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차례
누가복음 19장(108 ~ 111)
(108) 세리장 삭개오(누가복음 19 : 1 - 10)
(109) 하나님나라에서의 상급(누가복음 19 : 11 - 27)
(110)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누가복음 19 : 28 - 48)
(111) 성전 청결(누가복음 19 : 45 - 48)
누가복음 20장(112 ~ 115)
(112) 모퉁이 돌이 된 버린 돌(누가복음 20 : 1 - 19)
(113)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누가복음 20 : 20 - 26)
(114) 부활에 관한 논쟁(누가복음 20 : 27 - 40)
(115) 다윗의 자손이냐, 다윗의 주냐(누가복음 20 : 41 - 48)
누가복음 21장(116 ~ 118)
(116) 과부의 헌금이 보여주는 것(누가복음 21 : 1 - 4)
(117) 예수님의 재림과 징조(누가복음 21 : 5 - 28)
(118) 무화과나무의 비유(누가복음 21 : 29 - 38)
누가복음 22장(119 ~ 123)
(119) 가룟 유다의 배신(누가복음 22 : 1 - 6)
(120) 마지막 유월절(누가복음 22 : 7 - 23)
(121) 주님과 함께 한 자의 상급(누가복음 22 : 24 - 38)
(122) 주님의 마지막 기도(누가복음 22 : 39 - 46)
(123) 베드로의 통곡(누가복음 22 : 47 - 71)
누가복음 23장(124 ~ 127)
(124) 빌라도의 판결(누가복음 23 : 1 - 25)
(125) 너희와 너희자녀를 위해 울라(누가복음 23 : 26 - 31)
(126) 갈보리에서 있었던 일(누가복음 23 : 32 - 43)
(127) 십자가에서의 죽으심(누가복음 23 : 44 - 56)
누가복음 24장(128 ~ 130)
(128) 주님의 부활(누가복음 24 : 1 - 12)
(129) 엠마오로 동행하신 주님(누가복음 24 : 13 - 35)
(130)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누가복음 24 : 36 -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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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9장
◆ 밤중소리 01-11 | VIEW : 386
(108) 세리장 삭개오(누가복음 19 : 1 - 10)
(109) 하나님나라에서의 상급(누가복음 19 : 11 - 27)
(110)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누가복음 19 : 28 - 48)
(111) 성전 청결(누가복음 19 : 45 - 48)
(108) 세리장 삭개오
(누가복음 19 : 1 - 10)
서 론 : 삭개오에 대한 이야기는 잃어버린 자가 누구인가에 대하여 말씀해 주시는 것으로 이 기록은 누가복음에만 있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주님을 영접하는 일이 무엇이며 참회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배울 수 있습니다.
1. 예수님을 사모한 삭개오
삭개오란 사람은 원래가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그가 바리새인들이나 유대인들에게 죄인이라고 경멸 당한 이유는 자신이 유대인이면서도 로마정부의 세관에서 일했을 뿐 아니라 높은 벼슬을 가지고 있었고 그같은 직분 덕에 돈을 많이 벌어 부자가 된데 있었습니다. 그는 처세와 돈을 버는 일에 대단한 재간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에게 한가지 신체적인 결함이 있었는데 그것은 그는 아주 키가 적은 난쟁이 측에 속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토색한 재물에 대한 양심의 가책이 항상 마음에 걸렸고 가난한 자를 동정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주님이 비유적으로 말씀하신 바리새인과 세리가 성전에 올라가 기도한 일에 있어서 그 세리는 아마 이 삭개오의 경우를 가리킨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그는 부자이기는 했지만 자신이 죄인이라는 생각에서 마음에 평안을 얻지는 못한 것처럼 보입니다. 때마침 예수님이 여리고를 지나시게 되었는데 이 소문이 온 여리고에 퍼졌습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를 보기 위하여 길거리로 나왔으며 세리장 삭개오도 나온 것입니다.
삭개오가 예수님 보기를 얼마나 갈급했으며 그 사모하는 마음이 간절했는가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가 예수께서 어떤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그는 갖은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많고 키는 작아서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는 매우 조급했습니다. 이때 한번 뵙지 못하면 한평생에 예수를 볼 기회가 없을 줄 알고 결사적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할 수 없어 앞으로 달려갔다고 했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바라보기 위하여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해보면 우스운 일입니다. 여리고 성에서 삭개오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는 세리장으로도 유명하거니와 부자로서도 이름이 나 있고 더군다나 난쟁이로서도 심심지 않게 알려져 있어 그의 이름이 모든 사람의 입에 오르내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삭개오가 그 많은 사람들 틈에 끼어서 그리고 어린이들도 많이 있을 그 자리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뛰어 다녔으니 그의 모습을 250 \ 누가복음
바라보는 사람들마다 씩씩거리며 웃음이 터져 나왔을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를 사모하는 사람은 그까짓 남의 비웃음이나 이웃의 웃음거리가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으니 이제 내가 사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이라 그를 위하여 죽는 것도 내가 유익함이라”고 하는 우리의 믿음은 그까짓 주위의 동정에 신경쓸 것이 없는 것입니다.
2. 삭개오를 부르신 주님
삭개오는 길가에 있는 뽕나무로 올라갔습니다. 체면이나 인격이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그를 만나려는 심정이라면 자신의 사회적인 체면이나 남이 판단하는 인격이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다만 예수를 만나려고 하는 일념만이 있을 뿐입니다. 삭개오가 그러했습니다.
드디어 예수님이 그곳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대로 지나쳐 가시지 않으시고 삭개오가 있는 쪽을 우러러보시고 “삭개오야 속히 내려 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주님과 삭개오와의 만남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은 이미 삭개오가 그 뽕나무에 올라가 있을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길을 걸어가시던 주님이 뽕나무 위를 우러러 보셨다는 것이 이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삭개오의 이름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주님은 내 양을 안다고 하셨습니다. 목자가 잃은 양인 삭개오의 이름을 모르실 리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양을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노라고 하셨습니다. 삭개오 역시 우연히 뽕나무에 올라간 것은 아닙니다. 이에는 성령의 역사가 따랐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간절함을 주시고 사모하는 마음을 주시고 우리로 그리스도 앞에까지 인도하시는 분은 바로 성령이십니다. 삭개오는 이처럼 필연적인 연유로 주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우리와 주님과의 만남도 이런 것입니다. 그곳에는 나를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주님의 뜨거운 사랑이 있었고 잃은 양을 목자에게 인도하시는 성령의 역사가 따랐던 것입니다.
3. 삭개오의 태도
이 같은 예수님의 음성을 들은 삭개오는 급히 내려왔습니다. 내 이름을 기억하고 계시는 주님의 사랑을 생각한 것입니다. 나를 찾으시려고 이 뽕나무 밑으로 나오신 주님의 그 은혜를 생각한 것입니다. 이런 일을 생각할 때 어찌 주님의 부르시는 음성을 듣고 급히 내려오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까? 그는 즐거워했다고 했습니다. 삭개오는 평생 처음 마음에 기쁨이 넘쳤고 평안이 깃든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의 부르심을 듣고 응답하게 되면 이 삭개오와 같은 기쁨과 평안이 251 \ 누가복음
깃들 줄로 믿는 것입니다. 다음에 삭개오는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그 이름을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삭개오의 영접은 그의 심령의 영접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 집에 모시고 가서 가장 좋은 것으로 대접해 드린 것입니다.
4. 삭개오의 회개
주님을 영접한 삭개오는 기쁨으로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눅19:8). 세리란 남의 것을 토색하지 않을 수 없는 직업입니다. 아마 삭개오는 많은 사람에게 4배씩이나 갚을 보상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많은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을 위하여 나누어주었습니다. 이제 그에게는 돈이 필요치 않았습니다. 주님이 돈보다 더 자기에게 행복을 주고 기쁨을 주며 평안을 주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결단이야말로 삭개오가 주님을 만나 회개한 회개의 열매인 것입니다.
회개는 열매로 나타납니다. 삭개오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주님은 기뻐하셨습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원래 아브라함의 자손이었지만 죄로 인하여 잃어버린 양이 되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주님을 만나 다시 아브라함의 자손의 자격을 얻게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은 믿음으로 얻을 수 있는데 삭개오는 이런 믿음으로 회복한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삭개오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을 사모하는 일에 있어서 주님을 영접하는 일에 있어서 회개의 열매를 맺는 일에 있어서 그를 본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삭개오의 기쁨과 평안이 우리에게 깃들 것입니다.
(109) 하나님나라에서의 상급
(누가복음 19 : 11 - 27)
서 론 : 구약 적인 메시야 관을 가지고 있었던 유대인들이나 주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에 대하여 전혀 구별할 줄을 몰랐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당장에 영광 중에 나타나는 메시야를 기다리고있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야가 하나님의 큰 권능을 가지고 나타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주축으로 하는 메시야 왕국이 이 땅위에 세워질 줄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그의 고난에 대하여 말씀드려도 제자들은 그 말씀의 참뜻을 깨달을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입니다. 그는 그곳에서 당하실 고난을 생각하시면서 무거운 발걸음을 내디디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따르는 많은 군중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의 제자들도 그들의 선생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그들의 왕국이 세워지는 것으로 알고 몹시 흥분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님은 한심스럽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한 비유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세워지는가에 대하여 알려주시고 그날이 오기까지 우리들이 해야할 일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교훈 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곳에 기록된 말씀 그대로를 액면대로 해석할 수 없는 것은 주님은 말씀의 시초부터 한 비유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1. 예수를 따른 자들의 하나님 나라 관
성경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여러 가지 형태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나라는 여러 가지로 표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도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성령이 임재 하시며 그 성령이 우리를 다스리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도 하나님의 나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 교회를 다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재림하심으로 심판 후에 이 땅에 세워지는 나라도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주님이 만 왕의 왕으로 친히 온 땅을 다스리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늘에 있는 영원한 천국 역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곳에는 우리 하나님이 영원토록 우리의 왕으로 우리를 다스리시며 우리는 영원토록 그를 섬기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른 무리들이 바라고 금방 나타날 줄로 알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는 성경 어느 곳에도 없는 나라입니다. 그들은 메시야가 먼저 고난을 받으신 후 그 다음에 오시는 메시야가(재림) 영광의 메시야로써 그들의 왕국의 지배자인 사실에 대하여 캄캄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어두운 눈은 주님이 부활하신 후에도 가시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제 주님이 죽음에서 살아나셨으니 이제야말로 정말로 하나님 253 \ 누가복음
의 나라가 임하는 것으로 알고 승천하시려는 주님께 “주께서 이스라엘을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고 물었던 것입니다(행1:6). 주님이 이곳에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란 장차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 땅위에 세워지는 그리스도의 왕국, 다시 말하면 천년왕국을 가리키신 것입니다.
2. 주님의 비유
주님은 이 같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비유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비유 중에 몇 가지 상징적인 표현이 나오고 있습니다. 어떤 귀인, 먼 나라, 왕위 등이 그것입니다. 여기서 어떤 귀인이란 주님 자신을 가리키신 것입니다. 먼 나라 간다는 것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승천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왕위를 받아 가지고 온다는 것은 주님이 왕권을 가지시고 심판 주로 오실 일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당시 많은 나라의 왕들은 로마황제에게 가서 왕권을 받아와야 왕 노릇을 할 수 있었습니다. 헤롯도 그러했고 헤롯왕의 사후 그 아들 아켈라오가 로마에 가서 황제에게 유대왕의 직위를 받아온 것과 비슷한 일입니다. 이 비유에서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임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먼 나라인 하나님께로 갔다가 그곳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주의 자격을 얻어 만 왕의 왕으로 올 때 그때에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리신 것입니다.
3. 종들에게 각각 사명을 주심
주님은 그때까지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을 열심히 주님의 명하신 일을 해서 그날에 이르러 주님을 만났을 때 상급을 얻을 수 있도록 힘을 써야 할 것을 당부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그 종 열 명을 불렀다고 하셨습니다. 열 명은 완전수로 혹은 하나님의 종을 가리킬 수도 있고 우리 그리스도인 전체를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각기 은 한 므나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므나는 은전의 명칭인데 헬라의 화폐를 가리킵니다. 데나리온은 그 당시 로마의 화폐를 가리켰습니다(원, 엔, 달라 등과 같은 이치).
한 데나리온은 한 노동자가 하루 일한 삯으로 받는 대가를 말합니다. 하루에 만원을 받는다면 한 데나리온은 만원을 가르킵니다. 그런데 한 므나를 데나리온으로 환산하면 100데나리온이며 약 100만원에 해당된다고 보겠습니다. 마 25장에 나와 있는 달란트의 사명에 비하여 그 내용은 같아 보이지만 화폐의 이름이나 그 액수의 차이가 많으며 막 25장에는 제각기 재능대로 준 액수가 다른데 그곳에서는 다 똑같이 나와 있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비슷한 비유를 겹쳐서 하신 것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주님은 이것을 주시면서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은 주님의 재림 시까지 장사하는 것 같은 정성과 충성으로 254 \ 누가복음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장사란 말을 해석한다면 복음을 전하는 일, 주님의 양을 치는 일, 죽도록 충성하는 일 등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4. 돌아온 후의 내릴 상과 심판
그 귀인이 왕권을 가지고 돌아온다고 말씀하신 대로 주님은 만 왕의 왕의 왕권을 가지시고 반드시 돌아오실 것입니다. 주님이 돌아오시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장사하라고 명을 내린 그 종들에 대하여 반드시 회계한다고 하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함이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고후5:10).
(1)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긴 종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그의 전 생애를 주님을 위하여 바친 사람입니다. 그는 주의 일을 위하여 그의 생애를 온전히 바쳤습니다. 그의 많은 열매는 그것을 말해줍니다. 그에게는 열 고을 다스리는 권세가 상급으로 주어졌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상급입니다.
(2)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남긴 종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그의 인생을 주님을 중심으로 살아간 사람입니다. 그는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았습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살아간 사람입니다. 맡은 사명을 소홀히 함이 없이 충성했습니다. 그에게는 다섯 고을 다스리는 상급이 떨어졌습니다. 주님의 상급은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행한 대로 갚아 주십니다(고전15:58).
(3) 그런데 그중 한 종은 한 므나 그대로 내 놓았습니다. 이 사람은 한평생 주님을 위하여 아무런 보람있는 일도 못했습니다. 맡은 사명을 고의적으로 피하기도 하고 탐탁지 않게 여겨 육신의 일에만 몰두하는 생애를 보냈습니다. 그는 변명을 늘어놓았지만 주님 앞에는 변명이 통하지 않습니다. 그는 있는 모든 것을 빼앗겼습니다.
결론 : 주님은 결론적으로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고 하셨습니다. 있다는 말은 열매를 말합니다. 순종을 말합니다. 이 사람들은 더 많은 것을 받는 축복이 찾아갑니다. 그러나 없는 자는 그가 소유하고 있는 것까지 빼앗길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 앞에 무엇인가 내놓을 것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재림을 원치 않는 모든 자들, 주님이 왕 됨을 바라지 않던 모든 불신자, 복음을 거슬리는 유대인들, 이들 모두는 그날에 주님의 무서운 심판을 받고야 말 것임을 경종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신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장사하여 몇 므나를 남겼습니까? 자신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한 일을 잘 헤아려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날에 칭찬 받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110)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누가복음 19 : 28 - 48)
서 론 :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그 따르는 무리들에게 크나큰 관심과 흥분을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곧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는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린아이들을 비롯하여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둘러싸고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하는 대대적인 행사가 진행된 것입니다. 이들이 예수님의 입성에 대하여 이토록 열광적으로 환영했던 것은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의 본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큰소리로 하나님을 찬송했다”했다고 했습니다(37절). 그리고 그들의 찬양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란 것이었는데 이 말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시는 영광의 메시야를 가리킨 것입니다. 그들은 이처럼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했지만 그들이 예상한대로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진 것이 아니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제사장들에게 정죄 받아 빌라도의 법정에 선 모습을 보고는 “저희는 소리질러 가로되 저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라고 외쳤던 것입니다(눅23:21).
1. 예수님의 입성
예수님은 고난의 십자가를 지시려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길이었습니다. 그는 이제 먼 나라로 가시기 위하여 고난을 당하셔야 했으며 그곳에서 다시 오실 때야 말로 만 왕의 왕으로, 심판 주로 다시 오시게 될 것입니다. 많은 무리들은 영광의 메시야로 영접했지만 그러나 주님은 평화의 왕으로 입성하시는 것입니다. 평화의 왕만이 십자가를 질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과 죄인과의 화평의 상징입니다.
(1) 주님은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셨습니다. 이것은 성경을 응하게 하시려는 뜻에서 나타낸 것입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슥9:9).
나귀 새끼를 탄 겸손한 왕은 영광의 메시야의 모습이 아닙니다. 영광의 메시야의 모습은 엄위하신 심판주의 모습이어야 합니다(계19:11-16, 슥14:1-9).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게 하신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이 같은 예언을 이루시기 위하여 이미 모든 일이 준비되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수 백년 전에 스가랴를 통하여 예언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에게 응할 줄을 믿은 것입니다. 그리하여 제자들에게 맞은편 마을로 가서 매여 있는 나귀 새끼를 풀어 끌고 오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이라 하거든 주님이 쓰시겠다고 하라고 말씀하심으로 주님의 말씀의 전능하신 능력을 나타내셨습니다.
