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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장[사데,빌라델피아, 라오디게아 교회] / [강해] 계시록강해 (이광복 목사 편)

영국신사77 2020. 4. 1. 00:45


             3장 

제목 : 사데(Sardis) 교회[3:1-6] 
본문 : 계 3:1-6 
1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2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3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4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6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서론 

사데 교회는 라오디게아 교회와 더불어 칭찬이 없는 교회입니다. 

‘사데’는 고대 루디아 왕국의 수도였으며, 

식민지 정책의 일환으로 소아시아 지방을 정복하는 헬라인들에게 

가장 끈질긴 공격을 받은 도시입니다. 


‘크로에수스’가 통치하던 주전 546년에는 

바사의 고레스에게 침략을 당해 

바사 총독의 관할이 되었습니다. 
 

그 후 주전 334년에는 알렉산더 대왕에게, 

주전 218년에는 셀류쿠스의 안디오쿠스에게 함락 되었으며, 

그 이후에는 잠시 버가모에 넘어갔다가 

주전 133년경에 로마에 의해 점령되었습니다. 

그 후, 주전 17년에 끔찍한 지진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지리적으로 볼 때, 이 도시는 에베소에서 동쪽으로 약 80Km, 

두아디라에서는 약 48Km 지점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 도시는 천연 요새지를 배경으로 하고 있고, 

남쪽을 제외하고는 계곡 위로 450m의 높이로 

거의 수직에 가까운 암벽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근본적으로는 그 성에 접근하기 불가능하게 되어 있습니다. 

히 누가 중세 카톨릭을 무너뜨릴 수 있었습니까? 

중세, 교황권이 난공불락이었는데, 

루터와 같은 종교개혁자가 나타나서 하루아침에 무너져 버렸습니다. 
 

그 이름을 볼 때, ‘사르데신(Σ?ρδεσιν)’은 

‘남은 자, 남아 있는 자’라는 의미가 있고, 

산스크리트어로는 ‘새로 태어난’, 또는 ‘새로 되다’를 나타내어 

대체적으로 ‘개혁’이라는 의미를 표현합니다. 
 

또한 이곳은 부와 철학과 음악의 도시로 유명합니다. 

양털의 염색이 이곳에서 시작되었으며, 염직공업이 흥행하였고, 

모사공장과 자주 공장, 금, 은, 보석 등의 세공 공장이 많이 있어서 

부요한 도시의 상징처럼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데 교회는 
앞의 세 교회가 이단의 교리와 신앙의 혈전을 벌이는 것과는 달리 

부요 때문에 세속적인 풍습이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교회로 전락하였습니다. 
 

이 교회는 예언적으로 

종교개혁시대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이 A.D. 1517년에 있었는데, 

벌써 이 일이 예표되어 있으니, 

어떻게 그 하나님께 굴복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성경 하나 하나는 원자 폭탄 같습니다. 

내 영성에 따라서 
성경을 새 총으로 느낄 수도 있고, 소총으로, 포탄으로, 

핵으로 느낄 수도 있습니다. 

도덕적으로 느끼는 사람은 새총이나, 소총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어거스틴 같은 사람에게는 성경이 핵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참회와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진리의 단지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내가 영적으로 얼마나 깨닫느냐에 따라서 

새 총이 되느냐, 핵이 되느냐가 결정됩니다. 


여러분들은 말씀을 핵으로 느낄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사데는 중세교회를 예표적으로 보여줍니다. 


한 절, 한 절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 

예수님은 7교회, 그 시대에 적절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본문은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가 그렇듯이, 

첫째는 수신자인 사데 교회가 나오고, 

둘째는 주님의 모습이 나오고, 

셋째는 사데 교회의 행위가 나옵니다. 


먼저 주님의 모습입니다. 


1) 일곱 영 

1절 = “…하나님의 일곱 영…” 

여기 ‘하나님의 영’은 성령을 말합니다. 

그리고 ‘일곱’은 완전수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는 것은 

성령이 충만한 예수님을 말해줍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왜 이런 모습으로 나타날까요? 

그것은 성령의 완전성과 충만성과 편재성을 가르치는 것으로 

영적으로 죽어버린 사데 교회의 치료자로 

나타나신 분이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언적으로는 중세 교회가 다 죽어가기 때문에 

성령의 강한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구속사를 이루시려는 것을 

예표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사데 교회의 영적인 상태는 ‘

하나님의 일곱 영’으로 나타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2) 일곱 별을 가지심 

1절 = “…일곱 별을 가진 이…” 

일곱’은 완전수, ‘

별’은 주의 종을 예표합니다. 

여기 ‘가시셨다’는 것은 세웠다는 것입니다. 

일곱 영이 나오고, 주의 종이 나옵니다. 

에베소 교회에도 일곱 별을 붙드신 예수님으로 나타납니다.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라는 

1:16과 20절의 말씀을 반영한 것입니다. 


그래서 죽어가는 사데 교회에 

주님은 일곱 별을 붙잡으신 권능의 손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래서 참 종들을 통해 


영적으로 죽은 교회를 일으키시겠다는 의지를 

표현해 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개신교를 다시 세우려니까 

주의 종을 붙잡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세우실 때, 

성령의 역사가운데 주의 종들을 쓰십니다. 
이제, 중세 교회는 폐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카톨릭을 교회로 보지 않습니다. 
영세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영세를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다시 세례를 받도록 합니다. 

그들은 타락해서 세속 부요와 권력과 짝하고 

정치와 짝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을 떠나셨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교회는 이미 교회가 아닙니다. 
중세 교회가 폐하고 개신교가 세워지니까, 

일곱 영과 일곱 별을 붙드신 예수님의 모습으로 나타남으로 

종교개혁시대임을 나타내줍니다. 

예수님의 모습이 

이토록 해당 시대를 정확하게 예표해 주십니다. 


2. 책망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라는 말씀은 

깊은 사랑과 채찍이 담겨진 생명의 말씀입니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붙잡으신 그 권능으로 

사데 교회의 영적 상태를 아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모든 행위를 아시는 분이십니다. 

내 모든 행위를 아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일거수 일투족을 보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1) 죽은 이름을 가졌음 

1절 =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자로다” 

주님이 책망하신 사데교회의 행위는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하는 것입니다. 

사데 교회의 행위에 대해 

특별히 세 가지 내용을 생각할 필요가 있는데, 

그 첫째가 외형적인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들의 건물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사원들이 찬란합니다. 

둘째는 ‘이름’의 의미이고, 

셋째는 교회의 내면적인 모습입니다. 
 

