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新約]강해/◆ 사복음서 · 사도행전 강해-1

마태복음 10-15장[Ⅳ.예수의 계획 10장-15장]◆ 밤중소리

영국신사77 2020. 4. 10. 17:30

     

마태복음 10장-15장 

제목차례

마태복음 10장 (96∼100)

96) 12사도의 선택 (마태복음 10 : 1절∼4절)

97) 전도에 관한 주님의 명령 (마태복음 10 : 5절∼8절)

98) 복음 전도자의 자세 (마태복음 10 : 9절∼15절)

99) 박해에 대한 각오 (마태복음 10 : 16절∼27절)

100)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존재 (마태복음 10 : 24절∼31절) 

(101) 입으로 시인하는 신앙(마태복음 10 : 32 - 33)

(102) 검을 주러 오신 예수(마태복음 10 : 34 - 39)

(103) 영접하는 자의 복(마태복음 10 : 40 - 42)


마태복음 11장 (104∼111)

104) 시험에 든 세례요한 (마태복음 11 : 1절~6절) 

105) 선지자 세례요한의 위대성 (마태복음 11 : 7절~11절) 

106) 침노하는 자가 빼앗는 천국 (마태복음 11 : 12절~15절) 

107) 이 세대의 비유 (마태복음 11 : 16절~19절)

108) 권능을 보고도 믿지 않는 죄 (마태복음 11 : 20절~24절)

109) 어린아이에게 나타내신 슬기 (마태복음 11 : 25절~27절) 

110) 예수님의 인생 초대장 (마태복음 11 : 28절~30절)

111)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마태복음 11 : 29절~30절) 


제 12 장 (112∼119) 

112) 안식일의 주인이 되신 예수님 (마태복음 12 : 1절~8절) 

113) 안식일의 참 의의 (9절~13절)

114) 자기를 나탄내지 아니하신 이유 (14절~21절)  

115) 사탄의 분쟁 (22절~30절) 

116) 사함을 받을 수 없는 성령 훼방죄 (31절~33절)

117) 말에 대한 심판 (33절~37절)

118) 표적을 구하는 잘못된 신앙 (38절~45절)

119) 천국민의 새로운 가족 관계 (46절~50절) 


제 13 장 (120∼127) 

120) 씨뿌리는 비유 (마태복음 13 : 1절~23절)

121) 복 있는 귀 (10절~17절)

122) 복 있는 눈 (10절~17절)

123) 함께 자라는 알곡과 가라지 (24절~30절)

124) 천국의 생명력 (31절~35절)

125) 보화를 사라 (44절~46절)

126) 물고기 비유와 서기관의 책임 (47절~52절) 

127)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53절~58절) 


제 14 장 (128∼131)  

128) 세례요한의 순교 (마태복음 14 : 1절~12절)

129) 광야의 잔치 (13절~21절) 

130) 고난 중에 찾아오시는 주님 (22절~27절) 

131)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28절~36절) 


제 15 장 (132∼136)  

132) 헛되이 경배하는 유전 (마태복음 15 : 1절~11절) 

133)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무엇인가 (11절~20절) 

134) 천부께서 심지 않은 것은 뽑히리라 (12절~14절)

135) 가나안 여인의 큰 믿음 (21절~28절)

136) 7병2어의 기적 (28절~39절)


제 16 장 (137∼143) 

137) 하늘로서 온 표적 (마태복음 16 : 1절~4절) .

138) 삼가야 할 누룩 (마태복음 16 : 5절~12절) 

139) 베드로의 신앙고백 (마태복음 16 : 13절~20절) .

140)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마태복음 16 : 21절~23절) 

141) 주님을 따를 자의 자격 (마태복음 16 : 24절) 

142) 생명을 얻는 비결 (마태복음 16 : 23절~26절)

143)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올 때 (마태복음 16 : 27절~28절) 


제 17 장 (144∼146) 

144) 변화산에서 일어난 일 (마태복음 17 : 1절~13절)

145) 겨자씨 만한 믿음의 능력 (마태복음 17 : 14절~20절)

146) 예수님이 내신 성정세 (마태복음 17 : 22절~27절)


제 18 장 (147∼153) 

147) 천국에서 큰 자 (마태복음 18 : 1절~4절) 

148) 실족케 하는 자의 죄 (마태복음 18 : 5절~10절)

149) 잃은 양을 찾으시는 예수님 마태복음 18 : (12절~14절)

150) 범좌자에 대한 교회의 태도 (마태복음 18 : 15절~18절)

151) 합심 기도의 능력 (마태복음 18 : 19절~20절)

152) 용서의 원리 (마태복음 18 : 21절~35절)

153) 죄와 빚 (마태복음 18 : 23절~35절)


제 19 장 (154∼156) 

154) 이혼에 관한 교훈 (마태복음 19 :1절~9절) 

155) 주님이 말씀하신 독신 생활 (마태복음 19 :10절~12절) 

156) 어린이에게 축복하신 예수님 (마태복음 19 :13절~25절)

157) 영생을 놓쳐 버린 청년 (마태복음 19 :16절~22절)

158) 부자와 천국 (마태복음 19 :23절~30절)


제 20 장 (159∼161) 

159) 포도원의 품군 (마태복음 20 : 1절~16절)

160) 누가 높으냐 (마태복음 20 : 17절~28절)

161)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마태복음 20 : 29절~34절) 


제 21 장 (162∼168) 

162) 주님이 쓰시는 그릇 (마태복음 21 : 1절~11절)

163) 내 아버지의 집 (마태복음 21 : 12절~13절)

164) 성전 청결의 의미 (마태복음 21 : 12절~17절)

165) 저주받은 무화과나무 (마태복음 21 : 18절~22절)

166) 요한의 세례가 어디서 왔느냐 (마태복음 21 : 마태복음 21 : 23절~27절) 

167) 누가 아버지의 뜻을 이루었나 (마태복음 21 : 28절~32절)

168) 열매 맺는 백성이 받을 하나님의 나라 (마태복음 21 : 33절~46절)


제 22 장 (169∼174) 

169) 아들의 혼인 잔치 (마태복음 22 : 1절~9절)

170) 청함을 받은 자와 택함을 입은 자 (마태복음 22 : 10절~14절) 

171) 하나님의 것과 가이사의 것 (마태복음 22 : 15절~22절)

172) 부활에 관한 사두개인의 질문 (마태복음 22 : 23절~33절) 

173)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 (마태복음 22 : 34절~40절) 

174) 다윗의 자손과 메시야에 관하여 (마태복음 22 : 41절~46절) 


제 23 장 (175∼179) 

175)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 대한 책망 (마태복음 23 : 1절~12절)

176) 천국문을 닫는 죄와 지옥 자식을 만드는 죄 (마태복음 23 : 13절~15절)

177) 잘못된 맹세와 율법의 더 중한 것을 버린 죄 (마태복음 23 : 16절~24절)

178) 탐욕의 죄와 외식과 불법이 가득한 죄 (마태복음 23 : 25절~28절)

179)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는 죄 (마태복음 23 : 29절~39절) 


제 24 장 (180∼186) 

180) 주 재림의 징조 (마태복음 24 : 1절~14절)

181) 종말의 결정적 증거 (마태복음 24 : 15절~28절) 

182) 주 재림의 모습 (마태복음 24 : 29절~31절)

183) 무화과나무의 비유에 나타난 종말 (마태복음 24 : 32절~36절)

184) 노아의 때와 같은 세상 종말 (마태복음 24 : 37절~39절)

185) 예비하고 있어야 할 주 재림의 날 (마태복음 24 : 37절~44절) 

186) 충성된 종과 악한 종 (마태복음 24 : 45절~51절)


제 25 장 (187∼190) 

187) 지혜로운 처녀와 미련한 처녀의 비유 (마태복음 25 : 1절~13절)

188) 착하고 충성된 종 (마태복음 25 : 14절~23절)

189) 악하고 게으른 종 (마태복음 25 : 24절~30절) 

190) 양과 염소의 분별 (마태복음 25 : 31절~46절) 


제 26 장 (191∼198) 

191) 옥합을 깬 여인 (마태복음 26 : 1절~13절)

192) 랍비여 내니이까 (마태복음 26 : 14절~25절)

193) 새 언약의 피 (마태복음 26 : 26절~30절)

194)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마태복음 26 : 31절~35절)

195)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마태복음 26 : 36절~46절)

196) 검을 쓰는 자는 검으로 망하리라 (마태복음 26 : 47절~56절)

197) 사형 판결을 내린 종교 재판 (마태복음 26 : 57절~68절)

198) 베드로의 실패와 회개 (마태복음 26 : 69절~75절)


제 27 장 (199∼208) 

199) 가룟 유다의 결국 (마태복음 27 : 1절~10절)

200)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마태복음 27 : 11절~14절) 

201) 바라바냐 그리스도라고 하는 예수냐 (마태복음 27 : 15절~26절) 

202) 희롱을 당하신 예수 (마태복음 27 : 27절~31절)

203) 시몬의 십자가 (마태복음 27 : 32절) 

204) 쓸개 탄 포도주 (마태복음 27 : 33절~44절)

205) 두 강도의 경우 (마태복음 27 : 44절)

206)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마태복음 27 : 45절~49절) 

207) 찢어진 성소 휘장 (마태복음 27 : 50절~56절)

208) 예수의 무덤 (마태복음 27 : 57절~66절)


제 28 장 (209∼210) 

209) 부활의 아침 (마태복음 28 : 1절~10절)

210) 주님의 지상 명령 (마태복음 28 : 11절~2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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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0장


96) 12사도의 선택 (1절∼4절)

97) 전도에 관한 주님의 명령 (5절∼8절)

98) 복음 전도자의 자세 (9절∼15절)

99) 박해에 대한 각오 (16절∼27절)

100)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존재 (24절∼31절) 


96)열 두 사도의 선택

(마태복음 10 : 1 - 4)


예수님은 열 두 제자들을 부르사 그들에게 사도란 직분을 주시고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셨습니다. 사도란 직분은 예수님께서 복음 사역을 위해 세우신 최초의 직분입니다. 기독교 역사상 사도의 직분만큼 위대한 직분은 없었으며 이 직분은 그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만 해당되었던 단회적인 직분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직분은 언제나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님이 주십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직분을 나타낼 때 언제나 자신의 직분이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 주님이 부르시고 세우신 열 두 사도

주님이 그의 열 두 사도들을 세우시기까지 어떤 일을 하셨는가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주님은 사도를 세우기 위해 미리 준비하셨습니다. 주님은 사도들을 뽑으시기까지 오래도록 기다리셨습니다. 교회직분자들은 결코 서둘러 뽑을 일이 아닙니다. "이와 같이 집사들도 단정하고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술에 인 박이지 아니하고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찌니 이에 이 사람들을 먼저 시험하여 보고 그 후에 책망할 것이 없으면 집사의 직분을 하게 할 것이요"라고 했습니다(딤전3:8-10). 직분자를 세우기 전에 "먼저 시험하여 보고 그 후에"란 말씀을 명심해야 합니다.

(2)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추수군을 부르십니다. 하나님의 교회에는 여러 가지 많은 그릇들이 필요합니다. 그러

나 그들이 공통적으로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가룟 유다란 인물이 열 두 사도

중에 들어가 있는 일에 대하여 여러 가지 생각을 갖게 합니다. 가룟 유다란 이름은 성경에 저주스러운 이름으로 기록

되어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언제나 사도 중에 맨 뒤에 기록되어 있으며 그의 이름 서두엔 예수를 판자란 단서가 붙어 있습니다.

그러면 주님은 처음부터 가룟 유다의 배신을 알고 계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요6:6절에서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군지 처음부터 아심이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가 자기를 배반하여 대적의 손에 팔 것을 알고 계셨지만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위해 자신의 괴로움을 돌보지 아니하신 것입니다. 아바지의 뜻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3) 주님은 사도들을 세우시기 전에 기도하셨습니다. 이같은 일은 누가복음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맞도록 기도하시고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 열 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다"고 했습니다(눅6:12). 우리 주님의 이같은 사실은 직분자들을 세울 때 반드시 기도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교훈해 주시는 것입니다.


2. 열 두 사도들의 이모저모

이곳에 열 두 제자의 이름이 나와 있습니다.

(1) 베드로 : 베드로는 갈리리 바다에서 어부 노릇을 하다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가족들과 생업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열 두 제자 중 그 수제자가 된 사람입니다. 그는 뱃세다인 요나의 아들인데 안드레의 형제로 본명은 시몬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수리아어로 게바란 이름을 주셨는데 이를 번역하면 베드로이며 곧 반석이란 뜻입니다. 그의 성품은 매우 급하고 정열적이었습니다. 그는 주님의 이름을 세 번이나 부인했으나 곧 회개하므로 그의 사도 직분이 유다처럼 떨어지지 않고 훌륭하게 수행되었습니다.

(2) 안드레 : 안드레는 베드로의 형제로써 갈릴리 해변에서 일하다가 세례 요한의 제자가 된 사람입니다. 그는 선생인 세례 요한으로부터 예수의 이름을 듣고 예수를 따른 제자입니다. 안드레는 소아시아의 헬라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십자가에 달려 순교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3) 야고보 : 야고보는 세베대의 아들로 사도 중 큰 야고보로 불려집니다. 그 아우 요한과 함께 갈릴리 해변에서 어부생활을 하다가 베드로의 형제와 함께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는 사도 중 제1차로 순교를 당했는데 주수 44년경에 헤롯왕에 의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4) 요한 : 그는 야고보의 형제로 우레의 아들이란 별명을 가졌습니다. 주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으며 말년에 밧모섬에 유배되어 요한계시록을 썼습니다.

(5) 빌립 : 벳세다 출신의 제자로 나다나엘을 주님께 인도한 사람입니다.

(6) 바돌로매 : 일반적으로 나타나엘과 같은 사람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7) 도마 : 요한복음에는 디두모란 이름으로 나오기도 합니다. 그는 주님의 부활을 의심하다가 그 못 자국을 보고 믿었습니다.

(8) 마태 : 마태복음을 기록한 제자로 그의 본 이름은 레위입니다.

(9) 야고보 : 이는 알패오의 아들로 작은 야고보로 불려집니다.

(10) 다대오 : 유다라고 부르며 수리아와 아라비아 메소포나미아에서 전도하고 페르샤에서 순교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11) 시몬 : 그는 가나안 사람이라는 사실밖에 다른 기록이 없습니다.

(12) 가룟 유다 : 이 사람은 은 30에 선생을 팔고 그로 인하여 뉘우쳐 목메어 자살했습니다.


결론 : 우리가 이들 열 두 제자들에게서 찾을 수 있는 것은 그들은 세상에서 존경받을 만한 인격이나 직업을 가졌던 사람들이 아니란 사실입니다. "하나님게서 세상에서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주안에서 아름다운 이름과 직분을 가지고 일해도 우리에게는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97) 전도에 관한 주님의 명령

(마태복음 10 : 5 - 8)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장 위대한 사명은 전도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 가운데서 열 두 사도를 세우신 일도 그들에게 전도의 사명을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전도의 사명을 주심과 동시에 전도의 활동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런 부르심은 부르심을 받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동일하게 주신 하나님의 지상 명령이십니다.


1. 이스라엘의 잃은 양에게로 가라

주님은 전도대로 나가 복음을 전할 제자들에게 "이방인의 길로도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실질적인 전도지역과 영적인 전도지역으로 구분하여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실질적인 면으로 생각한다면 이 때 주님이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고을을 이스라엘의 잃은 양으로 국한하신 것은 아직 제자들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을 만치 성숙한 전도인의 자리에 있지 아니했다는 것이 그 하나의 이유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때는 아직 이방인들에게 본격적으로 전할 시기가 아니었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제자들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할 시기는 오순절 이후인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다른 또 한가지 해석은 이스라엘을 영적으로 보는 견해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말합니다. 복음은 영적으로 구원받을 백성들에게 필요한 메시지입니다. 이방인이나 사마리아인의 고을을 복음을 거절하는 영적 이방인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2. 잃은 양은 누구를 말하나?

그러면 주님은 제자들에게 어디로 가라고 하신 것입니까? 이스라엘 집의 잃은 양에게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잃은 양이란 목자를 잃은 양을 말합니다. 잃은 양이란 다음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1) 탕자 같은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은 물질 때문에 세상으로 간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그 물질로 인하여 오히려 세상에서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기 위해 탕자처럼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조차 배를 채우지 못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같은 경제적인 시련을 통하여 다시 아버지의 집을 생각하게 하며 아버지의 음성을 듣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찾아가 복음을 전해 주므로 아버지 집에 다시 불려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2) 시험에 빠져 낙심 중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사람에게는 시험이란 존재가 이따금씩 필연적으로 따라 우리의 신앙 생활에 제동을 거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생이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시험에 들어 얼마간 주님을 떠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들을 찾아가 목자의 음성을 들려주며 위로해 주어야 합니다.

(3) 잘못된 교훈으로 진리에서 떠난 사람들입니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사탄의 무리들이 많이 있습니다. 양으로 쑥물을 먹게 하여 진리에서 떠나게 하는 것입니다. 이같은 교훈에 미혹 받아 이단의 함정 속에 빠져 있는 형제들이 있습니다.

이들을 찾아가 바른 진리의 음성을 들려 주어야 합니다.

(4)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기는 하지만 아직 목자의 음성을 듣지 못하므로 교회라고 하는 우리 안에 들어오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택함은 받았지만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하므로 구원을 받지 못하고 있는 양무리들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바울을 빌립보 감옥으로 보내심으로 복음을 듣게 한 빌립보 감옥의 간수도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고 하셨습니다.


3. 잃은 양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방법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찾으시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 방법이란 바로 복음입니다. 복음은 잃은 양을 찾으시는 목자의 음성입니다. 잃은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들어야 그 목자를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가 잃은 양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잃은 양이 누구인지 아는 분은 하나님뿐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디서나 복음을 전하므로 누구에게나 목자의 음성을 듣도록 해야 합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복음으로 목자의 음성을 듣고 다 그리스도 앞으로 니오는 것입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전하라고 가르쳐 주신 복음은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메시지입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마음에 임하는 것을 말합니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가 빼앗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천국을 침노한다는 말은 천국에 쳐들어가는 것으로 회개를 의미합니다.

회개 이외에는 천국에 들어갈 길도 없으며 방법도 없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속에 천국이 임하는 것입니다. 천국의 주인이 되시며 천국을 친히 이루어 주시는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 앞에 계시니 천국이 가까이 온 것입니다. 회개하고 그를 영접하면 이 천국을 소유할 수 있으며 그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결론 :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놀라운 권능을 주셨습니다. 이런 권능은 그들에게 하나의 신임장인 것입니다. 우리는 잃은

양을 찾으시는 주님의 안타까운 심정을 헤아려 주님의 잃은 양을 찾는 진실한 전도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98) 복음 전도자의 자세

(마태복음 10 : 9 - 15)

주님은 제자들에게 전도 여행을 위하여 각처로 보내시기 전, 전도 여행시 명심해야 할 몇 가지 주의할 바를 말씀하셨습니다. 전도자는 여행을 위해 사적 준비를 하지 말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복음 전도자는 마땅히 복음으로 살아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1.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주님은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 명하시기를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받았을 때 금이나 은 같은 것을 주고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복음을 받을 만한 어떤 공로나 의로움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값없이 거저 받은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값없이 복음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우리로 자랑치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천국과 영생은 거저 받은 것들입니다.

그런데도 복음 전도자가 만일 거저 주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삯군에 해당될 것입니다. 병자를 고치는 하나님의 권능이나 복음을 전하는 일을 가지고 자신의 어떤 유익을 추구하는데 사용한다면 이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자세가 아닌 것입니다. 권능을 행한 후에 물질을 요구하거나 병을 하나님의 권능으로 고친 후, 어떤 금품을 요구한다면 이는 잘못된 전도자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하나님의 권능을 받았다고 하는 많은 하나님의 종들이 어떤 특별한 집회를 통해서 공연히 성도들로부터 금품을 요구하는 사례가 많은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10절에 있는 말씀에서 목회자들에 대해 오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다음에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일군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복음 전도자는 하나님의 일꾼입니다. 일꾼은 어떤 일꾼이던지 그 일터에서 먹을 것을 공급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복음 전도자들을 영접하지 않은 일에 대하여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니라"고 경종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일에 대하여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딤전5:17-18). 주님이 제자들에게 거저 주라고 하신 말씀은 전도자의 복음을 전하는 자 세를 말하는 것이요 말씀의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은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복음 전도자를 합당하게 영접하며 예우해야 하는 것입니다.


2. 평안하기를 빌라

하나님은 우리가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선사할 수 있기를 원하십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어떤 가정에 들어갈 때는 반드시 그 집에 먼저 복을 빌어 주라고 하셨습니다. "평안하기를 빌라"고 하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인사법은 "너희에게 평안이 있을 지어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음에 임하는 하나님의 평안과 가정에 임하는 하나님의 평안은 우리가 이 땅에서 받는 가장 큰 축복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어느 가정에 들어갈 때나 이같은 평안의 복을 빌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 가운데 우리가 알아야 할 축복 기도의 비밀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치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빈 복이 임할 수 있는 합당한 가정이 있고 그렇지 않은 가정도 있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복을 받을 가정이란 복음을 받아 드리는 가정을 가리킵니다. 복음 전도자를 영접치 아니하는 가정에 그들이 빈 복이 머물러 있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 경우 그 복이 축복한 자에게 되돌아온다고 하셨으니 이 복이야말로 전도자가 받을 놀라운 복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고 하셨습니다. 목회자들이 바라고 소망하는 복은 하늘의 상급인 것입니다. 성도의 가정도 목회자가 심방할 때 복을 받으려면 그 가정이 복을 받기에 합당한 자세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심방하는 목회자를 하나님의 축복의 사자인 줄로 알고 합당하게 영접하여 경건한 자세로 축복을 받아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처럼 너희를 영접도 아니하고 복음도 거부하는 성이나 집이 있을 때는 그 집이나 그 성에서 나올 때 먼지를 털어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이 말씀을 하신 것은 그 같은 곳에 저주나 분노를 표하라고 하신 것을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장차 심판을 받을 일에 대한 하나의 징표로 삼으라고 하신 뜻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복음을 거역하는 자들에 대한 복음 전도자의 영적 괴로움이나 슬픔을 나타내는 뜻으로 풀이해야 할 것입니다.


결론 : 주님은 이 말씀을 통해서 복음은 절대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이익이나 유익으로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

을 보여 주셨으며 또 복음 전도자를 맞이하는 사람들은 마땅히 기쁨으로 영접하여 합당한 대접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99) 박해에 대한 각오

(마태복음 10 : 16 - 23)


복음을 전하는 일과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 대한 박해는 서로 떼여 놓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복음은 빛으로 나타나며 어두움이 빛을 싫어하여 대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위해 박해를 받는 일에 대하여 성경에서는 많은 상급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1. 전도인의 무장과 자세

주님은 전도인의 자세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말씀을 요약하면 다음 몇 말씀이 되겠습니다.

(1)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하나의 격언적인 교훈으로 들려주신 말씀입니다. 주님은 뱀 같이 지혜로우라고 하셨을 때 이 뱀을 하나의 지혜의 대명사로 사용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지혜는 순결이 필수적이요 그리스도인의 순결에는 지혜가 따라야 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지혜의 보고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지혜의 창고는 성경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지혜와 순결을 함께 갖추어야 합니다. 순결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씻음 받은 정결한 마음을 가리킵니다. 전도인들은 이같은 영적 무장을 갖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2) 사람들을 삼가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말씀하신 사람들이란 곧 이리들을 가리킵니다. 삼가라는 말은 경계하라, 조심하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전도인들을 핍박할 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을 경계하고 조심하는 일은 당연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핍박을 받아야 할 자리에서는 핍박을 받아야 할 것이지만 스스로 그들을 격동시켜 핍박을 자초할 필요까지는 없는 것입니다. 핍박의 그물을 피하고 복음을 지혜롭게 전하기 위해 주님은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3)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전하는 일로 인하여 공회에 넘겨지게 될 것이며 채찍질을 받을 것이요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서게 될 것입니다. 이같은 일은 심문하는 그들이나 이방인들에게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증인이 되기 위해 부득이한 일입니다. 그들이 법정에 서려면 무엇을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에 대한 염려가 생길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일에 대하여 염려할 것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성령께서 우리에게 지혜의 말씀을 주심으로 우리의 입으로 스스로 말씀을 전하도록 하는 것을 의미하신 것으로 그들로 벙어리처럼 가만히 있으면 방언처럼 저절로 말이 나오게 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같은 일은 베드로가 백성들 앞에서 담대히 복음을 전할 때 제사장의 무리들에 의해 잡히게 되었을 당시,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예한 자리에서 성령이 충만하여 변론을 한 일에서 나타나 보여 주셨습니다. 베드로의 기탄 없이 말하는 놀로운 증거를 들은 그들은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 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한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행4:13).

(4)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핍박이든 그리스도인들은 그 핍박을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기는 방법은 한가지밖에 없습니다.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나중까지 견딘다는 말은 핍박 가운데서 신앙의 정절을 지키며 끝까지 견딘다는 말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목적에 대하여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2. 고난 중에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

그리스도인들이 고난 중에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로 다음 세 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1) 내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란 사실을 믿기 때문입니다. 참새 한 마리의 생명까지도 하나님이 주관하십니다. "너희는 이것들 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고 하셨습니다.

(2) 하나님은 나에게 그의 뜻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벧엘에서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그에게 하신 말씀이 바로 나에게 주신 말씀인 줄 믿는 것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

다(창28:15).

(3) 하나님은 미쁘시사 우리가 담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치 아니하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감당할 시험만

허락하시는 이유는 그 시험이 우리의 유익을 위함이라는 사실을 밝혀 주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비단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을 문자 그대로 복음을 전하는 일에만 결부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의 생

활 중에 어려움이 왔을 때 혹은 가난이나 질병이나 환난 중에 있을 때 이것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인내

로 이겨 나간다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

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느냐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겠느냐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

신데 누가 정죄하겠느냐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의 생활 가운데서 언제나 담대하여 고난과 시련과 핍

박을 이겨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100) 두려워해야 할 존재

(마태복음 10 : 24 - 31)

복음 전도자는 담대해야 합니다. 주님이 하신 모든 말씀을 모든 사람들에게 두려움 없이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 한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으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일이 드러납니다. 장차 심판 날에 그 앞에 모든 인류는 자기의 행실을 따라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완전하신 심판권을 믿을 때 우리는 담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1. 하나님 앞에는 숨길 것이 없다.

사람들이 아무리 자신의 죄악을 숨겨도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으며 은밀히 행해도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을 것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감취인이란 말은 완전하게 잘 감춰져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리고 드러난다는 말은 드러낸다의 미래형으로 하나님에 의해 철저하게 폭로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인간은 아무라도 하나님 앞에 숨길 것이 없습니다.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에 자신의 한 모든 일이 선악간에 드러나기 때문에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전12:14).

성경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의 두 가지 면을 바라보게 됩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회개시키시려고 이 세상에 재앙을 내리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한 개인이나 한 민족을 환난이나 재앙으로 징벌하시는 것입니다. 이같은 하나님의 징계를 통해서 회개하여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사람이나 그 백성들은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재앙을 거두시고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주시기 때문입니다. 니느웨 성이 그러했습니다. 그리고 죄값을 신원하시는 최후의 심판이 있습니다. 이 심판은 돌이킬 여유나 회개할 시기가 전혀 주어지지 아니합니다. 오직 두려운 심판이 기다릴 뿐입니다. 자신들이 세상에서 악을 행한 그 행실대로 갑절로 보응을 받는 심판입니다. 이 심판은 영육이 아울러 받는 심판이 될 것입니다.


2. 제자와 선생의 관계

주님은 "제자가 선생보다 또는 종이 상전보다 높지 못하니 제자가 선생 같고 종이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 나라 속담에 "형만한 동생이 없다"는 말과 비슷한 하나의 격언의 성격을 가진 말씀입니다. 제자가 선생보다 더 위에 설 수 없고 종이 상전보다 더 높은 자리에 앉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복음을 전하러 나가는 제자들이 선생이신 주님이 받은 대접처럼 받으면 족하다는 뜻을 표현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40절 이하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복음 전도자를 대접하는 일에 큰 상급을 약속하신 것은 누구든지 복음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을 소홀히 여겨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밝혀 놓으신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은 그의 제자들이 선생인 당신과 똑같은 대접을 받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선생이 핍박을 받은 것처럼 제자된 너희도 선생과 같은 핍박을 받아야 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집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사람들이랴 그런즉 저희를 두려워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주님의 제자된 그리스도의 종들은 주님의 영광에는 동참하려고 하면서도 그의 고난에는 좀처럼 참여하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같은 태도는 선생을 따르는 제자의 태도가 아닌 것입니다.


