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新約]강해/◆ 사복음서 · 사도행전 강해-1

요한복음서 14-17[.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보혜사,나는 포도나무요...성령의 일] ◆ 밤중소리

영국신사77 2020. 4. 12. 18:19


요한복음(3) 차례

제 14장(75-81)

75.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요한복음 14:1) 

76. 주님이 예비하신 처소(요한복음 14:1-3) 

77.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요한복음 14:4-6) 

78. 아들과 아버지와의 관계(요한복음 14:7-10) 

79. 더 큰 일도 하리니(요한복음 14:12-15)

80.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요한복음 14:16-20) 

81. 성령의 약속(요한복음 14:21-31) 


제 15장(82-85)

82. 참 포도나무와 그 가지(요한복음 15:1-6) 

83. 기도 응답의 비결(요한복음 15:7-11) 

84. 예수님의 계명(요한복음 15:12-17)

85. 세상과 그리스도인(요한복음 15:18-27) 


제 16장(86-89)

86. 성령의 세 가지 사역(요한복음 16:1-11) 

87.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요한복음 16:12-15) 

88.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한복음 16:16-32) 

89.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한복음 16:33) 


제 17장(90-93)

90. 영생은 무엇인가?(요한복음 17:1-3) 

91.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신 예수님(요한복음 17:4-8) 

92.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한복음 17:9-12) 

93.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요한복음 17: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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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4장 (75-81)

◆ 밤중소리 01-28 | VIEW : 615

75.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요한복음 14:1) 

76. 주님이 예비하신 처소(요한복음 14:1-3) 

77.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요한복음 14:4-6) 

78. 아들과 아버지와의 관계(요한복음 14:7-10) 

79. 더 큰 일도 하리니(요한복음 14:12-15)

80.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요한복음 14:16-20) 

81. 성령의 약속(요한복음 14:21-31)


(75)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요한복음 14:1)

서 론 :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어디론가 떠나실 것을 말씀하셨을 때 그들의 얼굴이 어두워졌습니다. 더욱이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고 말한 베드로에게 “네가 닭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하신 말씀에서 어렴풋이 나마 불길한 예감이 들었습니다. 주님이 가신다는 길을 자신들은 따라갈 수 없는 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근심으로 가득 찼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들은 마음으로 몹시 당황해 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1. 마음의 근심은 왜 오는가?

사람이 마음으로 근심하는 일은 인생 패배의 중요한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에 왜 근심이 생기는 것인가?

(1) 믿음이 없는데서 근심이 옵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아직까지 주님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갖지 못했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확실한 믿음은 그의 부활에 있어야 하며 주님께 대한 소망에 있어야 합니다.

(2) 근심은 그 마음에 하나님의 평강이 없는데서 나옵니다. 마음의 평안은 성령의 내주 하심으로 그 성령으로 말미암아 누립니다. 또한 하나님이 말씀이 우리 마음속에서 평안을 창조합니다. 우리의 마음에 이 같은 역사가 없을 때 근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평안은 바로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이십니다.

(3) 근심은 장래에 대한 불안에서 옵니다. 불안은 하나님께 대한 의뢰가 없을 때 생겨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무엇보다 하나님을 의뢰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뢰한다는 말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의뢰한다는 말입니다. “내가 주의 말씀을 의뢰함이나이다”고 말씀했습니다(시119:42).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을 견고히 잡고 그 말씀에 내 생애를 맡기는 일이야말로 하나님께 대한 바른 의뢰인 것입니다.

(4) 다음에 우리의 근심은 세상일에 대한 염려에서 찾아옵니다. 염려라는 말과 근심이란 말은 이웃 사촌간입니다. 우리에게서 이 염려를 물리쳐야 근심이 사라지게 됩니다. 인생의 염려는 내일 일 때문에 생겨난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인간의 염려는 또 의식주 문제로 찾아옵니다(마6:31-33). 염려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하나님의 방법은 주님께 맡기는 일이라고 이처럼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벧전5:7).

2. 두 가지 근심

근심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세상근심이고 하나는 그리스도인의 근심입니다.

(1) 세상근심이란 세상적인 일로 인한 근심을 말합니다. 세상근심은 우리에게 사망을 준다고 말씀합니다(고후7:10).

(2) 그리스도인의 근심이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 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육신이 연약함으로 어쩔 수 없이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죄는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일으킵니다. 이 근심이야말로 죄에 대한 통회와 자복으로 발전하여 우리로 하나님의 자비를 힘입게 함으로 사죄에 이르게 됩니다.

①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에는 골육을 위한 것이 있습니다. 바울은 골육의 친척을 위한 큰 근심이 있노라고 고백했습니다(롬9:1-3). 우리도 바울의 이런 심정을 가지고 내 골육의 형제의 구원을 위한 간절함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②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에는 교회를 위한 것이 있습니다. 바울을 항상 그의 마음 속 깊은 곳에 하나님의 교회를 위한 근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내 속에 눌리는 것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고후11:28).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를 위한 근심과 염려의 짐을 함께 져야 합니다.

3. “나를 믿으라”

주님은 근심에 잠겨 있는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 주님은 우리를 돌보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나를 믿으라고 하신 말씀은 바로 여기에 그 분명한 뜻이 있습니다. “너희 모든 염려를 주께 맡겨 버리라”고 하신 말씀의 뜻도 여기에 있습니다.

(2) 주님은 그의 언약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그의 피로 세운 언약 안에는 우리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충만으로 주시는 하나님의 온갖 축복이 다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결 론 : 우리 주님은 우리의 근심 중에 나타나셔서 우리를 위로해 주시며 우리의 근심을 맡으시며 우리에게 명안과 기쁨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낙심 중에 있을 때, 병중에 괴로움을 당하고 있을 때, 재앙으로, 실패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을 때, 주님은 우리를 찾아오셔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고 위로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76) 주님이 예비하신 처소

(요한복음 14:1-3)

서 론 : 예수님은 장차 자신들의 운명에 대하여 불안함과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고 위로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디론가 가시겠다고 하신 그 목적지가 이 세상에 있는 곳이 아니라 아버지 집임을 밝히시고 그곳에 가시는 목적도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기 위해”서임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확실한 천국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1. 우리의 영원한 집

우리가 신약에서 천국 또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살펴볼 때,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영생을 가졌다면 지금 우리의 육신적인 생명을 초월한 생명이 있어야 하며 그리고 이 생명이 삶을 누릴 수 있는 그 어떤 장소적인 처소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란 말씀을 하셨는데 이 처소란 말은 ‘토포스’란 말로 그 어떤 위치적인 장소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천국에 대한 확신은 인생의 어려움이나 고달픔 속에서도 큰 위로가 됩니다.

(2) 천국은 우리들이 살아 갈 영원한 본향 집입니다. 그곳은 이 땅위의 그 어떤 곳과도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영화로운 곳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 세상에서 비록 어려운 인생 길을 살아간다고 해도 천국이 틀림없이 있으며 나의 영원한 처소가 된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 어떤 괴로움이라도 이겨낼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우리 주님은 우리들에게 “내가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애게 일렀으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곳이 내 아버지 집이라고 하셨습니다.

2. 거할 곳이 많은 아버지의 집

예수님의 말씀 중에 우리의 눈길을 끄는 말씀은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 나라는 들어가서는 안될 사람들은 한 명도 들어갈 수 없는 곳이기도 하지만, 들어가야 할 사람들은 그 수효가 아무리 많아도 한 명도 빠트림 없이 다 들어갈 수 있는 넓은 곳입니다.

(1) 이곳은 믿음을 지킨 모든 사람들이 다 들어가는 곳입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딤후4:7-8).

(2) 이곳은 사모하는 모든 사람들이 다 들어가는 곳입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에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니…”(고후 5:1-2).

(3)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는 모든 사람이 다 들어가는 곳입니다. “자녀이면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8:17).

(4) 소망을 가진 모든 사람이 다 들어가는 곳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1:3-4).

(5) 성령으로 거듭난 모든 사람이 다 들어가는 곳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

(6)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모든 사람들이 다 들어가는 곳입니다(계21:27).


3.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리라”

우리는 여기서 하나의 어려운 문제에 부딪치게 됩니다. 그것은 하늘에 있는 영원한 우리의 본향 집으로 가는 길이 둘로 나뉜 것으로 나타나 있기 때문입니다.

(1) 부활한 몸으로 들어가는 곳이 있다고 했습니다(마25:34). 이때는 인류의 최후심판이 있을 흰 보화심판에서의 일입니다(계 20:12-15). 계시록 21장에 신부의 단장을 갖추고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은 바로 이런 천국입니다.

(2) 부활한 몸이 아니라 육신이 죽어 영으로 들어가는 곳이 있습니다. 바울은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있는 줄을 안다고 말했습니다(고후5:1-2).

이 둘은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표현하신 주님의 말씀에서 한 곳으로 보아야 합니다. 모세나 엘리야나 한곳에 있었지만 엘리야의 영광이 모세보다 우세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세나 다른 성도들도 마지막 부활의 날에는 더 영화로운 몸으로 그곳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마17:3-8. 고후5:4).


