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新約]강해/◆ 사복음서 · 사도행전 강해-1

사도행전 13-21장 ◆ 밤중소리

영국신사77 2020. 4. 12. 21:11

사도행전 차례

 땅끝까지 전파되는 복음.................13:1-28:31

1. 제1차 전도여행.........................13:1-14:28

2. 예루살렘 공의회........................15:1-35

3. 제2차 전도여행.........................15:36-18:22

4. 제3차 전도여행.........................18:23-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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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제목차례

사도행전 13장(45~52)

(45) 안디옥 교회에 내리신 성령의 지시(사도행전 13 : 1 - 3)

(46) 거짓 선지자에게 나타난 바울의 권능(사도행전 13 : 4 - 12 )

(47) 다윗의 씨가 되신 예수(사도행전 13 : 13 - 23)

(48) 선지자들의 예언대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관(사도행전 13 : 24 - 35)

(49) 이 사람을 힘 입어(사도행전 13 : 36 - 41)

(50) 은혜 가운데 있으라(사도행전 13 : 42 - 43)

(51)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사도행전 13 : 44 - 48)

(52) 복음과 핍박(사도행전 13 : 49 - 52)


사도행전 14장(53~55)

(53) 복음과 고난(사도행전 14 : 1 - 7)

(54) 구원 받을만한 믿음(사도행전 14 : 8 - 18)

(55) 하나님 나라와 많은 환난(사도행전 14 : 19 - 28)


사도행전 15장(56~59)

(56) 율법주의자와의 변론(사도행전 15 : 1 - 11)

(57) 네 가지 금기 사항(사도행전 15 : 12 - 21)

(58) 인정 받은 바울과 바나바(사도행전 15 : 22 - 29)

(59) 바울과 바나바의 다툼(사도행전 15 : 30 - 41)


사도행전 16장(60~66)

(60) 디모데의 등장(사도행전 16 : 1 - 5)

(61) 전도와 성령의 허락(사도행전 16 : 6 - 10)

(62) 루디아의 믿음(사도행전 16 : 11 - 15)

(63) 마음 문을 여시는 예수님(사도행전 16 : 14 - 15)

(64) 귀신은 어떤 존재인가?(사도행전 16 : 16 - 18)

(65) 기도하고 찬미한 바울과 실라(사도행전 16 : 19 - 26)

(66) 주 예수를 믿으라(사도행전 16 : 25 - 40)


사도행전 17장(67~69)

(67) 성경에 철저한 신앙(사도행전 17 : 1 - 9)

(68) 베뢰아 성도들의 모범(사도행전 17 : 10 - 15)

(69) 아덴 사람의 종교심(사도행전 17 : 16 - 34)


사도행전 18장(70~74)

(70) 바울의 자비량(사도행전 18 : 1 - 4)

(71) 두려워 말며 잠잠하지 말라(사도행전 18 : 5 - 10)

(72)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 바울(사도행전 18 : 11)

(73) 하나님의 뜻을 따른 바울(사도행전 18 : 12 - 23)

(74) 아볼로의 부족(사도행전 18 : 24 - 28)


사도행전 19장(75~78)

(75)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사도행전 19 : 1 - 7)

(76) 바울의 강론과 권면(사도행전 19 : 8 - 10)

(77) 바울이 행한 하나님의 권능(사도행전 19 : 11 - 20)

(78) 에베소의 소요 사건(사도행전 19 : 21 - 41)


사도행전 20장(79~84)

(79) 유두고의 실패(사도행전 20 : 1 - 12)

(80) 모범적인 목회자(사도행전 20 : 13 - 21)

(81) 바울이 피력한 그의 사명(사도행전 20 : 22 - 27)

(82)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사도행전 20 : 28)

(83) 일깨어 기억하라(사도행전 20 : 29 : 32)

(84) 주는 자의 복(사도행전 20 : 33 - 38)


사도행전 21장(85~86)

(85)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사도행전 21 : 13 - 14)

(86) 예루살렘에서 당한 바울의 결박(사도행전 21 : 15 -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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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3장(45~52)

◆ 밤중소리 11-06 | VIEW : 3,544

(45) 안디옥 교회에 내리신 성령의 지시(사도행전 13 : 1 - 3)

(46) 거짓 선지자에게 나타난 바울의 권능(사도행전 13 : 4 - 12 )

(47) 다윗의 씨가 되신 예수(사도행전 13 : 13 - 23)

(48) 선지자들의 예언대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관(사도행전 13 : 24 - 35)

(49) 이 사람을 힘 입어(사도행전 13 : 36 - 41)

(50) 은혜 가운데 있으라(사도행전 13 : 42 - 43)

(51)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사도행전 13 : 44 - 48)

(52) 복음과 핍박(사도행전 13 : 49 - 52)


(45) 안디옥 교회에 내리신 성령의 지시

(사도행전 13 : 1 - 3)


안디옥 교회는 바나바와 바울의 성실한 목회에 힘입어 급성장하여 어느덧 선교사를 파송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일은 복음 사역의 중심자가 예루살렘 교회에서 안디옥 교회로 옮겨지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베드로의 활동은 숨겨지고 안디옥에서 파송된 바울의 활동무대로 전개되는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들은 복음을 위하여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들이 이처럼 금식하며 기도할 때 성령의 지시가 내려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는 교회에 사명을 주십니다.


1. 주를 섬겨 금식한 안디옥 교회

안디옥 교회에는 주님이 사용하실 일꾼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복음전파의 사명을 위해 늘 금식하며 기도하는 중에 있었습니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복음 선교는 언제나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성령의 지시를 받기 위해 기도하는 일이야말로 복음 선교에 선행되어야 할 일인 것입니다. 주님을 섬기는 방법도 여러 가지입니다. 그런데 안디옥 교회에서는 금식으로 주님을 섬겼다고 했습니다. 금식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로 일관해야 합니다.

다른 이에게 보이려는 금식은 외식하는 금식으로 금식의 효과가 없습니다. 주의 일을 위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기 위한 간절함에서 하는 금식이야말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인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바나바나 바울에 의해 세워진 교회가 아닙니다.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예루살렘 교회의 환난으로 안디옥까지 이르게 된 다른 주님의 제자들에 의해 복음이 전파되어 세워졌습니다(행11:19-20).

바나바는 그 곳에 파송 받은 사람이요 바울은 바나바의 도움의 요청으로 다소에서 올라온 동역자입니다. 그런데 이 교회가 성장함에 따라 많은 일꾼이 생겼고 특히 바나바나 바울의 오른 팔처럼 일하는 일꾼들이 많았습니다. 이 일꾼들을 두 종류로 구분해서 소개하고 있는데 선지자와 교사로 나누고 있는 것입니다.

(1) 안디옥 교회의 선지자직은 바나바와 시므온과 루기오입니다. 선지자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자로 성경이 다 기록되기까지 하나님께서는 각 교회에 이같은 선지자적 직분을 주셨던 것입니다. 이들은 성령에 의해 예언하는 일을 담당하게 된 것입니다. 많은 성경 주석가들은 이들을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과 동일한 인물로 지목하고 있습니다(막15:21). 어떤 사람들은 루기오를 누가와 동일 인물로 여기지만 아무런 근거가 없습니다.

(2) 교사직은 사울과 마나엔이 맡은 직분입니다. 교사한 말은 그 범위가 대단히 넓습니다. 교사라고 하는 디다스칼로스( )란 말은 누구를 가르친다고 하는 말에서 나온 말로 선생님 혹은 스승으로 불려진 이름입니다. 교회에서는 가르치는 직분이 가장 중요한 직분으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의 마나엔이란 사람은 헤롯의 젖 동생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 헤롯이란 인물은 헤롯 안디바를 가리키는 것으로 예수님의 생존시에 유다 지방의 분봉왕으로 있었던 자입니다. 젖 동생이란 친형제가 아니라 그 안디바의 가정에서 헤롯과 함께 자라난 관계에 있었던 사람임을 말합니다.


2. 성령의 지시

이같은 안디옥 교회에 성령의 지시가 내렸습니다. 주님을 섬기기 위해 금식한 기도의 응답이 성령의 지시로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기도를 하면 하나님의 응답이 반드시 따른다고 하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응답이 성령의 지시로 내려졌습니다.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같은 성령의 사역을 통해서 성삼위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1) 성부 하나님은 그의 섭리와 경륜으로 구원 받을 자들을 택정하시고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2) 성자 하나님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자신을 낮추시어 세상에 오셨고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십자가에 죄인을 위한 대속 제물로 죽으셨습니다.

(3) 성령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의 보내심을 받아 세상에 오셔서 죄인을 부르시고 진리로 이끄시며 거듭나게 하시고 구원의 사역을 이루도록 일꾼을 부르시고 복음을 전파하게 하십니다. 이런 일은 성부 하나님 안에서 성삼위께서 함께 하셨고 성자 하나님 안에서 성삼위께서 함께 하셨으며 성령 하나님 안에서 성삼위께서 함께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죄인을 구원하시는 일에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성삼위 일체로 완전하게 그 뜻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에서는 이 두 사람을 위해 계속하여 금식하며 기도하고 안수한 후, 그 사명을 위해 파송했습니다. 그들은 사명을 받은 후, 안일한 생각을 가지고 임지로 떠난 것이 아닙니다. 그 사명을 이루기 위해 금식하며 계속해서 기도한 것입니다.


결론 : 우리 한국에도 이 안디옥 교회처럼 선교적인 사명을 받은 교회가 많이 생겨서 복음이 전달되지 아니한 세계 오지에 유능한 선교사들을 파송하여 선교적 사명을 이루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안디오 교회와 같은 기도가 따라야 할 것입니다.


(46) 거짓 선지자에게 나타난 바울의 권능

(사도행전 13 : 4 - 12 )

특별한 성교적 사명을 띠고 안디옥 교회를 떠나 살라미에 이른 바나바와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했습니다. 이처럼 초대 교회 성도들은 성령의 지시와 철저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것은 성령 안에서의 복음 활동입니다. 주의 복음은 성령의 역사하심에 따라 성령의 지시와 인도하심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1. 바울을 대적한 거짓 선지자

바나바와 바울은 그 곳 섬 가운데로 지나면서 바보란 곳에 이르렀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은 그 지역 총독으로 있는 서기오 바울을 만나 주의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이 서기오 총독은 지혜 있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바나바와 바울로부터 복음을 듣고는 그들을 불러 더 자세한 진리를 알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므로 서기오 총독이 하나님을 알려고 복음에 귀를 기우린 일은 지혜로운 일이라고 보겠습니다.

그런데 서기오 총독으로 복음을 따르지 못하도록 하는 사탄의 역사가 따랐습니다. 바예수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 박수가 이 서기오 총독과 함께 있으면서 바나바와 바울을 대적하면서 훼방했습니다. '바예수'란 이름은 예수의 아들이란 뜻으로 이 자는 유대인의 거짓 선지자라고 했습니다.

예수란 이름이 붙어 있지만 예수님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자로 그 당시 유대인들 중에는 예수란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예수란 이름은 '여호수아'의 음역으로 여호수아란 이름의 의미는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는 뜻으로 이런 이름은 유대이들 중에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거짓 선지자의 정체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거짓 선지자란 하나님이 하라고 명하지 아니한 말을 하나님의 이름이나 다른 신의 이름으로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고하라고 명하지 아니한 말을 어떤 선지자가 만일 방자히 내 이름으로 고하든지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면 그 선지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신18:20).

거짓 선지자의 특징은 성경에 없는 말을 전하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인양 다른 사람으로 믿게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보고 들은바를 말하기 때문에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전할지 모르지만 거짓 선지자들이 바로 이같은 수법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더욱 기막힌 일은 그들은 자신들을 거짓 선지자로 인정을 하지 않을뿐더러 정말로 하나님의 선지자인 줄 알고 있다는 사살입니다. 이스라엘의 아합왕은 많은 선지자들을 데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짓말하는 영들의 지배를 받은 거짓 선지자들이었습니다. 미가야란 하나님의 종이 왕에게 전쟁터에 나가지 말 것을 경종했지만 왕은 미가야의 말을 듣지 않고 자신에게 유리하게 예언해 주는 거짓 선지자들의 말을 듣고 행동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전쟁터에 나갔다가 참패하여 죽게 되었습니다.

(2) 초혼자나 복술자나 길흉을 말하는 자는 거짓 선지자들입니다. '그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복술자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의 중에 용납하지 말라 무릇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나니 이런 가증한 일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 내시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신18:10-12). 죽은 자의 혼을 불러 내는 자가 초혼자입니다. 길흉을 말하는 자란 인생사에 있어서 길한 일니나 흉한 일에 대해 예언해 주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복음은 예언이란 이름 아래 길흉을 점치는 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의 부활하심을 전하여 사람으로 생명을 얻게 하는 일입니다.


2. 예수에게 나타난 바울의 권능

바나바와 바울을 대적한 이 바예수라고 하는 엘루마 박수에게 드디어 바울로부터 저주가 내려졌습니다. 바울은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 이 하나님의 대적자를 향하여 '모든 궤계와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소경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 즉시로 안개와 어두움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구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이같은 권능을 행했을 때의 모습을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에게 이같은 권능을 행할 수 있도록 그 때 성령으로 충만함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할 일은 사울의 이름이 바울이란 이름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9절 말씀을 보면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라고 했습니다. 사울에게는 원래가 두 개의 이름이 있었습니다.

사울이란 이름은 그가 유대인으로 베냐민 지파에 속한 사람으로 이 이름을 사용하였고 바울이란 이름은 라틴어로 '작다'란 뜻으로 그가 로마 시민권을 가지면서 부쳐진 이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울이란 이름은 유대인 사회에서 기독교의 핍박자로 잘 알려졌던 이름이요 그가 본격적인 복음 사역에 나서면서 이 이름을 버리고 바울이란 이름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결론 :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바예수와 같은 거짓 선지자들이 깔려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들을 구별해하며 그들이 맺는 열매를 보고 잘 분별하여 미혹을 받지 말도록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는 자신의 모습을 숨기고 양의 옷을 입고 나오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들의 정체에 대하여 경계하시면서 우리에게 경종해 주셨습니다.


(47) 다윗의 씨가 되신 예수

(사도행전 13 : 13 - 23)

바울의 복음을 위한 행보가 빨라졌습니다. 성령의 지시에 의해 일행과 함께 살라미에 이른 바울은 그 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다시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를 거쳐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제 바울은 세게를 그의 선교지로 하여 활동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버가에서 마가라고 하는 요한이 일행에서 떨어지는 변고가 일어났습니다.

그 이유는 설명이 없지만 어린 요한에게는 힘겨운 전도 여행이어서 집 생각이 나서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간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런데 이 일이 나중에 바울과 바나바가 선교 여행을 위해 동행자를 결정할 때 크게 디툼을 갖게 한 한 원인이 되어 아시아 지역 선교에 중대한 영향을 가져온 것입니다.. (행15:36-41).


1. 바울의 설교

바울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안식일을 맞아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에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 회당의 예배 순서에 따라 화당장의 권고에 의해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곳에서 바울은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란 말로 하나님이 만민 중에서 이스라엘을 택하신 일에 대한 뜻을 풀이해 나갔습니다.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이같은 설교에서 전하고저 한 뜻은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이스라엘로부터 메시야를 태어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를 설명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의 자손을 약속하실 때에 '네 씨'라고 하신 것을 바로 그로부터 태어나실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밝혀 주고 있는 것입니다(갈3:16). 우리가 알아야 할 사항은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씨를 통해서 메시야를 태어나게 하시기 위해 특별히 선택 받은 백성이란 사실입니다. 결국 그들은 메시야를 태어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었지만 그들 자신은 메시야를 믿지 아니하므로 버림을 당하기에 이른 것입니다(롬11:19-20).

우리가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을지라도 불신 가운데 처하면 하나님의 뜻만을 이루어 드리고 자신은 버림을 당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항상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복음 전도자의 사명을 이루어나갔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고전9:27).


2.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게 하심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된 일에 대하여 언급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언약의 땅을 주지 아니하시고 애굽에서 나그네 생활을 하도록 하신 것은 이스라엘에게 반드시 있어야 할 일로 성경에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첫째로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관용하지 않았다는데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한 국가이건 한 개인이건 그를 심판하시는 일에 오래 참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회개하고 버려야지 그 죄를 자꾸 쌓으면 회개의 시기를 잃어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2)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권능을 보여 주시려는데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보여 주셨던 하나님의 권능이 오랜 옛날의 일이었지만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 권능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이름이 온 땅위에 펼쳐져 있는 것입니다. 만약 이스라엘의 출애굽이 없었던들 이런 하나님의 권능은 나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

(3)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은 교회 생활의 그림자로 보여 주셨으며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할 것을 교훈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오기까지 광야에서 패역한 길을 걸어 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그 패역함을 참으시고 가나안에 이끌어 들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에서 선지자 사무엘까지 사사를 주셨으며 그 후에 이스라엘이 왕을 구하게 되어 사울을 그들의 왕으로 40여년간 주셨다가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그 다윗의 씨에서 하나님의 약속하신 대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태어나게 하셨는데 그 메기야가 예수 그리스도이라고 증거했습니다. 사무엘이 이새의 집에서 다윗을 만났을 때에 증거하시기를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1) 다윗은 진실한 사람이었음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진실한 사람을 그의 일꾼으로 쓰십니다.

(2) 다윗은 맡은 일에 충성된 사람이었음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아비의 집에서 양을 지킬 때에 나타낸 용맹과 충성심은 다윗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릴 수 있는 적격한 인물이었습니다.

(3) 다윗은 회개의 사람이었음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를 범한 후 그 죄를 위하여 하나님께 드린 회개를 볼 때 눈물로 밤새도록 침상을 적셨다고 했습니다.


결론 : 하나님은 이런 다윗을 통하여 당신의 뜻을 이루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내 뜻이라고 하신 하나님의 뜻은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언약을 말합니다. 이 언약을 다윗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신 것입니다.


(48) 선지자들의 예언대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관

(사도행전 13 : 24 - 35)

유대인들에게 복음 전하는 일에 필요한 증거는 예수께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분이란 사실을 나타내는 일입니다. 유대인이나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은 메시야를 기다렸으며 그 메시야가 다윗의 자손으로 온다고 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믿고 있었습니다. 예수가 유대인들이 기다리고 있는 메시야이심을 성경적으로 증거하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바울은 이같은 일의 증거로 선지자들과 다윗의 예언의 말씀을 인용하므로 누구도 변박할 수 없는 증거로 삼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은 그리스도의 당하신 고난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선지자들과 다윗이 예언한 메시야의 예언과 결부시키는 논법을 사용한 것입니다.


1. 세례 요한이 증거한 메시야

예수의 메시야된 증거는 세례 요한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세례 요한이 선지자임을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유대인들은 혹 세례 요한이 메시야가 아닌가? 기대 했을 때, 그는 분명히 밝히기를 '나는 메시야가 아니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있으니 나는 그 발의 신을 풀기도 감당치 못하리라'고 말하고 제자들 앞에서 예수님을 가리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고 증거했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께서 메시야되심을 알게 된 것은 그에게 하나님의 계시가 나타나 요한이 세례를 줄 때 누구든지 성령이 내려서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 이가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줄 알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전도 연설을 열심히 듣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이제 더 적극적인 논법으로 예수가 고난을 당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고 그것이 결과적으로 성경을 응하게 함으로 예수가 메시야이심이 증거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1) 유대인의 관원들은 예수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진리를 증거하신 예수를 몰랐습니다. 예수님은 진리로 이 땅에 오신 분이시므로 그의 말씀과 그의 증거는 모두 진리였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의 말씀을 진리로 받아 드리지 아니했습니다. 예수님은 요8:45절에서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믿지 아니하는도다'고 하시면서 진리를 거역하는

유대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들이 예수를 보고 알 수 있었던 일은 그가 목수의 요셉의 아들이란 점과 그의 형제들이 자기들 중에 그들과 함께 있다고 하는 사실뿐이었습니다.

그들은 또한 많은 표적으로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신 예수에 대하여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이 증거한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다고 하시면서 '아버지 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나의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같은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되신 증거에 대하여 '저가 귀신의 왕을 빙자하여 귀신을 쫓아낸다'고 모함했던 것입니다.

(2) 그들은 또한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선지자의 말이란 그 아들에 관한 증거를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은 그 마음이 완악한 연고로 선지자들이 전한 아들에 관한 예언을 믿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완악했던 것은 많은 군중들이 예수를 따르는데 대한 시기에서 왔습니다.


2. 그의 부활로 드러난 메시야의 증거

바울은 ''성경에 저를 가리켜 기록한 말씀을 다 응하게 한 것이라'고 했는데 그것이 그리스도의 고난의 죽으심과 죽음을 이기신 부활이라고 증거한 것입니다.

(1)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일은 성경에 응하신 일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같은 이사야의 증거가 예수로 인하여 그대로 이루어 짐으로 이 예수야말로 선지자들이 증거한 이스라엘의 메시야이심을 나타내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2) 예수의 다시 살아나심도 성경에 응하신 일입니다. 바울은 시편 2편에 기록된 말씀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고 하신 말씀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뜻하는 것임을 바울은 영감으로 밝혔습니다. 그리스도의 다시 살아나신 일은 수많은 증인들과 목격자들이 있습니다.

(3) 예수의 부활에 대하여 다윗이 영감으로 받은 두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는 시2:7절에 있는 말씀대로 육신으로 죽으신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다시 살려내신 일에 대하여 '내가 너를 낳았다'고 하신 말씀으로 나타내신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다윗이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고 영감으로 예언한 말씀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말한 이 예언의 대상은 다윗을 말하지 않고 있음이 분명한 것은 다윗은 그 후 죽어서 썩음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결론 : 우리는 성경을 배우면 배울수록 그 성경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라'고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처럼 자기들의 메시야를 성경대로 죽이는 완악함으로 버림을 당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겸손히 주님께 순종하고 믿고 따라야 할 것입니다.


(49) 이 사람을 힘 입어

(사도행전 13 : 36 - 41)

이제 바울의 전도 설교는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언제나 설교는 복음으로 결론을 내려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율법으로 얻을 수 없는 하나님의 의와 죄사함의 은혜가 이 예수로 말미암아 그를 힘입어 얻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만약 사람이 이 놀라운 그리스도의 복음을 멸시한다면 여러 선지자들로 경종하신 그 놀랄만한 예언이 그들에게 이를 것이라고 경종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 것입니다.


1. 이 사람을 힘입어

바울은 예수가 선지자들이 예언한 이스라엘의 메시야이신 사실을 그의 죽으심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부활을 통해서 명쾌하게 나타냈습니다.

(1) 바울은 예수를 '이 사람'이라고 말함으로써 그가 이스라엘의 메시야이심을 증거했습니다. 이 사람이란 이스라엘을 위해 세우신 다윗의 씨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씨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고 했습니다.

