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新約]강해/◆ 사복음서 · 사도행전 강해-1

마가복음 10장-16장 ◆ 밤중소리

영국신사77 2020. 4. 12. 16:58

  

 ■ 차 례

제 10 장 (59 ~ 66)

59) 그리스도인의 이혼 문제 (마가복음 10장 : 1절 ~ 12절)

60) 어린아이와 하나님 나라 (마가복음 10장 : 13절 ~ 16절) 

61) 한가지 부족한 것 (마가복음 10장 : 17절 ~ 22절)

62) 부자와 천국 (마가복음 10장 : 23절 ~ 27절)

63) 복음을 위한 보상 (마가복음 10장 : 28절 ~ 31절)

64) 제자들이 요구하는 영광 (마가복음 10장 : 32절 ~ 40절)

65) 인자가 온 목적 (마가복음 10장 : 41절 ~ 45절)

66) 소경 바디매오의 믿음 (마가복음 10장 : 46절 ~ 52절) 


제 11 장 (67 ~ 72)

67) 호산나 (마가복음 11장 : 1절 ~ 11절) 

68) 무화과나무에 대한 저주 (마가복음 11장 : 12절 ~ 14절) 

69) 예수님의 성전 청결 작업 (마가복음 11장 : 15절 ~ 18절) 

70) 받은 줄로 믿는 기도의 능력 (마가복음 11장 : 20절 ~ 24절)

71) 기도와 죄 (마가복음 11장 : 25절 ~ 26절)

72) 요한의 세례와 예수님의 권세 (마가복음 11장 : 27절 ~ 33절) 


제 12 장 (73 ~ 79)

73)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예수 (마가복음 12장 : 1절 ~ 12절) 

74)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 (마가복음 12장 : 13절 ~ 17절)

75) 부활한 자의 형체 (마가복음 12장 : 18절 ~ 25절) 

76) 산 자의 하나님 (마가복음 12장 : 26절 ~ 27절) 

77) 계명 중에 첫째 되는 것 (마가복음 12장 : 28절 ~ 34절)

78) 그리스도와 다윗의 자손 (마가복음 12장 : 35절 ~ 40절)

79) 가난한 과부의 헌금 (마가복음 12장 : 41절 ~ 44절)


제 13 장 (80 ~ 85)

80) 세상 종말의 징조 (마가복음 13장 : 1절 ~ 9절) 

81) 견디는 자가 이기는 환난 (마가복음 13장 : 10절 ~ 13절)

82) 인류 역사 초유의 대환난 (마가복음 13장 : 14절 ~ 20절)

83) 재림의 날에 나타날 일들 (마가복음 13장 : 21절 ~ 27절) 

84) 무화과나무의 비유와 종말 (마가복음 13장 : 28절 ~ 32절) 

85)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마가복음 13장 : 33절 ~ 37절)


제 14 장 (86 ~ 94)

86) 옥합을 깬 마리아 (마가복음 14장 : 1절 ~ 9절)

87) 가룟 유다의 배신 (마가복음 14장 : 10절 ~ 11절)

88) 다락방에서 있은 일 (마가복음 14장 : 12절 ~ 21절)

89) 주님의 성만찬 (마가복음 14장 : 22절 ~ 25절) 

90) 베드로의 맹세 (마가복음 14장 : 26절 ~ 31절)

91) 시험에 들지 말라 (마가복음 14장 : 32절 ~ 42절)

92) 성경을 이루려 함이니라 (마가복음 14장 : 43절 ~ 52절) 

93) 내가 그니라 (마가복음 14장 : 53절 ~ 65절)

94) 생각하고 울었더라 (마가복음 14장 : 66절 ~ 72절)


제 15 장 (95 ~ 99)

95)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마가복음 15장 : 1절 ~ 15절) 

96) 구레네 시몬의 십자가 (마가복음 15장 : 16절 ~ 23절)

97) 몰약을 탄 포도주 (마가복음 15장 : 22절 ~ 32절)

98)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마가복음 15장 : 33절 ~ 41절)

99) 장사를 지낸 요셉 (마가복음 15장 : 42절 ~ 47절)


제 16 장 (100 ~ 101)

100) 마리아에게 나타나신 예수님 (마가복음 16장 : 1절 ~ 11절)

101) 주님의 지상 명령 (마가복음 16장 : 12절 ~ 2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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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0장

◆ 밤중소리 01-09 | VIEW : 601


≈ 59≈ 그리스도인의 이혼문제

(본문 : 마가복음 10 : 1 - 12)


서 론 : 옛부터 부부간의 이혼 문제는 사회적인 큰 문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 세상에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언젠가는 결혼을 해야 하며 결혼하면 서로간의 불화나 의견의 상충이나 성격적인 차이 등으로 이혼의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살아가는 사람 중에 이혼의 심각한 문제를 생각하지 않고 한평생을 평탄하게 살아가는 가정이 있는 것인가를 생각해 본다면 이혼 문제는 우리들 인생이나 가정에 실감 나는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시대가 종말에 이를수록 인간의 윤리 생활이 퇴폐해지며 성도덕이 무너져 갑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은 이혼율이 날로 높아져 가는 추세를 보이므로 가정의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성경에서는 과연 부부의 결합이나 이혼 문제에 무엇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으며 주님은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시는가에 대하여 분명히 알고 우리들의 가정을 이혼으로부터 지키며 행복한 가정을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1. 바리새인들의 시험적인 질문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을 떠나 유대의 지경과 요단강 건너편으로 가셨다고 했습니다. 아마 갈릴리 지역을 통과하시어 베레아 지경에 이르신 것으로 여겨집니다. 예수님은 어느 곳에서도 다른 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셨습니다. 그곳에서도 이처럼 전례대로 말씀을 가르칠 때, 예수님을 시험하려는 바리새인의 일당들이 이 예수님 주위에 둘러서 한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1) 바리새인의 질문은 “사람이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라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이 같은 질문은 주님의 가르침을 받으려고 하는 순수한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2절에서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묻되”라고 했습니다. 이 물음은 예수님께 대한 율법적인 도전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으로 율법적인 올무에 매이게 하여 그의 교훈을 무력화시키려는 불순한 의도에서 시도한 것이기 때문에 '시험'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가끔 엉뚱한 질문으로 대답을 난처하게 하는 시험을 시도 했는데 이 이혼 문제 역시 답변하기가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그들의 의도하는 바는 이 질문에 어떤 대답을 하시던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과연 무슨 대답을 하실까? 그 입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만약에 주님이 ‘이혼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면 예수님은 도덕성이 결여된 분으로 인식시킬 수 있으며, ‘이혼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면 모세의 교훈에 모순되는 것으로 매도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처럼 난처한 문제를 선정하여 질문 공세를 펴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물론 이 같은 그들의 시험의 저의를 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의 질문을 피하지 아니하시고 언제나 정공법으로 그 문제에 대한 율법적인 해답을 제시해 주심으로 유대인들이 지키는 유전적인 율법의 모순을 깨치고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온 율법의 진실성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2) 예수님은 먼저 그들에게 “모세가 어떻게 너희에게 명하였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질문자들로 답변하게 하심으로 교훈의 인상을 깊게 하셨습니다. 그들의 시험에 요지는 바로 ‘모세의 이혼증서’에 초점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들이 배우고 또 가르치고 있는 율법의 편견을 파헤쳐 율법이 말씀해 주고 있는 율법의 참모습을 보여 주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자신의 질문에 말려든 것으로 생각하여 속으로 쾌재를 부르면서 “모세는 이혼증서를 써주어 내어버리기를 하락하였

나이다”고 대답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인용한 모세의 허락은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 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보낼 것”이라고 한 신명기 24:1절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그런데 요는 여기서 “여자에게서 발견한 수치 되는 일”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견해에 있어서 바리새인들 간에도 학파에 따라서 해석이 달랐습니다. ‘샴마이’ 학파는 ‘음행’을 의미한다고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힐렉’ 학파는 이 해석을 ‘아내에게서 남편이 보기에 어떤 좋지 않은 면’이 있으면 이에 해당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심지어는 아내가 남편의 음식을 태웠을 경우도 이에 해당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많은 바리새인들은 ‘힐렉파’의 견해를 좋아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모세는 이혼증서를 써주어 내어버리기를 허락하였나이다”는 대답을 했습니다.

2. 이혼에 대한 예수님의 해답

바리새인들의 대답은 율법이 의미하는 정신과는 대단히 모순된 해석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주신 율법의 창시자로서의 해석을 그들에게 들려주셨습니다.

(1) 예수님은 그들의 해석을 전적으로 부인하지 않으시고 이 같은 모세의 명령은 “너희의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기이한 답변에는 다음과 같은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남성들의 아내에 대한 폭군적인 태도로 인하여 허락했다는 뜻입니다. 너희의 마음의 완악이란 아내를 지배하는 남성들의 우월적인 본성과 아내를 자기 소유로 인식하는 그릇된 자세를 의미합니다. 지금도 이 같은 풍조가 사회 일각에 깔려 있는 형편이거늘 그 당시 사회에서의 남성들의 횡포는 어떠했겠느냐는 것은 짐작할 수 있는 일입니다. 만약에 여성들이 남성에게 무조건 종속되어 살아야 한다면 남편이 몇 여자를 자기 아내로 얻건 여자가 남자로부터 그 어떤 학대를 받건 한 평생 종살이하듯 불행하고 눈물겨운 생애를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남성들의 이기적인 횡포로부터 보호하시기 위해 이혼증서를 써주고 내어버리게 허락하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혼증서를 받은 그 아내는 이제 그 남편의 학대에서 벗어나 다른 남자에게 결혼할 수 있는 권리를 주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문구에 나타난 것만 보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알고 좋아하지만 실상인즉 그것이 그런 것이 아니라 너희들의 마음의 완악하므로 그같은 명령을 내리셨다는 사실을 밝혀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런 말씀을 들은 그들은 예수님의 답변에서 더 이상 트집 잡을 것이 없게 된 것입니다. 이 말씀 후에 부부의 결합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창조섭리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인간적인 임의의 이혼은 하나님의 용납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하여 바른 교훈을 주셨습니다.

(2) “창조 시로부터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으니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 지어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여기서 “창조 시로부터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까? 그것은 여자는 남자의 종속적인 존재가 아니라 동등한 인격체임을 강조하신 말씀이며 인간의 혼인은 인격대 인격의 결합이지 남성이 위주가 되고 여자가 종속이 되는 불평등한 만남이 아니란 사실을 밝혀 주신 말씀입니다. 여자가 남자의 몸에 붙어서 비로소 한 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둘이 동등하게 결합하므로 한 몸이 된다는 사실을 명백히 하신 것입니다.

“이런 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한 몸이란 말의 표현은 온전한 결합으로 헤어질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해 주는 말입니다. 한 몸은 육체적인 결합으로서의 한 몸뿐 아니라 영적 결합으로서의 한 몸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온전한 인격적인 결합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이 문제에 대한 분명한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결혼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결합입니다. 그 결혼이 비록 주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닐지라도 모든 인생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시므로 예외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결혼을 사람이 나누어 남자가 싫어하는 사유가 있다는 이유로 이혼증서를 써주어 내어보내는 일이 어떻게 가능하겠느냐는 예수님의 결론적인 말씀에 예수님을 둘러서 있던 바리새인들은 그만 부끄러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결 론 : 예수님은 집에서 이 문제를 다시 묻는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그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데 장가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요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가면 간음을 행함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의 비유로써 일방적이고 인위적인 이혼은 간음죄에 해당된다는 경종으로 들려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란 말씀에서 시사해 주는 바와 같이 간음죄 외에는 아내나 남편을 버릴 수 없다는 사실을 명백히 하셨습니다(마5:32).

≈ 60≈ 어린아이와 하나님의 나라

(본문 : 마가복음 10 : 13 - 16)

서 론 : 예수님 곁에는 많은 여인들이 따랐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받아드렸고 주님께 대한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 자녀들이 주님의 손길로 안수를 받으므로 축복 받기를 원했습니다. 이 같은 일은 어머니의 자연스런 마음입니다. 평소에도 그런 일이 있었겠지만 이날에는 많은 사람에게 둘러 쌓여 매우 혼잡스러운 중에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그들을 말린 것입니다.

문제의 발단은 바로 이때에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이 같은 제자들의 분별없는 행동에 대해 분히 여기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엄히 이르셨습니다. “어린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어린아이들에게 축복해 주셨다고 했습니다.

1.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라

어느 사회이건 어린아이들에 대하여 성인들과 똑같은 입장에서 인격적으로 존중해 주거나 용납해 주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 어린아이들을 예수께 가까이 데리고 오는 것을 제자들이 꾸짖었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어린아이들을 주님께 데려온 것은 만져주심을 바랐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만져주심을 바란 이들의 행동은 그냥 ‘만져주다’ 또는 ‘쓰다듬다’의 의미가 아니라 더욱 적극적인 의미의 행동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안수하시고 축복하셨다”고 하심으로 그 의미를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이 같은 안수를 통한 축복은 유대인들에게는 오랜 역사적 전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삭이 야곱을 축복해 주었고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했을 때도 손을 얹고 안수하여 축복해 주었습니다(창48:13-20). 예수님 당시에도 이스라엘의 여인들은 자기 자녀들에게 랍비들을 통하여 이 같은 안수를 받는 관례가 있었다고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이 제자들에 의하여 제지를 받았습니다. “제자들이 꾸짖었다”고 했습니다. 제자들의 이런 꾸짖음은 아마도 그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온 어머니들에 대한 책망을 의미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아이들은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왔거나 품에 안겨온 매우 어린아이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주님 가까이 따라 오면서 만져주심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제자들의 이 같은 행동은 아마도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시기 위해 너무나도 분주하고 피곤하신 주님을 어린아이들의 만져주심을 원하는 여인들의 몰지각한 일로 자기들의 선생님께 더욱 피곤함과 귀찮음을 주지 않으려는 생각에서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당시는 사회적으로 어린아이들은 한 인간으로의 올바른 인격적 대접을 받지 못했던 때입니다. 그뿐 아니라 어린아이들과 하나님의 나라와는 상관이 없다고 여겼을 것이며 전도활동에 오히려 방해가 된다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2) 이 같은 제자들의 행동을 예수님은 분히 여기셨다고 했습니다. 분히 여기셨다는 표현은 노여워하시는 분개를 의미하는 말이지만 이런 노여움을 표면에 나타내신 일을 가리킨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이 같은 행동에 대해 마음으로 분개하신 것입니다. 이 같은 분개는 제자들의 어린아이들에 대한 인격적인 푸대접, 하나님의 나라의 구성원으로서의 어린아이들을 무시한 것, 그리고 이들 어린아이들이 얼마나 주님의 사랑의 대상인가에 대한 제자들의 무지함에 대한 탄식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같은 제자들의 분히 여기심을 두 가지 교훈으로 표현하셨습니다.

① “어린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선언은 어린아이들의 인격을 무시해 온 이 사회에 큰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어른이나 어린아이들이나 그 구성원에 구별이 없다는 뜻이기 때문에 이제 하나님의 교회는 어른들의 독점적인 존재가 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교회에 ‘어린이 주일학교’가 탄생한 일도 그 근원이 주님의 이 말씀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이 말씀으로 어린아이들도 하나님 나라의 일원이라고 하는 선언을 내리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린이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어야 합니다. 어린이들의 구원이 그 부모의 신앙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의 믿음을 통해 구원에 이른다면 우리는 결코 어린아이들의 신앙생활을 경히 여기거나 소홀히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도 교회에서 어른들과 똑같은 대접을 받아야 합니다. 결코 어린아이들이 주님께 오는 것을 금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② 다음에 주님은 “이런 자의 것이니라”는 말씀으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교훈을 주셨습니다. 여기서 ‘이런 자’란 ‘어린아이들과 같은 자’란 뜻으로 어린아이들을 가리키신 말씀이 아니라 ‘어린아이들의 신앙을 본받은 자’란 뜻이 되겠습니다. 어린아이들을 본받는 신앙의 소유자가 되어야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할 수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2.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예수님의 이 같은 말씀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하나의 중요한 교훈으로 받아드려지고 있습니다.

(1) “하나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고 하신 말씀은 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자격에 대하여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받드는 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어린아이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받든다고 하신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어린아이들이야말로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격자란 뜻이 내포된 말씀으로 보아야합니다.

① 어린아이들은 그 마음에 순결성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가 들어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아담으로부터 내려오는 원죄는 있겠지만 어린아이들은 아직 장성하지 못한 나이에 있기 때문에 악에 물들 기회가 별로 없었습니다. 세상에 오래 살면서 사회생활에 깊숙이 물들고 세상지식이나 학문에 물들면 복음을 어리석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린아이들은 복음을 진지하게 들으며 열린 마음으로 받아드립니다.

② 어린아이들은 생각이나 성격이 단순합니다. 단순하다는 말은 마음의 생각을 말합니다. 그들의 생각이 복잡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 쉽게 들어갑니다. 마치 백지에 그리듯 쉽게 받아드려지며 한번 마음에 받아드리면 쉽게 지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③ 어린아이들은 순수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섬깁니다. 어린아이들이 어른을 섬기는 자세는 순수하며 진실합니다. 이처럼 어린아이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 교회를 섬기는 일이나 주님을 사랑하는 일에 있어서 진지하며 순결합니다.

예수님이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코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신 말씀은 이들 어린아이들처럼 순결하고 단순한 마음과 거짓이 없는 진실한 믿음으로 주님을 영접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신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현재적인 나라로써 예수님에 의해 전파되고 확장되고 있는 나라를 의미합니다. 모든 성도들은 이 나라의 백성들입니다. 받든다는 말은 이 나라의 통치자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그 나라의 열매를 맺는 일을 의미합니다.

(2) 예수님은 그 어린아이들을 안으시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에게 안수하심으로 축복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을 사랑하십니다. 어린아이들도 주님의 잃은 양들입니다. 이들의 생명이야말로 어른들과 다름없이 아주 존귀한 생명이며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잘 받들어 복음을 잘 받아드리는 대상이란 점은 그들에게 복음이 얼마나 절실한 사실인가에 대하여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결 론 : 어린아이들의 생명을 구원하는 일이 얼마나 시급한 일인가에 대하여 이 말씀을 통해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타산적이요 기복적인 어른들의 신앙에 대하여 깊이 반성하고 어린아이들로부터 순결하고 아름다운 신앙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 61≈ 한가지 부족한 것

(본문 : 마가복음 10 : 17 - 21)

서 론 : 예수님이 길을 가실 때 한 사람이 달려왔습니다. 이 사람이 누구인가에 대한 신원은 자세히 언급되지 않았지만 그는 돈이 많은 부자였습니다. 그리고 권세도 있는 청년으로 밝히고 있습니다(마19:22, 눅18:18). 그가 달려와서 예수님 앞에 꿇어앉았다고 했습니다. 아마도 이 청년은 율법을 지키는 생활에 열심이었던 점으로 보아 바리새파 사람이었을 것이며 그가 꿇어앉았다는 것으로 보아 평소에 예수님을 존경하며 자신이 해결 받고자 하는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선생인줄로 믿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이 청년이 예수님께 물은 말은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란 영생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우리는 이 청년의 물음과 예수님의 대답에서 주님을 따르는 일에 걸림이 되는 하나의 커다란 장애물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재물이란 존재입니다. 성경에는 재물을 사랑하는 사람에 관한 경종의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마6:24).

1. 영생을 갈망한 청년의 경우

이 청년은 영생을 갈망한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다른 생활 면에서는 모든 것이 자신만만했습니다. 그러나 영생을 사모하는 그에게 영생에 관해서는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영생문제를 해결하려는 갈급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1) 그가 영생에 관한 해답을 얻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온 일은 참으로 잘한 일입니다. 아마도 이 청년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으려고 많은 사람을 찾아보았을 것입니다. 자기 자신도 이 문제를 율법에서 찾아보려고 율법에 따른 선한 사업이나 생활에 열심을 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시원스러운 대답을 주기는 고사하고 그에게 더 많은 고민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리고 율법에 열심을 가지고 그것을 지키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더욱 갈급한 마음을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그가 이 같은 갈등 속에서 예수님을 찾아 나온 것은 잘한 일입니다. 이 청년이 안고 있는 고민은 비단 그에게만 있는 고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생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라면 그 누구나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위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청년처럼 예수님께 나온다면 그는 문제의 정답을 얻을 수 있는 길에 들어섰다고 볼 수 있습니다.

(2) 이 청년의 질문은 이러했습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청년은 영생을 사람들의 행위와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이 청년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영생 관은 이 청년의 경우와 같이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입니다. 바로 이곳에 실족하는 인생의 함정이 있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는 바로 이 행위에 기초해서 만들어졌으며 제가끔 이 행위를 따라 영생의 길을 찾아 헤매고 있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은 이 청년에게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는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영생이 결코 인생들이 추구하는 선행에 있지 아니하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다는 사실을 그에게 나타내 주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간 중에는 ‘선한 자’가 존재할 수 없고 선행으로 구원 얻을 자도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가르쳐 주시기 위해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는 말씀을 들려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선의 기준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선을 의미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속성인 선을 가리킨 것입니다. 이런 선의 기준만이 영생에 합당한 선입니다. 그러나 인간들에게는 그 누구에게도 이 같은 선의 소유자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선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롬3:11).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예수님 자신이 ‘선한 이’가 아니라거나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란 사실에 기초한 말씀이 아닙니다. 이 청년은 예수님을 찾아 나와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르게 된 동기가 예수님을 절대적 선의 대상이신 하나님으로 인정해서가 아니라 보편적으로 인간들의 선보다 한 계단 차원이 높은 선행자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청년의 잘못된 선에 대한 관념을 깨우쳐 주기 위해 선의 기준을 하나님과 연결시켰던 것입니다.

인간은 불순종으로 타락한 이후, 이 선의 자리에서 영원히 떨어져 나왔으며 전부 죄의 종이 되었습니다. 선으로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르게 되었으며,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하므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되었습니다(롬5:16-21).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도 없고 의로운 이도 없습니다. 그가 참으로 예수님을 우리에게 선을 이루게 하시고 의로움을 주시는 분이신 하나님으로 인식하고 예수님을 향하여 “선한 선생님이여”라고 불렀어야 했습니다.

2. 한가지 부족한 때문에

예수님은 이 청년에게 그가 원하는 선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교육이 필요했습니다. 이 교육에서 그는 “한가지 부족한 것”을 깨닫게 되었으며 이 한가지 부족한 것 때문에 자신이 선에 이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1) 예수님은 이 청년에게 선의 표준이 계명에 있는 것이 아님을 가르쳐 주셔야 했습니다.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셨느니라”는 말씀을 들려 주셨습니다. 이 계명은 십계명 중에 후반부에 속하는 것으로 사람에게 관한 계명들입니다. 왜 전체적인 계명을 거론치 아니하시고 도덕적 행위에 속하는 후반부에 속한 부분만 말씀하신 것입니까? 그것은 이 청년은 유대인으로 하나님께 대한 계명을 철저하게 지켜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 같은 말씀에 이 청년은 자신 있게 “선생님이여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보시고 사랑하셨다고 했습니다. 이 같은 표현은 이 청년이 이런 율법적인 계명들을 완벽하게 지켰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젊은 청년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간절히 원했다는 사실을 기뻐하시고 칭찬해 주신 것입니다. 율법은 온전히 지킬 수 없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에 대하여 사람이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큰 고민 속에 빠지게 된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나타내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탄식했습니다(롬7:21-24). 이 말씀에 비추어 보면 그 청년은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예수님은 그에게 “네게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여기서 이 청년에게 “네게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하신 그 부족한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 말씀은 그 다음에 나오는 말씀,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고 하신 말씀에 대한 불순종을 의미해 주는 말씀은 아닙니다. 그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에 있어서 그 계명을 주신 하나님의 기준에 이르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그에게 부족한 한가지란 그가 율법을 지키는 일에 있어서 율법의 정신을 따라 지킨 것이 아니라 외식적인 행위에 지나지 않았음을 의미하신 말씀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지켰다는 율법은 결코 사랑의 바탕에서 지킨 것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증거를 그에게 밝히 보여 주실 필요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네게 오히려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가난한 자란 이 청년의 이웃을 말합니다.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일이 율법의 정신입니다. 그런데 이 청년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갔다고 했습니다. 율법은 원래가 그 율법을 행하므로 의를 얻어 영생에 이르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오히려 우리의 죄를 들어내어 우리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보여주는 역할을 합니다. 이 사실을 깨닫는 자만이 예수님께 나와서 그의 은혜를 구할 수 있으며 그를 믿는 믿음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결 론 : 이 청년은 자기의 부족한 것은 알았지만 그의 그 부족한 것을 채우지 위해 주님께 은혜를 구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그의 재물 때문이었습니다. 이 청년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매우 가까웠지만 그 문턱에서 재물 때문에 실족했습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원하셨던 것은 재물의 포기가 아니라 선행으로는 절대로 영생에 이룰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그러므로 이 청년은 이 같은 사실을 깨닫고 선행으로 영생을 원했던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주님을 영생의 구주로 믿고 영접했어야 했습니다. 그는 아마 베드로처럼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고 고백하면서 자신의 죄를 자백하던가, 아니면 “주여 나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고 자신의 무지를 회개하고 주님의 도우심을 구했더라면 그에게 영생의 소망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근심하며 떠났다고 했습니다.

≈ 62≈ 부자와 천국

(본문 : 마가복음 10 : 23 - 27)

서 론 : 우리는 오늘 본문에 나타난 예수님의 말씀에서 대단히 어려운 문제에 부닥치게 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이 놀라고 또 심히 놀라워한 것처럼 모든 사람에게 충격적인 놀라운 말씀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돈이 많은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다는 말씀과 그 말씀을 뒷받침해 주는 비유로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고 하심으로 전혀 불가능하다는 뜻으로 표현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세상에 재물이 많은 부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는 것인가? 다시 말하면 구원을 얻을 수가 없는 것인가? 우리는 이 문제의 바른 해답을 얻기 위해 이 같은 문제가 제기된 동기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게 된 배경 등을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1.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기 어려운 부자

예수님께서 이 같은 말씀을 하시게 된 이유는 재물이 많은 어떤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와 영생의 도리를 묻게 된데서 시작됩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계명을 잘 지키는 생활을 해 왔기 때문에 율법적으로는 흠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게 “네게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지적해 주심으로 그에게 영생을 얻기에 부족한 한가지 사실을 밝히셨습니다.

(1) 이 한가지 부족한 것은 사실인즉 그가 영생을 얻을 수 없었던 결정적인 요소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청년을 사랑스럽게 보셨습니다. 21절에서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키는 생활을 해 왔다는 것과 그가 영생에 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에서였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그에게 영생이 주어질 수 없었습니다. 구원은 율법적인 의나 어떤 선한 공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영생 곧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데 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요1:12-13). 그런데 이 청년에게는 율법적인 생활은 칭찬 받을만했어도 그리고 영생을 얻고자 하는 의욕은 바람직한 일이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영생의 자격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눅13:24).

그러면 이 청년에게 한가지 부족한 것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영생을 얻기에 부족한 것이라면 이것은 또한 예수님을 영접하기에 부족한 조건이라고 보겠습니다. 그것이 그 청년의 그 많은 재물로 나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네 있는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그러면 네게 영생이 있으리란 말씀이 아닙니다.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하늘의 보화는 영생이 아니라 신령한 은혜를 말합니다. 이 청년에게 이 같은 하늘의 신령한 은혜가 내려져야 주님을 영접하므로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리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막10:21). 그 청년이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청년은 그가 가지고 있는 재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막혀 있었던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부자 청년이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로 근심하며 가니라”고 한 이 청년이 돌아간 후, 제자들에게 이 같은 말씀을 들려주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그 말씀에 놀랐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제자들이 놀란 것은 예수님의 교훈에 감명 받아서가 아니라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신 말씀에 대한 충격으로 인한 것입니다.

이들의 이런 충격은 한층 고조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는 말씀에서 그들은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겠는가”고 서로 말하면서 심히 놀란 것입니다.

① 그들은 재물은 하나님의 축복의 선물이라고 여겨왔습니다. 성경에는 그같은 말씀이 여러 곳에 나타나 있습니다(욥1:10, 42:10, 시128:1-2 등).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부자가 되지 못한 이유는 하나님으로부터 이 같은 축복을 받지 못한 까닭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다고 말씀하시고 약대가 바늘로 들어가기보다 어렵다는 비유를 듣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② 인간들에게는 누구나 재물을 탐하는 욕심이 있습니다. 돈을 벌어 부자가 되고싶어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제자들도 자신들도 속으로 부자가 되기를 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부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다고 하셨으니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겠는가”고 서로 의논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2.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예수님은 이 같은 제자들의 동향을 보시고 부연해서 이처럼 말씀해 주셨습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1) 사람으로는 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할 수 없다는 말은 불가능을 의미합니다. 이 말씀의 뜻은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단정적인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한가지 명심할 일이 있습니다. 돈과 영생과는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밝혀주신 바는 돈이 믿음을 가지게 하는 일에 결정적인 방해요인이 되는 것을 밝혀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영생이 얻는 일에는 돈이 있고 없고 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사람의 믿음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런데 부자 청년이 재물이 많은 고로 그의 마음으로는 영생을 사모했지만 그 길을 포기치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그 사람의 재물은 그 사람이 영생을 갖게 하는 일에 방해가 된다는 사실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① 사람은 모두 죄인들입니다. 돈이 있고 없고 아무라도 영생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사 그 독생자를 보내심으로 그를 믿는 자들에게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큰 사랑이요 은혜입니다. 예수를 믿는 일에는 돈이 있고 없고 가 문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돈이 많아도 예수를 믿으면 영생을 얻고 돈이 없어도 믿으면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나 재물이 있는 자는 그 재물 때문에 믿음을 갖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재물은 육신으로 살아가는 인생들에게 있어서 절대적인 존재로 군림합니다. 즉 내 안에서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누구에게도 그 자리를 양보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재물이 많은 자는 그 재물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길이 돈으로 막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6:24).

② 재물은 인간의 마음을 가시넝쿨로 만듭니다. 말씀이 그 마음에 들어가도 그 말씀이 마음에 자리잡고 자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가시떨기에 뿌리었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마13:22). 그러므로 예수님은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다는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2)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할 수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대단히 고무적이요 소망적인 말씀입니다. 만약에 하나님도 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면 이 세상에 재물을 가진 모든 사람들은 영생의 소망을 가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① 하나님은 어린양의 생명 책에 기록된 사람이라면 그가 누구이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하실 수 있습니다. 삭개오의 경우가 그러하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한쪽 편에 달린 살인가도의 경우도 그러합니다. 재물이 있는 부자도 하나님으로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도록 하실 수 있습니다.

② 하나님으로서는 하실 수 있다는 말씀에는 하나님의 손길이 개입해야 한다는 뜻이 들어가 있습니다. 탕자의 경우에서 그는 재물이 많았을 때 아버지의 집을 떠나 외국에 가서 허랑 방탕하게 지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서 재물이 떠나가고 가뭄이 찾아오고 되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도 배를 채울 수 없는 기근이 왔습니다. 그때서야 그는 아버지 집으로 되돌아와 아들의 대접을 받게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토록 하셨습니다. 이 둘째 아들은 이미 어린양의 생명 책에 기록된 하나님의 잃은 양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부자 청년은 율법을 지키는 생활은 해왔지만 그리고 영생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기는 했지만 어린양의 생명 책에 기록되어 못한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결 론 : 부자라도 그에게 구원을 베푸실 수 있는 하나님의 방법이 있습니다. 그 방법이 혹은 연단으로 혹은 그의 인생실패로 혹은 질병으로 나타날지 모릅니다. 우리는 부자에 대한 전도에도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온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을 때, 우리의 신앙생활에 따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재물의 축복을 주십니다. 이 같은 재물은 영생의 길을 막는 재물이 아닙니다.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생활을 통해서 더 하여 주시는 물질의 축복을 받는 일은 영생의 길에서 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장구한 재물’이라고 말씀해 줍니다(잠8:17-19).

≈ 63≈ 복음을 위한 보상

(본문 : 마가복음 10 : 28 - 31)

서 론 : 세상 적인 부요를 누리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란 마치 약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이 쉬울 것이란 주님의 말씀을 들을 제자들은 심히 놀라면서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고 말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있느니라”고 하심으로 하나님으로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실 수 있다는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이 말씀에 힘을 얻은 베드로는 자신들의 경우를 주님께 내 세우면서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고 말했습니다. 베드로는 이 말을 하면서 과연 주님의 반응이 어떠하실까? 주님께서 자신들의 부르심과 복음사역을 위해 헌신하는 자신들의 입장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실 것인가? 이에 대하여 관심을 가졌을 것입니다.

1. 주와 복음을 위해 희생한 자의 축복

예수님은 베드로의 이 같은 말을 들으시고 주님과 복음을 위해 희생하는 자의 현세와 내세의 축복에 대하여 의미심장한 말씀을 들려 주셨습니다.

(1)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나와 및 복음을 위한다는 말은 한가지 뜻을 지닌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위해 우리가 버려야 할 대상에 대해 두 가지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재물에 관한 것이요 하나는 혈연에 관한 것입니다. 집과 전토는 재물, 형제나 자매 등으로 나오는 가족관계는 혈연관계입니다. 이 둘은 인간들이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히 여기는 삶의 뿌리요 목적이기도 합니다. 재물에 관한 말씀은 이미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으로 언급하셨고 혈연관계는 이 세상 누구에게나 본능적으로 귀히 여기는 가족관계로 이 두 가지를 희생한다는 일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위해 이 두 가지를 버려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2) 여기서 버린다는 말씀이 의미하는 뜻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버린다는 말은 무조건 유기 한다거나 포기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복음이냐? 가족이냐? 그리스도냐? 재물이냐의 선택에 있어서 어느 곳에 더 비중을 두느냐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나 복음을 위해 부득불 집이나 전토를 버려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택하느냐, 아니면 재물을 택하느냐에 있어서 주를 위해 단연 집이나 전토를 버리는 경우를 말합니다. 그리고 그의 생애에 있어서 재물을 위주로 사느냐, 아니면 그리스도를 위주로 사느냐에 있어서 그 해답이 명확하고 분명히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가족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족을 선택하느냐, 복음을 선택하느냐에 있어서 가족보다 복음을 선택하는 자세를 말합니다. 이 같은 사람의 생활은 언제나 가족위주가 아니라 그리스도위주가 되며 복음위주의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3) 이런 그리스도중심의 생활은 적극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를 의미해 줍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결코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합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 . . 너희가 하나님과 겸하여 재물을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6:24). 재물이 그 사람의 신앙생활을 저해하지 못합니다. 이 사람은 오히려 주를 위해 자신의 재물을 기꺼이 드립니다. 이런 일을 큰 보람으로 알고 기뻐합니다.

가족관계에 있어서도 그 누구보다도 주님을 더욱 소중히 여깁니다. 복음을 위한 일이라면 가족들의 유익을 희생할 수 있으며 가족들과 떨어지거나 혹 그리스도를 위해 가족의 생활을 전혀 돌볼 수 없는 상황에 이르러도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마10:37-38). 이것이 집이나 전토나 형제나 자매나 아비나 어미를 버린 자의 자세인 것입니다.

(4) 하나님께서는 이런 자에게 자기가 희생한 재물이나 가족관계의 축복을 백 배나 더해 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30절에서 ‘금세’란 말씀을 쓰심으로 이 같은 상급의 약속이 내세적이 아님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통상적인 법칙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법칙을 따라 주를 위해 헌신하거나 자기 희생을 아끼지 않으므로 주님이 말씀하신 백 배의 축복을 누리는 생활을 이루어 왔습니다. 심는 대로 거둔다는 말씀은 먼저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에 나타나야 합니다.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고 하신 대로 우리 주님과 복음을 위해 재물이나 가족을 희생하는 자들에 대한 보상은 가장 값진 것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반드시 현세적으로 나타난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현세에서 누리지 못한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내세의 상급으로 더욱 풍성하게 갚아 주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생활 중 현세에서 심은 모든 영적 씨앗이 현세에서 축복으로 거두는 일보다는 오히려 장차 나타날 하나님의 나라에서 받을 수 있는 씨앗으로 심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백 배라고 하신 표현은 숫자적인 의미의 백 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집이나 전토의 백 배란 말도 이론적으로 부적절하고 더욱이 형제나 자매나 부모의 백 배란 실현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 같은 보상의 약속은 하나님의 풍성하고 넘치는 축복에 대한 확실한 보증이십니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우리들이 영적으로 누릴 수 있는 인생의 축복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핍박을 겸하여 받는다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에는 언제나 핍박이 뒤따른다는 사실을 밝히신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생활 중에서 가장 귀한 것으로 여기는 재물이나 가족을 희생하는 일에는 사회적인 핍박이나 신앙생활에 어려움이 따른다는 사실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핍박이 따르고 시련이 따라도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끝까지 앞으로 나아가면 그 일에 대한 결실의 날이 반드시 오는 것입니다.

(5) 예수님은 축복에 대한 결론으로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내세란 말은 오는 세상으로 우리의 생애가 이 땅에서 마친 후에 오는 새로운 세계, 곧 천국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복음이나 주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 사람의 최종적인 축복은 바로 ‘영생’인 것입니다. 적어도 복음이나 주를 위해 이처럼 자신의 재물이나 자신의 가족을 버릴만한 희생적인 생활을 했다면 그 사람은 틀림없이 천국의 상속자입니다. 주님이 여기서 영생이란 말씀으로 하나님의 나라의 유업을 약속하신 것은 다만 영생, 그 자체만을 의미한 것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영생은 말할 것도 없고 그 나라에서 받을 상급까지 포함된 말입니다(고전15:58).

2. 먼저 된 자와 나중 된 자

예수님은 31절에서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된 자가 많으니라”고 하셨습니다.

(1)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된 자란 신앙의 열매를 나중에 맺은 자를 의미합니다. 이 자는 마치 탕자의 경우와 같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집의 아들이요 상속자였지만 오랜 세월 동안 창기와 더불어 탕진한 후, 회개하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이들은 또한 바리새인들과 같은 자들을 의미해 주기도 합니다. 믿는다고는 하지만 일찍 그 나라의 열매를 맺지 못한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포도원에 보내는 두 아들의 경우를 비유로 들려주시는 말씀 중,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고 하셨습니다(마21:31). 하나님의 나라는 열매 맺는 자가 유업으로 받기 때문에 먼저 된 자라 할지라도 열매를 나중에 맺었다면 그는 결단코 먼저 된 자가 못되고 나중 된 자가 될 것입니다.

