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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장-7장[Ⅱ.예수의 설교 5장-7장]◆ 밤중소리

영국신사77 2020. 4. 10. 17:29

마태복음 5장-7장 

제목차례

마태복음 5장(35-52)

(35)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 (마태복음 5 : 1절∼13절)

(36) 애통하는 자의 복 (마태복음 5 : 4절)

(37) 온유한 자의 복 (마태복음 5 : 5절)

(38)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복 (마태복음 5 : 6절)

(39긍휼히 여기는 자의 복 (마태복음 5 : 7절)

(40) 마음이 청결한 자의 복 (마태복음 5 : 8절)

(41) 화평케 하는 자의 복(마태복음 5 : 9)

(42)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의 복(마태복음 5 : 10 - 12)

(43) 성경에서 말하는 두 가지 축복(마태복음 5 : 1 - 12)

(44)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마태복음 5 : 13)

(45) 너희는 세상의 빛이니(마태복음 5 : 14 - 16)

(46) 율법을 완전케 하러 오신 예수(마태복음 5 : 17 - 20)

(47) 은혜의 세계와 율법의 세계(마태복음 5 : 17 - 20)

(48)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마태복음 5 : 20)

(49) 그리스도인의 살인죄(마태복음 5 : 21 - 26)

(50) 그리스도인과 간음죄(마태복음 5 : 27 - 32)

(51) 그리스도인과 맹세(마태복음 5 : 33 - 37)

(52) 그리스도인의 사랑(마태복음 5 : 38 - 48)


마태복음 6장(53-67)

(53) 그리스도인의 구제 (마태복음 6 : 1절∼4절)

(54) 감찰하시는 하나님 (마태복음 6 : 3절∼4절)

(55) 그리스도인의 기도 (마태복음 6 : 5절∼8절)

(56) 주기도문의 삼대 줄거리 (마태복음 6 : 9절∼13절)

(57)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마태복음 6 : 9절)

(58) 나라이 임하옵시며 (마태복음 6 : 10절)

(59)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태복음 6 : 10절)

(60)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마태복음 6 : 11절)

(61)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태복음 6 : 12)

(62) 시험에 들게 마옵시고(마태복음 6 : 13)

(63) 그리스도인의 금식 기도(마태복음 6 : 16 - 18)

(64) 그리스도인의 재산 관리(마태복음 6 : 19 - 21)

(65)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하는 이유(마태복음 6 : 22 - 24)

(66) 그리스도인의 염려(마태복음 6 : 25 - 32)

(67) 그리스도인이 먼저 구할 것(마태복음 6 : 33 - 34)


마태복음 7장(68-77)

(68) 그리스도인의 비판(마태복음 7 : 1 - 2)

(69) 내 눈 속에 있는 들보(마태복음 7 : 3 - 5)

(70) 거룩한 것과 개(마태복음 7 : 6)

(71) 그리스도인의 의를 이루는 생활(마태복음 7 : 7 - 8)

(72)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마태복음 7 : 7 - 8)

(73)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마태복음 7 : 9 - 12)

(74) 인생의 두 길(마태복음 7 : 13 - 14)

(75) 거짓 선지자를 삼가라(마태복음 7 : 15 - 20)

(76) 천국에 들어갈 자격자(마태복음 7 : 21 - 23)

(77) 지혜로운 건축자(마태복음 7 : 24 -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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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장 강해

(35)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 (마태복음 5 : 1절∼13절)

(36) 애통하는 자의 복 (마태복음 5 : 4절)

(37) 온유한 자의 복 (마태복음 5 : 5절)

(38)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복 (마태복음 5 : 6절)

(39긍휼히 여기는 자의 복 (마태복음 5 : 7절)

(40) 마음이 청결한 자의 복 (마태복음 5 : 8절)

(41) 화평케 하는 자의 복(마태복음 5 : 9)

(42)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의 복(마태복음 5 : 10 - 12)

(43) 성경에서 말하는 두 가지 축복(마태복음 5 : 1 - 12)

(44)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마태복음 5 : 13)

(45) 너희는 세상의 빛이니(마태복음 5 : 14 - 16)

(46) 율법을 완전케 하러 오신 예수(마태복음 5 : 17 - 20)

(47) 은혜의 세계와 율법의 세계(마태복음 5 : 17 - 20)

(48)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마태복음 5 : 20)

(49) 그리스도인의 살인죄(마태복음 5 : 21 - 26)

(50) 그리스도인과 간음죄(마태복음 5 : 27 - 32)

(51) 그리스도인과 맹세(마태복음 5 : 33 - 37)

(52) 그리스도인의 사랑(마태복음 5 : 38 - 48)


(35)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

(마태복음 5 : 1 - 3)

예수님은 산에 오르시어 무리들에게 귀한 교훈을 가르치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산상보훈이라고도 하고 여덟 가지 복을 말씀하셨다 하여 팔복이라고도 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듣기 전에 먼저 이곳에서 주님이 말씀하신 복이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에 대하여 알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이 복이 있다고 하실 때 쓰신 말은 마카리오스( )라고 하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이 복은 부요하다는 뜻으로 영적인 부요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헬라어에서 복이라고 하는 다른 또 하나의 단어가 있는데 그것이 유다이몬( )입니다. 이 단어는 세상에서 말하는 일반적인 행복을 의미하는 것으로 행운과 번영과 물질적 축복을 누리는 상태를 묘사할 때 씁니다. 예수님이 산상보훈에서 쓰신 모든 복은 유다이몬이 아닌 마가리오스란 단어를 쓰셨습니다.


1. 심령이 가난하다는 말은 무엇인가?

심령이 가난하다는 말을 알려면 먼저 심령의 부요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물질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떠난 심령이 부요한 심령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물질로 인하여 그들의 심령이 부요했었습니다. 주님은 이들에 대해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고 하셨습니다.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 역시 심령이 부요한 자인 것입니

다.

가난이란 말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이곳에 사용한 헬라어 단어는 프토코스( )로 구걸해야 할 만치 가진 것이 없는 극한 가난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가난한 심령이란 세상 물질이나 세상 소망이 전혀 없는 심령을 가리킵니다. 재물에 그 마음이 빼앗기지 아니하고 세상 소망 때문에 그 마음이 세상으로 흐르지 아니하는 심령을 가난한 심령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심령이란 겸손한 마음을 가리킵니다. 세상에 있는 것으로 마음에 채워지면 그 마음이 교만에 처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마음이 빈 사람은 언제나 겸손하고 온유합니다.

가난한 심령이란 죄에 대하여 민감한 마음을 가리킵니다. 마음이 가난하기 때문에 그 심령에 죄를 담아 둘 수 없는 것입니다. 바울이 부요한 마음을 버리고 가난한 마음을 가졌을 때, 그는 말하기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이 사 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라'고 탄식했습니다. 가난한 심령이란 하나님 말씀에 갈급한 마음을 가리킵니다. 가난한 마음속에 채워질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 말씀뿐입니다. 가난한 마음이 소망하는 것은 신령한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2. 가난한 자에 대한 복

가난한 마음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통회하는 심령이 가난한 마음을 가지게 합니다. 통회란 곧 회개로 이 회개는 우리의 마음에서 죄악을 몰아내고 정결하고 깨끗하게 합니다. 이같은 마음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사51:15). 성령이 임한 심령이 가난한 마음을 가지게 합니다. 가난한 마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성령을 보내심으로 우리의 마음을 가난하게 만드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재하지 않는 마음은 가난한 마음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에게 믿음으로 부요케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약2:5).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신다'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물질적으로 가난하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이들이 받을 복에 대하여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고 하셨습니다. 천국의 축복은 놀라운 축복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천국의 소유자들이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의 축복을 받기 시작합니다.

마음의 평안은 얻습니다. 하나님을 의뢰하므로 그의 인생이 복스럽게 됩니다. 그는 소망 중에 언제나 기쁨과 즐거움에 찬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 뿐 아니라 그는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됩니다. 우리 인생이 찾아야 할 복이 바로 이런 복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부요한 사람들은 그들의 눈이 소경이라 이 같은 복을 찾지 못하고 다만 이 세상에서 부요한 현실적 복에 마음을 돌리고 그런 복을 찾는 일에 전념하므로 천국과는 거리가 멀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가난하지 않으면 천국에 대한 확실한 소망을 가질 수 없습니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찾아 오십니다. 이런 사람의 마음을 성령의 전으로 삼으셔서 세상 끝까지 그와 함께 하십니다.


결론 : 하나님께서는 이런 마음속에 하나님의 은택을 부어 주십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났다면 우리는 마땅히 이같은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 재물에 대하여 가난한 마음을 가짐으로 우리의 마음을 재물로 부요하게 채워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36) 애통하는 자의 복

(마태복음 5 : 4)

예수님은 천국민의 두 번째 복으로 위로의 복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위로의 복은 누가 받게 되는 것입니까? 이 복에 대하여 주님은 '애통하는 자가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마땅히 하나님의 위로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위로는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그 의미가 다른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위로를 주실 때 영적 위로를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받아야 할 진정한 위로는 영적 위로라야 합니다. 이런 위로가 우리에게 소망을 주고 마음의 평안함과 영원한 기쁨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1. 애통이란 무엇인가?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는데 그러면 애통한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마음이 상하고 깨어진 상태를 가리켜 애통이라고 부릅니다. 애통이란 말은 헬라어로 펜도스( )로 이 말은 슬픔이나 비탄이란 말로, 야곱이 자기 아들 요셉을 죽은 줄로 알고 심히 슬퍼했을 때 사용한 단어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애통이란 말은 마음의 애통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마음의 애통은 그 마음을 찢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요엘은 종말에 관한 경종에서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찌어다'고 외쳤습니다(엘2:13). 애통은 회개로 인하여 마음을 찢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고 하셨습니다. 회개는 죄에 대한 두려움과 슬픔에서 나옵니다. 진정한 회개는 죄에 대해 슬퍼하는 마음이 없이는 할 수 없습니다.

회개는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한 자백에 있지만 이같은 자백은 죄의 두려움과 그의 결과를 알 뿐 아니라 그 죄에서 돌이키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를 산다는 사실을 깨닫고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회개는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죄로 말미암은 슬픔과 애통함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2. 애통하는 자가 받을 위로

예수님은 애통하는 자는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하셨는데 그러면 애통하는 자가 받을 위로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1) 사죄에서 오는 마음의 기쁨입니다. 죄로 애통하는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죄의 사유함을 받습니다. 인생의 축복 가운데 죄의 사유함은 가장 복된 것으로 이 축복은 인생의 마음에 무한한 기쁨을 줍니다.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고 했습니다(롬4:7-8). 죄는 인생의 마음속에 불안과 근심과 두려움을 심어 줍니다. 악한 죄인이라도 경찰에 자수하는 일이나 그 죄로 인하여 자살하는 일이 있는 것은 이같은 사실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임재에서 오는 마음의 평안이 있습니다. 죄로 애통하는 자는 그 마음에 성령이 임재하시는 것입니다. 주의 성령이 임재하시면 우리의 마음엔 평안이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주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3) 영생을 약속 받는 소망이 있습니다. 죄로 인하여 애통하는 자는 그 아들에 대한 믿음으로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됩니다. 이 생명은 영생이며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참된 소망인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무한한 위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소망은 허망한 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이루어지는 확실한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주님의 말씀 중에는 이런 위로가 담겨져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가로되 너는 살았을 때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고 하신 것입니다(눅16:25),

나사로가 받는 위로가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최종적인 위로입니다. 이 땅위에서 죄로 인하여 눈물을 흘리며 애통한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사망도 애통하는 것도 곡하는 것도 아픈 것도 지나갔음으로 영원한 위로 가운데서 복된 천국의 무궁한 생애가 펼쳐지는 것입니다. 위로라는 헬라어 단어는 애통하는 자를 하나님 곁으로 부른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위로자는 보혜사 성령이십니다. 보혜사란 말은 파라크레토스( )인데 이 말은 하나님께서는 죄를 슬퍼하고 애통하는 자에게 보혜사 성령을 보내시어 그의 곁으로 부르시고 위로 하신다는 뜻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받지 못하면 믿음의 선한 싸움에 승리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은 사죄의 기쁨과 마음의 평안과 소망의 확신에서 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위로하심을 받기 위해 늘 죄에 대하여 애통하는 심령을 가지고 회개하기에 지체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37) 온유한 자의 복

(마태복음 5 : 5)

예수님은 세 번째 복으로 '온유한 자의 복'을 말씀하셨습니다. 온유한 자가 받을 복으로 '땅을 차지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거듭나면 우리의 모든 것이 변화 받습니다. 특히 삶의 방향이 달라지며 아직까지 생각해 온 모든 생의 가치 판단이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온유한 자가 받을 복이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분명히 온유한 자가 받을 놀라운 축복이 있는 것입니다.


1. 온유한 마음의 소유자

온유하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예수님의 마음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를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온유하다는 말과 겸손하다는 말은 거의 같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헬라어로 온유는 프라위테스( )로 이 말은 친절, 겸손, 동정과 같은 말로 쓰여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에서 온유함을 먼저 찾아보아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온유하신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신 그 분이 사람의 모양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죽기까지 하나님께 복종하신 것은 그의 온유하심과 겸손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주와 선생이 되셔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고 하셨습니다(요13:14). 예수님은 참고 견디시는 것으로 그의 온유하심을 본 보여 주셨습니다.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벧전2:23). 예수님은 섬기시는 것으로 그의 온유하심을 보이셨습니다.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고 하셨습니다(눅22:27).

그러므로 우리가 온유한 마음을 가지려면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변화 받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변화는 무엇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죄를 깊이 뉘우치고 마음을 찢는 회개에서만이 발견되고 자랄 수 있는 것입니다. 온유한 마음은 새 마음입니다. 회개한 자에게 주시는 새로운 마음입니다. 이 마음은 세상 누구로부터도 본 받을 수 없습니다. 새 영이신 성령만이 우리에게 주시는 그리스도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2. 어떤 마음이 온유한 마음인가?

(1) 온유한 마음이란 자기 부족을 아는 마음입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모르는 사람은 온유한 마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자신이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가 이 세상에서 가장 미련스럽고 어리석은 사람이란 사실을 스스로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 부족을 모르는 사람은 교만하기 때문에 온유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나는 부족하고 어리석은 자임을 참으로 느낄 때 그는 남을 자기보다 높여주며 자기가 모든 사람보다 오히려 부족한 자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온유한 마음은 이런 심령 속에서 자라고 빛을 냅니다.

(2) 온유한 마음이란 죄의 두려움을 아는 마음입니다. 온유한 마음 안에는 죄가 거처할 자리가 없는 것입니다. 죄를 늘 경계하고 두려워 하기 때문입니다. 시1편에서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3) 온유한 마음이란 정욕을 이기는 마음입니다. 온유한 마음에는 성령이 임재하시기 때문에 그 속에 정욕을 담아 둘 수가 없는 것입니다. 늘 말씀에 사로잡히기 때문에 정욕적인 생각이나 생활을 의식적으로 피하여 도망하는 것입니다.

(4) 온유한 마음은 오래 참고 끝까지 견디는 마음입니다. 인내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승리의 전재 조건입니다. 온유한 사람이 아니면 인내의 결실을 맺을 수 없습니다. 온유한 마음은 인간 본래의 마음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열매로 나타납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갈5:22). 그러므로 온유한 마음은 성령으로 살 때 이루어질수 있습니다. 몸의 행실을 죽이고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생활을 하면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온유한 마음도 이같은 성령을 좇는 생활을 통해서 그 마음속에 맺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 : 온유한 자가 받을 상금으로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땅이란 현세적으로 우리가 밟고 살아가는 이 땅을 가리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받을 만한 아름다운 새 하늘과 새 땅을 말하며 이 땅은 그리스도인의 기업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온유하려면 먼저 온유하신 예수님을 진심으로 내 마음에 영접하고 그 예수의 온유하심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한 생활을 이룰 수 있도록 늘 기도하는 생활이 따라야 합니다.


(38)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복

(마태복음 5 : 6)

예수님은 천국민의 네 번째 복으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복'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의가 없이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의는 천국민의 필수적인 자격 조건입니다. 주님은 이 의를 소유하는 자격에 대하여 '주리고 목마른 자'란 말로 표현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의를 소유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마치 주리고 목마른 자의 심정으로 간절함을 나타낸 말씀입니다. '주리다'고 한 말의 원어는 '현재 심히 배가 고파 굶주린 상태'로 배고픔이 계속되는 상황을 말합니다. 목마르다는 말 역시 현재 계속적으로 기갈을 당하여 애끓게 물을 기다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1. 의란 무엇인가?

의란 하나님께 거룩하다고 인정받는 법적 선언을 의미합니다. 의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율법적 의요, 두 번째는 양심적 의요, 그리고 세 번째는 그리스도의 의입니다.

(1) 율법적 의란 율법에서 얻는 의를 의미합니다. 율법적 의란 율법을 지키는 자가 그 율법을 지키므로 얻을 수 있는 의를 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율법을 지키는 일로 의를 얻을 수 있는 자가 이 세상에 한명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데 그런데 그 율법을 지키는 문제에 있어서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고 전7:20절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롬3:20절에서 '율법으로 의를 얻을 수 있는 사람이란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의를 얻을 수 없었던 이유는 그들은 율법을 지키는 일로 의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믿음으로 얻을 수 있는 하나님의 의를 배격했다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받을 수 있는 첫째요건은 사람이

율법으로는 의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참으로 깨닫는데 있는 것입니다. 율법은 사람을 의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인으로 정죄하는데 있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에서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자기는 오직 죄인이라고 하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2) 다음에 양심적인 의가 있습니다. 이 의는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이 생명을 얻을 수 있는 하나의 조건으로 삼고 있는 것으로 이것을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면 마음의 율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롬2:15). 이같은 마음의 율법인 양심은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만약 사람에게 이 마음의 율법이 존재치 아니한다면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인간의 도덕성은 완전히 무너져 버렸을 것입니다. 인간이 죄로 타락한 후에도 양심은 활동하기 때문에 사회 질서가 유지하며 어느 정도 도덕적 생활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양심으로는 의를 얻을 수 없는 것이 인간은 양심의 지배를 받고 양심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양심의 정죄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롬2:12-16). 우리는 이 율법과 양심에 대하여 알아야 할 것은 율법의 행위나 양심으로는 절대로 하나님의 의를 얻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름은 바로 이런 깨달음에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 앞에 엎드려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라고 고백한 것은 베드로가 자신의 의에 주리고 목마름을 나타낸 말입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고 가슴을 친 세리의 고백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상태의 외침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에게 복을 주시는데 이들에게 '배부르게 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의에 주린자는 의로 배부름을 받아야 축복인 것입니다.


2. 배부름을 주시는 하나님의 의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 분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의는 완전한 의이십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하시는 의는 온전히 거룩한 의이십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이같은 의를 먹고 다시는 주리는 일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의를 준비하시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에게 이 의를 복으로 주십니다.

이 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바로 그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리스도의 의가 나의 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음으로 얻는 의는 율법적인 의나 양심적인 의처럼 하나님 앞에 부족한 의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가 내 의가 되기 때문에 나는 완전한 의의 소유자가 되는 것입니다.


결론 : 배부를 것임이라고 하신 말씀은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한 위로와 만족이 계속되는 상태를 말해 주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우리에게 배부름을 얻을 수 있는 복이 어디 있을 것입니까? 우리는 늘 주리고 목마른 심정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사모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의의 소유자가 되어 만족한 생애를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39) 긍휼히 여기는 자의 복

(마태복음 5 :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복에 대하여 그는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긍휼이란 말은 불쌍히 여긴다, 자비를 베푼다는 뜻입니다. 헬라어의 엘레오스( )란 말이 그런 뜻입니다. 긍휼은 그 발원지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시편25:6편에서 이르시기를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영원 전부터 있었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시45:9절에서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그 지으신 모드 것에 미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그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심으로 죄인들에 대한 그의 놀라운 사랑으로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하심을 받은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이런 긍휼을 베풀어야 하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이 나타내신 긍휼하심과 우리가 베풀어야 할 긍휼

주님은 마 18:23절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긍휼과 우리가 베풀어야 할 긍휼에 대하여 하나의 빚진 자의 비유를 통해서 교훈하셨습니다. 임금 앞에 끌려간 일만 달란트 빚진 자는 바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할 죄인들을 말합니다. 그가 임금에게 빚진 일만달란트는 우리가 갚아야 할 죄 값을 가리킵니다. 일만 달란트란 주인이 탐감해 주지 않으면 평생 갚을 수 없는 돈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임금이 탐감해 주신 것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 것을 비유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우리의 무서운 죄를 용서해 주시는 자비하심으로 나타내셨습니다.