이런 일은 감람산에서 가까운 벳바게와 베다니 동리에 가까이 왔을 때 일어난 일입니다. 벳바게란 무화과나무 집이란 뜻이고 베다니란 어부의 집이란 뜻입니다. 특히 이 마을에는 나사로와 그의 형제 마르다와 마리아가 사는 동리로 이 동리에 살아가고 있는 이들 형제들은 주님의 사랑을 받았고 주님은 그들을 가끔 찾아가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나귀가 바로 이들의 것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누구의 것이건 이미 성경에 예언된 것이 그대로 성취되었다는 점에서 참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2. 무리들이 환영함
주님은 그를 따르는 많은 무리의 환영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환영한 동기야 어떠하든 주님은 장차 만 왕의 왕으로 오실 영광의 왕이시며 평화의 왕으로 오신 분이시기 때문에 주님이 받으시기에 당연하고 합당한 환영이었습니다. 주님은 이 같은 그들의 환영을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받으신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어떤 바리새인들은 시기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향하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라고 불만을 토로했지만 주님은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를 것이라고 이를 물리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끊임없이 찬양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의 찬양이 끊기면 길가의 돌들이 우리를 대신하여 찬양할 것입니다.
3. 성을 바라보시고 우신 예수님
주님은 성 가까이 오시자 성을 바라보시고 우셨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우시면서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19:41-44). 주님은 자기 백성들이 아직 영의 눈이 어두워서 성경에 기록된 평화에 관한 일을 몰랐던 것을 안타까워하셨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하나님과의 평화를 위하여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오신 일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들이 바라야 할 평화란 사죄의 은총이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의요, 영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눈이 가리워 이 같은 사실을 바라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마음이 완악하였기 때문입니다. 죄를 회개하기를 거절하는 마음은 완악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 알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이 받을 무서운 재앙에 대하여 예언하셨습니다. 장차 원수들이 와서 예루살렘 성을 멸망시키며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판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주님의 예언은 이 말씀을 하신 지 40년이 채 못되어 주후 70년에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하여 문자 그대로 이루어짐으로 이스라엘이 완전히 멸망의 비운을 당하게 되 257 \ 누가복음
었고 그후 계속 2천여 년간 세계에 유랑하는 슬픈 민족이 되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이 권고 받는 날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 같은 심판을 당하게 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돌보시어 그들 가운데 메시야를 보내셨지만 그들은 이 같은 하나님의 돌보심을 거역하고 오히려 그들의 구주를 십자가에 못박음으로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은 하나님이 우리를 권고하시는 날입니다. 이날을 우리가 소홀히 여겨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을 저버린다면 우리는 장차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면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주님을 평화의 왕으로 우리 마음속에 진심으로 환영합시다. 나귀 새끼를 타시고 겸손한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찬양으로 노래하며 영광을 돌립시다. 지금은 은혜의 날이요 구원의 날입니다. 이 권고하시는 날에 우리가 주님을 거역하는 생활을 한다면 우리는 장차 영광의 왕으로 오시는 날 그의 무서운 심판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111) 성전 청결
(누가복음 19 : 45 - 48)
서 론 : 성전이 더럽혀지면 그곳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진노가 임합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곧 예루살렘 성전을 더럽힌 연유에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이스라엘의 정신적 지주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성도들의 영적 생활의 기초가 되는 곳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가 더럽혀 질 때 우리들의 신앙생활은 말할 수 없는 손상을 입으며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내리시는 진노가 우리들의 가정 생활에까지 미친다고 하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교회는 깨끗하게 보존하고 거룩하게 유지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강도의 굴혈이 된 예루살렘 성전을 청결케 하시는 작업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같은 예수님의 하시는 일에 대하여 깨닫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 후에 그들의 부패상은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주님이 예언하신 대로 그 성이 원수들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1. 성전이 왜 더러워지는가?
지상에 존재하는 성전은 천사들에 의하여 운영되는 곳이 아닙니다. 언제나 더렵혀질 여건이 생깁니다. 주님은 가라지의 비유에서 교회에는 원수가 심어 놓은 가라지들이 있다는 사실을 밝히셨을 뿐 아니라 그것을 뽑지 말고 놔두라고 하셨습니다. 교회의 세속화나 부패는 그 시초가 이 가라지들로 말미암은 것입니다(마13:24-30).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 악한 누룩과 영적으로 싸워야 합니다. 싸워서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헌데 바리새인, 서기관들, 제사장의 무리에 이르기까지 함께 썩은 것입니다. 그 부패의 양이 채워지면 하나님의 진노가 내려집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을 청결하는 작업을 하신 것도 이 때문입니다. 오늘날 모든 교회는 마치 멸망 직전의 예루살렘 성전 모양 타락의 길을 내닫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까지도 예루살렘 성전의 웅장한 모습을 바라보면서 주님을 향해 자랑을 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주님은 이 성전의 기둥하나도 남김이 없이 무너지리라고 저주하셨습니다.
이처럼 오늘날 모든 교회는 물량주의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큰 교회, 매머드 교회, 초 현대시설의 웅장한 교회를 자랑삼고있습니다. 그리고 그 재정 수입을 교회 운영의 제일로 삼고 있습니다. 물권주의입니다. 서로 사랑으로 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시기와 분쟁으로 교단마다 싸움질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본위가 아니라 돈과 인물 중심의 모임으로 파벌을 이루고 있습니다. 교회마다 기도의 불이 꺼져 있습니다. 기도하는 지도자가 없습니다. 성령의 등불이 꺼져 있습니다. 주님이 이 같은 교 259 \ 누가복음
회에 오셔서 둘러보신다면 무엇이라고 표현하실 것입니까? 아마 2천년 전 예루살렘 성전에 들르셔서 채찍을 가하실 때 하신 것처럼 “너희는 하나님의 교회를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고 책망하실 것이 아니겠습니까?
2.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주님은 성전을 가리켜 내 집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성전은 곧 하나님의 집입니다. 이것은 결코 우리의 마음의 성전을 비유적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성전이란 성도들이 모여 하나님을 경배하는 지리적 처소를 말합니다. 우리들의 예배처소인 교회도 하나님께서는 내 집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 집이라고 하신 하나님의 성전은 어떤 곳이 되어야 합니까? 어떤 곳이 되기를 주님은 바라십니까? 기도하는 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란 하나님과의 영적인 고통을 말합니다. 우리는 성전이야말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가장 적합한 장소임을 알아야 합니다. 산에서 하는 기도도 좋고 골방에서 하는 기도도 좋지만 가장 바람직한 기도 장소는 하나님께서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신 하나님의 성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솔로몬이 애초에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였을 때 그 무엇보다도 기도하는 처소라는 점을 강조했습니다(왕상8:30-40).
우리는 교회의 본질을 변질시키면 안됩니다. 기도하는 집을 다른 것으로 변질시키는 일은 교회를 강도의 굴혈로 만드는 일입니다. 강도란 곧 마귀를 상징합니다. 기도가 없는 교회, 기도의 목적에서 이탈된 교회, 세속에 물든 교회는 이미 마귀의 소굴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가 결코 강도의 굴혈이 되지 않기 위하여 기도하는 집으로서 활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3. 날마다 가르치심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요 또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고난 주간에 성전에서 모인 무리들을 향하여 날마다 가르치셨습니다. 주님은 말씀을 가르치시는 선생이십니다. 우리들도 다 그분 예수께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다 그분이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하나님 나라의 공부입니다. 세상 학문을 가르치는 곳이 아닙니다. 세상 것을 배우는 곳도 아닙니다. 말씀의 가르침이 없는 교회는 교회의 본분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교회입니다.
결론 : 우리는 기도하기 위하여 얼마나 교회를 찾아 나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기 위하여 얼마나 사모합니까? 교회를 강도의 굴혈로 만들지 말고 기도하는 아버지의 집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말씀의 집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신령한 축복은 이 같은 교회에 내려주시며 이런 교회에 속한 성도들의 가정 위에 하나님의 축복의 손길이 임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0장
◆ 밤중소리 01-11 | VIEW : 826
(112) 모퉁이 돌이 된 버린 돌(누가복음 20 : 1 - 19)
(113)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누가복음 20 : 20 - 26)
(114) 부활에 관한 논쟁(누가복음 20 : 27 - 40)
(115) 다윗의 자손이냐, 다윗의 주냐(누가복음 20 : 41 - 48)
(112) 모퉁이 돌이 된 버린 돌
(누가복음 20 : 1 - 19)
서 론 : 서기관이나 제사장들에게는 예수가 그들 눈의 가시만큼이나 미웠습니다. 이젠 직접적으로 성전에 들어오셔서 군중들에게 복음을 전하실 뿐 아니라 장사꾼들을 내어쫓고 강도의 굴혈을 만든다고 책망하시는 일에 이르자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예수님을 내어쫓을 심상으로 한가지 질문을 가지고 예수님께 다가온 것입니다.
1. 이 권세를 준 이가 누구냐
그들은 일단의 무리가 되어 많은 사람들 앞에서 가리키시는 주님께 왔습니다. 군중들에게 옹위 되어 있는 예수님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해를 가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들이 던진 질문은 이 같은 것이었습니다. “당신이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세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예수님이 분노하신 모습으로 성전을 청결하게 하신 일, 말씀을 군중들에게 가르치시는 일, 기적으로나 이적으로 병을 고치시는 일 등, 이런 것들이 그들의 눈에도 하나의 권세인 양 느껴진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권세를 준 근원을 밝히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대답을 통하여 말의 올무를 잡아 곤경에 빠뜨리려는 저의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들은 아마도 이 물음에 예수님이 대답을 못하고 우물쭈물 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대답이 듣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주님은 그들이 미쳐 상상도 하지 못했던 엉뚱한 질문을 오히려 그들에게 던지셨습니다. 주님은 바리새인들과의 대화에서 이 같은 반문 법을 많이 사용하셨습니다. 자신이 대답을 하지 않고 물어보는 상대방으로 문제의 해답을 할 수 있도록 만드시는 묘한 토론 법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 이 같은 주님의 반문 적인 토론 법을 적당하게 활용한다면 퍽 유익할 것입니다.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내게 말하라.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 서냐 사람에게로 서냐” 이처럼 물으신 것입니다.
요한의 세례 역시 그들에게는 예수님의 하신 일만큼이나 골치 아픈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강압적으로 말릴 수 없었던 것은 그에게 많은 군중이 따랐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들이 세례 요한이야 말로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인줄로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일이 그들이 세례요한을 잡아죽인다면 그들은 또 자기들의 조상들 모양 선지자를 잡아죽이는 무리들로 낙인을 찍힐 것이기 때문에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지금은 헤롯왕의 손에 의하여 순교를 당하여 유대땅 안에 존재하지 아니했지만 그를 사모하는 마음은 가시지 아니하였으며 그들 백성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선지자로 확인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이 같은 질문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대답하기가 매우 거북해졌습니다. 서로 의논하여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에 대하여 의견의 합치를 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이 만약 세례 요한이 하늘로서 온 선지자라고 말한다면 예수님의 반격을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너희는 왜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고 책망을 들을 것입니다. 그들 중에는 한 명도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았거나 회개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라 세례요한이 증거 하신 이는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였다는 사실을 그들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면 너희는 왜 그가 증거한 예수를 믿지 않느냐고 물으신다면 오히려 역습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만일 사람에게 서라 하면 어떻게 되겠느냐? 말하자면 하나님이 보내신 이가 아니라 가짜 선지자요 군중을 혼란케 한 위선자라고 말한다면 그때는 군중들의 매서운 돌팔매질이 겁이 난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이스라엘은 세례요한을 선지자로 여겼기 때문에 그 같은 모욕적인 언동에 대하여 용서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어디로서 인지 알지 못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그들이 듣기 원하는 대답을 이처럼 하셨습니다.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자신들이 대답하지 못한 일이었기 때문에 왜 대답을 피하느냐고 따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지혜를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이처럼 그들의 간계를 물리치셨던 것입니다.
2.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심
예수님은 그들에게 한 비유로 그들이 장차 당신을 죽이실 일에 대하여 예언적인 교훈을 하시고 그 결과 그들이 선민의 자리에서 떨어지고 그들이 받을 특권이 이방인에게 넘겨질 일에 대하여 경종 하셨습니다. 이 비유에서 한사람이란 포도원 주인이신 하나님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포도원이란 하나님의 선택받은 민족, 이스라엘을 가리켰습니다. 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새로 주었다고 하신 것은 농부들로 비유된 이스라엘 민족으로 그들에게 이 포도원 밭을 맡기신 것입니다.
잘 가꾸어서 기름지게 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 그리하여 만민 중에 뛰어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고 메시야를 통하여 구원의 축복을 주시려고 기대하신 것입니다. 포도원 주인이신 하나님은 포도원의 소출을 원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때가 이르매 그의 종들인 선지자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주인이 보낸 종을 환대한 것이 아니라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다고 하셨습니다. 이 같은 일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종들을 핍박하고 그들의 경종을 듣지 않고 이방 신을 섬기며 하나님을 떠난 악한 행위를 말한 것입니다. 이 같은 그들의 일은 계속적으로 나타나 마지막에는 종 대신 아들을 보내시리라고 생각하셨습니다.
아들이란 곧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서로 의논한 내용을 보면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업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고 말한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원치 아니했습니다. 자신들이 서기관으로 제사장으로 포도원을 다스리기를 원했습니다. 이제 이 아들을 죽이면 이 같은 그들의 생각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포도원 밖에 내어 좇아 죽였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십자가 위에서 죽이는 그들의 살인적 행위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3. 그런즉 이 사람들은 어떻게 하겠느냐?
주님은 무리들에게 그런즉 그 주인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입에서 대답을 기다릴 것이 없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에게 주리라.” 이것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내리시는 심판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이 심판은 주님이 돌아가신 후 40년만에 로마군에 의하여 이루어 졌습니다. 그들은 진멸을 당하여 2천년간이나 방랑하는 집시 족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약속된 언약은 하나님께서 열매 맺는 백성에게 돌려졌는데 이방인에게 남겨진 것입니다.
이때 무리들은 결코 이런 일이 있지 않기를 소리쳤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미 이 같은 일이 시편에 예언되어 있다는 사실을 근거로 들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함이 어찜이뇨.” 건축자들이란 바로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제사장들을 의미합니다. 버렸다는 말은 십자가에 죽인 것을 말합니다. 돌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머릿돌이 되신 예수그리스도를 말합니다.
결론 : 이 돌은 두 가지 심판을 이루십니다. 하나는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들에 대한 심판입니다. 그들은 깨어진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를 거역하는 자들에 대한 파멸을 말합니다(요3:18). 그리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그가 재림하실 때 이 세상 인류에 대한 심판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야 할 건축자들이 오히려 요긴한 모퉁이 돌을 버림으로써 실패했습니다. 그들은 다 이 돌 위에 떨어짐으로써 파멸을 자초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우리에게 이 포도원을 맡기셨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뒤를 따라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건축하는 건축자들로 이 모퉁이의 머릿돌을 소중히 여기며 그 돌 위에 우리의 믿음의 터전을 삼아야 할 것입니다.
(113)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
(누가복음 20 : 20 - 26)
서 론 : 예수님을 책잡으려는 모함은 끊임없이 계속 되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최후적인 간계를 생각해 냈습니다. 예수님으로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하여 총독의 치리와 권세 아래 붙이려고 한 것입니다. 그들이 꾸며낸 올무는 납세 문제였습니다. 예수님으로 반로마 적인 언동을 하게 함으로 로마 총독의 법적 제재를 받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서도 예수님은 그의 기발한 기지로 그들이 의도하는 올무를 능히 벗어나셨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들로 주님의 대답을 기이히 여기게 하였던 것입니다.
1. 그들의 질문
그들이 주님께 한 질문은 이러했습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사람을 외모로 취치 아니하시고 오직 참으로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나이다. 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나이까 불가하나이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속에 숨겨진 올무는 이렇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통치아래 있었는데 총독이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누구나 그들의 지배국인 로마에 일정한 세금을 내야 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일에 대하여 많은 반항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세리들을 죄인이라고 정죄하고 있었던 이유도 그들이 로마정권에 아부하여 그들의 관리로써 동족의 세금을 거두어 그들에게 바쳐 왔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이 같은 질문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입에서 대답을 듣기까지 결코 뒤로 물러서지 아니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일 예수님께서 세금을 바치는 것이 가하다고 하신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그때는 바리새인들이 모든 선지자들만도 못한 위선자요 겁쟁이라고 공박하고 모략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과 많은 무리들과의 관계를 멀리 띠여 놓게 하려는 것입니다.
다른 한가지는 만약 예수님의 입에서 불가하다고 하시는 말씀이 나오면 이 같은 일이야말로 그들이 노리는 함정인 것입니다. 그들은 당장에 현행범으로 총독에게 고소하여 로마정부에 세금을 내지 못하도록 선동하는 이 사람을 처벌해 달라고 할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든 여하튼 예수는 넘어지게 되었다고 자부했을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그들의 간계를 아셨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에 대한 칭찬을 잔뜩 치켜올려 논 다음에 그 입에서 말이 나오게 하려는 작전을 쓴 것입니다.
2.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예수님은 그들에게 데나리온 하나를 내게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데나리온이란 그 당시 로마에서 사용했던 화폐를 말합니다. 그리고는 이 화폐에 있는 화상과 글이 뉘 것이냐, 뉘 화상과 글이 여기 있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그들은 대답하기를 가이사의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가이사란 그 당시 로마의 황제를 말합니다. 주님은 이때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너무나도 기묘하고 의미 심장하며 무엇이라 판단하기가 난감하면서도 그렇다고 올무에 걸 수도 없는 그런 답변이셨던 것입니다.