3.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 하라

주님은 우리에게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자가 누구인가에 대하여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 권세자들은 다만 그들의 권세로 우리를 핍박한다 해도 몸에만 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우리의 생명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우리의 영혼입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권세 있는 자들이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죽인다고 해도 오직 육신에 국한하며 이같은 권세는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절대로 그들의 임의대로 사용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은 사람의 생명의 여탈권이 순전히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알려주시기 위해 참새의 경우를 예로 들어 말씀해 주셨습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일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안되는 일임을 분명히 하시면서 "두려워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결론 :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섭리 신앙에 철저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만물을 친히 섭리하신다는 신앙은 대단

히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작고 천한 참새에까지 미친다고 하신 것입니다.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라도

세신 바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권세자들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몸과 영혼을 아울러 지옥에 멸하시는 하나님 이외 아무도 두려워하지 말고 복음을 저

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따라 전파해야 하는 것입니다.


(101) 입으로 시인하는 신앙

(마태복음 10 : 32 - 33)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그의 신앙고백으로 확증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고백이란 그의 입으로 그리스도를 시인하는 일을 말합니다. 사람이 자신의 입으로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는 일이란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 이유는 오늘 주신 주님의 말씀에서 밝혀지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만약 주님의 입에서 우리를 부인하는 일이 생긴다면 우리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입니까?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는 선고를 받게 될 것입니다(마7:23).


1. 나를 시인하면

바울은 입으로 그리스도를 시인하는 일과 구원과의 관계를 분명히 밝혀 주고 있습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했습니다(롬10:9-10).

(1) 먼저 마음으로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에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대속의 죽으심과 죽음에서의 다시 살아나신 그의 부활하심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기본 뿌리입니다. 이 뿌리에서 신앙의 나무가 자라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2) 다음에 입으로 시인하는 일입니다. 믿음은 입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생깁니다. 그러나 그 믿음의 증거는

입으로 시인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자기는 그리스도를 믿노라고 하면서도 사람들 앞에서 입으로 그리스도를 시인

하지 못하면 그의 신앙은 구원에 이른 신앙이 아닌 것입니다. 누구 앞에서도 그리스도를 믿는 일을 부끄럽게 여기면

안 됩니다. 다음에 세례 받기를 주저치 말아야 합니다. 세례는 외형적인 신앙고백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과 연합된

선언입니다.

다음에 그리스도를 시인하는 일은 자신의 생명의 위기에서도 자신 있게 나타낼 수 있어야 합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

는 왕이 세운 금우상 앞에 경배하기를 강요하는 왕에게 이처럼 말했습니다.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

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3:

17-18).

그리고 그리스도로 핍박을 받는 일이 있어도 그 일로 오히려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전

하는 일을 금하라고 채찍질로 얻어맞았을 때 그들은 어떤 태도를 가진 것입니까?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고 했습니다(행5:41).


2.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이유

예수님이 이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신 이유는 그들이 복음을 전하는 이유로 인해 사람들에게 핍박을 당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런 핍박이 두려워 제자들이 사람들 앞에서 그리스도를 부인하거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을 것을 서약한다면 그들은 주님이 그들의 이름을 부인할 것이라고 하신 말씀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느브갓네살 왕은 자신의 금우상 앞에 절하기를 거부하는 다니엘의 세 친구들에게 한번만 절하면 용서해 줄 것이라고 회유했습니다.

"이제라도 너희가 예비하였다가 언제든지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듣거든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엎드리어 절하면 좋거니와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어디 있느냐"고 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인은 이런 회유에 넘어가 신앙의 정절을 버리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주의 이름을 부인하는 이유는 사람들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시인해야 하는 신앙고백이 자신의 생명과 연결되었을 때 두려운 나머지 부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빌리델비아 교회에 칭찬하시기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고 하심으로 그들이 주의 이름을 배반치 아니한 일에 대하여 칭찬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끝까지 시인하려는 믿음을 가지려면 무엇보다도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아무리 큰 권세를 가졌어도 육신의 생명밖에 해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권세자들을 두려워 그 앞에서 자기 목숨을 건지려고 주의 이름을 부인하면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하는 말씀을 거슬리는 것입니다.


결론 :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참는 인내의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자신의 생

명보다 더 소중하다는 사실을 알고 내가 죽기까지 그 이름을 부인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정절을 지키는 일입니다. 이런 신앙은 하루아침에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해야 합니다. 말씀을 듣고 깨달아 믿음이 성장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런 신앙의

깊은 자리에 이르도록 힘써야 합니다.


(102) 검을 주러 오신 예수

(마태복음 10 : 34 - 39)

복음에는 두 가지 면이 있습니다. 화평이냐? 검이냐?는 것입니다.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고 하신 말씀대로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화평을 이루지 못한 사람에게는 복음이 곧 검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원수의 자리에서 아들의 자리에까지 올려 주셨는데 이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얻어진 화평의 결과인 것입니다. 그러면 복음을 받아 드리지 않는 자에게는 왜 복음이 검이 되느냐? 그것은 복음은 빛이요 세상은 어두움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지만 세상은 사탄의 권세 아래 있기 때문에 복음과 세상은 타협할 수가 없으며 화평을 이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1. 화평과 검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너무나도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화평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고 하신 말씀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는 분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말씀하신 평안은 세상에서 말하는 화평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다는 말씀에서 구분하셨고 그리스도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영적 평안을 의미한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말씀하신 이 평안은 세상 사람들이 누리고 있는 평안과 충돌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1)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화평은 먼저 죄인과 하나님과의 화평에 있습니다. 이 화평은 세상에서는 받을 수도 없고

누릴 수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화평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화평이 깨어

진지 이미 오래입니다. 하나님과의 화평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우리에게는 아무런 소망도 없는 것입니다. 이 화평을 예

수님이 이루어 주신 것입니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

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골1:20).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과 화평할 수 있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일은 하나님과 화평해

지는 방법입니다. 하나님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심으로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영

원한 화평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2) 다음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화평은 이웃과의 화평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화목하게 하는 직

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

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다"고 했습니다(고후5:18). 우리는 이 하나님의 화평의 사자로서의 사명을

두 가지로 이행해야 합니다. 하나는 다른 사람들로 하나님과 화목케 하는 일입니다. 이것은 전도로 나타납니다. 그리

고 다른 한가지는 우리의 생활상의 화목으로 형제들과의 화목입니다. 주님은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

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화목은 형제의 죄를 용서해 주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2. 복음은 가정에 불화를 가져온다.

복음이 한 나라에 들어가면 그 복음이 어느 정도 자리잡기까지는 국가적인 사회적인 핍박이 따릅니다. 한 가정에 들어가면 그 가정이 복음으로 하나가 되기까지 불화는 계속되는 것입니다. 처음 복음이 한 가정에 들어가면 당장에 칼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불화하여 집안 식구들이 서로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적인 마찰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과 사탄과의 영적 대결인 것입니다. 이같은 빛과 어두움의 대결은 우리 마음속에도 동일하게 일어납니다.

바울은 롬7:23절에서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탄식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분명한 선택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이냐 하나님이냐 가족이냐 하나님이냐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우리 주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면 우리는 사람을 택하고 가정을 택하고 며느리나 아들이나 남편이나 아내를 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어두움을 쫓는 사람들은 결과적으로 다 잃어 버리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주님을 따르는데서 오는 고난을 각오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은

사람만이 그의 영광에 동참하는 권리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자기 십자

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사람들입니다. 자기 십자가란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일입니다. 우리가 만

약 이 십자가를 벗어버리려고 한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설자리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세상을 바라보

고 자신의 육신적인 생명을 생각하는 사람은 그 생명을 잃어버릴 것입니다. 복음은 세상에 참된 화평을 심

는 진리의 검입니다. 우리는 이 검으로 사탄의 권세를 물리치고 승리해야 하는 것입니다.


(103) 영접하는 자의 복

(마태복음 10 : 40 - 42)

주님은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영접이란 말은 데코메노스( )란 단어로 환영한다, 대접한다의 현재적 표현으로 계속적으로 대접을 받는 상태를 말합니다. 대접이란 말을 몇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42절에서 밝혀 주고 있습니다. 냉수 한 그릇이라도 정성어린 마음으로 공궤하면 그에 대한 상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주의 종들이 성도들의 가정에 심방했을 때 심방을 받는 가정은 주님을 대접하듯 그를 대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복음을 전하는 당신의 종들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무시 당하거나 아무렇게나 대접을 받는 일을 기뻐하지 아니하십니다. 그런 일은 그 종을 보내신 주님을 그렇게 대하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1. 영접의 중요성

어느 나라에서 그 나라에 대통령 특사로 방문한 전권대사에 대하여 나그네 정도의 푸대접으로 맞이한다면 그 나라의 최고 통치자를 모욕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주님은 그의 종들이 자기로 인하여 선한 대접을 받는다면 그것을 주님 자신이 받으신 것으로 간주하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주님을 직접적으로 대접해 드릴 수는 없지만 이 말씀에 의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종들을 대접하는 일로 주님을 대접한 것과 동일한 상급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도들에게 있어서 놀라운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개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히13:17). 바울은 갈6:6절에서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고 했습니다.

또한 영접하는 일이란 후원해 주는 일, 그를 도와주는 일을 말합니다. 주님은 가장 미천한 여인들로부터 이같은 후원을 받으셨습니다. "또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또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또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고 했습니다(눅8:2-3).

바울은 자신을 영접한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이처럼 말했습니다.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이처럼 복음을 위해 수고하는 하나님의 종들을 대접해 주는 일은 우리 주님을 가장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같은 일은 곧 자기(주님)를 영접하는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 잘못된 이단자들에 대한 태도

모든 성도들은 복음을 들고 주의 이름으로 수고하며 양 무리들을 가르치는 하나님의 종들을 정성껏 영접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고 넘어가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복음을 전하는 이단자들에 대해서 어떻게 대하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이들 이단자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아무리 복음을 들고 다닌다 해도 성경에서는 여러 가지로 경종해 주고 있습니다.

원래 이단자들의 복음은 실인즉 복음이 아닌 것입니다.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예하는 자임이니라"고 했습니다(요2서 10-11). 그런 자들에 대하여 영접치 말 것은 물론 인사도 금하라고 했습니다. 만약 그들에게 협조적으로 나간다면 이 같은 일은 결국 너희도 그 악한 일에 참예하는 죄가 된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차라리 이방종교를 믿거나 전하는 사람들에게는 관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이단자들에 대해서는 엄중해야 합니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고 바울은 선언했습니다.

그러면 이들은 왜 이처럼 혹독한 선언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까? 이들은 양의 목자인 것이 아니라 양의 가죽을 쓴 이리들로 양의 생명을 노략질하는 도적 떼들이기 때문입니다. 양의 우리를 문으로 들어오지 아니하고 다른 곳으로 넘어온 자로 그 목적은 양을 도적질하고 죽이려는데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을 영접하는 일에 선지자와 의인과 소자 중 하나로 분리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선지자란 하나님의 종들을 말합니다.

의인이라 그리스도의 의를 소유한 자로 복음을 위해 일하는 복음의 일꾼들입니다. 소자 중 하나라고 한 대상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란 뜻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속한 주님의 제자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꾼들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에게는 상이 따른다고 하신 것입니다.

결론 : 주님이 하신 이 말씀은 우리에게 무한한 격려와 위로가 됩니다. 성도들은 이같은 주님의 말씀에 따라 하나님의 종들을 주님을 영접하듯 대접함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며 또한 언약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종들은 이런 대접에 관심을 두어서는 안 됩니다. 하늘의 상을 바라보고 충성스러운 종으로서의 사명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1장

◆ 밤중소리 11-06 | VIEW : 4,722


≈ 104 ≈ 시험에 든 세례 요한 (마태복음 11 : 1 - 6)


서 론 : 세례 요한이 헤롯왕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혔습니다. 그런데 옥에 갇힌 요한이 시험에 들었습니다. 그는 자기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오실 그 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고 물었습니다. 이런 질문은 위대한 선각자요 오실 메시야의 증거자로써 분명히 의심에 찬 질문으로 그의 마음속에 걷잡을 수 없는 시험이 들게 된 증거입니다. 세례 요한의 사명은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이었습니다. 그의 이 같은 사명은 이미 이사야로 예언되었습니다.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마2:3). 세례 요한도 이같은 자신의 사명을 스스로 알고 있었습니다. 요단강으로 사람을 보내어 “네가 누구냐”고 묻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고 말했습니다(요1:23). 그는 요단강에서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 때에 비둘기 같은 성령이 그 머리 위에 임하시는 것을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인했습니다. 그의 확인은 움직일 수 없는 체험에서 온 것입니다. 그는 자기 제자들을 향하여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고 증거했습니다. 이런 세례 요한이 옥에 갇힌 후 시험에 든 것입니다. 1. 세례 요한이 시험에 든 이유 그리스도인은 아무리 신앙이 돈독하고 체험과 증거를 가졌다 해도 시험에 들때가 있는 것입니다. 시험도 여러 종류가 있지만 요한의 경우는 예수님이 과연 메시야냐 하는 데 대한 의심에서 나온 시험이기 때문에 위험한 시험이었습니다. 그의 확신이 뿌리 채 흔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마음에 의심이 먹구름처럼 뒤덮였습니다. 세례 요한의 이런 시험은 그의 급작스런 환경의 변화에서 찾아왔습니다. 세례 요한은 어느 날 헤롯왕을 찾아가 그의 패륜에 대해 꾸짖었습니다. 이 책망으로 그는 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여러 날 옥에 갇혀 있는 중에 하나님의 권능에 의해 옥에서 풀려날 수 있기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메시야관도 그 당시 유대인들의 그것과 다름없이 예수님이 영광의 메시야로 오셨음을 믿었으며 그가 메사야 왕국을 세우실 분이심을 믿은 것입니다. 그는 이런 왕국이 속히 이루어지기를 바랬지만 그 일이 이루어지지 않자 실망했을 것입니다. 그는 옥에서 정신적으로나 육신적으로 많은 고초를 받고 있는 가운데 사탄의 시험이 그에게 찾아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참말로 하나님의 아들이신가? 그는 이스라엘이 기다리는 메시야이신가? 그렇다면 왜 메시야 왕국이 임하지 않는 것일까? 자신이 겪는 이 어려움에서 왜 구원해 주시지 않는 것일까?’ 이런 의심이 세례 요한의 마음을 휘어잡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위기는 이처럼 어려움이 갑작스럽게 닥쳐왔을 때 어떤 결정적인 하나님의 도우심이 외적으로 나타나지 않을 때 찾아옵니다. 세례 요한이 시험에 든 원인을 두 가지로 살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그는 바른 메시야관을 가지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은 자신의 사명에 대하여 좀 더 깊은 하나님의 뜻을 알았어야 했습니다. 그의 사명은 주의 길을 예비하는 일 뿐이요 그 일이 끝나면 그는 가장 영광스러운 방법으로 하나님께 가는 일입니다.


2. 시험은 왜 오는가?

성경은 우리가 시험에 드는 일에 대해 여러 가지로 경종해 주고 있습니다.

(1) 시험은 기도의 생활이 중단되었을 때에 찾아옵니다. 주님은 산에 오르사 기도하실 때 제자들이 잠자는 것을 보시고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항상 기도하는 일입니다. 시험을 이기는 최상의 무기는 기도하는 일임을 그리스도인은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2) 시험은 욕심에 끌릴 때 찾아옵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라”고 했습니다(약1:14). 영적 생활을 못하고 육신에 끌려가는 생활을 하게 될 때 시험에 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육신이 원하는 정욕대로 살아갈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고 했습니다(갈5:24).

(3) 시험은 부하려 할 때 찾아옵니다. 돈을 많이 벌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부정한 방법이나 비 신앙적인 방법으로 돈을 벌겠다고 생각하면 그 즉시 시험 속에 빠지게 됩니다. 기복 신앙에는 시험이 따르기 때문에 뜻을 이룰 수도 없거니와 더욱 큰 시험을 자초하여 침륜과 멸망의 함정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함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고 했습니다(딤전4:9-10).

(4) 시험은 선 줄로 여길 때에 찾아옵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고전10:12). 선 줄로 생각하는 일은 사람의 교만입니다. 교만에는 그를 넘어지게 하는 시험이 따르게 됩니다. (5) 시험은 시련 중에 찾아오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벧전4:12-13). 세례 요한의 경우는 하나님의 시련 중에 찾아온 시험입니다. 시험이 찾아오면 확신도 변할 수 있습니다. 확신을 언제나 확신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확신이 되기 위해서는 항상 그 확신의 자리에서 서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고 신앙적으로 점진적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우리의 돌변적인 환경의 변화는 우리의 확신을 빼앗아 가고 우리의 믿음을 흔들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에 견고하여 흔들림이 없어야 합니다. 세월이 지나가다 보면 믿었던 것도 희미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늘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 안에 거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자기의 처지에 결부시키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자기 의도대로 되지 않을 때 의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성경에 기록된 대로의 신앙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결론 : 주님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너희가 가서 보고 듣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라고 하시면서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고 하셨습니다. 시험에 든 요한에게 대답하실 수 있는 적절한 방법은 그의 행하시는 권능이십니다. 시험에 들어 있는 요한에게는 백 마디의 설교보다는 실증적인 증거가 필요한 것입니다. 주님이 전하라고 하신 이 말씀은 시험에 들어 있는 요한에게 예수님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으며 자신의 사명을 이룬 사실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꺼이 순교의 제물이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 105 ≈ 선지자 요한의 위대성 (본문 : 마태복음 11 : 7 - 11) 서 론 : 세례 요한에 대한 주님의 칭찬은 놀라웠습니다. 그는 비록 감옥에서 시험을 당하고 있기는 했지만 그것이 세례 요한의 사명이나 그의 인간성에 손상을 준 것은 아닙니다. 요한은 주님의 증거자로서 잠깐동안이나마 주님을 의심한 일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위신이 깎인 일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세례 요한의 본래의 모습과 그의 위대한 사명을 알려 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주님은 세례 요한의 선지자로서의 위대한 사명과 그의 인격을 칭찬해 주신 것입니다. 1. 왜 광야에 나갔더냐? 요한은 유다 광야에서 복음을 외친 선지자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외쳤습니다. 이 때 유대와 예루살렘 등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와서 자신들의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너희는 그 때 왜 광야에 나갔더냐고 물으심으로 그들이 지난날에 광야로 세례 요한을 찾아가 세례를 받았던 일을 회상시켰습니다. 이 물음에서 주님은 두 가지 목적물을 제시하셨습니다. 하나는 바람에 불려 흔들리고 있는 갈대였고 하나는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입니다. 아마 주님이 이 말씀을 하시고 있는 그 곳은 갈대밭이 있었던 곳이며 때마침 그 갈대들이 바람에 보기 좋게 흔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따르고 있는 무리들 중에는 혹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이 있어서 이 말씀을 하실 때 다른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말씀하시면서 너희는 무엇을 보려고 그곳 광야에 갔었더냐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그들에게 놀라운 상상력을 갖게 했음에 틀림 없었을 것입니다. (1) 주님은 과연 너희들이 광야에 나갔을 때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보려고 갔던 것이냐고 물으셨습니다. 이 말씀에 제자들에게서 부정적인 대답을 끌어냈을 것입니다. 그러면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이것은 지조 없는 삯군 선지자를 가리키신 것입니다. 삯군은 권세의 바람에 흔들입니다. 세례 요한은 권세자에게 아부나 하는 지조 없는 선지자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리켜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고 책망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는 헤롯왕에게도 굴복하지 않고 그의 패륜적인 부도덕한 생활을 질책했습니다. 옛날에 지조가 없었던 사울 왕은 백성들을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므로 오히려 하나님께 버림을 당했던 것입니다. 금전의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들도 있습니다. 발람의 경우가 그러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분명한 뜻을 알면서도 왕이 보낸 값진 선물과 그에게 약속한 명예와 영광으로 인하여 그의 마음이 갈대처럼 흔들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했습니다. 선지자가 권세나 금전의 바람에 흔들려서는 선지자적은 사명을 이룰 수 없습니다. 오늘날에도 권세자들이 두려워 그들에게 아첨하므로 불의에 대하여 입을 다문다면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가 될 것입니다. (2) 주님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보러 광야에 간 것이 아니라면 그러면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고 물었습니다. 이때 이 주님의 말씀을 들고 있었던 주변에 많은 사람들은 광야에서 외치던 세례 요한이 입고 있었던 옷을 상상했을 것입니다. 그의 몸엔 부드러운 옷이 걸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보기에도 딱딱하고 거친 옷을 입고 있었던 그의 모습을 머리에 그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약대 털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이런 사람은 세속적인 선지자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세상과 짝하는 선지자들입니다. 세상 풍습을 적당히 따라가는 선지자들입니다. 오늘날에도 이 같은 부드러운 옷을 입은 하나님의 종들이 많이 있습니다.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동무들을 때리며 술친구들로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마24:48-51). 사람들로 풍부한 상상력을 상기시킨 이 말씀으로 듣고 있었던 그 많은 사람들은 세례 요한은 결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도 아니며 부드러운 옷을 입은 선지자도 아니라는 사실을 생각나게 했을 것입니다. 2.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처럼 반문 법을 되풀이하시면서 결론적으로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려더냐고 하심으로 사람들의 마음의 생각을 찌르신 것입니다.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는 주님의 길을 예비한 선지자였기에 그의 사명은 모든 선지자 가운데서도 가장 영광스러운 사명자였던 것입니다. 그는 마치 엘리야와 방불한 위대한 선지자였습니다. 주님은 말라기 선지로 예언한 말씀,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예비하리라”고 하신 것이 바로 이 사람, 세례 요한에 대한 것이라고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이가 없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세례 요한을 칭찬하신 것은 그가 인류의 메시야를 증거하며 소개하는 위대한 사명을 지니고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큰이라고 하신 표현은 그의 인간성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그의 사명을 의미해 주신 말입니다. 주님은 이 말씀 끝에 천국 백성들의 놀라운 축복에 대하여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에 대하여 혼란을 야기시키지 않으려면 이 말씀은 인간적인 위대성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천국 백성들이 누리는 축복을 표현하신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천국 백성들의 축복은 세례 요한이 소유하고 있는 것보다 큽니다. 천국에서는 아무리 작은 자라도 은혜 아래 속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구약의 율법 아래 속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천국 백성들은 온전히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다만 그리스도를 바라보았을 뿐입니다. 그 뿐 아니라 천국 백성들은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선지자적인 사명만을 가지고 일한 하나님의 사역자였습니다. 모세도 그러했습니다.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히3:5). 그리고 천국 백성들은 온전히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다만 그리스도를 바라보았을 뿐입니다. 그뿐 아니라 천국 백성들은 그 마음에 성령이 내주하십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심으로 이것은 그리스도의 임재하심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성령의 내주가 아니라 외적으로 역사한 사역자였습니다. 결론 : 우리는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고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선지자의 말을 들으려고 교회에 나와야 합니다. 선지자의 말이란 하나님의 언약의 비밀을 선포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 언약의 비밀이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입니다. 세속적인 말은 세상에도 많이 있습니다. 정치적인 말이나 철학적인 말도 세상에 많이 있습니다. 기복적인 말도 많습니다. 이런 것들을 들으려고 선지자를 찾아가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세례 요한보다 더 축복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면 우리는 세례 요한보다 더욱 크게 그리스도를 세상에 외치는 전도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 106


≈ 침노하는 자가 빼앗는 천국 (본문 : 마태복음 11 : 12 - 15)

서 론 : “천국은 침노를 당하노니 침노하는 자가 빼앗느니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그 해석이 다양합니다. 주님은 여러 가지 비유로 천국을 말씀하셨지만 침노하는 자가 빼앗는다는 말씀은 참으로 묘하신 비유가 아닐 수 없습니다. 침노란 말은 무력으로 쳐들어가 강탈한다는 뜻인데 천국이 이처럼 침노를 당한다고 하셨으니 도대체 이 말씀의 뜻은 무엇인가? 그 해석이 구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1. 천국이 침노를 당한다는 뜻 우리는 먼저 주님께서 왜 천국이 침노를 당한다고 하셨는가에 대하여 그 말씀의 뜻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천국은 이 세상 나라가 아닙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 세상이 아담의 후손으로 육의 사람이 살아가는 곳이라면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영적 자손만이 그 자격자가 됩니다. 이 두 나라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습니다. 서로 건너갈 수도 없고 건너 뛸 수도 없는 나라입니다. (2) 천국은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순탄하게 들어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이 나라에 들어가기까지는 철통같은 장애물들이 가로 막혀 있습니다. 죄라고 하는 장벽이 높이 솟아 있습니다. 끊어 버리기 어려운 세상 줄이라고 하는 끄나풀이 얽매어 있습니다. 부서져야 할 교만이 우뚝 서 있습니다. 사탄과 그 졸병들이 아무도 그 곳에 들어갈 수 없도록 겹겹이 둘러싸여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뚫고 들어간다는 일은 참으로 침노하는 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2. 천국은 오직 그리스도를 소유자만이 들어간다. 예수님은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뿐입니다. 사탄이나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천국으로 갈 수 있는 길을 막을 수 없는 한가지 길이 있는데 그 길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그의 사역을 완수하기까지는 이 길이 열려지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그의 최후의 생명을 우리를 위해 바치실 때 “다 이루었다”는 말씀과 함께 성소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성소의 휘장이란 하나님께 가는 길이 막힌 죄악의 담을 말합니다. 그것이 한 가운데가 찢어지면서 성소 한 가운데로 새로운 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놓으신 새롭고 산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고 말씀했습니다(히10:19-20). 이 길만이 천국을 침노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② 천국에 침노할 수 있는 무기란 진리입니다. 이 무장을 갖추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진리는 우리를 세상에 속한 모든 사탄의 권세에서 자유를 주는 유일한 하나님의 병기인 것입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셨습니다(요8:31-32). 진리란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키는데 예수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진리가 되십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말씀했습니다(요1:1). 그리스도인들이 정사와 권세와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과 대항하여 싸우려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해야 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성령의 검이라고 했습니다(엡6:10-17). 이 무기를 가지고 사단의 권세와 불의한 세력과 싸우지 않으면 천국에 침노할 수 없는 것입니다. 3. 천국은 오직 십자가로만이 침노할 수 있다. 십자가는 천국으로 침노해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누구든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십자가만 통하면 누구든 천국에 침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선한 일이라고는 한번도 해보지 못한 강도범도 십자가를 통해 천국에 침노할 수 있었습니다. 부잣집 대문간에 평생 동안 거지 생활밖에 못해온 거지 나사로도 이 통로를 통하여 천국에 침노했습니다. 아무리 그가 한 나라의 제왕이라 할지라도 이 십자가의 통로가 아니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죄의 인간이 죽었다는 표입니다. 죄 값은 사망이기 때문에 우리 인간들은 죽어야 자신의 죄 값을 치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죽음도 육체의 단순한 죽음인 것이 아니라 영과 육이 아울러 불붙는 유황불 못, 둘째 사망이기 때문에 그것으로 그의 생명은 끝장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우리 죄인들이 죄에 대하여 죽는 하나님의 방법인 것입니다.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했습니다(롬6:6). 십자가는 사망 권세를 이긴 표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은 사람들은 그의 부활에 연합되어 다시 살리심을 받는 것입니다. 이제는 죄에 대해서는 죽었고 의에 대해서는 살았습니다.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사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자로 여길지어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롬6:10-11). 이런 사람만이 사단의 견고한 죄악의 아성을 파헤치고 천국에 침노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천국은 하나님과 화목된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그 곳의 주인은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은 그 아들의 십자가만이 가능합니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셨다”고 했습니다(엡2:16). 4. 천국은 새사람만이 침노할 수 있다. 모든 인간들은 그들의 죄로 인하여 천국을 바라보는 눈이 감겨져 있으므로 그 곳을 볼 수 없을 뿐 아니라 가는 길조차 알 길이 없는 것입니다. 천국을 바라볼 수 없는 사람은 천국을 침노할 수 없습니다. 천국은 아무나 바라볼 수 있도록 존재하는 곳이 아닙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백성들만이 바라볼 수 있도록 만드신 하나님의 비밀한 곳입니다. 이 하나님의 비밀한 곳을 볼 수 있으려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의 심령의 눈이 열려야 하는 것입니다. 심령의 눈은 새 사람이 소유하고 있는 속 사람의 눈입니다. 새 사람이란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입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새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천국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들려주신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요3:3).


