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新約]강해/◆ 사복음서 · 사도행전 강해-1

마태복음 24-28장[Ⅶ.예수의 예언 24장-25장, Ⅷ.예수의 수난 26장-27장, Ⅸ.예수의 권세 28장]◆ 밤중소리

영국신사77 2020. 4. 10. 17:32

마태복음 24장-28장 

제목차례

제 24 장 (180∼186) 

180) 주 재림의 징조 (마태복음 24 : 1절14절)

181) 종말의 결정적 증거 (마태복음 24 : 15절28절) 

182) 주 재림의 모습 (마태복음 24 : 29절31절)

183) 무화과나무의 비유에 나타난 종말 (마태복음 24 : 32절36절)

184) 노아의 때와 같은 세상 종말 (마태복음 24 : 37절39절)

185) 예비하고 있어야 할 주 재림의 날 (마태복음 24 : 37절44절) 

186) 충성된 종과 악한 종 (마태복음 24 : 45절51절)


제 25 장 (187∼190) 

187) 지혜로운 처녀와 미련한 처녀의 비유 (마태복음 25 : 1절13절)

188) 착하고 충성된 종 (마태복음 25 : 14절23절)

189) 악하고 게으른 종 (마태복음 25 : 24절30절) 

190) 양과 염소의 분별 (마태복음 25 : 31절46절) 


제 26 장 (191∼198) 

191) 옥합을 깬 여인 (마태복음 26 : 1절13절)

192) 랍비여 내니이까 (마태복음 26 : 14절25절)

193) 새 언약의 피 (마태복음 26 : 26절30절)

194)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마태복음 26 : 31절35절)

195)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마태복음 26 : 36절46절)

196) 검을 쓰는 자는 검으로 망하리라 (마태복음 26 : 47절56절)

197) 사형 판결을 내린 종교 재판 (마태복음 26 : 57절68절)

198) 베드로의 실패와 회개 (마태복음 26 : 69절75절)


제 27 장 (199∼208) 

199) 가룟 유다의 결국 (마태복음 27 : 1절10절)

200)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마태복음 27 : 11절14절) 

201) 바라바냐 그리스도라고 하는 예수냐 (마태복음 27 : 15절26절) 

202) 희롱을 당하신 예수 (마태복음 27 : 27절31절)

203) 시몬의 십자가 (마태복음 27 : 32절) 

204) 쓸개 탄 포도주 (마태복음 27 : 33절44절)

205) 두 강도의 경우 (마태복음 27 : 44절)

206)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마태복음 27 : 45절49절) 

207) 찢어진 성소 휘장 (마태복음 27 : 50절56절)

208) 예수의 무덤 (마태복음 27 : 57절66절)


제 28 장 (209∼210) 

209) 부활의 아침 (마태복음 28 : 1절10절)

210) 주님의 지상 명령 (마태복음 28 : 11절20절)

===========================================

마태복음 24장 설교

◆ 밤중소리 03-01 | VIEW : 11,830

≈ 180 ≈ 주 재림의 징조(본문 : 마태복음 24 : 1 - 14)

≈ 181 ≈ 종말의 결정적 증거(본문 : 마태복음 24 : 15 - 28)

≈ 182 ≈ 주 재림의 모습(본문 : 마태복음 24 : 29 - 31)

≈ 183 ≈ 무화과나무 비유에 나타난 징조(본문 : 마태복음 24 : 32 - 36)

≈ 184 ≈ 노아의 때와 같은 세상 종말(본문 : 마태복음 24 : 37 - 39)

≈ 185 ≈ 예비하고 있어야 할 주의 날(본문 : 마태복음 24 : 37 - 44)

≈ 186 ≈ 충성된 종과 악한 종(본문 : 마태복음 24 : 45 - 51)


≈ 180 ≈ 주 재림의 징조

(본문 : 마태복음 24 : 1 - 14)

1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2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재난의 징조(막 13:3-13; 눅 21:7-19)

3 예수께서 감람 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와서 이르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5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6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7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8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

9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 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10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되어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11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12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13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서 론 : 마태복음 24장은 계시록이라고 불릴 정도로 

말세에 관한 일과 주 재림의 징조에 대하여 자세히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예언은 다른 사람이 아닌 예수님이 

자신의 재림에 대하여 친히 말씀하여 주셨다는 점에 있어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 것입니다.


1. 종말에 관한 길잡이로서의 교훈

세상이 그 종말에 이를수록 예수님의 예언하신 말씀대로 

거짓 선지자들이 많이 일어나며 

거짓 이적으로 미혹하는 무리들이 머리를 들고일어나 

세상을 미혹하는 일이 생기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서 말씀하신 세상 종말의 징조와 주 재림의 조에 대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친히 듣고 많은 것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가운데서 

다음 몇 가지 사실에 대하여 미리 알아두는 일이 좋을 것입니다.


(1) 그 하나는 예수님의 말씀 중에 그의 재림이나 종말에 대하여 

그 년 월 일 시를 절대로 밝히지 아니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가 무슨 말을 하든지 주 재림에 관하여 

그 일시를 밝히려는 시도는 버려야 하며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을 경계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만약 주 재림의 결정적인 시기를 년 월 일 시로 주셨다면 

그 양상이 어떻게 되었겠는가? 

이 세상은 말할 수 없는 혼돈에 빠져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주 재림의 소망 가운데 살아가야 하는데 

그 날짜가 나온다면 혼란에 빠지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기가 가까이 올수록 세상은 

무질서와 공포와 파괴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 버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2) 그 둘째는 예수님은 다만 세상 종말과 주 재림에 있어서 

세상에서 일어날 징조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같은 일은 주님이 예언하신 명시된 말씀으로 

이 세상의 징조를 바라보고 경성하라고 하신 뜻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지혜가 없는 자는 깨달을 수 없는 것입니다.


2. 종말의 징조

예수님이 이 예언을 말씀하시게 된 것은 

50여년 가까이 걸려서 건축된 

예루살렘 성전의 위용(그 당시에도 다 완공된 것은 아님)을 

제자들이 자랑했을 때 

이에 대하여 주님은 실로 놀라운 말씀 

즉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선생님의 이 같은 말씀에 정히 놀랐습니다. 

그리고 그러면 과연 이런 무서운 일이 

언제 어떻게 이루어지겠는가? 에 대하여 알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이 감람산 위에 앉아 계실 때 조용히 묻게 된 것입니다. 

그들의 물음은 두 가지로 나타났는데 

그 하나는 과연 어느 때에 

이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질 일이 일어날것이겠는가? 하는 것이었고 

다른 한 가지는 주의 임하심과 세상 종말에는 무슨 징조가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첫 번째 질문에 대한 해답은 한 말씀도 아니하시고 

세상 끝날의 정조와 주 재림의 징조에 대해서만 중점적으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1) 첫 번째 징조로 사람의 미혹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미혹이란 말은 ‘프라나오’로 

길을 잃게 한다. 나쁜 길로 인도한다. 방황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종말에는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와서 

자기를 그리스도로 칭하면서 

사람들로 생명의 길을 잃게 하고, 나쁜 길로(사망) 인도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때 미혹을 받는 무리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잘 알지 못하는 무리들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배우고 그를 알아야 합니다.


(2)두 번째 징조로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난리란 말은 ‘폴레무스’로 전쟁, 전투, 싸움, 충돌 등의 복수로 

많은 싸움과 전쟁을 의미합니다. 

종말에 나타날 두드러진 징조는 이곳 저곳에서 들려오는 난리 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잦은 국제적인 충돌, 인종 싸움, 내란, 정변, 혁명 등이 잇달아 일어나 

세상이 어수선하게 될 것입니다. 

당장에라도 큰 전쟁이 일어날 것 같은 국제적인 불안 상태가 

계속될 것임을 암시해 주신 말씀이십니다. 

그러나 이런 난리나 그 소문만으로 세상 끝이 오는 것은 아니고 

다만 그 시작이거나 세상 종말에 이르렀다고 하는 

강력한 징조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3) 다음 세 번째 징조로는 민족과 민족이,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는 얼이 일어나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주님이 말씀하신 조는 그 규모가 매우 큰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민족이란 말이나 국가란 말은 

가히 세계의 전면 전쟁을 유발시키는 대규모의 전쟁 형태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때를 맞추어 기근과 지진이 처처에 있을 것입니다. 

이런 일은 언제나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같은 일이 통계학 상으로나 그 빈번함과 엄청난 규모로 살펴보아 

예수님의 예언과 연관시킬 수 있는 지혜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조가 

재난인 것이 아니라 종말에 있을 재난의 시작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재난이라고 하신 말씀은 

종말에 이 땅 위에 임할 무서운 환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마24:29. 계2:10, 3:10. 단12:1. 슥14:1).


3. 환난의 시작

9절부터 마지막 종말에 있을 환난이며 온 인류가 겪어야 할 재난입니다. 

이애 대하여 예수님은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눅21:33-35).


(1) 그때 즉 환난 때에는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며 죽이리라고 하셨습니다. 

환난시기에는 적그리스도의 세력이 세상의 권세를 잡게됨으로 

그들은 성도들을 대적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저갱에서 나온 황충이 떼들이(악한 영) 세상에 나와 

사람들의 마음을 거처로 삼게 되는데 

이 황충이 떼들인 악령이 들어간 사람은 적 그리스도 사상에 물들게 되며 

이들은 성도들을 적그리스도에게 넘겨 줄 것이며 

핍박을 가할 것입니다(계9:1-6, 마10:21-22).


(2) 거짓선지자가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 13장에 기록된 거짓 선지자가 이때 출현 할 것입니다. 

“내가 보매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 

  새끼 양 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하더라 

  저가 먼저 나온 짐승의 모든 권세를 그 앞에서 행하고 ........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짐승 앞에서 받은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계13:11-18) 

이것은 데살로니가후서에서 

사도 바울이 밝힌 악한 자의 임함과 동일합니다(살후2:9-12).


(3) 이 때에는 이 세상에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고 하셨습니다. 

불법이 성하다고 하신 말씀은 이 세상에 번성하는 죄악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최악이 관용했을 때 심판을 하십니다(창6:5-8). 

종말에 세상에 있을 죄악에 대하여 성경은 이처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죄는 하늘에 사무쳤으며 하나님은 그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신 지라”(계18:5).


결 론 : 언제 이런 시기가 오느냐에 대하여 

예수님은 다만 천국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 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말세 기간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주님 시대 (초림) 

ⓑ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이스라엘의 박해시대 

ⓒ 이방 세계에 복음이 전파되는 시대 

ⓓ 이스라엘의 회복시대 

ⓔ 환난의 시작 

ⓕ 환난시대 

ⓖ 주님의 재림.


≈ 181 ≈ 종말의 결정적 증거

(본문 : 마태복음 24 : 15 - 28)

15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 바 

ㄱ)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16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17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 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내려 가지 말며

18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

19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20 너희가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21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22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

23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

25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26 그러면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27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28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일 것이니라


서 론 : 주의 재림과 세상 끝에 있을 정조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예수님은 

이제 그 결정적인 증거와 사건들에 대하여 예언하십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특별히 다니엘이 기록한 멸망의 가증한 존재에 대하여 설명하심으로 

적 그리스도의 대두가 세상 끝날에 나타날 중대한 사건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또한 이 같은 환난 날에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이 살 수 있는 길을 알려 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에 조심스럽게 귀를 기울려야 활 것입니다.


1. 멸망의 가증한 존재와 종말

주님은 종말에 나타날 적그리스도에 대하여 ‘멸망의 가증한’것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이 같은 말씀은 다니엘이 말한 예언의 내용인데 

다니엘은 종말에 가서 이레의 절반동안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악한 자에 대하여 예언했습니다.

“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강포하여 미운 물건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케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단9:27). 

이 자에 대해서는 신약에 와서 데살로니가후서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누가 아무렇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하지 말라 

  먼저 배도 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니 

  저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살후2:3-4)고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자가 종말에 어디 서느냐? 

예수님은 거룩한 곳에 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건은 적그리스도가 온 세계를 통치하는 

후 삼년 반 시대에 있을 일인데 

이 때 적 그리스도는 스스로 자신을 하나님이라 하여 하나님을 대적할 것이며 

하나님의 백성들을 핍박할 것입니다(계13:3-7).


우리는 이 사건이 주후 70년에 있은 

로마에 의한 예루살렘 함락으로 생각하면 안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인용하신 다니엘서의 “멸망의 가증한 자”란 

세상 종말에 나타날 멸망의 아들, 적그리스도나 그의 우상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의 의도는 

70년대에 당할 이스라엘의 환난을 가리킴이 아니라 

세상 종말과 주의 재림에 대하여 묻는 제자들에게 

인류의 종말과 그리스도의 재림의 시기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함락은 마지막 종말에 다시 한번 있게 됩니다(슥 14:12).


2. 산으로 도망하라

주님은 이 같은 환난 날에 예루살렘에서 살아 남울 수 있는 길을 밝혀 주셨습니다. 

‘산으로 도망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무서운 환난 날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수 있는 길은

 산으로 도망하는 일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1) 산은 하나님이 지정하신 이스라엘의 피난처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이 하늘의 유황불로 멸망을 당할 때에 롯도 그러했습니다. 

종말에 있을 예루살렘의 환난 날에 

그들이 산으로 도망할 일에 대하여 스가랴는 이처럼 예언했습니다.

“그 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편 감람산에 서실 것이요 

  감람산은 그 한가운데가 동서로 갈라져 매우 큰 골짜기가 되어서

  산 절반은 북으로, 절반은 남으로 옮기고 그 산골짜기는 아셀까지 미칠지라 

  너희가 그의 산골짜기로 도망하되 

  유다 왕 웃시야 때에 지진을 피하여 도망하던 것 같이 하리라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임하실 것이요 

  모든 거룩한 자가 주와 함께 하리라”(슥14:4-5).


(2) 이 같이 도망하는 일에는 돌이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뒤로 돌이키는 일은 롯의 아내의 경우에서 멸망 받을 일의 거울이 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세상을 바라보기에는 너무나도 시기적으로 급박한 상황임을 경종 하신 것입니다.


(3)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너무나도 환난이 급하고 심하기 때문에 

아이를 밴 부녀자나 행동하기에 거추장스러운 젖먹이 어머니들에게는 

다른 사람들 보다 화를 받는 확률이 많을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4) 겨울이나 안식일에 도망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안식일이 거론된 것은 이 환난이 분명히 그 때까지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고 율법을 지키는 유대인들에 관한 것임을 밝히신 일이며 

그 날에 환난이 임할 때 그들은 자신들의 율법에 얽매어 자승자박하는 결과가 올 것입니다. 겨울은 역시 추운 계절이기 때문에 환난을 겪는 일에 많은 어려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3. 환난의 날들을 감하시는 하나님의 자비

이 때에 일어날 환난은 역사상 초유의 사건이며 이후에 이 같은 사건이 없을 것은 

이 환난이 인류의 마지막 환난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이 날 들을 감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감하신다는 말씀은 

①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에게는 

이 환난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주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② 그리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 같은 무서운 시험의 때를 면케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계3:10). 

③ 이 말씀은 이 모든 환난을 계획하시고 주장하시는 이가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심을 의미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역사는 

오직 그의 백성을 구원하시고자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이심으로 

우리는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4 거짓 그리스도의 등장

환난 때의 영적인 혼란은 거짓 그리스도의 등장일 것입니다. 

지금도 거짓 그리스도들의 등장으로 교계가 시끄럽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는 자신을 숨기지 않고 자기가 그리스도라고 정면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미혹을 발아 믿음에서 떨어져 나갈 것이지만 

이들은 진리의 말씀에 의지한 사람들이 아니며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하나님의 백성들도 아닙니다. 

이 거짓 그리스도들은 사단으로부터 영적인 거짓 능력을 받아 

갖가지 회한한 이적이나 표적을 나타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엄중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고 말씀하심으로 

하늘로 올리우심을 본 그대로 오시는 분만이 

재림의 주님임을 알라고 하셨습니다(행1:31).


결 론 : 예수님은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일지니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곳에서 말씀하신 주검이란 말은 하나님의 최종적인 심판을 말합니다. 

그리고 독수리란 하늘의 새들을 말하는데 

이 날에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새들을 모으사 

사람의 고기로 그들의 배를 불리는 하나님의 잔치를 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또 내가 보니 한 천사가 해에 서서 

  공중에 나는 모든 새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와서 하나님의 큰 잔치에 모여 왕들의 고기와 말들과 그 탄 자들의 고기와 

  자유한 자들이나 종들이나 무론 대소하고 

  모든 자의 고기를 먹으라 하더라”고 했습니다(계19:17-18, 겔39:17-20).


≈ 182 ≈ 주 재림의 모습

(본문 : 마태복음 24 : 29 - 31)

인자가 오는 것을 보리라

(막 13:24-27; 눅 21:25-28)

29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30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31 그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서 론 : 예수님이 언제 어떤 모습으로 재림하시는가? 

이 문제에 대한 신학적인 논쟁도 많지만 

일반성도들도 알고싶어하는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재림하시는 그 재림의 시기를 년 월  일 시로는 알 수 없지만 

그 때와 그 모습은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친히 이 곳에서 말씀으로 가르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인류 종말에 있을 환난 후에 재림하십니다. 

그리고 그의 재림은 땅에 거하는 모든 사람들이 바라볼 수 있도록 오십니다. 

그는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의 모습을 가지고 오십니다. 

그러므로 인류의 종말인 대 환난 후, 

이런 모습으로 하늘에서 내려오시는 분이 아니시면 

그가 무슨 이적을 행하든지 그가 무슨 말로 그럴듯하게 꾸미든지 

그자는 분명히 종말에 나타날 것이라고 예언하신 거짓 그리스도임을 알고 

절대로 미혹을 받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1 예수님의 재림은 환난 후에 있다.

예수님은 “그날 환난 후에” 오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환난이라고 하신 사건은 인류의 종말에 있을 대환난을 의미합니다. 

이 날에 대하여 예수님은 “그 날”이라고도 표현하셨습니다(눅21:34). 

이 날에 대하여 “시험의 때”라고도 하셨습니다(계3:10). 

다니엘은 이 환난의 날을 “그 때”라는 말로 예언했습니다(단12:1). 

스가랴는 이 환난의 날을 “여호와의 날”이라고 말했습니다(슥 14:1-2). 

이 환난은 요한 계시록에서 “일곱째 대접 심판”으로 나옵니다(계16:1-21).


(1) 환난 후에란 말씀은 여섯째 대접 심판 후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이 세상 종말에 인류들에게 내리실 최종적인 재앙이 

요한 계시록 16장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 재앙이 일곱 대접 심판으로 나옵니다.


이 심판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① 첫째 대접을 땅에 쏟았습니다.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에게 독한 헌데가 생깁니다. 

② 둘째 대접을 바다에 쏟았습니다. 

바다가 피가 되어 모든 생물이 죽습니다. 

③ 셋째 대접을 강과 물 근원에 쏟습니다. 

모든 물이 피가 되어 사람들이 피를 마시게 됩니다. 

④ 넷째 대접올 해에 쏟습니다. 

해가 불로 사람들을 태움으로 사람들이 태움을 받습니다. 

⑤ 다섯째 대접을 짐승의 보화에 쏟았습니다. 

그 나라가 어두어지며 악한 종기로 말미암은 고통이 더욱 심하게 됩니다. 

⑥ 여섯째 대접을 큰 강 유브라데에 쏟습니다.. 

적그리스도의 모든 군대가 아마겟돈에 모이고 이 때 예수님이 재림하십니다. 

⑦ 일곱째 대접을 공기 가운데 쏟습니다. 

이 온 세상에 큰 지진이 일어나서 

이 지구가 세 갈래로 갈라지게 되고 

세계의 모든 도시가 폐허화되고 

이 지구상에 있는 모든 산도, 모든 섬도 없어져 버립니다. 


이 일곱째 대접 재앙으로 

이 지구는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받아 완전히 소멸되어 버림으로 

스바냐가 예언한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지면에서 모든 것을 진멸하리라 

  내가 사람과 짐승을 진멸하고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와 거치게 하는 것과 악인들을 아울러 진멸할 것이라 

  내가 사람을 지면에서 멸절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습1:2-3).


여기서 예수님은 여섯째 대접을 쏟는 재앙시에 오시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섯째 대접 재앙까지 이 세상에 무서운 환난을 주시고 

여섯째 대접을 쏟으시는 것으로 마지막 전쟁을 일으켜 

적그리스도와 그의 군대들에게 결정적인 심판을 내리시게 됩니다. 

이 전쟁의 모습이 계시록 19:11-21절까지로 

이곳에 그 전쟁의 양상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2) 그 날 후에 해가 어두어진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다섯째 대접 재앙으로 말미암은 흑암을 말합니다.


(3)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때에는 밤에도 역시 흑암이 계속됨으로 

하늘의 달이 그 빛을 나타내지 못할 것입니다.


(4) 하늘의 권능이 흔들리고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진다고 하셨습니다. 

이 같은 하나님의 두려운 심판은 마치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는 것처럼 보이게 될 것이며 

하늘의 별들이 땅에 떨어지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이런 일에 대하여 히브리서 기자는 이처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는 그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거니와 이제는 약속하여 가라사대 

  내가 또 한번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리라 하셨느니라 

  이 또 한번이라 하심은 진동치 아니하는 것을 영존케 하기 위하여 

  진동할 것들 곧 만든 것들의 변동 될 것을 나타내심이니라”(히12:26-27).


2. 재림하시는 징조와 주님의 재림

예수님의 재림 시기는 이처럼 환난 후가 될 것인데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아주 중요한 사실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1)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징조가 하늘에서 어떻게 우리에게 보일 것인지에 대하여는 알 길이 없지만 

하늘에서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가 나며 

구름을 타고 오실 때 이상한 일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2)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주님이 구름을 타고 오시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비추어 모든 사람들이 분명히 

재림하시는 주님의 징조와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지만 

어떤 모양으로 이런 일이 이루어질지는 모릅니다.


(3) 재림하시는 주님을 볼 수 있는 무리는 이때 둘로 갈라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는 땅의 모든 족속이요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신부들입니다. 

이들은 결코 동일한 장소, 통일한 입장에서 주님의 재림을 맞이하는 것은 아닙니다.

① 통곡하는 무리는 땅에 거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물론 그때까지도 주님을 영접하지 아니한 자들이요 주님을 대적해 온 자들입니다. ‘그를 찌른 자’나 ‘땅에 있는 모든 족속’들이 바로 그런 자들입니다(계1:7). 

어린양의 재림의 모습을 보고 그 몸을 숨기는 

족속들, 땅의 임금들, 왕족들, 장군들, 부자들, 강한 자들, 각 종과 자주자들이란 

이 세상에서 그 때까지 살아남아 있는 불신자들을 지칭하고 있는 것입니다(계6:15-16).

② 다음에 주님을 영광으로 맞이할 무리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물론 그의 신부가 될 성도들입니다. 

“그 날에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얻으시고 

모든 믿는 자에게서 기이히 여김을 얻으시리라”고 말씀했습니다(살후1:10).


(4) 이때 택한 백성들은 큰 나팔 소리와 함께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크나큰 의문점에 부딪치게 됩니다. 

이때 천사는 왜 택하신 성도들을 한 곳으로 모으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으는 그 곳이 과연 어디냐는 것입니다.

① 이 일은 예수님의 재림과 거의 동시에 이루어 질 것인데 

이 일로 성도들은 즉시 어디론가 옮겨질 것입니다. 

이 일은 마치 노아의 홍수시에 노아의 가족을 방주로 모으신 일과 같은 일이 될 것입니다. 

왜 이때 이처럼 서둘러 택하신 자들을 모아야 하느냐? 

그것은 그 다음 심판이 곧 올 터인데 

이 심판이야말로 일곱째 대접 심판으로, 

이 심판으로 이 지구는 파멸될 것이기 때문입니다(계16:17-21).


② 데살로니가 전서에서 이 곳이 공중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라”고 했습니다(살전4:16-17).


결 론 : 우리는 주님의 재림의 날을 소망으로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심판 받을 사람들이 아니요 주님의 신부들로 

그 날에 주님을 영광 중에 만나 

영원히 그와 함께 하는 축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 183 ≈ 무화과나무 비유에 나타난 징조

(본문 : 마태복음 24 : 32 - 36)


무화과나무에서 배울 교훈

(막 13:28-37, 눅 21:29-33, 17:26-30,34-36, 12:35-48)

32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33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2)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34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

35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36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서 론 : 예수님이 세상종말에 대한 말씀을 하시는 중에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통하여 교훈을 주셨습니다. 

이 교훈은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 의미를 불입니다만 

대개의 경우 두 가지로 집약되고 있습니다. 

하나는 종말의 예언에 나타난 징조를 보고 

그 예언의 성취를 바라보라는 것과 

다른 하나는 이 비유를 이스라엘의 회복과 연결시켜 

주 재림의 시대적 징조를 알라는 것입니다. 

어느 것이든 이 비유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여겨지는 것입니다.


1. 무화과나무의 비유에 대한 두 가지 해석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 어느 곳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나무입니다. 

한편 이 나무는 이스라엘이나 또는 하나님의 백성의 한 상징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무화과나무의 열매는 8월 말경에 익는 여름 무화과와 

5월 말경에 익는 겨울 무화과가 있습니다. 

그런데 대개의 경우 그 어린 싹은 2월경에 나오고

4월이면 그 잎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1) 무화과나무의 성장과정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징조를 배우고 준비하라는 뜻으로 

이 비유를 들려 주셨습니다. 

무화과 열매는 아무런 예고 없이 나무에 열리는 것은 아닙니다. 