(1) 가이사의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데나리온에 가이사의 화상과 글이 적혀 있는 것은 그것이 분명 가이사의 것임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이사가 로마 황제요 그가 많은 나라를 다스리고 있는 사실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롬 13:1에서 권세는 하나님께로서 나지 않음이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단 2:37-38에서도 다니엘이 느브갓네살 왕에게 “하늘의 하나님이 나라와 권세와 능력과 영광을 왕에게 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가이사는 로마를 다스리는 데 있어서 세금을 받을 수 있습니다. 데나리온은 자신이 발행한 돈입니다. 그는 자기의 것을 다시 거둘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같은 일은 자신의 권한에 속한 문제요, 또 하나님이 허락하신 바입니다.
(2)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란 말은 무엇입니까? 그러나 이 세상에는 가이사의 것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이사의 것이라고 말하는 것까지라도 실인즉 하나님의 소유물인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고 하신 말씀은 다음과 같은 뜻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는 신령한 예배는 결코 가이사의 것이 될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 당시 가이사는 자칭 신으로서 모든 사람들의 경배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는 예배를 받는 존재로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가 앉아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경배는 어떤 경우에도 사람이 받을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받으실 수 있는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의 소유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같은 일을 간접적으로 견책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가지는 아무리 로마의 지배권 아래 있다고 할지라도 가이사의 권한이 결코 침범할 수 없는 하나님의 소유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가이사의 것과 구별하여 하나님의 것으로 바쳐야 합니다. 이것은 말 3:10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드려야 할 십일조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결론 : 오늘날에도 눈에 보이는 유형적인 권력은 가이사에게 속한 것들입니다. 그들은 그 국민들에게 세금을 부과시키며 여러 가지 의무 조건을 내세웁니다. 우리는 이 가이사의 권력인 국가권력에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주는 생활이 한 국가의 백성으로서 응당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바쳐야 하는 원칙에 대해서 분명한 선을 그려야 하는 것입니다. 나라에 세금을 낼 줄을 알면서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일을 어기는 일은 바른 신앙태도가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에게도 오직 하나님께만 드리는 예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라도 하나님의 것을 바치지 않거나 내 것으로 소유할 수 없는 것입니다. 가이사가 자기의 것을 반드시 법률로서나 강권적인 방법으로 찾듯이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바치기를 꺼리는 것에 대하여 당신의 것에 대하여 찾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 모순되는 듯하면서 그렇지 아니한 관계를 잘 유지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114) 부활에 관한 논쟁
(누가복음 20 : 27 - 40)
서 론 : 예수님이 살아 계셨던 당시, 유대교는 크게 두 파로 갈라져 있었습니다. 하나는 보수적인 바리새파이고 다른 하나는 혁신적인 사두개파입니다. 성경에는 바리새인들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나와 있으며 특히 예수님과의 모든 논쟁의 대상이 된 사람들 역시 이 바리새파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그래도 성경대로 믿으려는 사람들이요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진리에 대하여 옹호해 나갔습니다. 그러나 사두개인들은 신앙적인 면에서는 이들과 전혀 다릅니다.
그들은 부활을 부인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구약에는 부활에 대한 어떤 뚜렷한 말씀이 나와 있지 아니합니다. 그런 중에 부활을 믿고 부활의 신앙을 갖는다는 일은 어려운 일입니다. 주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을 말씀하실 때, 그의 제자들까지도 그 같은 사실에 대한 믿음을 갖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은 신 25:5 말씀을 근거하여 부활을 부인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질문한 내용도 바로 이 같은 근거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1. 사두개인들의 질문
사두개인들에게 부활 신앙은 하나의 신비적인 신앙으로 비 성경 적이라 하여 배격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죽은 자들의 부활에 관하여 가르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이런 예수님을 성경 적으로 곤경에 집어넣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모욕을 주기 위하여 한 가지 질문을 짜낸 것입니다. 이 질문은 신명기 25장에 있는 말씀을 인용한 것임으로 매우 성경 적이었으며 무엇으로도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모세를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율법에는 혈통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형이 후사가 없이 죽었을 때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자식을 낳아 형의 기업으로 만드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부터 막내까지 자식이 없음으로 한 여인을 그들의 아내로 삼고 마지막에는 그 여인마저 죽었습니다. 이런 경우, 한 여자에 남편은 일곱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만약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면 부활 때에 이 여인은 어느 남자의 아내가 될 것이냐는 것입니다. 그들의 이 질문이야말로 참으로 답변하기 어려운 질문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아마 이 질문을 던져 놓고 아무리 예수라도 이젠 꼼짝없이 당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2. 부활에 대한 예수님의 해답
그런데 예수님은 이 질문에 답하는 말씀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놀라운 부활의 비밀을 알려 주셨습니다. 만약에 이들의 이 같은 질문이 없었던들 우리는 우리 주님의 267 \ 누가복음
이 주옥같은 진리에 대하여 듣지 못했을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1) 부활의 상태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부활의 상태가 첫째로 시집 장가가는 일이 없는 몸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시집 장가가는 일은 인류의 번식을 위한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결혼이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이 주시는 하나의 위로입니다. 그러나 신령한 몸은 인류의 번식이나 위로가 필요 없습니다. 다시없이 영화로운 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2) 다시 죽을 수도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한 몸은 다시 죽을 수 없는 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영생은 곧 부활을 말합니다. 부활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우리는 영으로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 부활한 몸으로 영원히 삽니다. 천국은 부활한 몸이 들어가는 곳입니다.
(3) 천사와 동등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영광과 존귀는 천사보다 월등히 앞서며 다만 그 존재가 동등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천사는 분명히 영적 존재입니다. 그들에게는 자녀를 생산할 수 있는 인간적인 육체적 조건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그런데 어떤 많은 신학자들은 창 6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들을 천사로 해석하여 천사와 사람의 딸과 결혼함으로 세상에 죄악이 관용했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모순도 이만 저만이 아닌 것입니다. 영적 존재인 천사에게는 임신하는 일에 필수적인 남성의 정자가 있을 리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부활의 소망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부활의 몸을 생각할 때 우리에게는 너무나도 놀라운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천사와 동등한 존재로 영원히 영화롭게 할 수 있는 확실한 소망을 가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3. 부활에 관한 구약의 증거
주님은 부활이 있다고 하는 성경 적 근거를 출애굽기 3장에서 찾으시고 하나님을 칭하기를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나타나셨을 때 자기를 가리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칭하신 것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죽어 있는 사람이 아님을 증거 하는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결코 죽은 자의 하나님이 되실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비록 육신 적으로는 무덤에 누워 있지만 그들에게는 부활의 생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언젠가는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눈에는 그들이 죽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에 구속당하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잠자는 사람을 보고 죽었다고 말하지 않는 것처럼 육신이 무덤에서 잠자는 상태를 하나님은 죽었다고 보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죽은 자를 가리켜 잠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고 하신 말씀의 뜻은 모든 사람은 살아 있는 사람이나 죽은 사람이나 모두 다시 살아날 것이기 때문에 살아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요 5:28에 “무덤 속에 있는 자들이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같은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에게는 분명히 부활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예수님은 부활을 부인하는 사두개인들을 향하여 증거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대적 자들에게 공격하거나 증거 할 무기는 반드시 성경에서 찾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에서 들어내심으로 그들에게 부끄러움을 주신 것입니다.
결론 : 예수님의 논증은 위대했습니다. 어느 누가 이처럼 명백하게 그들의 질문에 답할 수 있으리라고 상상이나 하였겠는가? 이런 대답을 들은 서기관들은 너무나 감탄한 나머지 “선생이여, 말씀이 옳으니이다.”고 말했습니다. 부활이 있다고 하는 바리새인들은 성경 적인 진리 면에서는 예수님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조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교만과 죄로 인한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결국은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 사두개파 사람들과 손을 맞잡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진리에 굳게 서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바리새인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115) 다윗의 자손이냐, 다윗의 주냐
(누가복음 20 : 41 - 48)
서 론 :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바라고 있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다만 육신 적인 신분에 관해서만 알고 있을 뿐 영적인 신분에 관하여는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다만 다윗의 육신 적인 자손으로 오실 분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마치 모세가 애굽에 갑자기 나타나서 하나님의 권능과 기적으로 이스라엘을 구출해 낸 것처럼 다윗 왕의 혈통으로 오는 메시야는 이 같은 하나님의 권능으로 나타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메시야의 왕국을 세울 줄로 알고 그렇게 기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그들의 사상은 끝내 그들 앞에 나타난 진짜 그리스도를 가짜로 여기게 되었고 십자가에 못박기까지 하는 어리석은 짓을 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이런 사상을 뜯어고치기 전에는 바른 메시야 관을 가질 수 없다는 뜻에서 영적으로 깊은 진리에 속하는 말씀을 들려주신 것입니다.
1. 다윗의 자손이신 그리스도
마태는 그의 복음서 1:1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세계라” 이곳에서 예수를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했습니다. 혈통을 존중하는 이스라엘에게 예수는 다윗의 자손으로 성경에 언약된 그리스도이심을 증거 하려고 벽두에 족보를 기록한 것입니다. 이 같은 기록은 사실인즉 마리아의 남편 요셉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정혼한 처녀에게 이르니”(눅1:27). 요셉은 분명히 다윗의 혈통적인 자손이지만 그의 아들이라고 불리는 예수님은 그의 혈통적인 자손이 아니십니다. 아내인 마리아가 처녀인 때 이미 잉태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족보상으로만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십니다. 다윗의 자손에 대한 약속은 성경 여로 곳에 나와 있는데 두드러진 기록을 보면 사 11:1-4에 있는 이 말씀입니다. 이새란 다윗의 아버지 되는 사람이며 그 줄기에서 나온 다는 말은 다윗의 자손으로 태어나실 그리스도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레미야 23:5에서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킨다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말한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아 30:9절에서는 그리스도를 아예 다윗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아 당시에 다윗 왕은 죽은지 벌써 오랜 때였습니다.
사도행전에서는 13:22-23에서 예수를 다윗의 씨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예언은 이스라엘에게 그리스도로 오실 메시야에 대한 바른 세상을 가지지 못하게 한 하나의 원인이 된 것입니다. 그들은 메시야로 예언하신 임마누엘의 참뜻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사7:13-14). 처녀가 잉태하는 일에 대하여 그들의 메시야와 전혀 관련을 짓지를 못한 것입니다. 다윗의 왕권으로 오실 분으로 여겼기 때문에 나사렛에서 무슨 좋은 일이 일어나겠느냐고 나다나엘이 말했고 예수를 가리켜 목수 요셉의 아들이냐고 거들떠보지도 아니했으며 베들레헴 땅에서 메시야가 태어난다는 예언을 알면서도 그 당시 그곳에 메시야가 나타날 만한 신통한 일이 없었기 때문에 서기관들이나 제사장들이 전혀 무관심했습니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나는 아브라함보다 먼저 있는 자라고 말씀하셨을 때 이해하기는 고사하고 네 나이가 아직 오십이 안되었는데 미친소리가 아니냐는 투로 조롱했습니다. 그들의 이 같은 그리스도 관이 바뀌지 않으면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없기에 예수님은 그리스도의 성경적 인 바른 신분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2. 다윗이 주라 부른 그리스도
성경을 삶의 경전으로 여기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바른 해답을 주려면 성경에서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문제에 관한 바른 해답을 다윗이 직접 성령의 감동으로 받은 예언을 통하여 증거 하신 것입니다. 그 말씀이 시 110:1에 있습니다. 내 주에게 라는 말에서 '주'란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에서 다윗이 그리스도를 가리켜 내주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구약에서 주란 말은 하나님을 지칭하는 말로 표현됩니다.
그리고 이 예언은 부활하시고 하늘에 올라가실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십니다. 많은 유대인들은 이 예언이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일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생각해 왔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 같은 말씀의 인용은 그들이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반문했습니다. “그런즉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으니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뇨”고 하신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이란 인성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나타내신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성이 그의 성품이신 것이 아니라 그의 신성이 그의 원래의 성품이신 것입니다. 다윗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찬양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의 위대하심과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3. 서기관들을 경계하라고 하심
이 말씀을 듣는 무리에게 서기관들에 관한 경계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의 교만과 탐심과 외식 때문에 많은 백성들이 오도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경계하지 않으면 그들의 오도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1) 긴 옷을 입고 다닌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긴 옷을 입고 다니는 이유는 그 옷깃에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고 다니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이 가장 성경을 많이 읽는 것으로 자랑하였고 존중히 여기는 것으로 과신한 것입니다.
(2) 그들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남에게 존경받기를 좋아한 것입니다.
(3) 그들은 회당의 상좌에 즐겨 앉았습니다. 교회에서 높임 받기를 좋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높은 자가 되는 길은 스스로 낮아져야 한다는 원리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4) 잔치 집에 가면 상석에 않기를 즐겨했습니다. 누구에게나 대접받기를 좋아하고 세상 영광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말씀을 가르친다고 하면서도 실상인즉 과부의 가산에 눈독을 들여 탈취하며 기도할 때도 길거리나 회당에서 길게 하는데 그 기도는 남에게 보이기 위한 외식적인 기도라고 신랄히 비난하신 것입니다.
결론 : 주님은 세상 사람들을 나무라시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자에게 징계를 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도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바라며 유대인들의 신앙적인 지도자이기 때문에 이처럼 책망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책망을 들을 때 속히 깨달아 죄악의 길에서 돌이킬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1장
◆ 밤중소리 01-11 | VIEW : 515
(116) 과부의 헌금이 보여주는 것(누가복음 21 : 1 - 4)
(117) 예수님의 재림과 징조(누가복음 21 : 5 - 28)
(118) 무화과나무의 비유(누가복음 21 : 29 - 38)
(116) 과부의 헌금이 보여주는 것
(누가복음 21 : 1 - 4)
서 론 : 예수님이 헌금에 대하여 말씀하신 곳은 성경 중 몇 군데 안됩니다. 그러나 하신 말씀이 많건 적건 일단 그 입에서 말씀이 나왔다면 그 말씀은 우리 생활의 거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가난한 과부의 헌금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헌금이 어떤 것인가에 대하여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1. 헌금을 주시하신 예수님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연보궤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또 어떤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셨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헌금하는 일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가지고 보신다고 하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들의 헌금에 대하여 절대 무관심한 분이 아니십니다. 보시고 관찰하시고 판단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드린 헌금에 축복해 주심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물질과 관계가 없는 곳이 아닙니다.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고 말씀하셨고 “네 보물이 있는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질은 이 세상에서 둘도 없는 하나님의 적수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많이 사랑하는 사람은 진심으로 하나님께 많은 물질을 드리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적은 사람은 물질을 드림에 심히 인색합니다. 유대인들은 회당에 들어가는 데 반 세겔을 성전세로 바쳐야 했습니다. 예수님도 이 세를 바친 사실에 대하여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마17:27).
하나님께서는 헌금의 최소의 액수를 분명히 설정해 놓으셨습니다. 그것이 말 3:10에 십일조와 헌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헌물이란 하나님께 마땅히 드릴 예물입니다. 말하자면 양의 첫 새끼, 농산물의 첫 열매 등입니다. 잠 3:9에서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십일조를 바치지 못하고 있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고 책망하셨습니다. 신앙 생활 하는데 이 같은 일은 초보적이요 기본적인 일입니다.
2. 부자의 헌금과 과부의 헌금
주님 앞에서 헌금한 사람은 두 종류의 사람이었습니다. 한 무리는 부자들로 그들은 남보라는 듯 많은 은전을 연보궤에 넣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이 잘못했다고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다음에 한 가난한 과부가 연보궤에 두 렙돈의 돈을 넣는 것을 보셨습니다. 렙돈이란 돈의 단위를 말하는 것으로 동전 중에 가장 적은 액수의 화폐를 가리킵니다. 생활비 전부라고 하셨으니 아마 기 천원은 되지 않았나 여겨집니다. 이 과부의 헌금은 주님의 눈길을 끌었고 주님으로 이 과부의 헌금을 통하여 우리에게 헌금의 자세에 대하여 교훈하지 않을 수 없게 되신 것입니다.
주님은 주변에 모인 사람들에게 이르시기를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 보다 많이 넣었도다”고 하셨습니다. 사실 헌금 액수로는 지극히 적은 금액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칭찬을 받은 이유는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라고 하신 말씀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구차하다는 말은 몹시 가난하고 궁색한 처지를 말합니다.
3. 과부가 칭찬 받은 이유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있는 바 생활비 전부란 말에서 우리는 과부의 지극히 적은 헌금이 어찌하여 주님에게 그토록 칭찬을 받을 수 있었는가에 대하여 훌륭한 대답을 찾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부자는 풍족한 중에서 자기들의 생활에 비하여 볼 때 얼마 안 되는 헌금을 드렸지만, 이 과부는 그의 생활비 전부를 드렸다고 하신 데 대하여 주님은 강조 점을 두신 것입니다.
(1) 정성을 다하여 헌금했습니다. 하나님은 헌금한 사람의 마음을 살피시는 것입니다. 과연 정성을 다한 헌금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헌금액수 보다도 그 헌금을 바치는 하나님께 대한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 정성을 드려 헌금해야 하겠습니다.
(2)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드렸습니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고후9:7). 자신의 생활비 전부를 낸다는 일은 억지로는 안됩니다. 즐거운 마음으로가 아니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인색함이나 억지에는 즐거움이 따를 수 없습니다. 즐거움이 없이 억지로 많이 내는 헌금에는 시험이 뒤따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억지로 내다가 큰 시험을 받았습니다.