결론 : 결론적으로 주님이 하신 말씀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하셨습니다(요5:24).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는 말씀은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들이 천국으로 침노해 들어간 것을 의미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어야 합니다. 우리의 옛 사람이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그리고 그와 함께 다시 살아나는 그리스도와의 영적 연합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튼튼히 잡고 날마다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의 생활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천국을 침노한 사람들임을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107 ≈ 이 세대의 비유 (본문 : 마태복음 11 : 16 - 19)

서 론 : 요한복음1:5절 말씀에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했습니다. 복음의 빛이 온 세상에 비취지만 어두움에 잠긴 세상상 사람들은 그 빛을 바라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회개할 줄 모르고 복음을 받아 드리지 않는 이 세대를 향하여 주님은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아니하고 애곡을 해도 가슴을 치지 아니하는 것과 같다”고 비유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요단강에서 회개를 역설하면서 이 세대를 꾸짖었습니다.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고 말했습니다(마3:11). 그러나 이 같은 요한의 애곡에 가슴을 치는 무리들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의 극기생활에 귀신이 들렸다고 악평했습니다. 그 반면에 예수님은 생명과 천국과 소망을 주는 복음의 피리를 불었지만 이 피리 소리에 맞장구쳐 춤추는 무리들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모든 죄인들과 함께 즐거워하시는 모습을 보고는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배척했습니다. 1. 영적으로 감각이 없는 세대 선지자가 나타나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하여 회개의 여사를 이룰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땅히 가슴을 치며 애곡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죄악이 관용할 때 그 곳에 하나님의 선지자를 보내어 그들에게 죄에서 돌이키라고 회개를 외치게 하십니다. 선지자 요나의 애곡하는 소리를 들은 니느웨 백성들은 이에 동조하여 가슴을 치며 애곡했습니다. 니느웨의 왕은 왕복을 벗고 대신 굵은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았습니다. 왕은 온 나라에 금식령을 선포하기를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떼나 양떼나 아무 것도 입에 대지 말지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각기 악하나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고 명을 내렸습니다(욘3:7-8).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성경은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감찰하시고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세례 요한의 애곡은 오히려 많은 사람들의 조롱을 받았으며 요한을 가리켜 귀신이 들린 사람이라고까지 혹평했습니다. 이 같은 일은 노아의 시대에도 그러했습니다. 노아가 120년간 하나님의 심판을 외치며 회개하기를 바랐지만 그들의 생활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도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물 속에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노아가 애곡을 했지만 그들은 먹고 마시는 일에 전념했습니다. 2. 애곡을 해도 가슴을 안치는 세대 애곡이란 말은 장사 집에서 슬피 울부짖는 소리를 말합니다. 누구든 슬픈 일을 당한 장사 집에서 애곡이 나오게 되고 이 소리를 듣는 무리들은 주인의 슬픔에 동참하여 슬퍼하며 가슴을 칩니다. 이 비유는 죄에 대한 회개를 말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주님의 길을 평탄케 하려고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향하여 회개를 외치며 물로 세례를 주었습니다. 대제사장을 위시하여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이나 서기관들은 세례 요한의 회개의 소리를 듣고 슬퍼하며 애곡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회개하기는 고사하고 그 마음이 더욱 완악해져 세례 요한을 죽였으며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았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애곡하라고 하신 것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1)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분입니다.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 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사55:7). 우리가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을 받지 못하면 우리는 우리의 죄악 중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2) 우리가 죄악 중에서 살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가 죄악에서 떠나면 죄악이 우리를 패망케 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라고 권면하십니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국문할지라 너희는 돌이켜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떠날지어다 그리한즉 죄악이 너희를 패망케 아니하리라 ....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죽는 자의 죽은 것은 낸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겔18:30-32).

(3)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길은 회개뿐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4) 하나님이 우리에게 회개를 권면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언약의 축복을 내려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너희 허물이 이러한 일들을 물리쳤고 너희 죄가 너희에게 오는 좋은 것을 막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렘5:25). 그러면 왜 사람들은 애곡하는 선지자의 경종에도 불구하고 회개하기에 인색한 것입니까? 그들의 마음이 죄로 굳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그 심령의 완악함으로 회개하기를 원치 않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치는 일에 불만을 품고 있었는데 이에 대해 주님은 “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셨다”고 했습니다(막3:5). 심령이 완악한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거역하며 성령의 일을 받으려 하지 않으며 구원의 역사를 대적합니다. 다음에 회개를 거역하는 원인은 사람들의 교만에 있습니다. 사람을 교만케 하는 것은 지식에 있습니다. 그의 명예와 권력에 있습니다. 그리고 남을 멸시하는 마음입니다. 이같은 사람은 하나님의 그들의 대적이 되십니다. 3. 피리를 불어도 춤을 안추는 세대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지 않는 세대라고 하신 말씀은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그 말 할 수 없는 축복을 거역하는 세대를 비유적으로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며 천국을 주며 평안을 줍니다. 이 복된 소리를 들을 때 사람들은 이 소리에 맞추어 기뻐해야 합니다. 사람이 피리 소리를 들으면 그 소리에 맞추어 춤을 추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복음을 들어도 아무 감각이 없습니다. 기쁨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주님을 향하여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비방했습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입니다. 우리는 이 복음의 나팔에 따라 춤을 추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세대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날 교회에 나오는 그리스도인들 조차 목회자의 피리에 좇아 춤을 추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 것입니까? 결론 : 그러면 왜 이런 세대에 이른 것입니까? 악한 세대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말세에 고통하는 때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세대료 부모를 거역하는 세대요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는 세대요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 하는 세대요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세대인 것입니다. 지금 이 세대 사람들은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명심해야 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 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하므로 변화함을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 108 ≈ 권능을 보고도 믿지 않는 죄 (본문 : 마태복음 11 : 20 - 24)

서 론 : 주님은 많은 권능을 행하시고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많은 수고를 기울이신 고을이 회개치 않고 주님을 배척했을 때 그 고을을 향하여 화를 선언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권능을 체험하고 주님의 구원의 사역을 보고도 회개치 아니하고 결실이 없을 때 화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고라신과 벳새다와 가버나움 등이 이런 고을들입니다. 이들에 대하여 주님은 두로와 시돈이나 소돔보다 심판 날에 하나님으로부터 화가 더욱 중하다는 것을 경종 하신 것입니다. 1. 세 고을의 역사적 배경 주님이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셨다는 고을, 고라신과 벳새다는 두로와 시돈과 비교되고 가버나움은 소돔과 비교되어 경종 하셨습니다.

(1) 고라신은 요단강 서쪽 갈릴리 북편에 있는 성읍으로 이곳에서 주님은 많은 권능을 행하셨다고 했습니다.

(2) 벳새다는 가버나움 근변에 있는 성읍으로 안드레와 빌립의 고향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곳은 주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곳으로 유명합니다. 주님이 산에서 기도하신 후 바다를 건너가신 곳이기도 합니다. 소경을 안찰 하시어 고치신 곳도 이곳입니다. 주님은 그들의 불 신앙을 꾸짖으시면서 그들에게 행하신 이런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다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3) 두로는 아합왕의 아내 이세벨의 고향입니다. 이 성은 주전331경에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이곳 주민들이 노예로 팔리고 시가지는 불타 버렸습니다. 그 후 로마가 점령하고 재건했지만 터키에 예속되어 다시 쇠잔해진 곳입니다. 시돈은 두로와 함께 동 지중해 연안에서 제일 큰 항구로 이곳 왕은 이세벨의 친정 아버지인 ‘엣바알’이었습니다. 주전351년에 바사에 반항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성읍 사람들이 스스로 도시를 불살라 버림으로 망하고 말았습니다. 역사상 이 두로와 시돈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 나라들로 외국의 침략을 받아 멸망 받았으나 주님은 만약 이곳에서 고라신이나 벳새다에서 행했던 권능을 행하셨다면 그들이 회개했을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4) 가버나움은 비교적 성경에 그 지명이 많이 등장합니다. 이 고을은 갈릴리 서북 해안에 있는 큰 성읍입니다. 이곳은 예수님의 제2고향으로 회당과 세관이 있고 주님은 이 지방에서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마태 등을 부르셨습니다. 자기 종의 병을 고쳐 주시기 위해 주님을 찾아 나온 백부장이 살던 곳이며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치신 곳도 이곳입니다.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친구들이 주님이 계신 곳으로 들여와 지붕을 뚫고 방 아래로 내리운 곳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곳에 살고 있었던 사람들은 끝까지 복음을 거절했습니다. 이들은 그 후에 회교도들에 의해 진멸을 당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2. 화가 있다고 선고받은 이유

주님께서 이처럼 고라신과 벳새다와 가버나움을 향하여 화가 있다고 하신 이유는

다음 두 가지 원인으로 인해서입니다.

(1) 권능을 보고도 믿지 아니했습니다. 하나님의 권능을 체험하거나 바라보고도 회개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화를 당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알아야 할 일은 하나님의 권능은 우리가 체험해야 할 일이요, 사모하고 바랄만한 일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이런 권능을 체험하고 능력을 맛보고도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반드시 화를 당할 것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권능을 우리에게 나타내 보이심은 그 같은 일을 통해서 우리로 회개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려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권능만이 아닙니다. 은혜를 받고도 그 은혜를 소멸하여 죄를 범할 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히브리서 6장에 나오는 말씀을 기억하면서 우리의 신앙 생활의 거울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히6:4-6).

(2) 그들은 말씀을 듣고도 그 말씀을 받지 아니했습니다. 복음을 듣고도 마음이 완악하여 그것을 받지 않을 때는 그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복음을 듣지 않았을 때는 그 죄가 경합니다. 경하다는 말은 죄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죄 사유함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다시 주어질 수 있다는 뜻이 됩니다. 말씀의 거역은 주님을 거역하는 죄가 따르는 것입니다. 말씀을 경히 여기거나 거역하는 자들에 대한 경종이 이렇게 나타나 있습니다. “내가 부를지라도 너희가 듣기 싫어하였고 내가 손을 펼지라도 돌아보는 자가 없었고 도리어 나의 모든 교훈을 멸시하여 나의 책망을 받지 아니하였은즉 너희가 재앙을 만날 때에 내가 웃을 것이며 너희에게 두려움이 임할 때에 내가 비웃으리라 너희의 두려움이 광풍같이 이르겠고 너희에게 근심과 슬픔이 임하리니 그때에 너희가 나를 부르리라 그래도 내가 대답지 아니하겠고 부지런히 나를 찾으리라 그래도 나를 만나지 못하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잠1:24-28).


3. 권능을 보고도 왜 회개치 않았나?

사람이 회개할 수 있는 일이 두 가지 경우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찔리는 경우입니다. 오순절에 회개한 유대인의 무리들은 베드로가 전하는 말씀을 듣고 회개했을 때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권능을 보고 두려움으로 회개하는 경우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 경우를 다 경험했으면서도 회개치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이들은 회개치 못하는 것입니까? 사람의 마음이 강퍅하게 되면 말씀을 듣거나 권능을 보아도 그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경우가 그러했습니다. “나의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나의 이적을 보고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한 그 사람들은 내가 그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 또 나를 멸시하는 사람은 하나라도 그것을 보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민14:22-23). 결론 :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때 지극히 조심해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일에 지극히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듣는 것으로 다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들을 때 순종하여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들은 그 들은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 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치 아니함이라”고 했습니다(히4:2).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순종하여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권능을 바라보거나 체험했을 때 우리는 더욱 두려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교만과 강퍅한 마음을 버리고 온유와 겸손하므로 우리 주님의 뜻을 따라가도록 힘써야 합니다.


≈ 109 ≈ 어린아이에게 나타내신 슬기 (본문 : 마태복음 11 : 25 - 27)

서 론 : 복음이 세상에 슬기 있고 지혜로운 자들에게는 감추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에 대하여 주님은 하나님께 감사하셨습니다. 고라신이나 벳새다, 가버나움이 주님으로부터 복음을 듣고 많은 권능을 바라보았지만 그들은 회개치 아니했습니다. 이같은 일은 스스로 슬기 있고 지혜롭다고 하는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천국의 비밀을 감추시고 나타내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이 비밀은 세상에서 사람들이 사용하는 슬기나 지혜로는 깨달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비밀을 오직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어린아이가 되지 않으면 복음을 듣거나 권능을 보아도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린아이들이란 누구를 가리키는 말입니까? 1. 세상 지혜로 알 수 없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 복음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세상 지혜나 슬기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십자가의 도가 헛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택한 모든 백성들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세상 지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새로운 지혜로 깨닫게 하셨습니다. 이 지혜가 곧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적어도 생명을 얻는 일에 있어서는 하나님께서 지혜 있는 자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의 총명을 폐하리라고 하신 말씀이 적용되는 것입니다(고전1:19). 만약 사람들이 세상 지혜로 십자가를 바라본다면 십자가의 도가 미련하게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고전1:18). 그러면 왜 세상 지혜로나 슬기로는 깨달을 수 없는 것일까요? 그 이유에 대해서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고전2:9).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셨다고 하신 것은 이 세상 지혜로 복음을 깨닫는 일에 미련케 하셨다는 뜻입니다. 2.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신 하나님 나라의 비밀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세상 지혜로 복음을 깨달을 수 없게 하시기 위해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비밀을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세상의 지혜나 슬기가 부족하기 때문에 복음을 쉽게 믿고 쉽게 받아 드립니다. 여기서 어린아이들이란 어린아이들처럼 인간의 지혜나 총명을 의지하지 않고 단순한 심령으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 드리는 사람들을 가리킨 말입니다.

(1) 어린아이란 자기를 낮추는 사람을 말합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 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고 하셨습니다(마18:3-4). 어린아이들이 자신을 높일 줄을 모르는 것처럼 자기를 낮추는 자만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 수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겸손을 말합니다. 겸손한 자에게 지혜를 주시고 은혜를 주십니다. 아합은 이스라엘의 역대 왕 중에 가장 악한 왕이었지만 자신의 죄를 바라봄으로 하나님 앞에 겸비함을 보인 일이 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그에게 내리시기로 작정하신 재앙에 대하여 그 아들의 시대에야 내리시기로 하셨습니다. 겸손한 사람만이 죄에 대하여 마음으로 통회합니다.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신다고 하신 것은 교만한 자는 끝까지 회개하기를 거절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사람이 언제 겸손해 지는 것입니까?

①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될 때 겸손해집니다. 바리새인은 자신의 죄를 바라볼 수 없었으므로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자신의 의로운 행위에 대하여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자신의 죄를 통절히 느꼈으므로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고 자신의 죄를 자복하면서 회개한 것입니다.

② 사람이 자신의 무익함을 느낄 때 겸손해 집니다. 탕자의 경우가 그러했습니다. 그는 최종적인 삶의 위기에 가서야 스스로 돌이켜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고 했습니다. 돈과 명예와 권세와 건강으로 인하여 교만한 사람들은 그 교만의 조건들을 제거해야 낮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③ 그리고 사람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바라보았을 때 겸비해집니다. 하나님의 영광 앞에 그 어느 누구의 교만도 꺾여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의 성전에 충만한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서 떨면서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아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고 가슴을 쳤습니다(사6:5).

(2) 어린아이들이란 하나님의 나라를 받드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막10:15). 받든다는 말은 공경하며 높인다는 뜻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어른들이나 위에 있는 분들을 공경하며 높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온유하고 순결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같은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게 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3. 아버지와 아들을 알 수 있는 계시 27절에서 주님은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아들이란 독생하신 하나님, 말씀이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을 가리키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를 받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이같은 그리스도의 비밀을 알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란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을 가리키십니다. 죄인을 정죄하시는 분이 아니라 그 죄인을 사랑하셔서 그의 아들을 십자가에서 속죄 제물로 주신 하나님이십니다. 만 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이름을 생명록에 기록하시고 그의 백성들을 피로 값주고 사신 그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계시는 누가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까?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다”고 했습니다(고전2:10).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신 것입니다(고전2:12). 결론 : 하나님은 이 같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 수 있는 지혜를 세상에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셨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린아이로 돌아가야 합니다. 어린아이들의 맑고 깨끗하고 순박한 심령으로 돌아가 겸손을 배우고 하나님의 나라를 받들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고 우리의 마음이 교만하고 죄에 대하여 회개하는 마음이 없이 하나님께 나오면 고라신이나 벳새다 사람들처럼, 가버나움 사람들처럼, 화를 당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 110 ≈ 예수님의 인생 초대장 (본문 : 마태복음 11 : 28 - 30)

서 론 : 성경에는 ‘오라’는 말씀이 600번나 나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예수님이 인생들을 향하여 내게로 오라고 하시는 인생 초대는 오직 한곳에만 나와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신 오늘 본문 말씀은 오직 한 사람만이 자신 있게 인생들에게 하실 수 있는 말씀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이 말씀을 하실 수 있는 것은 그 분이 이 인생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이 주님의 초대의 말씀을 듣고 그에게 갈 때 그는 말할 수 없는 위로와 위안과 축복을 받습니다. 주님은 이것을 쉼이라는 말씀으로 표현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말씀을 거역하고 그에게 오는 것을 거부할 때 그에게는 안식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같은 사람의 인생은 멸망일 뿐입니다. 주님이 내게로 오라고 하신 말씀은 오늘날 우리가 전하는 복음을 말합니다. 주님은 지금도 복음을 통해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방황하는 인생들을 향하여 내게로 오라고 하십니다. 오라고 하신 말씀은 인생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 줄 수 있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같은 약속은 인생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해 주실 수 있는 권능이 그분에게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능력도 없으면서 오라고 한다면 이같은 일은 사람의 생명을 도적질하는 강도일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이런 생명의 사기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생명의 참 목자로 오신 분입니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요10:10). 1. 누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들인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이란 누구를 가리킨 것입니까? 이 말씀은 온 인류를 안중에 두시고 하신 말씀입니다. 모든 인생은 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인생 길을 쉼 없이 걸어갑니다. 주님은 이 같은 인생을 불쌍히 보시고 다 내게로 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1) 수고하는 자란 고된 삶의 멍에를 메고 이 땅에서 고통을 저주 속에서 고통을 당하고 살아가는 인생을 가리킨 것입니다. 인생은 에덴에서 쫓겨난 후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게 되었습니다. 수고하고 라는 헬라어는 ‘코피온테스’(κοπιώντες)로 이 말의 뜻은 현재 계속 피곤하고 불안한 상태에 있는 것을 말합니다. 인생의 이런 수고는 죄로 말미암아 온 것입니다. 죄를 범한 아담에게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고 하셨습니다(창3:17). 아담의 후예들인 모든 남자들은 그 이마에 땀을 흘리는 수고가 없이는 인생을 살아갈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수고의 결과도 헛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으로 소득이 무엇이랴 일 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이라 그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고 했습니다(전2:22-23). 또 여인들은 죄로 인하여 잉태하는 고통의 수고를 받았습니다.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창3:16). 이처럼 인생은 남녀를 물론하고 일생 동안 이같은 수고를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인생들은 이런 수고로 그의 생애에 눈물이 따르고 질고가 따르며 시련과 고난과 환난이 따르고 그 결과 그의 인생이 만신창이가 된 채 그 마음에서 탄식과 슬픔이 그쳐질 사이가 없는 것입니다.

(2) 무거운 짐이란 율법의 멍에와 죄의 멍에를 가리킨 말입니다. 무거운 짐진 자란 말은 ‘페풀티스메노이’(πεφορτισμἐνοι)로 이 말의 뜻은 자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타의에 의해 계속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인생들이 지고 살아가는 율법이나 양심이나 죄는 지기에 곤비한 무거운 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은 율법을 가리켜 지기 어려운 짐이라고 하셨습니다. “너희 율법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 도다”고 책망하셨습니다(눅11:46). 그러면 왜 율법이 인생에게 무거운 짐이 된 것입니까? 이에 대하여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라고 선언하게 하시고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아멘’으로 화답하게 하셨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법이기 때문에 지키는 일에도 온전하고 거룩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된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약2:10). 죄 역시 인생들에게 무거운 짐이 되고 있습니다. 죄는 어느 국한된 사람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음으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했습니다. 죄는 어떤 특정한 범죄만을 가리킨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육신으로 행하고 있는 모든 것이 곧 죄악인 것입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했습니다(롬8:13). 다윗은 자신의 죄를 생각하면서 이처럼 탄식했습니다.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감당할 수 없나이다”고 기도했습니다(시38:4). 이 두 가지 인생의 짐은 아무라도 한평생 벗어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인생이 이 짐을 의식하게 될 때 그이 입에서 절망의 탄식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


2. 다 내게로 오라

예수님은 이런 절망적인 인생들에게 “다 내게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같은 인생들에게 소망을 주시며 그들을 파멸에서 구원하시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이끄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그래서 다 내게로 오라고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생들이 자기에게 오는 일에 대하여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요6:37). 다 내게로 오라고 하신 것은 그의 초청에 제한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누구든지 입니다. 그 초청의 시간도 제한이 없습니다. 언제든지 입니다. 이 같은 부르심은 에덴에서 이미 들려 주셨습니다. 범죄한 아담을 향하여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부르셨습니다. 주님은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하셨습니다(마9:13).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이처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벧전1:15). 예수님의 초청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에 대한 안식에 있습니다. 내게로 오라고 하신 주님은 그 다음 말씀으로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쉬게 하리라고 하신 말씀은 영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이것은 첫째로 우리 영혼의 만족입니다.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의 영혼을 소생케 하심으로 우리에게 소망이 있게 하고 영원한 생명으로 말미암아 만족을 안겨 주십니다. 다음에 우리 마음의 평안입니다. 이 평안은 사죄의 은혜에서 오는 평안으로 우리 마음속에 모든 불안과 걱정을 제거하고 오히려 즐거움과 안정을 줍니다. 결론 : 그리스도인의 안식은 궁극적으로는 천국에서 완성되지만 현세적으로는 우리의 생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육신적인 모든 염려와 걱정이 사라지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주님을 의뢰하며 그의 인도하심을 받는 생활이기 때문에 쉼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오늘 이 시간에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을 향하여 내게로 오라고 부르십니다.


≈ 111 ≈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본문 : 마태복음 11 : 29 - 30) 서 론 :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신 말씀은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라고 하신 말씀에서 곧 마음의 안식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인생의 참 안식은 먼저 마음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그 마음의 안식은 그 곳에 천국이 이루어질 때만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같은 안식을 누릴 수 있는 비결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우리들 마음에 간직하면 우리들의 마음이 쉼을 얻게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1. 인류가 메어야 할 무거운 짐

예수님이 오시기 전, 인류는 두 가지 멍에를 메고 살아왔습니다. 하나는 죄의 멍에요 다른 하나는 율법의 멍에입니다. 그러던 것이 주님이 오심으로 한가지 멍에를 더 주셨습니다. 그것이 내 멍에라고 하신 새로운 예수의 멍에입니다. 인간들은 죄라고 하는 어쩔 수 없는 멍에를 메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로마서에는 이같은 인간의 죄에 대하여 분명한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하므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롬5:17-19). 이런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인간의 죄가 우리들이 이미 이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으로 이 죄의 멍에를 메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멍에가 심히 무겁다는 것은 그 죄 값이 엄청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망이라고 하셨습니다.

(2) 율법은 인생들에게 무거운 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율법을 받은 백성은 이스라엘이지만 이방인들은 양심이라고 하는 마음의 율법을 멍에로 지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은 인간이 마땅히 지켜야 할 하나님의 법입니다. 이것을 지키면 생명을 얻고 지키지 못하면 저주를 받는 것입니다. “이 율벅의 모든 말씀을 실행치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고 말씀했습니다(신27:26). 이처럼 율법은 지키지 못하는 자에게 저주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사람이 이 율법을 지키는 일로 하나님의 의나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까? 사도 바울은 율법에 대하여 결론적으로 이처럼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한 것입니다(롬3:20). 원래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이 인간으로 하나님 앞에 죄인이란 사실을 깨닫게 하시려는데 있기 때문에 율법으로 의를 얻거나 생명을 얻으려는 노력은 헛된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3) 율법이나 양심의 멍에 뿐 아니라 인간에게는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살아가는데 있어 육신적으로 저야 하는 무거운 짐도 있습니다. 이 짐은 아담이 범죄한 후 하나님의 저주로 내려졌기 때문에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하여 전1:12절에서 “나 전도자는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궁구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 내가 하늘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고 했습니다. 인간들은 이 모든 짐으로 인하여 피곤에 지쳐 있는 것입니다.


2. 내 멍에를 메라

이 같은 인생들을 향하여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우리가 져야 할 다른 또 하나의 멍에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 멍에가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내 멍에라고 하신 그리스도인들의 멍에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의 멍에란 어떤 것인가? 우리에게 메리고 권고하시는 내 멍에라고 하신 주님의 멍에란 무엇을 말씀하신 것인가? 주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멍에는 온유와 겸손의 멍에입니다. 이 멍에를 우리가 메고 주님을 배우게 되면 우리의 마음이 쉼을 얻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1)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배우고 메야 할 멍에는 온유입니다. 온유란 부드러운 마음을 말합니다. 사랑의 마음을 가리킵니다. 상한 갈대도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아니하시는 마음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되 십자가에서 그들을 위해 기도까지 하신 그런 마음입니다. (2) 다른 또 하나의 멍에는 겸손의 멍에입니다. 주님은 겸손하신 분입니다. 말씀이 육신으로까지 낮아지셨습니다. 부요하신 분으로 가난하시기까지 낮추셨습니다. 심판주이시면서 친히 인류의 죄 값으로 스스로 심판을 받아 십자가에서 죽어 주셨습니다. 남을 대접하시고 남을 자기보다 높이시고 제자들의 발까지 씻기신 분입니다. 이 같은 주님의 마음을 우리 마음에 간직하면 우리의 마음이 쉼을 얻게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런 그리스도의 마음을 우리는 하루 아침에 배울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분명히 하나의 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은 이 짐을 내 멍에라고 하셨습니다. 이 멍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져야 할 멍에입니다. 그런데 이 멍에는 지기에 쉽고 가볍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무거운 율법과 죄의 멍에를 벗은 사람들입니다. 주님이 대신 저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이 지라고 하신 멍에를 메야 합니다. 이 멍에는 성령의 힘으로 지기 때문에 쉬운 멍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멍에를 메는 일은 주님을 배우는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으로 부터 배워야 합니다. 온유한 마음은 죄에 대한 회개에서 나옵니다. 죄는 사람의 마음을 완악하게 만듭니다. 죄는 우리 마음속에 두려움과 불안을 심어줍니다. 회개한 마음속에 온유한 마음이 싹트는 것입니다. 온유한 마음은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는 마음에서 나옵니다. 온유한 마음은 사랑에서 나옵니다. 온유한 마음은 십자가를 지는 고난에서 자랍니다. 겸손은 언제나 자신의 부족을 아는 데서 나옵니다. 자기는 모든 사람 중에서 가장 작은 존재림을 여길 때 생깁니다. 겸손은 자기의 부족을 발견할 때 이루어집니다. 주님의 가르치심은 온유와 겸손입니다. 우리가 늘 그의 가르침을 명심하여 그리스도를 배울 때 우리는 온유와 겸손의 그의 멍에를 메는 가운데서 우리의 마음의 참 안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살아가면 구원의 확신과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하늘의 상급을 소망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결론 : 주님은 우리가 저야 할 무거운 짐을 저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에게 온유와 겸손의 멍에를 메라고 하셨습니다. 이 멍에는 지기에 가벼울 뿐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쉼을 얻게 하고 영생을 얻습니다. 우리는 이 새로운 멍에를 반드시 메야 합니다. 이것을 벗으려는 사람들은 율법과 좌의 멍에를 다시 멜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멍에를 메고 주님을 배우는 생활로 우리의 마음에 쉼을 얻고 소망으로 자기 생애를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태복음 12장 설교

◆ 밤중소리 03-01 | VIEW : 9,550

≈ 112 ≈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

(본문 : 마태복음 12 : 1 - 8

서 론 : 복음서에서 안식일에 관한 논쟁은 주님과 바리새인들 간에 신랄하게 펼쳐지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안식일을 범하는 일은 그 법대로 집행한다면 사형에 해당되는 일임으로 바리새인들은 안식일 문제로 예수님을 책잡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율법에 밝은 지식을 가진 랍비들을 예수님의 행렬에 끼게 하여 율법을 어기는 사례를 일일이 확인하므로 법적인 증거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어느 안식일에 제자들과 함께 밀밭 사이로 지나가시게 되셨습니다. 이 때 주님의 제자들이 매우 시장한지라 그 밀밭에 있는 밀 이삭을 잘라먹었습니다. 이것이 문제의 발단이 된 것입니다.

1. 최초의 안식일

성경에 나오는 최초의 안식일은 창세기 2장에 나옵니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이 안식일을 제정하시고 하나님이 안식일을 지키시고 하나님이 이 안식일을 축복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창조주로 하나님과 함께 창조에 참여하셨기 때문에 주님이야말로 안식일의 주인이 되시는 분입니다(골1:15-17).

안식일은 이처럼 원래가 하나님이 안식하신 날로 축복하신 날입니다. 하나님은 이 같은 축복을 이스라엘에게 주시려고 안식일을 율법에 정하시고 이 안식일을 지킬 것을 명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안식하신 안식일의 참 의미는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이 안식은 하나님의 창조의 엿새 마지막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인간에게 안식의 축복을 주시려는 의도에서 이 날을 거룩하게 하시고 아담과 그의 자손들로 이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케 하시려는데 목적이 있으셨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하나님 앞에 범죄 하므로 이같은 안식의 축복을 상실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안식의 땅으로 특별히 만들어 놓은 에덴에서 내어 쫓겼습니다. 그 이후 사람들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면서 인간의 참 안식을 그리워하게 된 것입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언약하신 가나안 땅이 그들의 안식의 땅인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나안에서 결코 안식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이 안식일의 참 모습이 히브리서 4장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는 말씀에 나타나 있습니다(히4:8). 제 7일에 관한 성경의 설명은 하나님의 안식으로 ‘내 안식’이라고 말씀해 주셨으며 순종하는 자들이 그 곳에 들어갈 수 있는 천국이란 사실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천국의 모형입니다.

