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新約]강해/◆ 사복음서 · 사도행전 강해-1

요한복음 1-9 장 ◆ 밤중소리

영국신사77 2020. 4. 12. 17:35


요한복음 차례

제 1장(1-8)

1. 하나님이신 예수그리스도(본문 : 요한복음 1 : 1 - 3) 

2.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본문 : 요한복음 1 : 1 - 3) 

3.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본문 : 요한복음 1 : 4 - 11)

4.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본문 : 요한복음 1 : 12 - 13)

5.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본문 : 요한복음 1 : 1 - 14) 

6. 독생하신 하나님(본문 : 요한복음 1 : 15 - 18) 

7. 세례요한이 이룬 사명(본문 : 요한복음 1 : 19 - 34) 

8. 와 보라(본문 : 요한복음 1 : 35 - 51)


제 2장(9-12)

9. 예수님의 때(요한복음 2:1-4)

10. 순종과 결실(요한복음 2:1-11) 

11. 포도주의 변화(요한복음 2:9-11)

12. 성전을 청결하게 하신 주님(요한복음 2:12-25) 


제 3장(13-18)

13. 중생의 교리(요한복음 3:1-7) 

14. 성령으로 난 사람(요한복음 3:1-13) 

15. 인자도 들려야 하리라(요한복음 3:14-15) 

16. 하나님의 사랑(요한복음 3:16) 

17. 하나님의 심판기준(요한복음 3:17-21) 

18. 요한의 기쁨(요한복음 3:22-36) 


제 4장(19-23)

19. 사마리아 여인에게 주신 생수(요한복음 4:1-19) 

20.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요한복음 4:20-26) 

21. 그리스도인의 양식(요한복음 4:27-38) 

22. 사마리아 여인의 전도(요한복음 4:28-42) 

23. 왕의 신하의 믿음 (요한복음 4:43-54)


제 5장(24-28)

24. 네가 낫고자 하느냐?(요한복음 5:1-9) 

25.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한복음 5:10-18)

26. 아들과 아버지와의 관계(요한복음 5:19-23)

27. 사망에서 생명으로(요한복음 5:24-29)

28. 심판 주로서의 증거(요한복음 5:30-47) 


제 6장(29-35)

29. 오병이어의 기적(요한복음 6:1-15) 

30. 주님이 안 타신 배(요한복음 6:16-21) 

31. 하나님의 일(요한복음 6:22-29) 

32. 하늘에서 내려온 떡(요한복음 6:30-36)

33. 아버지의 뜻(요한복음 6:37-40)

34. 예수님의 살과 피(요한복음 6:41-59) 

35.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요한복음 6:60-71)


제 7장(36-39)

36. 예수님의 때(요한복음 7:1-9) 

37.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요한복음 7:10-24)

38. 유대인의 메시야관(요한복음 7:25-36)

39. 목마른 자는 내게로 와서 마시라! (요한복음 7:37-53)


제 8장(40-47)

40.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한복음 8:1-11) 

41.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한복음 8:12-18) 

42.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요한복음 8:19-27)

43. 인자를 든 후에 알리라(요한복음 8:28) 

44. 아버지와 함께 하신 예수님(요한복음 8:29-30) 

45. 진리가 자유케 하리라(요한복음 8:31-32) 

46. 아들이 자유케 하리라(요한복음 8:33-47) 

47. 하나님께 속한 자와 속하지 아니한 자(요한복음 8:47-59)


제 9장(48-51)

48. 하나님의 하시는 일(요한복음 9:1-7) 

49. 소경의 확실한 증거(요한복음 9:8-12) 

50. 담대한 증인이 된 소경(요한복음 9:13-34) 

51. 보는 자들을 심판하러 오신 예수(요한복음 9:35-41) 


제 10장(52-56)

52. 양과 목자(요한복음 10:1-6) 

53. 예수님이 오신 목적과 도적이 온 목적(요한복음 10:7-10) 

54. 선한 목자(요한복음 10:11-18) 

55. 그리스도와 그의 양(요한복음 10:19-29)

56.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한복음 10:30-40)


제 11장(57-61)

57. 마르다의 가정과 예수님(요한복음 11:1-4) 

58. 낮 열 두 시가 아니냐(요한복음 11:5-6) 

59. 마르다의 신앙고백(요한복음 11:17-27) 

60. 무덤에서 살아난 나사로(요한복음 11:28-46) 

61. 악인을 통해 이루시는 하나님의 뜻(요한복음 11:47-57) 


제 12장(62-68)

62. 옥합을 깬 마리아(요한복음 12:1-8) 

63. 나사로 까닭에(요한복음 12:9-11) 

64.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요한복음 12:12-19)

65. 한 알의 밀알(요한복음 12:20-26)

66. “이 때를 면케 하옵소서”(요한복음 12:31-33) 

67. 이 인자는 누구냐(요한복음 12:37-43) 

68. 아들과 아버지(요한복음 12:44-50) 


제 13장(69-74)

69. 끝까지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요한복음 13:1-11) 

70. 서로 발을 씻기라(요한복음 13:12-20)

7l. 주여 누구오니이까(요한복음 13:21-30) 

72. 주님이 얻으신 영광(요한복음 13:31-33)

73. 새 계명(요한복음 13:34-35)

74.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요한복음 13:36-38) 


제 14장(75-81)

75.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요한복음 14:1) 

76. 주님이 예비하신 처소(요한복음 14:1-3) 

77.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요한복음 14:4-6) 

78. 아들과 아버지와의 관계(요한복음 14:7-10) 

79. 더 큰 일도 하리니(요한복음 14:12-15)

80.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요한복음 14:16-20) 

81. 성령의 약속(요한복음 14:21-31) 


제 15장(82-85)

82. 참 포도나무와 그 가지(요한복음 15:1-6) 

83. 기도 응답의 비결(요한복음 15:7-11) 

84. 예수님의 계명(요한복음 15:12-17)

85. 세상과 그리스도인(요한복음 15:18-27) 


제 16장(86-89)

86. 성령의 세 가지 사역(요한복음 16:1-11) 

87.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요한복음 16:12-15) 

88.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한복음 16:16-32) 

89.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한복음 16:33) 


제 17장(90-93)

90. 영생은 무엇인가?(요한복음 17:1-3) 

91.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신 예수님(요한복음 17:4-8) 

92.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한복음 17:9-12) 

93.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요한복음 17:13-26) 


제 18장(94-97)

94. 아버지께서 주신 잔(요한복음 18:1-11) 

95. 베드로의 실패(요한복음 18:12-27) 

96. 내가 왕이니라(요한복음 18:28-38) 

97. 바라바를 선택한 무리들(요한복음 18:39-40) 


제 19장(98-101)

98. 예수를 넘겨준 빌라도(요한복음 19:1-16) 

99. 십자가 위의 죄패 (요한복음 19:17-22)

101. 장례를 치른 숨은 두 제자(요한복음 19:23-37) 


제 20장(102-105)

102. 막달라 마리아와 부활하신 예수님(요한복음 20:1-18) 

103. 주님이 주시는 평강(요한복음 20:19-20) 

104. 성령을 받은 자의 권세(요한복음 20:21-23) 

105. 도마의 신앙(요한복음 20:24-31) 


제 21장(106-108)

106. 디베랴 바다에 나타나신 주님(요한복음 21:1-14) 

107.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복음 21:15-17)

108. 베드로의 남은 생애(요한복음 21: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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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장(1-8)

◆ 밤중소리 03-02 | VIEW : 4,825

1. 하나님이신 예수그리스도(본문 : 요한복음 1 : 1 - 3) 

2.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본문 : 요한복음 1 : 1 - 3) 

3.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본문 : 요한복음 1 : 4 - 11)

4.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본문 : 요한복음 1 : 12 - 13)

5.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본문 : 요한복음 1 : 1 - 14) 

6. 독생하신 하나님(본문 : 요한복음 1 : 15 - 18) 

7. 세례요한이 이룬 사명(본문 : 요한복음 1 : 19 - 34) 

8. 와 보라(본문 : 요한복음 1 : 35 - 51)


≈ 1 ≈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본문 : 요한복음 1 : 1 - 3)


서 론 : 요한복음은 네 복음 가운데서 제일 뒤에 기록된 성경입니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이라 불리는 다른 세 복음과 

그 내용에 있어서 공통점이 거의 없을 정도로 독특한 내용이 담긴 책입니다. 

서두에 나와 있는 예수님의 족보에 있어서 

마태복음에서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하여 

아브라함에게까지 거슬려 올라가고, 

누가복음에는 시조 아담에게까지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의 근원을 

“로고스”에까지 올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마태복음은 유대적이요, 

누가복음은 인류적이며, 

요한복음은 우주적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1. 요한복음의 저자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람은 사도 요한입니다. 

요한이란 말은 히브리어인 ‘요하난’이란 말에서 유래된 이름입니다. 

이 말의 뜻은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입니다. 

신약성경에는 다섯 사람이 요한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원래 세례요한의 제자로 있었던 세베대 사람이었지만 

그후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고 갈릴리의 고기잡이 어부였던 그의 형제 야고보와 함께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입니다. 

사도요한은 열두 사도 중에 가장 나이 어린 주님의 제자였지만 

가장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제자로 알려져 있기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신앙이 좋은 제자를 세 사람을 뽑아 

중요한 일을 하는 곳에 데리고 다니셨는데 

이들이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요한은 예루살렘에 있으면서 베드로와 함께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과 같은 중요한 자리에 있었습니다. 

요한은 그의 만년을 에베소에서 지냈고 

많은 박해를 견뎌내며 도라얀 황제시대까지(98-111) 살아온 것으로 전해지며, 

열 두 제자 중 유일하게 순교하지 않고 장수하다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도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이나 요한계시록 등도 이때 쓴 저작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그 기록연대가 주후 90연경이었으리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 책이 기록된 목적에 대하여, 책의 말미에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요20:31)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2. 요한복음의 특색

요한복음에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에게 두 가지 성품이 있다는 사실을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그 하나가 그리스도의 인성입니다. 

인성이란 사람의 성품을 말합니다. 

즉 예수님은 사람이시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은 영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그는 사람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에게는 사람으로서의 결격사유가 전혀 없으십니다. 

그의 모든 신체적 조건이 사람과 똑같으신 분입니다. 

그는 분명 사람으로 태어나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인성뿐 아니라 신성이 동시에 있으십니다. 

신성이란 하나님의 성품을 말합니다. 

신성이란 곧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 

바로 이 증거를 위해 기록된 책이 요한복음입니다. 

요한복음은 이 증거에 전체적인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인류의 구원을 위해 보내심을 받은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이 분이 하나님이 아니시면 

인류를 구원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인류는 아담 안에서 죄로 타락한 존재입니다.

인류 중에는 의인은 없나니 한 명도 없습니다.

인간은 다 율법의 저주와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여 있는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같은 아담의 육신적 자녀로 태어나셨다면 

그는 절대로 의인이 될 수 없으며 

죄인을 위한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아니시고 

다만 사람이실 뿐이다”고 말한다면 

그는 우리와 똑같은 죄인일 뿐, 

그에게는 구주의 자격이 있을 수 없다는 무서운 결론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나시기 이전에 존재하셨다고 

요한복음은 그 벽두에서 강력하게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나신 일에 대하여 성경에서 중요시하는 이유는 

그는 아담의 육신적인 자녀가 아니라는 것을 

증거 하려는 의도에서인 것입니다.


3. 동정녀 탄생을 거부하는 신신학

오늘날 신신학의 쓴 물이 온통 신학사상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이 쓴 물이 교회 강단에 올라올 날도 

얼마 안 남은 것처럼 보여지고 있습니다. 

신신학을 간략히 요약하면 ‘성경의 비신화화 운동’을 말합니다. 

성경을 기록했을 당시는 

인간의 지식이나 과학이 발달되지 못한 원시시대였기 때문에 

지금 읽어보면 어리석게 보이는 신화적인 이야기가 많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성경에서 비과학적이며 이치에 닿지 않는 신화를 빼버리고 

진실한 복음만을 추려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같은 학설의 세계적인 권위자는 유명한 ‘볼트만’ 교수입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처녀가 아기를 낳았다는 이야기는 신화에 속하는 이야기지 

복음이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도 비과학적인 신화니 

이런 것도 성경에서 빼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것저것 다 빼면 남는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분명히 사람이시지만 

아담의 혈통으로 태어난 사람이 아니라 

새로운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에 대하여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예수님을 가리켜 둘째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난 사람입니다. 

아담의 후손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으로 보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하늘에 속한 사람이기 때문에 죄가 없으십니다. 

그리고 그의 생명은 영원합니다. 

죄로 물든 사람의 생명이 아니라 

영원히 거룩하신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오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 같은 그리스도의 신분을 증거하기 위하여 

그가 아담의 씨로서가 아니라 말씀이 잉태되었다고 증거 해주고 있습니다. 

남자를 알지 못하는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났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결 론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그의 독생자를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의 독생자를 보내심으로 증거 되셨습니다. 

그 독생자는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같은 지식은 인간의 지식으로는 도저히 미칠 수 없는 

높은 곳에 있는 지식입니다. 

주님은 이 일에 대하여 마 11:27에서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 2 ≈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

(본문 : 요한복음 1 : 1 - 3)


서 론 : 인생에게는 시작과 끝이 분명히 있습니다. 인생의 시작은 어머니의 배에 잉태되었을 그때입니다. 다윗은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고 말했습니다(시51:5). 우리의 존재는 이미 창세 전에 하나님께 알려진바 되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 신 바 되어 생명책에 우리의 이름이 기록은 되었지만 그때 우리가 어떤 영적인 존재로 존재해서가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미리 선택되었을 뿐입니다(엡1:3-6). 그리고 인생의 끝은 죄 값인 사망으로 그 종말이 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인생은 이처럼 시작과 마지막이 존재하는 것인가? 그 이유는 인생은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1. 그리스도의 선재성

성경은 그리스도의 선재성을 증거 해줍니다. 선재성이란 이 세상에 태어나시기 이전에 이미 존재하셨던 분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요한계시록 22:13절 말씀에서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알파와 오메가란 말이나, 처음과 나중이란 말이나, 시작과 끝이란 말이나 다 같은 뜻을 나타내고 있는데 시작과 끝이 모두 영원하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시작도 영원하시려니와 그 끝 역시 영원하십니다. 그것은 예수님은 피조물이 아니시라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버지께로 나와서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고 말씀하셨는데 내가 아버지께로 나왔다고 하신 것은 내가 아버지와 함께 있다가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가리키시는 것입니다(요16:28). 요한복음은 바로 이 사실을 증거 해주고 있습니다.

① 그리스도는 피조물이 아니시다.

②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③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는 본질상으로 하나님과 동일하신 분이시다.

④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체시지만 그 안에서 독립된 인격적인 한 위를 가지고 계시다.

요한복음은 이런 사실을 중점적으로 증거 하면서 그리스도의 신성, 곧 그가 하나님이심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복음의 특징입니다. 만약 요한복음이 우리에게 없었더라면 “영원하신 하나님은 오직 한 하 나님이시며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로 계신다”고 하는 우리 기독교의 삼위일체의 참 진리가 증거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2.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1절에 있는 말씀은 말씀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나타낸 것입니다. 그리고 14절에 가서 이 말씀이 육신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증거 하므로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기원과 그의 존재에 대하여 분명한 해답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태초란 말씀의 기원을 말해주며 하나님의 기원도 태초에 말씀과 함께 계셨다고 증거 하므로 말씀의 기원과 하나님과의 기원이 동일하심을 나타냈습니다.

그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말씀이란 헬라어로 ‘로고스’로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를 전후하여 세계의 정치 문화 판도는 헬라의 결정적인 영향을 받아왔습니다. 헬라의 알렉산더 대왕은 주전 333년경에 메데바사와 유다를 정복하여 헬라문명권을 이루었습니다. 주후 43년에 헬라는 로마제국에 의하여 패하고 이스라엘은 다시 로마의 통치 아래 들어갔지만 헬라문명권의 영향 아래서 지내게 되었으므로 헬라어가 그 당시의 표준어처럼 사용되었고 모든 문서가 헬라어로 기록되었던 것입니다.

이 같은 헬라문명의 영향을 받으며 자라온 예수님의 제자들도 성경을 기록하는데 있어서 헬라어를 사용한 것입니다. ‘로고스’란 말은 바로 헬라의 철학자들이 즐겨 써 온 말인데 철학적으로 ‘마음속의 생각’, 또는 ‘사고 자체’란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헬라 철학자들은 우주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철학적으로 탐색하며 연구하는 일을 활발히 전개해 왔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우주와의 관계에서 그 중간 사이에 어떤 알지 못하는 매개체가 있다’고 생각했으며 그 매개체를 ‘로고스’라고 불렀습니다. 말씀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요한은 그 로고스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한 것입니다.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이란 표현으로 요한복음에 등장시킨 것은 영원 전에 계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나타내고자 한 말이 아니라 “말 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하신 증거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가 이미 창세 전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시려고 사용된 말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하나님과 같은 분으로 나타내는 가장 적절한 이름은 바로 “말씀”이라는 말입니다.

(1) 하나님은 그의 마음속의 생각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영원한 이름을 말씀이라고 표현한 일은 적절한 이름이라고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고 하셨는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나타내신 분이시므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신 것입니다(요12:49, 14:10, 24).

(2) 예수님은 무엇이 진리인가에 대하여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자신을 가리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진리인 것은 아버지의 말씀을 가지고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십니다.

(3) 히브리서 1:2에서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아들은 이처럼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로써 보내심을 받은 분입니다. 그래서 그는 곧 “하나님의 말씀”이십니다.

3.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요한은 증거하기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말씀의 기원을 나타낸 것입니다.

4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그 생명의 시작에 있어서, 그 존재에 있어서, 그 성품에 있어서, 그의 모든 속성에 있어서, 하나님과 완전히 일체를 이루고 계시는 분입니다. 요한 사도는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결론적으로 하나님이라고 정의를 내린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두 분이신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십니다. 한 분이라고 하는 하나님은 그의 본체에서 오직 유일하신 한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유일하신 한 하나님은 세 위의 인격을 지니고 계십니다. 그 중에 한 위가 말씀으로 나타내신 성자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체시며 완전한 하나님이십니다.

결 론 : 사도 요한은 조심스럽게 그리스도의 선재성을 이같이 증거 하면서 결론적으로 그리스도는 곧 하나님이시라고 논증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시기 전에 누구로. 계셨던 분이신 가에 대하여 그는 하나님으로 계셨다고 하는 사실을 너무나도 명료하게 밝혀 놓은 것입니다. 요한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만물의 창조주가 되심을 말함으로써 그가 결코 피조물이 아니며 창조주이신 하나님이심을 더욱 분명하게 밝혀 놓은 것입니다. 어떤 이유에서이든 창조주는 피조물이 될 수가 없으며, 이 세상에 피조물이 아닌 존재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신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심과 성령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단의 역사는 그리스도는 피조물이라고 가르치는 일입니다.


≈ 3 ≈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본문 : 요한복음 1 : 4 - 11)

서 론 : 예수 그리스도는 신비에 싸여 있는 존재이십니다. 그는 인간의 상상이나 사고나 이해나 경험을 초월하여 존재하시는 분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만이 그 분의 존재를 증명해 줄 수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말씀은 빛과 생명으로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빛이나 생명은 오직 하나님만이 소유하고 계시는 비공유적인 하나님의 속성입니다.(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가지고 계실 뿐 다른 아무 피조물에게도 존재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성품을 가리켜 비공유적 속성이라고 말합니다).

1.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

태초부터 계셨던 말씀은 곧 하나님이신 데 그가 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일에 대하여 1절로 3절에 거쳐 그 근원을 밝혀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 안에는 생명이 있었는데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다는 말은 “말씀”은 곧 생명이라고 하신 뜻입니다. 생명이란 말은 “조에”인데 이 말의 의미는 모든 것의 원인이 되며 근본이 되는 생명의 본질을 말하는 것입니다. 말씀은 바로 생명 자체이시기 때문에 모든 만물에게 그의 생명을 공급해 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같은 그의 넘치는 생명을 공급받은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나사로의 죽은 현장에 가셔서 슬퍼하는 마르다에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는 참으로 생명 그 자체이신 것입니다.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신 것도 그가 바로 생명이시기 때문이며, 죽은 사람들을 다시 살리시는 부활의 권능이 그분에게 있는 것도 그가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그의 생명은 바로 알파와 오메가의 생명이기 때문에 그의 생명의 시작과 끝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저희가 가로되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6:33-35).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하나님의 떡으로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생명 그 자체이신 예수님만이 오직 “내가 곧 생명의 먹이라”고 말씀하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2. 빛으로 오신 예수님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의 생명은 이 세상에 빛으로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생명이란 말과 빛이란 말은 같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빛으로 나타나셨기 때문입니다. 요한1서 1:5에서 “하나님은 빛이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실 때 이 빛을 세상에 나타내셔서 빛과 어두움을 나누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요12:45절에서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다”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빛으로 세상에 오신 분입니다.

우리는 창세기의 빛의 창조를 잘못 연구하면 빛 자체의 창조인 줄로 오해함으로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창조설을 주장하는 이단에 물들기 쉽습니다. 창세기1:4에는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창조역사가 시작되기 이전은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상태”였습니다. 말하자면 어둠에 깔려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같은 흑암의 상태에서 빛이 있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게 된 하나님의 역사 는 빛되신 하나님께서 그의 빛을 이 세상에 비추시도록 들어내 놓은 사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어둠을 한 곳으로 물리치시고 빛을 나타내시어 이 세상을 빛과 어둠으로 갈라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빛 가운데서 세상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보시기에 좋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 여러 곳에서 어둠의 세력을 찾아보게 됩니다. 유다서 1:6에서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혹암에 가두셨다”고 했습니다. 이 같은 말씀은 벧후2:4절에서도 똑같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계9:1에 나온 말씀을 보면 무저갱이란 곳이 나옵니다. 이곳에는 수도 없이 많은 악령의 존재들이 거처하고 있으며 열쇠로 그 곳을 열 때 그 악령들이 이 세상에 올라와 사람들에게 들어가 첫째 화를 초래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어두움의 세상에 첫째 날의 역사로 빛을 보내시어 어둠과 빛을 나누셨지만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오히려 어둠의 사자인 사단을 따르게 됨으로 다시금 어둠이 세상에 깔리게 된 것입니다. 어둠이란 죄악을 말하며 예수님은 이 죄악된 어둠의 세상에 빛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빛은 다음 세 가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1) 이 빛은 어둠을 물리치는 빛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의 어둠을 물리치시기 위하여 오신 분입니다. 그러나 빛이 어둠에 비추되 어두용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했습니다. 깨닫지 못했다는 말은 그 빛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 빛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지 못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두움은 빛을 싫어합니다. 빛 가까이 있거나 그 빛을 받아드리기를 원치 아니합니다. 다만 성령으로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들만이 빛으로 인도하심을 받게 되며 빛의 자녀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빛이시기 때문에 그를 영접하는 사람들은 어둠이 쫓겨갑니다. 어둠이 그의 인생을 지배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험악하고 중한 죄악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라도 한번 이 빛에 비취기만 하면 진흥같이 붉은 죄가 흰눈 보다 더 희어지는 것입니다. 어두움인 죄악과 사망의 권세는 그에게서 물러가고 의와 생명의 권세가 그를 지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2) 다음에 이 빛은 사망권세를 영원히 추방하는 빛이십니다. 이 빛이 오기 전까지는 모든 사람들은 다 어둠의 자식들이요 사망권세 아래서 사단의 지배를 받아왔습니다. 그러나 이 빛을 받으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3) 그리고 이 빛은 하늘의 생명을 공급해 주는 빛이십니다. 누구든지 이 빛을 받으면 하늘의 생명을 받습니다. 이 생명의 빛을 받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4) 세례요한은 이 빛의 증거자로 보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 빛에 대한 최초의 증거자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은 세례요한입니다. 빛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사람들에 의하여 증거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이 빛을 세상에 증거하므로써 많은 사람으로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빛의 증거자는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세례요한은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태어난 사람입니다. 세례요한은 빛에 대하여 끊임없이 증거하는 생애를 보냈습니다. 그의 결실은 그의 활동보다 큰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 같은 일이야말로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결정적인 역사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결 론 : 아직도 이 땅에는 어두움에 잠겨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빛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세례요한의 사명을 가지고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므로 모든 사람으로 우리를 인하여 예수를 믿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 4 ≈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

(본문 : 요한복음 1 : 12 - 13)

서 론 : 예수 그리스도는 어둠의 세상에 빛으로 오셨건만 마땅히 이 빛을 받아 생명을 얻어야 할 세상은 그 빛을 깨닫지 못하므로 여전히 죄악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죄로 어두움에 깔려 있는 이 세상에 그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께서는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세상을 다시 빛과 어두움으로 갈라놓으시기로 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지금 이 세상은 빛의 자녀와 어두움의 자녀들로 나뉘어져 있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일은 하나의 권세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늘 위에나 하늘 아래에는 많은 권세가 있지만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친히 부여해 주시는 권세 중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있습니다. 이 권세야말로 그 어떤 권세보다 우선하는 권세이며 위대한 권세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왜 ‘권세’란 이름을 불이셨는가에 대하여 알아보아야 합니다.

(1)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음부의 권세를 이기게 됩니다. 음부의 권세란 사망의 권세 또는 지옥의 권세를 가리킵니다. 이 권세를 가지고 죄악과 사망의 칼을 휘두르는 자는 바로 사단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을 받았으며 그 빛을 소유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와 같은 사단의 권세가 절대로 미칠 수도 없고 우리를 이길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야말로 놀라운 권세라고 말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그 어떤 존재도 우리를 정죄 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양심의 정죄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도 이 양심의 소리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 범죄하고 자살하는 사람도 이 양심의 소리에 견디지 못해서입니다. 흉악한 범죄자가 스스로 자수하는 일도 그의 양심이 그를 끊임없이 괴롭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계명을 율법이라고 합니다. 이 율법은 그것을 지키는 자는 그 율법으로부터 의를 얻지만 만약 그 율법을 어겼을 때는 준엄한 정죄를 받는 것입니다. 모든 인류는 이 율법의 정죄 아래 놓여 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정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사람이라고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면 하나님의 자녀는 이런 양심이나 율법의 정죄를 받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양심이나 율법은 하나님께 속하지 않고 있는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하나님의 법입니다. 이 법의 최종적인 목적은 구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그같은 정죄가 필요치 않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진리에 대하여 우리에게 깨우쳐 주기를 롬8:1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3)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하나님의 기업의 상속자가 됩니다. 하나님의 기업은 무엇인가? 아마 사람들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기업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바른 지식을 가지고 깨닫는다면 하나님께 나오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업은 천국입니다. 이 천국의 아름다움과 그 호화로움은 요한계시록 21장과 22장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곳이 얼마나 좋은 곳인지 사도 바울은 “현재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비한다면 능히 비교할 수 없다”고 단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롬8:18) 하나님의 이 같은 상속자의 자격은 재벌이나 학벌이나 가문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에게만 주시는 하나님의 특권임을 명백히 밝혀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야말로 놀라운 권세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이 주십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이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지 않겠느냐”(롬8:32)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7:31)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을 하기만 하면, 우리가 그의 뜻대로 구하는 생활을 계속 하기만 하면, 우리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생활을 하기만 하면, 우리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시며 우리의 쓸 것을 미리 아시는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일이야말로 권세라고 말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2. 이 권세롤 받을 수 있는 방법

그러면 어떤 사람들이 이와 같은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가지고 축복된 생애를 살아갈 수 있는가?

(1)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접한다는 말은 그저 막연히 소유한다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자기 속에 가지는 깊은 소유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같은 소유물은 너무나도 귀중하기 때문에 결코 잊어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소유물은 값진 보화이기 때문에 자기의 모든 것을 희생해서라도 이 보화를 자기의 소유로 만드는 것입니다.

