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新約]강해/◆ 사복음서 · 사도행전 강해-1

마태복음 16-19장[Ⅴ.예수의 교훈 16장-19장]◆ 밤중소리

영국신사77 2020. 4. 10. 17:31


마태복음 10장-15장 

제목차례

제 16 장 (137∼143) 

137) 하늘로서 온 표적 (마태복음 16 : 1절~4절) .

138) 삼가야 할 누룩 (마태복음 16 : 5절~12절) 

139) 베드로의 신앙고백 (마태복음 16 : 13절~20절) .

140)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마태복음 16 : 21절~23절) 

141) 주님을 따를 자의 자격 (마태복음 16 : 24절) 

142) 생명을 얻는 비결 (마태복음 16 : 23절~26절)

143)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올 때 (마태복음 16 : 27절~28절) 


제 17 장 (144∼146) 

144) 변화산에서 일어난 일 (마태복음 17 : 1절~13절)

145) 겨자씨 만한 믿음의 능력 (마태복음 17 : 14절~20절)

146) 예수님이 내신 성정세 (마태복음 17 : 22절~27절)


제 18 장 (147∼153) 

147) 천국에서 큰 자 (마태복음 18 : 1절~4절) 

148) 실족케 하는 자의 죄 (마태복음 18 : 5절~10절)

149) 잃은 양을 찾으시는 예수님 마태복음 18 : (12절~14절)

150) 범좌자에 대한 교회의 태도 (마태복음 18 : 15절~18절)

151) 합심 기도의 능력 (마태복음 18 : 19절~20절)

152) 용서의 원리 (마태복음 18 : 21절~35절)

153) 죄와 빚 (마태복음 18 : 23절~35절)


제 19 장 (154∼156) 

154) 이혼에 관한 교훈 (마태복음 19 :1절~9절) 

155) 주님이 말씀하신 독신 생활 (마태복음 19 :10절~12절) 

156) 어린이에게 축복하신 예수님 (마태복음 19 :13절~25절)

157) 영생을 놓쳐 버린 청년 (마태복음 19 :16절~22절)

158) 부자와 천국 (마태복음 19 :23절~3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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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6장 설교

◆ 밤중소리 03-01 | VIEW : 5,599

≈ 137 ≈ 하늘로서의 표적(본문 : 마태복음 16 : 1- 4)

≈ 138 ≈ 삼가야 할 누룩(본문 : 마태복음 16 : 5 - 12)

≈ 139 ≈ 베드로의 신앙고백(본문 : 마태복음 16 : 13 - 20)

≈ 140 ≈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본문 : 마태복음 16 : 21 - 23)

≈ 141 ≈ 주님을 따를 자의 결심(본문 : 마태복음 16 : 24)

≈ 142 ≈ 생명을 얻는 비결(본문 : 마태복음 16 : 23 - 26)

≈ 143 ≈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올 때(본문 : 마태복음 16 : 27 - 28)


≈ 137 ≈ 하늘로서의 표적

(본문 : 마태복음 16 : 1- 4)

악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막 8:11-13; 눅 12:54-56)

1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1)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3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1)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4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1)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1)표적 밖에는 보여 줄 1)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가시니라


서 론 :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들은 주님이 하시는 일에 

사사건건 트집을 잡았으며 주님을 끊임없이 시험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인 사실을 

표적으로 나타내 보이시기를 강요했습니다. 

이 같은 표적을 원하는 이유는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메시야는 

큰 권세와 영광으로 세상에 나타날 것으로 알고 있으나 

예수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표적을 구한 것입니다. 

표적이란 말은 ‘세메이온’(σημεἰον)으로 

증거, 기적 같은 놀라운 일을 나타내는 외적인 증표를 의미합니다.


1. 하늘로서 온 표적

하늘로서 온 표적이란 하늘에서 내려온 표적으로 

모세처럼 예수가 메시야란 사실을 모든 사람이 인정할 만한 증거로 나타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평소에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내는 일, 병을 고치시는 일 등을 보았지만 

그들의 완악한 마음은 그런것 가지고서는 메시야의 표적이 될 수 없으며 

오히려 바알세불의 힘을 빌어 이뤄지는 기적이라고 비난한 것입니다. 

예수가 참 메시야라면 하늘로서 오는 이적을 

보여 주어야 할 것이 아니냐고 우겨댄 것입니다.

그들은 마치 모세가 홍해를 건너게 하고 

하늘에서 만나를 먹게 했던 것과 같은 이적을 요구한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아모리 사람들을 칠 때 

태양을 기브온 위에 머물게 하고 

달을 아얄론 골짜기에 머물게 했던 것 같은 이적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엘리야와 같이 하늘에서 불이 내려 바알 선지자들을 멸절시킨 것처럼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는 로마 군대를 전멸시킬 수 없느냐는 식으로 

그같은 표적을 보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그런 표적을 보고 주님을 믿으려는 마음에서 요구한 것이 아니라 

그를 배격하려는 불순한 의도에서 시도한 시험이었던 것입니다.


2. 예수님의 책망

예수님은 그들의 이런 요구에 응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땅에 굴러다니는 돌을 가지고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는 분입니다. 

하늘에서 열 두 영이 더 되는 천사들을 동원하여 

그의 대적들을 불사를 수 있는 권능이 있다고 스스로 말씀하신 분입니다. 

주님은 그들을 향하여 두 가지 면에서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고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그 날은 궂겠다”고 하는 일기는 잘 알면서도 왜 시대적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고 나무라셨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말씀입니까? 성경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을 연구하면서도 그 예언이 이루어지는 사실에 대해서는 왜 분별하지 못하느냐고 그들의 어리석음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시대적 표적이란 무엇입니까?

(1) 그들은 단9장에서 예언을 통해서 메시야의 도래 시기가 왔음을 알아야 했습니다.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7이레와 62이레가 지나면 기름 부음 받은 자가 나타날 것이라고 한 말씀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종말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도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라고 말씀하심으로 시대의 징조를 보고 주 재림의 시기를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동방에서 예루살렘에 찾아온 동방박사 일행은 메시야의 때를 하늘의 별의 징조를 보고 알고는 메시야를 찾아 경배했던 것입니다.

(2) 그들은 메시야가 해야 할 사명을 알아야 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고 하는 이사야의 예언에서 메시야의 사명을 알아야 했던 것입니다(사53:4-5). 그들이 이처럼 메시야가 땅에서 당하실 고난을 알았더라면 그들은 예수님께 어리석은 표적 같은 것은 요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3) 만약 그들이 메시야의 태어나심의 예언을 알았다면 그들은 겸손히 주님 앞에 무릎을 꿇었을 것입니다. 미5:2절 말씀에서 메시야가 베들레헴 땅에서 나실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같은 예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동방박사들이 베들레헴으로 찾아 갈 때에도 그들은 냉담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유대인들은 메시야의 출현을 원치 않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들이 왕 노릇하기 위해서였습니다.

(4) 그들은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말씀과 그의 행하시는 권능에서 그의 메시야 되심의 표적을 찾아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를 보여달라는 빌립을 향하여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4:11). 또한 주님의 말씀은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하고 권능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그가 행하신 표적은 모든 사람으로 그가 메시야 되심의 충분한 증거가 되었음에도 이를 인정하지 않고 다른 표적을 요구한 것은 그들이 마음이 완악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증거에 대하여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5:39).

(5) 주님은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란 예수님이 생전하셨던 그 당시의 세대를 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주님이 재림하실 때도 이에 포함됩니다. 악하다는 말은 그들의 외식적인 신앙을 가리킵니다. 겉으로는 하나님께 가까운 것처럼 보이지만 마음으로는 떠나 있는 신앙이 외식적인 신앙입니다. 이런 신앙은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하고 악한 것입니다. 음란하다고 하신 말씀은 그들의 세속된 신앙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과 벗된 것은 영적 간음에 속하기 때문에 음란하다고 하셨습니다. 주님께 표적을 구하는 사람은 그 표적이 끝날 때 곧 떠날 사람들입니다. 표적은 또 다른 표적을 구하게 됨으로 표적으로는 만족할만한 증거를 가질 수 없습니다. 종말에도 표적을 구하는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적그리스도를 그들의 메시야로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살후2:9-12).


3. 주님이 말씀하신 메시야된 결정적 표적

예수님은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들에게 

메시야된 표적을 보여 줄 것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그 표적이 무엇인지 대단히 궁금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이 말씀하신 메시야된 표적을 끝내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주님은 그 표적이 바로 요나의 표적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요나가 바다에서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 사흘간을 있었던 것처럼 

예수님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고 했습니다(롬1:3-4).


오늘날 예수님에 대한 복음의 핵심은 바로 이 사건에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누가 어떤 굉장한 표적을 보여 준다고 해도 

그것이 메시야된 증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요나와 같은 표적만이 메시야된 참 증표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표적을 보여 주심으로 그가 메시야 되심을 증거하셨으며 

이 사건이 바로 복음이 된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사람들이 표적을 요구하는 음란하고 패역한 세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표적을 요구하는 미련스러운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다만 하나님의 말씀에서 증거를 찾아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진리를 깨달아 믿음에 굳게 설 수 있어야 합니다.


≈ 138 ≈ 삼가야 할 누룩

(본문 : 마태복음 16 : 5 - 12)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막 8:14-21)

5 제자들이 건너편으로 갈새

떡 가져가기를 잊었더니

6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7 제자들이 서로 논의하여 이르되

2)우리가 떡을 가져오지 아니하였도다 하거늘

8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으므로 서로 논의하느냐

9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며

10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였는지를 기억하지 못하느냐

11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12 그제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


서 론 : 예수님은 누룩의 비유를 두 가지 면에서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는 천국이 온 땅에 번지는 역할로서의 누룩이요 다른 하나는 교회 안에 퍼지는 악의 교훈으로서의 누룩입니다. 누룩은 강력한 번식력을 가지고 순식간에 온 덩어리에 번지기 때문에 이 두 가지 어느 경우에도 합당한 비유가 되는 것입니다.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고 하신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누룩과 같이 확장될 것임을 가리키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감옥의 한 간수에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한 집에 한 사람으로 말미암이 복음의 씨앗이 떨어지면 그 씨앗은 마치 누룩처럼 번져서 온 가족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향하여 주의하라고 하신 누룩은 잠시 잠깐 동안에 사람의 마음속 깊이 파고 들어가는 악한 누룩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누룩은 번지는 전염력이 강력하기 때문에 악에 있어서도 굉장한 영향을 끼치는 것입니다.


1. 제자들의 오해

주님은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경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바리새인들과 가두개인의 교훈을 삼가라는 교훈이신데 제자들은 이 말씀을 잘못 해석했습니다. 제자들은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이해했습니다. 누룩이란 말에 자기들이 떡을 가지고 오지 못한 일에 대한 책망인 줄로 오해한 것입니다. 그들은 아마 자기들이 떡을 가져오기를 잊었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들이 주는 떡을 주의하라는 말로 인식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아직도 육신에 속해 있었으므로 육에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나 그 말씀을 해석할 때 몇 가지 명심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은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해석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내 말은 영이요 진리”라고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할 때도 있겠지만 영적으로 해석해야 할 경우도 많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지혜로 해석해야 합니다. 인간의 지혜로 해석하려다간 자칫 인본주의적인 해석이 되어 버립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성령이 주십니다.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반드시 짝이 있습니다. 누룩이 악한 비유에만 사용되는 것이 아닌 점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나타난 다른 비유의 말씀을 통하여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의 말씀은 그 말씀에 나타난 하나

님의 뜻을 이해할 때 바른 해석을 내릴 수 있습니다. 말씀의 전후에 나타난 문맥을 무시하거나 그 말씀 속에 들어가 있는 오묘하신 뜻을 저버린 채 말씀의 낱말에만 치우치면 엉뚱한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2. 믿음이 적은 자들아

주님은 깨달음이 적은 제자들을 향하여 “믿음이 적은 자들”이라고 나무라셨습니다.

(1) 적은 믿음이란 떡이 없으므로 염려하는 믿음입니다. 주님은 산상보훈에서도 “믿음이 적은 자”에 대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2) 적은 믿음이란 영적 깨달음이 적은 믿음입니다. 믿음이 적은 자들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깨닫는 심령만이 결실한다고 하셨습니다. “좋은 땅에 뿌리었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 배, 혹 육신 배, 혹 삼십 배가 되느니라”고 하셨습니다(마12:23).

(3) 적은 믿음이란 하나님의 은혜를 쉬 잊어버리는 믿음입니다. 고침 받은 아흡명의 문둥이는 주님의 은혜를 잊고 세상으로 돌아갔습니다. 제자들은 방금 전에 주님이 행하신 이적을 잊어버림으로 떡에 대하여 또 다시 염려하게 된 것입니다.


3.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

예수님이 여기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은 사람의 마음을 부패하게 하는 그들의 교훈을 가리킨 것입니다.

(1) 바리새인의 누룩은 마23장에서 주님이 그들을 책망하신 말씀 가운데 나타나 있습니다. ㉮ 그들의 누룩은 말만 하고 행함이 없는 생활입니다. 이같은 그들의 누룩에 대하여 제자들에게 경종하시기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한다”고 하셨습니다(마23:1-3). ㉯ 그들의 누룩은 그들의 외식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행위를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겉으로 나타내 보이는 생활에 치중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과 떨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 그들의 누룩은 돈을 사랑하는 마음에 있었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신앙은 악한 누룩입니다. 예수님이 무리들을 향하여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고 하셨을 때,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므로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었다고 했습니다. ㉱ 바리새인은 표적을 구하는 신앙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고 하셨습니다. ㉲ 그리고 그들에게는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는 누룩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에조차 없는 장로의 유전으로 부모를 공경하라는 율법의 계명을 스스로 저버리고 있다고 주님의 책망을 들었습니다.

(2) 한편 사두개인의 누룩은 무엇입니까? 사두개인은 바리새인들과 전 반대의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을 합리적으로 해석하는 나머지 영의 존재도 부인하고 천사도 없다는 주장을 합니다. 그들에게는 부활의 신앙도 없었습니다. “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고 하는 말씀에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행23:8).

이런 사두개인들의 누룩은 능히 모든 사람의 신앙을 무너뜨리는 악한 누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들은 현실 생활에만 충실하여 세속화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소망은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세적인 이 땅에서 누리는 물질적 축복에 있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교회에 번지고 있는 이 두 가지 누룩을 주의해야 합니다. 이 같은 주님의 말씀은 보수적인 정통 신앙에도 누룩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아니면 그것이 생명을 죽이는 누룩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를 향하여 이처럼 경종하셨습니다.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치 않게 하더냐 그 권면이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 번지는 누룩을 삼가야 하며 이 누룩이 우리 마음속에 들어와서 우리의 믿음을 넘어뜨릴까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 139 ≈ 베드로의 신앙고백

(본문 : 마태복음 16 : 13 - 20)

베드로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다(막 8:27-30; 눅 9:18-21)

13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14 이르되 

더러는 3)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15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4)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5)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6)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20 이에 제자들에게 경고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서 론 : 사람이 예수를 누구로 알고 믿느냐는 문제는 

그 사람의 구원과 직접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으므로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 사람에게 올바른 신앙이 있느냐는 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느냐 하면 

그의 입에서 나오는 신앙고백으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이단이냐, 아니면 정통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느냐는 판단도 

역시 신앙고백으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렀을 때에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연이어 그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은 것은 

제자들에게 과연 영생을 약속한 바른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여부를 

시험해 보시고 그들의 믿음을 굳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1. 일반적인 그리스도관

성경에는 주님을 대면한 사람, 그의 말씀을 들은 사람, 그로부터 병을 고침 받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예수님께 대한 판단도 여러 가지였습니다. 예수님께 대하여 호감을 가졌던 유대인들의 무리 중에도 바른 신앙고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1) 어떤 사람은 세례 요한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세례 요한과 같은 사명을 가진 선지자인 줄로 알았다는 것과 다른 한가지는 예수님의 능력을 보고 헤롯왕처럼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서 역사 한다고 믿은 것입니다.

(2) 더러는 엘리야라고 했습니다. 말4:5절에서 엘리야는 메시야가 아니라 그의 길을 예비하는 선지자로 예언되어 있으며 이들은 주님이 바로 세례 요한임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3) 더러는 예레미아나 선지자 중에 하나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에 대하여 옛 선지자 중에서 다시 살아난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보내실 때 다시 그 사람을 보내시는 줄로 알고 그의 성격이나 그의 행하는 능력이 죽은 선지자와 비슷하면 그 죽은 선지자가 다시 살아난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성경을 오해한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2. 올바른 그리스도관

예수님은 이 같은 제자들의 말에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이 때 베드로가 선 듯 나서며 이처럼 고백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 베드로는 주님을 “주”라고 했습니다. 주라고 한 말은 신구약에서 주로 주종 관계를 나타낼 때 사용된 말로 신앙인의 입에서 이 말이 나올 때는 주란 말을 하나님과 결부시켰으며 신약의 주란 말의 ‘큐리어스’는 예수님을 하나님과 동격으로 표현하는 말입니다.