2. 구약의 안식일

구약에는 모세의 율법에 처음으로 안식일에 관한 규례가 나옵니다. 율법에서 제 4계명으로 안식일의 규례를 주심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안식일은 절대적인 요소가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율법에 따라 지킨 안식일은 오늘 우리가 지키고 있는 안식 후 첫날인 주의 날이 아니라 토요일입니다. 원래 율법이란 이것을 지키면 생명을 얻고 지키지 못하면 저주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구약시대는 율법이 사람을 주장하여 정죄하였고 심판의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안식일을 어기는 일은 곧 저주를 자초하는 일이며 하나님의 두려운 심판의 대상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을 더 잘 지키려는 의도에서 율법에서 명한 것 외에도 소위 장로의 유전이란 것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으로 지게 했습니다. 그러나 율법은 결코 의의 전제 조건으로 주신 규례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을 지키는 일은 의를 얻는 조건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같은 문제에 대하여 갈라디아서에서 두 가지 분명한 교훈을 들을 수 있습니다.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2:16).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서냐 듣고 믿음으로냐”고 했습니다(갈3:2).

3. 신약시대와 안식일

그러면 신약 시대에 와서 안식일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그 해답이 성경에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골2:16절에서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치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월삭이나 절기처럼 안식일도 장래 일의 그림자라고 했습니다. 월삭이나 절기가 율법적인 절기로 폐해졌다면 안식일 역시 율법적인 절기로 폐해져야 마땅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들은 그것을 법대로 지키지 못할 때 율법이 규정한 온갖 저주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들은 다른 모든 율법적인 절기도 함께 지켜야 하며 율법에 규정된 모든 법도 온전히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신약 시대는 실체가 되신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에 그림자인 안식일은 다른 율법과 함께 폐해졌습니다. 온전히 성취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날로 지키는 날은 ‘주의 날’입니다. 주의 날이란 주님이 죽음의 권세를 깨치시고 다시 살아나신 부활의 날을 말합니다. 주님의 부활은 안식의 완성입니다.

안식은 쉼을 얻는 것인데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쉼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안식일 대신, 주일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주일이 안식일의 대 용품으로 생긴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안식일은 영원히 없어졌습니다. 법에 얽매어 저주나 받을 안식일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날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우리는 그의 영원한 생명과 연합되었기 때문에 이미 안식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날로 ‘주의 날’을 주셨습니다. 주의 날은 율법적으로 지키는 날이 아닙니다. 즐거움과 감사와 사랑으로 지키는 날입니다. 우리는 율법을 지키는 자에게 생명을 약속하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 아들을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십계명에 대하여 새로운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십계명은 그리스도인의 영원한 도덕률이라고 하지만 여기서 4계명에 나오는 안식일은 이 도덕률에서 제외시켜야 합니다.

주님은 밀 이삭을 잘라먹었다고 정죄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성경적인 근거를 대시면서 다윗 왕의 경우를 예로 들어 공격하셨습니다.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겨다닐 때 놉에 있는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가서 제사장외에 먹지 못하는 전설병을 먹은 사례를 드시면서 아무리 율법이 금지시킨 성별된 떡이라도 배고파 죽을 지경에 이른 하나님의 백성들의 생명을 건지는 일에 허용된다는 사실을 밝히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 다른 한가지 사례를 들었는데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일을 범해도 죄가 되지 않는 다는 사실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짐승을 잡는 일이나 떡을 진설하는 일 등등이 그런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같은 일은 율법이 정죄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안식일은 하나님을 예배드리는데 그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모든 바리새인들에게 깜짝 놀랄만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느니라”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고 하신 말씀이 그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안식일을 지켜야 할 사람들이 아닙니다. 폐해진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은 구약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지키는 주일은 안식일이 아닙니다. 안식일의 규례대로 주일을 지키려는 사람들은 잘못된 사람들입니다.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며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날로 천국의 영원한 안식을 소망하면서 기쁨과 감사함으로 이 날을 지켜야 합니다.

≈ 113 ≈ 안식일의 참 의의

(본문 : 마태복음 12 : 9 - 13)

서 론 : 예수님을 송사하려는 무리들은 예수님이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 따라다녔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을 주로 회당에서 지내셨기 때문에 회당까지 찾아 들어왔습니다. 회당이란 안식일에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곳인데 예수님을 송사하려는 무리들은 율법적인 근거를 잡아 예수님을 송사할 목적으로 예수님의 뒤를 따라다녔습니다. 그들은 먼저 예수님께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일이 옳은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분명한 해답을 듣고 올무에 걸리게 하려는 간계에서 그리한 것입니다. 랍비들의 안식일 해석에 따르면 사람의 병을 고치는 일은 하나의 의료 행위이기 때문에 안식일에 병 고치는 일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이런 질문에 예수님은 구덩이에 빠진 한 마리 양의 비유를 통해서 기묘하게 말의 올무에서 빠져 나왔습니다. 그리고 한편 손 마른 사람의 손을 고쳐 주셨습니다.

1. 무엇이 더 귀하냐?

유대인들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사람이 이 안식일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로 안식일의 종을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이 사람들에게 즐거운 날이 되지 못하고 어기면 형벌 받는 날이요 지키려면 힘겨운 날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안식일의 종의 자리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셨습니다. 안식일의 멍에를 벗어버리게 하시고 저주나 정죄를 받음이 없이 하나님을 진정과 신령으로 예배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고 하신 것입니다(막2:27-28).

안식일을 주신 하나님의 목적은 일에 지친 피곤한 인생들에게 쉼을 주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날에 감사와 즐거움과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이같은 목적에서 벗어나 안식일 때문에 사람들을 정죄하고 사람들이 지기에 곤비한 무거운 짐을 지게 하여 오히려 사람으로 더 큰 정죄의 멍에를 메게 만들었습니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고 하신 말씀은 예수님은 안식일을 제정하신 분이시며 안식일의 올바른 정의를 내리실 수 있는 분이심을 밝히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안식일관 만이 참 진리가 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런 영적 진리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안식일의 주인이 되신 분을 오히려 율법으로 정죄하기 위해 송사하려고 음모를 꾸몄던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이 더 귀한 것인가에 대하여 올바른 판단을 내려야 합니다. 그 순서는 이렇습니다. 안식일보다 더 귀중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람의 생명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보다 더 귀한 것은 바로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이십니다.

2.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예수님을 송사하려는 무리들은 언제인가 가이사의 화상이 그려진 동전을 가지고 와서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은 것이냐? 옳지 않은 것이냐? 고 질문한 일이 있습니다. 이때 주님은 가이사의 것을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에게 바치라고 하시므로 그들은 이 기이한 주님의 대답에 송사하려든 그들의 음모가 무산된 일이 있었습니다. 이번에도 그들은 주님의 입에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옳으냐는 질문에서 이 문제로 주님을 송사할 수 있는 분명한 증거를 잡으려고 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눈은 일제히 주님께로 행했습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옳으냐는 그들의 질문에 주님이 어떤 대답을 할 것인가에 대하여 큰 관심을 가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주님이 가지신 특유의 지혜로 그들의 올무의 함정을 기묘하게 피하셨습니다. 주님은 모세에게 율법을 주실 때 그들에게 명하신 말씀을 상기하면서 이처럼 물었습니다.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이런 질문에 유대인이라면 아무도 아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율법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네가 만일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만가거든 반드시 그 사람에게로 돌릴 찌며 네가 만일 너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을 싣고 엎드러짐을 보거든 삼가 버려 두지 말고 그를 도와 그 짐을 부리울찌니라”고 하셨습니다(출23:3-5).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안식일과 상관없이 따라야 할 명령입니다. 만약 안식일에 일어난 일이라고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면 분명히 율법을 어긴 죄를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예수님은 이 말씀으로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일이 율법에 저촉되지 않을뿐더러 합당한 일이란 사실을 강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가치를 참으로 귀히 여기십니다. 하나님은 박 넝쿨로 인하여 뜨거운 햇살로 혼곤하여 하나님 앞에 불만을 토했을 때 요나를 향하여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만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죄우를 분별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욘4:10-11). 하나님은 이처럼 사람의 생명뿐 아니라 육축의 생명까지 아끼시고 사랑하심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으로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일이 그들이 주장하는 율법에 따라 합법적인 일임을 증거하신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이 문제를 가지고 더 이상 왈가왈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구원하는 일에, 사람의 구하는 일에 안식일이 장애가 될 수는 없습니다. 짐승의 생명까지도 귀하 여기시어 구덩이에 빠져있는 것을 반드시 건져내야 하겠거늘 하물며 사람이야 이들 짐승보다 얼마나 더 귀한 것입니까?

3. 안식일의 의의

안식일은 그 규례를 어기는 사람을 정죄하기 위해 제정된 것이 아니라 사람의 안식과 하나님을 경배하는 날로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회당에 가셨습니다. 그 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배 의식에 따라 하나님께 경배 드렸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안식일은 이처럼 복음을 전하므로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안식일은 선한 일을 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선의 표준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데 있습니다. 구제하는 일도 안식일 여부에 관계없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일입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있는 날입니다. 누구라도 안식일 때문에 그의 신앙 생활이 속박을 받을 수 없습니다. 안식일을 사람을 위해 유익하게 사용하면 그 이상 좋은 일은 없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날을 일용할 양식을 얻는 일에 사용하고 육신의 정욕을 이루는 일에 사용하고 세상 재미를 만족시키는 일에 사용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안식일을 지키지 못했던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지금 율법과 같은 어떤 의문에 쓴 법에 얽매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께 메어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강제적이요 정죄적인 율법은 이제 영원히 그 자취를 감췄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애는 예수를 위해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모든 날이 이런 날입니다. 그러나 특별히 하나님을 경배하는 날로 주의 날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날을 거룩히 구별하여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복된 날로 지켜야 합니다.

  

≈ 114 ≈ 자기를 나타내지 아니하신 이유

(본문 : 마태복음 12 : 14 - 21)

서 론 : 예수님의 메시야적 사명은 소리 없이 조용히 진행되어 나가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지 말 것을 항상 당부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이사야서에 기록된 메시야에 대한 예언에 근거했습니다. 이 예언에서 메시야의 사역에 대한 특징에 대하여 몇 가지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나의 택한 종 나의 사랑하는 자로다.

예수님에 대하여 하나님의 택하신 종으로 나와 있습니다. 메시야는 하나님의 택하신 종입니다. 종이란 말은 예수님의 비하를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됐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택한 종이란 사람의 몸으로 자기를 낮추어 세상에 오신 그의 독생자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대속의 죽음을 이루시기까지 복종하여 아버지의 뜻을 성취하신 하나님의 택한 종이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독생자를 가리켜 “내 마음에 기뻐하는바 나의 사랑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인류 가운데서 오직 예수님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생활을 하시고 그의 생애를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요16:8). 최초로 지으심을 받은 아담은 불순종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지 못했습니다. 그 이후,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을 주는 인간은 없었습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했습니다(롬5:12). 모든 인류는 이처럼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원수의 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을 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인으로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나타내실 때 내가 기뻐하는 자란 말을 쓰셨습니다.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지으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의 아들 안에서 기뻐하십니다. 우리 역시 그 아들을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이 항상 그와 함께 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면 하나님이 우리를 혼자 두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생애에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이유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라”고 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뜻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고 기도에 응답해 주시고 강건함을 주시고 범사에 축복해 주시려고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표현하심에 있어서 “나의 사랑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사랑하는 자라고 나타내신 ‘호아가페토스“란 말은 ”오직 유일하게 사랑하는 자란 뜻으로 하나님께 오직 한 분뿐이신 독생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 말입니다.

  

2.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은 온 세상에 하나님의 심판을 알게 하시는 사명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가 바로 하나님의 심판의 표적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심판이라고 하는 ‘크리시스’란 말은 정죄, 공의, 의를 가리키는 말로 용서하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신 말씀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에 대하여 정의하시기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라고 말씀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는 것을 최종적으로 심판 받을 죄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보내신 그의 아들을 믿으면 우리는 모든 정죄에서 벗어나고 하나님의 심판을 이길 수 있으니 예수님께서는 이 같은 사실을 이방에 알리시기 위해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3. 메시야로서의 주님의 성품

19절부터는 메시야로서의 주님의 성품에 대하여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예언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온유하시고 겸손하신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1) “그가 다투지 아니하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악의에 찬 모함을 들으셨지만 그들과 다투지 아니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에는 누구에게나 사랑과 진실이 가득차 있었습니다. 주님은 혹은 비유로 혹은 예화로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깨우쳐 주시는 일에 성의를 다하셨습니다. 주님은 헤롯왕 앞에서도 입을 열지 아니하셨으며 빌라도 앞에서도 잠잠하셨습니다. 이사야는 주님의 이같은 성품에 대하여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땡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고 했습니다(사53:7). “미움을 다툼을 일으킨다”고 했습니다. 다툼을 일삼는 사람의 마음에는 시기와 증오로 가득차 있습니다. 주님이 비록 그 원수의 무리들과도 다투지 아니하신 것은 그에게는 미움이 없으시고 사랑만이 충망하시기 때문입니다.

(2) “들레지도 아니하신다”고 했습니다. 들렌다는 말은 큰소리로 떠드는 모양을 가리킵니다. 주님은 언제나 많은 군중들을 피하셨습니다. 대개의 경우 주님의 주옥같은 진리의 말씀은 단 둘이나 아니면 몇 명 안 되는 조용한 곳에서 하신 말씀들이 많습니다. 빈 그릇이 큰소리를 낸다고 거짓된 일꾼일수록 큰 소리를 칩니다. 주님의 그 어느 말씀 가운데서도 대중의 인기를 얻으려는 생각이나 환심을 사려는 의도에서 야단스럽게 떠든 일이 없습니다.

(3) “상한 갈대도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신다”고 했습니다. 갈대란 허약한 식물입니다. 바람에 간들간들 나부끼는 존재입니다. 그 갈대가 상했다고 했습니다. 상한 갈대란 죄인들을 비유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죄로 아무 소망도 없는 상한 갈대들입니다. 예수님은 이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꺼져가는 심지란 그의 생명이 마치 풍전등화와 같은 위급한 상태를 말합니다. 꺼져간다는 말은 ‘투포메논’으로 계속하여 꺼져가며 빛을 잃어가는 절망적인 상태를 말합니다. 주님은 가라지까지도 심판의 날까지 남겨두시고 회개하기를 기다리시는 분입니다.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을 불쌍히 보시고 정죄치 아니하신 분입니다. 우리는 베드로가 그의 서신에서 교훈해 주고 있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잊으면 안 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벧후3:8-9).

  

결론 : 주님은 온전하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의 이런 사랑은 최후의 심판 날 까지 변함없이 계속될 것입니다. 그의 이런 사랑으로 인하여 많은 이방인들이 그 이름을 바라며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어떤 죄인도 아무 두려움 없이 그 앞에 가까이 오기를 바라십니다. 그 날에 나가는 자는 그의 이같은 자비와 사랑을 힙 )입어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의 축복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 115 ≈ 사단의 분쟁

(본문 : 마태복음 12 : 22 - 30)

서 론 : 사탄은 궤휼과 간교에 뛰어난 존재입니다. 이런 사탄의 간교와 궤휼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과 교회의 분쟁을 조장하는 일에 가장 유효하게 쓰여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같은 사탄의 역사가 자신들의 나라에서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인가? 주님은 “사단이 만일 사단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저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고 하심으로 그들의 나라에도 질서와 체계가 있고 엄격한 규율이 있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마치 범죄단체에 더욱 엄격한 규율이 있고 공상주의 국가에도 엄한 법이 존재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불법적인 일을 수행하려면 그만큼 규율이 엄해야 하는 것입니다.

  

1. 귀신의 왕을 힘입었다는 모함

사람들이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된 사람을 주님께 데려 왔습니다. 주님이 그 사람을 고쳐주시매 그 벙어리가 말을 하고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이런 장면을 바라본 사람들은 놀랐습니다. 그들은 다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고 말하면서 예수의 메시야 되심을 믿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주님으로부터 송사할 조건을 찾아 잡으려는 바리새인들은 고의적으로 주님을 비방하기를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힙 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이런 그들의 주장이 터무니없는 일임을 증거하기 위해 주님은 몇 가지 예를 들어 그들의 경우와 결부시킨 것입니다.

(1) 바알세불이란 귀신의 왕을 가리키는 말인데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귀신의 왕에 사로잡혀 있으면서 그 귀신의 힘과 능력으로 졸개 귀신들을 쫓아 낸다고 비난한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의 주장의 부당성에 대하여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 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사단이 만일 사단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저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분쟁은 가정을 파괴합니다. 분쟁은 교회를 혼란케 합니다. 분쟁은 어떤 조직이던 파멸시킵니다. 사탄의 나라가 유지되고 있는 것은 그들 나름대로의 계율이 엄격하기 때문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예수님이 귀신의 왕을 빙자하여 그 졸개들을 쫓아낸다면 귀신의 나라는 존재할 수 없을 것이 아니냐고 반론을 제기한 것입니다.

(2) 예수님은 그들에게 “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두 번째 증거로써 그들 자신의 경우를 들어 반격을 시도하셨습니다. 너희 아들들이란 바리새인들의 제자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들 중에는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귀신을 내쫓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귀신을 쫓아낸 일은 예수님만 하신 것은 아닙니다.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고 말했든데 이들이 누구였었는지는 모르지만 바리새인들 중에도 하나님의 권능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있었다고 하는 사실이 그 당시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막9:38).

그들에게 반격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이러했습니다. “만약 귀신을 쫓아낸다고 하는 사실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은 것이라면 너희 제자들 중에 귀신을 내어쫓는 자들도 결국은 귀신의 왕인 바알세불과 결탁한 것이 아니겠느냐 그러므로 이 일에 대한 바른 해석은 내가 아니라 너희 제자들이 들려줄 터인데 그들이 너희들의 재판관이 될 것이다”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에 감히 한 사람도 대항할 수 없었습니다.

(3) 이처럼 말씀하신 예수님은 그들에게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권이 미치는 곳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같은 하나님의 나를 세우기 위해 오셨으며 그의 복음을 통하여 그때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나라는 끊임없이 확장되어 왔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다는 사실은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으로도 분명하게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일어지기 전까지는 이 온 땅에 사단의 지배아래 있었지만 성령의 능력으로 사람에게서 사단이 내어쫓기고 사단의 활동이 제산을 받으며 죄인에게 구원의 복음이 전달되어 죄에서 해방되고 율법의 정죄에서 벗어나며 이 땅에 속하지 아니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일은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서 벌서 세워진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4) 성령의 권능에 의해 사단의 나라가 무너져 가는 모습을 주님은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 그 집을 늑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강한 자라고 하신 대상은 바로 귀신의 존재를 말합니다. 그 집에 들어가 그 집세간을 늑탈한다고 하신 말씀은 강도처럼 그 집을 강점하고 있는 귀신을 쫓아내고 그의 생명을 거지려면 그보다 더 강한 존재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으로 바로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내고 사단으로 구원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결론적으로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해치는 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는 빛으로 오신 분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사람만이 진리에 설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생명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사람만이 생명 가운데 행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모든 기적의 역사는 바로 성령의 능력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은 이 세상에 종의 모습으로 계셨지만 삼위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그 분이 하나님으로써의 권능을 행하시려면 육신으로 계시기 때문에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예수님으로 하나님으로서의 능력을 행하시도록 그와 함께 하셨던 것입니다. 성령과 예수님은 한 본체를 이루고 있는 한 하나님이시므로 성령의 능력이나 권능은 곧 예수님의 능력이나 권능이십니다. 이 일에 대하여 성경에는 주님께 성령을 물 붓듯 부어 주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2.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모함한 이유

바리새인들이 이처럼 예수님을 귀신의 왕과 결부시켜 모함한 것은 시기심과 고의적인 모함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능력과 권능으로 증거되는 주님의 메시야적 증거를 이제 더 이상 부인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에 당황한 그들은 고의적으로 모함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권능이 정말로 귀신의 왕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권능인 줄로 속으로는 인정하면서도 그를 메시야로 믿으려는 군중들에게 믿지 못하게 하려고 심술을 부린 것입니다.

그들의 이 같은 행동은 두 가지 원인에서 나왔습니다. 하나는 그들의 시기심입니다. 하나의 천한 목수의 아들이 자기를 스스로 메시야로 나타내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메시야적 예우를 받는 일에 시기한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들의 잘못된 메시야관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고 탄식하셨습니다. 바른 지식이 없을 때 사람들은 진리를 대적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 : 주님은 결론적으로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해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내 마음에서 내 가정에서 그리고 내 교회에서 분쟁의 요소를 제거해야 합니다. 분쟁은 황폐의 원인이요 멸망의 동기가 되는 것입니다. 사탄의 나라조차 분쟁이 없는데 우리 주변에 분쟁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무지는 가장 무서운 하나님의 대적자가 된다는 사실을 알고 예수를 알기에 게으르지 말고 우리의 마음을 온유와 겸손으로 단장해야 할 것입니다.

  

≈ 116 ≈ 사함 받을 수 없는 성령 훼방죄

(본문 : 마태복음 12 : 31 - 33)

서 론 :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한다”는 말씀은 주님이 친히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대단히 두려운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또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을 근거로 선량한 성도들을 현혹시켜 자신들의 잘못된 은사를 정당화시키고 불법적인 능력 행사를 비판할 수 없도록 악용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한 올바른 해석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1. 성경에 기록된 무서운 세 가지 죄

성경은 세 가지 죄에 대하여 정죄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회개할 수 없는 죄’라고 했습니다.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없다”고 했습니다(히6:4-6). 이 말씀의 뜻은 은혜의 체험이 많은 사람이 그 은혜를 고의적으로 저버리고 계속적으로 타락하는 자리에 있으면 회개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고 하신 의미의 말씀입니다.

다른 하나의 경우는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다고 했습니다.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고 했습니다(요일5:16-17). 사망에 이르는 죄를 범하는 자에게는 구하라 하는 말을 하지 않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고 권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어떤 죄를 범해도 나중에 회개만 하면 될 것으로 여기지만 결과적으로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다음 세 번째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성령 훼방죄’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애 동안 죄를 멀리해야 하겠지만 특별히 성령을 훼방하는 죄보다 무서운 죄가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여 이런 죄를 범하는 일이 없도록 지극히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2. 성령 훼방 죄란 무엇인가?

우리는 예수님의 ‘성령 훼방죄’에 관한 이 말씀이 왜 나왔는가에 대해 그 동기부터 살피는 일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된 사람의 병을 고쳐 주신 일에 많은 사람이 놀라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고 분요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뒤쫓으며 고소거리를 찾고 있었던 바리새인들은 ‘그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는 능력을 행한다’고 비방했던 것입니다. 주님은 이들의 이 같은 고의적인 비방과 모함에 대하여 성령 훼방죄를 언급하시고 이 죄에 대한 두려운 사실을 경종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 낱말에 대한 원어의 뜻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훼방이란 말은 ‘브라스폐미아’(βλασφημἰα)로 비방한다, 중상한다, 모욕한다 또는 명예를 훼손한다는 뜻으로 성령을 비방하고 모욕하고 명예 훼손을 하되 끝까지 비방하는 일을 말합니다. 다음에 성령을 거역한다고 하신 거역이란 말은 ‘카타’(κατἀ)로 정면으로 맞서 적대시하고 원수시하여 계속하여 싸우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1) 바리새인들의 비방은 알면서도 고의적인 행동에서 나왔습니다. 성령 훼방죄에는 고의성이 따릅니다. 고의성이란 알고도 고의적으로 계속적으로 비방하는 일을 말합니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이 진리의 말씀인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을 메시야로 인정하기를 스스로 거부하고 대적했습니다. 이처럼 잘못인 줄 알면서도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를 계속적으로 비방하고 대적한다면 그런 사람에게 무슨 구원의 소망이 있을 것입니까? 예수님의 능력은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으로 기이히 여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많은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그런 능력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왔음을 알았으며 이로 인하여 그들은 예수님이야 말로 그들이 기다려 온 메시야인 줄로 믿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유독 바리새인들은 주님의 권능을 눈앞에서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권능이 아니라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라고 악의적으로 모함했습니다. 이처럼 어떤 목적을 위하여 계속적으로 진리를 대적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비방한다면 그들에게 어떤 소망이 있을 것입니까? 결국은 멸망만이 있을 것입니다.

  

(2) 바리새인들의 고의적인 비방은 무지와 시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천한 목수의 아들이 율법을 무시하고 자신들에게 도전해 오는 일에 대하여 시기했던 것입니다. 많은 무리들이 그를 따르며 그의 교훈에 귀를 기울이며 그를 메시야로 인정하는 일에 그들은 견딜 수 없는 시기심이 발동되었던 것입니다. 주님이 가시는 곳마다 병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며 놀라운 이적을 행하는 일에 그들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투기심이 솟구쳤습니다.

이런 것들이 동기가 되어 그들의 마음에는 시긴의 불길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지 않았던 것은 증거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시기심과 질투심에서 온 악의적인 생각이 그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빌라도 까지도 바리새인들의 이같은 시기심을 간파하고 예수를 무죄 방면하려고 노력했던 것입니다. “저희가 모였을 때에 빌라도가 물러 가로되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하니 이는 저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 줄 앎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마27:17).

  

(3) 그들은 교만하므로 마음이 강퍅했습니다. 그들은 교만하므로 자신들의 지식이 가장 숭고한 것으로 알았고 그들의 외식적인 생활이 가장 율법적인 생활로 의롭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마음이 교만하면 진리를 배우려고도 알려고도 아니합니다. 그들의 교만은 예수님까지도 율법으로 정죄했으며 십자가에 달았습니다. 마음이 계속적으로 교만하면 양심이 화인 맞아 옳은 일도 부인하게 되며 성령의 감화도 거역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진리를 증거하셨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기적을 수도 없이 보여주셨습니다. 이제 그들은 아무 것으로도 핑계 댈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다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5:22-24).

  

3.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인자를 거역한다는 말은 인간 예수를 말합니다. 우리가 진리를 깨닫지 못했을 때는 예수님을 하나의 인간이나 인간 중에 훌륭한 성현쯤으로 여깁니다. 그런 분을 비방하고 거역하는 일은 불신자라면 누구에게나 있는 일입니다. 사도 바울도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행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을 보고 그것이 하나님의 성령의 권능인 줄 알면서도 이 같은 일을 행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거역하고 비방하고 고의로 대적하고 귀신의 왕이 행하는 일로 모욕한다면 그런 일은 용납 받을 길이 없는 것입니다. 이일이야말로 성령 훼방죄인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일을 행한 자에게 사하심이 없다고 하신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사하심이란 말은 ‘아피에미’(ἀπιἠμι)로 통감한다, 용서한다, 취소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그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는 회개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성령으로 중생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죄의 사하심은 회개로부터 오는 것인데 이 회개 또한 하나님의 은사요 선물입니다. 하나님은 강퍅하게 하실 자를 강퍅하게 하시고 회개케 하실 자를 회개시키십니다.

  

결론 : 죄의 사하심은 회개로부터 오는 것이며 이 회개야말로 하나님의 은사요 선물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완악하고 교만하여 고의적으로 성령이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훼방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시지 않으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항상 진리에 서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 117 ≈ 말에 대한 심판

(본문 : 마태복음 12 : 33 - 37)

서 론 : 주님의 권능을 귀신의 왕을 힙 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라고 비방한 바리새인들은 이제 그들이 한 말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 앞에 져야 할 일에 대하여 주님으로부터 엄중한 경고를 받게 됩니다.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말은 마음의 거울이요 인격의 표현이기 때문에 사람이 무슨 말을 하든지 그 말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말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말을 낸다”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사람의 말은 자기의 선이나 악을 표면으로 나타내는 수단이기 때문에 선한 사람이 어쩌다가 악한 말을 낼 수가 없고 악한 사람이 어쩌다가 선한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예수님을 비방한 말은 그들의 마음이 악하기 때문이며 그들이 성령을 훼방하고 성령을 말로 거역하는 일은 그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1. 좋은 나무에 좋은 결실을 맺는 자연의 이치

실과와 나무는 어쩔 수 없는 동반 관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나무로 실과를 알고 실과로 나무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과나무에서 포도 실과를 딸 수 없으며 포도가 사과나무에서 맺혀질 수 없습니다. 이것은 대자연의 이치입니다. 이 이치는 그 무엇으로도 변결시킬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같은 나무와 실과의 이치를 사람의 마음과 마음에 비유해서 교훈으로 들려주셨습니다. 이 예화에서 주님은 좋은 실과로서 자신의 경우를 말씀하셨고 나쁜 실과로서 바리새인들의 경우를 말씀하셨습니다.

