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新約]강해/◆ 사복음서 · 사도행전 강해-1

사도행전 8-12장 ◆ 밤중소리

영국신사77 2020. 4. 12. 20:54


사도행전 제목차례

사도행전 8장(26~29)

(26) 교회의 박해와 흩어짐(사도행전8:1-8)

(27) 빌립에게 나타난 능력(사도행전8:9-13)

(28) 성령을 받은 사마리아 사람들(사도행전8:14-25)

(29) 빌립의 전도를 받은 에티오피아 내시(사도행전8:26-40)


사도행전 9장(30~35)

(30) 바울의 소명(사도행전9:1-9)

(31) 바울의 회개(사도행전 9 : 1 - 9)

(32) 바울의 성령 충만함(사도행전 9 : 10 - 19)

(33) 회심 후의 바울의 생활(사도행전 9 : 20 - 30)

(34) 교회 부흥의 운동력(사도행전 9 : 31)

(35) 애니아와 다비다(사도행전 9 : 32 : 43)


사도행전 10장(36~39)

(36) 고넬료의 신앙생활(사도행전 10 : 1 : 2)

(37) 하나님께 상달된 고넬료(사도행전 10 : 3 : 8)

(38) 베드로의 환상(사도행전 10 : 9 : 23)

(39) 고넬료의 집에 내리신 구원(사도행전 10 : 24 : 48)


사도행전 11장(40~42)

(40) 베드로의 변명(사도행전 11 : 1 - 18)

(41) 안디옥 교회의 시작(사도행전 11 : 19 - 21)

(42) 바나바로 인한 역사(사도행전 11 : 22 - 30)


사도행전 12장(43~44)

(43) 헤롯왕의 교회 핍박(사도행전 12 : 1 - 12)

(44) 더 흥왕해 가는 하나님의 말씀(사도행전 12 : 13 -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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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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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교회의 박해와 흩어짐(사도행전8:1-8)

(27) 빌립에게 나타난 능력(사도행전8:9-13)

(28) 성령을 받은 사마리아 사람들(사도행전8:14-25)

(29) 빌립의 전도를 받은 에티오피아 내시(사도행전8:26-40)


(26) 교회의 박해와 흩어짐

(사도행전8:1-8)

스데반 집사의 순교를 계기로 그 날부터 예루살렘 교회에는 핍박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핍박으로 예루살렘 교회는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는데 이같은 역사로 주의 복음이 이방 세계로 번지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사탄은 언제나 교회를 핍박하지만 교회를 주관하시는 주님은 그 같은 일로 오히려 주의 복음을 사방으로 왕성하게 퍼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1. 교회의 박해

유대인들은 스데반 집사를 성공리에 죽인 일에 쾌재를 부르면서 이 기회에 교회를 박멸하기로 결의했습니다.

(1) 그들이 이같은 결의를 하게 된 이유는 예수의 부활을 증거 하는 기독교야말로 자신들의 지위와 명예에 큰 손상을 주고 위협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율법이 그들의 생존에 절대적인 조건인 줄로 믿고 있었으며 율법에 도전하는 어떤 세력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만약에 예수를 믿음으로 의로워지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기독교의 복음이 번진다면 그야말로 자기들이 설 땅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2) 다음에 이 교가 날이 갈수록 염병처럼 번지기 때문에 큰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의 부활을 전하는 복음에는 이상한 힘이 작용해서 예루살렘 안에 자꾸 번져 가며 많은 백성들이 예수를 믿게 되는 일에 불안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베드로의 한번의 설교에 3천명이 회개하여 예수를 메시야로 믿게 되었으니 자신들로는 막을 도리가 없고 제지할 수가 없었습니다.

(3) 예루살렘 교회가 핍박을 받은 일은 많은 성도들이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으로 흩어지는 결과를 가져 왔습니다. 아직까지 예루살렘 교회는 자기 교회의 부흥과 확장에만 힘썼을 뿐 복음을 널리 전하는 선교적인 일에는 관심을 쓰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것이 스데반 집사의 순교를 계기로 교회의 박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교회를 이처럼 흩으신 것입니다.

(4) 각 곳으로 흩어진 교인들이 복음을 전했다고 했습니다.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 쌔'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5) 이처럼 흩어짐으로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파되었다고 했습니다. 사마리아는 앗수르의 지배 아래 있을 때 혼혈족을 이루었고 종교 생활도 정통적인 유대인들과는 달리 독특한 양상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하기를 거절하고 사마리아의 그리심 산에 별도의 예배처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메시야에 대한 소망은 유대인들과 다를바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야가 오시면 모든 것을 가르쳐 줄 것이라고 믿어 왔습니다.


2. 사울의 등장

우리 기독교 사상에 별처럼 빛나는 위대한 주님의 사역자 '사울'이란 인물이 교회를 핍박하는 중요한 유대인들의 멤버로 등장합니다. 이 사울은 행 9장에 가서 바울로 변화 받아 기독교 역사상 획기적인 공헌을 하게 됩니다.

(1) 사울은 길리기아의 다소 사람입니다. 그는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엄하게 율법 교육과 제반 학문을 전수 받은 사람으로 바리새파에 속한 사람으로 율법에 열심히 있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교회를 잔멸하려는 사명감에 불타 다메섹으로 가는 노중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되었고 그 이후 바울이란 이름을 가지고 한 평생 주의 복음을 위해 충성한 사도가 된 사람입니다.

(2) 바울은 율법과 하나님께 대한 열심 때문에 교회 같은 존재는 마땅히 없어져야 한다고 마음으로 굳게 결의하고 행동으로 옮긴 청년입니다. 그는 다른 바리새인이나 서기관과는 달리 그 행동이 과격하고 지나쳤지만 예수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이 일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같은 자신의 지난날의 일을 생각하고 이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

사울의 등장을 이처럼 보여 주는 것은 그가 어떻게 회심했는가에 대한 사실을 보여주시고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이 사람의 뜻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부르시는 하나님의 뜻에 있음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바울처럼 복음을 핍박하는 자라도 그 가운데는 하나님의 일꾼으로 예정된 하나님의 백성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결론 : 사마리아 성에 복음이 들어가자 그 성에 큰 기쁨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복음이 들어가는 곳엔 이처럼 큰 기쁨이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큰 기쁨이 따른다는 사실을 알고 이 복음이 주는 기쁨을 여러 곳에 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27) 빌립에게 나타난 능력

(사도행전8:9-13)


예루사렘 교회에 핍박이 내려지자 온 성도들이 사방에 흩어지면서 복음을 전했는데 그 중에서도 빌립 집사가 전도를 담당한 사마리아는 마침내 복음의 불이 붙기 시작한 것입니다.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자 갖가지 기적이 일어나고 놀라운 역사가 계속 일어났습니다. 그리하여 사마리아 성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이 놀라운 광경을 보고 일심으로 빌립을 따르며 그가 말하는 것을 듣기도 하며 귀신 들린 자들로부터 귀신이 쫓겨나고 많은 중풍 병자들이 나음을 입고 앉은뱅이들이 고침을 받게 되자 이로 인하여 그 성에 기쁨이 충만했다고 했습니다.


1. 마술사 시몬의 경우

사마리아 성에 마술을 행하는 시몬이란 자가 있었습니다. 마술이란 사람의 눈속임으로 속이거나 아니면 사탄의 권능으로 이적을 행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시몬은 그의 마술로 사마리아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 같은 시몬의 마술을 하나님의 능력인 줄로 알고 두려워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시몬 자신도 자기를 큰 자라고 지칭하여 사마리아 성 모든 사람들로부터 하나님처럼 높임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몬이 빌립 집사의 전도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빌립에게서 나타나는 능력과 이적에 대해 심히 놀랐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자기의 능력이나 이적은 가짜인데 반하여 빌립 집사의 경우는 자기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치 정말로 놀라운 능력이요 이적이었던 것입니다. 빌립에게서 나오는 능력은 주문이나 속임수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하나님의 큰 능력인 사실을 바라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벙어리가 말을 하며 귀신들인 자나 중풍 병자를 일으키는 등 무한한 능력이 나옴을 보고 자기도 그런 능력을 받으면 정말로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는 충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빌립으로부터 그런 능력을 배우려고 따라 다녔으며 급기야는 세례까지 받았습니다. 그러나 시몬의 믿음은 정말로 그리스도를 믿음을 영접한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빌립처럼 능력을 행하기를 원하는 탐심에서 그 비결을 배우려고 받은 것입니다. 이런 믿음은 구원이 없습니다. 거듭날 수도 없습니다. 그의 믿음은 거짓된 믿음이요 그가 받은 세례 역시 거짓된 신앙 고백으로 받은 형식적인 세례였습니다. 세례란 언제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룰 때 유효한 것입니다. 시몬은 사도들의 안수함을 보고 자기도 안수하면 안수 받는 사람들이 성령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알고 돈을 주고 그 같은 권능을 자신에게도 줄 것을 간청했습니다.

시몬의 이같은 의도는 세례를 주는 일로 사도와 같은 권위를 가지며 또 능력을 받아 사도들과 같은 권세도 누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런 시몬의 요구를 들은 베드로는 그를 향하여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고 하는 무서운 저주를 받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의 이같은 저주에 놀란 시몬은 '나를 위하여 주께 기도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내게 임하지 말게 하소서'라고 간청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2. 빌립에게 나타난 복음의 능력

빌립에게 하나님의 크신 능력이 나타난 일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빌립은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요 믿음과 지혜도 충만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빌립에게 하나님의 크신 능력이 나타난 것은 빌립이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만을 증거 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에 사람이 진실한 믿음과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과 죄인을 구원하고자 하는 간절함으로 복음을 전할 때 빌립 집사처럼 위대한 능력과 기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성이 빌립의 전도를 받아 이로 인하여 그 성에 구원의 기쁨이 가득한 일은 사마리아 성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이십니다. 아무리 능력 있는 전도자라도 하나님이 허락치 아니하시면 구원의 역사가 일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복음의 씨앗이 떨어지는 곳에 기적이 따릅니다. 그러나 어느 때나 어느 곳에서나 기적이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은 기적이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는 것입니다. 기적이 사람의 심혼 골수를 찔려 쪼개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런 역사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결론 : 빌립을 복음의 그릇으로 쓰신 하나님은 우리를 빌립처럼 복음의 일꾼으로 쓰시기를 원하십니다. 능력 있는 복음의 일꾼은 언제나 하나님의 큰사랑을 받으며 성령으로 충만케 하시며 여러 가지 은사를 주십니다. 전도에 힘쓰는 성도가 능력이 있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28) 성령을 받은 사마리아 사람들

(사도행전8:14-25)

사마리아 사람들이 빌립의 전도로 그 성에 큰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성의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세례를 받았지만 성령은 받지 못했습니다. 성령을 받지 못했다는 말은 구원에 이르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오직 성령이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믿음은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은 상태에서의 믿음이었습니다.