고대의 사데는 당당한 도시로, 

천연적인 요새지로서 그 명성을 떨쳤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 명성도 없는데, 

시민들은 과거의 명성에 의존하며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시민들의 안일한 정신상태가 교회로 들어와서 

이단의 고통도 없었으며, 

외부적인 핍박도 없었던 이 교회는 

이교도의 환경과 쉽게 타협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때 그 신앙을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헌금을 했으면 그렇게 아름답게 해 놓았을까요? 

얼마나 크고 웅장한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떠난 행위들은 죽은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정확하게 끄집어내어 책망하십니다. 


3. 권면 

책망에 이어 새로운 권고를 주십니다. 

주의 이런 권고에는 사데 교회가 

아직은 소망이 있는 교회라는 것을 알게 합니다. 


1) 남은 것이라도 지켜야 함 

2절 =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이 말씀은 죽기 직전에 

남은 것이라도 지켜야 한다는 말입니다. 

조금 남은 것이라도 꽉 잡으라는 것입니다. 

교회가 다 타락했는데, 

루터 개혁파만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라도 붙잡아야 산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완전히 망한다.”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데 교회에 주어진 이 말씀은 

교회를 향하신 주님의 끊임없는 관심과 

그 관심을 통하여 아직은 희망이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굳게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원문을 보면, ‘고정시키다, 단단하게 하다’를 의미 
합니다. 

그러니까 실낱같은 희망을 안고 있는 사데 교회의 성도들에게 

무조건적이면서도 필연적으로 순종해야 할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즉, 교회의 내적 생명인 믿음을 굳게 잡으라고 명령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남은 바’는 무엇일까요? 

사데 교회의 신앙상태는 완전히 죽은 것이 아니라 

아직은 교회의 생명이 되는 믿음이 남아 있음을 의미합니다. 


성경에 ‘남은 자’의 사상은 

전반적으로 흐르는 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록 그들이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죽은 자’였으나 

그 소망이 완전히 끊겨진 상태가 아니라 

아직은 믿음의 소망이 조금은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언적으로는 중세 카톨릭의 타락이 

종교 개혁을 기점으로 극치를 이루는 지경에 와 있을 그 때에, 

중세 교회의 모습은 ‘죽은 자’였지만 ‘

남은 자’의 사상을 따라 종교 개혁자들이 있었음을 증거합니다. 


2) 자신을 점검 

3절 =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이 말씀은 “네가 어떻게 복음을 받았느냐? 

네가 예수 복음 받고 천국 갈 자격이나 있는 사람이냐?” 

하는 것을 지적하는 말씀입니다. 

여기, ‘생각하라’는 것은 ‘

상 염두에 두고 지키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성도는 매일 매일의 삶의 현장에서 자신을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따라서 사데 교회에게 ‘생각하라’는 말씀은 

기회가 지나가기 전에 

바로 그들의 행위가 어떠한가를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또, ‘어떻게 받았으며’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미 받은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사데 교회는 

‘네가 복음을 어떻게 받은 것을 항상 생각하라’는 
명령을 주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예언적으로 보면, 

중세 교회 말기의 현상으로 
타락의 극치를 이루고 있는 그들이 

복음을 위하여 흘린 순교자들의 ‘믿음의 역사’를 통해서 전해진 

그 내용들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또, ‘어떻게 들었는지’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것은 그들이 과거의 어느 시점에 

결정적으로 들은 그 시기의 감격적인 순간을 

항상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전에 어떤 자들이었습니까? 

그것을 항상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주께서 우리를 찾아 오셨습니다. 

우리에게 복음이 들려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을 잊는 순간 

우리의 신앙은 실이 끊어진 연처럼 땅에 곤두박질 치게 됩니다. 


항상 영적으로 자신을 점검하시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3) 회개하라 

3절 = “…지키어 회개하라…” 

우리 주님이 주시는 권고는 이제 그 절정을 이룹니다. ‘

지키어 회개하라’는 말씀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여기, ‘지키라’는 것은 ‘지키다, 감시하다, 망을 보다’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이미 앞에서 밝힌 ‘받은 것과 들은 것’을 ‘꼭 붙들고 있으라’는 의미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초대 교회의 순교자들이 피흘려 세워 놓은 복음의 터전을 기억하여 잘 지키라는 것입니다. 

이런 주님의 요구는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지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누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받은 원복음을 잘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더욱이 이 시대는 얼마나 복음을 변질시키고 있습니까? 

심지어 예수 말고도 구원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을 지켜야 합니까? 

오직예 수’를 지켜야 합니다. 

이 신앙 때문에 우리 신앙의 선진들이 목숨을 초개처럼 버렸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복음을 변질시킬 수 있습니까? 

지켜야 합니다. 

초대교인들의 신앙, 저 1세기 크리스챤들이 지켰던 그 복음을 

우리는 끝까지 지켜야 합니다. 
그 다음 ‘회개하라’는 말은 무엇인가? 

‘즉시 마음을 돌이키라’는 의미입니다. 

악 가운데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즉시 마음을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사데 교회가 회개해야 할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사데 교회는 ‘지키지 못한 자기들의 신앙적 
인 죄’와 ‘죽은 믿음’으로 멸망이 눈앞에 이른 자기들의 죄악을 단번에 결정적으로 회개해야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생각할수록 ‘회개’처럼 좋은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 
회는 시간마다 “예수님처럼, 초대교인처럼 살지 못한 죄”를 회개합니다. 우리는 
철저히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요구를 거스린 것에 대해 회개해야 합니다. 
또, 하나님의 요구에 미치지 못한 것도 회개해야 합니다. 육적인 죄와 신앙적인 
죄를 모두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는 날마다 떠나면 안됩니다. 
회개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말라기부터 마태복음까지, 구약에서 신약까지, 모든 
예언서의 주제는 주제가 ‘회개’입니다. 죄를 책망하는 것이고, 심판을 선고하고,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모든 예언서의 공통점입니다. 예언서를 처음에 보면, 죄를 
무섭게 찌릅니다. 그러니까 예언서의 앞에만 보면 못 봅니다. 이사야도 1장만 보 
면 얼마나 무서운 책망이 있는지 모릅니다. 책망하고, 회개하라고 하십니다. 회개 
하면 회복하고, 축복한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말라기서에 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돌아와 또 타락하니까 그 때는 아예 ‘회개하라’는 말이 없이 끝나버립 
니다. 그러니까 그 때부터 하나님의 무간섭 시대가 되어 버립니다. 이것을 신구약 
중간기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손을 떼어버린 시대입니다. 하나님께서 손을 떼어버 
리시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역사상 가장 비참했습니다. 성전은 불태워지고, 성전에 
서 돼지로 드리는 제사가 성행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니까 아무 힘도 없고, 이스 
라엘 백성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A.D. 70년에도 간섭하지 않습니다.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기지 않고 멸하리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순교하신 뒤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손을 떼 버 
렸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전 세계에 끌려 다니면서 갖은 수치와 고난을 당했습 
니다. 선민이라는 그들을 이방 나라들이 마음대로 가지고 놀았습니다. 사탄이 마 
음대로 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회개가 그토록 중요합니다. “회개하라”는 음성은 
사랑한다는 음성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손 떼시면 사탄이 마음대로 가지고 놀 
아버립니다. 하나님이 손 때고, 사탄의 수하에 들어가면 그 때부터 우리도 세상에 
서 간음하고, 도둑질합니다. 제가 지금 신앙의 초기 단계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신앙위에 선 사람들, 집사도 되고, 연조가 있는 사람 
들에게 드리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언제 떠나시는가? 회개하지 않을 때, 하나님은 그 심령에서 떠나버리십 
니다. 우리는 죄를 지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연약합니다. 다윗이 살인죄, 간 
음죄를 함께 지었습니다. 이 얼마나 어마 어마한 죄입니까? 그런데 그 무서운 죄 
도 회개하니까 용서하시고, 그들 더 크게 쓰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우리 자신 
을 직관하고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우리가 죄를 안 지으려 
는 몸부림도 중요하지만, 죄를 짓고 나서 빨리 빨리 회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일단 우리가 회개하면 그 죄를 생각지도 않으십니다. 
 