(3)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고 하셨습니다. 비록 늦게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라도 먼저 될 자들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나중 되고 먼저 된다고 하신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해 주는 것입니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순서를 의미해 주는 말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자기를 희생하는 자들에 대한 보상을 말씀하신 후에 들려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주님으로부터 보상을 받는 시기를 말하는 것으로 나중 된 자들이라도 그의 신앙적인 열매에 따라 먼저 된 자들보다 우선할 수 있다는 의미이며 또한 하나님 나라에서의 상급도 먼저 된 자들이라고 나중 된 자들보다 더 많이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열매에 따라 결정된다는 사실을 의미해 주신 말씀입니다.

결 론 : 우리는 주님과 복음을 위해 어떤 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스스로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신앙적인 연한으로 인정을 받거나 그것이 상급의 표준인 줄로 오해해서도 안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무엇을 주님을 위해 바칠 것인가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는 우리의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 64≈ 제자들이 요구하는 영광

(본문 : 마가복음 10 : 32 - 40)

서 론 : 예수님은 그의 발길을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예루살렘 행은 그가 받으실 고난을 이루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의 언어행동에 있어서 다른 사람이 보기에도 어떤 결의에 찬 듯한 인상을 보이셨습니다. 일찍이 예수님으로부터 이런 인상을 받지 못했던 제자들이나 수다한 무리들은 예수님의 그같은 모습에서 놀라움과 어떤 두려움마저 느꼈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놀라고 좇는 무리들은 두려워하더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무리들의 이런 충격이 예수님이 당하실 예루살렘에서의 고난을 이해해서도 아니며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에 대하여 어떤 사건이 일어날 것이란 생각에서 나온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이 같은 분위기 속에서 예수님은 친히 당신이 예루살렘에서 당하실 그의 고난에 관한 자세한 언급을 하셨건만 뒤이어 요한과 그의 형제 야고보의 철부지 같은 진언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1. 예수님이 밝히신 고난의 의미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그의 열 두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에서 자기가 당하실 일을 일러 주셨다고 했습니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란 말씀으로 시작하신 주님의 고난의 말씀은 33절과 34절에서 너무나도 극명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인자가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일만에 살아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1) “인자가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운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말씀하신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운다고 하신 말씀은 그들이 주축이 되어 있는 ‘산헤드린 공회’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 기관은 72명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로 구성된 유대의 최고 의결기관입니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처럼 예수님은 산헤드린 공회에서 대제사장과 시기관들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사형 집행권은 그들의 권한 밖의 일이었습니다. 로마의 식민지 통치를 받고 있었던 유대인들은 로마 총독의 재가 없이는 어떤 피고에게도 사형을 집행할 수 없었습니다.

“이방인에게 넘겨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이방인인 로마인에게 넘겨줄 것임을 가리킨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처럼 로마인인 빌라도 총독에게 넘겨 그의 최종적인 재판에 의해 산헤드린에서 죽이기로 결안한 그들의 결안대로 십자가에서 죽이심을 당하신 것입니다.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유대인들로부터 예수님을 넘겨받은 로마군병들에 의해 수모를 당하시는 주님의 고난을 의미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처럼 예수님은 빌라도의 재판 중에 그리고 사형언도를 받으신 후에 이 같은 능욕과 채찍질을 당하시며 골고다에 올라가셨고 급기야 그곳에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저는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주님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 부활이야말로 고난과 죽음을 이기시고 새로운 소망을 주시는 복음의 핵심적인 메시지가 된 사건입니다.

(2) 예수님은 이처럼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그림처럼 자세히 말씀해 주셨건만 제자들은 그 말씀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이해할 수 없었던 이유는 첫째로 그들의 잘못된 메시야 관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에서 말씀해 주시는 메시야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는 영광의 메시야인 줄로 믿고 있었습니다. 다음에 그들은 자기들이 기대하는 메시야 왕국영광의 꿈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생각하고 있는 복음은 복음이 아니었습니다. 복음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으심과 그의 부활하심에 있었으나 이 복음을 제자들은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를 안타까이 여기시고 재차 삼차 자신이 겪으셔야 할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실 부활사건에 대하여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복음의 진리가 무엇인가를 올바로 가르치셔야 나중에 제자들이 바른 복음을 전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낙심하지 않고 제자들에게 계속적으로 복음의 진리를 가르치신 이유는 다음 몇 가지 사실 때문입니다.

첫째로 진리는 스스로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니라 가르치므로 깨달아 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선지자의 글에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6:45). 누구를 가르친다고 해도 가르침을 받는 사람에 따라 깨닫는 속도가 다릅니다. 그러므로 늦게 깨닫는다고 가르치기를 포기하면 안됩니다. 반복해서 가르쳐 깨닫도록 해야 합니다.

다음에 배우는 사람이 끝까지 깨닫지 못해도 그래도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는 누가 진리의 말씀을 깨달을는지 모릅니다. 끝까지 깨닫지 못하여 멸망 받을 사람에게도 이 구원의 복음이 필요합니다(고후2:15-16).

다음에 지금은 제자들이 깨닫지 못하지만 그 말씀대로 그 일이 성취되는 날이 곧 그들 앞에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그들은 그 말씀을 깨달아 알 수 있게 되며 복음의 일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부활 후에 이 모든 말씀이 생각나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에 그들의 생명까지 아끼지 아니하는 순교의 자리에까지 이른 것입니다.

2. 요한과 야고보가 소망한 영광

예수님이 열심히 들려주신 고난과 부활의 교훈은 깨들을 수도 없고 이해할 수조차 없는 말씀이었기 때문에 그 일에 관심을 갖는 제자들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예루살렘이 가까이 다가옴에 따라 제자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이루질 것으로 알고 마음이 조급해졌고 흥분하기조차 했습니다.

(1) 그 중에 야고보와 요한이 주님께 입을 열었습니다.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의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고 간구했습니다. 그들이 주님께 밝히고 있는 간구란 무엇입니까? “주의 영광 중에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하는 내용입니다. 이들이 말하는 주의 영광 중이란 말은 예수님이 곧 이루실 메시야 왕국에서 왕의 자리에 오르실 때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요구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 가셔서 곧 세워질 그의 왕국에 자기 형제들을 가장 중요한 위치에 앉혀 달라는 요구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이 같은 요구에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고 나무라셨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간구는 바른 간구가 아니란 뜻입니다. 그들의 간구는 분명히 곧 세워질 하나님 나라에서의 높은 자리를 의미하고 있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대로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는 일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을 구한다고 하신 책망이십니다. 우리의 기도는 언제나 무엇이든지 아버지의 뜻대로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간구하는 야고보 형제의 기도는 잘못된 메시야 관에서 나온 정욕적인 기도였기 때문에 자기들의 구하는 바를 자기들이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2) 주님은 그들에게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세례란 이 역시 잔과 동일한 의미의 표현이지만 주님이 우리를 위해 받으실 혹독한 모든 고난을 통틀어 말씀하신 것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할 수 있나이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의 이 같은 대답은 사실인즉 주님이 말씀하신 “잔과 세례”가 무슨 뜻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무심결에 대답한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말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그 내용을 알건 모르건 장차 그들은 주님을 위해 이 같은 “잔과 세례”를 받아야 할 것을 주님은 이미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과 같이 야보고는 헤롯에 의해 사도들 중 최초의 순교자가 되므로 주님의 “잔과 세례”에 동참한 것입니다(행12:2). 그리고 요한은 순교했다는 역사적 증거는 없지만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순교자의 생애를 보냈습니다.

결론 : 예수님은 “내 좌우 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예비되었던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서 그들이 누릴 영광의 자리를 이 땅위에서 이루러질 메시야 왕국에서가 아니라 하늘의 보좌에서의 영광과 연결시키셨습니다. 그들은 장차 주를 위한 큰 고난의 동참자로 하늘에서 말할 수 없는 영광의 자리에 앉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좌우 편에 앉는 상급은 이미 그 자리를 주시기로 예비된 자를 위한 것임을 말씀하심으로 누구든지 가장 충성스러운 그리스도도의 제자가 그 자라를 차지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10장 65,66번 설교는 11장으로 옮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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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1장

◆ 밤중소리 01-09 | VIEW : 584

≈ 65≈ 인자가 온 목적

(본문 : 마가복음 10 : 41 - 45)

서 론 : 야고보와 요한 형제의 간구는 당장에 제자들 간에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지금 제자들의 마음에는 선생님이 당하실 고난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예루살렘에 올라가 그곳에서 이루어질 메시야 왕국에서 높은 벼슬자리를 설계하고 있는 그들이었기에 야고보와 요한의 특출한 행동에 그들은 시기하는 마음으로 분히 가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노중에서 누가 높으냐는 문제로 다툰 일이 있었던 그들은 이제 그 기선을 요한 형제에게 빼앗긴 것을 보고 분격한 것입니다(막9:34). 예수님은 이 일을 계기로 하나님의 나라에서 큰 자가 되는 비결을 말씀해 주셨으며 인자의 오신 목적에 대하여 다시 한번 밝혀 주셨습니다.

1. 크고자 하는 자의 자세

예수님은 제자들 간에 서로 크고자 하는 마음으로 시기하고 다투고 있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이에 대하여 하나님 나라의 교훈을 가르쳐 주심으로 그들이 참으로 높고자 할진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에 대하여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1)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생각하고 있는 잘못된 영광을 바로잡기 위해 세상 권세 자들이 누리는 영광과 비교하시면서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은 백성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도 알고 있지 않느냐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집권자는 백성의 왕으로 군임하고 있는 자요, 대인들이란 왕으로부터 권세를 받아 백성을 다스리는 권세 자들을 의미합니다. 이들은 자기 임의로 집권하고 권세를 부리는 것입니다. 누구의 제재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권세는 그렇지 않다고 하신 것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이 같은 역설적인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까? 여기서 크고자 하는 자란 두 가지 뜻이 담겨진 말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일입니다. 하나님나라에서 크고 작은 일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아야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섬기는 자”를 큰 자로 인정하신다는 뜻입니다. 다른 또 하나의 의미는 미래 적인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상급을 바라보고 하신 말씀입니다. 장차 나타날 하나님의 나라에서 큰 자가 되려면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마땅히 남을 섬기는 생활을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크다는 말은 교만과 상통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는 것입니다. 섬기는 자야말로 겸손한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에게 은혜를 더 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이 말씀을 더 강조하시기 위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종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은 겸손과 낮아짐과 희생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란 장차 나타날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상급을 바라보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현세적인 생활에서 장차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받을 상급을 위한 공로를 쌓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높은 자리가 많이 있으며 영광을 누릴 복된 자리도 많습니다. 요한이나 야고보가 간구한 것처럼 주님 좌우 편에 앉는 영광의 자리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사람은 주님을 섬기는 일에, 현세적인 하나님 나라에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들려주신 이 말씀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주고 있습니다. 미래의 하나님 나라에서의 상급은 하나님에 의해 작정되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 자리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은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람,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받든 사람”이 될 것이란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런 소망이 있을 때, 섬기는 생활도 할 수 있으며 모든 사람의 종의 자리에서 헌신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직분 자들은 집사나 권사나 장로나 모두 이 같은 의미에서 세우게 된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 나라에서 참 영광을 누리려면 섬기는 일과 모든 사람의 종이 되는 일에 힘을 써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의 형편은 어떠합니까? 철없는 제자들처럼 영광만을 누리려는 교만과 세상 집권자들처럼 남을 지배하려는 교만함이 팽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인자의 온 것은 섬기려 함이라

다음에 예수님은 인자의 오신 목적에 대하여 설명해 주셨습니다.

(1)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선생이요, 또한 장차 나타날 메시야 왕국의 왕이십니다. 그런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이에 대하여 주님은 제자들에게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땅히 제자들의 섬김을 받으셔야 할 분입니다. 그리고 세상 모든 사람의 섬김을 받으셔야 할 분입니다. 그럼에도 그분은 섬김을 받으려고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이에 대하여 빌립보서에서 바울은 “그는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빌2:6-8).

그러면 이처럼 자신을 낮추시고 남을 섬기며 모든 사람의 종이 되신 예수님은 지금 어떤 자리에 이르게 되신 것입니까? 그 다음에 이어진 말씀에서 바울은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한평생 섬기심의 생애를 사셨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이시지만 스스로 사람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셔서 이처럼 섬기심의 생애를 사신 일은 그가 하늘보다 더 높아지실 수 있는 자격을 갖추셨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처럼 다른 사람을 섬기는 생활로 자신을 낮추고 주님의 뜻을 따를 때,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습니다.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이기는 성도들에게 이처럼 약속하셨습니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계3:11).

(2) 예수님의 섬기심의 절정은 그의 대속의 죽으심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 최상의 도달점은 그 사람의 위한 죽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친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 더 큰사랑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시기 위해 바치셨다는 사실은 남은 섬기는 일에 있어서 예수님이야말로 최상의 일을 하셨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 말씀으로 예수님은 자신이 하셔야 할 메시야의 사명에 대하여 다시 한번 제자들에게 분명히 밝혀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영광으로 섬기심을 받으시려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시기 위해 오셨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하실 일은 예루살롐에 올라가 왕국을 건설하고 왕위에 오르시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죽으셔야 할 일입니다.

대속물이란 빚진 사람의 빚을 대신 갚아주므로 노예의 몸에서 해방시켜 주는 일을 말하며 구속적 의미로는 대속 제물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그 전날 밤에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집에 바른 일은 장자의 피 값을 대신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또한 예수님께서 우리의 속죄를 위한 피 흘리심을 의미하는 대속의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죄 값으로 짐승을 잡아 그 피로 속죄 제물로 삼은 일도 대속의 뜻이 들어가 있는 것으로 이 모든 일들은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시는 그의 피 흘리심을 의미하는 그림자인 것입니다.

여기서 특히 유념해야 할 일은 많은 사람의 대속물이라고 하신 점입니다. 많은 사람이란 모든 사람을 의미하는 표현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예수님의 구속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의 백성들을 의미합니다. 어린양의 생명 책에 기록된 그의 백성들만이 이 같은 구속의 대상이 되며 그 효과가 미치는 것입니다. 대속이란 말은 먼저 자격이 분명해야 합니다. 죄인은 대속의 대상이 될지언정 대속의 주인공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대속해 주시는 어린양이 보이지 않았을 때, 요한은 크게 울고 있었는데 장로 중 하나가 나타나 그를 위로하면서 “울지 말라 유다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고 말해 주었습니다(계5:2-6). 오직 죄가 없으시고 하나님이신 예수님만이 우리의 속죄를 위한 대속 제물이 될 수 있으며 예수님은 그같은 사명을 이루기 위해 섬기는 자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결 론 : 예수님은 “섬기는 자”로,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철저하게 그에게 주어진 일을 잘 감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섬기는 사람은 이 같은 예수님의 섬기심을 본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장차 하나님의 나라에서 주님과 함께 영광을 받기를 소망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기 위해 이 땅에서 우리의 생애동안에 주님의 섬기심과 종의 본을 본받고 주님과 함께 고난을 받으려는 각오를 가져야 합니다.

≈ 66≈ 소경 바디매오의 믿음

(본문 : 마가복음 10 : 46 - 52)

서 론 : 성경에는 여러 사람의 여러 가지 믿음의 모습이 나옵니다. 그 중에 본문에 나오는 바디매오의 믿음은 가히 칭찬 받을만한 믿음이었습니다. 그의 끊임없이 부르짖는 믿음, 주변의 핍박과 방해에도 불구하고 끝내 주님을 만나는 믿음, 오직 한가지 목적을 이루기 위해 낙심하지 않고 끝까지 목적을 관철한 믿음은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하신 불신의 오늘의 우리 시대에 가히 본 받을만한 믿음이라고 보겠습니다.

1. 바디매오의 간구

예수님과 그 일행이 여리고에 이르렀다고 했습니다. 여리고는 예루살렘에서 북동쪽으로 약 24km의 거리에 위치하고 있는 작은 도시입니다. 예루살렘은 해발 762m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이곳까지 오려면 무려 1km나 되는 높이의 경사길이 계속되어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은 힘겨운 언덕길이었습니다.

(1) 바디매오는 여리고에 살고 있는 거지로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성경에서 그의 신분에 대해 소경 거지였다고 했습니다. 그의 신분은 이처럼 너무나도 미천했습니다. 소경인데다 기지로 길가에 앉아 동냥질을 하고 있었으니 누가 그에게 사람대접을 해 주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마침 여리고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려고 여리고에서 나가실 그때에 일어난 일입니다. 바디매오는 바로 그 길가에 앉아 구걸하다가 주변이 굉장히 시끄러운 것을 느꼈습니다. 사면에서 많은 군중들이 몰려오면서 그들의 말에 의하여 시끄러운 원인이 나사렛 예수가 그 길을 지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디매오는 벌써부터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가 많은 병자를 고쳤다는 말도 들었고 그는 또한 병자들을 불쌍히 보시고 그들을 말씀으로 치료해 주신다는 소문도 듣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의 입을 통해 그는 메시야 왕국을 세우실 다윗의 자손이란 말도 들었습니다. 바디매오의 귀가 번쩍 열렸습니다. 바디매오는 그 예수를 만날 수 있기를 얼마나 사모해 왔던 것입니까? 그를 만나면 자기의 소경된 눈을 고침 받을 수 있을 것으로 믿고 있었지만 소경인 그에게 그런 기회를 잡기란 여간만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 바로 그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기 위해 자신이 앉아서 구걸하고 있는 그 길로 지금 지나가신다는 것입니다.

(2)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이 절호의 기회를 결코 놓칠 수 없었습니다. 소경인 바디매오가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자신의 목소리를 그에게 들리게 하여 예수님으로 하여금 자기에게 다가오게 하는 일입니다.

사람이 성공하려면 기회를 잘 포착해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르기를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 했습니다(고후6:2). 바디매오는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습니다. 그의 구원여부가 이 기회에서 판결 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자기에게 복음을 받아 드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 바디매오처럼 자신의 구원이 지금 이 시기란 사실을 깨달아 주어진 그 기회를 붙잡는다면 그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 바디매오처럼 구원의 은혜를 받게 될 것입니다.

바디매오는 주님을 향하여 외쳤습니다. 그의 외침은 이러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처럼 부르짖은 것입니다.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미 그의 마음속에는 예수님이 이스라엘이 기다려온 메시야이심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란 바로 유대인들이 기다려온 이스라엘의 메시야를 표현하는 말이요 신앙고백이기도 합니다. 유대인들은 누구든지 예수에게 이 같은 고백을 할 경우, 출회하기로 결정하므로 예수를 메시야(그리스도)로 부르지 못하게 하고 있었습니다.

바디매오의 간절한 간구의 내용은 간단했습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란 호소였습니다. 바디매오의 이런 호소는 두 가지 의미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에게는 지금 ‘주님의 도우심만이 절대로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예수가 아니시면 자신의 눈을 뜨게 할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불쌍히 여기셔서 자기를 고쳐달라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 앞에 죄인이란 고백입니다. 예수님의 비유 중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에서 세리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고 회개했습니다. 세리의 이 같은 기도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아 의롭다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다고 했습니다(눅18:13).

(3) 바디매오의 기도는 계속되었습니다. 한번의 기도로 응답을 받을 줄로 여기면 안됩니다. 기도에는 인내가 따라야 합니다. 기도의 응답이 늦어도 밤낮 부르짖어야 합니다(눅18:1-8). 바디매오의 간구는 즉시 방해에 부딪쳤습니다.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바디매오를 향하여 꾸짖으면서 “잠잠하라”고 그의 간구를 제지했습니다. 기도하면 그 기도를 방해하는 각가지 요소들이 작용합니다. 우리는 그때 그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기가 어려울 줄 알고 포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실인즉 이때가 중요합니다. 바디매오가 방해꾼들의 제지에 굴복하여 기도하는 일을 포기해 버렸다면 예수님은 그에게 찾아오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더욱 크게 소리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과 바디매오의 관계를 살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처음 바디매오의 간구를 분명히 들으셨습니다. 아니 예수님은 이미 그곳에서 바디매오의 간구를 통하여 그를 구원해 주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기도라면 우리의 기도를 그 어떤 환경 속에서도 다 듣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같은 믿음은 우리를 실망시키거나 낙심케 하지 않습니다. 또한 이 경우 바디매오는 결코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이 절호의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기회가 지나가기 전 열심히 부르짖어야 하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하고 뜨거워졌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바로 이 바디매오의 이 같은 기도여야 합니다.

2. 예수님의 응답

바디매오의 두 번째 간구에 시끄러운 군중 속에서 부지런히 걸음을 재촉하셨던 예수님의 발걸음이 멈추었습니다.

(1) 예수님께서 머물러 서서 저를 부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주변에는 인파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는 많은 병자들도 있었습니다. 바디매오보다 더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주님을 만나 뵙기를 원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독 길거리에서 걸인으로 동냥질을 하고 있는 소경 바디매오에게만 응답의 축복이 내려진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시던 걸음을 멈추시고 머물러 스셨다고 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예수님의 발걸음을 머물러 서게 한 일은 모세가 홍해를 가른 기적보다도, 여호수아가 궁창의 해와 달을 멈추게 한 기적보다도 다 위대한 역사인 것입니다. 바디매오의 믿음의 기도가 그같은 이적을 만들어 냈습니다.

예수님은 바디매오를 부르라고 하셨습니다. 그 많은 사람 가운데서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오직 소경 거지인 바디매오 뿐입니다. 바디매오는 누구의 부름을 받고 그 앞에 나갈만한 존재가 아닙니다. 배우지 못한 사람입니다. 몸이 불완전한 소경입니다. 그에다 만인이 천시하는 길가의 걸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부르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왜 바디매오를 부르라고 하신 것입니까? 그에게 가장 존귀하고 아름다운 선물을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그에게 간절히 간구하는 사람이 누구이든 그 신분을 보지 아니하시고 그의 진실한 마음에서 나오는 기도를 들으시고 그를 부르시고 그에게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2) 바디매오는 주님이 자기를 부르신다는 말을 듣고 겉옷을 벗어 던지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갔다고 했습니다. 바디매오가 걸치고 있었던 그 옷은 그의 옛 생활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옛 사람의 자리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육신의 생활에서 일어나 이제 주님이 기뻐하시는 새로운 생활로 들어가야 합니다. 예수께 나가는 생활은 세상에서 걸쳐 입었던 추한 옷을 벗어 던지고 이제 새 사람의 새 옷을 입고 주님께로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때 바디매오는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바디매오의 간절한 소원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게 이처럼 물으신 것입니다. 우리들의 예수님과의 대화는 분명해야 합니다. 기도의 내용도 분명해야 합니다. 회개하는 죄나 구하는 요구 조건이나 모두가 구체적이고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바디매오는 분명히 “보기를 원하나이다”고 대답했습니다. 바디매오의 기도는 탐심의 기도가 아닙니다. 정욕을 위해 구하는 잘못된 기도도 아닙니다. 더군다나 증언부언의 기도는 아닙니다. 자신의 신체가 온전해지기를 구하는 기도는 결코 탐심일 수가 없습니다.

결 론 : 예수님은 바디매오에게 이처럼 선언하셨습니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바디매오의 눈이 뜨임 받은 주님의 기적은 바로 바디매오의 믿음 때문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바디매오의 믿음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믿은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그에게 영적 구원을 이루게 하는 신앙고백입니다. 다음에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란 기도로 자신의 죄인 됨과 무익함을 아뢰고 주님의 자비에 호소한 기도였습니다. 비디매오는 그의 눈이 밝게 뜨임 받아 이제 이후의 그의 생애는 오직 주님을 위한 새로운 생활로 들어갔습니다.

≈ 67≈ 호산나 !

(본문 : 마가복음 11 : 1 - 11)

서 론 :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부터 그의 공생애 마지막 한 주간이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의 생애에 절정에 이르는 사건이 연속적으로 일어나며 그의 인류 구속사적 모든 역사가 이 기간에 성취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승리의 입성이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의 승리는 메시야 왕국의 왕으로서의 입성인 것이 아니라 그의 고난과 죽으심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 땅에 세워질 메시야 왕국(천년왕국)은 먼저 그의 대속의 사역에서 완성되어 이 땅위에 영적인 하나님의 나라(교회)가 세워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바로 이 나라(교회)를 세우시고 이 나라의 왕으로 이 나라를 지배하기 위해 입성하시는 것입니다.

1.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거의 당도하셨을 때에 선지자가 예언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시는 겸손한 왕으로서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1)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여리고를 떠나 그곳에서 약 25km거리에 있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안식일을 베다니에서 쉬시고 다음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감람산 벳바개와 베다니에 이르렀다고 하셨습니다. 베다니는 감람산 동쪽에 자리잡고 있는 작은 마을이며 예루살렘에서는 약 3km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벳바게의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베다니 주변에 있는 마을로 짐작됩니다.

이때 예수님은 제자 중 둘을 마음 맞은 편으로 보내시면서 그 마을로 들어가서 “아직 나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러 끌고 오너라”고 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해 예비해 놓으신 나귀 새끼를 타실 것을 이미 마음에 작정하시고 제자들에게 명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명대로 나귀 새끼를 가져 왔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겉옷을 그 위에 걸쳐두었다고 했습니다.

(2) 예수님은 그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이제 제자들의 마음은 흥분의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예수님이 드디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나귀 새끼를 기적적인 방법으로 가져오게 하시고 그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시려는 자기들의 선생님을 바라보았을 때 그의 입성은 곧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의 생각대로 이루어질 것으로 확신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다는 것은 자기들의 선지자가 메시야의 등장에 대하여 이미 예언한바 있기 때문에 더욱 흥분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슥9:9). 이 같은 스가랴의 예언을 유대인들은 영광의 메시야가 나타나 메시야 왕국을 세우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려는 그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부플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2. 호산나

이런 흥분은 비단 제자들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라온 온 무리들과 예수님이 입성하신다는 소문을 듣고 이곳까지 딸려온 예루살렘 시민들도 제자들과 같은 생각으로 왕의 길을 예비하느라 주변이 떠들썩했습니다.

(1)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보고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는 찬양을 드높이 불렀습니다. 군중들의 이 같은 찬양의 외침은 그 안에 네 가지 의미가 들어가 있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호산나”란 말의 히브리 뜻은 ‘호시아나’의 음역으로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란 의미입니다. 이 호산나는 어려운 가운데서 구원자 메시야를 갈망하는 유대인들의 하나님께 대한 호소요 간구이기도 합니다. 이제 예수님이 메시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을 보고 그들은 그들이 갈망했던 그들의 구원이 이루어질 줄로 믿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로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란 말은 왕으로 입성하시는 메시야에 대한 환영의 찬양입니다. 그들의 앞에는 자기들의 눈에 메시야로 비취는 예수님이 그들이 대망한 구원자인 줄 알고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는 하나님을 가리키며 메시야는 하나님이 보내심으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실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란 말입니다. 이 대목은 메사야 왕국의 도래를 바라는 유대인들의 간절한 염원입니다. 이제 그들은 이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여겼기 때문에 이처럼 외쳤던 것입니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란 이스라엘이 기다리는 장차 올 다윗의 나라로 메시야 왕국을 의미합니다. 이에 대하여 예레미아는 이처럼 예언했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라”고 했습니다(렘23:5). 이곳에 나오는 다윗은 옛날의 다윗 왕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예레미아 시대엔 다윗은 이미 죽었고 그 시체를 장사한지 이미 오래 지낸바 된 그 시대였습니다. 그는 바로 다윗의 뿌리, 다윗의 자손, 다윗의 위를 이을 자로 표현된 메시야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다음 네 번째로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란 말은 이 같은 구원은 가장 높으신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찬양한 것입니다.

이런 내용으로 볼 때 그 당시 유대인들이 얼마나 메시야를 갈망했는지 알 수 있으며 그들은 예수가 바로 이 같은 메시야로 알고 있었으므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이처럼 대대적으로 환영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2)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시고 입성하신 것은 그의 메시야적 사명이 무엇인가를 나타내 보이신 것입니다. 장차 예수님이 영광의 메시야로 나타나실 날이 있습니다. 그 날엔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이 입성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백마를 타시고 만 왕의 왕으로 그의 하늘 군대로 더불어 예루살렘 앞 동편 감란산에 임하실 것입니다(슥14:4). 그날에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나약한 몸으로 입성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이 입에서 이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저희를 청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다”고 하신 심판주의 모습으로 오시는 것입니다(계19:11-16).

①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신 것은 그의 겸손을 말합니다. 세상의 군왕은 준말을 타지만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이 보다 더 위대한 겸손이 어디 있습니까?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 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종의 모습으로 나타내 사람으로 오신 분입니다(빌2:6-8).

②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신 것은 평화를 말합니다. 나귀는 전쟁에 필요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세상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는 평화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죄로 심판 받을 인생들에게 속죄와 구원의 소망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③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일은 그가 받으실 고난을 보여 준 것입니다. 나귀 새끼를 타신 몸으로 예루살렘에 그의 왕국을 세우실 수는 없습니다. 그는 필경 그를 왕으로 환영했던 많은 군중들에게 실망을 안겨줄 것이며 그들의 배척을 받을 것이며 예수님을 핍박했던 무리들에 의해 고난을 당하셔야 하시는 것입니다.

결 론 :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습니다. 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기대했던 것처럼 예루살렘을 평정하여 그곳에 메시야 왕국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그가 분명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는데도 예루살렘은 평온했습니다. 아무 것도 변하지 아니했습니다. 예수님이 성전에 들어가셨을 때 그들로 예수님을 따라 성전에 들어갔지만 그곳에서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환영하고 신이 나서 따라다녔던 무리들은 이제 지쳤습니다. 실망이 컸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 둘씩 예수님 주변에서 물러갔습니다. 날이 저물자 예수님은 어리둥절한 가운데 낙심하고 있는 제자들을 데리시고 베다니에 나가셨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메시야에 대한 잘못된 지식이 얼마나 두려운 결과를 가져 왔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들 군중들은 얼마 후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빌라도의 법정에서 발견 될 것이며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바라보고 조롱하는 무리들 중에서도 발견될 것입니다.


≈ 68≈ 무화과나무에 내린 저주

(본문 : 마가복음 11 : 12 - 14)

서 론 : 예수님은 이튿날 베다니에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시는 길입니다. 이튿날은 수난 주간의 둘째 날을 의미하기도 하며 이 날은 월요일에 해당되는 이른 아침입니다. 주님은 시장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멀리서 잎사귀가 무성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 나무 가까이 가셨습니다. 그러나 기대하셨던 열매는 없고 잎사귀만 무성했는데 주님은 이 나무를 향하여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는 저주를 내리셨습니다. 이 무화과나무에 대한 주님의 저주에는 여러 가지 교훈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율법주의적 외식신앙을 책망하시는 의미, 이스라엘의 멸망과 그의 회복에 대한 예언적인 의미, 그리고 넓게는 오늘날 교회에서 외형적인 모습은 그리스도인이지만 그의 생활에 아무런 열매가 없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심판의 경종의 의미도 들어있는 것입니다.

1.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의미

마가복음에 기록된 이 장면의 사건은 영적인 교훈의 의미와 연결짓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려운 면이 많이 있습니다.

(1) 무화과나무의 때가 아닌데 어찌하여 예수님께서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를 찾아가셨으며 그 나무를 저주하셨는가하는 의문이 제기됩니다. 예수님이 베다니에 가셔서 저녁을 드셨다는 말씀도 없고 또 이른 새벽에 베다니에서 나오시게 되었으므로 시장하셨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멀리 잎이 무성한 한 무화과나무를 발견하시고 혹 그 나무에 열매가 있을까하여 가까이 가 보셨습니다. 그러나 잎만 있을 뿐 기대하신 열매는 없으므로 그 무화과나무를 향하여 저주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13절 말미를 보면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었던 일에 대하여 “이는 무화과나무의 때가 아님이라”고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러면 예수님은 아직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을 시기가 아니었음을 알고 계셨을 터인데 무엇 때문에 혹시 열매가 있을까하여 그 나무를 찾아 가셨으며 아직 무화과 열매를 맺을 때가 아닌 나무를 향하여 저주를 내리신 것일까? 이런 의문점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 사건은 분명히 문맥에 의해서도 해석하기가 어렵고 그 내용자체로도 모순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이처럼 모순된 행동을 하셨으며 마가는 이 사실을 왜 소상히 기록했을까하는 것입니다. 여기엔 영적인 깊은 뜻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우리는 문맥에 나타난 모순에서 눈을 영적 교훈의 시야로 돌려야 할 것입니다.

(2) 이 같은 예수님의 행동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알고 있지만 아직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받을 때가 아님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나무입니다. 무화과나무의 결실은 여름이 와야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들에게 있어 여름은 아직 요원한 일임을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아직 그들이 기대해 온 메시야 왕국의 시기가 오지 아니한 것입니다. 이처럼 때가 이르기도 전에 이스라엘은 그 나라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 육신적으로 시장하신 때였습니다. 예수님의 이 시장하심은 또한 영적으로 이스라엘을 향한 구원의 열망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이 참으로 회개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들이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맺기를 원하셨으며 자기들의 메시야를 영접하므로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같은 주님의 열망을 채워주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메시야인 예수를 배척했고 결국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아직 그들에게 열매를 맺을 때가 아니었기 때문에 일어난 일들입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섭리가 그처럼 되신 일에 대하여 안타까이 여기시면서 탄식하신 것입니다.


2. 무화과나무에 내리신 저주

14절에 나오는 말씀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보여주는 예언적인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를 향하여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1) 예수님이 무화과나무에 내리신 저주는 시장 끼를 채워줄 열매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시장하셨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시장 끼로 무화과나무를 찾아가셨던 것처럼 기록된 것은 마가의 관점에서 본 것입니다. 예수님은 정말 그 나무에 열매가 없는 사실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시고 그 저주하신 까닭을 영적으로 교훈하시려는 의도로 그 나무를 찾아가신 것입니다. 무화과나무에 잎이 무성했다면 그 나무에는 당연히 열매가 달려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무화과 열매는 무화과 잎사귀와 함께 돋아나기 때문입니다. 이곳에서 마가가 “아직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고 말해 주는 것은 수확의 때를 말하는 것이지 무화과 열매가 맺어야 할 그 나무를 정당하게 인정한 말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 무화과나무에는 잎과 함께 달려 있어야 할 열매가 전혀 보이지 아니한 것입니다. 아마 이 나무는 무화과가 결실 할 때가 와도 수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잎과 함께 달려있어야 할 결실 할 수 있는 열매가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2) 이 나무에 대한 예수님의 저주는 곧 이스라엘의 멸망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마지막에는 아들까지 상속자라 하여 잡아죽이는 포도원 농부의 비유의 말씀을 말씀하시면서 그 결론으로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마21:43).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지 못한 이스라엘은 마땅히 그 나라를 빼앗기고 복음을 받아 드림으로 그 나라의 열매를 맺는 이방인들이 오히려 그 나라를 상속받게 될 일에 대한 교훈으로 무화과나무에 대한 저주를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스라엘의 넘어짐에 대하여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희는 믿음으로 섰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롬11:20). 20절에서 예수님의 저주대로 이 무화과나무는 뿌리로부터 말랐다고 했습니다. 이 교훈대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버린바 되어 주후 70년에 뿌리째 말라 뽑힌바 되어 그 후 2천년간이나 흔적조차 없어져 버렸던 것입니다.

(3) 성경은 뿌리째 마른 이 무화과나무가 하나님의 권능에 의해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는 열매”의 시기가 온다는 사실에 대하여 예언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종말에 되어질 모든 징조에 대한 말씀에서 의미심장한 말씀을 들려주신 적이 있습니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영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고 하신 것입니다(막13:28-29). 예수님의 이 비유의 말씀에는 두 가지 의미가 들어가 있습니다. 하나는 아직까지 말씀하신 모든 종말의 징조가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무화과나무의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알 수 있듯이 주님의 재림이 가까운 줄 알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곳에 등장하는 무화과나무는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는 나무로 보여 주셨습니다. 이 나무는 새롭게 움이 돋아나는 무화과나무입니다. 그러면 이 나무의 뿌리는 어디에 박고 있는 것입니까? 바로 예수님이 찾아가셔서 열매를 구했으나 구하지 못하시므로 저주하신 그 무화과나무를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 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한 이유는 “아직 무화과나무의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었지만 그 무화과나무는 영영히 버림받은 나무는 아닙니다. 이 일에 대하여 바울은 이처럼 말씀해 주었습니다. “저희도 믿지 아니하는데 거하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얻으리니 이는 저희를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고 했습니다(롬11:23).

성경에는 이스라엘이 믿음으로 열매를 맺힘으로 구원에 이르는 날이 온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 시기가 바로 예수님의 재림의 시기가 될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이제부터 너희는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고 하신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마23:39). 바울도 이스라엘의 멸망과 그들의 회복에 대한 비밀에 대하여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시기에 대하여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킬 때”가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롬11:26-27).

그리고 무화과나무로 등장하여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는 시기는 어떤 면에서 이스라엘이 영토 적으로 회복된 역사적 시기로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의 모든 예언은 이스라엘의 회복의 시기는 인류의 종말의 징조라고 예언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사11:11-12, 렘31:8, 암9:14-15, 겔38:8-9, 슥12:10-14, 행1:11, 롬11:25-27).

결 론 : 또한 이 말씀은 그 당시에는 이스라엘의 율법주의자들과 오늘에는 교회의 외식주의자들에게 주시는 경종이 되겠습니다. 나무에 잎사귀가 많은 것은 겉모양의 꾸밈을 말합니다. 형식이요 외식적 생활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내부에는 값진 것이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잎사귀를 보고 판단하심이 아니요 그 열매를 보고 판단하십니다. 열매를 맺는 백성만이 그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 69≈ 예수님의 성전 청결 작업

(본문 : 마가복음 11 : 15 - 18)

서 론 :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지 이틀째 되는 날입니다. 그러므로 이 날은 예수님이 고난받으실 고난 주간의 이틀째 되는 날이 되겠습니다. 주님은 이 날도 어제와 같이 성전에 들어가셨습니다. 그가 성전에 들어가셔서 하신 일은 유대인들을 격분케 하는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이 같은 성전 청결 작업은 이번이 두 번째입니다. 그의 공생애의 초기에도 이 일을 하셨습니다(요2:13-22). 그러나 이번에 하신 일은 예수님이 받으실 고난과 직접적인 연관을 가지는 계기가 된 사건입니다. 이 일로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어떻게 멸할까 꾀하고 이 일을 시발점으로 예수님을 죽이기 위한 음모가 급속도로 진행되어 갔습니다.


1. 교회를 살피시는 예수님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셔서 이처럼 성전 청결 작업을 하신 일은 우리들에게 교훈해 주시는 의미가 큰 것입니다.