(3)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드렸습니다. 사랑에는 무엇이나 부족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을 때는 적은 것도 아깝고 많아 보입니다. 그러나 사랑에는 많은 것도 적어 보입니다. 이 과부의 헌금은 사랑의 표현입니다. 사랑이 없이는 자신의 생활비 전부를 바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솔직하게 표현한다면 둘이다 똑같은 생활 수준이요 같은 수입이라면 하나님을 누가 더 사랑하느냐에 따라 헌금 액수가 달라진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 과부는 이런 관점에서 주님께 합격한 사람입니다.
결론 : 누구나 하나님께 헌금할 때에는 액수의 많고 적음에 부끄러움이나 자랑을 느낄 것이 아니라 내가 드린 헌금이 얼마였든 내가 과연 이 과부와 같은 정성으로, 즐거움으로, 사랑으로 믿음으로 드렸는가를 살펴 볼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드린 헌금이 비록 적은 것이었다고 해도 이 과부처럼 드려졌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헌금을 드린 것이며 우리 주님의 놀라운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옛날부터 하나님의 기적이나 축복은 큰 것에서 일어난 것은 없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바친 기드온의 삼 백 명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큰 역사를 이루신 것입니다. 사르밧 과부의 떡 한 덩어리의 정성이 그들의 가정 위에 삼 년 반 동안의 먹을 양식을 공급받는 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어린 소년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무려 오 천 여명의 굶주린 군중들에게 배불리 먹이는 복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이 과부의 본을 본받아 바른 헌금을 드리는 성도가 됩시다.
(117) 예수님의 재림과 징조
(누가복음 21 : 5 - 28)
서 론 : 우리는 성경 여러 곳에서 주님의 재림에 대한 말씀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재림에 관한 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보다 더 명확한 것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직접적으로 들려주신 재림의 징조에 대하여 연구함으로써 비록 때와 기간은 하나님께 속해 있지만 하늘의 징조로 날씨를 알아내듯 성경 적인 징조로 주님의 재림의 시기를 알고 준비하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1. 먼저 우리가 알아야할 사항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종말의 징조에 대한 것은 마태복음, 마가복음, 그리고 누가복음에 거의 비슷한 논법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마24:15-31, 막13:14-27). 그런데 이 예언의 말씀 중에 특히 예루살렘에 관한 말씀이 나오며 제자들의 질문에서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의 돌 위에 돌이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라고 하신 말씀을 듣고 언제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런 일들이 이루어지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고 하는 질문에 관한 답변형식으로 들려주신 말씀이므로 이 예언 중에는 반드시 예루살렘의 멸망이 이른 70년의 로마의 디도에 의한 파멸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예언의 말씀을 깊이 연구해 보면 이 말씀 가운데 70년에 있었던 디도 장군에 의한 멸망사건이 들어가지 않았다고 하는 사실을 찾아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연구한 많은 신학자들은 대개의 경우, 이 말씀은 예루살렘 멸망과 세상의 종말을 복합적으로 예언하신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같은 학설이 가장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기존 적인 학설에 하나의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떤 연고로 서냐? 그 이유는 예수님의 예언하신 징조는 너무나도 명백한 논리에 의하여 전개되어 있다는 데 있습니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논리의 비약이나 이중적인 예언의 복합성을 발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예루살렘의 로마에 의한 70년대의 멸망에 관한 예언이 아니라 전적으로 세상의 종말에 관한 예언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제자들의 분명한 질문 내용을 들으셨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관심사인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질문을 통하여 온 인류가 알아야 할 세상 종말에 관한 예언을 들려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유월절을 전후하여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 성을 바라보시고 우시면서, 날이 이를 때 원수들이 와서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라고 하신 예언을 이미 그들에게 들려 주셨던 것입니다(눅19:41-44). 그리고 주님의 징조 예언에는 예루살렘 성전 기둥에 관한 말씀은 전혀 없으신 것입니다.
2. 예수님이 밝히신 세상 종말
주님은 세상 종말에 나타날 여러 가지 징조에 관하여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1)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하셨습니다. 무슨 미혹이냐? 많은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로라 때가 가까이 왔다고 미혹한다는 것입니다.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이 와서 성도들을 미혹함으로 영적으로 그 생명을 죽이는 역사가 있게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이 같은 미혹에 대하여 성도들이 할 일은 그들을 쫓지 말라는 것입니다. 미혹하는 무리들을 진리의 말씀으로 잘 분별하여 그들을 좇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2) 전쟁과 지진과 온역 등이 전세계적으로 번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난리와 난리 소문이 나는데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는 동족 상잔과 비참한 국지적인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세계 처처에서는 큰 지진과 기근과 온역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3)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무서운 일과 하늘로서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주 재림 시에 있을 무서운 아마겟돈 전쟁의 모습과 하늘의 권능이 흔들리는 사상 미증유의 혼란을 바라보게 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밝히신 이 같은 예언은 종말 예언의 총론 적인 말씀이었습니다.
3. 주 재림 전에 받아야할 성도들의 시련
이처럼 말씀하신 후에 주님은 주 재림 전에 받아야 할 성도들의 시련과 실질적으로 주님의 재림 시에 일어날 구체적인 사건과 그때 예루살렘에 거하는 유대인들이 살 수 있는 길을 알려 주셨습니다.
(1) 이 모든 일이 일어나기 전에 이 땅위에 살고 있는 주님의 성도들에게는 무서운 시련이 있을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핍박을 받는데 회당과 옥에 넘겨주며 임금들과 관장들 앞에 끌려간다고 하셨습니다. 회당과 옥에 넘겨주는 일을 당할 사람은 이스라엘 경내에 있는 주님의 성도들을 말하며 임금들과 관장들에게 끌려가는 성도들은 세계적인 성도들이 받을 핍박을 말합니다. 성도들을 핍박할 무리들은 말할 것도 없이 적그리스도의 무리들이며 계 9장에 나오는 첫째 화에 등장하는 황충이 들입니다. 이때 이 황충이 사상이 들어간 사람은 부모이든 형제이든 원수가 되기 때문에 성도들을 적그리스도의 무리들의 손에 넘겨주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때 순교자도 생길 것입니다(계2:10). 그러나 이때 우리는 주님의 보호하심을 받음으로 머리털 하나까지라도 보호될 것입니다. 이때 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인내하는 일입니다(계3:8-10).
4. 예수님의 재림
여기서 우리는 20~24절까지의 말씀을 70년대의 예루살렘 침공으로 해석하기 쉬운 것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침공이(70년대) 예수님의 재림의 징조 예언에 들어갈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밑도 끝도 없이 예언의 중간에 그림자처럼 비췰 필요가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해석하는 데 예수님의 재림과 짝을 맞출 수 있는 너무나도 명백한 성경 구절을 찾을 수 있습니다.
(1) 먼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 의하여 에워싸인다고 하셨습니다. 물론 예루살렘은 원수들에 의하여 여러 번 에워싸였습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말씀하신 에워싸임은 세상 종말에 관한 일입니다.
(2) 이 같은 환난에서 살 수 있는 길은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3) 그날에는 아이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4) 그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많은 백성들이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이방에 사로잡혀 갈 것이라고 했습니다.
(5)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치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런 일이 있고 나서 예수님의 재림이 곧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하여 연구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슥 14장을 보면 여호와의 날은 주 재림의 날입니다. 내가 열국을 모아 열국과 싸우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싸움이 유브라데 전쟁과 아마겟돈 전쟁입니다. 이 싸움에서 적그리스도의 군대들은 예루살렘을 공격하게 됩니다(겔38:8-9, 14-16절). 이때 성읍이 함락된다고 했습니다. 가옥이 약탈되며 부녀가 욕을 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아이밴 자와 젖먹이는 자에게 화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읍 백성이 절반이나 사로 잡혀 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방에 사로 잡혀 갈 것이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과 일치되는 것입니다. 이때 예루살렘 성은 이 적그리스도의 군대들이 강점할 것이며 그들이 물러날 때까지 짓밟힘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계11:2).
결론 : 이때에 일어날 자연계의 징조에 대하여 일월성신에 징조가 있을 것과 세상 사람들이 이 같은 징조로 인하여 목도하게 될 일에 대하여 곤고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때에 주님이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너희 구속의 날이 가까이 왔기 때문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구속의 날이란 주님의 재림으로 말미암은 온전한 구원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같은 예언의 말씀에 나타난 징조를 통하여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야말로 종말에 심히 가까운 시대에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깨여 경성하는 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118) 무화과나무의 비유
(누가복음 21 : 29 - 38)
서 론 : 예수님은 이제 종말에 있을 징조에 관한 예언을 마치시고 이런 시기를 바라보고 경성하고 기도해야 할 그리스도의 신앙자세를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이 말씀 중에서 무화과나무의 비유로 주 재림의 시기와 징조를 삼으신 것과 이 날을 능히 맞이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1. 무화과나무의 비유
이스라엘에서 무화과나무는 그 잎이 여름에 핍니다. 마치 우리 나라에 버들잎이 봄에 피고 살구꽃망울이 여름에 피는 것과 같습니다. 이 말씀은 두 가지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1) 하나는 이 말씀 그대로의 해설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종말의 징조가 나타나면 반드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운 줄을 알라는 것입니다. 마치 무화과나무 잎이 돋우면 반드시 계절적으로 여름이 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이런 징조가 나타나면 반드시 주님의 예언이 적중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증거니 그리 알라고 하신 것입니다. 무화과나무 잎은 남을 속일 수 없습니다. 잎이 나면 반드시 여름이 오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의 말씀하신 종말의 징조가 세상에 나타나면 오래지 않아 세상 종말이 오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는 것입니다.
(2) 또 다른 한가지의 곁들인 해석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화과나무를 이스라엘로 가정하여 그 잎이 피는 비유를 이스라엘의 회복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저주받은 무화과나무처럼 뿌리로부터 말랐지만 이제 그 싹이 난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말합니다. 1948. 5. 14일에 이스라엘의 독립이 선포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회복은 세상 종말이 이르렀다고 하는 하나의 경종 신호입니다.
그런데 난해한 문제는 32절에 있습니다. 이 말씀은 대개의 경우 두 가지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말씀을 하셨을 당시를 말씀하시는 것으로 그들이 이 말씀을 듣는 그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세상 종말이 올 것이라고 하는 해석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해석이 바르지 못하다는 것은 적중하지 못했다는 데 있습니다. 다음에 이 세대라고 말한 세대는 이스라엘이 회복한 후로부터의 한 세대를 말하는 것이라고 보며 이 한 세대의 길이는 약 30년이나 40년쯤 잡고 있는 것입니다. 이 해석은 아무 무리가 없는 해석처럼 보이지만 30, 40년이 지나도 세상 종말이 오지 않는다면 이 해석도 옳은 해석일 수가 없을 것입니다.
저는 이 해석을 예수님 당시의 세대나 이스라엘의 회복의 시기로부터의 한 세대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런 일이 나는 것을 보거든 하신 말씀, 이런 일이란 예언하신 종말의 징조를 말합니다. 이런 징조가 일어나는 일이 분명히 나타나면 그때로부터 세상 종말, 주님의 재림의 시기까지는 한 세대를 넘기지 못할 것이라고 하신 말씀이라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심으로 이런 예언의 말씀은 진실 되며 앞으로 이 세상에 반드시 징조로써 나타날 것이라는 확실한 보장이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십니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 그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고 히 1:1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토록 분명하게 약속하신 예언에 대하여 전적으로 믿음으로 이를 준비하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2. 경성하여 기도하라
주님은 이 같은 세상 종말의 시기가 언제인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으시고 다만 이 날에 임하는 모습에 대하여만 경종 하셨습니다. 이날에 임하는 상태에 대하여 주님은 그 날이 뜻밖에 덫같이 임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생활은 스스로 조심하는 생활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조심하지 않을 때 범하게 되는 죄 때문에 마음이 둔해지고 이로 인하여 그날이 덫과 같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조심하지 않는데서 오는 죄는 무엇입니까? 세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로 방탕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방탕이란 사치나 세상 적인 허황된 생활을 말합니다. 자기 분수에 지나친 생활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방탕은 우리의 마음을 둔하게 만듭니다. 마음이 둔해진다는 말은 영적인 감각이 무딘 상태를 말하는데 이것은 성령의 감동을 소멸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는 데서 오는 필연적인 결과인 것입니다.
다음에 술 취함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술을 취한다는 말은 두 가지 의미로 구분할 수 있는데 하나는 정말로 술에 취하는 분별없는 생활을 하는 사람을 말하고 또 세상 술(오락, 세상 재미)에 취하여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못하는 경우도 이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술 취하는 생활은 그 사람의 마음을 둔하게 만들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다음 세 번째는 생활의 염려라 하셨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에 대하여 염려하는 사람의 경우입니다. 이런 염려는 그 사람의 마음을 둔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생활에 얽매이게 하고 물질에 눈을 어둡게 하고 신령한 것을 바라보는 눈이 점점 감겨져 버리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처럼 이런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주님이 언제 오신다고 할지라도 덫과 같이 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세상 종말은 어느 한구석에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피할 길이 없습니다. 하늘의 별들 사이에 깃들 지라도 그곳에서도 취하여 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마지막에는 이 땅에 병든 사람, 약한 사람, 무력한 사람, 가난한 사람들만 남아 있고 다 미국, 캐나다 등 이민을 가장한 피난들을 가지만 그러나 세상 종말에 오는 재앙은 온 지구상 모든 인류에게 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슥 14장에 기록되기를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구원을 받게 되며 다른 곳으로 간 사람들은 다 멸망을 받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도 이 땅위에 남아서 기도하고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세상 종말의 판단에서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구원해 주시라고 믿는 것입니다.
결론 : 주님은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결론적으로 말씀하십니다.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인자 앞에 서도록 기도하고 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인자 앞에 서도록 다시 말하면 주 재림의 소망을 가지고란 말입니다. 마음이 둔해지지 않으려면 항상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제 얼마 남지 아니한 사역을 마치시기 위하여 낮이면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이면 감람원이라고 하는 산에서 쉬시곤 하셨는데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이른 아침부터 성전에 나갔다고 말했습니다. 낮에 가르치시는 말씀을 들으려고 이른 아침에 성전에 나아간다면 그 사람의 수효가 얼마인가를 짐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인자 앞에 설 수 있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는 성도들이 되어 다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합시다.
누가복음 22장
◆ 밤중소리 01-11 | VIEW : 504
(119) 가룟 유다의 배신(누가복음 22 : 1 - 6)
(120) 마지막 유월절(누가복음 22 : 7 - 23)
(121) 주님과 함께 한 자의 상급(누가복음 22 : 24 - 38)
(122) 주님의 마지막 기도(누가복음 22 : 39 - 46)
(123) 베드로의 통곡(누가복음 22 : 47 - 71)
(119) 가룟 유다의 배신
(누가복음 22 : 1 - 6)
서 론 : 유월절은 의의 깊은 날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 앞에 희생 제물로 바쳐져야할 어린양입니다. 그의 희생은 이런 의미에서 유월절과 때를 맞춘다는 일은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그가 십자가의 속죄양이 되려면 이사야 53장에 예언된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이 이루어져야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제자에게 배신당하는 일로부터 모든 고난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1. 가룟 유다의 마음에 들어간 마귀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사단은 유다의 마음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마음대로 그를 조종했습니다. 우리는 왜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갔는가에 대하여 알아보면…
(1) 유다는 언제나 불만 자였습니다. 베다니 동리의 마리아가 예수님 머리 위에 향유를 붓고 그의 머리털을 씻길 때 이 유다는 이 같은 일에 대하여 불만을 털어놓았던 것입니다. “이 향유를 어찌하여 300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이 같은 시기와 불만은 사단에게 항상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사단은 이런 기회를 엿보아 그의 마음속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2) 유다는 원래가 도적이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감이로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요12:6). 도적은 사단의 조종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에게 사단이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도적이었기 때문입니다.
(3) 이 갸롯 유다는 돈을 매우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넘겨줄 것을 의논할 때 저희가 돈을 주기로 언약할 때 유다가 허락했다고 했습니다. 그가 애초에 돈으로 팔 생각까지는 가지지 아니했지만 돈을 주기고 언약했을 때 마음이 크게 움직이며 좋아하여 허락했던 것입니다. 딤전 6:10에서 이처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고 했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일은 사람이 저지르는 모든 범죄의 시발점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미혹을 받는 일 중에 돈이 가장 으뜸인 것입니다. 결국 돈을 사랑하는 유다는 마귀의 유혹에 넘어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4) 유다는 원래 간교한 인간성의 소유자임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 선생 가까이 가서 신호를 짠 군관들에게 알려주기 위하여 “선생님이여, 안녕하시옵니까”하며 천연덕스럽게 입맞추기까지 한 간교한 자였던 것입니다. 간교한 존재는 마귀입니다. 창 3장에 나타난 뱀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들짐승 중 가장 간교한 자였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마귀는 이처럼 간교한 유다의 마음속에 들어간 것입니다.
2. 마귀가 들어간 유다
일단 사단이 이 가룟 유다에게 들어가니 그는 그의 결심을 굳히고 무리가 없을 때에 넘겨줄 기회를 찾고 있었습니다. 사단이 들어가면 사람의 마음이 강팍해 지는 것입니다. 사단은 그의 계획을 그 사람을 통하여 추진하는 것입니다. 사단이 들어간 사람은 회개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가룟 유다를 회개시키시기 위하여 만찬석상에서 여러 번 기회를 주셨건만 강팍한 마음이 녹아지지 아니했던 것입니다.