결 론 : 그리스도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 육신의 장막을 벗으면 주님이 예비하신 우리의 영원한 처소가 있으며 그곳은 말할 수 없이 영화로운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언제 죽어도 우리 주님은 모든 것을 아시고 우리를 영접하실 모든 준비를 갖추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있게 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77)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요한복음 14:4-6)

서 론 :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간다”고 말씀하셨는데도 그들은 이 말씀의 뜻을 깨달을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은 결론적으로 제자들에게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제자들에게 여러 번 이와 같은 말씀을 들려 주셨으므로 너희가 알리라고 하셨지만 그들 중에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의 뜻을 알고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도마는 답답한 나머지 이처럼 물었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1. 내가 곧 길이요

예수님은 여기서 놀라운 말씀을 들려 주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길이라고 하신 말씀에는 두 가지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주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에게 오신 참 길이라는 뜻입니다(요6:63). 그리고 다른 한가지는 그리스도는 사람으로부터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유일하신 길이라는 뜻입니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I) 우리는 길이 아닌 다른 길을 걸어 왔습니다. 이 길은 사망의 길입니다(롬6:23). 죄 값으로 가야하는 길이였습니다. 이 길을 걸어가는 사람의 특색은 하나님을 거역하며 진리를 대적합니다.

(2)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 넣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친히 그 길이 되셨습니다.

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길이 되신 것은 그가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셨기 때문입니다(사53:6).

② 이 새로운 길이 바로 십자가에서 열린 것입니다. 그가 십자가에서 그의 육체를 화목 제물로 찢어 드리실 때 성소의 휘장이 찢어져 하나님께로 가는 새롭고 산길이 열린 것입니다(히10:20).

③ 그리스도이외 다른 길이 없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행4:12).


2. 내가 곧 진리요

예수님은 또한 “내가 곧 진리”라고 하셨습니다. 진리는 새 생명을 탄생시키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엡4:24). 우리는 진리의 말씀으로 새로운 생명을 받아 중생한 사람들입니다(엡1:23). 진리는 죄인을 거룩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습니다(요 17:17). 그 뿐 아니라 진리는 죄에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합니다(요8:32).

그러면 무엇을 진리라고 말하는 것인가? 이에 대하여 성경에 여러 가지 증거가 많지만 가장 핵심적인 것을 들어낸다면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17:17).

(1)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인 것은 그 말씀의 증거가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기 때문이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5:39).

(2) 하나님의 말씀은 그 목적이 생명을 얻게 하는데 있습니다.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약1:18). 만약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구원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면 그 말씀이 존재할 가치가 무엇이겠는가?


3. 내가 곧 생명이니

예수님은 내가 곧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 되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그 하나님 안에 태초로부터 계셨던 그 생명자체이십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요1:4).

(1) 인간의 생명은 원래가 생령적인 생명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고 하셨습니다(창2:7). 이 생령적인 생명은 완전한 생명이 못 되었습니다. 아담이 죄를 범하게 되자 이 생명은 곧 육신이 되어 흙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2) 그러나 그리스도의 생명은 이 같은 인간의 생명보다 훨씬 우위적인 생명입니다. 그의 생명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 생명은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생명을 그 아들 안에서 우리에게 공급해 주십니다. 이 생명은 그리스도와 연합한 생명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에 아무라도 우리의 이 생명을 빼앗을 존재는 없는 것입니다(요10:28-29). 이 생명은 또한 그리스도의 영광에 이르는 생명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의 영광을 보장받은 사람들입니다(롬8:17-18).


결 론 : 우리가 믿고 섬기는 예수 그리스도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분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이 같은 주님을 떠나갔습니다. 이때 주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도 가려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알았삽나이다”고 고백한 베드로처럼 이 분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78) 아들과 아버지와의 관계

(요한복음 14:7-10)

서 론 : 예수님은 아들과 아버지와의 바른 관계를 알려 주시기 위하여 기회 있으실 때마다 여러 말씀으로 깨우쳐 주셨습니다. 지금도 목회자들이 성도들에게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를 가르쳐 준다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이 관계는 삼위일체 교리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혹은 비유로 혹은 직설적으로 아들과 아버지와의 관계를 밝히심으로 삼위일체의 신비성을 깨달을 수 있도록 힘 쓰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 “나를 알았다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는 신비적인 관계이므로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깨달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고전2:9-12). 우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제자들에게 아버지와 아들과의 심오한 진리를 좀 더 깊이 깨닫게 하시기 위해 귀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1) 예수님께서 “너희가 나를 알았다면”이라고 하신 이 말씀은 우리가 보편적으로 알고 있는 그런 지식을 가리킨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예수님의 제자들은 세상 사람들보다 다른 각도에서 자기들의 선생님을 알고 있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런 영적인 심오한 지식이 결핍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① 그들은 예수님의 참된 신성을 모르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유대교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삼위일체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습니다.

② 그들은 예수님의 참된 사역을 모르고 믿었습니다. 주님의 사역은 십자가를 지시는 일이었습니다. 고난의 잔을 마시는 일이 그가 하실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런 사실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이 지상에서의 영광의 위에 앉으실 영광의 메시야로 믿고 따랐던 것입니다.

(2) 그들은 예수님을 사랑은 했지만 잘못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대한 바른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이 주님께 드린 사랑이란 인간적인 사랑, 이웃에 대하 사랑정도였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사랑은 했지만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신 사랑이 아니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사랑이었습니다. 그들이 이런 사랑을 가진 것은 아들과 아버지와의 바른 관계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2.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예수님은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고 말씀하셨을 때 빌립은 재빨리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고 말했습니다.

(1) 빌립의 간청은 자신의 눈으로 하나님을 봐올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빌립의 이 같은 간청이 성경적이 아닌 것은 아닙니다. 모세는 회막 안에서 하나님과 말씀하신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출33:7-11). 그러나 이런 일은 특별한 경우임을 알아야합니다. 성경에 있는 일이라고 그것이 오늘날에도 그 당시와 똑같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일은 잘못된 믿음입니다.

(2) 빌립은 그리스도를 잘 몰랐기 때문에 어리석은 질문을 하게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나타내시는 방법으로 말씀을 택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하나님을 나타내시는 모습으로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고 하셨습니다(히1:1). 구약에서 하나님이 그 선지자로 말씀하신 그 말씀으로 나타내셨고 오늘날에는 그 아들로 하신 말씀으로 나타내신 것입니다.


3. “너희가 믿지 아니하느냐”

예수님은 빌립을 향하여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 하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1) 나는 아버지 안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몸이지만 나는 아버지 안에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의 성삼위의 인격의 신비성을 찾을 수 있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이 삼위의 인격은 각자 별개의 독립성을 가지시지만 그 별개의 인격이, 각자의 그 안에 삼위의 신성이 함께 충만히 거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요1:18).

(2) 예수님은 자신이 하시는 모든 일이 아버지가 하시는 일이심을 밝히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시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결 론 : 우리가 하나님을 참으로 알려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에게 소망을 두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라고 말씀했습니다(벧후1:8). 그의 말씀 안에서 그를 깨닫고 그에 대한 믿음을 확고히 가질 때 우리의 신앙은 족한 신앙으로 전진하여 나갈 수 있습니다


(79) 더 큰 일도 하리니

(요한복음 14:12-15)

서 론 :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무나도 놀라운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제 주님과 다시는 만날 수 없는 헤어짐에 대한 염려와 근심에 싸인 제자들에게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세 가지 각도에서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는 “나를 믿는 자”란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 믿는 자의 범위는 어떤 것이냐? 하는 것이며, 다음에 “내가 시행하리니”라고 하신 말씀에서 그렇게 행하시는 일이 이상한 일이 아닌 것은 그 일을 행하시는 분이 내가 아니라 주님 자신이심을 밝힌 일이요, 또 하나는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고 하신 말씀으로 이 같은 일의 전재 조건으로 주님께 구하는 기도가 따라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1. “나를 믿는 자”란 누구를 말함인가?

예수님은 교회를 위해 나타내시는 그의 위대한 역사를 “나를 믿는 자”를 통하여 이런 일을 이루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1) 나를 믿는 자란 주의 이름을 믿고 주님과 연합된 성도를 말합니다. 주 예수를 믿는 믿음이 없으면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이런 사람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2) 이 믿음은 주님께 대한 의뢰를 말합니다. 믿음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소망이므로 주님께 대한 의뢰가 없이는 소유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믿음으로 주님을 섬겼던 바울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3) 이 믿음은 약속의 말씀에 대한 확신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어떻게 자기를 의뢰하라고 하시는 것인가? 하나님을 의뢰하는 의뢰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의뢰라는 것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시119:42). 하나님은 그의 말씀으로 자기를 우리에게 나타내시고, 그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명령하시며, 그의 말씀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그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소망을 주시며, 그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약속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의뢰하는 일은 곧 하나님께 대한 신실한 의뢰인 것입니다.

