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新約]강해/◆ 사복음서 · 사도행전 강해-1

마태복음 8-9장[Ⅲ.예수에 대한 증거 8장-9장]]◆ 밤중소리

영국신사77 2020. 4. 10. 17:30


마태복음 8장-9장 

제목차례

마태복음 8장 (78∼85)

78) 한 문둥병자의 신앙 (마태복음 8 : 1절∼4절)

79) 백부장의 모범적인 믿음 (마태복음 8 : 5절∼13절)

80) 질병을 담당하신 예수님 (마태복음 8 : 14절∼17절)

81) 너는 나를 좇으라 (마태복음 8 : 21절∼22절)

82) 한 서기관의 실패 (마태복음 8 : 19절∼20절)

85) 마귀의 정체와 그를 이기는 길(마태복음 8 : 28 - 34)


마태복음 9장 (86∼95)

(86) 사죄의 권세(마태복음 9 : 1 - 8)

(87) 죄인의 의원으로 오신 예수님(마태복음 9 : 9 - 13)

(88) 긍휼과 제사(마태복음 9 : 13)

(89) 그리스도인의 금식(마태복음 9 : 14 - 17)

(90)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마태복음 9 : 16 - 17)

(91) 죽은 소녀를 살리신 예수님(마태복음 9 : 18 - 19 , 23 - 26)

(92) 혈루증 여인의 믿음(마태복음 9 : 20 - 22)

(93) 두 소경의 믿음(마태복음 9 : 27 - 31)

(94) 벙어리 된 귀신(마태복음 9 : 32 - 34)

(95) 추수할 일꾼(마태복음 9 : 35 -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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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8장 (78∼85)

78) 한 문둥병자의 신앙 (마태복음 8 : 1절∼4절)

79) 백부장의 모범적인 믿음 (마태복음 8 : 5절∼13절)

80) 질병을 담당하신 예수님 (마태복음 8 : 14절∼17절)

81) 너는 나를 좇으라 (마태복음 8 : 21절∼22절)

82) 한 서기관의 실패 (마태복음 8 : 19절∼20절)

85) 마귀의 정체와 그를 이기는 길(마태복음 8 : 28 - 34)


(78) 한 문둥병자의 신앙

(마태복음 8 : 1 - 4)


1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 오시니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2 한 나병환자가 나아와 절하며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3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

4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ㄱ)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시니라

ㄱ)

레 14:2 이하

2 나병 환자가 정결하게 되는 날의 규례는 이러하니 

곧 그 사람을 제사장에게로 데려갈 것이요


그리스도인들의 영원한 도덕육로써 산상보훈을 전하신 예수님은 그 위대한 설교를 마치시고 산에서 내려오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은 무리들은 그의 가르치심에 놀랐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의 가르치심이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하고 마치 권세 있는 자와 같았다고 한 것입니다. 그의 입의 말씀은 바로 전능자이신 하나님의 말씀이시기 때문입니다.


1. 복음적 이적

기독교는 이적의 종교입니다. 복음 그 자체가 이적적인 것입니다. 주님의 태어나심에서 보여주시는 바와 같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이적은 기독교만의 특징입니다. 그가 동정녀의 몸에 잉태되신 것도 이적입니다.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일 역시 이적 중에 이적입니다. 그 뿐 아니라 예수님은 그의 복음 사역을 하시면서 수도 없이 많은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사도들도 이적을 행했습니다. 오늘날도 복음을 전하는 현장에서 많은 이적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1) 예수님은 그의 생애 중에 수많은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일은 예수님의 이적은 사도들이나 오늘날 우리에게 나타나는 이적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은 그 스스로 가지고 계시는 권능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주님이 우주 안의 모든 충만한 만물을 친히 창조하셨습니다. 그가 육신으로 땅에 계실 동안에도 그의 말씀은 창조적인 능력과 권능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2) 다음에 사도적 이적입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도적 이적은 놀랍게 나타나 있습니다. 주님의 권능과 조금도 다를바 없는 권능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권능은 그들 스스로의 권능으로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그들과 함께 계셔서 그들에게 그 권능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사도적 권능의 특징은 예수의 이름으로 명한즉 그대로 이루어졌고 모든 병이 사도들의 기도와 안수와 말씀으로 깨끗함을 얻을 수 있는 이적입니다.

사도적 이적은 예외자가 없이 당장에 나타났다는 것과 즉석에서 그 권능이 나타났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이같은 역사는 오직 사도 시대에만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에 의해서만 이루어졌습니다. 이런 일은 복음을 효과 있고 권능 있게 전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에 의해서 사도들에 의해서만 가능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3) 은사적 이적이 있습니다.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주님은 그의 몸을 이루는 교회를 세우시는 일에 여러 가지 성령의 은사를 주셨습니다. 이 은사를 통해서 오늘날 교회에도 하나님의 이적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은사적 이적은 사도시대와 같은 놀라운 권능이 나타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 그 권능이 즉각적으로 나타나지 않은 것이 특색입니다. 가령 병자를 위한 기도에도 계속적으로 기도를 받아야 하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4) 다음에 일반적인 이적이 있습니다. 비록 성령의 특별한 은사는 받지 못했어도 일반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께 기도하므로 그 응답으로 결실하는 이적이 그런 경우입니다. 이런 이적의 역사도 우리 주변에 많이 있는 것입니다.


2. 문둥병자의 믿음

주님이 산에서 내려오시자 주님 앞에 맨 먼저 나타나 주님의 은총을 받아 병고침을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문둥병 자입니다. 왜 하필이면 문둥병자가 제일 먼저 나타난 것입니까? 문둥병은 영원히 고침 받을 길이 없는 인간의 죄를 상징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영혼의 문둥병자들입니다. 죄는 그 자체가 죽음이기 때문에 문둥병의 균보다 더 무서운 존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문둥병자가 어떻게 고침 받은 것입니까?


(1) 자기의 비참함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양심이나 율법을 주신 이유는 그것을 거울로 자신의 비참한 모습을 발견하여 생명 되시는 예수를 찾게 하시려는데 있는 것입니다.


(2) 만난을 극복하고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문둥병자는 예나 지금이나 철저하게 격리 수용되어 왔습니다. 이 문둥병자가 주님 앞에 나오기까지는 어려움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자신의 문둥병을 고치려는 일념으로 주님을 찾아 그 앞에 간 것입니다.


(3) 그는 주님의 은총을 믿었습니다.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시겠다고 하신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결론 : 이 문둥병자는 주님께 나와 절을 했습니다. 온유와 겸손을 말합니다. 그는 주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믿었습니다.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할 수 있나이다'고 말했습니다. 믿고 구하는 기도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능력이 따릅니다.

주님은 그에게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79) 백부장의 모범적인 믿음

(마태복음 8 : 5 - 13)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시다

(눅 7:1-10; 요 4:43-54)

5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6 이르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7 이르시되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8 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9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10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1)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11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2)앉으려니와

12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13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즉시 하인이 나으니라

우리는 오늘 말씀에서 주님의 칭찬을 들은 한 놀라운 믿음의 사람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는 가버나움에 살고 있는 로마 군의 장교로서 한 백부장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사람으로부터 듣는 칭찬에는 함정이 있지만 주님으로부터 듣는 칭찬은 참으로 좋은 일입니다. 우리가 남모르게 주님께 충성하고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은 주님의 칭찬을 받고자 함입니다.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고 했습니다(고후10:18). 이같은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칭찬은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 우리의 큰 위로와 상급이 될 것입니다.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고전4:5).


1. 믿음으로 칭찬을 받은 백부장

백부장이란 자기 밑에 100명의 군사를 거느린 로마군의 장교를 가리킵니다. 이 백부장이 자기 집에 있는 한 종의 중풍병을 위해 주님께 나와 간구하는 과정에서 그의 위대한 믿음이 드러난 것입니다.


(1) 이 백부장은 주님의 말씀의 권능을 믿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고 그가 창조주이신 사실을 모르고는 그의 말씀의 권능을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백부장은 무슨 말씀이든지 주님이 하신 말씀대로 이루어진다고 하는 믿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고 말한 것입니다.


(2) 이 백부장은 주님이 말씀하시면 그 말씀대로 성취된다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가 이같은 믿음을 가지게 된 이유에 대하여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저더러 가라 하면 오고 내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고 말했습니다.

자신도 명령에 의하여 움직이며 자기 부하들도 자신의 명령에 의하여 움직인다고 하는 사례를 들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세상에는 주님의 말씀을 거역할 그 어떤 피조물도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의 말씀으로 만물이 창조되었고 지금도 그의 말씀을 만물이 보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은 것입니다.


(3) 이 백부장은 순종에서 오는 축복을 알았습니다.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나이다." 백부장의 이 말은 말씀의 순종에서 오는 축복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말씀하시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었습니다.


2. 백부장의 믿음의 열매

주님의 이만한 칭찬을 받을 사람이라면 그에게는 반드시 열매가 따랐을 것입니다. 눅7장에 나오는 같은 사건의 기사에서 이 사람의 놀라운 열매를 찾을 수 있습니다. 가버나움에 있는 장로들이 예수님께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나이다.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고 말했습니다.

(1) 이 백부장은 하나님의 백성을 사랑했습니다.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라고 한 이 말은 백부장의 아름다운 믿음의 생활을 엿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면 하나님의 백성들을 사랑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않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요일4:20).


(2) 이 백부장은 회당을 건축했습니다. 

유대인들이 거주하는 곳이면 안식일에 모여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곳이 어디든 있습니다. 

예수님도 그 회당에서 예배도 드리고 

회당에 모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도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세운다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어려운 일입니다. 

돈이 많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버나움의 이 백부장은 이방인었지만 

그리고 군인의 신분으로 넉넉한 재정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지만 

단독으로 회당을 지었다고 한 것입니다.


(3) 이 백부장은 자기 집 종을 지극히 사랑했습니다. 

비록 종의 신분으로 살아가는 천한 사람이었지만 그는 그 종을 지극히 사랑했습니다.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어 몹시 괴로워하나이다"고 했습니다. 눅7장에서는 "어떤 백

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종이라고 했습니다.

(4) 이같은 백부장의 아름다운 믿음은 모든 사람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이 일을 하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고 했습니다(눅7:4). 인정받는 신앙은 이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결론 : 세례 요한은 주님의 신들메를 끄르는 일도 감당치 못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이 백부장은 주님이 내 집에 오심을 감당치 못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이 말은 자기는 주님을 모실 만한 가치가 없는 하찮은 존재란 뜻입니다. 그의 온유와 겸손을 말해 줍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은 마땅히 이 가버나움의 백부장을 본 받아야 할 것입니다.