(1) 예수님은 교회를 살피시는 분입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헤롯에 의해 건축되었고 불의한 대제사장들이나 서기관들에 의해 운영되어 왔지만 그러나 예수님은 이곳을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여러 가지로 더럽혀 있는 성전까지도 사랑하셔서 그곳에 깊은 관심을 가지시고 청결의 채찍을 내리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당신의 교회를 부지런히 살피시는 모습을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특히 계2:1절을 보면 주님은 그의 오른 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다니시는 분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일곱 금 촛대는 지상의 모든 하나님의 교회를 말하고 일곱 별은 그 교회에서 주님을 대신하여 주의 양 무리들을 양육하는 주의 사자들을 가리킵니다. 주님이 일곱 금 촛대 사이를 다니시는 일은 주님의 교회를 부지런히 살피시는 모습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처럼 교회를 살피시는 이유는 어디 있습니까? 그 교회로 온전함을 보전하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셨습니다. 그곳에 주님의 이름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며 주님께서 그의 피로 사신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교회를 살피신 후, 행한 대로 갚으시는 일을 하시는데 악을 행한 자는 심판하시고 선을 행한 자는 칭찬하시며 보상해 주십니다.

(2) 예수님은 성전에서 바른 예배를 드리는가의 여부를 살피시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셨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셔서 모든 면을 살피시고 구석구석을 살펴보셨지만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가 한 명도 없음을 발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성전 청결을 위한 분노의 채찍은 여기서 나오게 된 것입니다. 마땅히 하나님을 경배해야 할 장소에서 하나님을 경배하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더럽고 추한 모습을 보였을 때 참으실 수가 없으셨던 것입니다. 이런 곳은 마땅히 청결해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많은 재물을 가지고 왔을 때 그들의 재물에 나타난 그들의 마음의 더러움과 추함을 보시고 “너희의 무수한 재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이나 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고 하셨습니다(사1:11).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 참 예배를 드리지 않고 그저 몸만 보이러 오는 형식적인 경배를 가장 미워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제물을 헛된 제물이라고 책망하시면서 다시는 내 앞에 가지고 오지 말라고 거절하셨습니다.

(3) 주님은 성전에서 악을 행하는 여부를 살피십니다. 하나님은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한다고 하셨습니다(사1:13-14). 절기 때마다 성전에 모여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악을 도모하는 일이 이스라엘의 대제사장들이나 서기관들의 하는 일이었습니다. 악이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영광을 구하며 하나님의 교훈을 저버리고 자기들의 외식적인 행실과 가식적인 가증한 허례허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같은 헛된 그들의 경배를 탄식하시면서 “너희가 내 단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말1:10).

2. 성전 청결 작업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신 시기는 유월절을 몇 일 앞두고 있었으므로 이른 아침부터 분비는 혼잡 상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유월절은 외국에서 살고 있는 유대인들도 이 민족적인 절기를 고국 땅에서 지내기 위해 몇 일전부터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그 모이는 곳이 예루살렘 성전이 그 구심점이었기 때문에 유월절을 지내기 위한 준비로 예루살렘 성전은 대 혼잡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1) 예수님은 성전 안에서 벌어져서는 안될 일을 보시게 되었습니다. 유월절을 마지하기 위한 경건한 준비로 분주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전 안에는 제물로 사용할 각가지 짐승들을 매매하는 자들, 외국에서 돌아와 성전세를 바치기 위해 돈을 바꾸려는 사람들과 돈을 바꿔주는 환전상들, 비둘기파는 자들로 분볐는데 성전은 완전히 이들 장사치들로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원래 예루살렘 성전은 신성한 곳으로 이 같은 장사터전으로 허용될 수 없는 곳입니다. 감람산 주변에 외국에서 돌라온 나그네들을 위한 환전이나 제물로 바칠 짐승들을 매매하기 위해 서너 곳의 시장이 서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 시장에서의 수입의 일부는 산헤드린의 관할에 두었다고 하는데 이런 장사에서 얻어지는 이익이 많은 것에 탐심을 품게 된 대제사장 가야바가 성전 뜰 안에 시장을 개설하도록 허락해 주므로 매매의 허가에서 오는 많은 이권과 이익을 챙길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후의 예루살렘 성전은 완전히 장사꾼들의 시장터전이 되어버려 각종 짐승의 냄새와 물건을 사고 파는 사람들의 흥정과 고함소리로 시끄럽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이 같은 환경 속에서 예루살렘 성전 안에 발을 드려놓으시게 된 것입니다.

(2) 예수님은 더럽혀진 성전의 청결 작업에 들어가셨습니다.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셨습니다. 무엇을 가지고 쫓으셨는지는 몰라도 그들을 내 쫓는 엄위하신 주님의 모습은 뭇 사람들에게 큰 두려움을 주었을 것이고 그들은 주님의 명령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또 돈 바꾸는 자들의 상을 엎으셨습니다. 그리고 비둘기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습니다. 비둘기는 가난한 자들이 하나님께 드릴 제물이지만 이것도 성전에서 파는 일을 용납 받을 수 없었습니다.

(3) 예수님은 이처럼 분노의 청결 작업을 하시면서 “기록된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고 책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강도들의 소굴이 되었다는 주님의 책망은 지나친 말씀이 아닙니다. 장사꾼들은 속여 팔았고 대제사장들이나 서기관들은 불법적인 방법으로 장사꾼들로부터 돈을 수탈했습니다.


결 론 : 이 광경을 본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을 너무나도 놀랬으며 이 어처구니없는 일에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예수님의 엄위하신 권위 앞에 감히 도전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곡 비상회의를 열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의제는 “예수를 어떻게 멸할까”하는 모의였을 것입니다. 여기서 멸할까하는 말은 그들의 거짓된 모함과 불법적인 음모가 개재된 것을 들어내고 있는 표현입니다. 이때부터 그들에 의해 예수님이 죽음을 당하시게 될 계획이 착착 진행되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 70≈ 받은 줄로 믿는 기도의 능력

(본문 : 마가복음 11 : 20 - 24)

서 론 : 복음서를 보면 한가지 사건은 그 한가지로 마쳐지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을 통해서 다른 또 하나의 교훈을 주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님이 저주하신 무화과나무의 경우도 이곳에서 기도의 능력과 연결되는 교훈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아침에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는 길에서 주님이 저주하신 그 무화과나무가 뿌리로부터 마른 것을 보고는 베드로가 아침의 일이 생각나 주님께 묻게 되었습니다.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주님의 저주가 인간이 아닌 식물에까지 미친 사실에 놀라면서 신기한 듯 물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일을 주님께는 이상할 것도 신기할 일도 아닙니다.

1. 하나님을 믿으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화과나무의 되어진 일을 들으시고 기도의 권능에 대하여 말씀하시기 전에 먼저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신 뜻은 하나님은 능치 못하심이 없는 분이시므로 그를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구하는 자에게 그대로 임한다는 사실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1)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먼저 우리의 기도에서 나타난다는 사실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씀을 들려주신 후, 곧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무한하신 능력자이십니다. 그 능력이 또한 믿는 자의 기도에 그대로 나타난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하나님 앞에 구하면 그대로 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면서 능치 못하게 이루실 대상을 비유적으로 산을 바다에 던지는 것으로 나타내셨습니다. 이 같은 일은 인간적인 방법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 같은 일을 능히 행하실 수 있다고 믿는 자에게도 이루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물론 불가능한 것을 하나님은 하신다고 하는 하나의 비유이지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면 하나님은 정말로 그렇게 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믿는 것입니다. 홍해를 바람으로 갈라 이스라엘을 건너게 하신 모세의 기도, 해와 달을 중천에 멈추게 하신 여호수아의 기도는 바로 이 같은 사실을 증명해 주는 실제적인 사례입니다.

(2) 그런데 예수님은 이곳에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기도가 어떤 것인가에 대하여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이란 단서를 붙이셨습니다.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는다는 말은 우리의 기도의 내용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간구하는 기도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성취될 것으로 믿는 믿음을 가리킵니다.

이런 기도는 아무 때나 되는 일도 아니고 누구나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는 믿음”은 먼저 그 기도부터 자신의 정욕적인 요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에 표적을 맞추는 기도일 때 가능한 것입니다. 이 같은 기도를 할 수 있는 사람은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믿고 있으며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의지하므로 하나님의 뜻만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다른 또 한가지를 더 첨가하셨는데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이라고 하셨습니다. 의심이란 말의 원어적 의미는 ‘혼돈된 결정’ 또는 ‘사리 분별이 엇갈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말은 자신의 구하는 기도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계속적으로 구하지 못하는 상태의 마음가짐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이와 반대의 믿고 구하면 이란 ‘믿고’란 원어는 한번 믿은 믿음을 계속적으로 지속하는 상태의 믿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야고보 사도는 약1:6-8절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고 했습니다.

의심이 나쁜 것은 의심하는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의심은 하나님께 대한 불신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언제나 믿음,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바탕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믿음이 결여된 간구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의심은 하나님의 권능에 도전하는 사탄의 최대의 무기입니다. 의심을 이기는 길은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의뢰입니다. 말씀을 믿고 그 말씀으로 사탄과 싸우는 일입니다.

2. 결정적인 승리

주님은 결론적으로 기도의 승리의 비결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그대로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1)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받은 줄로 믿으라는 말은 받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직 받지 못한 상태에 있다고 해도 받은 줄로 믿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기도에는 즉각적인 응답의 기도와 미래 적인 응답의 기도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시간과 공산을 초월하고 계시는 분이심으로 그 기도가 언제 응답되어도 하나님 편에서는 동일한 응답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생각으로 늦을 뿐,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늦은 것도 아니요 빠른 것도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이삭에 대한 기도의 응답은 25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지속적으로 믿음으로 결과적으로 승리했습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이 같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처럼 표현했습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고 했습니다(롬4:18-21).

(2) “그리하면 그대로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믿음의 기도는 반드시 응답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주님은 그 기도가 이루어지는 시기를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있어서 응답의 시기는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응답해 주실 가장 좋은 시기가 언제인가를 알고 계시며 우리에게 가장 좋은 시기에 응답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의 응답이 더디다고 믿음의 기도를 드리지 못한 것으로 생각해서도 안됩니다.

그러면 받은 줄로 믿는 기도란 어떤 기도입니까? 낙망치 않는 기도입니다. 불의한 재판장에 대한 어느 가난한 과부의 간구에 대하여 비유로 말씀하신 예수님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18:6-8).

다음에 받은 줄로 믿는 기도란 계속하는 기도입니다.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가라사대”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기도란 응답 받기까지 계속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음 세 번째로 받은 줄로 믿는 기도는 감사가 따르는 기도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했습니다(빌4:6-7).

결 론 :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은 무한합니다. 그러나 그 무한하신 능력은 오직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만 그렇게 나타납니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의 좁은 믿음으로 제한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살아가지 못하면 우리의 생애는 사탄의 공격으로 얼룩져 많은 상처를 입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의뢰하면 능력의 원천이 되신 그 하나님으로부터 능력을 공급받아 모든 일에 넉넉히 이기는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 71≈ 기도와 죄

(본문 : 마가복음 11 : 25)

서 론 : 예수님이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뿌리로부터 마른 것을 본 베드로로부터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고 한 말을 들으신 주님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기도의 능력을 말씀하시면서 사람이 믿음의 기도를 드리려면 상대방의 혐의에 대한 용서가 앞서야 한다는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기도에 여러 가지 방해요소가 있지만 그 중 가장 근원적인 것이 하나님께 대한 믿음임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믿음이 방해를 받는 요인은 무엇인가?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우리의 사랑과 연계시킨 것입니다. 이 사랑은 내 형제나 이웃의 혐의에 대한 용서와 결부시키신 것입니다.

1. 죄와 용서

우리의 죄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회개하므로 은혜로 사하심을 받지만 우리가 하나님 앞에 회개할 때 먼저 선행해야 할 일이 있는데 그것이 곧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한 올바른 처리에 있다는 사실을 밝혀주신 것입니다.

(1) 그리스도인의 생활에는 이 죄에 대한 바른 처리문제가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죄의 용서에는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만이 관련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에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란 말씀에서 죄의 용서에는 양면성이 따른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마6:12).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후, 이 말씀에 대한 해석으로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우리의 생활 중에서 우리들의 죄만 처리되었다고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하여 바른 처리를 하지 못하면 결과적으로 우리의 죄까지도 처리되지 못한 상태로 있다는 사실을 경종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 같은 일은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를 통해서 더욱 상세하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자는 빚을 갚아야 할 임금에게 자신을 불쌍히 여겨 주실 것을 사정해서 탕감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우리들 죄에 대한 회개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 회개를 통해서 죄의 사유함을 받은 사실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의 빚을 진 동관 하나를 만났을 때 그 동관이 자기를 불쌍히 여겨줄 것을 그 사람에게 빌었지만 그 사람은 그같은 동관의 간구를 무시하고 그 동관을 붙잡아 빚을 갚으라고 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런데 이 소문이 자기의 빚을 탕감해 준 임금에게 들렸습니다. 임금은 옥졸들에게 명하여 그 사람을 붙잡아 빚을 다 갚도록 옥졸들에게 붙였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결론적으로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고 하신 것입니다(마18:22-35).

이런 주님의 말씀으로 미루어 볼 때 우리는 우리의 형제들과 매일 부닥치는 생활에서 서로 범하기 쉬운 죄 문제에 대하여 성경적인 바른 지식을 가지고 처신해야 하는 것입니다.

(2)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간구에는 형제와 나와의 죄에 관한 문제가 많은 작용을 한다는 사실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일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제물을 드리라.” 본문에 나온 말씀을 보면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의 원어의 뜻은 ‘자신이 누구와 불화 하거든’이란 말입니다. 다른 번역성경을 보면 ‘마음 상한 일이 있거든’ 또는 ‘서로 적대관계에 있거든’ ‘등진 일이 있거든’이란 등등의 여러 해석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이 나에게 범죄한 일이 있을 때의 일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혐의가 있거든”이란 말씀과 “너희 허물”이란 말씀을 동일하게 보시는 것으로 본문에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엄밀한 의미에서 이 같은 일이 왜 하나님 앞에 죄가 되느냐는 문제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상대방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는 일은 그 자체가 하나의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죄는 세상사람들의 죄와 분명히 한계선이 그어져 있습니다. 세상사람들의 죄의 관념은 양심이나 율법적인 면에서의 죄이지만 그리스도인의 죄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율법의 대요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용서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만약에 용서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면 그 자체가 하나의 범죄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의 죄를 용서치 않는 일은 그 자체가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죄가 됩니다. 이 같은 죄악을 마음에 품은 상태로 하나님께 간구해 보았자 믿음의 기도가 나올 리 없는 것입니다. 죄악을 품고 기도하기 때문에 응답이 따를 수 없는 것입니다.

2. 죄에 대한 우리의 태도

우리가 하나님의 응답을 받는 믿음의 기도를 드리려면 우리 마음속에 죄악을 품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1)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는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혐의라고 나와 있는 죄는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로 그 사람과 나와의 관계된 혐의를 말합니다. 원망들을 만한 일이거나 오해된 일, 어떤 언쟁이나 다툼에서 나온 일을 당했을 때 그것을 용서해 주라는 뜻입니다. 용서한다는 말은 피차에 감정을 풀고 화목을 이루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일에 어떤 재산상에 중대한 피해가 있을 때, 그것을 포기하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빚은 갚아야 하고 받아야 하지만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은혜롭게 해결해야 하며 결코 세상 사람들의 방법으로 싸워서는 안됩니다.

다른 또 하나의 혐의란 자신과는 상관이 없지만 그 사람의 죄에 대한 용서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와 사람의 용서와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비록 하나님 앞에 큰 죄를 범한 사람이라도 우리는 그 사람의 죄에 대하여 용서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런 용서는 사랑으로 그 사람의 허물을 덮어주는 일이지 근본적인 죄의 사유는 아닙니다. 죄의 사유는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간음 중에 잡혀온 여인을 향하여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셨습니다(요8:11). 비록 하나님이 정죄한 죄인이라도 우리는 정죄할 권한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악한 누룩이 우리 중에 퍼질까 경계하되 불쌍히 여겨야 하며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2) 용서는 사랑의 극치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그 사랑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사랑은 그의 독생자의 죽으심을 통하여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신데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롬5:8). 우리의 사랑의 생활은 우리에게 죄지은 자의 허물을 용서해 주는 열매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했습니다(벧전4:8).

여기서 주님이 말씀해 주시는 의도는 우리가 이처럼 형제의 허물을 덮어주고 그 혐의를 용서해 주며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생활을 하면 우리는 담대한 믿음의 사람이 되어 우리가 구하는 바의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의 용서의 확신은 바로 형제의 혐의를 용서해 주는 것으로 확실한 증거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용서하여 주시리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같은 죄의 용서는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중생한 후의 생활에 나타나야 할 열매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죄든지 우리의 죄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방해하며 우리의 기도에 믿음의 능력을 빼앗고 하나님과 원수의 담을 쌓게 하는 악한 요소가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예레미아 선지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너희 허물이 이러한 일들을 물리쳤고 너희 죄가 너희에게 오는 좋은 것을 막았느니라”고 책망했습니다(렘5:25). 잠28:14절에서 말씀하시기를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결 론 : 우리는 그 어떤 죄라도 품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 죄가 나를 정죄하고 그 죄가 나에게 부끄러움을 주고 그 죄가 나를 하나님 앞에 송사하는 것입니다. “서서 기도한다”는 말은 기도하는 일반적인 자세를 의미해 주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주로 서서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죄를 용서받기 위한 기도이건 그 어떤 응답을 받기 위한 기도이건 기도에는 먼저 죄의 사유함을 받아야하며 이때 하나님께 대한 올바른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형제에 대한 혐의의 용서도 그 중에 크나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누구에게 혐의가 있거든 먼저 용서하므로 그 문제를 해결하는 자세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놀라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우리의 기도에 작용할 것입니다.

≈ 72≈ 요한의 세례와 주님의 권세

(본문 : 마가복음 11 : 27 - 33)

서 론 :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사람들의 ‘호산나’를 외치는 찬송소리와 함께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지 사흘째 되는 날입니다. 그러니 주님이 나귀를 타시고 메시야로서 입성하신 일과 성전을 청결케 하시기 위해 입성하셨던 일과 본문에서 다시 세 번 입성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전날 예수님이 성전 안에서 장사꾼들을 내어쫓으시며 “기록된 바 내 집을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고 진노하셨던 것입니다. 이에 대제사장들은 채찍을 드시고 진노하시는 예수님의 엄위하신 모습과 자신들이 하나님의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든 일에 대한 양심의 가책으로 어안이 벙벙하여 미쳐 대책을 세울 겨를도 없이 넘어갔지만 그들은 이 일을 계기로 “예수를 어떻게 멸할까 하고 꾀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 다음날에도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이 성전에 나타나신 것을 본 그들은 이 좋은 기회에 예수님을 책잡아 고소거리를 만들려는 의도로 예수님을 향하여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누가 이런 일 할 이 권세를 주었느뇨”고 따진 것입니다.

1.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누가 이런 일 할 이 권세를 주었느냐”는 그들의 질문에는 두 가지 의도가 있었습니다.

(1) 첫째는 그들은 주님을 향하여 “당신에게 무슨 권세가 있기에 그같은 일을 행하느냐”는 질문입니다. 그들의 이 같은 질문은 물론 함정이 깔려 있는 질문입니다. 감히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와 채찍을 들고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며 신성한 성전을 강도의 굴혈 운운하는 언동은 대제사장이나 서기관이라 할지라도 감히 하지 못할 일입니다. 그런 일을 당신은 무슨 권세로 하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권세를 행하실 수 있는 권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을 자신의 몸과 비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향하여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요2:18-20). 그는 성전에서 친히 경배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시기에 그런 일을 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이십니다. 그러므로 대제사장이나 서기관들은 못해도 예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입에서 자신이 이 같은 권세를 행할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이 나올 수 있기를 기대했던 것입니다. 만약 자신들의 의도대로 예수의 입에서 그같은 말이 나왔다면 그들은 아마 쾌재를 불렀을 것입니다. 그 이유로 그들은 예수님을 산헤드린 법정에 세우고 주님을 죽이려던 그들의 음모를 성사시키려고 했을 것입니다.

(2) 다음에 두 번째는 “누가 이런 일 할 이 권세를 주었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은 예수님의 이 같은 권세가 대제사장이나 서기관이나 산헤드린 공회로부터 받은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왜 이 같은 질문을 한 것입니까? 예수님은 분명히 이 같은 권세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고 대답할 것으로 짐작했기 때문에 만약 그같은 대답을 들을 경우, 그들은 예수님을 참람하다는 죄명으로 고소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 입에서 이 같은 질문에 대한 대답을 빨리 듣기를 원했습니다.

2.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서 왔느냐?

예수님은 이런 그들의 질문의 저의를 아시고 이 질문에 담겨있는 함정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을 모함하려고 하는 유대인들의 간계에서 나온 모든 질문에 예수님은 지혜를 쓰셨습니다. 이 같은 경우에 예수님은 언제나 그들의 음모에 그들 스스로가 올무에 걸려들게 하시므로 그들이 파 놓은 함정에 그들 스스로 빠지게 하셨던 것입니다.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특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리심을 보인다”고 하셨습니다(시18:26). 이들은 주님께 사특했으므로 주의 거스리심을 보이신 것입니다.

(1) 이런 질문을 받으신 예수님은 그들이 상상치도 못했던 이상한 질문을 그들에게 던지셨습니다. 그 질문이란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무르리니 대답하라 그리하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내게 대답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예상외의 질문에 어리둥절했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할지 이에 그들은 아직까지 득의 만만하여 예수님을 고소하려든 공격적인 방향에서 자신들에게 어려움의 화살이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심히 난감한 입장에 서 있게 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세례 요한을 미워했습니다. 그 이유는 요한이 자신들을 매도하며 모욕했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그들을 향하여 “독사의 새끼들”이란 표현으로 그들의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세례 요한이 이스라엘의 선지자임을 부인하지 못했습니다. 요한은 자신에 대하여 물으려고 찾아온 유대인들을 향하여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는 요한의 증거를 그들은 외면할 수가 없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 때 많은 유대인들이 가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으므로 유대인들은 세례 요한을 하나님께로서 온 선지자로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난감해 한 것은 만약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 온 것이라고 대답한다면 자신들이 요한을 믿지 않고 요한의 세례를 거부한 일에 대하여 변명할 수가 없고 그렇다고 만약 요한의 세례가 사람에게서 온 것이라고 하면 요한을 선지자로 믿고 있는 유대인들의 질타를 받을 것이 확실하므로 이렇게도 저렇게도 대답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모여 서로 의논한 결과 가장 무난한 답을 모색해 냈는데 그것은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고 대답했습니다.

(2) 예수님은 그들의 알지 못하노라는 대답을 들으시고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원래가 예수님으로부터 올바른 답변을 들으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대답에서 책을 잡아 예수님을 죽이려는 음모를 성사시키려는 악의적인 의도에서 이런 질문을 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메시야관에 대한 잘못된 지식이 그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만들었으며 그들의 명예와 지위와 이권이 그들의 신령한 눈을 멀게 하여 눈앞에 둔 메사야를 바라볼 수 없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결 론 : 예수님은 물론 이제 잠시후면 자신이 어떤 죽음으로 마지막을 마칠 것인가에 대하여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때까지 실로 하실 일이 너무나도 많았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바로 그때가 이를 때까지 예수님은 그의 남은 사역에 충성하실 것입니다. 우리들도 진리의 말씀에 어두우면 우리의 메시야에 대한 올바른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우리들이 바리새인들처럼 명예나 세상 물질에 눈이 어두우면 신령한 주님을 소홀히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의 지도자이면서도 믿어야할 세례 요한을 배척하므로 회개의 기회를 상실해 버렸고 끝내는 그가 증거한 메시야까지 져 버렸습니다. 우리는 우리들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우리를 정결케 하시는 주님에게 그들과 같은 자세를 가지고 스스로 멸망의 길을 걸어가면 안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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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2장

◆ 밤중소리 01-09 | VIEW : 556

≈ 73≈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예수

(본문 : 마가복음 12 : 1 - 12)

서 론 : 유대인들이 버린 예수 그리스도가 만민의 구원의 주가 되게 하신 일은 하나님이 하신 기이한 일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포도원의 비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거역하여 그들의 회개를 위해 보내신 하나님의 종들을 다 죽이고 마지막에는 하나님이 사랑으로 보내신 그의 아들마저 죽일 일에 대한 유대인들의 패역성과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이 죽인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살려 내시는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집을 짓는 거대한 사역의 모퉁이의 머릿돌로 세우시게 된 사실에 대한 예언적인 비유로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1. 포도원 비유의 대략

예수님의 이 포도원 비유는 그 역사적 배경을 이사야 5장에 두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교훈이나 유대인들과의 논쟁에서 가끔 비유로 대응하셨는데 비유란 문자적으로 “나란히 놓은”이란 의미의 ‘파라볼레’로 어떤 어려운 문제를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 모든 사람들이 익히 알 수 있는 이야기와 연결시켜 깨닫게 하려는 화법을 말합니다.

(1) 이 비유에 등장하는 포도원은 이스라엘을 의미합니다.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이스라엘은 자주 포도원으로 비유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가리키는 포도원은 하나님의 교회를 상징하는 표현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다만 이스라엘이 교회의 상징으로써 처음 등장시키고 있기 때문에 그 주인에 의해 포도원이 헐리기까지는 이스라엘이 포도원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나오는 본문에는 육적 이스라엘인 포도원이 어떻게 무너지며 그 대신 새로운 이스라엘인 하나님의 교회로서의 포도원이 어떻게 세워지는가에 대한 해답이 분명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1절에서 예수님은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즙 짜는 구유자리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시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을 포도원으로 가꾸시고 새로운 열매를 맺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세우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에게 율법도 주시고 하나님을 섬기는 여러 가지 제사제도도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같은 아름다운 열매를 맺기를 원하시는 그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에게 그 모든 일을 맡기셨습니다.

(2) 2절에서 “때가 이르매 농부들에게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받으려고 한 종들 보냈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포도원의 주인이 추수 때에 그 소출을 거두려는 심정처럼 간절하고 안타까우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한 종을 보내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종이란 물론 선지자들을 말합니다.

이 종은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여 그들로부터 영적 열매를 거두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종의 외침에 무관심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저희가 종을 잡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비유의 말씀처럼 포도원의 농부로 세운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종들을 잡아 때리고 배척하고 핍박했습니다. 그들이 열매를 맺지 못한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3) 포도원의 주인은 이 같은 포도원 농부들의 배반과 횡포에도 불구하고 큰 인내를 가지고 그들의 열매맺기를 기다리시며 그 후에도 여러 번 다른 종들을 보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종들을 더욱 혹독하게 대접했습니다. “다른 종을 보내니 그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종을 보내니 저희가 그를 죽이고 또 그 외 많은 종들도 혹은 때리고 혹은 죽였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회개를 외치는 많은 하나님의 종, 선지자들이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에 의해 학대를 받았으며 죽임을 당했습니다.

(4) 주인은 최종적인 방안으로 더욱 큰사랑의 방법을 택하고 그들의 회개를 기다렸습니다. 이 비유에 대한 뜻이 너무나도 분명하게 6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오히려 한 사람이 있으니 곧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라 최후로 이를 보내며 가로되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하였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이 주인의 아들은 누구를 말하는 것입니까? 말할 것도 없이 예수님을 가리킴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인이 이처럼 기대한 그 농부들은 이 아들에 대하여 어떻게 조처한 것입니까? “저 농부들이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업이 우리 것이 되리라”고 하여 결국 그 아들을 잡아 죽여 포도원밖에 던졌다고 했습니다. 포도원 주인의 아들인 예수님은 이처럼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인 농부들로부터 이 같은 비참한 대접을 받으신 것입니다. 이에 대한 농부들의 말을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때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가야바라 하는 대제사장의 위문에 모여 예수를 궤계로 잡아죽이려고 의논했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마26:3-5).

2.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예수

여기까지가 포도원을 가꾸어온 이스라엘의 마지막 시기였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비유는 본격적인 본론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1) 9절에서 포도원 주인의 진노의 선언이 내려집니다.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뇨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리”고 선언했습니다. 이 같은 포도원 주인의 선언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포도원으로서의 사명을 버리시는 선언이시며 다른 한편 새로운 포도원으로서의 하나님의 교회가 탄생되는 놀라운 선언이십니다.

이제 도저히 돌이킬 수 없는 농부들의 배신에 그 포도원 주인은 이 포도원에 대한 새로운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그 주인은 첫째로 농부들을 진멸하겠다고 했습니다. 이 농부들의 진멸은 곧 이스라엘의 최후를 말합니다. 이 비유에 나타난 예언처럼 하나님 앞에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했던 이스라엘은 주후 70년경 로마의 디도에 의해 예루살렘의 파멸과 함께 온 세계로 흩어지게 되었으며 이 같은 일이 1948년까지 계속되다가 기적적인 독립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독립은 포도원의 재건이 아닙니다. 예언의 성취를 위한 일이며, 주 재림의 길을 열어놓은 일이며, 이스라엘의 남은 백성들의 구원을 위한 특별하신 배려이십니다. 그들은 이 같은 이스라엘의 회복에도 불구하고 계속적으로 그 아들을 배신하므로 마지막 시기에 가서 이 일에 대한 보응으로 다시 한번 적그리스도에 의한 환난이 70년대와 비슷하게 나타날 것입니다(슥14:1-5).

(2) “포도원을 다른 사람에게 주리라”는 말씀은 포도원의 주인으로서의 이스라엘의 특권은 살아지고 그 아들로 말미암아 새로운 포도원으로서의 하나님의 교회가 형성될 것을 의미하는 말씀입니다. 이로써 예수님이 요15:1절에서 언급하신 말씀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처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이운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 옳도다 저희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음으로 섰느니라”고 했습니다(롬11:18-19).

결 론 :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지도자들에게 이처럼 결론을 내려주셨습니다.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시118:22-23절에 나온 말씀의 내용인데 이 말씀은 바로 이 비유에 나오는 말씀처럼 그들에게 쓸모 없다고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버린 돌이신 예수님이 하나님에 의해 교회를 세우는 가장 요긴한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 몸이 되심으로 모퉁이의 머릿돌로서 하나님의 교회를 주관하고 계십니다.

≈ 74≈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

(본문 : 마가복음 12 : 13 - 17)

서 론 : 포도원 농부의 비유를 듣고 그 비유가 자기들에 대한 책망인 것을 알게 된 이들 유대인들의 지도자들은 심히 분개한 나머지 예수를 책잡으려는 더욱 간교한 책략을 세웠습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납세문제를 들고 말씀의 올무를 잡으려고 한 것입니다. 로마정부에 대한 납세문제에 있어서 반대입장에 있었던 바리새인들과 한편 로마정부에 대한 납세문제에 관대했던 헤롯 당원들을 한 무리로 하여 예수님께 파견하여 그들의 질문에 대한 답을 끌어내려고 한 것입니다.

1. 로마정부에 대한 유대인들의 세금문제

유대인들의 로마정부에 대한 납세문제는 헤롯의 아들 ‘아켈라오’가 물러선 후 ‘코포니우스’가 로마 총독으로 임명된 A.D 6년경부터 유대인들은 로마의 가이사 황제에게 인두세로써 세금을 바치게 되었습니다.

(1)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바로 이 유대인의 인두세였습니다. 인두세란 유대인 중 남자는 14세 - 65세, 여자는 12 - 65세까지 각기 한 데나리온씩을 로마 황제에게 바치는 세금을 말합니다. 로마정부는 이 같은 인두세 외에도 여러 가지 명목으로 세금으로 착취해 갔습니다. 이런 세금은 유대인들이 로마인들의 지배를 받고 있는 식민지 민족임을 나타내는 일이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불만은 대단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이 세금을 징수하는 세리들을 죄인시하면서 멸시했던 것입니다.

그런 반면에 이런 로마정부의 세금에 호의적인 태도를 가진 무리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이 헤롯당원들입니다. 이처럼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들은 종교적이나 정치적인 면에서 극과 극의 대결상태에 있었는데도 그들이 예수를 책잡는 일에 하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처럼 로마정부에 반기를 드는 반로마주의자도 아니요 그렇다고 헤롯당원들처럼 친 로마주의자도 아니었으므로 함께 매도하는 일에 의견의 일치를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2) ‘가이사’란 그 당시 로마의 황제에게 부쳐진 일반적인 칭호였습니다. 로마의 최초의 황제 이름이 ‘가이사 아구스도’였는데 그 후 로마황제에 대한 칭호를 ‘가이사’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로마황제는 ‘디베료’였습니다(눅2:1).

2.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들이 한패가 되어 예수님께 질문한 내용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하는 것이었습니다.

(1) 아 질문은 예수님을 시험하려는 목적으로 계획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고 책망하신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시험이란 말은 상대방을 넘어뜨리기 위해 사탄이 사용하는 시험으로 ‘페이라조’입니다. 이 단어는 예수님이 주리신 후 광야에서 마귀로부터 받은 시험과 동일한 말로 그들은 사단의 간교로 예수님을 넘어뜨리기 위해 이 같은 시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 질문은 ‘하라’ 혹은 ‘하지 말라’고 대답할 수 없는 함정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고 말씀하시게 된 것입니다. 만약 이 같은 이들의 질문에 대하여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다’고 말씀하신다면 예수님은 많은 유대인들로부터 분노를 사게 될 것입니다. 친 로마적인 정책을 선동하는 예수를 자신들의 메시야로 영접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리새인들이 노리고 있는 책략이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예수님이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불가하다’는 대답을 하신다면 그때는 로마의 가이사 황제를 반역하는 죄인으로 체포될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헤롯당원들이 노리는 간교한 올무였습니다. 이런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들 간의 합동작전은 그들의 계획으로 아주 성공적인 작품으

로 만족했습니다. 그들은 이 같은 질문을 던져놓고는 마음속으로 득의 만만했을 것입니다. 이제는 어느 곳에도 빠져 나올 곳이라고는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입을 지켜보면서 가부간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귀가 내놓은 시험의 미끼보다 더 온전하신 지혜로 이 함정에 도전하신 것입니다.

(2) 예수님은 먼저 그들에게 “데나리온 하나를 내게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데나리온은 로마의 화폐단위로 로마가 지배하는 모든 식민지에서 이 데나리온의 화폐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한 데나리온의 가치는 노동자 한 사람의 하루의 임금에 비교되고 있습니다. 데나리온은 동전으로 만들었는데 데나리온 안팎에는 로마황제의 화상과 글이 쓰여져 있었습니다.

(3) 예수님은 그들에게 분명한 답변을 주셨는데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에 나타난 의미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①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데나리온에 적혀 있는 화상과 글은 분명히 가이사의 것임이 확인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데나리온은 그 주인인 가이사에게 되돌려 주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말을 확대 해석하면 가이사가 통치하는 지역은 가이사의 명령을 따라 그에게 세금을 바쳐야 한다는 뜻입니다. 국가의 통치는 어느 한 개인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이사의 통치도 실인즉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전 세계에 민족이나 지역단위로 국가를 세우게 하시고 임의로 그 국가를 통치할 인물을 세우십니다. 애굽의 바로도 로마의 가이사도 그렇게 해서 세워진 인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아를 토기장이의 집으로 데려가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언제든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뽑거나 파하거나 멸하리라 한다고 하자”란 말씀을 주셨는데 이 말씀에서 모든 나라를 세우시고 멸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밝히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의 가이사 황제도 하나님께서 세우신 인물임에는 틀림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국가를 운영하기 위해 피통치자들로부터 세금을 받는 일은 당연한 일입니다(롬13:1).

② 만약 예수님이 이 말씀만으로 끝났다면 예수님은 분명히 바리새인들의 올무에 걸려 그들의 계속적인 공격을 받아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시아에게 바치라”고 하신 말씀과 함께 이 말씀보다 더 중요한 전제조건을 세우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것이란 말씀 안에는 가이사의 통치권도 들어가 있습니다. 가이사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 앞에 올바른 통치행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가이사는 신적인 경배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신적인 경배는 가이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이사의 데나리온에는 ‘황제 디베료, 신적인 아구스도, 존엄한 아들’이란 글이 적혀 있으므로 스스로 자신을 신적 위치에 올려놓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같은 예수님의 대답 속에 들어가 있는 참 뜻은 무엇입니까?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일이 당연한 것처럼 가이사는 하나님이 소유하고 계시는 영역을 침범해서는 안되며,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지 않을 때 가이사에게 형벌을 받게 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것을 가이사가 자기의 것으로 사용할 때(신적 경배 행위) 그도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하는 경종이 되는 것입니다.

결 론 : 과연 어떤 대답이 나올 것인가? 궁금히 여겼던 이들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의 무리들은 예수님의 이 같은 대답에 어안이 벙벙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뜻을 알 듯도 하고 모를 듯도 하기 때문에 또다른 질문을 던질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으로 책을 잡으려던 그들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이 같은 일을 계기로 그들은 “예수께 대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더라”고 했습니다. 기이히 여길 수밖에 없는 것은 자신들이 상상치도 못했던 대답이 나왔기 때문이며 이런 대답에 감히 항거할 근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 75≈ 부활한 자의 형체

(본문 : 마가복음 12 : 18 - 25)

서 론 : 우리는 성경에서 우리가 알고자하는 여러 가지 궁금한 일들이 이상한 방법으로 해석되어 우리에게 큰 깨달음과 기쁨을 줄 때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장차 부활한 몸을 입을 때 어떤 형체를 가질 것인가에 대한 많은 의문을 가져왔었는데 그 해답이 예수님을 책잡으려는 사두개인들의 가시 돋친 질문에 의해 시원스럽게 풀어졌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1. 사두개인들의 질문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부활문제에 대한 질문으로 예수님을 대단히 곤경한 처지에 몰아넣으려고 시도한 것입니다.

(1) 사도개인들이란 유대교의 한 분파에 속해 있는 사람들입니다. 유대교에는 당시 세 개의 이름 있는 분파가 있었는데 그 규모가 비교적 크고 전통적인 보수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바리새파가 있었습니다. 이들을 보편적으로 바리새인들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엣세네파가 있었고 이들 사두개파가 있었습니다. 사두개파의 역사는 꽤나 긴 편인데 이들은 대부분 사제들과 귀족층에 속한 유대교인들 중에 많았습니다.

이들의 신앙적 특징은 모세의 오경 이외는 성경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과 그들은 현세적인 신앙관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었으므로 장래적이고 영적인 사항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천사의 존재도 믿지 않았으며 더욱 부활에 대해서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부활에 관한 말씀을 종종 하셨고 특히 자신에 대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실 일에 대해 말씀하셨기 때문에 이들은 이 같은 예수님의 부활관을 허물어뜨리려는 악한 의도로 지혜를 짜내어 부활에 관한 괴이한 질문을 생각해 낸 것입니다.