(2) 영접한다는 말을 더 알기 쉬운 말로 표현한다면 그 이름을 믿는 것이라고 풀이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것은 곧 말씀이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은 목구멍에서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진정한 신앙고백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마음속에 깊숙이 들어오고 그의 빛이 마음속에 어두움을 물리치고 예수를 내 인생의 왕으로 모신 심령 속에서 나오는 신앙고백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3) 이 권세를 가진 사람들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마땅히 하나님이 생산해 내셔야 하는 것입니다. 혈통으로 난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가 없습니다. 혈통이란 피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아브라함의 혈통으로 태어난 것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육정이란 말은 혈육을 가진 인간을 말합니다. 혈육을 가진 인간의 모습으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사람의 뜻이란 인간의 주권적 의지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싶다고 해서 그와 같은 자신의 의지적인 생각이나 판단이나 노력으로는 절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4)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란 어떤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인가? 하나님께서 피로 값 주고 사신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리킨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하신 그의 백성들로 자기의 아들이 되게 하시기 위해 말할 수 없는 회생을 치르셨습니다. 그 아들을 죄 있는 사람의 모습으로 세상에 보내셨을 뿐 아니라 우리들을 자기 아들들이 되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를 지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의 고통으로 우리를 해산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머니가 자기 태에서 난 자기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못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사50:15).


결 론 : 우리는 이 놀라운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깨닫고 우리의 심령을 새롭게 하고 아버지가 원하시는 기쁘신 뜻대로 사는 생활을 통해서 위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우리들은 더욱 놀라우신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 5 ≈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본문 : 요한복음 1 : 1 - 14)

서 론 : 예수님은 임마누엘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은 멀리 구약에 이사야 선지자로 예언하신 바요, 마태복음 1:23절에서 예수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하신 말씀을 통하여 확인되었습니다. 임마누엘이란 이름의 풀이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곧 임마누엘이 되신 것입니다.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란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에 대한 해석은 빌립보서 2:5-8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이시며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시지만 자기를 낮추시어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는데 이것이 곧 말씀이 육신이 되신 일이며, 이 같은 일이야말로 임마누엘의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1. 삼위의 하나님

하나님은 삼위로 계십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는 하나님의 삼위를 나타내신 것입니다. 이 삼위는 제각기 인격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은 그 본체가 하나이십니다.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본체는 오직 하나이십니다. 하나님은 삼위의 인격으로 자신을 나타내시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존재를 셋으로 구분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 존재에 있어서 오직 하나이신 유일하신 한 하나님이십니다. 성부, 성자, 성령은 한 본체이시기 때문에 권능도 동등이시며 영광도 동등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부를 가리킬 때에도 그분은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의 본체는 오직 하나이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자를 가리킬 때에도 그 분은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의 본체는 오직 하나이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하나님의 본체의 하나이심과 위의 삼위이심에 대하여 성경에 계시된 진리를 잘 깨달아 미혹에 영의 함정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여기서 1절로 거슬러 올라가면 주님은 말씀으로 하늘에 계셨던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 말씀은 하나님이 계셨던 그 무궁한 태초부터 계셨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의 기원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것으로 이 같은 사실을 확실하게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이란 분은 곧 하나님 그 분이시라고 논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다시 설명을 보충해서 그분이 왜 하나님이시냐 에 대하여 2절과 3절에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2절 -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절 - 만물이 그가 없이는 된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한 것은 말씀이신 예수가 하나님이신 사실을 충분히 증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2. 말씀이 어떻게 육신이 되셨나?

말씀이,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어떻게 육신이 되셨는가에 대하여 성경은 하나도 그 경위를 숨기지 아니하고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가 육신으로 새롭게 창조함을 받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신 예수가 육신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이것은 창조가 아니라 화신(化身) ‘인카네이션’인 것입니다. 그는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었습니다. 말씀이 육신으로 변화되려면 사람의 몸에서 태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은 이처럼 사람이 되시기 위하여 동정녀의 몸을 빌리시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이 동정녀의 몸에 어떻게 잉태될 수 있는가? 이 같은 변화는 인간의 생각이나 방법으로는 상상활 수조차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처녀의 몸 안에 사람으로 잉태된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창조적인 기적의 권능이 아니시고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성령을 통해서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그리스도의 잉태에 대하여 성령으로 잉태되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누가복음에서 마리아와 천사와의 대화가 나옵니다. 마리아는 “네가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할 것이라”고 하는 천사의 전갈에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이 말에 천사는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이신 말씀은 육신을 지니신 예수의 이름으로 인간의 역사 위에 사람의 모습을 가지시고 살아가게 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육신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계실 때에도 그 자신이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본체이심에 틀림이 없으셨던 것입니다.


3. 말씀이 육신이 되신 이유

우리는 왜 말씀이 육신을 입고 임마누엘로 세상에 오셨는가에 대하여 몇 가지 사실에 대하여 정확하게 알아야 하겠습니다.

(1) 그 첫째 이유가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을 인간에게 나타내시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말씀을 많이 듣습니다. 그러면 그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우리에게 나타나셨는가에 대하여 우리에게 아무런 증거가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사랑의 분명한 증거로써 그의 아들을 육신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보내셨던 것입니다(롬5:7-8).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고 하신 그 사랑이란 바로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으로 확실히 증명된 것입니다(요3:16).

(2) 하나님은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인간은 죄로 죽게 되었으며 하나님은 이 같은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뜨거운 사랑을 갖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담의 후손이 아닌 사람 중에서 죄 없는 온전한 인간이 나와서 인간의 죗값으로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아 죽지 아니하면 죄인들을 구원하실 길이 없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이 같은 희생 제물로 삼으시기 위하여 말씀이 육신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히2:14-18).


4.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에서 그의 영광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본다는 말은 “찾아본다, 만나본다, 깨닫는다”는 뜻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주의 깊게 관찰하는 일을 의미합니다.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영광은 사람들이 주의 깊게 관찰하지 않으면 바라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이처럼 자세히 관찰하여 깨달을 때 그분에게서 발견하는 것이 있습니다. 첫째로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을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의 신성울 찾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고 한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예수로부터 독생자의 영광을 바로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음에 은혜와 진리가 그분에게 충만한 것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 ‘카리스’는 죄인에게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뜻하며, 진리는 ‘알레데이아’ 곧 하나님의 불변적인 말씀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자세히 관찰하는 사람은 그분이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이 보내신 은혜의 선물이요, 이 마지막날에 친히 그 아들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진리로 오신 분이심을 깨달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결 론 : 그리스도는 이처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임마누엘이십니다. 그의 신분은 하늘보다 높으시고 그의 존재는 우주보다 장엄하십니다. 그분은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한 평생 동안 이 분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관찰하고 연구하여 그분에게서 나타나는 독생자의 영광을 바라보는 신령한 눈을 가짐으로써 소망에 흔들리지 말며 그에게서 충만하신 은혜와 진리를 공급받아 은혜와 진리가운데 살아나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 6 ≈ 독생하신 하나님

(본문 : 요한복음 1 : 15 - 18)

서 론 :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1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온 우주적 인격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함께 계시는 말씀이시며, 우주만물의 창조주이시며, 그는 빛이시며, 생명이시며, 말씀이 육신이 되신 독생자이시며,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분이라고 묘사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 있는 신령한 눈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이 눈을 가지지 못했던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왕이시오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버린 것입니다.

독생자의 영광이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의 말씀을 들으며 그의 실존을 알게되는 것입니다. 독생하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 자는 곧 하나님을 본 자요, 그의 말씀을 들은 자는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자이며, 그의 존재는 곧 하나님 자신의 존재를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의 빛이 있고 그분에게는 은혜와 진리로 충만하십니다.


1.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데 우리는 그의 충만한 것으로부터 이 은혜와 진리를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충만하다는 말은 언제나 철철 흘러 넘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그가 가지고 계시는 은혜와 진리를 계속하여 공급해 주셔도 역시 은혜와 진리는 계속 충만하신 것입니다. 그는 바로 은혜와 진리 그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1) 하나님께는 은혜도 하나요, 진리도 오직 하나이십니다. 하나님은 인류에게 구원의 방법을 여러 갈래로 나누어주시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에게 은혜가 충만하시다 는 말씀은 그가 하나님께로 가는 구원의 길로 오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이 세상에 살아가는 모든 인간은 죄인들입니다. 죄인들인 인간에게는 은혜와 진리가 존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들에게 주신 사랑의 선물이십니다. 이 선물은 그를 믿는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이 같은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고 하셨습니다. 진리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날 마지막에 그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진리는 사람을 자유케 합니다. 진리는 사람에게 생명을 공급해줍니다. 예수는 바로 이 진리이십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은혜가 되시는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기 때문에 언제나 은혜 위에 은혜가 넘치는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의 풍성한 생명의 공급을 말씀해 주십니다.

(2) 우리는 은혜가 되시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습니다. 이에 대하여 주님은 “내가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요 6:35).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오직 예수뿐입니다. 은혜가 넘치는 예수는 우리에게 구원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풍성한 생명을 공급해 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고 말씀하셨습니다.

(3) 그리스도는 진리 그 자체가 되시기 때문에 그에게는 이 진리가 충만합니다. 우리가 그에게 가까이 나가면 진리의 충만함을 받으며 진리 위에 진리가 넘치는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이 진리는 하나님을 아는 진리를 말합니다. 빛을 아는 진리입니다. 생명을 발견하는 진리를 말합니다. 그에게 가는 자는 이 진리의 공급이 영원히 그치지 아니합니다. 지금도 이 시간 우리는 이 진리의 공급을 받으므로 진리 위에 진리가 충만한 축복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2. 모세와 그리스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실 때 모세를 중보자로 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율법은 우리에게 죄를 보여주고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무서운 심판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나 은혜와 진리의 전달자는 모세가 아닙니다.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율법과, 은혜와 진리의 전달자의 차이점올 가리켜주신 말씀입니다. 인간의 죄를 정죄하는 율법은 단순한 인간을 통하여 주실 수가 있습니다. 그곳에는 인간의 구원의 역사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일의 적격자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택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와 진리는 사람들에게 죄 사함을 주시고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법입니다. 이 은혜와 진리는 모세나 아브라함이나 다윗 같은 사람으로는 안됩니다. 은혜를 직접 전달할 수 있는 분이라야 하며, 진리를 전달할 수 있는 분이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분은 하나님뿐이십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신 독생자를 이 땅 위에 육신으로 보내셨는데 그분이 곧 은혜와 진리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3. 독생하신 하나님

우리는 18절에 있는 말씀에서 예수님께 대한 새로운 표현을 찾아보게 되는 것입니다.

(1) “독생하신 하나님”이란 말이 그것입니다. 먼저 사도 요한은 증거하기를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구약, 특히 창세기에서 아브라함과 같은 족장들에게 가끔 여호와 하나님으로 나타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나 기타 족장들이 보았다고 하는 하나님은 그 본연의 하나님의 실체나 영광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죄인이 하나님을 보고 살 자가 없다는 것은 죄를 범한 이후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므로 옛날에 족장들에게 나타나 보이신 하나님은 하나의 자기 계시에 불과하십니다. 인간들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자기를 그들에게 나타내 보이신 것입니다.

(2) 이 같은 하나님이 독생하신 하나님으로 자기를 완전히 세상에 나타내신 것입니다. 요한이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자라고 표현한 것은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와의 한 본체를 이루고 있는 신비하신 관계를 인간적인 표현으로 나타낸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나타내시려고 아버지 품속에 계셨던 독생하신 하나님을 세상에 나타내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나타내셨느니라”고 하신 원어의 말뜻은 이끌어 내다 는 뜻입니다. 아버지 품속에 영원 전부터 계셨던 독생하신 하나님, 곧 태초에 계셨던 말씀을 육신으로 태어나게 하심으로 하나님이신 말씀을 세상으로 이끌어 내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이 세상에 오시게 되었습니다.

(3)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한번 분명히 밝혀야하겠습니다.

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체이시기 때문에 말씀이 육신이 되신 후에도 이 같은 그리스도의 신분은 절대로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본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빌2:6, 요14:9).

②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등이신 권능과 영광을 가지신 분이시므로 그리스도를 본 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본 자들입니다.

③ 그리스도는 진리로 오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의 말씀을 들은 자는 아버지의 말씀을 들은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은 완전히 일체가 되시는 분이시므로 주님은 스스로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요12:46). 하나님은 독생하신 하나님을 육신의 모습으로 세상에 보내심으로 누구나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게 하셨으며, 누구나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볼 수 있게 하셨으며, 누구나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하셨으며, 누구나 그를 보고 믿음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결 론 : 하나님은 이토록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 안타까운 심정을 그의 아들로 나타내셨습니다. 우리는 은혜와 진리가 되시며 스스로 충만하신 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입니다. 그로부터 영원히 갈하지 아니하는 생명의 생수를 마시며 영원한 진리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이런 위대하신 분을 모시고서도 우리는 얼마나 생명에 메마른 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얼마나 진리에 갈급한 생애를 보내고 있습니까? 그의 풍성한 것으로부터 충만하고 넘치게 받아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그리스도인의 성공적인 생애를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 7 ≈ 세례 요한이 이룬 사명

(본문 : 요한복음 1 : 19 - 34)

서 론 : 예수님이 계시는 곳에 그의 증인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예수님의 증거자로 이미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세례 요한입니다. 세례요한은 각 복음서마다 예수님과 함께 등장합니다. 그리스도의 증거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등장하는 것입니다. 요한은 그리스도를 세상에 들어내 놓은 최초의 증거자였습니다. 증거란 말은 ‘말투스’로, 이 말의 뜻은 증인 또는 순교자란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의 증인은 그리스도만을 높여야 합니다. 그리스도만을 증거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만을 들어내야 합니다. 그 리스도만을 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기를 바쳐야 합니다. 그래서 증인이란 말과 순교자란 말이 동일하게 쓰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바로 이런 사명으로 태어난 사람이요, 이런 사명에 철저한 생애를 보낸 사람이요, 이 사명을 이루다가 순교한 사람입니다.


1. 네가 누구냐?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공생애에 들어가셔서 활동하시기 전에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이 요한의 세례를 받으려고 요단강에 모여들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먼저 요한이 왜 세례를 이스라엘에게 베풀었느냐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세례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주게 된 동기에 대하여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고 말했습니다. 주의 길을 곧게 한다는 말은 메시야를 맞이할 길을 예비하는 것으로 이 길은 메시야를 맞이할 백성들의 회개운동을 뜻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물로 폼을 씻는 일은 죄를 회개하는 표시였습니다(레 8:6). 세례요한은 이 같은 세례로써 메시야를 기다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운동을 일으킨 것입니다.

(2) 다음에 세례요한이 세례를 준 또 다른 한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세상에 나타내려고 세례를 베풀었다는 사실입니다.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31). 세례요한은 물론 예수님에게 세례를 주기 이전에도 서로간에 잘 알고 있는 사이였습니다. 그들은 어머니 편으로 가까운 친척지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알게 된 것은 그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을 때입니다. 이 같은 사실에 대하여 세례 요한은 스스로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 인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 하였노라”(33)고 말했습니다.

(3) 세례요한이 남데 없이 요단강에 나타나 이스라엘에게 세례를 주는 일에 놀란 사람들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여기서 유대인들이란 율법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는 공회원들을 말합니다. 자기들의 관할 하에 있는 사람도 아니요 자기들의 승인도 받은바 없는 일개 무명청년이 회개를 외치면서 세례를 주었음으로 이 일에 대한 조사에 착수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에 대하여 소상히 알고 있는 제사 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그의 정체를 알아오도록 명령했습니다.

(4) 그들은 요한에게 네가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요한은 이 물음에 숨기지 아니하고 들어내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세례요한이 혹 그리스도가 아닌가하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는 자기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때까지 공생애에 들어가시기 전이시므로 세례요한이 혹 그리스도가 아닌가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아니라면 그러면 너는 엘리야냐? 라고 물었습니다. 엘리야는 말라기 4:5에 나오는 인물인데 엘리야는 그곳에서 세례 요한으로서의 사명이 주어져 있습니다. 예수님도 세례 요한을 향하여 오리라고 한 엘리야가 이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유대인들은 이 엘리야에 대하여 구약시대의 인물인 엘리야와 같은 위대한 하나님의 선지자가 나타나는 줄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세례 요한은 나는 아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들은 세 번째로 그러면 네가 그 선지자냐? 고 물었습니다. 그 선지자란 신명기 8:15에서 모세가 예언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리니”라고 한 그 선지자로, 이 선지자는 바로 메시야에 대한 율법적인 약속의 표현이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세례요한은 또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2. 세례요한의 증거

그들은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하는 세례 요한을 향하여 너는 내게 대하여 무엇이라고 하느냐? 고 따져 물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고 있었으며 그의 사명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기의 사명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요 이사야를 통하여 예언된 선지자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요한은 그들에게 이사야가 예언한 말씀을 인용하여 자기가 누구인가에 대하여 그들에게 증거 했습니다.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고 증거 했습니다.

(1) 내 뒤에 오시는 이는 얼마나 위대하신지 자기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세례 요한의 훌륭한 점은 그는 자기에 대하여 높이지 아니하고 자기가 증거 해야 할 그리스도에 대해서만 높였다는 사실입니다. 세례 요한이 “나는 쇠하고 그는 흥하여야 하리라”고 말한 것처럼 나는 언제나 작아지고 내가 증거 하는 그리스도는 언제나 높여져야 하는 것입니다.

(2) 세례요한은 29절에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나오심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고 증거 했습니다. 이 말의 뜻은 인류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속죄제물이란 의미입니다. 세례요한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바른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사야 53장에 예언된 고난의 종으로서의 메시야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알았던 것입니다. 어린양은 구약적인 제물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어린양은 온 세상의 죄를 젊어지고 인류의 속죄 제물로 십자가를 지실 분이심을 나타낸 말입니다.


결 론 : 세례요한은 한때 시험에 빠진 일도 있었지만(마11:1-3), 예수가 하나님의 어린양이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이시오,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실 분이심을 확실히 믿는 믿음을 가지고 그를 증거 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 때 그의 머리 위에 비둘기 같은 성령이 머무시는 것을 보고 자기에게 이르신 하나님의 명령과 일치함으로 담대하게 증거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일에는 세례요한 같은 확신과 하나님의 증거와 담대함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너무나도 많은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알고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요5:39). 성경의 계시와 성령의 증거는 우리로 확신과 담대함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증거 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 8 ≈ 와 보라 !

(본문 : 요한복음 1 : 35 - 51)

서 론 : 세례요한에게는 여러 명의 제자들이 그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 위대한 광야의 선지자를 스승으로 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세례요한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시에 의하여 나사렛 예수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게된 후로부터 이스라엘에게 메시야 되신 예수를 나타내시는 일에 자신을 바쳤습니다. 어느 날 제자들과 함께 서있을 때 예수의 지나가심을 보게 되었습니다. 세례요한은 제자들을 향하여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했습니다.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쫓았다고 했습니다. 이 두 제자는 안드레와 요한 자신이었습니다. 이 두 제자는 자기 스승을 배반하여 예수를 따른 것이 아니라 스승의 권면을 따라 주님을 따른 것입니다.


1. 예수님의 전도 방법

안드레와 요한이 스승의 권면에 의하여 예수를 따르기로 결심하고 예수님의 뒤를 쫓을 때 예수님은 그들을 돌이켜 바라보시고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1) “무엇을 구하느냐” 구하느냐는 말은 ‘제테오’로 찾는다, 생각한다, 원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를 보고 무엇을 생각하며, 무엇을 찾느냐는 뜻입니다. 주님을 따르려는 자들에게는 그리스도의 무엇을 보고 무엇을 생각하며 무엇을 찾느냐고 하는 뚜렷한 목표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먼저 이 같은 마음의 자세를 알기를 원하십니다. 만약 주님으로부터 세상의 어떤 것을 바란다면 주님은 자기를 따를 것을 결코 원치 아니하실 것입니다. 주님은 세상의 그 어떤 것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하여 오신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그는 생명의 떡으로 오셨으며 이 떡을 나누어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안드레와 요한은 세례요한의 말을 듣고 주님을 따랐는데 그 말은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어린양이란 말은 생명의 떡을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속죄제물로써 그를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기 때문입니다.

(2) 그들은 주님의 물으심에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계신 곳을 알기를 원했습니다. 찾아가 주님을 만나 그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는 주님이 계신 곳을 알아둘 필요가 있었습니다.

(3) 주님은 이 말에 “와 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와 보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따라 어디 계시는지 가보니 그들은 주님과 함께 지내게 되었으며 결국 주님의 제자가 된 것입니다. 주님의 전도방법의 비결이 여기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와 보라”는 것입니다. 이 방법은 다른 제자들에 의하여 그리스도를 전하는 전도에 가장 유용한 방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들이 “와 보라”고 하신 말씀에 따라 가본 결과 예수께서 메시야이신 사실을 참으로 깨달아 확신하게 되었고 제자까지 되는 영광마저 누리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전도의 대상자를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곳으로 인도해야 합니다. 말씀을 듣지 않으면 메시야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했습니다(롬10:17).

예수님을 우물가에서 만난 사마리아 여인은 주님과의 대화를 통하여 그분이야말로 메시야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우물가에 물동이를 그대로 버려둔채 성안으로 달려가서 성안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하면서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 아니냐”고 했습니다(요4:29). 여인의 이 같은 전도 결과 그 성안에 살고 있는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2.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

세례요한의 제자 두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 주님의 제자가 되자 그들의 전도를 통하여 3명의 친구들이 주님 앞으로 인도함을 받아 그 제자의 수효가 다섯 명이 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1) 안드레와 요한의 경우를 보겠습니다. 안드레와 요한은 세례요한의 제자로 최초로 주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세례요한의 직접적인 소개와 권면으로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입니다. 전도의 결실은 처음부터 큰 것은 아닙니다. 세례 요한으로부터 시작된 전도가 두 제자의 결실로 해서 계속하여 누룩처럼 번져서 지금 온 세계에 편만 하게 된 것입니다.

(2) 시몬 베드로의 경우를 보겠습니다. 요한과 안드레는 와 보라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 주님을 쫓아가 보니 그의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이야말로 자신들이 기다리던 이스라엘의 메시야이심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먼저 자기형제 시몬을 찾아가 자신의 놀라운 경험을 전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은 그리스도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그리스도를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자 하는 뜨거운 열의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안드레는 그리스도를 만난 일과 그에게서 들은 말씀을 전해줌으로 자기 형제 베드로를 주님 앞으로 끌어오게 되었습니다. 이 같은 안드레의 전도방법은 오늘날 교회의 전도방법의 시발점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만나 자신이 예수를 만난 결과를 사람들 앞에서 간증하게 되면 그 다음에는 그 사람을 예수 앞에 데리고 나오는 일입니다.

(3) 빌립의 경우를 보겠습니다. 빌립은 갈릴리로 나가시려는 길가에서 만난 사람으로 그는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아마 그는 예수님을 따라가는 안드레와 베드로를 바라보고 무엇인가 말을 주고받았을 것입니다. 그는 그들로부터 여기 계시는 이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이 기다리는 메시야라는 말을 들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빌립에게 “나를 쫓으라”고 하셨습니다. 이때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함께 주님을 따르므로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입니다.

(4) 나다나엘의 경우를 보겠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그의 제자가 된 빌립은 자기 친구 나다나엘을 찾아갔습니다. 전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자기가 만난 예수는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많은 선지자들이 예언한 메시야이신데 그분이 바로 나사렛 예수라고 증거 했습니다. 나다나엘은 빌립을 향하여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고 일축해 버리려고 했습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는 나다나엘의 말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태어나실 메시야의 출생지는 베들레헴이지 나사렛이 아님을 말한 것입니다(미5:2). 이때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와 보라”고 말했습니다. 나다나엘은 빌립의 와보라고 하는 권고를 듣고 주님 앞에 나갔던 것입니다. 나다나엘은 가본 결과 주님과의 대화를 통해서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나다나엘은 자기의 심령까지 꿰뚫어 보시는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이처럼 고백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누구든지 와 보면 모든 편견과 잘못된 인식을 고치고 그의 말씀을 통해서 그가 참으로 생명의 구주이심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에게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고 말씀하심으로 나다나엘의 신앙이 더 장성하면 더욱 놀라운 영적 체험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결 론 : 와 보라는 말은 ‘엘쿠 카이 이데’로, 온다는 것은 접근을 뜻하고 보라는 것은 주의 깊은 관찰을 의미합니다. 주님께 가까이 접근하는 일은 말씀으로 가까이 나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일은 곧 그를 만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주의 깊게 관찰하는 연구를 통하여 참으로 그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전하려면 우리가 만난 예수를 그들에게 똑바로 전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그 앞에 오도록 “와 보라”고 이끌어야 합니다. 가장 훌륭한 전도는 주님 앞으로 그 사람을 데리고 나오는 일입니다. 전도 대상자에게 찾아가 “와 보라” 그들의 손을 이끌고 그들로 주님께 와 보도록 강권하는 방법보다 더 좋은 전도의 방법은 없습니다.


요한복음 2장 (9-12)

◆ 밤중소리 03-02 | VIEW : 3,955

9. 예수님의 때(요한복음 2:1-4)

10. 순종과 결실(요한복음 2:1-11) 

11. 포도주의 변화(요한복음 2:9-11)

12. 성전을 청결하게 하신 주님(요한복음 2:12-25)


(9) 예수님의 때

(요한복음 2:1-4)

서 론 : 가나란 곳은 나다나엘의 고향입니다. 가나에서 서남 편으로 약6킬로 가량 가면 예수님의 고향인 나사렛이 있습니다. 이 곳에서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이 잔치에는 예수님의 어머니도 계셨고 예수님도 그의 제자들과 함께 초청 받아 참석하고 계셨습니다. 많은 학자들은 가나 혼인잔치의 주인공이 나다나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혼인집에 즐거운 시간이 흐르는 중에 한가지 어려운 일이 생겼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진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그 아들에게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말을 전했습니다. 주님은 어머니를 향하여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고 말씀했습니다.


1. 때를 따라 움직이신 예수님

우리가 성경을 살펴보면 주님은 모든 일에 때를 따라 움직이셨다는 사실을 찾아 알 수 있습니다. 인생의 범사에는 정하여 준 분명한 때가 있습니다. 때를 정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시킬 때가 있으며…” (전 3:1-8). 울 때, 웃을 때, 슬퍼할 때, 춤출 때, 사랑할 때, 미울 때 등 인생의 모든 일이 이 때를 따라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때를 기다리고 그때에 소망을 두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인생에게는 환난이란 것이 찾아올 때가 반듯이 있습니다. 시험이란 것도 때가 되면 찾아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같은 환난이나 시험이 올 때에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 그 받을 때가 되어 받는다는 것을 알고 원망 없이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때란 시기는 하나님만이 정하셨으므로 그만이 알고 계시는데 다만 우리가 피곤함이 없이 참아 기다리면 꼭 하나님의 선한 보응을 받을 것임을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의 때

우리는 우리에게 찾아오는 모든 때에 대하여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 때와 시기를 친히 만드시는 분이심으로 정확히 알고 계시는 것입니다.

(1) 잠시 후의 일이었지만 아직 내 때가 이르지 아니했음을 알고는 어머니의 요구를 거절하신 것입니다. 초막절이 이르렀을 때 예수님의 형제들이 주님을 향하여 예루살렘에 올라가 자신을 나타내라고 권면한 일이 있습니다. 이때 주님은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7:6). 예수님이 많은 군중들 앞에서 공공연히 말씀을 전해도 잡는 사람이 없었는데 이에 대하여 아직 때가 이르지 아니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요8:20).


3. 그리스도인의 때

모든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때를 분별하고 참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1) 때의 원리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울 때가 있으면 웃을 때가 있고 어려움을 당할 때가 있으면 형통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때는 자기가 당하고 있는 한 때가 물러가면 그 다음에는 그 정반대의 때가 찾아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려움을 당할 때가 와도 소망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시험을 만나도 길이 참을 수가 있습니다. 울 때가 와도 웃을 때의 소망을 바라보고 기다릴 수가 있습니다.