(4) 이 믿음은 주의 이름으로 구하는 기도가 포함되어 있음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고 하신 말씀은 “나의 하는 일도 하리라”고 하신 그 일을 이루심에 반드시 우리의 기도가 따라야 한다는 사실을 밝히신 것입니다. 기도란 믿음이 따라야 하는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2. “이보다 더 큰 것도 하리라”

예수님은 “또한 이보다 더 큰 것도 하리니”라는 말씀을 제자들에게 들려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교회사적인 측면에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1) 우리 주님의 참 권능은 인간의 생명을 구원하시는 영적인 권능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권능을 믿는 자들에게 주십니다(행1:8). 사실상 복음으로 인한 구원의 권능은 예수님의 생존시보다 그가 죽으시고 부활하시어 승천하신 후 그의 제자들에 의하여 강력하게 나타난 것입니다.

(2) 또한 이 말씀에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 나타나는 실질적인 권능의 역사도 물론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권능의 역사는 주로 치료의 역사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이 지상에서 행하신 권능은 그 대부분의 경우 병자를 고치시는 기적으로 나타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같은 치료하시는 권능의 역사가 두 가지 면으로 사도시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어 오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① 주님의 이 말씀이 초대교회시대에는 사도적 권능으로 나타났습니다. 사도적 권능이란 완전하고도 즉각적인 권능으로 나타나는 역사를 말합니다.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고 있었던 사람에게 나타난 온존한 권능이라든가, 죽은 다비다를 살려낸 일 등, 성경에 나타나지 않은 사건만도 부지기수일 것입니다. 이런 사도들의 역사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② 그리고 다른 한가지면은 그 이후 이 같은 역사가 점차 교회의 은사적인 권능으로 나타났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이 말씀에서 우리는 주님의 권능이 은사적인 면으로 변해져서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고전12:8-10).


결 론 : 우리가 이 같은 위대하고 놀라운 권능을 행할 수 있다는 사실은 전혀 그 근거가 사도들이나 은사 받은 성도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시행하리라”고 말씀하신 주님께 있기 때문에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일은 분명히 영으로 다시 오셔서 우리 속에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 일에 대한 말씀이십니다.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라고 하신 말씀에서 이 보혜사는 바로 그리스도의 영이시기 때문에, 주님은 우리 속에서 그의 전능하신 영으로 우리 육신의 연약에 얽매이심이 없이 그의 뜻을 이룰 수 있는 그의 권능을 따라 이런 일을 능히 행하시는 것입니다(요16:7).


(80)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요한복음 14:16-20)

서 론 :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깨닫기 어려운 영적인 깊은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떠나면 “보혜사”를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들은 보혜사란 말을 처음 듣는 것입니다. 이 보혜사는 “너희와 함께 영원히 거하실 분”이심을 밝히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18절에서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1. 약속하신 보혜사

예수님이 아버지께 구하여 보내시겠다고 말씀하신 성령에 대하여 이곳에서 보혜사란 말씀으로 표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보혜사”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예수님이 또 다른 모습으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실 일에 대한 시사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성령을 보혜사란 표현으로 말씀하셨는가? 이에 대하여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보헤사란 뜻이 나타내고 있는 것처럼 성령께서는 하나님과 나와의 법적인 관계에 대한 책임을 분명히 이루실 일에 대하여 이처럼 표현하신 것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1) 성령은 우리의 법적인 사죄의 대언자가 되심으로 우리의 보혜사가 되십니다(요일2:1).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생활하는 가운데서도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요일1:10). 그러나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사죄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범죄 할지라도 보혜사가 되시는 성령께서는 우리의 변호인으로써 하나님께 변호해 주심으로 우리는 결코 정죄함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2) 성령은 우리의 법적인 칭의의 대언자가 되시므로 그분은 보혜사입니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의 의를 은사로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언제나 아버지 앞에서 이 같은 우리의 의를 법적으로 변호해 주심으로 그 어떤 경우에도 우리를 정죄 할 존재란 이 세상에 없는 것입니다.

(3) 그 뿐 아니라 성령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는 자비하신 대언자이시기도 합니다(롬8:26).


2. 진리의 영이신 보혜사

주님은 이 보혜사에 대하여 좀더 구체적으로 언급하셨습니다.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고 하셨습니다(17). 성부 하나님은 진리가 되시는 분입니다(요17:17). 그리고 성자 하나님은 진리로 세상에 오신 분이십니다(요14:16). 다음에 성령 하나님은 이 진리를 증거 하시고 진리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영이십니다.

(1) 이 진리의 영이신 성령은 세상이 능히 받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한다고 하신 것입니다(고전2:14). 성령은 오직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사 영원토록 함께 하시기 위해 보내심을 받은 것입니다.

(2) 그러나 이 진리의 성령에 대하여 너희는 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너희와 함께 거하시기 때문이요 또 너희 속에 거하시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그 말씀을 깨닫는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성령이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이 사실은 우리가 성령을 받았다는 확실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은 이 성령이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데 영원토록 함께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성령이 나와 함께 하시는 이유는 첫째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루기 위해서 입니다. 이 연합은 말만의 연합이 아니라 그가 친히 내 속에 오셔서 나와 영원히 함께 계심으로 생명적인 연합을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둘째로 중생이란 그리스도의 영의 내주를 의미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이 세상 끝날 까지 구원을 이루어 주시기 위해서는 우리와 함께 영원히 계셔야 하는 것입니다.


3.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은 18절에서 조심스럽게 성령의 본질에 대하여 자신과 결부시키셨습니다. “내가 고아와 같이 너희를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고 말씀하심으로 주님이 보내주시겠다고 말씀하신 보혜사와 예수님과는 다른 존재인 것 아니라 하나이심을 밝히셨습니다. 그리고 19절에서 “너희가 나를 보리니”라고 하신 말씀과 20절에서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고 하신 말씀도 똑 같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의 이런 말씀은 너무나도 놀라우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깨닫지 못하고서는 이해할 수가 없는 논리의 일대비약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결 론 : “그 날에는”이라고 하신 그 날은 성령이 오신 오순절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이날에 분명히 두 번째 오신 것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계신다고 말씀하시고 또한 예수님이 보혜사 성령으로 오신다고 하신 말씀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가 내 안에 있다고 하신 것은 주님과의 연합이요 내가 너희 안에 있다고 하신 것은 성령의 임재이신 것입니다. 지금 우리 안에는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성령이 임재 하심으로 그리스도와의 온전한 연합을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분으로 말미암아 그 어떤 경우에도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81) 성령의 약속

(요한복음 14:21-31)

서 론 :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은 언제나 확신에 찬 믿음의 생활, 마음에 큰 기쁨과 평안이 충만한 생활을 이루는 것만은 아닙니다. 과연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시는가? 내가 주님의 사랑을 받는 것인가? 하는 의문에 사로잡혀 영적인 어두움이 우리의 마음에 가득 찰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 왜 이런 생각에 얽매여 스스로 캄캄한 영적인 늪 속을 헤매야 하는 것인가? 이 해답이 21절에 나와 있습니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이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께 사랑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요, 또 주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므로 주님이 그에게 나타내시지 않으셨기 때문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I. 주님을 사랑하는 자가 받을 축복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주님의 사랑을 받는 생활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은 누가 주님을 사랑하는 자인가에 대한 분명한 해답을 주셨습니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 주님을 사랑하는 자는 반드시 그의 계명을 지키는 생활을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생활이 왜 이토록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인가? 이에 대한 몇 가지 사실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① 우리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키는 생활은 하나님의 백성된 첫 번째 표적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 첫 열매가 바로 순종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②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생활은 우리가 세상과 구별되었다고 하는 유일한 표적입니다. 성도라고 하는 말은 거룩한 무리들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세상과 구별되어 성별된 무리들은 먼저 세상적인 생활에서 구별되어야 합니다.

③ 또한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키는 생활은 이제 우리는 지난날의 죄로 죽었든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받아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고 하는 믿음과 표적이 되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키는 생활은 다음 세 가지로 나타납니다.

① 하나는 성령의 열매입니다(갈 5:22-23).

② 다음에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키는 생활은 그리스도인으로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게 하십니다(엡4:24).

③ 그리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키는 생활은 그리스도인들로 죄에 대하여 죽는 생활의 결실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롬6:1-3, 10-11).

(3)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생활을 아니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주의 말씀을 지키는 일이 즐겁고 기쁘고 소망을 주지만 주님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키기란 너무나도 힘겨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2. 성령의 약속

그런데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이 하시는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깨달음이 없었습니다. 이에 가룟인이 아닌 유다(별명 다대오, 야고보의 아들, 눅6:16 행1:13)가 답답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왜 주님께서 자기들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게는 나타내지 않으려 하시느냐”는 것입니다. 메시야로서의 능력을 세상에 왜 나타내지 않으시고 또 스스로 자신이 메시야 되심을 세상에 널리 선포하지 않으시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모든 일을 깨달을 시기가 올 것임을 말씀하시면서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리”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1) 보혜사 성령은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 아버지께서 보내시기 때문에 아버지의 영이라고 합니다(마10:20). ㉯ 아들의 이름으로 보내시기 때문에 아들의 영,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합니다(갈4:6, 롬8:9). ㉰ 그는 성령으로 오시기 때문에 영원하신 성령이라고 합니다(히9:14). 성령은 인격을 갖고 계시며(행8:29), 가르치시고(요 14:26), 위로하시고(행9:31), 우리의 연악함을 도우시고(롬8:26), 근심하시고(사63:10, 엡4:30), 훼방을 당하시고(마12:31-32), 명령하시고, 직분을 주시고(행13:2, 16:6-7) 하나님의 깊은 것도 아시고(고전2:10), 사랑하시고(롬15:30), 그리스도를 증거 하신다고 하셨습니다(요15:26).