(80) 질병을 담당하신 예수님

(마태복음 8 : 14 - 17)

많은 사람들을 다 고치시다

(막 1:29-34; 눅 4:38-41)

14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사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운 것을 보시고

15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더라

16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 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

17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ㄴ)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ㄴ)사 53:4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여기서 '우리의 질고'는 '우리의 연약한 것'으로, 

또 '슬픔'은 '병'으로 번역되고 있다.


예수님은 가시는 곳마다 복음을 전하시면서 병자들을 말씀으로 고치셨습니다. 주님이 사람들의 질병을 고치신 일에는 두 가지 특징이 따랐습니다. 하나는 말씀으로 고치셨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창조적인 능력이 있기 때문에 그 분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어떤 병이라고 못 고치심이 없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어떤 은사적인 능력이나 권능으로 고치시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로서의 권능으로 고치시기 때문에 예외자가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1.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

마태는 이같은 예수님의 치료의 역사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이사야로 말씀하신 바를 이루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셨거늘"이라고 했습니다. 마태는 이 예언의 말씀이 응해진 사실을 밝혀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두 가지 약점이 있습니다. 하나는 인생에게 아무런 예고 없이 찾아오는 슬픔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어쩔 수 없이 짊어지지 않을 수 없는 육신의 질병입니다.

예수님은 이같은 인생의 질고와 고난에서 오는 슬픔을 지셨다고 하셨습니다. 마태는 질고를 연약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죄로 인하여 우리에게는 끊임없이 저주가 오고, 시험이 오고, 환난이 오고, 어려움이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 십자가에서 이 모든 것을 담당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주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세상을 이긴다는 말은 세상 풍습을 이기고, 죄악을 이기고, 사망 권세를 이긴 우리의 영생을 말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능력으로 이처럼 세상을 이깁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능력은 우리에게 어떻게 나타나는 것입니까? 오직 믿음으로 이긴다고 하시고 이 믿음이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요일5:4,5).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일은 이처럼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이 따른다는 사실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믿음만 견고히 잡으면 세상을 능히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2. 질병을 담당하신 예수님

주님의 십자가에는 우리의 질병까지도 함께 못 박혀 있다는 사실이 우리의 질고를 지고 고난을 당하셨다고 하는 말씀에 역역히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이같은 일은 사53:5절에서 자세히 예언해 주고 있습 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죄와 허물로 죽은 사람들입니다. 이같은 우리의 허물과 죄악은 그가 찔림과 상하심으로 고침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우리가 나음을 입었습니다. 나음을 입었다는 말씀에는 인생이 겪는 질고와 슬픔의 치료도 들어가 있습니다. 인간의 질병 역시 죄에서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이 죄의 저주에서 풀릴 때 이 질병에서도 풀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질병에서 나음을 입었다는 말씀은 모든 질병의 육신적인 치료를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질병의 근원적인 치료를 말하는 것입니다. 질병은 인생에게 죽음의 두려움을 줍니다.

주님은 이 죽음의 두려움에서 우리를 해방하신 것입니다. 질병은 인간에게 절망을 주고 삶의 의욕을 빼앗아 갑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영생과 소망은 이런 모든 것들을 능히 이길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주님은 우리가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는 일에 자비를 베푸시어 그 질병을 고쳐 주시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질병은 죄값으로 오는 것이 있습니다(요5:14). 자신의 죄를 주님 앞에 철저하게 회개하여 사유하심을 받으면 주님이 그 병을 고쳐 주십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고자 주시는 질병도 있습니다(요9:3).

하나님께서 그 영광을 나타내실 때 치료해 주십니다. 찌르는 가시로 주시는 질병도 있습니다(고후12:7). 겸손히 주님의 뜻을 기다리고 바울처럼 오히려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귀의 역사로 오는 질병도 있습니다. 욥의 경우가 그러했습니다(욥2:7). 잘 인내하면 때가 이르매 하나님께서 축복으로 갚아 주십니다. 죽을병으로 오는 질병이 있습니다. 히스기야 왕의 경우가 그러했습니다(왕하20:1). 그러나 이 모든 질병이 주님의 권능 앞에서는 즉시 물러가는 것입니다.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셨다"고 했습니다. (마4:33).


결론 : 그리스도인들은 두 가지 역사로 이 질병을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는 주님이 친히 우리의 질병을 담당하셨으니 그의 말씀이나 권능으로 고쳐 주시는 경우입니다.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로라"고 하셨습니다. 다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심어 주신 소망과 영생은 우리의 육신적인 모든 질병을 이길 수 있는 담대한 믿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했

습니다(롬8:37). 우리는 우리의 전 생애를 주님만 의뢰함으로 이같은 주님의 은혜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81) 너는 나를 좇으라

(마태복음 8 : 18 - 22)

나를 따르라(눅 9:57-62)

18 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에워싸는 것을 보시고 

건너편으로 가기를 명하시니라

19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아뢰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20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21 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


한 서기관이 예수님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좇겠다고 고백한 그 서기관의 동기는 육신의 영광에 두고 있었으므로 주님으로부터 사람이 주를 따르는 일은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각오가 없이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려주심으로 그의 안일한 생각을 물리치셨습니다. 그가 그 후에 어떤 길을 걷게 되었는지 기록된 바가 없으므로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있은 직후, 이번엔 주님의 제자 중 한 사람이 "주여 나로 먼저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하는 간청을 드렸습니다. 그의 몸은 주님을 따르고 있었지만 그의 마음은 집에 계시는 부친의 생각으로 차 있었습니다. 연로하신 부모님을 생각하는 일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 같은 생각으로 인하여 주님의 일이 중단되거나 주님을 따르는 일에서 떨어져 나간다거나 진리를 저버리는 일이 따라서는 안 됩니다.


1. 왜 세상을 바라보게 되나?

주님이 비유하신 씨 뿌리는 말씀 중에 열매를 맺지 못하는 세 가지 종류의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길가에 떨어진 씨앗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돌밭에 떨어진 씨앗도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처음에는 기쁨으로 받지만 말씀으로 인한 시련이 올 때에는 주님을 저버리는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으로 인하여 결실치 못하는 경우도 말씀하셨습니다. 부친의 장사로 먼저 집에 돌아가겠다고 한 이 제자의 경우는 세상의 염려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염려는 우리의 마음을 어둡게 하고 세상으로 가까이 가게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는 모든 염려를 주게 맡기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벧전5:7 ; 빌4:6). 사람이 그리스도를 끝까지 따르려면 분명한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그의 이름으로 맹세하심으로 약속하신 그의 말씀을 신뢰하는데서 확고한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같은 소망이 없을 때 그의 믿음은 흔들리게 되고 육신적인 어떤 이유가 계기가 되어 믿음을 저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귀중함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 어떤 경우에도 결코 주님을 떠날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을 저버릴 수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와 생명적 연합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1) 주님을 따른다는 말은 한 주인만을 섬기는 일입니다. 주님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재물로 말미암아 주님을 등지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2) 주님을 따르는 길은 육신의 사람이 죽어야 합니다. 

육신으로 주님을 섬기는 자는 

그 육신으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둘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육신의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갈6:7-8).


(3) 그리스도인은 영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생각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고 했습니다(롬8:5-6).


(4) 주님을 사랑하는 생활은 주님을 위한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갈2:20). 주님의 제자라고 말하는 이 사람은 주님을 따라야 할 이런 조건들이 구비되어 있지를 못했습니다.


2.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죽은 자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결코 그리스도인들이 부모님을 공경하는 일에 등한히 하라고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부친에 대한 일을 집안에 있는 다른 식구들에게 맡겨도 된다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가 주님을 따르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하면 자기가 집에 가서 부친을 위해 애쓰는 일보다 더 좋은 것을 주실 수 있는 분이 주님이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고 하셨습니다(마22:37-40).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면 가정의 어려움이 있다 해도 그런 일이 주님을 떠나는 핑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 말씀에서 보여주시는 대로 우리의 이웃은 언제나 하나님을 앞지를 수 없습니다.


결론 : 베드로는 주님을 따를 때 배와 부친을 버리고 따랐다고 했습니다. 주님의 일꾼들에게 들려주신 황금율이 있습니다. 

"쟁기를 메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고 하셨습니다. 쟁기란 복음을 말합니다. 계속적으로 복음의 씨를 뿌리고 밭을 갈아야 합니다. 뒤란 세상을 말합니다. 우리의 소망은 뒤에 있지 않고 앞에 있습니다. 뒤를 돌아보는 자는 샘명의 면류관을 받을 수 없습니다. 주님은 서머나 교회에 주신 말씀에서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주님을 따르는 일보다 더 시급한 일은 없습니다.


(82) 한 서기관의 실패

(마태복음 8 : 19 - 22)

19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아뢰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20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21 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


한 서기관이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 가운데서 나아와 그가 주님을 따를 일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좇으리이다." 우리가 언뜻 듣기에 서기관의 이 말은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진실한 신앙고백으로 들려 집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에게 실망스런 말씀을 들려주신 것입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지금도 주님을 따르겠다고 고백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의 큰 교훈이 되고 있습니다.


1. 서기관의 결단이 거절된 이유

아마도 이곳에 등장하는 서기관은 다른 서기관들과는 달리 예수님께 대하여 상당한 호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주님이 이스라엘이 바라는 메시야이심을 깨달은 사람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의 이같은 결단에 대하여 처음부터 탐탁히 여기지 아니하셨습니다. 우리는 다만 나타난 상황에 의해서 사리를 판단하려고 하지만 우리 주님은 그 동기와 마음의 진실함을 보시는 것입니다. 주님을 좇겠다고 한 서기관의 경우, 그의 결단의 동기가 주님이 보시기에 합당하지 못했다고 하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일은 감상적이나 감동적인 일시적 기분에 의해서 결정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리스도와 연합 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 관계는 그 어떤 경우에도 끊어질 수 없는 절대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서기관의 경우는 자기 자신의 인간적인 생각에 의해 내려진 결단처럼 보였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일에 동기가 올바르지 못하면 언제나 배신이 빠르게 따릅니다. 갸롯 유다의 경우가 그러했습니다.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은 것을 훔쳐 감이러라 "고 하는 말씀에서 유다는 원래부터 도벽이 있는 도적이었으며 그의 동기 자체가 악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1) 그는 육신의 생각으로 주님을 따르기를 원했습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이같은 육신의 생각으로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그 동기가 하나님의 영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유익에 있으므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롬8:7-8).


