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新約]강해/◆ 바울서신 강해-1

★로마서 1-3장

영국신사77 2020. 4. 11. 14:52


로마서 차 례

◆ 밤중소리 03-02 | VIEW : 9,090


제 1 장(1 ~ 10)

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 (로마서 1장 : 1절 ~ 2절) 

2) 미리 약속하신 복음 (로마서 1장 : 1절 ~ 2절) 

3)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아들 (로마서 1장 : 1절 ~ 4절) 

4)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 (로마서 1장 : 5절 ~ 7절)

5) 바울의 간절한 마음 (로마서 1장 : 8절 ~ 13절) 

6) 빚진 자의 생활 (로마서 1장 : 14절 ~ 15절)

7) 복음의 능력 (로마서 1장 : 16절 ~ 17절)

8)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로마서 1장 : 16절 ~ 17절)

9) 핑계치 못할 인간의 죄 (로마서 1장 : 18절 ~ 23절) 

10) 하나님께서 버리신 인간의 마음 (로마서 1장 : 24절 ~ 32절)


제 2 장(11 ~ 16)

11) 남을 판단하는 죄 (로마서 2장 : 1절 ~ 5절)

12) 행한 대로 갚으시는 하나님 (로마서 2장 : 6절 ~ 9절)

13)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 (로마서 2장 : 9절~11절)

14) 율법과 양심에서 오는 죄 (로마서 2장 : 12절~16절)

15) 율법으로 정죄 받은 유대인 (로마서 2장 : 17절 ~ 24절)

16) 참 유대인 (로마서 2장 : 25절 ~ 29절)


제 3 장(17 ~ 20)

17) 잘못된 네 가지 질문 (로마서 3장 : 1절 ~ 8절)

18) 온 인류의 죄 (로마서 3장 : 9절 ~ 20절)

19) 나타난 하나님의 한 의 (로마서 3장 : 21절 ~ 26절)

20) 율법과 믿음의 법 (로마서 3장 : 27절 ~ 31절)


제 4 장(21 ~ 25)

21) 아브라함의 의 (로마서 4장 : 1절 ~ 4절)

22) 은혜로 주시는 하나님의 의 (로마서 4장 : 4절 ~ 8절)

23) 믿음의 의로 나타난 하나님의 언약 (로마서 4장 : 9절 ~ 14절)

24) 믿음으로 이어 받은 하나님의 후사 (로마서 4장 : 15절 ~ 17절) 

25) 아브라함의 믿음 (로마서 4장 : 18절 ~ 25절) 


제 5 장(26 ~ 36)

26) 하나님과의 화평 (로마서 5장 : 1절 ~ 2절)

27) 성도의 환난과 소망 (로마서 5장 : 3절 ~ 4절) 

28) 사랑을 확증하신 하나님 (로마서 5장 : 5절 ~ 8절)

29) 구원받은 자의 생활 (로마서 5장 : 9절 ~ 11절)

31) 죄와 율법 (로마서 5장 : 13절)

32) 오실 자의 표상인 아담 (로마서 5장 : 14절)

33)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풍성한 은혜 (로마서 5장 : 15절 ~ 16절)

34) 한 사람 아담의 죄와 한 분 그리스도의 의 (로마서 5장 : 17절)

35) 아담의 불순종과 그리스도의 순종 (로마서 5장 : 18절 ~ 19절)

36) 죄와 은혜 (로마서 5장 : 20절 ~ 21절)


제 6 장(37 ~ 47)

37)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의 신분 (로마서 6장 : 1절 ~ 2절)

38) 그리스도와의 연합 (로마서 6장 : 3절 ~ 4절)

39) 연합이 의미하는 뜻 (로마서 6장 : 5절 ~ 7절)

40) 죄에서 벗어난 우리 (로마서 6장 : 6절 ~ 7절)

41) 주님의 부활의 참 의미 (로마서 6장 : 8절 ~ 10절) 

42) 승리적인 생활의 방법 (로마서 6장 : 10절 ~ 11절)

43) 성결 생활을 위한 그리스도인의 자세 (로마서 6장 : 12절 ~ 14절)

44) 불의의 병기와 의의 병기 (로마서 6장 : 12절 ~ 14절)

45) 순종과 소유권 (로마서 6장 : 15절 ~ 16절)

46) 거룩함에 이르라 (로마서 6장 : 17절 ~ 21절)

47) 죄의 삯과 하나님의 은사 (로마서 6장 : 20절 ~ 23절) 


제 7 장(48 ~ 55)

48) 율법의 기능 (로마서 7장 : 1절 ~ 4절)

49) 구원의 목적 (로마서 7장 : 1절 ~ 4절)

50)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는 생활 (로마서 7장 : 5절 ~ 6절)

51) 율법이 죄냐 (로마서 7장 : 7절)

52) 계명으로 드러난 죄의 권세 (로마서 7장 : 8절 ~ 9절)

53) 생명과 계명 (로마서 7장 : 10절 ~ 13절)

54) 육신에 속한 자 (로마서 7장 : 14절 ~ 20절) 

55) 육신에 속한 자의 탄식 (로마서 7장 : 21절 ~ 25절)


제 8 장(56 ~ 70)

56) 결코 정죄함이 없는 그리스도인 (로마서 8장 : 1절)

57) 생명의 성령의 법과 죄와 사망의 법 (로마서 8장 : 1절 ~ 2절)

58) 하나님이 하신 율법의 일 (로마서 8장 : 3절 ~ 4절) 

59) 육신을 좇는 자와 영을 좇는 자 (로마서 8장 : 5절 ~ 8절) 

60) 내주 하시는 성령 (로마서 8장 : 9절 ~ 11절)

61) 그리스도인의 성화 (로마서 8장 : 12절 ~ 13절)

62) 양자의 영 (로마서 8장 : 14절 ~ 15절)

63) 후사의 영광과 고난 (로마서 8장 : 16절 ~ 18절)

64) 그리스도의 영광과 고난 (로마서 8장 : 18절 ~ 23절)

65) 구원의 과거, 현재, 미래 (로마서 8장 : 24절 ~ 25절)

66) 성령의 탄식과 간구 (로마서 8장 : 26절 ~ 27절) 

67)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 (로마서 8장 : 28절)

68) 효과 있는 부르심 (로마서 8장 : 29절 ~ 30절)

69) 택한 자들의 특권 (로마서 8장 : 31절 ~ 34절)

70) 끊을 수 없는 사랑 (로마서 8장 : 35절 ~ 39절)


제 9 장(71 ~ 76)

71) 바울의 큰 근심과 고통 (로마서 9장 : 1절 ~ 5절)

72) 약속의 자녀 (로마서 9장 : 6절 ~ 8절)

73)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 (로마서 9장 : 9절 ~ 13절)

74)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 (로마서 9장 : 14절 ~ 18절) 

75) 선택과 유기에 대한 권한 (로마서 9장 : 19절 ~ 29절)

76) 행위에 의지한 이스라엘 (로마서 9장 : 30절 ~ 33절)


제 10 장(77 ~ 82)

77) 율법의 마침이 되신 예수 (로마서 10장 : 1절 ~ 4절)

78)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로마서 10장 : 5절 ~ 8절)

79) 구원에 이르는 믿음 (로마서 10장 : 9절 ~ 11절)

80)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신 예수님 (로마서 10장 : 11절 ~ 13절)

81) 믿음의 구원 (로마서 10장 : 14절 ~ 17절)

82) 복음을 순종치 아니한 이스라엘 (로마서 10장 : 18절 ~ 21절) 


제 11 장(83 ~ 88)

83) 은혜로 택하심을 입은 자 (로마서 11장 : 1절 ~ 6절)

84) 아직 소망이 있는 이스라엘 (로마서 11장 : 7절 ~ 12절)

85) 자긍치 말아야 할 이방인 (로마서 11장 : 13절 ~ 18절)

86) 믿음과 접부침 (로마서 11장 : 19절 ~ 24절)

87) 이스라엘 회복의 비밀 (로마서 11장 : 25절 ~ 27절)

88) 후회 없는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 (로마서 11장 : 28절 ~ 36절) 


제 12 장(89 ~ 93)

89) 그리스도인 들의 영적 예배 (로마서 12장 : 1 ~ 2절)

90) 한 몸의 지체를 이루는 성도 (로마서 12장 : 3절 ~ 5절) 

91) 지체로서의 은사 (로마서 12장 : 6절 ~ 8절)

92) 사랑의 생활 지침 (로마서 12장 : 9절 ~ 13절)

93) 사랑의 사회 생활 (로마서 12장 : 14절 ~ 21절)


제 13 장(94 ~ 96)

94) 권세자들에게 복종해야 할 이유 (로마서 13장 : 1절 ~ 7절)

95) 율법을 완성하는 사랑 (로마서 13장 : 8절 ~ 10절)

96) 주 재림의 준비 (로마서 13장 : 11절 ~ 14절)


제 14 장(97 ~ 100)

97) 믿음이 연약한 자에 대한 태도 (로마서 14장 : 1절 ~ 4절)

98) 그리스도인의 날과 절기 (로마서 14장 : 5절 ~ 9절)

99)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강과 희락 (로마서 14장 : 10절 ~ 18절)

100) 화평과 덕을 세우는 생활 (로마서 14장 : 19절 ~ 23절)


제 15 장(101 ~ 105)

101) 하나가 되는 교회 (로마서 15장 : 1절 ~ 6절)

102) 서로 받아 드리는 사랑 (로마서 15장 : 7절 ~ 13절)

103) 로마 교회가 받은 칭찬 (로마서 15장 : 14절)

104) 바울이 받은 하나님의 은혜 (로마서 15장 : 15절 ~ 21절)

105) 축복의 사장 (로마서 15장 : 22절 ~ 33절)


제 16 장(106)

106) 바울의 문안과 마지막 부탁 (로마서 16장 : 1절 ~ 27절)

========================================================

로마서 1장

◆ 밤중소리 03-02 | VIEW : 9,090


≈ 1 ≈ 예수그리스도의 종 바울

(본문 : 로마서 1 : 1 - 2)

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2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서 론 : 로마서는 신 구약성경의 모든 구속의 진리를 밝혀 놓은 기독교의 교리서입니다. 

만약 성경에서 이 로마서가 빠졌다면 

우리는 성경에서 바른 구원의 도리에 대하여 깨닫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물론 구원의 교리가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이 믿음을 우리에게 전달하는 매개체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는 누구든지 예수를 믿을 수 없습니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기독교회는 많은 파란곡절을 겪어 왔지만 

만약 우리 기독교에 올바른 교리가 서 있지 아니했었다면 

이단을 이루는 사단의 역사가 더 강하게 기세를 부려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많은 혼선을 가져왔을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로마서를 기록한 사도 바울은 

위대한 교리적인 성경학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로마서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성경 전체적인 진리를 

교리적인 면에서 풀이한 하나의 교리서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를 배우는 가운데 구원의 진리가 분명해져서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로마서가 기록되기까지

바울이 스스로 밝힌 것처럼 바울은 로마에 가 본적이 없습니다. 

베드로나 바울이 로마에서 순교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들 중에 어느 한 사람이 로마교회를 세우지 않은 일도 분명합니다. 

로마교회는 오순절 성령강림 때 예루살렘에 올라와 회심한 유대계 나그네들이 

자기 고장으로 돌아가 세웠을 가능성이 많으며, 

아마 그들 중에는 바울에게 신앙적인 영향을 받은 

얼마간의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바울의 심중에는 온 세계를 복음화 시키려는 거룩한 대 야망이 있었기 때문에 

언제나 로마를 그 복음의 전초기지로 삼으려고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로마시는 그 당시 세계 제일의 도시였습니다. 

로마는 마치 큰 호수 같아서 

세계의 모든 물이 다 이곳으로 몰려 왔다가 

다시 세계의 모든 곳으로 흘러가는 

하나의 거대한 세계문화와 정치의 중심지였습니다. 

바울이 이처럼 복음을 전하기에 최적한 도시인 로마 시를 출발점으로 하여 

그의 복음사역을 시도하려고 한 일은 훌륭한 구상 이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계획대로 이 같은 계획이 실천되지 못하고 늦어지자 

먼저 로마교회에 자신을 소개하고 자신이 받은 여러 계시를 정리하여 

새로운 면의 구원의 도리를 밝히는 편지를 써 보내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판단하여 

이 편지를 써서 로마교회에 보낸 것입니다. 

이 로마서는 바울이 이방교회에서 거둔 구제 헌금을 가지고 

그리스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기 직전 

고린도에서 써서 보낸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정확한 연대는 모르나 타당성 있는 보편적인 견해는 

주후 57년이나 58년경으로 추론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편지를 보낸 후 3년이 지나서야 로마에 이르게 되었는데 

그때 바울의 신분은 개선장군 같은 당당한 모습으로가 아니라 

하나의 죄수의 몸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일은 이 위대한 로마서를 기록하시고자 하신 하나님의 

참으로 놀라우신 섭리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

바울은 이 편지 서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1) 바울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불렀습니다. 

종이라고 하는 말은 

원래 좋은 뜻으로 불려지는 말이 아닙니다. 

종이란 ‘둘로스’인데 

붙들어 매다, 결박하다 에서 유래된 단어로 노예를 의미합니다. 

노예란 물건처럼 매매되는 신분이며, 남에게 묶여 있는 몸이기 때문에 

인간의 모든 자유가 유보된 사람들입니다.


(2) 바울은 왜 자신을 종이란 말로 부르면서도 그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한 것일까요? 

바울이 자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종이란 말의 원리에 입각 하여 부쳐진 이름입니다.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고전 6:19, 20). 

우리가 그리스도의 종이 된 것은 

그리스도께서 값을 지불하시고 당신의 소유로 사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원래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종의 운명을 지니고 태어나는 것입니다. 

“너희는 본래 죄의 종이더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롬 6:17). 


 그러면 우리는 왜 이처럼 종의 운명을 안고 태어나는 것인가? 

"한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하였습니다(롬 5:37). 

우리는 이 한 사람 때문에 

죄의 유산을 받아 죄의 종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한사람 아담으로 인하여 죄인이 되었고 

죄에 팔린 몸이 되어 결국 죄의 종이 된 것입니다.


(3) 죄의 종에서 하나님의 종으로 사시기 위해 

그 아들의 피를 속전으로 주셨습니다. 

애초에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파신 것으로 생각하면 됩니다. 

“ … 내가 어느 채주에게 너희를 팔았느냐 

오직 너희는 너희의 허물을 인하여 팔렸고 …”라고 말씀하셨습니다(사 50:1). 

우리는 우리를 소유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허락도 없이 

스스로 죄를 따라가 스스로 팔려간 사람들입니다. 

사단의 꾐에 넘어가 대가도 없이 자신의 생명전부를 넘겨주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같이 비참하게 된 우리들을 

죄의 종의 자리에서 구원하여 그의 자녀로 만드시기 위해 

놀라운 값을 지불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을 

죄의 종에서 해방시키시는 대속물로 바치신 것입니다(계 1:5, 딤전 2:6).


3. 종의 태도

(1) 하나님과 나와의 세 가지 관계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는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우리를 창조하신 창조주이시오 우리를 조성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창조주 되사는 하나님께 마땅히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다음에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독생자까지 보내신 자비하신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아버지이십니다.


다음에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주인으로서의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지불하신 그 아들의 피로 말미암아 

죄의 종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종의 자리로 옮겨졌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종이 된 것입니다. 

종이 하는 일이란 주인을 위하여 죽도록 충성하는 일입니다. 

