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新約]강해/◆ 사복음서 · 사도행전 강해-1

누가복음서 13-18장 ◆ 밤중소리

영국신사77 2020. 4. 12. 17:00

    

누가복음 차례

누가복음 13장(79 ~ 85)

(79) 너희도 망하리라(누가복음 13 : 1 - 5)

(80) 어찌 땅만 버리느냐(누가복음 13 : 6 - 9)

(81)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안식일(누가복음 13 : 10 - 17)

(82)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누가복음 13 : 18 - 21)

(8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누가복음 13 : 22 - 24)

(84) 닫힌 문(누가복음 13 : 25 - 30)

(85) 예루살렘아 !(누가복음 13 : 31 - 35)


누가복음 14장(86 ~ 89)

(86) 높이는 자와 낮추는 자(누가복음 14 : 1 - 11)

(87) 하나님나라 잔치의 초청(누가복음 14 : 12 - 24)

(88) 주님의 제자가 될 자격(누가복음 14 : 25 - 35)


누가복음 15장(89 ~ 92)

(89) 잃은 양의 비유(누가복음 15 : 1 - 10)

(90) 탕자의 비유(누가복음 15 : 11 - 32)

(91) 아버지의 사랑(누가복음 15 : 20 - 24)

(92) 맏아들의 경우(누가복음 15 : 25 - 32)


누가복음 16장(93 ~ 96)

(93) 불의한 청지기의 교훈(누가복음 16 : 1 - 13)

(94) 율법시대와 은혜시대(누가복음 16 : 14 - 18)

(95) 부자와 나사로(누가복음 16 : 19 - 31)

(96) 음부와 아브라함의 품(누가복음 16 : 22 - 25)


누가복음 17장(97 ~ 101)

(97) 실족케 하는 자의 화(누가복음 17 : 1 - 4)

(98) 믿음을 더하소서(누가복음 17 : 5 - 10)

(99) 아홉은 어디 있느냐(누가복음 17 : 11 - 19)

(100) 하나님의 나라(누가복음 17 : 20 - 25)

(101) 인자의 때(누가복음 17 : 26 - 37)


누가복음 18장

(102) 기도의 두 가지 원칙(누가복음 18 : 1 - 8)

(103)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누가복음 18 : 9 - 14)

(104) 천국과 어린아이(누가복음 18 : 15 - 17)

(105) 한가지 부족한 것(누가복음 18 : 18 - 23)

(106) 부자와 하나님나라(누가복음 18 : 24 - 34)

(107) 한 소경거지의 간구(누가복음 18 : 35 -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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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3장

◆ 밤중소리 01-11 | VIEW : 505

(79) 너희도 망하리라(누가복음 13 : 1 - 5)

(80) 어찌 땅만 버리느냐(누가복음 13 : 6 - 9)

(81)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안식일(누가복음 13 : 10 - 17)

(82)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누가복음 13 : 18 - 21)

(8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누가복음 13 : 22 - 24)

(84) 닫힌 문(누가복음 13 : 25 - 30)

(85) 예루살렘아 !(누가복음 13 : 31 - 35)


(79) 너희도 망하리라

(누가복음 13 : 1 - 5)


서 론 : 사람들은 어떤 불행을 만나 어려움을 당하거나 불의의 사고로 생명을 잃거나 하였을 때 그에게 어떤 죄가 있기 때문에 그같은 일을 만났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당하는 모든 재앙은 물론 죄 값으로 오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죄는 인생에게 질병과 죽음과 저주를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일이 다른 사람에게 미쳤다고 해서 그 사람이 나보다 죄가 더 많아서라고 생각하거나, 내가 그 사람보다 외로워서 나는 안전하다고 생각한다면 이런 사고방식은 잘못된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1. 갈릴리 사람의 경우

어떤 사람 두어 명이 새로운 뉴스를 가지고 예수님께 찾아와서 고했습니다. 그것은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었다는 것입니다. 이 사건은 유대인들로서는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제물이란 바로 그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인데 그 제물에 빌라도가 죽인 사람의 피를 섞는 일은 신성 모독이요, 그 사람의 저주인 까닭입니다. 이 사건의 내용이 자세히 나오지 않아서 알 수는 없지만 아마 빌라도에 의하여 죽임을 당한 갈릴리 사람은 범죄자였음을 보여줍니다. 그 이유로는 예수님이 그 사람에 대하여 정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죽음이 저주스러웠던 것은 제물에 그의 피를 썩은 일입니다. 이 같은 사건은 물론 빌라도의 횡포이기는 하지만 그처럼 저주를 당한 갈릴리 사람의 죄가 매우 저주스러웠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예수님은 물론 그들도 죄 때문에 죽임을 당했지만 그러나 너희들이 그런 일을 당하지 않았다고 죄가 없는 줄로 아느냐고 책망하시면서 만약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그들처럼 망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그들처럼 망하리라고 하신 말씀은 그들과 똑같이 그들의 피가 제물에 섞여질 것임을 의미하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내리시는 심판은 오히려 그것보다 더 저주스럽고 두려운 것입니다.


2. 실로암 사건의 경우

주님은 이 말씀을 하시면서 최근에 일어난 다른 또 한 가지 사건을 말씀하셨는데 그 사건이란 실로암의 망대가 무너져서 여덟 사람이 죽은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견실하지 못했던 실로암의 망대가 갑작스럽게 무너졌는데 우연스레 그곳에 있었던 여덟 명의 예루살렘 사람이 죽은 일입니다. 이 사건을 들은 사람들은 아마 그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그런 재앙을 받을 만한 어떤 무서운 범죄가 있는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사건으로 죽지 않는 다른 사람들 보다 의로운 사람들이 아님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주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는가?


3. 우리가 생각해야 할 일

(1) 이런 사건은 다른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심판의 두려움을 알려주시는 하나의 경종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건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나도 죄의 길에서 돌이키지 않으면 그런 사건을 당할 사람의 예외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2) 다음에 우리는 나도 그들과 똑같은 죄인이지만 내가 그들이 당한 것과 같은 환경 아래 놓여 있지 않은 연고로 무사함을 생각하고 죄에서 돌이키고 겸손하며 두려워해야 하는 것입니다.

(3) 나도 마땅히 그들과 같은 죄에 대한 심판을 받을 사람이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특별히 보호해주시고 그같은 사건을 유예시켜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사랑이요 은혜임을 알아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어떤 사건을 바라볼 때 회개의 거울로 삼아야 합니다. 나도 죄인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80) 어찌 땅만 버리느냐

(누가복음 13 : 6 - 9)


서 론 :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무화과나무의 비유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심판이나 또는 하나님의 진노를 표시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일에 대하여 성경은 여러 곳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히6:7-8).

예수님은 우리에게 많은 과실을 맺기를 원하십니다.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고 하셨습니다(요15:8). 무화과나무의 비유의 말씀 중에 나오는 등장 인물에 대하여 우리는 무엇에 대한 비유인가에 대하여 알아야 하겠습니다. 포도원이란 이스라엘을 말하는 것으로 오늘날 교회를 비유하신 것입니다. 무화과나무는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오늘날 또한 그리스도인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나무를 심은 주인은 하나님을 말씀하고 과원 지기는 우리를 하나님 나라에까지 인도하시는 성령을 비유하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1. 열매를 찾으시는 하나님

포도원 주인이 자기 밭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은 관상용도 아니요 아무 의미 없이 심은 것도 아닙니다.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심은 것입니다. 무화과나무는 사람이 보기에 보잘것없는 존재입니다. 아름다운 면도 없고 재목감도 못됩니다. 그렇다고 꽃의 아름다움도 없습니다. 만약 무화과나무로부터 열매를 딸 수 없다면 그것은 공연히 땅만 허비할 뿐인 쓸모 없는 나무가 무화과나무인 것입니다. 새벽길에 주님이 성안으로 들어가시면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열매를 얻을까하여 가까이 가셨지만 열매를 얻지 못하시고 저주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신 것은 우리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리는 열매를 맺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후에도 옛사람 그대로 세상에 속하고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우리에게서 무엇을 바랄 것입니까?

2. 3년을 구하심

주인은 이르기를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삼 년이란 세월은 짧은 기간은 아닙니다. 혹시나 금년에는 열매를 맺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연거푸 세 번이나 해를 넘긴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인내하심을 비유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열매를 바라시지만, 그 열매를 오랜 기간을 두고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의 공의나 우리를 구원하신 그 사랑을 생각하신다면 단번에 찍어버리실 수도 있었지만 하나님은 인내하신 것입니다. 육에 속하여 항상 넘어지는 우리를 불쌍히 보시는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이 삼 년이란 기간은 무화과나무의 경우, 능히 열매를 맺을만한 충분한 기간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만약 삼 년이 지나도 열매를 맺을 수 없는 나무라면 열매를 기대하기 어려운 나무임에 틀림이 없는 것입니다. 더 이상 그 나무에 기대할 것도 바랄만한 소망도 없습니다. 주인은 과원지기에게 이르기를 “찍어 내 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고 말했습니다. 이들은 분명히 가라지들이기 때문에 뽑아버리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한 가지들이기 때문에 불살라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그 자리에 놓아두는 일은 땅만 버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하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이사야를 통하여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네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사1:12).


결론 : 과원지기는 주인에게 탄원했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위한 성령의 탄식을 비유하신 것입니다(롬8:26). 그는 이처럼 주인에게 탄원했습니다. “대답하여 가로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 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이어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두루 판다는 말은 우리의 회개를 위해 우리의 신앙생활에 간섭하시고 열매를 맺도록 역사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거름을 준다는 말은 말씀으로 양육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무화과나무의 결과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과연 그 나무가 열매를 맺어 주인의 즐거움이 되었는지, 아니면 열매를 맺지 못하므로 끝내 찍힘을 당했는지 그 결과는 우리의 상상에 맡기시고 너희는 열매를 맺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고 경종하신 말씀입니다.


(81)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안식일

(누가복음 13 : 10 - 17)

서 론 : 예수님이 바리새인들과 공생애에서 첫 번째로 충돌된 사건이 안식일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이 문제는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까지 계속하여 바리새인들과의 충돌의 쟁점이 되어 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께로서 오시지 않은 증거를 이 안식일 문제에서 찾았습니다. 성경에 대한 바르지 못한 해석이나 판단은 이처럼 무서운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바른 안식일 관을 가져야 합니다.

1. 안식일과 주일

우리는 신약시대에 와서 구약에서 지켜온 안식일이 아닌 새로운 날을 하나님을 경배하는 날로 지켜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날을 주일이라고 부르고 있으나 이날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하나의 구약의 안식일처럼 하나님을 섬기는 날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구약의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새로운 주일을 정하여 그 날에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까?

안식일의 기원은 창세기 2장에서 연유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시고 쉬신 일이 바로 이 날이시며 하나님은 이 날을 거룩하게 하시고 이 날에 복을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아담 이후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날을 거룩한 날로 하나님이 복 주시는 날로 정하고 안식일로 지켰습니다. 그리고 모세 때 와서 율법으로 규정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구약에 있는 모든 약속과 예언은 하나의 그림자요, 상징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와서야 그 모습이 마치 수건을 벗은 것처럼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7일 안식은 그 자체가 우리의 안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안식은 하늘에서 누리는 영원한 안식입니다. 이 안식이 구약에서는 가나안 안식으로 상징되었습니다.

그러나 참 안식은 7일 안식도 가나안 안식도 아닙니다. 이 안식일 문제에 대한 성경적 해답은 히브리서에 와서 분명히 밝혀주고 있습니다. “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히4:8-11).

(1) 이 말씀에서 안식일의 뜻을 찾아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통해 안식일을 주신 일은 가나안 안식을 누리게 하시려는데 그 뜻이 있었음을 말해 줍니다.

(2) 그러나 그 가나안 안식은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그들이 얻을 수 없었다고 하신 것입니다.

(3) 가나안 안식이 실현되지 못했다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안식일의 복은 아직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살아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안식이란 하나님이 그의 일을 쉬심과 같이 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율법조문에 있는 대로 안식일을 지키는데 있는 것이 아니다.

(4) 이미 하나님의 백성 중에는 이런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간 사람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너희도 그곳에 들어가기를 힘써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5) 하나님의 안식은 순종하는 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불순종하므로 광야에서 멸망 받은 이스라엘을 본받지 말고 순종하므로 약속 받은 안식을 누려야 할 것임을 경종한 것입니다.


이 말씀을 따르면 율법에 있는 안식일은 참 안식의 그림자 일뿐입니다. 히4장에는 그리스도인의 안식에 대하여 이미 그곳에 들어간 자들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영적 안식으로 거지 나사로의 비유는 이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계14:13에 있는 수고를 그치고 쉬는 안식이 바로 그것입니다. 바울이 소망한 안식도 이것이었습니다(빌1:23). 이 안식은 부활로 완성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인들의 안식의 보증이며, 구약의 안식의 실체가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연합되지 않고는 안식을 누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안식은 그의 부활로 나타났으며 우리의 안식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연합됨으로 완성되며 이때 우리의 참 안식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2. 안식일과 주일은 어떻게 지킬 것인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이제 안식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실체가 오면 그림자는 완전히 살아집니다. 교회초기에는 율법에 철저한 유대인들이 교회를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안식일과 주일에 대한 명확한 한계선을 긋지 못했습니다. 어떤 성경 구절을 보면 그리스도인들이 마치 안식일을 지킨 것처럼 비취는 곳도 여러 곳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엔 안식일이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생활습성으로 정착하고 있었으며 이런 습성을 하루아침에 없앨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초기에는 안식일에도 모이고 안식 후 첫날인 주일에도 모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려면 그 당시는 유대인들이 전도의 대상이었는데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는 안식일에 예배에 동참하여 주어진 기회에 복음을 전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점차 교리적으로 정립됨에 따라 안식일이 폐해지고 주일을 하나님을 예배하는 날로 정착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바울의 말에서 이런 안식일의 고정관념이 어떻게 깨어졌으며 주일이 정착하게 되었는가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골2:16).

(1) 주일은 육신의 일을 쉬는 날입니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날로 구별된 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들어갈 하늘에서는 육신의 일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육의 일을 쉰다는 말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우리의 생애를 위하여 힘쓰는 일을 말합니다. 이것은 결코 이웃을 위하여 선을 행하는 일을 금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한 예로 주님은 안식일이라도 자기의 소나 나귀나 마구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않느냐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너희 중에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18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고 하신 것입니다.

(2) 안식일에는 주님을 섬기는 일을 하는 날입니다. 주님이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신 것처럼 안식일에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가르치는 일을 하는 날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마22:37-40 참조). 그러므로 이웃을 사랑하는 일은 안식일처럼 주의 날인 주일에도 마땅히 해야할 일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란 구제하는 일, 또는 병을 고쳐주는 일등도 포함될 것입니다. 또 이날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날입니다. 우리는 안식일을 유대인들처럼 장로의 유전을 따라 지키는 율법주의적인 방법에서가 아니라, 주님이 말씀하신 사랑의 방법에 의하여 지켜야 할 것입니다.


결론 :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주신 이유는 이레 중 하루를 안식하라는 뜻으로 주셨으며 이것은 하나님의 안식의 한 상징으로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율법을 받기 이전, 이미 아담이 안식일을 받았는데 그때 아담은 율법에 기록한 것과 같은 안식일을 지킨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오늘날 안식교도들이 지키는 율법에 기록된 안식일의 구례대로 지키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안식일을 고집한다면 율법의 정죄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주일 안에서 율법적인 모든 저주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참 안식의 약속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82)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

(누가복음 13 : 18 - 21)


서 론 : 하나님의 나라는 여러 가지 비유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곳에서 두 가지 모습의 하나님 나라를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를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겨자씨는 복음의 생명력을 의미하신 것이요, 누룩은 복음의 번식력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만약에 복음이 생명력과 번식력이 없었다면 복음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함께 십자가에 묻혀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1. 겨자씨와 하나님 나라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는 복음이 전파됨으로 이 땅에 형성되는 교회를 의미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마치 겨자씨와 같아서 적은 씨앗이 자라나 큰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가 깃든다고 하셨습니다.

겨자씨는 복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내신 말입니다. 첫째로 복음은 큰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님을 가르쳐 주십니다. 겨자씨는 모든 씨앗 중에도 가장 적은 씨앗입니다. 이 씨앗은 눈에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적으며 눈으로 보려고 코밑에 갖다 놓으면 코에서 나오는 숨으로 인하여 날아가 버릴 정도로 가벼운 씨앗입니다. 복음은 마치 이 겨자씨와 같은 것으로 사람들이 보기에 심히 적은 존재처럼 보여서 문제시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생명을 가볍게 보는 것입니다.

이 복음은 너무나도 적어서 아무에게나 짓밟힘을 당해왔습니다. 많은 사람이 사자 굴속에 집어넣음을 당했으며 많은 사람이 칼이나 톰에 찔리고 돌에 맞아 말없이 힘없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겨자씨 같은 복음에는 미미한 것처럼 보이지만 생명력이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겨자씨처럼 작은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그 적은 생명력은 오늘날 온 세계를 하나의 거대한 겨자 나무로 만드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나무에서 오늘날 얼마나 많은 인류가 영적 안식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까?

