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新約]강해/◆ 사복음서 · 사도행전 강해-1

마가복음 1장-9장 ◆ 밤중소리

영국신사77 2020. 4. 12. 15:53


마가복음 

■ 차 례

제 1 장(1 ~ 9)

1)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 (마가복음 1장 : 1절 ~ 8절) 

2) 세례를 받으신 예수 (마가복음 1장 : 9절 ~ 11절) 

3)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 (마가복음 1장 : 12절 ~ 13절)

4) 예수님의 첫 메시지 (마가복음 1장 : 14절 ~ 15절)

5) 첫 제자들의 부르심 (마가복음 1장 : 16절 ~ 20절) 

6) 권세 이는 예수님의 가르치심 (마가복음 1장 : 21절 ~ 28절)

7) 치료자 예수 (마가복음 1장 : 29절 ~ 34절) 

8) 주님의 기도와 전도 생활 (마가복음 1장 : 35절 ~ 39절)

9) 내가 원하노니 (마가복음 1장 : 40절 ~ 45절)


제 2 장(10 ~ 16)

10) 고침 받은 중풍병자 (마가복음 2장 : 1절 ~ 12절)

11) 죄를 사하시는 권세 (마가복음 2장 : 5절 ~ 12절)

12) 주님을 따른 레위의 자세 (마가복음 2장 : 1절 ~ 15절)

13)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마가복음 2장 : 16절 ~ 17절)

14) 그리스도인과 금식 (마가복음 2장 : 18절 ~ 20절)

15) 생베 조각과 새 포도주 (마가복음 2장 : 21절 ~ 22절) 

16) 안식일의 주인이 되시는 예수님 (마가복음 2장 : 23절 ~ 28절)


제 3 장(17 ~ 21)

17) 안식일에 대한 새로운 고찰 (마가복음 3장 : 1절 ~ 12절)

18) 열 두 제자의 부르심 (마가복음 3장 : 13절 ~ 19절)

19) 귀신을 좇으신 일과 바알세불 (마가복음 3장 : 20절 ~ 27절) 

20) 성령을 훼방하는 죄 (마가복음 3장 : 28절 ~ 30절)

21)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가족 관계 (마가복음 3장 : 31절 ~ 35절)


제 4 장(22 ~ 27)

22) 씨뿌리는 자의 비유 (마가복음 4장 : 1절 ~ 20절)

23) 하나님 나라의 비밀 (마가복음 4장 : 10절 ~ 12절) 

24) 등경 위에 있는 등불 (마가복음 4장 : 21절 ~ 25절) 

25) 하나님 나라의 성장 과정 (마가복음 4장 : 26절 ~ 29절)

26) 겨자씨로 비유된 천국 (마가복음 4장 : 30절 ~ 35절) 

27) 어찌 믿음이 없느냐 (마가복음 4장 : 36절 ~ 41절) 


제 5 장(28 ~ 31)

28) 군대 귀신들린 청년 (마가복음 5장 : 1절 ~ 17절)

29) 네 친속에게 고하라 (18절 ~ 20절) 

30)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21절 ~ 43절)

31) 혈루증을 치료받은 한 여인의 믿음 (25절 ~ 34절) 


제 6 장(32 ~ 37)

32) 고향에서 배척 당하신 메시야 (마가복음 6장 : 1절 ~ 6절) 

33) 전도인의 자세 (마가복음 6장 : 7절 ~ 13절)

34) 세례 요한의 죽음 (14절 ~ 29절)

35) 무리를 불쌍히 보신 예수님 (30절 ~ 43절)

36)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다 (45절 ~ 46절)

37) 내니 두려워 말라 (47절 ~ 56절)


제 7 장(39 ~ 41)

38) 헛된 경배 (마가복음 7장 : 1절 ~ 8절)

39)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 (9절 ~ 23절)

40) 응답 받은 한 여인의 간구 (24절 ~ 34절) 

41) 에바다 (31절 ~ 37절)


제 8 장(42 ~ 48)

42)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마가복음 8장 : 1절 ~ 10절) 

43) 표적을 보이지 아니하신 예수 (11절 ~ 13절)

44) 바리새인과 헤롯의 누룩 (14절 ~ 21절)

45)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22절 ~ 30절)

46)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31절 ~ 34절)

47) 목숨을 얻는 일과 잃는 일 (35절 ~ 37절) 

48) 그 사람을 부끄러워 하리라 (38절)


제 9 장(49 ~ 58)

49) 예수님의 변형 (마가복음 9장 : 1절 ~ 3절)

50) 오직 예수만 보이더라 (마가복음 9장 : 4절 ~ 8절)

51) 먼저 온 엘리야는 누구냐 (마가복음 9장 : 9절 ~ 13절)

52) 귀신의 존재 (마가복음 9장 : 14절 ~ 22절) 

53) 믿는 자의 능력 (마가복음 9장 : 21절 ~ 24절) 

54) 믿음 없음을 도우소서 (마가복음 9장 : 23절 ~ 29절) 

55) 깨닫지 못한 이유 (마가복음 9장 : 30절 ~ 32절) 

56) 누가 큰 자냐 (마가복음 9장 : 33절 ~ 37절)

57) 주님께 속한 자의 특권 (마가복음 9장 : 38절 ~ 42절)

58) 죄에 대한 투쟁 (마가복음 9장 : 43절 ~ 50절)


제 10 장(59 ~ 66)

59) 그리스도인의 이혼 문제 (마가복음 10장 : 1절 ~ 12절)

60) 어린아이와 하나님 나라 (마가복음 10장 : 13절 ~ 16절) 

61) 한가지 부족한 것 (마가복음 10장 : 17절 ~ 22절)

62) 부자와 천국 (마가복음 10장 : 23절 ~ 27절)

63) 복음을 위한 보상 (마가복음 10장 : 28절 ~ 31절)

64) 제자들이 요구하는 영광 (마가복음 10장 : 32절 ~ 40절)

65) 인자가 온 목적 (마가복음 10장 : 41절 ~ 45절)

66) 소경 바디매오의 믿음 (마가복음 10장 : 46절 ~ 52절) 


제 11 장(67 ~ 72)

67) 호산나 (마가복음 11장 : 1절 ~ 11절) 

68) 무화과나무에 대한 저주 (마가복음 11장 : 12절 ~ 14절) 

69) 예수님의 성전 청결 작업 (마가복음 11장 : 15절 ~ 18절) 

70) 받은 줄로 믿는 기도의 능력 (마가복음 11장 : 20절 ~ 24절)

71) 기도와 죄 (마가복음 11장 : 25절 ~ 26절)

72) 요한의 세례와 예수님의 권세 (마가복음 11장 : 27절 ~ 33절) 


제 12 장(73 ~ 79)

73)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예수 (마가복음 12장 : 1절 ~ 12절) 

74)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 (마가복음 12장 : 13절 ~ 17절)

75) 부활한 자의 형체 (마가복음 12장 : 18절 ~ 25절) 

76) 산 자의 하나님 (마가복음 12장 : 26절 ~ 27절) 

77) 계명 중에 첫째 되는 것 (마가복음 12장 : 28절 ~ 34절)

78) 그리스도와 다윗의 자손 (마가복음 12장 : 35절 ~ 40절)

79) 가난한 과부의 헌금 (마가복음 12장 : 41절 ~ 44절)


제 13 장(80 ~ 85)

80) 세상 종말의 징조 (마가복음 13장 : 1절 ~ 9절) 

81) 견디는 자가 이기는 환난 (마가복음 13장 : 10절 ~ 13절)

82) 인류 역사 초유의 대환난 (마가복음 13장 : 14절 ~ 20절)

83) 재림의 날에 나타날 일들 (마가복음 13장 : 21절 ~ 27절) 

84) 무화과나무의 비유와 종말 (마가복음 13장 : 28절 ~ 32절) 

85)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마가복음 13장 : 33절 ~ 37절)


제 14 장(86 ~ 94)

86) 옥합을 깬 마리아 (마가복음 14장 : 1절 ~ 9절)

87) 가룟 유다의 배신 마가복음 14장 : 10절 ~ 11절)

88) 다락방에서 있은 일 (마가복음 14장 : 12절 ~ 21절)

89) 주님의 성만찬 (마가복음 14장 : 22절 ~ 25절) 

90) 베드로의 맹세 (마가복음 14장 : 26절 ~ 31절)

91) 시험에 들지 말라 (마가복음 14장 : 32절 ~ 42절)

92) 성경을 이루려 함이니라 (마가복음 14장 : 43절 ~ 52절) 

93) 내가 그니라 (마가복음 14장 : 53절 ~ 65절)

94) 생각하고 울었더라 (마가복음 14장 : 66절 ~ 72절)


제 15 장(95 ~ 99)

95)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마가복음 15장 : 1절 ~ 15절) 

96) 구레네 시몬의 십자가 (마가복음 15장 : 16절 ~ 23절)

97) 몰약을 탄 포도주 (마가복음 15장 : 22절 ~ 32절)

98)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마가복음 15장 : 33절 ~ 41절)

99) 장사를 지낸 요셉 (마가복음 15장 : 42절 ~ 47절)


제 16 장(100 ~ 101)

100) 마리아에게 나타나신 예수님 (마가복음 16장 : 마가복음 16장 : 1절 ~ 11절)

101) 주님의 지상 명령 (마가복음 15장 : 12절 ~ 2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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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장

1)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 (1절 ~ 8절) 

2) 세례를 받으신 예수 (9절 ~ 11절) 

3)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 (12절 ~ 13절)

4) 예수님의 첫 메시지 (14절 ~ 15절)

5) 첫 제자들의 부르심 (16절 ~ 20절) 

6) 권세 이는 예수님의 가르치심 (21절 ~ 28절)

7) 치료자 예수 (29절 ~ 34절) 

8) 주님의 기도와 전도 생활 (35절 ~ 39절)

9) 내가 원하노니 (40절 ~ 45절)


≈ 1 ≈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

(본문 : 마가복음 1 : 1 - 8)


서 론 : 우리는 네 개의 복음서에서 제각기 특색 있는 서두를 찾아보게 됩니다. 마태복음은 메시야의 족보와 그의 탄생으로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은 세례 요한의 탄생 기사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성육신 이전의 ‘로고스’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나 이곳 마가복음에서는 공생애에 들어간 세례 요한의 사역으로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마가는 이 복음서를 기록함에 있어서 베드로의 영향을 전적으로 받았다고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마가복음이 베드로 복음이란 별명이 붙을 정도로 이 베드로에 의한 실질적 묘사가 많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 복음서는 마가라고 하는 패기 있는 청년에 의해 기록된 연유에서인지 전 문장에 생동감이 넘쳐 있고 문장이 비교적 순수하며 간결한 표현법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1. 이 복음을 기록한 사람과 그 배경

이 복음이 마가에 의하여 기록되었다는 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마가가 기록했다는 사실에 아무런 의의가 없습니다. 마가의 인척관계를 살펴보면 마가는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나와 있습니다(행12:12). 그리고 사도 바울과 함께 복음 사역에 크게 활약한 바나바의 조카로 바나바는 마가의 삼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골4:10).

마가가 주님의 생존시 주님의 제자로 성경에 언급된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두 가지 사실에서 마가는 예수님을 만난 일이 있으며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이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① 하나는 최후의 만찬을 베푼 다락방이 마가의 어머니의 소유였다면 마가는 예수님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② 두 번째는 베드로가 천사의 인도를 받아 옥에서 풀려 나왔을 때 그는 마가라고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갔다고 했으며 베드로가 그 집 대문을 두드릴 때 로데라 하는 계집아이가 베드로의 음성을 알아들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예수님 생존시에 제자들과 함께 이 집에 자주 찾아 오셨다는 사실을 말해주며 마가는 말할 것도 없이 예수님을 만나 뵈었을 것입니다(행12:12-17).

마가가 이 복음을 기록한 동기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그는 주로 로마인을 위해 이 복음을 기록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기록한 연대는 주후 50년 전후로 알려져 있습니다.

2. 복음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이 책의 서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마가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이라고 표현한 말은 하나님의 아들과 복음을 동일시한 한데서 나온 것입니다.

(1)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기원을 하나님과 함께 계신 분, 바로 그 하나님이신 ‘로고스’와 연결시켰습니다. 하나님의 인격의 비밀은 예수의 탄생으로 밝혀졌으며 하나님이신 예수의 탄생으로, 한 하나님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세 위를 가지고 계심이 나타난 것입니다. 영원히 독생하신 하나님으로 계셨던 제 2위의 하나님께서 세상에 사람의 모습으로 태어나심으로 그 분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을 뿐 아니라 그 아들로 죄인들을 속죄 제물로 삼으셨기 때문에 복음이란 곧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없이는 복음이 이땅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2) 복음은 예수에 관한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시어 세상에 태어나 실 때 그의 이름이 하나님에 의하여 이미 예수로 작정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이름의 뜻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을 뜻한다고 했습니다(마1:21).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구원할 자란 이름을 주신 분은 오직 예수, 그 분 한 분뿐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가 곧 복음인 것입니다.

(3) 복음은 그리스도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란 말의 뜻은 “기름 부음을 부은 자”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사명자 곧 왕, 제사장, 선지자들이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구약에 왕이나 제사장이나 선지자 중 그 누구보고도 그리스도라 부르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라 하는 개념은 그들보다 더 우월한 사명자로 여겼습니다. 바로 이스라엘의 구원자로서의 그리스도가 정말로 하나님께 기름부음을 받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없이는 복음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3. 세례 요한과 복음의 시작

마가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을 세례 요한으로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1) 이것은 복음의 기원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복음의 기원은 창세기 3장으로 거슬려 올라갑니다(창3:15).

(2) 세례 요한의 등장은 복음의 시작입니다. 창세기에서 타락한 인간에게 언약하신 복음은 선지자들에 의해 계속적으로 증거 되어 왔지만 그 복음의 주체이신 하나님의 아들의 나타나심에 대해서는 어두운 베일에 가려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메시야를 증거 하는 세례 요한이 요단들에 나타난 것입니다.

(3) 요한의 등장은 이사야로 말씀하신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였습니다. 요한은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는 하나님의 사자로 보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광야의 외치는 자로서 요단들에서 메시야의 출현을 외쳤고 자신이 그를 증거 했습니다.

4. 복음의 시작과 요한의 세례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습니다. 그의 외침을 들은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들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1) 요한의 세례는 죄 사함을 받게 하는 의식으로 베풀었습니다. 죄 사함은 정결을 의미합니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셨던 결례는 정결케 하는 의식으로 이 세례 의식과 같은 뜻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세례 의식은 또한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의 죄를 씻고 죄 사함을 실제로 받을 일에 대한 모형이었습니다.

(2) 흔히 침례라고 번역된 ‘팝티조’는 침례가 아니라 세례입니다. 세례를 ‘팝디조’라고 합니다. 이 말은 성경에서 ‘찍다’는 말과(레4:6, 눅16:24), 씻는다는 말에(출30:20, 레8:6, 히9:10, 막7:4) 사용된 단어입니다.

세례란 본문에 나와 있는 말씀 그대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상징적인 의식일 뿐 중생의 조건이 아닙니다. 성령 세례처럼 그리스도와의 영적 연합, 생명적인 연합을 이루는 일이 아닙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속죄의 죽으심이나 그를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세례를 주었으며 세례를 받는 유대인들도 이 세례를 통해서 영생을 얻었거나 중생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결 론 : 세례 요한은 자기 뒤에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자로서 충실했습니다. 그는 자기 뒤에 오시는 메시야에 비하여 그의 신발 끈을 풀어줄만한 종도 못한 자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는 일과 메시야가 하실 일에 대하여 “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고 증거했습니다.

≈ 2 ≈ 세례 받으신 예수

(본문 : 마가복음 1 : 9 - 11)

서 론 :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실 필요나 이유가 없는 분입니다. 세례란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는 상징적인 표인데 예수님은 자복할 죄도 없으려니와 회개하실 죄도 없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의인이시며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와 거룩하심을 그대로 소유하고 계시는 분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이 일에 대하여 예수님은 요한에게 이르시기를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고 하신 것입니다(마3:15). 예수님은 하나님의 자리에서 종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으며 자신을 죄인의 자리에까지 낮추셨으므로 그가 죄인이 아닌 죄인으로 세례를 받으신 것은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해서였습니다.

1. 예수님은 어떤 세례를 받으셨나?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곳은 요단강입니다. 그런데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란 말씀이 나옵니다. 이 같은 표현을 가지고 침례지상주의자들은 이것은 곧 침례를 의미하는 것으로 몸을 물 속에 완전히 잠겼다가 올라온 모습을 그린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해석하기는 이것은 예수님이 흐르는 요단강 물에 들어가서 세례를 받으시고 그 강물로부터 육지로 올라오는 모습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세례가 몸 전체, 머리까지 물 속에 잠긴 것일까? 아니면 강물에 들어가서 물을 머리로부터 붓는 방법이었을까? 이에 대하여 성경에서는 신구약 성경 전반에 걸쳐 아무런 언급이 없습니다. 이것은 그 어떤 방법으로도 세례에 합당한 방법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례는 구약의 할례와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4장에서 밝혀 주는 바로는 아브라함이 의를 얻은 것은 할례시가 아니라 무할례시였다고 하면서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라”고 했습니다(롬4:11). 또한 “네가 율법을 행한즉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한즉 할례가 무할례가 되었느니라”고 말하므로 사람의 의나 구원은 할례나 세례에 이는 것이 아니요 “마음의 할례”에 있고 “성령의 세례”에 있다는 것을 명백하게 밝혀 주고 있습니다.

2. 하늘이 갈라진 일

예수님이 물에서 올라오실 새 “하늘이 갈라짐”을 보셨다고 했습니다. 갈라진다는 말은 옷처럼 찢어지는 일을 말합니다. 육이 벗어져야 영의 존재가 나타나는 것처럼 눈에 보이는 하늘이 찢어져야 신령한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1) 신령한 세계를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실제로 하늘이 열립니다. 하늘이 열려져서 신령한 세계를 볼 수 있게 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께서 신령한 세계를 볼 수 있도록 나의 영의 눈을 열어주셔야 그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 눈이 열리시어 하늘의 갈라짐을 보실 수 있었습니다. 스데반도 그러했습니다.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고 했습니다(행7:55-56). 사도 요한도 그런 체험을 했습니다(계4:1-2). 바울도 하나님 우편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보았다고 했습니다(행26:16).

(2) 믿음으로 바라보는 신령한 세계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소경된 바리새인들이라고 질책하셨습니다(마23:26). 이것은 그들에게 믿음이 없음을 가리킨 것입니다. 내 안에 계시는 성령은 나의 믿음을 통하여 신령한 세계를 말씀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하시며 그곳에 소망을 갖게 하십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히11:1). 하늘이 실질적으로 갈라져 예수님처럼, 스데반처럼 신령한 세계를 바라보는 일은 극히 드문 일이며 특별한 사람에게 허락하셨던 일입니다. 그 대신 이런 것보다 더 확실한 방법을 주셨는데 그것이 믿음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신령한 세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그 말씀이 계시해 주시는 바를 믿음으로 바라봄으로 그것을 우리의 소망으로 삼고 즐거워하며 기뻐하는 것입니다(롬4:18-22).

3. 삼위 하나님의 계시

예수님은 갈라진 하늘에서 성령이 비둘기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늘로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구원의 역사에 있어서 삼위 되시는 하나님, 성부, 성자, 성령이 동시적으로 이루시는 사실을 보여주신 일입니다. 만물을 창조하실 때 ‘우리’로 나타내신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시는 사역에도 동일하게 나타내신 것입니다(창1:26-27).

(1) 아들은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이 아들은 하늘에서 하나님과 함께 보좌에 앉아 계셨던 독생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분이 세례를 받게 된 것은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을 스스로 종의 모습으로 낮추시어 사람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사람으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지만 그의 근본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본체이십니다.

(2) 성령은 비둘기의 형상으로 아들에게 내려오셨습니다. 성령은 아버지의 영 또는 그리스도의 영으로 불리시며 아버지와 아들의 한 본체를 이루고 계십니다. 성령은 사람으로 오셔서 연약에 싸이신 예수님께 하나님의 능력을 한량없이 공급해 주시고 인류의 구속 사역을 이루심에 무한하신 권능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누구의 힘이나 능력을 빌려 그의 사명을 이루셨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성령께서는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의 한 본체를 이루고 계시는 분이시므로 예수님의 사역에 함께 하시는 일은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에게 성령이 오셔서 우리에게 도움을 주시고 능력을 베푸시는 경우와는 전혀 다른 역사이십니다. 예수님이 육신으로 계실 동안 그가 하나님으로서의 권능을 행하실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본체이시기 때문이며 예수님과 하나님의 한 본체를 이루고 계시는 성령께서 예수님 안에 계셨기 때문입니다.

(3) 아버지는 하늘에서 아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인류의 구원을 계획하신 삼위의 하나님은 이처럼 아들은 구속 사역을 이루기 위해 세상에 육신을 입으신 아들로 오셨고 성령은 그 아들 안에서 삼위 하나님의 사역을 도우시는 분으로 그 아들 안에 오셨으며 아버지는 이 아들이 하시는 인류 구원의 사역을 친히 바라보시며 성취시키고 계심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성부 하나님의 아들로 오셨기 때문에 그는 자신을 스스로 비어 낮아지신 것입니다. 그에게는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성품과 연약을 지니고 계시게 되었습니다. 이 같은 예수님께 하늘에서 들려오신 아버지의 사랑에 넘치는 음성이야말로 그에게 말할 수 없는 위로와 힘을 주셨을 것입니다.

결 론 : 우리는 다음 말씀을 늘 마음에 간직해야 하겠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5-16).

≈ 3 ≈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

(본문 : 마가복음 1 : 12 - 13)

서 론 : 예수님은 공생애로 들어가시기 전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광야로 가셔서 40일간의 금식기도 후, 사단의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금식기도를 하셨습니까? 예수님의 공생애는 짧았지만 그 길은 험준한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이루셔야 할 모든 사역을 하나님이신 신성으로가 아니라 사람이신 인성으로 극복하셔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역을 완성하시려면 인성이 가지고 계시는 자신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는 위로부터 능력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는 비록 하나님의 아들이 시라도 인류의 구원을 위한 공생애에 들어 가시기전 이 엄청난 과업을 이루시기 위해 스스로 금식 기도에 들어가신 것입니다.

1. 예수의 시험

예수님이 광야에 가셔서 받으신 시험은 성령께서 하신 일입니다.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고 했습니다.

(1) 예수님의 이 시험은 마지막 아담으로서의 시험이었습니다.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다”고 말씀했습니다(고전15:45). 예수님을 아담의 표상으로 나타낼 때는 마지막 아담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의 첫 조상 아담은 에덴에서 사단의 시험에 넘어졌습니다. 그의 넘어짐은 그의 자손들에게 사망을 가져다주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첫 아담의 실패를 온전히 회복하시기 위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먼저 아담

이 실패한 사단의 시험에 반드시 승리하셔야 했던 것입니다.

(2) 예수님이 시험받으신 일은 우리를 대신한 것이었습니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히2:14-15). 우리는 마귀의 시험에 번번이 실패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로 연합되면 우리는 마귀의 시험을 이긴 자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기신 승리가 아무 공로 없이 우리에게 넘어오기 때문입니다.

(3) 예수님의 시험은 중보의 사역을 위해 준비하셔야 할 시련이셨습니다. 사람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인생들이 겪는 시련과 고난을 겪으셔야 했습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댁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히5:7-10).

(4) 예수님의 시험은 인성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고 했습니다(히4:15). 그는 인간으로서의 연약함을 친히 그의 몸으로 체휼하셨습니다.

첫 사람 아담은 가장 좋은 환경 속에서 사단의 시험에 넘어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40일간의 금식 기도 후, 가장 어려운 상황에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무엇이나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는 일은 어려운 일입니다. 아담이 무너뜨린 인간의 생명을 예수님이 다시 살리시기 위해 갚으신 대가는 모든 면에서 엄청난 지불이 따라야 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로 얻은 우리의 구원을 견고히 잡아야지 한번 타락한 후에 다시 회복하는 일이란 심히 어렵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고 경종하고 있습니다(히10:26-27).

2. 예수님이 시험을 이기신 이유

예수님이 시험을 이기신 일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줍니다.

(1) 예수님은 기도하신 후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기도는 시험을 이기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마에서 내리는 땀이 피 방울같이 흐르는 기도를 드릴 때에도 그의 제자들은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시기 전에 하신 40일간의 금식 기도는 능히 사단의 시험을 이길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가질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사단의 정체를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사단이 예수님 앞에 어떤 모습으로 나타났을 것입니까? 우리를 시험하는 자는 우리들 앞에 나타날 때는 언제나 광명한 천사의 모습을 가지고 나타나는 것입니다(마7:15, 고후11:14). 그러나 예수님은 사단의 정체를 알고 계셨습니다. 우리가 시험을 당할 때 그 시험이 사단으로 왔다는 것을 일찍 간파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래야 마귀를 대적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욕이나 탐심으로 시험을 당하고 있다면 그것은 사단으로부터 온 시험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모순된 것으로 유혹해 온다면 그것 역시 사단으로부터 오는 시험입니다.

(3) 예수님은 마귀의 시험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적하셨습니다. 마귀는 영적 능력을 가진 영적 존재이기 때문에 혈육의 방법으로는 이길 수 없습니다. 그를 대적하는 무기는 오직 영적 무기가 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무기를 “성령의 검”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엡6:17).

(4) 예수님이 마귀의 시험에 넘어갈 수 없는 결정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 속에는 죄가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는 이런 마음의 욕심의 끌림이 없으셨습니다.

3. 우리에게 오는 두 가지 시험의 형태

우리의 생애에는 많은 시험이 따릅니다. 이것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길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의 시험에는 정욕에서 오는 시험이 있고 하나님이 시련으로 오는 시험이 있습니다.

(1) 자기 정욕에서 오는 시험은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이 아닙니다.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에서 오는 시험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험을 ‘패이라죠’라고 합니다. 이 말의 뜻은 수색하다, 시도하다의 뜻으로 우리 안에 연약한 것을 수색해 내기 위하여 가장 약한 곳을 공격하는 시험으로 이 시험이야말로 시험을 당하는 자와 마귀와의 공동 작품입니다.

(2) 우리가 기뻐해야 할 시험이 있다고 했습니다.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말씀했습니다(약1:2). 이 시험을 ‘도키마죠’라고 합니다. 이 말의 뜻은 시련으로 어떤 시험에 합격시킨다는 뜻입니다. 사단은 우리를 정죄 받게 하려고 시험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정하신 어떤 축복의 기준에 합격시키시기 위해 시험을 주십니다(시66:6-10). 그 이유는 그 시험을 통해서 우리에게 더 좋은 것으로 주시려는 뜻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결 론 : 우리는 사단의 시험에 들지 않도록 항상 깨어 있어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앞에 하나님이 주시는 시련의 시험이 올 때는 온전히 기뻐하여 인내로 잘 감당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는 “생명의 면류관”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약1:12).

≈ 4 ≈ 예수님의 첫 메시지

(본문 : 마가복음 1 : 14 - 15)

서 론 : 예수님의 복음 사역은 세례 요한이 잡히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주의 길을 예비하는 선지자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회개의 외침과 물세례로 그 길을 예비하고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메시야심을 증거했습니다. 그는 자기의 제자들을 예수님의 제자로 보냄으로 주의 길을 예비하는 그의 사역을 마치게 되었을 때 헤롯왕의 불의한 생활을 책망하다가 옥게 갇히게 되었습니다. 이제 세례 요한이 그 길을 열었으니 주인공의 무대가 열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에 들어가시면서 복음을 전파하셨다고 했습니다.

1. 갈릴리에서 복음을 전하신 예수

복음이란 말은 ‘유앙겔리온’으로 좋은 소식, 혹은 복된 소식이란 뜻입니다. 이 좋은 소식이란 바로 예수의 소식을 말합니다. 이 세상에 예수의 소식보다 더 아름답고 좋은 소식은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 복음의 핵심이 명백히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신 말씀이 그것입니다. 예수 ! 그는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영생을 얻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후사가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받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당신 자신을 세상에 소개해 주시려고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신 모든 일이 바로 복음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사역을 세례 요한이 잡힌 후, 갈릴리에서 시작하셨습니다. 요한이 잡힌 일은 애석한 일입니다. 그는 젊었고 하나님의 신실한 종이었으며 오실 메시야의 증거자였습니다. 그처럼 담대한 일꾼이 주의 복음을 위해 주님과 더불어 더욱 긴요하게 쓰임 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하나님이 이루십니다. 사람이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세례 요한에게 맡겨진 일은 주의 길을 예비하는 것뿐입니다. 그 일을 완수한 요한은 이제 가장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부르심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순교자로 그를 데려 가셨습니다. 하나님도 그이 계획을 완전히 이루셨고 요한도 그의 인생을 승리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자기의 사명이 어떤 것이든 하나님 앞에 죽도록 충성하면 됩니다. 우리의 생애가 이 땅에서 지극히 짧다해도 가장 보람있게 살 수 있는 길이 바로 세례 요한이 보여준 길입니다.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복음을 전하신 것은 그의 사역이 아직 예루살렘에서 하실 시기가 아니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갈릴리에는 그가 선택하여 세워야 할 제자들이 살고 있었고 먼저 이 복음을 들어야할 그의 양떼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예언의 성취이기도 한 것입니다(마4:15-16).

2. 주님의 복음 선포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복음을 전파하면서 하신 말씀이 이러했습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1) 때가 찼다고 했습니다. 여기 나오는 때란 ‘호카이로스’로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그 때를 말합니다. 찼다는 말은 가득하게 한다고 하는 뜻의 ‘프레로오’란 말에서 나온 것으로 하나님에 의해 그 나라가 도래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 의 언약하신 바를 이루시고자 작정하신 그 시기가 정확히 이르렀다고 하는 뜻입니다.

① 이것은 창3:15에서 언약하신 ‘여인의 후손’의 때가 찼다는 뜻입니다.

②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네 자손”이라고 하신 그 자손의 때를 말합니다(갈3:16-17, 창13:15).

③ 이것은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아 임마누엘로 오실 그 메시야의 때가 찼다고 하신 뜻입니다(사7:14).

④ 또한 미가가 예언한 ‘이스라엘의 왕’의 때가 찼다는 뜻입니다(미5:2).

(2) 다음에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우리들 앞에 도래한 상태의 표현입니다. 여기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이루이지는 심령천국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의 주인이십니다. 그러므로 그 분이 계시는 곳이면 바로 그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입니다. 주님은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11:20).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눅17:21). 우리 가운데는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이 임재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고전3:15).

(3) 예수님은 그러니 회개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 눈앞에 와 있어도 그곳에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회개하는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회개란 말은 ‘마음을 바꾼다’ ‘마음을 고친다’는 뜻입니다.

① 아직까지의 불신의 죄를 씻으므로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일이 회개입니다. 우리가 회개할 죄에 대하여 주님은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죄에 대한 회개로는 하나님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② 회개란 아직까지 자기가 걸어온 인생 길에서 그 걸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일입니다. 탕자가 돼지 치는 더러운 곳에서 그의 발걸음을 아버지께로 돌이킨 것처럼,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영접했다면 그의 생애가 이제 새로운 인생 길을 걸어가야 것입니다.

③ 회개란 그리스도 안에서 열매를 맺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롬7:4).

④ 그리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법칙은 오직 믿음으로 출발합니다. 아벨은 이 복음을 믿고 가인보다 나은 제사를 드림으로 의롭다고 하는 증거를 받았습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나은 제사를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다”고 했습니다(히11:4). 아브라함도 그 씨를 통해 약속하시는 하나님의 복음을 믿음으로 의를 얻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롬4:3).

결 론 : 예수님이 그의 전도 초기에 갈릴리에서 외치신 이 복음은 지금도 그대로 유효합니다. 그리고 지금은 예수님의 초림의 때가 아니라 재림의 때가 찼습니다. 마음에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실제로 이 땅에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이제 모든 사람들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이 복음을 외면하면 이런 주님의 경종을 들어야 합니다.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 5 ≈ 첫 제자들의 부르심

(본문 : 마가복음 1 : 16 - 20)

서 론 : 예수님은 복음을 전파하시면서 그의 복음사역을 위하여 제자들을 부르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이 일은 예수님께 매우 중요한 일이었으며 장차 복음을 온 누리에 전하게 하시는 일에 깊이 관련되는 일이었으므로 예수님은 그들을 선택하심에 신중을 기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처음에 부르신 제자는 시몬의 아들 안드레였습니다 다음에 부르심을 받은 제자가 야고보와 요한입니다. 이들은 모두 어부들이었으며 둘이 서로가 형제들이었습니다.

1. 예수님의 부르심에서 알 수 있는 것

예수님이 이들 네 명의 제자들을 부르신 일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먼저 주님을 따라 나선 것이 아니라 먼저 주님의 부르심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선택을 말해줍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했노라”고 하셨습니다(요15:16). 주님이 디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사울을 부르셔서 사도로 삼으신 일도 우연한 일인 것이 아니라 이 사실을 모르고 겁을 먹고 있는 아나니아에게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행9:15). 바울 자신도 모든 서신서에서 한결같이 이 사실을 강조하면서 자신의 사도직이 어디서 온 것임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얻었으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롬1:1). 이런 하나님의 택정은 바울이나 사도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님을 성경은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고 말씀했습니다(엡1:3-4).

예수님은 이미 베드로나 안드레나 야고보나 요한의 이름이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으며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복음 사역에 일꾼들이 될 일에 대하여 낱낱이 알고 계셨습니다. 그들을 창세 전에 생명책에 그 이름을 기록한 분이 예수님이시며 그들로 사도의 직분을 맡을 것임을 작정하신 분도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과 그의 일꾼으로 세우시는 일은 매우 다양합니다. 이들 네 명의 제자들은 갈릴리 바다에서 부르셨고 삭개오는 뽕나무 위에서 부르셨으며 사미리아이 여인은 야곱의 우물가에서 부르셨습니다. 사명자로 부르실 때에도 모세는 미디만 광야 가시나무 불꽃 중에서 부르심을 입었고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노중에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2. 갈릴리 어부들로 제자로 삼으신 이유

예수님의 제자들의 인간적인 면모를 살펴보면 너무나도 보잘 것 는 존재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배운 것이 없는 무식한 사람들이요 직업도 천한 어부들이었습니다. 성격도 충동적이면서도 겁쟁이들이었습니다. 그들 중에 어느 누구 하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존경이나 칭찬 받을만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그들에게는 다른 훌륭한 사람이 가지고 있지 못한 몇 가지 중요한 자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 그들에게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가장 중요한 자격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를 나사렛에 살고 있는 목수 요셉의 아들로 알고 있었지만 이들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었으며 오실 그 메시야로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믿음의 사람을 통하여 위대한 역사를 이루십니다. 복음이야말로 믿음으로 생명을 얻는 일임으로 믿음의 사람이 아니면 예수님의 제자가 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2) 그들은 한결같이 주님의 소명에 즉각 응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주님을 따르는 일에 여러 가지 핑계를 댔습니다. 큰 잔치에 초청한 어떤 사람의 비유는 바로 복음의 사역자를 부르시는 주님의 초청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초청에 초대를 받은 사람은 모두 핑계를 대고 초청을 물리쳤습니다. 하나는 자기는 밭을 샀으니 불가불 나가 보아야 하겠다고 불응했습니다. 하나는 자기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니 이것을 시험하러 나가야 하겠으니 용서해 달라며 피했습니다. 또 하나는 자기는 장가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고 핑계하며 초청을 거절합니다(눅14:16-21). 이들은 바로 그 당시 배운 것이 많고 세상 사람들로부터 랍비라고 존경받으며 살아가고 있었던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제사장들을 지목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소명에 불응했을 뿐 아니라 거역하여 그 아들을 죽이기까지 한 것입니다.

이 같은 일에 대하여 바울은 이처럼 말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여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할 하심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고전1:26-29).

3. 나를 따라 오너라

예수님은 이들 제자들을 향하여 “나를 따라 오너라”고 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소명은 이처럼 명령으로 나타납니다. 이 명령을 받은 사람은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나로 먼저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하소서”하는 식의 주춤거림은 이 명령에 대한 불순종이 됩니다.

갈릴리 해변에서 이처럼 부르심을 받은 네 명의 제자들은 이 부르심이 있기 이전에 이들은 요한을 통하여 예수가 메시야인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예수님을 친히 만나 뵌 일이 있었습니다.

(1) 처음에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시몬입니다. 그는 함께 부르심을 받은 안드레와 한 형제이며 요한의 아들로 어부였습니다. 그는 처음 동생 안드레에 의해 주님께로 인도 받았습니다. 그는 정열적이고 매우 성급한 사람이었고 겁쟁이였으나 오순절 이후 많은 변화를 받아 사도 중에 언제나 수석자리에 있었습니다.

(2) 다음에 베드로와 함께 부르심을 받은 안드레입니다. 예수님은 이들 형제에게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을 듣고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주님을 좇은 제자입니다. 그는 형 베드로와 함께 세례 요한의 제자로 있었으며 요한으로부터 예수가 메시야이심을 듣고 있었습니다(요1:36-39).

(3) 다음에 야고보입니다. 이 야고보 역시 함께 부르심을 받은 요한과 한 형제지간입니다. 그는 믿음이 돈독하고 주님의 기도의 협력자로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주님의 선택을 받은 제자입니다.

(4) 그리고 야고보의 형제인 요한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배에서 아버지와 삯군들과 함께 그물을 깁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곧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들은 이 부르심에 즉시 응하여 아비 세베대를 삯군들과 함께 배에 버려 두고 예수를 따랐습니다. 이 요한은 주님의 남다른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는 최후의 만찬석에서도 예수님의 품안에 안겨 있었으며 예수님으로부터 십자가 위에서 어머니 마리아를 부탁 받은 제자였습니다.

결 론 : 예수님의 부르심은 은혜요 명령입니다. 이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핑계가 있을 수 없습니다. 주님은 쟁기를 메고 뒤를 돌아보는 자를 사명자로 사용치 아니하십니다.


≈ 6 ≈ 권세 있는 예수의 가르침

(본문 : 마가복음 1 : 21 - 28)


서 론 : 예수님은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르신 네 명의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에 들어가 안식일에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가셔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전파되는 복음만이 생명력이 있습니다. 사람에게 전파될 때만이 복음에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롬10:14). 예수님은 안식일을 맞을 때면 주로 회당에 들어가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1. 복음전도의 전초기지로서의 회당

회당은 예수님이나 그의 사도들에 의해 복음전도의 전초기지로 활용되어 왔습니다. 회당이란 헬라어로 ‘쉬나고게’로 이 말은 모으다라고 하는 ‘쉬나’에서 나온 말로 소집, 집합이란 말이며 이 말에서 회당이란 의미가 생긴 것입니다.

(1) 이 회당의 발생기원은 외국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 무리들이 한 공동체를 이루어 ‘토라’(모세 오경, 율법)를 연구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 회당의 정확한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는 정확한 학설이 없으나 주전586년 바벨론 포로생활과 함께 생겼을 것이라고 하는 견해가 가장 합당한 주장으로 받아 드려지고 있습니다.

(2) 회당에서의 예배와 성전에서의 예배는 그 형식이 전혀 달랐습니다. 회당에는 제사장이나 율법적인 직분자가 없었으며 그 대신 랍비라고 하는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회당 예배가 주관되었습니다. 그리고 성전 예배는 제물을 드렸지만 회당 예배는 제물의 봉헌이나 짐승의 제사가 없었습니다. 회당은 유대인들의 정치적인 공동체 구실도 했으며 민사, 형사, 또는 종교적인 문제를 판결하는 일종의 법정 구실도 했습니다(마10:17, 눅12:11).

(3) 회당은 회당장에 의해 모든 일이 주도되었습니다. 회당장은 회당의 주요 업무 집행자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회당의 건물유지, 제반 운영, 예배의 절차와 질서 등을 관리하는 책임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회당에서 두 번째 책임자는 ‘회당의 일군’으로 ‘핫잔’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말이 사환 또는 조수란 말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눅4:20). 랍비는 회당의 직임이 아니라 평신도들 중 토라와 유대교의 율법에 박식한 사람들을 지칭해 왔으며 이들이 성경을 해석하는 일에 한몫을 했습니다.

(4) 회당의 예배는 몇 가지 순서로 짜여져 있습니다. 처음에 쉐마 즉 기도문을 낭송하고 이어 감사문이 낭송됩니다. 그리고 다음에 토라의 봉독이 있는데 이 성경 봉독 후 곧 이에 대한 해석이 가해졌습니다. 그런데 이 해석이 관습에 따라 랍비들이나 그 회당에 처음 방문한 방문객 중 한 사람이 할 수 있었으며 회당장이 이때 회중들에게 말할 사람이 있는가 묻고 그 사람에게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때, 이 시간을 이용하시어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바울이나 다른 사도들 역시 이같이 주어진 기회를 이용하여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기 때문에 회당이야말로 복음 전파의 좋은 터전이었던 것입니다.


2. 예수의 교훈에 놀란 유대인들

예수님이 가버나움 회당에 들어가셔서 말씀을 가르치실 때에, 그의 말씀을 듣던 회당의 온 유대인들이 놀랐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가끔 그곳에 찾아오는 서기관들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과 교훈을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그들로부터는 이처럼 강렬한 인상과 마음의 큰 감동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1) 서기관들은 주로 장로의 유전을 가르쳤습니다.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다고 자랑한 일은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 아니라 장로들의 유전이었습니다(막7:8-13). 그들의 유전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죄를 가져온 것이라고 주님은 그들을 정죄하셨습니다. 이 같은 유전의 가르침에 감동을 주었을 리 없었습니다.

(2) 서기관들은 외식으로 가르쳐 왔습니다. 외식이란 중심으로 하나님께 보이려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꾸며 보이려는 행위를 말합니다. 외식이란 헬라어는 ‘휘포그리테스’로 위선자, 배우란 뜻으로 사용되는데 이 말은 가장한다, 또는 무대에서 대답한다는 말에서 유래된 것으로 마치 무대에서 배우들이 짜여진 각본에 따라 꾸며 행동하는 것처럼 중심에도 없는 위선적인 행동을 말합니다.

(3) 그들은 교인들에게 성경을 잘못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 도다”고 나무라셨습니다(마23:15). 아무리 열심히 전도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가르치면 지옥 자식을 만드는 것입니다. 사이비 종교가 그러하며 허다한 이단들이 그러합니다.

(4)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권세 있는 자와 같다고 놀란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언제나 권세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많은 무리들이 말씀을 듣기 위해 주님 곁으로 모여들었던 것입니다.

① 예수님은 그 자신이 말씀으로 세상에 오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 말씀에 권위가 있었습니다. 말씀이 되신 그 분이 입을 열어 말씀하시니 그 말씀이 권세가 있는 것입니다.

② 하나님은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고 하셨습니다(히1:2). 그러므로 그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로 그 말씀에는 권위가 따랐습니다.

③ 예수님의 말씀에는 권세 있는 증거가 따랐기 때문에 권위와 권능이 있었습니다. 그 회당에 마침 귀신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를 꾸짖어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명하신즉 귀신이 곧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 광경을 보고 이를 바라본 모든 유대인들은 권세 있는 새 교훈이라고 놀랐던 것입니다.


3. 쫓겨난 귀신

회당 안에 한 귀신들린 자가 있었습니다. 마가는 이 귀신을 가리켜 더러운 귀신이라고 말했습니다. 귀신은 악한 영이며 사람들을 유혹하며 죄의 길로 빠지게 하며 각종 병을 갖다 주는 존재이므로 더러운 귀신인 것입니다. 이 더러운 귀신은 그곳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말씀을 선포하시고 교훈하시는 일에 견뎌낼 수가 없었습니다. 이 귀신은 말씀을 전하시는 분이 누구이신 가에 대하여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귀신은 말씀을 전하시는 분의 신분을 그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들어낸 것입니다.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몸에는 성령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함께 계셨기 때문에 영적인 존재인 귀신은 이런 사실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결 론 : 예수님은 귀신을 꾸짖어 잠잠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귀신의 증거로 자신을 나타내시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아직 자신의 메시야된 신분을 세상에 나타내실 그런 시기에 이르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곳에 있었던 군중들은 예수님의 이 같은 귀신과의 대화에 놀랄 뿐 무슨 영문이지 몰랐습니다. 예수님은 그 귀신에게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명하심으로 주님의 가버나움에서의 첫 전도에 큰 성과를 거두신 것입니다.


≈ 7 ≈ 치료자 예수

(본문 : 마가복음 1 : 29 - 34)

서 론 :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담당하신 일은 다만 우리의 죄뿐만이 아닙니다. 그는 우리의 질병까지 담당하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고 하셨습니다(마8:17). 메시야로서의 주님의 사역에는 우리의 질병까지 친히 짊어지시는 일까지 하셨으므로 그 때에도 예수님은 그를 찾아오는 많은 병자들을 치료해 주셨고 지금도 우리에게 이 치료자의 위치에서 우리의 질병을 치료해 주시는 것입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약5:15).

1. 심방자 예수의 모습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자리에 누어 있었다고 했습니다. 누구인가 이 사실을 예수님께 알렸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가정을 심방가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심방자 예수의 모습을 바라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양과 염소의 분별에서 양들을 향하여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고 말씀하시고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마25:35-40). 예수님은 이 말씀 중에 있는 것처럼 자기 양떼를 친히 찾아가 돌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양을 아셨으며 그들을 살피시고 사랑하시고 자기 목숨까지 주셨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고 하셨습니다(요10:14-16). 하나님은 목자들에게 양 무리를 소중히 여기고 그들을 사랑하고 돌보아 줄 일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네 양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며 네 소떼에 마음을 두라”고 하셨습니다(잠27:23).

베드로는 그의 서신에서 참 목자 상에 대하여 이처럼 말했습니다.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벧전5:2-4).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신 주님은 베드로의 장모의 손을 잡아 일으키심으로 열병을 떠나게 하시고 그 여인으로 주님과 그의 제자들에게 수종들게 하셨습니다.


2. 치료자 예수의 모습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아직 베드로의 집에 머물어 있었습니다. 베드로의 장모의 수종을 통하여 대접을 받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 예수의 소문이 그곳 사면에 퍼졌습니다. 그리고 이 소문을 듣고 모든 병자와 귀신들린 자들이 사람들에 의하여 예수께 데려 왔습니다. 예수님은 이들 각색 병든 많은 사람들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어쫓았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무리들의 병을 고치신 일에서 한가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이나 구원과는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의 질병을 고쳐주셨다는 사실입니다.

(1) 이것은 병든 자를 불쌍히 여기신 주님의 사랑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에게 자비하십니다. 그는 믿음이 없는 자에게도 자비하십니다(마5:43-46).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의 죽은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고 하셨습니다(겔33:11).

(2) 예수님은 그들에게 기적을 보여주심으로 주님이 하시는 일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심을 알려 주시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없는 패역한 유대인들을 향하여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고 하셨습니다(요10:37-38).


3. 귀신을 쫓으신 예수

예수님이 귀신들린 자들의 귀신을 쫓으실 때 그 귀신들이 자기를 알고 있으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셨다고 했습니다. 귀신들이 예수님을 알고 있었다는 일은 놀라운 일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그리스도이심을 아직 나타내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그 사실을 숨기라고 이르시기도 하셨습니다. “이에 제자들을 경계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마16:20). 그 일은 오히려 메시야된 그의 사역을 방해할 요소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1) 그런데 귀신들은 예수가 이스라엘이 기다린 메시야이신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시험하는 자로 나타난 마귀가 예수님의 공생애 전에 있었던 금식기도 후에 나타났을 때에도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가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었을 때 천사의 전갈을 마귀도 들었을 것입니다. 또한 귀신들은 영물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성령의 권능으로 행하시는 영적인 역사를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2) 귀신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할 영광의 메시야인 줄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단은 예수를 죽이려는 음모를 꾸미도록 바리새인들을 충동했으며 그를 십자가에 죽이는 일에 성공한 것입니다.