(2) 서기관의 결단 속에는 시련이나 고난의 각오가 들어 있지 않은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일에는 영원한 기쁨과 소망과 값진 보화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믿음으로 바라볼 수 있는 약속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같은 사실을 믿고 그것을 바라보며 소망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고난과 시련이 따르며 우리는 이를 각오하고 주님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2. 주님의 대답에서 보여주신 교훈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고 하신 대답은 동문서답처럼 들려지지만 이 말씀이 교훈해 주시는 뜻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1) 예수님은 부요하신 분이시지만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습니다(고후8:9). 우리 주님은 그의 태어나심부터 가난하셨습니다. 그의 생애는 가난에서 시작되어 가난으로 마치셨습니다. 주님은 원래가 가난해 지실 수 없는 분입니다.

천지와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분이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의 이런 가난은 죄로 인하여 저주받아 참으로 가난하게 된 우리를 부요케 하시기 위해서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로부터 생명의 부요함을 받았습니다. 삶의 부요함을 받았습니다. 천국의 부요함을 받은 것입니다.

그보다도 생명이요 부활이신 그 분 자신을 내가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보다 부요함이 세상에 어디 있을 것입니까?


(2) 다른 한가지 교훈을 찾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그가 거하실 처소를 찾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저금 주님의 거하실 처소는 우리의 심령인데 우리는 그 분에게 아늑하고 따스한 그의 처소를 제공해 드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분을 우리의 마음에서 밖으로 내쫓으므로 내 마음 밖에서 나는 머리 둘 곳이 없노라고 탄식하시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의 마음의 문을 두드려 이르시기를 문을 열어달라고 노크하시지만 우리는 좀처럼 열어 주려고 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 :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볼찌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육신의 생각 때문에 주님을 따르고 있다면 이 시간에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83)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심

(마태복음 8 : 23 - 27)


23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따랐더니

24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께서는 주무시는지라

25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이르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27 그 사람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더라


주님이 제자들을 데리고 복음을 전파하시기 위해 갈릴리 호수를 건너 가다랴 지방으로 가실 때의 일입니다. 이 갈릴리 호수는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려지고 있습니다. 구약에는 기네레 바다 또는 게네사렛 바다라고 불렸으며 신약 시대에는 갈릴리 바다, 디베랴 바다 등으로 불려졌습니다. 이 갈릴리 호수는 담수호로 길이가 남북으로 20키로, 동서로는 제일 넓은 곳이 12키로 미터 가량입니다.

수면은 바다 표면보다 무려 207미터나 낮고 호수의 깊이는 60미터 이상 되는 곳이 별로 없습니다. 갈릴리 호수는 북편부터 사해 남편에 이르기까지 해면보다 대단히 깊은 분지와 저지로 되어 있기 때문에 사면에서 기압 관계가 빨리 변하고 바람과 회오리바람이 잦아서 배가 뒤집히는 사고가 종종 일어나곤 했습니다. 주님은 배에 오르자마자 몸이 몹시 피곤하시어 곧 잠이 드셨습니다. 그런데 그 때 갑자기 이 갈릴리 호수에 큰 놀이 일어나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된 것입니다.


1. 바다와 배와 그리스도

여기서 바다를 우리가 건너가야 할 인생 항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배는 반드시 바다를 건너가야 할 인생들이라고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 배속에 그리스도께서 타셨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축복입니다. 배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신 것은 그 배의 운전자가 그리스도이심을 의미합니다.


(1) 그리스도께서 먼저 배에 오르셨습니다. 주님이 배에 오르신 일은 우리 속에 내주 하시는 주님을 상징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 배는 주님을 태울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죄를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으면 그 마음 문이 열려져서 주님이 들어오십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은 주님이 그의 인생을 인도하시고 주장하시는 것입니다.


(2) 배 안에 주님이 계시다고 배의 운항이 안전한 것은 아닙니다. 제자들의 배에는 주님이 타셨지만 큰 놀을 만나 풍랑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때로는 고난과 시련과 어려움과 실패가 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의인에게도 고난이 있다고 하셨습니다(시34:19). 의인도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대저 의인은 일곱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난다"고 했습니다(잠24:16).


(3) 그러나 배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한, 갈릴리 바다를 건너는 일에 두려워 할 것이 없습니다."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을 이기신 주님이 내 속에 나와 함께 계심으로 우리는 환난이나 역경 중에라도 능히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내 안에 계시는 이유는 그가 나의 인생을 나와 함께 살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바울은 이 일에 대하여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한다"고 말했습니다(빌1:6).


2. 믿음이 적은 자들아 어찌하여 두려워하느냐?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그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되었을 때 제자들은 당황했습니다. 처음에는 어부로서의 노련한 기술과 힘으로 파도를 피하여 배를 앞으로 전진시키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이상 배를 안전하게 버텨 나갈 자신이 없었습니다. 이 때 그들은 배에서 곤히 주무시는 예수님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미련한 연고로 죽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에야 주님 앞에 도움을 청하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게 되었나이다." 주님은 그들의 간구를 못들은 척 하지 않으셨습니다.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책망하시면서 자리에서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셨습니다. 그러자 순식간에 잔잔해 진 것입니다.


(1) 제자들에게 믿음이 적었던 증거로 세 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하나는 주님을 곁에 두고서도 그를 의뢰하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을 의뢰치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믿음이 없거나 작은 연고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한가지는 주님이 행하신 이적을 보고 그들이 기이히 여겼다는데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의 능력을 기이히 여기는 사람은 믿음이 적기 때문입니다. 오늘 날 교회에도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한가지는 "이 어떤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하더라"고 말한 것에서 예수님의 전능하심을 믿지 못하는 그들의 어린 신앙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2) 믿음이 작은 자에게 불가피하게 나타나는 일이 있습니다. 두려움입니다. 그들은 풍랑을 두려워한 것입니다. 두려움은 하나님의 말씀이나 약속에 대한 불신에서 옵니다. 그리고 믿음이 적은 자들의 어리석은 행동은 자기 스스로 그 풍랑을 잔잔하게 하려고 한다는 사실입니다.


결론 : 그들은 자신들이 절망적인 상태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비로소 주무시는 예수님을 발견하고 그를 깨우게 되었습니다. 어려움을 당했을 때 주님을 찾았으면 그를 향하여 외쳐야 하는 것입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나와 함께 임재하신다는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환난 중에도 그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을 구하는 생활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승리적인 생애를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84) 귀신과 그의 활동

(마태복음 8 : 28 - 34)


28 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 

그들은 몹시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지경이더라

29 이에 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

30 마침 멀리서 많은 돼지 떼가 먹고 있는지라

31 귀신들이 예수께 간구하여 이르되 

만일 우리를 쫓아 내시려면 

돼지 떼에 들여 보내 주소서 하니

32 그들에게 가라 하시니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는지라 

온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 들어가서 물에서 몰사하거늘

33 치던 자들이 달아나 시내에 들어가 

이 모든 일과 귀신 들린 자의 일을 고하니

34 온 시내가 예수를 만나려고 나가서 보고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신약 성경에는 귀신, 악령, 사탄이라는 말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사람을 미혹하고 질병으로 고통을 주며 사람으로 미치게도 하고 하나님의 일을 대적하는 영적 존재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가다라 지방에 가셨을 때 귀신 들린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서 예수를 만났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귀신 들린 자가 주님을 향하여 외치기를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만일 우리를 쫓아내 실진대 돼지 떼에 들여보내소서"라고 했습니다. 물론 귀신들린 이들의 입에서 나온 이같은 간구는 사람의 입을 빌려 외친 귀신의 소리였습니다.


1. 귀신의 존재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귀신은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1) 귀신은 실재로 존재하는 인격적인 존재입니다. 귀신은 영적 존재로 실존합니다. 귀신은 사람들을 유혹하고 괴롭히고 대적하고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일 등을 하는 인격적 존재인 것입니다.


(2) 귀신은 자기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존재임을 시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귀신들이 예수님을 볼 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면서 두려워했습니다. 귀신들도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떤다고 했습니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3) 귀신들은 자기들이 언제인가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줄로 알고 있습니다.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여기서 때란 귀신이 심판 받을 최후의 시기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같은 때가 이르기 전까지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범위 안에서 활동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2. 귀신은 누구인가?

귀신을 죽은 자들의 영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근거로 귀먹은 귀신, 소경 된 귀신, 벙어리 귀신 등의 이름으로 보아 귀머거리로 죽은 사람의 영혼, 소경으로 죽은 사람의 영혼이 귀신이 된 것임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귀신이 죽은 사람의 망령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원래 성경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헬라 철학에서 나온 것입니다. 헤시오드의 글에서 발견된 것을 보면 귀신을 황금 나이에 죽은 사람의 영혼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습 니다. 유명한 피타코라스 학파에서는 정령술을 주장하는데 그들은 공기에까지 영이 존재하며 그 영은 영웅들의 망령이라고 생각했습니다.


(2) 귀신에 대하여 사탄과 함께 타락한 하늘의 악한 영들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성경에는 사람의 영이 죽은 후에 세상에 떠돌아 다닌다고 나타나 있는 곳이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이 새로운 장소로 옮겨진다고 하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전3:21)고 했습니다.

인생의 혼이 위로 올라간다는 말은 하나님께로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죽는 것이 심판인 것이 아니라 그 후에 받을 영혼의 심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계16:14절 말씀을 보면 "저희는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임금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귀신의 영에 대하여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선지자의 입에서 나왔다'고 했습니다. 이런 말씀은 귀신이 죽은 사람의 영혼이 아니란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딤전4:1절 말씀을 보면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란 말씀에서 사람의 죽은 영이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고 미혹 할만 한 영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헬라어로 귀신을 다이모니온( )이라 하며 마귀를 디아볼로스( )라고 합니다. 그런데 귀신의 왕이라고 부를 때 마귀를 지칭하는 디아볼로스란 말을 사용합니다.

이것은 귀신은 곧 사탄의 사자들로 사람의 죽은 영혼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악령들임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마25:41).