한국에 처음에 들어온 복음은 마치 하나의 겨자씨였습니다. 누가 이 씨앗이 오늘날 한국을 복음의 대국으로 만들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예루살렘의 마가의 다락방에 내려진 성령의 불은 120문도의 적은 겨자씨에 의하여 온 세계에 복음의 불을 붙여 놓은 것입니다.

이 겨자씨인 복음은 처음에 우리에게 큰 씨앗으로 심겨지는 것이 아닙니다. 작은 겨자씨로 심겨집니다. 구원의 확신도 없고 진리도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가운데 우리의 신앙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씨앗은 우리의 심령에서 생명력을 가지고 자라납니다. 그 결과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고 우리의 인생관을 새롭게 하고 우리의 생활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겨자씨는 바로 하늘의 생명을 말합니다. 우리 주님이 가지고 오신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 생명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으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씨앗은 위대한 하나님의 교회를 이루었습니다. 겨자 나무로 성장한 교회는 많은 피곤에 지친 심령을 포근히 안아 주는 것입니다. 주님은 인류를 이 겨자나무에 쉬게 하시려고 이처럼 초청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2. 누룩과 하나님 나라

' 그러면 누룩과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상관 관계로 말씀하신 비유입니까? 누룩이란 대개 좋지 않은 부패물이기 때문에 복음의 비유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나오는 경우는 다만 복음이 말할 수 없는 능력으로 번식시키는 데 그 번식시키는 모습이 마치 누룩과 같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라고 생각하면 별로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누룩의 번식력은 가루 서말 속에 넣은 적은 것으로 그 서말 전부 부풀게 하는 것입니다. 복음의 번식력은 누룩과 같은 것입니다.

이 적은 누룩이 한번 우리의 마음에 들어오면 그 사람은 이 누룩의 능력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사도 바울 같이 복음의 대적 자도 이 누룩이 그의 마음에 떨어지자 그의 전 인격이 복음화 되었습니다. 뿐 아니라 이 복음의 누룩이 한 가정에 들어오면 순식간에 그 집안이 누룩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복음화 된다는 말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행16:31). 이 말씀처럼 복음을 받아드린 빌립보 감옥의 한 사람의 간수로 말미암아 그의 온 집이 예수를 영접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결론 : 이 생명의 씨앗을 우리는 가지고 있습니다. 이 번식의 누룩을 우리는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이 신비스러운 겨자씨에 의하여 성장하고 반드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심령은 이 누룩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꽉 차게 되고 그 누룩의 번식력은 우리의 가정과 이 사회를 복음화 시키는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 적은 겨자씨가 여러분의 그 적은 누룩이 이처럼 위대한 복음의 능력을 나타낸다는 사실을 알고 그리스도인에게 맡겨진 사명을 이룰 수 있기 바랍니다.


(8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누가복음 13 : 22 - 24)

서 론 : 구원의 문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심각한 문제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이 말씀하시는 가운데서 구원의 핵심을 알지 못했습니다. 막연히 어렵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마 구원에 이르는 사람은 적은 무리가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이 문제를 알아보기 위하여 주님께 질문하게 된 것입니다. “주여, 구원을 얻는 이가 적으니이까.” 이 질문에 주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우리는 이 말씀에서 세 가지 사실에 대하여 알게 되는 것입니다. 첫째로 구원을 얻는 무리의 수효는 우리에게 알려주지 아니하셨다는 것과 다음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하신 것과 들어가기를 구해도 못하는 자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1. 믿음의 두 형태

우리는 구원이 다만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얻는 하나님의 은혜임을 의심치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이 문제인 것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선물인데 이 선물은 성령께서 주십니다. 성령이 임재하심으로 비로소 믿음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은 바로 하나님의 생명이기 때문에 이 하나님의 생명을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변화라고 하는 과정이 따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이는 믿음을 가졌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스스로의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인정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1)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이 행함의 열매는 평생을 통하여 변화되어 가는 모습을 말합니다. 언제까지 가도 행함이 따르지 않으면 죽은 믿음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2)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주님께 대한 사랑이 없는 증거입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하셨습니다.

(3) 열매가 없는 믿음은 생명이 없는 증거입니다. 주님은 참 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인데 가지가 그 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열매를 맺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4)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는 믿음은 참 믿음이 아닙니다. 진실한 신앙고백이 없는 믿음은 가짜입니다. 진실이 없는 믿음인 것입니다. 이 같은 믿음은 가라지들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아닙니다.


2.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여기서 좁은 문이란 말이 나옵니다. 주님은 어찌하여 구원에 이르는 문을 좁은 문이라고 하셨습니까?

(1) 이 문은 구원의 문이요 천국의 문인데 이 문이 좁은 문으로 비유된 것은 첫째로 죄를 벗어버려야 들어가는 문이기 때문입니다. 죄를 짊어지고는 이 문을 통과할 수 없으므로 좁은 문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죄를 사랑함으로 좀처럼 죄를 벗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이문의 통과가 어려운 것입니다.

(2) 다음에 이문은 소망을 바라보아야 통과하는 문이기 때문에 좁은 문입니다. 이 소망은 눈에 보이는 소망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소망을 찾는데 이런 사람에게는 좁은 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3) 이 문이 좁은 이유는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이 없이는 끝까지 가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게는 좁은 문인 것입니다.

(4) 다음에 이 문은 순종으로만이 통과되는 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순종 없이 믿으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같은 사람에게는 좁은 문인 것입니다.


3. 들어가기를 구해도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좀 이상한 말 같지만 들어가기를 구하는 사람 중에도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많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왜입니까? 구하는 태도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1) 재물과 함께 구하기 때문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재물이냐, 하나님이냐? 둘 중에 한 가지 밖에 소유할 수 없는 것입니다.

(2) 넓은 문으로 찾아가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생각으로는 하나님을 섬길 수 없습니다. 육신을 따르는 생각을 하면서 동시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바라는 사람은 들어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3) 잘못된 진리에 미혹된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내가 곧 진리”라고 하셨습니다. 진리가 아니고서는 구원에 이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모든 이단자들, 모든 미혹 받은 자들은 그들이 원해도 진리를 소유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들어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교회에는 이런 사람이 많다고 하셨습니다.


결론 : 주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하셨습니다. 힘쓰라는 말은 세 가지 뜻을 나타냅니다. 믿음에 굳게 서 있으라는 뜻입니다. 진리를 굳게 잡으라는 뜻입니다. 순종의 열매를 맺으라는 말씀입니다. 나는 지금 과연 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는 자인가? 내가 걸어가고 있는 천국 가는 길이 어떤 길인가에 대하여 살펴보는 지혜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84) 닫힌 문

(누가복음 13 : 25 - 30)

서 론 :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말씀하시고 들어가기를 구해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고 하신 말씀에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경종을 하신 것입니다. 집주인이 문을 한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열어주소서 하는 말이 나옵니다. 이 문은 좁은 문을 가리킵니다. 좁은 문이란 곧 구원의 문이며 천국의 문을 말합니다. 이 문은 언제나 열려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인가 닫힐 날이 오는 것입니다. 이 날은 예고하여 이르는 것이 아니라 도적같이 갑작스럽게 온다고 하셨으며 임신한 여인에게 그 해산이 갑자기 임함같이 온다고 하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평소에 이문을 통과하지 않으면 한번 닫힌 후에는 절대로 들어갈 수 없음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준비하지 못한 자들이 두드려야할 문이 성경에는 여러 개가 있습니다. 그 중에 세 가지 문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보호처의 문

환난 날에는 예비하지 못한 처녀들이 밖에서 두드리는 문이 있습니다. 이문이 보호처의 문입니다. 보호처란 7년 대 환난 기간 중 후 삼년 반의 대 환난에서 보호를 받는 하나님의 예비처를 말합니다(계12:6). 만약 이곳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무서운 환난에 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는 이때 문을 두드릴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시기가 늦은 것입니다. 환난이 다 끝날 때까지 그 문이 열리지 않을 것입니다. 이문에는 지팡이 같은 갈대로 측량하는 측량에 합격해야 통과하는 것입니다. 이 측량은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한다고 한 것입니다. 이 자는 말씀의 자요 진리의 잣대입니다. 이 자에 불합격한 자들은 환난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누가 불합격자냐? 바깥마당에 속한 자라고 했습니다.(외식하는 자, 세상에 속한 자) 불합격자는 마흔 두 달간 적그리스도에 의하여 짓밟힘을 당하는 것입니다.


2. 공중휴거의 문

다른 또 하나의 문은 공중 휴거의 문입니다. 마지막 환난 끝에 가서 이 땅위에는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이 내려지게 될 것입니다. 그 심판은 일곱 대접 심판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이 대접심판은 인류의 최후의 심판입니다. 이 심판에서 구원받기 위해서는 공중으로 휴거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재앙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모든 성도들을 하늘로 끌어올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공중 휴거 사건입니다. 그러나 이 휴거에서 떨어지는 무리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이마에 짐승의 표 666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닫혀진 문밖에서 적그리스도의 혹독한 통치를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대 환난 중에서 죽임을 당하던가 아니면 마지막 하나님의 심판의 표적이 될 것입니다.


3. 천년왕국의 문

그리스도인들은 천년왕국의 축복의 문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문은 언제나 곧 닫혀질 문입니다. 이곳은 어린양의 생명 책에 기록된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곳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들은 일곱째 대접으로 내리는 재앙으로 불 가운데서 멸망 받게 되는 것입니다.


4. 열어주소서

열어달라고 말하는 그들은 이미 문이 닫힌 후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들은 주님을 향하여 주여 열어주소서 했습니다. 그는 사뭇 자기는 주님을 잘 아는데 억울하게 왜 문이 벌써 닫혔느냐는 어투인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주님의 선언을 들어봅시다.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주님은 모른다고 하신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행악하는 자들이란 책망을 듣게 된 것입니다. 이들은 자기들이 주님을 섬기고 따른 일에 대하여 말했습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먹고 마시는 일을 했을 뿐입니다.

이 먹고 마신다는 말은 좋은 일이 아닙니다. 눅 12:45에 주인이 더디 오리라고 한 악한 종들이 먹고 마시며 취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주님을 위하여 사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아니라, 세상에 속한 생활을 말합니다. 다음에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길거리에서 가르침을 받은 것뿐입니다. 그들은 성전과 재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던 자들이 아니요 성전 마당만 밟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이 친숙한 것처럼 보였지만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전혀 알 수 없으셨습니다. 주님은 당신을 그 마음에 영접한 사람 외에는 아실 수가 없으십니다.


결론 : 이들은 결국 닫혀진 문밖에서 슬피 울 수밖에 없겠지만 이 잔치에 들어가기 위하여 예비한 종들은 그곳에 들어가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순서적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교회의 직위를 내세우지만, 그것이 상관이 없습니다. 나중 들어온 사람이 먼저 그곳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은 연유를 말하지만 그것도 상관이 없습니다.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면 그는 그 누구보다도 먼저 들어가는 곳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85) 예루살렘아 !

(누가복음 13 : 31 - 35)

서 론 : 우리는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하시는 탄식 중에서 주님의 애타하시는 심정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비록 멸망 받을 사람에게까지 그 인자하심이 나타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죄인의 회개를 위하여 하루가 천년처럼 기다리시며, 99명의 의인보다 한 사람의 죄인이 회개하여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을 기뻐하시는 사랑의 소유자이시기 때문입니다. 비록 당신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일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지만 주님은 그들의 최종적인 운명을 생각하실 때 깊은 탄식으로 슬퍼하셨던 것입니다.


1. 헤롯의 간계

주님 곁에 있었던 어떤 바리새인이 주님께 나아와서 말씀하기를 헤롯이 당신을 죽이려 하니 이곳을 떠나라고 권면해 주었습니다. 주님을 죽이려는 음모는 이곳 저곳에서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들대로, 사두개인들도 그들대로, 그리고 제사장도 역시 그들대로, 헤롯까지 주님을 죽일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헤롯이 예수님을 죽이려는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은 그는 예수님을 세례요한의 부활로 생각한 것입니다. 죽은 세례요한이 살아났다고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공연히 피해망상증에 걸린 것입니다. 그리고 한편 헤롯은 자신의 왕위의 확고한 유지를 위해서는 유대인의 대단한 환심을 사고 있는 예수를 죽여야 하겠다는 피해 의식을 느낀 것입니다. 이 같은 바리새인들의 말에 대하여 주님은 아직 자신이 죽을 때가 이르지 아니하셨음을 말씀하시고 자신이 죽을 때가 되면 예루살렘으로 갈 것임을 밝히신 것입니다.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 지리라 고 하신 말씀은 시간적인 일자를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말씀에도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하리니 라고 하신 말씀에서 모레라고 표현하신 것은 제 삼일인데 이때는 완전하여 지리라고 하신 삼일에도 갈 길을 가시는 것으로 나타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의 뜻은 오늘 그리고 내일과 또한 그 다음날도 하나님의 일을 하시다가 때가 이르면 고난을 당하실 것이라고 하는 의미로 풀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주님은 자신이 얼마 후에 예루살렘에서 고난을 당하셔야 할 일을 생각하시고 그들이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므로 받을 하나님의 심판을 슬퍼하시고 그들이 고대했던 메시야를 그들은 결국 인류의 종말, 주님이 영광의 재림 주로 오실 때에도 바라볼 것이라고 탄식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선지자들에 대하여 오히려 돌로 쳐죽이는 무서운 죄를 범해왔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치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시려고 힘쓰셨지만, 결국 그들은 이 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스스로 거역하고 하나님 품안으로 돌아오기를 원치 아니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마지막으로 그들에게 보내신 이들까지 십자가에서 죽이는 무서운 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그 예언대로 이루어져 70년에 로마의 디도에 의하여 예루살렘 성이 황폐되었고 그들 민족이 버린바 되어 2천년에 이르기까지 어려움을 겪은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언제 십자가에 못박은 그들의 메시야를 만날 것인가?

주님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라고 하셨습니다. 이때는 주님의 재림시기를 나타내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이 대망 하는 메시야를 주님이 재림하시기까지는 바라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슥 13장에 예언된 것처럼, 재림하시는 예수를 바라보고 그들이 대망 하였던 메시야가 바로 그들이 십자가에 찌른 목수 요셉의 아들이었음을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 : 하나님의 예언은 반드시 성취됩니다. 바울은 롬 11장에서 이스라엘의 회개 시기를 밝히고 있습니다.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번 마음이 불신으로 완악해 지면 이토록 회개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는 늘 회개하기를 더디 하지 말고 우리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며 믿음에서 떨어지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누가복음 14장

◆ 밤중소리 01-11 | VIEW : 623

(86) 높이는 자와 낮추는 자(누가복음 14 : 1 - 11)

(87) 하나님나라 잔치의 초청(누가복음 14 : 12 - 24)

(88) 주님의 제자가 될 자격(누가복음 14 : 25 - 35)

(86) 높이는 자와 낮추는 자


(누가복음 14 : 1 - 11)

서 론 :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한 두령 집으로 들어가셔서 떡을 잡수셨다고 했습니다. 아마 바리새인인 이 사람이 떡을 대접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초대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 이유는 예수님의 동정을 살피면서 어떤 결정적인 고소 거리를 찾고자 하는데 있었을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주님은 어느 곳이건 어떤 장소이건 구애되심이 없이 가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것은 누구에게든지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1. 안식일에 관한 바른 관념을 알리심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대하여 잘못된 관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이 요구하는 그 이상의 안식일의 요구 조항을 장로의 유전이라 하여 만들어 놓았던 것입니다. 그들의 안식일 관념이 이상했던 일은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는 주님의 일에 일제히 반기를 쳐들고 나온 사실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율법에는 절대로 안식일에 병을 고치면 안 된다는 규정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같은 잘못을 알려주시기 위하여 주위에 있는 율법사들과 바리새인의 무리들을 보고 주님 앞에 서 있는 고창병이 든 한 사람을 세워놓고는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그들이 합당치 않다고 말하면 예수님은 그들에게 물어보셔야 할 일이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이 물음에 대하여 누구하나 분명한 답변을 못했습니다. 그것도 그런 것이 합당치 않다고 하는 근거를 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잠잠하자 주님은 그들이 답변했을 때 들려주시려고 하신 한가지, 그들이 안식일에 행하고 있는 사실에 대하여 반문하신 것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누가 아들이나 소나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이에 대하여 대답을 못한 것은 주님의 말씀이 타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주님을 향하여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일이 율법을 지키지 않는 일이라고 하는 그들의 비난이 얼마나 큰 모순임을 그들로 스스로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안식일을 사람에게 주신 목적은 사람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는 일은 반드시 사람을 위하는 일이 되는 것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해로운 방향으로 이끄시고 사람에게 고통을 주시려는 의도로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안식일은 우리를 하나님의 안식에 동참시키시려는 축복이기 때문에 이날에 이웃에게 선한 일을 하는 일은 결코 안식을 범하는 일일 수 없습니다. 일을 금했다고 해서 자기 아들이 우물에 빠진 것을 그대로 두었다가 죽인다면 이런 처사야말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병자를 고쳐주는 논리도 이와 똑같은 것입니다. 수혈을 하지 않으면 죽을 생명을 눈앞에 두고 율법에서 피를 먹으면 안 된다는 규례에 얽매어 수혈을 거부하여 그 아들을 죽게 했다면 이런 일이 어떻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릴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2. 높은 자와 낮은 자

주님은 아마 이 바리새인의 집에 주님과 함께 떡 먹을 사람들을 많이 청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주인의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제각기 상좌로 앉기를 바라는 모습을 보시고 그들의 교만과 높임을 받으려고 하는 공명심에 대하여 교훈해 주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다른 사람의 청함을 받았을 때 결코 높은 자리에 앉기를 바라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만약 그 자리에 더 높은 사람이 들어왔을 때 그 사람은 그 자리에서 결국 아랫자리로 밀려날 것이며 그렇게 되면 그는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자신이 맨 뒷좌석, 말석에 앉으면 나중에 주인이 그를 불러 더 높은 자리에 올린다면 그는 그 많은 무리 가운데서 영광을 얻을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자기를 낮춘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먼저 하나님께 겸손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며 높여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낮추라는 뜻입니다. 이 낮아짐은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찢는 회개, 통회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심령에 통회하는 자와 함께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높이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높이면 하나님은 우리를 높여 주십니다. 우리는 남을 나보다 낫게 여겨 높여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나를 높여 주는 것입니다.