(2)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과 동일하신 분이시기 때문에(한 본체를 이루신 성삼위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도 나타내시고 아들의 이름도 나타내십니다.

(3) 성령은 모든 것을 가르치신다고 하셨습니다. 모든 것이란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를 말합니다(요16:31).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비밀이신 그리스도를 가르치실 분은 성령뿐이십니다. 구원의 도리를 말씀합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주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결 론 : 성령은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 참 평안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평안은 우리 안에 있는 모든 두려움과 근심을 쫓고 기쁨과 소망을 줍니다. 이 같은 평안은 ㉮ 하나님과의 화평에서 옵니다. ㉯ 사죄의 은총에서 옵니다. ㉰ 하나님의 임재에서 옵니다. 이 모든 축복은 특히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에게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5장 (82-85)

◆ 밤중소리 01-28 | VIEW : 580

82. 참 포도나무와 그 가지(요한복음 15:1-6) 

83. 기도 응답의 비결(요한복음 15:7-11) 

84. 예수님의 계명(요한복음 15:12-17)

85. 세상과 그리스도인(요한복음 15:18-27)


(82) 참 포도나무와 그 가지

(요한복음 15:1-6)


서 론 : 예수님의 이 참 포도나무와 가지와의 비유는 그리스도인들의 믿음과 열매와의 관계를 심오하게 말씀하신 것으로 그 뜻이 매우 깊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비유는 마지막 만찬의 자리에서 가룟 유다가 자리를 박차고 나간 다음에 하신 말씀으로, 아버지께서 제해 버리신 가지란 곧 이 유다를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일 것이라고 해석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아 꺾어진 가지처럼 불에 던져지지 않으려면 적어도 과실을 맺는 생활을 해야 한다고 하는 사실을 깊이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1.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가 참 포도나무요”라고 하는 말씀의 바른 해석은 “내가 그 참된 그 포도나무요”란 뜻입니다. 여기서 포도나무란 생명의 과실을 맺는 생명의 나무로 하늘의 새로운 생명을 가지고 내려오신 둘째 사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고전15:47). 그러므로 인간에게 하나님의 새 생명을 공급해 줄 수 있는 나무란 “내가 참 포도나무요”라고 하신 예수님 밖에 이 세상에 없습니다(행4:12).

(1) 예수님은 구원의 역사에 있어서 아들과 아버지와의 관계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고 표현하심으로 인간의 구원을 이루심에 아들과 아버지와의 관계를 밝히셨습니다.

(2) 이 비유에 등장하는 인물이 다섯 종류로 나와 있습니다. 한 분은 참 포도나무가 되시는 예수님이요, 다른 한 분은 내 아버지라고 하신 농부이신 하나님이요, 그리고 세 번째는 열매 맺는 가지로 비유된 그리스도인들이며, 네 번째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들로 이들은 가라지들이며 마지막 존재는 열매 맺지 아니하는 가지들을 불에 던져 넣는 자들로 이 존재는 천사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2. 농부이신 하나님이 하시는 일

우리는 예수님의 이 비유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서 열매를 맺으시기를 얼마나 간절히 바라신다고 하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한 것은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롬7:4).

(1) 하나님은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이를 제해 버리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구원의 사역에 있어서 한없는 은혜를 베푸셨습니다(롬5:8). 우리는 아무런 공로 없이 의롭다하심을 얻었고 생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확실하고 분명한 사실이,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그 후의 생활에도 아무런 열매를 맺지 아니해도 된다고 하는 보증이 될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① 중생은 새로운 영적인 생활의 시작입니다. 우리가 거듭나기 이전에는 육적인 생명 안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생활이 불가능했습니다(롬8:5-8). 그러나 우리가 이제 하나님의 은혜로 영적인 새로운 생명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새로운 생명을 주신 것은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영적인 열매를 맺게 하시려는데 그 목적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② 나무와 열매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고 하셨습니다(마7:16-18). 우리가 참 포도나무가 되시는 그리스도에 속한 자라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열매인 영적인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 대하여 오래 참으십니다.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 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눅13:7). 더 두어 보았자 과실을 맺을 가망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참으로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2) 하나님은 과실을 맺는 가지에 대하여 축복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그리스도인이라고 다 똑같은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닙니다. 많이 맺는 사람도 있고 적게 맺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과실은 자신에게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자신이 받은 사명의 달란트 대로 맺게 되는 것입니다.

③ 과실은 깨끗한데서 열립니다. 여기서 깨끗하다는 말은 ‘카다리조’로 그리스도인의 의로운 생활, 도덕적인 순결함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곧 우리의 마음의 새로운 변화를 의미합니다.

④ 과실을 더 맺게 하여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맺는 작은 열매는 하나님의 더욱 풍성하신 축복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30배로, 60배로, 100배로 풍성하게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고후9:10).


결 론 : 하나님을 향한 열매는 내가 맺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빌1:6). 우리는 다만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려고 하는 거짓 없는 순종의 의지만 간결히 보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육신의 정욕으로 따라 사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고 하는 의지적인 노력이 뒤따를 때 과실을 많이 맺는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83) 기도 응답의 비결

(요한복음 15:7-11)


서 론 : 주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참 포도나무와 가지”로 비유하신 교훈은 그리스도인들의 필연적인 열매를 강조하신 점에서 우리의 신앙을 한번 뒤 돌이켜 바라볼 수 있는 경종이 되기도 하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의 승리의 비결을 나타내셨다는 점에서 이 비유의 가리키는 바 깊은 뜻을 살펴 보아야합니다. 또 한편 우리는 이 비유와 함께 그리스도인들의 놀라운 기도 응답의 약속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하신 이 말씀은 너무나도 엄청나고 놀라운 약속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이런 기도의 응답 받는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인가? 이에 대한 주님의 해답을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1. 기도응답의 두 가지 조건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하신 말씀에서 예수님은 기도 응답의 두 가지 필수적인 조건을 제시하셨습니다. 하나는 “너희가 내 안에 거하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이란 말씀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1) “너희가 내 안에 거하라”고 하셨습니다. 내 안이라고 하신 말씀은 그리스도 안이란 뜻으로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계속적으로 접목되어 있는 상태를 말씀하십니다. 나무와 가지란 원칙적으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그리스도와 우리는 언제나 하나로 연합이 되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오래 지속하고 계속하여 머무르는 영원한 연합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말씀 안에서 떠나지 않고 계속하여 머무르는 상태를 말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이 같은 생활은 열매를 맺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2) 다음에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이라고 하셨습니다. 가지가 열매를 맺으려면 그 가지를 살리고 그 가지로 열매를 맺게 하는 힘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힘은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솟구쳐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 힘이 곧 “내 말”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한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첫째로 마음이 열려져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주님이 열어 주십니다. 주님은 회개하는 자의 마음을 열어 주십니다.


둘째,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려면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마음에 간직되고 마음에 심겨집니다. 그리고 마음에서 자라나서 우리의 생활에 열매를 맺게 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말씀을 받으려면 말씀을 주시는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함이 없는 분의 말씀이 마음에 깊이 새겨질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셋째로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려면 말씀을 듣고 깨달아야 합니다. 씨 뿌리는 비유에서 예수님은 좋은 땅이란 말씀을 듣고 깨닫는 마음이라고 하셨습니다. 말씀을 듣고 깨닫기 위해서는 두 가지 요건이 따라야 합니다. 한가지는 듣는 사람에게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다른 또 한가지는 하나님의 언약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그 마음에 가득 찬 사람은 그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 드리기 때문에 그의 생활이 순종을 통하여 많은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3) 그리고 나서 주님은 그러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기도에는 제한이 없습니다. 그리고 기도의 응답에도 제한이 없습니다. “원하는 대로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이런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기도로 무엇을 구할 것이기에 우리 주님은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지” 구하라고 하셨는가? 이런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하든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게 되는 것입니다(고전10:31). 예수님은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하셨습니다.


2. 과실을 많이 맺는 자의 축복

예수님이 이 포도나무의 비유에서 우리에게 교훈 하시려고 시도하신 바는 그리스도 안에서 순종의 생활에서 오는 하나님의 무한한 축복을 알려 주시려는데 있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일은 우리의 열매라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근원적인 목적은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다만 과실을 많이 맺으면 되는 것입니다. 이 열매는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생활에서 나타납니다.

(2) 주님의 제자가 될 조건도 우리의 열매라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제자의 자리에 이르러야 합니다. 제자란 주님의 남다른 사랑을 받는 그리스도인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결 론 :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나가는 과정에서 가장 긴요하고 아름다운 일은 많은 열매를 맺는 일입니다. 이런 생활은 우리로 주님의 제자가 되게 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릴 뿐 아니라, 우리 안에 주님의 기쁨이 충만하고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이루어 주십니다.


