 자기를 낮추셨기 때문에 아들의 모습을 가지고 세상에 오실 수 있었으며 자기의 뜻이자 아버지의 뜻인 대도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이라고 표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2.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니라

아들과 아버지는 한 본체이시기 때문에 그가 세상에서 나타내신 말씀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요 그가 세상에 나타내신 그의 모습은 곧 아버지의 모습이십니다.

(1) 예수님은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은 분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한 본체를 이루신 하나님은 모든 하나님의 역사에 있어서 언제나 “우리”안에서 계획하시고 성취하시는 것입니다.

(2)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그의 아들로 자신의 모습을 인간에게 나타내 보이신 사실을 알게 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말씀했습니다(요1:14).

(3)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믿는 것으로 인간들에게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계명을 어겼기 때문에 마땅히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사 아들을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시기로 약속하신 것은 그 아들이 바로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 우리가 거역하여 저버린 하나님, 우리가 범죄 함으로 우리와 원수가 된 하나님, 바로 그 분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3.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예수님은 또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고 말씀하심으로 제자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드셨습니다. “아버지를 보여 주시면 족하겠나이다”고 말하는 빌립에게 주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고 하셨습니다(요14:8-9).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으로 오신 분이심으로 그는 곧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본 자는 곧 하나님을 본 자가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 세상에 빛으로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빛은 그의 말씀을 가리킨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그를 나타내시기 때문에 그 말씀이 곧 빛이십니다.


결 론 : 예수님은 이 세상을 심판하시려고 오신 분이 아니심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신 것은 오직 구원을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죄인에 대한 심판은 반드시 있습니다. 그 심판은 아들을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 주신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심판의 표준이 될 것입니다.


요한복음 13장 (62-68)

◆ 밤중소리 01-28 | VIEW : 1,393

69. 끝까지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요한복음 13:1-11) 

70. 서로 발을 씻기라(요한복음 13:12-20)

7l. 주여 누구오니이까(요한복음 13:21-30) 

72. 주님이 얻으신 영광(요한복음 13:31-33)

73. 새 계명(요한복음 13:34-35)

74.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요한복음 13:36-38) 


(69) 끝까지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

(요한복음 13:1-11)


서 론 : 예수님은 자기가 아버지께로 가실 기간이 가까워지자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일시적인 사랑이 아니십니다. 주님으로부터 한번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세상 끝날 까지 주님의 사랑을 입게 됩니다. 주님으로부터 버리심을 당하지 않습니다(요6:37). 하나도 잃어버리신 바 되지 아니하신다고 하셨습니다(요 6:39). 세상 끝날 까지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마 28:20).

1. 끝까지 사랑하시는 주님

예수님이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하신 그 사랑의 대상이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자기 사람들”이란 주님의 양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이 양들을 위하여 그 아들을 보내셨으며, 예수님은 이 양들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고 하셨습니다(요 10:14-15).

(2) 끝까지란 말씀은 무한정의 기간을 말합니다. 우리를 향하여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혼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찌니라”고 말씀하신 끝없는 사랑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자기 사람들”로 인정받은 사람들은 그로부터 무한정한 사랑, 끝없는 사랑을 공급받습니다.

(3) “사랑하시니라”는 말씀은 영원 불변적인 사랑을 의미합니다. 사랑하시니라의 ‘에가페 센’이란 말은 한번 주님이 사랑하신 그 사랑이 다시는 영원히 변할 수 없는 불변적인 그런 사랑을 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어떤 죄라도 사하시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어떤 죄인이라도 용납하시는 사랑입니다.

2. 유월절 만찬에서 일어난 일

이미 예비된 다락에서 유월절 만찬이 무르익어 가는 그런 때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셨습니다. 그리고는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같은 행동에 제자들도 어리벙벙한 가운데 선생님이 하시는 일을 바라보고만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장면에서 세 가지 모습의 얼굴을 볼 수 있습니다.

(1) 가룟 유다의 모습입니다. 이 자는 “마귀가 벌써 그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다”고 했습니다. 깨끗지 못한 마 속에는 언제나 마귀의 생각이 출입합니다.