‘회개’라는 말은 사데교회가 너무 풍요롭고, 그 세상에 취해 있을 때 주신 것입니 
다. 이것은 중세 교회와 똑같은 모습입니다. 주님이 도적같이 임해서 회개가 없으 
면 멸하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어려울지라도 하나님 철저히 붙잡는 자는 
하나님이 회복해주십니다. 경제가 무너진 것이 급한 것이 아닙니다. 신앙 무너진 
것이 급합니다. 그러므로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4. 칭찬 

1) 흰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 

4절 =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 
니…”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몇 명’이 있어 주님은 그들을 향하여 칭찬을 주십니다. 
이것은 사데 교회에 소수의 무리들이 신앙의 정절을 지키는 자들로 남아 있었음 
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옷’은 행위를 말합니다. 역사적으로는 사데 교회 당시에 
그리스도의 성결을 더럽히지 아니한 소수의 무리들로 볼 수 있지만, 예언적으로 
는 중세 교회 말기의 타락한 현상중에서도 믿음의 정절을 지킨 종교 개혁가들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굴뚝 속을 헤쳐 나가면서도 그들의 흰 옷을 
더럽히지 않은 자들입니다. 루터가 이런 자입니다. 칼빈이 그렇습니다. 위클리프 
가 그렇습니다. 존 후스가 그런 자입니다. 존 낙스를 아시지요? 쯔빙글리도 그렇 
습니다. 이들은 흰옷을 더럽히지 않은 자들이었습니다. 
개신교를 ‘프로테스탄트’라고 합니다. 이 말은 ‘항의자들’이라는 말입니다. 종교개 
혁은 영적으로 항의하는 것입니다. 어느 시대나 하나님이 합당하다고 하는 자들 
이 있는데, 그 사람들이 남은 자들입니다. 엘리야 시대에 7,000명이 있었고, 노아 
시대에 여덟 식구가 있었고, 다윗 때는 다윗과 함께 한 400명이 있었고, 소돔과 
고모라 때는 롯의 세 친구가 있었고, 기드온 때는 300명 용사가 있었고, 마지막 
때는 ‘해를 입은 여자’, 참 교회가 있습니다. 이들은 전부 남은 자들입니다. 
그 시대에 끝까지 타락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믿음을 지킨 자들이 있습니다. 하나 
님은 바로 그 사람들을 남겼다가 불쏘시개로 쓰십니다. 하나님은 바로 거기다 불 
을 붙여서 큰불을 만드십니다. 그것이 루터와 같은 사람입니다. 루터는 카톨릭의 
조직과 규모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는 작은 사람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서는 루터를 비롯한 개혁자들에게 불을 붙여서 그 불이 활활 타게 했습니다. 작 
은 바람은 바람이 불면 곧 꺼져버립니다. 그러나 큰 불은 바람이 불면 오히려 
더 잘 탑니다. 하나님께서 종교개혁자들에게 붙이신 불은 결코 작지 않았습니다. 
세상 무엇도 끌 수 없는 큰불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불이 저 타락한 카톨릭 교회 
를 덮어 버리고, 전혀 새로운 횃불이 타오르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도 믿음 지키며 살아야 합니다. 세상이 다 세 
속화된다해도 우리는 절대 예수 한 분 붙잡고, 세속화되지 않고, 우리의 믿음의 
정절을 끝까지 지켜서, 주님 오실 때 영접해서 왕권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할렐루 
야! 


5. 이기는 자에게 주는 축복 

‘이기는 자’는 영적 싸움에서 이기는 자를 말합니다. 우리도 마귀 사탄과 싸웁니 
다. 세상의 음란과 혈기와 야망과 물질 부요와 싸웁니다. 이 모든 싸움이 전부 
‘이기느냐, 지느냐’ 하는 것입니다. 계시록 12장에 보면 ‘뱀 물’이라는 말이 나옵 
니다. 뱀 물은 사탄이 주는 소리들입니다. 우리는 거기에 둘러 쌓여있습니다. 바 
로 이런 것과 싸워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너무 부요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가난하다고 해도, 예수님과 한번 비 
교해보세요. 예수님이 뭐가 있었습니까? 예수님은 아무것도 갖지 않으셨던 분이 
아니십니까? 그런데 우리는 왜 그렇게도 덜 갖고, 더 갖고에 매여 살아야 합니 
까? 여러분! 이 세상에 안 믿는 사람들이 세워 놓은 가치관에 따라서 비교해서 
비참해집니다. 이런 것과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집도 그만큼 살면 됩니다. 차도 
그 정도면 됩니다. 셋방이라도 감사하면서 살면 됩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이기는 
것입니다. 욕망은 끝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성공을 꿈꾸고 삽니다. 그러나 성공을 꿈꾸며 사는 사람들은 세 
상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실패해야 하는가? 아닙니다. 우리도 실패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꿈꾸는 것은 성공이 아닙니다. 우리가 꿈꾸는 것, 우리 
가 추구하는 것, 성경이 요구하는 것은 성공이 아니라 ‘승리’하는 것입니다. 이기 
는 것입니다. 집 한 평 더 넓힌 것은 성공은 될지언정 승리는 아닙니다. 만약 그 
것이 성공이라면 예수님은 철저히 실패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승리하 
신 삶을 살았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승리자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혹 실패자라고 낙인이 찍히더라도 우리는 신앙안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이겨야 
합니다. 
개혁자들이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몸부림쳐서 싸워서 이겼습니다. 여러분도 이 
세상이 세워 놓은 가치관에 지면 안됩니다. 그런 것을 초월해야 합니다. 내 친구 
가 어떻게 사는가 상관하지 마세요. 사람들이 어떻게 보는가 하는 것은 상관없습 
니다. “주님이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주님이 어떻게 보시는가?” 그것을 당신의 
유일한 가치관으로 삼으세요. 그런 사람이 성도입니다. 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 
회는 그래서 전부 이긴자의 얘기가 나옵니다. 이긴자는 어떻게 될 것인가? 