(2) 베드로는 주님을 “그리스도시요”라고 불렀습니다. 메시야란 말로 창세기15장에는 여자의 후손으로 나왔고 율법에는 모세를 통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란 말로 기록되었습니다(신68:15). 그리스도란 말에는 세 가지 요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첫째는 모세가 율법에서 증거한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으로 오신 선지자이어야 합니다. 이 일에 히브리서에서는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히1:2). 두 번째로는 그리스도란 기름부름을 받은 자로 그에게 대제사장의 사명이 있어야 합니다. 시편에는 예수님에 대하여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이르기를 너는 멜기세댁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일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졌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댁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셨느니라”고 했습니다(히6:20). 세 번째는 그리스도는 다윗의 위를 계승한 영원한 왕이어야 합니다. 이에 대하여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 노릇할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눅1:32-33). 이 세 가지 요건이 갖추어진 이가 바로 메시야의 자격자입니다. 이런 분은 예수님 이외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3) 베드로는 주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은 보편적으로 세상에서 말하는 아들인 것이 아니라 그와 기원을 함께 하시고 영광이나 본체나 인격이 동격이신 독생하신 하나님의 아들을 말합니다. 상천하지에 이같은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뿐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은 보편적으로 세상에서 말하는 아들이 아니라 그와 기원을 함께 하시고 영광이나 권세나 본체나 인격이 동격이신 독생하신 하나님으로서의 아들을 가리킨 것입니다.


3. 베드로와 천국 열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반석이란 이름을 주셨는데 이 이름이 주어지기 이전까지 그에게 부쳐진 이름은 시몬이었습니다. 우리가 반석이란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헬라어에 나오는 두 단어를 알아야 합니다. 주님이 베드로에게 주신 이름은 ‘페트로스’(πἐτρος)로 이 단어는 작은 반석이란 뜻입니다. 반석 그 자체가 아니라 반석의 한 부분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반석에 ‘페트라’(πἐτα)란 말이 있습니다. 이 반석이란 말은 거대한 반석으로써 이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 했습니다(고전10:4).

그러므로 “너는 베드로라”고 하신 말씀은 ‘너는 너의 신앙 고백으로 그 반석의 한 부분이 됐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셨는데 이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신다는 의미이지 베드로를 통해서 교회를 세운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 외에 다른 어떤 존재도 교회의 머리가 될 수 없습니다. 베드로도 우리도 모두 똑같이 한 머리에 붙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한 지체에 불과합니다.

또한 주님이 베드로에게 천국 열쇠를 주시겠다고 하신 말씀으로 인하여 오늘날 많은 신학적인 논란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천국 열쇠란 구원의 열쇠, 생명의 열쇠를 말합니다. 여기서도 열쇠란 말을 두 가지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계시록3:7절에는 다윗의 열쇠란 말이 있습니다. 이 열쇠는 오직 예수만이 가지고 계시는 유일하신 천국 열쇠를 말합니다. 베드로라 할지라도 주님의 이 열쇠를 넘겨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에게만 오직 구원의 열쇠, 천국의 열쇠가 주어집니다. 땅에서 맨다는 말은 교회에서 실시하는 합법적인 징계를 말하며, 땅에서 푼다는 것은 교회에서 맨 징계를 풀어주는 일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라고 하신 대상은 베드로 한 개인이 아니라 베드로의 신앙 고백 위에 세워진 교회를 말합니다. 구원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어 그리스도와 연합한 몸이 되었을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결론 :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경계하시기를 

자신이 그리스도임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잘못된 메시야관을 가지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을 메시야로 전한다면 

올바른 복음을 전하기가 어려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이런 베드로의 신앙 고백 위에 세워진 믿음이라면 

우리도 복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같은 신앙은 하나님이 주신 신앙이며 

이런 신앙에는 영생이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 140 ≈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본문 : 마태복음 16 : 21 - 23)

죽음과 부활을 처음으로 이르시다(막 8:31-9:1; 눅 9:22-27)

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7)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서 론 : 베드로는 주님께 칭찬들을 만큼 훌륭한 신앙 고백을 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고백을 한지 얼마 못되어 

그 주님으로부터 사탄이라고 하는 심한 책망을 들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베드로는 주님께 대한 올바른 신앙은 할 수 있었지만 

그 신앙을 뒷받침할 만한 지식이 없었던 것입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주님의 신분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긴 했지만 

그러나 복음은 아니었습니다. 

복음은 그의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에 대한 증거인 것입니다. 

아직 이 같은 지식이 없는 베드로는 

사탄의 대리자 노릇을 하게 됨으로써 

주님의 책망을 듣게 된 것입니다.


1. 베드로가 들은 책망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주님의 발길은 죽음을 향한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주님의 이 같은 고난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으며 

주님의 심정을 헤아릴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런 고난의 사실을 제자들에게 미리 알려주셔야 했습니다. 

주님은 자신이 장차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그 곳에서 장로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당하실 일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죽음의 고난을 이기시고 

제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실 일에 대하여 알려 주셨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사야53장에 나오는 

고난의 메시야에 대하여 설명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말씀은 제자들에게 너무나도 큰 충격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왕으로 오르시어 메시야 왕국을 세우실 줄로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 일에 대비하여 좀 더 높은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은근히 서로간에 자리다툼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영광을 누려야 할 주님께서 

왕은 고사하고 잡혀서 죽게 된다고 하니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때도 성미가 급한 베드로가 주님을 붙들고 간했습니다. 

“주여 그 같은 일은 하지 마소서. 이런 일이 주님께 미쳐서야 되겠나이까”

하면서 매달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베드로에게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고 하시는 책망을 하시게 된 것입니다.


2. 베드로의 메시야관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붙들었다는 말의 원어의 뜻은 

“이용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베드로는 결코 주님을 위하여 붙든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 붙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자신들에게 치명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꿈이 수포로 돌아가는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예수님이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고 책망하신 것은 이 땅위에서의 영광만을 생각해온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나무라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이 하셔야 할 사역을 몰랐기 때문에 왜 제사장이나 서기관들에게 붙잡혀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셔야 하는가에 대하여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생각하는 부활도 세상 마지막에 있는 부활에 대한 믿음은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의 선생이 죽으신 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들의 부활관은 마르다의 고백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고 말했는데 주님이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는 말씀에 마르다는 이처럼 대답했던 것입니다(요11:24).

(1) 주님이 십자가를 지셔야 할 이유는 그는 율법의 마침이 되셔야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율법의 마침이 되셔야 할 일에 대하여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른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갈3:19). 이것은 우리의 의가 율법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의가 되시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희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5:21).

(2) 주님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셔야 했습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함인데 그 아버지의 뜻은 그가 십자가에 달려 죄인의 속죄 제물이 되시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그 몸을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는데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빌2:6-8).

(3) 주님이 십자가를 지셔야 했던 이유는 그는 그의 백성들의 죄의 형벌을 대신 치르셔야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이같은 주님의 고난에 대하여 이처럼 예언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고 했습니다(사53:5). 사도 요한은 이 일에 대하여 우리를 사랑하사 그 아들을 화목 제물로 보내셨다고 말씀했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다”고 하셨습니다(요일4:10).


3.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책망하시면서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그 이유로서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고 하신 것입니다.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은 세상 영광을 구합니다. 하나님의 영광보다 자신의 영광을 앞세웁니다.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은 정욕에 의하여 그의 생각이 지배를 받습니다. 우리가 이처럼 사람의 일을 생각하면 사탄에게 이용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게 하는 마귀의 생각입니다. 마귀는 우리의 마음에서 탐심을 일으키고 우리로 그 탐심의 노예가 되도록 역사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사탄이 준 육신의 생각에 사로잡혀 사탄에게 이용당하여 사탄의 대변자 노릇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하는 준엄한 책망을 듣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해야 합니다. 의, 식, 주 문제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내 유익과 내 영광을 생각하기에 앞서 먼저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는 일이 그런 생각입니다. 그리고 내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는 생활이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일입니다.


결론 : 사탄은 우리와 가까운 거리에서 언제든지 나를 공격할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습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에 굳게 서서 저를 대적하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의 생각을 하면 사탄은 그 때 나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항상 나와 가까운 내 주변의 사람을 통하여 넘어지게 하려고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혜 가운데서 우리의 신앙이 끊임없이 자라나야 하며 언제나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생활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생활을 하여 영생의 결실을 맺어야 할 것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죽음을 가져와도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을 가져옵니다.


≈ 141 ≈ 주님을 따를 자의 결심

(본문 : 마태복음 16 : 24)

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서 론 : 예수님은 자기를 따를 자들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저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을 따르려는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든지 주님이 말씀하신 이 분량에 이르도록 신앙적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일에 대하여 베드로가 “그리 마옵소서”하고 간하였을 때 그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자란 심한 책망을 들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바는 십자가를 피하는 일은 하나님의 생각이 아니라 사람의 생각이며 우리로 하나님 앞에 세우는 일이 아니라 넘어지게 하는 일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1. 예수님을 따를 자의 각오

예수님은 자신이 짊어질 십자가를 말씀하시고 베드로가 간한 사단의 생각을 나무라신 후, 주님을 따를 자들이 져야 할 십자가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장차 주님과 함께 영광을 누릴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누구나 그리스도와 연합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입니다. 그러므로 그와 함께 하나님 나라의 후사가 되기 위해서는 “그와 함께 영광을 얻기 위하여 그와 함께 고난도 받아야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같은 고난을 능히 감당할 수 있는 근거는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 고 보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십자가를 지심으로 말할 수 없는 영광의 자리에까지 높이 오르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2. 그리스도인의 자기 부인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생활에 나타내야 할 첫 열매는 자기 부인입니다. 여기서 말한 자기란 성령을 거슬리는 육신의 사람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의 옛 사람의 모습을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옛 사람의 열매란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 비방, 능욕, 교만, 자랑, 부모 거역, 우매, 무정, 무자비” 등이라고 했습니다.

(1) 자기를 부인하는 생활이란 죄에 대하여 죽는 생활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죄에 대하여 죽는다는 말은 영적인 말로 그 근거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단호하게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살겠느냐”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십자가에서 죽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죄 가운데 살아가서는 안 됩니다. 그리나 우리는 아직도 여전히 죄악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하며 이런 사실을 믿을 때 성령께서 죄에 대하여 죽는 생활을 이루게 해 주십니다.

(2)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은 영의 생각에 지배를 받는 생활을 뜻합니다.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입니다. 영의 생각이란 성령께서 주시는 생각인데 곧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생활입니다. 이런 생활에 대하여 바울은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고 한 것입니다. 영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는 생활은 육신을 하나님의 말씀에 굴복시키는 일입니다.

(3)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은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라는 말입니다. 육의 행실이나 생각을 버리지 않으면 그리스도 안에서의 생활은 불가능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갈2:20). 바울의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자기를 부인하는 생활을 해야 그 생활이 주님을 위한 생활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생활입니다. 이런 생활은 우리에게 언제나 승리를 안겨줍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15:6).


3. 그리스도인의 자기 십자가

주님은 우리가 저야 할 십자가에 대하여 “자기 십자가”란 이름을 부치셨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우리가 십자가를 질 때 어떤 십자가이건 그것은 마땅히 자기가 저야 할 십자가란 사실을 알아야 의미합니다. 십자가란 한마디로 말하면 우리에게 오는 고난을 의미합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생애에는 많은 고난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많은 십자가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것을 우리에게 지라고 하신 것입니다. 자신에게 오는 십자가가 어떤 것이건 그것은 반드시 자기가 저야 할 것이기 때문에 그 십자가를 피하면 안돼는 것입니다.

(1) 십자가 중에는 자신의 죄 값으로 오는 징계의 십자가도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같은 십자가를 졌던 많은 사람들을 바라봅니다. 다윗이 그러했습니다. 우리아의 아내로 말미암아 그에게 돌아간 십자가는 그의 생애에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삼손도 그러했습니다. 그의 방종한 생활은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붙잡혀 눈알이 빠지고 옥에서 맷돌을 돌리는 십자가를 져야 했습니다. 이런 십자가는 징계의 고통 중에서도 그리스도인이 기쁘게 저야 할 십자가입니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이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느니라”고 했습니다.

(2) 다음에 연단을 위해 우리로 지게 하시는 시련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고 말씀하십니다(벧전4:12-13). 우리가 이 시련의 십자가를 감사히 질 것은 이에 따른 놀라운 약속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했습니다(벧전4:13).

(3)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 길에 정해 놓으신 고난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이 정하신 이 십자가를 누가 면할 사람이 있을 것입니까? 누가 이 십자가를 피할 것입니까?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전7:13-14). 하나님께서는 언제 어느 때 우리에게 어떤 십자가를 지게 하실 지 모릅니다. 우리는 이 십자가를 저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가 자기를 부인하는 일이나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을 하면 우리에게 많은 영적인 유익이 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만이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의 평안은 십자가를 벗으려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 십자를 지는 데서 온다고 하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어떤 고난의 십자가가 온다해도 그것을 잘 지기만 하면 그 일이 오히려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큰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처럼 십자가를 지는 생활을 하면 우리의 믿음이 놀랍게 성장하게 됩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질 때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기회로 삼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 142 ≈ 생명을 얻는 비결

(본문 : 마태복음 16 : 23 - 26)

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서 론 : 예수님은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저야 할 것을 말씀하시고 참 생명을 얻는 비결과 생명을 잃는 일에 대하여 경종하셨습니다. 우리가 왜 영적 생명을 잃게 되는 것인가? 그것은 자기 목숨을 구원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참 생명을 찾을 수 있는 비결이 있는데 그것은 주님을 위하여 우리의 목숨을 버리면 찾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먼저 이해해야 할 일은 잃을 것이라고 한 목숨은 육신의 생명이요 얻으리라고 한 목숨은 영적 생명을 의미한다는 사실입니다.


1. 자기 목숨을 그리스도 구원하려고 하는 사람의 결국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제 목숨을 구원한다는 말은 그의 삶의 목적이 육신의 생명에 있다는 것을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여기서 목숨이란 말은 ㉮ 그리스도밖에 있는 자기의 생명을 말합니다. 이 생명은 흙에 속한 목숨입니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하신 말씀에서 밝혀진 그리스도 밖에 버려진 생명을 의미합니다(요15:5). ㉯ 이같은 목숨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서 이탈한 생명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한 목숨이요 죄를 좋아하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목숨입니다. ㉰ 또한 이런 목숨을 가진 사람은 그 목숨을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두 가지 삶을 동시에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영적인 생활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면서 동시에 자기의 육신적인 유익을 위해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육신의 생활은 하나님 앞에서 죽은 생활이요 생명의 길에서 떨어진 생활입니다. 여기서 주님이 구원코자 하면 이라고 하신 말씀은 얻으면 이란 뜻입니다(마10:39). 이런 생활은 육신의 것을 심는 일입니다. 이처럼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는 사람은 육신의 욕망을 이루는 일에 그의 생의 목적을 두는 것입니다. 그리고 돈을 사랑하는 생애를 살아갑니다. 그들의 생활은 또한 세상의 풍조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런 생활은 육신을 심는 일이요 육신의 것을 심는 사람들입니다. 그 결과는 이렇습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심는 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고 하셨습니다(갈6:8).

또한 잃을 것이라고 한 말씀은 자신의 참 생명인 영원한 생명을 상실한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육신의 목숨을 죽이지 못하고 자신의 목숨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은 그의 참 생명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을 구원코자 하는 사람은 자신의 참 생명을 잃게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기의 육신의 생각과 육에 속한 생활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면 그 사람은 결국 자신의 소중한 영적인 생명을 잃게 됩니다. 사람들이 자기의 육신적인 목숨을 소중히 여기고 그 육신적인 목숨을 구원하려고 한다면 다시 말하면 자기를 부인하는 생활과 자기 십자가를 지는 생활을 원치 않는다면 결국 그의 소중한 영적인 생명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경종이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육신대로 살아서 얻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고 모두 잃는 것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하셨습니다.


2.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예수님은 아무 거리낌없이 사람이 생명을 얻는 길이 어디 있는가를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진리이기 때문에 이처럼 분명히 밝히신 것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뜻이 있습니다.

(1) 자기 목숨을 잃는 일에 있어서 “나를 위하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오직 그리스도를 위한 목적에 두어여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삶은 그리스도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의 생애가 이런 목적에서 이탈하면 우리는 영생을 얻으려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들입니다. 그러면 이 지체를 가지고 우리가 해야할 일이 무엇입니까? “너희는 너희 것이 아나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했습니다(고전6:20). 자신의 목숨을 잃는 길을 택하는 사람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의 목숨보다 더 소중한 목적이 있을 때 그런 일이 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의 삶이 주님을 위한 것임을 가리킵니다. 이 목적에서 이탈하면 영생을 얻으려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나를 위하여 라고 한 또 한가지의 뜻은 주님을 사랑하는 생활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말의 뜻은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생활을 말합니다. 주님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라”고 하셨습니다.

