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新約]강해/◆ 사복음서 · 사도행전 강해-1

누가복음서 7-12장 ◆ 밤중소리

영국신사77 2020. 4. 12. 16:59

  

누가복음 차례


누가복음 7장(31 ~ 36)

(31) 어떤 백부장의 믿음(누가복음 7 : 1 - 10)

(32) 울지 말라(누가복음 7 : 11 - 17)

(33) 세례요한의 질문(누가복음 7 : 18 - 23)

(34) 세례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증거(누가복음 7 : 24 - 30)

(35) 영적으로 무감각한 세대(누가복음 7 : 31 - 35)

(36) 탕감과 사랑(누가복음 7 : 36 - 50)


누가복음 8장(37 ~ 43)

(37) 주님을 섬긴 가난한 부녀들(누가복음 8 : 1 - 3)

(38) 열매 맺는 씨앗(누가복음 8 : 4 - 15)

(39) 등경 위에 두어야 할 등불(누가복음 8 : 16 - 18)

(40) 예수님의 가족들(누가복음 8 : 19 - 21)

(41) 바람을 꾸짖으신 예수(누가복음 8 : 22 - 25)

(42) 거라사 인의 불 신앙(누가복음 8 : 26 - 39)

(43)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누가복음 8 : 40 - 56)


누가복음 9장(44 ~ 51)

(44) 권세를 주신 예수님(누가복음 9 : 1 - 6)

(45)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누가복음 9 : 7 - 17)

(46)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누가복음 9 : 18 - 22)

(47) 참 생명의 가치(누가복음 9 : 23 - 27)

(48) 오직 예수만 보이더라(누가복음 9 : 28 - 36)

(49)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누가복음 9 : 37 - 43)

(50) 누가 크냐(누가복음 9 : 44 - 48)

(51) 세 종류의 사람(누가복음 9 : 49 - 62)


누가복음 10장(52 ~ 56)

(52) 칠십 인의 전도대(누가복음 10 : 1 - 12)

(53) 참 기뻐할 조건(누가복음 10 : 13 - 20)

(54) 그러면 살리라(누가복음 10 : 21 - 28)

(55) 내 이웃은 누구인가?(누가복음 10 : 29 - 37)

(56) 더 좋은 편을 택한 마리아(누가복음 10 : 38 - 42)


누가복음 11장(52 ~ 66)

(57)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누가복음 11 : 1 - 4)

(58) 구하는 자가 받는 기도(누가복음 11 : 5 - 10)

(59)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누가복음 11 : 11 - 13)

(60) 분쟁과 사단의 나라(누가복음 11 : 14 - 20)

(61) 빈집의 위험(누가복음 11 : 20 - 26)

(62) 참으로 복이 있는 자(누가복음 11 : 27 - 28)

(63) 예수님과 요나의 표적(누가복음 11 : 27 - 32)

(64) 몸의 등불인 눈(누가복음 11 : 33 - 36)

(65) 바리새인들에게 내린 화(누가복음 11 : 37 - 44)

(66) 율법사에 대한 책망(누가복음 11 : 45 - 54)


누가복음 12장(67 ~ 78)

(67) 참으로 두려워할 자(누가복음 12 : 1 - 5)

(68) 두려워 말라(누가복음 12 : 6 - 12)

(69) 탐심을 물리쳐라(누가복음 12 : 13 - 21)

(70) 탐심을 이기는 비결(누가복음 12 : 22 - 31)

(71)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누가복음 12 : 32)

(72)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누가복음 12 : 33 - 34)

(73) 주님을 기다리는 자세(누가복음 12 : 35 - 40)

(74) 두 종류의 청지기(지혜로운 청지기)(누가복음 12 : 41 - 48)

(75) 두 종류의 청지기(악한 청지기)(누가복음 12 : 41 - 48)

(76) 불을 던지러 오신 예수(누가복음 12 : 49 - 50)

(77) 복음과 분쟁(누가복음 12 : 49 - 53)

(78) 시대의 분변(누가복음 12 : 54 -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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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7장(31 ~ 36)

◆ 밤중소리 01-11 | VIEW : 710

(31) 어떤 백부장의 믿음(누가복음 7 : 1 - 10)

(32) 울지 말라(누가복음 7 : 11 - 17)

(33) 세례요한의 질문(누가복음 7 : 18 - 23)

(34) 세례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증거(누가복음 7 : 24 - 30)

(35) 영적으로 무감각한 세대(누가복음 7 : 31 - 35)

(36) 탕감과 사랑(누가복음 7 : 36 - 50)


(31) 어떤 백부장의 믿음

(누가복음 7 : 1 - 10)

서 론 : 가버나움에 살고 있는 어떤 백부장의 믿음은 경탄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 조차도 이 백부장의 믿음을 기이히 여기셨다고 했습니다. 그의 믿음이 예수님의 칭찬을 들을 것은 그가 예수님의 말씀의 권위를 믿었다는데 있습니다. 이 백부장은 예수님이 말씀만 하시면 그 말씀의 권능에 의해 자기 하인의 죽을병이 고침 받을 것이라고 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 믿음의 사람 가버나움의 백부장

본문에 기록된 가버나움의 백부장은 이방인입니다. 로마의 시민권을 로마군의 장교입니다. 그는 식민지 관할 하의 장교로서 유대인들에게 환심을 사야할 이유도 없었지만 유대인들에게 필요 이상의 선을 베풀었고 유대인들의 종교생활에 깊은 관심을 가졌었습니다.

(1) 이 백부장은 유대인들을 지극히 사랑했다고 했습니다. 이 백부장의 부탁을 받고 예수님께 찾아 나온 가버나움 회당의 장로들은 예수님께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백부장이 유대인을 사랑했다는 말은 유대인들을 위해 그가 베풀 수 있는 호의를 베풀어 온 사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사랑이란 이웃에 대한 진실한 도움의 뜻이 들어가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계명을 그의 생활을 통해서 몸소 실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은혜를 받은 사람으로 하나님을 공경하는 생활이 유대인을 사랑하는 생활로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는 이 백부장이 유대인의 장로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는 사람임을 알 때 그가 비록 이방인이지만 유대인의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섬기는 하나님의 백성임을 알 수 있습니다.

(2) 이 백부장이 유대인의 회당을 지었다고 했습니다.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고 주님께 아뢰었습니다. 회당은 유대인의 안식일에 그들의 하나님을 예배하는 구약적인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그런데 그가 이런 하나님의 교회를 지었다고 했습니다. 백부장의 이 같은 그의 하나님께 대한 열매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증거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2. “내 집에 오심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예수님은 장로들의 간청을 물리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일행과 함께 자기 집 가까이 오실 때 이 백부장이 급히 벗들을 보내어 주님이 자기 집에 오지 마시기를 간구했습니다. “주여 수고하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고 한 것입니다. 우리는 백부장의 이 같은 간구가 의미해 주는 몇 가지 사실을 알아 보아야 합니다.

(1) 백부장의 이 같은 간구는 그의 진실한 신앙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는 예수님에 대한 바른 인식과 메시야에 대한 바른 식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말씀이 육신이 되신 하나님으로까지는 믿지 못했지만 이스라엘이 기다리는 메시야이심을 믿은 것입니다. 이 백부장은 메시야이신 예수님이 행하시는 권능이 곧 하나님의 권능이심을 믿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누구보다도 예수님께 대한 바른 인식과 메시야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2) 백부장은 자신의 존재와 그리스도의 존재를 비교해 볼 때 너무나도 엄청난 차이가 있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은 일개 로마군의 백부장이요 상대방은 위엄과 권능이 많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메시야이십니다. 그는 정말로 예수님을 만나 뵙기를 두려워했습니다.

(3) 백부장은 자기 일로 말미암아 주님이 수고하시는 일에 대하여 죄송하고 두려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주님에게 수고하지 마실 것을 아뢰고 주님이 내 집에 들어오심을 감당치 못하고 또 자기가 주님께 가기도 감당치 못하겠다고 고백했는데 이처럼 자신과 주님과의 신분의 차등을 알고 두려워한 진실한 고백은 백부장의 놀랄만한 믿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4) 이 백부장의 이런 훌륭한 믿음이 7절에 극적으로 나옵니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라고 한 그의 말입니다. 백부장은 주님의 말씀의 권능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야일진대 그의 말씀이야말로 창조적인 권능의 말씀이라고 믿은 것입니다. 자기 같은 백부장의 지위에 있는 신분조차 그의 말의 위력이 자기 부하들이나 자기 집 종들에게 권능으로 나타나 순종케 하거늘 하물며 창조주이신 예수님의 말씀이야말로 그 어떤 말씀이라도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그는 믿었습니다.

백부장의 이 믿음을 주님은 칭찬하셨습니다. 이 같은 백부장의 말을 전달받은 예수님은 주위에 있는 무리를 향하여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많나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고 하신 것입니다.

결 론 : 이 백부장의 착한 인간성을 나타내주는 대목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그의 집 노예로 부리고 있는 종의 중한 병을 안타깝게 여겨 주님께 장로들을 보내어 간구하게 하였다는 사실입니다. 그의 이 놀라운 이웃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예수님께 대한 믿음은 주님의 놀라운 칭찬을 받을만한 아름다운 믿음의 사람임을 증거해 주는 것입니다.


(32) 울지 말라

(누가복음 7 : 11 - 17)

서 론 : 누가복음 초두에는 예수님이 해결하신 두 가지 기적적인 사건이 나옵니다. 가버나움에 살고 있는 한 백부장의 이야기가 나오더니 이곳에서 다시 나인성에 살고 있는 한 불쌍한 과부에 대한 긍휼히 여기시는 주님의 사랑이 나옵니다. 가버나움의 백부장은 그의 믿음으로 자기의 사랑하는 종의 죽을병을 고침 받았을뿐 아니라 그의 기이하리 만치 놀라운 믿음에 주님의 찬사를 받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나인성에 살고 있는 이 과부는 자신의 믿음이나 간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님의 긍휼히 여기시는 사랑으로 죽은 아들을 살리심으로 큰 기쁨과 말할 수 없는 위로를 받은 것입니다.

1. 나인성의 과부

예수님은 나인성으로 들어가시는 길목에서 비극적인 한 여인을 만났습니다. 그 여인은 과부요 그에다 하나뿐인 그 아들의 시체를 가지고 무덤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는 통곡하면서 아들의 관을 메고 가는 일단의 무리들과 함께 막 성 길을 빠져 나오려는 그 길목에서 주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1) 누구에게나 그의 인생 길에는 비극이 있습니다. 나인성에 살고 있는 이 과부의 인생은 참으로 기구합니다. 남편을 잃고 여인 홀로 살아온 것만도 슬프고 고달픈 생애였지만 그에게 소망을 두고 살아온 아들마저 죽은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 여인에게 이처럼 혹독한 생애가 주어진 것입니까? 그 이유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우리의 생애를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까? 이 일에 대해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전7:13-14).

(2) 그러나 이 여인에게는 이런 비극이 있었기에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자기 생애에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크나큰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특히 불행을 당한 이 여인이 그 비극 중에서 예수를 만났다고 하는 일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인생의 어려움 속에서 슬퍼하며 탄식하는 인생을 찾으시고 그런 인생에게 새로운 삶의 보람을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나인성 과부와 같은 인생들에게 복음을 정하여 그들로 그들의 인생의 비애 속에서 주님을 만나 위로를 받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2. 울지 말라

예수님이 나인성 성문 어귀에서 이 불쌍한 과부를 만났을 때 훤화하는 무리, 자기를 위로해 주는 이웃들과 함께 성문을 나오면서 울고 있었습니다.

(1) 예수님은 이 여인을 보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의 슬픔 속에 찾아오셔서 우리를 위로해 주시는 분입니다. 주님의 위로가 우리에게 큰 것은 그가 우리를 위로해 주시기 위해 친히 이 땅에 오셔서 우리가 겪어야 할 모든 고난과 슬픔을 친히 경험하셨기 때문입니다(히2:18, 4:15).

(2)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울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위로의 말씀이라기보다 하나의 명령으로 들을 수 있는 말씀입니다. 이 과부의 주위에는 훤화하는 무리들이 슬피 울고 있었습니다. 이 과부는 그들의 울음과 위로 가운데서 더욱 애처롭게 울부짖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울면서 위로한 것이 아닙니다. “울지 말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이런 경우 어떻게 그 과부에게 울음을 그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까? 예수님이 그에게 울지 말라고 말씀하실 수 있으셨던 것은 예수님이 그 여인의 울음을 그칠 수 있게 하실 권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뿐 아니라 우리 모든 사람들에게 “너희는 근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하실 수 있는 것은 주님이 능히 우리의 생애를 그렇게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청년아 일어나라

예수님은 청년의 시체가 있는 관 위에 손을 얹으셨습니다. 그곳에 많이 운집한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관 위에 손을 얹으신 예수님께 쏠렸습니다.

(1) 예수님은 관속에 죽어 누어있는 청년을 향하여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고 하셨습니다. 죽은 청년의 어미인 과부의 부탁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 성에서 나오면서 과부와 함께 슬퍼하는 무리들의 간구를 들으신 것도 아닙니다. 이미 청년은 죽어 있었습니다. 그 청년에게는 아무런 소망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주님의 명령에 관속에 죽어 누워있었던 그 과부의 아들이 관속에서 일어나 앉았습니다.

(2) 예수님은 그 살아난 아들을 슬퍼하며 울고 있었던 어미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로하시되 그 기쁨과 즐거움과 축복을 우리에게 넘겨주시는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그 가정에는 새로운 기쁨이 생겼습니다.

결 론 : 이 일로 인하여 그 둘레에 있었던 많은 무리들이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은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났다고 하기도 하며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고 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33) 세례요한의 질문

(누가복음 7 : 18 - 23)

서 론 : 세례요한이 헤롯왕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혀 있었던 그 즈음에 요한은 자기 제자들을 시켜 예수님께로 파송하여 이상한 질문을 하도록 했습니다. 그 질문의 내용이 이러합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일을 기다리오리이까”란 것입니다. 이 질문의 요지는 ‘우리가 당신을 우리의 메시야로 믿어도 좋으냐, 그렇지 않으면 다른 메시야를 기다려야 하느냐’는 질문으로 세례요한에게는 의외의 질문이요 예수님께는 실로 어처구니없는 물음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경우에서 메시야의 잘못된 지식이 가져오는 무서운 결과와 환경에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연약성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1. 세례요한의 처지

사람이란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다 보면 이런 저런 시험에 들게 마련입니다.

(1) 요한이 이런 의심을 품게 된 것은 자신의 불행한 처지에 실망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헤롯왕의 패륜적인 사생활을 책망한 것이 동기가 되어 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헤롯왕은 자신의 이복 동생인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사랑하여 자기 아내로 삼았는데 이 일에 대하여 왕을 책망한 것이 왕의 기분을 상하게 하여 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세례요한은 이런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예수가 과연 이스라엘의 메시야라면 자신을 구원해 줄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기대는 기대일 뿐 오래 기다려도 소망이 실현되지 않자 예수가 메시야인가에 대한 그의 확신이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2) 요한은 자기의 사명과 자기의 최종적인 운명에 대하여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요한의 사명은 분명 이사야가 예언해 주고 선지자였으며 메시야의 증거자였습니다(마3:3). 요한은 하나님으로부터 맡겨주신 사명을 잘 이루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세례를 줄 때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와 그의 위에 머무는 것을 보고 그가 이스라엘의 메시야이신 줄을 알았습니다(요1:31-34). 그는 예수님께 대하여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고 증거하기도 했습니다(요1:29). 요한은 예수님의 사역과 자신의 사역에 대하여 “그는 흥하여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자기의 사명을 마치고 하나님께 가장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가야 할 처지에 있었지만 이에 대하여 그는 잘 몰랐고 옥에 갇혀있는 일에 대하여 괴롭고 비통하게 생각했습니다.

2. 세례요한의 확인

요한은 자기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메시야의 여부를 본인에게 직접 확인해 보겠다는 결심을 가지고 되었습니다. 스승의 보내심을 받은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께 가까이 갔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물었습니다. “세례요한이 우리를 보내어 당신께 말하기를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더이다”고 했습니다.

요한에게 닥쳐온 일은 분명히 시험입니다. 그러면 왜 요한은 이런 시험에 든 것입니까? 요한은 다른 유대인들처럼 잘못된 메시야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나 지금이나 초림의 예수는 너무나도 유약한 모습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영광으로 오셔서 그들을 다스릴 메시야로 인정치 않았습니다. 그들이 바라는 메시야는 영광의 모습으로 오셔서 혁명적인 방법으로 이스라엘을 그 위기에서 구원해 줄 이스라엘의 왕으로서의 메시야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세례요한의 메시야관도 그러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그는 초림과 재림의 사역에 대한 메시야의 분명한 지식을 자기고 있지 못한 것으로 인하여 시험에 들게 된 것입니다.


3.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라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찾아 왔을 때 마침 예수님께서 질병과 고통과 및 악귀 들린 자를 고쳐주시며 소경을 보게 하는 그런 때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고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고 하셨습니다.

(1) 예수님은 이 말씀으로 요한에게 이사야가 예언한 메시야의 사역에 눈을 뜨게 하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는 다분히 이사야35:5-6절에 있는 말씀이 인용되어 있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은 메시야 왕국에서의 인간의 온전한 회복과 아울러 메시야의 사역에 있어서의 예언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요한이 이사야로 증거된 메시야의 선지자로서의 사명자라면 깨닫고 알아야 한다는 뜻에서 이른 말씀이라고 보겠습니다.

(2) 소경의 눈을 뜨게 하며 문둥병자를 깨끗하게 하며 죽은 자를 살리는 역사는 메시야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권능이심을 이처럼 전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의 제자들이 돌아가 이 모든 일을 고할 때 세례요한의 눈이 열려 예수의 메시야되심을 알게 될 것이라고 믿으신 것입니다(요10:37-38).


결 론 : 예수님은 나를 인하여 실족치 않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실족치 않은 자가 복이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때문에 인내하고 그리스도 때문에 소망을 가지고 그리스도 때문에 위로를 받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어려운 환경, 고통 가운데서 그로 인하여 실족치 않는 복 있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34) 세례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증거

(누가복음 7 : 24 - 30)

서 론 : 예수님은 이곳에서 세례요한에 대하여 변명하고 계십니다. 그가 받은 사명과 그의 인간적인 위대성에 대해 극구 칭찬하십니다. 예수님은 군중들에게 세례요한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부각시켜 주시려고 시도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 일을 계기로 요한이 증거한 메시야에 관한 관심을 가지게 하시며 자신이 요한이 증거한 그 메시야이심을 나타내시려는 의도가 있음을 다분히 볼 수 있습니다.

1.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 수많은 무리들은 세례요한과 무관한 사이가 아닙니다. 그들은 요한의 외침을 듣고 세례를 받으려고 요한에게 갔었으며 예수님은 지금 바로 그들에게 그들이 지난날에 요단 들에 나갔던 일을 회상시키면서 “너희는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고 물으셨습니다. 광야에는 갈대가 많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갈대라고 하신 표현은 한편 이스라엘의 지조 없는 지도자들, 세파에 흔들리는 변절된 제사장, 바리새인들, 서기관들을 비유적으로 나타내신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다시 한번 그들에게 강렬한 인산을 주시기 위해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고 질문하는 형식을 통해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해답도 예수님이 스스로 내리셨습니다. “보라 화려한 못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고 말씀하신 후 그들이 마음속에서 부르짖고 있는 바를 말씀하셨습니다. “선지자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 이처럼 예수님이 스스로 모든 의문에 대한 해답의 결론을 내리시므로 듣는 사람으로 모든 답답했던 마음의 맺혔던 바를 일시에 폭발시킨 것 같은 시원함을 주신 것입니다.

2. 요한이 증거한 메시야

요한이 요단 광야에서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을 때 그 당시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메시야를 기다렸던 그런 시대였습니다. 다니엘은 예레미야의 예언을 통하여 바벨론으로 잡혀간 이스라엘의 회복기가 이른 줄을 알았습니다(단(9:1-2). 그 당시 경건한 유대인들은 메시야의 출현시기를 다니엘의 예언을 통하여 알고 있었습니다. 다니엘9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다니엘에게 70이레의 예언을 주시면서 메시야가 일어날 시기에 대하여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7이레와 62이레가 지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때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날 것이요 그리고 이후에 끊어져 없어질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단9:24-26).

(1) 많은 사람들이 요한을 메시야인 줄로 알았습니다.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의논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눅3:15). 요한은 여기서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고 자기가 증거하는 그리스도의 모습에 대해 밝혀주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은 요한의 증거 자로서 무리들에게 자신을 증거한 요한을 증거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2) 요한은 이스라엘의 그리스도를 증거 했습니다. 그 누구도 예수를 이스라엘이 기다리는 그리스도, 곧 그들의 메시야인 줄을 몰랐습니다. 메시야는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메시야의 증거자가 나타나 주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할 것이라고 예언되었기 때문입니다(마3:3). 요한은 이 같은 자신의 사명을 잘 수행했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믿고 예수님의 제자로 예수님을 따른 사람은 바로 요한의 제자들이었습니다.

3. 선지자보다 나은 세례요한

예수님은 무리들에게 이처럼 세례요한을 소개하면서 그의 위대성에 대해 두 가지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1) 예수님은 그를 가리켜 선지자보다 나은 자라고 칭찬하셨습니다. 선지자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사명자들을 말하는데 선지자들의 종국적인 증거는 메시야에 대한 것입니다. 모든 선지자들의 증거는 초림의 메시야와 재림의 메시야에 대한 예언에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이들 많은 선지자들의 경우와 다른 위치에서 메시야를 증거했는데 그것은 자기 눈으로 메시야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 메시야를 증거하는 사명자로 선택받은 선지자였습니다.

(2) 예수님은 또 세례요한에 대해 여자가 나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이가 없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세례요한이야말로 인류 중에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가장 위대하고 복된 사명을 받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처럼 그에 대해 칭찬해 주셨습니다.

결 론 :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천국 백성 된 자의 놀라운 특권에 대하여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의 참 뜻을 이해하기 위해 문맥을 잘 살펴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백성들을 의미합니다. 극히 작은 자란 그 안에 있는 극히 미미한 존재라도 란 의미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면 이들이 왜 요한보다 크냐? 이들은 여자가 난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요1:12-13). 피로 값 주고 사신 값진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하나님의 후사들이기 때문입니다(롬8:16-17).


(35) 영적으로 무감각한 세대

(누가복음 7 : 31 - 35)

서 론 : 예수님은 영적으로 무감각한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한 비유를 들어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책망은 또한 오늘날 영적으로 무감각한 이 시대의 경종이기도 합니다. 유대인들은 주님으로부터 은혜로운 복음을 들어도 기뻐할 줄을 모르고 오히려 트집을 잡아 비방했습니다. 그들은 지난날에 세례요한의 회개의 책망을 들었을 때도 회개하기는커녕 귀신이 들렸다고 비방했습니다.

1.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아니하는 세대

예수님의 비유는 어린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동심으로 소꿉장난 놀이를 하고 있는 모습에서 그 소재를 삼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비유로 인용하신 이 같은 이야기는 그 당시 속담 비슷하게 인용되었던 내용으로 보여집니다. 이 아이들은 그 나름대로의 열심을 다 해 한편쪽에서 피를 불어댔습니다. 그러나 상대편이 그 피리소리에 장단을 맞추어 춤추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불만이 되어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아니한다”고 항의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상대편에서는 “우리가 애곡해도 너희는 왜 울지 않느냐”고 항의하는 모습으로 재미있어야 할 이들의 놀이가 결국 싸움과 파국을 맞는 사실을 비유로 인용하여 경종하신 것입니다.

(1) 피리는 복음을 의미합니다. 비유에서 말씀하신 피리란 좋은 소식, 기쁜 소식을 의미하는 것으로 복음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이 피리를 부신 분입니다. 예수님이 피리를 부실 때 이를 듣는 모든 사람들은 이 피리소리에 기뻐하며 함께 춤추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은 기뻐할 줄을 몰랐습니다. 춤추기는 고사하고 피리를 부는 주님을 향하여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며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비방했습니다.

복음은 모든 사람들에게 춤을 추게 하는 피리소리입니다. 이 소리를 듣는 사람마다 함께 춤추어야 할 놀라운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피리소리를 듣고도 춤을 추지도 않았습니다.

(2) 비유는 또한 기쁨을 상실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경종이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쁨으로 받아야 합니다. 오히려 유대인으로부터 버림받은 죄인들과 세리들은 주님의 말씀을 기쁨으로 받았지만 정작 기쁨으로 받아야 할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은 그 말씀을 배척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기쁨을 상실한 백성은 하나님을 멀리하게 됩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고 느헤미야는 이스라엘에게 외쳤습니다(느8:10).

그리스도인의 생활에는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늘 피리소리를 들으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활은 기쁨을 상실했습니다. “항상 기뻐하라”고 말씀하고 있지만 세상근심과 염려로 인하여 그 기쁨을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가져야 할 이 기쁨이 세상 기쁨에 빼앗겨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3) 피리소리에 춤추지 못하는 이유는 마음에 병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기뻐해야 할 사람이 기뻐하지 못하는 이유는 기쁨을 나타낼 수 없는 병집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마음의 병은 죄로 인한 마음의 강퍅입니다. 죄는 사람의 마음을 강퍅하게 만들며 이것이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막아 그리스도안에서 누려야 할 기쁨을 빼앗아 가는 것입니다. 다른 한가지는 돈에 미혹된 마음 때문입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진다고 했습니다(딤전6:9-10).

2. 애곡해도 울지 않는 세대

예수님은 애곡해도 울지 않는 세대에 대해 책망하셨습니다. 이 비유는 세례요한의 회개의 경우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요단강에서 외치는 회개의 외침은 애곡이었습니다. 그의 책망은 회개할 줄 모르는 유대인들에 대한 애곡의 외침이었습니다.

(1) 세례요한의 애곡에 그들은 울어야 했습니다.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로 예언된 세례요한의 등장은 유대인들에게 많은 관심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애곡소리를 듣고 운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메시야를 영접해야 할 일에 대한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지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 제사장들은 이를 비웃고 거부했습니다.

(2) 사람이 회개를 외칠 때 가슴을 칠 줄 알아야 합니다. 죄인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길은 한가지뿐입니다. 그 길은 바로 회개입니다. 애곡해도 울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하심을 받을 수 없습니다.

(3) 하나님의 백성들은 회개를 외치는 소리에 귀를 기우려야 합니다. 축복의 소리에만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평강의 소리에만 귀를 가까이 하고 있습니다. 회개의 소리는 듣기 싫어합니다.

결 론 : 주님은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고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고의적으로 비방하고 거역하므로 스스로 실족하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기뻐할 때 기뻐하고 슬퍼할 때 슬퍼할 줄 아는 영적 감각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36) 탕감과 사랑

(누가복음 7 : 36 - 50)

서 론 : 예수님은 죄사함에 대한 비유를 빚진 자의 탕감과 결부시켜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임금과 회계하는 빚진 자의 탕감문제를 다루므로 하나님의 사죄와 우리들의 형제들에 대한 용서의 윈칙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일만 달란드의 빚을 진자가 임금의 자비로 무조건 탕감을 받았음에도 자신에게 일 백 데나리온의 빚을 진 동관을 붙들어 그의 목을 잡고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는 모습을 보여 주므로 빚진 자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진노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네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고 경종하고 있습니다(마18:24-35).

1. 어느 한 여인의 등장

문제의 발단은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초대한 일로부터 시작됩니다. 이 바리새인의 이름이 시몬입니다.

(1) 시몬의 행동이나 그 마음의 생각으로 비추어볼 때 그에게는 존경하고 사랑하는 분에게 보여야 할 정중한 예절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 시몬은 아마도 예수님께 대한 소문을 듣고 그가 과연 메시야인가? 그 여부를 시험해 보려는 의도에서 초대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초대하고서도 주님을 대접하는 태도가 불손했습니다. 귀빈 중에도 귀빈이신 그 분께 발 씻을 물도 내 놓지 아니했습니다.

(2) 초청은 받았지만 아직 음식이 들어오기 전, 좌석에 앉은 채 담화가 진행되어 가는 바로 그때 한 여인이 들어왔습니다. 이 여인의 이름은 없습니다. 다만 동리에 죄인인 한 여인이라고만 소개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4복음서에서 모두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사건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마26:6-13, 막14:3-9, 눅7:36-50, 요12:1-8). 그런데 마태, 마가, 요한복음에 나와있는 사건은 분명히 예수님의 공생애 마지막에 베다니에 가셨을 때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의 일임을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곳 누가복음에 나와있는 사건은 같은 향유를 부은 사건이지만 동일 인물이 아니며 시기와 환경도 베다니나 마리아가 아닌 것이 뚜렷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3) 이 여인의 행동으로 보아 이 여인이 가지고 있는 믿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여인은 평소에 예수님의 소문뿐 아니라 친히 그의 말씀을 듣기도 했습니다. 이 여인은 동리 사람이 알고 있는 것처럼 죄인이면서도 예수님을 사모하고 그를 만나기를 소원한 여인이었습니다. 마침 예수님이 그 마을 시몬이라고 하는 바리새인의 집에 초대되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 여인은 자신이 소유한 물건 중, 가장 값진 향유를 가지고 주님이 계시는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이 여인은 그곳에서 자신의 죄를 뉘우침과 감사하는 뜨거운 심령으로 머리를 풀어 주님의 발을 눈물로 씻기시고 발에 입을 맞추며 그 값진 향유를 아낌없이 주님의 발에 부은 것입니다.