결론 :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를 높이는 일에 관심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 겸손하고 하나님을 높이며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길 때 하나님은 나를 높여주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께 높임을 받는 성도가 되기를 힘씁시다.


(87) 하나님나라 잔치의 초청

(누가복음 14 : 12 - 24)

서 론 : 예수님은 우리의 신앙생활의 지침을 장래 우리에게 나타날 소망에 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현재에 갚음을 바라고 선행이나 어떤 행동을 한다면 안 된다는 데 대하여 교훈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에 이어 하나님 나라에서 이루어질 잔치에 대하여 말씀하심으로 잔치에 청한 자와 잔치에 합당한 자가 누구인가에 대하여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1. 상급이 약속된 초청

예수님을 잔치에 초청한 바리새인 중, 한 두령은 아마 그 잔치에 예수님을 비롯하여 이름 있는 명사급 인사들을 초청한 모양입니다. 주님은 그에게 이르시기를 “네게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갚음을 받는 잔치의 초청은 하나님 나라의 상급과는 관계가 없다는 것을 밝히신 것입니다. 상대적으로 보응 받는 선행에 관심을 두지 말고 갚음이 없는 선행에 힘쓰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반드시 그렇게 하라는 뜻으로 하신 것은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이웃이나 친척이나 성도들끼리의 사랑의 교통이 이루어 질 수가 없을 것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우리 이웃에 있는 가난한 형제에 대한 사랑을 잊지 말라는 것과 가난한 사람을 돕는 일에 힘쓰라는 뜻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 고로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이 말씀을 하신 주님의 참뜻은 잔치에 국한된 의미로 하신 것이 아니라, 갚을 것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이 복되다고 하는 말씀으로 들려주신 것입니다. 이 같은 복에 대하여는 성경 여러 곳에서 약속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잠19:17).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상급이나 축복에 대하여 조급한 마음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이 잔치의 초청 자는 의인의 부활 시에 갚음을 받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축복과 상급에 기대를 걸었던 것입니다. 이 같은 구제는 또한 은밀한 선행임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은밀하다는 말은 자기가 한 선행에 대해 나팔을 불어 선전하지 않는 일을 말합니다. 마 25장에서 주린 이에게 먹을 것을 주고 벗은 자에게 입을 것을 주고 병들었을 때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 찾아가 본 일에 대하여 이 지극히 적은이에게 한 일이 곧 주님께 한 일임을 말씀하셨습니다(마25:34-40). 이들은 갚음을 바라지 않고 형제들을 도와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부활 시에 받는 상급에 소망을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 나라 잔치의 초청

주님은 이 같은 말씀을 하신 후, 어떤 사람이 베푼 큰 잔치에 대한 비유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복음을 배척함으로 그들에게 돌아갈 구원이 이방인에게 돌아가는 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명확하게 나타내셨습니다. 이 잔치는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말씀하신 것으로, 복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구원을 베푸시는 잔치로서 교회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란 하나님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준비하시고 큰 잔치를 배설하시고 많은 사람을 청하셨던 것입니다. 모든 것을 준비하신 일은 하나님이 죄인의 구원을 위하여 이루어 놓으신 것으로 그의 독생자를 보내시고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심으로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신 일을 의미합니다.

이 잔치에 초청한 사람은 많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 당시엔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켰지만 오늘날에는 모든 인류들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들 초청 받은 자의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다 일치하게 이 잔치의 초청을 사양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복음을 거부하는 유대인들의 모습을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그들이 핑계하는 이유가 나옵니다. 한 사람은 밭을 샀다고 했습니다. 한 사람은 소를 샀다고 했습니다. 한 사람은 장가를 들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육신의 일 때문에 하나님을 섬길 시간이 없다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 주님의 말씀은 마24장에 있는 노아 홍수시대의 사람들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고 하셨습니다(마24:37-39).


결론 : 주인은 이들의 이 같은 핑계에 노하셨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말할 수 없는 큰복을 주시려는 일로 초청하셨는데 이를 거절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일입니다. 결국은 이들은 복음에 합당치 않기 때문에 버림을 당하고 사거리에 나가서 강권하여 병신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와서 잔치 자리를 채운 것입니다. 이들은 이방인들을 말하며, 세상에서 버림당할 수밖에 없는 미련하고,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 시에 받을 하늘의 면류관을 바라보고 꾸준히 선행을 해야합니다. 낙심치 않으면 때가 이르는데 그때 보상을 받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복음에 합당한 자가 되어 열매 맺는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열매 맺는 백성이 차지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88) 주님의 제자가 될 자격

(누가복음 14 : 25 - 35)

서 론 :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일은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 영광과 함께 그 책임도 무겁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면 제자가 된다고 해도 그 사명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은 제자의 영광만을 바라보고 그것을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 생존 당시에도 제자들의 수효는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 제자들이 어려움을 당했을 때는 다 스승을 배반했습니다.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요6:66). 12명의 제자 중에도 갸롯 유다가 주님을 배신하는 자리에 떨어졌습니다. 제자란 말은 Μανθανω(만 다노)라고 하는 헬라어의 동사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이 말에서 Μαθητής(마 테테스)란 단어와 Μαθητωύω(마 테튜오)란 단어가 파생되었는데 전자는 다른 사람의 가르침을 따른다는 뜻이고, 후자는 가르치다. 훈계하다의 뜻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리고 제자란 말은 헬라어 원어의 내용 중에는 반드시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는 의미가 내포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선택받지 못한 무리 가운데도 제자란 이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은 참 제자가 아닙니다.

1. 제자가 될 자의 각오

이곳에서 주님이 제자라고 하신 말씀은 주님이 불러서 친히 세우심으로 제자의 사명을 가진 사람을 가리킨 것이 아니라, 스스로 주님의 제자가 되려고 하는 사람들의 자세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의 선택은 하나님께 있기 때문에 일단 선택 받은 사람이건 안한 사람이건 결심은 자기 스스로 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가 될 자의 각오는 두 가지로 나와 있습니다.

(1) 육신 적인 혈연 관계를 초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미워한다는 말은 주님보다 더 사랑한다는 말의 반대되는 표현입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은 혈연적인 관계로 인정이나 사랑에 연연해서 주님의 일을 하지 못한 자에게는 합당치 않다는 뜻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일에는 자기 생명까지라도 버릴 만한 각오가 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밝히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주님을 따르는 일에 앞서서 먼저 자기 부친을 장사하게 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로 먼저 가족과 작별하게 해달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한결 같이 그들의 제자가 되려는 자세가 바르지 못하였기 때문에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눅9:59-62). 그리스도인들이 부모나 처자나 형제를 사랑해야 하는 일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들 때문에 주님을 위하여 일해야 할 일에 방해를 받거나 지장을 초래한다면 그런 자세로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2)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제자가 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자기 십자가란 주님의 일을 하는데 따르는 자기 일신상의 고통이나 시련을 가르칩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그의 고난에 동참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와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처럼 말했습니다.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 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4:13).

제자가 되려는 사람이 영광만을 바라본다면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와 함께 고난에 동참할 수 있는 사람이 제자가 될 수 있으며 이런 제자들만이 주님이 영광 중에 나타나실 때 그의 영광에 동참할 수 있는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땅위에서 영광을 누리려는 자는 갸롯 유다처럼 되어 버리고 맙니다.

3. 망대의 비유

주님은 제자가 되려는 자가 그 자세와 결심을 단단히 가져야 할 일에 대하여 두 가지 비유로서 말씀하셨습니다. 망대를 쌓는 비유에서 망대를 세우고자 할 때에는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 족한지 아니한지를 잘 분별해서 예산을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려는 자는 자신의 믿음의 분량과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의 깊이와 주님을 향한 진실함을 스스로 시험하고 측정하고 확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초만 쌓고 이루지 못하는 공사처럼 제자가 된 후에 도중 하차하거나 그 사명을 이루지 못하고 타락했을 때 얼마나 부끄럽겠느냐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의 비유는 싸움을 작정하고 전장에 나갈 때 승산의 자신이 없이 나간다면 패배할 것이 뻔하기 때문에 차라리 화친하여 화평을 기하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제자로서의 사명을 감당치 못할 바에는 차라리 일반 성도로서 주님을 섬기는 일이 더 나은 방법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말씀이 있습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고 했습니다(약3:1).


결론 : 소금은 좋은 것입니다. 제자의 이름은 참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러나 소금이 맛을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처럼 제자 된 자가 소금의 맛을 잃어버린다면 그 같은 제자는 땅에도 거름에도 쓸데없어 내어버린바 되는 것입니다. 직분을 맡은 자는 소금처럼 짠맛을 내야 합니다. 자기 희생과 주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으로 충성합시다.


누가복음 15장

◆ 밤중소리 01-11 | VIEW : 429

(89) 잃은 양의 비유(누가복음 15 : 1 - 10)

(90) 탕자의 비유(누가복음 15 : 11 - 32)

(91) 아버지의 사랑(누가복음 15 : 20 - 24)

(92) 맏아들의 경우(누가복음 15 : 25 - 32)


(89) 잃은 양의 비유

(누가복음 15 : 1 - 10)

서 론 : 예수님의 주변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제사장, 사두개인들, 그리고 세리와 죄인들입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들을 차별치 않으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을 대하셨던 것처럼 세리들이나 죄인들을 대하셨습니다. 이런 주님의 태도에 원망하며 비방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 대하여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먹는다”고 불평을 했던 것입니다.

1.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

예수님은 이들에 대하여 잃은 양의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양 백 마리를 소유한 사람이 그 중에 한 마리를 잃어버렸을 때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지 않겠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목자에게 양은 다 소중합니다. 잃은 한 마리의 양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이 목자의 심정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 잃은 양의 비유는 무엇을 비유하고 있는가에 대하여 알아보아야 합니다. 여기에서 목자가 거느리고 있었던 양 백 마리는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을 가리킨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잃은 양은 세리나 죄인을 가리킨 것도 아닙니다. 양 백 마리는 하나님의 소유된 양으로서 하나님께서 피로 값 주고 사신 그의 백성들을 가리킨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백 마리 중에 한 마리라도 잃어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한 마리, 한 마리가 그토록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마리를 잃었다는 말은 두 가지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아직 양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지 않은 양들입니다. 이들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그 울안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님으로 믿지 아니하는 도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요10:26~27).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예수님은 잃은 양을 찾으러 오신 분이십니다. 이 잃은 양을 찾는 운동이 곧 전도가 되는 것입니다.

다음에 이 잃은 양은 울 밖으로 나간 양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목자를 따르는 생활을 하는 중에 목자를 잃어버렸습니다. 어떤 사람은 시험을 만나 잃어버립니다. 어떤 사람은 혹은 돈에 미혹을 받고, 혹은 우는 사자처럼 찾는 마귀의 함정에 빠지고, 혹은 생활의 염려나 이단의 유혹에 빠져 길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목자 되신 주님은 이들 잃은 양떼들을 결코 포기하시지 않으십니다. 목자이신 주님께는 그들의 존재가 너무나도 소중합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나는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49:15). 이 말씀은 잃은 양에 대한 목자이신 주님의 심정을 표현하신 말씀입니다.

2. 죄인 하나로 말미암은 하늘의 기쁨

잃은 양을 찾은 기쁨이 얼마나 큰 하나님의 기쁨이 되시는가에 대하여 주님은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목자가 잃어버린 양을 찾았을 때 즐거워하며 어깨에 메고 돌아와 잔치를 벌릴 정도로 기쁜 것처럼 잃은 양을 찾는 주님의 심정이 그러하시다 는 것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회개할 것이 없는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은 이미 목자의 울안으로 들어온 양들을 말합니다. 이 비유는 마치 많은 자식을 거느린 아버지가 그 중에 한 아들을 잃어버렸을 때 그 애타하는 심정은 자식이 많다고 위로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잃은 아들을 찾았을 때의 기쁨은 집에 있는 여러 자식으로 인한 기쁨보다 더한 것입니다.

주님은 잃은 양의 경우를 열 드라크마를 소유한 어느 한 여인이 그 잃은 한 드라크마를 찾는 모습과 찾은 후의 기쁨으로 비유하심으로 죄인 하나의 회개함이 하나님께 얼마나 큰 기쁨이 되는가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비유에서 몇 가지 교훈 삼을 것이 있습니다.

(1) 이 세상에는 어느 곳에건 잃은 양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잃은 양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2) 그리고 이 잃은 양의 존재가 하나님께서는 울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나에게 주시는 사랑에 결코 못하지 않으신 사랑을 가지고 계심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3) 다음에 우리는 이 여인의 경우처럼 잃은 양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같은 직분을 주셨다고 말씀했습니다.

결론 : 한 드라크마를 잃은 한 여인은 잃은 동전을 찾는데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부지런히 찾았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잃은 양을 찾는 우리의 태도를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등불을 켜야 합니다. 이 등불은 복음의 등불입니다. 이 등불은 잃은 양을 부르는 목자의 음성입니다. 다음에 집을 쓸어야 합니다. 이 쓰는 모습이 눅 14:21에 나와 있습니다.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 오라” 이것은 전도의 모습입니다. 다음에 부지런히 찾으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이 잃은 양을 찾는 일에 나태해서는 안됩니다. 열심으로 찾고 부지런히 찾아서 그들을 우리의 목자이신 예수님 앞으로 인도하여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90) 탕자의 비유

(누가복음 15 : 11 - 32)

서 론 :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 중 탕자의 비유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비유에서 먼저 탕자가 다른 사람이 아닌 나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떠난 사람의 결국이 어떻게 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그 비참함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이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그의 인내하심과 그의 기다리심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1. 두 아들

이야기는 어떤 사람에게 있는 두 아들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이 두 아들은 비록 한 아들이 탕자가 되었지만 모두 하나님의 자녀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여기서 두 아들이라고 분명히 그들의 신분을 밝혔기 때문입니다. 이 두 아들은 처음에는 아버지의 자비와 사랑 밑에서 행복하게 지내왔습니다. 그들은 말하자면 평탄한 신앙 생활을 해온 성도의 모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하나에게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동생이 아버지에게 자기에게 돌아올 상속에 대하여 분배해 줄 것을 요구하여 그 뜻을 관철시켰습니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께 간구하여 받은 물질적인 축복을 상징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물질적 축복을 받는 일은 나쁜 일이 아닙니다. 또 하나님도 그 아들에게 그것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발단되었습니다. 재물이 생기자 둘째는 그의 마음속에 허황된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으로 흐르게 된 것입니다. 눅 12장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도 재물이 갑자기 생기자 미혹을 받아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육신 적인 안일과 향락에 마음이 쏠린 것입니다. 이 둘째는 그 재물을 가지고 먼 나라로 갔습니다.

2. 동생이 간 먼 나라

여기서 먼 나라란 하나님의 나라와 먼 나라를 가리킵니다. 이 나라는 곧 세상을 말한 것입니다. 이 같은 신앙에 대하여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돈은 우리로 세상으로 돌아가게 하는 유혹을 줍니다. 둘째는 처음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러나 그의 수중에 돈이 들어오자, 하나님보다 돈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는 이로 인하여 믿음에서 떠난 것입니다. 그는 먼 나라로 갔습니다. 돈 때문에 세상에 간 사람들이 생활이 여기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허랑 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세상으로 흐른 사람들은 사람에게 밟힌다고 하셨습니다. 맛 잃은 소금은 쓸데없어 밟힌 바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둘째 아들의 형편이 그리된 것입니다. 허랑 방탕했습니다. 세상 적인 생활에 젖었습니다. 육신의 정욕대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안중에 없는 생활은 허랑 방탕한 생활입니다. 그는 드디어 그 재산을 허비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쓰지 못하는 돈은 하나님이 거두어 가시는 것입니다. 재물에는 날개가 있다고 했습니다. 재물 때문에 하나님의 품을 떠난 경우의 사람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처럼 그 재산이 다 허비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3. 둘째 아들의 비참한 형편

그는 할 수 없이 돼지를 치는 돼지치기로 들어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교만한 마음과 재물에 대한 의뢰를 완전히 끊어버리시기 위해 가장 비참한 자리에까지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시66:10-12). 하나님께서는 왜 이토록 철저하게 그의 생활을 간섭하시는 것입니까? 이것은 그를 세상에서 건져내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인 것입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 깨닫지 못하면 이 어려움만 계속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사1:5-6).