1) 흰 옷 입음 

5절 = “…흰옷을 입을 것…” 

의복은 신분을 나타내는데 사용됩니다. 우리가 경찰을 어떻게 알아봅니까? 신분 
증을 보지 않아도, 그의 입은 옷을 보면 알아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옷을 입지 
않은 사복경찰은 알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잠복근무를 할 때는 경찰 
복을 입지 않습니다. 때에 따라 의복의 색상도 의미를 갖습니다. 물론 의미없이 
그냥 멋으로 입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초상집에 갈 때 사람들은 검정색 옷 
을 입습니다. 검정색이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크리스마스에는 빨강색이 물 
결을 이룹니다. 녹색은 생명을 상징합니다. 이렇듯 상징이 담겨 있는 옷과 색상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여기 ‘흰옷’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순히 흰색 옷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 
기에 상징이 숨어 있습니다. ‘흰 색’이 상징하는 의미는 정결과 공의와 거룩과 
신적 권위, 존귀와 청결, 그리고 승리입니다. 여기 흰옷을 입는다는 것은 거룩 
한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도의 신분에 맞는 성결의 복장입니다. 이기는 
자는 흰옷을 입습니다. 성결의 옷을 입습니다. 


2) 생명책에 새겨질 이름 

5절 =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흰옷을 입은 자들’은 그 이름이 생명책에서 흐리지 않는 축복을 누린다고 합니 
다. 계시록에 ‘생명책’이라는 용어가 6번 등장합니다. 이 말을 원어상으로 보면 
‘신적인 권위를 가지고 보호하시겠다’는 의미를 나타냅니다. 즉, 이 말씀은 구원 
의 확실성, 구원의 보장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역사적으로 볼 때, 사데 교회의 신앙이 식어가고 있는 그 때에 말씀에 
충성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위로입니다. 또 영적으로는 전 세계의 성도들에게 신 
앙의 정절을 준수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승리하여 흰옷을 입은 자들의 이름을 하나님의 생명책에서 흐리지 아니하십니다. 
끝까지 책임지십니다. 하나님의 보장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흔들리지 맙시 
다. 우리의 싸움은 이미 이긴 싸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승리하신 싸움입니다. 
생명책에서 우리의 이름이 흐리지 않는다는 약속의 말씀을 가슴에 간직하고 있다 
면 무엇이 두렵습니까? 믿음으로 당당하게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3) 아버지 앞과 천사들 앞에서 그 이름이 인정받음 

5절 =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이기는 자’는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될 뿐만 아니라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 
과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고 하십니다. 이런 약속을 받는 자들은 어찌 그 기 
쁨을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시인하 
겠다니 이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일국의 대통령 앞에서 
인정받는 것도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데, 하물며 전 우주의 주인이시자 영원한 
아버지 집의 주인되시는 그분 앞에서 인정받는 이름은 믿음의 사람들이라면 누구 
나 간절히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름을 시인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름을 시인한다’는 것은 구원의 확실성에 대한 보장입니다. 이것은 법정 용어 
로서의 가치를 지닌 말입니다. 하늘의 총회 앞에서 공적으로 시인해 주시겠다 
는 것입니다. “내가 재림할 때 너를 구원시켜서 그 영광스러운 나라를 상속할 것 
이다.”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법에 인정 받는 것보다 더 
좋은 축복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이보다 더 좋 
은 위로가 어디 있습니까? 
이것은 아시아 일곱 교회의 형편이지만, 예언적으로는 종교 개혁시대인데, 1,400 
여년 후에 역사속에서 어쩌면 그렇게 정확하게 이루어지는가 하는 것이 놀랍기만 
합니다. 우리는 이렇듯 말씀을 확실히 만져 보고 믿기 때문에 더 확실히 믿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 이긴 자들 되기를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제목 : 빌라델비아(Philadelphia)교회

                                [3:7-13] 
7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 
8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9  보라 사탄의 회당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그들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10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11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12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13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서론 

계시록 2장, 3장은 교회시대, 

1장은 과거, 4장부터 19장까지는 대환난부터 재림까지, 

20장부터는 재림 이후, 천년왕국, 이것이 요한계시록의 구조입니다. 

아시아 일곱 교회는 전세계 하나님의 교회에 주신 말씀이면서, 

예언적으로는 일곱 시대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각 교회가 각 시대를 예언하는데, 

빌라델비아는 ‘선교시대’를 역사적으로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볼 때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사를 주관하고 계신 것을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종교 개혁시대가 지나고, 

타락했던 복음, 변질된 복음, 감춰졌던 복음이 

개혁자들에 의해서 회복되고, 

회복된 그 복음이 전 세계에 증거됩니다. 

그래서 이 시대를 ‘선교시대’라고 봅니다.

미국이 전 세계에 선교사를 보내어 

땅끝까지 복음을 증거하는 선교시대입니다. 
헨드릭슨에 의하면 

1792년 이후 전세계는 

지구 구석 구석까지 복음이 전파되었다고 합니다. 


선교시대가 지나면 자연히 어떤 시대입니까? 

“천국 복음이 온 세계 
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그랬습니다. 

종말 시대입니다. 

이렇듯 어떤 면을 보아도, 

지금은 마지막 때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을 보아도, 계시록의 일곱 교회를 보아도, 

또, 예수님의 일곱 가지 천국 비유를 보아도 

지금은 그물 비유시대, 종말입니다. 

어디를 보아도 우리는 주님이 오실 때가 

너무 가까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빌라델비아는 사데 남방 44Km지점에 위치해 있습니다. 

B.C.150년 경에 버가모 왕조의 아탈루스 2세가 

빌라델비오스에 의하여 헬레니즘 문화를 전할 목적으로 건설했습니다. 


이 지역 이름이 B.C. 150년경에 지어졌는데, 

그 속에는 ‘형제사랑’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사랑’을 의미하는 ‘필로스’와 

‘형제’를 의미하는 ‘아델포스’가 합쳐진 복합 명사인 것입니다. 
 

여러분! ‘선교’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형제 사랑’이 아닙니까? 

어쩌면 이렇게 적절한지 모릅니다. 

이름 자체가 선교시대를 예언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이름 하나가 지어질 때부터 

먼 훗날 미국을 통해 전세계에 선교할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위대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이곳은 포도 산지입니다. 

왜 포도였을까? 