(84) 예수님의 계명

(요한복음 15:12-17)

서 론 : 예수님은 계명이란 말씀을 자주 쓰셨습니다. 그리고 그 계명은 사랑과 결부시키신 것입니다. 우리는 구약적인 계명과 예수님이 말씀하신 계명과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에 대해서 알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려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고 하셨습니다(마5:17). 율법의 완성은 곧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사랑을 새 계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의문의 율법이 하나님의 계명이 아니심을 밝히시고 계명의 참 뜻은 오직 사랑에 있음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1. 우리가 나타내야 할 주님의 사랑

예수님은 그의 입에서 계명을 말씀하실 때에는 내 계명이란 표현으로 나타내셨습니다. 이것은 율법적인 계명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요 그 율법보다 고차원적인 영적인 뜻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1) 우리의 사랑의 푯대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이 말씀은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어야 그 분명한 뜻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랑은 예수님께서 나를 위하여 종의 모습으로 사람이 되셔서 세상에 오신 사랑입니다(빌2:5-7). 이 사랑은 주님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그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으셨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됩니다. 이 사랑이 바로 “내가 너희를 사랑한” 주님의 사랑이십니다.

(2) 다음에 이 사랑의 대상은 우리의 형제들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위대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주님의 그 사랑이 우리의 마음속에 깊이 심겨졌습니다. 우리는 그 주님의 사랑의 씨앗에서 이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이 열매는 물론 주님의 사랑을 닮은 열매입니다. 그 열매가 우리의 생활에 나타나는데 그것이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형제에 대한 사랑입니다.

2. 가장 위대한 사랑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주님은 우리들에게 사랑 중에 가장 위대한 사랑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의 뜻은 우리에게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사랑을 가져야 한다는 뜻으로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를 친구로 보시고 그의 생명을 버리신 것을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친구로써 우리를 위하여 그의 목숨을 버리셨기 때문에 그의 사랑이야말로 “이에서 더 큰사랑이 없는” 위대한 사랑을 베푸신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어떤 사람들을 그의 친구로 삼아 그의 목숨을 버리는 큰사랑을 베푸셨나?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고 하셨습니다.

(1) 예수님은 우리를 친구라고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종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 일은 종으로써가 아니라 친구로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순종은 아버지의 유업을 함께 나눌 형제로써, 나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친구로써 대하기 때문에 그 순종에 억지가 없고 즐거움이 있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우리에게 친구로서의 도리를 다 하셨습니다.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모든 구원의 비밀을 다 우리에게 낱낱이 나타내 밝히셨으며, 그 일을 친히 이루시여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3) 예수님은 우리로 그의 친구로 삼으시기 위해 나를 택하여 세우셨다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무나 주님의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이 택하여 세우심을 받은 사람만이 그의 친구의 영광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명심할 일은 주님이 택하여 세우심을 받은 주님의 친구들은 반드시 과실을 맺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과실이란 사랑을 말합니다.

(4) 예수님은 이런 친구들에게 아버지의 응답을 받게 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계명올 지키는 친구들에게 더 많은 사랑의 과실을 맺게 하시기 위해 무엇을 구하든지 다 얻게 하여 주시겠노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결 론 :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계명은 사랑이시며 그리스도인의 열매는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사랑의 열매가 받드시 열려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그의 형제를 사랑하려면 겸손해야 합니다. 형제의 죄를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자기 희생이 따라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이런 생활은 주님이 기뻐하시는 생활이요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주시는 생활이 되어 우리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무한한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85) 기도 응답의 비결

(요한복음 15:18-27)

서 론 :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에서 미움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환영을 받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세상은 어두움을 사랑하는데 그리스도인은 빛을 발산하여 어두움을 내어쫓기 때문입니다. (요3:19). 만약 그리스도인이면서 세상에서도 환영을 받고 있다면 그 사람은 어두움에 동화된 사람이지 빛을 나타내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마5:14-16).

I. 세상 것을 사랑하는 세상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요15:19).

세상이란 말은 ‘코스모스’로 이 말은 질서, 치장, 우주, 세계란 뜻을 의미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말입니다. 그러나 이 코스모스는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이 같은 아름다움은 상실되고 오히려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는 저주의 세계로 변모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이 코스모스는 죄와 어두움의 대명사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이 소망이 없는 세상에 빛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입니다. 그는 이 빛으로 어두움을 밝히셨습니다. 여기서 코스모스는 빛과 어두움이 나뉘어진 것입니다.

2. 세상이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는 이유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에서 주님의 택함을 받은 자들입니다.

(1)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미움을 받는 것은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세상에 속한 자라면 세상에서 사랑을 받을 것입니다. 세상에 속한 자란 멸망 받을 이 세상과 운명을 함께 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지혜를 가지지 아니했습니다. 세상 지혜로는 십자가의 도가 미련하게 보이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영을 가지지 아니했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영율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고전2:12).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다 세상의 영의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이 영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단의 영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로서 온 영, 골 성령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대하여 못 박힌 사람들입니다. 세상풍조와 세상 죄악과 세상의 습관을 따라 살지 아니하고 이런 생활에서 끊어졌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따르는 자가 이니요 세상을 이기는 자입니다(요일5:4).

(2) 다음에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미움을 받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주관자인 사단은 시기와 질투의 존재입니다. 그가 가장 미워하는 존재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인데 그 대상자가 바로 그리스도의 택함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하며 핍박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택하심을 받은 사람은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단은 그리스도의 택자를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로 복음을 듣지 못하게 하며 그리스도를 믿는 일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으로 확실히 믿고 우리의 입으로 확실히 고백하여 우리들이 하나님의 택자임을 분명히 나타내어 진리의 말씀을 가지고 과감히 싸워야 합니다.

(3)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미움을 받는 다른 또 하나의 이유는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입니다. 21절 말씀에서 “사람들이 내 이름을 인하여 이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이 가장 미워하는 이름이 있다면 그 이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은 이 이름을 믿고 이 이름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란 이름은 세상을 심판하는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아 영원히 멸망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은 구원을 주시는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이 세상의 임금으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자기 소유로 삼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의 백성들을 이 어둠의 권세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새로운 생명을 주심으로 구원의 은혜를 주셨기 때문에 그 이름을 힘입어 구원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미워하는 일이나 또 그의 택하신 자를 미워하는 일은 하나님 앞에 무서운 죄가 아닐 수 없습니다. 먼저 “나를 미워하는 자는 또 내 아버지를 미워하느니라”고 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미워하는 일은 하나님을 미워하는 심판을 곁들여 받게 됩니다.


결 론 :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는 그 후로도 성령을 통하여 계속 나타내셨으며 사도들이나 하나님의 종들의 입을 통하여 수도 없이 증거 되었습디다. 그러므로 불신의 죄는 그 어떤 구실로도 씻음 받을 길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미움을 받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택한 백성임을 기뻐하며, 더욱 이기는 생활을 해야합니다.


요한복음 16장 (86-89)

◆ 밤중소리 01-28 | VIEW : 576

86. 성령의 세 가지 사역(요한복음 16:1-11) 

87.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요한복음 16:12-15) 

88.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한복음 16:16-32) 

89.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한복음 16:33)


(86) 성령의 세 가지 사역

(요한복음 16:1-11)

서 론 : 예수님은 장차 복음을 위해 받을 제자들의 핍박과 고난을 말씀하시면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미리 이르시는 이유는 그 때를 당하여 기억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같은 기억은 그들이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당할 때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위로를 받고 새 힘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 떠나시는 일에 대하여 제자들은 매우 불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으나 예수님은 그의 떠나시는 실상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1. 성령과 보혜사

예수님은 성령을 보혜사란 말씀으로 나타내셨습니다. 보혜사란 말은 ‘파라크레토스’로 다른 이를 돕기 위해 불려졌다는 뜻입니다. 성령은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돕기 위해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시기 때문에 이처럼 불려진 것입니다. 그는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그는 우리로 그의 감동하심을 받아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도록 결정적인 역할을 하십니다. 그는 우리 안에서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계셔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대언자가 되시는 분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를 돕기 위하여 친히 나와 함께 하셔서 보혜사가 되어 주신다고 하는 사실은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2. 성령께서 하시는 역사

예수님은 성령이 이루실 역사에 대하여 세 가지로 밝히셨습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1) 성령은 죄에 대하여 책망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부연해서 말씀하기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죄란 ‘하마르티아’로 목표(과녁)를 맞히지 못한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씀하신 목표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는 일로, 하나님은 이 목표를 위하여 인간을 창조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는 방법은 곧 그의 말씀의 순종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순종에 대한 하나의 계율을 주셨습니다(창2:15-17).