(3) 귀신들은 자기들의 종국적인 운명을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라고 하는 말은 자신들이 종국에 가서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4) 그러면서도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공경하거나 따르지 못했습니다. 이미 이들은 하나님의 정죄를 받은 존재들입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일은 그들에게는 적용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이처럼 자신들이 멸망 받을 일까지 알고, 예수가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인 줄을 알고 그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 사실을 알지만 그들은 회개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두려워하는 것과 주님의 사역을 방해하는 일입니다.

(5) 그런데 놀라운 일은 하나님의 복음의 비밀이 이들에게는 숨겨져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사단이나 이 귀신의 무리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 일로 완성된다고 하는 사실에 대해서는 캄캄했던 것입니다. 만약 그같은 비밀을 알고 있었다면 영광의 메시야를 결코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다음에야 이 모든 복음의 비밀을 알게 되었으며 그로부터 이들은 다른 복음을 가지고 미혹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결 론 : 예수님은 이 귀신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셨습니다. 귀신의 증거가 사실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귀신의 증거를 의뢰하는 일은 귀신과 손을 맞잡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귀신들은 주님 앞에서 주님의 엄위와 두려움에서 간교한 술책으로 위기를 모면해 보려고 했지만 예수님은 이미 그들의 간교함을 아시고 허락지 아니하신 것입니다. 귀신이 하는 일은 그의 왕인 사단을 본받아 언제나 거짓과 기만과 간교와 미혹과 함정을 파서 그곳에 빠트리는 일입니다. 우리는 치료자 예수를 바라보고 자기의 질병을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가 고침을 받도록 해야 합니다.

<1장 설교 ... 8.9번은 2장 설교란에 포함되었습니다>



≈ 8 ≈ 주님의 기도와 전도생활

(본문 : 마가복음 1 : 35 - 39)


서 론 : 우리는 예수님의 공생에 있어서 두 가지 빼 놓을 수 없는 특이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전도와 기도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사 40일간의 금식기도를 하신 일을 기점으로 그의 공생애를 마무리 짓는 십자가위의 마지막 시간까지 계속하신 일이 기도였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세상에 계실 동안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교통할 수 있는 방법이란 기도외 다른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아버지께로부터 맡은 사역을 능히 감당하시려면 아버지와의 끊임없는 영적 교통이 있어야 하셨으며 주님은 이것을 기도로 이루셔야 했기 때문에 그의 생애에서 단 한순간이라도 기도를 빼놓으실 수 없었습니다. 주님의 전도생활 역시 그의 공생애의 모든 일이 바로 전도로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1. 예수님의 기도생활 모습

예수님의 낮아지심과 그의 낮아지심의 신분이 어떤 것인가에 대하여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과 같이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빌2:6-7). 이것은 말씀이신 예수님이 어떤 모습의 사람이 되셨는가에 대해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의 전 인격이 곧 말씀이시며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그가 자기를 스스로 낮추어 사람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신 일은 하나님으로서의 모든 권능과 영광을 스스로 포기하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계실 동안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의뢰해야 했으며 그 분을 향하여 기도하셔야 했으며 그 분의 권능을 힘입음으로서만이 말씀의 능력도 이적의 권능도 하나님으로서의 권능의 역사도 이루실 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를 보여주면 족하겠다고 간구하는 빌립을 향하여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고 하심으로 예수님은 분명 아버지와 동일한 하나님이시지만 육신으로 지상에 계실 동안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행하신다고 하셨습니다(요14:9-10). 그러므로 예수님은 육신으로 계실 때에는 하나님으로서의 그의 마땅한 모든 권능이 잠정적으로 유보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스스로 종의 자리에 자신을 낮추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은 주 재림의 날에 대해 하신 말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 날은 아들도 모른다”고 하셨습니다(마24:36). 그러므로 예수님은 항상 아버지와의 영적인 교통이 필요하셨으며 아버지는 이 아들에게 성령을 물 붓듯 부어 주심으로 아버지의 권능으로 그의 구속 사역을 이루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마3:16, 12:18,28, 눅4:1).

(1) 예수님은 새벽에 기도하셨습니다. 새벽기도라고 하는 기도모임은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에서만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혹 이 땅에 처음 복음의 씨를 뿌린 선교사들에 의해 습관적으로 전해져 내려 왔다고 하나 그 기원은 바로 예수님까지 거슬려 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셨다”고 했습니다. 새벽은 아직 만물이 잠에서 깨어나기 전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사면이 조용하므로 기도하기에 최적한 시간이며, 하루 첫 시간을 하나님과 교통하는 시간이 바로 이 시간이 되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은 한적한 곳으로 찾아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한적한 곳은 기도하는 일에 다른 사람이나 어떤 환경적인 요소로부터 방해를 받지 않을 곳을 말합니다. 이곳이 주님이 말씀하신 골방기도의 장소이기도 합니다(마6:6). 예수님도 그의 사역을 위해서는 이처럼 끊임없이 기도하셔야 하셨거늘 하물며 우리들에게 있어서 주님으로부터 맡겨주신 사명을 이루기 위해 기도가 얼마나 절실히 요구되는가에 대하여 인식하고 기도생활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2. 예수님의 전도생활

주님이 기도하고 계시는 곳에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이 뒤를 따라가 만났습니다. 우리는 이들처럼 주님의 뒤를 따라가 만나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주님을 따라 함께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와 함께 고난을 받으면 그와 함께 영광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예수님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고 하셨습니다. 전도인은 어느 한 곳에 계속적으로 머물러 있을 수는 없습니다. 이제 예수님도 다른 마을로 가셔서 그곳에서도 복음을 전하셔야 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한곳에 계속 머물러 교세만 확장하여 나가다가 주의 복음이 사면으로 퍼지게 하시기 위해 핍박을 받게 하심으로 흩어지게 하셨던 일도 있습니다.

(2) 예수님은 거기서도 전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느 곳에 가시든지 전도하시는 일에 전념하셨습니다. 가까운 마을로 가자고 하시고는 거기서도 전도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전도열은 사마리아성 수가란 동네에서 무더운 여름철 행로에 곤하시어 쉬실 때에도 한 사마리아 여인이 우물 가까이 왔을 때 그에게 그 영혼을 사랑하는 뜨거운 심령으로 전도하신 사실로도 알 수 있습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고 했습니다(딤후4:2). 우리의 전도야말로 그리스도 인의 전 생애에 걸친 과업임을 알아야 합니다.

(3) 예수님은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고 하셨습니다. 전도와 복음과 주님의 사역은 일치를 이루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전도생활이 그의 공생애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이심을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 하시고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더라”고 했습니다(눅4:43-44). 예수님이 우리들을 세상에 보내신 이유도 역시 주의 복음을 전하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요17:18, 마28:19).

주님이 그의 복음 사역을 갈릴리로 잡으신 것은 그곳이 복음 전도의 가장 적격 지였기 때문입니다. 이곳은 예루살렘의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의 외식이 아직 물들지 않은 곳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그들의 신앙이 순박했으며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 드렸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의 제자들의 대부분을 이곳 갈릴리 바닷가에서 모으셨습니다. 그의 전도초기에 먼저 하실 일은 제자들을 모아 그들로 주님의 공생애 기간동안 훈련시키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갈릴리는 복음 선포지로 이미 예언된 고장입니다. “스볼론 땅과 요단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가”고 했습니다(마4:15-16).


결 론 :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의 본체시지만 그가 세상에 머물러 계실 동안은 스스로 종의 모습으로 자기를 낮추셨기 때문에 아버지로부터 무엇이건 공급받지 못하면 아무 것도 하실 수 없었습니다. 주님은 이처럼 자기 비하에서 스스로 겪으시는 어려움을 우리들을 위해 참으셨으며 아버지께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말할 수 없는 영광의 자리로 오르셨습니다. 우리도 그 분을 세상에 널리 전파하기 위해 기도와 전도에 전력하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 9 ≈ 내가 원하노니

(본문 : 마가복음 1 : 40 - 45)


서 론 : 문둥병이란 예나 지금이나 부정한 병으로 여겨오는 병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병을 하나의 저주를 상징으로 병으로 주신 일이 여러 번 있었기 때문에 인간의 질병 중, 가장 저주스런 병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복음서에는 문둥병자들이 믿음으로 주님 앞에 나오는 모습을 여러 번 볼 수 있는데 이들은 한결같이 병의 고침을 받고 예수님의 칭찬까지 들었습니다. 죽음의 선고를 받은 영적 문둥병자들인 우리들도 이들처럼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가 간구하면 이 무서운 병에서 놓임을 받을 뿐 아니라 영생의 새로운 생명을 받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도 한 문둥병자가 예수님 앞으로 나왔다고 했습니다.


1. 한 문둥병자의 경우

예수님을 찾아 나온 한 문둥병자의 경우를 보면 이 사람은 주님 앞에 나온 그의 태도가 매우 아름다웠고 그의 믿음이 참으로 훌륭했습니다.

(1) 그는 예수께 왔다고 했습니다. 모든 인생의 문제해결은 예수께 오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구원의 문제도 응답의 문제도 먼저 예수께 나와야 합니다. 이 길은 어려운 난관이 수반된 길일 수도 있습니다. 문둥병자는 성안에 들어올 수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사람들 틈에 낄 수도 없습니다. 그들은 부정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레13:45-46). 그런데도 그는 용기와 자비를 바라는 간절한 심정으로 어려움을 물리치고 예수께 나온 것입니다. 12년 혈루병 환자로써 자리에 누어있었던 한 여인의 경우도 그의

병상에서 일어나 많은 무리들을 헤치고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가 그의 옷자락을 잡는 결사적인 고투로 병에서 고침 받을 수 있었습니다(막5:26-34).

(2) 그는 예수님 앞에 꿇어 엎드렸습니다. 문둥병자의 이 태도는 죄인들이 예수님께 나아가는 자세입니다. 베드로가 이런 태도를 가지고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눅5:8). 세리가 이런 태도로 성전에서 기고하므로 의롭다함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자기에게는 아무런 소망이 없다고 중심으로 나타내 보인 태도가 바로 이런 태도입니다.

(3) 그는 예수님께 간구했습니다. 간구란 말은 ‘부르다’ 혹은 ‘청하다’란 말입니다. 이것은 응답이 있을 때까지 계속 부르는 자세를 말하고 청함에 응할 때까지 계속 청하는 끈질긴 간청을 의미합니다. 그의 간구는 이러했습니다.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그의 간구에는 두 가지 믿음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원하시면 이란 말로 주님께 불쌍히 여김을 받기를 원했습니다. 이 원하시면 이란 말에는 주님께서 불쌍히 여기시오면 또는 주님이 불쌍히 여기시어 고쳐 주심을 바라신다면 이란 그의 애절한 호소가 들어 있습니다. 다음에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란 말로 예수님의 깨끗케 하실 수 있는 권능을 믿었습니다.


2. 예수님의 태도

예수님은 자신의 문둥병에 대하여 불쌍히 여겨주심을 바라며 깨끗케 하실 수 있는 주님의 권능을 믿고 간구하는 이 가련한 버림받은 사람을 모른 채 하지 않으셨습니다.

(1) 예수님께서 그를 민망히 여기셨다고 했습니다. 민망이란 말은 ‘스프랑크니조마이’로 이 말은 마음 또는 간장이란 말에서 유래된 것으로 마음으로 감동하다, 측은히 여긴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간구는 주님으로 하여금 측은하신 마음을 갖도록 해야 합니다. 이같은 기도는 불쌍히 여김을 받고자하는 간절함과 그 마음의 진실과 주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2) 예수님은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셨습니다. 이것은 사랑의 손길입니다. 끔찍스러운 그의 몸에 손을 대신 주님의 손길은 한량없이 크고 자비하신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온 것입니다. 주님의 이 손길은 긍휼과 자비의 손길입니다. 주님의 이 손길은 또한 치료하시는 창조주의 손길입니다. 그의 손으로 만물을 창조하셨거늘 그 손길이 임하시는 곳에 치료의 역사가 나타나실 것임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3) 예수님은 내가 원하노라고 하셨습니다. 원한다는 말은 ‘델로’로 현재 바라고 원하시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① 예수님은 그의 자녀들이 간구하는 기도에 대하여 언제나 “내가 원하노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주님은 나와 연합이 되신 분이시며 내 속에 들어와 내 안에서 그의 삶을 살아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시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불어 주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18:6-8).

② 예수님은 범사에 잘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시는 분입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요삼1:2).

③ 예수님은 구하는 자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너희 중엔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마7:9-11). 그런데 하물며 비참한 자신의 병을 가지고 믿고 주님 앞에 나와서 무릎을 꿇고 간구하는 이 사람의 치료를 왜 원하지 않으시겠습니까?

(4) 예수님은 그에게 깨끗함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명령은 창조주의 명령이십니다. 그가 비록 자신을 낮추시어 사람으로 세상에 오셨지만 그의 본체는 언제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그가 명하시면 명하는 말씀대로 성취됩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서 이 일을 책임지고 이루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의 결과가 이처럼 나타났습니다. “곧 문둥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이처럼 예수님의 치료하시는 권능의 역사가 즉각 나타난 것입니다.


3. 예수님의 엄한 경계와 문둥병자의 전파

예수님은 그에게 삼가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다만 그의 몸을 제사장에게 가서 보여 저희에게 증거하라는 말씀을 내리셨습니다. 왜 예수님이 그에게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까? 병자의 치료는 두 가지 면에서 주님에게 큰 곤혹을 갖다 주었습니다. 하나는 많은 이적을 바라본 무리들이 오히려 믿음을 가질 수 없었다는데 있었습니다. 그리고 너무나도 많은 병자들이 몰려와 사람에 밀려 자신을 드러나게 다니실 수조차 없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병자들이 몰려오는 일로 복음을 전파하시는 일에 방해를 받으실 수 없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문둥병자는 자신의 병이 나음을 보고 너무 기쁘고 감격한 나머지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의 불순종은 나쁘지만 자신이 새롭게 변화 받은 몸을 많은 사람들에게 보이고자 하는 자랑과 그의 생애에 억누를 수 없는 기쁨, 예수님의 이름을 널리 전파하지 않을 수 없는 그의 뜨거운 열망은 아무도 그의 전도를 막을 수 없는 것입니다.


결 론 : 우리는 무슨 문제이건 이 문둥병자의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 앞으로 가지고 나가야 합니다. 불쌍히 여김을 받으려는 간절함과 주님의 권능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그 앞에 나가 간구한다면 “내가 원하노니 네 믿음대도 되라”고 하시는 응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2장

10) 고침 받은 중풍병자 (1절 ~ 12절)

11) 죄를 사하시는 권세 (5절~12절)

12) 주님을 따른 레위의 자세 (1절~15절)

13)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16절~17절)

14) 그리스도인과 금식 (18절~20절)

15) 생베 조각과 새 포도주 (21절~22절) 

16) 안식일의 주인이 되시는 예수님 (23절 ~ 28절)


≈ 10 ≈ 고침 받은 중풍병자

(본문 : 마가복음 2 : 1 - 4, 11 - 12)


서 론 : 예수에 대한 소문은 가는 곳마다 이웃과 먼 지역에 이르기까지 파다하게 퍼졌습니다. 예수님이 복음을 전하시면서 가버나움에 이르시게 되어 어느 집에 유하게 되셨는데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용신할 수 없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용신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한 말은 조금도 발 부칠 틈새가 없었다고 하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이 무리들 중에는 병 고침을 받기를 원하여 찾아 나온 중풍병자가 들것에 실린 채 사람들 틈에 밀려댔지만 조금도 전진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지붕 위로 올라가 지붕의 덮개를 뜯어내고는 그 구멍으로 환자를 주님 계신 방으로 달아 내렸습니다. 이 중풍병자는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명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 모든 사람 앞에서 상을 가지고 나가니 이 광경을 바라본 사람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했습니다.

1. 주님을 만난 그들의 노력

이 중풍병자와 그를 주님께 데리고 나온 네 친구들은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그를 찾아온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소문이란 곧 복음을 말합니다. 누구든지 예수의 소문을 퍼지게 하면 훌륭한 전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전도란 이 예수의 소문을 퍼지게 하는 일이며 이 소문을 들은 사람들로 예수님 앞에 나오게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소문을 듣는 사람이 다만 듣는 일에만 그친다면 그것이 그 사람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소문을 들은 사람은 그 주인공을 찾아와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이 중풍병자와 그 친구들은 소문을 듣고 예수를 찾아와 만났으며 그 분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므로 놀라운 축복을 받았습니다.

(1) 이 중풍병자와 그의 네 친구들은 주님을 꼭 만나겠다는 강한 의지를 가지고 주님을 찾아 왔습니다.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7:7). 동방에서 멀리 예루살렘으로 찾아온 동방박사들은 별의 인도하심을 받아 베들레헴에서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나신 아기 예수를 만나 그를 경배했습니다.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잠8:17). 그들이 심히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마침내 주님을 만나 그들의 목적을 달성한 일은 이런 간절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2) 이들은 문제의 해결을 보지 않고는 그냥 돌아 갈 수 없다는 신념을 가지고 어려운 난관을 헤쳐 나갔습니다. 주님을 만나는 길에는 난관이 많이 따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자 청년은 자신이 소유한 그 많은 물질로 인하여 생명의 길을 포기하게 된 것입니다. 문은 두드리는 자에게 열린다고 하셨습니다.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리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마7:7). 이들 앞에는 도저히 주님을 만날 수 없는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지붕 위까지 올라가 지붕을 뜯어 구멍을 냈다는 사실은 그들의 굽힐 줄 모르는 끈질긴 노력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3) 이들은 자신들에게 돌아온 이 좋은 기회를 결코 놓칠 수 없다는 생각에 꽉 차 있었습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고 하셨습니다(사55:6). 한번 잃어버린 기회는 다시 얻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이마 이들이 이곳에서 예수님을 만날 수 없었다면 그 중풍병자는 영영히 병과 그의 죄악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을 만난 모든 사람들은 일생에 주어진 절호의 기회를 잘 포착하여 그것을 놓치지 않고 자기 인생에 적용하였다는 공통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 사마리아 여인의 경우가 그러합니다. 이 여인은 주님을 만나 오랜 대화를 끈기 있게 지속해 나갔으며 마침내 영원히 갈하지 않는 생명의 생수를 마실 수 있었습니다(요4:1-42). ㉯ 나다나엘의 경우가 그러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났을 때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고 고백하므로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요1:46-49). ㉰ 니고데모의 경우 역시 그러했습니다. 밤에 주님을 은밀하게 찾아가긴 했지만 그곳에서 중생의 교리를 듣고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요3:1-15). ㉱ 소경 바디메오가 그러했습니다. 예수님이 무리들과 함께 여리고로 지나가실 때 바디메오는 예수님이 지나신다는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주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므로 눈을 뜨는 놀라운 기적의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 열 두 해 동안 혈루증으로 괴로움을 받던 한 여인이 그러했습니다. 그는 자기 집 앞을 지나가시는 예수의 소문을 듣고 밖으로 쫓아나가 주님의 옷가를 만지므로 고침을 받았습니다(막5:25-34). ㉳ 세리장 삭개오가 그러했습니다. 뽕나무에 올라가 예수님의 지나가심을 바라본 그의 앞에 주님이 서셨습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겠다”고 말씀하셨을 때 삭개오는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므로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고 하시는 축복을 받았습니다(눅19:1-10).

2. 믿음을 보신 예수님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셨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믿음이라고 하는 말에 대한 약간의 이해를 집고 넘어가야 하겠습니다. 신약에 쓰여진 믿음의 경우, 두 낱말로 나타나 있는데 ‘피스튜오’와 ‘피스티스’가 그것입니다. ‘피스튜오’는 맡기다, 위탁하다는 뜻이 포함된 말이고 ‘피스티스’는 신실성에 대한 믿음을 의미합니다. 물론 많은 경우, 영혼의 구원과 상관이 없는 의미에서의 ‘피스티스’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곳에서 예수님이 저희 믿음을 보셨다고 한 말은 주님의 구원 사역에 대한 구속적 의미에서의 의미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행하시고 계시는 사역에 대한 믿음과 질병의 고통을 해결해 주시는 능력에 대한 믿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만 만나면 꼭 해결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께 찾아 나온 사람의 믿음을 보시고 고쳐 주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있건 없건 상대편의 믿음과는 상관없이 그가 가지고 계시는 전능하신 권능으로 고쳐주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상대방의 믿음을 아주 귀히 보시고 이런 사람들에게 칭찬하시는 일을 잊지 않으셨고 그런 사람들의 요구를 한 번도 물리치신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혹은 소문을 듣고 주님의 치료하시는 권능을 믿게 되었으며 혹은 다른 사람에 나타난 증거를 보고 믿음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도 예수를 만나면 반드시 고침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2) 이들은 또한 예수님을 만나면 그 분의 자비와 긍휼히 여기심을 받을 수 있다고 믿은 것입니다. 주님은 자비를 베풀어주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시며 긍휼히 여김을 받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긍휼의 은총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6).

결 론 : 주님은 이들에게 그의 마음이 뜨겁게 움직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상에 누운 채로 주님의 얼굴을 우러러 바라보는 이 병자를 향하여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명하셨습니다. 이제 이 중풍병자는 더 그 자랑에 누어 있을 이유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미 주님의 입에서 일어나라고 하는 명령이 내려졌기 때문입니다. 그는 곧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그의 권능으로 치료받을 수 있을 것으로 이곳까지 찾아온 그는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할만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 모든 사람들 앞에서 걸어서 나갔습니다. 우리도 이 중풍병자와 같이 믿음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가면 극 체험한 이런 기적의 치료하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 11 ≈ 죄를 사하시는 권세

(본문 : 마가복음 2 : 5 - 12)

서 론 : 예수님은 네 친구에 의해 지붕 위에서 내려진 중풍병자를 보시고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으니라”고 하는 놀라운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이것은 죄인에 대한 사죄의 선언입니다. 이 선언은 하나님밖에 할 수 있는 존재가 이 땅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그곳에 있었던 서기관들에게 큰 물의를 일으켰습니다. 어떤 서기관들은 마음에 이르기를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당신에게 사람의 죄를 사하실 수 있는 권세가 있음을 친히 권능으로 보여 주심으로 그곳에 있었던 많은 무리들로 다 놀라게 하셨습니다.

1. 죄를 사하신 예수

예수님은 스스로 말씀하시기를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친히 중풍병자를 향하여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1) 예수님이 중풍병자의 죄를 사하신 일은 그가 하나님이심을 나타내 보이신 일입니다. 인간의 죄는 하나님이 아니시면 사할 권세 있는 존재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으로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성부, 성자, 성령은 각기 별개의 인격을 소유하고 계시지만 그 본체로는 유일하신 한 하나님을 이루고 계십니다. 성부, 성자, 성령은 각기 하나님으로 자신을 나타내시기도 하며 실상인즉 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삼위 모두가 제각기 하나님의 모든 속성을 소유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아들로 세상에 내려오셨지만 그의 본질은 언제나 하나님이심으로 그는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권능을 행하실 수 있습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신 선언은 죄를 사하시는 하나님으로서의 선언이시며 이런 선언을 예수님이 하신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저희의 믿음을 보셨다고 했습니다. 믿음은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는 원인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주님이 보셨다고 하는 저희 믿음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죄 사함을 얻을 수 있는 믿음이란 자신의 죄를 통회하는 회개를 의미한다고 보겠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요일1:9).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하나님께 자신의 죄에 대한 자백이 없이는 죄 사함을 받을 길이 없습니다. 이 병자가 주님을 바라보았을 때 “나는 죄인이로소이다”고 가슴을 치며 통회한 세리와 같은 심정으로 자기 자신의 죄에 대하여 회개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 병자는 자신의 병의 원인을 알고 있었으며 비록 입으로 자백할만한 처지에 놓여 있지는 않았지만 그의 마음으로 주님을 향하여 호소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이런 그의 마음을 헤아려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그의 죄가 사함 받은 사실을 알려주셔야 했습니다.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2. 죄를 사하실 권세가 있음을 증거하신 예수님

중풍병자에게 선언하신 주님의 사죄의 선언은 순간에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주었습니다.

(1) 서기관들은 참람한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고 속으로 의논했다고 했습니다. 속으로 의논했다는 말은 그들이 말로는 표현치는 않았지만 그들의 마음속으로 예수님의 이 말씀에 그가 참으로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참람하다고 정죄한 것을 의미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이 잘못되었다고 책망하시지 않았습니다.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구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고 하는 그들의 판단은 옳았습니다. 사실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인간의 죄를 사할 수 있는 권세 있는 분이 이 세상에는 없는 것입니다. 다만 그들의 잘못된 점은 그들이 그처럼 말씀하신 그 분이 바로 죄를 사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란 사실을 몰랐다는 점입니다.

(2) 예수님은 그들에게 자신이 죄 사함의 권세가 있음을 행동으로 보이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의논하느냐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제의는 그들에게 위험부담을 안겨준 하나의 모험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제 죄 사함을 받았다”는 말씀은 아무 표적이 없이도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죄를 사하시는 권세자가 아니더라도 그 누구의 입에서도 나올 수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고 하는 말은 말로 끝날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그 말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당장 그 자라에서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모욕을 당하거나 돌로 침을 당할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고 말씀하시고는 중풍병자를 향하여 명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제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상에 누어있는 이 중풍병자에게로 쏠렸습니다.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그가 예수의 명하신 말씀대로 상에서 일어나 집으로 걸어갈 것인가? 흥미와 흥분이 교차되는 숨막히는 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해답을 오래 기다릴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 다음 말씀에 분명히 해답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저희가 다 놀랐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3. 예수님의 사죄의 권세는 어디서 온 것인가?

예수님께 사죄의 권세가 있다는 사실은 예수님이 나타내신 이 같은 권세로 말미암은 것은 아닙니다. 주님의 이런 권세는 하나님으로서의 하나의 표징으로 주신 것일 뿐 예수님이 이 표적으로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그들에게 보이신 것은 아닙니다.

(1) 예수님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분이며 바로 그가 하나님이시라고 하셨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요1:1-3).

(2) 모든 죄의 사유함이 오직 예수의 이름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라고 했습니다(요일2:12).

(3) 그리스도는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히9:12).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신 이는 오직 예수 한 분뿐이십니다. 그 분은 우리의 죄를 사유하시기 위해 자신의 몸으로 우리의 속죄 제물이 되셨음으로 오직 그 분만이 우리의 죄를 사하실 수 있습니다.

결 론 : 우리는 우리 주님에게 우리의 죄를 사하시는 권세가 있다는 사실에 참으로 큰 위로와 마음에 평안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분은 바로 나를 위해 세상에 오신 분이시며 나로 인하여 십자가에서 자신을 희생하신 분으로 나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 12 ≈ 주님을 따른 레위의 자세

(본문 : 마가복음 2 : 13 - 15)

서 론 : 예수님은 자기를 따라야할 제자들에게 대한 태도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고 하셨습니다(눅9:62).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눅14:26-27). 예수님은 길을 가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레위를 부르셨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 레위는 “일어나 좇으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즉각 응했습니다. 레위는 예수님을 영접하므로 마음에 큰 기쁨과 소망을 얻고 자기 집으로 그 일행을 모셔 대접하게 된 것입니다.

1. 레위를 만나신 예수님

예수님은 숨겨져 있는 그의 일꾼들을 찾으셔야 했습니다. 12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에게 복음 사역자로서의 훈련을 시켜야 했습니다. 레위라고 불려지고 있는 마태는 이미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택정함을 받은 사람이며 주님의 12제자로 이미 예정을 입은 그릇입니다. 예수님께서 레위가 근무하고 있는 그 길목을 걸어가진 일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닌 것입니다. 복음을 위해 주님께 쓰임 받을 일꾼들은 사방에 흩어져 있습니다. 주님은 이들을 불러모으시는 일에 부지런히 활동하셨습니다.

(1) 주님은 지금도 그의 일꾼들을 부르십니다. 이 세상에는 추수할 곡식이 필요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이처럼 기도하라고 일러 주셨습니다.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하라”고 하신 것입니다(눅10:2). 우리는 이 일꾼들을 보내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2) 예수님의 일꾼은 어디든 있습니다. 주님이 그의 일꾼들을 부르신 곳은 거룩한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장의 무리들 중에서가 아닙니다. 성경에 능통하고 거룩한 교훈으로 백성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 중에서 찾으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레위를 죄인의 소굴인 세관에서 찾으셨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와 요한과 야고보를 아무의 눈길도 관심도 끌지 않는 한적한 갈릴리 바닷가에서 그물을 깁고 있는 어부들 중에서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어디든 복음을 전하여 주님이 필요로 하는 하나님 나라의 일꾼을 찾아야 합니다.

2. 주님을 좇은 레위 자세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레위는 어떤 자세로 그의 부르심을 좇은 것입니까? 우리는 그의 태도를 두 곳에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저에게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는 “그 후에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나를 좇으라 하시니 저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좇으니라”고 했습니다(눅5:2728).

(1) 레위는 이미 주님을 따를 모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가 곧 주님을 따른 사실이 이것을 말해 줍니다. 레위는 메시야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살아온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중에는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는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레위는 이미 그리스도에 대한 소문을 들었으며 그의 말씀의 가르침이나 그가 행하시는 모든 이적과 표적에 대해 예수님의 메시야 되심을 확신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예수님께 발견되어 그의 부르심을 입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입니다.

(2) 레위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에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메시야의 직접적인 부르심은 놀라운 영광입니다. 레위는 이 영광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을 발견하고 그의 부르심을 받은 레위에게는 이제 더 이 세상에서 바라볼 소망이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소중하신 예수님은 놓칠 수는 없었습니다.

① 레위는 그와 그의 온 가정의 유일한 직장도 그리스도를 좇는 일보다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했습니다. 그러므로 레위는 주님의 한 말씀에 “모든 것을 버리고 좇으니라”고 하신 말씀대로 주님을 좇은 것입니다.

② 레위는 메시야를 따르는 자의 축복을 잘 알았습니다. 그리스도가 누구인가에 대해 깨달을 수 있다면 그 사람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존재는 매우 값진 보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같은 레위의 자세는 마치 모세의 경우와도 같은 것입니다(히11:24-26).

③ 레위는 기회를 잘 포착했습니다. 레위가 만약 이때 다른 핑계를 대고 주님을 따르는 일을 늦췄더라면 그에게는 주님의 사도가 되는 말할 수 없는 영광이 돌아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 받을만한 때를 잘 알아서 결코 그 기회를 놓쳐서는 안됩니다.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 말씀했습니다(고후6:2).

④ 레위는 일어나 예수를 좇았습니다. 여기서 일어났다고 한 말은 ‘아니스테미’로 전치사로 쓰이는 말인데 ‘위를 향하여’ 또는 ‘위로’라고 하는 뜻입니다. 이것은 레위가 아직까지는 땅엣 것에 얽매인 생활을 해 왔지만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후에는 위를 향하여 새롭게 그의 인생을 출발하는 자세를 의미해 주는 말입니다. 그리고 좇으라고 하신 말씀은 ‘아콜루데오’로 ‘너는 나의 확고하고 친밀한 제자가 되라’는 뜻이 담겨진 말입니다. 이 단어는 주님의 제자가 처음 부르심을 받을 때 처음에 쓰는 단어로 사용되었습니다. 레위가 이 말씀을 듣고 주님을 좇은 일은 목자의 부르심에 믿음을 가지고 따른 그의 신앙적인 자세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4) 레위는 주님을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레위의 잔치는 그의 말할 수 없는 기쁨의 나타냄이 됩니다. 레위는 이 잔치자리에 자기 가족은 말할 것도 없고 많은 친구들도 데려 왔습니다. “많은 레위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세리들을 죄인으로 취급했습니다. 세리는 그 당시 두 종류로 구분되었는데 하나는 헤롯 안디바를 위해 세금을 거두는 세리들로 갈릴리와 베뢰아 지방에서 일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는 로마 정부에 바치기 위해 징수하는 세리들인데 세금을 거두는 세리들은 이방인과 접촉하고 안식일에도 세금을 징수하며 공정하지 못한 액수를 정하여 부정 축재하고 있었으므로 유대인들은 그들을 죄인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리고 레위의 친구들 중에 죄인들이 많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죄인이라고 한 말은 ‘하마르톨로스’란 말로 이 단어는 ‘하마르타노’ 곧 죄란 말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성경에서 죄란 말은 원래가 과녁을 맞추지 못했다는 뜻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과녁이란 하나님의 창조목적에서 어긋나갔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원래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기 위해 창조되었음에도 아담의 죄로 인하여 이 목적의 과녁을 맞추지 못했다는 데서 유래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므로 빗나간 과녁을 바로 맞추어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결 론 : 레위는 자기로 말미암아 많은 죄인들을 주님께로 인도했습니다. 우리도 레위와 같은 자세로 주님의 소명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 13 ≈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

(본문 : 마가복음 2 : 16 - 17)

서 론 :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하신 말씀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큰 감격을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우리는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의인과 죄인의 구분을 율법의 선에서 구분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자랑으로 삼았고 그것을 지키는 생활로 의를 행하는 줄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율법이 없는 백성, 이방인들이나 그 율법을 포기한 죄인(세리)들과의 교제를 단절하는 것으로 자신들의 의를 더럽히지 않는 것으로 생각해 왔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이 세리들과 그들이 범법자라고 말하는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모습을 보고 신랄히 공격해 온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건강한 자와 병든 자의 비유를 통하여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하신 것입니다.

1. 의인과 죄인

예수님은 의인과 죄인을 건강한 사람과 병든 사람으로 비유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물론 영적인 상태에 대한 의미를 가리킨 것입니다. 예수님은 병을 고치시는 의원으로 오신 분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고 하신 것으로 보아 예수님이 우리의 영적 의원 됨이 실증되고 있는 것입니다(사53:5).

(1) 의롭다하는 말의 뜻은 무엇입니까? 의란 말은 대인관계에 쓰여지는 말이 아닙니다. 죄인이란 말 역시 동일합니다. 의인 또는 죄인이란 말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의미하고 있는 말입니다. 의롭다, 결백하다, 옳다고 하는 말의 ‘디카이오스’란 말은 ‘디케’란 단어에서 나온 말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켜 드리는 일로 인간의 전혀 무죄의 상태를 말합니다.

이 세상에 이같은 의인은 없는 것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롬3:10). 우리 인간들은 그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아담 안에서 모두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롬5:12). 율법을 지키는 조건이 의를 보장해 주고 있지만 이 율법은 두 가지 뜻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이 율법으로 인간들에게 의를 주시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 율법에서 인간들이 자신의 죄를 발견하여 참 생명의 도리를 찾으라고 주셨다는 사실입니다(롬3:20, 갈3:24). 또 다른 한가지는 이 율법은 예수님께서 완성하시기 위해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이 율법을 온전히 이루시므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율법의 완전한 의를 소유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롬3:21).

유대인들은 이것을 모르고 율법으로 의롭게 되는 것으로 알고 율법을 지키는 생활로 의롭게 되려 했기 때문에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복음과 언제나 정면 충돌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이미 예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 속죄의 희생제물이 되실 필요가 없으신 것입니다. 그들은 이미 예수님의 양이 아니므로 그 음성을 듣지도 아니하려니와 예수님은 또한 그들을 부르시지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3) 죄인이란 말의 뜻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의원은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병들었다고 하는 병이란 말은 ‘키코스’란 말로 그 병이 보통 병이 아니라 악한 상태, 곧 흉악히 병든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앓고 있는 영적 질병인 죄라고 하는 병은 흉악한 병입니다. 우리 인간을 정죄하는 병이요, 인간의 생명을 지옥으로 끌고 가는 병입니다. 이 병은 세상 의원의 능력으로는 치료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의 이 흉악한 병을 치료해 주실 의원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2.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하신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나?

죄인을 부르신다는 말씀은 죄인들에게 들려주시는 목자의 음성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자기 양을 부르시는 목자의 음성에 대하여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 도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죄인이란 율법이나 혹은 양심을 통하여 자신의 죄를 바라보고 자신의 참담함을 깨달아 참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사람을 가리킨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의 죄를 보여주고 그 치료할 수 있는 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갈3:24). 양심도 우리의 죄를 보여주므로 생명을 사모하는 갈급한 마음을 줍니다(롬2:15). 양심의 소리를 듣고 율법을 깨닫는 사람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하는 바울의 탄식이 나오게 되며 이때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통하여 그 아들을 보여주시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고 하는 감격에 넘치는 감사가 터져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롬7:24-25). 죄인이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얻을 사람들이기 때문에 자기에게는 아무런 의가 없으며 자신은 오직 그리스도의 의가 아니면 영원히 멸망 받는다고 하는 사실을 믿고 그리스도께서 주신 의만을 견고히 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1) 예수님은 죄인의 죄를 사유해 주시기 오신 의원이십니다. 예수님이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신 것은 그 죄인을 불러 그의 죄를 깨끗하게 씻어 주시겠다고 하신 말씀입니다. 병든 자가 의원을 찾아오면 그 의원은 그 병자의 병을 치료해 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병든 자의 의원으로 오신 예수님은 죄인의 죄를 씻어주시므로 죄인의 병을 치료해 주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그리스도는 죄인의 친구이시며 죄인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아낌없이 주신 죄인의 구주 곧 죄인의 의원이 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내쫓으시거나 버리시는 분이 아니요 나에게 오라고 부르시는 분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 지라고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사1:18).

우리 하나님은 죄인이 죄로 죽는 것을 기뻐하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에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으며 예수님은 이 죄인의 친구로 그들을 불러 회개시키시려고 오셨습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겔33:11).

(2) 예수님은 죄인들에게 그의 의를 주시기 위해 오신 의원이십니다. 의원이란 환자의 완전한 치료에 목적을 둡니다. 죄인을 치료하시는 영적 의원으로서의 예수님의 역할은 완전무결하십니다.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에게 그의 온전한 의를 주십니다. 하늘의 생명을 보장 받을 수 있는 의입니다. 그의 의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가 되기 때문에 그의 의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의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며 이 의로 우리의 구원을 보장 받는 것입니다.

결 론 : 그리스도인은 이 그리스도의 의만이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는 완전한 의인인 것을 알고 자신의 율법적인 의나 양심적인 의는 내어 버려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의를 붙잡고 놓쳐서는 안됩니다. 이 의만이 우리를 안전하게 천국까지 인도해 주십니다.

≈ 14 ≈ 그리스도인과 금식

(본문 : 마가복음 2 : 18 - 20)

서 론 : 그리스도들은 금식이란 말을 많이 듣기도 하며 사용하기도 합니다. 금식이란 하나의 기도의 형태로 음식을 취하지 않고 기도하는 일을 말합니다. 신구약 성경에 금식에 대한 말이 많이 나옵니다. 바리새인들이나 세례 요한의 제자들까지도 금식을 정기적으로 해 오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같은 금식을 정기적으로 해야 만이 경건한 줄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금식을 하지 않는 사람들을 마치 이방인이나 세리들처럼 멸시했습니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이처럼 질문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이 질문에 예수님은 교훈적인 희한한 답변을 들려 주셨습니다.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나니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1. 유대인들의 금식

율법에는 금식에 대한 특별한 규정은 없습니다. 다만 매년 한차례 대 속죄일에 금식할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민29:7-11, 행27:9). 그 후 유대인들은 그들의 생활 가운데서 여러 가지 금식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40일간 음식을 전폐한 일이 있었습니다(출34:28, 왕상19:8). 사울 왕이 죽었을 때에 길르앗 야베스 거민들이 칠일간 금식한 일도 있었습니다(삼상31:13). 다니엘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을 때에 세 이레 동안 좋은 떡을 먹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단10:3).

그리고 예수님 당시의 바라새인들은 이레에 두 번씩 금식을 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이 금식을 큰 자랑으로 여겼습니다. 예수님은 한 비유로 바리새인들의 외식적인 금식을 책망하시면서 성전에서 하나님께 기도한 바리새인의 기도 내용을 이처럼 소개하셨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1) 이스라엘은 전쟁이나 국가적 위기가 닥쳐왔을 때 금식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한 지파인 베냐민과 싸울 때 벧엘에서 금식했습니다. 블레셋과의 전쟁 때에도 미스바에서 금식했습니다(삿20:26, 삼상7:6).

(2) 이스라엘은 자신이나 가족이 병중에 있을 때 금식했습니다. 우리아의 아내가 낳은 아이가 병들었을 때 다윗 왕이 금식했습니다.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보사 아이를 살려 주실 지 누가 알까 함이로다”고 말했습니다(삼하12:22).

(3) 이스라엘은 심히 애곡할 일이 있었을 때 금식했습니다. 길르앗 야베스 거민들은 사울 왕의 죽음을 애곡하여 칠일간 금식했습니다. 다윗의 신하들도 사울과 요나단을 위해 금식했습니다(왕상21:27).

(4) 이스라엘은 회개할 때 금식했습니다. 악한 왕 아합이 엘리야의 책망을 듣고 금식하므로 하나님의 불쌍히 여김을 받았습니다. “아합이 내 앞에 겸비함을 네가 보느냐 저의 내 앞에서 겸비함을 인하여 내가 재앙을 저희 시대에는 내리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왕상21:27).

(5) 이스라엘은 위험이 임박했을 때 금식했습니다. 여호사밧은 에돔의 위협을 받고 금식했습니다(대하20:3). 이스라엘은 하만이 왕의 조인을 얻어 자기들을 해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금식했습니다(에4:3). 메뚜기 재앙이 임할 때온 이스라엘이 금삭해야 했습니다(욜1:14).

2. 예수님의 금식관

예수님은 혼인집에 초대받은 손님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 어찌 금식할 수 있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금식이란 바리새인들이 생각하고 있듯이 절기나 의식에 따라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란 것에 대한 교훈입니다. 예수님은 금식을 반대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자신도 스스로 공생애에 들어가시기 전 40일 동안의 금식 기도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산상보훈에서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이나 우리에게 금식을 폐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금식에 대한 보상이 하나님으로부터 반드시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분명히 보장하셨습니다. 그러나 억지로 하는 금식이나 자랑이나 외식적인 금식은 아무런 효과가 없을 뿐 아니라 그같은 금식에는 보상도 없고 금식으로서 인정을 받지도 못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의 금식은 죄의 애통으로 인한 것으로 바리새인들의 금식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세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고 있었을 때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요한에게 가까이 왔을 때 요한은 그들에게 이처럼 책망했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고 했습니다(마3:7-9). 이처럼 요한의 제자들의 금식은 회개를 위한 죄의 애통을 의미하고 있었으나 그들은 같은 시대에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신랑이신 예수를 영접하지 못했으므로 신랑과 함께 있는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릴 수 있는 구원의 감격이나 사죄의 기쁨이 전혀 없었으므로 금식을 자주 해 온 것입니다.

3.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의 기쁨

예수님은 사람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1) 혼인집 손님이란 그를 따르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가리킨 말입니다. 여기서 혼인집이란 말은 ‘뉨프온’이란 말로 신부라고 하는 ‘뉨프헤’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손님이라고 하는 ‘휘오스’는 자손, 아들이란 뜻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혼인집 손님이라고 하신 말씀 속에는 그 손님을 신부와 동일시하는 뜻이 함께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혼인집 손님들이지만 그러나 이 말씀의 영적 의미는 그리스도의 신부들인 뜻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신랑이기 때문에 그와 함께 있는 동안은 오직 기쁨만이 있습니다. 사람이 기쁠 때에 금식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온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실 일에 대한 예언입니다. 제자들에게는 뼈아픈 날입니다. 이 날에 그들은 금식해야 할 것입니다.

결 론 : 그러나 제자들에게는 오히려 그 날이 기쁨의 날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그리스도인의 생활에는 근심과 슬픔이 살아졌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금식은 그 개념 자체가 달라졌습니다. 형식과 절기와 외식적인 금식은 영원히 살아지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된 금식만이 있을 뿐입니다(사58:6-9).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은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운 열매를 상징적으로 가리켜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앞에 무서운 죄를 범했을 때 그 마음속에서 울어 나오는 진실한 회개에서 나오는 금식,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어떤 사명을 감당하려고 할 때에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을 구하는 간절한 마음의 금식은 그 아무도 금할 수 없으며 이런 금식은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것입니다.

≈ 15 ≈ 생베 조각과 새 포도주

(본문 : 마가복음 2 : 21 - 22)

서 론 :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집요하게 고소거리를 찾는 무리들은 율법에 열심 있는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율법을 경홀히 여기는 자로 정죄했으며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로 여겨, 율법에 위배되는 허점을 찾아 공박한 것입니다. 그들의 율법적인 공격목표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이요, 죄인들과 교제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금식문제도 빼 놓을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요한의 제자들도 율법에 열심 있는 사람들로 그들의 눈에도 유대인의 규례와 장로의 유전을 따라 금식을 안 하는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마땅치 아니했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그들이 주님께 찾아와 이 사실에 대한 질문을 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같은 그들의 질문에 대하여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나니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는 말씀으로 금식하지 않은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생베 조각과 새 포도주의 비유의 말씀을 통하여 율법과 복음과의 병존할 수 없는 까닭에 대하여 놀라운 교훈을 주셨습니다.

1. 예수님의 복음과 바리새인의 율법

예수님의 복음 사역에는 바리새인들의 율법의 강한 도전을 받아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온전케 하시기 위해 오신 분이시므로 예수님의 율법관과 바리새인들의 율법관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의문을 따르는 외식적인 생활로 의를 얻으려 했기 때문에 율법의 참 정신을 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이런 생활은 결국 율법을 외식으로 지키는 외식자로 전락하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대 강령에 의해 움직이셨습니다. 그 강령은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한 율법사가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냐는 질문에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22:37-40).

하나님께서 “율법을 이루라 그리하면 그로 인하여 의를 얻으리라”고 하신 그 율법은 바로 이 온전한 사랑을 가리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 이 율법을 온전히 이르시므로 하나님 앞에 의를 얻으셨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율법을 완전케 하셨는데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루면 율법의 완성자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려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려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고 하신 말씀에서 율법의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마5:18).

2. 생베 조각과 낡은 옷의 비유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헤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는 주님의 비유에서 율법과 복음과의 새로운 관계를 찾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1) 생베 조각이란 새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하면 기운 새것이”라고 하신 이 말씀에서 생베 조각은 새것을 의미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복음을 의미하며 새 언약을 뜻합니다.

(2) 새것이란 새 언약을 말합니다. 율법은 새 언약이 아닙니다. 율법은 약속하신 메시야가 오시기까지만 필요로 했던 편법적인 법이었습니다.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 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기까지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갈3:19).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이끄는 몽학선생 구실밖에 할 수 없습니다(갈3:4). 우리의 의는 율법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낡은 옷이라고 불리는 율법은 새 언약이 될 수 없습니다. 그 옷은 그리스도가 오시므로 이미 쓸모 없는 옷이 되어 버렸습니다.

옛 언약은 모세를 통하여 중보의 손을 빌려 주셨지만 그러나 새 언약은 주님이 흘리신 피로써 이루어졌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22:20). 그리스도의 피는 능히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우리에게 온전한 의를 주실 수 있기 때문에 율법을 완전케 하신 새 언약이 되는 것입니다.