  

(1)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이나 권능은 선한 열매임을 누구나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귀신을 쫓으신 일, 모든 병자를 고치신 일,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신 일, 죽은 자를 살리신 일 등 그 어느 것 하나 나쁜 열매로 나타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이런 선한 열매는 그 일을 행하신 분의 인격을 나타낸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런 이치에서 마땅히 예수님을 선한 분으로 인정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예수님을 귀신의 왕에게 사로잡힌 사람으로 모함했고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라고 비방한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바리새인들이 악하다고 하는 산 증거로 보이셨습니다.

  

(2) 주님은 바리새인을 나쁜 나무에 결부하셨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이란 말에서 그들의 근본이 나쁜 나무란 사실을 밝히셨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이란 독사의 후손들이란 뜻입니다. 이처럼 나무가 나쁘니 그 곳에서 맺는 실과가 좋을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들에게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바알세불에 잡혔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들이 나쁜 나무였기 때문입니다.

  

2. 성경에 기록된 말의 책임

성경에는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의 책임에 대하여 엄중하게 경종해 주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면(말로) 그를 반드시 죽일찌니”라고 명하고 있습니다(레24:16). 아합 왕의 아내 이세벨은 나봇이 하나님을 저주하였다고 거짓 증거하므로 그를 성밖으로 끌고 나가 돌로 쳐죽였습니다. 우리가 말로 주님을 부인하면 심판 날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부인을 당할 것입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고 하셨습니다(마10:33). 다른 사람을 말로 판단하는 일은 자기를 스스로 정죄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롬2:1). 성령을 말로 거역하거나 훼방하면 그 같은 사람은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받을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는 말에 대해 왜 이 같은 엄중한 책임을 지우는 것입니까? 그것은 말의 출처는 단순히 입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인격의 바탕이 되는 마음에 있기 때문입니다. 선한 말은 선한 사람에게서 나오고 악한 말은 악한 사람에게서 나온다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말이란 그 사람의 사람됨 그대로를 겉으로 나타내는 방편인 것입니다.

  

3. 무익한 말에 대한 책임

우리가 우연히 발설한 말이나 사소한 말이건 한번 입에서 나온 말이면 그 말에 대한 책임이 그 말한 사람에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도 “여호와여 내 입 앞에 파숫군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라고 하는 기도를 드렸던 것입니다.

야고보는 사람이 혀에 재갈을 먹이지 아니하는 자의 경건은 헛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나 만일 말의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약1:26). 죄인들인 인생 중에는 온전한 사람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누구에게나 말의 실수가 많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말의 실수가 없도록 늘 우리의 혀에 재갈을 물려야 할 것입니다.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고 했습니다(약3:6).

  

그러면 무엇이 무익한 말입니까?

(1) 다툼은 분노를 일으키며 분쟁을 가져옵니다. “다툼을 좋아하는 자는 죄과를 좋아하는 자”라고 했습니다(잠17:19). 다툼의 출처는 교만이라고 했습니다. “교만에서는 다툼만 일어날 뿐이라”고 했습니다(잠13:10). 미련한 자의 입술이 다툰다고 했습니다. “미련한 자의 입술은 다툼을 일으키고 그 입은 매를 자청하느니라”(잠18“6).

(2) 다른 사람을 판단하거나 비방하는 말은 무익한 말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입을 무겁게 지켜 다른 사람을 비방하거나 판단하는 말을 하지 않는다면 복이 있는 입이 될 것입니다.

(3) 희롱의 말이나 어리석은 말은 무익한 말입니다.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고 했습니다(엡5:4).

  

4. 선한 말을 낼 수 있는 비결

사람이 선한 말을 하려면 먼저 마음의 변화가 따라야 합니다. 마음이 선하지 않으면 그 입의 말이 선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마음은 그대로 두고 입술만의 변화로 말을 변화시켜 보려고 시도합니다. 그러나 이런 시도는 번번이 실패합니다. 입술을 조심하는 것만으로는 무익한 말을 삼갈 수 없습니다. 말의 변화는 마음의 변화에서 나와야 온전한 변화를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했습니다(잠4:23). 마음의 변화는 오직 하나님 앞에 회개하여 새 마음을 받아야 합니다. 이 마음은 성령이 임재 하심으로 이루러 집니다.

결론 : 그리스도인의 말은 언제나 진실해야 합니다. 언제나 선해야 합니다. 우리는 새 마음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나무는 좋은 나무입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지난날의 입술에서 나왔던 악하고 무익한 말을 버리고 좋은 나무에서 좋은 과실을 맺도록 힘써야 합니다.

  

≈ 118 ≈ 표적을 구하는 잘못된 신앙

(본문 : 마태복음 12 : 38 - 45)

서 론 : 유대인들은 그들의 조상이 출애굽 당시 하나님의 권능으로 많은 표적을 보고 체험했기 때문에 표적을 좋아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가나안에 대한 소망을 버리고 애굽을 사모했습니다. 복음은 표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이 실패한 것은 복음을 표적에서 찾으려 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서신에서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고 했습니다(고전1:22-24). 주님은 자기를 가리켜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비방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성령을 훼방하고 거역하는 자의 받을 무서운 심판을 경종하자 그들은 예수님께 당신이 메시야된 표적을 보여주기를 원한다고 요구했습니다. 표적이란 말은 ‘세메이온’(σημεἰού)으로 표시, 증거 또는 기적으로 이것은 외적으로 나타나는 놀라운 일들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1.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

예수님은 그의 생애 중에 참으로 놀라운 표적을 많이 행하셨습니다. 오병이어의 이적을 행하셨을 때에도 그 곳에 있었던 군중들은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고 말하면서 놀랐습니다(요6:14). “무리 중에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말하되 그리스도께서 오실 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의 행한 것보다 더 많으랴”고 말하면서 믿었습니다(요7:31). 그런데도 바리새인들은 더욱 분명하고 결정적인 표적을 보여 달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들이 요구한 표적이란 어떤 종류의 표적이었을까? 홍해가 갈라지는 것을 목도할 수 있는 결정적인 표적을 보여 주는 것으로 메시야된 증거로 삼으라고 한 것입니다.

이런 바리새인들의 요구에 우리 주님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직까지 자신을 메시야의 증거로 삼기 위해 나타내신 표적은 한번도 없으셨습니다. 주님은 이런 바리새인들의 요구에 따라 그들이 원하는 표적을 거절하셨습니다.

복음은 표적을 보여 주는 것으로 믿음을 줄 수 있는 종교가 아닙니다. 이들 바리새인들도 주님의 표적을 보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주님을 불신했으며 오히려 그같은 기적이 귀신의 왕을 힘입어 하는 것이라고 비방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그 말씀을 믿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아무리 큰 표적을 보여 주어도 믿음을 가질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했습니다.

기독교는 기적의 종교인 것이 아니라 믿음의 종교입니다. 성경에 기적에 관한 기사가 많이 나오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믿음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기적은 믿음에서 나왔지만 믿음이 기적에서 나온 것은 아닙니다. 믿음보다 기적을 바라고 그것을 따르는 신앙을 신비주의 신앙이라고 부릅니다. 이 신앙에 깊이 빠지면 신앙의 정상궤도를 이탈하여 거짓 예언, 거짓 은사, 거짓된 증거 등으로 많은 사람들을 영적으로 타락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표적으로 메시야의 증거로 삼으려는 바리새인들의 요구에 대하여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고 책망하신 것입니다.

  

2. 주님이 보여 주실 표적

주님은 그가 보여주실 한가지 표적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표적이란 곧 요나의 표적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요나의 표적에 대하여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속에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그의 죽으심과 그의 부활에 대한 예언이요 메시야이신 그의 참 표적이 되십니다. 세상에서 우리의 눈앞에 나타나는 표적은 메시야가 아니라도 할 수 있습니다. 출애굽 당시 애굽의 술객들 조차 지팡이를 던져 뱀이 되는 술수를 썼습니다. 또한 종말에 등장할 거짓 선지자는 짐승의 우상을 만들어 그 우상으로 말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짐승 앞에서 받은바 이적을 행하므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 저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되더라”고 했습니다(계13:13-15).

이런 표적은 사람을 미혹하여 짐승의 우상 앞에 경배케 하려는 사단의 간계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누구라도 표방할 수 없는 메시야된 진실한 표적이 주님께 있으신 것입니다. 주님은 그 표적을 요나의 표적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죽으시므로 밤낮 사흘간을 땅속에 묻혀 있으실 그의 죽으심과 그의 부활하심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메시야된 표적을 바로 이 표적에서 찾지 않으면 영원히 생명의 길을 찾을 길이 없을 것입니다. 복음은 바로 이 표적을 증거하는 진리입니다. “내가 받은 것은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신” 사건을 말하는 것입니다(고전15:3-4).

  

3. 니느웨 사람들과 남방 여왕이 일어나 바리새인들을 정죄할 것임.

주님은 죄악의 도성에 살고 있었던 니느웨 사람들이 오히려 바리새인들보다 더 의로우며 이방의 남방 여왕이 오히려 그들보다 더 지혜로웠다는 말씀을 들려주심으로 그들에게 경종을 삼으신 것입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했습니다. 위로는 왕으로부터 아래로는 그들이 기르는 짐승에 이르기까지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으며 굵은 베옷을 입고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불쌍히 여김을 받았으며 하나님은 그들에게 내리시기로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셨습니다. 이때 느니웨 사람들은 요나에게 표적을 보여 달라고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요나는 그들에게 아무런 표적을 보여주지 아니했습니다. 그들 역시 요구에게 표적을 구하지도 않았습니다.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고 전했던 것입니다. 주님은 이들이 바리새인들의 심판자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또 바리새인들이 잘 알고 있는 남방 여왕의 경우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이 여왕은 단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그 멀리 남방에서 예루살렘을 찾아온 것입니다. 예수님이 솔로몬 왕보다 더 큰 존재이심은 그는 메시야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주님으로부터 지혜로운 말씀을 들으면서도 그를 메시야로 알아보지 못한다면 그들은 심판 날에 남방 여왕이 증거가 되어 정죄를 받게 될 것입니다.

  

결론 : 주님은 악한 세대를 비유하시기를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 있을 곳이 없으므로 다시 옛집을 돌아왔을 때의 경우를 들어 이 악한 세대가 이렇게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벌써 그런 귀신의 거처가 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죽으심과 그의 부활의 신앙을 견고히 가지고 움직임이 없어야 합니다.

  

≈ 119 ≈ 천국민의 새로운 가족관계

(본문 : 마태복음 12 : 46 - 50)

서 론 : 어느 날 예수님이 무리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말씀을 가르치고 있을 때에 한 사람으로부터 그의 모친과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 있다는 전갈을 들으셨습니다. 주님은 복음을 전하시느라 오랜 기간 집에 들리실 기회가 없으셨습니다. 그런 중에 예수님에 대한 잘못된 소문이 모친과 형제들에게 전해졌습니다. 아마 바리새인들이나 그의 적대자들로부터 예수님이 귀신 들려 이상한 일을 하고 있다는 풍문을 들은 듯 싶습니다. 모친은 아마 이런 풍설을 듣고 주님을 찾아 왔을 것입니다. 주님은 모친과 동생들이 찾아 왔다는 말을 듣고 앞에 모여 있는 많은 무리들에게 하나의 새로운 교훈을 들려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천국민의 새로운 가족관계입니다.

  

1. 인간 사회의 가족 제도

우리가 교회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게 됩니다. 이 나라는 이 세상과 다른 하나님 나라의 사회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회에서의 생활이나 책임이 새롭게 부여됩니다. 교회란 하나님 나라의 하나의 거대한 가족입니다. 이 땅위의 가족제도는 한 집안에 부모와 형제들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육신을 낳아주신 분을 부모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은 비록 성령으로 잉태되어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이 세상에 육신으로 태어나게 해 주신 분이 계심으로 마리아를 어머니로 공경하고 섬기셨습니다. 5그리고 한 부모아래 같은 혈육으로 태어난 사람을 형제들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는 믿음을 가진 성도들을 한 형제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같은 인간의 가족 관계는 영적인 모순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같은 혈육의 한 가족이라도 신앙이 같지 아니하면 서로 미워하고 원수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처럼 육은 가까워도 영이 서로 대적하는 입장에 있으면 서로가 원수가 되는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경우만 해도 그의 형제들이라도 믿지 않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그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고 했습니다(요7:5).

혈육으로 맺어진 관계는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만 유효합니다. 그러므로 여인이 남편이 죽은 후에 다른 남자에게 시집가는 것은 죄가 아니라고 롬7장에서 밝혀 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살던 사람들이 그 가족관계를 그대로 가지고 내세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같은 일은 사두개인의 질문에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일곱형제의 경우와 그들과 함께 살아온 한 여인과의 관계에서 장차 부활의 세계에서 과연 뉘 아내가 될 것이냐는 질문에 예수님은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고 하셨습니다(마22:30),

  

2. 천국의 가족 제도

천국은 혈육과는 상관없이 영적 결합체인 하나님의 자녀들로 이루어집니다. 누구나 예수를 영접하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하나님 나라 사회에서 한 형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됐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한 아버지로 부르는 하나님의 자녀들로 한 형제라 부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 모두는 예수님의 피로 값 주고 사신 하나님의 자녀들이므로 영적인 형제자매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같은 가족관계는 하늘나라에까지 미치므로 영원히 존속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하나님의 자녀로 한 형제들이 됐다면 한 가족을 하나로 결속하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하나님 나라의 가족관계가 냉랭해 지고 끝내는 허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형제의 사랑에 대해 그토록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임을 알리라”고 하신 것입니다(요13:34-35).

사도 요한은 요일3:14절에서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므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안다”고 했습니다. 사랑은 이처럼 하나님의 가족 관계를 이루는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그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족은 계급이나 남녀의 구별에 구애를 받지 아니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그 어떤 사회적 명예나 권세를 가지고 있어도 교만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누구든지 한 형제로서의 사랑과 교제를 나누지 아니하면 그 사람은 스스로 하나님의 가족에서 떨어져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했습니다(요일3:16-18). 우리 예수님은 천국 가족관계에서 우리의 맏 형님이 되십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 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롬8:29).

  

3. 예수님이 말씀하신 형제와 자매와 모친

주님은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고 하신 후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내 자매요 내 모친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주님을 맏아들로 하는 하나님의 가정의 가족이 될 수 있는 필수적인 자격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란 누구를 말하는 것입니까?

(1) 아버지의 뜻은 첫째로 그의 아들을 믿는 자를 가리킵니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2) 아버지의 뜻은 우리로 회개하는 일입니다. 죄를 품고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길 수 없습니다. 주님은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고 하셨습니다.

(3) 아버지의 뜻은 우리로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일입니다. 순종이 없는 자녀는 자녀의 반열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 밖에서는 가족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비결은 그의 계명을 지키는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4) 아버지의 뜻은 우리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정하시고 선택하신 것은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엡1:4-5).

일단 하나님의 나라의 가족이 되면 아버지의 크신 사랑을 받게 됩니다. 우리 아버지인 하나님의 사랑은 혈육을 가지신 우리들 부모님 사랑에 비교할 바가 아닙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이나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할지라도 우리 하나님은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사49:15).

우리는 탕자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에서 아버지이신 우리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보게 됩니다. 우리가 혹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아도 이같은 사랑에서 나온 것임을 밝혀주는 것입니다(히12:7-8). 또한 하나님 나라의 가정에는 맏형이 되신 우리 주님의 크신 사랑이 있습니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사랑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요일3:16).

결론 : 우리가 일단 하나님의 가족이 되면 가장이신 아버지의 크신 사랑을 받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멸망 받을 죄인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가정의 가족이 된 사람들입니다. 교회에서 아름다운 형제의 가족 관계를 지속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13장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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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0 ≈ 씨뿌리는 비유

(본문 : 마태복음 13 : 1 - 23)

서 론 : 주님은 천국을 설명함에 여러 가지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겉으로 듣기에는 누구나 이해할 만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생활 주변에서 찾을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는 비유를 예로 들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비유하시는 뜻을 영적으로 깨닫는 자는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비유는 천국의 비밀을 깨닫는 일에 하나의 설명이 되지만 예수님을 고의적으로 배척하고 진리를 대적하는 자에게는 그 뜻이 전혀 밝혀지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진리를 알기에 더 혼선을 일으키게 되는 것입니다.

“귀 있는 자는 들으라”는 말씀은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복 있는 귀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고 하신 대상은 하나님의 백성들인 아니라 고의적으로 진리를 대적하는 바리새인들을 가리킨 것입니다.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비밀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비밀을 알기를 허락 받은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1. 길가에 떨어진 씨

주님은 교회에 모인 사람의 심령 상태를 표현하심에 있어 네 가지 형태로 구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오랜 기간 신앙 생활을 하다 보면 그들의 신앙이 여러 형태로 변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같은 사실에 대하여 주님은 씨뿌리는 비유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천국의 비밀을 밝혀 주심으로 끝까지 열매를 맺음으로 신앙생활에 승리하는 성도가 누구인가에 대하여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 쌔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씨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마음 밭에 심겨지는 생명의 씨앗입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좋은 씨를 뿌리는 자는 예수님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모든 복음 전도자들은 주님의 명령을 받아 이 씨뿌리는 자의 사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씨뿌리는 자의 사명을 받으려면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행1:8).

그런데 이 씨앗이 떨어지는 밭이란 그 말씀을 듣는 사람의 마음을 가리킨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심겨지는 곳은 사람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귀로 듣고 마음으로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받아 드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한 마음에만 머무릅니다.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신10:16). 하나님은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한다”고 하셨습니다(사55:7). 할례나 통회란 말은 회개를 가리키는 말들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사람의 마음이 마치 길가와 같이 단단한 사람이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길가라고 표현한 것은 마음이 강퍅하여 굳어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죄로 인하여 그 마음이 길가처럼 단단해져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의 마음에는 말씀의 씨앗이 들어갈 리 없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다만 건성으로 들을 뿐 아무런 흥미나 관심을 갖지 못하며 마음이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게 되는데 그들이 이들입니다. 이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마음을 단단하게 만들고 있는 죄를 회개시키는 성령의 능력이 임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나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회개하기 위해서는 예수님 앞에 나가야 합니다. 그의 보배로운 피만이 우리의 죄를 깨끗이 씻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2. 돌밭에 떨어진 씨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이 말씀에 대한 해석을 이렇게 하셨습니다. “돌밭에 뿌리었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돌이 많은 밭의 특징은 처음에는 땅이 얇은 연고로 싹이 곧 나오면서 어느 기간 급속하게 자랍니다. 그러나 좀 커지는 과정에서 따가운 햇빛이나 바람이나 더위에 견디지 못하여 그만 쓰러지고 맙니다. 이들은 처음에는 기쁨으로 복음을 받아 드리고 어느 정도 신앙 생활을 계속하지만 그러나 말씀으로 인한 환난이나 핍박이 올 때는 견디지 못하고 넘어지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뿌리가 없어서 말랐다고 하셨습니다.

진리인 신앙의 뿌리가 그들에게 는 없기 때문에 환난이나 핍박에 견딜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이 견디지 못한 환난이나 핍박에 대해 성경에서는 여러 가지 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함을 받으리라”고 하셨는데 대개의 경우 이런 핍박은 그리스도를 부인하므로 피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의 생애에 신앙 생활로 인하여 많은 환난이 찾아옵니다. 예수냐, 세상이냐, 신앙이냐, 돈이냐는 문제에 있어 주님을 배신하고 세상이나 돈을 선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돌밭이란 아직도 정결함을 받지 못한 마음을 말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불같은 시련으로 끊임없이 연단을 받아 정결함을 입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인내와 시련을 통해서 정결하게 되고 신앙이 성장하며 결실을 맺게 되는 것입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고 했습니다(롬5:3-4).

  

3. 가시 떨기에 떨어진 씨

“더러는 가시 떨기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복음의 씨앗이 가시 떨기에 떨어진 상태를 말합니다. 이 씨앗이 열매를 맺을 수 없는 이유는 그 가시나 엉겅퀴가 복음의 양분을 다 도적질해 가기 때문입니다. 엉컹퀴의 뿌리는 번식력이 강하여 그 주변에 광범위하게 뿌리를 잡기 때문에 이같은 밭에 씨를 심는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은 이 같은 밭에 대하여 설명하기를 “가시 떨기에 뿌리었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의 염려는 우리의 마음을 둔하게 하는 뿌리로써 우리의 신앙을 좀먹게 합니다. 어떤 사람은 한 평생 교회에 나오지만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가시밭에 해당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은 먼저 그 심령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결론 :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땅에 대하여 주님은 “좋은 땅이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라고 설명하셨습니다. 말씀을 깨닫게 하시는 분은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이끄시는 성령이십니다. 우리의 심령이 깨끗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면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심으로 열매를 풍성히 맺게 해 주십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마음을 열매를 맺는 좋은 땅으로 기경해야 합니다. 그래서 좋은 열매를 맺는 좋은 밭으로 가꿔 나가야 합니다.

  

≈ 121 ≈ 복 있는 귀

(본문 : 마태복음 13 : 10 - 17)

서 론 : 예수님은 씨 뿌리는 비유의 말씀을 하신 후, 이것을 알 수 있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이 허락된 사람이 있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도록 방치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복음은 듣고 깨닫는 범위가 한정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모든 귀는 복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주님은 복이 있는 귀가 따로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고 하셨습니다. 이 귀란 단지 듣는 일에 머물러 있는 귀인 것이 아니라 듣고 깨달아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귀를 가리킨 것입니다.

  

1. 제한되어 있는 천국의 비밀

복음은 두 가지 냄새를 품깁니다. 하나는 구원에 이르는 향기요, 하나는 멸망에 이르는 냄새입니다(고후2:15-16).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고 했습니다(고후2:15-16).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므로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되지 않은 사람들에게 대하여 주님은 그들의 귀는 듣기에 둔하게 하시고 그들의 눈은 보지 못하도록 감기셨다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로는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하심에서 라고 밝히셨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그들의 마음이 완악하고 성품이 강퍅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며 보아도 무엇인지 알지 못하므로 결국은 그 죄악의 상태에서 영영히 고침을 받을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책임은 온전히 자신들의 죄악에 있는 것입니다.

(1) 그들이 천국의 비밀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마음이 완악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15절에서 밝히시기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겨졌다”고 하신 것입니다. 완악해졌다는 말은 죄로 강하게 굳어진 상태의 마음을 가리킵니다. 이런 마음은 자신의 힘만으로는 절대로 열리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마음이 열릴 수 있도록 은혜를 주셔야 열립니다.

(2) 할례를 받지 못한 귀는 천국의 비밀을 깨닫지 못합니다. 할례 받지 못한 귀는 여호와의 말씀을 자기에게 욕으로 여기고 즐겨 아니한다고 하셨습니다(렘6:10).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이 주님이 증거하시는 천국의 비밀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그 말씀을 자기들이 욕으로 돌린 것은 그들의 귀가 할례를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3) 목이 곧은 사람의 귀는 천국의 비밀을 깨닫지 못합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하례를 받지 못한 사람은 항상 성령을 거슬린다고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러했습니다(행7:51). 목이 곧다고 하신 말씀은 그들의 교만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교만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이 천국 말씀을 비유로 말씀하신 것은 그 비유를 쉽게 해석하므로 사람들로 깨닫게 하시려는데 목적이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이런 해석도 보는 눈과 듣는 귀를 가진 사람들만이 깨닫게 되는 것이지 완악한 마음이나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이나 목이 곧은 사람들은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2. 천국의 비밀을 깨달을 수 있는 귀

주님은 9절에서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귀라는 말은 원어에는 여러 가지 뜻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님이 말씀하신 귀는 ‘오우스’(οὐς)로 이 귀는 마음으로 깨닫는 기능으로서의 귀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으로 깨달을 수 있는 귀를 말합니다. 이런 말씀은 요한계시록에서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 말미마다 계속적으로 나옵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고 했습니다(계2:7).

(1) 들을 수 있는 귀는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육신에 속한 인간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 말씀을 깨달아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들을 수 있는 귀를 주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를 오늘날까지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신29:4).

(2) 하나님께서 우리의 귀를 열어 주셔야 합니다. 우리들은 육적인 음성은 잘 듣지만 영적인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능력은 없습니다. 우리의 귀가 신령한 음성을 들을 수 있으려면 하나님께서 그 귀를 열어 주셔야 합니다.

(3) 주님의 양이 되어야 목자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선한 목자로써 그의 양들이 어떻게 목자를 따르는가에 대해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엉 도망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요10:3-5).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다”고 하신 말씀 가운데 허락되었다는 말씀은 은혜를 받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이같은 하나님의 은혜가 어떻게 미치게 되었는가에 대한 해답을 얻으려면 성령의 역사를 들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리시는 은혜의 전달자는 성령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로 중생케 하시는 분도 성령이십니다. 우리 안에서 우리의 신앙을 성장시키고 성화 시키시는 분도 성령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비밀하신 것을 깨닫도록 우리에게 그 비밀을 알게 해 주시는 분도 성령이십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곳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고전2:10-12).

성령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깨닫게 하시는 일을 하십니다. 진리로 이끄시고 마음에 평안을 주시고 소망을 주시고 천국의 비밀을 알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의 확신을 갖게 하시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순종하게 하시는 능력을 주십니다.

사람이 만약에 성령을 훼방하고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그 같은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해 주시는 성령의 역사가 전혀 나타날 수가 없기 때문에 그의 죄가 이 세상이나 오는 세상에서도 사함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하신 말씀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 할지라도 만약 우리 마음속에 죄를 품고 있으면 성령이 우리에게 계시의 영을 어둡게 하시므로 들어도 깨달음이 부족한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이 우리 안에서 그의 활동을 마음껏 해드리도록 성령을 거역하거나 근심시키는 죄를 멀리하고 성령 충만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를 깨닫게 하실 때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십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비밀을 깨닫게 해 주시고 들을 수 있도록 우리의 귀를 열어 주시지만 그렇다고 모든 비밀을 알려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다니엘의 경우도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이 받은 계시조차 깨닫지 못했습니다.

결론 : 귀로 들어간 말씀을 깨닫는 곳은 마음입니다. 귀로 듣고 마음으로 보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귀로 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머리로 보냅니다.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 드리지 못하고 인간의 지식으로 받아 드릴 때 그 사람은 바리새인들처럼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예수를 믿고,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며 많은 열매를 맺으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간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순종해야 합니다.

  

≈ 122 ≈ 복 있는 눈

(본문 : 마태복음 13 : 10 - 17)

서 론 :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이런 주님의 말씀은 분명히 소경의 눈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소경은 육신의 소경인 것이 아니라 영적 소경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바로 이 영적 소경임을 알려 주시기 위해 이 말씀을 들려 주셨습니다. 이곳에 나와 있는 소경이란 원어는 ‘옵달모스’(ὀφθαλμὀς)로 마음의 눈, 통찰의 눈으로 해석이 됩니다. 이 눈이 열려 있지 못하면 신령한 것을 전혀 바라볼 수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이 행하시는 기적을 많이 보았으면서도 그가 메시야이심을 바라볼 수 없었던 것은 이 눈이 감겨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1. 우리의 눈은 새롭게 열려져야 한다.

우리의 눈이 새롭게 열려지지 않으면 우리는 천국도 볼 수 없으며 신령한 것도 볼 수 없고 소망도 가질 수 없습니다. 이런 것들은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열려진 눈으로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1) 인간 본래의 눈은 인간이 죄로 타락했을 때 신령한 것을 통찰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타락하자마자 먼저 자신들의 몸에 대하여 부끄러움을 가졌습니다. 생령의 기능을 가졌던 눈이 범죄하므로 영적인 기능이 마비되어 육신에 속한 것만을 바라보게 됨으로 그들이 맨 먼저 서로간에 벗은 몸을 바라보았을 때 음란한 마음이 들게 되어 부끄러움을 느껴 무화과 잎으로 가리게 된 것입니다.

(2) 타락한 인간의 눈은 탐욕의 눈이 되었습니다. 롯은 소돔과 고모라 성을 바라보는 탐욕의 눈으로 말미암아 무서운 심판을 받았습니다. 사람의 눈은 무엇이든지 정욕과 탐욕으로 받아 드리기 때문에 그 마음에 죄악을 품게 되는 것입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했습니다(약1:5).

(3) 타락한 인간의 눈은 음심이 가득한 눈이 되었습니다. 다윗은 성루에서 이 눈 때문에 우리아의 아내를 범하는 음란죄를 범하게 된 것입니다.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쉬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벧후2:14).

이런 우리의 눈이 새롭게 열려지지 않으면 이 눈으로 인하여 끊임없이 범죄 하게 되고 우리의 마음은 죄악의 소굴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라”고 하셨습니다. 천국을 바라볼 수 있는 눈,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열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밤에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보려면 우리는 반드시 거듭나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이 같은 신령한 것을 바라볼 수 있게 하는 눈을 주십니다. 누구의 눈이 신령한 것을 바라보는 밝은 눈이냐?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그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약속하신 바를 믿음으로 바라보는 눈을 가진 것을 말합니다.

  

2. 신령한 눈이 열려진 사람의 복

주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고 하셨습니다. 신령한 것을 바라볼 있는 눈은 어떤 복을 받는가?