종은 언제나 주인의 뜻을 따라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2) 종은 상전을 기쁘시게 해 드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남의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드리라”고 하셨습니다(롬 l2:1). 

우리의 몸으로 자기 자신을 기쁘게 하는 생활이 아니라 

주인이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3) 종은 주인을 성실하게 섬겨야 합니다. 

종의 직무란 주인을 섬기는 일뿐입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하셨습니다(롬 12:11). 

하늘의 상급은 이 종의 위치를 잘 지키는데서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결 론 : 우리는 성경에서 할례 받은 귀란 말을 듣습니다. 

“내가 누구에게 말하여 누구에게 경책하여 듣게 할꼬 

 보라 그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듣지 못하는 도다”고 하셨습니다(렘 6:10). 

그러면 할례 받은 귀란 어떤 귀를 말하는 것인가? 

귀에 할례를 받는 방법이 이처럼 나와 있습니다. 

“종이 만일 너와 네 집을 사랑하므로 너와 동거하기를 좋게 여겨 

네게 향하여 내가 주인을 떠나지 아니하겠노라하거든 

송곳을 취하여 그의 귀를 문에 대고 뚫으라 

그리하면 그가 영영히 네 종이 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신 15:16-17). 

그러나 자유 하는 종은 할례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는 자기가 좋아하는 대로 귀를 기울이기 때문에 

한 주인을 섬기지 못하고 여기저기 팔려 다닙니다. 

바울은 하나님 앞에 충성된 종으로서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한 것입니다. 

우리도 바울의 심경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 2 ≈ 미리 약속하신 복음

(본문 : 로마서 1 : 1 - 2)

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2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서 론 : 바울은 이곳에서 복음의 시작이 

결코 예수그리스도의 탄생이나 그의 복음 사역을 통하여 

비로소 이루어졌다고 말하지 아니합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고 증거 함으로써 

멀리 구약시대로부터 이어져 왔음을 밝혔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에 관한 연구는 구약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구약은 신약에 의해 설명되고 

신약은 구약에 포함된다고 표현한 말은 

아주 썩 잘 된 표현입니다.


1. 바울의 사도 직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자신의 사도 직 에 대하여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의 서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한 그의 사도 직은 12 사도 중에 포함된다는 의미에서 주장한 것은 물론 아닙니다. 

바울에게는 자신이 스스로 사도라고 주장할 만한 충분한 근거와 자격이 구비되어 있었습니다. 바울은 첫째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친히 보았습니다. 

바울은 주님의 부활에 관한 많은 증인에 대하여 증거 하면서 마지막에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 말했던 것입니다(고전15:8). 


둘째로 바울은 주의 복음을 위하여 예수님의 택정함을 입었습니다.

다메섹 성에 살고 있는 아나니아에게 주님은 환상 중에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행9:15). 

그뿐 아니라 바울은 

주님으로부터 지극히 큰 계시를 많이 받았습니다(고후13:7)


2. 미리 약속된 복음

(1) 복음이란 말은 기쁜 소식, 좋은 소식이란 뜻입니다. 

복음이란 말의 헬라어는 ‘유앙겔리온’입니다. 

이 말은 좋은 소식, 기쁜 소식을 의미합니다. 

죄로 영원히 멸망 받게 된 인생들에게 좋은 소식이란 무엇이겠습니까? 

기쁜 소식이란 어떤 것을 말하겠습니까? 

그것은 사죄의 소식이요, 구원의 소식이요, 영생의 소식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복음은 널리 전파되어야 할 기쁜 소식입니다. 

그러나 이 소식은 오직 성령을 받은 사람만이 전할 수 있는 소식입니다. 

주님은 승천하시기 전 그의 제자들을 향하여 이처럼 명령하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중인이 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행1:8).


(2) 바울은 이 복음을 하나님의 복음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이라고 한 말은 

이 복음이 하나님에 의하여 주어졌음을 밝힌 말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하나님에 의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언약이신데 

하나님의 영원한 약속으로 말미암은 언약이십니다. 

이 언약은 그 출처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누구에 의해서도 변경될 수 없고 변경시킬 수도 없습니다.


(3) 이 복음은 그 아들에 관하여 약속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아들”이란 말은 “하나님이 그 아들에 관하여”란 해석으로 

이곳에서 말씀하시는 아들이란 

오직 유일하신 아들, 하나님의 한 아들이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천사들에게도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표현으로 나타낸 일도 있습니다(욥1:6). 

그리고 이 땅위에도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창 6:2). 

그러나 그의 아들이란 오직 그의 독생자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아들이 없이는 복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아들은 복음의 본질입니다. 

아들은 복음의 주체이십니다. 

하나님은 아들로 복음을 이루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은 다른 것이 아니라 이 아들로 판결이 납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고 단정하고 있습니다(요일 5:12).


3. 선지자들로 약속하시고 증거 하신 아들

바울은 복음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성경에 미리 약속하였다고 말함으로써 

성경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증거의 책임을 밝혔습니다.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성경이란 구약성경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하나님의 복음이 

신약에만 있는 줄을 알고 신약에만 편중하기 쉬운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에 나타난 아들은 

이미 선지자들에 의하여 증거 된 구약의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복음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1) 이 아들에 관한 약속은 여인의 후손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그 기원이 인간의 죄로 인한 타락으로 말미암아 시작됩니다. 

아담이 범죄하여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이 그의 아들에 관하여 약속하심으로 처음 나타내셨습니다. 

장차 죄로 타락한 우리인생들에게 보내실 메시야에 대하여 

여자의 후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창 3:15).


(2) 이 아들은 아벨의 제사에서 나타납니다. 

그 아들로 말미암아 약속으로 말미암은 최초의 의인으로 등장하는 인물이 아벨입니다. 

그는 어린양을 잡아 그 피와 기름으로 제물을 삼아 제사를 드림으로 

의롭다하는 하나님의 선언을 받은 것입니다(창 4:4).


(3) 이 아들에 관한 언약은 아브라함의 부르심에서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갈데아 우르에서 부르신 것은 

그를 통하여 약속의 메시야를 태어나게 하시려는 뜻에서였습니다.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라고 하신 아브라함의 씨란 

곧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신 것입니다(창 22:18).


(4) 유월절의 제정도 그 아들에 관한 약속으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사람들에게 최종적으로 내리는 장자의 주검의 재앙에 대하여 

그들의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어린양의 피를 뿌리므로 

재앙이 미치지 않고 유월하는 약속을 받았는데 

이 피는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약속을 의미하는 것입니다(출 12:12-23).


(5) 모세가 광야에서 장대에 단 구리 뱀도 

그 아들에 관한 약속의 그림자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실을 니고데모에게 증거하셨습니다(민 21:6--9, 요 3:14).


(6) 모세가 나와 같은 선지자라고 증거한 그 선지자는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약속입니다. 

이 말씀은 율법 책에 기록된 약속으로 

이스라엘은 이 말씀에 의하여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신 18:15, 요 1:21).


(7) 시편에는 수 없이 아들에 관한 많은 약속들이 있습니다. 

시 2:2 = 기름 받은 자, 시 2:12 = 그 아들에게 입 맞추라, 시 16:10 = 그리스도의 부활, 

시 22장 = 주님의 고난, 시 89:4 = 다윗의 자손에 대한 약속, 

시 110:4 = 멜기세댁의 반차를 쫓은 대제사장으로.


(8) 이사야서에도 그 아들에 관한 약속이 많이 있습니다. 

사 7:14 = 임마누엘, 사 9:6-7 =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심, 

사 11:1,2 = 이새의 가지에서 나올 한 싹. 사 53:1-9 = 아들이 당할 고난의 예언 등 등.


결 론 : 하나님은 선지자들로 그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하여 우리에게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성경을 공부하고 연구하여 

그 아들에 관한 지식을 많이 가짐으로 

하나님의 약속에 견고히 서서 구원의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 3 ≈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아들

(본문 : 로마서 1 : 1 - 4)

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2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3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서 론 : 바울은 복음에 대하여 증거하기를 

“이 복음은 하나님이 그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복음의 주체가 되시는 이 아들에 관하여 

두 가지 면에서 증거해 주는 것입니다.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태어나심과 그의 부활을 통하여 

그의 인성과 신성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1. 그리스도의 인성

그리스도의 신적인 요소는 그가 곧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인적인 요소는 그가 곧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신적인 요소만을 주장한다면 

여러 가지 오류를 범할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로부터 모든 이단적인 요소가 이 같은 설로부터 나왔습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요한은 

이처럼 하나님의 영과 적 그리스도의 영을 구별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 그리스도의 영이니라”고 했습니다(요일 4:2, 3).


그러나 또 반면에 그리스도의 인성만을 주장하면 

그리스도는 다만 다른 위대한 성현들처럼 하나의 인간에 불과하므로 

그를 하나님의 자리에서 끌어내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기독교는 다른 이방종교와 다를 바 없는 

생명이 없는 종교가 되어 버리고 말며, 

죄로 타락하여 멸망을 당하게된 인생들에게 

아무런 소망도 안겨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그는 참 사람도 되시고 참 하나님도 되신다”고 하는 

그의 신성과 인성을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참으로 하나님이시고 또 사람이신 것입니다.


(1) 그리스도는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다고 했습니다. 

다윗의 혈통이란 말은 언약의 자손이란 뜻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에 관한 언약에서 

창세기 3창에서 여자의 후손이란 말씀을 사용하셨습니다 

이 같은 하나님의 언약이 역사가 진전되면서 

아브라함의 씨로써 표현되어 나타났고 

그 이후 또한 다윗의 자손이란 표현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이란 표현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메시야의 언약으로 

그들의 마음속에 깊이 심겨졌습니다

(시89:3, 4, 사11:1-5, 렘 23:5, 6, 30:9 ; 겔 34:23, 24, 37:24). 

이 “다윗의 혈통”이란 말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태어나실 육신적인 혈통의 체계를 나타낸 말입니다. 

실질적으로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메시야관을 나무라시는 말씀 가운데서 

예수님은 시편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시어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는 말씀으로 

메시야는 다윗의 주이심을 성경적으로 밝히셨습니다(마 22:41-45).


(2)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란 말씀은 

그의 인성에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보내실 메시야에 대한 언약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셨기 때문에 

다윗의 자손으로 태어나지 않는 사람은 

그 어떤 경우에도 메시야가 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지 아니하셨다면 

우리는 그가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야로 영접할 수 없을 것입니다. 

구약에서 언약하신 메시야에 관한 일이 

그리스도의 태어나심으로 완성되었습니다(마1:1, 16 ; 눅 1:26, 27). 

혈통이란 말은 씨, 종자 혹은 후손을 말하는 것으로 

예수님께서 인간의 본질 성을 가지고 태어나셨음을 뜻합니다.


(3)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혈통으로 나셔서 무엇을 하셨는가? 

예수님이 다윗의 혈통으로 태어나신 일은 

하늘에서 이 세상에 오신 사실을 가르친 말씀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하신 말씀은 

태초부터 계신 성자 하니님께서 다윗의 혈통을 입어 

언약의 자손으로 세상에 오신 것을 뜻합니다(요1:1, 14). 

말씀이 육신이 되신 일은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이 

종의 모습으로 사람의 자리에 내려오신 일인데 

하나님께서 이 일을 다윗의 혈통을 통하여 태어나게 하심으로 

이스라엘에게 주신 언약을 이루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혈통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무슨 일을 하신 것인가? 

그는 인간의 연약하심을 체휼하시고 시험까지도 받으셨다고 했습니다(히4:15, 사 53:3). 

그리스도는 육신으로 오셔서 인간들이 지킬 수 없었던 율법을 지키셨습니다. 

죄인들이 짊어져야 할 율법의 저주를 이루시기 위하여 

그 짐을 지시고 온전히 이루셨습니다.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 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셔서 하신 가장 극적인 사역이 

그의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입니다. 

사실 그가 육신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신 목적이 

이 일을 위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그의 피 흘리심에 목적이 있으십니다. 

피 흘림은 곧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에 

우리의 죄 사함과 죄 값에 대한 사망에서 벗어나는 일에 필수적인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의 신성

다음에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하여 바울은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인성도 중요하지만 그와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신성입니다. 

그리스도의 신성이란 그리스도는 

곧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인성을 인정하기는 쉽지만 

그의 신성을 인정하기란 어려운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으로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은 

인간의 지혜로는 믿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일에 대하여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시니라”고 하셨고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고 말씀하신 것입니다(마16:17, 요6:45).


(1) 예수님은 그의 부활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고 했습니다 . 

여기서 인정되었다는 말은 하나님이 인정해 주셨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메시야로서의 증거로 확실히 인정받을 수 있도록 부활로 그 증거를 우리에게 보여 주셨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는 부활이 없으셨다고 해도 그는 여전히 하나님의 아들이심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약속의 메시야로써 인간에게 인정받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의 부활하심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충분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행17:31).


(2) 그리스도는 성결의 영으로 살리심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성결의 영이란 죄로 오염되지 아니한 영을 의미합니다. 

이 영의 소유자는 오직 그리스도 한 분뿐이십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분이시지만 

그에게도 영이 있으셨습니다. 

그가 소유하신 영은 성결의 영으로 

그의 참 생명이 되시는 영이십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 성결의 영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죄가 없으신 그의 영은 

죽은 그의 육신을 다시 살릴 수 있는 능력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면 우리도 그의 성결의 영과 연합되므로 

우리의 죽을 몸을 그의 몸처럼 다시 살리시는 것입니다(빌3:21).


결 론 :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아들은 

이처럼 그의 인성과 신성이 함께 하시는 분으로 

그는 사람이시고 또한 하나님이십니다. 

그의 태어나심은 약속의 메시야를 보내심이요 

그의 부활하심은 

그가 언약의 메시야라는 하나님의 확실한 증거인 것입니다. 

우리의 영생은 오직 그에게만 있습니다.


≈ 4 ≈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

(본문 : 로마서 1 : 5 - 7)

5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6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

7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서 론 :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자기를 소개함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일에 대하여 자기는 이미 영원 전에 하나님의 계획하심에 따라 이 같은 사명자로 택정하심을 받았다고 하는 사실에 대하여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로마서를 받은 로마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그리스도로 쫓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고 축복했습니다. 여기서 성도로 부르심을 입었다고 하는 말은 확실한 하나님의 소유물로 하나님의 예정을 업은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7절에서 반복해서 천명하기를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라고 말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것이란 말은 그리스도께 속한 완전한 소유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 말의 뜻은 그리스도에게 붙은 그의 완전한 소유를 뜻합니다.


(1) 이 부르심은 유효한 부르심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유효한 부르심에는 하나님의 택정하심이 따라야하는 것입니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곳에서 청함만 받은 사람은 부르심을 입은 자가 될 수 없습니다(마22:34).


(2) 유효한 부르심은 하나님의 예정에서 나옵니다. 장로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예정이란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세례문답 조례 51문에는 “장로교회의 교리가 무엇입니까”고 하는 물음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해답으로 ‘하나님의 예정입니다’고 답을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영원 전에 이 세상에서 일어날 모든 일에 대하여 무엇이나 미리 작정해 놓으셨다”고 하는 성경적 견해가 하나님의 예정교리입니다.

인간은 불순종의 죄로 인하여 그 죄 값으로 다 죽게된 존재들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구원하기로 이미 만세 전에 예정해 놓으신 그의 백성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업으로 빼신 바 된 백성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시33:12).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 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다”고 했습니다(롬 8:29).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고 했습니다(행13:48).