(3) 새 것이란 새 사람을 말합니다. 새 언약에 들어간 사람을 새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새 사람은 율법의 속박을 받는 사람이 아니요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에 속박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4) 새 것이란 새 피조물을 말합니다. 새 언약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새 계명이 필요합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새 언약에 속한 사람들은 율법의 계명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계명을 좇아 살아가는 사람들인데 그 계명은 곧 사랑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복음은 율법의 부족한 것을 보충해 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온전히 새로운 것입니다. 율법과는 관계가 없는 새 언약입니다. 그러므로 이 둘은 서로 병행하여 하나의 옷을 말들 수가 없습니다. 바리새파에 속했던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서로 꿰매어 하나의 온전한 옷을 만들어 보려고 시도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믿되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고 주장했습니다(행15:1).

그러나 베드로는 그들을 향하여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율법이 아니라)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고 말해 주었습니다(행15:11). 이같은 시도가 두드러지게 나타난 곳이 갈라디아 교회였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향해 어리석다고 책망하면서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고 했습니다(갈3:1-3). 이같은 시도는 “새 것이 낡은 것을 당기어 헤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다는 말은 더 나쁜 상태를 말합니다.

3. 새 포도주와 낡은 부대의 비유

예수님은 다른 또 한가지 비유로 설명을 보충하셨습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도 새 포도주는 새 언약을 상징합니다. 새 포도주는 발효성이 대단히 높은 것처럼 복음은 전파되는 능력이 가히 폭발적입니다. 우리들로 새 마음을 갖게 합니다. 새 열매를 맺게 합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 놓습니다. 이같은 새 언약의 역사는 ‘낡은 가죽 부대’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은혜의 성령을 받은 사람만이 새 포도주를 담는 새 부대가 되어 둘 다 간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율법으로 의를 얻으려는 사람들은 이 새 언약을 받아 드릴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 두 다 터지게 되어 그 형편이 더 악화될 뿐입니다.

결 론 : 사람이 율법으로는 새 언약의 축복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율법적인 의를 가지고 하나님의 의를 이루려 한다면 그 사람은 은혜에서 떨어질 사람입니다. 복음은 율법과 조화될 수 없습니다. 새 언약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서만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 16 ≈ 안식일의 주인이 되시는 예수

(본문 : 마가복음 2 : 23 - 28)

서 론 : 우리는 오늘 말씀에서 안식일에 대한 예수님의 두 가지 놀라운 선언을 듣게 됩니다. 하나는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신 말씀이고 다른 하나는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마침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밀밭 사이로 지나시게 되었습니다. 그 날은 안식일인데다 제자들이 길을 열며 밀 이삭을 잘랐다고 했습니다. 제자들의 이런 행동은 그들이 몹시 시장하여 밀밭 사이를 지나면서 밀 이삭을 잘라 비벼서 먹은 것을 말합니다. 이같은 제자들의 모습을 바라본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안식일에 못할 일을 하나이까? 고 항의한 것입니다.

1. 바리새인들이 지키는 안식일

안식일이란 헬라어로 ‘삽바톤’입니다. 이 말은 ‘샤바트’라고 하는 히브리어에서 유래했습니다. 안식일의 최초의 기원은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창2:1-3).

이 안식이 출애굽에 와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으로 주시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켜야 할 구례가 된 것입니다.

(1)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지키는 일에 여러 가지 규정을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안식일을 지키는 일에 어떤 조항들을 주신 것은 아닙니다. 다만 안식일은 노동으로부터 쉬는 자유로운 휴식의 날이었으며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께 경배드리는 경건한 날로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랍비들은 이런 의미의 안식일에 자세한 토를 수도 없이 달았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의 규례를 39조 항목으로 제정하고 다시 그것에 39개 조항의 세목의 살을 덧부쳐 이것들을 안식일에 지키도록 함으로써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만들어 놓았습니다.

“안식일에 너희는 각기 처소에 있으라”는 명령을 안식일에는 1키로 이상 여행하면 안 된다는 것으로 결정하여 지키도록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을 고치신 일, 안식일에 손을 씻지 않고 먹는 일, 그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에서 이삭을 잘라먹은 일 등, 이런 일들이 장로들의 유전에 위배된다 하여 정죄했던 것입니다.

(2)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이 유전에 의하여 스스로 정죄에 이르렀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 자신이 지키지 못하므로 외식적으로 지켰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같은 인간의 법으로 인하여 죄도 없는 많은 사람들을 정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예수님이 이들에 대하여 혹독하게 책망하셨습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어미나 아비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거늘 너희는 가로되 누구든지 아비에게나 어미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도다”고 하신 것입니다(마15:4-6).


2. 안식일에 대한 예수님의 증거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안식일관을 공격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이 결코 사람보다 우선할 수 없다는 사실을 다윗이 어려운 경우에 처해 있었을 때의 경우를 증거로 하여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겨다닐 때에 아비아달 제사장에게 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자기와 또 함께 한 자들이 먹은 사실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삼상21:1-6). 그러면 왜 예수님은 다윗의 경우를 들어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시는 근거로 삼으신 것입니까?

다윗이 취한 이런 행동은 분명히 율법을 어긴 일입니다. 예수님의 이 예증은 다윗이 그 진설병을 먹은 것에 문제를 둔 것이 아닙니다. 아비아달 대제사장이 그의 주어진 권한으로 그 진설병을 다윗에게 주었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아비아달의 이같은 일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 올바른 일을 한 것이라고 주님이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고 하셨습니다(마9:13).

예수님은 자신을 성전보다 더 크신 이라고 하셨고, 자기는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신 분이시므로 아비아달이 핍절한 다윗과 그의 일행에게 제사장밖에 먹을 수 없는 진설병을 먹게 하였어도 하나님이 용인하셨거든 하물며 그의 제자들이 시장하여 밀 이삭을 잘라먹은 것으로 어찌 정죄할 수 있는가? 하는 것에 이 예증을 들려주신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2)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모든 법도는 그 근본 목적이 사람을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명령과 법규는 실인즉 우리의 행복을 위해 주셨다는 사실을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신10:12-13).

① 안식일은 사람들을 땀 흘리는 노동으로부터 해방시켜 그 한날을 쉬게 하시려는데 안식일의 목적이 있습니다. 인간은 “종신토록 수고하여 얼굴에 땀을 흘려야 식물을 먹고 살 수 있는 저주받은 존재”들이지만 하나님께서는 특별하신 은혜로 일곱째 날에 쉴 수 있는 안식일의 복을 주시고 이 날의 식생활까지 책임져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인간을 안식일의 종으로 전락시켰고 안식일의 주인이시오 율법의 제정 자이신 예수님까지 정죄한 것입니다.

② 안식일은 피곤한 육신을 쉬면서 그 날에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도록 주신 것입니다. 죄로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에게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는 날까지 주신 것은 놀라운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③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다음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은 안식일의 제정자란 뜻입니다.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 그 창조를 마치신 후 안식하시면서 인간들에게 그 안식에 동참할 수 있는 복된 날을 주셨는데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다음에 예수님은 성전보다 더 크신 분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마12:6). 성전보다 크신 이라고 하신 말씀은 그 성전의 주인이란 뜻입니다. 제사장들이 성전에서 안식일을 범해도 그것은 율법에 저촉되는 일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물며 예수님은 그 성전에서 거룩한 경배를 받으셔야 할 주인이 되신 분이십니다.

결 론 :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신 말씀은 우리가 안식일을 지키는 일에 율법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에서 의를 얻기 위해 안식일을 지켰지만 우리는 율법에서 의를 얻으려는 사람이 아니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의를 얻은 사람들이요 안식일의 주인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기쁨과 감사와 소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마가복음 3장

◆ 밤중소리 03-02 | VIEW : 5,414

17) 안식일에 대한 새로운 고찰 (1절 ~ 12절)

18) 열 두 제자의 부르심 (13절~19절)

19) 귀신을 좇으신 일과 바알세불 (20절~27절) 

20) 성령을 훼방하는 죄 (28절~30절)

21)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가족 관계 (31절 ~ 35절)


≈ 17 ≈ 안식일에 대한 새로운 고찰

(본문 : 마가복음 3 : 1 - 12)


서 론 :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외식으로 지켜온 안식일에 대한 관념을 근본적으로 뒤엎어 놓으셨습니다.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그들이 지키고 있는 안식일은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비록 안식일 문제뿐 아니라 율법 전체를 이런 방식으로 지켰기 때문에 주님의 신랄한 공격을 받았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계명을 사람의 계명으로 둔갑시켜 가르침으로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한다고 책망하셨습니다(마15:4-9).

1.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신 예수님

예수님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다는 주장은 바리새인들의 주장이요 사실인즉 예수님은 율법의 완성 자로써 안식일을 온전히 지키신 분입니다. 다만 바리새인들은 사람의 계명에 따라 지켜 왔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명대로 지켜 왔던 것입니다.

(1) 예수님을 송사 하려고 기회를 엿본 유대인들이 회당에 들어가신 예수님을 지켜보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지키는 일에 장로의 유전을 표준으로 삼으므로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도구로 사용하였을 뿐 아니라 자기들 자신도 스스로 안식일의 규정에 얽매어 종노릇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송사 하려는 의도에서 예수께서 안식일을 지키는가의 여부를 살펴본 것입니다. 엿본다는 말은 망을 본다고 하는 ‘테레오’에서 나온 말로 자세히 관찰한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보지 못하고 그 율법적인 사항을 지키는 일로 의를 얻으려고 했기 때문에 그들의 이같은 율법적인 자세는 언제나 그들 스스로가 정죄의 올무에 빠져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2) 예수님은 손 마른 사람을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주실 때 그 안식일을 지키는 여러 가지 규례를 주셨습니다. 안식일에는 일을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출20:10). 여기서 말씀하신 일은 ㉮ 밭을 갈거나 거두는 일 ㉯ 물건을 사거나 파는 일 ㉰ 나무를 하는 일 ㉱ 집에서 짐을 내는 일 ㉲ 오락을 구하는 일 등에 대한 규례만 있을 뿐, 선한 일, 병자를 고치는 일 등에 대한 규제는 없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안식일에 병자의 병을 고쳐주는 일은 인간의 생명을 구하는 일로 오히려 장려해야 할 일인 것입니다. 예수님은“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12:12).

(3)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이 중에 어느 것이 옳으냐고 물으셨습니다. 선을 행하는 것이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일을 말하고, 악을 행하는 일이란 안식일을 사람의 계명을 따라 지키는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킨다고 자부하고 있었지만 사실인즉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귀히 보십니다. 사람의 생명의 귀중함이 천하보다 더 중하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짐승까지도 사랑하시고 그들의 생명을 중히 여기십니다(욘4:11). 병자를 고치는 일은 생명을 구하는 일입니다. 병의 고통에서 놓임 받게 되며 그로 인하여 구원에 이르게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3) 저희가 잠잠하거늘 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질문에 답변할 수가 없었습니다. 조금도 모순이 없는 합당한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잠잠함에는 굴욕에 대한 창피와 이에 대한 복수심이 더욱 강렬하게 불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저들의 마음의 완악함을 아시고 근심하셨습니다. 완악하다는 말은 ‘포로시스’로 돌같이 굳어 있다고 하는 ‘프로오’에서 유래된 말로 그 뜻은 맹목적이요 무분별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은 이미 돌같이 굳어 있는 상태로 이성을 잃고 있었으며 올바른 지식을 상실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도 깨어지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사랑으로도 녹아지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심판만이 그들이 받을 보응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이런 완악한 마음을 보시고 근심하셨다고 하셨습니다. 근심한아는 말은 ‘쉴뤼페오’로 함께 슬퍼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고침 받을 길 없는 돌같이 굳은 마음에 대하여 함께 슬퍼하셨습니다.

(4) 예수님은 그 손 마른 사람의 손을 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손 마른 사람을 향하여 네 손을 내 밀라고 하셨습니다. 손 마른 사람의 손이 앞으로 내 밀어질 수는 없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의 명하신 말씀대로 그 손이 내 밀어진다면 예수님의 말씀은 창조적인 능력 있는 말씀으로 인정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손 마른 사람은 그의 손을 내 밀었습니다. 그의 손은 앞으로 내 밀어졌습니다. 그의 손이 회복된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예수님의 권능 앞에 무릎을 꿇고 회개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일로 인하여 이제는 예수를 죽일 의론까지 하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2. 안식일에 대한 새로운 고찰

우리는 율법에서 벗어났고 율법에서 해방되었고 율법의 제재를 받지 않는 새로운 신분을 갖게 된 사람입니다. 그것은 우리는 율법을 이룬 사람들이요 율법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율법에 있는 안식일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어야 합니다.

안식일은 장래 일의 모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골2:16-17).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율법의 안식일은 장래 일의 그림자라고 한 사실입니다. 안식일은 실체가 아닙니다. 다만 그림자였을 뿐입니다. 그림자는 그 실체가 나타나면 살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안식일의 실체는 무엇입니까? 그 실체는 바로 천국의 안식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제 7일에 관하여는 어디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 7일에 그의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또 다시 거기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란 말씀에서 먼저 “하나님이 쉬셨다”고 하신 안식은 제 7일 안식이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고 하신 안식은 천국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고 하신 말씀에서 더욱 안식의 참 뜻이 어디에 있는가에 대하여 명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히4:9).

이런 일은 예수님의 부활로써 그 그림자가 거치고 실체가 나타났습니다. 이제 안식일은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지켜야 할 계명이 아닙니다. 십계명이 우리의 영원한 도덕률이라고들 하지만 여기서 제 4계명인 안식일은 제외되던가 아니면 그림자로만 남겨 두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지키는 주의 날 혹은 주일은 안식일을 대체한 날이 아닙니다. 율법의 안식일이 완성된 날로 천국 시민이 누려야 할 정말로 안식할 날입니다. 우리는 율법적인 규례나 방법으로 이 날을 지킬 사람들이 아닙니다. 율법적인 안식일은 영원히 살아졌습니다. 이제 그리스도인의 모든 행동지침은 오직 예수에게 맞추어져야 합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생활이어야 합니다. 주의 날은 안식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날에 안식일의 관념을 깨쳐버리고 이 날을 그리스도만을 섬기는 날로 알고 지내야 합니다.

결 론 : 우리는 안식일의 주인이 되신 예수님이 율법을 온전히 이루실 때 안식일까지 이루신 사실을 알고 안식일에 대한 강박관념을 버리고 우리에게 안식의 실체로 주신 ‘주의 날’을 주님을 섬기며 기뻐하며 참 안식에 들어가기를 소망하는 날로 살아야 합니다.

75 \ 마가복음 주석 설교

(본문 : 마가복음 3 : 13 - 19)

서 론 : 예수님은 열 두 명의 제자들을 세우시기 전에도 여러 명의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셨습니다. 그러나 본격적인 선교 활동과 나중에 이 땅에 복음의 사도들로 세우기 위해 특별한 사명자로 열 두 명을 부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산에 오르셔서 이처럼 열 두 명의 제자들을 부르셨는데 그들이 예수님을 끝까지 따랐던 제자들로 그들에게는 사도라고 하는 영광스러운 이름이 부쳐졌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 하나는 예수님을 팔 가룟 유다도 들어 있었습니다. 물론 그 당시 이 가룟 유다는 자기 선생님이신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겠지만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부르실 당시부터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면 이곳에서 예수님이 그이 제자들을 부르신 그 부르심에서 취하신 태도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심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신 장소는 산이라고 했습니다. “또 산에 오르사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라고 했습니다.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제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1)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실 때에 자신이 제자 되기를 희망하는 사람을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원하는 자들을 부르신 것입니다. 주님이 제자를 부르신 것은 바로 주님이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그 마음에 원하는 자들을 그의 일군으로 쓰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의 일군 된 사명을 받았다면 우리는 ‘주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주님에 의해서’ 세움을 받은 자임을 알아야 하며, 이 사명을 영광스럽게 생각하여 충성스러운 일군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2) 이들은 아버지께서 보내신 자들입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요6:44, 65). 예수님은 언제나 자신의 뜻대로 행하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하나님의 나를 위해 쓰임 받을 주님의 제자들을 부르시는 일에도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보내는 자들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3) 이들은 창세 전에 이미 부르심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내가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사43:1). 하나님이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부르실 때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택하여 부르신 것입니다. 그의 부르심은 지명하여 부르시는 부르심입니다. 우연한 기회에 어쩌다가 산에 올라갔다가 예수님 곁에 있었기 때문에 운 좋게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런 부르심에 대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이라고 자신의 선택과 부르심을 분명히 했던 것입니다(고전1:1).

2. 제자들을 부르신 이유

예수님이 그의 제자들을 부르신 이유에 대하여 몇 가지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에 열 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어쫓은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고 했습니다(15),

(1)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이제 자신들의 생활은 버리고 부르신 주님의 생활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와 안드레가 처음 부르심을 받았을 때 “나를 따라 오너나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하시는 주님의 부르심을 듣고 “저희가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마4:19). 가족에 얽매인 사람이나 세상일에 미련을 가진 사람은 주님과 함께 있을 사람들이 아닙니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9:57-62).

(2) 귀신을 쫓아내는 권세도 주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에는 주님의 권세가 따릅니다. 주님께서는 복음의 효과적인 전파를 위해 각종 권세를 주십니다. 특별히 열 두 명의 제자들에게는 친히 놀라운 권능을 주시므로 그들의 사도적인 직임을 권위 있게 할 수 있었습니다.

3. 부르심을 입은 열 두 명의 제자들

예수님은 산에 함께 오른 사람 중 열 두 명을 지명하여 그의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1) 시몬 : 시몬은 어부 출신으로 요한의 아들이며 안드레와 형제지간입니다. 그는 대단히 변덕스러운데다 과격한 성품의 소유자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그의 신앙고백을 통해서 그에게 베드로란 새로운 이름을 주셨습니다(마16:16-19).

(2) 야고보 : 야고보는 세베대의 아들로 그도 역시 어부 출신입니다. 야고보는 특히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제자 요한과 한 형제입니다. 이 야고보는 사도 중 첫 번째 순교자로 등장합니다(행12:2).

(3) 요한 : 요한은 야고보의 형제이며 그의 불같은 성격으로 야고보와 함께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이 주어졌습니다. 이 요한은 요한1,2,3서와 요한계시록의 저자입니다.

(4) 안드레 : 안드레는 베드로의 형제로 그의 직업 역시 어부입니다. 이 안드레가 베드로를 주님께 인도했습니다.

(5) 빌립 : 베드로와 한 동네 사람이며 나다나엘을 찾아가 메시야를 소개하고 주님께 인도했습니다(요1:45). 그는 주님께 아버지를 보여주면 족하겠다고 말한바 있습니다.

(6) 바돌로매 : 이 바돌로매는 나다나엘로 알려지고 있습니다(요1:45, 49, 21:2). 그는 빌립에게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말했던 사람입니다.

(7) 마태 : 마태는 레위하고도 하며 세리 출신으로 세관에서 공무를 보던 중,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따랐던 사람입니다.

(8) 도마 : 도마는 디두모란 이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주님의 부활을 믿지 않으므로 의심 많은 이름으로 불려지지만 대단한 신앙의 제자로 나타나기도 합니다(요11:16).

(9) 야고보 : 이 야고보는 알패오의 아들로 작은 야고보라고 불려지기도 합니다. 그의 어머니의 신앙도 아름답게 나와 있습니다(마27:56).

(10) 다대오 : 이 다대오는 가룟이 아닌 유다라고 불려졌습니다(요14:22).

(11) 시몬 : 가나안인 시몬이란 말로 나와 있으며 그가 가나안 인이라고 불려진 것은 열광 자, 열심당원을 의미하는 아람어의 별명입니다. 그가 헤롯 당원이었음을 말해 줍니다(눅6:15).

(12) 유다 : 이자가 가룟 유다로 이 자에 대하여 “이는 예수를 판자러라”고 말해 주고 있습니다.

결 론 : 예수님이 자기의 원하는 자들, 열 둘을 부르셨으나 그 원하는 자 중에 하나는 예수님을 팔 가룟 유다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 가룟 유다를 부르시는 일이 주님께는 참으로 곤혹스러운 일이었지만 아버지의 뜻을 따라 부르셨습니다.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고 하신 말씀대로 된 것입니다(잠16:4). 우리는 충성스러운 일군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될지언정 가룟 유다처럼 악한 날에 쓰임 받는 자로 부르심을 받는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 19 ≈ 귀신을 쫓으신 일과 바알세불

(본문 : 마가복음 3 : 20 - 27)

서 론 : 예수님은 산상보훈에서 그의 제자들에게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고 하신 말씀대로 예수님이 욕하고 핍박받는 대상이 되셨습니다(마5:11-12). 혹은 친족들에게까지 미쳤다고 하는 소문이 들려 가족이 동원되어 예수님을 찾아오기까지 했으며 심지어는 유대인들로부터 예수님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는 비방을 듣기까지 하셨습니다.

1. 분주하신 예수님

예수님의 공생애는 어찌나 바쁘신 지 식사할 겨를도 없으셨습니다.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시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20). 예수님은 이처럼 식사하실 겨를조차 없는 중에도 그의 전도사업을 쉬지 않고 말씀을 전파하시고 병을 고쳐주시고 습관을 따라 산에 으르시어 밤새도록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주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시간이 없다는 핑계를 많이 댑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가정 일, 사사로운 일, 사업의 일이 아무리 바빠도 주의 일을 함에 핑계를 대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의 곁에는 항상 많은 무리들이 따랐지만 그들이 주님의 위로가 되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늘 외로운 가운데 그의 사역을 이루셨습니다. 모든 것이 주님께는 고난이요 십자가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친족들까지 예수님의 사역을 이해치 못하고 그를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요7:5).

하루는 주님의 친족들이 예수님이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붙들어 데려가려고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찾아 왔습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종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건만 그가 세상에서 받으신 대우는 죄인에 대한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이같은 일에 대하여 이사야 선지는 이처럼 말했습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고 예언해 주고 있습니다(사53:3).

2. 바알세불을 힘입었다고 하는 서기관들의 모함

예수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손 마른 사람의 손을 고쳐 주신 후,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바다로 물러가셨다고 했습니다. 이에 갈릴리에서 큰 무리가 좇으며 모든 지경에서 허다한 무리가 그의 하신 일을 듣고 나아왔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 산에 오르사 열 두 제자를 세우시고 어느 집엔가 들어가셨을 때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이 “저가 바알세불을 지폈다하며 또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모함하기 시작했습니다.

(1) 바알세불이란 귀신의 왕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바알세불이란 말은 ‘똥’ 또는 ‘오물의 주’란 뜻으로 이것은 랍비식 낱말에서 온 표현입니다. 바알은 주란 뜻이고 세불은 오물이란 의미로 주님을 모욕하는 가장 심한 말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오물과 연결시키므로 크나큰 인격적인 모욕을 주려는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2) 그들은 예수님이 바알세불에 지폈다고 했습니다. 지폈다는 말은 소유하다 또는 잉태한다는 뜻으로 예수님이 바알세불에게 붙잡혔다, 그가 귀신을 쫓는 능력은 그의 안에 들어가 있는 바알세불의 힘에 의한 것이라는 모함인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권세 있는 말씀의 능력과 권위에 시기심이 나서 이런 형태로 예수님을 모함하는 수법을 사용했던 것입니다.

(3) 예수님은 사단이 사단을 쫓아 낼 수 있느냐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바알세불을 사단으로 해석하셨습니다. 그리고 귀신도 사단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사단이란 대적자란 뜻입니다. 이런 이름은 하나님을 대적했던 사단의 역사에 기인하고 있습니다. 귀신이란 말은 ‘다이모니온’으로 악령과 같은 뜻으로 해석됩니다. 혹 어떤 사람은 귀신을 죽은 사람의 영혼이라고 말하나 이같은 사상은 고대 헬라 철학자들로부터 나온 잘못된 사상입니다. 헬라의 철학자 ‘탈레스’는 만물은 신으로 충만해 있다고 주장하였으며 ‘패타고라스’ 학파에서는 정령설을 주장하여 공기 가운데도 영이 있는데 그 영은 귀신이나 영웅들의 망령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단은 그 휘하에 많은 타락한 영물들을 거느리고 있는데 그는 편재하지 못하기 때문에(만물 가운데 존재할 수 없으므로) 이 영적인 존재들을 부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단에 의해 부림을 당하는 존재가 귀신들이며 이를 부리는 사단을 가리켜 귀신의 왕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사단은 오직 한가지 목적을 가지고 활동하며 역사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입니다. 그의 하나님 대적은 그가 마지막 심판으로 지옥에 들어가지 까지 계속될 것입니다(계20:20).

사단의 능력은 하늘에 있는 천사장 미가엘과 싸울 수 있을 만치 대단합니다. 악령 중에 감히 이 사단에게 도전할 존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단이 사단을 내어쫓는 일이나 대적해서 싸우는 일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4)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면서 우리에게 분쟁에 대한 한 교훈을 주셨습니다. “만일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며 그 나라가 설 수 없고 만일 집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 집이 설 수 없고 만일 사단이 자기를 거스려 일어나 분쟁하면 설 수 없고 이에 망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24-26). 사단의 나라가 하나님의 심판의 날까지 존속될 수 있는 것은 사단의 권위와 한가지 목적 앞에 하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나라의 분쟁과 가정의 분쟁은 사단의 분쟁에 대한 하나의 비유적인 예로 들려주신 것입니다. ‘화평’하는 나라는 흥하고 복을 받습니다. 화평하는 가정은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축복해 주십니다. 이같은 화평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었기 될 때 가능합니다.

3. 강한 자의 결박과 침입 당하는 일

예수님이 하나님의 권능으로 귀신을 쫓아내신 일이 강한 자(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은 일임을 분명히 하기 위해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치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늑탈치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강한 자의 집이란 사단이 점유하고 있는 집을 말하는 것으로 죄의 종이 되어 있는 인간의 마음을 가리킨 표현입니다. 사단은 세상 임금이며 죄와 사망 권세로 인간을 다스리고 있는 죄인의 주인입니다. 예수님이 귀신을 쫓으신 역사는 죄를 소멸하시고 사망 권세를 이기신 자가 나타나 강한 자를 내어쫓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늑탈하신 일은 사단이 가지고 인간을 종으로 다스리고 있는 사단의 권세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강한 자보다 더 강하신 분으로 오셔서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셨습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정죄에서 참 자유”를 주셨습니다. 죄에서 의로움을 주셨습니다.

결 론 : 예수님은 강한 자로부터 우리의 죄를 소멸하시고 생명을 찾아주시며 율법의 정죄에서 자유함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누구든지 이 분을 마음에 영접하는 사람은 사단의 권세에서 놓임 받아 하나님이 주시는 무한하신 자유에 이를 수 있습니다.

≈ 20 ≈ 성령을 훼방하는 죄

(본문 : 마가복음 3 : 28 - 30)

서 론 : 성경에는 죄에 관한 말이 많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죄는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 받을 수 있다고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하는 죄’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하는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한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면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무슨 죄이며 이 죄에 대하여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한다고 하신 말씀의 뜻은 무엇인가? 이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사하심을 얻을 수 있는 죄

예수님은 “사람의 모든 죄와 무릇 훼방하는 훼방은 사하심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이곳에서 밝히신 “사람의 모든 죄”란 율법을 범한 죄를 가리킨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율법은 우리가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밝혀 놓으신 하나님의 규약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습니다. 율법은 하나님 편에서 완전하신 것이기 때문에 죄로 타락한 인간들은 이 하나님의 완전하신 법을 준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시고 자신의 의를 주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구원의 사역)를 지셨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신다”고 하셨습니다(요일1:9). “훼방하는 훼방은 사하심을 얻는다”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이 죄는 “사람의 모든 죄”보다 더 악의적인 범죄임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의 이름을 세 번이나 부인한 일도, 바울이 개심하기 전 주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잔해한 일도 하나님 앞에 무서운 죄에 해당됩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죄까지도 사하심을 받을 수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사한다는 말은 ‘아피에미’로 탕감한다, 용서한다, 취소한다의 뜻입니다. 예수님의 탕감의 비유 중에서 일만달란트 빚진 자에 대하여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하신다는 말은 아무런 대가 없이 무조건 용서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죄는 우리의 생애에 일어날 수 있는 일반적인 죄악입니다. 이런 죄가 사하심을 얻는다는 말은 성령의 활동에 제한을 주는 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모든 죄인들에게 가까이 하셔서 그들로 회개케 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이들 모든 죄인들에게 가까이 하시는 일에 있어서 구애받으실 일이 없는 것입니다. 이런 근거에서 주님은 사하심을 얻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2. 성령을 훼방하는 죄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하느니라”고 하신 말씀에서 우리는 ‘사하심을 얻을 수 없는 죄’도 있다고 하는 심히 두려운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을 훼방하는 죄란 무엇인가? 이 문제는 대단히 궁금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문제는 해석하기가 매우 어렵고 두려운 일이기 때문에 우리는 조심스럽게 이 문제를 다루어야 할 것입니다.

(1) 그들이 성령을 훼방했다는 근거는 성령이 하시는 일을 더러운 귀신이 한 일로 돌려보냈다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시는 모든 일은 성령께서 행하시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성령을 한없이 부어주셔서 권능을 행하실 수 있도록 하셨다고 했습니다(눅4:1, 요3:24). 그러므로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신 일은 곧 성령의 역사로, 이같은 사실을 훼방하는 일은 곧 성령을 훼방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귀신을 쫓아내신 예수님의 권능을 보고 시기한 서기관들은 “저가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비방했으며 예수님은 이런 비방을 듣고 나실 후, 사하심을 얻지 못하는 성령 훼방죄에 대하여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2) 서기관들은 시기심으로 예수님을 비방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훼방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가 행하시는 권능이 하나님의 영의 역사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이적 중에 흠을 잡을만한 아무런 죄도 찾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제자들을 시켜 말의 올무를 잡으려고 끊임없이 시도했지만 헛수고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9장을 보면 나면서부터 소경되었으나 주님에 의해 눈을 뜨게 된 청년까지도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을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는 질문에 분명한 어조로 “선지자니이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사람이 대답하여 가로되 이상하나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이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 도다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창세 이후로 소경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요9:30-33). 그 당시 외식적으로 나마 율법을 지키며 하나님을 공경한다고 하는 생활을 해 온 그들이 더러운 귀신의 역사와 하나님의 영의 역사를 분별하지 못할 정도로 성경에 무식한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3) 이같은 훼방은 악의에 가득찬 훼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권능 행하심을 이같은 그들의 음모대로 악의에 찬 말로 훼방하였을 뿐 아니라 트집을 잡아 정죄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4) 이것은 성령의 분노를 살만한 훼방이었습니다. 이같은 죄는 ‘신성모독’ 그 이상 가는 죄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들 스스로가 알면서도 양심을 누르고 고의적으로 악의에 찬 비방을 일삼으며 율법의 흠을 잡으려고 하였으니 이런 일이야말로 성령을 대적한 죄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3. 사함을 받을 수 없는 이유

성령 훼방죄는 아무나 범할 수 있는 죄가 아닙니다. 멸망 받기로 작정된 자들만이 이에 해당됩니다.

(1) 이 죄는 복음의 원수들이나 저지를 수 있는 죄입니다. 이들은 “마음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하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입니다(행7:15). 이들은 그들의 생애에 나타나는 모든 성령의 감동하심을 소멸해 버리는 사람들입니다(살전5:19). 그들의 양심은 화인 맞아 영적 감각과 방향을 상실해 버린 사람들입니다(딤전4:2).

(2) 이들이 사함을 받을 수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들에게 죄를 회개케 하시는 성령의 역사가 따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런 성령의 감동하심을 스스로 거역하기 때문입니다. 죄를 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는 우리의 회개가 따라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로 하나님 앞에 회개케 하시는 성령의 은혜가 우리에게 미치지 못하면 그 누구라도 회개하여 사하심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결 론 : ‘성령 훼방죄’는 “사람의 모든 죄와 무릇 훼방하는 훼방”의 일반적인 죄의 범위를 훨씬 뛰어넘은 죄입니다. 멸망 받기로 작정된 자들만이 범할 수 있는 죄입니다. 이같은 무서운 죄의 시작은 회개할 줄 모르는 마음의 강퍅에서 나옵니다. 우리는 히브리서 기자의 다음과 같은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히3:7-8).

≈ 21 ≈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가족관계

(본문 : 마가복음 3 : 31 - 35)

서 론 : 예수님은 어떤 사건에 부닥칠 때마다 그 사건을 발판으로 놀라운 교훈을 주시곤 했습니다. 하루는 예수님이 많은 무리들에게 둘러 쌓여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실 때에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고 하는 전갈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같은 전갈을 들으시자 곧 이 말씀을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가족관계를 이루는 새로운 교훈으로 확대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육신적으로는 우리와 똑같이 외형적인 가족관계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교훈에서 이같은 육신적인 가족간계 보다 훨씬 차원이 높은 새로운 가족관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밝혀 주신 것입니다.

1. 예수를 밖에서 부른 모친과 동생들

예수님의 모친과 동생들과 누이들이 왜 예수를 찾으려 함께 왔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매우 궁금하게 여겨지고 있습니다.

(1) 이 문제의 해답은 21절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의 친속들이 듣고 붙들러 나오니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고 한 말씀이 있습니다. 아마도 그때에 예수님이 미쳤다고 하는 모함이 사방에 번졌던 모양입니다. 예수님이 공생애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시고 능력을 행하시며 많은 병자들의 병을 고쳐주시고 귀신들린 자들의 귀신을 내쫓아 주셨는데 이 일에 대하여 그 소문이 번져 나간 것입니다. 혹은 선지자라느니, 혹은 사람을 미혹하는 자라느니, 혹은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느니, 혹은 바알세불을 지폈다느니 이런 등등의 여러 가지 말들이 많았던 것입니다. ”는 말로 전해진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같은 좋지 않은 풍문에 휘말려 있는 예수를 붙들려고 나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족들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나타내 보이기 위해 이곳에 있는 예수의 친속들을 가족이나 친속이 아닌 친구들로 달리 표현하고 예수의 모친과 동생들이 예수님을 찾은 것은 무리들에게 피곤하게 시달리고 있는 그에게 휴식을 주기 위한 것이라고 미화하고 있지만 문맥의 전후를 살펴 볼 때에 그런 뜻이 아님이 분명한 것입니다. ‘붙들다’라고 하는 말은 ‘크라테오’로 이 말은 체포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쳤다고 하는 말에서 그들의 출동은 결코 호의적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2) 31절에서 “때에”라고 하는 말은 어떤 말의 계속성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때에”란 말의 헬라어는 ‘운’으로 이 말의 뜻은 그래서, 따라서, 그러므로 라고 해석됩니다. 21절에 나타난 사건은 아직 결말이 난 것이 아닙니다. 예수의 친속들이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붙들려고 나오고 있는 계속적인 상태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의 성령 훼방죄에 관한 엄중한 경종이 계속되다가 이제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를 붙들려고 온 그 친속들이 무리들에게 말씀을 전하시는 예수를 찾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31절과 21절은 한 사건의 계속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다음처럼 연결 지을 수 있습니다. ‘예수의 친속들이 듣고 붙들려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그래서(때에 = 그러므로, 따라서) 예수의 모친과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 . . ’ 친속이란 말은 가족보다 그 범위가 넓은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모친이나 동생들이나 누이들도 이 친속들 중에 하나가 될 수 있으며 그곳에는 모친과 동생들 외에도 다른 친척들이 그들과 함께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3) 친속들이 찾아 온 목적을 여러 가지로 관찰할 수 있습니다. 이 문제를 좋은 의미로 해석한다면 많은 군중들 틈에서 시달림을 당하며 그에다 ‘미쳤다’고 하는 소문까지 들리는 예수님께 잠시 동안의 휴식을 갖게 하려는데 있었을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붙들러 나왔다’고 한 말이 걸림이 됩니다. 또 다른 견해는 이같은 풍문이 과연 듣는 대로인가의 사실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찾아왔다는 생각입니다. 다른 또 하나의 경해는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 친속들은 예수님의 사역을 의심하고 절제시키기 위해 붙들려고 온 것이란 견해입니다. 주님의 형제들도 예수님의 메시야 사역에 불신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요7:5). 어머니 마리아 역시, 예수가 메시야라고 하는 생각이 들기 전에 자기 태에서 난 자식이요 사랑으로 키운 아들이기 때문에 언제나 아들에 대한 염려와 걱정 속에서 살았으며 이런 소문이 들려 왔을 때, 민감한 반응을 보였을 것입니다. 어떤 것이든 예수님을 이같은 생각으로 붙들러 나왔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가족들에게는 커다란 실수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2. 주님의 말씀이 가리키는 참 뜻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 . . .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고 하신 말씀은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고 하는 무리들의 전갈을 들으시고 대답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으로 미루어 예수님은 밖에 나가지 않으시고 계속하여 말씀을 전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 주님의 이 말씀은 예수님의 가족은 혈육의 차원을 넘어 신앙적인 차원에서 찾아야 한다는 사실을 가리킨 것입니다. 예수님을 찾아 나온 모친이나 동생이나 누이들도 그의 가족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같은 혈연적인 관계에 얽매일 분이 아니십니다. 그는 모든 사람의 죄를 용서하시고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로 오셨기 때문에 혈연적인 친속관계를 가지고 계십니다. 모친과 동생과 누이들 외에도 친속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삶은 이들에게 얽매어 살아가는 일이 아니십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과 관계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의 새로운 가족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란 하나님의 보내신 그의 아들을 믿는 자를 말합니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요6:40). 그러므로 비록 주님의 가족이라도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말씀하신 대로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상에서 예수님이 그의 어머니를 자기 동생들에게 맡기지 아니하시고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맡기신 일은 이런 뜻에서입니다. 십자가 아래에는 어머니 마리아와 사랑하는 제자 요한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생들이나 누이들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신앙적인 면에서 참된 가족관계를 이루고 있는 요한에게 부탁하시면서 “보라 네 어머니라”고 말씀하셨고 마리아에게는 요한을 가리켜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3) 이 말씀은 우리의 가정이 혈연적인 관계에서 보다 신앙적인 관계에서 가족관계를 이루라는 말씀으로 받아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했습니다. 믿음으로 결합되지 못한 가족은 참된 의미에서 형제요 자매요 모친일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지상에서는 한 가족을 이루고 있다고 해도 장차 천국에서는 천상의 가족으로 합쳐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결 론 : 예수님은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 . . .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천상의 가족을 이루려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교회에서 이같은 참된 가정을 이루고 우리들 자신의 가정에서도 모든 가족들이 이같은 신령한 관계에 기초를 둔 새로운 가정을 이루어야 하겠습니다.


마가복음 4장

◆ 밤중소리 01-08 | VIEW : 853

≈ 22 ≈ 씨뿌리는 비유

(본문 : 마가복음 4 : 1 - 20)

서 론 : 예수님은 천국의 오묘한 비밀을 비유로 말씀하신 경우가 많으셨습니다. 비유란 ‘파라볼래’로 곁에 두다, 비교하다란 의미로 ‘양자를 비교하기 위하여 어떤 하나를 다른 것의 곁에 두는 것’을 가리킵니다. 천국에 관한 해석을 돕기 위해 그것과 비교시켜 이해하도록 하려는 시도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경에 나타난 이 비유를 비유로서 해석하지 못했을 때 진리에서 이탈하는 경우도 생기기 때문에 비유를 해석함에 있어서 특히 두 가지 사실에 유의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는 비유에서 명백하게 제시하고 있는 특징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다음에 다른 하나는 비유 그 자체에 중점을 두고 그 하나 하나에 걸쳐 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의미를 주려고 시도하는 일입니다. 이같은 일은 비유의 성격을 훨씬 뛰어넘는 방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모든 비유 중에도 유명한 비유로 전도자들이 복음을 전할 때 그 복음이 각 사람에게 어떻게 받아드려지는가에 대하여 그 과정이 설명되고 있는 것입니다.

1. 씨뿌리는 자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시기 이해 배에 올라 바다에 떠 앉으시고 온 무리는 바다 곁 육지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씨뿌리는 비유로 가르치실 때에 “들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 씨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씨에는 무한한 생명력이 잠재해 있기 때문에 무한한 생명의 능력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비유되는 일은 매우 합당한 일입니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고 하신 말씀 속에 있는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란 지극히 작은 믿음이긴 하지만 그 안에 무한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참 생명의 믿음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눅17:6).

씨는 열매를 맺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한 비유가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고 하셨습니다(사55:11).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가면 말씀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씨는 뿌려야 자라나며 결실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도 사람의 마음속에 뿌려져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2) 씨는 뿌리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라고 하신 말씀에 대해서 14절에서 이르시기를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씨를 밭에 뿌려야 자라서 열매를 얻을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도 그 말씀을 사람의 마음에 뿌리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이 씨를 뿌려야 할 사람을 어느 계층만의 사람으로 국한시키지 않으셨습니다. 성령을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 씨뿌리는 자의 축복에 대하여 매우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롬10:13-15).

2. 씨가 떨어지는 네 종류의 밭

이 비유에서 예수님은 이 씨가 뿌려지는 밭으로 네 가지 종류를 보여 주였습니다. 그리고 그 씨가 떨어진 밭의 토양에 따라 씨가 자라는 모습을 비유로서 보여 주신 것입니다.

(1) 더러는 이 씨앗이 길가에 떨어진다고 하셨습니다. “말씀이 길 가에 뿌리었다는 것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단이 즉시 와서 저희에게 뿌리운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라고 해석해 주셨습니다(15). 길가는 열매를 얻기 위해 마련해 놓은 밭이 아닙니다. 그저 단단할 땅일 뿐입니다. 이것은 완악한 마음, 강퍅한 마음, 복음을 거역하는 마음, 회개를 거절하는 마음입니다.

말씀의 씨앗이 머물지 못하고 곧 살아져 버리는 이유에 대하여 주님은 “사단이 즉시 와서 저희에게 뿌리운 말씀을 빼앗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단은 말씀을 빼앗는 역사도 한다는 사실을 밝혀주신 것입니다. 사람이 말씀을 듣고도 마음속에 머무를 곳이 없으면 즉시 사단이 나타나 그 말씀을 빼앗아 갑니다. 이제 이 사람에게는 말씀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회개할 수도 없으며 새 사람이 될 수도 없으며 중생할 수도 없으며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도 없습니다.

(2)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졌다고 하셨습니다. 이 돌밭에 대하여 16절에서 해석해 주시기를 “또 이와 같이 돌밭에 뿌리었다는 것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흙이 얇다는 말은 말씀의 깨달음이 천박한 사람, 하나님의 말씀을 영적으로 깨닫지 못하고 육적으로 깨닫는 경우를 말합니다. 그의 기쁨은 영적인 깨달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기복적인 신앙에서 비롯된 것입 니다. 그들이 복음을 받아 드린 것은 겉으로의 일시적인 모습이요 거듭난 심령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이런 신앙은 언제인가 때가 오면 넘어집니다.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가 오는데 이때 이들은 견딜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에는 그의 믿음을 시험하는 말씀으로 인한 환난이나 핍박의 시기가 찾아옵니다. 뿌리가 없는 신앙은 이때 넘어지는 것입니다.

(3)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진다고 하셨습니다. 이 씨앗은 가시가 자라 기운을 막았기 때문에 결실치 못하는 씨앗이라고 하셨습니다. 19절에서 이 말씀을 다시 설명하시기를 “이들은 말씀을 듣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치 못하게 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마음에 말씀의 씨앗이 뿌려져 어느 정도 성장하여 얼마간 교회에 나와도 그의 심령 속에 재물에 대한 욕심이 남아 있고 세상에 대한 염려가 살아지지 않고 세상 죄악에 대한 유혹을 받아 드리는 생활을 한다면 그런 신앙은 끝내 결실을 못하고 맙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나”고 했습니다(딤전6:9).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더불어 재물을 겸하여 사랑할 수 없습니다.

(4)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졌다고 하셨습니다. 이 땅에 씨앗이 떨어지자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좋은 땅에 뿌리었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은 자”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다른 복음서에서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밭은 회개한 심령을 말합니다. 믿음을 간직한 마음을 가리킵니다. 이런 사람은 그 말씀을 순종하기 때문에 그 열매가 30배, 60배, 100배로 결실하여 그의 생애에 놀라운 축복을 창조하는 것입니다.

결 론 : 주님의 이 씨뿌리는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입니다. 비밀이란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만 이해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지고 듣고 깨달아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 23 ≈ 하나님 나라의 비밀

(본문 : 마가복음 4 : 10 - 12)

서 론 : 우리는 성경을 특별계시라고 말하여 자연계시와 구별합니다. 하나님은 자연을 통하여 어느 정도 자신을 나타내 보이고 계십니다. 그러나 이 자연계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까지는 더듬어 알게 되지만 그를 찾는 길과 그의 은혜를 받는 길은 침묵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일은 오직 자신을 드러내시고 인간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길을 보여 주신 성령으로서만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가리켜 특별계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 특별계시는 누구나 깨달을 수 있는 자연계계시와는 다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만이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비밀이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비유는 거의 모두가 복음서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비밀을 말씀하시는 중에 예수님이 사용하셨습니다. 비유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비밀을 깨닫게 하시기 위한 교훈적인 말씀이지만 진리에 대한 이해력이 없이는 비유가 가르치는 진의를 깨닫기란 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비유는 그 비유 자체만으로는 아무런 의미를 줄 수 없습니다. 진리와 비교될 때 비로써 비유의 의미가 명백해지는 것입니다.

1. 하나님 나라의 비밀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비밀이란 말은 ‘뮈스테리온’으로 세상적인 어떤 신비로운 것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자연의 이해력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것, 인간의 사고력으로는 깨달아질 수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만 알 수 있는 것, 하나님의 영으로 일깨움을 받은 사람만이 이해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란 “계시된 진리”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이 세상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누구나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비밀이라고 하는 말이 붙어 있습니다.

(1) 예수님은 이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다고 하셨습니다. 너희에게 주었다고 하신 말씀은 스스로 깨달을 수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로 이 비유에 대하여 알지 못하여 주님께 물었다고 했습니다. 주었다고 하신 말씀은 깨달을 수 없도록 장벽을 두었거나 비밀에 가리워 둔 것이 아니라는 뜻으로 너희라고 부르신 하나님의 백성들도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배워야 하며, 말씀을 듣고 깨달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2) 의라고 하신 무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리킵니다. 이 세상에는 “너희와 외인”들이 있는 것입니다(11). 너희란 하나님의 백성들이요, 외인이란 그밖에 사람들을 뜻합니다. “창세 전에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복 주시기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을 받은 무리들”이 있는 것입니다(엡1:3-4).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비밀을 깨닫습니다.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 도다”고 했습니다(골1:6). 하나님의 백성들은 복음을 들을 때에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을 깨닫는 일은 특별한 하나님의 은사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지 때문입니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요16:13). 하나님의 백성들이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진리의 성령의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한 것”이라고 했습니다(고전2:9-10). 하나님의 백성들

에게는 성령이 내주하시고 또한 그들의 생활 가운데서 여러 가지로 역사 하십니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가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하심이라”고 말씀했습니다(고전2:12).

(4) 비밀을 깨닫는 일에는 우리의 영적 귀가 열려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은 그 사람의 영적 귀가 열려지지 않고는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죄는 우리의 영적 귀를 둔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순종의 생활을 해야 합니다. 주님의 뜻을 거역하는 사람들은 그의 영적 귀가 어둡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주여 말씀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주의 뜻을 따르겠나이다”라고 하는 생활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베드로처럼 “선생이요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만은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고 하는 말씀에 의지하는 믿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눅5:5).

2.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감춘 사람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비유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설명하신 일이 대하여 “이는 너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여 들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함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매우 충격적인 말씀으로 그 해석도 여러 가지입니다.

