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新約]강해/◆ 사복음서 · 사도행전 강해-1

누가복음서 1-6장◆ 밤중소리

영국신사77 2020. 4. 12. 16:59


누가복음 차례

누가복음 1장 (1-5)

(1)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누가복음 1:1-4)

(2) 세례요한의 잉태(누가복음 1:5-25)

(3) 은혜를 받은 여인(누가복음 1:26-38)

(4) 마리아의 찬양(누가복음 1 : 29 - 56)

(5) 세례요한의 태어남(누가복음 1 : 57 - 80)

(5) 세례요한의 태어남(누가복음 1 : 57 - 80)


누가복음 2장 (6-9)

(6) 큰 기쁨의 좋은 소식(누가복음 2 : 1 - 11)

(7) 천사들의 찬양(누가복음 2 : 10 - 20)

(8) 시므온과 안나의 찬양(누가복음 2 : 21 - 39)

(9) 잃어버린 예수(누가복음 2 : 40 - 52)


누가복음 3장 (10-12)

(10) 세례요한의 활동(누가복음 3 : 1 - 6)

(11) 요한의 세례와 예수님의 세례(누가복음 3 : 7 - 17)

(12) 예수님이 받으신 세례(누가복음 3 : 18 - 38)


누가복음 4장 (13-17)

(13) 시험받으신 예수님(누가복음 4 : 1 - 13)

(14) 메시야의 증거(누가복음 4 : 14 - 24)

(15) 하나님의 사랑을 입는 자(누가복음 4 : 25 - 30)

(16) 말씀의 권세(누가복음 4 : 32 - 39)

(17)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누가복음 4 : 40 - 44)


누가복음 5장

(18)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누가복음 5 : 1 - 7)

(19) 주여 나를 떠나소서(누가복음 5 : 8 - 11)

(20) 주여 원하시면 하실 수 있나이다.(누가복음 5 : 12 - 16)

(21) 죄를 사하시는 주님의 권세(누가복음 5 : 17 - 26)

(22) 내가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누가복음 5 : 27 - 32)

(23) 새 술은 새 부대에(누가복음 5 : 33 - 39)


누가복음 6장

(24)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누가복음 6 : 1 - 11)

(25) 사도를 택하신 예수님(누가복음 6 : 12 - 16)

(26) 복이 있는 자(누가복음 6 : 17 - 23)

(27) 화 있을 자들(누가복음 6 : 24 - 26)

(28) 온전한 사랑(누가복음 6 : 27 - 35)

(29) 그리스도인의 자비(누가복음 6 : 36 - 42)

(30) 나무와 열매(누가복음 6 : 43 -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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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장 (1-5)

◆ 밤중소리 03-02 | VIEW : 4,825

(1)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누가복음 1:1-4)

(2) 세례요한의 잉태(누가복음 1:5-25)

(3) 은혜를 받은 여인(누가복음 1:26-38)

(4) 마리아의 찬양(누가복음 1 : 29 - 56)

(5) 세례요한의 태어남(누가복음 1 : 57 - 80)

(5) 세례요한의 태어남(누가복음 1 : 57 - 80)


(1)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

(누가복음 1:1-4)


서 론 : 누가복음을 복음서의 제 3권으로 제 3복음서라고 불려지기도 합니다. 

누가복음은 그 서두에서 밝힌 대로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살핀?사람에 의하여 기록된 책으로 

예수님의 태어나심에서부터 그의 부활 승천하시기까지의 배경과 사역이 

다른 복음서보다 더 자세히 나타나 있습니다. 

누가복음의 저자는 이 복음을 어느 특정인에게 보내는 한 서신의 형태로 썼는데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라’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누가복음을 배우면서 

아직까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배운 바의 더 확실함을 아는데 

큰 유익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1. 누가라고 하는 사람과 본서의 기록 연대

누가복음을 기록한 누가는 예수님의 제자는 물론 아닙니다. 

또 예수님이 생존하셨을 당시 예수님을 따랐던 인물도 아닙니다. 

그의 이름은 복음서에 한번도 나온 일이 없습니다. 

골4:1절 말씀을 보면 ‘사랑을 받는 의원 누가’란 말이 나옵니다. 

이것으로 알 수 있는 것은 

누가의 신분이 이방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수리아의 안디옥 출신으로 

바울의 전도를 듣고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누가는 그의 직업이 의사였다고 하는 분명한 사실과 

그 당시 명성이 많은 사람과 친분이 두터운 

이름 있는 인사였을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가 의사였으므로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가 

철두철미한 인자의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가 사랑을 받았다는 말에서 

그의 원만한 성품과 그의 존경할 만한 인격의 단면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 누가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자신이 생각한 대로 미흡한 점을 보완하고 싶은 생각에서 

이 복음에 관한 근원을 

자세히 살펴보려는 간절한 의욕을 가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누가는 여러 사도들과 

그리고 예수님과 상면하고 대화하고 병 고침을 받고 

주님의 여러 기사 이적을 친히 목격하고 말씀을 들은 

많은 사람들과 친히 접촉하여 

그들로부터 예수님의 생존시의 행적을 자세히 들었고 

또 몇몇 기록된 문서에 의하여 

예수님의 여러 가지 행하신 일에 대하여 알았을 것입니다. 

또한 이 책이 기록된 연도에 대하여는 

많은 주장과 이에 대한 이견들이 있으나 

주후 60년으로 주후 65년 사이로 보고 있습니다.


2. 누가복음의 특징

이 책은 여러 가지 특색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특색을 몇 가지로 분석해 본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 이 책은 목격자가 아닌 사람으로 기록된 책입니다. 

그런데도 누가는 이 복음서를 썼고 

이 기록이 예수님의 제자들에 의해 쓰여진 것 못지 않게 

중요한 의의를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② 이 책은 다른 증인들의 토대 위에서 연구하여 

결론적으로 기록한 책입니다. 

아마도 누가는 사도 바울이 수집해 놓은 자료를 많이 인용했을 것입니다. 

마태의 기록도 보았을 것입니다. 

누가는 이 모든 사실을 친히 자기가 확인하고 

더 낳은 자료를 얻고자 많은 사람들을 접촉했을 것입니다.


③ 이 책은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살펴 본 책입니다. 

근원이란 일의 근본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철저한 추적을 말합니다.


④ 이 책은 역사서로서의 특징을 살린 책입니다. 

누가는 이 책을 수신할 대상자에게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다’

고 말하고 있습니다. 

누가가 쓴 누가복음은 

그리스도의 생애를 차례대로 그리고 순서대로 

정연하게 기록한 것으로 특징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⑤ 이 책은 예수 그리스도를 

인자의 모습으로 뚜렷하게 부각시킨 책입니다. 

그래서 많은 신학자들은 누가복음을 

‘인자이신 그리스도’란 주제를 달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복음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실입니다. 

이것을 부인할 때 복음은 중대한 오류에 빠지게 되며 

이런 변질된 복음을 성경에서는 다른 복음이라고 정죄하고 있으며 

이단으로 낙인찍혀 왔습니다(요일4:2-3).


⑥ 이 책은 한 특정인에게 보낸 서신으로 쓰여진 책입니다. 

누가는 이 복음서를 받을 대상이 

데오빌로란 사람임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누가와 이 데오빌로는 오랜 교제를 해 온 친밀한 사이로 보여지지만 

누가가 그를 각하란 말로 상당한 존경을 표한 것은 

그가 상당한 신분의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서신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데로빌로란 인물 역시 이방인이며 

그의 이름이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자란 뜻이 있는 것으로 보아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이라고 짐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 론 : 누가의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깊은 연구는 

참으로 감탄할 만한 것입니다. 

우리는 베뢰아 교회 교인들로부터 

이 누가와 같은 깊은 연구심을 바라보게 됩니다. 

우리도 이 누가복음을 

누가와 같은 자세로 연구한다면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되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한 걸음 더 가까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2) 세례요한의 잉태

(누가복음 1:5-25)


서 론 : 누가는 그의 복음 서두에서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폈다”고 말한 대로 예수 그리스도도의 나심을 기록하기 전에 그의 선구자로 먼저 태어난 세례요한의 잉태된 사실부터 자세히 추적하고 있습니다. 세례요한의 출생은 이미 이사야에 의해 예언되었습니다(마2:1-3).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은 원래가 잉태치 못하는 여인이었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권능으로 잉태케 하셨습니다. 이리하여 이사야로 예언된 선지 요한이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것입니다.


1. 세례요한이 태어난 역사적 배경

세례요한은 헤롯왕때에 태어났습니다. 여기 등장하는 헤롯왕은 헤롯 왕조의 우두머리가 되는 헤롯 1세를 말합니다. 주전74년경에 출생한 자로 예수님의 출생 전후 유대지방을 다스려온 왕입니다. 그는 주전 40년에 로마원로원에 의해 유대 왕으로 지명 받았고 그에게 주어진 군사로 그 세력을 확장해 나가 상당한 영토를 자기 지배아래 두고 있었습니다.

요한의 아버지는 사가랴입니다. 사가랴란 이름은 “하나님이 기억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는 아비야 반열에 속한 제사장이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엘리사벳으로 아론의 자손이라고 했습니다. 엘리사벳이란 이름은 하나님이란 뜻과 약속하다의 두 가지 뜻이 합쳐진 이름으로 ‘하나님이 약속하다’란 뜻입니다. 이 두 부부는 다 함께 제사장 계열의 자손으로 복된 가정을 이루고 있었을 뿐 아니라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라고 했습니다.


2. 사가랴에 나타난 가브리엘 천사

사가랴은 마침 제사장의 임무를 수행하려고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은 24반열로 구분되어 있었습니다(대상24:1-19). 스가랴은 여덟 번째 반열에 속해 있었는데 이 반열은 아비아의 반열입니다(대상24:10). 각 반열은 한해에 두 번씩 성소에서 봉사했는데 그 기간은 한 주간씩이었습니다. 분향하고 있는 사가랴 앞에 주의 사자가 나타났습니다. 이때 사가랴는 갑작스러운 일에 놀라고 두려워했습니다. 사가랴 앞에 선 주의 사자는 가브리엘 천사였습니다. 가브리엘은 놀라면 무서워하는 사가랴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주었습니다 “사가랴여 무서워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은 반드시 이루어질 때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래 전부터 이사야를 통하여 예언하신 세례요한이 때가 됨에 그 예언을 이루시기 위해 가브리엘을 사가랴에게 보내셔서 요한의 탄생을 예고 하셨던 것입니다. 다음에 하나님의 약속은 기도를 통해 이루어주신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너희 간구함이 들린지라”고 말했습니다. 사가랴는 아들을 낳기 위해 오랜 동안 기도해 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세례요한의 잉태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예언이나 약속의 성취는 어느 누구인가의 간구를 통해 이루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70년으로 약속했지만 이를 위해 예레미아는 눈물의 회개와 간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녀들을 잘 보살피시고 인도하시지만 우리는 그렇게 해 주시도록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에는 반드시 그와 같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우리의 간구도 함께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겔36:37).

그리고 가브리엘은 사가랴에게 세례요한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몇 가지로 알려 주었습니다.

(1) 요한은 하나님 앞에 큰 자가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요한은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바로 말라기로 예언하신 말씀입니다.

(2) 그는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요한은 그의 전 생애는 통하여 술을 입에 대지 않을 것이라고 하면서 오히려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을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3) 그는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엘리야의 심령이란 말은 엘리야란 말이 아닙니다. 다만 엘리야의 마음을 가진 상징적인 인물이 될 것이란 예언입니다. 그런데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돌아오게 한다”는 말이 많은 경우 잘못 해석되어지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려면 말라기서를 보아야 합니다.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에서 아비란 하나님을 가리키고 자녀란 그의 백성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사람들을 회개시키는 세례로 하나님의 무한히 자비하신 긍휼하심이 그 자녀들에게 내리시게 하고 그의 백성들은 회개하여 그리스도를 영접하므로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결 론 : 또한 세례요한의 위대한 사역의 결론으로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으 예비하라”고 했습니다. 세례요한은 이런 사명을 가지고 태어났으며 그의 짧은 생애 동안에 이 사명을 이루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말씀대로 그의 아내 엘리사벳으로 하여금 잉태케 하셨습니다.


(3) 은혜를 받은 여인

(누가복음 1:26-38)


서 론 : 엘리사벳의 잉태소식을 사가랴에게 전해준 천사 가브리엘이 다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갈릴리 나사렛 동리에 살고 있는 마리아에게 나타나 그에게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전달해 주었습니다. 예수님의 잉태는 기적 중에 기적이요 신비 중에 신비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태어나신다고 하는 일은 이때 가브리엘 천사에 의해 세상에 처음으로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의 태어나심에 대한 예언은 많았지만 그가 친히 처녀의 몸에 잉태되어 육신을 가진 사람으로 태어날 것이라고 하는 생각은 그 어느 누구도 가질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신비에 싸였던 메사야의 탄생이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면 그 분을 잉태한 여자야말로 인류의 여성 중 가장 축복 받은 여인이 아닐 수 없습니다.


1.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가브리엘 천사는 마리아에게 나타나 그에게 한 첫 말은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고 하는 말이었습니다.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전하려는 은혜의 소식은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라”고 하는 놀라운 소식입니다.

(1)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한 이 사실이 마리아에게 왜 은혜가 되는 것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로써 택정을 입은 여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메시야의 후손의 태어나심에 대하여 이미 창3:15절에서 “여자의 후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여자가 바로 마리아를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사야로 예언케 하신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은 것이라”고 하신 처녀가 바로 이 마리아였음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마리아가 역사이래 그 모든 여인 중에서 이 같은 영광스러운 메시야의 어머니로 선택받은 일은 하나님의 은혜 중에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2) 마리아는 정결하고 깨끗한 처녀였습니다. 그는 사내를 알지 못했을 뿐 아니라 정혼한 남자가 있었지만 그의 순결함을 끝까지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깨끗한 그릇을 은혜의 그릇으로 사용하십니다. “큰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딤후2:20-21).

(3) 마리아는 천사 가브리엘이 전해준 말을 믿었습니다. 마리아는 처음에 놀라 고 두려워하기는 했지만 자기로 잉태케 하시겠다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으며 그가 이스라엘이 기다리는 메시야이심을 믿었습니다. “저가 큰 자가 되고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 노릇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고 말했을 때 그런 분이야말로 메시야가 아니시면 누구 시겠는가? 마리아는 이렇게 생각하고 그의 가슴은 설렘과 흥분에 가득 찼을 것입니다.

(4) 마리아는 자신의 불가사의한 생각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신뢰했습니다. 마리아가 천사에게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고 물었습니다. 사내를 알지 못하는 여자가 아들을 낳는다는 이론은 인간의 경험으로나 상식으로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입니다. 마리아는 가브리엘의 “대저 하나님의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고 한 말을 믿고 자신의 불신적인 말을 당장에 포기했습니다.

(5) 마리아는 메시야를 잉태하는 영광을 바라보며 그가 당해야할 모든 고난을 각오했습니다. 처녀가 아기를 밴다고 하는 일은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그 사실을 주변에서 믿어줄 사람이 없을 것이며 자신이 아기를 잉태할 사실을 숨길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종국에는 아기를 해산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마리아의 운명은 어찌 될 것입니까? 마리아는 돌로 쳐죽임을 당할 것입니다(신22:23-24). 아마 마리아는 ‘죽으면 죽으리이다’고 하는 각오로 이 일을 받아드렸을 것입니다(벧전4:14-16).


2. 성령이 네게 임하시면

마리아의 잉태는 성령으로 이루어진 일입니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라고 가브리엘이 말해주었습니다. 말씀이 마리아에게 잉태되신 일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대저 하나님의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바를 성령의 권능으로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든 인류는 남녀의 결합에 의해 비로소 어머니 배에 잉태됨으로 존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존재가 태초로부터 계셨으며 이 말씀이 육신을 입으시고 사람의 모습으로 세상에 태어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비록 사람의 모습으로 태어나셨지만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경배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마리아도 육신적인 면에서는 예수님의 모친이 되는 영광을 누렸지만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으로 보실 때에는 마리아는 예수님의 피조물이요 예수님은 마리아의 구주가 되시는 분입니다.


결 론 : 마리아는 가브리엘에게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할 수 없습니다. 그 말씀을 우리는 믿음으로 받아드려 그대로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리이의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4) 마리아의 찬양

(누가복음 1 : 29 - 56)


서 론 : 하나님의 섭리는 기묘하게도 친족이 되는 여인들에게 하나에게는 구세주의 어머니로 하나는 구주의 선구자의 어머니로 택정함을 받아 서로 기뻐하고 서로 위로받게 하셨습니다. 마리아는 가브리엘로부터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웠느니라 본래 수태하지 못하다하던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라고 전해준 말을 듣게되자 이루어진 사실여부를 확인하고 자신의 일도 알려 서로 의논하려는 조급한 마음으로 그의 발길을 산중에 있는 유대 한 동래로 달려갔습니다. 마리아가 그의 친족 엘리사벳을 방문한 것입니다.