무화과가 열리려면 먼저 그 잎이 돋아나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무화과나무의 잎이 돋아나는 시기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잎이 돋아나면 그들은 이제 여름이 가까운 줄로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같은 비유를 통하여 

종말의 조를 알아볼 수 있는 영적 지혜를 가져야 할 것을 교훈 하신 것입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세상 종말에 대한 조가 

이 세상에 한 가지 한가지 나타나는 것을 보거든 

이런 정조들이 곧 예수님의 재림을 예고해 주는 일임을 알고 

대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2) 또한 예수님은 이 비유롤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징조로 말씀하시고 

이스라엘의 회복이야말로 주 재림의 징조임을 알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이 멸망하여 황폐될 것임을 말씀하시고 

그 시기가 그의 재림 시기에까지 이를 것임을 시사하셨습니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마23:38-39).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회복파 주의 재림 시기는 

떼어놓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① 여기서 비유적으로 말씀하신 무화과나무는 

이미 오래 전에 죽은 무화과나무를 상징합니다. 

우리는 마태복음 21장에서 열매가 없음으로 

주님의 저주를 받아 뿌리째 말라버린 한 무화과나무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 지라 

  길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서 잎사귀밖에 아무 것도 얻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마21:18)고 했습니다. 

이것은 열매 없는 이스라엘의 멸망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마21:43)고 하신 말씀대로 

열매를 맺지 못한 그들은 실질적으로 그 나라를 빼앗겼습니다. 

이제 이방인의 때가 되었습니다. 

이 기간이야 말로 온 세상에 복음이 전파되는 기간인 것입니다(마24:14).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회복은 

이 세상 끝날이 이르렀다고 하는 하나님의 신호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1948년 5월 15일 독립을 선언함으로 

다시금 그들의 모습을 역사의 무대 위에 등장 시켰습니다.


② 우리는 이스라엘의 회복이 

그리스도 재림의 예언적인 조가 된다는 사실에 대하여 

구약 여러 곳에서 그 증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에스겔 38장에는 인류의 종말에 있을 곡과 마곡의 전쟁이 나옵니다. 

이 전쟁은 북쪽 끝에 있는 곡이 

회복된 이스라엘을 침공해 오는 것으로 

이 전쟁이야말로 종말에 있을 큰 전쟁인 것입니다. 

“여러 날 후 곧 말년에 네가 명령을 받고 

  그 땅 곧 오래 황무하였던 이스라엘 산에 이르리니 

  그 땅 백성은 칼을 벗어나서 열국에서부터 모여 들어오며 

  이방에서부터 나와서 다 평안이 거하는 중이라 

  네가 올라오되 너와 네 모든 떼와 너와 함께 한 많은 백성이 

  광풍같이 이르고 구름 같이 땅을 덮으리라 

  인자야 너는 또 예언하여 곡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 이스라엘이 평안히 거하는 날에 

  네가 어찌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네가 네 고국 땅 북쪽 끝에서 많은 백성 

  곧 다 말을 탄 큰 떼와 능한 군대와 함께 오되”(겔 38:8-9, 14-16).


③ 이스라엘의 회복은 반드시 있어야할 예언의 성취입니다. 

그것은 로마서 11장에서 하나님의 비밀로써 나타난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이 시온에서 구원을 얻을 시기가 오는데 

그 시기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라고 했습니다(롬11:25-27). 

또한 예수님은 회복된 이스라엘 땅에 

재림하실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는 것입니다(행1:11. 슥14:1-5). 

그리고 마지막 날에 전쟁을 일으키는 적그리스도는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것으로 예언되어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주 재림 전에 반드시 회복되어야 하며 

이스라엘은 이미 회복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회복되는 것을 보거든 

이것은 마치 무화과나무의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는 일이니 

세상 종말과 주 재림의 시기가 다가 올 줄로 알라고 하신 교훈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비하심과 이적으로 

열매가 없어 저주를 받아 뿌리째 마른 그 무화과나무를 

이처럼 다시 살리신 것입니다.


2.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예수님은 34절에서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주님이 말씀하신 “이 세대”가 

어떤 세대이며 어떤 시기를 의미하는 세대인가에 대하여 궁금증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세대란 말은 한 시대를 의미합니다. 

?한 때? 또는 “한 시대?를 가리키며 

이것은 또한 그 한 시대 사람들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 말씀을 만약 제자들이 살아가고 있는 그 세대를 말씀하셨다면 

그들이 생존한 시기까지를 의미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세대는 지나갔지만 아직까지도 이 같은 종말이 오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말씀은 다른 각도에서 해석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무화과나무의 비유에 나타난 징조(이스라엘의 회복)나 아니면 

세상 종말에 나타날 예수님의 예언이나 징조가 나타날 

그 시기부터 계산한 한 세대로 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또한 재림의 징조가 나타난 시기로부터 

예수님의 재림은 결코 길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말씀이 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한 세대를 40년 혹은 이스라엘의 희년인 50년 

혹은 한 세기인 100년을 잡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어느 사람도 그 어떤 방법으로도 그 날을 알 수 없다는 사실을 

더욱 분명히 하시기 위하여 “하늘의 천사”들까지도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아들도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 말씀을 하시는 주님은 

아직 세상에서 제한적인 인성을 지니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분명히 성자 하나님이시요 만물의 창조자이시요 

성부 하나님과 똑같은 본체를 지니신 분이시지만 

그가 자기를 낮추시어 종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육신을 입고 계실 동안은 

하나님으로서의 전지전능이 스스로 제한되어 있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하실 그 당시에 있어서 예수님은 

정말로 그 시와 그 때에 대해서는 모르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하늘에 올라가신 이후 

그는 다시 이전의 영광으로 환원하셨기 때문에 

모든 것이 가능하시며 

친히 이 모든 징조와 심판을 이루시는 권세를 가지고 계십니다.


결 론 : 지금 우리가 할 일은 

이 시대가 주 재림에 매우 가까운 세대임을 알고 

그 날을 위하여 준비하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성도의 준비를 서둘러야 할 세대에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습니다.


≈ 184 ≈ 노아의 때와 같은 세상 종말

(본문 : 마태복음 24 : 37 - 39)

37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38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39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서 론 : 예수님은 세상종말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이 

마치 노아의 때와 같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같은 주님의 말씀은 두 가지로 우리에게 경계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세상은 점점 완악해 져서 

하나님의 심판이 이르는 그 시기까지 회개치 않고 

세상을 따라가는 생활을 하게 될 것이라는 것과 

다른 또 하나는 이 세상이 하나님의 실질적인 심판의 날이 와도 

모든 사람들은 그같은 재앙이 세상종말에 있을 하나님의 심판인줄 알지 못하고 

멸망을 받게 된다는 뜻으로 경종해 주신 것입니다.

이런 일에 대하여 예수님 자신도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하셨습니다(눅18:8). 

세상 종말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이 얼마나 완악한지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수록 더욱 하나님을 대적하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그 손으로 행하는 일을 회개치 아니하고 

  오히려 여러 귀신과 또는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금, 온, 동과 목석의 우상에서 절하고 

  또 그 살인과 복술과 옴행과 도적질을 회개치 아니하더라”

  (계9:20-21. 참조 계16:8-9).


1. 노아의 때란 세상에 죄악이 관용한 때를 말한다.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가지롤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고 하셨습니다(벧후 3:8-9).


(1) 노아의 때에 하나님의 홍수심판이 내려진 것은 

그들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셨다”고 했습니다(창6:5-6). 

하나님은 이들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할 때까지 길이 참아 기다리셨던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400년간이나 애굽에서 보내도록 하신 이유에 대하여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함이라고 하셨습니다.

"네 자손은 사대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함이니라”(창15:16).


(3) 소돔과 고모라의 경우도 그러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중하니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창18:20-21)고 말씀 하셨습니다.


(4) 마지막 인류의 심판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죄는 하늘에 사무쳤으며 

  하나님은 그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신 지라 

  그가 준 그대로 그에게 주고 그의 행위대로 갑절을 갚아주고 

  그의 섞인 잔에도 갑절이나 섞어 그에게 주라”(계 18:5-6)고 하셨습니다.


2. 노아 시대 사람들의 죄악

노아 시대 사람들의 죄악은 

육신적인 생활에 나타난 죄악과 영적 생활에 나타난 죄악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육신적 생활에 나타난 죄악을 보면

① 노아 시대 사람들은 하나님이 없는 생활을 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그들의 생활상올 보면 

믿음으로 살거나 의롭게 산 흔적은 어느 한 곳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십니다(고전 10:31). 

그러나 그들의 생활에는 이런 것이 한 가지도 없었습니다.


② 그들의 생활은 정욕과 탐심의 생활이었습니다. 

그들의 정욕으로 가득찬 생활상이 주님의 말씀 중에 역력히 나타나 있습니다.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의 표면에 나타난 생활에 

이처럼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생활은 찾을 길이 없고 

정욕을 만족시키고 탐심을 이루는 생활로 깊숙이 젖어 있었습니다.


③ 그들은 성별된 생활을 못했습니다. 

시집가고 장가갔다고 하신 말씀은 

하나님이 금하신 잡혼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땅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창6:1-2)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의 자녀들인 셈의 후손들이 가인의 자손들과 잡혼을 하게 되므로 

그들이 가인의 자손들에 의하여 

불신적인 풍조에 물들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여기서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말은 

셈의 자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천사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천사들은 혹 사람의 모양으로 세상에 내려 올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존재는 육체적인 구조를 가진 것이 아니라 영적인 피조물이기 때문에 

사람들과 같은 생식기능이 있을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네피림이란 존재를 천사와 사람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손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이미 홍수 심판으로 

이 같은 족속이 완전히 사라진 이후인 가나안 땅에 

네피림 후손이 살고 있었다는 증거는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민13:33).


(2) 그러면 그들의 영적 생활에 나타난 죄악은 어떠했는가? 

그들은 의를 전파하는 노아의 경종을 비웃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심판을 120년 동안이나 전파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 백 이십 년이 되리라”(창6:3)는 말씀은 

노아가 방주를 만든 기간이 아니라 

노아로 하여금 의를 전파하여 회개시키시는 기간으로 

설정해 놓으신 것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벧후2:5). 

그리고 이때 하나님의 사랑은 그들에 대하여 오래 참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의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 하던 자들이라”고 했습니다(벧전3:20)


그러면 그 당시 살고 있었던 하나님의 백성들은 

홍수 심판으로 다 멸망 받은 것이겠는가? 

그들은 불순종으로 홍수의 심판을 받아 육신적으로는 멸함을 당했지만 

영으로는 구원을 얻은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5장에 기록 된 것을 보면 음행으로 더럽힌 어느 성도에 대하여 

사도 바울이 정죄했지만 그에 대하여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고전5:4-5).


결 론 : 한번 세속적인 신앙에 물들면 

그 사람은 영적 소경이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알게 되는 것입니다.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세상에 젖은 생활을 하게 되면 

하나님의 심판을 농담으로 비웃는 것입니다(창19:14). 

홍수 심판이 내렸지만 그들은 그 재앙을 우연으로 알았습니다. 

종말에도 이들처럼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무리들이 

그것을 받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그 재앙들을 만나도 회개치 않고 

그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 185 ≈ 예비하고 있어야 할 주의 날

(본문 : 마태복음 24 : 37 - 44)

37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38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39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40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41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42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43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 줄을 알았더라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44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서 론 : 예수님의 재림은 마치 노아의 때와 같을 것이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하나님의 심판을 미리 예비했던 노아의 가족은 다 살았지만 

이에 대하여 전혀 예비치 아니한 그 당시 모든 사람들은 

멸망 받았다는 것을 일깨우시기 위하여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왜 노아가 전파하는 복음을 듣지 않고 심판을 받은 것인가? 

그들은 방주를 만들지 않고 먹는 일과 마시는 일과 집을 짓는 일과 

장가들고 시집가는 세상적인 일에만 몰두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심령은 어떠한가? 

하나님의 심판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들이 

“홍수가 나서 저회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했다”고하신 것입니다. 

이 같은 일은 우리에게 큰 경종이 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종말에도 이와 똑같은 현상이 벌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눅21:34-36).


I. 데려감을 당하고 버려둠을 당할 일

노아 때의 형편을 말씀하신 후 예수님은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그 때”란 말씀은 분명히 예수님의 재림의 날을 가리킵니다. 

그러면 데려감을 당한다는 것과 버려둠을 당한다는 말씀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1) 데려감을 당한다는 말씀은 심판에서의 최종적인 구원의 역사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홍수 심판 전의 노아의 가족을 구원하심에 

그들을 모두 방주 안에 들어가게 하신 후 땅을 멸하시는 심판을 내리셨습니다(창7:6-12). 

롯의 경우도 역시 그러했습니다(창19:15-25). 

그러므로 마지막 심판의 날에도 구원받을 하나님의 백성들은 데려감을 당하고 

심판 받을 사단의 자녀는 다 버려둠을 당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① 이것은 알곡 추수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가라지의 비유에서 결론적으로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군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마13:30). 

이 같은 알곡 추수는 세상 종말에 나타날 것임을 요한계시록에서 밝혀주고 있습니다. 

“또 다른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구름 위에 앉은 이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네 낫을 휘둘러 거두라 거둘 때가 이르러 땅에 곡식이 다 익었음이로다 하니 

구름 위에 앉으신 이가 낫을 땅에 휘두르매 곡식이 거두어지니라”고 했옵니다(계15:15-16).


② 이 알곡 추수는 마지막 때에 천사를 통하여 이루십니다. 

예수님은 이 일에 대하여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저가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고 하신 말씀입니다(마24:30-31).


③ 이 때 데려가심을 당하는 사람들은 

천사들에 의해 공중으로 들림을 받을 것입니다(살전4:16-17). 

그러면 왜 마지막 하나님의 심판 직전에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의 공중 영접이 있어야 하는가? 

우리는 이에 대한 분명한 해답을 가져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마지막 인류의 심판이 일곱째 대접 재앙으로 나타나는데 

이 재앙은 이 세상이 온전히 무로 돌아가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계시록 16장에서는 

“사람이 땅에 있어 옴으로 처음 겪는 큰 지진으로 

큰 성 바벨론(이 지구)이 세 갈래로 갈라지게 되고 

만국의 성(세계 중요 도시)들도 무너지며 각 섬도(세계 모든 도서)없어지고 

산악도(세계 높고 낮은 모든 산) 간데 없어지는 심판”이 

마지막 이 세상에 내리시는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심을 명시하고 있습니다(계16:17-20). 

그런데 이런 심판에서는 

이 땅위에 살아남을 사람이나 짐승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습1:2-3) 

그의 택한 백성들을 공중으로 끌어올리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 그리스도인들은 새롭게 이 땅위에 세워진 천년황국으로 내려와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살게되는 에덴의 생활이 전개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년이 찬 후 우리는 하늘로부터 신부의 단장을 갖추고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인 

우리의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될 것입니다(계21:14).


(2) 다음에 버려둠을 당한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아 멸망 받는 일을 말합니다. 

홍수 심판 때 노아의 가족과 방주 안에 들어간 모든 생물 외에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완전히 멸망을 당했습니다. 

인류의 마지막날 하나님이 내리시는 심판 역시 

그가 버려둠을 당한 이상 어떤 존재이건 완전히 멸망함율 당할 것입니다.


① 이들 중에 많은 무리들은 하나님의 큰 잔치의 먹이로 새에게 먹히게 될 것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오시는 주님의 군대와 싸우기 위해 

아마겟돈으로 모인 모든 적그리스도의 군사들은 

이 잔치의 주빈으로 초대받는 공중의 각종 새들의 먹이가 될 것입니다(계19:17-18)


② 버려둠을 당할 대상자들은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모든 사람이 될 것입니다.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지우더라”(계20:15)고 했습니다.


③ 버려둠을 당할 자들은 한결같이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고 했습니다(계13:16-17) 

짐승의 표에 대해서는 계 13장에 있는 주석설교를 참조할 것).


④ 버려둠을 당할 자들 중에는 단 한 명도 예외자가 없을 것입니다(습1:2-3). 

여기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에 “두 사람”과 “두 여자”가 나옵니다. 

이것은 한 가족 중에도 이처럼 

데려감을 받을 사람과 버려둠을 당할 사람으로 나누인다고 하시는 뜻입니다. 

천국은 믿음으로 들어가는 곳이지 

어느 한쪽에 의존해서 함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이것은 또한 부부간에도 마지막 날에 가서는 

이처럼 비참하게 서로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경종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덧붙일 것은 

어떤 분은 주님의 이 비유를 대 환난 전에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을 사람들과(계12:6,14) 

환난에 떨어질 사람들의(계14:17) 구분이라고 말합니다. 

어느 쪽이든 종말 성도들이 깨어 있어야 할 일에 대한 주님의 경종이 십니다.


2. 이러므로 예비하고 있으라

“이러므로 깨어 있으라”고 주님은 결론적으로 말씀하십니다. 

깨어 있으라는 말씀은 ‘그레고레 이테’로 

그 뜻은 정신 차리라,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도적의 경우를 비유로 

그의 재림을 예비하라고 하신 말씀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려 주셨습니다.


(1) 깨어 있는 방법은 기도하는 일입니다.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눅21:36).


(2) 깨어 있는 일은 그 날을 예비하는 일입니다.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할 신부들은 특별한 단장을 해야 하는데 

그 단장은 깨끗한 세마포라고 했습니다(계19:7-8). 

성도들의 옳은 행실의 세마포는 그리스도인의 열매로 나타납니다(요15:5-8).


(3) 깨어 있는 방법은 진리의 말씀 위에 굳게 서서 

결코 미혹을 받지 말아야하는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나 거짓 그리스도의 미혹을 받지 않기 위하여 

우리는 진리 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살후2:9-12).


결 론 : 지금은 노아의 때입니다. 

모든 교회가 세속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지금은 롯의 때입니다. 

음란한 세대입니다. 

깨어 있어 그날을 대비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 186 ≈ 충성된 종과 악한 종

(본문 : 마태복음 24 : 45 - 51)

45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46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4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의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

48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49 동료들을 때리며 

술친구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50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51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서 론 : 예수 그리스도의 양떼를 맡아 주님을 대신하여 

그 양떼를 양육하는 사명을 맡은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향하여 

"내 어린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는 말씀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의 사명을 맡기셨습니다(요21:15-17).

그런데 예수님은 종말에 하나님의 교회에 있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 가운데에는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있고 반면에 

“악한 종”들도 있다는 사실을 밝히셨습니다. 

교회는 주님이 재림하실 세상 종말에 가서 

크게 둘로 나눠진다고 예언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진리에 선 교회요(계12:1-2) 하나는 음녀 교회입니다(계17:1-5).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진리에 선 교회를 맡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은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요 

음녀 교회를 맡아 양 무리를 치는 목자는 “악한 종”이라는 사실입니다.


1.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란 어떤 종을 가리키는 것인가?


(1) 충성된 종이란 하나님이 무엇이든지 마음놓고 맡길 수 있는 종을 말합니다. 

충성이란 발은 ‘피스토스’로 그 말의 뜻은 

믿을만한 가치가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① 이 종은 그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종입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며 겸손한 종들을 들어 쓰십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와 함께 하십니다(사57:15).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잠3:34). 

하나님은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십니다(시10:17).


② 이 종은 말씀을 가까이 하는 종입니다. 

양떼들에게 생명의 꼴을 먹이고 진리의 참 양식을 주려면 

그 원천이 되는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하는 것입니다 (시1:2, 112:2, 잠 16:20).


③ 이 종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행하는 종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자신이 기뻐하는 일을 행하는 종들을 혼자 두지 아니하십니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요8:20).


④ 이 종은 예수 그리스도의 양떼를 사랑하는 종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주님에 대한 사랑을 세 번씩이나 다짐하신 후 

그의 양을 맡기셨습니다(요21:15-17). 

“네 양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며 네 소떼에 마음을 두라”고 말씀했습니다(잠27:23). 

하나님은 양떼를 사랑하지 않는 목자들에게 무섭게 경종하셨습니다(겔34:1-6).


(2) 지혜 있는 종이란 하나님의 지혜로 모든 행동을 삼가는 사람입니다. 

지혜란 ‘프로니모스’로 

생각이 깊은 상태 또는 하나님의 일에 몰두하고 전념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① 이 종은 특별히 지혜의 은사를 받은 종입니다. 

은사적으로 주시는 지혜가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고전12:3) 

이 같은 지혜는 구함으로 받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약1:5).


② 이 종은 남달리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며 예수님을 사랑하는 종입니다. 

“완전한 지혜는 주의 이름을 경외함이니라”고 했습니다(미6:9).


③ 이 종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는 종입니다. 

“훈계를 들어서 지혜를 얻으라”고했습니다(잠8:33). 

“너는 듣고 지혜를 얻어 네 마음을 정로로 인도할지니라”고 했습니다(잠23:19).


④ 이 종은 그리스도 안에서 생활하는 종입니다.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 있느니라”고 했습니다(골2:3).


(3)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은 주인에게 그 집사람들을 말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준다고 하셨습니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은 자기가 치고 있는 양을 자기 양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주인에게 그 집사람들을 맡은 자”라고 했습니다. 

양은 예수님깨서 ‘내 양’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그의 피로 갚주고 산 양을 잠정적으로 맡아 그 양을 키우는 종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종들은 이 양 무리들을 잘 키워야 합니다. 

주인의 뜻에 합당하게 맡아 양육해야 하는 것입니다. 

양을 키우는 방법은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주는 일”입니다.

‘때를 따라’란 말은 ‘엔 카이로’로 ‘정해진 때 안’이란 뜻입니다. 

양들에게 양식을 먹일 때에 충분히 먹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 양식은 생명의 꼴이어야 합니다. 

종말에는 거짓 선지자들이 양떼들에게 

주검의 쑥물을 먹이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계8:10-11). 

그 양떼를 맡기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양 무리들을 사랑하지 못하는 종들은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4) 이들이 받을 축복에 대하여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저에게 맡기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주님이 말씀하신 복이란 ‘마카리오스’로 

영적인 축복, 미래적인 복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맡긴다는 말씀은 

양의 소유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유업을 나누는 일입니다. 

주인의 즐거움에 참례하는 축복입니다(마25:21). 

주인과 같은 영화로운 몸으로 변화시키시는 축복입니다(빌3:21). 

주인의 보좌에 주인과 함께 앉게 하시는 축복입니다(계3:21).


2. 악한 종의 경우

악한 종이란 양을 맡겨 주신 주인의 뜻을 거슬려 

주인의 뜻이 아니라 자기 뜻에 따라 양떼를 치는 종들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이런 목자에 대하여 

“자기만 먹이는 목자”라고 정지하셨습니다(겔34:3-10).


(1) 이 종은 주인이 더디 오리라고 생각합니다. 

주 재림에 대하여 관심을 전혀 가지지 않는 종입니다. 

자신도 준비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양 무리들에게도 주 재림의 준비를 전혀 시키지 않는 것입니다. 

그는 그 양떼들의 피 값을 받을 것입니다(겔33:1-6).


(2) 이 종은 동무들을 때리는 일을 합니다. 

주인에게 맡은 양떼들을 키우는 일에는 관심이 없고 

노회에서나 총회에서나 종교 집단에서 

정치 노름을 하느라고 모략하고 중상하고 투쟁하는 일을 말합니다. 

대개의 경우 목회에 등한한 종들이 

이 같은 교권 싸움이나 감투 쟁탈에 혈안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3) 이 종들은 또한 술친구들로 더불어 먹고 마신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타락한 세속화된 생활과 탐심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에 대하여 유다는 이처럼 정죄했습니다. 

“저희는 기탄 없이 너희와 함께 먹으니 

너희 애찬의 암초요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요 

바람에 불려 가는 물 없는 구름이요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라고 했습니다(유1:12).


(4) 이들이 받을 재앙에 대하여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의 받는 율에 처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마태복음 25장에서 미련한 처녀들을 보게 됩니다. 

회개치 못한 자들은 후3년 반의 무서운 환난 가운데 던져져 

불같은 연단을 통하여 회개하게 될 것입니다.


결 론 :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그 주인이 이른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주인을 기다리는 지혜로운 처녀가 되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25장 설교

◆ 밤중소리 03-01 | VIEW : 9,568

≈ 187 ≈ 지혜로운 처녀와 미련한 처녀(본문 : 복음 25 : 1 - 13)

마태≈ 188 ≈ 착하고 충성된 종(본문 : 마태복음 25 : 14- 23)

≈ 189 ≈ 악하고 게으른 종(본문 : 마태복음 25 : 24 - 30)

≈ 190 ≈ 양과 염소의 분별(본문 : 마태복음 25 : 31 - 46)


≈ 187 ≈ 지혜로운 처녀와 미련한 처녀

(본문 : 마태복음 25 : 1 - 13)

1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2 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

3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4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5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6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7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

8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9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10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11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12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서 론 : 우리는 여기서 주님이 말씀하신 비유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면으로 해석하는 것을 바라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말씀을 들려주신 목적이 어디 있었는가에 대하여 올바른 판단이 앞서야 바른 대답이 나옵니다. 주님의 이 비유는 주님이 장차 재림하실 때 모든 성도들이 깨어 있어야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는 우리는 깨어 있어야 신랑이신 예수님을 맞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하나의 비유이기 때문에 이 비유에 표현된 모든 말씀을 문자대로 해석하려고 한다면 심지어 교리상의 어려운 문제점까지 등장하게 될 것입니다. 이 비유의 목적이 우리들에게 주 재림을 바라보며 깨어 있으라고 하시는데 있다는 것을 먼저 그 핵심으로 알고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1. 열 처녀는 누구를 말하고 있는가?

우리가 이 비유에서 신랑은 예수님이시고 열 처녀는 성도들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열 처녀는 과연 ‘신부의 들러리냐?’ 아니면 신부냐?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중동 지방의 결혼 풍속을 예로 들면서 이 열 명의 처녀는 신부의 들러리라고 말합니다. 신랑은 하나인데 신부가 열 명인 것이 격에 맞지 않는 데서 이런 말이 나왔다면, 우리는 예수님이 신랑으로 등장하신 일도 하나의 비유요 또 열 처녀가 성도의 모습으로 등장한 일도 하나의 비유이기 때문에 이런 일은 문제 될 것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신부란 표현도 하나의 상징적인 말이라면 그리스도인 전부가 신랑이신 예수님의 신부라고 부른들 아무런 모순이 없는 것입니다.