(1)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그들로 이 비유를 통하여 진리를 깨닫게 하시려는데 목적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을 전혀 깨닫지 못하는 그들에게는 비유로밖에는 해석해 줄 도리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비유적인 해석은 그들로 참으로 깨달아 회개하여 죄 사함을 얻게 하려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비밀의 뜻을 세상적인 방법으로 어느 정도 이해시키려는데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유는 두 가지로 해석이 됩니다. 하나는 그 비유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더욱 선명하게 깨달음을 주어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게 하고, 외인들에게는 영적인 진리에 대하여는 알 수 없지만 비유 자체에 나타난 의미만은 알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을 비유로만 밝히신 것입니다. 이것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 있어서 심판하시는 그날의 핑계 치 못할 조건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롬1:20).

(2)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시려고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게 하신다”는 말씀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입니다. 고의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 때문에 회개를 스스로 거부합니다. 그들의 심령은 쌓인 죄로 인하여 완악해져 있습니다. 돌처럼 굳어져 있는 그들의 마음을 그 무엇으로도 깰 수가 없습니다. 그들의 교만은 하늘 끝에 닿았습니다. 이런 자들에게 하나님이 하실 일은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 대하여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시는 일”입니다. 이 말씀의 참뜻은 그들 스스로가 그런 길을 즐겨 가기 때문에 그대로 방치해 두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이 같은 문제에 대한 해답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롬9:18).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바로에게 여러 번 권고하시고 경종하셨던 것처럼 이들 완악한 무리들에게도 비유로라도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들려주심으로 그들이 받을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그들의 머리 위에 쌓아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 제자들은 이 비유를 깨닫지 못하여 그 해석을 구했습니다. 제자들이 비유를 물은 것은 그 뒤에 나타난 내용을 몰라서 물은 것은 아닙니다. 그 비유가 하나님 나라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에 대하여 몰랐기 때문에 그 뜻을 물은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제자들이 깨닫지 못함을 나무라시고 이 비유에 대한 영적인 해석을 가해 주셨습니다. 이 해석을 통하여 제자들은 예수님의 비유의 진의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은 사람들은 비유의 뜻을 설령 알았다고 해도 깨달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마음으로 받아 드리는 것이 아니다 비웃거나 거역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돈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말씀을 바리새인들 알 수 있는 비유로 이처럼 말씀하신 일이 있습니다.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고 하시는 비유의 말씀에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눅16:13).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이건 비유건 그 뜻을 바로 해석하는 설명이 필요합니다. 그리스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또 그 뜻을 배워서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을 깨닫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 24 ≈ 등경 위에 있는 등불

(본문 : 마가복음 4 : 21 - 25)

서 론 :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잠시 동안 암시적인 말씀으로 그들 자신이 숙고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주셨습니다.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나 평상 아래나 두려 함이 아니냐” 제자들은 이 암시적인 질문의 말씀에 직각 ‘아,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동경 위해 두려 함이 아니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대답했을 것입니다. 등불은 밤중에 비추는 빛을 말합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의 가정에는 이 등이 있었고 밤이 되면 예외 없이 등불을 켰을 것입니다. 이 등불 빛 때문에 그들은 방안에서 대화도 하고 일도 하며 두루마리로 만들어진 성경으로 성경 공부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부엌이나 혹은 다 마당에서 등불을 가지고 방으로 가져왔다면 아마도 그 등불을 말(쌀 같은 것을 되는 그릇)아래나 평상(침상 같은 것) 아래에 두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안약 등불을 그런 곳에 둔다면 그 등은 빛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1) 여기서 등불이란 곧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 복음을 가리킵니다. 사람이 복음을 받은 후에 그 복음의 빛을 사면에 비췸이 없이 마음속깊이 숨겨 둔다면 그 복음은 이미 이 세상에 아무런 쓸모 없는 존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복음은 세상을 밝히는 빛인데 그 빛을 자기 혼자만 간직해 두는 일은 마치 등불을 평상 아래나 말 아래 두려는 어리석은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전해야 빛을 비췰 수 있습니다. 이 일에 대하여 성경은 이처럼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자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요 함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롬10:13-15).

(2) 말이나 병상은 빛을 숨기는 온상입니다. 숨기는 말이나 병상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유대인들의 전통을 의미해 주기도 합니다. 그들은 장로의 유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말씀을 감추었습니다. 장로들의 유전을 내세우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누구든지 아비에게나 어미에게 말하기를 내가 들여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의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도다”라는 말씀으로 책망하셨습니다(마15:5-6). 또한 그들의 외식도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역할을 했습니다(마23:23). 우리들 속에 죄악이 들어와 있다면 그것이 이 빛의 통로를 차단하는 말이나 평상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음을 주실 때 세상을 비취는 빛으로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마치 등불을 말이나 평상 아래 숨겨 둔 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같은 일은 두 가지 모두가 실패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에 빛이 어둠 속에 갇혀 있다면 그 빛은 조만간 어둠에 삼켜 버리게 될 것입니다. 빛이 어두움에 가려 빛을 발산하지 못한다면 그 빛은 빛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이 복음의 빛을 세상에 비취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내 속에 있는 빛도 언젠가는 꺼져 버릴는지 모릅니다. 바울은 자신을 이 빛에 빚진 자라고 말하면서 이 빛을 비치는 일에 그의 전 생애를 바쳤습니다.

2.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예수님은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어라”고 말씀하시고는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고 하셨습니다. 무엇을 듣는가 삼가라고 하신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조심해야 할 것을 권고하신 말씀입니다.

(1) 무슨 말씀인가에 대하여 조심해서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전하는 그 말속에도 다른 복음이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저주를 받으라고 선언되었고 이 잘못된 복음에 물든 사람 역시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갈1:7-8). 바리새인들은 장로의 유전을 하나님의 말씀과 같은 위치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조심해야 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듣는데서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나 이단에서 전하는 복음을 듣는 데서 얻는 일은 사망입니다.

(2) 그 말씀이 나에게 무엇을 말씀해 주고 있는가에 대하여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들을 귀 있는 자만이 들을 수 있습니다. 들을 귀란 할례 받은 귀로, 회개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회개한 사람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들을 수 있습니다.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여 자신의 생활에 적용시키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조심하지 않으면 흘려버리게 되며 그렇게 될 때 아무런 유익이 없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고 말씀했습니다(히6:7-8).

(3) 헤아림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요 또 더 받으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헤아린다는 말을 비판이란 말로 해석하여 마태복음 7장에 있는 말씀과 연결시키려고 합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마7:1-2). 그러나 이곳에서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은 그 문맥상으로 보아 형제를 비판하는 비판을 의미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헤아린다는 말은 ‘메트레오’로 측량한다, 재어 분배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는다면(헤아린다면) 하나님의 적격한 측량을 받게 될 것인데 그의 대한 보상은 더 많을 것이라고 하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 말씀의 자로 측량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계11:1-2).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자의 측량에 합격할 수 있도록 말씀을 배우며 말씀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3)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진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고 하신 말씀은 문장의 표현이 해석하기가 매우 애매 모호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의 해석을 다음과 같이 하는 것이 이해하기가 쉬우리라고 생각합니다. “감추인 것은 나타나게 마련이고 비밀은 드러나게 마련이다”(현대인의 성경에서 발취). 모든 비밀은 그 나타날 때가 있습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비밀로서 아직까지 숨겨져 왔습니다. 그러나 그 비밀이 예수님에 의하여 밝혀진 것입니다. 숨진 것이 없이, 감추인 것이 없이 드러난 복음을 널리 전파해야 하는 것입니다. 말 아래나 평상 아래와 같은 어두운 곳에 감추지 말고 사면에 빛으로 드러내야 하는 것입니다.

3. 있는 자와 없는 자에 대한 보응

주님은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있는 자와 없는 자는 하나님의 측량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것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소유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은 앞으로 전진이냐? 아니면 제자리걸음이냐의 두 길이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전진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그 열매가 30배로, 60배로, 100배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나 답보상태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은 발전이 없고 세속적인 신앙으로 전락해 버릴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많은 것을 가진 자가 되어야 합니다. 기도하는 생활을 가져야 하며, 봉사하는 생활을 가져야 하며, 구제하는 생활을 가져야 합니다. 이 같은 그리스도인의 소유는 하나님으로부터 더 좋은 것을 받을 것입니다. 더 풍성한 은혜, 더 놀라운 축복, 더 즐거운 기쁨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이 없는 사람은 그나마도 그가 가지고 있는 그 약간의 은혜마저, 평강마저, 축복마저 걷어 가시는 것입니다.

결 론 : 우리는 우리의 복음의 빛을 동경 위해 두고 그 빛을 사면에 힘있게 비추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조심스럽게 듣고 그 말씀을 따른 생활을 통하여 더 많이 받는 축복된 생애를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 25 ≈ 하나님 나라의 성장 과정

(본문 : 마가복음 4 : 26 - 29)

서 론 : 씨뿌리는 비유의 말씀을 마치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그 말씀의 씨앗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들어가서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가에 대한 신비적인 역사에 대하여 또 다른 비유로 설명해 주십니다. 이 비유는 두 가지 뜻을 함유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들 마음속에 떨어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그 마음속에 이루어지는 심령의 천국에 대한 것이요, 다른 하나는 이 복음의 씨앗이 이 세상에 떨어진 후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추수의 계절을 의미해 주는 교훈으로 주님이 재림하실 때 이 땅위에서 알곡을 추수가 있을 것임을 암시해 주고 있기도 합니다.

1. 하나님의 나라와 땅에 뿌려진 씨앗

예수님은 씨앗을 하나님의 말씀 곧 복음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씨를 복음이라고 하면 사람은 그 복음을 전하는 전도인을 의미합니다. 땅이란 좀 전에 주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사람들의 마음을 가리킵니다.

(1) 씨를 뿌린 땅이란 열매를 맺을 만한 좋은 땅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 배와 육십 배와 백 배가되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4:8).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만이 충실한 결실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복음을 받을 수 있는 인간의 책임을 의미합니다.

(2)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랐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씨앗이 떨어진 밭에서의 성장 과정을 가르쳐 주시려는데 있습니다.

① 먼저 복음의 씨앗이 떨어져야 합니다. 이씨는 물론 영생의 씨앗입니다. 마치 겨자씨처럼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자신에게도 다른 이에게도 발견되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구원과 영생과 천국의 완전한 생명이 들어가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성장은 바로 이것이 자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② 이 씨는 반드시 자라납니다. 겨자씨가 가장 작은 씨앗이지만 그것이 땅에 떨어진 후에는 큰 나무를 이루는 것처럼 복음의 씨앗은 그 떨어진 밭에서 결실을 하는데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을 온전히 이루는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바울은 이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롬7:4).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21:43). 이 씨가 자란다는 말은 그 자라남이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씨앗 자체에 있는 능력으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빌1:6).

③ 이 씨는 사람이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자라난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하나님 나라의 성장은 점진적이요 계속적임을 의미해 줍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급격한 완성품이 아닙니다. 사람에게 복음이 들어갔다고 그 즉시로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그로부터 찾으려고 한다면 잘못된 생각입니다. 복음의 씨앗을 받은 사람의 성장은 확실합니다. 그러나 그 성장은 결코 당장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인 점진적 과정이 따르는 법입니다. 마치 어린아이들의 자라남과 같은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에게는 하나에 온전한 인격을 이루는 생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인격을 완성하기까지는 계속적이고도 점진적인 성장 과정이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로부터 어른들의 사고력을 바랄 수 없는 것처럼 어린아이 같은 그리스인들로부터 그리스도인의 충만한 분량의 결실을 바랄 수는 없는 것입니다.

② 그 자라남의 과정에서 어떻게된 것을 알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씨앗의 신비적인 능력을 가리켜 주고 있습니다. 농부들이 밭에 뿌린 씨앗은 신비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농부가 밭에 뿌리는 씨앗은 자연의 비밀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비밀을 농부들은 모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은 하나님의 영적 비밀을 지니고 있습니다. 인간은 그 말씀의 영 적 활동상을 모릅니다. 그러나 그 말씀은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명령대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 명을 땅에 보내시니 그 말씀에 속히 달리는 도다”고 말씀했습니다(시147:15). 씨에 농부로부터 아무런 능력이 들어가지 아니했지만 씨앗 자체의 신비적인 능력에 의하여 자라며 결실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된 것을 알지 못하지만 자라서 열매를 맺는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같은 말씀의 신비적인 역사에 대하여 예수님은 바람의 원리를 예로 들었습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3:8).

2. 땅이 열매를 맺는 순서

이 비유에서 예수님은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고 하셨습니다.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는 일은 그 원인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땅에 떨어진 씨앗에 있는 것입니다.

(1) 처음에는 싹이라고 하셨습니다. 씨가 처음에 땅을 헤치고 머리를 내밀 때 처음부터 온몸을 드러내 놓는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 나오는 것은 싹입니다. 우리가 싹을 보는 것만으로는 결실의 가능성은 보이지만 그 싹으로부터 당장에 열매를 딸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 싹에서 풍성한 열매를 기대하기 때문에 때로는 크게 실망할 때도 있습니다. 싹은 연약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처음 받아들인 사람들을 가리켜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2) 다음에는 이삭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삭은 열매를 맺는 일에 있어서 반드시 있어야 기초적인 가지가 되는 것입니다. 모든 열매는 싹에서 맺는 것이 아니라 이삭에서 맺게되는 것입니다. 복음의 씨앗이 좋은 땅에 떨어졌다면 싹이 나온 후 이삭으로 성장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삭이 다시 성장하여 열매를 맺는 자리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싹이 돋아나면 오랜 기간 잘 가꾸고 다듬어 그 싹이 줄기차게 잘 자라나서 열매를 맺을 만한 이삭의 자리에까지 가꾸어 나가야 합니다. 이 이삭이 아래로는 깊은 뿌리를 내리고 위로는 점점 뻗어나며 옆으로는 많은 가지들을 처서 풍성한 결실을 걷을 수 있도록 성장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3) 다음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고 하셨습니다. 곡식이란 ‘시토스’로 알곡이란 뜻입니다. 충실하다는 말은 가득하다, 채우다에서 나온 말로 ‘프레레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열매를 원하시되 충실한 열매, 가득 채운 알곡을 기뻐하십니다. 열매를 보고 그 나무를 안다고 하신 말씀은 충실하게 맺은 알곡을 보면 그에게서 이 같은 결실을 가져오게 한 씨앗이 어떤 씨앗인지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3.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열매가 익으면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말씀하신 추수 때란 종말적인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복음의 씨의 비유를 개인의 신앙성장의 과정을 설명하심과 아울러 또한 이 땅위에서의 복음의 결실과 연결시켰다는 사실을 이 말씀을 통하여 짐작케 합니다. 열매가 익는다는 말씀은 복음의 땅 끝까지 전파되어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원의 수효가 다 채워 진 사실을 가리킨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그때 이 백성들 알곡으로 추수하시려고 다시 오실 것입니다. 주 재림의 목적이 악인에 대한 심판에 있다기보다 그의 백성들을 알곡으로 추수하시려고 다시 오실 것입니다.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마3:11-12, 계14:15).

결 론 : 땅에 떨어진 씨앗은 반드시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는 그 열매를 맺는 과정을 일일이 관찰하거나 살펴볼 수는 없지만 싹이 이삭으로, 이삭에서 충실한 알곡으로 결실을 맺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른 비유에서 이 기간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3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 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

≈ 26 ≈ 겨자씨에 비유된 천국

(본문 : 마가복음 4 : 30 - 35)

서 론 : 예수님은 하나님나라에 관한 교훈에서 계속적인 비유로써 말씀하셨는데 이번에는 겨자씨의 자라나는 모습을 하나님의 나라와 비교하시면서 강론 하셨습니다. 모든 씨앗이 작지만 그 중에서도 더 작은 씨앗이 바로 겨자씨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 씨앗의 크기에 비하여 그 결실은 엄청나게 크기 때문에 이 비유는 복음이 세상에 나타내는 성격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모든 나물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니 그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 이 비유는 복음의 능력을 가리킨다.

어느 목사님이 외국에서 돌아오는 길에 겨자씨 얼마를 종이에 싸서 조심스럽게 가지고 왔습니다. 교회 성도들에게 그 겨자씨를 보여 주면서 실물 교육을 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성도들이 그 겨자씨를 보려고 종이에 쌓여 있는 겨자씨를 눈 가까이 가지고 갔습니다. 너무 작아 잘 안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코에서 나오는 숨결에 그만 그 씨앗이 날려가 아무 것도 구경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처럼 겨자씨는 미미하고 작은 존재입니다.

왜 하나님의 나라를 이처럼 겨자씨 같은 작은 존재로 비유하신 것인가? 그것은 복음이 사람들이 보기에 심히 미미한 존재로 인식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복음의 결과가 엄청난 결실을 가져온다는 사실에 대하여 아무도 모르고 있습니다. 이처럼 인식되고 있는 복음이 어떻게 큰 나무를 이루는가에 대하여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비록 복음이 매우 작은 것으로 보여지지만 겨자씨 안에 미지의 생명력이 있어 그토록 큰 나무를 형성하는 것처럼 복음 안에는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신비적인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복음을 볼 때 미미한 것으로 판단합니다. 마치 겨자씨처럼 작은 것으로 판단해 버립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고전1:18). 예수님을 피고로 심문했던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었지만 그는 이에 대하여 대단스럽게 여기지 아니했습니다. 바울을 심문하고 있었던 베스도는 크게 소리 질러 말하기를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고 했습니다(행26:24).

그러나 이 복음에는 우리가 알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습니다. 이 능력으로 하나님은 죄인을 구원하십니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롬1:16). 하나님은 복음으로만 죄인들을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은 율법에 있는 것이 아니요, 인간의 공로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겨자씨처럼 보는 복음에 이 구원의 능력을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시고 오직 복음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복음에는 사람을 의롭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습니다. 사람은 율법으로도 선행으로도 의로워 질 수 없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롬3:10). 그 어떤 방법으로도 의를 얻을 수 없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의를 주시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그 길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시는 언약인데 이 언약이 예수 그리스를 믿는 믿음으로 나타났습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롬3:21-22). 이 믿음이 복음입니다. 복음에는 죄인들이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누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영접하는 자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고 하셨습니다(요1:12-13).

2. 이 비유는 신앙의 성장을 말해 준다.

겨자씨는 작지만 땅에 심겨진 후에는 자라나서 심히 커집니다. 심령의 땅에 떨어져 심겨진 복음의 씨앗은 처음에 마치 겨자씨 모양 지극히 작은 것이지만 그 씨앗은 놀랍게 자라나서 크나큰 나무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생명의 능력이 있습니다. 이 능력이 우리들의 신앙을 성장케 하는 것입니다.

(1) 씨앗은 심는 일이 중요합니다. 심지 않은 씨앗은 한 알 그대로 있을 뿐입니다. 씨앗은 땅에 심겨질 때 자라나서 열매를 맺는 것처럼 복음의 씨앗 역시 심는 일이 중요합니다. 이 씨를 심는 밭이란 사람의 심령입니다. 베드로에게 내가 너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하신 말씀은 바로 이 복음의 씨를 뿌리는 전도자의 사명을 준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이 씨앗을 뿌리는 일로 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일이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했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보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요 함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롬10:14-15).

(2) 심겨진 씨앗은 반드시 성장해야 합니다. 만약 땅에 씨앗이 심겨진 후에 자라나지 못한다면 아무 결실도 바라볼 것이 없습니다. 심령에 떨어진 복음의 씨앗이 자라나지 못하면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씨앗이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비결에 대 해 이처럼 말씀해 주셨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하셨습니다(요112:24). 죽는다는 말은 육신의 생각을 죽게 하는 일을 말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게 합니다. 육신의 사람은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없습니다. 열매를 맺으려면 영에 속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고 했습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고 하셨습니다(갈6:8). 죄는 영적 성장의 장애물이기 때문에 언제나 회개로 그 심령을 깨끗하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과 육이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3. 이 비유는 하나님의 나라에 확장을 말해 준다.

이 겨자씨의 비유는 하나님의 나라로 표현된 교회의 부흥을 의미해 주기도 합니다. 처음에 복음은 단 한사람에 위하여 심겨졌습니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나사렛 예수란 청년에 의하여 갈릴리로부터 전파된 것입니다. 이 복음은 또한 주님의 12제자들에 의해 뿌려졌습니다. 처음에 예루살렘에 있는 마가의 다락방에 떨어진 성령의 불이 시발점이 되어 온 세계에 전파되어 오늘날의 교회를 이루게된 것입니다.

한국 교회의 경우를 보아도 처음에 한 겨자씨 같은 지극히 작은 복음의 활동으로 시작된 것이 오늘날 이처럼 세계 선교에 전초 기지가된 것입니다. 서상륜에 의하여 세워진 소래 교회가 우리 한국 교회에 뿌리를 이루었습니다. 토마스 목사가 대동강변에 뿌린 순교의 피는 적었지만 한국 교회 의 큰 부흥의 밑거름이 된 것입니다.

개 교회를 살펴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 전파의 사명을 받은 한두 사람의 피나는 노력으로 세워진 교회들이 오늘날 말할 수 없이 큰 교회로 성장하여 한국 교회는 물론 세계 교회를 향하여 복음 전파의 높은 기치를 들고 활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 론 :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나물보다 커 지며 큰 가지를 내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비유는 하나님의 교회의 방주적인 사명을 가리킨 것입니다. 성장한 나무에는 새들이 모이는 것처럼 하나님의 교회는 뭇 심령들이 깃들여야 합니다. 그늘에 깃들인다는 말씀은 영혼의 안식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마11:28). 우리는 복음의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복음은 누구에게나 영생의 열매를 맺게 합니다. 그것은 그 안에 하나님의 위대한 생명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능력 있는 복음이 내 마음속에서 나를 지배하고 내 마음을 주장하므로 내 심령을 새롭게 하며 내 인생을 새롭게 하도록 해야 합니다.

≈ 27 ≈ 어찌 믿음이 없느냐

(본문 : 마가복음 4 : 36 - 41)

서 론 : 고물에서 주무시는 예수님을 그대로 배에 태우고 바다를 건너가던 제자들이 큰 풍랑을 만났습니다. 그들이 타고 있는 배에는 물이 들어찼으며 배가 침몰 직전에서 위험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배를 풍랑에서 건지기 위해 힘껏 노력했으나 힘에 겨워 사태가 악화되자 아우성을 치면서 수라장을 이루었습니다. 그들이 고물에서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우면서 살려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이때에 예수님은 바람과 바다를 꾸짖어 잠잠하게 하시고 제자들을 향하여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면서 나무라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인생 항해에 커다란 교훈을 주는 사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1. 저편으로 건너가자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에 대한 여러 가지 비유의 말씀을 교훈으로 주시고 그곳을 떠나시기를 명하셨습니다.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제자들에게 명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과 저편으로 가는 동안 일어난 사건들을 우리 인생 항해에 교훈으로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

(1) 저편이란 그리스도인의 소망을 말해 줍니다. 이편은 떠들썩한 세상입니다. 많은 군중들이 아우성치는 곳입니다.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생존경쟁으로 싸우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이 편은 우리의 소망이 될 수 없습니다. 저편이란 우리가 달려갈 곳, 우리의 소망의 땅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저편을 바라보는 생활을 해나가야 합니다. 저편을 바라보는 생활은 소망의 생활이지만 이편에만 집착하는 생활은 세상적인 생활입니다. 이 같은 생활은 이 세상에 소망을 둔 세상 사람들이 걸어가야 할 생활이요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그의 인도하심을 바라는 사람들에게는 합당치 못한 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노아의 시대의 사람들, 롯의 시대의 사람들이 이처럼 이편만 바라보고 이편에만 집착하는 생활을 하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으며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든 날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오듯하여 저희를 멸하였느니라 인자의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고 하셨습니다(눅17:13-14). 넓은 길은 가기는 좋지만 멸망의 길입니다. 육신대로 살아온 지난날의 생활에서 벗어나 영으로 육의 생각을 죽이는 새로운 생활로 들어가야 합니다.

(3) 저편은 미지수이기 때문에 믿음이 필요합니다. 저편을 향해 노를 저가든 제자들에게 갑자기 광풍이 불어 왔습니다. 물이 배에 가득 찼습니다. 그들은 심한 위험을 느껴 죽는 줄로까지 알았습니다. 항해에는 위험이 따르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이 소망을 바라보고 우리의 인생 길을 걸어가는 일은 위험한 항해와 같습니다. 큰 광풍이 일어나는 것처럼 크나큰 시험이 오기도 합니다. 무서운 광란이 일어나는 것처럼 환난을 만날 때도 있습니다. 믿음이 없다면 중도에 파산이 되거나 되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나가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다”고 했습니다(히11:8). 그러므로 땅엣 것을 생각하는 사람은 가지 못합니다.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고 하셨습니다(골3:2). 안일을 좋아하는 사람은 갈 수 없습니다.

2. 광풍을 만난 제자들

제자들이 저편을 향하여 출발한지 얼마 안되었을 때 큰 광풍이 일어나 물결이 배에 부딪혀 물이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떠나는 길이라 이 같은 어려움은 뜻밖이었습니다. 그저 순조롭게 갈 줄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현상이 일어났으니 광풍을 만나 생명의 위험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1) 이 광풍은 믿음의 시련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육신적 생활을 벗고 영적 생활에 들어가려면 믿음의 시련이 필요합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약1:2-4).

(2) 이 광풍은 그리스도인의 가는 길에 만나는 환난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길에도 환난이 있습니다. 환난이 따르지 않는 인생들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자신에게 찾아오는 환난의 짐을 지고 그의 생애를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빌1:29).

(3) 이 광풍은 그리스인들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징계입니다. 징계 없이 성장하는 자녀가 없는 것처럼 하나님은 그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징계를 내리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히12:7-12). 하나님의 징계는 그 징계를 받을 그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지만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는다고 하신 것입니다.

3. 깨신 예수님

이 같은 큰 광풍의 위험 속에서 제자들은 지혜롭지 못한 행동을 했습니다. 그들은 광풍으로 죽게 되어서야 비로소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운 것입니다.

(1) 우리 생애에 풍랑을 만났을 때는 주님을 깨워야 합니다. 어려움을 만난 그리스인들이 그 어려움 속에서 스스로 헤어 나오기 위하여 인간적인 방법으로 노력하는 일은 무의미하고 위험한 일입니다. 주님께 간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들이 간구하기 전까지는 주무시고 계십니다.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우는 일이 간구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주무시는 예수님을 빨리 깨워야 하는 것처럼 재빨리 간구해야 합니다. 어려움을 당할 때 도움의 간구를 올려야 하는 것입니다. 죄를 범했을 때에도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간구는 늦을수록 받는 피해가 크며 받는 어려움이 큽니다.

(2) 잠에서 깨신 예수님은 잠잠하라 고요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우리가 고난을 당하는 것을 우리 주님은 기쁘게 여기지 아니하십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많은 고난을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당하고 있는 고난의 어려움을 아십니다. 그는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분이라고 하셨습니다(히4:15). 잠에서 깨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불쌍히 보시고 바다와 바람을 꾸짖어 이르시기를 “잠잠하라 고요하라”고 명하심에 아주 잠잠해졌다고 했습니다.

결 론 : 배를 큰 풍랑의 위기에서 구해 주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나무라셨습니다. “어찌하여 믿음이 없느냐” 이 말씀은 예수님께 대한 의지를 의미합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의지했었다면 이 같은 두려움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권능을 알지 못했습니다. 믿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에게는 능치 못하심이 없다고 하는 믿음이 그들에게 있었더라면 두려움 없이 주무시는 예수님을 즉시 깨웠을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언제나 나와 함께 계심을 알아야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의지하는 믿음을 가져야 아니다. 우리는 언제나 주님께 간구하여 그의 도우심을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5장

◆ 밤중소리 01-08 | VIEW : 695

28) 군대 귀신들린 청년 (1절 ~ 17절)

29) 네 친속에게 고하라 (18절~20절) 

30)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21절~43절)

31) 혈루증을 치료받은 한 여인의 믿음 (25절 ~ 34절) 


≈ 28 ≈ 군대 귀신 들린 청년

(본문 : 마가복음 5 : 1 - 17)


서 론 :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이 살고 있는 한 마을에 이르렀습니다. 예수님이 배에서 올라오실 때 무덤에서 나온 더러운 귀신 들린 한 청년과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청년은 어떤 연고인지는 모르지만 많은 군대 귀신들에게 사로잡혀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청년을 지배하고 있었던 귀신들과의 대화와 그의 권능의 말씀을 통해서 그 귀신을 내어쫓으심으로 영적인 세계의 여러 가지 감추어진 비밀을 들어내 놓으셨습니다.


1. 귀신들린 청년의 등장

예수님은 이 세상에 인간을 괴롭히는 귀신의 존재가 있다고 하는 사실을 여러 곳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거라사 땅에 살아가고 있는 이 청년의 경우는 대단히 심한 상태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 더러운 귀신이라고 했습니다. 귀신과 마귀, 타락한 천사들 간에는 서로 어떤 차이점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한 논쟁은 오래 전부터 여러 가지 모양으로 전개되어 왔습니다. 근래에 와서 어떤 사람들은 귀신이란 마귀나 타락한 천사들과 동일하게 볼 것이 아니라 죽은 사람의 영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기고 있습니다. 만일 죽은 사람들의 영혼들이 살아서 하나님을 대적하며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도전하고 살아 있는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다면 이야말로 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고 하신 말씀을 믿기 때문입니다(히9:27). 죽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계속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라면 논리가 맞지 않는 것입니다. 귀신이라 말이 원어에는 ‘아카다르토스 프뉴마’ 로 나와 있습니다. 이것은 더러운 혹은 부정한 영이란 뜻입니다. 성경에는 귀신이란 말이 ‘다이모니온’ 이런 말로 나오는데 이곳에서는 또 다른 표현으로 ‘프뉴마’로 나와 있는 것입니다. ‘프뉴마’란 영적인 실체를 가리킬 때 사용하는 말인데 성령도 이 ‘프뉴마’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귀신이란 죽은 사람의 영혼을 말한 것이 아니요 원래부터의 영적인 존재를 의미하는 것으로 마귀와 함께 타락한 하늘에 영적인 피조물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2) 이 귀신은 사람 속에 들어가 그 사람을 괴롭히는 존재라고 했습니다. 이 청년은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라고 했는데, 들렸다는 말은 그 귀신이 이 청년의 속에 들어가 거주하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악령의 거처에 대하여 성경에서는 몇까지로 알려 주고 있습니다. 하늘이라고 했습니다(계12:7-9). 이곳은 잠정적으로 만들어진 악령들의 왕국입니다. 이 왕국은 장차 주님의 재림의 날에 미가엘 천사가 이끄는 하늘에 군대에 의하여 파멸되고 말 것입니다. 또 어떤 악의 영은 어두운 구덩이로 비유된 지옥에 던져 넣었다고 했습니다(벧후2:4). 그리고 이 악한 영들은 사람 속에 들어가 그의 거처를 삼기도 합니다(막7:26, 눅8:27). 이 악한 영들은 또한 짐승 속에 들어가서 활동하기도 합니다(창3:1). 귀신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며, 그리스도의 구원의 역사를 훼방하는 자며, 세상에 질병과 재앙을 가져다주는 존재이기 때문에 귀신에 사로잡히면 극심한 괴로움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킨 것 뿐이라”고 하셨습니다(요10:10). 이 악의 영들이야말로 인간의 생명을 노략질하는 도적입니다.

(3) 이것은 인간을 지배하는 사탄의 권세를 보여 줍니다. 이 청년은 우리 인간의 죄를 상징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청년을 지배하고 있는 귀신의 존재는 인간을 죄로 지배하고 짓밟고 불행의 구렁텅이로 이끄는 지옥의 사자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극도로 허약하여 그의 의지력이 상실되고 죄나 어떤 정신적 충격으로 인한 분열 상태에 이르게 될 때 이 악한 영은 사람들 속에 들어가 거주하면서 그의 육과 영을 지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인간이 건강하고 의지력이 강하다고 해도 이 악의 영들은 우리들의 주변에서 죄로 유인하고 악으로 유혹하며 의심을 심어주며 죄악을 행하도록 충동하는 등 여러 가지 영적 감화를 주는 것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영적 생활에 등한하며 기도생활에 나태하며 순종의 생활에 게으를 때 강한 공격을 시도합니다. 성경에서는 이 같은 악의 영을 대적하기 위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하셨습니다((엡6:11-17).

이 악의 영은 또한 우리 인간에게 고통을 줍니다. 옛날에 욥이 받은 고통도 이 악의 영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악의 영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결단코 하나님의 백성들을 시험하거나 건드릴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그리스도인들은 용기를 가지고 악한 영을 대적해야 합니다(벧전5:9).


2. 귀신의 간구

귀신들린 청년이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왔다고 했습니다. 이 악한 영의 태도는 제법 온유하고 겸손한 듯했습니다. 그는 절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큰소리로 간구했습니다. 그는 이 간구의 서두에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라고 외쳐댔습니다. 그리고 그는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컨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라고 간구했습니다.

(1) 여기서 귀신들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알고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 하는 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고 말했습니다(약2:19). 사탄이나 악령들은 예수가 하나님이신 줄 알기는 하지만 그의 이름을 믿고 구원 얻을 수는 없습니다. 영적인 피조물들은 한 번 타락하면 회개하여 회복되는 하나님의 은총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늘의 천사보다 얼마나 더 좋은 지위를 가진 존재인가에 대하여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천사들은 단순한 피조물들입니다. 그리고 그들도 타락할 여지가 있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피로 값 주고 당신의 아들로 삼으신 귀한 존재들입니다. 지금 하늘에 있는 천군 천사들은 아무런 뜻이나 의미도 없이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구속에 대한 찬양을 드리고 있지만 우리는 장차 그곳에 들어가 우리들이 받은 구속의 은혜에 대하여 영원히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2) 귀신이 예수께 간구했다고 했습니다. 악한 영이라도 하나님께 간구한다고 하는 사실에 대하여 성경에서는 긍정적으로 말씀해 줍니다. 음부에 들어간 자색 옷 입은 부자의 영도 아브라함을 향하여 간구했다고 했습니다(눅16:22-23). 욥을 괴롭힌 사탄도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욥1:10-11). 그러나 이 같은 악한 영들의 기도는 괴로움에서 나오는 울부짖음에 불과합니다. 응답이 없는 기도입니다.

이 청년의 간구에 예수님이 하락하셨다는 것은 응답이 아닙니다. 아직 악령을 무저갱 속에 놓으실 때가 아니시기 때문입니다(20:10). 그리고 아브라함의 자손인 잃어버린 양을 악한 영의 권세에서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믿음이 없는 거라시인에게 경종으로 삼기 위해서입니다.

결 론 : 이 청년에게 들어가 있었던 귀신은 2천 마리나 되는 떼 귀신이었습니다. 귀신이 무리를 이루고 있어 군대란 이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청년을 불쌍히 보시고 그 귀신에게 명하여 이 청년에게서 나오라고 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권능은 군대를 이룬 귀신의 떼를 그 청년으로부터 내쫓으시어 사탄의 권세에서 이 청년을 건지셨습니다. 그러나 이 광경을 목격한 거라사인들은 오히려 그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예수님을 그 마을로부터 쫓아냈습니다. 죄와 사망의 사슬에서 건져 주실 분은 오지 이 예수이심을 알고 예수님을 영접하고 생명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 29 ≈ 네 친속에게 고하라

(본문 : 마가복음 5 : 18 - 20)


서 론 : 군대 귀신이 들렸던 이 사람은 자기를 고쳐주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그의 생애를 주님을 위하여 바칠 것을 각오하고 주님과 함께 있기를 간구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가 따라오는 것을 금하시고 오히려 집으로 돌아가서 주께서 행하신 이 큰일을 네 친속에게 고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각자가 각기 은혜를 받은 대로 어떻게 행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는 어떤 사명을 맡던지 주님이 나에게 맡기신 사명이 무엇인가를 알아 맡은 일에 충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1. 함께 있기를 허락지 아니하심

은혜를 받은 사람은 복음을 위하여 자신이 할 일이 있습니다. 귀신을 좇은 그 사람은 주님과 함께 있기를 원했지만 그에게 복음을 위하여 더 좋은 사명을 주시려고 함께 있기를 원하는 그의 간구를 물리치셨습니다.

(1) 누구나 다 사도의 사명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귀신을 내어쫓고 온전해진 사람은 크나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는 예수님 곁에 그의 제자들이 둘려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신도 그들 중에 하나가 되어 주님을 돕고 싶었습니다. 그는 생각하기를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이 받은 은혜를 갚는 길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제자가 되는 사명만이 은혜를 보답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이루는데 있어서, 주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 여러 가지 사명의 직분들이 있습니다. 교회를 위해 세우신 직분은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하거나 경히 여길 것이 없습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안을 하는 것이라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지 자겠느냐 다 방안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 너희는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고전12:27-31).

(2) 각기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주의 일에 헌신해야 합니다. 자기에게 주신 믿음의 분량을 지나쳐 봉사한다거나 주의 일을 하면 분쟁과 다툼이 생깁니다. 영적 교만이 이 같은 곳에서 생기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복음의 거치는 돌이 되며 평화를 해쳐서 교회의 질서가 파괴되어 버립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롬12:3).

(3) 주의 일을 할 수 있는 은사는 하나님이 주십니다. 자신이 어떤 재간이나 특별한 특기를 가졌다고 해서 그것이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은사인 줄로 여겨서는 안됩니다. 마술사가 예수를 믿은 후, 그 마술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려고 한다면 이것은 대단히 잘못된 사고 방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모든 일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시느니라”고 했습니다(고전12:11).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에서 교회를 위해 봉사케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영적으로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에게 주신 은사를 분별하여 유용하고 덕 있게 사용해야 합니다. 자신의 원치 않는다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닐 것이라고 판단해 버리면 안됩니다. 내가 원치 아니하고 내가 원하는 방법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통하여 더 좋은 은사로 활용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은사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대로 복음을 위하여 자신에게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쓰는 일입니다.


2. 내에 친속에게 고하라

예수님은 군대 귀신이 나간 그 청년에게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친속에게 고하라”고 하시는 명을 받았습니다. 복음을 위하여 이 사람이 받은 사명은 자기 친속에게 가서 주께서 자기에게 행하신 크신 일을 고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이 사명을 잘 감당하므로 큰 결실을 얻었습니다.

(1) 복음은 적은 것으로부터 시발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겨자씨로 비유된 적은 씨앗이 큰 나무를 이룬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복음에 대한 원대한 비전을 가져야겠지만 첫 걸음은 겨자씨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성령의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행1:8). 오늘날 땅 끝까지 전파된 복음은 그 시발점이 예루살렘입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자기의 친속에게 고한 결과 어떤 성과를 거두었는가에 대하여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신 것을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기이히 여기더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감옥의 한 간수에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했습니다(행16:31). 한사람의 믿음이 그 가정을 구원하는 것처럼 복음은 놀랍게 그 세력이 확산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롬1:16).

(2) 친속이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제일 좋은 대상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친속은 무엇보다도 나에 대하여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군대 귀신 들렸던 이 청년의 경우만 해도 그 집안 친속들은 이미 그 같은 증상에 대하여 소상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찾아가 자신의 온전해진 몸을 보여 줄 때 무엇보다도 신임을 줄 수 있습니다. 이 청년과 같은 병은 사람의 힘이나 의사의 의술로 어찌할 수 없는 병입니다. 그런 그가 온전한 몸으로 돌아와서 주께서 자기에게 행하신 크신 일을 전할 때 그들에게 믿음을 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명심할 일은 나에게 아무런 변화된 모습이 없을 때는 어떤 효과도 거둘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지만 자신이 변하지 못하므로 인하여 복음의 거치는 돌이 되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이 청년은 분명히 자신의 변화된 확실한 모습을 친속들에게 보여 줄 수 있었기 때문에 전도의 결실을 가져 올 수 있었습니다.

3. 데가볼리에 복음이 전파된 결과

군대 귀신 들렸던 이 청년은 주의 말씀에 즉각 순종하여 데가볼리에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자기 친속을 찾아다니며 주께서 자기에게 행하신 크신 행사를 전파했습니다. 그가 자기 친속에게 나타나 주님이 자기에게 행하신 일에 대하여 간증하는 일은 참으로 효과적인 복음 전파의 방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은 받은 은혜가 크면 클 수록 감사가 크며 헌신이 크며 증거가 큰 것입니다. 그가 자기 친속에게 전한 복음은 어느 사이에 데가볼리 전 지역에 전파되어 모든 사람들로 기이히 여기게 만든 것입니다.

전파한다는 말은 ‘케륏소’로 포고자 또는 전령이 된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복음을 전파하는 자는 하나님의 전령입니다. 전령이라는 말은 군대에서 중대한 작전상의 공문을 전달하는 사명자를 가리킵니다. 그는 자신의 생명이 위험할지라도 반드시 그 공문을 목적지에 전달해야 합니다. 복음도 이처럼 이것을 행하지 아니하면 자신에게 화가 올 것이라고 하는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전달해야 할 사람들에게 전달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기이히 여겼다는 말은 그의 온전해 진 몸을 보고 신기하게 여겼다는 말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가 이전보다 영적으로 무엇인가 새롭게 변화 받은 사실을 바라보고 많은 흥미를 가지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는 자신이 받은 사단에서의 놓임과 주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로 인하여 새사람으로 변화 받은 모습으로 친속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그의 증거는 성령의 권능으로 말미암은 것이었기 때문에 믿음과 확신과 뜨거운 열심히 따랐습니다.

결 론 : 데가볼리에 가서 주의 복음을 전파한 그는 참으로 훌륭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된 것입니다. 증인이란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 받은 사실에 대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있는 그대로를 전달하면 되는 것입니다. 과장도 필요 없고 허식도 필요 없으며 다만 자기가 받은 은혜를 그대로 전하면 그리스도의 훌륭한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잠잠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들이 주님께 받은 은혜야말로 귀신을 내쫓은 그 사람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 같은 주님의 은혜에 잠잠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친속들에게 전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기이히 여기도록 널리 전파해야 합니다.

≈ 30 ≈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

(본문 : 마가복음 5 : 21 - 43)

서 론 : 죽게 된 딸의 구원을 위하여 ‘야이로’라고 하는 회당장이 예수님께 찾아와 많이 간구했습니다. 예수님이 그의 간구를 들으시고 집으로 따라가실 때 그 딸이 죽었다는 전갈이 왔습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말할 것도 없고 예수님의 제자들까지도 실망했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릴 수 있었다면 죽지 않았을 것을! 못내 아쉬워했습니다. 그런데 이 때 예수님은 회당장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고. 이 말씀은 참으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딸이 죽고 절망에 쌓여 있는 이 야이로에게 이 말씀을 주셨다는 데 우리들에게 큰 위로와 소망을 주십니다.

1. 야이로의 믿음

야이로는 회당장이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안식일에 예배드리는 처소가 회당인데 이 회당의 관리책임자가 바로 회당장입니다. 회당장은 존경받는 직분이요 특히 야이로는 유대인들간에 신망이 두터운 사람입니다.

(1) 그가 문제를 안고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사람들에게는 그의 생애 동안에 문제점을 안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야이로의 인생에 찾아온 문제점은 집안에 하나밖에 없는 무남독녀 외동딸이 병으로 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문제점이 있을 때 이것을 해결하려면 해결해 줄만한 대상을 찾아가야 합니다. 야이로는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는 제대로 잘 찾아간 것입니다. 야이로 뿐 아니라 누구이든 문제가 있을 때 예수님을 찾아 나오는 인생은 잘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죄를 용서해 주는 권능이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질병을 고쳐 주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영생을 주시는 권능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간구하는 말을 응답해 줄 수 있는 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2) 야이로는 바른 기도의 자세를 가지고 간구했습니다. 그는 예수를 만난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응답 받으려면 예수를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은 진실하게 간구히는 자를 만나십니다(시145:18-20).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자를 만나십니다(잠8:17). 예수님은 자기에게 순종하는 자를 만나십니다(히5:9). 야이로는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리는 자세로 간구했습니다. 주님은 겸손한 자의 서원을 들으십니다(10:17). 주님께 불쌍히 여김을 받는 기도가 겸손한 기도입니다((눅18:13). 야이로는 많이 간구했습니다. 한두 번의 기도로 응답 여부를 결판 내려는 기도는 올바른 기도가 아닙니다. 기도에는 인내가 따라야 합니다. 끈질긴 계속적인 기도여야 합니다. 낙심하지 말고 응답 받을 때까지 그치지 아니하는 기도가 올바른 기도입니다. 야이로의 기도는 목적이 분명했습니다.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게 하소서”라고 간구한 것입니다. 목적이 분명치 않는 기도는 주언부언의 기도입니다. 간구는 하나의 요청입니다. 대상이나 목적이 없는 요청이 어디 있습니까?

(3) 이에 예수님이 그와 함께 가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야이로의 이 같은 간구에 움직이지 않으실 수 없었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야이로처럼 간절하고 목적이 분명하고 불쌍히 여기심을 원하는 기도라면 예수님의 마음이 뜨거워져서 응답해 주십니다(엘2:18). 야이로의 기도는 주님으로 하여금 움직이지 아니치 못할 능력의 기도였습니다. 그의 간구의 결과가 매우 아름답게 나와 있습니다. “이에 그와 함께 가실 새”라고 말씀했습니다.

2. 믿기만 하고 두려워 말라

예수님은 이제 야이로를 따라 그의 집으로 가시려는 길입니다. 큰 무리가 예수님을 따라가며 에워싸며 밀었기 때문에 행보가 느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직 말씀하실 때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왔다고 했습니다.

(1) 그들이 가지고 소식은 흉한 소식이었습니다. “당신 딸이 죽었사오니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이 소식은 야이로의 눈앞을 캄캄하게 만들었습니다. 딸이 죽을병에서 고침을 받을 것이라고 하는 그의 소망 이 완전히 살아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자기 옆에 계셨지만 야이로의 마음은 몹시 흔들렸습니다. 우리들의 신앙 생활 중에는 두려워해야 할 사건들이 생겨납니다. 더욱이 어떤 문제를 가지고 기도할 때 그 문제가 해결되기는 고사하고 더 악화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 많은 사람들은 당황합니다. 기도에 회의를 가집니다. 절망한 나머지 기도를 포기해 버립니다. 그러나 이 같은 흉한 소식을 접했을 때 그때 우리의 믿음의 자세가 정말로 요청됩니다.

(2) 이때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같은 말을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는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우리들이 만약 우리들 주변에서 일어나는 주위환경만을 바라본다면 실망할 일뿐입니다. 그때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이런 경우 주님이 무엇이라 말씀하시는가에 대해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두려워 말라고 하십니다. 야이로가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조건이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요는 예수님께서 이미 야이로의 간절한 간구를 들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라 지금 예수님은 야이로와 함께 가고 계십니다. 이런 경우, 우리들의 어느 것을 또 믿느냐가 문제가 됩니다. 환경을 믿느냐? 예수님의 말씀을 믿느냐? 하는 것입니다. 지금 자기 앞에 벌어진 현실 앞에 굴복하느냐? 아니면 하나님 말씀 앞에 굴복하느냐 어느 편이냐 하는 것입니다. 어느 것을 택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신앙의 깊이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권고하시는 말씀은 우리가 당하는 그 어떤 경우에도 결코 두려워하지 말하는 것입니다. 두려움은 언제나 우리에게 절망을 안겨 주며 하나님의 약속을 저버리게 하는 것입니다. 다음에 예수님은 믿기만 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미 그에게 응답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의 옆에 계십니다. 그를 의지하고 그의 말씀을 믿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믿음에서 나옵니다. 주님은 병을 고쳐 주실 때 언제나 “내 믿음대로 되라”고 하셨습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믿음 그 자체에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어떤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통해서 그 믿음대로 역사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믿음이 필요합니다.