(2) 때는 하나님이 주시기 때문에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 7:13-14). 모든 때의 창시자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때를 변경시키시는 이도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3) 우리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방법은 인내하는 방법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어떤 일을 만나도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태도는 인내로 기다리는 방법입니다. 피할 길도 하나님이 주시고 이길 능력도 하나님이 주시며 시험의 때를 단축시키는 권한도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결 론 : 하나님이 이처럼 우리 인간을 섭리하시는 이유는 모든 사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시려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뢰하면 어떤 일이 생기는가? ① 하나님께서 좋은 것을 예비해 두시고 그것을 주시는 것입니다. ②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처지가 어떠하든 그것을 선으로 만들어내실 수 있는 권능을 가지고 계십니다. ③ 때를 따라 은혜를 내려주십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만나도 하나님은 그것을 통하여 우리에게 은혜를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는 은혜는 형통할 때만 받는 것이 아닙니다. 어려움이나 시험을 당할 때에도 더 큰 은혜를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생활을 잘 하면 우리의 길에는 가장 좋은 것으로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때를 따라 축복해 주실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10) 순종과 결실

(요한복음 2:1-11)

서 론 :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 일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줍니다. 이 자리에는 여러 종류의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을 몸소 체험한 사람은 제자들이나 초대받은 귀빈들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주인이 시키는 대로 일을 처리하며 순종하는 하찮은 하인들이었습니다.

1. 무슨 말씀을 하시던지 그대로 하라

혼인집에 흥을 돋구어 주는 것이 있다면 술이라고 할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가정에서는 각기 재배한 포도로 포도주를 담가두고 그것을 귀한 손님에게 혹은 음료로 대접했으며 혹은 잔치 집 같은 경사에 술로 사용해 왔었습니다. 잔치 집에 음식이 떨어졌다면 손님들에게 예의가 아닌 것처럼 잔칫상에 술이 떨어져도 그 분위기가 썰렁해 질 것입니다. 예상외로 많은 손님이 온 까닭에 잔치가 파하기도 전에 중도에 포도주가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포도주를 사올 수도 없고 빌려올 곳도 없으니 주인의 입장으로서는 심히 당황하지 않을 수 없는 딱한 처지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1) 이때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그 아들에게 찾아가 이 같은 사정을 알려주게 된 것입니다. 이 사실로 미루어 보아 아마도 마리아는 그 아들이 이런 일을 해결할 수도 있다고 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어머니는 아들로부터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고 하는 말을 들었지만 그가 아들에게 바라는 간구를 버리지 아니했습니다.

(2) 마리아는 그 곳에 있는 하인들에게 명하기를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했습니다. 순종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합니다. 에덴동산에서도 “선악을 알게 하는 과일을 먹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아담이 이를 불순종했을 때 그는 하나님 앞에 죄인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선택의 자유가 없습니다. 무슨 말씀이든지 그대로 하라고 한 마리아의 태도가 필요합니다.

①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는 분이시며 우리에게 선을 베푸시는 분이시므로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말씀은 우리를 위한 축복의 말씀이십니다.

②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한 진리이기 때문에 그의 입에서 무슨 말씀이 나오든지 그 말씀을 절대로 의뢰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③ 하나님은 우리의 형편을 잘 아시며 네가 감당할 모든 능력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내가 능히 이룰 수 있는 적절한 말씀만 주시고 나에게 유익 될 말씀만을 주십니다.

④ 하나님은 언제나 그 말씀에 책임을 지시고 말씀대로 이루어주십니다.

2. 순종의 태도

예수님은 하인들에게 드디어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인들은 얼마 전에 이 집주인과 친한 관계에 있으며 이 일을 주관하는 마리아의 말을 이미 듣고 있었습니다.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1) 주님이 그들에게 내리신 첫 번째 말씀은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 곳에는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 두 세 통 드는 돌 항아리 여섯이 놓여 있었던 것입니다. 하인들은 주님의 명령이 어떤 뜻을 가졌는지? 그 항아리에 물을 부으면 어떤 결과를 초래할 것인지에 대하여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다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한 마리아의 말에 따라 그 돌 항아리 여섯에 물을 채웠을 뿐입니다. 물을 길어온 하인들 중에 그 누가 그들이 항아리에 부어 놓은 물이 맛이 좋은 포도주가 될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의 뜻은 몰라도 그 말씀에 의지하여 순종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나는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나를 위한 선한 뜻을 가지고 나에게 순종을 명하시는 것입니다.

(2) 하인들은 물을 채우되 아구까지 채웠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온전한 순종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순종을 하되 어느 시점에 가서 포기해 버리므로 아구까지 순종을 못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온전한 순종을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온전한 순종만이 참 순종입니다.

(3) 하인들은 주님의 명령을 따라 그 물을 연회장에게 갖다 주었습니다. 하인들의 생각에는 이상한 일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항아리에 물을 길은 것까지는 그렇다고 해도 그 물을 주전자에 담아 연회장에게 가져다주라는 명령은 어불성설이었습니다. 연회장에는 물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포도주가 부족했던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 때 순종을 포기하면 언약의 축복은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관문에서 낙제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결 론 : 순종의 열매는 맨 끝에 가서 나타납니다. 하인들이 주전자에 물을 채우고 연회장에게 갖다주기 까지 그 주전자 안에는 물 그대로 들어 있었을 것입니다. 끝까지 순종하는 순간, 물이 아구에서 나오는 순간에 가서 포도주가 되어 쏟아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적은 엄청난 믿음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 우리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할 때 기적이 생산되는 것입니다.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은 알더라”고 했습니다.


(11) 포도주의 변화

(요한복음 2:9-11)

서 론 : 혼인집 사람들이 물로 된 포도주를 마셨을 때 그 포도주의 맛이 이전의 것보다 더 좋았다고 칭찬하게 되었는데 이 같은 역사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기적의 역사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기적을 능히 이루실 수 있는 분입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1:3). 주님은 바로 만물의 창조자가 되시기 때문에 돌 항아리에 든 물 뿐 아니라 흥해 전부를 포도주로 만드실 기적의 능력이 있는 분입니다.

1. 첫 이적의 의의

예수님의 첫 이적이 왜 물이 포도주로 변화 받는 것으로 나타났느냐는 문제는 주님의 하시는 구원사업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새로운 변화를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 그리스도의 말씀의 능력 안에 사는 사람들은 물이 포도주가 되듯 새로운 변화가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고후5:17).

이전 것은 마치 무미건조했던 물과 같은 것으로 세상에 얽매었던 지난날의 육신적인 생활을 말합니다. 그러나 새것이란 완전한 변화를 통하여 중생하여 영적인 생활로 하나님을 향하여 열매를 맺는 나, 소망으로 살아가는 나,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나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1) 물은 육신의 열매를 말합니다. 물은 물 이상의 가치를 나타낼 수 없습니다. 인간의 육신의 열매는 썩어질 것을 거둡니다(롬8:6-8). 육신에 속한 사람은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변화가 없는 사람은 이름만 그리스도인일 뿐 실질적으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생활을 못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2) 포도주는 영의 열매를 말합니다. 포도주는 완전한 변화를 상징합니다. 육의 사람이 영의 사람으로 변화 받은 사실을 의미합니다. “육과 영과는 그 가치의 차이가 분명합니다. 이 같은 일에 대하여 갈라디아서에서는 이처럼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그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6:7-8). 그리스도인은 포도주로 변화 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언제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생활을 버릴 수 없습니다.

2. 변화의 비결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변화의 비결을 가나 혼인의 경우를 들어 배울 수가 있는 것입니다.

(1) 혼인집 주인이 자기 집에 초청했습니다. 혼인집은 하나님의 교회를 상징합니다. 혼인집 잔치에 초청을 받은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어린양의 잔치에 초청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이 같은 초청의 소리는 곳곳에서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흥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사1:18). 그러나 사람이 초청을 받아도 그 초청에 응하지 않으면 아무런 유익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 부르심에 순종하여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2) 돌 항아리에 물을 아구까지 채웠습니다. 혼인집 마당에 돌 항아리가 놓여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 돌 항아리란 우리의 굳은 심령, 우리의 더러운 마음을 가리킵니다. 세상에 살아가고 있었을 때 손이나 발을 씻었던 물그릇입니다. 더러운 것들이 담겨져 있었던 그릇입니다. 그 속에 새로운 물로 가득히 채워야 합니다. 새물이란 우리가 세상에서 길어 먹는 그런 물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명하신 바에 따라 길어온 물입니다. 마치 이 물은 야곱의 우물로 물을 길으러 나온 사마리아 여인에게 마시게 한 생수를 말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3-14).

우리의 심령 속에 성령이 임하셔야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성령은 변화시키시는 영이십니다. 육의 사람이 영의 사람으로 변화 받기 위해서는 성령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심령이 성령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3)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영원히 갈하지 않는 생수를 주시는 이유는 내 인생 속에 새로운 기쁨, 새로운 평안, 새로운 소망을 주시려는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생수를 그 마음에 받은 사람은 그 생수로 말미암아 살아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을 따르는 순종의 생활입니다.


결 론 : 포도주는 우리 가정에 기쁨을 선사합니다. 하마터면 즐거운 흥이 깨어질 뻔한 혼인집에 더 좋은 즐거움을 선사했던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변화는 먼저 내 가정에 축복을 받게 합니다. 포도주는 다른 이에게도 기쁨을 줍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주변에 살아가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과 자비와 생명을 공급해 주기 때문에 그들에게 기쁨을 주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은 기적을 창조하는 생활입니다.


(12) 성전을 청결케 하신 예수님

(요한복음 2:12-25)

서 론 :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고 하셨습니다. 

성경에 주님이 유월절을 지키신 일이 네 번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공생애 기간을 만 3년이 조금 넘는 것으로 계산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월절과 무교절은 잇달아 있는 명절로 

유대인들의 성력 1월 14일 저녁이 유월절이요 

그 이튿날 1월 15일부터 21일까지 만7일간이 무교절입니다. 

유월절후 50일인 성력 3월 6일을 오순절이라고 하고 

7월 15일로 22일까지 만 8일간을 초막절이라 하여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 등, 

이 세 절기가 유대인의 삼대 명절로 불려지고 있습니다.


1. 채찍을 드신 예수님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을 때에 

성전에는 유월절을 앞두고 장사꾼들의 무리들로 소란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1) 하나님을 경배하는 성전은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의 무리와 돈을 바꾸는 무리들로 시장바닥처럼 난장판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 절기에는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은 물론이요 외국 전역에 걸쳐 흩어져 있었던 교포들이 돌아오기 때문에 예루살렘 시가지는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외국에서 이 절기를 지키러 온 무리들은 제사를 드리기 위한 제물을 미리 준비하고 돈을 바꾸어 쓰느라 야단법석이었던 것입니다. 

이 같은 일이 처음에는 성전 바깥마당에서 하더니 

차차 그 범위를 넓혀 성전 안에까지 침투해 들어왔습니다. 

물론 제사장들이나 관원들은 이들로부터 뇌물을 받고 묵인해 주었습니다.


(2) 예루살렘에 올라오신 예수님은 이 같은 광경을 바라보실 수 없으셨습니다. 

그는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올 쏟으시며 상올 엎으시고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질책하신 것입니다.


(3) 이것은 우리의 예배드리는 태도를 말해줍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올 때는 온전한 제물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소나 양이나 비둘기처럼 

살아있는 상태로 성전 안에 들어와 하나님께 경배 드린다면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을 실 뿐 아니라 

채찍으로 내여 쫓김을 당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가지고 들어갈 제물은 

십자가에서 온전한 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는 유월절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써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2. 성전 청결의 의미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우리는 신령한 의미에서 우리에게 교훈 하시는 바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알아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심령성전의 청결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몸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고전3:16-17).

우리는 다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이란 말은 하나님이 계시는 처소를 말합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성령이 거하시기 때문에 분명히 하나님의 성전인 것입니다.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성전을 본래의 목적에서 이탈하여 더럽히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가?

(1) 세상풍습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풍습의 줄을 끊어야 합니다. 세상 풍습은 우리로 하나님을 떠나게 하므로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힙니다(롬12:2).

(2) 세상생각입니다. 세상생각이란 이 땅위에 속한 것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생각에 젖어야 합니다. 세상 생각에 짖으면 세상 사람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롬3:2).

(3) 탐심입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골3:5).


3. 하나님의 성전은 어떤 곳이어야 하나

예수님은 성전을 가리켜 말씀하시기를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하셨습니다. 

성전은 우리 아버지의 집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위에 그의 집을 세우신 목적은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만민이 기도하는 집입니다. 

교회는 기도하는 아버지의 집입니다. 

기도하는 장소로써 하나님께서 지정하여 주신 성별된 곳이 바로 성전인 것입니다. 

다음에 하나님의 성전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입니다.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인자를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경배하리이다”라고 다윗은 말했습니다(시5:7).


결 론 : 오늘날 교회는 점점 세속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세상 소망을 바라보고 그곳을 쫓아갑니다. 

세상의 썩어질 면류관과 재물을 바라보고 달음질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불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를 왕래하고 계십니다. 

그의 손에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장사꾼들을 내어쫓으신 채찍으로 드시고 

이런 교회를 내려치십니다. 

우리의 성전을 다만 기도하는 집으로, 예배드리는 곳으로 아름답게 만들어 

언제나 주님이 이 곳에 계셔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 주시고 

우리의 예배를 기쁘게 받으실 수 있도록 힘쓰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 3장 (13-18)

13. 중생의 교리(요한복음 3:1-7) 

14. 성령으로 난 사람(요한복음 3:1-13) 

15. 인자도 들려야 하리라(요한복음 3:14-15) 

16. 하나님의 사랑(요한복음 3:16) 

17. 하나님의 심판기준(요한복음 3:17-21) 

18. 요한의 기쁨(요한복음 3:22-36)


(13) 중생의 교리

(요한복음 3:1-7)

서 론 : 우리는 이곳에서 니고데모라고 하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바리새인이었지만 나다나엘과 같이 그 안에 간사가 없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관한 기사가 성경에 세 곳에 나와 있습니다. 요한복음 7:50에서 예수님을 체포하려는 바리새인들에게 경고를 준 일이 있었으며 요한복음 19:39에서 예수님이 죽으신 후 그의 장례를 위하여 정성을 드린 일에 대하여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같은 니고데모의 훌륭한 일은 그가 어느 날 밤 예수님을 찾아와서 중생에 관한 진리의 말씀을 들은 후부터의 일이었습니다.


1. 니고데모의 예수관

(1) 니고데모는 여러 가지 면에서 완벽하고 존경받을 만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니고데모는 율법을 잘 지키는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생활은 경건하고 또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린다는 말은 메시야를 대망 하는 그의 믿음을 나타낸 말입니다. 그는 공회 의원으로 그 당시 유대교의 최고 종교 의결기관의 관원이었습니다. 그는 주님으로부터도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이라고 불리실 만큼 모든 사람에게 선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2)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랍비’라고 불렀습니다. 랍비란 말은 선생님이란 존경어입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존경할 만한 훌륭한 선생으로 본 것입니다. 예수를 도덕적인 선생으로 보는 일은 바른 신앙관이 아닙니다. 이런 사람은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3) 니고데모는 예수님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으로 알았습니다.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이란 곧 선지자란 뜻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선지자 중의 하나로 알았습니다. 선지자는 메시야가 아닙니다. 선지자는 메시야를 증거 하는 사람일뿐입니다. 예수님을 선지자로 알고 있는 정도라면 아직 거듭나지 못한 사람입니다.

(4) 니고데모는 표적을 보고 이 같은 생각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유대인들은 역사적으로 하나님의 많은 표적을 보아온 사람들입니다. 홍해를 건넌 표적, 만나를 먹은 표적, 반석에서 물을 마신 표적 등 이런 것들이 하나의 신앙의 증거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만 보고는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을 수 없습니다. 표적은 더 큰 표적을 원하기 때문에 결국은 불 신앙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2. 중생의 교리

예수님은 이 니고데모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음을 아셨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사람이 거듭나는 이치에 대하여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거듭나야 하는 이치에 대하여 이곳 요한복음 3장에서만 매우 간략하게 설명하셨지만 이 중생의 짤막한 말씀은 기독교의 중심교리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하신 이 말씀은 사람이 새롭게 태어남이 없이는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고 그 나라 백성이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니고데모는 이같이 질문했습니다. 영적으로 생각할 때 너무나도 어리석고 유치한 질문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면 점점 늙어 가는데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난다는 말은 우리가 어머니 배에 다시 들어갔다가 나온단 말입니까? 하는 질문입니다. 신령한 것은 신령한 것으로 알며,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만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니고데모에게 중생의 진리를 다시 한번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1) 중생은 영적인 탄생을 가리킵니다. 사람이 육의 생명이 태어났을 때 그에 게 육적인 생명이 있는 것처럼 사람이 영으로 태어남이 없이는 영의 생명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중생의 원리에 대하여 물과 성령으로 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일에는 이 두 가지 사실이 전재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2) 물이란 세례를 가리키는 것으로 회개를 뜻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물이란 말씀의 뜻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유대인들은 율법에 의하여 정결하게 하는 의식으로 물을 사용해 왔으며 이런 뜻에서 회개를 외치는 요한의 물세례가 나온 것입니다. 회개가 없이는 중생할 수 없습니다.

(3) 성령이란 사람이 거듭나는 일에 필수요건입니다. 그것은 성령이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회개하는 자의 심령에 임하시어 그 곳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그에게 새로운 하나님의 생명을 주심으로 그로 거듭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결 론 : 우리는 이 중생의 교리를 잘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주로 시인하는 사람은 이미 성령을 선물로 받아 거듭난 사람입니다. 우리가 그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아 그의 인도하심을 따르면 우리에게는 새로운 생애가 열려지는 것입니다.


(14) 성령으로 난 사람

(요한복음 3:1-13)

서 론 : 주님은 성령께서 우리를 중생 시키시는 영적인 역사의 모습과 성령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의 변화의 역사를 바람을 비유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성령의 역사는 바람처럼 보이지 않는 역사이기 때문에 우리가 거듭나도 그같은 사실을 눈으로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성령이란 말은 헬라어로 ‘프뉴마’로 불려집니다. 이 말은 바람, 기운, 생기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이 중생의 과정에서 성령과 같은 뜻을 가지고 있는 바람이란 비유로 설명하신 것은 그 뜻이 깊은 것입니다.

1. 성령으로 난 사람

사람이 내가 성령으로 중생한 사실을 알 수 있는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같은 질문에 흥미를 가지고 어떤 육감적인 증거를 찾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침내 이런 증거를 발견하거나 찾는데 실패하고는 낙심하거나 자기는 아직도 중생치 못한 줄로 속단해 버리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자기가 중생한 장소와 시기까지 정확하게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판단은 성령의 역사를 모르는 데서 나온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 일도, 성령께서 우리 속에서 그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역사하시는 것도, 우리의 육적인 눈으로 볼 수도 없으려니와 육적인 감각으로 감지할 수는 더군다나 없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성령으로 우리의 생명이 살리심을 받았지만 육신적으로는 잘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의 거듭남을 증거해 주시는 증거는 영적인 증거인데 그 영적인 증거란 곧 우리의 믿음인 것입니다.

2. 바람과 같이 역사하시는 성령

성령의 역사는 마치 바람과 같이 활동합니다. 바람과 같다는 말의 뜻은 성령이 하시는 사역을 나타내는 하나의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첫째로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 존재는 분명히 있는 것 같이 성령도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바람은 그 행방에 대하여 잘 알 수가 없습니다. 성령도 역시 그 움직이는 사실은 분명하나 그 움직이는 행방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3.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주님은 바람의 움직이는 사실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신 후에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고 하셨습니다.

(1) 이 말씀은 사람이 거듭나는 일이 마치 바람과 같은 성령의 역사이기 때문에 우리가 볼 수 없고 알 수 없지만 분명히 일어난다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이 같은 성령의 역사는 다만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바라보며 깨닫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기 때문에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십니다.

(2) 성령으로 난 사람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새로운 변화를 받습니다. 성령은 우리 속에서 두 가지 일을 하십니다. 하나는 우리를 거듭나게 하십니다. 그리고 다른 한가지는 성령은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성령의 변화시키시는 영향을 받기 때문에 육에 사람의 자리에서 영에 사람으로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마음이 강퍅하여 성령의 감화를 거역할 때는 그 변화의 속도가 느려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마음의 변화에 따라 우리 육신은 영의 열매를 맺게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나님의 영의 인도하심을 받도록 부단히 우리의 생애 속에서 성령을 통하여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감화하심을 거역하는 이유는 우리의 마음이 죄악으로 강퍅한 상태에 있기 때문이며, 이런 마음을 깨시기 위하여 죄를 버리도록 하나님은 우리에게 징계의 손을 쓰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아무리 성령의 감화하심을 거역하고 육신의 뜻대로 세상풍습을 따른다고 해도 평생을 통하여 우리를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의 뜻을 포기하지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3) 육신대로 사는 사람은 죽는다고 하셨습니다. 죽는다는 말은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계속하여 성령의 인도하심을 거역하고 끝까지 육신을 따르는 사람은 결과적으로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임이 분명한 것입니다. 죽는다는 다른 또 한가지 해석은 성령의 인도하심과 감화하심을 거역하는 사람들은 그의 생활이 하나님의 계속적인 징계와 간섭하심으로 마치 죽은 자와 같이 비참한 상태에 놓여져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 론 : 그리스도인의 중생은 눈에 보이지 않게 진행되지만 바람과 같은 성령의 역사 하심으로 틀림없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으로 거듭나면 우리 속에 계시는 성령의 계속적인 역사 하심으로 우리의 마음에 새로운 변화를 일으키고 우리의 행실을 새롭게 만듭니다. 그리하여 그의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새로워집니다. 육의 일을 버리고 영의 일을 생각합니다. 성령은 바람처럼 역사 하시기 때문에 성령을 충만히 받는 생활은 강한 영적 바람이 우리 생활 가운데 나타나 우리로 영적인 열매를 맺게 한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아 성령으로 충만한 성도가 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15) 안자도 들려야 하리라

(요한복음 3:14-15)

서 론 : 사람이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일은 십자가의 진리를 깨닫는 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니고데모가 중생의 교리를 이해하여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도리를 알아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도리를 니고데모에게 구약성경에 있는 사례를 통하여 설명하셨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었다는 사건이 바로 그 설명이 되는 것입니다.

1. 이스라엘에게 나타내신 하나님

하나님의 구원섭리는 자신을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직접 나타내심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구약은 하나님이 이미 창세기 3장에서 약속하신 여인의 후손을 이 땅에 보내시는 과정을 그린 계획서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같은 하나님의 역사는 아브라함의 선택으로부터 본격화되었으며 이삭의 탄생으로 오실 메시야에 대한 예표로 삼으시고 아브라함의 믿음을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의의 표준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인류구원의 역사를 이루시기 위하여 직접 자신이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들어오시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결정적인 역사는 이스라엘을 모세를 통하여 바로의 손에서 구원해 내시고 광야에서 40년간의 생활을 하게 하심으로 모든 인류들에게 변명의 여지가 없도록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증거 하신 것입니다. 애굽의 바로 왕에게 내리신 열 재앙은 수백만의 애굽 민족이 몸소 체험한 역사적인 사건으로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홍해를 갈라 육지같이 건너게 하신 일도 60만 명이 넘는 이스라엘 민족이 역사적으로 체험한 사건이며 애굽 군대가 몰살한 사건임으로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사건입니다. 반석을 쳐서 물을 강물같이 내신 일, 40년간 이스라엘 민족으로 만나를 먹게 하신 일 역시 너무도 오랜 역사 기간 동안 이스라엘의 온 민족이 역사 속에서 체험한 사건이기 때문에 부인할 도리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인용하신 모세의 불 뱀도 바로 이와 같은 이유로 해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다고 하는 사실에 대하여 우리는 예수님의 증거를 듣게 되는 것입니다.

2. 구리 뱀을 쳐다보게 하신 놀라운 사건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구약적인 모든 사건이 그리스도의 속죄사업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하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요5:39).

이스라엘이 광야를 거니는 생활 중 호르산에서 진행하여 홍해 길로 둘러서 에돔 땅을 지나게 되었을 때 그 길이 험한 것으로 인하여 그들의 마음이 상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어찌하여 애굽에서 우리를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이곳에는 우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민21:5). 이때 하나님은 원망하는 이스라엘에게 불 뱀을 보내셨습니다.

이 불 뱀에 물린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수히 죽어갔습니다. 이때 모세가 이스라엘을 위하여 하나님께 회개하며 기도했습니다. 이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놋으로 불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아 뱀에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고 명하셨습니다. 모세가 즉각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높이 달았습니다.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민21:9). 모세 자신도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높이 달게 하고 그것을 쳐다보는 자마다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몰랐습니다. 예수님이 “이 사건이 바로 자신의 십자가를 지시는 사건”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우리는 이해할 수 없었던 구리뱀 사건을 너무나도 뚜렷하게 알게 되는 것입니다.

(1)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린 불 뱀은 죄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을 원망한 이스라엘의 죄는 결국 뱀에게 물리게 되었는데 이것은 범죄한 인간이 죄의 종이 된 사실을 상징하는 것입니다(롬6:16).

(2) 뱀에게 물린 이스라엘 백성은 죄인을 가리킵니다. 뱀에게 물린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독으로 죽은 것처럼 죄인들은 그 죄로 인하여 죽게 되는 것입니다.

(3) 죄를 상징하는 놋뱀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4) 뱀을 달아맨 장대는 십자가를 가리킵니다. 주님은 이 장대를 상징하는 십자가 위에 매달리신 것입니다.

(5) 바라보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장대에 달린 놋뱀을 바라보았을 때 살게 되었던 것처럼 모든 죄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바라보므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결 론 : 주님은 자신이 죄로 인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죄를 소멸하셨습니다. 그는 우리의 죗값을 갚아주셨기 때문에 이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죄는 죽은 존재가 된 것입니다. 주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사망권세를 이기셨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바로 이분을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장대에 달린 구리뱀을 바라보았을 때 그 시로 그들이 물린 뱀의 독이 사라져 버리고 죽어야할 몸이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 같은 기적은 바라보면 살아나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 때문인 것입니다.


(16) 하나님의 사랑

(요한복음 3:16)

서 론 : 성경 전체의 내용을 한 구절로 나타낸 곳이 있다면 그 구절은 바로 요한복음 3장16절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해하고 납득할 것 같으면서도 사실인즉 잘 모르고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그 무한하신 사랑의 길이와 넓이와 깊이를 안다는 것은 유한한 인간으로는 전혀 불가능한 일입니다. 요한복음 3장16절에 있는 말씀을 우리는 아주 평범하게 알고 있지만 그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사랑의 전부를 측량할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과연 어디에 있을 것인가?


1.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성경에서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이 가장 간략하고 정확하게 표현된 곳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4:16). 이 말씀을 빌린다면 하나님은 한 마디로 말해서 사랑이시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씀은 하나님은 바로 사랑의 원천이 되신다는 뜻입니다. 7절에서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 또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은 하나님이 우리의 사랑을 받아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하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요일4:10). 이처럼 우리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위하여 그 아들을 화목제로 보내주셨다고 하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그 아들을 화목 제물로 보내셨을 때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떠했나?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롬5:8).


2. 우리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은 우연한 사랑이 아니십니다.

(1)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은 우리를 창조하시기 이전부터였다고 했습니다. 이 같은 사랑의 근거는 에베소서 1장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 속한 모든 복을 주시되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만물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은 오직 인간을 창조의 중심으로 하여 사람이 살기에 알맞은 환경과 조건들을 구비해 놓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 만드신 만물을 통해서도 우리들에게 분명히 보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증거하기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고 한 것입니다(롬1:20).

