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新約]강해/◆ 사복음서 · 사도행전 강해-1

마태복음 20-23장[Ⅵ.예수의 현현(顯現) 20장-23장]◆ 밤중소리 민병석 목사

영국신사77 2020. 4. 10. 17:31


마태복음 20장-23장 

제목차례

제 20 장 (159∼161) 

159) 포도원의 품군 (마태복음 20 : 1절~16절)

160) 누가 높으냐 (마태복음 20 : 17절~28절)

161)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마태복음 20 : 29절~34절) 


제 21 장 (162∼168) 

162) 주님이 쓰시는 그릇 (마태복음 21 : 1절~11절)

163) 내 아버지의 집 (마태복음 21 : 12절~13절)

164) 성전 청결의 의미 (마태복음 21 : 12절~17절)

165) 저주받은 무화과나무 (마태복음 21 : 18절~22절)

166) 요한의 세례가 어디서 왔느냐 (마태복음 21 : 마태복음 21 : 23절~27절) 

167) 누가 아버지의 뜻을 이루었나 (마태복음 21 : 28절~32절)

168) 열매 맺는 백성이 받을 하나님의 나라 (마태복음 21 : 33절~46절)


제 22 장 (169∼174) 

169) 아들의 혼인 잔치 (마태복음 22 : 1절~9절)

170) 청함을 받은 자와 택함을 입은 자 (마태복음 22 : 10절~14절) 

171) 하나님의 것과 가이사의 것 (마태복음 22 : 15절~22절)

172) 부활에 관한 사두개인의 질문 (마태복음 22 : 23절~33절) 

173)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 (마태복음 22 : 34절~40절) 

174) 다윗의 자손과 메시야에 관하여 (마태복음 22 : 41절~46절) 


제 23 장 (175∼179) 

175)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 대한 책망 (마태복음 23 : 1절~12절)

176) 천국문을 닫는 죄와 지옥 자식을 만드는 죄 (마태복음 23 : 13절~15절)

177) 잘못된 맹세와 율법의 더 중한 것을 버린 죄 (마태복음 23 : 16절~24절)

178) 탐욕의 죄와 외식과 불법이 가득한 죄 (마태복음 23 : 25절~28절)

179)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는 죄 (마태복음 23 : 29절~39절) 

============================================================

마태복음 20장 설교

◆ 밤중소리 03-01 | VIEW : 5,446

≈ 159 ≈ 포도원의 품꾼(본문 : 마태복음 20 : 1 - 16)

≈ 160 ≈ 누가 높으냐?(본문 : 마태복음 20 : 17 - 28)

≈ 161 ≈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본문 : 마태복음 20 : 29- 34)


≈ 159 ≈ 포도원의 품꾼

(본문 : 마태복음 20 : 1 - 16)

포도원의 품꾼들

1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2 그가 하루 한 1)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

3 또 2)제삼시에 나가 보니

장터에 놀고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4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니 그들이 가고

5 3)제육시와 4)제구시에 또 나가 그와 같이 하고

6 5)제십일시에도 나가 보니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

7 이르되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8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9 제십일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1)데나리온씩을 받거늘

10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그들도 한 1)데나리온씩 받은지라

11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이르되

12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13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1)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14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15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16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서 론 : 예수님은 천국을 포도원으로 비유하여 교훈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포도원은 교회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이처럼 하나님이 그 백성을 불러모으신 땅 위의 천국인 것입니다. 

유대 지방은 포도원이 많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 비유는 

그들에게 그 말씀의 뜻을 깨닫게 하는 실감나는 교훈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비유에서 포도원 주인이 자기의 포도원을 어떻게 사랑하였는가에 대하여 

자세하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하사는 예수님의 심정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1. 품꾼을 부르시는 포도원 주인

우리는 이 비유에서 포도원에 등장하는 세 종류의 등장 인물들에 대하여 

그들이 누구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집주인이라고 나와 있는 포도원 주인은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 심판 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청지기라고 나와 있는 사람은 

주님의 심판을 돕는 하늘의 천사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품꾼들이란 

목자이신 주님의 부르심을 듣고 교회에 인도함을 받은 성도들을 말합니다.

우리가 이 비유에서 유의해야 할 점은 

포도원 주인이 무려 다섯 차례나 장터에 나가 

품꾼들을 포도원에 들여보냈다는 것과 

그들이 포도원에 들어간 시간적인 차이가 굉장히 많은데도 

포도원 주인은 그들 모두에게 똑같은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주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보아 예수님의 이 비유는 

고용과 임금 관계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비유의 결론에 가서 이르시기를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씀하신 한 데나리온의 값은 노동 임금을 가리키고 있지만 

그 품삯이 말하는 바는 믿음의 연한의 차이 없이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영생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6:23)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 포도원 주인은 포도원의 품꾼을 구하려고 이른 아침에 장터에 나갔습니다. 

여기서 이른 아침이라고 나타난 시간은 아침 6시경을 말합니다. 

이 시간에 포도원에 들어간 품꾼은 

일찍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이 육적 이스라엘일 수도 있고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도 있으며 

또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일찍 받은 그리스도인들을 

의미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참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일찍 부르심을 받은 일은 

인생의 최대의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2) 포도원 주인은 또 다른 일군을 찾으시려고 

제 삼 시에 다시 장터로 나섰습니다. 

제 삼 시는 지금 시간으로 오전 9시경입니다. 

이 시간에 부르심을 받은 사람도 복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인생이 늦기 전에 생명의 길에 들어섰기 때문입니다.


(3) 포도원 주인은 다시 제 육 시에 장터에 나갔습니다. 

제 육 시란 정오를 말합니다. 

포도원 주인이 정오에 장터에 나가서 품꾼을 찾아 포도원에 들여보낸 일은 

일을 시키려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들에게 삯을 주려는데 그 뜻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4) 그리고 또 포도원 주인은 제 구 시에도 장터에 나가 

그와 같이 하고 십일 시에도 나가 그처럼 했습니다. 

구시란 오후 3시경이요, 십 일시란 저녁 5시경을 말합니다. 

이것은 그 포도원 주인의 자비와 긍휼을 말합니다. 

이들은 아무리 생각해도 품꾼으로 포도원에 들어갈 자격도 없으려니와 

삯을 받을만한 입장이 못되는 것입니다. 

이같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이처럼 외쳤습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


2. 품꾼들이 받은 삯

포도원도 이제 일손을 놓고 문울 닫아야 할 저녁때가 되었습니다. 

날이 이처럼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명하기를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고 했습니다. 

이같은 주인의 결정에 그 포도원에 일찍 들어가 일했던 품꾼들이 

두 가지 불만을 주인 앞에 토로했습니다. 

한가지 불만은 먼저 온 그들이 

나중 온 자들보다 많은 시간 포도원에서 일한 것을 생각해 주지 않고 

나중 온 사람들과 똑같이 취급했다는데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또 한가지의 불만은 

을 주어도 먼저 와서 일한 자기들부터 주어야 하거늘 

주인은 말하기를 나중 온 자들로부터 주라고 했다는데 있었습니다.

이 같은 그들의 불만은 당장에 주인의 분노를 자아냈습니다. 

주인은 내가 너와 약속한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주었는데 

무슨 불만이냐? 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 온 이 사람들에게 

너와 똑같이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주는 일은 

내 뜻이니라고 말했습니다.

이 주인이 여기서 먼저 온 자들보다 

나중 온 자들에게 은혜를 베푸신 일은 

선하신 주님께서 그의 뜻대로 상급을 주시는 일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 비유의 뜻을 밝히시기를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1) 먼저 된 자로 우리는 몇 가지 종류의 사람들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①육적 이스라엘을 말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분명히 이른 아침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민족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교만으로 

스스로 은혜의 자리에서 떨어져 나갔습니다. 


② 다음에 먼저 된 자란 악하고 나태한 종을 말합니다.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동무들을 때리며 

술친구들로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생각지 않는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라”(마24:48-51). 


③ 이들은 교회에는 일찍 나왔지만 

심은 대로 거두시는 하나님의 법칙에 의하여 열매가 없는 종들입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6:7,8)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 나중 된 자로 먼저 된 자의 몇 가지 종류의 사람들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① 이들은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여 많은 열매를 맺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마치 두 달란트나 다섯 달란트를 맡은 종들처럼 

주인의 뜻을 열심히 따랐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에 대하여 예수님은 이처럼 말씀했습니다.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마25:21). 


② 이들은 마리아와 같이 자신의 값진 나드향을 주님께 부어드린 종들입니다. 

마리아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가장 값진 것을 주님께 드렸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되 마리아처럼 최선을 다하여 섬겨야 합니다. 


③ 이들은 죽도록 충성한 종들입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고 하셨습니다.


결 론 : 우리가 먼저 된 자와 나중 된 자의 경우를 

탕자의 경우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집에 머물러 있었던 맏아들은 

마땅히 집을 나간 동생에 대하여 

아버지와 더불어 걱정하고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처지에 대하여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동생이 돌아 왔을 때에는 

사랑으로 용서하고 기뻐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 앞에 불만을 토로했습니다(눅15:29-30).

맏형은 먼저 된 자였지만 나중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탕자는 늦게 출발했지만 형보다 먼저 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날이 저물 때,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날 

다같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서 

행한 대로 심판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고후5:10).


≈ 160 ≈ 누가 높으냐?

(본문 : 마태복음 20 : 17 - 28)


죽음과 부활을 세 번째로 이르시다(막 10:32-34; 눅 18:31-34)

17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에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이르시되

18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19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한 어머니의 요구(막 10:35-45)

20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2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23 이르시되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24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25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26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서 론 :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기 스승의 심정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주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장차 받으실 고난을 생각하시며 마음으로 고민하시고 계셨는데 

반면에 재자들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이 

영광을 안겨 주는 길 인줄 알고 

그곳에 가면 누가 높은 자리에 앉을 것이냐는 문제를 가지고 

마음으로 시기하며 다투기까지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답답하기 그지없는 제자들에게 

자기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할 것임을 거듭 거듭 세 번씩이나 말씀하셨지만 

그들은 이와 같은 고난의 예언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1. 아들을 위해 구한 세배대의 아들의 어미

제자들은 19:20절에서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을 잘못 들었음이 분명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쫓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고 하신 말씀에 대하여 그들은 

그리스도의 왕국을 현세에서 이루어 질 메시야 왕국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남다른 주님의 사랑을 받아온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그들은 형제지간으로 주님을 가까이 모셔온 제자들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의 생각 역시 예수님이 당하실 십자가의 고난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그가 왕이 되면 자기들이 가장 명예로운 자리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들의 어머니가 예수님을 찾아와 절을 하며 

두 아들을 위하여 무엇인가 구했습니다. 

그의 구함은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라고 하는 요구였습니다. 

이것은 메시야 왕국에서 왕 다음가는 자리를 

자기의 아들들에게 줍소서 하는 간청이었습니다. 

이제 메시야 왕국이 가까웠으니 서둘러야겠다고 하는 생각이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답답한 심정으로 이 여인에게 

“너희가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잘 알지 못할 때 

우리는 잘못된 것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무엇을 구할 때는 

반드시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을 알아야 합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요일5:14)고 하셨습니다.


2. 하늘의 상급은 아버지께서 예비하신 자들이 받는다.

(1) 주님은 그들에게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잔이란 말은 ‘포테리온’이란 말로 주님이 젊어지실 십자가의 고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마신다고 하신 말은 십자가를 지는 일로써 이것은 순교를 뜻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오직 순교자만이 주님의 좌 우편에 앉을 것임을 가리키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좌 우편에 앉는 영광은 그의 고난에 동참하는 사람만이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8:17)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주님의 물음에 야고보 형제는 마실 수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이 같은 대답을 시인하셨습니다. 비록 그들은 나의 잔이라고 하신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고 대답한 말이었지만 예수님이 그들의 말을 부인하지 않으신 것은 주님은 이미 그들이 장래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의 잔을 마실것임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처럼 야고보는 복음을 위하여 칼로 순교를 당하였고(행12:2), 요한은 말년에 복음을 위하여 밧모섬에 유배되는 고난을 당하였습니다. 그들은 이 같은 일이 그들에게 미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지만 예수님은 이미 아시고 그처럼 말씀하신 것입니다.


(2)예수님은 내 확 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상급에 대하여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계3:21)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잔을 마시는 사람은(이기는 자) 반드시 하늘의 상급이 있습니다. 이 상급은 영광스러운 상급입니다. 그러나 그 상급의 배정은 아버지께서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다만 충성하는 일입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나로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마5:11,12)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과 같은 하늘의 상올 바라보고 그것을 쫓아가는 생활올 해야 할 것입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쫓아가노라”(빌3:13,14).


3. 섬기는 자가 되고 종이 되어야 하리라

예수님의 다른 제자들은 야고보와 요한 형제에 대하여 심히 분히 여겼습니다. 그들이 분히 여겼다는 말은 그들도 역시 야고보나 요한과 같은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하나님 나라에서 높아지는 비결을 가르치실 필요성을 느끼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사람이 높아지는 일이 세상의 권세자나 명예를 소유한 사람들의 기준에서 생각하고 있었음으로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란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1)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세상 나라에서 크게 되는 방법과 하나님 나라에서 크게 되는 방법은 정 반대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를 낮추고 형제를 섬기는 자가 장차 하나님의 나라에서 큰 자가 되는 상급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라는 말씀은 가난한 형제를 도와주는 생활을 말합니다(요일3:17). 그리고 형제들을 사랑으로 돌보아 주고 형제가 당하는 일을 내가 당하는 일처럼 여기는 생활을 말합니다.

(2)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 라고 하셨습니다. 종이 되는 생활은 나를 낮추고 다른 사람을 높이는 일입니다. 자기에 게 맡겨진 모든 일을 오직 종의 입장에서 충실히 감당하는 생활을 말합니다.


결 론 : 예수님온 하나님 나라에서 

으뜸이 되고 높이 되는 일에 대하여 말씀하시고는 

자신의 경우를 예로 드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오히려 섬기려 하심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장 위대한 섬기심의 본보기는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신 일이십니다. 

대속물이란 말은 ‘루트론’으로 속전 또는 석방금이란 말로 

인류의 죄 값을 지불하시는 지불금을 의미합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홈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벧전1:18,19)고 말씀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 모든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그의 피로써 속전을 갚으실 분, 

곧 섬기실 분으로 오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고 서로가 서로를 섬기는 생활, 

서로가 서로의 종이 되는 생활올 해야 합니다(요 13:16).


≈ 161 ≈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본문 : 마태복음 20 : 29- 34)


맹인 두 사람을 고치시다(막 10:46-52; 눅 18:35-43)

29 그들이 여리고에서 떠나 갈 때에

큰 무리가 예수를 따르더라

30 맹인 두 사람이 길 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

31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지라

32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들을 불러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33 이르되 주여 우리의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34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그들이 예수를 따르니라


서 론 : 유월절이 가까워지자 

유대인의 많은 무리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그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의 뒤를 따랐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여리고에서 떠나실 때에는 

큰 무리가 예수를 쫓았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지나시는 길목에 두 명의 소경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들은 많은 사람의 행렬 틈에서 나사렛 예수라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귀가 번쩍했습니다. 

이때 이들은 지체치 않고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면서 외쳐댔습니다. 

그들의 간구는 드디어 예수님의 발걸음을 머물러 서게 하고 

예수님으로부터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라는 물음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주여 우리 눈뜨기를 원하나이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민망히 여기사 저희 눈올 만지시니 그들의 눈이 곧 보게 되었고 그들은 예수님을 쫓았더라고 했습니다.


1. 길가에 앉아 있었던 두 소경

우리는 여기서 길가에 앉아 있었던 두 소경이 어떤 경로로 예수님을 만났으며 그들이 받은 이 놀라운 축복은 어떻게 그들에게 주어졌는가에 대하여 몇 가지로 알아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1) 이들은 이미 예수의 소문을 듣고 있었던 소경들입니다. 

예수의 소문은 온 유대 땅에 퍼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소문은 두 가지로 퍼져 있었습니다. 하나는 그는 무리들을 미혹하는 자요 율법올 무시하는 자로 하나님께로서 온 사람이 아니라 마땅히 정죄를 받아야 할 자라고하는 견해였습니다. 이 같은 견해는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이 가진 견해였으며 이미 그를 고소하기 위해 많은 그들의 제자들을 무리가운데 파송하여 소송거리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의 견해는 예수를 가리켜 선지자중 하나다, 다윗의 자손이다, 그리스도다 하는 견해로 주님을 따랐으며, 다른 많은 군중들은 그 중간 입장에서 흥미를 가지고 뒤쫓아 다닌 것입니다.

이들 두 소경은 예수의 바른 소문을 듣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입에서 예수님을 향하여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부른 것이 이 사실을 말해 줍니다. 예수에 대한 바른 소문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온 한 여자도 이 예수의 바른 소문을 듣고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만나 병 고침을 받았습니다(마5:25-29).