1. 성령을 받은 사마리아 사람들

사마리아 사람들은 빌립이 전하는 복음도 듣고 이적 행함도 보면서 세례를 받았지만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생명이 없었습니다.

(1) 우리는 물세례가 중생의 보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거듭나지 못하였으면서도 세례를 받을 수 있습니다. 반면에 물세례를 받지 않았으면서도 성령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가이사랴에 살아가고 있는 고넬료의 경우가 그러했습니다. 베드로는 그들이 성령 세례를 받은 후에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줌을 금하리요 하고 명하여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다고 했습니다.

(2) 물세례를 받은 후에 성령 세례를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의 경우가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빌립 집사에 의해 물세례를 먼저 받았지만 성령 세례는 받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던 것이 베드로와 요한이 그들에게 안수할 때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여 비로소 성령의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3) 다음에 물세례와 성령 세례를 동시에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에 갔을 때에 그 곳에 있었던 어떤 제자들에게 물세례를 줄 때에 아울러 성령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행19:5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모두 열 두 사람쯤 되니라'고 했습니다.


2. 사도의 안수와 성령 세례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에게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말이 들려 왔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에 와서 사마리아 성의 신앙 상태를 점검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곳에 주의 제자 된 사람들은 많았지만 아직 한 명도 성령을 받지 못한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그들이 성령 받기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이 두 사도가 그들에게 안수하매 그들이 성령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1) 성령을 받는 일은 사도들의 안수 없이도 받을 수 있습니다. 만약 성령을 받는 일에 어느 한가지만을 주장한다면 많은 혼란이 생길 것입니다. 오순절 날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회개한 3천명의 무리는 사도들의 안수를 받음이 없이 성령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2) 어떤 사람들은 자기 혼자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 세례를 받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성령은 믿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에 믿음만 있으면 혼자서도 성령 세례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3) 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종들의 기도에 의해 성령을 받았습니다. 사마리아 성 사람들은 베드로와 요한의 안수 기도를 통해서 성령을 받은 것입니다. 특히 복음의 초기인 초대 교회 시대에는 이런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일은 하나님의 구원이 안수 기도로 임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들의 안수로서만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구원의 때가 이르렀을 때 구원의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성 사람들은 하나님의 섭리 중에 사도들의 안수에 의해 성령 세례를 내려 주신 것입니다. 성령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오 그것을 주시는 방법을 결정 짓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일은 사람의 안수로 인하여 기도를 받는 일은 그 기도를 받는 사람에게 강력한 영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잘못된 사람으로부터 안수 기도를 받으면 영적으로 잘못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장로회 헌법에는 하나님이 기름 부으심을 받은 목사가 아니면 함부로 안수할 수 없도록 법으로 규제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받기 이전의 사마리아 사람들은 거듭나지 못한 상태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오늘날 교회에도 이런 사마리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결론 : 복음을 듣는 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이적을 보고 따라 다니는 것만으로도 안 됩니다. 진실한 믿음이 따라야 합니다. 이 믿음은 회개에서 나오고 순종으로 환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장 긴요한 일은 성령을 받는 일이며 또 충만히 받는 일입니다. 진실한 회개와 순종으로 성령을 충만히 받는 성도가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29) 빌립의 전도를 받은 에티오피아 내시

(사도행전8:26-40)


본문에는 빌립의 색다른 전도의 모습이 나옵니다. 빌립은 주의 사자의 지시를 받아 에티오피아 내시를 만나 복음을 전했고 성령의 지시에 따라 내시 가까이 갔으며 또 주의 영의 이끌리심을 받아 다른 곳으로 옮겨져 복음을 전하게 되는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빌립은 에티오피아 내시에게 성경을 풀이해 주므로 올바른 복음을 전했으며 그 내시의 마음에 영적인 기쁨을 선사하고 참 생명을 주었습니다. 빌립의 전도 방법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본 받아야 할 것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1. 주의 사자의 지시

빌립은 주의 사자로부터 지시를 받았습니다. 남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고 명한 것입니다. 주의 사자란 곧 천사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빌립은 이런 천사의 지시를 받고 곧 그곳으로 달려갔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복음은 결코 천사나 어떤 영적 존재에 의해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복음을 받아 드린 성도들에 의해 전해진다고 하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구원을 사람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신 것처럼 그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도 하늘의 천사나 다른 어떤 권능 있는 영적 존재로서가 아니라 구원의 은혜를 받은 사람으로 전하도록 하셨습니다. 이런 일은 그리스도인들에게만 주신 특권이기 때문에 이 일에 충성하는 일은 이 특권에 참여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주의 사자의 지시나 성령의 직접적인 지시는 매우 희소한 일입니다.

빌립이 주의 사자의 지시로 에티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 특별한 경우인 것은 그가 복음을 다 전했을 때, 주의 영의 이끌림을 받아 어디론가 데려갔었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어떤 주의 일을 하거나 전도를 할 때 성령이나 하나님의 영적인 지시를 받으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올바른 인도함을 받기 위해 기도하는 일은 좋은 일이지만 빌립처럼 어떤 직접적인 지시를 받으려고 기도하는 일은 삼가야 할 위험한 일입니다.


2. 예루살렘에 올라왔던 에티오피아 내시

빌립이 주의 사자의 명을 받아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 보니 그 곳은 광야인데 마침 병거를 타고 그 곳을 지나고 있는 에티오피아 내시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내시는 에티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큰 권세 있는 사람이라고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이 내시는 예배하기 위해 그 먼 곳에서 예루살렘에 올라왔던 사람입니다. 그는 이방인이었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경배하려고 유월절에 에티오피아에서 예루살렘까지 올라온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는 유월절을 지내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이 내시는 흔들리는 병거 위에서 성경을 읽고 있었습니다. 빌립이 병거 가까이 갔을 때 그 내시가 어떤 책을 읽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바로 이사야의 글이었던 것입니다. 그것도 가장 난해한 53장을 읽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깊은 비애와 번민에 싸여 있었습니다.

비애란 그가 읽고 있는 책 속의 주인공이 당하는 고난 때문이며 그가 왜 그처럼 고난을 받아야 하는가와 그가 과연 누구인가에 대해 전혀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내시는 성경을 읽으면서 그 뜻을 깨닫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깨닫는 사람만이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빌립이 그에게 달려가 그 읽는 것을 깨닫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뇨'라고 말하고는 빌립을 청하여 병거에 함께 앉기를 권했습니다. 혹시나 빌립이 그 성경 구절의 뜻을 가르쳐 줄 수 있을까 기대했던 것입니다.

빌립은 내시가 읽고 있는 성경을 해석해 주었습니다. 그가 읽고 있었던 이사야의 글은 주님이 낮아지셔서 마치 사지로 가는 어린양처럼 잠잠함으로 그 입을 열지 아니하신 일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내시가 알고 싶었던 일은 이사야가 말한 이 말이 누구를 가리키는 것이냐는 것입니다. 자신이냐 아니면 다른 사람을 의미한 것이냐는 것입니다. 이 때 빌립은 그의 입을 열어 그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고난의 주인공이 바로 예수님이였기에 빌립은 참으로 전도하기에 너무나도 좋은 조건 속에서 증거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결론 : 전도는 성경에서 예수를 가르쳐 주는 일입니다. 빌립은 이사야의 글에 나타나 있는 말씀으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 고난의 종을 예수와 연결시켜 가르쳤을 때 이 내시의 의문은 당장에 풀렸고 마음에 큰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아 물이 있는 곳에 이르러 곧 세례를 받기에 이른 것입니다. 이 내시처럼 말씀을 배우는 일은 구원과 영생을 위해 가장 좋은 길입니다.



사도행전 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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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바울의 소명(사도행전9:1-9)

(31) 바울의 회개(사도행전 9 : 1 - 9)

(32) 바울의 성령 충만함(사도행전 9 : 10 - 19)

(33) 회심 후의 바울의 생활(사도행전 9 : 20 - 30)

(34) 교회 부흥의 운동력(사도행전 9 : 31)

(35) 애니아와 다비다(사도행전 9 : 32 : 43)


(30) 바울의 소명

(사도행전9:1-9)

1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3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5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6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7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

8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9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예루살렘 교회 초기에 사울이란 청년은 기독교를 핍박하는 경계 인물로 등장합니다. 

7장에는 스데반 집사를 돌로 죽일 때 증인들의 옷을 맡았던 사람으로, 

8장에서는 성도들이 죽임을 당하는 일에 대하여 

마땅히 여길 뿐 아니라 교인들의 집에까지 들어가 

남녀 성도들을 끌어다가 옥에 넘겨주는 일을 맡았던 자로, 

오늘 9장에서는 그의 회심이 나옵니다. 

사울의 회심은 다메섹에 있는 교회를 핍박하고 

그 곳의 성도들을 붙잡아 예루살렘으로 끌어가려는 목적으로 

대제사장의 공문을 가지고 다메섹으로 가는 길목에서 일어났습니다.


1. 사울에게 나타나신 주님

사울이 위협과 살기가 등등한 모습으로 예루살렘을 출발하여 

목적지인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입니다. 

바로 그 때 이 사울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 것이었습니다. 

사울은 이 빛에 그만 그 자리에 엎드러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빛은 예수님으로부터 비추인 빛이었습니다.


(1) 사울은 주님의 이 빛 앞에 엎드려졌습니다. 엎드려졌다는 말은 페손( )이란 말로 어떤 외부적인 권능에 의하여 넘어뜨림을 당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는 사울의 이같은 교만을 이처럼 꺾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실로 다양합니다. 시몬처럼 억지로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게 하심으로 부르시는 경우도 있고 사울처럼 주님의 교회와 성도들을 핍박하는 가운데 그를 넘어뜨림으로 부르시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2) 사울은 하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는 소리였습니다. '들으매'란 말은 에쿠센( )이란 말로 순간적으로 듣고 깨닫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사울이 주님의 발 앞에 엎드려졌을 때 그의 완고한 율법적 신앙이 깨어지면서 복음이 들어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음성은 누구에게나 다 똑같이 들려 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빛 앞에 자신의 완악한 심령이 깨어지는 사람만이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심령이 완악 했기 때문에 결국 복음을 받아드리는 대신 그 분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한 것입니다.


(3) 사울은 '사울아 사울아'하는 음성에 놀랐습니다. 