(2) 그들은 예수님께 모세의 글에 있는 이스라엘의 특수한 혼인제도를 예로 들어 부활에 대한 질문을 했습니다. 그들의 질문의 포문은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이란 말로 시작이 됩니다. 이들 사두개인들은 성경 중에 오직 모세의 오경만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모세가 써주었다는 율법적인 조항에 힘주면서 자기들의 질문에 분명한 성경적인 대답을 해야할 것을 은연중에 압력을 가한 것입니다. 그들이 인용한 모세의 글은 신25:5-10절에 있는 이스라엘에게 주신 특별한 혼인제도인데 이 같은 혼인제도를 확대해서 실질적인 사건도 아닌 것을 억지로 꾸며 예수님께 어려움을 주려고 시도한 것입니다.

한 여자가 그의 남편이 후사 없이 죽었으므로 죽은 남편의 형제와 살게 되었는데 그도 후사가 없이 죽었고 결국은 일곱 형제들과 모두 함께 살다가 그래도 후사가 없이 모두 죽었는데 이 여자는 부활의 날에 일곱 형제들 중 과연 누구의 아내가 될 것이냐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사탄의 간계에서 나온 기발한 질문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사두개인들의 생각에는 모세가 이 같은 율법을 주었으므로 부활을 인정했다고 보지 않은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의 이 같은 질문의 배후에는 그 당시 유대인들의 생각해온 부활관이 반영되고 있는데 부활을 믿는 유대인들도 부활의 날에는 어느 정도 현세와 같은 생활이 계속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일설에 따르면 바리새인들은 부활을 믿었지만 부활 후에도 결혼생활을 긍정적으로 보았으며 만약 그들이 사두개인들로부터 이 같은 질문을 받는다면 첫 번째 남편의 아내가 될 것이라고 대답했을 것이란 견해도 있습니다.

이런 부활에 대한 생각은 지금도 어떤 신학자들에 의해 주장되고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말하자면 종말론적인 입장에서 앞으로 올 천년왕국에서의 생활에 대하여 그리스도인들이 변화 받은 몸으로 그곳에 들어가고 또 천국에 있는 모든 성도들이 부활하여 그곳에서 살게 될 때 그들은 부활한 몸이지만 어느 정도 육신적인 생활을 겸할 수 있을 것이란 착상입니다. 그들의 이 같은 주장이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는 성도들이 주 재림시에 모두 변화 받고 모두 부활한다고 믿기 때문에 천년왕국을 믿는다면 그곳에 들어가 살아갈 성도들의 생활이 2천년전의 바리새인들의 부활관과 같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이 부분에 대해서는 저자의 홈페이지 ‘www.bamjoongsori.org'에 있는 ‘첫째부활과 천년왕국’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2. 예수님이 밝히신 부활한 몸의 형체

이 같은 사두개인들의 질문에 예수님은 그들을 너무나도 한심스럽게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두 가지 면에서 책망하시면서 신비스러운 부활한 몸에 대하여 성경적 진리를 밝혀주신 것입니다.

(1)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한다”고 나무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먼저 성경을 알지 못한다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26-27절 말씀을 통해서 설명해 주신 바와 같이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에서 지적해 주셨습니다.

이처럼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했을 때 그들과 같은 오해가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고 하신 것입니다. 성경에 대한 오해는 이 두 가지 요인, 성경을 모를 때와 하나님의 능력을 모를 때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의 부활에 대한 오해가 바로 이런데서 나왔음을 주님이 지적하신 것입니다.

(2) 예수님은 부활한 몸에 대하여 너무나도 놀라운 말씀으로 대답해 주셨습니다.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 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장가나 시집을 안 간다는 말씀은 그 몸이 신령체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부활한 몸은 신령한 몸으로 변화 받은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신령한 몸은 마치 천사와 같은 상태의 몸이라고 밝히신 것입니다.

바울은 부활체에 대하여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고전15:42-44). 부활의 몸은 육신적인 요소가 전혀 없는 실제적인 영생의 몸입니다. 이 영생은 종국적으로 우리의 부활한 몸으로 성취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부활에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역시 고전15장에서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으로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고 했습니다(고전15:50-52).

이 같은 주님의 말씀은 인류의 부활이 인류 역사의 맨 마지막에 있다는 사실을 의미해 주는 것입니다. 적어도 전천년설을 따른다면 그리스도인들의 부활은 천년왕국이 지난 후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천년왕국이 지나기 이전,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전 성도들이 변화체가 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성도들이 모두 부활한다면 천년왕국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천년왕국은 지상에 천년간 이루어지는 지상의 왕국이 되는 것이 아니라 지상에 천국을 옮겨 놓은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결 론 : 우리는 사두개인들처럼 성경을 모르거나 하나님의 능력을 모르므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나 계시를 오해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장차 우리의 몸은 영화로운 몸으로 변화 받게 됩니다. 죽은 자들은 영화로운 몸으로 부활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신령한 몸으로 영생을 누리는 새로운 생애를 천국에서 누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때는 천사들과 같은 몸으로(실제로는 더 영화로운 몸) 우리의 생애가 새롭게 전개될 것입니다. 이 같은 부활이 실질적으로 나의 소망이 된다는 사실을 믿는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인들에만 주어진 크나큰 축복입니다.

≈ 76≈ 산 자의 하나님

(본문 : 마가복음 12 : 26 - 27)

서 론 : 예수님께서는 한 여인과 일곱 형제와의 결혼으로 인한 부활 때의 그 여인이 뉘 아내가 되겠느냐는 질문을 던짐으로 자신을 시험한 사도개인들에게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한데서온 오해가 아니냐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사람이 죽었다가 부활한 후의 세계에 대하여 천사와 같다고 하시는 영적 영화로운 몸임을 설명하신 후, 그들이 인용한 모세의 글을 인용하시어 그들에게 증거해 주셨습니다.

1.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사두개인들은 모세가 부활을 믿지 않고 있는 조상이며 자신들도 그 모세의 글에 의해 부활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하려고 했지만 그들은 오히려 모세의 글에 나타난 모세의 증거를 통해서 공격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1)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부활의 진리를 계시하셨으며 모세도 이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성경에 기록하므로 부활을 믿고 있었다는 사실을 증거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두개인들에게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떨기에 관한 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이 자신들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출애굽기 3장에 있는 말씀인 것을 알았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그 구절을 읽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고 하셨다는 말씀을 그대로 인용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말씀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이기에 부활을 부인하는 사두개인들에게 부활의 증거로 인용하신 것입니까? 유대인들은 “우리 하나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살아 계신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산 자의 하나님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출애굽기를 썼을 당시에는 이미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이나 모두 육신적으로는 죽어 무덤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불붙는 떨기나무 가운데 나타나셔서 모세에게 자신을 소개하실 때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자기를 소개하실 때 언급하신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 있어서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은 무덤 속에 묻혀 있는 죽은 과거의 인물인 것이 아니라 아직도 살아 있는 인물이란 사실을 밝혀주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사두개인들에게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의 육신이 살아 있다는 뜻의 말씀을 드린 것은 아닙니다. 그들의 육신이 죽은 사실은 그들의 무덤을 다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은 부활에 관한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실인즉 부활이 있다면 육신의 죽음은 죽음이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잠자는 것뿐입니다. 다시 살아날 수 있는 보장이 있다면 그 사람은 이미 죽은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고 하신 뜻은 아브라함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소망가운데 잠을 자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모세를 향하여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이 살아 있는 것입니다. 다만 육신적으로 지금 잠을 자고 있을 뿐입니다.

(2) 그뿐 아니라 영적으로는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천국에서 하나님과 친히 교제하는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생이란 말은 영원히 죽음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에 영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생명은 사람이 죽는다고 살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생명은 사람이 죽으면 그 육신을 떠나 하나님과 함께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고 했습니다(고후5:8). 이 같은 하나님의 섭리는 신약시대에 와서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도 이 혜택을 누렸습니다. 아브라함은 죽어서 그의 생명까지 땅에 묻힌 것이 아니라 몸을 떠나 주와 함께 하늘에 거하고 있기 때문에 언제까지나 하나님 앞에 살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있는 나사로의 비유를 통해서 이 같은 사실을 명백히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곳에서 사두개인들을 향하여 이런 말씀을 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이 모세에게 주신 이 말씀은 아브라함아나 이삭이나 야곱이나 모든 사람들이 장차 부활할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시려는데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시간이나 공간을 초월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들의 부활을 이미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여기서 ‘산 자’란 말은 생존자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산 자의 하나님”이란 생존하고 있는 모든 사람의 하나님이시란 뜻입니다.

(1) 하나님께는 지금 세상에 살아 있는 모든 사람들도 살아 있고 부활의 소망 가운데 잠자고 있는 모든 사람들도 살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덤에서 죽은 나사로를 살려내셨습니다. 야이로의 딸을 살리셨습니다. 만약 앞으로 그들에게 부활이 없다면 예수님은 그들을 살려내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 속에 있는 여러 계시를 깨닫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주신 말씀이라도 그 말씀이 가리키는 바가 무엇인지 알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부활에 관한 비밀 역시 그러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출애굽기의 인용은 부활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우리에게 제공해 주는 것입니다. 죽음이란 말은 인간적인 단어입니다. 하나님 안에는 죽음이 없고 오직 영생과 부활만이 있습니다. 영생은 죽어도 그대로 계속되는 생명이요 부활은 이 영생의 생명이 새로운 형태의 영화로운 몸으로 다시 살아나는 과정에 불과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견지에서는 모든 인류가 살아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같은 사실에 대하여 고전15장에서 이처럼 증거해 줍니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 외쳤습니다(고전15:54-55).

(2) 우리는 변화산에 나타난 모세와 엘리야의 경우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의 제자들과 함께 변화산에 올라갔을 때 제자들의 눈에는 희한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하늘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난 것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인도하든 중 모압땅 비스가산 꼭대기에 올라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을 바라보면서 죽은 사람입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이끄심을 받아 회오리바람을 타고 하늘 병거에 둘러싸여 하늘로 올라간 사람입니다. 한 사람은 죽어서 천국에 갔고 한 사람은 산몸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둘 다 변화산에 똑같이 영화로운 몸으로 하늘에서 내려온 것입니다. 엘리야의 경우는 그의 육체가 영화롭게 되었기 때문에 부활체와 같은 변화체로 지금 하늘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는 몸은 모압 땅 골짜기에 매장되었지만 그도 역시 영화로운 몸으로 주님 앞에 나타났습니다. 모세나 엘리야나 하나님 앞에는 모두 살아있는 사람들입니다. 모세에게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자기를 나타내신 하나님은 지금도 “나는 모세의 하나님, 엘리야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들은 모세와 같은 몸이 아니라 예수님이나 엘리야 같은 보다 영화로운 몸으로 변화 받거나 부활한 몸으로 천국에서 영원한 삶을 누리게 됩니다. 모세의 부활은 엘이야에 비해 시차문제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결 론 : 성경에는 어떤 한가지 문제에 대하여 한곳에서 자세하게 보여주지 아니합니다. 부활에 대한 비밀도 성경 여러 곳에 많이 깔려 있습니다. 부활문제는 특히 종말론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습니다. 사람의 부활은 인류의 종말에 있을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류의 최종적인 종말을 어느 시점으로 보느냐하는 신학적인 입장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천년왕국이 없다는 무 천년설의 입장에서는 물론 인류의 최종적인 종말이 주님의 재림시기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인류의 부활도 그 시점에서 이루어진다고 주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 천년설의 입장에서는 천년왕국이 끝나는 시점이 사실상의 인류의 종말이 될 것이기 때문에 부활론이 복잡하고 다양해지는 것입니다(이 부활문제에 대해서는 고전15장을 다룬 주석설교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 77≈ 계명 중에 첫째 되는 것

(본문 : 마가복음 12 : 28 - 34)

서 론 : 예수님을 곤경 속에 집어넣으려는 사두개인들의 부활에 관한 의도적인 질문은 흥미로운 질문이기는 했지만 그들의 의도하는 바가 예수님에 의해 산산조각이 난 것입니다. 이런 변론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던 한 서기관이 예수님께 한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 질문이란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서기관의 질문에 관한 답변에서 유대인들이 복잡하게 생각해 온 그 수많은 계명을 하나로 정리하시고 율법이 명시해 주는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의를 얻는 일에 지켜야할 조건으로 알고 지켰지만 사실인즉 율법이란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 사람과 사람과의 바른 관계를 제시해 주신 사랑의 법임을 이곳에서 밝혀 주신 것입니다.

1. 하나님께 대한 사랑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율법의 참뜻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율법을 계명대로 지키는 것이 참 생명을 얻는 길 인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이런 사고방식은 율법을 외식으로 지키는 한가지 죄를 더 가중시킨 데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신 근본정신은 오직 두 가지에 있었습니다. 주님은 이 두 가지 정신을 서기관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통해서 밝혀 주셨습니다.

(1) 예수님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하신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라고 하셨습니다. 서기관들이란 원래 글을 기록하는 사람을 의미하는데 구약시대에는 주로 제사장의 직무를 기록하는 직분 자를 가리켰습니다. 그런데 신약에 와서 서기관이란 이름이 율법사 또는 율법학자와 같은 의미로 해석되고 있는데 이들이 가지고 있는 율법에 대한 고도의 지식에서 부쳐진 이름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한 서기관이 예수님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입니까”란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 들려주신 말씀 중 첫째로 구분시킨 말씀이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나왔습니다.

율법은 십계명에 집약되어 있습니다. 이 계명에 대하여 유대인들에게는 사람 몸의 지체 수에 해당하는 248개의 규정령과 1년의 날 수에 해당되는 365개의 금지령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많은 양의 규정령이나 금지령은 모두 십계명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십계명 중 첫 계명부터 넷째 계명까지는 하나님께 대한 계명입니다. 이 계명은 하나님만을 섬길 것과 우상을 섬기지 말 것과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 것과 안식일을 거룩히 지킬 것에 대한 명령이며 이 명령에 따라 유대인들은 부수적인 여러 가지 장로들의 유전을 첨가하여 사람으로 지기 어려운 짐으로 만들어 놓았지만 이 같은 명령을 주신 하나님의 뜻은 바로 예수님이 밝혀 주신 말씀 안에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하신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우리 하나님은 유일하신 주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유일하신 하나님이란 표현에는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언약관계가 개재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심을 밝히셨으며 이 하나님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셨고 섭리하고 계시며 그분이 언약에 의해 이스라엘을 선택하셨음을 의미하는 말씀입니다.

(2) 예수님은 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네 마음을 다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마음이란 인간의 지, 정, 의를 포괄한 전 인격적인 표현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전 인격적인 사랑을 원하십니다. 목숨을 다하라고 하셨습니다. 목숨이라 ‘프쉬케’로 육체적 생명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있어서 적당한 한계점을 둘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버리기까지 해야 한다는 뜻으로 순교적인 사랑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법규에 얽매어 외식적으로 섬기는 일을 싫어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실 때 이 같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요구에서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이처럼 사랑한다면 하나님의 계명을 다 이루는 일이 된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2. 이웃에 대한 사랑

다음 율법의 두 번째 계명인 5계명부터 10계명까지 이르는 계명은 그 내용이 사람들에게 대한 계명으로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계명의 근본적인 바탕은 어디 있는 것입니까?

(1) 예수님은 이에 대하여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고 단정하셨습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우리의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한다면 율법에 무슨 조문이 들어있던 그 사람은 이미 율법을 다 이룬 사람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이웃이란 이스라엘이 생각했던 것처럼 자기 동족이나 계약적인 의미에 있어서의 특정한 민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적인 예화에서 하신 말씀처럼 우리가 일상생활 중에 당하는 모든 사람이 우리의 이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같은 이웃에 대한 사랑이 어디서 나오는 것입니까? 인간들에게는 이런 사랑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도 없으며 이웃에 대한 사랑도 없습니다. 우리의 죄는 우리로 이런 사랑에서 떠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과 원수의 자리에 이르게 되었고 이웃과도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복수해야 마땅히 여기는 자리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율법의 조문은 사랑의 조문이 아니라 우리를 정죄하는 조문으로 변했으며 우리에게 생명을 약속한 율법이 우리로 사망의 자리에 이르게 하는 안내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사랑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 아들을 십자가에서 희생하시므로 우리에 대한 사랑을 확증해 주셨고 이 사랑을 바탕으로 우리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같은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들로 이웃에 대한 사랑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우리들 마음속에 심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은 위로는 하나님께 대하여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셨고 이웃에 대하여 내 몸과 같이 여기며 사랑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이 사랑의 회복이 인간의 구원이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하는 사람들만이 내주하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이 같은 사랑의 회복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서기관의 지혜로운 대답에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도다”고 칭찬해 주셨습니다. 이 서기관은 외식하거나 예수님을 책잡기 위한 의도로 질문한 것이 아니라 진실한 마음에서 한 것이며 또 예수님의 대답이 자기가 생각하는 것과 동일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는 내심으로 고무되면서 예수님의 의견에 전적으로 찬사를 던졌던 것입니다. 서기관이 이처럼 대답하는 일은 바리새인들이나 제사장들의 율법적인 견해와 다른 것이었으므로 주님을 책잡으려는 무리들 앞에서 서기관의 신분으로 하기엔 대단히 큰 모험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를 칭찬하신 말씀은 그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갔다는 뜻이 아닙니다. 구원의 보장인 아니라 가깝다는 뜻입니다. 그는 분명히 영적인 분별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진리를 알려고 하는 진실함이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대답하심에 크게 공감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는 지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결 론 : 우리는 십계명을 어떻게 알고 있으며 어떤 마음으로 지키려 하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는 율법적인 계명대로 지키는 생활로 우리의 신앙적인 성장을 원한다면 반드시 실패할 것입니다. 사랑이 모든 문제를 해결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생활로 계명적인 율법이 아니라 계명보다 우선하고 계명을 능가하는 사랑의 법을 이루어야 합니다.

≈ 78≈ 그리스도와 다윗의 자손

(본문 : 마가복음 12 : 35 - 40)

서 론 : 메시야에 대한 잘못된 관념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배척하게 만들었고 이 같은 메시야관이 성경적으로 바르게 인식되기 전에는 그들이 메시야를 기다리는 소망은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이에 대한 바른 가르침을 주시려고 어느 날 성전에서 다윗의 자손과 메시야의 관계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 앞에서 질문을 던지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그들이 기다렸던 메시야가 다윗의 자손이라 함은 일반적인 해석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해석은 그리스도의 존재를 육신적인 다윗의 자손으로만 해석하기 쉬운 잘못을 범하게 됩니다. 사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서기관들의 이런 가르침의 영향을 받아 자신들이 소망하는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으로 오는 왕으로 인식되어 왔고 그가 오시면 이스라엘을 회복하고 새로운 왕국을 세울 것이라고 하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1.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냐?

이 같은 메시야관은 메시야를 이스라엘만의 메시야로 한정시켜 왔으며 그 메시야의 사역 역시 이스라엘의 회복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왕만으로서의 존재로 인식시켜 왔습니다. 사도들조차 예수님의 사역을 이스라엘의 회복과 연결시켜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고 묻는 어리석은 질문을 하게 되었고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에도 많은 군중들로부터 “호산나, 호산나”하는 외침을 듣게 되었던 것입니다.

(1) 예수님은 다윗이 쓴 시를 들어 다윗의 자손과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관계를 인식시키시려고 시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지적하신 성경은 서기관들이나 백성들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시편110:1절에 나와있는 다윗의 시입니다.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는 구절입니다. 이 시편에 나와있는 말씀은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예언한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친히 말하되”라고 말씀해 주심으로 다윗이 언급한 시편에 기록된 말씀이 성령에 감동한 말씀으로 하나님의 말씀임을 확인하셨습니다.

성령의 감동하심이 아니면 이 같은 예언적인 시를 다윗의 임의로 기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다윗의 글 내용이 하늘 보좌에서 일어난 일이며 그리스도와 하나님과의 대화내용이기 때문에 다윗이 자기 생각대로 기록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2) 이 시편의 내용 중 두 분이 같은 ‘주’의 이름으로 대화하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두 분은 분명히 같은 인물이 아니시며 그 중에 한 분이 그리스도이심을 나타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란 대화의 내용이 전개되어 나옵니다. 여기서 “주께서”라고 표현된 주와 “내 주께”라고 표현된 주는 두 분의 존재를 나타내 보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 주께”라고 한 내는 분명 다윗이 자가자신을 가리키고 있는 말입니다. 이 말씀을 헬라어 성경보다 히브리 원문을 보면 이들 두 분의 존재가 더욱 뚜렷이 나타납니다. “여호와께서 내 주께”로 나와 있습니다. 이것이 공동번역에는 개역 성경보다 더 알기 쉽게 “주 하나님께서 내 주님께 이르신 말씀”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 시편은 성부되신 하나님이 성자되신 예수님께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하여 이르신 말씀을 예언적으로 기록한 내용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 예언적 대화는 무엇을 의미하는 내용입니까? 이것은 예수님의 구속 사역의 완성과 그의 재림으로 말미암은 마지막 심판에 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 예언입니다. 이 같은 사실은 “내 우편에 앉았으라”는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마가는 그가 기록한 마가복음 끝에 가서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에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막16:19). 예수님은 그의 초림의 메시야적 사역을 마치신 후,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심으로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장차 하나님께서 ‘네 원수’라고 지칭된 사단과 그 일단의 무리들을 심판하시게 되는데 그때까지 앉아 계시다가 그가 심판주로 내려 오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이 기대해야 할 메시야가 누구이며 그가 하셔야 할 메시야적 사명이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메시야의 모습을 보여 주심으로 다윗의 자손을 훨씬 능가한 메시야의 신적 신분을 밝혀 주고 있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의 가르침은 절정에 이르셨습니다.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고 반문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 아니란 사실을 성경적으로 밝혀주시려는 의도에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결코 아니십니다. 성경에는 분명히 오실 메시야에 대하여 다윗의 자손, 다윗의 위를 이를 왕 등의 표현으로 계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마1:1절에서도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고 그의 족보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계시는 예수님의 육적 부모의 혈통적인 계보를 따른 것이지 결코 예수님의 태어나신 영적 기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이시므로 다윗의 혈통을 초월하신 분입니다. 다만 다윗의 자손인 요셉과 그와 정혼한 마리아의 몸에 성령으로 잉태되어 다윗의 가문에서 태어나셨기 때문에 다윗의 자손이라 부르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시하신 시편의 다윗이 글이 바로 그것을 증거해 주고 있으며 예수님은 이 글을 인용하여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다윗뿐 아니라 아브라함보다 먼저 계신 분이며 그뿐 아니라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을 창조하시고 만물을 섭리하시며 만물을 다스리시는 분으로 그의 시작은 끝이 없고 그의 마침도 끝이 없는 그런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주되신 그리스도께” 말씀하신 것을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다윗이 그리스도를 가리켜 “내 주”라고 부른 분이 어찌 그의 자손이 될 수 있겠느냐는 최종적인 결론에 그 자리에 있었던 서기관들은 입을 봉했고 백성들은 그의 기이하신 교훈과 가르침에 놀라 “백성이 즐겁게 듣더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지금도 역시 그때 그 당시의 이스라엘처럼 그들의 메시야 곧 그리스도를 다윗의 혈통적인 자손으로 오실 것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메시야는 모세와 같은 권능의 민족적 지도자로 혹은 다윗과 같은 왕권을 가진 이스라엘의 통치자로서의 메시야인 것입니다. 이 같은 메시야관으로 인하여 그들은 그들의 참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 박았고 하나님의 구원을 스스로 거역하였으며 그들의 이런 인간적 고집이 그들과 그들의 후손에게 말할 수 없는 고난을 안겨주었으며 앞으로 메시야가 나타나 그들이 그 앞에 회개하여 바른 신앙고백을 할 때까지 그들에게 미칠 환난은 그침이 없이 계속 될 것입니다.

2. 서기관의 외식과 그들이 받을 판결

예수님은 이 말씀을 마치신 후, 성경을 잘못 가르침으로 이스라엘로 참 메시야를 배척하게 만들고 있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외식하는 생활을 삼가라고 교훈하셨습니다.

(1) 하나님의 영광보다 자신들의 영광을 추구하는 서기관들의 행실을 삼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긴 옷을 입고 다닌다고 했습니다. 이 긴 옷이란 서기관들이 입는 흰 긴 두루마기 형태의 세마포로 짠 통옷인데 이 옷을 입고 거리를 다니면서 자신을 과시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또 시장에서 문안 받는 일을 좋아했습니다. 시장은 많은 사람이 모이며 왕래하는 곳입니다. 서기관들은 보통 랍비란 이름으로 백성들의 존경을 받아 왔으므로 시장거리에 나가면 이 같은 존경의 인사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또한 회당의 상좌를 앉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잔칫집에 가면 상석에 앉기를 원했습니다. 이처럼 서기관들은 자신들의 지위를 과시하면서 모든 사람들 위에 군임하여 존경과 영광을 받으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삼가라고 경계하셨습니다. 그들의 그같은 행동에 동조하거나 부러워 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2) 이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이들 서기관들은 율법적으로 불쌍히 여기며 도와 주어야할 과부의 가산을 오히려 삼키는 일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헌금을 강요하거나 그들의 재산을 헌납하도록 위협을 주는 행동으로 그 이익을 그들이 취해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기도는 외식으로 하는 긴 기도라고 하셨습니다. 기도하는 자신의 모습을 많은 사람들에게 보이므로 더욱 존경을 받으려는 외식적인 기도를 좋아했던 것입니다.

결 론 : 백성들에게 성경을 잘못 가르침으로 실족하게 하며 외식하는 생활로 영광을 취하는 서기관들에 대한 하나님의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백성들의 지도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성경대로 바로 가르치는 일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이 이스라엘의 민족적 비극을 수 천년간 계속시켜 온 사실이라든가 서기관들의 외식적인 생활이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을 떠나시게 하여 하나님께 버림받은 백성으로 타락하게 한 책임이 종말에 가서는 모두 이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에게 돌아갈 것임을 예수님은 경종하신 것입니다.

≈ 79≈ 가난한 과부의 헌금

(본문 : 마가복음 12 : 41 - 44)

서 론 : 하나님의 나라와 헌금에 대한 관계를 아는 일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반드시 필요합니다. 오늘 한 가난한 과부의 헌금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들에게 헌금에 대한 여러 가지 교훈을 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언제나 우리 마음의 중심을 보십니다. 그런데 그 중심이 우리가 봉헌하는 헌금에 반영된다고 하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 과부는 헌금을 통해서 그의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하나님을 섬기는 중심에 대하여 주님의 놀라운 칭찬을 들었습니다. 반면에 외식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헌금이 그들의 신앙을 보여주고 있는 사실에 대하여 대조시키므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헌금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져야 할 것을 교훈해 주신 것입니다.

1. 헌금을 살피시는 예수님

41절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 연보궤를 대하여 앉으사 무리의 연보궤에 돈 넣는 것을 보셨다”고 했습니다.

(1) 예수님은 연보궤를 대하여 앉으셔서 연보궤에 돈을 넣는 사람들을 살피셨습니다. 이 연보궤가 놓여 있던 자리는 여인들의 뜰로 연보궤는 바로 이 뜰을 구분하는 벽을 따라 일렬로 놓여져 있습니다. 인 연보궤는 나팔처럼 생긴 모양의 놋쇠로 만들어졌습니다. 아마 예수님께서는 이곳을 지나시다가 그 앞에 자리를 잡고 앉으셔서 그 연보궤에 헌금하는 사람들을 한참동안 유심히 살피셨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이 같은 태도로 보아 예수님은 그의 백성들의 헌금에 대하여 대단한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과 그 헌금에 대하여 낱낱이 살피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직이 이스라엘백성들에게 각 절기마다 하나님께 보이되 공수로 보이지 말라고 엄중히 말씀하셨습니다. “너의 중 모든 남자는 1년 3차 곧 무교절과 77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공수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리라”고 명하셨습니다(신16:16).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어리석은 부자의 경우, 그의 어리석은 이유에 대하여 예수님은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에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고 말씀하셨는데 어리석은 부자가 하나님에 대하여 부요치 못하였다는 것은 그가 11조에 인색하고 헌금에 인색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눅12:20).

(2) 예수님은 헌금의 사용처에 대하여 언급하심이 없이 단지 헌금함에 헌금하는 사실을 주시하셨습니다. 성전에서 연보궤에 헌금하는 이 돈은 물론 성전의 운영비, 구제비 등으로 사용되는 돈입니다. 그러나 이 돈을 주관하는 자는 제사장들이나 서기관들이었을 것입니다. 이들이 과연 이 헌금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사용했느냐는 문제는 크게 의문시 될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사장들이나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이 성전을 잘못 운영하고 있으니 헌금을 내지 말라고 하시거나 그 헌금을 그들이 불법하게 사용할 것임으로 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교회에서 우리가 내는 헌금은 교회에서 어떻게 사용하든 하나님께 드리는 봉헌 물입니다. 그 헌금을 집행하는 사람들이 잘못 사용했다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책망하실 일이지 헌금한 성도들에게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성전 안에 있는 연보궤에 헌금했던 것처럼 성도들이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 앞에 헌금하는 일은 언제나 어떤 경우에나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3) 예수님이 연보궤에 헌금하는 장면을 보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헌금을 친히 보신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연보궤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헌금을 하기 위해 줄을 서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헌금하는 모습을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문제가 제기됩니다. 사람들에게 보이고자 하는 부자들이나 외식하는 자들은 자신의 헌금을 과시했으며 얼마나 많은 돈을 헌금한다는 사실을 보이면서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다 무시해도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연보궤에 헌금하는 무리들을 낱낱이 살펴보시는 하나님의 눈이 그 헌금뿐 아니라 헌금하는 사람들의 마음까지도 살피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아야 그 분 앞에 인정을 받고 칭찬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2. 과부에 대한 주님의 칭찬

예수님은 그 자리에서 한참 동안 헌금하는 장면을 보신 후,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1)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한 과부의 헌금에 대하여 칭찬해 주셨습니다. 연보궤에 돈을 넣은 사람은 이 과부만이 아닙니다. 무리라고 표현하고 있는 대로 많은 사람들입니다. 그 중에는 부자들도 여럿 있었습니다. “여러 부자는 많이 넣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과부의 헌금에 대해서는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렙돈은 그 당시 그 지역에서 사용하고 있는 유대인들의 가장 적은 액수의 동전입니다. 하루 노동자들의 임금에 비교되는 한 데나리온에 비교한다면 10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지극히 작은 돈입니다. 고드란트는 라틴어로 표현한 두 렙돈의 동전으로 아마 이 복음서가 로마인들에게도 읽혀질 것을 예상하고 삽입한 것으로 보입니다.

(2) 그러면 예수님은 왜 부자들의 많은 헌금에 대하여 칭찬하지 아니하시고 이 가난한 과부의 매우 작은 헌금에 대하여 칭찬하신 것입니까? 44절에 그 해답이 나와 있습니다. “저희는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는 말씀이 그 해답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헌금의 표준이 결코 액수에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적은 것보다 많은 것을 더 좋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사람의 마음, 그 중심을 보십니다. 이 과부는 가장 작은 액수의 헌금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과부의 헌금에 대하여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주님의 말씀은 결코 액수로 환산한 것이 아닙니다. 헌금한 그 과부의 중심을 달아보신 것입니다.

(3) 부요한 자들은 풍족한 중에 넣었지만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기 때문에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다”는 판정이 내려진 것입니다. 부자는 그 헌금이 아니더라도 생활에 궁색함이 없습니다. 그같은 액수는 그들에게 있어서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입니다. 그들에게는 그 헌금이 조금도 부담이 되지 않았습니다. 삭개오도 부자였지만 삭개오의 경우는 이들과 다릅니다. 삭개오는 자기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을 위해 하나님께 헌금하겠다고 했습니다. 이 액수는 마치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과 같은 인정을 받는 부자의 헌금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삭개오에 대하여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는 칭찬을 아끼지 아니하셨습니다(눅19:9).

이 가난한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신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다고 하셨습니다. 이 여인은 구차한, 다시 말하면 가난하기 그지없는 여인입니다. 그에게 가지고 있는 재산이란 두 렙돈의 동전뿐입니다. 아마 이 동전도 그날 어느 곳인가 일터에 나가 그날의 끼니를 위해 번 일당이었을 것입니다. 그 돈이 아니면 이 과부와 혹 있을지 모를 그의 자녀들의 그날의 생활은 막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중에도 이 여인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연보궤에 넣은 것입니다.

가난한 중에, 구차한 중에 바치는 헌금이야말로 하나님께 값진 것입니다. 가난하다는 것이 헌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는 이유는 될 수 없습니다. 자기가 부자라면 부자로써 하나님께 부끄럽지 않게 헌금해야 합니다. 그럴만한 처지가 아닌데도 주일에 교회에서 하나님께 바치는 헌금을 백원이나 오 백원 짜리 동전 하나 땡그랑 넣는 것을 우리 주님은 과연 칭찬하실 것입니까? 한해가 다 가도록 감사헌금 없는 부자들, 감사해야 할 일이 생겼는데도 돈이 아까워 헌금에 인색한 부자들을 보실 때 우리 주님은 어떻게 판단하실 것입니까? 만약 우리 형편이 가난하다면 이 과부의 정성어린 헌금처럼 자신의 힘에 넘치도록 헌금한다면 우리 주님은 그런 가난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생각할 것입니까?

결 론 : 헌금에는 놀라운 축복이 뒤따릅니다. 많이 심는 자는 많은 것을 거두게 하시겠다는 약속이 있습니다. “이것이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하는 말”이라고 했습니다(고후9:6). 그리고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고후9:10). 예수님께서 이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통해서 우리에게 교훈하시는 바는 우리로 이 과부의 심정으로 하나님께 헌금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려는 주님의 뜻임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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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3장

◆ 밤중소리 01-09 | VIEW : 517

≈ 80≈ 세상 종말의 징조

(본문 : 마가복음 13 : 1 - 9)

서 론 : 예수님은 복음서에서 인류의 종말에 관한 징조에서 여러 가지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특히 마태복음24장, 마가복음13장, 누가복음21장에서 이 문제에 대하여 자세하고도 심도 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같은 종말에 관한 징조와 종말적인 사건에 대해 언급하신 동기가 제자들이 예루살렘 성전의 웅장한 규모와 화려한 건축에 매료되어 주님께 자랑하며 동의를 얻으려는 대화 중에 나왔다는 점에서 주목할만한 내용이 되겠습니다. 왜냐하면 종말에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것이고 장차 나타날 적그리스도에 의하여 그들의 예배가 중단되는 사건이 일어나며 또한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 적그리스도에 의해 짓밟힘을 당할 것이란 성경적인 예언이 있기 때문입니다(단9:27, 슥14:1-5).

1. 감란산에서의 대화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 맞은 편에 있는 감란산에 가시려고 성전에서 나가실 때의 일입니다. 제자 중 하나가 성전 건물을 올려보며 미석으로 꾸민 성전들의 기둥들을 가리키면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고 물었습니다. 이 제자는 이 성전의 화려함과 웅장함에 대하여 예수님도 공감하실 줄로 알고 감탄 어린 말투로 물은 것입니다.

(1)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근시안적으로 성전의 크기와 미석과 하려함으로 다듬어진 일에 활홀감을 가지고 감탄하고 있었지만 예수님은 그 성전의 장래 운명에 마음을 두고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예루살렘성의 결국과 아울러 예루살렘 성전의 종말이 어떻게 될 것이란 사실을 이미 내다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어느 날 예루살렘을 바라라보시면서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고 탄식하신 일이 있으셨습니다(마23:37-39). 예수님의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는 말씀은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고 하신 말씀과 연결되는 말입니다.

이 예언처럼 이 같은 예루살렘 성전의 완전한 파멸은 그 후 얼마 안가 주후 70년 로마의 디도에 의한 침공으로 성취되었습니다. 유대의 유명한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디도는 이 예수님의 예언을 이루기 위해 성전과 그 나머지 부속건물 전체를 고의적으로 파괴했다고 언급해 주고 있습니다.

(2) 예수님께서 감람산에 오르셔서 성전을 마주 대하여 앉으셨을 때 네 명의 제자가 이 같은 예수님의 충격적인 말씀에 대하여 더 자세한 설명을 요구했습니다. 그 제자의 이름이 베드로, 야고보, 요한, 안드레로 나와 있습니다. 그들의 질문요지는 두 가지로 나뉘었는데 이러했습니다.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 모든 일이 이루려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느냐는 질문에는 침묵하셨습니다. 이 같은 시기적 문제는 제자들이 알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직전에도 제자들의 이런 시기를 알려는 욕망은 그치지 아니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이 물음에 예수님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이 질문에서 예루살렘의 멸망은 곧 세상의 종말인 줄로 알고 있었으며 그러면 그같은 일이 일어날 때에 어떤 징조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두 번째 물음의 요지라고 보겠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이 자신들이 기대하고 있는 메시야 왕국의 도래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사건인 줄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관심을 쏟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에 대한 예언을 들으면서 아마도 예루살렘의 최종적 환난의 시기를 명시해 준 슥14장에 있는 말씀을 기억했을 것입니다(슥14:1-5).

2. 종말의 징조

5절부터의 말씀은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입니다.

(1)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이 “이 모든 일이 이루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는 질문을 다시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제자들이 “이 모든 일이 이루려할 때”란 시기는 주후 70년의 로마의 디도에 의한 성전파괴의 시기가 아니라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의 징조임이 밝혀져 있습니다(마24:3). 그러므로 예수님의 답변은 디도의 침공으로 예루살렘이 파괴된 그 시기에 관한 것이 아니라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①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하셨습니다. 종말의 출현은 거짓 메시야의 등장과 그의 미혹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일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세상종말의 징조가 주후 70년경이나 그 이후의 오랜 역사의 기간에 일어날 사건을 염두에 두신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재림 직전에 있을 종말을 가리키고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종말에 이르면 많은 사람이 자신을 메시야로 자처하여 유대인들을 미혹하는 사례가 발생할 것입니다. 주님은 이 같은 미혹을 받지 말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② 두 번째의 징조로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고 하셨습니다. 인류의 종말에 가서 유대인들은 난리와 난리소문을 듣게 될 것입니다. 이 같은 소식은 그들과 직접적으로 관계된 사건입니다. “두려워 말라”는 말씀이 그것을 의미해 줍니다. 이 같은 난리소문은 인류의 종말에 중동지역에서 끊임없이 일어날 분쟁일 것이며 이런 분쟁은 이스라엘과 직접 연관된 분쟁일 것입니다. 끝이 아니란 말씀은 종말을 의미하는 것으로 주의 재림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③ 세 번째의 징조로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지진이 있겠으며 기근이 있으리니 이는 재난의 시작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재난이란 유대인들이 종말에 겪어야 할 환난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 환난은 세상에 임할 환난과도 연관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종말적인 재난은 무엇보다도 적그리스도에 의한 종교적인 핍박과 예루살렘성의 말할 수 없는 피해입니다.