1. 엘리사벳의 환영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하여 그의 문안을 들었을 때 그는 갑자기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문안을 들었을 때 자기가 수태한 아이가 그의 배에서 뛰노는 놀라운 사실을 체험했습니다.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을 입을 것이라고 말한 가브리엘 천사의 예언대로 배 안에 있는 아이에게 성령으로 채워주신 것입니다(눅1:15).

(1) 엘리사벳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마리아에게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엘리사벳은 자신에게 주신 복도 크지만 마리아에게 내리신 축복이야 말로 너무나도 놀라운 축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2) “네 태중의 아니도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태중의 아이란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 아이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아들로 태어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지상에서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이루신 일은 말할 수 없는 축복된 일이었습니다(빌2:6-11).

(3) “내 주의 모친이 내게 나아온다”고 했습니다. “내 주”라고 말한 것은 마리아에게 잉태된 아이를 가리킨 호칭입니다. 이 같은 엘리사벳의 인사는 마리아에게 잉태된 아이가 엘리사벳에게 “내 주”가 되심을 고백한 말입니다. 엘리사벳은 내 주라고 말한 마리아이 아이가 이스라엘이 기다려온 메시야이심을 알았습니다.

(4) “믿은 여자에게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마리아의 믿음은 사가랴나 엘리사벳의 믿음에 비하여 굉장한 차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가랴는 가브리엘에게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내 아내도 아이 많으니이다”고 말하므로 아이를 낳을 때까지 벙어리가 되는 징계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고 말하므로 전적인 믿음과 순종의 자세를 보였던 것입니다. 사람은 무엇을 보는 것으로 믿음의 근거로 삼으려하지만 하나님이 칭찬하시는 말씀으로 믿는 믿음을 귀히 보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고 하셨습니다(요20:29).

(5) “주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했습니다. 마리아에게 잉태된 아기는 다른 사람이 아닌 메시야이십니다. 그에게 말씀하신 것을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은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보내실 것을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2. 마리아의 찬양

마리아는 엘리사벳의 환영을 받고 하나님께 찬양했습니다.

(1) 마리아는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고 찬양했습니다. 여기서 만세란 영원한 복으로서 그의 이 같은 말은 그대로 적중하여 오늘날 마리아와 같이 복된 여성으로 일컬음을 받는 여인은 없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그의 잉태로 말미암아 얻은 현세적인 복은 없었습니다. 시므은이 예언한 것처럼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고 말했듯이 칼이 그의 마음을 찌르는 생애를 살았으나 그가 하늘에서 받을 영광의 상급과 후세에 그의 이름에게 돌려진 축복은 만세에 없었습니다(눅2:35).

(2) 마리아는 “ 하신 이가 이를 행하셨다” 했습니다. 마리아에게 구주가 잉태된 일은 능하신 이의 크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3) 마리아는 능하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가에 대해 성경에 기록된 여러 말씀을 기억하면서 이처럼 찬양했습니다. ① 그 이름이 거룩하다고 했습니다. ②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대대에 이른다고 했습니다. 마리아에게 이 같은 은혜가 임한 것은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며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③ 마리아는 하나님께서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를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다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④ 마리아는 결론적인 찬양으로 그의 백성들을 도우시며 긍휼히 여기시고 조상에게 언약하신 바를 이루시는 분이심을 찬양했습니다. 여기서 찬양이란 말은 ‘메가루노’로 크게 한다, 영광스럽게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은 이처럼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일입니다.


결 론 : 우리는 이처럼 마리아에게 메시야의 어머니가 된 일에 대하여 그를 보고 복된 여자라고 말하지만 그보다 더 놀랍고 기이한 복이 있으니 그것은 내 이름이 그리스도 안에서 만세 전에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이로 인하여 기뻐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 대한 찬양과 우리의 기쁨이 항상 마리아와 같이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5) 세례요한의 태어남

(누가복음 1 : 57 - 80)

서 론 : 하나님의 역사는 중단됨이 없습니다. 엘리사벳으로 인태케 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로 기한이 차매 언약하신 말씀대로 아들을 낳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아들을 낳은 지 팔일이 되는 날이면 할례를 받게 되어 있으므로 할례를 받으러와서 그 아이의 이름을 부친의 이름을 따라 사가랴라 하고자 했습니다. 벙어리가 된 사가랴가 이 자리에 따라오지 못하고 가장 가까운 친족이 와서 친권자의 입장에서 이름을 사가랴라고 지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이 일행을 따라간 그의 어머니 엘리사벳이 “아니라 요한이라 할 것이라”고 제동을 걸게 되자 이 문제로 과연 이 아이의 이름을 어떤 이름으로 지을 것인가에 대하여 의견이 대립되었습니다. 그들은 아이를 다시 부친께 데리고 가서 물어보았더니 서판에 “요한”이란 이름을 썼습니다. 이런 장면을 바라본 친족들은 모두 기이히 여겼다고 했습니다.


1. 사가랴의 메시야에 대한 예언

사가랴가 서판에 요한이란 이름을 씀과 동시에 벙어리가 되었던 사가랴의 입이 곧 열리고 혀가 곧 풀려 말을 하면서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그의 찬송의 내용은 다음 몇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구원의 뿔을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다”고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사가랴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을 돌보셨다고 했습니다. 그 돌아보신 일은 그의 백성을 속량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그 구원의 뿔을 다윗의 집에 일으키신 일입니다. 이 찬송에 나오는 구원의 뿔은 구주이신 예수이시며 이것은 예수님께서 다윗의 자손으로 오셔서 다윗의 왕위를 계승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2) 하나님의 이 같은 일은 예로부터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모든 선지자의 중심적인 예언은 메시야의 태어나심과 이스라엘의 종국적인 구원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그 일을 이루신 것입니다.

(3) 구주의 태어나심은 우리의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구원을 위하심이라고 찬송했습니다. 예수의 태어나심은 우리의 원수에게서 우리를 해방시키셨습니다. 우리의 원수란 사망이며 이 사망권세를 쥐고 있었던 사단입니다(히2:11-16). 그리고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이란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나라들로 이들은 종국에 이 땅에 재앙을 가져올 뿐 아니라 재림하시는 주님에 의해 심판을 받게 됩니다(계19:11-21).

(4)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셨던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다고 찬송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맹세로 언약하신 거룩한 언약은 이와 같습니다. “내가 네게 큰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창22:17-18).

(5)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메시야가 오시면 그는 우리로 원수의 손에서 건져주시고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실 것이라고 찬송했습니다.


2. 세례요한에 대한 사가랴의 예언

세례요한은 태어남 자체로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의 태어남은 반드시 메시야의 태어나심과 연결시킬 때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가랴는 그의 선구자로 보내심을 받은 사명에 대하여 예언했습니다.

(1) 세례요한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가랴는자기 아들 요한을 가슴에 품고 “이 아이여”라고 말하면서 그에 대한 앞으로의 사역에 대하여 예언한 것입니다. 그는 아들에게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요한은 지극히 높은 분이신 그리스도의 최후 증거자요 그의 앞서 보내심을 받은 선지자입니다. 그는 선지자 중에 가장 복된 선지자인 것은 메시야를 친히 자기 눈으로 바라보면서 증거한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로서의 축복을 받게 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2) 선지자로서의 세례요한의 두 가지 사명이 나와 있습니다. 하나는 주 앞에 가서 주의 길을 예비하는 사명입니다. 요한은 바로 이 같은 사명 때문에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세상에 보내심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세례요한은 자기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다 이루었습니다. 그가 요단에서 베푼 세례, 자기 제자들에게 메시야를 소개하여 따라가게 한 일, 그의 순교는 모두 이 같은 그의 사명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다른 한가지는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라”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이스라엘의 많은 사람들에게 죄 사함의 길을 보여주었습니다. 그의 세례는 바로 메시야를 영접하게 하는 죄 사함의 길이었습니다.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라고 한 말은 성령의 세례를 주시는 이에게 인도하는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마3:11).


결 론 : 예수님은 세례요한에 대하여 대단히 칭찬하셨습니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요한보다 큰이가 일어남이 없다”고 하셨습니다(마11:11). 그의 위대함은 그가 그의 전 생애를 오직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에 바쳤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의 사명을 본 받는 그리스도의 증인이 된다면 그가 받을 상급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장 (6-9)

◆ 밤중소리 03-02 | VIEW : 2,086

(6) 큰 기쁨의 좋은 소식(누가복음 2 : 1 - 11)

(7) 천사들의 찬양(누가복음 2 : 10 - 20)

(8) 시므온과 안나의 찬양(누가복음 2 : 21 - 39)

(9) 잃어버린 예수(누가복음 2 : 40 - 52)


(6) 큰 기쁨의 좋은 소식

(누가복음 2 : 1 - 11)


서 론 : 우리는 인류의 역사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한 인류의 구속사임을 믿는 것입니다. 창3:15절에서 여인의 후손으로 밝혀진 메시야의 언약이 있은 이래, 인간의 역사는 이메시야 탄생과 메시야로 인한 인류의 구원의 역사로 계속되어온 사실에 대하여 인류의 역사와 성경은 일치되고 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자기들이 살고 있는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 가게된 일이라든가 그 베들레헴에서 아기 예수를 낳은 일 등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이미 미가 선지를 통해 예언한대로 성취된 일입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총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미5:2).


1. 아구스도의 호적령

미가의 예언이 응한 것은 바로 로마 황제인 가이사 아구스도의 호적령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로마 황제인 아구스도의 등장도, 역사상 가장 잔인한 대 폭군 헤롯 왕의 등장도, 그리스도 탄생의 예언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1) 아구스도는 그 당시 로마제국의 황제입니다. 이 사람의 본명은 가이우스 옥타비우수로 주전27년부터 주후14년경까지 로마황제 직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가 자신의 통치기간 중에 인구 조사령을 내림으로 부지중에 미가서 5:2절에 기록된 메시야 탄생의 하나님의 예언을 성취시키는 일에 쓰임 받은 인물이 된 것입니다.

(2) 호적하러 올라온 마리아와 요셉의 경우를 보겠습니다. 예수님의 부모가 되는 요셉과 마리아는 그들의 고향인 나사렛 땅에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주의 사자의 현몽을 받은 요셉은 마리아 데려 오기를 두려워하거나 지체하지 아니하고 자기 집에서 마리아를 보호하였지만 예수가 탄생하기까지 함께 동침하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마1:19-25)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베들레헴에 가서 호적 해야 할 사람은 마리아가 아니라 요셉이란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요셉 혼자만 가도 될 일을 만삭된 마리아까지 왜 데려갔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요셉이 메시야 탄생에 대한 미가 선지의 예언을 알고 있었으며 그 예언을 응하게 하려는 믿음의 행동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서에서 예수님도 자신에 대하여 선지자들에 의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힘쓰신 사실을 찾아 볼 수 있는 것입니다(요18:9, 19:28).


2. 예수님의 태어나심

요셉과 마리아가 벧르레헴에 갔을 때 이미 잉태된 마리아의 해산할 날이 찼다고 했습니다.

(1) 아기 예수는 사관에조차 머물 곳이 없으셨습니다. 베들레헴은 다윗의 옛 도성으로 큰 도읍은 아닙니다. 그곳을 지나가는 나그네를 머물게 하기 위한 사관(여인숙)이 몇 있었지만 호적 하러온 사람들을 수용할만한 수효는 되지 못했습니다. 요셉은 아마 어느 사관 주이에게 간곡히 부탁하여 그 집 마구간 한편 구석을 잠자리로 마련했을 것입니다.

(2) 예수님은 말구유에 뉘이셨습니다. 아기 예수의 자리는 말구유였습니다. 예수님의 낮아지심은 철두철미하셨습니다. 인생의 맨 마지막 자리에까지 자신을 낮추신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고후8:9). 이처럼 주님의 낮추심으로 우리는 어떤 부요를 얻은 것입니까? 하늘에 간직한 부요를 얻게 하셨습니다(엡1:3). 생명의 부요를 얻게 하셨습니다(요10:10). 그리스도 안에 모든 풍성한 복을 얻게 하셨습니다(롬8:23).


3. 큰 기쁨의 좋은 소식

아기 예수가 태어나실 그 지경에 양떼를 치는 목자들이 들 밖에서 자기 양떼를 지키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밤중에 이들에게 주의 천사가 갑자기 나타난 것입니다. 이 같은 놀라운 광경을 바라보게 된 목동들은 심히 두려워했습니다. 이때 천사가 그들을 향하여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리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고 하는 하늘의 메시지를 전달해 준 것입니다. 천사들은 그리스도의 태어나심에 대한 소식을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고 했습니다. 이 소식이 바로 복음입니다.


결 론 : 우리는 여기서 하늘의 천사가 목동들에게 복음을 전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원래 복은 천사가 전할 일이 아닙니다. 하늘의 천사는 이들 목동들에게 구주의 태어나심에 대한 기쁜 소식을 전해 주었을 뿐입니다. 목동들은 천사들의 구주탄생의 전달을 듣고 그가 태어나셨다고 말한 마구간에 찾아가 확인하므로 그들은 주님을 증거할 수 있는 증거자가 된 것입니다. 이들은 축복의 사람들임에 틀림없습니다. 메시야를 친히 보았고 메시야 탄생의 증인이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이처럼 축복을 받은 이유는 그들이 베들레헴 들판에 있었고 주님이 태어나실 장소에서 가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 가까이서 주의 음성을 듣기를 기뻐하는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잠8:34-35).


(7) 천사들의 찬양

(누가복음 2 : 10 - 20)

서 론 : 성탄의 깊은 밤입니다. 베들레헴 들판에서 추위를 무릅쓰고 양떼를 지키던 목동들에게 천사들이 주의 영광을 가지고 나타나 그들 곁에 섰습니다. 이 놀라운 광경을 바라본 목동들은 크게 무서워했습니다. 이때 천사가 그들에게 이처럼 말해주었습니다.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들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이 말을 마치자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양하기를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이 같은 찬양이 고요한 밤 하늘아래 온 누리를 메아리쳤습니다.


1.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하나님을 찬송하는 천군과 천사의 찬양은 구주의 탄생을 두 가지로 구분해 줍니다. 하나는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했으며 다른 하나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탄생이 어찌하여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시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까?

(1) 하나님은 그 말씀하신대로 언약을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성탄절 메시지의 기원은 창3:15절로 올라갑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고 하신 말씀에서 인류 구원의 구주이신 그리스도 주를 여인의 후손으로 보내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이 같은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시기 위한 섭리로 운행되어 왔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드디어 베들레헴에서 언약하신 대로 여자의 후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태어나게 하심으로 영광이 되신 것입니다.

(2) 하나님은 모든 선지자로 말씀하신 메시야 탄생의 예언을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메시야 탄생을 위한 언약을 성취하시기 위해 인류의 역사를 주장해 오셨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이 같은 하나님의 계획을 숨기시고 오랜 기간 내려오시다가 이사야를 통하여 메시야의 태어나심에 대해 예언하셨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밝히신 처녀란 창3장에서 말씀하신 여자이며 후손이란 이 처녀가 낳은 아들, 그리스도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후 하나님께서는 미가 선지를 통하여 이 여인이 탄생할 고장에 대하여 예언하셨는데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미5:2).

(3) 그리스도의 탄생은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그 아들을 보내신 일은 그의 말할 수 없는 사랑에 기인하지만 더 근원적인 뜻은 하나님의 영광에 있으셨습니다. 죄인들에게 그 아들을 통하여 의를 주신 일은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내신 일이기 때문에 지극히 높은 곳에서 계시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신 것입니다(롬3:25-26).


2.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그러면 왜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라고 한 것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이란 말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1) 이 땅에는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나심으로 평화를 누리게 될 대상은 온 인류를 가리킨 것이 아닙니다.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에게 이 같은 축복이 해당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이며 하나님의 기뻐하신 뜻대로 예정하신 자들입니다(엡1:4-5). 이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요1:12-13).

(3) 그리스도의 나심은 죄인과 하나님과의 평화를 말합니다. 인간은 아담의 범죄이후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지고 평화가 깨어졌습니다. 이것이 구약에서는 성소의 막혀진 휘장으로 상징되고 예수님께서 이 휘장을 찢으심으로 우리에게 하나님께로 가는 새롭고 산길을 열어주셨습니다(엡2:13-15). 이 하나님과의 평화야말로 하나님이 죄인과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축복입니다. 이처럼 죄인과 하나님과의 개선관계가 바로 복음입니다.

(3) 이 평화는 모든 믿는 자의 마음에 임하십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는 우리에게 기쁨과 소망을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들 마음속에 한없는 평안을 주십니다. 임마누엘이란 말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인데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시므로 그 성령이 우리 마음에 들어와 계시므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축복이 임하시게 된 것입니다.


결 론 : 천사들이 얼마 후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간 다음 천사들을 통해서 알려주신 기쁜 소식을 알아보려고 그들은 빨리 베들레헴까지 달려가서 아기 예수를 만났습니다. 이들이 자기들이 경험한바 놀라운 사실을 말했을 때 그곳에 있었던 이들은 이를 기이히 여겼지만 마리아는 마음에 지키어 생각하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오심은 이처럼 하늘에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그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입니다.