2. 탕감과 사랑에 대한 교훈

이때 시몬은 쾌재를 불렀습니다. 이 순간이야말로 예수가 메시야이신가의 여부를 시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여긴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선지자라면(모세가 말한 그 선지자로 메시야를 의미함) 이 여인에 대하여 죄인임을 알 것이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1) 예수님은 시몬에게 네게 이를 말이 있다고 하시고는 탕감의 비유를 말씀하기 시작하셨습니다. “빚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 둘이 있는데 한 명에게는 500데나리온, 다른 한 명에게는 50데나리온의 빚을 졌는데 둘 다 탕감하였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는 질문을 시몬에게 던지셨습니다. 이때 시몬은 상식적인 선에서 바른 대답을 했지만 그의 답변이 자신에 대한 책망으로 나올지는 몰랐습니다.

(2) 주님의 이 두 명의 빚의 차이를 보인 액수는 죄의 다과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 앞에 많은 죄, 적은 죄가 없습니다. 죄값이 사망인 것은 죄의 경중이나 죄의 많고 적음에 기준을 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죄와 자기의 죄를 구분하여 자기의 죄는 50데나리온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자기 죄에 대해 잘못 생각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3) 이 말씀은 사죄의 은혜를 받는 사람의 자세를 말해 줍니다. 50데나리온이라고 하여 덜 사랑한다면 그는 자신의 죄에 대한 참된 뉘우침이나 사죄의 은총을 깨닫지 못한 사람입니다. 많은 빚의 탕감인줄 알고 더 사랑한다는 말은 은혜에 대한 진실한 감사와 감격을 말합니다.

(4) 예수님은 이 비유를 말씀하신 후, 시몬에게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고 물음에 그는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 받은 자니이다”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사랑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사람이란 사죄의 참 가치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이 여인은 주님으로부터 그 사죄의 은혜를 간절히 바라고 뜨거운 심령과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향유를 붓고 눈물로 발을 씻기고 그 발에 입을 맞추었던 것입니다.

결 론 : 예수님은 시몬의 거짓되고 외식적인 대접에 대해 이 여인과 비교하시면서 책망하셨습니다. 사랑은 주님에 대한 우리의 신앙에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죄사함의 은혜에 참으로 감격하고 자신의 귀중한 것을 드릴 때 생기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8장(37 ~ 43)

◆ 밤중소리 01-11 | VIEW : 679

(37) 주님을 섬긴 가난한 부녀들(누가복음 8 : 1 - 3)

(38) 열매 맺는 씨앗(누가복음 8 : 4 - 15)

(39) 등경 위에 두어야 할 등불(누가복음 8 : 16 - 18)

(40) 예수님의 가족들(누가복음 8 : 19 - 21)

(41) 바람을 꾸짖으신 예수(누가복음 8 : 22 - 25)

(42) 거라사 인의 불 신앙(누가복음 8 : 26 - 39)

(43)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누가복음 8 : 40 - 56)


(37) 주님을 섬긴 가난한 부녀들

(누가복음 8 : 1 - 3)

서 론 : 예수님은 각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반포하시는 일에 전념하셨습니다. 그는 가는 곳마다 귀신을 쫓아내며 병든 많은 사람들을 고쳐주셨지만 그 목적은 복음을 전하시려는데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겉보기엔 열 두 제자들을 데리고 다닌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겉으로는 나타나지 아니한 중요한 일군들이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을 도와주고 있었습니다.

1. 복음사업에 동참한 여인들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일에도 일군이 필요하고 돈이 필요합니다. 일군이 일을 하려면 먹고 마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수입이 없는 분입니다. 그의 제자들도 직업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기 때문에 수입이 있을 리 없습니다. 그러면 누가 이들의 재정적인 후원자가 되어 주었느냐는 것입니다.

(1)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복음사업을 위해 물질적으로 섬긴 사람들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이 아닌 여자들이었습니다. 이 여자들에 대하여 누가는 그들의 신분을 자세히 명시해 주고 있습니다. 그 중 한 여인은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고침을 받은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라고 했습니다.

다른 또 한 명의 여인은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라고 했습니다. 청지기란 종과 같은 낮고 천한 신분입니다. 이 여인은 가난하고 어려움 속에서도 주님을 섬기기 위해 남편의 빈약한 급료에서 주님을 위해 감사하므로 봉헌했던 것입니다. 또 그 밖의 여인들도 이들과 그 신분의 별반 다를 바 없는 여인들로 그들은 마음을 함께 하여 이처럼 물질로 저희를 섬겼다고 했습니다.

(2) 자기의 물질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쓰는 일은 보람있는 일입니다. 자신의 재물을 하늘에 쌓아 두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거기에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저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이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6:19-21).

이 여인들은 세상에서 자신들은 주리고 어렵게 살아가면서도 주님을 위해서는 아낌없이 바쳤습니다. 예수님은 주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의 가장 귀한 것을 희생할 때 그것으로 인한 보상에 대해 확실하게 약속하셨습니다(마19:29).

(3) 이 여인들은 열 두 사도들과 똑같은 하늘의 상급을 받는 지혜로운 주님의 일군들입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인들이 받을 상급에 대하여 놀라운 약속을 주셨습니다.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10:41). 선지자만이 선지자의 상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 선지자를 선지자로 영접한 자도 같은 상급을 받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일을 도움으로 복을 받을 수많은 여인들

성경에는 하나님의 일에 자기를 희생하여 도움을 준 많은 여인상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이 현세에 받은 여러 가지 축복도 찾아볼 수 있지만 그 보다도 하나님나라에 가서 받은 그들의 상급은 더욱 클 것입니다.

① 엘리사를 섬긴 수넴 여인이 있습니다. 이 여인은 수넴에 이른 엘리사를 강권하여 음식을 대접했을 뿐 아니라 엘리사를 위해 방을 작만 하여 극진히 대접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여인에게 아들을 주셨고 그 아들이 앓아 죽었을 때 다시 살려주셨습니다(왕하4:8-37).

② 엘리야를 섬긴 사르밧 과부가 있습니다. 이 과부는 이 일로 그 땅에 가뭄이 지나기까지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③ 베다니의 마르다와 마리아가 있습니다. 이들은 남다른 주님의 사랑을 받았으며 그들의 오라비 나사로가 죽었을 때 무덤에서 다시 살리심을 받았습니다.

④ 욥바의 다비다가 있습니다(행9:36-43). 자주 장사 루디아가 있습니다(행16:14). 복음의 동역자로 수고한 아굴라의 아내 브리스길라가 있으며, 바울로부터 교회의 일군으로 칭찬 받은 겐그리아의 뵈뵈, 교회를 위해 헌신적인 수고를 아끼지 아니한 마리아 등 수 없이 많은 것입니다.

3. 주님을 섬기는 방법

주님을 섬기는 방법은 여러 가지 있습니다.

(1) 자기 소유로 섬기는 방법입니다.

(2) 기도로 섬기는 방법입니다.

(3) 지극히 작은 일로도 주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냉수 한 그릇도 주의 이름으로 대접하면 그 일로 상을 받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결 론 : 이들은 보잘것없는 여인들입니다. 누구 하나 알아 줄 사람도 없는 가난하고 못난 여인들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우리 주님께는 귀한 보배 같은 일군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주님의 나라에 가서 이 세상의 그 어느 누구도 차지할 수 없는 영광을 누릴 수 있는 복된 여인들입니다.


(38) 열매 맺는 씨앗

(누가복음 8 : 4 - 15)

서 론 : 하나님의 나라와 열매와는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고 하신 말씀에서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는 열매 맺는 백성들의 기업입니다(마21:43).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의 백성으로 택정하신 이유는 “우리로 하나님의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에 있는 것입니다(롬7:4).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씨뿌리는 비유는 우리에게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가에 대해 교훈해 줍니다.

1. 길가에 떨어진 씨앗

예수님의 비유는 길가에 떨어진 씨앗으로부터 시작됩니다.

(1) 길가란 사람이 잘 다니는 행길을 말하는 것으로 사람들의 발로 밟힌바 되어 이미 딱딱한 토질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땅에 뿌려진 씨앗은 그 씨앗이 흙 속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그의 마음이 죄로 굳어져서 하나님이 말씀이 그 마음속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을 말합니다.

(2) 길가에 떨어진 씨앗은 사람에게 밟힌다고 하셨습니다. 인간의 지식에 밟히고 인간의 판단과 사고와 생활에 밟히기 때문에 그 말씀이 마음에 정착하여 영적인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3) 이 같은 씨앗은 공중의 새들의 밥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마음속에 들어박히지 못한 씨앗은 공중의 새들의 좋은 먹이가 되는 것입니다. 공중의 새란 공중권세를 잡은 사단을 의미합니다.

2. 바위에 떨어진 씨앗

더러는 그 씨앗이 바위에 떨어졌다고 하셨습니다. 바위 위엔 여러 층의 흙으로 계층이 있습니다. 그래서 씨앗이 그 흙 속에 묻힐 수 있는 것입니다.

(1) 바위 위에는 뿌리를 내릴만한 흙이 없습니다. 얇은 흙에선 뿌리가 깊이 내릴 수 없습니다. 뿌리가 깊지 못한 나무는 싹은 나지만 온전한 영양분을 섭취하지 못하기 때문에 결실을 낼 수는 없습니다. 이 신앙은 세상을 따라가는 세속적 신앙입니다.

(2) 이 씨앗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다고 했습니다. 습기란 수분으로 열매를 맺게 하는 생명의 근원을 말합니다. 뿌리가 약하므로 수분을 끌어드릴 수 없습니다. 진리가 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 심령을 주장하지 못하므로 그 싹이 곧 말라버리는 것입니다. 생명이 없는 믿음은 시련이나 핍박이나 환난이 올 때 그것을 견디어 승리할 수 없습니다.

3.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앗

더러는 그 씨가 가시떨기 속에 떨어졌다고 하셨습니다. 이 비유는 주변환경이나 사정이 여의치 못해 결실을 못하는 경우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1) 밭에 가시떨기가 있었습니다. 이 가시떨기는 신앙성장에 결정적인 해를 끼치는 악한 존재입니다. 이 가시떨기에 대해 주님은 “이생의 염려와 재리와 일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치 못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이생의 염려는 우리의 신앙의 성장을 저해하는 가시떨기입니다. 재리란 물질에 대한 탐심을 말합니다. 일락이란 세상을 사랑하므로 세상 사람에 푹 빠진 상태를 말합니다. “일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었다”고 말씀해 줍니다(딤전5:6).

(2) 이 사람의 경우, 씨와 가시가 함께 자란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사람의 신앙은 성장하는 것 같지만 실인즉 성정은 해도 결실이 없는 성장으로 마치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이룰 뿐입니다.

(3) 가시떨기가 기운을 막았다고 했습니다. 결국 가시떨기는 우리들 속에서 우리의 신앙으로 생명의 결실을 못하도록 그 성장을 막아버리는 것입니다.

4.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

농부가 씨를 뿌리는 중, 그 씨앗이 더러는 그 밭에 있는 좋은 땅에 뿌려졌다고 했습니다. 이 땅은 뿌려진 씨앗이 자라기에 매우 적합한 땅입니다. 그 밭이 단단치도 아니했습니다. 이것은 회개한 심령을 말합니다. 바위도 없었습니다. 이것은 진리의 말씀으로 그 뿌리를 깊이 내린 심령입니다. 가시떨기도 없었습니다. 이것은 육신의 일이나 세상적인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아니하고 오직 주님께만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심령입니다. 이런 땅은 참으로 좋은 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곧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깨달은 말씀을 순종하는 생활에 들어갑니다. 언제나 말씀에 소망을 두고 인내하는 생활을 합니다. 이 밭에 떨어진 씨앗은 그 결실함이 백 배에 이른다고 하셨습니다.

결 론 : 예수님은 이 비유의 말씀을 들려주시면서 결론적으로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들을 귀한 어떤 귀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영이요 생명이기 때문에 영적 귀를 소유하지 못한 사람은 이 같은 말씀을 듣고 깨달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귀는 또한 할례 받은 귀입니다. 이 귀는 심령이 가난한 자의 귀입니다. 예수님이 이처럼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는 들을 귀 없는 자에게 비밀로 하시기 위해서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지고 지금 듣고 있다는 사실을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39) 등경 위에 두어야 할 등불

(누가복음 8 : 16 - 18)

서 론 : 오늘 본문에 나타난 등경 위의 등불의 비유는 씨뿌리는 비유의 결론으로 주신 말씀입니다. 이 비유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어떻게 해야 하느냐에 대한 교훈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마치 등경 위에 둔 등불처럼 그들이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의 빛을 비취어야 할 책임 있으며 각자가 행한 일에 대한 보응이 반드시 있다고 하는 격려와 경종으로 들려주고 있습니다.

1. 등경 위에 둔 등불

사람들이 등불을 켜는 이유는 그 빛을 사람들에게 비취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어둠에서 그 빛을 통하여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한 것입니다.

(1) 예수님은 이 등불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비유하셨습니다. 이 등불은 빛의 근원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빛 자체이시기 때문에 등불의 빛에 비유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소유한 빛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마음에 비추어진 그 빛의 반사를 의미합니다. 말씀을 받은 마음은 그 말씀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열매가 그리스도인의 빛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밭에 떨어진 씨앗만이 이 빛을 발휘할 수 있으므로 우리는 언제나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인내로 결실 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2) 그리스도인들이 빛이란 그 열매를 말합니다. 예수님이 이곳에서 하신 말씀의 참뜻을 알려면 마태복음에 나타난 산상보훈에서 찾아야 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리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셨습니다(마5:14-16).

(3) 이 빛을 등경 위에 두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등불을 켜는 이유는 그 등불을 비취고자 하는 것이지 결코 그 빛을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 두고자 함이 아닙니다. 등경이란 등잔을 올려놓기 위해 기둥이나 벽에 만들어 놓은 받침대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열매는 먼저 그 가정에 빛으로 나타나야 하며 동리에서도 숨겨져서는 안됩니다. 등경 위에서 빛을 발사하지 못하는 등불은 이미 등불이 아닙니다.

2. 숨은 것은 반드시 드러난다.

예수님은 이곳에서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1) 하나는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모든 죄는 결과적으로 반드시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열매를 맺고 맺지 않고는 제각기 자신의 자유에 속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로 말미암은 종국적인 책임은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전도서에서 말씀하시기를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과 네 눈이 보는 대로 좇아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전11:9).

이 같은 심판의 날은 주님의 재림의 날이 될 것입니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고 하셨습니다(마16:27). 우리의 마음이 죄로 강퍅해져 아무런 결실을 맺지 못했을 때 그 사람은 아무 것으로도 자신을 숨길 것이 없이 벌거벗은 몸으로 심판주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2)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인들은 이 빛을 가지고 사람들의 죄악된 그 어두움을 들추어내라고 하신 뜻입니다. 이 말씀의 맥을 우리는 예수님의 교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즉 두려워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으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고 하셨습니다(마10:26).

그리스도인들은 어둠과 동조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어둠을 책망하는 사람들입니다. 빛으로 어둠을 들추어내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비록 세상에서 도외시되고 무시된 말씀이지만 우리는 이 말씀을 세상에 빛으로 나타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으로 세상의 은밀한 죄를 드러내어 그들로 회개케 해야 하는 것입니다.

(3)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에 있어서 조심하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그냥 흘러보내면 안됩니다. 노아의 때 사람들이 노아를 통하여 경종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말로 들었다가 다 멸망을 받았습니다. 롯의 때의 사람들은 롯의 경종을 농담으로 들었다가 불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4)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 빼앗기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같은 일은 마지막 심판의 날에 되어질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의 백성은 많은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같은 열매를 맺히게 하시려고 우리로 그의 백성으로 삼으신 것입니다(눅13:6-9, 롬7:4).

결 론 :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두 달란트나 다섯 달란트를 받은 종들과 같이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의 생애처럼 하늘의 상급을 바라보면서 그의 남은 생애를 보람있게 살아야 합니다.


(40) 예수님의 가족들

(누가복음 8 : 19 - 21)

서 론 : 예수님은 언제나 주어진 환경 속에서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비밀과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아들을 만나려고 찾아 나온 모친과 동생들을 보시고 예수님은 무리들에게 하나님나라의 가족에 대한 새로운 교훈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주님이 맏아들이 되시고 우리는 그 안에서 아버지와 맏아들로 말미암아 새로운 가족관계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이 말씀하신 교훈은 바로 이 같은 관계에 관한 것입니다.

1.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리스도안에서의 가족관계

예수님은 그 제자들에게 그리스도안에서의 새로운 가족관계의 설명이 필요하셨습니다. 이것은 또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알고 그의 생활에 실천해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이 복음을 전하시면서 병든 자를 고치시는 이적을 행하실 때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의 모함에 의해 예수님이 귀신에 잡혔다, 바알세불을 힘입었다는 소문이 주변에 퍼졌습니다. 아마 이 같은 소문에 괴로움을 받은 모친 마리아는 아들의 정신적이 괴로움과 피로를 더러 드리려고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찾아 온 듯 싶습니다. 그러나 운신조차 할 수 없는 많은 무리들로 인하여 만나기가 힘들게 되자 사람을 안으로 보내어 소식을 전하게 한 것입니다.

이 소식을 전하는 자의 말은 이러했습니다.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을 보려고 밖에 섰나이다” 예수님은 천국의 가족관계를 말씀하실 좋은 기회를 맞은 것입니다.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심으로 천국 백성들의 가족관계를 밝혀주신 것입니다.

(1) 이 말씀은 지상의 가족관계의 중요성을 도외시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결코 가족관계를 소홀히 해도 된다고 하지 않습니다. 십계명 중에 대인관계에 나오는 제 1계명이 바로 가족관계에 대한 바른 관념을 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섬긴다는 핑계로 부모님 섬기기를 게을리 하는 바리새인들을 저주하셨습니다(막7:8-13).

(2) 예수님도 자신의 가족을 중히 여기셨습니다. 요셉이 언제 죽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예수님은 오랫동안 목수 일로 그의 가족들을 부양하셨다고 여깁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모친을 요한에게 당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딤전5:8).

(3) 다만 이 말씀은 육적 가족관계의 이야기에서 영적 새로운 가족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보이신 교훈입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영적인 가족관계에 대하여 소홀히 하고 정상적인 관계를 이루어 나가지 못하고 있지만 이런 일은 올바른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육신의 가족관계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처럼 영적 가족관계도 올바로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이 말씀에서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가족관계

우리가 그리스도안에 들어오면 하나님의 관계, 그리스도와의 관계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가 새롭게 정립됩니다.

(1)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도록 아들의 영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롬8:15).

(2)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 가족의 맏아들이 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로 그의 아들이 되게 하시기 위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롬8:29). 예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오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우리의 구세주가 되시지만 한편 하나님 나라의 가족관계로는 황공스럽게도 우리의 맏형님이 되십니다.

(3) 우리는 하나님 나라 가족의 한 형제들이라고 했습니다(히2:12, 마23:8).

3. 영적 가족관계의 특성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처럼 새로운 가족관계를 이루고 있지만 이 관계를 육신저인 가족관계처럼 여겨서는 안됩니다. 이 관계는 어디까지나 영적 관계입니다.

(1) 이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한 아버지의 아들이 되었으니 서로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계명은 바로 이 같은 뜻에서 주신 계명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가족을 이루고 있는 우리는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사랑을 배워야 합니다.

(2) 형제에 대한 사랑은 진실한 도움에 있습니다. 한 몸의 지체가 괴로움을 당했을 때 몸 전체가 괴로움을 당하는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괴로움을 당하는 형제의 괴로움에 동참하는 일이 하나님 가족의 사랑입니다.

결 론 :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고 하신 이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한 가족을 이루고 있다는 뜻이며 이런 하나님 나라의 가족은 듣고 행하는 자란 사실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41) 바람을 꾸짖으신 예수

(누가복음 8 : 22 - 25)

서 론 : 우리는 성경 여러 곳에서 예수님의 신적 사역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다시말하면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란 사실을 바라보게 됩니다. 신약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사실은 그의 말씀의 능력에서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창조주의 말씀이기 때문에 모든 만물이 그의 만물에 순종합니다. 그가 말씀으로 광풍을 향하여 꾸짖었을 때 그것들이 그 말씀에 순종하여 잠잠하여졌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창조적인 능력의 말씀임을 나타내 보이신 것입니다.

1. 잠이 드신 예수님

바쁘신 일정 중에서 하루하루를 지내시는 예수님께는 쉬실 틈이 없으셨습니다. 갈릴리 바다 저편으로 건너가실 일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향하여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명하셨습니다. 제자들에 의해 배는 육지에서 떠났고 예수님은 무리들로부터 떨어지고 사면이 조용해지자 깊은 잠에 드셨습니다.

(1) 예수님이 배 안에서 깊은 잠이 드셨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큰 경종을 주고 있습니다. 그 배의 위기는 배 안에 계신 예수님이 잠이 드렸을 때 일어났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위기는 바로 여기서 찾아옵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 예수님이 주무실 때 우리 신상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예수님과 상관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계시는 예수님으로 주무시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2)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이 주무시지 못하도록 항상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끊어질 때 예수님은 우리 안에서 주무십니다. 우리가 하는 기도는 주님으로 주무시지 못하게 하시고 우리를 위해 일하시게 하는 방법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기도와 간구로 구할 것을 주님께 아뢰는 생활입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하므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하셨습니다(빌4:6).

(3)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주님을 의지하지 않을 때 주님은 주무십니다. 배 안에 있었던 제자들은 자신들의 힘과 재능을 의지했습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자라온 그들은 이만한 풍랑은 자주 만났었고 그때마다 그들의 능숙하고 노련한 기술로 위기를 이겨낼 수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이 당한 위기에서 예수님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잠3장에서 이르시기를 “여호와는 너의 의지할 자이시라”고 하셨습니다(잠3:16).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방패가 되신다고 하셨습니다(잠30:5). 시편2:12에서 말씀하시기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잠29:25절에서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그들이 어려움을 만났을 때 자신들의 자만과 경험과 지혜를 버리고 주님을 의지했어야 했습니다. 그들의 배에는 위기가 왔습니다. 배에 물이 가득 찼습니다. 아무리 물을 퍼내도 사나운 파도로 높은 곳에서 내려치는 물결과 물의 넘침을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두려움이 갑자기 그들의 머리와 몸에 엄습했습니다. 하나님을 의뢰하는 일은 경험이 필요 없습니다. 경험을 의지하는 자는 경험 이상의 위기가 닥쳐올 때 그 위기를 벗어날 길이 없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을 깨운 제자들

제자들은 자기들의 힘이 부족하고 그들이 노력하는 일이 무모한 일임을 깨달을 때 주무시는 예수님께 시선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느 때나 늦었다는 말을 믿으면 안됩니다. 이제 절망이다, 이제 모든 것이 끝장났다, 이 말은 우리를 절망의 함정으로 끌어드리려는 마귀의 거짓말입니다.

(1) 제자들은 절박한 상황에서 절박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그들의 기도는 절박했습니다.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우는 일은 우리의 기도입니다. 감사하게도 우리 주님은 절박한 상황에서 부르짖는 우리의 기도를 외면치 않으시고 들으십니다. 예수님은 잠에서 깨셨습니다. 그리고 바람과 바다를 꾸짖었습니다. 그랬더니 바람과 물결이 잠잠해졌습니다. 너무나도 놀라운 일입니다. 제자들은 어리석었습니다. 너무도 오랫동안 쓸데없는 고난을 당해야 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들 제자처럼 만신창이가 되어 죽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 그때 가서야 비로소 주무시는 주님을 깨우시면서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게 되었나이다” 이처럼 기도할 것입니까? 기도는 빠를수록 좋습니다. 회개는 이를수록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일은 속히 할수록 형통함을 받습니다.

(2)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면서 책망하셨습니다. 이 책망은 무엇을 말해주는 것입니까? 어려움을 당하면서도 왜 나를 깨지 아니하였느냐는 것입니다. 그들이 평소에 자랑하든 믿음이 어디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결 론 : 예수님은 지금 나와 함께 계십니다. 주님은 나와 함께 내 생애 중에서 살아 계십니다. 사도 바울은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히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고 했습니다(롬8:33-34). 여러분, 절대로 두려워 마십시오. 그 어떤 위기에도 주님을 의뢰하고 그에게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인생의 승리는 반드시 보장받을 수 있습니다.


(42) 거라사 인의 불 신앙

(누가복음 8 : 26 - 39)

서 론 : 사람들은 심히 충격적인 체험과 믿을만한 증거를 보고도 그 기회를 스스로 저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거라사인들의 경우가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귀신들린 청년의 온전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자기들의 돼지 떼들이 몰살한 사건으로 더욱 실감있게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이 예수님의 놀라운 권능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두려워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영접하여 그들의 구주로 섬긴 것이 아니라 도리어 예수님을 그 땅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했습니다.

1. 귀신들린 자의 간구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맞은편 거라사인의 땅에 이르셨습니다. 이곳에는 그 도시 사람으로 귀신들린 자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무덤사이에 거하고 있었는데 오랫동안 옷도 입지 않고 많은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주었던 사람입니다.

(1) 예수를 본 이 청년은 그 앞에 엎드리어 큰 소리로 부르짖었습니다. 그의 부르짖은 간구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이 이처럼 주님께 간구한 이유는 예수님이 그를 사로잡고 있는 더러운 귀신을 향하여 “이 사람에게서 나오라”는 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귀신은 인간의 육신을 지배하고 주장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 경우에 보여주고 있습니다. 귀신은 이 청년의 육체뿐 아니라 그의 정신과 생각까지도 주장하여 이 사람을 자신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2) 여기서 우리는 귀신은 그들의 세계에서 복된 삶을 살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귀신이란 원래가 사단과 함께 하늘에서 하나님을 반역한 천사의 무리들인데 그들 중에 얼마는 무저갱 속에 결박당한 채로 영원한 형벌가운데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했습니다(벧후2:4, 유6). 그러나 그 중에 어느 계층은 인류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도구로 지상에서 활동을 허락하셨습니다.

귀신들의 역할은 선택받지 못한 자들을 믿지 못하게 하고 선택받은 자들을 시험하고 연단케 하시려는데 그 사용목적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귀신들 자체의 삶도 심히 괴로운 삶이며 고통스럽고 저주스러운 삶을 살다가 결국은 영원한 멸망에 떨어져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3) 귀신들이 예수님께 간구했다고 했습니다. 귀신들의 간구한 내용이 두 가지로 나와 있습니다. 하나는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무저갱은 영적인 감옥으로 범죄한 천사들이 가 있는 곳입니다(벧후2:4). 유다서6절에서는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었다”고 했습니다. 다른 한가지는 마침 그곳에 많은 돼지 떼가 있는 것을 보고 그 돼지에게로 들어가게 허하심을 간구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간구를 허하셨습니다.

(4) 예수님이 귀신들의 간구를 허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려는데 있으셨습니다. 예수님이 귀신의 간구를 허락하신 일은 응답이 아닙니다. 기도의 응답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만 해당되는 특권입니다. 귀신들을 무저갱으로 보내지 않으신 이유는 그들은 무저갱으로 보낼 귀신들이 아니라 지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쓰임 받을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돼지 떼에게 들어가기를 허락하신 일도 거라사인들이 그들의 희생을 통한 깨달음을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거라사인들에게 예수님의 기적을 보여주시므로 복음을 전하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거라사인들 중에 선택받은 하나님의 잃은 양은 무덤 사이에 있었던 귀신들린 그 청년뿐이었습니다. 이 모든 일은 예수님께서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신 일입니다.

2. 하나님의 큰 일을 네 집에 고하라

거라시인들이 예수님이 행하신 하나님의 큰 일을 보고도 예수님을 배척한 것은 돼지 떼를 일시에 잃은 일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크신 능력과 권능에 두려움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사건의 전말을 듣고 알게 된 그들은 자신들의 재산상 손실을 애석하게 여겼습니다. 그들은 예수는 자기들에게 어떤 재앙을 가져다 주는 위험인물로 간주하게 되었으며 더 큰 재앙을 만나기 전에 그곳으로부터 빨리 떠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지금도 물질의 손실 때문에 주님을 멀리 떠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귀신 들렸던 청년은 예수님을 만나 온전해지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는 예수님과 함께 가기를 구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에게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 일 행하신 것을 일일이 고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을 집으로 보내셨습니다. 은혜 받은 사람은 먼저 자기 집에 가서 그 집안에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전도의 효과적인 방법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가를 일일이 고하는 일입니다. 그 청년은 살아있는 증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증거를 먼저 자기 집안 식구들에게 일일이 고하는 것이 전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나에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가에 대한 증거를 분명히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 사실을 감사와 기쁨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고해야 하는 것입니다.

결 론 : 이 청년은 온 성내에 전파했다고 했습니다. “저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하신 것을 온 성내에 전파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거라사인들의 불 신앙적인 태도를 버리고 이 청년이 자기가 받은 은혜를 전파한 것처럼 신실한 복음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43)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

(누가복음 8 : 40 - 56)

서 론 : 신앙생활에는 간혹 두려움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생애에는 두려워할 만한 사건들이 수시로 생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힘있게 달려가다가도 절망적인 사태 앞에 이르게 될 때 우리는 당황하게 되고 혹은 낙심하게도 됩니다. 이런 때 주님이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위로와 격려의 말씀이 있습니다. “두려워 말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두려움은 우리의 마음을 믿음에서 떠나게 합니다. 의심을 품게 하여 기도의 능력을 빼앗아 갑니다.

1. 혈루증 여인의 경우

예수님이 거라사인의 배척으로 가버나움으로 되돌아오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곳에서 많은 사람들의 환영을 받으셨습니다. 그때 회당장 야이로가 나타났습니다. 회당장의 신분은 유대인 사회에서 유대인들에게 높임과 존경을 받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앞에 나와 그 발아래 엎드려 간구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야이로를 따라 그의 집으로 발을 옮기셨습니다. 그런데 야이로의 집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기다린 또 한 명의 여인을 만나시게 되었습니다.