그는 가장 곤경한 가운데서 그는 눈을 아버지 집으로 돌이키게 된 것입니다.

(1) 자기가 주려 죽게 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기의 죽게 된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에게 하나님이 필요한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2)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의 생활이 넉넉하여 부족함이 없습니다. 순종하는 생활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생활을 하면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3)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로 갈 것을 결심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 회개하기로 마음을 굳혔습니다.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이 말은 그의 인격의 새로운 면, 그의 변화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의 발걸음은 이제 아버지께로 돌이켰습니다.


결론 : 이 아들은 아버지의 환대를 받았습니다. 그는 옛날 믿음을 회복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아버지의 집은 큰 경사처럼 기쁨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탕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돈을 사랑하는 생활은 탕자가 될 위험한 신앙입니다. 우리는 탕자의 자리에 있으면서 깨닫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탕자의 자리에서 돌이켜 바른 신앙 생활을 해야 합니다.


(91) 아버지의 사랑

(누가복음 15 : 20 - 24)

서 론 : 누가복음에 있는 탕자의 비유는 실상인즉 아버지의 사랑을 보여주시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탕자의 회복은 오직 아버지의 사랑으로 결실을 맺게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말할 수 없는 인내하심, 그리고 한없이 자비하신 그 사랑의 용서를 바라볼 때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시면 우리는 아무런 소망이나 기대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1. 아버지의 인내

참으로 많은 세월이 흘렀습니다. 부모라 할지라도 기다리기에 능히 지쳤을 그런 시기가 몇 번인가 지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집을 뛰쳐나간 아들을 잊지를 못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포기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달린 한편 강도에게 그가 사형을 당하는 그 최후 순간까지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참고 그의 회개를 기다리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회개도 역시 이 탕자 같은 심정으로 오래 오래 기다리시며 참으셨습니다. 이 같은 하나님의 인내하심에 대하여 베드로 사도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같이 기다리시는 이 한가지 사실을 잊지 말라고 말씀했습니다. 이사야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며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신다”고 하셨습니다(사42:2). 우리는 이 같은 하나님의 인내하심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징계가 속히 임하지 않는다고 하나님을 멸시하는 죄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2. 아들을 맞이하시는 아버지의 태도

우리는 탕자가 집에 돌아오는 모습도 아름다우려니와 집에 돌아오는 아들을 맞이하는 아버지의 모습이야말로 너무 감격스럽고 황송한 것입니다.

(1) 아버지는 상거가 아직 먼데 그를 보고 달려가셨습니다. 아들이 집으로 돌아오는 길입니다. 그가 아직 집과는 거리가 먼데 아버지는 아들에게로 달려나갔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모습을 이처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고 하신 말씀은 오히려 그 표현이 약하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고 하신 말씀은 절대로 과장된 표현이 아닙니다.

(2) 아버지는 아들을 보고 측은히 여기셨다고 했습니다. 그가 범한 죄는 다 잊어버리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어버이의 사랑이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돌아온 아들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셨습니다. 이 탕자가 아버지 앞에 회개하기도 전에 아버지는 이처럼 놀랍게 그를 맞으신 것입니다.


3. 아들의 회개를 들으심

드디어 이 아들은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잘못을 회개했습니다. 이 아들의 눈물 어린 회개를 들으신 아버지는 즉각적으로 그 회개를 들으시고 그 회개에 합당한 조치를 당장에 취하셨습니다.

(1)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히셨습니다. 이 옷은 그의 모든 죄를 용서하고 불의를 깨끗하게 하시는 의의 옷을 가리킨 것입니다. 이제 그는 눈같이 희어졌습니다. 양털 같이 희어졌습니다. 어린양의 피는 우리의 어떤 죄라도 감싸고 의의 옷으로 갈아 입히시는 것입니다. 이 옷만 입으면 이전 죄는 하나도 기억됨이 없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악인이 만일 그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떠나 내 모든 율례를 지키고 법과 의를 행하면 정녕 살고 죽지 아니할 것이라 그 범죄한 것이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 행한 의로 인하여 살리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어찌 악인의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서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겔18:21-23)..

(2) 손에 가락지를 끼우셨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신 새 언약으로서 이 언약은 어떤 경우에도 결코 소멸되거나 효력이 상실되는 일이 없다고 하는 확실한 약속인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3) 발에 신을 신기셨습니다. 아버지 집에서는 새로운 신이 필요합니다. 세상에서 죄악에 빨랐던 신은 벗어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직까지의 망령된 행실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말해줍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네가 선 땅은 거룩하니 네 신을 벗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자녀들에게 때묻은 세상의 신을 벗기시고 의롭고 열매 맺는 새 신을 신기십니다.


결론 : 집을 나간 아들을 다시 만난 아버지의 기쁨과 그 집의 기쁨은 놀라우리 만치 컸습니다. 아버지의 즐거우심은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은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살진 송아지를 잡으라고 하셨습니다. 먹고 즐기자고 하셨습니다.

탕자의 돌아옴은 이처럼 하나님께 기쁨이 되고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혹 이 탕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아닙니까? 우리 곁에는 혹 이런 탕자가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파수꾼의 사명으로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합시다. 그들을 아버지 집으로 이끌어 하나님께 큰 기쁨을 드리도록 합시다.


(92) 맏아들의 경우

(누가복음 15 : 25 - 32)

서 론 : 탕자의 비유에는 아버지와 둘째 아들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맏아들이 등장합니다. 이 아들에 대하여 우리는 소홀히 넘기기 쉬우나 오늘날 교회에는 이 맏아들과 같은 성도가 많이 있음으로 여기서 이 맏아들의 경우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아버지의 사랑을 몰랐다

이 아들은 어떤 의무감에서 자기의 일을 해내는 율법주의 적인 교인의 거울이 되고 있습니다. 이 아들이 이처럼 그 심령이 냉랭하고 영적 감각이 없었던 일은 그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한 분의 평범한 아버지로 여겼습니다. 자기와 아버지와의 관계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에 대하여 알지 못했습니다. 아버지가 자기를 어떻게 사랑하고 있는가에 대하여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에 아버지가 둘째 아들에게 대하시는 사랑에 대하여 이해하지 못할 뿐 아니라 시기와 질투를 나타낸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나타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고 하셨습니다(요4:10). 그 아들을 나를 위한 화목제로 보내신 아버지의 사랑을 이 아들이 깨달았다면 맏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동생이 돌아온 일에 대하여 기쁨을 함께 했을 것입니다.


2. 맏아들의 충성

우리는 이 맏아들이 아버지의 집에서 대단히 충성스러운 아들처럼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아들은 사랑에서 나온 충성이 아니었습니다. 언제나 그리스도인의 충성은 주님께 대한 사랑에서 나와야 합니다. 그러나 이 아들은 다만 의무에서만 나온 충성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의무에는 즐거움이나 기쁨이나 평안이 없습니다. 하지 않으면 아버지에게 책망을 들을 것이라고 하는 의무감에서 마지못해 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기는 해도 그의 생활 중에 기쁨도 감사도 사랑도 평안도 찾을 수 없는 경우를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교회에서 자기의 맡은 일에 대해서는 그런 대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자기보다 못한 사람에 대해서 칭찬해 준다거나 환대해 주는 일에 대해서 기뻐하지 아니합니다. 맏아들은 둘째가 돌아와서 아버지의 말할 수 없는 환대를 받으며 기쁨이 되자 그의 불만이 즉각적으로 그 표정에 나타난 것입니다.


3. 그에게는 기도가 없었습니다.

그는 마땅히 자기 동생이 아버지 집에서 나갔다면 그 동생을 위해서 기도했어야 했습니다. 동생이 돼지 치는 집에 가서 쥐엄 열매조차도 제대로 못 먹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가슴을 찢는 아픔이 있어야 했습니다. 동생의 회개를 위해서 끊임없이 기도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 아들은 동생이 겪는 고통에 대해서나 그의 생명에 대하여 관심이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동생은 죄를 범했기 때문에 당연히 버림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동생은 다만 자신이 지은 죄 값의 심판을 받아야 할 것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생각입니까. 이 형은 자기 동생의 생명의 파수꾼으로 세워진 사실에 대하여 외면했던 것입니다(겔3:17-19).

이 맏아들은 모든 것이 풍성한 아버지 집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사실인즉 그의 생활은 비참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그는 아버지에게 항의하기를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기며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한 일이 없었다”고 말한 사실에서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 집에는 양도 많이 기르고 살찐 송아지도 많았건만 이 맏아들은 가장 천한 염소새끼 한 마리 얻어먹지 못했다고 실토한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풍성합니다. 이 풍성한 하나님 집에서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살찐 송아지는 고사하고 염소 새끼도 얻어먹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아버지께 구하지 아니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고 하십니다. 구해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아버지 집에 있는 재산이 다 내 것임으로 아버지 집에 있는 풍성한 것으로 풍성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사실인즉 가난하고 어려움을 겪는 불행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 : 이 같은 맏아들의 불평과 항의에 아버지는 사랑으로 타이르셨습니다.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내 것이 다 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것이 다 내 것이니 우리는 그것을 쓸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맏아들처럼 무의미한 교회 생활을 할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아버지에 대한 사랑으로 해야합니다. 형제들에 대한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 비유에 나오는 맏아들이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누가복음 16장

◆ 밤중소리 01-11 | VIEW : 558

(93) 불의한 청지기의 교훈(누가복음 16 : 1 - 13)

(94) 율법시대와 은혜시대(누가복음 16 : 14 - 18)

(95) 부자와 나사로(누가복음 16 : 19 - 31)

(96) 음부와 아브라함의 품(누가복음 16 : 22 - 25)


(93) 불의한 청지기의 교훈

(누가복음 16 : 1 - 13)

서 론 : 여기 있는 청지기의 비유는 이해하기 어려운 비유 중의 하나입니다. 문자대로 해석한다면 논리가 이상하게 전개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이 비유를 들려주신 근본 목적이 어디 있는가를 정확히 안다면 우리는 그것에 해석의 초점을 맞출 수 있으며, 논리의 전개는 어떻든 주님이 말씀하시려는 근본 사상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비유는 언제나 우리에게 하나의 교훈으로 주셨기 때문에 까다롭게 해석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들려주시고자 하시는 교훈을 찾아내야 할 것입니다.


1. 세상 재물에 대한 교훈으로 주신 것입니다.

이 비유의 총 결론은 13절에 나와 있습니다. 집 하인이라고 말한 사람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말함과 동시에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다는 소문이 들린 청지기를 가리킵니다.

주님은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청지기의 경우에 그의 불의 함이 어디서 나왔는가에 대하여 밝혀주신 말씀이십니다. 한 주인 밑에서 일하는 청지기는 오직 그 주인만을 섬겨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다른 주인을 더 섬기고 있었습니다. 다른 주인이란 재물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청지기는 자기의 주인보다 재물에 대한 욕심이 더 많았기 때문에 재물을 섬긴 것입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했습니다. 그가 돈을 사랑하자 주인을 섬기는 일에 차질이 생겨났습니다. 그는 주인을 속여 불의한 짓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돈을 중히 여기고 주인을 경히 여긴 것입니다. 이 같은 비유는 우리가 재물을 사랑하는 생활을 하면 우리의 생활은 재물이 중심이 됨으로 돈을 중히 여기고 하나님을 경히 여기는 생활을 하게 된다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2. 불의한 일이 드러났다

청지기의 불의한 일이 드디어 드러났습니다. 불의한 일은 언제인가는 드러나게 됩니다. 주인은 그 청지기에게 이제 청지기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고 그 직분을 빼앗고 네 보던 일을 셈하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해온 일에 대하여 장부 정리를 해서 사무 인계를 하라는 것입니다. 이에 청지기는 한 지혜를 짜내어 직분을 빼앗긴 후에도 이익을 취할 수 있는 묘한 사무 처리를 구상한 것입니다. 이 같은 청지기의 지혜는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재물을 사랑하는 자들의 간교와 거짓과 속임수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가 주인의 눈을 속이듯이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눈을 속여 불의한 일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마땅히 드릴 감사도 빼먹습니다. 하나님의 것으로 드려야할 십일조도 살짝 자기 것으로 제 주머니에 넣습니다. 주인은 이 청지기가 자신의 장래를 위하여 지혜롭게 일을 처리하는 것을 보고는 칭찬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이 청지기가 가지고 있었던 못된 지혜에 대한 일종의 역설적인 감탄사입니다. 이 같은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주님은 이 세대의 아들들이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롭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이 세대의 아들의 표본으로 등장한 청지기는 먼 장래 자기의 살길까지 생각하여 일을 처리하는 것처럼 만약 하나님의 자녀들이 자신들의 소망을 위하여 지혜롭게 처신한다면 그에 대한 축복이 얼마나 크겠느냐고 하시는 역설적인 교훈입니다. 우리는 눈앞에 일어나는 일에만 큰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까운 일에만 열중합니다. 당장에 어떤 열매를 맺는 일에만 흥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이 같은 생활은 차라리 이 세대 사람들이 세상일을 위하여 지혜롭게 행하는 일에 대하여 본받을만하다고 교훈하신 것입니다.


3.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이처럼 말씀하신 주님은 지혜롭게 재물을 쓰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세상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것입니다. 친구란 말은 전도하여 그리스도인을 만들라는 말입니다. 왜 재물을 불의한 재물이라고 하셨습니까? 이 말은 우리가 재물에 대하여 가지는 생각을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돈에 마음이 끌립니다. 돈을 소중히 여깁니다. 돈을 사랑합니다. 결국 사람은 이 재물 때문에 신앙을 잃게 되고 재물 때문에 불의한 행실을 하게 되고, 이 돈 때문에 하나님과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재물이란 불의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불의한 것으로 가장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는 일에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전도 사업에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전도하여 열매를 맺는 일에 자기의 재물을 사용한다는 것은 재물을 낭비하는 것이거나 무의미하게 쓰는 일이 아닙니다.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전도의 많은 열매는 하나님께 영광이 될 뿐 아니라 영생을 보증 받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고 하셨습니다(단12:3).


4.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된 자

여기서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된 자란 말은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는 일을 말한 것입니다. 어떤 부자 청년은 그의 불의한 재물 때문에 천국 문에 못 들어갔습니다. 그는 그의 그 많은 재물을 가지고 친구를 사귀는 일에 사용하지 못했습니다. 거절한 것입니다. 가난한자를 주라는 말씀은 친구를 사귀라는 말입니다. 자기 재물로 전도 사업에 긴요히 쓸 줄 모르는 사람이라면 다른 어떤 일에도 충성할 수 없고 이 재물에 대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쓰지 못한다면 곧 불의 하다면 다른 하나님의 일에도 불의 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않으면 이란 말씀이 이 같은 사실을 가리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다른 어떤 일도 맡기시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너희가 남의 것에 충성치 아니하면 이란 말씀은 남의 것이란 재물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재물은 남을 위하여 써야 하는 존재입니다. 이처럼 자기 재물을 남을 위하여 쓸 때 하나님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축복은 실상인즉 하나님이 우리의 것으로 언약된 것들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시지만 재물에 대하여 잘못 쓰면 우리는 우리의 것을 받을 수조차 없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언제나 문제의 핵심을 잘 깨달아야 합니다. 이 말씀도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 뜻을 깨닫기를 바라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지금 재물에 대하여 교훈해 주시고 그 재물로 불의한 청지기처럼 처신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쓸 때 크나큰 축복을 받는다는 교훈을 받아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불의한 청지기가 재물 때문에 주인으로부터 파직 당한 것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불행이 있으면 안되겠습니다.


(94) 율법시대와 은혜시대

(누가복음 16 : 14 - 18)

서 론 : 바리새인들은 항상 예수님의 입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 입에서 나오는 말로 주님을 책잡아 공박하고 예수님을 체포하는 하나의 고소거리를 삼으려는 것입니다. 그들은 사람이 돈을 사랑하는 일이 얼마나 무서운 해독인가, 그리고 재물은 반드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써야 복이 된다고 하는 말씀에 대하여 비웃은 것입니다. 바른 교훈을 듣기를 싫어하는 자들은 아무리 이치에 합당한 말을 한다고 해도 그것을 받아들이기를 거절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단에 속한 자들과 진리에 대하여 토론한다고 그들이 이단을 버리고 진리로 돌아온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그들이 그들의 주장하는 바가 비 성경 적인 것이라고 여겨졌다고 해서 마음을 돌이키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무가치하고 공허한 토론을 삼가야 하는 것입니다.