(2) 제 목숨을 잃는다는 말은 육신을 따르는 정욕과 탐심의 생활을 버린다는 뜻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 안에 거하는 생활을 한다면 우리는 마땅히 우리의 육신적인 생활을 죽여야 합니다. 이것이 곧 그리스도를 위하여 우리의 목숨을 잃는 생활입니다. 예수님은 이곳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생활을 자기 목숨을 잃는 생활이란 말씀으로 바꾸어 표현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참 생명을 얻으려는 사람은 세상으로 향한 육신의 생각을 주님을 향한 영의 생각으로, 육신의 정욕적인 욕망을 영원한 소망으로, 자기자신의 영광을 바라는 육신의 유혹에서 하나님의 영광으로 옮겨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적인 모든 문제가 근원적으로 주님을 향하여 방향이 전환되어야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얻으리라”고 하신 말씀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3. 천하와 비교되는 우리의 생명

잃으면 안되고 반드시 찾아야 할 우리의 생명은 영적 생명으로써 이 생명이야말로 천하보다 귀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만일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 우리의 생명은 천하보다 더 귀한 가치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인생의 행복이 우리의 어디엔 가 숨겨져 있는 것으로 알고 그것을 찾으려고 무던히 노력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그런 가치 있는 것은 존재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원하는 모든 것을 자기 소유로 삼을 수 있을지라도 그것을 누릴 수 있는 기간은 대단히 짧은 기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생명을 찾아가시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하나님의 정하신 바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2)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신의 가치를 안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이 목숨은 죽음에도 소망이 있다고 했습니다.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목숨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연합되는 몸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자녀로서 유업을 받을 목숨입니다. 하늘에 소망을 둔 목숨입니다. 이 세상에는 이같은 우리의 목숨과 바꿀만한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런 우리의 목숨이 참으로 귀한 것은 이 목숨을 주신 분이 우리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벧전1:18-19).


결론 : 우리들이 소유하고 있는 생명은 이처럼 가치가 있는 생명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육신의 생활을 죽이고 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은 그런 생활에서 참 생명을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존귀한 생명을 이하여 자기 목숨을 그리스도를 위해 잃어버릴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 143 ≈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올 때

(본문 : 마태복음 16 : 27 - 28)

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2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서 론 : 예수님은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분명히 주님의 재림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그 때에 행한 대로 갚으시는 상급과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시기 직전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고 하셨는데 바로 이 말씀에 대한 심판을 이처럼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마치 달란트의 심판 비유와 유사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 후에 28절에서 하신 말씀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는 말씀은 그 해석이 여러 가지로 시도되고 있지만 아직까지 해석하기 어려운 문제로 남아 있습니다.


1.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올 때의 심판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의 심판은 행한 대로의 심판입니다. 행한 대로라고 하신 말씀은 각자가 심은 대로란 의미가 되겠습니다. “사람이 무엇을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고 했습니다(갈6:7-8).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의 행한 대로의 심판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하나는 불신자의 심판입니다. 마지막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은 하나 뿐입니다.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이니 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2) 다른 하나의 심판은 믿는 자들의 심판입니다. 이 믿는 자들의 심판도 두 가지로 구분되는데 하나는 소위 마귀가 심어 놓은 가라지들의 심판입니다. 이 가라지의 심판은 세상 끝날에 천사들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하셨습니다.

① 이 가라지 중에는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둔 사람들이 이들입니다.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 ...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마25:28-30). 이 사람이 이처럼 악하고 게을렀던 원인은 그가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②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사람들이 이들입니다.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고 했습니다(히6:7-8). 이들이 가시와 엉겅퀴를 낸 까닭은 그들이 거듭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성령이 내주하지 아니하심으로 복 받을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입니다.

③ 가라지 중에는 교회에서 진리를 대적하고 당을 짓는 자들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않고 불의 좇는 자들에게는 노와 분으로” 심판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롬2:6-8). 이들이 교회에서 진리를 좇지 않고 불의를 좇으며 당을 지어 진리를 대적한 이유는 진리의 말씀으로 새롭게 함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한편 구원받은 성도들에 대한 상급의 심판이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 했습니다(고전5:10). 이 그리스도의 심판대는 백보좌 심판 때,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주시는 상급의 심판입니다. 우리가 주를 위해 하는 모든 일에는 이 자리에서 받을 상급이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 했습니다.


2. 왕권을 가지고 올 때에 볼 자가 있느니라

예수님은 27절에서 그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올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실 것이라고 하신 후, 28절에서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고 하시므로 이 사건이 마치 그의 재림의 시기를 가리키는 듯이 보여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주의 재림은 이뤄지지 않았고 그 당시 이 말씀을 들은 주님의 제자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이 주의 재림을 가리킨 것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1)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이 17장에 나오는 변화산의 변화된 주님의 모습을 가리킨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변화산에서의 예수님의 변화는 잠깐 동안일 뿐 그의 왕권을 가지고 오신 모습은 아닙니다.

(2) 다른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을 예수님의 부활과 결부시켜 주님의 부활의 영광을 가리킨 것이라고 말합니다. 주님의 부활한 몸은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신 영화로운 몸이시지만 죽음에서 살아나신 모습이지 왕권을 가지고 오신 모습은 아닙니다.

(3) 또 어떤 사람은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예수님의 말씀이 이루어졌다고 말합니다. 이런 주장은 대단히 타당성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자신이 이 세상에 다시 오실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고 하셨습니다(요14:18-19).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의 재림이나 그의 부활을 가리킨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분명히 성령으로 다시 오실 것임을 가리킨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오심을 세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가 성령으로 다시 오실 일에 대하여 대단히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고 하셨을 때 제자들은 이 말씀의 뜻을 알 수 없으므로 예수님이 그들의 묻고자 하심을 아시고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요16:16-22).

이 말씀은 주님이 성령으로 다시 오실 것을 말씀하신 것으로 이 말씀의 흐름을 보면 그가 큰 영광으로 오실 것임을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다음에 예수님은 인류의 종말에 친히 재림하십니다.

오순절의 성령의 임하심은 예수님이 분명히 왕권을 가지고 오신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오순절을 기점으로 그의 나라인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시고 친히 그 머리가 되시므로 왕이 되셨습니다. 우리에게 미치는 주님의 왕권은 우리를 고아처럼 두지 아니하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가 왕권으로 지켜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고 하셨습니다. 화난을 이길 능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는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도록 우리의 교회와 우리의 생명을 그의 왕권으로 지켜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다고 하신 말씀은 영적인 의미로 해석해야 합니다. 오순절에 오신 성령님은 분명히 왕권을 가지고 오신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오순절을 기점으로 그의 나라인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시고 친히 그 머리가 되시므로 왕이 되셨습니다. 그는 왕권의 소유자로 지금 교회를 다스리시며 우리는 그 분을 우리의 왕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결론 : 왕권을 가지고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는 것을 가룟 유다는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이 왕권을 가지고 오신 주님을 지금 우리의 심령 속에 모시고 있습니다. 우리의 이 왕은 이 세상 끝날 까지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왕을 힘입어 죄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는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왕을 의뢰하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17장 설교

◆ 밤중소리 03-01 | VIEW : 5,851

≈ 144 ≈ 변화산에서 일어난 일(본문 : 마태복음 17 : 1 - 13)

≈ 145 ≈ 겨자씨 만한 믿음의 능력(본문 : 마태복음 17 : 14 - 20)

≈ 146 ≈ 예수님이 내신 성전세(본문 : 마태복음 17 : 22 - 27)


≈ 144 ≈ 변화산에서 일어난 일

(본문 : 마태복음 17 : 1 - 13)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형되시다(변화산 사건)

(막 9:2-13; 눅 9:28-36,벧후 1:16-18)

1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2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3 그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이거늘

4 베드로가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

6 제자들이 듣고 엎드려 

심히 두려워하니

7 예수께서 나아와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이르시되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니

8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명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10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1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12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

13 그제서야 제자들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이 

1)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


서 론 : 예수님은 어느 날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습니다. 그 산의 위치가 어디인지 밝혀지지 않고 있어서 

보통 변화산이라고 말합니다. 

이 산 이름이 이처럼 붙여진 이유는 

예수님이 이 산에서 변형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는 12명의 사도들이 있었고 

그 외에도 주님을 따르는 많은 제자들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주님의 사랑을 받는 세 사람의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였는데 

이들은 주님을 위해 헌신함에 다른 제자들보다 더욱 적극적이며 

주님의 인정을 받은 제자들입니다.


1. 사랑을 입은 세 제자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을 모두 똑같이 사랑하시거나 

똑같은 사명을 주신 것은 아닙니다. 

주님의 제자들 중에도 다른 제자보다 

더욱 큰사랑을 받고 있는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들을 쉽게 알아낼 수 있습니다.

(1) 그 중에 하나가 베드로입니다. 

베드로는 적극적인 성품을 가진 제자였습니다. 

주의 일에 적극성을 가진다는 일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는 무덤에 갔었던 여인들의 이상한 말에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주는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5:8)고 고백한 사람입니다. 

그는 비록 파도를 무서워하기는 했지만 바다 위로 걸어간 사람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주님 앞에서 칭찬 받을만한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그는 단연 제자들의 으뜸으로 인정받았습니다.


(2) 요한은 예수님의 특별하신 사랑을 입은 제자입니다. 

요한복음에는 요한이 스스로 자신을 가리켜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란 이름을 

여러 번 붙이고 있습니다(요13:23, 19:26, 20:2, 21:20). 

요한은 영적으로 가장 깊이 있는 신앙의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실 때 그 뒤를 베드로와 요한이 따랐는데 

요한은 담대한 믿음으로 끝까지 그 자리에 있었고 

베드로는 계집종 앞에서 세 번이나 주님의 이름을 부인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실 때 다른 제자들은 다 도망갔지만 

요한은 끝까지 십자가 곁에서 주님의 쓰라린 고난에 동참했습니다.


(3) 야고보는 요한의 형제로 최초의 순교자가 된 제자입니다. 

예수님은 이 어린 야고보가 주님을 위한 최초의 순교자가 될 줄 이미 아시고 

그를 더욱 사랑하신 것입니다(마10:22-23).


2. 예수님의 변형

이들 세 명의 제자와 함께 높은 산에 올라가신 주님은 

그 곳에서 변형되셨다고 했습니다. 

주님의 변형되신 모습을 보면 

그 얼굴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고 했습니다. 

이 같은 주님의 모습은 그의 영광을 드러낸 모습입니다. 

복음을 위해 밧모섬에 유배되었던 사도 요한에게 나타나셨던 

그 영광의 모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얼굴이 해같이 빛났다는 것은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같더라”고 하신 말씀과 같으며(계1:16),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다고 하신 모습은 

“그 옷은 희기가 눈 같고”라고 표현한 단7:9절의 주님의 모습과 같으며 

이런 모습은 그의 몸에서 그의 신성이 비취어진 모습입니다. 

다니엘은 이 모습을 보았을 때 혼절하였고 

사도 요한도 죽은 자와 같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세상 종말에 온 인류는 재림하시는 주님의 영광의 모습을 바라보고 

두려워하며 애곡하리라고 했습니다.


이 산에서 예수님이 영광의 모습으로 변형되신 이유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명을 띠고 주님을 찾아온 

모세와 엘리야와의 상면을 위해서였습니다. 

하늘의 영광의 모습으로 내려오는 그들과 상면하시기 위해서는 

주님도 불가불 영광의 모습으로 변형되셔야 했습니다. 

우리는 변화산에서 이루어진 모세와 엘리야와의 만남과 그 대화의 중심이 

주님의 죽으심에 관한 것임을 본문에서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모세는 율법의 대표자로, 엘리야는 선지자의 대표자로 

보내심을 받았을 것이며, 

아마 이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메시지를 가지고 왔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의를 주시는 그리스도는 

일찍 율법과 선지자의 증거를 받은 분입니다(롬3:21-22). 

이 일에 대하여 누가복음에는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쌔

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눅9:30-31). 

아마도 이 자리에서의 대화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받으실 고난에 대하여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내용일 것입니다.


2. 베드로의 초막집

졸다가 깨어난 세 제자들은 

이같은 기이한 영광의 모습을 바라보고는 심히 놀랬습니다. 

이 때 베드로가 주님을 향하여 이처럼 말했습니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우리는 베드로의 이런 말에서 다른 세 가지 사실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마 베드로는 이런 광경이 

장시간 계속되리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밤에 쌀쌀한 날씨에 

이 분들에게 무엇인가 의지할 곳을 만들어 드리는 것이 

자신들의 할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그 영광의 장면이 너무 황홀해서 

그대로 그 곳에 오래 머물러 있기를 원하는 마음에서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란 말을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3. 구름 속의 음성

베드로가 이처럼 말할 때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물론 이 소리는 하나님이 세 제자들에게 들려주시는 음성이었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희 말을 들으라”

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세 명의 제자들이 

변화산에서의 경험을 다음 몇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1) 주님의 영광된 모습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그의 태어나심과 그의 말씀과 그의 생애를 통하여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고 하신 그 영광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2)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었습니다.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이 같은 체험은 하나님의 은혜의 체험인 것입니다.


(3)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들이 들은 하나님의 음성은 두 가지로 나와 있습니다. 

하나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음성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들려주시려는 음성은 이 두 가지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독생자이심을 믿고 

우리가 그의 말씀을 듣고 순종한다면 

우리는 이 음성을 들은 사람들이며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4) 주님은 그들에게 “일어나라 두려워 말라”고 하시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들이 주님의 이 말씀을 들었을 때 

두려움이 살아지고 기쁨과 평안이 찾아온 것입니다.


결론 : 그들은 “일어나라 두려워 말라”고 하시는 

주님의 위로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들이 이 말씀을 들었을 때 

두려움이 살아지고 기쁨과 평안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오직 주님만 보였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오직 예수만 보이게 하시고 

그의 말씀만 듣게 하십니다. 

이것만이 우리의 생명의 길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놀라운 체험을 한 후, 

그들은 주님을 모시고 산에서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 145 ≈ 겨자씨 만한 믿음의 능력

(본문 : 마태복음 17 : 14 - 20)

귀신 들린 아이를 고치시다

(막 9:14-29; 눅 9:37-43 상)

14 그들이 무리에게 이르매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이르되

15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그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16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니라

18 이에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 때부터 나으니라

19 이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20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서 론 : 주님이 베드로, 요한, 야고보를 데리고 산에서 내려오셨을 때 산아래 제자들은 어느 어린 병자를 가운데 두고 매우 난감한 처지에 있었습니다. 귀신이 들려 간질로 고생을 하는 아들을 데리고 온 어느 아버지의 부탁을 받고 그 아들의 병을 위해 기도했으나 아무런 효험이 나타나지 않자 그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면서 쩔쩔매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지난날 복음을 위해 각 고을로 보내심을 받았을 때 주님으로부터 귀신을 쫓는 권세와 문둥이를 깨끗게 하는 권세를 경험했던 터라 간질병쯤은 기도로 고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실패하여 어려움을 당하고 있을 때 마침 예수님이 나타난 것입니다.


1. 주님의 탄식

그 아들의 아버지는 예수님께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저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 지라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고 간구 했습니다. 이 때 주님은 심히 탄식하셨습니다.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주님의 이 탄식은 그 아버지를 향해 던져진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없고 패역한 그 당시의 세대를 향하여 탄식하신 것입니다.

(1) 믿음이 없는 세대라고 탄식하셨습니다. 유대인의 선생들은 예수를 믿고 구원받는 길을 택하지 아니하고 그를 모함하여 죽이려 하였으니 참으로 믿음이 없는 세대였습니다.

(2) 패역한 세대라고 탄식하셨습니다. 주님이 이처럼 탄식하신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떠난 생활을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도다”고 책망하셨습니다.

(3)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겠느냐고 탄식하셨습니다. 주님은 이제 얼마 후에는 아버지께로 가셔야 합니다. 그가 오랜 기간 그들과 함께 있지 못할 일을 이처럼 표현하셨습니다.

(4)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하셨습니다. 그들의 패역은 주님으로 참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길이 참으심은 이사야가 예언한 바와 같이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시고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는” 자비하심으로 나타내셨습니다.