탕감 받은 종은 그 임금의 자비를 본받아 자신도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는 것입니다. 임금의 책망에서 그 같은 일을 찾을 수 있습니다.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고 하셨습니다. 탕감 받은 이 종은 자신에게 빚진 동관 하나에게 100 데나리온의 적은 빚을 갚지 않는다고 관에 고발하여 옥에 가둔 것입니다. 이 소문이 임금에게 들렸을 때 임금은 그 종을 붙잡아 빚을 다 갚도록 옥졸에게 부쳤다고 했습니다.


2. 긍휼히 여김으로 복을 받은 사람들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을 보면 다른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푼 사람들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1) 행10장에 나오는 고넬로란 사람은 베드로가 찾아가 복음을 전함으로 온 가족이 구원받은 사람인데 그가 그 같은 은총을 받은 일에 대하여 천사는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었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것은 이처럼 하나님에게 상달되어 하나님의 긍휼의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2) 욥의 경우를 보면 성경은 욥에 대하여 의로운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의는 그의 생활 가운데서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며 도움을 준 일로 나타나 있습니다(욥29:11-17). 그가 어려운 시험을 이기고 결국은 더욱 큰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이같은 긍휼히 여기는 아름다운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3) 잠31장에는 현숙한 여인상에 대하여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현숙한 여인의 행실을 보면 '그는 간고한 자에게 손을 펴며 궁핍한 자를 위하여 손을 내민다'고 했습니다. 불쌍히 여길 줄 모르는 자는 사람이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인간성을 상실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3. 그리스도인들의 긍휼

성경에서 그리스도인이 감당해야 할 긍휼에 대하여 다음 세 가지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의 긍휼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는 것으로 나타나셨기 때문에 우리도 형제의 죄를 용서해 주는 긍휼을 베풀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 하리이까'는 물음에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찌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죄의 용서는 우리의 생각이나 감정이나 인간적인 자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내게 베푸신 하나님의 긍휼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긍휼은 도움 받을 길이 없는 과부나 고아를 불쌍히 보시는 것으로 나타나며 가난한 자를 돌보시는 것으로 나타나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길 것을 원하시는 것입니다(잠19:17).

(3) 하나님의 긍휼은 원수를 사랑하는 것으로 나타나시기 때문에 우리로 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결론 : 남에게 긍휼을 베푸는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남에게 재물로 긍휼을 베풀어 주었을 때 하나님은 나에게 어려움이 올 때 재물로 갚아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심판대 앞에서 나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심판을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약2:13).


(40) 마음이 청결한 자의 복

(마태복음 5 : 8)

주님은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을 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누구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눈은 마음에 있습니다. 그 눈은 마음이 청결한 자만이 열려서 하나님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마음이란 헬라어로 칼디아( )로 중심, 내부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음은 프뉴마( )라고 하는 심령과는 구분됩니다.

심령이란 사람의 영의 근본적인 부분을 가리키지만 마음이란 사람들의 속 사람의 인격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의 심령은 죄와 허물로 죽어 있습니다(엡2:1). 그러나 모든 사람의 마음은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의 마음이 그 사람의 생각과 인격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거듭나는 것은 마음이 거듭나는 것이 아니라 심령이 거듭나는 것입니다.


1. 마음은 인생의 그릇이다.

청결이란 말은 카다로스( )로 깨끗하다, 순결하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마치 그릇과 같아서 더러울 수도 있고 깨끗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그릇에 대하여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고 했습니다(딤후2:20).

사람의 더러운 마음속에는 시기, 분쟁, 악독, 미움, 거짓이 들어 차 있고 깨끗한 마음속에는 사랑, 이해, 겸손, 화평, 긍휼이 들어차 있는 것입니다. 마음은 사람의 인격의 거울입니다.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이라고 했습니다(잠23:7).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에 지배를 받으며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청결하게 간직한다는 것은 그의 인생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생애를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잠4:23절 말씀을 보면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그에서 남이니라'고 했습니다.


2. 어떤 마음이 청결한 마음인가?

청결한 마음의 거울은 양심입니다. 그러나 이 양심은 우리 인간에게 청결한 생활의 표준은 줄지언정 그런 생활을 이루게 할 능력은 없습니다. 인간은 죄에 팔려 죄의 종이 되었기 때문에 양심대로 살아갈 힘이 없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의 백성들은 양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그 마음을 지배합니다. 죄의 세력에 밀려나고 죄로 인하여 더러워진 양심이 아니라 항상 살아 계셔서 말씀대로 운동력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속에 우리의 인격과 생활을 지배하는 존재로 군림해야 하는 것입니다.

(2) 마음이 청결하려면 그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빛이 들어와 그 마음의 어둠을 물리쳐야 하는 것입니다. 빛이 들어온다는 말은 성령의 임재하심을 말합니다. 성령은 빛으로 우리 가운데 계시기 때문에 우리 마음속에 끊임없이 하나님의 빛을 비치어 주십니다. 이 빛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더러운 죄악된 것들을 내어쫓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3) 마음을 청결하게 하려면 물질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인간의 마음은 두 세력이 그것을 지배하러고 부단히 투쟁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성령께서 우리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게 하시려고 우리의 왕으로 임재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악령은 우리로 하나님을 떠나 생명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물질로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마음이 청결하지 못한 사람은 돈 때문에 그의 생명을 죽이지만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그리스도 때문에 자기 생명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의 마음은 어떻게 청결해 질 수 있는 것입니까? 사람의 마음은 원래가 더러워져 있습니다. 근본적인 방법에 의해 그 마음의 청결함을 얻지 못하면 하나님을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심과 그의 임재하심을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음의 청결은 그리스도의 피로서만이 이룰 수 있습니다. 마음의 청결은 곧 죄의 청결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그리스도의 피가 아니라 다른 것으로 그 마음을 청결하게 하려고 한다면 그 같은 노력은 아무런 결실도 맺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하나님 앞에 회개하게 하는 자에게 그의 죄를 씻어 청결하게 하는 역사를 이루십니다(요일1:9).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청결하게 됩니다.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라고 했습니다(엡5:27). 다음에 우리의 마음은 믿음으로 청결하게 됩니다.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행15:9).


결론 :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본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의 뜻은 호라오( )로 본다, 지각한다, 경험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지각하고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41) 화평케 하는 자의 복

(마태복음 5 : 9)

예수님이 일곱 번째로 말씀하신 복은 화평케 하는 자의 복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하셨습니다. 화평이란 말은 헬라어로 에이레네( )로 평화, 평안, 평강 등을 말합니다. 그리고 화평케 하는 자란 평화를 만드는 자란 뜻입니다. 화평은 분쟁의 반대말입니다.

사랑으로 이해하고 용서함에서 오는 평안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복음의 역사는 어디서나 화평의 결실을 맺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탄의 역사는 인간의 마음에서, 우리들의 가정에서, 오늘의 세계에서 이 화평을 제하려고 부단히 노략하고 있습니다. 계6장에 보면 둘째 인이 개봉 될 때에 붉은 말이 등장하는데 그 탄 자가 허락을 받아 땅에서 화평을 제하고 서로 죽이게 하는 전쟁을 일으킨다고 했습니다.


1. 두 종류의 화평

성경에는 두 종류의 화평에 대하여 말씀해 줍니다. 이 두 가지 화평은 우리들이 다 이루어야 할 화평입니다. 그런데 이 화평을 이루는데는 차례가 있습니다.

(1) 우리가 먼저 이루어야 할 필수적인 화평이 나와 하나님과의 화평입니다. 욥22:21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먼저 하나님과 자신과의 화평이 이루어져야 2차적 화평, 사람과 사람과의 화평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의 화평을 원하시지만 그 길이 막혀 있었습니다. 우리의 죄가 담을 쌓아 화평의 길을 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아들을 우리와 하나님과의 막힌 담을 허시는 화목의 제물로 삼으사 세상에 보내시어 십자가에서 속죄 제물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의 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심으로 죄악의 담을 허시고 화평의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의 용서함을 받고 화목 제물이 되신 그리스도 안에서 화목되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된 것입니다.

(2) 우리가 두 번째로 이루어야 할 화평은 사람과 사람과의 화평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화평의 직분을 주셨습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이룬 사람은 이 화평을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롬12:18절에서 '할 수 있거든 너희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하라'고 했습니다. 고후5:18절에서는 '그리스도로 말 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케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웃에게 나타내야 할 화평의 직분은 첫째로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평할 수 있도록 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일입니다. 이 일은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일로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처럼 빚진 자의 무거운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는 일로 세상이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도록 부단히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다음에는 나와 내 형제간의 화평의 직분입니다.

이 화평의 직분은 어떻게 이루는 것입니까? 첫째 형제의 죄를 용서하는 것으로 가능합니다.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18:35). 두 번째는 '너희 마음에 소금을 두고 화목하라'고 하셨습니다. 화목에는 자기 희생이 따라야 합니다. 소금이 자기 희생을 통해서 짠맛을 내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희생이 없이는 화평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원수에 대해서는 어떤 방법으로 대해야 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오직 너희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라'고 하셨습니다(눅6:35). 우리가 원수를 선대하고 사랑하는 방법에 대하여 롬12:20절에서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고 하셨습니다.


2. 화평을 이룬 결과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면 우리에게는 놀라운 축복이 오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평안이 깃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지 못한 사람에게는 이런 평화가 없습니다.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고 했습니다)(사48:22). 하나님과 화평을 이룬 사람은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가 이루어지는데 원수의 관계에서 아들의 관계로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기업의 후사가 되어 천국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결론 : 화평케 하는 자의 복에 대하여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란 말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하나님의 아들이란 영광스러운 칭호를 받을 것이란 뜻이며 또 하나님의 실질적인 자녀로서의 자격을 갖춘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하나님의 아들이 화평케 하는 일로 말미암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축복은 말할 수 없이 클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이룬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제 이 화평을 들고 나아가 화평케 하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42)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의 복

(마태복음 5 : 10 - 12)

이제 우리는 산상보훈의 최절정에 이르렀습니다. 주님은 팔복 중 마지막 복에 대하여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팔복의 말씀은 그 시작이 심령이 가난한 자가 받을 복으로 천국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팔복을 마무리 짓는 마지막 복에 대해서도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최대 최상의 복은 뭐니뭐니해도 천국입니다. 만약 우리에게 천국의 복이 약속되어 있지 않다면 그리스도인들이야 말로 참으로 비참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1.무엇이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일인가?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어려움도 많이 당하고 혹은 다른 이로부터 핍박을 받는 경우도 있지만 누구나 핍박을 당하거나 당하기를 즐겨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더군다나 핍박을 받는 일을 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받는 핍박에는 놀라운 축복이 약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안다는 일은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크나큰 위로가 되며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아무런 굴곡 없이 그저 평안하게 살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런 생애가 복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리스도인의 최대의 축복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일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핍박을 받는다는 말은 데디오그메노이( )로 그의 생애 중에 핍박이 그치지 않고 계속되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리고 의란 말은 의의 주체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11절에서 의에 대하여 그가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심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핍박을 받는 일이 이처럼 복이 된다는 말씀은 주님을 위해 시련을 당하며 핍박을 당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과 타협치 않고 순교의 길을 걸은 것은 바로 이같은 축복이 약속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2. 왜 그리스도인들은 핍박을 받는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왜 핍박을 받는 것이겠습니까? 그리스도는 세상에 빛으로 오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그 빛을 받은 빛의 자녀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어둠에 속해 있기 때문에 빛보다 어둠을 사랑합니다. 우리는 빛을 따르며 그 빛을 따르는 사람 들이기 때문에 어둠이 우리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1) 의를 따르는 자는 핍박이 따른다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핍박 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5:20). 불의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의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이 핍박을 받는 일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2) 주 안에서 경건하게 살려는 사람들에게는 핍박이 따릅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딤후3:12). 세상을 따라 살아갈 때에는 순탄한 길을 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마음을 정하고 경건한 길을 걸으면 사면에서 핍박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일로 받는 핍박도 세상에는 많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 핍박으로 인하여 신앙 생활에 브레이크가 걸려서는 안 됩니다. 소망을 가지고 의의 길을 가야 복이 있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환난을 당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행14:22). 천국에 들어가기까지는 많은 환난의 관문을 통과해야 하는 것입니다. 핍박을 받는 모양에 대해서 너희를 욕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욕을 먹는 것입니다. 아마 그리스도를 부인하도록 고문을 당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다음에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저주할 것입니다. 사실무근한 일로 모함할 것입니다. 거짓으로 중상할 것입니다. 이런 일을 당하는 일은 일신상 괴로울 것입니다. 견디기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런 일을 만나면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단순한 위로의 말씀이 아닙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하늘에서 너희에게 상이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위해 핍박을 당할 때, 기뻐하는 이유가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천국의 확실한 소유입니다.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다음에 하늘의 상이 크다고 하셨습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을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고 했습니다.


결론 : 사도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복음을 전하는 일로 붙잡혀 채찍질로 매질을 당했을 때, 그들은 '주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났다고 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린 아이같은 신앙에서 일어나 그리스도를 위해 핍박을 받을 때 기뻐하고 주를 위해 고난을 당할 때 즐거워할 줄 아는 장성

한 믿음의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43) 성경에서 말하는 두 가지 축복

(마태복음 5 : 1 - 12)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축복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보이는 축복이 있고 보이지 않는 축복이 있습니다. 보이는 축복을 물질적 축복이라고 하며 보이지 않는 축복을 영적 축복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신약과 구약의 경우에 결부시켜 구약적 축복은 물질적 축복이요 신약적 축복은 영적 축복이라고 흔히들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축복관에 오해와 혼돈을 가져올 수 있는 것입니다.

과연 신약과 구약의 축복을 구별해야 하는 것이냐? 축복의 성경적 개념이 신약에 와서 달라졌느냐는 문제는 우리의 실생활에 중대한 문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과연 구약과 신약에 있어서 축복에 대한 개념을 달리하셨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일은 구약에는 물질적 축복에 관한 말씀이 많은 반면에 신약에는 그런 말씀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며 그런 면에서 이같은 오해가 오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되는 것입니다.


1. 신약적 축복관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인의 구원이 이루어진 사실을 주목적으로 하여 기록된 책입니다. 사죄, 구원, 중생, 부활, 회개, 생명, 천국 등 이 모든 것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받을 수 있는 놀라운 축복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축복은 이 땅에서 우리가 누리는 그 어떤 물질적 축복에 비해 우선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에 와서 그 가치 면에서 언제나 영적 축복이 앞서기 때문에 물질적 축복의 가치가 숨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축복의 원리

우리는 성경에서 우리가 누리는 모든 축복이 어디서 오느냐는 문제에 대해서 그것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현세적인 물질의 축복도 그리고 우리의 생명을 약속하는 영적 축복도 구약이나 신약이나 변함없이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주신다는 사실에 대해 바른 이해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1) 구약의 원리 - 우리가 구약의 경우를 보면 축복장이라고 말하는 신28장에서 밝혀 주시기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에게 현세적인 축복을 주시느냐에 대한 분명한 해답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삼가 듣고 지키는 자,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자들에게 주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 대신 불순종하는 자에게는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치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2) 다음에 신약의 원리를 보겠습니다. 신약에 와서 이같은 하나님의 축복의 원리가 변질된 것이냐? 아닙니다. 먼저 산상보훈에서 하신 말씀을 보면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베푸시는 물질적 축복에 대한 원리를 신약적인 입장에서 밝혀 주신 것입니다.


3. 산상보훈의 축복

예수님이 산상보훈에서 밝히신 축복은 신약시대에만 통하는 특별한 복이 아닙니다. 팔복의 마지막 부분인 하늘의 상에 대하여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곳에서 세상에서 누리는 일반적인 복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천국을 소유할 수 있고 하늘에서 큰상을 받을 수 있는 인간 최대의 축복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축복이 헬라어로는 마카리오스( )로 표현되어 있는데 현세에서 누리는 복인 유다이몬( )과 구별되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하여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축복은 신약이나 구약이나 구별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하나님의 축복은 인간이 하나님을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는데 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받을 수 있는 약속된 축복은 사죄와 영생과 천국의 기업입니다. 다음에 이같은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의 결과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약속된 물질적인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하나님으로부터 참으로 복을 받을 사람들은 그의 생활 태도나 마음의 방향이 물질에 두지 않고 있으며 축복은 그의 생활의 결과에서 온다는 사실입니다.


(44)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마태복음 5 : 13)

산상보훈으로 팔복을 말씀하신 예수님은 우리들 생활의 실천 철학으로 그리스도인들의 사회적 사명을 소금과 빛의 비유를 가지시고 두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한 가지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셨으며 또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소금이 세상에 필요한 이유는 그 색깔에 있는 것도 아니요 그 모양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 존재나 그 형체야 어떠하든 그 맛이 짜다는데 있습니다.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9:50).


1. 세상에 짠맛이 필요한 이유

지금 세상은 죄악으로 날로 부패해져 가고 있습니다. 앞으로 그 부패의 농도는 더욱 심화될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소금은 이같은 세상에 맛을 냄으로 썩음을 방지하고 세상을 새롭게 하는데 그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소금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너희는 세상에 소금이라고 하신 것은 그리스도인을 가리킨 말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다 소금이냐 하면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새로운 생명을 가지고 열매를 맺는 사람만이 소금의 맛을 내고 있는 것입니다. 소금이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그리스도만이 세상의 소금입니다. 그는 소금의 사명을 가지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의 생명을 주시므로 소금으로서의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소금의 새 생명이 우리로 짠맛을 내는 능력이 되어 세상의 소금이 되어 세상의 썩음을 방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소금의 특징

소금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이런 소금의 특징이 썩음을 방지하는 힘이 되기 때문에 소금은 그의 독특한 특징을 구비하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1) 소금은 자신이 썩는 법이 없습니다. 만약 소금이 썩는다면 그 소금은 이미 소금이 아닙니다. 이처럼 세상의 소금이 된 그리스도인들은 절대로 세속에 물들어 자신을 썩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썩지 않기 위해 그리스도의 생명을 풍성히 받아야 합니다. 이런 생명의 공급은 성령을 통해서 주시기 때문에 '너희는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2) 소금은 맛을 냅니다. 만약 소금이 맛을 내지 아니하면 소금으로서의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소금의 짠맛을 내려면 먼저 내 마음에 평강을 가져야합니다. 기쁨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천국 백성의 소망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속에 맛을 낼 수 없는 소금이라면 다른 사람에게 소금의 맛을 전달할 수 없는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신 말씀은 다른 사람의 인생 속에 그 맛을 심어 주라는 뜻입니다. 예수가 없는 인생 속에 예수의 맛을 심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죽어 가는 생명이 눈앞에 있는데도 그 생명에 대하여 소금의 짠맛을 주어 살려내지 못한다면 이미 소금으로서의 가치가 상실된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3) 소금은 썩음을 방지합니다. 소금이 썩음을 방지하지 못한다면 그 소금은 이미 맛 잃은 소금이 된 것입니다. 세상엔 죄악이 관용합니다. 그 죄악은 내 주변에서 끊임없이 사망의 냄새를 풍기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그런 곳에 소금을 쳐서 썩음을 방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주변에 있는 이 죄악의 썩음에 대하여 소금의 구실을 못한다면 이미 맛 잃은 소금이 되어 버린 우리에게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고 책망하실 것입니다.

(4) 소금은 자신을 희생합니다. 소금의 짠맛은 소금 자신의 희생에서 나옵니다. 소금이 스스로 녹아서 자신의 생명을 다른 곳에 쏟지 않으면 짠맛을 전달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자신의 짠맛을 내실 수 있었던 것입니까?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하신 것입니다(빌2:2-8).

이처럼 엄청나고 놀라운 자기 희생을 치루신 결과 모든 죄인들이 죄를 소멸하며 그리스도의 의를 주시며 천국을 기업으로 주실 수 있는 소금이 되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소금이 자신을 희생한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소금이 녹는다는 말은 무엇을 뜻합니까? 사랑을 말합니다. 겸손을 말합니다. 도움을 말합니다. 위로를 말합니다. 경건을 말합니다.