(2) 이 사람이란 바로 세례 요한이 증거한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요한이 그 달려갈 길을 마칠 때에 말하되 나를 누구로 생각하느냐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있으니 나는 그의 신을 풀기도 감당치 못하리라'고 말한 그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라고 증거한 것입니다.

(3) 이 사람이란 선지자로 증거한 메시야이심을 증거한 말입니다.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저희 관원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고 말한 그 사람이 '이 사람'이라고 증거한 것입니다.

(4) 바울은 이스라엘의 관원들이 빌라도에게 호소하여 십자가에서 죽인 예수, 이 사람이 바로 이스라엘이 기다린 메시야라고 증거했습니다.

(5) 이 사람이란 다윗이 예언하여 증거한 대로 썩음을 당하지 않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를 말하고 있음을 가리켰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만이 이스라엘의 확실한 메시야이시며, 인류의 구세주가 되시는 분입니다. 이 사람만이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 되심에 대하여 바울은 이처럼 증거한 것입니다.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했습니다(행4:12).

(6) 바울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사함과 의롭다하심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 사람 예수를 힘입어 얻을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두 가지 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이 사람을 힘입어 죄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죄는 율법으로도 양심으로도 사함을 받을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사람 예수를 힘입어 이같은 죄의 사유함을 받는다고 증거했습니다.

다음에 바울은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하심을 얻는 이것이라고 했습니다. 의롭다란 말은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설 수 있는 의로움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예수님이 소유하시는 하나님의 의를 그를 믿는 자에게 은혜로 주시기 때문에 이 사람 예수로 말미암아 죄인이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2. 멸시하는 자들이 받을 화

바울은 전도설교를 선지자의 글을 인용하여 복음을 멸시하는 자들에 대한 무서운 경종을 들려 주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바울이 인용한 선지자의 글은 하박국이 이스라엘을 향하여 경종했던 예언입니다(합1:5).

(1) 복음을 멸시하는 자들은 놀라고 망하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말씀을 증거하는 그 자리에서 이 말씀을 듣는 무리 가운데서 얼마간의 유대인들로부터 멸시하는 듯한 거부 반응을 받았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에 대한 엄중한 경종을 내린 것입니다. 멸시한다는 말은 업신여긴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전한 구원의 도리를 업신여기는 자는 구제의 소망이 없는 자들입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놀라고 망하라고 저주한 것입니다.

놀란다는 말은 다우마조( )로 이상이 여긴다는 뜻입니다. 복음은 듣고 믿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이지 그것을 이상히 여기는 자는 망하는 것입니다. 망한다는 말의 압하니조( )는 없어지다 멸망한다는 의미로 영원한 멸망을 가리킵니다. 사도 요한은 이처럼 말씀했습니다.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2) 복음을 멸시하는 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 더 많은 것을 이룰지라도 도무지 믿지 아니할 것이라고 경종했습니다. 믿음으로 의를 얻고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는 일을 업수이 여겨 복음을 멸시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때를 당하여 한 일을 행하실 것은 다른 어떤 사람일지라도 그들에게 이같은 사실을 계속 들려주고 경종할지라도 도무지 믿지 못하게 하심으로 결국은 이상하게 여기다가 망하게 될 것이라고 경종한 것입니다.


결론 : 복음은 믿는 자에게 죄 사람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 놀라운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 사람'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만이 주어집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복음을 거역함으로 망하는 자가 되지 말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50) 은혜 가운데 있으라

(사도행전 13 : 42 - 43)

바울의 안디옥 회당에서의 전도 설교는 듣는 사람들로부터 많은 공감을 샀습니다. 이 복음을 들은 유대인들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은 더 자세한 말씀을 듣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고 청한 것입니다. 경건이란 말은 세보( )란 헬라어로 그 기본 동사는 예배한다, 공경한다는 뜻입니다. 경건한 사람이란 하나님을 잘 예배하는 사람, 하나님을 잘 공경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데서 나온 말입니다.

1. 하나님의 은혜

바울은 자기를 따른 경건한 사람들에게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고 권면했습니다. 있으란 말은 헬라어도 머무르다, 체재하다, 묵다의 뜻으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할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1) 복음은 은혜의 선물입니다. 복음과 은혜는 떨어질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은혜 곧 카리스( )란 말은 원래가 돌려 받을 것을 기대하지 않고 값없이 베푸는 호의로써 이 말의 뜻이 하나님이 죄인에게 베푸시는 사랑과 일치하기 때문에 기독교에서 종교적인 용어로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값없이 죄사함과 의로우심을 주셨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떠나고서는 은혜란 말은 전혀 무의미한 것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에게 은혜로우신 분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에게 그 은혜를 크게 나타내셨습니다.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에게 의를 주실 뿐 아니라 그 자녀로 삼으시고 그 아들과 함께 기업의 후사가 되게 하시려고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리하여 그 아들을 믿는 자에게 이같은 축복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은혜를 받았다는 말은 이같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일을말합니다.

(2)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값없이 주신 구원으로 나타났습니다. 죄인이 구원을 받는 일은 온전히 주 예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은 줄을 믿노라'고 말씀했습니다(행15:11). 여기서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말은 구원이 우리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값없이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란 뜻입니다.

(3) 하나님의 선택도 하나님의 은혜에 속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복된 그의 백성들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예정과 복된 선택을 인정하려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은혜로 우리에게 주셨다면 그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사람들도 은혜로 산택하셨다고 하는 일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롬11:5).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는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은 사람에게만 나타나며 이들은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택함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찬송히라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주시되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엡1:3-5).


2. 은혜 가운데 있으라

바울이 그들에게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고 권한 말씀은 은혜안에 영주하라는 뜻으로 은혜에 붙어서 떠나지 말라는 권면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에서 떠나면 아무런 소망도 없습니다. 멸망만이 기다릴 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에는 그 아무것도 침범할 수 없으며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1) 예수 안에 거하는 생활은 은혜에 붙어 있는 생활입니다.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어 말라진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은혜의 주체가 되시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생활이 은혜 안에서의 생활인 것입니다.

(2) 예수 안에 붙어 있는 생활은 열매를 맺는 생활입니다.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머무르고 있는 사실을 무엇을 알 수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한가지로밖에 증거 될 수 없으며 그 증거가 그리스도 안에서의 열매인 것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하셨습니다(요15:5). 하나님이 우리를 죄악 가운데서 구원해 주신 것은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신다'고 경종하셨습니다.


결론 : 우리는 지금 우리가 서있는 자리가 과연 어디인가에 대하여 살펴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 했숩니다(고후13:5). 어떤 사람은 예수를 믿으면서도 이 은혜의 자리에서 떠나 세상 사람들이 서있는 세상에 그대로 머물러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우리는 영원토록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

서 떠나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생활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51)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

(사도행전 13 : 44 - 48)

우리는 복음을 전하지만 때로는 실망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전한 복음의 열매가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니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만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만이 그 복음을 받아 드려 영생에 이른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1. 유대인들의 시기

비시디아 안디옥 회당에서의 전도 설교는 대단한 반응을 보여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성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회당에 모였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유대인들이 이 큰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드디어 바울 일행을 핍박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들이 시기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을 것입니다.

(1) 이방인들이 회당을 찾아온 목적이 유대교로 개종하려는 목적에서가 아니라 바울의 설교를 듣기 위해서였기 때문입니다.

(2) 유대인들인 자신들의 성스러운 회당이 반 율법적인 교훈의 장소로 제공된 일에 대해 마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3) 바울이 자기들의 회당을 예수를 전하는 전도의 장소로 활용하는 일에 대하여 대단한 분격을 가졌을 것입니다. 율법을 가르치는 회당에서 율법으로는 구원을 받지 못하고 예수의 이름을 힙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설교를 더 이상 용납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바울 일행이 자신들에게 유익이 안되고 오히려 큰 손상을 준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때 그들을 더 이상 방관할 수 없었습니다.


2. 영생을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는 유대인들

바울과 유대인들간의 갑론을박으로 이제 비시디아 안디옥 회당 안은 난장 판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더 이상 그들과의 변론이 무익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결론적으로 담대히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유대인들은 바울이 말한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전함을 받을 사람들이었지만 스스로 그것을 거역한 것입니다.

(1) 그들이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전함 받을 사람들이란 사실은 구원이 유대인들로부터 나왔기 때문입니다

(요4:22). 예수님은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마땅히 이 구원의 기쁜 소식을 먼저 듣고 복음을 받아드려 복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같은 특권을 스스로 포기한 것입니다.

(2)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사람들입니다.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고 했습니다(롬3:1-2).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들에게만 주셨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맡아 오늘날까지 간수해 왔고 그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는 민족입니다. 그러면서도 그 말씀의 생명이 되는 그리스도를 거역한 것입니다.

(3) 메시야에 대한 약속은 원래가 유대인들에게 주신 언약이십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언약을 스스로 거역하고 그들의 메시야를 십자가에 매다는 죄까지 범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같은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그들에게 이 특권을 버리고 그들 스스로가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했다'고 책망한 것입니다. 바울이 유대인들을 떠나 이방인에게로 향하여 이 복음을 전할 것이라고 했을 때 이 말을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예정을 결정적으로 나타낸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들이 있는데 이처럼 하나님이 작정하신 그 사람들은 다 예수를 믿어 구원에 이른다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영생이란 말은 보에 아이오니오스( )로 장차 올 시대의 생명을 뜻합니다. 이 생명은 부활의 생명으로 영생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 자에게 그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부활한 몸은 아니지만 그 부활의 생명만큼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영생의 대상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창세전에 하나님에 의하여 예정된 자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하나님의 예정을 입었다면 하나님은 그에게 반드시 복음을 통해서 부르신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양을 찾으시는 목자의 음성으로 복음을 들려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예정된 자를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사람 자신도 자신의 택하심에 대하여 알지 못합니다. 바울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지만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분은 주님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느 곳에서나 아무에게나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 하나님은 그의 택하신 자들을 반드시 부르십니다. 그러나 그 부르심의 시기와 장소는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바울은 그 지경에서 쫓겨났지만 그들이 전한 복음은 이미 그 온전히 전해져서 하나님이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구원에 이른 것입니다.


(52) 복음과 핍박

(사도행전 13 : 49 - 52)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일로 환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핍박과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러면 초대교회 사도들이나 성도들 그리고 모든 시대의 성도들은 왜 핍박을 받으며 복음을 전한 것입니까?. 왜 복음을 전하는 일에는 핍박이 따르는 것인가? 그리스도인들은 이 문제에 대한 올바른 견해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1. 복음을 전하는 일에 고난이 따랐던 이유

고난 가운에서 한평생 복음을 전해 온 바울은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대로 기독교는 고난의 종교라고 불리우리만치 많은 고난의 길을 걸어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고난의 상급은 바로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 약속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말도 복음을 위해 받는 그리스도인들의 고난을 의미합니다.'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신 말씀도 복음을 위한 고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복음이 처음 전파되는 곳엔 핍박이 아울러 따릅니다. 기독교 역사를 살펴 볼 때 어느 시대나 어느 국가에서나 동일했습니다. 이런 고난이나 핍박은 복음이 처음 우리들 가정에 들어올 때도 어둠의 권세를 통해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일에 대해서 예수님은 마10:34-36절 말씀에서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고 하셨습니다.

(1) 이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은 사탄이 복음을 전하는 일을 방해하기 위해서입니다. 복음은 사탄의 권세인 사망 권세를 내쫓는 일을 하기 때문에 사탄은 복음에 호의적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2) 복음을 전하는 일에 핍박과 고난이 따르는 일은 하나님의 편에서 볼 때 복음을 전하는 일에 반드시 있어야 할 일입니다. 교회에 핍박이 내려야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하나님께서는 핍박자들을 통하여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으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잠16:4).


2. 핍박을 당한 바울의 태도

바나바와 바울 일행은 이런 핍박을 당한 중에 어떤 태도를 가졌습니까? 이에 대한 그들의 태도를 살펴보고 우리의 거울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핍박을 받으며 복음을 전하는 그들에게 기쁨이 충만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무슨 일로 그들에게 기쁨이 있었던 것입니까? 그 이유는 그들이 그리스도를 위해 핍박을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받았다고 하는 일에서입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정말로 주를 위해 받는 핍박을 기뻐했던 것입니다(행5:41).

능욕을 받아 심한 고통을 당하면서도 기뻐할 수 있었던 일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핍박이 얼마나 귀한 영광이 따르는 일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편 주님을 사랑하는 그들의 마음은 주를 위해 받는 고난이 그렇게도 감사했던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 일에 대해서 벧전4:13-14절에서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안에 계심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또한 성령에 충만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성도들의 성령 충만은 핍박 중에 온다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소망과 상급을 바라보고 핍박을 이겨 나갈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의 충만함을 주시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쫓겨난 바울과 바나바는 비시디아 안디옥을 떠나면서 발의 먼지를 떨어버렸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않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이 세상에 많은 죄가 있지만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까닭없이 핍박하는 자들의 죄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가리킨 주신 것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지상명령입니다. 그리고 이 복음은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져 있는 하늘의 메시지입니다. 이 복음은 죽은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하거나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핍박하는 일은 하나님 앞에 무서운 범죄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면에 잘못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받을 하나님의 심판도 매우 큰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해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도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으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자들을 집에 영접하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고 경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 :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 사도 시대나 처음 복음이 전파되었던 그런 핍박이나 고난의 시대는 아닙니다. 만약 이처럼 복음을 저하기에 좋은 시대에 우리의 입을 막고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얼마나 부끄러운 존재들입니까? 믿음의 선조를 따라 살자.


사도행전 14장(53~55)

◆ 밤중소리 11-06 | VIEW : 2,811

(53) 복음과 고난(사도행전 14 : 1 - 7)

(54) 구원 받을만한 믿음(사도행전 14 : 8 - 18)

(55) 하나님 나라와 많은 환난(사도행전 14 : 19 - 28)


(53) 복음과 고난

(사도행전 14 : 1 - 7)

초대교회에서 복음과 고난은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고난 없이 복음을 전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딤후1:8).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당하는 고난이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것이라면 말할 수 없는 축복이 되기 때문에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은 많은 믿음의 선진들은 고난 중에도 굴하지 않고 복음의 전도자로서의 사명을 끝까지 감당했습니다. 성경에서는 우리가 고난을 받아야 할 일에 대하여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8:17).


1. 둘로 갈라지는 복음의 역사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유대인들의 핍박을 받은 바울과 바나바는 결국 그 지경에서 쫓겨나서 이고니온 지방으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바울과 바나바는 복음을 위해 이곳 저곳 쫓겨다녔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자신의 고난이나 죽음을 조금도 두려워 아니하고 담대했습니다. 이고니온으로 간 바울과 바나바는 그 곳 유대인의 회당에서 오랜 기간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복음을 전한 이고니온의 반응은 대단히 좋았습니다.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탄의 역사는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 곳에도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여 능욕하며 돌로 치려는 위험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곳에 반드시 그 복음으로 말미암은 정반대의 세력이 등장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바울은 이처럼 말했습니다.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라고 했습니다(고후2:16). 그 뿐 아니라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은 어두움인데 복음이라고 하는 빛이 세상에 비췰 때 어둠의 반항이 핍박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2. 담대한 전도인과 함께 하시는 주의 힘

두 전도인은 이고니온에서 주의 말씀을 담대히 증거했습니다. 핍박하는 악한 무리들이 많았지만 그들은 인내로 오래 머무르면서 그들에게 맡겨진 복음 전파의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그러면 이들은 어떻게 담대함을 가지고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까? '주를 힘입어' 했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우리가 주님을 의뢰할 때 주를 힘입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에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의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고 했습니다(사12:2). 여호와를 의뢰한다는 말은 그의 말씀을 따른다는 뜻입니다(시119:42).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는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흔들림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마음을 견고히 붙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2) 우리가 주님을 바라볼 때 주를 힘입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일은 새 힘을 얻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 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고 했습니다(사40:31). 그리스도인들은 마땅히 주님을 바라보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주님을 바라본다는 말은 위엣 것을 찾는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그 곳에 소망을 두며 그를 위하여 살아가는 생활이야말로 주님을 바라보는 생활인 것입니다.

(3) 하나님은 주를 힘입어 복음을 담대하게 전하는 종들에게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십니다. 초대교회에는 표적과 기사가 복음에 뒤따랐습니다. 그 당시에는 아직 성경이 완성되지 못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 못했으며 핍박자가 많았기 때문에 효과 있게 복음을 전하려면 표적과 기사를 보이셔야 했습니다.

① 이런 표적과 기사는 주를 힘입을 때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능력을 나타내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② 이런 표적과 기사는 또한 담대히 말씀을 증거할 때 그 말씀 가운데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표적과 기사는 언제나 말씀과 병행합니다. 여기서 복음을 전하는 우리의 지세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표적과 기사의 힘으로 복음을 전하려는 유혹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이나 사도들은 그들이 복음을 전할 때 한번도 표적과 기사에 의지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일은 다만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전심으로 전하는 자에게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가 사명감을 가지고 주님을 힘입어 담대히 주의 말씀을 전하면 주님의 손길이 때때로 나타나셔서 우리를 붙들어 주시고 혹은 표적과 기사를 나타내시어 더욱 큰 은혜를 내리시는 것입니다.


결론 :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원들의 무리로 된 악한 자들이 두 사도를 능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들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 곳에서 도망하여 다른 지방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54) 구원 받을만한 믿음

(사도행전 14 : 8 - 18)

바울과 바나바는 이고니온에서 쫓겨난 후, 루스드라와 데베지방으로 가서 다시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이나 바나바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 쉬는 일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 이유로 바울의 세 가지 고백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내가 빚진 자라'고 말한 것처럼 하나님께 빚진 자의 무거운 책임감으로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롬1:14).

다음에 바울은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다'고 말할 것처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화를 받을 것이라고 하는 두려움에서 전했습니다(고전9:16). 세 번째로 바울은 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따르는 하늘의 상급을 바라본 것입니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고 말할 것처럼 이 복음 전파의 상급이 얼마나 크다는 것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디다(엡3:14)


1. 앉은뱅이의 믿음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할 때 한 앉은뱅이가 바울이 말하는 것을 열심히 듣고 있었습니다. 이 앉은뱅이는 나면서부터 앉은증뱅이가 되어 걸어 본 일이 없는 자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그의 모습에서 무엇인가 그에게 숨겨진 비밀한 믿음을 찾아 냈습니다. '바울이 구원 받을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현장에 나타나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열심히 들었습니다. 바울은 그의 진지한 모습에서 그에게 구원 받을만한 믿음이 있는 것으 발견한 것입니다.

구원 받을만한 믿음과 그렇지 못한 믿음은 말씀을 들을 떄 말씀을 받아 드리는 그의 표전에서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에서 트집을 잡으려는 사람들은 말씀에서 은혜는 고사하고 걸려 넘어지는 돌이 될 것입니다. 베릐아 사람들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는 태도야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듣는 자세인 것입니다. 구원 받을만한 믿음은 죄에 대한 통회하는 마음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통회하는 마음이 생겨 하나님 앞에 회개하게 될 때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고 했습니다(히4:12-13). 예수님이 중풍병자를 향하여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실 때 주님은 이미 그 중풍병자가 그 마음으로 통회하고 있는 사실을 발견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이 앉은뱅이의 심령에서 자신의 죄에 대해 회개하여 통회하고 있는 사실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2. 복음을 전하는 이유

앉은뱅이를 일으킨 일은 루스드라에 큰 소동을 가저오게 했습니다. 무리들이 바울의 행한 희한한 일을 보고 놀란나머지 소리 질러 말하기를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 오셨다 하여 바나바는 쓰스라고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임으로 허메라고 했습니다. 그들 중 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관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들과 함께 제사를 드리고자 하므로 바울과 바나바는 놀라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 그들의 이같은 일이 잘못된 일임을 책망하면서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말렸습니다.


(1) 바울은 그들에게 말하기를 복음을 그들에게 전하는 것은 이같은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신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함임을 증거했습니다. 바울이나 바나바는 그들이 놀랄만한 희한한 일을 했지만 그들은 신이 아닙니다. 신이 아닌 사람이나 우상에게 경배하거나 제사를 드리는 일은 헛된 일입니다. 죄값으로 죽어야 할 사람들이나 할 일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살아계신 하난께로 돌아게 하는 일인 것입니다.

(2) 바울은 또한 지나간 날에는 이같은 행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묵인하셨으나 그 때에도 하나님이 자기를 인생들에게 나타내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지나날에는 묵인하셨다고 하는 말은 용서해 주셨다거나 용서 받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떠나 그 상태대로 놔 두심으로 그들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때는 아직 은혜의 복음이 전파될 시기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 아들로 말미암은 복음이 전해지기 전에는 강퍅한 인간의 마음을 그대로 놔 두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에도 하나님은 하늘에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사 인생들로 음식과 기쁨을 갖게 하셔서 인생들로 만족한 생애를 살아가도록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지 아니하였으며 감사할 줄도 몰랐습니다.


결론 : 오늘 말씀에 등장한 앉은뱅이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의 생애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한 마음으로 들은 것이 그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된 원인이 된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이나 변화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중에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고 말씀을 들을 때 진지하게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55) 하나님 나라와 많은 환난

(사도행전 14 : 19 - 28)

바울은 복음을 위하여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받았습니다.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바울을 해치기 위하여 루스드라에까지 온 유대인들에 의하여 바울은 돌로 침을 당했습니다. 바울은 이들이 던지는 돌에 맞아 한동안 기절한 상태에서 죽은 듯이 보였기 때문에 죽은 줄로 알고 성밖에 끌어 내쳤다고 했습니다. 바울의 제자들은 바울이 죽은줄로 알고 슬픔과 걱정 속에서 오랫동안 바울이 내쳐진 자리에 머물러 서 있었습니다. 이 때 바울이 그 자리에서 일어나 이튿날 다시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갔습니다. 바울은 마치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는 오뚜기 처럼 또 일어나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1. 복음을 위한 바울의 새로운 생애

우리가 회심 후에 나타낸 바울의 생애를 바라볼 때 참으로 놀라운 면을 볼 수 있게 됩니다. 바울은 그의 생애 전부를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헌신했던 것입니다.