2.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예수님은 그 아들의 아비에게 “그를 이리로 데려 오라”고 하셨습니다. 데려 오라고 하신 말씀은 네 문제를 내가 해결해 주겠다는 응답이십니다. 이런 말씀은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입니다. 데려오라고 하신 것은 네 문제를 내가 해결해 주겠다고 하시는 응답이기 때문입니다. 그 아버지는 자기 아들을 예수님께 데려 갔을 때 모든 문제의 해결을 보았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는 말씀은 비록 그 아비에게만 해당하는 말은 아닙니다. 모든 인류들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입니다.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신 말씀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고통을 당하는 모든 사람에게 “내게 오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2)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는 자에게 내게로 데려 오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모든 병자를 불쌍히 보십니다. 예수님은 모든 병든 자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누구든지 병든 자를 그에게 데리고 가면 그의 자비하신 손길로 고쳐주십니다. 우리는 간질병으로 고생하는 아들을 주님께 데리고 나온 이 아버지의 심정으로 죄로 고통을 당하는 인생들을, 갈급한 심령으로 생명을 얻기를 바라는 영혼들을, 질환으로 소망이 끊겨진 심령들을 주님께로 데리고 가야 합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그를 이리로 데려 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3) 인생의 갈급함을 해결 받으려는 자들을 이리로 데려 오라고 하십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고 하셨습니다(요7:37-38).


3. 너희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주님의 권능의 말씀에 그 아이에게서 귀신이 쫓겨 나가자 아이가 온전해졌습니다. 

이 때 제자들이 주님께 자기들은 어찌하여 내어쫓지 못했는가 고 물었습니다. 

이에 대해 주님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권능이나 능력은 한때 받았다고 해도 

믿음으로 유지하지 못하면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너희 믿음이 적었다는 말씀에는 

그들의 신앙 생활에 큰 믿음을 가질 수 없을 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것을 가리키신 것입니다.


(1) 그들은 계속적인 은혜 생활을 못했습니다. 

그들은 영적 생활이나 복음 사업보다 

자신들의 처신 문제에 더 큰 관심을 가졌었습니다.


(2) 그들은 기도 생활에 나태하고 등한했습니다. 

그리스인의 기도 없는 생활은 믿음을 잃어버리기 쉬운 생활입니다. 

주님은 습관을 따라 기도하셨지만 

제자들은 기도의 습관이 없었고 

스스로 기도하는 모습을 아무 데서도 찾을 수 없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주의를 시켰습니다.


(3) 그들은 땅에 일만 생각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들은 누가 더 크냐는 데 더 큰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소망을 바라보고 

신령한 일에 관심을 갖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너희가 못할 일이 없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믿음을 겨자씨에 비유하신 것은 

적은 믿음을 가리킨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이미 그들을 향하여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고 책망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항상 적은 믿음입니다. 

그러나 이 적은 믿음에서 하나님의 살아 계신 능력이 나타나려면 

그 믿음이 살아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겨자씨는 심히 적지만 그 안에는 그 겨자씨로 

큰 나무를 만들 수 있는 생명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아무리 적어도 그 속에 겨자씨 만한 생명만 깃들여 있다면 

무엇이나 믿음대로 이뤄질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 같은 믿음은 어떤 신앙 생활에서 얻을 수 있는 것입니까? 

첫째로 기도가 있는 믿음입니다. 

다음에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입니다. 

셋째로 말씀을 믿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만을 의뢰하는 믿음입니다.


결론 :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란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와 여러 가지 은사들을 잘 간직하여 

우리의 신앙생활에 유익하게 하려면 믿음이 없고 패역한 이 세대에서 

우리 주님만을 믿고 그 말씀의 능력 안에서 

아름다운 생활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 146 ≈ 예수님이 내신 성전세

(본문 : 마태복음 17 : 22 - 27)

22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23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매우 근심하더라


성전세를 내시다

24 가버나움에 이르니

3)반 세겔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나아와 이르되

너의 선생은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

25 이르되 내신다 하고 집에 들어가니

예수께서 먼저 이르시되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냐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 관세와 국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

26 베드로가 이르되 타인에게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렇다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

27 그러나 우리가 그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라


서 론 : 예수님은 자신의 수난의 날이 가까워짐에 따라 

제자들에게 자신이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어 죽임을 당하고 

삼일만에 살아나리라는 말씀을 자주 들려 주셨습니다. 

주님이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에 모일 때에 

이 같은 수난의 두 번째 예언을 그들에게 들려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주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심히 근심하더라고 했습니다. 

그들의 근심은 주님이 받으실 고난에 대한 인간적인 동정이며 

한편으로는 그같은 고난의 일이 오면 

자기들은 어찌될 것인가에 대한 불안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죽으심에 대한 말씀은 믿을 수 있었지만 

사흘만에 다시 살아난다고 하신 말씀은 전혀 관심에 두지 아니했습니다. 

이 같은 사실은 주님이 부활하신 후에 

그가 다시 살아나셨다고 전한 여인들의 말을 믿지 않은 사실에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예수님은 가버나움에 이르게 되었는데 

이곳에서 반 세겔을 받는 자들과 만나 성전 세를 내시는 문제에 대하여 

주님이 취하신 아름다운 태도를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1. 유대인의 성전 세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어느 날 가버나움에 이르렀을 때 성전 세를 징수하는 사람으로부터 성전 세의 독촉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베드로에게 “너의 선생이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하고 물은 것입니다. 20세 이상 된 이스라엘의 남자들은 율법에 의 하여 매해 반 세겔의 돈을 성전 세로 의무적으로 바쳐야 했습니다. “무릇 계수 중에 드는 자마다 성소에 세겔대로 반 세겔을 낼지니 한 세겔은 이십 게라라 그 반 세겔을 여호와께 드릴찌며 무릇 계수 중에 드는 자 곧 이십세 이상 된 자가 여호와께 드리되 너희의 생명을 속하기 위하여 여호와께 드릴 때에 부자라고 반 세겔에서 더 내지 말고 가난한 자라도 덜 내지 말찌며,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속전을 취하여 희망의 봉사에 쓰라 이것이 여호와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기념이 되어서 너희의 생명을 속하리라”(출30:14-16).

반 세겔이란 두 드라크마와 같은 액수이며 드라크마는 헬라의 은전으로 로마의 데나리온과 동일한 화폐가치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반 세겔은 이틀간의 노동임금에 버금가는 액수였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 중 이십 세 이상 된 남자들은 한 해에 한번씩 니산월 초일이 되기 전에 의무적으로 내야하는 일종의 세금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마도 이 성전 세를 제 때에 내시지 못하셨던 것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성전 세를 징수하는 자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이것을 받으려고 그가 고향 땅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님을 찾아와 베드로에게 왜 안 나시느냐고 따진 것입니다.

이 같은 논란을 이미 아신 예수님은 집에 들어가신 후 베드로에게 한가지 문답을 시도하셨습니다.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뇨 세상 임금들이 뉘게 관세와 정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 이 물음에 베드로는 “타인에게 니이다”고 대답했습니다. 이처럼 물으신 이유는 주님은 바로 이 성전이 되신 분이시며 이 성전의 주인이시며 이 성전보다 더 크신 분이시기 때문이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느니라”(마12:6).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마12:8). 주님의 이 말씀은 주님이 하나님의 성전의 주인이시며 그 성전에서 경배를 받으실 분이심을 밝히신 것입니다. 성전은 자신의 집이시며 자기가 주인이시며 자신이 그 곳에 출입하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경배를 받으실 분이신 데 그런 분이 성전 세를 내신다는 것은 세상 법으로도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의 건덕(健德, 건전한 덕)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로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하여 

그들의 요구에 따르기로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에도 

세례 요한이 극구 말려 오히려 자기가 주님으로부터 

세례를 받아야할 것이라고 거절했을 때에도 주님은 그에게 

“허락하라 우리가 이같이 하여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마3:15)

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일이라면 

자신의 권위나 체면을 돌아보시지 않고 스스로 본을 보이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놀라우신 건덕이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주님을 위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나 나를 희생하고 모든 사람을 위하여 

덕을 세우는 일이 필요한 것입니다.


(I) 그리스도는 다른 사람으로 오해케 하시는 일을 하지 아니하셨습니다. 

다른 사람을 오해시키는 일은 

그 사람으로 실족케 하는 중대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오해케 한다의 오해란 말은 ‘스칸달리조’로 

이 말의 뜻은 걸리게 한다, 넘어지게 한다란 의미입니다. 

우리는 신앙적으로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문제라고 할지라도 

혹 다른 사람으로 오해케 하는 일이 되지 않는가 하는 것을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덕을 세운다”(고전8:1)고 말씀했습니다.

바울은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믿음이 약한 자 앞에서 덕을 세우라고 말했습니다.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고전8:12,13)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당연한 주장이나 권리도 행사하지 아니하시고 

다른 사람들에게 덕을 세우시기 위하여 세상 법을 따르신 것입니다.


(2) 예수님은 하나님의 법을 지키시는 일에 다른 사람들의 본이 되셨습니다. 

주님은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지키는 것에 대하여 책망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율법을 외식으로 지키며 장로의 유전으로 지키는 일을 비난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태여 율법의 굴레에 얽매이실 분이 아니시지만 

그는 창조주로써 인간에게 주신 그 율법을 스스로 온전히 지키심으로 

우리에게 본을 보이셨습니다.


3. 주님이 바치신 성전 세

이처럼 예수님은 성전 세를 바치셔야할 입장에 있었지만 예수님이나 베드로에게는 성전 세를 바칠만한 돈이 없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자기 자신을 위하신 일에는 이적을 행하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때는 다른 사람들로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하여 필요했습니다.


(1) 우리는 주님의 이 말씀에서 예수님이 내실 성전 세는 이미 하나님에 의하여 예비 되어 있었다고 하신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이 모든 되어질 일을 아셨기 때문에 성전 세에 필요하신 돈도 이 같은 방법으로 예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예비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을 의뢰하고 그 말씀을 따르기만 하면 하나님이 예비하신 축복을 받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2)우리는 이 말씀에서 하나님으로서의 예수님의 능력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 넓은 바다에 수없이 많은 물고기 중에 한 세겔의 돈을 물고 있는 고기를 아셨을 뿐 아니라 그 고기가 베드로의 낚시에 걸리게 하실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은 그가 하나님으로서의 능력을 가지고 계심을 나타내 보이신 것입니다.


결 론 : 우리에게는 사회에서 또는 교회에서 

마땅히 바쳐야할 헌금과 세금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일에 우리 주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인도하시는 한 나라에 소속되어 있는 국민들입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롬13:1)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들이 한 국민으로서 마땅히 준수해야할 세금 문제에 대해서도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 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롬13:7)고 했습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마22:21)

고 하신 주님의 말씀에 따라 

교인으로서 하나님의 것도 제대로 바치는 신앙생활을 해야하며, 

국민으로서도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칠 줄 아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18장 설교

◆ 밤중소리 03-01 | VIEW : 8,661

≈ 147 ≈ 천국에서 큰 자(본문 : 마태복음 18 : 1 - 4)

≈ 148 ≈ 실족케 하는 자의 죄(본문 : 마태복음 18 : 5 - 10)

≈ 149 ≈ 잃은 양을 찾으시는 예수님(본문 : 마태복음 18 : 12 - 14)

≈ 150 ≈ 범죄자에 대한 교회의 태도(본문 : 마태복음 18 : 15- 18)

≈ 151 ≈ 합심 기도의 능력(본문 : 마태복음 18 : 19 - 20)

≈ 152 ≈ 용서의 원리(본문 : 마태복음 18 : 21 - 35)

≈ 153 ≈ 죄와 빚(본문 : 마태복음 18 : 33 - 35)


≈ 147 ≈ 천국에서 큰 자

(본문 : 마태복음 18 : 1 - 4)

천국에서 큰 사람(막 9:33-37, 42-48; 눅 9:46-48; 15:3-7; 17:1-2)

1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2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3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서 론 : 천국에서는 누가 크냐는 문제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 주님께 물어 볼만한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 천국에 올라갈 사람들인데 그곳의 생활을 전혀 알 수 없는 우리로서는 과연 천국에서는 어떤 사람이 크냐는 문제는 우리의 흥미 있는 관심사가 아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이 점점 가까워지자 제자들은 그들이 바라고 소망하는 메시야 왕국이 눈앞에 다가온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제 그 나라에서 과연 자기들 중에 누가 큰 자가 될 것이냐에 대하여 신경을 곤두세웠습니다. 그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그 나라에서 제가끔 큰 자가 되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결론을 얻지 못하고 이 문제에 대하여 주님께 물어 보기로 하고 주님께?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고 묻게 된 것입니다.


1. 어린이와 같지 아니하면

예수님은 제자들의 이 같은 질문에 대하여 누가 천국에 들어갈 자이며 누가 천국에서 큰 자인가에 대하여 말씀하셨는데 그 대답이 제자들에게는 참으로 놀라운 말씀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한 어린아이를 불러 가운데 세우시고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궁금해한 대답에 대하여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주님은 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까?

(1) 어린아이란 육체적인 신체적인 요건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어린아이란 말은 ‘네피오스’로 이 말은 천진난만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어린이란 어린아이들의 성격적 특성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2) 어린이 란 말은 죄가 없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린아이들에게도 죄가 있습니다. 다만 그 죄의 깊이나 부피가 어른과 같지는 않지만 그들도 의인은 아니며 더욱이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그 후손들에게 내려온 원죄에 대해서는 어른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죄인인 것입니다.


2. 어린아이들의 성격적 특성

어린아이들에게는 그리스도인들이 본받아야할 성격적인 특성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같은 특성을 지니고 신앙 생활을 한다면 그 사람은 하늘 나라에서 큰 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1) 어린아이의 특성이란 무엇보다 교만함을 모른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특수층에서 자라난 아이들이 아닌 대다수의 어린이들은 그들의 성격이 교만하지 않고 온유하며 겸손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겸손하다는 말에는 다음 세 가지 요소가 포함되어 있어야 합니다.

① 겸손이란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주님은 우리들에게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먼저 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제각기 자기는 다른 사람보다 죄도 없고 인격도 훌륭하고 성품도 좋은 것으로 자부하려고 하는 못된 성품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만입니다.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 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들보를 빼리라”(눅6:42). 우리는 늘 이 말씀을 명심해야 합니다.

② 겸손이란 남을 섬기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섬김을 받으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교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의 법은 교만한 자를 물리차고 겸손한 자를 높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을 가리켜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③ 겸손이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참으로 무익한 종임을 아는 마음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주의 일을 한 후에 이에 대하여 자랑을 합니다.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이처럼 가르치십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할 일을 한 것 뿐이라 할찌니라”(눅17:10)

(2) 어린아이들의 성격적인 특성이란 쉬 뉘우친다는데 있습니다. 어린아이의 마음은 뉘우치는 일에 빠릅니다. 어른들처럼 숨기거나 변명하려는 마음이 없습니다. 죄를 뉘우치는 일에 있어서 우리는 어린아이들의 마음을 본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죄에 대하여 뉘우치는 회개하는 사람들이 들어갑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련 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죄에 대하여 회개할 줄 알아야합니다. 우리가 죄에 대하여 뉘우치는 마음을 갖지 못하는 이유는 죄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죄는 우리의 영혼을 죽이는 독소이건만 우리의 육체는 이 죄와 친숙해졌기 때문에 좀처럼 그 올무에서 빠져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의 죄에 대한 미온적인 태도에 대하여 우리 주님은 산상보훈에서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 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폼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마5:29,30).

우리의 이런 결연한 태도는 나의 무서운 죄로 말미암아 젊어지신 주님의 십자가롤 바로 바라볼 때에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죄 값의 두려움을 알고 그리스도안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때 우리는 죄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로마서 6장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죄에 대하여 취할 태도에 대하여 두 가지로 말씀해 주었습니다. 하나는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라고 하였고, 다른 하나는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찌어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3) 어린아이들은 그들의 마음의 밭이 순결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받아드립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했습니다(갈6:7). 어린아이들의 마음은 아직 죄로 인하여 단단한 길가를 이루지 아니했습니다. 아직 돌밭도 형성되지 않고 있습니다. 재리의 유혹을 상징하는 가시밭도 아닙니다. 씨를 뿌리면 뿌리는 씨대로 그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어린이들은 어른들이 가르쳐 주는 대로 의심하지 않고 액면 그대로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린아이들의 마음속에 참 생명의 씨앗인 하나님의 말씀을 심는 일은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심는 대로 결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마음도 어린아이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받아들이지 않으면 생명의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서로간 시기와 질투와 반목을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제각기 높아지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들이 주님의 이 말씀을 들었을 때 자기들이야말로 하나님의 나라에서 가장 낮은 자리에 머무를 것이라는 부끄러움을 금치 못했을 것입니다.


결 론 : 우리는 예수님의 겸손을 배워야 합니다. 제자들과 함께 저녁을 잡수실 때에 그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어주신 그 겸손함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주님이 가르쳐 주신 올바른 방법으로 하나님의 나라에서 큰 자가 될 수 있는 보람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생애를 보내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 148 ≈ 실족케 하는 자의 죄

(본문 : 마태복음 18 : 5 - 10)


서 론 : 남을 실족케 한다는 말은 다른 사람으로 범죄케 하는 일을 말합니다. 실족케 한다의 ‘스칸달리조’란 말의 뜻은 걸리게 한다, 넘어지게 한다, 범죄케 한다는 의미로 이것은 그 행위에 있어서 고의적인 뜻이 들어가 있는 것을 말합니다. 다른 사람을 유혹하여 그 사람으로 하여금 죄에 빠지게 한다든 가, 이단으로 이끌어 생명의 길에서 떨어지게 한다던가, 거짓 진리로 속여서 잘못된 길을 가게 하는 일 등은 다 남을 실족케 하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1. 실족시키는 대상

예수님은 천국에서 누가 큰 자냐 라는 제자들의 물음에 한 어린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셔 어린아이와 소자를 혼돈하기 쉽지만 이 두 단어는 같은 뜻이 아닙니다.