이런 것들로 그리스도의 냄새를 주변에 풍기는 것입니다. 이같은 냄새는 죄로 썩어져 가는 이 세상에 능히 세상의 소금의 구실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소금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소금으로 세상에 짠맛을 내야 하지만 그 소금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고 하신 주님의 기도는 우리의 신분이 결코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시간에 우리를 향하여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소금으로서의 사명을 이루시는 성도가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45) 너희는 세상의 빛이니

(마태복음 5 : 14 - 16)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사명 가운데 소금과 빛으로 비유하신 말씀을 들었습니다. 소금이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공급해 주므로 죄악으로 썩어 가는 우리 주변에서 그 썩음을 막는 생명의 새 힘이란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 생명의 새 힘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 소금으로 오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알았으며 우리는 그것을 받아 소금의 구실을 할 사명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러면 빛이란 무엇입니까? 어둔 세상을 밝게 비춰주는 생명의 힘입니다. 이 빛 역시 소금처럼 이 세상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며 하나님이 바로 그 빛이신 것입니다.


1. 빛의 근원

우리는 빛의 근원부터 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고 하셨습니다(요일1:5). 이 말씀은 그 빛 자체가 하나님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빛은 하나님의 공유적 속성(하나님만이 가지고 계시는 성품)을 나태내는 말입니다. 빛은 하나님이 소유하시고 계시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빛의 소유자는 오직 하나님뿐이십니다. 그리고 이 빛을 비췰 수 있는 분도 그 빛의 소유자 되시는 하나님뿐이십니다.

창1:3절에는 빛의 창조 역사가 나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했습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상태에서 하나님은 빛이 있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빛이 유형의 빛이 아니요 세상은 깨닫지도 못하고 볼 수도 없는 하나님의 빛이심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이같은 사실은 고후4:6절에서 밝혀 줍니다.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엿새 동안의 창조 사역에서 먼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는 그의 빛을 세상에 비취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으셨던 이 빛 아래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어두움에서 하나님의 창조 역사가 이루어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빛이 있으라 하신 이 하나님의 말씀을 빛을 만드신 일로 해석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소유하신 그 빛을 세상에 들어내 비취심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빛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그 빛을 세상에 비취신 일을 창조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빛은 인간의 죄악으로 어두어져 세상이 저주받게 되었고 어두움에 빠진 세상에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빛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하신 말씀대로 죄로 어두어진 세상은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깨닫지 못하여 그를 배척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이 같은 그리스도의 빛을 받은 사람들을 말합니다.


2. 빛의 역할

빛이 하는 일이란 자신의 빛으로 주변의 어두움을 물리치는데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빛이란 말씀은 우리에게 주신 그리스도의 빛으로 세상의 어두움을 물리치고 밝게 비취게 하는 일입니다.

(1) 빛은 어두움을 물리칩니다. 어떤 빛이든 빛이란 존재는 어둠에 지는 법이 없습니다. 내 어두운 마음속에 빛이 들어오면 죄악의 어두움은 물러가고 새로운 빛으로 밝혀지는 것입니다. 이 빛으로 인하여 소망이 생기고 천국을 바라보게 되고 마음에 평안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2) 빛은 길을 비취어 줍니다. 이 빛을 받은 사람만이 길을 찾게 되고 진리를 찾게 되고 생명을 찾게 됩니다. 세상 종교에는 이 빛이 없습니다. 그곳엔 빛되신 예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빛되신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빛으로 오신 예수님만이 인생의 참 빛이 되십니다.

(3) 빛은 사면을 밝혀 줍니다.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둔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빛은 감추는 것이 아니라 주위를 밝게 비취어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디가든 어둠을 물리쳐 주위에 빛을 발산해야 하는 것입니다.

(4) 빛은 언제나 따듯합니다. 빛의 근원은 불입니다. 불은 우리에게 따듯함을 줍니다. 이것은 사랑을 말합니다. 사랑이 없는 빛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빛이 아닙니다. 죄를 용서해 주는 사랑, 허물을 덮어주는 사랑, 남을 불쌍히 여기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이같이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착한 행실로 빛의 사명을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결론 : 우리가 빛을 비취려면 등과 기름이 있어야 합니다. 등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기름이란 성령을 말합니다. 말씀과 성령으로 인도하심을 받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세상에 착한 행실로 나타나 이 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입니다.


(46) 율법을 완전케 하러 오신 예수

(마태복음 5 : 17 - 20)

율법과 주님과의 관계는 대단히 중요한 연관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잘못 판단하면 그리스도인은 마치 율법이 없는 자로 오해받기 쉬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율법이 없는 무 율법주의자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인은 율법주의자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완전케 하려고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율법과의 관계를 나타내신 것으로 우리는 이 말씀을 이해해야만 그리스도인과 율법과의 바른 관계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1. 율법은 없어질 수 없는 하나님의 법이다.

율법은 하나님의 계명으로 언제까지나 존재합니다. 율법은 크게 두 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의식적 율법입니다. 이 율법은 예수님 자신을 예언하셨던 것으로 그가 친히 성취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폐해진 것이 아니라 완성하신 것입니다. 하나는 도덕적 율법입니다. 이 율법은 십계명으로 우리 주님이 친히 준행하여 그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심으로 우리를 율법의 정죄나 저주에서 해방시키셨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이요 인간이 행해야 할 의의 표준으로 인간은 누구나 이 율법을 준행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율법의 표준으로 그의 심판을 행하시기 때0문-에 누구나 이 율법의 표준에서 예외가 될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이 율법의 표준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은 모두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는 율법을 통해서 우리가 죄인이란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값이 하나님의 심판이란 사실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 율법의 요구를 완전히 이루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율법의 요구를 이루신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의의 표준을 삼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의 표준이 둘입니다. 하나는 율법이요 다른 하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를 얻으려면 율법으로냐, 아니면 그리스도로냐 이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하신 말씀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 믿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그리스도의 의가 넘겨져 의로워지며 생명을 얻을 수 있지만 만약 사람이 율법으로 의를 얻고자 하면 그 율법이 우리의 죄를 오히려 정죄하여 하나님의 심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2.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님

율법을 완전케 하려 함이라고 하신 말씀은 율법의 요구를 이루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아담 이후, 이 땅위에 태어난 사람 중에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으신 분은 예수 한 분뿐입니다.

(1) 예수는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그 분은 아담의 후손으로 세상에 태어나신 분이 아니시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신 분으로 둘째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2) 그 분은 율법을 다 이루셨습니다. 예수는 율법을 온전히 이루셨으므로 율법이 절대로 그 분을 정죄할 수 없는 것입니다.

(3) 그리스도는 우리의 모든 죄 값을 다 갚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순전히 우리의 죄 값을 지불하시기 위한 속죄의 제물로 죽으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율법을 이루셨다는 말에는 몇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그는 율법의 저주를 받으사 인류에게 내리시는 율법의 저주를 소멸하셨기 때문에 율법의 마침이 되신 것입니다. 예수 이후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율법의 저주나 정죄가 적용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완전히 이루신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의를 주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죄의 종이 된 우리가 율법을 이루지 못할 것임을 아시고 율법 대신 그 율법을 이루신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 의의 표준으로 삼으셨으니 이 일이야 말로 하나님의 은혜요 무한하신 사랑이신 것입니다. 그러나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하셨습니다.

다 이룬다는 말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으로 율법은 살아 있을 것이라고 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예수님이 이루신 율법으로 말미암아 그를 믿는 자에게 주시는 온전한 의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미 율법적 의를 이룬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의는 율법을 이루신 그리스도의 의이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므로 얻는 의보다 더 완전한 의인 것입니다.


결론 :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율법에서 의를 이루려고 율법을 지키는 생활이 아닙니다. 이미 율법의 의를 이룬 사람으로 율법을 순종하는 생활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혹 우리가 율법을 범해도 우리는 율법의 정죄함을 받지 아니합니다. 율법을 온전히 이룬 그리스도의 의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의문에 기록된 율법이 우리를 정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 말씀을 따르는 생활을 통해서 많은 열매를 맺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는 생활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인 것입니다.


(47) 은혜의 세계와 율법의 세계

(마태복음 5 : 17 - 20)

예수님이 오신 후, 이 세상은 빛과 어두움으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빛은 은혜의 세계요, 어두움은 율법의 세계입니다. 은혜는 의를 공급하고 율법은 죄를 공급해 주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이 세상 인류들의 죄를 다스려 온 하나님의 법입니다. 그런데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를 주시는 하나님의 법입니다.

주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모두 율법의 정죄 아래 있었기 때문에 율법 시대, 율법 세계에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율법은 첫 사람 아담의 자손들을 지배하는 육체의 법입니다. 그러므로 이 율법은 신약 시대나 구약 시대의 관계없이 아담의 육체적인 족보에 따라 태어나는 모든 인류를 지배하며 정죄해 온 것입니다.


1. 마지막 아담, 둘째 사람

예수님은 마지막 아담으로 오신 분이시며 둘째 사람으로 오신 분입니다. 마지막 아담이란 말은 율법의 마침이 되었다고 하는 사실에 있습니다. 둘째 사람이란 말은 그가 은혜를 주시는 인류의 시조가 되셨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첫 사람 아담은 산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고전15:45).

산영이 된 첫 사람 아담은 죄로 인하여 육체가 되므로 율법의 지배를 받게 되었지만 살려주는 영이신 마지막 아담 예수는 죄로 죽은 인간을 살려주는 생명의 공급자로 오셨습니다(고전15:47). 아담은 죽을 수 있는 땅의 생명을 가지고 있었지만 예수는 죽을 수 없는 하늘의 생명을 소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율법의 세계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없어지지 아니한다는 말씀은 모든 죄인들은 언제까지나 율법의 지배와 그 정죄를 받으며 살아가야 할 것을 의미합니다. 율법은 그 법을 이루어 정죄를 받지 못할 사람들에게는 그 권능이 상실되어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그 권능이 그대로 살아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율법을 이룰 수 없는 것은 인간은 죄인으로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그 품성이 더러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죄에 팔린 몸이 되었기 때문에 율법의 정죄를 받을지언정 그 율법에서 자유로워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고 탄식했습니다(롬7:14).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이 그 율법으로 의를 이룰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이유가 의를 주시려는데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죄를 정죄하려는데 목적을 두셨기 때문입니다.


3. 은혜의 세계

은혜의 세계는 율법의 정죄나 저주가 절대로 미칠 수 없는 새로운 세계입니다. 이 세계는 그리스도 안에서만이 이루어지는데 이 세계에는 의와 생명만이 넘칩니다. 이 세계는 둘째 사람으로 오신 예수의 자손들만이 합당한 백성들로 성령의 법이 주관하는 세계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희를 해방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롬8:1-2).

은혜의 세계의 법은 율법이 아니라 '생명의 성령의 법'입니다. 이 법은 율법과는 달리 사람에게 사망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와 생명을 주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를 받고 생명을 받은 것은 우리가 율법의 세계에 속하지 아니하고 새로운 은혜의 세계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의를 충만하게 소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의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의이기 때문에 완전하고 부족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이같은 의는 실질적인 의인 것이 아니라 법적 의인 것입니다. 법적으로 하자가 없는 의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의를 받은 우리도 실질적으로는 의로운 사람들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활에서 이 의를 이루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 의는 속죄의 의이거나 구원을 얻기 위한 의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야 하는 생활상의 의인 것입니다. 신약 성경에는 이런 의를 이루는 표준을 새로운 낱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요13:34절에서 '새 계명'이라고 했습니다. 이 계명은 곧 사랑입니다.


결론 : 성경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이루어야 할 의에 대하여 혹은 사랑의 열매, 의의 열매, 빛의 열매, 성령의 열매 등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의는 성령께서 이루어주십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고 했습니다(빌1:6). 지금 그리스도 안에서 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을 떠난 새로운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은 은혜를 굳게 잡고 믿음에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의를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48)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

(마태복음 5 : 20)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은 율법적인 의를 이루려고 힘쓰는 사람들입니다. 율법으로 의를 얻으려고 율법을 지키려는 사람들은 필경 율법으로 의를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율법을 폐하려 오신 분이 아니라 완전케 하려고 오신 분이시므로 율법을 완전히 지키지 않고서는 율법적인 의를 얻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이곳에서 바리새인 보다 나은 의를 말씀하신 것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의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 의가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하신 말씀은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이 가지고 있는 의를 가지고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면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의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1.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의 의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은 율법 조문에 의한 철저한 율법적인 생활을 해 왔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은 그 같은 율법적인 의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면 이들은 왜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없었습니까? 첫째로는 그들은 하나님이 자기들에게 율법을 주신 참 뜻을 알 수 없었다는데 있습니다. '그런즉 율법이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고 했습니다(갈3:19). 우리 인간들이 죄를 범하기 때문에 그 죄 위에 더해 주신 것이 율법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자기가 범한 죄를 깨닫게 하려고 더하여 주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했으므로 율법을 지키므로 의에 이를 줄 알고 율법을 지키는 일에 열심을 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열심이 결국 외식으로 흘러 주님의 책망과 저주를 받기에 이른 것입니다.

원래가 율법의 직무는 의를 주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율법을 범한 죄인을 정죄하므로 그 죄를 보여 주시려는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은 그런 율법으로 의를 얻으려고 했으니 천국은 고사하고 정죄를 받기에 이른 것입니다. 율법도 지킬 수 없으며 또 외식하는 그들의 행위로는 천국은커녕 하나님의 저주에 이를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연합니다.


2.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이라고 하신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이 의는 율법을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보다 더 잘 지킴으로 얻을 수 있는 의를 가리킨 것이 아닙니다. 이 의는 믿음으로 얻을 수 있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의란 그리스도의 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 안에는 다음 두 가지 뜻이 들어 있습니다.

(1)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려면 의를 소유해야 하는데 그 의가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이 자랑하는 의가 아님을 밝히신 것입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고 했습니다(갈2:16).

천국에는 완전한 의의 소유자가 아니면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으로 의를 얻으려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경계하고 믿음으로 의를 얻어야 한다는 사실을 이 말씀을 통해서 강조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율법적인 의를 추구하므로 의를 얻고자 하는 잘못된 태도를 버리고 그리스도의 의로 의로운 자가 되었고 그 의로 구원을 얻었으며 그 의를 가지고 천국에 간다고 하는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의를 믿고 의뢰해야 하는 것입니다.

(2)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새로운 순종의 생활을 하되 결코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처럼 외식하는 자세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로 그리스도의 의를 주시고 구원을 주신 것은 우리들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의의 열매를 맺게 하시려는 뜻이 계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우리들로 하나님을 향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이 열매야말로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의 외식적인 의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의의 열매인 것입니다.


결론 :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의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의입니다. 율법에서 나온 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믿음으로 물려받은 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입니다. 이 의는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완전한 의이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천국에 들어가는데 필요한 다른 추가적인 의가 필요치 않습니다. 주님은 너희는 이 의만을 끝까지 견고히 잡

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 의를 가진 자의 생활을 하나님을 향하여 열매를 맺는데 그 열매야말로 율법을 지키는 자들의 외식적인 의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릴 수 있는 의의 열매인 것입니다.


(49) 그리스도인의 살인죄

(마태복음 5 : 21 - 26)

우리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의는 율법적 의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란 사실을 알았습니다. 우리가 가진 의는 온전히 예수님의 의로 우리는 그를 믿을 때 그 의의 소유자가 되어 아무 공로없이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처럼 그리스도의 의로써 구원을 얻었으니 우리는 범죄해도 상관이 없을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제기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죄 가운데 살아갈 사람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의를 이루는 생활을 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런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맺는 의는 영생이나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갖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의를 가진 자가 가져야 할 그리스도 안에서의 의인 것입니다. 이 의를 한마디로 말하면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사랑의 법을 실천해야 할 사람들이며 이곳에서 부수적으로 이 사랑의 법을 설명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1. 그리스도의 의와 그리스도인의 의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와 그리스도인의 의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그리스도인의 의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의란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아 가는 열매인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로 구원을 얻고 영생을 얻고 천국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우리의 생활에 이제 더 이상 의가 필요 없게 되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롬7:4). 이 열매가 그리스도의 생활에 나타내야 할 의인 것입니다.


2. 살인죄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율법

바리새인들은 율법에서 살인죄에 대한 의에 대하여 생각하기를 외면으로 나타나는 행위만을 표준으로 삼았습니다(신16:18-20). 이 율법 조문대로 그들은 살인하여 그들의 손에 사람을 죽인 피가 묻지 아니하면 살인죄를 범치 아니한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계명을 우리에게 주셨을 때는 그 참 뜻이 사람들의 마음의 살인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살인하지 말라고 하셨을 때, 그 마음속에 살 인의 악의를 품지 말아야 할 것을 아울러 명령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살인의 동기가 되는 요소를 품고 있고 그것을 버리지 못하면 그는 살인죄를 범하게 될 것입니다. 설령 실제적으로 살인죄에까지는 미치지 않았어도 살인의 악의를 품고 있는 이상,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는 살인죄를 범한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1)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노한다는 말은 마음에서 불같이 일어나는 분노를 말합니다. 이런 노는 능히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범죄인 것입니다. 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 노를 격동한 헤롯왕이 어떤 죄를 범하게 된 것입니까? 헤롯은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두 살 아래의 사내아이를 다 죽였습니다. 그러므로 엡4:25절에서는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했습니다.

(2) 형제에게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라가란 말은 '형편없고 쓸모 없는 놈'이란 뜻을 가진 낱말입니다. 이런 욕설은 다른 사람의 인격을 무시하는 욕설입니다. 공회에 잡힌다는 말은 종교적 최고 재판기관인 산헤드린 공회를 말하며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을 상징한 표현입니다.

(3)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미련한 놈이란 말은 지금 우리가 우리생활 중에 사용하는 단순한 욕설이 아닙니다. '사람이 영적으로 우둔하여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무시하는 자'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욕설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아주 치욕적인 모욕이요 저주인 것입니다. 이처럼 미련한 놈이란 욕은 한 사람의 생명을 하나님과 단절시켜 그를 정죄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 같은 자의 죄는 지옥의 저주를 면치 못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형제들에 대하여 미워하는 일. 판단하는 일, 정죄하는 일 등은 자신의 생명을 죽이는 일이기 때문에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향하여 주님은 사화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화란 회해하는 일로 서로 평화를 유지하는 일입니다. 주님은 사화의 방법을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원망들을 만한 일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사화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결론 :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행위보다 그 마음입니다. 그리스도의 율법은 마음에 새겨져 있어야 합니다. 이같은 마음은 성령이 임재한 사람에게 존재합니다. 사랑의 실천 방법으로 형제와 화목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마음에서 형제에 대한 미움과 노여움을 풀고 사랑으로 피차에 용서하므로 그리스도인의 율법을 이루는 성도가 되어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생활을 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50) 그리스도인과 간음죄

(마태복음 5 : 27 - 32)

율법에서 가장 엄하게 다스리는 죄가 첫째는 살인죄요 다음이 간음죄입니다. 율법을 잘 지키고 있다고 자부하는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은 율법에 기록된 대로 육체적으로 간음한 사실이 없으면 이 죄에 해당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내에게 이혼 증서를 써 주고 헤어지면 다른 여자를 아내로 맞아도 하나님 앞에 죄가 안 되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간음을 육체에만 국한시킨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속에 두셨습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는 간음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필요합니다. 성경에는 간음죄에 대하여 육체적, 정신적, 영적 간음 등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1. 육체적 간음죄

간음죄는 유독히 인간들에게만 있습니다. 그 이유는 남녀의 결합은 한 몸을 이루는 일인데 그 한 몸이란 부부간의 성적 결합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간음이란 이런 한 몸의 관계를 깨는 일이기 때문에 한 가정의 불행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적 타락은 인간의 모든 도덕적 타락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간음이란 바로 성적 타락의 시발점이 되는 심각한 사건인 것입니다.

인간만이 신성한 가정을 이루고 건전한 사회를 건설하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존속하여 왔다는 것은 성적 도덕을 지켜 왔다고 하는 이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입니다. 이것을 파괴하는 것이 간음인 것입니다. 성적 타락은 이 사회를 소돔과 고모라를 이루게 하고 곧 하나님의 심판을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간음하는 자가 받는 무서운 형벌이 잠6:32절 이하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부녀와 간음하는 자는 무지한 자라 이것을 행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망하게 하며 상함과 능욕을 받고 부끄러움을 씻을 수 없게 되나니 그 남편이 투기하므로 분노하여 원수를 갚는 날에 용서하지 아니하고 아무 벌금도 돌아보지 아니하며 많은 선물을 줄지라도 듣지 아니하리라.' 간음자는 자기 영혼을 죽이게 됩니다. 그리고 세상에서도 한없는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2. 정신적 간음죄

간음은 육체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간음을 마음에다 결부시키셨습니다. 28절에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 대로 해석한다면 남자 중에 간음죄에 해당되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으로 짐작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한 정확한 판단을 위하여 약간의 원어의 풀이가 필요합니다.