(1) 바울은 그리스도를 알게 된 후, 그의 생의 목표가 바뀌었습니다. 인생에게 자기 생애에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그 목표를 위해 자기 삶을 경영하는 일은 보람 있는 일입니다. 그러면 바울의 자기 인생의 최고의 생애의 목표는 무엇이었습니까? 바울은 이처럼 고백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갈2:20). 성령으로 새롭게 된 사람은 예수를 영접한 후로는 그의 인생의 새로운 목표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

(2) 바울은 하늘의 상급을 위한 삶이 그의 남은 생애의 전부라고 믿었습니다. 성경에서 이 땅위에서 살아가는 인생의 가치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인생이 이 세상을 살아갈 동안은 그 생각에 따라 화려하고 보람 있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의 종국은 너무나도 참담한 것입니다. 그의 생명이 풀과 같이 마르는 것입니다. 그의 부귀영화의 영광이 마치 풀의 꽃과 같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사람이 죽은후에 자신에게 무엇이 올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알 수 있다면 인생으로 살아가는 그 자체가 하나의 저주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죄값은 사망이며 그 결국은 지옥에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우리의 생애에 하나님의 빛이 들어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들어갈 수 있는 천국을 소유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이 나라를 분명히 바라보고 자기는 차라리 육신의 장막을 벗어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를 원한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 생애을 위해 다름질 하는 사람은 모두 썩어질 면류관을 얻는 무의미한 경주를 하지만 바울이 바라본 면류관은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그의 생애를 바친 것입니다.


2.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바울은 베데에서 복음을 전한 후,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제자들에게 믿음을 굳게 하라고 권면했습니다. 그의 권면은 마음을 굳게 하여 믿음에 거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거해야 할 곳은 오지 믿음입니다. 믿음을 떠나서는 설 수 있는 땅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요15:5절에서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믿음 안에 거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굳게 해야 합니다. 굳게 한다는 말은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다진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그 어떤 침입자도 들어 올 수 없도록 다져져야 하는 것입니다. 다음에 큰 바위처럼 어떤 바람이나 풍랑에도 움직이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 당시에 복음을 전하는 일에는 유대인의 박해가 따랐기 때문입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이 유대인들의 율법적인 도전을 받지 않고는 복음을 전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이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능력은 오지 믿음에만 있습니다. 다음에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인내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오직 보이이 않는 소망을 향하여 달려가는 일입니다. 이같은 그리스도인의 삶은 인내 없이는 달려갈 수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제자들에게 권고하기를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 나라란 우리 인생의 종착역인 천국을 가리킨 표현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는 어둠의 세력과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 바울은 인디옥에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고하고 제자들과 함께 오래도록 그 곳에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방인에게 믿음의 문을 여셨다는 말은 이방인의 때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방인의 때는 이스라엘을 버리는 그 시리로부터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재림때까지 계속됩니다.

우리는 아직까지 이방인의 때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복음을 땅끝까지 전해야 할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5장(56~59)

(56) 율법주의자와의 변론(사도행전 15 : 1 - 11)

(57) 네 가지 금기 사항(사도행전 15 : 12 - 21)

(58) 인정 받은 바울과 바나바(사도행전 15 : 22 - 29)

(59) 바울과 바나바의 다툼(사도행전 15 : 30 - 41)


(56) 율법주의자와의 변론

(사도행전 15 : 1 - 11)

복음의 적은 교회 안에 도사리고 있을 때가 많은 것입니다. 교회 안에 있었던 할례당과 율법주의자들로 인하여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일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초대교회는 유대인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그들 중에는 율법에 열심이 있는 바리새파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들은 교회에서 공개적으로 '이방인에게 할례를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이런 율법주의적인 복음을 당연시했으며 이런 사상을 가진 유대인들을 이방인들의 교회로 보내어 이런 교훈을 주장하므로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복음의 교리를 흔들었습니다.

이런 현상은 특히 갈라디아 교회의 경우 더욱 심했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편지하기를 '사람이 의룹게 되는 일은 율법의 행위에서가 아니라 오직 믿음'에서 나는 것임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책망하기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했습니다(갈3:1-2).


1. 안디옥 교회에서 일어난 변론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안디옥에 내려 왔습니다. 이들은 할례당에 속한 사람이거나 율법에 열심 있는 교인들로 잘못된 구원관을 가지고 바울이 복음을 전파한 여러 곳을 찾아 다니면서 교회를 흔들어 놓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말인즉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고 선동했습니다. 이런 그들의 주장은 믿음의 성장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구원에 관한 문제였기 때문에 아주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그들의 주장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그들은 마치 예루살렘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파송된듯한 권위를 가지고 그들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이 일로 바울과 그들과 심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 것입니다.

(1) 유대로부터 온 자들의 주장은 할례를 구원의 필수 조건으로 보았습니다. 할례란 곧 이방인들이 유대교에 입교하는 필수적인 의식에 속해 있습니다. 그것을 복음에도 똑같이 적용시킨 것입니다. 그들은 복음을 율법처럼 유대인들에게만 주신 구원의 특권인줄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이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으려면 할례를 받아 먼저 유대교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복음 운동을 유대교의 새로운 개혁 운동 차원에서 인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2) 그러나 바울의 주장은 이신득의였습니다. 율법으로는 사람이 절대로 구원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구원에는 율법적인 요소가 필요 없으므로 율법이 복음에 개입되는 것을 단호히 배척했습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사람이 절대로 구원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구원에는 율법적인 요소가 필요치 않다'고 주장한 것입니다(갈2:16). '무릇 율법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갈3:10).


2. 예루살렘 교회로 넘어간 변론

그러나 이같은 변론은 안디옥에서 결론이 나올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이론도 강력했으며 바울의 반론에 고개 숙일 그들이 아니었습니다. 드디어 그들은 이 문제의 최종적인 결론을 사도들에 의해 내리고저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사도들과 장로들이 중심이 되어 관장하고 있었으며 모든 선교의 시달이 이곳에서부터 내려졌기 때문에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는 대단히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사도들과 장로들이 이 일로 모여 많은 변론이 오고 갔습니다. 이 자리에서 바리새파 중에 속한 자들은 한결같이 '이방인에게 할례를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했습니다.

다음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경험담으로부터 들려 주었습니다. 베드로는 이방인 고넬료의 경우를 들어 서두를 꺼냈습니다. 그가 약 10년전에 고넬료의 집에 갔을 때에 그들은 이방인이요 아직 유대교에 입교되지 아니한 사람이었으므로 할례도 받은 일이 없고 율법적 생활도 철저히 하지 못했을 그런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베드로를 그에게 보내셔서 복음을 전하게 하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일을 상기시키면서 이방인들의 마음을 오직 믿음으로 깨끗케 하신다는 사실을 주장했습니다. 베드로는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느냐고 책망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다 믿음으로 깨끗함을 받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복음으로 밝히셨는데도 할례를 받게 하고 율법을 지키는 일을 구원을 얻는 일에 결부시키는 일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결론 : 베드로는 결론적으로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 줄을 믿노라'고 했습니다. 이런 베드로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한명도 없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구원의 교리는 그 무엇으로도 무너뜨릴 수 없는 것입니다.


(57) 네 가지 금기 사항

(사도행전 15 : 12 - 21)

이방인의 선교 사역에 난점이 드러나 복음 전파에 문제가 되자 이 일을 토의하기 위해 예루살렘 교회의 중진들이 한곳에 모였습니다. '사도와 장로들이 모여 많은 변론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 회의의 주제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은 전할 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과 병행하여 할례를 받으며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이 문제가 심각했던 것은 바리새파에 속한 일부 유대인들이 이같은 율법적인 사항을 구원에 결부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고 말함으로써 이방인들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온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으며 바울이 애써 닥아 놓은 이방인의 교회를 혼란의 도가니로 흔들어 놓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초대교회 시대에 이 구원론에 대해 얼머나 교리적으로 체계가 잡히지 않았는가를 알 수 있으며 이신득의의 확고한 구원관을 세운 바울의 노고에 다시 한번 그의 위대함을 치하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1. 아고보의 결론

처음 베드로가 등단하여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고 말하므로 토의의 방향을 올바로 잡았으며 다음에 야고보가 이 모든 토론의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이 야고보는 주님의 형제를 말합니다. 그가 어떻게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적 위치에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밝혀진바 가 없지만 전하는 말에 의하면 야고보가 예수님의 동생이란 사실과 그의 존결 받을 만한 성품, 탁월한 능력과 지도적인 영향력에 대해서 아무도 의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으로 보아 그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적 위치에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1) 베드로의 말과 선지자의 말씀이 합하다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말한바 이방인들 중,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을 부르셔서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받게 하신 것은 선지자들로 예언하신 말씀과 일치된다는 사실을 아모스의 예언을 인용하여 증거했습니다.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라고 예언된 말씀은 다윗 왕국의 재건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것은 다윗왕의 왕위를 이어 다윗집의 영원한 왕이 되실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왕권을 가지고 그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통해서 그의 백성들을 일으키셨습니다.

(2)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이방인들을 괴롭게 말라고 했습니다. 야고보 장로는 예루살렘 교회의 최고 지도자적인 입장에서 그의 결론적인 의견을 개진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만으로 구원을 받아야 할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받게 하거나 율법을 지키는 일을 구원에 결부시킨다면 이런 일은 하나님의 말씀에도 어긋나거니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이방인들을 괴롭히는 일이 되기 때문에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가하다'고 했습니다. 야고보가 이곳에서 자신의 견해로 지적한 네 가지 금기 사항은 구원에 따르는 조건인 것은 아닙니다.

다만 야고보가 제시한 그의 견해는 하나님의 교회에서 이방인들과 유대인들간의 원만한 교통을 위한 건덕상 규정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2. 야고보가 말한 네 가지 의견

야고보는 네 의견이란 말로 네 가지 금기 사랑을 말할 때 그의 권위로써 모든 회중을 압도했습니다.

(1) 우상의 더러운 것을 금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우상의 제물을 먹지 말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방인들은 우상의 제물과 접촉할 기회가 많이 있습니다. 우상의 제물은 율법의 금기 사항이기 이전에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들에게는 신앙적인 양심에 과한 문제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 먹어도 되는 것처럼 언급한 것으로 말하지만 바울도 우상의 제물인줄 알고도 그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 정죄하고 있는 것입니다(고전10:20-21, 27-29).

(2) 음행을 금하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음행에 대하여 율법적인 엄격한 규제를 받고 있지만 이방인 사회에서는 음행이 널리 성행되고 있었습니다.

(3) 목메어 죽인 것을 멀리하라고 했습니다. 짐승을 목메어 죽이는 일은 이방인들 간에 일반화된 방벙이었습니다. 이같은 일을 금하라고 한 이유는 잔인한 살생 방법과 피를 빼지 않고 먹는 일은 율법이전에 성경에서 금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창9:3-5).


결론 :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에 있어서 따라야 할 하나의 윤리적인 생활 강령으로 이처럼 네 가지 금기 사항을 야고보가 제시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방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일에 그 어떤 이유에서나 장애 요인을 원치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은혜로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시는데 할례나 율법의 규제로 주 앞으로 나오는 길을 막는다면 이것은 그 사람을 실족시키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주 앞에 나오는 심령들에게 기쁨과 감사와 평안함을 얻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58) 인정 받은 바울과 바나바

(사도행전 15 : 22 - 29)

야고보의 의견은 예루살렘 교회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습니다.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메어 죽이는 것과 피를 멀리 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가하니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니라'고 의견을 제시한 것이 그대로 전체 회의의 합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이같은 결정 사항을 속히 안디옥 교회를 비롯한 여러 이방인들의 교회에 보내기 위하여 사람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가결하였는데 파송자로 뽑힌 사람이 바사바라고 하는 유다와 실라였습니다. 바사바는 유스도라고 하는 별명을 가진 요셉이요 실라는 실루아노로써 바울의 계속적인 동역자로 성경에 등장하며 이들 두 명은 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지도적인 위치에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1. 편지를 보내게 된 이유

아디옥, 수리아, 길리기아 교회에 보낸 예루살렘 교회의 편지는 할례와 모세의 율법에 열심이 있어서 율법적인 복음을 전하는 유대교파 사람들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고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복음을 전한 바울과 바나바에게 있어서 승리를 안겨 준 것입니다. 그러나 이같은 현상을 잠정적인 것이요 바울은 그의 복음을 전하는 전 생애를 통해서 계속적으로 유대인들의 율법적인 도전을 받아 온 것입니다.

(1) 이 편지의 서두는 이방인 형제들에 대한 문안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사도와 장로된 형제들은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문안하노라'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와 장로들은 이들 이방인 교인들에게 '형제'들이라고 불렀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구원에 있어서 이스라엘에게 특권이 주어져 있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성경에는 그 어떤 특권도 주어진 사실을 지적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어떤 경우에나 율법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한 바울의 말은(롬11:26) 이스라엘이 가지고 있는 어떤 특권이 아니라 그들이 종말에 예수를 영접하므로 얻을 남은 자들의 구원에 관한 예언인 것입니다. 그들의 구원은 혈통적인 우위나 율법적인 혜택으로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의 이름을 믿음으로' 이방인들과 아무런 차별이 없이 구원함을 얻게 되는 것임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2) 교회에서 시킨 일도 없는 일꾼들이 일을 저질렀다고 했습니다.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시킨 것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혹하게 한다 하기로'라고 한 말에서 사도들과 장로들은 교회에서 시킨 일이 없는 자들의 단독적인 처사에 대하여 위험신호를 보냈습니다. 이방인 교회에 찾아가서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한 무리들은 어떤 이단적인 단체에서 파송된 무리였던 것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저지른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아닌 예루살렘 교회의 중진들이었습니다. 교인들은 교회에서 시킨 일도 없는 일을 자의로 행함으로 교회를 어지럽히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2. 충성된 일꾼으로 인정 받은 바나바와 바울

바나바와 바울은 일부 유대인들의 다른 복음으로 말미암아 교회에서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이에 사도들은 그들에게 바나바와 바울에 대한 신임과 그들이 전한 복음이 참된 복음이었음을 알려 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와 장로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의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이라고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바나바와 바울은 사도들과 장로들에게 인정을 받은 주의 일꾼이 된 것입니다.

(1)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아끼지 아니한 일꾼이였음이 인정 된 것입니다.

(2) 바울은 바른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열심을 내어도 바른 복음이 아니면 그 일이 사탄의 일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분명한 성령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진실한 복음만이 사람을 구원할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바른 복음만이 구원의 확신을 줍니다. 바른 복음을 전하는 일꾼만이 하나님과 교회의 인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

(3) 바울은 받은 사명감에 투철했으므로 인정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빚진 자의 의무감'으로 했습니다. 그는 오직 하늘의 상급만을 바라보고 그의 생애를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이루는 일로 마쳤습니다.


결론 : 이 편지의 마지막은 교회의 결의 사항을 전하는 일이었습니다.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게 아니하는 것이 가한 줄 알았다'고 했습니다. 요긴한 것들이란 예루살렘 교회에서 결의한 네 가지 금기 사항을 가리킵니다. 이같은 사항은 교회를 이루시며 주관하시고 인도하시는 성령의 뜻을 따른 것이므로 사도들은 '성령과 우리'란 말로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59) 바울과 바나바의 다툼

(사도행전 15 : 30 - 41)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에서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인 형제들로 인하여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어려움을 당했지만 예루살렘 교회의 장로들과 사도들이 모인 회의에서 이 문제를 매듭지으므로 바울의 승리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사도와 장로들의 이같은 결정은 곧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급 인물들인 유다와 실라를 통해서 안디옥 교회에 편지로 전해졌고 바울과 바나바도 그들과 함께 안디옥에 돌아왔습니다. 그 후, 교회는 평온을 되찾았고 바울과 바나바의 능력 있는 놀라운 말씀의 가르침을 통하여 안디옥 교회는 더욱 영적인 부흥을 가져온 것입니다.


1. 안디옥 교회가 받은 위로

장로와 사도들이 안디옥 교회에 보낸 편지는 안디옥 교회에 말할 수 없는 기쁨을 주었습니다. 그 편지에는 위로의 말이 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위로란 말은 파라클레시스( )로 이 말은 부르다(어느 누구의 도움을 청하기 위해)는 말에서 유래된 말로 격려, 위로, 권면이란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1) 성도들에게는 위로가 필요합니다. 인간은 위로를 받아야 살아갈 수 있도록 창조된 존재입니다. 슬픔을 당해도 위로를 베풀어 줄 사람이 없다면 그 사람은 더욱 슬퍼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위로는 그 사람에게 소망을 주고 새 힘을 주며 기쁨을 줍니다.

(2) 하나님은 우리의 참된 위로자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잊고 그들의 대적을 두려워하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하나님은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를 위로하는 자는 나여늘 나여늘 너는 어떠한 자이기에 죽을 사람을 두려워하며 풀 같이 될 인자를 두려워하느냐 하늘을 펴고 땅의 기초를 정하고 너를 지은 자 여호와를 어찌하여 잊어버렸느냐'고 하셨습니다(사51:12-13).

(3)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위로가 됩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위로를 받고자 할 때 하나님은 그의 말씀으로 위로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거나 그 말씀을 모르는 자는 위로를 받을 길이 없는 것입니다.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나로 소망이 있게 하였나이다 이 말씀은 나의 곤란 중에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음이니이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시119:49-50).

(4) 우리는 하나님의 위로의 대리자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받는 위로는 우리로 하여금 능히 환난 중에 있는 다른 형제들을 위로해 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라'고 말씀하셨습니다(고전1:4). 위로는 믿음과 사랑에서 나옵니다.

자기 자신이 어려움에 처해 있으면서도 다른 형제를 위로해 줄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는 사람입니다.

바나바는 그의 이름의 뜻하고 있는 대로 예루살렘 교회의 위로자였습니다(행4:36). 주님은 우리의 위로의 주님이십니다. 슬퍼하며 근심하는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오셔서 그 말씀안에서 위로를 받으시고 그 위로를 통해서 소망과 기쁨과 새힘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2. 바울과 바나바의 다툼

우리는 39절에서 바울과 바나바가 심히 다툰 나머지 피차 갈라져 제각기 복음을 전하였다는 놀라운 말씀을 듣게 됩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주의 복음을 전하는 동역자로 둘이 힘을 다하여 복음을 전하는 일에 하나가 되었던 하나님의 종들입니다. 이들이 서로 다투어 피차 헤어진다는 일은 사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이 서로 다투게 된 원인은 이러했습니다. 바울은 아직까지 자신들의 생명을 다하여 여러 곳에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여 교회들을 세웠는데 그 교회들의 그 후의 소식이 궁금했습니다.

그리하여 그 교회들의 형편을 알아보려는 요량으로 이같은 의견을 바나바에게 전하게 되었고 바나바도 이 일에 찬성하여 곧 떠나기로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일행으로 데려갈 마가의 문제로 바울과 바나바의 의견이 갈라졌습니다. 마가는 바나바의 생질이요 바나바가 매우 사랑하여 주의 일꾼으로 키우려는 의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이번 여행(제2차 전도 여행)에 이 마가를 데려가기를 원했지만 바울은 이같은 바나바의 견해와 달랐습니다. 바울도 마가란 청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마가는 언제인가 바울 일행과 함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여러 곳에 함께 다닌 일이 있었는데 이들이 버가에 이르렀을 때에, 어린 마가는 어려움을 못견디어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일이 있었습니다(행13:5,13). 바울은 이처럼 복음을 전하는 일에 고난을 두려워하고 어려움을 이기지 못하는 마가를 또 데리고 갈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이 문제로 바나바와 바울 둘 사이에는 심한 다툼이 있었고 이 다툼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서로 해어지는 불행을 가져온 것입니다.


결론 :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들의 다툼은 서로가 자신들의 과오를 깨닫게 되어 더욱 주님의 일에 큰 역사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일로 인해 바울은 다른 복음의 일꾼인 실로를 얻게 되었으며 이런 일을 계기로 마가를 더욱 사랑할 수 있게 된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16장(60~66)

◆ 밤중소리 11-06 | VIEW : 7,314

(60) 디모데의 등장(사도행전 16 : 1 - 5)

(61) 전도와 성령의 허락(사도행전 16 : 6 - 10)

(62) 루디아의 믿음(사도행전 16 : 11 - 15)

(63) 마음 문을 여시는 예수님(사도행전 16 : 14 - 15)

(64) 귀신은 어떤 존재인가?(사도행전 16 : 16 - 18)

(65) 기도하고 찬미한 바울과 실라(사도행전 16 : 19 - 26)

(66) 주 예수를 믿으라(사도행전 16 : 25 - 40)


(60) 디모데의 등장

(사도행전 16 : 1 - 5)


제 2차 전도 여행에 마가를 데리고 가느냐 마느냐는 문제로 서로 갈라진 바울과 바나바는 바나바는 자기 조카인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 지방으로 떠나고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주의 일을 수행하는 일에 다투어 갈라진 일은 불행한 일이었지만 이런 일로 인하여 교회를 살피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는 말할 수 없는 유익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서로 헤어졌지만 길리기아 지방을 지나 약 2,3년전에 그들에 의해 세워진 더데와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비시디아 안디옥 등의 교회를 방문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루스드라에서 디모데라고 하는 한 유능한 복음의 사역자를 만나게 됩니다.


1. 디모데의 신앙

디모데에 관한 이야기는 이곳에 처음 등장하지만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라고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대모데가 바울을 그 이전에 만나 본 일이 있으며 바울의 전한 복음을 듣고 이미 바울의 제자가 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재 1차 전도 여행시 그는 이미 디모데가 살고 있는 루스드라에 가서 복음을 전한 사실이 있었습니다. '저희가 알고 도망하여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및 그 근방으로 가서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행14:6,7).


(1) 디모데는 그 지방에서 칭찬을 듣는 청년이었습니다.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자니'라고 2절에서 말씀해 줍니다. 형제들에게 칭찬을 들었다는 말은 하나님의 교회에서 칭찬을 들었다는 뜻입니다.

연소한 디모데가 교회에서 형제들에게 칭찬을 들은 일은 참으로 좋은 일입니다. 그의 충성됨과 그의 인간적인 선함을 보여 주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을 당신의 일꾼으로 쓰십니다. 예루살렘교회에서 초대 집사들을 선출할 때도 필수적인 조건이 칭찬을 듣는 사람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칭찬을 듣기 위해 자신을 속여 거짓으로 꾸미는 행실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목회자들은 이런 사람들에게 속는 일로 교회에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2) 디모데는 거짓이 없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이 이 디모데를 보고 싶었던 심정에 대하여 그에게 보낸 서신에서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고 했습니다(딤후1:5). 진실한 믿음만이 통합니다. 하나님은 진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진실한 믿음을 가진 사람만을 인정하십니다.

(3) 디모데는 하나님으로부터 좋은 은사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하므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한다'고 했습니다(딤후1:6).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위해 유익하게 일할 일꾼에게는 은사를 주십니다.


2. 할례를 받은 디모데

바울은 다모데를 전도 여행자로 데리고 가려고 할 때 그 지경에 있는 유대인을 인하여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했다고 3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할례 의식을 반대하며 이로 인하여 예루살렘까지 올라가 사도들과 장로들의 편지까지 받아온 바울이 디모데에게 할례를 준 일은 무엇인가? 이에 대한 많은 논란이 있지만 그 이유는 다음 몇 가지로 간추릴 수 있습니다.