(3) 예수님은 죽은 야이로의 딸에게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그의 집안에 들어가셔서 훤화함과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너희가 어찌하여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변에서 울고 있었던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 같은 말씀을 비웃었습니다. 죽은 사람에게 잔다고 말씀하신 일은 중대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죽은 사람은 다시 일어날 가망이 전혀 없지만 자는 사람은 얼마 안가 깨어 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인생의 주검을 잔다고 표현하심으로 주검의 개념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러면 주님은 왜 죽은 야이로의 딸을 잔다고 하셨습니까? 그 이유는 이 아이가 다시 살아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살 수 있는 사람을 보고 죽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자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지막 날, 주님의 명령에 의하여 다시 죽지 아니하는 부활의 몸으로 살아날 것이기 때문입니다(요5:28-29).

결 론 : 예수님은 그곳에 있는 믿음이 없는 사람들을 모두 내 보내시고 믿음의 사람들만 남기셨습니다. 믿음의 기도를 해야 할 곳에 불신적인 요소가 개입되면 기도에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야이로의 손을 잡고 “달리다굼”이라고 명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아람어인데 일어나라는 뜻입니다. 이 같은 명령을 하시자 죽었던 야이로의 딸이 일어났습니다. 이에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이 크게 놀라고 놀랐다고 했습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면 이처럼 크게 놀라운 일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 31 ≈ 혈루증 여인의 믿음

(본문 : 마가복음 5 : 25 - 34)

서 론 : 우리는 본문에서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고통을 받아온 한 여인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 여인은 아무런 방법으로도 자신의 병을 고치지 못했습니다. 마침내 그에게 병을 고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습니다. 이 여인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예수님께 찾아 나가 그의 그 두렵고 무서운 병을 고침 받았습니다. 의학상 혈루증은 유전으로 알려져 있으며 여자에게는 해당의 안 된다고 알고 있지만 그 당시에는 혈루중으로 진단된 변명이 없었으며 여자가 계속적으로 피를 흘리는 병으로 하나의 위험스러운 부인병 중의 하나였을 것입니다.

1. 이 여인의 절망적인 상태

이 여인은 그의 생애 중 위험한 고비를 맞이했습니다. 그가 앓고 있는 병은 그 당시 치료가 불가능한 절망적인 병으로 살 가망이 전혀 없는 병입니다.

(1) 이 여인은 12년간이나 이 병으로 고통을 받는 생애를 보냈습니다. 열 두 해란 결코 짧은 해가 아닙니다. 이 여인은 그 많은 세월 동안 삶의 보람을 상실한 채 투병하는 일에 전력을 썼습니다. 그가 병의 종이 되어 병으로 그의 인생이 사로잡힌 일은 마치 우리가 죄 중에 사로잡혀 그 죄로 인하여 우리의 인생을 망쳐 놓는 일과 같은 것입니다. 이 여인은 기진맥진한 인생의 고비에서 예수의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율법으로도 선행으로도 의롭게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2) 그의 모든 노력은 오히려 그에게 더 큰 괴로움만 안겨 주었습니다. 이 여인은 자신의 불행한 병을 고치기 위해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도 받았고 있는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였다”고 했습니다. 병을 고쳐줄 의원이 그에게 줄 수 있었던 것은 많은 괴로움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이 그들에게 의를 줄줄 알고 열심히 지켜 왔지만 율법이 그들에게 선사한 것이란 의가 아니라 정죄였습니다. 이 여인이 의원으로부터 받은 것은 치료가 아니라 괴로움이요 그 괴로움이 더욱 중하여진 일입니다. 결국 이 여인은 그가 가진 재산마저 다 허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세상에 있는 것으로 자신의 인생의 행복을 추구하거나 만족을 얻으려는 사람은 결과적으로 이로 말미암아 자신의 모든 것을 상실해 버린다는 사실을 발견하게될 것입니다.

2. 이 여인에게 찾아온 소망

이 여인이 구원받은 역사를 보면 그의 인생 중 가장 절망적인 상태에 있었을 때였습니다. 이 여인은 그의 생애에 가장 어려움에 처했을 때 새로운 인생길이 열렸습니다. 이처럼 죄인들이 신앙을 가지게 되는 시기는 그의 생애에 가장 어려움을 당한 결정적인 순간일 때가 많은 있습니다.

(1) 주님께는 절망적인 병이란 없습니다. 절망이란 인생에게는 위기지 만 이 절망이 예수님께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주님께는 모든 일에 능치 못하심이 없습니다. 그 여인이 그의 절망적인 인생의 절벽에서 예수님을 찾은 일은 그의 새로운 인생의 열리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그가 비록 늦게 주님을 찾아 나온 아쉬움은 있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그런 아쉬움 속에서 우리를 찾으시는 것입니다. 이 여인에게 그 같은 무서운 병이 주어지고 또한 예수님을 만나기까지 고침을 받지 못한 일은 그에게 다행한 일이었습니다. 이를 인하여 이 여인은 주님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2) 절망적인 그 시기가 주님을 찾을 절호의 기회입니다. 이 여인은 “더 중하여졌던 차에 예수의 소문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이 여인은 아마 그 이전에도 예수의 소문을 들었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때에는 예수의 소문이 그에게 절박하게 여겨지지 아니했을 것입니다. 아직도 돈이 있었고 찾아가야 할 의원이 있었고 아직도 기력이 남아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에게 예수의 소문이 복음으로 들려진 것은 자기 자신이 폐인처럼 되어 아무 쓸모 없는 존재가 된 후입니다. 더 이상은 어떻게 해볼 여망이 없었을 때였습니다. 여기서 예수의 소문을 들었다는 말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그를 믿었다는 것을 전제하는 말입니다. 물론 이 여인의 믿음은 병을 고침 받을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누구인가 이 가련한 여인에게 예수의 소문을 들려주었습니다. 이 여인에게 예수의 소문을 들려준 사람은 훌륭한 전도인의 사명을 다 이룬 사람입니다. 우리도 소망이 없어 자기 인생을 탄식하며 절망에 빠진 불행한 사람을 찾아가 예수의 소문을 들려주므로 그에게 인생의 새로운 소망을 가지도록 해야 합니다.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라고 말씀했습니다(롬10:14-15).

(3) 이 여인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 여인의 믿음은 초등단계의 믿음으로 예수님께서 자기의 병을 고쳐 주실 것이라고 하는 믿음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여인의 이 같은 믿음을 귀히 여기셨습니다.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녀는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얻는 구원의 믿음도 받았을 것입니다. 여기서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는 말은 ‘소조’란 말로 이 말은 영적인 사역에 쓰여질 때는 생명의 구원을 의미하지만 질병과 관계되었을 때에는 성함을 얻는다는 뜻으로 해석이 됩니다. “예수의 옷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니라”고 한 말씀 중에 성함을 얻으리라고 하는 말에도 ‘소조’라고 하는 같은 구원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막6:56).

3.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이 여인의 믿음은 자신의 손을 주님의 옷가에 대어도 나음을 얻을 것이다라는 믿음이었습니다. 이 같은 믿음은 큰 믿음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 치료받은 여러 가지 사실을 예수의 소문으로 들었을 때, 이 여인은 이 같은 믿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 무리 가운데 섞였습니다. 이런 이 여인의 결단은 대단한 모험이었습니다. 그녀는 지금 중병을 앓고 있는 처지입니다. 실의에 가득 차서 자리에서 일어설 기록조차 없는 여인입니다. 그런데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밖으로 나가 무리 가운데 섞였습니다. 주님을 찾아 만나야겠다는 결단이 이 여인으로 이처럼 큰 힘과 용기를 얻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 앞으로 나가려면 누워 있었던 그 자리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슬픔의 자리에서, 절망의 자리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일어난 사람은 이 여인처럼 예수를 만나려는 일념으로 어려운 난관을 헤쳐 나가야 합니다. 자기 앞에 거슬리는 모든 장애물을 무시하고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드디어 이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이 여인은 자기 믿음대로 자기 병이 나음을 곧 마음으로 느꼈습니다.

결 론 : 이때 예수님께서 자기 몸에서 능력이 나간 줄을 스스로 아셨다고 했습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라”고 하신 말씀처럼 믿음의 기도가 위대한 것은 그 기도를 통하여 주님의 능력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믿음은 주님으로부터 능력을 만들어 냅니다. 주님이 자기를 만진 사람을 찾으실 때 이 여인은 두려운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와 모든 사실을 고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을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면서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 지어다”라고 하시는 축복의 선언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절망 속에서, 역경 속에서 이 여인의 이 같은 믿음을 가지고 딛고 일어서야 합니다.


마가복음 6장

◆ 밤중소리 01-08 | VIEW : 738

32) 고향에서 배척 당하신 메시야 (1절~6절) 

33) 전도인의 지세 (7절~13절)

34) 세례 요한의 죽음 (14절~29절)

35) 무리를 불쌍히 보신 예수님 (30절~43절)

36)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다 (45절~46절)

37) 내니 두려워 말라 (47절~56절)


≈ 32 ≈ 고향에서 배척 당하신 메이야

(본문 : 마가복음 6 : 1 - 6)


서 론 :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지만 고향은 나사렛입니다. 그의 고향 방문은 개선 장군의 모습이 아니라 이상히 여김을 받는 바 되어 가장 환영 받으셔야 하실 분이 냉담한 대우를 받으시고 배척을 당하셨습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바라봄에 있어 그를 누구로 보느냐는 문제는 매우 중요합니다. 나사렛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너무 잘 알았으므로 목수의 아들로 보았고 요셉의 대를 이은 목수 예수로 보았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근본을 이처럼 그의 태어나신 가정이나 직업이나 환경에 결부시키면 예수는 메시야의 자리에 머무실 수 없었습니다. 나사렛 사람의 배척은 바로 이 같은 관점에서 예수를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1. 이런 권능이 어찜이뇨?

예수님은 그의 공생애 중에 고향으로 내려가신 일은 여러 번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고향으로 내려가셨습니다. 고향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시려는 의도에서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간 떨어져 있었던 가정도 살펴보실 겸 찾아가신 것입니다. 안식일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려서부터 안식일에는 부모나 형제들과 함께 회당의 예배에 참석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려서부터 매우 지혜로우셨으며 성경에도 능통하셨기 때문에 회당에서도 동리 사람들의 칭찬을 듣는 모범적인 청년이었습니다(눅2:52).

(1) 예수님이 회당에서 가르치셨다고 했습니다. 안식일에 회당에서 예배를 드리는 순서에는 두루마리로 된 성경을 회당장이 지적한 사람에게 읽도록 하고 또 그 사람으로 말씀을 강론할 수 있는 기회도 주었습니다. 그곳 회당장은 예수님이 여러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셨다는 소문을 들었고 또 자기도 예수님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를 지적하여 말씀을 강론하도록 배려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언제나 안식일이면 회당에 가셔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면서 강론을 하시곤 했습니다.

(2)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많은 사람이 놀랐다고 했습니다. 고향에 있는 이들이 놀란 것은 그 말씀에 위엄과 침범할 수 없는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서기관들이나 제사장들의 가르침과는 전혀 다른 면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심에 무리들이 그 가르침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고 하였습니다(마7:29). 그들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닌가?’ 이것은 아무래도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말하자면 정상적인 일이 아니라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가 그저 평범한 모습으로 고향에 돌아왔다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겠지만 그의 돌연한 변화는 환영 대신에 고향사람들의 이상히 여김을 받아 배척을 받게된 것입니다.

(3) 이 지혜와 이 권능이 어찜이뇨?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혜롭게 가르치셨습니다. 아직까지의 그들은 그같은 권위 있는 말씀을 들어본 일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그곳에서 병자들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는 권능도 행하셨습니다. 이런 것들이 그들의 눈에는 기이히 보인 것입니다. 만약 이 같은 권위 있는 말씀과 주의 권능을 고향이 아닌 다른 곳에서 행하셨다면 큰 환영을 받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사렛 사람들은 이런 일이 이상했던 것입니다.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누구나 이상스럽게 바라보게 됩니다.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뇨” 그들은 주님의 행하시는 모든 일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이처럼 지혜로운 말씀을 가르치시고 권능을 행하시는 예수님을 이상히 여긴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고 말하면서 예수를 배척했습니다. 예수님의 육신적인 근본에 대하여 그들은 너무나도 상세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메시야가 될 수도 없는 사람이요 뛰어난 지혜로 말씀을 가르칠 만한 위인도 못되고 더군다나 귀신을 쫓는 권능이나 병자들을 말씀으로 치료하시는 능력을 행할 수 있는 선지자일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눈앞에 나타난 이 예수는 너무나도 놀라운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런 일이 그들에게 수용되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마리아의 아들로 나온 것은 아버지 요셉이 이미 죽은 이후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목수가 아니냐고 말한 것은 예수님이 공생애에 들어가시기 전까지 이곳 나사렛 땅에서 목수 일을 하고 계셨음을 말해 줍니다.

(4) 사람들은 예수를 배척하는데 여러 가지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를 배척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영적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이 예수를 어떻게 판단하건 인간의 생각과 눈으로 바라본다면 그 사람은 얼마안가 예수를 떠나게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초두에서 예수님의 근원을 파헤치고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1:1). 예수님으로부터 사람의 모습만을 찾으려면 예수를 만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지만 동시에 하나님이십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기 때문입니다(요1:14). 예수로부터 하나님의 모습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은 결국은 사람이신 예수를 믿기 됩니다. 이들은 다만 예수를 훌륭한 인격자 예수, 인도주의자 예수, 위대한 사랑의 실천자 예수로 바라보고 존경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 예수를 알되 그의 근본이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되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사람이 오신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2.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으신 예수님

나사렛에서 배척받으신 예수님은 마음으로 깊이 탄식하셨습니다. “선지자가 자기의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고 하신 말씀에서 자기 친척들과 자기 집에서조차 배척 당하신 서글픈 사실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선지자가 자기 고향에서 존경을 받지 못한다는 말은 그 당시 널리 인용되어온 속담이었을 것입니다. 이 말씀의 뜻은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엄위가 있으며 능력과 권능을 행하는 데 자기 고향에서는 가까이서 오랫동안 너무 깊이 알고 있기 때문에 존경심을 가질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나사렛에서는 아무 것도 행하실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없는 곳에서는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권능은 믿는 자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아무 것도 받을 줄로 생각하지 말아야합니다.

그러나 그런 중에도 예수님이 위로를 받으신 일은 얼마간의 믿음의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쳐주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데교회가 전혀 소망이 없는 것으로 여기면 안됩니다. “그러나 사대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시리라”고 하셨습니다(계3:4). 그 몇 명 때문에 주님은 사데교회를 멸하지 아니하시고 회개를 촉구하신 것입니다. 나사렛에서도 주님을 영접한 이 소수의 무리들 때문에 큰 위로를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좁은 문입니다 좁은 문은 길이 좁고 협작하고 찾는 이가 적다고 하셨습니다.

결 론 : 예수님은 이곳 사람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주님께서 놀라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이 친히 듣고 친히 보는 바인데 어찌하여 믿지 못하는 것인지, 그들의 마음에 완악함을 인하여 탄식하시는 주님의 심정을 이처럼 나타낸 것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따라야 믿음에서 오는 귀한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 33 ≈ 전도인의 자세

(본문 : 마가복음 6 : 7 - 13)


서 론 :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전도인의 사명을 주셔서 각 고을로 보내기로 하셨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에 대한 전도 훈련인데 여기서 복음을 전하고자 하시는 주님의 심정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들을 보내실 때마다 목자 없는 양같이 고생하며 유리하는 모습으로 불쌍히 보셨습니다. 복음을 전파하기를 열망하시는 주님은 베드로에게 내가 너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하셨고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은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9:35-38).


1. 전도인으로서의 권세를 주신

예수님은 12 제자들을 불러 둘 씩 쌍쌍이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1) 두 명씩 짝지어 보내셨습니다. 둘은 증인의 수효입니다. 복음의 증거는 증인에 의해 전달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복음의 증인들입니다. 증인에게는 다른 또 한 명의 협력자가 필요합니다. 한 명의 행동은 불안하고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서로 보충하고 합력하여 기도하고 위로해 주는 일은 복음 전도에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2)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이것은 여러 가지 병을 고치는 권세를 말합니다. 신약성경에 특히 귀신에 관한 기사가 많은 것은 그 당시 귀신에 눌려 고통을 당했던 사람들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이때 제자들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권세는 특별한 권세입니다. 주님이 친히 주신 명령적인 권세였으므로 그들이 전도인으로 보내심을 받아 그 사명을 이루기까지 자동적으로 따라 오는 권세입니다. 이 같은 권세가 그들에게 계속적으로 지속된 것은 아닙니다(막9:18). 마지막 환난 시 등장하는 두 증인은 1260일의 전 3년 반기간 불사신의 권능을 가지고 복음을 전파한다고 했습니다(계11:1-7). 지금도 전도인들에게는 어느 정도의 이 같은 권세가 주어져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 자체가 성령의 권능의 역사이기 때문에 병을 치료하시는 권세가 성령에 의해 나타납니다. 우리는 이 같은 권능을 합법적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병 고치는 은사나 능력이나 여러 가지 권능을 어떻게 사용해야하는 것인가? 그것은 주의 복음을 위해서만 사용되어야 합니다. 만약 이곳에 자랑이나 명예나 재물이 개입된다면 그런 일은 불법적인 일로 주님의 준엄한 문책을 받게 될 것입니다(마7:22-23).


2. 여행을 위한 도구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전도자가 지니고 다녀야 할 것과 갖고 다니지 말 것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주머니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이며 신만 신 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여행이란 말은 원어에는 도로란 말과 같은 낱말을 사용합니다 이것은 여행은 길을 떠나는 일이기 때문에 도로와 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전도 역시 길을 떠나는 여행에 비결 수가 있습니다. (1) “양식을 가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유대인의 생활습성은 나그네를 대접하는 관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도인들이 이 같은 양식문제에 염려하다 보면 맡은 사명을 감당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도인들에게 먹을 양식을 예비하십니다. 전도인은 하나님의 일꾼들입니다. 일꾼이 삯을 받는 일은 당연한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2) “주머니나 전대의 돈도 가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주머니란 여행에 필요한 물건을 담아 가지고 다니는 여행용 가방을 말합니다. 전대의 돈은 여행에 사용하려고 챙긴 돈을 말합니다. 이런 것들은 복음을 전하는 일에 거침돌이 되기가 쉽습니다. 이런 일에 집착하다 보면 복음 전파에 소홀해지기 쉬운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이 같은 명령은 그들의 모든 일을 주님이 친히 책임져 주신다는 것을 전제하신 말씀입니다.

(3) “두 벌 옷도 입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두 벌 옷이란 중동 지방은 주, 야의 기온 차이가 심하므로 밤에 입을 옷을 미리 준비하는 일을 말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여행자로서 필요한 것은 신과 단벌 옷과 지팡이뿐이라고 하셨습니다. 신을 신지 않고는 여행을 떠날 수 없습니다. 옷을 걸치지 않고는 밖에 나갈 수가 없습니다. 지팡이가 없이는 사막에서 만나는 독사나 해로운 짐승으로부터 방어 할 수가 없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이 같은 말씀을 하시는가 하면 전도자가 이런 모든 일에 마음을 쓰고 부족한 것이 없도록 준비하려면 맡은 사역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 하니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눅9:62).


3. 목적지에 가서

예수님은 전도자가 그 전도지에 가서 제자들이 해야 할 일에 대하여 몇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1) “어느 곳에 가든지 한곳에 유하라”고 하셨습니다. 전도인을 영접한 가정은 복 받을 가정입니다. 그곳에 유숙하고 있는 전도인들은 그곳을 떠나기까지 그 집에 유숙하라고 하셨습니다. 전도자들이 덕스럽지 못한 일로 실수할 때가 있습니다. 권능을 행하고 많은 무리들이 따를 때 더 좋은 대접을 받으려고 부요한 가정의 초청을 거절하지 않고 응하는 경우가 그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같은 일을 삼가야 할 것을 엄중히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가정에서 어떤 대접을 받던 감사히 받으면서 끝까지 지내야 하는 것입니다.

(2) “전도자를 배척하는 곳에서는 증거를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어느 곳에서든지 너희를 영접치 아니하고 너의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거기서 나갈 때 발아래 먼지를 떨어버려 저희에게 증거를 삼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곳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거역한 지방에 대하여 주님은 화를 선언하셨습니다(마11:20-22). 복음은 구원을 얻을 사람들에게나 멸망 받을 사람들에게 다 같은 향기를 풍깁니다. 그러나 “복음을 거역하는 자들에게는 사망으로 쫓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라”고 했습니다(고후2:15-16). 발아래 먼지를 떨어버리란 말은 그 당시 나그네 영접하기를 싫어하는 집에 대한 저주의 뜻으로 했던 관습으로 보입니다.

(3) 제자들이 파송되어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회개하라고 전파했습니다. 복음은 회개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회개 없이는 복음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들은 많은 귀신을 쫓아냈다고 했습니다. 더러운 귀신들이 말씀의 권능 앞에 소리를 지르며 쫓겨 나갔습니다. 많은 병자에게도 기름을 발라 고쳤다고 했습니다. 기름이란 올리브유나 감람유를 말합니다. 이 기름에 대하여 그 당시 유대인들은 몸 속에 깊이 스며들어 사람들에게 힘과 건강을 줄 수 있다고 믿었으며 지금 말하는 민간요법의 한 방편으로 사용한 의료행위였습니다. 그에다 기름은 종교적인 의미도 포함돼 있어서 병자의 치료에나 안수기도 시에 기름을 바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결 론 : 사도 바울은 빚진 자의 심정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헬라인이 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을 전하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롬1:14-15).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이 같은 바울의 빚진 자의 심정을 가지고 전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전도의 사명을 이루는 일에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마10:8).


34) 세례 요한의 죽음 (14절~29절)

(본문 : 마가복음 6 : 14 - 29)

서 론 : 세례요한에 관한 기사는 4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요한 이야말로 메시야에 앞서 그를 증거하는 마지막 선지자로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례요한의 태어나면서부터 그의 활동과 그의 생애의 최후를 바라보면서 그의 너무나도 험난하고 어려웠던 인생 길에 측은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생애는 하나님의 주신 사명대로 이 세상에 왔다가 그 사명을 온전히 마치는 것으로 그의 인생을 마침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온전한 생애를 보낸 복된 선지자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요한은 아마 그의 마지막 운명을 구하는 시간에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라고 고백한 사도 바울 같은 심정으로 기뻐했을 것입니다(딤후4:6-8).


1. 헤롯에게 들린 예수의 소문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의 복음 활동은 예수님을 세상에 드러내 놓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와 세례요한의 활동은 겹쳐지는 기간이 얼마간 있었지만 예수님의 적극적인 활동에 따라 세례요한의 빛은 차츰 시들기 시작했습니다. 세례요한은 언젠가 이처럼 그의 제자들에게 말한 일이 있습니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3:30).

(1) 예수님의 행적이 헤롯왕에게 들렸습니다. 여기 나오는 헤롯왕은 예수님이 태어났을 때 통치하던 대 헤롯이 사마리아 여인 ‘말디스’에게서 난 아들로 그 당시 갈릴리와 베뢰아 지방의 분봉왕으로 있었던 ‘해롯 안디바’를 가리킵니다. 분봉왕이란 로마의 분할된 영토 중의 한 지역의 지배자로 로마 황제의 임명을 받고 치리하는 자를 말합니다. 그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은 세 지역으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이 헤롯왕은 자신의 불의한 일로 의로운 세례요한을 죽인 죄로 인하여 양심의 가책을 받으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예수님의 권세 있는 말씀과 기사이적을 행하시는 소문에 겁을 먹고 놀랬던 것입니다.

(2)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여러 가지로 퍼져 나갔습니다. 어떤 이는 이가 엘리야라고 말하기도 말했습니다. 엘리야란 말라기가 예언한 선지자로 이 예언은 세례요한에 관한 것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들은 주님을 잘못 평가한 것입니다(말4:5-6, 마11:14). 어떤 이는 이가 옛 선지자 중의 하나와 같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선지자의 사역을 감당하실 분으로 모세가 율법에서 증거한 그 선지자이기는 하지만 이에 선지자 중의 하나 같다고 말한 것은 주님을 잘못 평가한 것입니다. 그런데 헤롯은 그들보다 더 엉뚱하게 여겼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이는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도다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운동하느니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죄인은 본능적으로 어떤 보복의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헤롯은 정신 분열증에 걸린 환자처럼 의로운 세례 요한을 죽인 일에 대하여 신의 보복을 받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2. 헤롯에 대한 세례 요한의 책망

헤롯의 조부는 에돔 사람으로 일설에 의하면은 할례를 받고 유대교에 위해서라면 어떤 악랄한 일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동방박사들을 속여서 자신이 아기 예수께 경배하러 가겠노라고 하여 그 아기를 죽이려는 음흉한 계획을 꾸몄던 이자는 동방박사들이 꿈에 지시를 받아 다른 곳으로 본국에 돌아가자 베들레헴 지역에 두 살 아래 사내아이들을 전부 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헤롯은 이 자가 사마리아 여인인 ‘말디스’로부터 얻은 아들로 ‘헤롯 안디바’입니다.

(1) 이 헤롯은 패륜적인 결혼을 한 까닭에 세례요한의 책망을 듣게 된 것입니다. 헤롯이 그 당시 데리고 살고 있는 아내 헤로디아는 원래가 자신의 배다른 동생이 되는 ‘헤롯 빌립’의 아내였습니다. 그런데 헤롯이 주후 29년경 팔레스타인 연안 도시에 살고 있는 동생 헤롯 빌립을 방문했을 때 서로 불륜의 사랑을 나누게 된 것입니다. 이때 헤로디아는 헤롯왕의 아내 ‘아레타스’(나바레아왕의 딸)를 추방한다는 조건으로 결혼을 약속하였고 헤롯은 자기 아내를 추방하므로 결혼이 성사되어 자신의 아내로 삼아 살아오고 있었던 처지였습니다. 이 같은 일은 율법에서 정죄하고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도덕적으로도 타기 받을 만한 패륜적 행위였습니다. 세례요한은 왕궁으로 헤롯을 찾아가 이 같은 왕의 죄악을 지적하여 책망했던 것입니다.

(2) 헤로디아는 세례 요한을 위하여 그를 죽일 음모를 꾸몄습니다. “헤로디아가 요한을 원수로 여겨 죽이고자 하였으되 하지 못한 것은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헤로디아는 이 요한을 죽이지 않고는 마음이 편할 수 없었습니다. 눈엣가시처럼 여겨질 뿐 아니라 또 불안하기도 했습니다. 헤로디아는 이 세례 요한을 남편으로 하여금 옥에 가두어 유대인들에게 자신들의 패륜적 행위에 대하여 선동하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마침 세례 요한을 죽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왕의 생일이 되었습니다. 해마다 이날이면 대신들과 천부장들과 갈릴리의 귀인들로 더불어 큰 연회가 베풀어지는 것입니다. 헤로디아는 이때 자기 남편이 술에 취하여 흥겨워 하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이 기회를 포착하면 세례 요한을 죽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헤로디아는 한창 흥이 돋구는 그 시간에 전 남편에게서 태어난 딸 ‘살로매’를 연회석에 들여보내어 헤롯이 좋아하는 특이한 춤을 추게 했습니다. 과연 헤로디아의 예견대로 헤롯은 대단히 즐거워하면서 “무엇이든지 너 원하는 것을 내게 구하라 내가 주리라 .....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리라”고 그 많은 사람 앞에서 맹세했습니다. 딸의 말을 들은 헤로디아는 왕에게 급히 들어가서 세례 요한의 목을 소환에 담아 내게 주기를 원하옵나이다”고 시켰습니다. 왕은 자신의 맹세와 또 그곳에 있는 여러 사람들을 인하여 시위병을 통하여 옥에 가서 세례 요한의 목을 가져오도록 명령하게된 것입니다. 이래서 하나님의 위대한 선지자는 간교한 계집에 의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3. 세례 요한의 죽음이 뜻하는 것

이처럼 세례 요한의 마지막은 한 음탕한 계집의 계략에 의하여 비참한 최후를 마쳤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세례요한의 죽음이 주는 교훈이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을 얻어야 하겠습니다.

(1) 요한은 광야의 외치는 자의 사명을 다 이루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특별한 사명자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빛이 아니라 이 빛에 대하여 증가하는 자”라고 말했습니다(요1:8). 그의 사명은 메시야를 증거 하는 일입니다. 그는 세례를 통하여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알게 되었으며 예수님을 세상에 들어 내 놓는 사명을 이룸으로 그의 할 일이 다 끝난 것입니다. 그는 메시야가 아니기 때문에 더 이상 이 세상에서 할 일이 없습니다. 그가 무엇인가 선지자로서의 사명을 계속한다면 그는 메시야되신 예수님과 충돌할 수밖에 없게 될 것입니다.

(2) 요한은 가장 영광스러운 죽음으로 하나님께 가야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위대한 상급은 순교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이 예수님보다 먼저 십자가에서 죽어서도 안되고 복음을 전하다가 죽어서도 안 됩니다. 그리스도의 사역과 혼돈 될 염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있어서 가장 영광스러운 죽음이 무엇인지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헤롯왕을 예비해 놓으시고 불의를 책망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헤롯의 칼날에 순교 할 수 있도록 섭리하셨던 것입니다.

결 론 : 위대한 사명을 가지고 세상에 태어난 세례 요한은 가장 짧은 생애를 메시야를 증거하는 일에만 헌신하고 보람있게 죽었습니다. 우리는 세례요한의 생애를 본받는 성도가 되어야겠습니다.


≈ 35 ≈ 무리를 불쌍히 보신 예수님

(본문 : 마가복음 6 : 30 - 43)


서 론 : 예수님이 가시는 곳이면 항상 큰 무리들이 그의 뒤를 따랐습니다. 주님이 행하시는 이적과 권세 있는 말씀과 메시야일는지도 모른다는 호기심 때문에 무리가 군중을 이루어 뒤따른 것입니다. 옹위하는 무리들이 많으니 주님과 그를 따르는 제자들은 자연히 분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피하여 자리를 옮기셨지만 그들도 도보로 그곳에 달려와 한적한 들판에는 예수님을 둘러싼 많은 군중들로 가득 찼습니다. 이제 이곳에서 참으로 놀라운 잔치가 벌어지게 될 것입니다.


1. 무리를 목자 없는 양처럼 보신 예수님

예수님은 큰 무리가 따르는 것을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셨다”고 했습니다.

(1) 주님은 왜 그들을 목자 없는 양으로 보셨는가? 양은 자기 목자에 의해 키워집니다. 목자의 인도함을 받아 꼴을 먹고 출입합니다. 인생은 아담이 에덴에서 범죄한 후 그의 생명을 보장해 주고 인도해 줄 영원한 목자를 잃었습니다. 인생은 끊임없이 사망의 길을 해 매이다가 시랑의 밥이 되어 죽어 갑니다.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겔18:4).

(2) 예수님은 친히 이 같은 인생의 목자가 되기 위해 세상에 오신 분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나는 선한 목자”라고 하시면서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요10:10-11). 예수님은 양의 우리에 문으로 오신 분이시기 때문에 예수님 이전에는 인생의 참 목자가 없었습니다.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요10:8). 양의 문이란 양의 우리의 문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비로소 양의 우리가 형성되었습니다. 그가 자신의 피로 값 주고 사시고 그 무리들로 자기 양으로 삼으시고 양의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이 그 문이라고 하신 것은 예수가 아니면 그 우리 안으로 절대로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고 말씀에 주고 있습니다(행4:12). 그러므로 우리의 문이 되는 인류의 목자가 예수님보다 먼저 올 수는 없습니다. 먼저 온 자가 있다면 그자는 절도요 강도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의 이름을 부인하고 진리를 거역하는 무리들이 양의 목자인양, 양을 유혹하지만 이들은 실인즉 양의 생명을 죽이는 절도요 강도들입니다.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대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요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0:1-2). 이들 절도요 강도의 무리들은 양의 생명을 위하여 우리 안에 들어온 자가 아니요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인 것입니다(요10:10).

(3) 예수님만이 우리의 참 목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로 양들을 위해 그 목숨을 버리신 목자”이십니다(요10:11). 우리는 그 당시 목자 없는 양들처럼 예수님을 따라다닌 길 잃은 양 같았습니다. 생명의 길을 잃고 제각기 그릇된 길로 갔었는데 우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시어 우리의 생명을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사53:6), 예수님의 목자 적인 사명은 우리의 영혼을 위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고 했습니다(벧전2:25).

목자로서의 예수님은 우리를 악한 자에게서 지켜 주십니다(살후3:3, 유24). 또한 양의 목자이신 예수님은 그의 양 무리의 이름을 친히 부르시며 인도하십니다(요10:3).


2. 오병이어의 기적

잠깐 쉬기 위해 한적한 곳에 이르신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찾아오는 사람의 무리들로 인하여 쉴 겨를도 없었습니다. 마침 때가 저물어 갈 때였습니다. 많은 무리들은 주님의 곁을 떠날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을 보내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곳은 한적한 빈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냥 보내기에는 모든 사람들이 너무 지쳤습니다. 걱정이 된 제자들은 주님께 가까운 동리로 가 음식을 사먹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1) 그러나 주님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의 뜻을 헤아리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 말씀하신 바를 보면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요6:5-6). 예수님은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먹게 하옵소서”라고 건의하는 제자들의 믿음을 시험하시려는데 이 말씀을 하신 목적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이 많은 무리들을 먹이는 일은 그 누구도 불가능한 일이라고 여겼습니다. “무엇을 사먹게 하옵소서”고 하는 말과 “우리가 가서 일 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고 하는 빈정대는 어투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고 하신 말씀에서 우리 중에 이 일을 하실 분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이 같은 일은 오직 주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하면서 주님 앞에 무릎을 꿇었어야 했습니다.

(2) 예수님은 “너희에게 떡 몇 개가 있느냐 가서 보라”고 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주님께 무엇인가 바칠 것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무엇인가 바칠 때 그 바친 손길에 내려 주십니다. 십일조를 온전히 바칠 때 하늘 문을 여시고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 주십니다. 심는 대로 거둔다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어디선가 덕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져왔습니다. 이것은 어떤 한 아이가 안드레를 통해서 주님께 드려진 것입니다(요6:8-9).

예수님은 그 떡과 물고기를 가지시고 무리를 앉히신 후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축사하셨다는 이 축사란 말은 ‘율로게오’로 축사란 말 외에 축복하다, 복을 빌다라고 하는 뜻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축사는 주님께 바친 그 제물을 위한 축복기도라고 보는 것이 합당합니다.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제물이 이처럼 주님의 축복기도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우리가 주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정성으로 드리는 재물에는 이 같은 주님의 축복이 따른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3) 예수님은 이 축사를 통해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창조하셨습니다. 혹 백씩, 혹 오십씩 떼를 지어 앉은 무리들은 이 기적의 떡을 먹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축복의 두 가지 원리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있는 바를 받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다른 이에게 나눠주는 일입니다.

결 론 : 주님의 기적은 많은 무리를 보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신대서 만들어졌습니다. 자기 생각에 따라 아무 때나 기적이 창조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 그를 의뢰하고 그를 따르면 주님이 우리의 길을 형통케 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축복은 충만한 축복입니다. 그 많은 군중들을 다 배불리 먹이고도 12바구니가 남았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언제나 남는 축복입니다.


≈ 36 ≈ 기도하러 산으로 가신 예수님

(본문 : 마가복음 6 : 45-46)

서 론 : 우리는 예수님의 기도하시는 모습을 성경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도 46절에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다”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많은 군중들을 배불리 먹이신 예수님은 이 무리들의 큰 동요를 보시고 제자들을 재촉하사 배를 타고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예수님은 무리들을 보내신 후 홀로 산으로 기도하러 가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이 때때로 기도하시기 위해 산에 오르셨는데 그 여러 형태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오병이어 사건의 여파

저녁 녘에 들판에서 벌어진 잔치는 그 잔치에 참여한 많은 무리들에게 놀라운 충격을 주게 되었습니다. “떡을 먹은 남자의 수효”만 5천명이었으니 이들은 가히 큰 무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1) 이들이 큰 동요를 일으켰습니다.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요6:14-15). 이 말씀에 비추어 보면 오병이어의 사건은 그 큰 무리들에게 큰 파장을 일으킨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성인이 된 남자의 수효만 5천명이라면 굉장한 무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마음에 동요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 같은 이적을 행하시는 예수야말로 이스라엘이 기다리는 메시아임이 틀림없으니 그를 임금으로 삼자는 공감대가 형성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혁명의 기도이며 폭동의 시발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2)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메시야관에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단일신론(單一神論)자들입니다. 단일신론이란 하나님을 단일 신으로 보는 신관입니다. 이 신관은 하나님의 3위를 부인합니다. 더군다나 삼위일체란 말은 하나님께 대한 모독으로 판단합니다. 그들에게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 그 단일신인 하나님만을 인정할 뿐, 한 하나님으로서의 아들, 한 하나님으로서의 성령의 존재를 부인합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였다고 해도 성경적인 많은 모순이 드러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선지자 중 하나로 여겼습니다(눅24:20). 이스라엘은 그들의 메시야로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기다렸습니다(신18:15). 그들은 메시야가 나타나면 그가 이스라엘을 회복할 것으로 알았습니다(눅24:21, 행1:6). 그들은 이스라엘의 메시야야 말로 하나님의 세우시는 영원한 왕국의 왕이 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단2:44). 그러나 이 같은 그들의 메시야관은 성경의 한 단면만 바라보는 오류에서 나온 것입니다. 메시야란 창세기 3장15절에서 밝혀주고 있는 대로 인류의 구속을 위한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분을 말합니다. 그는 대속의 제물로 오실 메시야요, 타락한 인류의 생명의 구속자로 오실 메시야요,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다시 이 땅에 오셔서 이 세상을 심판하실 메시야이십니다.

(3)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잡아 억지로 자기들의 왕으로 세우려고 했습니다. 그들의 눈은 이제 의심할 여지도 없었습니다. 그의 교훈으로 보나,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보나 성경에 언약된 모세와 같은 선지자임이 분명한 것입니다. 자기들이 할 일이란 이제 예수를 왕으로 세우면 이 땅위에 메시야 왕국이 이루어질 것으로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이 같은 의중을 아시고 긴급히 조처를 취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이 무리들과 합류하면 안되겠기에 그들을 벳새다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무리들을 각기 자기 집으로 가도록 흩으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산으로 기도하러 올라가신 것입니다.


2. 산으로 기도하러 가신 예수님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벳새다로 가시지 않고 기도하러 산으로 가신 이유는 무리들을 흩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제자들 함께 뱃새다로 가신다면 그들 무리들도 함께 딸아 나섰을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는 이 일이 인간적인 하나의 큰 시험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마지막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고 간구하신 뜻을 음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고 하신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십자가의 고난 없이 인류를 구속하실 수 있거든’이란 의미가 되겠습니다(눅22:42). 예수님도 그의 인성으로는 사람이신 지라 십자가의 고난을 생각하셨을 때 이 같은 생각이 그를 유혹했을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예수님은 이 같은 시험을 이기시기 위해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통이 필요했습니다. 그가 산으로 기도하러 가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고 봅니다.

(1) 예수님은 중요한 일에 봉착할 때마다 기도하셨습니다. 12제자를 선택할 때 기도하셨습니다.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서 밤이 맞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다고”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눅6:12-13). 산상 설교를 하시기 전에도 기도하셨습니다. 전도 여행을 떠나시기 전에도, 공생애에 들어가셨을 때에도,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도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생애 중 오랜 시간을 기도하시는 일에 보내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생활 중에 어려운 일이 닥쳐와도 위기가 눈앞에 가까이 다가와도 기도할 생각은 하지 않고 근심이나 하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할 때가 얼마나 많은 것입니까? 우리에게도 우리의 생애에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예수님처럼 하나님께 간절히 간구하는 오랜 시간에 기도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2) 예수님은 새벽 일찍이 기도하셨습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예수님이 기도하신 시간을 살펴보면 우리도 어느 때 기도할 것인가에 대한 교훈을 삼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새벽 일찍이 기도하셨습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지금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새벽기도회를 갖는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새벽기도의 유래는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서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막1:35). 한날에 처음 시간을 주님께 바치고 그의 인도하심을 받는 일이란 아름다운 일입니다.

(3) 예수님은 밤이 맞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셨다고 했습니다.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서 밤이 맞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라고 했습니다(눅6:12). 지금은 예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입장이지만 그 당시에는 아버지께 기도하셔야 할 입장이셨습니다.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은 스스로 자신을 종으로 낮추셨기 때문에 육신적으로 당하셔야 할 모든 일에 기도로 하나님의 도심을 받으셔야 하셨습니다(히5:7).

(4) 예수님은 습관을 따라 감람산에 기도하러 가셨다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시매”라고 했습니다(눅22:39). 예수님께는 기도가 그의 생활에 없으면 안될 하나의 습관이 되신 것입니다. 기도야말로 우리 신앙 생활에, 몸에 깊이 익혀야 할, 그래서 하나의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에서는 우리들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항상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결 론 :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말씀했습니다(히12:2). 예수님의 하신 모든 일은 우리의 신앙 생활의 본으로 삼으라고 보여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의 공생애에 나타난 적은 일로부터 큰 일에 이르기까지 기도하심으로 문제 앞에 나가셨던 것처럼, 우리들도 주님의 기도를 본받는 생활로 우리에게 맡겨주신 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 37 ≈ 내니 두려워 말라

(본문 : 마가복음 6 : 47 - 56)

서 론 : 주님을 뭍에 두고 제자들만 배를 타고 벳새다로 가는 그들의 항로는 평탄하지 못했습니다. 갑자기 바람이 거슬림으로 어려움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인생항로는 마치 바다에 배와 같습니다. 배는 지극히 적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바다는 매우 넓고 언제 사나운 바람이 불어닥쳐 파도가 배를 삼킬는지 모릅니다. 모든 인생은 누구도 목표하는 항구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 오직 예수님이 그 배에 동승하셔서 길잡이가 되어 주셔야 소망의 항구에 이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괴로이 노를 저었지만 바다는 잔잔하지 못했습니다. 배는 점점 위험에 빠져들어 갑니다. 제자들의 생명이 위태롭게 되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그들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1. 산에 계신 예수님

기도하러 산으로 가신 예수님은 “제자들의 괴로이 노 짓는 것을 보셨다”했습니다.

(1) 산에 계신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우리의 대제사장을 보여 주십니다. 대제사장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멜기세댁의 반차를 좇아 하늘의 지성소에 올라가신 우리의 대제사장이십니다(히7:15-25). 대제사장의 직분은 1년에 한 차례씩 지성소에 들어가 백성들의 죄를 속죄하기 위한 희생제물을 드리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의 피로 영원한 희생제물로 삼으시고 지금도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고 했습니다(롬8:34). 예수님의 대제사장 직분에 대하여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있는 그가 살아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라”(히7:25). 그는 우리의 모든 것을 보고 계시며 우리의 연약을 아시며 우리를 위해 간구해 주시는 분입니다.

(2) 예수님은 우리의 영혼의 닻이 되십니다. 지금 우리와 주님은 끊어져 있는 사이가 아닙니다. 영혼의 탓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간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히6:19). 배에 매여 있는 닻은 배와 운명을 같이 합니다. 배와 연결되어 있으므로 배를 풍랑에서 안전하게 지켜줍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혼의 닻 같아서 우리를 놓치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견고히 붙들어 주십니다. 제자들이 풍랑을 만나 어려움을 겪고 있었지만 그들의 생명이 안전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이 그들에게 닻이 되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3) 예수님은 제자들이 괴로이 노 젓는 것을 보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눈으로 보실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는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의 모든 일을 아시고 감찰하십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도 그것을 하나도 모르심이 없습니다. 이 같은 사실은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 일입니까? 다윗은 시편에서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시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시139:1-4).

(4) 예수님은 제자들이 가장 어려운 시점에 처했을 때 그들을 찾아오셨습니다. 밤 사경이란 새벽 3시 이후로 아침을 맞이하려는 어두운 새벽녘을 말합니다. 이 시간은 우리 인생의 가장 어려운 고난의 시기를 말해 주기도 합니다. 이처럼 우리 예수님은 우리의 어려움을 함께 하시기 우리가 만나는 환난 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우리는 우리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시고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다음 말씀을 기억하여 시험 중에 힘을 얻어야 합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고 하셨습니다(고전10:13).


2. 제자들에게 가까이 오신 예수님

예수님은 물위로 걸어서 그들 앞에까지 오셨지만 그냥 지나치시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의사를 무시하고 우리 가운데 들어오셔서 우리를 주관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가 들어오시도록 우리가 문을 열어 들여야 합니다. 주님은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고 하셨습니다(계3:20). 우리는 주님을 맞이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필요로 하여 부를 때 주님은 나에게 찾아오셔서 나에게 당면한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시50:15). 우리는 예수님을 만날 기회를 잘 포착해야 합니다. 내가 시험 중에 있을 때, 어려운 환난 중에 있을 때, 이런 시기가 예수님을 찾아야 할 가장 시급한 시기임을 알아야 합니다.

(2) 예수님은 그들에게 안심하라고 하셨습니다. 안심하라는 말씀은 다만 위로의 말씀만이 아닙니다. 문제의 해결자가 아니면 안심하라는 위로는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주님의 안심하라는 말씀은 이제 문제 해결자가 왔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가까이 오심은 우리의 모든 걱정과 염려를 맡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내 기도를 들으시고 주님께서 내 문제의 해결 자로 내게 오셨음을 믿는다면 이제 모든 염려를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너의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고 하셨습니다(벧전5:7). 권고란 말은 돌보아 주신다는 뜻입니다.

(3) 예수님은 두려워 말라고 하셨습니다. 두려움은 믿음의 대적입니다. 마귀는 우리의 믿음을 넘어뜨리기 위해 여러 가지 조건과 환경으로 우리에게 끊임없이 두려움을 안겨 줍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언제나 두려워하지 말 것을 당부하십니다. 딸이 죽었다는 전갈을 듣고 낙심한 회당장에게 주님은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고 하셨습니다(막5:36). 나사로가 죽은 무덤에서 “죽은지가 나흘이 되어 벌써 냄새가 난다”고 하는 마르다의 절망적인 비탄에 예수님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는 말씀으로 마르다의 두려움을 물리쳐 주셨습니다.

(4) 예수님이 이 배에 올라 저희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쳤다고 했습니다. 그처럼 사납게 불던 바람도 예수님의 권능에 굴복했습니다. 예수님은 만물의 창조자이실 뿐 아니라 창조물을 당신의 뜻대로 섭리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 어느 것 하나 주님을 거역하거나 거슬릴 수 없습니다. 그 주님의 나와 함께 하시고 나에게 관계된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자 하실 진데 이루시지 못하심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담대히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했습니다(빌4:13).


결 론 : 이 일로 제자들은 마음에 심히 놀랬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바로 얼마 전 예수님이 그 많은 군중들에게 떡을 떼어주신 이를 바라보고서도 이 같은 일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어떤 분이신 가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가 가지신 권능과 창조적인 능력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이 모든 그의 권세를 가지고 나를 돌보시고 나를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믿어야합니다.