(1) 이 여인은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여자였습니다. 누가는 의사였기 때문에 이 여인에 관한 병 증세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고 있지만 여기서 말하는 혈루증이란 병명은 정확한 의학적 병명이 아닙니다. 원어 해석으로 보면 ‘뤼시스 하이마’로 피가 흘러나온다는 뜻으로 여자들에게 흔히 있는 유혈병으로 보며 지금 의학적인 진단으로 본다면 아마 자궁암으로 인한 고통으로 짐작됩니다. 이 여자는 이 병을 고치기 위해 오랜 기간 있는 돈을 허비해 가면서 의원들에게 괴로움을 당했지만 병 증세는 더욱 악화된 그런 상태였습니다. 이때 이 여인은 예수의 소문을 듣고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뒤를 따라 가면서 행렬에 섞였습니다.

(2) 이 여인은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가를 만졌다고 했습니다. 옷가란 길게 늘어뜨린 겉옷 네귀에 가두리 장식을 단 옷술을 말합니다. 이 여인의 병은 율법적으로 부정한 병이었으므로 예수님 앞에 나가서 자기 병을 위한 간구를 드리지 못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옷가를 만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걸음을 멈추시고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이 예수님의 옷가에 손을 댔을 때 자신의 능력이 그에게 나간 줄을 아셨던 것입니다.

(3)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하셨습니다. 이 여인은 야이로와는 신분의 차이가 많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의 믿음은 질병의 고통 중에서 예수님께 최종적인 소망을 둔 믿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 앞에 엎드리지도 않았고 간절하므로 간구하지도 아니했습니다. 그런데도 이 여인은 그의 믿음대로 증시로 고침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예수님께만 연결되면 그로부터 능력이 나오기 때문에 무슨 문제이건 해결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2. 야이로의 딸의 경우

혈루증 여인과의 대화가 아직 진행 중일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그 집의 종인 듯한 이 사람의 말은 “당신의 딸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예수 선생을 더이 상 “수고를 끼쳐 괴롭게 하지 말라”고 권고했습니다.

(1) 이 세상 사람들은 죽음을 인생의 최종적인 절망으로 알고 있습니다. 병으로 앓아 죽어갈 때는 그래도 고침을 받을 수 있는 소망이 있지만 숨이 끊어져 죽은 후에는 더 이상 무슨 소망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2) 예수님께서 이 같은 전갈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집에서 보낸 사람에 의해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 야이로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절망이 왔을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이 야이로를 향하여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손길은 언제 우리 가까이 계십니다. 그는 말씀으로 우리를 붙들어 주십니다.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3) 두려움을 내쫓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믿음에는 언제나 그 주변에 두려움이 따릅니다. 그러나 믿음과 두려움은 공존할 수 없습니다. 믿음의 능력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두려움을 내어쫓아야 합니다. 두려움을 쫓는 방법은 주님을 의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끝까지 말씀에 순종하는 일입니다.

(4) 예수님은 그 집에 들어가 그 죽은 딸을 살려내셨습니다. 집에 들어서니 애곡하는 무리들이 통곡하고 있었습니다. 야이로의 딸의 죽음은 이제 부인할 수 없는 분명한 사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야이로는 예수님 곁을 떠나지 않고 끝까지 따랐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들에게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는 깊은 뜻이 들어 있습니다. 잔다는 말은 다시 살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 소녀가 예수님의 권능으로 좀 뒤에 다시 살 수 있거니와 그 보다는 이 말씀의 뜻은 그리스도인의 죽음은 결코 죽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활의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결론 : 예수님은 아이의 손을 잡고 “아이야 일어나라”고 명하니 그 영이 돌아와 다시 살아났습니다. 우리는 믿기만 하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만을 믿고 끝까지 순종해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약속이 있고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면 아무 일에나 두려워말고 믿음으로 나가야 믿음의 승리가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9장(44 ~ 51)

◆ 밤중소리 01-11 | VIEW : 591

(44) 권세를 주신 예수님(누가복음 9 : 1 - 6)

(45)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누가복음 9 : 7 - 17)

(46)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누가복음 9 : 18 - 22)

(47) 참 생명의 가치(누가복음 9 : 23 - 27)

(48) 오직 예수만 보이더라(누가복음 9 : 28 - 36)

(49)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누가복음 9 : 37 - 43)

(50) 누가 크냐(누가복음 9 : 44 - 48)

(51) 세 종류의 사람(누가복음 9 : 49 - 62)


(44) 권세를 주신 예수님

(누가복음 9 : 1 - 6)

서 론 :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는 전도의 훈련이 필요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그들의 곁을 떠났을 때 그들 스스로 복음을 전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때를 대비하여 그의 제자들에게 부지런히 전도자로서의 사명을 익혀주고 복음을 전하는 훈련을 시키신 것입니다.

1. 능력과 권세를 주신 예수님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려고 전파하려 나갈 때에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1) 능력과 권세를 주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입니다(마28:18). 예수님은 만민을 지배하시는 권세 자이십니다(요17:2). 예수님은 그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들고 계시는 분입니다(히1:3). 예수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분입니다(요1:3-10).

예수님은 이처럼 능력과 권세의 주체가 되시는 분이시므로 모든 능력과 권세는 그 분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 어떤 능력과 권세가 있다 해도 그것을 나에게 주신 분은 오직 예수님이시며 그것을 주신 이유는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는 청지기의 사명으로 주신 것으로 알아야 합니다(마7:22-23).

(2)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권세를 주셨습니다. 이런 권세는 복음 전도의 사명을 가지고 떠나는 그 때에만 부여해 주신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언제나 귀신을 제어하고 병든 자를 고치는 권세와 능력이 따랐던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한 간질병 들린 어린 소년을 고쳐주는 일조차 실패했습니다(마17:16). 하나님께서는 필요할 때에 우리에게 능력과 권세를 주십니다. 그러나 그것이 언제까지나 우리에게 머물러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어떤 경우에 혹 놀라운 권능이 우리의 기도나 손길을 통해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권능이 항상 나타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3) 복음을 전할 때에 능력이나 권능을 따르는 일은 오히려 예외적인 일이지 반드시 따르는 일이 아닙니다. 복음을 증거할 때에 기적이나 이적이 일어났다고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고전12:3).

복음을 받아드리는 일은 이적이 아니라 개인적인 성령의 나타나심에 있습니다. 복음엔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기 때문에 복음 그 자체가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능력이요 권세인 것입니다. 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고 말했습니다(롬1:16). 우리는 기적을 나타낼 수 있는 권능을 받아 복음을 전하여는 생각보다는 복음을 능력 있게 증거케 하시는 성령의 권능을 받아야 합니다.

2.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의 자세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능력과 권세를 주시면서 그들이 각 고을에 파송되어 복음을 전할 때 그들이 취해야 할 전도자의 자세를 몇 가지로 일러주셨습니다. 그것은 복음을 전하려고 여행할 때 아무 것도 가지고 갈 것이 없다는 것과 영접하지 않는 자들에게 증거를 삼으라고 하신 일입니다.

(1) 지팡이를 가지고 다니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에는 지팡이의 종류나 그 사용도에 대한 말씀이 여러 가지로 나오지만 이곳에 나와 있는 지팡이는 여행을 위한 보신도구를 의미합니다. 중동지역은 사막이 많은 지방이라 각가지 해로운 짐승이 출몰합니다. 나그네들은 이 같은 해로운 들짐승의 피해로부터 자기 방어의 수단으로 지팡이를 필수적인 여행 휴대품으로 들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그런 일에 신경을 쓰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보호해 주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2) 주머니나 양식을 가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주머니란 물건이나 옷 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필수품을 챙겨 넣는 가방을 말합니다. 양식은 식생활에 필요한 음식입니다. 전도인은 이런 의식주에 대한 염려에 집착하면 안 된다는 교훈이십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나그네들을 성심껏 대접하는 습관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하나님께는 일꾼이 자기 일에 대한 정당한 삯을 받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3) 돈이나 두벌 옷을 가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전도는 호화로운 여행이 아닙니다. 만약 전도인이 돈을 많이 가졌다거나 여러 벌의 옷을 가지고 다닌다면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자세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딤후1:8).

(4) 어느 집이든지 유하든 곳에 머물다가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전도인이 대접이 소홀하다는 이유로 유숙하는 곳을 옮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정성껏 맞이한 가정이면 떠날 때까지 그곳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결론 :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너희를 영접치 아니하거든 증거를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영접치 아니한다는 말은 노골적으로 핍박하는 일을 말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로 그 마을에서 내쫓는 일을 말합니다. 이들이 그 성에서 떠날 때까지 회개치 아니하고 계속하여 핍박한다면 그 성에서 떠날 때 너희 발에서 먼지를 떨어버려 저희에게 증거를 삼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 같은 주님의 당부를 듣고 복음을 힘있게 전했다고 했습니다.


(45)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누가복음 9 : 7 - 17)

서 론 : 벳세다 들판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예수님은 전도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제자들을 거느리시고 벳세다란 곳으로 떠나가셨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도 이 사실을 탐지하고 그곳까지 따라왔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마지하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들려주시면서 병든 자의 병도 고쳐주셨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덧 날이 저물었습니다. 날이 어두어지자 제자들의 마음이 조급해졌습니다. 그것은 이 많은 군중들에게 먹을 것을 먹여야 할 일이 걱정스러워졌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으로 가서 유하며 먹을 것을 얻게 하소서”라고 여쭸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태연한 자세로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 헤롯왕의 두려움

그 당시 헤롯왕은 갈리리와 베뢰아 지방의 분봉왕이었는데 그에게 예수님의 놀라운 사역과 그의 제자들의 기적적인 전도활동의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헤롯왕은 이런 소문을 듣고 심히 당황했는데 그것은 혹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도 말하며 혹은 엘리야가 나타났다고도 하며 혹은 옛 선지자 중 하나가 다시 살아났다는 소문이 들려왔기 때문입니다.

분봉왕이란 자기의 통치권이 미치는 어느 특정지역의 통치자를 말합니다. 헤롯은 한가지 걱정이 생겼는데 그것은 예수란 사람이 자기 주변에 갑자기 나타나 세례요한과 똑같이 불의를 책망할 뿐 아니라 기사와 이적을 행하며 많은 군중들이 그를 따른다는 말에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던 것입니다. 더욱 헤롯의 마음에 두려움을 안겨준 것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서 예수의 이름으로 역사하고 있다는 소문입니다. 만약 이런 소문이 사실이라면 자신의 생명과 왕권에 크나큰 위협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2.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예수님을 따른 무리들은 큰 군중이었습니다. 어린아이들과 여자들을 제외하고도 오 천명에 이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을 유하게 하며 그들에게 배불릴 음식을 제공해 준다는 일은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무리를 보내어 두루 마을과 촌으로 가서 유하며 먹을 것을 얻게 하소서” 건의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고 명하셨습니다.

(1) 그들은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먹을 것을 주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수중에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우리에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으니“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주리고 명하셨을 때 주었으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는 것이 현실적으로 너무나도 부족한 사실에 집착한 나머지 “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먹을 것을 사지 않고는 할 수 없나이다”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이 주라고 하신 말씀에 그들의 믿음이 따르지 못한 것입니다. 그들은 “주어라”고 하셨을 때 말씀을 따라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주었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주라고 명하신 것은 그들에게 있는 것이 군중들을 먹일 수 있는 양식으로 넉넉했기 때문입니다.

(2) 그들이 줄 수 없었던 것은 “할 수 없다”는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인 생각에 얽매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분명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먹여야 할 대상은 무려 남자만 오 천명이나 됩니다. 그런데 그들의 손에 쥐어져 있는 것은 불과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입니다. 그들의 이 같은 인간적인 생각이 주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지 못하게 했습니다.

(3) 기적은 순종에서 나옵니다. 만약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들의 가지고 있는 그대로를 가지고 무리들에게 나누어주었더라면 예수님의 손에서 이룩하셨던 그 놀라운 기적이 그들의 손에서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능력이 전혀 미칠 수 없는 일이라도 ‘말씀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가 하겠나이다’고 하는 믿음을 가지고 주의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한 선지자의 아내가 엘리사의 말을 듣고 동네에서 빈 병을 많이 빌려왔습니다. 그리고 한 병밖에 없는 기름을 그 수다한 빈 병에 붓기 시작했습니다. 만약 이때 이 여인이 ‘엘리사님, 이런 일은 불가능합니다. 어찌 한 병의 기름으로 이 많은 빈 병에 채울 수 있다는 말입니까?’고 이의를 제기하고 따르지 않았다면 그 여인에게는 아무런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왕하4:1-7).

(4) 이 말씀의 교훈은 네가 가진 것으로 네 이웃의 가난을 구제하라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나는 가진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좀 더 많은 것을 소유한 이후에 구제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네 그 많은 것 중에서 얼마간 주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네게 무엇이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구제하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듣고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그는 더욱 부하게 되는 복을 받을 것입니다(잠11:24). 그는 후히 주시고 넘치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눅6:38).

결론 : 주님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습니다. 내게 있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바쳐야 합니다. 가장 작은 것이라도 감사하므로 봉헌하고 헌신해야 합니다. 기적은 여기서 나옵니다. 넘치는 보상도 여기서 받게 됩니다.


(46)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누가복음 9 : 18 - 22)

서 론 :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올바른 메시야 관을 심어주시려고 시간이 있을 때마다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유대인의 메시야 관은 영광의 메시야 관입니다.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으시는 메시야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의 메시야 관 역시 그러했습니다. 다만 다른 유대인들과 달랐던 것은 그들은 예수님을 자신의 메시야인 줄 믿고 따랐지만 그러나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실 고난의 메시야로서가 아니라 장차 예루살렘에 올라가 왕으로 등극하실 영광의 메시야로 믿고 따랐습니다.

1. “무리가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께서 따로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이 주와 함께 있었다고 했습니다.

(1) 예수님은 제자들로부터 신앙고백을 들으시기 위해 먼저 “무리가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실인즉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이 자기를 누구로 알고 있건 그런 일엔 별로 관심을 갖지 아니하셨습니다. 이처럼 묻게 된 이유는 제자들의 대답이 세상 사람들과 어떻게 다른 것인가에 대해 그들 자신이 알도록 하시기 위해 먼저 이처럼 물으신 것입니다. 이런 주님의 질문에 제자들은 세간에서 퍼지고 있는 예수님에 관한 평판을 세 가지로 줄여 말씀드렸습니다.

① 더러는 세례요한이라고 말하고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보다 빨리 공생애에 들어갔기 때문에 세례요한이 하나님의 선지자로써 유대인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런 세례요한이 헤롯왕에 의해 죽음을 당한 후, 통분해 하다가 이어 예수님의 권능 행하심과 권위 있는 말씀 선포로 많은 사람들에게 죽은 세례요한이 살아난 것이란 소문이 퍼지게 된 것인데 이 말이 모든 사람들에게 잘 먹혀 들어간 것입니다. 헤롯왕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② 더러는 엘리야라고 알려져 있다고 말했습니다. 엘리야란 아합왕 시대 선지자 엘리야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오시기전 엘리야가 먼저 나타날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마17:10-13).

이 엘리야에 대한 예언은 말라기에 있습니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라고 하신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말4:5). 많은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로는 생각지 않고 이 엘리야로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은 영광의 몸으로 오신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③ 다음에 더러는 옛 선지자 중에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 말은 옛날에 등장했던 하나님의 선지자와 같은 그런 선지자의 사명을 가지신 분이 아니시겠느냐는 관점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이 알고 있는 예수님의 관점은 대단히 다양하고 잘못되어 있었습니다.

2.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님은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시기 위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알고 싶어하신 것은 제자들이 입에서 나올 그들의 대답이었습니다. 그들 중에 먼저 베드로가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고 대답했습니다.

(1) 그리스도란 말은 히브리어 메시야의 역어로 기름부음을 받은 자란 뜻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부른 것은 왕으로서의 기름부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제사장이나 선지자로서의 직분도 함께 가지고 계시지만 그의 기름부음의 근본은 왕으로서의 직분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단9:24절에서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고 예언되어 있는데 이 예언은 예수님의 천년왕국에서의 왕으로서의 기름부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단9:25,26절에서 예언되어 있는 기름부음은 예수님의 초림의 메시야적 사명의 직무로 받으실 기름부음이십니다.

(2) 제자들이 바른 메시야 관을 고백은 했지만 메시야의 사역을 이해한 것은 아닙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성경에 예언된 메시야이심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들 역 시 잘못된 메시야 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사야53장에 예언된 고난의 종으로서의 메사야가 아니라 유대인들이 기다리고 소망하는 영광의 메시야 관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고백을 하면서도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실 것이라고는 상상치 못하고 있었습니다.

(4)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말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경계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자기 선생이 메시야라고 알려 준다고 해도 메시야 관 자체가 잘못되어 있는 유대인들에게는 믿어지지 아니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라 만약에 메시야 관에 대한 잘못된 지식으로 예수님을 환영한다면 아마 예수님을 억지로 잡아 자기들의 왕으로 삼으려는 민중운동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런 일은 예수님의 메시야의 사역에 많은 지장을 초래할 것입니다.

결 론 :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제자들을 향하여 자신이 받으실 고난에 대하여 숨김없이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 3일에 살아나야 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같은 말씀은 그들로 이사야로 예언한 사53장에 대한 예언을 깨닫게 하시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예수님이 우리를 향하여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신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올바른 신앙고백을 할 수 있는 성도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47) 참 생명의 가치

(누가복음 9 : 23 - 27)

서 론 : 예수님은 자신의 고난 당하심에 대한 말씀을 들려주시면서 제자들이 살아가야 할 삶의 자세에 대하여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고난을 따르는 일은 주님의 영광에 동참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필수조건입니다. 이것을 교회에 넘겨주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했습니다(골1:24).

1. 주님을 따르는 자의 삶의 태도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는 무리들을 향하여 “아무든지 나를 다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나 지금이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의 걸림돌이 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참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임을 알아야 합니다.

(1)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의 삶의 자세는 첫 번째로 자기를 부인하는 일입니다. 여기서 말씀한 자기란 육신의 사람으로 자기 본위로 살았던 옛사람을 가리킵니다. 이 옛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몸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생활에서 이 사람을 날마다 부인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육신의 생각대로 살아도 안되고 육신대로 살아도 안됩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라고 하셨습니다(롬8:6-8).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고 하셨습니다(롬8:13). 영으로 산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이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육신대로 살면 죄를 범하게 되지만 영을 좇아 살면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해 주신 것은 육신의 행실을 버리고 하나님을 향하여 새로운 열매를 맺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롬7:4).

(2)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십자가란 고난과 시련을 말합니다. 자기가 잘못하고 그 일로 자신에게 찾아오는 시련을 십자가란 말로 포장해서는 안됩니다(벧전4:15). 십자가란 자기 생애의 억울한 일, 받지 않아도 될 일 때문에 받는 고난을 말합니다. 이 같은 자기의 십자가를 제각기 짊어져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십자가를 지는 일에도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세상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받는 고난이 있습니다. 질병도 오고 사고도 오고 실패도 오고 죽음도 옵니다. 우리는 이 짐을 져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지는 방법이 세상과는 다릅니다. 우리는 이런 우리의 짐을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벧전5:7). 다음에 우리는 주를 위해 져야하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노라면 이런 일은 때때로 찾아옵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고 하셨습니다(마5:10-12).

2. 목숨을 잃는 일과 얻는 일

예수님은 다시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1) 여기 자기 목숨을 구원코자하는 목숨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목숨은 자신의 육신의 위한 풍요로운 삶을 의미합니다. 이 사람은 이미 십자가에서 죽었어야 할 옛 사람의 생각대로 살아가는 생애를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의 결국은 자기 생명을 잃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잃을 것이라고 하신 이 생명은 영적 생명, 영원한 생명을 말합니다.

(2) 그러나 여기 또 하나의 경우가 있는데 이 사람은 주님을 위해 자기의 육신의 목숨을 버리는 사람입니다. 주님을 위해 우리가 버려야 할 목숨이란 순교를 가리킨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위해 받는 고난을 의미합니다(딤후1:8). 자신의 생애를 주님을 위해 바치는 일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일을 말합니다. 이처럼 주를 위해 자기의 육신 적인 목숨을 바치면 구원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말씀하신 구원은 영적 생명의 구원을 말합니다. 그뿐 아니라 영적 생명의 풍성한 축복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3) 예수님은 인생의 생명의 가치를 높이셨습니다. “사람이 만일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천하를 얻어도 그 가치는 생명의 가치만 못한 것입니다. 천하를 얻는 인생을 살아가도 자기의 생명을 잃는다면 그의 생애는 결과적으로 인생의 파멸뿐입니다(눅12:15).

결 론 :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처럼 말씀하시면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부끄러워한다는 말은 ① 주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육신의 뜻대로 살아가는 일을 말합니다. ② 육신의 정욕으로 인하여 주의 말씀대로 살아가기를 기피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③ 그리스도 때문에 고난 당하는 일을 싫어하는 일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마지막 주 재림의 날에 인류의 최종적인 심판의 날에 한없는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부끄러움을 당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 날에 주님의 영광에 동참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48) 오직 예수만 보이더라

(누가복음 9 : 28 - 36)

서 론 : 예수님의 공생애의 정점은 그의 십자가에서 받으신 고난입니다. 예수님은 이 문제로 많은 시간을 기도하셨으며 잡히기 전날 밤에도 밤새도록 이마에 땀을 흘리시며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느 날 베드로와 요한과 야곱을 데리시고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셨습니다.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에 그 용모가 영광의 광채로 변모되셨다고 했습니다. 그때 문득 모세와 엘리야가 영광 중에 나타나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시는데 그 대화의 내용이 주님이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일에 대한 것이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1.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

예수님이 산에 오르시기 전, 제자들과의 대화에서 자기의 참 생명을 찾는 일에 대한 말씀을 들려주시면서 결론적으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고 하시면서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에 나온 27절 말씀에 대한 해석이 구구합니다.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라고 하신 말씀은 그곳에 있었던 주님의 제자들을 가리킨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 제자들이 다 죽었는데도 아직 예수님은 영광 중에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을 그의 실제적인 재림이 아니라 다른 각도로 해석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말씀은 오순절의 성령의 임하시므로 성취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하늘로 승천하시고 오순절에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이 같은 성령의 보내심은 예수님이 친히 우리에게 다시 오시겠다고 하신 약속의 이행이 되십니다(요14:18-19).

그뿐 아니라 예수님은 오순절을 기점으로 당신의 교회를 이 땅위에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같은 사실에 대해 너희가 본다고 하신 점으로 보아 “너희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다”고 하신 말씀이 그의 성령강림으로 이루어졌다고 할 것입니다.

2. 예수님의 측근에 있었던 세 제자

예수님 곁에는 열두 명의 제자가 항상 그림자처럼 따라다녔지만 예수님은 그 중에서도 특히 세 제자를 더 가까이 하셨습니다.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과 야곱입니다.

(1) 이들은 주님의 기도를 돕는 기도의 동반자들이었습니다. 밧모섬에서의 사도 요한의 깊은 기도를 볼 때 이들 세 제자들은 주님 곁에서 주님의 기도를 도와 두릴 수 있는 기도의 사람들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비록 그들이 이 산에서나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다가 졸며 자기고 했지만 그래도 그들은 열두 명의 제자들 중에서는 으뜸으로 손꼽을만한 제자였습니다.

(2) 이들은 다른 제자들에 비해 담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나중에 베드로는 유약한 계집종들 앞에서 주님의 이름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예수님이 결박당하여 끌려가신 대제사장의 집 뜰까지 들어갔었다는 사실과 요한은 끝까지 예수님의 재판과정을 지켜보았다는 사실은 그들의 담대한 믿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최초의 순교자로 복음을 위해 피를 흘린 사도입니다.

이들 세 명의 제자들과 함께 산에 오르신 예수님은 그 용모가 변화되셨다고 했습니다. 이 변화는 변형으로 일반적인 변화란 뜻과는 다릅니다. 이 변형은 다른 곳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이루어진 변화가 아니라 스스로 가지고 계시는 자기 모습의 영광을 그때 나타내신 것입니다.

엘리야의 영광의 모습은 살아서 영광의 몸으로 변화 받을 종말 성도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고전15:5

1). 엘리야는 죽음을 거치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사람입니다. 그의 하늘에 올라가 있는 모습이 영광의 모습으로 변화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영광의 몸으로 변화되신 이유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명을 띠고 주님을 찾아온 모세와 엘리야와의 상면을 위해서입니다. 영광의 모습으로 주님을 찾아온 그들과 대면하시려면 예수님도 영광의 모습으로 변형되어야 하셨기 때문입니다.

(3)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주님께 나타나 하마께 나눈 대화의 내용은 주님이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일에 대한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아마 주님의 고난의 시간이 다가오므로 주님으로 하여금 더욱 확고한 믿음을 가지시고 대비하게 하시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세 제자들이 잠에서 깨어나 이 같은 광경을 바라보았을 때 그들은 너무나도 황홀한 나머지 베드로가 주님을 향하여 초막 셋을 지을 것을 제의했으며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간청은 받아드려질 수 없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구름이 내려와 모세와 엘리야를 덮었습니다. 이때 구름 속에서 말씀이 들려 왔습니다.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결 론 : 구름 속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서을 듣고 있었던 이들 세 제자들 앞에는 어느덧 모세도, 엘리야도, 구름도 사라지고 “오직 예수만 보이더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바라보았던 이 모든 일들은 “오직 예수만 보이기 위함”이였습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신비에 치우치지 말아야 하며 우리의 초점을 다른 곳에 돌려서는 안됩니다. 영생이신 분은 오직 예수이십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분은 오직 예수이십니다. 예수만 바라보는 성도가 최종적으로 승리하는 성도가 됩니다.


(49)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

(누가복음 9 : 37 - 43)

서 론 : 예수님은 믿음이 없는 세대에 오셨고 패역한 세대에 오셨습니다. 그는 이 세상에 계실 동안 끊임없이 탄식하셨으며 그런 어둠 속에서 그의 사역을 이루셨습니다. 세 제자들과 함께 높은 산에 오르셨던 예수님이 이튿날 산에서 제자들과 무리들이 있는 동리로 내려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아들의 병을 고침 받기를 원하는 한 아버지의 간절한 간청을 받으시면서 이 같은 탄식의 책망을 주신 것입니다.

1. 제자들의 실패와 주님의 탄식

예수님이 산에서 내려오시자 제자들을 둘러싸고 그 주변이 떠들썩했습니다. 제자들은 난감한 표정으로 많은 사람들 앞에서 당황해 하고 있었습니다. 귀신들려 경련을 일으켜 고통을 당하는 한 어린아이를 가운데 놓고 쩔쩔매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아비가 자기 외아들의 병을 고쳐보려고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부탁했지만 귀신이 물러가지 않고 여전히 병 증세가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조롱을 당하면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들 제자들은 왜 귀신 들려 고통을 당하는 그 아비의 아들을 고쳐주지 못한 것입니까?

(1) 제자들은 주님과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주님과 떨어진 심령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사람은 언제나 주님과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능력과 권능은 주님과 함께 하실 때 비로소 나타나는 것입니다.

(2) 그들은 기도생활에 나태했습니다. 예수님이 습관을 따라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실 때에도 그들은 동행치 아니했습니다. 기도를 시켜도 그들은 졸거나 잠자는 일이 일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무엇이나 주님의 권능을 받고 그 권능의 힘으로 될 줄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도가 없이는 그 어느 누구도 아무 것도 받을 수 없습니다. 이 같은 사실은 마17:21절에 있는 난하주에서 밝혀주고 있습니다. “기도와 금식이 아니면 이런 류가 나가지 아니하느니라”고 했습니다. 한번 받은 은혜나 몇 번 행한 권능을 믿고 기도생활에 나태하게 되면 그 사람은 이제 아무 일도 주의 이름으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은 무리들을 향하여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너희를 참으리요”하시면서 탄식하셨습니다. 그들에게 많은 권능을 보여주시고 권능을 행할 수 있는 권능을 주셨건만 그들은 그것을 간수하지 못하고 상실해 버린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주님과 멀리 떨어져 있을 때 우리는 올바른 믿음이나 주님이 주신 권능이나 능력을 행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 속에 계시는 성령께서는 심히 탄식하십니다(롬8:26).

(4) 주님은 그 아들의 아비와 그와 함께 있는 무리들의 불 신앙을 탄식하셨습니다. 예수님 주변에는 언제나 많은 무리들이 따랐습니다. 겉으로는 신앙이 좋은 듯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그 어떤 결정적인 기적을 원했습니다. 적어도 메시야된 권능이나 기적이라면 홍해를 가르거나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게 했던 모세의 권능쯤은 나타내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유대인들의 지배적인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기록된 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먹게 하였다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요6:30-31). 이 말씀은 예수님을 향하여 당신이 메시야라면 더 큰 이적을 보여야 우리가 믿을 것이 아니겠느냐는 불 신앙적인 요구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같은 저들의 불 신앙에 마음을 아파하시면서 탄식하신 것입니다.

(5) 예수님은 패역한 세대를 탄식하셨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참 신앙을 버리고 외식하는 신앙으로 회칠한 무덤을 만드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율법, 율법을 외쳐댔지만 그들이 지킨다는 율법으로 그들 자신이 스스로 정죄를 받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율법을 지키는 태도에 대해 “화 있을진저”를 선언하셨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눈앞에 조상 대대로 대망 해 온 메시야를 바라보고도 그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의 권위로 귀신을 쫓아내고 각가지 이적을 행하셨지만 그들은 그 증거들을 믿으려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의 일을 한다고 모욕했습니다. 참으로 주님의 심정은 말할 수 없이 답답하고 가슴 터지는 탄식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3. 네 아들을 데려 오라

예수님은 그들을 이처럼 책망하시면 서도 그들이 당하고 있는 처지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아이의 아비에게 “네 아들을 이리로 데리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그 아비는 자기 아들을 주님께 데려왔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 아비의 끈질긴 간구를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 제자들에게 부탁했지만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실망하지 않고 산에서 예수님이 내려오시기를 기다렸습니다. 기다리는 신앙은 응답을 받습니다. 이 아버지는 믿음이 없었지만 주님의 자비에 의지하여 호소했습니다(막9:24). 우리는 우리의 문제점을 가지고 주님께 나가야 합니다. 믿음이 없을지라도 믿음을 구하면서 주님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합니다.