열 처녀는 교회에 나오는 성도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신랑이신 예수님을 맞이하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신랑이 오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속히 오리라”고 하셨습니다.


2. 미련한 처녀란 누구인가?

예수님은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 중 다섯은 미련한 처녀라고 하셨습니다. 그 까닭은 등은 가졌지만 기름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의미는 이 처녀들은 신랑을 사모하며 기다리는 마음이 없이 세속적인 생활을 하다가 결국은 신랑을 영접할 기회를 잃어 버렸다는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의 결론에 가서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1) 이들은 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라고 하신 말씀에서 등은 하나님의 말씀과 연관된 말이며, 구원을 뜻하기도 하는 것입니다(시119:105. 요15:3)물론 이 등은 외식적인 믿음을 가리킬 수도 있지만 주님이 이 곳에서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의도는 주 재림 시에 그를 영접할 자와 영접하지 못할 자를 구분하기 위해서이며, 이 같은 일은 멸망 받을 자가 아닌 구원 받을 성도들에게도 있기 때문에 이들을 경성 시키시려는데 있으셨으므로 이처럼 해석하는 일이 무리가 없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2) 이들에게도 기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가진 기름은 주님을 영접하기에 부족했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생활을 못했습니다 (롬8:14). 그들은 영의 생각으로 주님을 섬기지 못했습니다(롬8:6). 그들은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지 못한 사람들입니다(롬6:13).

미련한 처녀들은 기름이 부족하여 신랑을 맞이할 수 없음을 알고 슬기 있는 처녀들에게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요구를 거절당한 것입니다. 그들이 슬기 있는 처녀들에게 들은 이야기는 “차라리 파는 자들에 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는 권면을 들었습니다.

(3) 이들은 기름을 사러 갔습니다. 기름을 사러 갔다는 말은 회개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고 하셨습니다(계3:18). 여기서 사라고 하신 말씀은 하나님께 대한 회개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련한 처녀들이 기름을 사러갔다는 말은 그들의 회개할 시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4) 이들은 기름을 샀지만 문은 이미 닫혔습니다. “저희가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오므로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문은 구원의 문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왔다”고 하신 것은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왔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들어가야 할 문은 이미 닫힌 지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오실 때 믿는 많은 성도들이 환난에 떨어진다고 하는 여러 가지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눅21:34-36. 고전3:15. 계3:10, 11:13, 12:17) 주님은 7년 환난 중, 후 삼 년 반 마지막 시기에 이 땅에 오십니다. 그런데 성도들은 전 삼 년 반 동안 외치는 두 중인의 회개의 권면을 듣게 되는데 이때 회개한 성도들은 슬기 있는 처녀들로 후 삼 년 반의 환난에서 보호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계3:10, 7:15-17, 11:1-3, 12:6, 13-16).

여기서 말씀하신 문은 바로 이 전 3 년 반의 문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회개는 했지만 문이 이미 닫힌 다음에 회개한 것입니다. 그들에게 이 문이 열릴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 세상은 이미 후 삼 년 반에 들어간 것입니다. 이들은 할 수 없이 후 삼 년 반의 환난을 겪어야 하는 것입니다. ‘남은 자’ ‘남은 자손’이라고 나와 있는 사람들이 나중에서야 회개하여 대환난에 떨어지게 된 이 미 련한 처녀들인 것입니다(계11:13, 12:17). 그러나 이들은 한 명도 누락됨이 없이 다 최종적인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계20:15. 요3:18)


3. 슬기 있는 다섯 처녀

슬기 있는 처녀란 지혜로운 그리스도인들을 상정한 말입니다. 지혜란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을 말합니다. 가장 슬기로운 성도란 이 세상의 유혹을 물리치고 자기가 현재 당하는 고난과 시련을 견디며 소망 중에 주님의 재림을 바라보는 성도들입니다.

(1) 이 처녀들은 둥도 가지고 기름도 가졌습니다. 등이 신앙의 외형적인 모습이라면 기름은 ‘엘라이운’으로 신앙의 내적인 모습을 의미하는 것으로 성령의 임재를 말합니다.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다”고 하셨습니다.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한” 미련한 처녀들과는 근본적으로 신앙적인 자세가 다른 것입니다. 미련한 처녀들은 기름을 빌려달라고 했지만 슬기로운 처녀들은 신랑이 오시는 그 시간까지 그들의 길을 밝힐 충분한 양의 기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비유는 성령 충만한 성도는 환난을 이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2) 기름을 준비한 처녀들은 주님을 만날 예비를 합니다.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갔다”고 하셨습니다. 성령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그 기름으로 등을 밝힙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빛을 내는 생활은 열매를 맺는 생활을 의미합니다. 영으로 육신의 일을 죽이는 생활, 성령으로 무시로 기도하는 생활, 충성된 생활을 합니다.


결 론 : 예수님은 재림의 시기에 대하여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세”라고 하셨습니다. “악한 종들은 주인이 더디 오리라”고 하여 취하고 먹고 마시는 시기에 오실 것입니다(마24:48-49).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하여 기롱하는 자들이 일어날 그 때에 오십니다(벧후3:3-4). 이 세상이 영적으로 졸며 잠자는 어두운 상태에 이르러 신랑은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 188 ≈ 착하고 충성된 종

(본문 : 마태복음 25 : 14- 23)

14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15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1)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1)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1)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16 다섯 1)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1)달란트를 남기고

17 두 1)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1)달란트를 남겼으되

18 한 1)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19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새

20 다섯 1)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1)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다섯 1)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1)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22 두 1)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두 1)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1)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3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서 론 : 우리들에게 들려주시는 천국의 비유는 굉장한 범위로 확장되어 갑니다. 미련한 처녀와 슬기 있는 처녀의 비유가 주 재림 시, 예비한 성도와 예비치 못한 성도가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교훈이라면 이 달란트의 비유는 주 앞에 설 때 모든 성도가 제각기 그 행한 바에 따라 주님으로부터 받을 상급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고후5:10).


1. 달란트는 무엇을 말하는가?

예수님은 비유에서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세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란 바로 예수님을 가리킨 것이며 타국이란 주님이 부활하신 후 하나님께로 가시는 그의 승천을 의미합니다. 그 종들이란 모든 성도들을 말하며 자기 소유를 맡기셨다는 말은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모든 성도들에게 주시는 각가지 은사를 말합니다.

(1) 이 달란트는 받는 액수가 제각기 다르다고 하셨습니다. 한 사람은 다섯 달란트, 한 사람은 두 달란트, 다른 한 사람은 한 달란트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비유에서 제각기 다른 액수를 받은 일은 그리 중요한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한 달란트와 두 달란트의 차이보다 두 달란트와 다섯 달란트의 차이는 더 크지만 이런 일에 차별을 두지 않고 둘에게 똑같이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는 칭찬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교회의 어떤 직분을 맡든지 그것이 상급을 받는 일에 크고 작은 일이 된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큰 도시 교회에서 수고하는 종이나 농촌 벽지에서 적은 교회를 담임하는 종이나 그가 받을 상급은 차별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2) 이 달란트는 각자의 재능을 따라 그 재능대로 주었다고 하였습니다. 재능이란 말은 ‘두나미스’로 자기가 가지고 있는 권능, 힘 또는 세력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가 날 때부터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천부적인 능력이나 성령께서 주신 은사적인 능력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그 사람의 재능대로, 그 사람에게 주신 은사대로 사명을 주시고 그 사명대로 회계하십니다.

(3)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모두 이 사명이 주어져 있습니다.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고전12:20-21).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요 우리는 그 지체들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는 지체가 그 맡은 사명에 소홀하면 그 몸에 중대한 손상을 끼치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 말씀했습니다(고전12:26-27).


2. 달란트의 회계

자기 종들에게 그 재능대로 달란트를 맡겼던 주인은 반드시 돌아와서 그 종들과 더불어 회계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 오랜 후에 돌아온다고 하셨습니다. 돌아온다는 말씀은 주님의 재림을 뜻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의 재림에 대하여 오랜 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신 종말의 정조가 다 이루어진 후의 일이므로 오랜 후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른다”고 하셨습니다(마24:50).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13). 신랑이 더디 오므로 이 세상은 다 졸며 잠자는 영적 어두움에 들어가지만 그러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고 하는 소리가 반드시 들려 올 것입니다.

(2) 주인이 돌아오면 “저희와 함께 회계”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회계란 결산입니다. 회계는 달란트를 받고 장사한 그들의 모든 결과를 들어낼 것입니다. 이 같은 회계는 예수님의 재림 시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누구든지 육신을 떠나 하나님께 가면 똑같은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히9:27). 사도 바울은 “우리가 심판대 앞에 서리라”고 했습니다(롬14:10).

3. 두 달란트와 다섯 달란트를 받은 종의 경우

이제 세 명의 종은 주인 앞에 서서 제각기 위엄 받은 달란트에 대한 결산 보고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우리 중에 누가 이 보고를 드리지 않아도 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므로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고 말씀했습니다(롬14:12).

(1)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은 이 두 종은 달란트를 받은 즉시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했다고 했습니다. 이들은 주인이 자기들에게 달란트를 준 목적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것으로 장사하여 이익을 남기라는 뜻임을 알고 받은 그 길로 장사를 시작한 것입니다.

그들이 장사를 했다고 한 말은 자기의 재능을 가지고 열심히 주의 일에 임한 자세를 말합니다. 우리가 여기서 알아야 할 일은 주님이 원하시는 하나님의 교회의 핵심적인 일(장사)은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많은 이익을 남기려면 첫째로 많은 사람을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는 일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온갖 은사는 먼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데 사용해야 합니다. 다음에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많은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우리가 열매를 맺는 일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리는 일입니다(요15:8).

(2) 그들은 착하고 충성된 종이란 칭찬을 들었습니다. 착하다는 말은 ‘아가도스’로 선하고 유능하며 친절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이처럼 착하게 일을 했습니다. 충성된 종이란 말은 ‘피스토스’로 믿을만한, 맡길만한 사람을 가리키며 하나님은 이처럼 맡길만한 사람들을 기뻐하시고 그들에게 달란트를 맡기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 같은 칭찬을 받게된 것은 주님의 인정을 받을만한 이익을 남겼기 때문입니다.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눅12:48).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이 두 달란트의 이익을 남겼다면 이런 칭찬을 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고전 4:2).

주인이 이들에게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다”고 하신 말씀은 우리가 엄청나게 생각하는 아무리 큰 것 같은 일도 지극히 작은 일임을 알아야 하며, 한편 아무리 작은 일로 보이는 일이라도 그 일을 잘 감당하면 놀라운 상급을 받는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신 말씀이십니다(고전15:38. 마10:42).


결 론 : 이처럼 충성된 종에게 주시는 상급에 대하여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 지어다”고 하셨습니다. 주인의 즐거움은 하늘의 영광의 자리를 말합니다(계3:21). 이 즐거운 자리는 말할 수 없는 영광의 자리인 “어린양의 혼인자리”를 의미하기도 합니다(계19:6-8). 더 많은 것으로 맡기신다고 하신 말씀은 주님이 우리를 높여 주시는 역사를 말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 같은 종이 되라고 이 말씀을 들려 주셨습니다.


≈ 189 ≈ 악하고 게으른 종

(본문 : 마태복음 25 : 24 - 30)

24 한 1)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25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26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27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하고

28 그에게서 그 한 1)달란트를 빼앗아

열 1)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29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서 론 :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착하고 충성된 종”들이 있는가 하면 “악하고 게으른 종”들도 있습니다. 한 달란트를 받았던 종에게 그 주인이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이 악하고 게으른 종에게 내려진 선고는 너무나도 엄중합니다. 가지고 있는 달란트까지 빼앗기고 슬피 울며 이를 갈아야 하는 바깥 어두운 곳으로 내어쫓긴 것입니다. 그가 이 같은 선고를 받은 것은 한 달란트를 받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주인의 선고에 나타난 것처럼 “악하고 게을렀기 때문”입니다.


1. 한 달란트 받은 종이 한일

한 달란트를 받았던 종은 두 달란트와 다섯 달란트를 받았던 종들과는 매우 대조적인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두 달란트와 다섯 달란트를 받은 종들은 주인에게 달란트를 받은 즉시 그것으로 장사하여 각기 두 달란트와 다섯 달란트의 이익을 남긴 반면에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은 장사할 생각을 하지 않고 그 돈올 땅에 묻어 두었다가 그대로 주인에게 드린 것입니다.

(1)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재능으로 하나님의 일은 전혀 하지 않고 세상적인 생활에만 몰두한 그의 무책임한 생활상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활용하지 않고 감추어 둔 돈은 아무런 이익도 가져올 수 없습니다. 이 같은 그의 행동은 달란트를 맡긴 그 주인의 뜻을 거역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고전12:1-6).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유익하게 하시려고 각자에게 달란트의 은사를 주셨는데 그것을 받고도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했다면 이 사람은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과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2)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은 자기에게도 회계할 때가 반드시 온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들려주신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에서 “네 보던 일을 셈하라”고 하는 주인의 말을 들은 청지기의 당황해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녹16:3-8). 예수님은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저희와 회계한다”고 하셨습니다.


2. 한 달란트 받은 종의 변명

이 종은 자신이 장사를 하지 않고 돈을 땅에 묻어 둔 일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변명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불의한 일에 대하여 입술의 말로 미화시키려 했습니다. 그러나 중심을 살피시는 하나님 앞에 거짓된 변명이 통할 리 없는 것입니다.

(1) 이 종은 주인을 행하여 “당신을 굳은 사람으로 알았다”고 했습니다. 굳다는 말은 ‘스크레로스’로 엄한, 혹독한, 잔인한, 무자비한 사람이란 뜻입니다. 여기서 이 종이 말한 내가 알았다고 하는 말은 ‘에그논’으로 이 말의 뜻은 잘못 배워서 그릇되게 알고 있는 지식을 의미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잘못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2) 이 종은 주인을 향하여 “당신은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사람인줄 알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은 무엇이나 할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에 자신이 하지 않아도 더 좋은 방법으로 하나님이 하실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그의 말은 한낱 구실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가 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하실 걸?이란 생각은 한 달란트를 받았던 악하고 게으른 종의 넋두리입니다. 내가 안 해도 하나님은 물론 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하지 않은 일에 대한 책임은 반드시 나에게 돌리시는 것입니다. 하만의 간계에 의하여 유대인들의 생명이 위기에 놓이게 되었을 때 모르드개는 왕비 에스더에게 이처럼 말했습니다.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대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비 집은 멸망하리라”고 했습니다(에4:14). 헤치지 않은 데서 모은다고 한 말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전혀 손에 대기도 싫어하는 구실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모을 수 있도록 헤쳐 주시는 분이십니다.

(3) 이 종은 하나님을 두려운 분으로 알았다고 했습니다. 그는 실상인즉 두렵게도 여기지 아니했으면서도 이처럼 변명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만홀히 여겼지만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결코 만홀히 여기심을 받지 아니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신다”고 했습니다(갈6:7).


3. 주인의 선언

이 종은 변명처럼 과연 주인의 돈올 염려해서 땅에 묻어 두는 일을 했는가? 정말로 자신의 부족한 것을 두려워하여 전능하신 하나님의 뜻에 맡겼는가? 그의 이런 변명이 거짓된 말이었음이 주인의 책망을 통하여 나타난 것입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올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고 책망했습니다.

(1) 이 종은 원래가 악한 종이었습니다. 악하다는 말의 ‘포네로스’는 무가치한, 못쓰게 된 상태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 종이야말로 하나님이 쓰시기에 무가치한 그릇입니다. “큰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고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고 했습니다(딤후2:20-21). 이 종은 자신을 깨끗하게 하지 못함으로 주인의 쓰시기에 합당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2) 이 종은 게으른 종이었습니다. 게으르다는 ‘오크네로스’는 빈둥 빈둥대는 태도로, 이런 사람은 쉽게 싫증이 나셔 무관심한 상태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게으른 자는 일하기를 싫어하고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놀자”고 하는 습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잠6:10).

(3)주인은 이 종을 무익한 종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과 은혜를 베푸사 구원의 은총을 주신 것은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롬7:4). 이 열매가 없는 성도들은 하나님께 무익한 종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신다”고 하셨습니다(요15:2).

(4) 주인은 이 종이 가지고 있었던 그 한 탈란트를 빼앗으라고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그 모든 것을 빼앗겨 원점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5)주인 은이 악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고 했습니다. 이곳은 그가 받아야 할 최종적인 형벌의 장소입니다.

결 론 : 주님은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기본적인 열매가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환청과 직분과 재능과 은사로 언제나 최선을 다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지니고 있는 모든 소유, 말하자면 재능이나 은사나 재물에 이르기까지 그 주인이 바로 예수님이심을 알고 이것을 가지고 최대한으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이루어 도려야 하는 것입니다.


≈ 190 ≈ 양과 염소의 분별

(본문 : 마태복음 25 : 31 - 46)

인자가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

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42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43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44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46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서 론 : 예수님은 24장에서 주 재림의 정조를 말씀하시고 

25장에서는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그를 영접할 사람과 버림받을 사람들에 대한 경종으로 

여러 가지 비유적인 교훈을 들려 주셨습니다. 

여기서 말씀하신 양과 염소의 분별은 

인류의 최종적인 심판의 모습을 양과 염소로 구분하여 

비유적으로 들려주신 말씀이십니다.


1. 인류의 최종적인 심판

성경에는 인류의 종말 또는 하나님의 최후 심판이란 말이 자주 동장 합니다. 

이 심판은 인류가 최종적으로 천국과 지옥으로 양분되어 갈라지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이 비유의 말씀의 결론으로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고 하신 말씀이 

이것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심판의 자리를 “영광의 보좌”라고 하셨고 

요한계시록에는“크고 흰 보좌”로 나와 있습니다.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라고 하신 말씀입니다(계20:11). 이 보좌에 앉으신 이는 바로 예수님이시며 

이 자리에서 모든 인류가(산 자나 죽은 자나) 

“각 사람이 자기의 행한 행위대로 심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1) 모든 민족이 그 앞에 모인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모든 민족이란 온 인류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는 물론 죽은 자들도 포함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라고 표현했습니다(딤후4:1).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다”고 했습니다(계20:12). 

이 때 이 자리에 모이는 무리들은 

생명의 부활자와 심판의 부활자가 될 것입니다(요5:28-29).


(2) 이 때에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지우더라”고 하신 말씀대로(계20:15) 

염소로 나타난 왼편쪽에 서있는 악한 자들은 

영벌인 불 못에 던지우게 되는 것입니다.


2. 양에 대하여

“그 때 임금이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인자로 나타내신 자기를 임금으로 표현하셨습니다. 

만왕의 왕으로 심판하시는 엄위하신 모습을 가리키신 것입니다. 

왜 천국을 유업으로 받을 사람들은 오른편에 있게 되는 것인가? 

그것은 예수님이 하늘에서 지금 계시는 곳이 오른편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늘로 올라가신 후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고 했습니다(막16:19). 

우리는 언제나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곳에 함께 있게 됨으로 

오른편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계3:21).


(1) 임금이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칭찬해 주신 행실은 

그들의 구원이 그 같은 행위로 말미암은 것임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신 마지막 심판의 모습을 나타내신 이 말씀에서 

가장 해석하기가 어려운 점이 있다면 

그들이 영생에 이르게 된 축복이 

마치 그들의 선행에 있었던 것처럼 여겨지고 있는 점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문제가 별로 문제될 것이 없는 것은 

사람이 그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수는 

절대로 없기 때문입니다(딛3:5. 딤후1:9. 엡2:8-9. 롬11:6. 갈3:2). 

만약 이 원칙이 그 어떤 경우에 무너진다면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헛된 것이며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기독교의 진리가 

일시에 무너져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2)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의 열매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열매는 선행으로 나타납니다(요15:8. 마5:16). 

그리스도인들이 아무런 열매 없이 자기의 구원을 믿는 일은 

진실한 믿음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마음에 영접한 사람은 

그의 생활에 하나님을 향해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성령은 이 같은 열매를 맺히게 하기 위해 우리 중에 계시며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로 

이런 열매를 맺히게 하시려고 징계를 내리시는 것입니다(히12:11).


(3) 오른편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의 생애 중에서 친히 주님을 사랑하는 생활을 해 왔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계명이 무엇이며 

그 계명을 지키는 생활이 어떤 것인가에 대하여 바로 알아야 합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요15:12). 

그리고 주님이 말씀하신 사랑의 실천에 있어서 

가장 주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사랑의 열매가 있습니다.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고 했습니다(요일3:17-19).


우리는 그리스도를 영접했을 때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이 사랑이 언제나 우리의 마음을 지배합니다. 

우리는 이 사랑을 내 형제들에게 나타냄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의 증거를 갖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 사랑을 자기에게 베푸는 사랑으로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3. 염소에 대하여

왼편에 있는 자들이란 버림받은 자들,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무리를 가리킵니다. 

그들이 갈 곳이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1) 여기서 주님이 오른편에 있는 자들과는 대조적으로 말씀하신 것은 

주님이 없는 생활을 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그의 마음속에 예수가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계명이신 사랑을 실천할 수도 없었고 

예수님을 섬기는 일이 무엇인지 조차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는 자는 

그 어떤 경우에도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이미 그들에게는 사망이 선포되어 있습니다(요3:18).


(2) 이들은 또한 처음 믿음을 져 버린 자들입니다. 

그들의 생활은 마치 노아 홍수 때의 사람들과 같으며 

세상일에 완전히 젖어서 처음 가진 믿음을 배신한 것입니다. 

물론 이들이 소유했던 믿음은 

구원에 이르는 온전한 믿음은 아니었습니다(딤전5:12).

*딤전5:12

12 처음 믿음을 저버렸으므로 정죄를 받느니라


(3) 이들은 그리스도를 믿는다고는 했지만 

믿음이 없는 생활을 했습니다. 

복음은 들었지만 들은 그 복음과 믿음이 화합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은 사실에 대하여 

우리에게 이처럼 경종해 주고 있습니다.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 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치 아니함이라”(히4:2).


결 론 : 믿음을 가진 자는 반드시 열매가 있으며 

그 열매가 내 신앙의 유무의 판단의 기준이 된다고 하는 사실을 명심하여 

열매를 맺는 생활에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보이는 가장 올바른 방법은 

행함이 있는 믿음의 생활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고 한 말씀을 명심하여 

열매가 없는 자가 되지 말고 자기의 열매로 자신의 믿음을 더욱 견고히 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약2:18).



마태복음 26장 설교

◆ 밤중소리 03-01 | VIEW : 7,489

≈ 191 ≈ 옥합을 깬 한 여인(본문 : 마태복음 26 : 1 - 13)

≈ 192 ≈ 랍비여 내니이까?(본문 : 마태복음 26 : 14 - 25)

≈ 193 ≈ 새 언약의 피(본문 : 마태복음 26 : 26 - 30)

≈ 194 ≈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본문 : 마태복음 26 : 31 - 35)

≈ 195 ≈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본문 : 마태복음 26 : 36 - 46)

≈ 196 ≈ 검을 쓰는 자는 검으로 망하리라(본문 : 마태복음 26 : 47 - 56)

≈ 197 ≈ 사형언도를 내린 종교재판(본문 : 마태복음 26 : 57 - 68)

≈ 198 ≈ 베드로의 실패와 회개(본문 : 마태복음 26 : 69 - 75)


≈ 191 ≈ 옥합을 깬 한 여인

(본문 : 마태복음 26 : 1 - 13)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다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2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리라 하시더라

3 그 때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가야바라 하는 대제사장의 관정에 모여

4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이려고 의논하되

5 말하기를

민란이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하지 말자 하더라


예수의 머리에 향유를 붓다(막 14:3-9; 요 12:1-8)

6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7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1)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8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9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10 예수께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11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12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

1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서 론 : 우리는 여기서 한 여자라고 밝힌 여인에 의하여 한 가지 아름다운 사건이 벌어진 일을 바라보게 됩니다. 매우 귀한 향유를 가지고 와서 식사하시는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 데서 온 파문입니다. 만약 마태복음에서만 이 사건을 취급했다면 우리는 퍽 아쉬움을 금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고 말씀하신 이 여인에 대하여 사도들 외에는 자신 있게 설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똑같은 사건이 요한복음 12장에 기록됨으로 우리는 이 미지의 여인이 베다니에 살고 있는 마리아란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요 12:1-8).

예수님은 유월절을 당하기 이틀 전에 예수님을 위해 잔치를 베푼 베다니 동네 문둥이 시몬의 집에 초대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양으로 희생되실 분이신 지라 이미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꾸미고 있었으며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이제 이틀을 지나면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인자가 팔리우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 주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여인

시몬의 식사 초대를 받으신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방안에서 식사하시는 중에 계셨습니다. 그 방안에는 마리아의 오라비 나사로도 함께 동석했습니다 (요 12:2). 그리고 마리아의 언니 마르다는 접대하는 일에 분주했습니다. 분위기 가 한참 고조되어 있을 때 바로 그 때였습니다. 한 여자가 아주 귀하고 값진 향유가 든 옥합을 가지고 방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이 여인은 그 향유가 담긴 옥합을 깬 후에 식사하시는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 것입니다. 요한복음에는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요12:3). 머리와 발의 차이는 아마 한 근이나 되는 이 나드 향유를 처음엔 머리에다 붓고 또 나중엔 발에도 부었을 것입니다. 마리아의 안색은 과히 기쁨에 찬 모습은 아닌 듯 보입니다. 자기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겨 드린 일은 슬픔이나 눈물을 연상하게 되는 것입니다.