귀신들은 주님께 "만일 우리를 쫓아내실 진 대 돼지 떼에 들여보내소서"란 간구에 예수님은 저희더러 가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문제시 되는 것은 주님은 과연 귀신들의 간구를 들어 응답해 주셨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응답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주님 보시기에 가장 합당한 방법으로 여기셨기 때문에 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결론 : 세상 종말에는 귀신의 영의 역사가 강하게 나타날 것입니다. 이들은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는 일, 미혹을 받는 일, 잘못된 가르침으로 유혹하는 일 등, 이 모든 역사로 성도들을 미혹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귀신의 존재를 가볍게 보거나 무시하거나 소홀히 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이들보다 훨씬 월등하고 우월한 주님의 능력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들 귀신을 진리로 대적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승리하는 생활을 해야하는 것입니다.


(85) 마귀의 정체와 그를 이기는 길

(마태복음 8 : 28 - 34)


28 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 

그들은 몹시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지경이더라

29 이에 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

30 마침 멀리서 많은 돼지 떼가 먹고 있는지라

31 귀신들이 예수께 간구하여 이르되 

만일 우리를 쫓아 내시려면 

돼지 떼에 들여 보내 주소서 하니

32 그들에게 가라 하시니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는지라 

온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 들어가서 물에서 몰사하거늘

33 치던 자들이 달아나 시내에 들어가 

이 모든 일과 귀신 들린 자의 일을 고하니

34 온 시내가 예수를 만나려고 나가서 보고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우리는 마귀가 실존하는 인격체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사자들로 악령들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그러면 마귀나 이 악령들의 존재는 어디서 나온 것이냐? 이에 대한 분명한 언급이 성경에 없기 때문에 이에 대한 연구가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마귀의 존재와 그의 활동에 대해서만 말씀하시고 그의 기원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으신 이유는 우리의 구원 역사에 필요치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전체적으로 살펴볼 때 이 마귀의 존재나 그의 기원에 대해서 좀 더 깊이 있는 지식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1. 마귀의 기원

모든 존재는 그 기원이 있습니다. 다만 하나님만이 알파와 오메가의 존재로 영원히 계실 뿐 피조물들에게는 존재한 근원이 없을 수 없는 것입니다. 마귀의 기원에 대해서는 다음 세 가지 설이 있습니다.


(1) 뱀이 마귀에 되었다는 설입니다. 이 설은 창3:1절에 근거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더냐" 이런 하와와의 대화에서 하와를 유혹한 사탄이 뱀으로 나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사탄이 뱀으로 단정할 수 있는 근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탄은 들짐승 중에 간교한 뱀에게 들어가 하와와 대화하게 된 것입니다. 그 같은 증거는 많이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짐승들에게 사람과 대화할 수 있는 언어를 주신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사탄은 사람이나 짐승 속에 들어갈 수 있으며 자신의 존재를 숨길 수 있습니다.


(2) 다른 한가지는 마귀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이란 설입니다. 그러나 이 설은 하나님의 창조 원리에 위배되는 주장으로 합당치 못합니다. 선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악의 극치인 사탄을 그의 손으로 친히 창조하셨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3) 마지막 세 번째 설은 천사의 타락설입니다. 천사가 타락하여 마귀의 자리에 떨어졌다고 하는 주장입니다. 마치 인간이 범죄 하므로 타락하여 죄인이 되므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가 된 것처럼 그 지위가 높은 천사가 하나님 앞에 범죄하여 마귀의 자리로 타락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주장입니다. 이 마귀 타락설이 성경과 가장 부합한 정통적인 학설로 오늘날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2. 루시퍼의 타락

많은 신학자들이 사탄의 이름을 사용할 때 그 근원적인 이름으로 두 가지를 사용합니다. 하나는 루시퍼란 이름입니다. 이 이름은 사14:12절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이 말씀에서 계명성이란 말이 나옵니다. 이 계명성이란 말이 바로 루시퍼로 해석이 되는 것입니다. 이 별은 보통 샛별이라고도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귀가 처음 지음을 받았을 당시 그의 완전함과 그 지위의 아름다움과 높음을 나타내 주는 표현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귀를 가르켜 그릅이라고도 말합니다. 아마 이 말은 마귀의 이름 중 그의 전신(前身)을 나타내는 가정 적절한 이름이 될 것입니다. 겔28:14절에서 그룸이란 이름이 마귀의 타락상을 보여 주는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너는 기름 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임이여 내가 너를 세우매 네가 하나님의 성산에 있어서 화강석 사이에 왕래하였도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생물이 하늘에서 얼마나 높은 지위에 있는가에 대하여 계시록에서 말씀해 주는 네 생물의 경우에서 쉽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마귀는 그의 이름이 여러 가지로 나옵니다. 마귀, 사탄, 옛 뱀, 붉은 용, 바알세불, 이 세상 임금, 공중의 권세 잡은 자, 참소자 등 많은 이름이 그에게 적용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 존재에 대하여 "마귀와 그 사자들"이라고 말씀하셨고 계12:7절에서는 "용과 그의 사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사탄의 나라가 존재하고 있음을 시사하셨습니다(마12:26). 사탄의 나라는 사탄이 왕이요 그 휘하에 있는 악한 영의 무리들이 존재합니다.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란 말씀이 있습니다(유1:6). 마귀는 하나님 앞에 범죄하므로 그의 거룩한 본래의 품성이 전적으로 더러워졌으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리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죄의 주관자,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타락하므로 그의 지혜는 간교하게 되었고 그의 능력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권세로 바뀌었습니다.


결론 : 마귀는 우는 사자처럼 그 삼킬 자를 찾아다닌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마귀를 이길 수 있습니다. 마귀를 이기신 우리 주님과 연합한 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마귀를 이기는 생활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 믿음으로 마귀를 대적해햐 합니다. 우리는 이 마귀의 권세를 이기기 위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옷입니다. 굳센 믿음과 확실한 소망을 가지고 주님을 따르면 우리는 언제나 마귀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9장 (86∼95)

(86) 사죄의 권세(마태복음 9 : 1 - 8)

(87) 죄인의 의원으로 오신 예수님(마태복음 9 : 9 - 13)

(88) 긍휼과 제사(마태복음 9 : 13)

(89) 그리스도인의 금식(마태복음 9 : 14 - 17)

(90)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마태복음 9 : 16 - 17)

(91) 죽은 소녀를 살리신 예수님(마태복음 9 : 18 - 19 , 23 - 26)

(92) 혈루증 여인의 믿음(마태복음 9 : 20 - 22)

(93) 두 소경의 믿음(마태복음 9 : 27 - 31)

(94) 벙어리 된 귀신(마태복음 9 : 32 - 34)

(95) 추수할 일꾼(마태복음 9 : 35 - 38


(86) 사죄의 권세

(마태복음 9 : 1 - 8)


1 예수께서 배에 오르사 

건너가 본 동네에 이르시니

*본(本) 동네에(1절)

이는 갈릴리 전도의 중심지였던 가버나움을 가리키는 것으로서(4:13; 막 2:1)

2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3 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르되 

이 사람이 신성을 모독하도다

4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5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

6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7 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거늘

8 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능을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예수님은 언제가 그를 배척하는 곳에는 머물지 아니하셨으며 믿음이 없는 곳에서는 이적을 행치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곳을 떠나시기글 원하는 가다라 지방에 머물기를 원치 아니하시고 배를 타고 건너편 본 동네에 이르셨다고 했습니다. 이 때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 하나를 여러 사람들이 데리고 예수님께 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에게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사실을 바라본 한 서기관이 속으로 "이 사람이 참람하도다"고 생각했습니다. 주님은 서기관의 이런 악한 마음을 아시고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로 너희로 알게 하노라"고 하시면서 그 중풍병자를 향하여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랬더니 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1. 죄를 사하시는 권세

서기관이 생각했던 것처럼 사죄의 권세는 오직 하나님 한 분께만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알지 못하고 있는 그들이 주님을 향하여 참람하다고 한 것은 당연한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자기에게 죄인의 죄를 사할 수 있는 권세가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심으로 당신이 하나님이시란 사실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인간의 죄는 아무도 사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죄는 그 무엇으로도 소멸할 수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이 두 가지 일을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에 능히 이 일을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의 죄를 사하실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근거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하나는 독생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에 근거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그의 독생자를 우리 죄인들과의 화목을 위한 속죄제물로 삼지 않으셨다면 하나님이시라도 인간의 죄를 용서하실 수 없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가지는 죄의 용서에는 회개가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죄 사함의 근거가 되며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하나님의 지정하신 방법이기 때문에 죄에 대한 회개가 없이는 죄의 사유함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2. 중풍병자가 보여 준 것 우리는 예수님이 중풍병자의 죄를 무조건 사해 주신 것이 아니란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그들에게서 믿음을 보셨습니다.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중풍병자와 그를 데리고 온 그의 친구들로부터 믿음을 보신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주님이 말씀하신 믿음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1) 그들은 예수가 그들의 메시야이심을 믿은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받는 믿음은 올바른 신앙고백에 있습니

다. 그들이 한결같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은 것입니다.


(2) 그들은 주님이 능히 이 중풍병자를 고치실 줄을 믿었습니다. 이들의 마음에 움직이는 뜨거운 믿음은 주님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3) 중풍병자는 주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마음으로 통회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 병자는 언어의 장애로 말을 하지 못하지 않는가 보여집니다. 그러나 그의 눈이 주님을 바라보았을 때 그의 마음에 회개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아마 이 중풍병자는 자신이 범한 죄로 인하여 이같은 질병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것으로 마음 아프게 뉘우치면서 통회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그의 마음을 감찰하시고 그의 중심을 보신 것입니다.


(4) 그들은 주님을 만나는 일에 간절함을 보여 주었습니다. 사람이 너무 많아 문으로는 들어갈 수 없으므로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그 아래로 달아 내리기까지 한 것입니다(눅5:18-20). 간절히 찾는 자가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간절한 기도가 주님께 상달됩니다.


(5) 이 중풍병자의 놀라운 믿음이 그 곳에서 나타났습니다. 그는 주님으로부터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 때 이 중풍병자는 병이 쾌유된 자리에서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이제 병이 고침 받았다고 하는 어떤 징상이 뚜렷하게 그에게 나타난 것도 아닙니다. 그의 몸은 여전히 침상에 누워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주님을 향하여 "주님 내가 이런 불편한 형편인데 어떻게 일어날 수 있습니까" 주님이 손을 내밀어 자를 잡아 일으켜 주세요"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님의 말씀을 듣자 그 말씀에 의지하여 그 침상에서 몸을 스스로 일으킨 것입니다. 그랬더니 말씀대로 그 자리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주님은 서기관들의 마음속에 악한 생각이 있음을 아시고 한가지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입에 말은 하기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바로 눈앞에 보이는 중풍병자를 말씀으로 일으킴에는 입의 말만으로는 안 됩니다. 자기가 한 말대로 성취되는 권능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 이 사람은 그의 죄 값으로 무서운 질병에 걸려 고생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가 주님 앞에 나옴으로 그의 질병은 고침을 받은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은 어떤 죄인이라도 그 앞에 나와서 회개하는 자에게는 죄만 용서하실 뿐 아니라 새로운 생애를 살아가게 하십니다.