전도란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에 대한 바른 소문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고하신 말씀은 예수에 대한 바른 소식을 듣는 데서 믿음이 생김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파하는 자란 바로 그리스도에 대한 좋은 소식을 전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2) 이들은 예수님을 만나기를 소원했습니다. 이 같은 사실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즉시 그를 향하여 소리를 지른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눈 먼 소경들이었음으로 예수님을 찾아 나설 입장이 못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을 만날 수 있기를 마음으로 간절히 소원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사모하여 만나기를 원하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십니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시19:10)고 하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주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34:10).


(3) 이 두 소경은 기회를 잘 포착했습니다.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주님을 만 날수 있는 기회가 주어집니다. 

사람들이 이 시기를 잘 포착하여 자기 생애에 적용시키면 

놀라운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런 관심 없이 그냥 지나쳐 버린다면 

일생에 다시없는 후회가 될 수 있습니다. 

아마 이들이 자기들에게 주어진 이 같은 절호의 기회를 놓쳐버렸다면 

다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그들에게 오지 아니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후 

다시는 여리고로 내려오지 아니하셨고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2. 두 소경의 간구한 태도

길가에서 예수님을 만난 이들 두 명의 소경들은 

이제 이 좋은 기회를 잃으면 

다시는 이 같은 기회를 만날 수 없을 것이라는 판단아래 

있는 힘을 다 하여 주님을 놓치지 않으려고 매달렸습니다. 

여기서 그들이 취한 세 가지 특징을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1) 하나는 예수님을 향하여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입니다. 

다윗의 자손이란 말은 메시야에 대한 구약적인 신앙 고백입니다. 

이스라엘은 다윗의 자손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다윗 왕의 왕위를 이어 받은 메시야 곧 그리스도로 그가 오시면 

이스라엘을 회복하고 

이스라엘의 영원한 왕위에 앉을 것이라고 하는 기대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그들이 기다렸던 메시야임이 틀림없었지만 

그러나 그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영광의 메시야로 왕위에 당장에 앉으실 분이 아니시라 

그런 일이 있기 전에 

먼저 고난의 십자가를 지셔야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이처럼 메시야 관이 잘못되어 있었으므로 

예수를 그들이 기다리는 메시야로 바라보는 사람이 얼마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에게 다윗의 자손이란 이름을 붙여서 메시야로 받아 드리는 일은 

예수가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분이라는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 당시 형편으로 예수님을 향하여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는 정도의 신앙 고백을 한다는 일도 

대단한 믿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2)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불쌍히 여겨 주실 것을 원했습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말한 그들의 간구는 

주님만 불쌍히 여겨 주시면 

자기들의 눈은 능히 뜰 수 있다고 하는 믿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시103:13)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긍휼히 여기심 받기를 간구한다면 

하나님은 그의 풍성하신 긍휼하심을 우리에게 나타내 주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시며(욥2:18) 

하나님은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분이십니다(출33:19).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처럼 긍휼하심이 풍성하신 분이시라고 말씀하셨습니다(엡2:4). 주님의 불쌍히 여겨 주심이 

결국 그들의 소경된 눈을 뜨게 해 주실 것이라고 하는 그들의 믿음은 

대단한 믿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힘에 대하여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막 11:23)고 하셨습니다.


(3) 그들의 간구는 응답 받을 때까지 계속된 기도였습니다. 

이들에게는 많은 무리들이 그 앞에 가로 놓여 있었습니다. 

무리들은 이 소경들이 소리지르는 것쯤은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고 

잠잠하라고 그들을 꾸짖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더욱 소리 질렀다고 했습니다. 

기도에는 방해물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낙심하지 말고 기도할 것에 대하여 

불의한 재판관의 경우를 비유로 교훈해 주시기도 하셨습니다(눅18:1-8).


결 론 : 이처럼 간구하는 소경들의 간절한 간구에 예수님의 발이 머무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불러 말씀하시기를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주여 우리 눈뜨기를 원하나이다”고 말했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간구하는 목적이 분명한 기도를 원하십니다.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때 중언부언하는 대답을 한다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소경들처럼 “주여 우리 눈뜨기를 원하나이다”라고 

자기의 가장 간절하고 응답 받아야 할 소원을 아뢰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민망히 여기시고 저희 눈을 만지사 고쳐주셨습니다. 

이들은 곧 주님의 뒤를 따르는 복음의 일군이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21장 설교

◆ 밤중소리 03-01 | VIEW : 6,311

≈ 162 ≈ 주님이 쓰시는 그릇(본문 : 마태복음 21 : 1 - 11)

≈ 163 ≈ 내 아버지의 집(본문 : 마태복음 21 : 12 - 13)

≈ 164 ≈ 성전 청결의 의미(본문 : 마태복음 21 : 12 - 17)

≈ 165 ≈ 저주받은 무화과나무(본문 : 마태복음 21 : 18 - 22)

≈ 166 ≈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서 왔느냐(본문 : 마태복음 21 : 23 - 27)

≈ 167 ≈ 누가 아버지의 뜻을 이루었나(본문 : 마태복음 21 : 28 - 32)

≈ 168 ≈ 열매 맺을 백성이 받을 하나님 나라(본문 : 마태복음 21 : 33 - 46)


≈ 162 ≈ 주님이 쓰시는 그릇

(본문 : 마태복음 21 : 1 - 11)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다

(막 11:1-11; 눅 19:28-38; 요 12:12-19)

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 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2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3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1)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4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5 ㄱ)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사 62:11, 슥 9:9

사 62:11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선포하시되 너희는 딸 시온에게 이르라 

보라 네 구원이 이르렀느니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느니라 하셨느니라

슥 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6 제자들이 가서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하여

7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8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10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이르되

이는 누구냐 하거늘

11 무리가 이르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서 론 : 주님께는 쓰시는 그릇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름 없는 나귀로 그의 하시는 일에 그릇으로 쓰셨습니다. 

발람의 나귀도 그의 주인이 하나님의 명을 거스려 어그러진 길로 갈 때 

그의 당나귀를 통하여 책망케 하심으로 하나님께 쓰임 받는 그릇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 나귀 새끼를 타셔야 했습니다. 

그 이유는 스가랴서에 예언되었기 때문입니다.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슥9:9)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예수님이 지상에서 하시는 모든 일은 오직 아버지의 뜻에 따르는 일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뜻은 아버지께서 그에게 하라고 하신 모든 일을 이루시는 일이었습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4:34)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잡으려고 검과 몽치를 가지고 왔을 때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마26:55, 56)

고 하셨습니다. 그

가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일은 스가랴의 예언처럼 

왕으로 입성하시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는 선지자의 예언처럼 나귀를 타고 입성하셔야만 했습니다.


(1) 예수님은 분명히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분이십니다. 

이 같은 일은 그의 태어나심에서 

동방으로부터 온 박사들에 의하여 증명되었습니다(마2:1-3). 

이 사실은 예수님께서도 스스로 인정하셨습니다. 

빌라도 총독이 주님께 묻기를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했을 때 

주님은 빌라도에게 “네 말이 옳도다”(마27:11)고 대답하셨습니다. 

다윗의 자손이란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그들의 메시야로 

이 메시야는 그들이 맞이해야 할 그들의 왕이었던 것입니다.

스가랴는 예수님을 나귀 새끼를 타신 겸손한 왕으로 표현했습니다. 

스가랴의 어 예언은 예수님의 겸손한 왕으로서의 위치를 가리킨 것입니다. 

이 왕의 위치는 세상의 권력을 잡은 현세적인 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겸손한 왕이란 그의 백성을 섬기시는 왕의 위치를 말씀한 것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

고 하신 주님의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유월절을 앞두고 

가장 겸손한 왕으로서의 그의 사명을 이루시기 위하여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셔야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같은 예수님의 왕으로서의 위치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다만 스가랴서에 기록된 대로 

그들의 메시야로서의 왕으로 영접하려고 시도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그들의 의도도 그가 잡히시어 재판을 받게 되자 

그들이 바라던 메시야가 아니라고 판단한 그들은 

그에게 아무 것도 기대할 것이 없다는 것을 안 후에는 

오히려 예수님을 정죄하는 편에 가세하여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는 자리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장차 실제적으로 그들의 왕으로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실 것입니다. 

그의 재림하시는 그 날에 예수님은 

영광의 메시야 만왕의 왕으로 그곳으로 입성하실 것입니다(계19:11-13). 그

러면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이 모습이 어디서 발견될 것이냐? 

“그 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편 감람산에 서실 것이라”(슥14:4)

고 하셨습니다. 

이 때의 모습은 나귀 새끼를 타신 겸손한 왕으로서의 모습이 아니라 

백마를 타시고 불꽃같은 눈으로 인류를 심판하시고 

그의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영광의 메시야의 모습을 가지고 오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시는 모습은 

장차 정말로 그들의 왕으로 오시는 하나의 그림자로 보여주시는 

예표적인 모습이십니다.


(3) 예수님은 장차 예루살렘성에서 통치하시는 왕이 되실 것입니다. 

장차 이 땅위에 세워질 그리스도의 왕국에서 예수님은 친히 왕이 되시며 

그는 예루살렘성에서 그의 백성들을 다스리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계19:6,7). 

여기서 전능하신 이의 통치는 

예수님의 천년 왕국에서의 다스리심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주가 쓰시겠다 하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산 뱃바게에 이르렀습니다. 

주님은 그의 두 제자를 맞은편 마을로 보내시면서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면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같은 일은 

선지자 스가랴의 예언을 이루려 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분명한 사실을 바라보게 휩니다. 

하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하시는 뜻대로 

이루어져 나간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하시는 뜻대로 

이루실 능력이 있으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는 이미 자기가 예언에 의하여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나귀 새끼를 타셔야 할 일을 아셨고 

자기가 탈 나귀가 이미 준비되어 있음을 아셨으며 

그 주인이 주께서 쓰시겠다고 말씀하시면 즉시 보내실 것도 아셨습니다. 

그리하여 제자들에 의하여 끌려 온 이 나귀 새끼는 

주님이 쓰시는 그릇이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쓰시는 그릇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이 쓰시는 그릇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선한 목적에 사용하시는 그릇이며, 

다른 한 가지는 진노의 그릇으로 쓰시는 경우입니다. 

선한 목적이란 하나님의 구원을 말하는데, 

이 그릇은 선한 일에 마련된 아름다운 그릇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깨끗하게 단장한 그릇을 선한 일에 쓰십니다. 

“큰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딤후2:20-21)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항상 그에게 가까이 있는 사람을 쓰십니다. 

주님께 가까이 있다는 말은 

주님이 하시는 계획에 합당한 사람을 말합니다. 

이사야 선지는 하나님이 “내가 누구를 보낼꼬” 하실 때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즉시 응답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주님께 인정을 받는 사람을 당신의 그릇으로 쓰십니다. 

인정의 표준은 순종입니다. 

하나님은 순종이 없는 사람을 절대로 쓰지 아니하십니다. 

사울 왕이 불순종으로 기울어졌을 때 

하나님은 그를 버리셨습니다.


결 론 : 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님은 많은 

무리들의 환영을 받으시며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셨습니다. 

무리의 대부분은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기도 하며 

다른 이는 나무 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하며 환영했습니다. 


‘호산나’란 지금 구원하소서, 원컨대 구원하소서란 뜻으로 

자기들의 구원(정치적인)을 호소하는 찬양과 간구였습니다.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라고 외친 것은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인줄로 알고 그를 높인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호소대로 

“호산나”로 입성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들이 바라는 호산나는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는 지금 고난의 메시야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입성하시는 것입니다.


≈ 163 ≈ 내 아버지의 집

(본문 : 마태복음 21 : 12 - 13)


성전을 깨끗하게 하시다

(막 11:15-19; 눅 19:45-48; 요 2:13-22)

12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13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ㄴ)내 집은 

사 56:7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1)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ㄷ)강도의 소굴을 

렘 7:11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둑의 소굴로 보이느냐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서 론 : 성경에는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 안에 들어가셔서 

장사꾼들의 상을 뒤엎으신 일이 두 번 나옵니다. 

이것은 동일한 사건의 반복이 아니고 

제각기 다른 시기에 별도의 사건으로 있었던 일입니다. 


처음 나오는 성전 청결 사건은 요한복음 2장에 있습니다. 

이 시기는 주님의 전도 초기였습니다. 

이 때에도 유월절에 성전에 들어가셔서 

돈올 바꾸고 짐승을 파는 무리들을 채찍으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상올 뒤엎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의 공생애를 거의 마무리 지으시게 되는 시기에 

다시 한번 성전에 들어가셔서 동일한 방법으로 성전을 청결하시게 됩니다. 

이 때에도 유월절이었지만 

이 유월절은 그가 하나님께 어린양으로 바쳐지는 

마지막 유월절이 되는 시기였습니다. 


예수님은 분격하시는 어조로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 도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을 가리켜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셨습니다.


1. 하나님의 성전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을 가리켜 

"아버지의 집" 또는 "내 집"이란 말로 표현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 있었던 예수님 당시의 성전은 세 번째 세워진 성전으로 

이방인의 주관자인 혜롯에 의하여 세워진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이 세 성전이 세워진 것과 

그것들이 파멸된 일에 대하여 간략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솔로몬의 성전 : 솔로몬이 세운 성전으로 

솔로몬에 의하여 건축된 제일 성전입니다. 

성전 건축은 다윗이 그 마음에 원했던 일이었는데 

하나님은 그의 아들 솔로몬에 게 그 사역을 맡기셨습니다.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삼하 733)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성전이 세원진 자리가 

바로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을 제물로 드린 

모리아산이었음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인류의 속죄 제물로 드리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이심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대하3:1).


이 성전은 기원전 967년경에 착공하여 7년 6개월만에 준공되었습니다. 

그러나 성전을 건축한지 400여 년만에 

바벨론 군대에 의하여 불사름을 당하였습니다. 

이 성전이 이처럼 소멸된 일에 대하여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성전을 

우상의 제물로 더럽혔기 때문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대하33:4-7). 

이같은 그들의 행위에 대하여 

하나님은 놀랍도록 그 대가를 치르신 것입니다.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백성과 그 거하시는 곳을 아끼사 

부지런히 그 사자들을 그 백성에게 보내어 이르셨으나 

그 백성이 하나님의 사자를 비웃고 말씀을 멸시하며 

그 선지자를 욕하여 여호와의 진노로 

그 백성에게 미쳐서 만회할 수 없게 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갈대아 왕의 손에 저희를 다 붙이시매 

저가 와서 그 성전에서 칼로 청년을 죽이며 

청년남녀와 노인과 병약한 사람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였으며......... 

또 하나님의 전을 불사르며 예루살렘 성을 헐며............."(대하36:15-20).


(2) 스룹바벨 성전 : 스룹바벨 성전은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사왕 고레스에 의하여 성전 건축을 허락 받음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바사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으로 내게 주셨고 

  나를 명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너희 중에 무릇 그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거기 있는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라 

  너희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스 1:2-3). 

이 성전은 제2성전으로 

솔로몬의 성전에 비하여 빈약한 성전이었고 법궤도 없었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은 메데바사의 통치하에 있었으나 

그 후 헬라의 알렉산더에 의해 그 나라가 패망하게 되자 

수리아의 통치 아래 들어갔습니다. 

그때 수리아의 가장 유명한 왕은 안티어쿠스 에피파네스로 

이자가 예루살렘을 통치하게 되자 유대인중 

모세의 율법에 충실한 자나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는 자나 

할례를 행하는 자 또는 히브리어 성경을 가지고 있는 자들을 불잡아 

사형에 처해 버렸습니다. 

그는 예루살렘 성전 안에 신상을 세우고 돼지피로 제단을 더럽혔습니다.

이에 맛디아스란 제사장의 세 아들 유다, 요나단, 시몬이 일어나 

수리아의 군대를 물리치고 예루살렘을 해방시켰습니다. 

그러나 시몬이 죽고 그의 아들 힐카너스가 대제사장겸 왕으로 올랐고 

그후 힐카너스2세가 그의 동생 아리스토뷰로스2세에 의하여 축출되어 

아라비아로 망명하였는데 

이곳에서 그는 헤롯 1세의 아버지요 이두메 사람인 안티파터와 알게 되었습니다. 

힐카너스 2세가 헤롯의 도움으로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되었고 

이때부터 안티파터의 가문(헤롯가문)은 

팔레스틴의 정치에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후 젊은 헤롯 2세는 로마로 가서 로마 황제인 안토니의 환심을 사 

유대인의 왕으로 임명받아 로마의 힘을 빌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되었으며 

유대는 결국 로마의 속국이 된 것입니다. 

이 같은 과정에서 스룹바벨의 성전은 더럽혀지고 훼파되었습니다.