유다가 이처럼 스승을 팔아먹기까지 타락하게 되었던 것은 그에게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생각했을 것이지만 우리의 속죄 재물로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셔야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지 못한 것입니다. 그는 주님께 대하여 신앙고백이나 어떤 선한 생각을 가진 사실이 전혀 없음을 나타내주고 있는 것입니다. 유다는 예수를 따라 다니면서도 전혀 변화 받지 못했습니다. 육신 그대로의 사람이었습니다. 변화 받지 못한 사람은 결국에는 주님은 배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단은 사람으로 새 사람으로 변화 받는 것을 원치 아니합니다. 사람이 아무리 예수를 믿는다고 해도 그의 심령이 성령으로 변화 받지 못하는 한 사단의 종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이 유다의 경우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가 예수님의 제자였지만 그것이 구원의 보장이 될 수 없었다는 것은 우리가 교회의 중요한 직분을 맡았다 할지라도 그것은 결코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나 믿음의 사람이라는 증거가 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믿음에 서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확증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시기와 불만이 신앙생활에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 마음은 사단이 심어주는 마음이기 때문에 시기하는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불만 하는 마음을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다음에 돈을 사랑하는 마음이 주님을 배신하는 일에 한 몫을 가진다는 사실에 정신을 차려야 하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돈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돈 때문에 예수를 믿고 그를 따르고 순종하는 일에 결정적인 방해를 받는다면 그는 이미 사단에게 그의 종으로 사로잡혀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에게도 이 유다와 같은 인간성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고 늘 자기를 돌아보아 나는 과연 예수님을 사랑하는 생활을 하고 있는가? 나는 지금 믿음에 굳게 서 있는가 스스로 돌이켜 보아야 할 것입니다.
(120) 마지막 유월절
(누가복음 22 : 7 - 23)
서 론 : 유월절 행사가 성만찬으로 변모하는 놀라운 광경을 우리는 이 사건에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유월절의 주인이십니다. 그의 흘리신 피는 하나님의 어린양의 피로서 모든 이스라엘을 죄로 인한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에서 구원하는 확실한 표로 보여주고 있으며 이런 점에서 유월절의 어린양의 피와 십자가에서 흘리시는 주님의 피와는 하나는 그림자요 하나는 본체일 뿐 똑같은 의미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유월절 행사를 해마다 행했지만 참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유월절 행사를 성만찬의 모습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유월절은 한 그림자요 신약의 성만찬은 본 모습입니다.
1. 유월절을 예비할 장소
이제 유월절이 되었습니다. 예수님 일행도 유대인들인지라 유월절 행사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유월절을 지낼만한 장소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와 요한에게 가서 우리를 위하여 유월절을 예비하여 우리로 먹게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성내로 보내시면서 “너희가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의 들어가는 집으로 따라 들어가서 그 집주인에게 말하기를 선생님이 당신에게 하시는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먹을 객실이 어디 있느냐 라고 물으면 그 사람이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예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 다락방이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의 다락방일 것이라고 말합니다(막11:12).
예수님이 과연 마가의 다락방을 예상하시고 베드로와 요한을 동리로 보내셨는지는 몰라도 그때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이 누구인가에 대하여 아는 바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같은 일이 예수님에게 있어서 자연스럽게 일어날 수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미리 아셨건 또 말씀의 권능으로 그렇게 하시도록 명하셨건 이런 일에 대하여 문제 삼을 것은 없습니다. 그들은 과연 주님의 말씀대로 모든 일이 이루어지는 사실을 바라보고는 심히 놀랐을 것입니다.
2. 유월절 행사의 새로운 의의
드디어 모든 제자들과 주님은 베풀어진 다락방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주님은 이 자리에서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이날에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잔치를 함께 치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셨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 자리야말로 주님의 최종적인 제자들과의 유월절 잔치요 또 조용히 말씀하실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주님이 제자들과 행하신 행사는 유월절 행사뿐 아니라 신약시대에 우리가 실행해야할 새로운 유월절 행사인 성만찬을 최초로 행하신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1) 최종적인 유월절을 지키신 것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16~17절). 예수님은 이 성만찬에서 제자들에게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 하셨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이 유월절이 마지막으로 맞이하시는 유월절이 되신다는 뜻도 되겠지만 그보다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제 유월절 행사가 예수님이 최종적으로 행하시는 이 행사로 끝난다는 사실을 말씀하신 뜻이 감겨져 있습니다. 과연 이 말씀대로 이제 후로는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유월절 행사는 없었습니다. 이제 실체가 오셔서 다 이루셨는데 그림자를 지킬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2) 19~20절에서 우리는 새로운 유월절의 뜻이 담긴 행사를 주님이 몸소 행하심으로 우리에게 본을 보여주셨다는 사실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먼저 떡을 제자들에게 떼어 주시며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죄악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실 몸은 어린양이 아니라 예수님의 몸이셨습니다. 그의 몸은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신 바 된 속죄 제물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사53:5).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 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악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신 일이야말로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통하여 보여주신 그림자의 실체입니다. 사람들은 실체가 온 후로는 그림자는 버리는 것입니다.
유월절이 어린양을 잡는 일에 대한 기념이라면 주님의 성만찬은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몸소 당하신 일에 대한 기념입니다. 성만찬에서 떡을 떼는 일은 나를 위하여 그 몸을 버리신 주님의 고난을 상징하는 일로서 이로써 주님이 당하신 그 고난을 우리가 기념하는 것입니다. 떡을 떼신 후에 잔도 이처럼 돌리셨습니다. 그리고 하신 말씀이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십자가에서 흘리실 주님의 피를 상징하는 것으로 우리 하나님은 이 피로써 우리와 새 언약을 세우신 것입니다. 새 언약이란 옛 언약을 폐하시고 새로운 언약을 주신 일을 말합니다.
옛 언약이란 모세를 통하여 주신 율법적인 언약이신 데 이 언약은 우리 인간들에게 의와 생명을 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의와 생명을 주시는 새 언약을 세우셨던 것입니다. 이 언약에 동참자가 되려면 주님의 살을 먹고 그의 피를 마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그가 하신 일을 믿고 그를 영접하 285 \ 누가복음
는 믿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같은 새 언약에 동참자임을 주님이 행하라고 하신 성만찬을 통하여 체험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하신 주님의 이 말씀은 오늘날 교회에서 성만찬을 반드시 행해야할 이에 대한 주님의 명령이십니다. 이 말씀에 비춰볼 때 이 성만찬은 크게 둘로 그 뜻을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이 행사로 우리가 주님의 새 언약의 동참자임을 확인하는 일이요, 다른 하나는 이 같은 일을 행함으로 주님이 나를 위하여 고난받으신 일에 대하여 깊이 생각함으로 기념 데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행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말할 수 없는 영적인 유익을 주는 행사입니다.
결론 : 그런데 이 자리에 앉아서는 안될 인물이 그들과 함께 자리를 했습니다. 새 언약에 들어 갈 수 없는 인간이 이 행사에 참여하는 것은 주님의 몸과 피를 욕되게 하는 일이 됩니다. 예수님을 팔아먹은 갸롯 유다가 이 성만찬 자리에 앉아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이자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그의 회개를 바라셨지만 유다는 끝까지 그 완악한 마음을 회개하지 못하고 저주받은 바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주님의 성만찬에 참여할 수 있는 백성이라는 사실을 무한한 영광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121) 주님과 함께 한 자의 상급
(누가복음 22 : 24 - 38)
서 론 : 이제 일은 점점 다가오고 있습니다. 주님은 얼마 남지 아니한 기간에 제자들에게 이르고 가르쳐야 할 일이 너무나도 많으셨습니다. 제자들은 스승의 의중도 모르고 높은 자리를 원했습니다. 베드로는 선생이 당하실 일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주와 함께 죽는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다고 큰소리를 쳤습니다. 제자들은 긴박한 사태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 줄을 모르고 당황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혹은 교훈 하시고 혹은 경계하시고 혹은 위로를 주셨습니다.
1. 섬기는 자가 되라
아마 예수님의 제자들은 가끔 어떤 문제점을 가지고 토론도 잘하고 다투기도 잘 한 것으로 보입니다. 저희 사이에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났다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누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높은 사람이 될 것인가 하는 서열 다툼입니다. 이 문제가 이때 거론된 것은 주님이 예루살렘에서 곧 왕이 되실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서로 시기하는 마음으로 누가 크냐는 문제가 제기된 것입니다. 주님은 이런 철부지 제자들을 향하여 이방인의 임금들처럼 사람들을 주관하며 높임을 받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큰 자는 적은 자와 같고 두목은 섬기는 자와 같을 찌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어린아이 같은 사람이 큰 자가 되고 남을 섬기는 자가 높임을 받는다는 뜻으로 이처럼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예수님은 바로 우리의 표본이 되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가장 큰 분이시지만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고 말씀하신 분입니다. 우리는 남보다 자신을 낮추는 자가 큰 자며 남을 섬기는 자가 큰 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에 대한 하늘의 상급이 그렇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섬기는 자로 우리 중에 계셨더니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신 이름을 가지신 분이 되셨습니다.
2. 하늘에서의 상급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 땅에 있는 동안에 그들이 주님을 섬긴 일에 대한 보상에 대하여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들이 상급을 받을 이유에 대하여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말하자면 주님과 함께 고난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고난을 받으면 주님과 함께 영광이 약속된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놀라운 약속이요 소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 287 \ 누가복음
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라고 하셨습니다(마5:11). 사도 바울은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롬8:18). 우리는 주님을 위하여 받는 고난에 낙심할 것이 아니고, 슬퍼할 것도 아니요 앞으로 하나님 나라에서 받을 상급을 생각함으로 기뻐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에서의 상급이 어떻게 나타나 있습니까?
(1) 내 나라에서 내 상에서 먹고 마신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나라에서 주님과 함께 한 상에서 먹고 마시는 축복을 가리킨 것입니다. 한 상에서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시는 축복이란 더할 나위 없는 위대한 상급이 아닐 수 없습니다.
(2) 다음에 그들이 주님의 보좌에 앉아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에서의 왕권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가는 것은 다 똑같지만 그곳에서 누릴 영광은 다 같은 것이 아닙니다.
3. 베드로에 관한 경계
사단은 바른 신앙을 가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베드로에 대하여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청구했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이 같은 사단의 역사를 이미 바라보고 계셨기 때문에 베드로를 위하여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했노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산에 올라가서 밤이 맞도록 기도하신 일은 바로 베드로의 이 같은 기도도 한 제목이었음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볼 때 지금도 하늘 보좌에서 나를 위하여 기도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미 주님은 베드로가 사단의 시험에 빠져들 것을 아셨지만 또한 돌이켜 회개할 것도 아셨습니다. 그리하여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런 주님의 말씀이 무슨 말씀이시냐는 듯이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고 항변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는 예언을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이 말씀을 들었을 때 자신의 연약함을 알고 기도했어야 할 터인데 기도하지 못했고 영적으로 무장하여 조심했어야 했는데 오히려 자기 믿음과 자신의 힘만 의지함으로 실패하게 된 것입니다.
4. 너희에게 부족한 것이 있었더냐?
유월절 행사에서 보이신 주님의 말씀이나 베드로를 향하신 말씀을 따라 정세가 절박한 줄을 알았습니다. 우리 중 누가 높으냐고 하는 분위기는 순간에 공포 분위기로 바뀐 것입니다. 주님은 이런 그들의 마음에 평안과 위로를 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내가 너희를 전대와 주머니와 신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들을 전도대로 하여 각 고을로 보내셨을 때의 이야기를 끄집어내신 것입니다. 그들은 “없었나이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다음 말씀에 이상한 여운을 남기셨습니다.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주머니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찌어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아직도 신학자나 설교자들간에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말씀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37절 말씀에서 그 해답을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 감이니라는 말씀으로 그의 받으실 고난이 얼마 남지 않으셨음을 제자들에게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잡히시고 그들에 의하여 죽으심을 받으실 때 제자들은 이 같은 시험을 견뎌낼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의 연약함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들에게 오순절의 성령이 임하기까지는 역시 세상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전대나 주머니나 검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겉옷을 팔아 검을 사라고 하시는 명령 투로 말씀하신 것으로 나와 있지만 그렇게 될 것이라고 하는 말씀의 강조점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들은 새로운 사명을 받기까지에는 전대 없이는 다닐 수 없을 것입니다. 돈 없이 어디 가서 누구의 영접이나 대접을 받을 수 있겠는가? 그들은 사막을 지날 때나 나그네길을 행할 때 필수품인 칼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주님이 그들의 곁을 떠나는 일은 곧 주님의 권능이 떠나는 일과 한가지임으로 이처럼 말씀하신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심히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늘 주님의 의뢰하고 그분만을 따르지 않으면 주님을 부인할 위험이 있습니다.
(122) 주님의 마지막 기도
(누가복음 22 : 39 - 46)
서 론 : 주님의 공생애는 기도로 시작하고 그의 공생애의 마지막도 기도로 끝내셨습니다. 주님은 이제 자신이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써 고난을 당하셔야 할 시기가 가까이 이르고 있음을 아셨습니다. 이것은 주님에게 있어서 하나의 큰 시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보편적인 인성을 가지신 사람이셨기 때문에 고난 앞에서 괴로워 하셨고 죽음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분이 육신 적으로 받는 시험은 우리의 경우와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산에 자주 올라가셔서 밤이 맞도록 기도하시는 생활을 하신 것입니다. 그가 감람산에 올라가신 일도 고난과 시험을 이기시기 위한 기도 때문이셨습니다.
1. 예수님의 기도 생활
예수님은 시험에 들만한 일이 생기셨을 때는 반드시 기도하셨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을 때 수많은 군중들이 주님으로 왕을 삼고자 했을 때 산에 오라가신 것입니다. 기도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주님은 당하실 고난을 앞두고 시험에 들지 않으시려고 기도하시려 산에 올라가신 것입니다. 39절 말씀에서 예수님은 습관을 따라 감람산에 가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감람산에 올라가시는 일은 하나의 생활 습관이 되셨습니다. 그것은 기도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날도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기도하러 올라가신 것입니다.
습관은 제2의 인간 창조의 방법입니다. 사람은 습관에 따라 그의 영적인 생활이 좌우됩니다. 기도하지 않는 습관에 젖어 있으면 기도와는 영영 멀어지는 것입니다. 주일을 못 지키는 습관에 빠지면 주일을 지키는 일이 그렇게도 어려운 것입니다. 주님은 기도생활을 참으로 많이 하셨습니다. 그의 기도 생활은 하나의 생활 습관화가 된 것입니다. 기도의 습관화란 바람직한 일입니다. 기도생활을 항상 계속적으로 반복함으로 자기 생활에 필수적인 습관을 만들어야 합니다. 예수님도 습관을 따라 기도 하셨거늘 우리들에게 있어서야 말할 나위도 없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의 기도의 자세
(1) 예수님은 산에 데리고 올라간 제자들과 얼마간 떨어져 기도하셨습니다. 개인적인 중대한 문제가 있을 때는 하나님과 나와 그 문제 해결에 대한 간절한 호소가 있어야 함으로 개인 기도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개인 기도를 많이 하셨습니다.
(2)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기도하는 자세는 무릎을 꿇는 290 \ 누가복음
것이 정상적인 자세라 보겠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릎을 꿇는 것은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추는 일로 겸손을 나타내는 태도입니다.
(3) 힘쓰고 애써 기도하셨습니다. 기도는 명상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는 영적 노동”이라고 말했습니다. 힘쓴 기도가 상달됩니다. 힘쓴다는 말은 기도의 노력입니다. 사람이 기도를 힘쓸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또 애쓰는 기도를 하셨습니다. 애쓴다는 말은 기도의 집념에서 나온 끈기입니다. 기도에는 끈기가 있어야 합니다. 이 끈기가 없으면 기도를 오랜 시간 끌고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4) 더욱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기도의 열의가 시간이 흐를수록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간절하셨습니다. 기도에는 더욱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기도를 하신 그의 모습이 어떻게 비취어 지고 있는가? “땀이 땅에 떨어져 핏방울 같이 되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도하실 때 주님의 얼굴에 땀이 흐르는 모습을 이처럼 표현한 것입니다. 지극히 슬픈 사연이 있어 마음으로부터 흐느낄 때 피눈물을 흘린다는 말을 쓰는 것처럼 주님의 힘쓰고 애쓰시며 더욱 간절히 간구하시는 그 모습은 피눈물 나는 모습이며 그 얼굴에서 뚝뚝 떨어지는 그 땀이야말로 보는 이로 하여금 마치 핏방울 같이 되더라고 표현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기도에 이처럼 간절함으로 애쓰고 힘쓰는 간구를 드릴 수는 없지만 커다란 문제점을 안고 기도할 때에는 이 같은 주님의 기도의 본을 본받아야 닥쳐오는 시험을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이런 기도는 십자가에서의 그 무서운 시험을 그처럼 장하게 이기실 수가 있으셨습니다.
3. 예수님의 기도의 내용
예수님이 하나님께 간구하신 기도의 내용이 간단히 나와 있습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 여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의 제목은 뚜렷했습니다. 이 잔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잔이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얼마 후에 자신이 짊어지실 고난의 십자가를 가리키신 것입니다. 이 같은 잔이야말로 그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쓴 비통한 잔이 아니실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잔이 어떤 것인가를 잘 아셨습니다.
당신이 당하실 모든 일에 대하여 손바닥에 올려놓은 듯이 낱낱이 알 수 있었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를 외치지 않으실 수 없는 그 처절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실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와의 영적인 교통이 완전히 두절되고 인류의 죄를 한 몸에 걸머진 죄인의 대표로 십자가에 달려 저주받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신 것 291 \ 누가복음
입니다. 주님은 공생애 초기부터 이런 자신의 사명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 때가 가까이 올수록 그의 마음이 착잡해진 것입니다. 이 일은 하나의 인생이 당하실 큰 시험이 아니실 수가 없으신 것입니다.