(87) 죄인의 의원으로 오신 예수님

(마태복음 9 : 9 - 13)


9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10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1)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1)앉았더니

11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13 너희는 가서 

ㄱ)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ㄱ)호 6:6

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예수님이 마태라고 하는 세리의 집에서 음식을 들고 계실 때의 일입니다. 마태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 기쁨을 세관에 있는 많은 친구들과 친지들과 함께 나누기 위해 큰 잔치를 배설하고 주님과 그의 제자들을 초대한 것입니다. 이같은 광경을 밖에서 바라보고 있었던 바리새인들은 주님의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드시느냐"고 항의한 것입니다. 이런 그들의 말을 들은 주님은 참으로 놀라운 말씀을 들려 주셨습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주님이 세상에 오신 뜻을 한마디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1. 마태를 부르신 예수님

주님은 세관을 지나가실 때 그 곳에서 일하고 있는 마태라고 하는 세리를 부르셨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소명은 사람의 뜻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전혀 하나님의 뜻에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언젠가 "나는 주님을 따르겠나이다"고 말한 어느 서기관의 제의를 거절하신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아무 말도 없이 세관에서 일하는 마태를 향하여 "나를 좇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마태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위하여 일할 모든 일을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태가 주님의 제자로써 충성된 사명을 이룰 것을 이미 다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를 만나기 전에 이미 마태가 세관에서 일하고 있음을 알고 계셨으며 이 마태가 장차 주님의 제자로써 위대한 일을 할 인물임을 알고 계셨습니다. 마태는 주님의 "나를 좇으라"고 하신 단 한마디 말씀에 그 자리에서 일어나 주님을 좇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그의 심령의 깊은 곳에서 신적 소명을 느낀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주님의 제자가 된 것입니다.


2. 병든 자에게 쓸데 있는 의원

유대인들은 유대인들과 동석하는 일조차 수치스럽게 여겼으며 더욱이 그들과 음식을 함께 나누는 일은 용납할 수 없는 일로 여겼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세리들을 죄인이라고 정죄하고 있는 이상, 그들은 세리와의 교제를 기피해 온 것입니다. 이들의 이 같은 행동은 시1편에 나오는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한다"는 말씀과 잠23:6절에서 "악한 눈이 있는 자의 음식을 먹지 말며 그 진찬을 탐하지 말라"는 말씀에 따른 의로운 행동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왜 너희 선생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고 핀잔을 주게 된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으신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 라야 쓸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이 말씀에서 건강한 자를 의인에 비유하시고 병든 자를 죄인에 비유하셨습니다. 그리고 의원은 바로 주님 자신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인간은 그의 영혼이 죽게 되었습니다. "범죄하는 영혼이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겔18:4). 우리의 영혼이 죽을병에 걸려 있는 것입니다. 이 병을 고쳐 주실 분은 예수님 뿐이십니다. 그래서 그 분은 의원으로 이 세상에 오셔야 하셨습니다.


3.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주님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그러면 죄인이라고 한 그 대상은 누구를 지칭한 것입니까?


(1) 죄로 인하여 슬퍼하는 자들입니다. 자기 죄를 바라볼 때 그 죄로 인하여 마음에 슬퍼하는 자를 가리켜 죄인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를 바라보고 슬퍼했습니다(시38:17-18).


(2) 율법에서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자기의 곤고함을 탄식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이유는 의를 주시려

는데 있지 않고 죄인임을 깨달아 하나님 앞에 회개케 하시며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르 영접하게 하시려는데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율법이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라고 표현했습니다.


(3) 의를 행할 수 없는 자신의 부족을 깨닫고 가슴을 치는 자가 죄인입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고 하는 고백이 나오지 않고서는 자기 생명의 의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지 못합니다(롬7:17-18).


결론 : 사람들은 죄라고 하는 영혼의 무서운 병을 발견해야 합니다. 이것을 발견하지 못하는 인생은 죄 가운데서 살다가 죄 가운데서 멸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생들에게 이 죄를 알려 주시는 하나님의 방법은 한가지밖에 없습니다. 그 한가지는 바로 성경입니다. 성경만이 우리의 죄를 가르쳐 주며 그 치료하시는 의원이 누구인가에 대하여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세관에 앉아 있었던 마태를 부르시듯 지금도 죄인들을 부르십니다. 우리는 과연 이같은 부르심을 듣고 주님을 따르는 생애를 살아가고 있는가 이 시간에 한번 깊이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니다.


(88) 긍휼과 제사

(마태복음 9 : 13)


13 너희는 가서 

ㄱ)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ㄱ)호 6:6

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하나님의 성품을 한마디로 잘 표현한 곳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는 말씀입니다(요일4:16). 이 말씀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이 아니시라면 하나님은 그의 독생자를 이 땅위에 보내실 이유도 없으시며 예수님께서도 그토록 고난을 당하실 필요도 없으셨을 것입니다. 사랑은 율법을 초월하며 사랑은 독생자를 이 땅위에 보내시기까지 하셨으며 사랑은 능히 주님으로 하여금 십자가를 지시게 까지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그 사랑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요일4:10).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온갖 사랑을 쏟으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 또한 사랑이십니다.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고 하신 말씀의 뜻이 여기 있는 것입니다.


1. 긍휼보다 제사에 앞선 이스라엘

주님은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호6:6절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을 섬기는 자는 어떤 예배 의식보다는 사랑이 중요하며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가를 아는 일이 제사를 드리는 일보다 중요하다는 뜻으로 들려주신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은 율법 의식에 얽매어 사랑을 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 없이 제단에 제물을 드린 것입니다. 자기 죄에 대한 회개 없이 제물을 드렸습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 없이 율법으로 정죄하고 판단했습니다. 하나님은 이같은 이스라엘의 제사를 원치 아니하시고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들이 사랑을 가지고 행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식을 가지라고 경종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들의 행위에 대해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고 탄식하셨습니다.


(1)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보이러 성전을 찾았습니다.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고 하셨습니다(사1:12).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께 드릴 제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보이러 찾아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제물을 원치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비록 수다한 제물을 하나님께 드린다 해도 사랑이 없는 제물은 받지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2) 이스라엘은 제사를 드리면서도 악을 행했습니다.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고 하셨습니다(사1:13). 아무리 좋은 것으로 분향해도,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일에 열심을 내어도 사랑이 없으면 그 분향이 가증한 것이 되고 하나님이 견디시지 못할 무거운 짐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3) 하나님은 예나 지금이나 긍휼과 인애가 없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구약 제사의 연장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제사란 제사함을 받으려는 예배 행위인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용서받으려는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려면 자기도 이웃에게 긍휼과 인애를 베풀어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는 사랑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이 나타내신 죄인에 대한 긍휼과 인애

하나님은 죄인들에 대한 긍휼과 인내를 그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것으로 확실한 증거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1) 하나님은 죄인들이 그 죄로 인하여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십니다. 오히려 죄에서 돌이켜 사는 것을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겔18:23).


(2) 주님은 세상에 오신 목적에 대하여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으로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요3:17). 우리는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우리의 영적인 생활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란 사랑이 기초가 되고 사랑이 열매가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에 대하여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히13:16).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요3:23-24). 신령이란 말은 영적이란 말로 율법적인 의식이 아니라 영적으로 받으실 예배를 말합니다. 진정이란 그 심령의 중심에서 나오는 진실한 경배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몸으로 드리는 산 제사가 있습니다.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것입니다.

이 제사는 우리가 이 세대를 본 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생활을 의미합니다(롬12:1-2).


결론 : 우리는 하나님은 우리의 진실을 원하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진실은 사랑에서만이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가 참으로 이같은 예배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가 되려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뜨거운 심령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심령이 변화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89) 그리스도인의 금식

(마태복음 9 : 14 - 17)


14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15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16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17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우리의 신앙 생활에는 금식에 관한 문제로 갈등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에는 금식이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금식에 관한 교훈이나 가르침이 여러 곳에 있습니다. 하루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와 이 문제를 가지고 질문했습니다.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의 큰 의문일 수도 있고 주님의 제자들은 자신들이나 바리새인들에 비하여 올바른 신앙 생활을 못하는 줄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1. 금식은 그 할 때가 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금식을 할 때가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 당시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은 비록 외식적이긴 하지만 금식을 해왔었습니다(눅18:11-12). 세례 요한도 율법적인 생활에 철저했기 때문에 금식을 자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교훈이나 가르침에는 금욕적인 요소가 없습니다. 금욕은 인간을 인간이 만든 틀에 가두어 놓는 것이기 때문에 복음적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의 금식은 금욕적인 의도에서나 어떤 의무감에서 시도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금식은 우리가 이행해야 할 교회의 행사도 아닙니다. 오늘날 잘못된 종교일수록 금식을 그들의 정규적 행사인양 정하여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금식은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행해야 할 의무 조항도 아닙니다. 교회에는 금식 생활을 하지 않고도 신앙 생활을 잘 하는 성도들이 있고 금식을 자주 하면서도 바른 신앙 생활을 못하는 성도들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금식 무용론을 주창하신 분은 아닙니다. 금식의 필요성을 인정하시고 다만 금식할 시기에 대하여 언급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는 이유에 대하여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혼인집 손님들이란 예수님의 제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신랑은 바로 예수님 자신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에서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이 세상에 머물러 계시는 기간을 혼인집에 비유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기간 동안은 슬퍼할 필요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금식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입니다.

이 기간에 제자들이 할 일은 금식하는 일이 아니라 신랑이 되시는 주님과 함께 기뻐하는 일입니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습니다. 더욱이 주님의 일에는 더욱 그런 것입니다. 일해야 할 때, 일은 하지 않고 금식을 한다면 하나님의 칭찬을 들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온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그가 고난을 당하실 일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제자들도 주님을 빼앗긴 후에는 금식을 했습니다.


2. 우리는 언제 금식할 것인가?