(1) 이 나드 향유는 그 값이 무려 300 데나리온에 상당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노동자의 하루 임금이 한 데나리온으로 환산된 시기였기 때문에 300 데나리온이란 돈은 그 누가 생각하기에도 엄청나게 많은 돈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이로 인하여 파문이 나게 된 것입니다. 이 여인에겐 더욱이 굉장한 액수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는 가난한 여인으로 이만한 돈은 그의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가난한 중에 주님을 섬기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막12:43).

(2) 이 나드 향유는 결혼하는 신부의 지참물이었습니다. 그 당시 중동 지방에는 처녀들이 결혼할 때 신랑을 위하여 한 평생 자기 몸에 바를 향유로 이 나드향 한 근이 들어 있는 옥합을 준비했었습니다. 집안이 가난한 마리아였지만 장래의 부푼 꿈을 안고 이 귀한 옥합을 장만했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그것을 주님께 바쳤습니다. 자기에게 있는 가장 귀한 것으로 주님을 섬긴 것입니다. 예수님을 귀히 보는 사람은 그가 가지고 있는 가장 귀한 것으로 섬깁니다.


2. 이로 인한 제자들의 견해

값진 나드향을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 일은 그 방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즉각적인 반응을 일으켰습니다. 제자들이 나타낸 반응은 이러했습니다. “제자들이 보고 분하여 가로되 무슨 의사로 이것을 허비하느뇨 이것을 많은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고 했습니다.

(I) 무슨 의사로 이것을 허비하느냐고 꾸짖었습니다, “무슨 의사냐”란 물음에서 제자들은 마리아가 나드향을 부어드린 그 참 뜻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2) 그들은 이것을 왜 허비하느냐고 했습니다. ‘허비’란 말은 쓸 데 없는 곳에 돈올 낭비하는 일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위해 값있게 쓰는 일에 대하여 허비하는 것으로 잘못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주님께 대한 뜨거운 사랑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사랑으로 헌신한 경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세상적인 이해타산으로 주님을 섬겨 왔기 때문에, 참으로 섬기는 마리아의 헌신을 깨닫지 못하고 그것을 허비하는 것으로 오해한 것입니다.

(3) 그들은 이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고 말했습니다. 이 같은 그들의 말은 그들이 정말로 가난한 사람을 사랑해서가 아닙니다. 이런 말을 대표적으로 말한 가룟 유다는 “그는 도적이라 맡은 돈 중에서 홈쳐가기 훌 위함이라”고 밝혀 주고 있습니다(요12:6).


3. 예수님이 취하신 태도

우리의 관심은 이런 상황에서 과연 예수님은 어떤 태도를 취하셨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의 결론은 예수님의 말씀으로 최종 판결이 나오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행한 일과 이 여인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을 바라보시고 예수님은 몇 가지로 이 문제에 대한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1)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인을 괴롭게 하느냐고 하셨습니다. 마리아는 분명히 주님께 가장 중요한 헌신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같은 일은 주님이 기뻐하시고 인정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이 일을 나무란 나머지 그 여인을 괴롭게 한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이 말씀을 통하여 알아야 할 일은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을 괴롭히면 주님의 책망을 듣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2)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여인이 한 일은 책망을 듣거나 괴롭힘을 당해야 할 일이 아니라 주님께 좋은 일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 주님이 내게 좋은 일을 했다고 하신 그 좋은 일이란 다른 말씀이 아니라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위하여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일이야 말로 예수께 좋은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마리아의 이 같은 일은 예수님이 죽으시기 전에 그에게 최종적으로 헌신한 일로, 말하자면 예수님의 장례를 위한 헌신이었던 것입니다. 마리아는 제자들조차 알지 못하고 있었던 주님의 고난을 알고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늘 주님의 곁에서 말씀을 가까이 해 온 여자였습니다. 그 언니 마르다의 신앙도 대단했습니다. 이 여인은 주님 앞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고 고백했습니다(요11:27).

이제 얼마후면 주님께서 고난올 당하실 줄로 알고 마지막으로 자신이 가진 가장 값진 향유로 주님의 머리에 부어드리며 머리를 풀어 씻어드리며 눈물을 흘렸던 슬픔의 봉사였던 것입니다.

(3)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최대의 칭찬과 상급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을 위한 일에는 아무리 적은 일이라도 주님의 칭찬이 따르고 상급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결 론 : 마리아의 옥합은 주님의 장례 전에 깬 것으로 인하여 참 가치가 나타났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때를 놓쳐서는 안됩니다. 우리 주님께 헌신하는 일에는 가장 귀하고 값진 것으로 해야 합니다. 사랑은 자신의 것을 드리고도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 192 ≈ 랍비여 내니이까?

(본문 : 마태복음 26 : 14 - 25)

14 그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15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 을 달아 주거늘

* 슥 11:12

12 내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거든 내 품삯을 내게 주고

그렇지 아니하거든 그만두라

그들이 곧 은 삼십 개를 달아서

내 품삯을 삼은지라

16 그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마지막 만찬

(막 14:12-26; 눅 22:7-23; 요 13:21-30; 고전 11:23-25)

17 무교절의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유월절 음식 잡수실 것을

우리가 어디서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18 이르시되

성안 아무에게 가서 이르되

선생님 말씀이 내 때가 가까이 왔으니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네 집에서 지키겠다 하시더라 하라 하시니

19 제자들이 예수께서 시키신 대로 하여

유월절을 준비하였더라

20 저물 때에

예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1)앉으셨더니

21 그들이 먹을 때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하시니

22 그들이 몹시 근심하여 각각 여짜오되

주여 나는 아니지요

23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24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25 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이르되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하시니라


서 론 : 우리는 오늘 말씀에서 인류가 있어 온 이래 가장 불행하고 비참한 인간의 모습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의 모습이 바로 그 모습입니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다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는 주님의 깊은 탄식을 들은 사람입니다. 가룟 유다는 주님을 거짓 사랑한 한 표본 인물입니다. 가룟 유다는 주님을 배신한자의 거울입니다. 가룟 유다는 진실한 믿음이 없이 예수님을 따르고 믿는 거짓된 믿음의 본을 보여 준 사람입니다.


1. 유월절에 지킨 최후의 만찬

베다니 시몬의 집에서 있었던 옥합을 깬 사건은 가룟 유다의 마음속에 스승에 대한 반발심을 강하게 가지게 했습니다.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 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나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요12:5)고 한 유다의 힐책에 예수님은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히느냐”는 책망을 주셨을 때, 무안을 당하자 그의 내심에는 예수님을 어떻게 제사장들에게 넘겨 줄 것인가에 대하여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는 지체하지 않고 즉각 실천에 옮겼습니다. 유다는 그 틈에서 이탈하여 대제사장에게 찾아갔습니다. 유대인의 무리들은 예수님의 제자들로부터 이 같은 제의를 받았습니다.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스승을 원수들에게 넘겨주는 일에 서로 마주 앉아 흥정을 한 것입니다. 그때 마침 그들은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가야바라 하는 대제사장의 아문에 모여 예수를 궤계로 잡아죽이려고 의논”하고 있을 그 때였습니다(2,3).

가룟 유다를 맞은 그들은 이 놀라운 사실에 쾌재를 불렀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 자리에서 은 삼십을 달아 유다의 손에 꽉 쥐여 주었습니다. 은 삼십이 얼마 정도의 돈인가에 대하여 알려진 바가 없지만 가룟 유다에게는 흡족한 액수였을 것입니다. 이제 유다와 대제사장간의 예수를 사고 파는 계약이 이루어졌습니다. 유다가 할 일은 기회를 엿보아 예수를 그들의 손에 넘겨주는 일이요 그들은 유다로부터 예수를 넘겨받아 재판을 하여 죽이는 일입니다. 유다는 다시 제자들과 함께 어울렸습니다. 지금부터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함께 한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손에 넘겨주기 위한 기회를 엿보기 위해 한 무리가 된 것입니다.

(I) 무교절 첫날에 예수님과 제자들과의 최후의 만찬이 준비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성안에 있는 한 집을 지적하시면서 제자들로 그 집에 찾아가서 유월절 잔치를 준비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저물 때에 예수님과 열 두 제자는 상에 둘러앉았습니다. 이때 가룟 유다는 속히 예수님을 잡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왔으면 하는 생각에 마음이 초조했을 것입니다.

(2) 이때에 참으로 놀랍게도 예수님의 입에서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는 말씀이 나왔습니다. 이 말씀은 순식간에 그 자리를 숙연하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이 말씀에는 가룟 유다가 하는 일에 대하여 통분하시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러면서도 그의 운명에 대하여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을 가지신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를 모르는 그의 완악함에 대하여 분노하시는 면도 찾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은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은 화가 있으리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실 일은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같은 계획이 아니시라면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실 아무런 이유도 없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계획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제 이틀이 지나면 주님은 기록된 대로 속죄제물이 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실 것입니다. 물론 이런 하나님의 계획에는 그 일을 이루심에 쓰임 받는 그릇이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이 일에 자기 스승을 대제사장의 무리들에게 팔아먹는 인물로 등장합니다. 그러나 그가 인류구원의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는 일에 있어서 예수님을 파는 일을 담당한다고 해서 그 책임이 그에게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은 화가 있으리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 유다가 배도자가 된 이유

나를 팔자가 너희 중에 있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심히 근심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가 누구인가를 찾아내려는 듯, 자기는 결코 자기 선생님을 팔아먹는 배신자가 아님을 여러 사람 앞에서 확인시킬 필요가 있기 때문에 차례로 돌아가면서 주님을 향하여 “주여 내니이까”하며 물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고 하셨습니다.

(1) 유다는 예수님께 소망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그를 배신한 것입니다. 그는 인간적인 두뇌가 남달리 명석했습니다. 스승이 죽게 될 것을 누구보다도 먼저 눈치 챘습니다. 이제 예수님께 더 소망을 둘 것이 무엇이겠는가? 땅의 것만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의 육신의 소망이 살아졌을 때 가룟 유다가 되어 버립니다.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골3:2).

(2) 유다는 원래가 탐심으로 주님을 섬겨 온 인물이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이처럼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는 도적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요12:6). 유다는 애초부터 도적이었고 돈을 사랑하는 탐심 많은 인간이었습니다. 그가 돈올 사랑한 일은 자기 스승을 돈으로 팔아먹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입니다(딤전6:10).

(3) 유다는 인간성 그 자체가 간교하고 뻔뻔스러운 자였습니다. 한 사람씩 돌아가며 “주여 내니이까”하며 묻는 순서가 이제 유다에게 까지 왔습니다. 그는 “랍비여 내니이까”하며 물었습니다. 이 물음은 유다의 인간성의 간교함과 뻔뻔스러움을 잘 나타낸 말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체포하려는 악당들의 길을 인도하여 예수님께 데려왔을 때에도 “선생님이여 안녕하시옵니까”라고 인사했습니다. 그의 이 같은 후안무치한 행동은 거짓의 아비인 마귀의 성품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4) 유다는 회개가 없는 자였습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이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지 결코 죄악 가운데서 멸망 받는 것을 원치 아니하십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에게 여러 가지로 자신을 깨달아 회개하여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라고 하셨는데도 그는 마음을 강퍅하게 했습니다(요13:26). 예수님은 “네가 말하였도다”고 그에게 직선적으로 말씀하셨는데도 그는 그 마음을 더욱 굳혔습니다(마26:25). 예수님은 그에게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고 하셨는데도 끝내 뉘우치기를 거절했습니다(요 13:27).


결 론 : 가룟 유다는 돈에 눈이 먼 사람이요, 땅의 것으로 소망을 삼은 사람이요, , 탐심을 위해서는 비정의 사나이였지만 결국 돈도 써 보지 못하고 세상의 소망도 이루지 못하고 비참하게 멸망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유다의 길을 걸으면 안됩니다.


≈ 193 ≈ 새 언약의 피

(본문 : 마태복음 26 : 26 - 30)

26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27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29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30 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 산으로 나아가니라


서 론 :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 양으로 세상에 오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가 속죄 양으로 죽으실 시기도 유월절이 가장 적합한 시기입니다. 하나님은 속죄의 언약을 피로 세우셨습니다. 구약 율법 아래서의 속죄 언약은 짐승의 피로써 세우셨지만 신약에서 하나님은 그의 아들로 만민의 죄를 속죄하는 새 언약의 피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어 이 새 언약의 피를 흘리셔야 하셨기에 십자가에 달리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 이 같은 속죄 양으로 고난을 받게 되셨습니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이 지키는 유월절 행사에서 자신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떡과 포도주를 나누어 마시게 하신 일은 새 언약의 참여자들에게 중대한 의의를 갖는 것입니다.


1. 떡을 떼신 예수님

유월절 행사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기 집안 식구들끼리 모여 양을 잡아 그 고기를 먹고 그 한 주간은 누룩이 없는 떡 즉 무교병을 먹습니다.

(1) 예수님은 먼저 떡을 가지고 축복하셨습니다. 이 떡은 물론 유월절에 먹는 무교병이었지만 이 떡을 먹게 하신 참 의의는 우리를 위하여 대속의 제물이 되실 예수님의 몸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떡에 축복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찬 시 이 떡을 먹는 사람은 주님의 축복을 받습니다. 축복한다는 ‘율로게오’란 말은 찬양한다, 축복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이 먹을 때 주님이 주신 축복에 감사하며 그를 찬양해야 할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이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유월절에 먹는 무교병을 가지사 그것을 내 몸이니라 하셨습니다. 주님의 몸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하여 찢기신 그의 몸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몸은 누룩 없는 떡이십니다. 누룩이란 인간의 죄를 상징합니다. 죄인들인 인간은 그 누구도 누룩 없는 떡을 줄 수 없습니다. 이 떡이야말로 영생의 만나요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입니다. 예수님만이 이 누룩 없는 떡으로 그의 몸을 우리에게 생명의 떡으로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누룩 없는 먹을 먹고 참 생명을 얻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묵은 누룩, 인간에게 죄와 사망을 가져다주는 묵은 괴악한 누룩을 버리고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이 되어야 합니다.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회생이 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먹으로 하자”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고전5:7-8).


2. 포도주를 주신 예수님

예수님은 먹을 떼게 하신 후에 이번에는 잔에 포도주를 주시면서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신 데 특히 인간의 죄를 피로 사죄할 것을 언약하셨습니다.

(1) 아담과의 언약에도 피로써 이루셨음을 알게 됩니다. 타락한 아담은 죄 사함을 위한 제사를 하나님께 드려야 했습니다. 아벨이 믿음으로 드린 제사가 이 제사입니다.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는데 하나님이 아벨의 예물에 대하여 증거 하셨다고 했습니다(히11:4).

(2)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셨을 때에도 피로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율법을 범한 자는 정죄함을 받아 멸망합니다. 그러나 사랑이신 하나님은 그 율법을 범한 자를 용서해 주시는 언약을 짐승의 피로 세우신 것입니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레17:11). 신약에 와서도 이를 증거하기를 “율법을 쫓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히9:22).

(3) 속죄의 언약은 그리스도로 완성되었습니다. 구약의 피 흘리는 모든 속죄 제사는 인간의 속죄를 위하여 대신 흘리실 그리스도의 피 흘림에 대한 하나의 모형이요 상징이었습니다.

① 율법의 피는 언약의 피의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놀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히10:1).

② 예수님은 자기 스스로 속죄 양이 되심으로 언약의 피를 흘리셨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고 했습니다(히10:12).

③ 예수님의 피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히7:22).

④ 이제 이 새 언약의 피를 더럽히는 자들에 대한 속죄는 다시는 없다고 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고 말씀했습니다(히10:29).

(4) 그리스도로 완성하신 새 언약은 그를 믿는 자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것으로 그를 믿는 모든 자에게 미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5) 예수님은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이 잔을 저희에게 주시며 너희는 이것을 마시라고 하셨습니다. 잔이란 곧 포도주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포도주를 자기의 피로 상징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참 포도나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5:1). 자신을 참 포도나무로 비유하신 예수님께서 그 나무에서 짜낸 포도주를 그의 피로 상징하신 일은 매우 뜻 깊은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멜기세댁은 예수님의 대제사장 직의 근원을 이루고 있는 미지의 인물인데 그가 아브라함에게 축복해 줄 때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다고 했습니다(창14:18. 히5:10). 여기에는 영적인 다분한 의미가 주어져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것을 주님이 오실 때까지 행하라고 하신 일은 이로 인하여 우리에게 여러 가지 영적인 유익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받는 떡과 잔은 주님이 축복하시고 사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성찬에 참여함은 이 같은 주님의 축복의 잔에 동참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축복하는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때는 먹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에 아니냐”고 했습니다(고전10:16). 십자가에서 그의 몸이 찢기시고 그의 피가 흘리신 바 된 것이 우리가 맥을 떼고 잔을 마시는 것처럼 분명하여 이를 행하므로 내게 이루어진 구원의 사실을 영적으로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고난을 상기시키므로 그의 남은 고난을 우리의 몸에 채우는 일에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결 론 : 우리는 주님의 다시 오심을 믿고 그를 기다리고 있는 그의 신부들입니다. 우리는 그가 오실 때까지 주님이 축복으로 주시는 이 떡과 잔을 들면서 소망 중에 확신을 가지고 주님의 재림을 기다려야 합니다. 유월절은 구약적 언약의 상징으로 육적 이스라엘이 지켜온 명절입니다. 그러나 주의 성찬은 신약적 언약의 성취로 우리는 이를 행할 때마다 감사와 기쁨으로 그의 구원을 영원히 찬양해야 합니다.


≈ 194 ≈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본문 : 마태복음 26 : 31 - 35)

베드로가 부인할 것을 예언하시다

(막 14:27-31; 눅 22:31-34; 요 13:36-38)

31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2)버리리라

기록된 바

ㄱ)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 스가랴 13:7

7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 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

 

32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33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주를 3)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4)버리지 않겠나이다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35 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시다

(막 14:32-42; 눅 22:39-46)

36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37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서 론 :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이 끝난 후 찬미하고 제자들을 데리고 감람산으로 오르셨습니다. 이때에 주님은 다시 제자들에게 충격적인 선언을 하셨습니다. “오늘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몇 시간 전에 만찬석에서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제자들은 심히 근심하면서 제각기 “내니이까”하며 물었습니다.

이제 가룟 유다는 그들 가운데서 물러갔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 범위를 훨씬 넓혀서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의 본심에도 없는 이 말씀은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먼저 베드로가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고 맹세하고 다른 제자들도 베드로와 같이 주님과 함께 죽을 것을 맹세했습니다.


1.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예수님의 말씀은 그 모든 말씀이 다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 그의 말씀은 창조주의 말씀이요 인류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는 주인공의 예언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고 하신 주님의 예언은 제자들의 안타까운 맹세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그 말씀대로 이루어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1) 예수님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셨습니다. 가룟 유다의 배신도 예수님은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틀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고 말씀하심으로 이일이 이미 예언된 사실임을 밝히셨습니다(요13:18. 시41:9). 그리고 모든 제자들이 주님을 버릴 것이라고 하신 말씀도 바로 스가랴서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을 근거로 하신 것입니다(슥13:7). 예언의 말씀은 진실하신 하나님의 말씀이시기 때문에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믿으셨기 때문에 그 말씀에 의지하여 제자들이 자기를 버리실 일에 대하여 알고 계신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자신이 당하실 모든 일에 대하여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며 구약의 선지자 속에 예언의 영으로 역사하신 분이십니다(벧전1:11). 그러므로 주님은 모든 일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스가랴가 예언한 말씀에 따라 제자들에게 이 같은 말씀을 하실 수 있었습니다.

(3) 예수님은 바로 우리 인생의 걸음을 정하신 분이십니다. 주님이 베드로에게 네가 닭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말씀하셨다면 베드로의 인생은 그대로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주장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의 입에서 나오시는 말씀이 헛된 곳으로 갈 수는 없습니다(히1:3. 사57:19).

(4) 그러면 예수님은 왜 이처럼 작정하신 것인가? 첫째로 예수님에게는 매우 괴로우신 일이지만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자 하심에서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모든 예언은 그대로 이루어져야 그가 바로 그리스도이심이 증거 되기 때문에 주님은 그에게 예언된 모든 쓴 잔을 다 마셨던 것입니다. 이 같은 일에 대하여 예수님은 이처럼 말씀하신 일이 있었습니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마26: 53,54).

둘째로 주님은 그들을 데려가시는 데 목적이 있지 아니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다른 사명이 주어졌습니다.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 중에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고 하신 것입니다(요21:18. 요17:15). 세 번째의 이유는 그들로 세상에 남아서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는데 목적이 있었던 것입니다(요17:18. 행1:8).


2. 베드로의 호언장담

(1) 베드로는 자신의 마음의 부패성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탄식을 듣게 되면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약하고 내가 원하는 일을 못하고 육신의 일에 사로잡혀 범죄 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탄식했던 것입니다(롬7:21-24). 예레미야 선지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고 했습니다(렘17:9). 베드로는 이 같은 자기 마음의 더러움을 모르고 자기를 너무 과신한 나머지 큰 실수를 저지른 것입니다.

(2) 베드로는 영적인 교만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베드로의 말은 이러했습니다.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을 자기 바로 옆에 두고 “다 버릴지라도”라고 하는 말을 거침없이 사용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기라고 하신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얼마나 교만한 말인가?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도 자신의 신앙의 우월성을 나타낸 것입니다. 물론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교만한자를 낮추신다고 하신 말씀대로 그의 그 방자한 교만이 꺾인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3) 베드로는 독단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의 결론적인 대답은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고 하는 말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믿음의 분량을 몰랐습니다. 감정적인 기분에 사로잡힌 상태에서 앞뒤를 가리지 않고 이런 말을 한 것입니다.

(4) 베드로의 더 큰 잘못은 예수님의 말씀보다 자신을 더 믿었다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향하여 “오늘 밤 닮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하신 말씀 앞에 그는 마땅히 엎드려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고 하는 지난날의 자신의 겸손과 무력함을 보여 주어야 했습니다(눅5:8). 그런데도 베드로는 그 주님의 말씀에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주장을 그 말씀보다 앞세우고 권위를 두었습니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우리의 실수와 잘못은 늘 이 베드로와 같은 마음가짐에서 오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따라가야 하며 말씀 앞에 녹아나야 하며 말씀 안에 자신을 굴복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5) 다른 모든 제자들도 베드로처럼 맹세했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이와 같이 말 하니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을 무시하고 자신만을 내 세우는 베드로가 마땅치 아니했습니다. 아마 속으로 분히 여겼을 것입니다. 그들은 제각기 나서며 “나도 베드로처럼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고 대답한 것입니다.


결 론 : 이들은 주님의 하신 말씀대로 주님이 붙잡히는 현장에서 다 도망쳐 버렸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그 날 밤 닭 울기 전에 주님의 이름을 세 번이나 부인해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버림받지는 아니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고 하신 말씀대로 이루신 것입니다(요 17:12). 예수님은 제자들의 배신을 아시고도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마 26:29). 베드로에게는 이 실패가 그의 성공의 관건이 되었습니다. 그 후 그는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을 가졌으며 그의 평생을 통하여 다시는 주님을 부인하는 잘못을 저지르지 아니했습니다. 우리도 한 번 실패했다고 낙심하여 좌절하면 안됩니다.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난다”고 말씀하셨습니다(잠24:16). 하나님께서 일으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 195 ≈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본문 : 마태복음 26 : 36 - 46)

36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37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40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42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43 다시 오사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피곤함일러라

44 또 그들을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45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이 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46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서 론 : 예수님은 언제나 앞에 다가올 큰 일을 두시고 기도하셨습니다. 공생애에 들어가실 때에도 광야에서 사십 일을 금식 기도 하셨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군중들로부터 왕으로 모시고자 하셨을 때도 밤이 맞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을 택하실 때에도 밤 새워 기도 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앞에 두신 예수님은 그 때도 산에 오르사 밤 새워 기도하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기가 당하는 환난의 때에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은 참으로 좋은 일입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시50:15).


1. 겟세마네에 올라가신 예수님

이제 주님이 십자가를 지실 시간이 얼마 남지 아니하셨습니다. 이처럼 촉박해 오는 고난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시는 예수님은 그의 마음에 말할 수 없는 고민과 슬픔을 안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 때 고민하고 슬퍼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같은 마음의 고민을 아버지께 맡기고 새 힘을 얻어 십자가에서 승리하시기 위해 겟세마네 동산으로 오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기도의 일군이 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함께 기도할 사명자를 뽑았습니다. 여러 명의 제자 중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기도의 협력자로 인정하시고 그들을 데리시고 기도하시는 곳으로 오르셨습니다.

예수님은 고민하고 슬퍼하셨다고 했습니다. 주님의 이런 심정은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라는 말씀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이것은 그의 다가온 죽음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고민이란 말은 ‘루페’로 이 말의 뜻은 괴로움, 고통을 말합니다. 주님은 괴로움으로 그 마음이 착잡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이런 괴로움과 슬픔은 어디서 온 것인가? 잠시 후 유다가 길을 인도해 올 대제사장의 무리들이 밀어닥칠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제자들이 결국은 다 스승을 버리고 도망할 것을 아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주님은 그의 재판 과정에서 여러 가지 견디기 어려운 수모를 당하실 일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를 외치셔야 할 그의 영 육간의 고통을 이때부터 몸으로 체험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2. 주님의 기도하시는 모습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신 주님의 기도는 처절하신 기도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이처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5:7).

(1) 주님은 그 얼굴을 땅에 대시고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은 그의 피곤하심과 말할 수 없는 비애를 말해 줍니다. 주님의 비하는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내려오신 것 뿐 아니라 그 머리를 땅에까지 대실 정도로 낮추셨습니다. 주님은 참으로 그의 얼굴을 땅에 가리우실 정도로 큰 비애를 안고 계셨던 것입니다.