여기서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난다”는 말씀은 전대미문의 전쟁을 의미합니다. 이 전쟁이 요한계시록에는 둘째 화로 나와있으며 이 둘째 화는 유브라데 전쟁으로 이 전쟁으로 예루살렘은 곡의 침공을 받아 큰 재앙을 만나게 되며 적그리스도에 의한 제사와 예물의 금지가 시작되며 적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재앙이 마흔 두 달간 계속될 것입니다.

(2)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너희라는 말은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공회와 회당이 등장하는 것은 그 시기가 예루살렘성전의 멸망을 말씀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인류의 종말에 있을 징조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때 이스라엘에 공회가 있고 회당이 있다는 사실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의 회복은 1948년 5월 15일에 있었습니다. 신실한 유대인들은 적그리스도와 그에게 미혹 받아 추종하는 무리들에 의해 매질과 핍박을 받을 것입니다.

결 론 : 우리는 복음서에 있는 예수님의 종말의 징조에 대하여 로마의 디도에 의해 예루살렘이 침공을 당한 70년대의 환난으로 오해하거나 그 시기를 중심으로 해석하려는 유혹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해석이 어렵다는 이유만으로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이 있을 징조”를 함부로 시대를 뛰어넘어 70년을 인류의 종말로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종말의 징조를 성경적으로 잘 연구하여 소망을 가지고 그 날을 바라보면서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는 간구를 드릴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 81≈ 견디는 자가 이기는 환난

(본문 : 마가복음 13 : 10 - 13)

서 론 :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들려주시는 종말의 징조는 일면 광범위한 내용처럼 보여 그 시기를 알기가 어렵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밝혀주신 종말적인 징조는 인류의 최 종말에 있을 사건을 의미하는 것으로 결코 긴 인류의 역사의 흐름에서 보여주고 있는 사건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10절에서 이 같은 종말의 시기가 곧 임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는 “복음이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인류의 종말이 오려면 먼저 이루어져야 할 일이 있는데 그것이 복음이 만국에 전파되는 일입니다. 이때가 이방인의 때가 끝나는 시기가 되며 또한 이스라엘의 남은 자의 구원의 시기가 되겠습니다.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세우시고 복음전파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전파의 사명을 가진 교회는 인류의 종말에 대한 큰 관심을 가져야 하며 전도인들은 주님의 재림의 소망을 바라보며 복음전파의 사명을 이뤄야 합니다.

1. 유대인들이 받을 핍박

11절부터 13절까지에 이르는 말씀은 14절부터 22절까지 이르는 대 환난시기에 유대인들이 적그리스도와 그의 추종세력들로부터 받을 핍박 상황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1) “사람들이 너희를 끌어다가 넘겨준다”고 하셨습니다. 이 시기는 유대인들이 적그리스도의 무리들로부터 받을 핍박의 시기입니다. 사람들이란 적그리스도의 무리들과 그들을 따르는 유대인들을 가리킵니다.

적그리스도는 유대인들의 생존을 위한 7년간의 언약(평화조약)을 성사시킵니다. 이 조약은 단9:27절에서 다니엘이 예언한바 ‘한 이레의 언약’입니다. 이 언약의 주체적 인물이 바로 적그리스도이기 때문에 적그리스도는 온 인류로부터 평화의 왕이란 칭호를 받게 됩니다. 이때 유대인들은 이 영광의 인물로 유대인의 영광의 메시야로 착각합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바벨론의 포로시절로부터 자기들을 구원해 주실 메시야를 기대해 왔습니다. 특히 다니엘의 예언을 통해서 이방인들을 무찌르고 그들을 구원할 영광의 메시야가 반드시 나타날 줄로 믿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그같은 메시야로 알았다가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나약한 모습을 보고는 실망했습니다. 그러한 메시야를 고대하는 민족적 염원은 아직까지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것은 그때부터 아직까지도 유대인들은 고난의 연속 중에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요5:43절에서 하신 말씀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치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다른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고 하신 이 다른 이는 누구를 말합니까? 이에 대해 그가 종말에 유대인의 혈통을 가진 인물로 세계적 지도자로 등장하여 유대인들을 위한 ‘한 이레의 언약’을 체결할 적그리스도, 바로 그 인물로 연계시키게 됩니다. 이 적그리스도는 유대인들의 대단한 환영을 받으며 예루살렘에 입성하게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입성하셨을 때의 “호산나”의 외침이 이때에 아마 실감 있게 재연될 것입니다.

이 자는 예루살렘에 입성한 후, 급기야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칭하고 자신과 자신의 우상에게 신적인 경배를 강요하게 됩니다. 이때 많은 유대인들이 적그리스도로부터 등을 돌리고 그를 대적할 것이지만 그러나 이미 적그리스도에게 미혹된 많은 유대인들이 있어 적그리스도를 대적하려는 유대인들을 핍박하게될 것이며 짐승의 표를 거부하는 유대인들을 죽이기도 할 것입니다. 막13:11-13절에 나오는 핍박이 바로 이 같은 유대인들의 핍박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런 시기에 하나님께 대한 신앙심이 두터운 유대인들은 아마 적그리스도를 메시야로 인정하지도 않을 것이며 적그리스도나 그의 우상 앞에 결코 경배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문제는 여기서 일어납니다. 적그리스도의 무리들과 미혹 받은 유대인들은 이런 반 메시야적인 유대인들에게 호의적일 수 없습니다. 그들을 끌어다가 넘겨줄 것입니다. 이때 이들 유대인들은 적그리스도가 배설한 법정에서 심문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 주님은 너희가 무슨 말을 할 것인가 미리 준비하지 말고 그 시에 성령이 주시는 그 말을 하라고 일러주셨습니다. 그들은 아직 예수님을 영접하여 구원에 이르고 있는 상태는 아닙니다. 그러나 이들이 적그리스도를 끝까지 배격하고 짐승의 표를 받지 않는다면 이들이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되어 구원받을 백성이 될 것입니다.

(2) 그날에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죽는데 내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같은 일은 비록 예루살렘이나 이스라엘에서 유대인들에게만 해당되는 핍박이 아닙니다. 계9:1-6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첫째 화로 불려지는 황충이 환난이 나옵니다. 이 환난 중에도 역시 무저갱에서 지상으로 올라온 악령들에게 사로잡힌 황충이떼들에 의한 성도들의 다섯 달간의 시한부 환난이 있습니다. 이때에도 무저갱의 악령에 사로잡혀 황충이떼가 된 가족들에 의하여 형제에게 핍박을 받으며 아비가 자식을,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는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신실한 유대인들에 대한 핍박은 이보다 좀 늦은 후3년 반에 들어가면서부터 시작이 될 것입니다. 이때 적그리스도에 대한 신적 경배를 거부하는 유대인들은 무저갱의 악령들에게 사로잡힌 이들 무리들, 혹은 형제들로부터 혹은 부모나 자녀들로부터 이 같은 무서운 핍박을 받게 될 것입니다. “죽게 하리라”는 말씀대로 아마 이때 죽임을 당하는 유대인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 이들의 죽음은 순교로 볼 수 없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계명에 따라 다만 적그리스도에 대한 신적 경배를 거절하고 짐승의 표를 받기를 거절했을 뿐 아직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영생을 얻은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2.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나중까지 견디는 자”란 끝까지 견디는 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어느 곳에서나 해당되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적그리스도와 대적하는 유대인의 경우를 말씀해 주고 있다고 보겠습니다.

(1) “나중까지 견디는 자”란 끝까지 짐승의 표를 받지 아니할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우상 앞에 경배할 수 없는 일과 적그리스도에게 신적인 경배를 할 수 없는 일은 그리스도인들이나 유대인들이나 똑같습니다. 이 같은 일은 십계명 중 첫째와 둘째 계명을 어기는 일입니다. 이 계명을 율법적인 면에서도 지켜야 할 것이지만 복음적인 면에서도 반드시 지켜야 할 계명입니다.

(2) “나중까지 견디는 자”가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은 그들이 바로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슥14:8-9절에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에 대한 구원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말하노라 이 온 땅에서 3분의2는 멸절하고 3분의1은 거기 남으리니 내가 그 3분의1을 불 가운데 던져 은같이 연단하며 금같이 시험할 것이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들이 유대인들 중에 핍박받을 대상자들인 3분의1의 무리들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 중에도 종말에 하나님의 자비에 의하여 구원받기로 예정된 많은 무리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입니다. 이들은 결코 짐승이나 그 우상 앞에 신적인 경배를 드리지 아니할 것입니다. 이들은 끝까지 견디는 그들의 신앙의 절개를 통해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게 될 것입니다.

결 론 : 종말적인 환난은 교회의 경우건 유대인들의 경우건 모두 적그리스도로부터 나옵니다. 하나님의 교회에는 전3년 반 마지막 시점에 가서 다섯 달 동안의 황충이 환난을 통해서 오게 되고 유대인들의 경우는 후3년 반 동안 적그리스도와 그 우상 앞에 경배를 거절하는 일로 오게 됩니다. 유대인들은 그때에 하늘에서 예루살렘 앞 동편 감람산에 내려오시는 그들의 메시야를 만나게 될 것이며 그들에게 제시된 최종적인 피난처에서 민족적인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 하나님의 자비하시므로 구원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슥14:1-5).

≈ 82≈ 인류역사 초유의 대 환난

(본문 : 마가복음 13 : 14 - 20)

서 론 : 인류의 역사에는 종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종말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일입니다. 예수님이 복음서에서 밝혀주신 종말의 징조와 사건의 진행을 주로 예루살렘을 구심점으로 하여 말씀해 주고 있다는 사실을 먼저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곳에서 전술하고 있는 인류의 종말은 전 세계적이지만 주로 유대인들이 겪을 징조와 사건을 중심으로 기록된 것입니다.

오늘 주신 14-20까지의 본문은 이미 영토적으로나 민족적으로나 종교적으로 회복된 이스라엘을 전제하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는 예언이기 때문에 28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1948년5월15일의 이스라엘의 실제적인 독립은 인류의 종말과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사건입니다. 이제 두 가지 성취되지 못한 일, 즉 이스라엘의 종교적 회복과 10절에 있는 말씀의 성취, “또 복음이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 것이니라”고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면 이 모든 종말의 징조가 급속하게 성취될 것입니다.

1.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예수님의 14절 말씀,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이란 말씀은 다니엘이 언급한 종말의 계시를 인용하신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마24:15절에서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 바”란 말씀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해 주는 것입니까?

(1) 멸망의 가증한 것이란 예루살렘성전에 세워질 우상을 의미합니다. 다니엘서에는 우상에 대한 언급이 세 곳에 나와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9:27절에 나오는 “또 잔포하여 미운 물건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라고 했습니다. 두 번째는 11:31절에 “멸망케 하는 미운 물건”이라고 했습니다. 세 번째는 12:11절에서 “멸망케 할 미운 물건”이란 표현으로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언급 중에 두 번째 사건은 지난날 ‘안티어쿠스’ 4세에 의하여 주전 170년경을 전후하여 예루살렘에서 이미 성취된 사건입니다.

다만 첫째 번과 세 번째 사건이 종말에 적그리스도에 의하여 다시금 예루살렘에서 성취될 사건으로 예수님의 예언은 이 사건과 연관된 사건입니다. 적그리스도는 유대인들로부터 메시야적인 환영을 받게 됩니다. 그는 ‘한 이레’의 평화조약으로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게 될 것이며 그의 출신 형통이 유대계란 점에서 그리고 그가 가히 유대인들이 기대하고 기다리는 메시야적인 영광을 가지고 세계의 제패자로 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자는 평화의 왕으로, 유대인들이 대망해 온 그들의 메시야로 예루살렘에 입성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자는 유대인들의 메시야도 아니며 평화의 왕도 아닙니다. 이 자는 미혹하는 자이며 그 미혹에 넘어간 자는 이 자를 살아 있는 하나님으로 추앙하게 되며 그의 우상 앞에 경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이 자의 등장 목적이 온 인류들로 이 자와 이 자의 우상에게 경배시키므로 짐승의 표를 받게 하는 일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자는 예루살렘에 들어온 후, 먼저 하나님께 대한 “제사와 예물을 금지”시키는 조치를 취하게 됩니다(단9:27, 12:11). 그뿐 아니라 이 자는 예루살렘성전에 앉아 자존하여 자신을 하나님이라 칭할 것이라고 했습니다(살후2:4).

(2) 이 일이 유대인들에게는 종말의 결정적인 징조로 작용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괄호 안에 말씀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라고 하신 말씀은 다니엘이 언급한 종말에 계시를 읽는 자를 가리킨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다니엘의 이 같은 언급을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다만 이 계시가 어느 시대 누구에게 적용되는 것인가에 대해서만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날에 유대인들 중에 적그리스도에게 미혹을 받지 아니하고 적그리스도에게 신적인 경배를 하지 아니한 신실한 유대인(이들이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로 최종적인 구원에 이르게 된다)만이 다니엘의 말한바 그 계시를 이때에 깨닫게 될 것이며 이들에게 베풀어주시는 종말적인 피난처를 찾아 갈라진 감람산 줄기를 따라 아셀까지 미치는 그 산골짜기로 도망하게될 것입니다(슥14:1-5).

(3) 예수님은 적그리스도에게 미혹 받지 아니하고 끝까지 그에게나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유대인들에게 그들의 살길을 열어주시기를 “그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산은 비유적 표현이거나 상징적 의미의 표현이 아닙니다. 그냥 산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스가랴로 말씀하신 인류의 종말에 남은 유대인들의 구원의 길에 대하여 그 말씀을 인용하여 이곳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편 감람산에 서실 것이요 감람산은 그 한가운데가 동서로 갈라져 매우 큰 골짜기가 되어서 산 절반은 북으로, 절반은 남으로 옮기고 그 산골짜기는 아셀까지 미칠지라 너희가 그의 산골짜기로 도망하되 유다 왕 웃시야 때에 지진을 피하여 도망하던 것 같이 하리라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임하실 것이요 모든 거룩한 자가 주와 함께 임하리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슥14:4-5).

2. 산으로 도망할 때의 유의할 점

우리는 유대인들 중에 남은 자들만이 최종적인 구원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이들의 구원은 곧 주 재림의 날에 하나님이 스가랴로 지칭하신 “그 산”으로 도망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1) 그들이 도망하는 일에 대하여 유의해야 할 점에 대하여 예수님은 몇 가지로 경종해 주셨습니다.

① 첫째는 도망하는 일에 지체해서는 안되며 매우 신속한 행동을 취해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지붕에 있는 자는 내려가지 말며 집에 있는 무엇을 가지러 들어가지도 말며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고 하신 말씀이 그런 뜻입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에서 이 같은 말씀 끝에 “롯의 처를 생각하라”는 말씀으로 재물 때문에 시간이 지체되면 멸망 받을 것임을 경종해 주신 것입니다(눅17:32).

②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적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 역시 다른 영적인 뜻이 포함된 말씀이 아닙니다. 19절에서 말씀해 주시는 대로 “그날들은 환난의 날”이 될 것이기 때문에 그런 긴급한 상황에서 산으로 도망하는 일에 아이 밴 자들이나 적 먹이는 자들이 신속히 움직일 수 없는 것은 당연하며 이들은 도망하는 일에서 낙오되거나 지체하다가 롯의 아내와 같은 운명에 빠질 염려가 다분히 있는 것입니다.

③ “이 일이 겨울에 나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겨울은 여러모로 도망하기가 어려운 시기입니다. 마24:20절 말씀에는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는 말씀이 곁들여 있는 것을 볼 때 유대인들이 산으로 도망하는 장애요인이 겨울과 안식일이 된다는 사실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같은 말씀을 하신 일에 대하여 19절에서 해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는 그날들은 환난의 날이 되겠음이라 하나님의 창조하신 창초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이 같은 환난은 인류의 종말에 인류에 대한 최종적인 하나님의 심판이시기 때문에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을 대 환난이 될 것입니다.

(3) 이 환난의 날에는 그날들을 감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배려가 있을 것임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날들”이라고 하신 그날이 어떤 날이며 감하여 주신다는 말씀이 어떤 뜻인가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그날들”은 만약 감하지 않으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그런 날을 가리킵니다. 이 날은 일곱째 대접심판으로 큰 바벨론으로 음녀화된 이 세상을 불로 심판하시는 지구 최후의 날입니다. 이 날은 지구 안에 거하는 모든 존재가 하나의 생존자도 없이 모두 멸절 되는 그런 날이라고 하셨습니다(습1:2-3, 계16:17-21).

예수님께서는 택한 자들을 위해 이 날을 감하여 주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같은 말씀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공중휴거를 의미해 주신 것입니다.(마24:31, 살전4:17).

결 론 : 성도들의 공중휴거는 바로 이때에 있습니다. 공중휴거는 이 지상에서 그의 택하신 자들의 구원을 위한 그날들을 감해 주시는 자비로우신 은혜입니다. 이 공중휴거는 모든 택하신 자들이 다 포함됩니다. 하나님의 교회의 성도들이나 남은 자로 구원의 혜택을 받을 유대인들이나 구별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휴거에 누락되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 83≈ 재림의 날에 나타날 일들

(본문 : 마가복음 13 : 21 - 27)

서 론 : 21절에 있는 말씀은 6절에서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로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고 하신 말씀과 맥을 같이 하는 말씀으로 주 재림의 시기에 일어날 거짓 그리스도의 발호와 그들의 미혹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종말에 일어날 사건에 가장 관심을 끄는 사건은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의 등장이라고 보겠습니다. 이들의 등장은 유대인들과 많은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미혹에 있습니다. 이들은 특별한 능력으로 이적과 기사를 행하기 때문에 미혹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을 삼가라고 하셨습니다.

1. 종말에 일어날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

이 같은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의 등장은 인류의 역사상 끊임없이 존재해 왔습니다. 그러나 인류의 종말에 그같은 양상은 더욱 심화될 것입니다.

(1) 거짓 그리스도는 누구를 말하는 것입니까?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거짓 그리스도는 적그리스도와는 별도의 다른 존재를 의미해 줍니다. 거짓 그리스도는 적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가장하여 적그리스도의 통치하에서 그를 대적하는 성도들을 미혹하는 다른 또 하나의 사단의 간계로 등장하는 사단의 일꾼입니다.

(2) 이 자들이 등장하는 날은 주의 재림 직전입니다. 물론 이 시기에 이 거짓된 자들의 미혹을 받을 자들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참 메시야를 고대하고 있는 유대인들입니다. 이들 유대인들은 이미 등장하여 자신을 이스라엘의 왕,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자존하는 적그리스도를 따르지 않고 그를 대적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되어 주의 재림의 날에 구원받을 신실한 유대인들로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적그리스도에 의해 핍박을 당하는 유대인들에게 한 가닥의 소망을 줄 것입니다. 왜냐하면 짐승의 표를 거부하고 적그리스도를 대적하고 있는 이들 신실한 유대인들은 이때 정말로 자기들의 메시야를 고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미혹 받을 무리는 후3년 반에 떨어진 미련한 처녀로 비유된 성도들입니다. 이들은 후3년 반에 떨어진 후, 둘째 화로 등장하는 유브라데 전쟁을 통해서 회개하게 되어 “영광을 하늘의 하나님께 돌리게 되며”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계11:13, 12:17). 이들은 후3년 반기간 동안 말할 수 없는 적그리스도의 핍박을 받으며 살아가야 하지만 이때 또 이들을 미혹하는 무리들이 등장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들로 나오는 또다른 무리들은 거짓 그리스도들과 손잡고 또는 그들 스스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미혹하므로 그리스도의 재림의 소망을 방해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때 이들에게 미혹을 받으면 안 된다고 경종하신 것입니다. 이들은 그들의 미혹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이적과 기사를 행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들이 행하는 이적과 기사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대망하는 신실한 유대인들이나 후3년 반에 떨어진 모든 성도들의 믿음을 뒤흔들어 이 거짓된 자들에게 넘어지게 할 위험이 많은 것입니다. 그때 그만큼 그들이 당하는 핍박과 영적인 시련이 크기 때문이며 사단은 이런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미혹의 손길을 뻗치는 것입니다.

2. 주의 재림의 시기와 재림의 모습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은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의 미혹을 경종하신 후, 주 재림의 시기와 재림의 모습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1) 24,25절에 나오는 말씀은 주 재림의 시기에 있을 천재지변의 현상을 상징적으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그때에 그 환난 후”에 이 같은 현상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말씀하신 그 환난 후에란 셋째 화 중 다섯째 심판까지의 재앙을 의미합니다. 이 다섯 번째까지의 재앙 중 특히 네 번째 재앙은 해가 권세를 받아 사람들을 태워 죽이는 재앙이며 다섯째 재앙은 세상 나라가 캄캄해지는 재앙이기 때문에 “해가 어두어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에 있는 권능들이 흔들리는 현상”을 볼 수 있습니다.

이 환난 후에 곧 여섯째 대접이 유브라데에 쏟아질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이처럼 다섯째 대접까지의 환난 후, 여섯째 대접을 유브라데강에 쏟는 일곱째 재앙으로 오시게 됩니다. 26절에서 “그때에”라고 말씀하신 시기가 바로 다섯째 대접까지의 환난 후, 여섯째 대접의 재앙의 시기를 말합니다.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때 이런 모습으로 오실 것이기 때문에 결코 거짓 그리스도나 거짓 선지자들의 미혹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주의 재림을 바라본다고 하신 사람들은 일부 제한된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예루살렘에 거주하고 유대인들이 될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스가랴는 이처럼 예언해 주고 있습니다. “그 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동편 감람산에 서실 것이요” “모든 거룩한 자가 주와 함께 하리라”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이란 말씀을 주 재림의 날에 그리스도를 지상에서 바라볼 수 있는 무리들이 예루살렘에 거주하고 있는 유대인들임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슥14:4-5, 12:10).

성경에는 주의 재림의 날에 재림의 주를 맞이할 일에 대하여 세 가지로 구분해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의 무리는 성도들이라고 표현된 무리들입니다. “그날에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얻으신다”고 했습니다(살후1:10). 다른 또 하나의 무리에 대하여 “모든 믿는 자에게서 기이히 여김을 얻으시리라”고 했습니다(살전4:17). 그리고 다른 또 하나의 무리는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입니다. 이들 중에 적그리스도를 메시야로 영접하고 짐승의 표를 받은 유대인의 무리들은 그들이 받을 심판을 위해 애곡할 것이며,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인 신실한 유대인들은 이때 갈라진 감람산의 골짜기로 도망하여 그들의 메시야를 바라보게 될 것이며 이때 그들의 구원이 이루어지며 이때 이들도 이방성도들과 함께 공중으로 끌어올림을 받을 것입니다.

(2) 2절에서 예수님은 “그때에 저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 택하신 자들을 땅 끝으로부터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그때에”라고 표현된 연속적인 시기는 거의 주 재림의 날을 가리키는 시기이기 때문에 동시적인 사건으로 혹은 얼마간의 간격을 두고 일어나는 사건들입니다. 27절에 나오는 “그때에”의 시기는 주님의 재림과 동시적인 시기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재림 시에 두 종류의 수반 자들을 데리고 오시게 됩니다. 하나는 하늘의 군대들입니다. 이들에 대하여 계19:14절에서는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천사가 아닙니다. 영적 존재인 천사가 육신을 가진 적그리스도의 무리들과 아마겟돈에서 전쟁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부활하신 몸으로 오시기 때문에 그들과 전쟁하실 수 있으며, 이들 하늘의 군대들은 첫째부활 자들이기 때문에 육신을 가진 적그리스도의 무리들과 싸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천사는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분명 예수님이 데리고 내려오시는 무리들임에 틀림없지만 이들은 적그리스도의 무리들과 싸우는 하늘의 군대로 내려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임무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택하신 자들을 “땅 끝으로부터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는 일”입니다. 이 모으는 일은 주 재림과 동시에 이들 천사들에 의해 모든 성도들이 한 명의 누락자도 없이 하늘 공중으로 끌어올림을 당하는 공중휴거가 있게 됩니다.

결 론 : 예수님이 복음서에서 그의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이 말씀들은 말씀 그대로 인류의 종말, 주의 재림의 날에 이루어질 일들입니다. 이 말씀의 전반적이며 체계적이며 결론적인 예언을 위해 사도 요한을 밧모섬에 보내시어 요한계시록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구약 선지서에 있는 종말의 예언이나 신약에 여러 곳에 나와 있는 주 재림의 날에 이루어질 일에 대한 모든 예언에 대하여 깊이 연구해야 하는데 언제나 그 결론은 요한계시록에서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자세한 연구는 홈페이지 CD에 나와 있는 ‘종말의 계시’나 ‘재림의 메시지 101’ 참조)

≈ 84≈ 무화과나무의 비유와 종말

(본문 : 마가복음 13 : 28 - 32)

서 론 : 무화과나무의 비유는 여러 가지로 많은 쟁점을 안고 있습니다. 이 비유를 이스라엘의 독립과 연결시킬 때 문제가 제기되며 더군다나 그 아래에 있는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는 말씀을 이스라엘의 독립이후의 한 세대로 해석할 때 시한부 종말관에 빠질 우려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근간에 시한부 종말에 대한 여러 가지 미혹으로 한차례 큰 혼역을 치른 일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독립 년대가 1948년이기 때문에 한 세대를 40년으로 잡으면 1988년, 50년으로 계산하는 경우, 1998년을 재림의 시기로 계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시한부 종말관은 우리에게 큰 유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 문제에 대한 바른 해석을 시도해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1. 무화과나무의 비유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수님은 종말에 관한 여러 가지 사건과 징조를 비교적 상세히 들려주신 후,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는 말씀으로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1) 우리는 이 무화과나무의 관한 말씀을 해석하기 이전에 이 말씀이 하나의 비유란 점에 먼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비유란 말은 문자 적으로 ‘곁에 둔다’는 말로 ‘양자를 비교하기 위해 어떤 하나를 다른 것의 곁에 두는 것’을 말합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비유가 사용되는 경우가 많이 있고 그 비유 안에는 또한 심오한 영적 의미가 주어져 실제적인 표현보다 더 큰 의미를 주는 교훈의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비유를 해석할 때 유념해야 할 일은 이 비유를 너무 확대 해석하여 비유가 오히려 주제를 압도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며 주제가 제시하고 있는 중요한 특징을 무시하거나 간과해서도 안 된다는 점입니다.

(2)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란 무화과나무에서 얻을 수 있는 비유란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의 말씀을 들려주시기 전에 인류의 종말에 있을 여러 가지 징조를 말씀하셨으며 결론적으로 주의 재림과 그의 보내실 천사들에 의해 택하신 자들을 땅 끝으로부터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는 말씀을 하신 후,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예수님의 비유는 인류의 종말과 관계된 것이며 주의 재림과 연관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 비유를 두 가지 면으로 살펴보면서 이 비유가 의도하는 바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① 한가지는 예수님이 아직까지 말씀하신 바 종말의 징조가 이르면 곧 주의 재림이 있을 것이란 의미의 비유로 보는 해석입니다.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을 알라”는 말씀에서 우리는 무화과나무의 성장과정의 특성을 보는 것으로 종말의 징조와 주의 재림의 관계를 알 수 있다는 의미의 해석입니다.

무화과나무는 가을에 낙엽이 집니다. 그리고 봄철이 오면 나무의 진액이 오르면서 잎사귀가 돋아나기 시작합니다. 중동지역의 봄철은 계절적으로 매우 짧기 때문에 무화과나무의 잎이 돋기 시작하면 곧이어 여름철이 올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본 절의 비유는 바로 이 같은 무화과나무의 특성을 들어 예수님이 말씀하신 종말의 징조가 너희 중에 나타나거든 그것은 무화과나무의 잎이 돋아나는 예와 같으니 무화과나무의 잎이 돋으면 곧 여름이 올 줄을 알게 되는 것처럼 인자의 때가 곧 이를 줄을 알라고 하신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② 다른 한가지의 해석은 약간 비약된 면이 있기는 하지만 종말과 연관된 비유로써 설득력이 있는 해석입니다. 그것은 이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이스라엘의 회복과 연결짓는 해석방법입니다. 성경적으로 볼 때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과 뗄 수 없는 연관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나무들은 선지자들이나 예수님에 의하여 여러 가지 교훈적인 비유에 많이 사용되어 온 것들이며 또 이스라엘의 민족적, 국가적 상징으로도 볼 수 있는 것들입니다.

이 같은 면에서 이 비유를 해석한다면 ‘여름’은 예수님의 재림과 인류의 종말을 의미하는 비유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왜 무화과나무의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는 비유를 이스라엘의 회복으로 해석하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비유하신 무화과나무의 상태는 원래가 죽은 상태로 방치된 나무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기 이전까지의 상태’는 겨울철의 무화과나무 모양 전혀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하고 있는 상태의 나무였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마치 이스라엘의 역사적인 운명과정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면서 시장하셨을 때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일이 있습니다(막12:1-9). 이 나무는 예수님의 저주로 곧 뿌리째 말랐습니다. 이 나무는 마치 열매를 맺지 못하므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아 2천년간이나 죽은 상태로 버림받아 온 이스라엘을 상징해 주는 것으로 나무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는 과정은 바로 이스라엘의 회복으로 이스라엘의 구원을 이루는 열매를 맺을 시기가 가깝다는 영적 뜻이 함유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에 예언된 말씀에도 인류의 종말이전에 이스라엘의 회복은 필수적입니다(사11:11-12, 렘31:8-9, 암9:14-15, 갤38:8-9, 슥12:10, 행1:11 등등). 그런데 문제는 29절에 나오는 말씀,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나는 것을 보거든”이라고 하신 말씀 중 “이런 일”이란 과연 무화과나무의 경우를 가리키느냐? 아니면 아직까지 주님이 말씀하신 인류의 종말에 관한 징조를 가리키느냐? 아니면 이 두 가지 모두를 의미하는 것이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를 조심스럽게 다 수용해야 할 줄로 압니다. 왜냐하면 두 가지 견해 모두 타당성을 띄고 있으며 우리에게 종말에 대한 비유로써 영적인 교훈을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 세대”란 말의 시기를 이스라엘의 회복으로부터 30년 혹은 40년이라는 식의 시한부적 연대를 부치면 32절에서 “그러나 그 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른다”고 하신 말씀과 정면 충돌되기 때문에 이 문제는 대단히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할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2. 아들도 모르는 주 재림의 시기

(1) 30절에서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는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문제는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한 세대란 기간은 원어 상으로 한 인간이 사는 날 동안의 기간을 의미해 주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이 한 세대에 대한 기간을 성경적으로 30년, 40년, 50년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또 아브라함에게 400년을 4대라고 말씀하시므로 한 세대를 100년으로 잡는 경우도 있습니다(창15:13). 그러면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이라고 하신 이 세대의 출발점은 어느 시대, 또는 어느 사건을 의미하느냐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회복의 시기를 말하는 것이냐, 아니면 인류의 종말에 대한 징조가 나타난 이후의 어느 시기냐는 등등의 난제들이 많이 대두되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어떤 신학자의 경우는 한 세대를 40년으로 잡고 로마의 디도에 의한 예루살렘 침공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세대주의 신학의 종말론적 해석의 경우, 이스라엘의 회복기간으로부터 40, 50년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전자의 경우는 예수님의 말씀의 전개로 보아 인류의 종말이지 결코 70년대에 있었던 디도의 침공이 아님이 분명하기 때문에 설득력이 없고 후자의 경우는 시한부적 종말이 되므로 “인자도 모른다”고 하신 말씀에 도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가장 합리적인 해석은 예수님께서 종말의 징조에 대하여 5절로부터 말씀을 전개하셨는데 바로 그 시점부터 “한 세대”의 기간을 의미하며 그 한 세대의 기간이 얼마인가는 성경에서도 정확한 해답을 얻기 어렵기 때문에 그냥 말씀 그대로 “한 세대”로 넘기는 것이 무난한 해석이라고 여겨집니다.

(2) 예수님이 이 같은 종말적인 여러 징조와 재림에 관한 말씀을 하신 이후 결론적으로 하신 말씀이 32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하면 큰 오해가 생기게 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말할 수 없는 자기비하(自己卑下)이신 데 그가 세상에 계셨을 동안에 그는 스스로 하나님으로서의 전지전능하심의 제약을 받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같은 자기비하는 바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주시기 위해 스스로 하신 일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으십니다. 지금 예수님은 하늘보다 더 높아지신 신분을 가지셨으며 만물을 그 앞에 굴복시키시는 분으로 계십니다. 지금도 그런 분이 “그 날과 그때를 모른다”고 하신다면 그같은 주장이야말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서 끌어내리려는 잘못된 해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결 론 : 예수님은 31절에서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을 하시므로 그의 말씀에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같은 종말적인 사건은 반드시 그의 말씀대로 성취될 것임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주 재림의 날을 소망으로 바라보면서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하는 신앙으로 그날을 대비하는 신부들이 되어야 합니다.

≈ 85≈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본문 : 마가복음 13 : 33 - 37)

서 론 : 하나님께서 주 재림의 시기를 우리에게 밝혀주시지 아니하신 일은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만약 성경에 주 재림의 일시가 명시도었다면 인류의 역사는 아마 혼돈에 혼돈을 초래했을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정상에서 이탈하여 기이한 현상을 초래하여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들이 생겼을 것입니다.

만약 주의 재림이 오랜 미래의 일로 나타났다면 모든 성도들은 아마 주 재림에 대한 소망을 전혀 갖지 않고 안일한 가운데 세속적인 생활 속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 날이 밝혀져 점점 가까이 온다면 그 날에 이를수록 사회질서나 국가의 행정력이 완전히 마비되며 생산기능도 정지상태에서 벗어나 온 세계가 큰 혼란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들에게 다만 그날을 소망으로 바라보면서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고 하신 것은 우리들에게 큰 은혜요 축복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1. 그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니라

주님은 종말에 있을 주 재림의 모든 징조를 말씀하신 후, 결론적으로 이르신 말씀은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니라”는 말씀입니다.

(1)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주의하라는 말씀은 주님이 말씀하신 종말의 징조에 대한 모든 일을 주의 깊게 살피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애 중에 일어나는 모든 세계정세에 민감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예언하신 종말의 징조는 이 같은 세계정세 속에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로마의 최종적인 멸망이후(1453년)에 나타난 세계 정세의 추이에 민감해야 합니다. 우리는 1948년 이스라엘의 회복이후의 이스라엘의 움직임에 대하여 주시해야 합니다. 우리는 1957년 로마조약에 의해 출발했고 1993년11월1일을 기해 ‘마스트리히트조약’의 발효로 10뿔의 양상을 보이고 있는 EU의 동태에 대해 예의 주목해야 합니다. 주의하라는 말씀은 섣불리 결론을 내리지 말고 성경에 계시된 예언의 종말의 징조와 무슨 연관관계가 있는지에 대하여 연구하며 살펴보라는 뜻입니다. 우리들이 이 일에 무관심 한다면 우리는 그날을 맞이할 아무런 준비 없이 덧과 같이 도적과 같이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다음에 “깨어 있으라”는 말씀은 주 재림에 대한 소망 중에 언제나 그 가능성을 인정하고 기도하는 생활과 열매 맺는 생활에 열심을 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반드시 인류의 종말에 있으며 이미 성경에 계시된 말씀대로 있게 됩니다. 그리고 주의하고 깨어 있는 성도들만이 이런 징조를 바라보게 되며 주의 재림을 준비하는 신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성도들이 깨어 이어야 할 일에 대하여 타국에 간 주인과 종들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34절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함과 같으니”라고 하셨습니다. 비유 속에 나오는 타국으로 간 주인은 부활 승천하신 주님이십니다. 그가 종들에게 권한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종들은 성도들을 의미합니다. 주신 권한이란 복음전파의 권한입니다. 이에 대하여 “오직 너희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복음을 전하는 일이야말로 주인으로부터 받은 큰 권한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각각 사무를 맡겼다는 것은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는 직분을 의미합니다. 문지기는 종들의 또다른 표현이지만 양들의 문을 지키는 사명자, 교회의 청지기 직분을 맡은 하나님의 종들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깨어 있으라”고 명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집주인은 언제 온다는 기약이 없이 다만 ‘곧 온다’고 하는 약속만 하고 떠난 것입니다. 비유 중에 나오는 것처럼 “집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 엘는지, 밤중 엘는지, 닭 울 때 엘는지, 새벽 엘는지 너희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감사할 일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야말로 정말로 주님이 예언하신 종말의 징조가 눈에 보이게 하나 둘씩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우리 시대 이전의 모든 성도들에게는 종말에 대한 아무런 징조를 보이지 아니한 것입니까? 이 문제의 답은 하나님께서 그 계시와 징조를 비밀에 부치시므로 깨닫지 못하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다니엘도 계시를 받기는 했지만 깨닫지 못했었습니다. 사도들도, 그리고 요한계시록을 받은 요한조차, 사도 바울조차 종말적인 징조에 대해 올바로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대하여 성경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15세기 칼빈 시대만 해도 종말의 징조에 대하여 맹목이었기 때문에 계시록의 해석만큼은 유보하는 지혜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니엘에게 종말의 계시를 주신 후,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봉함하라”는 명령을 주셨기 때문에 어느 시대에나 깨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2. 홀연히 오시는 주님

26절에서 예수님은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의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고 하셨습니다.

(1) 홀연히 오신다는 말은 언제든지 갑자기 오실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의 재림에 대하여 항상 “주의하며 깨어 있지 않으면” 그런 사람들에게 홀연히 임하신다는 뜻입니다. 홀연이란 말은 예상밖에 급작스럽게 들이닥친다는 뜻입니다. 만약에 성도들이 주의 날을 마지하기 위해 준비하는 생활을 못한다면 그런 사람에게는 언제인가 홀연히 임하실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예수님은 노아시대의 사람들의 경우를 예로 들어 설명해 주신 일이 있습니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다”고 하셨는데 하나님의 심판은 이들에게 홀연히 임하게 된 것입니다.

(2) “너희의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문제는 잘 때에 생깁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항상 깨어있는 생활이어야 합니다.

주님이 오실 때 이처럼 자는 것을 보이는 사람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동무들을 때리며 술친구로 더불어 먹고 마시는 목회를 한 종’들은 악한 종으로 “엄히 때리고 믿지 않는 자의 율에 처하리라”고 하신 심판을 받을 것이며, ‘기름 준비 못하여 신랑을 영접하지 못한 미련한 처녀들로 비유된 성도’들은 대 환난 가운데 던져져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게 될 것입니다(마24:48-51, 25:6-13).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문지기의 사명입니다. 하나님의 종들인 양의 문지기들은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되어야 하는데 악한 종의 생각처럼 주님의 재림에 관심이 없이(더디 오리리 하여) 세속적, 기복적 신앙을 심어 주므로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만들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마24:45).

(3) 주님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이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이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제자들로부터 예수님의 재림 시까지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선진들은 모두 이 같은 종말적인 신앙을 가지고 그들의 한 생애를 살아 왔습니다.