(3) 헤롯 성전 : 헤롯은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고 

자기의 이름을 영원히 기억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예루살렘의 성전 건축을 시도했습니다. 

이 성전은 예수님이 

그의 공생애의 사역에 들어가신 첫 해(주후 27년경)에도 아직 건축중이였는데 

그때는 이미 이 성전을 건축한지 46년이나 지난 후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성전에 대한 예언에서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녹21:6)고 하셨습니다. 

그 후 로마의 디도에 의해 주후 70년 예루살렘 성이 함락되었고 

결국 주님의 예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유대인들이 참 성전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죄는 

이처럼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되었고 

그들은 성전 파괴와 함께 2천 년간이나 

성전이 없는 이방 땅에서 칼을 피하며 살아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2. 아버지의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셨다.

예수님 당시의 예루살렘 성전은 비록 헤롯에 의해 세워졌지만 

그 목적이 여호와 하나님께 경배 드리는 곳으로 세워졌기 때문에 

그곳은 헤롯의 궁전이 아니라 하나님의 집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의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거하고 있을 때에는 

그를 섬기는 성전을 허락하셨습니다. 

고레스의 명에 의하여 스룹바벨의 성전이 건축된 것이나 

헤롯의 손을 통하여 성전을 건축한 것이나 

그렇게 하신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이 성전을 어렸을 때부터 사랑하시고 자주 출입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성전을 더럽히는 무리들을 정죄하시고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 도다”고 책망하시면서 

그들을 성전에서 내어 쫓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아버지의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셨습니다. 

기도한다는 말과 경배한다는 말과는 같은 뜻의 말입니다. 

기도해야 할 그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기도 소리는 들리지 않고 

장사하는 무리들의 고함소리와 짐승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습니다. 

하나님을 경배해야 할 성전은 

장사꾼으로 변신한 대제사장들이나 바리세인들, 서기관들로 말미암아 

외식으로 더럽혀졌습니다. 

모여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심으로 

우리는 신령과 진정으로 경배해야할 것입니다(롬12:1, 요4:23).


결 론 : 성경은 우리에게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3:16,17)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심령의 변화를 받고 거룩함으로 옷 입어 

우리의 성전을 깨끗하게 하여 

늘 주님이 거하실만한 처소로 만들어야 합니다.


≈ 164 ≈ 성전 청결의 의미

(본문 : 마태복음 21 : 12 - 17)

성전을 깨끗하게 하시다

(막 11:15-19; 눅 19:45-48; 요 2:13-22)

12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13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ㄴ)내 집은 

사 56:7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1)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ㄷ)강도의 소굴을 

렘 7:11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둑의 소굴로 보이느냐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14 맹인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주시니

15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 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어린이들을 보고 노하여

16 예수께 말하되

그들이 하는 말을 듣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ㄹ)그렇다

시 8:2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

17 그들을 떠나 성 밖으로 베다니에 가서

거기서 유하시니라


서 론 :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을 두번 식이나 찾아가시어 

심한 꾸지람과 채찍으로 청결하게 하신 일은 

우리에게 크나큰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고 하신 말씀을 

우리는 오늘 날 계속적으로 흐르고 있는 교회와, 

세상풍조에 떠내려가고 있는 우리의 신앙에 대한 경종으로 

받아들여야할 것입니다.


1.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예수님께서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말씀하신 성전은 지극히 거룩한 곳입니다. 

그런데 후대인의 지도자들은 이곳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주님은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요2:15)고 하셨습니다. 

성전을 장사하는 집이라고 책망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성전이 지도자들의 손에 의하여 상업적으로 경영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위치를 이용하여 

하나님의 성전을 돈벌이하는데 사용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을 구실로 

돈을 벌어 그들의 주머니를 채우는 일은 분명히 장사꾼들이 하는 짓이며 

그들은 이처럼 하나님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1) 이것은 오늘날 물질적으로 타락한 교회를 책망하시는 소리입니다. 

현대 교회는 두 가지 면에서 병적 요소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는 교회의 병적 요소입니다. 

많은 교회들이 물량주의로 그들의 교회를 운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에 예산을 맞추지 아니합니다. 

구제하는 일에 인색합니다. 

다만 교회를 미화시키는 일에 열중합니다. 

자기 교회의 건물 확장이나 새 성전 건축을 위한 일에만 신경을 곤두세웁니다.


다른 한 가지는 교인의 병적 요소입니다. 

많은 교인들이 기복 신앙을 가지고 교회에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시고 

우리가 바라기를 원하시는 축복은 어떤 것입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엡1:3-5)하셨습니다. 

많은 교인들이 이처럼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바라는 생활이 아니라 

땅에 속한 세상적인 복, 물질적인 축복만을 바라고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입니다.


(2) 이것은 또한 오늘날 진정한 예배가 없는 세속적인 교회를 책망하시는 소리입니다. 진정한 예배란 하나님께 합당한 바른 제사를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드린 제사는 하나님이 가증히 여기시는 제사였습니다.

① 가증한 제사란 진리가 없는 예배를 말합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호4:6)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예배는 무익한 예배입니다.


② 가증한 제사란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하는 예배입니다.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주의 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함을 인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회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말1:7,8)고 하셨습니다. 

오늘날의 교인들도 온전한 예물을 드리지 못하므로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하는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감사에도 인색하고 십일조도 온전한 것이 못되며 절기 현금도 그러합니다.


③ 가증한 제사란 회개가 없는 예배를 말합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더욱 패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 뿐이어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사1:5,6)

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는 죄에 대한 회개에 있습니다.


④ 가중한 제사란 희생 제물이 없는 예배입니다. 

구약의 제사에는 회생 제물이 필수적이었습니다.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에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회생 제물이 있어야 합니다.


⑤ 가증한 제사란 사랑이 없는 예배입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6:6)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새 계명을 주신다고 말씀하시면서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34)고 하시고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14:15)고 말씀 하셨습니다.


2. 강도의 굴혈을 만들지 말라

예수님은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올 만드는도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게 된 것은 하나님의 성전이 예수님이 보시기에 

마치 강도들의 소굴처럼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성전의 우두머리 격인 대제사장이나 제사장들은 

많은 뇌물을 받고 이같은 불법적인 상행위를 방관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두둔해 주었으며 

신성한 예배 장소가 온통 난장판이 되어도 

누구하나 안타깝게 생각하는 사람이나 제재하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그야말로 “하나님의 영광을 강도질하는 집단”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역시 세상적인 명예심을 위한 싸움질, 분쟁, 욕설 등이 

비일비재하므로 하나님의 예배 장소가 강도의 소굴처럼 되어 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심령을 감찰해 보아야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아직도 죄가 주장하고 있다면 

우리의 성전은 강도의 굴혈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롬6:12-14). 

우리의 마음이 아직도 옛 풍습을 따르는 옛 사람이 다스리고 있다면 

그런 마음은 강도의 굴혈이 되어 있는 마음입니다(롬12:2). 

우리의 마음에 성령이 계시지 않는다면 

그 마음은 강도의 굴혈이 되어 있는 마음입니다(고전3:16,17). 

예수님은 이런 마음을 청결시키시려고 

우리의 마음 문을 노크하고 계십니다. 

“볼찌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3:20)고 하셨습니다. 

내 심령을 새롭게 하시는 주님의 역사가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주님 앞에 

우리의 마음 문을 열어드려야 합니다.


결 론 : 예수님은 성전 청결을 하신 다음 

자기에게 나오는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성전까지 찾아 나온 예루살렘의 어린 아이들이 

주님을 보고 소리지르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외쳐 댔습니다. 

이때 성전에서 이 모양을 바라본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분히 여기며 또 이상한 일로 겼습니다. 

장사하는 장사꾼들의 눈에는, 강도질하는 강도들의 눈에는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으며 

예수님의 청결의 채찍이나 예수를 높이는 일들이 분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오른 손에 일곱 별을 불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다니시며 

그의 몸된 교회들을 일일이 살피고 계십니다. 

그리고 “회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손에는 더러운 성전을 청결하시기 위해 징계의 채찍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가 장사하는 집이 되어버린 우리의 교회를, 

강도의 굴혈이 된 우리의 마음을 그대로 방치해 둔다면 

그는 여지없이 그의 채찍으로 청결하게 하시는 역사를 이루실 것입니다(히12:8-11).


≈ 165 ≈ 저주받은 무화과나무

(본문 : 마태복음 21 : 18 - 22)

무화과나무가 마르다(막 11:12-14, 20-24)

18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19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20 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이르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2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22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서 론 : 예수님은 이 땅에서 육신을 가지고 계실 때 

신성과 인성을 겸하여 소유하신 분이십니다. 

그는 다른 분이 아니라 말씀이 곧 육신이 되신 분이심으로 

그가 어떤 형태로 존재하시든 

그의 신성은 절대로 소멸될 수도 없으시고 변하실 수도 없습니다. 

영원전부터 하나님의 품안에 계셨던 영원하시고 독생하신 예수님이 

성령의 권농으로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어 직접 육신으로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그가 하늘에 계셨을 때에도 그는 독생하신 영원한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땅에 계실 동안만은 그의 신성은 신비스럽게 감추어져 있었고 

그의 인성만이 나타나 계셨기 때문에 

그는 육신을 가진 사람이 겪어야 할 모든 육신적인 고통을 당하셔야 하셨습니다. 


어느 날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가실 때 시장하셨다고 했습니다. 

이른 아침에 그에게 아침 식사를 대접해 줄 만한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1. 저주받은 무화과나무

주님은 시장하신 몸으로 길을 거니시다가 길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나무에게서 시장끼를 채울 수 있는 열매를 바라시고 

나무 가까이로 가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무화과나무로부터 아무 것도 얻지 못하시고는 

그 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고 하시니 

그 무화과나무가 곧 말랐다고 했습니다. 


이 기사는 우리에게 여러 가지 면에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1) 이 교훈은 첫째로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신 경종이신 것입니다. 

주님이 찾으신 열매는 영생에 이르는 생명의 열매를 말합니다. 

유대인의 지도자들은 외식적인 율법의 준수에만 열심이었기 때문에 

생명의 주가 되시는 그들의 메시야를 배격하므로 

그들에게 있는 것은 열매가 아니라 외식을 상징하는 잎사귀뿐임을 나타낸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열매를 구하셨으나 

그들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은 열매가 아니라 다만 잎사귀뿐임을 아시고 

그들을 저주하시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화 있다고 책망하셨습니다(마23:27-28).


(2) 이 교훈은 둘째로 이스라엘의 멸망을 상징하는 경종이신 것입니다. 

주님은 이스라엘에게 열매를 맺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들이 이 같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의 메시야를 십자가에 죽이는 일로 

그들이 장차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으로 멸망 받게될 일에 대하여 

주님은 탄식하셨습니다(마23:37-38). 

그러나 예수님은 또한 이 저주받은 무화과나무가 

다시 그 잎이 샘 돋을 때가 있음을 한 비유로 예언하셨습니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알라”(마24:32)

고 하셨습니다.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낸 이 무화과나무는 

예수님이 저주하시어 그 뿌리까지 말라버린 

길거리의 무화과나무임을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나무는 회복된 이스라엘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3) 이 교훈은 셋째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경종이 되기도 한 것입니다. 

주님이 열매를 찾으신 무화과나무는 그리스도인을 상징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그 열매이십니다.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롬7:4)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열매를 원하십니다. 

주님이 원하실 때 열매는 드리지 못하고 잎사귀만 무성한 것을 보인다면 

주님의 책망을 듣게 될 것입니다. 

아무 것도 “얻지 못하시고”란 말은 ‘우덴휴렌’으로 발견하지 못하셨다는 뜻으로 

가까이 가셔서 애써 찾으신 결과를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찾아 오셔서 그 열매를 애써 찾으셔도 

주님의 눈에 발견되지 못한다면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 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눅13:7)고 하시는 

노여움에 가득 찬 책망을 듣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2.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않는 기도의 능력

예수님의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으십니다. 

그의 말씀은 바로 무에서 만물을 창조하시는 창조주의 말씀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 하신 말씀대로 

그 무화과나무가 곧 말랐습니다. 

이 같은 광경을 현장에서 직접 목격한 제자들의 놀라움은 말할 수 없이 컸습니다. 

그들은 이를 이상히 여기면서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고 묻게 된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요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나타난 한 가지 사건을 통하여 

제자들에게 기도에 관한 위대한 교훈을 주셨습니다.


(1) 응답 받는 기도의 첫째 조건은 믿음의 기도라고 하셨습니다.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말씀하신 믿음은 기도 응답에 대한 확신을 말합니다. 

이 믿음은 기도하면서 “믿습니다”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할 때 생깁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요일5:14)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기도는 담대한 기도입니다.


(2) 다음에 응답 받는 기도의 둘째 조건은 의심치 아니하는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약1:6-8)고 말씀하셨습니다. 

의심치 아니하려면 하나님의 분명한 약속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불잡고 요동치 말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기도는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에 의한 기도였습니다(롬4:18-22).


(3) 응답 받는 기도의 셋째 조건은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요일3:21-22)고 말씀했습니다.


3. 이 산더러 명하여 바다에 던지우라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 중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요”

라고 하신 말씀에서 해석상 장벽에 부닥치게 됩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이 산이란 감람산올 가리키고 바다란 사해를 가리킵니다. 

그러면 이런 일이 기도로 가능한 것이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믿고 의심치 않는 기도의 능력을 

비유적으로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믿고 구하는 기도의 능력이 이처럼 기적으로 나타난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믿음으로 깨닫고 

믿음의 기도를 할 줄 아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결 론 :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어찌하여 길가에 있는 무화과나무에 

그 열매가 없는 사실을 미리 아시지 못하셨을까? 하는 질문을 제기합니다. 

예수님은 말할 것도 없이 전지하시고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가 육신을 입으시고 세상에 계시는 동안 

그는 그의 인성으로 인하여 그의 전지 전능하신 신성이 

제한을 받으신 사실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재림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에도 

“하늘의 천사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신비적인 섭리이시기 때문에 우리들은 알 길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교훈을 받은 대로 

열매를 맺는 백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 166 ≈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서 왔느냐

(본문 : 마태복음 21 : 23 - 27)

예수의 권위를 두고 말하다(막 11:27-33; 눅 20:1-8)

23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새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이르되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

2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25 요한의 2)세례가 어디로부터 왔느냐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그들이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26 만일 사람으로부터라 하면

모든 사람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니 백성이 무섭다 하여

27 예수께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서 론 : 예수님은 그가 당하실 고난이 얼마 남지 아니하신 것을 잘 아셨지만 

그의 복음사역은 조금도 중단됨이 없이 계속되었습니다. 

성전은 강도의 굴혈처럼 그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였고 

그 안에는 예수님을 대적하는 수다한 무리들로 진쳐져 있었지만 

주님은 위축되심이 없이 담대하게 말씀을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이때 예수님을 책잡아 송사 하려는 독사의 손길이 

다시 한번 주님에게 다가왔습니다. 

일단의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또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뇨”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무슨 말씀인가 그들에게 대답해 주셔야 했습니다. 

그들의 눈은 예수님께로 향하여 그가 과연 무슨 말로 대답할 것인가? 

큰 흥미를 가지고 주님의 입을 지켜 본 것입니다.


1.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라고 묻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아직까지 주님을 책잡으려고 따라다닌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보다 훨씬 격이 높은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었습니다. 아마 이들은 예수님으로부터 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는 결정적인 어떤 대답을 기대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면 이들이 주님을 향하여 질문한 내용 중 “이런 일”이라고 한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이런 일이란 주님이 행하신 성전 청결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신 일은 그들이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는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이 같은 일로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은 자신들의 처사에 대하여 부끄러워하면서도 다른 한편 분격을 금치 못했던 것입니다. 자신들이 가장 미워하고 트집만 있으면 당장에 라도 체포하려고 벼르고 있는 예수란 사람에 의해 망신을 당하였다는 것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을 시키지 아니하고 자신들이 직접 따져보고 일을 처리하려는 의도에서 이처럼 물은 것입니다.

(2) 이런 일이란 주님이 성전 안에서 말씀을 가르치시는 일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주변에는 언제나 많은 무리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말씀을 듣기 위해서였습니다. 메시야를 대망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갈급한 심령 속에 예수님의 말씀은 새로운 권세 있는 교훈으로 들려졌으며 그가 혹시 메시야가 아닌가하고 기대하는 수다한 무리들이 주님의 곁을 떠나지 않고 있었습니다. 대제사장들이나 백성의 장로들은 이것이 큰 걱정거리였습니다. 유대인들이 이 예수로 말미암아 잘못 오도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네가 무엇이관데 무슨 권세를 가지고 성전에서 이 같은 잘못된 교훈을 가르치고 백성들을 미혹하느냐”고 공박하고 나선 것입니다.