그러나 아담은 계율을 어김으로 불순종의 자식이 되었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지 못함으로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목표물, 과녁을 맞추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새로운 순종의 계명을 주셨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그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릴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순종의 목표물, 곧 과녁을 주셨습니다. 그 과녁이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언약이십니다. 사람이 이 말씀을 순종하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드리는 하나님의 목표의 과녁을 맞추게 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그에게 자녀의 권세를 주시고 아들의 생명, 곧 영생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제 신약시대에 죄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 같은 하나님의 목표물을 맞추지 못하는 일을 가리키기 때문에 죄라 함은 나를 믿지 아니함이라고 밝히신 것입니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서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요3:l8).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보내신 후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정죄를 받는 가장 무서운 죄는 그 독생자를 영접치 아니하는 일입니다.

(2) 성령의 두 번째 사역은 의에 대하여라 하셨습니다. 10절 말씀에서 “의에 대하여라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함이요.”

① 의는 오직 그리스도에게서만이 찾을 수 있습니다. 그에게는 아담 안에서 모든 인간에게 미치는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의 원죄가 전혀 없으십니다. 그뿐 아니라 그는 그의 전 생애를 통하여 처음부터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요일2:1).

② 그리스도께서는 이 같은 자신의 완전한 의를 죽음에서 살아나심으로 세상에 나타내셨으며 그가 아버지께로 가심으로 확정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하나님 앞에 온전한 의를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의를 주시기로 하셨습니다. 이 의야 말로 영생을 얻을 수 있는 하나님의 의입니다. 성령께서는 바로 이 사실을 가지고 세상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3) 성령의 세 번째 책망은 심판에 관한 것인데 “심판에 대하여라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 임금이란 공중 권세를 잡은 사단을 말합니다. 사단의 무기는 죄와 사망입니다. 그런데 이 죄가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에 의하여 이미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결 론 : 이 같은 사단에 대한 심판은 오직 성령께서 복음을 통하여, 세상을 향하여 책망하심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성령의 책망을 듣고 권세를 상실해 버린 죄의 종의 자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 책망을 듣고 죄에서 자유 함을 얻어야 합니다. 성령은 이 세 가지 사역을 위하여 지금 역사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복음을 통하여 성령의 이 같은 사역의 그릇으로 죄인들을 주께로 인도해야 할 것입니다.


(87)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요한복음 16:12-15)

서 론 : 예수님은 성령이 오셔서 하실 사역으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는 말씀을 하시고 이 같은 사역을 이루실 성령의 인도하심에 대하여 몇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로 가셔서 보내실 성령이 오시면 그가 하실 놀라우신 구원사역에 대하여 세세히 알려 드리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기셨습니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고 하신 말씀에서 그 뜻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가운데로 인도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1. 진리로 이끄시는 성령의 인도하심

성령이 하시는 가장 위대한 역사는 인간의 구원에 있어서 죄인들을 진리 가운데로 언도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성령이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는 말씀에는 여러 가지 뜻이 함유되어 있습니다.

(1) 성령께서 진리를 증거 하신다는 뜻입니다. 진리의 증거 자는 성령이십니다. 모든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책으로 성령이 그 증거 자이십니다.

(2) 성령께서 진리를 깨닫게 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진리가 무엇이냐”는 물음은 빌라도가 죄인으로 자신의 재판 대 앞에 선 예수님께 던진 질문입니다. 예수님은 분명 그에게 진리에 대하여 증거 하셨지만 빌라도는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8:45). 진리란 곧 생명이신 예수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잔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요14:6).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요 1:17).

(3) 성령께서 진리를 믿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진리에 대한 믿음은 성령이 주십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습니다(엡2:28). 누구든지 진리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영생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믿음은 우리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순전히 성령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십니다.

(4) 성령께서 진리로 거듭나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진리로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는 역사는 성령이 하시는 사역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요3:5).

2. 장래 일을 알게 하시는 성령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장래 일을 알리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장래 일이란 “장차 올 일들”을 말합니다. 이것은 성령의 계시로써 우리들에게 나타났습니다.

(1) 장래 일이란 부활의 소망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부활이란 큰 소망임과 함께 장래에 올 일입니다. 성령은 우리들에게 끊임없이 이 부활에 대한 소망을 견고히 하도록 하십니다.

(2) 장래 일이란 천국에 관한 일을 말합니다. 우리는 성령의 계시로 말미암아 천국에 대한 뚜렷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천국에 대한 일은 오직 성령께서만이 알게 하실 수 있는 영적 계시입니다.

(3) 장래 일이란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일을 말합니다. 성령께서는 특별히 사도 요한을 통하여 종말에 관한 계시로써 ‘요한 계시록’을 주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장래 일에 대하여 기록된 말씀을 통하여 이미 완전히 계시하셨습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모든 계시는 자의로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도 스스로 말씀하신 일이 없으셨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아버지께 들은 것을 말씀하셨다고 밝히셨습니다(요8:26).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그 본질에 있어서 한 분이십니다. 세 분은 오직 한 본체를 이루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과 대화하십니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있어서 서로 의논하셨던 것처럼 인간의 구원사역에 있어서도 의논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이 같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지식으로 우리에게 장래 일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3.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성령

성령이 오시면 그가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그러면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어떤 영광을 나타내시는가? 성령은 그리스도께서 바로 영광의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십니다. 성경은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심을 증거 하시며, 그가 바로 만물의 창조주이심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령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계시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에 대하여 그리스도는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말씀이시며 그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요1:1). 그리고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라고 말씀했습니다(요1:14). 모든 만물이 그리스도에 의하여 창조되었으며 그리스도를 위하여 창조되었다고 말씀했습니다(골1:16).


결 론 : 성령이 하시는 일은 그리스도를 높이시는 일입니다. 그의 무한대한 영광을 들어내시는 일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일은 사단이 하는 일은 그리스도를 피조물의 자리에까지 내리는 일이요, 성령이 하시는 일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에까지 끝없이 높이사는 일입니다.


(88)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요한복음 16:16-32)

서 론 :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 달리셔야 할 시간이 매우 촉박해져 오고 있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아직 영적으로 어린 제자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 주시고 그 실상을 말씀해 주심으로 슬픔을 이길 수 있는 소망을 주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좀 더 구체적인 말씀으로 제자들의 마음을 위로해 주시고 자신이 고난을 당하실 때 그들로 이 말씀을 기억하여 어려움을 이기게 하시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가르치심이 필요하셨던 것입니다.

1.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예수님은 이 같은 복안을 세우시고 그 서두를 이처럼 말씀하신 것입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보리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던지신 이 말씀은 그 말의 뜻을 알려고 하는 의문을 일으키게 되었고 예수님은 이 의문을 토대로 하여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바를 나타내셨습니다.

(1)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란 말씀은 그의 고난의 죽으심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에게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이해하고 있는 제자들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겪으실 고난에 대하여 자세하게 설명해 주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들이 대망하고 믿고 있는 이스라엘의 메시야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시는 영광의 메시야였기 때문에 메시야로 믿고 있는 예수님이 그처럼 비참하게 죽으시리라고 하는 생각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처럼 참담하게 죽으실 예수님이 그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실 수 있다고 하는 믿음은 더군다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잘 깨닫지도 못하는 이 같은 말씀을 되풀이하는 이유는 이런 일을 당할 때 주님이 하신 말씀을 그들로 기억나게 하시려는 데 목적이 있으셨습니다(요16:4).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조금 있으면”이라고 하신 말씀은 시간적으로 매우 촉박한 상태를 말합니다. 32절에서 이 말씀을 다 끝맺으시기도 전에 이 때가 “벌써 왔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때가 오면 제자들은 곡하고 애통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근심할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기뻐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임으로 그들의 기뻐하는 모습을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참으로 세상에 기쁨을 가져왔습니다. 기쁨이 된 것입니다. 만약에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없으셨다면 이 세상은 절망만 있을 뿐 아무런 기쁨이 없었을 것입니다.

(2)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고 하신 말씀은 그의 부활과 계속적으로 그들과 있는 그들의 기쁨에 대하여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을 때, 22절에서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이 같은 기쁨은 오늘날까지 계속되어 오고 있으며 우리들의 마음속에도 이 기쁨이 충만합니다.

2. 내 이름으로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예수님은 이 같은 말씀 끝에 그리스도인들에게 충만한 기쁨을 선사하시는 놀라운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내 이름으로 구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고 하셨습니다.

(1) 이 말씀은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가시는 것이 제자들에게 결코 슬픔을 가져오는 일이 아님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올라가시면 하나님의 보좌우편에 앉으셔서 기도의 응답자가 되신다고 하신 뜻입니다.

(2) 이 말씀은 이제부터 우리의 기도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반드시 해야 할 근거는 바로 아들로 인하여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일에 있는 것입니다(요14:13). 아들을 공경하는 것은 곧 아버지를 공경하는 일이요, 아들을 믿는 일은 곧 아버지를 믿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들의 이름으로 구원함을 받았고 그 아들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유일하신 중보자가 되시며,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자가 없음으로 우리의 기도는 반드시 아들의 이름으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3)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하시는 주님의 두 가지 사역에 대하여 알 수 있게 됩니다.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라”고 하신 말씀에서 우리는 우리를 위한 대제사장으로서의 예수님의 중보 기도의 뜻을 알게 됩니다.