(1) “어린아이” 예수님은 실질적으로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문제에 대하여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라”고 말씀하심으로 제자들 앞에 세워둔 어린아이들도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인들에게 베푸시는 구원은 어린이들도 어른들과 동일하게 필요합니다.

우리 기독교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토대로 하여 어린이들도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사역에 포함되어야할 하나의 온전한 인격체임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어린아이를 주의 이름으로 영접하는 것은 곧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영접한다는 말은 그 어린아이에게 예수님의 구원의 도리를 가르치는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2) “소자” 예수님은 어린아이에게 관한 말씀 끝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소자란 말은 먼저 말씀하신 어린아이와는 구별된 말입니다. 주님이 나를 믿는 이 소자라고 하셨을 때 주님은 그 곳에 있었던 주님을 따른 무리들을 가리킨 것입니다. 소자란 말의 ‘미크로스’는 어린아이처럼 보잘것없이 보이는 존재를 가리킨 말입니다. 이들은 생명의 길을 걸으려고 걸음마를 시작한 연약한 심령들입니다. 이들은 외부적인 유혹이나 작용에 의하여 쉽사리 넘어질 수 있는 그리스도안에 있는 어린아이들입니다. 이들을 어떤 이유에서이건 실족시키는 일은 차라리 그 사람의 목에 무거운 연자 맷돌을 매달아 깊은 바다 가운데 빠뜨려 버리는 것이 오히려 나을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한 사람을 믿음에서 실족시키는 일은 그 사람의 참 생명을 죽이는 일이기 때문에 육신의 생명을 죽이는 죄보다 더욱 큰 죄가 된다는 사실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2. 소자를 실족시키는 일

실족시킨다는 말은 고의적인 뜻이 들어 있습니다. 거짓으로 또는 어떤 계책으로, 속임수로 신앙이 연약한 사람으로 믿음에서 떨어지게 하는 일입니다. 이 죄는 다른 사람의 영혼을 지옥으로 인도하는 영적인 살인 행위이기 때문에 극악한 범죄 행위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남을 실족시키는 일이 없도록 다음 네 가지 사항을 명심해야 합니다.


(1) 우리는 다른 사람을 죄의 길로 인도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비록 적은 일이라 할지라도 그 일로 인하여 다른 사람을 죄로 유혹 받도록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노아는 술을 많이 마심으로 부주의하여 벌거벗은 몸으로 자게된 것이 그의 아틀 함으로 하여금 죄의 킬로 유혹을 받게 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 많은 함의 자손들이 저주를 받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한 것입니다.


(2) 우리는 신앙적인 본이 안 되는 일로 인하여 다른 사람으로 실족시키도록 해서는 안됩니다. 특히 하나님의 종들의 경우에 있어서는 그의 모든 행실이 양 무리의 본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선한 일에 열심을 품고 덕을 세우며 다른 이에게 칭찬을 받을만한 행실을 하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3) 우리는 혹 잘못된 성경지식으로 다른 사람으로 실족시키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올바른 교리의 토대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성경에서 증거하는 진리란 어느 한 구절의 말씀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전체에 흐르는 참된 증거에서 진리를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4)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다른 이에게 경홀히 여기게 함으로 실족시키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히 여기며, 생명으로 알아야 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 앞에서도 그렇게 행동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모든 사람들에게 존귀하게 여기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이 연약한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경홀히 여기는 듯한 행동을 취함으로 그 사람으로 실족시키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3. 죄에 대한 우리의 결단력

예수님은 실족케 하는 죄의 중함을 여러 차례 경종 하셨습니다. 이 죄는 세상에 화를 불러오는 죄라고 하셨습니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남을 실족케 하는 범죄가 많이 있다는 사실을 밝히셨습니다. 그렇지만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으로 인하여 실족함을 입은 사람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돌이키게 하심으로 다시 일으키심을 받을 수 있는 소망이 있지만 다른 사람을 실족케 한 사람은 그 보응을 하나님으로부터 반드시 받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남을 실족시키는 죄를 범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죄를 결연히 끊어버리는 결단을 가져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 손이나 발이 범죄케 할 때에, 예수님은 몸의 한 부분이 범죄 했을 때 그 부분을 짤라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온전한 몸으로 영원한 지옥에 들어가느니 차라리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나올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액면대로 받아 드릴 말씀이 아니라 하나의 비유이신 것입니다.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로 여기라”(롬6:11)는 말씀이 바로 이 비유에 해당되는 말씀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죄를 버리려면 이 같은 결단력이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2) 주님은 눈이 너희로 범죄케 할 때에는 눈을 빼어 내버리라고 하셨습니다. 죄가 어찌 눈에서 나올 것인가? 마음에 있는 더러운 것이 눈올 통하여 범죄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눈을 뽑아버린다고 죄에 대한 용서가 따르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 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이행해야할 회개에 따르는 결단력을 의미하신 것입니다. 회개란 이처럼 죄를 끊어 버리는 실행력이 없이는 무의미합니다.


결 론 : 예수님은 삼가 이 소자 중에 그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우리들도 연약한 심령들을 주님의 심정으로 긍휼히 여기는 마음과 귀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주님은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다고 말씀하심으로 그들도 하나님에 대한 하나님의 백성들이며 그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음을 가르치셨습니다. 저희 천사란 말은 한 사람 한 사람, 개개인에게 천사가 딸려 있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십니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부리시고 계심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하늘의 천사까지라도 이들 소자들을 소홀히 여기지 않고 하나님의 명에 의하여 돌보는 책임을 다 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형제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고 그들을 나보다 낫게 여기며 존귀히 여기는 생활올 해야 합니다.


≈ 149 ≈ 잃은 양을 찾으시는 예수님

(본문 : 마태복음 18 : 12 - 14)


서 론 : 소자의 생명을 귀히 여기시는 우리 주님은 잃은 양의 비유를 통해서 그들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심을 밝히셨습니다. 예수님이 비유로 들려주신 잃은 양의 경우는 너무나도 유명하신 말씀이십니다. 모든 하나님의 교회에서 하나님의 종들이 아마 이 비유의 말씀을 가지고 설교하지 않은 목자가 없을 정도로 우리의 귀에 익숙한 말씀이십니다. 이 비유에서 예수님은 일 백 마리의 양파 한 마리의 양을 대조적으로 등장시키셨습니다. 일 백 마리란 한 교회의 온전한 교인 수효를 가리키신 것이고 잃은 한 마리란 목자를 잃은 양이며, 길을 잃은 양입니다.


1. 누가 잃은 양인가?

길을 잃은 한 마리의 양을 귀히 여기시는 주님의 심정을 살펴볼 수 있다면 우리는 이 한 마리의 양에게 많은 관심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 잃은 한 마리의 양은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1) 이들은 다른 사람들의 미혹을 받아 생명의 길을 이탈한 소자를 가리킵니다. 이들은 죄의 유혹을 받아 실족한 무리들입니다. 이 세상 우리 주변에는 실족케 하는 많은 무리들이 들끓고 있습니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다”고 하신 말씀대로 실족케 하려는 사단의 손길이 거짓 형제들을 통하여, 거짓 선지자들을 통하여, 잘못된 교훈을 가르치는 거짓 선생들을 통하여 그 틈을 노리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 같은 일에 대하여 엄히 경계할 것올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벧전5:8,9). 이들은 비록 잠시동안 여러 가지 원인으로 인하여 실족된 자리에 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최종적으로 구원받을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인 것입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6:39)고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그 어떤 경우에라도 잃은바 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일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 중에도 일시적으로 죄악에 빠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 죄악 중에서 그대로 버림받아 멸망 받을 사람들은 아닌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피로 값 주고 사신 귀하고 값진 그의 백성들이기 때문에 한 생명도 버림 바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2) 아버지의 집을 나간 탕자도 잃은 양입니다. 탕자란 말이 우리 입에서 자주 오르내리지만 탕자란 세상 유혹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품에서 떠난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러나 탕자는 궁극적으로 아버지 집에 돌아온다는 사실이 전제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기로 예정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복음에 등장하는 탕자의 비유는 그들이 세상으로 떨어져 나갈 때에 그들에게 어떤 결과가 오느냐에 대하여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언제인가는 되돌아오지 않을 수 없지만 그러나 돌아오기까지는 그 오랜 기간동안 말할 수 없는 영적인 방황이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 탕자는 가진 것을 다 잃은 후 인생의 패배를 철저하게 경험한 후에야 아버지 집을 생각함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들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하여 아혼 아홉 마리의 양을 산에 두고 찾으신다고 하셨습니다.

(3) 목자가 우리에서 내어쫓은 잃은 양 무리들도 있습니다. 목자들의 잘못으로 인하여 잃어버린 양들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목장의 양 무리들을 멸하며 흩는 목자에게 화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스라엘 하나님 나 여호와가내 백성을 기르는 목자에게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가 내 양 무리를 흩으며 그것을 몰아내고 돌아보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내가 너희의 악행을 하여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23:1-2). 이 같은 목자들에 게 스가랴 선지는 못된 목자라고 말했습니다. “화 있을진저 양떼를 버린 못된 목자여 칼이 그 팔에 우편 눈에 임하리니 그 팔이 아주 마르고 그 우편 눈이 주 어두우리라”(슥11:17). 예수님은 이들을 삯군이라고 정죄하셨습니다.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늑탈하고 또 해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군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니”(요10:12-13).

목자가 양을 돌아보지 않으면 그 양 무리들은 잃은 양이 되며 그 목자는 못된 목자 즉 삼군 목자가 되는 것입니다. ①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는 목자가 양을 돌보아주는 참 목자입니다. 목자는 자기 양의 이름을 일일이 알아야하며 그 이름을 따라 기도해야 합니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요10:3). ② 양의 무리들을 잘 먹이는 목자가 양을 돌보아주는 목자입니다. “너희가 살진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으며 그 털을 입되 양의 무리는 먹이지 아니하는도다”(겔34:3)고 책망하셨습니다. 양의 고기는 먹고 그 털로 따뜻하게는 하지만 그들에게 때를 따라 양식을 먹일 줄 모르는 목자는 양을 흩으는 못된 목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③ 연약한 자를 강하게 하며 병든 자를 고쳐주는 목자가 양을 돌보아 주는 목자입니다. 하늘의 소망으로 믿음을 강하게 해 주며 병든 자를 위하여 기도해 줌으로 치료해 주는 목자가 되어야 합니다(약 5:14). ④ 상한 자를 싸매어 주는 목자가 양을 돌보는 목자입니다. 양은 그의 성품이 단순하고 우직하기 때문에 적은 일에도 상처를 입게 마련입니다. 이들을 방치해 두면 잃은 양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그들을 위로의 말씀으로 싸매어 주어야 합니다(겔344). ⑤ 쫓긴 자를 돌아오게 하는 목자가 양을 돌보는 목자입니다. 그리고 잃어버린 양을 찾는 목자가 양을 돌보는 목자입니다(겔34:4).


2. 잃은 양을 찾는 목자의 심정을 갖자

우리 주님은 잃은 양을 찾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잃은 양을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를 통하여 찾으시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과 같은 심정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1) 주님의 심정은 잃은 양을 찾으려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19:10)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의 집에 가셔서 앓은 양인 그를 찾으신 기쁨을 이처럼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주변에 삭개오 같은 앓은 양이 있는가 부지런히 살피면서 찾아야 합니다. 주님은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손길을 통해서 다 찾으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2) 주님의 심정은 잃은 양을 귀중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아혼 아홉 마리의 양을 산 에 두시고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으신다고 하신 말씀은 찾은 한 마리가 아혼 아홉 마리보다 더 귀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찾은 그 기쁨의 정도를 목자의 입장에서 표현하신 말씀이십니다. 예수님은 잃은 그 한 마리의 귀중함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에 대하여 그 심정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우리의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보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한 생명의 가치를 주님의 견지에서 바라보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결 론 : 우리는 잃은 양 무리들에게 목자의 음성을 들려주어야 합니다. 이 목자의 음성이 우리가 전하는 복음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20:21)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아니면 그들은 목자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심정으로 복음을 전함으로 잃은 양을 찾으시는 예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이루어 드려야 할 사명이 우리에게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 150 ≈ 범죄자에 대한 교회의 태도

(본문 : 마태복음 18 : 15- 18)


서 론 : 우리는 성경에서 죄라는 말을 많이 듣게 됩니다. 그러면 무엇을 죄라 하느냐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그 범위가 광범위한 것으로 생각되기 쉽습니다. 죄란 말은 ‘하말티아’로 과녁을 바로 맞히지 못함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말하자면 죄란 하나님의 법에서 탈선한 상태를 가리키는 말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죄의 시발점은 아담의 불순종으로부터 나왔습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다음 네 가지 성경 구절은 죄에 대한 명백한 사실을 말씀해 줍니다. ①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2:16,17). ②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3:6). ③ “가라사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창3:11). ④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발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 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3:17-19).


1. 교회의 권위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놀라운 권위가 부여되어 있습니다. 오늘날천주교에서 이 교회의 권위를 악용함으로 하나님께 범죄하고 있지만 교회의 권위를 바르게 행사하고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 권위에 굴복하는 일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교회의 지체들인 우리로서 마땅한 의무요 책임입니다.

특히 주님은 교회에는 죄인의 죄를 책망하는 권위와 그 죄를 용서해 주는 권위가 있음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 가운데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하신 말씀은 정죄와 용서의 권위가 교회에 있음을 암시하신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대체로 교회에는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권위가 부여되어 있습니다.

(1) 직분을 세우는 권위가 있습니다. 교회에는 주님을 머리로 하여 그 밑에 여러 가지 직분이 있습니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폼을 세우려 하심이라”(엡4:11-12)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직분을 세우는 일은 교회의 특권입니다. 모든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권위로써 세우는 이 같은 교회의 직분을 두려옴으로 잘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2) 죄인을 징계하는 권위가 있습니다. 죄는 점과 홈이 없어야 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손상케 하는 존재입니다. 교회는 이 같은 암적 존재를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거역하는 자룰 온유함으로 징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딤후2:24-25)라고 했습니다.

(3) 또한 교회에는 회개한 죄인을 용서하는 권위가 있습니다. 교회는 교회 앞에서 회개하는 죄인을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4) 말씀을 선포하는 권위가 있습니다. 교회는 가르치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곳이 곧 교회입니다. 교회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강처럼 흘러야 합니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뇨”(마24:5)고 하셨습니다. 충성된 종은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 가르치는 종을 가리킵니다.

(5) 교회는 성례를 수행할 권위가 있습니다. 성례가 합법적으로 수행되지 못하는 교회는 하나님 의 교회가 아닙니다. 세례와 성찬식을 주님의 말씀대로 수행하는 권위는 하나님의 교회의 특권입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마28:19)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고전11:23-27).


2. 죄의 처리

예수님은 죄에 대하여 세 가지로 구분하여 교회에서 처리 할 것을 말씀 하셨습니다.

(1) 은밀한 권고로 회개시키도록 하라고 하셨습니다. 교회에서 처리하는 죄의 문제는 그 사람으로 하여금 회개케 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될 수 있는 대로 그 문제를 확산시키지 않는 방향으로 처리 할 것을 교훈 하셨습니다. 주님은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같은 죄에 관해서는 은밀한 방법으로 권고해야 하는 것입니다. 권고란 죄를 깨닫게 하는 책망과 권면을 의미하는데 은밀하게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만일 그 권고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죄를 회개하고 돌이키는 일은 이처럼 중요한 일입니다. 네 형제를 얻는다고 하신 말씀은 그의 생명을 건진다는 말입니다. 이 같은 권고는 우리들에게 반드시 있어야 할 일입니다. “가령 내가 악인에 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케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 최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네가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겔3:18-19)고 하셨습니다.

(2) 두 세 사람으로 증참케 하라고 하셨습니다. “만일 듣지 않거든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 세 중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고 하셨는데 증참 하라는 말은 세운다, 제출 한다의 뜻으로 두 세 사람이 함께 권고하는 일을 의미합니다. 이때라도 두 세 사람의 권고를 듣고 회개하면 한 형제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3) 교회에 말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같이 여기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교회에 말하라고 하신 말씀은 공개적인 권고를 말합니다. 이 교회의 권고라도 들으면 그의 생명을 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권고도 듣지 않으면 이 같은 죄인을 주님은 이방인과 같이 여기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공개적인 치리를 통해서 정벌하라고 하신 말씀이십니다. 교회의 말은 하나님의 정하신 권고의 최종적인 방법이십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정하신 하나님 나라의 지상 최고 법정인 것입니다. 이 같은 교회의 결정이 땅에서 매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하나님의 법도를 따라 어느 누구를 맨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이 매신 것이기 때문에 하늘에서도 매이는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땅에서 푸는 일은 죄인이 회개할 때 교회에서 풀어주는 일로 해벌을 가리킵니다.