결 론 : 지금 우리는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제 주님 오실 날이 얼마 남지 아니했습니다. 우리는 이 패역한 세대에 물들지 말고 거룩하므로 의의 세마포로 단장해야 합니다.


(50) 누가 크냐

(누가복음 9 : 44 - 48)

서 론 : 사람이 살아가는 사회는 계급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어느 곳이건 사람이 모이는 곳엔 큰 자와 작은 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제각기 큰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간에도 이 작은 자와 큰 자에 대한 말이 오고 갔습니다. 그들에게 이 문제는 그들 자신의 심각한 문제라고 여겼습니다. 그 이유는 이제 얼마 안 있으면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고 예수님이 그 나라의 왕이 되실 터인데 그때 가서 우리 중에 누가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를 것인가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이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은 우리들이 하나님 나라에 올라가서 과연 누가 높은 사람, 큰 자의 위치에 오르게 될 것인가에 대한 문제가 제기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은 이 땅위에서조차도 교회에서 누가 큰 자냐는 문제를 가지고 시기하고 싸울 때도 있는 것입니다.

1. 숨김이 된 말씀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그들이 깨닫지도 못하는 말씀을 자주 들려주셨던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제자들이 이해도 못하고 잘 깨닫는 것 같지도 않은 그런 말씀을 왜 하시는지 의아심을 가질 때가 있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의 말씀 중에는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신 말씀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우리라”는 말씀을 제자들에게 들려주셨는데도 제자들은 그 말씀의 뜻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다니엘도 하나님으로부터 종말에 관한 많은 환상과 되어질 일에 대한 예언을 받았지만 그때 그 자신은 아무 것도 알 수 없었습니다. 그에게 주신 환상과 예언은 종말에 되어질 일이기 때문에 종말에 살아가고 있는 하나님의 사람에 의하여 해석이 되고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말씀을 적절히 주십니다. 그러나 언제나 믿음의 분량과 은혜의 깊이에 따라 주시기 때문에 뜻을 모르고 듣는 경우도 있지만 어느 시기에 가면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남으로 우리에게 유익한 것입니다. 만약 전도 초기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자기들의 선생님이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우리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의 뜻을 알 수 없었던 것은 그들에게 고난의 메시야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직접 부활의 주님을 만난 이후에야 이 말씀을 깨달았던 일은 주님의 사역이나 제자들 자신을 위해 대단히 유익한 일이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말씀 중에는 숨김이 되는 말씀도 있습니다. 구약에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실이 전혀 숨겨져 있었습니다. 이사야 53장에 대한 메시야의 고난은 아직도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 숨겨져 있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장차 예수님이 그들 앞에 나타나실 때 그때 비로소 그 숨김이 벗어져 드러날 것입니다. (슥12:10) 숨김이 되는 말씀은 그때에 이르러야 드러나는 것입니다. 주님이 장차 당하실 고난이나 부활에 대한 것은 철저하게 숨겨진 말씀입니다. 제자들 뿐 아니라 제사장들에게도 바리새인들에게도, 사두개인들에게도 숨겨진 말씀이었습니다. 사단에게도 숨겨진 말씀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는 그 일로 완전한 승리를 거둘 줄로 알았던 것입니다. 지금 종말에 관한 숨겨진 말씀들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을 연구할 때 하나님께서 그 숨겨진 것을 벗겨 주심으로 깨닫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2. 누가 큰 자냐?

주님을 따르고 있는 열 두 명의 제자들은 그들의 심중에 언제나 누가 높으냐? 는 잠재적인 의식이 꿈틀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그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생각에 예수님이 왕으로 오르실 하나님의 나라가 속히 올 줄로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그때가 가까울수록 더욱 표면에까지 드러내 놓고 다투는 양상을 띄웠습니다. 야고보와 요한 형제는 너무 다급한 나머지 다른 제자들을 제쳐놓고 “우리의 구하는 것을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고 아뢰면서 한다는 소리가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하는 실로 어처구니없는 간청을 올린 일도 있었습니다(막10:35-45).

(1) 예수님은 한 어린아이를 데려다가 앞에 세우시면서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 어린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여기서 주님은 어린아이의 영접에 대한 말씀으로 누가 크냐고 하는 그들의 변론에 교훈을 주셨는가? 어린아이란 그의 신분의 비천을 말합니다. 교회에서 이처럼 소외당하는 비천하고 낮은 사람들을 영접하는 사람이 참으로 큰 자로 인정받을 수 있는 자란 뜻입니다. 어린아이란 낮은 자리에 있는 형제를 말합니다. 신분이 낮고 가난하고 멸시 당할 수밖에 없는 약한 자를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헌신하며 봉사해 주는 사람이 교회에서 큰 자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교훈 해 주신 것입니다.

(2)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이가 큰 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큰 자가 되기를 원하면 작은 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은 가히 역설적인 말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이 역설적인 말씀이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 중에는 신분의 고하, 재산의 차등, 인격과 인품의 차이, 학식의 유무에 있어서 많은 차이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런 중에도 제각기 자신들이 스스로 크다고 자부하고들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중에서 가장 작은 자로 생각하고 인정받기를 힘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3) 작은 자가 되려면 겸손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겸손한 자란 자신을 다른 모든 사람에 비하여 쓸모 없는 사람으로 낳은 것이 하나도 없다고 여기고, 언제나 다른 사람의 의견을 존중하고 다른 사람의 인격을 존귀히 여기며, 바르고 의로운 일에 자신의 견해를 꺾고 올바른 주장을 따르는 자세를 말합니다. 만약 겸손에 진실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 겸손이야말로 위장된 겸손이요 외식 적인 겸손이기 때문에 우리는 겸손이란 말에 매우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4) 다음에 가장 작은 자가 되라고 하신 말씀은 하나님의 교회에서 스스로 비천한 자의 자리에 서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존귀한 줄로 여기는 사람은 하나님께 비천히 여김을 받을 사람입니다. 마리아처럼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고 하는 겸비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눅1:38). 예수님의 비천은 우리의 본 받을 바가 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셨다”고 했습니다(빌2:6). 그는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다”고 했습니다(빌2:8). 우리들이 하나님의 교회에서 취할 태도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언제나 자기를 비천한 존재로 낮추어야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으며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5) 다음에 가장 작은 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은 자신의 부족과 죄인 됨을 바라볼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 완전한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부족을 안다는 일은 자기 발전의 시작입니다. 자신의 죄를 바라 볼 수 있는 사람은 어느 누구 앞에서도 자기를 내세울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우리는 자신의 부족과 자신의 죄를 바라보는 가운데 자신의 비천함과 하나님 앞에서의 죄인 됨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교회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높은 자로 인정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가시기 바랍니다. 가장 작은 자의 위치에서 헌신하시고 봉사하십시오. 그러면 가장 큰 자의 상급을 받을 것입니다.


(51) 세 종류의 사람

(누가복음 9 : 49 - 62)

서 론 : 예수님을 좇고자 하는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많이 있습니다. 은혜를 받으면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져 주님을 따르려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 같은 마음은 세상에 얽매인 줄로 인하여 우리의 원하는 바를 가로막을 때가 많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세 인물은 모두 마음으로는 주님을 따르기로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주님을 좇는 일에 실패했습니다. 우리는 이들 세 사람의 경우를 잘 살펴보는 중에 우리들도 그들처럼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주님을 따를 수 있는 참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1. 주님의 두 가지 책망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 되어진 일입니다. 요한이 예수님께 달려와서 자신이 본 한가지 사건에 대한 보고를 올렸습니다. “주여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고 했습니다. 이 같은 일을 행한 사람들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그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는 일은 사실로 보아집니다. 제자들은 이것을 금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일을 구태여 금할 필요가 없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로는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는 일이나 주의 일을 행하는 일에 그런 일이 우리의 독점 물처럼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들이 주의 이름으로 하는 일의 공과는 주님께 맡기고 너희는 너희에게 맡겨주신 사명에 충성하면 된다는 의미로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또 하나는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사마리아 땅을 지나가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여행 중에 시장하신 지라 제자들을 사마리아 고을로 식사 준비차 먼저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그곳 사마리아인들이 이들 일행을 거절했습니다. 예수님 일행은 그들로부터 나그네 대접을 받지 못하고 시장 끼를 참아가며 지나치게 되었습니다. 이때 화가 치민 요한이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 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고 물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요한을 돌아보시며 꾸짖으셨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다가 혹 요한과 같은 경우를 만나 감정이 북받쳐 오를 때가 있을 것입니다. 이때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저주를 부어주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모든 사람에게 관대하셨습니다. 만약 주님이 이처럼 관대치 아니하셨다면 아마도 그 당시 유대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멸망을 당했을 것입니다. 이 같은 일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꾸짖으시며 다른 촌으로 발길을 옮기셨습니다.

2. 세 사람의 경우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입니다. 제자들도 흥분에 쌓여 있었고 주님을 따르는 군중들도 많은 흥미를 가지고 따랐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지금 올라가시는 그 길이야말로 새로운 왕국을 이루는 길 인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의기양양했던 것입니다.

(1) 그런 중에 어느 한사람이 예수님께 가까이 와서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고 했습니다. 이 사람은 주님을 따르는 일을 안이하게만 생각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일은 즐거운 일이요 기쁨이 충만한 길이요 축복을 받을 길로만 생각한 것입니다. 우리들의 경우도 이 사람의 경우와 같은 마음으로 주님을 따르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기쁨으로 따라갑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돌밭에 뿌리었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라고 하신 것입니다(마13:20-21).

예수님은 그에게 “여우도 굴이 있고 궁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 육신적으로 결코 평안하고 즐거움이 따르는 일이 아님을 일러주신 말씀입니다. 51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하늘로 승천하실 기약이 차 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시기로 굳게 결심하셨다고 했습니다. 이 사람은 영광의 길 인줄 알고 제의했다가 어처구니없는 말씀을 듣고 크게 실망했을 것입니다. 그는 주님을 따르는 대열에서 떨어져 나갔습니다.

(2)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고 있는 다른 한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같은 부르심은 너무나도 놀라운 축복의 소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 소명에 곧 응하지 못하고 다른 토를 달았습니다.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라고 말했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에는 이의가 없어야 합니다. 베드로나 야고보나 요한은 그렇지 아니했습니다. “…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저희가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고 했습니다(마4:18-22). 그러나 이 사람의 경우는 “나로 먼저 가서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해 달라”고 한 것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의 기회는 언제나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한번 잃어버리면 영원히 놓쳐 버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에서의 경우가 그러했고 가룟 유다의 경우가 그러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고 하셨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일은 물론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는 일에 걸림돌이 될 수는 없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보다 더 우선적인 일은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보다 자기 부친을 더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결국 주님을 좇는 영광의 대열에서 밀려났습니다.

(3) 또 다른 사람이 예수님 앞에 나타나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에 예수님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사람은 가족들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가족에 대한 작별이란 가족을 이해시키고 가족에 대한 모든 준비를 갖추고 그리고 나서 가족에 대한 거리낌이 없도록 만들어 놓은 후에 주님을 따를 것이라고 한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고 하셨습니다(마10:37-38).

예수님은 “이 사람을 향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종말에 대한 경종을 말씀하시면서 결론적으로 “롯의 처를 생각하라”고 하셨습니다.(눅17:33) 가족에 연연하여 주님 따르기를 더디 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가 될 수 없음을 밝히신 것입니다. 뒤를 돌아보면 그곳에는 뗄 수 없는 끄나풀에 얽매이게 되는 것입니다. 롯이 소돔 땅을 택한 것도 뒤를 돌아본 연고입니다. 뒤란 세상을 말하는데 그리스도인들은 이 뒤에 미련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좇아가는 사람들입니다.”(빌3:13-14).

결론 :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군사들입니다. 군사들은 그를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해 드리는 목적이 있습니다.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고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딤후2:3-4). 끝까지 주님을 따를 수 있는 군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누가복음 10장(52 ~ 56)

◆ 밤중소리 01-11 | VIEW : 612

(52) 칠십 인의 전도대(누가복음 10 : 1 - 12)

(53) 참 기뻐할 조건(누가복음 10 : 13 - 20)

(54) 그러면 살리라(누가복음 10 : 21 - 28)

(55) 내 이웃은 누구인가?(누가복음 10 : 29 - 37)

(56) 더 좋은 편을 택한 마리아(누가복음 10 : 38 - 42)


(52) 칠십 인의 전도대

(누가복음 10 : 1 - 12)

서 론 : 예수님께 가장 긴요하신 일은 복음을 전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복음을 전하는 일군을 양성하고 확보하는 일이었습니다. 주님은 몹시 바쁘고 피곤하신 중에도 이 동리, 저 동리로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셨으며 때때로 제자들을 보내어 전하도록 하셨습니다. 전도의 훈련과정으로 가끔 제자들을 선정하여 각 동, 각처로 보내신 것입니다. 지난번에는 12명의 제자들을 보내시더니 이번에는 70인의 제자들을 선정하여 전도대로 보내시면서 주의 복음을 전하면서 명심하고 유의해야 할 몇 가지 사항을 들려 주셨습니다.

1. 추수할 일군을 보내소서

전도대로 70인의 제자들을 선정하시기까지 많은 어려움이 따랐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일할만한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고 하셨더니 그의 말이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라고 말하면서 어렵다고 뒤로 슬그머니 물러서는 것이었습니다.

(1) 그래도 예수님은 70명의 일군을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이 뽑으신 이 70명의 전도대는 복음 전도의 정예부대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도 일군을 찾다보면 속이 답답한 일이 많이 있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일군들을 남겨 두시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아합 왕의 아내 이세벨의 낯을 피하여 호렙산에 이르러 하나님으로부터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고 하는 물음에 이스라엘의 모든 선지자들은 다 죽음을 당하고 오직 자기만 남았노라고 불만을 토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7천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않고 입을 맞추지 아니한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때는 자기만 일군인줄로 착각하고 자신의 우월함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은 자기 외에도 자기와 같은 일군을 얼마든지 예비해 놓으시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주여, 가장 못나고 미련한 주의 종이 여기 있사오니 주의 뜻대로 사용하여 주옵소서”라고 겸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불의한 청지기의 경우처럼 불의한 소문이 주인에게 들려 네가 네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와서 계산하라“고 하는 노여움을 사서 그 직분을 빼앗기는 날이면 이제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교회에서 유용하게 쓰임 받을 수 있는 그릇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눅16:1-2).

(2) 추수할 일군을 보내어 주소서라고 기도하라고 그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복음을 전해야 할 곳은 너무나도 많았지만 그곳에 파송할 제자들의 수효가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안타까운 나머지 그들을 향하여 추수할 일군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그 기도의 내용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2절에서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혼자 하겠다고 하는 욕심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을 함께 할 수 있는 일군이 많을수록 좋은 것입니다. 추수할 일군은 전도의 사명 자를 말합니다. 이 세상에 추수할 것은 많습니다. 구원받아야 할 하나님의 백성들이 많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 일군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들이 추수할 일군들입니다. 이 세상에 살아가고 있는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효과 있게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생명 책에 기록된 하나님의 백성들뿐입니다. 그들은 반드시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의 도움 없이 가만히 그 앉은자리에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누구인가 그에게 찾아가 복음을 들려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추수할 일군들입니다. 우리들은 이 추수할 일군으로 세우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2. 갈지어다

예수님은 이들 70인을 향하여 두 명씩 전도 팀을 짜시고 각 동 각처로 보내면서 “갈지어다”고 명령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보내신 일터로 가야 합니다. “갈지어다”라고 하신 이 주님의 명령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의 생활에 반드시 적용시켜야할 명령이 되는 것입니다.

(1) 주님은 이들을 보내시면서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는 두 가지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는 전도대로 보내는 제자들에 대한 주님의 염려입니다. 이 세상은 이리가 들끓는 곳입니다. 이리란 양을 실족시키거나 잡아먹는 사단의 권세를 말합니다. 이들이 세상에 나아가 복음을 전할 때 사단은 그의 전 병력과 권세를 동원하여 전도자를 넘어뜨리고 복음을 전하지 못하도록 방해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파송하는 이들 전도인들은 마치 어린양과 같은 순결함으로 이들 이리가운데로 들어갈 것입니다. 우는 사자 같은 모습으로 달라붙는 마귀의 권세가 그들에게 여러 모양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이것을 염려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이미 이런 사단의 계교와 도전을 아시며, 또 그들보다 능력과 권세가 많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그들 가운데서 보호해 주실 것이며 지켜 주실 것입니다.

다른 또 하나의 의미는 이들 전도대원들로 전도의 사명을 띄고 세상으로 나가는 일에 있어서 마치 이리 가운데로 들어가는 어린양과 같은 자세를 가져야 할 일에 대한 경종이 되기도 한 것입니다. 양은 순결함에 그 생명이 있습니다. 전도인들이 비록 이리떼 같은 세상에서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신의 신분이 양임을 알아서 그의 순결함을 지켜야할 것을 교훈 해 주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 하라”고 하셨습니다.

3. 전도인의 자세

복음을 전하는 일은 세상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전도인들에게 예수님은 몇 가지 알고 지켜야 할 자세를 말씀하셨습니다.

(1) 전대나 주머니나 신을 가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전도인이 자신의 생활에 얽매여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이들은 어떤 방법으로 전도해야 하는 것인가? 7절에 나와 있는 말씀을 보면 일군이 그 삯을 얻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일군은 하나님이 삯을 주십니다. 사도 바울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주께서 명하셨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고전9:14). 이 같은 일을 예수님은 그 복음의 혜택을 받는 사람들을 통하여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7절에 있는 말씀을 다시 한번 보면 “그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일군이 그 삯을 얻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갈 6장에 기록된 말씀을 보면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고 하셨습니다. 복음을 받는 자는 복음을 전하는 자에게 생명의 빚을 지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의 생활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하며 자기가 가지고 있는 가장 좋은 것을 그와 함께 누려야 한다고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2)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쓸데없는 곳에 귀중한 시간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손에 쟁기를 잡았으면 뒤를 돌아보지 말고 앞으로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3)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그 집을 위하여 평안을 빌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평안을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과의 평안이 복음입니다. 가정의 참된 평안은 복음으로 복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4) 어느 곳에 가든지 차려 놓은 음식을 대접받고 병든 자를 고쳐주며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병자를 고치는 일은 그 병자를 위해 기도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어떤 융숭한 대접을 받아도 자신의 사명을 잊어버리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사실을 전해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영접치 아니하는 동리에서는 발에 묻은 먼지를 떨어버리라고 하셨습니다.

결론 : 지금도 예수님은 추수할 일군을 찾으십니다. 부친의 장사나 가족과의 이별을 핑계하는 약하고 나태한 자가 되지 말고 복음전도자로 보내심을 받는 70인의 전도대의 한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53) 참 기뻐할 조건

(누가복음 10 : 13 - 20)

서 론 : 예수님이 처음에 걱정스럽게 여기시면서 각 마을로 보냈던 70인의 전도대원들이 다시 돌아왔습니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고 하시면서 보낸 그들이 기쁨으로 돌아와서 주님께 자랑스럽게 그들의 행한 전도사역을 늘어놓았습니다. 아마도 그들이 그들의 전도사역에서 가장 기뻤던 일이 귀신의 항복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고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 그들의 이 같은 말씀을 들으신 예수님은 그들의 흥분을 가라앉히시면서 “귀신들이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에서 그리스도인의 참된 기쁨의 소재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벳새다와 고라신의 화

예수님은 주님의 말씀과 기적의 은총을 가장 많이 받은 고장이 오히려 주님을 배신하여 복음을 거역한 지역에 대한 화를 선언하심으로 전도의 사역을 분부 받고 떠나려는 70인의 전도자들에게 경종을 삼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같은 경종은 몇 가지 우리의 교훈을 삼아야 할 것입니다.

(1) 비록 심판을 받아 마땅한 고장이라 할지라도 복음은 전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고라신과 벳새다는 가버나움과 매우 가까운 위치에 있는 고을들로 이 근방은 예수님의 복음 사역 기간인 공생애 중 가장 많은 활동무대이셨습니다. 그 어느 고장보다도 이곳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주어졌고 이적과 기사를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저주하신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이런 벳새다, 이런 고라신 인줄 아시면 서도 그들의 회개를 위해 그곳을 찾으셔서 복음을 전하셨고 기적과 이적을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전도자들은 죄악이 관용한 곳이라 할지라도 그곳에 찾아가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교훈을 그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2) 이 말씀의 또 다른 교훈은 주님의 말씀을 많이 듣고 그가 베푸신 기적이나 은혜를 많이 받았으면서도 그의 결과가 주님을 거역하여 믿음에서 떨어졌을 때 그들이 받을 화가 크다는 사실에 대한 교훈이란 사실입니다. 우리 주님이 만약 우리에게 행하신 그 놀라우신 사랑과 은혜를, 회개의 가망이 없을 것이라고 바라보이는 다른 죄인들에게 전하셨다면 오히려 그들은 회개했을 것이란 의미가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혜를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더욱 두려운 심정으로 우리의 구원을 견고히 잡아야 하며 축복을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감사하는 마음과 보답하는 심정으로 주의 사업에 열심을 내야 할 것입니다.

2. 너희 말을 듣는 자는 나의 말을 드는 것이요

예수님은 전도대원으로 파송될 70인의 제자들에게 놀라운 말씀을 들려주심으로 그들의 사명이 중대함을 알려 주셨고 또한 그들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권위가 얼마나 높은가에 대하여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라”로 하신 말씀이십니다.

(1) 전도인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곧 목자의 음성입니다. 예수님은 잃은 양을 찾으시는 일에 전도자를 보내시는데 그들에게 자기의 권위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말을 전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이 전하는 모든 말은 주님을 대신한 주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2)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자라고 말씀하심으로 전도자와 주님과의 일체성을 강조하셨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주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주님과 같은 심정으로 영접하고 대접해 주는 겸손한 자세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말씀을 전하고 주의 이름으로 기도해 주고 주의 이름으로 심방 하는 하나님의 종들에 대한 대우는 우리 주님의 인격이나 대접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일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의 사환을 어느 가정으로 심부름 보냈을 때 그 집에서 그 사환을 무시하여 욕설을 퍼붓고 냉대해 보낸다면 그것은 바로 그 사환을 그 집에 보낸 주인데 대한 냉대요 모욕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는 “말씀의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고 교훈 해 주고 있습니다(갈6:6).

3. 참 기뻐할 조건

드디어 각 마을로 파송되었던 70인의 전도대원들이 기쁨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고 보고를 올렸습니다. 아마도 그들의 활동 중 가장 감동 깊은 기적은 귀신이 쫓겨가는 것인 듯 했습니다. 이 같은 그들의 기쁨에 찬 보고에 주님은 세 가지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1)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대한 해석은 매우 어렵습니다. ① 나는 사단의 우두머리가 하늘에서 추방되는 것을 보았다. ② 광야에서의 시험을 물리치실 때 사단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③ 장차 사단이 받을 심판을 말씀하신 것이다 등의 해석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말씀은 사단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이때까지 사단은 공중권세 잡은 자로 활동하면서도 하늘의 보좌에 출입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사단의 타락과 하늘보좌에서의 추방은 이미 사단이 범죄 했을 때 이루어졌습니다(사14:12-15, 겔28:13-17). 그러나 그같은 사단이 그 후에도 하나님이 계시는 보좌에 오르락내리락하였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욥1:6). 욥을 시기한 사단은 천사들과 함께 그 대열에 서서 욥을 참소한 것입니다. 그러던 그 사단이 이제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그곳으로부터 조차도 쫓겨나 공중권세자로서만이 그의 활동이 축소된 것으로 하늘에서 번개 같이 떨어지는 그 순간, 이 같은 일이 있었다고 보아지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전도인들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모든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은 아닙니다. 복음초기에 주셨던 사도적인 권세요, 또 마지막 인류의 복음의 추수시기에 두 증인에게 주시는 권세로 여겨집니다. 뱀과 전갈을 밟는 권세란 사단의 권세에 대한 승리로 말합니다. 사단의 권세가 복음의 권능을 막지 못할 것입니다.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란 복음을 대적하는 자들의 능력을 막을 권세를 말합니다. 이 모든 악의 세력들이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의 전도활동을 막지 못할 것이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결론 : 다음에 예수님은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참 기쁨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 이름은 이미 창세 전에 그리스도안에서 기록되었다고 했습니다(엡1:3-5). 그 이름이 기록된 책이 어린양의 생명 책이라고 했습니다(계20:15). 이곳에 기록된 사람은 선택받은 복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그 은혜에 감격하여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뻐하는 생활은 순종으로, 감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생활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우리는 하늘에 상급을 쌓는 생활로 남은 생애를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54) 그러면 살리라

(누가복음 10 : 21 - 28)

서 론 : 한 율법사가 영생의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이 율법사는 아마 바리새인들에 의해 보낸 율법사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의 시험을 위한 질문은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과 영생을 분리시킬 수 없었습니다. 영생은 바로 율법을 지키는 일로 얻을 수 있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을 볼 때 예수님은 율법을 경시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안식일에도 바리새인들이 금하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같은 질문에서 예수님의 영생과 율법 관을 알아보고 고소의 재료를 얻으려는 함정으로 묻게 된 것입니다.

1. 성령으로 기뻐하신 예수님

예수님이 율법사와의 대화가 시작되기 전에 예수님은 돌아온 70인의 전도 대원들과 대화를 나누시면서 성령으로 기뻐하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기뻐하시는 생활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에게도 “항상 기뻐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예수님은 기뻐하실 만한 생활조건이나 주위 환경이 아니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기뻐하실 수 있었는가? 21절에서 이르시기를 “성령으로 기뻐하사”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적으로 기뻐하신 것이 아니십니다. 성령으로 기뻐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으로 기뻐하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인한 기쁨이 영원한 기쁨이며 항상 기뻐할 수 있는 기쁨입니다.

(1) 성령으로 인한 기쁨은 순종에서 오는 기쁨입니다. 순종에는 기쁨이 따릅니다. 순종이 없는 생활에 참 기쁨이 없습니다. 순종에는 마음에 평안이 있고 감사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이 같은 평안과 감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2) 성령으로 인한 기쁨은 소망에서 오는 기쁨입니다. 소망은 현실적인 우리의 생활에 기쁨을 심어주는 활력소가 됩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대한 소망을 바라볼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현실적인 생활의 어려움과 역경 속에서도 그 기쁨을 가질 수 있습니다. 소망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은 그 무엇으로도 빼앗을 수 없는 것입니다.

(3) 성령으로 인한 기쁨은 봉사에서 오는 기쁨입니다. 주의 일에 힘써 봉사하는 성도들에게는 언제나 기쁨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봉사에서 얻는 기쁨은 값진 기쁨입니다. 이 같은 기쁨의 체험자는 어떤 봉사라도 감사함으로 잘 감당해 내는 것입니다. 그 봉사하는 중 그리고 그 후에 오는 기쁨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4) 성령으로 인한 기쁨은 기도의 응답에서 오는 기쁨입니다. 기도에 힘쓰는 사람을 보시기 바랍니다. 기도하는 일에 게으른 사람들이 보기에 괴로운 일인 것처럼 보일는지 모르지만 기도하는 그 사람은 남모르는 기쁨이 있습니다. 기도의 응답을 받은 사람은 그 응답에서 오는 기쁨이 언제나 값진 것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2.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신 하나님의 계시

예수님은 하나님께 간구 하시기를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고 아뢰셨습니다.

(1)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이란 세상 사람들의 지혜와 슬기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세상의 지혜와 슬기로서는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지혜란 육신 적인 지혜를 말하는데 이 지혜는 모든 사물을 인간적인 지혜로 연구하고 판단하기 때문에 영적인 신령한 일에 대하여는 오히려 어리석은 지혜가 된다고 하셨습니다(고전1:18-21).

(2) 어린아이들이란 세상 지혜에 미련하고 어두운 사람을 가리킨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영적인 세계입니다. 영적 세계의 깨달음은 인간의 지혜나 지식으로 되지 아니하고 영적인 지혜로서만이 가능합니다.

(3) 아버지와 아들을 아는 일,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를 아는 일에 있어서 어린아이들의 지혜로서가 아니면 진리를 깨달아 알 수가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들과 아버지와의 관계에 대하여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군지 아는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아들이신 예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은 오직 아버지이신 하나님만이 알고 계시는 것입니다. 아버지에 대한 지식은 아들만이 아시고 그리고 “그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자가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다시 말씀드리면 성령의 지혜를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아버지의 존재를 깨달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지식도 온전한 자식이 못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3.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시험한 질문은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하는 것입니다.

(1) 예수님은 이 율법사에게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이처럼 물으신 이유는 이 사람은 율법사였으며 예수님으로부터 율법적인 해답을 얻으려고 시도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요 이방인들은 버림받은 사람들이라고 확신했던 근거가 바로 율법에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그 율법을 잘 지키는 생활을 통해서 영생을 얻게 하시려는데 있으며 이방인들에게는 율법을 주신 일이 없기 때문에 영생이 없고 버림받을 수밖에 없다는 관념에 사로 잡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영생이란 율법 이외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없는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들이 생각하는 바대로 율법적인 해답을 해 드리기 위해서 이처럼 물으셨습니다.

(2) 이 율법사는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고 대답했습니다. 이 사람의 대답은 지혜로운 대답임에 틀림없었지만 그러나 이것을 행함으로 영생을 얻는다는 율법 관에는 전혀 변동이 없었습니다. 이 율법사는 ‘예수님의 경우 과연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에 대하여 호기심을 가지고 대답을 기다렸을 것입니다.