보고란 말은 브레폰( )으로 이 말은 현재 분사로 계속적으로 음욕을 품고 바라보는 상태를 말합니다. 아마 이런 과정을 통해서 간음의 수순으로 옮겨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음욕을 품는다는 말은 에피두메오( )로 욕구한다, 동경한다, 욕심을 품는다는 의미로 한 여자를 계속적으로 바라보고 가장 강한 욕망을 가지고 그 마음에 간음의 결단을 내릴 때 해당되는 말입니다. 간음은 이런 사람에 의해 저질러지는 것입니다.

간음죄는 이혼에서 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이혼 증서를 써 주고 아내를 내버리는 일에 대하여 그들의 행위는 하나님 앞에 간음죄를 짓게 하는 것이라고 정죄하셨습니다. 주님은 자기 아내를 버릴 수 있는 조건을 한가지로 제한하셨는데 그것이 간음한 연고입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인들이 지켜야 할 이혼의 도덕율이 분명해졌습니다. 아내가 음행한 연고 없이는 그 아내를 버릴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3. 영적 간음죄

다음에 영적 간음죄가 있습니다. 부부간의 결합은 하나님과 성도들의 결합과 동일한 신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간음이 부부간의 결합에 금이 가서 파탄이 오는 것처럼 영적 간음은 하나님과 성도간의 결합에 금이 가고 급기야는 파탄을 초래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영적 간음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일입니다. 우상 앞에 경배하는 일도 간음죄가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풍속을 따라 미신적인 관습을 따르거나 점을 치거나 하는 행위 등은 영적 간음죄에 속합니다.

그리고 돈을 사랑하는 일이 우상 숭배하는 일이며 세상과 짝하는 일이 세상과 간음하는 일이라고 경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류의 종말에 등장하는 짐승(적그리스도)은 자신을 신적 존재로 내세워 신적 경배를 강요시키며 자신의 우상을 만들어 그 우상을 경배하게 하므로 짐승의 표를 받게 한다고 했습니다. 인간의 범죄는 마음에서 생산되고 다음에 눈과 손으로 범죄하게 되는 것입니다. 애굽에 팔려간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이긴 것은 요셉이 하나님이 이 모든 일을 감찰하신다고 하는 신앙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는 '내가 하나님 앞에서 이 큰 악을 행할 수 없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결론 : 음란죄, 간음죄는 모든 죄 가운데 가장 유혹이 많고 무서운 죄입니다. 우리는 부부 생활을 원만하게 하여 사탄으로 오는 성적 유혹의 틈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여 마음으로부터 음란의 유혹을 쫓아내어 깨끗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51) 그리스도인과 맹세

(마태복음 5 : 33 - 37)

예수님은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이 자주 사용하는 맹세에 대하여 교훈하십니다. 주님은 레19:12절에 나오는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하므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과 민30:2절 말씀 '사람이 여호와께 서원하였거나 마음을 제어하기로 서약하였거든 파약하지 말고 그 입에서 나온 대로 다 행할 것이니라'고 하신 말씀에 대한 바른 해석을 내리시기 위하여 이 말씀을 들려주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맹세하지 말라고 하신 그 말씀의 진정한 뜻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법정에서 하는 선서와 같은 맹세를 가리킨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결백을 주장할 때 자신에게 유리하게 하려고 아무 것이나 맹세하는 일로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에 대한 경종으로 주신 것입니다.


1. 왜 맹세하지 말라고 하셨나?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절대로 맹세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왜 맹세하지 말라고 하셨느냐? 인간은 항상 거짓되기 때문입니다. 죄의 지배를 받고 살아가는 죄의 종들이기 때문에 맹세를 지킬 수 없을 뿐 아니라 자기 파멸의 올무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1) 맹세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일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일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맹세하는 것을 보면 자신들의 어려운 처지를 벗기 위한 방편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개입시켜 맹세하는 것입니다. 이같은 일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호를 망령되이 일컫는 죄가 아닐 수 없습니다.

(2) 맹세는 다툼의 최종적인 판결입니다. 그러므로 맹세는 최종적인 최선의 선이며 진실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지혜나 판단은 온전한 것이 못됩니다. 진실한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 거짓으로 판명될 때가 많은 것입니다. 전장에 나가면서 하나님께 서원한 입다의 맹세는 잘못된 맹세였습니다.

이기고 돌아올 때 누구든지 자기 집 문에서 자기를 영접하는 그를 여호와께 번제로 드릴 것이라고 맹세한 것입니다

(삿11:30). 그러나 그가 전쟁에 이기고 돌아 왔을 때 자기 외동딸이 제일 먼저 자기를 맞이한 것입니다. 입다가 전쟁에서 원수를 이긴 것은 그의 맹세 때문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승리케 하신 것입니다. 입다는 자기가 한 맹세로 인하여 낭패를 당한 것입니다.

(3) 인생은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맹세를 쉽게 저버릴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그릇인지 안다면 함부로 맹세하는 어리석은 일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잠시 잠깐 후면 주님을 배신할 처지에 있었으면서도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고 맹세한 것입니다(마26:33). 그러나 그는 그 다음날 가야바의 뜰에서 연약한 계집종 앞에서 그것도 예수님이 바라보시는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것입니다. 때에 따라 쉽게 저버릴 수 있는 일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일은 가장 가증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4) 모든 일의 결국은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그것을 인간이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사람 앞에서 맹세하는 일은 악한 일입니다. 사람은 그 앞날에 일어날 일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모릅니다. 어쩌면 자신이 한 맹세로 인하여 돌이킬 수 없는 정죄에 빠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헤롯이 헤로디아의 딸에게 '무엇이든지 달라는 대로 주겠다'는 맹세로 인하여 후회했으나 할 수 없이 세례 요한의 머리를 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2. 어떤 경우에 맹세할 수 있는가?

사람에게 맹세하는 경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가야바의 뜰에서 맹세하라는 말에 이처럼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고 했을 때,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법정이나 또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인하여 죽느냐 사느냐는 생명의 위협 앞에 처했을 때, 재판관이나 혹은 핍박자들 앞에서 주의 이름을 시인하는 일에 맹세하는 일에 주저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고 하셨습니다(마10:32).


결론 :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오직 진실입니다. 옳은 일은 옳다, 그른 일은 아니다고 하면 되는 것입니다. 거짓이 없는 진실이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보화입니다. 우리의 생활에서 쓸데없이 맹세하는 일이 사라져야 하겠습니다. 거짓이 많은 사람일수록 내가 맹세할 수 있다는 말을 서슴없이 합니다. 내 사정은 분명 하나님이 아실 것이

란 말도 잘 합니다.

우리는 어떤 일에도 하나님의 이름과 결부시키는 일로 자신의 결백을 내세우려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할 일은 맹세인 것이 아니라 옳으면 옳다 그르면 아니다는 대답으로 부끄러움이 없는 양심의 진실을 밝히는 일입니다. 우리는 아무 일에나 함부로 맹세하는 일로 스스로 올무에 빠질 것이 아니라 깨끗한 양심과 바른 판단으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52) 그리스도인의 사랑

(마태복음 5 : 38 - 48)

우리의 생활 주변에는 우리들과 등을 지고 살아가는 사람들, 다툼과 싸움으로 미워하고 시기하고 지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원수란 말은 엑드로스( )로 서로 미워하고 증오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한 가정에서 한 사회에서 서로 미워하는 사람들끼리 어떻게 교제하며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구약에 명시된 율법에는 원수에 대하여 서로간 원수를 갚는 것을 허락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에서 서로간 싸우다가 피해를 볼 경우, 그 상대방에게 어떻게 해야 할 일에 대하여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데운 것은 데움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하므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으라'고 하셨습니다(출21:23-25). 왜 구약에서는 이처럼 원수에 대한 가혹한 보응을 법적으로 허락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율법은 죄에 대한 심판임으로 그 어떤 악이라도 자기가 행한 대가 만치 보응을 받아야 한다는데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1. 보복에 대한 주님의 두 가지 교훈

그러면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된 그리스도인들에게 원수들에 대하여 보복을 인정하고 원수를 미워하라고 하신 하나님께서 신약에서는 왜 사랑하라고 하시는가?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구약의 율법에서는 죄를 정죄하는데 목적이 있었지만 신약에서는 그 죄를 용서해 주므로 생명을 얻게 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심판에는 언제나 사랑 대신에 보응이 있고 용서 대신에 정죄가 있을 뿐입니다.

그리스도를 떠난 모든 인류는 장차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이 같은 율법적인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용서에는 사랑이 있어야 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정죄하지 말고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주라는 주님의 명령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갚는 보복을 하는 것이 아니라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의 두 가지 면

사랑에는 두 가지 자세가 있습니다. 하나는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원수를 갚지 말라는 소극적 방법입니다. 그 이유는 악한 자를 대적하는 일은 악을 이기는 최선의 방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롬 12:36). 악을 이기는 방법은 악이 아니라 선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원수 갚는 일이 하나님께 있다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하였으되 원수 갚은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원수를 대적하지 않는 몇 가지 방법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1)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왼편, 카이텐알렌( )은 '다른 것까지도'란 의미가 됩니다. 다른 한쪽까지 희생하므로 화평이 이루어질 수 있다면 그 희생은 고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희생은 진리와 화평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상대편의 거짓 계교에 넘어가 불의 앞에 굴종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2)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속옷은 값이 싼 반면에 겉옷은 값이 비쌉니다.

화해하거나 악한 자로 더불어 싸우지 않기 위해서는 값비싼 희생이라도 치루라는 말씀입니다. 탐심 때문에 다툼이 일어날 때 어느 편에선가 한쪽이 포기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롯과의 자리다툼에서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고 말하고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고 롯과 화해했습니다.

(3)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십리를 가라고 하셨습니다. 오리란 1478.5미터를 가리킵니다. 너그러운 마음은 상대펀의 마음을 진정시키고 어려운 돌발적인 사태라도 능히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4) 구하는 자에게 주고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화평을 위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렇게 해야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만약 이런 원칙을 우리 일상생활 전반에 걸쳐서 행한다면 가정 생활에 파탄을 초래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그런데 45절에서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영접하므로 이미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를 가졌지만 우리가 우리의 생활 가운데서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하면 더욱 하나님을 아버지로 가까이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아버지처럼 모든 사람에게 은혜로우며 사랑을 베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결론 :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자비로우신 분입니다. 나에게 자비하심 같이 내 원수들에게도 자비하십니다. 나를 사랑하심 같이 나의 대적도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에게 하나님처럼 자비를 베풀고 사랑을 나타낼 때, 실질적인 하나님의 아들로써 하나님이 기뻐하시며 하나님께 더욱 가까운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 강해


(53) 그리스도인의 구제 (마태복음 6 : 1절∼4절)

(54) 감찰하시는 하나님 (마태복음 6 : 3절∼4절)

(55) 그리스도인의 기도 (마태복음 6 : 5절∼8절)

(56) 주기도문의 삼대 줄거리 (마태복음 6 : 9절∼13절)

(57)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마태복음 6 : 9절)

(58) 나라이 임하옵시며 (마태복음 6 : 10절)

(59)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태복음 6 : 10절)

(60)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마태복음 6 : 11절)

(61)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태복음 6 : 12)

(62) 시험에 들게 마옵시고(마태복음 6 : 13)

(63) 그리스도인의 금식 기도(마태복음 6 : 16 - 18)

(64) 그리스도인의 재산 관리(마태복음 6 : 19 - 21)

(65)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하는 이유(마태복음 6 : 22 - 24)

(66) 그리스도인의 염려(마태복음 6 : 25 - 32)

(67) 그리스도인이 먼저 구할 것(마태복음 6 : 33 - 34)


(53) 그리스도인의 구제

(마태복음 6 : 1 - 4)

예수님은 산상보훈에서 그리스도인이 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바리새인들의 율법적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맺어야 할 사랑의 법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산상보훈은 5장, 6장, 7장에 걸쳐서 우리의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그의 백성들이 마땅히 행해야 할 바를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6장에서는 주로 구제와 기도와 금식과 재산 관리와 의식주 생활에 관한 교훈의 말씀이 선포되어 있습니다.


1. 구제에 대한 성경적 교훈

하나님은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일, 도와주는 일, 가난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일에 대하여 대단히 기뻐하십니다. 다만 이런 일에 그 목적이 뚜렷하기를 원합니다. 자신의 명예심이나 사람의 칭찬이나 인정을 받으려는 목적으로 한다면 이미 그것으로 보상을 받은 것이기 때문에 아쉬워하십니다. 하늘의 상급이나 세상에서 하나님이 갚아 주실 상급이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한 일의 목적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사실에 두는 일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제는 하나님이 갚아 주십니다.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 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 지리라'고 하셨습니다(잠11:25). 그러면 구제하는 자는 왜 윤택하고 풍족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까? 이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고 하셨습니다(잠19:17).

하나님은 우리에게 빌리신 돈에 대하여 반드시 갚아 주시는 분이시며 그것을 갚되 30배로, 60배로, 100배로 갚으시는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예수님도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적도 가까이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눅12:33).


2. 구제의 성경적 방법

구제란 축복의 언약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구제하는 일이 하나의 생활화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구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1) 하나님의 금하신 방법이 있습니다.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1절에서'보이려고'라고 한 말씀은 과장해서 꾸미려는 의도적 행동을 말합니다. 나팔을 불지 말라고 하신 것은 자기 선행에 대하여 자기 입으로 선전하는 일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바리새인들에게 '외식하는 자'라는 책망을 하셨습니다. '외식하는 자'란 배우 또는 연출자란 의미로 해석되며 위선적인 행동을 한다, 가면을 쓴다는 뜻으로 사용하는 말입니다.

구제는 가난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진실한 마음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려는 신앙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칭찬을 받으려고 한다면 '그들은 이미 상을 받았느니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대로 헛된 일에 그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이 권면하시는 방법이 있습니다.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란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신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냐? 이 비유적인 표현은 선한 일을 남이 모르게 하라고 하는 히브리 사람들의 속담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구제는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는 동기에서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냉수 한 그릇에 대한 상급에서 '내 이름으로 주면'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려는 마음을 가리킵니다.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고 했습니다(엡5:10). 다음에 청지기의 입장에서 구제해야 합니다. 청지기란 주인의 소유를 맡아 관리하는 종을 말합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청지기들입니다.

우리의 소유물이 하나님의 소유이시기 때문입니다. 자기 것으로 남을 구제하는 것으로 여기지 말고 하나님의 소유로 도와준다고 생각할 때 그 영광이 주인이신 하나님께 돌아갑니다. 다음에 하늘의 상급이 있으니 구제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늘의 상급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갈망해야 할 진정한 소망입니다. 그리고 구제는 하나님의 축복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에 구제는 바람직한 일입니다. 많이 심는 자에게는 많은 것을 거두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축복의 원리를 안다면 우리의 생활은 좀더 복되고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는 하나님 앞에 드리는 헌금을 마치 구제와 같은 것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구제와 헌금은 전혀 다릅니다. 헌금은 세 가지로 구분됩니다. 십일조 헌금은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감사 헌금과 주일 헌금은 '빈손으로 내게 보이지말라'고 하신 말씀대로 하나님께 드릴 마땅한 예물인 것입니다(출23:15).


결론 :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반드시 구제가 따라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우리는 일상 생활 가운데서 구제하는 일을 적은 것으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그리하여 구제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언약하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54) 감찰하시는 하나님

(마태복음 6 : 3 - 4)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일을 은밀한 중에 낱낱이 살피시고 보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 생활 중에 이런 하나님의 감찰하심을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제가 아무도 모르게 은밀하게 행해지고 우리의 기도가 아무도 들을 수 없는 은밀한 골방에서 드려지고 우리의 금식이 아무도 모르는 중에 행해져도 하나님은 이 모든 우리의 행한 일에 대하여 다 알고 계시다고 하는 믿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1. 하나님 앞에는 감추일 것이 없다.

하나님께 우리의 비밀한 일이나 감추인 은밀한 일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감찰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 은밀히 감출 수 있는 것이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기를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고 하셨습니다(렘23:4). 감찰하신다는 말은 낱낱이 살펴 아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지금 하나님 앞에 서 있다고 하는 사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 하나님 앞에서 행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님 앞에서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다'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눅12:2).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낸다'고 하신 것입니다(고전4:5).

우리는 우리 마음과 생각에 대한 것까지 책임을 져야 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시기 때문입니다(히4:2).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살전2:4). 그러므로 우리가 비록 마음의 생각으로 죄를 범했을지라도 회개하여 사함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마12:36).


2. 우리의 행위를 감찰하시는 하나님

다윗은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이처럼 말했습니다. '내 아들 솔로몬아 너는 네 아비의 하나님을 알고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섬길지어다. 여호와께서는 뭇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사상을 아시나니 네가 저를 찾으면 만날 것이요 버리면 저가 너를 영원히 버리시리라'고 했습니다(역대상 28:9).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사상을 아신다고 했 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행위가 하나님 앞에 있으므로 우리는 언제나 우리 행위의 열매를 먹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행한 대로 갚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행위가 하나님 앞에 어떻게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까?

(1) 믿음으로 행해야 합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도 그의 행위로 의를 얻은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믿음으로 행한다는 말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순종하는 일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종은 오직 믿음으로만이 가능합니다. 믿음은 성령이 주시므로 늘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믿음은 성장하기 때문에 믿음의 성장을 위해 기도하는 일과 말씀을 가까이하는 일에 열심을 품어야 합니다.

(2) 진심으로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진실하심을 원하십니다.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라고 말씀했습니다(시51:6).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의 생각도, 우리 입술의 말도 진실을 원하십니다. 진실이 결여된 행위는 그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없습니다.

(3) 다음에 사랑으로 행해야 합니다. 사랑은 두 가지로 구분됩니다. 하나님께 대한 것과 형제들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순종할 수 있는 것도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고 하셨습니다(요14:15). 그러므로 주님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끝까지 주의 말씀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형제의 죄를 용서해 주는 것도 사랑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3. 우리의 곤고를 감찰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우리의 어려움이나 억울함이나 주님을 위해 행하는 모든 수고에 있어서 어느 것 하나 결코 허술히 넘기시거나 잊으심이 없습니다. 감찰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고전15:58).


결론 : 우리는 하나님을 끝까지 의뢰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언제나 견고한 소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의 감찰하심이 언제나 나에게 선하게 나타나셔서 나로 항상 주의 뜻만을 따르고 그의 앞에 진실과 전심으로 충성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55) 그리스도인의 기도

(마태복음 6 : 5 - 8)

기도 생활은 바리새인들이나 그리스도인들이나 그의 생활에 반드시 따라야 할 필수 요건이지만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바리새인의 기도와 구별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의 기도 생활에 바리새인들의 기도를 본 받으면 안 된다고 명령하시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의 기도는 외식하는 기도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올바른 기도가 아닙니다. 이같은 기도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의 기도를 본 받으면 안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1. 구하기 전에 이미 알고 계시는 하나님

우리가 기도하면서 알아야 할 일은 우리의 기도가 우리의 구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아니란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구하는 바를 알려 드리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미 알고 계시는 것을 무엇 때문에 기도하는 것이냐? 이에 대하여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럴지라도 하나님께서 기도하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에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였으니 이루리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할지라'고 하신 것입니다(겔36:36).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것을 예정하셨다면 그와 동시에 우리의 구하는 기도도 그 예정하신 하나님의 뜻 가운데 들어 있다고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하는 자에게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 구하는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요일5:14절에서 이르시기를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고 했습니다. 기도에서 얻는 응답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크나 큰 즐거움을 안겨 주며 그 생활에 풍요한 하나님의 축복을 끌어 드릴 수 있습니다.


2.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예수님은 기도에 대하여 우리에게 경종하시기를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외식하다의 헬라어는 휘포크리노마이( )로 이 단어의 뜻은 하는 체 한다, 가장한다, 속인다 입니다. 바리새인들이 기도하는 곳은 회당이나 큰 거리 어귀라고 했습니다. 회당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장소이기는 하지만 자기 전시를 위해 많은 사람들 앞에서 기도한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외식하는 기도는 사람들에게 자기의 기도하는 모습을 보이려고 하는 기도이므로 사람들이 없을 때에는 기도를 계속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는 하는체 가장하는 기도이기 때문에 외식하는 기도라고 정죄하십니다.