이 음성은 아담이 에덴에서 죄를 범한 후, 동산 나무 뒤에 숨었을 때 하나님이 아담을 찾으셨을 때 들려준 그 음성이셨습니다. 잃은 양을 찾으시는 목자의 음성이셨습니다. 사울은 이 음성을 들은 것입니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사울을 부르시는 음성에 놀라 사울은 하늘을 향하여 이처럼 물었습니다. '주여 뉘시오니이까' 물론 이 때 사울의 눈은 감겨진 채 소경이 되어 있었고 그 대신 신령한 새로운 눈이 열려져 이런 주님의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사울은 하늘 보좌에서 인자 같은 이를 보았지만 그 분이 누구인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주여 뉘시오니이까'고 물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때 그에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사울에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하신 말씀에서 예수님과 교회와의 관계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과 교회와를 동일하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엡1:23절에서 '교회는 그의 몸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골1:18절에서는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교회는 그리스도와 온전한 연합 관계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교회란 양 무리의 울입니다. 주님은 양의 문이시며 그 문을 통해 그 우리 안에는 많은 양 떼들이 있습니다. 이 양 떼와 그 우리의 문이 되시는 예수님은 완전히 하나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안에 있는 양 무리를 자기와 동일시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25:40),

그 뿐 아니라 예수님은 또 이렇게도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마25:45). 교회를 미워하고 까닭 없이 핍박하는 일은 그것이 곧 예수께 대한 핍박이란 사실을 알 때 하나님의 교회를 대적하는 일이 얼마나 두려운 일이지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 하나님의 부르심은 다양합니다. 

모세의 경우는 그의 귀족적인 교만과 자만이 없어지고 

그가 온전히 하나님만을 의뢰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기까지 

40년간이나 참으신 후에 미디안 광야 호렙산에서 그를 부르셨습니다. 

브라함은 메소보다미아의 자기 고향 아비 집에서 불러 내셨습니다. 

사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길목에서 부르신 것입니다. 

어떤 경우이든 우리가 그리스도의 빛 앞에 엎드려져 

그의 부르심에 순종할 때 

그에게 주님의 교회를 위한 사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31) 바울의 회개

(사도행전 9 : 1 - 9)

1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3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5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6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7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

8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9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하늘의 강한 빛에 의하여 눈이 멀고 땅에 엎드려졌을 때 

그는 하늘 문이 열리고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하늘 보좌의 주님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자기가 아직까지 핍박해 온 예수야말로 

진정한 이스라엘의 메시야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바울이 체험한 회개는 

어떤 것이었나에 대하여 알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주님의 영광을 바라본 바울

바울의 교회를 핍박하려는 무모한 계획과 잘못된 메시야관은 

하늘에서 강열하게 내려 비취는 빛에 의하여 완전히 꺾여졌습니다. 

이로 인해 아직까지 자기 마음대로 살아온 바울의 생애가 하나님의 손에 의해 움직이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이 때 비로소 자신의 생애가 하나님의 손에 붙잡히게 된 것입니다. 누구이든 한번 하나님의 손에 의해 붙잡히면 그의 생애는 하나님에 의해 지배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의 인생에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온 것은 하늘에서 내려 비췬 빛에 의해 그의 신령한 눈이 열려지고 그 눈으로 누님의 영광을 바라보았을 때 그때 부터인 것입니다.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하신 그 영광을 바라본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고 하신 그 독생자의 영광을 바라본 것입니다. 바울의 마음에는 아직까지 자기가 잘못 알고 저지른 일에 대한 말할 수 없는 후회와 이제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지게 되었으며 그는 그의 인생의 방향을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향인 예수께로 돌린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과 함께 그 동행했던 그 많은 일행은 바울의 눈을 멀게 하고 바울로 길까에 엎드러지게 한 하늘의 빛도 바라볼 수 없었고 그들 중에는 눈먼 사람도 없었으며 더군다나 하늘 보좌에 계시는 주님을 바라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한 일행으로 함께 행동한 그들이었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그들 사이에 크나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인간의 구원은 누구에게난 공평하게 주어지는 일은 아닙니다. 누구나 동일한 조건아래 같은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을 구원하심에 있어서 인간의 방법이나 인간의 지혜나 생각을 전혀 고려치 아니하시고 다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역사하십니다.


2. 주님의 말씀을 친히 들은 바울

바울은 하늘 보좌에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는 말씀이 들려 왔을 때 그 말씀의 출처를 확인하려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바울은 '주여 뉘시오니이까'고 물은 것입니다. 

이 때 바울은 주님으로부터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는 말씀을 듣게 된 것입니다.


(1) 바울은 자기에게 말씀하신 분이 예수님이신 줄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울의 믿음은 이처럼 예수님의 음성을 직접 들음에서 나왔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바울에게 들려 주셨던 주님의 음성이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들려주는 말씀이나 전혀 다름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그 하나님의 말씀만 견고히 붙잡으면 우리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2) 바울은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자신이 잘못된 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죄인의 마음을 움직이고 회개시키는 능력은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듣는 사람이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3) 바울은 주님의 말씀에 사로잡혔습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에 사로잡힌 바울은 이제 핍박자가 아니라 주를 위해 그의 생명을 바칠 수 있는 충성된 종으로 변하게 된 것입니다. 바울과 함께 다메섹에 가든 사람들도 바울이 들은 이 음성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음성이 누구의 음성이며 어디서 들려온 음성인 줄을 몰랐으며 그 뜻도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바울처럼 회개치 못하고 그 발걸음을 예루살렘으로 돌이킨 것입니다. 회개에는 열매가 수반해야 합니다. 그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 나옵니다.


진실한 회개는 그의 발걸음이 하나님께로 온전히 돌이켜 가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듣고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눈으로 땅에서 일어나 

사람의 손에 이끌리어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 식음을 전폐하는 가운데 

주님이 보내신다고 약속하신 사람을 기다렸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지 아니했습니다.


결론 : 사람들에게는 각자 주님으로부터의 부르심의 시기가 있습니다. 

회개의 기회가 있습니다. 

변화를 주실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때를 잘 포착해야 합니다. 

바울은 이 때를 잘 포착하여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했기 때문에 

의 인생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지난 날의 잘못된 죄악의 줄을 끊어버렸습니다. 

그는 유대인과 원수가 되어도 

오히려 기뻐하는 새로운 인생길을 걷게 된 것입니다.



(32) 바울의 성령 충만함

(사도행전 9 : 10 - 19)

10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이르시되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11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12 그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1)보았느니라 하시거늘

13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14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나이다 하거늘

15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16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19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바울이 길에서 하늘의 빛에 의해 땅에 엎드려졌을 때, 

그는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고 하시는 주님의 직접적인 말씀을 듣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사람의 손에 이끌리어 다메섹으로 들어가 사흘 동안을 보지도 못하고 식음을 전폐한 가운데 기도만 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 주님께서 아나니아를 통하여 바울을 찾아가도록 명하신 것입니다.


1. 아나니아의 등장

주님은 바울을 친히 부르셨지만 그의 소경된 눈을 다시 뜨게 하는 일과 그에게 할 일을 알려 주는 일은 다메섹에 살고 있는 주님의 제자에 의하여 이루시도록 하셨습니다. 아나니아가 기도하는 중, 주님이 환상 중에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이같은 환상에 놀란 아나니아는 주님이 말씀하시는 그 청년 사울이 교회의 성도들을 핍박하는 자임을 고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에게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해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이처럼 예수님이 친히 주님의 사역을 위해 예정하신 그의 택한 그릇이었지만 바울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아나니아도 몰랐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 몇 가지 사실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1) 주님께서 택하신 그릇일지라도 그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기 이전까지는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는 핍박자였다는 사실입니다. 살기 등등하여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감옥에 쳐 넣는 바울을 가리켜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히여 택한 그릇'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을 것입니까? 교회사를 볼 때 바울 같은 핍박자를 세워 위대한 하나님의 일꾼으로 삼으신 일은 부지기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를 핍박하는자들일지라도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2) 우리는 주님이 택하신 그릇은 어디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단자의 무리 가운데도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성 어거스틴이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불교도들 가운데도 이런 하나님의 일꾼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방 종교를 믿는 사람들을 원수처럼 여기거나 저주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

(3) 다음에 우리가 알아야 할 일은 주님의 택한 그릇은 언제인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악한 길에서 돌이킬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그들을 일찍 부르시지 않으신 것입니까? 이것은 길이 참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그에게 나타내시기 위함이요 부르심을 받은 후에 자신의 죄에 대하여 철저하게 회개시키시려는 하나님의 섭리라고 믿으며 이런 일이야말로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러나 부르심의 때와 장소는 오직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완악한 사람이라도 조급한 마음으로 회개하기를 서두르지 말고 길이 참고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2. 아나니아에게 안수 받은 바울

아나니아는 사도는 아니었지만 장차 사도라 불리울 바울에게 안수했습니다. 그러나 아나니아의 이런 행동은 스스로 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명령에 따라 한 것입니다. 이 아나니아의 안수를 통해서 바울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아마 이때 바울은 아나니아로부터 안수를 받을 때 주님으로주터 사도직의 사명을 주신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부활하신 주님을 확실히 본 증인입니다. 그는 부활의 주님을 땅에서 본 것이 아니라 하늘 보좌에 계시는 모습을 본 것입니다.

이제 바울은 아나니아로부터 주님의 사역자로써 안수를 받았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위하여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하신 대로 주님의 사역자로 인침을 받고 또 기름부음을 받은 것입니다. 아나니아의 안수를 받은 바울은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다시 본다고 하는 아나브레포( )란 말은 우러러 본다는 말의 뜻입니다.

다시 보게 된 바울의 눈은 자신에 대하여는 죄인의 괴수로 보였고 세상에 대하여는 오예물처럼 보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우러러 뵈는 생애를 살게 되었으며 위에 있는 하늘의 상급을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바울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이제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가 성령을 받으므로 하나님의 구원이 그에게 임하신 것입니다. 이 때부터 바울은 담대한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시작했으며 주님을 위한 그의 위대한 사역에 들어간 것입니다.

바울의 온전한 변화는 성령의 충만한 단계에 이르렀을 때에 가능했습니다. 우리가 바울처럼 부르심을 받았을지라도 바울처럼 당장에 온전한 그리스도인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이 체험한 것과 같은 놀라운 체험을 했어도 성령의 충만함을 받지 못하면 바울과 같은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결론 : 은혜 가운데 성장하여 하나님의 사역자로 쓰임 받으려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계속적인 성령충만함을 받기 위해 

기도하고 맡은 사명에 충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33) 회심 후의 바울의 생활

(사도행전 9 : 20 - 30)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20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21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멸하려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그들을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 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22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니라


사울이 피신하다

23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24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그들이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25 그의 제자들이 밤에 

사울을 광주리에 담아 

성벽에서 달아 내리니라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다

26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27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하니라

28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29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30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


아나니아의 안수를 받은 후 

바울은 그의 눈이 열리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었으며 

음식을 먹고 강건해 졌다고 했습니다. 