(1) 디모데의 어미니는 유대인이요 아버지는 헬라인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디모데는 온전한 유대인이었던 것이 아니라 혼혈아였습니다. 어머니는 유대인이었으므로 유대인의 관점으로 볼 때 디모데는 할례를 받아야 유대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 당시 믿는 유대인일지라도 유대인들의 자녀들에게는 계속 할례를 주어 왔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내린 조치는 이방인들에게 내린 조치였으며 할례는 구원과는 상관이 없는 것으로 받아도 그만 받지 않아도 그만이었습니다.

(2) 바울은 디모데에게 할례를 주는 일이 복음 전파를 위해 유익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이 할례를 그토록 반대한 이유는 할례를 구원과 연결시켰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인간의 구원에는 율법에서 나온 할례가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주장했지만 그렇다고 유대인들에게 할례를 받지 말라고 주장한 바는 없습니다. 사실 할례 받는 일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할레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했습니다(고전7:19). 그러므로 바울이 디모데에게 할례를 받게 한 것은 디모데의 어머니가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그에게 할례를 행하지 않고 데리고 다니면 유대인들과 쓸데 없는 충돌을 우려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은 복음을 위한 바울의 신앙 양심에서 나온 바울의 판단에서 나온 것입니다(고전9:20).


결론 : 드디어 디모데는 바울의 동반자가 되었습니다. 바울에게는 큰 힘이 되었고 디모데에게는 하나님의 사역자로서의 위대한 출발점이었습니다. 바울은 여러 성으로 다니면서 격려하며 사도와 장도들의 규례를 가르쳤습니다.


(61) 전도와 성령의 허락

(사도행전 16 : 6 - 10)

바울이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려고 계획한 그의 계획이 성령의 직접적인 간섭으로 인하여 변경된 사실에 대하여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바울이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려는 계획을 막으신 일은 참으로 놀라운 일로 복음을 전하는 모든 우리의 계획이 그 배후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인도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의미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오직 성령의 의지에 따라는 일이며 성령의 뜻을 거역하고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1. 바울의 계획과 성령의 뜻

바울은 그의 제 2차 전도 여행을 아시아 지방에 국한시켜 보려고 했습니다. 자기가 세운 교회의 형편도 살피면서 복음이 전파되지 못한 지역에 복음을 전하려고 한 것입니다. 바울의 이런 계획은 시기에 적절한 지혜로운 방법으로 칭찬 받을 만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같은 바울의 전도 방법에 제동을 거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방법을 따로 가지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아시아 지방을 두루 살피기 위하여 비두니아 지방으로 가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바울로 아시아를 건너 뛰어 유럽 지역으로 보내려고 하신 것입니다. 마게도냐 지방은 지금의 그리스 지역으로 옛날 헬라의 판도입니다. 주전 4세기경 필립왕과 알렉산더 대왕 때 헬라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도시가 마게도냐였습니다.

(1) 하나님께서는 그의 계획을 숨기셨습니다.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고 했습니다(잠25:2).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들의 생각과 계획을 따라 복음을 전하도록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계획을 우리를 통하여 이루실 때 우리의 생각, 우리의 계획에 이르기까지 이미 아시고 당신의 계획 속에 포함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인가 주의 일을 계획할 때는 언제나 이같은 사실을 깨닫고 자기 중심적인 계획을 세우려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그 뜻을 따라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2) 우리는 언제나 잘못이 드러났을 때 곧 그 길을 돌이키는 슬기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우리의 길을 걷고 있지만 우리가 하는 모든 일과 모든 길이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신실한 종은 언제나 주인이 시키시는 일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인의 뜻을 따르는 자세가 종의 자세인 것입니다.


2. 복음 전도와 성령의 사역

바울의 아시아행 복음 전도의 길을 막으신 분이 다른 분이 아니라 성령이시란 사실을 볼 때 성령과 복음 사역과의 특별한 관계를 생갈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은 복음 사역을 위해 보내심을 받은 그리스도의 영이시며 그의 의지와 그의 권능으로 온 세계적으로 복음 사역을 펴시며 주장하시는 것입니다.

(1) 성령을 예수의 영이라고 했습니다. 6절에서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이라고 말씀하고 7절에서 성령을 다른 표현인 '예수의 영'으로 나타낸 일은 주목할 만한 일입니다. 예수는 살려주는 영이라고 했습니다.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라고 말씀했습니다(고전15:45). 살려주는 영은 곧 예수의 영인데 이곳에서 우리는 예수나 예수의 영이나 성령을 동일하신 표현으로 나타내고 있는 사실에서 성령의 인격성과 그의 하나님 되심에 대한 증거를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2) 성령이 바울에게 어떤 방법으로 나타나 아시아로 가려는 바울의 길을 막은 것입니까?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없기 때문에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바울에게 직접적인 방법으로 나타나지 않으신 것만은 확실합니다. 아마도 루스드라 교회에 있는 어느 예언자에 의해 듣게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성령의 뜻은 본인에게 직접적인 방법으로 전해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아내는 일에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방법을 원하지만 그러나 이런 방법은 대단히 위험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에게 말씀하실 때에도 나단 선지자를 보내셔서 그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할 때에도 제사장이나 선지자를 통해서 들려 주셨습니다. 바울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계시가 많았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고자 하셨을 때에 친히 말씀이나 환상으로 하지 아니하신 것입니다.


결론 : 바울은 아시아로 가는 길을 막는 성령의 뜻을 처음에는 따르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비두기아로 가고자 애썼기 때문입니다. 비두기아는 아시아에 있는 지방입니다. 그러나 다시 그 곳에서조차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심으로 무시아를 거쳐 도로아로 내려갔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 때까지 성령이 보내실 곳이 어디인지 몰라 이처럼 방황한 것입니다. 그러다가 드로아에서 비로소 환상으로 마게도냐 사람을 통해서 예수의 영이 보내시려는 곳이 마게도냐인 것을 알고 그 즉시 마게도냐로 가기를 힘썼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주의 일을 하는데 주님이 원하시는 뜻이 따로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내 뜻을 버리고 주님의 뜻을 따르는 지혜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62) 루디아의 믿음

(사도행전 16 : 11 - 15)

바울은 환상 중에 마게도냐 사람이 손짓하여 부르는 모습을 보고 성령께서 친히 마게도냐 지방으로 가라는 지시인 줄 알고 그 곳으로 가기를 힘썼습니다. 바울은 배를 타고 어려운 항해 끝에 마게도냐 해안의 네압볼리에 당도하게 되었고 약 10여마일 떨어져 있는 빌립보로 가게 되었습니다. 빌립보는 마게도냐 지경의 첫 성인데 주전 168년경에 로마의 식민지 구역이 된 곳입니다.


1. 루디아와의 만남

이곳에서 여러 날을 유한 바울 일행은 안식일을 맞아 기도처를 찾아 나섰습니다. 기도처란 유대인이 안식일에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유대인의 회당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기도처를 찾지 못한 것은 이 빌립보 지방에는 유대인의 수효가 작았던가 아니면 유대인이 거주하지 아니한 것으로 짐작 됩니다. 그러다 바울은 강가에 나와 함께 모여 예배 드리는 한 여자의 무리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여인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 동석하여 함께 신앙적인 이야기를 주고 받았습니다.

그들 가운데 루디아라는 여인이 있었는데 이 여인은 두아디라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여자라고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이 루디아는 유대인 여자는 아닙니다. '하나님을 공경하는 여자'란 표현은 이방인으로 유대교에 개종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두아디라는 유대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곳이기 때문에 이 여인이 그 곳에서 유대교에 개종했을 것입니다.

자주 장사인 이 여인은 비교적 부요한 경제력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자주 장사란 하나의 고급 옷감으로 비싸고 귀하게 여겼던 자주빛 옷감을 파는 장사를 말합니다. 바울이 이 여인을 만난 일은 마게도냐 지방에서 첫 번째로 세례를 준 일과 그 녀의 집이 예배처소가 되어 빌립보 교회가 세워진 점에서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1) 루디아는 하나님을 공경하는 여인이었습니다. 자주 장사를 하면서 올바른 신앙 생활을 하기란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루디아는 바울을 만난 그 날도 하나님을 공경하는 다른 여인들과 함께 기도하기 위해 강가에 모여 앉아 있었습니다.

(2) 루디아는 바울의 말을 청종한 여인이었습니다. 청종이란 말의 원어의 뜻을 보면 그 마음을 . . . 에게 돌린다는 뜻이 담긴 말입니다. 루디아는 바울의 입에서 나오는 주님의 말씀에 그의 마음을 돌렸습니다. 바울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에 그의 마음이 온전히 사로잡힌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이 전하는 말씀에 귀를 기우려 그 말씀을 청종하는 일은 귀한 믿음의 사람만이 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의 마음속에 말씀을 통해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3) 루디아는 하나님의 종을 강권하여 자기 집에 유숙케 하여 대접을 아끼지 아니했습니다. 루디아는 복음을 받아 드린후, 즉시 세례를 받았습니다. 아무 것도 주저할 일이 없었습니다. 생명을 얻는 일인데 지체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루디아는 자신 뿐 아니라 자기집 모든 식구들에 이르기까지 세례를 받도록 했습니다.


2. 루다아의 마음을 여신 주님

루디아가 강 가에서 다른 여인과 함께 앉아 있었을 때, 그 자리에 와서 말씀을 전한 바울의 말을 듣고 있었을 때, 주님께서 그 여인의 마음을 여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이요 생명이기 때문에 주님이 마음을 열어 주셔야 그 말씀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의 교훈이나 말씀은 귀가 열려야 들을 수 있습니다. '사람의 귀를 여시고 인치듯 교훈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말씀했습니다(욥33:16).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배움이나 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마음이 열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은 신령한 것을 보이시기 위해 우리의 눈을 여십니다. 아람 왕의 군대가 엘리사를 사로잡기 위해 도단성을 포위했을 때, 이를 두려워하는 종에게 하늘의 군대를 보여주시기 위해 기도했습니다. '여호와여 그 사환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이 기도로 그 종의 눈이 열렸을 때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두르고 있는 광경을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3) 하나님은 우리의 입을 여십니다. 예수님은 벙어리를 향하여 에바다 하시니 그의 혀가 풀어지고 입이 열렸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열리기에 앞서 먼저 우리의 마음이 열려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마음에 합한 사람의 마음을 열어주십니다.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마음을 여십니다. 하나님은 회개한 자의 마음을 열어주십니다.


결론 : 루디아는 바울을 만남으로 그의 생애에 중대한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이제 새로운 신앙 세계로 들어간 것입니다. 40절 말씀을 보면 바울이 옥에서 나온 후, 루디아의 집에 들렀을 때, 그의 집에는 형제들이 함께 있었던 것으로 두리아의 전도 생활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의 이같은 축복은 그의 마음이 열려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한데서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생활, 즉 하나님께 계속적으로 잘 예배드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여시어 그 말씀에 청종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63) 마음 문을 여시는 예수님

(사도행전 16 : 14 - 15)

각 사람에게는 마음 문이 있습니다. 계3:20절 말씀에서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마음은 물론 영적인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이 마음 문을 여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루디아의 마음을 여심으로 바울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그의 마음에 영접하여 구원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1. 닫혀진 마음

인간의 마음은 죄를 범한 후 하나님 앞에서 그 마음이 닫혀졌습니다.

(1)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마음은 닫혀진 마음입니다.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롬1:28). 죄는 우리의 마음과 하나님과의 거리를 멀어지게 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불의를 용납하지 아니하시기 때문에 죄인을 가까이 하실 수 없으며 또한죄인들은 어둠을 가지고 빛되신 하나님을 찾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두기 싫어하는 마음은 인간의 본능적인 마음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이 떠난 인간 본래의 마음은 다른 짐승의 마음이나 별로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2) 인간의 마음은 본래 악하다고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용함과 그 마음의 생각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셨다'고 했습니다(창6:5-6).

(3) 타락한 인간의 마음은 만물보다 더 거짓되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알리요'라고 했습니다(렘17:9). 세상 사람들은 자기 마음을 믿으라고 합니다. 양심이 없는 인간이라고 나무라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처럼 거짓되고 부패한 사람의 마음이나 양심을 믿는 일은 대단히 위험한 일입니다.

(4) 죄인의 마음은 교만합니다. 교만이란 하나님보다 더 높아지려는 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미워하시고 대적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교만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음에서 생기기 때문에 죄인들의 마음에는 이 교만이 도사리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이처럼 다쳐지면 그 마음이 절대로 열릴 수 없습니다. 마음이 다쳐진 채 열리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합니다.

이에 대하여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2:40). 마음이 열려지지 않으면 그 마음이 둔해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막8:17).


2. 마음 문을 여시는 예수님

예수님이 우리의 마음을 노크하시는 방법은 여러 가지입니다.

(1) 첫째로 말씀으로 두드리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마음을 두드리는 방망입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말이 불같지 아니하냐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종들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사람의 마음을 노크하는 것입니다. 루디아도 이같은 말씀의 노크를 받으므로 마음이 열려진 것입니다.

(2) 다음에 성령으로 우리의 마음을 두드리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을 성령의 감동으로 두드리십니다. 예수님은 마음을 여시는 성령의 역사에 대하여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책망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의 책망은 말씀으로 나타나시며 그 책망이 우리의 마음을 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마음은 오직 여시는 분이 계시다는 사실을 보여 주십니다. 우리의 마음의 열쇠는 누가 가지고 계시는 것입니까?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루디아의 마음을 누가 열었다고 하셨습니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었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음 문을 여시고자 먼저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경종하시는 것입니다. 루디아는 하나님을 공경하는 여자였다고 했습니다.

그의 하나님 공경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마음 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그에게 바울을 보내시어 바울을 통하여 복음을 듣게 하시고 성령으로 그의 마음을 찔리게 하시며 통회하는 마음을 주사 닫혀진 루디아의 마음 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마음 문이 열리면 첫번째 나타나는 변화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일입니다.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셨다'고 했습니다(눅24:45).


결론 :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주장하시는 분입니다. 마음을 강퍅하게도 하시고 굳은 마음을 제하기도 하십니다. 우리는 늘 우리의 마음을 주장하시는 주님 앞에 겸손한 자세를 가지고 우리의 마음을 열어주셔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신령한 축복을 바라볼 수 있도록 간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64) 귀신은 어떤 존재인가?

(사도행전 16 : 16 - 18)

종말에 이를수록 귀신의 역사가 강하게 나타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고 한 말씀에서 귀신의 존재가 교회의 심각한 문제임을 가리켜 주고 있는 것입니다.


1. 바울이 만난 귀신 들린 여자

바울이 빌립보에 머물러 있는 동안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 여종은 귀신을 통해 점을 치는 여인으로 그 주인에게 많은 돈벌이를 해 주므로 크게 유익을 준다고 했습니다. 이 여자가 바울을 향하여 소리질러 이르기를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고 하면서 이런 말을 여러 날에 걸쳐 되풀이 하므로 바울이 심히 괴로워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 여인은 무슨 일로 이처럼 바울을 따라다니며 여러 날 동안 바울의 신분을 알려주며 그를 높여 주는 일을 했으며 바울은 이런 일에 왜 괴로워한 것입니까? 이것은 사탄이 바울로 하여금 교만한 마음을 가지게 하려는 간계에서 나온 것입니다. 사탄은 자신을 속여 천사의 모습으로 보이려고 한 것입니다. 이 여종에게 있었던 귀신은 이런 방법으로 자신을 광명한 천사로 가장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영 분별의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그 여종의 실체를 이미 간파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귀신의 역사를 구태여 막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의 경우는 자신과 연관되어 이처럼 괴롬을 주고 있었기 때문에 괴로워하게 되었고 그 귀신을 내 쫓기에 이른 것입니다.


2. 귀신의 문제

귀신에 대한 신학적 견해는 두 가지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한가지 견해는 귀신은 본래가 마귀와 함께 타락하여 하늘에서 쫓겨 내려온 타락한 천사의 존재라는 설입니다. 이런 주장은 성경에 합당한 주장으로 정통적인 교회에서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다른 한가지 견해는 귀신을 사탄이 타락한 천사들인 것이 아니라 죽은 사람들의 영혼이라고 주장하는 설입니다.

이 두 가지 주장은 그 기원이 고대로 올라가는데 귀신을 타락한 영적 피조물로 해석하는 견해는 성경적인 견해지만 죽은 사람의 영혼이 귀신이 되어 활동한다는 주장은 이방 세계에서 널리 퍼져 있는 미신적인 견해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 철학자들이 나 종파에서 이런 주장을 해 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문제는 대단히 심각한 문제로 만약 귀신이 죽은 자의 영혼이라면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기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1) 귀신이 죽은 사람의 영이라면 죽은 사람의 영혼의 거처가 문제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어서 그 영이 그냥 이 세상에서 어떤 형태로건 살아간다면 하나님의 심판은 무의미한 것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하셨습니다(히9:27). 죽은 자들의 영이 하나님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자유로울 수 있다는

이같은 주장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2) 귀신이 죽은 사람의 영이라면 이 세상이 바로 음부요 무저갱이라고 하는 주장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같은 주장을 펼치는 사람들은 이런 주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받아 드린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조상 대대로 죽은 우리들 조상들의 영혼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귀신으로 말미암은 질병에 대하여 언급해 주고 있습니다. 만약 죽은 사람의 영혼이 사람들에게 병을 줄 수 있다면 나쁜 일 뿐 아니라 좋은 일에도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온 세상은 완전히 귀신의 영적 영향 아래서 그들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3) 그리고 만일 귀신이 죽은 사람의 영혼이라면 자기 조상에게 제사를 드리는 일에 대하여 정죄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육신이 아니라 영인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조상의 영이 살아서 여기 저기 왕래하며 돌아다니는데 그들이 우리에게 있어서 얼마나 소중한 존재가 될 것입니까? 그렇다면 성경의 모든 진리는 거짓말이 되며 우리는 헛된 것을 믿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귀신은 하나님이 부리시는 악신이라고 했습니다. 삼상16:14절을 보면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그를 번뇌케 한지라'고 했습니다. 귀신의 출처는 죽은 사람인 것이 아니라 붉은 용인 마귀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저희는 귀신의 영이라'고 했습니다(계16:12-14).


결론 : 마귀에게는 마귀를 따르는 그의 사자들이 있습니다(마25:41). 이들은 마귀가 타락할 때 마귀와 함께 하나님을 대적했던 무리들로 이들이 타락한 천사들입니다. 이들은 원래 높은 영적 존재였지만 범죄하므로 타락하자 더러운 존재로 추락했습니다. 이들이 인간 사회에서 사탄의 지시와 조종을 받아 미혹하며 갖가지 재앙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이들은 거짓의 아비인 사탄을 본받아 간교와 거짓에 능한 솜씨를 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들에게 속아 혹은 조상의 영으로 오해하기도 하며 이들의 농간에 미혹되는 일로 하나님을 대적하게 되는 것입니다.


(65) 기도하고 찬미한 바울과 실라

(사도행전 16 : 19 - 26)

바울이 점치는 여종에게서 귀신을 쫓아낸 것이 원인이 되어 또 다시 핍박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여인의 주인은 그 귀신들린 여인을 하나의 이익의 도구로 삼아 돈을 벌어 왔기 때문에 귀신이 내 쫓김으로 다시는 점을 칠 수 없게 되자 바울과 실라를 당장에 붙잡아 관원들에게 끌어간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치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는 모함으로 당국에 고발한 것입니다. 그 여인의 주인에게 충동받은 일단의 무리들이 일제히 일어나 바울 일행을 송사 할 때 상관들이 바울과 실라의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쳤습니다. 그들은 많은 매를 친 후, 바울과 실라를 옥에 집어 넣어 그 발에 쇠사슬로 착고를 단단히 채운 것입니다.


1. 역경 속에서 기도하고 찬미한 바울과 실라

깊은 옥에 갇혀 있는 바울과 실라는 매를 많이 맞아 그들의 몸은 찢기고 터져 온 몸에 선혈이 난자 했습니다. 이전에는 바울 자신이 그리스도인들을 옥게 가두고 핍박한 장본인이었으나 이제는 자신이 그 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복음을 위한 고난에 감사했습니다. 바울이 얻어맞은 상처에서 나는 아픔은 말할 수 없이 컸을 것입니다. 그들의 발이 쇠사슬에 매어 착고에 채였으니 신체적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습니다.

그런데 그런 가운데서 그들은 하나님께 감사했으며 옥중에서 찬미를 불렀습니다. 밤중쯤 된 시간은 깊은 시간입니다. 바울이나 실라에게는 매우 피곤한 그런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자리에 누어 잠잔 것이 아니라 일어나 기도하며 하나님을 찬미한 것입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은 초대 교회 성도들은 주의 이름을 위해 받는 고난 중에서도 크나큰 기쁨을 나타냈습니다. 그들의 이런 기쁨은 주님의 말씀에 큰 격려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위해 받는 그의 고난에 대해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 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 . .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 고백했습니다(행11:23-27). 바울은 옥중에서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찬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며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 새힘을 부어 줍니다.


2. 기적이 일어난 옥중

깊은 옥중에는 바울과 실라뿐 아니라 다른 중죄를 지은 죄수들도 있었습니다. 바울과 실라의 기도와 찬미는 이들에게도 들렸습니다. 이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에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진실하고 절박한 기도에는 응답이 따릅니다.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고 했습니다(시145:18). 진실한 기도는 언제나 인생의 위기에서 나옵니다. 주의 이름을 위하여 어려움을 당했을 때, 그 사람에게서 주님께 대한 진실한 사랑이 나타납니다. 바울과 실라는 주의 복음을 위하여

그토록 모진 매를 맞으며 고난을 당하고 있었건만 원망이나 괴로움의 하소연은 없고 기도와 찬미로 감사했던 것입니다.

(2) 감사하는 기도에 하나님의 응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하셨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어려움 속에서 염려나 괴로움에서가 아니라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뢴 기도였으며 감격스러운 찬미였습니다.

그들의 이런 기도와 찬미의 향이 하나님의 보좌에까지 올라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인 것입니다. 그들의 기도와 찬미는 깊은 옥중이라도 능히 그 옥을 부술 수 있는 능력을 나타냈습니다. 옥은 그들의 이런 기도와 찬미를 감당할 수 없어 큰 지진을 일으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졌습니다. 지진은 옥문을 부수뜨리고 그들의 발목에 단단히 채인 쇠사슬이 끊겨져 죄수들의 몸이 자유한 몸이 되었습니다.