(1) 하나님의 약속을 액면대로 믿는 것입니다. 영의 눈이 열린 사람은 그 눈을 가지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기 때문에 하나님의 모든 언약을 의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아무 것도 받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면 “네 믿음대로 되리라”는 말씀에 따라 약속된 모든 것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의 생애는 언제나 소망이 있고 승리가 있으며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2) 영의 눈이 열린 사람은 믿음의 기도를 들임으로 구하는 것마다 받는 축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영의 눈이 열린 사람은 기도한 것을 받는 줄로 믿는 것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바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약속이 더딜지라도 기다립니다. 받은 줄로 믿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3) 영의 눈이 밝은 사람은 온 몸이 밝아집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몸이 밝다는 말은 몸이 정결한 것을 의미합니다. 아무 일에나 거리낌이 없는 깨끗한 양심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은 담대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기 때문에 간구하는 기도마다 응답을 받을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의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고 했습니다(요일3:21-22).

(4) 영의 눈이 밝은 사람은 보이는 세상에 눈을 돌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소망을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기업의 풍성함이 무엇인지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같은 소망을 가진 사람은 어떤 역경 중에도 좌절하지 않고 어떤 시험 중에도 인내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속에 살아 있는 소망은 현실적인 어떤 어려움도 이길 수 있는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3. 신령한 눈은 어떻게 열려지나?

영의 눈이 밝아지는 일은 인간적인 노력이나 수련으로는 불가능합니다.

① 첫째로 마음이 정결한 자의 눈이 열립니다. 영의 눈은 마음의 눈이기 때문에 그 마음이 맑지 않으면 열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정결한 마음이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씻음 받은 마음입니다. 이 일은 회개하여 복음을 믿는 일입니다. 주님은 예수님을 거역하는 바리새인들의 무리들을 향하여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고 하셨습니다(마23:26). 바리새인들이 영의 눈이 감겨져서 신령한 하나님의 나를 바라볼 수 었었던 것은 그들의 안이 더러웠기 때문인데 예수님은 그것을 깨끗하게 하면 볼 수 있게 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② 다음에 영의 눈은 육의 눈이 소경 되었을 때 열려집니다. 세상 것만 바라보고 세상 것만 추구하는 사람은 영의 눈이 열릴 수가 없습니다. “내가 심판하러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③ 다음에 지혜자의 눈이 열립니다. “지혜자는 눈이 밝고 우매자는 어두움에 다닌다”고 했습니다(전2:6). 지혜자란 하나님의 말씀을 간직한 사람을 말합니다. 지혜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근원을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간직하고 그 말씀을 묵상하며 그 말씀을 깨달은 사람에게는 그 지혜가 그의 신령한 눈을 밝혀주는 것입니다. ④ 열매를 맺는 자의 눈이 열립니다. 입으로만 주여주여 할뿐 그의 생활에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들은 영의 눈이 열려질 서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신령한 세계를 바라볼 수 없기 때문에 세사을 바라보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신령한 눈은 열매 맺는 사람들만이 열려져서 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결론 : 그리스도인들의 눈은 언제나 하나님의 언약에 그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믿음을 가지고 소망을 확실히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런 일은 누구에게나 저절로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순종의 생활이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손에 의해 훈련을 잘 받아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의 눈은 무엇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어떤 눈이 열려져 있습니까? 영의 눈이 열리려면 세상 눈이 감겨져야 합니다. 영생, 소망, 천국, 언약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 123 ≈ 함께 자라는 알곡과 가라지

(본문 : 마태복음 13 : 24 - 30)

서 론 : 어떤 사람이 자기 밭에 좋은 씨를 심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 싹이 나고 결실 할 때에 밭에 가보니 가라지가 보였습니다. 주인 집 종들이 놀라 집으로 달려가 주인에게 물었습니다. 우리가 밭에 좋은 씨를 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면 가라지는 어디서 생긴 것입니까? 이 비유는 먼저 네 가지 밭으로 비유하신 마음의 밭과 비슷한 내용으로 공통점이 많은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주님이 알곡과 가라지로 비유하신 말씀은 우리의 마음에 자리잡은 밭을 가리킨 것이 아니라 교회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의 모형으로 이 땅 위에 속해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져 나가며 확장되어 나갑니다. 좋은 씨란 복음으로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예수님은 일찍이 교회를 세우시는 일에 대하여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대로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이 같은 씨를 심는 장소로 교회의 터를 닦아 놓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 알곡과 함께 가라지가 자랐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1. 가라지의 발견

우리는 36절 이하에서 이 비유를 설명하시기를 좋은 씨를 뿌리는 자는 예수님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며 추수군은 천사들이요 밭은 세상이라고 하셨습니다. 밭을 세상이라고 하신 것은 복음을 뿌리는 곳을 말한 것이요 좋은 씨가 자라는 곳은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가라지를 발견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가라지를 발견한 종들은 심겨진 좋은 씨를 맡아 그들을 양육하는 하나님의 종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좋은 씨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싹이 나고 결실 할 때에 보니 심지도 않은 가라지가 보인 것입니다. 그 종은 놀란 나머지 그 주인에게 물었습니다. 아주 뽑아 없애리라고 마음먹고 “뽑기를 원하시나이까”고 물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의외로 주인은 뽑지 말고 가만 두라고 하셨습니다. 만약 그때 뽑으라고 하셨다면 불완전한 인간들은 가라지보다 더 많은 수효의 알곡을 다쳤을 것입니다.

(1) 교회는 가라지도 자라는 곳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만 모이는 곳이기 때문에 알곡만 자라는 곳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쩌다가 가라지가 발견되면 그것을 뽑아 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시험은 이런데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알곡도 자라고 가라지도 함께 자라는 곳임을 알아야 합니다.

(2) 가라지를 덧뿌리는 자는 원수라고 하셨습니다. 이 원수란 바로 마귀라고 39절에서 설명해 줍니다. 마귀는 교회에 가라지를 덧뿌리는 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가라지는 중동지방에서 자라는 독보리를 말하는데 이 가라지는 줄기나 모양은 보리를 닮았지만 쓸모 없고 해로운 식물로 사람이 이것을 먹으면 구토증과 경련과 설사를 일으키며 사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라고 하신 말씀처럼 마귀가 밭에 가라지를 심는 것은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해를 주려는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3) 이 가라지는 사람들이 잘 때에 곡식 가운데 덧뿌린다고 하셨습니다. 잔다는 말은 영적 표현으로 마귀가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심는다는 뜻도 있습니다. 마귀는 그 가라지를 심을 때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심습니다. 전혀 알지 못하게 처음부터 거짓과 외식과 속임수로 역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이 가라지라고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결실하는 시기임으로 그 뿌리가 사방에 뻗쳐 있으며 많은 알곡들과 뿌리와 줄기가 엉켜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한편 잠을 잘 때란 교회가 기도가 없을 때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교회는 언제나 기도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귀가 가라지를 덧뿌립니다.

(4) 가라지는 싹이 나고 결실할 때 보였다고 했습니다. 가라지의 식별은 인간의 판단으로 진부를 가리기가 어렵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눈에 가라지로 보이는 것도 가라지가 아닌 경우도 있습니다. 또 우리의 눈에 가라지로 보이지 않은 것도 가라지일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눈엔 사도로 보였지만 가룟 유다는 분명히 가라지였습니다. 오직 예수님이 처음부터 그가 가라지였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결실할 때란 그 가라지의 정체가 분명히 드러났을 때를 말합니다. 죄악이 관용하여 머리를 쳐들 때입니다. 비 진리로 마귀의 도구로 머리를 쳐들어 자기 모습을 보였을 때를 말합니다.

(5) 가라지를 뽑지 말고 그냥 두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되기 때문입니다. 가라지는 반드시 뽑혀야 할 존재지만 그것을 잘못 손대는 날이면 곡식까지 뽑힐 염려가 있는 것입니다.

  

2. 가라지의 형태

가라지는 마귀가 심은 것으로 마귀의 자녀들이라고 했습니다.

(1) 가라지는 거짓 형제의 너울을 쓰고 자랍니다. 거짓 형제란 진리에 대한 신앙고백이 다른 사람을 가리킵니다. 결실할 즈음에 이르러야 그 정체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교회에는 그 초기로부터 이단자가 등장했습니다. 이들 이단자들은 성장함에 따라 마귀의 가르침을 따릅니다. 다른 이단자들에게 포섭되어 그와 한 무리가 되기도 하며 스스로 성경을 잘못 풀어 진리를 대적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 중에도 가장 위험한 거짓 형제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무리들입니다. 이들 무리들은 우리의 구원을 송두리째 빼앗기까지 쉬지 않고 활동하는 것입니다.

(2) 가라지는 악한 누룩을 말합니다. 교회에는 악을 뿌리는 자가 있습니다. 이것을 악한 누룩이라고 부릅니다. 죄악으로 이 누룩을 번지게 합니다. 잘못된 교훈으로 만연시킵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분열시키고 혼란케 합니다.

  

3. 가라지의 처리

본문에 나오는 말씀을 보면 가라지의 처리는 하나님이 친히 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추수 때까지 자라게 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교회가 사탄의 가라지들에 짓밟히기까지 그들의 번성을 그대로 방관치 아니하십니다. 시험의 그물에 던져 뽑기도 하시며 말씀으로 인한 환난이나 핍박으로 견딜 수 없게 하심으로 처리하기도 하십니다. 혹은 세상 법으로 뽑기도 하시고 하나님의 예리한 진리의 말씀에 견디지 못해 쫓겨나게도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의 최종적 처리는 장차 주님의 재림의 날에 추수군들에 의해 뽑아 불사르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을 뽑을까 염려한다고 하신 것은 가라지의 식별이 어려운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가라지는 오랜 기간 교회에서 뿌리를 내리고 자랐기 때문에 그에게 동조하는 무리나 그의 혈육의 친척 중에 있는 알곡이 함께 뽑혀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 경고하신 것입니다. 우리들 눈에 혹 천사의 너울을 쓴 가라지로 보여도 우리의 손을 대기에 앞서 하나님께 간구하여 하나님의 손으로 뽑을 수 있도록 지혜를 써야 할 것입니다.

  

결론 : 우리에게는 마귀의 권세를 능히 이길 만한 여러 가지 무기가 있습니다. 성령의 검인 진리의 말씀이 있습니다. 이 검으로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나는 기도가 있습니다.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는 믿음의 방패가 있습니다. 주님은 음부의 권세가 교회를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시기 때문에 종국적 승리는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 124 ≈ 천국의 생명력

(본문 : 마태복음 13 : 31 - 35)

서 론 : 예수님은 천국을 겨자씨와 누룩으로 비유해서 말씀 하셨습니다. 겨자씨로 비유하신 것은 천국은 지극히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되지만 가장 놀라운 결실을 맺는다는 것을 의미하신 것입니다. 또 누룩으로 비유하신 것은 천국은 그 번식이 빠른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복음의 능력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1. 천국과 겨자씨

여기서 주님이 천국을 겨자씨로 비유하신 말씀은 천국의 발생과 그 놀라운 성장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다고 하셨습니다. 겨자씨의 특징은 그 씨가 지극히 작은 반면에 그 나무는 씨에 비해 지극히 크다는데 있습니다. 이 겨자씨는 그 길이가 긴 것은 4미터가 넘는 것도 있는데 가을철 그 가지가 견고해 질 때면 새들이 햇빛을 피하는 그들의 안식처로 혹은 폭풍우를 피하는 피난처로 깃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토록 작은 씨앗이 어떻게 큰 나무를 이룰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 해답은 그 씨앗이 아무리 작아도 그 안에 생명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주님은 이 비유를 통해서 복음 속에 깃들여 있는 생명력은 마치 이 겨자씨와 같은 능력이 있기 때문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다”고 했습니다(요1:4). 이 생명의 역사는 마치 가장 작은 겨자씨와 같은 존재처럼 보였지만 오늘날에 이르러 온 세계를 뒤덮는 큰 겨자나무를 이룬 것입니다.

(1) 예수님의 태어나심은 이 겨자씨의 등장이십니다. 아무의 관심도 없는 가운데 베들레헴 어느 농가의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 어린 작은 생명이 세계의 역사를 바꿔 놓았으며 인류의 운명을 변경시켰으며 새로운 인류의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아기 예수에게는 다른 사람이 갖지 아니한 겨자씨의 생명이 있었습니다. 그 분은 바로 생명 그 자체이시며 하나님의 생명이십니다.

(2) 이 씨앗은 또한 복음의 능력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은 세계를 움직일 만한 위인들이 못되었던 것입니다. 갈릴리 바다 어부 출신들로 배운 것이 없고 기껏해야 자기 집안에서 한 가장으로나 여생을 마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로부터 나간 복음이 온 세계를 정복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들로 사도라고 하는 영광스러운 이름으로 불려졌습니다. 이것은 그 능력이 그들에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복음의 능력에 있었던 것입니다.

  

2. 생명의 열매를 나타낸 겨자씨

생명력이 있는 겨자씨는 내 마음속에 떨어질 때 놀라운 결과를 가져옵니다.

(1) 하나님의 생명을 받습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므로 하나님의 생명을 공급받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것은 율법이나 양심이 아닙니다. 오직 겨자씨로 떨어진 복음의 씨앗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씨앗이 주는 놀라운 결실을 바라보지 못한 채 받지만 결과는 엄청난 결실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2)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신분을 가져다줍니다.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3)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줍니다. 우리의 신분은 죄의 종이었지만 이 지극히 작은 복음의 씨앗으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갖게 된 것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이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4) 이 씨앗은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변화시킵니다. 우리의 마음이 그리스도의 피로써 정결하게 됩니다. 죄에 얽매었던 우리의 마음이 진리로 인하여 자유함을 얻습니다. 율법에 속박 받아 정죄에 빠졌던 것이 그 정죄의 사슬을 끊고 정죄에서 벗어납니다.

(5) 이 씨앗은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습니다. 이전에는 사망의 열매를 맺었지만 우리 속에 심겨진 이 씨앗으로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맺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복음의 씨앗은 그 안에 있는 생명력으로 말미암아 놀랍도록 성장한다는 진리를 주님은 겨자씨의 비유로써 그 비밀을 밝히셨습니다.

  

3. 누룩의 비유

주님은 다른 또 하나의 비유로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를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고 하셨습니다. 누룩을 가지고 천국으로 비유하신 것은 복음의 생명력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대개의 경우 누룩은 좋지 않은 교훈이나 죄악의 번식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그러나 비유에 적용하신 대상은 반드시 그 적용목적이 동일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누룩이 가루 속에서 나타내는 능력이, 천국을 이루는 복음의 생명력으로 비유될 수 있기 때문에 이 비유를 들려주신 것입니다. 누룩이 만약 가루 속에 넣었지만 그 가루를 부풀게 하지 못한다면 누룩은 이미 누룩일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만약 복음이 누룩처럼 그의 생명력을 번식시킬 수 없었다면 복음은 이미 이 땅위에서 자취를 감추어진지 오랬을 것입니다.

(1) 복음의 누룩은 먼저 온 가정에 퍼집니다. 바울은 빌립보 감옥의 간수에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했습니다. 이 빌립보 간수는 그 후 “저와 온 집이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크게 기뻐했다”고 했습니다. 그의 마음에 떨어진 복음의 누룩은 자기 집안의 온 덩어리를 부풀게 한 것입니다.

(2) 복음의 누룩은 우리를 새 사람으로 만듭니다. 아무리 악한 마음이라도 이 누룩이 들어가면 그의 생명력이 그의 인격을 지배하게 됨으로 새 사람으로 변화 받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하므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했습니다(롬12:2). 복음은 우리 안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이 일을 능히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누룩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최대한도로 발효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많은 열매를 맺는 생활을 하게 되고 소망 중에 살아가는 생애를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성령 충만한 생활입니다. 성령 충만한 생활의 극치는 사도 바울의 신앙고백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갈2:20). 사도 바울 속에 있었던 누룩은 그의 발효성이 대단히 컸던 것입니다. 이것은 그의 성령 충만한 생활을 의미합니다.

  

결론 : 복음이 겨자씨와 같이 그 안에 생명력이 있으려면 그 씨앗이 좋은 땅에 심겨져야 합니다. 좋은 땅이란 말씀을 듣고 깨닫는 마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면 그 말씀의 씨앗이 겨자씨의 놀라운 능력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밀가루가 누룩으로 말미암아 부풀려면 그 누룩을 내 마음에 맞이해야 합니다. 누룩이 번지도록 마음 문을 열어야 합니다. 그 누룩이 구석구석에 미치도록 육신에 속한 나는 죽어야 합니다. 내 마음이 누룩으로 부풀어오르도록 성령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겨자씨와 누룩의 역사를 통하여 나를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변화시키고 나를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도록 힘쓰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 125 ≈ 보화를 사라

(본문 : 마태복음 13 : 44 - 46)

서 론 : 밭에 감추인 보화나 값진 진주는 해석이 구구하나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바울은 빌3:7-9절에서 예수야말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팔아 소유할 만한 분이심을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를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팔아 소유할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는 보화로 여겼던 것입니다. 여기서 주님이 천국의 비유로 말씀하신 밭에 감추인 보화와 좋은 진주는 바로 천국의 주인이신 주님 자신을 발견하는 사람의 기쁨과 그의 생애의 새로운 변화를 가리킨 것입니다.

  

1. 밭에 감추인 보화의 경우

어느 한 사람이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했습니다. 우리는 이 사람을 구태여 농부나 나그네라고 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밭은 사람이 씨를 뿌려 경작하는 장소를 말한 것이 아니라 곧 세상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밭은 세상이요”라고 주님이 그 전에 해석해 주고 있습니다. 이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평소에 진리에 목마른 사람이었습니다.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영생의 길을 간절히 찾은 사람입니다.

밭으로 표현된 이 세상은 이 보화로 비유된 영생도 진리도 소망도 전혀 없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드디어 이 보화를 찾아낸 것입니다. 그는 진리가 되시며 부활이요 생명이 되신 값진 인생의 보화가 되시는 예수님을 발견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 보화를 발견했을 때의 감격에 대하여 이처럼 고백하고 있습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한 것입니다(딤전1:15). 바울의 감격은 이토록 컸던 것입니다.

누구나 이 보화의 가치를 아는 사람만이 참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언제나 기뻐할 수 있는 이유는 이 보화의 진정한 소유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보화란 ‘데사우로스’(θησαυρὀς)로 어느 한 덩어리뿐만의 보화를 가리킨 것이 아닙니다. 하나의 보배함을 의미하며 보배를 많이 쌓아 둔 창고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는 바로 이 같은 보화이십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인생의 모든 것이 충만히 들어 있습니다. 이것을 소유한 사람은 아무 것도 부족함이 없는 생애를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보화가 가득히 들어 있는 보배 창고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요10:10).

(1) 이 보화는 감추인 보화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세상 사람들이 발견하지 못하는 그리스도를 가리킨 것으로 그리스도야말로 감추인 보배로 어느 한 사람도 이 보화를 발견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 온 비밀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골1:26-27).

사람이 감추인 보화를 발견하려면 하나님께서 그 눈을 열어 주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자의 눈을 열어서 이 보화를 발견하게 하십니다. 겸손한 자의 눈을 열어 주심으로 이 보화를 소유하게 하십니다.

(2) 이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그 보화를 숨겨두고 기뻐했다고 했습니다. 발견 했다는 말은 ‘휴론’(εὺρὠν)으로 ‘만난 후’란 의미로 해석이 됩니다.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은 그 비밀을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는 것입니다. 기뻐했다는 말은 이 보화를 소유한 마음의 기쁨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참으로 그리스도를 생명의 보화로 발견한 사람의 신앙적인 자세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발견한 사람은 그 보화를 아무렇게나 버려 두지 아니합니다. 반드시 깊숙한 곳에 숨겨둡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비밀을 마음에 간직해 두는 진실한 신앙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 집사를 선택할 때의 자세에 대하여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한다”고 했습니다(딤전3:9).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비밀이시기 때문에 이 비밀을 마음에 깊히 간직해야 하는 것입니다. 숨겨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같은 사람들에게는 그의 생애에 놀라운 기쁨이 따릅니다.

(3) 이 사람은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완전한 소유를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이처럼 완전히 소유하려면 자신의 소유를 다 팔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아니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고 하셨습니다(마10:37-38).

우리가 이 보화를 온전히 소유하고자 한다면 물질에 대한 욕심, 곧 탐심을 버려야 합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가지고는 이 보화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는 생활을 하지 않으면 이 보화를 자기 것으로 소유할 수 없습니다. 자기 부인은 정욕과 탐심을 이기는 생활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자기의 소유로 가지려면 우리는 그 분을 위하여 내게 있는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2. 값진 진주의 경우

주님은 또 하나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 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진주는 금은방에서 살수 있는 보화를 가리킴이 아닙니다. 이 진주는 심히 값진 진주로 영생이 되신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진주를 구한 이 사람은 영생을 얻기를 갈망하는 구도자처럼 보여집니다. 그는 많은 종교를 찾았으나 만족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드디어 자기가 생각한 것과 같은 아주 귀한 진주를 구한 것입니다. 이떄에 그 진주장사가 기뻐한 그 기쁨이야말로 말할 수 없이 컸던 것입니다. 그는 지체치 않고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습니다.

이 진주장사는 율법에서 영생을 얻으려고 애쓰는 어느 율법에 열심 있는 자를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부자 청년이 그러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온전한 종교를 구하기를 애쓰는 이방종교가일 수도 있습니다. 동방박사들이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것입니다. 이 보화는 보화의 가치를 아는 사람만이 발견할 수 있고 소유할 수 있습니다. 이 보화를 찾는 태도에 대하여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은을 구하는 것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인 보배를 찾는 것같이 그것을 찾으면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된다”고 했습니다.

보화를 발견하는 일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이지만 어떤 사람들은 순탄한 가운데서 만날 수 있으며 어떤 사람은 이 진주장사처럼 고생과 시련 끝에 만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은 한 하나님이 그의 기쁘신 뜻에 따라 역사하시는 은혜임으로 우리가 어떤 방법으로 이 보화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반견했다고 해도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관에 앉아 있다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마태의 경우도 있지만 36년간이나 앓았던 중풍병으로 인하여 주님을 만나게 된 사람도 있습니다.

결론 : 밭에 감추인 보화나 좋은 진주는 너무도 값진 보화입니다. 이것을 소유하는 일은 자기 소유를 다 팔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도 값싸게 이 보화를 소유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종국에는 이 보화를 소유하지 못하고 잃어버리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보화의 가치를 잘 알아야 합니다. 이 보화 하나만으로 자기의 소유물로 대신하고 자기 인생의 소망으로 삼을 수 있는 사람만이 이 보화의 참 소유지가 될 수 있습니다.

  

≈ 126 ≈ 서기관의 책임

(본문 : 마태복음 13 : 47 - 52)

서 론 : 주님은 천국을 여러 가지로 비유하시는 중에 본문에서는 물고기를 잡는 그물로 비유하셨습니다. 천국을 감추인 보화나 값진 진주와 비교하신 비유는 복음 속에 숨겨져 있는 생명의 가치를 나타내신 것이며, 이곳에서 천국을 물고기를 잡는 그물로 비유하신 것은 천국의 값진 보화를 가진 사람과 그것을 갖지 못한 사람들을 구별하여 심판하실 것을 나타내신 비유입니다. 그물을 친 바다는 이 세상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내가 너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라고 하는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아야 할 어부들입니다. “오직 너희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신 말씀을 우리는 어디든지 우리의 발이 닿는 곳에 이 그물을 치고 고기를 잡아야 합니다.

  

1. 그물에 가득 차야 한다.

이 물고기의 비유는 종말적인 면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 비유의 뜻을 살펴보면 인류의 심판을 이루는 종말이 오려면 먼저 고기가 그물에 가득 차야 합니다. 그물은 교회를 상징하는 것이라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예정하신 충만한 수효가 채워져야 합니다. 이런 일에 대하여 주님은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 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고 하셨습니다(마24:14).

(1) 이 물고기를 가리켜 각종 물고기라고 하셨습니다. 바다는 온 세상을 가리키기 때문에 그곳에 잡히는 물고기란 각종 물고기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 말씀은 복음에는 차별이 없다는 뜻입니다. 어느 특별한 계층의 차별도 없으며 학벌이나 문벌의 차등도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평등한 곳이요 가증 민주적인 곳입니다. 오늘날 민주주의가 교회로부터 싹 텄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2) 교회는 물고기를 강권하여 채우는 곳입니다. 물고기들이 스스로 그물로 들어오는 경우는 없습니다. 물고기 떼들을 고기 있는 곳으로 몰아야 하고 그물을 물고기 있는 곳에 쳐서 물고기를 그물로 잡아야 합니다. 이런 일에 대하여 주님은 눅14:21절에서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강권하여 채워진 물고기들은 모두 구원을 얻은 사람들만을 가리킨 것은 아닙니다. 택함을 입은 사람이 있는 반면에 청함만을 입은 사람들도 있는 것입니다.

  

2. 의인 중에서 악인을 골라내는 심판

각종 물고기가 그물에 가득히 차면 반드시 고르는 작업이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주님은 “그물에 가득 차매 물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버리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비유에 대하여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물고기 중에는 좋은 것이 있고 못된 것이 있는 것처럼 교회에 나온 의인 중에도 악인이 섞여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좋은 씨를 심은 밭에서 가라지가 보였을 때 그것을 뽑으려는 종들에게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군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고 하신 말씀과 일치되는 것으로 가라지를 뽑을 때가 된 것입니다.

(1) 좋은 고기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백성들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들이 상속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를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유업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그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하시기 위해 열매 맺기를 원하십니다.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롬7:4).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유업으로 받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 안에서 창세 전에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사람만이 들어가는 곳입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고 하신 말씀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받은 사람만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2) 못된 고기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고 오히려 버림받을 사람들을 말합니다.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고 경종하고 있습니다(히6:7-8).

이들은 주인이 원치 아니하는 들 포도 열매를 맺은 사람들입니다. 이사야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탄식하시기를 참 포도 열매를 맺히기 위하여 애쓰셨지만 그들이 결과적으로 맺힌 열매는 들 포도 열매였다고 하신 것입니다(사5:1-2). 이들은 불법을 행한 자들로 낙인이 찍힌 사람들입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3. 서기관의 책임

이런 비유로 경종하신 주님은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시기관이란 대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할 주의 종들을 가리킨 말입니다. 서기관이 할 일은 중요합니다. 그물에 걸린 고기들을 잘 키우는 책임이 이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들에 대하여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 오는 집주인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곳간이란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성경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새 것이란 신약 성경을 가리켰고 옛 것이란 구약 성경을 가리킵니다. 그물에 든 물고기로 비유된 그리스도인들은 이 곳간에 새 것과 옛 것을 양식으로 삼고 자라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곳간에는 양식이 풍족합니다. 탕자는 “내 아버지 집에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고 탄식했습니다. 서기관들은 부지런히 가르쳐야 합니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뇨”고 했습니다.

결론 : 마지막 심판 날에 하나님의 심판은 먼저 하나님의 교회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그리고 그 심판은 좋은 것과 악한 것을 가르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우리는 이 가르는 심판에 좋은 것으로 천국 그릇에 담겨져야 합니다. 그리고 이들을 맡아 양육의 책임을 진 하나님의 종들은 주인의 곳간에 있는 새 것과 옛 것을 부지런히 양 무리들에게 먹여야 합니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은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고 하셨습니다(마24:45-46).

  

≈ 127 ≈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본문 : 마태복음 13 : 53 - 58)

서 론 :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고향에 내려가셨습니다. 그는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이 때 이상이 일이 일어났습니다. 회당에는 많은 고향 사람들이 모여 있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도 하며 그가 행하시는 능력을 바라보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심히 놀라 이처럼 말했습니다. “이 사람의 이 지혜와 능력이 어디서 났느뇨” 그런데 그들이 놀랜 것은 지혜의 말씀이나 그가 행하시는 능력에 놀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행하시는 분이 바로 그 동네에서 살아온 목수 요셉의 아들이요, 그 모친은 마리아, 그리고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니냐? 이들은 다 우리 중에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데 이 사람이 행하는 이 기이한 일이 어찌 된 일이냐. 그의 지혜와 능력이 어디서 난 것이냐? 그들이 예수님은 배척한 일은 이런 이유에서였습니다.

  

1. 예수를 배척한 이유

고향에서 목수 요셉의 가정은 너무나도 잘 알려진 가정입니다. 작은 고을이기도 하거니와 특히 요셉의 가정은 목수의 가정으로 그리고 사랑과 평안이 넘친 복된 가정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예수님은 아버지를 도와 목수의 일을 해 왔으며 그 동리에서 모범 청년으로써, 효자로써, 성실한 일꾼으로 존경과 사랑을 받아 온 처지였을 것입니다. 물론 그가 배우지 못했으며 다른 어떤 특별한 재간이 있었던 것도 아님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그가 고향을 떠난 지 얼마 안되어 고향에 나타나 전혀 다른 모습으로 기이한 일을 행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의 생애를 어려서부터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으며 그 가정에 관한 일도 소상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같은 인간적인 경험과 생각을 넘어서 예수를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예수가 아무리 지혜가 출중하고 능력을 행한다고 해도 그를 메시야로 인정해 줄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를 오해하여 배척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2. 목수의 아들로 알고 있는 신앙

우리가 예수를 누구로 알고 있느냐는 문제는 그를 영접하는 일에 결정적인 열쇠가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나사렛 사람이 예수를 메시야로 영접하지 못한 이유는 예수를 목수의 아들로 알고 그 이상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 일에는 먼저 그가 성령으로 잉태되어 말씀이 육신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아야 하며 그는 하나님과 동등하신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에서 이 일을 이루신 분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믿음은 육신의 생각이나 지혜로서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같은 사실에 대하여 성령으로 우리에게 보이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고전2:9-12). 그래서 그 고향 사람뿐 아니라 예수님의 형제들까지도 그를 믿지 않았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 형제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라”고 했습니다(요7:5).