2.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서 왔느냐?

예수님은 언제나 그들의 도전에 물러서지 아니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이 자기에게 묻고 있는 근본적인 동기를 이미 아시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그들의 올무에 잡히시지 아니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의 말할 수 없는 놀라우신 지혜로 그들에게 어떤 대답은 하셔야 하실 지 이미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요한의 세례가 어디서 왔느냐 하늘로 서냐 사람에게로 서냐”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대답하기가 가장 어려운 질문이자 또한 그들의 물음에 대답하신 가장 정확한 답변이셨습니다.


(1)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내 뒤에 오시는 이라고 증거했습니다.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마3:11)고 말했습니다.


(2)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요 그는 또한 인류를 친히 심판하실 분이라고 증거했습니다.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3:12)고 말했습니다.


(3) 세례 요한은 그의 활동 초기에 예루살렘에서 그를 찾아온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에게 나는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한 사람이라고 증거했습니다.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세례 요한을 향하여 네가 누구냐? 고 물었을 때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려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요1:22-23)고 말했습니다.


(4)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증거했습니다. “이튿날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1:29)라고 말했습니다. 만약 바리새인들이 세례 요한을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인줄로만 알았다면 그들은 세례 요한이 증거한 예수 그리스도를 결코 배척하지 아니했을 것입니다.


3.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예수님의 물으심에 역습을 당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입장이 난감했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자기들의 입장이 궁지에 몰리게 된 일에 당황했습니다. 그들이 잠시 구수 회의를 열고 어떻게 대답해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의논했습니다. 그들은 세례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 왔다고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 이율배반이 되는 것이 그들은 한결같이 세례 요한을 선지자로 믿지 아니했기 때문입니다. 또 그들이 세례 요한을 믿었다면 그가 증거한 메시야이신 예수님도 믿었을 것이기 때문에 하늘로서 라고 말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또 세례 요한의 세례가 사람에게서 난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들은 당장에 둘러싸인 군중들의 공격을 받을 것임이 분명합니다. 그 이유는 모든 유대인들은 한결같이 세례 요한을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로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백성들을 가장 두려워했습니다. 이제 그들의 외식적인 대답이 나와야 했습니다. 그들에게 진실이란 존재치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드디어 예수님께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그들은 마치 우리 나라 속담에 있는 말처럼 ‘혹 떼러 갔다가 붙여온 격’이 되어 궁지에서 속히 빠져 나가려한 것입니다.


결 론 : 예수님은 거짓된 말로 답변하는 외식자들에게 

대답하실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고의적으로 올무에 잡아 낚으려는 그들의 음흉한 술책에 

스스로 결박당하실 필요가 없으신 것입니다. 

만약 주님이 바르게 말씀하셔도 그들은 그 말씀을 믿지 아니할 뿐 아니라 

그 말을 가지고 소송의 재료로 삼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이 같은 저의를 아시고 

지혜롭게 이 위기를 피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시시각각으로 그의 때가 가까이 오고는 있었지만 

아직도 그의 죽으심의 예언을 이루실 때가 오지 아니하셨으며 

그의 잡히심도 그들의 말이 올무가 되어 잡히실 것이 아니시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처럼 지혜롭게 피해 나가신 것입니다.


≈ 167 ≈ 누가 아버지의 뜻을 이루었나

(본문 : 마태복음 21 : 28 - 32)

28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29 대답하여 이르되

아버지 가겠나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30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그와 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이르되 

싫소이다 하였다가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31 그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이르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32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그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녀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서 론 : 하나님은 “중심에 진실함을 원하신다”고 하셨습니다(시51:6). 

주님은 진실함이라고는 전혀 없고 언제나 외식과 꾸밈으로 의를 나타내려는 

백성의 장로들과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들은 입과 겉으로 나타나는 모양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것은 회칠한 무덤일 뿐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을 믿지 아니하므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같은 그들의 잘못을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하는 아버지의 명을 받은 

맏아들과 둘째 아들의 경우를 예로 들어 

뉘우침이 없는 그들의 신앙을 공박하신 것입니다.


1. 맏아들의 경우

예수님이 말씀하신 아버지의 명을 받은 두 아들의 비유는 

맏아들과 둘째 아들이 누구인가에 대하여 분명히 지적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러면 맏아들은 누구를 가리킨 것이냐?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종시 믿지 아니하였도다”고 말씀하심으로 

지적하신 그 대상이 장로들과 바리새인들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 아들은 세리와 창기로 

이들은 그들에 의하여 죄인시되고 있는 사람들로 

이방인들을 가리켰다고 볼 수 있습니다.


포도원이란 하나님의 나라, 교회를 상정한 말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의 일군들을 부르십니다. 

하나님께서 바라신 것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로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해 주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맏아들에게 먼저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아들의 대답은 “아버지여 가겠소이다”였습니다. 

그런데 이 아들은 그의 대답과는 다르게 가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1) 가겠소이다 라고 대답한 말은 진실성이 없는 말이었습니다. 

그 당시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이나 장로들은 진실이 없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진실이 결여되었기 때문에 외식으로 진실을 가장하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하는 일에 적합하지 않음을 

그들의 비 진실성으로 증거를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의 일도 

진실성이 없는 사람에게 시키면 

대답과는 전혀 상이한 결과를 보게 될 것입니다.


(2) 가겠소이다 라고 한 말은 

고난이 따를 것을 모르고 대답한 말이었습니다. 

그들은 돈올 좋아하며, 권세를 좋아하고, 교만하기 때문에 

고난이 따르는 일을 싫어합니다. 

포도원에서 해야 할 일은 돈을 버려야 하는 일이며, 스스로 낮아져야할 일이며, 

남의 종이 되어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들이 비록 대답은 가겠소이다 라고 했지만 

결과적으로 가지 않은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포도원에서 일하는 일은 좁은 길로 가야 할 길이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야할 길이기 때문에 

그들은 엄두도 못낼 일인 것입니다.


(3) 맏아들은 포도원에서 일하는 것을 어리석은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어리석은 자들은 눈앞에 있는 이익에 가려서 생명의 길을 찾지 못합니다. 

자기가 죽을 것도 모르고 돈만 벌겠다는 욕심에 사로잡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눅12:20)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생명의 떡이요 

그를 믿는 자에게는 영원히 갈하지 않는 생수를 주시는 분이시지만 

그러나 그들은 이 예수를 믿는 일을 심히 어리석게 보았을 뿐 아니라 

그를 믿는 유대인들을 출교하기까지 했습니다. 

맏아들은 결국 가지 아니했습니다.


2. 둘째 아들의 경우

둘째 아들은 처음에는 “싫소이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이 아들은 결국은 “그 후에 뉘우치고 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들과 대조적인 입장에 있는 창기와 세리를 가리켜 말씀하시면서 

죄인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가에 대하여 우리에게 교훈해 주십니다. 


세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 때 

세리들과 백성들은 다 그에게 와서 

회개의 세례를 받았습니다(눅3:12-13, 7:29).

이 둘째 아들의 경우는 탕자의 경우를 말해 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했던 이방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온 사람들을 말합니다. 


문제는“싫소이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뉘우치고 갔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회개의 열매를 말해 줍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하신 이 말씀의 뜻이 43절에 와서 명백하게 나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1) 둘째 아들을 통하여 회개의 참 뜻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싫다고 한말은 하나님의 일에 관심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이들은 그들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을 몰랐으며 

하나님과 원수된 자리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 후에 뉘우쳤습니다. 

그들이 뉘우친 경위를 보면 

그들은 세례 요한으로부터 죄에 대한 책망을 들었습니다. 

이것은 죄인에게 역사하시는 성령의 감동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회개의 표시로 요한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사람이 회개하려면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끌어 주셔야 합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느니라”(요6:44)고 하셨습니다.


둘째 아들은 뉘우치고 갔다고 했습니다. 

갔다는 말은 회개의 열매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아니했던 죄인이 

이를 뉘우치고 그의 인생의 발걸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일이 올바른 회개인 것입니다.


(2) 하나님은 입의 말에서 진실성을 찾지 아니하시고 

행함의 열매에서 진실성을 찾으십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2:28)고 말씀했습니다. 

맏아들은 입으로는 가겠소이다 고 말함으로 

아버지의 뜻을 가장 잘 받든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버림을 받은 것은 그 말에 대한 행함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가지 아니했다고 하신 것입니다. 

싫소이다 라고 말한 둘째 아들은 아버지 앞에 불순종한 아들이요 

어느 모로 보나 쓸모 없는 자식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그 후에 뉘우치고 

아버지의 말씀하신 대로 포도원에 갔습니다.


(3) 하나님은 일의 시작보다 일의 결국을 중히 여기십니다. 

사람들은 일의 시작은 잘 합니다. 

그러나 그 일의 결실을 잘 맺는 사람은 심히 적습니다. 

신앙은 언제나 결과에서 판단이 납니다. 

초청은 받았지만 택함을 받지 못했다면 그 사람의 결과는 어떻게 되겠는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도 하고 귀신을 쫓아내기도 하며 많은 권능을 행했지만 

그날에 가서 주님으로부터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 7:21-23)고 할 때에 

  그 사람의 결과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의인이 그 의에서 돌이켜 악을 행할 때에는 

  이미 행한 그 의는 기억할 바 아니라”(겔3:20)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결국을 중히 보시는 것입니다. 

싫소이다 라고 말한 둘째 아들의 말은 결과가 아닙니다. 

그 후에 뉘우쳐 갔다고 한 말씀이 그의 결과입니다. 

가겠소이다 라고 한 맏아들의 말은 결과가 아닙니다. 

그 후에 가지 아니한 것이 그의 결과인 것입니다.


결 론 : 예수님은 의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시오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시기 위해 오신 분이십니다. 

그리스도의 의를 버리고 율법에서 의를 얻으려고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죄인들 보다 오히려 더 더디고 어려울 것입니다. 

율법에서 의를 얻으려는 자들은 그 율법으로 말미암아 정죄를 받지만 

죄인이 그의 죄를 뉘우치고 하나님 앞에 바로 회개했을 때 

그는 하나님 앞에 합당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세리가 성전에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기도했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의롭다함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불순종으로 버림받는 자가 되지 말고 

순종으로 성령의 열매를 맺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 168 ≈ 열매 맺을 백성이 받을 하나님 나라

(본문 : 마태복음 21 : 33 - 46)

포도원 농부 비유(막 12:1-12; 눅 20:9-19)

33 다른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거기에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34 열매 거둘 때가 가까우매

그 열매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35 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거늘

36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내니

그들에게도 그렇게 하였는지라

37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이르되

그들이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38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산을 차지하자 하고

39 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느니라

40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그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41 그들이 말하되

그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열매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이다

4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에 

ㅁ)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시 118:22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44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

45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46 잡고자 하나

무리를 무서워하니

이는 그들이 예수를 선지자로 앎이었더라


서 론 : 예수님이 말씀하신 또 하나의 포도원 비유는 

이스라엘이 왜 하나님의 나라를 빼앗길 것인가에 대한 교훈이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하나님의 나라로 삼기 위하여 

세계 만방 중에서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많은 배려를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같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그들의 메시야로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까지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열매를 바칠만한 백성이 못되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나라가 다른 백성에게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이 비유는 이스라엘이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를 빼앗기고 

그 나라가 어떻게 이방인들에게 돌아가게 되었는가에 대하여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결론적으로 그 이유를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1. 패역한 이스라엘

이 포도원의 비유는 한마디로 이스라엘의 패역함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1)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드셨다고 했습니다. 

이 주인은 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포도원이란 하나님이 세우신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이 비유는 이사야 5장이 그 배경이며 또한 주석이 되기도 합니다. 

이사야를 통하여 하나님은 포도원의 죄악상올 책망하시고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라”(사5:7)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로 포도원을 삼으신 것은 

그들로 의로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려는 거룩하신 뜻에서였습니다. 

하나님이 이 포도원에서 바라신 것은 오직 그 열매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맺은 열매는 하나님이 기대하신 열매가 못되었습니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 포도를 맺혔도다”(사5:2)고 탄식하신 것입니다.


(2) 하나님은 이 포도원에 대하여 모든 배려를 다 하셨습니다. 

산들로 둘렀다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산들로 두르신 나라였습니다(시125:1-2). 

* 시125:1-2

1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

2 산들이 예루살렘을 두름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두르시리로다


그들이 계속하여 좋은 열매를 맺기만 하였었다면 

이 같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은 언제까지나 계속되었을 것입니다. 

또 거기 즙 짜는 구유를 팠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의 순종에서 나온 열매는 

그것이 그대로 그들의 무진장한 축복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망대를 지으셨습니다. 

망대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지키심을 의미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맺는 이상 

하나님의 계속적인 지키심을 받았을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하여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었으랴”(사5:4)고 말씀하실 정도로 

모든 것을 다 배려하셨던 것입니다.


(3) 그들은 주인이 보낸 종들을 다 죽였습니다. 

하나님은 이 포도원을 농부들에게 세로 주셨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너의 칭찬과 명예와 영광으로 

  그 지으신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그 말씀하신 대로 너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라”(신26:19)

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그의 종들을 보내시어 열매를 맺히게 하시기 위해 

때때로 경종하시고 패역한 행실을 책망하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때마다 그들은 그 종들에게 순종하거나 

종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거절하고 오히려 죽여 버렸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자기 종들이라고 비유하신 종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하여 끊임없이 보내신 선지자들을 말합니다.


(4) 그들은 마침내 주인이 마지막으로 보내신 그의 아들까지 죽였습니다. 

주인은 아들을 보내면서 “저희가 내 아들을 공경하리라”고 여겼다고 했습니다. 

주인이 보낸 그의 아들은 마땅히 공경을 받으실 분이십니다. 

그 분은 자기의 독생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주인은 이 패역한 농부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그 아들을 마지막으로 보낸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아들을 어떻게 한 것입니까?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 하고 

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어쫓아 죽였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신 것입니까?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메시야를 기다린다고 말하면서도 

사실인즉 그들은 메시야의 지배가 아닌 

자기들의 권세와 지배를 계속 누리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이 메시야이심을 여러 가지로 증거 하셨지만 

완악한 그들은 이를 듣지 않고 

포도원 밖으로 내어 쫓아 죽인 것입니다.


2.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

예수님은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기묘한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이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뇨”라고 물으셨습니다. 

이에 그들은 “이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실과를 바칠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찌니이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 비유가 의미하는바 참뜻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저 하나의 재미있는 이야기로 듣고 합리적으로 대답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이 같은 대답은 

자기들의 입으로 스스로 정죄한 말이며 

자기들의 운명을 그들의 입으로 예언하는 말이 되어 버렸습니다.

여기서 주인이 올 때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예수님의 재림을 의미하고 있지만 

이 말씀은 두 가지로 응해질 것입니다. 

하나는 주후 70년에 그들은 이미 그들의 하나님의 나라가 

문이 닫히는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이 악한 자들을 진멸”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나라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열매 맺는 백성이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또 한가지는 예수님이 재림 하실 때에도 

그들은 그들의 패역했던 죄악을 안고 

많은 시련과 환난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슥13:8-9, 14:1-2).


3.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예수

예수님은 자신들이 받을 운명을 스스로 대답하도록 만드시고 

결론적으로 시편 118편에 있는 자신에 대한 말씀을 인용하여 

*시편 118:22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무서운 심판을 경종하셨습니다.


(1) 유대인들은 메시야 왕국의 머릿돌 되신 예수를 버렸습니다. 

건축자들이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상징합니다. 

이스라엘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나라의 기둥으로 삼으시고 

그의 아들을 이 나라의 영원한 왕으로 세우시기로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보내신 그들의 왕을 

쓸모 없는 돌로 여겨 버린 것입니다.


(2) 그러나 하나님은 이 돌을 다시 취하여 머릿돌로 삼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버린 돌을 하나님은 다시 살리심으로 

교회의 머리로 삼으신 것입니다. 

이런 일이야말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이루신 일이요 

인간의 눈으로 볼 때에는 참으로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3) 이 돌은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반석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이 돌을 거역하거나 이 돌을 대항할 수 없습니다.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의 어떤 권세자나 권력도 하나님의 나라를 대적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깨어질 것입니다. 

또한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실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이 세상 심판 권세를 의미합니다. 