(3) 예수님은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대답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사에게 율법에서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답변해 주신 것이 아닙니다. 율법을 행하면 살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율법을 온전히 행하면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지킴으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육체가 한 명도 없다고 성경에서 증거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갈2:16). 사람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은 그것을 지키므로 의를 얻게 하시려는데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율법으로 자신의 죄를 깨달아 회개하고 하나님의 의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려는데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 마음이 완악함으로 인하여 예수에 대한 믿음을 저버렸고 율법으로 인한 의를 구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율법의 저주 아래 처해 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 : 예수님이 이 율법사에게 이를 행하라고 하신 말씀은 그 율법사로 하여금 네가 말한 그 율법을 네가 그대로 행함으로 그 가운데서 생명을 얻을 수 있겠는가? 에 대한 해답을 스스로 얻도록 하신 것입니다. 부자 청년은 한가지 부족한 것 때문에 예수님을 잃었는데 이 율법사는 과연 그 후 어떤 길을 택했는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55) 내 이웃은 누구인가?

(누가복음 10 : 29 - 37)

서 론 : 영생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을 시험하려든 한 율법사가 이제는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고 물었습니다. 이 율법사는 하나님께 대한 관념은 분명한데 그러면 네 이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그 이웃의 대상은 누구인지? 어려운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이 같은 질문을 한 까닭은 바리새인들의 생각에는 그들의 이웃이 바리새인들이라고 규정하고 있었으며 율법을 잘 지키는 자기 파 유대인들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행하여 “당신은 그 이웃이 누구로 보느냐”고 질문한 것입니다.

1. 비유로 말씀하신 이웃

예수님은 이 율법사의 질문에 매우 지혜로우신 비유로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율법에서 영생을 얻으려고 하는 바리새인들의 외식과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그들의 허구성을 책망하심으로 율법사와 예수를 송사 하려고 따라 다니는 다른 바리새인들로 부끄럽게 하신 것입니다.

(1)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다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까지의 거리는 27㎞ 정도입니다. 과히 가까운 거리도 아니지만 이 길은 여행자들에게는 가파른 길이며 위험스러운 길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이 해발 9㎞나 되는 높은 지대인데 비하여 여리고는 지중해보다 오히려 3㎞나 더 낮은 저지대임으로 길의 경사도가 심했습니다. 이 사람은 동행인도 없이 그를 보호해 줄만한 사람도 없이 험한 고갯길을 걸어갔습니다. 이런 곳에는 강도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가 강도를 만난 것입니다. 강도는 이 사람을 붙잡고 소지품을 빼앗았을 뿐 아니라 그 옷까지 벗겼습니다. 그리고 때리기까지 하여 거반 죽게 만들고는 그 사람을 고갯길에 버려 둔 채 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2) 마침 그 길로 제사장이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건이 발생한 후 처음으로 이 길을 지나간 사람이 이 제사장이었습니다. 제사장이란 이스라엘의 가장 거룩한 어른입니다. 하나님 앞에 백성들의 속죄 제물을 드리는 사람입니다. 그는 가장 자비해야 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에 모범을 보여야 할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이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도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이 사람은 당장에 누가 손을 써 주지 않으면 생명이 위독한 사람인데도 그대로 피하여 지나친 것입니다. 이 제사장은 율법으로 영생을 얻는다고 믿고 있으면서도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시는 율법의 강령을 내 던져버린 것입니다.

(3) 그 후에 다른 한 사람이 지나가게 되었는데 레위인이였다고 했습니다. 레위인은 레위 지파에 속한 사람들을 말하며 이들은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들 중에서 장자로 간주되었습니다(민3:21-27). 이 레위인들이 율법을 가르치는 일을 담당했으며 서기관들이나 율법사 등 많은 사람이 레위인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레위인도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는 피하여 지나가 버렸습니다. 율법을 가르치는 레위인들 조차 율법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예수님은 이 비유로서 보여주신 것입니다(갈3:10-12).

2. 어떤 사마리아인의 등장에서 보여주시는 사랑의 뜻

그런데 어떤 사마리아인이 여행 중 거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사마리아인은 먼저 지나간 제사장이나 레위인과는 달랐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그를 돌보아 주었을 뿐 아니라 끝까지 책임졌습니다.

(1) 어떤 사마리아인을 등장시키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마리아인은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입니다. 유대인들이 천히 여기는 존재입니다. 이곳에 등장시킨 사마리아인은 유대인들이 율법을 중히 여기지 않다고 비방하며 지금도 율법을 가지고 시험하고 있을 뿐 아니라 사마리아인처럼 천히 여기심을 받고 계시는 예수님 자신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예수님은 죄 가운데서 구원받아야 할 비참한 죄인들에 대한 놀라우신 사랑을 나타내고 있으며 그가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여 주신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너희도 이런 사랑을 가지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교훈 해 주시는 것입니다(요13:34).

(2) 이웃에 대한 사랑은 불쌍히 여기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강도 만난 사람을 피하여 그냥 가 버린 이유는 그들에게 강도 만난 사람에 대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그를 불쌍히 여겼다고 했습니다.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죄인을 불쌍히 여기심에서 출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도 불쌍히 여기심에서 비롯되셨습니다(막5:19, 눅7:13). 우리들에게 이르시기를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라”고 하셨습니다(엡4:32).

(3)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사람 가까이 갔다고 했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으면 그 대상자에게 가까이 가게 되는 것입니다. 가까이 간다는 것은 도움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불쌍히 여기면서도 도움을 주지 않는다면 마음의 원하는 바를 막는 사람으로 스스로 속이는 사람입니다(요3:17).

(4) 이웃에 대한 사랑은 실천적인 사랑입니다. 사마리아인은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줬을 뿐 아니라 돈까지 주었으며 더 소용되는 여비까지 주겠노라고 약속했습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은 사랑의 첫째 조건입니다(약2:26). 그뿐 아니라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약4:17).

3. 내 이웃은 누구인가?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과연 우리의 이웃을 어떻게 정의해 주고 있는 것입니까? 비유에서 나타내 주는 내 이웃이란 어느 한정된 범위를 초월하고 있습니다.

(1) 내가 돌보아 주어야 할 가난한 사람들을 이웃이라고 말씀하고있습니다. 내 주변에는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나타내 보내 주십니다. 이때 우리는 제사장이나 레위인처럼 이들을 피해가면 안 되는 것입니다.

(2) 내 이웃이란 내 주변에서 곤경을 당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언제 어디서든지 내 주변에 곤경을 당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의 이웃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3) 또한 내 이웃이란 내 주변에 있는 잃은 양들입니다. 제사장은 잃은 양을 발견했지만 그를 그냥 지나쳐 버렸습니다. 사람의 생명의 중요성을 외면한 것입니다. 레위인도 잃은 양에게 전혀 관심을 두지 아니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마리아인은 정성을 기우려 그의 생명을 돌보아 주었습니다. 기름과 포도주로 그 상처에 부었습니다. 성령과 말씀으로 새 힘을 공급해 준 것입니다. 상처를 싸맸습니다. 그는 물질적인 도움까지도 아끼지 아니했습니다. 그는 주막까지 데려와서 주인에게 부탁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까지 인도하여 하나님의 종에게 부탁한 것입니다.

결론 : 주님은 율법사에게 “누가 이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냐?”고 물으셨습니다. 이 물으심은 오늘에도 나에게 똑같이 적용됩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하십니다.


(56) 더 좋은 편을 택한 마리아

(누가복음 10 : 38 - 42)

서 론 : 예수님의 전도여행은 피곤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를 맞이하여 쉬게 해 주는 사람도 없었고 그럴만한 보금자리도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고 하셨습니다(눅:9:58). 이제 예수님 일행은 한 촌에 들어갔습니다. 지명은 밝히지 않고 있지만 여기 한 촌이란 동리는 마르다와 마리아가 살고 있는 동리인 점으로 보아 베다니임이 분명합니다. 이 집에는 삼 남매가 살고 있었는데 그들이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입니다. 예수님이 이 집에 들어가셨을 때 형제간의 다툼이 있었습니다. 이 다툼은 신앙적인 면에서 아름다운 다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다툼에서 마리아가 더 좋은 태도로 인정받은 일은 우리의 주목을 끌게 되는 것입니다.

1. 예수님을 영접한 마르다 형제

38절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 한 촌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마르다의 아름다운 모습이 나옵니다.

(1) 마르다는 예수께서 그 동리로 오신다는 소문을 듣고 맞으러 나갔습니다. 예수님이 베다니에 들어가셨을 때 그 소문을 들은 베다니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만 소문만 들었을 뿐 그 이상의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혹은 병자들이 나왔을는지 모릅니다. 혹은 예수가 누구이신가 구경 삼아 나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자기 집으로 영접하기 위해 예수님을 길가에 찾아 나가 맞은 사람은 마르다 뿐이었습니다.

(2) 마르다는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영접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일은 크나큰 영광입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영접하는 일에 대한 기쁨이 있었기 때문에 반기어 영접한 것입니다. 마르다와 같은 사랑과 믿음으로 주님을 영접할 때 그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실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요1:12). 우리가 복음서를 연구해 보면 예수님은 가끔 베다니에 살고 있는 마르다의 집에 들르신 것으로 보아집니다. 그것은 마르다의 형제들이 사랑과 믿음과 정성으로 영접하고 반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마르다는 예수님이 언제 오셔도 그를 영접할 수 있는 제반 준비를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날도 마르다가 예수님의 대접을 위해 부지런히 일하고 있는 모습으로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마르다처럼 주님을 사랑하고 사모하는 심령으로 그를 영접할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2. 마리아가 한 일

예수님이 마르다의 영접으로 집에 들어서시자 의자에 앉으셨습니다. 마리아는 언니처럼 마중 나가지 못하고 집에서 예수님을 대접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가 남은 일은 언니에게 미루고 예수님 발아래 앉았습니다.

(1) 마리아는 주의 말씀에 갈급한 심령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주님을 기뻐한 이유 중 하나가 그의 말씀을 사모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분주하신 일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자기 집에서 오래 지체치 못하실 줄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잠시 그 짧은 시간에 어떻게 하면 그의 말씀을 들을 것인가? 초조한 마음으로 예수님 발 앞에 앉아 말씀을 듣게 된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금 곧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시19:10). 베드로 사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갓난아이들 같이 순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고 했습니다(벧전2:2).

(2) 마리아의 말씀을 듣는 태도가 아름다웠습니다. “발아래 앉았다”고 했습니다. 마리아의 이 같은 태도는 말씀을 받아들이는 겸손한 자세입니다. 이런 자세로 말씀을 듣는 사람이 말씀을 깨닫고 열매를 맺습니다(마13:23). 마리아의 말씀을 듣는 자세는 “말씀만 하옵소서 내가 따르겠나이다”고 하는 순종의 자세인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한마디도 놓칠 새라 고개를 쳐들고 입을 주목했습니다.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 말씀을 듣는 일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3. 예수님의 판단

마르다의 집안은 갑자기 붐볐습니다. 갑작스런 방문이라 누구의 도움을 받을 여유도 없었습니다. 마리아는 일손을 던지고 예수님 발 앞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마르다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마음만 분주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 발 앞에 앉아 있는 동생을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1) 마르다는 신앙적으로 성숙한 여자였습니다. 주를 위한 봉사는 신앙의 성숙에서 옵니다. 참으로 말씀을 갈급히 사모하는 사람들은 또 봉사에도 열심이어야 합니다. 주님을 대접하는 일에 많은 준비를 혼자 담당한 마르다는 칭찬 받을 만한 봉사자입니다. 그런데 마르다는 한가지 실수를 하게 되었습니다. 동생 마리아에 대하여 시기하는 마음으로 다투었다는 사실입니다. 마르다는 예수님 앞에서 투정을 부렸습니다. 자기는 분주스레 일하고 있는데 동생 마리아는 한가로이 방안에서 말씀만 듣고 있는 것이 옳은 일입니까? 왜 주님은 마리아로 언니를 도와주라는 명을 내리지 아니 하시나이까? “도와 주라 하소서”라고 항의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2) 예수님은 마르다를 위로해 주셨습니다. 마르다의 봉사는 주님을 위한 것이므로 그가 하고 있는 일은 좋은 일입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라고 하시는 정다운 음성에서도 마르다에 대한 주님의 사랑이 넘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고 위로해 주셨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봉사에 대한 평가절하가 아닙니다. 주님께 대한 봉사는 반드시 거창한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 믿음의 분량대로, 자기 처지에 합당한 대로 기쁨과 감사함으로 해야 합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많은 것으로 대접하고자 하는 일로 인하여 마음만 분주한 나머지 불만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같은 방법의 봉사를 원치 않으십니다.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고 하셨습니다. 마르다가 준비하는 일이란 주님을 대접할 음식이었습니다. 그것을 장만하는 일로 염려하고 근심한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많은 것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과 진실에서 우러나오는 대접은 적은 것이라도 귀한 것입니다. 우리는 마르다처럼 많은 것으로 염려하고 근심할 것이 아니라 적은 봉사라도 진심을 다하고 사랑을 다하면 그것으로 족한 것입니다.

(3) 예수님은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마리아의 경우에 해당되는 말입니다. 마리아는 분명히 좋은 편을 택한 것입니다. 그가 언니를 도와 봉사하는 일보다는 예수님 발 앞에 앉아서 말씀을 듣는 일이 마리아에게는 분명히 좋은 일이었습니다. 마르다가 자기 일을 도와 달라고 부탁을 해도 아마 마리아는 지금 자신의 위치에서 움직이지 아니할 것입니다. 마리아는 말씀을 들음으로 예수님을 기쁘게 해드렸고 마르다는 대접해 드릴 음식 준비로 예수님의 칭찬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주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일할 수 있는 지혜를 가져야 하며 자신의 은사를 그런 방법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결론 : 하나님의 교회에는 제각기 자신들에게 맡겨주신 사명이 있습니다. 은사가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오직 주님을 위해 헌신하고 봉사할 수 있도록 힘써야 합니다.


누가복음 11장(52 ~ 66)

◆ 밤중소리 01-11 | VIEW : 479

(57)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누가복음 11 : 1 - 4)

(58) 구하는 자가 받는 기도(누가복음 11 : 5 - 10)

(59)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누가복음 11 : 11 - 13)

(60) 분쟁과 사단의 나라(누가복음 11 : 14 - 20)

(61) 빈집의 위험(누가복음 11 : 20 - 26)

(62) 참으로 복이 있는 자(누가복음 11 : 27 - 28)

(63) 예수님과 요나의 표적(누가복음 11 : 27 - 32)

(64) 몸의 등불인 눈(누가복음 11 : 33 - 36)

(65) 바리새인들에게 내린 화(누가복음 11 : 37 - 44)

(66) 율법사에 대한 책망(누가복음 11 : 45 - 54)


(57)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

(누가복음 11 : 1 - 4)

서 론 :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무엇인가 다른 기도의 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과는 다른 기도, 자기들이 아직까지 해 온 기도와는 좀 다른 체제의 기도를 듣고는 예수님과 같은 새로운 형태의 기도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마침 예수님이 기도를 마치셨을 때에 제자 중 하나가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라고 말씀 드리면서 기도 가르쳐 주기를 간청했습니다. 믿음이 어린 초신 자들은 기도를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한 기도가 어떤 것인가?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

1. 이 기도를 가르쳐 주신 배경

주님이 그의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문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만 나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동일치 아니하고 약간의 차이점을 드러내 놓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6장에서 가르치신 기도는 산상보훈 중에 스스로 가르치신 기도요 누가복음의 경우는 때와 장소를 알 수 없는 그런 환경에서의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누가복음의 이 기사가 마태복음에 있는 산상보훈이 아닌 다른 곳에서의 말씀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은 주어진 여러 환경 속에서 같은 교훈을 반복하실 수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의 경우는 서언 적인 기원으로부터 결론에 이르기까지 여섯 가지 간구의 내용이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는 셋째 간구인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란 간구가 빠져 있으며 결론으로 나와 있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이란 부분이 없습니다. 그리고 내용에도 약간의 차이점이 발견됩니다. 그러나 그 기도의 근본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다를 바가 전혀 없습니다.

2. 기도의 구분

예수님은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하는 제자들의 간청을 들으시고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고 하시면서 그 중요한 줄거리만을 간략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1) 예수님은 처음 시작하는 기도의 첫 마디를 “아버지여”란 말로 시작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기도의 대상을 나타낸 표현입니다. 기도는 대화이므로 대화하는 대상이 존재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유는 예수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아들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는 오직 한 아들, 예수 그리스도만이 계실 뿐입니다. 그가 우리를 그의 피로 값 주고 사심으로 우리로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요1:12). 우리가 받은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십니다. 그 영은 우리들에게 양자의 영으로 임재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롬8:14-15).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된 것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새로운 관계를 의미합니다. 이 관계는 잠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관계로 누구든지 이 같은 사랑의 관계를 끊을 자가 이 세상에 없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롬8:39). 우리는 이처럼 아들의 특권을 가지고 우리의 아버지께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2) 다음에 첫 번째의 간구로 “이름이 거룩히 여기심을 받으시오며”란 내용입니다. 우리가 아버지라 일컫는 하나님은 참으로 거룩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죄인으로 있었을 때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몰랐습니다. 우리는 참람되게도 거룩하신 하나님을 망령되이 일컬었으며 그분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고 오히려 그의 대적자가 되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그 분을 안 후에는 그의 거룩하심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혈육의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를 더욱 공경합니다. 그에 대한 공경은 그의 거룩하신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3) 다음에 두 번째 간구로 “나라이 임하옵시며”란 내용입니다. 이곳에서 말씀하고 있는 나라란 하나님의 나라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간절히 소원하는 간구가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몇 가지로 구분이 됩니다. 우리들 마음에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이 땅위에 임하는 나라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원한 처소인 하나님의 나라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는 우리에게 약속하신 우리의 영원한 처소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나라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의 한결 같은 소망입니다. 이 소망을 주시려고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이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롬8:17). 이 나라는 우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요(마25:34), 우리에게 주신 주의 나라요(눅22:29),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입니다(약2:5). 이 나라가 속히 우리에게 임하여 그 나라에서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와 실질적인 안식의 생활을 누릴 일은 우리의 간구의 중심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4) 다음 세 번째의 간구가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란 내용입니다. 우리가 먹는 모든 일용한 양식의 공급처는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인류는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여 하나님께 감사치도 아니하며 간구치도 아니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재능이나 힘으로 우리의 양식을 취하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가 취하는 일용할 양식에 대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항상 감사해야 하며 그것을 우리에게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는 겸손한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5) 다음 네 번째의 간구가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란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일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해 주는 대가로 오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자를 용서해 주는 일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일입니다. 죄의 용서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나왔습니다(요일4:10).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심으로 나타난 것처럼 주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도 내 형제의 죄를 용서해 주는 것으로 나타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내 형제의 죄를 용서해 주었을 때 하나님을 향하여 담대한 믿음으로 우리의 죄도 사하여 주옵소서라는 기도가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6) 다음에 다섯 번째 간구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란 내용입니다. 이 기도는 우리를 시험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란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 하시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약1:12). 우리들이 당하는 시험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 됨이라고 했습니다(약1:14).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에서 시험이 옵니다(눅21:34). 부하려는 자들이 시험과 올무에 걸립니다(딤전6:9). 시험이 올 때 정욕에 떨어지게 됨으로 타락이 오고, 하나님의 징계가 따르고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됩니다(딤전6:9).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이 시험의 함정에 빠지지 말아야 하며 이를 피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로 이 시험에서 지켜 주시고 바로 인도해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시험에 들지 않기를 위해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결론 : 이처럼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는 오늘 하나의 기도문으로 나와 그리스도인들이 아무 의미 없이 외우는 것으로 사용하고 있지만 본래의 뜻은 그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 드릴 때 이 기도의 줄기와 내용을 중심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58) 구하는 자가 받는 기도

(누가복음 11 : 5 - 10)

서 론 :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시기를 원했던 제자들에게 주님은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고 하시면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간구하는 기도의 기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문이 결코 주문 식의 기도문이 아니라 우리의 기도의 내용과 기도의 체제를 가르쳐 주신 것으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응답 받는 기도의 모범 답안으로 인식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받으시는 기도가 어떤 것인가에 대하여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기도를 하는 그리스도인의 태도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니다.

1. 강청하는 기도

예수님은 기도하는 자의 기도의 자세에 대하여 적극적인 면을 강조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본문에서 강청하는 간구를 통하여 응답 받은 한 비유를 통해서 그리스도인의 기도가 이처럼 하나님 앞에 강청하는 기도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 여행 중에 한 벗이 찾아 왔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비유 중에 강청하는 기도를 하므로 응답 받은 기도의 제목이 무엇이었는가에 대하여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나에게 여행 중에 한 벗이 왔다고 했습니다. 벗이란 형제를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또 다른 비유 중에서 말씀하신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난 그 사람의 경우처럼 그 사람의 진정한 이웃을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의 기도는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형제를 위한 기도였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먼저 내 이웃에 불행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기도여야 한다는 교훈이 되겠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기도 생활을 우리에게 원하십니다. 우리는 이 사람의 강청하는 기도가 이웃을 위한 기도였었다는 점을 유의하여 우리도 내 이웃을 위해 강청하는 기도를 할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런 기도가 응답 받을 때 결과적으로 하나님께 나도 그 축복의 대열에 함께 서게 하신다는 사실을 깨닫는 일은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입니까?

(2) 그런데 그 벗이 그에게 찾아간 시간은 밤중이었다고 했습니다. 밤중이란 언제나 우리들 인생이 당하는 어려운 시련과 고난의 기간을 의미해 줍니다. “여호와여 내가 밤에 주의 이름을 기억하고 주의 법을 지켰나이다”라고 했습니다(시편119:55). 이 밤은 그가 당하고 있는 인생의 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웃 중에 이처럼 인생의 어려운 시련의 기간인 밤중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 형제가 없는가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사람은 밤중에 자기를 찾아온 형제를 괄시할 수 없었습니다. 무엇인가 도움을 주기를 원했지만 자신에겐 가진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른 친구를 찾아가 그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았습니다. 여러분이 이처럼 밤중에 만난 여러분의 이웃에 도움의 손길을 뻗치면 하나님이 복을 주십니다. 만약 도와줄 힘이 없다면 하나님께 강청하는 기도를 드리십시오. 그런 기도에도 응답이 있으며 그 형제와 함께 나도 축복을 받게 됩니다.

(3) 예수님은 이 같은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결론적으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을 인하여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사람의 경우를 예로 들어 설명하시기를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은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소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것이 없노라 하겠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어찌 이런 기도를 물리치실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기도를 거절하실 이유가 하나도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응답해 주실 것이라는 보장에 대한 이유를 “비록 벗됨을 인하여는 주지 않을지라도 그의 강청함을 인하여 주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4) 강청이란 억지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되지도 않는 문제를 가지고 떼를 쓰는 기도가 강청의 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을 가지고 떼거지 식의 기도를 한다고 응답해 주실 것이란 의미가 아닙니다. 응답 받을 수 있는 강청기도는 먼저 사랑이 깃들여져 있어야 합니다. 내 형제, 내 이웃에 대한 진실한 사랑에서 기도하는 그 기도에 하나님의 응답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반드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야할 기도를 말합니다. 강청한다는 말은 이런 기도를 하는 일에 멈추지 말고 꾸준히 기도하기를 계속하면 반드시 응답 받을 것임을 의미하는 말씀입니다.

2. 구하는 자가 받는 기도

예수님은 강청하는 기도를 하라고 하시는 교훈으로 밤중에 찾아온 한 벗에 대한 경우를 비유로 들려주신 후 결론적으로 참으로 주옥처럼 귀한 황금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1)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라고 하셨습니다. 기도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하는 일이 없이는 또한 받는 일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이든 주시는 통로가 있습니다. 그 통로가 우리의 구하는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이든 하나님께 기도로 구하라고 하신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알려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도를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로 범사에 하나님을 의뢰케 하시려는 뜻에서입니다.

(2)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찾는 이가 찾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기도한다는 말은 곧 하나님을 만나는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서 만나면 그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찾는다는 말도 계속성을 지니고 있는 말입니다. 만날 때까지 계속해서 찾으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나를 찾는 자가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에 잘 표현되고 있습니다(잠8:17).

(3) 마지막으로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문은 두드리는 이에게 열린다고 하셨습니다. 문을 두드린다는 말은 구하고 찾는 바른 자세를 말씀해 주는 것입니다. 이 문은 구하면 그것을 누릴 수 있는 분이 그 안에 계시는 문입니다. 주인이 없는 빈집의 문이 아닙니다. 여기서도 본문의 분명한 뜻은 문을 두드리되 열릴 때까지 계속적으로 두드리는 자세를 말합니다. 문안에 계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두드리는 자의 태도는 매우 정중하고 겸손하며 간절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 계시는 분이 열어 주실 때까지 그 두드림을 쉬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열어 주시리라고 하셨습니다.

결론 :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기도는 서로 분리할 수 없는 절대적인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구하는 자가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비유에 나타난 사람처럼 이웃을 위해, 사랑에 입각한 기도, 받을 때까지 쉬지 않고 계속적으로 구하는 강청하는 기도를 원하십니다. 이 기도로 여러분의 생활에 항상 응답의 축복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59)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누가복음 11 : 11 - 13)

서 론 :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신 후 응답 받는 기도의 비유로 여행 중에 밤중에 찾아 온 벗에 대한 강청하는 기도를 들려 주셨습니다. 그리고 구하는 자에게 주시고 찾는 이가 찾고 두드리는 자에게 열어 주신다고 하는 기도의 법칙을 말씀해 주시고 결론적으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아니하시겠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구해서 받아야 할 가장 긴요하고 중요한 기도의 내용이 성령을 받기 위한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1. 육신의 아버지의 경우와 영의 아버지의 경우

예수님께서 무엇이나 주저하지 말고 구할 것에 대하여 세상의 아비의 경우와 하늘의 천부의 경우를 비교하시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는 이 세상의 혈연적인 가족관계입니다. 그곳에는 사랑이 있고 그 자식의 장래에 대한 선한 계획과 책임이 있습니다. 그 아버지는 아들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압니다. 이것은 인간의 본능의 작용이기 때문에 불가항력적인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생선을 달라고 하는 아들에게 전갈과 같은 해로운 것을 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님은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하물며 란 말씀은 세상에 있는 우리들의 육신 적인 아버지의 경우도 이러하거든 이란 말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경우야 어떠하겠느냐”는 뜻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이 말씀이 마태복음에서는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아니하시겠느냐”로 말씀하고 있어서 약간의 차이점을 들어내 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별 문제로 제기될 수 없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것 중 가장 좋은 것이란 바로 성령이시기 때문입니다.

2.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주님이 하신 이 말씀은 우리에게 교리 적인 문제에 혼선을 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주님의 이 말씀이 성령을 받기를 위한 기도인지, 아니면 성령 충만함을 위한 기도인지 그 식별이 어렵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이 들려주신 그 말씀 그대로를 가지고 해석해야 할 줄로 압니다.

(1) 먼저 우리는 성령은 하나님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란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들 마음대로 생각대로 가질 수 없습니다. 금이나 은이나 세상의 제물로 살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요4:10, 행2:38). 이 선물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사입니다. 성경에서는 구원과 성령과는 같은 맥으로 취급하고 있으며 구원의 선물과 성령의 선물을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 성령을 받으므로 구원이 확정되기 때문입니다.

(2)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부릅니다(롬8:9). 롬8:9에서 이르시기를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단정 짓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은 교회에 나온다고 해도 그저 교회에 나오는 사람이지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입니다. 성령이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받아야 할 필수적인 것이기 때문에 성령을 받았느냐 받지 못했느냐는 문제는 구원의 근본적인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3) 성령은 생명의 영이라고 부릅니다(롬8:2).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란 생명을 주시는 성령이란 뜻입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생명 곧 영생을 주시는 이는 바로 성령이십니다. 성령이 영생을 가지시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생을 우리에게 적용시키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거하지 아니하는 사람에게는 영생이 없습니다.

(4) 성령은 양자의 영, 아들의 영이라고 부릅니다(롬8:15, 갈4:6).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로 확정지어 주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아들과 양자는 같은 뜻에서 나온 말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아들의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성령이 없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도 있겠지만 이 같은 일은 자기를 속이는 일이요 법적인 바른 관계를 가지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거짓된 표현으로 하나님의 인정받지 못한 호칭인 것입니다.

(5) 성령은 진리의 영이라고 부릅니다(요14:17, 16:13). 성령은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진리로 인도하시는 분은 오직 진리의 성령뿐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은 진리에로의 인도하심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며 진리에서 벗어난 잘못된 이단에 미혹되기 쉬운 것입니다. 우리는 이상과 같은 성령의 위치와 사역으로 볼 때 성령을 받는다는 사실보다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3. 성령은 어떻게 받는가

우리는 이 성령을 누구나 다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성령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이것을 받았는지, 그렇지 못한지 잘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은 증거는 인간적인 방법으로는 분별할 길이 없습니다. 영적인 방법으로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됩니다.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은 성령의 권능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영을 좇아 생각하고 살아가는 생활을 하게 됩니다. 내가 성령을 받았는가? 아닌가의 여부를 알려면 내가 옛날 그대로의 죽은 생활을 하고 있는가? 아니면 영적인 생각에 사로잡히고 영적인 생활에 관심을 두고 영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생각이 전혀 없고 영적인 생활에 전혀 관심도 없고 영적 열매도 없다면 그 사람은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불가피하고 불가항력적입니다. 성령은 강권적으로 나에게 열매를 맺도록 내 안에서 역사 하시기 때문입니다.

(1) 만약에 여러분에게 이 같은 일이 전혀 나타나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성령이 여러분 안에 안 계시는 증거입니다. 이런 분은 성령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성령을 받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비참하고 불쌍한 사람으로 교회 생활을 마칠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는 영생도 구원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2) 이런 분은 성령을 받기 위해 기도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반드시 성령을 받는다는 말에 국한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구원을 얻기 위해 간절히 기도하거나 영생을 얻기 위해 사모하며 기도하는 일도 같은 의미의 기도가 될 것입니다.