(2) 다른 제자들의 철없는 모습입니다. 제자들은 겸손함을 모르고 오히려 하나님 나라에서 누가 높으냐? 는 벼슬자리로 인하여 서로 다투고 있었습니다(눅22:24). 그들은 식사 전에 먼저 주님의 발을 씻겨 드려야 할 터이나 제각기 미룰 뿐 누구 하나 수건을 들고나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3) 선생이 되시어 본을 보이신 에수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자신이 얼마 후에 대제사장들에 의하여 십자가에 달리실 것을 아셨습니다. 주님은 자기가 아버지께로 떠나가면 제자들이 고아처럼 남게 될 일에 대하여 측은히 생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대야에 물을 담아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이 대야의 물로 씻기시고는 허리에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시기를 시작하셨습니다.

3. 발을 씻기신 교훈

예수님은 이처럼 발을 씻기시면서 시몬 베드로가 있는 자리까지 이르셨습니다.

(1) 베드로는 이런 주님의 행동이 전혀 가당치 않다는 표정으로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내 발을 절대 씻기지 못하리이다”고 완강히 거절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에 두 가지로 대답해 주셨습니다. 하나는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하시는 일에 대하여 혹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있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다른 한 말씀은 “내가 너를 씻기지 않으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그의 하시는 일을 통하여 먼저 정결케 하시는 사죄의 은총을 밝히셨습니다. 베드로의 더러운 발(죄)은 예수님에 의하여 씻겨진 것입니다. 이 같은 사죄가 하나님의 은혜인 것은 베드로는 자신의 더러움을 씻는 일에 자기의 의나 자신의 공로가 하나도 들어가지 아니했습니다.

(2) 베드로는 그러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또 하나의 다른 교훈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미 목욕한 자란 “중생의 씻음”을 말합니다(딛3:5). 이미 구원의 은혜를 받은 사람을 말합니다. 이 말씀은 또한 구원의 단회성(일회성)을 말합니다.


결 론 : 구원받은 자들에게도 그의 일상생활상에 죄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죄는 다시 목욕해야 할 죄가 아니라 발만 씻으면 되는 죄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복하면 우리 주님이 친히 우리의 발을 씻겨주심으로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깨끗케 하신다고 하셨습니다(요일1:9).


(70) 서로 발을 씻기라

(요한복음 13:12-20)

서 론 :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일은 두 가지의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한가지는 우리의 생활 가운데 날마다 죄를 범하는 일에 대한 회개를 말하고, 다른 한가지는 주님이 하신 일을 본 받아 서로 섬기는 생활을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또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며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 “너희가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주님은 제자들의 스승으로 그들의 선생이십니다. 주님은 또한 그들의 주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선생이요 주가 되셨지만 그들의 발을 씻기신 것입니다. 이 일을 주님이 행하신 일에 대하여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고 하셨습니다.

(1) 이것은 서로 겸손한 마음으로 섬기는 자가 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겸손히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큰 사람이요 으뜸으로 하나님께 인정받는 자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하셨습니다(마20:26- 27).

(2) 이것은 서로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라는 뜻입니다. 제자들은 서로간에 인격을 존중하여 존대해 주거나 자기보다 훌륭하게 보지를 못했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본이야말로 자기 형제들 앞에 겸손히 낮아져서 다른 사람을 낫게 여기라는 교훈으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3) 이것은 또한 서로 죄를 용서해 주라는 뜻입니다. 발을 씻는 일이 죄 사함의 뜻이라면 서로 발을 씻겨 주는 일이야말로 형제들 서로가 죄를 용서해 주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마18:21-22).

2.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1) 주님은 보내신 분으로 우리의 발을 씻기셨으니 우리는 종으로서 이런 일을 행하는 일이 당연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셨습니다(마11:29). 우리의 마음이 높아지려고 할 때에 우리는 언제나 제자의 발을 씻기시기까지 낮아지신 주님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 안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고 말했습니다(빌2:5).

(2) 서로가 연약한 그릇임을 알리는 뜻이 있습니다. 우리들은 연약에 싸인 몸들입니다. 서로가 사랑해 주며 죄를 용서해 주며 격려해 주어야 그리스도 안에서 한 지체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3. 주님의 보내심을 받는 자

예수님은 주님이 보내신 자들에 대한 축복에 대하여 “나의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누가 주님의 보내심을 받은 사람들인가?

(1) 이들은 곧 사도들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내가 너희를 보낸다고 하셨습니다. 사도들은 마땅히 주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들로 인정을 받았으며 그런 영접을 받았습니다.

(2) 이들은 또한 주님의 양 무리들을 맡은 주의 종들을 말합니다(마24:45). 오늘날 교회의 목사들은 주인 되신 예수님으로부터 그의 양 무리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주는 종들입니다.