(2) 하나님의 사랑은 변질됨이 없는 순수하고 영원한 사랑이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왜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오게 되었으며 하나님과 원수의 관계를 이루고 등을 지고 있는 것인가? 이 책임은 절대로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셨으며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버리지 않고 변함없는 사랑으로 사랑하고 계십니다. 다만 우리 인간들이 죄로 인하여 스스로 하나님을 떠났으며, 하나님의 사랑을 저버렸으며, 하나님의 대적자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선지를 통하여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이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져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범죄한 인간은 이처럼 스스로 하나님을 그 마음에서 내어쫓을 뿐 아니라 두기조차 싫어하며 오히려 하나님을 원수로 여겨 하나님을 대적하면서 하나님이 없는 생애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들이 받을 보응은 그 마지막이 사망이라고 하셨습니다.

(3) 사랑하사란 말은 ‘에가페센’란 말로 아무런 조건 없이 단순히 사랑하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이처럼’이란 말은 ‘후토스’로 다음과 같이 란 뜻입니다. 말로만 나타내신 사랑이 아니라 이처럼 어떤 실제적인 증거를 보이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처럼 구체적이고 실질적으로 보이신 사랑이 독생자를 보내신 것으로 증거된 것입니다. 인간이 죄에서 용서함을 받고 생명을 얻으려면 그 죗값을 대신 갚을 회생제물이 있어야 했습니다. 죄가 전혀 없는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죄인들을 위해 죗값을 대신 갚아줄 수 있는 존재가 필요했습니다. 누가 이 같은 회생제물이 될 수 있겠습니까? 죄인을 사랑하는 지극한 사랑의 소유자가 아니면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천사에게 이런 사랑이 있겠습니까? 그 외 다른 어떤 피조물에게 이런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 말씀에 죽기까지 순종할 존재가 있겠습니까? 이 같은 사랑을 가지신 분은 오직 한 분 사랑의 원천이신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놀라우신 일을 그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심으로 이루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이 실질적으로 우리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결 론 : 하나님께서 그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실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은 사랑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내대신 십자가에서 나의 죗값을 대신 받게 하심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생명의 길을 주셨습니다.


(17) 하나님의 심판 기준

(요한복음 3:17-21)

서 론 :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역사는 심판에 있지 아나하고 구원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지 않는 일은 무서운 죄요 그것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조건이 되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이유는 인류를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라 오히려 죄인들을 그 이름으로 구원하시고자 하심인 것입니다. 복음은 세상에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는 일이 아니요 소망이 없는 세상에 구원의 좋은 소식을 선포하는 일입니다.


1. 인간이 스스로 취한 하나님의 심판

인간들은 원래가 아무런 소망이 없는 존재들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죄와 허물로 우리 인간은 죽어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엡2:1).

(1) 우리는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이미 사망선고를 받은 사람들입니다(롬5:12).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주셨지만 우리는 그같은 선물을 받을 만한 아무런 자격이나 공로가 없는 존재입니다. 이 선물은 다만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인데 우리에게 이런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다시 한번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입니다.

(2) 하나님은 소망이 전혀 없는 인생들에게 놀라운 선언을 하셨습니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심판은 무슨 심판을 말하는 것입니까?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진 무서운 심판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로마서에서는 이것을 죗값인 사망이라고 했지만 이 사망이란 하나님의 영원한 형벌을 말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믿으면 이 같은 심판을 받지 아니한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누구에게는 받아야할 필요성이 있고 누구에게는 그럴 필요성이 없는 구원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은 한 명의 예외자도 없이 모두 이 같은 하나님의 심판의 선고를 받고 있기 때문에 이 선고에서 풀려나지 않으면 아무런 소망도 없는 것이 우리 인생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이 같은 심판을 받지 않을 뿐 아니라 구원을 얻는다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심판의 새로운 기준

그런데 18절 말씀에는 이처럼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1) 우리는 이 말씀에서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은 죄가 아니라 하나님의 독생자이심을 알게 됩니다. 독생자가 오시기 전에도 이미 인간들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 내려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려고 그의 사랑하는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으셨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거역하고 그를 믿기를 거절하면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게 하신 자신의 죄에 대하여 더욱 무서운 심판을 각오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으로 보내신 아들을 믿지 않는 죄는 하나님의 사랑을 거역하는 죄입니다.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고 하신 말씀은 심판한다는 ‘크리노’의 3인칭 완료형으로써 하나님에 의하여 이미 정죄되고 심판 받은 상태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룰 믿지 아니함으로 정죄를 받는 이유에 대하여 이처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사랑한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그리스도를 거역하는 인간심리가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세상의 빛으로 오신 분입니다. 그분을 마음에 영접한 사람은 빛이 그 마음속에 임재하기 때문에 어두움과 짝할 수가 없습니다. 죄가 거할 곳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빛을 싫어한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어두움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거역하며 계속하여 어두움에 거하기를 스스로 원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일은 고의적인 배신임으로 자기가 자신의 정죄를 자초하는 것입니다.


3. 진리를 쫓는 자는 빛으로 온다.

악을 행하는 자는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지만 진리를 쫓는 자는 빛으로 오는데 그 이유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진리이십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빛으로 나온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는 일은 빛 가운데 나타나는 선한 열매들입니다. 이런 열매는 다 내 안에 빛으로 계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결실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기를 기뻐하는 것입니다.


결 론 : 우리가 빛으로 나오려면 먼저 자기 자신의 악한 행위를 회개해야 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느냐? 안 받느냐? 하는 것은 일시적인 문제이거나 우리 생애에 어느 한 부분에 속한 문제가 아닙니다. 영원한 멸망이냐? 영원한 구원이냐? 하는 문제가 이 문제입니다. 한번 잘못 선택한 인생의 길은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자기 운명의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18) 요한의 기쁨

(요한복음 3:22-36)

서 론 : 요한은 그리스도를 증거할 선지자의 사명을 받아 이사야를 통한 예언대로 세상에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 세례를 줌으로써 그가 곧 자기가 증거 해야 할 메시야이심을 알게 되었고 그의 생애는 바로 이곳에 초점을 맞추어 나갔던 것입니다. 요한은 신랑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이제부터 해야할 일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잘 알고 지혜롭게 처리하는 모습을 바라보게 됩니다.

1. 요한의 기쁨

신랑의 음성을 들은 요한은 기뻐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음성을 무엇으로 듣느냐에 따라 자기 인생의 방향이 달라집니다.

(1) 인생을 크게 기뻐하는 생활, 자기 생애에 기쁨이 충만한 생활은 그리스도의 음성을 신랑의 음성으로 들을 수 있는 사람만이 가능합니다. 세례 요한은 이 같은 음성을 주님으로부터 들었기 때문에 그에게는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2) 요한이 그리스도를 신랑이라고 비유한 것은 주님에 대한 사랑과 사모하는 마음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가리켜 그 신랑의 친구라고 말한 것은 그는 신랑을 세상에 나타내야 할 사명이 있다는 뜻을 표현한 것입니다.

2. 세례요한의 희생

세례는 요한이 그의 제자들과 더불어 요단강에서 해왔습니다. 그러던 것이 이제 예수께서도 그의 제자들과 함께 세례를 주게 되었습니다. 이런 일이 세례요한의 제자들에게 하나의 시기심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요한에게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강 저편에 있던 자 곧 선생님이 증거 하시던 자가 세례를 주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고 불안해했습니다. 여기서 요한은 자기 제자들에게 자기의 위치와 사명에 대하여 분명히 천명해 줌으로써 자신은 다만 그분을 증거 하는 작은 존재에 불과할 뿐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말해주었습니다.

(1) 세례요한은 제자들에게 “나의 말한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의 사명에 대하여 요한은 들어내어 분명히 증거하기를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고 말했습니다(요1:23).

(2) 세례요한은 그의 제자들에게 그들이 증거 해야 할 자기 선생의 존재에 대하여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 할 자는 너희니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세례요한은 자기자신이 제자들로부터 바르게 증거 될 수 있기를 원했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증거 하였으며 자기 제자들이 그를 따라가는 것을 허락하였습니다(요1:36-37).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사람들은 항상 이 세례요한의 정신을 본받아야 합니다. 자기는 감추고 그리스도만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3) 세례 요한은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자기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말했습니다. 이 같은 자신의 말처럼 예수님이 공생애에 나타나신 이후 자신은 점점 그늘로 숨어 들어갔습니다.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사람은 자기가 흥하면 안됩니다. 그리스도만이 흥하고 자기는 쇠하여야 합니다.

3. 아들을 믿는 자에게 주시는 영생

31절부터는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도 요한이 부연해서 설명을 해주는 말씀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1) 요한 사도는 세례 요한과 그리스도와를 비교하기를 위로부터 오시는 이와 땅에서 난 이로 구분했습니다. 그리스도는 만물 위에 계시는 분입니다. 그는 만물의 창조자이시오 만물의 주관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이라 할지라도 그가 땅에서 난 이상 땅에 속한 사람이요 그의 말 역시 땅에 속한 말에 불과한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다만 그 증거자로 보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2) 우리에게는 이제 여러 가지 증거 곧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말씀으로 보여주신 증거가 있으며 또 세례 요한의 증거가 있으며 성령의 증거가 있습니다. 그리고 만세에 이르도록 영원히 변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의 증거가 있습니다. 이 증거를 통하여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지만 순종치 않는 자에게는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3) 믿는 자란 말은 현재에 믿는 상태에 있는 그 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믿음이란 말은 언제나 현재와 관계된 말입니다. 믿음이란 과거의 소유물도 아니요 미래의 소유물도 아닌 현재의 소유물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이란, 소유한 그 한사람에게만 관계된 문제입니다. 이처럼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다고 했습니다. 생명이 있다는 말은 그 생명을 가졌다고 하는 말입니다.


결 론 : 우리는 그리스도의 증인들입니다. 우리는 이런 면에서 세례요한의 사명이 주어진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증거 함에 세례 요한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을 나타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그의 신부들에게 소개해 주는 일에 큰 기쁨을 가져야 합니다.


요한복음 4장 (19-23)

◆ 밤중소리 03-02 | VIEW : 2,288

19. 사마리아 여인에게 주신 생수(요한복음 4:1-19) 

20.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요한복음 4:20-26) 

21. 그리스도인의 양식(요한복음 4:27-38) 

22. 사마리아 여인의 전도(요한복음 4:28-42) 

23. 왕의 신하의 믿음 (요한복음 4:43-54)


(19) 사마리아 여인에게 주신 생수

(요한복음 4:1-19)


서 론 : 우리는 생에 지친 한 여인을 봅니다. 그리고 그 여인이 참으로 우연하다고 볼 수 있는 그런 인생의 시점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장면을 바라보게 됩니다. 여기서 그녀의 생은 새로운 변화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제야말로 만족과 행복과 보람을 한꺼번에 되찾는 놀라운 생애를 걸어가게 되었습니다. 이 여인은 바로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 잃은 양을 찾으시는 목자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1. 주님의 전도

주님은 복음을 전하시기 위하여 갈릴리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 땅 수가성에 이르시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음식을 마련하기 위하여 동네에 들어갔으며 예수님은 행로에 피곤하시어 우물곁에 그대로 앉으셨습니다. 신성의 면으로는 그분은 하나님이시지만 육신적으로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당하는 모든 어려움이 그분에게도 동일하게 찾아오는 것입니다. 바로 이때 어느 사마리아 여인이 물을 긷기 위하여 예수님이 앉아 계시는 우물로 나온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유명한 대화가 시작됩니다.

(1) 죄인을 찾아오신 예수님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주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상봉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말씀하신 주님은 잃은 양인 죄인을 부르러 오셨으며 이 사마리아 여인도 그가 부르시는 죄인이었습니다(마 9:13). 주님은 이처럼 피곤하심이 계속되는 어려움 속에서도 자기에게 맡겨주신 아버지의 사명을 이루시기 위하여 쉴 사이조차 없으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파하라”고 하신 말씀을 되새겨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전심전력해야 할 것입니다.

(2) 주님의 대화는 여인과의 가장 가까운 사실로부터 시작하셨습니다. 전도는 일상 생활의 가장 평범한 사실로부터 출발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같은 전도의 비결을 우리들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그 여인에게 “당신은 죄인임을 아느냐”고 묻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은 천국과 지옥에 대하여 알고 있느냐”고 물은 것도 아닙니다. 주님은 “물을 좀 달라”고 하신 것입니다.

(3) 주님은 이 여인으로 영적으로 깨달을 수 있도록 지혜롭게 대화를 유도해 나가셨습니다. 이런 대화 중에 주님은 이 하잘것없는 여인으로부터 모욕적인 여러 가지 말을 들으셨지만 그 때마다 주님은 더욱 큰사랑으로 이 여인을 대하시면서 영적으로 깨달을 수 있도록 화제를 발전시켜 나가셨습니다.

(4)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서 결정적인 기회를 포착하셨습니다. 주님은 이 여인으로 자신의 죄를 스스로 자백하게 만드셨으며 그에게 생수가 필요하다는 말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주님의 전도 방법을 배워서 잃은 양을 찾는 일에 가장 유효하게 적용해야 할 것입니다.


2. 생수란 무엇인가?

주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영원히 갈 하지 않는 생수를 주시겠다고 말씀하셨고 이 여인은 이 생수를 마셨습니다.

(1) 그러면 주님이 말씀하신 생수란 무엇을 말씀하신 것이냐? 우리는 요한복음 19장에서 이 생수에 대하여 쉽게 그 말씀의 뜻을 찾을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말씀하신 것이라”고 하신 말씀에서 그 참 뜻을 보여 주셨습니다(요 7:37-38).

(2) 생수는 구하는 자에게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내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내게 주었으리라” 우리가 구원에 이르기 전에도 성령은 끊임없는 감화와 감동의 역사로 우리로 하나님께 회개하게 하고 구원을 얻기 위한 간구를 드릴 수 있도록 하십니다.

(3) 생수를 받는 일은 주시는 이가 누구인줄 알아야 합니다. “네게 물 좀 달라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성령이 주어질 수 없습니다. 죄인의 구원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이 주님을 향하여 생수를 요구하지 않은 것은 아직 그가 누구이신 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자기가 만난 그리스도를 증거하기를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고 말한 것으로 그의 영의 눈이 열려 그분이 바로 그리스도인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 여인은 그를 믿음으로 생수를 마시게 된 것입니다.

(4) 이 여인은 자신의 죄를 그리스도 앞에 드러내 놓았을 때 비로소 그의 눈이 열렸습니다. 사람의 눈을 어둡게 하는 것은 죄입니다. 이 여인의 눈이 어두워 주님을 바라 볼 수 없게 하였던 것은 그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결 론 : 성령을 생수라고 하신 이유는 그가 우리를 진리로 이끄시기 때문입니다. 성령만이 우리를 새롭게 태어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만이 우리를 새롭게 변화시키시기 때문입니다. 생수를 마신 사람의 생애는 변화 받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처럼 생수를 마심으로 변화 받은 성도의 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

(요한복음 4:20-26)


서 론 : 우리는 주님과의 대화에서, 사마리아 여인의 영적인 각성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처음 주님을 대하여 말할 때에는 평범한 유대인으로 대했습니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그 다음에 이 여인은 주님으로부터 생수에 대한 말을 듣고 나서는 ‘주’라고 불렀습니다. ‘주’라고 표현한 말은 ‘큐리에’로 당시 일반적인 존경어로 사용된 말입니다.

1. 참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태도

이 여인은 다시 주님으로부터 네 남편을 데려오라고 하시는 말씀으로 자기의 속에 감추어진 죄를 드러내셨을 때 선지자라고 불렀습니다.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선지자란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으로 이 여인은 자기와 대화하는 이 유대인을 선지자로 높였습니다. 그리고 이 여인은 “내가 그로라”고 하신 말씀을 들은 후 이 유대인이 자기들이 기다려온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대화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참으로 알 수 있게 됩니다. 주님은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우리에게 가장 귀한 말씀을 들려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고 하신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것은 구약적 예배와 신약적 예배와의 차이점을 밝힌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1) 구약적 예배는 예루살렘 중심이었습니다. 이방 땅에 가 있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예루살렘 쪽을 향하여 기도하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다니엘도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신약적 예배는 지역에 관계없이 어느 곳에서든 어느 방향이건 상관없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성전이 예루살렘에 있으며 그 성전 안에 하나님의 법궤가 있기 때문에 이 같은 장소적인 일에 예배의 중심을 삼았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는 지성소가 하늘로 옮겨졌습니다. 그곳에는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제사장으로 계시는 것입니다(히9:11-15).

(2) 구약적 예배는 제물중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적 예배는 제물이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 제물은 이미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회생되심으로 온전히 드려졌기 때문입니다(히 924-28). 이스라엘이 드린 어린양의 회생제물이 신령과 진정한 예배가 될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은 이 같은 제사의 참 뜻을 모르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의 의식으로 했을 뿐 그들의 이런 희생제물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으로 완성된다고 하는 사실에 대하여 알지 못했습니다.


2.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란 무엇인가?

이스라엘이 드린 예배란 의식적인 것이었으므로 시일이 갈수록 외식에 흐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형식이나 의식이나 육신에 속한 예배를 받지 아니 하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 중심에 진실하심을 보십니다.

그러므로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란 밖에 나타나는 것으로 인정을 받으려는 예배가 아니라 중심으로 드리는 예배를 가리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중심으로 예배드리기 위해서는 두 가지 기본적인 사실이 필요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실존을 아는 일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 가지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일입니다. 이런 제사는 바로 믿음의 제사인 것입니다(히11:6).

(1) 신령의 예배란 성령 안에서의 예배란 뜻입니다. 신령이란 말은 ‘엔프뉴마티’로 이 말의 뜻은 성령 안에서란 말입니다. 신령한 일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만이 하나님께 열납 될 수 있는 예배가 어떤 것인지 아십니다.신령의 예배에는 주님의 십자가가 빠져서는 안됩니다. 모든 예배의 중심이 바로 십자가에 있기 때문입니다. 신령의 예배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따라야 합니다. 이 사랑 역시 십자가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2) 진정한 예배란 진리 안에서의 예배란 뜻입니다. 진정으로란 말은 ‘엔알레데이아’로 진리 안에서란 말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드리는 예배를 가리킵니다. 하나님께 대한 예배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야 합니다. 말씀을 떠난 예배는 우상숭배에 빠지게 됩니다. 모세가 40일간 산에 올라가 기도하는 동안 이스라엘은 아론을 앞세우고 금으로 송아지를 만들어 “이것이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하여 경배하며 섬겼던 것입니다.

(3) 진정한 예배에는 그 드리는 사람이 영적인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영적인 변화가 없는 사람은 진정한 예배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롬12:1-2 ).

(4) 예배란 헬라어는 ‘라트레이아’인데 이 말의 뜻은 봉사한다, 섬긴다는 말입니다. 섬김이 없이는 참된 예배로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결 론 : 하나님은 이처럼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이유는 그같은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에 보상을 해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겸손함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잠22:4). 하나님은 감찰하시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감찰하시는 눈으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21) 그리스도인의 양식

(요한복음 4:27-38)

서 론 : 예수님은 가끔 제자들이 잘 깨달을 수 없는 영적인 말씀을 들려 주셨습니다. 육신적인 문제를 질문하는 제자들에게 영적인 답변을 들려주심으로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전혀 알 수 없었던 것입니다. 주님이 우물가에서 기다리시는 동안 제자들은 수가성에 들어가 주님이 잡수실 음식을 사왔습니다. 그들은 음식을 주님 앞에 내놓으면서 “랍비여 잡수소서” 권했을 때 주님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고 하시고 의아해하는 제자들을 향하여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여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고 풀이해 주셨습니다.

1. 주님의 양식

주님은 제자들에게 새로운 양식에 대한 가르치심이 필요했습니다. 주님의 가르치심은 언제나 시기를 잘 포착하셨고 듣는 이에게 영적인 풍부한 암시력을 주었습니다. 자기들도 배가 고프고 선생님도 대단히 시장하리라고 생각했을 제자들을 향하여 주님이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노라”고 하신 말씀은 그들에게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자 하는 심적 충동을 일으켜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1) 주님은 사단의 시험에서 이미 이 말씀으로 승리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4:4).

(2) 주님이 그의 참된 양식으로 삼으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며 그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일이란 무엇인가? “내가 하늘로서 내려 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요6:39-40).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고 계셨습니다. 그가 하실 일은 죄인을 위하여 회생제물이 되시는 일입니다.

(3)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인생의 제일 되는 목적으로 삼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낸 서신에서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했습니다(고전10:31). 세상에 오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이 같은 인생의 본분을 스스로 솔선하심으로 모든 사람에게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4) 주님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는 일을 양식처럼 여기는 생활을 하셨습니다. 사람이 양식을 일정하게 취해야하듯이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 양식처럼 생각하시어 그에게 맡기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나가신 것입니다.

2. 우리의 양식

주님이 제자들에게 이 새로운 양식에 대한 말씀을 들려주신 목적은 그들로 그같은 양식을 취해야 할 것을 가르쳐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이 양식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반드시 필요한 양식으로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1)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영의 양식으로 삼으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리는 길은 그의 말씀으로 살아가는 생활입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둥이요 내 길에 빛이라”고 하셨습니다(시119:105).

(2) 이 말씀은 순종을 양식으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듣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순종함으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듣고도 행치 않으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도 행치 않음으로 오히려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약4:17).

(3) 이 말씀은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자기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마치 육의 양식을 취하는 것처럼 당연한 사명으로 여겨 충성해야 할 것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했습니다. 충성이 없는 그리스도인은 마치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삶의 목적을 스스로 거역하는 사람과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4)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이 육신적인 일에 치우치면 그의 영적 생명이 죽는다는 것을 깨우치는 것입니다. 육신이 필요로 하는 것을 구하는 생활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3. 눈을 들어 발을 보라

주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눈을 들어 밭을 보라고 하셨습니다. 이 밭이야말로 우리의 신령한 양식을 심고 거두어 드리는 전도의 밭입니다. 밭이란 말은 ‘코라’로 이 말의 뜻은 지방, 마을, 밭이란 말의 낱말로 복음을 전할 복음의 터전을 가리킨 것입니다. ‘보라’라는 ‘데아사스데’는 찾아가서 만나보라는 뜻입니다. 전도란 말씀을 전할 지방이나 촌을 두루 찾아가 그 대상자를 만나는 일임을 가르쳐 주는 말입니다.


결 론 : 주님은 우리에게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들 앞에는 넓은 밭들이 펼쳐져 있습니다. 그곳에는 거두어 드려야 활 곡식들이 익어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거두는 일을 우리의 영적인 참 양식인줄 알고 이 일을 온전히 이루는 생활을 통하여 추수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22) 사마리아 여인의 전도

(요한복음 4:28-42)

서 론 : 야곱의 우물에서 그리스도를 만난 사마리아 여인의 마음속에는 이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생물이 솟아나기 시작했습니다. 복음을 들은 사람은 두기지 형태로 그 모습을 나타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쫓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쫓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고 했습니다(고후2:15-16).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은 생명에 이르는 냄새가 되지만 길가에 떨어진 씨앗은 사망에 이르는 냄새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1. 그리스도의 증인이 된 사마리아 여인

주님은 남편을 다섯 명이나 가라치운 이 여인의 마음속에서 죄로 인한 괴로움을 발견하셨습니다. 죄악된 자신의 생활을 통회하는 모습과 인생의 허무한 막다른 골목에서 메시야를 대망 하는 믿음을 보셨습니다. 주님과의 대화에서 이 여인의 마음의 밭에 떨어진 씨앗은 생명에 이르는 냄새로 나타났으며 “내가 그로라”하신 결정적인 말씀을 믿음으로 그의 심령에는 기쁨이 넘치게 되었습니다. 그의 이같이 변화 받은 심령은 즉각적으로 행동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심령 속에 심겨진 기쁨은 그대로 담아둘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1) 이 여인은 물동이를 우물에 그대로 놔둔 채 동네로 달려갔습니다. 이유는 동네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여인의 생각에는 그리스도가 언제 다른 곳으로 가실지 모릅니다. 이 좋은 기회에 동네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하는 뜨거운 소원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 동네 사람들에 대한 생명의 파수군의 사명감에 불타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에게서 처음 찾을 수 있는 증거가 이렇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에 대한 처음 사랑입니다.

(2) 이 사마리아 여인은 다른 곳으로 달려간 것이 아니라 자기가 살고 있는 동네로 뛰어갔습니다. 복음은 멀리 가서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잘 알고 있는 이웃에 전해야 합니다. 자기 생활환경에 비추어 전하기 쉬운 곳을 택하는 일은 지혜로운 일입니다. 이 여인은 어느 한집만 전도한 것이 아닙니다. 그 동네 모든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3) 이 여인의 전도방법은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는 것이었습니다. 여인은 자기에게 일어난 체험을 증거로 삼았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가장 좋은 방법은 자기에게 일어난 체험입니다. 그것을 증거로 전하는 것입니다. 이 여인에 대한 일은 그 동네 모든 사람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같은 사실을 자신에게 말해준 사람이 있으니 “와 보라”는 것입니다.

복음을 다른 사람에게 효과 있게 전하는 좋은 방법은 그 사람들에게 분명히 보여줄 수 있는 증거입니다. 이 여인은 그들에게 자신의 변화된 모습을 보여줌으로 모든 동네사람들에게 큰 관심을 끌게 했습니다. 자신의 어두운 생활이 부끄러워 사람들 앞에 얼굴을 쳐들지 못했던 이 여인이 거리에 나타나 자신의 죄악된 생활을 들추어가면서 그리스도를 전했을 때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감화력을 주게 된 것입니다. 이 여인은 이미 변화 받은 자신의 모습을 그들에게 보인 것입니다.

“와 보라”고 한 사마리아 여인의 전도방법은 놀라운 효과를 거두었습니다. 유능한 전도인은 그들을 그리스도 앞에까지 오도록 잡아끌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자신이 증거 하는 이가 누구인가에 대하여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고 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바로 복음인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증거하고 좋은 말로 흥미를 주었다 해도 복음의 핵심인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하지 아니했다면 그같은 전도는 아무런 쓸모가 없는 일이 되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2. 사마리아 여인의 전도의 결실

(1) 사마리아 여인의 전도를 들은 수가 성 사람들은 그가 누구이신가 알기 위하여 예수께로 왔다고 했습니다. “저희가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30).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을 받고 그 심령의 변화를 받으며 그의 인생이 새로워지면 전도의 능력을 받습니다. 자신의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고 수가 성에 거주하고 있는 동네 사람들에게 이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하겠다고 하는 그녀의 뜨거운 열의는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 그들로 예수님 앞으로 나오게끔 만들었습니다.

(2) 이 여인은 그들을 예수님 가까이로 모으므로 그들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게 했습니다. 이 여인은 하나의 전도인의 사명만 있을 뿐 그들에게 말씀을 가르치고 그리스도를 믿게 할 은사는 주어지지 아니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든 전도한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나와 말씀을 듣게 하므로 구원의 자리에까지 이르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말씀을 인하여 믿는 자가 더욱 많았다”고 했습니다(41). 사람에게 믿음을 주는 것은 이적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결 론 : 사마리아 여인은 전도인으로서의 사명을 완벽하게 이루었습니다. 사람의 믿음은 우리의 간증이나 경험이나 체험에서 온전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은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이 여인이 자신의 변화 받은 모습과 간절한 호소로 얻은 소득은 그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했다는 것뿐입니다.


(23) 왕의 신하의 믿음

(요한복음 4:43-54)

서 론 : 주님 앞에 나온 사람들은 각계 각층의 여러 종류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가나에 이르셨을 때 왕의 신하 한 사람이 예수님께 나와 간구 했습니다. 아들이 병으로 죽게 되었으니 가버나움까지 내려오셔서 고쳐달라는 것입니다. 그는 주님으로부터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는 꾸지람을 들었지만 그의 간절하고 끈기 있는 기도는 주님의 마음을 움직여 아들을 병에서 살려냈습니다.

1. 문제가 생겼을 때

사람이 세상을 살아나가는 동안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생깁니다. 이 헤롯왕의 신하는 이 같은 재앙이 흘연히 그의 인생 길에 임했을 때, 그는 재앙을 만난 인생이 찾아가야 할 바른 길을 간 것입니다.