(3) 구원을 받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성령을 받기 이전에도 진리로 인도하시는 성령의 감동과 인도하심의 강한 역사를 받게 됩니다. 만약 이 같은 성령의 사전 사역이 우리에게 없다면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일이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엔 성령의 감화를 받고 나오기는 하지만 아직 성령을 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도 상당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성령 받기 위해 사모하는 심령으로 간절히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몇 가지 병행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행10:44). 회개를 해야 합니다(행2:38). 순종해야 합니다(행5:32). 받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행8:15-17, 눅11:11-13).

결론 : 성령을 구하고 받는다고 어떤 증거를 얻으려고 하면 안됩니다. 성령 받은 증거는 확실한 믿음으로 알게 됩니다(고전12:3). 영을 좇아 살아가는 자신의 생활의 변화로 알게 됩니다(롬8:5-8).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으로 알게 됩니다(고전2:10-12).


(60) 분쟁과 사단의 나라

(누가복음 11 : 14 - 20)

서 론 : 예수님께서 한 곳에서 벙어리 귀신에 매어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을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한 벙어리 귀신을 쫓아내시니 귀신이 나가매 벙어리가 말하는 지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벙어리 귀신이란 귀신이 벙어리란 것이 아니라 그 사람으로 벙어리가 되게 만든 귀신을 의미합니다. 귀신은 사람의 몸에 들어와서 혹은 벙어리로 혹은 소경으로 고통을 당하게도 하며, 이적을 행하는 일도 하고, 미혹하기도 하며, 가르치기도 한다고 했습니다(계16:14, 막9:25, 행16:16, 딤전4:1). 이 일로 인하여 두 가지 형태로 나누어지게 되었습니다. 한 형태의 무리는 그 하시는 권능을 기이히 여기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고 또 다른 한 형태의 무리는 저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비방했습니다.

1. 바알세불을 힘입었다는 주장

예수님은 일단의 무리들, 그들은 바리새인들이었는데 저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하신 말씀을 들으셨습니다.

(1) 이들은 왜 예수님의 이 같은 권능의 행하심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입니까. 지금 이들 바리새인의 한 무리들은 친히 예수님의 능력 행하심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귀신이 예수님의 명령에 떨면서 쫓겨 나가는 일과 귀신에게 눌려 있었던 사람이 온전한 몸으로 고침 받은 사실을 직접 목격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그렇지 않다고 부인 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예수의 이 같은 권능이 어디서 나온 것이냐? 그들은 부득이 이 문제에 대한 어떤 결론을 내야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한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장로의 유전을 무시할 뿐 아니라 자칭 하나님이라 하여 참람한 말을 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의 이 같은 권능의 역사가 결코 하나님의 권능이라고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틀림없이 사단의 역사일 것이라는 결론을 얻었을 것입니다.

(2) 그래서 그들은 저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바알세불이란 무엇을 말하나? 이 어원은 구약 열왕기하 1:1,3,6절에 나옵니다. 이곳에서 바알세불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 신은 에그론의 신으로 나와 있습니다. 아하시아 왕이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부하를 에그론에 보내어 그들의 왕인 바알세붑에게 물어 보라고 했습니다. 이 바알세붑이 신약에 와서 바알세불로 고쳐서 부르고 있습니다. 바알세불의 바알이란 말은 소유주, 주인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세불이란 말은 더러운 오물로 똥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아마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방신에 대하여 고의적으로 모욕적인 말을 첨가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해석이 신약에 와서는 귀신의 왕이라고 불려졌고, 본문에서 예수님은 만일 사단이 스스로 분쟁하면 하시는 말씀 중에서 이 자를 사단과 결부시켰습니다. 귀신은 악령의 존재들이므로 그들의 왕이라면 사단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바리새인들은 그리스도의 이적 행하심을 부인하지는 못하고 귀신의 왕인 바알세불을 힘입어 행하는 사단의 권능이라고 비방하면서 예수님을 정죄한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에 대한 시기와 미움에서 나온 고의적인 비방이었습니다.

(3) 이들 중에 또 어떤 이들은 예수님께 하늘로서 온 표적을 구했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는 민족입니다. 그들은 옛날부터 하나님의 표적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그들은 어느덧 표적을 증거로 삼으려는 악한 습성이 생겼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영접하지 않은 이유가 바로 이곳에 기인되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 그들이 예수님께 구한 표적은 적어도 모세가 행한 것 같은 것을 구했을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고 하는 말에서 그들의 메시야된 표적을 구한 저의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요6:31).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하늘로서 온 수 많은 표적을 보았습니다. 그들에게 부인할 수 없는 결정적인 표적을 보였는데도 그들은 그 표적에 승복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같은 현상을 음란하고 패역한 세대라고 진단하셨습니다.

2. 바알세불의 분쟁

예수님께서 그들의 이 같은 잘못된 생각을 아시고 그들에게 이처럼 이르셨습니다.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 지며 스스로 분쟁하는 집은 무너지느니라. 너희 말이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만일 사단이 스스로 분쟁하면 저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고 하셨습니다.

(1) 사단이 귀신을 쫓는 일은 하나의 분쟁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내어쫓는다고 하신 말씀은 그들끼리의 농간이나 거짓된 사기 극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경우처럼 결정적인 대적의 상태와 내어쫓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일이 만약 사단의 나라에서 생길 수 있다면 그 나라는 분쟁하는 나라가 될 것이며 그렇게 된다면 사단의 나라는 스스로 무너져 버릴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단에게도 엄한 조직을 가진 그들의 나라가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나라는 규율이 엄하고 질서가 있으며 그럼으로 사단이 그의 부하인 귀신을 내어쫓는 일 같은 분쟁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명시하셨습니다.

(2) 예수님은 이 같은 말씀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크나큰 교훈을 주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도 분쟁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이 분쟁의 교훈에서 나라와 집에 비유하셨습니다.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를 의미하며 집은 교회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의 경우도 역시 이 원리가 적용된다고 결부시켜야 할것입니다. 가정의 경우를 보아도 가정에 분쟁이 일어나면 그 가정은 무너져 버리게 됩니다. 교회 역시 분쟁이 잦은 교회는 무너져 버립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분쟁을 이기는 능력이 사랑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3)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저희가 너희 재판장이 되리라고 정죄 하셨습니다. 너희 아들들이란 바리새인 중에 속한 사람들로 아마 그 당시 그들 중에도 하나님의 권능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경우가 있었던 것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주님이나 그들의 경우나 귀신을 쫓아내는 경우가 매 일반이라면 그들의 자녀가 행하는 일에 대해서만은 어떤 근거로 하나님의 권능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그들 너희 자녀들이 오히려 너희 말에 대한 심판자가 될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 같은 일련의 반격적인 책망에 대꾸할 말이 없었습니다.

(4) 예수님은 그들에게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하였다고 하시는 선포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으로 이미 이 땅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사단의 권세를 물리치시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시는 일은 하나님 나라가 임한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로 이루어집니다. 복음이 전파됨으로 이 땅위에는 그의 많은 백성들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주님이 오실 때까지 확장되어 나갈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군사들입니다. 사단의 나라에서조차 분쟁이 없다고 하셨는데 우리들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분쟁이 있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진리의 터전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모든 일은 진리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분쟁의 세력은 진리를 대적하는 사단입니다. 진리에 굳게 서서 사랑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견고히 세워 나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61) 빈집의 위험

(누가복음 11 : 20 - 26)

서 론 : 기독교의 하나님의 나라와 유대인의 하나님 나라와는 완전한 차이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메시야의 나타남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는 그의 백성 가운데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곧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며 복음의 확장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인 것입니다. 이처럼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의 임재하심과 그의 사역으로 인한 복음의 확장에 그 의미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1. 강한 자의 무장

예수님은 21절 이하에서 강한 자의 무장과 더 강한 자로 인한 무장해제에 대한 비유의 말씀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이 비유의 말씀은 지금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임하고 있는가에 대한 해석이며 그 임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1)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킨다고 하신 말씀은 사단이 그의 나라를 견고히 지키는 모습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단은 인류를 그의 나라로 삼고 있으며 이를 지키기 위하여 완전한 무장을 갖추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진자는 이기는 자의 종이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벧후2:19). 죄에게 진 아담은 죄의 종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강한 자로써 우리 인간을 종으로 삼아 자신의 무장으로 그의 소유를 지키는 그의 무장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2) 사단은 그의 나라를 지키는 일에 율법이라고 하는 무기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원래가 하나님이 인간에게 의의 표준으로 주신 것인데 의를 이루지 못하는 인간의 약점을 이용하여 사단은 이 율법으로 인간을 꼼짝못하게 얽어 매놓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은 인간의 죄를 정죄 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두려움을 주면서도 죄에 이끌어 갈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3) 그뿐 아니라 사단은 사망이라고 하는 최대의 공포의 무기를 가지고 그의 소유물을 지키고 있습니다. 사망이란 원래가 죄로 말미암아 필연적으로 온 것이기 때문에 죄인들은 이곳에서 빠져 나올 길이 없는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롬6:23). 이 사망의 권세야말로 마귀가 휘두르는 강한 무기 중 가장 위협적인 존재인 것입니다(히2:14-15).

2. 강한 자의 무장 해제

이처럼 사단이 강한 자로서의 완벽한 무장을 하고 인간을 지배하고 지키고 있지만 더 강한 자가 와서 저를 이길 때에는 그 무장을 해제시킬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주님이 말씀하신 더 강한 자란 바로 예수님 자신을 이르신 말씀이며 지금 그 더 강한 자의 나타나심으로 이 세상 임금으로 있는 사단의 지역을 침범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며 확장되어 가고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1) 예수님이 더 강한 자로 비유된 것은 그는 죄를 이기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으로 세상에 태어나셨기 때문에 원래가 죄의 종의 신분이 아니십니다. 그 이유는 그는 아담의 혈육으로 태어나신 분이 아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사람으로 태어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요1:14). 그리고 그는 이 세상에 계시면서 단 한번도 죄를 범하신 일이 없으십니다(요3:5). 그리고 그 분은 죄 가운데 놓여 있는 인간의 죄를 사유하심으로 죄에서 자유함을 주셨습니다. 그는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고(갈1:4), 그는 우리의 죄를 위한 영원한 제물이 되셨고(히 10:12), 그의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습니다(벧전2:24). 사단이 지배하고 있는 나라에서 죄 가운데서 죄의 종으로 속박 받고 있는 죄인들을 해방시키심으로 더 강한 자로 등장하신 것입니다.

(2) 사단이 율법이란 무기로 인간들을 정죄해 온 이 율법의 권능도 예수로 말미암아 여지없이 무너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율법이 죄가 없으신 예수를 정죄할 수 없었고 강한 자의 권능으로 죄에서 해방시킨 그의 백성들을 정죄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롬8:1).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제 율법의 권능의 범위는 점점 축소되어 갑니다. 복음으로 전파되는 하나님의 나라가 율법이 정죄하는 지역을 정복해 나가는 것입니다.

(3) 사단이 큰 권세로 무자비하게 휘두른 사망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권세가 꺾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제 사망은 사단의 만능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새로운 권세 앞에 무릎을 꿇게 되었고 그리스도의 새로운 생명이 주어지는 곳에서 영원히 추방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히2:14-15). 이제 사단은 더 강한 자가 와서 저를 이김으로 저의 믿던 무장을 빼앗기고 저의 재물이 나누어질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4) 이 말씀을 하신 후 예수님은 강한 자에 의해 쫓겨나간 귀신이 다시 그 집에 찾아 들어 올 수 있다는 경종을 하심으로 사단의 간교와 이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경성을 경계하셨습니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간 것은 복음을 받아 드림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권세가 그에게 나타나 죄와 율법과 사망의 권세로 지배해 온 사단의 권세가 내어쫓긴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자가 다시 옛 집으로 돌아올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죄로 인한 끊임없는 사단의 유혹을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에 대하여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고 경종해 주고 있습니다(벧전5:7-8). 그러면 쫓겨나간 집에 다시 들어온다고 하신 빈집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옛 주인이 내쫓은 성령의 임재하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안에서의 생활을 말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의 생활에 소홀할 때 이 옛 주인이 엿보게 되며 다시 들어와 나를 사로잡으려는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롬6:12). 그리고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늘 마음에 채워 그 말씀의 능력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이 일에 게을리 할 때 사단은 다시 죄의 종으로 삼으려 넘보는 것입니다.

결론 : 만약 소제되고 수리된 집안에 주인이 안보일 때 그의 영적인 위기가 닥쳐오는데 이 기회를 포착한 귀신은 자기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올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는 늘 깨어 있는 생활, 성령 안에서의 순종의 생활을 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든든히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62) 참으로 복이 있는 자

(누가복음 11 : 27 - 28)

서 론 :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그의 주변에는 항상 많은 인파들이 들끓었습니다. 그 무리 중에는 여자들도 많았습니다. 특히 누가복음 11장에서 들려주신 주님의 말씀은 둘러선 무리들에게 큰 감동을 준 모양입니다. 그 중에서 한 여인이 큰 소리로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도소이다”고 소리쳤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 같은 훌륭한 아들을 둔 어머니에게 복이 있다고 한 말입니다. 참으로 이 여자의 외침처럼 마리아야말로 만대에 복이 있는 여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같은 복은 마리아 자신이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말하기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고 했습니다(눅1:48). 그런데 이때 예수님은 그 여인을 향하여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우리에게 나타났나

하나님의 말씀은 일차적으로 그 말씀을 듣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하나님의 말씀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1) 하나님의 말씀이란 자기를 세상에 나타내신 하나님의 계시이십니다. 인간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졌습니다. 이제 인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영적인 생명이 죽은 인간은 하나님과의 의사소통이 단절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죄로 죽게 된 인간을 불쌍히 보시고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인간을 불쌍히 보시고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셔서 대화를 모색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하여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사1:18).

이 같은 하나님의 계시는 무언중에 만물 가운데 표현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이런 것을 우리는 “자연계시”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자연의 신비스러움을 관찰할 때 그 창조의 오묘하심에 감탄치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시는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된다”고 하셨습니다(롬1:20). 그러나 이 계시로는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할 수는 있어도 하나님을 찾아 갈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을 인간들에게 들려주시기에 이르신 것입니다. 인간은 이 하나님의 말씀을 “특별계시”라고 부릅니다. 이 계시만이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이 같은 특별계시로만이 하나님을 찾을 수 있고 그 앞에 가까이 갈 수 있으며 하나님이 주시는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2) 이 같은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시대를 초월하여 인간들에게 들려 주셨습니다. 이 일에 대하여 히브리서 1장에서는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히1:1). 하나님은 그의 영이신 성령을 통하여 감동을 주신 선지자들로 그의 말씀을 전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그 말씀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스려 오셨고, 그들에게 당신의 뜻을 전달해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에 그의 아들로 말씀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실 뿐 아니라 그는 하나님이시며 만물의 창조주이십니다. 그래서 이 땅위에서 하신 모든 그의 말씀은 하나님이 하신 말씀의 권위를 가지실 뿐 아니라 진실로 하나님의 말씀이십니다. 이처럼 나타내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말은 그의 말씀이 기록된 성경을 뜻하며 성경에는 이 모든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도 부족함이 없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이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에게 주셔야 할 모든 말씀을 이처럼 선지자들을 통해서, 그의 아들을 통해서 모두 나타내셨기 때문에 다른 말씀으로 전하실 말씀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완성된 우리의 이 시대에는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또 다른 계시로 주시는 경우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가 복이 있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은 말할 수 없는 복입니다. 옛날에는 유명한 철학자들 밑에 많은 문하생들이 몰려 왔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로부터 지혜로운 말을 듣고 무엇인가 인생에 대하여 알려고 하는 생각에서입니다. 그런데 바로 지혜 자이시며 명철 자이시며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말씀을 듣는 일이야말로 놀라운 복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듣는 것입니까?

(1) 하나님의 말씀은 영이요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들으려면 영이 살아야 하고 생명이 소성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심이라”고 했습니다(고전12:12). 주의 말씀을 듣는 자들에 대하여 예수님은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고 하셨습니다(마13:16).

(2) 말씀을 받는 마음이 좋은 밭이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그 말씀을 받는 마음에 따라 그 결과에 놀라운 차이점을 드러내 놓는 것입니다. 말씀을 받아 간직하는 장소가 마음이기 때문에 그 마음이 정결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하는 심령만이 말씀을 간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길가와 같은 마음은 씨앗이 마음에 심겨져 결실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돌밭은 말씀으로 인한 시험 중에 넘어진다고 하셨습니다. 가시떨기 밭은 이생의 염려와 재리와 일락에 기운이 막혀 결실을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만이 30배 60배로 100배로 결실 할 수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좋은 땅이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듣고 깨닫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3. 복이 있느니라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신 것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축복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1) 말씀을 듣는 자는 생명을 얻기 때문입니다. 이 일에 예수님은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하셨습니다(요5:24).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새로워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그 자체가 벌써 그 사람에게 영적 생명이 살아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는 그 말씀 안에서 살게 되고 그 말씀의 인도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는 그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축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모든 약속을 말씀을 통해서 하셨습니다. 우리가 그 말씀을 믿을 때 하나님의 언약이 말씀에 나타난 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네 믿음대로 되라”,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라고 하신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믿을 때 누구에게나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결론 :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제각기 여러 가지 종류의 복을 찾지만 진실한 복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일에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을 얻는 일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도, 우리 인생의 참 평안과 형통도 이 길로부터 출발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진리를 깨닫지 않고 이 말씀의 가치를 인정치 않는 사람은 하나님이 그의 말씀으로 약속하신 축복의 대열에서 영원히 제외되기 때문에 그에게는 아무런 소망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63) 예수님과 요나의 표적

(누가복음 11 : 27 - 32)

서 론 : 예수님에게는 메시아로서의 공인 장이 두 가지가 있으십니다. 하나는 그의 말씀입니다. 그의 말씀은 곧 창조주 되신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증거 해 주는 움직일 수 없는 공인 장이 됩니다. 다른 또 하나의 공인 장은 그의 권능이십니다. 그리스도는 그의 권능으로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가 행하시는 권능을 수 없이 보아 온 유대인들은 끊임없이 예수님을 향하여 표적을 보여 달라고 도전해 왔습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악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고 정죄 하시고 주님은 그들이 바라고 원하는 것과 같은 표적을 보여 주지 아니하시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너희에게 메시아된 표적을 보여줄 것은 요나의 표적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 표적을 구하는 악한 세대

예수님은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고 하셨습니다.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마12:39절 말씀을 보면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고 하셨습니다.

(1) 예수님의 세대는 악한 세대였습니다. 그들은 끈질기게 예수님을 쫓아다니면서 메시아된 표적을 나타내 보라고 유혹하고 강권했습니다. 그러면 이들 유대인들이 보고 싶어한 메시아된 표적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은 모세의 경우를 들었습니다.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기록된 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고 했습니다(요6:30-31). 말하자면 그들은 모세처럼 좀 엄청나고 모든 유대인들이 함께 체험할 수 있는 그런 표적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이 같은 표적의 증거는 악한 세대에 속한 사람들이 요구하는 일입니다.

(2) 인류의 종말에도 이처럼 표적을 구하는 악한 세대가 올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습니다. 종말에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따르지 않고 표적을 따른다고 경종 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심판하시기 위해 미혹의 영으로 미혹하는 표적을 보여 주심으로 심판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살후2:12). 이 같은 거짓 표적은 종말에 등장할 거짓 선지자에 의하여 그 최 절정에 달할 것입니다. 이자는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하고 우상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우상의 입으로 말을 하게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계13:13-15).

(3) 예수님은 그의 사역을 통하여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 하시는 완벽한 표적을 여러 가지로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요한복음 5:36-39절에 걸쳐서 증거 하신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메시야로서의 확증 적인 증거를 여러 가지로 증거 해 주셨습니다. 첫째로 요한의 증거를 들으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의 메시아를 증거 하는 사명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고 이 세상에서 활약한 선지자였습니다. 세례 요한은 주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는 사명을 가지고 광야의 외치는 소리로 활동한 하나님의 선지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보다 더 큰 증거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 증거란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나의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증거 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생애 중에 너무나도 엄청난 기적을 행하신 분이십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일, 오병이어의 기적을 나태내신 일, 야이로의 딸과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일, 열 명의 문둥병 자를 고치시고 나면서부터 소경 된 사람들을 고쳐서 눈을 뜨게 하신 일등 기록된 표적만도 놀라운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 하는 증거가 되기에 충분한 것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너희들이 상고하는 성경도 나를 증거 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영생을 얻는 줄로 알고 성경을 상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성경이 바로 예수님을 증거 해 주는 하나님의 증거임을 그들은 몰랐던 것입니다.

2. 요나의 표적과 예수님의 증거

예수님은 이처럼 패역한 그들을 향하여 이상한 말씀을 들려 주셨습니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같은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한가지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요나의 사건이 바로 예수님의 메시야 되시는 표적과 연관되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1) 요나는 하나님의 선지자로 하나님으로부터 니느웨 성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라고 하신 명령에 불복종한 사람입니다. 그는 니느웨 성과는 정반대 방향의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그러나 그 배는 이 요나로 인하여 바다에서 큰 풍랑을 만나게 되었고, 요나는 풍랑을 초래케 한 장본인으로 제비에 뽑혀 바다가운데 던져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미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큰 물고기로 인하여 그를 삼키게 하셨습니다. 요나는 이 물고기 뱃속에서 삼 주야를 지낸 후 물고기 배에서 토해냄을 받아 니느웨 성에 들어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요나의 표적이란 요나가 고기뱃속에 들어가 죽은 자와 같이 사흘간 있다가 다시 살아 나온 사실을 가리키신 것입니다.

(2) 이 같은 요나의 사건은 예수님의 속죄의 죽으심과 그의 부활하심에 대한 하나의 대표적인 일이었습니다. 이처럼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모든 사실은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일에 참으로 오묘하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모든 사건과 징조와 표적을 그리스도에게 맞추어 지도록 계획하시고 간섭하신 것입니다. 요나가 그가 당한 사건으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대한 증거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메시야 되신 유일하신 표적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이란 곧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의 부활 사건이며 이 사건을 믿는 것이 그리스도를 믿는 일이요 이것이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하나님의 방법인 것입니다(고전14:3-4).

(3) 예수님은 이처럼 표적을 구하기를 좋아하며 불신 적인 악한 세대에 대하여 정죄 하시면서 심판 때에 남방여왕이 이 세대를 정죄 할 것이며, 니느웨 사람들이 이 세대 사람들을 정죄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남방여왕은 솔로몬 왕의 지혜로운 말을 듣기 위하여 땅 끝 먼 곳으로부터 예루살렘을 찾아왔습니다. 이 말씀은 지혜로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사모하고 그 말씀을 거역한 세대는 마땅히 남방여왕에 의해 정죄 받아야 할 것이라고 하시는 뜻입니다. 니느웨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요나의 전도를 통하여 회개함으로써 하늘에서 내릴 불의 심판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요나 같은 선지자의 전도에도 이처럼 회개해서 구원을 받은 이방인들이 있거늘 하물며 요나보다 훨씬 더 크신 하나님의 아들이 진리의 말씀을 전하여 하늘의 메시지를 전해도 이를 거역한다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처하는 이들 패역한 무리들은 마땅히 그 당시 니느웨 사람들에 의해 심판 날에 정죄를 당할 것이 아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솔로몬이나 요나와 같은 왕이나 선지자와는 비교조차 하실 수 없는 높고 높으신 존재이십니다. 그런데 그분의 그 말씀을 거역하고 그 복음을 거역하고 그 권능의 증거를 거역하고 다른 표적을 보여 주어야 믿겠다고 하는 그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패역한 무리들임을 밝히신 것입니다.

결론 : 지금 우리는 패역하기 이를 데 없는 악한 세대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악한 세대 사람들이 구하는 표적으로 믿음을 가지고 증거를 찾고 소망을 가지려는 사람들은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영생의 말씀을 뒤로 던지고 표적이나 따르고 이적이나 쫓아다니는 믿음은 패역한 세대의 믿음입니다. 우리는 이 세대 사람이 구하는 표적을 구하지 말고 말씀의 표적을 굳게 잡고 소망으로 전진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64) 몸의 등불인 눈

(누가복음 11 : 33 - 36)

서 론 : 사람의 눈은 그 사람의 마음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눈에 비췬 대로 마음에 영상 됩니다. 우리가 카메라로 사진을 찍을 때 렌즈는 그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렌즈에 물건이 나타난 그대로 필름에 영상 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람의 눈도 그 사람의 등불로 비유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방을 비취는 등불과 사람의 마음을 비취는 눈과 비교하시면서 그리스도의 빛으로 온 몸을 비췰 것을 교훈해 주셨습니다. 등불의 광선이 너희를 비출 때와 같이 네 온 몸이 밝아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1. 몸의 등불인 눈

예수님은 등불과 사람의 눈을 비유적으로 비교하시면서 영적인 교훈을 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등불을 방안에 켜 두는 이유를 이처럼 말씀해 주셨습니다.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움 속에나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동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이 말씀은 어떤 교훈을 우리에게 주는 것입니까?

(1) 이 눈은 우리의 육적 눈을 가리킨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육신의 눈의 기능은 몸을 밝게 해 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눈을 어둡게 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요9:39). 보는 자들이라고 하신 말씀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말합니다. 주님의 말씀에 의하면 인간의 눈은 두 가지 모두 함께 뜰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세상을 바라보는 육신의 눈도 뜨고 영적인 세계를 바라보는 마음의 눈도 뜰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어느 한가지가 뜨여지면 다른 한가지는 감겨진다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눈이 열려 세상 것을 바라보는 사람은 소경 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의 마음의 눈이 소경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육신의 눈이 감겨진 사람, 다시 말하자면 세상 것에 소망을 두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마음의 눈을 열어 신령한 세계를 보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사실 세상 것을 바라보는 인간의 눈은 그의 마음과 몸 전체를 어둡게 합니다.

(2) 예수님이 이곳에서 말씀하고 있는 눈은 신령한 영적인 눈을 말합니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라고 하셨는데 성한 눈은 곧 마음의 눈, 신령한 눈, 영적인 눈을 말합니다. 성한 눈을 가진 사람은 온 몸이 밝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온 몸이 성할 것이라고 하신 말씀의 뜻은 죄를 떠난 생활, 순종의 열매를 맺는 생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리는 생활을 말해줍니다.

(3) 이 눈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등불처럼 빛을 비추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들의 마음의 눈을 열어 주어 그 눈을 어둠에서 빛을 발산하게 합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고 시편 기자는 말했습니다(시119:105).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눈을 밝혀 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의 빛으로 눈을 밝히지 못한 사람은 실인즉 소경 된 사람들이요 이들의 몸은 어둠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4) 이 눈은 자기의 죄를 바라 볼 수 있는 눈입니다. 등불이 비추어야 그 빛을 따라 사물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이 빛이 우리의 몸에 비췰 때 우리는 우리 몸 속에 숨겨 있었던 온갖 더럽고 추한 죄악이 노출되어 그 죄악을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눈을 소유한 사람이 자기 안에 죄가 존재하고 그 죄가 자기를 지배하고 있으며, 그 죄의 지배로 자기가 죄의 종의 상태에 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해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눈이 밝아졌을 때 이처럼 외쳤습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했습니다(딤전1:15).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비추어 자기들은 의롭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눈이 어두웠던 그들은 자기들 몸 안에 있었던 죄를 찾아 낼 수 없었습니다. 말씀이 없는 눈은 빛이 없기 때문에 자기 속에 죄가 있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5) 이 눈은 또한 성령으로 열어 주시는 눈입니다. 성령의 감동이나 성령의 사역은 우리들에게 신령한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눈을 열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사실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고전2:12). 그리스도인들 안에 계시는 성령은 우리로 신령한 것들을 바라볼 수 있게 하십니다.

2. 나쁜 눈

34절에서 말씀해 주시기를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고 말합니다.

(1) 하와의 눈이 그러했습니다. 그녀는 뱀과의 대화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했습니다. 오히려 뱀의 말에 유혹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눈을 밝게 하지만 사단의 말은 우리의 마음을 어둡게 합니다. 사단은 어두움의 세력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빛 되신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거나 멀리하고 오히려 사단의 말에 미혹 받으면 우리의 눈은 당장에 빛을 잃게 되어 우리 몸을 어둡게 할 것입니다.

(2) 발람의 눈이 그러했습니다. 발람은 자기 직분을 잊고 발락 왕의 물질적인 유혹에 넘어갔습니다. 우리 마음의 탐심은 우리의 눈을 어둡게 만듭니다. 탐심으로 어두워진 눈은 온 몸을 어둡게 하여 결국 발람의 길을 걷게 되며 발람의 결국처럼 비참한 종말을 고하게 되는 것입니다.