(3) 하나님의 예정의 뜻은 “믿어 순종케” 하시려는데 있으십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그를 또한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방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므로 그들로?어 순종케”하시려고 자기에게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주신 것이라고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말미암아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은 믿어 순종하는 열매를 반드시 맺게 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열매는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를 따라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라고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 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엡1:11)

여기서 하나님의 예정론을 반대하는 자들의 주장에 부닥치게 됩니다. 만약 인간의 구원이 하나님에 의하여 이미 만세 전에 결정된 것이라면 마음이 완악하여 예수를 영접하지 않는 사람들을 어떻게 허물 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예정에 안 들어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를 믿지 못하도록 그 마음을 강퍅하게 하셨다면 피조물인 인간이 어찌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여 예수를 믿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 같은 질문은 하나님의 예정교리를 대적하는 사람들의 가장 자랑스런 무기이며, 우리는 이 같은 공격 앞에 그들을 이해시킬 말이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은 이 같은 사람들에게 무엇이라고 하셨는가?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을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고 바울은 공격을 가했습니다(롬9:19-12).

우리가 생각해야 할 일은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시는 일이나 인간을 구원하시는 일에 인간이 납득하고 인간이 수긍하며 따를 수 있는 방법을 취하셨다면 이 우주만물의 질서는 벌써 끝장이 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심에 있어서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치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방법을 따르셨다고 하는 사실 앞에 너무나도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2.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

바울은 7절에서 “로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은혜와 평강의 축복을 기원하고 있습니다. “성도로 부르심을 업었다”는 말은 6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었다”는 말과 같은 표현이면서도 한층 더 강하게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관계를 밝히고 있습니다.


(1)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들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요일4:10).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이란 바로 이처럼 하나님이 보내신 자 그 이들을 영접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면 가질 수가 없습니다. 이 사랑을 깨닫게 해 주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택하신 자들에게 복음을 통하여 성령으로 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여 믿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2) 성도로 부르심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성도란 말은 ‘하기오스’로 이 말의 뜻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를 의미합니다. ‘하기오스’는 ‘하조’란 말에서 나왔는데 이 말은 숭배한다 또는 경의를 표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최대의 경의와 숭배는 ‘예배’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은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예정을 입은 사람들로 하나님은 이들을 복음으로 하나님의 교회로 부르십니다. 교회는 이 땅에 존속하는 유일한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3)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이 바울의 축원은 그의 택하신 백성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한없는 축복의 선언입니다. 은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 중에 가장 위대한 선물은 물론 그 아들로 값없이 주신 구원입니다. 그 뿐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내려오는 모든 선물이 다 은혜에 속한 것들입니다. 이 은혜가 넘치는 생활은 주안에서 가장 복된 삶인 것입니다. 평강이란 하나님과의 화목에서 나오는 마음의 평안함을 가리킵니다. 이 평강이 우리의 생애를 주장할 때 우리는 어떤 환경 속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고 승리적인 생애를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결 론 :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이 주님의 소유라면 우리의 생애는 소유자 되신 주님의 뜻에 따라야 할 것입니다. 우리 의 생애는 먼저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생활을 해야합니다.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고 하셨습니다(엡5:10).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성도다운 생애를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 5 ≈ 바울의 간절한 마음

(본문 : 로마서 1 : 8 - 13)

8 먼저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에 관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9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10 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11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12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13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서 론 :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을 심히 사모했습니다. 아직 신앙적으로 어리며 교리적으로 미숙한 그들에게 바울은 자신이 받은 복음의 계시를 속히 전할 수 있기를 원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로부터 많은 열매를 거두기를 바랬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처럼 자신의 간절한 기대와는 달리 로마로 가는 길이 쉽사리 열리지 아니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 편지를 쓰는 그 순간에도 로마로 달려가기를 원했지만 하나님이 막으신 것은 이 로마서를 쓰게 된 동기가 되었으니 오히려 하나님의 오묘하신 뜻이라고 하겠습니다.


1. 바울의 감사

바울은 때때로 로마교회의 소식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바울은 그의 심령

에서 감사가 넘쳤습니다. 그 이유는 로마교회 성도들의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I) 바울의 감사는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감사였습니다. 감사란 말은 ‘유카리스티아’로 좋은 것을 값없이 준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께 감사하는 이유는 우리의 생애가운데서 하나님으로부터 항상 가장 좋은 것으로 값없이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감사에 대하여 그 서두에 첫째란 말을 쓴 이유는 편지 내용의 순번을 알리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가장 요긴한 일이 감사임을 나타낸 말입니다. 바울은 이 같은 감사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바울이 감사하게 된 원인을 가리킨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나 생애에 예수가 없이는 감사가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받고 있는 모든 감사의 조건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인함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없이 우리가 무엇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까? 그리스도 없이 우리는 그 무엇을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의 자세에 대해서도 이 같은 태도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빌4:6).


(2) 바울은 로마에 있는 모든 사람을 인하여 감사했습니다. 바울이 감사한 그 감사는 폭이 넓었습니다. 자신이나 자신의 가족에게 국한시킨 감사였던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한 감사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많은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그 감사의 범위가 다른 사람에게까지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처럼 복음전도를 사명으로 살아가고 있는 하나님의 종들의 감사는 이 같은 감사의 기쁨이 충만한 것입니다.


(3) 바올의 감사는 그들의 믿음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고 했습니다. 성도들에게 믿음이 있는 일은 하나님의 종들에게 있어서 참으로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믿음은 자라며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 도다”고 했습니다(골1:8). 우리의 믿음이 자라서 또한 열매를 맺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된 모든 사람들로부터 하나님께 기도할 때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감사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이 여러분들을 위해 기도할 때 여러분의 성장하지 못하는 믿음을 생각하면서 안타깝게 탄식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2. 바울의 증인

바울은 로마교인들을 위한 기도와 그들을 향한 그의 간절한 사모함의 증인으로 하나님을 내세웠습니다.“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 바울은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자신의 증인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 섬기는 범위와 섬기는 자세를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한 복음 안에서란 말의 의미는 그 아들로 말미암은 구원, 긍휼, 사랑, 한없는 용서 둥을 말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지난날처럼 의를 얻기 위해 율법의 행위로 섬긴 것이 아니라 심령으로 섬겼습니다. 심령은 ‘프뉴마’로 그의 영혼을 말합니다. 영으로 섬긴다는 말은 마음으로 섬긴다는 뜻으로 거짓이 없는 믿음, 진실한 섬김의 자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2) 바울은 그의 기도에서 쉬지 않고 로마교회의 성도들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너희를 말하며”라고 한 말은 너희 기억을 만든다고 하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종들이 기도할 때 성도의 이름을 그의 기억에서 끄집어내는 일은 그 사람을 위해 가장 아름다운 기억이 될 것입니다. 평소에는 다정하지만 기도할 때 기억에 떠오르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 못되는 것입니다.


3. 로마교회 성도들을 사모한 이유

바울이 로마교회에 가기를 심히 원한 것은 그들을 볼 수 있기를 사모한 마음에서였지만 바울은 그 이유를 몇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1) 신령한 은사를 나눠주기를 원하는 마음에서였다고 했습니다. 은혜 ‘카리스’와 은사 ‘카리스마’는 비슷한 단어로 불려지지만 그 뜻은 서로 주고받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은혜는 그의 아들을 통해서 우리가 거저 받는 선물이지만 은사는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우리가 하나님께 바치는 충성, 헌신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로마교회 성도들은 그들의 믿음에 비해 맺는 열매가 적었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마음을 안타깝게 했습니다. 그가 로마에 가면 이런 면을 잘 깨우쳐 그들로 더 많은 열매를 맺도록 하겠다고 바울은 생각한 것입니다.


(2) 이 같은 바울의 생각은 서로 안위함을 얻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로마에 가서 그들에게 신령한 은사를 나눠줌으로 그들의 믿음을 더욱 돈독하게 하고 이방인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된다면 이런 일이야말로 바울에게 있어서는 위로를 받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일은 바울만이 위로를 받는 일이 아니라 바울로 말미암아 그들 자신도 위로를 받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로마교인들로 말미암아 위로를 받고, 로마교인들은 바울로 말미암아 위로를 받음으로 피차 안위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3) 바울은 자신이 로마로 가기를 여러 번 시도한 일을 알아 달라고 말했습니다. 로마교회 성도들에 대한 바울의 사모함은 그들을 만나기 위해 로마로 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같은 길이 아직까지 막혔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막혔다는 말은 바울은 원하는 바였지만 하나님에 의하여 저지 당한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결 론 : 바울은 하나님을 증인으로 삼고 그의 복음사역과 기도생활을 했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증인으로 삼지 말고 우리의 마음을 살피시고 우리의 생애를 주장하시는 하나님을 우리의 증인으로 삼아야 합니다. 바울이 그 수많은 고난과 핍박과 환난 속에서도 낙심치 않고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을 자신의 증인으로 삼고 주의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 6 ≈ 빚진 자의 생활

(본문 : 로마서 1 : 14 - 15)

14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15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서 론 : 성경에는 빚에 관한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빚은 분명히 하나의 인생의 무거운 짐입니다. 너희는 빚을 지지 말라는 것이 성경적인 교훈입니다. 빚을 지면 빚을 진자의 종이 된다고 했습니다. 잠22:7절에서도?“ 진자는 채주의 종이 되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돈을 빌려쓰는 사람은 그 사람 앞에서 늘 머리를 숙이는 삶을 살아야 하고 인격적으로 비열해 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빚을 다 갚기까지는 마음이 무겁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주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1. 세 종류의 빚

사도 바울은 이 빚진 자의 안타까운 심정을 가지고 자신을 복음에 빚진 자로 여겼습니다. 14절에서 “헬라인에게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다 내가 빚진 자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우리들이 갚아야 할 빚으로 세 가지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우리가 갚아야 할 빚 중에 첫째로 손꼽히는 빚이 죄의 빚입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문을 보면 죄란 단어가 빚으로 나와 있습니다. 마태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란 말씀에서 죄에 대하여 ‘오페이레마타’라고 말하므로 빚 또는 부채란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마6:12). 이 같은 표현은 참으로 큰 의미를 지니고 있는 말이라고 보겠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죄가 하나님께 빚으로 처리된다는 뜻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빚은 우리가 대인관계에서의 빚을 반드시 갚아야 하는 것처럼 우리들이 하나님께 반드시 갚아야 할 빚입니다. 이 빚은 금전으로 환산할 수 없는 엄청난 빚으로 죄 값이 사망이란 말은 죄의 빚이 곧 사망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같은 죄 값을 예수님이 대신 갚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에서의 대속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이제 죄의 빚을 갚았기 때문에 죄에서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이제는 죄의 종이 아닙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통해서 우리의 죄의 빚을 갚아 주신 일은 우리도 우리들의 형제의 죄를 용서해 줄 것을 전제로 하신 것입니다(마18:23-35).


(2) 빚 중에는 사랑의 빚이 있습니다. 이 사랑의 빚은 두 가지 방법으로 갚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고 일렀습니다(롬13:8). 이 말은 다른 사람에게 사랑의 빚을 지고 살라는 의미가 아니라 피차에 빚을 진 것 같은 마음으로 사랑을 갚는 생활을 하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피차에 빚을 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빚은 주님이 갚아 주셨지만 그러나 그 주님의 갚으심이 우리가 우리의 형제들을 피차 사랑해야 할 빚으로 남겨두신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 갚는 사랑의 빚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받은 사람들임으로 우리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는 생활을 해야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요일5:3).


(3) 다음에 우리들이 생각하려는 것은 오늘주신 본문 말씀의 주제가 되는 복음의 빚입니다. 바울이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빚을 지고 있다고 한 말은 바로 이 복음의 빚을 말해 줍니다. 왜 바울은 복음을 빚으로 생각한 것입니까? 그것은 복음을 받은 자는 그 복음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야 할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2. 복음의 빚진 자의 생활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크나 큰 선물에 대하여 너무나도 감격했습니다. 그는 이 선물로 인하여 그리스도롤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여기는 생활을 기쁨으로 했습니다(빌3:7,8).


(1) 하나님의 선물을 받은 자는 복음의 빚진 자들입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들려주신 말씀 중에 “하나님의 선물”이란 말이 나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을 좀 달라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다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고 하셨습니다(요4:10,11). 그러나 이 선물이 무엇인지, 이 선물의 가치가 어떠한지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복음으로 갚아야 할 하나님의 선물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이에 대하여 에베소서에서는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구원은 더할 나위 없이 값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 값진 선물은 우리들이 그 무엇으로도 값으로 살수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사도는 이에 대하여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받은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홈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피로 한 것이니라”고 말씀해 주었습니다(벧전1:18).


(2) 바울은 이 하나님의 선물을 자신이 갚아야 할 복음의 빚으로 여겼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선물, 사죄의 빚, 구원의 빚, 사랑의 빚을 복음으로 갚기로 한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교회에 가고 싶어한 것도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므로 이 빚을 갚으려는 심정에서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진 빚을 무엇으로도 갚을 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빚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선물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빚으로 알고 바울처럼 우리의 한 생애를 이 빚을 갚는 자세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바른 신앙적 태도입니다.


(3) 복음의 빚을 갚는 생활은 그리스도인들의 다시없는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우리에게 복음의 빚으로 갚으라고 하신 일은 하나님의 이중적인 축복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을 전하는 일은 말할 수 없는 영광과 축복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① 복음은 그것을 받아 드리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롬1:16). 하나님은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는 이처럼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이루는 천국의 일꾼들입니다. 너무나도 영광스러운 직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


② 복음을 전하는 일은 주님의 명령이십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지키게 하라”고 하셨습니다(마28:18-20). 이 명령을 잘 수행한 종들은 주님의 영광에 동참하는 축복을 약속 받고 있습니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25:21).


③ 복음을 전하는 자에게는 금세와 내세의 약속과 영생을 보장받고 있습니다. “이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지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 10:29-30).


(4)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일을 빚진 자의 자세로 수행했습니다. 그는 빚을 갚아야 한다는 뜨거운 심정으로 복음의 일군이 되었습니다. 이 빚을 갚는 일에 바울은 어떤 어려움도 감당했습니다. 그는 가말리엘 대학을 나온 당대의 이름 있는 학자요, 부러울 것이 없는 부요한 가정의 촉망받는 청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생애가 다메섹의 변화를 통하여 빚을 갚는 생애로 돌아서게 된 것입니다. 그는 그 이후의 생애를 그리스도의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복음을 전하는 기수로 보냈습니다(고후11:23-27).


결 론 : 바울은 이처럼 그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 생명의 빚을 갚는 심정으로 온전히 그리스도께 붙잡히는 생애를 보냈습니다. 그는 죽음을 앞에 둔 인생의 마지막 고비에서 후회 없는 자신의 인생 길을 돌아보면서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생애가 바울처럼 복음의 빚을 갚는 생애로 출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7 ≈ 복음의 능력

(본문 : 로마서 1 : 16 - 17)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ㄱ)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ㄱ)하박국 2: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


서 론 : 복음이란 좋은 소식, 기쁜 소식이란 뜻입니다. 이 말은 한자로 쓰면 福音으로 복된 소식이란 의미가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이란 말은 원어의 내용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말이라고 하겠습니다. 로마서 1:16, 17절은 로마서의 핵심을 이루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복음에 대하여 크게 두 가지 뜻을 부여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것입니다.