(8) 시므온과 안나의 찬양

(누가복음 2 : 21 - 39)

서 론 : 예수님은 율법아래 태어나신 분이시므로 그의 생애는 율법을 지키시고 율법의 의를 얻으셔야 했습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갈4:4-5). 요셉과 마리아는 결례를 따라 제사를 드렸고 예수님은 할례를 행하시고 또 장자를 하나님께 드리는 의식을 행하셨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시므온의 찬양과 안나의 감사가 나옵니다.


1. 율법의 율례를 따르신 예수님

어린 예수님은 율법에 따라 할례를 행하시고 장자로써 하나님께 드리는 의식을 행하셨습니다. 그 결례의 제물이란 일년생 양 한 마리와 비둘기 한 마리로 규정하고 있지만 형편이 미치지 못하면 어린양 대신 비둘기 한 마리를 더하여 산비둘기 둘이나 집비둘기 둘로, 하나는 번죄물로 하나는 속죄물로 삼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모들이 비둘기 한쌍으로 제사하려고 한 일은 그 당시 그들의 재정적인 힘이 어린양을 사기에 미치지 못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부요하신 분으로 참으로 가난하게 되신 것입니다.


2. 시므온의 찬양

예수님의 부모들이 모세의 결례대로 제사를 드리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 성전에서 이 같은 예식을 취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주님의 가족들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그가 아기 예수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1) 시므온의 신분에 대해서는 자세히 나와있지 아니합니다.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라고만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므온에 대하여 이 사람이 의롭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경건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고 했습니다.

(2) 주님도 할례를 행하셨습니다. 원래 할례란 양피를 제거하는 의식으로 이 의식의 영적인 뜻은 몸에서 죄를 제거함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할례란 마음의 할례를 뜻하고 있습니다(롬2:28-29). 구약에서도 할례의 의미를 육체에 두지 않고 마음에 두고 있습니다(신10:16). 이 할례를 주님이 받으신 이유는 그가 율법아래 태어나셨기 때문입니다. 율법아래 태어나신 예수님은 율법의 의를 이루셔야 했습니다.

(3) 주님은 하나님께 바쳐지는 의식을 행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율법에 의해 그 첫 태에서 난 아들을 주의 거룩한 자라하여 하나님께 바쳐져야 했습니다. 이런 의식의 동기는 애굽에서 노예로 지낼 때 애굽사람들에게 내려진 마지막 재앙에서 장자를 죽이는 심판은 내리게 되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특별하신 은혜로 이 죽음의 재앙에서 유월하게 된데서 비롯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장자로써 하나님께 바쳐졌다는 것은 깊은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그는 실로 세상의 모든 장자(하나님의 자녀가 될 구속받은 백성들)들을 대신해서 온전히 하나님께 바쳐진 대속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그의 바쳐지심을 인하여 우리는 다시는 율법의 율례에 따른 의식이 필요치 않게 되었습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모든 속전을 갚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다만 그를 믿음으로 하나님께 바쳐진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4) 요셉과 마리아는 모세의 법대로 결례의 날이 차매 예수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고 했습니다. 아들을 낳은 여자의 결례기간은 40일간으로 율법에서 명하는 바 결례의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레12:1-6).

(5) 시므온은 성령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시므온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시므온은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다고 찬양했습니다. 주의 구원이란 하나님의 구원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약속하신 그 언약의 성취를 말합니다. 우리는 이 같은 주의 구원을 본 사람이요 친히 체험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 감사와 찬양은 시므온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유대인들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요 만민에게 예비하신 것으로 온 인류를 위한 메시야이심을 찬양한 것입니다. 이방을 비취는 빛이라고 했습니다.


3. 안나의 감사

시므온이 아기 예수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요셉가 마리아에게 축복하고 있을 때 안나라고 하는 여 선지자가 이 광경을 목격하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했다고 했습니다. 이 안나는 84년간이나 과부로 지낸 여인으로 성전을 떠나지 않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하므로 하나님을 섬겨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여인에게 메시야를 보여주시고 참 소망을 갖게 하신 것입니다.


결 론 : 하나님은 시므온과 안나처럼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경건하며 기도생활을 해온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나타내시고 또 그들에게 메시야를 만날 수 있는 특별하신 은혜를 주셨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하나님 보시기에 기쁜 생활을 하면 이 같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와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9) 잃어버린 예수

(누가복음 2 : 40 - 52)

서 론 : 아기 예수는 지혜가 충족하며 강하여지며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자라고 있었습니다. 오늘 주신 본문은 예수님이 열 두 살 되시든 해 유월절을 당하여 부모를 따라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을 때 일어난 일입니다. 나사렛에 살고 있었던 예수님의 가족은 유월절을 당하면 이 절기의 전례를 따라 예루살렘에 올라가 율법이 명하는 대로 절기를 지켰습니다. 유대인들이 지켜야 할 절기는 유월절, 칠칠절, 수장절 등이었는데 예루살렘으로부터 먼 곳에 흩어져 있었던 유대인들은 이 삼대절기 중에 한 절기만 지켜오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부모들도 유월절을 지켜온 전례에 따라 예수님을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간 것입니다.


1. 예수님의 자라나심

우리는 성경에서 예수님의 어린 시절과 그의 성장에 대한 자세한 상황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누가가 이곳에서 얼마간 언급해 주고 있을 뿐입니다.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고 했습니다(40절). 또한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50절).

우리는 예수님의 어린 시절에 대해 여러 가지 궁금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은 어린 시절에도 하나님으로서의 자혜가 계셨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과연 그에게 하나님으로서의 능력을 소유하고 계셨느냐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자신이 말씀으로 계셨던 하나님이심을 알고 계셨으며 인류의 구주로 이 세상에 오신 일에 대하여 알고 계셨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에 대하여 성경에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곳에 나와 있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성장이 모든 사람들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어리실 적 자라시는 과정에서 남다른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자라셨지만 그가 일정한 나이에 이르시기까지 자신의 모든 일에 대하여 아직 알려지지 않은 유보적인 상태에 있었을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비록 자신의 존재와 사역에 대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셨다고 해도 그 분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하신 말씀 그대로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요1:14).


2. 잃어버린 예수

마리아와 요셉은 예루살렘에서 유월절 절기 행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모는 예수가 그들 동행중에 있는 줄로 알고 하룻길을 갔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아들 생각이 나서 그들 일행 중에서 찾았지만 보이지 아니했습니다. 그들은 아기 예수를 찾으면서 다시 예루살렘 쪽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그 부모들이 예수를 잃어버린 일을 영적으로 우리의 생활과 연결시켜보려고 보려고 합니다.

(1) 그리스도인중에는 주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데도 주님이 자기와 동행하시는 줄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모가 예수님을 잃어버린 것은 그리스도 없이 생활하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의미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활 중에서 그리스도를 잃어버리고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그의 인생 길을 그리스도 없이 자기 혼자 걸어가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신자의 이 같은 생활은 그리스도와의 단절된 생활을 말합니다. 그러면 어떤 경우에 그리스도와 단절된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까? 첫째로 수시로 주님을 찾지 아니할 때 단절됩니다. 예수님의 부모들은 하룻길이나 가면서도 찾지 아니했습니다. 그리스도의 기도는 주님을 찾는 생활이기 때문에 기도가 끊어지면 그리스도 없는 인생 길을 걸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다음에 우리의 죄는 우리로부터 주님을 멀리 떠나게 합니다. 죄는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단절시킵니다. 죄 가운데 거하는 생활, 죄에서 돌이키지 않는 생활은 주님 없이 자기 생애를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2) 잃어버린 예수님은 반드시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활 중에서 예수님을 잃어버리고도 찾을 생각을 하지 않고 그대로 자기 생애를 걸어가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러나 주님 없이 걸어가는 인생 길은 헛된 길입니다. 예수님의 부모들처럼 언제인가 잃어버린 예수를 찾아야 할 날이 반드시 오는 것입니다. 찾는 일이 늦으면 늦을수록 그의 인생은 암담하고 큰 손실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심을 확인하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 생활이 조금이라도 신앙에서 비뚤어진 길로 걸어가고 있다면 이때 그 발걸음을 멈추고 잃어버린 주님을 찾아 그와 함께 동행하는 생활로 돌이켜야 하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의 부모들은 주님을 잃어버린 줄 알고 먼저 친족과 아는 사람 중에서 찾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잃어버린 정확한 장소를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결국 성전에서 찾았습니다. 주님이 계시는 곳은 성전입니다. 그들은 사방을 찾아 헤매었지만 결국은 예루살렘성전에서 찾은 것입니다.


결 론 : 하나님은 너희가 나를 찾고 또 찾으면 만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찾는다는 말은 기도를 말합니다. 그를 향하여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말씀 중에 계시기 때문에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성전을 떠나면 주님을 잃어버릴 줄 알고 성전을 부지런히 찾아야 합니다.


누가복음 3장 (10-12)

◆ 밤중소리 03-02 | VIEW : 2,806

(10) 세례요한의 활동(누가복음 3 : 1 - 6)

(11) 요한의 세례와 예수님의 세례(누가복음 3 : 7 - 17)

(12) 예수님이 받으신 세례(누가복음 3 : 18 - 38)


(10) 세례요한의 활동

(누가복음 3 : 1 - 6)


서 론 : 4복음서 어디나 세례요한의 등장을 볼 수 있습니다. 복음서에 있어서 그의 등장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그것은 그가 오실 메시야 앞에 먼저 보내심을 받은 선지자이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은 이미 이사야를 통해, 말라기를 통해 그의 선지자적인 사명이 예언되어 있는 것입니다(말4:5-6, 사40:3-5). 요한은 이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사명을 깨닫고 그 사역에 충성하므로 순교의 영광을 누리고 하나님께 돌아간 것입니다.


1. 세례요한의 등장

누가는 눅3장에서 세례요한의 활동시기에 대하여 역사적인 근거를 상세히 들고 그 배경을 설명해 주면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한편 이 같은 세례요한의 활동시기에 대한 증거는 또한 예수님에 대한 역사적인 증거와 예수님의 공생애에 대한 시대적인 배경의 증거가 되기도 합니다.

(1) 요한의 활동은 디베료 가이사아 위에 있은 지 열 다섯 해였다고 했습니다. 이런 점으로 보아 세례요한의 활동은 주후29년경을 말하는데 이런 역사적인 연대는 여러 학설이 다 일치하기가 어렵습니다.

(2)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있을 때에라고 했습니다. 빌라도가 유대지방에 파송된 것은 5대 총독으로 주후26-36년경 사이에 유대를 통치한 사람으로 그의 이 같은 통치기간에 세례요한의 활동이 시작되었다고 한 것입니다.

(3)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왕으로 있었을 때라고 했습니다. 여기 나와있는 헤롯은 헤롯 안디바로 이 자는 주전4년-주후39년경까지 왕으로 있었습니다.

(4) 헤롯의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왕으로 있었을 때라고 했습니다. 이 빌립은 헤롯1세가 예루살렘엣 클레오파트라에 의해 얻은 아들로 주전4- 주후34년에 이르기까지 종신토록 왕위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5) 다음에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라고 했습니다. 안나스는 주전6년에 임명된 대제사장으로 15년에 해임되었지만 그는 계속 산헤드린의 정신적 통치자로 군임하고 있었습니다. 가야바는 안나스의 사위로 주후18년-36년 사이에 대제사장으로 활동한 사람입니다.


2. 세례요한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

이 같은 역사적 배경 속에서 세례요한은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로 메시야의 예언자로 등장한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빈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했다”고 했습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고 한 것은 요한에게 주신 선지자적 사명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의 사명을 부여하실 때는 반드시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십니다. 선지자란 꿈이나 환상이나 이적이나 기사를 보이는 사람은 가리킨 것은 아닙니다. 몽사나 이적은 어떤 때는 하나님께서 미혹과 유혹의 도구로 쓰실 때도 있습니다(신13:1-5). 꿈 이야기나 이적을 따르는 신앙은 가장 위험스런 신앙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에게 말씀을 주실 때는 반드시 무엇을 고하라고 명하시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만약 선지자가 방자히 고하라고 하지 아니한 말씀을 전하면 그 선지자를 일컬어 거짓 선지자라고 합니다.

(2) 요한이 받은 선지자의 사명은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였습니다. 이에 대해서 “요한이 요단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람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회개와 세례’란 말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세례는 회개에 그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례는 구원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구원은 세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음으로 오는 것이기 때문에 이 둘은 구분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우리에게 세례를 받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례 때 사용되는 물은 그 물에 죄 사함의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란 말씀에서 물로 씻어 거룩하게 하시는 그 물이란 곧 주님의 피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세례를 주라고 하신 것은 이런 뜻에서 죄 사함의 참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온전한 죄 사함의 은혜를 주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3) 그러므로 세례에는 회개가 따라야 합니다. 회개가 없이는 사죄의 은혜가 따를 수 없습니다. 회개란 죄를 하나님께 자복하는 일입니다. 회개란 죄에서 돌이키는 일입니다. 회개란 양심의 악을 깨닫고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에는 의의 열매가 따라야 합니다. 이처럼 세례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통하여 죄 사함을 얻게 하려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가지고 요단강 들판에 등장하였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임한 것입니다.


결 론 : 누가는 이 같은 세례요한의 요한의 선지자적 사역이 바로 이사야로 예언하신 바 그 예언의 성취임을 이곳에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세례요한의 등장을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쳤습니다. 그가 외친 메시지의 핵심은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리라”는 내용인데 그러기 위해 너희는 그 길을 예비하라는 것입니다. 주의 길을 예비하는 길은 바로 회개의 세례를 말합니다.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고 했습니다. 구원에 이르는 첩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일입니다. 평탄케 한다는 말은 그 이름을 믿고 그을 영접하는 일입니다. 지금도 우리에게 이 세례요한의 외침이 필요합니다.


(11) 요한의 세례와 예수님의 세례

(누가복음 3 : 7 - 17)

서 론 :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는 요단강 부근의 광야에 메아리쳤습니다. 그의 외침은 신날 했습니다. 회개를 촉구하는 그의 외침은 많은 무리들에게 책망으로 나타났으며 오실 메시야를 영접하게 하려는 회개의 세례로 나타났습니다. 세례요한은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는 무리들이 혹 요한이 그리스도가 아닌가 그들의 심중에 의논하는 것을 보고 자신과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세례로 구분하므로 메시야를 증거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증거했습니다.


1. 요한의 책망

요한은 자기에게 세례 받으러 오는 무리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고 크게 책망했습니다. 이런 책망을 들은 무리들은 교만과 외식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군임하고 있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었습니다(마3:6-7).

(1)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책망했습니다. 독사란 무서운 독을 지닌 뱀으로 이 독은 죄와 사망의 독을 가리킵니다. 이 독사라고 표현한 대상은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을 지적한 것이지만 간접적으로는 영적인 의미로 사단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들은 거짓의 아비인 사단을 따라 많은 사람들에게 죄와 사망의 독을 풍기는 존재였기 때문에 이 같은 책망을 듣기에 충분했습니다.

(2)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가르친다는 말은 ‘휘포데이크뉘미’로 찾아내어 보여준다는 뜻입니다. 이 말의 뜻은 ‘너희에게 하나님 나라 비밀을 보여주어 장차 올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라고 누가 말하더냐’는 것입니다. 그들은 장차 올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3)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했습니다. 천국은 오직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사람만이 유업으로 받게 됩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기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큰 자랑으로 여겼습니다. 그들은 모세를 통하여 준 율법을 천국의 보증서인 줄로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의 행위로 의를 추구하는 생활을 해 왔습니다. 그들은 아들을 보내시어 구속의 은총을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을 거역했습니다. 그들이 이 같은 완악한 마음을 깨고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하면 그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내릴 것임을 강하게 경종한 것입니다.

(4)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다”고 했습니다. 세례요한은 하나님의 심판의 긴급성을 경종했습니다.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놓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고 했습니다. 도끼란 하나님의 심판을 비유한 말입니다. 나무뿌리란 하나님 앞에 열매를 맺어야 할 인류를 말합니다. 이 같은 경종에 대하여 예수님은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제해 버리신다”고 하셨습니다(요15:2).

(5) 이 같은 세례요한의 책망을 듣고 있든 많은 무리들이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그러하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고 물었습니다. 이에 세례요한은 “옷 두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누어주고, 먹을 것이 있는 자도 이처럼 하고, 세리들은 정한 세 외에는 늑징치 말고, 군병들에게는 강포하지 말며 무소하지 말고 받은 료를 족한 줄로 알라”고 말해주었습니다.


2. 요한의 세례와 예수님의 세례의 차이

세례요한이 요단강에서 회개의 세례를 베풀 때는 이스라엘이 메시야를 기다리고 바라던 시기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혹 요한이 메시야가 아닌가 기대하면서 심중으로 의논했다고 했습니다.