결 론 :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나를 하나님께로 온 줄 믿은 고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니라”고 말씀하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로서 온 사실을 믿는 믿음에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들 제자들은 성령의 빛에 의하여 주님이 하신 이 말씀을 어느 정도 깨닫기는 했어도 그들은 주님이 고난을 받으실 때 한결같이 스승을 배반하고 도망할 것임을 예언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항상 함께 하시기 때문에 이 모든 일이 이루어 질 것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89)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한복음 16:33)

서 론 : 예수님은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세상을 이기셨다는 말씀은 사단의 권세를 이기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사단의 권세를 이기시어 아버지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이처럼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1. 평안을 누리게 하시려는 주님

그리스도인에게는 특별한 평안이 있습니다. 이 평안은 위로부터 오는 평안으로, 이 평안의 출처는 주님이십니다(요14:27). 예수님이 제자들을 향하여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앞으로 제자들이 말할 수 없는 환난으로 인하여 어려움을 당해야 할 그 시기에 주안에서 참 평안을 얻게 하시려는 뜻에서 주신 것입니다.

(1) 주안에서의 평안은 주를 위해 환난을 당할 때 옵니다. 이 같은 평안은 장차 나타날 소망에서 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산상보훈에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5:11-12).

(2) 주안에서의 평안은 죄를 이기는 생활에서 옵니다. 죄는 그리스도인의 마음에 두려움과 불안을 심어 줍니다. 죄를 이기는 생활은 힘겹지만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참된 평안은 이 같은 생활에서만이 누릴 수 있습니다. 죄를 이기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란 두 가지 면에서 이루어집니다. 하나는 회개에서 옵니다. 다른 한 가지는 마음의 평안은 순종에서 찾아옵니다. 순종의 생활이야말로 우리가 평안을 얻을 수 있는 가장 쉬운 첩경입니다(요15:9-11).

(3) 주안에서의 이 같은 평안은 그 출처가 세 가지임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주님의 고난에서 온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기쁨과 평안의 뿌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의 고난으로 우리들의 구원의 소망을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그리스도인의 평안은 보혜사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우리들의 마음에 기쁨과 평안을 창조하시는 분은 바로 성령이십니다(요16:7). 다음 세 번째는 주님으로부터 받는 기도의 응답으로 말미암아서 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기도의 응답은 큰 기쁨과 평안을 주시는 요소가 되고 있습니다.

2.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당해야 할 환난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환난이 없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세상의 환난에서 구원하시려고 그의 독생자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이 패역한 세상의 죄 가운데서 구원하시기 위해 보내셨습니다. 세상은 예수님이 오신 이후에도 여전히 악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죄악의 권세는 강하게 모든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우리의 본향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까지는 이 세상의 환난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 피해를 피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에는 환난이 따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보다 더 많은 환난을 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처럼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 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4:12-13).

(2) 그리스도인들은 그의 가정에서도 이런 환난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고 하셨습니다(마10:34). 한 가정에 복음이 들어갔을 때 그 복음은 그 가정의 세상적인 화평은 주님이 주시는 영적인 화평이 임하기까지 깨어지고 화평을 깨는 칼이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 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고 하셨습니다(마10:35).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방법으로 이 세상의 환난을 이기시어 승리하게 된 것인가? 32절 말미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승리는 아버지께서 그와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처럼 말씀하신 이유는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께서 세상 끝날 까지 우리와 함께 계실 것이기 때문입니다(마28:20).

결 론 : 예수님은 세상을 이기신 그의 능력을 우리에게 나타내심으로 우리로 이기게 하십니다. 예수님이 보내신 성령께서는 바로 이 같은 주님의 일을 이루시기 위해 우리 안에서 역사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빌1:6). 예수님이 당하신 모든 환난은 바로 우리를 도와주시기 위한 체휼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히4:14-16).


요한복음 17장 (90-93)

◆ 밤중소리 01-28 | VIEW : 499

90. 영생은 무엇인가?(요한복음 17:1-3) 

91.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신 예수님(요한복음 17:4-8) 

92.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한복음 17:9-12) 

93.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요한복음 17:13-26) 


(90) 영생은 무엇인가?

(요한복음 17:1-3)

서 론 :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느냐? 이 문제는 인류가 있어 온 이래 많은 사람들에게 크나큰 관심을 가져 온 수수께끼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를 인간들에게 명쾌하게 풀어준 사람은 없었습니다. 다만 예수님만이 이 문제의 해답자로 성경에 등장합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영생을 가지고 그 영생을 주시려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올 외면하므로 자신들이 간절히 갈망하는 영원한 생명의 길을 스스로 거절하고 있습니다.

1. 영생은 무엇을 말하나?

우리는 성경에서 영생이란 낱말을 많이 듣습니다. 영생이란 그 말과 같이 영원한 생명을 말하며 이 생명은 죽음이 없는 생명을 의미입니다. 이 생명은 육신적인 죽음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생명입니다. 육신적인 죽음은 육에 속한 생명이지만 영생이란 육신과는 관계없이 영원히 존재하는 영적인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참 생명은 육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에 속해 있습니다. 영생은 영의 존재를 믿는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하신 말씀에서 “죽어도 살겠고”라고 하신 말씀은 영원한 부활로 다시 사는 생명을 가리키고 있으며,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신 말씀은 우리 안에서 지금 존재하고 있는 영원한 영적 생명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인간사회에는 영원한 생명이 존재치 아니합니다. 죄인은 죄 값으로 사망을 치러야 하기 때문입니다. “범죄 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고 하신 말씀은 범죄한 사람 곧 죄인의 영혼은 결코 영생을 얻지 못하고 죽는다는 뜻입니다(겔18:4). 물론 여기서 죽는다고 하신 말씀은 둘째 사망을 말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한 영원한 형벌 곧 멸망을 의미하는 말씀입니다(계20:15).

(1)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십니다. 유일(唯一)하시다 는 말은 오직 하나이신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것은 하나님의 본체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본체는 오직 하나이십니다. 그러나 그 한 본체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이루고 있습니다.

(2) 참이라고 하신 표현은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참이란 진리 혹은 진실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진실하심을 그의 말씀과 그의 언약에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오직 그의 말씀과 그의 언약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3) 영생은 유일하신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사람들은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 없으므로 하나님을 헛된 우상으로 섬기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영광을 돌리지도 아니합니다(롬1:21-23). 하나님은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을 가지기를 원하십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 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호6:6).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이 하나님을 섬길 때 그 섬기는 자체가 하나님을 욕되게 하거나 하나님 앞에 죄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지식은 하나님께 배움으로 가능합니다. 예수님은 이에 대하여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선지자의 글에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요6:45).

3. 영생은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만 아는 것으로 되지 아니합니다.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또한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안다는 말은 ‘기노스코’란 말로 이 말의 뜻은 지각한다, 깨닫는다, 인식한다, 인정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은 배워서 아는 구체적인 지식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배우지 않고는 그리스도를 알 수 없으며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는 믿음을 가질 수 없다는 뜻입니다(롬10:17).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고 하는 지식이 있어야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십자가에서 죄인들을 위한 대속의 죽으심으로 죽으셨고 죽은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부활하신 사실을 아는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의 대속의 죽으심과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그의 다시 살아나심에 대한 지식이 없는 믿음은 믿음일 수가 없습니다. 복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야 합니다. 영생은 은혜로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는 오직 믿음으로만 받을 수 있습니다.


결 론 : 아버지에 대한 지식은 아들을 통해서만이 얻을 수 있습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아버지께로 가며 아버지를 알 수 있기 때문에 아들을 아는 지식에서 영생에 대한 모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들 안에는 죄인들이 영생 얻기에 합당한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91)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신 예수님

(요한복음 17:4-8)

서 론 : 성경은 사람이 이 세상에 사는 제일 되는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는 것임을 누누이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고전10:31). 우리 예수님은 이 같은 인간 본분의 생활을 몸서 실천하심으로 그 본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1. 아버지께서 하라고 주신 일을 이루어 드렸다.

예수님은 4절에서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아오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내게 하라고 하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해 드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 예수님은 충성되고 참된 증인의 사명을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이 라오디게아 교회에 나타나신 모습을 보면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라고 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이처럼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증인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증인된 사명은 그 이름을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내야하며, 그의 말씀을 지키도록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하늘로 승천하실 때 제자들을 향하여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

(2)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심에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해 드렸습니다. 순종이 없이는 그 어떤 방법으로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순종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빌립보서 2장에는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참 순종은 고난 중에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그의 전 생애가 십자가를 지시는 고난의 길이였으며 이 모든 가운데서 전 생애를 순종하시는 일에 바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한 고난의 대열에서 빠져 나오는 신앙생활을 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릴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3)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영화롭게 해 드리려면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서는 순종의 의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가장 명백하게 알고 계셨습니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6:40). 예수님은 이 같은 아버지의 뜻을 모두 이루시기 위하여 죽기까지 복종하셨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그의 말씀에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고 말씀했습니다(엡5:17).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판단과 자기의 뜻을 이루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많은 하나님의 일군들이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노릇도 하였으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기도 하였으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도 행하였지만 그같은 그들의 주의 일이 주님의 인정을 받아 칭찬을 받기는 고사하고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이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는 선언을 들었습니다(마7:22-23).