1. 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 아니한 이유

바울은 분명한 어조로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 아니하노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이 말은 바울 자신이 지난날에 복음을 부끄러운 것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부끄러워 할 대상인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복된 소식인 것입니다. 물론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한다고 하는 말은 그의 영적 눈이 띄어져 있을 때의 일입니다. 우리의 영적 눈이 감겨져 있을 때는 우리들 자신의 운명에 대하여 전혀 알고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눈이 열려지면서 우리는 우리들의 비참한 운명에 눈을 뜨게 되며, 슬퍼하며 가슴을 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알게되며, 죄 값이 사망임을 알게될 때 이 세상에서 바라본 우리의 소망이 허망한 것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이 같은 우리의 죄 값을 대신 갚아주신 대속의 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예수를 통하여 그의 대속의 죽으심과 그의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부활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우리의 죄 값을 갚으시기 위한 대속의 죽으심이요 그의 부활하심은 그가 하나님의 이들이심을 인정받으시는 표이며, 우리의 속죄의 표시가 되며, 믿음은 이 같은 사실을 증거해 주는 확실한 증표인 것입니다. 이것이 죄인의 구속사건으로 복음 곧 좋은 소식인 것입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이유는 이 일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1) 복음은 세상 사람들의 공감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부끄러워하게 됩니다. 세상 지혜로는 복음을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속한 그 수다한 무리들은 복음에 대하여 동조하지 아니합니다. 세상사람이 그러하고 자신에게도 믿음이 없으니 이런 사람들에게 복음을 자랑할 수 있는 지혜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2) 복음은 지식인들의 비웃음을 사게 됩니다. 우리들 자신의 경험으로도 우리가 세상에 속했을 때 우리는 복음에 비웃음을 던졌던 사람들입니다. 복음에 나타나 있는 이론과 주장이 우매하고 어리석게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없는 사람은 이 같은 세상의 비소를 이겨낼 만한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3) 우리들에게 구원의 확신과 이에 대한 감사가 없을 때 복음을 부끄러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깨달음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감사가 넘치게 하기 때문에 그 어떤 비소나 핍박도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2. 복음의 능력이란 무엇인가?

복음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능력이란 말은 ‘두나미스’로 이 말의 뜻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힘을 말합니다. 이 힘은 인간이 물리칠 수 없는 절대적인 힘입니다. 이 힘은 모든 환경과 조건을 이길 수 있는 불가항력적인 힘입니다. 이처럼 복음 그 자체에 이 같은 하나님의 힘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할 때 먼저 우리가 전하는 복음에는 이 같은 하나님의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안다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인식해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복음은 곧 하나님의 힘이란 사실을 망각하기 때문에 기사이적에 미혹되고 거짓된 간증에 열을 올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1)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이란 말은 복음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거듭난 일에 대하여 성경은 무엇이라 증거해 주는 것입니까?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이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벧전1:23).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에 대하여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성경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 말씀을 기록하신 목적은 인류로 구원을 얻게 하시기 위하심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고 하셨습니다(요5:39).

하나님의 말씀은 믿는 모든 자에게 능력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하심이 없다고 하신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자에게는 그 말씀이 말씀대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히4:12). 복음은 바로 이 말씀의 능력으로 역사 하시는 것입니다.


(2)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란 말은 두 가지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나온 의란 뜻과 하나는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의란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의를 율법에서 얻으려고 하다가 결국 실패했습니다(롬3:20). 그런데 복음에 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복음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의를 어떻게 소유하게 되는 것인가?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롬3:21,22). 율법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의는 율법을 지킴으로 얻는 것인데 이 방법을 시도한 이스라엘은 의는 고사하고 오히려 정죄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복음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의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에게 차별 없이 미치는 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복음에서 나온 이 의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공짜로 우리에게 온 것인가?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은 얻는 자 되었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롬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이란 예수님이 우리의 죄 값을 위하여 치르신 그 말할 수 없는 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이 구속이 곧 복음입니다.


(3) 복음에는 믿음에 이르게 하는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 있습니다. 복음은 인간의 지혜나 경험에서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인간적인 지혜나 경험으로는 복음을 깨달아 알 수가 없습니다. 복음은 성경에 있는데 이 성경은 오직 성령의 가르치심을 통해서만이 알 수 있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은 복음에서만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말은 복음에는 우리로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가 따른다는 말입니다.

결 론 : 복음은 하나님이 보내신 사명자에 의하여 세상에 전파됩니다. 우리가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이 복음을 전파하면 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있을 뿐 아니라 이 복음은 또한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에 사람들로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2장

◆ 밤중소리 03-02 | VIEW : 5,093

≈ 8 ≈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본문 : 로마서 1 : 16 - 17)


서 론 :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는 이유로써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는 사실과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게 한다고 증거하고 결론적으로 이 같은 성경적인 근거는 기록된 말씀에 있음을 증거 했습니다. 바울의 성경적인 증거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주장하는 의의 뿌리는 믿음입니다. “이신 득의”사상이 로마서에 나타난 바울의 철저한 복음 사상이며, 또 이 사상이야말로 성경전체에 넘쳐흐르고 있는 하나님의 구원 사상입니다.


1. 하나님의 의는 믿음에서 나온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하신 말씀의 뜻은 하나님의 의가 오직 믿음에서 나온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바울이 복음에서 나오는 의를 설명함에 있어 하박국을 통해 주신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하박국서에는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입니다(합2:5). 바울은 하나님의 의를 율법에서 나온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나온 의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이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빌3:9).


(1) 이 말씀의 근원은 아브라함이 받은 의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롬4:3). 원래 의는 율법에서 출발한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생존할 당시에는 율법이 존재치 아니한 시대였습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고 하는 선언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처럼 의롭다하심을 받은 것은 그의 믿음에서였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은 믿음이란 무엇이었나?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그의 아들 이삭에 관한 약속에서 출발합니다(롬4:18-22).


(2)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란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대제사장의 반열이 유다 지파에서가 아니라 멜기세댁으로부터 나온 사실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리로 앞서 가진 예수께서 멜기세댁의 반차를 쫓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셨느니라”(히6:20). 이 말씀은 예수님은 율법을 따라 된 대제사장이 아니시라 이미 율법이 있기 이전에 대제사장으로도 있었든 멜기세댁의 서열을 따라 된 것임을 밝히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의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라 율법이 존재하기 이전 아브라함이 받은 의에 근거한 것인데 아브라함의 의란 곧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이라고 부르게 된다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갈3:6,7).


(3) 믿음으로 살리라고 하신 믿음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고 하신 것처럼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의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의에 대하여 바울은 우리가 얻을 의는 예수 그리스도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음을 이처럼 말씀했습니다.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라고 했습니다(롬4:23,24).

우리의 죄를 속죄하시기 위해 그의 아들을 보내시고 십자가에서 속죄 제물로 받으시고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하나님,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르는 믿음이며 이 믿음을 가진 자가 아브라함의 믿음의 아들들인 것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하셨습니다(갈 3:29).


2. 의인은 믿음으로 살게 된다.

우리는 성경에서 나타내 주고 있는 의인이란 말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의인이란 율법적인 의의 소유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의인이란 하나님의 의를 소유한 자들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인이 된 것처럼 우리도 그의 독생자를 보내시고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을 믿으면 성경이 말하는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인이란 도덕적인 관념에서 부르는 명칭이 아니라 믿음의 관점에서 부르는 명칭이므로 이 점을 혼돈하면 우리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들이라고 착각하기 쉬운 것입니다. 여기서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고 하는 말씀의 몇 가지 뜻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이 말씀의 뜻은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산다는 말은 생명을 얻는 다는 뜻입니다. 의란 곧 구원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의를 소유한자만이 구원을 얻게 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된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고 말씀했습니다(엡2:8). 예수님께서는 “내 말을 듣고 또 내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5:24). 율법에서는 구원의 약속이 없습니다.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요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행함으로 살리라고 말씀하고 있으나 율법은 인간에게 저주만 줄뿐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얻을 사람은 한 사람도 존재치 않는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하신 믿음의 의를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이 말씀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율법으로나 육신의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의 생애를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살아온 의인이었습니다. 그는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했지만 오직 믿음으로 갔습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다고 했습니다. 이 아브라함의 믿음은 그 아들 이삭에게 약속하신 언약을 믿었기 때문에 이삭이 죽어도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줄을 믿었다고 했습니다(히11:8, 17-19). 기생 라합도 믿음으로 정탐꾼을 숨겨 둠으로 생명을 건졌다고 했습니다(히11:31). 베드로도 믿음으로 그물을 내릴 때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눅5:4,5). 이처럼 믿음을 가진 사람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4:4).


(3) 이 말씀은 의인은 소망으로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의 소망은 눈에 보이는 소망이 아닙니다(롬8:24,25). 아브라함은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으면서. “하나님이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고 말씀하심으로 그가 하나님 나라를 소망으로 살아갔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히11:9, 10).


결 론 :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의인들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믿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음에 그 믿음을 의로 여기신 것처럼 우리에게 독생자를 보내시고 우리들의 죄의 속제 물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그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얻은 믿음에서 나온 의인 것입니다. 우리의 이 믿음은 곧 아브라함의 믿음이며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의를 얻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 9 ≈ 핑계 할 수 없는 인간의 죄

(본문 : 로마서 1 : 18 - 23)


서 론 : 성경에서는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남으로부터 죄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고백하기를 자기는 어머니 배에 잉태함으로부터 죄인이며 죄악 중에 태어났다고 했습니다(시5:15). 성경은 인간의 죄의 기원에 대하여 분명한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장로교회에서 하나의 신앙고백서로 사용하는 웨스트 민스터 고백 6장에서 이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인류의 시조는 사단의 간교와 시험에 져서 금지된 실과를 먹음으로 범죄하였다.” 이 같은 아담의 범죄는 인류로 하여금 돌이킬 수 없는 죄악에 빠트리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신앙고백서는 이 죄에서 온 결과에 대하여 이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이 죄로 인하여 저희가 본래 가졌던 의 는 잃어버리고 하나님과 가졌던 교제는 끊어졌으며 그 결과로 저희는 죄에서 죽었고 또 저희의 영혼과 육체의 모든 기능이 전부 더러워졌다”고 했습니다. 이 같은 인간의 상태를 전적 타락이라고 부릅니다. 전적 타락이란 다시 어떻게 돌이킬 수 없는 절망적인 상태를 말합니다. 본문은 이 같은 인간들이 하나님을 떠난 상태와 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경종으로 들려주고 있습니다.


1. 하늘로 쫓아 나타나는 하나님의 진노

바울은 이곳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진노는 하늘로조차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 같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사람들에 대하여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쫓아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란 타락한 인간의 죄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죄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있는 죄입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음으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롬5:12). 하나님은 이런 죄인들에게 진노의 심판을 내리신다고 하셨습니다.


(1) 과거에 이 같은 하나님의 진노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노아 시대에 내리신 홍수심판이 그렇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용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창6:5-7). 소돔과 고모라 성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도 그런 진노에 속한 심판입니다(창19장). 출애굽기에 나와 있는 애굽에 대한 심판도 그런 심판 중에 하나입니다(출6장-12장).

(2) 하나님의 진노는 이 땅위에 내리는 최종적인 심판으로 내려집니다. 이에 대하여 계시록 16장에서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진노가 최종적인 일곱째 대접심판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일곱째가 그 대접을 공기 가운데 쏟으매 큰 음성이 성전에서 보좌로부터 나서 가로되 되었다 하니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이 있고 또 큰 지진이 있어 어찌 큰지 사람이 땅에 있어 옴으로 이같이 큰 지진이 없었더라 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만국의 성들도 무너지니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 바 되어 그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으매 각 섬도 없어지고 산악도 간데 없더라”(계16:17-20).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은 이 일곱 번째 대접으로 마쳐집니다.


2. 핑계할 수 없는 인간의 죄

그러면 아담의 자손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 우리 인간들은 왜 이 같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는 것인가? 21절에 그 해답이 이처럼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인간이 타락하여 저지르고 있는 죄에 대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살만한 막중한 죄는 바로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아니하는 죄인 것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만한 말씀은 “하나님을 안다”고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죄인들도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을 알고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 이유에 대하여 밝히시기를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19). 그러면 하나님이 인간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알만한 것을 보이신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하나님께서 그 만드신 모든 만물에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분명히 보여 알게 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만드신 만물의 오묘하심과 그의 위대하신 섭리와 만물 자체 안에 숨겨진 놀라운 신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존재를 알 수 있도록 하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 어떤 경우에도 핑계할 수 없다고 못을 박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피조물로부터 영광을 받으시기 위하여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죄로 타락한 인간들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아니하는 것입니다. 영광이란 말은 ‘독사조’로 찬양한다, 존경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찬양과 존경이 없거나 결여된 사람의 생활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지 못하는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2) 다음에 말씀하고 있는 두 번째 죄는 하나님께 감사치 않는 죄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알지만 하나님께 대하여 감사가 없는 생활은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간에게 번진 죄로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받을 죄인 것입니다. 감사치 아니한다는 말은 전혀 감사가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감사란 말은 ‘유카리스티아’로 좋은 은혜, 좋은 선물을 말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이유가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받고 있는 좋은 은혜, 좋은 선물로 말미암는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대한 감사에는 기쁨과 축복이 넘치는 것입니다. 성도의 생활은 마땅히 이 감사에 바탕을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3) 다음에 인간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야할 죄로 우상숭배의 죄를 들고 있습니다.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인간이 우상을 숭배하게 되는 것인가? 이에 대하여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기 때문”이라고 밝혀 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소망이 없습니다. 이 같은 인간의 상태는 하나님의 존재를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외면하는데서 온 것입니다.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다고 했습니다. 죄는 마음을 어둡게 합니다. 지혜 있다고 하나 우준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사람이나 금수나 버러지 형상으로 바꿈으로 우상숭배의 죄에 빠져 버리게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사람이나 금수나 버러지 행상으로 바꾸는 일은 하나님께 대한 말할 수 없는 고의적인 모욕이며, 도전이 되는 것입니다.


결 론 :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이처럼 하나님이 진노를 받을 무서운 죄인들입니다. 예수를 영접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는 새로운 인생 길을 걷지 못한다면 누구에게나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 10 ≈ 하나님께서 버리신 인간의 마음

(본문 : 로마서 1 : 24 - 32)


서 론 : 그 당시 로마는 인류 문화와 정치의 중심지였으며 또한 타락한 인간의 모든 죄악의 전시장이기도 했습니다. 로마황제를 신의 아들로 섬기는 황제숭배와인간의 죄악에서 나오는 모든 죄악상이 적나라하게 표출되어 있었고 특히 우상숭배의 결과에서 나온 역리적인 성생활의 범죄가 만연되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인간의 이 같은 죄악상에 대하여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함에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인간의 죄는 그들의 마음에서 하나님을 내어쫓았습니다.


1. 내어 버려 두신 하나님

로마서 1장에서는 주로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죄를 다루고 있는데 인간들의 죄의 근원이 하나님을 섬기기를 싫어하는 마음에 근거하고 있음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그 이유로 하나님께서는 죄악상태에 내어 버려 두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 내어 버려 두셨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포기를 말합니다. 죄로 타락한 인간을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손을 쓰실 수 없으셨습니다. 그들에게서 이미 하나님의 형상이 살아져 버렸습니다. 이런 인간의 구제 불능의 상태에 대하여 일찍이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탄식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용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셨다”고 하셨습니다(창6:5,6).