어떤 사람들처럼 종말에 이르러서야 재림 신앙을 가지겠다고 생각하여 아직 그의 오실 날이 멀었으며 먹고 마시는 생활로 살아가는 것이 복이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에 도든 성도들의 소망이 있다는 사실을 숨기고 이 땅에서 복을 받는 생활이 그리스도인들의 최상의 소망인 것처럼 가르친다면 양 무리들을 잠재우는 목회를 하는 문지기밖에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결 론 : 주의 재림에 우리의 소망의 표적을 두는 생활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 같은 신앙으로 살아가는 성도들만이 주님의 재림을 맞이할 수 있으며 비록 주의 재림의 날까지 살지 못하고 죽었다고 해도 주님 앞에 가서 칭찬 받을 것입니다. 이런 신앙을 가져야 천국에 넉넉히 들어감을 얻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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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4장

◆ 밤중소리 01-09 | VIEW : 840

≈ 86≈ 옥합을 깬 마리아

(본문 : 마가복음 14 : 1 - 9)

서 론 : 유월절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오신 예수님의 수난이 점점 가까이 오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린양으로서의 죽으심이기 때문에 유월절 절기와 관계되어 있습니다. 그의 희생은 우리에게 죄와 사망에서 유월시켜 주셔야 하기 때문에 그의 희생의 시기도 유월절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1절 초두에서 “이틀을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유월절과 무교절은 다른 절기지만 이 절기는 모두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연관된 행사이며 또 시기적으로 하루가 겹쳐지므로 이곳에서 한 절기로 묶었습니다.

출애굽 직전에 하나님께서 애굽의 장자들을 그 죽음에서 구원해 주시기 위해 세워주신 뜻 깊은 절기가 유월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급히 나올 때 겪은 고생을 기억하여 지키는 절기입니다. 이 무교절은 니산월 15일부터 21일까지 7일간 지키며 이 기간에는 누룩을 넣지 않은 무교병과 쓴 나물을 먹으면서 지냅니다. 이 같은 이유로 유월절과 무교절은 하나의 절기로 간주되어 왔으며 그 기간은 니산월 14-21일까지 8일간을 지켰습니다.

1. 사건의 경위

이틀을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을 맞는 그런 시점이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궤계로 잡아죽일 방책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유대인들의 살해음모에 의해 계획적으로 수난을 당하셨습니다. 이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최고의 지도자들이요 모든 종교적인 재판의 최고법정인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들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이들이 주관하고 있는 이 법정에서 사형언도를 받으셨습니다. 이처럼 어수선한 시기에 베다니에 살고 있는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오늘의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1) 예수님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를 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를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다고 했습니다. 본문에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이라고 했는데 이 시몬이란 사람은 이전에 문둥이었다가 이제는 나음을 받은 사람이거나 예수님에 의하여 고침 받았거나 아니면 그의 별명이거나 했을 것입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이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를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부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한 여자에 대하여 요12:3절에서 마리아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 마리아는 문맥의 흐름으로 보아 베다니에 살아가고 있는 나사로와 마르다의 형제 마리아임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늘 예수님 곁에서 그의 말씀을 즐겨듣기를 기뻐하며 또한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을 대접하기를 즐겨했든 마리아야말로 능히 이 같은 놀라운 사랑을 주님께 나타낼 수 있는 여자였습니다.

(2) 이 나드향은 “매우 값진 향유”라고 했습니다. 이 나드향은 ‘나르도스타카스 비타만시’라고 불리는 향나무의 뿌리에서 빼내는 정액성의 액체 향으로 원산지는 히말라야 산맥이나 인도지방에서 자라는 나무로 대단히 비싼 값의 향유입니다. 3백 데나리온이라고 했으니 노동자의 거의 일년 치의 임금과 맞먹는 고가 품입니다. 이 향유는 중동지역의 처녀들이 자신의 결혼지참 물로 시집가는데 가지고 가는 필수품으로 이 향을 온몸에 발라 향으로 남편의 사랑을 받으려 한 것입니다.

이 여자는 이처럼 소중하고 매우 값진 나드 향유가 든 옥합을 깨어 그것을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드렸다고 했습니다. 옥합은 값진 나드 향유를 담은 호리병인데 부드럽고 반투명한 그릇으로 만든 대리석 비슷한 광물질입니다. 그 주둥이가 좁고 길게 올라간 병이기 때문에 그 주둥이를 깨면 적은 구멍이 생기고 그곳으로부터 향유를 부어 사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이 사건으로 빚어진 시비

이 여인이 향유가 든 옥합을 깨고 그 안에 들어있는 나드향으로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드린 사건은 주변에 놀라운 반응을 일으켰으며 즉각적으로 시비가 벌어졌습니다.

(1) 어떤 사람들이 분을 내었다고 했습니다. 이들이 분을 낸 이유는 분명했습니다. 첫째는 무슨 의사로 이 향유를 허비하느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것을 300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 여인이 한 행동을 허비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들이 보기엔 허비라고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 향유를 주님의 머리에 한번 부어드리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겠느냐는 생각에서입니다. 더군다나 300데나리온에 해당하는 값진 향유를 쏟아 한번에 그것을 없애는 일은 그들의 상식으로는 납득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간에는 유월절이면 가난한 자들에 대한 구제가 습관적으로 실시되어 오고 있었습니다. 300데나리온이라면 노동자의 1년간의 노임이니 큰돈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돈으로 가난한 자들을 구제한다면 그들의 말처럼 많은 사람을 구제할 수 있었을 것이며 그런 일이야말로 보람된 일이 아니겠느냐는 생각은 사람의 견지에서는 당연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치판단을 잘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 드리는 일은 그 액수의 다과에 관계없이 매우 좋은 일이며 잘한 일입니다. 이 여인은 그 일을 했습니다. 주님을 많이 사랑하는 사람은 많은 것으로 바치고 적게 사랑하는 사람은 적은 것으로 바칩니다. 이 여인은 주님께 대한 사랑이 컸으므로 많은 것으로 드렸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일에 인색했습니다. 그들은 짐승의 십일조를 드릴 때에도 병든 것, 발 저는 것, 약한 것으로 드렸습니다. 그리고도 그들은 입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물건은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지치셨고 누가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으면 좋겠노라고 탄식하셨습니다(말1:8-10). 이 여인은 그들로부터 책망을 들었습니다. 주를 위해 핍박을 받는 일은 비단 반대자에게 서뿐 아니라 내 이웃으로부터도 이처럼 받는 것입니다.

(2) 이때 예수님은 무리들을 향하여 “가만 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저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저를 괴롭게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당신 때문에 괴로움을 당하는 일을 원치 않으십니다. 주님 때문에 시련을 당하는 성도들에게는 상으로 보상해 주시고 그들에게 고통을 주고 그들을 괴롭힌 자들에게는 보응으로 갚아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이십니다.

주님은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일이 왜 주님께 좋은 일이라고 하셨나? 주님을 사랑하는 일은 가난한 자들을 도와주는 일보다 더 값진 일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이웃은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셨지만 하나님께는 네 생명을 다하여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일을 제쳐놓고 가난한 자들을 생각한다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이 사건에 대하여 요12:6절에서 밝혀 주기를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있는 것을 흠쳐감이러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 당시 바리새인들이나 많은 유대인들은 율법적인 외식에 잠겨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외식에 대하여 사람이 부모에게 드릴 것을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면 그만 이라는 사상을 가지고 부모를 공경하지도 아니하고 하나님께 드린바 되지도 아니한 사실을 책망하셨습니다(막7:10-13).

(3) 예수님은 이 여인에 대하여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여인이 향유를 부어드린 일은 힘을 다한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일, 주님을 위해 무엇인가 일을 할 때에는 이 여인처럼 힘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 안에는 심오한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이 마리아는 이미 주님의 죽으심에 대하여 알고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주님의 죽으심에 대하여 큰 슬픔의 표시로 옥합을 깨어 힘을 다하여 주님의 몸에 부어 드린 것입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는 주님의 죽으심 후에 몰약과 침향을 가지고 와서 장사 지냈지만 이 여인은 이미 그의 죽으심의 고통과 슬픔을 안고 미리 그의 몸에 그들보다 더 귀하고 값진 나드향으로 그의 몸에 부어드린 것입니다(요19:38-40).

결 론 : 이 여인은 주님으로부터 참으로 놀라운 축복의 선언을 들었습니다.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주님의 말씀처럼 이 여인이 행한 일에 대하여 기념하는 말씀을 말하여 이 여인을 기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믿음의 여인처럼 주님께 대한 많은 지식을 가지고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어 주님의 이 같은 칭찬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 87≈ 가룟 유다의 배신

(본문 : 마가복음 14 : 10 - 11)

서 론 : 베다니에 살고 있는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일어난 주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사건은 여러 가지로 많은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가난한 자들을 생각하는 일과 주님을 사랑하는 일을 어떻게 분별해야 하느냐에 대한 교훈을 주셨고 한 여인이 부은 나드향 한 옥합은 예수님의 장사를 미리 준비한 것이라는 놀라운 말씀으로 그 여인의 그 놀라운 믿음을 보게 되고 또한 예수님이 이 여인을 위해 하신 말씀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그의 제자들은 스승에게 큰 부끄러움을 당했는데 특히 그 중에 가룟 유다가 지목된 대상이었습니다. 이 사건 직후, 유다는 곧장 대제사장에게로 달려가 예수님을 팔려고 하는 음모를 꾸미고 이미 돈까지 받기로 약속을 하는 장면이 나오는 것입니다(요12:6).

1. 유다의 배신은 어디서 온 것인가?

성경에는 많은 의문점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룟 유다의 배신이야말로 의문 중에 의문으로 남아 있습니다.

(1) 그의 배신의 동기에 여러 견해들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견해가 유다는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메시야로 기대했었는데 자신의 판단에는 예수님께 그런 가능성이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고난, 장사, 부활에 대하여 강조하시므로 실망했기 때문이라는 견해입니다. 다른 또 하나의 견해는 유다는 예수님으로 하여금 반드시 메시야적인 권세 있는 행동을 취하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하려는 의도적인 뜻이 원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음에 하나는 예수님이 자신에게 심한 모욕감을 주심으로 울화가 나서 순간적으로 배신했다는 견해 등입니다.

그런데 성경적인 동기를 살펴보면 그의 탐심이 많은 작용을 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유다는 애초부터 도적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감이러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요12:6). 유다의 도벽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이전부터였음이 분명합니다. 그는 제자가 된 후, 돈궤를 맡게 되었으니 그 돈궤에서 많은 돈을 훔쳐갔을 것이란 것은 짐작하기에 어렵지 않은 것입니다. 그의 이 같은 돈에 대한 욕심과 도벽은 탐심을 가져왔고 예수님의 책망으로 이제 그것마저 소망이 끊겼기 때문에 그리고 주님께 당한 모욕의 보복으로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그의 몸 값을 흥정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룟 유다의 이 같은 인간성을 아심으로 예수님을 유대인들에게 팔아 고난을 받게 하시려는 적격자로 선택하신 것입니다.

애굽의 바로 왕이 그같은 적격자로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사실에 대하여 바울은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롬9:17). 우리는 악한 일에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나타내는 그릇으로 선택되어서는 안됩니다. 그같은 그릇은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이기 때문에 그 종말이 유다처럼 비참하게 되는 것입니다(롬9:22). 잠16:4절 말씀에는 “여호와께서는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바로 이 악한 자로써 쓰임 받기 위해 선택된 자였으니 참으로 비참한 인간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2) 유다는 주님의 견책을 싫어했습니다. 시몬의 집에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견책이셨습니다. “가만 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저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고 하신 말씀은 그 지목된 대상이 유다였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다가 가난한 자들을 들먹이면서 그 여자를 책망했기 때문입니다. 잠15:12절 말씀을 보면 “거만한 자는 견책 받기를 좋아하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같은 자에게는 견책도 하지 말라고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자신에게 욕이 돌아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중에도 좋은 칭찬 듣기만을 좋아하고 견책을 듣기를 싫어하면 이 같은 일은 결과적으로 자신의 파멸을 초래하게 되는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훌륭한 사람, 위대한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견책을 들었을 때 회개하고 죄에서 돌이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사람들을 그의 능력 있는 일꾼으로 사용하십니다. 유다가 이때 주님의 책망을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기회로 삼고 나쁜 버릇을 고쳤다면 그의 생애는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을 것입니다.

유다는 진리를 분별할만한 지혜가 없었습니다. 유다는 주님을 3년 반이나 따라다녔지만 주님이 전하시는 복음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가 알고 있는 메시야는 왕으로 오시는 영광의 메시야여야 하는데 나사렛 청년의 이야기는 자신은 많은 고난을 받고 대제사장들에게 잡혀 죽어야 한다고 하니 유다는 예수를 메시야로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유다는 인간적인 면에서는 영리했습니다. 모든 제자들이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면 왕이 되실 줄로 알고 있었는데 이 유다만큼은 예수님이 왕이 아니라 죽는다는 사실을 짐작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런 것입니다. 사람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예수님의 사역을 알 수 없습니다. 진리 안에 그리스도의 비밀이 있는데 진리에 눈이 어두우면 교회에서 유다의 역할밖에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2. 예수를 넘겨줄 기회를 찾은 유다

가룟 유다는 대제사장들에게 갔습니다. 베다니에서 예루살렘까지의 거리는 약 3키로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1) 유다가 예수를 넘겨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갔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넘겨주려고 했다는 말은 그때 대제사장들은 이미 예수를 궤계로 잡아죽일 방책을 강구하고 있었던 처지였기 때문에 좋은 기회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이미 죽일 계획을 세우고 진행 중에 있었고 그 가장 좋은 기회가 명절(유월절)로 생각했지만 그 날은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명절을 지내는 날이므로 민요가 날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좋은 방책을 구하고 있는 그런 시기에 그들 앞에 가룟 유다가 불쑥 나타났으니 그들에게는 너무나도 뜻밖에 좋은 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예수를 넘겨주려는 유다의 제의를 받은 대제사장들은 기뻐했습니다. 사람들이 없는 가장 한가한 장소에서 은밀히 체포할 수만 있다면 민요는 염려치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의 죽일 일을 미룰 까닭이 없었습니다. 이런 일의 진행은 예수님이 유월절에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죽으실 일이 하나님의 섭리대로 이루어져 나가는 일이 되는 것으로 유다의 배신이 성경을 응하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입니다.

(2) 유다는 예수를 넘겨줄 기회를 찾더라고 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넘겨주는 대가로 그들로부터 돈을 받기로 약속 받았습니다. 여기서 유다가 예수님을 대제사장들에게 넘겨준 동기에 돈이 작용했음이 드러난 것입니다. 은 30량은 한 노예의 몸값밖에 안 되는 돈이었지만 가룟 유다에게는 그만한 돈이라도 필요했던 것입니다. 원래가 도적인 유다는 아마도 그들과 예수님의 몸값을 흥정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노고와 세심한 배려로 틀림없이 예수를 잡게 해 줄 것을 장담하고는 그 대가로 은 30량을 약속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이 돈을 한푼도 써보지 못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입니다.

유다는 이 시간부터 예수님을 잡으려는 대제사장들의 체포조의 안내인으로 다시금 예수님 곁으로 다가온 것입니다. 유다는 유월절 행사에 참석하여 떡을 떼어먹을 때 사단이 결정적으로 그에게 들어가 잠시후면 감람원 은밀한 기도의 장소로 가는 사실을 알고는 그곳으로 그들을 데리고 와서 스승의 몸에 포승을 묶이는 저주스러운 일을 완수했던 것입니다.

결 론 : 우리는 누구나 가룟 유다와 같은 사람들이 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사람의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사랑보다 탐심을 품고 있으면 예수님을 배신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탐심 때문에 주의 이름을 부인하고 주의 뜻을 거역할 때가 얼마나 많은 것입니까? 우리들도 책망 듣기를 싫어하면 유다가 될 수 있습니다. 책망을 싫어하는 자는 교만한 자라고 하셨는데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치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 위에 굳게 서서 흔들림이 없어야 합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고후13:5). 자기 자신의 믿음을 시험하고 확증하는 일에는 선한 열매와 순종과 감사가 그 밑거름이 되어야 합니다. 돈을 사랑하는 마음, 예수님께 대한 진정한 사랑이 없는 마음, 순종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따르는 믿음의 생활을 못하면 우리는 능히 가룟 유다의 자리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유다가 되지 말도록 힘쓰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 88≈ 다락방에서 있은 일

(본문 : 마가복음 14 : 12 - 21)

서 론 : 유월절 하루 전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다음 날이면 유월절이며 예수님은 이 날에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십자가에 달리셔야할 바로 그날입니다. 12절에 나오는 “무교절 첫날 곧 유월절 양 잡는 날”이란 유월절을 준비하기 위해 양을 잡기 시작하는 전날을 의미하기 때문에 예수님께는 이날이 중요한 의미가 주어지는 날입니다. 유월절 어린양으로 고난을 당하실 예수님께 있어서 이 날은 그의 죽으심에 대한 참된 의미를 부여하는 신약적인 유월절의 행사를 이행해야 하므로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1. 준비된 다락방

이때까지 제자들은 유월절에 이루어질 선생님의 고난에 대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의 관습에 따라 유월절 행사를 지내지 않을 수 없었으며 이에 대하여 주님은 “우리가 어디로 가서 선생님으로 유월절을 잡수시게 예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고 물은 것입니다.

(1) 예수님은 제자들의 제안을 받아드려 두 명의 제자를 성내로 보내시기로 하셨습니다. 이 두 명의 제자들은 눅22:8절에 의하면 베드로와 요한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보내시면서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성내로 들어가라 그리하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를 따라가서 어디든지 그의 들어가는 그 집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의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먹을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뇨 하시더라 하라 그리하면 자리를 베풀 예비된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2) 이 말씀에서 우리는 두 가지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하나는 예수님은 이미 그의 죽으심을 준비하시는 일에 유월절 행사까지 예비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기록된 대로 가신 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스스로 그 기록된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 모든 일을 준비하셨습니다. 유월절을 먹을 방이 어느 곳에 있는 누구의 집인지 언급된바 없지만 “그 집주인에게 이르기를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먹을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뇨 하시더라 하라”는 말씀에서 예수님은 이미 제자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유월절을 지내실 객실을 예비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 장소를 찾는 일에 기적적인 방법을 사용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를 따라 가서”란 말씀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두 제자들이 성내로 들어가는 그 시간에 과연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이 있었는지? 있다고 해도 그 사람이 어느 집사람인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이 같은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때 제자들이 할 일은 순종하는 일뿐입니다. 가나의 혼인집에서 그 집 하인들에게 돌 항아리에 든 물을 담아 연회석에 가지고 가라는 말씀에 그 하인들이 순종했더니 최상의 포도주로 변하는 이적이 나타났습니다. 밤새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지 못한 베드로에게 깊은 대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는 말씀에 순종했더니 그물이 찢어질 만한 많은 양의 고기를 잡았습니다.

2. 너희 중에 한사람이 나를 팔리라

제자들이 말씀하신 대로 성내로 들어가 예비된 객실을 찾았고 제자들은 그곳에서 유월절을 예비했습니다. 유월절에는 양만 잡는 것이 아니라 집안의 누룩을 제거하고 무교병과 포도주와 쓴 나물과 양념들을 준비하였으므로 이 같은 일을 제자들이 담당했을 것입니다. 준비하는 일이 다 마치고 저녁때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열 두 명의 제자들을 데리시고 와서 다 앉아 유월절 음식을 먹을 때였습니다.

(1)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 중에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고 하시는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이 자리에서 비로소 당신을 팔 가룟 유대에 대한 언급을 하신 것입니까? 지금 다락방에서 벌어지고 있는 유월절 행사는 놀라운 의미를 지닌 행사입니다. 구약적인 유월절 행사가 영원히 살아지고 이제 새로운 신약적 의미의 유월절 행사를 세우는 순간입니다. 구약의 유월절 행사는 바로 왕 밑에서 노예생활을 해온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키기 위해 어린양이 피로서 그들의 생명을 대신하고 이스라엘을 탈출하게 하신 행사입니다.

물론 이 같은 구약적 의미의 유월절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전히 성취되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그의 백성들을 그의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하나 대속제물로서의 어린양이 되셔야 했으며 이 일로 그의 백성들은 죄에서 자유함을 얻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이 직접 집례하시는 유월절 행사는 그의 죽으심으로 구약적 의미의 유월절 행사는 영원히 사라지고 그의 피를 마시고 그의 살을 먹는 일로 영원한 생명을 부여받는 새로운 유월절 행사를 창시하는 의미 깊은 행사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실시하고 있는 ‘주의 성만찬’이 바로 이 같은 새로운 형태의 유월절 행사입니다.

그런데 그런 자리에 주님을 팔 인물이 동석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가 회개하여 이 자라에 참사하던가? 아니면 이 자리에서 나가던가? 어느 한가지만을 택해야 할 것이므로 예수님은 나와 함께 먹는 자 중에 하나가 나를 팔리라고 하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2) 이때 제자들은 “근심하여 하나씩 하나씩 여짜오되 내니이까”고 묻기를 시작했습니다. 제자들의 이 같은 물음에는 자기도 그런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란 두려움이 깔려 있었고, 도대체 자기들 중에 그럴 사람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에서 근심하여 묻게 된 것입니다. 이때까지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고난받으실 일을 모르는 상태였고 스승을 파는 일이 무엇인지 잘 이해를 못하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그 대상이 가룟 유다인 줄은 전혀 일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도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니라”는 말씀으로 정확하게 그 대상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릇이란 나물이나 무교병이 담겨있는 접시종류를 말하는 것으로 아마 이때 물론 가룟 유다도 주님과 함께 손을 넣었겠지만 다른 제자들의 손도 들어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것은 팔 자를 제자들 앞에 공개하려는 뜻이 아니라 본인이 자신을 지적한다는 사실을 깨달아 회개하기를 바라시는 마음에서였을 것입니다.

(3) 예수님은 21절에서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과연 가룟 유다가 회개할 수 있었을는지 어떨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그가 회개하지 못하므로 오는 책임은 모면할 수 없습니다. 가룟 유다의 배신과 그의 죽음은 이미 성경에 예언되어 있었기 때문에 기정 사실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시41:9). 그러나 인간의 책임은 하나님의 예정과는 관계없이 당사자가 져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그 대가의 화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유다는 이 같은 화를 곧 받게 되었으며 그의 생명은 차라리 세상에 태어나지 아니함만 못한 처참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유다는 결국 회개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물러났습니다. 그가 물러난 후, 새 언약에 의한 축복의 새로운 유월절 행사인 ‘주의 성만찬’이 시작되었습니다. 요13:30절에서는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유다가 그 조각을 받도 곧 나가니 밤이러라”고 했습니다. 그의 마음에도 사단이 어두움의 밤을 심어주었고 세상에 나가니 캄캄한 밤이 역시 그를 마지하고 있었습니다.

결 론 : 우리는 유월절을 의미하는 ‘주의 성만찬’을 매년 몇 차례씩 거행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때마다 깊이 생각할 일은 가룟 유다의 배반입니다. 은 30으로 스승을 배반한 유다는 결국은 회개치 못하고 차라리 나지 아니함만 못한 비참한 최후를 마쳤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행실에 대해 철저하게 회개한 후, 성만찬에 참여해야 합니다. 회개에는 주어진 기회가 있습니다. 그 기회를 유다처럼 놓치면 생명의 길을 영원히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 89≈ 주님의 성만찬

(본문 : 마가복음 14 : 22 - 25)

서 론 : 그리스도인들은 누구이든 주님의 성만찬을 멀리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주의 성만찬에 참여하도록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유월절의 성만찬에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명하셨습니다(눅22:19). 주의 성만찬은 교회의 예배의식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절대적인 행사 중 하나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희생되셨기 때문이며 출애굽으로부터 이스라엘이 계속해온 유월절 행사가 하나님의 교회에서 새 언약에 동참하는 새로운 행사로 계속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1. 떡을 가지사 축복하신 예수님

우리는 주의 성만찬에는 주님의 축복이 따른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셨다”고 했습니다.

(1) 예수님은 떡을 가지사 축복하신 후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받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이 유월절을 지낼 때에 먹는 떡은 누룩 없는 떡으로 이 떡을 먹는 이유는 쓴 나물과 함께 애굽에서의 고난의 생활을 회고하며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락방에서의 마지막 유월절에서 예수님은 새로운 의미의 해석을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떡을 가지사 “이것이 내 몸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몸을 유월절의 누룩 없는 떡으로 비유하셨습니다. 누룩이 없다는 말은 순수하고 순결함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떡이 고난을 상징하는 것처럼 예수님은 고난을 받으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고난은 구속사적인 면에서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그의 육체의 찢기심으로 말미암은 화목제물로서의 죽으심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의 피 흘리심으로 말미암은 속죄제물로서의 죽으심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두 가지 의미에서의 희생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떡을 가리켜 자신의 몸이라고 하신 것은 그 떡 자체가 예수님이시란 말씀이 아니라 자신의 몸을 화목제물로 표현하시고 떡을 먹는 일은 예수님과의 연합으로 인한 하나님과의 화목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주님의 몸인 떡을 떼어먹는 것입니까? 희생제물은 우선 어린양을 잡아야 합니다. 살이 찢기고 각을 떠야 합니다. 이처럼 주님은 우리의 희생제물로 십자가에서 그 몸이 찢기셨습니다. 이제 새 언약으로서의 유월절 행사이기 때문에 양의 고기로서가 아니라 찢겨진 주님의 몸을 상징하는 떡으로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떡으로 화목제물이 되신 주님의 몸을 먹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주님의 십자가로 하나님과 영원한 화목제물이 되셨다는 언약의 상징입니다.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골1:22).

(2) 또한 이 떡은 예수님이 하늘에서 내려오신 영생의 떡임을 상징해 주는 것임으로 이 떡을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자의 살을 먹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고 하셨습니다(요6:52-55).

그러면 우리는 이 떡을 어떻게 먹는 것입니까? 주의 성만찬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유력하게 주장되는 설이 개신교 측에서 주장하는 영적 임재설이요 다른 하나는 천주교 측에서 주장하는 화체설입니다. 화체설이란 우리가 교회에서 성만찬을 거행할 때 예수님이 실제로 임하신다는 주장으로 떡과 포도주를 먹을 때 그것이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하다는 주장입니다. 이 설은 9세기초에 대두되었고 16세기 트랜트 회의에서 확정시킨 천주교의 정설입니다. 그런데 영적 임재설은 15세기 칼빈이 주장한 것으로 성만찬식에 예수님이 육체적으로 임하는 것을 부인하는 반면 영적으로 임재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견해입니다. 우리는 천주교에서 주장하는 화체설을 따를 수는 없습니다. 떡이 실제로 예수님의 살로 변하고 포도주가 피로 변한다는 주장은 거짓말이기 때문입니다.

실질적으로 우리는 주님의 살과 피를 먹을 수는 없습니다. 주님이 먹으라고 하신 것은 영적인 뜻입니다. 요6:63절에서 예수님은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같은 영적인 사실을 예수님은 마지막 성만찬에서 떡과 포도주로 대신 하셨던 것입니다. 이 일이야 말로 그리스도인들의 놀라운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명령하신 방법에 따라 친히 영적으로 임재하시고 영적인 연합의 축복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2. 잔을 가지사 사례하신 예수님

떡을 떼는 순서가 끝났습니다. 아마 이때 제자들은 어리둥절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예년에 집에서 해온 유월절 행사와는 많은 차이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곧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제자들에게 주셨다고 했습니다.

(1) 성만찬의 잔은 포도주를 의미합니다. 유월절에는 양의 피를 문설주와 문지방에 발랐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의 유월절은 하나님의 어린양의 피를 상징하는 포도주로 대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24절에서 잔을 주시면서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하셨습니다. 언약이란 ‘은혜의 언약’을 말하며 이 언약은 옛 언약에 대체시킨 새 언약을 의미합니다. 옛 언약이란 짐승의 피로 세운 율법적인 언약입니다(출24:8). 이 짐승의 피가 바로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의 피를 의미해 주며 예수님은 이 언약을 온전히 이루시기 위해 친히 십자가에서 그의 피를 영원한 속죄제물로 드린 것입니다. 적어도 예수님이 세우신 유월절 성만찬은 짐승의 피가 예수님의 피를 의미하는 포도주로 대체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구약적 제물인 짐승의 피는 사람의 죄를 온전히 사유해 줄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피는 그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구약적 짐승의 피는 하나님과 이스라엘만의 잠정적인 관계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피는 하나님과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를 가졌습니다. 주님은 이 피를 마시라고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포도주를 주셨습니다.

(2) 우리는 포도주가 어떻게 주님의 피를 의미하는 것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같은 일은 예수님이 친히 그런 법도를 세우시고 우리에게 명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포도주로 주님의 피를 대신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를 마실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의 피는 영적인 의미를 두신 말씀이며 옛날이나 지금이나 우리는 그의 피를 구할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피를 마신다는 일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포도주가 입에 들어갔을 때 실제로 주님의 피로 변한다는 화체설은 너무나도 끔찍하고 야만스러운 표현이기 때문에 수용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주의 성만찬에 그의 살을 대신하여 떡을 떼며 그의 피를 대신하여 포도주를 마시는 것으로 주의 성만찬을 치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의 성만찬에서 이처럼 떡을 먹고 피를 마시면 주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것이 되어 예수님이 세우신 새 언약의 동참자가 되는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성만찬에 참여했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이 같은 축복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믿음으로 참여하는 자에게만이 이 같은 영적 유익과 새 언약의 동참자로서의 크나큰 축복의 대상자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주의 성만찬에 참여하는 일에 대하여 엄히 경종해 주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3) 25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다락방에서 있은 유월절 행사가 구약적 절기로서의 마지막 유월절이심을 밝히신 것이며 예수님이 곧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의 희생제물이 되시어 새 언약을 이루셔야 할 것을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하나님 나라에는 포도나무도 있으며 그 포도에서 마실 것도 나온다는 사실을 가리켜 주신 것입니다. 주 재림 시에 주님과 함께 거처할 천년왕국의 하나님 나라에도 이 나무가 있어 우리는 그때 그 포도나무에서 난 새로운 포도주를 마시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천국에 올라가서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 마실 포도주는 성만찬으로서가 아니라 생의 즐거움으로 마실 것입니다.

결 론 : 다락방에서 있었던 주의 성만찬은 여러 가지로 의미가 깊은 행사입니다. 우리는 관습에 의해서나 전통에 따라서가 아니라 주님의 새 언약에 동참하는 축복의 의식으로 주의 명하심에 따라 주의 오실 날까지 이 행사를 행하면서 주님께 감사할 것입니다.

≈ 90≈ 베드로의 맹세

(본문 : 마가복음 14 : 26 - 31)

서 론 : 예수님과 제자들은 유월절 식사를 마친 후 마지막으로 찬미를 불렀는데 이 노래는 할렐의 후반부(시115 - 118편)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은 감람산으로 올라간 것입니다. 주님이 제자들을 데리고 이 산에 오르신 목적은 제자들로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기 위함이요 또 자신은 앞으로 져야할 무거운 십자가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마지막으로 확인하시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이때 산으로 오르시면서 베드로와 나누신 말씀이 인상깊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 왜 주님께서 맹세하지 말라고 하셨는가에 대하여 베드로의 경우를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주와 함께 죽기까지 하겠노라고 맹세한 그가 힘없이 시험에 들게 된 것입니다.

1.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나이다”

이제는 결정적인 순간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메시야 왕국이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했던 제자들도 숙연해 졌습니다. 자기들의 스승인 예수님의 태도에서 무엇인가 심상치 않은 감이 잡힌 것입니다.

(1) 이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슥13:7절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스가랴서에 있는 이 말씀은 분명히 주님의 죽으심에 대하여 언급해 주고 있습니다. 내가 목자를 친다는 말씀은 하나님에 의하여 당하실 주님의 고난을 말씀하시며 그 결과 양들이 흩어진다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얼마 후면 이 예언과 같이 이루어질 것을 아시고 이 같은 사실을 제자들에게 미리 알려 주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흩어진다는 말은 그들 제자들이 예수님을 영영히 배신할 것이란 의미가 아닙니다. 그들이 잠시동안 시험에 들것이지만 주님이 그들을 돌이키게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고 말씀하시므로 장차 되어질 모든 사실에 대하여 이미 아시고 하나님께서 주신 그 계획에 따라 일을 진행시키고 있었습니다.

(2) 이때 베드로가 재빨리 주님께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나이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베드로의 이 같은 말은 거짓말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진심으로 마음에 있는 자신의 생각과 각오를 이처럼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베드로의 충정어린 고백을 받아 주시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베드로가 앞으로 이 같은 자신에 찬 맹세를 뒤엎고 주님을 부인할 일에 대하여 이미 낱낱이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베드로를 향하여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베드로뿐 아니라 모든 제자들에게 크나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베드로의 고백은 진실에서 나온 말인데 주님이 어떻게 그에게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으로 오히려 의심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다시 한번 힘있게 자기의 각오를 주님 앞에 거침없이 토로했습니다. 그의 새로운 맹세는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고 한 것입니다.

2. 베드로는 왜 실패한 것인가?

예수님은 베드로의 고백을 거짓말로 인정하신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의 진심에서 나온 사실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면 왜 결과적으로 베드로는 예수님의 예언하신 말씀대로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세 번씩이나 부인하는 일을 하게 되었느냐는 것입니다.

(1) 베드로가 주님을 향한 자신의 진실한 마음을 계속 유지하려면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 기도했어야 했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의 결심이야말로 제자들 중에서도 모범적인 일로 보여준 일이지만 그같은 결심이 사단의 시험에 의해 무너질 것임을 알고 계셨습니다. 베드로의 이 같은 굳은 결의에는 반드시 기도가 따라야 했습니다. 맹세는 잘했지만 맹세로 일이 다 성취된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가 맹세한 사항을 다 이루기까지 베드로는 그 맹세를 이루기 위한 영적인 투쟁에 승리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싸움에 패자가 된 것입니다.

이 같은 일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기도하실 동안 베드로가 무엇을 했느냐에 대한 사실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시몬아 네가 한시 동안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마음은 원했었지만 기도하지 못하므로 육신이 약하여 사단의 시험에 넘어진 것입니다(막14:37-38).

(2) 베드로의 맹세에는 자기만이 할 수 있다는 교만이 있었습니다. 이 교만이 그로 걸려 넘어지게 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처럼 말했습니다. “다 버릴지라도 나는 버리지 않겠나이다”고 했습니다. 다 버린다는 말은 다른 제자들의 경우를 말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과 자신을 구별했습니다. 자기의 믿음은 그들의 믿음보다 우월하다고 여겼습니다. 자기는 다른 제자들보다 주님께 대한 사랑이 두 두텁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생명의 위협 앞에서 다 도망간다 해도 자기는 주님과 함께 죽을 수 있는 결심과 각오가 확고히 서 있다고 자만했습니다.

이 같은 베드로의 생각은 물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작용한 것이지만 그의 교만을 나타낸 말입니다. 교만은 넘어짐의 앞잡이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를 물리치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주시지만 “교만한 자를 대적하신다”고 하셨습니다(벧전5:5). 베드로는 이 교만의 올무에 걸려 사단의 시험의 대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3)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는 말씀에 베드로는 무엇인가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주님께 의뢰했어야 했습니다. 닭이 두 번 울기 전이라든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는 말씀을 좀더 심각한 마음으로 받아 들여야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연약함을 참으로 발견하고 주님께 자기의 믿음 없음을 고백하고 도우심을 간구했어야 했습니다. 귀신들려 간질병 걸린 아들의 병을 고치려고 주님께 찾아 나온 아버지는 주님을 향하여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고 자신의 연약함을 도와달라고 호소했습니다(막9:24). 그러나 베드로는 자신의 믿음을 과신한 나머지 주님의 도우심을 원치 아니했습니다. 그런 일은 자기 스스로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은 것입니다. 이런 생각은 자기 과신으로 결국 교만한 마음을 자지게 되었으며 시험을 주는 사단의 좋은 미끼가 되어 그 덫에 걸리게 된 것입니다.

시험을 이기는 능력은 기도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교만한 마음은 기도의 능력을 상실해 버리고 말게 됩니다. 베드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과 함께 죽기 위해 기도했어야 했습니다. 주님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스스로 자만한 나머지 자신의 마음을 믿었습니다. 기도가 없어도 자기가 생각한 바를 할 수 있을 것으로 자신했습니다. 이 같은 베드로의 마음가짐이 그리스도인들의 실패의 원인이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일에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결실 해야 합니다. 기도가 없는 계획은 실패하게 됩니다. 사단은 계획이나 장담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사단은 그리스도인들의 기도를 두려워합니다. 기도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단은 그리스도인들의 주언 부언하는 기도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진실하고도 간절한 기도를 두려워합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주님의 기도를 본받아 함께 간절하므로 아뢰는 기도로 깨어 있었더라면 승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결 론 : 빌라델비아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는 칭찬을 들었습니다. 그러면 이들의 이 같은 적은 능력은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그들의 기도에서 나온 것입니다.

≈ 91≈ 시험에 들지 말라

(본문 : 마가복음 14 : 32 - 42)

서 론 : 이제 결정적인 시각이 점점 다가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는 숨겨진 비밀이 아니라 그가 당하실 모든 일을 낱낱이 알고 계십니다. 그는 자신이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십자가에서 온갖 수모와 수치와 고통을 당하실 일에 대하여 인간적인 면에서 너무나도 괴로웠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시고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려운 일을 만나셨을 때 평소에도 기도하시는 일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산에 올라가 밤이 맞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이제 그의 사역을 이루셔야 할 최 정점에서 최후적인 승리를 위한 피나는 기도를 위해 겟세마네로 향하신 것입니다.

1. 기도하시는 주님의 모습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신 후 제자들을 둘로 구분하셨습니다. 열 한 명 중 여덟 명에게는 “너희는 여기 앉았으라” 하시고 먼 곳에 남겨 두셨습니다.

(1)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등 세 명만을 데리시고 더 멀리 떨어진 곳으로 향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왜 세 명만의 제자들을 데리고 기도하실 곳으로 가셨나? 이에 대해 두 가지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앞으로 얼마 후 곧 찾아올 시험을 앞두고 그들로 시험에 이기도록 기도를 시키시려는 뜻에서입니다. 이들은 모든 제자들 중 핵심적인 인물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들만이라도 시험에서 이길 수 있다면 다른 제자들을 능히 시험 중에서 건질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한가지는 주님이 당하실 고난에 그들로 기도의 협력을 얻고자 하시려는 주님의 생각에서였을 것입니다. 교회에는 주의 종들을 위해 기도해 줄 기도의 일꾼이 필요합니다. 누구나 기도의 일꾼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들 세 명은 그 기도의 사명자로 선발된 제자들입니다.