(1) 그는 모든 문제의 해결 자이신 주님을 찾아갔습니다. 우리가 살아 나가는 생애 중에 어떤 문제가 찾아와도 그 문제를 가지고 달려갈 곳은 예수이십니다. 우리들이 인생 길에서 만나는 어떤 일이라도 그것을 가지고 갈 곳은 오직 주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는 이미 믿음으로 승리를 거둔 사람입니다.

(2) 왕의 신하는 자기 아들의 병을 고침 받기 위하여 주님을 자기 집으로 와달라고 초청했습니다. 문제가 있으면 그 문제의 해결 자되신 예수님을 문제가 있는 곳으로 청해야 합니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약5:14). 오늘날은 주님을 청할 수는 없지만 주의 종들을 청하여 기도를 받아야 합니다.

(3) 이 왕의 신하는 응답 받기까지 간절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는 한번 간구하는 기도에서 절망적인 말을 들었지만 낙심하지 않고 간절한 기도를 드리자 응답을 받은 것입니다. 기도에 가장 두려운 대적은 낙심입니다. 낙심은 기도를 좌절시켜 버리기 때문입니다.

2. 표적과 기사의 신앙

주님은 이 왕의 신하의 간구를 들으면서 책망 비슷한 탄식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1) 표적물 직접 보기를 원하는 믿음은 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주소서” 그의 이 같은 간구는 표적을 보여달라는 뜻입니다. 표적을 보여달라는 믿음은 그 말씀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데서 오는 것입니다.

(2) 기적이 나타나지 않으면 믿으려 하지 않는 믿음이 표적 위주의 신앙입니다. 유대인의 신앙이 바로 이런 신앙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 모세가 광야에서 행한 것과 같은 표적을 보여주면 메시야임을 믿겠노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그런 그들에게 표적을 보여주시지 아니하셨습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하셨습니다(마12:39). 주님은 의심 많은 도마에게 그 몸을 보이신 후에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고 하셨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기 때문에 표적을 가지고 믿는 신앙은 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3) 주님은 사람이 죄로 인한 영혼의 병은 모르고 육신의 병만을 고치려는 불 신앙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이 왕의 신하인 경우만 해도 주님 앞에 나와서 안타깝게 호소한 것은 자기나 아들의 영혼의 구원에 대한 것이 아니라 질병에 관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영혼의 질병에 관한 두려움을 알고 주님 앞에 나아가는 진실한 믿음을 주님은 기뻐하십니다.

3. 왕의 신하의 믿음

왕의 신하는 그의 간구함을 통하여 주님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 응답은 말씀으로 나타났습니다.

(1) 그는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습니다. 주님은 그를 향하여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고 하셨습니다. 이 왕의 신하는 주님과의 대화를 통하여 그의 신앙이 성장한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왕의 신하는 주님의 이 말씀을 믿었다고 했습니다. 그에게는 이제 말씀을 믿는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2) 왕의 신하는 그 말씀을 믿고 집으로 내려갔습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이제 자기 아들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나았다고 하는 믿음을 가지고 간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들에게 단호히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11:24).

(3) 왕의 신하는 응답의 증거를 바라보았습니다. 그가 집에 내려가는 길에 아들이 나았다는 소식을 전달하기 위하여 그 집 하인들이 올라오는 길에 주인을 만났습니다. 왕의 신하는 하인들로부터 아들이 나은 시간을 물었습니다. 그 시간이 바로 주님으로부터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고 하신 시간과 일치됨을 알고는 더욱 큰 믿음을 가졌습니다.


결 론 : 왕의 신하의 집안은 온통 기쁨으로 가득 갔습니다. 그리고 그 집은 그리스도를 믿는 복된 가정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아마 이 가정은 아들이 살아난 기쁨이 처음에는 컸겠지만 그 후에 그들은 아들로 말미암아 온 집이 구원받은 일에 더욱 감사하는 생활을 했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5장 (24-28)

◆ 밤중소리 01-28 | VIEW : 723

24. 네가 낫고자 하느냐?(요한복음 5:1-9) 

25.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한복음 5:10-18)

26. 아들과 아버지와의 관계(요한복음 5:19-23)

27. 사망에서 생명으로(요한복음 5:24-29)

28. 심판 주로서의 증거(요한복음 5:30-47)


(24) 네가 났고자 하느냐

(요한복음 5:1-9)


서 론 : 유대인의 명절을 지키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올라오신 예수님은 ‘베데스다’라고 불리는 연못에 찾아가셨습니다. 베데스다란 말은 은혜의 집이란 뜻입니다. 이곳에는 많은 병자들이 병을 고침 받기 위하여 모여 있었습니다.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 등이 행각에 누워서 연못의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곳에 왜 이 같은 이름이 부쳐질 수 있었을까? 이 비참한 곳에 은혜의 주님이 찾아오셨기 때문입니다.

1.주님이 찾아오신 베데스다

베데스다는 마치 병자들의 아비규환의 장소인 것처럼 보입니다. 세상의 소망이 없는 사람들이 모여서 살길을 모색해 보려고 아우성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곳에 주님이 찾아오셨습니다.

(1) 주님은 이 세상에 빛으로 오셨지만 세상은 그 빛을 깨닫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요1:45). 주님이 베데스다 못에 나타나셨지만 그곳에 있는 사람들 중 주님을 빛으로 마지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2) 주님은 그 많은 사람들 중에 한 사람에게만 찾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중에 잃은 양을 찾으러 오신 분입니다. 주님은 그 가운데 있는 모든 사람들을 다 만나실 수도 있었으며 또 그들의 병을 다 고쳐 주실 수도 있었지만 38년 된 그 한사람에게만 나타나셨고 그만을 고쳐주셨습니다.

(3) 주님은 가장 비참하고 도움의 손길이 없는 절망적인 병자를 찾으셨습니다. 이 사람의 그의 무서운 병은 죄 값으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요5:14). 이 사람은 자신의 무서운 병이 자신의 죄 값으로 당연히 받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38년간이나 중풍병으로 누워있으면서도 아무의 도움도 받지를 못했습니다. 그는 이제 소망이 없는 자리에서 지난날의 죄과를 뉘우치면서 마음으로 통회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주님이 그 사람을 찾아가셨다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의 백성은 병든 사람, 찢긴 사람, 가난한 사람들 중에 있습니다. 주님은 복음을 전하시는 대상에 대하여 분명히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찢기고 상한 가운데 처해있는 이유는 하나님은 사랑과 긍휼이 풍성하시기 때문에 그들에게 사랑과 긍휼을 나타내시기 위해서 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2. 교회와 베데스다

베데스다는 교회로도 상징됩니다. 세상에 소망이 없는 사람들이 모인 것이 베데스다인 것처럼 교회 역시 세상에 소망을 등진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세상에는 소망이 없지만 주님이 계시기에 교회는 은혜의 집입니다. 그런데 교회에도 베데스다 못의 경우와 같이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는 물의 동함을 기다리고 있는 무리들입니다. 교회라고 하는 은혜의 집에는 나왔지만 아직도 주님께만 소망을 두지 못하고 인간적인 힘으로 무엇인가 힘쓰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베데스다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은 오직 주님에 의해서만 고침 받을 수 있습니다. 교회에는 자기 스스로는 꼼짝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주님이 아니시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리들입니다. 이들은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이 같은 성도들을 찾아오셔서 베데스다 못에서 만난 38년 된 병자에게 자신을 나타내시듯 자기를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3. 주님이 찾으시는 사람

우리는 주님이 베데스다를 찾으신 일을 통하여 여러 가지 교훈을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1) 주님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도 찾으십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만이 주님이 구원하시는 대상에 들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베데스다 못에서 주님을 만난 사람은 그의 대화 속에서 그에게 믿음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베데스다에 가신 목적은 다만 이 병자만을 만나시려는 의도였습니다.

(2) 주님은 믿음이 없는 자에게 소망을 주십니다. 주님은 그 병자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물으심으로 그의 병이 고쳐질 수 있다는 소망을 그에게 안겨주셨습니다. 낫고자 하느냐의 하느냐는 말은 ‘텔레이스’로 네가 원하느냐? 는 말로 그 사람의 마음속에 치료에 대한 밝은 비전을 심어주신 것입니다.


결 론 : 그는 주님의 얼굴을 우러러 뵈면서 그의 도움을 구했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는 것을 발견하셨습니다. 그에게 주님의 결정적인 말씀이 내려졌습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주님의 이 말씀을 통하여 믿음이 들어갔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했습니다. “일어나 걸어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는 자리를 들고 걸어갔습니다. 이제 그는 어둠에서 빛으로 걸어갔습니다. 사망의 자리에서 일어나 생명의 길로 걸어간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사망의 자리에서 일어났으면 우리도 이 사람처럼 빛을 향하여, 생명의 길로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25)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요한복음 5:10-18)


서 론 : 38년간이나 자리에 누워있었던 병자는 베데스다에서 주님을 만난 후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주님을 만난 사람은 먼저 자기가 누워있었던 자리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사람은 앞으로 걸어가야 합니다. 이것은 자리에 누워 있었던 죽은 행실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나가는 새로운 생활입니다(롬12:2). 우리는 그를 다시 만난 자리에서 주님이 그에게 들려주신 말씀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신 말씀을 되새겨 하나님의 은혜로 고침 받은 후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1. 주님의 경종

38년된 병자는 병을 고침 받은 후에 성전에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성전에서 주님을 만난 일은 고침 받은 후의 그의 생활에 한 면을 보여주기 때문에 그가 죄에서 돌이킨 생활을 하고 있다는 증거를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를 만나셨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그에게 가까이 하는 사람들에게 만남이 되는 것입니다. 아마 그가 감사를 모르는 아홉 명의 문둥이들처럼 세상에 묻혀있었다면 주님을 만나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1)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들려주시는 경종이십니다. 우리의 병은 죄 값으로 오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물론 아담의 범죄로 인간에게 저주로 나려진 것이 병이지만 여기서 말씀하신 것은 일반적인 것이 아니라 한 개인이 그의 생애에 저지른 범죄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병은 죄의 보응으로 오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2) 이 사람은 주님의 말할 수 없는 자비하심으로 고침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우리 몸의 병을 어떤 형태로 고침 받던, 고침 받았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에서 나오신 은총인 것입니다. 병에서 고침 받은 사람은 그의 생활에 근본적인 변화의 역사가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죄를 떠나는 생활입니다. 만약 병에서 고침 받은 사람이 다시 죄에 물든 생활에 빠져 버린다면 그는 얼마 안 가서 그의 고침 받은 병이 더 무섭게 재발될 것이라고 하는 경종입니다.

2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고침 받은 병자는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쳐주신 이가 바로 예수님이심을 알려주었습니다. 이 같은 일은 그 사람이 예수님을 그들에게 고발한 것이 아니라 베데스다 못에서 자리를 들고나올 때 유대인들이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다니는 그를 향하여 책망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때 그가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셨다고 했을 때 그들은 그가 누구인지를 말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병자는 자기의 병을 고쳐주신 이가 누구인지 알지를 못했기 때문에 알게되면 알려주기로 약속하였다가 예수님이심을 알게 되자 반갑고 기쁜 마음으로 그들에게 그분이 예수님이심을 알려주게 된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지킨 안식일은 외식적이었으며 장로들의 유전을 첨가함으로 하나님의 바라시는 근본취지를 저버린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주신 목적은 하나는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운 휴식을 주시려는데 있고 다른 한가지는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게 하시려는데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안식일의 목적이 사람들의 손에 의하여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존속하는 것 같은 제도로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씀 하셨습니다(막2:27). 주님의 이런 말씀은 인간의 필요성이 안식일의 요구보다 앞선다는 뜻으로 가리킨 것입니다.

3. 예수님을 죽이려한 두 가지 이유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범하는 예수님에 대하여 적의를 품고 핍박했습니다. 범한다는 말은 헌다, 깨뜨린다, 파괴한다는 뜻으로 예수님이 율법을 헐어버리는 율법의 파괴주의자로 간주한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 가지는 예수님이 이처럼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셨다는 사실에 격분하여 이때부터 죽일 기회를 찾으려고 획책했습니다.

동등이란 말은 ‘이손’으로 그 수와 크기와 질에 있어서 동일한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가리키실 때 항상 내 아버지란 표현을 쓰셨습니다. 예수님은 태초에 계셨던 말씀으로 하나님과 함께 계신 분이시며 그 말씀은 곧 하나님이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신 분이심으로 그가 자신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셨다 하여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지만 유대인들은 이런 표현을 참람하다고 하여 죽이려고 계획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움직일 수 없는 증거로 포착된 것이 바로 이 죄명이었습니다.

결 론: 예수님은 갖은 핍박을 받으시면 서도 죄인의 구원을 위하여 생명을 다하여 힘쓰셨습니다. 한 병자의 병을 고쳐주시는 일로 인하여 이처럼 고초를 당하셨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위하여 고난을 받아야 하며 주님이 기뻐하시는 새로운 생활에 들어가야 합니다.


(26) 아들과 아버지와의 관계

(요한복음 5:19-23)

서 론 : 우리가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이해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아들과 아버지와의 바른 관계를 알아야 합니다. ①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5:17). ②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요5:23). ③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요8:19). ④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10:30). 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14:9). ⑥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요14:9). 우리가 이런 말씀에 나타난 아들과 아버지와의 관계를 바로 인식할 때에 아들과 아버지는 절대로 떨어져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1. 안식일과 하나님이 하시는 일

(1)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일은 그가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셨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지키는 일이야말로 율법의 근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그가 메시야일 수 없다고 단정해 버렸습니다.

(2)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신 말씀은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천지의 창조를 마치신 후 안식에 들어가셨지만 아담이 죄를 범함으로 인간이 죄로 멸망하게 되고 사단이 세상의 권세를 잡게 되었을 때 인간의 구원을 위한 새로운 일을 하시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계속적으로 일하셨고, 독생자를 보내신 그 아들 안에서 끊임없이 일하고 계셨으며, 지금도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심으로 그의 구원의 역사를 하루도 쉬심이 없이 계속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인간의 생명을 구원하시는 일에 안식일이라고 조금도 구애받으심이 없으셨던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19). (1)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그가 세상에 오시기 이전에 아버지와 함께 계셨을 때 하나님이 하신 사역을 가리킨 것입니다. (2) 주님은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고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그가 아버지의 창조적인 역사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셨음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3. 아버지와 아들의 결합은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20). 우리는 이 말씀을 대략 다음 세 가지 면으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1)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하나님의 본질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4:8).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은 아들 되시는 예수님에 대한 무한하신 사랑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이 아들에 대한 사랑을 가지시고 우리를 또한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요일4:10).

(2) 아들에게 보이셨다고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모든 것을 아들에게 보이신 일은 바로 사랑의 전달입니다. 사랑에는 비밀이나 장벽이 없습니다. 사랑은 오직 하나를 이루는 요체입니다.

(3)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참으로 기이하게 나타났습니다.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기이한 하나님의 역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이 죄인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대속의 재물이 되신 일 역시 너무나도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4. 아들도 죽은 자들을 살리신다고 하셨습니다.

21절에서 이처럼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은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만의 권능에 속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 권능이 아들이신 예수님께도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아들이신 예수님 역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곧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에 아버지의 일과 똑같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요6:40).

결 론 : 하나님께서 이처럼 그의 아들에게 그의 모든 권능을 위임하시고 함께 역사 하시게 한 이유를 말씀해 주고 있는데 그 가장 두드러진 이유의 하나로 이는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는데 있다고 하셨습니다. 아들을 공경하게 하신다는 것은 첫째로 아들을 믿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아들을 믿는 것은 곧 아버지를 믿는 것으로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아들을 공경한다는 말은 아들을 순종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통한 순종만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들을 공경하라는 말은 아들을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사랑하는 사랑만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받으시는 것입니다.


(27) 사망에서 생명으로

(요한복음 5:24-29)

서 론 : 예수님의 말씀은 모두가 새롭고 놀라운 것뿐입니다. 주님의 말씀 중에도 오늘 주신 말씀은 더욱 놀라운 말씀입니다.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무덤 속에 있는 자들이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I. 이미 얻어진 영생

주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자가 누리는 영생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참으로 놀라운 선언을 하셨습니다.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많은 세상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을 독단주의자, 독선주의자들이라고 비방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모든 진리는 오직 예수님만이 생명이요 진리이심을 분명히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주님의 모든 말씀은 그에게만이 영생이 있음을 너무나도 뚜렷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1) “내 말을 듣고” 영생을 얻는 첫째 조건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데 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했습니다(롬10:17).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생명을 주시는 역사를 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은 곧 진리요 생명입니다. 이 말씀을 듣는 사람만이 하나님께로 나올 수 있습니다.

(2)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이 말씀의 뜻은 아들을 믿는 자는 아버지를 믿는 자라고 하신 말씀과 같은 의미입니다. 아들의 음성을 듣고 아버지를 믿는 사람은 곧 아들을 믿는 자는 아버지를 믿는 자라고 하신 말씀과 같은 뜻입니다.

2. 영생의 상태

주님은 그의 말씀에서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하셨습니다.

(1) 이미 얻었다고 하셨습니다. 얻었다는 말은 이미 얻어진 상태를 말합니다. 앞으로 소유할 대상이 아니라 현재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우리가 영생으로 들어가는 것은 주검을 거쳐서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로 영생이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영원한 생명 안으로 들어가는 일은 바로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그를 보내신 하나님을 믿을 때” 바로 그때 얻어지는 것입니다.

(2) 심판에 이르지 아니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심판을 받았다고 성경에서는 끊임없이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으로 재창조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사망과는 다시 만날 수 없는 영원한 결별을 한 사람들입니다.

(3)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고 하셨습니다. ‘옮겼느니라’는 원어는 ‘메타베베켄’으로 옮긴다, 건너간다, 이사한다, 자리를 옮긴다의 뜻으로 현재완료형입니다. 이 말은 “영원한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옮겨진 상태”를 말합니다.

3. 영적 부활의 상태

영생을 말씀하신 주님은 영적인 부활과 육적인 부활의 상태를 밝히셨습니다. 25절에서 하신 말씀이 그리스도인들이 영생을 얻는 영적인 부활의 상태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님의 생명을 갖지 못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향하여 ‘죽은 자들’이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아직도 죽음이 선언된 죄와 허물 가운데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이처럼 죽은 자들에게 전하는 생명의 소식입니다. 우리는 이 복음을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원칙적으로 죽은 자들은 영적인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지 아니하면 살아날 수가 없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인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4. 육적 부활의 시기

다음에 우리 주님은 마지막심판의 권세가 주님의 손에 쥐어져 있음을 말씀하시면서 부활의 시기를 말씀하셨습니다. “무덤 속에 있는 자들이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부활은 두 가지 형태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는 생명의 부활이요 하나는 심판의 부활입니다. 생명의 부활뿐 아니라 심판의 부활도 주님으로 말미암아 됩니다. 심판의 권세가 주님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선한 일이란 하나님을 사랑하는 생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생활을 말합니다.


결 론 : 우리는 언제나 어디서나 생명의 길은 오직 하나뿐임을 확실히 믿어야합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으면 영생도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놀라운 생명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어떤 유혹이 오더라도 결코 이와 같은 진리에서 떨어져 나가거나 우리의 믿음이 흔들려서는 안됩니다.


(28) 심판주로서의 증거

(요한복음 5:30-47)

서 론 : 예수님은 자신이 온 세상의 심판주이심을 강력히 주장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인류의 최종적인 심판에 있어서 산 자와 죽은 자의 심판자가 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8-29). 예수님은 이처럼 말씀하신 자신의 증거에 대하여 스스로 해답을 주셨습니다.

1. 예수님의 심판이 의로우신 증거

주님의 심판은 의로운 심판이 되십니다. 그 증거로는 주님의 심판은 자신의 원대로 하는 심판이 아니며, 듣는 대로 행하는 심판이며, 아버지의 원대로 하시는 심판이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1) 나의 원대로 하려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그가 사람으로서의 어떤 단독적인 방법이나 생각에 따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는 아버지와 하나이시기 때문에 아버지를 떠나서는 존재하실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보내심을 받았기 때문에 아버지의 뜻을 저버리고 단독적으로 행동하실 수는 없는 것입니다.

(2) 주님은 다만 듣는 대로 심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사람이 그의 행한 대로 받는 심판을 말합니다.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하나님의 심판의 표준이 됩니다. ① 사람은 말로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② 사람은 말로 성령을 거역합니다. 말로 성령을 거역하는 죄는 사하심을 얻을 수 없습니다(마12:32). ③ 사람의 의는 그의 입의 말로써 구별이 된다고 하셨습니다(마12:37). ④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게 되리라“고 하셨습니다(마12:36).

(3)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생활해 나갈 때 반드시 명심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우리의 입으로 예수를 시인하는 일입니다(롬10:9).

다음에 우리의 입으로 사람 앞에서 주님의 이름을 시인하는 일입니다(마10:32). 우리는 늘 우리의 생활 가운데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말을 해야 합니다(말3:16). 우리는 우리의 입술로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해야 합니다. (엡1:14).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우리의 구원을 확실하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뿐 아니라 장차 하나님 앞에 상급을 받는 보증이 될 것입니다.

2. 예수님이 심판주가 되시는 증거

예수님은 자기가 메시야 되심과 그가 심판주가 되시는 일에 대하여 스스로 증거 하지 아니하셨습니다.

(1) 나를 위하여 증거 하시는 이가 따로 있다고 하셨습니다. 32절 말씀에서 주님은 “나를 위하여 증거 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나를 위하여 증거 하시는 그 증거가 참인 줄 아노라”고 하셨습니다. 이 분은 말할 것도 없이 성령을 가리키신 것입니다. 인간의 구원역사에 있어서 성자는 성부를 증거 하시고 성령은 성자를 증거 하십니다. 주님은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째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요15:36).

(2) 세례 요한의 증거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앞서 오실 메시야를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세례 요한은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고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세상에 나타냈습니다(요1:19-39).

(3) 요한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메시야로 행하신 그의 수많은 기사와 이적과 권능의 역사를 가리키신 것입니다.

(4) 주님은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거 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아버지의 증거는 예수님이 세례 받으실 때 하늘에서 들려온 음성이요 변화산에서 친히 들려주신 음성이십니다.

(5) 주님은 자기를 증거 하는 결정적인 증거로써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어려서부터 성경을 배워왔습니다. 그들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알고 성경을 배웁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성경에서 영생으로 보여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하고 다만 율법만 찾고 율법에서 의를 얻으려고 했습니다.

(6) 주님은 유대인들이 숭상하는 모세도 자기를 증거 했노라고 하셨습니다. 모세도 메시야를 증거 했다는 말은 율법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고 했습니다(롬3:21).


결 론 : 사람이 메시야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며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고 미워합니다. 로마서 1:28절에서 증거하기를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는 다른 또 하나의 이유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취하지 않고 자기 영광을 취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6장 (29-35)

◆ 밤중소리 01-28 | VIEW : 789

29. 오병이어의 기적(요한복음 6:1-15) 

30. 주님이 안 타신 배(요한복음 6:16-21) 

31. 하나님의 일(요한복음 6:22-29) 

32. 하늘에서 내려온 떡(요한복음 6:30-36)

33. 아버지의 뜻(요한복음 6:37-40)

34. 예수님의 살과 피(요한복음 6:41-59) 

35.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요한복음 6:60-71)


(29) 오병이어의 기적

(요한복음 6:1-15)

서 론 : 예수님이 행하신 많은 기적 가운데서도 오병이어의 기적은 모든 기적 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기적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의 특이하신 점은 그의 기적에는 창조적인 권능이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때로 하나님께 감사기도는 드리셨지만 기적을 위하여 기도하신 일은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은 바로 창조의 능력을 소유하고 계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의 생각하는 모든 것을 그대로 기적으로 나타내실 수 있는 것입니다.

1. 주님이 권능을 행하신 특징

주님은 그의 공생애 중에 이루 헤아려 알 수 없는 수많은 이적과 권능을 행하셨지만 그러나 단 한가지라도 자신을 나타내거나 자신을 위한 일에는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권능은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실 수 있는 일에만 사용하셨습니다. 가나 혼인집에서 있었던 최초의 기적을 비롯하여 모든 기적이 많은 사람들에게 반듯이 있어야 할 유익을 위해서만 사용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권능은 불쌍한 병자들을 위하여 행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믿음이 있건 없건 간에 가까이 와서 병 고침을 원하는 모든 병자들의 질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주님은 이 모든 권능이나 기적의 행하심으로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들어내셨습니다.

2. 주님을 따른 큰 무리

주님이 디베랴 바다 건너편에 가셨을 때 큰 무리가 주님을 따라 그곳으로 찾아갔습니다.

(1) 이들은 목자 없는 양처럼 유리하는 무리였습니다. 그들은 목자 없는 양들이 된 사람들입니다. 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이들 양 무리들을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이스라엘의 목자로 세우셨건만 그들은 자기만 먹는 목자가 되었고 양 무리는 먹이지 못하는 목자가 된 것입니다(겔34:2-4). 주님은 이들을 목자 없는 양처럼 보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신 것입니다.

(2) 이들은 표적을 보고 주님을 따라다닌 무리들이었습니다. 이 같은 사실은 2절에서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인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봄이러라” 대개의 경우 표적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따라다니기는 잘 하지만 그들의 동기가 표적에 있기 때문에 진리를 사모하는 간절한 마음이 없으며 신앙적으로 자라나지를 못합니다.

(3) 그들은 잘못된 메시야관을 가지고 주님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약속의 메시야를, 표적으로 찾으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한눈에 메시야로 믿을 수 있게 하는 어떤 결정적인 표적을 보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결국은 오병이어의 기적도 메시야로서의 충분한 표적이 못된다고 생각하여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하시는 (메시야로)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이니까”고 물었습니다(요6:30).

3. 빌립과 안드레와 한 아이의 경우

예수님은 자기에게로 다가오는 이 큰 무리들이 굶주려 있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1) 주님은 빌립에게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 같은 물으심은 주님이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이때 빌립은 그의 명석한 머리로 다가오는 큰 무리의 수효와 그들에게 조금씩 떡을 나누어주게 될 때 들어가는 비용을 재빨리 계산해 냈습니다. 그리고는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 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고 대답한 것입니다. 주님은 빌립의 입에서 이 같은 대답을 기대하신 것은 아니십니다. “저는 주님이 그들에게 먹이실 양식을 준비하신 줄로 압니다” 그의 입에서 이 같은 대답이 나왔더라면 그는 주님의 칭찬을 받았을 것입니다.

(2) 이때 안드레가 주님이 하시는 걱정을 듣고 군중 가운데 나아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는 한 아이를 데리고 왔습니다.

(3) 주님이 기적을 나타내실 수 있었던 결정적인 동기는 한 아이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였습니다. 이 어린아이의 칭찬 받을만한 점은 그가 예수님을 따라나섰을 때 그의 먹을 양식을 준비하였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어린아이로써 주님을 따라 먼 곳인 빈들에까지 쫓아왔다는 것이요 또 한편 그가 가지고 있는 도시락을 온전히 예수님께 드릴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4. 오병이어의 기적

주님은 이 어린 소년의 티없는 제물을 가지시고 축사하시고 자리에 앉은 자들에게 나누어주도록 명하셨습니다. 그랬더니 그 떡과 물고기가 오 천명이 넘는 그 많은 군중들을 배불리고도 12바구니를 남기는 기적이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이 받으시기에 합당한 제물을 드리면 주님은 그 제물을 가지시고 축사하여 주십니다. 그러면 오병이어의 기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은 충만한 축복입니다.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주시는 축복”입니다(눅6:38).

결 론 : 주님은 이 기적을 보고 그를 왕으로 세우려는 군중들을 피하여 산에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왕이 되시려고 오신 분이 아닙니다. 그는 그의 맡은 사명을 이루시는 일에 방해되는 그 어떤 유혹도 단연 물리치셨습니다.


(30) 주님이 타지 않은 배

(요한복음 6:16-21)

서 론 : 우리는 어느 화가가 그린 성화에서 우리 주님이 선장이 되셔서 배의 키를 잡으시고 격랑의 파도를 해치시며 운항하시는 모습을 바라봅니다. 이 그림 속의 주님은 바로 우리의 험한 인생 길을 친히 인도하시는 주님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하셨습니다(요16:33).