(2) 내어 버렸다는 말씀은 인간이 하나님을 떠난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도록 하실만한 아무런 이유도 갖고 계시지 아니하십니다. 인간 스스로 자기 멋대로 하나님을 떠나버렸고 하나님을 저버린 것입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이런 인간들에게 한없는 자비와 은총을 베푸시기를 원하셔서 아담을 찾으셨고 살인자 가인에게조차 다른 사람이 죽이지 못하도록 표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한 번 하나님을 거역하여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은총의 손길에서 영원히 빠져나가 버릴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모든 인간은 아담 안에서 죄인이 되었으며 무서운 죄의 함정 속으로 들어가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2.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죄

로마서 1장에는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다“는 내용이 세 가지로 구분되어 나옵니다. 그 하나가 24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다고 하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지적하고 있는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다고 하신 표현은 역리적인 음란의 죄를 가리키고 있는 것만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전체적인 타락상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욕되다고 하신 말씀은 추잡하다. 무시하다의 뜻으로 풀이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이 그들 의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를 싫어하였기 때문에 서로 자기들의 몸을 욕되게 하며 더럽히는 것을 간섭치 아니하시고 그들의 자유에 맡겨 두신 것입니다.

인간의 이런 추잡하고 수치스러운 생활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결국 피조물을 조물주이신 하나님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에서 온 마땅한 결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을 저버리고 헛된 우상을 만들어 하나님 께 돌릴 경배와 영광을 피조물에게 줌으로서 하나님은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 두셨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에 바울은 죄의 타락에서 온 인간이 가장 추한 죄로 역리적인 성생활의 범죄를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 두셨다”고 했습니다. 부끄럽다는 말은 수치를 말하고 욕심은 육신의 욕정으로 색욕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1) 여인들의 역리적인 성범죄에 대하여 말씀하고있습니다. 성범죄에 대하여 남자들 보다 여자들에 대하여 먼저 언급하고 있는 것은 그 당시 로마의 사회고위층에 있어서의 여인의 타락한 성생활의 실상을 폭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것을 바꾸어 역리로 쓴다”는 말은 인간의 남녀간의 성생활에 있어서 하나님이 정하여 주신 자연적인 방법을 버리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바꾸어 쓴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남녀간의 결합은 성생활로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른 성생활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축복이요 하나도 부끄러울 것이나 수치스러울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자가 여자로 더불어 결합하는 성생활은 역리적인 성생활로 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인간들을 남자나 여자나 가릴 것 없이 다 죽이라고 명하셨습니다(레20:13).


(2) 다음에 남자들의 역리적인 성범죄가 지적되어 있습니다. 여인들 다음에 남자들에 대한 역리적인 성범죄에 대하여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일듯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한다”고 했습니다. 지난날의 소돔 성이 이 남색으로 인하여 멸망당했습니다. 이성에 두 천사가 들어갔을 때 그 성의 많은 백성들이 이 천사들을 보고 그로 더불어 강제적으로 남색을 시도하려고 롯의 집을 에워싼 일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창19:1-5). 그 악한 성은 결국 하늘의 불로 심판을 받았습니다.

로마시민을 모델로 한 이방사회의 이 같은 범죄는 이미 그에 상응한 보응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이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 각인의 양심에 느끼는 심리적인 보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같은 역리적인 성범죄로 말미암은 정신적 파탄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비밀이 최근에야 밝혀지고 있지만 이 같은 성범죄로 말미암은 질병인데 이 질병 이름이 ‘에이즈’란 이름을 가지고 공포의 병으로 사회에 스며들고 있습니다. 후천성 면역 결핍증이라고 하는 이 세계적인 공포의 병은 그 원인이 동성애에서 발단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짐으로 성경적인 사실을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결 론 : 28절에서부터 언급하고 있는 다른 또 한가지의 범죄는 인간의 모든 합당치 못한 범죄사실에 대하여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신 일이 여러 가지로 나와 있습니다. 모든 불의라고 했습니다. 불의란. 인간의 행악과 옳지 않은 일을 말합니다 추악이란 악덕과 죄악을 말합니다. 탐욕은 육신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한 욕심이며 악이란. 사악과 행실, 시기란. 질투․투기이며 살인, 분쟁, 시기, 악덕, 수근수근 하는 자, 비방하는 자, 교만한 자, 자랑하는 자, 악을 도모하는 자, 부모를 거역하는 자, 우매한 자, 배약하는 자, 무정한 자, 무자비한 자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하나님 보시기에 말할 수 없는 죄인들입니다. 우리가 만약 우리들 마음속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일은 싫어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주장하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생각대로 내어 버려 두실 것입니다. 그러면 이처럼 무서운 죄악 중에 스스로 빠져버리게 될 것입니다.


≈ 11 ≈ 남을 판단하는 죄

(본문 : 로마서 2 : 1 - 5)


서 론 : 로마서의 전체적인 개요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이신 청의’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이신 청의’의 기독교의 진리를 1:16절에서 시작하여 8:39절까지 펴냈습니다. 바울이 본문에서 지적하는 바는 판단하는 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경종이 되겠습니다. 이 경종은 주로 율법이 있는 유대인들에게 해당되는 것으로 유대인들은 그들이 율법을 가지고 있다는 우월감으로 이방인들을 멸시하였으며, 판단하는 죄를 범하고 있었으므로 바울은 율법이 있는 유대인들도 하나님의 정죄하심을 면할 수 없다고 하는 경종을 들려주고 그들의 회개를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1. 남을 판단하는 자의 죄

성경은 여러 곳에서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일에 대하여 정죄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말씀하고 있는 판단이라고 하는 말은 ‘크리마’란 말로 ‘선이냐? 아니면 악이냐의 결정을 내리는 최종적인 선택’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1) 율법에 속한 사람들이 남을 판단합니다. 율법의 사명은 죄에 대한 정죄에 그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에 속한 사람들은 죄에 대하여 용서가 아니라 정죄를 내리게 됩니다. 율법이 주어진 목적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율법아래의 인간들은 정죄뿐 아니라 원수 갚는 일조차 허락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데운 것은 데움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출21:23-25). 이 같은 일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복수의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런 하나님의 허락은 인간의 마음이 악하기 때문입니다{마19:7, 8).


(2) 그러나 은혜에 속한 사람들은 이와 판이합니다. 은혜는 판단이나 정죄가 아니라 사랑과 용서입니다. 예수님은 죄인에 대한 우리들의 태도에 대하여 결코 정죄하라고 하시거나 판단하라고 하지 아니하셨습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혼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마18:21,22). 은혜 받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무한대한 사랑과 용서입니다.

다음에 은혜 받은 사람은 자신의 연약함과 허물에 대하여 곧바로 바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라 하겠느냐”고 말씀하심으로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를 밝히셨습니다(마7:1-4).


(3) 남을 판단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판단을 받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남을 판단하는 일은 자신이 자기를 정죄하는 일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왜 남에 대한 판단이 자기 스스로 자신을 판단하는 결과가 되느냐? 이에 대한 해답을 바울은 명쾌하게 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남을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하기 때문이라고 한 것입니다.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려면 자신만큼은 절대로 그같은 죄를 범하지도 말아야 하며, 다른 이로부터 판단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돼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도 다른 사람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내린 것과 똑같은 판단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 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우리는 내가 판단한 사람과 똑같은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우리 중에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없는 의인은 한 명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일은 절대로 핑계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남을 판단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한가지 죄가 더 추가되는 것입니다. 판단하는 죄와 또 판단한 사람과 똑같은 죄를 자신이 짓는 죄입니다. 이 같은 죄는 하나님의 판단을 받는 죄가 된다고 경종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고 말씀했습니다.


2. 남을 판단하는 사람의 세 가지 무지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무서운 범죄자들임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율법에 얽매어 율법적인 의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 판단하고 정죄하는데 이 같은 일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기 때문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1) 율법을 가지고 남을 판단해 온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의 풍성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인자하심이 풍성한 분이라고 여긴 것이 아니라 판단하고 정죄하시는 분이시라고 여긴 것입니다. 인자란 하나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에게도 똑같으십니다. 하나님은 어리석은 자에게도 인자하십니다(시116:5). 하나님은 가난한자에게도 인자하십니다(시35:10, 시9:12). 그뿐 아니라 하나님은 죄인에게도 인자하십니다. 하나님은 그 어떤 죄인들에게도 오라고 하십니다(사1:18,19).


(2) 다음에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용서하심의 풍성하심을 알지 못했습니다. 용납이란 용서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그의 무한대 하신 사랑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그 어떤 죄라도 용서하여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간음 중에 잡혀 온 여인에게조차 “나도 너를 정죄치 아니하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가지고 우리를 정죄하고 판단하시는 분이 아니라 그 아들 안에서 무한대한 사랑으로 우리를 용납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며 생명을 주시는 분이심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사55:6,7).


(3) 다음에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길이 참으심의 인내의 풍성을 몰랐습니다. 길이 참으신다는 말씀의 원어의 뜻은 사람의 죄와 허물에 대하여 오래도록 참으시고 화를 내지 아니하시고 간과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최종적인 심판을 내리시기까지 오래도록 길이 참으시는 분이십니다. 노아의 때에도 하나님은 죄악된 세상 사람들을 즉시 심판하실 수 있으셨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회개를 위해 오래도록 참으셨다고 하셨습니다(벧전3:20). 그뿐 아니라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은 아무도 멸망치 않고 회개하기에 이르도록 하시려는 하나님의 길이 참으심이라고 하셨습니다(벧후3:8).


결 론 :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가 반드시 이 같은 무리들에게 임하십니다. 이들은 고집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고집이란 말은 ‘스크레로테스’인데 완고, 완악을 의미합니다. 마치 마음을 경화시키는 영적 경화증입니다. 그 마음에 불신으로 가득차 있는 상태가 완고한 마음입니다. 다음에 회개치 않는 자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십니다. 회개란 말은 ‘메타노에오’로 마음을 고친다, 바꾼다, 뉘우친다의 뜻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근본적으로 바뀌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러므로 회개에는 하나님 앞에 반드시 생명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이 같은 회개가 없는 사람들은 그들의 죄악이 관용함에 따라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의 날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 12 ≈ 행한 대로 갚으시는 하나님

(본문 : 로마서 2 : 6 - 9)



서 론 : 사도 바울은 로마서 2장에서 하나님의 진노가 인간에게 임하시는 일에 대하여 그것은 다만 인간들의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 때문에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하신 인자를 멸시함에서 온 것임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하나님의 심판이 하나님의 공의대로 이루어지는데 그것은 두 가지 불변의 원칙에 의하여 이루어 질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각 사람의 행한 대로 내려질 것인데 하나는 선한 일을 행한 지의 보응이요, 하나는 악한 일을 행한 자의 보웅이라고 했습니다.


1. 행한 대로 보응하시는 하나님의 심판

6절에서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보응한다는 말은 ‘아포디소미’로 이 말의 뜻은 반환한다, 청산한다, 넘겨준다, 돌려준다 입니다. 이 말이 하나님의 심판과 연관되어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행한 것만큼 그들에게 갚아 주신다는 뜻에서 비롯되어 있습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행하는 모든 일은 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되며 하나님께서는 우리들로부터 받은 우리의 모든 행실에 대하여 우리들에게 다시 돌려주시는데 그것이 곧 보웅하시는 일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는 모략이 크시며 행사에 능하시며 인류의 모든 길에 주목하시며 그 결과 그 행위의 열매대로 보응하시나이다”고 말씀했습니다(렘32:19).


(1) 하나님의 보응에는 종말적인 보응과 현세적인 보응이 있습니다. 종말적인 보웅이란 백보좌 심판 시에 있을 심판을 의미하며 이 보웅에는 다시 돌이키고 뉘우치는 회개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현세적인 보웅은 우리 생애 중에 받는 보웅으로 이 보옹을 통해서 하나님의 두려움을 알고 회개할 수 있는 길이 있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보응은 심는 대로 거두시는 법칙이 적용됩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했습니다(갈6:7). 우리가 이 땅위에서 살면서 행하는 모든 일은 씨를 심는 일입니다. 씨란 언제나 정직하기 때문에 심는 대로 결실 하는 것입니다. 육신을 위하여 씨를 뿌린 자는 그 씨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씨를 뿌린 자는 그 씨로부터 영생을 거둔다고 한 것입니다(갈6:8). 그러므로 하나님의 보응은 너무나도 공의로우시고 정직하시기 때문에 누구라도 그 앞에서 변명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보응은 그가 행한 대로 나타나십니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저에게 갚으시리라”고 하셨습니다(담후4:14). 이 같은 보웅은 특히 믿는 사람들에게 적용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에 대해서는 회개함으로 용서해 주시지만 그 행한 일에 대해서는 보응으로 우리 머리 위에 내리실 때가 많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어떤 시련과 고난을 당할 때 지난날의 우리가 저지른 악행에 대한 보응으로 생각하고 우리의 생활가운데서 악을 버리고 선을 심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단4:27). 그 결실이 앞으로 우리의 생애에 반드시 아름답게 열매로 나타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2. 참고 선을 행하는 자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보응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신다”고 말씀했습니다.


(1) 참고 선을 행한다는 말은 끝까지 구원을 이루는 일을 말합니다.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선이란 세상에서 말하는 도덕적인 선행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구원의 열매, 믿음의 열매를 말합니다. 주님은 이 같은 열매에 대하여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하셨습니다(요15:5). “선한 일”이란 ‘앨곤 아가돈’이란 말로 하나님의 구원의 일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가장 선하게 보시는 일은 그의 아들을 믿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고 하셨습니다(요6:29).


(2)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일이 선한 일이 되는 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리는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가장 큰 열매는 그 아들을 믿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그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그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며(요1:12),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을 그 아들에 대한 믿음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요3:18).


(3) 그리스도를 믿는 일에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참고 선을 행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를 믿는 일은 육신의 사람이 죽고 영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입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톰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고 하셨습니다(롬8:13). 우리의 옛사람은 언제나 육신대로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는다고 선언되어 있습니다. 육신대로 살지 않고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는 영적인 생활을 하려면 참는 인내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일에 대하여 이처럼 말씀하고 있습니다.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 하는 자니라”고 하셨습니다(눅8:15). 이처럼 믿음의 결실에는 인내가 따릅니다.


(4) 이 같은 일은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만 맺을 수 있는 열매입니다.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이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궁극적인 소망을 말합니다. 우리가 끝까지 참고 선을 행하면 우리에게는 영광이 옵니다. 그리스도와 같은 영광의 몸으로 변화함을 받습니다. 하늘에서 영광 중에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의 이 낮은 몸이 그리스도와 같은 존귀한 몸으로 됩니다. 썩지 아니함이란 영생의 부활을 말합니다. 우리의 몸은 썩지 않고 생명의 부활로 다시 살아납니다. 이 소망이 있는 사람들은 참고 선을 행함으로 영생으로 갚으시는 하나님의 선한 보응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3. 불의를 쫓는 자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노와 분

바울은 악을 행하는 자에 대한 하나님의 보웅에 대하여 이처럼 말씀했습니다.“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쫓지 아니하고 불의를 쫓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고 한 것입니다. 당을 짓는다는 말은 진리를 거슬리는데 목적이 있는 것을 말합니다. 당이란 말은 원어 적으로 볼 때 다툼이나 이기심과 같은 뜻으로 쓰여지고 있습니다. 대개의 경우 불의한 일을 이루는 일에, 다툼을 일으키는 일에 당을 짓는 것입니다. 모세를 대적한 고라와 다단과 온이 당을 지은 것은 모세와 아론을 거스리기 위한 행위였습니다(민16:1-3).