1. 돈을 사랑하는 바리새인들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좋아한다는 말은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그들이 바른 진리를 거슬린 일은 바로 그들이 이처럼 돈을 사랑함에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의 타락한 원인이 돈을 사랑하는 일에 있었다는 사실을 찾아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돈을 좋아하면 영의 눈과 귀가 감겨지게 되어 있습니다. 돈은 사람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볼 수 없게 만듭니다. 그들이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사사건건 트집 잡고 공박했던 것은 그들이 돈을 사랑함으로 영적인 눈이 어둡고 귀가 먹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돈을 사랑하면 돈을 하나님으로 섬기기 때문에 자기 입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은 거짓이요 자기 기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외식하는 신앙생활을 해 왔으며 주님의 저주에 가까운 책망을 들었지만 돌이킬 줄 몰랐습니다. 다음에 돈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두 가지 병폐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고 자기의 결백이나 의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사람 중에서 높임 받기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은 아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어디서나 선인과 악인을 감찰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비웃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불의 하다고 정죄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높아지려는 그들의 교만을 꺾어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 앉히실 것입니다.


2. 시대의 구분

주님은 그들에게 놀라운 선언을 하셨습니다. 16절 말씀이 그것입니다. 율법과 선 213 \ 누가복음

지자는 요한의 때까지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후부터는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된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인류의 전 역사를 둘로 구분하신 창조주의 선언이십니다. 율법시대는 요한의 때까지로 끝났고 그후부터는 은혜시대라고 하는 새로운 시대가 도래한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율법시대, 선지자 시대는 영원히 지나갔습니다. 이제 후로는 복음이 전파되는 은혜의 시대로 접어들어 주님이 오시는 그날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면 율법시대란 무엇입니까? 율법과 선지자라고 하신 시대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율법으로 다스리는 시대, 율법적인 의가 인정된 시대를 말하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는 이스라엘이 율법으로 다스림을 받았습니다. 율법으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의의 표준을 율법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율법적인 시대는 이제 마감되었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세례 요한 후부터는 어떤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까? 복음을 전파하는 시대라고 하셨습니다. 이 시대는 은혜 시대를 말합니다. 은혜 시대란 믿음으로 의를 얻는 시대를 말합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시대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시대입니다.

율법이 지나갔다고 하여 율법 그 자체가 살아진 것을 의미한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율법이 폐하여 진 것이 아니라 온전해 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율법 시대가 지나갔다고 하여 율법 그 자체가 없어 진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언제나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온전한 의의 표준입니다. 하나님은 이 표준에 의하여 공의로우신 심판을 하시게 됩니다.

이 의무는 영원히 변함이 없으십니다. 다만 복음이 이 의를 완전히 이루기 때문에 복음으로가 아니면 하나님의 의에 이룰 수 없음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무릇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데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요 무릇 버리운 이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이 율법의 계명은 영원히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결론 : 주님은 사람이 은혜 시대에 들어가는 방법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아주 의미 있게 표현하셨습니다.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은 율법시대에서 은혜시대로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들어가는 방법이 있습니다. 은혜시대로 들어가는 방법은 바로 복음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복음이 아니면 절대로 은혜시대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 사람은 언제까지나 율법시대에 속한 사람이기 때문에 율법을 온전히 지켜야 생명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으로 의를 얻을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요10장에서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라” 우리는 복음으로 은혜시대로 침입한 사람들입니다. 율법적인 생활을 청산하고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시다.

214 \ 누가복음


(95) 부자와 나사로

(누가복음 16 : 19 - 31)

서 론 :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여러 가지로 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인들에 대한 경종으로 들려주셨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종말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하여 부자의 결국을 보여주심으로 경고하신 것입니다. 둘째는 부자는 율법적인 의의 표본이요, 나사로는 복음으로 의를 얻는 표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셋째는 사람이 죽은 후에 그 영혼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하여 확실한 믿음을 주시려는 데 교훈의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1. 부자와 나사로

이 비유에는 두 인물이 등장합니다. 부자와 거지인 나사로입니다. 이곳에서 두 사람의 생활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두 사람은 하나님을 섬겨온 사람들임을 알게 됩니다. 부자가 기도하기를 “아버지, 아브라함이여”라고 말한 것은 그가 생존시에 하나님을 섬겨온 사실을 말해줍니다. 아버지란 말은 이 같은 사실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사로의 경우도 그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 사실은 그가 천국에 들어간 것을 의미합니다. 천국은 거지가 들어가는 곳은 아닙니다. 주님은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고 말씀하셨는데 거지 나사로가 들어간 하나님 나라는 바로 복음으로 침입하는 곳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곳에서 주님이 바리새인들에게 깨우치시려는 바는 돈을 사랑하는 바리새인을 부자에 비유하셨고, 거지 나사로를 자신들이 마치 개처럼 취급하는 이방인들이나 세리나 죄인들을 비유하신 것입니다.


2. 부자와 나사로의 생활

이 두 사람은 그들의 생활이 정 반대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부자의 생활을 보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 했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이 부자에 대하여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이 부자는 생존시에 그가 가지고 있는 재물을 가지고 오직 자신의 정욕과 탐심을 이루는 생활을 해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생의 목적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보다 재물을 모아 드리는 일이었습니다. 그에게서 가난한 이웃에 대하여 사랑을 베푸는 일이라곤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이 부자의 생활은 마치 한해에 많은 풍작을 거둔 어리석은 부자가 계획한 생활을 말해줍니다. 그는 스스로 옳다고 생각했을 뿐 아니라 사람에게서 높임을 받으려 하였습니다. 이들은 바로 그 당시 바리새인들의 생활상을 나타내 보이신 것입니다. 그 215 \ 누가복음

러면서도 그들은 하나님을 잘 섬기는 줄로 알았고 율법을 잘 지키며 자기들이 가장 의로운 줄로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행한 대로 갚으십니다. 그들의 갚음은 바로 그들의 죽음의 문이 열릴 때 나타나는 것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하셨습니다(히9:27). 시 73편에 나오는 주인공을 보면 그는 악인이면서도 그의 생존시에 호화로운 인생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그의 결국은 파멸이었습니다(시73:1-26).

그러면 거지 나사로의 경우를 보자. 거지 나사로는 그의 생활상이 가장 비참하게 서술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그가 받는 사회적인 학대, 이웃의 모멸을 상징합니다. 사회적인 모든 경제 체제는 권력층인 바리새인들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음으로 그들의 눈에 개처럼 보여지는 죄인들은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찌꺼기로 배불리려 하는 모습과 동일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나사로가 받은 고난은 주님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 고난은 비단 삶의 고난만을 가리킨 것은 아닙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은 고난을 말합니다. 이런 고난에 대한 기록은 많이 있습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마5:10-12). 나사로의 생활이 비통한 것은 죄로 말미암은 통회하는 심령을 말합니다. 그리고 나사로의 생활이 재물에 있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는 생활에 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3. 두 사람의 죽음에서 온 결국

하나님은 이 세상의 일에 대해서는 그리 많은 관심을 갖지 않으십니다. 인생의 종국적인 행복이 이 땅위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소망으로 불러 주셨습니다. 그 소망의 실현만이 인생의 최대의 축복인 것입니다. 그들의 행과 불행은 그들의 육신이 죽었을 때 마침내 드러납니다.

나사로 거지는 죽어서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품이란 하나님 나라를 가리킵니다. 들어갔다고 하신 말씀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는 복음으로,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로 침입하는데 성공한 것입니다. 그런데 부자는 죽어서 음부에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음부는 불 가운데서 고통을 받는 영적인 장소를 말합니다. 돈을 좋아하는 사람의 결국, 율법에서 의를 찾으려는 사람들의 결국,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외식으로 해온 사람들의 결국(말로만 ‘주여’를 찾는 무리)이 어떠하다는 것을 가리키신 것입니다.

주님은 이 비유에서 두 사람의 경우를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 216 \ 누가복음

서 귀중히 보신다고 하셨습니다(시116:15). 의인은 그 죽음에도 소망이 있다고 하셨습니다(잠14:32). 주안에서 죽는 자는 복이 있나니 수고를 그치고 쉰다고 하셨습니다(계14:13).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았을 때 행한 보응은 죽은 후에 이처럼 받는 다는 것을 분명히 알리신 것입니다.


4. 부자의 호소

불꽃 중에서 고통을 견딜 길이 없는 부자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있는 나사로가 한없이 부러웠습니다. 이 부자는 일찍이 회개할 수 없었던 자신을 저주했을 것입니다. 30절 말씀에 회개에 대한 말이 나오는 것으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회개는 오직 이 세상에 살아가고 있는 동안에만 가능하다는 것을 보이셨습니다. 그는 하다못해 나사로의 손끝에 물을 찍어 입술에 바르게 해달라는 요구마저 거절당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 세상에서 끝장납니다. 지옥에까지 뻗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에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부자는 자기 집안에 살아 있는 식구들이 생각났습니다. 그들이 자기가 고통받고 있는 음부로 오기를 원치 아니했습니다.

우리는 부지런히 전도하여 자기 식구들, 이웃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부자와 같은 원통함이 천국에 가서까지 있을 것입니다. 부자는 나사로를 살려 자기 집으로 보내면 그들 식구들은 회개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간구를 물리치셨습니다. 지옥에 있는 사람의 기도까지 들어주실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적이나 기적을 보인다고 회개하는 것이 아님을 밝히셨습니다. 하나님의 증거의 말씀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비록 죽은 자가 살아난다고 해도 믿을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과연 어떤 부류에 속해 있는 사람인가에 대하여 스스로 물어 보고 바른 신앙으로 소망의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는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96) 음부와 아브라함의 품

(누가복음 16 : 22 - 25)

서 론 :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이 어떻게 될 것이냐의 문제는 옛날부터 사람들의 입에 흥미 있게 오르내렸습니다. 성경에도 이 문제에 대한 여러 가지 기록이 있습니다. 우리가 구약 성경을 읽을 때 구약 시대의 많은 사람들도 죽었을 때 음부에 내려간다는 개념을 가졌음을 찾아보게 됩니다. 그러던 것이 신약성경에 와서 사람이 죽어서 갈 영적 처소가 음부만 있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곳이 있음을 분명히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한 성경에 이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가 각기 다른 모습을 띠고 나타나 있습니까? 이 문제를 우리는 잘 이해하고 깨달아 구약의 견해와 신약의 견해를 잘 이해해야 진리를 바로 깨달을 수 있습니다.


1. 음부

음부란 히브리어로는 ‘스올’이라고 말하고 헬라어로는 ἁδης(하데스)라고 합니다.

구약적인 견해를 보면 ‘하데스’에 대하여는 주로 무덤이라는 말로 생각되어 왔습니다. 구약에 살아가고 있었던 사람들은 인간의 죽음 후에 될 일에 대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뚜렷한 계시를 받지를 못했습니다. 그들은 다만 사람이 죽으면 무덤에 묻히게 되며 그것으로 우선 일시적으로 사람의 운명이 마쳐지는 것으로 알아왔습니다.

물론 많은 유대인들은 부활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 부활이란 마지막 날에 다시 살아나는 일로서 그날이 오기 전까지는 그냥 무덤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여겨 왔습니다. 예수님이 나사로의 무덤에 가서 마르다에게 이르시기를 네 오라버니가 다시 살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는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고 했습니다(요11:24). 다윗은 시 6:5에서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음부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라고 했습니다. 그도 사람의 죽음은 곧 음부에 내려가는 것이며 그 음부는 기억됨이나 하나님을 찬양함이 없는 적막한 곳으로 알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전도서를 기록한 솔로몬도 죽은 자가 들어갈 곳은 음부인데 그곳은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는 곳으로 알고 있었습니다(전9:10). 그저 덤덤하고 답답하고 적막한 무덤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성경에 이처럼 기록되었다고 사람의 죽음이 정말로 그런 것이냐 하면 그런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같은 기록은 성경을 기록한 그 사람들의 마음에 품고 있거나 알고 있는 상태를 성령의 감동으로 거짓 없이 그토록 기록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에도 하나님의 백성들의 죽음에 대한 소망의 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시 116:15에서 성령으로 감동하심을 받은 어떤 시인은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218 \ 누가복음

귀중히 여기신다”고 했습니다. 잠 14:32에는 “의인은 그 죽음에도 소망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런 표현은 비록 그 계시가 불분명하기는 하지만 의인이 죽으면 무감각상태이거나 아무 것도 모르는 무덤에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2. 신약의 명시

그런데 이 같은 음부의 관념이나 사람이 죽은 이후의 상태에 대한 계시가 뚜렷하게 나타난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먼저 이 문제는 우리 주님의 증거에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주님은 눅 16장에서 음부가 어떤 곳임을 너무나도 분명하게 밝혀 놓으셨습니다. 그것은 무덤도 아니요, 적막하거나 기억됨이 없거나 아무 감각이나 생각이 없는 곳이 아님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의인이 죽어서 가 있는 곳도 있으며 그곳은 또 어떤 곳인가에 대해서 너무나도 분명하게 증거하셨습니다. 주님이 이같이 밝히신 일은 믿음으로 구원받는 사람들에 대한 소망이요, 심판 받는 자들에 대한 경종이신 것입니다.

이런 것을 계시의 발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처음엔 뚜렷하고 명백하게 계시가 나타나지 않았지만 그것이 시대와 역사가 변천됨에 따라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서 좀더 확실하게 나타내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메시야의 언약에 대한 계시도 창세기에 나와 있는 계시와 그 후 선지자들을 통해서 좀더 명확하게 밝히신 계시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신약에 와서 마태복음 첫 장에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고 밝히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 되심의 혈통과 여자의 후손에 대한 명백한 계시를 보여 주신 것입니다.

(1) 주님이 밝히신 음부, 하데스란 죽은 모든 영혼이 다 함께 갈 곳이 아님을 증명하셨습니다.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한 부자만이 들어갔고 나사로는 그곳에 들어가지 아니했음을 분명히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데스란 곳은 악한 영이 들어가 머물고 있는 고통받는 곳입니다. 악한 영이란 부자 같은 사람,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동안에 하나님을 거역한 인생들의 영혼을 가리킵니다. 음부에서 당하는 고통이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불꽃 가운데서 고통을 당하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이곳에 들어간 사람은 절대로 이곳에서 빠져 나올 수 없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기회가 영영히 사라진 곳임을 밝히셨습니다.

(2) 아브라함의 품에 대해선, 나사로가 들어간 곳은 음부가 아니라, 아브라함의 품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곳은 하나님이 계시는 곳입니다. 곧 하나님의 나라를 상징합니다. 주님은 이곳의 상태를 나사로가 위로 받는 곳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곳은 음부와 동일한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거리가 멀 뿐 아니라 큰 구렁이 끼여 있어 왕래가 불가능한 곳임을 천명하셨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품이라고 밝히신 곳은 어디 219 \ 누가복음

를 말합니까? 주님은 한편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곳이 낙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낙원에 올라가 보았다고 증거했습니다(고후12:4). 그리고 바울은 이 낙원을 사모하면서 내가 차라리 그곳에 가서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을 원한다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계 6:9-11절 말씀을 보면 순교자의 영혼들이 이곳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뿐 아니라, 주안에서 죽은 자들은 복이 있는데 그 이유는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결론 : 악인이 들어가 고통받는 음부가 분명히 있습니다. 또한 의인이 들어갈 낙원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에 대한 분명한 진리를 깨닫고 죽음 후에도 소망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가지고 담대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누가복음 17장

◆ 밤중소리 01-11 | VIEW : 1,102

(97) 실족케 하는 자의 화(누가복음 17 : 1 - 4)

(98) 믿음을 더하소서(누가복음 17 : 5 - 10)

(99) 아홉은 어디 있느냐(누가복음 17 : 11 - 19)

(100) 하나님의 나라(누가복음 17 : 20 - 25)

(101) 인자의 때(누가복음 17 : 26 - 37)


(97) 실족케 하는 자의 화

(누가복음 17 : 1 - 4)

서 론 : 남을 실족케 하는 자의 죄가 얼마나 중한 것인가에 대하여 참으로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실족시킨다는 말은 도덕적인 죄의 문제 뿐 아니라 믿음에서 떠나게 하는 죄를 말합니다. 그 죄의 모양이 어떻든 사람을 믿음에서 떠나게 하면 그 사람은 차라리 연자 멧돌을 그 목에 메우고 바다에 던지우는 것이 나으리 만치 저주받은 인생임을 알게 됩니다.