마가복음 7장

◆ 밤중소리 01-08 | VIEW : 1,349

38) 헛된 경배 (1절~8절)

39)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 (9절~23절)

40) 응답 받은 한 여인의 간구 (24절~34절) 

41) 에바다 (31절~37절)


≈ 38 ≈ 헛된 경배

(본문 : 마가복음 7 : 1 - 8)

서 론 : 예수님의 주변에는 유대인들로부터 파송 받은 일단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습니다. 율법에 어긋난 범죄를 찾아내어 고소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가르침보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는 사실에 대하여 참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교훈이 자신들의 교훈에 비해 권능 있는 사실에 대해 시기했습니다. 또한 가는 곳마다 자기들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이적과 기사를 이루고 이 에 호기심을 가진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는 일이 못마땅했습니다. 더군다나 반 율법적인 행사로 모세의 계명을 어기는 이 목수의 아들을 이스라엘의 메시아로 믿는 사람들이 많은 데는 견딜 수 없었습니다. 이날도 예루살렘에서 온 이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떡을 먹었다 하여 장로의 유전을 지키지 아니한 사실에 대하여 예수님께 항의한 것입니다.

1. 장로의 유전

문제의 발단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씻지 아니한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었다는데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이 같은 행위는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지 않은 것으로 마땅히 정죄 받아야 할 일이라고 책망했습니다.

(1) 장로들의 유전이란 랍비들의 가르침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유전이란 말은 ‘파라도시스’로 전수(넘겨주다)란 뜻을 가지고 있으며 이 말은 율법의 해석을 뜻하는 말입니다. 랍비의 가르침은 그들의 율법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율법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해석하지 아니했다는데 심각한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잘못 해석한 율법의 교훈을 율법과 동일시하여 그것을 그들의 일상생활에 적용시켰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교훈의 권위를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한 위치에 두었습니다. 이럭 것들이 전례 적으로 내려온 것이 곧 “장로들의 유전”이 된 것입니다.

(2) 그런데 이 같은 유전은 예수님에 의해 정죄를 받았습니다. 유전으로 내려온 그들의 교훈은 비 성경 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율법의 해석은 인간의 지식에 두었기 때문에 그 방향이 엉뚱한 곳으로 빗나갔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해석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단도 실인즉 성경해석의 오류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들은 안식일, 여행, 식사, 금식, 규례, 상거래, 이방인과의 교제 등에 있어서 율법에 따른 행동 규범을 규정해 놓았습니다. 모세의 율법을 613개의 독립된 법령으로 세분하기에 이르렀는데 유대인들은 어려서부터 율법을 이 장로의 유전의 의해 지켜 온 것입니다.

(3) 그러면 왜 장로의 유전이 이처럼 예수님의 정죄를 받기까지 잘못된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까? 그들은 의의 표준을 율법에 두었습니다. 율법을 지키므로 의로운 생활을 할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실질적으로 의로운 생활을 하려면 율법에 따른 많은 세목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부지런히 연구하여 많은 조문을 만들었고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그것들을 지키는 생활을 강요해 왔습니다. 그 결과 그들의 생활은 의식에 얽매이게 되었고 종내에는 외식하는 자들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한가지 예를 든다면 그들은 맹세에 대한 율법적인 해석을 예물로 규정했습니다.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나 ... 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재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 도다 ”고 했습니다(마23:16-22).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영적인 경배다 눈에 보이는 의식적인 경배에 치중했습니다. 이 같은 오류로 인하여 많은 의로운 사람들을 정죄하기에 이르렀고 많은 사람들을 잘못 오도하여 사망의 길로 인도했습니다. 이 일에 대하여 예수님은 이처럼 그들을 정죄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죄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 도다”고 하셨습니다(마23:15).

(4) 예수님의 제자들이 바리새인들에게 지적 받은 죄는 결례의 관한 것이었습니다. 결례란 물로 씻는 규례인데 율법에 의하여 부정하게 된 자에게 이 같은 결례를 시행하므로 정결케 하는 의식입니다 원래가 물로 몸을 씻을 수 있는 이 결례는 몸에 유출 평이 있는 자, 설정한 자, 피를 유출한 여인과 접촉한 자 등에 대한 정결 법으로 시행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이것을 확대 해석하여 “손을 부지런히 씻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 또 시장에서 돌아와서는 물을 뿌리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지키어 오는 것이 있으니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음이러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같은 사실을 볼 때 그들의 결례는 분명히 비 성경적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이 모든 말을 너희는 지켜 행하고 그것에 가감하지 말지니라”(신12:32). “너는 그 말씀에 더하지 말라 그가 너를 책망하시겠고 너는 거짓말하는 자가 될까 두려우니라”(잠30:6).

2. 예수님의 책망

율법의 제정자가 되시며 그 율법의 심판자이신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의 이 같은 장로의 유전에 대하여 책망하신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1) 예수님은 이사야의 예언을 들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고 책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존경하는 방법이 두 가지로 나와 있습니다. 하나는 입술로 존경하는 일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그들의 입술로는 하나님을 존경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실인즉 마음으로는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참 존경은 마음으로부터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입으로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의 갈 것이 아니요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할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2) 예수님은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침이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 도다”고 책망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사람의 계명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해석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사람의 교훈이 된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큰 경종이 됩니다. 이런 방법의 경배는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들의 입술로는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기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었지만 그것은 외식에 지나지 않았을 뿐, 그들은 하나님을 헛되이 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외식은 마음이 따르지 않은 형식적인 모양에 불과합니다. 그곳에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없습니다. 바울은 이에 대하여 “이제는 우리가 얽매었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에 묵은 것으로 아니할 지니라”고 했습니다(롬7:6).

결 론 :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의 경배는 헛된 경배였습니다. 헛된 경배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가르침으로 사람의 유전을 지키게 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경배는 마음의 변화함을 받아 사랑으로 말씀에 순종하는 일입니다.

≈ 39 ≈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

(본문 : 마가복음 7 : 9 - 23)

서 론 :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유전을 책망하시는 중에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야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장로의 유전으로 내려오는 결례가 사람을 능히 깨끗케 할 수 없다는 말씀으로 이 말씀은 바리새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제자들에게까지 충격적인 말씀으로 들렸습니다.

1.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내세우는 장로의 유전이 얼마나 비 율법적인가에 대하여 5계명을 해석한 교훈을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에게 명한 재 5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란 말씀입니다. 그런데 랍비들은 이 계명의 해석을 “사람이 아비에게나 어미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고 가르쳤습니다. 랍비들의 이 같은 가르침은 겉보기에 매우 타당한 듯합니다. 그러나 이 같은 교훈은 결과적으로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는 하나님의 계명을 거역하게 하는 원인이 되게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의 전한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 같은 일을 많이 행하게 하였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마땅히 자기 부모를 공경해야 할 것을 가지고 부모님에 대한 공경을 포기하고 그것으로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을 원치 아니하십니다. 이런 일은 사람의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폐한 것이기 때문에 용납될 수 없는 일입니다. 이처럼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유전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져버리는 일을 저지른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리를 다시 부르시고 “너희는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고 하시면서 놀라운 교훈을 주셨습니다.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1) 이것은 결례의 무익함을 선언하신 말씀입니다. 물로 씻는 의식인 결례란 하나의 거룩을 표방하는 이스라엘만의 의식이었습니다. 율법에 규정된 부정한 일을 범했을 때,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 부정을 씻고 거룩함을 회복해야 하는데 그 방법으로 결례라는 의식법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마치 양이나 염소의 피가 사람의 죄를 속할 수 없는 것처럼 물로 씻는 의식이 사람에게 의롭다고 선언하는 거룩을 안겨 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 같은 결례는 신약에 와서 하나님의 어린양이 대신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의 죄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는 그림자로서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는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수건에 쌓인 모세의 얼굴을 보듯 성경에서 실상과 증거는 보지 못하고 그림자만 보았던 것입니다.

(2) 예수님의 이 말씀은 구약에 규정되어 있는 부정한 음식과 정결한 음식의 차별이 없어졌다는 선언입니다. 레위기에 보면 부정한 음식과 정결한 음식의 규정이 매우 까다롭게 나옵니다. 그러나 이 규정은 실상인즉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로 주변에 살고 있는 이방인들과의 생활의 성별을 시키므로 이스라엘로 성별된 생활을 하도록 하시는데 그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성별은 음식으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참된 성별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이루어집니다. 부정한 음식을 먹지 않고 정결한 음식을 먹는다하여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빌3:9). 밖에서 사람에게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한다고 하신 말씀은 어떤 음식이든 모든 음식은 부정한 것이나 정결한 것에 차별이 없다고 하신 새로운 교훈이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부정한 음식과 정결한 음식”대에 관한 구약적인 율법의 규례를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3)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제 구약적 의식법이 폐해지고 “믿음으로 의”를 얻는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음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율법은 ‘도덕적 율법’과 ‘의식적 율법’으로 구분됩니다. 도덕적 율법은 인간과 인간과의 도덕적 규범으로 십계명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 5계명부터 십계명까지를 말합니다. 이 계명은 우리 인간이 지켜야 할 영원한 도덕적 규범인데 예수님은 이 규범의 근간이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도덕적 율법을 폐하려 오신 분이 아니심을 스스로 증거하셨습니다(마5:17-18). 하나님이 율법에서 인간에게 주신 도덕적 계명은 폐해진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사랑으로 완성시키셨습니다.

그러나 그 반면에 율법의 의식적 규정은 완전히 폐해졌습니다. 이 의식법은 죄속함을 얻는 제사 방법, 음식의 규례, 물로 씻는 규례, 제사법에 따른 여러 가지 의식을 말합니다. 이런 것들은 장차 올 일들에 대한 그림자로서 예수님께서 온전히 성취하셨기 때문에 폐해진 것입니다(롬3:27-28).

2. 사람을 더럽히는 것

예수님이 무리를 떠나 집으로 들어 가셨을 때 제자들이 이 비유를 물었습니다. 장로들의 유전과 율법적인 조항에 얽매어 살아온 그들에게 예수님의 새로운 교훈은 깨닫기에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1) 밖에서 들어가는 음식은 마음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능히 사랑을 더럽히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이는 마음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에 들어가 뒤로 나감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무엇이든 먹으면 그 음식은 배로 들어갑니다. 그러므로 배 안은 더럽기가 그지없습니다. 음식을 소화시키는 배 안을 깨끗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까? 부정한 것이건 정결한 것이건 소화과정에서 똑같이 더럽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뒤로 나오기 때문에 사람을 더럽게 할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무엇이관데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고 하신 것입니까? 예수님은 사람의 속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모든 생각은 다 악합니다. 노아의 시대 사람들이 홍수 심판을 받은 이유가 이 악한 생각 때문임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창6:5).

결 론 : 예수님은 이 악한 생각을 몇까지로 나누어 그것이 무엇인가를 밝히셨습니다.

① 음란이라고 하셨습니다. 음란이란 난잡한 성생활을 말합니다.

② 도적질과 살인이라고 하셨습니다. 사기, 절도, 강도, 부정한 방법으로 버는 수입을 말합니다. 살인은 미워하는 마음, 시기하는 마음, 원수를 갚고자 하는 마음, 죽이고자 하는 마음 등입니다.

③ 간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악한 생각 속에 성에 관한 것이 무려 세 가지가 들어 있습니다. 음란, 간음, 음탕 등입니다. 간음이란 부부가 아닌 남녀간의 성 관계를 말합니다.

④ 탐욕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분에 넘치는 욕심을 말합니다.

⑤ 악독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도덕을 파기한 생활을 말합니다.

⑥ 속임과 음탕이라고 하셨습니다.

⑦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악한 세대에서 믿음으로 새로운 변화를 받아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보다 더 나은 의를 소유해야 했습니다(마5:20).


≈ 40 ≈ 응답 받은 한 여인의 간구

(본문 : 마가복음 7 : 24 - 30)

서 론 :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은 수도 없이 많지만 그 중에 특별히 우리에게 교훈이 될만한 경우에는 그 이적을 행하신 자세한 상황이 의미 있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여자라고 하는 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이 여인은 수로보니게 지방에 살고 있는 헬라여인입니다. 이 여인은 자기 딸에게 들린 귀신을 내쫓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 나왔습니다. 예수님 앞에 찾아 나와 간구하는 이 여인의 재치 있는 말과 변함없는 의뢰와 응답의 확신은 참으로 놀라운 것입니다. 이 같은 이 여인의 믿음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기 위해 본문이 기록된 것입니다.


1. 딸을 위해 간구한 이방 여인

이 여인은 딸의 병으로 그의 마음이 몹시 상한 처지에 있는 어머니였습니다. 자기 딸에게 악한 귀신이 들려 어머니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이 여인은 아마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온 여인처럼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더 중하여지고 있었는지 모릅니다(막5:25-27).

(1) 이 여인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왔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만날만한 때가 있습니다. 은혜도 받을만한 때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고 하셨습니다(사55:6). “내가 은혜 받을만한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8:2). 이 여인은 예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그 소문을 들은 직시 예수님께 달려나왔습니다. 예수님이 그 고장을 지나치면 예수를 만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상실해 버릴 것입니다. 좋은 소식은 차후로 미룰 일이 아닙니다.

(2) 이 여인은 예수님 앞에 엎드려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 주시기를 간구했습니다. 이 여인은 자기가 들은 예수의 소문을 조금도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소문을 들으면서부터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는 그 믿음을 가지고 딸에게서 귀신 쫓아 주시기를 간구했습니다. 이 여인의 기도는 믿음이 없는 기도가 아닙니다. 이 여인의 기도는 중언부언의 기도도 아닙니다. 확실한 목적을 가지고 믿음으로 기도했습니다. 이 여인의 기도의 태도가 바로 이 같은 것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하므로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7).

(3) 이 여인은 남다른 자녀의 사랑을 가지고 있었던 좋은 어머니였습니다. 모든 어머니들이 자녀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있겠지만 이 여인의 사랑은 더욱 깊은 사랑이었습니다. 이 세상 어머니들이 이 여인처럼 그 자녀의 문제를 가지고 주님을 찾아 나와 이처럼 간구한다면 그 자녀의 장래는 얼마나 놀라운 축복이 있을 것입니까?


2. 기도를 거절하신 예수님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 여자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이십니다. 예수님의 응답은 이러했습니다.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1) 여기서 자녀라고 하신 말씀은 유대인들을 가리킨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의 첫 열매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에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고 하신 말씀에서 아브라함을 통해 이룰 큰 민족이란 바로 이스라엘을 가리킨 것입니다(창12:2). 그러나 하나님은 이 이스라엘만을 축복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신 것은 아닙니다. 3절에 가서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란 이스라엘 중에 약속의 자녀로 택하심을 받은 자들과(롬9:6-8), 또한 이방인들 가운데서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백성이요 참 이스라엘입니다.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요10:16). 이것을 사도 바울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 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했습니다(갈3:27-29).

그런데 예수님이 이곳에서 자녀라고 말씀하신 것은 구약적인 의미에서 우선권을 가진 유대인들을 가리킨 말입니다(마22:1-10). 하나님은 끊임없이 그의 선지자들을 보내어 유대인들에게 메시야의 언약을 주셨고 그들의 구원을 약속하셨습니다. 이 같은 일은 베드로가 유대인들에게 들려준 설교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너희는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또 하나님이 너희 조상으로 더불어 세우신 언약의 자손이라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기를 땅 위의 모든 족속이 너의 씨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셨으니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을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행3:25,26). 예수님도 “구원이 이스라엘에게서 남이니라”고 하셨습니다(요4:22).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한다”고 하신 말씀도 이 같은 뜻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2)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개라고 표현하신 것은 예수님이 유대인들을 최상으로 여기고 이방인들을 멸시하는 의미에서 하신 뜻이 아닙니다. 개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이방인들을 나타낼 때 사용했던 비유적인 멸시 어로 예수님은 다만 이 여인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 이처럼 인용하신 것입니다.

언뜻 보기에 이 말씀은 이 여인에게 응답의 가능성을 배제한 듯이 보입니다. 만약 이 여인이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실망하여 간구하기를 그쳤다면 그는 응답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관문을 통과하지 못하고 걸려 넘어짐으로 응답 받을 수 있는 기도를 중도에 포기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응답의 기회가 전혀 없다고 하신 것은 아닙니다.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한다”고 하신 말씀은 개들에게도 줄 수 있다는 암시가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3) 이 여인은 “주여 옳소이다 마는 상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고 아뢰었습니다. 이 여인의 이 같은 간구는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이 여인은 예수님의 마음속에 뜨겁게 타오르고 있는 사랑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사랑은 결코 유대인들만을 상대로 하신 편협한 사랑이 아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개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결코 좌절하지 아니했습니다. 그는 오히려 자신의 무익함과 죄인 됨을 더욱 깊이 깨닫게 되어 더욱 겸손해 질 수 있었습니다. 더욱 큰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인내로 주님을 의뢰하게 되었습니다.


결 론 : 이 여인의 이 같은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은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여인은 결국 응답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을 개처럼 취급하신 것이 아니라 그 마음에 있는 믿음을 보시려고 시험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을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기도의 본으로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 41 ≈ 에 바 다

(본문 : 마가복음 7 : 31 - 37)

서 론 : 예수님은 복음을 위해 바쁜 발걸음으로 이곳 저곳을 누비셨습니다. 두로 지경에서 나오신 후, 시돈을 지나시고 데가볼리 지방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셨다고 했습니다. 그때 어떤 사람들이 귀먹고 어눌한 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안수하여 고쳐주시기를 간구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안수하시면서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셨다고 했습니다. 오늘은 주님의 이 탄식에 스며 있는 영적 의미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귀먹고 어눌한 자

이 환자는 두 가지 면에서 어려움을 겪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귀가 먹었을 뿐 아니라 말의 장애까지 있었습니다.

(1) 예수님은 이 환자에게 특별하신 방법으로 안수해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 뱉아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불행한 사람은 귀머거리이기 때문에 자신이 지금 무엇 때문에 이곳에 끌려왔는지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좀 조용한 여건 속에서 그에게 베푸시는 주님의 은혜를 알 수 있기를 원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주님의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으셨습니다. 그 후에 침 뱉아 그의 혀에 손을 대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기이하신 행동에 다른 해석을 달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귀 먹고 어눌한 그에게 말로 하실 수 없기 때문에 하나의 시청각적인 방법으로 본인이 알 수 있도록 기도해 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손은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의 손이십니다. 그 분의 손가락이 귀머거리의 귀에 들어갔을 때 그의 귀는 열리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면서 에바다 하시니 그의 귀가 열리고 혀의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더라”고 했습니다. 에바다란 말은 아람말로 열리라는 뜻입니다. 이 에바다는 예수님의 명령이십니다. 예수님이 에바다란 명령을 내리시기 전에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셨다고 했습니다. 탄식이란 말은 어떤 원통한 일이 있을 때 입에서 나오는 한숨으로, 예수님의 이 탄식은 이 사람이 겪고 있는 생의 비극에 대한 깊은 인간적인 동정에서 나온 것입니다.


2. 예수님의 탄식이 의미하는 것

주님의 탄식은 귀먹고 어눌한 그 사람에게 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이 탄식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1)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할 때 탄식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하여 이처럼 책망하셨습니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이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고 하신 것입니다(마13:14-15).

① 사람의 마음이 완악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주님은 우리의 마음이 완악하여 깨닫지 못할 때 탄식하십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 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으리라”고 하신 것은 마음이 완악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버린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탄식이십니다(호4:6).

② 우준하고 무지한 자는 깨닫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행사가 어찌 그리 크신지요 주의 생각이 심히 깊으시니이다 우준한 자는 알지 못하며 무지한 자도 이를 깨닫지 못하나이다”고 했는데 이 말씀은 하나 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무지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탄식이십니다(시92:5-6).

③ 다음에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게을리 할 때 깨닫지 못하는 영적 귀머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에디오피아 내시는 고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병거에서 이사야 53장을 읽고 있었지만 그 읽고 있는 말씀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빌립의 가르침을 통하여 그곳에 기록된 고난의 종이 예수이심을 깨닫게 되었고 그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행8:26-39). 하나님의 종에게 나아와 말씀의 가르침 받기를 게을리 하는 사람은 영적 귀머거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은 이 같은 사람들에게 안타까이 탄식하시는 것입니다.


(2) 다음에 입을 가지고도 전하지 못할 때 탄식하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전할 사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전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① 성령의 권능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행1:8).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②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사람은 세상일에 분주하여 주님을 위하여 시간 받치기를 아까워하지 때문입니다. 마음에 성령으로 말미암은 은혜가 있어야 하는데 세상 욕망과 정욕과 탐심이 가득 찼기 때문에 입을 열었다하면 세상 말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같은 사람들에게 탄식하십니다.

③ 복음을 전하는 사람에 대한 하늘의 상급을 모르기 때문에 전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복음에 빚진 자들입니다. 빚진 자의 심정으로 전도할 때 많은 사람들을 주께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고 하셨습니다(단12:3).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께 나아와 안수를 받아야 합니다. 에바다의 명령을 받아 우리의 귀머거리의 귀를 열고 어눌한 혀를 풀어야 합니다.


3. 예수님의 경계

예수님은 이 귀머거리와 어눌한 자에게 안수하심으로 귀가 열리고 혀의 맺힌 것이 곧 풀어졌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 예수님은 그에게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경계하셨습니다. 이 경계에는 다음 두 가지 뜻이 담겨있습니다.

(1) 한가지는 예수님은 메시야로서의 소문이 퍼지기를 원치 아니하셨습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의 메시야관이 잘못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왕국을 당장에 세울 영광의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예수가 메시야로 알려지면 알려질수록 그를 왕으로 삼으려는 운동이 전개될 것이기 때문입니다(요6:14-15). 예수님은 물론 메시야의 사명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그러나 그의 메시야적 사명은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를 지시는 일에 있으셨습니다.

(2) 다른 한가지는 예수님은 이적을 보고 자신을 따르는 일에 대하여 못마땅히 여기셨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이적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고전1:22-23). 예수님께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마12:39).

결 론 : 그러나 이 일로 예수님의 소문은 더욱 많이 더욱 널리 퍼져 나갔습니다. “경계할수록 저희가 더욱 널리 전파했다”고 했습니다. 귀머거리 된 우리의 귀가 열리고 어눌한 펴가 풀릴 때 우리의 그 귀로 듣고 입으로 전파하는 복음이야말로 더욱 널리 전파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공급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마가복음 8장

◆ 밤중소리 01-08 | VIEW : 609

42)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1절~10절) 

43) 표적을 보이지 아니하신 예수 (11절~13절)

44) 바리새인과 헤롯의 누룩 (14절~21절)

45)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22절~30절)

46)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31절~34절)

47) 목숨을 얻는 일과 잃는 일 (35절~37절) 

48) 그 사람을 부끄러워 하리라 (38절)


≈ 42 ≈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본문 : 마가복음 8 : 1 - 10)


서 론 : 주님의 공생애 중 주님 곁에는 항상 큰 무리들이 따랐습니다. 물론 그들이 주님을 따르는 목적이 다 똑같은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순수하고 순결한 목적으로만 따라 다닌 것도 아닙니다.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그의 말씀을 사모하며 그를 통하여 구원을 얻으려는 믿음으로 따른 무리는 언제나 심히 적었습니다. 세상적인 기복, 육신의 질병, 당장에 실현되기를 바라는 메시야 왕국의 도래에 큰 관심을 가지고 따랐습니다.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그같은 목적의 기대를 얻을 수 없으면 아주 쉽게 그 곁을 떠났습니다. 그래도 주님은 그들을 측은히 여기셨고 지극히 사랑하셨습니다.

1. 내가 불쌍히 여기노라

주님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기를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불쌍히 여기신다는 말씀은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솟아오르는 말할 수 없는 긍휼을 의미합니다.

(1) 주님의 불쌍히 여기심의 그 심정은 그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은 무리들을 불쌍히 보시고 그들의 용서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그들은 언제인가 주님으로부터 화의 선언을 받은 바리새인들이요 서기관들이요 제사장들의 무리였지만 그러나 주님은 그들의 영혼을 불쌍히 보시고 그들의 죄 사함을 위하여 눈물의 기도를 드리신 것입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도 이 사랑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롬5:8).

(2) 예수님은 먹을 것이 없는 무리들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다고 했습니다.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주님 곁에 있는 수다한 무리들은 주님과 함께 머문 기간이 이미 사흘이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사흘간 굶었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사흘이 지나매 먹을 것이 떨어졌다는 의미입니다. 그들 중에는 멀리서 온 무리들도 있으므로 만약 그대로 보낸다면 그들은 결국 길에서 기진 할 것이기 때문에 주님은 그들의 이 같은 정경을 불쌍히 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의 식생활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식생활은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가는 과정에서 반드시 취해야 할 양식입니다. 이 일에 어려움을 겪으면 사람이 기진 하기도 하고 어려운 고통도 당하게 되는데 주님은 우리의 이 같은 처지를 낱낱이 살피시고 불쌍히 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고 하신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마6:31-32).

하나님은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르밧 과부를 불쌍히 여기시고 엘리야를 그곳에 보내시어 극한 가뭄 중에서 그 가족들을 먹이시므로 그 생명을 살리셨습니다. 아들마저 빚쟁이 손에 넘어가게 된 한 선지자의 아내를 불쌍히 보신 하나님은 그녀에게 엘리사를 보내시어 빚을 갚게 하셨을 뿐 아니라 먹을 양식까지 구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간이나 광야에서 하늘에서 내리시는 만나를 먹었습니다. 인류의 종말에도 그의 백성들에게 극한 가뭄과 식량난의 어려움 속에서 먹을 양식과 마실 음료에 대하여 염려 없도록 약속해 주셨습니다(계6:6, 7:15-17).

우리가 여기서 깨달아야 할 일은 우리 주님이 우리를 이처럼 불쌍히 여기시는 것처럼 우리들도 우리의 형제들에 대하여 그같은 사랑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가난한 형제를 도와주는 일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며 이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갚아 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잠19:17). 예수님은 최후의 심판대에서 심문하실 내용에 대하여 적은 한 부분을 밝혀 주셨는데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냐”는 것입니다(마25:36-37).

2.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예수님은 문제의 해결자가 되십니다. 문제만 제기하고 해결의 방도가 없다면 그런 대상에게는 아무 것도 바랄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문제가 있는 곳에 반드시 그 해결 자로 나타나시어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1) 제자들은 “만일 내가 저희를 굶겨 집으로 돌려보내면 길에서 기진 하리라”고 하신 말씀을 듣고 어리둥절했습니다.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은 문제의 해결을 자기들에게 하라는 말씀인줄 알고 “이 광야에서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고 물었습니다. 선생님이 아무리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 신들 현재의 입장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들은 얼마 전에도 이 같은 질문 식 대답을 통하여 주님의 책망을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빈들에서 많은 무리들이 목자 없는 양 같음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는데 주님은 이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고 하셨습니다. 이때 제자들은 “우리가 가서 2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는 말로 그같은 일을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겠느냐는 조로 항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곳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나타내시어 5천명의 군중들을 먹이시고도 12바구니에 남은 조각을 거두신 일이 있으셨습니다. 제자들은 바로 몇 일전의 일이었건만 이 같은 주님의 기적을 잊어버리고 또 불만조의 대답을 하게 된 것입니다.

(2)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쉬 잊어버립니다. 주님이 내게 베푸신 사랑에 대하여 제자들처럼 잊어버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라”고 했습니다(시103:2).

제자들처럼 이전에 베푸셨던 주님의 은혜에 대하여 잊어버리면 감사가 나올 수 없습니다. 주님께 대한 의뢰가 살아지게 됩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고 하셨는데도 주님의 이 돌보심의 권고를 망각하고 염려를 주께 맡기지 못하는 일은 주님이 나에게 베푸신 은혜를 쉬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3) 주님은 “떡 일곱 개와 생선 두어 마리를 가지사 축복하시고 4천명의 무리들에게 배불리 먹이시고 남은 조각을 일곱 광주리에 거두셨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떡 몇 개가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주님은 없는데서 있게 하시는 분이시지만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에는 그 축복을 감사할 수 있는 제물을 바칠 것을 명하십니다. 사르밧 과부의 경우에도 그러했습니다. 한 선지자의 아내의 경우에도 그러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주님께 드릴 제물을 남겨야 합니다. 극한 가난 중에도 한 가난한 과부는 그의 생활비 전부를 주님께 드릴 제물로 남겨두었었습니다. 주님께는 무엇인가 축복을 해 주실만한 봉헌물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결 론 : 예수님만 옆에 모시고 있는 생활을 한다면 늘 나를 돌보시는 목자의 입장에서 나를 살피시고 나를 돌보시는 것입니다. 내게 양식이 없을 때에 내가 기진 할까 걱정해 주시고 내 몸이 병으로 쇠약할 때에도 몸의 고통을 긍휼히 여기사 베데스다 연못가로 36년 된 병자를 찾아오신 것처럼 나를 찾아오시어 돌보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같은 우리 주님을 더욱 사랑하고 그의 뜻을 따르는 생활을 하므로 주님이 늘 내 곁에 머무시도록 그와 함께 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 43 ≈ 표적을 보이지 아니하신 예수

(본문 : 마가복음 8 : 11 - 13)

서 론 : 예수님으로부터 무슨 흠을 잡을까하는 기대를 가지고 예수님을 따랐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 그가 행하시는 이적 등에 문제될 만한 요소만 발견되면 힐난하면서 대들었습니다. 이날도 일단의 바리새인들이 제기된 어떤 문제를 가지고 예수께 힐난했다고 했습니다. 힐난이란 공격적인 논쟁을 말합니다. 그들은 예수를 메시야인줄 알고 따르는 많은 무리들을 예수의 미혹에서 건지고자 하는 의도로 결정적인 시험을 시도했습니다.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했다”고 했습니다.

1. 하늘로서 오는 표적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선지자나 메시야로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의 교훈도 정통적인 바리새인들이 따르는 장로들의 유전과 달랐으며 무엇보다 안식일을 자기들의 율례대로 지키지 아니했기 때문에 율법을 범하는 자로 낙인을 찍었습니다. 그에다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에 대해 비판적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를 눈의 가시처럼 여겼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군중들이 이 불법적인 무명청년을 마치 메시야인양 추앙하면서 따르는 것을 볼 때 참기 어려웠습니다. 그들은 이 일로 예수께 대한 시기심이 극도로 달했으며 기회만 있으면 흠을 잡아 법적인 조치를 취하려고 했습니다. 심지어는 어떻게 죽일꼬 하는 음모까지 도모하고 있었습니다.

(1) 그들은 예수님께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표적을 보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병자들을 고쳐주신 표적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습니다. 문둥이를 고치시고 심지어는 죽은 자를 살리시는 이적까지 보이셨습니다. 예수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인 이 사람의 행한 것 보다 더 많으랴”고 말하고 있었습니다(요7:31). 하루는 옥에 갇힌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이까”고 물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고 일러주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에게 참으로 많은 표적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밤에 주님을 찾아 온 니고데모는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어떤 표적을 바란 것입니까? “하늘로서 온 표적”이라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메시야된 표적을 보여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시험입니다.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이 시험은 마치 예수님이 공생애 초두에 40일간 금식하신 후, 광야에서 마귀에게 받던 시험과 동일한 시험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정말로 예수가 메시야인가?의 여부를 알려고 이런 질문을 시도한 것이 아니라 다만 그의 마음을 격앙시켜 무리들 앞에서 품위를 손상시키려는데 목적을 두고 있었습니다.

(2) 바리새인들도 예수님의 표적을 보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도 그의 많은 표적을 보고 그같은 이적을 다각도로 검토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내린 결론은 “귀신의 왕을 빙자하여 이적을 행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병자들에게 행하신 표적을 과소평가하고 있었습니다. 이 같은 일은 자기들 가운데서도 행하고 있는 보편적인 신유의 능력정도로 여겼습니다. 또 주술적인 방법으로 평가절하 하여 나타난 사실대로 믿으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미혹하지 말고 어떤 결정적인 표적을 보여야 할 것이 아니냐“고 힐문했습니다. 그들은 모세를 표적을 행한 하나님의 선지자로서의 모델로 삼았습니다. 바로 왕 앞에서 열 가지 재앙을 내린 표적, 홍해를 육지처럼 가른 표적, 반석을 쳐서 생수의 강을 내게 한 표적,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이스라엘게 먹게 한 표적을 요구했습니다. 모세가 오실 메시야에 대해 “하나님께서 자기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희 가운데서 세우신다”고 했기 때문에 그들이 기다리는 메시야에 대한 인식이 무엇보다 먼저 모세와 같은 표적에 맞추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에게 모세와 같은 표적을 보여달라는 것이 그들의 주문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믿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은 예수님이 그런 표적을 보일 수 있다고 믿지 않고 있었으며 설혹 나타내신다고 해도 그로써 예수를 자시들의 메시야로 믿을 그들이 아니었습니다.

2. 너희에게 표적을 주지 아니하시리라

예수님은 이 같은 바리새인들의 하늘로서 오는 표적의 요구를 들으시면서 “마음속에 깊이 탄식하셨다”고 했습니다.

(1) 예수님의 탄식은 진리를 믿지 않고 오히려 대적하는 그들의 완악한 마음에 마음속으로 깊은 슬픔과 분노를 느끼고 있는 상태를 의미해 줍니다. 그들의 완안한 마음의 상태는 주님이 부활하신 후, 그의 부활을 확인한 후에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탄식은 “믿음이 없는 패역한 세대”에 대한 탄식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는 의도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으려는 뜻에서가 아니라 오직 진리를 대적하기 위해 시험하려는 의도로 나왔다는데서 나오신 탄식이십니다.

(2) 예수님은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여기서 표적을 구하느냐고 하신 표적은 설교나 하고 병자나 고치는 것으로 군중들을 미혹하지 말고 메시야여든 메시야를 증거 할 만한 결정적인 표적을 보여 주어 그것으로 믿게 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는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찾는 표적은 그의 표적이 그들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홍해를 건넌 놀라운 표적의 체험자이면서도 몇 일이 못되어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만나를 먹으면서도 하나님께 불평했습니다. 반석의 물을 마셨으면서도 물이 없다고 하나님을 원망했던 그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모세 당시에도 패역한 자들이었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그 세대에서도 역시 패역한 자들이었으며 지금도 패역한 무리들로 남아 있습니다. 그들의 패역은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그날까지 지속될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고 하신 말씀은 지금 우리의 이 세대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패역한 세대에는 말씀으로 전파되는 진리가 배척을 당하고 오직 표적이 권위를 가지게 됩니다. 표적을 구하는 믿음의 세대가 오늘날에도 우리 주변에 팽배하고 있습니다. 인류의 종말에 이를수록 이 같은 상황이 더욱 기승을 부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 중에 유혹의 영을 보내시어 그들의 표적으로 유혹하시어 심판하시겠다고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며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희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신 것입니다(살전2:9-12).

(3) 표적은 결코 믿음의 방편이 될 수 없습니다. 믿음이 표적에 근거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했습니다(롬10:17). 말씀은 믿음의 씨앗이며 생명의 씨앗입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벧전1:23). 예수님도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한다“고 하셨습니다(요5:24). 표적은 신앙생활을 영위하는 과정에서 우리에게 혹은 생활의 축복으로 혹은 질병의 치료로 혹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해 주시는 것이지 믿음의 증거로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서 예수님은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 자색 옷 입은 부잣집에 나타나 그들에게 자신을 증거하게 한다고 해도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듣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결 론 : 예수님은 “이 세대에게 표적을 주시지 아니하시리라”고 결론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표적으로 믿기를 구하거나 표적으로 예수의 메시야된 증거를 구하려는 자들에게 결코 표적을 주시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표적으로 믿음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표적을 구하는 신앙은 예나 지금이나 우리 주님을 탄식시킵니다. 오직 말씀을 믿는 믿음만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 믿음입니다.

≈ 44 ≈ 바리새인과 헤롯의 누룩

(본문 : 마가복음 8 : 14 - 21)

서 론 : 예수님의 제자들은 영적인 깨달음이 부족했습니다. 예수님은 때때로 그 제자들에게 영적인 교훈을 주셨지만 그들은 그것을 육적인 사고방식으로 판단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의 깨닫지 못함을 책망하시기에 앞서 영적으로 자세히 풀이해 들려주시므로 그들로 영적인 깊은 깨달음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교훈이 오늘날 우리에게 얼마나 유익한 교훈이며 가르침이 되는지 모릅니다. 그것은 우리도 역시 그들처럼 영적인 깨달음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데리시고 바다 건너편으로 가실 때의 일입니다. 예수님은 선상에서 제자들에게 한가지 교훈을 들려주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경계하신 것입니다. 이 영적인 경계가 제자들에게는 떡으로 들렸습니다. 그들은 서로 의논하기를 “이는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고 말하면서 주님께 드릴 떡이 없는 일에 대하여 근심했습니다.

1. 주님이 말씀하신 누룩

누룩이란 떡을 만드는 일에 필수적인 물건입니다. 빵을 부풀게 하는 발효제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일찍부터 밀가루를 누룩으로 발효시켜 빵을 만들어 그것으로 그들의 일용할 양식으로 삼아 온 사람들입니다.

(1) 누룩을 주의하라는 말씀을 떡과 연결시킨 이유는 제자들이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이란 말씀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데서 나왔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의 영적인 뜻을 이해하지 못했을 때,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해석이 엉뚱하게 전개하게 됩니다. 제자들은 보편적으로 이 말씀의 뜻을 바리새인들이나 헤롯 당원들이 먹는 떡과 같은 것으로 이해하므로 자신들이 떡을 가지고 오지 못한 일에 대하여 후회하면서 근심하게 된 것입니다.

(2) 제자들은 방금 전에 떡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를 가지고 약 4천명을 배불리 먹이고도 일곱 광주리의 남은 조각을 거두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바로 이 남은 일곱 광주리의 남은 조각을 가져오지 못하고 들에 두고 온 사실에 대하여 근심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지금 자기들에게 있는 양식이라고는 배에 뒹굴고 있는 떡 한 조각밖에 없으니 어떻게 할 것인가? 선생님이 남은 조각의 떡을 찾으실 때 어떻게 하지? 하는 생각으로 염려하게 된 것입니다.

이 같은 제자들의 행동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엉뚱한 행동을 하게 된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들의 생활 중에 금과옥조처럼 지키는 장로의 유전이 그러했습니다.

(3) 예수님은 그들의 둔한 마음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웅성거림을 들으셨습니다. 그들이 떡이 없으므로 의논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의 영적인 무지를 탄식하시면서 바른 이해에 이르도록 설명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말씀하신 누룩이 떡이 아님을 이해시키기 위해 떡으로 염려하는 그들의 생활자체에 대하여 실증적으로 교훈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제자들에게 문답법으로 지난 일에 대하여 기억시키고 스스로 해답을 내리도록 하셨습니다. “내가 떡 다섯 개를 5천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고 물으셨습니다. 이에 제자들은 “열 둘이니이다”고 일제히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한번 물으셨습니다. “떡 일곱 개를 4천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이에 대하여 제자들은 “일곱이로소이다”고 대답했습니다. 이 말씀 후에 예수님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고 책망 조로 되물으신 것입니다.

이 같은 예수님의 물으심은 제자들로 좀더 깊은 영적인 통찰력을 가져야 한다는 교훈으로 들려주신 것입니다.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롬8:8). 육신에 있는 자들은 단단한 것을 취하지 못하고 젖만 먹고 자라기 때문에 신앙이 성장할 수 없습니다(히5:13). 신앙이 성장하려면 의의 말씀을 경험해야 합니다(히5:13). 의의 말씀에 대한 경험이란 자신의 생활에 적용하여 스스로 체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씀의 체험이 없는 신앙은 장성한 자리에 이르지 못하고 언제나 어린아이의 자리에 머물러 있게 됩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직접 보고 듣고 체험한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이제 이 같은 체험적인 말씀이 그들의 생활에 적용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 말씀이 주는 교훈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데 그 하나는 먹을 것에 대하여 왜 염려하느냐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의 능력을 보았으면 그 능력을 행하시는 분을 믿고 그를 의뢰해야 할 것을 의미해 주는 것입니다.

2. 주님의 책망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처럼 책망하셨습니다. “아직도 알지 못하느냐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치 못하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1) 예수님은 주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없는 제자들에게 “너희 마음이 둔하냐”고 책망하셨습니다. 영적인 깨달음이 없는 것은 마음이 둔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둔한 사람은 영적 깨달음이 없습니다. 그러면 왜 사람의 마음이 둔하게 되는 것입니까? 그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할례란 마음을 베는 것으로 회개를 뜻합니다. 자신의 죄를 하나님께 자복하고 그 죄에서 돌이키는 생활이 회개입니다. 이 회개의 생활이 곧 영적인 생활로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생활입니다(롬8:14). 이런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인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빠릅니다. 회개가 없는 심령에는 온갖 죄악이 가득 들어차 있으므로 영적인 감각이 둔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종말에 당한 교회를 향하여 이처럼 경종하신 적이 있습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날이 덧과 같이 임하리라”고 하셨습니다(눅21:34). 그리스도인들은 모름지기 조심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여기서 조심한다는 말은 육적인 생각을 버리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생활을 의미합니다. 만약에 사람들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거역하고 오히려 육적인 생활에 빠진다면 방탕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를 가져오게 되고 마음이 둔하여진다고 하신 것입니다. 마음이 둔한 사람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또 신령한 일을 기억치 못하고 쉽게 진리에서 떠나며 동요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아직 떡에 대한 주님의 가르치심에 대하여 분명한 깨달음이 없었습니다. 떡이란 일용할 양식입니다. 이 양식에 대한 염려는 그것이 적든 많든 사람의 마음을 영적으로 둔하게 만들고 어둡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의 산상보훈에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같은 것은 하나님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권능도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마6:31-34).

(2) 바리새인들의 누룩이란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교훈을 말합니다. 누룩이란 떡을 팽창시키고 썩히고 부풀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므로 누룩의 비유는 영적으로 사람에게 해를 주는 교훈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출12:15, 레2:11, 고전5:6). 그러므로 여기서 예수님이 지적하신 바리새인들의 누룩이란 주로 장로의 유전을 가리킵니다. 장로의 유전은 유대인들의 일상생활의 규범이 되어 왔는데 그들은 율법보다 한술 더 떠서 엄격한 규율을 정하므로 이것이 오히려 그들의 올무가 되어 그들의 모든 행위가 외식으로 흘러 버렸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같은 의식을 이스라엘 전체에게 누룩으로 번지게 하여 이로 말미암아 그들의 구원의 길이 막혀 버리고 그들의 참 메시야를 거절하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같은 그들의 누룩을 주의 하라고 경계하신 것입니다.

또 헤롯에 누룩도 주의하라고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의 누룩이 종교적인 것이라면 헤롯의 누룩은 정치적인 미혹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헤롯을 옹립하고 왕정에 협력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신앙을 세속화시켰습니다. 아마도 그 당시 이 같은 헤롯 당의 누룩이 이스라엘간에 번져서 많은 유대인들로 헤롯 정권에 아첨하고 하나님이나 메시야에 대한 소망을 갖는 신앙에서 떠나게 했던 것입니다. 이들은 또한 예수님을 해치는 일에는 바리새인들과 한통속이 되어 예수님의 율법적인 약점을 찾는 일과 정치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려는 일에 힘을 합쳤던 것입니다.

결 론 : 예수님은 이 같은 누룩이 그 당시 사회 전반에 널리 번져 가고 있었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그들의 누룩에 대한 경계의 말씀을 주셨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 주변에도 우리들의 영적인 생명의 치명타를 가하는 악한 누룩들이 많이 번지고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경계심을 가져야 합니다.

잘못된 효도라고 하는 누룩이 조상 숭배에 대한 악한 교훈으로 번지고 있습니다. 토속 신앙이라는 누룩이 기독교를 하나의 민족적인 종교의 테두리 안에 가두고 기독교를 무속 신앙으로 전락시키고 있습니다. 현대신학에 누룩은 기독교의 특유한 가치관을 스스로 폐기하고 하나님을 범신적인 인격체로 만들고 모든 종교를 기독교와 동일시하는 다원 종교 신학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같은 누룩을 주의해야 합니다.


≈ 45 ≈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본문 : 마가복음 8 : 22 - 32)


서 론 : 예수님이 벳새다에 이르셨을 때 사람들이 소경 하나를 데리고 왔습니다. 예수님은 이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신 후 침을 뱉어 그의 눈에 바르시며 안수하셨다고 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예수님의 치병과정은 다른 곳에 나오는 치병의 경우와 약간 차이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안수를 두 번 해 주신 일이라든가 눈을 단번에 밝히 보이게 아니하시고 단계적으로 보이게 하신 일 등은 그의 치병의 능력이 점진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특이하신 방법이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죽은 자도 당장 살아나게 하시는 기적도, 문둥병 자도 말씀 한마디로 치료하시는 권능도 나타내신 분입니다.

어느 날 가이사랴 빌립보 여러 마을로 나가실 때의 일입니다. 들에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에 대하여 물으시고 또 제자들 자신에게도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1.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그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신 일은 제자들에게 보다 확실한 메시야관을 심어 주시기 위한 공부였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의 메시야관은 대단히 잘못된 요소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고난받아야 할 메시야 상”에 대하여 가르치실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1) 예수님은 먼저 세상 사람들 곧 유대인들에 대한 메시야관에 대하여 알려 주시기로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외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 냐”고 물으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보는 모습을 세 가지로 말씀 드렸습니다.

어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세례 요한이라고 보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얼마 전에 헤롯에 의해 목 베임을 받은 세례 요한으로 보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 같은 생각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세례 요한이 죽을 때 이미 예수님은 공생애에 들어가서 많은 활동을 하고 계셨을 때입니다. 그러나 헤롯까지도 그렇게 생각했었다고 말씀해 줍니다. “내가 목 베인 요한 그가 살아났다 하더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오해를 받게 된 이유 중의 하나는 세례 요한이 죽은 후에 예수님의 공생애가 본격적으로 펼쳐졌다는 사실에서 혼돈이온 것입니다. 예수님의 명성이나 그의 행하시는 여러 가지 기적 등이 그때로부터 더욱 많이 퍼진데서 나온 일종의 과장된 유언비어라고 볼 수 있습니다.

(2) 또 다른 어떤 유대인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엘리야라고 부른다고 말했습니다. 아마도 여기서 엘리야라고 지칭하는 인물은 장차 여호와의 두려운 날에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신 그 엘리야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라고 하신 말씀에 나타난 엘리야를 의미합니다(말4:5).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 당시에도 이 엘리야에 대하여 여러 가지 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엘리야에 대하여 세례 요한과 결부시키셨습니다(마11:9-10). 유대인들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바로 말라기로 예언된 선지자 엘리야인 줄로 믿었던 모양입니다. 이 엘리야에 대하여는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로 돌이키게 하리라”고 하신 것으로 이 같은 말씀으로 미루어 볼 때 그는 메시야가 아니라 메시야를 소개하며 회개를 경종하는 것으로 세례 요한에게 적용되는 사역임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또 한편 인류의 종말,예수님의 재림 때 그의 오심을 경종하고 회개를 외치는 두 증인에 사역에 결부시킬 수 있는 예언이기도 합니다(계11:3).

(3) 세 번째로 예수님에 대하여 유대인들의 생각은 선지자 중의 하나로 오신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선지자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보내신 하나님의 종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행하시는 기적이나 그의 교훈 등은 과연 그를 선지자 중의 하나로 여길 만 했습니다. 아마도 유대인들 중에는 예수님을 선지자로 보는 경향이 많았을 것입니다.