금식은 의무이거나 의식이 아니기 때문에 각자의 형편에 따라 할 수 있습니다. 금식이란 자신의 진정한 마음을 하나님께 바치는 몸과 마음의 헌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1) 자신이 범한 죄과를 바라보고 참으로 슬퍼할 때 마음을 찢는 통회로 금식이 따르는 것입니다.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를 범하므로 범죄했을 때 주야로 금식하며 하나님 앞에 그 죄를 자복하고 통회했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철저하게 회개시키는 방법으로 금식을 명하셨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도 돌아오라 하셨나니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찌어다"(욜2:12

-13). 이 말씀에서 하나님은 금식의 뜻을 밝혀 주셨습니다.

울며 애통하는 회개, 곧 옷을 찢는 회개가 아니라 마음을 찢는 회개가 있어야 하며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열매가 따라야 할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따르지 않는 금식은 열납 받지 못하는 금식인 것입니다. 이같은 금식만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습니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욜2:13). 니느웨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

포하고 왕으로부터 짐승에 이르기까지 무론대소하고 베옷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났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을 받아 재앙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2) 다음에 우리가 하나님께 애절한 마음으로 간구할 때 금식이 필요합니다. 다니엘이 모함을 받아 사자굴 속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왕은 사자굴 속에 들어간 다니엘을 위해 밤이 맞도록 금식하며 침수를 폐했다고 했습니다.


(3) 다음에 우리는 어떤 사명을 받았을 때 그 사명을 위하여 금식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안디옥교회에서 선교사를 파송하기 위해 기도하면서 금식했습니다. "주를 위해 금실 할 때" 성령께서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시고 선교사의 사명을 주시고 파송케 하셨습니다.


결론 : 금식은 주님이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금식은 자랑도 아니며 공로도 아니며 의식도 아닙니다. 우리의 목소리로 하나님께 상달되게 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이같은 금식에는 죄에 대한 통회하는 마음과 진정한 회개가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을 우리의 신앙 생활에서 이루는 일은 신앙의 놀라운 성장과 축복을 가져 올 것입니다.


(90)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마태복음 9 : 16 - 17)


16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17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 다 보존된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놀라운 복음적인 교훈인 것입니다. 주님은 율법적인 금식이 소용없고 복음적인 금식의 중요성을 주시려고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본문에서 두 가지 비유로써 율법과 복음과의 관계를 밝히셨습니다.


1. 생베 조각과 낡은 옷

생베 조각이란 주님의 새로운 교훈, 복음 곧 진리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낡은 옷이란 율법을 가리킵니다. 주님은 낡은 옷을 꿰매려고 오신 분이 아니십니다. 주님의 교훈은 율법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려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율법을 왜 낡은 옷이라고 표현하셨나? 낡은 옷은 의의 옷이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더러운 옷, 낡은 옷은 죄를 상징합니다. 탕자가 집에 돌아 왔을 때 그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의 더러운 옷을 벗기고 제일 좋은 옷으로 입히셨습니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고 하셨습니다. 죄의 옷을 벗고 복음의 새 옷을 입혀 주신 것입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그의 옷이 마치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 같았습니다. 이처럼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자들을 명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고 하셨습니다(슥3:4). 이 낡은 옷을 입고는 아버지 집에서 살아갈 수 없으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이 낡은 옷으로 의를 얻으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인정을 받을 수 없는 이 옷은 아무리 노력해도 새 옷 구실을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이 낡은 옷에 생베 조각을 붙이러 오신 줄로 알고 있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에서 이 같은 풍조가 있었습니다. 가만히 들어온 거짓 선생들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사람이 복음으로 구원을 얻되 율법을 지켜야 온전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바울은 이 같은 복음을 변질된 복음, 곧 다른 복음이라고 정죄한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주님은 하나의 흠도 없는 거룩한 옷으로 우리에게 입혀 주시는 분이십니다. 결코 낡은 옷에 붙이기 위해 오신 생베 조각이 아니신 것입니다. 만약 사람들이 낡은 옷을 꿰매기 위해 그 곳에 생베 조각을 붙인다면 옷을 헤여지게 하여 둘 다 버리게 하는 결과를 가져 올 것입니다.


2.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다음에 주님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로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보전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포도주란 성경에서 진리를 말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합니다. 특히 주님이 새 포도주라고 하신 말씀은 복음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새 포도주란 말의 새로운 말은 네오스( )로 시간적인 각도에서 새롭다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율법과 구분시킨 복음을 말합니다.

그러면 새 부대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같은 새롭다는 말이지만 여기 나오는 새롭다는 말은 카이노스( )로 질적으로 새 것이란 뜻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복음을 받아 드리는 심령을 말합니다. 이와는 반대로 낡은 부대란 복음을 받아 드리기에 합당치 않은 심령, 율법에 젖어 있는 심령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새 포도주로 비유된 복음은 묵은 포도주처럼 발효력이 없는 포도주인 것이 아니라 처음 담근 포도주처럼 발효력이 대단히 강합니다. 낡은 부대는 이 같은 발효력을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강한 발효력에 의해 터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복음도 결실치 못하고 그 사람의 심령도 구원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1) 새 부대란 새 마음을 말합니다. 새 마음은 변화 받은 마음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변화 받으려면 하나님의 영이 거해 합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겔36:26). 하나님의 영은 회개한 심령 속에 거하십니다.


(2) 새 부대란 영이 그 마음을 지배하는 마음입니다. 성령의 지배를 받는 마음이 아니면 새 부대가 될 수 없습니다. 성령은 우리 속에서 여러 가지 하나님의 영의 일을 하십니다. 영의 일을 생각하게 하고 영의 일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롬8:7-8).


(3) 새 부대란 옥토에 떨어진 씨앗입니다. 옥토에 떨어진 씨앗만이 결실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율법으로 의를 얻으려는 사람들의 마음을 낡은 부대라고 하신 것은 그 마음에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출발은 사랑이 아니라 정죄입니다. 복음은 그 시발이 사랑에 있습니다.


결론 : 율법은 믿음이 아닙니다. 의문입니다. 의문은 사람을 구원하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데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심령이 새 부대라면 우리는 마땅히 그 속에 새 포도주를 담아야 합니다. 새 포도주를 담은 새 부대는 그 포도주로 말미암아 부대가 부픕니다. 소망으로, 평강으로, 사랑으로, 감사로 부픕니다. 우리는 진리의 말씀으로 내 마음에 담아 이 새 포도주의 부프는 역사가 일어날 수 있도록 진실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91) 죽은 소녀를 살리신 예수님

(마태복음 9 : 18 - 19 , 23 - 26)


18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한 관리가 와서 절하며 이르되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어 주소서 

그러면 살아나겠나이다 하니

19 예수께서 일어나 따라가시매 

제자들도 가더니

23 예수께서 그 관리의 집에 가사 

피리 부는 자들과 떠드는 무리를 보시고

24 이르시되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그들이 비웃더라

25 무리를 내보낸 후에 

예수께서 들어가사 

소녀의 손을 잡으시매 일어나는지라

26 그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더라


성경에는 주님의 칭찬을 받은 많은 믿음의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은 한 직원이라고 말한 회당장의 믿음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는 이 직원이 회당장 야이로라고 그의 직위와 이름이 밝혀져 있습니다. 회당이란 유대인들이 안식일에 모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장소를 가리킵니다. 야이로는 그 같은 회당의 책임자로 일하고 있었던 사람으로 종교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며 유대인들에게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예수님께 나와 절하고는 이처럼 말씀 드렸습니다.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니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으소서 그러면 살겠나이다." 주님은 그의 간구를 들으시고 그와 함께 집에 가서 어린 딸의 손을 잡아 일으키심으로 죽은 딸을 살리셨습니다.


1. 야이로가 만난 불행

야이로는 그의 인생에 가장 큰 슬픔을 만났습니다. 자식이 죽었다는 것은 사람들이 체험하는 일 중에 가장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일은 인생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는 어려운 시련도 오고 비극도 오고 환난도 온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모든 문제는 싫던 좋던 반드시 우리의 생애에 찾아오는 것입니다. 야이로의 문제는 그의 생애에 찾아올 것이 찾아 왔을 뿐입니다. 우리에게 오는 문제의 해결은 찾아온 후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파도가 밀려오면 반드시 뱃머리를 치는 것처럼 우리에게 오는 문제는 노크만 하다가 우리가 받아 드리지 않으면 물러가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찾아오는 것입니다. 내 생애에 부닥치는 것입니다. 내 생애 속에 들어와 자리를 잡는 것입니다. 그러면 야이로는 이로 인하여 그의 인생이 좌초되어 버린 것입니까? 그런데 야이로는 그의 인생 고난을 통해서 오히려 더 큰 기쁨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실패 후에 하나님의 능력의 손길이 나타납니다.

어려움을 당한 후에 새로운 은혜가 뒤따릅니다. 우리는 실패를 통해서 오히려 큰 기쁨을 맛보며,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야리로로 하여금 예수님를 난나게 된 동기가 어데 있었던 것입니까? 야이로는 주님을 만남으로 놀라운 축복을 받았으며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구원의 은혜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야이로는 그의 인생의 심히 두려운 사건을 만났을 때 먼저 예수님을 찾아간 것입니다. 우리에게 오는 고통은 괴로운 일이기는 하지만 이 괴로움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기 회를 얻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와 생명을 얻게 된 사람들은 거의가 그들의 인생에 행복이 아니라 고통이 찾아 왔을 때였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야이로가 당했던 불행은 그에게 이같은 축복을 받게 했던 것입니다.


2. 고난을 당했을 때 야이로가 한 일

야이로가 고난의 생애를 만났을 때 어떤 태도를 취한 것입니까?


(1) 야이로는 먼저 예수님을 찾아 갔습니다. 인생이 자기 생애에 역경이 찾아와 어려움을 만났을 때 누구를 찾아 갈 것인가를 경정하는 일은 문제 해결에 중요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야이로는 딸이 죽었을 때 장의사를 찾아간 것이 아닙니다. 야이로는 예수님을 찾아간 것입니다. 야이로가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찾아간 일은 참으로 잘 한 일이며 그는 그 보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문제가 해결되었으며 인생의 놀라운 변화까지 가져온 것입니다.


(2) 야이로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 나서지만 만자기도 전에 포기하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는 길은 생명으로 인도 받는 길이기 때문에 길이 좁고 협착한 것입니다. 세상을 등지지 않으면 안되는 길입니다.