포도는 성도를 예표합니다. 

선교시대에 이르러 성도들이 전 세계에서 나타날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빌라델비아는 조그마한 도시, 제일 적은 도시인데, 

바로 그들이 세계를 향하여 선교를 합니다.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청교도 102명이 아메리카 대륙에 넘어갔는데, 

그들 102명이 시작하여 전세계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또한 이곳은 순교자를 많이 배출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선교시대는 세계에서 순교자가 제일 많이 나옵니다. 

우리 
나라에도 카톨릭에 해당하는 사건이지만, 

유명한 절두산이 있습니다. 

한강에 목을 
대어놓고 작두로 한 명씩 목을 잘랐습니다. 

이 빌라델비아 교회가 순교자가 많이 
나왔는데, 

미래에 순교자가 많이 나올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피 없이 복음이 전파될 수 없습니다. 

피 없이 전파되면 이상하게 사이비가 들어 
갑니다. 

이것은 일개 가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 예수 믿는 사람이 피를 토하는 
고통을 겪으면서 믿어야 

결국 그 가문이 예수 앞에 나옵니다. 
 

18세기, 19세기에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나라가 한 나라도 없습니다. 

인도에는 윌리암 캐리’, 아프리카는 ‘리빙스턴’, 중국은 ‘모리슨 테일러’, 

한국은 ‘언더우드’, ‘아펜셀러’, 

버어마는 ‘챠슨’, 

일본은 ‘헤븐 브라운드’, ‘윌리암스 박스터’같은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이렇게 순교한 바로 그 때 

미국에는 세계적인 인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러면 지금 세계 선교의 주자는 누구입니까? 

세계가 입을 모아 한국이라고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21세기 한국을 선교의 주자로 쓰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나라 이 땅에서 

세계적인 기업과 인물, 기업가가 나오는 것입니다. 

제가 주일 날 새벽에 자녀들에게 안수 기도할 때 

“하나님, 저 아이들이 21세기 귀한 인물들이 

다 되게 하실 줄로 확신합니다”하고 기도하는 것이 

바로 이와 같은 것들 때문입니다. 
 

어느 민족이든 세계 선교를 감당하면 

그 민족가운데 뛰어난 인물들이 나옵니다. 
이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자녀들을 인간적으로 잘 되는 것 생각하면 

동물적인 차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계적인 지도자가 될 것을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가장 짧은 기간동안에 급성장한 교회가 빌라델비아 교회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또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18세기, 19세기에 거의 100년도 안되어서 

미국이 전세계를 복음화시켜 버렸습니다. 

짧은 기간동안 전세계를 복음화시킨 것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있다면 ‘선교’입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 

편지를 보내는 주님의 모습은,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는 주님의 세 가지 모습을 소개하고 있는데, 

첫째는 거룩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둘째는 진실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셋째는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1) 거룩성 

7절 = “…거룩하고…” 

빌라델비아 교회에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거룩하신 분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거룩하고’라는 말의 원어적인 의미는 ‘거룩한 자’입니다. 


‘거룩’을 의미하는 단어가 신약에서는 

총 218회나 등장합니다.

 이 말은 ‘구별되다’, ‘성별되다’하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상대적 가치로 분별할 때 

‘구별되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 주님이 선교시대에 걸맞게 

거룩하신 예수님으로 나타나셨습니다. 


2) 진실성 

7절 = “…진실하사…” 

‘진실’이라는 말이 헬라어에는 두 가지로 쓰입니다. ‘알레데스(?ληθ??)’와 ‘알레 
디노스(?ληθιν??)’가 있습니다. 이 두 단어가 어떻게 다른가? ‘알레데스’는 ‘진 
실한’이라는 말로 언어나 증거에 참된 것을 나타낼 때 사용합니다. 그리고 ‘알레 
디노스’는 위조품이나 허실한 것에 비해 참된 것을 나타내는 의미로 사용됩니 
다. 
본문에서는 이 두 번째의 단어가 사용되어 예수 그리스도는 복음이 전파되는 곳 
곳에 유대인들의 훼방으로 고통과 핍박을 겪는 성도들에게 “오직 주님만 진시하 
신 분”이심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실한 자’라는 표현은 문법적으로 거의 사람에게 사용되 
지 않는 용어입니다. 누구만이 진실합니까? 오직 그리스도만이 유일하게 진실한 
분이십니다. 이것은 선교의 문이 열리고 있는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더 없는 큰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3)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7절 =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마지막으로 묘사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분”입 
니다. 그러면 왜 다윗의 열쇠를 가졌을까? 잘 알 듯이 다윗은 왕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의 왕, 만왕의 왕 예수의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전세계에 선교가 되니까 
그 시대에 적절한 모습으로 예수님이 나타나신 것입니다. 
열쇠로 문을 열면 들어가고, 닫으면 못 들어갑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권세입니다. 
예수님이 열어 주셔서 전 세계에 선교가 되었습니다. 미국이 잘 나서 선교한 것 
이 아닙니다. 주님이 열어 주니까 된 것입니다. 빌라델비아 토지는 옥토였습니다. 
씨를 뿌리기만 하면 농사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미국이 전 세 
계에 선교사를 보낼 때 예수님이 전 세계에 문을 열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러 
니까 미국이 똑똑하고 잘 나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언젠가 언더우드 목사님이 섬겼던 교회를 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작은 교 
회인지 모릅니다. 한국으로 말하면 50여명쯤 들어가는 조그마한 교회입니다. 무 
엇을 말합니까? 사람, 언더우드 목사가 똑똑해서 선교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문을 열어 주셔서 사용된 것입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는 어땠습니까? 그저 전도 
지 뿌리고, 북만 쳐도 얼마나 많이 모였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전 
혀 다릅니다. 모이도록 하기 위해서 별 이벤트를 다 해도 모이기가 쉽지 않습니 
다. 
우리가 하는 선교사역도 우리 스스로가 똑똑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헌금하는 것도 여러분이 신앙 좋아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마음을 열어 
놓았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 의’를 절대 자랑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선교시대는 우리 주님께서 세상의 모든 문을 열쇠를 가지고 
열어 버렸습니다. 
헨드릭슨은 1792년부터 선교운동이 흥왕했다고 말합니다. 윌리암 캐리가 세계 
선교를 강조한 소책자가 1792년에 나왔습니다. 이것이 미국 전역을 감동했습니 
다. 마음을 열어 주었습니다. 지금 한국은 개척교회만 해도 선교한다고 합니다. 
한국 교회는 시작하면서 선교합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열어 놓으신 것입 
니다. 대원군이 그렇게 쇄국정책을 하면서 복음의 발길을 막았지만, 하나님께서 
문을 열어 주셔서 이렇게 기독교가 꽃을 피운 것입니다. 지금 미국 교회가 선교 
를 그치기 시작합니다. 교회당을 빌려주고 돈을 받아 살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 
서 우리 한국이 지금 복 받는 나라입니다. 지금 우리는 우리 한국교회가 선교하 
는 시대, 멋진 시대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2. 칭찬 