당이란 말은 진리를 대적하기 위해 파당을 형성하는 일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 같은 파당의 형성은 그 어떤 명목으로도 하나님 앞에 정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어떤 경우에도 진리를 따라야 합니다. 불의를 쫓기 위하여 이기심이나 다툼으로 한 무리가 되어 진리를 거스리거나 불의를 쫓는다면 하나님의 보웅을 면할 길이 없다는 사실을 경종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대적하기 위해 모함하고 진리를 거스린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의 무리들이 그런 자들이었습니다.


결 론 : 진리를 쫓지 않는다는 말은 구원의 진리에 대하여 대적하는 일을 말합니다. 이 같은 일은 구원의 도리에 대하여 끝까지 거역하는 자들이며, 회개를 거부하고 죄 가운데 거하는 생활을 말하며, 잘못된 사단의 가르침을 따르는 나머지 진리에 선 자들을 핍박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불의를 쫓는다고 하신 말씀도 이와 똑같은 경우로 고의적으로 불의한 길을 택하고 구원의 복음을 배척하는 일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공의가 노와 분으로 나타나십니다.


≈ 13 ≈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

(본문 : 로마서 2 : 9 - 11)



서 론 : 하나님은 편벽 되지 아니하시며 공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의 심판 에 있어서도 이 원칙이 적용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은 유대인의 하나님이시오 아브라함의 자손인 이스라엘을 선택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축복도 구원도 이스라엘에게만 해당되는 줄로 인식해 왔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곳에서 유대인들의 이 같은 사고방식을 두들겨 부수고 모든 인류에게 공평하게 대하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증거했습니다.


1.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있을 환난과 곤고

바울은 말하기를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들 에게요 또한 헬라인 에게라”라고 했습니다.


(1) 악을 행한다는 말은 진리를 거스리고 불의를 좇는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8절에서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쫓지 아니하고 불의를 쫓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악이란 말은 인간의 본성을 의미합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치 못한 악을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롬1:28). 악은 죄요 곧 어두움이기 때문에 복음을 거역하며 진리를 대적하는 것입니다.


(2) 이들의 영에게는 환난과 곤고가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영이란 말에 대하여 얼마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온 영과 혼과 몸”이란 말씀을 보게 됩니다(살전5:23 ; 히4:12). 그런데 여기 나타나 있는 영과 혼에 대하여 원어를 살펴보면 그 안에 스며 있는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곳에서 영이란 말은 ‘프뉴마’로 나와 있습니다. 이 말은 불다, 숨쉬다 에서 유래된 말로 바람, 영, 성령이란 뜻으로 쓰여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혼이란 말은 ‘프쉬케’란 말로 달리 나와 있는데 이 말의 뜻은 호흡, 생명이란 말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에 기록되어 나오는 영혼이란 말의 헬라어를 보면 제각기 말씀의 내용에 따라 두 가지로 달리 표현되어 있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영혼이란 말이 어떤 경우에는 ‘프뉴마’란 뜻으로 나오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프쉬케’란 뜻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라고 하신 말씀에서 목숨이란 말이 헬라어에는 영혼으로 나왔는데 이 영혼은 프뉴마가 아닌 프쉬케로 나와 있습니다(마6:25). 예수님께서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고 하셨는데 이 목숨도 영혼을 버린다는 말씀으로 프쉬케란 말로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경우도 이와 같습니다(눅10:19). 이처럼 영혼이란 말은 육신의 생명을 가리킬 때도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반면에 우리 인간에게는 영원히 멸하지 아니하는 영적인 생명체가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알 수 있는데 이 존재 역시 한글 역에는 같은 영혼이란 말을 사용했지만 헬라어로는 프뉴마란 말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눅23:46). 그런데 이곳에 있는 영혼은 조금 전에 말씀드린 자신의 목숨이나 생명을 의미하는 프쉬케란 말이 아니라 성령과 동일한 말로 사용하는 프뉴마란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사람의 속에 영이 존재한다고 말했습니다.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일리요”라고 했습니다(고전2:11). 그런데 이 영이란 말이 성령과 같은 말인 프뉴마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라고 한말도 영원히 존재하여 멸절하지 아니하는 존재로 나타낸 프뉴마로 표현하고 있습니다(약2:26). 그런데 오늘 주신 본문에 나타난 영이란 말은 목숨이나 생명을 뜻하는 프쉬케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을 것이라고 하신 말씀은 그의 육체가 살아 있을 동안에 당하는 영육간의 심판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환난과 곤고에는 유대인에나 헬라인의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율법이 있다고 치외법권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악인들은 이 같은 환난과 곤고의 길을 떠나 살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악인이 살 수 있는 길은 악에서 돌이키는 길입니다(겔33:11). 악에서 돌이키는 길은 먼저 죄를 자복하고 그의 인생의 발걸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회개로 나타납니다(행2:37,38).


2. 선을 행하는 사람에게 돌아갈 영광과 존귀와 평강

악인과 선인의 보응은 천국에서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현세에도 있습니다. “선을 행하는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1) 선이란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롬2:7). 하나님이 원하시는 최고의 선은 무엇인가?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일”입니다. 이것은 그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안에서 언약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 약속을 자기 인생의 최고의 소망으로 삼고 살아 나가는 사람들의 생활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선이란 그리스도안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맺는 열매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그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 싫어했던 지난날의 생애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새로운 열매입니다. 이 열매가 하나님 앞에 최선의 선으로 인정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2) 그의 생애에 하나님의 축복이 약속되었습니다. 그 축복이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라고 했습니다. 영광이란 말은 ‘독사’로 어떤 좋은 평가로 말미암은 명예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면 하나님은 우리를 영예롭게 해 주십니다. 존귀는 모든 사람들에게 귀중히 여김을 받는 일인데 이 일에 대하여 이처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자와 진리로 네게서 떠나지 않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메며 네 마음 판에 새기라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잠3:3). 평강이란 마음속에서 언제나 생수처럼 샘솟는 평안을 말합니다. 주님은 이 평강을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요14:27).

이 같은 선을 행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언약도 유대인과 헬라인의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들과의 차별은 그리스도가 태어나시기 이전까지에만 해당됩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을 통하여 메시야를 태어나게 하시기 위하심이요, 이 일을 위하여 이스라엘로 율법을 주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간수하며 하나님의 특별하신 사랑을 입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신 후로는 그리스도로 만민의 구주가 되게 하셨기 때문에 이 같은 차별의 담이 무너지고 그리스도안에서 하나가 된 것입니다. 율법으로 의를 얻지 못한다면 그 율법이 그들에게 특권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육적인 이스라엘이 아브라함의 자녀가 아니요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는다면 유대인이란 혈통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는 일에 아무런 특권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롬9:6-8).


결 론 : 공의의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외모란 유대인과 헬라인의 차별을 말합니다. 그뿐 아니라 가문이나 교육이나 명망이나 인물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같은 차별의 눈으로 사람을 보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오직 그의 중심의 진실을 보십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중심은 상한 심령, 깨어진 마음을 말합니다. 죄악의 사람이 하나님 앞에 깨어지지 않으면 하나님의 가장 좋은 선물인 그리스도를 선물로 받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선한 열매를 맺을 수도 없습니다.


≈ 14 ≈ 율법과 양심에서 오는 정죄

(본문 : 로마서 2 : 12 - 16)


서 론 : 인간의 심판자와 구원자는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심판이란 말은 인간의 양심이나 율법의 정죄에 대하여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일이요, 구원이란 인간이 죄 값으로 받을 사망에서 건짐을 받아 새 생명을 얻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일에나 죄인들을 심판하시는 일에 있어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에게 차별을 두지 아니하시고 다 동일하게 하신다는 것이 성경적인 증거입니다. 12절에 나와 있는 말씀대로 “율법 없이 망한다”는 말씀은 율법을 갖고 있지 아니한 이방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하고 있으며 율법으로 심판을 받는다고 하신 말씀은 율법을 가지고 있는 유대인들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1. 세 가지 하나님의 법

성경에서 명시해 주고 있는 바는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에게 세 가지 법을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1) 그 하나가 양심의 법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지 오랜 이후의 일이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율법이란 것이 인간 사회에 존재치 아니했으며 다만 인간의 마음에 기록된 양심의 법에 의하여 살아가도록 하셨습니다. 양심이란 말은 ‘순네이데시스’로 선악에 대한 인간의 지각, 이해력, 통찰력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도덕적인 생활규범으로 주신 율법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율법과 양심이 다른 점은 다만 양심은 마음의 법으로 심령에 새겨 주시고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의문(돌판)에 기록해 주신 것입니다.

양심이란 오직 인간에게만 주신 특권이요 책임입니다. 최초로 아담의 마음에 심어주신 양심은 범죄이전의 양심으로 깨끗한 양심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범죄한 후 그 양심이 죄로 인하여 더럽혀졌습니다. 이 같은 양심은 더러워진 양심, 혹은 약해진 양심이라고 말합니다(고전8:7). 이 마음은 사람들이 그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를 싫어하는 상태로 하나님께서 그 상실한 마음대로 방치해 두시는 인간의 마음입니다(롬1:28).

인간의 마음이 이처럼 더러워진 후에 자신의 죄에 대한 판단이나 정죄하는 일에는 기능을 발휘할 수 있으나 그 양심대로 살아야 된다고 하는 양심의 소리를 따를 수 있는 능력은 이미 상실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도 바울의 외침은 율법대로 살 능력을 상실한 자신의 비참함을 고백한 말이지만 양심대로 살 수 없는 안타까운 양심의 외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롬7:23).

그리고 성경에서는 양심의 최악의 상태를 ‘화인 맞은 양심’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딤전4:2). 우리 인간의 더러워진 양심은 그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를 싫어함에 자연히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 상실되어 버렸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양심의 소리가 묵살되어 버렸습니다. 다만 있는 것이라고는 도덕적 양심뿐이나 이 양심도 판단하고 정죄하는 기능만 살아 있을 뿐 행할 능력을 상실해 버렸기 때문에 인간의 마음은 갈수록 완고하고 완악해 질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2) 다음에 율법입니다. 인간의 양심이 화인 맞은 상태에서 정죄와 판단의 기능이 약해짐에 따라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약해질 수도 없고 무뎌질 수도 없는 인간의 본래의 양심을 돌판에 새겨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주셨습니다. 이것이 율법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인간이 양심이 마비되어도 돌에 새겨진 율법이 엄존하는 이상 인간은 하나님의 정죄에서 모면할 길이 없는 길입니다. 인간의 양심이라고 하는 등불이 죄의 관용으로 희미하게 꺼져 가는 이 세상에 온전한 양심의 등불을 (사람이 끌 수 없는) 주신 것이 바로 율법입니다. 이 등불(율법)은 화인 맞은 양심이 깨닫지 못하는 인간의 죄를 명백히 들어내려는데 그 목적이 있다고 하셨습니다(롬3:20).


(3) 끝으로 믿음의 법이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롬3:27). 양심의 법도 율법도 인간에게 구원을 줄 수 없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형상이 살아져 버렸고 죄로 인하여 더러워졌기 때문입니다. 양심이 더러워진 것은 아담의 원죄에서 온 것이기 때문에 그 누구도 깨끗한 양심으로 회복시킬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온전한 의를 주시고 구원에 이르게 하실 수 있는 새로운 법을 주셨는데 이 법이 믿음의 법입니다.

믿음의 법이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받는 법입니다. 이 믿음의 법은 두 가지 면에서 역사 하십니다. 하나는 우리의 죄를 근원적으로 씻어 주시는 일입니다. 죄인들이 하나님의 사죄의 선언을 듣지 못한다면 영원토록 양심의 법에 의한 정죄, 율법에 의한 정죄를 면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피로써 우리의 죄를 용서하심으로 양심의 법과 율법에서의 정죄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다른 또 하나는 우리에게 영원한 의를 주시는 일입니다. 아무리 양심이나 율법의 정죄에서 벗어났고 그 죄에 대한 사죄의 은혜를 받았다고 해도 인간은 연약하기 때문에 언제 또다시 죄를 범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양심의 법이나 율법에서 참으로 영원히 벗어나려면 영원한 의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법으로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가지고 계시는 영원한 의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이 믿음의 법을 소유한 사람은 그 마음이 새롭게 창조함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으로 죄를 깨닫게 될 뿐 아니라 죄와 싸워 이길 수 있는 능력도 받은 것입니다.


2. 양심의 송사

바울은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이 있는 자가 그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게 된다고 하신 이유는 그 다음에 나오는 말씀이 해답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라고 했습니다. 율법이 있는 자는 그 율법대로 행해야 의를 얻을 수 있는데 “율법의 행위로 그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롬3:20). 그런데 바울은 이곳에서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율법 없이 망한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1) 율법 없는 이방인들도 율법이 적용된다고 했습니다.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사람이 율법이 없어도 율법적인 책임을 모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의 양심은 마음에 새겨진 하나님의 율법이기 때문입니다.


(2) 양심이 이방인의 마음속에서 율법적인 활동을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 양심이 우리의 행위를 이 재판에 송사 하게 됩니다. 거기서 우리 인간은 변명이 시도되지만 양심은 정죄를 내립니다. 이때 우리 인간은 가책을 받게 됩니다. 이런 일이 한평생 계속됩니다.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이 양심의 가책과 정죄 속에서 살게 되고 평안이 없고 기쁨이 없고 소망이 없는 생애를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사죄의 길이 없고 구원의 길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결 론 : 이 같은 인간의 죄는 바울이 증거한 복음에 이른바와 같이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날에 하나님의 최종적인 심판이 내려지게 되며 이 심판에서 모든 사람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 15 ≈ 율법으로 정죄 받은 유대인

(본문 : 로마서 2 : 12 - 24)


서 론 : 로마에서 복음에 거침돌이 된 사람들은 이방인들이 아니라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자랑하는 선민의식과, 율법이 오히려 그들로 복음을 배척케 하는 동기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유대인들의 이 같은 그릇된 사상을 통렬히 비난했습니다. 율법이 있는 유대인이나 율법이 없는 이방인이나 다 한가지로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밝혔습니다.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고 준엄하게 선언했습니다(롬232). 그 이유로서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증거하면서 율법을 자랑하는 유대인들이 그 율법에서 정죄함을 받는 몇 가지 사례를 지적하므로 경종해 주고 있습니다.


1. 유대인들이 자랑한 것들

모든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특권적인 존재로 여겨 왔습니다. “모든 민족가운데서 빼낸 백성” “하나님의 선택된 민족” “아브라함의 자손” “할례 받은 백성” 등 등 유대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많은 자랑거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또한 그들에게 있어서 사실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분명한 그들의 특권적인 사실 때문에 오히려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하나의 큰 경종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1) 그들은 율법을 의지한다고 자랑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율법이 곧 그들의 생활의 규범이요 생활의 법도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의 생활은 마땅히 율법에 의지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 율법에 의지하는 생활을 하고 있다고 여겨 왔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그들의 자랑은 사실인즉 거짓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율법을 잘못 해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에 깔려 있는 진리는 버리고 겉에 나타난 외형적인 모형만을 따랐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은 따르지 아니하고 오히려 율법을 사람의 뜻을 따라 해석했습니다. 예수님은 이에 대하여 이처럼 책망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소경된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우맹이요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금이냐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마23:16, 17).

유대인들은 이처럼 율법을 의지한다고 자랑했지만 그들이 의지한다고 자랑한 율법이란 하나님께서 귀중히 여기시는 조항을 소홀히 한 것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의 정죄함을 받는 올무가 된 것입니다.