결론 : 우리의 인생길에는 바울이 맞은 캄캄한 밤이 올 때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의 밤이 우리의 죄악으로 인한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어떤 인생의 밤을 만난다고 해도 슬퍼하거나 원망하거나 후회하는 부질없는 태도를 가지지 말고 신앙적인 새 힘을 얻어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한다면 그 사람의 생애는 새롭게 되며 놀라운 축복의 문이 열릴 것입니다.


(66) 주 예수를 믿으라

(사도행전 16 : 25 - 40)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의 깊은 옥에 갇혀 그들의 발이 착고에 든든히 채워졌지만 그들은 그런 중에도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사도들은 복음을 위해 어려움을 당할 때 그 어려움을 고역으로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했다'고 했습니다.


1. 기도와 찬미에서 나온 기적

바울과 실라의 기도와 찬미는 옥중에 놀라운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이에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졌다'고 했습니다. 이 때 피곤한 나머지 잠을 자다가 이같은 지진에 잠을 깬 빌립보 감옥의 한 간수는 이같은 광경에 너무나도 놀라 어쩔 줄을 몰라 했습니다. 그는 옥의 모든 문이 열려진 것을 보고는 죄수들이 모두 도망친 줄로 알고 문책 받을 일에 겁을 먹어 자결하려고 결심했습니다. 이 때 바울이 크게 소리 질러 간수에게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고 안심시켜 주었습니다.

그러면 바울 일행은 이런 기회를 타서 옥에서 도망가지 아니한 것입니까? 그 이유는 그들의 기도와 하나님께 대한 찬미로 인하여 큰 지진이 일어나 옥터가 움직이고 모든 옥문이 열리며 죄수들의 매인 것이 벗어지기는 했지만 이같은 일이 이 옥을 탈출하라는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이 옥에서 나왔던 다른 경우를 보면 주의 사자가 옥에 나타나 사도들을 친히 이끌어 냈던 것이나 이곳에서는 그런 인도하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간수는 바울의 말을 듣고 심히 놀랐습니다. 옥문이 열려져 있었는데도 죄수들이 도망치지 아니한 사실이 그에게는 도저히 믿어질 수 없었습니다. 그는 곧 등불을 달라고 하며 등을 가지고 어두운 깊은 옥으로 다름질쳤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 바울과 실라와 함께 다른 죄수들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모습을 보고서야 안도할 수 있었습니다.


2.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이 간수는 잠깐 졸았을 뿐 바울과 실라의 기도와 하나님께 대한 찬미를 듣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무엇 때문에 이곳에 들어왔는가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바울과 실라에 의해 옥중에서 이 처럼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으니 이 간수는 너무나도 당황하고 놀란 나머지 바울과 실라를 마치 하나님처럼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들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바울과 실라를 향하여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고 물었습니다. 이 빌립보 감옥의 간수가 생각하고 있는 구원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절박한 상태에서 외친 그의 태도로 미루어 자기 인생에 있어서 가장 귀중한 생명에 관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 이같은 물음은 모든 인류의 입에서 나와야 할 말입니다. 인류가 에덴에서 보금자리를 잃고 영생을 잃어버린 후, 이것을 회복하는 일을 탐구해 왔습니다. 여기서 각종 종교가 생겨났습니다. 철학이 등장했습니다. 그러나 한번 잃어버린 낙원과 생명은 어디서도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인류에게 이 구원을 주시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그리고 그의 죽으심과 그의 부활로 이 일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시는 것입니다.많은 사람들은 이같은 물음의 해답을 엉뚱한 곳에서 찾다가 허무하게 그의 생애를 마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간수야말로 꼭 물어야 할 사람들에게 이 물음을 던진 것입니다.

(2) 이 간수는 원래가 하나님께 잃은 양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기이하시고 놀라우신 구원의 섭리를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이 간수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인 것입니다. 이 간수는 보잘 것 없는 간수였지만 예수님께는 잃어버린 당신의 양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잃은 당신의 양을 찾으시려고 바울과 실라를 빌립보 감옥의 깊은 옥에까지 보내시어 그를 찾으신 것입니다.

빌립보 감옥의 한 간수의 간절한 물음에 바울의 입에서 위대한 해답이 나왔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바울의 이 대답은 그 후 2천년간 내려오면서 많은 사람들의 구원 문제에 결정적인 대답을 주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두어 가지 교훈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했다'고 했습니다.

온전한 구원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따라야 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다른 한가지는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네 집이란 그들의 가족을 말합니다. 이것은 그 집에 한 사람이라도 복음을 받으면 그로 인하여 그 가족들에게 복음이 전달되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확산된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결론 : 빌립보 감옥의 간수 집에는 이제 큰 기쁨이 생겼습니다. '저와 온 집이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바울처럼 언제 어디서나 주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17장(67~69)

◆ 밤중소리 11-06 | VIEW : 2,448

(67) 성경에 철저한 신앙(사도행전 17 : 1 - 9)

(68) 베뢰아 성도들의 모범(사도행전 17 : 10 - 15)

(69) 아덴 사람의 종교심(사도행전 17 : 16 - 34)


(67) 성경에 철저한 신앙

(사도행전 17 : 1 - 9)

바울과 실라는 비록 빌립보에서 감옥에 갇히고 옷을 찢기고 벗긴채 매로 얻어 맞는 고난을 당했지만 루디아의 집에 교회를 세우게 되었고 빌립보 감옥의 한 간수와 그의 가정을 구원하는 놀라운 복음의 수확을 거둔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 그들의 선교지로 보여 주신 마게도냐 지방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는 중, 데살로니가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1. 성경을 가지고 강론한 바울

바울은 안식일에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는 일을 자기의 규례로 삼았습니다. 복음은 유대인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먼저 전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유대인들은 그들의 조상으로부터 메시야 사상이 내려 왔으며, 메시야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 민족이었기 때문에 메시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에는 이방인들보다는 생소하지가 않으며 복음을 쉽게 깨달을 수 있게 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예수는 많은 사람들에게 큰 공감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가는 곳마다 정작 환영해야 할 유대인들로부터는 배척을 받고 유대교로 귀화한 이방인, 곧 헬라인이나 여인들의 환영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이처럼 많은 무리들에게 효과 있게 복음을 전하여 그들을 따르게 한 일에 대하여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이 효과적인 전도로 많은 열매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이처럼 성경적인 철저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성경을 가지고 강론한 요지는 무엇이었습니까?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했다고 했습니다.

(1) 성경은 철두철미하게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책입니다. 예수님은 성경에 대하여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5:39).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도 하셨습니다. 이런 그의 말씀은 그가 능히 모든 성경의 주인공이란 사실을 증거해 주는 것입니다.

(2) 성경의 중심 사상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의 부활에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했다 고 하는 말씀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은 성경에서 영생을 풀 수 있는 비밀이 되고 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같은 인류 구원의 비밀은 이미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뱀에게 저주하신 말씀 가운데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장차 메시야로 등장하실 여자의 후손에 대하여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기를 '네 씨'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라'는 말씀에서 네 씨라고 하신 아브라함의 자손이 육적 이스라엘이 아니라 여자의 후손으로 태어나실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자의 후손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또 다윗의 혈통에서 태어나실 일에 대하여 그의 이름이 임마누엘로 불려질 것이며 그 징조로써 그가 처녀의 몸에서 잉태될 것임을 예언하셨습니다(사7:14).

(3) 구약은 오실 메시야의 예언이요 신약은 오신 메시야에 대한 증거로써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여자의 후손으로 메시야의 사명을 이루실 하나님의 아들이 누구이신가에 대하여 증거한 구약의 예언을 예수께서 온전히 이루심으로 인류의 메시야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증명되었으니 이를 증거하여 생명을 얻는 역사를 이루기 위해 신약성경이 기록된 것입니다.


2. 성경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보고

하나님이 자신을 나타내신 계시로 '자연 계시'와 '특별 계시'가 있습니다. 우주 만물에는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자연 계시가 충만하지만 그 계시의 지식으로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인정하지 않을 수 없지만 생명을 얻는 축복에까지는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자연 계시 속에는 생명과 영생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직 성경에만이 여자의 후손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부활하시어 우리의 구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아니고서는 인류에게 참 생명을 주는 하나님의 계시를 어디서나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경이야말로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의 특별게시인 것입니다.


결론 : 바울은 이 성경의 뜻을 풀어 증명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이 주신 예언의 뜻을 풀어야 하는 것 입니다. 인간이 구원 받아야 할 원인이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죄로 죽게 된 인간의 비참한 처지를 성경에서 발견하여 올바른 사죄의 길과 영생의 길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설교의 특색은 바로 이 점에 있었습니다. 성경에서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풀어 예수가 성경에서 증거해 주시는 메시야이심을 증명한 것입니다. 그 결과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들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랐다고 했습니다.


(68) 베뢰아 성도들의 모범

(사도행전 17 : 10 - 15)

데살로니가에서 어려움을 겪은 바울과 실라는 밤에 형제들의 권면에 따라 베뢰아로 가게 되었습니다. 데살로니가에서 베뢰아까지는 100여킬로의 거리가 있었지만 바울과 실라는 오직 복음을 전하려는 뜨거운 심정으로 그 곳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곳에서 디모데와 합류하여 선교팀을 보강했습니다. 베뢰아에서도 안식일에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게 되었는데 이곳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과는 달리 복음을 받아 드린 사실에 대하여 언급해 주고 있습니다.


1.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은 베뢰아 사람들

베뢰아 사람들의 칭찬이 여러 가지로 기록되어 있는데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신사적이라고 했습니다. 신사적이란 말은 유게네스( )로 마음이 고상하고 진실하며 인격적으로 교양이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복음을 받는 태도는 여러 가지입니다. 그런데 베뢰아 사람들이 복음을 받는 태도는 간절했다고 했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라고 했습니다. 간절이란 말은 지성스럽고 절실하다는 말입니다. 헬라어에 나온 이 말의 뜻을 보면 '열심' 또는 '앞을 향한 돌진'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1)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을 때 하나님이 그의 마음 문을 얼어 주십니다. 복음은 마음 문이 열려진 사람들에게만 들어갑니다. 세상 지식은 우리의 두뇌 속에 들어가지만 하나님의 지식은 마음에 들어가기 때문에 마음 문이 열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영이요 생명이므로 세상에 속한 인생은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루디아의 경우에서도 '주께서 그 마음을 열었다'고 했습니다. 마음 문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듣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볼찌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간다'고 하셨습니다.

베뢰아 사람들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걍퍅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마음 문은 결코 열리지 않습니다. 교만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마음도 열리지 않습니다. 죄로 물든 마음은 열리지 않습니다. 죄인은 그 죄를 자복하고 회개해야 마음 문이 열립니다.


(2)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깨닫지 못한 말씀은 심겨지지 않은 씨앗과 같습니다. 아무런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3)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믿음을 주십니다. 믿음을 갖는 시간은 오래지 않습니다. 간절함으로 말씀을 받아 드릴 때 그 말씀이 그에게 믿음을 심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건성으로 듣는 사람에게서 진실한 믿음을 찾을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마음에서 역사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2. 날마다 성경을 상고한 베뢰아 사람들

베뢰아 사람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복음을 받아 드렸을 뿐 아니라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상고란 말은 아나크리크( )로 이 말의 뜻은 신중하고도 정확한 조사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들 베뢰아 사람들은 바울로부터 들은 복음이 과연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다고 했습니다. 즉 그들은 들은 말씀을 성경에 비취어 신중하고도 정확한 조사를 하여 확인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베뢰아 사람들이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성고했다는 말은 바울이 그들에게 전한 메시야에 대한 바울의 증거로 베뢰아 사람들은 이 증거를 토대로 성경에 비취어 연구한 것입니다. 성경을 상고하는 일은 곧 성경을 연구하는 바른 길입니다. '여호와의 행사가 크시니 이를 즐거워하는 자가 다 연구하는도다'고 하신 말씀은 성경을 상고한다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어떤 문제가 제기되어 그것을 알고자 할 때 이것이 그런가하여 성경을 자세히 상고한다면 그 문제에 대한 성경적인 해답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제대로 상고하는 일은 이단의 미혹에 빠지지 않는 가장 바른 길입니다. 이단의 특징은 성경 전체에서 문제의 해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좁은 성경 구절에서 문제의 단안을 내리기 때문에 위험하기 그지 없는 것입니다.

성경을 상고하는 일은 날마다 계속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계속적인 연구를 말합니다. 우리들이 성령을 읽을 때 그 짝을 찾아 가면서 상고해 나간다면 우리의 성경 지식은 놀랍도록 성장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계속적인 성경의 상고, 계속적인 기도, 계속적인 말씀에 대한 순종이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성경을 상고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인생의 참된 기쁨과 소망이 거기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는 우리가 알아야 할 신령한 모든 것들이 다 들어 있습니다. 말씀을 연구하면 할수록 그리스도를 깨닫게 되며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그를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베뢰아 사람들의 이같은 모범적인 자세를 본 받는 성도가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69) 아덴 사람의 종교심

(사도행전 17 : 16 - 34)

베뢰아에서 복음을 전한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이 이곳에까지 찾아와 심한 소동을 버림으로 이에 위험을 느낀 베뢰아의 제자들이 바울을 인도하여 아덴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아덴이란 도시는 헬라 반도 중동부, 앗티카 지방에 위치한 도시로 그 기원의 역사는 매우 오래인 것입니다.

이곳에 있는 역사적 유물에 의하면 주전 4,5세기경에 이룩한 조각, 문학, 예수, 수사학은 이미 세계 최고에 이르렀던 터였습니다. 이 도시는 소크라데스, 플라톤의 출생지요 아리스도텔리스, 에피쿠루스, 제논의 제 2의 고향으로 알려진바와 같이 세계적 철학인의 산실이기도 한 것입니다.


1. 아덴에 등장한 바울의 활동

바울이 아덴에서 실라와 디모데를 기다리는 중, 아덴 성중에 다녀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덴이란 도시는 바울이 다녀 본 어느 도시보다 더 전 도시 곳곳에 우상이 세워져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 당시 아덴에는 그 모든 조각, 예술품, 문화적 유산물들이 다 허탄한 우상으로 장식된 것들이어서 바울의 마음에 분함을 갖게 했습니다.

(1) 바울은 아덴의 형편에 따라 복음을 전하는 일에 양면 작전을 세웠습니다. 그는 회당에서는 유대인들과 경건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또 시장에 나가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했습니다. 바울은 마음에 분한 그의 의로운 감정을 우상을 섬기는 아덴 시민들과의 토론을 통해서 전달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지식인이요 또 위대한 철학자였으므로 그들과 능히 변론의 대상이 될 수 있었습니다.

(2) 바울이 상대한 아덴의 철학자는 에베구레오와 스도이고 학파에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에베구레오 학파는 네피쿠스 학파로 이 철학파는 인생의 최고의 목적으로 쾌락을 제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신관은 신의 존재는 인정하고 있었지만 그러나 그 신이 인간 생활에 전혀 관여치 않는다고 믿었습니다. 이와는 대조적인 스도이고 학파는 스토아 학파로 키프로스의 제논이 이 학파의 주창자였습니다.

이들은 범신론자들로 신을 세계을 지배하고 있는 하나의 정신으로 보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들과 신의 존재나 우상에 대한 이론적인 논쟁을 전개한 것입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전해 준이야기는 그들의 철학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예수와 또 그 몸의 부활하심을 전하였으므로 그들은 이상히 여기며 이상한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고 의아한 눈초리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이론이 능히 그들의 주장을 이겼으므로 바울에게 '말장이'라는 딱지를 부쳐 준 것입니다.


2. 아레오바고에서의 바울의 논증

아덴의 이들 철학자들은 바울이 전하는 이상한 철학적인 이론을 듣고 한편 의아해 하면서 다른 한편 그가 전하는 철학 사상에 대하여 더 상세한 내용을 알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붙잡아 아레오바고란 곳으로 데려갔습니다. 아레오바고란 아덴 사람들의 권위 있는 법정을 의미합니다. 이 법정은 패판권도 행사되었지만 새로운 학설에 대한 일연의 발표장으로도 활용되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전하는 새로운 교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알고자 하노라고 말하면서 바울을 이 법정에 세운 것입니다. 바울의 이 아레오바고에서의 논증을 아레모바고의 연설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이 절호의 기회에 수 많은 아덴 사람들과 아덴의 세계적인 철학자들 앞에서 복음을 증거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1) 바울은 아덴 사람들에게 종교심이 많다고 치켜세워 주었습니다.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고 했습니다. 바울의 복음은 이처럼 아덴 사람들의 신관에서부터 그 맥을 풀어 나갔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아덴 시내를 두루 다니면서 한 신단을 보게 되었는데 그 단에 새긴 것을 보니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씌어진 곳도 있었으므로 그들이 알지 못하고 있는 참 하나님에 대한 증거를 이 알지 못하고도 그들이 섬기는 이 신의 경우와 연결시켜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한 것입니다.

(2) 참 신이신 하나님의 거처는 손으로 지은 전이 아니요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분도 아니심을 증거했습니다.

'하나님은 높고 거룩한 곳에 계시며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신다'고 하셨습니다(사57:15). 바울이 그들에게 전한 하나님의 증거는 ①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신 하나님 ② 이 인류로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를 정하신 하나님 ③ 거주의 한계를 정하신 하나님이심을 증거하고 하나님이 이렇게 하심은 사람들로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이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심이 아니라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3) 그리고 바울은 그들에게 하나님이 이제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을 찾을만한 분명한 증거를 주셨다고 말했습니다.


결론 : 아레오바고에서의 바울의 유명한 연설은 끝났습니다. 바울은 세계의 철학의 도시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철학적으로 논증한 것입니다. 바울이 전한 이같은 사실에 대해 그들은 기롱도 하고 배척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열어 주신 사람들은 그와 친하여 믿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바울의 선교 방법을 배워 효과 있게 복음을 전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사도행전 18장(70~74)

(70) 바울의 자비량(사도행전 18 : 1 - 4)

(71) 두려워 말며 잠잠하지 말라(사도행전 18 : 5 - 10)

(72)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 바울(사도행전 18 : 11)

(73) 하나님의 뜻을 따른 바울(사도행전 18 : 12 - 23)

(74) 아볼로의 부족(사도행전 18 : 24 - 28)


(70) 바울의 자비량

(사도행전 18 : 1 - 4)

전도 바울은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렀을 때 아굴라라고 하는 유대인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이 아굴라는 그의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주의 복음 사역에 동역자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들을 만나 큰 힘을 얻게 되었으며 복음 사역에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진실한 전도인에게는 이처럼 하나님께서 좋은 동역자를 만나게 해 주십니다. 사람이 사람을 잘 만났을 때 그 사람의 길은 형통하고 일이 잘 진행되는 것입니다.


1. 아굴라 부부의 등장

아굴라는 고린도에서 바울을 만난 후, 바울과 함께 복음 사역에 크게 기여하여 그의 이름이 성경 여러 곳에 등장합니다. 성경에서 말씀해 주는 아굴라의 인적 사항은 그가 아시아 본도 지방에서 태어난 유대인이라고 밝혀진 사실과 그가 로마에서 황제 글라우디오가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떠나라는 명령에 의해 고린도에 오게 되었다는 사실만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왜 로마 황제가 로마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에 대한 추방령을 내렸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바 없지만 이방인들이 로마에 많이 몰려드는 현상을 막기 위한 정책상 조처였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아굴라 부부가 고린도에서 바울을 만났을 때, 그가 과연 복음을 받아 드린 그리스도이었는지에 관해서는 문헌에 남겨진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아굴라 부부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말이 없이 다만 그들의 직업이 같으므로 함께 거하여 일을 했다는 것으로 미루어 이들은 로마에서부터 그리스도인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아굴라가 바울을 도와 복음 사역에 얼마나 협력했는지에 대해서는 로마서에서 바울의 안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문안을 부탁하라는 말과 함께 그 문안의 대상자로 아굴라와 그의 아내 브리스길라를 언급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 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고 했습니다(롬16:3-4).


2. 바울의 자비량

전도 바울과 아굴라 부부와의 만남이 누구의 소개로 인한 것이냐? 아니면 같은 직업 때문에 만나게 되었느냐에 대해서는 해답을 찾기 힘들지만 바울이 아굴라를 찾아 갔을 때 그들의 업이 서로 같았으므로 함께 거하며 일을 했다고 했습니다. 그들의 직업에 대해서는 '그 업은 장막을 만드는 것'이라고 한 점으로 천막을 제조하여 팔아 온 것으로 짐작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바울은 당대에 박식한 학자요 자존심이 강했던 사람인데 그가 어떻게 천막 제조업을 하면서 살았을까 하는 의문인 것입니다.

이 설명은 그 당시 유대인들 특히 서기관들이나 율법학자들의 경건한 생활상을 보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들 유대인의 랍비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대하여 그에 대한 보수를 받는 일은 온당한 일이 아니라고 간주되어 그들이 가진 직분을 영광스러운 명예직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기관이나 율법학자들 간에는 이같은 명예스러운 직분외 그들의 생계를 이어 나가기 위한 한 가지씩의 직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일은 그들에게 자랑으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성경 여러 곳에서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의 일꾼은 마땅히 그 보수를 받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딤전5:17-18; 마10:9-10; 고전9:4-14).

(1) 그렇지만 바울은 마땅한 자신의 권리를 버리고 더 좋은 상급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바울이 교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꾼들에게 마땅히 그 삯을 받을 권이 있다는 사실을 이처럼 주장했으나 자신에 대해서는 스스로 이런 권리를 포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위대함이 여기에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늘의 보다 큰 영광을 바라보고 이런 상급을 받으려는 목적으로 자비량하는 전도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2) 바울은 한편 빚진 자의 자세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롬1:14). 생명의 빚을 갚고자 하는 그의 간절한 마음의 자세는 누구나 본 받을만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빚을 갚는 사람이 그 삯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3)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의 그 어떤 것이라도 포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지식이나 모든 유익한 것들을 해로 여기고 배설물로 여긴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빌3:7-9). 바울의 이같은 신앙적인 자세는 그의 인생의 모든 것을 다 바쳐 주님의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론 : 바울은 실로 위대한 사역을 이루면서도 자신에게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의 이같은 일은 부득불한 것이기 때문에 자랑할 것이 못된다고 했습니다. 부득불 했다는 말은 억지로 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능력의 손에 붙잡혀 아니할 수 없었다고 하는 절실한 소명감에서 나온 고백인 것입니다. 우리들도 바울과 같은 이같은 정심을 본 받아 복음 사역의 일꾼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71) 두려워 말며 잠잠하지 말라

(사도행전 18 : 5 - 10)

바울이 당도한 고린도는 퇴폐적인 도시였습니다. 그런데다 그 곳 유대인들은 유달리 바울에 대해 분노와 핍박이 심했습니다. 이처럼 바울이 극히 어려움을 당하고 있을 때 동역자인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바울에게로 돌아왔습니다. 바울은 여러 곳에 교회를 세우고 떠났기 때문에 그 교회들의 소식을 알고 싶어서 바울은 믿을만한 동역자인 실라와 디모데를 여러 곳에 보냈었습니다. 이제 다시 바울에게로 돌아온 이들은 바울에게 좋은 소식을 가지고 온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그 어려운 시련 가운데서도 그들의 믿음을 견고히 하고 있다는 디모데의 소식이었습니다. 바울은 새 힘을 얻어 유대인들의 핍박에도 불구하고 담대히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밝히 증거할 수 있었습니다.