(3) 아간의 눈이 그러했습니다. 아간은 하나님의 종 여호수아의 명령을 어기고 여리고 성에 들어갔을 때, 그 성에서 약탈한 물건 중 하나님께 거룩히 구별하여 바쳐야 할 금 덩어리와 은 덩어리와 시날산 아름다운 외투 한 벌을 몰래 땅에 묻어 숨겨 둔 일로 인하여 이스라엘이 아이성과의 전투에서 참패케 되었으며, 이 일이 밝혀지자 아간과 온 가족들과 그들의 소유인 짐승에 이르기까지 다 돌로 쳐죽이게 하고 불사르게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물질에 빠지면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게 되고 그런 결과 아간처럼 그 결국이 비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4)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 자신들을 살피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고후13:5). 빛이 없으면 회개 생활을 못합니다. 회개가 없는 사람은 자신의 몸이 어둡다는 것을 알아야 하며 소경도 눈을 떠야 합니다. 몸이 어두운 사람은 영적 사랑도 시들어 버려 미지근하게 변해 버립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죄에 대한 감각이 예민치 못하여 죄를 범해도 그 마음에 성령의 탄식이 없다면 이 사람은 이미 그 몸의 구석구석이 어둠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속히 회개하여 그 몸에 빛을 비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들 몸에 결코 어두움이 깔려 있어서는 안됩니다. 등불의 광선이 사면에 비췸같이 밝은 빛이 온 몸에 비취게 해야 합니다. 먼저 우리는 주님의 빛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밝은 눈으로 온 몸을 살펴서 죄를 끄집어내고 흠과 점이 없도록 항상 빛으로 꽉꽉 채워야 합니다. 먼저 우리는 이 세상을 밝게 보는 눈을 감고 심령한 눈을 열 수 있도록 힘쓰는 생활이 필요함을 깨닫고 이 빛을 소유하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65) 바리새인들에게 내린 화

(누가복음 11 : 37 - 44)

서 론 : 예수님은 어느 한 바리새인의 초청을 받고 그 집에 들어가 앉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매우 시장하셨고 그를 초청한 바리새인은 나그네를 대접하려는 심정이 아니라면 아마 그에 대한 흥미를 가지고 자기 집에 초청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윽고 방에 음식상이 들어왔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손을 씻지 아니하시고 음식을 대하셨습니다. 이 일이 그 방안의 분위기를 흐려 놓았습니다. 예수님을 초청한 이 바리새인은 주님이 손을 씻지 아니하고 음식을 대하시는 모습을 보고 이상히 여겼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같은 바리새인의 외식 적인 신앙을 몹시 책망하셨는데 그 책망이 화의 선언으로 나왔습니다.

1. 탐욕과 악독이 가득한 바리새인들

바리새인들은 장로의 유전을 따라 정결의 예법을 지켰습니다. 그들은 시장에서 집에 돌아와서는 반드시 물을 몸에 뿌렸습니다. 그리고 식사를 들기 전에도 물론 손을 씻었습니다. 그리고 씻지 아니한 손으로는 음식을 먹지 아니했습니다. 이제 그들에게는 이 같은 생활이 하나의 규범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같은 정결케 하는 의식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음식을 드시려고 하는 것을 본 이 바리새인이 이상히 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고 보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같은 바리새인들의 생활양식에 구애를 받으시면서 살아가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일에 있어서 철저하셨습니다. 그것은 율법의 완전한 의를 이루셔서 우리로 그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장로의 유전은 율법이 아닌 사람의 법으로, 하나님이 가증히 여기시는 인위적인 법인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이 만들어 놓은 유전으로 오히려 하나님의 법을 범하여 정죄를 자초하는 어리석은 일을 해 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느 날 바리새인들의 항의를 받으신 일이 있었습니다.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고 불만을 토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거늘 너희는 가로되 누구든지 아비에게나 어미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고 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고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마15:1-6).

(1) 예수님은 자기를 초청한 이 바리새인을 향하여 너희는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하나 너희 속은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잔과 대접의 겉이란 그들이 깨끗이 하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외형적인 겉 사람을 말합니다. 물론 정결케 하는 예식은 원래가 잔과 대접을 물로 씻는 일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것을 바리새인들이 사람에게 적용시켜 물로 씻으면 사람도 정결케 된다고 믿은 것입니다. 잔과 대접은 물로 씻으므로 깨끗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은 보이는 겉보다 보이지 아니하는 속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겉은 이처럼 물로 세척하여 깨끗하게 보이고, 정결케 되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보시는 사람의 정결은 겉에 있는 것이 아니라 속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을 더럽게 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마15:11-20). 바리새인들의 속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다고 하셨으니 이런 것들이야말로 물로 씻을 수 없는 더러움입니다. 탐욕이란 말은 원어로 해석하면 많다는 말과 가진다는 말의 합성어가 됩니다. 욕심이 한이 없어서 오직 가지기만을 욕심 내는 마음을 가리킨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오직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안에 있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탐욕과 악독입니다. 이것은 그들의 재물을 사랑하는 마음을 정죄 하신 것입니다. 그 안에 있는 것이란 바로 그들이 소유하고 두 손으로 꽉 붙들고 있는 돈입니다. 그들은 그것을 하나님 앞에나 이웃에게 대단히 인색했습니다. 돈 많은 부자 청년의 경우도 그가 많은 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네 재물을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고 하시는 주님의 말씀에 고민한 나머지 주님을 포기하고 세상 길로 되돌아갔던 것입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그것을 구제하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에서 물질을 비우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탐욕과 악독이 사라지고 깨끗해 질 것입니다.

2. 공의와 사랑을 버린 바리새인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하나님께 얼마나 가증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하여 신랄하게 공격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 도다”고 책망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라고 하신 화란 말은 “오, 슬프도다”는 의미로 그들이 이 같은 죄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임할 비극적인 종말을 슬퍼한다는 표현입니다. 그들의 외식 적인 신앙은 집 뜰 앞에 심은 운향이나 채소에 이르기까지 십일조를 드림으로 철저한 듯한 인상을 주고 있지만 그들의 생활과 마음에서 공의를 버렸고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사랑은 찾아 볼 수가 없었습니다. 남에게 보이려는 그들의 신앙은 공의도 사랑도 버렸으며 다만 눈에 보이고 다른 사람에게 나타나는 외형적인 십일조 생활만큼은 철저하게 계속해 온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드린 헌물이나 십일조도 그 실인즉 하나님을 멸시하고 경홀히 여기는 가증한 방법을 써 온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말1:8).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면서 의미심장하신 말씀을 곁들여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할 것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지적하신 이것도 행하라고 하신 “이것”이란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요, 저것도 버리지 말라고 하신 “저것”이란 그들이 철저하게 행한다고 하는 십일조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계속적으로 화를 내리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 도다. 화 있을진저 너희여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들이 많은 사람이 있는 곳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 것은 많은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고 높임을 받고자 하는 교만한 마음에서입니다. 이들은 하나님 앞에서 가장 낮은 자리로 떨어져 버릴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평토장한 무덤 같다고 하셨습니다. 평토장한 무덤은 눈에 잘 띄지 아니합니다. 그리고 겉으로는 아름답게 꾸밉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더럽고 추한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이처럼 겉으로는 외식으로 꾸미기 때문에 그 겉만 바라보는 사람들은 그들의 속에 있는 이 더러운 탐욕과 악독을 발견할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결론 : 외식 적인 신앙생활은 하나님 보시기에 매우 악한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 속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 정결하고 깨끗함을 보여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66) 율법사에 대한 책망

(누가복음 11 : 45 - 54)

서 론 : 바리새인들에 대한 책망을 하실 때 그곳에 있었던 한 율법사가 주님을 향하여 항의를 했습니다. “선생님 이렇게 말씀하시니 우리까지 모욕하심이니이다.” 율법사란 바리새인들 중, 한 무리들입니다. 서기관들이나 율법사들은 다 바리새파에 속한 무리들이기 때문에 주님이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책망하실 때 그렇게 되면 율법사인 자기들까지 그런 책망을 듣는 것이 되니 그같은 일은 자신들에 대한 인격적인 모욕이라고 분히 여겼던 것입니다. 율법사란 서기관들과 쌍벽을 이루는 율법에 전문적인 지식인들로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일을 담당한 상당한 지식인들이었습니다. 그의 항의를 들으신 예수님은 이제 율법사들을 향하여 공격의 화살을 돌리신 것입니다.

1. 남에게만 짐을 지우게 하고 자신은 안 지는 지도자들

율법은 무거운 인생의 짐입니다. 율법이 인생의 짐이 되는 이유는 사람들이 그 율법을 통해서 의를 얻으려고 힘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사람이 율법으로는 의로워질 수가 없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아무리 힘쓰고 노력해도 의롭게 될 수 없는 율법을 지키려고 애쓰니 그것이 인생의 무거운 짐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율법의 짐에 매어 허덕이다가 결국 그 율법의 정죄를 받아 멸망 받는 인생들을 불쌍히 보시고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인생들에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다가 그들은 또 무엇이 부족한지 수백 가지에 달하는 장로들의 유전을 율법의 혹으로 붙여 놓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것을 열심히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반드시 지켜야할 것을 강요했습니다. 그런데 이 같은 짐을 그 백성들에게는 지우지만 자신들은 한 손가락도 이 짐에 손을 대지 않는다고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남은 가르치되 자신들은 배울 줄을 몰랐습니다. 남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가르쳤지만 자신들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생활을 해왔습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으면서 남에게는 강요했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외식 적인 행동과 그들의 생활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이 같은 하나님의 종들이 있습니다. 남을 가르치는 사람은 먼저 자기부터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남에게 순종을 강요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열매를 맺어 본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율법사에게 내리신 주님의 책망을 똑같이 듣게 될 것입니다.

2. 지식의 열쇠를 가지고 자기도 못 들어가고 남도 못 들어가게 하는 무리들

율법사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 자들입니다. 율법의 모든 지식을 그들이 독점하고 모든 사람들을 그들의 지식으로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 지식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그들에게 그 지식이 무익한 존재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는 지식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들어가는 것인데 그들에게는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메시야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일에 대하여 성경 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곳으로 찾아가지는 아니했습니다.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라 믿음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들의 천국 길을 가로막았습니다. 그들은 그 당시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을 유대교에서 출교 했을 뿐 아니라 정죄 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지식으로 참 생명의 길을 가고자 하는 백성들의 길을 막은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왜 믿음이 없었습니까? 율법은 믿음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행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행하므로 의롭다함을 얻는데 율법의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행함으로는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율법대로 살려고 그 율법을 행해도 결과적으로는 율법을 범하게 되며 죄인의 비참한 모습으로 들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롬3:20).

바울은 율법으로 의를 얻고자 힘썼으나 그가 얻으려는 의는 얻지 못하고 죄를 행하지 않을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이처럼 애처롭게 부르짖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러면 왜 바울은 율법을 좋아하고 그 법대로 살려고 했으나 실패한 것입니까?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율법이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의 죄를 깨닫는 일인 것입니다.

3.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는 도다

예수님은 이처럼 말씀하시고 그들의 가장 아픈 곳을 찔렀습니다.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는다고 하신 것입니다(47-48).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들을 죽였습니다. 주님은 그 조상들이 바로 너희들의 조상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조상들은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그리고 너희는 그 위에 그 무덤의 수효를 더 쌓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의 조상들이란 지난날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을 죽인 이스라엘의 지도자들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적은 수효의 선지자들을 죽였지만 지금 이스라엘의 지도자의 위치에서 그들이 걸어온 길을 답습하고 있는 바리새인들은 잘못된 교훈과 율법의 횡포로 자기 백성들을 사망의 길로 인도하고 있으니 그들의 이런 일이야말로 무덤 위에 무덤을 더 쌓는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쌓는 일은 죽이는 일보다 더 회생의 수효가 많음을 가리킨 것입니다. 그들이 남을 잘못 가르치는 일은 많은 영혼을 죽이는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의 이런 행위는 절정에 달하여 급기야 하나님이 보내시는 메시야와 그의 증인들까지 죽이는 죄를 범하게 될 것임을 예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을 위해 최후의 의인으로 보내신 그들의 메시야를 그들의 손으로 죽였으니 그 죄에 대한 보응은 어느 세대 사람들보다 크며 그들은 그 죄를 짊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결론 : 백성들의 지도자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서야 한다는 일은 중요합니다. 백성의 지도자들은 지식의 열쇠를 가진 자들입니다. 여기서 지식의 열쇠라고 표현하신 말은 백성들에게 가르칠 하나님의 말씀의 지식을 의미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에게 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는 지도자들에게 이런 지식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지식을 올바로 활용하지 못하므로 자신들도 의나 구원에 이르지 못하고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는 사람들까지 그 길을 막았다고 책망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구원의 주이신 예수를 비방, 정죄 하였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출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선지자들을 죽인 자기 조상들보다 더 중한 죄를 짓고 있으니 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에 대한 책임을 그들이 담당해야 할 것이라고 책망하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12장(67 ~ 78)

◆ 밤중소리 01-11 | VIEW : 559

(67) 참으로 두려워할 자(누가복음 12 : 1 - 5)

(68) 두려워 말라(누가복음 12 : 6 - 12)

(69) 탐심을 물리쳐라(누가복음 12 : 13 - 21)

(70) 탐심을 이기는 비결(누가복음 12 : 22 - 31)

(71)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누가복음 12 : 32)

(72)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누가복음 12 : 33 - 34)

(73) 주님을 기다리는 자세(누가복음 12 : 35 - 40)

(74) 두 종류의 청지기(지혜로운 청지기)(누가복음 12 : 41 - 48)

(75) 두 종류의 청지기(악한 청지기)(누가복음 12 : 41 - 48)

(76) 불을 던지러 오신 예수(누가복음 12 : 49 - 50)

(77) 복음과 분쟁(누가복음 12 : 49 - 53)

(78) 시대의 분변(누가복음 12 : 54 - 59)


(67) 참으로 두려워할 자

(누가복음 12 : 1 - 5)

서 론 : 우리는 참으로 두려워 할 자를 모르기 때문에 우리의 행실이 하나님 앞에 바르지 못하고 세상 죄악에 물들어 갈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에 대한 경계를 말씀하시면서 두려워할 자를 알고 신앙적으로 바르게 살아갈 것을 권면하셨습니다.

1. 바리새인의 누룩

주님 주위에는 서로 밟힐 만큼의 실로 많은 수만의 무리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이때 주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바리새인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경종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주님은 누룩이라고 규정하신 것입니다. 누룩은 악한 번식물입니다. 그리고 누룩은 물건을 썩히는 데 필요한 존재이기도 합니다. 교회의 누룩이란 주로 잘못된 교훈을 말합니다. 이것에 물들면 그 심령이 썩고 그 생명이 죽기 때문에 이 같은 이름을 붙였습니다. 외식이란 겉으로 꾸미는 거짓된 모양을 말합니다. 심령의 변화 없이 그의 행실로 변화 받은 것처럼 거짓되게 꾸미는 행실이 외식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외식 자들에게 평토장한 무덤이라고 책망하신 것입니다. 누룩이 위험한 것은 누룩은 놀라운 번식력을 가지고 활동하기 때문입니다.

고전5:6에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진다”고 했습니다. 누룩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가라지’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가라지를 심는 자는 마귀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심어주지만 마귀는 미혹의 영으로 우리의 심령 속에 가라지를 심어줍니다. 이 가라지는 욕망으로, 탐심으로, 음욕으로, 물질로 우리들 생활 속에서 자라게 되고 죄를 조장하며 급기야 우리들로 믿음에서 떠나게 하는 것입니다. 누룩이 들어오면 우리의 마음에서 평안이 살아집니다. 말씀에 대한 의심이 생깁니다. 기도생활에 나태해 집니다. 교회와 목회자와의 거리가 점점 멀어집니다. 그러므로 더 깊이 우리의 심령 속에 들어와 우리의 생명을 썩히기 전에 우리는 우리들 심령 속에 들어와서 우리의 생애를 잠식하는 누룩을 뽑아내야 합니다.

2. 외식은 드러난다

외식 자들은 자신의 진실한 마음을 깊이 감추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그들의 마음을 알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거짓된 것, 감추어진 모든 것은 반드시 들어 날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외식을 숨기려고 마음을 감추어도 하나님은 겉 모양을 보시지 않고 중심을 감찰하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의 불꽃같은 눈앞에 여지 없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중심에 진실함을 원하시기 때문에 거짓된 것을 들추어내어 심판하십니다. 히브리서 4:12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부요한 것을 자랑했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심령을 살피시고 나무라셨습니다. 실인즉 그들은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상태에 있었고 다만 겉으로 보기에 부자로만 꾸민 것입니다. 이런 행위는 영적인 외식입니다. 하나님 앞에는 죄도 숨기지 못합니다. 자기 혀로 스스로 하나님 앞에 자백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 앞에 아무 것도 숨김없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진실해야 합니다.

3.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자

이 세상에는 권력자들이 있지만 이들의 권세는 한정되어 있습니다. 몸을 죽일 권세밖에 없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할 수 없는 권세입니다. 사람들은 이들을 두려워하고 이들에게 칭찬 받으려고 거짓을 행하고 이들 앞에서 외식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겨우 몸만을 죽일 수 있는 세상 권세 자들 앞에서 외식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 앞에서 그리스도를 부인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 앞에서 거짓말 하지 말아야 합니다. 참으로 두려워 할 이에 대해서 주님은 몸도 죽이고 영혼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그분이라고 하셨습니다. 지옥이란 인간의 최종적인 심판인데 그 권세는 오직 주님께만 있습니다.

(1) 하나님은 우리 몸의 생사 여탈 권을 가지고 계십니다. 비록 사람이 어떤 사건을 계기로 죽었다해도 그런 방법으로 그 사람의 생명을 취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은 참새 한 마리의 생명도 하나님의 허락하심이 없이는 결코 땅에 떨어짐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우주의 신비와 이 대자연의 법칙은 모두 하나님의 지혜에 의해 한치의 오차도 없이 운행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허락하심이 없이는 누구도 우리의 생명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같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능과 능력을 믿고 그 분을 의지해야 합니다. 결코 권세 있는 사람을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2) 몸을 죽이는 자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죽은 후에 그를 심판하시는 그 분이 두려운 것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하셨습니다(히9:27). 사람은 한번 죽는 것으로 소멸되는 존재가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죽은 후에도 죽지 않는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생명의 최종적인 심판이 죽은 후,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이 심판이 두려운 이유는 이 심판으로 최종적인 인간의 운명이 좌우되는데 여기서 지옥의 심판을 내리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이 분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결론 : 우리는 하나님 앞에 온전해야 합니다. 주님과 진실로 하나님 앞에 바로 서야합니다. 우리는 하나님만 두려워해야 합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존재를 두려워하는 자는 성밖에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두려워 할 자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68) 두려워 말라

(누가복음 12 : 6 - 12)

서 론 : 주님은 그리스도인들이 저지르는 죄 중에서 특별히 경계해야 할 죄에 대하여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 앞에서 인자를 부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죄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이름을 부인 받는 결과가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심으로 우리의 구원과 직결되는 문제임을 경종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이 같은 말씀을 하시게 된 것은 장차 그리스도인들이 권세 잡은 자들 앞에 끌려가서 그리스도의 이름에 대한 부인을 강요당할 것임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1.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인하는 여러 가지 형태

(1) 두려움에서 부인하게 됩니다. 장차 적그리스도가 등장하는 세대에서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시인하는 문제가 자기 생명과 직결되는 경우가 될 것입니다. 로마의 여러 황제들이 그러했습니다. 베드로는 생명 잃는 것을 두려워하여 부인했었습니다. 인류의 종말에 거짓 선지자가 등장하면 이 자가 세상 인류로 하여금 적그리스도에게 경배케 합니다. 이 일에는 이적으로 미혹하는 일이 따릅니다. 만약 이때 적그리스도에게 경배치 아니하거나 그를 따르지 않을 때는 누구든지 다 죽임을 당하게 된다고 했습니다(계13:11-18). 이런 경배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인하는 것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 성도들은 이 일에 주님으로부터 크게 칭찬을 받았습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고 하셨습니다(계3:8).

(2) 부끄러움에서 부인하게 됩니다. 어떤 경우는 신앙고백이 부끄러워 친구나 친지들 앞에서 부인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신앙의 어린 초기에 있는 사람들이 저지르기 쉬운 죄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 아니하노니” 복음에 대한 분명한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사람이 왜 복음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입니까? 복음이 무엇인지 복음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곧 “예수”이신 데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사람이 그 예수를 부끄럽게 생각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구원의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혜 가운데 신앙이 자라야 하며 구원의 확신을 가짐으로 복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3) 이해 타산에서 부인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는 직장 관계로, 사업관계로, 상관이나 거래손님에게 부인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는 관료 직에 있는 사람이 직속 상관 앞에서 부인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믿음을 지키는 일에는 그 앞에 어떤 장애물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 앞에는 이해타산을 초월해야 합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치 아니하면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4) 미혹으로 부인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단은 우리를 미혹합니다. 물질로 미혹하고 권세의 위엄과 협박으로 미혹하고 이단으로 미혹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있어서 예수보다 더 소중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어떤 경우에도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인하거나 그 이름의 명예나 영광을 더럽혀서는 안됩니다.

2. 정사 잡은 자 앞에 끌려간다

11절에서 사람들이 너희로 회당과 정사 잡은 이와 권세 있는 이 앞에 끌고 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우리는 시인이냐? 부인이냐? 결단을 내야 합니다. 이 일에 대하여 주님은 염려하지 말고 두려워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담대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의지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십니다. 주님은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은 언제나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나타납니다. 그러나 성령이 우리가 해야 할 말을 가르치신다고 우리를 기계처럼 사용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때 우리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든지 그 말이 곧 성령께서 가르쳐 주신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주님은 두려워 말라고 하셨나? 그 이유로서 참새의 경우를 예로 드셨습니다. 돈에 팔려 가는 미미한 참새의 생명까지라도 하나님이 주관하시고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밝히신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이 참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을 아주 귀하게 다루시는 분입니다. ‘참새보다 얼마나 귀하냐’는 말씀에는 우리의 이름이 생명책 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음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독생자를 보내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참새에게는 구주가 없습니다. 참새를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보내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를 피로 값 주고 사신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에는 진귀하고 아름다운 생명체들이 많지만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주님이 피를 흘리신 일이 없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기업을 주신 것을 의미하는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참새나 다른 모든 동물들의 생명을 주관하시지만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의 기업의 약속이 없습니다. 오직 인간에게, 그 인간 중에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만 허락된 특권이요 영광인 것입니다. “이토록 귀한 생명을 하나님은 얼마나 소중히 다루실 것이냐”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머리털까지라도 다 세신 바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결론 : 우리는 사람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무슨 일을 당해도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그리고 어떤 권세 자 앞에서라도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인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내 생명을 주를 위하여 바칠 때 나의 참 생명이 살게 되는 것입니다.


(69) 탐심을 물리쳐라

(누가복음 12 : 13 - 21)

서 론 : 신약에서 “탐심은 우상숭배”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골3:5). 우상숭배란 하나님이 아닌 존재를 하나님처럼 섬기는 행위를 말하는데 돈을 사랑하는 일을 비록 우성처럼 절은 안 하지만 하나님보다 더 귀중히 여기며 사랑하는 일은 동일하기 때문에 이처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날 무리 중에 어느 한 사람이 주님께 한가지 부탁을 드렸습니다. “내 형에게 명하여 유업을 나누게 해 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아마도 아버지의 상속문제로 형제끼리 다툼이 일어나 동생이 불리한 입장에서 억울함을 당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주님의 동정을 받을 것으로 알았지만 주님은 그의 요구를 거절하시기를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고 책망하시면서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고 경계하셨습니다. 이 사건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앞에 부딪힌 문제를 가지시고 즉각적으로 주옥같은 교훈의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1. 탐심을 물리 치라

주님은 어떤 경우에도 우리의 탐심을 이루어 주시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아마 이 사람도 평소에 주님을 잘 알고 따르고 있는 사람인양 인상을 주고 있지만 주님은 그의 요구를 일언지하에 거절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탐심이란 무엇입니까?

(1) 부당한 이익을 욕심 내는 마음을 탐심이라고 말합니다. 저울추를 속이고 버는 이익은 무서운 탐심입니다. 이런 사람을 하나님은 심판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거짓말하며 장사하는 일은 탐심에서 나오는 일입니다. 또한 기업주가 삯군에게 품삯을 제때에 주지 않는 일도 탐심입니다. 이에 대해 약 5:4에서 부한 자들에게 경종하시면서 보라 너희 밭에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른다고 했습니다.

(2) 다음에 탐심이란 돈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했습니다. 사랑한다는 말은 돈을 자기 인생의 위주로 삼는 생활을 말합니다. 돈 때문에 형제의 우애를 해치는 일도 역시 탐심에서 나온 것입니다. 주님은 이것을 물리치라고 하셨습니다. 유혹을 받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주로 살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2. 하나님께 부요하지 못하는 자의 결국

주님은 탐심을 경종 하시면서 하나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밭에 소출이 풍성한 어느 한 농촌 부자의 경우였습니다. 이 사람을 주님은 탐심의 전형적인 인물로 등장시키셨습니다. 이 사람은 많은 소출에 도취되어 자신의 재물을 위해 그 쌓을 곳을 짓기를 원했으며, 앞으로 자기 인생의 계획을 설계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그 날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하신 말씀이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사람이 왜 어리석은가에 대하여 주님의 말씀에 비취어 알아보면 하나님이 없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의 말 중에는 하나님이란 말이 한마디도 안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생활은 소망이 없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 생애의 목적을 자기 즐거움에 두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아무런 계획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지적하신 대로 이 사람은 자기에게는 부요했지만 하나님께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십일조도, 감사도 없었습니다.

(1) 하나님께 부요한 생활이란 그의 살아가는 삶의 목적을 하나님의 영광에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그 마음에 탐심을 가지면 그 사람의 마음에서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가질 수 없습니다.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생활은 자연스레 자기 본위의 생활이 되며 하나님을 향한 열매도 찾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2) 하나님께 부요한 삶이란 물질을 하늘에 쌓아두는 일입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저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그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결론 : 이 부자는 이 두 가지 가져야 할 일에 모두 실격했습니다. 오직 자기 욕심을 따라 자신의 삶을 경영했으며 그런 방법으로 자기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이것이 탐심을 가진 사람의 삶의 철학입니다. 그러나 결국 탐심은 자기 생명을 죽입니다. 이 부자는 그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에 의해 그 날밤 그의 영혼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의 인생은 자신이 거둔 것조차 누리지 못했으며 그의 육신의 생애는 허망하게 끝났고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후, 그의 영혼에 대한 심판에서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우리는 곰곰이 생각하고 이 부자와 같은 어리석은 인생을 살아가서는 안될 것입니다.


(70) 탐심을 이기는 비결

(누가복음 12 : 22 - 31)

서 론 : 주님은 탐심을 버리라고 말씀하시고 그리스도인들에게 탐심이 없어야 할 이유에 대하여 이곳에서 자세히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만약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 말씀을 자신의 생활 철학으로 삼아 세상을 살아간다면 그는 참으로 아름답고 복된 생애를 주안에서 이루어 나갈 것입니다.


1.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위하여 염려치 말일에 대하여 주님은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고 하셨습니다. 말하자면 음식의 염려는 생명을 죽이는 일이며 의복의 염려는 결국 자기 육신을 죽이는 일이 된다는 사실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까마귀의 경우를 들어서 교훈 하시기를 “까마귀는 곡식을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고 하셨습니다. 까마귀가 자기 양식을 위하여 농사를 짓는 일이 없습니다. 또 하나님께 기도하는 골방에 들어가 양식 때문에 기도하는 일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그 까마귀를 기르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너희는 이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고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그의 피로 값주고 사신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온 세상을 주고도 능히 바꿀 수 없이 귀중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사 그 아들을 보내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이처럼 중하고 값진 우리들이거늘 어찌 그까짓 까마귀에 비교가 될 것입니까?


2. 염려는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다

인생이 그의 염려로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하나님은 아마 너희는 기도하지 말고 염려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자나 더할 수 있느냐고 하셨습니다. 염려로 자신의 키 한자도 더할 수 없는 연약한 인생이 무엇 때문에 염려를 하느냐는 것입니다. 지극히 적은 것 하나 능치 못하면서 어찌 더 큰 일에 염려하는 가고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3. 백합화를 보라

주님은 사람이 염려를 하지 않아도 될 일에 대하여 자연 속에서 자라나는 백합화의 경우를 예로 드셨습니다. 백합화가 자기를 꾸미기 위하여 길쌈도 하지 아니하고 짜지도 않지만 그가 입은 것이 솔로몬의 영광 보다 더 아름답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입히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한낱 들풀의 존재, 하루 있으면 아궁이에 들어갈 들풀조차 우리 하나님께서 이렇게 입히시기늘 너희가 무엇 때문에 염려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1) 주님은 그리스도인들이 염려하는 일은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고 책망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적은 사람은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염려하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누가 염려하는 생활을 하면 그 사람은 아직도 자기에게는 믿음이 적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믿음이 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이 적다는 말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하여 전폭적인 믿음을 가지고 의뢰하지 못하는 신앙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같은 사람들은 그의 생활이 항상 염려로 뒤덮여 있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인의 염려는 불신과 의심에서 나옵니다. 믿음은 염려를 물리칩니다. 기도하면서도 과연 하나님은 이 일에 응답해 주실까? 하나님은 이런 일이 가능하실 것인가? 이런 생각이 들 때 염려가 찾아오는 것입니다.

(3) 염려는 우리로 하나님 앞에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마13:22절에서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염려는 우리의 마음을 어둡게 하기 때문에 마음에 떨어진 말씀의 씨앗이 마치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앗 같아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염려는 내가 할 것이 아니라 주님께 맡겨야 할 일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리스도인의 염려의 처리방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벧전5:7절에서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염려를 주께 맡기면 그 일이 주님의 일이 되어 주님이 책임져 주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권고(眷顧)란 말은 맡겨준 일에 대해 돌보아 주신다는 뜻입니다.


4.. 먹을 것과 입을 것에 대하여 근심하지 말라

의식주에 대한 근심은 세상 사람이 하는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이같은 근심이나 염려쯤은 하나님께 맡겨야 하는 것입니다. 특히 생활의 염려는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을 둔하게 만들어 주 재림의 날에 올바른 신앙생활을 못하므로 그 날이 덫과 같이 임할 것이라고 경종 하셨습니다(눅21:34).