(4) 그러면 여기서 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보지 않고 이처럼 세례 요한이나 엘리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로 보았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권능이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잘못된 메시야 사상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보편적으로 안정된 사회를 이루고 있었을 당시에는 여자의 후손(창3:15), 아브라함의 씨(창22:18), 실로(창49:10), 모세와 같은 선지자 중 하나(신18:15), 한 별(민24:17) 등으로 나타나 있고 이들이 누구이며 또 어느 시기에 등장하여 무슨 일을 할 것인가에 대하여 유대인들은 전혀 몰랐습니다. 그 후 이사야를 통하여 다윗의 자손에 대한 언약으로 유대인의 메시야가 다윗의 뿌리에서 나올 것이라는 사상이 자라나 메시야를 부를 때는 다윗의 자손이란 표현으로 나타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BC 586년을 전후하여 예루살렘이 함락된 후로 계속하여 바벨론, 메데바사, 로마 등 열강들의 지배 아래서 많은 종교적 핍박과 피지배자의 고난을 면할 길이 없었습니다. 이때부터 유대인들의 메시야관은 현실적인 문제로 대두되기 시작하였는데 그들이 머리에 그리고 상상한 메시야는 예루살렘에서 침략자를 물리적으로 물리치고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메시야 왕국을 건설하는 정치적 메시야 사상이 대두된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메시야 신학으로 정립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이 같은 형태의 메시야가 아니면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성경에 예언된 모든 메시야의 언약도 이 같은 방법으로 풀이했고 다른 형태로 예언된 모든 메시야의 관한 예언은 메시야의 예언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사야가 예언한 “고난의 메시야”는 고난을 당하는 이사야나 그가 아니면 다른 하나님의 종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했을 뿐 결코 메시야의 고난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메시야는 고난을 당하실 분이 아니라 권능을 가지고 그들 중에 오셔서 영광을 나타내시고 메시야 왕국을 세우실 이스라엘의 왕으로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까닭에 그들은 결코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예수님의 제자까지도 예수님의 고난이나 그의 죽으심이나 부활에 대하여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예수님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회복을 기대했던 이유가 그들도 이 같은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메시야 사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2.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님은 이제 제자들에 대하여 물을 차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실인즉 제자들의 신앙고백을 듣기 위해 같은 방법으로 물었던 것입니다.

(1)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하셨습니다. 이 물음에 성미가 급한 베드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 시니이다” 베드로의 이 대답은 다른 복음서에는 약간 다른 말로 표현하고 있지만 그 내용은 똑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고 그렇게 믿고 있었습니다.

원래가 그리스도란 말은 메시야로 “기름 부음 받은 자”란 뜻입니다. 구약의 경우, 왕이나 제사장이나 선지자들이 이 같은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기름부음을 받은 자들이 신정 체제 아래서 하나님의 직무를 수행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기름부음을 받은 자란 뜻의 그리스도에 대하여 왕이나 제사장이나 선지자와는 차원을 달리한 민족적 구원자로서의 메시야를 부르는 호칭으로 변모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혹은 메시야라 할 때는 이런 의미에서 해석했던 것입니다.

(2) 그러나 제자들 역시 유대인들에 전통적인 메시야관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이 다른 유대인들과 예수님에 대한 메시야관에 대하여 다른 점이 있었다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여기지 않고 세례 요한이나 엘리야나 선지자 중 하나로 여긴데 비하여 그들은 메시야로 인정했었다는 사실뿐입니다. 그리고 제자들 역시 메시야가 할 일에 대한 사역에 대해서는 다른 유대인들이나 인식이 같았습니다. 대제사장들이나 서기관들에게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할 메시야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도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입니까”고 물어볼 정도로 민족 회복에 대한 정치적 메시야의 집념이 강했던 것입니다.

결 론 : 올바른 신앙은 먼저 올바른 메시야관부터 정립되어야 합니다. 바른 메시야관이야 말로 믿음의 뿌리요 신앙고백의 첫 걸음입니다. 모든 이단이 바로 이 메시야의 신앙고백의 잘못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그후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의 영적 체험 신앙을 통해서 확고한 메시야관을 가질 수 있었으며 그때부터 온 땅에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올바른 신앙을 가지고 구원의 확신 가운데 살아가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생활을 하려면 예수님의 그리스도이심을 성경적으로 바로 믿는 그 믿음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에 대하여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 46≈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본문 : 마가복음 8 : 31 - 34)

서 론 : 주님은 베드로부터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고 하는 자신에 대한 올바른 신앙고백을 들으신 후 매우 흐뭇해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제자들을 향하여 이 일에 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 것을 경계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아직은 자신을 유대인들 앞에 메시야로 공개할 시기가 아니심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라는 이유로 사형언도를 내릴 것이기 때문에 아직은 그의 죽으실 시기가 아니었으므로 그의 입에서 자신을 메시야로서의 신분을 나타내시면 안되셨던 것입니다(마26:63-66).

잠시 후에 예수님은 자신이 결국 장로들과 대제시장과 서기관들의 무리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시고 사흘만에 살아나셔야 할 일에 대하여 말씀하시게 되었는데 이때 이 말씀을 곁에서 들었던 베드로는 재빨리 예수님을 붙들고 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책망을 하시게 되었습니다.

1.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베드로가 고백한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고 하는 주님에 대한 고백은 완벽한 신앙고백은 아닙니다. 주님의 그리스도란 면에서만 바른 고백이었을 뿐,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해서는 엉뚱한 메시야관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1) 예수님은 여기서 제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성경적인 지식을 심어주시기 위해 이시야의 예언을 들려주셨습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르들과 대제시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이 같은 메시야의 사역은 메시야가 받을 고난과 그의 죽으심과 그의 부활을 의미합니다. 메시야의 참된 사역은 유대인들이 대망하는 그리스도처럼 영광의 주로 오셔서 이 땅위에 그의 왕국을 건설하는 그런 메시야가 아니라 이사야로 예언하신 고난에 메시야이심을 밝히신 것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는 신원 미상의 하나님의 종의 고난은 장차 이스라엘에 나타날 메시야의 고난에 대한 예언으로 바로 예수님이 당하실 고난을 가리킨 것입니다(사53:1-6). 적어도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이 같은 메시야의 사역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고난을 당하신 이후, 그의 부활하심을 통하여 제자들로 이 모든 말씀을 기억나게 하심으로 온 천하에 복음을 전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이 같은 실제적인 교육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2) 이때 베드로가 주님을 붙들고 간했습니다. 무엇을 간했다는 표현은 이곳에 나오지 않았지만 마태는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 하리이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마16:22). 간했다는 단어는 책망하다, 꾸짖다, 비난 하다는 의미의 ‘에피티마오’를 번역한 말입니다. 이 같은 표현은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주님, 그런 일이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선생님은 우리의 메시야로서 이스라엘을 로마에서 회복하고 이 땅위에 당신의 왕국을 세워야 할 것이 아닙니까? 어찌하여 그처럼 약한 말씀을 하심으로 우리로 실망케 하시나이까? 뒤에는 우리가 있으니 힘을 내시고 메시야로서의 임무를 완수하셔야 합니다’라고 하는 권고가 이 경우에 합당한 말입니다. 이 같은 간언을 마친 베드로는 이제 자기야말로 주님께 보람있는 충언을 들였다고 속으로 흐뭇해했을 것입니다.

(3)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를 향하여 칭찬은 고사하고 대단히 격한 꾸지람을 내리셨습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는 말씀으로 베드로를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단이라고 지적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베드로가 사단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리고 가룟 유다의 경우처럼 사단이 베드로에게 직접 들어간 상태에서 사단의 조정에 의하여 한 말이기 때문에 베드로에게 사단이라고 지칭한 것도 아닙니다(요13:27).

베드로를 향하여 사단이라고 부른 것은 베드로가 바로 사단이나 해야 할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부터 예수님으로 영광의 메시야의 꿈을 심어 주었습니다(마4:8-9). 베드로의 간언이 왜 사단의 일이냐? 그것은 예수님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신 일은 그의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메시야의 사역이 없이는 인류의 구원도 없고 장차 나타날 메시야 왕국의 실현도 없는 것입니다. 지금 베드로는 분명히 예수님 앞에서 사단의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사단이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이 같은 일은 베드로뿐만이 아닙니다. 다른 모든 제자들에게도 해당되며 모든 유대인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들의 메시야관이 그러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베드로는 왜 이 같은 간언을 하게 된 것입니까? 그 다음에 나오는 주님의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는 말씀이 그 해답이 되겠습니다.

사람의 일이란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은 인류의 구원이나 이방인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에는 추후에 관심도 없었습니다. 오직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회복이 그들의 급선무였습니다. 그들이 메시야를 기다리는 이유도 이 같은 사람의 생각에 있었으며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른 이유도 이런 생각에서였습니다. 메시야의 사역에 있어서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일은 사단의 일입니다. 교회의 일도 하나님의 일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사업은 사단의 사업이 되는 것입니다.

2.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으라

예수님이 베드로를 향하여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하신 책망은 제자들에게 크나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1)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내 뒤로 물러가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에 마귀로부터 시험을 받으셨을 때 마귀에게 선언하신 말씀 “사단아 물러가라”는 말씀과 같은 의미의 말씀입니다. 그런 사단의 소리는 다시는 하지 말라는 명령이시며 그 같은 간언은 메시야를 넘어지게 하는 일이 되므로 내 앞에서 떠나가라는 뜻입니다. 이 같은 사건 이후 그들은 주님에 대한 사역에 대하여 깊은 생각을 가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2) 이 사건이 있은 후 예수님은 무리들과 제자들을 불러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왜 이 말씀을 이 시기에 하시게 된 것입니까? 그들은 마음이 들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 그의 기적, 그의 인기, 그의 권능은 이제 얼마 안되어 메시야 왕국이 실현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게 하였으며 이런 믿음을 가지고 주님의 뒤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따르는 일에 오직 영광만을 생각한 나머지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는 자기 두 아들에게 높은 벼슬을 주실 것을 간구하기도 했습니다(마20:20-22).

(3) 예수님이 고난의 십자가를 지셔야 하는 것처럼 그의 제자들 역시 주님을 따르는 일에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할 것을 교훈 하신 것입니다. 초림의 예수를 영접하는 성도들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생활로 주님의 길을 쫓아가야 하며 재림의 주님을 맞이할 때 그에 대한 충분한 보상을 받아 주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게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먼저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자기라고 표현하신 신분은 육신 적인 신분을 말합니다. 베드로가 이 육신 적인 생각 때문에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책망을 듣게 된 것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고 했습니다(롬8:8). 이 육신의 생각을 부인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내가 매일 죽노라고 한 말은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는 자기의 생활을 의미해 주는 말입니다. 이 같은 생활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생활로 가능합니다(롬8:13-15).

그리고 “자기 십자가”란 자기가 짊어질 자기 인생의 고난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특히 이 같은 고난은 그리스도를 믿는 일로 그에게 부닥치는 시련을 의미해 줍니다. 우리는 이 십자가를 내가 져야합니다. 이 십자가를 벗어버리고는 주님을 쫓을 수 없습니다. 이 고난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 바울은 이처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 고난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저야 할 자기 십자가”인 것입니다.

결 론 : 우리는 주님의 메시야적인 사역에 대한 성경적인 바른 지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생활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바른 해답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영광의 메시야만을 생각하면 우리는 이 땅에서 영광의 생활 많을 추구하게 될 것입니다. 고난의 주님을 생각하여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생활을 해야, 장차 나타날 그날에 주님과 함께 영광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 47≈ 목숨을 얻는 일과 잃는 일

(본문 : 마가복음 8 : 35 - 37)

서 론 :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34절에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제 35절 이하의 말씀은, 이 말씀을 새로운 각도에서 해석해 주는 말씀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왜 주님을 따르는 일에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하는가에 대한 설명이 되겠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사람들이 세상의 명예나 물질이나 인간적인 처세를 중요시 하지만 그러나 그런 것들이 아무리 중요할지라도 자신들의 육신 적인 생명보다는 덜 중요하며 그리고 사람들의 생명이 온 천하보다 중요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의 참 생명에는 비길 수 없다는 뜻으로 교훈 해 주신 것입니다.

1.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는 생명

예수님이 하신 이곳의 말씀은 문장 적으로는 역설의 극치를 이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고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는 말씀은 우리가 한번 그 뜻을 깊이 음미해볼 만한 말씀입니다.

(1)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라”고 하신 말씀의 제 목숨이란 육체적인 생명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제 목숨이란 단어는 영원한 생명을 의미하는 ‘조에’나 마음, 영혼 혹은 생명을 뜻하는 ‘프뉴마’가 아니라 육체적 생명 혹은 현재 누리고 있는 땅의 생명을 뜻하는 ‘프쉬케’를 말합니다. ‘푸쉬케’란 오직 이 땅에서만 누릴 수 있는 자기 생명이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뜻하는 ‘조에’나 ‘프뉴마’와는 당연히 구분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제 목숨을 구원한다는 말은 자신의 육신 적 생활을 위주로 살아가는 생애를 말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푸쉬케’를 위해 살아갑니다. 적어도 그들의 인생은 아무리 고상한 목표를 세우고 아무리 위대한 포부를 지녔다고 해도 그 궁극적 목적은 자기자신의 영광을 누리는 일에 있습니다. 자신의 것을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한다고 해도 그런 일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에 있지 않다면 그것은 자신의 영광에 있는 것입니다.

또 여기서 밝혀주는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는 생활은 자신의 육신의 정욕을 이루고자 하는 생애를 말합니다. 육신의 사람이 잘 되려고 하는 모든 인간적인 노력은 모두 자신의 정욕을 위한 생활입니다. 사람들이 이처럼 자신의 정욕을 위한 생애를 보내는 한, 그의 모든 노력은 아무런 유익이 없는 것입니다. 이 같은 노력으로 인생의 최고의 지경에 이르렀던 솔로몬 왕은 그가 원하는 일을 다 성취한 후, 그 허무함에 대하여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분복이로다 그후에 내가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전2:10-11).

(2) 잃을 것이라고 한 말씀은 참 생명을 뜻합니다. 예수님이 잃을 것이라고 하신 생명은 ‘프쉬케’를 의미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조에’를 의미하신 말씀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육체적 생명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은 실인즉 자신의 영원한 생명을 상실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노아 시대의 사람들이나 롯의 시대의 사람들이 바로 이 같은 생애를 살다가 멸망을 당했다고 경종 하셨습니다.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으며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오듯하여 저희를 멸하였느니라”(눅17:26-29). 이들의 생활은 온전히 ‘프쉬케’에만 목표를 두었습니다.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는 생활에 열심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여기서 잃는다고 하신 대상은 천국에서 누릴 영광의 기업을 말합니다. 이 땅위에서 누리려는 영화로운 자신의 생애는 결과적으로 하늘에서 누릴 영원한 영광의 기업의 상실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천국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 중에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하고 숨겨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고 하셨습니다(마13:44).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이 자신의 생애를 이 보화를 위해 살아갈 때 천국을 소유할 수 있다고 하신 것으로 새로운 삶의 가치를 얻기 위해 제 목숨을 구원코자하는 ‘프쉬케’적인 생애를 버려야 할 것을 의미한 것입니다.


2.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을 얻는 생명

예수님의 역설적인 설명은 그 반대 입장에서도 적용 시키셨습니다.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1) 제 목숨이라고 하는 이 ‘프쉬케’는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영원한 삶의 가치가 좌우되는 것입니다.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고 하셨는데 여기서 구원받을 생명은 ‘프쉬케’가 아니라 ‘조에’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역설적인 말씀은 영원한 생명을 위해 육신의 생명을 희생하는 생애를 살아야 할 것을 권면 하는 말씀입니다.

(2)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의 ‘프쉬케’를 희생해야 할 대상에 대하여 “나와 복음을 위하여”란 단서를 붙이셨습니다. 양심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또 사회에서 칭송 듣는 정의적인 일도 아닙니다. 이 같은 일이 아무리 고상하고 세상에서 높이 평가받는다고 해도 그것은 ‘프쉬케’에 속한 것이지 ‘조에’에 속한 일이 아닙니다. 오지 “나와 복음”을 위한 희생만이 영원한 생명을 이루는 가치를 가집니다.

나와 복음을 위한다는 말은 그리스도와 복음을 이중적으로 분리시킨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복음을 하나로 본 것입니다. 복음을 위한 일은 모두 그리스도를 위한 일이며 그리스도를 위한 일은 또한 복음을 위한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의 상이 큼이라 너의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5:11-12).

(2) 여기서 제 목숨을 잃는다는 말은 자기 희생을 뜻합니다. 잃는다는 말을 순교로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순교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바울은 “내가 날마다 죽노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이 죽는다고 한 그의 고백은 주님과 복음을 위해 날마다 자신의 ‘프쉬케’의 생명을 희생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프쉬케’의 생애를 보내면서 반면에 ‘조에’를 위한 생애를 동시에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조에’를 위한 생애는 오직 ‘프쉬케’의 희생에서만이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육신 적인 희생이 따르지 않는 영적인 열매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바울도 로마서에서 “육신을 쫓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쫓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고 말했습니다(롬8:5-6).

결 론 :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만일 천사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온 천하를 얻는 육신의 최대의 영광을 얻는다고 해도 만일 자신의 육신의 생명을 잃으면 그 같은 영광이 무엇에 소용될 것이냐는 것입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서 자신의 육신적의 생명과 대체할 대상이 무엇이겠느냐는 것입니다. 그처럼 필요한 생명을 가치 없는 이 세상일에 사용하므로 그 생명을 잃어버리지 말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에 사용해야 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 48≈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본문 : 마가복음 8 : 38)

서 론 : 예수님은 이 시대를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라고 정죄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세대는 어느 역사적인 한 시점을 가리킨 말씀이 아니라 인류의 전 역사적인 과정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같은 인류의 총결산은 그 값을 치르게 될 날이 오게 되는데 그 날이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아버지의 영광으로 천사들과 오실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날에 인류의 선악간의 모든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이 있습니다. 모든 인류는 바로 그날을 대비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 날은 먼 훗날인 것이 아니라 어느 시대의 사람이건 바로 자신의 생애 앞에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날은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1.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

예수님은 이 세대를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타고 정죄 하셨습니다.

(1)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란 바로 하나님을 떠난 인간 사회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인간들은 그들의 마음과 생각과 생활에서 하나님을 내어쫓았습니다. 죄의 종의 자리로 스스로 타락하였고 죄의 길을 택하였으며 정욕과 탐심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인간의 마음을 타락한 그대로 방임해 두신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다”고 말씀하시고 그 결과 인간 사회에는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 능욕, 교만, 자랑, 배역, 무정, 무자비 등이 팽배한 사회가 된 것이라고 경종해 주고 있습니다(롬1:28-32). 성경에는 이 세대를 비유하기를 소돔, 애굽, 바벨론 등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계11:8).

(2)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란 특히 종말에 살아가는 인류 사회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인자가 올 때에 대하여 노아의 때와 같다고 하신 것은 노아 시대의 인류의 생활상이 음란하고 죄 많은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고 하셨습니다(마24:37-39).

여기서 음란하다는 말은 인간 사회의 타락한 성도덕과 아울러 영적 음란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성도덕의 타락은 언제나 영적 진리의 타락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육적인 음란은 그 가운데서 빠져 나올 수 있지만 영적 음란은 좀처럼 돌이킬 수 없습니다. 두아디라 교회에 등장한 음녀 이세벨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길을 주었으되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아니하는 도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계2:21). 진리를 버리고 음행의 포도주를 마시는 자는 회개의 기회가 주어져도 회개하지 못하며 결국은 배도 자로 주님의 심판을 면치 못하는 것입니다.

(3)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란 표현은 이 세상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의 생활상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노아 시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는 생활을 했다는 것은 그들의 생활 가운데 하나님의 없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마땅히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떠난 육신 적인 생활에 만족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인 음란이며 이 영적 음란이 우리를 영적으로 타락시키고 종말에는 적 그리스도와 손을 잡는 배도 세력으로 형성되고 세상을 혼취케 하는 음행의 포도주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4) 이 같은 사회가 바벨론 입니다. 인류의 종말은 이 바벨론 사회가 완전히 형성된 사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사회에서 빠져 나오지 않으면 안 된다고 경종 하십니다. “힘센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들이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를 인하여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그로 더불어 음행 하였으며 땅에 상고들도 그 사치의 세력을 인하여 치부하였도다 하더라.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서 다른 음성이 나서 가로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그 죄는 하늘에 사무쳤으며 하나님은 그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신 지라 그가 준 그대로 그에게 주고 그의 행위대로 갑절을 갚아주고 그의 섞은 잔에도 갑절이나 섞어 그에게 주라”고 하셨습니다(계18:2-6).

2.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예수님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고 하셨습니다.

(1) 여기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한다는 말은 35절에 있는 말씀과 연결된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는 말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한다는 뜻을 찾아야 합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잃는 제 목숨이란 육적 생명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인의 육신은 영적인 생명을 추구하는 일에 헌신할 때 고귀한 것이지 그의 육적인 생활에 만족을 이루기 위하여 살아갈 때는 가장 추한 생애가 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자신의 참 생명을 잃어버리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한다는 말은 그리스도를 부끄러워하는 일과 그의 말씀을 부끄러워하는 일,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주님을 부끄러워한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주님을 믿는 일을 자랑스럽게 여기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는 죄악이 세상에 관용한 세대입니다. 이 시대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주의 이름을 부끄럽게 여길 수 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임을 떳떳하게 나타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빛을 발산해야 하며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빛을 숨기려 하고 향내를 억제하려고 합니다. 이 사람들은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 동화되어 가는 사람들입니다.

내 말을 부끄러워한다는 말은 그의 말씀을 순종하는 생활을 부담스럽게 여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성결된 생활을 드러내기를 꺼려하는 것입니다. 자신도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의 구성원 속에 숨어 있기를 원합니다.

이 같은 생활은 결국 사람들 앞에서 주의 이름을 부인하는 중대한 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활 속에 어떤 어려운 여건이나 무서운 핍박이나 혹은 환난 가운데 처하게 될 때 주의 이름을 부인한다면 예수님도 그 사람을 아버지 앞에서 부인할 것이라고 경종 하셨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결과적으로 그리스도를 다른 사람들 앞에서 증거하는 일을 꺼려합니다.

(2) 우리는 어떤 환경 속에서도 결코 주의 이름을 부끄럽게 해서는 안 됩니다. 이 일에 대하여 요한계시록 서두에 있는 2, 3장에서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이기는 자”가 될 것을 권고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우리의 믿음을 지키는 일에 생명을 걸어야 합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주의 말씀을 지키며 그 이름을 배반치 아니한 교회로서 크게 칭찬을 들었을 뿐 아니라 “나도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케 해 주시겠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진리를 파수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세상이 종말에 이를수록 진리를 넘어뜨리려는 사탄의 악랄한 방법이 동원됩니다. 온 세상을 음행의 포도주로 취하게 하는 음녀의 세력이 등장하여 금잔 안에 담긴 포도주로 취하게 합니다. 진리를 지키는 일은 진리의 말씀을 배우고 말씀 가운데 믿음으로 굳게 서서 그 말씀 안에서 순종하는 생활입니다.

다음에 우리는 죄악을 이기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죄의 물결에 휩싸여 탁류에 떠내려가는 나약한 성도가 아니라 영으로 육의 사람을 죽이며 지배하는 생활로 육의 사람을 이기는 영적 생활의 승리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 같은 생활은 성령의 충만함을 얻기 위해 기도하고 사모하며 순종하는 생활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합니다. 이런 무장을 단단히 하고 자신을 지키고 사탄을 대적해야 믿음의 선한 싸움에 승리자가 될 수 있습니다.

결 론 : 모든 결론은 예수님이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올 때” 결판나는 것입니다. 이날은 주님의 재림의 날을 의미하면서 또 한편 마지막 인류의 심판 장소인 흰 보좌 심판대 앞에서의 심판의 모습을 보여 주시는 말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재림과 흰 보좌 심판대는 그 중간에 천년 동안의 천년 왕국의 기간이 개재되어 있기는 하지만 예수님의 이 말씀은 이 모든 것을 심판하실 마지막 심판의 시기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9장

◆ 밤중소리 01-08 | VIEW : 545

49) 예수님의 변형 (1절~3절)

50) 오직 예수만 보이더라 (4절~8절)

51) 먼저 온 엘리야는 누구냐 (9절~13절)

52) 귀신의 존재 (14절~22절) 

53) 믿는 자의 능력 (21절~24절) 

54) 믿음 없음을 도우소서 (23절~29절) 

55) 깨닫지 못한 이유 (30절~32절) 

56) 누가 큰 자냐 (33절~37절)

57) 주님께 속한 자의 특권 (38절~42절)

58) 죄에 대한 투쟁 (43절~50절)


≈ 49≈ 예수님의 변형

(본문 : 마가복음 9 : 1 - 3)


서 론 : 성경에는 사람이 쉽게 납득할 수 없는 말씀이 많이 나와 있습니다. 1절에 있는 말씀도 그 중에 하나가 되겠습니다.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는 말씀의 이해가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문체적으로 해석한다면 예수님의 제자 중에 얼마인가는 살아서 예수님의 재림을 바라볼 수 있다는 뜻으로 나타나 있기 때문입니다.


1. 권능으로 임하는 하나님 나라

그러면 이 같은 문제에 대하여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 바른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하여 신중한 연구가 있어야 합니다.

(1) 이 말씀은 예수님의 재림을 실제로 그의 제자들이 볼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아직도 재림하지 않으셨으며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미 다 죽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그 말씀이 성취된 다음에 그 진실성이 드러나기 때문에 주님의 재림을 주의 제자들 중에 볼 자들이 있다고 하는 해석은 타당성이 없습니다.

(2) 어떤 분은 이 경우의 해석을 그 다음에 나오는 말씀과 연결시키기도 합니다. 2절에 나온 말씀대로 이 말씀을 들은 후 엿새만에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신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산에서 놀라운 광채의 몸으로 변형되셨는데 하늘에서 내려 온 엘리야와 모세와 함께 말씀하는 광경이 나오고 있습니다. 1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권능으로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란 바로 이때 제자들이 친히 본 변화산에서의 이 같은 광경이 아닌가 하는 추측입니다.

그러나 이 해석도 석연치 않은 점이 많이 있습니다. 먼저 “죽기 전”에 라고 그 시기를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을 하신 지 불과 엿새 후에 일어난 사건이란 점에서 시기적으로 너무 빠르지 않느냐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높은 산에 내려와 예수님과 함께 대화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 장면이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장면이라고 볼 수 있느냐는 데도 문제가 있습니다.

(3) 다른 또 하나의 경우는 그 후 오랜 시일이 지나 “오순절 날” 마가의 다락방에 임하신 성령의 경우를 가리킨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이 해석은 또한 그 후 온 세계적으로 복음을 전파하여 복음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나라의 형성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해석도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란 말씀에서 아마 이 같은 사건이 일어날 때에는 그곳에 있었던 제자 중 얼마는 이미 죽은 상태에 있을 것을 말씀하신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점을 제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순절 날 성령 강림 때는 가룟 유다만 제외하고 모든 제자들이 살아 있었습니다.

(4) 마지막으로 한가지 또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사도 요한이 받은 종말적 계시의 경우가 그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주후 95년경 복음을 위해 유배되었던 밧모섬에서 놀라운 광경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주 재림의 영광이 그것입니다. 요한은 요한계시록 서두에서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의 본 것을 다 증거 하였느니라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요한은 이때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서 주 재림의 영광을 바라보았고 그는 그 기쁨에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하는 간구를 드렸습니다. 우리는 오순절 날에 임한 성령의 경우와, 사도 요한이 받은 계시의 경우를 가장 합당한 해석으로 볼 수 있지만 요한의 경우가 더욱 본문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변화산에 나타난 엘리야와 모세

예수님이 먼저 영화로운 몸으로 변형되사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고 후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저희에게 나타나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1) 예수님의 변형은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심히 희어졌더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변형이란 단어는 다른 형태로 변화되었다는 뜻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일시적으로 제자들 앞에 그렇게 보인 것이 아니라, 그리고 그의 몸뿐 아니라 그의 옷까지도 완전히 변화된 상태를 말하며 이것은 아마도 부활의 몸의 영광을 나타낸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신 후 지금 하늘에서 이런 모습으로 계실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왜 이 같은 모습으로 변형되신 것인가에 대한 해답은 하늘에서 내려 온 엘리야와 모세와 더불어 말씀을 나누시려면 그들보다 더 우위적인 모습을 가져야 할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2) 엘리야와 모세가 내려와 예수님과 말씀을 나눈 일은 중요한 의의가 있습니다. 엘리야는 살아 있는 몸으로 승천한 하나님의 선지자입니다. 그가 하늘로 올려 갔을 때 그의 몸은 물론 변화 받아야 했습니다. 썩어질 육신의 몸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에 올라가 살아갈 사람은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세는 몸은 세상에서 죽고 땅에 묻혔지만 영으로 하늘에 올라간 하나님의 종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알 수 있는 것입니까? 첫째로 모세는 어떤 사람들의 견해처럼 영의 대기소라고 말하고 있는 낙원에서 온 것이 아니라 엘리야와 함께 천국에서 왔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낙원과 천국은 같은 뜻으로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낙원은 영의 대기소요, 천국은 하나님 나라로 부활한 몸으로 들어가는 곳이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바울이 가본 셋째 하늘이라고 한 낙원이란 바로 천국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바울이 차라리 몸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를 사모했던 그 장소도 천국이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로 엘리야나 모세가 똑같은 영화로운 몸으로 내려갔습니다. 우리들의 보기엔 같은 영광의 몸이지만 하늘에서 보기엔 엘리야의 몸이 모세의 몸보다 더욱 영화롭게 보일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엘리야는 변화 받은 몸, 말하자면 신령체인 부활한 몸을 입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3) 이 같은 놀라운 광경을 바라본 사람은 예수님의 세 제자들이란 사실은 우리에게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이들 세 명의 제자들은 항상 주님 곁에 있었습니다. 주님 곁을 떠나지 않고 주님과 함께 있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주님 가까이 있다는 말은 그의 말씀의 가르침을 받으며 그 말씀을 묵상하는 생활을 말합니다. “누구든지 내게 들으며 날마다 내 문 곁에 서서 기다리며 문설주에서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나니 대저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얻을 것이라”고 했습니다(잠8:34).

이들 세 명의 제자들은 누구보다도 충성스러웠습니다. 비록 베드로는 계집종 앞에서 주님의 이름을 부인하는 실수를 저질렀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허물이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적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바른 신앙 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학식은 부족하고 비록 어부들로 무식한 처지에 있었지만 주님을 아는 지식이나 지혜는 남달리 뛰어났습니다. 이들은 또한 높은 신앙 차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땅에 속한 신앙에 가까웠지만 이들은 신령한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영적인 밝음이 있었습니다.

결론 : 우리들이 주님의 말씀을 따르고 주님을 남달리 사랑하면 이들처럼 주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땅의 것에 얽매이고 신령한 은혜를 소홀히 하면 우리는 언제나 어리석은 자들이 될 것입니다. 우리들도 우리의 신앙적인 단계를 높여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처럼 다른 제자들이 볼 수 없었던 신령한 세계, 주님의 영광된 모습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 50≈ 오직 예수만 보이더라

(본문 : 마가복음 9 : 4 - 8)


서 론 :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이 계시는 산에 나타난 일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와 더불어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그 말씀의 내용이 이곳에는 없지만 눅9:31절에는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하였다”고 밝혀 주고 있습니다. 이 같은 세분의 대화는 우리의 관심을 끕니다. 그것은 모세는 구약 율법의 대표자이자 이스라엘이 원하고 바라는 메시야의 예표 인물로 자기를 나타냈기 때문입니다. 한편 엘리야는 구약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 선지자의 대표자로 이 두 인물이 예수님이 계시는 산에 내려온 사실과 예수님의 죽으심에 관한 대화는 심각한 것이었으며 의미가 깊은 것이었습니다.


1. 베드로의 초막론

갑작스럽게 이 같은 황홀한 광경을 바라보는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는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1) 아마 이들 두 명의 하나님의 전권 대사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가지고 예수님께 나타났을 것입니다. “저희에게 나타났다”는 말은 환상이나 이상으로 본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나타남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 같은 사건은 제자들의 육안으로 분명히 볼 수 있는 체험적이며 실질적인 사건이란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구약에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모세와 엘리야가 실제로 그곳에 나타났다는 사실입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그들의 생명이 중단된 상태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계속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두개인들에게 죽은 자에 부활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 “죽은 자의 부활을 의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여 야곱의 하나님으로라 하신 것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고 하신 말씀에서 모세도 하나님 앞에서 죽은 자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마22:31-32).

둘째는 사람이 죽으면 그 생명 (영혼)은 반드시 하나님이 계시는 천국에 올라간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누가 말하는 것처럼 영의 대기소에서 부활의 날까지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곧장 천국으로 올라가 그곳에서 주님과 함께 거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모세나 엘리야나 똑같이 천국에서 파견되어 내려온 천국 사람들입니다.

셋째는 이들은 이미 육신의 옷을 벗고 신령한 생명으로 변화된 사람들입니다. 모세는 육신은 죽었지만 그의 영이 영원한 생명으로 살아 있기 때문에 신령한 생명의 소유자가 되었으며, 엘리야는 그의 육신이 신령 체로 변화되어 부활한 몸과 동일한 신령한 몸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계시록 11장에 등장하는 두 증인에 대하여 그들의 하는 사역이 모세나 엘리야의 사역과 같다는 점을 들어 종말에 모세와 엘리야가 하늘에서 내려와 두 증인의 사역으로 예언을 하다가 순교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다시 죽기 이전의 육신의 몸을 가지고 세상에 내려올 수 없으며 설령 모세와 엘리야가 신령 체로 세상에 와서 복음을 전한다고 해도 그들은 결코 순교 할 수는 없습니다. 변화산에 내려온 그들은 이미 죽을 수 없는 영화로운 신령한 몸으로 내려왔기 때문입니다.

(2) 세 제자중 하나인 베드로가 이 광경을 바라보고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베드로는 이 놀라운 광경을 바라보면서 흥분과 감격을 억제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 당장에 그들이 기대했던 메시야 왕국이 실현될 줄로 알고 있는 터에 예수님의 모습이 영광의 모습으로 변형되고 하늘에서 모세와 엘리야까지 동원되어 함께 대화하시니 흥분 할 만도 한 것입니다.

유대인의 메시야관은 신약의 교회시대를 거치지 않고 그들의 메시야가 오시면 그분에 의하여 곧장 이 땅에 그들의 왕국이 실현 될 줄로 알고 있었던 그런 메시야관이었습니다. 구약에는 신약시대에 관한 직접적인 언급이 없고 복음으로 이방인들이 구원을 얻는 신약시대는 철저하게 비밀로 가려졌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고난이나 복음 전파로 인한 이방인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서는 이스라엘 중 아무도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초막 셋을 지을 것을 제안했습니다. “초막 셋을 짓되”라고 말했습니다. 아마 높은 산인지라 날씨가 내우 쌀쌀했을 것입니다. 세 분이 밖에서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보고 자신들이 할 최선의 예우는 아마 그분들을 위해 초막을 세우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아마도 이 같은 영광스러운 광경이 그대로 오랫동안 계속되기를 원했을 것이며 메시야 왕국을 세우는 일에 모세나 엘리야도 그들과 합세하여 도와 줄 것으로 여겼을는지 모릅니다.

(3) 이 일에 대하여 마가는 “이는 저가 심히 무서워하므로 저가 무슨 말을 할는지 알지 못함이더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육신을 가진 인간이 하늘의 생명체를 바라볼 때는 무서워하는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다니엘도 그랬고 종말의 계시를 받은 사도 요한의 경우도 그러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 예수님의 변화된 모습을 바라보는 세 제자들은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이 광경을 황홀하게 바라보았으며 이 같은 영광스러운 광경이 계속되기를 원했습니다. 사람이 무서울 때는 헛말이 나오거나 말에 실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들의 경우가 그러했습니다.


2. 예수만 보이더라

이때 마침 하늘에서 구름이 그들에게 내려와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났다고 했습니다.

(1) 구름 속에서 들려온 음성은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그러므로 구름이 그들에게 내려왔다는 말씀은 하나님이 그곳에 나타나셨다는 의미가 됩니다.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의 표현이기도 하며 하나님은 구름 속에서 말씀하기도 하셨습니다(출24:16). 이 구름이 저희를 덮었을 때 그들 중에 있었던 모세와 엘리야는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그들은 임무를 마치고 구름에 덮여 하늘로 올려 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마 제자들에게 변화산의 사건을 보여 주신 것은 모세의 모습을 통해서 예수님이 모세가 예언한 메시야 이심을 확인시키기 위함이며 엘리야를 통해서는 지난날 그들의 선지자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외치고 약속한 메시야 이심을 나타내려고 하셨을 것입니다. 모세는 일찍 이스라엘을 향하여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 지니라”고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신18:15).

(2) 구름 속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는 명령이십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제자들에게 이 같은 영광을 보여 주신 하나님의 뜻을 밝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란 말씀에서 예수님에 대한 제자들의 믿음을 견고케 하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바리새인들이나 유대인들의 끊임없는 도전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또 얼마 후에 예수님의 고난 앞에서 실족할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무엇인가 주님에 대한 확실한 믿음의 뿌리가 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이처럼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하늘의 음성을 들려주심으로 이 같은 믿음을 그들의 마음속깊이 심어 주신 것입니다.

“내 사랑하는 아들”이란 말씀으로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이스라엘의 참 메시야 이심을 확인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그 누구의 말을 들어도 안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의 말씀만을 들어야 합니다. 이에 대하여 히브리서 기자는 이처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 하셨다”고 했습니다.

(3) “이때 제자들이 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와 자기들뿐이었더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다시 바라본 예수님은 변형된 황홀한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이제야 자기들의 선생이 보통 분이 아니심을 알고 더욱 두려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결 론 : 제자들의 변화산에서의 이런 경험은 그들의 마음에 한평생 간직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더욱 확실하게 믿게 되었을 것입니다.


≈ 51≈ 먼저 온 엘리야는 누군가

(본문 : 마가복음 9 : 9 - 13)

서 론 : 변화산에서 일어난 황홀한 사건은 이들 세 제자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경험이요 또한 여러 가지 의문점이 제기되는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그곳에 왜 엘리야가 나타났을까? 그리고 그 엘리야는 말라기에 있는 엘리야의 예언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점 등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요한계시록 11장에 나오는 두 증인 중에 엘리야의 사역을 이루는 한 명에 대하여 그가 엘리야이며 인류의 종말에 모세와 엘리야가 직접 하늘에서 내려와 예언을 하다가 순교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1. 예수님의 경계

산에서 내려오시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경계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는 내용입니다.

(1) 예수님이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하신 말씀은 자신이 영광의 모습으로 변모되셨던 사실을 세상에 알리지 않으시려는 의도에서입니다. 예수님은 분명 유대인들이 기다려 온 메시야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성경에서 고난의 메시야에 대한 계시는 이해하지 못하고 영광의 메시야의 출현만을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고 따른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께 대하여 이 같은 메시야로 알고 따랐습니다. 예수님에 의하여 곧 하나님의 나라, 메시야 왕국이 건설될 줄로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이 같은 처지에서 산에서 본 예수님의 영광의 모습과 모세와 엘리야에 관한 사건을 소문낸다면 그야말로 이제 당장에 메시야 왕국이 임할 줄로 알고 소동이 날 것이기 때문에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는 경계의 말씀을 들려주시게 된 것입니다.

(2) 제자들은 이 말씀을 마음에 두며 서로 의논했다고 했습니다. 제자들의 의논은 이 두 가지 문제 때문에 나왔을 것입니다. 하나는 “인자가 죽는다는 것이 무엇일까”하는 의문입니다. 유대인들이 믿고 있는 메시야에게는 죽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오래 전부터 메시야를 기다려 왔지만 결코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는 메시야를 기다려온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메시야가 나타나면 모세와 같은 큰 권능을 가지고 먼저 로마의 지배 아래 있는 이스라엘을 회복할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 메시야는 다윗의 왕위를 계승한 영원한 왕으로 앉아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온 세계를 영원히 다스릴 것으로 믿었습니다. 이 같은 기대와 소망 가운데서 그들은 메시야를 기다려 왔습니다. 지금까지도 유대인들의 메시야 관은 그때나 변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자기들이 메시야로 확신하고 있는 예수님은 그들에게 “인자가 죽는다”는 말씀을 들려주고 있기 때문에 메시야가 죽는다는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른 또 하나는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다”는 말씀입니다. 메시야가 죽다는 말씀도 이상하거니와 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다는 말은 더더욱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인데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다니 참으로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의논하게 된 것입니다.

2. 엘리야는 누군가?

제자들이 생각하기에 예수님이 분명 메시야이 신데 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다”는 말씀을 하시는가? 이에 대하여 해답을 얻을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말라기에 기록되어 있는 엘리야에 대한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질문하게 되었습니다.

(1) 제자들은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고 물었습니다. 그 당시 서기관들은 성경을 베끼기도 하고 해석도 내리는데 그들이 메시야가 올 때의 상황에 대하여 말라기에 예언된 엘리야의 경우를 들어 메시야가 올 때에는 먼저 엘리야가 와야 할 것이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이 같은 질문이 제자들에게서 나오게 된 것은 예수님의 메시야 이심이 분명한데 그러면 엘리야는 누구며, 만약 엘리야가 와서 이스라엘로 회개시켜 메시야를 영접하게 한다면 메시야가 왜 죽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가시지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2) 엘리야에 대한 말라기의 예언은 이러합니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고 하셨습니다(말3:5-6).

이 말라기의 예언에는 종말론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여기에 나타난 문장을 보면 마치 엘리야의 등장이 재림의 예수의 시기로 보는 듯한 표현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면으로 보아 유대인들은 메시야의 등장의 시기를 인류의 종말로 알고 있었으며 이 종말에 메시야가 와서 이스라엘을 회복하고 새로운 왕국을 세울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메시야의 등장에 앞서 엘리야가 나타나 이스라엘을 회개시킬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은 분명 주 재림의 시기가 되는 인류의 종말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이것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느냐? 이 해석에 있어 두 가지 면에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① 이 예언은 주의 초림에 관한 예언이며 세례 요한의 등장과 주의 초림으로 이 예언은 성취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의 이르기 전에”라고 한 말은 마지막 인류의 심판이 있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메시야로 그의 아들을 보내실 것과 엘리야를 보내실 일에 대하여 예언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은 바로 대목의 경우에 적용시켜 해석해 주신 것입니다. “엘리야가 왔으되 기록된 바와 같이 사람들이 임의로 대우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곳에서 엘리야를 세례요한과 결부시켰습니다. 예수님이 직접적으로 세례요한이라고 지적한 것은 아니지만 “그제야 제자들이 예수의 말씀하신 것이 세례요한인 줄을 깨달았다”는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마17:13).

예수님은 세례요한이 임의로 대우를 받아 그들에게 멸시를 당하며 끝내는 헤롯왕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처럼 예수님도 그들의 손에 고난을 당하실 것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마17:12). 예수님은 이 같은 사실에 대하여 기록된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기록하기를”이란 말씀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엘리야로 먼저 온 세례요한도 기록된 대로 사람들에게 임의로 대우받았으며 예수님 자신도 기록된 대로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하셔야 했습니다.

② 우리는 이 엘리야의 등장해서 초림의 메시야의 경우가 아닌 종말론적인 입장에서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란 말을 주 재림의 시기가 되는 인류의 종말과 연결시킬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말하자면 이 말라기의 예언을 이중적으로 해석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면 초림의 메시야의 경우에는 엘리야를 세례요한으로 지적했다면 재림에 메시야의 경우에는 누구를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초림의 메시야의 영접을 위해 회개를 외쳤습니다.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는 말씀은 이스라엘의 회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재림의 경우는 어떠한가? 재림의 경우는 세례요한과 같은 회개의 사명을 가지고 등장하는 또 다른 엘리야가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두 증인”들입니다. 두 증인은 종말에 하나님으로부터 권세를 받습니다. 이 권세에 대하여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1206일을 예언하리라”고 하셨습니다(계11:3).

세례요한은 요단강에서 서기관들이나 제사장들을 책망하면서 회개를 외치며 물로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메시야의 초림의 길을 예비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 재림시의 엘리야는 지팡이 같은 갈대를 가지고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므로 그리스도의 신부들에게 흰옷을 입혀주며 신부가 입을 세마포로 단장을 시킵니다(계7:9-14).

세례요한의 회개의 세례를 거역한 자들이 다 패역한 자들로 하나님의 나라에서 제외되었던 것처럼, 두 증인이 외치는 회개의 예언을 거부하는 무리들은 후3년 반에 온 세상에 임하는 저주의 대 환난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들 종말의 엘리야는 144000명의 순교자들로 종말에 하나님에 의해 세례 요한의 사명처럼 쓰임 받을 하나님의 종들을 의미합니다.


결 론 :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경 적인 깊은 지식을 전달해 주셨지만 그들에게는 깨달음이 부족했습니다. 아직까지도 유대인들은 모세의 얼굴에 씌운 수건을 벗지 못하고 성경을 상고하기 때문에 고난의 메시야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숨겨진 계시의 비밀을 깨달아 바른 지식을 가지고 바른 믿음을 가져야 했습니다.


≈ 52≈ 귀신의 존재

(본문 : 마가복음 9 : 14 - 22)


서 론 : 변화산에서 일어났던 일은 이제 막이 내리고 새로운 사건으로 장면이 옮겨집니다. 예수님은 세 제자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그들이 내려온 곳은 남은 제자들이 머물러 있었던 장소입니다. 산 아래에 남아 있었던 제자들은 무리에게 둘러싸여 서기관들과 변론하는 일, 귀신들린 아이로 인한 난처한 처지 중에서 쩔쩔매며 진땀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마침 이때 선생님이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본 온 무리는 “심히 놀라며 달려와 문안하거늘”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놀랐다는 말은 제자들의 난감한 처지를 안쓰럽게 보고 있었던 주변의 무리들이 문제의 해결 자가 나타난 것을 보고는 반가워한 표정을 말합니다. 달려와 문안한 것은 평소에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늘 예수님을 선지자와 같은 훌륭한 선생님으로 존경하고 따랐기 때문입니다.


1. 제자들과 서기관들에 변론

예수님의 눈에 비춰진 것은 제자들의 난감한 모습입니다. 그들은 서기관들에게 둘러싸여 공격적인 질문을 받고 있었으면서도 그 공격을 막아낼 답변을 못하고 있었습니다.

(1) 예수님은 이 같은 제자들을 민망히 보시고 그들에게 “너희가 무엇을 저희와 의논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주님의 질문에 그들은 묵묵부답이었습니다. 아직까지 그들로부터 부끄러움을 당하고 수모를 당한 일을 말씀 드리기가 어려웠던 모양입니다. 그때 무리 중의 하나가 주님께 나왔는데 그 사람이 곧 귀신 들린 아들의 아비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지금 그 자리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에 내용을 설명하기를 “선생님 벙어리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 왔나이다. 귀신이 어디서든지 저를 잡으면 고꾸라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하여 가는지라 내가 선생의 제자들에게 내어쫓아 달라 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고 대답한 것입니다.

(2) 이 대답에 따르면 주님의 제자들이 귀신들린 아비의 아들을 고치지 못한 사건으로 인하여 변론이 벌어졌음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여기서 그들의 변론을 추론해 본다면 제자들은 서기관들로부터 “너희가 무슨 권능으로 귀신을 내어쫓느냐” “너희 선생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아니냐” “그런데 왜 너희는 왜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냐” “안식일에 병 고치는 일이 율법에 어긋나거늘 왜 너희 선생은 안식일에도 병을 고치느냐” “너의 선생이 전하는 복음은 반 율법적인 것이거늘 그것으로 어찌 죄인을 구원한다 하느냐 ”는 등, 이런 안건을 가지고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을 것이며 제자들은 어떤 결정적인 대답을 하지 못하고 궁색한 처지에서 어쩔 줄 모르고 있었던 그런 시기에 주님이 그들 앞에 나타나셨을 것입니다.