1. 말씀에 붙잡힌 바울

바울이 핍박에 굴하지 않고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혔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거했다'고 했습니다.

(1) 바울의 마음엔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움직였습니다. 살아 있는 말씀은 운동력이 있다고 했습니다. 말씀에 대한 확실

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뿌려진 말씀에는 이같은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마음에는 말씀이 살아 있을 수도 없고 성장할 수도 없습니다. 바울은 부활하신 주님을 친히 만난 사람입니다. 그는 여러 가지 주님의 직접적인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는 셋째 하늘에 올라가 말할 수 없는 주님의 음성을 듣기도 했습니다. 바울의 생애 전부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은 사람이요 그 안에 파묻힌 사람입니다. 이런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갔다면 그의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뜨거워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2) 바울은 빚진 자의 책임감에 사로 잡혀 있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게 된 사명의 출발점은 빚진 자의 책임감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우리에게 바울과 같은 빚진 자의 자세만 서 있다면 빚을 갚아야 하겠다는 사명감과 두려움에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히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3)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바라본 것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바라본 것은 하늘의 상급이었습니다. 바울이 천막을 만들어 팔아가면서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하늘의 보다 좋은 상급에 대한 야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이 하늘의 상을 얻으려고 달음직한 자세에 대하여 이처럼 표현하고 있습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 하라(고전9:24). 하늘의 상급을 얻는 일에는 양보가 없어야 합니다. 이런 일에는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욕심을 가지라는 것이 성경적인 가르침인 것입니다.


2. 두려워말고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바울은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할 때에도 마찬가지로 그 곳 유대인들의 심한 대적과 훼방을 받았습니다. 그들의 이같은 핍박에 유대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기를 포기하고 이방인들에게로 가서 복음을 전할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그 반면 유대인의 회당장과 그 곳 고린도인들이 말씀을 듣고 예수를 믿어 세례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1) 밤에 환상 중에 하나님이 바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환상이란 말은 호라마( )로 이 말의 뜻은 보이는 것을 말합니다.

무엇인가 보이는 양상입니다. 밤에 주님이 바울에게 자신을 나타내 보이신 것입니다. 어떤 모습으로 보이셨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질이 없습니다. 이 때 주님이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나타나신 이유는 사면에서 당하는 핍박과 좌절하기 쉬운 그런 상태에서 바울에게 새 힘과 자신감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2) 두려워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에 두려움은 금물입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두려움이 없을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그의 두려움으로 인하여 주님의 이름을 세 번씩이나 부인한 일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말씀하신대로 몸이나 죽일 수 있는 자들을 두려워하면 안 됩니다. 바울은 주님의 이 말씀을 듣고 엄습해 오는 유대인들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 버릴 수 있었습니다. 엘리야도 한때 생명의 위협 앞에서 두려워 한 일이 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그의 사자를 엘리야에게 보내시어 어루만지며 위로해 주시고 식물을 주며 힘을 주셨습니다(왕상19:1-8).

(3) 다음에 잠잠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대해서 늘 근신하라고 하십니다. 혀에 자갈을 물려 잠잠하라고 명하십니다. 지혜로운 자는 말을 적게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는 일에는 잠잠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바울에게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위하여 얼마나 우리의 입을 열었습니까? 왜 우리의 입은 세상 말은 잘하면서도 복음을 전하는 일에는 벙어리처럼 잠잠한 것입니까? 우리의 입을 크게 열어 때를 얻던지 얻지 못하던지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 바울은 주님이 그에게 나타나 이같은 말씀을 들려 주신 것으로 인하여 큰 힘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 고린도 성안에 하나님의 백성이 많다고 하신 말씀에 그들의 영혼에 대한 사랑으로 그는 더욱 힘을 얻어 복음을 전하게 된 것입니다.


(72)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 바울

(사도행전 18 : 11)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그의 정성을 기울였습니다. 복음 전파는 전도로서만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전도로 복음을 받아 드린 사람들에게는 양육이 따라야 합니다. 그리고 이 양육은 계속적이어야 합니다. 지상에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진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의 이 계속적인 양육을 위해 서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고 하신 말씀은 이런 양육을 의미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은 뿌려진 복음의 결실을 위해 있어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교회에 가르치는 직분을 주셔서 이 일을 맡기신 것입니다.


1. 구원의 세 가지 뜻

성경에는 구원에 관하여 세 가지 의미를 나타내는 말씀이 있습니다.

(1) 그 하나는 너희는 '구원을 얻었다'는 말씀입니다(엡2:8). 구원에 있어서 우리가 할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구원에 모든 것을 다 준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구원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이미 완성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영접한 사람에게는 구원이 이미 과거의 기정사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얻었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일에 대하여 예수님은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일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하셨습니다(요5:24).이처럼 구원을 얻은 사람의 구원은 누구이거나 뺴앗을 수 없습니다. 그 구원을 회수하거나 유보할 수도 없습니다. 그는 이미 영생을 얻은 것입니다.

(2) 다음에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했습니다(빌2:12). 이루라고 한 말씀은 노력한다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애써서 완성하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지만 이 구원은 아직 실현되지 않은 구원입니다.

구원을 얻었다는 말은 약속입니다. 이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기까지 이 약속은 성취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우리는 그 날까지 우리가 얻은 구원이 나타나기를 사모하면서 인내로 기다릴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구원은 얻었지만 그 구원이 현실적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는 그 날을 맞이하는 과정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구원이 온전히 이 루어질 때까지 그 구원을 계속적으로 지니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이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는 일'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었다고 안일한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구원이 실현될 그 날까지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 나가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런 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입니다.

(3) 그리고 '천국에 이르도록 구원하시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라고 했습니다(딤후4:18). 우리의 궁극적인 구원은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만 완성됩니다.두렵고 떨림으로 우리가 애써 구원을 이루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모든 일을 이루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너희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빌1:6).


2. 자라나는 믿음

그리스도인의 성화도 세 가지 면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는 그의 완전한 의를 입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다른 어떤 의를 얻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의 생활에 의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이 열매가 없이는 신앙의 성장이 없습니다. 그리고 성장이 없으면 그 신앙은 퇴보하게 됩니다. 또 하나의 성화는 성화의 완성입니다. 이 완성은 우리가 육에서 벗어날 때 우리의 영으로 나타납니다.

우리의 몸이 육신에서 벗어나 영으로 하나님 앞에 설 때, 그리고 마지막 날, 우리의 몸이 주님과 같은 영화로운 몸으로 변화함을 받을 때 완성된 성화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믿음은 자라나야 합니다.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라라'고 말씀해 주심으로 우리의 신앙이 그리스도의 완숙한 단계에까지 이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엡4:15). 그리고 믿음의 성장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고 병행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지만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구원의 확신을 심어 주기 때문에 늘 그 말씀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에 관한 증거의 책입니다. 구원의 확신은 확실한 증거로서만이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의 확신의 터전 위에 서는 일은 승리적인 생활을 위해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결론 : 바울은 그가 개척한 각 교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열심을 냈으며 후에도 그들이 바른 신앙으로 성장하고 있는가에 대해 점검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믿음을 생산하며 우리로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교육시켜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성도가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73) 하나님의 뜻을 따른 바울

(사도행전 18 : 12 - 23)

바울은 전도 여행을 통해서 세운 교회를 관리하는 일에 두 가지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한가지는 말씀을 가르치는 일로 했습니다. 그는 고린도에서 '일년 육개월을 유하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니라'고 한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바울이 각 교회의 성도들의 믿음을 굳게 하는 일로 했습니다. 23절에서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땅을 차례로 다니며 모든 제자를 굳게 하니라'고 했습니다. 그들의 믿음을 굳게 하는 일에 힘쓴 바울의 노력을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1. 갈리오의 재판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

바울은 고린도에서 오랜 기간 머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왔습니다. 이는 바울의 환상 중에 주님이 그에게 나타나시어 '두려워 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는 말씀에 큰 힘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갈리오가 아가야 총독 되었을 때 유대인들이 일제히 일어나 바울을 대적하여 갈리오의 재판자리로 끌어 갔다고 했습니다.

이제 바울이 고린도를 떠날 시기가 되자 하나님께서는 이같은 방법을 통해서 바울로 그 곳을 떠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어떤 때는 친히 말씀으로, 어떤 때는 환상으로 또 어떤 경우에는 주위 환경의 변화로 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바울로 핍박을 받게 하신 일은 아름다운 의미가 주어져 있습니다.

(1) 하나는 복음을 전하는 바울로 하늘의 놀라운 상급을 받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고난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표현했습니다(골1:14).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는 일은 우리의 주님의 무한하신 은혜에서 나온 축복입니다(빌1:29). 주님은 당신을 위해 고난을 받는 성도들이 받을 상급에 대해 친히 말씀해 주셨습니다(마5:11-12).

(2) 다음에 이같은 핍박이나 고난은 바울로 온전케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로 온전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이 위대하고 성숙한 전도인이 될 수 있었던 일은 복음을 전하면서 받은 고난에서 온 것입니다.

(3) 그리고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핍박이 따른 것은 바울로 겸손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게 하시려는데 있었습니다. 바울이 몸에 찌르는 가시로 비유된 고통의 질병으로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했을 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이같은 일에 대하여 말하기를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갈리오 총독 앞에 선 일은 부정한 일이나 괴악한 행동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갈리오는 아가야 지역의 로마총독으로 부임되어 온 자인데 아가야 지역은 그 당시 로마 황제에 의해 다스려 지는 식민지 행정 구역으로 고린도 지역도 이곳에 포함되어 있었으므로 그의 재판에 넘겨진 것입니다.


2. 바울의 서원

바울은 고린도에 여러 날 더 유하다가 수리아를 떠나 겐그리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곳에서 바울은 어떤 서원 때문에 머리를 깎은 일이 18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했다고 하는 서원이란 말은 유케( )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 또는 '맹세'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이 일찍 가지고 있었던 서원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언급된바 없지만 서원이란 '하나님께 헌신하며 봉사하고 자신의 가장 귀중한 것을 바치는 인간과 하나님과의 사이의 종교적인 관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서원은 바울이 복음의 빚진 자로서 자신에게 부과된 사명을 온전히 이루고저 하는 나머지 주님의 은혜를 간절히 기대하는 자신의 서원을 표시함에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이같은 서원은 한번만 있었던 일이요 또 지속적으로 계속된 것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있었던 일이기 때문에 주님을 위한 어떤 서원을 위해 바울처럼 머리를 깎는 일이 잘하는 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바울이 머리를 깎은 곳은 겐그리아인데 이곳은 고린도 항구입니다. 바울은 이곳을 다시 떠나 에베소로 왔습니다. 에베소에 온 바울은 회당에 들어가 유대인들과 변론하는 사역을 했지만 그는 그 곳에 오래 머물러 있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바울은 여러 번 하나님이 그에게 어려움을 주신 일을 통하여 자신이 떠나야 할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된 것입니다.


결론 : 바울은 정든 에베소 교회를 떠나면서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다시 돌아 올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전한 모든 곳을 두루 다니면서 모든 제자들을 굳게 했다고 했습니다. 믿음에 굳게 서게 하고 은혜의 자리에 굳게 서게 한 것입니다. 목회자는 언제나 자기 양무리들에 대하여 믿음에 굳게 서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의심으로부터 믿음을 굳게 지키도록 해야 합니다. 시험으로부터 믿음에 굳게 서도록 해야 합니다.


(74) 아볼로의 부족

(사도행전 18 : 24 - 28)

아볼로란 사람은 복음의 사역자로 뒤늦게 등장한 인물이지만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귀히 쓰임 받은 그리스도의 일꾼입니다. 아볼로는 늦게야 바울이나 사도들에게 발굴되어 복음의 일꾼이 된 사람입니다. 그가 올바른 지도를 받은 후 복음을 위하여 능력 있게 일하는 활약상을 여러 곳에서 보여 주고 있습니다. 아볼로는 특히 고린도 교회에서 그 곳 교회들을 돌 보았으므로 고린도 교인들의 두터운 신망을 받고 있었습니다.


1. 아볼로의 등장

아볼로의 등장은 교회의 활력소가 되었습니다. 그의 박식과 능변과 덕망과 열정은 가히 복음의 이론가로써 타인의 추종을 불허했습니다.

(1) 아볼로는 학문이 많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학문이라고 하는 로기오스( )란 말은 박식한, 학식이 있는 이란 뜻으로 그가 가지고 있는 철저한 지식을 의미합니다. 이 말을 혹은 언변의 사람으로도 해석합니다. 아볼로가 태어난 알렉산드리아는 주전 332년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건립된 도시로 이 도시에는 전 인구의 삼분의 일이 유대인들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곳은 이방 학문과 유대 학문이 교차되는 헬라 문화의 중심지로써 아볼로는 이 고장에서 교육받은 유명한 철학자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신의 지식이나 학문을 오예물처럼 여겼지만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견주어 그렇게 한 것이지 그의 학문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전혀 무가치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울의 그 많은 학문이나 지식은 주의 복음을 전하는 있어서 놀라운 힘이 된 사실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아볼로의 능변과 유대인들과의 그의 변론은 이같은 그의 많은 학문이 그 기초가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2) 아볼로는 성경에 능한 자라고 했습니다. 아볼로는 유대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성경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성경적인 지식이 많았습니다. 그에다 그의 탐구심과 하나님이 그를 들어 쓰시기 위해 베푸신 은혜로 인하여 그의 성경적 지식은 탁월하여 성경에 능한 자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성경에 능하다는 말은 성경을 바로 배운 것과 그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가 무엇인가에 대해 올바로 인식했다는 말입니다. 아볼로는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이 모든 것을 깨닫고 있었습니다.

(3) 다음에 아볼로는 일찍 주의 도를 베웠다고 했습니다. 아볼로가 주의 도를 어디서 배웠는지에 대해서는 밝혀져 있지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세례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고 하는 말씀에서 아볼로는 일찍 세례 요한의 제자로 요한으로부터 메시야에 대한 가르침을 배웠을 것입니다. 주의 도란 '예수는 성경에서 악속된 그리스도'라고 증거되는 진리를 말합니다. 아볼로의 이같은 주의 도는 세례 요한이 그의 제자들에게 가르친 내용입니다.

요한은 뒤에 오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분명한 가르침을 준바 있습니다.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고 했습니다.

(4) 아볼로는 예수의 열심 있는 증거자였습니다.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쳤다'고 했습니다. 열심이란 말은 제오( )로 끓이다, 삶다, 뜨겁다는 뜻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예수의 증거자는 그 마음이 뜨거워야 합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말씀했습니다(롬12:11). 아볼로의 이같은 열심은 그가 그 이후 얼마나 복음의 큰 일꾼으로 쓰임 받았는지에 대한 바른 해답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2. 아볼로의 부족했던 점

아볼로는 어느모로 보나 나무랄 것이 없는 전도자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한가지 부족한 점이 있었습니다. 아볼로의 부족한 것을 발견한 사람은 아굴라와 그의 아내 브리스길라였습니다. 아볼로가 유대인의 회당에서 예수에 관한 증거를 열심히 하고 있을 때, 그 증거를 아굴라 부부가 듣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이 아볼로를 데려다가 주의 도에 관한 자세한 말씀을 줌으로 아볼로로 하여금 훌륭한 복음의 일꾼이 될 수 있게 했습니다.

아보로에게 부족했던 것은 아볼라가 그리스도의 세례를 몰랐었다는 점입니다. 요한의 세례는 다만 메시야를 맞이하기 위한 회개의 세례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세례는 성령과 불의 세례 곧 성령 세례를 말하는 것입니다. 아볼로는 예수님이 보내실 성령 세례의 선물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습니다.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일은 요한의 세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세례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아볼라는 또한 구원의 참 도리에 대하여 확신 있는 전도를 못했습니다. 아볼로는 다만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증거에만 전념했습니다. 예수의 죽으심과 그의 부활하심에서 오는 구원의 은혜를 몰랐습니다.


결론 : 아굴라 부부가 그의 설교를 통해서 이런 사실을 발견하고는 

아볼로를 데려다가 이같은 십자가의 도리와 구원의 도리에 대하여 

자세히 풀어 깨닫게 해 준 것입니다. 

그 후 그의 설교에는 구원의 능력이 강력하게 나타났습니다.

그의 복음에는 생명력이 넘쳐 흘렀습니다.


사도행전 19장(75~78)

◆ 밤중소리 11-06 | VIEW : 4,107

(75)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사도행전 19 : 1 - 7)

(76) 바울의 강론과 권면(사도행전 19 : 8 - 10)

(77) 바울이 행한 하나님의 권능(사도행전 19 : 11 - 20)

(78) 에베소의 소요 사건(사도행전 19 : 21 - 41)


(75)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사도행전 19 : 1 - 7)


에베소는 소아시아의 문턱에 자리한 소아시아 최대의 상업도시였습니다. 이 도시는 로마에서 동방에 이르는 주요 통로상에 세워져 있었기 때문에 아시아 지방의 수도로서의 면모를 가진 도시였습니다. 바울은 이 도시에 잠깐 머문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더 오래 있기를 바라는 여러 사람들의 간청을 물리치고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는 말과 함께 에베소를 떠나 안디옥과 갈라디아의 브루기아 땅을 차례로 다니며 제자를 굳게 하는 일을 하다가 윗 지방을 거쳐 다시 에베소에 이르렀습니다. 이처럼 에베소 교회는 바울이 3차 전도 여행시 설립한 교회로 그는 약 3년간이나 이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왔습니다. 바울이 윗 지방으로 다녀 이곳 에베소에 이르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설립한 첫 발이었습니다.


1. 에베소에서 만난 어떤 제자들

바울이 에베소에 당도했을 때 어느 일단의 제자들과 만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제자들이라고 한 사람들은 '예수의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들'로 그러나 이들에게는 아직 올바른 신앙을 가진 것이 아니었고 교리적으로도 많이 부족한 면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관찰한 바에 의하면 그들에게는 어딘지 모르게 석연치 못한 곳이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의 믿음에 뜨거운 열의가 없었다던가, 그들의 생활에 생동감이 없었다던가 하는 면을 보았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을 만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으냐'고 물었습니다. 이 물음에 대한 그들의 대답은 놀랄 만한 말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1) 어떤 제자들이라고 불린 이들은 아마도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는 물음에 '요한의 세례로라'고 한 답변에서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자기 선생이 순교하는 그 순간까지 자기 스승을 따랐습니다(요1:35-42). 이들 중 몇몇 제자들이 예루살렘을 떠난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예루

살렘에서 예수가 당하신 고난이나 그의 부활이나 오순절 사건 같은 결정적인 복음의 핵심적인 사건들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예수가 메시야이심을 증거할 수는 있었지만 더 자세한 구원의 도리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성령의 체험이 전혀 없었고 성령의 사역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성령에 관한 사건과 지식은 오순절을 통해서 나타났으며 예루살렘 교회를 통해서 불같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성령의 있음도 듣지 못한 것입니다.

(2) 한편 이들의 믿음은 예수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상태가 아닌 것입니다. 예수는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메시야라고 하는 성경적 증거에 의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 사실을 전파했습니다. 그들이 믿고 전한 복음은 죄인들에게 죄사함의 은혜와 구원을 선사하는 십자가의 복음인 것이 아니라 예수가 메시야라고 하는 증거하는 정도의 복음이었습니다. 이런 복음에는 구원의 능력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와의 영적 연합도 이룰 수 없으므로 아무런 소망도 줄 수 없습니다.


2.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들 에베소의 제자들은 성령 없이 예수를 믿고 있었습니다. 성령 없이 예수를 전했습니다. 이런 믿음은 올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온전한 복음도 아닙니다.

(1) 성령이 없는 믿음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성령은 우리를 거듭나게 합니다. 성령이 우리의 구원을 온전케 하십니다.

(2) 우리는 성령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에베소에서 바울이 만난 제자들은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구원에 있어서의 성령의 역사는 절대적입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감동을 주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여십니다. 우리로 회개케 하십니다. 성령이 우리를 거듭나게 하십니다.

(3) 바울이 이들에게 구원에 이르는 믿음에 대해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것은 예수에 관한 성경적인 올바른 지식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지식은 그의 십자가에서의 죽으심과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살아나신 그의 부활에 있는 것입니다. 다음에 올바른 믿음은 이같은 지식에 대한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그리스도를 마음에 영접하여 새로운 생명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에 성령으로 말미암은 그리스도와의 영적 연합입니다. 이것이 곧 성령 세례입니다. 이같은 구원의 요소는 거의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4)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는 말은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느냐는 말입니다. 성령 세례란 성령의 내주하심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결론 : 바울이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바울의 안수 기도를 통해서 성령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나 하나님의 종들의 안수에 의해 성령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은 영이심으로 그의 임재하심이나 임하시는 일에 있어서 확실한 증거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으로 받아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성령을 받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76) 바울의 강론과 권면

(사도행전 19 : 8 - 10)

바울은 얼마 전 에베소에 있는 유대인의 회당에서 유대인들과 변론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 때 바울은 더 오래 있기를 간청하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다시 돌아오리라'고 약속했습니다. 이 약속대로 바울은 하나님의 허락하심을 얻어 다시 에베소에 돌아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강론하게 된 것입니다. 바울의 강론은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 되심에 관한 성경적인 증거로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이로써 그들에게 구원의 확신을 줄 수 있었습니다. 그런 후에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강론하므로 신앙의 폭을 넓히며 성장시켰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이런 일을 오랜 기간 계속하여 많은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했습니다.


1. 담대히 강론한 바울

강론한다는 말은 디아레고마이( )로 설교한다는 뜻으로 풀이됩니다. 바울은 자신이 받은 복음의 계시를 구약 성경에 비취어 풀이하므로 그의 강론은 신약의 교리를 이루는 토대가 되었습니다. 바울이 이 강론을 함에 담대했다고 했습니다. 그가 담대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습니다.

(1) 그는 자신이 받은 계시가 확실했기 때문에 담대함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불확실한 일에는 담대함을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셨다'고 했습니다(엡3:3). 갈라디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도 자신의 강론이 그리스도의 계시에 근고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했습니다(갈1:11-12). 하나님의 말씀에 둔 강론은 언제나 담대할 수 있습니다.