(1) 요한의 세례는 물세례였습니다. 요한은 메시야를 증거함에 있어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이 주는 세례와 메시야갸 주는 세례와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음을 말해주었습니다. 물세례는 정결케 하는 율법적인 의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요한의 이런 회개를 위한 세례의식은 메시야를 맞이하는 일에 “주의 길을 예비하는 일이요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는 일”이 된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분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베푸실 세례에 대하여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요한이 말한 성령세례는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이미 약속하신 일이 있습니다(행2:1-4). 이 성령세례는 오순절 날 실질적으로 임했습니다. 성령세례는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의 임재하심을 말하며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영접한 사람들은 성령을 선물로 받으므로 성령세례를 받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다음에 불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하신 이 불 세례는 무엇입니까? 이에 대산 논란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주목할 일은 요한이 세례란 말을 부친 점에 이 불 세례의 의미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불이란 말을 쭉정이를 태우는 진노의 불, 심판의 불과 연결 지을 필요는 없습니다. 불은 성령의 사역을 말합니다. 불은 우리의 죄를 소멸하시는 권능으로도 사용됩니다(사6:6, 말3:3, 계3:18). 오순절에 임한 성령은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형상으로 나타났습니다.


결 론 :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에 의한 종말적인 심판을 말합니다. 이때 알곡은 곡간에 들어가게 됩니다. 알곡은 성령세례를 받은 성도들이요 쭉정이란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자들입니다.


(12) 예수님이 받으신 세례

(누가복음 3 : 18 - 38)

서 론 : 누가는 누가복음을 기록함에 예수님의 공새애이 등장에 앞서 세례요한의 무대 뒤로의 퇴장을 먼저 기술하고 있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보다 그의 사역에 있어서 약 6개월 가량 앞섰지만 1년간의 공생애가 서로 겹쳐져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예수님의 등장과 함께 세례요한을 퇴진시키려고 요한을 옥에 가둔 일을 이곳에 미리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리”고 말한 세례요한의 말대로 된 것입니다.


1. 예수님은 왜 세례를 받으셨나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나이 삼십은 공생애에 들어서는 법적인 연령입니다. 예수님은 이 나이에 세례요한이 세례를 베푸는 요단에 이르러 백성들이 세례를 받을 때 그 중에 끼어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1) 예수님의 사역에는 그의 세례 받으심이 반드시 필요하셨습니다. 세례란 원래 회개를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죄가 전혀 없으시고 정결하게 하실 필요가 하나도 없으신 예수님으로서는 세례를 받으시거나 받으셔야 할 이유가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셨지만 죄인처럼 십자가를 지셨고 예수님은 세례 받으실 이유가 없으셨지만 죄인처럼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그가 사람으로 세상에 오신 목적은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시고 그 죄 값을 치르시는 속죄 양으로 오셨기 때문에 그 사역을 완성하기까지는 죄인들과 같은 자리에 계셔야 하셨던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자신이 세례를 받으심으로 하나님의 모든 의를 이루시는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요단강에 이르러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하실 때 요한은 극구 사양하면서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고 말렸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요한에게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심에 예수님은 자신을 낮추시고 세례 받는 일에까지 모든 사람의 본이 되신 것입니다.

(3) 세례요한으로 메시야이심을 확인시키기 위해서 예수님의 세례 받으심은 있어야 했습니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여 그를 증거하게 된 동기가 바로 예수님게 대한 세례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세례요한의 증거는 이러합니다. “요한이 또 증거하여 가로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 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세례가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 인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요1:32-34).


2. 성령의 임하심과 하늘의 음성

예수님이 세례를 받고 기도하실 때 두 가지 놀라운 사실이 나타났습니다.

(1) 세례가 형체로 비둘기 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셨다고 했습니다.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은 아마 감사의 기도를 드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기도할 그때에 세례가 형체로 비둘기 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신 것입니다. 성령은 영이심으로 그의 형체의 나타나심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곳에 성령의 나타나심은 인류의 구속사역에 있어서 성삼위 하나님의 공동사역을 보여주신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안에서 섭리하시고 성자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루시고 성령은 하나님의 권능으로 이 모든 일을 성취하신다고 볼 수 있는데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는 곳에 함께 나타나신 것입니다(눅4:1).

(2) 하늘에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하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이 순간 하늘에 계셨습니다. 성령께서는 비둘기 같은 형체로 예수님 머리 위에 계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지금 말씀이 육신이 되신 낮은 자리에서 세례요한 앞에서 죄인들의 대속제물이 되기 위한 회개의 세례를 받고 계시는 것입니다. 육신을 입고 낮아지신 예수님은 이제 위로가 필요하신 몸이 되었습니다. 배고프시고 유혹을 받게 되시고 시험을 당하시고 두려움도 당하셔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되신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으로서의 그 무엇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 자신이 스스로 종의 몸으로 낮아지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부께서는 예수님께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하시는 위로의 말씀과 사역의 확신을 주셨고 성령께서는 한량없는 능력으로 충만케 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아들로서 하셔야 할 모든 사역을 기쁘시게 받으신다는 뜻으로 풀이됩니다.


결 론 : 23절 이하에는 예수님의 족보가 나옵니다. 예수님의 족보는 마태복음과 이곳에만 나옵니다. 그러나 사실상 예수님은 족보가 필요 없으신 분입니다. 그 이유는 그 분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족보란 혈통의 계보인데 예수님은 인간적인 혈통으로 태어나신 분이 아니라 동정녀의 몸을 빌려 “독생하신 하나님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곳ㅇ 나와 있는 예수님의 족보에는 커다란 의미가 주어져 있습니다. 이 족보는 아담으로부터 혈통적으로 내려온 인류의 죄를 짊어지실 인류의 메시야 되심을 보여주는 족보입니다. 그리고 이 족보에 나타난 주님의 이름은 마지막 아담으로서 십자가를 지실 예수님을 보여주시고 온 인류에게 새로운 생명을 공급해 주실 둘째 사람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4장 (13-17)

◆ 밤중소리 01-26 | VIEW : 1,171

(13) 시험받으신 예수님(누가복음 4 : 1 - 13)

(14) 메시야의 증거(누가복음 4 : 14 - 24)

(15) 하나님의 사랑을 입는 자(누가복음 4 : 25 - 30)

(16) 말씀의 권세(누가복음 4 : 32 - 39)

(17)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누가복음 4 : 40 - 44)


(13) 시험받으신 예수님

(누가복음 4 : 1 - 13)


서 론 :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시럼을 받으실만한 아무런 조건이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완전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누가 그를 시험할 자격이 있을 것입니까?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 분은 곧 하나님이십니다. 누가 그 분을 시험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을 것입니까? 그런데도 성경은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 일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로 교훈해 주시는 바가 큰 것입니다.


1. 예수님은 왜 시험을 받으셔야 했나

예수님은 요단강에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 성령의 충만함을 입으셨습니다. 예수님에게 성령의 충만함이 왜 필요한 것인가?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다는 말씀은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속사역에 성령께서도 예수님과 함께 동역 하신다는 뜻이 됩니다. 육신으로 낮아지신 예수님께서 그의 사역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권능의 행사가 필요하십니다. 인성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이 같은 하나님으로부터의 권능의 행사에 있어서 성령의 동역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1) 예수님은 성령의 이끌리심으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다고 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다고 하는 충만이란 말은 ‘플레레스’로, 가득하다, 충분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구세주로 사역하시기에 충분한 성령의 임재하심, 성령의 능력의 부여하심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부터 끊임없이 이 같은 능력을 부여받으시므로 그의 사역을 완벽하게 수행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2)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시기 위해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이유 중의 하나가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시기 위함이십니다(히4:15). 그러므로 그는 우리의 시험을 도우시고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기심을 받을 수 있으며 도움을 주실 수 있습니다.

(3) 예수님은 마지막 아담으로 오신 분으로 아담의 실패를 회복하심에 마귀의 시험을 이기셔야 했으며 둘째 사람으로 반드시 마귀의 시험의 승리자가 되셔야 했습니다. 처음 아담은 에덴에서 마귀의 시험에 넘어졌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아담 안에서 사망을 유산으로 넘겨받았습니다. 마지막 아담으로 오신 예수님은 아담의 실패를 회복하셔야 합니다. 아담이 실패한 것을 예수님이 회복하시려면 이기셔야 합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은 둘째 사람으로 오신 분입니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피조물을 창조하셔야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마귀의 시험을 이기셔야 합니다.


2. 예수님이 받으신 세 가지 시험

마귀의 공격은 간교하기 때문에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형편과 처지를 부단히 살펴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틈새만 보이면 여지없이 공격을 가해옵니다. 마귀는 예수님이 시험을 받기에 가장 적절한 시기에 찾아왔습니다. 사십 일간의 금식이 끝난 직후에 예수님을 시험으로 넘어지게 하려고 날카로운 공격을 시도한 것입니다.

(1) 마귀는 돌들에게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유혹했습니다. 시험이란 예수님으로 넘어지게 하려는 마귀의 실험이기 때문에 이 같은 마귀의 말은 동정이나 배 곺음을 면해 보라는 뜻에서 준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마귀의 이 같은 간계를 알고 계셨기 때문에 반격을 가하셨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셨느니라”고 말씀하심으로 마귀의 첫 번째 시도를 물리치셨습니다.

(2) 마귀는 두 번째 시험을 시도했습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만국을 보이며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이 모든 권세와 영광을 네게 주리라”고 유혹했습니다. 마귀는 예수님이 왕으로 오신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마귀는 왕의 영광을 이 세상에 있는 권세와 영광에 결부시켜 그 길을 택하도록 유혹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에게 경배하라고 하는 마귀의 유혹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마귀는 다시 한번 참담한 실패를 당했습니다. 그 옛날에 에덴에서 아담을 유혹했을 때 써먹었던 그의 솜씨로서는 도저히 당해낼 도리가 없었습니다.

(3) 마귀는 이번에는 마지막 시험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여 유혹을 시도했습니다. 예수님을 예루살렘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는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 든 여기서 뛰어 내리라”고 유혹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엉뚱하게 시편에 있는 말씀과 결부시켜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의 유혹을 물리칠 수 없도록 시도했습니다. 마귀가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도용한 것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시험케 하려는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직각 마귀의 간교함을 간파하시고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는 말씀을 인용하여 마귀의 세 번째 시험을 물리치셨습니다.


결 론 : 마귀의 말에는 인간적인 합리성이 다분히 있습니다.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찾게 하는 것, 세상 영광을 보여 주는 것, 하나님을 시험케 하는 일 등,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거나 진리에 눈이 어둡고 육신의 일에 눈을 돌리는 한, 이 같은 마귀의 유혹에 걸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이한 검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성령의 검으로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셨습니다. 마귀는 이기는 능력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 하나님의 능력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알고 늘 마귀의 시험을 대비해야 합니다.


(14) 메시야의 증거

(누가복음 4 : 14 - 24)


서 론 : 예수님이 광야의 시험에서 승리하시고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로 돌아가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는 성령의 권능으로 시작하셨습니다. 주님의 메시야적인 모든 사역은 오직 성령의 권능으로 행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전도는 갈릴리로부터 시작하셔야 합니다. 그 이유는 선지자 이사야로 예언된 말씀을 이루어야 하셨기 때문입니다(마46:12-16). 이미 예수님의 소문은 사방에 퍼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이면 여러 회당에서 많은 유대인들에게 가르치셨으며 그 결과 뭇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으셨다고 했습니다.


1. 나사렛에서 일어난 일

예수님은 고향인 나사렛에 이르셨습니다.

(1) 예수님은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규례대로 들어가셨다는 말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회당에서 거행되는 예배에 참석해 오셨음을 가리킨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후, 안식일마다 회당에 모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왔습니다.

(2) 예수님은 성경을 읽으려고 일어서셨다고 했습니다. 회당에서 드리는 예배 순서는 먼저 회당의 직원이 법귀에서 율법의 한 두루마리를 풀어 가지고 읽을 사람에게 넘겨줍니다. 두루마리를 읽을 사람은 대개의 경우 회당장이 지명하는 데 회중 가운데 존경 받을만한 사람이나 아니면 처음 손님으로 예배에 참석한 사람을 지명하여 읽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날 그 회중 가운데서 가장 뭇 사람의 시선을 끌었었으며 회당장에 의해 지명 받을만한 처지에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행하신 일이라든가 그가 가르치신 교훈 등이 이곳에서도 그 소문이 널리 퍼졌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3) 예수님은 이사야의 글에 있는 메시야에 관한 예언의 말씀을 찾아 읽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넘겨받은 두루마리는 마침 이사야의 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책에서 이처럼 기록한 곳을 찾으셨습니다. 그곳은 이사야61:1-2절에 기록된 메시야에 관한 말씀이었습니다.


2. 예수님이 읽으신 이사야의 글

예수님은 이사야의 글에서 어느 대목을 분명히 찾으셨습니다. 이런 일은 예수님의 의식적인 일입니다. 이사야의 글에 있는 메시야에 관한 예언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1)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다고 했습니다. 메시야의 사역은 성령의 권능으로 이루시는 구원사역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성령의 충만하심을 받으셨으며 성령의 권능으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눅4:1,14).

(2)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하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가난이란 심령이 가난한 자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사랑하십니다. 자신의 공로가 없음을 알고 하나님의 의를 사모하는 사람,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하나님의 사유하심을 바라는 사람,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자기를 낮추는 사람, 물질에 욕심을 품지 않고 그날 그날의 양식에 만족하는 사람, 이런 사람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3)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셨다고 하셨습니다. 메시야는 기름부음을 받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을 말합니다. 메시야를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란 말이 기름부음을 받은 자란 뜻이기 때문입니다. 메시야가 기름부음을 받는 이유는 메시야의 사역이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의 사역이기 때문입니다.

(4)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메시야에게 기름을 부으시고 세상에 보내심은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주게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포로란 죄의 포로를 말합니다. 이들에게 자유를 주신 것은 죄의 사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죄의 결박을 풀어주고 자유케 하시는 일이 메시야의 사명입니다. 예수님은 이 같은 일을 하셨습니다.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한다고 했습니다. 눈먼 자란 마음의 눈을 말합니다. 메사야는 눈먼 자에게 신령한 눈을 열어주십니다. 소망의 눈, 천국의 눈을 열어주십니다.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눌림이란 억압을 받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인생은 율법에 억압을 받고 있습니다. 이런 것에서 자유함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주의 은혜의 해란 복음의 시대를 말합니다.

(5)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배척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주님을 주목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들을 향하여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모든 사람들은 즉각적으로 예수님을 배척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그 신분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생각에 목수 요셉의 아들이 어찌 메시야가 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결 론 : 예수님은 메시야를 배척하는 그들에게 두 가지 속담을 들려주셨습니다. “너희가 반드시 의원아 너를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증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의 들은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그들이 배척한 메시야가 앞으로 그들에게 반드시 필요하여 찾을 날이 올 것이라고 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15) 하나님의 사랑을 입는 자

(누가복음 4 : 25 - 30)

서 론 : 예수님이 고향이신 나사렛에 가셔서 복음을 전하신 일은 나사렛사람들의 거역으로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는 일에는 실패가 없는 있을 수 없습니다. 복음을 받아 드리지 않는 곳일지라도 그곳에 반드시 복음을 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겔3:17-19). 예수님께서 나사렛 사람들에게 의미 있는 말씀을 하셨는데 그것이 엘리야 시대에 있었던 사렙다 과부의 이야기와 엘리사 시대에 있었던 수리아의 나아만 장군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이들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은혜를 받은 것은 이들에게 이스라엘에게 없었던 아름다운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 엘리야 시대의 경우

엘리야 시대에 극심한 흉년으로 이스라엘 전체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누가 과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도우심을 받았는가를 상기시켜 주시면서 이스라엘 안에 있었던 그 수많은 과부들이 아니라 이방 땅 사렙다에 있는 한 과부가 아니냐고 하신 것입니다.

(1) 이스라엘에 있었던 흉년은 하나님의 저주였습니다. 그들이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을 섬겼습니다. 하나님의 종들을 죽이고 모든 백성들로 여호와를 떠나게 하고 산당에서 바알신을 섬겨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심한 가뭄으로 흉년이 들게 하셔서 그들의 악을 징계하셨습니다.

(2) 이스라엘에는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시는 과부가 많았습니다.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를 사랑하십니다. 특히 재앙의 날이나 기근의 날에 이들 과부들에게 특별하신 은총을 베푸십니다. 그런 중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종 엘리야를 공궤할 과부를 찾고 계셨습니다. 엘리야를 공궤하게 하시므로 그 과부에게 복을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중에는 엘리야를 영접할만한 믿음의 과부가 없었습니다. 엘리야를 숨겼다가 아합 왕에게 잡히는 날이면 죽임을 당할 위험이 따랐습니다. 그리고 극심한 흉년에 엘리야를 대접할 말한 믿음의 과부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3)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참 믿음의 과부에게 보내셨습니다. 이 과부는 이스라엘에 있었던 과부가 아닙니다. 이방 땅인 사렙다에 살고 있는 이방 여인입니다. 열왕기상 17장에 나오는 사르밧은 사렙다와 같은 지명입니다.

(4) 이 여인은 믿음으로 엘리야를 영접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먼저 약속을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들로 과연 하나님이 제시한 약속을 믿는가를 보십니다. 하나님은 그 믿음을 보시고 그의 언약을 지키시므로 복을 주십니다. 엘리야는 성문에서 나무 가지를 줍고 있는 이 과부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었습니다. “엘리야가 저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하나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왕상17:13-14). 이 과부는 엘리야의 입에서 나온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과부의 이런 믿음을 보시고 약속하신 복을 그의 가정에 내려주신 것입니다.