3. 중언부언하는 기도를 드리지 말라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중언부언이란 말은 바타로게오( )로 개구리라고 하는 말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 말의 뜻은 지저귄다, 종알거린다 입니다. 이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고 자기 소리만 요란스럽게 지저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중언부언하는 기도는 다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정욕을 위한 기도입니다. 

정욕을 위한 기도는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구하여도 얻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고 했습니다(약4:3). 

어떤 기도가 승리하느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리는 기도입니다. 

이런 기도가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는 기도인 것입니다.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고 하셨습니다.


(2) 자기 자랑의 기도입니다. 

성전에서 드린 바리새인은 자기 의에 대한 자랑을 즐비하게 늘어놓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다만 그의 자비와 긍휼에 호소해야 하는 것입니다.


(3) 입술만의 기도입니다. 

마음의 생각과 입술의 기도가 같지 않으면 가증한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입술의 말보다 그 중심을 보시고 응답하시는 분입니다.


4. 골방에 들어가 기도하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골방 기도란 무엇입니까? 골방이란 말은 타메이온( )으로 창고, 숨은 방, 밀실을 뜻하는 말입니다. 골방 기도란 어느 장소를 가리킨 것이 아닙니다. 어느 곳이든 시간과 공간의 제한 없이 마음과 영혼의 깊은 기도가 골방 기도인 것입니다. 한나의 기도가 이런 기도였습니다. 바리새인과 함께 성전에서 기도한 세리의 기도는 바리새인과 같은 장소였지만 바리새인은 외식하는 기도였고 세리는 골방 기도였던 것입니다.


결론 :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기도로 끝나버리면 안됩니다. 

생활과 연결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회개하는 기도를 드렸다면 

우리의 생활은 그 회개의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원하는 기도를 드렸다면 

그 서원을 반드시 갚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기도가 얼마나 우리의 생활에 중요한 것인가를 깨닫고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56) 주기도문의 삼대 줄거리

(마태복음 6 : 9 - 13)


주 기도는 주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입니다. 

제자들은 하나님께 어떻게 기도해야 하느냐에 대하여 잘 알지 못했습니다. 

기도에 대하여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외식하지 말라, 골방에서 하라는 등의 말씀은 들었지만 

실상 하나님께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에 대해 궁금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주님은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는데 

이 기도가 오늘날 주기도란 이름으로 알려져 있고 

보통 주기도문이라고 불려집니다.

이 기도는 기도의 하나의 본보기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는 모범 기도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는 우리의 기도의 본이요 우리 영적 생활의 지침입니다. 

이 기도문을 우리는 세 가지로 크게 분류하여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기 위한 기도의 시작입니다. 

두 번째는 내 영혼의 구원을 위한 간구입니다. 

세 번째는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간구입니다.


1.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기 위한 간구

주기도문 처음에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란 말이 나옵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이 그의 생활과 그의 생애를 통하여 

오직 하나님만을 영화롭게 해 드리기 위해 살아야 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은 

인간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려고 하시는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하나님의 바라심은 

인간이 그의 말씀을 불순종함으로써 깨어져 버렸습니다. 

죄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릴 수 없을 뿐 아니라 

하나님과 원수의 자리에 이르게 했습니다.

순종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려야 할 인생이 

그 순종을 버림으로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의 자리에 이르게 되었고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기에 이른 것입니다(롬1:21-23).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죄인들에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릴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로 멸망을 선고 받은 인생들에게 

다시 한번 순종의 기회를 주시기로 작정하시고 

누구든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지난날의 불순종의 죄와 허물을 용서해 주실 뿐 아니라 

영생을 주시기로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릴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의 본분은 바로 이 사실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그 어떤 방법으로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릴 수 있는 길이 없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 방법은 그리스도 안에서 열매를 맺을 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릴 수 있으며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해 드려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목표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는 믿음의 생활과 

그리스도 안에서 많은 열매를 맺는 생활을 통해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우리의 기도가 

실질적으로 생활화되어야 하겠습니다.


2. 내 영혼의 구원을 위한 간구

주기도문의 중요한 다른 하나의 줄거리는 내 영혼의 구원을 위한 간구입니다.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악에서 구하옵소서' 하는 기도의 내용이 

바로 이런 것들입니다. 

모든 인간은 다 죄인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사실인즉 '의롭다 하심을 받은 죄인'들입니다. 

우리의 의는 내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를 법적으로 전가 받은 것입니다. 

이 의가 내 구원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실질적인 우리의 생활에는 이 의가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죄는 정죄에 이르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만한 

심각하고 두려운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우리가 범하는 생활 가운데의 죄에 대하여 

죄사함의 은총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죄에 빠지지 않도록 

악에서 구원함을 받기 위해 간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3.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기도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이다.' 

하늘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뜻이 이 땅위에 실천되기 위한 간구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뜻이 이 땅위에 이루어지는 일에 우리를 당신의 사역자로 쓰십니다. 

우리는 하늘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뜻을 

이 땅위에 이루어 드리는 하나님의 그릇들입니다.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간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이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를 잘 연구하여 

우리의 실제적인 기도에 적용하므로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57)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마태복음 6 : 9)


기도는 하나님과의 영적 대화입니다. 

이 대화는 생소한 사람들끼리의 대화가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간의 대화인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은 영적 존재이시기 때문에 

영적 대화를 하려니까 기도로 아뢰게 되는 것입니다.


1.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우리가 대화해야 할 우리의 아버지가 어디 계시는지 그 계신 장소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늘에는 높은 보좌가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그 곳에 앉아 계십니다. '내가 곧 성령에 감동하였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의 모양이 백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계4:2).

다니엘이 환상에서 본 이 보좌의 모습에 대하여 '내가 보았는데 왕좌가 놓이고 옛적부터 항상 계신이가 좌정하셨는데 그 옷은 희기가 눈 같고 그 머리털은 깨끗한 양의 털 같고 그 보좌는 불꽃이요 그 바퀴는 붙는 불이며 불이 강처럼 흘러 그 앞에서 나오며 그에게 수종하는 자는 천천이요 그 앞에 시위한 자는 만만이며 심판을 베푸는데 책들이 펴 놓였더라'고 했습니다(단7:9-10). 이곳에 앉아 계시는 분은 지극히 거룩하십니다. 이 땅위에 살아가는 인생 중에는 제아무리 거룩하다고 불려지는 자라도 감히 그 앞에 설 수 없는 것입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로 그분의 자녀가 된 우리들은 그 앞에서서 그를 섬기며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2. 우리 아버지여

이런 분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위대하신 분의 자녀가 될 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이런 분의 자녀가 된 것입니까? '만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주시기 위하여 그의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예정을 따라 그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고 그의 피로 우리를 값주고 사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 되었고 그 분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그 분의 아들들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 것은 말할 수 없이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이런 영광을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라고 했습니다.

(1) 이 분은 내 육신을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창조주가 되십니다. '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고 다윗은 고백하고 있습니다(시139:13-16).

(2) 이 분은 내 육체의 아버지보다 더 존귀하신 영의 아버지이십니다.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히12:9). 이분은 나를 위해 독생자를 보내신 사랑의 아버지이십니다. 이분은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위로와 자비의 아버지이십니다.

이런 분이 내 아버지가 되신다는 사실은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 것입니까? 이같은 하나님과의 관계는 내가 내 멋대로 설정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예정하신 가운데 이루어 주신 일이기 때문에 조금도 흔들림이 없는 것입니다.


3. 이름이

아버지의 이름은 창조주의 이름이십니다. 우리는 우리 부모님의 이름조차도 함부로 부르기를 꺼려합니다.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의 죄에 대하여 엄히 경종하고 있습니다. 그 이름은 만물을 붙드시고 운행하시고 섭리하시는 이름이십니다. 만물을 심판하시는 심판주의 이름이십니다.


4.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이같은 거룩하신 아버지의 이름 앞에 모든 만물들은 마땅히 찬송과 영광을 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높은 보좌 위에서 하나님 보좌에 둘려 있는 네 생물들이 밤낮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는데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고 하면서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보좌에 앉으사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돌리신다고 했습니다. 우리 아버지의 이름은 이토록 영광스럽고 거룩하십니다. 우리는 이런 하버지의 성호를 존귀히 여겨야 하며 그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림으로 언제나 거룩히 여기심을 받도록 그 이름을 높여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 무리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대상은 이처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되시는 분입니다. 그는 높은 보좌에 앉아 계시지만 우리의 간구하는 기도에 귀를 기울이사 모든 기도를 듣고 계십니다. 우리 아버지는 이처럼 말씀하십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주리라.' 우리는 이런 우리의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 기도를 듣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

고 항상 담대한 믿음으로 그 앞에 나가 우리의 마음을 토하여 그 분의 사랑과 자비와 긍휼하심을 받는 생활을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58) 나라이 입하옵시며

(마태복음 6 : 10)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는 세 부문으로 구분됩니다. 첫 번째는 서언이요 두 번째는 진정입니다. 그리고 송영으로 매듭을 짓게 됩니다. 진정에는 하나님께 관한 일과 자신에게 관한 일로 나누어집니다.


1. 두 종류의 진정

하나님께 대한 진정은 셋으로 세분이 되는데 첫 번째 진정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입니다. 이 전정은 성부 하나님께 드리는 진정입니다. 다음 두 번째 진정은 '나라이 임하옵시며'인데 이 진정은 성자 하나님께 드리는 진정입니다. 세 번째 진정은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로 이 진정은 성령 하나님께 관한 진정입니다.

다음 자신에 관한 진정 역시 세 가지로 구분됩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란 간구는 성부 하나님께, 그리고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란 진정은 성자 하나님께, 그리고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는 성령 하나님께 드리는 진정입니다. 그리고 송영으로 주기도문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주 기도의 본론은 진정에 있습니다.

기도란 곧 하나님께 드리는 진정입니다. 기도란 이처럼 우리의 마음에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므로 하나님은 기도의 길고 짧은 것이나 수사학적 배열이나 유창한 언어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 중심을 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진정은 여섯 가지로 나누이는데 지난 시간에는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두 번째 진정인 '나라이 임하옵시며'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2. 세 가지로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

성경에서 가르치는 바는 하나님의 나라는 세 가지 모습으로 임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눅17:20-21). 하나님의 나라란 하나님의 통치권 안에 있는 영역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곳이 곧 하나님의 나리입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의 법정에서 빌라도에게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1) 첫째로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마음속에 임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마음에 있느니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 이같은 사실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하신 복음의 첫 메시지는 바로 우리 마음속에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천국이 먼저 이루어져야 할 곳은 우리 마음입니다. 우리 마음에 성령이 임하셔서 그의 권능으로 우리가 다스림을 받으면 하나님의 나라가 내 마음에 임하신 것입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롬8:9). 우리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임재하시면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룬 사람이요 우리의 왕이신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인 것입니다. 이 나라는 어떻게 이루어지나?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이같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 위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2) 다음에 이 땅위에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이 나라가 곧 예수님의 재림으로 지상에 세워지는 그리스도의 왕국으로 성경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한 천년왕국입니다. 이 나라는 주의 재림으로 이 세상이 불의 심판을 받은 후, 그 모습을 들어낼 것입니다(계19:11-16). 하늘에서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은 하나님을 대적했던 모든 죄인들이 심판을 받는 날이요 주님이 만왕의 왕으로 군림하시어 이 땅위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날이 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 나라의 도래를 위해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란 간구를 드렸습니다.

(3) 세 번째로는 우리의 영원한 소망인 하나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고 했습니다. 이 나라가 우리의 영원한 본향인 하나님 나라입니다. 우리는 이 나라에 들어가기를 사모하는 심령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한 것은 바로 이런 기도인 것입니다.


결론 :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분명한 태도를 가지고 그 나라의 임함을 바라보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의 임재하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제 성령충만한 생활로 이 나라를 전파해야 할 것입니다. 장차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임하실 나라를 위해 신부의 단장으로 준비해야 합니다. 그리고

영원한 안식 세계인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고 이 땅위에 살아가는 동안 주님께만 소망을 두고 즐거워하는 생애를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59)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태복음 6 : 10)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라고 하신 말씀 중에 '뜻'이라고 표현된 말은 하나님의 섭리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장차 이루어질 모든 일에 대하여 이미 창세전에 계획해 놓으셨습니다.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시고 예정하신 이 모든 일도 창세전에 하셨다고 밝혀 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일은 이미 하늘에서 이루신 일을 인간의 역사 속에서 이루시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일

하나님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하여 하나도 모르심이 없습니다. 그리고 어느 한가지도 그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음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의 뜻을 거역하는 일이란 상상치도 못할 일입니다. 이 땅에서 이루시는 하나님의 뜻은 이미 하늘에서 창세전에 이루신 일들입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은 반드시 이루실 것이기 때문에 이루신 일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는 그의 계획하신 대로 하나의 빈틈도 없이, 하나의 오류도 없이 다 이루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이같은 사실을 알면서도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까? 그 해답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지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와 우리를 도구로 쓰시는 섭리도 하나님의 계획안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예수님의 경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6:38-39).

이 말씀에서 우리는 이 땅위에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가에 대하여 값진 해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류를 구원하실 계획을 이미 만세전에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런 계획은 이미 하늘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나.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의 구애를 받지 않으시며 그가 계획하시는 것은 이루지 못하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늘에서 이미 이루어진 이같은 하나님의 계획을 땅에서 이루시기 위하여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는 이런 하나님의 뜻을 이루실 책임이 있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같은 아버지의 뜻을 아셨기 때문에 그 분의 일생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표적에 맞추어 사셨습니다. 그가 십자가를 지셔야 할 어려운 시점에 이르렀을 때 이처럼 기도하셨습니다.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이 기도를 끝맺으실 때 하신 기도는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은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온전히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데 있었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 '다 이루었다'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이 땅위에 이루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셨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늘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말합니다.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일에 방해가 되는 모든 요소를 제거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하늘에서 이루신 일을 우리는 예수님처럼 이 땅위에 이루는 일에 하나님께 기도하고 또 우리가 해야 할 사명을 감당할 수 있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2. 이 땅에 이루어져야 할 하나님의 뜻

우리는 이 시간 이 땅위에 이루어져야 할 하나님의 뜻을 몇 가지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일입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어찌 악인의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서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고 하셨습니다(겔18:23). 만일 우리의 마음이 완악하여 복음을 거역한다면 죄인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가 없을 것입니다.

(2)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기를 원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말할 수 없는 사랑으로 나타내신 복음이 어느 한민족이나 어느 특정한 사람에게만 묶여 있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이 복음을 모든 사람들에게 편만하게 펴지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우리를 그의 사역자로 사용하십니다.

(3)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생활을 원하십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 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깨닫고 우리가 그 뜻을 따르는 일은 하나님이 이 땅위에서 그의 뜻을 이루는 일에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이 땅위에 이루어지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이루어 지이다'고 하는 말씀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우리의 간절한 소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이 땅위에 이루시는 일을 양식으로 삼으신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을 기도로, 순종으로, 열매로, 전도로 나타낼 수 있는 성도가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60)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마태복음 6 : 11)

어떤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우리가 먹을 양식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과연 하나님의 뜻이겠는가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에 나오는 일용할 양식을 신령한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석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도 우리가 매일매일 취해야 할 양식임에는 틀림없지만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문에 나오는 일용할 양식은 분명 육신의 양식을 의미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일용할 양식을 위한 기도를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것입니까? 이 문제에 대하여 창3:17절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참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일용할 양식마저 공급받을 자격이 없는 죄인들인 것입니다.


1. 일용할 양식의 의미

일용할 양식이란 우리의 탐식을 만족시켜 주는 호화로운 음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양식이란 말은 헬라어로 토알톤( )으로 '그 떡'이란 의미로 유대인들이 먹던 보리떡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떡은 한 개의 떡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야개의 아들 아굴은 잠30:8-9절에서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고 기도했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위한 우리의 기도는 이같은 마음에서 드려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구하는 양식의 기준은 언제나 일용할 양식의 범위를 넘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눅11:3절에서는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일용할 양식에 대하여 어떤 분은 주님은 먹을 일에 대하여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왜 기도해야 하느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염려하는 일과 기도하는 일은 다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염려를 주님께 맡기는 일이나 염려를 물리칠 수 있는 일은 우리가 주님께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애써 먹을 양식을 구한다고 해도 그 양식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 양식을 주시는 그 하나님께 감사하는 일과 그 양식을 오늘도 주시기를 간구하는 일은 우리에게 오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는 신앙적 태도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간의 광야 생활에서 하나님이 내리시는 만나를 먹었을 때, 그 날 그 날의 일용할 양식만 거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하루 먹을 양식보다 더 많은량을 거두었는데 이 때 하나님은 책망하셨고 그 만나는 먹을 수 없는 썩은 양식으로 변해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안식일에는 만나를 거두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것들은 오늘날 우리의 경제 생활에 큰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위한 기도에는 이 기도에 따르는 우리의 의무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는 엿새 동안 부지런히 일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라'고 말씀하심으로 우리의 생활이 게으르거나 우리가 마땅히 힘써야 할 일에 책임을 다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잠10:4절에서 교훈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 '손을 게으리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고 하신 말씀을 명심해야 합니다.


2. 우리에게 주옵소서

이처럼 하나님께 일용할 양식을 위한 기도는 자기 혼자만을 위한 기도가 아닙니다. 그 기도의 범위가 '우리'란 말로 넓게 나와 있습니다. 우리란 말을 우리는 네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들의 가정을 말합니다. 우리들 가정 위에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하는 기도는 감사가 함께 나가는 기도가 될 것입니다. 두 번째는 내 교회의 형제들을 말합니다. 교회의 형제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들입니다. 한 지체가 굶는데 다른 지체가 평안하거나 건강할 수 없습니다.

다음에 우리의 이웃을 위한 기도가 따라야 합니다. 가난한 내 이웃과 가난한 내 민족의 일용한 양식을 위해 기도하는 일은 그 이웃에 가난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마땅한 의무인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난하여 굶고 있는 온 인류들을 위한 기도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의로운 자나 불의한 자나 구별하심이 없이 비와 햇빛을 주시고 비를 내려 주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류가 다 일용할 양식을 먹을 수 있기를 바라십니다.


결론 : 우리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일용할 양식을 하나님께 구하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아니면 

우리가 살아갈 수 없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간구하는 기도대로 

항상 일용할 양식을 풍족하게 주시는 분이심을 알고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61)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마태복음 6 : 12)


우리들은 한평생 죄의 용서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었을 때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나 죄에 대한 사죄는 똑같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설 때에 두 가지 자세가 필요합니다. 하나는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원죄와 내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법을 어긴 본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요 하나님의 공의에 빚진 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또 어떤 방법으로도 이 빚을 갚을 길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음에 우리는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기쁘게 받으신 것과 영원토록 그의 은총과 은혜를 우리에게 베풀어주심을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가지는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같은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육신의 연약으로 인하여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그 때마다 주님의 보배로운 피를 의지하여 가슴을 치는 회개를 하며 계속적인 하나님의 죄 사유함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1. 그리스도인과 죄

주님은 우리에게 죄 사유하심을 받기 위한 기도를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가 알아야 할 일은 이 기도는 아직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신 것이 아니란 사실입니다. 주기도문은 이미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그들이 배워야 할 기도의 방법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란 기도는 구원을 위한 기도가 아닙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은 후에도 죄의 유혹을 받아 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죄는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사죄의 은총을 받은 것입니다. 이 죄로 인하여는 그리스도인들이 결코 정죄를 받지 않습니다(롬8:1).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즉시 용서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의 죄의 용서에는 반드시 나에게 죄 지은 내 형제의 죄를 내가 용서해 주는 사랑이 필수적으로 따른다는 사실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조건이 얼마나 중요한지 주님은 우리에게 거듭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2. 죄라고 하는 두 가지 낱말

죄라고 하는 말이 헬라어로는 여러 가지 낱말로 다양한 뜻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여기서 흔히 사용되는 두 가지만을 간추린다면 오페일레마( )와 하말티아( )입니다. 주님이 이곳에서 말씀하신 죄란 말은 오페일레마를 사용하셨습니다. 이 말의 뜻은 빚이란 의미가 됩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다른 표현으로 번역하면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를 탕감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빚도 탕감하여 주옵시고'란 말이 됩니다. 우리는 이같은 사실을 주님이 말씀하신 마18:23-35절에 걸쳐 나오는 어떤 임금과의 회계 관계의 비유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고 말함으로써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 책임을 통감했습니다. 그리고 하말티아란 말은 과녁을 맞추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과녁이란 활 쏘는 사람의 목표물입니다. 이처럼 사람의 표적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므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는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들은 그 과녁을 맞추지 못한 것입니다. 에덴에서 아담이 실패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율법으로 실패했습니다. 이방인들이 양심으로 실패했습니다. 그러므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죄에 대한 사함을 받아야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일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셨습니다.