(3) 이들은 또한 주의 복음을 전하는 자들입니다.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롬10:15).

(4) 그러나 예수님은 그 중에도 예외자가 있다는 것을 밝히셨습니다. 예수님은 12제자들을 택하셨지만 그러나 그 중에 하나인 가룟 유다는 구원의 선택에서가 아니라 성경의 응함을 위한 선택이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양의 목자 중에서 사도들처럼 부르심을 받은 충성된 종이 있는 반면에 가룟 유다같은 악한 종이 있는 것입니다(마24:45-51).


결 론 : 주님이 보내신 자를 영접한다는 말은 ⓐ 주의 이름으로 그들을 대접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들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대접하면 결코 상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 이들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영접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왕하 4:8-12). ⓒ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를 말합니다. 라합은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을 믿음으로 받아들여 위험한 생명을 구원해 줌으로 복을 받았습니다. ⓓ 자기 집에 유하게 하는 자를 말합니다(마10:11). 주님의 보내신 자를 합당하게 영접하여 유하게 하는 사람은 그 집을 위하여 빈 평안이 그 집에 머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 어려운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공궤해 주는 일을 말합니다. 사르밧 과부가 엘리야를 그처럼 영접하여 복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영접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보내신 자를 영접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71) 주여 누구오니이까?

(요한복음 13:21-30)

서 론 : 주님은 자기 제자 중에 자기를 팔 사람이 있음을 마음 아프게 생각하셨습니다. 물론 이 같은 일이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고 한 성경을 응하게 하시려는 아버지의 뜻인 줄을 알고 계셨지만 그 일이 가까이 다가오자 예수님은 심히 괴로워 하셨습니다. 주님은 이 유다가 멸망치 않기를 진심으로 원하셨기 때문에 회개하기를 바라는 심정에서 여러 번 기회를 주셨건만 그는 끝내 멸망의 지식으로 종말을 고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1.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예수님의 이 같은 말씀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그 말씀의 진의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분명하게 알게 하실 필요가 계시기에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고 말씀하시게 된 것입니다.

(1) 너희 중 하나란 말은 주님을 팔 자가 12명의 제자 가운데 있다는 것을 말씀하심이 분명했습니다. 그들은 “나를 팔리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 자세히는 알지 못했지만 그것은 분명히 선생님께 대한 배신이기 때문에 주님의 이 말씀이 충격적인 말로 들려졌으며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2) 베드로의 반응이 가장 민감하게 나타났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품에 안겨 있는 다른 제자(요한)를 향하여 그가 누구인지 말씀하시도록 하라고 머리 짓을 보냈습니다.

(3) 요한은 주님을 바라보면서 “주여 뉘시오니이까”고 물었습니다. 마태복음에 기록된 것을 보면 제자들이 제각기 자기의 결백을 나타내려고 “주여 내니이까”고 물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마26:22). 이때 예수님의 입에서 결정적인 말씀이 나왔습니다.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고 말씀하신 후 곧 “한 조각을 찍으셔다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주시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 스승을 팔 자가 누구인지 명백히 드러났습니다. 그들의 시선이 일제히 가룟 유다에게로 쏠렸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이 같은 말씀에 대하여 “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앉은 자 중에 아는 이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가룟 유다로 하여금 거듭되는 지적을 통하여 자신의 죄를 회개시키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뻔뻔스러운 배신자는 “랍비여 내니이까”고 물으면서 주님이 찍어 주시는 떡 조각을 받은 것입니다(마26:25). 유다는 이 떡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그가 이 먹 조각을 받고 밖에 나가니 밤이었습니다. 그의 심령의 어두움을 상징해 주는 밤입니다. 유다의 밤은 그가 목메어 죽는 그 시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2.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이 같은 모든 일은 너무나도 의외로 갑작스럽게 된 일들이라 제자들은 아연실색했습니다. 가룟 유다는 주님으로부터 떡을 받았을 때 그 떡을 먹기 전에 그 자리에서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했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유다에게 떡을 집어 주신 일은 두 가지 면에서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유다로 그 장본인이 바로 자기임을 뉘우쳐 회개시키려고 하심에서이고, 다른 하나는 일이 이루어졌을 때에 주님의 말씀이 응해진 사실을 알게 하시려 함입니다.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이제 때가 임박하셨음을 아셨습니다. 유다는 회개하기를 거절한 이상 성경대로 자기 선생을 파는 일을 수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1) 가룟 유다는 처음에는 돈주머니 속에서 얼마간의 돈을 도적질하는 일을 했습니다. 이것은 당장 에라도 버릴 수 있는 죄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이 버릇을 고치지 아니했습니다. 이 작은 죄가 그의 마음을 점점 어둡게 하고 완악하게 만들었습니다.