이제 바울은 완전히 새롭게 되었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새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그 후 바울은 어떤 생활을 했으며 어떤 생애를 살아간 것입니까?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했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회개한 사람의 열매는 서서히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런 변화는 회개와 함께, 중생과 같이 일어납니다.


1. 바울의 전 인격적인 변화

바울의 변화는 전인격적인 변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1) 바울은 먼저 자신의 소속의 변화를 확인했습니다. 바울의 사명은 원래가 대제사장의 임명장을 지참하고 다메섹에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을 잡아 예루살렘으로 데려가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변화 받은 후, 바울은 더 위대하고 권세 있는 분의 새로운 명령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바리새인의 무리에서 빠져 나왔습니다. 그가 속한 소속이 완전히 새롭게 된 것입니다. 율법을 준행했던 그가 복음을 따르게 되었고 교회를 핍박했던 그가 교회의 중요한 일꾼이 된 것입니다.

(2) 바울은 교제의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그가 다메섹으로 올 때는 바리새인들이나 유대인들과 함께 왔지만 그가 예수를 영접한 후에는 그들과 결별하고 다메섹에 거주하는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지내게 된 것입니다. 회개하여 변화 받은

사람은 이전 죄악의 길에 함께 서 있던 사람들과 함께 계속해서 서 있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들과 인연을 끊고 주님을 섬기는 성도들과 함께 교제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3) 바울은 처신의 변화를 가져 왔습니다. 이전에는 율법에 열심히 있었고 율법에 얽매이는 생애를 살았지만 이제 그는 믿음으로 의를 얻는 새로운 방법을 따랐습니다.

(4) 바울은 자식의 변화를 가져 왔습니다. 바울은 어려서부터 율법을 배우면서 엄하게 자라왔습니다. 그는 그 당시 유명한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고등 학문을 배웠습니다. 그의 학문은 유대인들이 인정해 줄 정도로 유명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그 유명한 세상 학문이나 지식을 쓸모 없는 것으로 여겨 버렸습니다. 그는 이제부터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최고의 지식으로 알았습니다(빌3:6-9). 그리스도인들이 회개하여 새롭게 되었다면 이 바울과 같은 전인격적인 변화의 역사가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2. 바울은 담대히 예수를 전했다.

바울은 회심 후,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전파했습니다.

(1) 예수가 곧 이스라엘이 기다려온 메시야이심을 증거한 것입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말은 예수가 곧 메시야라는 뜻입니다. 베드로가 말한 신앙고백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대제사장이 예수님을 심문할 때 '네가 찬송 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 (막14:61)고 질문한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이란 이름이 예수와 적용시켰을 때에는 약속된 메시야, 하나님이 기름 부으심을 받는 자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2) 바울은 더 힘을 얻어 예수를 증명했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예수를 증거했을 때 다메섹 시민들은 놀랐습니다. 

그것은 바울이란 사람은 원래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체포하기 위해 

파송된 자인줄로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더 힘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힘으로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거침없이 증거한 것입니다. 

증명하다의 숨비바조( )란 말은 연결시킨다, 논증한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그 해박한 성경 지식으로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거하는 일에 연결시킨 것입니다. 

성경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는 일에 

큰 담력과 힘을 얻을 수 있는것입니다. 

23절에서 '여러 날이 지나 매'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여러 날은 바울이 아라비아에 있었던 3년간의 기간을 말합니다. 

이 일에 대하여 바울은 갈라디아 1:16-17절에서 

* 갈 1:16-17절

16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17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18 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십오 일을 머무는 동안


아라비아로 간 일에 대하여 언급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아라비아에서 3년간 기도와 명상으로 주님과 교제했으며 

그 곳에서 복음에 관한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많은 계시를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바울은 그 기간이 지난 후, 다시 다메섹으로 왔다가 

그를 죽이려는 유대인들의 공모를 탐지하고는 

예루살렘으로 피신하게 된 것입니다.


결론 : 예루살렘에 간 바울은 사도들과 교제하고저 했지만 

주님의 제자들은 바울에 대하여 의심한 나머지 

바울의 회심을 믿지 아니하고 오히려 두려워했습니다. 

이 때 바나바가 나타났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 밭을 팔아 하나님께 봉헌한 사람으로 행4:36절에 나와 있습니다. 

이 바나바가 고립된 바울을 변명해 주게 되어 

예루살렘의 성도들과 교제하게 되었으며 

바울의 선교 활동이 시작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변화된 사람을 일꾼으로 쓰십니다.

바울의 변화가 여러분의 변화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34) 교회 부흥의 운동력

(사도행전 9 : 31)

예루살렘 교회의 핍박으로 사방으로 흩어진 성도들에 의해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에 교회가 새로 세워지고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갔을 뿐 아니라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졌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이처럼 교회가 부흥된 원인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몇 가지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교회가 평안하였다.

31절 초두에서 이 교회들이 평안하였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평안했다는 말은 평안을 가지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평안이 있을 때, 기쁨이 있고 소망이 있으며 사랑이 있습니다. 우리의 가정에 평안이 있을 때, 가정의 참된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영적인 평안함이 있을 때 수가 더 많아지는 부흥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1) 교회의 평안은 성도들간의 화평에서 오는 것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음 받을 것임이라'고 하셨습니다. 교회에 화평이 깨어지면 평안을 찾을 길이 없습니다.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지며 스스로 분쟁하는 집은 무너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초대교회에 이처럼 분쟁이 없었던 이유는 모든 성도들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한 마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2) 교회의 평안은 성령의 역사에서 옵니다. 성령은 교회에 화평과 평안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성령께서 그 교회의 운영을 주장하실 때 평안함이 교회에 임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복음 전도에 전력할 때 성령의 평안이 임하십니다. 사탄은 항상 교회의 평안을 깨는 역사를 합니다. 성도들이 전도에 힘쓸때 교회의 평안을 깨려는 사탄에게 틈을 주지 않는것입니다.

순종하는 교회에는 성령께서 평안을 주십니다. 평안을 깨는 독소는 교만에서 옵니다. 순종은 겸손에서 옵니다. 하나님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 없이는 교회의 평안이 있을 수 없습니다. 교회가 기도할 때 성령께서는 그런 교회에 평안을 주십니다. 마귀가 교회에 가라지를 덧뿌리는 시기는 잠을 잘 때라고 하신 것입니다. 꺠어 있는 교회는 잠들 틈이 없습니다.

(3) 교회의 평안은 사랑에서 옵니다. 사랑이 매마른 교회는 뼈만 앙상하게 남아있는 건물뿐입니다. 성도들의 마음속에 사랑의 훈기가 뜨겁게 넘쳐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은 형제의 죄를 용서해 주고 그 허물을 덮어주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4) 교회의 평안은 올바른 질서에서 옵니다. 교회에는 질서가 있습니다. 성도들이 그 질서를 서로간 존중해야 평안이 있습니다. 교회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위임 받아 그의 양무리들을 인도하는 목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의 양무리를 그 목자에게 맡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야 하며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이런 위계질서가 무너질 때 교회의 평안이 깨어집니다.


2. 교회들이 든든히 서가고 있었다.

다음에 교회가 든든히 서 가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교회가 든든히 서 간다면 그 교회는 부흥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가 이처럼 든든히 서 가는 몇 가지 이유를 살필 수 있습니다.

(1) 성도들의 정상적인 신앙의 성장은 교회로 든든히 서 가게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신앙은 언제나 성장해야 합니다.

교회의 소란과 침체는 언제나 성도들의 신앙이 답보 상태에 있을 때 일어납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이 왕성한 교회는 든든히 서 가는 교회입니다. 사람의 소리는 교회를 세속화시킵니다. 사람의 소리는 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이 크게 울려 퍼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로 능력 있고 부흥되려면 하나님의 말씀이 왕성해야 합니다. 강단에서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이 흘러나와야 하며 서로 격려하고 가르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합니다. 이런 교회는 언제나 든든히 서 갈 것입니다.

(3) 성도들이 봉사하고 충성하는 교회는 든든히 서 나가는 교회입니다. 하나님은 온 땅을 두루 살피사 충성된 자를 찾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충성된 일꾼은 그 교회의 기둥들입니다. 봉사의 일꾼 없이 교회가 움직일 수 없습니다. 이런 성도들은 교회를 든든히 세워 나가는 일꾼들입니다. 이같은 기둥들이 교회를 떠받치고 있다면 그 교회야말로 든든히 서 가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결론 : 이들 초대교회들은 주를 경외하는 일에 전심전력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공경하되 순종하는 마음으로 겸손히 섬기는 일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교회가 이처럼 주님을 섬기면 주님은 이런 교회를 부흥케 하실 것입니다. 또 이 교회들은 성령의 위로로 진행해 나갔다고 했습니다. 성령의 위로란 곧 주님의 위로를 말합니다. 이처럼 평안과 말씀으로 든든히 서가며 주님을 경외하는 믿음으로 온 교회가 하나가 될 때 그런 곳에 성령의 위로하심이 임하시어 교회가 그 아름다운 모습대로 진행해 나갈 것입니다.


(35) 애니아와 다비다

(사도행전 9 : 32 : 43)

32 그 때에 베드로가 

사방으로 두루 다니다가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도 내려갔더니

33 거기서 애니아라 하는 사람을 만나매 

그는 중풍병으로 

침상 위에 누운 지 여덟 해라

34 베드로가 이르되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대 곧 일어나니

35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오니라


베드로가 도르가를 살리다

36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37 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누이니라

38 룻다가 욥바에서 가까운지라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와 달라고 간청하여

39 베드로가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가서 이르매 

그들이 데리고 다락방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보이거늘

40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41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 들여 

그가 살아난 것을 보이니

42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

43 베드로가 욥바에 

여러 날 있어 

시몬이라 하는 무두장이의 집에서 

머무니라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답게 교회의 핍박과 환난 중에도 사방으로 두루 다니며 이곳 저곳의 교회를 보살피고 있었습니다. 베드로의 귀에는 언제나 예수님이 자신에게 마지막으로 들려 주신 그 말씀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하신 세 번의 주님의 음성이 그로 하여금 대제사장의 뜰에서 주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한 자신의 부끄러운 행동과 조화되어 부지런히 양 무리를 돌 보아온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이같은 태도를 거울로 보여주면서 모든 목회자들에게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하므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면류관을 얻으리라'(벧전5:2-4).