결 론 : 우리는 교회의 권고나 치리가 얼마나 두려운 일이며 순종해야 할 일 인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의 권위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교회를 업신여기거나 교회 앞에 교만하거나 교회를 대적하는 일은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요즘 교인들은 교회의 치리를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생각하는 나쁜 경향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교회의 출교조차도 대단찮게 여기는 것입니다. 다른 교회로 옮기면 모든 것이 다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의 권위를 바로 인식하여 교회를 중심으로 바른 신앙 생활올 해야 합니다.


≈ 151 ≈ 합심 기도의 능력

(본문 : 마태복음 18 : 19 - 20)


서 론 : 예수님은 18절에서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말씀하시고 19절에 와서는 땅에서 구하면 하늘에서 이루어진다는 말씀을 하심으로 전자는 죄인을 정죄하고 용서하는 교회의 권위에 대하여 인정하시고 후자는 교회의 기도에 대한 하늘의 응답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두 사람 또는 두 세 사람은 교회의 최저 구성원을 말하는 수효입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는 교회의 합심기도를 가리킨다고 보아야 합니다.


1. 합심 기도의 두 가지 요건

예수님은 합심 기도에 필요한 두 가지 요건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는 두 사람입니다. 두 사람은 합심 기도의 최저 선이며, 또 응답 받는 기도의 가장 효과적인 수효입니다. 다른 한 가지는 합심입니다. 합심이란 두 사람이 같은 기도의 내용을 가지고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는 기도를 말합니다. 어떤 문제가 있을 때 교회에서 그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하여 합심하여 기도 드리는 일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합심하다라는 말은 ‘숨포네오’란 헬라어로 일치한다, 어울린다, 조화가 된다는 뜻입니다. 헬라어로 합주곡을 ‘숨포니아’라고 하는데 이 말은 소리를 함께 낸다는 의미입니다. 영어로는 심포니라고 하며 원어로 풀이할 때의 합심 기도란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합주곡이 된다는 뜻입니다.


2. 합심 기도란 무엇을 의미하나?

합심 기도란 두 사람 이상이 어떤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그 문제를 위하여 오직 마음을 함께 하여 간절히 간구하는 기도를 말합니다. 한 사람의 골방 기도가 독창이라고 한다면 이런 합섬 기도야말로 기도의 심포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같은 합섬 기도에 대하여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옛날에 하나님의 종들이 나타낸 위대한 기도의 능력은 합심 기도가 많았습니다.

(1) 오순절의 합심 기도.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제자들이 감람산에서 예루살렘에 돌아와 성령을 받기 위하여 합심 기도에 들어갔습니다.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행1:14)고 했습니다.

합심 기도는 우선 기도하는 사람들의 마음의 일치가 중요합니다. 서로 딴 마음을 가지고 구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겉치레로 하는 형식적인 기도도 아닙니다.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기도가 아닙니다. 두 사람 이상이 꼭 이루기를 원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어서 이것을 응답 받기 위하여 간구하는 기도가 합심 기도인 것입니다. 오순절에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던 120문도 들은 기도하는 목적이 오직 하나였습니다. 이 목적에 그들은 오직 마음이 하나가 되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행 1:4)고 하신 주님의 명령에 따라 그들은 다만 성령을 받으려는 단 한가지 목적을 가지고 여럿이 모여 합심 기도에 들어간 것입니다.

다음에 합심 기도에는 전혀 기도에 힘쓰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이 자세는 목적하는 바가 이루어질 때까지, 응답을 받을 때까지 계속적으로 간구하는 일입니다. 그들은 “전혀 기도에 힘썼다”고 했습니다. 전혀 란 표현은 간구하는 목적이 이루어지기까지 다른 곳에 마음을 두거나 한눈을 팔거나 생각을 돌리거나 하는 일이 없이 오직 기도하는 일에만 모든 것을 기울이는 자세를 말합니다. 이런 기도에 대하여 주님은 약속하시기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게 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드디어 오순절 날에 그들의 기도의 목적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2) “미스바의 경우” 사무엘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후에 그는 이스라엘의 제사장으로, 이스라엘의 사사로 이스라엘을 다스리기 위하여 모든 백성들을 미스바로 모이게 했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사무엘과 더불어 금식하고 회개기도를 합심으로 드렸습니다. “그들이 미스바에 모여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그 날에 금식하고 거기서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라”(삼상7:6). 이때 불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치려고 많은 군사들을 거느리고 미스바로 왔습니다. 하나님은 사무엘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레를 발하사 불레셋 군대를 어지럽게 하시매 그들이 이스라엘 앞에서 폐하여 도망했다고 했습니다.


3.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예수님은 합섬 기도의 성공적인 원칙에 대하여 20절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내 이름으로란 말씀은 내 이름을 위하여 란 뜻입니다. 합심기도란 두 세 사람이 모여 기도하되 반드시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의 목적이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고 하신 말씀대로 합심 기도의 목적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정욕적인 기도는 어느 경우에도 통하지 않습니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대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약4:3)고 말씀하셨는데 우리가 모일 때에는 반드시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모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합심 기도를 할 때에는 그 기도의 목적과 제목이 과연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구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에 대하여 분명한 해답을 먼저 찾아야 할 것입니다. 이 같은 확신의 토대 위에 서서 우리가 합심하여 기도하면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고 하신 말씀대로 응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자리에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주님은 언제나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이는 그 곳에 함께 계시겠다고 하신 약속이시며 이런 약속은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여 주시겠다고 하시는 해답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는 일은 자주 있어야하며 특히 기도하기 위하여 모이거나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모인다면 그런 장소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축복의 장소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응답이 약속된 합심 기도를 잘 활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합심 기도를 위하여 교회의 장로들을 청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너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찌니라”(약5:14)고 했습니다.


결 론 : 기도하는 일꾼은 교회에서 참으로 필요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그 교회를 이끌어 가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기 이름을 위하여 모여 합심으로 기도하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우리 주님은 그 자리에 반드시 함께 하셔서 그들의 기도를 들으실 뿐 아니라 

그 기도를 응답해 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간구하는 진실한 기도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일이며 

주님의 이름을 위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실 것입니다. 

교회에서 기도하는 일꾼은 가장 귀한 보배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과 함께 하십니다. 

그들의 기도를 응답해 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 152 ≈ 용서의 원리

(본문 : 마태복음 18 : 21 - 35)

용서할 줄 모르는 종 비유

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23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24 결산할 때에

만 5)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26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28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6)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29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31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32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서 론 : 예수님은 교회에서 범죄한 자를 최종적으로 징계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시고 이 같은 권위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된 것임을 분명히 하시기를“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때 제자들은 약간의 혼돈을 일으켰습니다. 예수님은 얼마 전 산상보훈 중에서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6:14-15)고 하신 말씀과 조금 전에 말씀하신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에서 이 두 말씀이 마치 이율 배반적인 말씀처럼 제자들에게 들렸을 것입니다. 그들은 도대체 형제들의 죄를 우리가 얼마정도나 용서해야 합격점에 들것인가에 대하여 궁금한 마음을 금치 못했던 것입니다.


1. 인간이 생각하는 사랑의 한계점

21절에서 베드로는 용서에 대한 인간의 최대의 한계, 다시 말하면 우리 인간이 용서해줄 수 있는 사랑의 한계점올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베드로는 일곱 번까지 용서해줄 수 있다고 하는 뜻에서 이 말씀을 물은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에 과연 자기에게 계속적으로 죄를 범하고 있는 죄인에게 일곱 번씩이나 용서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것인가? 사실 우리가 생각해 보면 우리는 일곱 번까지 내게 죄지은 죄인에 대하여 사랑으로 용서해준다는 일은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베드로를 향하여 너무나도 놀라운 답변을 들려 주셨습니다.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혼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찌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이 같은 용서의 원리는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해 주시는 것입니까?

(1) 첫째로 이 말씀은 우리 하나님의 사람의 척도를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숫자에 얽매인 사랑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형틀에 꽉 묶여 있는 사랑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 깊이에 있어 끝이 없으시며 그 높이에 있어 미치지 못할 곳이 없으시며 그 넓이에 있어 한이 없으십니다. 만약에 그의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이 그 무엇인가에 얽매일 수 있다면 죄인을 위하여 그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신 하나님의 사랑이 죄의 정도에 따라 속박을 받는 아주 연약한 사랑이 되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2) 둘째로 이 말씀은 우리가 나타내야 할 사랑의 표준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나타내고 베풀어야 할 사랑의 표준은 마땅히 사랑이신 하나님께 두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형제들에게 아무리 사랑을 베풀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 하나님이 나에게 베푸신 사랑에 비하여 얼마나 보잘것없는 사랑인가? 얼마나 부족한 사랑인가에 대하여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3) 세 번째로 용서는 계속 되는 것이지 그것이 한 순간도 중단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하여 이 말씀을 주셨던 것입니다. 사랑은 용서로 나타나지만 그러나 용서의 횟수가 사랑의 척도는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일혼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주라고 하신 말씀은 490번의 용서가 사랑의 한계점이라고 하신 말씀은 아니십니다. 용서는 마음의 상태지 수효가 아님을 가르쳐 주시려는데 그 목적이 있으십니다.


2. 용서의 양면

우리가 용서에 대하여 잘못 생각하면 자기 모순에 빠지게 되기 쉽습니다. 죄를 범한 형제가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용서를 구하는 경우 이런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 같은 형제의 죄를 용서해 주지 못한다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범한 죄도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는 것입니

다. 그러면 우리는 과연 자신의 죄를 회개치 아니하는 형제들의 죄에 대하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내 형제가 자신의 죄를 뉘우침도 없고 용서를 빌지도 아니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① 우리는 먼저 그런 사람을 경계해야 합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라”고 하셨습니다. ② 그 죄의 쑥물이 다른 사람들에게 번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③ 혹은 어떤 경우에는 교회에서 치리하며 심한 경우에는 사단에게 내어 줄 수도 있습니다(출교, 고전5:5). 그러나 사랑이 끊겨서는 안됩니다. 그 형제의 회개를 위하여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3. 두 빚진 종들의 경우

예수님은 우리가 형제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면 안될 일에 대하여 어느 임금에게 그들의 빚을 탕감 받은 하나의 비유로써 교훈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비유로 들려주신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탕감과 백 데나리온 빚진 자의 정죄는 용서의 원리에 대하여 교훈해 주시는 하나의 경종이 됩니다.

달란트와 데나리온의 계산은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로 복잡하게 숫자의 차이가 납니다. 그러나 한가지 공통적인 사실은 일만 달란트란 액수는 우리 인간이 한평생 벌어도 갚지 못할 죄 값을 말하고 백 데나리온은 우리가 노력만 하면 쉽게 벌 수 있는 적은 액수를 말함으로써 이것은 우리들이 용서해 주어야 할 형제들의 죄가 아무리 크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하나님께 갚아야 할 빚에 견주어 본다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어떤 분은 한 달란트를 육천 데나리온으로 계산합니다. 한 노동자가 일천 주일을 일해야 겨우 벌어들일 수 있는 돈입니다. 그러니 한 노동자가 자기의 한평생에 10달란트의 수입을 올리기도 힘든 것입니다. 한 데나리온은 한 노동자가 벌 수 있는 하루의 노임인데 요즘 액수로 5천원을 잡는다면 백 데나리온이란 불과50만원에 지나지 않는 돈입니다. 그 당시 사회제도가 돈올 빌린 후 지불 능력이 없는 경우에 채무자의 노예로 팔려 가는 일이 통례였으므로 그 빚을 탕감해 준다는 일은 노예에서 자유한 몸이 되는 일이어서 우리가 죄의 노예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일에 대한 적절한 비유로 인용할 수 있는 말씀이었습니다.

(1) 자비를 간구하여 탕감 받은 종의 경우. 일만 달란트의 빚으로 자기는 물론 처와 자기의 자녀들까지 대대로 종이 되어야 할 이 빚진 사람은 임금에게 자비를 호소했습니다. 이것은 죄인들의 회개를 의미합니다. 죄인의 회개는 언제나 임금이신 하나님의 자비에서만이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임금은 그의 자비의 호소를 듣고 탕감하여 주었습니다. 이 비유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신 일인가에 대하여 깨닫게 하시는 말씀이십니다.

(2) 빚진 동관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했을 때의 경우. 빚을 탕감 받아 자유의 몸이 된 그 종은 이제 새로운 생활로 들어가야 했습니다.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생활로 들어가야 합니다. 탕감해 주신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기 위한 새로운 생활의 열매를 맺히게 하시려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이 열매는 새 계명인데 주님은 이 계명이 곧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길에서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의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동관은 갚을 돈이 없어 주인의 자비에 호소했지만 처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임금으로부터 말할 수 없는 은혜와 용서와 자비와 사랑을 받았지만 자신은 다른 사람에게 판단과 정죄와 복수와 미움으로 가득찬 생활을 하므로 자비를 입은 임금의 노여움을 사게된 것입니다.


결 론 : 예수님이 들려주신 이 비유는 형제들의 죄에 대하여 중심으로 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사랑의 원칙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네가 벌기에 내가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사랑이 이 원리에 바탕을 두고 계시기 때문에 그 누구도 주님 앞에서 핑계 댈 수가 없는 것입니다.


≈ 153 ≈ 죄와 빚

(본문 : 마태복음 18 : 33 - 35)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서 론 : 이곳에 비유로 나타내신 어떤 임금과 두 종들의 경우는 하나님으로부터 우리가 용서받은 죄의 탕감과 우리가 형제의 죄를 용서해 주어야할 관계가 어떻게 이어져 나가는가에 대하여 설명해 주시는 교훈으로 우리는 이 같은 용서의 법칙을 우리의 실생활에 적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강력한 경종으로 받아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 받은 경우는 복음의 은혜를 받은 사람을 상정합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그의 생활에 사랑의 열매가 없이 다른 사람에 대하여 율법적인 정죄 생활을 해 온 것입니다. 이 사람은 마땅히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은 것이니라”(마7:2)고 하신 말씀대로 될 것입니다.


1. 죄와 빚

죄란 말의 뜻이 헬라원어로는 대개 아홉 가지로 나타나 있습니다. 아홉 가지 낱말 중에서 우리가 보편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말은 두 가지 입니다. 하나는 ‘하말티아’로 이 말은 표적이나 또는 목표점에 미달된 것을 의미합니다. 이 말의 뜻은 하나님의 정하신 수준에 이르지 못하는 것, 하나님의 뜻에 위배되는 행동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이루지 못하는 상태를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오페일레마’로 이 낱말의 뜻은 빚을 말합니다. 이 빚은 사람 상호간의 금전적인 빚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께 대한 도덕적, 영적 채무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셨던 기도문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6:13)란 말씀에 나타난 죄가 곧 ‘오페일레마’로 죄를 빚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을 받은 죄의 빚은 얼만 달란트인 것입니다. 이 빚은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팔아도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으로 다만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탕감 받는 길 이외에는 별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갚아야 할 죄의 빚어 일만 달란트라고 하신 말씀은 우리 인간은 그 어떤 방법으로도 갚을 길이 없다는 사실을 알려 주시려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사람은 인간의 양심적인 의나 도덕적인 선이나 율법적인 행위로는 죄를 씻음 받을 길이 전혀 없고 하나님의 정죄 하심을 면할 수 없음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의를 줄 수 없는 율법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목적은 그 율법을 통해서 죄를 깨닫고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힘입게 하시려는데 있으신 것입니다.


2. 빚을 갚으로 오신 예수님

일만 달란트의 빚을 진 종의 주인이 어떤 임금 또는 주인이란 말로 나타나 있습니다. 어떤 임금이란 바로 율법의 주재자이신 하나님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1) 임금이 회계한다고 했습니다. 인생은 임금 앞에 가서 회계할 때가 오는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히브리서 9:27에서 말씀하시기를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심판대 앞에 선 인생은 누구를 막론하고 그 행한 대로 갚으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 같은 심판이 반드시 있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미리 이에 대비하지 않으면 일만 달란트의 빚을 찾으시는 심판자 앞에서 죄 값의 심판을 면활 길이 없을 것입니다.