(2) 주님은 엎드려 기도하셨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하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무릎을 꿇으신 채로 엎드리신 것입니다. 이것은 아버지 앞에서의 그의 겸손하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3. 주님의 기도의 내용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고 하시기까지 하나님의 버리심을 당하는 고통을 받으셔야 했습니다. 주님은 모든 죄인의 죄를 대신 젊어지시고 그 죄 값에 대한 심판을 받으셔야 하셨으므로 재판에서 사형 언도를 받으신 이후의 그의 모든 괴로움과 고통은 하나님의 위로나 도우심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주님의 고통은 바로 이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고통의 잔에 대하여 그토록 애절한 호소로 아뢴 것입니다.

(1) 예수님은 먼저 당신이 지금 당하고 계시는 그 고통을 아뢰었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 드린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이 기도를 주님이 십자가를 피하시려는 뜻에서 하셨다고 말하면 안됩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바로 그 고통의 잔을 마시기 위해서였음을 아셨으며 그 잔을 마시지 않고는 인류의 구원이 이루어질 수 없음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고 하신 말씀에서 예수님의 심정을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요12:27).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 말할 수 없는 고통과 마음의 갈등에서 그의 인간적인 심정을 이처럼 표현하신 데 불과한 것입니다.

(2)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기도를 곧 수정하셨습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기도는 주님이 자신의 그 어려운 시련 속에서도 먼저 아버지의 뜻을 찾으셨음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아무리 어려운 고난이나 환난 중에라도 아버지의 뜻을 생각하고 찾는 지혜와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은 밤이 새도록 이같이 동일한 기도를 세 번씩이나 드렸습니다. 이런 기도의 반복에서 주님이 드실 이 쓰디쓴 잔의 괴로움을 우리는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마음에 움직일 수 없는 확신을 얻기까지 반복적으로 기도하신 것입니다.

(4) 주님을 따라 함께 간 세 명의 제자들까지도 주님이 기도하실 시간에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눈이 심히 피곤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고 나무라셨습니다. 그리고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하시고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고 탄식하셨습니다.

(5) 예수님은 기도를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오사 “이제는 자고 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뜻이 여러 가지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자도 된다는 뜻이냐? 그러나 주님은 곧 얼어나라 함께 가자고 하심으로 잠을 말씀하신 것이 아님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면 제자들을 향하여 빈정대신 말씀이시냐? 주님은 가장 신실하시고 긍휼히 많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면 이제는 올 것이 왔으니 이 문제에 대하여 기도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냐? 그렇습니다. 주님은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결 론 : 예수님은 이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에서 어떤 응답을 받았다던가 어떤 음성을 들었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너무나도 명백한 사실에 대하여 다만 침묵하시고 예수님 자신이 결단을 내리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기도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아버지의 뜻을 더욱 굳게 확신하셨습니다. 이 기도로 더욱 큰 성령의 능력을 받으셨습니다. 주님은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에까지 이 기도로 계속 행진하셨습니다.


≈ 196 ≈ 검을 쓰는 자는 검으로 망하리라

(본문 : 마태복음 26 : 47 - 56)

잡히시다(막 14:43-50; 눅 22:47-53; 요 18:3-12)

47 말씀하실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칼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48 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이르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한지라

49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50 예수께서 이르시되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이에 그들이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

51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의 하나가 손을 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52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53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54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

55 그 때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칼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56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서 론 : 예수님은 그의 때가 오셨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다”고 하셨습니다(요12:27). 기도하신 자리에서 일어나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함께 가실 새 가룟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를 데리고 예수님을 향하여 가까이 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임전 태세를 갖춘 제자들은 예수님의 명령이 내리시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다가 그 중 한 제자(베드로)가 대제사장의 종(말고)을 쳐 그 귀를 떨어뜨렸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참으로 온 인류의 역사상 모든 독재자들과 칼로 사람들을 지배하는 자들에게 큰 경종을 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는 말씀이십니다.


1. 유다의 간교한 인사

가룟 유다가 길을 인도한 무리들은 큰 무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가룟 유다의 조언에 의하여 완벽한 작전을 썼습니다. 그들은 제자들의 결사적인 대항을 예상했습니다. 유다는 제자들이 자기 선생을 위하여 대담하게 싸울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는 말씀을 하셨을 때 제자들은 “주여 내니이까”고 물으면서 어찌 그런 일이 있을 것인가? 하는 결연한 태도를 보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혹시 그의 주변에 주님을 따르고 있는 무리들이 얼마간 있을 것으로 예견했기 때문에 큰 무리들을 동원했고 그들의 손에는 검과 몽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선생과 입을 맞추는 것으로 군호를 썼습니다. 입을 맞추는 인사는 서구적인 인사법이지만 이스라엘 사람들도 이런 인사법을 오래 전부터 관습적으로 사용해왔습니다. 이 인사는 친하고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이에 있었던 인사였는데 가룟 유다는 자기 선생을 잡으라는 군호로 이 인사법을 쓴 것입니다.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는 그리 스도인들은 바로 이 가룟 유다의 인사법으로 예수님을 대하는 사람들입니다. 입으로는 주님을 부르지만 그의 마음은 세상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면서도 주님의 이름을 잘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은 가룟 유다의 입술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2. 친구여 !

가룟 유다의 간교하고 음흉스런 인사를 받은 예수님은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다에게 친구라는 말로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이 친구라고 하신 말씀에는 넘치는 사랑과 신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언제나 친구란 표현으로 불렀습니다.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12:4). 나사로가 죽었을 때에도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고 하셨습니다(요11:11).

예수님의 이 말씀 중에는 유다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진실이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유다가 사단의 종으로 일하고 있는 일에 대하여 불쌍히 보셨습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원수의 무리들의 손에 넘겨주는 자가 된 일에 대하여, 그가 하필이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좋지 않은 그릇이 된 일에 대하여 그의 인생을 슬퍼하셨습니다.

유다에게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서 주님은 유다를 사랑하시는 나머지 그가 행하려는 그의 행위를 다시 한 번 돌이켜 바라보게 하심으로 그를 회개시키시려는 뜻에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아마 이때에 유다가 예수님 앞에서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마 27:4)고 가슴을 치며 통회했었다면 예수님은 비록 그들의 손에 잡혀가셨을지라도 유다의 그 무서운 죄는 사유하심을 받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주님으로부터 배울 점이 또 하나 있습니다. 아무리 무서운 죄를 범하는 죄인이 있다고 해도, 그리고 그가 정말로 하나님의 정죄하심을 받아 멸망 받을 사람이라 해도 우리는 이 같은 주님의 심정으로 끝까지 회개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불쌍히 보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3. 베드로의 검

이곳에는 “예수와 함께 있는 자 중에 하나”라고 나와 있지만 요한복음에는 그가 베드로임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아마 마태가 이 글을 쓸 당시에는 베드로의 이름을 밝힐 시기에 이르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가 주님의 신상에 위험이 올 때 사용하려고 마련한 것일는지 모릅니다. 베드로는 이제 자기 선생님의 위기가 온 줄로 알았습니다. 그리고 아마 자기가 예수님께 맹세한 일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고 말했을 때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하선 주님의 말씀올 생각하면서 그들과 생명을 다하여 싸울 임전 태세를 갖춘 것입니다.

베드로는 칼을 뽑았습니다. 그는 그 칼을 휘둘렀습니다. 그런 것이 그만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에 맞아 짤라져 떨어진 것입니다. 베드로의 생각에는 이제 예수님도 자기편이 되어 이들 무리들과 싸우실 것으로 알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어려울 때 나타내신 권능이라든가 기적을 늘 보아왔기 때문에 아무리 큰 무리가 검과 몽치를 들과 왔어도 문제가 없을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칼을 휘든 그의 만용은 바로 여기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베드로를 향하여 꾸짖으시는 투로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때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자신들의 신변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예견했습니다. 그들의 머리에는 이제 “오늘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머물 곳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도망갈 기회만을 엿보다가 자기 선생을 그

(1) 하나님의 뜻은 검으로 이루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검으로 죄인의 구원을 이룰 수 있다면 예수님은 그 당시 자기를 거역하는 모든 사람들을 멸절시키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고 말씀하심으로 베드로의 검을 도로 꽂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2) 복음의 유일한 무기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영적인 검이 필요합니다. 이 검이야말로 사람의 심혼골수를 쪼개어 회개시키며 영생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검이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엡6:17).

(3) 이 말씀은 또한 검을 쓰는 자는 그 검으로 망할 것이라고 하는 만고 불변의 하나님의 법칙을 천명하신 말씀이십니다. 인간의 역사가 있어온 이래 아직까지 검을 쓴 자들이 그 검으로 망하지 않은 경우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이 같은 주님의 말씀은 검과 몽치를 가지고 잡으러 온 그 무리들이 받을 결과에 대한 경종도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 말씀대로 로마군의 검에 의하여 멸망을 받았습니다.


결 론 : 예수님께서는 잠잠하셨습니다. 그들의 검과 몽치에 대항치 않으시고 순순히 그들의 손에 잡히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당장에라도 아버지께 구하여 열 두 영이 더 되는 천사를 보내어 이들을 하늘의 불로 소멸시키거나 죽일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라는 말씀으로 아버지께서 주시는 쓴잔을 드시기로 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도 그가 받으신 상급을 받게 하시기 위해 우리가 져야 할 얼마간의 주님의 고난을 남겨 놓으셨다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이 일을 이처럼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 우리가 이 고난에 참여함은 놀라운 축복입니다(마5:11-12. 롬 8:17-18).


≈ 197 ≈ 사형언도를 내린 종교재판

(본문 : 마태복음 26 : 57 - 68)

공회 앞에 서시다

(막 14:53-65; 눅 22:54-55, 63-71; 요 18:13-14, 19-24)

57 예수를 잡은 자들이 그를 끌고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가니 

거기 서기관과 장로들이 모여 있더라

58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가서 

그 결말을 보려고 안에 들어가 하인들과 함께 앉아 있더라

59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 증거를 찾으매

60 거짓 증인이 많이 왔으나 얻지 못하더니 

후에 두 사람이 와서

61 이르되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 동안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 하니

62 대제사장이 일어서서 예수께 묻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이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 하되

63 예수께서 침묵하시거늘 대제사장이 이르되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64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65 이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그가 신성모독 하는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이 신성모독 하는 말을 들었도다

66 너희 생각은 어떠하냐 

대답하여 이르되 

그는 사형에 해당하니라 하고

67 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어떤 사람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68 이르되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더라


서 론 :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을 잡으려는 큰 무리들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가까이 올 때 그들을 대항하려고 베드로는 칼까지 뽑아 대제사장의 종을 쳤습니다. 그러나 의외로 예수님의 책망을 들었을 뿐 아니라 예수님이 스스로 그들의 손에 잡혀가시는 모습을 바라보고는 자기들의 신상에 위기가 온 줄로 직감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그 곳에 둔 채 다 도망쳤습니다. 예수념은 그들에게 끌려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갔습니다. 예수님은 그 곳에서 참람하다는 정죄와 함께 사형 언도를 받은 것입니다. 이제 빌라도 총독의 재가만 얻으면 그들이 그렇게도 바라던 예수님께 대한 살인 음모가 성취되는 것입니다.


1. 예수님이 받으신 재판

예수님은 그들에게 잡히신 그 시부터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하루 동안에 여기 저기 왕래하시면서 무려 다섯 차례의 심문과 재판을 받으신 것입니다.

(1) 예수님은 먼저 안나스의 집에 끌려 가셨습니다. 마태복음에는 가야바에게로 갔다고 했지만 가야바에게로 가기 전에 안나스에게 간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요18:12). 안나스는 대제사장 가야바의 장인이자 증경 대제사장으로써 실질적인 권세를 가지고 산혜드린 공회를 움직여 온 실력자였습니다.

(2) 예수님은 다음에 가야바에게로 끌려 가셨습니다. 이 사람은 그 해의 대제사장이라고 했습니다. 이 곳에 서기관들과 백성들의 장로들이 모여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 곳에서 예수님을 정죄할 종교 재판의 준비가 다 갖추어진 것입니다.

(3) 예수님은 이제는 최종적인 확인을 위해 빌라도 총독 앞에 서시게 되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에서 사형 언도를 내렸어도 그 집행에 있어서는 총독의 승인이 필요했기 때문에 빌라도 앞으로 끌려 간 것입니다.

(4) 예수님은 헤롯왕 앞에 스셨습니다. 빌라도는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갈릴리 사람인 사실을 알게 되자 이 재판권은 헤롯왕에게 속한 것임을 알고 예수님을 마침 예루살렘에 와 있는 헤롯에게로 보낸 것입니다.

(5) 예수님은 다시 빌라도 앞에서 최종적인 재판를 받게 되었습니다. 헤롯은 예수님께 기대했던 자기 생각이 허망하게 되자 예수님을 업신여기고 희롱한 후 다시 빌라도에게 보냈습니다(눅23:6-12).

예수님은 전날 밤을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에 오르셔서 밤이 맞도록 기도하셨기 때문에 그 몸이 몹시 지치셨습니다. 그리고 그 전날 밤에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드신 이후 아무 것도 입에 대신 것이 없으셨습니다. 주님은 시장하시고 피곤하신 지치신 몸으로 그들의 손에 결박된 채 이처럼 끌려 다니신 것입니다.


2. 참람한 죄목으로 정죄 받으신 예수님

가야바의 뜰에 산혜드린 공회의 재판석을 베푼 이들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과 서기관들은 유죄 판결을 위해 먼저 확실한 증거를 채택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시기와 음모로 예수를 죽이려는 그들에게 증거가 있을 리가 없는 것입니다.

(1) 거짓 증인이 많이 왔다고 했습니다. 거짓 중인이란 사실이 아닌 증거를 내세워 죄 없는 사람을 정죄하게 만드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렇지만 거짓말은 일치하기가 어려운 법입니다. 그들 거짓 중인이 오기는 많이 왔지만 그들의 증거를 채택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2) 두 사람의 보다 확실한 증인이 왔다고 재판석에 알려져 왔습니다. 그 사람들의 증거는 예수님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지올 수 있다”고 말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들으셨지만 그저 잠잠하셨습니다. 이제 유대인들은 답답하고 조급했습니다. 모처럼 예수를 잡기는 했지만 재판에서 사형을 언도할만한 죄목이 발견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3)이때 대제사장 가야바가 심문했습니다.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고 물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그 당시 유대인들의 메시야 사상이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과 동일시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말하라고 한 것입니다. 그들은 메시야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고 있었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신앙고백 중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고 한 부분은 유대인들이 대망 해 온 확실한 메시야시라는 뜻입니다.

가야바의 심문에 예수님은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를 그리스도로 말하지 말라고 하신 예수님의 입에서 이처럼 자신을 분명하게 그리스도로 나타내신 일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제 자기를 분명히 나타내실 때가 된 것입니다. 그들에게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분명히 밝히시고 그들로 하나님이 보내신 자기들의 그리스도를 죽인 살인자로서의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하시기 위해서도 이 같은 일은 필요했습니다.

(4) 예수님의 이 말씀에 가야바는 자기 옷을 찢었습니다. 가야바가 자기 옷을 찢은 것은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말이 참람하였다는데 있었습니다. 옷을 찢는 일은 말할 수 없는 탄식과 슬픔의 표시였지만 그러나 가야바는 속으로 이제 예수를 죽일 수 있게 되었으니 되었다고 하는 쾌재를 불렀을 것입니다. 참람한 말을 했다는 말에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여 자신을 하나님과 동격으로 말함으로 하나님의 성호를 망령되이 일컬었다는 것입니다.

가야바는 공회 중에서 일어나 결론적으로 이처럼 말했습니다.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이 참람한 말을 들었도다 너희 생각은 어떠하뇨” 공회 의장 가야바의 말을 들은 모든 공회원들은 일제히 ?저는 사형에 해당하니라?고 선언했습니다. 이제 산혜드린 공회의 종교 재판에서 결론이 내려졌습니다. 그것은 ‘사형’입니다. 사형 언도가 내린 것입니다.


결 론 : 이렇게 하여 예수님은 사형에 해당된 자로 결정되었습니다. 재판을 끝낸 그들은 예수님을 희롱하기 시작했습니다. 얼굴에 침을 뱉으며 주먹으로 얼굴을 치고 손바닥으로 때리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자가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이들 죄인들의 손에 의하여 얼마나 수모를 당하셨으며 부끄러움을 겪으셨는가에 대하여 생각해야 합니다.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화 우편에 앉으셨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히12:2). 우리도 주님은 위하여 고난을 받을 때 그 부끄러움을 참으면 그와 함께 영광을 얻게 됩니다(벧전4:14-16).


≈ 198 ≈ 베드로의 실패와 회개

(본문 : 마태복음 26 : 69 - 75)

베드로가 예수를 알지 못한다고 하다

(막 14:66-72; 눅 22:56-62; 요 18:15-18, 25-27)

69 베드로가 바깥 뜰에 앉았더니 

한 여종이 나아와 이르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70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

71 앞문까지 나아가니 

다른 여종이 그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되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매

72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73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도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거늘

74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곧 닭이 울더라

75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서 론 : 베드로는 주님의 이름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는 큰 죄를 지었습니다. 주님은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고 하셨습니다(마10:33). 이토록 무서운 죄를 범했던 베드로였지만 그는 눈물로 회개하고 오히려 그의 신앙에 유익을 주어 순교자의 반열에 서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는 일에 승리하신 것은 기도에 승리하셨기 때문이며 베드로가 예수님의 이름을 부인한 것은 기도에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주님이 기도하시는 그 시간에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잠을 잔다는 말은 깨어 기도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때에는 반드시 베드로의 시험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1. 베드로가 주님의 이름을 부인하게 된 이유

아마 베드로의 마음에는 주님을 배반하거나 그 이름을 부인하려고 생각한 일은 한번도 없었음이 분명합니다. 오히려 그는 정말로 다른 사람은 다 주님을 버릴지라도 자기는 결코 버리지 않을 것임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다짐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가 왜 이 같은 자신의 생각을 저버리게 되었는가?

(1) 베드로는 멀찍이 예수님을 쫓아갔습니다.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쫓아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가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58). 멀찍이란 말은 ‘아포마크로덴’으로 이 말의 의미는 보일락 말락한 먼 거리에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님과 한 무리로 잡힐 것이 두려운 나머지 멀찍이 예

수님을 쫓은 것입니다. 이제 그의 마음속에는 주님을 위해서 십자가를 져야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고 다만 두려워하는 마음만이 꽉 차 있었습니다.

(2) 베드로는 주님의 결국을 보려고 주님의 뒤를 멀리 따라간 것입니다. “그 결국을 보려고 그 안에 들어가 하속들과 함께 앉았더라”고 했습니다(58). 베드로가 주님을 뒤쫓아간 것은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겠다는 생각이 아니라 그 결국을 보려고 따라간 것입니다. 예수님은 저처럼 무력하게 잡혀가셨는데 그가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바야흐로 어떤 기적의 역사가 나타나서 그 많은 무리들을 헤치고 나올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무력하게 그들의 손에 의하여 죽게 될 것인가? 그에게는 무척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결국을 보려는 마음에서 슬금슬금 뒤쫓아 따라간 것입니다. 결국을 보고 믿으려는 믿음은 주님에 대한 올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이런 믿음의 소유자는 베드로의 함정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3) 베드로는 하속들과 함께 바깥뜰에 앉아 있었습니다(58,69). 베드로는 예수님과 함께 앉아 있었어야 할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대제사장의 하속들이 있는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깥뜰은 예수님이 서 계신 자리가 아닙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가 받으실 고난의 동참자로서가 아니라 방관자, 참관자로서 앉아 있었던 것입니다.

(4) 베드로는 두려운 마음으로 앞문까지 나아갔습니다. 베드로에게 또 한차례의 위기가 왔습니다. 한 비자가 그에게 나아와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고 지적 받았습니다. 베드로는 이제 자기의 정체가 탄로 날 위험을 느꼈습니다. 그는 도망치려고 앞문까지 나아간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때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보다 자기 눈앞에 서있는 계집종을 더 두려워했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 지금 베드로에게는 아무런 효과가 없었습니다(마10:28).


2.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

베드로의 부인은 한번에 그친 것이 아닙니다. 세 번씩이나 계속 되었습니다. 사람이 한번 범죄하면 그 다음에는 저절로 따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죄의 유혹은 처음에 물리쳐야 합니다. 처음에 넘어지면 그 다음에는 그 죄악의 끄나풀에 끌려 쉽게 끌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1) 처음에 베드로는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앓지 못하겠노라”고 부인했습니다. 이 부인은 한 계집종의 물음에 모든 사람들 앞에서 부인한 일입니다. 아마 예수님도 이 베드로의 부인을 들으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다음 말씀을 잘 명심해야 합니다.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마10:30).

(2) 다음에 베드로는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자기 몸에 위험이 다가온다는 두려운 생각에 도망갈 차비를 차리느라 앞문까지 나아가다가 그 문턱에서 이번에는 다른 계집종에 게 덜미를 잡혔습니다.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는 그 계집종의 말에 베드로는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맹세하고 부인한 것입니다.

(3) 세 번째로 베드로는 “저주하며 맹세하여” 말하기를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도망칠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이미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의 시선이 자기에게 쏠려 있기 때문에 더 이상 밖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잠시 후에 그 곳에 있는 다른 한 사람이 “너도 진실로 그 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고 말했습니다. 베드로는 이 말에 “저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고 부인했다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부인한 말의 내용은 회가 거듭할수록 더욱 짙은 농도로 악해졌다는 사실을 찾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베드로가 알지 못하노라고 한 ‘우크 오이다’는 전혀 모르는 상태를 뜻합니다. 74절에 나타난 베드로의 저주와 맹세는 주님을 저주한 것이 아니라 “내가 만약 예수의 제자라면 나는 마땅히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뜻과 “나는 그의 제자가 아님을 그 무엇으로도 맹세할 수 있다”는 의미가 복합적으로 들어가 있는 부인입니다.

베드로는 사실상 예수님을 몰랐기 때문에 부인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는 주님의 죽으셔야 할 이유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주님이 왜 고난을 스스로 당하셔야 하셨는가에 대하여 정말로 몰랐던 것입니다. 또한 베드로는 주님이 고난 당하신 후 부활하실 일에 대해서도 몰랐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주와 함께 고난받는 일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몰랐습니다. 베드로의 이런 상태는 예수님을 전혀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베드로처럼 예수에 대하여 모르면 자기 생명이 위험한 시기에 가서 주님의 이름을 부인하거나 배신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3. 베드로의 회개

자기 입에서 세 번 주님의 이름을 부인하자 곧 닭소리가 울려 베드로의 귓전을 뜨겁게 때렸습니다. 이 닭소리에 새 정신이 들게 된 베드로는 밖에 나가 심히 통곡하게 되었습니다.

(1) 닭이 울었다는 사실이 베드로의 결정적인 회개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사람에게는 회개의 시기가 있습니다.

(2)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회개에는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너는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로 돌아 오라”고 하셨습니다(호 14:2).

(3) 베드로는 밖에 나가 심히 통곡했습니다. 베드로는 고통을 당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그때 비로소 바라보았습니다. 자기를 긍휼히 바라보시는 주님의 모습을 바라보고 그 눈길이 서로 마주쳤을 때 베드로는 더 견딜 수 없어 밖으로 뛰쳐나갔습니다. 아마 주님이 그가 나갈 수 있도록 그 길을 열어 주셨을 것입니다. 그가 밖에 나와 통곡한 것은 그의 회개를 말합니다.


결 론 : 베드로의 시험은 우리의 시험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시험을 당하는 일은 거듭나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부족해서도 아닙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해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고 말씀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27장 설교

◆ 밤중소리 03-01 | VIEW : 7,050

≈ 199 ≈ 가룟 유다의 결국(본문 : 마태복음 27 : 1 - 10)

≈ 200 ≈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본문 : 마태복음 27 : 11 - 14)

≈ 201 ≈ 바라바를 선택한 유대인들(본문 : 마태복음 27 : 15 - 26)

≈ 202 ≈ 희롱을 당하신 예수(본문 : 마태복음 27 : 27 - 31)

≈ 203 ≈ 시몬의 십자가(본문 : 마태복음 27 : 32)

≈ 204 ≈ 바라바를 선택한 유대인들(본문 : 마태복음 27 : 33 - 44)

≈ 205 ≈ 두 강도의 경우(본문 : 마태복음 27 : 44)

≈ 206 ≈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본문 : 마태복음 27 : 45 - 49)

≈ 207 ≈ 찢어진 성소 휘장(본문 : 마태복음 27 : 50 - 56)

≈ 208 ≈ 예수님의 무덤(본문 : 마태복음 27 : 57 - 66)


≈ 199 ≈ 가룟 유다의 결국

(본문 : 마태복음 27 : 1 - 10)

1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2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라


유다가 목매어 죽다(행 1:18-19)

3 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4 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5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6 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이르되 

이것은 핏값이라 성전고에 넣어 둠이 옳지 않다 하고

7 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8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밭을 피밭이라 일컫느니라

9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나니 

일렀으되 ㄱ)그들이 그 가격 매겨진 자 

곧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가격 매긴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

ㄱ)슥 11:12-13

12 내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거든 내 품삯을 내게 주고

그렇지 아니하거든 그만두라

그들이 곧 은 삼십 개를 달아서

내 품삯을 삼은지라

13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이 나를 헤아린 바 그 삯을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하시기로 

내가 곧 그 은 삼십 개를 

여호와의 전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지고

10 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명하신 바와 같으니라 하였더라


서 론 : 여기에 유다의 회개가 나옵니다. 회개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양심적인 회개요, 하나는 복음적인 회개입니다. 양심적인 회개는 세상사람들이 하는 회개로 이 회개는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양심적인 회개의 표본 인물은 가룟 유다요 그는 결국 그 회개의 결과 목을 매어 스스로 죽었습니다. 그리고 복음적 회개의 표본 인물은 베드로인데 그는 더욱 주님을 사랑하게 되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 나갔습니다.