2. 엘리사 시대의 경우

사렙다 과부의 경우를 말씀하신 예수님은 다음에 또 문둥이로 있다가 믿음으로 고침 받은 수리아 사람 나아만의 경우를 들어 나사렛 사람들의 불 신앙을 책망하셨습니다. 엘리사 시대에 이스라엘에도 문둥이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하필이면 이스라엘을 괴롭힌 수리아의 나아만 장군의 문둥병을 고쳐주셨는가에 대한 해답을 들을 수 있습니다.

(1) 나아만은 자기 집 종으로 있는 한 소녀의 말을 믿고 이스라엘로 엘리사를 찾아갔습니다(왕하5:1-4). 나아만은 일신상 부족함이 없는 영화를 누리고 있었지만 문둥병으로 말미암아 아무런 소망 없는 생애를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가 이스라엘에서 포로로 잡아 온 자기 집 하인의 말을 믿고 그 병을 치료받을 수 있다는 복음을 듣고 멀리 이스라엘의 선지자를 찾아 나섰으니 그의 믿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만한 믿음이었습니다.

(2) 나아만은 엘리사의 어려운 조건을 결과적으로 순종하므로 그 몸의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나아만은 자신의 명예나 위신이나 권위를 더 버리고 엘리사가 명한 대로 요단강에 들어가 몸을 일곱 번 담갔습니다. 그가 요단강 물에 몸을 담근 것으로 문둥병이 치료받은 것이 아닙니다. 나아만의 순종의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치료해 주신 것입니다. 이 같은 믿음의 문둥병자가 이스라엘에는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후일에 있을 예수님의 교훈을 위하여 이방인인 나아만의 문둥병을 고쳐주신 것입니다.


결 론 : 예수님의 이 같은 역사적인 사건의 인증은 나사렛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교훈을 주시려는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믿음에서 떠날 때 그들을 버리시고 믿음이 있는 이방인들을 사랑하신다는 말씀이 되겠습니다(롬11:16-20). 이 말씀은 또한 하나님은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는데 하나님은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사람들의 하나님이심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메시야를 배척하고 진리를 거슬리는 나사렛 사람들을 버리시고 믿음이 있는 이방인들을 더욱 사랑할 것이라고 하는 경종의 말씀으로 들려주신 것입니다.


(16) 말씀의 권세

(누가복음 4 : 32 - 39)

서 론 : 예수님은 쉬실 틈이 없으실 정도로 바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발걸음을 가버나움으로 옮기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곳 가버나움에서도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셔서 여전히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그 어떤 경우에도 중단됨이 없이 계속되었습니다. 이 일에 대하여 마가복음에서는 이처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저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어쫓으시더라”(막1:38-39).


1. 권능 있는 말씀으로 들림

회당에 모여 있었던 많은 무리들은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은혜로운 말씀에 심히 놀랐습니다. 그의 가르침이 자기들을 가르쳐온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과 같지 아니했기 때문입니다.

(1)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의 말씀에 그런 위엄이 있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지니고 계시는 영원한 모습을 우리는 요한복음1장에서 찾게 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니라”(요1:1-2). 하나님이 육신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예수께는 하나님의 엄위가 있으십니다.

(3) 예수님의 말씀은 영이요 생명이기 때문에 그 말씀이 권세 있는 말씀으로 들린 것입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요6:63). 영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속에 울릴 때 그 말씀이 좌우의 날선 검이 되어 심혼골수를 쪼개기까지 하므로 권세 있는 말씀으로 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4) 예수님의 말씀은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 그대로 이르시는 말씀이기 때문에 그의 말씀이 권세 있는 말씀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그 말씀에는 아버지의 권위가 있으므로 권세 있는 말씀으로 들린 것입니다.

(5) 예수님은 스스로 그의 말씀에 대하여 영원한 권위를 부여하셨습니다.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절대불멸의 예수님의 말씀에 권세가 따른다는 일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2. 말씀으로 나타내신 주님의 권세

예수님은 가버나움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신 후, 친히 그의 말씀의 권세를 모든 사람들에게 보이셨습니다.

그곳에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귀신을 더럽다고 표현한 것은 귀신은 죄악의 존재지만 회개를 모르고 하나님의 사유하심을 받을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더럽다고 불려지고 있습니다. 이 귀신이 예수님을 보고 견딜 수 없어 부르짖었습니다.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고 외쳤습니다. 이것은 귀신이 느끼는 영적 괴로움의 부르짖음입니다.

우리는 이 같은 귀신의 호소를 듣고 귀신에 대한 몇 가지 비밀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이 귀신은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고 외쳤는데 이 사람에게 들어온 귀신은 하나인 것이 아니라 여럿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란 말에서 나타나 있습니다. 무슨 상관이냐는 말은 자신들이 아직은 멸망 받을 시기가 아닌데 어찌하여 괴롭히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귀가 귀신들을 없애버리려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마귀의 무리는 예수님 당시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활동할 것입니다. 그의 최종적인 운명은 천년왕국 후에 영원한 지옥, 둘째 사망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괴롭히는 귀신들의 활동을 용서치 아니하십니다. 그의 말씀의 권능으로 쫓아내시고 그 사람으로 더러운 귀신의 사슬에서 벗어나게 하십니다.

다음에 귀신들은 영적인 피조물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존재에 대하여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귀는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나시기까지 메시야의 태어나실 일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동방박사의 방문과 예방을 통해서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귀신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알고 그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영적 존재가 한번 타락하면 그 타락을 회복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구세주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에게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 결과 귀신은 쫓겨나고 그 사람은 다친 곳이 없이 온전해졌습니다. 이에 이 같은 일을 바라본 회당 안의 사람들이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세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 도다”고 하며 놀랬습니다.

결 론 : 이 같은 예수님의 권능으로 그 소문이 그 근처에 도루 펴졌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그 회당에서 나오셔서 시몬의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마침 그 집에는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에 붙들린바 되어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곧 열병을 꾸짖어 그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시몬의 장모는 병에서 일어나 곧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을 위해 봉사에 들어갔습니다.


(17)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

(누가복음 4 : 40 - 44)

서 론 : 사람이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이 무엇인가에 대한 분명한 해답을 얻고 그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일은 너무나도 값진 인생을 살아가는 일입니다. 더군다나 그 일이 하나님이 자신에게 맡겨주신 일이라고 할 때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삶을 온전히 이루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환영하며 환대하는 무리들로부터 자기들과 함께 있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뿌리치면서 “내가 다른 동리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고 하신 것입니다.


1. 각색 병자를 고치신 예수님

예수님은 가버나움 회당에서 귀신을 말씀으로 쫓아내셨는데 이런 소문이 순식간에 그 근처사방에 퍼져나갔습니다. 또한 시몬의 집에 들어가셔서 열병에 붙들린 시몬의 장모의 병을 꾸짖어 고쳐주신 일 등의 소문이 파다하게 번져나가자 그 날 해질 무렵이 되니 각기 자기 집에 병 있는 모든 식구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나와 그의 안수하심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안수하심은 몇 가지 의미가 주어져 있습니다.

(1) 주님의 손은 창조적인 권능의 손이십니다. 예수님은 친히 자신의 권능의 손으로 사람들의 병을 고치신 것입니다. 그의 안수하심은 그의 창조적인 능력을 나타내신 것이기 때문에 못 고치실 병이 없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이 그의 거룩한 손을 병자의 더러운 환처에 친히 얹으신 일은 그의 말할 수 없는 자비와 긍휼의 표시입니다. 문둥병자의 고름나는 환부에도 손을 데고 고쳐주신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이사야는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다”고 했습니다(사53:4).

(3) 예수님이 각색 병든 자를 고쳐 주신 것은 두 가지 뜻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병고침의 권능을 복음을 전하시는 전도의 방편으로 쓰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병 고침의 기적은 그 소문이 당장에 그 근처사방에 퍼져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곁으로 모여들게 되었고 그들은 예수님께 가까이 나오므로 복음을 들을 기회가 주어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병 고침을 받은 사람들은 병 고침을 받는데 그쳤을 뿐 좋은 결실을 거둔 경우는 매우 적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일은 병 고침의 기적에서가 아니라 믿음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다른 한가지는 예수님은 병으로 고통을 당하는 인생들이 불쌍히 여기시어 치료를 베푸신 것입니다. 병자를 고치신 주님의 손은 자비와 사랑의 손길입니다. 믿는 자에게만 해당된 것이 아닙니다. 믿지 않는 사람에게조차 치료의 은총을 내리셨습니다. 그러나 그같은 치료의 체험이 그들의 구원에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우리는 체험의 신앙을 강조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체험적인 신앙은 병을 고침 받는데 있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생활을 통해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말씀대로 성취되는 신앙적인 체험이 중요한 것입니다.


2. 귀신의 말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심

예수님이 많은 무리들의 각색 병을 고치실 때 귀신들이 나가면 소리질렀다고 했습니다. 귀신들의 외치는 소리는 다른 소리가 아니라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고 소리지른 것입니다. 이 귀신의 소리는 두려움에서 비명처럼 외치는 몸부림이지만 예수님은 이 같은 귀신의 소리지름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습니다. 귀신의 이런 소리지름은 결과적으로 예수님으로 그리스도이심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1) 예수님이 이처럼 자신을 그리스도로 들어내 놓은 귀신의 소리지름을 허락하지 않은 이유는 잘못된 메시야관 때문에 그의 사역에 중대한 차질이 생겨날 것으로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의 메시야관은 현시적인 영광의 메시야 대망인 것입니다. 그들은 메시야가 오시면 당장에 유대인을 중심한 다윗의 왕국을 건설하여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줄로 믿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기대하고 그에게 소망을 둔 이유도 알고 보면 이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만일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이 같은 메시야로 인정한다면 예수님의 메시야 사역은 헛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나타내셨을 때도 이 같은 기적을 바라본 군중들이 예수님이야말로 자신들이 기다려온 그리스도인 줄로 알고 억지로 잡아 왕으로 삼으려고 했던 것입니다(요6:15).

예수님은 그날 밤을 어느 곳에서인가 쉬시고 다음날 아침, 아침이 밝았을 때에 일어나시어 한적한 곳에 가셨습니다. 그러나 그 동리에 사는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잠깐동안만이라도 기도하실 수 있도록 가만두지 아니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다른 곳으로 떠나지 마시기를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이 같은 간청을 즉시 물리치셨습니다. “내가 다른 동리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세상에 오신 분명하신 목적을 가지시고 그리스도의 생애를 살아가신 것입니다.


결 론 : 예수님의 이 말씀은 곧 예수님이 하실 사역에 관한 말씀인데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다고 하신 말씀에서 전도란 사명이 얼마나 위대하고 광범위한 것인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전도란 말씀 속에 그의 낮아지심과 그가 당하신 모든 고난까지 모두 포함시킨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전도에 성공하신 예수님은 그의 사역에 위대한 성공을 거두신 것입니다. 우리도 전도에 성공하는 성도가 됨으로 주님의 영광에 동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누가복음 5장

◆ 밤중소리 01-10 | VIEW : 1,512

(18)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누가복음 5 : 1 - 7)

(19) 주여 나를 떠나소서(누가복음 5 : 8 - 11)

(20) 주여 원하시면 하실 수 있나이다.(누가복음 5 : 12 - 16)

(21) 죄를 사하시는 주님의 권세(누가복음 5 : 17 - 26)

(22) 내가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누가복음 5 : 27 - 32)

(23) 새 술은 새 부대에(누가복음 5 : 33 - 39)


(18)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

(누가복음 5 : 1 - 7)

서 론 : 예수님의 초기전도는 갈릴리부터 시작되었는데 여러 회당과 갈릴리 바닷가에서 활발하게 전개되었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은 게네사렛 호수에 이르셨습니다. 게네사렛 호수란 갈릴리 바다를 말합니다. 이 호수는 면적이 엄청 넓어서 바다란 말로 불려졌지만 실은 담수로 된 호수입니다. 예수님은 무리의 옹위를 받으며 이 호수에 이르시고 효과적인 전도를 위하여 그곳에 놓여 있는 배 한 척에 오르시어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베드로의 생애에 놀라운 변화를 가져온 사건이 바로 여기서 생겼습니다.


1. 베드로의 생애에 밤에 찾아오신 예수님

베드로가 처음 예수님을 만났을 때에 예수님을 따르므로 그의 제자가 된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하룻밤의 상면을 마친 후 이 게네사렛 호수에서 다시 만나게 된 것입니다(요1:40-42). 베드로의 결정적인 부르심이 이곳에서 이루어졌습니다.

(1)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찾아오신 때는 베드로가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인생이 밤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그의 직업을 따라 가족의 생계와 생존을 위해 그날도 밤이 맞도록 고기를 잡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날 밤 그가 한 많은 수고에 비하여 얻은 것이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날이 밝아오자 고기잡이를 중단하고 호숫가에 배를 대 놓고 실의에 찬 모습으로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이처럼 그의 인생의 어려운 밤에 예수님이 그를 찾아오시어 그를 부르심으로 사람을 낚는 어부로서의 새로운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2) 예수님은 베드로의 역경 속에 찾아오셨습니다. 인생에게 찾아오는 고난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인생에 고난이 오는 것은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최적의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호숫가에서 그물을 씻는 중에 예수님을 만났다고 하는 일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찾아가실 수 있는 기회로 베드로에게 고난의 밤을 주신 것입니다.

(3) 베드로는 그의 인생의 시련 속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처음에 예수님은 무리가 옹위한 중에 그 무리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옹위한 무리들의 수효가 늘어나자 배에 오르신 것입니다. 이제 호숫가에서 그물을 씻고 있었던 베드로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청중가운데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베드로의 마음에 무엇인가 와 닿는 것이 있었으며 그의 마음을 사로잡는 흡인력이 있었습니다.


2.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게네사렛 호숫가에는 두 개의 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예수님은 베드로의 배에 오르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중에 예수님에게 자신의 배를 빌려드렸습니다. 베드로는 자기 배를 주님께 바치는 헌신이 있은 후에 복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헌신에 인색합니다. 봉헌을 즐겨하지 않습니다. 심는 대로 거두는 하나님의 법칙을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자기 배를 예수님께 빌려드린 일로 인하여 다른 사람들이 받지 못한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신 예수님은 드디어 베드로를 향하여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위하여 배를 빌려 준 베드로를 공수로 돌려보내지 아니하신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을 때에도 먹고 남은 12바구니를 모아 생선과 보리떡을 바친 어린 소년에게 돌려주셨습니다.

(1) 베드로는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는 일이 고기를 잡을 수 있는 방법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새벽녘에는 고기가 없을 뿐 아니라 깊은 곳에는 고기떼가 모이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는 베드로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선생님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나이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을 그물을 내리라고 하신 그 자리는 이미 베드로에 의해 몇 번인가 그물을 내린 장소임이 틀림없습니다. 베드로는 여기서 기로에 서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경험을 거울삼아 그물을 던져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느냐, 아니면 자신의 생각을 포기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느냐 어느 것을 택하느냐는 것입니다.

(2) 베드로는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만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리이다”고 말하고 그물을 바다에 내렸습니다. 인간의 생각으로는 누가 무엇이라 하든 고기가 잡힐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베드로의 생각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같은 베드로의 생각에서 발을 멈추기 때문에 더 깊은 신령한 은혜를 받지 못하고 다시없는 좋은 기회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러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리이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베드로의 순종의 태도가 그로 하여금 놀라운 축복을 받게 한 동기가 된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 앞에는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 말씀에 순종하는 길 외 다른 것이 개입될 수 없는 것입니다.


결 론 : 베드로는 자신의 생애를 자기 의지나 생각을 따른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그의 생활에 적용시켰습니다. 이 같은 베드로의 순종에 즉각적인 응답이 나타났습니다. “그리한즉 고기를 애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하나의 기적입니다. 순종에는 이 같은 기적이 따릅니다.


(19) 주여 나를 떠나소서

(누가복음 5 : 8 - 11)


서 론 :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깊은 곳에 그물을 내린 결과 고기를 애운 것이 심히 많았습니다. 베드로는 이처럼 많은 고기가 잡힌 일에 놀란 나머지 주님의 무릎아래 엎드려 이처럼 고백했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 순간은 베드로의 심령이 깨어지는 순간입니다. 베드로가 새롭게 그의 인생 길을 출발하는 순간입니다. 베드로의 옛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순간입니다.

1. 기적에서 믿음을 가지게된 베드로

기적은 사람에게 믿음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기적이 믿음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기적을 대하는 여러 계층의 사람을 보면 각양 각색입니다.

(1) 어떤 사람은 기적을 본 후에 더 큰 기적을 보여달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많은 무리 앞에서 오병이어의 이적을 행하시어 배불리 먹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몇 일이 못되어 예수님께 이처럼 말했습니다.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기록된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요6:30-31). 이런 말은 그들이 예수님께 모세와 같은 방법으로 더욱 큰 이적을 보여달라는 요구였습니다. 예수님은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고 하시면서 탄식하셨습니다. 표적이나 이적은 믿음을 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절대로 다른 표적을 보이지 아니하셨습니다.