(1) 예수를 목수의 아들로 아는 것으로 바른 신앙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의 태어남과 그의 가족 상황에 대해 너무나도 소상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그들의 생각은 그 어떤 정황에서도 예수를 목수의 아들 이상으로 생각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이 예수를 나사렛 땅에서 자라난 한 목수의 아들로서 그 이상의 가치를 부어해 주지 않고 있습니다.

(2) 많은 사람들은 예수를 하나의 안간으로 여기고 인격적으로 높이기는 합니다. 그리하여 그를 세계의 4대성현으로까지 우러러 받들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의 나타난 생애를 관찰하여 그의 위대한 생애를 성현의 자리에까지 올려놓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만물의 창조주이신 사실이라던가 그가 세상의 구주이신 사실이나 그를 믿으면 영생을 얻는 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결사적으로 반대합니다.

(3) 기독교 안에도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근래에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한 많은 신학자들에 의해 그리스도의 신성이 부인되고 있습니다. 그의 동정녀 탄생이 부인되고 그의 이적 행하심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는 다만 인류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전달한 하나의 위대한 사랑의 실천자로 보고 그 사랑으로 인류가 평화를 누리며 가난한 자의 해방자로 억압을 당하는 자들의 구주로 만들고 있습니다. 이처럼 지금도 성령이 주시는 계시의 조명을 통하여 하나님의 비밀이신 예수님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은 옛날 나사렛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를 배척하고 있습니다.

  

3. 참 믿음을 소유한 자의 축복

나사렛 사람들은 인간적인 면에서 생각할 때 예수와 가까운 사이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마땅히 자기 고향에서 나신 영광의 메시야로 인하여 기뻐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배척하므로 스스로 구원의 자리에서 떨어졌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축복에 대하여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라”고 했습니다(살후3:3).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가 아니면 그리스도에 대한 진실한 믿음을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 된 자는 다 믿더라”고 했습니다(행13:48). 이처럼 믿음을 가질 수 있는 축복은 오직 하나님의 놀라우신 선물인 것입니다.

(1)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해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리시는 것은 모두가 은혜입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는 믿음으로 받는데 아버지께서 주님 앞으로 이끄시는 사람들만이 이 은혜의 동참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 보았고 그의 입에서 은혜로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으며 하나님의 능력으로 행하시는 기적을 보기는 했지만 그를 배척한 것입니다. 그들은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손에 이끄심을 받지 못했습니다.

(2)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성령이 인도하심이 없는 사람은 예수를 영접할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만이 우리로 우리의 이성을 초월할 수 있는 능력으로 우리를 주님께로 인도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없는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참 믿음을 소유할 수 없는 것입니다.

(3)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영생이심을 깨닫게 하는 지식은 바로 성경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견고히 붙잡아야 합니다. 세상 풍조에 밀리거나 세상 학문에 현혹되어 진리의 말씀인 성경의 지식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신앙을 자라게 하는 요소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얻을 수 있는데 이 지식은 바로 성경이 가르쳐 주십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고 했습니다(벧후3:18).

결론 : 이제 인본주의 신앙의 물결이 온 세상에 팽배해져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을 견고히 잡아야 이런 불 신앙의 물결을 거슬려 올라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계시의 정신을 받아 마음 눈이 밝아져서 그리스도를 알고 그를 배움으로 구원의 확신을 가져야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은 예수를 믿는 믿음에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4장 설교

◆ 밤중소리 03-01 | VIEW : 4,469

≈ 128 ≈ 세례 요한의 순교

(본문 : 마태복음 14 : 1 - 12)

서 론 : 세례 요한은 자신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다 이루었습니다. 그는 메시야의 사역을 위하여 온 사람이 아니라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려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 온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이 메시야의 영광을 취해서도 안되고 메시야의 대접을 받아서도 안됩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의 위치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말했듯이 사명을 완수한 그의 할 일은 이제 가장 영광스러운 방법으로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증거 했듯이 여자가 난 자중에 가장 위대한 선지자였으므로 당연히 그의 죽음도 가장 위대한 죽음이어야 했습니다. 성도들에게 있어서 가장 위대한 죽음은 순교입니다. 세례 요한의 순교야말로 그의 당연한 죽음이요 영광스러운 죽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는 메시야가 아니기에 십자가에서 죽으면 안 됩니다. 그의 죽음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유사점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가 불의를 책망하다가 헤롯왕에게 순교를 당한 것은 선지자다운 순교이며 사명자로서의 훌륭한 죽음이라고 불 수 있습니다.

  

1. 헤롯왕의 인간성

신약에는 헤롯이란 이름이 여럿 나옵니다. 마2장에서 베들레헴 지경의 어린아이들을 죽은 헤롯이 헤롯왕 혈통의 제1인자로 그의 이름을 대 헤롯이라고 불렀습니다. 그의 아래로 아들들과 손자들로 6명의 헤롯이 등장하는데 이들이 유대 지경에 있는 여러 지방의 분봉 왕 직을 나누어 누리며 권세를 잡았던 자들입니다. 그 중에도 베들레헴 지경에 있는 어린아이들을 학살한 대 헤롯이란 자는 뇌물을 주고 로마 황제로부터 유대 왕으로 임명받은 자입니다.

그는 예루살렘을 다스리는 동안 퇴락한 스룹바벨의 성전을 재건하기로 하여 이 대공사를 주전 19년에 시작하여 주후 64년경에 마무리졌습니다. 예수님은 생전에 헤롯왕이 건설 중에 있는 성전에 출입하셨으며 완공을 보지 못하시고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이 대 헤롯은 난폭한 성품과 권력에 대한 끊임없는 집념으로 그가 사랑하던 아내 마리암메와 그의 아내의 조부인 힐키너느, 부인의 동생 아리스토불러스 그리고 자기의 아들까지 죽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을 죽인 헤롯은 이 헤롯왕의 아들로 사마리아 여인 말다게 사이에서 태어나 갈릴리, 베리아의 분봉 왕으로 헤롯 안디바란 이름을 가지고 행세했던 자입니다.

예수님은 이 자를 일컬어 여우라고 부르신 일도 있으며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신 일도 있으십니다. 이 헤롯왕은 세례 요한을 죽인 후, 늘 두려움 속에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소문이 유다에 퍼지자 죽은 세례 요한이 살아난 것이라고 착각하리 만치 정신적으로 혼미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2. 헤롯왕의 죄악

헤롯 안디바는 혈통적으로 부전자전의 유전을 받아서인지 그의 생활면이 도덕적으로 패륜했습니다. 그가 유대인의 환심을 사려고 겉보기에는 하나님을 섬기는 자인 것처럼 꾸몄지만 그 속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가 세례 요한의 책망을 들은 것은 하나님의 책망이었건만 그는 오히려 요한을 잡아 옥에 가두고 그를 목을 베어 죽임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를 범한 것입니다.

(1) 그가 동생의 아내를 자기 아내로 취한 것은 도덕적으로 타기 받을 일이었습니다. 율법에도 “너는 형제의 아내를 범치 말라 이는 네 형제의 하체니라”고 하셨습니다(레18:16). 헤롯은 자신의 권세를 이용하여 무력한 동생의 아내를 빼앗아 자기 아내로 삼은 것입니다.

(2) 헤롯은 세례 요한의 책망을 무시했습니다. 헤롯은 인물됨이 다윗과는 천양지차였습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의 연고로 책망을 들었을 때에 요가 젖도록 밤새 회개하는 통회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나 헤롯은 세례 요한의 책망을 무시했을 뿐 아니라 그를 옥에 가둔 것입니다. 그의 마음이 죄로 더러워져 있었으며 완고하고 강퍅했으므로 선지자의 책망이 그의 마음에 들어갈리 없는 것입니다.

(3) 헤롯은 경솔한 맹세를 하므로 인생 일대의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맹세는 모든 일의 최종적 결정이기 때문에 함부로 하면 안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이 없는 헤롯은 맹세에 대한 두려움을 모르고 함부로 한 것입니다. 자신의 생일을 축하하는 연회석에서 그 마음이 흥겨운데다가 헤로디아의 춤에 매료되어 “무엇이든지 달라는 대로 주겠다”는 약속을 맹세로 한 것입니다. 그 맹세가 올무가 되어 의인의 목을 베는 죄를 범하게 된 것입니다.

(4) 헤롯은 세례 요한을 죽인 후, 번민은 했지만 회개하지는 아니했습니다. 무모한 맹세는 용서받을 수 있지만 잘못 맹세한 그 맹세를 잘못인줄 알고도 지킨다면 그는 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헤롯이 자신의 맹세를 지킨 일은 그 연회석에 앉은 자들에게 자기의 맹세에 대한 체면을 세우기 위한 일이었으므로 그의 행위는 어떤 구실로도 용서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5) 헤롯이 요한을 죽인 후 번민은 했지만 회개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양심의 소리를 듣고서도 회개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소문을 듣자 세례 요한이 살아나 역사하는 것으로 착각하여 더욱 그의 생애에 두려움을 안겨 준 것입니다.

  

3. 세례 요한의 순교

세례 요한의 순교에 대하여 몇 가지 알아야 할 일이 있습니다. 요한은 불의한 일을 책망하는 일에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헤롯은 그 당시 권세와 위세가 당당한 왕이었습니다. 그는 왕에게 찾아가 그 앞에서 그의 패륜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꾸짖었습니다. 이것은 그의 선지자로서의 사명을 다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이 메시야를 증거한 후, 그의 사명을 마치면 순교로서 하나님께 갈 줄로 아셨습니다. 요한은 한때 예수님이 자기를 옥중에 갇혔을 때 구해내지 아니한 일에 대하여 시험을 받기는 했지만 그 후 주님이 보내신 증거에 의해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순교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물론 요한을 옥중에서 건져내실 수도 있었습니다. 헤롯을 죽이고 세례 요한을 구해 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일을 하시려고 세상에 오신 분이 아닙니다. 순교는 요한에게 합당한 죽음이며 영광스러운 죽음이기 때문에 주님은 그의 순교를 막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에게 찾아오는 모든 것은 그 인도하심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에 어떤 일이 와도 결코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뢰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 길을 그렇게 정하셨을 때 우리는 십자가를 지고 그 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길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고 하셨습니다(잠16:9). 우리에게 찾아오는 모든 일은 그 인도하심이 우리 하나님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거스리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뢰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 “악인은 그 환난에 엎드려져도 의인은 그 죽음에도 소망이 있다”고 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한낱 부도덕한 폭군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마쳤지만 이로써 요한은 그의 이 같은 죽음을 통하여 소망을 이루었으니 영광스러운 순교자의 반열에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언제나 예수님을 위하여 자신이 작아졌으며 예수님의 활동을 위해 자기를 희생했습니다. 우리는 세례 요한처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하는 믿음으로 주님의 이름을 높이며 주님을 위한 생애를 살아야 하겠습니다.

  

≈ 129 ≈ 광야의 잔치

(본문 : 마태복음 14 : 13 - 21)

서 론 :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많은 무리들이 따랐습니다. 군중들을 피하여 배를 타시고 빈들에 가셨지만 그를 따르는 무리는 조금도 줄지 않았습니다. 이 빈들에 모인 사람들이 여자와 아이를 제외하고도 5천명이나 됐다고 했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병을 고치려고 따른 무리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행하시는 기이한 이적을 보고 따르는 무리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따른 무리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육신의 생각을 가지고 따른 일에 대하여 주님의 책망을 듣고 주님이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하나님의 떡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들은 흥미를 잃고 주님 곁을 떠나 버렸습니다. 오늘날 주님을 떠나는 많은 무리들도 그때 그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병고침이나 받으며 이적이나 바라고 어떤 물질적인 혜택이나 바라다가 그런 곳에 만족을 얻지 못하고 영적인 문제로 들어갈 때 주님의 곁을 떠나는 것입니다.

  

1. 불쌍히 여기신 주님

주님은 자기를 따라 빈들까지 좇아온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셨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 쉬실 틈을 주지 않고 피곤하게 만들었지만 주님은 오히려 그들을 불쌍히 여기신 것입니다. 주님이 그들을 불쌍히 여기신 이유에 대하여 몇 가지를 살필 수 있습니다.

(1) 주님은 그들이 목자 없는 양처럼 방황하는 모습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을 향하여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고 하셨습니다(마9:36). 그들의 목자가 되어야 할 제사장이나 서기관들은 올바른 목자의 구실을 못했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므로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해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명예와 재물을 위해 목자의 자리에 앉아 있는 삯군에 지니지 않았습니다.

(2) 병든 자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의 병 고치심에 대하여 “이사야로 예언한바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마8:17). 이런 사명이 주님에게 있기에 주님은 그 많은 병자들을 불쌍히 보시고 모두 고쳐주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처럼 병든 자를 불쌍히 보십니다. 우리들은 병든 자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 앞에 나와서 그의 능력을 힘입어 고침을 받아야 합니다.

(3) 그들의 굶주린 것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주님은 영적 양식을 주시는 일에만 관심을 가지신 분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우리의 의식주 생활에 우리 주님께서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신가에 대하여 알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는 말씀에서 우리에게 풍족한 생활의 비결까지 가르쳐 주신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2.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예수님은 모여든 많은 병자들의 병을 고쳐주시고 또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유대인의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의 교훈과 달라서 능력과 권 위가 따랐습니다. 그래서 많은 군중들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배고프고 지친 줄도 몰랐습니다. 어느덧 날이 저물기 시작했습니다. 이 때 마음이 조급해진 제자들이 주님께 여쭈었습니다. “이곳은 빈들이요 때는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 이 때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것은 어떤 소년이 가지고 있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에 담겨진 뜻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이 말씀은 너희에게는 가난한 자들을 먹일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일깨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에게 네 손을 펴라고 하십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 말며 손을 움켜쥐지 말고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요구하는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고 명하셨습니다(신15:7-8). 우리의 이웃이나 형제들의 굶주림의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밝히신 것입니다.

(2) 우리 하나님은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네게 있는 것을 주라고 하십니다. 가진 것이 적어서 가난한 형제를 도와주지 못했다는 말은 하나님께 통할 수 없습니다. 제자들은 군중들을 배불릴 많은 떡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시시한 것 가지고서는 어림도 없다는 생각에 자신들이 도와주기엔 너무나도 벅찬 일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먼저 네 손에 든 것을 주라고 하십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고 하셨습니다(눅6:38).

(3)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라고 하시는 이유는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방법은 여러 가지입니다. 가난한 자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신 이유는 그들을 위함이 아닙니다. 주는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너는 반드시 그에게 구제할 것이요 구제할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범사와 네 손으로 하는 바에 복을 주시리라”고 하셨습니다(신15:10).

  

3. 그것을 내게 가져 오라

주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이 가지고 있는 전부를 내게로 가져오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어느 소년이 바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을 가지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1) 축복은 봉헌에서 만들어집니다. 주님은 없는데서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시지만 우리에게 복을 주실 때에는 반드시 우리가 바치는 것을 통하여 축복의 재료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인가 심을 때 그 심는 자에게 심을 씨와 양식을 주십니다.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고후9:10).

(2) 기적은 전부를 바치는 데서 나타납니다. 제자들은 소년이 전달한 것을 모두 바쳤습니다. 그 결과는 놀라운 기적이 창조되었습니다. 여자와 어린아이들을 제하고도 5천명을 먹였습니다. 사르밧 과부 집의 가루 통에서 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기름병에서 기름이 마르지 아니했던 기적은 가진 모든 것을 하나님의 종에게 바쳤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과부는 성전에서 헌금궤에 돈을 낼 때 동전 두렙돈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생활비 전부를 바쳤다는 칭찬을 들었습니다. 마리아는 나드향이 든 값진 향유를 전부 쏟아 부었습니다. 이같은 일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믿음으로 체험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습니다.

(3) 주님은 우리의 바친 것을 축복하십니다. 예수님은 손에 받으신 제물을 가지시고 축사하셨습니다. 축사란 말은 ‘올로게오’로 찬양한다 또는 축복한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축복에는 넘치는 보답이 나타납니다. 그 많은 군중을 배불리 먹이고도 남은 것이 열두 바구니나 되었습니다.

  

결론 : 주님께서는 그를 따르는 군중들을 불쌍히 보시고 그들에게 먹을 것을 풍성히 주셨습니다. 이처럼 주님을 따르는 자들을 주님은 굶겨 보내지 아니하십니다. 그리고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자들에게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바친 것을 축복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손에 받으신 제물을 가지고 축사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가지고 오리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우리의 것을 가져갈 때 그 곳에 축사하시는 주님의 축복에 의하여 복을 받는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 130 ≈ 고난 중에 찾아오시는 주님

(본문 : 마태복음 14 : 22 - 27)

서 론 : 주님이 명하여 바다 건너편으로 그 제자들을 가게 하셨지만 그들이 가는 길은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바람이 거슬리므로 물결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고난 중에서 주님의 새로운 모습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고난 중에 찾아오시는 주님을 만나게 되었고 주님이 그들의 배에 오르자 고난이 그친 사실을 체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걸어가는 우리의 인생 길에는 고난이 있습니다. 비록 그 길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길이요 주님이 명하신 길이라 해도 고난이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너희가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나 담대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고난을 외면하지 아니하시고 그 고난 중에 찾아오셔서 그 고난에 동참해 주십니다. 그 고난 중에서 우리를 구해 주십니다.

  

1.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신 예수님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나자 그 많은 군중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참으로 이 사람이야말로 자기들이 바라는 메시야가 아니냐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잘못된 메시야관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에 대하여 그릇된 판단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기다리는 메시야는 이스라엘을 압박과 고난에서 구원해 내는 영광의 메시야로 믿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으로 인하여 이 분이 바로 그 분이 아닌가하는 생각으로 예수님을 잡아 억지로 그들의 왕으로 삼으려고 한 것입니다. 이와같은 생각은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말하자면 성경에 예언된 메시야로 추대하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의 행동에서 벗어나려고 군중들을 각기 집으로 흩어 보내시는 동안에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를 타고 자기 보다 앞서 바다 건너편으로 가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기도하시려고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우리는 이 같은 주님의 행동에서 몇 가지 영적 교훈을 찾아보게 됩니다.

(1) 주님은 어떤 경우에도 자신이 스스로 자기의 영광을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분은 하나님의 본체 되시는 하나님이셨지만 스스로 낮추시어 종의 모습으로 사람으로 나타나셨기 때문에 철저하게 자신을 낮추시고 아버지를 높이셨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붙들고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고 간하였을 때에도 주님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고 하시며 책망하셨습니다(마16:23).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잡히시는 시간에도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고 하시면서 고난의 쓴잔을 마신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 이외의 것은 결코 행치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하라고 하신 그 일만을 하셨습니다. 주님은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일만 하셨습니다. 주님은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3) 예수님은 문제가 있을 때마다 기도하셨습니다.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시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주님은 산에 올라가셔서 어떤 기도를 드리셨습니까? 아마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잘못된 신앙을 가지고 있는 많은 군중들의 그릇된 바른 메시야관과 그들의 영혼을 불쌍히 보시고 그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주님은 자기를 왕으로 옹립하려는 무리들의 유혹을 이기기 위해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주님은 분명 하나님이시지만 그러나 사람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이런 유혹들을 이기기 위해서는 기도하셔야 했습니다.

  

2. 고난 당한 제자들의 배

주님의 재촉하시는 명에 의하여 배를 탄 제자들은 이미 육지에서 수리나 떠나 바다 한 가운데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바람으로 많은 고난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날은 어두워 캄캄한 밤중입니다. 밤은 영적 흑암의 권세를 말합니다. 우리는 이런 영적 어두움의 권세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 주님의 말씀의 빛을 우리의 인생 길에 비취어야 합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의 빛이니이다”고 했습니다.

바람이 불어오고 파도가 일었습니다. 이것은 고난을 당하는 인생을 말해 줍니다. 바다 한 복판에서 어두움을 만난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더 암담했던 것은 그 배에는 주님이 안 계셨던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 닥쳐도 예수님이 함께 계시면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배에는 주님이 타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육지에 놔두고 자기들만 온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고난이 닥쳐와도 믿음만 있다면 그 고난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안 계시니 그들의 믿음으로는 이겨낼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들 앞에 부닥친 이런 일만 바라본다면 우리에게는 아무런 소망도 가질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산에서 기도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고 했습니다(롬8:34). 제자들이 고난 중에 실패한 이유는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환난 중에도 담대하게 주님을 의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두려움은 언제나 실패를 가져오지만 주님을 의뢰하는 자는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없는 생활을 하면 되는 일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항상 예수님을 모시는 생활이어야 합니다. 주님을 모신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의 내주를 의미하지만 성령이 내주한 사람이라도 적극적인 면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데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하셨습니다.

  

3. 환난 중에 찾아오신 예수님

제자들이 바다 가운데서 한참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주님은 바다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오셨습니다. 주님이 제자들을 찾으신 시간은 밤4시경이었습니다. 이 시간은 새벽 3시부터 6시경 사이를 말합니다. 그들은 아마도 있는 힘을 다 기울였지만 바람은 더 강하게 불고 파도는 점점 더 높이 흉용 했을 것입니다. 이제는 안되겠다고 모든 노력을 포기하고 자포자기했을 그 때였습니다.

그 때 주님은 그들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다가가 안심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용기를 내라는 뜻입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나의 의로운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하셨습니다(사41:10). 우리는 어떤 고난에라도 “안심하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당황하지 말고 마음의 평안을 되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음에 “두려워 말라”고 하셨습니다. 담대하라는 것입니다.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수1:9). 우리는 이 말씀에 힘을 얻어야 합니다.

  

결론 : 우리는 우리의 생활 속에 주님을 모셔야 합니다. 그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고난 중에 내 가까이서 나를 붙드시고 격려하시는 주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바람과 풍랑이 잠잠해 지므로 평안과 기쁨과 축복이 오는 것입니다.

  

≈ 131 ≈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본문 : 마태복음 14 : 28 - 36)

서 론 : 주님을 태우지 않고 배를 몰고 바다를 건너는 중 제자들은 바람과 파도를 인하여 고난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주님이 기도하시고 산에서 내려오셔서 바다 위를 걸어 제자들이 타고 있는 배 가까이 까지 이르셨습니다. 제자들은 바람과 파도에도 서슴없이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주님의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았을 때 유령이라고 생각하여 두려운 나머지 고함을 쳤습니다. 이 때 주님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고 그들을 위로해 주셨습니다. 그들은 기뻐했지만 아직은 바람이나 파도가 잔잔해 진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가 반가운 나머지 주님께 빨리 가까이 가기를 원하고는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여 물위로 오라 하소서”라고 간구한 것입니다.

  

1. 베드로의 믿음

베드로는 성격이 좀 급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예수님의 제자 중에는 가장 모범적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다른 제자들이 감히 상상도 못할 모험적인 믿음을 가지고 말씀에 도전한 것입니다. 그가 배에서 내려 물위로 걸어 예수님이 계시는 곳으로 갔다고 하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그의 믿음인 것입니다.

(1) 베드로는 예수님이 말씀만 하시면 능히 바다 물위로 걸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은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물위로 걸어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상식 밖의 일이요 상상을 초월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주님이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것을 보고 유령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라”고 하신다고 하여 걸어갈 수 있다고 믿는 일은 아무에게나 통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것을 믿은 것입니다. 그가 믿었다고 하는 증거는 오라고 하시는 주님의 말씀이 떨어지자 배에서 내려 물위로 걸어갔다는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2) 베드로는 물위로 내려가기 전에 주님의 오라고 하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베드로가 만약 예수님께 가려고 무조건 물위로 내려왔다면 물에 빠져 버렸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향하여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위로 오라하소서”라고 간구했던 것입니다. 믿음은 만용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와야 합니다. 베드로는 그의 간구에 분명한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오라”고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베드로는 응답을 받고 물로 내려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응답이란 말을 잘못 인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처럼 “오라”고 하시는 직접적인 음성을 듣는 것으로 알고 기도하는 가운데 이 같은 음성을 듣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의 육신의 귀를 가지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응답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의 신앙은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성경에서 들어야 합니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이루기를 원한다면,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를 알려고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마음속에 믿음을 심어주실 것입니다.

응답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실한 믿음에서 찾아야 합니다. 기도의 응답은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뜻대로 무엇을 구했을 때 믿음의 확신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로 아느니라”고 하셨습니다(요일5:14-15).

(3) 베드로는 말씀에 의지하여 물위로 내려 바다를 걸었습니다. 믿음은 순종이 따를 때 기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믿노라고 하면서도 순종이 따르지 않으면 그 믿음은 헛된 것으로 결실도 없거니와 응답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믿음은 나를 버리고 말씀에 자기를 던지는 일입니다. 베드로가 믿음의 사람이었다는 것은 그가 기도의 응답을 받자 그 말씀을 믿고 배에서 바다 물위로 내려와 걸었다는데 있습니다.

  

2. 바람을 보고 무서워한 베드로

베드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얼마간 물위를 걸어갔습니다. 그러나 그의 눈길이 주님을 떠나 다른 곳으로 돌려지는 순간 그의 몸이 바다 물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베드로가 물 속에 빠지게 된 일에 대하여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바라보고 걸어가야 할 표적은 주님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그의 목표점을 주님께 맞추어 물위를 걸어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바람을 보았고 바람을 보자 그는 무서워했습니다. “보고”란 말은 ‘브레폰’으로 베드로의 눈이 주님을 떠나 바람과 파도를 보고 있는 현재의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바라보아야 할 곳은 예수님이었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했습니다(히12:2). 그런데 베드로는 바람과 파도를 보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기도의 응답을 받고 믿음으로 나갈 때는 자신의 주변에서 위협과 두려움을 주는 환난이나 어려움을 바라보아서는 안됩니다. 일사불란한 믿음으로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바람은 우리의 믿음을 넘어뜨리려는 시험이기 때문에 우리의 눈이 그곳으로 돌려지면 두려움이 오게 되고 담대한 믿음이 약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즉시 잔잔해 지는 것으로 찾아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이나 응답은 바람이 여전히 불어오는 그 어려움 중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어려움이 계속해도 환난의 바람이 계속 불어 대도 우리는 낙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믿음을 가지고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당장엔 실제적으로 받은 것은 없다고 해도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근거로 믿음으로 받은 줄로 믿고 기다리면 그대로 이루어지는 기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주님이 그렇게 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고 하신 말씀을 새겨야 합나다(히11:1-2).

  

3. 손을 내 미신 주님

물 속에 빠져 들어가는 베드로는 주님을 향하여 큰소리로 외쳐댔습니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이 때 주님은 그에게 손을 내 미시고 위기에 놓인 베드로를 구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약한 그릇입니다. 믿음에서 나오는 확신은 가져야 하지만 인간적인 자신감은 버려야 합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경우는 우리에게 좋은 교훈이 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의 교훈은 우리는 완벽한 믿음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응답을 받고 믿음으로 하는 일에도 시험이 올 수 있고 언제나 실패는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어려움을 당했을 때 주님을 향하여 소리지르며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하고 외쳐댄 것은 참으로 잘한 일입니다. 그 간구 때문에 위기에서 내 미시는 주님의 손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결론 : 예수님은 베드로를 향하여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고 책망하셨습니다. 믿음이 작은 것은 의심에서 나옵니다. 의심하였느냐는 말은 ‘디스타조’(διστἀξω)로 망설인다 주저한다는 뜻입니다. 그는 바람을 보고 무서운 나머지 주저한 것입니다. 다음에 믿음이 적은 자는 바람을 보게 됩니다. 고난은 우리에게 믿음을 주지 못합니다. 주님을 봐야 합니다. 믿음이 적은 자는 무서워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행하되 두려움을 버리고 주님을 의뢰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15장 설교

◆ 밤중소리 03-01 | VIEW : 14,422

≈ 132 ≈ 헛되이 경배하는 장로의 유전

(본문 : 마태복음 15 : 1 - 11)

서 론 : 예수님을 따른 무리들은 다만 예수님의 교훈을 듣거나 그의 행하시는 이적을 보기 위해 그리고 병을 고침 받기 위해 주님을 따랐던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 주변에는 예수님으로부터 율법적인 약점을 잡아 그를 모함하려는 무리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어려서부터 율법과 성경을 배워온 박사들이었기 때문에 배운 것이 없는 예수님을 상대로 능히 율법적인 토론을 벌려 책잡을 수 있을 줄로 자신했습니다. 그들은 그 날에도 예수님으로부터 율법적으로 고소할 만한 사건을 포착하고는 이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따지려 온 것입니다. 그들이 문제를 삼은 사건은 주님의 제자들이 떡을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않은 일인데 이런 일은 그들에게는 장로의 유전을 범하는 일로 율법을 범하는 사건과 똑같이 취급되어 왔습니다.