(2) 이 회계는 엄중한 계산에 따라 합니다. 그 종에게는 빚을 갚을 길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 종뿐 아니라 모든 죄의 종들은 그 빚을 갚을 길이 없을 것입니다. 주인은 명하기를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인간은 죄의 빚에 대하여 그 어떤 방법으로도 속전할 길이 없기 때문에 재산은 말할 것도 없고 그에게 속한 가족들의 생명까지 다 팔아도 갚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에서 이 같은 죄 값에 대한 두려운 결과를 바라보고 “하나님이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하는 죄의 고백이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3) 그 종이 비로소 자신의 빚에 대한 두려운 심판을 깨달았습니다. 임금 앞에 끌려나와 빚에 대한 임금의 심판을 받는 종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모습을 보여드리는 것입니다.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종의 이 같은 말은 자신이 진 빚에 대한 두려움에서 오는 회개의 모습이라고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가 갚겠다고 말한 것은 주인의 자비에 호소하는 자신의 무력함을 들어낸 말이지 갚을 능력이 있어서 그처럼 말한 것은 아닙니다.

(4) 그 종의 주인이 그를 불쌍히 여겼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불쌍히 보시는 분이십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겔33:11)고 말씀하셨습니다. 탕자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에 아버지가 불쌍히 여기신 것같이 하나님께서 회개하는 죄인을 불쌍히 보시는 분이십니다.

(5) 주인은 그 종을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다고 했습니다.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은 죄의 종에서 놓임 받게 됩니다. 죄의 종이 아니라 율법의 정죄에서 해방되고 죄의 종의 멍에에서 풀려납니다. 자비하신 주인은 그 종을 불쌍히 보시고 그 많은 빚을 탕감해 주셨습니다. 죄 값은 오직 탕감 받는 도리밖에 없는 것입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홈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벧전1:18-19)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이 죄의 빚을 탕감하여 주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보혈의 피는 우리의 영적인 빚인 죄 값을 모두 갚기에 풍족한 대가로 지불된 것입니다.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홈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히9:13-14)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의 빚을 탕감해 주실 수 있는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같은 자신의 사명을 이처럼 밝히셨는데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 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 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38)고 하셨습니다.


결 론 : 이처럼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입어 죄의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은 

형제의 죄에 대하여 사랑을 베풀어 용서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자신은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 받았으면서도 

자기에게 빚진 백 데나리온의 형제에 대하여 반드시 갚으라고 말하고 

율법적인 정죄에까지 이르게 하였을 뿐 아니라 재판에까지 넘겼으니 

그가 받은 탕감의 은혜가 어디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이런 자의 죄에 대하여 용서하지 않으시고 정죄할 것이라고 경종하셨습니다.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라”(요일2:9)고 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마태복음 19장 설교

◆ 밤중소리 03-01 | VIEW : 6,018

≈ 154 ≈ 이혼에 관한 교훈(본문 : 마태복음 19 : 1 - 9)

≈ 155 ≈ 주님이 말씀하신 독신생활(본문 : 마태복음 19 : 10 - 12)

≈ 156 ≈ 어린이들에게 축복하신 예수님(본문 : 마태복음 19 : 13 - 25)

≈ 157 ≈ 영생을 놓쳐버린 청년(본문 : 마태복음 19 : 16 - 22)


≈ 154 ≈ 이혼에 관한 교훈

(본문 : 마태복음 19 : 1 - 9)

이혼에 대하여 가르치시다(막 10:1-12)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갈릴리를 떠나 요단 강 건너 유대 지경에 이르시니

2 큰 무리가 따르거늘

예수께서 거기서 그들의 병을 고치시더라

3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이르되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5 말씀하시기를

ㄱ)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6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7 여짜오되

그러면 어찌하여 ㄴ)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버리라 명하였나이까

8 예수께서 이르시되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9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서 론 : 마지막 시대의 두드러진 정조로 성경에서는 도덕적인 퇴폐를 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가장 뚜렷해지는 현상이 성도덕의 타락입니다. 이 같은 인간의 타락은 육적인 면에서도 그러하고 영적인 변에서도 그러합니다. 그리고 성도덕의 표준은 사회의 이혼율이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근래에 나타난 통계에 의하면 선진국일수록 이혼용이 높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미국의 이혼율이 세계에서 단연 으뜸이고 기독교 국가라고 하는 덴마크조차도 이혼율이 많기로 미국을 뒤따르고 있습니다. 또 근래에는 실험 결혼이라고 하는 얼마간의 동거 생활을 전제로 한 예비 결혼이 유행되고 있어 가정의 순결은 땅에 떨어지고 이 사회는 점점 음란의 함정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1. 바리새인의 시험

예수님을 죽이기로 작정한 바리새인들은 기회만 있으면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을 시험해 왔습니다. 이번에는 이혼 문제를 가지고 도전해 온 것입니다. 그들의 질문은 이러했습니다.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하는 문제입니다. 아내를 버리는 일이 가능 하느냐는 질문입니다. 그들은 아마 이 질문에서 주님에게서 “안 된다”라는 말이 당연히 나올 줄로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야 그들이 고소하려는 문제로 예수님을 유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예상대로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찌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그들은 “그러하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증서를 주어서 내어 버리라 명하였나이까”고 물었습니다. 이제 바리새인들은 이 질문에서 나오는 대답에서 올무를 잡으려고 예수님의 입을 지켜보았습니다.


2. 하나님이 정하신 부부의 세 가지 원리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이 같은 질문이 자기를 시험하려는 악의에서 나온 것인 줄 아셨지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에서 하나님의 창조 원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1) 하나님이 태초에 사람을 지으실 때 남자와 여자를 지으셨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 회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지으셨기 때문에 남자나 여자가 독신으로 지내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닙니다.

(2)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 부부를 이루라는 명령을 내리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 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찌니라 하신 것을 얽지 못하였느냐”고 하셨습니다. 둘이 한 몸을 이루게 하신 하나님의 원리는 원래가 둘은 두 몸이 아니요 하나로부터 갈라졌기 때문입니다. 아담의 몸에서 하와를 갈라지게 하심으로 ①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도록 하셨고 ② 서로를 위하여 반드시 있어야 할 존재로 만드셨으며 ③ 이 같은 일은 둘이 다시 한 몸으로 합하는 일로써 이룰 수 있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부부생활은 이런 하나님의 창조 원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는 결혼을 금하는 일에 대하여 정죄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귀신의 가르침을 쫓는 자들이 “혼인을 금하고 음식을 폐하라”고 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담전4:1-3).

“아내에게 합하여”라고 하신 말씀은 세 가지 뜻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부부간의 육적인 결합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하신 축복은 곧 남녀의 육체적인 결합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정신적인 결합입니다. 하나님이 하와를 지으실 때에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창2:18)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부부는 한 가정에서 서로 돕는 정신적인 결합을 이루어 나갈 때 행복한 가정을 꾸밀 수 있습니다.

세 번째로는 서로간의 영적인 결합입니다. 이것은 둘이 한 몸으로 하나님을 잘 섬기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신 창조목적이나 남녀가 결합하여 한 가정을 이루는 결혼 등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려는데 있습니다. 이 목적을 이탈하게 되면 그같은 사람의 생활은 하나님이 없는 금수의 생활과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3)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찌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이혼의 불가 성을 분명히 밝히신 것입니다.


3. 율법에서 허락한 이혼의 경우

하나님의 창조 원리를 밝히심으로 이혼의 불가함을 말씀하시는 예수님에게 그들은 모세가 준 율법을 들고 나왔습니다. 그리하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증서를 추어서 내어 버리라 명하였느냐? 율법에서는 허락하고 있는 것을 당신은 왜 허락할 수 없다고 하느냐? 당신의 말은 율법을 부인하는 말이 아니냐? 는 것입니다. 이 같은 바리새인들의 주장은 신명기에서 인용해온 것입니다.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 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 보낼 것이요 그 여자는 그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신24:1-2)란 말씀이 있습니다. 여자에게 수치 되는 일이 있어 남자가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증서를 써주어 버려도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모세는 왜 이 같은 이혼증서를 써 주는 일을 허락하였는가? 이에 대하여 예수님의 답변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인간의 마음이 완악하다는 말은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질투심을 말합니다. 아내를 의심하거나 수치스러운 사실이 있을 때 이혼율 허락하지 않으면 그 여인에 게 더 불행한 일이 생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완악한 마음이란 용서를 모르는 마음입니다. 인간은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한 용서에 인색합니다. 특히 자기 아내의 부정한 협의가 있다면 용서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두 부부가 사랑으로 한 가정을 이루어 나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인간의 마음에는 특히 남자들의 마음속에는 다른 여인을 넘나 보는 악한 마음이었습니다. 모세는 사람들의 이 같은 완악한 마음 때문에 아내 내어 버림을 허락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기들의 완악함으로 인하여 허락한 모세의 이혼증서를 더 좋아했습니다.


4. 이혼이 허락되는 경우

예수님은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고 말씀하심으로 이혼이 성립되는 한가지 경우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음행은 아내를 버리는 이혼이 성립된다고 하셨습니다. 음행이란 ‘폴네이아’로 매음, 음란, 부정, 간음이란 뜻으로 자기 몸을 다른 남자에게 파는 행위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음행은 한 몸을 이루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의 파괴입니다. 육적인 결합이 파괴되는 일이요 정신적인 결합이 파괴되는 일이요 영적인 결합이 파괴되는 일이기 때문에 음행은 곧 하나님이 이루어 주신 한 폼을 스스로 파괴하는 일임으로 이혼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결 론 :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 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시면서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성경은 어느 한 부분적인 면만 바라보면 올바른 해석이 나올 수 없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글은 글자 그대로 해석하려고 했지만 이 말씀을 뒷받침 해 주는 창세기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는 별반 관심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라고 했습니다(시119:105).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이 음란하고 패역한 세대를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 155 ≈ 주님이 말씀하신 독신생활

(본문 : 마태복음 19 : 10 - 12)

10 제자들이 이르되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장가 들지 않는 것이 좋겠나이다

11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

12 어머니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


서 론 : 예수님의 교훈은 새로운 교훈입니다. 그의 교훈은 율법적인 교훈인 것이 아니라 율법을 주신 분의 사랑의 교훈이심으로 그 당시 율법 생활에 깊숙이 젖어 있었던 유대인들에게는 쉽게 받아 드릴 수가 없는 교훈이었습니다. “누구든지 간음한 연고 외에 자기 아내를 버리면 하나님 앞에 간음죄가 된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에게 놀라움을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남자의 우월성을 믿어 왔으며 이 같은 우월성은 자기의 아내를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하나만으로 임의로 버릴 수도 있다는데 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대로라면 성적인 문제나 이혼 문제에 있어서 온전히 남녀가 동등하기 때문에 남자들의 우월성이 조금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하는 말이 그럴 바에야 차라리 장가들지 않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는 것입니다. 이토록 그들은 여자의 인권을 무시했으며 남자위주의 생활을 당연시해 왔었던 것입니다.


1. 남자의 간음 죄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 함이니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율법에서도 남자들의 간음죄가 여자의 경우와 똑같이 

적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신 최초의 말씀이십니다. 

어떤 이유에서이건 아내를 내버린 남자가 다른 여자를 아내로 취했을 때 

그 사실이 하나님 앞에 간음죄가 된다고 하신 말씀은 

이혼증서를 써주어 내어 보내는 일을 당연히 여겼던 그 당시 유대인 남자들에게는 

너무나도 충격적인 말이 아닐 수 없었던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의 말씀이 사실이라면 

남자로 태어난 것이 여자로 태어난 것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냐? 

남자의 우월성이 하나도 없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적으로 방종하고 싶고 더 많은 여자와 더불어 

쾌락을 얻고자 하는 남자들의 추한 마음에 

하나의 놀라운 경종이 아닐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대한 반응이 즉각적으로 나타났습니다. 

만일 아내에게 이처럼 대한다면 

차라리 장가를 들지 않고 독신으로 사는 것이 

훨씬 좋지 않겠느냐고 한 말에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찌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일에는 남자이건 여자이건 구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간음죄로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원래 합한다는 말의 “합하여”는 ‘콜레데세다이’로 

이 말은 ‘콜라오’로 밀착시킨다, 굳게 결합 시킨다의 미래 수동으로 

계속하여 남자가 아내에게 하나가 되는 상태를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같은 부부간의 결합은 간음한 연고와는 사람이 나눌 수 없는 것입니다. 

간음이란 이미 이 부부간의 결합 상태를 포기한 일이기 때문에 

한쪽은 마땅히 하나님의 정죄함을 받아야 하고 

한쪽은 이혼이 허락되어 다른 데 장가드는 일이 허락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조건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데 장가드는 남자는 

간음함이라고 정죄하셨으니 

이처럼 율법의 정신은 사랑을 이루는 데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2. 세 가지 경우의 독신생활

차라리 장가를 들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세 가지 경우의 남자들의 독신 생활의 가능성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1) 어미의 태로부터 난 고자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고자란 생식기가 불완전하여 남녀간의 성생활이 불가능한 상태의 남자를 가리킵니다. 이런 남자는 장가를 들 수가 없는 것입니다. 특히 이 남자의 경우는 어미의 태로부터 고자로 난 자의 경우를 말씀하시기 때문에 이처럼 고자로 태어난 남자들은 장가를 들고 싶어도 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찌니라”고 하신 말씀은 타고난 사람이 아니면 남녀가 한 몸을 이루는 하나님의 결합의 원칙을 파괴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남녀가 결합하여 한 부부가 되어 가정을 이루는 일은 남자들이 결혼을 원하고 원치 않는 것으로 좌우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적 원리이며 이 같은 원리에 적응하지 못하는 존재는 오직 그렇게 타고난 자만이 가능하다는 말씀으로 틀려 주신 것입니다.

(2) 다음에 고자 중에는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들도 역시 성 기능이 불완전하므로 남녀간의 결합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이들도 장가들 수가 없도록 타고난 사람들입니다. 사람이 만든 고자란 신체적으로 거세된 사람을 의미합니다.

이 같은 경우는 두 가지 경우를 뜰 수 있습니다. 하나는 평소에 어떤 사건을 계기로 하여 생식 기판이 상함으로 고자가 된 사람입니다. “곱사등이나 난쟁이나 눈에 백막이 있는 자나 괴혈병이나 버짐이 있는 자나 불알 상한 자나 제사장 아론의 자손 중에 흠이 있는 자는 나아와 여호와의 화제를 드리지 못할찌니 그는 흠이 있은즉 나아와 하나님의 식물을 드리지 못하느니라”(레21:20-21)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서 불알 상한 자란 곧 평소에 입은 상처로 고자가 된 사람인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가지 경우는 사람의 손으로 고의적으로 고자를 만드는 경우인 것입니다. “또 왕의 몸에서 날 아틀 중에서 사로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되리라 하셨나이다”(왕하20:38). 이 말씀에서 나타난 대로 왕궁의 환관을 삼기 위하여 패전국의 왕자 중에서 인위적으로 고자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 같은 고자들은 장가가지 못할 자로 타고난 사람들입니다.

(3) 그리고 세 번째의 경우는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사람들의 경우는 그 동기가 매우 숭고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스스로 고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스스로 고자가 되었다는 말이 거세를 말하느냐? 신체적 고자에 대한 하나의 비유적 표현이냐에 대하여 논란이 많지만 우리가 성경에 기록된 말씀으로 고찰해 볼 때에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사람이 만든 고자가 아니라 스스로 된 고자라고 말씀하신 점에서 극기 생활의 특별한 은사를 받은 성도의 금욕 생활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한국에 있는 어떤 목사님은 이 말씀에 의하여 스스로 거세함으로 고자가 된 끔찍한 일이 있었지만 이 같은 일은 하나님의 창조 원리를 무시한 행위이며 너무나도 잔인한 행위로 이런 방법으로 하는 금욕은 칭찬 받을 만한 일이 못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결혼 생활을 포기하고 스스로 험자의 몸으로 다만 예수님만을 위하여 그의 생애를 바쳤습니다. 바울은 이 같은 생활이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라고 말했습니다(고전7:6,7).

주님을 위한 독신 생활은 두 가지 모양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는 여자는 남편과 갈라지지 말아야 하는데 만일 갈리는 일이 있더라도 그냥 지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같은 독신 생활은 사명을 받은 자가 아니면 어려운 일입니다. 다른 하나는 주님을 위한 사명감으로 한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남녀간 서로 결혼하면 아내가 생기고 남편이 생기며 자녀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아내는 남편을 위해서, 남편은 아내를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 하고 마음이 갈라지게 됨으로 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는 일에 지장이 있기 때문에 충성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고전7:32-35).