(2) 어떤 사람은 기적을 보고도 의심하므로 불신에 빠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나면서부터 소경된 한 청년의 눈을 뜨게 하셨을 때 이 사건을 둘러싸고 쟁론이 벌어졌습니다. 이 기적을 확인하려는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은 소경 되었던 청년이나 그의 부모의 말을 믿지 않고 의심하므로 스스로 정죄에 빠진 것입니다(요9:17-34).

(3) 그런데 베드로는 고기를 많이 잡게 된 기적을 통해서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베드로에게 믿음을 주고 그를 변화시킨 기적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베드로는 친히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그에게 있어서 약속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체험한 기적은 그 자신의 순종에서 온 것입니다. 이처럼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이 순종하므로 그 순종의 결과에서 나온 이적의 체험만이 베드로와 같은 믿음과 변화의 역사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2.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베드로의 변화는 그의 고백에서 나타납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고 한 베드로의 고백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변화 받는 모든 사람들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향하여 자기를 떠나달라고 호소했습니다. 자신의 죄를 바라볼 때 견딜 수 없는 그의 심정을 이처럼 토로한 것입니다. 베드로의 이 말은 또한 자신은 앞에 계시는 주님을 감당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오 그 본체의 형상이십니다(히1:3). 우리가 이 같은 주님의 영광을 바라본다면 베드로처럼 “주여 나를 떠나소서”라고 하는 고백이 나오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고 한 베드로의 말에서 우리는 죄인의 몇 가지 형태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1) 죄인이라고 불리우는 죄인이 있습니다. 이 죄인은 아담의 혈통적인 자손으로 이에 대하여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롬6:23). 이 죄인들은 전혀 소망이 없는 죄인들입니다.

(2) 예수님이 찾은 죄인이 있습니다. 이들은 주님께 잃은 양들입니다. 예수님은 이 잃은 양을 위해 오셨습니다. 주님은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잃은 양을 가리키신 말씀입니다. 이 죄인은 복음에 의하여 반드시 부르심을 받게 되며 이 죄인들은 회개하여 예수님을 믿으므로 생명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3) 의인이 된 죄인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안에 있는 사람들은 의인이 된 죄인들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받았지만 이 의는 하나님의 의의 법적인 선언이지 우리의 육신이 실질적으로 의로워진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몸은 여전히 죄인입니다. 죄인이라고 하는 말은 우리가 의롭다고 인치심을 받은 이후에도 여전히 죄를 범할 수밖에 없는 죄인들이란 뜻입니다. “만일 우리가 범죄치 아니하였다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요일1:10). 그러나 이런 죄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속한 죄일 뿐 우리의 구원이나 천국에 가는 데는 아무런 영향이 없는 죄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롬8:1).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요13:10).


결 론 : 베드로는 주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았습니다. 주님은 이처럼 자기를 낮추고 죄인임을 고백하는 베드로를 향하여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베드로의 생애는 과연 주님의 이 소명의 말씀대로 사람을 낚는 어부로서의 사명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20) 주여 원하시면 하실 수 있나이다.

(누가복음 5 : 12 - 16)

서 론 : 자기 인생에 절망적인 한 사람의 모습을 봅니다. “온 몸에 문둥병 들린 사람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예수를 만난다는 일은 사람에 따라 놀라운 운명의 변화를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보고 만나고도 아무런 유익이나 도움을 얻지 못했다면 이 사람은 심히 유감스러운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시 돌이올 수 없는 절호의 기회를 영원히 상실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문둥병자는 그의 믿음의 간구로 깨끗함을 받아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새로운 생애를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1. 문둥이의 간구

온몸에 문둥병 들린 사람이 어떤 경로로 주님을 찾아 나왔는지에 대해서는 모릅니다. 그에게는 그 문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가 주님 앞에 나온 후에 어떤 태도를 가지고 주님과 접촉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1) 그는 자신의 기대이상의 분을 잘 찾아 나왔습니다. 이 문둥병자가 만약에 의원을 찾아갔다면 그에게는 별로 도움을 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유명한 의사라도 문둥병자를 치료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 인생의 문제 해결자가 되시는 예수님을 바로 찾아간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비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자지와 긍휼을 베푸시는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어떤 소청도 물리치지 아니하십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라”고 하셨습니다(요14:13).

우리는 복음서에서 주님을 찾아 나와 진실하게 간구한 사람 중에 단 한사람도 물리침을 받은 사람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온 몸에 문둥병이 들린 이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 나온 것은 그에게 말할 수 없는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2) 이 문둥병자는 주님의 자비에 호소했습니다.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이 같은 그의 간구는 주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하는 그의 간절한 호소가 깊숙이 깔려있는 기도였습니다. 예수님은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자신이 불쌍히 여김을 받아야 할 죄인임을 깨닫는 사람이 불쌍히 여기심을 받을 사람입니다.

(3) 이 문둥이는 주님의 뜻에 의지했습니다. “주여 원하시면”이라고 간구한 그의 기도는 주님의 뜻대로 되기를 바라는 마음의 기도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주님이 자신의 병을 고치심이 주님의 뜻인 줄로 알았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뜻을 안다는 일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주의 뜻을 따라 구할 때 응답을 받게 되고 주의 뜻을 따라 살아갈 때 우리의 생애에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4) 이 문둥병자는 믿음으로 구했습니다. “원하시면 나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이 간구는 믿음의 기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실 수 있나이다”의 기도는 주님이 하시지 않을 수 없는 기도입니다.

(5) 주님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역사는 명령의 역사입니다. 말씀의 명령으로 우주만물을 만드신 주님께서는 만물을 향하여 모든 명령을 내리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주님의 말씀가운데 “내가 원하노니”라고 하신 말씀에서 그의 자비와 긍휼하심을 바라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문둥병자가 그 병으로 고통받는 것을 원치 아니하셨습니다. 그를 고쳐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주님은 무엇이든지 우리로 잘되기를 원하십니다. 좋은 것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큰 믿음과 사랑을 가지고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 그의 뜻대로 구하는 생활이 필요한 것입니다.


2. 예수님의 경계

(1) 예수님은 이 문둥병자에게 아무에게도 그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경계하셨습니다. 이처럼 말씀하신 의도를 두 가지 면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이 그를 고쳐주신 일은 결코 다른 사람에게 그 사실을 알리시려는데 있는 것이 아니란 사실입니다. 기적은 전파될 필요가 없습니다. 전파돼야 할 것은 기적이 아니라 복음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런 기적 때문에 많은 인파가 몰려들어 복음전파에 지장을 초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내가 다른 동리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고 하셨습니다(눅4:43).

(2) 예수님은 그에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또 네 깨끗케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고 하셨습니다. 레위기에 기록된 율법에 의하면 문둥병에 걸렸던 사람이 나음을 입으면 하나님이 명하신 예물을 가지고 제사장에게 가서 증거를 받아야 가정에 들어갈 수 있었고 자신의 깨끗해진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증거 할 수 있었습니다.

(3) 예수님은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 가셔서 기도하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아버지와의 영적인 교제를 위해 필수적인 일이셨습니다. 바쁘신 중에도 아버지와의 교통은 끊어지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와 한 본체를 이루고 계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아버지와의 교제가 없이는 존재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리스도로 연합된 몸이기 때문에 그와 항상 기도로 교통해야 하는 것입니다.


결 론 : 우리는 다른 일 때문에 기도하는 시간을 희생합니다. 그리고 기도 못하는 이유를 바쁘다는 구실에 둡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일보다 더 중요고 바쁜 일은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본받아야 합니다.


(21) 죄를 사하시는 주님의 권세

(누가복음 5 : 17 - 26)

서 론 :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그의 주변에는 말씀을 듣고자 모여든 무리뿐 아니요 병을 고치려는 많은 병자들로 붐볐고 그에다 또 예수님을 책잡으려는 조직적인 일단의 무리들까지 들어 있었습니다. “갈릴리 각 촌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나온 바리새인들과 교법사들이 앉았다”고 했습니다. 이들은 혹 예수님의 언동 중에 율법으로 책잡을 것이 없을까? 기회를 노렸고 그 기회가 도래하면 즉시 일제히 반격을 가하여 예수님을 여지없이 매도했고 상부에게 보고할 보고재료를 만들고 있었던 무리들입니다. 예수님은 이들과 끊임없이 싸워야 했습니다.

1.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문제의 발단은 한 중풍병자의 병고침의 사역에서 나타난 것입니다. 그 동리에 한 중풍병자가 있었습니다. 이 환자는 침상에 메지 않으면 거동할 수 없는 중증의 환자였기 때문에 친구들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그의 이웃 친구들이 그를 침상에 메고 예수님을 찾아왔으나 인산인해처럼 모인 많은 무리들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하고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 한 사람이 기발한 기지를 냈습니다. 환자가 누어있는 침상을 지붕위로 올려가 지붕의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 채 무리 가운데로 내려 예수님 앞에 달아 내린 것입니다.

(1)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을 보시는 분입니다. 죄의 사유함에는 회개가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을 구세주이심을 믿고 그 앞에 자신의 죄를 자복하는 회개 없이는 죄사함의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2)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 죄 사함의 선언을 내리셨습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같은 예수님의 선언은 두 가지 중에 하나임을 나타내시는 말입니다. 하나는 그가 죄 사함의 권세도 없이 한번 시도해 본 말이던가, 아니면 그가 정말로 죄 사함의 권세를 가지고 계신 하나님이시던가 하는 것입니다.

(3) 이 말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새로운 도전을 시도했습니다. 그들은 서로 의논했다고 했습니다. “이 참람한 말을 하는 자가 누구뇨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그들의 말은 틀림이 없는 말입니다. 죄의 사유함이란 하나님 한 분 외는 감히 내릴 자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나사렛 동리의 목수의 아들인 예수가 했으니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율법과 장로들의 유전과 교만에 가리워서 예수의 바른 모습을 바라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했습니다(요1:5). 말의 올무를 잡으려는 바리새인들에게는 도전의 호기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를 따라다니고 추적하면서 행동을 감시하고 말씀의 올무를 잡으려고 한 일은 결국 예수님을 죽이려는 악한 음모에서 발단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참으로 좋은 기회를 만났다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을 것입니다(막36:6).


2. 나타난 예수님의 권능

예수님은 이때 죄 사함의 권세를 나타내시는 분으로 자신의 모습을 보이시기로 하셨습니다.

(1) 예수님은 그들에게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유익이나 자신의 메시야된 증거를 위해서는 기적을 행하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러나 죄를 사하여 주시는 권세는 그의 입에서 나오신 말씀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권능으로 증거해 주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2) 먼저 예수님은 단지 죄 사함을 준다는 말과 중풍병자를 고쳐주는 일과 어느것이 더 쉽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말뿐인 선언은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말로는 율법을 지킨다고 자랑하고 있지만 실상인즉 외식하는 거짓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속이고 사람을 기만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능력에 있다고 하셨습니다(고전4:20). 예수님은 그의 권능으로 죄를 사하실 수 있는 권세가 있으심을 나타내시기로 하신 것입니다.

(3)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창조적인 명령이셨습니다.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말씀이시요 지금도 만물을 그 말씀으로 붙들고 계십니다(히1:3). 예수님이 중풍병자에게 명하사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사람이 저희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었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찾아왔을 때는 침상에 누운 채 여러사람의 도움으로 왔지만 예수님을 만난 후에는 자신이 누었던 침상을 걸머지고 자기 스스로 자기 집으로 걸어간 것입니다.


결 론 : 이런 주님의 권능을 바라본 모든 사람들은 너무나도 기이한 일에 놀랜 나머지 이처럼 말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오늘날 우리가 기이한 일을 보았다하니라.” 예수님을 참람하다고 비방한 바리새인들과 교법사들은 그들의 입을 다물었습니다. 주님의 권능 앞에서 그들은 부끄러움을 당하고 찔림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열려진 것은 아닙니다. 그들의 돌같이 굳은 마음이 녹아난 것은 아닙니다. 완악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기적을 보고도 믿음을 가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22) 내가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누가복음 5 : 27 - 32)

서 론 : 예수님이 세상에서 하신 일은 한결같이 선한 일이셨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사람들의 비방과 모함과 핍박을 받았습니다. 세시의 집에 초대받아 식사를 하시면 바리새인들은 비방하기를 저는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악의에 찬 비방이나 모함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으시고 “내가 의인을 부르러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 레위의 부르심

우리는 예수님의 전도초기에 그의 제자들을 부르시는 주님의 여러 가지 모습을 바라보게 됩니다. 오늘은 주님이 세관 앞을 지나시다가 레위라 하는 세리를 부르시는 모습을 바라봅니다.

(1) 예수님은 레위를 보시고 나를 좇으라고 명하셨습니다. 레위한 사람은 세관에 근무하는 세리요 그가 부르심을 받은 후에 마태란 이름이 주어졌으며 마태복음을 기록한 제가가 되었습니다.

(2)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레위의 태도는 훌륭했습니다. 부르심을 받은 레위는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라고 말하지 아니했습니다(눅9:60).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라고도 말하지 않았습니다(눅9:61). 레위가 주님을 따른 태도에 대해 “저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좇으니라”고 했습니다.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렸다고 했습니다. 직장도 버리고 세리의 좋은 자리도 버렸습니다. 사람에게 기회란 그리 쉽게 오는 것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주님의 제자가 되는 기회란 그리 쉽게 오는 것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주님의 제자가 되는 기회란 한번 놓치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단 일회적인 기회였습니다. 그것을 레위는 붙잡은 것입니다.

(3) 레위는 예수를 위해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레위가 베푼 이 잔치에서 우리는 레위의 기쁨과 감사를 알 수 있습니다. 레위는 그의 신분이 비록 세리이기는 했지만 그의 성경적인 지식이나 메시야에 대한 소망은 누구보다도 간절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자기를 부르실 때에 이미 레위는 자기를 부르시는 예수님이 이스라엘이 기다리는 메시야이심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그의 태도에서 알 수 있습니다. 레위는 즉각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을 모시고 큰 잔치를 배설했습니다. 부르심을 받은 기쁨, 구원을 받은 기쁨은 이처럼 주님을 자기 집으로 영접하여 큰 잔치를 베푸는 감사와 봉사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2. 병든 자에게 필요한 의원

레위가 베푼 잔치에는 세리로 근무하는 레위의 많은 친구들도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이 장치자리를 엿보고 있는 일단의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말할 것도 없이 예수님을 책잡기 위해 뒤를 따라 다니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고 비방한 것입니다.

(1) 함께 먹고 마시는 일은 한 동류로 취급되어 왔습니다. 유대인들은 함께 먹고 마시는 일을 중요시했습니다. 세리를 죄인으로 취급하는 바리새인들이 그들과 함께 잔치자리에서 음식을 먹는 일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기 때문에 이같이 행한 예수님의 태도에 대해 그들은 비방을 가한 것입니다.

(2) 이에 예수님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 라야 쓸데 있나니”라고 하신 말씀에서 죄인과 예수님과의 관계를 명백하게 들어내 놓으셨습니다. 이것은 의인과 죄인에 대한 비유적 설명이 되겠습니다. 여기서 의원이란 바로 예수님 자신을 가리킨 것이기 때문에 건강한 자란 예수님이 필요로 하지 않는 자란 뜻입니다. 이들은 스스로가 자신들에게는 죄가 없다고 믿고 있는 자들입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란 말씀에서 건강한 자란 의인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무리들은 바로 자신들을 의인이라고 믿고 있는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그들에게 의원으로 오신 예수님이 필요치 않았습니다. 의인은 예수님과 상관이 없으므로 예수님은 그들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들의 죄악 중에서 죽을 사람들입니다.

(3) 죄인이란 병든 자를 말합니다. 병든 자는 자신의 병을 알고 있습니다. 이처럼 죄인이란 자신의 죄를 바라보고 통회하는 자를 말합니다. 그 죄의 비참함을 알고 마음을 찢는 자를 말합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율법에서 의를 얻은 줄로 알고 율법적인 의를 찾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자신의 죄를 치료해 주고 건강을 주는 병든 자의 의원이 되신 예수님이 필요치 아니했습니다.

(4) 예수님은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죄인이란 하나님을 떠난 모든 인간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특별히 잃어버린 자들을 의미하고 있습니다(눅19:10). 죄인을 부르신다고 하신 것은 잃은 양을 찾으시는 모습으로 목자의 음성을 들려주는 일입니다. 회개시키려 오셨다는 말씀은 그들의 죄를 깨닫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결 론 : 병든 자가 의원의 치료를 받듯이 죄인들이 죄인의 의원이 되시는 예수님의 치료를 받을 때 놀라운 치유의 효과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의원 되신 예수님께서 그의 죄를 사유해 주십니다(눅5:20). 사망에서 건져내 주십니다(요5:24). 다시는 병들지 아니하는 새로운 생명을 주십니다(요11:25).


(23) 새 술은 새 부대에

(누가복음 5 : 33 - 39)

서 론 :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이차적인 공격을 시도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방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세리인 레위를 부르셨을 때 레위가 이에 감사하는 뜻으로 자기 친구들과 더불어 예수님과 제자들을 초청하여 잔치를 배설했을 때 한 말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 라야 쓸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고 말씀하심으로 그들의 이 같은 비방을 물리치셨던 것입니다.