1. 남을 실족케 하는 일

“실족케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있게 하는 자는 화”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사람들로 믿음에서 떨어지게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 같은 일은 이 세상에서 없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있게 그 사람은 화가 있을 것이라고 주님은 경종 하셨습니다. 남을 실족케 하는 일은 결과적으로 믿음의 길에서 떠나게 하는 결정적인 행위를 말합니다. 이 같은 일은 다음 몇 가지로 구분해서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악행을 권장함으로 실족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죄악된 행위를 권장함으로 그 사람으로 결국은 믿음에서 떠나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같은 죄악된 행위를 말의 유혹으로 하던 죄의 함정을 파놓음으로 하든 그 일로 그 사람으로 신앙 생활에서 떠나게 한다면 그런 일은 큰 죄악이 되는 것입니다. 하와가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게 한 일은 아담으로 실족케 했습니다. 드릴라의 간교는 삼손을 실족케 했습니다.

(2) 진리를 오도케 함으로 실족케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람을 바른 진리에서 돌이키게 하여 잘못된 진리로 오도케 한 자는 사람을 실족케 하는 자입니다. 진리를 오도케 하는 역사는 사단이 합니다. 이단을 전파하는 자들은 모두 이 사단의 하수인들입니다.

(3) 경종하지 않음으로 실족시킬 수도 있습니다. 죽음의 길을 달려가고 있는 사람에게 살길을 가르쳐 주지 않을 때 그 책임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겔 3장에서 “하나님께서 죽으리라고 한 죄인에 대하여 내가 그를 말로 깨우치거나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생명을 구원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으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미칠 것이라고 여기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주변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하지 못함으로 그들로 실족케 하는 일을 해서는 안되겠습니다.

221 \ 누가복음


2. 실족케 하는 일을 경계하는 방법

주님은 이 같은 일에 대하여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고 하시면서 실족케 하는 일을 경계하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1)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경계하라고 하신 말씀은 다음 몇 가지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① 권고하라는 말씀입니다. 마 18:15에서 형제가 죄를 범했을 때 그 사람을 찾아가 권고하라고 말씀했습니다.

②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형제의 생명이 그의 죄로 인하여 파멸되지 않을까 염려하여 기도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③ 그 죄가 악한 누룩처럼 교회에 퍼질까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것을 막아야 합니다. 다음에 나도 그같은 죄에 물들지 않을까 스스로 조심하여 모든 행동을 삼가야 합니다.

(2) 다음에 주님은 회개하거든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죄라도 회개를 건너뛸 존재는 없습니다. 그리고 어떤 죄라도 회개 없이는 사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죄의 사함을 받지 못하는 사람을 우리 스스로가 용서해 줄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용서에는 먼저 하나님의 용서가 뒤따라야 합니다.

회개하거든 이라고 하신 말씀은 그저 입술만으로 고백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 회개에 진실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죄에서 돌이키는 열매가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용서해 주라는 말씀은 다시 한 형제로서 회중에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의 고통을 싸매 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는 그의 죄를 기억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결론 : “남을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많은 사람이 믿음에서 실족하고 있습니다. 그 원인이 혹 나로 말미암은 것이 아닌가 우리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혹 회개한 내 형제에 대하여 아직도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남의 신앙을 붙들어 주며, 남의 허물을 가려 주며 사랑으로 권면하며 생명의 길로 이끄는 아름다운 생활 가운데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어야 하겠습니다.

222 \ 누가복음


(98) 믿음을 더하소서

(누가복음 17 : 5 - 10)

서 론 : 제자들은 선생님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자신들의 연약함을 깊이 깨닫게되었으며 자기들에게 믿음이 없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실족케 하는 일과 형제의 죄를 용서해 주는 문제를 들었을 때 자기들의 믿음으로서는 자신이 없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일제히 주님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했던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의 이 말에 두 가지 비유적인 예화를 들려주심으로 사람이 믿음을 더하는 비결이 어디 있는가에 대하여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는 산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하여 겨자씨 한 알의 비유를 드셨고, 순종하는 겸손한 믿음을 가져야 함을 가르쳐 주시기 위하여 종의 경우를 들려주셨습니다.


1. 믿음을 더하소서

신앙 생활에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전 생애에 걸친 믿음의 생활입니다. 자기에게는 믿음이 언제나 많은 줄로 알면 잘못된 생각입니다. 언제나 제자들 모양 자신의 믿음이 부족한 것을 알고 주님을 향하여 나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는 간구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우리들의 겸손한 자세입니다. 특히 우리들은 우리의 연약함을 깨닫게 될 때 우리에게 너무도 믿음이 적은 일에 대하여 스스로 안타까울 때가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믿음을 주시는 주님을 향하여 믿음을 더해 달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듣고도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여 더 큰 믿음을 가지기를 원할 때가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이들 제자들처럼 주여,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는 기도가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2. 겨자씨의 믿음

겨자씨로 비유된 믿음은 은혜를 받은 사람들마다 다른 각도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비유는 어떻게 해석이 되든 주님이 우리에게 나타내시고자 하신 뜻을 분명히 제시만 하면 다 바른 해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1) 겨자씨의 믿음이란 곧 살아 있는 믿음을 말합니다. 씨는 작지만 그 씨는 살아 있기 때문에 무한한 가능성이 그 안에 있는 것입니다. 씨는 기적을 만들어 내는 신비적인 생명체입니다. 사람이 죽은 믿음이 아니라 살아 있는 믿음을 소유하면 능치 못함이 없는 것입니다.

(2) 겨자씨는 생명이 있는 믿음을 가리킵니다. 생명은 새로운 것으로 탄생되기 때문에 그 안에는 폭발적인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았을 때 그 안에서 공급받게 됩니다.

(3) 겨자씨의 믿음은 성장하는 믿음입니다. 씨가 심겨지면 밭에서 자라나는 것처럼 믿음은 우리의 심령 속에서 자라나는 것입니다. 씨가 자라나지 않을 때 아무런 열매를 기대할 수 없는 것처럼 믿음이 성장하지 못할 때 그 같은 그리스도인은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4) 겨자씨의 믿음은 열매를 맺는 믿음입니다. 씨가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그 씨는 이미 죽어 있는 씨앗에 불과합니다. 이 겨자씨는 바로 우리의 마음속에 영접한 그리스도의 생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에게 살아 있는 믿음을 주십니다. 생명이 있는 믿음을 주십니다. 성장하는 믿음을 주십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겨자씨 만한 믿음이 있었다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순종하였을 것이란 말씀은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기이한 일이라도 능히 이룰 수 있다고 하시는 비유적인 말씀입니다.


3. 순종의 믿음

주님은 두 번째로 제자들에게 믿음을 갖기를 원하면 순종하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비유에서는 밭을 소유하고 있는 주인과 그 주인집에서 종으로 일하는 사람을 등장시키셨습니다. 이 종은 마치 피로 값 주고 사심으로 당신의 종으로 삼으신 우리들의 경우를 가리킨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다”고 했습니다(롬6:22). 종은 아무리 힘든 일을 해도 그것이 주인 앞에 공로가 될 수 없습니다. 당연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가 너무나 큰 것입니다. 그분은 너무나도 값진 대가로 나를 사셨습니다. 나는 그분에게 어떤 일을 해 드려도 그 은혜를 갚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말씀은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이 말뿐입니다. 이 말씀을 들려주신 이유는 하나님께 대한 충성과 겸손을 가르치시려는 데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이런 심령으로 순종하고 겸손하면 우리의 믿음은 날로 성장하여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결론 : 큰 믿음을 가지기를 원하는 사람은 먼저 진실한 마음으로 주님을 영접하여 그 분의 생명이 나를 지배하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믿음을 더 갖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겸손하고 마음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은 우리에게 더 큰 믿음, 더 아름다운 믿음을 주실 것이며, 우리는 그 믿음으로 주님을 위하여 좀더 보람있는 생애를 살아 갈 수 있을 것입니다.


(99) 아홉은 어디 있느냐

(누가복음 17 : 11 - 19)

서 론 : 열 명의 문둥이가 병 고침을 받은 후 한 명의 문둥병자만이 주님께 돌아와서 감사한 일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로 영적인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이 사건에서 우리는 청함을 받는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다는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아홉은 청함 받은 사람이요 한 사람은 택함 받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대로 아홉은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요 그 중에 하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간 사람입니다. 또한 이 사건은 구원을 얻는 자가 적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믿는다고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러나 구원을 얻을 자는 적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하나님의 은택을 받는 자는 많지만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는 심히 적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1. 열 문둥병자의 출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 한 동리로 들어가시게 되었습니다. 그때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멀리 서서 주님께 소리를 높여 간구했습니다. 이들의 출발은 참으로 좋았습니다. 그들은 자신에게 죽을병이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문둥병은 인간의 죄를 상징합니다. 죄는 저주스러운 존재요, 인생을 죽이는 병입니다. 사람이 이처럼 자신의 죄를 안다는 것은 이 병의 치료자이신 예수님을 찾는데 필수적인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의 죄를 비춰주는 거울입니다. 이 거울은 우리의 참모습을 보게 하고 우리로 예수를 만나는 길로 인도합니다. 그래서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이라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찾은 것입니다. 예수를 만나면 자신들의 질병을 고침 받을 줄로 알았습니다. 예수를 만난 그들은 소리를 높여 간구했습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그들은 다만 주님의 자비에 호소한 것입니다. 세리는 “나는 죄인이로소이다.”고 가슴을 쳤습니다. 그는 긍휼히 여기심을 받았습니다. 베드로도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고 예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죄인들은 주님의 긍휼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난 일도 큰 축복이지만 그 예수님께 기도한 사실은 칭찬 받을 만 합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다만 주님의 자비에 호소할 뿐입니다. 우리에게 무슨 공로가 있습니까? 그들은 긍휼을 호소하여 간구한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말씀을 그들이 어떻게 이해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이 이 말씀에 순종하여 성안으로 달려간 225 \ 누가복음 것으로 보아 무슨 말씀이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이 그들에게 있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는 경우는 그 몸이 온전히 문둥병에서 고침 받았을 때 그의 의학적인 확인을 위하여 찾아가는 경우가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기실 문둥병이 고쳐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몸에서는 여전히 고름이 나옵니다. 손은 꼬부라졌습니다. 눈썹은 빠진 대로입니다. 그런 형편인데 가서 보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무엇을 믿고 가서 보이라는 것입니까? 그렇지만 그들은 이 말씀을 믿고 달려갔습니다. “믿고 구한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그대로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들의 몸은 아직 문둥병 그대로 있었지만 주님의 말씀에 의하여 성안으로 달려간 것입니다. 그들은 이처럼 출발이 좋았습니다. 예수를 만나고 기도하고 응답 받은 것입니다. 그들에게 기쁨이 왔습니다. 그런데 여기서가 문제입니다.


2. 감사를 잊은 아홉 문둥이

그들은 기도는 했지만, 그리고 응답은 받았지만 감사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죄악에서 구원해 주신 일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엡1:3-6).

만일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지 못한다면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지 못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죄란 화살이 빗나간 상태를 말합니다.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이루지 못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가 만약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생활을 못하면 그 한가지 사실만도 무서운 죄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다시 돌아와 감사하는 문둥이를 향하여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주님은 돌아오지 않은 아홉을 찾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은혜를 입었건만 감사하지 못하는 그들의 불 신앙을 탄식하시며 그들의 앞날을 염려해서 이같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한편 주님께 돌아온 문둥이는 놀라운 칭찬과 축복을 받았습니다. 사람은 은혜를 받기는 쉬워도 감사하기는 어려운 존재입니다. 감사에는 재물이 따르고 봉사가 따르고 충성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결론 : 그러나 우리는 감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이 같은 일이야말로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226 \ 누가복음


(100) 하나님의 나라

(누가복음 17 : 20 - 25)

서 론 :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와 유대인들이 생각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는 서로 상충되는 점이 많았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는 유대인들이 생각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와 많은 모순 점을 지니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대망하는 메시야가 오시면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임하는 줄로 알고 있었습니다. 이 같은 사고는 제자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예수님이 왕으로 취임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질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예수가 과연 그리스도이시라면 이 문제에 대하여 분명한 대답을 해줄 것이라고 생각하여 시험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고 물은 것입니다.


1. 너희 안에 있는 하나님 나라

주님은 물론 이런 그들의 물음의 저의를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하나님의 나라 관념을 바로 잡아주려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올바른 진리를 가르쳐 주셔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이 물음에 대하여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둘로 구분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볼 수 있는 하나님의 나라, 자기들이 그 나라의 일원이 될 수 있는 현세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대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현세적인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대하여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는 주님의 재림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하여 인자의 날에 일어날 사건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1)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메시야 왕국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 잡기 위하여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의 눈에 보이게 임하는 나라가 아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크게 둘로 구분되는데 하나는 심령 천국이요, 하나는 영원 천국입니다. 이 두 나라는 모두 영적인 나라이기 때문에 사람의 눈에 나타나는 나라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가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진리인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또 하나님의 나라는 장소를 지칭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눈에 227 \ 누가복음

보이는 나라가 아닌 것처럼 눈에 보이는 어떤 장소를 가리킨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이 바라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는 전적으로 잘못된 생각임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바리새인들에게 큰 충격과 실망을 주었습니다. 실망을 안겨주었다고 하는 것은 그들은 예수님 입에서 유대인들이 기다리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오셨다고 하는 말이 나오기를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가이사 황제를 반역하는 반란 음모자로 고소할 수 있었으며, 다른 하나는 이 나라에 대하여 모른다고 말씀하시기를 기다렸습니다. 그 이유는 그렇게 되면 예수님의 교훈은 아무런 가치 없는 것으로 나타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분명하고 정확하게 제시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산상수훈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하신 말씀을 기억할 것입니다. 이 천국은 심령이 가난한 자의 마음에 이루어지는 천국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그리고 그가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의 마음속에 이루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주권이 미치는 곳을 말합니다. 주님이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다고 하신 것은 먼저 성령의 임재 하심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계시는 곳에 하나님의 주권이 미치고, 하나님의 지배가 미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곳은 분명히 하나님의 나라인 것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 말씀했습니다(고전3:16).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엄중하신 말씀을 가지고 우리를 다스리십니다. 모든 이 나라 백성들은 이 말씀을 거역할 자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에 잘 순종하면 보상을 받고 불순종하면 징계를 받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의 육신의 장막이 무너지면 하늘의 처소로 옮겨지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고 있는 동안에 우리의 마음에 이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지 아니하면 우리는 실질적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란 불가능합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루어집니다.


3. 인자의 날

주님은 제자들에게 때가 되면 나타날 인자의 날에 대하여 부연하여 말씀해 주셨습니다. 인자의 날이란 주님의 재림의 날을 가리키신 것입니다. 주 재림에 대하여 228 \ 누가복음

제자들은 매우 궁금했습니다. 주님은 이날에 되어질 일에 대하여 결론적으로 간략히 말씀드렸습니다. 그날을 전후하여 세상에는 많은 미혹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거짓 그리스도가 도처에 나타나 자기를 가리켜 ‘주’라고 말하겠지만 너희는 가지도 말고 좇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자신이 재림 주라고 말하는 자들의 말에 미혹되어 그들은 좇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은 그같은 방법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번개가 하늘아래 이편에서 저편까지 비췸같이 주님이 재림하시는 그날에도 그러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주 재림의 모습을 한마디로 나타내신 표현입니다. 도적같이 갑작스럽게 임할 것이란 말씀이오 주님은 그의 날에 도처에 나타나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알 수 있게 임하실 것이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계 19장에서 예언해 주신 말씀대로 열려진 하늘로 백마를 타고 하늘에 군대와 더불어 아마겟돈에 임하시는데 그의 입에서 이한 검이 나오며 그것으로 만국을 치시며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을 것이라고 하신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먼저 우리 마음속에 온전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도록 바로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음에 우리는 다시 오시는 주님을 소망 가운데 기다리되 미혹을 받지 말고 하늘에서 번개 빛처럼 비취임 같이 임하시는 주 재림의 날을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하나님의 일은 오직 예수님의 고난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값진 선물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101) 인자의 때

(누가복음 17 : 26 - 37)

서 론 : 주님은 주 재림의 날을 인자의 때란 말로 표현하셨습니다. 주님은 인자의 때를 설명하심에 노아의 때와 롯의 때의 경우를 예로 들었습니다. 그리고 인자의 때도 이러하리라고 하셨는데 이는 하나님의 심판의 시기에 사회에 팽배하는 죄악을 비유하신 것입니다. 노아의 때에 대하여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용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셨다”고 하셨습니다. 롯의 때에 대해서는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중하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말씀하신 인자의 때에 대해서는 “그 죄는 하늘에 사무쳤으며 하나님은 그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계18:5). 이런 말씀으로 비춰 보아 주 재림의 시기는 이 세상이 과학적으로나 지식적으로는 발전하는 문명 사회를 이룰지 모르나 도덕적으로나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는 그 죄악상이 심히 관용한 상태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1. 노아 때와 롯의 때의 사회상

그러면 노아의 때는 어떠했는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노아는 홍수 심판의 경종을 듣고 세상에 나아가 부지런히 경종했습니다. 그러나 그 때 사람들은 이 경종을 전혀 무시하고 세상 관습에 젖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생활을 해오다 물의 심판으로 멸망한 것입니다.