그러나 독신 생활이나 금욕 생활에는 견뎌내기 어려운 육신적인 결함이 우리 인간들에게 있기 때문에 아무라도 이 같은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금욕할 수 없거든 차라리 혼인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극기 생활이 특별한 은사로 타고난 사람이 아니면 어렵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 론 : 예수님이 하신 이 모든 말씀으로 미루어 볼 때 인간은 원래가 남녀의 결합으로 한 몸을 이루어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법도임으로 부부간의 사랑으로 잘 융화하고 한 몸을 이루어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아름다운 하나님의 뜻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 156 ≈ 어린이들에게 축복하신 예수님

(본문 : 마태복음 19 : 13 - 25)

어린 아이들에게 안수하시다(막 10:13-16; 눅 18:15-17)

13 그 때에 사람들이

예수께서 안수하고 기도해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14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사람의 것이니라 하시고

15 그들에게 안수하시고

거기를 떠나시니라


재물이 많은 청년(막 10:17-31; 눅 18:18-30)

16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 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18 이르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ㄷ)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19 네 부모를 공경하라, 

ㄹ)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20 그 청년이 이르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2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23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24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25 제자들이 듣고 몹시 놀라 이르되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서 론 :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을 지극히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어린아이들이 자기들에게 가까이 오는 일을 마땅하지 않게 여겼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축북 기도를 받으려고 어린이를 데리고 자주 찾아 왔으나 그때마다 그들은 꾸짖었다고 했습니다. 아마 그들은 어린아이들에게 보내는 시간이 무의미하며 공허한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선생님이 어린아이들의 접근으로 말미암아 피곤함을 느끼신다면 중대한 복음사업에 큰 방해가 되는 것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제자들을 심히 꾸짖으시면서 “어린아이를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 예수님이 어린이들을 사랑하신 이유

예수님이 어린이들을 사랑하신 특별한 몇 가지 이유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어린이들은 성품적으로 주님의 사랑을 받을 만 합니다. 예수님은 겸손한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는 대적하시지만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주십니다. 사람이 겸손하지 않으면 복음을 받아 드릴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은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어린이들은 온유한 마음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들과 같이 온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2) 어린이들은 죄나 악에 아직 깊이 물들지 않은 존재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처럼 말했습니다.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고전14:20).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는 말은 죄를 고의적으로 계획하거나 죄에 대하여 흥미를 가지거나 죄 가운데서 살아가지 말라는 뜻입니다. 어린아이들의 생활은 어른들처럼 죄로 물들고 멍든 생활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의 사랑을 받을만한 것입니다.

(3) 어린이들은 장성하게 되면 하나님의 나라에 일꾼들이 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일꾼을 찾으십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일꾼을 기르시는 일에 많은 관심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유용한 일꾼이 되려면 어려서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신앙적으로 자라나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이유 때문에 어린이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으셨습니다.


2. 우리는 어린이들에게 큰 관심을 가져야 한다.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은 복음을 전하는 우리들에게 어린아이들에게 큰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 드려야 합니다.

(1) 어린아이들도 그리스도 앞으로 나와야 합니다.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에서 우리는 어린아이들도 그리스도 앞으로 나와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훈 받는 일은 그 어린아이의 구원에 큰 역할을 하게 됩니다. 디모데는 훌륭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의 이 같은 믿음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이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3:15). 사람이 어려서부터 성경을 배운다면 일찍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이나 어른들이나 모든 사람이 거듭나는 역사는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어렸을 때 믿음을 가지기 쉬운 것은 어려서 그리스도 앞에 나오면 어른이 된 후 보다 그의 성품상 구원을 받기가 용이하기 때문입니다.

(2) 어른들이나 부모들은 어린아이들을 반드시 그리스도 앞으로 데리고 나와야 합니다. 부모들은 예수님 앞으로 자기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나왔습니다. 이 같은 부모의 행실은 주님의 칭찬을 받을만한 일입니다. 그 이유는 이로 인하여 주님은 그 어린아이들에게 축복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스스로 주님께 나올 수 없습니다. 부모에 의하여 데리고 나와야 합니다.

어린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는 일이나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일에 등한히 하는 일은 그 어린아이를 신앙적으로 키우는 방법이 아니며 그 어린아이의 영적인 생명을 죽이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3) 어린이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도를 받으며 자라나야 합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에게 친히 안수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안수는 곧 축복입니다. 어린아이들에게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해 주는 일은 그 아이들에게 신앙적인 성장을 위하여 꼭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안수가 그 받은 아이들에게 놀라운 축복이 되었던 것처럼 주의 이름으로 기도해 주고 축복해 주는 일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어린아이들의 부모들은 그들의 어린아이들의 영적인 축복을 위해 하나님의 종으로부터 주의 이름으로 기도를 받도록 해야 합니다.

(4) 어린이들이 그리스도 앞으로 오는 일에 어른들이 방해 요소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라도 그리고 어떤 이유에서라도 어련 아이들이 예수님께 가까이 오려는 것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주님이 친히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에는 두 가지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는 소극적인 뜻으로 어린이들을 실족시켜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십니다. 어린이들을 그리스도 앞으로 못 가도록 막는 일은 그들의 생명을 실족시키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것이 어떤 형태로 나타나든 우리는 어린아이들을 실족시키는 일이 없도록 지극히 조심해야할 것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마 18:6)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적극적인 뜻으로 어린아이들을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는 일입니다. 어린아이들로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사람이 구원을 받는 일은 어른이나 어린이나 조금도 다를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5) 어린이들도 천국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 고 하신 말씀에서 우리는 어린아이들도 천국을 소유할 수 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3. 우리도 어린아이와 같이 되자

예수님은 주어진 상황에서 언제나 적절한 교훈을 주셨습니다. 어린아이들을 환영하시고 그들에게 축복해 주신 일은 우리들을 위한 교훈의 뜻이 다분히 들어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18:4)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우리에게 너희는 어린 아이들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받들어야 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막10:15)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처럼 어린아이들같이 단순하고 겸손하게 그리스도를 섬기기만 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넉넉히 들어갈 뿐 아니라 천국에서 가장 큰 자란 인정을 받게 될 것입니다.


결 론 : 어린아이들의 마음은 무엇을 심든지 잘 받아 드려질 순결한 밭입니다. 우리는 이 어린아이들의 좋은 밭에 복음의 씨를 부지런히 심어야 합니다. 우리들도 우리 가정에서 어린아이들을 귀히 여길 뿐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신앙적으로 자라나도록 영적으로 보살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어린아이들과 같은 온유하고 겸손한 신앙을 가지고 예수님의 칭찬을 받을 수 있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 157 ≈ 영생을 놓쳐버린 청년

(본문 : 마태복음 19 : 16 - 22)

재물이 많은 청년(막 10:17-31; 눅 18:18-30)

16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 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18 이르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ㄷ)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19 네 부모를 공경하라, 

ㄹ)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20 그 청년이 이르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2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서 론 : 이 세상에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면서도 영생을 바라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람이란 원래가 애초에 죽지 아니하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었기 때문에 누구나 죽기를 싫어하며 영생을 갈망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전도서에서 이르기를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전3:11)고 하셨습니다. 영생을 사모하는 한 젊은이가 주님 앞에 찾아 나왔습니다. 그 청년은 영생의 도리에 대하여 이처럼 물었습니다.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것이 그 청년의 물음이었습니다. 이 같은 물음은 세상 사람들의 공통적인 물음이요 똑같은 생각입니다.


1. 부자 청년의 생각

영생에 대한 길을 묻기 위하여 주님께 나온 이 청년은 이름 있는 청년이요 많은 재물을 가진 부요한 유대인이었습니다. 그의 경건한 율법적인 생활은 아마 사도 바울 만큼이나 율법에 홈이 없는 생활을 해 온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불안한 마음을 버릴 수 없는 염려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영생에 관한 일업니다. 어쩐지 그는 영생에 관한 한 자신을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유명한 선생님에게 이 고민을 털어놓고 그 길을 알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예수의 소문을 듣고 이러한 자신의 문제를 그에게 물어 보기로 마음먹고 찾아 간 것입니다.

그가 물어 본 말은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이 청년이 말한 선한 일이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의 열매를 말한 것은 아닙니다. 선한 일이란 ‘아가돈’으로 이 말의 뜻은 윤리적, 율법적인 일로 사람이 외모로 보기에 선한 일을 가리킵니다. 이 청년은 영생을 사모하기는 했지만 그 방법을 몰랐습니다. “무슨 선한 일”이 무엇인가? 하는 그 해답을 얻으려고 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영생을 얻으려고 하는 세 가지 종류의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신앙의 사람입니다. 이 사람들은 영생의 조건이 오직 믿음에 있는 것으로 알고 영생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율법적인 사람입니다. 이 사람들은 율법을 행함으로 영생을 얻는 줄로 알고 율법을 지키는 일에 전념합니다. 이 사람들은 육적인 이스라엘 사람들입니다.

다른 또 하나의 사람은 양심적인 사람입니다. 이들은 도덕적인 기준에 의하여 영생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방 종교를 믿는 사람들 또는 영생을 바라는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이 안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2.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무슨 선한 일”을 묻는 이 청년에게 예수님은 이처럼 답변하셨습니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주님이 말씀하신 계명이란 물론 십 계명 곧 율법을 가리킨 것입니다. 사람이 율법을 온전히 지키기만 한다면 그 사람은 그 율법의 의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2:16)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인간의 죄악성을 몰랐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계명은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합니다(롬7:12). 사람이 바라는 영생의 자격은 사실인즉 이 계명 안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계명의 큰 뜻을 두 가지로 말씀하셨는데 하나는 하나님께 대한 것으로 “네 마음을 다하고 뭇을 다하고 생명을 다하여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신 것이

요, 다른 하나는 이웃에 대한 것으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같은 율법의 참 뜻을 사람들이 깨닫는다면 그 안에 복음이 있고 그 안에 영생이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같은 정신을 전혀 모르고 기록된 의문에 얽매이는 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외식함으로 정죄함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 청년은 계명을 지키는 일에 있어서 문자적으로 지키는 것으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네가 계명을 지키라”고 하는 말씀에는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 있게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그 계명이란 어느 계명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갈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에 청년은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고 물었습니다.


3. 청년에게 부족했던 한가지 일

예수님은 이 청년이 과연 하나님의 계명을 제대로 지키는 생활을 했는가의 여부를 그의 입에서 확인하기 위하여 마지막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시는 율법의 참 정신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기록된 계명에는 이런 말씀이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이 계명의 대 강령을 말씀하실 때 하나님께서 계명을 주신 정신을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톰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

이런 주님의 물음에 대하여 그 청년이 “내가 다 지키었사오니”라고 말한 것은 자기 자신을 속인 거짓말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청년으로 “선생님, 저는 어려서부터 계명을 지키는 생활을 해 왔다고 하면서도 참으로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생활을 못했나이다”라고 하는 고백이 나오기를 바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 모든 것을 다 지켰다”고 자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외식적인 거짓된 점을 그에게 알려 주시려고 의문에서가 아니라 실제적인 그의 생활에서 이웃을 사랑하는 생활의 방법을 제시하셨습니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주님의 이 같은 말씀은 “네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켰다면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생활을 하였다면 네가 가지고 있는 네 재물을 처분하여 가난한 네 이웃에게 나누어 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에서 그가 계명을 제대로 지키는 생활을 못해 왔음을 그의 양심에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영생이 가난한 이웃의 구제에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 청년이 율법을 지킨 일은 외식적인 것이요 온전히 지킨 것이 아님을 밝히시려는 데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나를 좇으라”고 하신 말씀에서 이 말씀의 뜻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그 청년이 정말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진실한 생활올 해 왔다면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순종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결 론 : 이 청년은 영생이 되시는 예수님을 바로 찾아오기는 했지만 그리고 자기가 바라던 영생을 소유할 수 있는 분명한 길이 그에게 열려져 있었지만 그는 그 길을 따르지 못한 것입니다. 그가 영생의 길을 버리고 세상으로 돌아선 일에 대하여 이처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이 청년은 자기가 하나님을 계명대로 사랑하고 있는 줄로 알고 있었지만 예수님의 시험에서 자기는 하나님보다 돈올 더 사랑하고 있다고 하는 증거가 드러난 것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눅13:24)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청년은 재물을 사랑하는 마음에 그의 천국 문이 닫혀져 들어가기를 구하기는 했지만 영생의 문턱에서 근심하며 돌이키게 된 것입니다.


≈ 158 ≈ 부자와 천국

(본문 : 마태복음 19 : 23 - 30)

23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24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25 제자들이 듣고 몹시 놀라 이르되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26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27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29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1)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30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서 론 : 영생을 얻으려고 예수님 앞에 찾아 나오기는 했지만 재물 때문에 눈앞에 보이는 영생의 길을 버리고 근심하며 세상으로 돌아간 그 청년은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하여는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청년이 물러간 후 제자들을 향하여 더욱 놀라운 말씀을 들려 주셨습니다. 그것은 재물이 많은 부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같은 사실은 마음은 영생을 원하지만 재물 때문에 그 길을 스스로 버린 그 청년의 경우가 그 증거가 된 것입니다.


1. 부자의 실격 이유

이 같은 주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말할 수 없는 크나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아마 자기들도 실격자가 아닐까? 하는 두려운 마음을 품게 되었을는지 모릅니다. 그들은 심히 놀라면서 이처럼 물었습니다.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제자들의 이 말은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다 부자란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세상 사람 누구나 다 부자 되기를 원하고 힘쓰고 있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부자 되기를 힘쓰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단 말인가? 그리고 애쓰고 힘써서 돈을 벌면 누구나 다 부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 사람 모두가 다 구원에 이르지 못할 것이 아닌가? 그들의 놀램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면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 보다 쉬우니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인가?

(1) 부자는 돈의 힘 때문에 자기 힘으로는 영생의 문에 들어 갈 수 없는 것입니다. 영생을 바라고 예수님을 찾아 나온 청년에게 만약 재물이 없었다면 주님을 따르는 일에 크게 구애받을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많은 재물이 있었기 때문에 근심하며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재물과 겸하여 하나님을 섬길 수 없는 일은 하나님의 법칙입니다.(마6:24).

(2) 돈이 많은 사람은 두 가지 사실에 실격이 됩니다. 하나는 부자는 돈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생활을 못합니다. 돈이 많은 사람은 돈의 비중이 하나님의 비중보다 훨씬 큰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 하여 섬기기를 원하십니다. 그가 소유한 돈 때문에 뒷전으로 쳐지는 일을 절대로 기뻐하지 아니하십니다. 다른 또 하나는 돈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생활에 방해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그 청년에게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고 하신 말씀에 그가 순종할 수 없었던 것은 그에게 재물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언제인가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문제의 선태에 이를 때가 있습니다. 이 때 재물을 가진 사람은 단연코 하나님을 버리고 재물을 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3)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했습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덤전6:10)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돈은 인간의 마음을 잡아끕니다. 그럼으로 이것을 사랑하게 되면 미혹을 받게 되며 결국에는 믿음에서 떠나게 된다고 한 것입니다.


2. 하나님으로서는 할 수 있느니라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라고 놀라 묻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의미 심장하신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은 구원할 자를 구원하실 수 있으니 너희는 걱정할 것이 없다는 뜻에서 하신 말씀이십니다. 그러면 이 말씀은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 것인가? 하나님은 부자이건 가난한 자이건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이라면 다 그의 권능으로 구원하실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1)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다고 하신 말씀은 부자들은 천국에 절대로 들어 갈 수 없다고 하신 말씀과 동일하신 말씀이십니다.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는 일은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습니다. 누가 부자이면서 자신이 영생을 얻기를 바라고 있다면 이 같은 일은 마치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나 매 일반으로 이 비유의 뜻은 절대로 불가능함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2) 그러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에 들어 있는 뜻을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의 방법은 하나님이 부자를 구원하시고자 하실 찐대 그의 그 부요함을 끊으시고 하나님만을 의뢰하도록 만드시는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40년간 연단하신 일에 대하여 하나님은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8:2,3)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부자로 하여금 그가 의뢰하는 그 재물을 다 흩으시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로 말할 수 없는 시련과 고난을 받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욥처럼 그의 몸을 쳐서 그를 질병으로 병상에 눕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이때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게 되고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또 하나의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강권적인 권능의 부르심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권능을 나타내시어 그의 마음을 강권적으로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시는 일입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가 그러했습니다. 바울이 대제사장 의 공문을 가지고 다메섹에 있는 교회를 핍박하기 위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하늘에서 강한 빛을 받아 그의 마음이 자기의 생각이나 다른 사람의 권면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변화 받게 된 것입니다(행9:1-9).

하나님의 권능 앞에는 그 누구의 마음도 돌이키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3. 먼저 된 자와 나중 된 자

베드로는 이 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는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쫓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놀라운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심판권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심판권이 어떤 것인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이런 심판권은 오직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에게만 적용되는 상급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과 이방인과의 경우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먼저 된 자들이지만 그들은 그들의 메시야를 거역함으로 이방인이 그들을 앞서고 그들은 나중이 될 것입니다(롬11:25-29).


결 론 :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들에 대한 축복을 이생에서와 내세에서 똑같이 약속하셨습니다. 이들은 이 세상에서도 여러 배를 받고 영생을 상속하는 축복을 확실히 받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내가 가지고 있는 재물을 가지고 영생에 거치는 돌이 되려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감사함으로 바칠 줄 알아야 합니다.


출처 : http://www.bamjoongsori.org/bbs/view.php?id=board38&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