그를 거역한 무리들에 대한 심판은 한 사람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결 론 : 하나님의 나라는 열매맺는 백성이 차지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는 성도만이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된다고 하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22장 설교

◆ 밤중소리 03-01 | VIEW : 7,653

≈ 169 ≈ 아들의 혼인잔치(본문 : 마태복음 22 : 1 - 9)

≈ 170 ≈ 청함을 받은 자와 택함을 입은 자(본문 : 마태복음 22 : 10 - 14)

≈ 171 ≈ 하나님의 것과 가이사의 것(본문 : 마태복음 22 : 15 - 22)

≈ 172 ≈ 부활에 관한 사도개인의 질문(본문 : 마태복음 22 : 23 - 33)

≈ 173 ≈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본문 : 마태복음 22 : 34 - 40)

≈ 174 ≈ 다윗의 자손과 메시야(본문 : 마태복음 22 : 41 - 46)


≈ 169 ≈ 아들의 혼인잔치

(본문 : 마태복음 22 : 1 - 9)

혼인 잔치 비유(눅 14:15-24)

1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이르시되

2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3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4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르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5 그들이 돌아 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

6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

7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8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

9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대


서 론 : 예수님이 말씀하신 혼인 잔치의 비유는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주님과 함께 즐길 장차 올 천국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 가지는 그 그림자가 되는 오늘의 교회를 말해 주는 것입니다. 

처음 청한 사람들은 이 혼인 잔치에 오기를 도대체 싫어했습니다. 

그는 처음 청한 사람들은 누구를 말하고 있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을 거역하여 그들의 메시야로 보내신 그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인 유대인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후에 사거리 길에서 만나는 대로 데려온 사람들은 

복음으로 데려온 이방인들을 가리킵니다. 

혼인 잔치란 말은 결혼식, 결혼 잔치를 말하는 ‘가모스’의 복수 ‘가무스’로 

이것은 우리 기독교의 성격을 나타낸 말입니다. 

기독교는 기쁨을 주는 종교이며, 장래의 소망을 주는 종교인 것입니다.


1. 아들을 위한 혼인 잔치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다”

고 하신 말씀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나 하나님의 교회의 목적은 

아들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은 골로새 서에서 더욱 분명하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화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다”고 했습니다(골 1:16).


그 잔치에 초청 받은 우리는 그 즐거움에 동참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그의 즐거움에 동참하는 것으로 

최종적인 관계가 맺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주님의 비유에서 혼인 잔치에 초대되는 사람들을 바라보게 됩니다. 

이 혼인 잔치에 처음 초대된 이스라엘의 거역은 

결과적으로 그 초대 범위가 넓어지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일에 대해 바울은 이처럼 말했습니다.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이운 것은 

  나로 접붙힘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롬11:19-20)고 했습니다.


이 비유는 기독교의 세 가지 특징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1) 하나는 기독교는 잔치의 종교입니다. 

잔치는 언제나 인생에게 즐거움을 줍니다. 

이처럼 기독교는 누구든지 아들의 잔치에 들어오는 자는 

인생의 큰 즐거움을 누리 게 되는 것입니다. 

이 자리는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다 갖춘” 자리입니다. 

이곳에는 누가 들어와도 이것들을 먹을 수 있으므로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 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다음에 기독교는 초청의 종교입니다. 

청하다는 말은 ‘케크레메누스’로 

하나님에 의하여 계속하여 이 혼인자리에 초청되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 혼인 자리에 초청을 받는 일에 아무런 장애물이 있을 수 없습니다.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고 하는 주인의 명령이 있었습니다.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구원”이 있는 것입니다.


(3) 그리고 세 번째로 기독교는 선택의 종교입니다. 

믿든지 아니 믿든지 그것은 주인에 의해 강요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혼인 자리에 들어오기 전에도 그리고 이 혼인 자리에 들어온 이후에도 

누구든지 선태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사실만은 알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3:18)

고 하신 주인의 엄숙한 선언입니다.


2. 혼인 잔치에 초청 받은 사람들

아들을 위한 혼인 잔치를 마련하시고 손님을 초청하시는 어떤 임금은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이 그 아들을 위한 잔치에 인류를 초대하시는 모습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의 인자하심과 그의 사랑의 결실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1) 첫 번째 초청에서 

이 혼인 자리에 오기를 싫어한 이스라엘의 완악한 모습을 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보내어 이스라엘을 이 잔치에 초청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패역한 이스라엘을 향하여 혼인 잔치에 오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흥 같이 붉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흥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사1:18). 

이 말씀은 하나님의 초청이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국문할찌라 

너희는 돌이켜 회개하고 모든 죄악을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할찌어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겔18:30-31)

고 하신 말씀도 선지자들을 통하여 부르시는 하나님의 초청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이같은 초청을 거절한 것입니다.


(2) 두번째 초청에서 혼인 잔치의 신랑되신 그의 아들과 사도들을 죽인 

이스라엘의 패역한 죄를 바라보게 됩니다. 

유대인들은 회개하라고 외치는 세례요한을 배척했습니다. 

예수님은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말씀하시므로 

유대인들을이 잔치에 초청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일음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요73738)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생명의 주를 그들의 손으로 죽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사도들도 죽였고 모든 믿는 자들을 핍박했습니다.

비유에서 말씀하신 살인자들에 대한 진멸은 

이스라엘이 멸망 받을 일에 대한 하나의 예언이었습니다. 

이 패역한 백성들은 주후 70년 

베스파시안 황제의 아들 티투스( 디도장군)에 의하여 함락 당하고 진멸 됨으로 

살인자에 해당한 보응을 받았던 것입니다.


(3) 세 번째 초청에서 

드디어 이 혼인 자리에 이방인을 초청하시는 모습을 바라보게 됩니다. 

임금은 종들에게 이처럼 명령했습니다. 

“혼인 잔치는 예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들의 혼인 잔치에 초청하는 하나님의 간절한 호소를 

스스로 거역함으로 이 축복의 대열에서 떨어져 나갔습니다. 

예수님은 이 일에 대하여 이미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마21:43).


이것을 시기적으로 말하면 이방인의 때입니다. 

이방인의 때에 대하여 바울은 이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롬11:25)고 했습니다.


결 론 : 우리는 주님의 어 비유를 이스라엘의 경우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오늘날 우리 의 경우에도 적용시킬 수 있습니다. 

오기를 싫어한 사람은 복음을 거역하여 

그리스도 앞에 나오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을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놀라운 축복의 초청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믿지 않을 뿐 아니라 우습게 여겨 오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많은 사람들도 

세상일이나 사업상 핑계로 이 잔치에 참여하기를 거절합니다.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 차로 갔다”는 말은 

세상 일로 말미암아 영생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마13:22). 

세상일이나 사업은 죄가 되는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일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 170 ≈ 청함을 받은 자와 택함을 입은 자

(본문 : 마태복음 22 : 10 - 14)

10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

11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12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13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서 론 : 우리 기독교는 선택의 종교입니다. 

“청함은 받은 자와 택함을 입은 자”는 

이 같은 기독교의 특색을 나타내 보이는 예수님의 비유이십니다. 

이 같은 하나님의 선택은 이방인뿐 아니라 

이스라엘 역시 마찬가지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자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롬9:7-8).


1.청한 사람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써의 열매를 맺지 못하였으므로 아들을 위한 혼인 잔치에 청한 사람으로 합당하지 아니했습니다. 이 일에 대하여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하여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 할 것이 있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힘은 어찜인고 이제 내가내 포도원에 어떻게 행할 것을 너희에게 이르리라 내가 그 울타리를 걷어 먹힘을 당케 하며 그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할것이요 내가 그것으로 황무케 하리니.....”라고 경종하신 것입니다(사5:5-6). 그러면 임금은 이 아들의 혼인 잔치에 어떤 사람들을 청해 오라고 하신 것인가? 임금은 그 들에게 “혼인 잔치는 예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고 하셨습니다. 이 같은 임금의 말씀을 따라 그 종들이 데려온 사람들이 나와 있는데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자리에 손이 가득한지라”고 나와 있습니다.


(I) 청한 사람들이란 복음으로 부르는 모든 이방인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버림받은 후 복음은 이방인들에게 전해졌습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이 일을 이처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이운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롬 11:19-20). 사거리 길에 나가 모든 사람들을 청하는 기간을 이방인의 때라고도 합니다(마24:34, 롬11:24).


(2) 청한 사람들 중에는 가라지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이 비유는 예수님의 유명한 가라지의 비유입니다(마13:24-30).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 온” 이 사람들 중에는 마귀가 덧뿌린 가라지도 많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3) 청한 사람들 중에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13장에서 말씀하신 예수님의 씨 뿌리는 비유는 복음을 들었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다 천국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님을 잘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복음을 듣고 깨닫지 못하는 사람, 복음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사람, 환난이나 핍박이 올 때 넘어지는 사람들은 청함을 받기는 했지만 결실이 없으므로 결국은 다 내어쫓길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임금은 종들에게 명하시기를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할 일은 열매를 맺고 맺지 못하고는 오직 하나님께 맡기고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아들의 혼인잔치에 청하여 데리고 와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에는 선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명하셨습니다.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눅14:23)고 하신 말씀에서 내 집은 오늘날 하나님의 교회를 말하고 있습니다.


2.예복을 입지 않은 손

마침내 혼인 자리에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왔습니다. 혼인 자리에 들어온 임금은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았습니다. 임금은 그 손을 향하여 엄히 질책했습니다.?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 왔느냐?그리고 그 손에 대한 최후 조처가 내려졌습니다.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이 있으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초청된 손님들에게는 준비된 예복이 제공되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예로부터 종교적인 행사에 참가하는 사람들에게는 준비된 예복을 나눠줌으로 예복을 미리 입게 한일이 있었습니다(왕하10:22).그러면 여기서 예복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이 예복은 말할 것도 없이 예수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말합니다.

창세기에는 우리 인간이 입은 두 가지 옷의 모양이 나옵니다. 하나는 아담이 죄를 범한 후 입은 옷인데 이 옷은 자기의 부끄러움을 가리우기 위하여 엮어 입은 무화과나무 잎이었습니다(창3:7). 그리고 다른 한가지 옷은 하나님이 아담에게 입혀주신 옷인데 짐승을 잡아 그 가죽으로 하나님이 만드신 가죽옷이었습니다(창3:21). 아담은 무화과 나뭇잎으로 엮은 옷을 입었을 때에는 하나님이 두렵고 부끄러워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나무사이에 숨었었지만 하나님이 지으신 가죽옷을 입고는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리울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상징하는 옷으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아들의 혼인 자리에 초청된 사람들은 마땅히 주 예수로 옷 입어야 합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말씀했습니다(롬1334).이 옷을 새사람이라고도 말씀하고있습니다.?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했습니다(엡4:24).

여기서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는 말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말하는 것입니다 (갈3:27).이처럼 이 잔치 자리에는 믿음으로 참석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는 이 옷을 입지 않고 참석한 사람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람이 예복을 입지 않은 것은 그 자신이 예복을 거절한 일이기 때문에 결과적인 책임은 입지 아니한 그 사람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가 예복을 입지 않았다는 것은 그에게 그리스도의 의의 옷이 없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는 이 자리에 믿음으로 참석한 사람이 아니며 또 계속적으로 믿음을 거부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마땅히 그 혼인 자리에 더 머물러 있을 자격이 없습니다. 임금이 들어온 후로는 놀라운 축복의 향연이 시작될 것이기 때문입니다(계22:1-5).

이 사람은 결국 아들의 혼인 자리에서 쫓겨나 이 혼인 자리에 들어오지 못했던 모든 사람들과 함께 영원한 멸망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같은 사실을 가라지의 비유에서 결론적으로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군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곡간에 넣으라”(마13:30)


결 론 : 아들의 혼인 자리는 그 문이 널리 열려져 있습니다. 누구나 그 곳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무라도 그곳에 초청해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에 맡겨진 복음 전도의 사명입니다. 그러나 요는 그 사람들이 다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고 그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사람들,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만이 아들의 혼인 자리에 정식으로 초청 받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을 가리켜 “예정을 입은 자”(엡1:5), “택함을 받은 사람”(엡1:4)이라고 말하며 이곳에서 예수님은 “택함을 입은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돼함을 입었다고 하는 이 사람들에 대하여 다음 세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이들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모든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어린양의 생명책에 이미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기록된 사람들입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은 바로 이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 171 ≈ 하나님의 것과 가이사의 것

(본문 : 마태복음 22 : 15 - 22)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막 12:13-17; 눅 20:20-26)

15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면 예수를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의하고

16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진리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

17 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하니

18 예수께서 그들의 악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19 세금 낼 돈을 내게 보이라 하시니 

1)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왔거늘

20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21 이르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22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놀랍게 여겨 

예수를 떠나가니라


서 론 : 하나님의 지혜는 진리에서 나지만 사단의 지혜는 간교에서 나옵니다. 창세기 3장에서 뱀이 하와를 유혹했을 때 그 뱀을 가리켜 들짐승 중 가장 간교하다고 했습니다. 간교한 마귀는 언제나 간교한 자의 마음속에 들어가 간교한 지혜로 역사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걸려 넘어지게 하려는 또 하나의 간교한 지혜를 찾아냈습니다. 그들은 그 지혜야말로 틀림없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올무에 걸리게 할 줄로 믿었습니다. 그들은 이 같은 자기들의 계획을 수행하는 일에 중인이 되기도 하며 또 당장에 체포하도록 하기 위해 헤롯당원들과 함께 자기들의 제자를 예수께 보낸 것입니다. 헤롯당이란 헤롯왕의 권세와 그늘 아래서 헤롯의 뜻을 받들어 권세를 누리는 정치적인 무리들로 평소에는 바리새인들과 좋지 않은 사이였지만 예수님을 잡는 일에는 서로간에 배짱이 맞았던 것입니다.


1. 바리새인들의 간교한 질문

예수님께 파송 받은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들은 예수님을 올무로 잡기 위하여 입술로 아첨하는 거짓 혀로 가까이 왔습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선생님은 참되시고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 하심이니이다” 그들이 이 같은 달콤한 말솜씨는 마음으로는 예수님을 잡으려는 함정이요 입술로는 거짓 아첨인 것입니다. 외식에 젖어온 바리새인들은 이 같은 연구에도 훌륭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대한 이런 판단은 진정한 의미에서 볼 때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짓으로 꾸며 말한 것이었기 때문에 올무의 낚시 밥이었던 것입니다. 아첨하는 일은 스스로 패망을 이루는 일입니다(잠26:28). 아첨하는 자가 가까이 올 때에는 언제나 그 사람의 입술에 조심해야 합니다. 아첨하는 입술은 음녀의 입술과 다름이 없습니다. “대저 음녀의 입술은 꿀을 떨어뜨리며 그 입은 기름보다 미끄럽다”고 했습니다(잠5:3).

그들의 질문은 이제 본론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그들의 이 같은 질문이야말로 너무나도 기막힌 질문으로 어떤 대답이건 깊숙한 함정이 그 앞에 파헤쳐져 있었습니다. 그 당시 로마 정부에서는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는 모든 식민지에 대하여 사람의 머릿수대로 일률적으로 징수하는 인두세라고 하는 세금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매해 이 세금을 로마 황제에게 바쳐 왔습니다. 그런데 이 세금에 대하여 유대인들간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이방인의 황제에게 이 같은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은 일인가? 옳지 않은 일인가? 에 대하여 많은 논란이 일어나 있었습니다. 만약 이 대답에서 예수님이 세금을 바쳐야 한다고 말씀하신다면 그들은 예수님을 향하여 가이사의 정책에 동조하는 자라고 하는 딱지를 붙여 매도할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세를 바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면 이런 일이야말로 가이사에게 반기를 드는 자란 죄명으로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될 것입니다.


2. 예수님의 지혜로운 답변

예수님은 이미 그들의 마음의 악함을 아시고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고 책망하시고 “셋돈을 내게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셋돈이란 가이사에 게 세금을 바치는 화폐를 가리킨 것입니다. 그들은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가져온 한 데나리온의 셋돈을 받으시고 그 돈에 그려져 있는 형상과 글을 가리키시면서 “이 형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고 물으셨습니다. 그 화폐에는 한쪽에 로마 황제의 형상이 그려져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가이사의 글이 씌어져 있었습니다. 화폐 그 자체를 가지고 따져도 그것은 분명히 십 계명을 어기는 우상의 형상이요, 자칭 신이라고 나타낸 그 글은 신성 모독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이 물음에 서슴지 않고 “가이사의 것이니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드디어 이제 예수님의 대답이 나오셨습니다.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이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좀 쉽게 옮긴다면?가이사가 받아야 할 것은 가이사에게 주라, 그리고 하나님의 것은 그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는 말입니다.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을 절대로 혼돈하지 말고 제각기 의무를 바로 이행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1)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주라고 하셨습니다. 가이사는 유대인의 통치권자로 유대인들을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모든 백성들은 통치권자의 법령을 지킬 것은 지켜야 합니다(롬13:12). 유대인들이 가이사에게 바치고 있는 셋돈은 가이사 황제가 자기의 소유로 만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요구한다면 그에게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통치자와의 충돌을 원치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활이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딤전2:2). 그러나 예수님은 그 지키는 범위에 있어서 ‘가이사’의 것에 한정 하셨습니다. 가이사는 이땅의 한정된 치리자로써 절대로 하나님의 영역에 있는 것을 침범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것을 가이사에게 바쳐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가이사의 것이란 어떤 것을 말하는가? 그가 통치하는 지역에서 선을 이루고 악을 응징하는 일입니다(롬13:4). 모든 통치자는 하나님의 일군으로 마땅히 그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세와 국세에 대하여 가이사에게 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롬13:7).