(2) 그들은 하나님을 자랑했습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자랑한 일은 잘못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의 자랑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지 못했다면 그들의 자랑은 오히려 하나님께 무거운 짐이 되는 자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유대인들에게 하신 모든 행사는 유대인들로 참으로 하나님을 자랑할 만 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선택이라든가,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해 내신 권능이라든가,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주신 일,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신 일 등, 허다한 자랑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 같은 역사가 그들의 자랑이 되기 위해서는 그들이 이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릴 수 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자랑하는 대로 이스라엘을 위하여 모든 것을 해 주셨건만 그들은 하나님을 실망시켰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하여 이처럼 탄식하셨습니다.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었느냐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 포도를 맺힘은 어찜인고”(사5:4).

“자랑하는 자는 주안에서 자랑할찌니라”(고후10:17). 이 자랑은 우리들의 자랑해야 할 모든 공로가 오직 예수님께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우리가 이룬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우리의 자랑은 십자가뿐입니다.


(3) 유대인들은 자기들은 율법의 교훈을 받는 백성이라고 자랑했습니다. 율법의 교훈은 두 가지로 나타나 있습니다. 율법의 교훈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며 또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길 줄을 알게 된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자랑대로 어려서부터 율법의 교훈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그들은 어느 민족보다도 하나님의 뜻을 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길 줄을 알고 있다고 자부했습니다. 지극히 선한 것이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알고 있다는데 만족했습니다. 행하는 일에는 인색한 나머지 외식으로 흘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롬2:13).


(4) 유대인들은 또 자기들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라고 자랑했습니다. 이 같은 유대인의 자랑은 자신들이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라고 자부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소경이란 율법도 없고 하나님도 없는 이방인들을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향하여 우맹이요 소경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마23:16-26). 성경에서는 누구를 보고 소경이라고 부르나?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치 못하고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벧후1:5-9), 그리고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라고 자랑했습니다. 또 어리석은 자의 훈도라고도 했습니다. 어린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기도 했습니다. 사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잘 깨닫고 그 율법에서 진리를 배우고 하나님의 뜻을 따랐다면 이들의 자랑은 다 옳은 주장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자랑이 헛된 것은 하나님 앞에 아무런 열매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결국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잘림을 당하고 말았습니다(요15:1,2 ; 롬11:20).


2. 유대인들이 받은 정죄

하나님은 유대인들에게 그들의 자랑에 대한 책임을 물었습니다. 하나님이 질문하시는 책임은 준엄하게 내려집니다. 이 같은 준엄한 책임은 그들의 자랑이 헛된 일임을 깨우치시려는데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들은 남은 가르치면서도 자신에 대해서는 소홀했습니다. 그들이 외식으로 흐르게 된 원인이 여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도적질 말라하는 네가 도적질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 물건을 도적질하느냐?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하므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고 나무랐습니다.


결 론 : 바울의 이 같은 논법은 유대인들에게 자신의 반성을 재촉하는 일련의 반문인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 하나님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자랑을 하기에 앞서 우리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시고 그의 자녀를 삼으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그 열매를 맺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할 것을 교훈 받아야 합니다.


≈ 16 ≈ 참 유대인

(본문 : 로마서 2 : 25 - 29)


서 론 : 할례란 말은 ‘페리도매’로, 뺑 둘러 벤다는 뜻입니다. 할례가 사람의 인체에 주는 의미는 의학적으로나 위생학적으로 어찌되든 이 할례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세우실 때 그 언약의 표시로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주시는 선민의 표식 이였습니다. 갈데아 우르땅에서 아브라함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내신지 어언 24년이 된 아브라함의 나이 99세시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주시기에 앞서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에게 주시는 영원한 언약으로 할례의 법칙을 주셨습니다.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창17:10). 이 할례란 돌로 사내아이의 양피를 베어내는 의식을 말하는데 아브라함의 자손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같은 언약에 의하여 세상에 출생한지 8일만에 할례를 받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할례가 신약에 와서 영적인 의미를 지니게 된 것입니다.


1. 문제가 된 할례

이처럼 할례는 분명히 하나님의 백성된 언약의 표징으로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행하므로 하나님께 속한 백성들임을 나타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할례가 신약시대에 와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복음을 받아 드린 사람, 그리스도를 믿게된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니 그들이 유대인들처럼 할례를 받아야 할 것이라는 주장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미 언약의 약속을 이루신 이상, 이런 약속에 참여하기 위해 할례를 받는 일은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주장했습니다. 이 같은 엇갈린 주장 때문에 예루살렘 교회 안에 할례 당까지 만들어졌으며 이 할례로 인하여 바울은 유대인들로부터 신랄한 공격을 받았을 뿐 아니라 핍박까지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지적하고 있는 바는 할례 받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할례자가 만약 율법을 지키는 생활을 못하면 그 할례가 무 할례와 다름이 없다는 점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할례가 없는 사람일지라도 그가 율법을 지키는 생활을 한다면 그 무 할례를 할례와 갈이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고 반증했습니다.


2. 할례의 영적 의미

바울이 이곳에서 주장하는 바는 할례는 율법에 속한 사람들에게나 소용되는 일이요 그리스도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 할례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라고 주장하므로 오늘날 할례는 새로운 영적 의미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롬2:28,29).


(1) 할례의 유익은 율법을 지키는데 있다고 했습니다. 할례 자체가 언약이 아닙니다. 할례란 언약의 증표입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유대인들이 받는 할례야말로 선민 그 자체의 특권적인 증거인양 자랑했고 할례를 행해야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구원에 이르는 줄로 알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할례를 율법과 동일하게 연관시켰기 때문에 바울은 “네가 율법을 행한즉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한즉 네 할례가 무 할례가 되었느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율법이 유대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이라면 유대인들의 할례는 그 율법을 지켰을 때 율법을 통하여 의를 얻을 수 있는 하나님의 언약에 참여하는 축복이 따르는 것입니다.

만약에 유대인들이 율법을 지키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의를 얻을 수 없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백성된 증표인 할례가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에게는 할례의 유익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이 한 명도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롬3:20).


(2) 할례에는 참 할례와 육신적 할례가 있습니다.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고 했습니다(38). 육신적 할례란 말은 아브라함의 혈통적인 자손이란 의미에서 받는 할례를 가리킵니다. 혈통이란 사람을 거듭나게 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 수 없습니다(요1:12, 13). 또한 육신적인 할례란 율법적인 할례를 말하는 것으로 율법은 사람을 의롭게 하지 못하므로 할례의 언약이 미칠 수 없습니다.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고 밝힌 할례란 참 할례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구약에 나타난 할례만을 볼 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할례의 영적인 뜻을 찾아내기란 어렵습니다. 그러나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란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할례란 영적인 뜻이 담겨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케 되는 것입니다.

할례란 아브라함의 믿음의 언약에 연합한 자들에 대한 인 치심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할례야말로 신령한 뜻을 지니고 있는데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하나님의 백성된 언약의 보증으로 주셨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 할례는 오늘날 그리스도의 할례란 이름으로 불려지게 되었는데 그리스도의 할례란 그리스도와 영적인 연합을 이루는 세례를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고 했습니다(골2:11). 12절에서 이 할례는 세례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 세례가 오늘날 우리들이 형식적으로 받는 물세례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밝혀 주고 있습니다. 11절에서는 세례란 육적 몸을 벗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할례란 곧 육적인 몸을 벗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의미하며, 이로써 하나님의 백성이 되며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다는데 참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3) 유대인도 표면적 유대인이 있고 이면적 유대인이 있다고 했습니다.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란 말씀은 유대인을 둘로 나누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란 아브라함의 육적 자손을 의미하고 있지 아니함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혈통적인 유대인은 에서나 이스마엘을 말합니다. 에서는 자신의 장자 권을 경망스럽게 팔아먹은 아들로 장자 권을 박탈당했습니다. 이미 그는 약속의 자녀가 아닙니다. 곧 유대인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스마앨도 약속의 씨로 태어난 자녀가 아니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축복의 언약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도 아브라함의 혈통적인 유대인을 고집하고 아브라함의 약속 안에 들어오지 아니한다면 그들은 참 유대인일 수가 없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유대인이란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진 자를 말하며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을 가진 사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 론 : 바울이 증거한 이 말씀은 비단 그 당시 육적인 유대인들에게만 교훈으로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들도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하면서도 하나님의 언약 안에 들어가 있지 않다면 그는 표면적 유대인이며, 우리가 세례를 받았다고 자랑하면서도 그리스도와 연합된 신령한 생활을 못한다면 그의 세례는 표면적 육신의 세례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칭찬 받는 이면적 유대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로마서 3장

◆ 밤중소리 03-02 | VIEW : 8,513

≈ 17 ≈ 잘못된 네 가지 질문

(본문 : 로마서 3 : 1 - 8)



서 론 : 유대인들은 그들이 자랑으로 여겼던 모든 특권이 결국 아무 것도 아니란 사실을 바울의 논증을 통하여 통렬히 공격받은 사실에 대하여 바울에게 네 가지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습니다. 유대인들의 자랑은 율법과 할례였는데 그 율법도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는 책망을 들었고, 그들이 행하는 자랑스런 할례에 대해서도 할례는 양피를 베는 표면적인 것이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가죽을 베는 할례가 참 할례이기 때문에 율법을 자랑해도 그것을 지키지 못할 때에는 율법에서 의를 얻을 수 없으니 율법의 유익이 없으며 할례를 받아도 율법을 범하는 생활을 한다면 그 할례가 결과적으로 무 할례가 될 것이 아니냐고 공박 받은 것입니다. 로마서 3:1-8까지는 바로 이 같은 유대인들과 이를 변증하는 사도 바울과의 하나의 변론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유대인들은 바울에게 네 가지 질문을 던졌으며 바울은 이 질문에 대하여 날카롭고 명쾌한 답변으로 그들의 잘못된 사상을 정죄했습니다.

1.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

그들이 1절에서 그렇다면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바울에 의하면 유대인들도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라고 했으니 자신들은 아브라함의 육적인 자손으로써 그러면 자신들이 이방인들 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조상들에게 주어 자랑스럽게 여기는 율법도 그들의 불순종으로 오히려 율법을 받은 자기들을 정죄한다고 하니 차라리 율법 없는 이방인들보다 나은 것이 없는 것이 아니냐는 항변입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그들에게 범사에 많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일은 그들의 유익이라고 했습니다. 2절에서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말씀을 맡아 온, 세계 유일의 민족입니다. 이 같은 일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크나큰 영광이요 자랑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류구원의 약속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성취되는데 이 말씀이 유대인들에 의하여 유지되어 온 것입니다.

(2) 유대인이 이 일에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일은 그들의 자랑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한 혈통에서 메시야를 태어나게 하실 것을 작정하셨으므로 그 혈통의 조상으로 아브라함을 택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유대인의 혈통적인 조상도 되고 또 한편 그의 자손(그리스도)으로 말미암은 진정한 믿음의 조상도 된다는 사실을 그를 부르신 하나님의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창12:1-3, 17:4-5). 하나님은 그들의 조상들 중 선지자들을 통하여 메시야 탄생과 인류 구원에 대한 말씀을 기록하여 그들로 간직하게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야말로 인류에게 구원의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의 특별계시로 이 계시를 유대인들이 맡았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큰 자랑으로 여겨야 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 유대인은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이신 여인의 후손을 낳는 역사적인 과업을 이루므로 구약시대의 막을 내리게 하였고 온 인류에게 그 구원의 축복을 전달하는 메시지의 전달자, 그 진원지가 된 것입니다.

2.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1) 유대인들은 3절에서 두 번째 질문을 던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일에 대하여 이 일이야말로 유대인의 자랑이요 유익이 아니겠느냐는 대답에 대하여 그러면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던 유대인들이 그 말씀을 믿지 아니하였을 경우, 그들이 맡았다고 하는 하나님의 약속은 소용없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맡은 사람이 믿지 아니했는데 그 말씀이 어떤 효과가 있을 것이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그들의 믿지 아니함 때문에 하나님의 미쁘심이 결코 폐할 수 없다는 주장이 바울의 주장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유대인들이 그 말씀을 믿지 아니했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착오가 있거나 부족함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 말씀을 맡은 유대인들이 거짓되고 불의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반대나 불신에도 그 자신이 가지고 계시는 의로써 승리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주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에게 맡기셨다고 해도 그들이 그 이유만으로 특별한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누구에게도 공정하며 말씀이 나타내고 있는 하나님의 뜻을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이루시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자신들이 맡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아니하였다해도 그들의 불신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살아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맡은 자가 불성실할 때에는 그 받을 책임이 더 크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2) 바울의 주장에 동조할 수 없는 유대인들은 5절에서 세 번째 질문을 던졌습니 다. “우리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하리요”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었던 유대인의 경우 그들이 하나님을 거역했던 불신과 그들의 죄가 오히려 하나님의 의를 들어낸 결과가 되었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내게 한 사람들을 하나님이 어찌 심판하실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 같은 주장은 사단의 궤변입니다. 그 마음의 완악함에서 나온 악의에 찬 거역입니다. 이 같은 유대인들의 질문에 대하여 바울은 두 가지를 들어 공격했습니다. 유대인들의 그같은 주장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은 불의하시다는 것이요 하나님의 심판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죄를 지은 모든 사람들이 자기 죄가 불의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의를 들어내는 동기가 되었다고 말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유대인들은 네 번째의 질문으로 바울에게 최종적으로 도전했는데 “나의 거짓 말이 하나님의 참되심을 더욱 풍성히 들어내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면 그런 사람이 불의를 행했다고 어찌 죄인처럼 심판을 받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기를 기뻐하시고 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거짓말로 이 같은 일을 했을 때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겠느냐? 절대로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의와 진리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거짓과 불의와 악으로 영광 받기를 원하는 존재는 하나님이 아니시라 사단입니다.

결 론 : 유대인들 중에 어떤 자들이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대 하여 “은혜로 구원을 얻는 일”을 악랄하게 비방한 것입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많으니 악을 행하라고 권장하는 것이 바울의 복음이라고 비방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 같은 유대인들의 도전에 대하여 공박하면서 “저희가 정죄 받는 것이 옳으니라”고 단언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어떤 경우에도 공의로우시고 공의로 구원을 이루시고 공의로 영광을 받으시고 공의로 세상을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공의로 하나님을 섬기고 공의에 입각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 18 ≈ 온 인류의 죄

(본문 : 로마서 3 : 9 - 20)

서 론 : 로마서는 사람이 믿음으로 의를 얻어 구원에 이르는 도리를 밝혀 주는 위대한 교리서입니다. 바울은 이 로마서 서두에서 사람이 스스로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이유를 밝혀주고 있으며 율법이나 양심이나 이 모든 것들이 사람을 구원의 길로 인도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1장에서 모든 이방인들의 죄에 대하여 소상히 밝히고 이들이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음을 나타내 보였으며, 로마서 2장에서는 유대인들 역시 하나님 앞에 좌인 임을 들어냈으며, 로마서 3:9-20절에서는 모든 인류가 다 죄악가운데 있음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1. 의인은 없나니

바울은 9절 서두에서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라고 묻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우리라고 표현한 말은 바울과 이 서신을 전달받는 로마교회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바울이 결코 아니라고 밝힌 말은 바울이나 로마교회 성도들 역시 이 같은 죄 아래 속해 있는 사람들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도 역시 유대인이나 헬라인에 속해있는 이상 이 같은 인류의 범주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다만 이 같은 저주에서 벗어난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사실에 대하여, 21절 이후에서는 율법에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얻는 새로운 의 때문임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I) 의인이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의 표준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란 죄가 전혀 없는 완전한 의를 말합니다. 이 의란 곧 하나님의 의인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의를 소유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인정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같은 의의 표준을 율법을 통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율법으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는 것입니다.