1. 애니아에게 나타내신 주님의 능력

33절 말씀에 나타난 것을 보면 애니아란 여 성도가 나옵니다 .그는 중풍병으로 누운지 8년째 되었다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여러 교회를 돌보러 다니던 중 룻다에 오게 되었는데 그 곳에서 애니아를 만난 것입니다. 애니아가 이곳에 등장하는 것은 베드로가 주님의 권능으로 그 여인을 일으켰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하여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 왔다는 사실을 밝히려는데 있는 것입니다.

(1) 애니아는 베드로에게 발견되었습니다. 애니아가 병에서 놓임 받고 구원을 얻은 일은 그가 베드로를 만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은 그가 이미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을 입은 복된 여인임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8년간이나 중풍병으로 괴로움을 당한 일은 그에게 있어서 오히려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조건이 되었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불행한 환경 속에 있어도 우리 하나님은 그 모든 일을 통하여 우리의 구원의 역사에 선히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2) 베드로는 이 애니아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신다'고 말했습니다. 베드러는 이 애니아에 대한 주님의 섭리를 영감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애니아에게는 능히 베드로를 통해 자기 병에 서 일어날 수 있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복음을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치 아니하면 들은 그 말씀이 유익되지 못하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히4:2). 예수님이 너를 낫게 하신다는 베드로의 말이 애니아의 마음속에 강한 믿음을 심어 준 것입니다.

(3) 베드로는 애니아에게 일어나라고 명했습니다. 이 순간 애니아에게는 담대한 믿음이 들어갔습니다. 그는 자신의 중풍병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다만 베드로를 통하여 자기에게 명하시는 주님의 말씀만을 믿은 것입니다. 애니아는 곧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는 8년간이나 누어있었던 자리를 정돈했습니다. 왜 자리를 정돈하라고 말했습니까?

그것은 다시는 그 자리에 누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한번 일어난 자리에 다시 돌아오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적인 자세가 아닌 것입니다. 애니아가 새로운 모습으로 사람들 앞에 나타났습니다. 애니아의 온전한 변화는 이처럼 그리스도의 복음의 빛을 사면에 비춰 많은 사람들을 주께로 인도하게 된 것입니다.


2. 다비다의 살리심

베드로가 아직 룻다에 머물고 있었을 때, 욥바 교회에서 룻다에 있는 베드로에게 급한 전갈이 왔습니다. 욥바에 있는 성도 중 다비다라 하는 여 제자가 있었는데 이 여인이 갑자기 병들어 죽었다는 소식입니다. 그러니 빨리 와서 살려달라는 것입니다.

(1) 우리는 다비다의 아름다운 믿음을 바라보게 됩니다. 이 여인은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았다'고 했습니다. 선행은 그의 선한 믿음의 열매를 말합니다. 그리고 구제는 가난한 형제를 물질로 도와주는 일입니다. 사랑은 선행이나 구제와 직결됩니다. 다비다는 이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았다고 한 것입니다.

(2) 욥바 교인들의 믿음도 대단했습니다. 이 여인은 이미 병들어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시신은 물로 씻어 이미 다락에 안치해 둔 상태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베드로가 와서 기도하면 죽은 다비다를 살려 낼 것으로 믿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사람들을 모두 내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그가 응답을 받고 다비다의 시체를 향하여 '다비다야 일어나라'고 명했습니다. 이것은 마치 예수님의 나사로의 무덤에서 '나사로야 나오라'는 명령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경우는 창조주의 권능으로 나사로를 살려내셨고 베드로의 경우는 예수님의 이름을 빌어 주님의 권능으로 살려낸 것입니다.


결론 : 다비다의 살아난 소문은 당장에 욥바에 파다하게 번졌습니다. 다비다의 살아남으로 인하여 그 곳 욥바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주를 믿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10장

◆ 밤중소리 11-06 | VIEW : 5,624

(36) 고넬료의 신앙생활(사도행전 10 : 1 : 2)

(37) 하나님께 상달된 고넬료(사도행전 10 : 3 : 8)

(38) 베드로의 환상(사도행전 10 : 9 : 23)

(39) 고넬료의 집에 내리신 구원(사도행전 10 : 24 : 48)


(36) 고넬료의 신앙생활

(사도행전 10 : 1 : 2)

사도행전 10장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고넬료라고 하는 이방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구원에 이르렀는가에 대한 자세한 과정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욥바에 머물고 있었을 때에 가이사랴에 살고 있는 고넬료에게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가 나타나 한 지시를 내렸습니다.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 되었으니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저는 피장 시몬의 집에 우거하니 그 집은 해변에 있느니라'고 전달해 준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하나님은 경건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하나님의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고 구원의 길로 인도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보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1. 경건한 사람

고넬로 고넬료는 이달리야대라고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고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달리야대란 로마군에 속한 군부대의 명칭이며 백부장이란 백명의 군사를 거느린 장교를 말합니다. 이 사람은 로마인이었으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으로 성경에서는 그가 하나님을 얼마나 잘 섬기는지 놀랍게 칭찬해 주고 있습니다. '그가 경건하여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 ' 라고 했습니다.

(1) 경건이란 말은 좋은 예배란 뜻입니다. 경건이라고 하는 유세베스( )는 예배를 드린다고 하는 '세보'란 말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이 말은 경건 그 자체가 하나의 좋은 예배가 된다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경건은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거

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영적 예배입니다. 경건이란 말이 다양하게 해석되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으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2) 경건이란 말은 신앙심이 깊다는 뜻입니다. 경건생활은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 아니면 열매를 맺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경건 생활에는 선한 열매가 따르므로 신앙이 두텁지 않고는 어려운 일입니다. 또한 경건 생활이란 주 재림에 대한 소망에 굳게 서 있지 않으면 안 되는 생활입니다.

(3) 경건에도 헛된 경건이 있다고 경종해 주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경건한 사람은 그 마음이 진실해야 합니다. 말에 덕이 있어야 합니다.

(4) 경건에는 능력이 따라야 합니다. 모양만 있는 경건은 사탄의 외식이지 경건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고 디모데에게 말했습니다. 능력이란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순종할 수 있는 영적 능력을 의미합니다. 고넬료는 이런 경건의 사람이었다고 했습니다.


2. 하나님을 경외한 고넬료

고넬료의 신앙생활은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나타났습니다. 경외란 말은 포보스( )로 이 말의 뜻은 두려움, 존경, 공경 등을 나타낼 때 사용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두려워 하는 마음으로부터 울어 나오는 존경심'을 의미합니다.

(1)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해야 할 이유는 하나님은 너무나도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참 모습을 볼 수조차 없는 죄인들입니다. 그의 거룩하신 빛 앞에 우리의 눈은 뜰 수조차 없습니다.

(2)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해야 할 이유는 죄의 사유하심이 오직 주님께만 있기 때문입니다.

(3)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해야 할 또하나의 이유는 그는 심판주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4)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해야 할 이유는 하나님이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은 하나님의 명하신바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바인 것입니다. 노아도 아브라함도 야곱도 요셉도 다윗도 그리고 초대 교회 모든 성도들도 다 하나님을 경외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고넬료는 자기 온 집으로 더불어 이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는 생활을 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편 고넬료는 구제 생활을 많이 한 것으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구제라고 하는 엘레에모 수네( )는 불쌍히 여긴다, 자비를 베푼다란 뜻으로 형제를 물질로 도와두는 착한 행실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열매는 이웃 사랑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이웃 사랑은 반드시 구제로써 나타나는 사랑이어야 합니다(요일3:16-18). 고넬료의 아름다운 생활은 이에 그치지 않고 그의 생활에 항상 기도가 있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의 기도는 항상이란 말로 진실함과 성실함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결론 : 이같은 고넬료에게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 구원의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여 준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은 세계 어디서나 의로운 자를 살피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도 하나님은 낱낱이 살피시고 아름다운 상급으로 보상해 주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37) 하나님께 상달된 고넬료

(사도행전 10 : 3 : 8)

고넬료는 축복의 사람입니다. 그의 신앙적인 생활이 하나님의 기억하신 바가 되어 그에게 구원의 사신까지 보내신 것은 그가 말할 수 없이 복된 사람임을 증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고넬료가 축복 받은 일은 그의 신앙생황의 세 가지 일이 하나님께 상달되었기 때문임을 밝혀 주고 있는데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과 그의 기도와 구제가 그것이었습니다.


1. 환상을 보게 된 고넬료

고넬료의 기도 생활이 이곳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는 제 9시쯤 기도할 때에 환상 중에 자기에게 가까이 오는 하나님이 사자를 밝히 보았다고 했습니다. 제 9시는 오후 3시경으로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정한 시간입니다.

(1) 하나님이 주시는 환상은 밝히 보입니다. 주위 환경이 어떤 처지에 있어도 방해 받음이 없이 명백하게 보이는 것이 하나님이 보이시는 환상입니다. 긴 가민가 알쏭달쏭하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명백하고 분명하게 사건이 나타나거나 전개되는 것입니다.

(2) 그리고 하나님이 보이시는 환상은 내적인 환상이 아닙니다. 환상은 사람이 눈을 뜨든 감든 한가지로 보입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바라보는 것이기 때문에 특정한 사람에게만 물리적인 현상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으시는 예수님의 머리 위에 성령이 비둘기처럼 내려 오시는 모습도 영적으로 나타난 사실적인 형상으로 요한이 이것을 분명한 영안으로 바라보았으므로 이를 증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사야가 성전에서 본 주님의 환상도 동일한 형태의 경험인 것입니다.

(3) 하나님이 주시는 환상은 자신의 지각으로 체험하는 사실적인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 초자연적인 일이나 그 사람의 지각을 통해 보여주시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고넬료는 기도 중에 하나님의 사자가 자기에게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고넬료는 그를 주목하여 보았습니다. 그가 주목하여 본 것은 자기가 바라보는 그 일이 혹 잘못 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 확인을 위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지금 보고 있는 존재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자인 것을 깨닫고는 두려움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육을 가진 사람이 영적인 존재를 볼 때에는 두려움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2. 고넬료가 하나님께 상달된 것

고넬료는 자기에게 나타난 천사에게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고 물었습니다. 그 때 그 사자는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네 기도'란 기도들이란 말로 고넬료의 계속적인 기도를 의미합니다.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기 위해 그의 기도를 기억해 두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억은 그것을 이루어주시기까지 결코 잊은바 되지 않으십니다.

(2)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의 구하는 바를 주시기 위해 우리의 기도를 기억해 두십니다. 예수님은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할 일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음에 고넬료의 구제가 상달되었다고 했습니다. '네 구제'란 말은 네 구제들로 고넬료의 계속적인 구제 사업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이웃을 위하여 사랑으로 구제를 베풀 때 이것은 반드시 하나님께 상달되어 하나님의 기억하신바 되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은 진실한 사람의 구제를 받으십니다. 사람이 구제를 할 때에는 나팔을 불지 말아야 합니다.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 손이 모르게 은밀하게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구제는 또한 자기를 숨기고 주님만을 나타내야 합니다.