1) 적은 능력으로 큰 일을 행함 

8절 =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빌라델비아 교회는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큰 일을 행한 것에 대하여 칭찬을 받 
았습니다. 그러면 ‘적은 능력’이 무엇을 나타내는가? 빌라델비아 교회가 지닌 신 
앙의 밑천이라는 것은 ‘적은 능력’으로 불리울 만큼 연약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빌라델비아 도시에서 교회가 거의 영향력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적 
은 능력’은 바로 교회의 성도들이 지닌 사회적인 여건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복음을 처음 영접한 빌라델비아 도시의 상태는 상류층 
출신이 아니라 바로 하류층이자 빈민층 출신들이 먼저 예수를 영접하였기 때문입 
니다. 바로 적은 교회에서 이 도시에 거의 영향력을 행사 할 수 없는 이들이 복 
음으로 인해 변화받고 믿음을 지켰기 때문에 어려웠던 그 상황에서 ‘오직 예수’ 
를 부여잡고 신앙의 정절을 지켰던 것을 칭찬받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선교는 결코 돈 있고, 큰 교회에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적어도 할 수 있습니다. 없어도 할 수 있습니다. 선교하는 기업과 가정은 반 
드시 하나님께서 더 많은 것으로 주십니다. 그러므로 돈이 없어서 선교할 수 없 
다고 하지 마세요. 능력이 없다고 하지 마세요. 하나님은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것 
을 사용하십니다. 보리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를 몇 명이 먹을 수 있습니까? 
그것이 적은 것이로되, 주님께 넘어가면 5,000명이 먹고 남습니다. 빌라델비아는 
적은 능력을 가지고 가장 열심히 선교했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2) 예수 이름을 배반치 아니함 

8절 =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주님이 칭찬하시는 다음 내용은 “내 이름을 배반치 않았다”는 것입니다. 빌라델 
비아 교회 성도들은 적은 능력으로 예수의 말씀을 지켰을 뿐만 아니라 바로 그 
이름을 지켰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이 교회 성도들은 내적으로는 예수의 말 
씀을 지켰고, 외적으로는 예수의 이름을 배반치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 남미는 카톨릭이 들어가니까 다 죽어갑니다. 이름 배반 
하지 않았다는 것은 ‘오직 예수’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 진리만을 전한 것입니다. 
WCC가 배교하는 행위를 하는데, 출발은 선교가 명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정치가 목적입니다. 혼합주의입니다. 여러분! 선교는 ‘오직예수’ 그 이름을 전하는 
것입니다. 


3. 약속 


1) 지키심 

10절 = “…너를 지키어…” 

이 말씀은 그들이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위하여 
신앙의 인내를 이룩한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지켜 주시리라는 은혜의 약속입 
니다. 이것은 죽도록 충성하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자 사랑이 담긴 
약속입니다. 
선교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이요, 순교입니다. 물질을 드리는 것입니다. 김창인 목 
사님이 말씀하셨듯이, 선교는 한강에 벼 한 가마니를 뿌려 놓으면 다 떠내려가 
고, 씨 하나가 언덕에 떨어져 벼가 자라 나중에 밭을 이루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힘든 것이 선교이고, 인내가 필요한 것이 선교입니다. 그러나 선교하는 교 
회, 선교하는 기업, 선교하는 지갑은 하나님이 지키십니다. 또한 우리 주님은 온 
세상에 임할 시련의 때에 지켜 주실 것입니다. 




2) 시험을 면제 

10절 =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겠다”는 것은 선교할 때 오는 모든 시험에서 너를 지 
키겠다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12제자가 선교할 때 지켜 주셨습니다. 미국이 
전 세계를 선교할 때 지켜주신 것을 역사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 하나님은 대 
환난중에서도 우리를 보호하실 것입니다. 
록 펠러가 선교할 때, 십일조를 드리고, 또 십일조를 선교헌금으로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와 그의 후손들을 얼마나 축복하셨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선 
교하려면 물질이 있어야 하는데, 물질을 주시지 않고 마냥 선교하라고 하시겠습 
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한국에 물질을 주시는 것입니다. 선교하고 기도하는 20% 
때문에 80%가 잘 사는 것입니다. 


4. 권면 

선교시대가 끝나면 “속히오리니” 하신 말씀대로 주님은 속히 오실 것입니다. 마 
24:14에는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 
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고 했습니다. 빌라델비아 시대가 가버리면 주님이 속히 오 
신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때에 우리는 믿음과 면류관을 지켜야 합니다. 


1) 믿음을 지켜라 

11절 =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믿음의 사람들은 주님의 약속을 계속적으로 확고하게 붙잡아야 합니다. 말씀과 
주님에 대한 믿음을 끝까지 굳게 잡으라고 하십니다. 주님이 오실 날이 가까울수 
록 믿음 지키기가 어렵습니다. 믿음이 식어집니다. 그렇게 뜨겁던 믿음이 냉냉해 
집니다. 때문에 믿음을 굳게 잡아야 합니다. 굳게 잡아야 할 목표가 무엇인가?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하는 것입니다. 


2) 면류관을 지켜라 

11절 =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일곱 교회 중에 ‘면류관’을 사용하여 권면하고 있는 교회는 두 교회입니다. 오늘 
빌라델비아 교회와 또 하나, 서머나 교회입니다. 서머나 교회는 생명의 면류관입 
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여기서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우리 주님이 가장 원하시 
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순교와 선교입니다. 
교회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나는 구원받은 성도가 믿음을 지키며 믿음을 장성시 
키는 것입니다. 두 번째 목적은 그렇게 장성한 성도가 다른 사람을 그리스도 앞 
에 인도하는 전도와 선교가 목적입니다. 


5. 이기는 자에게 주는 축복 


1)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함 

12절 =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선교한 사람은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졌기 때문에 기둥이 되게 하십니다. 하나님 
의 교회를 지탱하는 큰 일꾼, 버팀 기둥이 되게 하십니다. 계시록 21장에 보면 
새 예루살렘의 12 기초석이 있습니다. 왕상7장에는 성전의 놋 기둥 둘이 나옵니 
다. 예루살렘에는 야긴과 보아스, 두 기둥이 있었습니다. 야긴은 ‘굳게한다’, ‘보아 
스’는 ‘유력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교회의 기둥입니다. 
이기는 자는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한다고 했습니다. 빌라델비아 도시는 역 
사적인 지진 때문에 엄청난 피해를 본 지역입니다. 이런 지진이 지나간 후에 성 
전 기둥만 남았습니다. 그것을 보는 그들에게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하리라”는 약 
속은 피부에 와 닿는 약속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빌라델비아 백성들에 
게 있어서 ‘기둥’이 주는 의미는 견고성과 부동성을 상징하는 모형물이 되었을 것 
입니다. 
지진 때문에 항상 두려워 떨었던 그들의 생활에서 견고한 기둥이 되게 하시겠다 
는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은 세상의 그 어느 약속과도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이 되 
었을 것입니다. 예언적으로는 열린 문을 통하여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는 교회에 
게 이처럼 “하나님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라”는 축복의 약속을 주시는 것입 
니다. 