(2) 예수님은 이들을 데리고 가시면서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내 마음이 심히 민망하여 죽게 되었다”는 말씀은 주님이 죽게 되신 것으로 고민하셨다는 말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란 뜻으로 앞으로 주님이 겪으실 일에 대한 마음의 괴로움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죽을 지경으로 답답함과 괴로움과 고민스러운 모든 마음의 괴로움을 안고 겟세마네 동산에 오르신 것입니다. 이 같은 마음의 번민을 해결하지 않고는 십자가를 지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결사적인 기도의 시간을 가지시려고 산에 오르셨습니다. 예수님은 함께 올라온 세 제자들과도 떨어진 거리에서 기도하시려고 그들보다 조금 나아가셨다고 했습니다.

(3) 예수님의 기도는 처절할 정도로 간절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의 모습이 35절 이하에서 몇 가지로 나와 있습니다.

① 땅에 엎드려 기도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의 기도에는 여러 가지 자세가 있지만 예수님처럼 땅에 엎드린 기도는 자신을 낮춘 겸손한 기도, 순종을 나타내는 기도로 볼 수 있습니다.

② 예수님은 “될 수 있는 대로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 때”라고 하신 말씀은 그가 당하실 고난의 때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지금 그 때를 향하여 한 걸음씩 다가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걸음이 매우 고통스럽고 괴로우신 것입니다. 빨리 그 때가 지날 수 있기를 기도하셨습니다.

③ 예수님은 기도의 시작에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여기서 ‘아바’란 말은 아람어로 아버지란 뜻인데 이 표현은 어린아이가 아버지에 대하여 친근하게 부르는 호칭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대개의 유대인들은 불경스럽다고 하여 이런 호칭을 사용하지 않고 있었지만 예수님의 경우는 독생하신 하나님으로서 아버지의 품속에 영원 전부터 계신 독생자이시므로 이처럼 ‘아바’란 칭호로 하나님을 부르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연이어 나오는 아버지란 말은 ‘아바’란 아람어를 다시 해석해 주는 말로 볼 수 있습니다.

④ 예수님은 다음에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 잔이란 예수님이 짊어지실 십자가의 고통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옮겨주시기를 원했습니다. 이 잔이란 말에 함유된 뜻은 단순히 죽음의 고통만을 의미해 주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전 인류의 죄에 대한 심판을 의미합니다. 그가 인류의 죄를 지고 그 죄 값의 심판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 순간에는 아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다만 인류의 죄를 짊어진 죄인으로 그 아들을 십자가에 매 달으시며 오직 죄인으로서 그에게 무자비하신 죽음의 채찍을 내리실 것입니다. 이 잔에 대한 주님의 괴로움이 십자가에서 메아리쳤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란 말씀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막15:34).

주님은 “이 잔을 내게서 옮기옵소서”라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주님께서 아버지께서 그렇게 해 주시리라고 믿어서 이런 기도를 드렸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주님은 자신의 그런 사명 때문에 이 세상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일에 대하여 너무나도 명백하게 알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극한 상황에서 마음의 번민과 갈등을 해소하고 승리하는 일에 이처럼 애써 고민하신 사실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란 기도로 자신이 하셔야할 일에 다시 한번 마음의 결심을 가졌습니다.

2.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예수님은 기도하신 후 세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오셨습니다.

(1) 예수님은 제자들이 기도하고 있기를 기대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잠을 잘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하여 “눈이 심히 피곤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이 당하실 일과 또 당차 자신들이 당해야 할 문제를 심각히 생각하고 기도했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시 동안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특별히 베드로에게 이처럼 말씀하신 이유는 그가 자신이 맹세한바와는 달리 곧 주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할 그런 큰 시험을 앞두고 있는데도 한시 동안도 깨어 있어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할 수 없었던 사실을 안타깝게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말씀하신 예수님은 베드로를 측은히 여기시면서 의미 있는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말씀하신 마음은 원어로 ‘푸뉴마’로 곧 영을 뜻합니다. 베드로의 영은 이미 중생한 생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마음은 무엇이건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고 하는 간절함이 있었으며 주를 위해 죽는 일에도 함께 하겠다는 진실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의 육신이 약하다는 사실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베드로가 깨어 기도해야 할 때에 잠을 자고 있었던 것은 그의 육신의 약함에서 온 것임을 이해하고 계셨습니다.

(2) 예수님은 세 번째 제자들에게 오셔서 그때까지 잠을 자고 있는 모습을 보시고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이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이다”는 말씀은 그 표현상 해석하기 어렵습니다. ‘그만큼 잤으면 됐다’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하며 ‘아직도 자고 있으며 쉬고 있느냐 이제 그만했으면 됐다’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결 론 : 예수님은 곧 닥쳐올 고난을 대처하시려는 영적인 무장을 갖추시기 위한 기도의 싸움을 마치셨습니다. 예수님은 “때가 왔다”고 하셨습니다. 이제 곧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잡으려는 무리들과 함께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은밀한 그곳으로 밀어닥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일어나라 함께 가자”고 하셨지만 제자들은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는 일에 실패하므로 인하여 비참한 시험에 빠질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 92≈ 성경을 이루려 함이니라

(본문 : 마가복음 14 : 43 - 52)

서 론 : 예수님은 겟세마네의 기도를 마치신 후 ‘성경을 이루려’하시려는 결연한 자세로 무리들 앞에다가 스셨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이 곤하여 잠을 자고 있는 제자들 앞에 오셨을 때에 가룟 유다가 이미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무리들을 거느리고 예수님이 계시는 그곳으로 가까이 오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피하시려고 대항치 아니하고 그들에게 순순히 잡히셨는데 이 일에 대하여 예수님은 “이는 성경을 이루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태어나심부터 십자가에서 죽으심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이 오직 성경에 기록된 대로의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하심이었음을 최종적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1. 가룟 유다의 입맞춤

가룟 유다는 자기의 스승을 파는 일에 입맞춤으로 신호를 삼았습니다.

(1) 예수님을 체포하려는 무리들 앞에는 가룟 유다가 앞장섰습니다. 유다가 데리고 온 무리들에 대하여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무리”라고 했는데 이 같은 표현은 이 무리들이 바로 산헤드린에서 파송된 무리들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산헤드린은 대제사장이 의장이었고 바리새인, 서기관, 장로들로 구성된 72명의 회원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이 기관을 ‘산헤드린 공회’라고 부르는데 이 기관은 구약시대의 전통을 계승하여 예루살렘이 멸망할 당시인 70연대까지 존속해온 유대인들의 최고 재판기관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공회는 주로 모세의 율법을 수호하며 이를 어기는 자들에 대한 형벌을 가하는 절대적인 기관이었으나 예수님 당시에는 로마정부로부터 파송된 총독 관활하에 있었기 때문에 사형에 관한 한, 총독의 재가를 받아야 했습니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그들은 예수님을 체포하기 전에 벌써 산헤드린 공회를 열어 예수님을 체포하고 사형에 처할 것을 결의하여 이 같은 결의에 따라 파송된 무리들이 유다의 뒤를 따라온 것입니다.

(2) 유다는 이미 그들과 군호를 짰는데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아 단단히 끌어가라”고 일러주었다고 했습니다. 날이 아직 밝지 않아 어두웠을 때입니다. 매우 가까이 다가가지 않으면 얼굴의 식별이 어려웠습니다. 더군다나 여러 명의 제자들과 함께 계시는 예수님을 빨리 구별하여 체포하지 못하면 혹 놓칠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정확한 정보가 필요했습니다. 이 일에 누구보다 가룟 유다가 잘 알았으므로 그가 앞장서서 체포의 대상인 예수님께 입맞추는 것으로 군호를 짠것입니다.

유다는 예수님 곁에 가까이 와서 아주 친절한 어투로 랍비여 하면서 예수님 얼굴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입맞추는 일은 사랑과 존경의 표시로 나타내는 그 당시 사회의 일반적인 인사였습니다. 우리는 가룟 유다로부터 역사상 가장 간교한 입맞춤을 보게 됩니다. 이처럼 가룟 유다는 자기 스승을 파는 일에 입맞춤으로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거짓된 배신의 입맞춤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들은 마치 강도를 잡는 것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들은 다른 곳에서 예수님을 잡을 수도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49절에서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어서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는 성경을 이루려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예루살렘에 들어오신 후에도 날마다 성전에서 많은 군중들에게 가르치시기도 하셨으며 성전을 더럽히는 장사꾼들을 채찍으로 내어쫓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곳에서 예수님을 잡지 아니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같은 일로 인하여 혹 민란이 일어날까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아무도 없는 곳에서 은밀하게 체포하기로 했습니다. 때마침 예수님의 제자 중 하나인 유다가 그들에게 찾아와서 선생을 팔 것을 흥정하므로 그들은 예수님을 체포하여 죽이려는 일에 쾌재를 부르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같은 일에 대하여 “이는 성경을 이루려함이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경을 이루려함이니라 고 하신 말씀은 여러 가지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먼저 이 말씀은 가룟 유다에 대한 성경적인 예언성취를 의미하는 말씀이라고 보겠습니다. 또한 이 말씀은 예수님 자신에 대한 성경을 이루시는 일이셨습니다. 이사야53장은 주님이 고난을 당하실 일에 대한 예언인데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창세기3장에서는 여자의 후손으로 나오는 메시야가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슥13:7절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고 하셨는데 이 모든 일들이 이처럼 성경에 가록된 대로 다 이루어져야 할 것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2. 주님을 버리고 도망친 제자들

예수님은 그들의 손에 붙잡히셨습니다. 이때 그 곁에 들러 있었던 제자들은 모두 도망쳤다고 했습니다.

(1) 예수님을 붙잡으려는 무리들이 다가와 주위를 둘러 진을 치자 제자들은 임전태세를 갖추었습니다. 먼저 베드로가 허리에서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렸습니다. 잠시 서로 대결한 상태에서 긴장된 분위기가 조성되었습니다. 그러나 곧 예수님이 제자들을 꾸짖었습니다.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리라”는 말씀과 함께 그 종의 귀를 다시 부쳐주셨습니다(마26:25).

그리고 예수님은 스스로 그들의 손에 붙잡힌바 되셨습니다. 일이 이쯤 되자 제자들은 도전을 포기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게 되었는데 그들이 취할 수 있는 길은 그곳에서 도망치는 일이었습니다. 이처럼 제자들이 선생을 원수의 손에 맡긴 채 도망치게 되었는데 그들이 도망한 일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먼저 그들은 예수님이 이 같은 처지에서 그들을 대항하여 싸우실 줄로 알고 있었습니다. 아마 그들에게는 이 싸움이 발단이 되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어 새로운 왕국이 건설될 것으로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싸움을 포기하고 스스로 체포되는 모습을 바라보았을 때 그들에게는 왕국에 대한 소망이 살아졌습니다. 한편 예수님이 힘없이 붙잡히는 장면을 바라본 제자들은 이제 자신들이 바라던 꿈이 살아지고 예수님이 평소에 말씀드렸던 고난의 시기가 온 것으로 알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같은 일에 대한 아무런 준비도 없었기 때문에 위급한 처지에서 그들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도망치는 일이었습니다. 죽어도 주와 함께 죽을 것이라고 장담했던 베드로와 나머지 제자들도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계2:13절에서 버가모 교회 성도들의 아름다운 신앙을 바라보게 됩니다.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는 칭찬을 들었습니다. 안디바가 교회를 핍박하는 집권자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는 그런 위급한 상황이 버가모 교회에 닥쳐왔습니다. 그런데도 그 교회 성도들은 안디바와 함께 주를 위해 죽는 길을 택하므로 주님을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처럼 쉽게 그들의 선생을 악한 무리들의 손에 내어 맡긴 채 도망친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벗은 몸으로 도망친 한 청년에 대한 모습을 보여 주므로 실소를 금치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51,52절 말씀에서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오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도망친 청년이 이 마가복음을 기록한 마가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가는 예수님의 제자는 아니지만 예수님이 잡히시는 현장에 따라갔다가 이런 일을 당했을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결 론 : 그들은 주님과 함께 영광을 누릴 일에 대한 소망은 가지고 있었지만 주님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할 일에 대해서는 준비를 못했었습니다. 우리는 두 가지 사실에 대해 분명한 신앙적인 자세를 가지고 미리 준비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는 주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기 위해서는 그와 함께 고난도 받아야 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롬8:17). 고난이 따르지 않는 영광은 없습니다. 안이한 생각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 중에는 고난은 주님이 모두 지셨으니 우리는 그 영광만 누리고 영광에만 동참할 것이란 생각을 가질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주님을 위해 어려움이 올 때 이들 제자들처럼 예수를 버리고 도망치게 될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영광에 동참하기 위해 받는 고난은 그 고난이 아무리 어려운 것이라 해도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경미한 고난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롬8:18). 이 영광을 바라보고 지난날 많은 믿음의 선진들은 자진하여 고난의 대열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순교의 잔을 기쁘게 마시기도 했습니다. 우리들도 이들처럼 주님을 위해 어려움이 올 때 그 고난의 대열에서 주님과 함께 고난을 받을 수 있는 믿음의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93≈ “내가 그니라”

(본문 : 마가복음 14 : 53 - 65)


서 론 : 검과 몽치를 가지고 예수님을 붙잡은 무리들은 먼저 전직 대제사장인 안나스에게 끌고 가 예비심문을 마치고 현직 대제사장인 가야바에게로 가시 끌고 갔습니다(요18:12-14). 안나스는 전직 대제사장이었으나 현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었으며 실력자였으므로 산헤드린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가야뱌의 집 뜰에서 공회의 재판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재판은 역사상 유례가 없는 불법적인 재판이었습니다. 증인이 없었으며 피고의 해명의 기회도 전혀 주어지지 않고 일사천리로 사형을 언도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 중, “내가 그니라”고 하신 말씀을 듣고 두려워하여 회개했어야 했지만 오히려 참람하다고 정죄하므로 자신들이 받을 심판을 더욱 중하게 했습니다.


1. 증거를 찾지 못한 재판

54절까지 잠깐 베드로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도망치다가 발걸음을 돌이켰습니다. 31절에서 말한 자신의 맹세와 예수님은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하나님의 권능으로 그들을 섬멸하고 그의 권세를 보이는 그런 기적적인 일은 없을 것인가? 이런 궁금증을 풀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혹 무리들에게 들켜서 붙잡힐 것을 두려워하여 멀찍이 쫓아가 결국 가야바의 집 뜰 안까지 들어가 하속들과 함께 불을 쬐고 있었습니다. 물론 자신의 신분은 철저히 숨긴 것입니다.

(1) 대제사장의 집 뜰에 모인 무리들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바로 산헤드린 회원들입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죽이려는 재판을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재판이 처음에 큰 난관에 부닥치게 되었습니다. 55절에서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증거를 찾되 얻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증거를 얻지 못한 이유는 “예수를 쳐서 거짓 증거하는 자가 많으나 그 증거가 서로 합하지 못함이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재판에는 그들의 율법에 의해 확실한 증거가 필요했습니다. 피고에게 유죄선고를 내리기 위해서는 두 사람 이상의 일치된 증거가 필요했습니다(민35:30, 신17:6). 이 재판은 애초부터 예수님을 죽이려는 음모로 시작된 재판이었으므로 거짓 증인들을 여러 명 세워 증거들을 조작하려고 했지만 급작스럽게 꾸며진 연극이었으므로 거짓증거 자체가 일치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 증거 중 하나가 58절에 나오는데 “우리가 그의 말을 들으니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에 지으리라하더라”는 거짓증거입니다. 그러나 그 증거도 서로 합하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이 거짓증거의 정확한 내용은 요2:19절에 나와 있는데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동안에 일으키리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그의 부활에 관한 예언이셨습니다. 이처럼 이 말씀은 영적으로 심오한 뜻이 담겨져 있었으므로 그 깊은 뜻을 헤아려 알 길이 없는 유대인들은 그 말씀에 대한 증거를 맞출 수가 없었습니다.

가장 답답하고 조급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은 대제사장이었습니다. 일이 계획대로 진척이 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가야바는 자신이 직접 심문하리라고 마음먹고 주님께 질문했습니다. “너는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의 증거가 어떠하냐”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전히 아무 말씀도 없이 침묵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을 심문하고 있었던 대제사장이나 다른 공회원들은 매우 놀랬으며 이상하게 여겼을 것입니다. 재판정에 나온 피고는 자신의 무죄를 변호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고 변명하는 것이 통례였지만 예수님은 전혀 동요되는 기색 없이 사형언도를 가다리는 사람처럼 묵묵히 서 있는 모습을 보고 놀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 조급해 졌을 것입니다.

(2) 대제사장은 예수님이 입을 열지 않을 수 없는 핵심적인 질문으로 심문을 유도했습니다. 61절에서 “네가 찬송 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고 물었습니다. 찬송 받을 자란 바로 하나님을 지칭하는 표현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성호를 부르는 일을 송구스럽게 여겨 이처럼 간접적으로 부르고 있었습니다. 이 말은 곧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뜻입니다(마26:63). 그 당시 유대인들의 메시야관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러왔습니다. 그들이 부르는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독생자로서의 신적인 의미의 아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처럼 탁월한 이스라엘의 민족적인 지도자, 하나님의 권능으로 다윗의 왕국을 건설할 다윗의 위를 이을 왕으로서의 표현을 그처럼 부른 것입니다.

메시야는 반드시 자신의 메시야된 증거를 나타내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소에도 유대인들은 예수님에게 끊임없이 ‘당신의 메시야된 증거’를 보여달라고 졸랐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기도하고 직접 그 떡을 먹기도 하였지만 그것만으로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할 수 없었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향하여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기록된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먹게 하였다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는 말로 당신이 메시야라면 메시야로서의 표적을 보여달라고 했습니다.(요30:31).

대제사장은 예수님을 메시야와 연결시키는 방법을 취하므로 혹 그 답변을 통해 결정적인 어떤 증거를 예수님 스스로의 입을 통해서 얻으려고 한 것입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사형언도를 내릴 합당한 방법을 찾을 길이 없었기 때문에 깊은 관심을 가지며 그 입을 지켜보았습니다.

(3) 예수님은 대제사장의 심문에 “내가 그니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그들의 말한 대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밝히셨습니다. 그러나 이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부연해서 더 많은 사항을 그들에게 자세히 들려주셨습니다. 62절에서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때 대제사장의 행동은 대단히 기민하게 나타났습니다. 그는 먼저 자신의 옷을 찢었습니다. 옷을 찢는 일은 극한 분노의 표시입니다. 예수님의 증언을 참람되다고 판정한 대제사장은 예수가 하나님께 모욕을 가한 것으로 간주하여 분노의 표시로 옷을 찢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배심원격으로 앉아 있는 공회원들에게 자신의 의견을 말했습니다. “우리가 어찌 증인을 요구하리요 그 참람한 말을 너희가 들었도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뇨”고 물었습니다. 판결은 지체되지 아니했습니다. “저희가 다 예수를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공회로부터 정죄를 받아 사형에 해당한 자로 사형언도를 받게 된 것입니다. ‘참람죄’였습니다. 대제사장이 흥분하여 자기 옷을 찢으며 외친 말이 “그 참람한 말을 너희가 들었도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것입니다(레24:16, 민15:30). 그러면 예수님의 이 같은 증언이 왜 하나님을 모독하는 ‘참람죄’에 해당된다는 판정을 내리게 된 것인가? 첫째로 메시야로서의 아무런 증거도 없이 “네가 찬송 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는 심문에 거침없이 “내가 그니라”는 말씀으로 메시야를 자처하므로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것입니다. 다음에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을 너희가 보리라”는 증언입니다. 권능자란 하나님을 지칭하는 말씀인데 예수님이 권능자의 우편에 앉는다는 말은 하나님의 보좌에 앉는다는 표현으로 하나님과 동격의 신성을 나타내는 말이 되기 때문에 ‘참람하다’는 판결을 내린 것입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은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구약적 표현은 하나님을 가리킨 말입니다. 단7:13절에 나오는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권세와 영광을 가지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을 다스린다는 말씀은 주의 재림으로 말미암은 새로운 왕국의 건설을 의미하신 예언입니다.


결 론 : 그러면 예수님은 왜 이처럼 자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심으로 그들로 사형언도를 내리게 하셨던 것입니까? 그것은 그가 그같은 죽으심으로 죽으셔야 할 시기이심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스스로 자신의 신분을 증언하시므로 그들로 예수님을 정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위함이십니다. 정죄 받은 예수님은 재판석에 모여 있었던 무리들, 공회원들과 대제사장들의 하속들과 종들로부터 수모를 당하셨는데 “혹은 그에게 침을 뱉으며 그의 얼굴을 가리우고 주먹으로 치며 가로되 선지자 노릇을 하라하고 하속들은 손바닥으로 치더라”고 했습니다.


≈ 94≈ 생각하고 울었더라

(본문 : 마가복음 14 : 66 - 72)


서 론 : 72절에서 베드로는 주님이 자신에게 하신 말씀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신 것이 기억되어 생각하고 울었더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바로 주님이 사형선고를 받고있는 대제사장의 뜰, 주님이 보시는 그 면전에서 주님을 모른다고 주의 이름을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주님이 하신 말씀이 기억되어 생각하고 울었습니다. 이 울음은 베드로의 회개로써 그의 새로운 생애를 여는 관문이 되었습니다. 사람은 약하기 때문에 때로는 자신이 한 맹세를 자신이 짓밟는 경우도 있습니다. 베드로도 연약한 인간이었으므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회개는 그의 허물을 용서받았고 수제자의 위치도 확고히 할 수 있습니다.


1. 베드로의 부인

예수님이 대제사장이 보낸 하속들에게 잡히시자 제자들은 예수님을 내버려둔 채 모두 도망쳤습니다. 그런데 54절을 보니 “베드로가 예수를 멀찍이 좇아 대제사장의 집 뜰 안까지 들어가서 하속들과 함께 앉아 불을 쬐더라”고 했습니다.

(1)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집 뜰 안까지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요한의 안내 때문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요한의 뒤를 따라 이곳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마침 대제사장과 잘 아는 처지였으므로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으며 들어오지 못하고 밖에서 머뭇거리는 베드로를 보고 요한이 문 지키는 여종에게 말하여 들어오게 했습니다(요1:15-16).

베드로가 이곳까지 예수님을 뒤따라 좇아온 것은 과연 이 사건이 어떻게 진행 될 것인가? 그 추이를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정말로 저들에게 정죄 받아 사형언도를 받을 것인가? 아니면 어떤 기적적인 권능을 나타내시어 새로운 돌발적인 국면이 일어날 것인가? 이 문제는 베드로에게 꼭 알고 싶은 문제였을 뿐 아니라 자신들의 앞으로의 처신과도 직접적으로 연관된 문제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담대하지 못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그들의 재판에 의해 정죄를 받는 날이면 베드로는 곧 도망치려는 생각을 가지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그곳에 있었을 것입니다.

(2) 베드로에게 첫 번째 시험이 왔습니다. 베드로는 한 비자의 안내로 대제사장 집 아래 뜰에 들어섰습니다. 베드로는 그곳에서 그 집 종들이 모여 불을 쬐는 무리 중에 섞였습니다. 베드로는 이제는 자신의 신분이 철저하게 숨겨진 사실에 대하여 마음을 놓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한 비자가 불을 쬐는 베드로에게 다가와 그를 주목하여 보고는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고 지적하는 것이었습니다. 나사렛 예수란 말은 바로 예수님을 가리켜 천하게 부른 말로 나다나엘도 처음에는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는 말로 빌립의 전도를 무시했습니다. 나사렛은 예수님이 어릴 적에 자라나신 고향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라고 부른 이유는 나사렛에서는 선지자가 나올 고장도 아니요 더군다나 메시야가 나올 수 있는 곳은 더욱 아니었기 때문에 ‘나사렛 예수’란 호칭 속에는 예수님은 선지자도 메시야도 아니라는 뜻이 함유되어 있습니다(요1:46).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비자에게 자기의 신분이 노출된 사실에 심히 놀랬습니다. 이제 이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 베드로는 자신의 신분을 철저하게 숨기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그 비자가 한 말을 부인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나는 아니다’라고만 부인한 것이 아닙니다. “나는 네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노라”고 시치미를 뗀 것입니다. 네가 정신이 있느냐? 네가 언제 나를 보았다고 생사람 잡으려느냐? 나는 예수란 사람을 알지도 못할 뿐 아니라 네 말하는 뜻이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다는 항변을 한 것입니다.

(3) 베드로에게 두 번째 시험이 왔습니다. 베드로는 이제 한고비 넘겨 위기를 넘겼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될 수 있는 대로 그 자리에서 빨리 빠져 나오려고 앞뜰로 걸어 나갔습니다. 이때 그 비자가 또 베드로에게 다가와 베드로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곁에 서 있는 자들에게 “이 사람은 그 당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처음에는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다”고 말했지만 이번에는 ‘그 당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 얼굴을 보고 재차 확인하므로 주변 사람들에게 이 자를 빨리 체포하라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이 같은 비자의 말에 베드로는 “또 부인하더라”고 했습니다. 한번 거짓말한 베드로는 두 번째는 좀더 적극적으로 부인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양심에 어느 정도의 가책을 느꼈지만 두 번째는 그 양심의 소리도 무뎌졌습니다.

(4) 베드로에게 세 번째 시험이 왔습니다. 그후 약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70절에 있는 말씀을 보니 “조금 후에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이 다시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는 갈릴리 사람이니 그 당이니라”고 지적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 갈릴리 사람들이었으며 갈릴리 사람들의 말은 그 표현상 사투리가 두드러졌으므로 그 말의 발음의 억양으로 쉬 알 수 있었는데 베드로의 말을 들으니 갈릴리 사람이 틀림없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나사렛 예수’의 당이라고 확정지은 것입니다.

베드로는 대단히 난감했습니다. 더 이상 변명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이제 최종적으로 그들에게 자신은 그 당의 무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거해야 했습니다. 대개의 경우 유대인들은 그들의 증거를 세우는 일에 최종적으로 맹세로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습니다. 베드로가 자신에게 닥쳐온 위기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마지막 수단으로 긴급하게 사용한 방법이 이 방법이었습니다. 72절에 나와있는 말씀을 보면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의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일은 이곳에서 베드로가 한 맹세나 저주는 예수님에 대하여 사용한 것이 아니란 사실입니다. 다만 베드로는 자신에게 닥쳐온 위기를 면하려는 생각에서 자기는 맹세코 그 사람을 모르며 자기가 만약에 그 사람을 알고도 모른다고 한다면 자기는 저주받을 것이란 뜻의 말입니다. 이로써 베드로는 예수를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2. 베드로의 회개

베드로가 이처럼 세 번에 이르도록 예수님과 자기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노라고 부인하자 그때에 마침 닭이 곧 두 번째 울었다고 했습니다. 이 닭소리는 베드로에게 매우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1) 닭소리가 베드로에게 충격을 주게된 것은 예수님의 말씀이 기억났기 때문입니다. 30절에서 예수님은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나이다”고 장담하는 베드로에게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사람으로 회개케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란 사실입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이 말씀을 하시지 않으셨다면 베드로는 회개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두 번째의 가룟 유다가 되었을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허물과 죄를 깨닫게 되고 그 말씀의 권능으로 회개케 된다는 사실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고 그 말씀을 기억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2) 베드로는 “생각하고 울었더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무엇을 생각했겠습니까? 예수님이 자기에게 하신 말씀을 생각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은 마음에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사데 교회를 향하여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고 하셨습니다. 말씀을 생각하고 자신의 행실을 말씀의 거울에 비취어 회개하는 사람이 진실한 회개를 이룰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을 생각하면서 울었습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는 ‘심히 통곡’했다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흘린 눈물은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회개의 눈물입니다.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해 원통히 생각하는 눈물, 견딜 수 없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통분의 눈물이었습니다. 베드로의 이 회개는 베드로로 새사람을 이루게 했습니다. 그는 겸손한 사람이 되었고 평생 주님 앞에 죄송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충성하는 진실한 일꾼이 되었습니다.


결 론 : 베드로가 어떻게 밖으로 나올 수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제자 중 한 명도 잃지 않으셔야 할 일에 대하여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실 때에 주님은 제자들의 신변을 염려하시어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요18:8-9). 베드로가 이처럼 예수님을 부인하는 순간 주님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셨다고 했습니다. 아마 이때 예수님께서 그의 권능으로 그들의 눈을 피하여 밖으로 도망쳐 나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을 것입니다.


마가복음 15장

◆ 밤중소리 01-09 | VIEW : 536


≈ 95≈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본문 : 마가복음 15 : 1 - 15)

서 론 : 예수님에 대한 불법적인 재판을 감행한 유대인들은 ‘참람한 말을 하였다’는 죄로 사형언도를 내렸습니다. 이제 자기들의 재판대로 예수에게 사형을 집행하려면 빌라도의 재가가 필요했습니다. 로마는 이스라엘에게 종교적 행사에 대한 관용을 베풀었으나 사형집행에 관한 권한은 식민지를 관할하는 총독의 재가를 필요로 했습니다. 공회원들은 보다 효과적인 방법으로 빌라도의 사형판결을 얻어내기 위해 유대교의 중진들이 산헤드린 공회원들과 함께 긴급히 모여 의논하고 예수님을 결박하고 끌고 가 빌라도에게 넘겨주었다고 했습니다.

1.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님을 재판할 때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죄과를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사형에 해당될만한 아무런 죄과도 없었던 것입니다. 거짓 증거하는 자가 많았지만 그 증거가 서로 합하지 못하므로 재판의 증거로 채택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대제사장이 최종적으로 예수님으로부터 결정적인 증거를 찾기 위해 예수님을 메시야와 연결시켜 심문하게 되었습니다. 대제사장이 예수님께 “네가 찬송 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고 답변하셨습니다. 이에 대제사장은 쾌재를 부르며 당장에 자신의 옷을 찢으며 “그 참람한 말을 너희가 들었도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뇨”고 묻고 전원일치의 판정으로 사형을 언도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1) 그러나 이 사형언도는 로마법정에서 인정받기가 어려운 죄명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신성모독은 로마인들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그리스도’나 ‘찬송 받을 자의 아들’ 등의 죄명은 유대인들의 종교재판에서나 유죄언도를 받을 사건이지 로마법정에서는 유대인들의 종교적 문제이기 때문에 상관할 바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들 스스로는 참람죄를 적용하여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사형언도를 내렸지만 그 죄명을 가지고 빌라도에게 가지고 갈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드른 먼저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주장하므로 로마의 황제를 거역하는 죄를 범했다고 고소했던 것입니다. 그 외에도 3절에 있는 대로 ‘대제사장들이 여러 가지로 고소’했던 것입니다.

(2) 빌라도는 그들의 여러 가지 고소하는 죄명 중에 뚜렷하게 부각된 한가지 죄명에 관심을 가지고 결박된 채 피고 석에 서 계시는 예수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물었습니다. 빌라도가 정말로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으로 여겨서거나 유대인의 왕의 행세를 한 것으로 믿고 이 같은 심문을 한 것은 아닙니다. 빌라도는 예수가 대제사장들에 의해 고소되기 이전에도 예수란 청년에 대한 많은 보고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란 청년에 대한 많은 보고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는 로마의 통치에 도전하거나 반란을 꾀할 인물이 아님을 확인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빌라도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물은 것은 예수님의 입에서 과연 어떤 대답이 나올 것인가? 흥미를 가지고 듣고 싶어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의 이런 질문에 “네 말이 옳도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아무 것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그는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주시는 잔을 마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이 사건을 그같은 방향으로 의도적으로 이끌어 가셨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이사야로 예언된 메시야로서의 사명을 이루시기 위해 아버지께서 주신 그 한 말씀 한 말씀의 성취를 위해 기꺼이 빌라도 앞에 서서 재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심중에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고 하신 자신에 대한 이사야의 예언을 이루시기 위해 그곳에 서 있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시인하는 답변에 대하여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그 답변이 종교적인 메시야로서의 위치를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빌라도의 심문의 진행이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되자 대제사장은 안절부절못하면서 여러 가지로 계속적으로 고소했습니다. 아마 그들의 고소내용 중에는 가이사에게 바치는 세금문제도 포함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군중들을 선동하여 로마정부에 반란을 일으킬 것이 분명하다는 내용의 무고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아주려고 했을 때 그들은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고 위협적인 압력을 가하여 결국 그들의 손에 넘겨줄 수밖에 없게 만든 것입니다.(요19:12).

이 같은 고소가 증거도 없는 엉터리 죄명이란 사실을 빌라도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입을 다물고 계시는 예수님께 “아무 대답도 없느냐 저희가 얼마나 많은 것으로 너를 고소하는가 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런 대답도 아니하셨고 빌라도는 예수님의 침묵을 기이히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피고들은 한결같이 자신의 무죄를 위해 변호하며 심지어는 거짓말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것이 통례이기 때문입니다.

2. 바라바냐? 유대인의 왕이냐?

유대인들의 명절이 되면 죄수 중 하나를 놓아주는 전례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 전례에 따라 유대인들은 사법권을 행사하는 빌라도에게 나아가 죄수의 석방을 요구했습니다. 이때 빌라도의 머리에는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1) 빌라도는 그들의 요구에 따라 죄수를 놓아주되 이 예수란 청년을 놓아줄 것을 마음에 다짐하고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이에 대제사장의 충동을 받은 무리들은 ‘바라바’를 놓아달라고 외쳤습니다. 이 바라바는 민란에 살인하고 포박된 흉악한 범죄자였습니다. 민란에 살인했다면 아마도 로마정부에 반역하기 위해 반란을 주도한 인물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에게는 인기가 있었고 많은 동정을 샀습니다.

빌라도는 이렇게도 저렇게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무죄를 변호하기도 하고 석방시켜보려고 애도 써보았지만 헛수고였습니다. 그는 저들이 이 청년에 대해 과연 어떤 판결이 내려지기를 원하는가에 대하여 알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러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는 내가 어떻게 하랴”고 물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유대인들은 “저희가 다시 소리지르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라고 외쳤습니다. 빌라도는 결국 그들의 요구에 굴복하게 되었습니다. 15절에서 “빌라도가 무리들에게 만족을 주고자하여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고 했습니다.

(2) 그러면 빌라도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으며 그에게는 주님의 재판에 대한 어떤 죄과가 있는 것입니까? 빌라도는 식민지 통치자로서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정의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양심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중심의 미미한 것이었으며 자신의 이해득실에 따라 이렇게도 변하고 저렇게도 변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소신을 위해 끝까지 책임질줄 아는 인물이 아니었으며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재판장으로서의 인격을 갖춘 인물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의 협박에 위축되는 비겁한 인물이었으며 정의로운 재판보다는 만약에 일어날지도 모를 민란에 대한 책임문제가 그에게는 더욱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더욱이 한 명의 무명 청년의 생명에 대한 책임문제는 그에게는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곧 마음을 돌이켜 자신이 생각하고 있었던 것과는 달리 정반대의 판결을 아주 쉽게 내렸습니다.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하여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었다고 했습니다. 그는 손을 씻는 것으로 자신의 죄를 모면하려 했지만 자신이 내린 판결이 손을 씻는 것으로 책임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결 론 : 우리가 성경적인 답을 내린다면 빌라도란 인물은 예수님의 재판을 위해 하나님께서 총독으로 예비하신 그릇입니다(롬9:17). 그의 등장은 가룟 유다의 경우와 같습니다. 그는 멸망의 자식으로 태어났으며 차라리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아니함만 못한 생애를 살았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빌라도의 손에 의해 다시 십자가에 목 박히게 로마군병들에게 넘겨졌습니다.

≈ 96≈ 구레네 시몬의 십자가

(본문 : 마가복음 15 : 16 - 23)

서 론 : 빌라도의 임무는 이제 끝났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라는 유대인들의 협박에 가까운 고함소리에 질린 빌라도ㅓ는 정의로운 판단이나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민란이 일어날지도 모를 위급한 시점에서 하나의 무명청년을 옹호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드디어 무리들에게 만족을 주려는 마음으로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게 무리들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주님은 로마병정들에게 온갖 수모와 모욕을 당하시 후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길을 오르셨습니다. 그때 그곳에서 많은 무리들 틈에서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던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이 로마병정들에게 붙잡혀 예수님의 십자가를 억지로 대신 지고 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1. 희롱 당하시는 예수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은 빌라도의 일이 아닙니다. 빌라도의 사형언도가 내려지면 그것을 집행하는 일은 로마병정들이 담당하게 됩니다.

(1) 사형언도를 받은 예수님은 로마병정들에게 이끌리어 ‘브라이도리온’이라는 뜰 안으로 끌려 들어가셨습니다. 이 뜰은 총독 관저의 뜰로 이곳에서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갖가지 희롱을 자행하게 됩니다. 로마군인들은 유대인들의 종교적인 문제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며 유대인들이 말하는 메시야에 대해서도 관심이 있을 리 없습니다. 그들은 오직 로마황제만이 살아 있는 신으로 믿고 있기 때문에 유대인의 왕이라고 말하는 예수에 대해서 그들에게는 하나의 조롱의 대상으로밖에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온 군대가 그곳으로 모여들었습니다. 만약에 일어날지도 모를 소요사태를 대비하기

위한 예방조치이며 많은 군중들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군사력이 필요했습니다. 이들 로마군인들은 자기들의 몫을 이행하기 전에 자기들대로의 또 한차례의 희롱 재판을 시도하게 되었습니다. 사형수들에게는 그런 일이 하나의 관례가 되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먼저 예수님을 왕의 모습으로 꾸미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죄명이 ‘유대인의 왕’이었기 때문입니다. 예로부터 왕은 자색 옷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자색 옷으로 만들어진 왕복이 있을 리 없습니다. 그들은 어디선가 로마군인들이 입었던 더러운 홍포를 얻어다가 주님의 몸에 걸쳤습니다. 왕으로서의 한가지 모습을 갖춘 그들은 아마 기괴한 함성을 지르면서 좋아라 떠들썩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다시 왕에게는 왕관이 씌어져야한다고 의견이 모아졌습니다. 그러나 왕관이 그들에게 있을 리 없습니다. 그들은 누구인가의 제의로 가시로 엮은 면류관을 만들었습니다. 왕관은 금으로 만들지만 예수님께 씌운 면류관은 가시로 엮은 것입니다. 그들은 이처럼 가시 면류관을 주님의 머리에 씌우고는 이제 왕의 모습이 만들어졌다고 흡족해 했습니다. 누군가의 제의로 그들은 왕으로 꾸민 예수님앞에 머리를 숙여 “예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고 말했습니다. 이 같은 그들의 행위는 로마황제에게 행하는 충성의 예의를 본받아 예수님께 적용한 희롱입니다. 그들에게는 왕이 사형수로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된 것도 우습거니와 왕의 모습을 꾸며 그 앞에서 희롱하는 일에 큰 재미를 느꼈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갈대(왕이 가지고 있는 홀로 예수님의 손에 쥐어준 것)로 가시관을 쓰신 예수님의 머리를 쳤습니다. 가시관이 이마 밑으로 내려오면서 주님의 얼굴엔 머리에서 흘러내리는 피로 얼룩졌습니다. 그리고 얼굴에 침을 뱉으면서 그 앞에 꿇어 절하는 흉내를 냈습니다. 로마병정들의 이 같은 일은 거의 광적인 광란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에게 이처럼 모욕적인 희롱을 가했지만 그분은 언제인가 그들 앞에 왕이 되시어 왕의 권세를 가지고 나타나실 것입니다. 슥12장에서는 유대인들이 만왕의 왕으로 오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애통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부르지 못하는 많은 무리들은 그때 가서 자기들을 멸하려오실 진짜 왕으로서의 예수님을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2) 주님은 이 같은 수모를 받으시면 서도 아무런 항거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당연히 받으실 일을 받으시는 것처럼 그 모든 일을 순순히 당하셨습니다. 이 일에 대하여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사53:7). 20절을 보니 그들은 희롱을 다한 후 자색 옷을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갔다고 했습니다. 지금 예수님의 몸은 피에 젖어 있습니다. 채찍질로 살이 찢기고 온 몸에 핏줄이 시퍼렇게 서 있고 전신에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몸 위에 자색 옷을 입히고 머리에는 가시관을 만들어 씌웠습니다. 이런 처절한 상태에서 그들 로마병정들은 좋아라 박장대소하면서 미친 사람들처럼 희롱을 한 것입니다. 이제 그 일도 지쳤는지 자색 옷을 벗기고 그의 옷을 도로 입힌 것입니다.