(2) 참 구제는 그 구제의 효과가 주님께 해 드리는 것과 똑같은 인정을 받게 됩니다(마25:34-40). 하나님이 이같은 구제를 기억해 두시는 이유는 구제한 그 손길에 보상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하나님이 기억하실만한 고넬료의 아름다운 신앙생활을 통하여 때가 이르매 갚으심의 은혜가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사자를 베드로에게 보내시어 그를 청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하나님 앞에 상달하게 하며 또 어떤 일을 하나님으로 기억하시도록 할 것인가에 대하여 잘 알아 두어야 합니다. 고넬료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우리에게도 내려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론 : 하나님을 경외하는 생활과 항상 기도하는 생활과 

끊이없이 구제하는 생활로 하나님의 기억하신 바 된 고넬료는

이처럼 놀라운 은혜를 받기에 이른 것입니다. 

우리도 고넬료와 같은 경건한 생활을 한다면 

우리의 생활이 반드시 하나님께 상달될 뿐 아니라 

기억하신 바 되어 좋은 것으로 보상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38) 베드로의 환상

(사도행전 10 : 9 : 23)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베드로가 묶고 있는 욥바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베드로에게 한 환상을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어떤 사명을 주실 때에는 혼란하게 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 고넬료에게만 환상을 보이시고 베드로에게는 아무런 지시가 없었다면 고넬료가 지시를 받아 행하고자 하는 일은 성공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고넬료에게 지시하신 하나님은 다시 베드로에게 똑같은 지시를 내리심으로 고넬료의 가정에 내리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임을 분명히 나타내신 것입니다.

1. 베드로가 본 환상

베드로가 지붕에 올라가 기도하는 기간에 환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본 환상은 호라마( )로 이 말의 뜻은 비젼이란 말입니다.

(1) 꿈으로 주시는 비젼이 있습니다. 야곱과 요셉의 경우가 그러했습니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하란으로 떠나는 야곱에게 꿈에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끝 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나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약속하심으로 어린 야곱에게 위대한 비젼을 심어 주셨습니다. 요셉 역시 어려서 하나님께서 꿈을 통하여 부모와 형제들의 왕이 되는 비젼을 보았으며 이로인해 그의 앞날의 운명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2) 다음에 환상으로 주시는 비젼이 있습니다. 고넬료나 베드로의 경우가 그러합니다. 꿈이 사람이 잠을 자면서 보는 환상이라면 환상은 깨어 있으면서 보는 하나의 꿈의 현상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환상 중에서 지시하시기도 하며 그의 뜻을 알려 주시기도 하십니다.

(3) 말씀으로 주시는 비젼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인생들에게 위대한 비젼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 말씀에서 자기 인생의 비젼을 찾았고 성공적인 그의 삶을 살아갔습니다. 말씀이 자기 생애의 비젼이 되려면 먼저 그 말씀을 들어야 하며 묵상해야 하며 그 말씀을 배우고 연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6시(정오)에 기도하러 지붕에 올라갔습니다.

베드로는 기도 중에 비몽사몽간에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비몽사몽이란 말은 자신도 모르게 무아지경에 이르게 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베드로가 본 환상은 이러했습니다. '하늘에서 보자기가 내려 오는데 그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으며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색 네 발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고중에 나는 것들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2. 환상에서 발견한 비젼

이런 모양의 보자기가 자신에게 내려오자 베드로에게 하늘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 오는데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고 하신 음성입니다. 이런 명령은 유대인들에게는 가당치 않는 일이었습니다. 율법에 의해 부정한 것은 먹지 못하게 되었는데 부정한 것으로 꽉찬 보자기 안의 짐승을 잡아 먹으라니 베드로는 놀랜 나머지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것들을 내가 언제든지 먹기 아니하였나이다'고 했습니다. 이에 하늘에서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는 말씀이 들려왔습니다. 베드로는 하늘의 음성이 무엇을 뜻하는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 환상에서 신약시대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받아 누릴 위대한 축복의 비젼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1) 이 환상에서 이미 하나님께서 유대인과 이방인들과의 차별을 허셨다는 사실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 아들 안에서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나중에서야 이 말씀의 뜻을 깨달았습니다.

(2) 다른 또 한가지는 구약시대의 율법의 규례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폐해진 사실을 가리킨 것입니다. 율법에서 금지된 부정한 짐승은 실인즉 하나님의 백성과 이방인들과의 실질적 성별생활에 두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구분된 담이 헐어진 이상 이같은 율법의 제재는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된 것입니다. 율법에는 도덕적 계명이 있고 의식적 율법이 있습니다. 안식일에 관한 한가지만 빼고 도덕적 계명인 십계명은 영원히 존속하지만 의식적 율법은 예수님이 그 의식이 가리키는 모든 일을 완성하셨기 때문에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 것입니다.


결론 : 베드로에게는 아무런 거리낌이나 두려움이 었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분명하신 뜻을 알게 되었고 '일어나 내려가 의심치 말고 함께 가라 내가 저희를 보내었느니라'고 하신 말씀을 듣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비젼을 안고 고넬료의 집을 찾아가 그 비젼을 현실로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39) 고넬료의 집에 내리신 구원

(사도행전 10 : 24 : 48)

복음으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가 되어 참 이스라엘을 이루는 모습이 오늘 본문 말씀에서 나옵니다. 고넬료와 베드로의 만남에서 표면적 유대인이 깨어지고 이면적 유대인이 새롭게 탄생되는 모습을 바라보게 됩니다.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고 하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롬2:28-29).


1. 하나님의 사자를 대하는 고넬료의 태도

베드로가 성령의 지시에 따라 고넬료가 보낸 하인들과 함께 가이사랴에 있는 고넬료의 집을 방문하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나타나신 성령께서는 환상이나 말씀으로 나타내 보이시고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할 일에 대하여 지시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 베드로의 경우와 같은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은 때로는 환상으로 보이시고 말씀으로 지시도 하시지만 그런 경우는 아주 특별한 경우로 보통은 성령의 감동으로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심으로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일은 분명히 성령이 보내심을 받은 일임을 알고 담대히 증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께 같으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고넬료는 자기 집에 들어오는 하나님의 사자를 겸손히 영접했습니다. 베드로가 집에 들어올 때 그를 맞아 발 앞에 절을 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종들은 주의 사자들입니다. 이들에게 최대의 겸손과 존경을 나타내는 일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러 나가는 제자들에게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2) 고넬료는 베드로가 도착하기 전에 미리 그의 일가와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렸다고 했습니다. 고넬료는 베드로를 자기 집에 청하게 된 이유를 소상하게 설명하고 난 후,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고 말했습니다. 고넬료의 이 말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베드로 앞에 있는 일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 모였다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우리가 그 어느 장소이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곳에 모였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모인 것입니다.


2. 베드로의 증거

베드로는 고넬료에게 자기가 이곳에 오기까지의 경로를 자세히 설명하면서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느냐고 물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고넬료는 자신이 본 환상에 대하여 베드로에게 말해줌으로 베드로를 부르게 된 이유를 설명한 것입니다.

(1) 베드로는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증거했습니다. 베드로는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이미 성경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가 고넬료의 가정에 와서야 깨달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2) 베드로는 화평의 복음을 전하신 예수를 증거했습니다. 하나님이 만유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시게 하여 갈릴리에서 온 유대에 전파된 사실에 대하여 말해 주었습니다. 여기서 베드로가 복음을 화평의 복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복음이 하나님과 죄인과의 화평에 있기 때문입니다.

(3) 베드로는 예수의 행하신 일에 대한 증인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가 행하신 일은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 착한 일과 병든 자를 고치신 일과 그가 죽임을 당하신 후,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신 일에 대한 증인이라고 말했습니다. 주님이 사도들을 명하사 백성들에게 전도하게 하신 것은 산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이가 바로 이 예수이심과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는다고 하신 일에 대한 증인으로 전도하게 하셨음을 밝힌 것입니다.

고넬료가 이처럼 예수를 증거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줄 때에 성령이 이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들에게 내려 오셨다고 했습니다. 성령은 그리스도를 전할 때 그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사람들에게 임하시는 것입니다. 고넬료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고 하나님의 사자의 보내심까지 받았지만 복음을 듣지 못했음으로 성령이 임하시지 아니했던 것입니다. 베드로를 통하여 복음을 들었을 때에 이같은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결론 : 베드로와 함께 고넬료의 집에 간 할례 받은 다른 형제들은 이같은 성령의 내려오심을 바라보고 놀랬다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그들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들은 할례를 받음이 없이 물로 세례를 받은 최초의 사람들이 되었고 이방인으로써 첫 열매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사도행전 11장

◆ 밤중소리 11-06 | VIEW : 3,220

(40) 베드로의 변명(사도행전 11 : 1 - 18)

(41) 안디옥 교회의 시작(사도행전 11 : 19 - 21)

(42) 바나바로 인한 역사(사도행전 11 : 22 - 30)


(40) 베드로의 변명

(사도행전 11 : 1 - 18)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들어가 복음을 전한 일은 이미 예루살렘에까지 그 소문이 퍼졌습니다.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 갔을 떄에 그가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 음식을 먹은 일에 대하여 할례자들로부터 공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이 일에 대하여 제세히 전후 사정을 설명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이 일로 오히려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으므로 이 일로써 복음이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1. 베드로에 대한 공격

예루살렘 교회에 있는 할례자들이 고넬료의 집에 들어가 복음을 전한 베드로를 공격한 일은 예루살렘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주님의 제자들이나 다른 제자들이 아직 복음의 참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 놓고 있는 것입니다.

(1) 그들은 아직도 율법적인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복음은 율법과 병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율법과 복음에 대하여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생베 조각은 복음이요 낡은 옷은 율법입니다.

이 둘은 서로 목적이 다르기 때문에 공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복음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하나님의 은혜요 율법은 그것을 지키는 자를 의롭다하는 것으로 은혜가 아니라 자기 의가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베드로에게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먹었다'는 말은 할례자인 베드로가 이방인들이 먹는 부정한 음식을 그들과 더불어 먹었다는 것으로 이 사실을 공격한 것입니다.

(2) 그들은 복음을 전하는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음식을 먹은 일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진 것입니다. 그들은 복음을 율법의 하나의 부수적인 것으로 여겼을 뿐, 율법과 복음이 모순된 사실에 대하여 몰랐습니다. 갈라디아 교회에 다른 복음을 전파한 장본인들도 이들입니다. 바울은 이들과 싸우는 일에 전력을 다했을 뿐 아니라 그들에 대하여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라고 정죄하고 이단시했습니다.