2) 성전에서 나가지 아니함 

12절 =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이것은 천국에 영원히 거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축복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선교를 가장 기뻐하십니다. 선교하는 자에게 
이런 엄청난 복을 주십니다. 선교는 어떤 의미에서 계속 쏟아 붓는 것입니다. 태 
평양에 돌 하나 던지는 것과 같은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그 모든 
행위를 기억하십니다. 그래서 복에 복을 더하십니다. 하늘의 신령한 복을 주십니 
다. 결코 성전에서 나가지 않도록 하십니다. 천국에 영원히 거하게 하십니다. 


3)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함 

12절 =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계시록 21장에 새 예루살렘에 열 두 기초석을 세우고, 그 위에 이름을 새긴다는 
것은 축복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선교할 때 네 이름을 기록하겠다. 교회에 이름 
을 기록하겠다”는 것은 그만큼 축복하고 책임지겠다. 네 이름을 영원히 빛나게 
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단12:3에서 뭐라고 약속하셨습니까?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 할렐루야! 
사도행전13:1~4절 보면, 안디옥 교회가 바울과 실라를 통해 선교합니다. 그런데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교회는 선교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이 두 장소를 비교해 보 
십시오. 안디옥 교회는 지금까지 신앙의 본산지로서 그 아름다운 신앙의 유산이 
역사 속에 남아 있습니다. 성경 사본도 안디옥 사본이 가장 좋습니다. 그런데 알 
렉산드리아는 자유주의 일색입니다. 카톨릭이 숲을 이룹니다. 이것만 보아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합니다. 여러분들이 전도하고 선교 
하면, 하나님의 성전에 여러분의 이름이 기록되어서 영원히 빛날 줄로 믿습니다. 
강해(3) 
 

제목 : 라오디게아(Laodicea)교회[3:14-22] 
 


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22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서론 

라오디게아 시대는 역사적으로 종말시대를 가리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이미 성경은 지금으로부터 1,900여 년 전에 예언해 놓았습니다. 

요한을 통하여 예언된 그대로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 역사적인 라오디게아 마지막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해 몇 가지 개요를 설명하겠습니다. 
라오디게아는 빌라델비아 남쪽 62Km 지점에 위치해 있고, 

에베소 동쪽 160Km 
지점에 있습니다. 

B.C. 3세기에 수리아의 안티오커스 2세에 의해 건설되어 

주전 190년에는 버가모 성의 지배를 받아 라오디게아의 쇠퇴를 예고하였고, 

주전 133년 로마의 지배 아래서 경제적인 잠재력을 발휘하도록 허락되어 

이 도시가 옛 모습으로 회복되어 갔습니다. 
이 도시 이름은 본래 ‘디오스폴리스’라 불렸습니다. 

그런데 수리아 왕 셀류커스가 전쟁에서 승리한 기념으로 

충성하는 안티오커스 2세에게 포상으로 내려준 땅이었기에 

안티오커스 2세가 그의 아내 라오디게의 이름을 기념하여 지었습니다. 
 

이 라오디게아의 ‘라오스’라는 말은 

‘백성’, ‘민중’이라는 말입니다. 

딕토스’는 ‘기쁘게 하다’, ‘비위를 맞춘다’는 뜻입니다. 

또 어떤 곳에는 ‘민주주의’라고 비유해 놓았습니다. 

그러니까 민중의 비위를 맞춘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렇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와 정확하게 맞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이 장엄한 섭리, 말씀의 권위, 역사성에 

숨을 죽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엄청난 진리앞에 우리의 고집이나 자아는 먼지같이 보잘 것 없습니다. 

안티오쿠스의 부인의 이름이 정해질 때부터 하나님은 섭리하신 것입니다. 

대환난 직전에 민주주의 시대가 올 것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 성경밖의 세계, 온 우주, 개인의 삶까지 전부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의 원래 정신은 기독교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지금 민주주의는 타락했습니다. 

타락하고, 세속화된 민주주의가 교회안에 들어오고 있습니다. 

어떤 정당이든 민주가 들어갑니다. 

정당들의 다툼도 민주를 걸고 넘어집니다. 

우리는 이 ‘라오디게아’라는 이름 하나를 통해서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하나님의 위대하심, 장엄하심, 초월성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여기서 분명히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타락한 민주주의! 

교회는 절대로 민주주의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민주주의 찾는 교단, 교회는 싸우고 난리입니다. 

지어 장로가 목사 안수를 줍니다. 

장로는 양입니다. 

목사는 목자입니다. 


오늘 이 시대를 세 가지로 봅니다. 

‘민주주의의 확산’, ‘자유무역의 확대’, ‘인권의 신장’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끝까지 하나님의 신권통치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종을 보내서 철저히 신권통치를 하십니다. 

물론 교회안에도 민주적인 요소는 필요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교회가 민주주의로 나가면 안됩니다. 
 

1992년 2월에 카톨릭 교황청에서 

민주주의를 나타내는 구테타적 발상이 나타났 
습니다. 

그 때까지는 만장일치제였습니다. 

그러나 그 때부터 투표를 해서 뽑게 되 
었습니다. 

교황청에도 민주주의가 들어간 것입니다. 


이렇듯 ‘라오디게아’라는 지역의 개요를 통해서도 

그 영적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이곳에서는 검은 빛 나는 양모와 골비안이라는 향유도 생산되었습니다.

고 멋쟁이는 검정색을 입습니다. 

고급 옷, 향유를 뿌리면서 멋을 부린 시대가 라오디게아 시대입니다. 

오늘 이 시대도 얼마나 멋을 부립니까? 

그 다음에 이 곳에 
서는 각종 약이 셀 수 없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약 학교’가 있 
었습니다. 

이렇게 의학을 비롯한 각종 학문이 발달한 도시였습니다. 

오늘 이 시대 
도 각종 학문이 얼마나 놀랍도록 발전하고 있습니까? 

또, 이 곳은 길이 많았고, 문이 많았습니다. 

지금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돈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의식주가 넉넉했고, 토지는 비옥했고, 

각종 산지에서 오는 산지물이 풍성했고, 

업, 농업의 중심지였으며, 당시에 제일 잘 사는 도시였습니다. 