(2)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통치자에 우선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것을 가이사에게 바치는 일은 금하셨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하나님의 것인가?

① 예배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인간의 예배는 오직 우주 만물의 창조자이시며 그 주관자이신 하나님께만 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이사를 신의 아들이라고 하여 그를 경배하는 일은 단연 거부되어야 하며 이스라엘은 가이사를 예배해서는 안돼는 것입니다.

② 경배와 영광도 오직 하나님의 것입니다. 가이사는 그의 피통치자들로부터 경배와 영광을 받아 오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결코 가이사에게 경배해도 안되며 그에게 영광을 돌려서도 안됩니다. 하나님은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사42:8). 하나님께 대한 경배에 대하여 예수님은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4:10).

③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떤 경우에도 십일조를 성별하여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결 론 : 가이사의 것은 국민된 의무를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것은 그리스도인의 의무를 가리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국가에 대하여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바른 성경적인 지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혁명가이거나 사회 개혁주의자들이 아닙니다. 가난한 백성들을 자본주의자들의 손에서 건져내 주어야 할 사명자들이 아니며 노동자들을 고용주의 착취로부터 해방시켜 주어야 할 사회주의 운동가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가이사의 법에 순종함과 아울러 하나님의 법에 순종해야 합니다. 만약 이 두 길에서 상충되는 일이 있으면 우리는 단연 하나님의 법을 따라야 합니다. 여기서 순교자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 같은 기이한 답변에 홈을 잡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놀라움을 나타냈습니다. 언제나 그러했듯이 사단의 지혜는 하나님의 지혜에 여지없이 판정패하는 것입니다.


≈ 172 ≈ 부활에 관한 사도개인의 질문

(본문 : 마태복음 22 : 23 - 33)

부활 논쟁(막 12:18-27; 눅 20:27-40)

23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 날 예수께 와서 물어 이르되

24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ㄱ)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 들어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25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장가 들었다가 죽어 상속자가 없으므로 

그 아내를 그 동생에게 물려 주고

26 그 둘째와 셋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27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28 그런즉 그들이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30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31 죽은 자의 부활을 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32 ㄴ)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33 무리가 듣고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더라


서 론 : 유대교에는 두 종파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바리새파와 사두개파가 이들입니다. 제사장이나 장로들로 그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사두개파는 그들의 신앙적인 특정이 죽은 자의 부활을 부인하는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존재에 대하여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음으로 심지어는 천사의 존재까지도 부인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평소에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신앙적인 동지가 아니라 서로 원수처럼 지내오고 있었는데 예수님을 송사 하는 일에 있어서 만은 손을 굳게 잡았습니다.

어느 날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기발한 질문을 가지고 찾아 왔습니다. 그들의 질문은 한 여자를 아내로 데리고 살았던 일곱 형제가 부활의 날에 과연 누가 그 여인을 자기 아내로 삼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1. 사두개인들의 오해

사두개인들의 이 같은 질문은 분명히 예수님에 대한 시험이었지만 성경적인 문제였으므로 예수님은 이 문제에 대하여 그들이 깨닫도록 자세히 가르쳐 주시는 입장을 취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선 그들의 이 같은 질문이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다”고 가볍게 책망하시고는 부활에 관한 바른 지식을 심어 주신 것입니다. 알지 못했다고 하신 말씀은 ‘메이돈테스’로 “보지 않은 고로”란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느 한 부분만 보아서는 진리에 이를 수 없습니다. 성경 전체를 꿰뚫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고 하나님이 계시하시는 바른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 다. 우리도 성경을 전체적으로 보지 않으면 진리에 대하여 잘못 판단한 나머지 오해 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 횡행하고 있는 모든 이단은 성경을 이처럼 오해한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1) 우리는 성경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모르면 성경에서 참 진리를 찾아 낼 수가 없습니다. ⓐ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하나님의 말씀이십니다(요5:39). 우리가 성경을 원을 때에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시켜야 합니다. 성경에서 만약 예수 그리스도를 제해 버린다면 성경은 알맹이 없는 책으로써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도 없을 것입니다. ⓑ 성경은 영생을 주시는 책입니다(요5:39).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영생이시기 때문입니다. ⓒ 성경은 믿음을 가지게 하고 그 믿음으로 영생을 갖게 하는 책입니다(요일5:13).

(2)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모르면 성경에 기록된 기적이 거짓이 되어 버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는 줄 알아야합니다(눅1:37). 하나님의 말씀은 그 말씀 자체가 창조적인 능력이신 것입니다. @ 하나님은 죽은 자도 살리실 분이심을 알아야 합니다(롬4:17).


2. 부활한 사람들의 상태

부활시의 인간 상태는 어떤 것인가?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명쾌하게 대답해 주셨습니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이 말씀에서 나온 부활한 몸의 신비를 몇 가지로 열거할 수 있습니다.

(1) 부활한 몸은 장가가거나 시집가는 몸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결혼은 육신을 가진 인간에게 적용되는 일이요, 또한 이성의 결합은 육체를 가진 이 땅의 생명체만이 작용하도록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입니다.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은 그 자손을 번식시키는 일 때문에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천국은 그런 번식이 필요 없는 곳입니다.

(2) 부활한 몸은 천사와 같은 몸이라고 하셨습니다. 천사는 장가가는 일이나 시집가는 일이 없는 영적인 피조물입니다. 그러므로 천사들은 그들의 자손을 번식시킬 수 없습니다. 천사 하나 하나의 존재가 오직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되었습니다. 천사에게는 생식 기능이 없습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천사는 그의 생명이 영원하다는 것과 하나님의 사역자로 하나님을 섬기는 영적인 존재란 사실입니다. 우리가 장차 부활체가 되면 우리 역시 이 같은 천사와 같은 몸을 가지게 되는데 사실인즉 그들보다 더 높은 위치에서 축복을 누릴 수 있도록 약속되어 있는 것입니다.

(3) 그리스도인의 부활한 몸은 예수님과 같은 영화로운 부활의 몸이 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를 믿음과 동시에 그와 연합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 연합은 부활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롬6:5)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부활의 중인이 되신 분이십니다.

(4) 그리스도인의 부활은 영생의 실체며 구원의 소망의 실현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말했습니다(롬8:24). 그 소망의 실현이 곧 우리의 부활인 것입니다. 오직 부활한 몸만이 천국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천국은 육체로 살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천국에서 영화롭게 살기에 합당한 몸은 부활한 몸입니다.


3.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예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하였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같은 사실을 모세와 엘리야의 경우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 요한, 야고보 등 세 제자들을 데리시고 한 산에 올라 가셨을 때 영광스런 몸을 가진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더불어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모세는 분명히 죽었지만 그의 영적인 생명이 영광스러운 몸으로 살아 있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장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기를 나타내실 때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을 하실 때에는 이미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이 죽은지 오래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하나님이 이들의 이름을 대시면서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신 것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 살아있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1) 죽음은 인간의 소멸이 아닙니다. 죽음은 육신이 잠자는 것이요 그의 영적인 생명은 중단됨이 없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2) 죽음에는 육체적 부활의 소망이 있습니다. 비록 우리의 육신이 죽는다해도 그 죽음 자체가 인생의 최후가 아닌 것입니다. 육체의 죽음은 부활의 씨를 뿌리는 일에 불과합니다(고전15:35-38, 42-44).

(3) 하나님이 스스로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의 언약 관계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에게는 이삭과 야곱의 축복이 주어집니다. 우리는 다 아브라함의 자손들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르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갈3:29).


결 론 : 우리는 부활의 소망을 확실히 가져야 합니다. 이 같은 소망은 우리의 구원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우리가 전하는 복음의 중요한 내용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고전15:14-19). 예수님의 부활은 그리스도인의 부활의 산 표본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우리의 믿음이 헛될 뿐 아니라 우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게 될 것이요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부활의 소망을 견고히 불잡고 흔들리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 173 ≈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

(본문 : 마태복음 22 : 34 - 40)

가장 큰 계명(막 12:28-34; 눅 10:25-28)

34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35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36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ㄷ)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ㄹ)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서 론 : 예수님이 사두개인들과의 부활에 관한 논쟁에서 부활의 참 진리를 가르치심으로 그들로 감히 대답할 수 없게 하셨는데 이 일이 바리새인들에게 들려졌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사두개인들과는 달리 부활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이 모인 것은 부활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공감해서가 아니라 사두개인들이 질문하지 못한 다른 율법상의 어려운 질문을 통하여 자기들이 승리하려는데 그목적을 두고 있었습니다. 이 바리새인들 중에 한 율법사가 선발되어 율법적인 어려운 문제를 가지고 시험하려고 예수님께 질문을 하게 된 것입니다. 율법사란 말은 율법의 전분가란 뜻으로 그 당시 서기관이나 율법학자들에게 불려졌던 율법 교사란 말과 같았습니다.


1. 한 율법사가 던진 율법 문제에 대한 시험

이 율법사는 율법 문제에 관한 이상 자기 이상 가는 전문가가 없는 것으로 자부하고 자신만만하게 예수님께 도전해 온 것입니다. 그의 시험은 이러했습니다.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하는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그들의 랍비 학교에서 율법을 배운 일이 없으며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이 같은 문제에 대하여 도저히 답변할 수 없을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율법의 전문가라 할지라도 능히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던져 놓고는 과연 예수님의 입에서 어떤 답이 나올 것인가에 대하여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너무나도 명쾌한 것이었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아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예수님의 이 대답은 질문해 온 율법사 자신도 깨닫지 못했던 율법의 진수를 들어내 놓은 일이었기 때문에 더 무슨 말을 내 놓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1) 율법은 문자로 나타난 조문보다 그 정신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밝히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단지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의의 표본으로 삼으려 했기 때문에 율법 안에 있는 근본 정신을 깨달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율법에 나타난 조문만을 중시하는 그들에게 율법의 참 정신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2) 율법은 홈 없고 완전한 하나님의 법이시지만 정말로 하나님의 완전하신 법은 율법의 바탕을 이룬 사랑에 있음을 밝히셨습니다. 율법을 이룰 수 있는 비결은 사랑에 있습니다. 사랑을 버리고서는 율법을 이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율법의 조문만을 강조하고 지키는 것으로 의를 얻으려고 했기 때문에 율법의 사슬에 스스로 얽매어 포로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3) 율법은 정죄에 그 목적을 둔 것이 아니라 그곳에 하나님의 참 사람이 있음을 보이셨습니다. 인간의 사랑은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 사랑이 죄에 더러워졌으며 이기주의적인 정욕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의 한량없는 사랑을 그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아들을 통하여 이 율법을 온전히 이루는 축복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2 율법의 두 대지

율법이 십계명으로 불리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두 대지로 나누셨습니다. 계명부터 4계명까지를 한 대지로 하여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풀이로 말씀하셨고, 5계명부터 10계명까지를 또 하나의 대지로 하여 이웃에 대한 사랑의 계명으로 풀이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에

대하여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1) 하나님께 대한 사람에 대해서 “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우리들의 자세를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로 마음을 다해야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마음이란 ‘칼디아’로 중심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는 먼저 중심에서 그 섬김이 나와야 합니다.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고 하셨습니다(삼상16:7). 중심에서 나오지 않는 섬김은 헛된 섬김일 뿐입니다. 여기서 마음의 중심이란 곧 마음의 진실함을 의미합니다.

둘째로 목숨을 다하여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목숨이란 ‘푸케’란 말로 인간의 내적 존재를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영혼이나 생명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함에는 그 사랑이 그의 영혼 깊은 생명으로부터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인간적인 그 어떤 사랑보다 더 우선하는 사랑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랑에 대하여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롤 지고 나를 쫓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마10:37-38).

셋째로 하나님을 사랑함에는 뜻을 다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뜻이란 ‘디아노이아’로 이해력, 깨달음, 생각 등으로 해석됩니다. 이것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이해력이나 생각을 다 바치는 일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는 자신의 지성이 총동원되어야 합니다. “다하여”란 말은 전체를 드리라는 뜻입니다. “사랑하라”는 말은 ‘아가패세이스’로 일시적 잠정적 사랑이 아니라 영구적 계속적 사랑은 가리키는 말입니다.

(2) 이웃에 대한 사랑에 대해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웃이 누구냐? 고 하는 문제는 예로부터 궁금증이 되어온 말입니다. 예수님은 불한당을 만난 나그네의 경우를 비유로 들어 우리의 이웃의 범위를 밝혀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유대인의 이웃은 이방인까지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에서 우리는 원수까지도 내 이웃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네 몸과 같이’란 말은 ‘호스 세아우톤’으로 “네 자신과 같이” “네 자신처럼”이란 말입니다. 이웃을 내 자신을 사랑하는 만치 사랑하는 일은 이웃에 대한 사랑의 절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같은 사랑에 대하여 예수님은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7:12)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은 이웃 사랑의 최고의 방법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결 론 : 율법의 정신은 사랑입니다. 율법의 참 열매는 사랑에서만이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이야말로 율법의 완성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마5:17)고 하신 말씀은 예수님이 그의 말할 수 없는 사랑으로 이 율법을 이루실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로 율법의 정죄를 능히 이기게 하였습니다.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롬8:33).

예수님의 사랑은 율법의 요구를 이루셨습니다. 그가 이 세상에서 율법을 지키신 모든 일은 그 이루신 일을 우리에게 이루어지게 하시려는데 있었습니다(롬8:4).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새로운 계명은 율법이 아니라 사랑이십니다. 사랑을 이루어 나가는 그리스도인만이 율법을 온전히 이루는 그리스도 인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 174 ≈ 다윗의 자손과 메시야

(본문 : 마태복음 22 : 41 - 46)

그리스도와 다윗의 자손(막 12:35-37; 눅 20:41-44)

41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42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43 이르시되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44 ㅁ)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45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46 한 마디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


서 론 : 유대인들은 메시야를 기다리는 민족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메시야를 기다리면서도 잘못된 메시야 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참 메시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그들의 잘못된 메시야 관을 성경적으로 깨닫게 해 주시기 위하여 성경을 잘 알고 있다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뉘 자손이나”고 물으셨습니다.


1. 유대인의 잘못된 메시야 관

성경에는 분명히 메시야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에 대한 이 문자적인 사실만을 중요시하고 기다렸습니다. 그들은 이처럼 메시야가 다윗의 혈통으로 오는 사실만을 알았을 뿐 동정녀의 몸에서 성령의 권농으로 태어나신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1) 유대인들은 그들의 메시야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출생에 대하여 알고 있었습니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왔을 때에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헤롯왕에게 불려가 이스라엘의 왕의 출생지에 대하여 ‘유대 베들레헴’이라고 알려 주었습니다(마2:1-6).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이 이 베들레헴에서 출생한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나사렛이 고향이었으며 그 곳에서 성장하셨기 때문에 나사렛 사람으로만 알려 졌습니다. 그러므로 나다나엘 조차도 이처럼 말한 일이 있습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1:46).

(2)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육신적인 다윗의 자손으로만 알았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족보에 따라 거슬러 올라가면 다윗의 자손이 됩니다. 그러나 이 족보도 사실은 요셉의 족보지 예수님의 실제적인 족보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동정녀의 몸에서 성령의 권능으로 잉태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성경 상으로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영적인 뜻이 다분히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다윗의 자손인 메시야에 대하여 이중적으로 예언하고 있습니다.“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명과 정의를 행할 것이라”(렘23:5). 이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혈통으로 태어나심을 보여주지만 다른 곳에 기록된 예언을 보면 다윗의 자손이란 말이 무엇을 뜻하고 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를 섬기며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일으킬 너희 왕 다윗을 섬기리라”고 하신 이 말씀에서 보여 주시는 바는 예수님이 다윗 왕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입니다(렘30:9). 다윗의 자손이란 다윗의 위(왕)에 앉는다는 사실을 밝혀주는 말씀이 이사야서에 있습니다. “그 정사와 평강의 더 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명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사9:7)고 하셨습니다.

(3) 그들은 메시야야 말로 이스라엘의 영광을 나타내 보여 줄 왕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구약에서는 다윗의 자손으로 이스라엘의 왕이 되실 메시야는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올 얻겠고”라고 하신 말씀이나(렘23:5,6)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할 것이라”고 하신 말씀에서 그들은 확신했던 것입니다(사9:7).

아마도 유대인들은 그들에게 나타날 메시야란 말하자면 무한한 능력과 권농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해 온 모세와 같은 위대한 하나님의 종일 것이라고 생각했음이 분명합니다. 그들은 5병 2어의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께 당신이 메시야라면 그 증거로 좀 더 큰 표적을 보여 주어야 활 것이 아니냐고 이처럼 물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기록된바 하늘에서 너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요6:30-31).