1. 바리새인들의 금식과 기도

바리새인들은 금식도 자주 했으며 기도도 길게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기도에 대하여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라고 책망하셨습니다(막12:40).

(1) 바리새인들이 자랑하는 기도와 금식을 외식 적인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통하여 주신 금식 일은 속죄 일이었습니다(레16:29-34). 그런데 그들은 자주 금식했습니다. 그들은 율법에 열심이 있다는 사실을 과시하기 위하여 율법에 규정된 것보다 훨씬 많은 규례를 정하고 그것을 실천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규례를 실천했던 것이 아니라 외식으로 흘렀습니다.

(2) 세례요한의 제자들도 금식과 기도를 자주 했습니다. 요한은 그의 생활에 나타난 바를 보면 금욕주의 자였습니다. 그의 영향을 받은 그의 제자들도 율법적인 생활에 열심이었고 장로들의 유전이나 바리새인들의 생활에 젖어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생활에 자주 금식이 있었습니다.

(3) 그러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은 금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금식으로 말미암은 열매에 있었습니다.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사58:6-7). 이것은 금식으로 말미암는 결실입니다. 이런 결실이 없는 금식은 무익한 금식이며 외식적인 금식임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2. 혼인집 손님들과 금식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고 공박한 바리새인들의 비방에 대하여 예수님은 그 사실을 시인하시면서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냐 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저희가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 신랑은 혼인집 주인이요 기쁨의 주인입니다. 예수님은 임마누엘로 오신 우리의 신랑이십니다. 그는 모든 인류의 기쁨이 되시는 신랑이십니다. 그로 말미암아 죽음이 물러가고 생명을 가져왔으며 정죄가 떠나고 의로움이 주어졌습니다. 예수님에게 신랑이란 말이 적격인 것은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그 분과 하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2) 예수님이 계신 곳은 그곳이 바로 혼인집입니다. 생명의 풍성한 축복의 잔치가 계속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같은 혼인잔치에 대하여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가로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잔치에 오소서 하라”(마22:2-4). 이런 혼인잔치에 금식이란 가당치 않은 일입니다.

3. 새 술은 새 부대에

예수님은 낡은 옷과 새 옷,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의 비유를 통해서 율법아래서 낡고 묵은 것들이 생명과 의를 주시는 새 언약에 합당치 않다는 사실을 밝히셨습니다.

(1)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율법아래서는 슬픔과 애통의 표시로 금식이 필요했습니다. 이것은 죄로 인한 탄식입니다. 이곳에는 기쁨이나 소망이 없습니다. 새 옷엔 이런 것들이 필요치 않습니다. 그곳에는 구원의 기쁨, 생명의 풍성, 소망의 넘침, 은혜와 감사만이 있기 때문입니다.

(2)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새 포도주란 새 안약, 즉 복음을 말합니다. 묵은 포도주란 율법을 말합니다. 새 포도주에는 강력한 발효성이 있지만 묵은 포도주엔 발효성이 없습니다. 의의 공급력, 생명의 공급력, 은혜의 공급력이 오직 새 포도주인 복음에만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는 율법적인 마음에 새 포도주를 넣으면 부대가 터져 버리기 때문에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인 변화 받은 마음에 넣어야 합니다. 이 마음을 성령이 임재하시는 마음입니다.


결 론 : 바리새인들은 율법적 규범에 얽매인 나머지 더 좋은 하나님의 은사엔 눈이 어두웠습니다. 그들은 묵은 포도주인 율법에 취해 있었기 때문에 더 좋은 맛을 가진 새 포도주를 원치 아니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에서 떨어져 나갔습니다.


누가복음 6장

◆ 밤중소리 01-10 | VIEW : 668

(24)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누가복음 6 : 1 - 11)

(25) 사도를 택하신 예수님(누가복음 6 : 12 - 16)

(26) 복이 있는 자(누가복음 6 : 17 - 23)

(27) 화 있을 자들(누가복음 6 : 24 - 26)

(28) 온전한 사랑(누가복음 6 : 27 - 35)

(29) 그리스도인의 자비(누가복음 6 : 36 - 42)

(30) 나무와 열매(누가복음 6 : 43 - 49)


(24)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

(누가복음 6 : 1 - 11)


서 론 : 율법에서 안식일에 대한 문제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예수님은 때때로 바리새인들로부터 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는 이유로 많은 공격을 받으셨습니다. 그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 때 안식일에 대한 다른 또 하나의 문제가 제기된 것입니다. 제자들이 손으로 밀 이삭을 비벼먹는 것을 바라본 바리새인들이 “왜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는 것이냐”고 항의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건을 계기로 너무나도 값진 말씀을 들려주셨는데 그 말씀이 바로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1. 이삭을 지른 일과 안식일의 시비

바리새인들이 공격하는 공격의 목표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는데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냐”고 트집을 잡은 것입니다. 이삭을 자른 일이나 그 이삭을 손으로 비빈 일이나 안식일을 범하는 죄가 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율법 해석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아셨지만 이곳에서는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지 아니하시고 이보다 더 큰 일도 때로는 하나님이 용납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다윗의 경우를 예를 들어 반박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다윗의 경우를 예로 제시하신 것은 바리새인들의 율법적인 논쟁을 잠재우려면 그들의 조상과 왕으로 생각하고 있는 다윗을 등장시켜야 하겠기에 이렇게 하신 것입니다.

다윗이 사울 왕을 피하여 도망 다닐 때 놉에 가서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때 다윗은 자기를 따르는 소년들과 함께 매우 시장하였으므로 아히멜렉에게 청하여 먹을 것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히멜렉이 가지고 있었던 떡은 성전에 비치된 진설병으로 이 떡을 율법에 따라 제사장만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 떡을 심히 시장하여 죽게된 다윗과 그의 부하들에게 먹도록 허락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이처럼 예로 들어 말씀하신 다윗의 이 같은 행적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무엇이라고 답변할 길이 없었습니다.


2.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예수님께서 이들 바리새인들에게 결론적으로 들려주신 말씀은 그들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놀라운 폭탄적인 선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1) 안식일의 주인이란 말씀은 천지창조의 주인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창조사역을 마치신 후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다고 했습니다(창2:1). 이처럼 하나님께서 창조를 마치신 후, 안식하셨기 때문에 천지창조의 주인이 아닌 존재는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2) 안식일의 주인이란 말은 안식일을 제정하신 당사자란 뜻입니다. 안식일을 제정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다”고 하셨습니다(창2:3). 안식일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율법에 안식일의 규정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분이라면 그 예수님은 또한 안식일을 제정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예수님이시기에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습니다.

(3) 안식일의 주인이란 안식일을 지금도 주관하시고 계시는 분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이 제정하신 안식일은 그 의미가 인간에게 주실 영원한 안식에 있었습니다. 이런 안식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누릴 인류의 최대의 축복입니다. 이 안식일이 율법에 규정된 것은 그리스도안에서 장차 이루어질 참 안식의 그림자로서의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히4:4-11). 둘째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그의 부활하심으로 영원한 참 안식에 들어가셨습니다. 우리의 안식은 그리스도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이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이 바라는 안식의 모습이며 우리는 그 안식에 들어가기 위한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는 주님의 부활의 날을 주의 날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4) 이런 사건이 있은 후 또 다른 안식일을 맞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회당에 들어가 말씀을 가르치실 때 오른손 마른 사람을 앞에 놓고 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이 그의 병을 고치시는가 엿보고 있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이 그들에게 묻기를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멸하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안식일을 지키는 그리스도인의 태도에 대하여 분명한 해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의 날을 지키는 일에 구약적인 안식일의 규례에 얽매어 율법적인 안식일을 지키려는 비 복음적인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결 론 : 예수님은 오른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고 하셨습니다. 그가 손을 내밀자 즉시 그의 손이 회복되었습니다. 이 같은 주님의 권능과 능력을 보고도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완악한 마음이 녹아나지 못하고 오히려 예수를 어떻게 처치할까 의논했습니다. 완악한 마음은 회개도 거절하고 순종도 거절하고 성령의 감동도 거절합니다. 내 마음이 완악해지지 않도록 늘 자신을 살피고 돌보아야 합니다.


(25) 사도를 택하신 예수님

(누가복음 6 : 12 - 16)

서 론 : 예수님의 공생애 중 12사도를 택하신 일은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뒤를 이어 복음사역의 주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중심으로 그의 공생애를 지내셨습니다. 그들에게 믿음을 주시는 일에, 확신을 주시는 일에,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셨습니다. 예수님 주변에는 그를 따르는 많은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수의 많음보다 복음을 능력 있게 전할 정예부대가 필요했습니다. 예수님의 12사도들에 대한 제자 훈련은 과연 예상대로 적중하여 온 세계에 복음의 불을 지피는 일에 성공하실 수 있었습니다.

1. 산으로 가사 기도하신 예수님

예수님이 12사도를 택하신 일은 공생애에 들어가신 후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다음입니다.

(1) 예수님이 산으로 기도하시러 가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지상생활에서 그의 기도는 그칠 날이 없었습니다.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좇았더니”라고 하신 말씀에서 예수님의 기도는 습관화된 그의 생활의 한 부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눅22:39).

(2) 예수님은 밤이 맞도록 기도하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의 자세는 무릎을 꿇는 기도였습니다(눅22:41). 예수님의 기도는 힘쓰고 애쓰는 기도였습니다(눅22:42). 이날 밤 예수님이 오래도록 기도하신 기도의 제목은 12사도를 택하시기 위한 기도였습니다. 예수님이 이토록 밤이 맞도록 기도하신 이유 중 하나는 가룟 유다로 말미암은 것이었을 것입니다.

2. 12명의 사도를 세우신 예수님

이미 날이 밝았습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마치시고 기도하셨던 자리에서 일어나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들에게 사도라고 하는 막중한 직분을 수여해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1) 처음에 사도로 지명 받은 사람은 베드로였습니다. 베드로의 이름은 시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시몬에게 베드로라고 하는 새 이름을 주셨습니다. 베드로에게는 다시없는 영광의 이름입니다.

헬라어로 베드로의 이름은 ‘페트로수’로 이 ‘페트로스’는 바위란 이름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작은 바위라고 해석해야 하는데 이것은 반석이 되시는 예수님과 연합하여 교회의 한 구성원의 위치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그 이름과는 달리 변덕이 많은 제자였습니다. 예수님은 메시야로 고백했지만 얼마안가 예수님으로부터 사단아 물러가라는 책망을 들었습니다. 자기는 주님을 죽기까지 부인하지 않을 것이란 그의 고백이 얼마안가 주님의 면전에서 세 번씩이나 부인했습니 다. 자기 발을 씻길 수 없다고 했다가도 금방 손과 머리까지 씻겨달라고 말했습니다.

(2) 다음에 사도의 이름에 오른 제자는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였습니다. 이 안드레는 베드로를 주님께로 인도한 제자였습니다(요1:41-42). 한 사람의 전도가 이처럼 중요한 결실을 거둘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3) 다음에 택함 받은 사도는 야고보와 요한입니다. 이들 두 제자는 형제들로 예수님은 이들에게 우레의 아들이란 별명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선천적인 격렬한 성격 때문에 받은 이름입니다. 야고보는 12사도들 중에 제일 먼저 순교의 영광을 누린 사람입니다(행12:2). 그런데 반면에 요한은 지상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던 사도로 알려져 있습니다.

(4) 다음에 빌립입니다. 빌립은 벳새다 출신으로 베드로와 안드레와 동향인입니다. 이 사람은 나다나엘을 만나 전도하여 주님께로 인도했습니다.

(5) 그 다음 순서가 바돌로매입니다. 이 이름은 돌매의 아들이란 뜻인데 이 제자는 나다나엘이란 견해가 지배적입니다(요1:41, 21:2). 빌립의 전도를 받고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말한 그 사람입니다.

(6) 다음에 마태입니다. 이 사람은 세리로 예수님이 세관을 지나실 때 세관에 앉아 있는 그를 보시고 부르신 제자로 그는 이때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좇았습니다(눅5:28). 그의 세리 직에 썼던 이름은 레위입니다.

(7) 다음에 도마입니다. 도마란 이름은 우리에게 의심이 많은 제자로 연상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다른 제자들이라도 도마의 처지에 있었다면 그와 다를 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한편 헌신적인 뜨거운 면도 있었습니다(요11:16). 철저하게 캐묻는 그의 성품은 그에게 좋은 신앙을 갖게 했습니다.

(8)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도 택정 받았습니다. 이 제자를 작은 야고보라고도 부릅니다. 요한의 형제 야고보와 구분하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9) 셀롯이라고 하는 시몬이 선택되었습니다. 마가복음에는 가나안인 시몬이라고 했습니다.

(10) 야고보의 아들 유다도 제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 유다의 이름이 다른 복음서에는 ‘다대오’로 불려집니다(요6:70-71).


결 론 : 다음에 마지막으로 가룟 유다입니다. 

그의 이름이 불명예스럽게 나옵니다. 

“예수를 배반한 자” “배반자” “‘시몬 가룟의 아들 유다” 등입니다. 

그는 끝내 마귀의 도구로 사용된 인물입니다. 

유다는 은혜를 끝까지 거절했습니다. 

그는 탐심으로 일했습니다. 

그는 결국 버림을 받았습니다.


(26) 복이 있는 자

(누가복음 6 : 17 - 23)

서 론 : 누가는 본문에서 예수님의 산상보훈의 말씀을 간략히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누가의 기록은 마태가 마태복음에서 기록한 내용보다 간략하고 순서 면에서도 달라져 있는 곳도 있습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기록된 것이지만 그렇다고 동일한 사건이 천편일률적인 문장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성령께서는 기록한 사람의 성품이나 학식이나 타고난 문장력까지 주장하여 그 뜻을 전하게 하셨는데 다만 성령이 원하시는 뜻대로 쓰게 하셨습니다. 마태의 경우에는 하나님이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나타내셨고 누가의 경우 역시 누가의 기록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나타내신 것입니다.

1. 예수님 주변에 몰려 온 허다한 무리들

예수님이 열 두 제자를 게우신 후, 산에서 평지로 내려오셨을 때 허다한 무리들과 많은 백성들이 몰려와 있었습니다.

(1) 이들은 말씀도 듣고 병 고침을 받으려는 무리들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곁에는 제자들의 허다한 무리들이 따랐습니다. 이들이 주님을 따른 목적이 두 가지로 나와 있습니다. 하나는 병을 고치려는 의도에서 따랐고 하나는 예수의 말씀도 들으려고 따랐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나오시는 말씀을 그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 이상 값진 보화가 없는 것입니다.

(2) 능력이 예수께로 나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함이라고 했습니다. 많은 무리들 중에는 더러운 귀신에게 고난받는 자들도 많았는데 이들이 다 고침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몸을 만지려고 큰 혼잡을 이루었는데 이들이 예수님의 몸을 만지려고 이처럼 몰려든 것은 주님의 몸을 만지면 그 몸에서 신기한 능력이 나와 모든 사람의 병을 낫게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2. 복이 있는 자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강론은 언제나 신선하고 지혜롭고 사람의 마음을 찌르는 것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말씀하시기 시작하셨다고 했습니다.

(1)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저희 것임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일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이란 말의 뜻입니다. 여기서 복이라고 하신 말씀은 ‘마카리오스’로 이 말의 뜻은 영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은 종교적인 의미의 말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거나 체험할 사람들이 그의 삶 중에서 누리는 기쁨과 만족을 뜻합니다. 반면에 세상적인 복에 대한 헬라어는 ‘유다이몬’으로 이 말은 이 세상에서 누리는 사람들의 행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가난이란 말도 영적인 말로 풀이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물질적 가난이 복이라고 말씀하고 계심이 아닙니다(잠30:9). 영적 가난과 이 가난을 통해서 받을 영적 부요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난이란 마음의 가난으로 세상의 정욕과 탐심을 버린 상태를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죄에서 벗어난 마음을 말합니다.

(2) 이제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린 자란 심히 배가 곺은 상태에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 사람에게 나타난 복 역시 ‘마카리오스’로 영적인 복을 가리킵니다. 이 말씀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를 의미합니다. 가난한 자와 주린 자는 일맥 상통하는 말 같지만 가난이란 소극적인 반면에 주림은 적극적인 면이 있습니다. 배고픔을 당한 사람은 배를 채우기 위해 먹기를 원하는 간절함이 있습니다. 아직까지는 죄에 부른 상태에서 지내왔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배부름은 그 결국이 사망입니다. 이런 사실을 깨닫고 부터는 죄를 버렸습니다. 그 주린 인생 안에 새로운 것으로 채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바라는 간절한 소원입니다. 의로운 생활을 하려고 하는 뜨거운 열망입니다. 이처럼 의에 주린 자의 복으로 주님은 그들이 배부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3)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우는 자란 애통하는 자를 말합니다. 운다는 말은 애곡 또는 통곡함을 뜻합니다. 이 말씀은 죄에 대한 회개로 자신의 마음을 찢는 괴로움을 말합니다(욜2:13). 이들에게는 웃을 수 있는 복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사죄의 은총이나 마음의 평안은 크나큰 위로가 아닐 수 없습니다.