1. 그들은 왜 고난을 당했나?

예수님은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을 삼으려는 군중의 움직임을 바라보시고는 산으로 기도하러 올라가신 것입니다. 날이 저물매 제자들은 바다건너편 가버나움으로 가게 되었는데 그들은 배를 띄어 떠난 지 얼마 안되어 큰 풍랑을 만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들이 왜 이토록 풍랑을 만나 고난을 당해야 했나?

(1) 그들은 주님을 태우지 않고 떠났습니다. 갈릴리 바다에는 예기치 아니했던 풍랑이 갑작스럽게 불어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바다는 하나의 거대한 담수호로 지중해 바다표면보다 무려 207 미터나 낮은 호수입니다. 지형과 산세의 영향에 의해 이곳은 예로부터 갑작스럽게 바람이 몰려와서 바다표면을 격동시킴으로서 풍랑이 이는 곳입니다. 제자들은 이 바다에서 대대로 어부로서 그 잔뼈들이 굵어진 사람들이라 어지간한 풍랑은 그들의 기술과 힘으로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2) 그들은 주님이 없이도 안전한 항해를 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습니다. 우리의 고난은 바로 여기서 나오는 것입니다. 주님이 없이도 내가 해낼 수 있다는 생각은 우리의 인생을 실패로 이끕니다. 우리는 지금 멸망으로 인도하는 넓은 길을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생명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이 길은 험하고 협착합니다. 주님을 모시고 가지 않으면 언제나 실패할 수밖에 없는 길입니다.

(3) 그들은 어두울 때에 떠났습니다. 어둡다는 말은 빛이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가 가는 길에 빛이 없고 어둡다면 우리는 한치도 앞으로 갈 수가 없습니다. 빛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을 자기 인생의 항로로 삼고 노를 저어 나간다면 우리 주님이 그 키를 잡으시고 안전하게 운행하여 우리로 소망의 항구에 도착할 수 있게 하십니다.

(4) 그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 가에 대하여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고난 중에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주님을 보고 두려워했습니다. 예수님인 줄을 몰라보고 유령인줄로 착각을 한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모를 때 고난 중에 주님이 우리를 도우시기 위하여 가까이 오시는 모습을 바라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내가 고난을 당할 때 주님이 나를 도우시려고 가까이로 다가오고 계심을 바라보고 그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쳐야 합니다.

2.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는가?

제자들을 떠나 있었던 예수님은 무엇을 하고 계셨나?

(1) 그는 산에 올라가 기도하셨다고 했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우리를 위하신 대도이입니다. 제자들이 탄 배는 비록 광풍으로 인하여 바다 한가운데서 고난을 당하고는 있었지만 그들의 배는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산에서 그들을 바라보시고 그들의 고난을 불쌍히 보시며 아버지께 간구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비록 이 세상에서 본의 아닌 불 신앙이나 실수로 고난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 고난의 풍랑을 바라보고 무서워 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고 계시는 주님을 바라보고 새 힘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2) 다음에 예수님은 친히 산에서 내려오셔서 바다위로 그들을 찾아오셨습니다. 주님은 고난을 당하는 제자들을 그 고난에서 구원해 주시기 위하여 친히 그들을 찾아오셨습니다. 주님이 언제 우리 가까이 계시는가?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입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고 하셨습니다(사 55:36). 언제 만날만한 때인가? 우리가 고난을 당하여 실의와 낙망에 빠져 있을 때입니다.

3. 주님을 배에 영접하니 목적지에 이르렀더라

그렇게도 바람이 사납게 불어대며 풍랑을 일으켜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받은 항해였건만 주님을 그들의 배에 맞이하자마자 바다가 잔잔하여지고 배에는 사랑과 평안과 즐거움이 되돌아오고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목적지에 도착한 것입니다.

(1) 주님은 인생의 풍랑을 잔잔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주님은 우리 인생의 고난을 물리치시고 우리의 인생 속에 평안과 즐거움을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이런 주님의 인도하심만 받으면 우리의 모든 문제점들을 해결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2) 제자들은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그 배에 주님을 모셨습니다. 언제나 주님을 모셔야 합니다. 그들은 이제 바다를 건너는 일에 있어서 자신들의 노력과 경험을 버리고 온전히 주님만을 의뢰했습니다.


결 론 : 우리는 우리의 인생의 항로를 과연 누구에게 맡겼습니까? 내가 운행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주님의 손에 의하여 운행되고 있는 것인가? 만약 지금 우리의 배가 세상 풍랑으로 말미암아 심한 고난을 당하는 생애를 보내고 있다면 우리를 돕기 위하여 가까이 찾아오신 주님의 모습을 바라보고 그분을 여러분의 배에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31) 하나님의 일

(요한복음 6:22-29)

서 론 : 옛날이나 지금이나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는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따르는 그들의 동기는 한결같지가 아니합니다. 오병이어의 놀라운 기적을 바라본 많은 군중들은 어쩌면 광야에서 조상들이 먹었던 바 만나와 유사한 양식을 먹게 될 줄로 알았고 이런 이적을 행하신 예수님을 그들의 왕으로 추대하려고 따라다닌 것입니다. 주님을 찾아 나선 무리들은 가버나움으로 가서 바다 건너편에서 겨우 주님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너무 반가운 나머지 “랍비여 어느 때에 여기 오셨나이까”라고 인사를 드렸지만 예수님은 자기를 찾아 나온 그들에게 오히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고 책망하신 것입니다.

1. 인생이 취해야 할 두 가지 양식

주님을 따르는 많은 무리들은 그의 메시야 된 표적을 떡으로 바라보고 떡을 먹고 배부른 연고로 주님을 따라다닌 것입니다. 참으로 이들은 예수님을 따르면서 주님으로부터 취해야 할 양식을 잘못 취한 것입니다.

(1) 주님은 그들에게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으로부터 표적을 바라보는 눈은 두 가지입니다. 마음이 완악한 사람의 눈으로 바라볼 때는 그의 표적으로부터 찾을 것이 오직 육신의 것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주님이 행하시는 이적으로부터 그의 신적 권위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위엄을 발견할 수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주님의 표적 속에서 찾은 것은 그들의 육신의 정욕을 채워주는 떡이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육신의 양식을 위하여 주님을 쫓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2)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주님을 따르는 무리들이 있습니다. 주님은 자신을 가리켜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하나님의 떡”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영적인 양식을 의미하신 것으로 영생의 떡을 가리킵니다. 에수님으로부터 우리들이 취할 양식이란 바로 이것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영생의 양식으로 그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생명의 떡으로 알고 이 떡을 취하라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그를 영접하는 일을 말합니다. 먹는다는 말의 영적인 뜻은 영접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라고 말해도 마찬가지입니다.

2.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주님은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생명의 양식은 우리가 스스로 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주심으로 우리는 받을 수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것은 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것뿐입니다. 이 은혜의 순서를 말한다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신령한 복을 주시기 위하여 창세 전에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엡1:3-4). ②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셨다”고 했습니다(롬8:30).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요6:44). ③ 이처럼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함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한 명의 누락자도 없이 온전히 구원함을 받게 됩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요6:39).

주님은 자신을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으로 주시기 위하여 참으로 놀라운 희생을 치르셨습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요일3:16). 십자가에서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심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떡이 되신 것입니다.

3. 무엇이 하나님의 일인가?

주님 곁에 모인 많은 무리들은 먹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듣고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고 물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이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말합니다. 말하자면 영생을 위하여 우리는 어떤 일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물은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놀라운 대답을 들려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는 생활이 하나님의 일 인줄로 여겼습니다. 하나님의 일이란 우리의 생활이나 우리의 손이 미치기 어려운 높은 곳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이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는 믿음이상 더 훌륭한 일의 대상이 없는 것입니다. 독생자를 보내신 목적은 그를 믿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결 론 : 우리는 과연 육신의 떡을 위하여 주님을 따르고 있는지 아니면 영생하도록 있는 참된 양식을 위하여 일하고 있는지 우리의 위치를 분명히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생활이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생활을 통하여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32) 하늘에서 내려온 떡

(요한복음 6:30-36)

서 론 : 예수님으로부터 사람들이?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 그러면 우리로 당신을 보고 하나님이 보내신 자인줄 믿게 하는 표적이 무엇이냐고 물은 것입니다. 그들은 메시야를 믿는데 있어서 확실한 표적을 구했습니다. 그들이 요구한 이 같은 표적은 성경적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만일 선지자가 있어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의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그 선지자가 방자히 말한 것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말지니라”고 하신 말씀에 근거한 것입니다(신18:22). 그러나 그들은 주님을 메시야로 인정할만한 충분한 증거를 바라보았지만 다만 그들에게 믿음이 없는 연고로 주님을 배척했기 때문에 이 말씀으로 그들의 불신의 죄를 덮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1. 모세가 보인 표적

그들은 모세의 경우를 들어 모세는 하늘에서 조상들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모세가 이스라엘의 선지자로 인정받은 일은 이처럼 하늘에서 만나를 내림으로 되었으니 당신도 모세와 같은 움직일 수 없는 표적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1)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한가지부터 열 가지에 이르도록 표적만을 구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모세가 먹였다고 하는 하늘의 만나에 대하여 바른 해석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2)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그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모세는 아무 것도 그 스스로의 힘으로나 능력으로 행한 것이 없습니다. 홍해를 건넌 일도, 반석에서 물이 솟은 일도, 하늘에서 만나가 내려온 일도, 모두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의 행하신 모든 일이 그의 창조적인 능력으로 스스로 하셨습니다.

(3)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늘에서 이스라엘에게 내린 떡은 만나였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진 만나에 대하여는 우리들에게 여러 가지의 영적인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이 떡은 그들로 사람이 사는 일이 떡으로만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줄을 알게 하려고 하신 일이십니다(신8:3). 그러나 예수님을 따라다닌 무리들은 다만 떡을 먹고 배부른 연고로 쫓았을 뿐 그 표적에서 그들의 메시야를 찾고 생명을 얻기를 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2.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주님은 과거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려주신 만나가 실인즉 하늘에서 내려 주신 떡이 아님을 말씀하심으로 이 문제를 영적으로 설명해 주시려고 그들의 생각을 영적인 차원으로 끌어올리셨습니다.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조상이 먹었다고 하는 만나는 그것을 먹은 사람들이 다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먹은 만나는 생명을 주는 하늘의 양식도 아니요 그 떡을 먹인다 고해도 메시야 된 참 표적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1) 그들은 “이 떡을 우리에게 항상 주소서”라고 말했습니다. 이 같은 주님의 영적인 설명에 대하여 그들은 알아들을 리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 설명마저도 육적으로 생각한 나머지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라고 간청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들의 생의 목적은 오직 이 땅위에 있습니다. 그들이 필요로 한 것은 늘 배부른 떡입니다. 이처럼 그들이 주님을 따른 이유는 표적으로 육신의 것을 얻으려는 흥미와 욕심에서 나왔던 것입니다.

(2) 주님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영적인 생명을 깨닫지 못하고 생명의 양식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그들에게 폭탄적인 선언을 하셨습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심히 놀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들에게 이해가 될 리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생명을 주시는 생명의 떡으로 오신 분입니다. 이분이야말로 하늘에서 내려온 하나님의 떡이십니다. 예수님은 그를 영접하는 자에게, 그를 믿는 자에게 생명의 양식이 되기 때문에 그를 믿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주리지 아니 할 것이라고 하신 말씀은 다시는 영생에 관하여 걱정이 없이 생의 만족을 누리는 것이요,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하신 말씀은 그가 누리는 평안과 기쁨과 소망을 가리킨 것입니다.


결 론 : 예수님은 하늘의 생명을 가지고 이 세상에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내려오신 하나님의 떡이십니다. 이 떡을 찾는 사람만이 예수로 만족한 인생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떡을 먹는 사람만이 영생을 소유하며 그 마음에 기쁨과 평안이 강처럼 흐르며, 그를 믿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충만한 축복된 생애를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33) 아버지의 뜻

(요한복음 6:37-40)

서 론 : 예수님은 자주 아버지의 뜻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함이니라”고 하신 것처럼,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부터가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였습니다. 그의 모든 일은 온전히 아버지의 뜻을 따르고 그 뜻을 이루시는 일이었습니다.

1. 하나님의 제한구원과 온전한 구원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은 많았지만, 그의 말씀을 듣고 그의 이적을 바라보며 체험한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고 그를 배척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매우 어렵지만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 볼 때 하나님의 구원이 제한구원(制限救援)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1)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예수께로 올 수 있는가에 대하여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 해답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만이 그리스도께로 인도되고 그들에게만 믿음이 주어지며 그들에 한하여 하나님의 구원이 선물로 주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로 오는 자는 이미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게 보내시기로 작정된 사람들임을 분명히 밝혀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 같은 하나님의 구원이, 제한구원임을 알려주시는 많은 증거를 제시해 주고 있지만 두 가지만 예로 든다면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가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13:48). 또한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고도 하셨습니다.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라”(살후3:2).

(2)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예정된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을 다 ‘자기백성’이라고 말씀하지 아니하십니다. 인류 중에 특별히 하나님의 성별된 백성이 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믿지 아니하는 무리들을 향하여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고. 하셨습니다(요10:26). 복음은 온 세상에 누구에게나 전파되지만 하나님은 그의 예정된 사람들만을 세상에서 불러 예수님께로 인도하시여 구원의 선물을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라고 하신 대상은 바로 이들인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예정된 백성은 한 명도 하나님의 구원사역에서 빠지지 아니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다 내게로 올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그 중에 누락된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4) 예수님은 이들을 한 명도 내어쫓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내어쫓지 아니하신다는 말은 어떤 경우에라도 결코 버려짐이 없다는 의미로 그리스도 앞으로 오는 모든 사람들의 절대적인 구원의 보증을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 중에는 얼마간 따르다가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주님에 의하여 내어쫓긴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떨어져 나갈 수밖에 없는 가라지 들입니다. 예수님은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2. 아버지의 뜻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에 대하여 세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같은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이루어드리는 일을 마치 주님의 양식으로 삼으신 것입니다(요4:34).

(1) 아버지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말은 ‘메아폴레소’로 이 말은 영원히 멸망시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 안에는 하나님의 주권과 성도의 견인(堅忍)이 들어가 있습니다. 인간의 구원은 하나님 편에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에 속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는 우리의 모든 환경과 조건을 초월하십니다.

또다른 한가지는 성도의 견인인데 성도들은 어떤 시험과 고난과 핍박과 환난 중에서라도 끝까지 이기며 구원을 쟁취하는 것입니다(고후2:14).

(2)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를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 같은 영생을 선물로 주시기 위하여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3) 아버지의 뜻은 마지막날에 다시 이들을 살리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마지막 날이란 하나님의 심판의 날을 의미합니다. 다시 살리시는 일은 그리스도인들의 최종적인 부활을 말합니다. 이 부활은 영생을 이루는 온전한 구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부활이 없다면 영생의 증거를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부활의 보증으로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하는 것입니다. 


결 론 :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우리 주님은 반드시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이루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에 의하여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어떤 경우에도 나를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며 내어쫓지도 아니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그날에 나를 생명의 부활에 참여시키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진실하시며 천지가 없어질지언정 그의 말씀은 결코 없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붙들고 구원의 확신 위에 우리의 믿음을 세워 승리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34) 예수님의 살과 피

(요한복음 6:41-59)

서 론 :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하신 말씀대로 예수님의 말씀은 영적인 가르침이었지만 이 말씀을 듣는 많은 무리들은 그 말씀을 육적인 말로 들었습니다(요6:63).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의 지성과 큰 갈등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주님이 자기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라고 하실 때 그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생각은 이러했습니다.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제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로서 내려왔다 하느냐.”

1. 그리스도에게로 올 자는 누군가?

예수님은 수군거리는 군중을 향하여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1) 아버지께서 이끄시는 자만이 온다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에게로 올 사람들은 아버지께서 이끄시는 선행적인 역사가 따라야 한다는 사실을 말씀해 주십니다.

① 인간의 자유의지에 속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② 다음에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창세 전에 이미 예정한 자들을 이끄신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③ 그러나 이 같은 하나님의 예정은 이 세상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 중에는 아무도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구원받았을 때 이 같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어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④ 하나님이 이끄심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게 하시는 은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역사로 이 은혜는 불가항력적입니다.

(2) 다음에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올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지식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이끄시는 백성들에게 지식으로 구원의 도리를 가르치십니다. 우리의 믿음이나 구원은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구원의 첫 단계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께 나아가 배워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그를 배우는 사람에게 생명의 떡이 되며 영생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자연히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움으로 성장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영적인 지식이나 약속도 배움으로 깨달아 알게되는 것입니다.


2. 인자의 살과 인자의 피

예수님은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고 말씀하신 후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주실 영생의 떡이란 바로 예수님의 살이라고 밝히신 후 53절에 가서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같은 말씀을 들은 유대인들은 심히 놀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영적인 말씀으로 소화시키지 못하고 육적인 생각으로 들었던 것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라고 하셨으니 그들이 놀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 같은 표현을 육적인 생각으로 듣는다면 식인종이 되라는 말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영적으로 이해하려면 예수님이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고 하신 말씀에 대해서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고 하신 말씀은 주님의 선재를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요셉의 아들로 비로소 세상에 태어나신 분이 아니십니다. 그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신 분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이 하늘에서 내려오셨다고 하시는 말씀에 대하여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은 예수님이 이 땅에 태어나시기 이전에 하늘에 이미 계셨던 사실에 대한 지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 성령으로 잉태된 사실은 이 같은 그리스도의 선재에 대한 지식에서만이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2) 인자의 살은 참된 양식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살이 우리의 양식이 된다고 하신 말씀은 우리의 영적인 구원을 위한 생명의 양식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살이 어떻게 하여 생명의 양식이 되는 것인가? 그의 몸이 십자가에서 찢기시고 고난 당하심을 인하여 우리와 하나님과의 화목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살이 아니고는 생명을 얻을 길이 없는 것입니다.

(3) 인자의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다고 하셨습니다. 인자의 피라고 하신 것은 주님이 우리의 죄 값으로 인하여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보배로운 그의 피 흘림을 가리킨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이 없다면 우리의 죄가 사함 받을 길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화목 제물로 십자가에서 고난 당하신 사실을 믿어야 하며, 그의 피로 인하여 죄 사함을 받은 사실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 생명의 양식으로 우리의 구원의 보증이 되는 것입니다.


결 론 : 우리는 여기서 생명의 떡이 되시는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에 대하여 몇 가지 사실을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로 영생을 가졌다고 하셨습니다. 영생은 이 같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리고 이 같은 사람의 삶에 대하여 그 사람은 나로 인하여 살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삶이요 그리스도를 위한 삶이 되는 것입니다.


(35)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요한복음 6:60-71)

서 론 : 하나님의 말씀은 아무나 들을 수 있으나 그 말씀을 이해하는 일은 누구나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고 하신 주님의 이 말씀은 그 자리에서 이 말씀을 들은 사람 가운데 많은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와 들을 수 없는 귀

이 말씀을 들은 제자 중 여럿이 이처럼 말했습니다. “이 말씀은 어렵도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들으려니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고 영적으로 들으려니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하여 많은 제자들이 물러갔습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들을 생명으로 모으는 역사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흩으는 역사도 동시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쫓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쫓아 생명에 이르게 하는 냄새”가 되기 때문입니다(고후2:16).

(2) 그들에게는 영의 말이 어리석게 보이는 것입니다. 인간의 지성이나 보편적인 사고방식으로는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것을 믿는 사람들을 어리석게 보는 것입니다.

(3) 그들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에서 아무 것도 찾지 못하고 육신의 길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 중에는 그 말씀을 받는 일에 다음 네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보겠습니다.

① 듣고 깨닫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순종하여 열매를 맺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의 양으로 그 목자의 음성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② 듣고 깨닫지는 못하지만 가르치심을 받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가까운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지혜가 자라고 영적인 분별력이 성장하면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좋은 열매를 맺을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③ 다음에 듣기는 하지만 어리석게 생각함으로 주님을 따르기를 포기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고 말한 그 무리들이 이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④ 그리고 주님의 영적인 말씀을 듣고 걸림이 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오히려 말씀에서 흠을 잡으려고 합니다.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이나 많은 유대인들이 그런 종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2. 영생의 말씀의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는 66절에 있는 말씀에서 많은 것을 배워야 합니다.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결국 육신의 것을 위하여 주님을 따른 모든 무리들은 다 물러가고 이제 다시는 주님을 따르는 무리 중에 들지 아니했습니다. 오늘날에도 그리스도인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포기하고 주님의 곁을 떠나버리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육신의 것을 바라보고 따라다녔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함으로 소망을 견고히 잡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1) 주님은 자기 앞에 앉아 있는 12제자들을 향하여 “너희도 가려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이 말씀을 듣자 자기 선생님의 그 심정을 헤아려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의 결단을 주님 앞에 밝힘으로 주님의 마음에 위로를 드리려고 했습니다. 그는 이처럼 말씀드렸습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많은 무리가 다 떠났어도 주님은 이런 베드로의 고백에 기뻐하셨습니다. 베드로의 이 말에는 두 가지 뜻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는 그들의 결단으로 이제는 영생이신 주님을 떠나서는 아무 곳에도 갈 곳이 없으니 자신들은 절대로 주님을 떠나지 않을 것을 다짐한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들은 주님이 누구이신가 에 대하여 이제 확실히 믿고, 알고 있다는 신앙적인 의지를 나타낸 것입니다.

(2)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라고 말했습니다. 베드로가 드린 이 말 중에는 여러 가지 뜻이 들어가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오직 생명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야말로 하늘에서 내려오신 영생의 떡이시라는 것입니다.

(3)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고 고백했습니다. 베드로의 이 말은 다른 또 하나의 그의 신앙고백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 말에도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이 말은 주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생명의 떡이시라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은 자기들이 대망한 참 메시야가 되신다는 뜻입니다.


결 론 : 우리는 혹 하나님의 영적인 생명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여 주님의 곁을 떠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베드로처럼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하는 신앙을 가지고 주님을 따라야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7장 (36-39)

◆ 밤중소리 01-28 | VIEW : 546

36. 예수님의 때(요한복음 7:1-9) 

37.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요한복음 7:10-24)

38. 유대인의 메시야관(요한복음 7:25-36)

39. 목마른 자는 내게로 와서 마시라! (요한복음 7:37-53)


(36) 예수님의 때

(요한복음 7:1-9)


서 론 : 주님에게는 여러 명의 형제들이 있었습니다. 이들 형제들은 물론 마리아와 요셉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육신적인 형제들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집안에서도 맏이가 되셨습니다. 우리들이 생각할 때 이들 주님의 형제들은 자기 형님을 구주로 모셨으니 얼마나 행복하겠느냐는 생각을 가질 수 있겠지만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가장 가까운 형제들까지라도 그가 메시야이심을 믿지 않고 있었습니다.

1. 당신을 나타내소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유대에 나타나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빨리 잡아죽이려는 음모를 세워놓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무 때나 잡혀 그들의 임의로 처치되어서는 안되실 분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써 유월절에 희생되셔야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형제들은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워오자 “당신의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라고 권고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메시야 되심을 믿지 아니했지만 그가 행하시는 능하신 일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제자들이 그를 따르며 많은 군중들이 그를 존경하고 있음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이 자기를 나타내지 아니하시고 숨기시려는 일에 대하여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야 될 것이 아니냐??고 말한 것입니다. 주님의 형제들이 이처럼 말한 데 대하여 요한은 이렇게 풀이했습니다.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예수님의 형제들이라도 예수님을 믿지 아니했다는 데서 우리는 다음 몇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믿음은 혈육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주님의 형제들은 주님이 공생애에 들어가기까지 줄곧 주님과 함께 한 집에서 지냈습니다. 그리고 그 형제들은 주님의 훌륭하신 인격과 진실하심과 모든 면에서 흠이나 점이 없으신 분이심을 목격하고 피부로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로는 믿지 아니했습니다.

(2) 다음에 기적이 참된 신앙을 심어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의 형제들은 주님이 행하시는 기적을 듣기도 하고 직접 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그들에게 믿음을 심어줄 수는 없었습니다.

(3) 사람은 성령을 받아야 바론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는 생활을 할 수 있음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토록 주님을 믿지 않던 그 형제들이었지만 오순절에 이르러 성령을 받자 그들은 훌륭한 전도인이 되었고 주님의 동생 야고보는 사도들과 함께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 같은 일꾼이 된 것입니다.

2 예수님의 때

예수님은 이 같은 그이 형제들의 조롱 섞인 권면에도 결코 노하지 아니하시고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다”고 하셨습니다.

(1) 예수님은 이 “때”에 대하여 가끔 말씀하신 일이 있습니다. 가나 혼인집에서도 포도주가 모자란다고 전갈한 어머니의 말을 들었을 때도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고 말씀하셨던 일이 있습니다(요2:4). 이 같은 주님의 말씀은 모든 일에는 주어진 때가 있음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전3:1-2).

(2) 우리는 하나님의 이 때를 알 길이 없습니다(전 7:13-14).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일 때를 부지런히 찾았지만 하나님이 주신 때가 아니었음으로 자기들 생각대로 죽일 수가 없었습니다.

가룟 유다도 자기 스승을 팔아 넘길 때를 몰랐음으로 그때를 찾았다고 했습니다(눅22:6). 주님은 자신이 하실 모든 일에 대한 정확한 그 때를 알고 계셨기 때문에 이런 때를 따라 움직이심으로 자기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 나가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3) 예수님은 이 때를 어김없이 지키셨습니다. 그는 자기가 죽으셔야 할 때를 알고 계셨기 때문에 그의 하시는 모든 일이 그 때에 어김이 없도록 행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자신이 아직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시기가 아니심을 아셨기 때문에 그 형제들에게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나는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 예수님은 이 초막절 명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이 때를 채우시는 일은 그 기간이 며칠일 수도 있고 몇 시간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 형제들에게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고 하셨습니다. “아직”이란 말은 그 때를 가리키신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고 하신 그 아직의 시기가 며칠 후 지났을 때에 올라가셔서 활동하셨던 것입니다.


결 론 : 우리는 주님이 때를 따라 아버지의 뜻대로 그의 사역을 이루신 것처럼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때를 잘 활용하고 그 때를 놓쳐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저희가 양떼와 소떼를 끌고 여호와를 찾으러 갈찌라도 만나지 못할 것은 이미 저희에게서 떠나셨음이라.” 회개할 때를 놓쳐서도 안됩니다(호5:6). 은혜를 받을 기회를 놓쳐서도 안됩니다.


(37) 공의의 판단으로 하라

(요한복음 7:10-24)

서 론 : 예수님은 초막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를 권하는 형제들에게 “나는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고 말씀하시고 갈릴리에 머물러 계셨으나 이 명절이 시작되어 거의 중간이 되었을 때 자신을 나타내지 아니하시고 비밀히 올라가셨습니다. 이제 그의 때가 찬 것입니다. 그가 비밀히 올라가신 이유는 유대인들이 그를 잡을 기회를 노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 예수님께 대한 수군거림

초막절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가장 거족적인 민족적 행사였습니다. 수장절이라고 하는 이 초막절에 유대인들은 나뭇가지로 지붕에 초막을 짓고 7일간의 절기 동안 이 곳에 거처했습니다. 이 절기는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방황한 것을 기억하고, 예물을 주고받으며 크게 즐거워한 명절입니다. 이 명절에는 모든 유대인들이 다 고국으로 돌아오는데 예루살렘은 이들로 인하여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무리 가운데서 예수를 찾은 것도 그가 유대인으로 이 명절을 지키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올 줄로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시기에 이미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사면으로 펼쳐진 때라 예루살렘에 모인 무리들은 그를 보기를 원하는 무리들도 많았고 그에 대한 수군거림으로 술렁대고 있었습니다. 수군거림의 내용은 두 가지로 나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혹은 좋은 사람이라 하였고 또 어떤 사람은 아니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2. 성전에서 가르치신 예수님

자신을 비밀히 감추신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후 명절의 중간이 되자 성전에 올라가 무리들에게 말씀을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말씀을 가르치시는 주님의 주변에는 마침 명절 분위기에 무르익은 많은 무리들을 주위에 모이게 하기에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한편 놀라면서도(기이히 여김) 한편 배우지 못한 예수님을 무시하면서 그의 입에서 나오는 교훈은 하등 가치가 없다고 공중들 앞에서 조롱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이 같은 비방과 모함에 대하여 그들의 불 신앙을 책망하셨습니다.