2. 예수님이 밝히신 메시야의 정체

예수님은 우선 유대인들의 잘못 인식된 메시야 관을 근본적으로 부셔버려야 할 것이 라고 생각하셨습니다. 그 방법은 성경적인 증거를 보여 주므로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할 수 없도록 만드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성경에 가장 밝다고 자부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뉘 자손이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이 질문은 겉으로 보기에는 너무나도 쉬운 질문이라고 생각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다윗의 자손이니이다”고 대답했습니다. 여기까지는 평범한 질문과 평범한 대답이었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 물옴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시편에 기록되어 있는 메시야에 관한 말씀을 끄집어내어 이처럼 물으셨습니다.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 물음에 능히 대답할 바리새인들은 없었습니다. 성경에 관한 한 박사라고 자부해 마지아니한 그들이 이 너무나도 간단하고 분명한 성경적인 질문에 입을 열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메시야란 다윗이 존재하기 그 이전부터 계신 분이심을 밝히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다윗은 성령에 감동하여 메시야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영적으로 바라보고 시편 110편을 기록했던 것입니다. 다윗이 그곳에서 “내 주”라고 가리킨 대상은 바로 메시야를 의미하고 있음을 바리새인들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주란 하나님에게만 적용되는 명칭입니다. 만약 메시야가 과연 다윗의 육신적인 자손이라면 어떻게 다윗이 메시야를 가리켜 “내 주”라고 불렀겠느냐는 것입니다.

다윗이 아직 태어나지도 아니한 그의 자손을 어떻게 바라볼 수 있으며, 보았다고 해도 자기의 자손을 보고 어찌 주란 명칭을 사용할 수 있겠느냐는 의미도 들어가 있습니다. 이 메시야는 세상에 오시기 이전에 “말씀”으로 계셨던 분이요,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독생하신 하나님이시요, 다윗의 주라 불리우시는 분으로 하늘의 영광의 보좌에 계셨다는 사실이야말로 그리스도에 대한 하나님의 비밀로 이 사실을 깨닫는 자만이 메시야를 영접할 수 있으며 구원의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결 론 : 여기서 몇 가지로 메시야에 대한 구약적인 예언을 들어보면 

다음 네 가지로 간추릴 수 있습니다.

(1) 메시야는 다윗의 뿌리에서 나올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라”(사11:1)고 했습니다. 이것은 메시야가 육적 인 이스라엘에서 태어나실 것이란 예언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12지파 중에서 유다 지파인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2) 메시야는 그의 선재하심이 상고에, 태초에니라는 예언입니다.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미5:2)고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예언의 참 뜻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3) 메시야의 이름이 하나님의 이름과 동일하게 불려졌습니다.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것임이니라”(사9:6)고 했습니다.

(4) 메시야의 이름이 독특하게 예언되었습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7:14)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이 말의 뜻을 깨닫는 유대인들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이 메시야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지고 예수님을 성경대로 믿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23장 설교

◆ 밤중소리 03-01 | VIEW : 12,751

≈ 175 ≈ 서기관과 바리새인에 대한 책망(본문 : 마태복음 23 : 1 - 12)

≈ 176 ≈ 천국 문을 닫는 죄와 지옥자식을 만드는 죄(본문 : 마태복음 23 : 13 - 15)

≈ 177 ≈ 잘못된 맹세와 율법의 더 중한 것을 버린 죄(본문 : 마태복음 23 : 16 - 24)

≈ 178 ≈ 탐욕과 외식과 불법이 가득한 죄(본문 : 마태복음 23 : 25 - 28)

≈ 179 ≈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는 죄(본문 : 마태복음 23 : 29 - 39)


≈ 175 ≈ 서기관과 바리새인에 대한 책망

(본문 : 마태복음 23 : 1 - 12)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꾸짖으시다

(막 12:38-40; 눅 11:37-52; 20:45-47)

1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3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4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5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6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7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8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9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 

너희의 아버지는 한 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이시니라

10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의 지도자는 한 분이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

11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12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서 론 : 예수님은 자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외식에 대하여 책망하셨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연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비록 그들이 바른 신앙생활을 못하고 있었지만 그들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켰는데 그들에 대해 몇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파 그들의 말하는 바는 그 말대로 행하되 그들의 행위는 본 받지 말아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1. 외식자에 대한 책망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 대하여 외식하는 자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외식온 세 가지로 간추려 말할 수 있습니다. 중심으로 하나님께 보이려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남에게 보이려고 꾸미는 것. 사람들에게 자신을 나타내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것. 속과 겉이 다른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1) 그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고 하셨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고 하신 것은 그들이 율법을 가르치는 자리에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과연 이 자리는 누구나 존경해야 할 자리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들의 업에서 나오는 말은 옳았지만 그들의 행실은 옳지 못했습니다. 외식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서기관들의 잘못은 그들의 말에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존경받을 만한 인물은 아니지만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때에는 그 말을 듣고 행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누가 가르치든 바른 가르침을 따라야 합니다.

(2) 그들은 말만 하고 행치는 아니한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행위는 말의 결실이어야 합니다. 말과 행실이 다를 때 외식자란 이름이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가르치는 말과 그들의 행실이 달랐던 이유는 심령의 변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 없는 사람은 그 말씀대로 살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3) 그들은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한다고 하셨습니다. 율법은 사람을 정죄하는 일을 하기 때문에 이를 바로 가르치지 못하면 이 율법이야말로 지기 어려운 짐이 되기 쉬운 것입니다. 인생들은 이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였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율법에 대하여 베드로는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라고 말했습니다(행15:10).

특히 서기관들은 율법을 무거운 짐으로 만드는 선수였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일에 있어서도 이삭을 자르는 일, 병을 고쳐 주는 일, 식사시 손을 씻는 일등을 엄격히 규제하므로 사람들의 생활을 의문에 묶어 놓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실상인즉 율법을 어기는 생활을 행했습니다. 그들이 이 점을 지지 않은 이유는 옳은 줄은 알면서도 질 능력이 그들에게 없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는 누구에게나 율법의 짐을 질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가르치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그들은 수고스러운 일을 원치 않았으며 지도자의 위치에서 안일한 생활에 젖어 있었습니다.


2.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신앙적인 열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이 그들의 생활에 나타낸 행위에 대하여 신랄하게 비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신앙적인 외식을 날카롭게 꿰뚫어 보시고 파헤치셨습니다.

(1)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했다고 하셨습니다. 경문이란 ‘플라크테리온’으로 성경 구절을 쓴 일종의 호신 패로 유대인들은 이것을 차고 다녔는데 그 목적이 다른 사람으로 자신은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귀히 여긴다는 인상을 주려는데 있었던 것입니다.

(2) 그들은 옷술을 크게 했다고 하셨습니다. 옷술이란 유대인들의 겉옷 네 모퉁이에다는 옷단인데 이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충성의 기호로 인식되어 왔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자신의 충성심을 과시한 것입니다.

(3) 잔치의 상석에 앉기를 좋아한다고 하셨습니다. 잔치의 상석은 주인의 바로 옆자리를 말합니다.

(4) 그들은 회당의 상좌에 앉기를 좋아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지도자란 말에 매력을 느끼고 그런 소리 듣기를 매우 좋아했습니다.

(5)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좋아한다고 하셨습니다. 문안은 웃어른들이 받는 인사입니다. 그들은 어른 대접을 받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길거리에서나 시장 등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문안을 받는 일은 그들에게 매우 유쾌한 일 일수밖에 없었습니다.

(6) 그들은 또한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한다고 하셨습니다. ‘랍비’란 말은 나의 스승이란 뜻으로 율법 교사를 칭하여 불러온 최대 존칭입니다.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은 이처럼 자기를 밖으로 나타내기를 좋아했으며 사람들에게 관심과 주목을 이끌려는 욕망으로 자기를 세상에 내보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들이야말로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들”로 예수님은 이들의 거짓과 모함과 정죄에 의하여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3. 예수님의 권면

예수님은 채자들을 향하여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을 닮아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을 거울로 몇 가지 사항을 권면하셨습니다.

(1)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사도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은 다만 그리스도 안에서 가르치는 자들입니다. 그리스도를 능가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의 선생은 오직 한 분 예수만 계실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형제 틀입니다.

(2)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우리의 육신적인 혈연 관계의 부자 지간을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씀하신 아버지의 존칭어는 그 이상 가는 위치를 가리키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하나님께로서 난자가 되었습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우리 의 진정한 아버지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3) 지도자라 청함을 받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도 예수님의 절대적인 지도자의 위치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영적으로 인도하시고 양육하시고 주관하시는 지도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분뿐이십니다.


결 론 :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참으로 큰 자가 될 수 있는 하나님의 방법을 가르치셨습니다.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하셨습니다.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의 잘못은 섬김을 받으려는 자가 되고, 높임을 받는 자가 되려는 데서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그들의 이 같은 행실을 본 받거나 미혹 받는 일이 없기 위하여 말씀하시기를 자기를 낮추는 자가 되고 남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 176 ≈ 천국 문을 닫는 죄와 지옥자식을 만드는 죄

(본문 : 마태복음 23 : 13 - 15)

1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14 1)(없음)

1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서 론 : 예수님은 외식하는 자에게는 화가 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외식자의 전형적인 모델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손 꼽으셨습니다. 외식자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해도 그들에게 돌아갈 상급은 전혀 없고 오히려 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외식자가 맺는 열매는 그들의 외식을 위한 노력에 비하여 어처구니없는 결말이 그들에게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들이 화를 받을 것이라고 지적하선 무서운 최악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천국 문을 닫는 죄

외식은 사람들 앞에서 천국 문을 닫는 행위가 되기 때문에 그 죄가 매우 큰 것입니다. 그들의 위선적인 지식이나 외식적인 행위는 사람을 실족케 하는 것입니다.

(1) 천국이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이 있는 곳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 나라를 가지고 오셨으며 이 나라를 세우시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는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심으로 우리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그의 백성들로 또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나라는 미래에 실질적으로 완성되는 나라를 말합니다.

(2) 천국 문이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나는 양의 문”이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바로 그가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이심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곧 길이라”고 말을 하신 것도 예수님이 바로 천국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길이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모든 사람들 앞에서 생명에 이르는 길을 가로막고 있는 것입니다.

① 이들은 진리를 대적함으로 이 길을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진리로 오신 분이시며 그 진리를 증거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럼에도 서기관돌파 바리새인들은 이 진리를 배척하고 대적함으로 그를 믿지 못하게 이 문을 굳게 닫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② 이들은 율법을 잘못 가르침으로 이 문울 닫고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천국은 율법의 의로 들어간다고 잘못 가르침으로 이 문울 스스로 굳게 닫아 버렸고, 자기 자신들도 들어가지 못할 뿐 아니라 들어 갈 수 없도록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와 가까이 하려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그를 따르면 출교 한다는 산혜드린 공회의 결의로 인하여 천국으로 들어가려는 많은 사람들을 천국에 들어갈 수 없도록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니고데모, 아리마대 사람 요셉 둥도 이 같은 출교 조치의 두려움으로 예수님의 제자로 들어내 놓고 자기를 나타내지 못했었습니다.


2. 배나 더 지옥 자식을 만드는 죄

예수님은 또한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을 향하여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교인이란 이방인들이 유대교로 개종하는 일을 말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이방인들이 유대교로 개종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가버나움의 백부장이 그러했습니다. 그는 이방인이었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가이사랴에 살고 있었던 고넬료란 이달리야대 군대의 백부장도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한 이방인이었습니다(행10:1-2). 이들은 육신적인 아브라함의 자손은 아니더라도 종교적으로는 유대인들과 똑같은 언약 아래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1) 그들은 이 같은 교인들을 얻기 위하여 힘썼습니다.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녔다는 말씀은 그들의 전도열을 나타낸 표현이십니다. 그들의 전도에 대한 열심은 대단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널리 펴기 위하여 이방인이 유대교로의 개종을 위하여 전도 활동을 네 게 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2) 그들은 이렇게 얻은 교인들을 철저한 지옥 자식으로 만들었습니다.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을 지옥 자식으로 만들었다는 말씀은 그들 자신이 소경이면서 소경을 인도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① 성경을 잘못 가르치는 일은 지옥 자식으로 만드는 일입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요5:39).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런 구원의 방법에 대하여 전혀 알지 못했음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성경은 잘못 가르친 것입니다.

②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사람의 유전으로 가르쳤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사람이 가르치는 유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게 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거늘 너희는 가로되 누구든지 아비에게나 어미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도다”고 그들을 정죄하셨습니다(마15:3-6). 이 같은 가르침은 그 가르침을 받는 자들로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③ 그들은 또한 개종한 이방인들에게 철저한 율법의 멍에를 지게 했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고 주장하는 가르침은 이방인들로 자기들의 외식을 따르게 할 수밖에 없으며 그 결과는 그들로 지옥 자식이 되 게 하는 일입니다. 갈라디아 교회 초기에 이런 율법주의적인 복음이 번져서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이 같은 복음을 다른 복음이라고 정죄했습니다(갈1:7-8).


3. 지옥 자식

예수님의 말씀 중에서 “지옥”이란 말은 헬라어로 ‘게헨나’를 말합니다. 이 지옥이란 말은 예수님이 여러 곳에서 사용하신 단어입니다.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다”고 하셨습니다(마5:29). 이곳을 “영원한 불”이라고도 하셨으며(마18:8), “지옥의 판결”이란 말씀으로 사용하기도 하셨습니다(마23:33). 헬라어로 영적인 처소로 세 곳을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1) ‘게헨나’ - 이곳은 악한자가 죽어서 마지막으로 가는 곳으로 나와 있습니다. 이 헬라어는 지옥이라고 번역되며 이 말의 어원은 “힌놈의 골짜기”(왕하 23:10, 대하28:3)를 가리키는 말인데 이곳은 아하스 왕 이후에 몰렉 신을 위하여 어린아이를 불태워 제사를 드린 곳으로 인간이 죄의 심판으로 영원한 불의 심판을 말할 때 이곳 이름이 적용된 것입니다.

(2) ‘하데스’ - 죽은 자들이 거처하는 곳으로 “음부”란 말로 불려졌습니다. 이 말은 구얼 구약적인 표현으로 영혼의 거처 또는 무덤이란 말과 혼돈 되어 왔습니다.

(3) ‘타르타로오’ - 이곳은 무저갱으로 번역되며(벧후2:4), 타락한 천사들이 당분간 감금된 장소로 알려져 왔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지욕 자식이란 어느 쪽을 가리키신 것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어느 쪽이라도 상관될 것이 없습니다.


결 론 : 말씀을 가르치는 종교계의 지도자들은 이 말씀을 잘 명심하여 양 무리의 본이 될 뿐 아니라 충성된 주님의 일군으로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 177 ≈ 잘못된 맹세와 율법의 더 중한 것을 버린 죄

(본문 : 마태복음 23 : 16 - 24)

16 화 있을진저 눈 먼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17 어리석은 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금이냐 그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18 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19 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예물이냐 그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20 그러므로 제단으로 맹세하는 자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으로 맹세함이요

21 또 성전으로 맹세하는 자는 

성전과 그 안에 계신 이로 맹세함이요

22 또 하늘로 맹세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로 맹세함이니라

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24 맹인 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


서 론 :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화 받을 죄는 그 규모도 엄청나거니와 그 죄목도 많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세 번째 죄로 그들의 잘못된 맹세를, 그리고 네 번째 죄로 율법에서 의와 인과 신을 버리고 외식을 취한 죄에 대하여 신랄히 책망하셨습니다.


I. 맹세에 대한 죄

예수님은 일찍이 산상보훈에서 맹세에 대한 교훈을 들려 주셨습니다(마5:33-37). 이것은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의 거짓된 맹세에 대한 책망이셨습니다. 그들은 능히 지키지도 못할 맹세를 쉽게 하였고 그 맹세를 져버리는 일을 무서운 죄로 여기지 아니했습니다. “땅에서 자기를 위하여 복을 구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을 향하여 복은 구할 것이요 땅에서 맹세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으로 맹세하리니”(사65:16)라고 했습니다.

(1) 예수님은 제단이나 성전으로 맹세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이 가르치는 맹세가 외식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잘못된 맹세의 방법을 책망하시기 위해 하나의 예증으로 들려주신 것입니다.

(2) 예수님은 그들이 맹세에 경중을 두고 있는 일에 대하여 잘못임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맹세의 대상에 대하여 제단이나 성전으로 한 맹세는 지키지 않아도 죄가 안되지만 성전의 금이나 제단의 예물로 맹세하면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맹세란 어디서 어떤 모양으로 했든 맹세의

대상자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맹세한 그 사람은 그 맹세를 지켜야 합니다. “사람이 여호와께 서원 하였거나 마음을 제어하기로 서약하였거든 파약하지 말고 그 입에서 나온 대로 다 행할 것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민 30:2). 이 같은 말씀은 성경 도처에 너무도 많이 깔려 있습니다(신23:22. 시15:4. 전5:4).