그들의 죄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없는 생활을 해왔다는데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 없이 먹고 마시며 장가들고 시집가는 생활은 죄악 중에도 가장 무서운 죄악입니다. 두 번째는 심판에 대한 하나님의 경종을 무시했다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심판에 앞서 반드시 선지자나 하나님의 종들을 통하여 예고해 주시는 것입니다(암3:7). 그러나 이 파수꾼의 경고를 무시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롯의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롯이 긴박한 사항을 외쳐댔지만 그의 사위들마저 농담으로 여겼습니다.

인자의 날에도 그러하리라고 하신 말씀은 주 재림의 시기의 이 사회상 역시 모든 사람의 생활이 하나님을 떠난 물질주의, 세속주의가 이 땅 위에 충만하고 하나님의 심판의 경종을 무시함으로 주의 재림이 어디 있느냐고 비웃는 것입니다(벧후3:3-5). 끝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거역하고 회개하기를 거절하는 세상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230 \ 누가복음


2. 롯의 처를 생각하라

주님은 인자의 날인 그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거나 밭에 있을 때 뒤로 돌이키지 말아야 할 일에 대하여 롯의 처의 경우를 들어 경종 하셨습니다. 이 말의 뜻을 우리가 이해하려면 마 24장에 있는 말씀을 참고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그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며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고 하셨습니다. 지붕에서 내려오지 말라고 하신 말씀이나 뒤로 돌이키지 말라는 말씀은 산으로 도망하는 일에 신속히 하라는데 있습니다.

롯의 처가 소돔에서 도망하는 일에 뒤를 돌아봄으로 소금 기둥이 된 것입니다. 인자의 날에 유대 땅에 사는 사람들은 산으로 신속히 도망하는 일에 있어서 집안에 있는 재물 때문에 지체하면 노아의 때의 사람들처럼, 롯의 때의 사람들처럼 환난을 당할 것이라고 하는 경종입니다. 슥 14장에는 주 재림의 인자의 날에 대하여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여기서 그의 산골짜기로 도망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슥14:1-5). 이곳으로 도망하는 일에 세상 재물에 얽매이지 말 것을 미리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예언은 유대 땅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해당되는 말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3. 데려감을 당한 자와 버려둠을 당한 자

31절에서 말씀하신 도망하는 일에 대한 것은 유대인들에 관한 것으로 그들이 환난을 피하여 궁극적인 생명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요, 33~35의 말씀은 온 세계적으로 이날에 구원받을 백성과 버림받을 백성에 관한 예언입니다. 인자의 날에는 노아나 롯처럼 하나님의 심판 중에서 구원받을 백성들이 있는 반면에 또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지막 하나님의 심판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떤 방법으로 구원해 주시는가? 이에 대하여 데려감을 당한다는 말씀으로 표현하셨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재림 시에 있을 모든 성도들의 영광스러운 휴거를 말하는 것입니다(살전4:16-18).

이스라엘은 그때까지 불신가운데 처해 있게 됨으로 주님의 재림을 바라보고 회개한 후에 비로소 구원의 은총을 민족적으로 받게 되며 최종적인 구원인 공중 휴거에 교회와 함께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결론 : 이날에는 짐승의 표를 받게 하는 적 그리스도의 역사가 강한 시기이므로 우리는 소망을 가지고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자기 생명을 버릴 각오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육신의 생명을 두려워하여 적 그리스도에게 굴복하는 자들은 그의 생명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 같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러면 이 231 \ 누가복음

같은 일이 어디서 일어날 것인가에 대하여 물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주님은 이해하기 어려운 대답을 들려주셨습니다. “주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보이느니라” 이 구절은 여러 가지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말씀하신 정확한 뜻을 나타낼 수 있는 해석 자는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 짝이 될만한 성경구절이 계 19:17~18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큰 잔치가 벌어지는 이 잔치는 주님의 재림으로 온 세상이 그의 심판의 칼날에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시체를 먹이로 하여 몰려든 새들의 잔치를 묘사한 것입니다. 이 말씀으로 비추어 해석할 때 인자의 때에 심판을 내릴 곳은 전 세계적이며 어느 곳이든 심판이 미칠 것임을 상징적으로 표현하신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노아 시대의 사람들처럼, 롯의 시대 사람들처럼 세속적인 생활을 하다보면 하나님의 심판을 외면하게 되며 그렇게 되면 짐승의 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지 말고 노아처럼 롯처럼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삶을 지내야 할 것입니다.



누가복음 18장

◆ 밤중소리 01-11 | VIEW : 471

(102) 기도의 두 가지 원칙(누가복음 18 : 1 - 8)

(103)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누가복음 18 : 9 - 14)

(104) 천국과 어린아이(누가복음 18 : 15 - 17)

(105) 한가지 부족한 것(누가복음 18 : 18 - 23)

(106) 부자와 하나님나라(누가복음 18 : 24 - 34)

(107) 한 소경거지의 간구(누가복음 18 : 35 - 43)


(102) 기도의 두 가지 원칙

(누가복음 18 : 1 - 8)


서 론 : 그리스도인이 되면 그날부터 천국에 이르기까지 계속되는 일과가 있습니다. 그것은 기도인 것입니다. 주님은 이 기도에 있어서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원칙을 두 가지로 밝혀주셨습니다. 하나는 항상 기도하라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기도하되 낙망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같은 기도에 대하여 우리의 이해를 돕기 위해 주님은 한 재판장과 한 과부의 경우를 예로 들어 비유적으로 설명해 주셨습니다.


1. 재판관과 과부

어떤 도시에 있는 한 재판관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왜 주님은 이 비유에서 불의한 한 재판관을 하나님과 비교하여 말씀하셨는가? 이 말씀은 ‘하물며’에서 해결됩니다. “불의한 재판관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하나님 일까보냐”는 논법으로 적용하시기 위하여 그러하신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무시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 대하여 두려워함이 없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이 재판관이 얼마나 방약무인하며 불법적이며 몰인정하며 교만한가에 대하여 강조하시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그리고 원한이 있는 한 과부는 이 세상에서 가장 무력하고 의뢰할 곳이 없으며 무력한 사람으로 등장시키셨습니다. 두 사람의 인간성과 그 처지가 이러하므로 이 과부가 그 재판관에게 간구하는 것은 도저히 응답될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것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이처럼 말씀하신 것입니다.


2. 과부가 한 간구의 특징

주님은 이 비유에서 불의하고 교만한 재판관이 그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던 비결에 대하여 이 과부의 계속적인 간구를 들었습니다. 이 재판관은 “내 원수에 대한 내 원한을 풀어주소서”하는 이 과부의 간구를 얼마동안 듣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과부의 끊임없는 간구는 그를 심히 괴롭게 만들기에 족했던 것입니다. 그 재판관은 이처럼 스스로 말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이 과부의 간구는 재판관을 번거롭게 해 준 것입니다. 사람은 번거로운 것을 싫어합니다. 그는 자신의 직책상 이 과부를 만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과부는 억울한 사정을 고소한 사람이요 재판관은 그 문제에 대하여 판결을 내려 주어야 할 사 233 \ 누가복음

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그 간구를 듣지 않으려고 해도 이 여인은 막무가내 자신의 간구를 그치지 않고 늘 찾아와 올리기 때문에 귀찮아 죽을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이 재판관은 이 같은 일을 통하여 많은 괴로움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그 재판관은 이 같은 일이 싫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 과부의 소청을 들어주기로 마음을 고쳐먹은 것입니다. 그것은 재판관이 의롭게 되어서가 아니라, 그 여인의 사정을 들어주고 싶은 불쌍한 생각이 일어나서가 아니라 자기가 번거롭고 괴로움을 당하기가 싫어서 들어주기로 한 것입니다.


3. 그리스도인의 기도의 자세

주님은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기도의 자세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과부와 같이 하나님을 번거롭게 해 드리라는 것입니다. 번거롭게 해 드리는 기도란 기도를 하되 항상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기도를 드립니다. 그런데 그 기도의 응답이 더디면 기도의 자세가 움츠러듭니다. 이 문제가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 의심을 품게 되며 기도의 힘을 상실하고 그만 그쳐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도하기 전에 한번 하나님께 간구하리라고 결정했으면 그 문제의 응답을 받기까지 항상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과부의 기도제목을 먼저 바라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주소서” 이 기도 제목은 이 여인의 절박하고도 절실한 호소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꼭 반드시 하나님께 응답 받지 않으면 안될 필수적인 기도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같은 원한을 풀 분은 재판관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이 문제를 재판관에 들고 간 것처럼 우리가 반드시 해결보지 않으면 안될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가지고 가서 문제 해결을 위하여 기도하기 시작했다면 기도가 응답 받기까지 끊어지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을 번거롭게 해 드릴 정도로 기도해야 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다음에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을 괴롭혀 드려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찌 열정적으로 간구하는지, 어찌 쉬지 않고 간구하는지 그 간구를 듣는 일 조차 괴로움을 당하도록 하시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응답이 더디다고 하여 낙망치 말고 괴롭혀 드릴 정도로 기도를 계속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번거롭게 여기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의 기도를 또한 괴롭게 여기시는 분도 아니십니다. 다만 그 같은 자세로 간구 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런 기도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3. 하물며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주님은 이처럼 결론을 맺으셨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234 \ 누가복음


(1) 우리는 여기서 주님이 하신 말씀에서 택하신 자들이라고 하신 말씀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그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그의 자녀들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아들을 주신 이가 그 아들과 함께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밤낮 부르짖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응답 받기 위해서는 밤낮 부르짖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원한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간절한 호소를 말합니다.


결론 : 주님은 풀어주시라고 하셨습니다. 응답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오래 참으시지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지치고 넘어지기까지 물리치지 아니하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인자의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고 탄식하셨습니다.

이런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는 하나님의 자녀를 찾아 볼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모든 사람이 죄악이 관용된 세상에서 세속적인 생활을 하기 때문에 이만한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는 사람이 있겠느냐고 탄식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까? 주님이 분명히 말씀하신 대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이 믿음을 저버리지 마시고 끝까지 부르짖어 응답을 받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103)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누가복음 18 : 9 - 14)

서 론 : 주님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의 자세를 말씀하셨습니다. 기도는 자신의 의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낮추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자세가 필요함을 알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같은 말씀을 하신 것은 바리새인들의 기도가 지나치게 자기의 의를 나타내며 남을 정죄하고 자기를 높이는 일을 서슴지 않기 때문에 이에 대하여 교훈해 주신 것입니다.


1. 바리새인의 기도

바리새인은 따로 서서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따로’란 말은 별도로 란 의미로 그는 기도할 때에도 세리 같은 죄인과는 함께 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따로 기도한 것입니다. ‘바리새’란 말은 원래가 분리한다는 뜻을 나타내고 있는데 이들은 기도할 때까지라도 분리를 철저하게 보인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기도할 때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그 감사란 것이 자신들은 의롭다고 하는 감사기도였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의인인줄 알았습니다. 주님이 잃은 양의 비유에서 하늘에서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회개한 죄인 한 명을 인하여 더 기뻐하라고 하셨는데 그 의인이란 바로 이런 바리새인들을 가리키신 것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의로움을 율법과 장로들의 유전에 기준을 두었습니다.

그들은 도덕적으로 토색 불의 간음하지 않은 일에 대하여 의로운 줄 알았습니다. 그들은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는 종교적 행사를 빠짐 없이 실시하고 있는 일을 의로운 행실로 알았습니다. 그들은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고 있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의의 조건으로 여겼습니다. 이 바리새인은 다른 사람을 판단하면서 자신은 그 같은 죄인이 아닌 사실에 대하여 감사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회개가 어찌 있을 수 있었겠는가 짐작이 가는 것입니다. 이 같은 의인들에게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가 어찌 필요했겠는가 너무도 잘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의 기준

우리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의 기준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앞에 완전한 의를 요구하십니다.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의란 흠과 티가 없는 완전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죄인으로 태어나는 인류 중에는 의인을 찾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의인의 표준으로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이 표준 236 \ 누가복음

에 미달하는 죄인들은 오직 심판이 있을 뿐입니다. 누가 감히 하나님 앞에 자신의 의를 감사할 자가 있겠는가. 다만 그 앞에서 송구할 뿐이요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는 회개만이 나올 뿐이 아니겠습니까? 바리새인들이 자기들은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율법의 온전한 의를 이룰 수 없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이 주시는 의를 찾아야 할 것이었지만, 그들은 율법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여 그 의를 이루려는 노력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를 거절한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율법의 의도 얻지 못하고 하나님의 의도 얻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3. 세리의 기도

우리가 이 비유에서 바리새인은 율법을 지킴으로 의를 얻으려는 유대인들을 말하는 것이요 세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를 얻으려는 이방인을 가리킨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리가 기도한 그의 태도와 결과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그는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로 인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갈보리에서 바라볼 때 누가 감히 눈을 우러러 바라볼 자가 있겠습니까? 죄 값은 사망이요, 나의 이 같은 죄와 허물이 결국은 하나님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하였다는 사실 앞에 우리는 이 같은 사랑을 베푸신 하나님 앞에 감히 눈을 우러러 바라볼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 때문입니다. 감사 때문입니다. 감격 때문입니다.

(2) 세리는 다만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고 했습니다. 가슴을 친 것은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참을 수 없는 자신의 죄에 대한 통회입니다. 죄인들이 이때 가슴을 치는 애통함이 나오는 것입니다. 마음을 찢는 회개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회개가 구원에 이르는 회개입니다. 세리는 하나님 앞에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고백했습니다. 십자가 밑에 엎드린 심령이 하나님께 아뢸 수 있는 기도는 ‘하나님이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고 하는 고백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어찌 자기 의를 주장하며 다른 형제를 판단하여 자신의 선함을 내세울 수 있겠습니까?


4. 하나님의 판결

하나님은 이 두 사람 중에 과연 누구에게 의의 선포를 내리셨습니까?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 사람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사람이란 세리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세리에게 의를 주셨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하나님의 의는 율법에서 얻는 것이 아니라 237 \ 누가복음

죄를 통회하여 하나님께 불쌍히 여기심을 받는 그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하여 의를 선고하시기 때문입니다.


결론 : 주님은 결론적으로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스스로 낮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보시고 그리스도의 의를 주십니다. 구원을 주십니다. 평안함을 주십니다. 소망을 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면 하나님은 그를 낮추십니다. 음부에까지 낮아질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아무 것도 받지 못합니다. 우리는 이 세리와 같은 심정으로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낮추어야 할 것입니다. 낮추는 방법이란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께 통회하며 그의 자비와 긍휼히 여기심을 받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여러분은 이 아침에 세리의 모습으로 하나님께 나오셔서 하나님의 찾으신 바 되어 하나님의 위로와 축복을 받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104) 천국과 어린아이

(누가복음 18 : 15 - 17)

서 론 : 천국은 어린아이들에게도 필요한 곳입니다. 그러므로 어린아이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어린아이들은 종교에서 예외적으로 제외되어 왔습니다. 우리 주님은 기독교와 어린아이들과의 관계를 명시하심으로 어린이들도 믿음으로 의를 얻으며 믿음으로 소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인격이 교회에서 존중되었고 오늘날 교회에서 불같이 일어나는 유년 주일학교의 부흥은 참으로 놀랄만한 것입니다.


1. 제자들의 꾸지람

사람들이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주님께 가까이 나왔습니다. 예수님의 만져 주심을 바라고 왔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안수하심과 축복 기도를 받기를 원해서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제자들이 그들을 꾸짖음으로 주님 곁으로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가뜩이나 분주하고 번거로운 선생을 어린아이들로 말미암아 더 귀찮아 질 것 같아서였습니다. 말하자면 어른들도 제대로 가까이 오지 못하며 말씀을 듣거나 기도 받는 일에 심히 어려운데 얘들까지 달라붙으면 어떻게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은 어린아이들과는 상관이 없으신 분이신 줄로 여긴 것입니다. 그들은 어린아이들에 대하여 생각하기를 인격적으로 상대가 안될 대상이라고 여겼으며 하나님의 나라와는 상관이 없는 존재인 줄로 알았으며 복음을 전할 대상이 안 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이 같은 생각과 행동은 즉각적으로 주님의 심한 꾸중을 들었습니다.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더 이상 어린아이들이 예수님께로 오는 것을 금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어린이들은 이제 교회에서 어른들과 똑같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어엿한 성도로서 대접을 받게 된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주님의 놀라운 말씀은 다시 계속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자의 것이라고 하신 말씀에는 두 가지 뜻이 들어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나라는 어린아이들이 들어가는 나라이며, 다른 하나는 어린아이들과 같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받들지 못하면 어른들이라도 들어갈 수 없는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신 점입니다.

(1) 하나님의 나라는 어른들만 들어가는 곳이 아닙니다. 그곳에는 어린이들도 들 239 \ 누가복음

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 역시 어린이들의 마음 속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는 것입니다. 어린이들도 하나님의 나라의 일원이라면 우리는 그들의 생명을 귀히 여기며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대접을 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도 우리 주님께서 피를 흘리심으로 구원하신 백성들이며 피로 값 주고 사신 하나님의 소유이신 것입니다.