(1) 주님은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내 것이 아니라고 하신 말씀의 뜻은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세상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의 전하시는 말씀이 세상에서 터득한 학문의 말이 아니심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2) 주님은 내 교훈은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모든 교훈은 온전히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친히 하나님으로부터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이 말씀은 자신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밝히시고 그의 교훈이야말로 하나님의 교훈임을 알라고 그들에게 경종 하신 말씀이십니다.

① 예수님은 스스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분입니다(요1:14). 예수님은 진리 그 자체로 오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입에서 나오시는 모든 말씀은 우리들을 가르치시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교훈이 되는 것입니다.

②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입니다. 말씀은 곧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분은 세상 학문을 배우고 그것으로 사람들을 교훈 하실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③ 하나님은 마지막 시대에 그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히1:1). 하나님은 그 아들로 직접 말씀하시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교훈은 바로 이 같은 교훈이심으로 그의 교훈에는 권위가 있고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2. 누가 이런 사실을 알 수 있는가?

그러나 누구나 이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이런 사실을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는 사람만이 알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①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면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은 예수를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②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의 독생자를 보내신 것으로 깨달아 알게 되는데 이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죄를 바라보고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③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면 성경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령을 받지 않고는 성경을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공격적인 자세로 그들에게 날카로운 반격을 가하셨습니다.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무리 중에서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고 하신 말씀을 그 자리에 있었던 많은 유대인들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지도자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하는 계획을 알 턱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주님을 향하여 귀신이 들렸다고 공격하면서 누가 당신을 죽이려하느냐고 공박했습니다.


결 론 : 유대인들은 예수님올 외모로 판단했습니다. 예수님을 외모로 판단하는 사람들은 그의 판단으로 스스로 실족하게 됩니다. 주님의 나타난 모습은 아무 보잘 것이 없습니다(사53:2).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볼 때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해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로 그를 바라볼 때 그의 교훈이야말로 하나님의 교훈이심을 깨달아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이 될 것입니다.


(38) 유대인의 메시야관

(요한복음 7:25-36)

서 론 : 유대인들은 오래 전부터 메시야를 대망 해 온 민족입니다. 그들은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메시야를 바랐습니다. 이 같은 그들의 바람은 자기들이 원하는 그때에 메시야가 나타나서 자기들을 민족적으로 구원해 줄 것을 기대한데서 나온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메시야관이었음으로 그들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메시야관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그들의 메시야관이 결국은 나사렛 땅에 가난한 가정의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예수를 메시야로 믿지 아니한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이스라엘(유대인)은 지금도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자기들을 구원해 줄 메시야를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1. 이 사람을 참으로 그리스도인줄 알았는가?

예수님은 초막절 중간이 되어 성전에 올라가셔서 성전에 모인 유대인들을 향하여 복음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곳에 그를 비난하는 무리들이 많이 있었지만 도 안식일의 규례를 어기는 그들의 잘못된 행실에 대하여 신랄하게 공격하셨습니다.

(1)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으리라.”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의 태어나심에 대한 신비를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다만 그들을 구원해줄 메시야가 말할 수 없는 영광 중에 오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예수님의 신상에 대하여 너무나도 소상히 알고 있었습니다. 주님의 이 같은 신상관계가 그들로부터 메시야로서의 인정을 외면하게 만들었습니다.

(2)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출생지에 대하여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나사렛이 그의 고향이며 갈릴리 사람인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권세 있는 말씀을 하고 놀랄만한 이적을 행해도 메시야에 대한 그들의 사상을 뒤엎을 수가 없었습니다. “혹은 그리스도라 하며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의 살던 촌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요7:41-42).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 부모와 동방박사들이며 들에서 양을 쳤던 목동들은 이미 까마득히 잊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갈릴리 나사렛에서 온 사람임을 누구나 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메시야관에 합치되는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혹 그들 가운데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는 무리들도 적지 아니하였지만 그들의 메시야관도 유대인만을 위한 편협적인 사상이었음으로 바른 메시야관은 못되었습니다.

2 예수님의 증거

진리를 증거 하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진리는 깨닫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가 없으면 깨달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1)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안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그들이 자신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실이 사실이다고 하신 뜻에서 이처럼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이 육신적으로 알고 있는 주님에 대한 지식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에 대하여 탄식하시는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신분에 대하여 알고 있었던 일은 나사렛 땅에서 태어나셨다는 것으로 그들은 이 일에 대해서만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2)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로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태어나심의 신비를 그들에게 가르쳐 주시기를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로라”고 하셨습니다.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고 하신 말씀은 인간적인 방법으로 태어나지 아니하셨다는 사실을 밝히신 것입니다.

(3) “나를 보내신 이는 참이시라”고 하셨습니다. 참이란 진리인데 진리는 곧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참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분입니다.

(4) “너희는 모르나 나는 그를 안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어째서 그들에게 “너희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하셨나? 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의식화된 율법적인 하나님입니다.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이런 모습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같은 말씀으로 그들의 잘못된 메시야관을 공격하고 자신이 참 하나님의 보내신 메시야심을 증거 하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말씀에 그들은 분이 가득하여 주님을 잡으려고 했지만 감히 어느 누구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은 아직 그들의 손에 잡히실 때가 아니셨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시는 말씀에는 권능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강하게 움직이셨습니다. 그들은 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자 그들 중에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기 시작했습니다.


결 론 : 무리들의 수군거림은 바리새인들을 당황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잡으려고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의 하속들을 그곳에 보냈지만 아직 때가 이르지 않은 예수님을 붙잡을 수는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유월절에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돌아가실 것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초막절부터 유월절까지는 약 반년간의 시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의 사명을 마치시고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것입니다.


(39) 목마른 자는 다 내게로 오라

(요한복음 7:37-53)

서 론 : 예수님은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많은 무리들을 향하여 서서 외치셨습니다. 명절 끝날 이란 일곱째 날로 절기가 끝나고 여드레 되는 날은 대회 혹은 성회라 불려지는 날이므로 명절 마지막 7일째 되는 날을 의미합니다. 주님이 외치신 메시지는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는 것입니다.

1. 누가 목마른 자인가?

예수님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하셨습니다. 이 명절에는 매일 실로암 물을 길어오는 일들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 말씀은 초막절 행사 중에 하신 것으로 이 말씀을 듣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어떤 암시적인 흥미를 줄 수 있었습니다. “목마른 자는 오라”고 하신 목마른 자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가?

(1) 영혼의 기갈을 당하고 있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돈이 많았던 부자 청년도 이 영혼의 기갈로 인하여 주님 앞에 찾아 나와 “내가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으리이까”고 물었습니다. 삭개오도 이 기갈로 예수님을 뵈려고 뽕나무에 올라갔다가 목마른 자에게 생수를 주시는 예수님을 만나 이 물을 마신 것입니다.

(2) 인생의 죄 짐을 짊어지고 있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죄 값은 사망입니다. 누구든 이 죄의 굴레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자기의 죄를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목마른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께로 나와야합니다.

(3) 마음에 참 평안이 없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인생에게 평안이 없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지옥에서 살아가는 듯한 고통을 줄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평안이 없는 사실을 발견한 사람은 자기가 목마른 인생을 살아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께로 나와서 평안을 주시는 물을 마셔야 합니다.

2. 내게로 와서 마시라

주님은 누구든지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하셨는데 예수님은 목마른 자의 해결자로서 그들을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오직 예수님만이 이 같은 초청자이십니다. 예수님은 바로 부활이요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시고, 죽은 자에게 부활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면 이 물을 마시라고 하신 말씀의 뜻은 무엇인가? 목마른 자의 목마름을 해결하는 주님의 물은 요한복음 6:53절 이하에서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고 하셨습니다.

3. 생수와 성령

예수님은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설명되기를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목마른 자에게 마시라고 하신 그 물은 곧 예수 자신이시며 마신다는 말은 그를 믿는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1) 성령은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요16:13).

(2) 성령은 그리스도를 증거 하십니다. “내가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 하실 것이요”(요15:26).

(3) 성령은 우리들로 회개케 하십니다.

(4) 성령은 끝날 까지 우리 가운데서 착한 일을 이루어주십니다(빌1:6).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은 많은 무리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수군거렸습니다.

① 어떤 사람은 이가 참으로 그 선구자라 했습니다. 이 선지자는 모세가 증거한 선지자로 이스라엘은 이 선지자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② 어떤 이들은 그가 그리스도라고 말했습니다. 그를 영접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행하시는 이적과 그의 권위 있는 말씀으로 그렇게 판단한 것입니다.

③ 그리고 또 어떤 이들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성경적인 증거를 댔습니다.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올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둘러싼 무리들 중에는 그를 잡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바리새인들이 보낸 하속들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예수를 잡아오지 못한 일에 대하여 바리새인들의 책망을 들을 때에 그들은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들의 이 같은 말은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깊은 감동을 받았음을 말해줍니다.


결 론 : 바리새인들이 공회에서 예수님에 대한 쟁론을 벌렸습니다. 그들은 대노하여 하속들에게 “너희도 미혹되었느냐”고 책망하면서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들은 저주를 받은 자”라고 예수님의 말씀에 감동을 받은 무리들을 정죄했습니다. 이때 니고데모가 저희에게 공박했습니다.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판결하느냐”고 말한 것입니다. 율법에서 재판은 공정해야 할 것이라고 명하고 있습니다(출23:1-3).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하시는 말씀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 물을 목마른 자들에게 마시게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 (40-47)

◆ 밤중소리 01-28 | VIEW : 888

40.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한복음 8:1-11) 

41.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한복음 8:12-18) 

42.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요한복음 8:19-27)

43. 인자를 든 후에 알리라(요한복음 8:28) 

44. 아버지와 함께 하신 예수님(요한복음 8:29-30) 

45. 진리가 자유케 하리라(요한복음 8:31-32) 

46. 아들이 자유케 하리라(요한복음 8:33-47) 

47. 하나님께 속한 자와 속하지 아니한 자(요한복음 8:47-59)


(40)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요한복음 8:1-11)

서 론 : 어느 여인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누구에게 잡혔는지는 모르지만 그 여인은 바리새인들에게 끌려 예수님께 오게 되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여인이 저지른 간음죄에 대하여 예수님은 과연 어떤 판단을 내랄 것인가에 대하여 흥미를 가지고 예수님을 소송하는 고소 거리로 삼으려고 한 것입니다.

1. 주님을 시험하려는 바리새인들의 간계

바리새인들은 이 여인을 처벌하는 율법적인 조항을 몰라서 예수님께 찾아 나온 것이 아닙니다.

(1) 그들은 간음죄에 대한 예수님의 율법적인 해석을 듣고 고소할 조건을 찾으려고 한 것입니다. 간음이란 율법에서 가장 엄하게 다스리는 죄입니다. 특히 여자의 경우 이 죄에 대한 자비나 용서란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예수는 이 여인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할 것인가?

(2) 간음죄가 죄가 된다면 마땅히 율법적인 처벌이 내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주님이 그 여자를 모세의 명한 대로 돌로 치라고 한다면 그 여인이 그들의 손에 의하여 죽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에도 분명히 위배되는 것입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마9:13).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께서 이 가련한 죄인을 돌로 치라고 하신다면 이 일이야말로 그곳에 있었던 많은 군중들에게 크나큰 실망을 주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 여인의 죄를 용서한다면 간음죄를 인정하지 않는 일이 되어 주님은 그들에게 무 율법주의자란 누명을 쓰고 재판을 받아야하셨던 것입니다.

2.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바리새인들의 질문은 끈질겼습니다.

(1) 이들의 이런 질문을 받으신 예수님은 아무 말씀도 아니하시고 몸을 굽히시고 땅에 무엇인가 쓰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이 억지로라도 대답을 들으려고 강압적인 자세로 공격을 취해오기 때문에 주님은 무엇이라고 하시던 그의 견해를 밝혀주지 않으실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예수님은 몸을 일으키시고 그들에게 참으로 놀라운 말씀을 던지셨습니다.

(2)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그들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하신 말씀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의 질문에 하나의 율법적인 도전을 시도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의 취지는 이러합니다. 너희들이 율법으로 이 여인을 정죄하여 돌로 쳐죽이기를 원한다면 그러면 너희 중에 율법을 온전히 지킴으로 율법의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라고 하나님 앞에 맹세할 수 있는 자가 있거든 먼저 이 여인에게 돌을 들어 치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3) 예수님의 이 말씀은 모인 군중들에게 놀라운 반응을 일으켰습니다. 그 여인을 고소한 바리새인들에게 큰 충격을 준 듯 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이 말씀을 이처럼 해석할 수 있습니다.

① 예수님은 그 여인을 분명한 죄인으로 인정하셨습니다. 돌로 치라고 하신 말씀은 그 여인은 마땅히 돌로 쳐서 죽임을 당할 죄인임을 인정하신 말씀입니다.

② 그리고 이 말씀은 바리새인까지도 양심상으로 자기들에게는 죄가 없다고 장담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③ 율법의 정죄는 비록 간음죄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약 2:10-11).

3.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간음 중에 붙잡힌 여인을 예수님 앞으로 끌어온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이 권위 있는 말씀에 그들의 양심에 가책을 받고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물러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서 있는 여자만 남았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가련한 여인을 측은히 바라보시면서 사랑에 넘치는 말씀을 들려 주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예수님은 이 여인의 마음의 깊은 뉘우침을 보시고 그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정죄하지 않는다고 하신 말씀은 곧 용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앞으로 그 여인이 행해야할 바 그의 생활태도를 밝혀 주셨습니다.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다시는’ 이란 말은 ‘아포투툰’이란 말로 지금부터란 뜻입니다. 죄를 용서받은 사람은 그 시간부터 그 죄를 버려야 하고 그 죄에서 떠나야 하며 그 죄를 다시는 짓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결 론 : 우리는 바리새인들처럼 죄인을 정죄해 버리려는 잘못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나도 죄인이었으며 나도 그들과 같은 죄를 범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고 죄인을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이 세상에 죄를 범하지 아니하는 의인은 한 명도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간음 중에 잡힌 이 여인의 경우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이 회개할 때 그 죄를 용서하십니다. 우리도 죄에서 떠나 하나님 앞에 열매맺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41)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한복음 8:12-18)

서 론 :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는 놀라운 선언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그곳에 모여있는 군중들에게 놀라움을 주었고 한편 바리새인들에게는 비웃음을 샀습니다. 예수가 나사렛에서 태어난 목수의 아들이라고 확실히 알고 있는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자신을 증거 하시는 여러 가지 말씀에 반기를 들고 공격을 가했습니다. “네가 너를 위하여 증거 하니 네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도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메시야의 참 증거를 찾으려 하지 않고 사람의 증거를 원했습니다.

I. 빛으로 오신 예수

예수님이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신 말씀은 그가 세상에 빛으로 오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빛이시라고 말씀했는데 이 빛이란 말은 곧 생명을 뜻합니다. 이 빛은 세상의 사물을 비취는 유형의 빛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 비취는 영적 빛입니다.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빛으로 오셨기 때문에 누구든지 이 빛을 영접하면 빛을 받은 사람이 됩니다.

2. 빛을 받은 사람은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한다.

주님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빛을 받은 사람은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합니다.

(1) 빛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줍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빛으로 오신 목적이 우리에게서 어두움을 쫓고 우리 안에 빛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이 빛을 받은 사람들입니다(살전 5:5).

(2) 이 빛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게 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빛을 받은 사람은 그 영광을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고후4:6).

(3) 이 빛은 우리를 빛 가운데로 걸어가게 합니다. 빛이 우리들 마음속에 들어오면 죄와 의를 분명히 밝혀줍니다. 그 빛이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길을 보여줍니다.

(4) 빛을 받은 사람은 신령한 것을 바라봅니다. 빛은 우리의 영적인 눈올 밝혀 줍니다. 영적으로 소경이었던 우리의 눈이 열려지자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봅니다. 그것을 바라보게 하는 매체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약속된 모든 하나님의 언약은 영의 눈이 열려진 사람이 아니면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5) 빛은 빛의 열매를 맺게 합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고 했습니다(엡5:8-9).

3. 빛으로 오신 증거

그들은 빛으로 왔다고 하는 주님의 말씀에 분격한 나머지 “네가 너를 위하여 증거하니 네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다”고 공박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빛을 바라보는 눈이 소경이 되었음으로 하늘에서 내려온 증거를 예수님께 요구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심으로 예수님이 메시야 되심을 알지 못하는 책임은 바로 그들에게 있다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1) 내가 나를 증거해도 내 증거가 참되다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하여 보내심을 받은 사람은 세례요한 한 사람 뿐입니다(요10:5-8). 예수님은 말씀으로 자기를 증거 하셨습니다. 그의 행하시는 이적도 그를 증거 하는 표적으로 보여주셨지만 언제나 예수님은 군중들에게 배척을 당하시고 외롭게 투쟁하셨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에 참여했던 그 많은 무리들까지도 주님을 향하여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고 다그쳐 묻기까지 한 것입니다(요6:30). 예수님은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 하여도 내 증거가 참되니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앎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이 받지 않더라도 예수님의 증거는 참됩니다.

(2)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거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대하여 율법적인 증인을 요구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자신의 증거를 자기와 아버지로 증인을 내세우심으로 그들의 완악한 마음을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증거와 그를 보내신 아버지의 증거는 이 세상에서 그 어떤 많은 수효의 증거보다 확실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버지의 증거라고 하신 하나님의 증거는 바로 성경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요5:39).

결 론 : 우리는 빛을 받은 사람입니다. 빛을 받은 사람은 어두움에 다니지 말아야 합니다. 빛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빛은 그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찬연하게 비취입니다. 그의 말씀을 따라 우리 인생 길을 걸어갈 때 우리는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고 생명의 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11:35). 우리는 이 빛을 내 마음속에 충만히 받아 이 빛을 사면에 비취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42)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요한복음 8:19-27)

서 론 : 예수님은 그의 말씀에서 아버지란 말씀을 많이 사용하셨습니다. 물론 주님이 아버지라고 하신 대상은 하나님을 가리키신 것입니다. 그러나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목수 요셉의 아들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시는 아버지란 말의 참뜻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에게 “네 아버지가 누구냐” “너는 누구냐”는 질문을 많이 던졌습니다.

1.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예수님이 “나는 세상의 빛이니”라고 말씀하셨을 때에 “네가 너를 위하여 증거하니 네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다”고 공박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거가 참되다 기록하였으니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 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내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거 하시느니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없어서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고 물은 것입니다. 그들은 종국에는 예수님이 자기의 아버지라고 지칭하시는 분이 다른 분이 아닌 그들이 여호와라고 부르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줄을 안 후에야 분이 가득하여 예수님을 죽일 결심을 더욱 굳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10:30)고 말씀하셨을 때 예수님의 그 말씀이 바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낸 것으로 알아듣고는 돌로 치려고 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께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을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느냐”고 물으셨는데 그들은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증거를 찾을 때에도 대제사장이 예수님을 향하여 “네가 찬송 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막14:61)고 물었으며, 예수님의 그렇다고 하시는 대답을 듣고는 자신의 옷을 찢으며 외치기를 “우리가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그 참람한 말을 너희가 들었도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뇨 하니 저희가 다 예수를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했다”고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그를 따르는 무리는 적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예수님을 바로 알고 바로 믿지 못하는 믿음은 헛된 믿음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만이 바르게 자라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설교에서, 묵상에서 그리스도롤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그를 자세히 배워서 그가 누구이신가 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2. 네가 누구냐?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이 엄청난 말씀에 대하여 하도 어이가 없음으로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네가 누구냐”

(1)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고 하셨을 때 그들은 “네가 누구냐”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가 그들이 찾는 메시야인데 다른 메시야를 찾으려고 하니 그들이 메시야를 찾을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를 거역하고 믿지 못하는 그들은 결국 자신들의 죄 값으로 죽을 수밖에 없으며 믿는 자에게 약속된 주님의 나라에 갈 수 없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2) 예수님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들은 “네가 누구냐”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위란 하늘을 가리키고 아래란 땅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나는 위에서 났다고 하신 말씀은 그의 근본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는 아버지의 품속에 영원히 계셨던 독생자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위에 오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위에서 나신 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래서 난 사람들입니다. 아래서 난 사람은 모두 아담의 후손들입니다. 아담의 후손들에게는 의도 없고 생명도 없고 소망도 없습니다. 있다면 오직 죄 값인 죽음뿐입니다(롬5:12). 예수님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셨기 때문에 그는 하늘에 올라가셨습니다.

(3) “너희가 만일 내가 그 인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들은 “네가 누구냐”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나를 믿지 아니하면 죄 가운데서 죽는다고 말하는가? 그들은 극도로 분노하여 대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결 론 :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이 말씀은 모든 사람들이 들어야 할 심히 아쉬운 말씀입니다. 그들이 예수를 알았더면 그들은 결코 예수를 배척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를 알았더면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는 어리석은 일을 하지 아니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를 알았더라면 그들은 예수를 영접하여 생명의 구원함을 얻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알아야 합니다. 천국도, 생명도, 부활도, 부요도, 치료함도 모두 예수 안에 있습니다. 예수를 아는 사람은 이 모든 부요의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비밀이십니다. 이 비밀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풀려집니다. 깨닫지 못하는 그들의 마음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복음의 비밀이 드러날 때에 마음에 찔림을 받아 “우리가 어찌할꼬”하는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행2:37).


(43) 인자를 든 후에 알리라

(요한복음 8:28)

서 론 : 예수님이 그를 믿지 않는 무리들을 향하여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요8:23)고 하신 말씀을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부모로부터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이 땅에서 난 사람이요 이 세상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말씀이 육신이 되어 하늘에서 내려오신 예수님은 이 땅위에 속한 사람이 아니십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같은 특권을 그를 믿는 사람에게도 주신 일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기도하셨습니다.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요17:14).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은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1. 인자란 말

예수님은 ‘인자’라고 하는 말씀으로 자신을 즐겨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나 이 인자란 말이 신약에 와서는 사람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외 아무도 인자란 말을 쓴 일이 없습니다.

(2) 예수님은 자신을 메시야적인 사명이나 신적인 자신의 존재를 나타내시려고 하실 때 인자란 말을 사용하셨습니다. 인자란 표현에 대하여 알듯 모를 듯 엉거주춤 하던 많은 무리들은 예수님을 향하여 이처럼 물었습니다. “이에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이 인자는 누구냐”고 했던 것입니다(요12:34). 인자에 대하여 우리가 가장 잘 깨달아 알 수 있도록 주님이 나타내신 말씀은 요한복음 3:13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로 올라 간 자가 없느니라.” 여기서 인자라고 하신 자기 표현은 그의 신성을 입증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3) 우리는 성경에 나타내 보이신 인자의 모습을 세 가지로 살필 수 있습니다.

① 하나는 비하(卑下)의 인자이십니다. 그가 말할 수 없는 천하신 몸으로 세상에 내려오신 모습이 바로 이 모습입니다.

② 다음에는 구속의 인자이십니다. 이 모습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의 모습에서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이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고 하신 말씀에서 우리는 그의 구속의 인자의 모습을 바라보게 됩니다.

③ 그리고 영광의 인자이십니다. 이 인자의 모습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이후의 주님의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2. 인자를 든 후에

“너희는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 인줄 알고”라고 하신 말씀은 주님이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신 후에야 많은 무리들이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그를 그들의 메시야로 믿을 것임을 예언하신 말씀입니다.

(1) 인자는 반드시 들려야 하십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4-15). 인자로 오신 예수님은 그의 첫째 되는 사명이 들리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의 들리심은 마치 광야에서 모세가 뱀을 든 것과 같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2) 인자는 반드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손에 의하여 들려야 하십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택하심을 입은 축복 받은 백성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선택의 축복은 아브라함의 씨를 통하여 메시야를 보내시려는 하나님의 위대하신 섭리에 의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마음이 완악하여 하나님의 뜻을 거역함으로써 스스로 메시야를 죽이는 죄를 범하게 된 것입니다.

(3) 주님은 들리셔야 하셨지만 그를 드는 자들에 대하여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들리심을 받는 십자가 위에서도 예수님은 그들의 죄를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자기를 십자가에 드는 일로 인하여 화를 받을 예루살렘을 위하여 눈물을 흘리셨습니다(마23:37-39).

3. 내가 그 인줄 알리라

예수님이 들리심을 받은 후에야 모든 사람들은 그가 그 인줄 안다고 하신 말씀은 무엇인가? 아마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일이 없으셨거나 그가 죽지 아니하시고 계속 살아 계셨다면 그를 믿을 사람이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이들이심을 믿게 된 것은 바로 그의 죽으심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어찌하여 그가 죽으신 이후에야 그가 메시야이심을 알게 되느냐? 그 이유는 주님이 하늘에 올라가셔서 성령을 보내주시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요6:13).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 하실 것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5:26).


결 론 : 예수님의 이 말씀은 물론 인자를 든 무리들에게만 국한시킨 말씀이 아닙니다. 모든 인류는 어느 면으로 보면 모두 인자를 든 자들입니다. 그는 내 죄로 인하여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마음을 강퍅하게 함으로 성령의 감동 하심을 거역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참으로 그 인줄을 알고 그들 믿음으로 생명을 얻는 그의 백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44) 아버지와 함께 하신 예수님

(요한복음 8:29-30)

서 론 :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함으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고 하신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비결을 교훈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계심을 알고 계셨습니다. 주님의 이 같은 믿음은 그의 예언된 사역을 이루시는 일에 결정적인 힘이 되셨습니다. 우리에게 만약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고 하는 확실한 믿음만 가질 수 있다면 이 세상에서 아무 것도 두려울 것이 없으며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능치 못함이 없는” 승리적인 생애를 보낼 수 있을 것입니다.

1. 우리에게 약속하신 예수님의 임재하심

하나님은 영이심으로 그의 임재 하심은 영적이십니다. 영적인 임재를 깨닫는 일은 오직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로 올라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주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또한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향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마28:20). 예수님의 이 같은 말씀은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겠다고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세상 끝날 까지 나와 함께 하시겠다고 하신 예수님의 약속을 확신을 가지고 믿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 같은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생활을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이나 말씀의 확신은 저절로 생기거나 아무에게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는 사람에게 생긴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2.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란 무엇인가?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는 것인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가장 위대한 일은 순종입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일을 빼놓고서도 자기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지 전혀 모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일 보다 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일이란 없습니다. 순종에는 다음 세 가지 점이 따릅니다.

(1) 사람이 하나님께 순종하려면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순종할 수가 없습니다. 주님이 들려주신 씨뿌리는 비유에서 오직 깨닫는 자만이 결실 한다고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마13:23). 말씀을 듣고 깨닫는 심령만이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2) 다음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는 순종이 생길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은 처음에 얼마간은 순종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뿌리가 내려지기도 전에 시들어버리고 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는 오랜 시간 그 순종이 계속될 수 없는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은 지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4:15). 순종은 사랑의 동기에서 나와야 합니다.

(3) 다음에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이 없이는 순종할 수가 없습니다. 믿음이 없는 순종이란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 이것이 순종의 밑거름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명기 28장을 축복의 장으로 오해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순종하는 사람들에게는 축복의 장이지만 불순종하는 자들에게는 저주의 장이기도 한 것입니다. 1절로 14절까지는 축복의 말씀이 금싸라기처럼 널려있습니다. 그러나 이와는 정반대로 15절부터 무려 마지막 68절에 이르기까지 무서운 저주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15절 처음에서 밝히시기를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3.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자의 축복

하나님이 함께 계시면 우리는 어떤 축복을 받게 되나?