(3) 할례자들의 복음에는 비전이 없었습니다. 복음의 비전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말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야 할 그들이었지만 베드로가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 음식을 먹은 일로 소동을 부린 것입니다.

(4) 이런 사실로 미루어볼 때 예루살렘 교회에는 많은 할례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으며 복음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자들이 교권을 쥐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사실을 볼 때 초기의 복음은 유대인 중심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예수를 믿지만 동시에 할례를 받고 율법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는 모순된 교리에 매어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에 머무르고 있는 동안 유대에서 온 할례자들에 의해 형제들을 가르치는데 그들의 가르치는 요지가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바울과 저들 사이에 큰 다툼과 변론이 일어났으며 이 일이 결국 예루살렘 교회의 총회에 의해 그 결론이 내려지게 된 것입니다. 이 일에 베드로가 일어나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 줄을 믿노라'고 말하여 율법주의적인 구원 사상을 배격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2. 베드로의 변명

베드로는 자신이 경험한 바에 따라 사실 그대로 증거했습니다. 사실보다 더 확실한 증거는 있을 수 없습니다. 버울은 자기가 본 환상이 정확한 하나님의 환상임을 증거하기 위해 세 번씩이나 보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아무 의심 말고 함께 고넬료의 집에 따라 가라고 하시는 성령의 명령을 받고 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하는 중,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는데 처음 자기들에게 임하심과 동일하게 임하심을 보고 그가 생각하기를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하신 주의 말씀이 생각났노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결론적으로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데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고 말한 것입니다. 베드로의 이같은 변명으로 이 문제에 대한 결론은 분명해 졌습니다. 그들은 잠잠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분명히 나타났을 때는 잠잠해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 베드로를 힐난한 일로 문제가 제기된 이 일이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다고 결론을 내리면서 기뻐했습니다. 이로써 유대인과 이방인들의 담이 무너졌음을 알게 되어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활발하게 전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41) 안디옥 교회의 시작

(사도행전 11 : 19 - 21)


핍박으로 인한 예루살렘 교회의 흩어짐은 복음 전파의 하나의 큰 전환점을 이루었습니다. 이로 인한 영향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에 까지 이른 것입니다. 이곳 안디옥은 셀류시드 왕조의 나카토르가 주전 300년경에 세운 도시로 그 후 시리아가 로마제국에 합병되자(주전64) 안디옥은 자유도시가 되어 시리아 지방의 행정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이곳에 큰 유대인의 공동체가 있었으며 유대인의 많은 영향을 받는 도시였습니다. 이 도시는 성 도덕이 문란한 곳으로 그 원인은 아르케미스와 아폴로 신을 숭배한 때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도시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된 것입니다.


1. 이방 전도의 전초 기지로 출범한 안디옥 교회

예루살렘 교회에서 복음은 다른 곳으로 옮겨지기 시작했습니다. 빌립은 사마리아에서 사울은 아라비아에서 베드로는 유다의 모든 지방과 사마리아와 갈릴리에서 다른 또 일단의 형제들은 북쪽으로 베니게와 구브로섬 그리고 그 당시 그 근방에서 가장 유명한 도시인 안디옥에까지 뼏쳐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있었습니다. 이때만 해도 복음이 유대인이라고 하는 민족적인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때라 이 도시에 들어온 일단의 복음 전도자들도 다른 사도들이나 제자들과 같이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베드로가 행한 고넬료 가정의 일로 이방인에게도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사도들의 모임에서 결정 지었기 때문에 복음이 활발하게 이방 세계로 전파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런 최초의 이방인의 전도 기지로 세워진 곳이 이곳 안디옥이었습니다. 우리는 안디옥에서 복음이 전파된 두 가지 모습을 바라보게 됩니다.

(1) 처음에 안디옥에 복음이 전해진 일은 그 곳에 있는 헬라파 유대인들에 의해서입니다. 이 시기는 아직 베드로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한 일로 말썽이 일어나기 이전이었습니다.

(2) 그 후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했다고 했습니다. 헬라인에게 복음을 전한 이들 유대인들은 베드로로 인한 새로운 복음전도의 변화를 가져온 이후에 안디옥에 도착했음을 암시해 주는 것입니다.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란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것은 그들에게는 그들대로의 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다만 이스라엘의 민족적 신으로 인정을 해 주고는 있었을 뿐 그 이상의 신적 존재로 인정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에게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전파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으며 더군다나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기들의 메시야로 여기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방인들에게 전파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구약성경을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로밖에 인정치 않고 있었으며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밖에 인정

하지 않고 있었음으로 그들에게는 메시야의 언약이나 구세주에 대한 소망에 관해서는 전혀 생소한 일이었습니다.


2. 안디옥에서 이방인들이 돌아오게 된 이유

안디옥에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은 모험적인 큰 도전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일에 크게 성공하여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던 것입니까?

(1) 그들은 성령의 권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복음을 모든 인종과 민족들에게 전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지난날 유대교가 세계적인 종교가 될 수 없었던 일은 성령의 권능이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2)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그것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땅에는 구원을 예정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이 도처에 있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을 복음으로 부르시기 때문에 능력으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복음이 일찍 전파된 곳은 그 곳에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이 그만큼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은 복음이 전해진 역사가 매우 짧지만 그것은 우리에게 베푸시는 구원의 시기가 늦었을 뿐, 이로 인하여 한국 사람 중, 구원 받아야 할 사람들이 구원 받지 못한 일은 한 명도 없는 것입니다.

(3) 다음에 주의 손이 복음을 전하는 그들과 함께 하셨다고 했습니다. 안디옥에서 복음을 통해서 그토록 이방인들을 많이 구원으로 이끌 수 있었던 일은 주의 손이 함께 하셨기 때문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들에게 복음이 전파될 때 희한한 이적들이 일어나 그들의 강퍅한 마음을 부셨습니다. 사도들의 그림자만 지나가도 병든 자들이 일어나는 기적이 일어난 것은 주님의 손길이 그들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결론 : 안디옥 교회는 최초의 이방인의 교회로 부흥되고 자랐습니다. 이방 세계로 복음을 수출하는 전초기지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복음이 효과 있게 전해지려면 주의 손이 함께 하셔야 합니다. 성령의 권능을 받고 복음 전도의 일꾼으로 나선다면 주의 손이 그런 사람들과 함께 하여 많은 결실을 맺게 하실 것입니다.



(42) 바나바로 인한 역사

(사도행전 11 : 22 - 30)

스데반의 순교는 결과적으로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핍박의 바람을 불러 일으켜 주님의 수다한 제자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게 되었는데 이같은 그들의 흩어짐이 이방인의 땅에 교회가 세워지는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기독교는 핍박 중에 꽃피는 종교입니다. 한 명의 순교자로 인한 열매는 마치 땅에 떨어진 한 알의 밀알처럼 많은 결실을 가져 온 것입니다.


1. 바나바의 등장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바나바란 사람을 대면하게 됩니다. 그가 처음 등장하는 곳은 행4장인데 바나바란 이름은 권위자란 뜻으로 그가 가진 별명이요 그의 본명은 요셉입니다.

(1) 이 바나바는 자신의 소유를 교회에 바친 사람입니다(행4:7). 그가 밭이 있음에 그 밭을 팔아 바쳤다고 했습니다. 네 물질이 있는 그 곳에 네 마음도 있다고 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물질을 바칠 때 그의 신앙도 성장하는 것입니다.

(2) 바나바는 바울이 어려움을 당했을 때 도움을 준 사람입니다(행9:27). 바울이 다메섹에서 자기를 죽이려는 무리들에게 쫓겨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주의 제자들과 교제하고자 했으나 그를 믿어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 때 바나바가 바울을 믿고 그를 사도들에게 데리고 가서 바울에 대한 증인으로 바울의 어려운 처지를 해결해 주었습니다. 이는 바나바의 통찰력과 사람을 믿는 신의에서 나온 행동으로 칭찬 받을만한 일이었습니다.

(3)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24). 착하다는 말은 그의 선한 마음을 의미합니다. 바나바는 그 마음 그릇이 착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고 있었습니다.

(4) 바나바는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24). 바나바의 성령 충만은 그의 기도생활과 순종의 생활에서 얻어진 결실입니다. 그 당시에도 예루살렘 교회에 많은 일꾼들이 있었지만 바나바와 같은 일꾼은 심히 적었습니다.

(5) 바나바는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24). 바나바의 믿음은 그의 헌신적인 생활과 순종을 통해 나온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을 쓰십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에서 이 사람을 안디옥으로 파송한 것입니다.


2. 바나바와 안디옥 교회

바나바의 안디옥 교회 파송은 안디옥 교회의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바나바의 권면과 위로는 안디옥 교회 성들들에게 큰 기쁨을 주었습니다. 그들은 바나바로부터 많은 영적 감화를 받은 것입니다.

(1) 바나바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했습니다. 바나바는 다른 것을 본 것이 아니라 교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습니다. 바나바는 하나님께서 안디옥 교회에 한량없는 은혜로 채워주심을 보고 기뻐한 것입니다. 이런 기쁨이 바나바에게 큰 사명감을 주었고 복음 전도의 일을 수행할 수 있도록 힘을 얻은 것입니다.

(2) 바나바는 믿음의 권면으로 성도들의 신앙을 자라게 했습니다. 바나바의 권면은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은주님과 함께 있으라는 뜻입니다. 주님께 붙어 있는 생활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반드시 있어야 할 필수 조건입니다.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생활할 때 포도나무처럼 붙어 있게 됩니다. 죄에 죽고 의에 살 때 주님께 붙어 있게 됩니다(롬6:4-5). 주님께 대한 순종이 우리로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게 합니다(요15:10). 주의 말씀이 우리로 그리스도와 붙어 있게 합니다(요15:7). 주님의 사랑이 우리로 주님께 붙어 있게 합니다(롬8:35-39).

바나바의 성실한 목회로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고 했습니다. 바나바는 사랑의 목회자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했으며 모든 사람들에게 주께 붙어 있으라고 권면했습니다.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로 바울을 데려 왔습니다.