(3) 야이로는 예수님을 향하여 분명하고 간절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주언부언하는 기도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간구하는 내용이 분명해야 하는 것입니다. 분명한 나팔을 불어야 합니다. '내 딸이 방장 죽었사오나" 자기 딸이 죽은 일에 대하여 간구했습니다.


(4) 야이로는 믿음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기도에 하나님의 능력이 따르는 것은 기도하는 사람의 믿음에 있는 것입니다.

이 회당장은 "내 딸이 죽었사오니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으소서 그러면 살겠나이다." 주님의 손길이 닿으면 죽은 자기 딸이 살수 있을 것이란 사실을 믿었으니 그의 믿음은 훌륭한 믿음인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믿음대로 이루어 주시며 그 믿음의 분량대로 채워주십니다.

우리가 복음서을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님 앞에는 죽은 자가 없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생명이신 예수님 앞에서 죽음의 권세가 도망쳐 버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이 딸의 죽은 일을 죽었다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잔다고 하셨습니다. 그 아이는 주님의 말씀에 의해 곧 살아날 것이기 때문에 자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죽은 모든 성도들도 사실인즉 주님이 일어나라고 명령하실 때까지 잠을 자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 : 절망 할 수밖에 없는 어려움 속에서 주님을 찾아나와 간구한 야이로는 놀라운 응답을 받았습니다. 야이로는 어려움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끝까지 주님을 의뢰했습니다. 우리도 야이로처럼 모든 일에 주님께 간구하는 생활로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92) 혈루증 여인의 믿음

(마태복음 9 : 20 - 22)


20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21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22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


우리는 오늘 성경 본문 말씀에서 한 가련하고 비참한 여인의 모습을 바라보게 됩니다. 이 여인은 몸에 피가 흐르는 혈루증이란 병으로 열 두 해나 고생해 왔다고 했습니다. 여인들의 혈루병이란 자궁에서 나오는 출혈을 말하는데 이 여인의 경우는 아마 자궁암으로 절망적인 상태에 이른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는 많은 의원을 찾아 다녔지만 치료를 받기는 고사하고 고생만 하고, 있는 재물을 다 허비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 여인은 하나님과의 영적 교통도 이웃과의 교제도 완전히 차단된 생애를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1.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

이 가련한 여인의 구원받은 은혜를 보면 그는 인생의 가장 절망적인 시기에 구세주를 만날 수 있었고 주님의 구원하시는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이 여인은 회복할 수 없는 죄인의 한 상징입니다. 죄인이 신앙을 가지게 되는 시기는 모든 일이 형통할 때나 평안할 때가 아니라 생의 막다른 골목에서 이제 더 이상의 소망을 바라볼 수 없을 때 바로 그 시기에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을 불쌍히 보시고 찾아가시기 때문에 우리는 이 여인처럼 소외된 사람들을 찾아가 예수님의 음성을 들려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의 새로운 길은 가장 참담한 인생의 골짜기에서 열려진다는 사실을 알고 어려움을 당해도 낙심치 말고 소망을 가지고 주님을 의뢰하고 주님의 도우심을 인내로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어쩔 수 없이 죽게 되었다고 생을 체념한 이 여인에게 소망의 소식이 들려 왔습니다. 주님은 자기 백성들을 결코 버리지 않으시고 언제인가는 찾아오시어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의 인생의 가장 어려운 고비에 찾아오십니다. 사람의 고집과 교만과 세상을 의지하는 마음이 이 때 모두 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 깨어진 심령이 복음을 받아 드리며 이 때 그는 마음을 찢는 회개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예수의 소문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이 예수의 소문이 곧 복음인 것입니다. 이런 절망적인 상태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자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사람이 믿음을 가지게 되는 동기는 동일하지 않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께서 병을 고치신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 믿음은 예수를 만나면 자신의 병을 고칠 것이라고 하는 주님의 권능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믿음이 처음에는 유치한 곳으로부터 시작해도 이로 인하여 예수님 앞으로 인도 받아 그 분을 만나 그 분의 말씀을 들으면 구원에 이르는 믿음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이 여인의 믿음은 주님의 옷가에 자신의 손이 닿기만 해도 자기의 병이 고침 받을 것이란 간절한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2. 모든 문제의 해결점은 주님께 있다.

이 여인에게 예수의 소문을 듣게 하시고 믿음을 주셔서 주님을 찾아 나올 수 있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요6:37). 이 여인이 찾아 간 것은 그가 아버지께서 주님께 주신 잃은 양이었기 때문입니다.


(1) 비참한 자리에서 일어났다는 것은 그의 믿음의 첫걸음이었습니다. 만약 이 여인이 소문만 들었을 뿐 자리에 그대로 누어 있었다면 그에게는 아무런 기적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12년간이나 누어 있었던 그 비참한 자리에서 주님을 만나기 위해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의 소문을 듣고도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사람은 주님께 아무 것도 바랄 수 없습니다. 좌절된 자기 인생의 자리에서 주님을 만나기 위해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에는 일어나는 첫째의 행동이 따라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2) 이 여인은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움직였습니다. 이 여인은 허황된 망상을 생각하면서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본 것입니다. 이 여인이 거리에 뛰쳐나갔지만 예수를 만날 것을 확실한 목표로 삼지 않았다면 다른 사람에 이끌리어 다른 의원에게 찾아갔을는지 모릅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3) 이 여인은 목표점을 향하여 일사불란하게 달려 간 것입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고 하셨습니다. 이 여인이 밖에 나갔을 때 자신의 허약한 몸으로 인파를 헤치고 예수께로 가는 길에서 몇 번인가 발걸음을 멈추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의 경주장에서 여러 가지 장애물이 있다 해도 두려움이 없이 모든 장애물을 헤치며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4) 이 여인은 주님의 겉옷을 만졌습니다. 주님이 "네 믿음대로 되라"고 하신 말씀은 믿음대로 행하는 열매가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이 여인이 열매를 맺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믿음이 믿음대로 행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리에 누운 채 믿습니다를 외칩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님을 만나 그의 옷가를 만짐으로 그의 믿음을 나타낸 것입니다.


결론 : 주님은 이 여인을 향하여 안심하라고 위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안심하라고 하신 것은 이 여인이 부정한 혈루증 병자로 주님 앞에서 두려워 떨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죄인을 가까이 하십니다. 우리에게는 이 여인과 같은 믿음이 아쉽습니다. 절망 중에서 역경 중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만을 가지고 소망을 바라고 나가는 신앙은 언제나 승리가 따른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93) 두 소경의 믿음

(마태복음 9 : 27 - 31)


27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가실새 

두 맹인이 따라오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

28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맹인들이 그에게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니

29 이에 예수께서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이르시되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시니

30 그 눈들이 밝아진지라 

예수께서 엄히 경고하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하셨으나

31 그들이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그 온 땅에 퍼뜨리니라


소경 두 명이 주님께 나왔습니다. 이 소경들은 자신들의 눈이 주님의 권능에 의하여 능히 고침 받을 줄로 믿었습니다. "내가 능히 이 일할 줄을 믿느냐"는 주님의 물음에 그들은 "주여 그러하오이다"고 대답했습니다. 이같은 그들의 믿음은 아주 귀한 믿음입니다. 주님은 "너희 믿음대로 되라"고 말씀하심으로 그들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들의 끈기 있는 기도와 주님의 전능하신 권능을 믿는 믿음을 본 받아야 할 것입니다.


1. 두 종류의 소경

성경에는 두 종류의 소경이 있습니다.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요9:39).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고 하신 소경은 영적 소경을 가리킨 것입니다. "눈이 있어도 소경이요 귀가 있어도 귀머거리인 백성을 이끌어 내라"고 하셨습니다(사43:8). 이 소경 역시 영적 소경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육적 소경보다는 영적 소경을 더 가련하게 보셨습니다. 그들의 눈이 열려지지 않는 한,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제사장들, 이들은 한결같이 영적 소경들이었으며 주님은 이들에 의해 핍박과 비방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면 누가 영적 소경이 되는 것입니까? 자신의 죄를 발견치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죄는 우리의 마음을 어둡게 합니다. 영의 눈은 죄에 가리워 지기 때문에 누구든지 죄를 회개하지 못하면 영적 소경에서 벗어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영적 소경을 면하려면 빛을 받아야 합니다. 빛은 어두움을 물리치기 때문에 빛을 가지고 있으면 죄가 머물 곳이 없으므로 영의 눈이 열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영의 눈이 열렸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소망도 영생도 천국도 하나님의 말씀에서 약속해 주시는 하나님의 언약이기 때문에 눈이 열린 사람은 소망도 확실히 가질 수 있고 믿음도 가질 수 있으며 천국도 소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소경들이 보여 준 믿음

예수님이 야이로의 집에서 나오실 때 두 사람의 소경이 주님을 따라오며 소리쳤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외친 말은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간구였습니다.


(1) 그들에게는 절호의 기회가 왔습니다. 사람에게는 기회라고 하는 것이 주어집니다. 이 기회를 잘 잡으면 크게 성공할 수 있습니다. 소경들은 자기들에게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가까이 계시는 그 시기를 붙잡은 것입니다. 사람들에게는 누구에게나 예수님을 가까이서 붙잡을 수 있는 그런 기회가 있는 것입니다. 이 기회를 잘 포착하여 자기 인생에 그분을 영접하는 사람은 그의 생애에 가장 위대한 승리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시기를 놓친 사람은 그 이유 하나 때문에 그의 생명을 영원히 잃어 버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사55:6).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다음 기회로 미루는 사람만큼 어리석은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고 하셨습니다(잠27:1).


(2) 그들은 자신들의 무능을 알았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노력하고 애써도 소경된 자신들의 눈을 뜨게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이 무엇이건 할 수 있다고 자신할 동안은 그들에게 예수님이 필요치 않습니다. 우리가 내 손으로 돈을 벌 수 있다고 자신할 때 성수주일은 뒤로 미루게 되고 십일조 생활의 필요성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내 힘과 애씀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정말로 믿게 될 때 우리에게 당면한 이 어려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분이 누구인가를 깨닫게 되고 인간적인 방법을 버리고 하나님의 방법을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3) 이 소경들은 자신들의 눈을 뜨게 하실 분이 누구인지 알았습니다. 이 소경들은 주님께 대한 소문을 듣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 분이야 말로 다윗의 자손이 아니시겠느냐고 믿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란 곧 메시야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분이야 말로 자신들의 소경된 눈을 능히 뜨게 해 주실 분이심을 믿은 것입니다.