(4)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주님을 위해 사는 생애에 어려움이 있어도 그런 생활이야말로 복이 있는 생애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인자를 인하여”라고 하셨습니다. 인하여 란 말은 때문 에란 뜻입니다. 인자로 인하여, 예수 때문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벧전4:15). 그리스도 때문에 받는 고난이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남겨 놓으신 일인데 이 일로 우리는 말할 수 없는 영광을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롬8:17).


결 론 : 주를 위해 받는 고난, 주님 때문에 받는 고난이란 복음 때문에 받는 고난을 말합니다. 주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받는 고난을 말합니다. 우리는 주님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받는 고난을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주님은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고 하셨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하늘에서 받을 우리의 상급이 클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바라보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27) 화 있을 자들

(누가복음 6 : 24 - 26)

서 론 : 예수님은 먼저 복이 있는 자가 누군가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다음에 이와 반대적인 입장엣 화 있을 자에 대해 경종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 “주린 자” “우는 자” “핍박받는 자”에 대한 복에 대해 말씀하신 후, 이제 그와는 정 반대로 “부요한 자” “배부른 자” “웃는 자” “칭찬 받는 자”에 대한 화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일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 받을 자의 자격은 모두 영적인 뜻을 의미하고 있는 반면에 화 있을 자의 자격은 모두 현실적인 그들의 생활을 반영한 것이란 사실입니다.


1. 부요한 자가 받을 화

부자가 받을 화에 대해 예수님은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난한 자의 복은 위로를 받는 것인데 그 위로란 곧 하나님의 나라의 소유를 말합니다. 그러나 부요한 자는 위로를 이미 받았기 때문에 다른 위로가 돌아갈 수 없습니다.

(1) 부요하다는 말은 물질적 풍요를 말합니다. 성경에서는 재물의 축적이나 물질적 풍요에 대하여 많은 경종을 주고 있습니다(막10:24-25).

(2) 물질이 풍요한 자가 화를 받을 것이라고 하신 말씀은 그들이 하나님께 대해 가난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주님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한 부자의 경우를 비유로 들려주신 일이 있습니다. 이 부자는 자신의 부요에 대하여 기뻐하고 자만하며 찬양했지만 하나님께 대해서는 인색했습니다(눅12:16-21).

(3) 예수님은 이들에게 “화 있을진저”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여기서 화라고 선언하신 저주는 헬라어로 ‘우아이’란 말로 ‘오 슬프다’란 절망적인 탄식이 되겠습니다. 그들은 자신에게 돌아갈 이 화를 면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날마다 연락하며 호화롭게 지낸 한 부자의 죽음에 대하여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16:22-25).


2. 배부른 자가 받을 화

예수님은 배부른 자가 받을 화로써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고 선언하셨습니다.

(1) 배부르다는 말은 자기 생애의 만족을 말합니다. 하나님 없이 자기 생애에 만족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노아나 롯의 때의 모든 사람들이 이 같은 생활을 했었습니다. 그들은 홍수가 나서 멸망할 때까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었다”고 했습니다(마24:37-38). 그리스도인들도 이처럼 세상으로 만족하는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에 대해 무관심할 때 배부른 자가 받을 화를 받게 될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이들이 받을 화에 대하여 “너희가 주리리로다”고 하셨습니다. 주린다는 말은 심히 배고픈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환난의 날에 이 같은 화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또한 하나님의 나라의 축복에 참여하지 못할 것입니다.


3. 웃는 자와 칭찬 받는 자가 받을 화

(1) 웃는 자란 세상의 환락 속에 빠져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웃음은 자기 인생의 기쁨을 말하는데 이들은 그 기쁨을 하나님을 섬기는 길이나 사랑하는 생활에서 얻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취미나 풍습이나 죄악된 생활에서 누리는 것입니다. 이들은 그들의 인생을 성령으로 심지 않고 육신으로 심는 자들입니다(갈6:8). 이들은 회개의 기회를 상실하게 되며 그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기 때문에 그들의 앞날엔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2) 이들은 애통하며 우는 화를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애통은 슬퍼하는 모습이며 운다고 하신 말씀은 그들의 운명을 스스로 슬퍼하는 애곡의 모습입니다. 이 같은 화는 그들이 최종적으로 받을 그들의 심판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주님이 재림하실 때 이 같은 애통함과 슬픔을 당할 것입니다(계6:15-17).

(3)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사람은 그의 생애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언제나 사람들 편에 서서 그들의 의견에 접근하며 그들을 따라갑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하나님 앞에서의 생활입니다.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생활입니다. 바울은 이런 생활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고 말했습니다(갈1:10).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으려면 거짓 예언자가 되어야 합니다. 거짓 선지자는 사람 중심으로 예언을 합니다.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면 하나님의 방법을 버리고 사람의 방법을 따라가야 하며 사람들의 생각이나 여론을 의식하여 담대한 믿음으로 인도하지 못합니다. 이 같은 자들에게는 화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들은 많은 사람의 참 생명을 죽였기 때문에 그들이 받을 화도 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계2);10).


결 론 :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생각을 가지고 세상 사람들을 따를 때는 그에 대한 응분의 화를 받아야 합니다. 영적인 생활을 버리고 육을 추구하는 생활을 하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고 하셨습니다.


(28) 온전한 사랑

(누가복음 6 : 27 - 35)

서 론 : 예수님은 그리스도인들이 그의 생활에 나타내야할 사랑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사랑이 주님이 요구하시는 사랑에 비해 얼마나 미미하고 부족한 것인가에 대해 바라볼 수 있어야 하며 베드로처럼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하는 진실한 고백이 터져 나와야 합니다.


1.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표준

예수님이 27-28절에서 하신 말씀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여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신 말씀은 참으로 놀라운 사랑의 선언이십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표준으로 다음에 나오는 말씀은 이 표준에 근거하여 결실 해야 할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열매들입니다.

(1) 이 말씀은 사랑의 폭탄선언입니다. 이 말씀은 인간이 나타낼 수 있는 한계선을 훨씬 뛰어넘은 선언이기 때문입니다. 아직까지 유대인들이 그들의 생활에 적용해온 도덕률은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은 율법으로 의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뒤집어 엎어놓는 듯한 충격을 주고도 남았습니다. 그들은 아직 그 누구로부터도 이런 교훈을 들어본 일이 없었습니다.

(2)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원수란 미움과 증오의 대상을 말합니다. 도저히 용납할 수도 없고 용서할 수도 없는 대상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런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런 말씀은 예수님이나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이십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런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롬5:8-10).

(3)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라고 하셨습니다. 미워한다는 말은 ‘미세오’로 증오하는 대상, 몹시 싫어하는 상대에 대해 사용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선을 잘 대해주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4)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에게 퍼붓는 다른 사람의 저주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까닭 없는 저주는 자기에게 미칠 염려가 없기 때문입니다(잠26:2). 반면에 자기를 저주하는 자에게 축복해 주면 결과적으로 그 축복이 자기에게 돌아올 것이기 때문에 절대로 손해볼 것이 없습니다.


2. 사랑의 실천

이처럼 사랑의 표준을 말씀하신 예수님은 이제 29절부터 그 사랑의 실천에 대해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1) “네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들이 여기에 기록된 주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수용해야 하느냐는 문제는 깊이 생각해 볼일입니다. 한편쪽 뺨을 맞은 사람이 다른 쪽 뺨도 또 때려달라고 그 뺨을 내미는 일은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의 난센스에 불과합니다. 이 일은 예수님의 경우조차 그렇다고 반증하고 있습니다(요18:22-23).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폭력을 행사하는 자에게 함께 폭력으로 대적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와 똑같은 경우로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금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 역시 겉옷을 빼앗는 자란 강도를 말합니다. 빼앗기를 원하는 자를 대항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라”고 하셨습니다. 구하는 자에게 주라고 하신 말씀은 자기가 마땅히 주어야 할 사람에게 주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웃의 가난한 사람에게 주어야 합니다. 품꾼들에게 그 삯을 주어야 합니다. 내가 내 이웃에게 주는 일이 사랑입니다.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지 말라”고 말씀은 남에게 사랑을 베풀 때 결코 어떤 대가를 바라지 말라는 뜻입니다.

(3)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고 하셨습니다. 남이 자기에게 대접한 것처럼 대접하란 뜻이 아닙니다. 자신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대접받기 원하는 그 자세로 남에게 대접하라는 말입니다. 이 자세가 사랑의 최상의 자세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이웃을 대한다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율법의 완성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곳에서 그리스도인이 베풀 사랑과 세상 사람들의 사랑을 이곳에서 구별하셨습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 역시 이런 사랑은 가지고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받기를 바라고 빌려주는 일이라면 세상의 고리대금업자와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이 말씀은 금전의 대여관계를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남에게 어떤 보상이나 되돌림을 바라고 가난한 자에게 빌려주거나 도와주는 일을 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결 론 : 예수님은 35절에서 결론적으로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29) 그리스도인의 자비

(누가복음 6 : 36 - 42)

서 론 : 주님은 우리에게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특별히 하나님을 가리켜 “너희 아버지”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아들과 아버지로 말씀하신 것은 유전적이고 가족적인 관계에서 교훈 하시려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닮아야 합니다. 유전적인 요소로 볼 때 인간은 아버지로부터 많은 것을 닮아갑니다. 우리는 육적인 유전은 아니지만 성령을 주심으로 그 아버지의 영의 역사로 아버지를 닮아갈 수 있는 요건을 주셨습니다. 성령은 우리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닮아갈 수 있도록 감화하고 능력으로 역사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성품 중에도 우리가 닮아가야 할 성품이 주님은 “자비”라고 하셨습니다.

1. 아버지의 자비하심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

예수님은 그리스도인들의 온전한 사랑에 대한 결론으로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신 하나님의 경우를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인들이 나타내야할 자비에 대하여 몇 가지 사항을 제시하시면서 교훈 하셨습니다.

(1)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말씀하신 비판이란 자비와 관계된 것으로 나와 상대방과의 사이에 존재하는 죄나 다툼에 관한 문제를 말합니다. 이 말은 악의적인 뜻에서 나온 비판을 말합니다. 이 비판은 교회에서 교리에 의하거나 징계로 인한 어떤 조치를 내리는 비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2) “정죄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정죄란 최종적인 판결, 선고를 말합니다. 다른 사람의 죄나 허물에 대해 경솔하게 스스로 판결을 내리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의 흠을 의도적으로 성급하게 내리는 최종적인 판단을 말합니다. 이런 정죄는 과오를 범하기 쉬운 것입니다.

(3)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용서란 사유함을 뜻합니다. 어떤 형제가 자기에게 해를 가했거나 죄를 범했을 때 그것을 사유해 주는 것이 용서입니다. 용서가 필요한 이유는 상대방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회개란 조만 간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어진 기회가 있습니다. 이런 기회는 하나님이 주시는데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런 기회를 주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용서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 대하여 자비하시고 관대하십니다. 우리에게 수다한 죄가 있다고 해도 우리 하나님은 그 죄를 정죄하시기 보다 용서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요일1:9).

형제의 죄를 용서해 주는 방법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그를 저주하지 말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그 형제가 자신의 죄를 회개할 때 용서해 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17:3-4). 용서란 그 형제를 다시 형제의 자리에 맞이하는 일이기 때문에 회개가 없을 때 우리는 그를 불쌍히 여기고 기도해 주되 그 죄가 교회의 쓴 뿌리가 되지 않을까 염려하며 그 죄가 자신을 더럽히는 쑥물이 되지 않을까 조심하면서 경계해야 하는 것입니다.

(4) “주라”고 하셨습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안겨주리라”고 하셨습니다. 주라고 하신 말씀은 가난한 자에 대한 도움의 손길을 말합니다. 성경에는 고아와 과부들에 대한 도움에 대하여 자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일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 있는 가장 정확하고 빠른 길입니다. 주는 자에 대한 보상에 대하여 예수님은 “후히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너희에게 안겨주리라”고 하셨습니다.

2. 먼저 네 눈 속에 들보를 빼라

우리가 영적 소경이 되면 다른 사람까지 잘못된 길로 빠뜨리게 하고 말게 됩니다. 바리새인들을 선생의 자리에서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영적인 소경이므로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교훈이 제대로 가르쳐지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케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주님을 선생으로 비유하시고 우리로 그 제자로 비유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제자들로 주님보다 더 높아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말씀으로 온전케 된다면 주님과 같으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예수와 같이 되기를 끊임없이 힘쓴다면 우리도 주님과 같은 영광에 이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얻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롬8:17, 계3:21).


결 론 : 예수님은 들보와 티의 비유로 형제를 비판하거나 정죄 하지 말아야 할 일에 대하여 말씀해 주셨습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고 하셨습니다. 티는 적은 먼지에 불과하지만 들보는 대들보를 말합니다. 사람이 자신의 들보를 볼 수 있다면 언제나 하나님의 자비하심 같이 자비해 질 수 있을 것입니다.


(30) 나무와 열매

(누가복음 6 : 43 - 49)

서 론 : 나무와 열매는 서로간 어쩔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무슨 나무이든 그 나무는 반드시 그 나무의 열매를 맺게 마련입니다. 어떤 방법으로도 변화를 가져 올 수가 없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두 가지 면에서 교훈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 인간은 죄인들인데 이 죄인들이 맺을 수 있는 열매란 사람이란 사실입니다. 다른 또 하나는 우리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생명을 받았다면 그 사람의 나무에서 맺을 수 있는 열매란 사망이나 죄악의 열매인 것이 아니라 생명과 의의 열매여야 하는 것입니다.

1. 나무는 그 열매로 아나니

나무를 열매로 안다는 것은 상식적인 일입니다. 나무란 어떤 경우이든 열매를 속일 수 없는데서 나온 말입니다.

(1) 이 말씀이 교훈해 주는 바는 둘이 다 병행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비방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나무도 좋고 실과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실과도 좋지 않다 하든지 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에 나나내신 열매가 좋다면 그 나무이신 예수님의 근원도 좋다고 해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2) 하나님은 우리로 열매를 맺게 하시려고 택하셨기 때문에 선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우리는 원래가 가시나무였고 찔레나무였습니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께서 택하신 것은 우리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나무로 만드셔서 하나님을 향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시려는데 있습니다(롬7:4).

2. 열매의 근원 되는 인간의 마음

열매는 물론 겉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 열매를 맺는 근원지는 겉이 아닙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1)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낸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좋은 땅에서만이 좋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신 말씀과 같은 뜻입니다.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 배, 혹 60배, 혹 30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마13:8).머움애 쌓은 선이란 심령의 변화를 말하며 이 심령은 곧 좋은 땅을 가리킵니다. 심령의 변화는 새로운 생명이 그 마음에 들어왔을 때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심습니다. 말씀이 밭으로 표현된 심령 속에 떨어졌을 때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좋은 땅에 대하여 예수님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마음이라고 하셨습니다. 말씀의 깨달음이 있어야 좋은 열매, 곧 말씀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2)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낸다고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겉으로는 선하게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맺는 열매는 보이는 것과는 달리 늘 하나님 앞에 악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책망하시고 화를 선언하신 것은 이 때문입니다. 그들은 외식하는 자들이었으므로 그들의 마음의 악을 외식으로 선하게 꾸미려 했지만 불꽃같으신 예수님의 눈은 속일 수 없었습니다.

3. 주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와 행치 않는 자

예수님은 겉으로 표현되는 믿음과 그들의 열매와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입으로는 주님을 섬기면서 그의 행실로는 불순종하는 일이 우리 주님 앞에 얼마나 가증한 일인가에 대하여 경종하셨습니다.

(1) 입으로 주여주여 하는 자에 대하여 그들의 신앙이 결국은 무너질 것임을 경종하셨습니다. 주님은 자기를 따르고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고 나무라셨습니다. 입으로 주여주여 한다고 좋은 신앙이 아닙니다. 입으로 주여주여를 외치는 자들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이 들어간다고 하신 말씀을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2) 순종하는 자와 불순종하는 자와의 차이에 대하여 그 결과의 엄청남을 하나의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집은 큰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힐 때라도 능히 요동치 않는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행치 않는 자는 주초 없이 흙 위에 지은 집 같아서 탁류가 부딪힐 때 그 집의 무너짐이 심하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생애에는 큰물이나 탁류로 비유된 환난이나 시험의 때가 찾아오는 것입니다. 이때 사람의 참 믿음이 나타난다고 하신 것입니다. 큰물이나 탁류에 넘어지는 신앙, 그 탁류와 함께 흘러 내려가는 신앙은 그 마음에 쌓은 선이 없기 때문이며 그의 생애에 그리스도 안에서 열매를 맺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결 론 : 오직 순종의 믿음만이 승리합니다. 순종하는 믿음만이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들 앞에는 언제인가 무서운 불같은 환난의 시기가 찾아옵니다. 그때 알곡과 쭉정이를 가르시는 역사가 옵니다. 이때 믿음으로 순종하는 성도들만이 흰옷을 입고 주님을 영접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