(2) 진리를 진리로 전하기 위해 담대했습니다. 복음은 사람을 즐겁게 해 주는 노래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주어진 말씀대로 전해야 올바로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증거 하는 일에는 담대함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의 귀를 즐겁게 해 주는 변질된 말씀을 즐거워하기 때문에 담대한 하나님의 종들만이 하나님의

말씀의 증거자가 될 수 있습니다.

(3) 복음에는 핍박하는 무리가 따르기 때문에 담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그 말씀을 듣는 모든 자들이 그 말씀에 공감하거나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패역한 이스라엘에게 보내실 때에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강퍅한 자에게 보내신다고 말씀하시고 '그들은 패역한 백성이라 듣든지 아니 듣든지 너는 내 말로 고하라'고 하셨습니다(겔2:4-7). 그러므로 예수님은 산상보훈에서 '의를 위해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 권면한 바울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강론하며 권면했다'고 했습니다. 권면이란 말은 페이도( )로 권함을 받는다, 설득한다는 뜻입니다. 강론에는 권면이 함께 따릅니다. 설교의 주된 목적은 권면에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성경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가장 요긴하게 교훈하는 말씀은 '사람이 하나님을 대하여 어떻게 믿을 것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본분'이라고 했습니다(소요리 문답 3). 이같은 하나님의 뜻은 강론과 권면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권면의 중요성을 몇 가지로 들 수 있습니다.

사람이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게 하려면 끊임없이 권면 해야 하는 것입니다(히3:13). 자신의 행동의 잘못을 깨닫게 하려면 권면이 있어야 합니다.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기나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잠12:15). 권면의 목적은 다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죄를 버리고 하나님께 가까이 하여 하나님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든 죄악을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할찌어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고 하셨습니다(겔18:39).

권면의 방법은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자녀에게 대하듯, 형제에게 대하듯,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바울은 마치 자녀들에게 하는 것같이 권면했다고 했습니다(고전4:10). 권면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한다는 말은 듣는 상대방으로 하여금 진지하고 두려움을 가지게 함이요 권면하는 사람으로 간절하고 진실하게 권면하려는데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잘못된 권면도 많이 있다는 것을 알고 권면을 잘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결론 : 바울의 강론과 권면은 권위가 있었습니다. 그의 권면에는 성령의 능력이 따랐지만 그렇다고 바울의 권면이 누구에게나 먹혀 들어간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였다'고 했습니다(9). 마음이 굳다고 하는 말은 죄로 마음이 강퍅해진 상태의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회개하면 하나님이 그 사람의 마음을 열어 주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드리게 하십니다.


(77) 바울이 행한 하나님의 권능

(사도행전 19 : 11 - 20)

바울은 주님의 능하신 손에 붙잡힌 유능한 복음 전도자였습니다. 그는 말씀을 능력 있게 전하기도 했지만 많은 권능을 행하기도 했습니다. 바울의 이같은 역사는 이미 그를 선택하여 세우신 예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1. 바울에게 나타난 희한한 능력

에베소에서 주의 말씀을 전할 때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권능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과 주의 복음에 대한 흥왕으로 놀라운 부흥의 불길이 일어났습니다. 바울의 기도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가고 악귀들도 떠나갔다고 했습니다. 이런 일은 주님이 살아 계셨을 당시에도 찾아 볼 수 없었던 일입니다. 그러므로 11절에서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게 하셨다고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1) 우리는 여기서 모든 권능의 출처는 오직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게 하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모든 권능은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이같은 권능을 행하려면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내 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2) 이런 권능은 사명적인 하나님의 선택에서 오는 것입니다. 모든 복음 전도자에게 바울에게 나타난 것과 같은 회한한 권능이 나타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복음을 위해 특별한 사역의 사명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바울과 같은 권능을 받으려고 애쓴다면 그런 노력은 무위로 끝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 받은 우리의 사명과 믿음의 그릇을 살펴보고 자기 믿음의 분수 안에서 주어진 사명에 충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3) 이런 권능은 위대한 믿음에서 나옵니다. '만일 너희가 믿음에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요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믿음을 따라 역사하기 때문에 바울과 같은 믿음의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역사가 희한한 권능으로까지 나타난 것입니다.

(4) 하나님의 권능은 능치 못함이 없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은 모든 일을 하실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시요 만물의 주관자시요 만물의 운행자이시기 때문에 그의 역사는 이루시지 못할 일이 없으시며 그 의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고 하셨습니다(창18:14). 렘32:27절에서는 '나는 여호와요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라 내게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고 하셨습니다.


2. 바울이 권능을 행한 자세

바울은 두려운 마음으로 권능을 했습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다'고 했습니다(고전9:27). 아무리 희한한 권능을 행해도 나중에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하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약한 데서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하여 진다는 원리를 알았습니다. 바울은 지극히 큰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으며 하나님의 권능을 행한 반면에 그의 몸에는 견디기 어려운 괴로움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이 가시란 그의 몸에서 떠나지 이니한 질병의 고통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이 고통의 가시를 위히여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했지만 거절 당하고 오히려 그 가시를 짊어져야 한다는 응답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고후12:8-9). 하나님의 권능을 행하는 일에 두 가지 두려워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권능을 바라보고도 믿지 않는 일입니다.

이같은 자들에게 주님은 엄중한 경종을 주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뱃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고 하신 것입니다(마11:21-24). 그리고 다른 한가지는 권능을 행하고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불법이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 권능입니다.


결론 :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이런 바울의 희한한 권능을 바라보거 자신들도 흉내를 내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악귀들린 사람이 그들 위에 뛰어 올라 그들을 억제하여 이겼다고 했습니다. 이들은 믿음도 없이 다만 마술의 한 방편으로 삼아 보려는 불순한 동기에서 했기 때문에 오히려 악귀의 조롱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일로 에베소에 거하는 헬라인과 유대인들이 두려워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게 되었습니다.


(78) 에베소의 소요 사건

(사도행전 19 : 21 - 41)

바울의 발이 머무는 곳이면 복음의 위대한 일꾼들이 구름 떼처럼 모였습니다. 그리하여 그 곳이 마침내 복음 전파의 중심지가 되어 복음이 사방으로 환산되어 나갔습니다. 에베소에 오래 머물러 있었던 바울의 주변에는 많은 동료들이 모여 바울의 복음 사역을 도와 주었습니다. 그 곳에는 디모데도 있었고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 그리고 새로운 동역자들로 이들 대열에 함께 오른 에라스도와 가이오, 아리스다고 등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다 한결같이 바울의 발이나 팔이 되어 자신들의 생명까지라도 아끼지 않고 바울의 복음 사역에 동참하였습니다. 에베소는 복음을 전하는 이 바울 일행으로 말미암아 복음이 점점 확산되어 나갔으며 이 같은 일로 우상의 중심지인 이곳 사람들의 큰 반발을 사게 된 것입니다.


1. 바울의 선교 계획

바울은 이 지역에서 비교적 평온한 가운데 교회를 확장해 나갔습니다. 유대인들의 회당 쓰기를 포기하고 두란노 서원에서 말씀을 강론하면서 두 해 동안 지냈습니다. 바울은 마게도냐와 아가야로 다녀서 예루살렘에 가기를 경영했지만 그의 계획은 로마에 가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로마로 가려고 한 것은 몇 가지 복음적 야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 바울은 빚진 자의 심정으로 로마에 가기를 원했습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고 말했습니다(롬1:14-15). 로마는 이미 복음이 널리 전해져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터를 닦은 곳에 가서 씨를 심지 않는 일이 바울의 전도 전략이지만 그래도 이 로마시는 워낙 광대한 도시요 복음이 무한대하게 수용될 수 있는 세계적 도시이기에 자신도 로마를 발판으로 활동할 수 있기를 간절히 원했던 것입니다.

(2) 바울이 로마에 가려고 한 것은 복음의 세계화를 위한 야심을 이루려는 욕망에서인 것입니다. 그 당시 로마는 세계의 수도였습니다. 로마로부터 온 세계로 가는 길이 열려져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 로마 제국의 위대한 도시에 가서 세계를 선교화 시키려는 원대한 꿈을 이루고저 했습니다. 그 뿐 아니라 로마 황제를 신으로 섬기는 이 도시를 그리스도의 복음

앞에 굴복시키려는 강한 의지를 가지고 이 일에 도전하려고 한 것입니다.


2. 에베소의 소요

에베소는 아시아 지방에서도 우상 숭배의 중심지가 되어 온 곳입니다. 그도 그런 것이 에베소에는 아르테미스라고 하는 여신의 전각인 큰 아데미 신전이 있었습니다. 아데민 신전에 모신 그들의 여신 아르테미스는 신들과 사람의 어머니로써 오랜 역사를 통하여 그 곳 주민들과 아시아 지역 주민들로부터 숭배되어 왔습니다. 이런 도시에서 복음을 대적하는 무리들에 의해 큰 소동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1) 에베소시가 점덤 복음화 되어 가고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복음에는 생명이 있기 때문에 이 복음의 씨앗이 떨어지는 곳에는 번지는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두란노 서원에서 오랜 기간 전한 복음은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처럼 에베소 곳곳에 심겨져 결실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2) 그 결과 이 도시에서 우상을 섬기는 무리가 줄어 들었습니다. 은장실의 수요가 급작스레 줄어 들어 이 방면에서 종사하는 사람들의 생계에 막대한 영향을 주게 된 사실로도 알 수 있습니다. 은장실이란 은장색이 만드는 수공예품으로 우상 숭배하는 일에 헌납하기도 하고 그 실로 아데미 신전의 모형을 만들어 팔기도 했습니다. 

(3) 이 소요는 데메드리오라고 하는 유력한 은장색에 의해 시도되었습니다. 그는 아데미 신전에 관계된 여러 가지 공예품을 만들어 재미를 보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 데메드리오는 에베소와 아시아 전역에 걸쳐서 허다한 동업자들을 권유하여 반기를 들게 한 것입니다. 그 이유가 자신들의 생계가 위협을 받게 되었다는 것과 자신들의 영업이 천해졌다는 것입니다. 이 소요는 잠시 동안에 에베소 온 시를 소란과 무질서로 몰아갔습니다.

데메드리오의 선동은 은장색들의 마음을 순식간에 격동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들은 가이오와 아리스도고를 체포하여 연극장으로 달려 들어 갔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붙잡혀 간 동료를 구하려는 생각으로 극장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에베소에 있는 바울의 친구들의 권유로 들어가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같은 소요는 에베소시의 한 서기장의 지혜로운 권고로 진정되었습니다.

그는 에베소 시민들에게 그들이 아데미 신전과 그 여신을 숭앙하는 일에 대해 칭찬하면서 그러나 이들이 이 신전과 자기들이 섬기는 여신을 훼방한 것도 아니요 신전의 물건을 도적질 한 것도 아닌데 이런 일로 소요가 발생하면 이에 대한 책망을 듣게 될 것이라고 경종한 것입니다. 이런 서기장의 설파로 에베소시의 위험스러운 소요사태는 진정된 것입니다.


결론 : 하나님의 도우심은 어떤 경우에는 이처럼 이방인들의 손길을 통해서 나타날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환경속에서도 하나님의 손길이 나타나 도와주신다고 하는 믿음을 가지고 담대함으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20장(79~84)

◆ 밤중소리 11-06 | VIEW : 3,931

(79) 유두고의 실패(사도행전 20 : 1 - 12)

(80) 모범적인 목회자(사도행전 20 : 13 - 21)

(81) 바울이 피력한 그의 사명(사도행전 20 : 22 - 27)

(82)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사도행전 20 : 28)

(83) 일깨어 기억하라(사도행전 20 : 29 : 32)

(84) 주는 자의 복(사도행전 20 : 33 - 38)


(79) 유두고의 실패

(사도행전 20 : 1 - 12)


바울이 에베소에 오래 머물러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여 많은 결실을 맺었지만 에베소시가 뒤집히듯 소요사건이 난 이후 바울은 그 곳을 떠나기로 했습니다. 바울은 마게도냐를 거쳐 헬라에 이르러 그 곳에서 수리아로 가려고 했지만 자기를 해하려는 유대인들의 공모를 피하여 마게도냐로 다녀 돌아가기를 작정했습니다. 바울 일행은 헬라에서 빌립보로 갔으며 그 곳에서 무교절을 지낸 후, 배로 드로아에 가서 한 주간을 머물게 되었습니다.


1. 안식 후 첫날에 모여 말씀을 강론한 바울

바울은 드로아에서 이레간 머무는 동안 안식 후 첫날에 떡을 떼려 하여 모였다고 했습니다.

(1) 안식 후 첫날에 떡을 떼고 말씀을 강론하기 위해 모였다고 한 일은 주의 날에 예배를 드렸다고 하는 최초의 증거가 됩니다. 안식 후 첫날이란 바로 요일로는 일요일이며 이 날 주님이 부활하셨으므로 성경에서는 주의 날이라고 부르며 '주일'이라고 말합니다. 드로아에서 이처럼 주의 날에 성도들이 모여 떡을 떼고 말씀을 강론했다고 한 사실은 예배를 위해 이 날에 모이는 습관이 있었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분명한 사례인 것입니다.

바울이 안식일에 유대인들의 회당에서 예배를 드리고 복음을 전한 일은 주로 유대인등을 상대로 복음을 전하기 위한 전도 방법의 수단으로 그렇게 한 일이지 그 날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관례로 그렇게 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바울은 안식 후 첫날인 주의 날에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과 함께 떡을 떼며 말씀을 강론한 사실을 드로아 교회에서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인들이 안식일에 대한 올바른 견해를 갖는 일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십계명 중 제 4계명이 안식일에 대한 계명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십계명은 도덕적 계명이므로 영원히 기켜져야 할 도덕율이라고 하여 안식일을 어기는 일은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일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소위 안식교라고 하는 이단 종파까지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십계명 중 4계명인 안식일은 영원한 계명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지켜야 할 복음적 계명이 아닌 것입니다. 바울은 이 안식일에 대해 분명한 계시를 받아 우리에게 안식일의 무효성을 분명히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골2:16-17). 안식일을 인하여 폄론하지 말라는 말은 안식일은 이미 지나간 일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에게 아무런 효력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라고 했습니다. 안식일은 그 자체가 실체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림자는 그 실체가 오면 반드시 폐해지는 것입니다. 안식일이 장래일의 그림자란 말씀은 안식일 그 자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뜻입니다. 안식일의 참된 의미가 히4:1-11절에 걸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안식은 천국 생활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구원은 부활로써 완성되며 부활한 몸으로 천국에 들어갈 때 모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마무리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크나큰 의의가 있습니다. 주님의 부활하신 날이야말로 구약적인 안식의 그림자인 안식일의 신약적인 실체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안식일에 얽매인 자는 아직까지 그 얼굴에서 수건이 걷히지 않은 이스라엘처럼 율법으로 의를 얻고저 하는 일이기 때문에 복음에 도전하는 율법주의가 되는 것입니다.


2. 유두고의 실패

바울이 말씀을 강론할 때 유두고란 청년이 말씀을 듣는 중 졸다가 3층에서 떨어지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유두고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세가 잘못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듣느냐는 문제는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에 많은 영향을 미치는 일입니다.

(1)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의미하게 듣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에 아무런 감동도 받지 못합니다.

(2) 또 어떤 사람들은 완악한 마음을 가진 채로 말씀을 듣습니다. 회개치 않은 마음으로 말씀을 들으면 그 말씀이 그 사람의 마음에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3) 어떤 사람은 습관적으로 교회에 출석하여 습관적 자세로 듣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믿음을 가질 수 없으며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서 그들의 생활에 나타날 수 없습니다.

(4) 하나님의 말씀은 간절하므로 받아 드려야 합니다. 먼저 회개하여 그의 마음 문이 열려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유두고는 창에 걸터 앉아 말씀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말씀을 듣는 자세가 잘못된 유두고는 곧 졸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이 깊은 졸음으로 인하여 창에서 떨어져 죽게 된 것입니다.


결론 : 유두고는 창에서 떨어져 죽었지만 바울의 기도로 그가 다시 살아 났습니다. 우리는 유두고처럼 졸다가 떨어져 죽는 일이 없도록 늘 깨어 기도하는 생활,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히 받아 말씀으로 깨어 있는 생활을 해야 하는것입니다.


(80) 모범적인 목회자

(사도행전 20 : 13 - 21)

바울의 심정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는 에베소 교회를 둘러보고 싶었으나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당도하고자 하는 계획 때문에 에베소를 지나 밀레도에 이르렀습니다. 바울이 오순절 이전에 예루살렘에 가고자 한 것은 새로운 사명을 받기 위한 바울 나름대로의 계획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교회의 출발지요 성령이 최초로 임하신 곳입니다.

이 예루살렘으로부터 복음이 전파되어 땅 끝까지 전해질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이곳에는 전 세계에 복음 전파의 전략을 세우는 총사령부가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회의는 사도들이 주관하는 최고회의였습니다. 바울은 이런 자신의 예루살렘 방문 계획이 자신이 하나의 죄수의 몸으로 그가 그토록 바랐던 로마로 가는 동기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입니다.


1. 아시아에서 행한 바울의 모범적 목회

밀레도에 당도한 바울은 그 곳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위하여 그 교회 장로들에게 긴요히 당부할 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에베소 교회 장로들이 밀레도에 오자 바울은 자신이 아직까지 복음 전도를 위해 걸어온 길을 회고하는 말을 들려주면서 앞으로 에베소 교회 안에 생겨날 흉악한 이리들이 등장하여 교회를 어지럽힐 일을 경종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장로들에게 눈물을 흘리면서 양 무리들을 지켜 줄 것을 당부했습니다. 이 바울의 연설은 진실한 목회자의 길과 걸음을 보여주는 호소였습니다.

(1) 바울은 모든 겸손과 눈물로 양 무리들을 섬겼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서 힘을 쏟아 목회한 날 수는 3년입니다. 바울은 이 3년간에 걸쳐 목회 생활을 겸손과 눈물로써 보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목회자의 첫째 미덕은 겸손입니다. 교회 성도들은 상처 입기 쉽고 깨어지기 쉬운 연약한 그릇들입니다. 그들을 감싸주는 힘은 겸손에 있습니다.

목회자들이 양 무리들에게 겸손해야 할 것은 자기가 맡은 양 무리는 실인즉 주님이 자기에게 맡겨진 양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뿐 아니라 바울은 또 에베소 교회를 목회하면서 많은 눈물을 흘렸다고 했습니다. 목회자의 위로는 눈물입니다. 바울이 어떤 일로 눈물을 흘렸는지는 몰라도 목회를 하다 보면 눈물을 흘릴 때가 한 두 번이 아닌 것입니다. 목회자는 어려운 일을 당할 때 강단에서 홀로 눈물을 흘려야 하는 것입니다. 까닭없이 오해를 받았을 때에도 눈물로 진실을 아뢰게 되 는 것입니다.

교회가 어지럽고 목회자가 양들로부터 배척을 당할 때에 누구에게 찾아가 그 속사정을 나눌 수 있을 것입니까?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기도할 뿐입니다. 성도들의 가정이 어려움을 당했을 때 그 가족과 함께 정말로 울어 줄 수 있는 사람은 목회자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들로부터 오해를 사고 배척을 받을 때 목회자는 눈물을 흘리게 되는 것입니다.

(2) 바울은 시험을 참고 주님을 섬겼다고 했습니다. 바울에게는 말할 수 없는 많은 시험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괴로웠던 것은 동족인 유대인들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런 시험을 참고 주님을 섬겼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종들에게는 많은 시험이 따릅니다. 목회자들의 주변에는 시험의 요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섬기는 일에는 어떤 시험이라도 참아야 합니다.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하므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벧전2:19).


2. 바울의 교육 목회

바울은 양 무리들에게 가르쳐서 유익한 것은 거리낌없이 가르쳤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는 절대로 뒤로 물러섬이 없었습니다. 그가 수모를 달게 여기며 시험을 참으며 겸손과 눈물로 양 무리들을 돌 본 일은 실인즉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며 그 말씀을 따르게 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의 목회는 이처럼 교육적 차원에서 힘있는 목회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양 무리에게 유익한 것이면 꺼림이 없이 가르쳤다고 했습니다.

꺼림이란 말은 휘포로텔로( )로 오므리다, 물러가다, 낮추다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므리지도 않고 물러서지도 않으며 낮추는 일도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증거했습니다. 회개가 따르지 않는 복음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천국은 회개하는 자들이 들어가기 때문에 우리는 교회에서 회개의 목소리를 높여야 하는 것입니다(마3:2).

하나님의 나라는 회개의 열매를 맺는 백성들이 얻는다고 했습니다(마3:8 ; 21:43). 회개란 말은 메타노에아( )란 말에서 유래되었는데 이 말은 마음이나 목적을 바꾼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복음을 듣고 그 마음이나 그의 생애의 목적의 돌이킴이 없이는 회개의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결론 : 한마디로 바울의 목회는 모든 목회자의 거울입니다. 지혜롭고 충성된 종이 되려면 바울의 심정으로 목회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한편 성도들은 바른 목회자의 지도 아래 영적으로 성장하여 목회자를 돕는 충성스러운 일꾼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81) 바울이 피력한 그의 사명

(사도행전 20 : 22 - 27)

예루살렘으로 가려는 바울의 심정은 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령께서 이미 바울에게 나타내 보이신 것은 그 곳에는 환난과 결박이 기다린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예루살렘 방문 계획을 로마의 성도들에게 알렸을 때, '나로 유대에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에게서 구원을 받게 하고 또 예루살렘에 대한 나의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음직 하게 하기 위해' 자신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해 줄 것을 부탁한 일이 있었습니다(롬15:31). 바울은 이제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을 위하는 일을 완수함에는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한다'고 하는 굳은 결의를 가지고 예루살렘에 갈 것을 주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1. 바울의 달려갈 길

바울은 나의 달려갈 길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달려갈 길은 어떤 길이었습니까? 바울은 그의 전 생애를 그의 달려갈 길을 향하여 힘있게 달려갔습니다.

(1) 바울은 앞에 있는 상을 바라보는 삶으로 그의 인생길을 달려갔습니다. 바울은 이처럼 말했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나는 아직 내가 잡은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 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고 했습니다(빌3:12-14).