1. 유다가 뉘우친 과정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쳤다”고 했습니다(3). 여기서 뉘우친다는 ‘메타멜로마이’란 말은 후회한다는 뜻입니다. 자기가 한 일을 돌이켜 보고 양심의 고통을 받아 번민하는 마음의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하여 후회하는 사람들의 열매를 보면 다음 몇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1) 그런 사람은 마음에 괴로움을 받는 생애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양심의 가책이 그의 평생에 계속되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사유하심을 받지 못하는 죄는 우리의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고 양심에 고통을 주게 됩니다.

(2) 유다는 스승을 팔아 받은 돈을 도로 갖다 주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에 대하여 회개하는 표로 자기가 얻은 부당 이익이나 남에게 손실을 준 물질적인 손실에 대하여 변상해 줍니다. 그러나 이것은 율법적인 변제가 될 뿐 이것으로 하나님의 사죄를 받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3) 유다는 결국 그들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돈올 반납했지만 그들은 그 죄에 대한 책임은 네게 있으니 네가 당하라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자신이 범 한 죄는 자기가 담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맛 잃은 소금이 되면 세상 사람들에게조차 짓밟히게 된다고 하셨습니다(마5:13).

(4) 유다는 죽는 길을 택했습니다. 여기서 죽는다는 말은 죄 값에 대한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유다는 자신이 한 일이 이토록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자기의 배신이 주님이 죽기에까지 이르게 되자 유다는 비로소 자신의 양심의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이처럼 죄를 범하기까지는 분별력이 약해지고 담대해집니다. 이것은 죄의 강한 유혹에 비해 인간의 의지가 너무나도 약하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인간은 이미 죄의 종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 하지 못하게 하라”고 말씀했습니다(롬6:12).

유다는 스승을 판 돈 은 삼십을 성소에 던지고 목메어 죽어 버렸습니다. 예수님을 팔아 번 돈은 자기 소유가 되지 못합니다. 성수주일하지 않고, 십일조 없이 번 돈은 자기 소유로 쓰지 못할 것입니다. 이런 돈은 마치 구멍 뚫린 전대에 넣음과 같고 “너희는 쌓으라 나는 헐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말 1:4).


2. 유다는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유다는 자신의 죄를 인정했옵니다. 자기 죄도 고백했습니다. 그 죄로 인하여 고민도 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결국 자살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유다는 무엇이 잘못 되었는가?

(1) 유대의 회개는 양심의 회개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방법을 따른 회개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회개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이 생각이 나서 밖에 나아가 통곡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회개는 하나님을 향한 회개를 말합니다. 유다처럼 대제사장에게 자기 죄를 자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여 자기의 죄를 자백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요일1:9).

(2) 유다는 양심의 인도를 받았습니다. 양심의 인도를 받는 회개는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아마 그 사람의 도덕적인 행실은 바로 잡을 수 있을는지 모릅니다. 어느 정도 자기 마음의 위로가 될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열매를 맺지는 못합니다. 참된 회개는 하나님을 향하여 열매를 맺는데 있습니다. 이 같은 회개는 양심의 인도가 아니라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죄의 사유는 하나님의 아들을 힘입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3) 유다는 자살로 그의 인생을 마쳤습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개과천선함으로 원상복귀를 하든가? 아니면 양심의 소리에 괴로워 자살을 시도함으로 인생으로서의 최고의 책임을 수행하던가? 두 가지 중에 한 가지입니다. 가룟 유다는 후자를 택한 것입니다. 그러나 진실한 회개는 탕자의 경우처럼 그의 발걸음을 아버지께로 돌이키는 일입니다(눅15:17-20). 그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께로 돌이킬 줄 모르는 회개는 구원에 이르는 회개가 아닙니다.


3. 토기장이의 밭을 산 피 값

유다가 스승을 판 은 삼십을 피 값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대제사장들의 업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것은 피 값이라 성전고에 넣어 둠이 옳지 않다”고 말한 것입니다. 유다가 그들에게 찾아와서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는 후회의 말과 함께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습니다. 그러나 돈을 성전고에 넣어 두기에 합당치 않은 것은 피 값으로 지불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결국 그 돈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습니다. 이런 일은 이미 선지자 예레미야로 하신 말씀의 성취라고 마태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가 인용한 예레미야의 예언은 사실상 예레미야의 글에 있는 내용과는 거리가 멀 뿐 아니라 차라리 스가랴의 글에 있는 말씀과 많은 유사점올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풀이해야 하는 것인가? 마태가 인용한 예레미아의 글은 사실상 스가랴의 예언과 같은 뜻으로 스가랴가 예언한 글의 출발점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말한 힌놈의 골짜기는 저주의 골짜기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리고 그 곳을 더럽혔는데 그것은 그 곳이 다른 신들에게 분향한 곳이 되었기 때문입니다(렘19:1-4). 여기서 예레미야가 말한 이 곳이란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로 이 자리가 곧 유다가 던진 피 값으로 산 토기장이의 밭인 것입니다. 4철에서 무죄한 자의 피로 이 곳에 채웠다고 하신 말씀은 무죄하신 자를 팔아 얻은 은으로 이 곳에 채웠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힌놈의 아들의 골찌기가 채워진 것처럼 그 아들의 피를 흘린 이스라엘도 이 힌놈의 아들의 골찌기와 같은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하는 경종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이 같은 경종이 스가랴의 글에 와서 더욱 분명한 모습을 들어내 놓고 있는 것입니다(슥11:12-13). 그러므로 마태가 스가랴의 글에 있는 예언을 예레미야로 말씀하셨다고 표현한 것은 스가랴가 예레미야의 글에서 예언의 근거를 삼은 것이기 때문이며 마태는 이 예언의 글을 가룟 유다와 연결시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낸 것입니다.


결 론 :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회개에 있어서 마치 유다와 같은 회개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양심적인 회개, 양심의 소리를 듣고 움직이는 회개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회개에는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열매가 따르지 못합니다. 말씀을 따라 성령으로 이루는 회개만이 그리스도인의 참 회개임을 알아야 합니다.


≈ 200 ≈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본문 : 마태복음 27 : 11 - 14)

십자가에 못 박히게 예수를 넘기다

(막 15:2-15; 눅 23:3-5, 13-25; 요 18:33-19:16)

11 예수께서 총독 앞에 섰으매 

총독이 물어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고

12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발을 당하되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는지라

13 이에 빌라도가 이르되 

그들이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언하는지 듣지 못하느냐 하되

14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총독이 크게 놀라워하더라


서 론 : 빌라도란 이름은 역사이래 가장 잘 알려진 이름 중에 하나입니다. 빌라도의 이름을 모든 그리스도인의 입에서 신앙고백을 할 때마다 혹은 여러 행사의 예배 시에 그의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사도신경에 기록되어 있는 그의 이름은 앞으로도 계속하여 예수님이 오시는 그 날까지 불려질 것입니다. 그러면 그의 이름이 왜 이처럼 불명예스러운 악명의 대명사로 남게 되었는가? 그는 유대인의 왕이신 예수를 죽이는 일에 결정적인 재판을 집행했기 때문입니다.


1. 빌라도의 인물

빌라도란 인물은 성경에 기록된 것 외에 아무 것도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1) 빌라도는 그의 권력에 비해 사람이 우유부단한 인물이었습니다. 자기 양심의 소리를 들을 줄은 알았지만 그 양심의 소리를 관철할만한 인물은 못되었던 것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 대하여 매우 호의적인 태도를 가졌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무죄 판결을 내리려고 애썼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헤롯 안디바에게 보내기도 하였고(눅23:5) 다만 매로 때린 후 놓아주자고 제의도 했습니다(눅23:16). 그는 명절에 죄수 하나를 놓아주는 관례에 따라 예수를 놓아주려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군중에게 압도당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2) 빌라도는 민란이 나려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빌라도의 노력이 아무런 효력 이 없고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24) 굽은 판결을 내렸습니다. 민란이 일어나면 이에 대한 책임을 자신이 지지 않올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3) 빌라도는 민심 수습책으로 무리들에게 만족을 주고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었다고 했습니다(막I5:I5). 빌라도는 무리들에 게 만족을 주려고 했다고 한 것입니다. 무리에게 만족을 주려고 잘못된 결정을 내린다면 급기야 그 무리들을 다 잘못된 길로 오도할 것입니다.

(4) 빌라도는 자신의 현재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하여 양심을 져버렸습니다. 그가 예수를 고소하는 무리들에게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고 물었을 때 대제사장들이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고 외쳐 댔습니다. 이 말에 그는 예수를 방면하면 가이사 외에 다른 왕을 인정하는 모함을 받은 것이 우려되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총독으로서의 현재 지위는 박탈당하고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반역한 자로서 재판을 받을 것입니다. 이에 빌라도는 서둘러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저희에게 넘겨주니라”고 했습니다(요19:15-16).


2.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님이 빌라도 앞에 섰을 때 재판장 석에 앉아 있었던 빌라도로부터 맨 처음 심문 받은 내용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는 것이었습니다. 이 죄목이 유대인들이 예수를 빌라도에게 고소한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었던 것입니다. 대제사장의 무리들이 빌라도에게 예수를 끌고 가서 고소한 고소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 바치는 것을 금하여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눅23:2).

백성을 미혹했다는 말은 예수님이 진리의 말씀으로 참 도리를 백성들에게 가르친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생명 의 도리를 그들은 미혹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가이사에 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했다고 말한 고소는 거짓말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시험에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20:22-25).

다음에 자칭 왕 그리스도라 말했다는 고소는 그 날 아침 가야바의 뜰에서 행한 산헤드린 공회 재판에서 가야바의 최종적인 심문에서 찾아낸 증거였습니다(마 26:63-65). 그들은 예수님의 왕적인 표현이 다만 메시야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사실을 뻔히 알고 있었으면서도 이렇게 고소한 이유는 빌라도로 하여금 이 예수야말로 가이사에 반역하려는 민란 음모의 주모자임을 은근히 암시하려는 뜻에서 한 일입니다.

(1) 벌라도는 예수님을 향하여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심문했습니다. 빌라도는 로마 황제인 가이사의 명을 받들어 유다를 통치하고 있는 실질적인 지배자였기 때문에 그의 왕에게 도전하는 자는 누구든지 용납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관심은 과연 이 예수가 가이사의 왕권에 도전한 유대인의왕이냐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관심은 예수가 고소자들의 말대로 왕이 되기 위하여 반란을 시도했는가? 이 예수는 정말로 유대인의 실질적인 왕이 되려는 야망을 가진 사람인가? 예수는 정말로 왕이 되려고 가이사에게 반기를 들것인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2)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네 말이 옳도다”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네 말대로, 아니 이 무리의 고소한 대로 나는 유대인의 왕이니라”고 하시는 말씀이십니다.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현세에서의 왕권을 의미한 것도 아니며 그의 정치적인 야망을 표현한 것도 아닙니다. 메시야로서의 그의 위치를 천명하신 것입니다. 메시야는 분명히 유대인의 왕으로 나와 있으며 다윗의 위를 이을 영원한 왕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3) 빌라도는 이 같은 예수님의 말씀에서 그가 결코 가이사에게 반역할 실질적인 왕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빌라도가 만약 예수의 세력이 강대하여 자기 눈에 능히 그가 가이사에게 반기를 들어 유대인의 왕이 될 수 있는 인물이라고 사려되었다면 용서해 주려는 마음조차 가짐이 없이 당장에 유죄 선고를 내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빌라도의 눈에 비취인 예수의 모습은 너무나도 연약하고 초라했습니다. 동조자도 한 명도 없을 뿐 아니라 반란의 흔적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빌라도는 이 문제는 애초부터 종교적인 문제인 것을 잘 알고 있었으며 그들이 고소하는 내용도 종교적인 문제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빌라도는 이 문제는 그리스도에 대한 유대인의 시기로 말미암은 것임을 알았습니다.


3. 잠잠히 입을 담으신 예수님

빌라도에게 가장 기이하게 생각된 것은 피고로 서있는 예수란 사람이 도대체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 많은 불리한 고소에도 불구하고 잠잠히 입을 열지 않고 있느냐는 사실이었습니다. 빌라도가 이를 이상히 여겨 “저희가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거 하는지 듣지 못하느냐”고 물었지만 예수님은 한 마디도 대답지 아니하셨다고 했습니다.

(1) 예수님은 그들의 고소에 대하여 대답하실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그는 이 재판에서 무죄로 풀려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정죄를 받아 죽으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이사야는 이처럼 예언했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고 했습니다(사53:7).

(2) 예수님은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실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그는 죄가 없으셨지만 그가 지금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의 죄를 젊어지고 그 곳에 서 계신 것입니다(사53:4).

(3)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재판을 받으시기를 원하시지 아니하셨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사53:5).


결 론 :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십니다. 그 분은 우리의 왕이신 것입니다. 우리의 왕은 빌라도의 뜰에서 이처럼 고초를 당하셨습니다. 그가 받으신 재판에서 우리는 마땅히 우리의 죄를 발견하고 그가 정죄 받으신 일로 인하여 정죄에서 영원히 풀려난 사실을 깨달아 한 평생 그의 사랑 안에 거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 201 ≈ 바라바를 선택한 유대인들

(본문 : 마태복음 27 : 15 - 26)

15 명절이 되면 총독이 무리의 청원대로 

죄수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더니

16 그 때에 바라바라 하는 유명한 죄수가 있는데

17 그들이 모였을 때에 빌라도가 물어 이르되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1)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하니

18 이는 그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더라

19 총독이 재판석에 앉았을 때에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 하더라

20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무리를 권하여 

바라바를 달라 하게 하고 

예수를 죽이자 하게 하였더니

21 총독이 대답하여 이르되 

둘 중의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바라바로소이다

22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그들이 다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23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그들이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

24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2)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25 백성이 다 대답하여 이르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26 이에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서 론 : 빌라도 총독이 최후적으로 유대인들에게 선택권올 주었습니다. “바라바냐? 아니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이 물음에 그들은 한결같이 바라바를 달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죽이려고 고의적으로 악의에 찬 선택을 하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그리스도를 죽이는 피 흘림의 죄에 대하여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고 자원했습니다. 그들의 이 같은 선택이 얼마 안가 실질적으로 그들과 그들의 자손의 머리 위에 떨어질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맹세한 서원대로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피 흘린 죄를 그들과 그들의 자손의 머리 위에 내리신 것입니다.


1. 바라바를 등장시킨 이유

빌라도가 그리스도에 대하여 매우 동정적이었다는 사실은 그가 예수님을 재판하는 여러 과정에서 분명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1) 빌라도는 예수의 활동이 유대인들의 종교적인 활동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만약 예수의 활동이 가이사에게 반역하는 것이거나 민란을 일으키려는 것이었다면 주님은 대제사장들의 손에가 아니라 빌라도의 손에 의하여 벌써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의 활동이 자기 자신이나 가이사의 통치에 하등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방관했던 것입니다.

(2) 빌라도는 예수가 존경할만한 의로운 청년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빌라도는 평소에도 예수에 대하여 죄가 있다는 평판을 듣지 못했을 뿐 아니라 유대인들의 고소에도 죄로 재판 받을 만한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무슨 악한 일을 행하였느냐?”고 물었고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다”고 손을 씻기까지 한 것입니다.

(3) 빌라도는 유대인의 지도자들이 이 청년을 시기로 죽이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는 저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 줄 앎이러라”고 했습니다(1).

(4) 빌라도는 예수가 무력한 죄 없는 죄인으로 재판 석에 서있는 모습을 측은히 여겼습니다. 빌라도는 “저희가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거 하는지 듣지 못하느냐”고 말함으로 답답하게 서 있지만 말고 자기의 무죄함을 좀 강력하게 주장하라고 암시한 것입니다. 빌라도는 그러면서도 예수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자신의 비양심적인 판결이 신의 보응을 받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운 마음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빌라도는 아내로부터 꿈에 그리스도로 인하여 많은 애를 썼으니 그 옳은 사람에 대하여 상관하지 말라고 하는 전갈을 받았습니다. 이때 빌라도의 머리에는 좋은 발상이 떠올랐습니다. 명절이 되면 무리의 소원대로 한 명의 죄수를 방면하는 관례가 전통적으로 지켜져 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죄 받은 가장 파렴치한 죄인인 바라바와 연결시켜 이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선언한다면 그들 무리들은 반드시 이 청년을 선택할 것이라고 생각하게된 것입니다. 이것은 건전한 인간의 상식입니다. 빌라도는 이 상식이 통할 줄로 알았던 것입니다.


2. 너희는 누구를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빌라도는 무리들 앞에서 이 사실을 공포했습니다.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둘 중에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었습니다.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즉각적으로 무리들을 충동하여 바라바를 달라하게 하고 예수를 멸하자고 권했습니다. 백성의 지도자들의 이 같은 권함을 받은 무리들은 “바라바로소이다”고 외쳐댔습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예수를 배신한 무리들의 심리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1) 유대인들은 예수를 그들의 그리스도인줄 알고 예루살렘 입성을 대대적으로 환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들의 기대에 어긋난 것입니다. 그들이 기다리고 원하는 그리스도는 빌라도 앞에서 재판을 받는 피고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구원할 그들의 왕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은 그들의 기대에 어긋나자 환영이 배신으로 돌변한 것입니다.

(2) 모든 판세는 대제사장이나 장로들에게 유리하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런 판국에 만약 그들의 권고를 듣지 않는다면 나중에 어떤 화를 당하게 될는지 모르는 일입니다. 유대인들 중에 예수를 따르는 자들은 출회하기로 이미 결의된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시세에 따라 유리 한 곳으로 폼을 옮기는 것이 지혜로운 처신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3) 연약한 피고로 빌라도 앞에 서있는 예수는 이제 기대해 볼만한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능력도 사라지고 이적도 사라져 버리고 있는 것이라고는 묵묵한 침묵뿐입니다. 그에게 이제 또 무엇을 기대해 보겠는가?

군중 심리는 순식간에 하나가 되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여기 저기서 함성이 들려 왔습니다. 빌라도는 그의 모든 노력이 아무 효험이 없고 오히려 민란이 나려는 기미가 보이자 예수에 대한 구명을 포기해 버렸습니다. 그 당시 로마의 지배를 받아오고 있는 유대인들은 지배자들에 대한 적대감을 언제나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사건만 있고 그 곳에 군중 심리만 작용하면 쉽게 민란이 일어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에 예수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에서 민란이 일어난다면 빌라도는 그 책임을 지고 총독의 자리에서 물러나야 활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빌라도의 마음의 생각은 반대쪽으로 굳히게 되었습니다. 그는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고 말하고 바라바를 저희에게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려고 그들 손에 넘겨주었습니다.


빌라도의 판결은 났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는 사형 언도가 내려졌습니다. 사형수에게는 사형을 집행하기 전에 채찍질의 형벌이 있었습니다. 로마 군인들의 채찍은 짧은 손잡이에 몇 줄의 가죽끈을 달고 그 앞부분에 작은 납덩어리로 뾰족하게 만든 뼛조각이 달려 있었기 때문에 이 채찍으로 후려치는 날이면 등뼈가 드러나기도 하며 살점이 묻어나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형수는 자신이 져야 할 십자가 형틀을 젊어지고 형장까지 올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로마군인들의 잔인한 채찍이 그에게 사정없이 내려쳐진 후 이제 십자가의 형틀을 짊어지고 그 고난의 골고다의 언덕을 올라가셔야 하셨습니다.


결 론 : 빌라도의 뜰에 있었던 많은 유대인의 무리들은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하는 선택에서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버리고 바라바를 택했습니다. 그 결과 민란의 주범 바라바는 석방되고 죄 없으신 예수님은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준바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선택을 잘 해야 합니다. 결코 바라바를 선택해서는 안됩니다. 바라바를 선택한 그들은 메시야를 죽였고 그로 인하여 자신들도 죽은 것입니다. 아비나 어미보다 그리스도를 택해야 합니다. 아들이나 딸보다 그리스도를 택해야 합니다(마10:37). 그리고 재물보다 그리스도를 택해야 합니다{마6:24).


≈ 202 ≈ 희롱을 당하신 예수

(본문 : 마태복음 27 : 27 - 31)

군병들이 예수를 희롱하다

(막 15:16-20; 요 19:2-3)

27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28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29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30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31 희롱을 다 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서 론 : 빌라도의 사형 언도가 확정되자 예수는 많은 무리들의 희롱을 받게 되었습니다. 빌라도의 관정 안으로 예수를 데리고 들어간 총독의 군병들은 마치 이성을 잃고 광적으로 날뛰는 사육제의 주인공들 같았습니다. 우리는 이들의 예수에 대한이 희롱이 우리의 신앙과 어떤 영적인 연관성이 있는가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I. 옷을 벗기고 흥포를 입히신 예수

관정 안으로 끌려 들어가신 예수님은 후안무치한 무리들에 의해 말할 수 없는 희롱을 당하셨습니다. 먼저 그들이 주님께 행한 일은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힌 일입니다. 홍포는 왕들이 입는 옷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단장하고있었습니다. 왕으로 인정해서가 아니라 희롱을 목적으로 그렇게 꾸민 것입니다.

주님은 참으로 왕이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왕으로 꾸미고 가짜 왕으로서 희롱을 했습니다.

(I) 이것은 마치 주님을 입으로는 시인하나 그 행위로는 부인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중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딛1:16). 행위로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란 곧 순종이 없는 사람, 모든 선한 일을 버리고 자기 육신의 정욕대로 살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들은 예수를 그들의 왕으로 섬긴다고는 하지만 실상인즉 총독의 군병들처럼 왕으로 꾸며 희롱하는 일과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왕으로 섬기는 백성들은 그 왕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를 기쁘시게 해 드리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2) 이것은 마치 자기의 유익이 있을 때는 섬기고 유익이 없으면 저 버리는 일과 같은 일입니다. 주님을 따른 많은 무리들은 주님의 오병이어의 기적을 바라보자 그를 따랐습니다. 그를 자기들의 왕으로 세우고자 했습니다(요6:12-15). 물질적인 유익을 위해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그 물질로 인하여 예수님을 또 저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찾아온 무리들에게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6:26). 이들은 예수로부터 떡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물러간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영광뿐 아니라 고난도 그와 함께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빌1:29).


2. 가시 면류관을 쓰신 예수

총독의 군병들은 홍포를 입힌 예수에게 가시로 면류관을 엮어 머리에 씌웠습니다. 이 면류관은 왕들이 그 머리에 위엄과 권위로 쓰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 관을 가시로 엮었던 것입니다. 고난의 그리스도이신 우리의 왕은 머리에 가시판을 쓰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참으로 놀라우신 모습으로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가 오실 때 그의 머리에는 정말로 깜짝 놀랄만한 면류관을 쓰실 것입니다.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이 있고”라고 말씀했습니다. 그가 오시는 날 그의 머리에 가시로 엮은 면류관을 씌워드린 그들은 이 같은 주님의 모습을 바라보고 가슴을 칠 것입니다(계1:7).

(1) 주님 앞에 보이러 오는 신앙은 그의 머리에 가시관을 엮어 씌워 드림과 같은 괴로움을 드리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공경하거나 사랑함이 없이 의례적으로 성전에 출입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온다”고 책망하셨습니다(사1:12). 우리 주님은 당신에게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몸만 보이거나 제물만 보이러 오는 신앙은 가장 미워하시며 차라리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으면 좋겠노라고 하시는 것입니다(말1:10).

(2) 성전 마당만 밟는 신앙은 주님께 괴로움을 드리는 신앙입니다.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고 하셨습니다(사1:12). 성전 마당만 밟는 사람은 종말에 환난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수 없습니다.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되 밖 마당은 척량치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 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고 말씀했습니다(계11:1-2).

(3) 헛된 제물을 드리는 신앙은 주님께 가시관을 씌워 드리는 고통을 안겨 드리는 일입니다.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사1:13). 그들이 월삭이나 안식일을 지키는 일도 하나님께 대한 경배나 영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기와 질투와 다툼에 있었습니다. 속죄 제물로 양을 잡아도 그 일이 헛된 것은 이로써 그들이 악행을 버리거나 회개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실한 회개 없이 드리는 모든 제물은 헛된 제물로 주님은 이런 제물을 가증히 여기실 뿐 아니라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사1:14).

(4) 병들고 병신된 제물을 드리는 신앙은 주님께 가시관을 씌워 드리는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하는 악행을 자행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말라기를 통하여 이처럼 책망하셨습니다.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 도다 이는 너희가 주의 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함을 인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먼 회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말1:7-8). 병든 제물이란 하나님께 드려서는 안될 제물을 말합니다. 온존치 못한 십일조는 저는 짐승으로 드리는 제물인 것입니다. 인색한 헌금은 병든 것으로 드리는 제물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 생활을 통하여 주님을 괴롭혀 드리는 자들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들의 면류관을 주님의 머리에 씌워 드려야 합니다. 보좌 앞에 둘러선 이십 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 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진 것”처럼 우리 의 가장 좋은 것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3. 갈대를 손에 들리신 예수

총독의 군병들은 예수로 더욱 그럴듯한 왕으로 분장시키기 위해 그의 손에 갈대를 들렸습니다. 이 갈대는 임금의 손에 들린 홀을 상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처럼 꾸민 왕 앞에 무릎을 꿇고 희롱했습니다.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 지어다” 그리고는 그 얼굴에 침을 뱉고 갈대를 도로 빼앗아 그것으로 왕의 머리를 쳤습니다.

만약 이들이 희롱한 예수가 정말로 그들 앞에 왕으로 서 계셨다면 그들은 어찌 되었겠는가? 그런데 그들은 왕으로 오시는 주님의 모습을 직접 바라볼 수 있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 그들이 얼마나 놀리며 당황할 것인가? 그들은 왕이라고 말하면서 그 앞에 경배를 드렸지만 그들의 경배는 희롱이었습니다. 우리 가운데 이들처럼 주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희롱하는 무리들은 없는 것인가?


결 론 : “십자가에 못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고 했습니다. 결국 이 같은 사람들은 주님을 끌고 십자가에 갈 사람들입니다. 다시 현저히 욕 보이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무리들에 게 경종하고 있는 말씀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고 말씀했습니다(히6:4-6).