(4)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릴 순종은 자신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해 제각기 지체로서의 사명을 주셨다고 했습니다(고전12:13-31). 자기에게 주신 분량을 넘는 사명을 이루려 한다면 시행착오가 올 것입니다.

2.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예수님은 아버지께 내가 이 세상에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께서도 자기를 영화롭게 해 주실 것을 간구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에서 몇 가지 생각할 일이 있습니다.

(1)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영화로우심을 받으셔야 할 분입니다. 예수님은 영광의 보좌 위에 계셨던 분입니다. 그런데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 스스로 그 영광을 버리시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성경에는 아들의 영광에 대하여 그는 하나님이시라고 하셨으며(요1:1) 모든 창조물의 창조주시라고 하셨으며(요1:3, 히1:2) 하나님의 본체이시며 하나님과 동등하시다고 하셨으며(빌2:6)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고 하셨습니다(히1:3).

(2) 아들의 영화는 곧 아버지의 영화이심을 밝히셨습니다.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요17:1). 이제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으셔야 할 때가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에서의 부활하심은 아들로 영광의 자리에 오르시는 일이 되시며 이로써 아들은 아직까지 이 세상에서 그가 하신 사역을 통해서 아버지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부활의 영광을 받지 못하셨다면 아들이 행하신 그 모든 일이 결코 아버지를 영화롭게 해 드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결 론 :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와 하나가된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를 본 받아 우리들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면 하나님께서도 그 아들에게 주신 영광을 우리에게도 함께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계3:21).


(92)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요한복음 17:9-12)

서 론 : 요한복음 17장은 아버지를 향한 예수님의 중보자적인 기도이십니다. 예수님의 중보자으로서의 사명은 이 땅위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이 땅위에서 기도하신 그 모습에서 지금 하늘에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시는 중보자로서의 예수님의 모습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롬8:34).

1. 중보 기도의 대상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딤전2:5). 중보란 언약관계에 적용되는 말입니다. 두 사람 사이의 언약을 확실히 증거하기 위하여 두 사람 사이를 중보하는 사역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새 언약을 맺은 사람들입니다. 이 언약은 그리스도의 피로써 이루어졌습니다(눅22:20, 마26:28, 고전11:25). 우리는 이 언약에 의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그리스도의 의를 소유하게 되었으며 그 아들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언약에는 중보자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중보자가 없이는 우리는 이 언약의 증거를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중보자가 없이는 이 언약을 지속시킬 수가 없습니다. 그뿐 아니라 중보자가 없이는 우리는 직접 하나님께로 나아갈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친히 우리와 아버지와의 중보자가 되어 주신 것입니다(히9:15).

(1) 중보기도의 대상은 오직 이 언약에 대상자입니다. 예수님이 중보기도를 하심에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저희란 언약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만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이 새 언약에 들어 있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2)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 예수님이 아버지를 향하여 중보의 기도를 드린 대상은 “내게 주신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통하여 구원의 사역을 이루게 하신 대상은 아버지의 소유된 백성인데 그들을 구원하시는 일을 아들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아버지의 것과 내 것에 대한 분명한 소유권문제를 밝히셨습니다.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구원사역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소유가 된 모든 백성이 실인즉 아버지의 소유이심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자들이기 때문입니다(요6:37).

(3)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의 구원 사역으로 말미암아 성자로서의 영광을 받으신 사실을 말합니다. 아버지는 그 아들이 아버지의 뜻을 이루실 것을 원하셨습니다. 아들은 그 아버지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영광을 받았다고 표현하셨습니다.

2.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중보기도는 더욱 간절한 마음으로 호소하셨습니다.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은 이 중보기도에서 구원받은 백성들의 보전을 간구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보전해 주시라고 하신 것입니다. 보전이란 말은 이 땅위에 살아가고 있는 동안에 하나님의 완전한 보호를 의미합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심에 내 아버지의 손에서 우리를 빼앗을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1) “우리와 같이”라고 하신 말씀은 삼위의 하나님을 지칭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삼위로 존재하시지만 그 본체는 오직 하나이십니다.

(2)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라고 하신 말씀은 그리스도안에서 한 지체를 이루는 일을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가 될 수 있는 길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서 각기 지체로 연결될 때 가능한 것입니다.

(3) 하나가 되는 일은 진리로서만 가능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를 폭 넓게 누구와도, 어떤 종교와도 결합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진리를 떠나서는 설 땅이 없습니다. 어떤 불교계의 지도자는 교회예서 목탁소리가 나오고, 절간에서 아멘 소리가 나와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이쯤 되면 하나인 것이 아니라 완전한 타락이요 멸망입니다. 진리가 아닌 것과 손을 잡으면서 그것이 하나라고 주장하는 시대가 오는데 그 시대가 바로 종말에 등장할 음녀교회 시대입니다(계17:4-5).

(4) 하나가 되는 일은 오직 사랑으로서만이 가능합니다. 사랑은 그 표준이 에수님께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용서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생활가운데 그의 사랑을 나타내는 일입니다.


결 론 :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는 일은 진리의 터전 위에 굳건히 세워진 교회를 의미합니다. 모든 불의와 타협치 아니하고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교회를 의미합니다. 패역한 세상에서 오직 그 아들의 음성만을 듣고 따라가는 교회를 의미합니다.


(93)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요한복음 17:13-26)

서 론 : 우리는 지난 시간 말씀을 통하여 요한복음 17장이 아버지를 향하신 예수님의 중보자적인 기도임을 알았으며 우리는 또한 예수님의 중보자적인 기도는 하늘에서 뿐 아니라 그의 공생애중 이 땅위에서도 하셨다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예수님의 기도에는 그리스도인들이 기뻐해야 할 이유, 우리들이 세상에서 미움을 받는 이유, 성도들이 악에 빠지지 않는 이유, 우리가 거룩함을 얻은 이유 등 기독교의 근본적인 교리문제가 자세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1. 주님의 기쁨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향하여 간구하시는 말씀은 “저희로 내 기쁨을 저희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고 하셨습니다(13). 이 말씀에서 우리는 주님이 말할 수 없는 기쁨을 가지고 계셨으며 이런 기쁨을 우리들 모두에게 가지기를 원하신다는 뜻을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과연 어떤 기쁨을 가지셨으며 우리들이 가지기를 바라시는 예수님의 기쁨은 어떤 기쁨일 것입니까?

(1) 예수님께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비록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는 일이 십자가를 지셔야 할 고난의 길이셨지만 자신의 고난으로 인하여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 드림으로 아버지의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시는 일은 주님에게 다시없는 기쁨이셨던 것입니다(마18:12-13).

(2) 예수님께는 아버지께로 가시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주어진 사명을 다 이루시고 아버지께로 가시는 기쁨은 주님께 있어서 이 세상에서 가지실수 있는 참 기쁨이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얻을 것이라고는 다 허무한 것들 뿐이요 바람을 잡으려는 헛된 것뿐입니다. 우리들에게 참된 기쁨을 주는 것이 있다면 아버지께로 갈 수 있다는 이것입니다(요14:1-3).

(3) 예수님께는 소망의 기쁨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그가 받으셔야 할 모든 고난을 참으신 일은 그의 앞에 있는 이 소망을 바라보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우편에 앉으셨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히12:2).

2. 세상이 성도들을 미워하는 이유

예수님은 세상이 우리를 환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미워한다고 하셨습니다. (1) 세상이 미워하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14).

(2) 세상이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하는 이유는 우리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두움에 속해 있지만 우리는 빛에 속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마귀에게 속해 있지만 우리는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세상풍조를 따라 살아가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갑니다. 우리는 세상과 타협하는 사람들이 아니요 세상을 책망해야 할 사람들이기 때문에 세상의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3. 세상에서 데려 가려 하심이 아니요

예수님은 우리로 세상이 미워하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가운데 악에 빠지지 않기를 간곡히 간구하셨습니다.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에서 데려가신다고 하신 말씀은 우리의 육신적인 주검을 말합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주검은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우리가 육신의 생활을 마치는 일은 주님의 데려가심을 당하는 일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성도들로 거룩한 무리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거룩은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거룩이 아닙니다. 이 거룩은 하나님의 온전한 거룩을 뜻합니다. 이 거룩함이 없이는 누구든 하나님을 뵐 수 없습니다. 이 거룩함은 인간이 그 어떤 노력이나 공로로 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심으로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라고 말씀하심으로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1)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해 진다는 뜻입니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고전1:2)라고 하신 말씀에서 밝혀진 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거룩함에 연합이 되기 때문에 온전한 거룩함을 얻은 것입니다.

(2) 이 같은 거룩함은 성령 안에서 얻는다고 했습니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고전 6:11).

(3) 그리스도인의 거룩은 하나님의 법적인 선언입니다. 실질적으로 거룩하지 못한 자들이지만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의 죄를 씻고 깨끗케 하셨고 그를 믿는 자에게 그리스도와 동일한 의를 주셨습니다.

결 론 :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거룩하게 하시려고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우리의 의와 거룩함과 하나님의 백성됨과 소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