바나바는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알고 바울의 협조를 구한 것입니다. 바나바는 자신의 명예보다 하나님의 교회를 더 소중히 여겼으므로 유능한 일꾼인 바울의 협력이 필요함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는 바울이 거하고 있는 다소로 가서 그를 찾아 안디옥으로 돌아와 이제 안디옥 교회는 둘이 함께 협력하여 목회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이 한 일에 대하여 간략하게 두 가지 사실로 부여 줍니다. 26절에서 큰 무리를 가르쳤다고 했습니다. 바울의 등장으로 교회는 더욱 부흥되었습니다.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주의 복음이 안디옥에 편만되어 모든 사람들로부터 자신들과 분리된 무리로 붙여진 이름입니다. 또 이같이 붙여진 일은 안디옥 교인들의 생활이 모든 사람들에게 선하게 인정 받았다는 사실을 보여 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결론 : 안디옥 교회는 바나바란 성실하고 충성된 사역자를 통하여 아름답게 성장해 나갔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한 명의 일꾼은 이처럼 위대한 결실을 맺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2장

◆ 밤중소리 11-06 | VIEW : 4,934

(43) 헤롯왕의 교회 핍박(사도행전 12 : 1 - 12)

(44) 더 흥왕해 가는 하나님의 말씀(사도행전 12 : 13 - 25)


(43) 헤롯왕의 교회 핍박

(사도행전 12 : 1 - 12)


교회에 대한 핍박은 계속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교회를 핍박한 자는 헤롯왕입니다. 이에 대해 1절에서 '그때에 헤롯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 몇을 해하려 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였다'고 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사도들 중에 제일 먼저 주님의 부르심을 받는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이 일을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기뻐했다고 했습니다. 이에 헤롯왕은 유대인들의 기분을 맞추어 주려고 베드로까지 잡아 옥게 가두어 두게 된 것입니다.


1. 헤롯왕은 누군가?

우리는 이곳에서 또 다른 헤롯을 보게 됩니다. 이 자는 아그립바 1세로 예수님이 태어나실 당시의 통치자였던 헤롯 1세의 손자벌 되는 위인입니다. 이 자는 로마에서 그 당시 황제의 조카벌 되는 가이우스와 친한 관계를 가져 이 자가 37년 로마 황제로 오르게 되자 아그립바에게 파레[스틴 지방을 주어 왕으로 삼은 것입니다. 그 후 헤롯에게는 갈릴리와 베레야가 덤으로 주어졌으며 가리우스 황제의 암살 후에도 글라우디오가 주후 41년에 로마의 황제가 되었을 때 총독들이 다스렸던 유대 지방까지 주어 방대한 권한을 행사하게 된 것입니다.

이 헤롯은 유대인들의 호감을 사려고 우선적으로 기독교인들의 핍박에 착수하였고 야고보를 칼로 죽였으며 베드로를 잡아 옥에 가둔 것입니다. 베드로의 투옥은 유대인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는 사도 중에 수제자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의 환심을 사는 일에 베드로를 투옥하는 일 이상 좋은 일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요원의 불길처럼 타 오르는 복음의 불길을 잡는 일에는 베드로의 투옥과 그를 죽이는 일이 현명한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2. 옥에서 일어난 기적

베드로가 붙잡혀 투옥된 날은 무교절이라고 했습니다. 무교절이란 누룩 없는 떡을 만들어 먹는 민족적 절기로 이 무교절은 유월절 행사의 시작인 것입니다. 베드로는 7일 첫날에 투옥 되었습니다. 그들은 무교절이 지난 후인 유월절 후에 사형을 시킬 만반의 준비와 계획을 세워 놓은 것입니다. 베드로가 투옥된 이래 그에 대한 감시는 철저했습니다. 밤 낮을 네 명의 군사가 교대로 감시하면서 지켰습니다. 그 뿐 아니라 그들 중 두 명은 베드로가 투옥되어 있는 감방 안에 들어와 베드로와 한 쇠사슬에 자신들을 묶어 베드로로 도망치지 못하도록 만들었습니다.


(1) 이때 예루살렘 교회는 베드로를 위해 하나님께 간절히 빌었다고 했습니다. 간절하다는 말은 엑테네스( )로 열성적인 기도, 진지한 기도를 말합니다. 온 교회가 이처럼 열성적이며 진지한 기도를 드렸던 것입니다. 그들이 기도한 곳은 마가요한의 집입니다. 그들의 기도는 베드로가 출옥한 후에도 계속된 것으로 보아 계속적인 기도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옥에서 잠들어 있었지만 그가 잠을 잘 동안에도 교회는 그를 위해 기도한 것입니다.


(2) 이런 중에 베드로가 갇혀 있는 옥에 크나큰 변이 일어난 것입니다. 두 명의 파수군은 베드로와 함께 쇠사슬에 매어 있었고 두 명의 파수군은 옥문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중에 홀연히 주의 사자가 베드로의 곁에 섰다고 했습니다. 이때 이 주의 사자로 말미암아 옥중에 광채가 조요했다고 했습니다. 조요하다는 말은 람포( )란 말로 어떤 빛이 빛나게 비취는 모양을 가리킨 말입니다. 교회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된 것입니다 . 

천사는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웠습니다. 그리고 급히 일어나라고 명했습니다. 이때 베드로의 손목에서 무거운 쇠사슬이 풀어졌습니다. 천사가 두 번째로 베드로에게 띠를 띠고 신을 들메라고 명했습니다. 베드로는 천사가 시키는 대로 따랐습니다. 그리고 천사의 말대로 겉옷을 입고 그의 뒤를 따랐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참인줄을 모르고 하나의 환상을 보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이처럼 하나의 환상인줄로 착각한 것은 그가 수면 중에서 갑자기 깨어 났기 때문으로 사건의 추이를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눈을 떠보니 옥안이 홀연히 빛난 빛으로 비취져 있었고 어떤 광채나는 사람이 자기에게 나타나 명령을 내리고 있었으므로 환상을 보고 있는 것으로 알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거리에 나서서 새벽 공기를 마시고 정신이 났을 때 곧 깨달아 이것이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어 나를 헤롯의 손과 모든 유대 백성의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 일인 줄을 알았다고 스스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결론 : 베드로를 옥에서 구출케 하신 하나님의 역사는 놀라운 기적입니다. 옥중에 함께 쇠사슬에 묶여 있었던 간수나 파수를 섰던 간수나 이런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고 베드로가 쇠사슬에서 풀려나가는 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교회의 합심 기도가 얼마나 위대한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낼 수 있는가에 대하여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위대한 역사를 이루시려고 하실 때 그 누구인가를 통해서 기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위대한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밑거름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44) 더 흥왕해 가는 하나님의 말씀

(사도행전 12 : 13 - 25)


베드로는 옥에서 풀려난 후, 마가 요한의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베드로가 대문을 두드렸을 때 로데라는 그 집 계지아이가 영접하러 나왔다가 베드로의 음성을 듣고 너무 기뻐한 나머지 문을 열어 줄 것을 잊은 채 집 안으로 달려가 주의 제자들에게 문을 두드리는 장본인이 베드로임을 고했습니다. 그들은 옥게 갇혀 있는 베드로를 위해 기도했으면서도 로데의 말을 믿지 못하고 오히려 그 계집아이에게 미쳤다고 나무랐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란 사실을 우기는 계집아이에게 그러면 베드로의 천사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베드로를 만난 후, 하나님의 기이하신 역사에 심히 놀랐습니다. 베드로는 그들에게 주님께서 자신을 옥에서 이끌어 내신 일을 말하고 그 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갔다고 했습니다. 헤롯의 눈을 피하여 알려지지 않은 곳으로 잠시 피하려고 떠난 것입니다.


1. 헤롯의 낭패와 그의 죽음

베드로가 빠져 나온 옥에서는 베드로의 일로 큰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날이 새매 군사들은 베드로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여 적지 않게 소동하니'라고 했습니다. 헤롯은 많은 군사들을 풀어 도망한 베드로를 수배했지만 허사였습니다. 화가 난 헤롯은 결국 파수군들을 심문한 후 그들을 죽이라고 명했습니다. 그 후 헤롯은 가이사라로 내려가서 그 곳에서 얼마간 살았던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헤롯의 집은 원래가 예루살렘이었지만 로마 황제 글라우디오의 경축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다른 수도인 가이사랴로 내려 갔을 것으로 예측하고 있습니다.

헤롯은 평소 엘베니게의 해안 도시에 자리잡고 있는 두로와 시돈 사람들을 몹시 노엽게 여겼습니다. 그 원인이 어디 있었는지 모르지만 이로 인해 이 지방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몹시 노여워하는 헤롯왕이 마음을 돌이키지 않으면 식량 공급이 끊겨질 것을 염려하여 궁내대신 불라스도를 통해서 뇌물 공세로 화친 작전을 썼습니다. 헤롯은 그들의 화친에 동의하여 한 날을 택하여 왕복을 입고 위에 앉아 백성을 호유했습니다. 이것은 헤롯이 위엄있게 그의 왕위에 앉아 연설을 한 일을 나타낸 말입니다.

그의 연설은 그 곳에 모인 대중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왕의 연설을 듣고 있었던 백성들은 왕의 말이 하나님의 음성처럼 들렸습니다. 이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는 왕이 권위를 갖추고 위엄있게 연설함으로 그 권위에 눌려 하늘에서 들려 오는 듯한 착각을 일으켰을 것이란 생각입니다. 다른 하나는 두로와 시돈 사람이 헤롯의 환심을 사기 위해 그를 극찬하여 왕의 소리는 신의 소리라고 크게 부르짖은 것입니다. '당신은 참으로 신이지 사람이 아니니이다' '당신의 그 말씀은 신의 음성이지 사람의 소리가 아니나이다' 아마 이런 말들로 떠들석한 분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헤롯은 그 같은 군중들의 외침에 두려워 했어야 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이 자신에게 돌아 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이 들으실 수 있는 거룩한 말을 자신이 들었을 때 그는 마땅히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군중들의 그 같은 환호를 거절했어야 했습니다. 이 일로 이때 주의 사자가 헤롯왕을 충이먹어 죽도록 치셨습니다. 헤롯은 원인 모를 돌연한 병으로 그 자리에 쓰러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2. 더 흥왕하여 가는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 하더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교회가 심한 핍박을 당하는 중에도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여 가게 된 것입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하고 더 하려면 그 말씀이 진리에 서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성령의 흥왕케 하시는 능력의 역사는 진리 안에서만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가 되려면 오직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증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탄의 역사는 그리스도의 권위를 천사의 자리에까지 낮추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자리로 높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의 속죄 사실을 밝히기 때문입니다. 죄인을 위한 속죄 제물로서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일이야말로 진리에 선 복음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해야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생명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는 이 세 가지 사실이 결여된 복음을 증거하는 자들이 많이 생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더 흥왕하여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하려면 그 말씀이 널리 전파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은 전파하는 자가 없이는 퍼질 수가 없으며 퍼지지 않으면 흥왕해 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말씀이 흥왕하려면 말씀을 전파하는 사람이 그 말씀의 능력에 사로잡혀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사로잡히려면 바울처럼 빚진 자의 심정으로 말씀이 전해져야 합니다. 그리고 전하지 않으면 그 저주가 자기에게 올 것임을 알고 두려워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 하나님의 말씀은 그 누구에게도 메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그 안에 운동력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전하여 흥왕시키도록 힘쓰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