≈ 203 ≈ 시몬의 십자가

(본문 : 마태복음 27 : 32)

32.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워 가게 하였더라


서 론 : 예수님은 이제 그의 마지막 가실 길,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의 언덕 길을 올라가셔야 했습니다. “희롱을 당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박으려고 끌고 가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31). 그들은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하여 끌고 갔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끌려가신 것입니다. 끌려 가셨다는 말은 그가 십자가에 형틀을 지고 골고다까지 올라가실 힘이 없으셨기 때문에 그들의 채찍과 희롱과 재촉에 의하여 끌려가다시피 따라가신 모습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날 밤 밤새도록 기도하시느라 피곤하신 예수님, 이리 저리로 끌려 다니시며 재판을 받으시느라 지칠 대로 지치신 예수님, 그간 떡 한 덩어리도 물 한 모금도 드시지 못하신 고통, 육신을 가지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이런 고초를 그의 폼으로 겪으셔야하셨습니다. 주님은 오래 걸어가지 못하시고 그 자리에 쓰러지셨습니다. 당장에 그의 둥에 로마 군병들의 채찍이 내리쳤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일어나라고 채찍을 쳐대도 땅에 쓰러지신 채 꼼짝하실 수 없으셨습니다. 그들은 이제 이 죄수가 십자가의 무거운 형틀을 지고 언덕까지 올라가기는 틀렸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1. 주님을 따른 무리들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로 올라가신 길에는 많은 무리들이 주님의 좌우와 앞뒤에서 따랐습니다. 실로 이들 중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섞여 있었습니다.

(1) 그 무리 중에 많은 사람들은 주님을 희롱하려는 무리들입니다. “왜 그토록 잠잠히 따라가느냐? 그 십자가를 벗어 던지고 이리로 나오라”고 희롱하는 무리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전에는 많은 능력을 행하더니 지금은 왜 그렇게 무력해졌느냐?”고 조롱하는 무리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메시야가, 유대인의 왕이 왜 이렇게 되었느냐?”고 빈정댄 무리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2) 그 결과를 보려고 따라간 사람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의 결국을 보려고 멀찍이 예수를 쫓아 대제사장의 뜰에까지 갔었습니다(마26:58). 빌라도의 뜰에서 빌라도가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고 물었을 때 저희가 다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고 외쳐댔는데 그들은 과연 그 결과가 어떠할 것이냐에 대하여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 무리들도 주님의 뒤를 따를 것입니다.

(3) 주님의 주위에는 채찍과 검을 든 로마군병들이 따랐습니다. 그들은 다만 군인이란 우월감과 위세로 어깨를 흔들면서 무슨 큰 자랑거리나 되는 것처럼 예수님을 치고 때리는 일에 열심했습니다. 차라리 이들은 유대인들 보다 나은 자들이라고 말하겠습니다.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의 참 모습을 찾은 사람은 대제사장이나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의 무리가 아니라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채찍으로 때리며 그를 십자가에 못박은 로마군병들이었음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4) 주님을 뒤따르며 울부짖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평소에 예수님을 따른 예루살렘의 여인들이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발을 구르며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지켜보면서 그가 채찍에 맞을 때마다 가슴을 도려내는 아픔을 느끼면서 가슴을 쳤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의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23:28).

(5) 그 무리들 중에는 주님에 대하여 동정만 할 뿐 구경만 하면서 따르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십자가를 내가 대신 지고 가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로마군병들의 채찍에 맞고 땅에 쓰러진 채 일어나실 줄 모르는 주님의 모습을 보면서도 두려운 마음과 부끄러운 마음으로 주님 곁에 나서는 사

람이 없었습니다.


2. 시몬의 등장

예수를 끌고 간 로마군병들은 주님의 쓰러진 몸을 더 일으킬 생각을 포기하고 주변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비교적 순박하게 보이고 아주 건장한 체구의 한 청년을 찾았습니다. 그들은 그 청년을 억지로 잡아 예수의 십자가를 지어 같이 가게 한 것입니다. 그 청년의 이름이 구레네 사람 시몬이라고 했습니다.

이 시몬은 원래가 유대인이었지만 그의 태어난 곳은 구레네였으며 지금도 그 곳에 살아가는 그곳 주민이어서 유월절 명절을 당해서 예루살렘에 올라왔던 것입니다. 구레네란 지금의 리비아를 말합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근간에 일어난 사건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도 예수의 재판을 구경하려고 빌라도의 뜰에 갔다가 그의 유죄판결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의 발걸음을 따라 자기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을 골고다까지 올라가 볼 흥미를 가졌던 것입니다. 그는 이 예수를 좀더 가까운 곳에서 보려고 예수님 가까이 있다가 로마군병의 눈에 발견되어 예수대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까지 올라가는 사람으로 붙잡힌 것입니다.

(1) 시몬은 이 십자가를 억지로 졌습니다.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웠더라”고 했습니다(32). 그 주변에 있었던 사람들은 자기가 발견되지 않은 것을 무척 다행스러운 일로 여겼을 것입니다. 그리고 시몬에게 저 사람은 억세게 재수 없는 청년이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시몬의 생각 역시 “내가 오늘 왜 이처럼 재수 없지, 하필이면 그 많은 사람 가운데서 내게 이런 일이 걸렸지”라고 마음속으로 자기가 예수를 따른 일을 몹시 후회했을 것입니다. 시몬은 이 십자가를 져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의 제자도 아닐 뿐 아니라 평소에 예수를 따라 다닌 적도 없으며 예수에게 전혀 알려진 인물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행적에 대해서도 백지였고 그가 왜 십자가를 지시 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2) 시몬은 십자가를 지고 자기 옆에 있는 예수와 함께 골고다의 언덕길을 올라갔습니다. 시몬이 이 십자가를 짊어졌을 때 온 몸에 소름이 끼쳤을 것입니다. 그것은 십자가 형틀이란 저주스러운 사형 기구요 그곳에 매달려 죽는 사람이란 저주받은 극악의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시몬은 피가 낭자하게 묻은 십자가를 지고 주위의 많은 사람들의 킬킬거리는 웃음소리를 귀에 들으며 힘겹게 그 언덕길을 올라간 것입니다. 시몬은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억울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했을 것입니다.

(3) 그러나 시몬은 이 십자가로 인하여 그의 인생에 놀라운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① 시몬은 십자가를 억지로 지고 가면서 그 십자가를 짊어진 주인공인 예수를 가까운 거리에서 만나볼 수 있었습니다. 주님의 온유하시고 인자하신 모습을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억울하다는 기색도 없이 오히려 로마군병이나 자기를 희롱하는 무리들을 측은하게 바라보는 모습도 보았을 것입니다. 그는 이 십자가를 지고 예수와 함께 골고다에 올라가면서 이 청년에 대하여 좀더 자세히 무엇인가 알고싶은 마음을 가졌을 것입니다.

② 시몬은 그 후 주님의 제자가 되어 복음을 위하여 수고한 그리스도의 일군이 되었음을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시몬은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라고 했습니다(막15:21).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에 편지하면서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고 했습니다(롬16:13). 이 구절을 보면 시몬의 아들 루포는 바울이 편지를 보낼 당시 로마에 살았으며 그 어머니는 이 사도 바울을 도와 준 여인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결 론 : 아마 이 시몬은 자기가 주님의 그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에 올라간 일에 대하여 한 평생 감사히 여기며 영광스럽게 생각한 것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이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고 말씀했습니다(벧전4:14).


≈ 204 ≈ 바라바를 선택한 유대인들

(본문 : 마태복음 27 : 33 - 44)

33. 골고다  해골의 곳이라는 곳에 이르러

34. 쓸개 탄 포도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하지 아니하시더라

35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36 거기 앉아 지키더라

37 그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를 붙였더라

38 이 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39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40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41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42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43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44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서 론 : 주님은 십자가에서 매우 목마르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 전날부터 물을 마시지 아니하신 탓도 있지만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므로 그 몸에 수분이 갈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목마르신 고통에 “내가 목마르다”고 하셨습니다(요19:29). 그때 그 옆에서 주님을 희롱하던 무리들은 주님께 쓸개 탄 포도주를 주어 마시게 하려 했습니다. 주님은 맛을 보시고 마시고자 아니하셨습니다. 쓸개 탄 포도주는 십자가에 달리는 죄인 중 고통을 당하는 사람에게 그 고통을 덜어 주는 하나의 마취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이것을 마시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을 마시지 아니하셨습니다.


1. 십자가 아래서 벌어진 일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모습을 보려고 모여든 잔인한 구경꾼들이 십자가아래서 가지각색의 모습을 들어내 놓고 있었습니다.

(1) 예수님의 가장 가까운 곳에는 같은 십자가를 지고 고통을 당하는 두 강도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자기 자신도 고통을 당하면서도 자기들 옆에 계시는 주님을 향하여 욕하고 희롱했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의 친구라는 비방을 들으셨지만 십자가에서는 그 죄인들로부터도 배척을 당하신 것입니다.

(2) 십자가 아래에는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로마 군병들이 희희낙락하며 하나의 게임을 벌리고 있었습니다. 그 게임이란 십자가에 못박은 예수님의 옷을 나누어 갖는 제비 뽑기였습니다. 그들은 십자가에 못박은 죄수들을 마지막으로 지키기 위하여 그 자리에 앉아서 이처럼 제비를 뽑고 있었던 것입니다.

(3) 십자가 곁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했습니다. 이 비정한 인간들은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시는 주님을 향하여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 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 오라”고 모욕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이 같은 말은 하나의 조롱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오지도 못하는 그리스도가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들의 이 말은 “네가 이스라엘을 구원할 줄로 알았는데 십자가에서 죽느냐? 네가 그래도 이스라엘의 메시야라고 말할 수 있느냐”는 조롱인 것입니다. 그들의 말은 네가 그리스도 여든 잔말 말고 그 십자가에서 내려와야 할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4)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도 함께 희롱했습니다. 이 백성의 지도자들은 가짜 메시야가 어떻게 죽는가? 그 모습이나 보려는 생각으로 득의 만만한 모습으로 골고다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확인하고는 회심의 미소를 띄우면서 승리에 취했습니다. 그들은 다 같이 이처럼 희롱했습니다.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이 얼마나 악의에 찬 희롱이며 자신만만한 면전 모욕인가?

남을 구원했다는 말은 주님이 많은 병자를 권능으로 고쳐 주신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 같은 사실을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친히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같은 주님의 권능이 하나님의 권능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바알세불을 힘입었다고 비방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남을 구원하였다는 말은 하나의 희롱인 것입니다. 그런 일이 하나님의 권능으로 이룬 기적이었다면 너 자신은 어찌하여 그처럼 무력하게 십자가를 지느냐는 것입니다. 그들은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고 조롱했습니다. 주님의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고 쓰여진 죄패를 보고 그처럼 조롱한 것입니다(37).

그들은 또 주님을 향하여 십자가에서 내려 오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고 외쳐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무력하게 십자가에 달리신 모습을 바라보고 그가 가짜 메시야이신 것이 분명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내려 올 일은 불가능한 것으로 알고 내려와 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 주님이 십자가에서 내려왔다고 해도 그들은 결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지는 아니했을 것입니다.


2. 쓸개 탄 포도주를 마시지 아니한 이유

주님은 목마르셨을 때 그들이 내민 잔에 쓴 포도주가 들어있어 그 맛이 쓰셨기 때문에 마시지 아니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마시면 십자가에서 당하시는 그의 고통이 해소될 것이기 때문에 거절하셨던 것입니다.

(1) 주님은 그의 죽으심을 통하여 죄인의 죄를 사유하실 수 있기 때문에 그 자신이 몸소 십자가의 모든 고통을 당하셔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고통을 쓸개 탄 포도주로 피하려 하지 아니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밤 검을 빼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떨어뜨린 베드로를 향하여 “검을 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주신 잔을 지금 마시면서 고통을 덜어 주는 쓴 포도주를 들지 아니하신 것입니다(요18:11).

예수님은 우리를 향하여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 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16:24). 주님이 나를 위하여 이처럼 고통을 온전히 당하셨거늘 우리도 주님을 위하여 나에게 젊어진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에게 십자가가 다가오면 이 쓸개 탄 포도주를 우리 입에 가까이 가져다 대줍니다. 고통 없이 십자가를 지라는 유혹입니다. 십자가에는 고통이 따라야 그것이 참 십자가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십자가의 고난을 이기면 말할 수 없는 축복과 영광이 오는 것입니다(벧전4:13-14).

(2) 주님은 그가 겪으시는 고통까지도 죄인을 위한 대속 제물로 필요한 것이었기 때문에 이 포도주를 마시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께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의 고통이 필요했습니다. 성경을 응해야하기 때문입니다(시22:1. 막 15:34). “그가 찔림은 우리 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고 말씀했습니다(사53:5).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바로 이 고통을 당하셨기 때문에 그가 당하시는 고통을 감하실 수가 없으신 것입니다.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하셨습니다(빌2:8). 죽기까지 복종하신 이 복종은 십자가에서 당하시는 고통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결 론 : 우리에게는 이따금 십자가가 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 의 믿음의 분량대로 우리가 져야할 십자가를 주십니다. 우리가 지는 십자가에는 몇 가지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로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는 훈련으로 주십니다. 우리는 이 인내의 훈련에 합격해야 합니다. 다음에 주님은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주십니다. 우리들이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일은 은혜를 받게 하실 뿐 아니라 고난도 받게 하시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빌1:29).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게 하시는 또 다른 이유는 주님의 영광에 동참하게 하시려는 뜻에서인 것입니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고 말씀하고있습니다(롬8:17-18). 주님은 우리에게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인내로, 기도로, 믿음으로 이기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 205 ≈ 두 강도의 경우

(본문 : 마태복음 27 : 44)

44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서 론 : 주님의 십자가 곁에 두 강도가 등장합니다. “이 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고 했습니다(38). 예수님이 하필이면 강도범과 함께 십자가에 달리시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왜 두 명의 강도가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달려 예수님이 그 중앙에 계시는지? 이 또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여러 가지로 우리에게 큰 의미를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1. 두 강도는 인류를 대표한 죄인들의 모습이다.

이 두 강도는 바로 인류를 대표한 죄인들의 모습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두 명의 죄인은 참으로 정죄 받은 죄인들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마땅한 인간들입니다. 이런 죄인이 죄 없으신 예수님과 나란히 좌 우편에 십자가에 못 박힌 일은 결코 우연이거나 아무 의미 없는 일이 아닌 것입니다.

(I) 이 두 명의 강도는 이미 죄인으로 하나님의 정죄 하심을 받은 우리 인간들을 말해 줍니다.

① 우리 인간은 모든 사람이 예외 없이 아담 안에서 죄인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롬5:12). 우리는 마땅히 아무 소망이 없는 이 두 강도처럼 하나님의 정죄 하심을 이미 받은 사람들이요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처럼 우리도 똑같이 그같은 저주를 받을 사람들임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② 두 강도의 경우는 바로 죄 값은 사망임을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라”고 말씀했습니다(롬6:23). 우리는 이미 이 사망의 선고를 받은 인간들입니다.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낼 존재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모든 사람이 아담 안에서 죄인 되었기 때문이며 죄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③ 이 두 강도가 인류의 죄를 말해준다면 우리 인간에게는 절대로 의인이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고 말씀하셨습니다(롬3:10-12).

(2) 이 두 강도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인류가 두 길로 갈라진 사실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두 강도에 대하여 누가 좌 우편에 서 있었는지에 대하여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편의상 구원받은 강도에 대하여 오른편에 있었던 것으로 말하고 있으며 멸망 받은 강도를 왼편에 있었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처럼 생각하는 일은 매우 성경적이라 보겠습니다(마25:31-46).

①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왼편에 있는 강도는 율법의 정죄를 받아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자들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율법은 그리스도인들을 정죄하지 못하지만 율법이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율법의 정죄에서 벗어났지만 그러나 모든 사람이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난 것은 아닙니다. 율법은 세례요한의 때까지만 존재 가치가 있지만 그 이후의 세대에 이 율법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닙니다(마5:17-18).

그리스도가 없는 인간들은 율법의 정죄나 율법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롬2:12).

② 그리고 오른편에 달린 강도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 그리스도의 의를 소유한 사실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다 죄인이며 그 죗값은 한결같이 사망입니다. 하나님의 의에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의를 소유해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의를 소유할 수 있는 하나님의 방법이 선포된 것입니다(롬3:21-24).

우리는 영원히 정죄 받을 강도 같은 자들이지만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들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 서실 때 그의 왼편 강도를 통하여 율법의 저주로 영원히 멸망 받을 인간의 길을 보여 주셨고, 오른편 강도를 통해서는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얻어 생명을 얻는 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모든 인류는 골고다 언덕 위에 세워진 이 세 십자가를 바라보고 그들의 갈 길이 어느 길인가에 대하여 사망의 길이든지, 생명의 길이든지 선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③ 우리는 어 두 강도의 경우로 볼 때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일은 모든 인류를 위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을 위한 특별하신 은혜인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두 강도가 다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 중에 한 강도만 구원을 받은 사실이 이를 증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영생이 작정된 자가 있음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행13:48).


2. 두 강도가 택한 길

두 강도가 죄를 범한 일은 일치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형에 사형 언도를 받은 일도 같았습니다. 또 그들이 처음에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을 비방한 일까지도 마찬가지었습니다. 그러나 이 두 강도는 운명의 최후의 순간에 그들의 길이 나뉘어지게 된 것입니다.

(1) 왼편쪽 강도는 끌까지 회개를 못했습니다. 이 강도는 예수에 대한 비방과 조롱이 죽기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이 강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주어졌지만 스스로 거절하고 멸망의 길을 택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이 강도처럼 예수를 믿을 기회를 스스로 거절함으로 사망의 길을 가고 있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은 것입니다.

(2) 오른편 강도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에게 자기 인생을 의뢰했습니다. 이 강도는 그 한편 강도와 동일 범이요 그와 함께 예수를 조롱한 사람이었지만 그는 얼마 후에 마음의 변화를 받아 그리스도를 영접했습니다.

① 그는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했습니다. 그는 한 동료를 꾸짖으며 이처럼 말했습니다. “네가 통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죄를 바라보고 회개했습니다.

② 그리스도에게는 죄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고 말했습니다.

③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믿었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라고 말했습니다.

④ 그는 그리스도의 공로로 그곳에 갈 수 있음을 믿었습니다. 그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해 달라고 간구한 그의 기도 내용에서 이것을 찾을 수 있 는 것입니다.

⑤ 그는 믿음으로 의를 얻었습니다. 그 확실한 증거로 예수님은 그를 향하여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오랜 세월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심령의 변화는 순간적일 수도 있습니다. 이 같은 역사는 성령의 역사이십니다.


결 론 : 우리는 이 두 강도 중 과연 어느 강도의 경우에 해당된 사람들인가에 대하여 자신을 살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고후13:5). 우리는 모두 이 강도들처럼 멸망을 받을 존재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온전히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선물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 206 ≈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본문 : 마태복음 27 : 45 - 49)

영혼이 떠나시다

(막 15:33-41; 눅 23:44-49; 요 19:28-30)

45 제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되더니

46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47 거기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48 그 중의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면을 가져다가 신 포도주에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거늘

49 그 남은 사람들이 이르되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


서 론 : 예수님은 아직도 골고다 언덕 위에 세워진 십자가 위에 못 박히신 채 달려 계십니다. 그의 고통은 날로 더 심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고통 중에서도 예수님은 자기를 해롭게 한 무리들을 바라보시며 아버지께 자비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그는 강도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약속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 죄인들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까지 많은 일을 하셔야 했습니다. 갑자기 세상이 어두워졌습니다. 사람들은 너무나도 놀랜 나머지 어찌할 줄을 몰라했습니다. 그런데 그 어두움이 걷힐 시간이 이르게 되었을 때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입에서 하늘이 찢어질 듯한 비통한 부르짖음이 적막한 공기를 가르고 모든 사람들의 가슴을 찔렀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나님께 버림받으신 주님의 고통의 외치심이었습니다. 인류의 역사가 있어온 이래 이처럼 애절한 고통의 외침이 있었겠는가? 이 고통의 부르짖음은 아직까지도 온 세상에 메아리쳐 올려 퍼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십자가에서 들려오는 이 주님의 고통의 외치심을 듣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그 주님 앞으로 돌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1. 세상에 임한 어두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시간은 제 삼 시였습니다(막15:25). 이 시간은 현재 시간으로 오전 9씨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세 시간이 지난 후인 제 육 시(12시를 가리킴)에 이 세상에 어두움이 임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어두움은 세 시간이나 계속되었습니다. 제 9시에 걷히게 되었고(3시경) 그 때 주님이 운명하셨습니다.

이 어두움은 하나님의 진노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을 향하여 무섭게 진노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진노는 곧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골고다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겨냥하여 죄인들에 대한 진노의 심판을 퍼부으셨습니다. 그는 지금 하나님의 아들로서가 아니라 온 죄인의 죄를 대신 젊어진 온 인류의 죄의 대표자로서 이 진노를 당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같은 진노의 심판을 그 아들에게 부으심으로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 같은 죄인의 심판을 대신 받으시는 것으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롬5:7-8).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고 했습니다(요일4:10). 예수님은 이 어둠을 견디시기 어려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버리시는 순간이요 무서운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셔야 할 고통의 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2.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제 6시부터 제 9시까지 계속된 어두움이 가실 즈음인 그 시간에 예수님은 큰 소리를 질러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외치셨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의 뜻이 곧 풀이되고 있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1)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극진히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주님이 세례 받으실 때에도, 또 변화산에 올라가셨을 때에도 아들에 대한 사랑을 말씀으로 들려 주셨습니다.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3:17). 예수님은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의 나타내심으로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늘 위에서나 하늘 아래에서 예수님 보다 아버지의 사랑을 더 받는 존재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요1:18).

(2) 하나님은 그의 아들과 항상 함께 계셨습니다. 주님은 태초에도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했습니다(요1:2). 예수님은 그의 공생애 중 제자들에게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신다”고 하시는 말씀을 가끔 들려 주셨습니다(요6:16-29, 16:32). 예수님은 아버지의 보내신 자이시기 때문에 아버지가 그를 버리실 수는 없으십니다. 주님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아버지의 일을 위하여 세상에 오셨으므로 아버지가 그와 함께 하셔야 했습니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버리신 것입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시는 그의 아들을 버리신 것인가? 그것은 십자가 위에 달리신 그 아들을 아들로 보신 것이 아니라 죄인으로 보셨기 때문입니다. 비록 순간적이지만 하나님은 이 때 예수를 아들로 보시지 않고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아야할 죄인으로 보셨던 것입니다. 실로 예수는 죄인으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으신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죄인으로서의 심판을 받았음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게 된 것입니다(요3:18. 롬6:6). 예수님이 이 때 버리심을 당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처럼 그의 아들까지라도 버리실 수 있었던 것은 우리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그만큼 컸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은 요한복음 3:16절에 너무나도 명백하고 선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4) 주님의 이 외치심은 그의 고통 속에서 부르짖은 소리였습니다. 예수님의 고통은 육적인 면에서 보다 영적인 면에서 더욱 심하셨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비극적인 말이 있다면 그것은 가장 사랑하는 이로부터 버림 당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이 어두움 속에서 그런 고통을 당하신 것입니다. “이제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했다”고 하는 순간적인 생각은 그의 영혼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을 안겨주어 견딜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외침은 바로 여기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이처럼 버리심을 당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결코 하나님께 버리심을 당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성경은 이 일에 대하여 이처럼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8:1). 이처럼 주님이 우리 죄를 대신 지셨을 뿐 아니라 우리 죄에 대한 완벽한 형벌(그의 피 흘리심과 사망의 고통)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다만 이 사실을 믿고 주님을 영접만 하면 우리의 모든 죄가 사유함을 받으며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받을 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기업의 후사가 되는 것입니다.


결 론 : 하나님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벌하셨으며, 우리가 받아야 할 죄 값을 다 치르게 하셨습니다. 아무 죄도 없으신 우리 주님은 다만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채 그 모진 고통과 하나님의 버리심을 감당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당하신 십자가 위의 고통은 모든 죄인들이 자기의 최 값으로 지옥에 들어가서 영원히 당해야 할 고통만큼이나 큰 것이었습니다. 이제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죄 값으로 지옥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이 예수님의 사랑을 거역한 죄 값으로 지옥에 가게 되는 것입니다. 아, 이 놀라운 우리 주님의 사랑이여, 사도 바울은 이처럼 감격했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 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선언했습니다(롬8:35-39).


≈ 207 ≈ 찢어진 성소 휘장

(본문 : 마태복음 27 : 50 - 56)

50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51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52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53 예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54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55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

56 그 중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


서 론 : 영국에서 태어난 찬송 작가 해벌거 양은 “내 너를 위하여”란 찬송가185장을 작사한 사람입니다. 그가 몸이 심히 쇠약했을 때 아버지의 권유로 세계 여러 곳으로 여행을 떠난 일이 있었는데 이 때 독일 뒤셀돌프에 있는 어느 목사님 댁을 방문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곳에서 그녀는 목사님 서재에서 가시간을 쓰고 계시는 “엑케이 호모”란 이름이 붙여진 주님의 성화를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성화 아래에는 두 줄로 짤막한 좌우명이 쓰여져 있었습니다. “나 너를 위해 이 일을 햇것만 너 날 위해 무엇을 했느냐” 해벌거 양은 말할 수 없는 마음의 충격을 받아 그 순간 영감이 떠오르는 대로 종이에 찬송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해벌거 양이 독일 목사님 서재에서 쳐다 본 ‘엑케이 호모’란 성화는 슈테른 베르크의 작품으로 그 그림의 이름인 ‘엑케이 호모’란 말은 라틴어로 ‘이 사람을 보라’고 하는 뜻입니다. 해벌거 양은 이때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길을 주었다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는 찬송시를 썼던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리시고 이제 큰 소리와 함께 영혼이 그 몸을 떠나셨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그의 영혼이 그를 떠나신 후에 더욱 놀라운 사건들이 일어났습니다.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겨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성소 휘장이 위로 아래까지 찢어지다.