(2) 가룟 유다는 소망이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남달리 영리했습니다.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신 후 돌아가실 것을 말씀을 듣고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의 부활은 믿지 아니했습니다. 주님이 죽으시면 자기의 이익의 소망이 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3) 이 같은 유다의 마음속에 사단은 예수를 팔고자 하는 생각을 심어 주었습니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라고 했습니다(2). 악한 생각에 사로잡힌 자는 언제나 마귀가 그 악한 일을 행할 수 있는 용기와 지혜와 담력을 줍니다.

(4) 유다가 끝내 회개치 않고 떡을 받자 그만 마귀가 그에게로 들어갔습니다(27). 마귀가 유다의 전 인격을 사로잡았고 그는 자신의 일을 행할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주님은 그를 향하여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결 론 : 유다는 예수를 파는 일을 실천하기 위하여 밖으로 나갔으며 그가 밖에 나가니 그의 가는 길은 흑암이 싸인 어두움이었습니다.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쫓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고 말씀했습니다(요3:20-21). 우리 중에 혹 가룟 유다처럼 빛을 등지고 어두움에 사로잡혀 캄캄한 길을 걷고 있는 사람은 없는 것인가? 가룟 유다의 결국이 되지 않도록 회개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72) 주님이 얻으신 영광

(요한복음 13:31-33)

서 론 : 예수님의 구속사역은 성삼위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실 일을 눈앞에 두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실 때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과 하나님의 영광은 서로 깊은 연관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아들은 아버지로 인하여 영광을 얻고 아버지는 아들로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는 것입니다.

1.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다.

예수님은 미래적인 사건이나 사실에 대하여 현재적으로 표현하실 때가 많으셨습니다.

(1) 인자가 영광을 얻었다고 하신 그 영광은 그의 부활하심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죽으심은 죄인을 대신하여 죽으신 그의 가장 낮아지심이십니다. 이 부활로 주님은 그가 바로 하나님이심을 증거 하시게 되었습니다.

(2) 예수님이 영광을 얻었다고 하신 그 영광은 그의 높아지심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높아지심은 그의 부활과 승천을 가리킵니다. 주님의 승천은 곧 그가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에 앉으실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3) 예수님이 영광을 얻었다고 하신 말씀은 만물의 모든 권세를 받으신 사실을 가리키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28:18).

2. 하나님이 얻으신 영광

예수님은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 하나님은 그 아들로 인하여 사랑을 나타내심으로 영광을 얻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죄인을 위한 희생제물이 되심으로 아버지의 사랑을 나타내셨고 이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얻게 하셨습니다.

(2)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통하여 그의 뜻을 이루셨으므로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으신 것입니다(요6:40).

(3) 하나님은 그 아들로 인하여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심으로 영광을 얻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예수를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롬3:25-26).

3. 아버지와 아들의 상호적인 영광관계

예수님은 이곳에서 아들과 아버지와의 영광을 연결시킴으로 아들이신 예수님이 아버지와 동등의 영광을 가지신 분임을 나타내셨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저로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다면 하나님도 자기로 인하여 저에게 영광을 주시리라”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그러면 아들이신 예수님은 어떻게 이런 영광을 하나님으로 얻게 하셨으며, 하나님이 예수님께 영광을 주시게 된 연유는 어디서 비롯된 것인가?

(1) 예수님은 그 영광의 보좌를 스스로 포기하시고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죄인의 모습인 인간으로 태어나심으로 이 일을 이루셨습니다. “모든 만물이 예수로 말미암아 창조함을 받았고 또 그를 위하여 만들어졌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분이 이 세상에서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마구간에 태어나신 일, 시련과 고난을 당하시되 묵묵히 참으신 일, 비방과 모함 속에서 그의 생애를 지내신 일, 죄 없이 정죄하심을 받아 십자가 형틀의 처절한 형벌을 받으신 일, 그의 이 같은 낮아지심이 하나님으로 영광을 얻으시게 하셨으며 또 아버지로부터 영광을 받으시게 하셨던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일만을 하여 드리므로 이 일을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에서 이처럼 아뢰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7:4).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마지막으로 외치신 “다 이루었다”고 하신 말씀이야말로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뜻을 다 이루었다고 하신 외침이었습니다.