결론 : 하나님은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알고 계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해야할 일은 근심이나 염려가 아니라 그의 나라를 구하는 일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복 받는 길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여 주시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71)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누가복음 12 : 32)

서 론 :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는 무리들을 향하여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고 하셨습니다. 언제나 주님을 진심으로 따르는 무리는 많은 무리가 아니었습니다. 이같은 일은 예나 이제나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의 문이 결코 넓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구원의 문은 좁다고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생활을 하지 않으면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교회에 지극히 적은 무리에 속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들에게 너희는 무서워 말라고 말씀하시고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1. 왜 적은 무리인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사람은 그리 많은 수효의 사람들이 아닙니다. 생명책에 기록된 택한 무리는 적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 22장의 어느 임금의 아들 혼인 예식의 비유를 통하여 주님이 말씀하실 때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택한 백성들을 반드시 예수그리스도에게로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고 하셨습니다.

(1) 노아 시대의 경우

하나님은 노아 시대에 세상에 죄악이 관용할 때에도 그 많은 인류 가운데 오직 노아의 여덟 식구만을 택하시고 의의 후사로 삼으셨습니다.

(2) 모세의 경우 :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시험하고 불순종할 때 이스라엘의 많은 수효를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광야에서 다 멸망케 하셨습니다.

(3) 기드온의 경우 : 하나님은 대적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데 이스라엘의 많은 군대를 원치 아니하시고 기드온의 3백명을 쓰셨습니다. 적은 수효로서 그 영광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4)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많은 무리들이 주님을 따랐지만, 주님이 진리의 말씀으로 가르치자 흥미를 잃은 많은 무리들이 물러가고 주님 곁에는 몇 명 안되는 적은 수효가 서 있었습니다. 이때 주님은 너희도 가려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적은 무리들만이 영생의 말씀을 따라 끝까지 주님을 따랐습니다.

(5) 주님은 그의 12명의 제자들 중에도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택하여 변화산에 데리고 올라가셨습니다.

(6) 오순절날 성령을 받은 성도들도 많은 수효가 아닙니다. 120명의 문도들이었습니다. 인류의 종말에도 믿는 사람이 결코 많은 수효라고 말씀하고 있지 아니합니다. “인자가 올 때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2. 무서워 말라

주님이 이들을 향하여 무서워 말라고 하신 이유는 이들 무리들에게 무서워할 일이 많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이 받을 어려움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예언해 주고 있습니다.

(1)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복음에는 고난이 따릅니다. 이 고난을 벗어버리고는 주님의 사명자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 주변은 어둠으로 깔려 있습니다. 우리는 이 어둠을 빛으로 물리쳐야 합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인의 빛된 사명에 대해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5:15).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등불을 말 아래 숨겨두려고 합니다. 등불은 등경 위에 두어야 빛을 비췰 수 있습니다. 등경 위에 둔다는 말은 고난을 상징합니다. 바람이 불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때 그 바람을 이기지 못하면 빛을 제대로 비췰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자기 가정에서 빛을 발휘하려면 고난이 따를 때도 있습니다. 사회에서, 직장에서 활동할 때도 그리스도인이란 이름 때문에,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명예를 위해서 받아야 할 고난이 따르는 것입니다.

(2) 의롭게 살려는 자에게는 핍박이 겸하여 따를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안에서 의롭게 생활하면서 세상의 핍박을 받지 않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추구하는 의는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일반적인 타당성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생활하기 때문에 세상 사람의 핍박이 따르는 것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이 같은 핍박이 두려워 세상 사람의 관습을 따르거나 그들의 생활에 동조하면 그리스도인다운 생활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무서워 말라고 하셨습니까?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주님이 도와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요16:33).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사41:14). “의인은 환난에서 구원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잠11:8).

결론 : 두려움은 우리 마음에서 믿음을 추방합니다. 마귀는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며 하나님은 우리에게 마음의 평안을 주십니다. 두려움을 물리치는 길은 담대한 믿음입니다. 담대한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과 의뢰에서 나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어떤 일에도 무서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72)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

(누가복음 12 : 33 - 34)

서 론 : 성경에는 주머니에 대한 비유의 말씀이 여러 번 나옵니다. 학 1:6에는 구멍 뚫어진 전대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 폐허된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지 아니하고 자기들이 살기 위한 완벽한 집을 짓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이스라엘에게 경종하신 말씀입니다. 열두 제자들을 둘씩 묶어 전도대로 보낼 때 주님은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주머니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눅 12:33에 있는 말씀은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영적인 표현으로써 하나님의 축복과 이들의 상급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1. 주머니는 하나님이 주관하신다.

주머니란 돈주머니를 말합니다. 사람들은 이 주머니 속에 세상 재물을 담기 위하여 여러 가지로 애쓰며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신의 노력과 지혜로 능히 주머니에 돈을 채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들이 바라는 돈주머니의 주관자는 바로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1) 하나님이 준비해 주시는 주머니가 아니면 허사임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시 127:1에서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다”고 하셨습니다. 비록 일찍 일어나고 늦게 누울지라도 그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된 것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난다고 하셨습니다(잠16:1).

(2) 하나님은 우리의 경영하는 바를 세우기도 하시며 헐기도 하십니다. “에돔은 말하기를 우리가 무너뜨림을 당하였으나 황폐된 곳을 다시 쌓으리라 하거니와 나 만군의 여호와는 이르노라, 그들은 쌓을지라도 나는 헐리라”(말1:4). 인생들이 바라는 주머니는 자기가 원하는 소원 한마디로 그리 쉽게 채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손길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의 계명을 무시하고 허영과 탐심으로 주머니를 채우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가지고 있는 주머니는 구멍 뚫린 전대인 것입니다. 이 전대를 소유한 사람들은 비록 힘써 많이 뿌릴지라도 수입이 적으며 먹어도 배부르지 아니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아니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학1:6). 이것은 불의한 재물에 내리시는 하나님의 재앙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2. 하나님의 전대를 소유해야 한다.

우리는 헛된 사욕과 탐심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주머니를 소유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주머니는 누구에게 주십니까?

(1)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를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고 하셨습니다(시편128:1-2). 우리의 손이 수고한대로 먹는 축복은 하나님의 손에서 나온 복입니다.

(2) 순종하는 자에게 이 주머니를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여 네게 미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3) 십일조를 바치는 사람에게 이 주머니를 주신다고 하셨습니다(말3:10).

(4)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자에게 주신다고 하셨습니다.(마 6:33)

3. 낡아지지 않는 하나님의 주머니

주님은 우리들에게 권고하시기를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이 주머니는 하늘에 간직해 두는 주머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돈주머니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가장 안전한 곳에 우리의 재물을 쌓는 방법입니다. 이 주머니는 어떻게 만들 수 있습니까? 구제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구제의 상급은 너무나도 확실함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구제가 그저 구제로 끝나는 줄로 알면 안됩니다. 구제는 넘치는 보상이 따릅니다.

(1) 구제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잠11:25).

(2) 특히 가난한 자에 대한 구제를 격려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자는 궁핍하지 아니하려니와 못본체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많으리라”(잠28:27).

(3) 구제는 선한 일이며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의 초보적인 열매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엡4:28).

(4) 구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좋은 일이지만 외식적으로 하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5) 착한 일에 대한 상급은 오래 기다리는 중에 받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고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결론 : 이 주머니를 만듭시다. 그리스도인은 소망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이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이 이곳에 채우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73) 주님을 기다리는 자세

(누가복음 12 : 35 - 40)

서 론 : 주님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의 지침을 여러 가지로 교훈적으로 말씀하신 후 결론적으로 주님의 재림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최종적인 소망은 주님의 재림입니다. 주님의 재림은 우리들의 구원의 완성이 되며 부활과 영생의 시작이 되기 때문에 주님은 그의 재림에 대하여 시간이 있으신 대로 혹은 교훈적으로 혹은 경종으로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1. 그리스도인이 깨어 있는 영적 상태

주님의 재림을 맞이할 성도들은 깨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깨어 있다고 하는 말은 영적인 의미로 들려주신 말씀인데 그 깨어 있는 상태를 몇 가지 비유로 표현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인들이 깨어 있어야 할 일에 대하여 다음 세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1) 허리에 띠를 띠라고 하셨습니다. 허리란 사람의 중심 부분입니다. 사람은 허리가 온전해야 그의 활동이 정상적일 수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말씀하신 허리란 영적인 뜻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속 사람의 중심인 허리를 말씀하셨습니다. 이 허리에 띠를 띠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 띠란 무엇을 말합니까? 엡 6:14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갖추어야할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영적 사람의 허리에 띠를 띠라고 하신 띠란 진리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속 사람은 진리로 말미암아 그 생명이 유지되고 있는 것입니다. 진리로 속 사람의 중심을 잡아야 합니다. 이 말씀은 진리로 우리의 속 사람을 강건케 하라는 말씀이십니다. 진리로 우리의 속 사람을 성장시키라는 말씀이십니다.

(2) 다음에 등불을 키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등불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비취어야할 빛을 말합니다. 주님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시고 사람이 등불을 켜서 발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둔다고 하시고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마6:14-16). 주님을 맞이할 그리스도인은 이처럼 등불의 빛을 세상 사람에게 비취게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마 25장에는 미련한 처녀와 지혜로운 처녀들이 가진 것으로 등과 기름이 나옵니다. 이것은 등불을 말하는 것입니다. 등은 구원을 상징하며 기름은 성령을 상징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람만이 빛을 세상에 비췰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3) 다음에 서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서 있다고 하는 말은 일하는 자세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의 깨어 있는 신앙생활의 태도를 말하는데 기도생활, 봉사생활, 전도생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서 있는 상태의 반대는 잠자는 상태입니다. 미련한 처녀들은 잠을 자는 상태에 있었던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2. 깨어 있는 사람

주님은 깨어 있는 모습을 하나의 비유로 표현하셨습니다. 36절에서 “너희는 마치 혼인집에서 그 주인이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주인은 돌아옵니다. 그러나 그 주인이 돌아올 시간에 대하여 언제인지 모른다고 하시고 혹 이경에나 혹 삼경에 이를지 모른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제 주인이 돌아와서 문을 두드려도 그 주인을 기다리는 종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깨어 있는 상태입니다. 이 같은 종은 복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 종은 집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주인으로부터 올 때까지 지키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이 종은 마땅히 주인이 곧 올 것으로 알고 기다리는 자세로 주인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이 종처럼 주님이 오실 것을 소망으로 삼는 자세로 믿음의 생활을 해야 합니다. 주님은 사도 요한에게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종은 그 시각이 언제라도 혹 이경이나 혹 삼경이라도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하는 자세로 그 주인이 오실 것을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런 자세로 살아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2) 혼인집에 간 주인이 돌아올 것을 기다리라는 말씀은 주 재림에 관한 말씀을 듣고 그 말씀 안에서 살아야 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요한계시록은 곧 돌아갈 것이라고 그 집 종들에게 보내신 편지입니다. 그 편지의 내용 중에 주인이 다시 돌아올 일에 대한 모든 비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인을 기다리는 그 집 종은 마땅히 이 예언의 말씀을 잘 읽고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기록된 말씀대로 주인을 기다려야 합니다. 주 재림에 대한 소식을 모르고서는 제대로 기다릴 수 없습니다. 이제 모든 성도들은 아직까지 멀리했던 재림에 소식이 담긴 요한계시록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결론 : 주님은 결론적으로 주님이 오시는 시기는 마치 도적의 경우와 비교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도적이 어느 때에 이를지 알지 못하는 것처럼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재림을 바라보고 예비하고 준비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주인이 돌아오면 곧 문을 열어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은 자세로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노아 시대나 롯의 시대 사람들처럼 먹고 마시고 세상일에 취하는 생활에 젖어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고 하는 밤중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면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말씀하신 그 대상이 될 것입니다.


(74) 두 종류의 청지기(지혜로운 청지기)

(누가복음 12 : 41 - 48)

서 론 : 예수님은 재림에 대한 말씀을 들려주시고 주님이 재림하실 때 상급 받을 종과 징계 받을 종들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종말에 대한 주 재림의 교훈의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주님을 향하여 이 말씀은 누구에게 하시는 말씀이냐고 물었을 때 주님은 주님의 말씀이 주로 양 무리를 맡아 치는 청지기들에게 대한 것임을 밝히셨습니다. 주님은 이 말씀에서 하나님의 종들을 청지기로 비유하시고 그 청지기 중에는 선한 청지기와 악한 청지기가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1. 선한 청지기의 경우

주님은 선한 청지기는 어떤 종이어야 하느냐에 대하여 자세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동서고금의 모든 하나님의 종들을 향하여 경종으로 들려주시는 말씀이기 때문에 모든 하나님의 종들은 이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1) 선한 청지기는 지혜로워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지혜는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지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련한 사람들로 세상에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는 분이심으로 세상에 지혜 있는 사람을 쓰시지 아니하십니다. 이 지혜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합니다. 이 지혜의 원천은 하나님께 있음으로 하나님이 주십니다. 하나님이 주신다는 말은 성령이 주시는 지혜를 말합니다. 솔로몬은 이 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이 같은 지혜는 기도할 때 받을 수 있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1:5). 다음에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지혜를 주십니다. “내가 주의 증거를 묵상하므로 나의 명철함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 승하며 주의 법도를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승하니이다”(시119:99-100).

(2) 선한 청지기는 진실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군은 진실한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 진실이 빠져버리면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그를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진실이란 마음에 간사가 없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처음 나다니엘을 만나셨을 때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고 하셨습니다(요1:47). 진실한 사람은 그의 입에 거짓이 없습니다.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계14:5). 십 사만 사천의 하나님의 종들의 자격으로 진실한 종을 선택하십니다.

(3) 선한 청지기는 그 종들에게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줍니다. 주님은 이 같은 종들에게 양떼를 맡기십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보내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온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이들을 자기 양이라고 말씀하셨고, 이 양을 당신의 종들에게 맡기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종들은 이 양들에게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주는 일을 감당합니다. 때를 따라 준다는 말은 육신의 양식을 시간을 따라 먹이는 것처럼, 시간 따라 영의 양식을 먹이는 일을 말합니다.

다음에 양떼들에게 시대의 징조를 따라 양식을 공급하는 것을 말합니다. 때라는 말은 주로 주 재림의 시기를 가르치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재림의 시기를 말씀하시는 가운데 때란 말씀을 많이 쓰셨습니다.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고 하셨는데 인자의 때란 바로 주님의 재림의 날을 가리키신 것입니다.

2. 선한 청지기가 받을 복

주님은 선한 청지기가 받을 복에 대해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저에게 맡기리라”고 하셨습니다.

(1) 주님께서는 이들 진실한 청지기를 통해서 그의 신부들에게 밤중의 소리를 들려주십니다. 마태복음25장을 보면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는 말씀이 들려옵니다. 유감스럽게도 신랑을 맞이해야 할 신부들이 신랑이 더디 오므로 졸며 자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신앙적으로 경성하고 주인 맞기에 단단히 준비해야 할 사람들이 잠이 들었습니다. 노아 시대 사람들처럼, 롯의 시대 사람들처럼 세상에 깊이 잠들은 것입니다. 주님은 이들을 잠에서 깨워 신랑을 맞이할 수 있도록 진실한 청지기를 세워 그들로 밤중에 나는 소리로 나팔을 불게 하십니다.

(2) 이들이 종말에 주님을 대신해서 교회의 추수를 위해 활동하는 두 증인들입니다. 요한계시록11장의 두 증인들은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라고 했습니다. 촛대는 교회를 의미하고 감람나무는 진실한 종으로 인정받은 선한 청지기들, 밤중의 소리로 주 재림의 복음을 외쳐 잠자는 주님의 신부들을 깨우는 사명을 이루게 되며 그들에게 신부가 입을 흰옷을 입혀 신랑을 맞이할 수 있게 할 것입니다. 마지막 때, 주님은 이런 사명을 모든 종들에게 주지 아니하시고 선한 청지기들에게 주실 것입니다.

(3) 이들이 받을 상급에 대해 “주인이 모든 소유를 저에게 맡기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들은 추수군의 사명을 이루는 중, 적그리스도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들은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곧 부활 승천하게 되며 주님 오실 때 하늘 군대로 흰말을 타고 주님과 함께 하늘에서 내려오게 될 것입니다. 이들은 첫째부활자의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며 천년왕국에서 주님과 더불어 왕 노릇하는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결론 : 이처럼 주님은 이 같은 종들에게 놀라운 상급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종의 사명을 부끄러움 없이 제대로 감당하려면 선한 청지기가 되어야 합니다.


(75) 두 종류의 청지기(악한 청지기)

(누가복음 12 : 41 - 48)

서 론 : 청지기 중에는 선한 하나님의 종들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악한 청지기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들은 물론 주님이 세우신 종들이 아닙니다. 이들에 대하여 주님은 원수가 와서 심었다고 하셨습니다(마13:28). 그러면 이들은 장차 어떻게 될 것인가?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분명한 심판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악한 종들에 대하여 주님이 경종하신 말씀을 들어보도록 하자.

1. 악한 청지기의 경우

(1) 악한 청지기는 주 재림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아니한 종들입니다.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고 생각한다고 하셨습니다. 이들은 주님의 재림을 원치 아니합니다. 그날은 자기들의 거짓된 모습이 드러나는 날이요 그 대가를 받을 심판의 날이 되기 때문입니다. 마치 예루살렘에 있는 제사장과 서기관들이 그들의 메시야가 베들레헴 땅에서 태어난다는 예언은 알고 있었으나 그 예언을 전해들은 동방박사들은 그곳을 찾아갔지만 그들은 가지 아니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은 메시야를 바라는 마음이 없었으며 메시야가 필요하지도 아니했기 때문입니다. 아들에게는 지혜도 진실도 없습니다.

(2) 이들은 때를 따라 양식을 주는 목회가 아니라, 노비를 때리며 먹고 마시는 일을 했다고 하셨습니다. 때린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양들의 생명을 노략질하는 것을 말합니다. 거짓 종들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분이라”고 하셨습니다(요10:10). 이들은 생기기는 양처럼 생겼지만 그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가 숨어 있습니다. 이들을 가리켜 주님은 삯군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들의 목회는 먹고 마시는 일입니다. 말하자면 직업적인 목회입니다. 사명자적인 목회가 아닙니다. 자기 이익을 구하고 육신의 평안을 원하고 영광을 바랍니다. 그들은 세속적인 생활을 합니다. 취하는 생활이란 세상에 물든 생활을 의미합니다.

(3) 이들에 대하여 주님은 어떤 조치를 취하십니까? 이에 대하여 반드시 그들이 행한 일이 그들의 머리 위에 내려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엄히 때리고 신실치 아니한 자의 받는 율에 처한다고 하셨습니다. “그 죄는 하늘에 사무쳤으며 하나님은 그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신 지라. 그가 준 대로 그에게 주고 그의 행위대로 갑절을 갚아 주라”고 하셨습니다(계18:5-6).

엄히 때리시는 일은 그들은 환난 시기에 누구보다도 먼저 환난을 받는 자가 되는 것을 뜻합니다. 이들에 대하여 주님은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그 종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기를 갊이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의 받는 율이란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는 곳”인데 이곳은 적그리스도가 다스리는 대 환난 시기를 말합니다. 그들은 아무리 회개해도 그 기간 동안 대 환난에서 벗어날 길이 없으며 그 환난의 기간을 거쳐야 구원받은 자라면 구원에 이르고 받지 못한 자라면 짐승의 표를 받고 멸망 받게 될 것입니다.

2. 많이 맞을 종과 적게 맞을 종

이 악한 종들도 두 종류로 나뉩니다. 알고도 행한 종의 경우와 모르고 행한 경우의 두 가지입니다. 알고도 행치 않는 종에 대해서는 많이 맞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죄에 대한 심판은 동일하지만, 알고도 행치 아니한 죄는 더욱 그 책임이 무거운 것임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1)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들은 주 재림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양 무리들에게 재림의 메시지를 전해야 할 것도 알고 있습니다. 아마 성령의 강한 감동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같은 성령의 감동이나 자신의 성경 지식이 자신의 목회에 절실한 문제로 생각지 아니했습니다. 현실적인 생활에 안주하기를 좋아했습니다. 주 재림의 문제보다 심판의 설교보다 축복에 관한 문제가 현실적이라고 생각했고 양 무리들에게 필요할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렇게 목회 하다보니 어느덧 임기가 끝났습니다. 알지 못하는 시간, 생각지 않은 때에 주님이 오셨습니다. 이런 종들은 많이 맞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2)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알지 못했다는 말은 주 재림에 대한 지식이 없어 재림 문제가 절실한 문제임을 깨닫지 못했을 경우입니다. 이들은 성경적인 종말의 징조를 모르기 때문에 자기도 재림의 준비를 못하고 있는 처지에 있었을 것입니다. 이들이 자기가 맡은 양 무리들에게 올바른 재림의 사상을 심어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깨닫기를 원하지만 깨닫지를 못하는 종들이 많이 있습니다. 가르치기를 원하지만 알지 못해 가르치지 못하는 경우도 많은 것입니다. 주님은 이들에 대해 적게 맞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적게 맞는다는 말은 아마 환난 중에 이들에 대해 많이 배려해 주시므로 그 고통을 감해주실 것을 의미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환난 중에 회개하여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게 될 것이며 적그리스도의 통치아래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을 것입니다.

결론 : 이처럼 경종하신 주님은 하나님께로부터 많이 받은 일에 대하여 그 책임을 분명히 나타내셨습니다. 많이 받았다는 말은 은사 적인 사명을 의미합니다. 많이 맡았다는 말은 재물이나 양떼들의 수효를 말하기도 합니다. 이들의 사명이나 책임은 적게 받은 자보다 훨씬 큰 것입니다.


(76) 불을 던지러 오신 예수

(누가복음 12 : 49 - 50)

서 론 :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주님이 이 말씀은 여러 가지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불은 성령을 말합니다. 그리고 불은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이 말씀은 무엇을 말씀하시는가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불은 주님의 사명의 완수를 말합니다.

주님은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주님이 이 땅위에서 이루실 그의 사명을 말씀하심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라고 하신 말씀으로 미루어 보아 아직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그의 목적을 이루시지 못하심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던지러 오셨다고 하는 이 불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 불은 복음을 상징하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은 나의 받을 세례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이 세례가 이루어질 때 비로소 불이 땅에 던져짐을 시사하신 것으로 보아 그의 세례란 그의 십자가에서 당하실 고난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는 이 고난을 통하여 복음을 완성하시기 때문에 아직 이 고난을 겪으시지 않으신 주님은 그의 답답하심이 심하셨던 것이며 이 같은 답답함을 표현하신 말씀입니다.

2. 불은 왜 복음인가?

복음은 인류의 구원과 심판의 동시적인 역사를 이루는 일을 합니다. 구원의 역사도 불로하시고 심판의 역사도 불로하십니다. 불로 구원의 역사를 하시는 일은 구원의 역사는 성령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불로 상징됩니다. 그 뿐 아니라 심판도 이 불의 역사인 것입니다.

“이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키운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습1:18). 신 2:24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라”고 하셨습니다.

요3:18에서 이처럼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을 것이니라.” 복음은 이처럼 구원과 심판의 불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불을 이 땅에 던지러 오신 분입니다. 이 불이 이미 붙었다면 주님이 원하실 일이 없으시지만 이 일을 위해서는 주님의 세례가 따라 오는 것입니다. 이 세례란 십자가 위에서 당하신 고난을 의미합니다.

그가 답답하다고 하신 말씀은 두 가지 뜻으로 해석이 됩니다. 하나는 그의 인간적인 고민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같은 고민은 마26:38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라고 하신 말씀이 그것입니다. 또 한가지는 이 같은 그의 고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명을 이루시고자 하시는 그의 사명감에서 나온 말씀입니다. 주님은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 그는 이 일을 위하여 세상에 오셨음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이 같은 사명을 이루시기까지 답답하시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3. 이 불은 이제 땅에 떨어졌다

그러나 이제 주님은 그의 사명을 이루셨습니다. 이제 주님이 원하시는 뜻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구원의 불은 이미 오순절 날 마가의 다락방에 있는 120 문도에게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모습으로 임하여 지금까지 훨훨 타오르고 있습니다. 이불은 온 세계를 불태우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불도 이제 조만 간에 내려질 것입니다. 계15장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진노가 가득히 담긴 금 대접 일곱이 예비된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론 : 불은 복음입니다. 이 불은 지금 우리의 심령에서 불붙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구원의 성령의 불을 이 땅 위에 붙여야 하는 것입니다. 너희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능력을 받아 이룬다고 하셨습니다.


(77) 복음과 분쟁

(누가복음 12 : 49 - 53)

서 론 : 우리는 복음을 화평의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오늘 말씀을 통하여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함이로라”고 말씀하심으로 제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화평의 복음이 분쟁의 원천이 되느냐? 이 문제에 대한 성경의 바른 견해를 알아보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1. 우리가 누리는 화평

복음은 분명 화평을 주는 일을 그 사명으로 합니다. 주님이 전하신 복음은 화평의 복음이심입니다(행10:36). 그러면 이 화평이란 말과 그 화평이 이루어지는 일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화평의 복음이란 말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화평을 말합니다.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욥22:21). 욥기에 있는 이 말씀은 인생이 하나님과 화목할 때 복을 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은 인생과 하나님과의 화목의 방법인 것입니다. 죄인과 하나님과의 화목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졌습니다. 골1:20에서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는 우리로 죄의 용서함을 받게 하셨을 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받아, 하나님과의 화목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 화평은 오직 믿음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롬5:1에서 이르시기를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화평을 이루시기 위하여 그 아들을 화목 제물로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요4:10).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는 하나님과 원수의 자리에 있었지만, 그를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화평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화평의 결과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 것입니다.

(2) 너희도 서로 화평하라고 하셨습니다. 다음에 복음이 말하는 화평은 서로 화평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서로란 말은 그리스도안에서 한 형제가 된 사이를 말합니다. 주님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보다 형제의 화목이 더 중하다고 하셨습니다(마 5:23-24). 우리의 화목의 원천은 사랑입니다.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소금이란 사랑을 가리킨 것입니다(막9:50).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안다고 하셨습니다.

(3) 다음에 복음이 말하는 화평은 사람들로 하나님과 화평케 하라는 것입니다. 고후5:18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화평케 하는 직책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이 직분이 곧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모든 인류는 하나님과 원수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은 그들로 하나님과 화평케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이 위대한 사명을 우리에게 맡기셨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고후5:19).

2. 분쟁

이와 반면에 복음은 요소 요소에 분쟁을 일으키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어두움이요, 복음은 빛입니다. 우리는 이 빛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어두움의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이 복음을 미워하는 이유는 자신의 어두움이 복음의 빛 앞에 나타나기를 원치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자기 것을 사랑합니다. 어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빛을 미워합니다. 주님은 세상이 나를 미워하였으니 너희도 미워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한 가정 안에서 분쟁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결론 :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인의 처신에 대하여,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덕을 세우라고 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비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고 하신 것입니다(마태복음5:16).


(78) 시대의 분변

(누가복음 12 : 54 - 59)

서 론 : 외식하는 자들은 영의 눈이 어두운 법입니다. 그들은 시대의 움직임에 대하여 영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이 어떤 때이냐? 하는 것을 아는 일은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은 그들의 영적 어둠으로 시대를 분변치 못했습니다. 먼저 그들은 구약의 율법시대가 지나가고 있음을 알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메시야가 그들 앞에 서 계심을 바라볼 수 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며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고 있음을 알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같은 일에는 눈이 어두웠고, 교만과 오만에 젖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너희는 어찌하여 천지의 기상을 분변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변치 못하느냐”고 책망하신 것입니다.

1. 천지의 기상

주님이 천지의 기상을 예로 드신 것은 그곳에는 누구나 공통적으로 알고 있는 일기의 변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구름이 서에서 일어남을 본다는 말은 지중해가 그곳에서 서쪽에 있었기 때문에 서쪽에서 바람이 일면 그쪽에 있는 수분을 날아다가 비를 뿌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서편에서 바람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그곳 사람들은 곧 소나기가 오리라고 생각하게 되며 그들의 이 같은 예측은 들어맞았습니다. 남풍은 남쪽에서 심히 더운 바람을 몰고 오기 때문에 남풍이 불어오는 것을 보면 곧 더워질 것임을 예측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 같은 천지의 기상을 알아내는 지혜는 있으면서도 이 시대의 분변을 제대로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2. 시대의 분변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은 예언의 말씀을 연구하기도 하며 남을 가르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그 예언을 통하여 마치 천지의 기상 같이 시대의 분변을 할 수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약속된 메시야에 대하여 많은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세대가 메시야가 태어나는 세대임을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낡아진 언약의 시대는 지나고 이제 새로운 언약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음을 그들은 알고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시대는 바야흐로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는 은혜시대가 도래하고 있음을 그들은 예수님의 활동을 통하여 깨달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것을 분변치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그들의 앞에 가까이 왔지만 그들은 그것을 바라보지 못한 것입니다. 이 같은 일에 대하여 주님은 이사야의 글을 인용하고 그들에게 책망하신 것입니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 받을까 두려우니라”(마13:14-15).

3.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치 못하느냐?

그들은 이처럼 옳은 것에 대하여 스스로 판단하는 능력을 상실했던 것입니다. 사람이 왜 옳은 것에 대한 판단력을 상실하는 것입니까? 진리를 알기를 힘쓰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파수하기를 소홀히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일에 그 마음이 빼앗기기 때문입니다.

4. 화해하기를 힘쓰라

주님은 이들의 완악한 마음을 마치 자기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관에게 끌려가는 비유로 비교하셨습니다. 만약에 사람이 자기를 고소하는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 때에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 이유는 재판관에게 끌려간 후에는 화해하는 시기가 지나갔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고소할 자가 되시는 주님과 함께 있습니다. 그들은 이제 주님과 화해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결론 : 시대를 분변치 못하면 영적 소경이 됩니다. 우리는 이 시대의 분별을 올바로 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별해야 할 시대는 주 재림의 시기를 의미합니다. 이 시대는 우리의 살아가는 역사적 무대 위에 전개되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에서 예언해 주신 주 재림의 예언에 나타난 시대상을 잘 분별하는 영적 지식과 감각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