(2) 사람이 왜 의인이 될 수 없느냐?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모든 인류는 다 아담의 자손이라는데 있습니다. 아담이 죄인이기 때문에 그 아담의 죄를 원죄로 물려받은 인간들은 모두 죄인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롬 5:12). 다른 또하나는 아담의 원죄를 물려받은 인류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자연히 죄를 짓지 아니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입니다(마7:18).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만 지키면 의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율법에서 의를 얻으려고 힘쓰는 생활을 해 왔습니다. 그러나 만약 사람이 율법으로 의를 얻을 수 있다면 십자가란 무용지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십자가란 죄인들이 의를 얻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율법으로 의를 얻을 수도 있다면 모든 사람은 십자가 없이도 의를 얻을 가능성이 있게 되므로 십자가의 도리는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그의 독생자를 보내신 것은 이 땅위에는 단 한 명도 의인의 자격을 가질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 아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만약 단 한 사람이라도 인간의 노력으로나 공로로나 율법으로 의인이 되어 구원함을 얻을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에게 그같은 방법으로 구원을 받으라고 명하시지 우리에게 그의 아들을 믿으므로 의를 얻으라고 말씀하실 리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온 인류의 죄

인간이 범하는 죄에 대하여 본문 말씀에서 세 가지 형태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음에서 나오는 죄에 대하여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죄가 11-12절에 언급되고 있는 죄입니다. “깨닫는 자가 없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깨닫지 못한다고 한 부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이요 생명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은 깨달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이 세상사람들에 대하여 죽은 자들로 표현하고 있습니다(요5:25, 엡.2:1). 다음에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고 했습니다. 인간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원수의 관계에 있으므로 그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를 싫어합니다. “선을 행하는 자가 없다”고 했습니다. 이곳에서 말씀하는 선이란 인간의 선행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이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순종의 열매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바탕을 두지 아니한 선은 하나님 앞에 선으로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2) 다음에 입으로 나오는 인간의 죄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13-14절에서 “저희 목구멍은 열련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다”고 했습니다.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라고 했습니다. 무덤이란 시체가 있는 곳입니다. 목구멍은 자기 마음에 있는 것들을 밖으로 들어내 놓는 기관입니다. 이 목구멍이야말로 ‘불의, 추악, 탐욕, 악의, 투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나오는 출구이기 때문에 시체가 있는 무덤을 방불케 하는 것입니다(롬1:29-31). “혀로는 속임을 베푼다”고 했습니다. 인간은 그의 혀로 거짓말을 꾸며댑니다. 창3:1에 나오는 뱀의 혀같이 사람의 혀는 간교하여 속임을 베풉니다. 혀를 잘 움직이는 사람은 뱀의 혀를 닮았기 때문에 거짓이 많고 간교가 많고 모함이 많은 것입니다(약3:2-6).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다”고 했습니다. 독사의 독이 사람을 죽이는 것처럼 사람의 입의 말은 능히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독사의 독이 있는 것입니다. 거짓 증언의 입에는 이 같은 독이 들어있기 때문에 “거짓증거하지 말라”고 하시는 계명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3) 세 번째로 인간의 죄악에는 몸에서 나오는 것이 있습니다. 이 죄는 우리의 몸을 운반하는 발이라고 하는 기관을 통하여 나오는 죄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 의 이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르다고 했습니다. 피 흘린다는 말은 화평을 깨는 일, 전쟁을 일으키는 일, 사람을 죽이는 일을 말합니다. 사람의 발이 이 같은 일에 분주했기 때문에 인류의 역사는 언제나 파멸과 고생이 따랐고 평강의 길을 알 길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발은 화평의 복음을 전달하는 발이라고 했습니다.

결 론 : 그러면 율법이 말해주는 바는 무엇이냐에 대한 결론적인 해답을 내려야 합니다. 율법이 인간들에게 말해주는 바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게 하려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율법은 이 같은 인간의 죄에 대하여 정죄하며, 하나님의 심판을 경종해 주는 것입니다. 이 같은 율법의 정죄와 경종의 대상자 중 이 세상 인류가운데 한 명의 예외자도 없다는 사실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모든 인류는 이 같은 율법의 엄숙한 소리를 듣고 하나님의 은혜에서 나오는 그리스도의 의를 얻어야 소망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 19 ≈ 나타난 하나님의 한 의

(본문 : 로마서 3 : 21 - 26)

서 론 : 바울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말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모두 죄인임을 명시하고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을 뿐 율법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음을 밝혔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율법은 인간들에게 무엇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인가? 이에 대하여 바울은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아래 있는 사람들의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고 선언했습니다. 이 선언으로 이제 모든 인류는 어떤 행위로도 의를 얻을 수 없게 되었음을 밝혀 주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21절에서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율법 외에 새로 나타난 하나님의 한 의란 무엇인가? 바울은 이 의의 소재를 밝혀주는 일에 새로운 논리를 전개해 나가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의 한 의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는 바울의 선언은 놀라운 뉴스가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소망이 없는 인류가 그 의를 소유할 수 있게 된다면 우리는 의로워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 의를 소유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1) 이 의는 “예수 그리스도룰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는 의”라고 했습니다. 의인이 한 명도 없으므로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게 되었다고 선언한 바울은 이 하나님의 심판을 이길 수 있는 하나님의 한 의를 제시했으며 이 의가 바로“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라고 증거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로 심판을 받게 될 인류에게 주실 하나님의 한 의를 준비하여 놓으셨는데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는 의라고 밝힌 것입니다. 이것은 만대로부터 온 하나님의 비밀이십니다. 이 같은 의는 하나님께서 이미 창세 전에 그리스도안에서 예비하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엡1:3,4).

(2) 이 의는 율법과 선지자들의 증거를 받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한 율법의 증거란 두 가지를 말합니다. 그 한가지는 이 같은 의는 이미 율법아래에서도 그 그림자를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창15:6, 합2:4, 롬1:17, 롬4:3,7,8). 율법아래에서도 율법의 행위로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고 하시는 하나님의 선언을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또 한가지의 증거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실 때 곁들여 제사제도를 주신 일입니다. 율법은 의를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죄를 들어내기 때문에 제사를 통하여 그 죄를 사하심을 받는 일은 하나님의 은혜요 이 같은 제사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역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피의 제사를 통하여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시는 율법적인 증거인 것입니다. 그리고 선지자의 증거라고 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이 같은 사실을 끊임없이 증거해 온 것을 말합니다(히1:1,2).

(3) 이 의는 차별이 없다고 했습니다. 율법을 가지고 있었던 유대인들은 의에 차별을 두었습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유대인들은 의롭다고 믿었지만 이방인들은 이 의로움에서 제외된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하나님의 한 의는 차별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차별이 없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구원의 보편성, 온 인류 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혈통적인 차별, 율법적인 차별, 민족적인 차별 등, 이 모든 지난날의 차별이 이제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의를 얻는 일에 그 장벽이 무너지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고, 믿음으로 참 유대인이 되었다는 선언입니다(요1:12). 하나님의 의를 얻는 일에 모든 장벽이 제거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하나가 된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된 의

인간의 죄는 하나님의 영광에서 떠나게 하였으며 다시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1) 인간의 죄는 하나님의 영광에서 떠나게 했습니다. 성경에서는 언제나 모든 사람이 범죄 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두 가지 원리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아담 안에서 모든 인류는 죄인이라는 뜻입니다(롬5:12). 다른 하나는 모든 인류는 율법의 정죄 아래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롬3:19.20). 이 같은 인간의 죄는 결국 하나님의 영광에서 떠나게 되었으며 다시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곳에서 언급되고 있는 하나님의 영광이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해드리는 일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된 인간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릴 수 없다는 사실은 인간의 최대의 실패요, 저주인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의미로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재의 두절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아담은 그의 범죄 함으로 에덴에서 쫓겨남으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재가 단절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단절은 마치 지성소의 휘장 같아서 휘장가운데로 열려진 새롭고 산길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또 한가지의 뜻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소유한자는 이 같은 관계가 범죄이전으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2) 이 같은 하나님의 의는 값없이 주신 은혜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하나님의 의를 가질 수가 없습니다. 은혜란 하나님께서 긍휼히 보시므로 대가없이 거저 주시는 선물인데 이 같은 하나님의 은혜의 근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에게도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는 무한한 값을 치르셨습니다. 죄인의 죄를 아무런 조건 없이 용서해 주는 일은 불법이요 하나님의 공의가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조건을 우리에게 두지 아니하시고 하나님 자신이 지불하시는 것으로 선택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속이란 말은 우리들이 갚아야 할 죄에 대한 속전을 하나님이 대신 지불하셨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은 하나님께서 이처럼 인간들이 갚아야할 모든 죄에 대한 속전을 그 아들의 피로 갚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3)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러나 이 화목제물은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화목제물”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믿을 때 이 같은 화목제물의 가치가 나에게 적용되어 하나님의 의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결 론 :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의 죄와 심판에 대하여 길이 참으셨다고 하셨습니다. 이 같은 하나님의 참으심은 결과적으로 우리가 지은 지난날의 모든 죄를 간과하시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나타났는데 이 일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셨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죄를 심판치 아니하시고 길이 참으시는 가운데 결과적으로 그 아들의 피로 화목 제물로 삼으시므로 죄인들에게 의롭다 하심을 주신 일은 참으로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신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일은 자기도 의로우시며 예수 믿는 사람들도 의롭다하려 하신 일로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은혜를 받아 구원에 이른 하나님의 백성임을 감사할 수 있기 바랍니다.


≈ 20 ≈ 율법과 복음의 법

(본문 : 로마서 3 : 27 - 31)


서 론 : 바울은 사람이 의를 얻는 일에 있어서 아무도 자랑할 데가 없다는 사실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고 못을 박았습니다. 유대인으로 자랑할 데가 있느냐? 율법으로 자랑할 데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의의 조건이 될 수 없으므로 자랑할 데가 없는 것입니다. 의를 위해 하나님이 예비하신 것은 유대인도 율법도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오직 그의 아들로 인간에게 의를 주실 수 있는 화목 제물로 세우셔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시고 예수 믿는 자들을 의롭다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신 하나님의 의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무한한 찬양과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1. 의를 얻는 일이 무슨 법으로냐?

바울은 27절에서 “무슨 법으로냐”고 묻고 있습니다. 사람이 의를 얻는 일이 어떤 법으로 말미암아서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사람이 의를 얻는 일이 행위(율법)로 말미암은 것이라면 자랑할 데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행위로냐”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믿음의 법으로니라”고 정의를 내렸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에게 의를 얻을 수 있는 두 가지 법을 주신 사실에 대하여 알 수 있게 됩니다. 율법과 믿음의 법이 그것입니다.

(1) 하나님은 행위의 법으로 율법을 주셨습니다. 율법은 인간이 생각하기에는 그로 말미암아 의를 얻을 수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너희는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레18:5). 그러나 여기에 율법의 함정이 있는 것입니다.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고 선언하고 있기 때문에 율법의 온전한 행함이 따라야 한다는 조건이 있는 것입니다. 첫째로 율법은 그 많은 명령 중에 그 어느 하나만이라도 범하면 의에서 제외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약2:10). 다음에 율법에는 용서나 사죄의 은혜가 없습니다. 오직 정죄와 심판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라도 한 평생 동안 단 한번이라도 율법에 거치는 일을 하면 그 사람은 율법의 정죄를 면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율법은 왜 주신 것인가? 이에 대한 해답을 성경에서는 여러 가지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하신 말씀대로 죄를 깨닫게 하시는데 있습니다(롬3:20).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롬3:19). 율법은 “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롬5:20). 더한다고 하신 말씀은 조장한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율법으로 인하여 더 들어낸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이처럼 의도 줄 수 없고 인간의 죄를 들어내며 정죄하는 율법을 주신 이유는 무엇인가? 그 대답은 오직 십자가에서만이 풀리는 것입니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갈3:24).

(2) 새로운 법으로 믿음의 법을 주셨습니다. 범죄하여 죽게된 인간을 구원하시는 일에 하나님께서는 애초에 믿음으로 의를 주시기로 작정하시고 그리스도안에서 인류의 구원을 계획하셨습니다(엡1:3-5). 인류 최초의 의인으로 인정받은 아벨의 경우,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의도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히11:4).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 치심을 받은 성경적 대표인물은 아브라함입니다. 그가 가진 의는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증거되고 있습니다(롬 4:16-22). 이에 대하여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고 하셨습니다(갈3:11). 그러나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율법으로는 의를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갈 3:12).

믿음의 법이란 하나님의 대속의 은혜를 믿는 법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친히 담당해 주심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법이 곧 믿음의 법”인 것입니다. 이 같은 믿음의 법은 신약시대에 와서 비로소 생겨나서 효력이 발생된 것은 아닙니다. 애초부터 하나님은 이 믿음의 법으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섭리하셨고 그 섭리대로 이루어 오셨습니다.

2. 차별이 없으신 하나님

만약 하나님께서 인류구원에 차별을 두신다면 하나님의 심판은 공의롭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끊임없이 유대인과 이방인과 차별을 두었습니다. 그리고 그 차별이 마치 하나님에 의하여 주어진 것처럼 여겨왔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인류에게 의를 주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결코 차별이 없음을 밝혔습니다. “할례 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 할례 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고 말했습니다(롬3:30).

(1)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뇨. 바울은 편견적인 사상에 깊숙이 물들어 있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 뿐이시뇨”고 묻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의 육적인 조상인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선택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하나님의 부르심은 유대인들에게 의나 구원을 주시기 위해서가 아닌 것입니다. 이 사실에 대하여 바울은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롬4:16). 여기서 모든 사람이라고 말한 범위란 16절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다”고 하심으로 아브라함은 유대인의 조상이 아니라 믿음에 속한 모든 민족의 조상으로 세움을 받은 조상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이것을 유대인들은 잘 못 알고 성경을 오해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바른 성경 지식을 가지지 못하고 오해한 일이 많았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이처럼 책망하신 적이 있으십니다.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 하였도다”(마22:29).

(2)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뇨”고 했습니다. 메시야의 언약은 결코 유대인들을 위한 언약이 아니십니다(창3:15). 아브라함과 세우신 하나님의 언약도 어느 모로 보나 유대인들과의 언약이 아니십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사망이 왔다면 그리스도안에서 모든 사람의 생명이 와야 할 것입니다(롬5:12).

결 론 : 바울은 마지막 절에 가서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고 반문했습니다. 사람이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다면 이제 율법은 무용지물이 아니겠느냐? 그러하다면 신약시대에는 마땅히 율법이 폐하여져야 할 것이 아니겠느냐고 하는 반론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에 대하여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고 말했습니다. 폐한다는 말은 ‘카타르게오’로 헛되게 하다, 없게 하다란 뜻입니다. 그리고 세운다는 말은 ‘히스테미’로 서게 하다, 굳게 하다, 확정하다란 뜻입니다. 믿음은 율법을 헛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율법을 굳게 할 뿐 아니라 확정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율법은 절대로 폐할 질 수 없는 법입니다. 의를 주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온 인류로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게 하기 위해 율법은 언제까지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믿음은 율법의 증거가 필요하며 율법이 있으므로 믿음의 법이 하나님의 최선의 의를 주시는 법인 줄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은 언제나 믿음의 법과 병행하여 인류를 정죄하고 인류로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음을 알게 할 것이며 죄인들을 믿음으로 인도하는 길잡이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http://www.bamjoongsori.org/bbs/view.php?id=board42&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