3. 죄 사람의 두 가지 방법

우리가 하나님께 죄사함을 받는 일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는 용서와 하는 회개입니다. 용서는 형제에 대한 사랑에서 나옵니다. 이 사랑은 결코 나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십자가에서 나오는 주님의 사랑을 받았다면 우리의 생활에 형제에 대한 용서가 또한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나도 항상 형제에게 죄를 짓고 살아간다는 사실을 알고 화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화해가 용서로 나오는 것입니다. 다음에 우리는 자기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란 첫째로 자기가 지은 죄를 애통하는 심령으로 하나님께 자백하는 일이요 둘째로 그 죄를 미워하고 죄의 길에서 돌이키는 일입니다. 다음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결론 : 죄는 우리에게서 마음의 평안을 빼앗아 갑니다. 소망을 희미하게 만듭니다. 구원의 기쁨을 노략질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리 떠나게 합니다. 이같은 죄는 빨리 버릴수록 우리에게 유익합니다. 우리는 죄를 버리는 방법을 제대로 알아서 이같은 암적 존재인 죄와 결별하여 우리 생애에 주님의 무한하신 은혜와 축복을 받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62) 시험에 들게 마옵시고

(마태복음 6 : 13)

오늘은 주기도문의 마지막 진정인 여섯째에 이르렀습니다. 이 진정은 우리의 연약함을 호소하며 하나님의 무한하신 긍휼로 우리를 시험과 악에서 지켜 주시기를 간구하는 기도입니다. 인생에게 시험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이 세상이 사탄의 권세 아래 있으며 우리는 유혹을 받기에 알맞은 육신을 입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시험은 죄가 없었던 아담과 하와에게도 찾아 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도 시험이 있었습니다.

성경에는 악으로 우리를 시험하는 자가 있다고 말씀해 줍니다. 이 자는 바로 사탄입니다. 그러나 마귀가 시험해도 단독으로는 사람으로 시험에 들게 못합니다. 반드시 시험을 받는 대상자의 호응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약1:14). 마귀는 하나님을 대적하기 위해 이같이 욕심에 끌려 미혹 받을 수 있는 시험의 대상자를 찾는 것입니다.


1. 시험이란 말

우리는 성경에서 시험이란 말을 많이 접하게 됩니다. 그런데 야고보서에 보면 시험이란 말이 두 가지 모습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앎이라'고 했습니다(약1:2-4). 이 시험은 선의적인 의미의 시험으로 그리스도인에게 꼭 있어야 할 시험으로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같은 1장인데도 13-15절에 나오는 시험이란 낱말을 보면 전혀 그 의미가 다릅니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인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했습니다.

시험이란 말은 원어로 살펴볼 때 두 가지 낱말로 나와 있습니다. 약1:2절에 나오는 시험은 도키마조( )로 이 말은 시험이라기보다 시련이란 말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시험에 합격하다'란 말에서 나왔는데 우리가 가진 신앙을 인정하는 일을 목적으로 삼아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시련입니다. 이 도키마조란 말은 하나님의 경우에만 사용합니다. 그 이유는 사탄은 누구를 인정하기 위해 시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인정하시는 목표에까지 이르게 하시기 위해 성도들을 선의의 시험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삭을 모리아 산에 데려가 제물로 바치라고 하신 아브라함의 경우가 그러했습니다. 그리고 약1:13절에 나오는 시험은 페이라조( )로 간파해 내다, 수색하다, 시도하다는 뜻입니다. 어떤 곳 안에 있는 좋고 나쁜 것을 발견할 목적으로 시험해 본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어떤 사람을 좌절시키려는 의도로 의도적으로 유혹함으로써 넘어지게 하는데 사용하는 말입니다.

물론 이런 시험은 사탄으로부터 옵니다. 사탄은 우리 속에 있는 악을 끄집어내기 위해 우리 앞에 유혹의 올무를 가져다 놓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시험 중 어느 것이나 우리의 생활에 어려움을 가져오며 고통이 따르는 것입니다. 하나는 죄의 결과로 오는 괴로움이요 하나는 하나님의 연단에서 오는 고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이런 시험에 들기 않기 위해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2. 시험의 종류

시험의 종류는 다양합니다. 첫째로 재물로 오는 시험이 있습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돈의 미혹을 받지 말아야 합니다. 속히 부자가 되려는 생각도 갖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는 유혹으로 오는 시험입니다. 이 시험은 남녀 관계에서 오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음욕이란 정욕이 불일 듯 일어날 때, 이 같은 시험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부부간 분방하지 말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세 번째는 질병으로 인한 고통, 생활의 가난으로 인한 어려움이 올 때 이런 시험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적 유익을 위해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이 있습니다. 이 시험은 하나님이 주관하시고 좋은 결실을 보장하시는 시험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 시험을 참으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이룰 때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신앙의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음에 마지막으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아옵나이다.' 이 간구는 마지막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송영입니다. 우리가 하는 주기도문에는 '대개'란 말을 삽입하고 있는데 이 말은 대체로 또는 위와 같이, 이 모든 것으로 비추어 볼 때'란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결론 : 우리가 시험을 이기고 악에서 구함을 받으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시고 붙들어 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험이 결과적으로 나에게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끝까지 인내함으로 승리해야 하는 것입니다.


(63) 그리스도인의 금식 기도

(마태복음 6 : 16 - 18)

그리스도인의 신앙 생활에서 금식 기도는 반드시 따라야 합니다. 성경에는 금식 기도의 사례가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금식 기도로 말미암아 응답 받는 경우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일에 우리에게 신앙적인 본을 보여 주신 분입니다. 그가 하신 기도도 모범적인 기도로 우리가 본 받아야 할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신 후, 40일 간의 금식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공생애에 들어가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금식 기도 후에 나타나신 일을 살펴보면 금식 기도 후에 사탄의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능력을 받아 복음을 전파하시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1. 두 가지 금식

예수님은 우리에게 금식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 두 가지 경우의 금식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는 자기를 위한 금식이요,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향한 금식입니다.

(1) 금식에는 자기를 위한 금식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어떤 금식이 이런 금식 기도인가에 대해 '슬픈 기색을 내며 얼굴을 흉하게 하는 금식'이 그런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금식이란 말은 헬라어로 네스테이아( )로 음식을 먹지 않는 일을 말합니다. 사람이 음식을 먹지 않는 금식 기도에는 자연히 고통이 따르게 됩니다. 그런데 금식하는 사람이 이같은 자신의 고통을 다른 사람에게 자랑스럽게 보이려고 슬픈 기색을 내며 그 얼굴을 흉하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금식을 가리켜 외식하는 금식이라고 말씀하시고 이런 기도는 이미 자기 상을 받았기 때문에 응답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신 것입니다.

(2) 반면에 하나님을 향한 금식이 있습니다. 이 금식은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 보이려고 하나님을 향하여 금식하는 일을 말합니다. 그러면 이런 금식은 어떤 것이냐, 이에 대하여 주님은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도 바르고 얼굴도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은 금식의 자세가 자기를 다른 사람에게 나타내 보이려고 할 것이 아니라 그 중심을 하나님께 보여야 된다는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2. 금식의 참 뜻

그리스도인들이 왜 금식 기도를 하는가? 그 이유는 하나님으로부터 기도의 응답을 받으려는데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 금식해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몇 가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자기 죄에 대한 슬픔을 하나님께 보이기 위해 금식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최악의 왕인 아합이 이 같은 금식을 하여 하나님의 긍휼히 여김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아합이 내 앞에서 겸비함을 보느냐 저가 내 앞에서 겸비함을 인하여 내가 재앙을 저의 시대에 내리지 아니하고 그 아들의 시대에야 그 집에 재앙을 내리리라'고 하셨습니다(왕상21:21-29). 하나님께서 아합과 같이 악한 자가 없다고 말씀하신 그 아합 왕에게도 그가 하나님 앞에 겸비한 마음으로 금식하며 죄사함을 위해 기도했더니 이를 용납하시고 그에게 내리실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신 것입니다.

(2) 민족적 수난을 당하게 되었을 때에 금식 기도가 필요합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후, 바벨론이 메데 바사의 수중에 들어 갔을 때 민족적인 일대 수난의 위기를 맞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만의 모함으로 이스라엘이 몰살을 당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때 유대인인 모루두게와 왕비 에스더가 이 사실을 하나님 앞에 고하고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얻기 위해 금식하며 기도했던 것입니다. 이런 기도는 곧 하나님의 응답을 받아 죽음의 위기에서 살게 되었을 뿐 아니라 이런 악한 음모를 꾸민 자들이 오히려 죽임을 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3) 다음에 하나님의 멸망의 경종이 임할 때 금식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요나의 경종을 들은 니느웨 백성들은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무론 대소하고 굵은 베를 입은지라 그 소문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조복을 벗고 굵은 베을 입고 재에 앉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금식하며 힘써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하나님께서 그들이 죄악의 길에서 돌이켜 회개하는 모습을 보시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환난 날에 금식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엘 선지자를 통해서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고 하셨습니다. 진실한 금식 기도야말로 환난 날에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로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교회에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헌신의 하나로 금식 기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에서 선교사를 파송할 때 금식 기도하면서 주님의 지시를 기다렸습니다. 바울이 여러 교회에 장로를 세울 때도 금식 기도를 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어떤 중대한 일을 결정할 때 이 일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과 인도하심을 위해 금식하며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 금식에는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마음과 교회를 섬기려는 뜨거운 열정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외식적인 금식이나 의미가 없는 금식은 하나님이 원치 아니하시며 우리에게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64) 그리스도인의 재산 관리

(마태복음 6 : 19 - 21)

자신의 생애에 어떤 것이 중요하냐에 대한 가치 판단을 잘못하므로 인생의 결정적인 실패를 초래한 많은 사람들을 우리는 봅니다. 특히 영생의 길을 알아보기 위해 예수님께 나왔던 한 청년의 경우가 그러했습니다. 그는 재물이 많은 연고로 그 재물 때문에 천국의 문턱에서 지옥으로 방향을 돌리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밭에 소출이 많아 주체를 못했던 어리석은 부자의 경우도,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었지만 그 날 밤, 하나님이 그의 영혼을 부르실 때에 그 쌓아 둔 재물이 뉘 것이 되겠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1. 그리스도인과 물질관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경제 생활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우리 주변에 어느 것 하나 경제 생활과 연결되지 않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경제 생활이란 간단히 표현해서 돈이 필요한 생활이란 뜻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자칫 잘못하면 돈을 천시하거나 무시하는 것이 바른 신앙인의 생활 태도인 줄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돈의 가치나 그 활용 면에서 무시하거나 배격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면 이 땅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재물의 축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성경의 교훈입니다.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고 하셨습니다(잠22:4).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나 자녀들의 장래를 위해 돈을 저축하는 일에 대하여 금하고 있지 않습니다. 게으른 자를 향하여 개미의 부지런함을 배우라고 하신 말씀은 장래를 위한 저축성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바울은 '어린아이가 부모를 위하여 재물을 저축하는 것이 아니요 부모가 어린아이를 위하여 하느니라'고 말하므로 이같은 일에 긍정적으로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전3:13절에서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을 또한 알았도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까?


(1) 재물을 땅에 쌓아 두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재물이 자신의 정욕적인 삶의 도구로 사용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는 인색한 사람들을 가리킨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재물을 가지고 먼저 하나님께 부요해야 합니다. 사람이 재물을 쌓아 두는 일은 그 재물이 나중에 자신에게 큰 유익이 되게 하려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이같은 목적을 이루려면 그 재물을 제대로 쌓아 두는 장소를 잘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땅에 쌓아 두는 지물은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 하기 때문에 불안정합니다. 하늘에 쌓는다는 '쌓다'의 헬라어는 데사우리조()로 저장한다, 남겨 둔다의 뜻입니다. 우리의 재물은 이 세상일에만 쓰지 말고 하늘에 남겨 두어야 하며 이 세상에만 쌓아 두지 말고 하늘에 저장해 두어야 합니다.

(2) 다음에 재물을 하나님과 겸하여 섬기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섬긴다는 말은 두울류오( )란 헬라말로 종이 된다, 봉사한다는 말입니다. 재물은 그 쓰는 사람이 주인이 되어야지 재물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그 재물의 종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재물을 섬겨 재물의 종이 되던가 하나님을 섬겨 하나님의 종이 되던가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재물의 종이 된 자리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하나님은 미워하십니다.

(3) 사람이 돈을 사랑한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성경은 '돈은 일만 악의 뿌리'라고 말씀해 주는 것이 아니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사람이 정직한 방법으로 돈을 벌어서 하나님께 드릴 것을 마땅히 드리며 그 돈으로 가난한 이웃을 돌보며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투자한다면 그런 재물이야말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며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열매가 될 것입니다.


2. 하늘에 쌓아 두는 일이란 무엇인가?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 이 말씀은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의 창고에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것으로 규정한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십일조 헌금은 우리가 적어도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함으로써 이 세상에 있는 물질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한다는 최저의 한계선인 것입니다. 이런 증거를 하나님께 보일 수 없다면 우리가 무엇을 근거로 재물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한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입니까?

(2)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을 말합니다. 주님은 우리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에 대하여 정성을 다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성전 험금궤에 두 렙돈의 동전을 넣은 어느 가난한 과부에 대하여 이 과부는 그 누구보다도 많은 것으로 하나님께 헌금했다고 칭찬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있는바 생활비 전부를 넣었기 때문입니다.


결론 : '네 보물이 있는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잊지 말아야 할 일은 우리는 부지런하므로 일하여 재물을 모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재물을 부지런히 하나님의 나라에 쌓아 두는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보물을 간수해야 할 곳을 잘 알고 지혜롭게 인생을 살아가므로 하늘의 놀라운 상급과 축복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65)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하는 이유

(마태복음 6 : 22 - 24)


우리에게 있어서 돈의 위치가 얼마나 큰지 돈이 심지어 자신의 주인의 자리에까지 올라가 있는 것입니다. 주인이란 종을 마음대로 부리며 지배하는 절대적인 위치에 있는 존재입니다. 성경에는 인간이 섬겨야 할 주인에 대하여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너의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고 했습니다.

인간에게는 섬겨야 할 주인이 둘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는 만물의 주재자이신 하나님이시고, 다른 한 주인은 인간의 탐심을 지배하는 재물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인간은 어차피 이 두 주인 중 어느 한 주인을 택하여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섬김으로 하나님의 종이 되느냐? 아니면 물질을 섬김으로 돈의 종이 되느냐? 자신이 섬길 주인을 명백히 선택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1. 눈은 몸의 등불이다.

눈은 몸의 등불이라고 하셨습니다. 눈이 우리 몸에 있어 마치 등불과도 같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눈을 감을 때 우리의 온 몸은 거저 답답하고 캄캄할 뿐입니다. 여기서 눈이 나쁘다고 하신 말씀은 영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밝다는 말은 포티조( )로 비췬다, 조명한다의 뜻이고 나쁘다는 말은 포네로스( )로 악한, 타락한, 허약한 상태를 말해 줍니다. 그래서

주님이 말씀하신 눈은 우리의 마음을 비취는 눈, 즉 빛을 말합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했습니다(요1:4). 빛이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으로 이 생명이 우리의 마음을 비췰 때 우리의 몸은 밝아서 생명의 빛 가운데로 다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눈이 어두우면 우리의 인생을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빛이 어두워 악한 상태, 타락한 상태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이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 육신의 눈이 어두워도 캄캄하여 답답한 생애를 보내거늘 하물며 그 마음에 생명의 빛을 잃으면 그의 영혼과 그의 삶이 그 어두움 속에서 타락하지 않겠느냐'는 뜻이 되겠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여기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마음의 눈, 생명의 빛을 어둡게 하는 요소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말씀하시려는데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재물입니다. 하나님보다 돈을 중히 여기는 사람의 마음은 어두움을 가져옵니다.

사람이 그 마음에 탐심을 품으면 그것이 자신의 영혼의 빛을 어둡게 하여 그의 인생을 캄캄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보물이 있는 곳에 그의 마음에 있기 때문에 우리의 재물이 하늘에 싸였다면 그 곳으로부터 더욱 밝은 빛이 우리의 마음에 비취어 우리의 생애는 더욱 밝은 빛 가운데 다닐 수 있을 것입니다. 마음에 탐심이 없고 재물을 하늘에 쌓아 두는 사람은 그 마음이 빛으로 언제나 밝게 비취임으로 청결한 마음을 소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마음에 평안과 감사와 기쁨이 넘치며 천국을 소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두 주인을 섬기지 말라.

주님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두 주인이란 하나님과 재물을 가리킵니다. 재물은 사람의 마음을 지배하는 주인으로 군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베이버란 사람은 '돈은 군주의 군주'라고 했습니다. 전10:19절에서는 '돈은 범사에 응용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주인은 돈이여서는 안 됩니다. 돈은 이차적인 존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는 돈을 아울러 섬길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라'고 하셨습니다(마22:37).

우리의 사랑은 언제나 한곳에 집약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를 사랑하면 하나는 미워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사람들의 신앙 생활을 보면 하나님을 멸시하고 개의치 않는 사실을 많이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여기서 사랑이라는 말씀을 하실 때 아가파오( )란 말을 사용하셨습니다. 이 사랑이란 말은 하나님이 죄인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신 절대적인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랑을 하나님이 아닌 재물에 바칠 수 없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하나님과 재물에 있어서 어느 편을 사랑하는가에 대한 분명한 태도를 나타내야 합니다. 물질을 섬기던가 하나님을 섬기던가 하나님 앞에 거짓 없는 신앙적 태도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재물이 있던지, 없던지, 잘살던지, 못살던지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하나님만을 섬기는 신앙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포도주의 풍성할 때 보다 더 하니이다'고 노래한 다윗의 이같은 기쁨을 마음에 간직하고 하나님만을 섬기고 그에게만 소망을 두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66) 그리스도인의 염려

(마태복음 6 : 25 - 32)

그리스도인들에게 떨쳐 버리기 어려운 지난날의 습성들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병들어 가는 무서운 암적 존재가 바로 염려라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염려에 대하여 많은 경고와 함께 권면을 주십니다. 염려에 대한 경종은 염려는 백해무익하다는 것이고 권면은 염려는 해서는 안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염려하는 것입니까? 근원적인 것을 따져 보면 의식주에 관한 것입니다. 먹는 것과 마시는 것과 입는 이 세 가지 문제는 인간 생활에 기본 요소들입니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이 문제에 대한 바른 해답을 듣고 우리 육신적인 생활에 관한 근본 문제에 대하여 올바른 신앙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1. 염려는 왜 무익한 것인가?

성경은 인간의 염려는 무익한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 이유를 몇 가지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인간은 자기 생명을 조금이라도 연장할 수 없다는 사실에 근거합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 할 수 있느냐'고 하셨습니다. 염려란 말은 메리므나오( )로 근심한다, 걱정한다, 관심을 가진다고 하는 뜻입니다.

염려는 근심이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에서 평안을 빼앗아 갑니다. 기쁨을 가져가고 대신에 두려움을 안겨 주는 것입니다.

(2) 사람은 자신의 머리카락 한 개도 희게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고 하셨습니다(마5:36). 인간은 이처럼 자신의 몸에서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일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인간이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일에 염려한다는 것은 미련하고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3) 인간은 자신의 생사 화복에 대하여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핍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드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위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건강, 가정, 사업 등에 대한 염려는 결국은 자신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 급기야는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이유가 그 시발이 세상에 대한 염려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2. 염려는 왜 오는가?

주님은 염려하는 일에 대하여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염려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적기 때문에 생긴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이 적다는 말씀의 뜻은 무엇입니까?