예수님의 운명하심과 함께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겨진 일은 참으로 놀라운 사실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 성소 휘장이 찢겨진 일은 이제는 구약적인 희생 제물은 필요 없으시다 는 하나님의 선언이십니다. 휘장은 지성소와 성소간에 가로막힌 하나의 칸막이를 말합니다. 그러나 이 칸막이는 우리에게 중대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은 매해 한차례씩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를 속함 받기 위해 그 지성소 안에 들어가 하나님께 속죄 제물을 드렸습니다. 이때 대제사장은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잡아 그 피를 가지고 들어갔으며 또 백성들을 위해서는 염소를 잡아 그 피를 가지고 이곳에 들어가 속죄 제물로 삼았던 것입니다. 이제 주님의 죽으심으로 성소 휘장이 찢어져 지성소와 성소와의 차별이 없어졌습니다. 이제 대제사장이 그 곳에 들어갈 필요도 없게 되었고 백성들의 죄를 위해 염소의 피를 가지고 들어갈 필요도 없게 된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써 그 백성들의 영원한 속죄제물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2) 성소 휘장이 찢겨진 일은 땅 위의 지성소가 하늘로 옮겨졌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원래가 땅의 지성소는 하늘의 지성소의 모형입니다(히8:5-6). 땅 위에 존재했던 지성소는 예수님이 오셔서 하늘의 지성소의 대제사장이 되실 때까지만 필요로 했던 곳입니다(히9:11-12).

지성소에 들어가 일했던 이 땅 위의 대제사장은 예수님이 멜기세댁의 반차를 쫓은 대제사장으로 등장하심으로 그 존재 의의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들 대제사장은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하나의 모형이었기 때문에 실체가 오신 후에는 모형은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히9:1-10). 지성소가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모형으로 세우게 하셨던 땅 위의 지성소가 없어졌으며 그 곳에서 일하던 대제사장만이 없어졌을 뿐 우리의 참 지성소가 하늘로 옮겨졌으며 주님께서 친히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하늘의 지성소에 들어가신 것입니다. 이 대제사장은 영원히 변치 않으실 분이요 그가 가지고 들어가신 속죄 제물도 그의 피를 가지고 들어가셨기 때문에 영원한 속죄 제물로 다시는 그 어느 무엇도 속죄 제물로 드릴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히7:23-27).

(3) 성소 휘장이 찢겨진 일은 하나님과의 원수의 담이 무너진 사실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인간이 죄를 범하므로 하나님과 원수 된 관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골1:20). 그러므로 성소의 휘장은 바로 우리 인간이 죄악의 담으로 인하여 절대로 하나님께로 넘어갈 수 없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이 담을 허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의 영원한 속죄 제물이 되심으로 허신 것입니다(골1:20-22).

(4) 성소의 휘장이 찢겨진 일은 아버지께로 가는 새롭고 산 길이 열려진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고 말씀했습니다(히10:20). 주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4:6). 예수님께서 자신의 육체를 십자가에서 찢어 하나님께 화목 제물로 드리심으로 지성소의 휘장을 찢으시고 그가 친히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 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가는 길은 다른 길이 절대로 없습니다. 예수님이 그의 몸으로 찢어 놓으신 휘장 가운데로 가는 길만이 참 길인 것입니다. 휘장 가운데로 간다는 말은 그 휘장을 찢으신 예수님을 통해서만 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5) 성소의 휘장이 찢어짐으로 이제는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 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화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고 했습니다(히4:16). 오직 대제사장만이 일년에 한번만 들어 갈 수 있었던 그 자리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언제든지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도 땅의 지성소가 아니라 친히 하나님이 계시는 그리고 우리의 대제사장이 계시는 은혜의 보화 앞에 나아 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2. 다른 사건들

주님이 운명하신 직후 일어난 사건은 비단 성소 휘장이 찢어진 일만이 아닙니다. 땅이 진동하여 바위가 터지는 지진이 있었고 무덤들이 열려 자던 성도들의 몸이 많이 일어나는 일도 생겼습니다.

무덤이 열려 자던 성도들의 몸이 많이 일어난 사건은 놀라운 일입니다. 모든 주석가들은 이 대목의 말씀에 대해 주석을 피하고 있습니다. 너무 난해한 문제로 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록된 말씀 안에서 이 문제를 잠깐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로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시 무덤에 묻혀 있었던 사람 중 주님의 부활시 무덤에서 살아난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이 성도들이란 물론 구약성도들을 의미하고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존시에는 그를 믿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만한 많은 성도들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이들이 부활한 몸으로 살아난 것이 아닌 것은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이시며 그 다음에 부활할 자로는 주님이 강림하실 때 그에게 붙은 자들로 말씀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고전15:20-24). 그들이 그 후에 어떻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성경에 아무 말씀이 없으므로 우리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다음에 끝까지 그 곳에 남아 있었던 사람들에게 새로운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 곳에 남아 있었던 사람들은 로마 군병의 지휘자인 백부장과 

주님을 채찍으로 때리며 희롱하며 주님의 옷을 제비뽑은 무리들, 

곧 로마 군병들과 갈릴리로부터 온 많은 여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결 론 : 우리가 알아야 할 일은 이제 우리의 지성소는 하늘에 옮겨졌다는 사실과 

그 장소에는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해 주시는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 계시다는 사실입니다(롬8:34. 히7:25. 요일2:1). 

우리 인간의 구원의 길은 

예수님께서 그의 몸으로 찢어 놓으신 휘장으로 들어가는 새롭고 산길이요 

이 길만이 하나님의 보화에 이르는 길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길을 열어 놓으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시어 고난을 당하셨고 

그가 이 일을 다 이루었을 때 

성소의 휘장이 찢어져 그 길이 열린 것입니다.


≈ 208 ≈ 예수님의 무덤

(본문 : 마태복음 27 : 57 - 66)

요셉이 예수의 시체를 무덤에 넣어 두다

(막 15:42-47; 눅 23:50-56; 요 19:38-42)

57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58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에 빌라도가 내주라 명령하거늘

59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60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

61 거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


경비병이 무덤을 지키다

62 그 이튿날은 준비일 다음 날이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이르되

63 주여 저 속이던 자가 살아 있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64 그러므로 명령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둑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속임이 전보다 더 클까 하나이다 하니

65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에게 경비병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지키라 하거늘

66 그들이 경비병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지키니라


서 론 : 예수님이 죽으신 후에 그의 무덤을 중심으로 여러 가지 일이 일어났습니다. 성경 다른 곳에서는 전혀 언급이 없었던 충성스러운 제자, 요셉이란 사람이 등장하여 주님의 시체를 장사지내는 아름다운 모습이 나오는가 하면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의 무리들이 빌라도를 찾아가 예수의 무덤을 지키는 일의 허락을 받아 무덤을 막은 돌에 인봉하고 파수꾼으로 무덤을 굳게 지키게 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1. 아리마대 부자 요셉의 등장

예수님의 죽으심과 함께 우리가 반드시 생각되는 인물로 아리마대 부자 요셉이란 사람을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1) 그는 예수의 제자라고 했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예수의 제자 중에는 많은 사람의 이름이 성경에서 누락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한번의 동장도 없었던 제자 중에 이처럼 믿음이 훌륭하고 실천적인 사람이 있었는가? 생각되리 만치 그의 등장은 복음서를 마무리짓는데 있어서 너무나도 아름다운 기록이 아닐 수 없습니다.

(2) 그는 존귀한 공회원이라고 했습니다(막15:43). 공회원이란 이스라엘의 최고 재판 기관이요 종교적 의결 기관인 ‘산혜드린공회’의 의원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곳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후 빌라도의 재판 석에 스셨습니다. 이 기관은 이스라엘의 가장 존귀한 사람들, 대제사장, 서기관들, 백성의 장로들이 모여 유대인들의 당면한 중대사들을 처리하는 곳이기에 그 회원들이야말로 이스라엘의 존귀한 자란 존칭을 받을 만 했습니다.

(3) 그는 예수를 죽이려는 그들의 결의에 가타 아니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눅23:50-51). 예수를 잡아 공회에서 예수님을 재판할 때 그들은 관례에 의하여 다수결로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결코 만장일치의 결의를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이 요셉이란 사람은 분명히 부표를 던졌기 때문입니다. 그는 쟁쟁한 유대인들의 무리 앞에서 예수를 정죄하는 표결에서 가타 아니한 것입니다(마 10:32-33).

(4) 요셉은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막15:43). 신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표현된 곳은 어떤 천국의 모습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메시야를 대망하는 사람들의 영적인 믿음의 상태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같은 사람들은 예수를 통하여 그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수 있습니다.

(5) 요셉은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라고 했습니다(눅23:50). 바리새인들이나 공회원들은 시기가 가득한 자들이었고, 외식하는 자들이었으며, 거짓 증거에 능숙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재판할 때 찾은 것은 거짓 증인들이었으며, 잡다한 거짓 증거로 예수님올 정죄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요셉이란 사람은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선하고 의로운 열매를 맺는 생활을 하고 있는 공회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결코 그들 무리들과 함께 예수를 죽이는 일에 가타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 요셉이 단신 빌라도를 찾아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관원들에게 잡힐 두려움으로 지금 어디 숨어 있는지 조차 알 수 없는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요셉이 겹도 없이 빌라도를 찾아가 예수의 시체를 당당히 요구한 일은 그의 결사적인 각오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진실한 충성됨은 어려운 일이 일어났을 때 찾아보게 됩니다. 베드로는 안일한 가운데서는 주를 위해 죽겠다고 다짐하고 맹세했지만 그에게 위험이 왔을 때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평소에는 제자로 자신을 나타내지 아니했지만 예수님의 시체를 장사지내는 가장 어려울 때 어느 누구하나 손을 쓰는 사람이 없는 그 위기에 그가 흔연히 나타나 그의 담대함을 보여준 것입니다.


2. 무덤에 끝까지 남아 있었던 여인들

(1) 가슴을 치며 졸아간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어두움이 세 시간 동안 깔렸을 때 많은 사람들은 가슴을 두드리며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이를 구경하러 모인 무리들도 그 된 일을 보고 다 가슴을 두드리며 돌아갔다”고 했습니다(눅23:48). 어둠이 세상에 깔린 일은 때가 한 낮이었습니다. 이 어둠은 골고다 언덕뿐 아니라 모든 언덕과 계곡에까지 덮였습니다. 온 세상이 어두움으로 캄캄해진 것입니다. 누구라도 장님처럼 더듬지 않고는 길을 걸을 수 없었습니다. 주님을 조롱하던 무리들의 입이 닫혀졌습니다. 제비를 뽑던 로마 군병들의 손이 내려졌습니다. 머리를 흔들며 주님을 모욕하던 무리들도 어리벙벙했습니다. 그들은 이 돌연한 사태에 공포심을 가지게 되었고 자신의 비이성적인 행동을 돌이켜 바라볼 수 있게 하였습니다. “저들이 가슴을 치며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2) 나중에 백부장과 그의 부하들인 로마군병들도 철수했습니다. 백부장은 그 된 모든 일을 친히 보고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말하기를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고 고백하면서 끝까지 지키고 있다가 부하들과 함께 골고다에서 철수했습니다.

(3)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만이 끝까지 주님의 무덤 앞에 있었습니다. 이제 해는 서쪽으로 기울고 땅거미가 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주님의 시체는 십자가에 달린 채로 골고다 언덕 위에 서 계시는 것입니다. 이 시체를 그대로 두고 갈 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로 나온 몇 명의 여인이었습니다. 안타까운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이 때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 여인들은 요셉의 하는 모든 일을 먼 거리에서 지켜보았습니다.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 뒤를 쫓아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둔 것을 보고 돌아갔다”고 했습니다(눅23:55).

주님 곁에 끝까지 남은 일은 어려운 일입니다. 처음에는 잘 따르다가도 얼마안가 떠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다 주님의 곁을 떠나고 다만 열 두 명의 제자들만 그의 곁에 남았을 때 주님은 그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요6:62).


3. 무덤을 지킨 파수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이제 예수가 완전히 죽은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그 시체를 누군가에 의하여 무덤에 장사되어 있는 것도 확인했습니다. 모든 일이 잘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에 게 한 가지 걱정이 가시지 아니했습니다. 그 걱정이란 그들이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말로 예수가 평소에 죽은지 사흘만에 다시 사신다고 말씀한 일입니다. 물론 그들은 그 말을 곧이 들을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염려는 그의 제자들이 그 시체를 홈쳐간 후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했다고 선전하면 뒤가 시끄러워 질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들은 서로 의논한 후 빌라도를 찾아가 건의하기로 했습니다. 그 무덤을

  

 

마태복음 28장 설교

◆ 밤중소리 03-01 | VIEW : 4,863

≈ 209 ≈ 부활의 아침(본문 : 마태복음 28 : 1 - 10)

≈ 210 ≈ 주님의 지상명령(본문 : 마태복음 28 : 11 - 20)


≈ 209 ≈ 부활의 아침

(본문 : 마태복음 28 : 1 - 10)

1 안식일이 다 지나고 

1)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2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3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4 지키던 자들이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5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6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7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8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할새

9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10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서 론 :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 새벽 주님이 묻히셨던 무덤 주변에는 여러 가지 이변이 생겼습니다. 시체를 제자들이 도적질해 가지고 가서는 나중에 예수가 부활했다고 거짓 선전할 것을 염려하여 빌라도에게 허락을 받고 파송한 특별 경비병들이 삼엄하게 그 무덤 둘레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새벽녘에 갑자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 무덤을 막았던 큰 돌을 굴려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그 옷은 회기가 눈 같으며 그 형상이 번개같아 수직하던 자들은 무서워 떨며 죽은 사람같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 천사가 무덤을 찾은 여인들에게 들려준 말은 실로 놀라운 말이었습니다.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고 말해 준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것입니다.

  

1. 새벽에 무덤을 찾은 여인들

막달라 마리아와 또 다른 한 명의 마리아는 무덤을 보려고 안식일이 다하여가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미명에 주님의 무덤을 찾았습니다. 안식 후 첫날은 일요일을 말하고 첫날이 되려는 미명이란 일요일 새벽을 가리킵니다. 이들이 무덤에 온 그 시각에 놀라운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1) 주님의 부활 사건을 제일 먼저 바라본 사람들은 수직했던 파수꾼들이었습니다. 이 파수꾼들이 무덤을 굳게 지키고 있었던 그날 새벽에 그 형상이 번개같고 그 옷의 회기가 눈 같은 하나님의 천사가 그 무덤에 나타나 돌을 굴려내고 그 위에 앉은 모습을 바라보았을 때 그들은 무서워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두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파수꾼들은 부활의 목격자들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다만 천사를 보고 두려워했을 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본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이 파수꾼들은 무덤에서 자기들의 눈으로 이 놀라운 사건을 바라보고 무서워 죽은 자와 같이 되었었지만 나중에 대제사장들에게 돈에 매수되어 거짓소문을 퍼 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2) 천사들은 이 여인들에게 주님이 부활하신 사실을 알려 주었습니다. 천사들이 이 여인들에게 가까이 다가와서 “‘너희 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고 말했습니다. 이 천사는 그들에게 주님이 여기 계시지 않고 다시 살아 나셨느니라 고 알려주고 “너희는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봐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3) 여인들은 제자들에게 이 소식을 전해 주려고 빨리 달음질했습니다. 그들은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무덤을 빨리 떠났다고 했습니다. 천사들의 모습과 주위 환경에서 그 여인들은 두려옴을 금치 못했지만 그러나 천사로부터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말을 듣고는 큰 기쁨에 싸여 이 두 가지가 엇갈려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무덤을 빨리 떠났다고 한 것입니다. 바로 이때 예수님이 저희를 만나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일 먼저 이 여인들에게 부활하신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2.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여인들

예수님의 부활은 바리새인들조차 알고 있었던 것처럼 주님이 친히 공개적으로 여러 번 말씀하셨고 성경에도 예언된바 있었지만 이 사실이 이루어 질 일에 대하여 믿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제자들도 믿지 못했습니다. 바리새인들도 믿지 못했습니다. 여기 찾아 나온 여인들도 믿지 못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사단도 그것을 믿지 못했습니다. 만약 사단이 주님께서 주검의 권세를 이기시고 다시 부활하실 것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사단은 결코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아니 했을 것입니다. 사단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으로 모든 승리가 자기에게 온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1) 이 여인들은 주님을 성심으로 섬겨온 여인들입니다. 예수님이 여러 촌에 다니시며 복음을 전하실 새 주님의 주변에는 열 두 제자들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또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또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고 했습니다(눅8:1-3). 이 여인들은 자기들의 소유로 복음을 전하는 일에 아까워하지 않고 사용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18:29-30).

(2) 이들은 주님과 함께 십자가의 괴로움을 끝까지 맛 본 여인들입니다. 이들은 “갈릴리로부터 따라온 여자들”입니다(눅13:49). 이들은 주님과 함께 골고다를 올랐습니다. 그리고 멀리 서서 십자가에서 당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았습니다. 그뿐 아니라 요셉이 주님을 장사 지내는 일이 끝날 때까지 지켜보았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둔 것을 보고 돌아간 여자”들입니다(눅23:55).

(3) 이 여인들은 주님의 장례를 치른 사람들입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시체를 내려다가 세마포로 싸서 자기의 새 무덤에 넣어 둠으로 장사를 지냈지만 이 여인들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고 말씀하고 있는 대로 요셉이 치른 주님의 장례에 동참한 사람들인 것입니다(마2:59-61).

이 여인들은 주님을 지극히 사랑하고 사모한 여인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두려운 마음도 떨쳐 버리고 새벽 미명에 주님의 무덤으로 달려간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잠8:17). 예수님은 이 여인들에게 먼저 평안을 물으셨습니다. “평안하뇨”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물음은 유대인들의 첫 인사말이지만 여기에는 특별한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평안을 원하실 뿐 아니라 그의 평안을 친히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 여인들은 결코 평안치가 못했습니다. 주님을 만난 이들은 이제 너무나도 큰 기쁨에 사로잡혀 정말로 평안을 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음에 예수님은 그 때까지도 두려움올 떨쳐 버리지 못하고 있는 이 여인들에게 “두려워 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이기게 하십니다. 세상을 이기는 능력이 그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라고 말씀했습니다(요일5:5).


결 론 : 우리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사망의 문을 열어제치시고 그 주검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를 믿는 종교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인류 구원의 모든 역사를 다 이루셨습니다. 복음이란 곧 주님의 대속의 죽으심과 사망 권세를 이기고 승리하신 그의 부활 사건인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사역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만이 이 지상에서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마르다에게 이처럼 말씀하신 일이 있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이 때 예수님이 무덤에 죽어 있는 나사로를 향하여 “나사로야 나오라”고 하신 말씀으로 그를 주검의 권세에서 살려 내시고 자신이 바로 부활이심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십자가에서 당하신 자신의 주검을 스스로 부활로 이기심으로 온 세계 인류에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하신 자신의 말씀을 진리로 입증하신 것입니다.


≈ 210 ≈ 주님의 지상명령

(본문 : 마태복음 28 : 11 - 20)

11 여자들이 갈 때 

경비병 중 몇이 성에 들어가 

모든 된 일을 대제사장들에게 알리니

12 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인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13 이르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둑질하여 갔다 하라

14 만일 이 말이 총독에게 들리면 

우리가 권하여 너희로 근심하지 않게 하리라 하니

15 군인들이 돈을 받고 가르친 대로 하였으니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


제자들에게 할 일을 분부하시다

(막 16:14-18; 눅 24:36-49; 요 20:19-23; 행 1:6-8)

16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러

17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18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2)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서 론 :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하늘로 올라가시기까지 40여 일간 지상에 계시면서 이모저모로 자기를 나타내시며 제자들에게 부활 신앙의 확신을 주셨고 제자들의 믿음을 견고케 하셨습니다. 주님은 갈릴리에 가셔서 주님이 명하신 산에 이르러 그의 제자들에게 지상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이 명령은 참으로 놀라운 분부이신 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도들은 이 같은 주님의 분부에 의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권위 있게 가르쳤으며 세례를 주었습니다. 오늘 날 교회에서 목사님들도 이 주님의 분부의 권위를 가지고 복음 사역을 담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1. 거짓 소문으로 퍼지게 한 그리스도의 부활

안식일 첫 날 새벽에 천사의 나타남으로 놀람과 두려움으로 기겁을 하여 도망친 파수꾼들은 이 사실을 보고하기 위하여 먼저 대제사장을 찾아갔습니다. 이 문제로 말미암아 산헤드린 공회가 다시 모였습니다. 파수꾼들이 전해 준 사건은 너무나도 엄청난 일이었음으로 믿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들은 아마 누구인가를 급히 현장에 보내어 사실을 확인했을 것입니다. 파수꾼들이 말한 그대로인 것을 알게 된 그들은 몹시 당황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급한 일은 사태의 수습입니다.

그들은 이 사실을 목격한 파수꾼들이 입을 열어 이 소문을 성안에 퍼뜨리면 그야말로 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의 추종자들로부터 집단 항의를 받을는지 모릅니다. 더 심한 경우에는 민란이나 소요가 일어날는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뿐 아니라 이 말이 빌라도의 귀에 들어가면 그로부터 책임 추궁을 당할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의 지혜를 쨌습니다. 그들의 지혜란 언제나 거짓의 아비인 마귀로부터 온 것입니다. 먼저 파수꾼들의 입을 봉하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뇌물을 주어야 했습니다. 그들은 파수꾼들에게 많은 돈을 주었습니다. 대제사장이나 바리새인들이나 백성의 장로들은 무엇보다 사람의 약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들이 그 방법으로 살아 왔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장사꾼들로부터 많은 뇌물을 받으면서 하나님의 성전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파수꾼들에게 하나의 거짓말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적질하여 갔다 하라”고 일러주었습니다. 예수의 시체가 없어진 일에는 타당성 있는 합리적인 변명이 필요했으며 이에 따른 증인이 따라야 했습니다. 이제 그들은 이 사건을 완벽하게 처리 한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에 예루살렘성에 퍼지는 예수의 부활의 증인들의 증거를 그들은 파수꾼의 거짓말 증거로 메울 수가 없었습니다.


2. 주님의 지상 명령

가룟 유다가 빠진 열 한 제자가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갈릴리로 갔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명하신 산에 이르러 주님을 만나 뵙고 경배했습니다. 이 때에 그들에게 주님의 장엄하신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이 주님의 명령은 그 후 모든 세대를 걸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주님의 권위로써 그의 몸 된 교회에서 지켜지고 있습니다.

(1) 예수님은 하늘과 땀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원래가 이 권세는 주님의 것이었습니다. 그가 잠정적으로 사람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내려오심으로 얼마간 유보되었던 권세입니다. 예수님은 성자 하나님이시면서도 스스로 종의 자리에 내려 앉으셨기 때문에 권세를 사용치 않으신 것입니다. 주님이 그 사역을 다 마치시고 부활하셨으니 그 권세가 다시 주님께 돌아오심이 당연한 일입니다.

(2) 주님은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주님의 명형은 이 지상에 계셨던 때와는 다르십니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으로 명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가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우리를 그의 전권대사로 세상에 보내시는 명령이십니다. 주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20:21).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을 이제 그의 하나님 된 명령으로 세상에 보내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마치 아버지께서 그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일과 같은 뜻으로 하신 말씀이십니다.

(3)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족속이란 유대인의 담을 넘은 모든 인류를 말합니다. 그들을 제자를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란 그리스도의 제자를 말합니다. 복음을 믿는 사람은 모두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4)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율법적인 결례는 마땅히 없어졌습니다. 세례는 그 기원이 정결케 하는 결례 의식에서 나왔지만 세례를 통하여 신앙 고백의 표로 삼으라고 세례를 명하신 것입니다. 결례는 구약에서 부정한 사람이 이로써 깨끗해진다고 하여 행해 온 것입니다. 그러나 참 깨끗케 하시는 하나님의 결례는 오직 그리스도의 피로 씻는 일입니다. 이제 주님은 깨끗함을 얻는 표로서가 아니라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신앙 고백으로 이 세례 의식을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라”고 하신 말씀대로 세례를 받는 일은 마땅한 일인 것입니다(마10:32).

여기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룸으로 주라고 하신 말씀은 바로 성삼위 되시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주라고 하신 것입니다. 아들이 없는 자는 아버지가 없는 자이기 때문에 세례를 받은 자격이 없습니다. 아들을 보내셔서 그 사랑으로 죄인을 구원하시는 그 하나님을 믿으려면 아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복음을 주셔서 이를 깨닫게 하시고 믿음을 주시는 하나님을 믿으려면 성령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인간에게 주시는 구원의 역사는 한 본체를 이루신 한 하나님 되신 성부, 성자, 성령으로 말미암은 역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믿고 사람 앞에서 고백하는 세례는 마땅히 성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해야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백성 된 표로써 할례를 받은 것처럼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 된 표로써 이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5)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분부하신 것은 주님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그것을 가르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곧 말씀의 강론입니다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고 하신 말씀대로 주님의 말씀을 가르치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믿음을 줄 수 없습니다. 지키게 하라고 하신 말씀은 순종을 말합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이 주님의 분부를 이행해야 합니다. 말씀을 가르쳐야 합니다. 구리고 가르친 그 말씀을 순종하는 생활로 이끌어야 합니다.


결 론 :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분명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 약속은 우리에게 무한한 고무가 됩니다. 복음을 담대히 전파할 수 있는 힘이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모든 능력의 출처가 어디인가를 가리켜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시간에도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와함께 계셔서 갈릴리의 어느 산에서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바와 같이 그의 이 같은 명령을 이행할 것을 바라시는 주님의 뜻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