(4) 그들은 문제의 해결자를 만났습니다. 우리의 문제의 해결자는 우리가 찾기만 하면 만나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들은 소경들이었지만 어려움을 헤치고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소경들은 주님을 따랐습니다. 사람들에게 조롱을 당하기도 하고 걷어채기도 하고 밀치기도 하면서 주님을 놓칠 새라 따른 것입니다.


결론 : 이 소경들은 소리를 질러 간구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어느 집에 들어가셨다고 했습니다. 소경들은 주님이 그집에서 나오시기를 문에서 기다려 서 있었습니다. 주님이 나오시면서 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내가 능히 이 일할 줄을 믿느냐" 이 물음에 그들은 "주여 그러하오이다"고 대답했습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의 이같은 믿음의 대답은 주님에게서 그들의 소경된 눈을 뜨게 하는 무한한 능력을 이끌어 낸 것입니다.

너희 믿음대로 되라고 하신 이 한 말씀으로 그들의 눈이 떠진 것입니다. 그들은 육신의 눈만이 떠진 것은 아닙니다. 신령한 눈도 함께 떠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에는 큰 기쁨과 감격과 함께 불붙는 전도의 불꽃이 피었습니다. 우리들도 우리의 신령한 눈이 열렸다면 그들과 같은 기쁨과 감격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94) 벙어리 된 귀신

(마태복음 9 : 32 - 34)


32 그들이 나갈 때에 

귀신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예수께 데려오니

33 귀신이 쫓겨나고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거늘 

무리가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다 하되

34 바리새인들은 이르되 

그가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 하더라


오늘 본문에는 귀신들려 벙어리 된 자가 예수님께 나와서 그 귀신이 쫓겨나고 벙어리가 말하게 된 사실에 대하여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귀신은 영적 존재로 인간 사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악령입니다. 귀신들은 인간에게 질병도 주고 고통과 파멸까지 가져다주는 사탄에 속한 무리들입니다. 예수님이 이같은 귀신를 인간에게서 쫓아내어 벙어리로 말하게 한 사건은 즉각적으로 많은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이것을 바라본 바리새인들은 주님이 귀신의 왕을 빙자하여 이같은 일을 했다 하여 비난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1. 귀신의 종류

신약성경에는 귀신의 종류가 다양하게 나옵니다. 벙어리된 귀신, 귀머거리 귀신 등등 여러 가지로 불려집니다. 이 귀신에 대하여 어떤 사람들은 죽은 사람의 영이라 하여 악령과 구별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 아무 곳에서도 죽은 사람의 영혼이 귀신이 되어 이 세상에서 사람들을 상대로 활동한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눅16장에 나오는 주님의 비유의 말씀에 나타난 사실은 사람의 영은 그의 육신의 죽음과 함께 음부나 혹은 낙원에 간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귀신이란 악령의 다른 대명사에 불과한 표현입니다. 막3장에서 서기관들이 예수님은 귀신에 잡혔다, 혹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했을 때, 예수님은 "사단이 어찌 사탄을 쫓아내겠느냐 만일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면 그 나라가 설 수 없고 만일 사단이 자기를 거슬려 일어나 분쟁하면 그 나라가 설 수 없고 이에 망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귀신들려 벙어리 된 자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귀신은 영적으로 사람들에게 큰 피해를 줄 뿐 아니라 육적으로도 가지가지 병을 가져다주는 장본인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귀신의 무리들은 제각기 자기 사명을 따라 사람들 속에 들어가 영적으로 혹은 육적으로 괴롭힌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사람들이 귀신들려 벙어리 된 자를 주님께 데려왔습니다. 주님이 그 귀신을 쫓아내시니 귀신이 쫓겨나고 벙어리가 말을 했다고 했습니다.


2. 영적 벙어리 된 사람들

모든 인간은 죄를 범하면서 모두 영적 벙어리들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이 영적 벙어리들이 있습니다.


(1) 기도하지 못하는 벙어리가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이 대화가 끊겨진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자비와 은총이 내려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쉬지 말고 기도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입을 열지 못하는 사람들은 영적 벙어리들로 이런 벙어리들은 마땅히 받아야 할 혜택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2) 죄를 자백할 줄 모르는 벙어리들이 있습니다. 이런 벙어리는 가장 가련한 사람들입니다. 구원에 이를 수 없는 것입니다. 죄를 자백하는 회개로서만이 구원에 이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죄를 자백할 줄 모르는 벙어리들은 이런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회개하는 일에 벙어리가 되면 형통한 길이 막히는 것입니다.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한다"고 했습니다(잠28:13).


(3) 하나님께 감사할 줄 모르는 벙어리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할 줄 모르는 입술은 분명 벙어리인 것입니다.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라"고 하셨습니다(시50:14).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했습니다(빌4:6).


(4) 찬양의 입술이 닫혀진 벙어리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찬양을 받으실 이름입니다.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기업이 된 일은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엡1:12). 우리의 입술이 열려 하나님을 높이 찬양하는 찬송의 소리가 크게 울릴 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우리의 삶은 더욱 풍성해 질 것입니다.


(5) 그리스도를 증거하지 못하는 벙어리도 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해야 할 일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일입니다.

구원받은 우리의 입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에 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입이 굳게 닫혀져 그리스도를 증거하지 못한다면 벙어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6) 책망할 줄 모르는 벙어리 개들이 있습니다. "파수꾼들은 소경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라 능히 짖지 못한다"고 했습니다(사56:10). 파수꾼들이 책망하지 못하면 그는 짖지 못하는 벙어리 개인 것입니다. 파수꾼이란 목자를 말합니다.

목자는 마땅히 책망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고 하셨습니다(잠6:23). 우리는 왜 이런 벙어리가 되는 것입니까? 본문에 나오는 이 사람의 경우는 벙어리 귀신이 들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만약 죄를 범하면 그 시로부터 우리의 입은 벙어리가 되는 것입니다.


결론 : 주님은 네 믿음대로 되라고 하신 말씀을 통하여 많은 사람의 질병을 고치셨습니다. 그러면 믿음이 없는 사람은 주님의 치료를 받을 수 없었던 것입니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있건 없건 다만 주님이 말씀하시면 그 말씀의 능력으로 치료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벙어리의 경우는 벙어리의 믿음으로 고침 받은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의 권능으로 고침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비록 귀신 들려 벙어리 된 사람은 아니라도 벙어리 된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기도하는 입을 열고 회개하는 입술을 열고 감사의 입

술을 열고 찬양의 입술을 열고 복음을 증거하는 전도의 입술을 열어야 할 것입니다.


(95) 추수할 일꾼

(마태복음 9 : 35 - 38)


35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2)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36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37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38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천국 복음을 전하시기 위해 매우 분주한 나날을 보내셨습니다.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들을 고치시니라"고 한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는 다니셔야 할 성과 촌은 너무나도 많고 가르쳐야 할 어리석은 백성들도 수 없이 많으며 고쳐 주셔야 할 병자도 너무나도 많았습니다.

주님에게는 그들이 모두 목자 없이 유리하는 양처럼 보이신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 가운데 구원받을 당신의 백성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추수할 곡식이 많은 것을 아시고 안타깝게 여기신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 같은 일을 깨닫게 하시고 그들 자신이 이런 일꾼이 되게 하시기 위해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다"고 하시고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주소서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 추수할 것이 많도다.

추수할 것이란 알곡을 말합니다. 추수한다는 말은 그 곡식을 거두어 창고에 둔다는 말로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의 집 곧 교회에 이끌어 드리는 일을 말합니다. 이 말씀은 주님의 잃은 양의 비유로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한 마리의 잃은 양을 위한 주님의 심정을 말씀해 주시며 한 죄인이 회개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경우의 기쁨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추수할 곡식이 많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이 많다는 것이요 우리의 전도 대상이 많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추수할 곡식은 많지만 그들을 돌보아 주어야 할 목자가 없음을 주님은 안타까이 여기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이나 제사장들은 마땅히 그들의 목자가 되어야 할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은 그들의 양무리들을 먹이지 아니했으며 흩어지게 하였고 오히려 그들의 고기를 먹음으로 자신들의 배를 채운 것입니다(겔34:2-6). 이들은 이스라엘 집의 잃은 양떼들로 우리 주님은 이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주님은 이들을 추수할 곡식으로 보셨습니다.


2. 추수할 일꾼이 적다.

일꾼은 추수꾼을 말합니다. 복음을 전함으로 하나님의 곡간에 거두어 드려야 할 잃은 양무리들은 많지만 그들을 거두어 드릴 추수꾼이 심히 적다고 하신 것입니다. 잃은 양을 찾으시는 주님의 심정으로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적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의 제자들을 이런 전도자로 양육하셨으며 그들은 오순절에 이르러 성령을 충만히 받음으로 이같은 사명 을 이루는 추수꾼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날에도 이런 추수꾼을 찾고 계십니다.

누가 이런 추수꾼이 될 수 있는 것입니까?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유리하는 양떼들을 추수하려면 권능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권능을 받은 증거는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추수할 일꾼들은 양무리들을 위해 고난을 받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목숨을 버리기까지 양떼들을 돌 볼 줄 아는 목자가 주님의 심정으로 양무리를 치는 진실한 목자입니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뇨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저에게 맡기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양떼들을 맡기는 했지만 그들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치지 아니하고 세속 생활을 즐기는 생활을 해 온 목자들을 향해 무섭게 경종하셨습니다.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동무들을 때리며 술친구들로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복음 전도의 사명자는 하늘에 있는 상급의 푯대를 향하여 좇아가는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 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주님께 합당한 추수꾼이 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앞에 있는 상급만을 그 인생의 달려갈 길로 알고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운 사람입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고 말했습니다(질3:12-13). 뒤에 있는 것이란 세상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에 있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몸을 빼앗기다 보면 하늘의 상금을 위하여 일 할 시간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새로운 푯대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는 일꾼이 참된 추수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 : 오늘날 교회에는 일꾼으로 자처하는 사람들은 참으로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원하시고 찾으시는 일꾼은 심히 적습니다. 오늘날 주님을 믿고 따르는 무리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무리는 적습니다. 천국을 소망으로 삼고 살아가는 성도들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좁은 길과 협착한 길을 찾는 사람은 적습니다. 하나님께서 성전에서 기도하는 이사야를 향하여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부르시는 소명을 듣고 이사야는 자기가 가기를 자원했습니다. 주님은 오늘에도 이런 추수꾼을 바라십니다. 우리도 이같은 주님의 소명을 듣고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날 보내소서"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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