바울은 그의 고백처럼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는 생애'를 보낸 것입니다. 그가 좇아가려고 한 것은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이라고 했습니다. 하늘의 상을 바라보고 그 상에 소망을 두고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은 복 있는 생애를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양 무리를 치는 목회자들을 향하여 장차 받을 영광의 면류관을 위하여 모든 일에 자중하고 절제하라고 했습니다.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벧전5:2-4). 목회자들은 어려운 일을 만나고 시련을 당할 때 이같은 소망으로 격려를 받고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2) 바울은 잠시의 환난의 대가가 장차 크나큰 영광을 안겨 준다는 믿음으로 그의 인생길을 달려갔습니다. 바울은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결박과 환난을 두려워하지 않은 것은 바로 이같은 사실에 근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주를 위해 이 땅에서 아무리 큰 환난을 당해도 그 일은 우리가 장차 하나님의 나라에 가서 받을 영광의 상급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긴 것입니다.

(3) 바울은 믿음을 지키는 인생길을 달려갔습니다. 바울은 얼마 남지 아니한 자신의 생애를 바라보고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생애에 가장 중요한 일은 믿음을 지키는 일입니다. 바울은 믿음을 지키는 일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그는 고백하기를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을 될까 두려워함이로다'고 한 것입니다(고전9:27).

(4) 바울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인생길을 달렸습니다. 고후5:8절에서 이르기를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기쁨이나 유익을 위한 삶을 살아간 것이 아니라 온전히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생애를 살아간 것입니다.


2. 바울이 예수께 받은 사명

바울은 자신의 생애의 목표를 두 가지로 분류했는데 이 두 가지가 모두 주님께 관한 것입니다.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교파적인 분쟁도 몰랐고 복잡한 신학적 이론을 만들어 낸 적도 없습니다. 다만 주의 복음만을 뜨겁게 증거했습니다.

은혜의 복음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에게 맡겨 주신 사명을 이처럼 이루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해 깨끗하다고 주장했습니다. 바울은 다시는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맞나 보지 못할 일에 대해 애석히 여기면서도 그러나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이 없음을 자신 있게 피력했습니다.

결론 : 바울은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는 담대했습니다. 은혜의 복음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한 바울의 생애를 본 받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82)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사도행전 20 : 28)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밀레도로 불러 그들에게 간절한 부탁을 하는 중 '앙떼들을 위해 삼가라'고 하는 말을 주었습니다. 바울은 장로들에게 자신은 은혜의 복음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한다는 결의를 밝힌 후, 그들도 양 무리들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일러 준 것입니다. 이 바울의 부탁은 주님이 모든 양 무리의 감독자들에게 당부하는 간절한 부탁으로 바울의 양떼를 사랑하는 심정을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1. 자기와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바울은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자기를 위하여 또는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고 말했습니다. 삼가라는 말은 프로세코( )로 주의하다, 조심하다, 청종하다, 착념하다란 뜻을 담고 있습니다. 장로의 직분을 가진 자는 양무리들 앞에서 모든 행위에 조심하고 주의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청종하고 착념하라는 뜻으로 삼가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 장로에게는 먼저 자신을 위하여 삼가는 생활이 필요합니다. 장로들의 직임은 무거운 것입니다. 비단 장로뿐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에서 직분을 맡은 자의 책임은 모두 무거운 것입니다. 교회의 직분에는 많은 상급과 영광이 따르기 때문에 그 책임 역시 크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2) 장로는 자기 향상이 따라야 합니다. 영적인 성장이 없이는 자기 향상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영적 지도자가 안일한 생각에 사로잡히는 생활을 하거나 육신의 평안함을 추구한다면 그의 목회 생활이나 신앙 생활은 퇴보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목자가 자기 향상을 기하려면 양 무리들에게 신령한 양식을 먹이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연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양떼들의 풍성한 생명을 위해 끊임없이 보살피며 기도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3) 장로는 지혜 있고 충성된 종이어야 합니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줄자가 누구뇨'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충성스러운 종을 가장 기뻐하십니다. 충성스럽다는 말은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을 책임감을 가지고 수행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4) 장로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야 합니다. 양을 다스리는 사람은 어느 모로 보나 양 무리의 본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양에게 거치는 지도자는 양들로 넘어지게 하는 장로요 양떼들에게 깊은 신앙을 주고 아름다운 생활의 열매를 맺게 하려면 먼저 자신이 양 무리의 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장로는 양떼의 영혼의 빚진 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을 가르칠 뿐 아니라 권면하는 일에도 삼가야 하는 것입니다. 죄는 양떼의 생명을 죽이기 때문에 늘 회개를 권고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른 교훈에 순종하도록 주의 이름으로 권면해야 합니다. 사탄의 궤계에 넘어가지 않도록 늘 경계하도록 해야 합니다.


2. 감독자로 삼으신 성령

바울은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았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하나님의 교회의 모든 직분은 성령께서 세우신다고 하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맡은 교회의 직분이 어디로부터 왔느냐고 하는 사실에 대하여 잘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 직분에 대한 중요성을 깨닫게 되며 충성된 사명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들로 하나님의 교회의 직분자로 세우신 성령의 뜻을 깨달아 그 뜻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 장로들이 섬기는 교회에 대하여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란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자기 피라고 하신 피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는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시는 일로 결실을 보셨는데 이런 결실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써 이루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있어서 교회란 이 세상 그 무엇보다 소중하고 귀중한 존재인 것입니다. 그의 피로 사셨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소중히 여기시는 그의 양 무리를 치는 일은 놀라운 사명이며 아무에게나 이같이 막중한 사명을 맡기시는 것이 아니십니다.

(1) 그러므로 양떼를 치는 장로는 그 양떼를 잘 쳐야 합니다. 양떼들은 우준한 목축이기 때문에 목자가 치는 대로 자라며 목자가 다스리는 대로 길 들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이 피로 사신 것이기 때문에 이 세상을 이깁니다. 이곳에 음부의 권세가 절대 미치지 못합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신 예수님은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비록 연약한 그릇처럼 보이는 교회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

는 것입니다.


결론 : 하나님의 교회에는 비록 장로의 직분만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성령께서 제각기 직분을 주신 것은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말씀하신 대로 충성케 하기 위함이란 사실을 명심하고 하나님의 교회에 충성스러운 일꾼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83) 일깨어 기억하라

(사도행전 20 : 29 : 32)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밀레도로 불러 심심한 부탁을 하는 중 특히 흉악한 이리가 교회에 들어와 양떼들의 생명을 노략질해 갈 것을 알고 일깨어 바울이 삼년간이나 눈물로 가르친 교훈을 기억하라고 당부한 것입니다. 바울의 이같은 간절한 당부는 그의 진실한 목회자 상을 보여주며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하는 목자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이리들은 각 교회마다 도처에 많기 때문에 바울의 교훈을 거울 삼아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1. 흉악한 이리의 모습

바울이 떠난 후에 에베소 교회에 들어 올 흉악한 무리들에 대하여 바울은 이미 영적인 통찰력으로 관찰하고 다음 세 가지 모습으로 경계한 것입니다.

(1) 첫째로 그 양떼들을 아끼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교회에 들어와 양들의 생명을 노략질하는 이리들의 특성은 양떼를 아까지 아니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양들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이리들입니다. 이들에 대하여 예수님은 요10:10절에서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뿐'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같은 목적을 가지고 양떼들에게 다가오기 때문에 양들의 생명을 도무지 귀하게 여기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진실한 양들의 목자들에 대하여 지혜롭고 충성된 종이 되어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줄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만 먹인다는 말은 양들에게는 먹이지 않고 자기는 양의 젖만 먹고 살아가는 목자를 일컫는 말입니다.

(2) 다음에 이들은 양 무리들을 끌어 자기를 쫓게 한다고 했습니다. 흉악한 이리의 정체는 양 무리로 자기를 쫓게 하는 일에 깊은 관심을 두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목자가 양 무리를 맡았으면 그 양들을 예수님의 양으로 키우며 예수님을 따르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양 무리는 하나님이 피로써 값주고 사신 것이기 때문에 그 소유권이 주님께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양들을 자신의 소유인양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같은 일로 인하여 교회에서 파당이 형성되며 싸움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양들로 자기를 따르게 하기 위해 교회에서 당을 지어 파당적인 행동을 하는 자들에 대하여 엄중한 경종을 주고 있습니다.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3) 다음에 이같은 이리떼들의 특성은 어그러진 말을 한다고 했습니다. 어그러졌다는 말은 바른 말에서 떠났다는 말입니다. 진리로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진리를 잘못 전하여 양 무리들의 영적 생명을 병들게 하고 죽이게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이런 자들이 그들 가운데서 일어날 것이라고 경종한 것입니다. 아마 바울의 이같은 경종을 들은 그들 장로들 중에서도 이런 이리가 생겨날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깨어 기도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경성하므로 이같은 쓴 뿌리들, 이리떼들이 되지 않도록 경계하며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2. 이리떼를 이기는 승리의 비결

그러면 이같은 이리들의 미혹을 이기며 그들에게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1) 바울은 장로들에게 권고하기를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이리떼들을 물리치는 일이나 그들의 미혹을 이길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능히 거짓 선지자의 가면을 벗겨 그들의 정체를 들어 낼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서 삼년간이나 뼈아픈 목회 생활을 하면서 눈물로 그들을 가르쳤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기억하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는 아무 것도 숨겨질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한다'고 했습니다.

(2) 바울은 은혜의 말씀께 너희를 부탁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은혜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로 진리 가운데 살아가게 하십니다. 이 말씀은 능히 우리로 모든 사탄의 유혹을 이길 능력을 공급해 주십니다. 우리가 이 말씀에 의지하면 그 말씀이 친히 우리를 지켜 주시고 하나님의 권능으로 우리를 사탄의 권세에서 구해 줄 것이기 때문에 바울은 은혜의 말씀께 부탁한다고 한 것입니다.


결론 :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삼년간 목회할 동안 결코 성도들의 재산을 탐하지 아니했으며 그의 손으로 자비량하는 목회를 했다고 했습니다. 바울의 이같은 목회는 에베소 교인들에게 보인 모범으로 그들은 이같은 목자의 일을 본 따 그들 스스로가 수고하여 약한 형제들을 도와주고 다른 형제들에게 주는 자들이 되라고 권면했습니다. 이 모든 말을 다한 바울은 무릎을 꿇고 저희들과 함께 기도했을 때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은 다 바울을 껴안고 입을 맞추고 울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바울의 권고를 우리 신앙의 경계를 삼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84) 주는 자의 복

(사도행전 20 : 33 - 38)

바울이 밀레도에서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권고한 눈물의 당부는 그의 진심과 거짓 없는 사랑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그 곳에 있었던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바울은 마지막 권고를 자신의 경우에 비추어 '주는 생활'에 대하여 말했습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1. 바울의 일관된 생애

바울이 걸어온 인생을 그의 회심 이전의 생애와 회심 이후의 생애로 나눌 수 있습니다. 회심하기 이전의 바울은 로마의 시민권을 소유하고 있는 청년이요 고등 교육을 받아 그 당시 모든 계층으로부터 그의 지식과 인격이 인정받은 유능한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열심이 특심한 바리새파 사람이요 하나님을 위하는 일이라면 어떤 희생이라도 감수할 신앙적 청년으로 예수를 추종하는 주님의 교회들을 이단의 집단으로 단정하여 교회를 핍박하는 일에 선두에 나섰던 자였습니다.

이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회심한 후, 그의 이같은 생애가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향하여 새롭게 쏟아지게 된 것입니다. 그의 기왕의 모든 지식은 그리스도를 아는 일과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지식으로 탈바꿈하였고 하나님과 율법을 섬겨 온 그의 신앙은 그 방향이 예수께로 전환되어 '살든지 죽든지' 자신의 온 생애를 주를 위해 바쳐온 것입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는 자는 복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 당연한 권리마저 스스로 포기하면서 주의 일에 자신의 인생을 바친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것이 주님게 기억하신바 되어 하늘의 상급으로 갚아 주실 소망을 가진 것입니다.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너희 아는 바에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당하여 범사에 너희에게 모범을 보였노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2.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바울은 자신의 경우, 온전히 자신의 온 생애를 복음을 위해 바쳐 왔기 때문에 그리고 그 일이 바울에게는 무한히 자랑스럽고 후회 없는 생애였기 때문에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마지막 부탁으로 주님의 말씀을 빌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라'고 권고한 것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는 두 가지 면에서 살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다음에 나와 이웃과의 관계에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처음 익은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면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또 각종 처음 익은 열매와 너희 모든 예물 중에 각종 거제 재물을 다 제사장에게 돌리고 너희가 또 첫 밀가루를 제사장에게 주어 그들로 네 집에 복이 임하도록 하게 하라'고 말씀했습니다(겔44:30). 잠3:9절에서는 '네 재물과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처음 열매 속에 깃들어 있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진실한 사랑에는 반드시 물질이 따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도 '네 물질이 있는 그 곳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을 언제나 물질에서 먼저 달아보시기 때문에 물질을 드리기를 아까워하는

마음, 물질의 축복 받을 길이 없는 인색한 믿음의 사람들이 되지 말고 언제나 하나님께 기쁨으로 풍성히 드릴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2) 11조를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십일조를 드리는 일을 굉장한 믿음의 성장이라고 여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실인즉 이 십일조는 하나님께 드려야 할 가장 최저의 표준임을 알아야 합니다. 십일조란 엄격히 말한다면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야 할 마땅한 세금인 것입니다.

(3) 다음에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많이 심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자신이 그의 생활 가운데 심은 것을 거두어 드리는 생활입니다.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고 하셨습니다.

(4) 다음에 '받는 자 보다 주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한 말은 주로 대인관계를 생각하면서 들려준 말입니다. 여기서 받는다는 말은 넉넉하지 못하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임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준다는 말은 넉넉하다, 부요하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도와 주는 것이냐하면 그런 것이 아닙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고 하셨습니다(눅6:38).

우리는 이런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을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는 대상은 가난한 사람입니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입니다. 잠19:17절에서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어려운 사람을 도와 주는 일은 복을 받는 일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 이곳에서 바울이 복이 있다고 한 복은 마카리오스( )로 영적인 축복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하늘의 상급과 연결되는 복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물질의 복과 연결될 뿐 아니라 하늘의 상급과도 연결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이 복을 누릴 수 있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21장(85~86)

◆ 밤중소리 11-06 | VIEW : 3,077

(85)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사도행전 21 : 13 - 14)

(86) 예루살렘에서 당한 바울의 결박(사도행전 21 : 15 - 40)


(85)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사도행전 21 : 13 - 14)

바울은 밀레도에서 에베소 교회 장로들과 작별하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행선을 계속했습니다. 빠른 시일에 예루살렘에 도착하려고 행선 코스를 따라 여러 배를 가라 탔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에 잠시 머물러 있었던 곳마다 예루살렘에서 당할 위험을 성령으로 경고 받았으나 바울은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고 복음을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한 그의 결심을 나타냈습니다.


1. 성령의 지시

바울이 여러 곳에 있는 성도들로부터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 것을 권고 받았는데 이런 권고는 한결같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습니다. 그가 두로에 도착했을 때 그 곳에 거하는 제자들을 찾아 이레간을 머물게 되었습니다. 이 교회는 바울이 세운 교회는 아니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으로 영접한 그 곳 성도들은 바울에게 깊은 호의를 베풀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로 교회에는 예언의 은사를 받은 성도들이 여러 명 있어서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말 것을 권면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가이사랴에 이르렀을 때 빌립 집사의 집에 머물게 되었었는데 유대로부터 내려온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바울이 있는 곳에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고 하면서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 것을 간곡히 권면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같은 상황에서 두 가지 면으로 나타난 성령의 역사를 바라보면서 바울이 올바른 성령의 뜻을 따른 믿음의 결정에 대하여 그의 위대한 선택에 찬사를 보내게 되는 것입니다.

(1) 바울이 받을 것이라고 하신 성령의 나타내심은 바울이 받을 고난에 대한 예언으로 주신 것입니다. 바울이 고난을 당할 일에 대하여 성령께서 분명히 밝히셨지만 성령께서 바울더러 그 일을 피하라고 명하신 일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다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 것을 권면한 일은 바울을 아끼는 여러 형제들의 위안의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같은 주위 사람들의 권면을 받아들여 바울이 자신이 겪을 고난의 길을 피한다면 그런 우유부단한 일이야말로 성령의 뜻을 거역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당하실 일에 대하여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가 간하여 이르기를 '주여 그 리 마옵소'라고 말했을 때 주님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로 하시면서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고 나무라셨습니다(마16:21-23).

(2) 다른 한가지는 성령께서는 이미 바울의 마음에 예루살렘에서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심어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두로 교회 형제들의 예언이나 아가보의 성령의 나타남은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 것을 지시한 권고가 아니기 때문에 그들의 권고를 따라 예루살렘에 갈 것을 포기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어떤 결정을 내리려 할 때나 어떤 길을 선택할 때는 반드시 성령의 뜻을 하나님의 말씀에서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2. 복음을 전하여려는 바울의 결단

바울은 가이사랴 교회 형제들에게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고 자신의 심정을 토로했습니다. 바울이 이처럼 죽을 것도 각오했노라고 한 말에서 바울의 복음을 전하는 진실한 자세를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런 신앙적인 결단은 어디에 온 것입니까? 그리스도를 만난 후의 그의 인생관과 그가 그리스도 안에서 바라본 위대한 상급에 대한 소망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고 말했습니다(빌1:20-21). 그들은 바울을 설득하여 죽음의 사지로 들어가지 말 것을 말렸지만 바울은 그들의 권함을 듣지 아니했습니다. 결박 뿐 아니라 죽기를 각오한 바울에게 결박이 두려워 몸을 도사릴 그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할 수 없이 다 함께 기도하기를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고 기도하는 것으로 그쳤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결론은 바로 이 기도와 같이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위해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는 십자가가 당장에는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것처 보이고 자기 인생에 손실을 가져오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결과적으로는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축복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 바울은 그의 생애를 오직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일에 헌신했습니다. 그는 후회 없는 생애를 살았고 모든 성도들의 귀감이 되는 삶을 살았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했노라'고 고백한 바울의 그 굳은 믿음의 심지를 본 받아 우리의 생애도 주를 위하여 죽을 것도 각오한 생애,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생애를 보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86) 예루살렘에서 당한 바울의 결박

(사도행전 21 : 15 - 40)

바울은 드디어 예루살렘에 이르렀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온 표면적 이유는 하나님께 드릴 제물과 예루살렘 성도들에게 전해 줄 구제금의 전달이었습니다(행24:17). 그러나 실인즉 바울의 예루살렘 방문은 복음의 보다 큰 사역을 이루기 위해서였습니다. 바울은 과연 자신이 예언한 대로 예루살렘에서 주의 복음을 위해 결박 뿐 아니라 더 심한 핍박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1. 야고보를 방문한 바울

바울이 예루살렘에 도착하자 그 곳 형제들의 영접을 받았으며 이튿날 아고보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야고보는 요한의 형제인 사도 야고보를 가리킴이 아닙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미 헤롯왕에 의해 칼로 죽임을 당했습니다(행12:1-2). 이곳에 나오는 야고보는 주님의 형제가 되는 야고보를 말합니다. 야고보는 사도는 아니었지만 주의 형제라는 이름 때문에 그 당시 예루살렘 교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행12:17).

(1) 야고보에게는 이해심과 사랑이 있었습니다. 바울을 처음 만난 야고보는 아직까지 좋지 않은 소문이 예루살렘에 들려 왔기 때문에 바울에 대해 오해할 만한 요소가 많이 있었지만 반갑게 맞이하여 그의 봉사로 말미암은 복음 사역에 대하여 보고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이방인 가운데서 어렵게 복음을 전한 사실을 낱낱이 듣고 모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우리는 혹 사람들이 전하는 풍문으로 다소 오해 받을 만한 일이 있어도 사랑과 이해심을 가지고 사실 여부를 사실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2) 바울로 말미암아 문제점이 제기 되었을 때 야고보는 슬기롭게 대처해 나갔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아직 영적으로 미숙한 초대교회란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이 교회에는 많은 성도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아직까지 다 율법에 열심 있는 율법주의적인 생활에 깊숙이 젖어 있는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머리와 생활에 스며 있는 율법주의적인 사고와 생활은 그리스도를 영접했다고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에 믿는 유대인들중 수 만 명이 율법에 열심 있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에서 인정 받으려면 이들이 가지고 있는 잘못된 바울에 대한 오해를 풀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여기서 야고보는 바울에게 한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그 제안이란 바울에 대하여 유대인들이 듣고 있는 바가 사실이 아님을 행동으로 증거를 삼아 보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서원한 네 사람의 경비를 부담하고 결례를 행하고 머리를 깎게 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야고보의 제안을 좋게 여겨 받아 드렸습니다. 네 사람의 서원이란 나실인의 서원으로 이들은 율법에 의해 결례를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민6:1-21). 바울은 율법의 의를 인정치 않았지만 의롭다 함을 얻으려는 목적이 아닌 이상 복음을 위해 율법에 대해 관대하기도 했습니다.


2. 바울이 유대인에게 당한 핍박

바울은 야고보의 제안에 동의하고 스스로 서원을 하고자 하는 네 사람을 데리고 자신이 배용을 드려 결례를 거의 마쳐갔습니다. 이로써 예루살렘 교회에서 자칫 오해 받기 쉬운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형제들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에베소 지방에서 올라온 유대인들에 의해 일어났습니다. 에베소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은 바울에 대해 악한 감정을 가지고 그를 위해하려고 했지만 실패한 적이 있었습니다(행19:23-41). 그런 바울이 이방인을(에베소 사람 드로비모) 데리고 성전에 들어간 것을 보고 이 기회에 바울을 죽이려는 악한 음모를 가지고 소동을 일으킨 것입니다.

(1) 이방인은 성전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이방인들은 다만 성전 밖 마당인 이방인의 뜰만 밟을 수 있을 뿐입니다. 바울은 실제로 이 이방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을 모함라려는 유대인들이 현장에서 바울을 체포하지 않고 다음 기회에 바울이 홀로 성전에 있을 때 소동을 일으킨 것입니다.

(2) 그들은 바울을 혹독하게 비방했습니다.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곳을 훼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이 자가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안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게 했다고 거짓 증거한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온 예루살렘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몰려와 바울을 체포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들은 바울을 죽이려고 성전 밖으로 끌고 갔습니다. 이 때에 로마군의 천부장이 나타나 바울을 구해 주게 됩니다. 예루살렘 성의 치안을 담당하고 있는 천부장에게 예루살렘 성이 요란하다는 소문이 들려 왔습니다. 천부장은 군사를 이끌고 현장에 달려와 돌로 치려는 바울을 죽음 직전에서 구해 주게 됩니다.


결론 : 바울의 예루살렘 방문은 결국 다른 사람이 예언했던 대로, 바울 자신이 예견했던 대로 주의 이름을 인하여 결박을 당하는 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같은 바울의 결박이야말로 앞으로 바울이 그렇게도 갈망했던 로마로 가는 길잡이가 되어 놀라운 복음 사역의 출발점이 되었다는 사실은 기독교 사상 특기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