(1)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약속입니다. 사람이 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할 때 믿음이 없는 사람이 되어 그 마음속에 근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담대한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신실하시며 언제나 자기의 영광을 위해 반드시 그 말씀대로 이루시기 때문에 말씀을 믿는 사람은 아무 일에나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이 자기를 돌보고 계시다는 믿음을 가지지 못한 사람의 믿음은 적은 믿음의 소유자입니다. 염려는 바로 여기서 나오는 것입니다. 형의 낯을 피하여 하란으로 가는 야곱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야곱에게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나의 뜻을 다 이루기까지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내가 이 세상 끝날 까지 내가 너와 함께 있겠노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겠다는 것은 나를 돌보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위험한 길에서, 어려움을 당했을 때, 생활의 두려움에서 나의 방패가 되어 주시고 산성이 되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는 신앙은 적은 믿음입니다. 인간의 염려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는데서 나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다면 우리의 모든 염려에 대하여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을 의뢰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염려에 대한 성경적인 해답은 그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하나님이 너희를 돌보고 계시다고 하신 것입니다(벧전5:7).


결론 : 음식의 염려에 대하여 공중의 새를 보라고 하셨습니다.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기르신다고 하셨습니다. 의복의 염려에 대하여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를 보라고 하셨습니다.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지만 이 꽃의 영광이 솔로몬의 영광을 능가한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문제의 염려는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뢰하며 그의 말씀을 믿음으로 모든 염려를 주님께 맡기고 우리는 다만 그 분의 뜻대로 순종하는 일에 전심전력해야 할 것입니다.


(67) 그리스도인이 먼저 구할 것

(마태복음 6 : 33 - 34)

주님은 우리에게 염려하지 말아야 할 일에 대하여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이에 대하여 결론적으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의 생애 중에 그 무엇보다도 최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 일이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축복의 비결이 이 주님의 짤막한 말씀 가운데 들어 있는 것입니다.


1. 그리스도인이 구해야 할 것

구약에는 이방인이란 말이 자주 나옵니다. 그러나 신약에도 이방인이란 말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주로 우리 주님이 사용하셨다는데 의의가 있습니다. 구약의 이방인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된 이스라엘이 아닌 다른 족속들을 가리킬 때 이방인이라 불렀습니다. 그러나 신약에 와서는 하나님께 버려진 사람들을 이방인이라 부른 것입니다. 구약 시대이거나 신약 시대이거나 하나님의 백성과 이방인들 간의 생활 방법이 달라야 합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주님도 이곳에서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과 하나님의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구분되어야 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3절에서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이라고 하신 말씀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입는 일을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삶의 목적은 단지 이 일에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아담이 타락한 후, 그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를 싫어하게 되면서부터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은 그의 생애에서 무엇을 구하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까? 주님은 이 문제에 대하여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다만 그들의 육신의 욕구만 채우려는 일에 그들의 삶의 목적을 두고 있지만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는 일에 그의 생의 목표가 있기 때문에 살아가는 방법이나 삶의 방향이나 목적에 있어서 그들과 커다란 차이를 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원칙

그리스도인의 생활에는 아주 평범하고 근본적인 해결책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이해하고 믿음으로 받아 드릴 때 그리스도 안에서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신 언약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의식주 문제에 관한 모든 염려를 해결하고 오히려 이 문제에 대한 더 풍성한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원칙을 주셨습니다. '그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는 일'이 그것입니다. '그리하면 더 하여 주시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더하여 주시리라고 하신 말씀은 더욱 풍성하게 주시겠다는 약속이십니다.

그러면 왜 이 말씀대로 살아가는 생활을 통해서 이런 복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이 말씀은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이해가 안 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적 방법에 따라 살아가는 것을 원치 아니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을 따라 살아가는 것을 원하십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마4:4).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사람들은 이같은 하나님의 법칙을 따라 움직이지만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이 법칙을 무시하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하나님의 축복의 대상에서 제외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먼저란 말은 프로토스( )로 첫 번째, 우선이란 뜻입니다. 구하라는 말은 찾는다, 얻으려고 한다, 가지고자 한다의 명령어로써 찾으라, 얻으라, 가지라는 뜻입니다.

(1) 그 나라를 구한다는 '그 나라'란 하나님의 나라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 나라를 구하는 생활이란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섬기는 생활입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하셨습니다.

(2) 다음에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3) 다음에 우리의 소망을 하나님의 나라에 두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천국을 소망으로 삼고 우리의 생애를 살아가는 생활이 그 나라를 구하는 삶인 것입니다.

(4) 하나님의 나라는 전도로서 확장되어 나갑니다. 전도로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께 인도하는 일은 그 나라를 구하는 일입니다. 다음에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이란 그리스도의 의를 말합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의는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우리의 의를 버리고 그리스도의 의를 의뢰하고 그 의를 덧입는 생활입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의 생활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리스도의 의를 나타내는 일입니다. 이 의는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용서로 나타납니다. 온유와 겸손으로 나타납니다.


결론 : 우리 주님은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 나갈 때 하나님도 없고 구원도 없으며 소망도 없는 이 세상 사람들의 살아가는 방법으로 살아가지 말고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생활'을 원하십니다. 우리가 이 말씀대로 따르면 하나님은 우리의 생애에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시리라'고 하신 말씀을 지키실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

(68) 그리스도인의 비판(마태복음 7 : 1 - 2)

(69) 내 눈 속에 있는 들보(마태복음 7 : 3 - 5)

(70) 거룩한 것과 개(마태복음 7 : 6)

(71) 그리스도인의 의를 이루는 생활(마태복음 7 : 7 - 8)

(72)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마태복음 7 : 7 - 8)

(73)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마태복음 7 : 9 - 12)

(74) 인생의 두 길(마태복음 7 : 13 - 14)

(75) 거짓 선지자를 삼가라(마태복음 7 : 15 - 20)

(76) 천국에 들어갈 자격자(마태복음 7 : 21 - 23)

(77) 지혜로운 건축자(마태복음 7 : 24 - 29)


(68) 그리스도인의 비판

(마태복음 7 : 1 - 2)


마태복음 7장은 산상보훈의 세 번째 장으로 신앙생활의 규율과 그 열매에 대하여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겉으로 나타나는 태도보다는 그 사람의 마음의 상태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람의 태도는 언제나 그 사람의 마음의 생각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잠16:2).

그 사람의 마음의 생각이나 자세가 올바르다면 그 사람의 행동에 대해서는 염려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의 마음의 생각이 그 사람의 행동으로 나타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7장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일상 생활에서 저지르기 쉬운 잘못에 대하여 몇 가지 경종을 들려주십니다. 남을 비판하는 일이나 헤아리는 일이 자신에게 얼마나 해로운 것인가에 대하여 자세히 교훈해 주십니다.


1. 훼방하려고 남의 약점을 찾아내는 일

남을 훼방하려고 그 사람의 약점을 찾아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에는 똑같은 보응이 따릅니다. 상대방도 내 약점을 찾아내어 나를 비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같은 일은 심는 대로 거두는 법칙과 동일합니다. 자기가 가슴아픈 일로 남을 찌르면 오래지 않아 자기가 찔림을 받는 일이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자기가 찾아내어 남을 비판하고 헤아린 약점이 자신에게도 있을 때 이는 자기의 그 비판과 헤아림으로 자기가 정죄함을 받는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게나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롬2:1-3).


2. 다음에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일을 말한다.

남을 판단한다는 말은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일을 말합니다. 정죄란 재판의 최종적인 언도를 가리킵니다.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확정적인 판결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정죄에는 긍휼의 여지가 없습니다. 정죄란 죄인의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최종적으로 내리시는 죄에 대한 언도를 말합니다. 성경에는 이같이 정죄함을 당할 사람들에 대하여 두 종류로 나누고 있습니다.


(1) 구약시대에서는 율법의 범법자들이 하나님의 정죄를 받았습니다. 율법은 인간을 정죄합니다. 율법은 죄인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법이기 때문에 율법의 정죄는 곧 하나님의 정죄입니다. 성경에서는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롬3:20). 그러므로 율법에서 의를 얻으려는 사람들은 그 율법을 통해서 결국 정죄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이 율법의 정죄에서 해방시켜 주시기 위해 율법의 저주를 받으사 십자가에서 희생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2) 신약시대에 와서는 정죄의 범위가 바뀌었습니다. 율법의 정죄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통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정죄함을 받을 사람이 누구인가에 대하여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고 하신 것입니다(막16:16). 신약에 와서는 이처럼 정죄의 기준이 율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하나님의 의이시기 때문에 이 의를 소유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의에 이르지 못하는 죄인들인 것입니다.


3.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저주하는 일을 말한다.

남을 비판하고 헤아린다는 말은 다른 사람을 비방한다는 말입니다. 비방이란 남의 결점을 들어내어 다른 사람에게 알리는 일입니다.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고 하셨습니다(잠17:9).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니 입술을 벌린 자를 사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잠20:19). 그리고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헤아린다는 말은 남을 저주하는 일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무에게도 저주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심지어 원수들에게조차 저주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하셨습니다(롬12:19). 모든 저주는 하나님만이 내리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 저주를 내리시는 것입니까? 악인의 집에 내리십니다. '악인의 집에는 여호와의 저주가 있느니라'고 했습니다(잠3:33).


결론 : 남을 판단하고 헤아리는 일은 늘 자신의 부족함을 모르는 데서 나오는 과오로 이런 일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에 앞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내는 사랑의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69) 내 눈 속에 있는 들보

(마태복음 7 : 3 - 5)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왔을 때 처음 깨닫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사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들로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교회 생활의 첫걸음은 형제들 간의 화목에 있습니다. 이 화목은 사랑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이같은 사랑은 우리 마음속에 부어진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하는 것입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3:16). 이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과 형제를 사랑하는 일은 따로 떼어놓을 수 없는 연관성이 있다는 사실을 성경은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요일4:20-21).


1. 비판에서 오는 해로움

우리는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여 형제들간 서로의 죄를 용서해 주고 화목해야 하는 것입니다. 형제에 대한 비판은 결국 그것이 두 가지 모습으로 내게로 찾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는 나도 남에게 마땅히 비판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남에게 비판받아야 할 죄와 허물과 모순을 너무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에 우리는 하나님의 비판을 면치 못하는 것입니다. 내가 내 형제들에게 대하는 그대로 하나님께서 나에게 대하신다는 사실을 알 때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에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내 형제들에 대하여 자비를 베풀어야 하나님의 자비를 받을 수 있으며 형제에 대하여 사랑을 가져야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비판이나 사랑은 모두 마치 산울림과 같습니다. 남을 비판하면 이 비판이 산울림이 되어 내게 되돌아와 나를 비판하게 되며 내가 사랑을 베풀면 이 또한 산울림이 되어 내게 되돌아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내 허물이 덮어지는 것입니다.


2. 비판하지 말아야 할 이유

주님은 우리가 형제를 비판하지 말아야 할 이유로 '어찌하여 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고 하셨습니다. 들보와 티는 그 크기에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돌보란 말은 도 코스( )로 대들보를 말합니다. 그런데 티란 칼포스( )로 짚이나 겨의 작은 조각을 말합니다. 여기서 들보란 남을 비판하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죄를 말하는 것이요, 티는 형제가 가지고 있는 죄를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로부터 죄를 발견하되 들보와 같은 죄를 발견하여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고 하는 바울의 탄식이 나올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전에서 자기를 자랑하며 기도한 바리새인은 자신의 죄는 티만도 못하고 세리의 죄를 들보보다 더 큰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주님은 이런 사람을 향하여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 내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의 죄를 과소평가하고 다른 사람의 죄를 과대평가 하는 사람을 외식하는 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외식한다는 휘포크리노마이( )란 말은 가장한다, 속인다는 뜻입니다.


3.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라

그런데 주님은 우리에게 형제를 비판도 하지 말고 헤아리지도 말아야 할 것을 명하셨지만 한편으로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뺀 후,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야 할 것이란 점도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이 말씀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형제들이 범죄하고 죄악의 길을 걸어가고 있을 때 그들을 비판하지 말고 그들을 헤아리지 말하고 하셨다고 해서 그저 방관하고 방임하라고 하신 것은 아닙니다. 성경 여러 곳에서는 이들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명백한 교훈들이 많이 있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오히려 형제의 죄를 그대로 방임해 두거나 옹호하면 안 된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1) 우리는 형제에 대하여 그가 죄악의 길을 걸어가거나 범죄 했을 때 마땅히 경고해야 하는 것입니다(겔33:8).

(2) 성경은 어둠에 속해 있는 형제에 대하여 함께 동조하지 말고 오히려 그들을 책망하라고 하셨습니다(엡5:11).

(3) 우리는 내 이웃이 잘못했을 때 그에게 책선해야 합니다.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네 이웃을 인하여 죄를 당치 않도록 그를 반드시 책선하라'고 하셨습니다(래19:17).

(4) 우리는 형제들에게 권고할 수 있어야 합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마18:15).


결론 : 그리스도인들의 책선이나 권고는 언제나 사랑에 바탕을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비판은 미움과 정죄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를 피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에서 나오는 권고는 그 사람의 영혼을 살리는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내 눈의 들보를 뺀 다음, 이런 사랑의 권면도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70) 거룩한 것과 개

(마태복음 7 : 6)

주님은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권고하는 일에, 복음을 전하는 일에 하나의 지혜로운 경종으로 들려주신 말씀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개라고 비유될 만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돼지와 같은 존재들도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영적으로 신령한 지식이나 생각이 없을 뿐 아니라 심히 교만하므로 그들을 권면하려다가 오히려 수욕을 당하는 경우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거만한 자를 징계하는 자는 도리어 능욕을 받고 악인을 책망하는 자는 도리어 흉을 잡히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잠9:7).


1. 무엇이 거룩한가?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거룩한 것이라고 한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17:17). 하나님의 말씀은 참으로 귀하고 거룩합니다. 특히 주님의 산상보훈의 말씀은 거룩하고 진주 같이 귀한 말씀입니다. 주님은 이 하나님의 말씀을 합당하게 받아 들이지 못할 사람들을 개 같은 자, 또는 돼지로 비유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방인들을 개란 말로 자주 표현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이 없는 생활을 하며 하나님 앞에 합당한 생활을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개란 말이 신약성경에 여러 번 나옵니다.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손 할례당을 삼가라'고 했습니다(빌3:2). 또 '창기의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아무 서원하는 일로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가져오지 말라 이 둘은 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임이니라'고 하셨습니다(신23:18).


2. 누가 개 같은 자인가?

개는 부정한 동물 중의 하나입니다. 굽이 안 갈라져 있으며 새김질을 못할 뿐 아니라 깨끗하지 못합니다. 굽이 갈라지지 아니한 것은 성별된 생활을 못하고 세속적인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새김질을 못하는 것은 그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고 더러운 정욕과 탐심이 가득 찬 상태를 말합니다.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바리새인들의 무리, 서기관들, 제사장의 무리들이 이런 자들이었습니다.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고 했습니다(시22:16). 이 시편 말씀은 주님이 당하실 고난의 예언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고난을 당하신 이후에도 이런 무리들이 하나님의 교회에서 일어날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히10:26-29).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다'고 했습니다. 이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로 이들이 개라는 말로 일컬을 자들입니다. 주님은 이들에게 거룩한 것을 주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에게 거룩한 것을(하나님의 말씀) 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내가 누구에게 경책하여 듣게 할꼬. 보라 그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듣지 아니 하는도다 보라 여호와의 말씀을 그들이 자기에게 욕으로 여기고 이를 즐겨 아니하니 그러므로 여호와의 분노가 그들에게 가득하여 참기 어렵도다'고 했습니다(렘6:10-11).


3.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말라

주님은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진주란 보화입니다. 이 진주는 마13:45절에서 비유된 말씀과 같이 천국을 상징한 것입니다.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이 말씀은 천국의 비밀이 돼지에게 통할 리 없으니 돼지 같은 자에게 던지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돼지란 더러운 존재입니다.

개와 돼지에 대한 비유에서 베드로 사도는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메이고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다고 하시면서 이들은 마치 개가 그 토하였던 곳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운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벧후3:20-22).

돼지란 부정한 짐승으로 구약에서는 율법에서 먹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돼지는 굽은 갈라졌지만 새김질을 못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상징합니까? 겉으로는 교인입니다. 그러나 그 속은 새김질을 못하므로 열매가 없습니다. 그들의 맺는 열매는 들포도입니다. 돼지가 진주의 가치를 모르고 발로 밟는 것처럼 세속에 속한 사람들은 모든 신앙의 기준을 돼지 같이 물질에 두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굽도 안 갈라지고 새김질도 못하는 세속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아닌가 스스로 살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굽은 갈라졋지만 새김질을 못하는 돼지 같은 존재가 아닌가 돌이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회개하여 신령한 양식을 섭취하여 열매를 맺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외식을 버리고 마음의 더러움을 씻어내 버림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그 마음에 이루어 진주의 참 가치를 깨달아 천국을 확실히 소유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71) 그리스도인의 의를 이루는 생활

(마태복음 7 : 7 - 8)

마태복음 5장에서 시작하신 예수님의 산상보훈이 여기까지 이르렀습니다. 오랜 시간 산에서 주옥같은 말씀을 들려주신 산상보훈은 이제 7절부터 서서히 막을 내리며 결론에 들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7절 이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생활에 실질적 행동 지침을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산상보훈에서 들려주신 주님의 말씀이 우리의 실생활에 적용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살기를 위해 힘껏 노력하지만 번번이 실패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의의 표준과 비교할 때 우리의 생활은 너무나도 먼 거리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우리는 이같은 거룩한 생활에 이를 수 있는 것입니까?


1. 그리스도인들은 그의 의를 이루는 생활을 어떻게 하는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의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심판을 이기고 구원을 이루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완전한 의입니다. 이 의는 오직 그리스도의 의뿐인데 이 의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공로나 선행과는 전혀 상관이 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주시는 하나님의 법적 의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의를 얻은 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우리 자신이 마음으로나 행위로 의롭지 못한 자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설 때에는 그리스도의 의를 얻은 후에도 '하나님이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고 하는 가슴아픈 고백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후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의를 이루는 생활을 명하십니다. 이것은 율법적인 의미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생활 법도로서의 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에 충분한 의이며, 천국에 들어가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의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의는 이미 이같은 의를 가진 사람들에게 마땅히 가져야 할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인격을 갖추는 의입니다.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여 함이라'고 했습니다(롬6:6).

우리는 지난날에 죄의 종으로 죄의 지배 아래 살았었는데 그 죄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가 된 후, 어떻게 지난날 우리가 살아온 죄 아래서 계속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까? 이 문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아주 중대 한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일은 우리의 힘으로는 불가항력적인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에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같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시는 한 인격체가 계셔서 그 분이 그 의를 이루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고 했습니다(빌1:6).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고 하셨습니다(살전5:23-24).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를 이루게 해 주시는 능력 있는 분이 내주 해 계셔서 그 분이 이루어 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같은 그리스도인의 승리적인 생활은 성령이 그의 능력으로 이루어 주시기 때문에 성령을 받지 않고서는 아무런 열매도 맺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1절에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셨는데 좋은 것이란 바로 '성령'을 가리키신 것입니다(눅11:13).


2. 성령에 대한 약속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이미 성령을 받은 사람을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은 후에도 성령을 받은 사람이 있고 받지 못한 사람이 있는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은 사람조차도 성령을 받기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은 사람은 성령을 받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충만함을 받기 위해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는 일은 구원을 얻는 일과 관계가 있으며 성령의 충만을 받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관계가 되는 일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고 하셨습니다(요16:13).

우리가 진리를 알고 진리 위에 굳게 설 수 있는 것은 오직 진리의 성령이 내주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비밀하신 것을 얄려 주십니다(고전2:10-12).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구원의 비밀, 축복의 비밀, 천국의 비밀, 부활의 비밀, 심판의 비밀을 알게 되는 것은 오직 성령이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게 하는 능력입니다(롬8:13-14).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는 일'은 성령이 내 안에서 그의 능력으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결론 : 우리가 구하는 일이나 찾는 일이나 두드리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일상 생활에 반드시 따라야 할 일들입니다. 우리가 이런 일을 효과 있게 하려면 우리의 생애를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능력이 오직 성령이 주시는 능력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성령의 능력이 아니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

리스도인의 첫째 조건은 성령을 받음으로 거듭나는 일이며 다음에 이 성령을 충만히 받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는 일입니다.


(72)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

(마태복음 7 : 7 - 8)

주님은 우리에게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고 말씀하시고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의 첫째 조건으로 우리의 생활이 늘 하나님께 가까이 해야 할 것을 가리키신 말씀입니다. 구하는 생활, 찾는 생활, 문을 두드리는 일은 우리의 매일 매일의 생활에서 일상 생활화해야 할 일들입니다.