  

1. 장로의 유전이란 무엇이가?

유전이란 ‘파라도시스’(παρἀδοσις)로 이 말의 뜻은 전해져 내려오는 전통적 교훈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 장로의 유전을 정죄하기 전에 이 장로의 유전에 대한 몇 가지 사실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장로의 유전이 나오게 된 동기는 이러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성전 파괴와 바벨론으로의 포로가 자신들이 하나님을 온 마음으로 섬기지 못한 까닭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들은 포로생활에서 고국에 돌아오자 하나님을 잘 섬겨야 한다는 일념에서 그들이 지켜야 할 엄한 규율을 랍비들의 손을 통하여 만들었습니다. 이런 규율은 그들의 실생활에 적용될 수 있는 것들이며 이런 규율을 만들어 놓고 백성들에게 이것을 지킬 것을 엄히 명했습니다. 이런 엄격한 규율을 생활화시키는 일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로 알았으며 율법보다 더 앞세워 지키게 한 것입니다. 이런 새로운 규례가 장로의 유전으로 불려집니다.

(2) 장로의 유전 중 먹는 일에 대하여 세 가지 교훈을 세웠습니다. ㉮ 그 하나는 손을 부지런히 씻지 않으면 먹지 아니한 것입니다. 이것은 정결한 의식을 따르는 것인데 이런 의식은 물론 율법에도 없었던 일입니다. ㉯ 다음에 그들은 시장에서 돌아와서 물을 몸에 뿌리지 않으면 먹지 아니했습니다. 이 역시 일종의 정결 의식인데 이들은 사람의 정결을 회개에 두지 않고 이런 형식적인 의식에 두고 그것을 실천하는 생활을 강요한 것입니다. 이들은 사람의 정결을 이같은 의식에 두고 교훈을 삼았으므로 그들의 신앙이 외식으로 흐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 다음에 그들은 잔이나 주발이나 놋그릇을 씻지 아니하면 음식을 먹지 아니했습니다.

이런 교훈은 율법에 없는 것을 장로들이 교훈으로 가르쳐서 유전으로 내려오게 한 것들입니다. 이런 복잡한 유전 외에도 많은 유전이 있는데 예수님이 그들에게 지적했던 것처럼 부모님을 공경하는 일에도 무엇이든지 부모에게 드려 유익하게 될 것이라도 그것을 하나님께 드림이 됐다고 하면 부모님을 공경치 않아도 된다고 하는 잘못된 교훈을 유전으로 가르쳐 온 것입니다.

2.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바리새인들의 죄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먹는 것을 보고 장로들의 유전을 범한다고 정죄했을 때 주님은 그들을 준엄하게 문책 하셨습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려고 오히려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한가지 예로 부모님 공경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유전을 정죄하신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계명은 어떤 명목으로도 변경시킬 수 없으며 이 계명을 범하는 자는 정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이 엄연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는 교훈을 만들어 장로의 유전으로 지키게 했습니다.

그들이 가르친 교훈이 예수님의 지적에서 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거늘 너희는 가로되 누구든지 아비에게나 어미에게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면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고 하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부모를 공경해온 태도는 장로의 유전을 표면적 이유로 삼아 실상인즉 하나님의 계명을 의식적으로 범했던 것입니다. 자기가 그 부모를 봉양할 책임이 있는 자녀라도 그가 자신의 재산을 하나님께 드릴 것이라고 의사 표시를 하면 부모님의 봉양 책임이 면제되며 부모님을 공경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 것입니다. ‘고르반’이란 말은 히브리어로 제물이란 뜻입니다. 제물은 이미 하나님의 소유가 된 것이니 그것으로 부모를 섬길 수 없다고 하여 부모님을 공경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계명을 스스로 범했던 것입니다.

3. 바리새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책망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이사야의 예언을 들어 책망하셨습니다. 물론 이사야의 예언은 이사야 당시의 이스라엘의 패역상에 대하여 책망한 것이었지만 그 책망이 또한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에게도 적용되는 책망이었던 것입니다.

(1) 입술로는 가깝지만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난 생활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존경은 그들의 입술에만 있었고 그들의 행동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존경도 경외도 없었습니다.

(2)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사람의 계명으로 인해서 바뀔 때 그런 교훈은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실 때 이처럼 경종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신4:2).

(3) 이런 경배는 헛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헛되다는 말은 무가치하게, 혹은 쓸데없이 경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입술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였고 장로의 유전을 지키는 생활로 하나님을 잘 섬기는 생활을 한 것으로 자랑했지만 이런 경배는 하나님께 무가치한 경배, 헛된 경배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지도 않고 원하지도 아니하시는 경배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손을 씻지 않고 떡을 먹은 것이 죄가 되는 것이 아님을 인체의 자연적인 신진대사와 결부시켜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듣고 깨달으라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의 마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결론 :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하게 하는 사람의 교훈은 오늘에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교훈으로 삼지 않고 사람의 가르침을 교훈으로 삼기 때문에 바른 신앙생활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언제부터 퍼진 유전인지 교파간의 장벽을 높이 쌓아 다른 교파에 속한 교회간의 거리가 그 이웃에 있어도 교제가 없고 이방 종교와의 거리만큼이나 멀어져 있는 것입니다. 서로 모함하고 찢고 양을 빼앗아가고 헐뜯는 일이 비일비재한 것입니다. 주일 낮 예배시간에만 교회에 출석하는 유전도 널리 퍼져 있습니다. 예배 후엔 오락장에 가건 사업을 하건 문제가 될 것이 없다는 유전도 지금 팽배해 있습니다. 이런 유전을 누가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까? 유전이나 사람의 교훈은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은 결국 하나님을 헛되이 섬기게 하는 것들로 우리는 이런 것들로부터 멀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따라야 할 신앙은 유전이나 사람의 교훈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진실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일입니다.

  

≈ 133 ≈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무엇인가?

(본문 : 마태복음 15 : 11 - 20)

서 론 :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의 생활이 얼마나 외식적인가 하는 문제는 그들의 생활 태도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율법에서 정결하게 하는 의식을, 먹는 일에까지 확대 해석하여 장로의 유전으로 내려오는 의식으로 정결하게 하지 않으면 그 먹는 음식으로 인하여 사람이 더럽혀 진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그들의 주장에 정면으로 도전하셨습니다.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1.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한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힐 수 없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에는 두 가지 중요한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1) 그 하나는 이제 의식에 따른 율법적 행위는 사람을 정결케 할 수도 없고 더럽게 할 수도 없다는 선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킨 율법적 정결 방식은 그리스도의 피로 사람을 정결케 하는 일에 대한 하나의 모형으로 보여 주신 것일 뿐 그 의식으로 사람이 거룩하게 되거나 정결하게 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온전케 하려고 오신 분이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결례의 의식의 뜻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람의 죄를 깨끗케 하는 방법은 오직 하나님의 사죄인데 이 사죄는 그리스도의 피로써 씻을 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2) 다른 또 하나는 부정한 음식과 정결한 음식의 구분이 없어졌다는 선언이십니다. 레11장에서 부정한 음식과 정결한 음식에 대한 구분을 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부정한 음식을 먹지 말 것을 명하셨습니다. 이런 율법의 명령은 구약 시대는 사람의 정결이나 거룩함이나 성별을 언제나 육신적인 법을 만들어 실생활에 적용토록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의식은 이방인과 하나님의 백성들과의 구별에 있어서 성별의 뜻으로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같은 의식 역시 이스라엘과 이방인과의 구별에 있어서의 하나의 그림자로 보여주신 일에 불과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갈3:19).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율법에 얽매어 살아온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에게는 가히 폭탄적인 선언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부정한 음식을 먹으면 사람이 더럽혀질 뿐 아니라 하나님께 범죄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으므로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은 정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을 엄격히 구분하여 먹었으며 부정한 음식은 입에 넣지 아니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이 문제의 분명한 답변을 듣게 됩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어 버려지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 하신 말씀에서 그 이유가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음식은 먹어서 소화기관을 통해 뒤로 배설되면 그것으로 끝나는 일이기 때문에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할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사람을 음식이나 입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구별한 일은 구약시대에 이스라엘에게 주셨던 잠정적인 육신의 법이었을 뿐, 하나님의 구별 방법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창세 전부터 세워져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1) 하나님의 백성과 이방인의 구별은 음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으로 먹은 사람은 성별된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아무리 이스라엘 백성이라도 이 생명의 떡을 먹지 않으면 하나님의 백성에서 제외되어 이방인이 되는 것입니다. “너희가 그리스 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도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갈3:9).

(2) 사죄의 은혜는 결코 율법에서 규정한 의식의 이행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의 자백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고 말씀했습니다(요일1:9). 하나님의 은혜는 오직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보배로운 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2. 사람을 더럽히는 것

예수님은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사람을 더럽게 하는 원인에 대하여 올바른 교훈이시며 아울러 장로들의 유전을 따라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에 대하여 정죄하시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입은 마음의 출구입니다.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 이 입을 통하여 밖으로 나오므로 이것이 그 사람을 의롭게도 하고 더럽게도 하는 것입니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마음에 있는 것들이 그 사람의 입을 통하여 나오기 때문에 그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그 사람의 마음의 거울이 되며 인격의 표현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에 대하여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라”고 하셨습니다. 타락한 인간의 마음속에는 누구에게나 이런 것들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것이 사람을 더럽히고 있는 것입니다. 더럽힌다는 말은 하나님 앞에서 받을 정죄를 가리킵니다.

(1) 우리가 이 같은 더러움을 이기려면 우리의 마음을 정결하게 해야 합니다. 정결하게 한다는 말은 깨끗하게 씻는다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말하기를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회개하면 우리 하나님은 흠 없고 점 없는 그리스도의 보배로우신 피로 정결하게 씻어 주십니다.

(2) 우리가 더러움을 이기려면 육신의 일을 버려야 합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한다”고 했습니다(롬8:5). 우리가 육신에 속한 자로 있었을 때에는 더러운 가운데 살았었습니다.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맺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죄에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롬6:22-24).

(3) 우리가 정결한 마음을 가지려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사람이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는다고 하셨습니다. 마음에 있는 이 더러운 것들이 그 사람을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영으로 몸의 행실을 죽여야 합니다.

결론 : 우리는 우리의 입술로 사람을 더럽히는 말을 할 것이 아니라 정결한 마음에서 새로운 말이 나와야 합니다. 이 새로운 말이란 그 입에서 나오는 감사입니다. 기도입니다. 찬송입니다. 입으로 증거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위로와 권면입니다. 우리는 성령께서 내 마음에 임하셔서 내 마음을 주장하심으로 더러운 것들은 다 씻음 받아 정결케 해 주시고 우리의 입술에서 마음에서 나오는 기도와 찬송과 감사가 나올 수 있도록 늘 간구해야 합니다.

  

≈ 134 ≈ 천부께서 심지 않은 것은 뽑히리라

(본문 : 마태복음 15 : 12 - 14)

서 론 :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기들 선생님의 책망이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에게 오히려 더 큰 반발을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좀 부드럽게 대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 걸림이 된 줄 아십니까” 이 말의 뜻은 그런 주님의 교훈 때문에 바리새인들이 두려워하여 그들의 생각을 바꿀 줄로 아십니까? 말하자면 천만의 말씀이란 뜻입니다. 그들은 오히려 주님의 그런 말 때문에 더욱 격분하여 주님을 더욱 해치려는 악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으니 그들의 비위를 극도로 자극하는 그같은 말씀은 삼가시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건의가 되는 것입니다. 이에 주님은 제자들에게 “심은 것마다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 그냥 두어라”고 하셨습니다.

  

1. 뽑힐 것이 있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는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백성들 중에는 뽑혀질 존재가 많다는 것을 암시하신 것입니다. 심겨진 것이 아무리 많아도 하나님께서 심지 않으신 것은 뽑혀 질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백성은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초청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는 죄인도 있고 세리도 있으며 창기도 있고 바리새인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초청을 받은 사람 중에 많은 사람이 예복을 입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이들은 결국 축복된 혼인 자리에서 뽑혀 바깥 어두운 곳으로 던져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그들 중에 누가 뽑힐 것인가에 대하여 주님은 그 다음 말씀에서 소경된 인도자와 그를 따르는 소경들이 다함께 뽑혀질 것임을 암시하셨습니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고 하신 말씀은 그런 뜻입니다.

(1) “본다”고 하는 자들은 소경으로 뽑힐 자들입니다. 예수님이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우리도 소경인가”고 주님의 말씀을 경멸하였을 때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있느니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여기서 주님이 본다고 하신 것은 빛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소경이 바라본 빛은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나면서부터 소경이었던 청년은 그 눈이 뜨여짐으로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가 바라본 빛은 참 빛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빛 되신 그리스도를 무시하고 배척하면서도 그들은 말하기를 자기들은 빛 가운데로 다닌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보지도 못하고 본다고 하는 그들을 향하여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2) 열매가 없는 자들은 영적 소경으로 뽑힘을 당할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라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성장은 열매를 맺을 때 가능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말하기를 “너희가 더욱 힘써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고 했습니다. 이런 열매가 없는 자는 소경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들의 결국에 대하여 히브리서에서는 이처럼 경고해 주고 있습니다.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가는 자들의 끄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고 했습니다(히6:7-7).

(3) 외식하는 자들은 영적 소경으로 결국은 뽑힘을 당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을 보고 소경이라고 하신 것은 그들이 외식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외식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 도다 소경 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고 하셨습니다. 구덩이란 영적 소경이 필연적으로 바지지 않을 수 없는 영적 함정으로 두 말 할 것도 없이 지옥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을 믿기를 거절하는 자들을, 아무런 열매가 없는 자들을, 외식하는 자들을 영적 소경으로 만드십니다. 그들의 눈에는 그들이 가는 길이 보일 리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에게 보여 주시는 소망을 바라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없는 자들에게 참 소망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소망을 주시는 말씀을 깨닫지 못합니다. 진리의 성령만이 말씀을 깨닫게 해 주시는데 그들은 스스로 성령의 감동을 거역하므로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도 없고 말씀을 깨달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2. 하나님께 심지 않은 것이 있다.

하나님은 그의 밭에 반드시 알곡만을 심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알곡을 심는 과정을 다음 몇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은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서 심습니다.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고 오직 아들 안에 영생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창세 전에 그 아들 안에서 예정하신 그의 백성들을 그리스도로 구속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십니다.

(2) 하나님께서는 심으실 때가 있습니다. 심는 것이나 거두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왜 지금 이 세대에 태어나 하나님의 구원을 받게 되었느냐에 대해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같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입어 우리의 구원을 이루기에 한치의 오차도 없이 이 세상에 태어났으며 나의 전 인생의 과정이나 앞으로 되어질 모든 일까지도 이 때에 맞추어 작정되었습니다. 우리가 이런 하나님의 섭리를 깨들을 때 우리 앞에 어떤 장애가 오더라도 두려움이 없으며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심는 역사는 그의 말씀으로 하십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는 심겨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복음입니다. 그리고 이 복음의 주체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복음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며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벧전1:23).

하나님께서 심지 않은 것은 뽑히리라고 하셨는데 이에 대하여 주님은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들이 뽑히는 과정을 보면 ㉮ 이들은 생명으로 가는 좁은 길에서 떨어져 나갈 것입니다. 이들은 원래가 육신에 속한 사람들로 그들의 이같은 생활은 하나님을 섬기는 생활에 크나큰 부담을 주며 고통을 줄 것이기 때문에 떠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 이들은 시험 중에 넘어질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시험을 감당할 능력이 없고 피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들이 시험을 당할 때 하나님의 도우심의 손길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결국 시험으로 인하여 넘어지게 됩니다. ㉰ 이들은 잘못된 지식으로 이단에 빠져 생명의 길에서 떨어져 나갈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진리의 말씀을 이해할 능력이 없으므로 결국 사단의 조종을 받아 다른 진리, 다른 복음을 따르다가 멸망을 받게 될 것입니다.

결론 : 그리스도인은 스스로 속지 말아야 합니다. 진리에 굳게 서서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순종의 열매를 맺고 자신이 자기의 믿음을 시험하고 확인하는 생활을 통해서 믿음 안에서 성장해야 합니다.

  

≈ 135 ≈ 가나안 여인의 큰 믿음

(본문 : 마태복음 15 : 21 - 28)

서 론 : 가나안 사람이란 율법도 하나님도 없는 이방인들입니다. 그 가나안 여인이 예수님께 나와서 귀신들려 고통을 받는 딸을 위해 간구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을 향하여 “네 믿음이 크도다”고 하시는 칭찬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가나안 여인의 기도를 통하여 큰 믿음의 기도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가르쳐 주셨습니다. 누가복음18장에서는 기도하는 사람이 낙망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하여 불의한 재판관에게 호소하는 가난한 과부의 간구를 비유로 들려 주셨습니다. 기도에 믿음이 있어야 할 일에 대한 비유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고 하셨습니다(마17:20). 예수님은 이 가난한 여인의 간구를 통하여 큰 믿음의 기도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1. 큰 믿음이란 무엇인가?

큰 믿음이란, 문제가 있으면 그 문제를 가지고 주님께 나오는 믿음을 말합니다. 가나안 여인에게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에게는 흉악히 귀신 들린 딸이 있었습니다. 그 일로 인하여 어머니는 자기 딸이 측은하고 불쌍해서 견딜 수 없었습니다. 삶의 참 보람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 여인은 이런 자기 딸을 고침 받으려는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주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우리들 가정에 문제가 생겨도 그것을 가지고 예수님 앞으로 나오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에게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야 말로 자신의 이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 주실 분이라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그는 이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찾은 것입니다.

(1) 그 여인이 주님을 찾은 태도에서 이런 믿음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을 부를 때 “주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불렀습니다. 이 여인이 말한 주란 구약 성경에서 주로 주종 관계에 있어서의 하나님, 신약에서는 만물의 주되신 하나님에 대한 칭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신약에서는 하나님을 나타내는 세 가지 명칭이 있습니다. 하는 ‘데오스’(θεος)로 일반적으로 말하는 하나님의 칭호입니다. 다음에 예수님이 자주 사용하신 ‘파테르’(πατἠρ)인데 이 말은 아버지란 뜻입니다. 그리고 가나안 여인이 사용한 ‘큐리어스’(κυριος)란 칭호로 이것이 “주”인 것입니다.

가나인 여인은 예수님을 주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란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이 메시야에 대한 대명사로 사용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주 다윗의 자손”이라고 한 이 여인의 호칭은 예수님께 대한 바른 신앙 고백으로 이것은 마치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방불케 하는 것입니다.

(2) 이 여인이 외친 첫마디는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한 호소입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의 자비와 긍휼하심에 호소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야 할 것이라곤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주님의 긍휼 하심으로 받지 않으면 아무 것도 받을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이 여인처럼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호소해야 합니다.

(3) 이 여인이 주님께 대한 긍휼의 소소가 그의 딸에게 나타났습니다. 이 여인은 “내 딸이 흉악히 귀신 들렸나이다”고 아뢰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그 내용이 분명해야 합니다. “만일 나팔이 분명치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쟁을 예비하리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받기 위해 분명한 목적을 제시하는 것이 우리의 기도인 것입니다.

  

2. “주여 옳소이다”고 하는 믿음

이 여인은 자기 딸을 고침 받으려는 간절한 기도를 주님께 드렸습니다. 귀신들려 고통을 당하는 딸을 구원하려는 애절한 어머니의 간구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 여인은 주님으로부터 응답 받기까지 많은 시간과 어려운 여러 고비를 넘겨야 했습니다. 이 여인은 이런 고비를 믿음으로 잘 넘겼습니다. 그의 큰 믿음이 여기서 나타난 것입니다.

(1) 오랜 시간 침묵이 흘렀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기도를 들으셨지만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셨다”고 했습니다. 기도의 응답은 하나님 편에서 내려 주시기 때문에 그 시기와 방법은 오직 하나님의 권한에 속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응답이 더디다고 포기하는 기도는 큰 믿음의 기도가 아닙니다. 가나안 여인에게는 훌륭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한 말씀도 대답을 듣지 못했지만 그는 그의 간구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곁을 떠나지 아니했습니다. 이것은 기도의 인내를 말합니다. 기도하는 자가 응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인내하는 자가 응답을 받습니다. 기도의 응답에는 두 가지 조건이 따릅니다. 하나는 꼭 응답을 받고야 말겠다는 결의와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다음에 구하는 자에게 응답해 주실 것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포기하지 않는 기도입니다. 가나안 여인은 주님이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않으셨지만 그는 기도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2) 이 여인은 드디어 절망적인 상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권면에 따라 단 한마디의 말씀을 들려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응답이라기보다는 절망적인 거절이었습니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그 여인에게 소망적인 말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이 가나안 여인에게 메시야에 대한 바른 믿음이 없었더라면 그는 낙심천만하여 포기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이방인에게도 미친다는 믿음을 기지고 있었습니다. 가나안 여인은 주님의 말씀에 위축되어 물러간 것이 아니라 한발자국 더 앞서 갔습니다. “주여 나를 도우소서” 그녀의 기도는 끈질긴 기도였습니다.

(3) 그러나 이 여인은 모욕적인 말로 기도를 거절당했습니다. 주님은 자기를 도와 달라는 이 여인에게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주님의 태도는 이 여인에 대한 최종적인 기도 응답의 관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이 이런 때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에 대하여 이미 그 여인의 마음을 꿰뚫어보고 계셨습니다. 여기서 주님이 말씀하신 개들이란 낱말은 물론 이방인들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예수님이 이방인을 개로 여긴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다만 이 여인의 믿음과 겸손과 인내를 시험하신 것입니다. 이 여인은 자녀와 개의 구별을 인정했습니다. 자녀란 이스라엘 백성을 의미하고 이방인인 자기는 개라고 인정한 것입니다. 이 여인은 주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하면서도 자비를 바라는 자신의 믿음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주여 옳소이다 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이 가나안 여인의 믿음이 주님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칭찬을 받은 것은 “옳소이다”고 말한 그의 태도에 있습니다.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은 진리이기 때문에 우리는 무조건 “옳소이다”는 말이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이 같은 믿음으로 주님께 나가는 자들에게 우리 주님으로부터 “네 믿음이 크도다”고 하는 칭찬을 들을 수 있습니다.

  

결론 : 우리는 마땅히 이 가나안 여인의 기도를 본 받아야 합니다. 그는 주님께 찾아 나온 후 한번도 후회하거나 주님 곁을 떠난 일이 없었습니다. 응답이 없었지만 간구를 중단한 일도 없었습니다. 관심이 없다고 외면 당했지만 더 가까이 나가 도우심을 구했습니다. 마지막에는 말할 수 없는 수모까지 당했지만 자신은 그런 수모를 마땅히 받아야 할 사람이라고 여기면서 “옳소이다”고 말했습니다. 이때 주님의 응답이 내려진 것입니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이 여인의 믿음을 따라 큰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136 ≈ 7병 2어의 기적

(본문 : 마태복음 15 : 29 - 39)

서 론 : 성경에는 예수님이 떡을 가지고 기적을 이루신 일이 두 곳에 나옵니다. 마14장에 나오는 기적은 5병 2어의 기적으로 어린아이와 여자 외 5천명을 먹이고도 12바구니를 남기신 일이고 오늘 말씀에는 떡 일곱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아이와 여자 외 4천명을 먹이시고 7광주리의 남은 조각을 거둔 일입니다. 이 일은 갈릴리 호숫가에 있는 어느 산에서 일어났습니다 많은 병자들과 무리들이 주님을 따랐는데 그들이 그 때까지 사흘간이나 주님과 함께 했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불쌍히 보시고 그들에게 떡을 먹이신 것입니다.

  

1. 산상 심령 부흥회

예수님이 강사가 되신 심령 부흥회는 갈릴리 호숫가에 있는 어느 산에서 사흘간이나 계속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나타난 세 가지 역사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1) 첫 번째로 나타난 것이 말씀의 역사입니다. 예수님이 피곤하신 몸을 이끄시고 이곳 저곳 다니신 것은 온전히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시기 위하심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 하시고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눅4:43-44). 예수님은 영원 전부터 삼위의 하나님이시며 땅에 내려오신 후에도 그의 이같은 위치에 하등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가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고 했습니다(히1:1-2). 예수님을 따른 많은 무리들은 병 고침을 받으려는 생각으로 좇았을지라도 예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시는 사명에 충실하셨던 것입니다.

(2) 다음에 나타난 것이 신유의 역사입니다. 주님이 말씀을 증거하시는 그 자리에는 절뚝발이와 불구자와 소경과 벙어리와 기타 여럿을 데리고 와서 주님의 고쳐 주심을 바랬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불쌍히 보시고 그들의 질병을 고쳐 주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인간이 고통을 받는 모든 질병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인간의 질병은 인간이 범한 죄로 온 저주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질병을 고쳐주실 수 있는 것은 그 분이 우리의 모든 죄 문제를 해결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이들의 병을 다 고쳐주셨습니다. 벙어리가 말하고 불구자가 건전해 지고 절뚝발이가 걸으며 소경이 보는 것을 무리가 보고 기이히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했습니다.

(3) 그리고 나타난 것이 기적의 역사입니다. 예수님은 그가 원하시면 그의 뜻대로 모든 기적을 행하실 수 있었습니다. 세상 만물이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에 순종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에게 그의 창조적인 기적으로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주님이 행하신 기적은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에 그 목표를 두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배가 고프셔서 새벽길에 무화과나무를 찾으셨지만 기적으로 떡을 만들어 떡을 만들어 제자와 함께 먹지 않으셨습니다. 사미리아 땅을 지나가실 때에도 제자들을 시켜서 들어가 먹을 것을 사오도록 하셨지 기적으로 떡을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리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자신의 유익이나 공명심이나 영광을 위해서는 절대로 그 자신의 권능을 행하지 않으셨다고 하는 하나의 교훈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능력을 받았다고 자신의 공명심이나 유익을 위할 목적으로 사람들 앞에서 희한한 일들을 연출하므로써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까지 높이 올리는 것입니다. 이같은 일을 가리켜 주님은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마7:22-23).

  

2. 떡을 먹이시게 된 이유

갈릴리 호숫가에 있는 산 위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도 하며 또 병을 고침 받기도 한 무리의 수효는 여자와 아이 외에 사천 명에 달했다고 했습니다. 사흘 동안이나 예수님과 함께 산 위에 머물러 있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이들을 집으로 돌려보내셔야 했는데 그들을 굶긴 채로 보낼 수가 없으셨던 것입니다.

(1) 주님은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그의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에 대하여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며 항상 견책치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시는 분”이심을 알고 늘 그 분을 의뢰해야 하는 것입니다(시103:8-10).

(2) 무리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시장 끼를 잊고 주님을 따른 지가 사흘이나 지났습니다. 우리가 어려운 중에도 주님을 따르며 그를 위하여 헌신하면 주님의 인정을 받으며 이런 사람에게 주님의 기적의 손길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은 무리들이 길에서 기진 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주의 일을 하는 사람들을 공수로 보내지 아니하십니다. 그들을 굶겨 두시지 않습니다.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들의 육신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필요 적절하게 그것을 우리에게 공급해 주십니다.

  

3. 7병 2어의 기적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라고 주님께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광야에 있어 우리가 어디서 이런 무리의 배부를 만큼 떡을 얻으리이까.” 이 같은 그들의 말은 참으로 미련하고 우둔한 생각에서 나온 말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우직하고 완악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권능으로 홍해를 건넜지만 그들은 얼마나 하나님을 원망한 것입니까? 반석에서 물이 강처럼 흘렀건만 들은 얼마 후, 목마름을 견디지 못하여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로 몇 일 전에 5병 2어의 기적을 친히 목격했지만 이런 사실을 잊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 고 물으셨습니다. 이같은 주님의 물으심은 두 가지 뜻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그들에게 가진 것이 없는 것을 알아야 그 후에 받은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인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축복에는 나에게 있는 것을 무엇인가 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고 하신 말씀했습니다(고후9:6). 제자들이 떡 일곱 개와 생선 두어 마리를 주님께 드렸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여 주셨을 때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이처럼 완악한 것입니다. 우리도 지난날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얼마 안가 잊어버릴 때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치료와 축복은 한번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계속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결론 : 이런 기적으로 인하여 그 곳에 있었던 많은 무리들이 다 배불리 먹고도 남은 조각을 일곱 광주리나 거두었습니다. 여자와 아이 외라고 말한 것은 그 당시 사람의 수효를 셀 때 어린아이나 여자들은 수효 가운데 포함시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주님과 늘 함께 하는 생활을 통하여 그로부터 불쌍히 여기심을 받음으로 이 같은 기적의 역사가 우리의 생활에 나타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