(3)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에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이 일을 이루셨습니다.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빌2:8). 예수님은 아버지로 영광을 얻으시게 하시기 위해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결 론 : 우리가 이 말씀으로 깨달아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통하여 영광을 얻으시기를 기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① 우리가 하나님이 보내신 그의 독생자를 믿을 때, 우리 하나님은 영광을 얻으시고 우리에게 그의 영광을 주시는데 이 영광이 곧 영생의 면류관입니다(요5:24). ② 그리고 우리가 주님을 위해 고난을 받을 때 하나님은 이 같은 영광을 얻으시고 우리에게도 그의 영광을 주십니다(마5:10-12). ③ 우리가 우리에게 오는 시험을 잘 참을 때 또한 그러한 것입니다(약1:12). ④ 우리들이 많은 열매를 맺을 때 또한 이런 영광을 받게 된다고 하셨습니다(요15:8).


(73) 새 계명

(요한복음 13:34-35)

서 론 :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새 계명이란 말을 쓰셨습니다. 새 계명이란 말은 분명히 옛 계명이란 말과 구별된 말입니다. 인류에게는 새 계명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옛 계명은 인간에게 의를 줄 수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정죄함을 주기 때문이며 우리는 이제 의문에 쓴 율법적인 옛 계명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신 의에 합당한 새로운 계명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새 계명에 대하여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우리에게 새롭게 주신 계명은 사랑입니다.


1. 율법에 나타나 있는 두 면

율법에는 겉으로 드러난 면이 있었고 속에 숨겨진 면이 있었습니다. 나타난 면을 율법 혹은 계명이라고 부르고 숨겨진 면을 사랑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숨겨진 이 새 계명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들어 나게 되었습니다.

(1) 이스라엘은 율법에 숨겨진 면을 바라보지 못하고 나타난 면만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율법에서 의를 얻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에서 의를 얻지 못하고 오히려 그 율법 때문에 정죄를 받게 되었습니다.

(2) 그러면 율법에 숨겨진 면이란 무엇인가? 예수님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율법을 주신 참 뜻이 정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있었다는 점을 들어내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톰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율법에서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새 계명을 밝혀 내신 것입니다(마22:37-40).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겉으로 나타난 면을 바라보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인 사실을 발견하고, 나타나지 아니한 또 다른 면,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보고 그 사랑을 받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에서 속죄의 제사로 나타났고 신약에 와서 속죄 제물 되신 그리스도의 피로써 하나님의 영원한 의를 나타내신 것입니다.


2. 새 계명이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는 왜 제자들에게 새 계명이란 말씀으로 계명 앞에 “새”자를 불이셨습니까? 새롭다라고 하는 이 새란 말은 ‘카이노스’로 새로운, 신선한, 전에 없었던 일이란 뜻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곧 사랑입니다. 이스라엘은 율법에서 사랑을 발견하지 못하고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고 하는 보복적인 요소만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새 계명에 대하여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란 단서를 부침으로 우리가 나타내야 할 사랑이 ‘아가페’의 사랑임을 밝히셨습니다.

(1) 새 계명이라고 주신 주님의 사랑은 자신을 낮추신 사랑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위해 스스로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의 몸을 입으시기까지 낮추셨고(요1:14)

(2) 새 계명이라 하신 주님의 사랑은 원수 되었을 때 오히려 사람을 나타내신 그 사랑을 말합니다(롬5:8).

(3) 죄인을 위해 스스로 고난을 당하신 그의 사랑을 말합니다(사53:5).

(4)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는 그의 사랑이십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바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한 회생이셨습니다. 그의 회생의 피는 우리의 모든 죄를 영원히 용서해 주시기 위하신 것이었습니다(히9:12-14).


3.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

사랑에 한정된 대상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형제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은 특별히 그리스도의 제자 됨을 나타내기 위한 사랑을 말씀하시면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들의 사랑 중에 그 무엇보다도 귀하고 아름다운 사랑은 형제들에 대한 사랑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1) 이 사랑은 서로 죄를 용서해 주는 사랑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형제가 죄를 범했을 때 일혼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18:21-22).

(2) 이 사랑은 형제의 허물을 덮어 주는 사랑을 말합니다.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운다고 하셨습니다(잠10:12, 17:19).