그의 육신 적인 생각은 ‘아버지, 이런 고통이 없이도 인류 구원의 사업을 하실 수 있으시거든 그 방법을 하게 해주시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하나님이시지만 그에게는 완전하신 인성이 계십니다. 우리의 육체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육체적 조건을 가지고 사람으로 태어나셨기 때문에 이 엄청난 사건을 앞두고 고민하셨다는 일은 너무나도 당연하신 일입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이 사건을 당하시면 서도 아무렇지 아니하시고 마음이 평안하실 수 있으셨다면 아마 예수님을 육신을 가지신 분이라고 생각하기 심히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님은 자기의 뜻을 밝히면서 기도하셨지만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분은 자기의 뜻대로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오신 분이신 것입니다.
이때에 하늘에서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 예수님의 기도를 도와주었더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기도에서 자기의 생각이나 뜻을 아뢰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기도하면 하나님은 그 기도에 승리를 얻도록 천사를 보내시어 힘을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들도 천사가 내려와 기도를 도와주는 기도를 하시기를 바랍니다.
결론 : 예수님은 이 기도에서 아버지의 직접적인 음성으로 응답 받지는 못하셨습니다. 왜 그러하셨습니까?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것은 우리 주님은 이 일에 관하여 아버지의 뜻을 너무나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고민으로 인하여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하여 기도는 하셨지만 그 기도 중에 성경에 예언된 아버지의 뜻과 자기의 할 일에 대하여 다시 한번 깊이 깨달으시고는 큰 위로와 힘을 얻으신 것입니다. 그는 모든 일을 결단하시고 기도하던 자리에서 일어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기도하는 곳에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해야 할 제자들이 피곤함과 슬픔을 인하여 그 자리에 엎어져 잠들고 있는 모습을 보시고 측은히 여기시며,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그토록 힘써 기도하심으로 시험을 승리하여 아버지의 뜻을 이루셨지만 제자들은 시험을 앞두고 기도하지 못하고 잠을 잔 연고로 시험을 이기지 못하고 넘어지게 된 것입니다. 시험을 이기는 요소는 하나님께 대한 기도에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깨어 기도하라고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23) 베드로의 통곡
(누가복음 22 : 47 - 71)
서 론 :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고 전도서 3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도 이제 관원들에게 잡히시고 예언된 고난을 받으실 때가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친히 자기의 때를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갈릴리 가나 혼인 잔치에 초대받으셨을 때 흥겨운 잔치 자리에 포도주가 떨어져 그 어머니의 말, 포도주가 없다고 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으십니다(요2:4). 이제 주님은 자신이 고난을 받으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모든 일을 예언대로 이루시기 위하여 그 고난을 향하여 돌진해 나가신 것입니다. 유다가 군관들을 데려오고 제자들이 다 도망하고 베드로가 배신하고 불의한 재판을 받으시고 주님이 골고다로 향하시는 길이 급속도로 열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1. 유다의 배신
가룟 유다가 자기 스승을 판다고 말씀하신 대로 그의 배신을 진작 아셨지만 그가 대제사장이 보내는 군관의 무리를 거느리고 주님이 계시는 곳으로 인도해 오는 것을 보셨을 때 주님의 마음은 이루 형용할 수 없는 분노와 슬픔과 애처로움이 뒤섞이셨을 것입니다. 유다는 이때까지도 자신의 배신을 숨겼습니다. 그는 지난날과 같은 모습으로 자기 스승에 대한 사랑의 표시로 입맞춤으로 다가왔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척하면서 그를 배신하는 일은 참으로 가증한 일이며 가룟 유다 같은 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입으로는 그래도 주여 주여 하면서 세상과 완전히 짝짓는 생활을 하는 일, 예수의 이름을 부끄럽게 하는 일은 차라리 덥지 않을 바에야 차라고 하신 말씀대로 주님을 모르는 일이 더 그에게 나았을 뻔했을 것입니다. 주님은 그에게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나를 파느냐”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진실을 원하십니다. 우리는 적어도 하나님 앞에 진실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일에 진실을 가집시다. 입으로는 유다 처럼 입맞추고 행위로는 팔아먹는 유다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주님을 잡으러 유다를 따라온 무리는 대제사장과 성전의 군관들과 장로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마치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온 것입니다. 그들은 그 전날까지 만도 성전에서 말씀을 가르치시는 예수님을 만나고 잡을 수 있었지만 그곳에는 많은 사람이 있는 고로 잡지 못하고 사람들이 없는 한적한 곳으로 유다의 인도함을 받고 잡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피하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베드로가 가지고 있는 검을 가지고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쳐서 떨어뜨렸지만 주님은 떨어진 귀를 다시 붙여주시면서 이것까지 참으로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 293 \ 누가복음
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의 권세로다”고 하심으로 그들의 때가 이르신 줄로 아시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시기로 하신 것입니다.
2. 베드로의 실패
누가는 22장에서 베드로의 실패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예언하신 바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이냐에 대하여 밝히 보이시기 위해서이며 영적인 자랑이나 교만을 경계하시는 하나의 교훈 때문입니다.
(1) 베드로는 멀찍이 따라갔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다 도망한 후였습니다. 베드로는 도망가다가 자기가 주님께 다짐한 말이 생각났습니다. “내가 주와 같이 옥에도, 죽는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 그는 차마 양심상 도망가기가 괴로웠습니다. 그는 발걸음을 돌려 멀찌감치 주님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주님이 잡혀가셨으니 어찌 되시려나? 궁금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몸의 신변을 보살피는 일이 중요했으므로 자기의 신분을 숨기기 위해서는 남이 눈치채지 못하게 멀찌감치 뒤에 따라 부치는 것이 상수였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왜 이처럼 비겁해졌습니까? 그의 생명의 두려움 때문입니다. 두려움은 항상 우리의 믿음을 약하게 합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다고 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이 두터울수록 두려움을 이길 수 있습니다.
(2) 베드로는 하속들 틈에 섞여서 불을 쬐고 있었습니다. 시 1:1에서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하속들과 함께 앉아 불을 쬐고 있을 것이 아니라 주님 편에 서서 주님과 함께 있어야 했습니다. 주님은 옆에서 하속들에게 욕설과 놀림을 받으며 구타를 당하고 계실 때, 베드로는 자기 신변이 드러날 것이 염려되어 하속들 틈에 섞여 불을 쬐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어느 자리에 가든지 우리의 설자리와 우리의 앉을 자리는 분명해야 합니다. 비 신앙적인 자리에 앉아서도 안되고 세상을 따르는 무리 중에 섞여 있어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 자리가 고난의 자리든 외로운 자리든 환난의 자리든 주님이 계신 자리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곳에 우뚝 서서 요동함이 없이 주님과 함께 서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러하지 못했습니다.
(3) 베드로는 드디어 자신의 연약함을 들어내고야 말았습니다. 어느 계집종 하나가 베드로를 주목하여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고 말했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여자여 내가 저를 알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한번 부인한 것입니다. 조금 후에 다른 사람이 그를 보고 너도 그 당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에 베드로는 “이 사람아 나는 아니로라”고 부인했습니다. 두 번 부인 한 것입니다. 또 얼마간 시간이 지난 후에 다른 사람의 입에서 “저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고 말했습니다. 베드로는 다급했습니다. 더 우물쭈물 하다간 잡힐 것이 뻔합니다. 그는 힘주어 단연코 “이 사람아, 나는 너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지켜보시는 앞에서, 주님이 들으시는 주님의 면전에서 이쯤 말했다면 베드로의 뻔뻔스러움도 이만 저만이 아닌 것입니다.
이때 두 가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는 주님이 돌이켜 베드로를 보셨다고 했습니다. 주님의 눈과 베드로의 눈이 마주친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때 그 주님의 눈에서 무엇을 발견했습니까? 베드로는 불쌍히 여기시는 말할 수 없는 사랑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마음이 찔리고 아팠습니다. 이때 또한 닭이 세 번째 울음을 울었습니다. 베드로의 귀에 닭의 울음소리는 뜨거운 참회의 회오리바람을 몰아왔습니다. 네가 세 번 닭이 울기 전에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고 하신 말씀이 생각이 난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새겨진 주님의 말씀은 이처럼 회개시키실 주님의 때가 이르면 우리의 마음을 찢게 하며 통회하게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제 더 이상 그 자리에서 자신을 위장하면서 앉아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자리를 박차고 밖으로 나가 심히 통곡했습니다. 이 베드로의 통곡은 귀한 통곡입니다. 그 통곡으로 회개하여 그의 믿음을 굳게 한 것입니다.
3. 공회에서의 재판
예수님은 재판을 받기 위해 공회로 끌려가셨습니다. 공회란 유대인들의 의회라고 불리는 종교적 최고 의결 기관입니다. 그 구성원은 백성의 장로와 서기관들과 제사장들과 대제사장으로 되었습니다. 장로와 서기관은 바리새인들이며 제사장들은 사두개인들이요 대제사장은 공회의 의장이었습니다. 이들은 종교적인 논쟁으로는 서로 원수처럼 지냈지만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는 마음이 하나로 통한 것입니다. 그들의 심문 내용은 두 가지였습니다. “네가 그리스도냐”라는 것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이란 곧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너희 말과 같이 내가 그니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들은 율법 재판에 의하여 유죄 판결을 내릴 수 있는 근거를 잡은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이 짧은 말씀에서 주님을 판 유다의 모습을 보고,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함으로 배반한 베드로의 모습을 보며, 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였다 하여 참람한 자니 죽일 죄에 해당된다고 판결을 내리는 바리새인들의 일단의 공회원의 무리들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 중에 오직 베드로만이 통곡하며 회개했습니다. 그는 죄에서 돌이켜 크게 복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이 베드로처럼 죄에서 돌이킬 줄 아는 사람이 됩시다. 주님이 주신 말씀을 깊이 생각하고 주님의 눈을 바라봅시다. 그리고 자기의 죄를 위하여 통곡하며 회개합시다.
누가복음 23장
◆ 밤중소리 01-11 | VIEW : 611
(124) 빌라도의 판결(누가복음 23 : 1 - 25)
(125) 너희와 너희자녀를 위해 울라(누가복음 23 : 26 - 31)
(126) 갈보리에서 있었던 일(누가복음 23 : 32 - 43)
(127) 십자가에서의 죽으심(누가복음 23 : 44 - 56)
(124) 빌라도의 판결
(누가복음 23 : 1 - 25)
서 론 : 공회를 소집하여 죽이기로 결의를 한 유대의 장로들과 서기관들과 제사장들은 이제 더 지체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피고 예수를 빌라도에게 끌고 간 것입니다. 그 당시 유대 지방의 정치적 지배 판도는 예루살렘에는 유대를 다스리는 로마의 총독부가 있었고, 빌라도가 그 책임자인 총독으로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주변인 갈릴리와 대가볼리 지방은 로마 황제의 임명을 받은 헤롯이란 인물이 분봉왕으로 지배하고 있었는데 이들 두 명의 지배자 사이에는 서로의 다툼과 시기가 있어 좋은 사이를 유지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어떻게 하든지 빌라도로부터 사형언도를 얻어내기 위해 여러 가지 죄목을 조작하여 사형에 처할 수 하도록 꾸몄던 것입니다.
1. 빌라도에게 고소한 유대인들
그들은 빌라도에게 세 가지 죄목을 붙여 고소했습니다.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 바치는 것을 금하였으며 또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형에 처하는 언도를 내려 달라고 고소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백성을 미혹했다는 말은 병자들을 고치시고 기적을 행하신 일을 모함한 말이요,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지 못하도록 금했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요, 자칭 왕 그리스도라고 말한 것은 왕이란 말을 강조함으로 빌라도나 가이사 황제에게 위협을 주는 존재로 인식시킴으로 중벌을 내려 줄 것을 은근히 기대한 중상이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앞에 두고 심문을 시작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주님이 빌라도의 심문을 받으시는 피고가 되셨지만 온 인류가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시는 날이 있습니다. 그 날에는 산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이 되시는 주님 앞에 빌라도가 머리를 조아려 엄중한 심문을 받게 될 것입니다. 빌라도의 심문은 이러했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빌라도는 이미 여러 가지 정보에 의하여 예수님의 동정을 알고 있었으며 가이사에게 반기를 들거나 민중을 선동하여 반란을 도모할 만한 위험한 인물로는 생각지 않고 있었습니다.
“유대인의 왕이냐”고 물은 일도 죄로 정하려는 뜻이 아니요, 예수님의 처지와 그 당하고 있는 모든 형편을 보고는 한번 그 대답을 들어보려고 물은 데 불과한 것입니다. 이 물음에 예수님은 “네 말이 옳도다”고 하셨습니다. 빌라도 앞에서 주님은 담대한 자세로 네 말이 옳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에 빌라도가 위협을 느끼지 않은 것은 그의 대답이 종교적인 의미의 말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왕이라면 왕다운 체모도 갖추고 군사와 백성도 있으며 위기에 처했을 때 싸움도 일으켜야 하는데 예수 296 \ 누가복음
의 경우는 전혀 이 같은 일이 없었기 때문에 빌라도는 예수님에 대해 사형으로 정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빌라도는 정의감이 있는 사나이요, 자기 아내의 권면을 듣기도 해서 할 수만 있으면 이 죄 없는 청년을 석방해 줄 것을 내심으로 원했던 것입니다. 그는 고소하는 무리들에게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다”고 선언함으로 일차적으로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이 같은 빌라도의 태도는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 당시 상황이나 민중의 호감을 사야 말썽 없이 지배할 수 있는 조건들에 미루어 볼 때 군인다운 용기였던 것입니다.
2. 헤롯의 심문
빌라도는 고소하는 무리들로부터 피고인 예수님이 갈릴리 사람인 사실을 발견하고는 이 골치 아픈 사건에서 손을 떼고자 하는 생각으로 그 지방의 통치권자인 헤롯 관할이니 그리로 데려가라고 하여 헤롯에게 보냈습니다. 헤롯이란 인물은 간교하고 인격적으로 저열하고 동생의 아내를 자기 아내로 삼은 불의한 위인이요 세례 요한을 목베어 죽인 장본인이기도 하며 예수님이 공생애에 들어가셔서 각가지 이적을 행한다는 소문을 듣고는 죽은 세례 요한이 살아났다고 두려워했던 자입니다.
이자는 뜻밖에 예수님이 자기의 재판을 받기 위하여 피고로 데려오는 일에 대하여 심히 기뻐했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한번 예수를 보려고 단단히 벼르고 있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된 일에 대하여 기뻐했던 것이요 그의 이적 행하심을 직접 바라볼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헤롯은 왕의 의장을 갖추고 피고로 자기 앞에 서신 예수에게 여러 가지로 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무죄로 석방되기를 바라시거나 그들의 자비를 바라시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그런데 이 뱀처럼 간교하고 불의한 헤롯의 질문에 대답하실 리 없었던 것입니다. 대단히 기뻐하고 기대했던 헤롯은 만나보니 말도 제대로 못하는 바보요 기적이라고는 하나도 하지 못하는 위인인줄을 알고는 당장에 태도를 돌변하여 업신여기게 된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조롱하고는 빛난 옷을 입힌 후 다시 빌라도에게 보냈다고 했습니다.
3. 빌라도의 판결
빌라도는 다시 자기에게로 돌아온 예수에 대하여 자신의 의지대로 판결할 것을 결심하고 유대인의 지도자들과 백성들의 무리들을 불러모으고는 “너희의 고소하는 일에 대하여 죄를 찾지 못했으며 헤롯도 죄를 찾지 못하여 도로 보냈으니 그를 죽일 일이 없은즉 그러므로 때려서 놓겠노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유월절이 되면 사형수 중에 한 죄수를 석방해 주는 관례에 따라 예수를 내어줄 것을 제의했습니다. 297 \ 누가복음
그러나 그들은 이 사람을 없이하고 바라바를 놓아 달라고 외친 것입니다. 바라바란 위인은 민란을 꾸민 살인자였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저를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외쳐대기 시작했습니다. 빌라도는 세 번째 그의 무죄를 주장하여 석방하기를 바랐지만 군중의 소리에 압도당하고 말았습니다.