1. 구하라 구러면 주실 것이요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은 한가지로부터 열 가지에 이르기까지 철두철미하게 하나님께 구하는 생활이어야 합니다. 모든 만물의 소유자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어느 것 하나 하나님의 자비가 아니시면 우리의 것으로 사용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주인에게 필요한 것을 구하는 일은 당연한 일입니다. 구하다의 아이테오( )란 말은 요구한다, 요청한다는 뜻으로 기도하는 사람의 소원을 의미합니다.

이런 소원은 한두 번의 기도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 계속하여 구하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원이 한가지나 두 가지로 매듭지어지는 것이 아닌 것처럼 구하는 우리의 기도도 우리 온 생애를 통하여 계속하여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가 계속적으로 구해야 할 일에 대하여 몇 가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신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에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기 위해 성령을 주시기 않겠느냐?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이루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려기 위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2) 하나님은 더욱 큰 은사 사모할 것을 말씀하시고 사랑의 은사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랑이 따르지 않는 것은 무엇이나 하나님께로서 온 것이 아니므로 사랑의 바탕 위에서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3) 주님은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는 기도에는 시간이나 조건의 제한이 없습니다. 무엇이든지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요14:13). 이 말씀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우리의 기도는 아들의 이름으로 인하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열매를 맺는 기도여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에 대하여 야고보 사도는 이처럼 말씀했습니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얻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구하는 일에는 응답의 원칙이 있습니다. 첫째로 받은 줄로 믿는 신앙입니다. '무엇이든지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하셨습니다(막11:24). 다음에 구한 바를 받는다고 하는 믿음입니다.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고 하셨습니다(요일3:22).


2.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그리스도인의 생활에는 찾는 일이 늘 따라야 합니다. 찾는다는 말은 제테오( )로 찾아다닌다, 조사한다, 애쓴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현재 우리 생활에서 계속하여 부단히 찾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고 하셨습니다(암5:6).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고 하셨습니다(시34:10).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찾아야 하는 것입니까?

(1) 뜻을 다하여 찾으면 만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대하15:15).

(2) 간절히 찾는 자가 만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잠8:17).

(3) 은을 구하는 것같이 구하며 보배를 찾는 것같이 찾으면 깨닫는다고 하셨습니다(잠2:4). 그리고 진심으로 찾고 찾으

면 만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렘29:13).


3.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문을 두드린다의 두드린다는 말은 크루오( )로 노크한다, 때린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적극적인 기도의 자세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현재 계속해서 이 문을 두드리는 생활을 해 나가야 할 것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문의 열쇠는 오직 주님만이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아무도 이를 열 수가 없으므로 이 열쇠를 가지신 주님께 끊임없이 노크하며 두드리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구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찾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찾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두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두드리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같은 생활은 우리들의 생활 속에 하나님의 무한하신 축복이 내려질 비결입니다.


(73)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

(마태복음 7 : 9 - 12)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끊임없이 구하는 생활임을 알았습니다. 구하는 생활에서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일은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는 바를 기쁜 마음으로 주실 정도로 좋으신 분이시란 사실입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들을 낳으시고 우리를 기르시고 우리들의 행복을 위해 희생하시는 우리들의 육신의 아버지에 비하여 우리 하나님은 더욱 우리를 생각하시고 우리의 생활과 우리의 인생과 우리의 생사 화복을 주관하고 계시는 분이심을 밝혀 주신 것입니다.


1. 육신의 아버지의 경우

이 세상에 살아가는 부모 중에는 여러 가지 형태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혹은 좋은 부모도 혹은 나쁜 부모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공통적인 점은 자기 자식에 대한 사랑인 것입니다. 자기 자녀들이 잘 되기를 소원하며 좋은 것으로 먹이고 입히고 마시우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하나님의 좋으심을 나타내시는 비교 강조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이같은 말씀을 하신 목적은 다음에 들려주실 말씀에 있으셨습니다.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들로 하나님을 향하여 구하는 생활, 찾는 생활, 두드리는 생활을 계속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좋은 것으로 늘 우리의 생활에 채워야 한다는 사실을 비유적인 예화로 들려주신 것입니다.


2.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경우

주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표현하심에 있어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나의 아버지'라고 하지 아니하시고 '너희 아버지'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여기서 우리에게 알려주시려는 목적은 이 땅에 계시는 우리 육신의 아버지보다 하늘에 계시는 우리의 아버지가 우리와 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무관하신 분이 아니시라 우리의 아버지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같은 사상에서 그리스도인의 승리적인 생활을 이루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그 부모와의 관계에서 우리와 우리 부모와의 관계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신 분이심으로 그의 태어나심은 요셉이나 마리아와 별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는 물론 부모에 의해 이 세상에 태어났지만 우리가 부모님에게 잉태되기 훨씬 이전,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날 것으로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1) 하나님은 우리를 낳으신 분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요1:12절에서 예수를 영접하는 자는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2) 하나님의 사랑은 육신의 아버지의 사랑에 비교될 바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의 관계에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나를 사랑하사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어 십자가에 죽게 하셨다고 하셨습니다(롬5:6-8).


(3) 하나님은 우리의 가치를 이 세상 그 무엇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고전7:23). 하나님이 지불하신 값은 그 독생자의 보혈이기 때문에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존귀한 것입니다.


3. 좋은 것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십니다. 예수를 믿고 그의 자녀가 된 사람들에게는 말할 수 없이 좋은 분입니다. 또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이 있어야 할 것을 알고 계시는 분입니다. 그 뿐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이든지 좋은 것을 주실 수 있는 능력과 권세가 있는 분입니다. 만물의 창조주요 그 만물을 주관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분이 우리에게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결론 : 하나님은 정이 많으시고 사랑이 풍성하시고 긍휼히 여기심이 무한하시기 때문에 그 자녀들과의 솔직한 대화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그 방법으로 우리에게 구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것들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부터 내려온다는 사실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 하나님은 모든 일에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할 수 있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께 대한 감사는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고 응답 받는 생활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74) 인생의 두 길

(마태복음 7 : 13 - 14)


성경에는 문에 관한 비유의 말씀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문의 비유도 우리에게 크나큰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말씀하신 문은 좁은 문, 넓은 문,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 등으로 나옵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잘못 해석하면 세상과 교회에 대한 비유로 오해하기 쉬운 것입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말씀해 주시는 비유의 뜻은 하나님을 섬기는 길에 두 길이 있고 하나님을 따르는 길에 두 문이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 중에도 좁은 문으로 가는 사람이 있고 넓은 문으로 가는 사람이 있다는 교훈입니다.


1. 멸망으로 인도하시는 문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에도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이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입니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다'고 하셨습니다. 복음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모입니다. 전도 받아 교회에 나오게 되자 그들에게는 두 길이 있고, 두 문이 열려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왜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넓고 찾는 이가 많다고 하신 것입니까?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보다 육신의 눈으로 보기에 아름답고 매력적이기 때문입니다. 이같은 본보기로 우리는 아브라함과 롯의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롯은 삼촌인 아브라함을 따라 하나님의 지시하시는 땅으로 떠났습니다. 그러나 롯은 매마르고 거친 땅인 가나안에 들어가지 않고 에덴동산처럼 보이는 소돔을 택했습니다.

롯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이나 장차 나타날 소망 따위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좋은 것을 바라보고 그것을 따라간 것입니다. 롯이 선택한 문이 넓은 문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가나안의 매마른 땅을 밟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선택한 문이 좁은 문인 것입니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의 몇 가지 특징을 살펴보겠습니다.

(1) 이 문은 아무라도 들어가기가 쉽다는데 사람들의 눈길을 끕니다. 들어가기가 쉽다는 말은 세상에서 살아온 그 방법 그대로를 가지고 예수를 믿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육신의 생활에 구애받을 일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 사람들은 혼인자리에 강권함을 받아 모이는 일에는 동참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청함은 받았으 나 택함을 받지 못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2) 이 문은 통과하기가 쉽습니다. 문이 대단히 넓기 때문에 어디서 어디까지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이고 어디서 어디까지가 세상을 따라는 문임을 구별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3) 이 문은 또한 그 길이 넓은 것이 특징입니다. 길이 넓다는 말은 걸어가기가 매우 쉽고 편리하다는 뜻입니다.

(4) 그래서 이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에도 영적인 생활을 거절하고 여전히 죄의 지배를 받으며 죄의 종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그의 심령이 새롭게 변화 받지못하면 우리는 넓은 문을 통과하는 사람들 틈에 끼어 있을 것입니다. 이 길에는 십자가도 없고 고난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결국은 멸망이라고 하셨습니다.


2.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문

사람이 그리스도 앞에 나왔을 때에 그로부터 새로운 인생의 문을 발견할 수 있어야 올바른 신앙 생활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를 믿노라고 하면서도 이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을 찾지 못한다면 그 사람에게 그리스도란 존재란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이 문은 생명의 문인데 세상 사람들은 생명의 문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에서 이 생명의 길을 찾아야 하고 생명의 문을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양의 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순님이 이 문을 열지 않으셨다면 생명의 문은 영원히 열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문을 그의 고난의 십자가를 통해서 여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느니라'고 하신 말씀은 예수님 자신이 이 문이시기 때문에 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문에는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1) 첫째는 그 문이 좁다는 것입니다. 좁다고 하신 말씀은 영적인 표현으로 육신의 생각으로는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2) 이 길은 협착합니다. 이 길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조심스럽게 걸어가지 않으면 실족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3) 다음에 이 문을 찾는 이가 적다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이 길은 눈에 보이는 소망을 바라보고 가는 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결론 : 이 좁은 문, 좁은 길은 

실상인즉 육신에 속한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입니다. 

주님을 확실히 영접하고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는 

어려운 길도 어려운 문도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을 우리 주님은 친히 인도하시어 

방패가 되어 주시고 산성이 되어 주시어 

안전하게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75) 거짓 선지자를 삼가라

(마태복음 7 : 15 - 20)


이 세상엔 빛과 어둠이 존재하는 것처럼 참과 거짓이 존재하며 진리와 거짓 진리가 존재하게 마련입니다. 시장에 나가 보면 우리가 사용하는 물건 중에도 진짜와 가짜가 나란히 어깨를 견주고 있습니다. 가짜 또는 거짓이란 말은 진짜나 참과 그 구별이 어렵다는 데서 나온말입니다. 거짓 선지자란 그리스도의 거짓된 종으로 그들로부터 거짓의 가면을 벗기면 사탄의 종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1. 참 목자

성경에는 참 목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우리의 참 목자이신 예수님입니다. 주님은 자신을 가리켜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고 하셨습니다(요10:14-15). 우리의 진실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그의 양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그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그 죽으심으로 양의 생명을 사망에서 구원해 내신 것입니다.


(1) 선한 목자는 양떼를 버리지 않습니다. 양떼를 버린 목자에 대하여 하나님은 엄중한 경종을 주셨습니다. '화 있을찐 저 양떼를 버린 목자여, 칼이 그 팔에 우편에 임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슥11:17).

(2) 선한 목자는 양 무리를 위하여 살찐 꼴을 준비합니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뇨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고 하셨습니다(마24:45-46).

(3) 선한 목자는 그의 행실이 양의 본이 됩니다.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벧전5:3-4).


2. 거짓 선지자의 정체

그러나 거짓 선지자는 선한 목자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 줍니다. 주님은 이들에 대하여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양의 옷을 입었다고 하신 말씀은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가장한 것을 의미합니다. 옷을 입었다는 말은 탈을 썼다는 말입니다. 소아시아 지방에서는 이리가 실제로 양의 탈을 쓰고 양떼 가운데 들어가 양 새끼들을 잡아먹는 일이 있다고 합니다. 이런 일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고후11:13-15). 거짓 선지자들이 하는 일에 대하여 성경에서는 여러 가지로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1) 이들은 다른 복음을 전합니다. 참 복음은 십자가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의로 죄인들이 아무 공로없이 구원을 얻는 메시지입니다. 그러나 다른 복음은 이곳에 무엇인가를 하나 덧붙이는 것입니다. 거짓 선생들이 갈라디아교회에 나타나 십자가에 율법을 첨가시킨 복음을 전한 일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이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니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고 선언했습니다.


(2) 이들은 자기가 본 것을 자기 생각대로 전합니다(렘23:25-28).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 그대로 성실하게 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생각한 것과 자기 마음에 품은 것들을 또 자신이 본 것을 하나님의 계시인양 전하므로 양 무리들의 참 생명을 노략질하는 것입니다.


(3) 이들은 성경에 없는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인양 전합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특징은 성경에 기록되지 아니한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인양 전합니다. 이런 일에 대하여 하나님은 신18:20절에서 이처럼 경종하셨습니다. '내가 고하라고 명하지 아니한 말을 어떤 선지자가 만일 방자히 내 이름으로 고하든지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면 그 선지자는 죽임 을 당하리라 하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4) 이들은 오직 자신을 자랑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로 자랑하지 않고 자기를 자랑합니다. 그리스도를 높이지 않고 자기를 높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선전에 이용합니다. 왜 거짓 선지자는 이렇게 행하는 것입니까? 그들은 하나님이 세우신 참 선지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결론 : 주님은 이같은 삯군에 대하여 반드시 그 정체를 알아야 할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들에게 우리의 생명을 노략질 당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들의 열매로 그들의 정체를 알라고 하셨습니다. 교묘히 자신을 감춰도 그의 열매가 증거가 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종을 판단하는 죄를 범하면 안되

지만 가짜와 진짜, 참과 거짓은 분간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76) 천국에 들어갈 자격자

(마태복음 7 : 21 - 23)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밭에 심기운 곡식 중에 알곡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중에 가라지도 보였던 것처럼 

교회에는 두 종류의 성도들이 있습니다. 

하나는 입으로만 주여 주여하는 무리들이요 

다른 하나는 아버지의 뜻대로 살아가는 성도들입니다. 

이들이 교회에서 함께 자라기는 하지만 

그들이 모두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주의 이름만 입으로 불렀던 자들에 대해서는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고 하는 선고를 받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1. 주여

주여하는 자는 어떤 자인가? 

천국에 불합격될 사람들의 수효가 

교회에 결코 적지 않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시기 위하여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한다고 하셨습니다. 

이들은 모두 예수를 믿으나 실상인즉 믿음이 없는 가라지들입니다. 

이같은 가라지들이야 말로 교회에서 가장 불쌍한 존재들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결국이 주님으로부터 버림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겉모양을 보면 알곡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리고 알곡과 함께 자라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들의 식별은 사람의 눈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의 신앙생활도 한 평생 계속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가라지는 다만 추수 때 가봐야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그의 은밀한 모든 불법적인 일들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1) 이들은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했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가라지들 중에는 하나님의 교회에서 

양 무리를 치거나 가르치는 거짓 선지자들도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라지는 숨는 법이 없습니다. 

언제나 자기를 나타내되 

혹은 선지자로 혹은 사도로 혹은 하나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그들은 선지자라고 주장하지만 

주님은 그것을 인정해 주시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하나의 큰 교훈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의 종들은 늘 자신의 행실을 잘 살펴보는 중에 

진실하고 충성된 일꾼으로 자기를 단장해야 하는 것입니다.


(2) 거짓 선지자는 말하기를 

자기는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거짓된 일꾼 중에 많은 사람들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주님도 인정하셨습니다. 

갸롯 유다의 경우에서처럼 이들은 어떤 일을 계기로 

하나님의 능력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능력이 그것을 행하는 그들의 신분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보장해 주는 것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3) 이들은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했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가라지들도 때로는 권능을 행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권능이란 영적 능력으로 이적과 기사를 말합니다. 

사탄으로부터 오는 미혹의 손길은 

언제나 기사와 이적으로 오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사람들을 진리에서 떠나게 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 이 방법인 것입니다.


2. 주님의 인정

하나님의 일을 하는 하나님의 일꾼들에게는 

하나님의 최종적인 인정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주님은 이들을 어떻게 인정하신 것입니까?


(1)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알지 못한다고 하신 말씀은 

그들이 한 일에 대하여 인정해 줄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행한 모든 권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영광과 명예와 이익을 위해 사용한 것입니다. 

불법이란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지 않은 것을 말합니다. 

이들에 대한 주님의 최종적인 선고는 때가 이르면 반드시 내려집니다. 

'내게서 떠나가라'고 하시는 명령이 이들에게 내려졌습니다. 

이제 그들은 다시는 주의 이름으로 이같은 일을 행할 수 없을 것입니다.


3.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

주님은 오직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가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란 

두 가지 열매를 맺는 자란 뜻입니다. 

하나는 아들을 믿는 믿음입니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고 하셨습니다(요6:40).


영생은 귀신을 쫓는 일이나 

주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하는 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믿는 것으로 옵니다. 

다음에 그리스도 안에서 열매를 맺는 일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에는 반드시 포도나무의 열매가 맺혀지는 것입니다.


결론 : 그리스도인들은 선지자나 능력이나 권능에 관심을 갖지를 말고 

자신의 열매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천국에는 입으로 주여 주여하는 자가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77) 지혜로운 건축자

(마태복음 7 : 24 - 29)

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5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26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27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무리들이 가르치심에 놀라다

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29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예수님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집을 짓는 건축자에 비유하셨습니다. 건축자는 두 종류인데 하나는 지혜로운 건축자요 하나는 어리석은 건축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누가 지혜로운 자며 누가 어리석은 자입니까? 이에 대하여 주님은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건축자'라고 말씀하시고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1. 지혜로운 건축자

지혜로운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세운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여기서 지혜롭다고 하신 말씀은 누구를 대상으로 하신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는 인생을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반석이란 말은 그리스도인들이 집을 세울 건축의 터전을 말합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고전3:10-11).

그리스도인의 건축의 터전은 바로 그리스도여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반석 곧 패트라( )는 반석으로 믿음을 뜻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위에 우리의 인생을 건축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건축하는 것이 이 반석 위에 세우는 것입니까?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듣는다고 하신 말씀의 듣고의 아쿠온( )은 현재 계속 듣고 있는 상태를 말하며 행하는의 포이에이( )도 현재 계속 행하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산상보훈으로 주님이 들려주신 말씀대로 우리가 계속 행하는 생활을 하면 우리의 집은 반석 위에 세우는 집이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2. 지혜로운 건축자의 재로

지혜로운 그리스도인들이 반석 위에 세우는 집은 말씀의 순종으로 건축하는 집이기 때문에 그 곳에는 비와 창수를 이기는 튼튼한 재료 가 들어가게 됩니다. 바울은 고전3:12-13절에서 이처럼 말씀했습니다.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고 했습니다.

(1) 말씀에 순종하는 건축재료는 금입니다. 금은 '불로 연단한 금'으로 시련과 연단으로 단장한 믿음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수많은 말씀의 연단을 거쳐야 그 찬연한 빛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2) 다음에 말씀에 순종하는 건축재료는 은입니다. 은은 그리스도이 겪을 시련을 말합니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우리를 단련하시기를 은을 단련함 같이 하셨다'고 했습니다(시66:10). 그리스도인은 시련을 통해서 그의 육신의 더러운 찌기를 씻어낼 수 있습니다.

(3) 세 번째 재료는 보석입니다. '집은 지혜로 말미암아 건축되고 명철로 말미암아 견고히 되며 또 방들은 지식으로 말미암아 각종 귀하고 아름다운 보배로 채우게 되느니라'고 했습니다(잠24:3-4). 그리스도인이 건축하는 집의 재료 중 가장 아름다운 재료는 이처럼 그리스도를 아는 지혜인 것입니다. 이런 집은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한다고 하셨습니다. 인생의 비운이 그에게 닥쳐와도 그는 겁내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는 끝까지 인내하므로 그의 구원을 이루는 것입니다.


3. 어리석은 건축자

어리석은 건축자는 그의 집을 모래 위에 세운다고 하셨습니다. 모래란 소망이 없는 이 세상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터전 위에 세우지 않고 세상의 터전 위에 세우진 건축물은 무너져 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 곳은 하나님의 심판이 견디지 못하는 곳입니다. 심판 날에는 그 기초까지 뽑혀져 영원한 불못 속에 던져질 것입니다. 이들은 주님의 말씀을 듣기는 했지만 그 말씀을 계속적으로 순종하는 생활에 실패한 것입니다. 이같이 어리석은 자들이 모래 위에 세운 재료는 나무나 짚이나 풀입니다. 이것은 겉치레로 꾸미는 외식 신앙을 말합니다. 이같은 집은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 때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버린다고 하신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어느 쪽이던 한가지 건축자 중에 속합니다. 지혜로운 건축자가 아니면 어리석은 건축자입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 하셨습니다(고후13:5). 이 말씀을 명심하여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그리스도의 터전 위에 집을 세워 나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http://www.bamjoongsori.org/matea77.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