(3) 이 사랑은 서로 자신을 낮추고 서로 대접해 주는 사랑입니다. 형제를 자기보다 낫게 여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 론 :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사랑을 내 형제들에게 나타낼 수 있는 것인가? 첫째로 나를 향하신 주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서는 주님의 사랑을 나타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는 그리스도인의 사랑으로 세상에 냄새를 풍깁니다. 예수님은 이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지고 서로 사랑하는 성도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74)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요한복음 13:36-38)

서 론 :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디론가 떠나가실 것 같은 말씀을 하셨기 때문에 제자들은 이 같은 주님의 태도에 대하여 매우 근심스러워 했습니다. “소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터이나 그러나 일찍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 이르노라”고 하신 말씀에 자신들을 버리고 떠나 가실지도 모를 주님의 향방에 대하여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33). 그러므로 베드로는 이때 주님을 향하여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고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1.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하신 말씀은 그가 잠시 후에 받으실 십자가의 고난으로 그들에게서 떠나시게 될 일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이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인가에 대하여 전혀 깨달음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주님의 말씀을 따라 짐작으로 안 것은 다음 몇 가지 점입니다.

(1) 예수님은 어디론가 가실 계획을 세우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나를 찾는다” “나의 가는 곳”이란 말씀은 분명히 어느 곳으로 떠나실 계획이 있으심을 나타낸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2) 예수님이 가시려는 곳은 자기들이 따라 갈 수 없는 곳인 줄로 알고 있었습니다. “너희는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는 말씀에서 그들은 예수님이 가시려고 계획하신 곳은 매우 위험스러운 곳으로 예수님은 자기들을 따돌리고 가시려고 생각하시는 줄로 생각했습니다.

(3) 예수님은 함께 갈 수도 없고 찾을 수도 없는 곳에 혼자 가시려는 마음을 굳힌 줄로 알고 있었습니다. 궁금하고 답답하여 마음이 터질 듯한 베드로가 노골적으로 질문했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 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는 주님을 향하여 “주여 지금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고 장담했습니다.

2. “주를 위해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고 장담한 베드로는 나중에 주님을 배신한 일에 가슴을 치며 통회했습니다.

(1) 베드로의 장담은 예수님이 가신다고 하신 그 길이 무슨 길인지 모른 데서 나온 것입니다. 만약 베드로가 주님이 가신다고 하신 그 길이 십자가를 지시는 고난의 길임을 알았더라면 결코 이 같은 장담을 입밖에 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2) 베드로는 예수님이 지셔야 할 고난의 잔이 무엇인지 전혀 몰랐기 때문에 어디든지 따라가겠노라고 장담했습니다. 자기가 한 말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경솔히 서원 하거나 맹세하는 일은 삼가 해야 할 일입니다. “함부로 이 물건을 거룩하다 하여 서원하고 그 후에 살피면 그것이 그물이 되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잠20:25).

(3) 베드로는 육신의 생각으로 주님을 따르려고 했기 때문에 장담했습니다. 우리의 육신은 영의 일을 하기에 무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인 능력으로 주의 일을 해야 합니다. 베드로의 성품은 과격하고 의협심이 강했기 때문에 그의 이 같은 말은 육신의 생각으로는 진실하고 거짓이 없는 말이었지만 영적인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엉뚱한 결과를 초래했던 것입니다.

(4) 베드로는 자신의 믿음의 분량과 영적 능력의 한계를 몰랐습니다. 베드로의 이런 무지가 자기의 교만을 불러왔습니다. 교회에서 어떤 일을 계기로 은혜를 받으면 “자기는 주를 위해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영적인 자만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 그 사람은 반드시 넘어집니다.

3. 주님의 대답

“자기 목숨까지”라도 버릴 것이라고 하는 베드로의 맹세를 들으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나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그가 버리기는커녕 오히려 배반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그처럼 무력하게 그들의 손에 붙잡히고 십자가에 달리게 되실 줄을 몰랐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그의 권능으로 원수의 무리들을 섬멸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 상황이라면 자신도 주님 편에서 죽을 각오로 싸워 보겠다는 심산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지금은 따라 올 수 없으나 후에는 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 론 :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닭소리는 새벽에 시간을 알리는 소리입니다. 유대인들은 저녁 시간을 6시로부터 9시, 자정을 9시-12시, 닭 우는 시간을 12시-3시, 아침 시간을 3시-6시까지 잡았습니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나중에 그에게 회개할 수 있는 말씀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가신 길을 겸손히 따라가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