어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것과 똑같이 어린이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른들의 생명만 귀중한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들의 생명도 똑같이 귀중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린이들이 복음을 듣는 기회가 어른들의 경우에 비하여 적기 때문에 믿는 사람의 가정에서 자기 자녀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해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잘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신6:6-8).

(2) 주님은 어린아이를 가까이 세우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자의 것이라고 하신 것은 그후에 말씀하신 것처럼 비록 어른들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나라를 어린아이들과 같이 받들지 아니하면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신 뜻입니다.

이 말씀은 어린아이들의 성품과 복음을 듣고 믿는 일에 있어서 단순하며 듣는 대로 잘 받드는 태도를 가리키신 것입니다.

① 어린이들은 전하는 대로 믿는 영적 단순함이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세상 재물이나 정욕이나 탐식이나 음란의 죄악성이 아직 깊이 물들지 않았기 때문에 전하는 대로 믿는 것입니다.

② 그리고 어린이들은 무엇이건 단순하게 받아들입니다. 진실을 말하면 진실을 받아들입니다. 거짓을 말하면 또한 그것을 받아들입니다. 잘못된 것을 가르치면 잘못된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에 복음을 전하면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③ 그들은 일단 복음을 받아들이면 믿음으로 잘 자라나며 하나님의 나라를 잘 섬깁니다. 잘 받드는 것입니다.


결론 : 여기서 주님이 우리들에게 강조하시는 것은 어린아이들의 심령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된 대로 믿고 그것을 단순하게 받아들이며 그 나라를 받드는 생활을 해야 할 것이라고 하시는 교훈이십니다. 이런 심령은 어떻게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회개하는 마음에서 오는 것입니다. 자기를 낮추고 겸손해 질 때 가질 수 있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어린이들은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잘 대우해 주어야 할 뿐 아니라 그들을 심령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받들어야 할 것입니다.


(105) 한가지 부족한 것

(누가복음 18 : 18 - 23)

서 론 : 한 부자 청년이 큰 번민에 싸였습니다. 그는 젊은 나이에 부러울 것이 없는 인생을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는 관원이라고 했습니다. 관원이란 아마도 ‘산해드린’ 의원을 가리키고 있는 듯 싶습니다. 그는 큰 부자였다고 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율법을 잘 지키는 생활을 해온 견실한 모범적인 청년으로 보입니다. 그가 하루는 주님을 찾아 와서 영생에 관한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이 질문은 오늘날 모든 사람이 똑같이 던져야 할 질문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청년은 주님으로부터 어떤 해답을 받았으며 그 결과는 어찌 되었습니까?


1. 영생을 갈망한 청년

이 청년은 영생을 갈망했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세상에 있는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고 하는 영적인 기갈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돈만 가지고서는 인생의 만족을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돈이 손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돈이면 인생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줄로 알지만 실상 돈이 들어오고 보면 인생의 갈증은 더한 것입니다.

그는 율법을 지켜오고 자기 자신은 율법적으로 흠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마음속에는 영생의 확신을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율법의 목적은 죄를 보여주고 그 죄를 정죄하는 것이지 영생을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생의 마음에 영생의 확신을 주거나 평안함을 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의 고민은 견딜 수가 없어서 예수님을 찾아 나선 것입니다. 그는 처신은 참으로 잘 한 일입니다. 그는 바른 해답을 찾을 수 있는 참 생명의 길에 들어 설 수 있는 해답 자를 만난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에는 이 청년과 같은 애타는 심정으로 주님을 찾아 나오는 청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인생의 바른 해답을 얻을 수 있는 가장 좋은 곳으로 찾아 나온 것입니다.


2. 청년이 생각한 예수

그런데 이 청년은 처음부터 무엇인가 잘못된 듯한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 던진 질문 중에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선한 선생님이여” 이처럼 예수님을 부른 것입니다. 이 청년은 예수가 참으로 누구이신 지 몰랐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소문은 들었고 그의 가르치심에 대하여 들었지만 그가 생각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가 아니라 선한 선생님으로 서였습니다. 그는 예수야말로 자기보다 더 완벽하게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다, 그의 교훈에는 무엇인가 뜻깊은 것이 있다, 그는 모든 일에 있어서 선하신 분이시고 그의 교훈은 인생들에게 새로운 교훈으로 아마 영 241 \ 누가복음

생에 관한 문제에 대하여 바른 해답을 줄 수 있는 열쇠를 가지고 계실지 모른다, 아마 이렇게 생각하고 주님을 찾아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말하기를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고 질문했습니다. 여기서 이 청년은 특히 구원 문제를 행위에 결부시키고 있는 사실에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여야 하나이까? 그는 영생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인간의 노력과 그 행함에 따라 얻을 수 있는 보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율법주의자들의 모순인 것입니다.


3. 주님의 답변

주님은 이 청년을 사랑스럽게 보셨습니다. 젊은 나이에 그래도 이만한 인생의 고민을 안고 영생의 길을 찾아 나선 그를 대견스럽게 보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영생이 어떤 행함의 대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인 사실을 깨닫게 해 주기 전에는 영생의 길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에게 “네가 계명을 아나니” 하시면서 율법의 조항을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주님은 1계명부터 4계명까지의 하나님과의 관계에 관한 것은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대인관계의 계명만을 말씀하셨습니다. 왜 이리 하셨습니까? 대개의 경우,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완벽하다 시피 잘 지켜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말씀에 자기는 어려서부터 그런 것은 잘 지켜오고 있다고 대답하면서 뭐 다른 교훈이 없는가? 자기 마음의 갈증을 해갈해 줄 수 있는 참된 교훈이 업는가? 이런 식으로 다음 답변을 기다린 것입니다.


4. 한가지 부족한 것

주님은 이때를 놓치지 아니하시고 “네가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가를 알려주시기 위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 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말씀에서 그 청년에게 부족한 한가지 사실을 어떻게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까? 이 문제에 대하여 성경을 풀이하는 학자들마다 그 견해가 형형색색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의미를 지녔든지 우리에게 크나큰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주님의 말씀에서 보이고자 하시는 주님의 뜻을 찾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그 청년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돈을 사랑하는 마음보다 부족하였다는 데 있습니다. 그는 돈 때문에 영생을 갈망하는 주님의 바른 해답을 따를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의 대답이 옳다고 여기면서도 돈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영생의 길을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청년은 실상인즉 율법의 참된 정신을 저버리는 생활을 해왔다는 것을 주님은 그에게 가리키신 것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242 \ 누가복음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마22:37-39). 이 청년의 경우 이 같은 율법의 정신을 저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깨우치기 위해서는 그의 재산을 버리게 하는 길 외는 없었습니다. 돈은 일만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사랑할 때 그렇다는 것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침륜에 빠진다고 하셨습니다. 돈을 사랑할 때 그런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청년은 우선 돈의 노예의 상태에서 벗어나기 전에는 하나님의 나라의 은혜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결론 : 결국 그 청년은 돈을 버릴 수 없었습니다. 이제 그는 자기에게 부족한 한가지가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알면서도 행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근심하면서 집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고 하신 말씀은 바로 이런 경우에 해당되는 것입니다(눅13:24). 그는 자기의 부족을 알면서도 행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처럼 돈의 위력은 막강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하시고 하나님과 겸하여 돈을 사랑할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영생을 사모해도 돈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영생의 길이 막혀져 있고 하나님 나라의 문에 굳게 닫혀져 있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106) 부자와 하나님나라

(누가복음 18 : 24 - 34)

서 론 : 부자가 하나님이 나라에 들어가기가 마치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제자들에게 대단히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많은 사람에게 매우 충격적인 말씀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러나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고 말씀하심으로 구원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주권 적인 역사를 시사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말씀의 진의는 무엇입니까? 이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재물과 하나님의 나라

주님이 이 말씀을 하시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재물이 많은 한 부자 청년이 영생을 바라보고서도 그 길을 버린 사실을 바라보시면서 제자들에게 교훈하신 실물교육이었습니다. 그러면 주님은 재물이 있는 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왜 어렵다고 하셨습니까? 물론 이 말씀은 아직 믿지 않고 있는 중생이 안된 상태에 있는 사람을 가리키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성경 여러 곳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그가 소유한 재물이 하나님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에게는 재물이 곧 그들의 하나님입니다. 말하자면 재물이 그들의 섬기는 주인인 것입니다. 그들은 이 자신의 절대적인 주인을 어떤 경우에도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 같은 사실을 방금 부자 청년의 경우를 통하여 바라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해석하는 일은 여러 가지로 복잡한 문제가 따릅니다. 이 말씀을 어떤 사람들은 예루살렘에는 ‘침공 문’이라고 하는 작은 문이 있는데 약대를 가지고 그곳으로 들어가려면 먼저 짐을 부리고, 다음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야 통과되는 문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같은 문이 있건 없건 이 주님의 말씀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을 강조하시는 비유적 설명이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이 같은 주님의 비유적 설명은 간혹 성경에 나옵니다.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겨질 것이요”라고 하신 말씀도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다고 하시는 하나의 비유적 설명이신 것입니다(마17:20).


2.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제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너무나도 충격적인 말씀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천국에 들어갈 자가 누구이겠느냐고 즉각적으로 묻게 된 것입니다. 244 \ 누가복음

그들이 이렇게 물은 것은 그들이 부자여서가 아닙니다. 세상에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모두 부자 되기를 바라고 살아가는데 그렇다면 그들이 목적을 달성한다면 한결 같이 천국에는 들어 갈 수 없을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들은 부자 되기를 포기해야 할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크게 놀랄만한 일이 아닐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주님은 “무릇 사람의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을 할 수 있느니라”고 말씀하심으로 이 문제에 대한 바른 해답에 혼선을 빚은 듯한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부자라고 무조건 다 못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들어가게 하시면 들어갈 수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일은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능하십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천국에 들여보내실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그 사람으로 하여금 회개케 하시는 일입니다. 회개란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회개케 하지 아니하시면 회개할 자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누구를 회개시킵니까? 이에 대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다만 생명 책에 기록된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의 전권 적인 주권에 속하신 문제일 뿐입니다. 다음에 하나님은 그 사람으로 구원을 이루게 하시기 위하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물을 다 흩어버리게 하시는 방법으로 하실 수도 있습니다. 이 방법도 하나님만이 구원하시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하실 수 있는 방법입니다.


3.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재물과 가족을 버리는 자의 축복

이때 베드로가 재빨리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재물을 버리고 주님을 뒤쫓았습니다. 이에 대하여 주님은 그들이 받을 하나님 나라의 상급을 말씀하셨습니다(29-30).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다는 말씀은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그리스도인의 신앙 자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소유를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사용하는 사람의 경우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들은 어떤 축복을 받게됩니까? 금세의 축복으로는 여러 배를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 안에는 영육간의 복이 복합적으로 들어가 있습니다. 가족의 구원, 가정의 평안, 온 가정의 축복 등 여러 가지로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에 내세의 축복으로는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영생은 인생 최대의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희생적으로 일한 사람들의 상급은 분명하다는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을 멀리하면서까지 부자가 되려는 욕심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가장 귀중한 생명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우리는 베드로의 고백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서라도 주님을 따르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집이라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버리고, 가족이라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는 일이라면 버릴 수 있는 신앙적인 자세나 결심은 우리들에게 놀라운 축복이 약속되어 있는데 이 세상에서도 여러 배의 축복을 받고 내세에는 영생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이 말씀을 하시면서 당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당하실 고난을 알려주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바치는 자신의 모든 것을 털어놓으셨습니다. 그는 죽으시고 그후에 부활하실 것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지만 이 말씀을 깨닫는 제자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이 같은 고난으로 그에게 어떤 보상이 온 것입니까? 만왕의 왕, 만주의 주가 되신 것입니다(빌 2:6-11). 우리도 주님이 말씀하신 이 언약의 말씀을 따라 주님의 고난을 짊어질 수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롬 8장에는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107) 한 소경거지의 간구

(누가복음 18 : 35 - 43)

서 론 : 주님이 여리고로 가실 때의 일입니다. 한 소경이 길가에 앉아 구걸하다가 예수가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만나 자신의 인생의 가장 큰 문제를 해결 받은 사실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이 거지의 이름이 이곳에는 없지만 막 10:46에 보면 ‘바디매오’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가 하는 일은 길가에서 구걸하는 일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육신이 멀쩡한 사람은 구걸을 못하고 소경 같은 병신들만 허락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소경거지가 어떻게 기적의 체험을 했는가에 대하여 알아보려고 합니다.


1. 예수의 소문을 들었다

예수의 소문이란 곧 복음을 말합니다. 예수의 소문을 듣고 그를 만나는 일은 생명을 얻는 일입니다. 오늘날에도 사면에 예수의 소문이 퍼집니다. 우리도 이 소문을 펼치는 소문 꾼 들입니다. 곧 전도하는 사람들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교회에 나오는데 어떤 사람은 이 소경 거지처럼 예수를 만나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냥 따라 다니는 많은 군중들 모양으로 구경만 하다가 되돌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1) 이 사람은 가장 비참한 자리에서 이 소문을 들었습니다. 이 거지는 행복한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소경인데다가 구걸하는 신세였습니다. 아무런 소망이 없었습니다. .이런 때에 나사렛 예수가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듣게 된 것입니다. 가장 효과적인 전도의 대상은 모든 것이 풍족한 중에 행복한 살림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인생의 가장 비참한 고난에 처해 있는 사람, 질병 중에 누워 있는 사람,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 이런 사람들에게 예수의 소문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의 이름은 절망 중에 있는 사람에게 소망을 주기 때문입니다.

(2) 누구에게나 예수를 만나는 기회가 있습니다. 이 소경은 자기가 만나보고 싶을 때 언제나 예수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가 예수를 만난 것은 자기 일생의 절호의 기회였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만나는 일은 흔하게 나타나는 일이 아닙니다. 만날 만한 절박한 시기는 그의 인생 가운데 얼마 안 되는 것입니다. 그 기회를 놓치면 다시 만나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부자 청년은 만나는 절호의 기회를 가졌기는 했지만 구원의 기회를 잃어버린 후 그는 다시는 예수를 만날 수 없었습니다.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고후6:2). 각 사람에게는 은혜를 베푸실 때가 있고 구원받을 만한 날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날과 이 기회를 잘 포착하여 생명을 얻고 은혜를 받으며 응답을 받게 되시기 바랍니다.


2. 소경의 간구

이 소경은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칠세라 예수를 붙잡기로 한 것입니다. 소문을 듣는 것만으로 행운이 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를 직접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지나가시는 예수를 자기에게 머물도록 붙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소경은 예수님을 향하여 큰 소리로 외친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길은 그를 향하여 외치는 길입니다. 이 외침은 그의 간구를 말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1) 그는 외쳤습니다. 그가 간절히 간구한 기도를 말합니다. 간절한 기도만이 예수님의 귀에 들립니다. 이 기도 소리만이 가시는 예수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실 수 있습니다.

(2) 그의 기도는 주위 사람들에 의하여 방해를 받았습니다. 시끄러우니 잠잠 하라고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소경은 더욱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간절한 기도는 낙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3) 그의 기도는 계속적이었습니다. 계속적인 기도는 주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십니다.

(4) 그는 자기의 비참한 상태를 호소했습니다. 바리새인처럼 자기의 의를 자랑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자비와 긍휼에 호소한 것입니다.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 호소였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가장 비참한 처지를 그대로 주님 앞에 드러내 놓고 그의 불쌍히 여기심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3. 기도의 응답

예수님은 가시던 길을 멈추셨습니다. 그리고 그 소경을 데려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는 예수님과 만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고 물으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기도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주십니다. 목적이 불분명한 기도는 중언부언하는 기도입니다. 이때 소경은 주여 내가 보기를 원하나이다. 그가 원하는 분명한 목적을 제시한 것입니다. 주님은 그에게 이르시되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명하심으로 그는 곧 보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이 소경의 기도는 믿음의 기도였습니다. 이 소경이 예수님께 대한 믿음은 겨자씨 같이 살아 있는 믿음이었습니다. 이 믿음이 주님의 기적을 창조한 것입니다.


결론 : 이제 이 소경은 완전한 변화 받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소경이 아니기 때문에 길거리에 앉아 거지 노릇을 할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예수를 영접한 사람은 육신의 일에 얽매여서는 안됩니다. 이 소경처럼 그 자리에서 변화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일어서야 하는 것입니다. 그는 눈을 떴습니다. 주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영의 눈이 열린 것입니다. 우리의 영의 눈은 세상의 눈에 감겨질 때 열리는 것입니다. 두 눈이 동시에 열려질 수는 없습니다. 이 소경 거지는 그 거리에서 일어났을 때 새로운 눈이 열린 것처럼 세상에서 여러분의 눈을 주님께로 돌리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신령한 눈이 열릴 것입니다. 이 소경은 새로운 생활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거지 생활을 청산하고 주님을 따르는 생활에 들어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이 소경처럼 예수님을 만나고 그의 능력을 체험하고 신령한 눈이 열려서 세속적인 우리의 생활에서 일어나 주님을 위하여 살아가는 새로운 변화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