2. 귀신의 존재와 귀신의 사역

성경에는 귀신의 존재에 대하여 분명한 언급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귀신의 근원에 대한 명확한 해답을 찾을 수는 없습니다.

(1) 악한 영에 대하여 성경에서는 여러 가지로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사탄입니다. 이 사단은 악한 영의 근원 자로 등장합니다. 이 사단은 뱀의 모습으로 에덴에 나타나 최초의 사람, 아담과 하와를 미혹합니다. 그러나 뱀은 사단의 자기 표현의 수단에 불과할 뿐 뱀이 곧 사단은 아닙니다. 사단은 영적 존재이기 때문에 육적 존재인 인간을 미혹하기 위해서는 어떤 물질 형태의 생명체에 들어가 활동해야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사단에게 이용당할 만한 타락한 피조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비교적 가장 간교하게 만들어진 뱀에게 들어가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인간을 타락시키는 첫 번째 활동을 시작한 것입니다.

이 자에 대하여 계시록 12장에는 “한 큰 붉은 용”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인류의 종말에는 이 자의 적극적인 활동에 의하여 온 세상이 미혹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자는 하늘의 첫 번째 반역자로 성경에 계시 되어 있습니다(사14:12-15, 겔28:14-16). 이 자는 하늘 보좌에서 내어쫓긴 후, 공중 권세를 잡고 이 세상 흑암의 권세 자로 활동하다가 인류의 종말에 미가엘 천사에 의하여 땅으로 내어 쫓기게되며 1천년간 무저갱 속에 갇혀 있는 신세가 되었다가 궁극적으로 영원한 지옥 불에 던져지게 됩니다(계20:1-3, 10).

(2) 그런데 성경에는 악령의 존재에 대하여 사단에게만 국한시킨 것이 아닙니다. 악령, 귀신, 더러운 영, 미혹케 하는 영 등으로 불리는 존재가 등장합니다. 그러면 이들은 누구인가? 이에 대한 성경 적인 바른 규명이 있어야 합니다.

① 어떤 사람들은 이 귀신이 존재를 “죽은 사람의 영혼”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불신자의 영혼은 어느 일정 기간 동안 세상 영계에 머무르는데 그 사람들의 영혼이 이 귀신의 존재로 인간계에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 같은 주장은 설득력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귀신이 자기를 사람들에게 나타낼 때는 반드시 죽은 사람의 이름을 대며 그 사람에 생존시에 모든 언행, 성품 등을 너무나도 흡사하게 나타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귀신을 내어쫓는 어떤 축사 자는 바로 그 귀신의 이름을 대며 내어쫓음으로 실효를 거두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 같은 주장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입니다.

② 예수님이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이라고 말하면서 그 귀신을 쫓으신 것을 보고 벙어리 되고 귀먹은 사람이 죽은 귀신이 그 사람에게 들어갔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오늘날 많은 귀신 쫓는 사람들이 이 같은 귀신론을 믿고 있습니다. 이런 바탕 위에서 귀신을 내어쫓는 사역을 복음 사역의 제일로 삼고 있습니다.

③ 악령 들린 사람들의 증상을 보면 이들은 자기의 조상, 또는 다른 사람의 흉내내며 그 사람에 대하여 너무나도 자세히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불가사의적인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그뿐 아니라 악령 들린 자에게는 투시력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거라사인의 악령 들린 경우를 보면 생전에 한 번도 주님을 본 일이 없었는데도 예수님을 만나자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아냈습니다. 그리고 악령 들린 자의 악령이 주님의 권능에 의하여 내어쫓기며 다른 짐승에게 들어갈 수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3) 귀신이나 악령, 또는 더러운 영 등은 별개의 구분된 존재들이 아니라 한 존재에 대한 여러 갈래의 이름으로 불려지는 존재입니다. 이들이 죽은 사람들의 영혼이란 주장은 비 성경 적인 해석입니다. 사람이 한 번 죽으면 그것으로 그 사람의 생명은 모두 끝납니다. 끝난다는 말은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고 영원히 갈 장소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자색 옷 입은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서도 밝혀 주고 있지만 사람의 생명은 죽으면 그의 육신적인 생명은 땅에 묻히고 영적 생명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장소로 옮겨지는 것으로 명시되어 있습니다(히9:27). 만약 사람이 죽은 후에도 그의 영적 생명이 살아남아 이 세상에서 계속 활동할 수 있다면 성경의 진리는 일시에 무너져 버립니다. 그들에게는 아직 구원의 소망이 있을 것이며 죽어서도 계속하여 하나님을 대적할 수 있고 하나님의 교회나 성도들을 괴롭힐 수 있다면 아마도 믿는 성도들의 영혼도 이 세상 영계에 남아 있어서 이들과 계속적으로 싸워야 할 것입니다.

(4) 사단에 관한 성경의 증거는 사단의 허다한 무리들이 사단과 함께 존재하며 사단과 함께 활동한다는 사실을 증거 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존재에 대하여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해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는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마25:41). 그리고 사단이 미가엘에 의해 공중에서 땅으로 내어쫓길 때에도 “저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쫓기니라”고 했습니다(계12:7-9). 이들은 공중 권세를 잡은 사단과 함께 세상을 미혹하는 사단의 사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을 외에도 다른 일단의 사단의 사자들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이 무저갱 속에 갇혀 있는 범죄한 천사들이라고 했습니다(벧후2:4). 유다는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그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다”고 했습니다(유1:6). 이들이 왜 이 세상에서 활동하는 악령들과 구별된 무저갱 속에 갇혀 있는 것인가? 이에 대해서는 성경에 공급한 일은 없지만 이들은 그들보다 더 중한 형벌을 받은 타락한 천사들로 볼 수 있겠습니다(눅8:29-31). 그러나 이들도 마지막날에 사단에 의하여 하나님의 교회를 대적하는 일에 사용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화로 나오는 환난은 무저갱 속에서 올라오는 악령들에 의하여 하나님의 교회에 가해지는 핍박인데 이 핍박에는 사단과 그의 온 사자들이 총동원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계9:1-4).


결 론 : 사단은 타락하기 이전에는 하늘 보좌에서 가장 거룩하게 지으심을 받은 구릅 중에 하나였습니다(겔28:14, 계4:6). 그리고 사단의 사자들로 나오는 악령의 존재는 그의 휘하에서 그와 함께 하나님을 대적하다가 내어쫓긴 타락한 천사의 무리들입니다. 이들이 타락하여 하나님의 대적자가 되었을 때 그들의 거룩함은 사라져 버리고 가장 더럽고 추한 존재로 떨어져 버렸으며 이들이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우리를 미혹하는 악령의 역사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 53≈ 믿는 자의 능력

(본문 : 마가복음 9 : 21 - 24)

서 론 :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산에서 내려오셔서 불신의 현장에 도착하셨습니다. 귀신들린 한 아이를 가운데 두고 제자들은 서기관과 변론 중에 곤혹을 당하고 있었으며 아이의 아비는 자기 아들을 고치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실망하고 혹시 예수님이 나타나시면 이 국면을 타개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었을 그때에 예수님이 그곳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곳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면서 믿음이 없는 세대에 대하여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하시면서 책망하셨습니다. 여기서 믿음이 없는 세대라고 하신 말씀은 주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한탄이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믿음이 없었습니다. 서기관들에게도 믿음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기들의 메시야를 죽이려는 음모로 고소거리를 찾으려고 예수님을 좇아 다니고 있었습니다. 자신을 따르는 많은 군중의 무리들도 믿음으로 주님을 따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것을 얻고 찾으려고 따르고 있었습니다. 귀신들린 아이의 아비에게도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믿음이 없는 세대”라고 책망하시면서 탄식하셨습니다.

1.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란 말씀에서 예수님의 비분에 찬 탄식을 들을 수 있는데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겠느냐는 말씀은 얼마 후에 예수님은 그들과 헤어질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것은 얼마 후에 있을 예수님의 고난을 가리킨 말입니다.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겠느냐는 말씀도 제자들과 함께 이 땅에 머무실 기간이 얼마나 되겠느냐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오랜 기간 그들과 함께 계실 것도 아닌데 그들의 이 같은 불신을 보셨을 때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1) 그 아이의 아비는 예수님께 매달려 애원했습니다. 지금 그 아비는 자기의 아들에게 들어간 귀신이 예수님을 보고 그 아이로 심한 경련을 일으키게 하며 땅에 엎드려져 굴며 거품을 흘리는 아들의 모습을 보고 있었습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는 예수님의 물으심에 “어릴 때에 부터니이다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고 대답하면서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라고 간구 했습니다.

‘그러나’라고 하는 말에는 한 가닥의 소망을 버리지 못하고 주님으로부터 무엇인가 얻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하는 기대가 들어 있습니다.

(2)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이란 말은 그 아이의 아비의 주님께 대한 믿음의 정도를 나타낸 말입니다. 그 아비의 이 같은 말은 그가 예수님이 그런 일을 하실 수 있다고 하는 확실한 믿음을 갖지 못한 상태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자기 아들의 귀신을 쫓아내실 수 있다는 분명한 믿음을 갖지 못했습니다.

그가 예수님께 대하여 아마 선지자 중의 한 분이신 정도로 여기기는 했어도 인류의 죄를 지고 그의 백성들을 구원하실 메시야이심을 아직 몰랐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만물의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그가 원하시는 것이면 그 무엇이라도 하실 수 있다고 하는 믿음이 그에게는 없었습니다. 다만 어쩌면 고칠 수 있다고 하는 한가닥 요행을 바라는 기대감으로 “그러나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라는 간구를 드린 것입니다.


2.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겨 도와주옵소서”라는 그 아비의 간구를 들으신 예수님은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한 일이 없느니라”는 말씀으로 대응하셨습니다.

(1) 이 말씀은 먼저 그 아비의 불신에 대한 책망으로 나온 말입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없는 불신의 세대에서 지금 그들의 불신에 도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할 수 있거든 무슨 말이냐”는 예수님의 일차적인 말씀의 뜻은 “그러나 하실 수 있거든” 도와달라는 그 아비의 말에 대하여 “왜 나에 대한 믿음이 없느냐 ”는 뜻입니다. 만약 그가 내가 예수님께 대한 바른 믿음만 가졌었다면 “주여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내 아들이 낫겠나이다”고 아뢰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실 수 있거든”이란 토를 다는 일로 하지 못할 수 도 있다는 불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이 같은 그 아비의 불 신앙은 어디에 근거하고 있었습니까? 예수님께 대한 불신에 있었는데 그는 예수님이 누구이신 가에 대한 분명한 해답을 얻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2) 우리는 예수님을 만났을 때에 그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 가에 대한 분명한 해답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은 늘 예수님을 만나고 그 앞에서 여러 가지 기사 이적을 목격하며 권위 있는 말씀도 들었지만 백성들을 미혹하는 거짓 선생으로 여겼기 때문에 그를 죽이라는 음모를 꾸미고 고소거리를 찾으려고 뒤를 쫓아다녔던 것입니다. 많은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현실적인 메시야로 알고 그로부터 모세와 같은 권능과 하늘에서 내리는 떡을 원했지만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고 하시면서 “내가 곧 생명이 떡이로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는 말씀을 하셨을 때 그들은 예수님께 실망하고 그 곁을 떠나 버린 것입니다(요6:48-71).

예수님을 따른 제자들의 믿음도 온전한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셔야 할 고난의 메시야이신 것을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고난을 받으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실 때도 메시야 왕국을 세우시기 위한 영광의 입성인 줄로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도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입니까”고 물었는데 이 질문은 주님이 지금 메시야 왕국을 건설하실 시기냐는 딱한 질문인 것입니다(행1:6).

귀신 들린 아들의 아비의 믿음은 이보다 더 낮은 수준으로 그 당시 많은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대로 예수님은 아마도 이 선지자 중의 한 분으로 오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귀신 들린 자기 아들의 그 귀신을 내쫓아 온전하게 하실 수 있다고 하는 믿음을 갖지를 못했습니다. 다만 요행을 바라는 마음으로 간구한 말이 “하실 수 있거든”이란 말로 나온 것입니다.

(2) 예수님은 뒤이어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한 일이 없느니라”는 말씀으로 믿는 자에게 나타나는 놀라운 권능에 대하여 말씀해 주셨습니다. 여기서 믿는 자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의미합니다.

① 이 믿음은 먼저 하나님이 보내신 그 아들에 대한 믿음을 말합니다. 아들에 대한 믿음이 없는 자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없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아들이신 예수님께 대한 올바른 믿음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시발점이 됩니다.

② 이 믿음은 그 아들을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능력을 말합니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습니다. 그 아들과 연합이 되므로 아들에게 주어진 모든 은사가 그를 믿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③ 이 믿음은 예수님이 비유하신 한 겨자씨처럼 살아 있는 믿음을 의미합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일이 없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17:20). 한 겨자씨는 지극히 작은 씨앗이지만 그 씨앗이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은 그 겨자씨 안에는 살아 있는 생명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살아 있는 믿음은 그 말씀을 믿는 믿음을 의미합니다. 말씀은 하나의 씨앗입니다. 그 씨앗 속에 열매를 맺는 씨앗으로서의 생명이 없으면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④ 이 믿음은 의심치 않는 기도의 능력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이 같은 기도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요 너희가 기도할 때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마21:21-22). 여기서 믿고 구하는 기도란 약속에 기초한 기도를 말합니다. 정욕이나 사역을 위한 기도가 아닙니다 죄를 버리고 순종하는 믿음의 생활 가운데서 구하는 기도입니다.


결 론 : 예수님께서 하신 이 놀라운 말씀은 비록 그 아비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어떤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이처럼 우리에게 금과옥조 같은 귀한 말씀을 주십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한 일이 없습니다. 모든 성도들은 이 능치 못함이 없는 믿음을 개발해야 합니다.


≈ 54≈ 믿음 없음을 도우소서

(본문 : 마가복음 9 : 23 - 29)


서 론 : 귀신 들린 아이에 대한 문제는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그 아이의 아비가 예수님을 향하여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라고 외치자 예수님은 그를 향하여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한 일이 없느니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같은 말씀을 들은 그 아비는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고 소리를 질러 아니었다고 했습니다.

1. 내가 믿나이다.

그 아이의 아비는 처음에는 “내가 믿나이다”는 말로 대답하더니 곧 이어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는 도움의 간청을 드렸습니다.

(1) 이 아이의 아비가 처음에 한 “내가 믿나이다”는 말은 주님의 그 말씀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이 아이의 아비에게 하신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는 말씀은 그 아이의 아비에게 믿음이 적어서 아들의 병을 못 고친다는 뜻이 아닙니다. 첫째로는 예수님의 무한하신 능력과 권능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권능을 믿는 자에게도 이런 권능이 따른다는 뜻입니다.

이 아이의 아비가 “내가 믿나이다”고 외친 것은 자신에게 능치 못함이 없는 믿음이 있다는 의미에서 한 말이 아니라 주님이 하신 그 말씀을 믿는다는 뜻으로 “내가 믿나이다”고 말한 것입니다.

(2) 다음에 그 아비는 또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는 애처로운 호소를 드렸습니다. 여기서 호소한 “나의 믿음 없음을 도와주소서”라는 말은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는 그 믿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아이의 아비는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한 일이 없느니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믿을 수 있었기 때문에 “내가 믿나이다”고 대답할 수는 있었지만 자신에게 그 같은 믿음이 없음을 안타까이 여기면서 자기의 믿음 없음을 도와달라고 하는 간구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이 아이의 아비에게 이런 믿음을 기대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이 같은 믿음을 구하기가 어려웠던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이 같은 믿음은 대단히 성숙한 믿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롬10:17). 그리스도의 말씀이 믿음의 씨앗입니다. 이 씨앗을 좋은 밭(회개한 심령)에 뿌려야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 이 아이의 아비는 이 같은 능력 있는 믿음을 가질 만한 말씀을 들은 일이 없으며 열매를 맺으므로 믿음을 소유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믿음을 갈망한 나머지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고 간구하게 된 것입니다.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벧후3:18).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우리의 믿음을 성장하게 합니다. 믿음의 성장이 없이는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는 그런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 아이의 아비에게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성장할 만한 믿음을 소유하고 있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아비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란 간구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만일 우리의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요일3:21-22). 우리의 담대한 믿음은 ‘믿습니다’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하나님 앞에서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의 기뻐하시는 것을 행할 때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아비에게는 그런 믿음이 없었습니다.

(3) 예수님은 이 아비를 불쌍히 보시고 그의 간구를 들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아이를 보시고 그에게 들어가 있는 더러운 귀신을 꾸짖었습니다.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이란 표현은 그 귀신이 벙어리 되고 귀먹었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 아니라 그 악랄한 귀신이 그 아이에게 들어가 그 아이로 여러 가지 병을 유발시켰는데 그 아이로 벙어리 되고 귀먹게 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때 귀신이 소리 지르며 아이로 심한 경련을 일으킨 후, 나갔다고 했습니다. 귀신은 아이로부터 쫓겨 나가면서 최종적으로 그 아이로 경련을 일으키게 하므로 고통을 준 것입니다. 사탄의 역사는 언제나 인간을 괴롭히며 그 생명을 해롭게 하는 일에 온힘을 기울입니다. 예수님은 이 같은 귀신의 최후 발악적인 행동에 의하여 마치 죽은 것같이 비참하게 쓰러져 버린 이 불쌍한 아이를 손으로 잡아 일으키셨다고 했습니다.

2. 제자들의 질문

이 후에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어느 한집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때까지 아무 말 없이 선생님이 하시는 일을 바라보고 있었던 제자들이 주님께 종용이 물었습니다.

(1)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예수님은 그처럼 쉽게 거침없이 되는 일이 왜 자신들은 그처럼 애를 쓰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심한 창피를 당하기까지 했는데 쫓아내지 못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하고 화가 치밀었습니다.

그들이 경험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12 제자를 부르사 둘씩 짝을 지어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셨다’고 했습니다(막6:7). 그들에게 귀신을 쫓아낸 경험이 부족했던 것도 아닙니다.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인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고 했습니다(막6:12-13). 그러면 왜 그들이 이 아이에게 들어가 있는 더러운 귀신을 내어쫓는 일에 한결같이 실패한 것입니까?

그 이유를 알아본다면 귀신을 쫓는 권세나 병 고치는 권세는 언제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주님의 명령에 의하여 전도대를 구성하여 복음을 전할 때 이 같은 권능을 받은 것인데 그들은 언제나 계속적으로 가지고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권능을 필요에 따라 회수하시기도 하며 자신들이 잘못 간수하므로 상실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은 그들이 실패한 원인에 대하여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는 말씀으로 해답을 주셨습니다. 제자들의 실패는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이 문제를 가지고 기도 없이 지난날에 소유하고 있었던 권능만으로 내쫓으려고 시도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지난날의 권능을 계속 소유할 만한 기도의 계속적인 생활도 못했습니다. 계속적인 기도 없이 계속적인 권능의 행사란 불가능합니다. 그들은 권능만을 믿고 그 권능을 계속적으로 소유하게 하는 기도생활에는 나태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 아이로부터 귀신을 쫓는 일에 실패했습니다.

결 론 : 이 아이의 아비의 신앙적인 자세는 매우 훌륭했습니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우소서”란 간구는 그런 성숙한 믿음을 갖기를 원하는 간절한 마음의 호소입니다. 아마도 그 후 그는 이 같은 믿음의 소유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이 아이의 아비처럼 연약한 것을 알고 무조건 권능을 행하기를 원하는 자만한 마음을 가리지 말고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달라고 하는 겸손하므로 담대한 믿음을 가질 수 있는 성숙한 기도의 생활, 열매맺는 순종의 생활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 55≈ 깨닫지 못한 이유

(본문 : 마가복음 9 : 30 - 32)


서 론 : 예수님은 귀신들린 아비의 아들을 고쳐주신 후 그곳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새 갈릴리 가운데로 지나시게 되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아무에게도 자신을 알리고자 아니하셨는데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앞으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곳에서 일어날 일에 대하여 제자들에게 가르쳐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잘못된 메시야관을 가지고 예수님을 현세적인 메시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수행하셔야 할 메시야적 사역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가르쳐 주셔야 했습니다.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계속적으로 이 같은 메시야적 고난의 말씀을 들었지만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또 이해하려고 하지도 아니했기 때문에 주님의 고난의 현장에서 이를 감당하지 못하고 주님을 배신한 채 뿔뿔이 흩어지게 된 것입니다.


1. 깨닫지 못한 이유

주님의 제자들은 그토록 오랜 기간 주님을 따르며 그의 말씀을 듣고 그의 하시는 행적을 친히 보고 자신들도 복음을 전하면서 권능을 행했지만 그들은 참 구속의 도리에 대하여 캄캄했습니다.

(1) 예수님은 그의 고난과 부활에 관한 문제를 제자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 예수님은 유대인들이나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을 상대하실 때는 고난과 부활에 관한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복음의 핵심이자 비밀이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복음의 내용은 이스라엘에게는 비밀이어야 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해야 했습니다.

인류의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섭리는 유대인들은 그들의 죄로 인하여 오랜 기간 영적으로 버림받는 상태에 놓여 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오래도록 그들의 회개를 기다리시며 그들로 충분한 회개의 기간을 주셨지만 그들은 끝까지 거역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죽이기까지 패역한 길을 걸었습니다. 이 같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의 등장은 그들의 심판의 하나의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율법으로 자기 의를 내세우며 하나님의 의를 거부하는 그들은 그들이 의지하는 율법에 걸려 넘어 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복음의 주체로 오셨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정죄의 표준이요 복음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은혜를 저버리고 율법을 따랐습니다. 율법을 따르기 위해 그들은 복음을 배척하였고 율법으로 의를 얻기 위해 하나님의 의가 되시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저주의 죽음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구원이 유대인으로부터 나와야 했기 때문에 그의 아들을 보내실 때에 이스라엘 땅에 나게 하셨고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약속대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세상에 오시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세상에 전파하게 되었으며 선택받은 유대인들인 예수님의 제자들에 의하여 이 일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복음의 비밀을 깨닫게 하시려는 노력을 계속하셨고 예수님의 이 같은 노력은 그의 제자들에 의하여 이 복음이 이방에 전파되는 결실을 맺게 되었습니다.

(2) 제자들은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의 가르치심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영적인 개념을 전혀 생각에 두지 않고 현세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그들은 예수님이 이루실 구원 사역에 대하여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구원은 오직 이스라엘에게만 있는 줄로 알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만이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요 율법을 가지고 있는 이스라엘만이 의로운 백성이요 메시야는 이 같은 유대인들의 구원을 위해 오실 것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방인들에게 구원이 주어진다는 생각은 상상도 못할 일이요 더욱이 자기들이 선생님이 이방인들에게 구원을 주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으리라 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자기들이 하는 일이 전세계에 복음을 전하고 그 복음으로 유대인들이 아닌 이방인들을 구원하는 일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보지 못한 일입니다. 그런 그들이 예수님이 자신이 죽으실 일과 다시 사실 일에 대한 가르침을 이해하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처지가 못 되었습니다.

다음에 그들의 메시야관은 복음과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고난에 관한 가르침을 이해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다니엘이 계시 받은 메시야 왕국의 약속이 유대인들에만 해당되는 것이요 그 약속에 메시야가 출연하므로 현실적으로 실현될 하나님의 나라로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 같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 이전에 메시야가 고난을 당하시고 또 부활하셔야 할 일에 대하여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그 같은 계시가 구약에는 깊숙이 숨겨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선생님의 죽으심이나 부활에 대하여 이해할 수 없었던 일은 너무나도 당연했으며 그들은 오직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시기만 하면 당장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일에 대하여 큰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누가 크냐고 하는 논쟁도 곧 실현될 메시야 왕국에서의 자신들의 지위에 대한 다툼이었으며 그들은 지금 이 같은 꿈에 부풀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가르침이 귀에 들릴 리 없었습니다. 호세아 선지는 일찍이 이스라엘을 향하여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 도다” 고 탄식한 일이 있습니다(호4:6).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바른 지식이 없는 백성은 망합니다. 이스라엘은 이 같은 진리의 지식을 버리고 현실적인 영광만을 추구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복음으로 거치는 돌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을 육신적으로 이해하려는 사람들은 복음을 깨닫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내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의 핵심을 무시합니다. 그리고 현실적인 영광만을 추구합니다. 그들의 이 같은 신앙은 주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는 일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 나라에서 주님과 함께 영광을 얻기 위해 주님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할 일에 대하여 이해하려하지 않습니다. 부활에 소망도 갖지 못하고 이 세상에서의 기복적인 생활에 신앙의 중점을 둡니다. 이들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려고 합니다. 이들은 복음의 진수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그들 자신이 믿음의 주체가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더군다나 믿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 구원의 확신도 가질 수 없고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의 생활도 할 수 없습니다.


2. 주님의 가르치심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계속적으로 그가 당하실 고난과 부활에 대하여 가르치셨습니다. 8:31절에서도 이미 말씀하셨고 9:9-12절에서도 언급하셨으며 연이어 또 이 말씀을 주셨습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은 계속적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를 진리로 이끄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이 아니면 누구든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길이 없습니다. 제자들도 끝내 이해하는 일에 실패했지만 그들이 오순절 날에 성령을 받자 이 모든 가르침을 깨달아 알게 되었고 믿음을 가지고 복음에 큰 일꾼이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전하는 천국 메시지는 바로 예수님의 죽으심과 그의 부활 사건을 전하는 일입니다. 그의 죽으심이 없으면 우리의 속죄나 구원이 있을 수 없으며 영생도 천국도 허황된 약속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의 부활이 없으면 우리에게 새 생명이 존재할 수 없으며 부활의 소망도 가질 수 없습니다. 이 두 가지 사건을 집중적으로 설파하는 일이 설교의 구심점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듣던지 아니 듣던지 이 말씀을 전해야 하며 이 말씀을 듣는 중에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그 사람의 영이 살아나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이처럼 나타납니다.

(2)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 같은 주님의 가르치심에 대하여 깨닫지 못 했을 뿐 아니라 “묻기도 무서워하더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질문을 무서워한 이유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이해할 수 없는 말이며 너무나도 의외의 말로 그들에게 두려움을 주기 때문에 더 이상의 질문을 삼가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기대가 무너지는 일을 원치 아니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다른 어떤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려고 했지만 이해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일은 그냥 모른 채로 묻어 두고 예루살렘에 올라가 자신들이 누릴 영광의 소망에 찬물을 끼얹는 일을 하지 않으려고 묻기조차 두려워한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한번 간하다가 몹시 책망들은 일이 생각나 다른 어떤 건의도 삼가 했습니다.


결 론 : 예루살렘은 우리의 소망입니다. 하늘에 있는 새 예루살렘만이 우리에게 참 소망을 줍니다. 우리는 지금 그것을 목표로 삼고 달려가는 생애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현세적인 영광과 축복을 바라고 달려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과 함께 누릴 영광을 바라보면서 달려가는 것입니다. 이 믿음의 선한 싸움에 낙오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주님의 고난과 그의 부활에 관한 올바른 지식과 믿음을 가지고 끝까지 인내에 경주 장을 달려가야 합니다.


≈ 56≈ 누가 큰 자냐?

(본문 : 마가복음 9 : 33 - 37)


서 론 : 누가 크냐는 문제는 주님의 제자들에게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당면문제였습니다. 선생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질 터인데(메시아 왕국) 눈앞에 다가온 그 나라에서의 자신들의 지위에 관심을 갖는 일은 그들에게는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이들은 주님과 함께 길을 거닐면서도 주님이 눈치 채지 못하게 자기들끼리 “누가 크냐”에 대한 문제를 안건으로 쟁론하고 있었습니다. 쟁론이란 말은 서로간 자신의 정당성을 내세워 자신의 의견이 옳다고 우기는 다툼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이 같은 철없는 쟁론을 들으시고는 마음으로 탄식 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가 노중에서 쟁론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셨습니다. 이 물으심을 통해서 예수님은 그리스인들의 겸손이 무엇이며 자신을 낮추는 일이 무엇인지, 그런 생활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왜 필요한가에 대한 해답을 주셨습니다.


1. 첫째가 되고자하는 자의 자세

예수님의 제자들은 땅에 것만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2) 세상에서 첫째가 되고자하는 자는 땅엣 것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고 하셨습니다(골3:2). 땅에서 첫째가 되고자하는 생각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하는 마음에서 생겨납니다. 다른 이에게 봉사하고 사회에 헌신하고 인류사회에 유익한 일꾼이 되기 위한 생각에서도 아니요 남을 지배하고 남의 머리가 되어 그들에게 존경을 받는 생활을 동경하는 마음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주님은 이 같은 인간의 생각을 미워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 역시 임박한 하나님 나라에서 자신들이 가장 높은 벼슬자리에서 남을 지배하고 영광을 누리고자하는 탐욕에서 누가 높으냐의 쟁론이 나왔기 때문에 주님의 책망을 듣게된 것입니다.

땅엣 것은 썩어질 것입니다. 땅에서 첫째가 되려는 노력에 전념하다보면 주님의 일은 할 수 없으며 그 첫째의 자리에 올라가면 사랑과 헌신과 겸손과 충성스러운 성도의 생활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2)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에서 우리는 역설적인 논법을 발견하지만 이 말씀에서 우리는 주님의 의도를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첫째가 되는 일이 나쁘다고 책망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지금 생각하고 있는 첫째가 되려는 생각이 잘못되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며 그같은 그들의 첫째가 되려는 생각은 첫째는 고사하고 꼴찌에 해당된다는 사실을 인식시키시려는 뜻이 깔려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참으로 첫째가 되려면 먼저 그들의 의식을 바꾸어야 한다는 사실을 밝혀 주신 것입니다.

① 첫째가 되고자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주님이 하신 끝이란 말씀은 ‘맨 끝’이런 뜻으로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는 자리를 말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 신분적인 위치의 끝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있는 신분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먼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언제나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맨 끝’까지 낮추어야 합니다. 이것이 곧 종의 자세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 할지니라”고 하신 말씀처럼 무슨 일이든 종의 자세를 가지고 일하는 것이 뭇 사람의 끝이 되는 일이며 이처럼 행하면 첫째가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눅17:10).

뭇 사람의 끝이 되는 일은 겸손에서 열매를 내게 됩니다. 위선적이 아니라 진실한 겸손이란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며 존경해 주는 일입니다.

② 첫째가 되려면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섬긴다는 말은 여러 가지 뜻이 있습니다. 섬김을 받는 자가 아니라 남을 섬기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남을 섬기는 자만이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남에게 섬김을 받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남을 섬기려 왔다”고 하셨는데 그의 위대한 섬기심은 인류의 지도자의 면모를 보이셨습니다. 남을 섬길 줄 모르는 사람이 첫째가 되는 사회는 독재자의 경우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주님을 선생으로 그의 말씀을 본받으며 그의 생활을 본받아야합니다. 누구나 남을 섬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 없는 섬김은 외식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외식은 교만보다 더 가증스러운 죄악입니다. 사랑은 먼저 그 사람의 허물을 용서해 주고 형제가 어려울 때 도움의 손길을 뻗치는 일입니다. 내가 형제의 입장에 서서 그 형제의 어려움을 이해해 주는 일입니다.

이처럼 자신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는 일은 정말로 첫째 되는 영광에 상급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이 같은 일은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상급과 연결된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2.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일

이 말씀을 하시면서 예수님은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고 나를 영접함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1) 여기서 우리는 어린아이를 안으신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왜 예수님이 어린아이를 데려다가 안으셨을까요? ‘뭇 사람에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의 표본으로 삼기 위해서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회에서 어린아이에게 대하는 대접이나 관심은 적습니다. 인격적인 대우를 제대로 받지 못합니다. 관심 밖의 전제로 제켜 놓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어린아이를 사랑하십니다. 많은 관심을 가지십니다. 한 어린아이를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신 주님의 모습은 아주 연약하고 보잘것없는 자를 섬기시는 진실한 사랑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뭇 사람의 끝이 되는 사람은 이처럼 모든 사람들의 관심밖에 있는 형제들에게 크나큰 관심을 가지고 보살펴 주는 사람을 말합니다. 못나고 소외된 형제들을 사랑해 주고 그런 사람들의 친구로써 그들을 도와주는 사람이 뭇 사람의 끝이 되고 뭇 사람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우리들에게 이런 사람의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 같은 사람들에게 첫째 되는 영광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2) 주의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일에 대한 놀라운 상급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특별히 관심을 둘 말씀은 ‘내 이름으로’란 대목입니다. 주의 이름으로란 말에는 주님의 명령이 들어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들에게 그 같은 생활을 원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뭇 사람의 끝이 되고 뭇 사람을 섬기는 생활을 하려면 먼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주의 이름으로 하지 않으면 할 수가 없습니다.


결 론 : 만약에 우리가 나는 할 수 없지만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의 이름으로 하면 그같은 우리의 일은 주님을 그처럼 공궤한 일로 주님의 인정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주님의 말씀은 최후의 심판대인 흰 보좌 심판대 앞에 섰을 때, 주님의 선고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주님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비유로 말씀해 주셨습니다(마25:34-40). 한 걸음 더 나아가 주님은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는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주의 이름으로 뭇 형제를 섬기는 자가 되고 주 이름으로 뭇 사람의 끝이 되어 자기를 낮추면 하나님 나라의 커다란 상급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약속하신 말씀입니다.


≈ 57≈ 주님께 속한 자의 특권

(본문 : 마가복음 9 : 38 - 42)


서 론 : 주의 이름으로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자의 축복에 대하여 예수님은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는 말씀으로, 아무리 미미하고 보잘것없는 사람일지라도 우리는 그들을 소홀히 여기지 말고 주의 이름으로 청중이 맞아들이고 존중하며 생명의 길로 인도해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같은 일이야말로 주님을 영접한 것과 똑같은 크나큰 축복이란 사실을 강조하신 후,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란 이름 때문에 그에게 비록 사소한 대접을 하였다고 할지라도 그같은 일은 결과적으로 주님을 대접한 일이기 때문에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1. 귀신을 내쫓은 사람에 대한 논란

요한이 주님께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은 일에 대한 경과를 말씀 드리면서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고 말씀드렸습니다.

(1) ‘그 어떤 사람’은 분명히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쫓았다고 했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 예수님의 제자 중에 들어가 있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쫓은 일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이 같은 사실을 인정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귀신 들린 어린아이로 말미암아 큰 창피를 당했고 믿음이 없는 세대란 책망까지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제자들마저 내어쫓지 못한 귀신을 주의 이름으로 내어쫓은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들에게는 제자들보다 훌륭한 믿음이 있었다는 증거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이런 일을 하였다는 사실을 반증해 줍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모르셨을까요?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일은 그 능력이 주님으로부터 나가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혈루증 여인의 경우 그 여인이 믿음으로 뒤에서 주님의 옷자락에 손을 댔을 때 혈루 근원이 곧 말라 고침을 받았는데 이때 주님께서는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셨다”고 했습니다(막5:30). 제자들은 전혀 몰랐지만 주님은 이미 귀신을 쫓은 사람이 누군지 알고 계셨던 것이 분명합니다. 사실인즉 예수님의 제자의 이름에 오르지 아니한 사람 중에 제자들이 많았으며 그들 중에 아리마대 요셉 같은 사람은 제자들보다 더 큰 믿음의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 같은 일을 금하지 말 것을 명하셨습니다.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배반할 자가 없느니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주의 이름으로 하는 일을 금할 수 있는 자는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얼마 전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는 말씀을 들려 주셨는데 이 사람은 주님이 인정해 준 사람들이었음을 밝혀 주고 있으며 그들의 믿음의 능력은 능히 귀신을 내어쫓는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두 가지 사실을 명심하도록 주의를 환기시켰습니다. 그 하나는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능한 일을 했다면 어찌 그 사람이 나를 비방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일하는 일꾼이기 때문에 그들을 비방하거나 그들로 실족케 해서는 안 된다는 뜻에서 들려주신 말씀입니다. 다음에 다른 또 한가지는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고 하심으로 그들은 분명히 우리를 위하는 사람들인데 왜 금하게 했느냐는 책망 조로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42절 말씀에서 실족케 하는 자에 대한 엄중한 경종을 들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41절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은 우리에게 대단한 고무가 되며 또한 주님을 믿는 형제들에게 베푸는 사랑의 헌신이 얼마나 놀라운 상급이 되는가에 대한 분명한 약속입니다.

(1) “누구든지 너희를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가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그의 제자들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쫓는 것을 보고서도 형제로서 대접은 고사하고 냉대한 일에 대한 책망 겸, 주님을 섬기는 형제들에 대하여 주의 이름으로 잘 섬겨야 할 일에 대한 교훈으로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하여”란 말씀에 관심을 가져야겠습니다. 이들은 곧 그리스도 안에서 한 지체를 이루고 있는 형제들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 사람이 예수를 믿는 일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 사람에게 형제의 사랑으로 선대한다면 이 사실을 우리 주님은 반드시 기억하시고 상급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선을 베풀어야 하나 믿는 형제들에게 더욱 그러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섭섭하게 대하면 안되지만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에게 그 같은 일을 하면 더욱 안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또한 우리를 대접하는 사람들에 대한 상급이란 점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얼마나 귀히 여기시며 소중히 생각하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곤경에 처했을 때 다른 사람으로부터 어떤 실질적인 도움을 받았다면 부모 된 우리는 응당 그 보답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처럼 대하심으로 우리를 대접하는 사람들에 대한 보상까지 약속해 주신 것입니다. 이 같은 약속은 또한 하물며 우리들이랴! 얼마나 귀히 여기시겠느냐는 고마움의 감격이 나오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물 한 그릇’이란 대접의 한계가 나옵니다. 물 한 그릇은 어느 곳에서나 구할 수 있는 값싼 것입니다. 그렇지만 목마른 사람에게 물 한 그릇이란 너무나도 갈급하고 시원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같은 대접은 생각만 있으면 누구에게나 가능한 일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상급을 받는 생활은 멀리 우리의 손이 미치지 못한 곳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의 상급은 우리가 실천하기 어려운 선행이나 덕행에만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냉수 한 그릇을 대접하는 일에도 이같이 놀라운 상급의 약속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얼마나 고무적인 일입니까? ‘물 한 그릇’이란 참된 위로를 의미합니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위로는 갈급한 심령 속을 촉촉이 적시는 ‘물 한 그릇’의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물 한 그릇이란 매우 작은 헌신입니다. 어려움을 겪는 형제에게 그도 한 주님의 형제란 이름 때문에 함께 그 어려움을 짊어지고 적은 도움이라도 줄 수 있다면 이 같은 일이야말로 그 사람에게는 목마른 그의 인생이 가뭄을 해갈시키는 ‘물 한 그릇’이 될 것입니다.

주님은 “주의 이름 때문에” “주의 이름으로” “주님께 속해 있기 때문에”란 말을 사용하시므로 새로운 의미를 주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환경이나 우리의 생각은 귀찮고 싫지만 그러나 주님께 속한 사람의 일이 되기 때문에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 위해 한다고 하는 그 사실 귀중함의 초점을 두시는 것입니다.

(2) 주님은 42절에서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는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바다에 던지움이 나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좀 전에 예수 이름으로 대접하는 경우와는 정 반대적인 입장에서 하신 경종입니다.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란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미천하고 어리석고 존재 가치가 없는 보잘것없는 존재라 할지라도 만약 그를 실족시키는 경우에는 이처럼 두려운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실족케 한다는 말은 ‘걸려 넘어지게 한다’ 또는 ‘죄를 짓게 한다’ ‘배반하게 한다’의 의미가 들어 있는 말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에 속한 자 중 아무리 미천한 자에게라도 그를 미혹하므로 그로 그 죄로 걸려 넘어지게 하거나 주님을 배반하게 하므로 믿음에서 넘어지게 한다면 그처럼 미혹한 자들이 받을 하나님의 심판의 엄중함을 경종하신 것입니다. 연자 맷돌을 목에 달리운다는 말은 나귀의 힘으로 돌리는 대형 맷돌과 같은 무거운 것으로 목에 매달아 바다에 던진다는 뜻입니다. 만약 그렇게 하신다면 그 사람은 영영 그 바다에서 헤어나올 수가 없을 것입니다.


결 론 : 연자 맷돌은 그 사람의 무거운 죄를 말합니다. 그리고 바다는 그 죄 값으로 받을 하나님의 형벌로써 지옥을 상징합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형제들에게 대접하는 우리의 적은 헌신이 말할 수 없는 하늘의 상급이 약속되어 있고, 또한 그리스도를 믿는 지극히 미미한 형제라 할지라도 그를 실족시키는 일을 하면 무서운 하나님의 형벌을 받을 것이라고 하는 이 엄중한 경계의 말씀을 듣고 우리의 신앙생활에 거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 58≈ 죄에 대한 투쟁

(본문 : 마가복음 9 : 43 - 50)


서 론 : 예수님은 우리가 범하는 죄에 대한 심각한 문제를 본문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지옥과 인간의 죄와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죄로 말미암아 들어가야 할 지옥의 존재에 대한 분명한 언급과 그 지옥의 두려운 심판의 모습을 보여 주셨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죄에 대한 심각성과 두려움을 실감케 하고 있습니다.


1. 지옥과 범죄의 두려움

예수님은 42절에서 다른 사람을 실족케 하는 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바다에 던지움이 나으리라”는 말씀을 들려주신 후, 본문에 와서 범죄하는 자들이 받을 지옥의 심판에 대하여 언급해 주고 있습니다.

(1)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본문에서 인간의 범죄 도구로 ‘손과 발과 눈’이란 신체 기관을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이 세 기관은 분명히 우리 인간들의 범죄도구로 씌어지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 세 기관은 우리의 마음과 연결된 것들이며 우리의 영혼과 상관되는 것들입니다. 손이나 발이나 눈이 저지른 죄 때문에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들을 통해서 범죄의 도구로 만들어 자신의 인생의 불법적인 쾌락을 추구하고 하나님께 범죄를 조장한 그 사람의 인격, 다시 말하면 그 사람의 영혼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주님이 지적하신 찍어버리라 빼어버리라는 말씀은 범죄한 그 손과 발과 눈의 절단이나 빼어냄이 아닙니다. 이것은 죄를 대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의 자세를 언급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찍는다는 표현은 다시는 범죄치 않도록 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찍혀 없어진 손은 다시는 범죄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범죄와의 절단은 손을 찍는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 손이 행한 범죄에 대한 온전한 회개를 의미합니다.

회개란 말은 그 죄에 대한 사실을 하나님께 고백히는 일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요일1:9). 여기서 자백한다는 말은 두 가지 의미가 동반되는데 하나는 그 죄에 대한 마음을 찢는 회개를 의미합니다. 그 죄에 대하여 통회하는 마음의 고백이 ‘죄에 대한 자백’인 것입니다. 다른 또 한가지는 이제 자백한 죄에서 돌이키는 일입니다. 자백은 왜합니까? 다시는 그같은 죄를 짓지 않겠다고 하는 고백으로 하는 것입니다.

범죄한 손을 찍어 버리듯이 다시는 그 손으로 죄를 범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손으로 또 범죄 하게 됩니다. 참으로 우리는 우리를 공격하는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힘든 육체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일흔 번씩 7번이라도 용서해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무한대를 보여 주신 것입니다. 만약 손을 찍어 버리는 일을 범죄와의 절단 수단으로 안다면 아마 몇 일이 못 가 우리 손이나 발이나 어느 하나도 남아 날 것이 없을 것입니다.

(2) 발이나 눈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리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도 같은 뜻의 표현입니다. 비록 우리가 절뚝발이로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영생에 들어갈 때에는 그 절뚝발을 가지고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영생에 들어갈 때나 지옥에 들어갈 때나 우리 신체적인 조건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범죄에 대한 회개와 결연한 의지에서 나오는 결단력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둘은 사실인즉 하나입니다. 결단력이 따르지 아니하는 회개란 회개의 아무런 가치도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자세로 이 같은 결단력을 가지고 죄를 이기고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까?

① 먼저 우리는 내 죄가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했다는 사실에 대한 뜨거운 뉘우침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지난날의 우리의 죄로 족한 것입니다.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삶을 위해 우리를 우리의 죄 가운데서 건져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롬7:4).

② 죗값은 사망이란 사실을 말합니다. 이 같은 죗값을 주님이 대신 갚아 주셨는데 주님의 갚아주신 죄를 또 짓는다면 우리는 주님 앞에 배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③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알고 죄와 결별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고 했습니다(롬6:11). 우리는 우리의 죄에 대하여는 분명히 죽은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우리의 죄로 인하여 죽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죄의 유혹 앞에서 우리는 마치 죄에 대하여 죽은 자와 같은 심정으로 죄에서 떠나야 하는 것입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 앞에서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하면서 죄 앞에서 도망쳤습니다. 그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었고 하나님께 대하여는 산 자가 되었습니다.

④ 다음에 우리는 육신의 정욕에 이끌리는 생활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하심을 받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롬8:13-14). 우리는 매일 매일의 생활을 바라보면서 발이나 팔을 찍어 버리고 눈을 빼어버리는 뼈아픈 회개의 생활을 해야 죄를 이기는 생활이 가능합니다.


2. 지옥의 두려움

우리는 본문에서 주님께서 범죄자가 최종적으로 갈 곳으로 명시된 지옥에 대한 명백한 언급을 듣게 됩니다.

(1) 43절에서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여기서 지옥에 해당되는 ‘게헨나’란 낱말은 ‘힌놈의 골짜기’해서 유래된 말입니다(느11:30, 왕하23:10, 렘7:23). 이름의 유래는 그렇지만 힌놈의 골짜기를 가리켜 지옥이라고 표현한 것은 아닙니다. 지옥은 장소 적이요 실질적인 처소로 하나님께 범죄한 사탄과 그 무리들과 그 세력을 따른 모든 인류들의 영원한 심판 장소로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 지옥의 형편에 대하여 예수님은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간다”는 말씀으로 그곳은 꺼지지 않는 불 도가니임을 명시하셨습니다. 이 같은 지옥 상은 계시록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계14:10, 19:20, 20:15).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구더기도 죽지 않는다는 말씀은 그곳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죽음이 없는 영원한 형벌을 받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뿐만 아니라 불도 꺼지지 않는다는 말씀 역시 형벌의 영원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해 예비에 두신 영원한 형벌의 장소에서의 하나님의 심판의 두려움을 밝혀 주신 것입니다(마25:41).

(2) 우리는 이 말씀을 행위로 말미암은 구원론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성경을 해석할 때 어느 한 곳에 나타난 표현만으로 성경의 전체적인 해석을 시도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은 본문에서 인간의 구원에 대한 진리를 밝혀 주신 것이 아닙니다. 죄에 대한 심판의 두려움을 경종 하시려는데 있습니다. 만약 사람들이 자신들의 죄에 대한 처리를 분명히 하지 않으면 그 죄 값으로 지옥에 형벌을 받는다는 사실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죄에 대한 심각성을 들려주심으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올바른 생활을 찾도록 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율법적인 심판의 두려움을 나타낸 것이며 우리는 그 율법의 정죄에서 벗어났으니 더더욱 죄를 멀리하는 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결 론 : 예수님은 본문의 결론으로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고 하셨는데 이 구절은 대단히 난해한 구절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이 결론적인 말씀은 지옥 형벌의 두려움을 언급하면서 그곳에서의 형벌의 모양으로 불로서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는 내용으로 수용되기 때문에 그런 방향에서 해석해야 합니다. 불 속에 소금을 넣으면 그 소금이 몹시 튑니다. 이것은 마치 지옥에서 당하는 괴로움이 불 가운데서 소금이 튀듯 하는 괴로움일 것이라고 하는 표현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50절의 소금의 비유는 예수님이 지옥의 형벌의 두려움으로 인용하신 소금의 유용 도에 대하여 교훈해 주신 비유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