결론 : 우리는 여기서 빌라도의 입장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빌라도는 세 번이나 예수를 살리려고 노력했습니다. 그 군중들의 함성에도 그는 그의 의지를 관철해보려고 애쓴 것입니다. 그는 예수의 제자도 아니었고, 메시야를 기다리는 유대인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사람은 더군다나 아니었습니다. 예수를 살려줌으로 자신에게 오는 어떤 정치적인 이익이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공회의 높은 사람들과 마찰만 생길 뿐입니다. 이 같은 일은 자신의 집권을 위해서도 불리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예수를 살려보려고 끝까지 시도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군중의 동태가 경직하고 자기가 숙어지지 아니하면 어떤 폭동이라도 일어날 것 같은 불리한 정황 속에서 그는 할 수 없이 저희의 구하는 대로 언도하고 그들의 손에 넘겨준 것입니다. 죄는 빌라도에게 보다도 그를 고소하고 사형을 외친 무리들에게 있었습니다. 전해진 로마의 고대 문서에 의하면 이 빌라도가 이 재판의 결과를 가이사 황제에게 보고한 문서가 있었습니다. 거기에 따르면 빌라도가 후에 예수를 영접한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125) 너희와 너희자녀를 위해 울라
(누가복음 23 : 26 - 31)
서 론 : 드디어 사형 선고를 언도 받은 예수님은 빌라도가 넘겨준 그들의 손에 끌려 멀고도 긴 골고다의 언덕길을 향하여 이끌려 가시게 되었습니다. 거리로 보아서는 얼마 안 되는 곳이지만 무거운 십자가를 지시고 등에 채찍을 맞으시며 끌려가는 예수님에게는 하늘 보좌에 가시는 길보다 오히려 더 먼 길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1. 구레네 사람 시몬이 진 십자가
예수님은 너무나도 힘에 겨운 일이었습니다. 하룻밤 동안에 몇 군데나 끌려 다니시며 재판과 심문을 받으신 것입니까? 안네스의 집에 끌려간 후, 다시 대제사장 집으로 그리고 공회에 끌려가고 유죄 판결을 받은 후 빌라도에게, 그는 예수가 갈릴리 사람이라 하여 분봉왕 헤롯에게 보내고, 헤롯은 다시 빌라도에게 보냈던 것입니다. 무려 빌라도에게 다시 넘겨질 때까지 여섯 번씩이나 왕래하셨습니다. 그는 피곤하신 몸을 이끄시고 겟세마네동산에서 밤새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심히 피곤하고 배고프시며 목마르신 그런 처지에 계셨습니다. 그런 주님의 등위에 무거운 십자가형틀이 짊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분은 힘에 겨우셨고 피곤하고 무거워 견뎌 내실 수 없었습니다. 그에다 그를 강제적으로 끌어가는 군병들은 재미있다는 듯 채찍으로 그의 등을 내려쳤습니다. 넘어지면 또 후려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일이 몇 번인가 되풀이되니 이제 더 이상 견디실 수가 없으셨던 것입니다. 그는 그만 그 자리에 쓰러지신 것입니다. 로마 군병들도 더 이상 그에게 십자가를 지고 가게 하심은 무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대신 짊어지게 해야 했습니다.
그때 시골에서 올라와서 마침 이 광경을 바라보기 위하여 무리들 틈에 끼어 골고다로 올라가던 시몬이라고 하는 구레네 사람이 그들의 눈에 띄게 되었습니다. 제법 힘을 쓸 것 같은 시몬이란 이 청년을 잡아 주님이 지셨던 십자가 형틀을 억지로 지게 했습니다. 이 난데없는 곤욕을 당하게 된 시몬은 속으로 오늘은 참으로 재수 없는 날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에게 주목하면서 혹은 조롱도 하고 혹은 격려도 하면서 따라오는 것을 보고 창피스럽게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몬은 비록 십자가를 억지로 지기는 했어도 무익한 십자가는 아니었습니다.
(1) 주님을 잠시나마 편하게 해드릴 수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주님이 지셔야할 십자가였지만 시몬이 대신 지게됨으로 주님이 편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주님을 위한 십자가를 졌습니다. 주님을 위한 십자가는 좋은 것입니다. 나에게 힘겨울는지 모르지만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십자가를 각기 져야 하지만 때로는 주님을 위하여 고난의 십자가를 져야할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쓸데없는 고난을 당한다고 불평하거나 힘겨워 할 것이 아닙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하셨습니다”(마5:11).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이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고 했습니다(벧전4:14).
(2) 시몬은 이 십자가를 지고 가면서 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예수님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는 아직까지 생각하지 못했던 일을 생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의 이 같은 체험은 놀라운 변화를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질 때 우리에게는 우리 자신을 돌이켜 바라보게 되고 뿐만 아니라 주님의 고난을 깊이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몬의 옆에는 다만 바라보면서 따라가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런 유익도 얻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시몬은 이 십자가를 진 일로 인하여 그후 주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그의 온 집안까지 주님을 섬기는 가정이 되었음을 성경에서 찾아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시몬의 아들이 알렉산더루포였는데(막 15:21) 롬 16:13에는 이 루포에 관한 기사가 나오며 그는 사도 바울에게 사랑을 받은 성도였음이 밝혀지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한 고난에는 영육간에 축복이 있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십자가를 짊어질 때 무거운 짐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기쁜 마음으로 져야 할 것입니다.
2. 우는 여자의 모습
주님이 가시는 골고다 길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주님의 행렬에 낀 것입니다. 그 중에는 로마 군병, 단순한 구경꾼,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의 무리, 흥미 있는 모습으로 따라가는 백성들, 그런데 일단의 무리가 주님의 주변에서 가슴을 치며 슬피 울며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평소에 주님을 섬겼던 여인들입니다. 이 같은 모습은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오늘, 이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많은 사람 중에 다만 이 여인들만이 슬피 울며 주님의 고난에 가슴을 쳤습니다. 그들은 주님께는 아무런 죄도 없으심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여인들은 주님의 그 여위신 모습을 보고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군병들의 채찍에 얻어맞아 등에 흐르는 피를 보고 가슴이 아팠습니다. 피곤하고 힘겨워 넘어지고 쓰러지신 모습을 보고 슬피 울었습니다. 우리는 나를 위하여 이 같은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과연 얼마나 명상하는 시간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때 그 모습은 지금도 300 \ 누가복음
생생하게 우리의 머리에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때 그 여인들처럼 우리는 주님의 그 모습을 바라보고 가슴을 치는 슬픔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눈물을 흘리는 애통함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결론 : 주님은 그 괴로우신 중에서 슬피 울며 따라오는 이 여인들을 향하여 눈을 돌리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하나의 심각한 경종을 들려 주셨습니다. 그것은 앞으로 예루살렘에는 주님을 죽이는 피 값으로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이라는 경종이시며 그때를 위하여 지금부터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날이 반드시 이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며 그 성의 장래를 위하여 눈물 흘리시며 우신 일이 있었는데 날이 이른다고 하신 말씀은 바로 예루살렘이 심판을 받아 멸망을 받을 날을 가리키신 것입니다. 그날에는 원수의 무리가 예루살렘에 들어와 성안에 있는 백성들을 다 죽일 뿐 아니라 아이를 밴 여인의 배를 가르고 철없는 어린아이에 이르기까지 무참히 살해할 것입니다.
이러한 날을 바라보신 주님은 그 여인들에게 이날을 대비하여 기도하는 생활을 해야 할 것이라고 일러주신 것입니다. 푸른 나무에도 이처럼 하거든 마른나무에는 어떻게 하리요 하심으로 죄 없는 주님을 십자가에 죽이는 그들(마른나무)이 받을 죄에 대한 심판이 얼마나 크고 중함을 보이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예언대로 그후 40여 년만에 이루어져서 민족적으로 수난을 받았을 뿐 아니라 2천년의 긴 세월동안 그들의 수난이 계속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와 자녀를 위하여 울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이요 주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면서도 이 이방인의 권력자만도 못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들이 예수님을 고소한 무리들처럼 주님의 은혜를 받고서도 자신들이 분리할 때면 주님을 여지없이 거역하고 원망하는 무리들이 아닙니까? 우리의 신앙자세를 바로 잡아 끝까지 주님을 사랑하고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바치기를 다짐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26) 갈보리에서 있었던 일
(누가복음 23 : 32 - 43)
서 론 : 예수님이 끌려간 곳은 해골이라 이름하는 산으로 사형 판결을 받은 사람들의 사형장입니다. 이곳 이름이 해골이라고 나와 있는 것은 그 산의 모양이 마치 해골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알려져 있으며 혹은 사형장임으로 실제로 사람의 해골이 뒹굴고 있다하여 붙여졌다는 말도 있습니다. 이곳 이름이 여러 가지로 일컫는데 히브리어로는 골고다요, 헬라 말로는 크라니온이요, 라틴말로는 갈바리아입니다. 영어의 갈보리는 라틴어에서 나온 것입니다.
1. 두 행악자와 예수님이 함께 달린 갈보리
갈보리 언덕에는 예수님 한 분의 십자가만 선 것이 아닙니다. 행악자 둘이 함께 끌려갔는데 이 둘이 예수님 좌 우편에 못 박혔고 주님은 그들 가운데 못 박히신 것입니다. 이 같은 갈보리의 십자가 형틀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1) 두 명의 행악자들은 죄의 저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 인류를 상징하는 사람들입니다. 모든 사람은 다 죄와 사망의 종으로 팔린 존재들입니다. 한 사람의 예외도 없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 두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나와 여러분들 한사람, 한사람들입니다.
(2) 두 사람의 행악자 중에 한 사람은 회개를 했지만 한 사람은 회개치 못했습니다. 한 행악자는 말하기를 “네가 그리스도 여든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그러나 다른 한 행악자는 그 사람을 꾸짖으며 이처럼 말했습니다.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을 것이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향하여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죄로 멸망 받게된 인류 중에는 회개하는 사람과 회개치 못한 사람들로 나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한 사람은 주님께 소망을 두고 그의 자비와 긍휼을 바라는 것입니다.
(3) 이 두 행악자는 구원과 버림의 상징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을 수 없는 무리들도 많이 있습니다. 구원받을 사람은 궁극적으로 회개하여 주님을 영접하게 됩니다. 그러나 버림받을 사람들은 끝까지 예수님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 죄대로 조금도 자비가 없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4) 예수님은 두 행악자가 받을 똑같은 심판을 받으셨습니다. 그들 두 명의 행악자들 틈에 끼어 십자가를 지신 것은 그도 완전히 죄인 중 하나로 죄인과 똑같은 심판을 받은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죄인들을 그 죄에서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이십니다. 그러나 자기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한 행악자는 구원함을 맡았지만, 조롱하며 회개를 거절한 한 행악자는 영원히 버림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죄를 사하여 주는 주님의 보혈의 능력이 아무리 크고 하나님의 사랑이 아무리 넓어도 죄를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구원받기를 원치 않는 자에게는 가장 준엄한 심판만이 있을 뿐입니다.
(5) 낙원의 약속을 받은 사람은 의인이 아니라 행악자였습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이 말씀은 놀라운 축복의 언약입니다. 이 언약을 최초로 받고 이루어진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십자가 위의 행악자였습니다. 그는 잃은 양이었습니다.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받은 구원의 예정자였습니다. 그의 회개는 의인이 되고 구원에 이르기에 충분했습니다. 그의 믿음은 구원에 이르기에 충분했습니다. 이 두 행악자는 모든 것이 다 똑같았지만 다만 회개하는 일과 그를 영접하는 일만이 차이가 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이런 것입니다.
2. 갈보리의 여러 모양
우리는 갈보리 언덕에서 벌어지고 있는 여러 모양의 사람들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아들은 십자가 위에 못 박혀 고난의 잔을 마시고 계십니다.
(2) 두 행악자들도 십자가 위에 못 박혀 심판을 받고 있습니다.
(3) 예수님을 십자가 형틀에 못박은 무리들은 그 아래 앉아서 희희낙락하며 벗어진 예수님의 옷을 제비 뽑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마치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면서 인생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는 사단의 졸개들입니다.
(4) 많은 백성들은 이 광경을 재미있게 구경거리로 관망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그의 고난이 자기와는 아무런 연관 없는 것처럼 생각하며 관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이런 무리들이 지금도 많은 군중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5) 관원들은 주님을 희롱했습니다.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 여든 자기도 구원할지어다” 오늘날에도 이처럼 주님을 희롱하는 무리들이 많이 있습니다.
(6) 군병들도 희롱하면서 신 포도주를 주며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 여든 내가 너를 구원하라고 외쳐댔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그의 생의 마지막에 있도록 참담한 생애를 보내셨습니다.
결론 : 그러면 우리 주님은 이들에게 어떤 태도를 가지셨는가? 이 원수의 무리들을 향하여 저주를 퍼부으셨는가? 아닙니다. 그분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그의 교훈을 이곳에서까지 용서, 실천하심으로 사랑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 같은 죄인들의 죄까지라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그의 이 기도는 지금도 온 땅 끝까지 이르러 메아리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을 불쌍히 보시고 알지 못한 연고로 하고 있는 그들의 그 무지한 죄의 용서를 위하여 오히려 아버지께 기도를 드려 주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바로 이 두 행악자 중에 하나에 해당하는 죄인들입니다. 내가 달려야할 그 자리에서 고통을 받으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우리가 그 자리에 있는 두 행악자 중의 하나라면 우리는 어떻게 주님을 대했을 것인가에 대하여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그들 많은 무리들 가운데 있었다면 우리는 과연 어떤 무리 중에 섞여서 주님을 대했을까? 한번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회개하고 주님께 대한 바른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원수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본 받는 사랑의 생활을 이루어 나가시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127) 십자가에서의 죽으심
(누가복음 23 : 44 - 56)
서 론 :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새도록 피같은 땀을 흘리시며 기도하신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고난의 잔을 마셨습니다. 그는 십자가에서 이 고난의 잔을 마시느라 말할 수 없는 괴로움을 겪고 계시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의 괴로움이 그토록 처절하시기에 그는 아버지, 하실 수 있으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떠나게 하소서 하는 기도를 드리신 것입니다.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여진 죄패 아래서 정말로 이스라엘의 왕이시오 만 왕의 왕, 만주의 주이신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시는 것입니다. 그 죄패에는 세나라 말로 그 분의 죄명이 기록이 되었습니다. 히브리말로 유대인들에게 볼 수 있게 하였고, 헬라말로 세계의 모든 문명권에 살아 나가는 인류가 보게 하였고, 라틴말(로마 어)로 기록함으로 이스라엘을 식민지로 다스린 정복자의 나라, 로마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1. 해가 빛을 잃고 어둠이 임함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시간은 제3시라고 했습니다. 이 시간은 오전 9시경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제6시에 해가 빛을 잃고 9시까지 어둠이 임했다고 했습니다. 무려 3시간 동안이나 온 세상에 어둠이 깔린 것입니다. 이것은 두 가지 뜻을 나타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1) 주님의 고통에 모든 그의 피조물들도 얼굴을 가리운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 자식이나 집 어른이 중한 병고나 사고로 중상을 당했을 때 그 모습을 안타깝게 여길 뿐 아니라 심한 경우에는 얼굴을 가리우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고통에 괴로워하시는 주님의 모습 앞에 만물이 얼굴을 들어 바라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2) 이 같은 일은 하늘의 한 징조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주님이 태어나실 때에도 하늘의 별의 징조가 있었습니다. 동방 박사들은 이 징조를 보고 베들레헴으로 아기 예수를 경배하러 간 것입니다. 마지막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에는 하늘의 여러 징조로 보여주시겠다고 예언하셨습니다. 인류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예수님의 이 같은 놀라운 일에 어찌 하늘의 징조가 없겠습니까? 이런 현상은 갈보리에 모여서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에게 놀라운 반응을 일으켰습니다. 갑작스런 어둠에 놀람과 두려움이 그곳에 가득 찼습니다.
백부장은 이 같은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 사람은 의인이었도다”고 탄식했습니다. 백부장이란 로마 군대에 속한 고급장교입니다. 그는 로마 사람이며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도 아닙니다. 아마도 예수님을 갈보리까지 끌고 온 군관들의 책임자 일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런데 그의 입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향하여 의인이라고 탄성이 나왔고 그의 입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이를 구경하러 모인 무리도 그 된 일을 보고 다 가슴을 두드리며 돌아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죄 없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빌라도에게 고소한 자기들의 죄가 부끄러워졌습니다. 갈보리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징조를 바라볼 때 그들의 마음속에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잘못을 뉘우치고 가슴을 친 것입니다. 이런 징조로 그들은 두려움에 사로 잡혀 다 집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갈보리에는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무리들만이 남아 있습니다.
2. 주님의 운명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모두 일곱 마디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이것을 십자가상의 7언 이라고들 말합니다. 그런데 그 맨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고 하신 외치심입니다. 이 마지막 말씀을 마치신 후 그는 숨을 거두신 것입니다. 주님은 자기의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드렸습니다. 사람에게는 죽어도 그 영혼은 살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영혼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의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신 것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하셨습니다(히9:27). 전도서에는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고 하셨습니다(전3:21).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마지막 유언은 바로 주님이 마지막 남기신 이 말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3. 성소 휘장이 찢겨짐
주님의 운명과 함께 참으로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가운데가 찢겨진 것입니다.
(1) 이처럼 성소 휘장이 찢겨진 것은 하나님께로 가는 새롭고 살 길이 열린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은혜의 보좌 앞에 나가 기도할 수 있는 것은 주님께서 그의 육체의 죽으심으로 하늘의 지성소로 들어가는 길을 열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제 짐승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이 휘장을 찢으신 그리스도의 피로써 들어간다고 하셨습니다(히10:19-20). 우리들이 다 왕 같은 제사장이 되었다는 것은 이처럼 옛날에는 대제사장만이 1년에 한번만 들어간 지성소에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항상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며 주님은 십자가에서 이 길을 열어놓으신 것입니다.
(2) 이 일은 이제 구약 시대는 막을 내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 시대에 들어갔음을 알리시는 하나님의 방법이십니다. 성소의 휘장이 없어진 사실은 제사장이 필요 없다는 것과 희생 제물이 더 이상 필요치 않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지성소는 하늘 보좌로 옮겨져서 우리 주님이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셨으며, 그의 희생은 우리의 영원한 제물이 된 것입니다.
(3) 또한 이 같은 일은 주님이 하셔야할 아버지의 명령을 온전히 이루신 일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하셨습니다(빌2:8). 주님은 그의 온전한 죽으심으로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입니다.