2. 구레네 시몬의 십자가

로마병정들은 예수님에게 십자가를 지우고 골고다에 끌고 올라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그곳에 올라가실 기력이 없으십니다. 유월절을 지내시면서 입에 드신 약간의 떡과 포도주를 마셨을 뿐 그때까지 입에 대신 것이 없으셨습니다. 채찍에 맞으시고 로마병정들에게 가혹하리 만치 심한 희롱을 당하신 후의 일이라 목도 갈 하시고 매우 힘드셨습니다.

(1) 그때에 마침 그곳을 지나가는 구레네 사람 시몬이 로마군병들에게 발견되어 예수님이 지고 가시는 십자가를 그에게 지웠습니다. 물론 시몬이 진 십자가는 로마군인들에게 붙잡혀 억지로 지운 것이기 때문에 즐거움으로 진 십자가는 아닙니다. 시몬의 주변에는 시몬 외에도 지나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시몬이 걸려 이 십자가를 진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선택을 의미합니다. 시몬은 이 일을 계기로 하여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고 그는 후에 교회에 큰 일꾼이 된 사실에서 알 수 있습니다. 구레네는 북아프리카의 중요 도시인데 오늘날의 리비아 수도 트리풀리를 말합니다. 그곳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유월절을 당하여 시몬이 예루살렘에 올라온 것으로 추측됩니다. 여기서 시몬의 이름 위에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라고 표현한 것은 초대교회에서 이들 이름에 대하여 잘 알고 있다는 의미도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의 문안 인사 중에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는 말에서 시몬이 예수를 영접한 후 온 가족이 주께로 돌아온 사실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롬16:13).

(2) 다음에 시몬은 자기가 짊어진 십자가가 자신의 의지에서가 아니라 억지로 졌다고 했습니다. 결국 시몬의 십자가는 하나님에 의해 주신 것이기 때문에 시몬의 힘으로서는 물리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나에게 지게 하시는 십자가는 그 어떤 것이건 내가 물리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힘이 개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찾아오는 십자가를 인위적인 방법으로 물리치려는 생각을 버리고 그것을 조용히 짊어질 수 있어야합니다. 십자가를 지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는 우리에게 유익을 주시는 뜻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참아야 합니다.

시몬이 그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까지 올라간 후에야 그의 십자가를 벗을 수 있었습니다. 십자가를 벗은 후 그는 예수님의 참된 모습을 바라볼 수 있었고 그를 그의 마음에 영접할 수 있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약1:12).

결 론 : 우리는 시몬의 십자가를 우연한 십자가로 여기면 안됩니다. 그리고 그가 그 십자가로 인하여 그의 생애가 새로워졌고 생명의 길을 걸어갈 수 있었다는 사실은 십자가를 잘 지는데서 오는 결과가 영광스럽게 나타난다고 하는 사실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 97≈ 몰약 탄 포도주

(본문 : 마가복음 15 : 22 - 32)

서 론 : “때가 제 삼 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했습니다. 제 삼 시란 로마식 시간 환산법으로 계산하여 오전 9시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구레네 시몬이 지고 골고다에 올라간 그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역사적 고증에 따르면 예수님 당시 잔혹한 형벌인 십자가형을 집행하는 십자가 형틀의 모양이 세 가지로 나와 있습니다. 하나는 문자 그대로의 †형틀이며, 다음에 T자 형틀, 세 번째가 X자 형틀입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통나무형인 1자형 형틀을 고집하나 이는 전혀 근거가 없는 주장이며 이런 주장은 십자가로 인한 인류의 구원의 사역을 부인하려는 이단적인 발상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22절에 있는 말씀 “예수를 끌고 골고다라 하는 곳에 이르러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께서 받지 아니하시니라”는 말씀에 관심을 갖으려고 합니다.

1. 몰약을 탄 포도주를 물리치신 예수님

몰약이란 복숭아 과에 속한 나무에서 추출해 낸 액체로 환자의 통증을 없애주는 마취제 역할을 하는 약제입니다. 이 몰약을 먹을 때, 포도주에 혼합하여 먹은 이유는 그 쓴맛을 포도주의 알코올 성분으로 없애기 위해서였습니다.

(1) 예수님은 이 몰약을 탄 포도주를 받지 아니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십자가 형틀의 사형은 극심한 고통이 오랜 시간 계속됩니다. 아마 유대인들의 어떤 경건한 여성들이 이 같은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사형수들에게 이것을 마시게 하는 습관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이 같은 자비는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된 것이기 때문에 사형집행권자인 총독이나 유대인들도 묵인해준 것입니다. “독주는 죽게된 자에게 포도주는 마음에 근심하는 자에게 줄지어다”는 말씀이 있습니다(잠31:6-7).

다만 이 같은 몰약을 탄 포도주가 언제 주어졌느냐의 시기는 잘 모르지만 아마도 십자가에 못 박히기 직전의 일로 짐작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포도주를 거절하셨습니다. 받지 않으신 것입니다. 주님이 몰약을 탄 포도주를 받기를 거절하신 이유는 여러 가지 면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① 예수님이 지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주신 잔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주시는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곳에는 심판에 대한 고통이 따라야 합니다. 만약 예수님이 고통이 없는 십자가를 지셨다면 우리를 위한 대속의 죽으심이라고 볼 수 없을 것입니다.

② 몰약을 탄 포도주를 마심은 자신의 고통을 덜어보려는 의도가 들어 있기 때문에 예수님에게는 합당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고통이 따르는 십자가여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는 말씀이나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오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는 말씀 등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그 아들이 당하신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전제한 것으로 생각해야 합니다(롬5:8). 십자가에 못 박히신 세 명중 유독 예수님만이 많은 고통을 당하신 듯한 모습은 다른 죄수들은 이 몰약을 탄 포도주를 마셨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③ 그리고 예수님의 대속의 죽으심은 죄인들에 대한 대속의 십자가였으므로 주님은 괴롭고 고통스러워도 이 십자가를 지시고 끝까지 인내해야 하셨습니다. 그가 당하신 고통은 죄인의 죄에 대한 징계에서 오는 마땅한 고난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임함이라 그가 징계를 맞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고 하셨는데 이 같은 메시야의 고통은 그가 지실 십자가에서 이루셔야 하셨던 것입니다(사53:5).

(2)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온전히 마셨습니다. 예수님은 고통이 따르는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들의 죄 값을 갚으시는 일에 예수님은 그 어떤 어려움도 이미 각오하셨습니다. 우리들에게도 때때로 십자가가 찾아오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과연 어떤 신앙적 태도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까? 많은 사람들은 몰약을 탄 포도주를 찾고 있는 것입니다. 고통이 없고 괴로움이 따르지 않는 십자가란 없습니다. 몰약을 탄 십자가란 사단의 유혹입니다. 이 같은 십자가를 찾는 일은 적당한 타협이 따르게 되며 결국 사단의 함정에 빠져 헤어날 길이 없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일은 고통과 괴로움이 수반하지만 그러나 그 십자가에는 더 많은 유익이 따르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고 하셨습니다(벧전4:12-13). 우리가 당하는 십자가의 고난 속에는 무한한 축복의 약속이 들어 있습니다. 그 십자가를 벗고자하지 말고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말씀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벧전4:16).

2. 두 명의 강도의 경우

27절에서 “강도 둘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니 하나는 그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고 했습니다.

(1) 십자가에 달린 강도 둘은 심판 받을 인류를 상징합니다. 이들은 강도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고백에 따르면 자신들은 마땅히 정죄 받을 조인들이라고 했습니다(눅23:40-41). 이들의 십자가 형벌은 그들이 행한 죄에 대한 마땅한 보응이었습니다. 이 같은 사실은 이들은 마땅히 저주스러운 심판을 받아야 할 인류를 의미해 줍니다. 그런데 그들 중간에 계신 분은 아무런 죄 없이 그곳에서 저주스러운 형벌을 받고 계시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 순간에도 둘 다 예수님을 욕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들의 죄악은 돌이킬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이들 중 하나가 자신의 죄를 돌이켜 회개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마가복음에는 없지만 누가는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달린 행악 자 중 하나는 그 사람을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하되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응한 보응을 받는 것이 마땅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고 말하고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라고 자신의 구원을 탄원했습니다(눅23:39-42). 예수님은 그 자리에서 이 강도의 회개를 받으시고 그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2) 십자가상의 이 사건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하나는 구원과 심판을 말합니다. 모든 인류는 십자가의 저주스러운 심판을 받아야할 죄인들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이제 인류는 누구든지 이 사실을 믿고 회개하는 자는 구원을 얻고 끝까지 거역하는 자는 멸망을 받습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3:18).

두 번째는 사람의 회개는 결코 늦음이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두 명의 강도 중 하나는 죽을 그 순간에 회개했습니다. 하나님은 끝까지 길이 참으시면서 우리의 회개를 기다리십니다. 우리의 전도는 꾸준한 인내를 가지고 하나님의 자비를 기다려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쉽게 정죄하는 잘못을 범해서는 안됩니다. 절망적인 죄인은 없다는 사실을 믿고 사랑을 가지고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세 번째로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예정에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두 명 중 한 명만이 회개했다는 사실은 성령의 감동이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감동 없이는 사람이 회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의 아들을 보내신 것이 아니라 어린양의 생명 책에 기록된 예정된 자들의 구원을 위해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예정이 누구에게 미치느냐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습니다. 그 일은 오직 하나님만의 고유한 권한에 속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결 론 : 예수님의 머리 위에는 죄인들의 죄를 밝히는 죄패가 있었습니다. 그 죄패에는 “유대인의 왕”이라고 써 있었습니다. 이 같은 죄명은 빌라도가 임의로 부친 것입니다. 빌라도가 이처럼 죄패를 쓰게된 이유는 빌라도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심문했을 때 예수님이 “네 말이 옳도다”고 대답하셨는데 이 말에 근거한 죄명으로 기록하게 한 것입니다. 이 죄패에는 세 가지 뜻이 있습니다. 그에게는 사형에 해당할 만한 죄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메시야가 아니냐, 너희들의 왕의 이 초라한 모습을 보라는 뜻으로 유대인들의 메시야 관을 조롱하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명심해야 할 일은 예수님은 정말로 ‘유대인의 왕’이시며 그같은 왕의 권세를 가지고 정말로 이 세상에 오실 일에 대한 예언적인 증표도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 98≈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본문 : 마가복음 15 : 33 - 41)

서 론 : 예수님은 십자가위에서 오랜 시간 고통의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제 3시(9시)에 못 박히신 예수님은 3시간 후인 제 육 시가 되매 온 땅에 어두움이 깔렸습니다. 이 같은 현상은 일부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일식 현상이 아닙니다. 이 어두움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관계된 현상으로 죄인을 위한 대속의 죽으심의 고통과 수치스러움을 보여주신 하나님의 역사였다고 보아야합니다. 이 어두움은 제 9시(3시)까지 계속되었다고 하니 무려 3시간 동안이나 계속된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골고다를 중심한 예루살렘 주변에만 지역적으로 있었던 현상으로 그때까지 십자가 곁에 있었던 로마군인들이나 많은 군중들은 한편 놀랬을 것이나 그러나 영적으로 깨달음이 없는 그들에게는 일시적으로 일어난 자연계의 현상쯤으로 넘겨버렸을 것입니다.

1.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예수님은 오전 9시경에 십자가에 목 박히신 후, 무려 6시간 동안이나 십자가에서 무리들에게 조롱을 당하시면서 고통을 참으셨습니다. 3시간이나 계속된 어두움이 막 걷히려는 순간, 그때가 예수님이 운명하시는 마지막 시간입니다.

(1) 바로 그때에 예수님은 크게 소리지르시면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외치셨습니다. ‘엘리’란 말은 히브리어로 ‘나의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마가는 엘리라고 하는 히브리어로 그대로 음역하므로 헬라어로 기록한 마가복음을 유대인들의 독자들도 이해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입니다. 마가는 이 사실을 기록하면서 친절하게도 그 말씀의 뜻을 번역해 주었는데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이 같은 예수님의 처절한 외침은 십자가에서 겪으신 예수님의 고통의 함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육신을 가지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통이란 우리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고통을 당하셔야 했던 것은 우리의 죄로 말미암음입니다. 특히 예수님이 당하셨던 고통은 영적 괴로움까지 겹친 것으로 온 인류의 죄에 대한 심판을 그곳에서 예수님이 스스로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 예수님의 외침은 지옥에서 당해야할 인류의 고통을 보여주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옥의 고통에 대하여 주님은 사도 요한을 통해서 우리에게 자세히 보여주셨습니다.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고 말씀했습니다(계14:9-11).

그리고 이 예수님의 부르짖음은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실 일에 대한 예언의 성취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당하실 고난에 대한 예언은 주로 시22편에서 보여 주는데 1절을 보면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하는 고통의 외침이 나오는데 예수님은 십자가위에서 이 말씀의 성취를 생각하시면서 외치신 것입니다.

(2) 예수님의 이 같은 고통의 외침을 들은 주변의 유대인들과 로마군병들은 잠시 멈췄던 조롱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그들 중 어떤 사람은 엘리야를 부른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엘리란 말은 엘리야란 말로 잘못 들은 모양입니다. 엘리야란 인물은 유대인들에게 생소한 인물이 아닙니다. 엘리야는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에 올라간 하나님의 선지자임을 모르는 유대인은 없었습니다. 또 그들은 말라기에 예언된 엘리야에 대한 기대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엘리야를 부르고 있는 것으로 착각한 것입니다(말3:5-6).

그리고 어떤 자는 해융에 머금게 한 신 포도주를 갈대에 달아 예수님으로 마시게 했습니다. 해융이란 스펀지처럼 수분을 흡수시키는 해초로 그들이 음료수로 사용하는 신 포도주를 그 해융에 머금게 한 후 갈대에 달아 예수님으로 그것을 마시게 했다고 했습니다. 아마 이 같은 일은 십자가 형틀에 매달린 죄수들이 목 말라할 때 마시게 하기 위해 관례적으로 하고 있는 행습으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인도적인 측면에서 한 일은 결코 아닙니다. 그렇게 한 무리들이 “가만 두어라 엘리야가 와서 저를 내려주나 보자”는 말로 조롱을 계속했기 때문입니다.

2. 예수님의 운명

37절 말씀에서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운명하시다”고 했습니다. 이 큰 소리가 무슨 의미의 소리인지 마가는 기록하지 않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일곱 마디 말씀 중 마지막 말씀인 “아버지요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고 큰 소리로 불러 외치신 후 운명하셨는데 아마도 이 말씀일 것으로 여겨집니다(눅23:46).

(1) 예수님이 운명하시자 이상한 일이 발생했는데 그것은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된 사건입니다. 이 성소 휘장은 성전의 지성소 옆에 쳐있는 휘장을 말합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 사건입니다. 이 휘장은 인위적으로 찢겨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의해 찢겨진 것입니다. 지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한 가운데가 찢겨졌다는 사실은 예사로운 징조가 아닙니다. 이런 일은 제사장이나 서기관들에 의해 극비에 부쳐졌지만 그러나 복음을 기록한 기자들은 그같은 사건을 이미 영적으로 바라본 것입니다. 이 사건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① 이 같은 일은 하나님께로 가는 새로운 길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열렸다는 사실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일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길이요 휘장은 그의 육체니라”고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히10:19-20). 구약적 제사는 오직 대제사장을 통해서 1년에 한차례씩 지성소에 들어가는 일이 허락되었으나 예수님이 이 같은 장벽의 휘장을 그의 육체로 찢으시므로 누구나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직접 하나님께로 나갈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새롭고 산길입니다. 구약적인 제사는 실상인즉 죽은 제사였습니다. 그것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길이야말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열어놓으신 새로운 길입니다.

② 그리고 이 사건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은 인류의 속죄사업을 완성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양을 대신하여 제물로 받치고 그의 피로 속죄의 제물로 삼는 구약적인 제사제도는 이제 필요 없게된 것입니다. 양이나 소나 염소의 피로 속죄제물을 삼아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제도는 십자가 이전까지의 그리스도의 속죄사업의 그림자로 필요했을 뿐입니다. 그 이후에도 새삼스럽게 이 같은 제물로 제사를 드린다면 이런 일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의 피를 짓밟는 죄를 범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사건 후에도 계속적으로 예루살렘 성전에서 구약적 제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70년에 이르러 로마의 디도로 예루살렘을 공격케 하시고 예루살렘 성전을 폐허화시켜 구약적 제사제도를 이 땅에서 영원히 살아지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인류의 종말에 이르러 회복된 예루살렘에 구약적 제사를 위한 성전을 건축하게 되며 적 그리스도부터 이 같은 유대인의 제사에 대한 혹독한 핍박을 받게 하실 것임을 예언해 주고 있습니다.

(2) 이 사건을 끝까지 주시했던 한 백부장이 주님의 운명하심을 보고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고 고백했습니다. 백부장이란 로마군병을 거느리는 중견장교입니다. 약 백 명의 군사를 통솔하는 인물입니다. 아마도 이 자는 예수님을 사형 집행하는 일에 책임자로 파견된 자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골고다에서 일어난 일에 대하여 유심히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예수님의 범상치 아니한 인품, 그의 행하시는 일과 말씀, 자연계의 이변 등을 보았을 때 그는 예수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가지고 살펴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운명하시는 모습을 바라보고는 스스로 중대한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고 고백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이 고백은 십자가에 달려죽은 이 청년이야말로 참으로 유대인의 왕이었다고 하는 신앙고백이 되는 것으로 이때 이 청년 백부장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회개하고 교회의 중요한 위치에서 일을 했으며 후에 순교로 생애를 마쳤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결 론 : 주님이 십자가에서 겪으신 사건은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최대의 정점입니다. 구약과 신약시대의 분기점이 되는 사건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주셨던 구약적인 제사제도가 막을 내리고 유대인과 이방인의 벽이 무너지며 한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섭리가 비로소 명백하게 드러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대제사장보다 더 온전한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주시고 왕 같은 제사장의 직분을 주시므로 우리에게 미친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 99≈ 장사를 지낸 요셉

(본문 : 마가복음 15 : 42 - 47)

서 론 : 우리는 오늘 요셉이란 인물을 대하게 됩니다. 이 요셉은 아리마대 지방 사람인데 그가 평소에 얼마나 예수님을 사랑하고 사모한 사람이었던가에 대하여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 등장하지 아니한 사람들 중에도 예수님의 제자들이 많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그런 사람 중에 이 아리마대 요셉과 같은 훌륭하고 진실한 제자들이 많았다는 사실에 대하여 새삼 놀라게 되는 것입니다. 요셉은 자신의 신분에 위험과 생명까지 버리기로 각오하고 예수님의 장례를 치른 사람입니다. 이 일은 니고데모도 구 그곳에 나타나 요셉에게 협력해 주었지만 실제로 장례를 주관한 사람은 요셉이었습니다(요19:38-42).

1. 아리마대 요셉의 등장

십자가에 못 박히신 채 오랜 시간 고통을 겪으시면서 유명한 십자가상의 일곱마다 말씀을 남기셨지만 제 9시가 되자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외치시고 그 후 또 큰 소리를 지르시고 운명하셨습니다.

(1) 이 날은 예비일 곧 안식일 전날이었다고 했습니다. 예비일이나 안식일 전날은 같은 날입니다. 안식일 전날은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특별히 예비하는 날이기 때문에 예비일이라고 불려지고 있습니다. 이 날은 금요일입니다. 유대인들은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키기 때문에 금요일이면 안식일에 쓸 물건이나 안식일에 필요로 하는 것들을 미리 이날에 준비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엔 절대로 일하기 않기 때문입니다. 특히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 성행된 장로의 유전에 따르면 안식일에 걷는 거리도 제한되어 있었고 죽을 환자가 생겨도 치료가 불가능하며 손에 아무 것도 들고 다닐 수 없는 엄격한 조항들을 준수하고 있었습니다.

이 안식일 전날이 저물었다고 했습니다. 제 9시 곧 오후 3시경이었으니 이미 이른 저녁에 다다른 시간임을 말해줍니다(3시부터 6시까지를 이른 저녁, 6시부터 9시경까지를 늦은 저녁으로 간주하고 있었음). 유대인들은 해지는 시간인 오후 6시경을 기준으로 하루의 시차가 바뀌기 때문에 예수님이 운명하신 시간은 예비일이 되는 금요일 저물었을 시간입니다. 그런데 아직 주님의 시신은 골고다 언덕위 십자가에 그대로 달려있는 것입니다. 율법에는 나무에 달려있는 시체는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지내란 말씀이 있습니다(시21:22-23). 뿐만 아니라 예비일에 시체를 장사하지 않으면 다음날이 안식일이므로 장사를 지낼 수 없으며 시체가 나무에 계속 달려 있다면 짐승이나 악한 무리들에 의해 시체에 손상을 받을 염려가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반드시 예수님의 시체를 거두어 장사를 지내야 했습니다.

(2) 이 요긴한 시각에 골고다에 등장한 인물이 바로 아리마대 요셉이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이란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란 뜻인데 지금은 이 아리마대 지방이 어느 지방을 의미하는지 알 길이 없지만 예루살렘 북쪽 약 30키로 지점에 위치한 ‘라마다임’이란 고장으로 보는 견해가 많습니다. 이 요셉이 당돌하게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이 아리마대 요셉에 관한 몇 가지 사실에 대하여 살펴보려고 합니다.

① 43절에 있는 말씀을 보면 “이 사람은 존귀한 공회원”이라고 했습니다. 공회원이란 산해드린 의원이란 뜻입니다. 산해드린 의원이란 유대인 사회에 있어서 최고의 명예로운 지위를 말하며 율법적인 재판의 최고법정이기도 했습니다.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도 요셉과 같은 공회원이었으며 요셉은 예수님의 재판에서 가타아니하고 그들의 사형선고에 동조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특히 마가는 요셉이란 인물을 평가함에 ‘존귀한 공회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공회원 중에도 존귀한 자란 의미로 그가 많은 유대인들로부터 존경을 받아온 인품 있는 유대인이었다는 사실을 나타내 주는 말입니다. 누가는 요셉을 “공회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눅23:50). 그는 다른 공회원들과 달리 선하고 의로운 사람인 점에 있어서 유대인들로부터 존귀한 자란 칭호를 듣고 있었을 것입니다.

② 요셉을 가리켜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같은 의미의 교회시대나 또는 이 땅에 새롭게 탄생할 ‘천년왕국’을 의미하는 말은 아닙니다. 유대인들이 메시야관은 독특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가장 위기상황에 처했을 때 그들을 구원해 줄 수 있는 모세와 같은 메시야가 나타날 줄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나타나면 이 세상에는 새로운 평화의 시대가 오며 이 시대는 다윗의 자손으로 오는 메시야가 왕이 되며 유대인들이 중심이 되어 새롭게 전개되는 왕국을 의미합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이런 메시야 사상을 가지고 있으며 그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바로 이 같은 메시야로 오신 분이신 줄로 믿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모습을 보고는 크게 실망했습니다(눅24:21). 이 요셉이란 사람도 역시 유대인들이 갖고 있는 메시야 사상에 따른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③ 이 같은 요셉이 당돌하게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한 것입니다. 당돌하다는 말은 요셉의 대담한 행동을 표현한 말입니다. 요셉은 그의 신분이 산헤드레 의원입니다. 그는 유대인의 존경을 받고 있는 공회원이요 또한 부자였으므로 그가 취한 이런 처신은 의외의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예수를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하였고 실질적으로 예수를 십자가 틀에 못 박은 산헤드레 공회인데 그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하여 장사를 치른 사실이 드러나면 그가 어떤 처분을 받을는지 너무나도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일로 빌라도를 찾아간다는 것도 하나의 큰 모험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아무도 거리끼지 않고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가 생각하고 결단한 바를 실행에 옮긴 것입니다. 요셉이야말로 정말로 진실한 주님의 제자요 존귀한 유대인이요 참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2. 장사를 지낸 요셉

뜻밖에 요셉의 방문을 맞은 빌라도는 놀랬을 것입니다. 요셉은 공회원이요 그에다 부자였으므로 이전부터 빌라도와는 여러 번 면식이 있었을 것입니다.

(1) 평소에 요셉을 존경해온 빌라도는 요셉을 정중히 맞았습니다. 빌라도는 시간적으로 아직 예수가 십자가에서 운명하지 아니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백부장에게 알아본 후 시체를 요셉에게 내어 주었습니다. 시체를 인계 받은 요셉은 부지런히 장례를 치러야 했습니다. 시간은 점점 안식일로 다가서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누구하나 예수님의 제자 중 그곳에 나와서 예수님의 장사지낼 일에 대하여 걱정하고 서두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2) 요셉이 새로 마련한 세마포에 주님의 시체를 쌌다고 했습니다. 세마포에 싸서 장사지내려면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려야 합니다. 누가 요셉의 이 일을 도와주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아마 그 주변에 있었던 여인들이 협력했을 것입니다.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 뒤를 좇아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둔 것을 보고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예비하더라”고 했습니다(눅23:55-56). 이들 여인들 중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요셉의 어미니 마리아도 있었다고 47절에서 말해 줍니다.

요셉은 예수님의 시신을 세마포로 싸서 바위 속에 판 무덤에 넣어두고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는 것으로 장사를 모두 치렀습니다. 바위 속에 판 무덤이란 아직 장사지낸 일이 없는 새 무덤으로 이 무덤은 자신의 장례를 위해 요셉이 미리 예비해 두었던 것입니다(마27:60).

결 론 : 요셉은 이처럼 예수님의 장사를 치르는 일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습니다. 생명의 위험까지도 무릅쓰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어려울 때에 도움이 된다는 일은 큰사랑의 증거입니다. 요셉은 주님에 대한 사랑의 증거를 이처럼 적절한 시기에 가장 보람있게 나타냈습니다. 그의 숨겨진 사랑이 이처럼 나타난 것입니다. 요셉과 같은 주님의 사랑을 간직하여 그 사랑을 주님이 가장 필요로 할 때 요셉처럼 나타낼 수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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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6장

◆ 밤중소리 01-09 | VIEW : 1,208

≈100≈ 마리아에게 나타나신 예수님

(본문 : 마가복음 16 : 1 - 11)

서 론 :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놀라운 사건입니다. 이 역사적 사건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은 그의 부활의 현장에서 막닥라 마리아에게 맨 먼저 나타나 보이셨습니다. 주님을 따른 제자들도 많았고 주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도 많았지만 주님이 죽으신 지 사흘만에 다시 사실 것이라는 그의 부활에 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한사람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죽으신 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이란 말씀을 제자들에게 여러 번 들려주셨지만 그 말씀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죽으신 지 사흘이 되었지만 부활한 주님을 만나기 위해 무덤을 찾은 무리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완전히 감춰진 하나님의 비밀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실 것이란 사실을 사단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1. 안식 후 첫날 아침의 무덤

안식일이 지났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예비일 곧 안식일 전날에 십자가에 달리셨으므로 안식일이 지났으면 토요일이 지난 다음날, 곧 안식 후 첫날에 이른 것입니다.

(1)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은 때에 그 무덤으로” 가는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이름이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매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평소에 주님을 남달리 사랑했던 여인들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실 때 그 아래서 함께 고통을 나눈 여인들로 끝까지 남아 요셉의 장례까지 보고 그 무덤까지 확인했던 여자들입니다. 이들이 예수님의 몸에 바르기 위해 향품을 사두었다가 안식 후 첫날 해 돋은 때에 무덤으로 간 것입니다. 대개의 경우 향품은 장례를 치를 때 세마포와 함께 시신에 싸는데 이 여인들은 자신들의 사랑과 정성을 담은 향품을 별도로 주님의 시신에 바르기 위해 이날 아침 새벽에 무덤으로 가지고 간 것입니다.

(2) 이 여인들은 무덤에 가면서 한가지 걱정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장례 지내면서 무덤 입구에 돌을 굴려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힘으로는 그 돌을 굴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무덤 입구에 이르러 보니 누군가가 이미 돌을 굴려놓았기 때문에 그들은 속으로 심히 근심하며 당황했습니다. 그것은 밤사이에 누가 주님의 시체를 훔쳐간 것이 아닌가? 염려됐기 때문입니다. 여인들은 담대하게 무덤에 들어갔습니다.

2. 그가 살아나셨느니라

무덤 안에 들어간 여인들은 그 무덤 안에서 흰옷 입은 한 청년이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이 청년은 말할 것도 없이 천사였습니다. 이 천사는 여인들을 향하여 참으로 놀라운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의 말인즉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천사의 이 같은 소식에 여인들은 주님이 살아나셨다는 사실에 기뻐하기보다는 너무나도 놀라 마치 정신나간 사람들처럼 놀랬을 것입니다.

(1) 천사는 이 여인들에게 그들이 해야 할 일을 알려주었습니다. “가서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고 말했습니다. 이 여자들이 이런 광경에 얼마나 놀랬는지는 “여자들이 심히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했다”는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빈 무덤을 보고 천사의 전갈을 들은 이 여인들은 마땅히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제자들과 베드로는 이 같은 여인들의 증거를 듣고도 믿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3)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른 새벽 무덤에 찾아 나온 마리아를 만나주셨습니다. 9절에서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셨다”고 했습니다. 마리아는 참으로 축복 받은 여인입니다. 주님을 만나기 이전의 그의 생애는 불행하고 비참했지만 그는 주님의 가장 놀라운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 같은 사랑 받음은 우리 모두에게 큰 위로와 격려가 되기도 합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잠8:17).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을 만난 후 자신의 생애를 버리고 주님을 사랑하는 새로운 생애를 살았습니다. 이 여인은 자신의 소유로 주님을 섬겼습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에서는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 마리아라 하는 마리아와 또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가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고 했습니다(눅8:2-3).

마리아는 끝까지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 골고다에 올라갔습니다. 주님의 처절한 모습을 보고 그는 울며 통곡했습니다.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랐다”고 했습니다(눅23:27). 마리아는 십자가 밑에서 주님이 당하시는 고통을 함께 맛보며 끝까지 지켜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햇살이 서산에 기울어 어두워질 때까지 그곳을 떠나지 않았으며 아리마대 요셉이 장례를 치르는 것까지 목격하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마리아의 변화는 그리스도인의 변화의 모형입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고 했습니다(롬12:1). 마리아는 그의 몸은 천하고 질병과 환난과 멸시에 상하고 찢겨진 생애를 살아왔지만 주님을 만난 이후 그는 자신의 전 생애를 주님께 드리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렸던 것입니다.

결 론 : 마리아는 이 세상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생애를 보낸 여인이며 주님의 지극한 사랑을 받은 여인입니다. 그의 상급은 오직 하늘에 있었습니다. 지금 마리아는 그 누구보다도 영광스러운 지위를 얻고 주님 가까이서 주님과 함께 놀랄만한 행복과 축복을 누리는 만대의 복이 있는 여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고전15:58).

≈101≈ 주님의 지상명령

(본문 : 마가복음 16 : 12 - 20)

서 론 : 오늘로 마가복음 강해를 마치게 됩니다. 오늘 마가복음을 마침에 있어서 주님께서 이 말씀을 들으시는 여러분들에게 충만한 은혜를 내려주셔서 기록된 말씀을 믿고 여러분의 생활에 적용하는 생활을 통해서 신앙의 성장과 축복이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참으로 중요한 의미를 주는 말씀으로 주님의 엄숙한 지상명령이십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라도 이 말씀을 따라야할 의무가 있으며 이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며 그 나라가 속히 임하게될 것입니다.

1. 믿지 아니하는 마음

예수님은 믿지 아니하는 마음을 완악한 마음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같은 완악한 마음을 가졌다해도 주님이 그의 마음을 치유해 주시며 사명을 주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1) “저희 중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 때”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들 중 하나에 대하여 누가는 글로바라고 밝혀주고 있으며 걸어서 찾아간 시골은 엠마오로 나와 있습니다. 이들은 엠마오로 내려가면서 노중에서 한 나그네를 만났는데 그 분이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열어 근래에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일에 대하여 성경적으로 소상히 해석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음식을 먹을 때 그들의 눈이 열려 그 나그네가 주님이신 줄 알고 급히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갔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의 어느 한 집에 숨어서 사태의 추이를 바라보고 있었던 제자들을 찾아가 자기들이 다시 살아나신 주님을 만났던 사실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들의 말을 믿으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친히 만나 이야기까지 나누고 제자들에게 이르라는 말씀까지 전해주었지만 믿지 아니했었습니다. 이처럼 그들이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던 것은 그들의 마음이 완악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마음이 완악해지면 나타난 사실마저도 믿지 않으려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인간적인 상식이나 기준으로 무슨 일이든 판단하려 하기 때문에 영적 진리에 대해서는 맹목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이 그들 앞에 나타나셔서 그들의 마음의 완악함을 꾸짖으셨습니다. 열 한 제자가 음식을 먹을 때에 주님이 그 자리에 나타나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두 가지 사실에 대해 책망하셨는데 첫 번째는 저희에게 믿음 없음을 책망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어 고난을 받으실 일과 죽은 자 가운데서 사흘만에 부활하실 일에 대하여 여러 번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말씀을 깨닫지 못했으며 믿으려하지도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다만 자기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메시야 왕국을 세울 일에만 관심을 쏟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세상 것에 마음을 빼앗기면 신령한 진리에는 눈이 감겨지게 되어 있습니다. 기복신앙에 빠진 사람들에게 신령한 은혜와 진리에 깨달음이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다른 한가지는 그들의 마음의 완악함을 꾸짖으셨습니다. 마음이 완악하다는 말은 믿음이 없다는 말과 맥을 같이하지만 제자들의 마음의 완악은 주님의 말씀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데서 나타난 현상이며 두려운 생각에 사로잡혀서 주님에 대한 사랑이 살아져 버린 데서 온 것입니다. 이 같은 제자들의 태도는 주님의 책망을 마땅히 들어야했습니다. 예수님이 이처럼 제자들을 꾸짖으신 것은 “자기의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이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이처럼 큰 시험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기도에 실패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과 함께 기도할 동안, 기도는 하지 않고 잠만 자고 있었습니다. 잠을 잔 그들의 마음에 어둠이 들어간 것입니다. 그들이 가질 수밖에 없었던 두려움도 기도의 실패에서 왔습니다. 그들은 두려운 나머지 주님을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그들은 두려운 나머지 주님이 골고다에서 고난을 당하시는 그 자리에도 올라가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그들은 마음이 완악해졌으며 두려움에 떨면서 어두운 곳에 숨어 있었습니다.

2. 주님의 지상명령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중요한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그리고 이 명령은 바로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우리에게도 함께 주신 명령임을 알아야 합니다.

(1) 예수님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면서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셨습니다. 온 천하에 다니라는 말씀은 복음의 전파 대상자가 범세계적임을 의미합니다. 초대교회 시대의 유대인들은 복음을 유대계에 축소시켰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천하가 그 전도대상입니다. 복음으로 이제 새로운 이스라엘을 형성하시며 복음으로 새로운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시며 복음으로 이면적 유대인을 만드셔야 하므로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약속이 전세계적으로 펼쳐지지 위해서는 온 천하에 전파되어야 합니다.

그뿐 아니라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유대인뿐이 아닙니다.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된 하나님의 백성은 온 천하에 흩어져 있습니다. 다만 유대인들을 통해서 말씀을 주셨고 메시야를 유대인을 통해서 태어나게 하셨고 복음을 유대인들을 통해 최초로 전파하게 하셨을 뿐입니다.

(2)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주님께서 특히 세례를 말씀하신 것은 유의해야할 일입니다. 세례는 믿는 자들이 자신이 그리스도를 영접한다고 하는 외적 신앙고백이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그리고 세례는 아직까지의 죄인된 생활을 청산하고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난다고 하는 회개의 표시이기 때문에 세례를 등한히 여기거나 무시하는 행위는 정죄 받아 마땅한 일입니다. 그리고 세례는 그리스도와의 영적인 연합의 표식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할 일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례는 구원의 전제조건이 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세례를 구원과 연관시키거나 구원에 절대적인 조건으로 삼으면 ‘다른 복음’이 됩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이 심판 받을 정죄는 결코 율법적인 조항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느냐? 안 하느냐하는 문제에 달렸습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는 구원을 얻으며, 믿지 아니하는 자는 정죄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결 론 : 주님은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믿는 자들에게 따르는 표적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표적인 이적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주님이 말씀하신 이 믿는 자들에게 따르는 이적에 대하여 올바른 해석을 내려야 합니다. 이 이적을 누구에게나 주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언제나 임한다거나 어느 시대에나 동일하게 나타난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방언도 마찬가지입니다. 믿는 모든 사람이 누구나 방언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문제는 서신 서에 가서 바울이 자신이 받은 계시로 새롭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뱀을 잡을 수 있는 문제 역시 실질적으로 독이 든 뱀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않는다”고 하신 말씀 역시 누구에게나 어느 시대에나 언제나 해당된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복음을 받아드린 사람들에게 성령께서 교회의 유익을 위해 은사적으로 또는 한시적으로 또는 선별적으로 주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혹 어떤 사람은 이 은사의 보편성을 주장하지만 이 같은 은사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선택된 하나님의 특별한 일꾼들에게 주시므로 복음 초기에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큰 힘이 되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