(3) 예수님은 그들의 이 같은 가르침이 그들의 탐심에서 나온 일임을 폭로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성전의 금이나 제단의 제물을 가리켜 맹세하라고 가르친 것은 맹세하는 자가 성전이나 제단에 바칠 제물을 탐해서인 것입니다.


2. 율법의 더 중한 것을 버린 죄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은 율법을 지켰지만 그 외형적인 면만 살폈기 때문에 정말로 율법을 지킨 것이 아니라 그 율법의 참 생명인 의와 인과 신을 버렸습니다. 자신의 의를 남에게 보이려고 율법의 외형의 모습만 지킨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그런 행동이 외식으로 흐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사람이 율법을 온전히 지킴으로 의를 얻을 육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 한 가지 예로 그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십일조 생활의 철저한 면을 들으시면서 그러나 하나님께는 십일조 조항보다 더 중한 율법의 요구가 있다는 것을 밝히신 것입니다. 그들의 십일조는 박하와 근채의 지극히 보잘것없는 것까지 철저하게 드림을 말씀하시고 그러면서도 그들은 “율법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다고 개탄하신 것입니다.

(1) 의란 ‘크리시스’로 율법의 공정성을 의미합니다. 율법 속에는 죄에 대한 정죄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도 들어 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신 거울입니다. 그 율법 속에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 의를 자기들의 외식 적인 행실로 얻을 수 갔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그들이 하나님의 의를 버린 것이 내 다름이 없습니다. 율법의 완전한 의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찾아야 하며 그리스도의 의로 이 의를 소유하려는 믿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2) 인이란 ‘엘레오스’로 자비와 긍휼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세리들을 죄인시하는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을 향하여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하셨습니다(마9:12-13).

하나님은 사람이 율법의 정죄로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을 원치 아니하십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 게 율법을 주셨을 때 그 정죄를 벗어날 수 있는 제사 제도로 함께 주셨습니다. 이처럼 구약 시대에는 제사 제도로 사함을 받는 길을 열어 놓으신 인애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또한 그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심으로 의를 주시 기를 기뻐하십니다. 율법에는 이 같은 하나님의 인애와 긍휼의 정신이 전체에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3) 신이란 ‘피스티스’로 이것은 믿음을 가리킵니다. 율법 속에 믿음이 있다는 말씀은 율법은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기 때문입니다. 율법으로는 사람이 의를 얻지 못하지만 율법은 우리에게 의를 얻을 수 있는 믿음의 길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율법의 선생이었으면서도 율법의 이런 정신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외식자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3.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지니라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은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의 능력도 몰랐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는 일에도 그 경중을 구분할 줄을 몰랐습니다. 말하자면 율법 속에 가득히 채워져 있는 영적인 교훈에는 소경들이었고 조문에 기록된 의식적인 면에만 치우쳤습니다. 그러나 율법은 그 의식 보다 하나님의 공의에 그 초점이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그들이 율법에서 “의와 인과 신”을 버린 일을 책망하시면서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1) 이것을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먼저 행해야 할 일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이 율법에 나타난 “의와 인과 신” 입니다. 이것을 버린 채 율법의 조문을 지키는 일은 아무 의의가 없는 것입니다. 의를 걷으려다 불의가 드러나 결과적으로 율법의 정죄를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율법에 제시된 하나님의 “의와 인과 신”올 한 마디로 축소하면 “사랑”입니다.

예수님이 어느 율법사와의 대담에서 그 율법사에게 율법이 가르치는 바가 무엇이냐고 물으셨을 때 그는 이처럼 대답했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하셨습니다(눅10:25-28).

(2) 저것도 버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저것이란 문맥상으로 예수님 자신이 지적하신 그들의 철저한 십일조를 가리킨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명하신 하나님의 것은 반드시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임을 밝히신 말씀입니다. 십일조는 율법에서 기인된 것이 아니라 믿음과 축복의 조상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결 론 :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소경된 인도자”란 딱지를 붙여주셨습니다. 율법의 영적인 진정한 뜻을 바라보지 못하니 소경이요 그러면 서도 지도자로 자부하고 있으니 소경된 지도자들인 것입니다. 하루살이를 걸러내므로 율법의 작은 의식적인 면에는 정성을 쏟지만 약대는 삼키므로 지킬만한 것은 삼켜 버리는 것입니다.


≈ 178 ≈ 탐욕과 외식과 불법이 가득한 죄

(본문 : 마태복음 23 : 25 - 28)

2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26 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27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28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서 론 :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화의 선언은 주저하심이 없이 가차없이 계속됩니다. 그들의 겉으로 보이는 외형적인 삶은 깨끗하게 보였지만 그들 안에는(마음) 온갖 더러운 것들이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속에 깔려 있는 품성은 마치 죽은 사람의 뼈와 더러운 것들이 가득했으므로 이 같은 그들의 마음의 상태와 그들의 겉모양은 마치 회칠한 무덤 같은 것이라고 책망하선 것입니다.


1.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한 죄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더러운 마음을 잔과 대접으로 비유하셨습니다. 잔과 대접은 깨끗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결례에 의해서 가능합니다. 그들은 어떤 부정을 입으면 율법의 결례에 따라 정결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릇의 겉을 물로 씻은 것처럼 그들의 육체는 이런 결례로 깨끗해 졌을는지 모르지만 그들의 마음은 여전히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한 채로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겉보다 속이 더 중요한 줄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육체보다 마음의 정결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할례는 육체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에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신10:36).

(1) 그들의 생활은 탐욕으로 일관되었습니다. 탐욕이란 말은 ‘할 파게스’로 강탈이나 차압 혹은 약탈 혹은 몰수를 의미합니다. 그들은 이 같은 탐욕에 숙련된 지도자들 이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돈올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눅16:14). 그들은 또한 예수님이 지적하신 대로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자”들로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한 자들입니다(막12:40).

(2) 그들의 생활은 또한 방탕으로 일관되었습니다. 이처럼 취한 재물을 그들은 방탕으로 소비한 것입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거룩한 듯이 꾸몄지만 실인즉 방탕으로 더러워져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거짓된 모습을 숨길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외식하는 자들은 바로 이런 모순된 생활을 아주 의로운 듯이 꾸미는 것입니다. 그들이 참으로 율법에 의한 결례의 법칙으로 깨끗해지려면 먼저 안을 깨끗이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들에게 “소경된 바리새인들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고 교훈 하셨습니다.


2 외식과 불법이 가득한 죄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너희는 “회칠한 무덤 같다”고 하셨습니다. 회칠한 무덤이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그들의 인격을 비유적으로 나타내신 말씀이십니다.

(1) 회칠한 무덤이란 겉으로 꾸민 그들의 외형적인 면을 가리킨 것입니다. 무덤에 회를 칠하는 일은 그 무덤을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서 입니다. 이처럼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의 외형적인 모양은 아름답게 보입니다. 이것은 그들의 거짓을 감춘 외식의 모양입니다.

(2) 회칠한 무덤 속에는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 차 있다고 하셨습니다. 회칠한 무덤과 같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에는 자연히 그 무덤 안에 있는 물건이 거론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들이 가득 차 있다고 하신 것은 하나님이 보시는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의 속마음을 표현하신 말씀입니다. 그들의 내부에 있는 영적인 요소나 도덕적인 요소는 죽은 송장처럼 썩은 냄새를 풍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3)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의 죄는 예수님의 혹독한 정죄를 받아 마땅했습니다.

① 그들이 저지른 무서운 죄는 조상들의 유전을 중히 여긴 나머지 하나님의 율법을 유린한 죄입니다. 그들은 손을 부지런히 씻지 않으면 음식을 먹지 아니했으며 또 시장에서 집에 돌아와서는 몸에 물을 뿌리지 아니하면 먹지를 아니했으며 잔과 주발과 붓 그릇까지라도 씻지 않으면 먹지 아니한 것입니다.

이것은 율법에서 나온 법이 아니라 장로들이 세운 유전입니다. 그들은 이 유전을 중히 여긴 나머지 이것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정죄함으로 불법적인 재판관 노릇올 해 온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 너희의 전한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 같은 일을 많이 하느니라”고 정죄하셨습니다(막7:1-13).

②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은 외식하는 신앙을 자랑하면서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자부했습니다. 이 같은 그들의 태도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에서 예수님이 비유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는 이러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눅18:11-14). 하나님이 정죄하시는 자신들의 행위를 자기 자신이 의롭다고 여기는 일이야말로 더욱 정죄 받을 죄악이 아닐 수 없습니다.

③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은 영적인 진리에 대하여 무지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가르치는 선생이었으면서도 그 성경이 인간에게 가르치는 목적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너회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올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고 하셨습니다(요5:39). 그들은 진리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핍박하였으며 이 진리의 도를 정면으로 도전함으로써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④ 그들은 성령을 고의적으로 훼방함으로 스스로 정죄의 자리에 내려앉았으며 다시는 구제불능의 인간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권능을 목격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권능의 역사임을 분명히 인지하고서도 예수님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비방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단호히 그들을 정죄하셨습니다(마12:22-32).

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끊임없이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그들은 쉴새 없이 그들의 제자들로 예수님을 뒤따르게 했습니다. 그것은 말의 올무를 잡아 법정에 고소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이 사단의 지혜로 가장 사악하게 계획한 시험이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하는 올무였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저희의 악함을 아시고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고 책망하셨습니다.

결 론 : 우리는 오늘의 이 시점에서 이 말씀이 우리에게 교훈해 주시는 바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살펴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1) 이 말씀은 오늘날 교회의 지도자들에 대한 엄중한 경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선생들이 받을 심판이 더 크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선생된 지도자들은 마땅히 양 무리의 본이 되는 생활올 해야 하는 것입니다(약3:1. 벧전5:1-4).

(2) 이 말씀은 교회의 직분자들에게도 관계되는 경종입니다. “이와 같이 집사들도 단정하고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지니 이에 이 사람들을 먼저 시험해 보고 그 후에 책망할 것이 없으면 집사의 직분을 하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딤전3:8-13).

(3) 이 말씀은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경종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면 현대판 바리새인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알고도 행치 아니해도 외식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누구나 순종에 힘쓰지 않으면 바리새인들이 정죄 받은 그 정죄에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실한 믿음으로 자기를 단장치 않으면 이 역시 바리새인의 후손이 될 것입니다.


≈ 179 ≈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는 죄

(본문 : 마태복음 23 : 29 - 39)

29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이르되

30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 

우리는 그들이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 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31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명함이로다

32 너희가 너희 조상의 분량을 채우라

33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3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거나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서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따라다니며 박해하리라

35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36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 돌아가리라


예루살렘을 두고 이르시다(눅 13:34-35)

37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38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

39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서 론 : 예수님이 내리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 대한 화의 선언은 이제 마지막으로 그 절정에 달합니다. 그들이 지난날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들을 죽인 조상들의 본을 따라 그 조상의 양을 채우는 일을 하고 있음을 탄식하시면서 앞으로 그들이 그들의 조상보다 더 무서운 죄를 범할 것임을 예언하셨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이들이 죄악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뜻에 따르기를 바라셨지만 그들은 끝내 주님의 권면을 거역함으로 결국은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도리라”고 하신 말씀대로 되었습니다.


1. 선지자들의 비석을 꾸미는 바리새인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선지자들의 무덤과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는 일에 열중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은 돌이켜 보지도 않고, 선지자들의 의와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다가 죽은 일에 대하여 애석한 마음을 가진 듯 그들의 무덤을 새로 꾸미고 단장하는 일에 신경을 쓰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은 “우리가 우리의 조상 시절에 살아 있었다면 선지자들의 피를 흘리게 한 조상들의 불의한 일에 자신들은 절대로 동조하거나 첨예하지 아니했을 것”이라고 다짐하면서 그때 조상들이 저지른 일에 대하여 매우 유감스럽게 여기는 듯이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이러한 외식적인 가증한 언행에 대하여 정면으로 공격하셨습니다.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 됨을 스스로 증거함이로다”고 정죄하시고 “너희가 너희 조상의 양을 채우라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1) 이 같은 그들의 말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거하는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지난날 선지자들을 죽인 그들의 조상들도 그 선지자를 죽이는 일을 합당한 일로 여겼으며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다만 그들은 재앙을 선포하는 선지자들의 경종이 듣기 싫었으며 거짓 선지자들의 달콤한 예언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수 백년이 지난 후의 결과는 그들이 죽인 선지자의 예언이 적중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처럼 말하고 있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성령이 증거하시는 예수님에 대한 메시야의 여러 가지 증거를 받아 드리기를 거부하고 다만 시기로 예수를 잡아죽이기로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으로 이런 일이야말로 선지자들을 죽인 지난날의 자기 조상들을 따라가는 일이며 그들 스스로 그 자손임을 나타내는 일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2) 예수님은 그들의 의중을 샅샅이 살펴보시는 통찰력을 가지시고 너희도“너희 조상의 양을 채우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처럼 그들의 조상의 양을 채우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조상은 메시야가 오리라고 한 선지자를 죽였지만 그들은 그 선지자가 증거한 대로 오신 진짜 메시야를 죽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그들의 할 일에 대하여 알고 계셨기 때문에 이처럼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3) 그들은 또한 예수님이 보내시는 복음의 일군들을 죽일 것이라고 예언하심으로 그들의 조상의 양을 채우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을 위하여 많은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실 것을 말씀하시고 그러나 너희들은 그들 중에서 더러는 죽이고 십자가에 못박고 그 중에 더러는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구박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주님이 말씀하신 선지자나 서기관이란 표현은 신약 시대에 교회에 세우신 하나님의 일군들의 구약적인 표현입니다. 선지자란 사도들이나 혹은 특별한 사명을 받아 사역하는 일군을 말하고 서기관이란 가르치는 사명을 맡은 교사직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교회를 핍박할 때 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많은 사도들과 주님의 제자들을 죽였으며 주님 자신에게 십자가에 못 박는 사형을 내리기도 했으며 많은 복음 증거자들에게 채찍질하고 구박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이 같은 행동은 지옥의 판결을 결코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4) 예수님은 그들에게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조상들에 의해 저질러진 범죄에 대하여 그 기원을 아벨에게까지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요아스 왕 시대에 왕의 명에 격하여 여호와의 전 뜰 안에서 백성들에게 쳐죽임을 당한 스가랴에 이르기까지의 의인과 선지자를 죽인 모든 죄악이 이 세대에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경종하셨습니다. 그것은 이 세대에 와서 그들 자신이 이 의인과 선지자의 살인 사건의 총결산이라고 말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것으로 그들 자신의 손에 의하여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예언은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성취되었으며 그들은 이때 그들과 그들의 자손들에게까지 그들이 흘린 피 값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2.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여 선지자와 의인을 죽인 죄로 인하여 그리고 오리라고 증거된 메시야를 죽인 죄로 인하여 멸망 받게 될 예루살렘의 운명에 대하여 목메어 탄식하셨습니다. 이 같은 모든 일이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던 일이므로 그 화도 이 예루살렘에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장차 찾아올 예루살렘의 멸망은 견딜 수 없는 비극이었으므로 예수님은 가슴 아파 하셨습니다.

(1) 예수님은 예루살렘이 멸망하지 않고 그들 중에 있는 백성이 구원을 받기 위하여 많은 애를 쓰셨다고 하셨습니다.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고 탄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악인이 그 죄악으로 죽는 것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히려 회개하여 사는 것을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이나 세리나 다른 유대인들이나 아무 가림이 없이 그들을 위해 기도하셨으며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했으며 그들에게 구원의 참 도리를 가르쳤습니다. 꺼져 가는 등불도 끄지 아니하시는 그 주님의 사랑으로 끝까지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보다 더한 사랑으로 회개를 외치셨습니다.

(2)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원치 아니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길이 참으시는 중에 많은 기회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루 헤아릴 수 없는 확실한 증거를 보이셨습니다. 그들에게 믿을만한 놀라운 이적과 표적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같은 하나님의 최종적인 권면을 스스로 거절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예수님을 참람하다는 죄의 굴레를 씌워 십자가에 달았습니다.

(3)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황폐를 예언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너희 집이라고 하신 곳은 예루살렘과 아울러 그 중앙에 있는 예루살렘 성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과연 이러한 예수님의 예언대로 주후 70년에 로마 군대에 의하여 황폐되어 버린바 된 것입니다.

결 론 : 이제 끝까지 패역하여 황폐되어 버린 이스라엘은 그들이 아무리 원한다 해도 그들은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룸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다시는 메시야를 만날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것입니다(눅11:30, 계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