결론 : 모든 일은 이제 끝났습니다. 그는 죽으심으로 그의 사명을 다 이루신 것입니다. 공회원인 요셉이란 사람이 빌라도에게 말하여 주님의 시체를 장사 지냈습니다. 이 사람에 대하여 그를 가리켜 의롭다고 말하고 주님을 정죄 하는 결의에 반대했으며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다 도망쳤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주님의 장사 지내실 일을 위하여 아리마대 사람 요셉을 준비해 놓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아니면 할 사람이 없을 것 같지만 내가 아니더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준비해 놓으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을 사랑하며 의로운 제자가 주님이 죽으신 후에 등장한다는 것은 퍽 큰 의의를 주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 요셉 같은 성도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누가복음 24장
◆ 밤중소리 01-11 | VIEW : 521
(128) 주님의 부활(누가복음 24 : 1 - 12)
(129) 엠마오로 동행하신 주님(누가복음 24 : 13 - 35)
(130)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누가복음 24 : 36 - 54)
(128) 주님의 부활
(누가복음 24 : 1 - 12)
서 론 :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는 일은 고금동서에 없었습니다. “네가 정녕 죽으리라”고 하신 말씀에 따라 육신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난 아담의 후손은 죄 값으로 죽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은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서 다시 일어나신 것입니다. 그는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부활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 예수님이 부활하셔야 했던 이유
우리는 먼저 예수님이 왜 부활하셔야 했었는가에 대하여 알아야 하겠습니다.
(1) 예수 그리스도는 빛과 생명으로 오신 분입니다. 빛은 하나님이요, 어둠은 사망입니다. 빛은 언제나 어두움을 이길 수밖에 없습니다. 생명은 하나님의 생명을 말합니다. 모든 생명의 근원을 의미합니다. 이 생명은 사망에 삼킨바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죄가 없는 분입니다. 사망은 죄의 대가로 찾아온 것입니다. 사망의 권세는 죄에게만 미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는 사망의 권능이 미칠 수가 없는 것입니다.
(3)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왔으며 그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왕 노릇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담의 자손이 아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사망의 지배에서 벗어난 사망의 치외법권 자이심으로 죽음에 머물러 계실 수 없었던 것입니다.
2. 여인들의 증거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에 올라가실 때 가슴을 치며 울며 따르는 많은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십자가에서 일어난 사건을 끝까지 지켜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요셉이란 사람이 예수님의 시체를 자기 무덤 안에 장사지내는 것까지 낱낱이 보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신 날은 예비일 이었습니다. 안식일 전날(금요일)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안식일을 쉬기 위한 예비일로 유대인들은 이 날에 안식일에 쓸 모든 일을 마련해 두었습니다. 이 여인들도 예비일에 주님의 시신에 바를 향품과 향유를 준비한 것입니다. 지루했던 안식일의 밤이 지났습니다. 이날 밤을 뜬눈으로 세운 이들 일단의 여자들은 새벽에 이르자 전날에 예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달려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여인들의 주님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무덤에 이르자마자 사태의 변화에 심히 놀라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무덤 입구를 막은 무거운 돌이 제자리에서 굴려 옮겨져 있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 무덤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시체가 뉘였던 자리에 안치돼 있어야 할 시신이 보이지 아니한 것입니다. 이를 인하여 그들은 깊은 근심에 싸이게 되었습니다. 이제 죽은 시체까지 없어졌으니 그들의 실망이야말로 어떠했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더 좋은 것을 바라보지 못하고 우리의 가진 것을 잃었을 때 상심하고 절망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깊은 섭리를 안다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진 것은 걱정거리인 것이 아니라 그의 살아나신 일이기 때문에 오히려 큰 기쁨이 된 것입니다.
(1) 낙심 중에 있는 여자들에게 빛난 옷을 입은 두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이 천사는 주님의 부활의 증인으로 이 여인들에게 보내심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그를 찾는 자에게 나타내 주시는 것입니다.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댄 여인들에게 천사들은 이처럼 말씀했습니다.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천사는 여인들이 찾는 분이 누구인지 알고는 그들이 찾는 자리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산 자를 죽은 자 중에서 찾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천사는 여자들에게 주님의 말씀을 기억나게 해주었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제자들에게 여러 번 당신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말씀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주님이 해 주신 분명하신 말씀에 대하여 깨닫지를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잘못에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 두라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우리라 하시되 저희가 이 말씀을 알지 못하였나니, 이는 저희로 깨닫지 못하게 숨김이 되었음이라.”고 했습니다(눅9:45-46).
하나님의 말씀은 숨겨져 있는 보화와 같은 것입니다.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지 아니하시면 숨겨진 말씀에 대하여 깨달아 알기란 어려운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의 사실은 제자들에게 숨겨져 있었던 것입니다. 이 숨겨진 말씀을 천사들이 일깨워 주었습니다. 그럴 때 여자들은 주님의 말씀이 상기되어 지난날 주님이 하신 말씀을 깨닫게 되었고 그 말씀에 대한 믿음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이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말씀을 듣는 일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성령께서는 그 말씀을 상기 시켜 깨닫게 해 주실 때가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도 닭 우는소리와 함께 주님의 말씀이 생각되어 통곡하며 회개하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동방 박사에게 나타난 별이 다시 나타나 그들의 길을 인도해 주었던 것처럼, 천사의 이 말은 그들의 믿음을 일깨워 주었던 것입니다. 이 여인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 살로메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헤롯왕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다른 여자들이라고 했습니다.
3. 제자들에게 전달해 줌
이 여인들은 주님의 부활의 증인들이 되었습니다. 말씀으로 깨닫고 믿는 사람만이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증거를 받은 다른 제자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렸다고 했습니다. 허탄하다는 말의 원어는 ‘호세이레로스(ὡσειλἡρος)로 잡담처럼 혹은 농담처럼 들렸다는 말입니다. 롯의 사위들처럼 심각한 사실에 대하여 농담으로 여겼으니 그들의 불 신앙이 얼마나 되었는가에 대하여 짐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중에 적극적인 믿음의 소유자인 베드로가 일어나 무덤에 달려갔습니다. 그 사실 여부를 알아보려는 것이었습니다. 가보니 과연 세마포만 보이고 시체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 같은 일을 목격하고는 기이히 여기며 집으로 달아갔다고 했습니다. 천사가 그들에게는 나타나지 아니했습니다. 여자들의 증거를 의심함으로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베드로에게 다른 증거를 보이시기를 거절하신 것입니다. 다만 그는 기이히 여겼을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행사를 기이히 여기는데 그치지 말고 말씀의 증거를 믿는 신앙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결론 : 누구든지 주님의 무덤을 찾아 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무덤에서 무엇을 발견하느냐? 무슨 말을 듣는가 하는 문제는 중요합니다. 당신은 어떠합니까?
(129) 엠마오로 동행하신 주님
(누가복음 24 : 13 - 35)
서 론 : 자기들의 선생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까지 지낸 사실을 바라본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제 모든 것이 끝난 것으로 알고 제각기 흩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베드로와 함께 있었던 제자들 중 두 명이 그날 아침 일찍 엠마오로 떠난 것입니다. 이들이 엠마오로 가게 된 사유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없지만 아마도 자기들의 고향이 아니면 처자가 있는 고장이었을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주님이 살아 계실 동안은 주님께 소망을 두고 그를 따랐지만 주님이 고난을 당하고 난 후에는 마치 부모를 일시에 잃어버린 고아와 같은 쓸쓸한 심정을 감출 길이 없었을 것입니다. 엠마오란 예루살렘에서 25리 정도에 떨어져 있는 마을로 엠마오란 말의 뜻은 따뜻한 우물이란 뜻입니다. 주님의 고난만 알고 그의 부활의 기쁨을 모르는 사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그의 살아 계신 증거를 못 가진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오늘도 엠마오를 향하여 슬픈 기색을 띄며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그 길로 계속 걸어가게 하시지 아니하시고 여러 가지 영적 경험을 통하여 다시 예루살렘으로 발을 돌이키게 하여 교회의 일꾼으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1. 엠마오로 가는 걸음
엠마오로 걸어가는 발걸음은 슬픈 발걸음입니다. 기쁨도 없고 소망도 없고 모든 것이 헛된 꿈과도 같고 허황된 일로 여겨지는 심정인 것입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의 경우를 보기로 합시다.
(1) 그들은 예수님을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로 알고 있었습니다(19절). 예수님은 선지자적인 사명을 가지고 계시기는 하지만 선지자는 아니십니다. 그는 선지자의 증거를 받으신 구세주이십니다. 선지자로 믿은 그들은 그의 부활에 대하여 확신을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2) 그들은 예수님을 이스라엘을 구속하실 자로 바랐습니다(21절). 고난을 받으시고 부활하신 메시야가 아니라 영광의 메시야로 그가 유대인의 왕이 되시며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그런 분이신 줄로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당장에 이스라엘의 구속을 바라던 그들에게 예수님의 죽으심은 치명상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크게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선생님이 죽은 이 마당에 그들은 예루살렘에 더 머물러야 할 필요성이 없었습니다. 이 두 제자는 다른 제자들에 앞서 일찍 엠마오를 향하여 길을 재촉하게 된 것입니다. 믿음에 낙심하고 인생에 실패하여 자신들을 부요하게 해 주시고 자기에게 복을 주실 줄 알았다가 이것도 저것도 안되었을 때 이들 모양 예루살렘(교회)를 떠나 311 \ 누가복음
엠마오(세상)로 다시 발길을 재촉하는 사람들이 우리 중에서 얼마나 많습니까?
2. 주님이 동행하신 엠마오의 길
이들 두 제자들은 슬픔 속에 잠겨 주님을 생각하면서 발길을 엠마오로 향하고 있었지만 주님은 그들이 엠마오로 가는 것을 원치 아니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발걸음을 돌이키게 하시기 위하여 그들이 가는 엠마오의 길에 동행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어떤 환경 속에서도 우리를 떠나지 아니하시고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1) 그들은 다른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주님이 당하신 일에 대하여 이야기 한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모든 우리의 음성을 다 들으시는 것입니다.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 책에 기록하였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말3:16). 우리가 서로 모였을 때에는 언제나 주님에 관한 이야기로 주고받으면 주님은 이 말씀을 분명히 들으시고 하늘 보좌에 있는 기념 책에 기록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마12:36에서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주님께 대한 말을 주고받은 일은 주님으로 그들 앞에 가까이 이르게 하시고 그들의 대화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게 됨으로 그들로 진리에 이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말3:16).
(2) 그들은 눈이 가려져서 주님과 대화하면서도 그분이 주님이신 줄 알지 못했습니다.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영적인 눈이 가려짐으로 주님을 바라보는 눈이 열리지 아니합니다.
(3) 주님은 그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주님이 하시는 일은 말씀으로 가르치시는 일입니다. 그들이 잘못 알고 있는 예수님에 대하여 성경을 자세히 풀이해 주며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셔야 할 일에 대하여 증거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 5:39에서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이 말씀의 풀이를 듣고 어느 정도는 깨달음이 되었지만 전적으로 받아들이기에는 영적인 이해력이 부족했습니다.
4.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간 두 제자
그들은 길가에서 만나 나그네 걸음을 같이 걸으며 목적지에 이른 후 더 가시려는 주님을 강권하여 자기들 집으로 인도했습니다. 한 집에 들어가셔서 식사하실 때 주님이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그들에게 주실 때 그들의 눈이 열려져 주님을 바라보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비로소 이제 모든 것을 깨달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길에서 그분에게서 말씀을 들을 때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던 사실을 상기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낙심하여 세상 길로 향하던 두 제자는 다시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진리를 깨닫게 되었고 소망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결론 : 주님을 만나는 길은 그에게 가까이 가서 그의 말씀을 듣는 길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함으로 우리로 강팍한 마음을 녹이게 하고 주님께 대한 잘못된 지식을 바로 잡게 하여 새로운 소망을 가지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 대한 바른 지식이 아니고서는 소망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주님을 바로 섬길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처럼 주님을 만난 후 새로운 용기를 가지고 그 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올라가 열 한 사도와 그 함께 한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엠마오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을 그 길에서 돌이키게 하시기 위하여 동행하시며 우리로 소망을 갖게 하시려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있어야 은혜를 받습니다. 성령을 받습니다. 예루살렘인 하나님의 교회에서 떠나지 않고 늘 그 분을 섬기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130)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누가복음 24 : 36 - 54)
서 론 : 부활한 몸이 어떤 것이냐에 대하여 우리는 여러 가지로 궁금합니다. 엠마오로 갔던 두 제자들이 다시 그 발걸음을 돌이켜 예루살렘으로 와서 열 한 제자들이 있는 곳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피차에 주님의 부활하심에 대한 말을 주고받았습니다. 그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들 앞에 그 모습을 나타내셔서 제자들을 놀라게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의 몸을 마치 영으로 알고는 두려움에 놀랐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의 몸에 대하여 몇 가지 말씀하신 가운데 부활의 신비에 대한 비밀을 풀어주셨습니다.
1. 부활한 몸의 신비
(1) 부활한 몸은 육신을 가지고 있음을 증거 하셨습니다. 그들이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고 놀라고 무서워함으로 주님은 자기의 몸은 영이 아니라 육임을 밝히시면서 나를 만져보라고 하셨습니다. 영은 영이므로 사람의 손으로 만져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육은 우리의 손으로 직접 만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죽은 몸이 무덤에서 그 몸으로 살아나셨다면 그 육신을 그대로 지니고 있어야 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2) 부활한 몸은 더디든 나타날 수 있는 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말하고 있는 장소에 문을 노크하고 들어오신 것이 아니십니다. 난데없이 갑자기 그들 가운데 서신 것입니다. 육신은 가지셨지만 부활한 몸은 자기 임의로 마음먹은 장소에 아무런 장애물의 구애를 받음이 없이 출입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3) 부활한 몸은 사람의 눈에 보일 수도 있고 안보일수도 있으며 남이 알아볼 수 없는 다른 모양으로 나타날 수도 있음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엠마오로 두 제자와 함께 동행하실 때 그들의 눈에 알아보지 못하는 모습으로 나타나셨으나 음식을 잡수실 때에 주님이심을 알 수 있게 하셨으며, 또 그 자리에서 그들의 눈에 보이지 않도록 그들의 눈앞에서 사라져 버리신 것입니다.
(4) 부활한 몸은 음식을 먹을 수도 있고 또 먹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고 하시고 그들이 내어 주는 생선을 그 자리에서 잡수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어느 곳에서 음식을 일정하게 드신 일에 대하여 언급이 없으십니다. 우리는 장차 부활한 몸으로 천국에 가서 황금길 가운데 있는 생명수 강 좌, 우편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부활한 몸은 비록 몸은 있지만 그 행동에 있어서는 영적 존재인 천사와 같으며 그보다 더 우월한 것은 음식도 먹을 수 있으며 육신으로 할 수 있는 일까지 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2.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주님은 제자들 앞에 나타나시자 맨 먼저 하신 말씀이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고 하신 말씀이십니다. 평강은 주님이 주시는 가장 큰 축복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평강은 마음의 평안을 가리킨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에 평안을 주시는 분은 예수님입니다. 그 이유는 다음 몇 가지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소멸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죄는 사람의 마음에 불안과 두려움을 심어줍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보혈로 그 죄를 씻고 보면 우리 마음에는 말할 수 없는 평안이 깃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원수의 관계를 십자가로 소멸시켜 주신 분이십니다. 십자가에서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분을 영접하면 하나님과 화목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우리 마음에는 한없는 평안이 깃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의 모든 염려를 맡으시는 분입니다. 너의 모든 염려를 다 주께 맡겨버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염려는 근심과 두려움을 안겨주지만 우리 주님이 이 염려를 맡으심으로 근심과 두려움은 물러가고 그 대신 평강만이 넘치는 것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그를 통하여 이 같은 평강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십니다.
3. 마음을 열어 말씀을 깨닫게 하십니다.
제자들은 부활에 대한 진리에 대하여 깨달음이 부족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하여 성경은 마음이 열려 있지 않기 때문임이라고 을 말씀해 줍니다. 주님이 그들의 마음을 여시자 그들은 성경을 깨닫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진리를 깨달으려면 마음이 열려져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열려 있지 않으면 주님에 대한 진리에 대하여 캄캄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주님이 열어주십니다. 주님이 우리의 마음을 열어주시려면 그 주님을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을 만나 마음이 열리자 그리스도에 관한 구약의 예언의 비밀을 다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영광의 메시야로 오시는 것이 아니라 고난의 주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시는 일과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실 일과 예수의 이름으로 구원을 얻는 회개 운동이 복음으로 예루살렘으로 시작하여 땅 끝까지 전파될 일에 대하여 분명히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같은 일에 증인의 사명을 받았으며 증인의 사명을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주실 터인데 그 성령을 받기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그들이 이 같은 일에 증인이 되려면 위로부터 능력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 능력은 성령을 받는 데 있습니다. 이 말씀에 따라 그들은 예루살렘에 머물렀으며 오순절에 모두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증인이 된 것입니다.
4. 예수님의 승천
주님은 부활하시고 40여 일의 시간을 지내신 후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가 40여 일간 머무신 것은 그의 부활하신 사실을 그의 제자들에게 확실하게 증거 하시려는 데 있으셨습니다. 그는 베다니 앞까지 가셨다고 했습니다. 이곳은 주님이 늘 기도하시던 감람산입니다. 주님은 이 세상에 다시 올 때 이곳에 내려오실 것입니다.
결론 : 주님의 제자들은 승천하시는 주님께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왔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소망을 잃은 제자들에게 새로운 기쁨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들이 소망은 더욱 돈독해졌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에 돌아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전혀 기도에 힘쓰는 나날을 보냈습니다. 드디어 오순절이 이르러 하늘로서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성령이 임하시어 예루살렘 교회가 이루어지고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되는 놀라운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사도행전은 누가가 기록한 책으로 누가복음의 끝 절과 직접 연결될 수 있는 책입니다. 우리는 이들과 똑같은 사명이 주어진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증인이 받아야할 성령을 받아 이 모든 일의 증인으로서의 사명을 이룰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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