(1) 첫째로 마음의 평안을 얻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주노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마음의 평안은 주님을 의뢰하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실 때 우리의 마음에는 평안이 깃들고 우리의 생활은 즐거움과 기쁨으로 들어차게 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이 함께 계시면 모든 시련을 이길 수 있습니다.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이 나의 시련 중에 나를 도와주시고 나를 인도해주심으로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인내의 능력을 주심으로 이기게 하십니다.

(3)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주십니다.


결 론 :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결코 혼자 두지 아니하십니다.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거하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수종 하리로다”고 말씀하셨습니다(시101:6).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가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그 일을 순종으로 열매를 맺는다면 우리 주님과 함께 하신 그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으로 나의 인생을 인도하시고 나의 생애에 무한한 축복을 안겨 주실 것입니다.


(45) 진리가 자유케 하리라

(요한복음 8:31-32)

서 론 : 우리에게 왜 자유가 필요하냐?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은 무엇이냐?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자유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자유란 사람이 죄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아담으로부터 죄의 속박을 받아 죄의 종이 되었습니다. 이 종의 멍에에서 해방되어 죄의 멍에를 벗는 일이야말로 우리 인생들의 가장 시급한 문제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진정한 자유인 것입니다.

1.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 오신 분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인간의 자유는 이미 에덴에서 잃어버렸습니다. 아담의 범죄는 스스로 이 자유를 상실하며 죄의 종으로 팔려 그 결과로 사망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롬5:17).

그러므로 그리스도안에 있는 우리들은 인간의 참 자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자유는 그리스도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에 아무도 이것을 빼앗을 수 없으며 우리는 이 자유를 아무에게도 빼앗겨서도 안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갈5:1). 예수님은 우리로 자유케 하시려고 자신을 우리의 죄 값으로 지불되는 속죄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2.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그러면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 이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인가? 예수님은 우리에게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간섭을 받지 않고 살아간다고 해서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현실적으로 어떤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해도 만약 죄에서 자유 함을 얻지 못했다면 그 사람은 가장 비참한 종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생들에게 이와 같은 자유를 얻게 하는 방법은 진리라고 하셨습니다. 진리란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죄의 멍에를 끊고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유를 얻게 하십니다.

(1) 진리를 소유한 사람만이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나는 골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진리로 자유를 얻으려면 먼저 진리가 되시는 예수님올 소유해야 하는 것입니다.

(2) 진리를 깨달은 사람만이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무엇이나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그것이 아무리 자신에게 유익한 것이라 할지라도 유익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할 때 그 말씀이 그 사람에게 아무런 유익도 줄 수 없습니다.

(3) 진리 안에 거하는 사람만이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하신 내 말이란 말씀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붙들린 상태에 있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참 자유를 누리려면 그리스도의 말씀에 붙들리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다음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 내 말에 거하면 이라고 하신 거한다고 하는 말은 헬라어로 ‘메노’란 단어로 이 말의 뜻은 남아 있다, 머문다, 거주 한다를 의미합니다. 이 사람은 그가 어떤 환경 속에 있다고 해도 말씀을 떠나지 않고 그의 말씀 안에 살아가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3. 자유를 누리는 그리스도인

많은 그리스도인 중에는 진리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영접했으면서도 이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아직도 죄의 멍에를 메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 멍에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적인 생활을 못하고 있습니다. 죄를 이기는 생활을 못하고 있습니다.

(1) 자유에는 자유를 누리려고 하는 노력이 따라야 합니다. 마귀는 우리의 이 자유를 빼앗으려고 눈독을 드리고 있습니다. 기회만 있으면 공격을 가해 옵니다. 이에 대하여 베드로 사도는 이처럼 말했습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벧전5:8-9). 인간은 죄의 종이 되던가? 아니면 자유를 누리는 자유인이 되던가? 어느 한가지를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롬6:16). 그리스도 안에서의 순종의 생활이야말로 죄에서 자유 함을 얻는 비결인 것입니다.

(2) 자유에는 책임이 따라야 합니다. 책임이 없는 자유는 방종입니다. 자유에 대한 책임이란 죄를 멀리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누린다고 하면서 그 자유가 죄로 나타난다면 이런 일이야말로 자유를 모독하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유에 대한 책임이란 우리의 자유를 속박하려는 모든 비 진리에 대하여 과감하게 투쟁하는 일입니다.


결 론 : 베드로 사도는 우리에게 이처럼 권면했습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우리에게 자유 함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바로 깨닫고 그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진리가 되시는 예수를 아는 지식으로 우리의 신앙이 자라가야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은혜와 지식가운데 여러분의 믿음이 자라기를 바랍니다.


(46) 아들이 자유게 하리라

(요한복음 8:33-47)

서 론 : 유대인은 사실상 아브라함의 자손이면서 예수님으로부터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하여 예수님은 그들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육적인 이스라엘의 조상으로 삼으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르는 사람들의 구원의 조상으로 세우시기 위하여 갈데아 우르땅에 있는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입니다. 유대인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지고 죄의 멍에를 벗고 아들이 주시는 자유를 얻어야 했습니다. 인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자유는 아브라함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1. 아브라함의 자손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진리, 자유 또는 종이란 말씀을 사용하셨을 때 그들은 예수님의 이 말이 귀에 거슬렸습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지손이라 남의 종이 된 일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창세기 17장에서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말씀을 그들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내가 내 언약을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그뿐 아니라 그들은 하나님이 선택한 거룩한 백성임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종이란 말은 가당치도 아니했으며 자유를 누려야 한다는 말이 그들에게 이해될 리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닌 사실에 대하여 몇까지 들려주셨습니다.

(1)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고 말하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주님은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혈통적인 아브라함의 자손인 점에 대해서는 인정해 주셨습니다.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줄 아노라”고 하신 것입니다(37). 그러나 아브라함의 자손은 혈통적인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에 의한 계약적인 것이 중요한 것임을 알아야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에 혈통으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언약으로 부르셨습니다(창12:1-3).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혈통으로 축복을 약속하신 것이 아니라 언약의 씨로 약속하셨습니다(롬9:7-8).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의를 주실 때에도 혈통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은 언약관계로 주셨습니다(창15:6).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려면 먼저 아브라함의 행사를 해야 그 자격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행사란 바로 믿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는 후손에 대한 믿음입니다(롬4:18-22). 이에 대하여 갈라디아서 3장에서는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합께 복을 받느니라”고 했습니다(갈3:9).

아브라함의 다른 하나의 믿음은 순종의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히11:8). 유대인들은 언필칭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자랑하고 있었지만 아브라함의 순종의 행사가 없었습니다.

(2) 아브라함의 자손은 진리를 대적해서는 안 됩니다. 진리란 곧 복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복음의 주체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아브라함이 믿고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자손인 예수님 그 자신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3)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마귀의 행사를 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는 말하면서 그들이 하는 일은 마귀가 하는 일이었습니다. 마귀는 거짓을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거짓으로 예수님을 대적했습니다. 마귀는 진리를 대적합니다. 마귀는 그 자체가 진리의 대적자로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끝까지 진리를 대적했습니다. 마귀는 살인자입니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로 존속했습니다. 아담을 유혹하여 영적인 살인을 자행했습니다. 가인으로 아벨을 죽이게 했습니다. 그 이후 계속하여 하나님의 참 종들을 수없이 죽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아들은 죄의 종의 멍에를 메고 있는 죄의 종들에게 자유를 주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인류는 모두 죄의 종들입니다. 이 종의 멍에는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면서부터 젊어져 있는 짐입니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의 의의 표준인 율법을 이루지 못함으로 율법의 정죄함을 받고 있는 죄인들입니다. 누구든지 이 죄의 멍에를 벗어버리지 못하면 그의 인생은 절망적입니다(롬5:2). 예수님은 이 같은 인생들에게 참 자유를 주시기 위하여 오신 분입니다.


결 론 : 자유란 말의 원어의 뜻은 고소 당한 사람이 무죄가 선언될 때 얻는 자유를 말합니다. 이 자유는 다시는 침해될 수 없는 자유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이 자유를 주시려고 이 세상에 보내심을 받으셨으며 이 자유 때문에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무죄를 선언해 주셨습니다.


(47) 하나님께 속한 자와 속하지 않은 자

(요한복음 8:47-59)

서 론 : 예수님은 하나님께 속한 자와 속하지 않은 자를 분별할 수 있는 방법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고 하신 것입니다. 누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냐?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 안다고 하셨습니다. 듣는다고 하신 말씀은 즐거움으로 듣고 깨달을 뿐 아니라 그 말씀을 그의 생활의 지침으로 삼아 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1. 누가 하나님께 속한 자냐?

예수님은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 하나님의 백성된 증표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히브리서 1:1-2에 나온 이 말씀으로 미루어 볼 때 하나님의 말씀은 옛날에는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이스라엘 민족에게 나타났고,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그 아들로 말씀하셨으며 이 두 형태의 말씀이 성경을 이루어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주신 하나님의 뜻은 오직 한가지로 일관되어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로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 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요5:39).

그러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인가?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이 친히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하심으로 그 말씀을 듣고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고전2:9-12).

(1) 예수님의 말씀은 진리이십니다. 그러면 진리란 무엇이냐?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고 말씀하심으로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진리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곧 진리”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의 신분을 가리키신 것이며 그리고 그의 입의 모든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시라는 사실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자기의 말이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라고 증거 하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고 하셨습니다(요14:24). 이 말씀은 놀라운 선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가 우리에게 주신 모든 말씀은 진리요 조금도 어김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3) 예수님은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고 하신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일 뿐 아니라 그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신 것입니다(요8:51).

(4) 예수님은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 시라고 하셨습니다. 영광을 받으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그 영광을 예수님이 받으실 뿐 아니라 하나님조차도 아들이신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신다는 사실을 밝히셨습니다.

(5) 예수님은 그 자신의 존재가 아브라함보다 이미 그 이전에 계셨다고 하셨습니다. “너의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8:56). 예수님이 아브라함보다 먼저 계셨다고 하신 것은 그의 태어나심의 연대를 가리킨 것이 아니라 그의 선재성을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이 예수님의 때 볼 것을 보았다고 하신 말씀은 하나님이 그에게 약속으로 주신 것을 믿음과 소망으로 바라본 사실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2. 유대인의 반발

예수님의 이 같은 말씀은 그들에게 크나큰 분노를 자아냈습니다.

(1)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향하여 정면 도전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는 것입니다. 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가장 멸시했음으로 예수님을 사마리아 사람과 비교하면서 공격했습니다. 귀신이 들렸다고 하는 그들의 말은 예수님이 스스로 허황된 말을 하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2)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이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고 하신 말씀에 “네가 아직 오십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고 공격했습니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완전히 이성을 앓고 손에 굵직한 돌들을 찾아 들었습니다. 돌을 들어 쳐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피하셔서 성전에서 나가셨습니다. 아직 그의 고난의 때가 안되신 것을 스스로 아셨기 때문에 그들을 피하신 것입니다.


결 론 : 예수님은 나더러 주여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갈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하나님께 속한 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생활을 하고 있는가? 그 말씀을 얼마나 깨닫고 그 말씀의 열매를 얼마나 맺고 있는가를 살펴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9장 (48-51)

◆ 밤중소리 01-28 | VIEW : 576

48. 하나님의 하시는 일(요한복음 9:1-7) 

49. 소경의 확실한 증거(요한복음 9:8-12) 

50. 담대한 증인이 된 소경(요한복음 9:13-34) 

51. 보는 자들을 심판하러 오신 예수(요한복음 9:35-41) 


(48) 하나님의 하시는 일

(요한복음 9:1-7)

서 론 : 어느 날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된 한 거지 청년을 만나게 되셨습니다. 제자들의 화제가 이 소경된 청년에 쏠렸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향하여 이처럼 질문했습니다.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뭐 죄로 인함이오니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인간의 모든 질병과 저주는 그 근원이 바로 죄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이 나면서부터 눈먼 청년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나면서부터 소경으로 났으니 자기의 죄는 아닐 것이고 그렇다면 그 부모의 죄인가? 그러면 어찌하여 그 부모는 멀쩡한데 그 아들에게 죄 값의 저주가 나타났을까? 이 같은 의문을 풀어보겠다는 심산으로 이 문제에 대하여 심각하게 질문하게 된 것입니다.


1.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우리는 성경(특히 구약)에서 죄와 저주가 우리에게 오게 된 이유에 대하여 다음 세 가지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1) 그 하나는 우리의 조상인 아담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아담 한 사람의 죄는 모든 사람의 죄와 동일시되어 있는 것입니다(롬5:12). 그리고 죄 값으로 인생이 받게된 사망이란 인간 최대의 저주로 이 안에는 질병이나 육신의 모든 장애적인 요소도 포함되어 있음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2) 다음에 하나는 인간의 저주가 부모의 죄로도 온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출 20:5-6, 민14:18). 이 말씀에서 하나님을 미워한 자의 부모의 죄가 자식의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신다는 말씀은 인간의 저주가 부모의 죄로부터 연유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3) 다른 또 한가지는 인간의 저주는 자신의 죄로 인함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신28:15).


2.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이 같은 제자들의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은 참으로 깜짝 놀랄만한 대답을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같은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이 아직까지 알고 있는 율법적인 지식과 모순되는 일이었음으로 이 말씀을 듣는 제자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을 것입니다.

(1) 예수님의 이 말씀은 인간의 원죄로 말미암아 인간에게 저주가 왔다는 사실을 부인하신 말씀은 아닙니다. 인간 사회에는 아담 한 사람으로 인하여 죄가 들어왔고 그 죄로 인하여 저주가 왔습니다. 그런데 이 청년의 경우는 모든 인간이 겪어야하는 이 같은 저주에서 해방된 사람은 물론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의 소경이 그 부모나 그의 죄로 인한 것은 아니라고 밝히신 것입니다.

(2) 하나님은 그의 영광을 위하여 여러 가지 구원섭리로 죄인들을 자기에게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소경으로 태어난 이 청년이 예수님과 만남이 되어 그의 눈이 떠졌다는 사실은 눈이 떠졌다는데 그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을 만남으로 빛을 보았다는데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가 사망에서 생명을 얻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청년의 경우는 이런 경우에 해당되기 때문에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3.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예수님은 이 청년을 고쳐 주시는 이유에 대하여 4절에서 이처럼 밝히셨습니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때가 낮이란 말씀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때를 의미합니다. 우리에게는 이처럼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가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내가 너희를 보내노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때에 반드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는데 색다른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능히 말씀으로 고치실 수 있으셨지만 그의 눈에 진흙을 침에 묻혀 바르신 후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이처럼 하신 뜻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청년과 우리에게 순종에서 오는 하나님의 축복과 위대한 능력을 보여 주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결 론 : 이 청년은 죄로 소망이 없는 죄인의 상태를 말해줍니다. 우리는 죄로 인하여 빛을 보지 못하고 소망이 없는 생애를 지내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실로암 못에 찾아가 눈을 씻으니 나음을 입은 것입니다. 실로암이란 보냄을 받았다는 뜻으로 하나님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이 연못의 물은 예수님의 사죄의 보혈을 상징합니다. 우리들의 눈을 실로암 못에 가서 주님의 보혈로 씻음 받을 때 우리의 영적인 눈이 떠져서 신령한 세계를 바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49) 소경의 확실한 증거

(요한복음 9:8-12)

서 론 : 그리스도인이 된 첫 번째 역사는 그의 변화에 나타납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면 그 마음에 하나님의 성전을 이룹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고전4:15). 마음에 하나님의 성전을 이룬 사람은 그의 생활에 놀라운 변화를 가져옵니다. 소경이었다가 예수님을 만나 눈이 떠진 이 청년은 그리스도인의 한 모형입니다. 이 청년은 구원받은 사람의 한 모형으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1. 소경 청년의 근본적인 변화

소경이었던 이 청년의 변화는 결정적인 변화입니다. 자기 자신이 고의적으로 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변화였습니다. 인격적인 수양이나 교육적인 배움으로 닦아진 변화가 아니라 어떤 권능에 의해 초래된 강권적인 변화였습니다.

(1) 그의 변화는 자신의 소경 되었던 눈이 떠진 것입니다. 이 변화는 자신이나 자기 부모나 이 청년을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절대로 부인할 수 없는 변화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헤어 나와 밝은 빛을 보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빛으로 오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소경된 눈은 예수님을 만났을 때 뜨이게 되며 이 눈이 열려질 때 비로소 밝은 빛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2) 그리스도인들의 변화는 먼저 나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이웃 사람들에게 밝히 보여지는 변화입니다. 이 청년이 눈이 뜨인 다음에 제일 먼저 수군거림이 있은 것은 바리새인들이 아니라 그를 알고 있는 이웃 사람들이었습니다.

(3) 그런데 여기서 세 가지 견해가 나왔습니다.

① 하나는 “그 사람이다”고 하는 견해입니다. 소경 되었던 그 청년은 과연 소문대로 모든 것이 변했지만 그 인물은 거리에 앉아서 구걸하던 그 청년임이 분명했음으로 “그 사람이라”고 확인했습니다.

② 두 번째 견해는 “아니라”고 하는 견해입니다. 그의 모든 것이 새로워졌음으로 그를 잘 알지 못했던 사람들은 아니라고 부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③ 다음 세 번째 견해는 “그와 비슷하다”는 견해입니다. 되어진 일로 미루어 보면, 아닌 것이 분명하지만 사람을 자세히 보니 그 사람임이 틀림없는 것 같다는 견해입니다.

(4) 이때 문제의 소경 되었던 그 청년이 그들 앞에 서서 “내가 그로라”고 말했습니다. 지금 눈을 떠서 여러분 중에 서있는 나는 다름 사람이 아니라 그 전에 거리에서 걸인으로 앉아있었던 소경이요 “내가 바로 그 사람이요”라고 자신의 신분을 분명히 나타냈습니다.


2. 소경의 간증

그들 둘러선 많은 사람들은 “내가 그로라”고 하는 그 청년의 말에 그러면 네가 어떻게 하여 눈을 뜰 수 있게 되느냐고 물었습니다.

(1) 예수를 만난 사실을 먼저 분명히 밝혔습니다. 우리의 변화는 예수로부터 온 것입니다. 예수와의 만남이 없으면 우리에게는 영적인 아무런 변화도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2) 다음에 이 청년은 예수가 자기에게 무엇을 행하셨는가에 대하여 사실 그대로를 말했습니다.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발랐다”고 했습니다.

(3) 이 청년은 예수가 자기에게 무엇을 명하셨는가에 대하여 말해 주었습니다.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라고 말했습니다.

(4) 이 청년은 자기가 한일에 대하여 말했습니다.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그의 간증을 듣고 있는 사람들은 아마 이 청년이 엄청난 일을 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소경의 눈이 떠질 일을 하려면 굉장한 대가를 치렀을 것이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청년의 답변은 아주 간단했습니다. “가서 씻었더니”입니다. 다만 예수님이 명하신 그 말씀을 따랐더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5) 이 청년은 그 결과에 대하여 말했습니다. “보게 되었노라” 군중들이 요구하는 것은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는 문제였음으로 “내 눈이 이렇게 떠졌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 청년은 배운 것이 없는 무식한 사람이었지만 훌륭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자기가 체험한 경험에 대하여 사실 그대로를 증거 하는 일보다 더 위대한 증인은 없는 것입니다.

그의 이 같은 간증은 체험으로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며 또한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수 있도록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그 자리에 있었던 많은 사람들에게 흥미를 주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은 말의 재간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사실 그대로의 증거에 있는 것입니다.


결 론 : 그들은 드디어 예수를 만나보려는 충동을 받았습니다. 그에게 이런 이적을 나타내실 수 있는 분이라면 그 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의 메시야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을는지 모릅니다. 그 청년에게 “그가 어디 있느냐”고 묻게 된 것입니다. 이때 나다나엘을 찾아간 빌립처럼 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해야 했지만 그 청년은 아직 신앙이 어림으로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그들을 인도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 과연 이 청년과 같은 확실한 변화를 받은 것입니까? 이웃 사람들에게 기이히 여김을 받을 만치 그들 앞에 변화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까?


(50) 담대한 증인이 된 소경

(요한복음 9:13-34)

서 론 : 그리스도의 증인들은 심문과 박해를 당해야 합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사람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너희를 회당에서 매질하겠으며 나를 인하여 너희가 관장들과 임금들 앞에 서리니 이는 저희에게 증거 되려 함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막13:9). 소경으로 있다가 눈이 뜨인 이 청년은 자기나 자기 부모의 죄로 소경으로 태어났던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셨기 때문에 이 청년은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마땅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했습니다.


1. 바리새인들에게 끌려간 증인

이 청년을 누군가가 바리새인들에게 데리고 갔습니다. 이 청년을 바리새인들 앞으로 데려가게 된 동기를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안식일에 병 고침을 받은 이 청년과 그를 고쳐준 예수를 고소하기 위해서입니다. 다른 한가지 생각은 소경의 눈이 떠진 기적적인 사건을 그들에게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2. 그의 확실한 증언

증인이란 말은 순교자란 말과 같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그리스도에 대하여 바른 말을 하려면 때로는 생명의 위협까지라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청년은 어떻게 그의 증인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했는가?

(1) 그는 자기가 경험하여 알고 있는 사실 그대로 만을 증언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과장해도 안되고 그 말씀을 경시해도 안됩니다(잠30:6). 이 청년의 대답은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동일합니다. “그 사람이 진흙을 내 눈에 바르매 내가 씻고 보나이다”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증인들은 성경에 기록된 사실 그대로만을 증언하면 되는 것입니다.

(2) 바리새인들은 이 청년이 소경으로 있다가 보게 된 것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먼저 알고자 한 일은 그가 참으로 소경으로 있었던 사람인가? 하는 것과 그 소경이 정말로 눈을 뜨게 된 것이냐에 대한 의문이었습니다. 이 같은 사실은 인간의 상식으로는 믿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들은 이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그의 부모를 소환했습니다. 그들은 이처럼 심문했습니다. “이는 너희 말에 소경으로 났다 하는 너희 아들이냐?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되어 보느냐” 이 같은 바리새인들의 물음에 그 부모는 매우 지혜롭게 대답했습니다. “이가 우리 아들인 것과 소경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그러나 지금 어떻게 되어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저에게 물어 보시요 저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그들의 입에서 말하지 않더라도 자기 아들의 입에서 더욱 분명한 대답을 들을 수 있음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만약의 경우 그들이 바리새인들에 의하여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는 이유로 출교 당할 일을 두려워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사건을 매듭짓기 위해 그 소경 되었던 청년을 두 번째로 소환했습니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부정적인 대답을 들을 수 없음을 알고 그의 눈이 뜨여진 일은 하나님의 권능이지 예수로 말미암은 이적이 아님을 설명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너는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우리는 저 사람이 죄인인줄 아노라”고 예수를 모함했습니다. 그 청년은 이 같은 그들의 말에 결코 동의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받은 은혜는 너무나도 확실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3) 그들은 이 청년에게 재차 삼차 계속해서 물었습니다.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고 했습니다. 그들은 이 청년의 입에서 예수를 정죄할 근거를 얻어내려고 광분했습니다. 이 청년은 이제 그들의 의도를 짐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나쁜 의도를 알고는 그들의 완악한 마음과 예수를 정죄하려는 그들의 의도에 분노를 느꼈습니다. 이 청년은 이처럼 그들에게 모욕적인 말로 응수했습니다.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4) 그는 바리새인들 앞에서 예수가 하나님께로서 온 사람임을 증거 했습니다. 한 거지 청년으로부터 말할 수 없는 모욕을 받은 이들 바리새인들은 그 청년을 향하여 욕설을 퍼부으면서 “너는 그의 제자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고 했습니다. 이 청년은 이제 그들로부터 완전히 예수의 제자라고 하는 딱지가 붙었습니다. 이로써 그는 바리새인들의 재판에서 정죄함을 받은 것입니다.

이 청년은 그들에게 “하나님은 결코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를 들으시는 줄을 안다”고 말했습니다. 이로써 예수가 죄인일 수 없다고 증거한 것입니다.


결 론 : 그들은 참을 수 없는 모욕과 수모를 하나의 이름 없는 거지의 신분인 청년으로부터 듣고 분노를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이 청년을 그들의 판결대로 정죄하여 출교함으로 내쫓았습니다. 우리는 이 청년과 같은 확신에 찬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누구 앞에서도 담대하게 증거할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51) 보는 자들을 심판하러 오신 예수

(요한복음 9:35-41)

서 론 : 소경으로 있다가 눈이 뜨여진 청년은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이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고 생각하면서 이상하다고 여긴 것입니다. 세상 사람의 방법으로는 예수님올 하나님께로서 오신 분이신 줄을 알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들의 눈이 감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분이신 줄 알려면 그의 신령한 눈이 열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소경된 사람이 눈을 뜬 사건을 영적인 신령한 눈과 연관시켜 아직도 신령한 일에 소경된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책망하시면서 “보지 못하고 본다”고 하는 그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자들임을 경종 하셨습니다.


1. 네가 인자를 믿느냐?

예수님은 언제나 그를 위하여 핍박을 받거나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을 멀리하지 아니하시고 가까이 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6:33). 예수님은 그 청년이 바리새인의 재판에서 출교조치를 당하였다는 말을 들으셨습니다. 그는 이제 유대인이면서도 유대교에서 쫓겨난 것입니다. 이 청년이 이런 핍박을 당하는 이유는 바리새인들 앞에서 예수를 시인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청년은 참으로 장한 일을 한 것입니다.

(1) 그의 신앙을 본받으면 하늘에서 하나님 앞에서 그의 이름이 부인 받지 않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10:32-33).

(2) 그의 신앙을 본받으면 이 땅위에 임할 환난에서 건짐을 받을 것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가 주님의 칭찬을 받은 것은 그의 이름을 배반치 않은데 있습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고 하셨습니다(계3:8). 그리고 그들에게 보장하시기를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찾아오셔서 “네가 인자를 믿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 청년은 아직 믿음이 어렸습니다. 그가 인자란 주님의 말씀에 그 인자가 누구이며 누구를 가리키고 있는지에 대하여 몰랐습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묻고 계시는 인자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거룩하신 분을 가리키신 말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이 청년은 아직 자기의 눈을 뜨게 하신 이를 만나본 일이 없으므로 그가 예수이신 지에 대해서는 분명히 알지는 못하고 있었지만 그 청년은 “주여 그가 누구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고 말했습니다. 인자라고 말씀하신 그 분이 누구이신 지 알려만 주신다면 그에 대하여 믿을 의사를 분명히 밝혔습니다.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이 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자 이 청년은 모든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이분이 자신의 눈을 뜨게 해주신 분이시며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너무나도 감격스럽고 반가운 상면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주여 내가 믿나이다”고 하는 신앙고백이었습니다.


2. 보는 자들을 심판하러 오신 예수

“내가 심판하러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사실인즉 소경들입니다. 말하자면 그들의 눈은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못한 것입니다. 이들에 대하여 이미 이사야선지는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고 예언했던 것입니다(마13:14). 제자들이 하루는 떡 가져오기를 잊었을 때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이는 자기들에게 떡이 없음이로다고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의논하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느냐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고 나무라셨습니다(막8:14-21).

반면에 예수님은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보지 못하는 사람이란 지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하나님의 자비를 바라는 사람을 말합니다. 자기에게는 구원의 소망이 전혀 없음을 깨닫고 오직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드리는 사람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의 눈을 보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눈을 뜬 청년처럼 생명의 빛 되신 예수를 바라볼 수 있게 하심으로 그에게 소망을 주시고 그의 삶을 보람있게 하실 것입니다.


결 론 : 바리새인들의 죄는 씻음 받을 길이 없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눈이 소경이면서도 자기들만이 빛을 바라보는 것으로 알고 있으며 자기들만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눈은 앞으로도 뜨여질 가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죄악 중에 해메이다가 결국은 망할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8:21). 우리가 소경 되지 않으려면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그 빛을 따라 우리의 인생 길을 살아나가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