오늘 이 시대도 보십시오. 

얼마나 잘 사는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너무 잘 알지 않습니까? 
바울이 에베소에서 3년간 머무는 동안 이곳에 복음이 전달되었는데, 

사도행전 19장 10절이 배경입니다. 

"이같이 두 해 동안을 하매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최초의 감독은 ‘아킵보’였습니다. 
364년에 32명이 모이는 유명한 종교회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라오디게아 종교회의에서 계시록을 정경에서 빼 버렸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마지막 때는 계시록이 무시당할 것에 대해 

역사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 

라오디게아 교회에 나타나신 에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삼중적인 확언으로서 자신을 밝히고 있습니다. 

첫째 아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둘째 충성된 예수 그리스도, 

셋째 참된 증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1) 아멘이심 

14절 = “…아멘이시오…” 

‘아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그분의 말씀이 전혀 의심할 것이 없는 진실한 분이심 
을 증거하는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아멘이십니다. 예수님은 절대자이십니다. 예수 
님이 말씀하시면 그 말씀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 
다. 예수님이 왜 이렇게 나타났을까요? 이 시대는 전부 예수님을 훼손하기 때문 
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말씀에 철저히 ‘아멘’해야 합니다. 그리고 말 
씀이 아닌 것에는 철저히 ‘아니오’라고 해야 합니다. 사탄 마귀는 우리에게 끊임 
없이 말씀을 먹지 못하게 합니다. 말씀을 혼잡시킵니다. 진리에 다른 것들을 섞어 
버립니다. 혼합주의가 그것입니다. 종교 다원주의가 그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만 ‘아멘’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멘이십니다. 성부 하 
나님의 말씀에 ‘아멘’하셨습니다.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아멘’하셨습니다. 

2) 충성심 

14절 = “…충성되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셨을 뿐 아니라 죽기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 
시는 충성되신 분이십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상태가 세상을 향해서는 말할 수 
없이 부요했지만, 하나님을 향해서는 기아선상을 헤매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충 
성이 없었습니다. 
3) 증인되심 

14절 = “…참된 증인이시오…” 

예수님은 하나님의 참된 증인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참된 증인이 되어야 합 
니다. 어떤 사람을 가리켜 증인이라고 합니까? 현장을 목격한 사람 아닙니까? 우 
리는 십자가를 목격한 십작의 증인들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목격한 예수의 증인 
들입니다. 우리는 천국을 목격한 천국의 증인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증인들 
입니다. 


4) 창조주되신 예수 그리스도 

14절 = “…창조의 근본이신 이…” 

이 말씀은 요한복음 1장3절, 히브리서 1장 2절에도 나오는 말로, 곧 예수님이 창 
조주시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십니다. 이 말씀이 예수님이라고 했고, 
이 말씀이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창세기 1장 1절, 천지를 창조하실 때 삼위가 
다 계셨습니다. 
지금은 예수님을 창조주로 보지 않습니다. 그래서 창조의 근본이심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1996년 10월 26일에 교황이 진화론이 맞다고 인정했습니다. 그런데 
미국 켄사스주에서는 진화론은 잘못된 것이라며 교과서에서 빼 버리도록 결의했 
습니다. 1999년 7월 31일, 베이징, 자바인, 네안데르타인, 유인원이라고 했던 것 
들이 DNA검사를 통해서 전부 가짜라고 밝혀졌습니다. 저는 이 소식을 듣고 얼마 
나 통쾌했는지 모릅니다. 우리 예수님이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것을 믿습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것을 믿습니까? 오늘 이 시대에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기 
때문에 아멘이시오, 충성이시오, 창조의 근본이시라고 소개합니다. 


2. 책망 


1) 미지근한 신앙 죄 

15절 =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오늘 이 시대의 신앙은 미지근합니다. 복음의 뜨거운 열정이 없이, 혼합되어 있습 
니다. 라오디게아가 종말시대라면 이 시대 최대의 특징이 혼합주의인데, 여기서 
무슨 근거가 없을까 생각했습니다. 계17장에서는 “음녀가 많은 물 위에 앉아 있 
다”고 했습니다. 혼합주의 사상에 있다는 근거가 있습니다.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 
회에는 없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라오디게아 도시에 들어오려면 ‘리쿠스’라는 계곡에서 들어오는 물과, ‘히엘라볼리 
스’에서 나오는 온천물이 나옵니다. 이 둘이 서로 만납니다. 민물과 온천수 두 물 
이 만나는 것이죠. 그래서 미지근한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 물은 도저히 마실 
수 없는 토해버릴 상태입니다. 이것이 곧 혼합주의입니다. 혼합주의가 나타날 것 
을 이런 자연환경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는 무엇이든지 섞어져 버립니다. 민족도 섞어집니다. 신앙도 세속화 
됩니다. 종교도 섞어집니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 편에서 보면 역겨워서 토해버 
리고 싶으신 것입니다. 어쩌면 그렇게 이 시대를 정확하게 보여주는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으려면 확실히 믿고, 안 믿으려면 말아버려야 합니다. 
그 색깔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믿는 둥 마는 둥 하면 안됩니다. 여러분 미지근한 
신앙이라고 할 때, 단순히 한국만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 나라는 부정적인 면이 
많이 있지만 그래도 세계에서 제일 뜨겁고 열정적입니다. 그러나 전 세계적인 추 
세가 어떻습니까? 미지근합니다. 어쩌면 그렇게도 정확하고, 실감나는지 모릅니 
다. 


2) 부요죄 

17절 =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라오디게아’에는 돈이 많았습니다. 얼마나 돈이 많은지 시세로가 이곳에서 신용 
장으로 현금을 바꿔 썼다고 할 정도입니다. 이곳은 은행이 발달하고 돈이 많은 
곳이었습니다. 주후 60년에 대 지진이 났는데, 돈이 많아서 그 모든 피해를 자력 
으로 복구 해 버렸습니다. 
오늘 이 시대도 부요합니다. 교회들도 물질이 풍요로운 시대입니다. 믿음도 자기 
들이 다 부요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죄악입니다. 우리는 이런 때에 “내가 
부족하고, 내가 모자라고, 믿음이 이 정도 밖에 안 되는가” 하는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3) 곤고한 죄 

17절 = “…네 곤고한 것…” 

‘곤고한 것’은 정말로 곤란한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들이 영적으로 갈등이 없 
다는 것은 영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시체들은 때려도 모릅니다. 영적으로 괴로 
운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영적으로 죽어서 아무것도 모릅니다. 철학, 무신론적 
철학 사상이 들어가서 독일 교회가 다 죽어버렸습니다. 다 죽어서, 화인 맞아버리 
니까 모릅니다. 


4) 가련한 죄 

17절 = “…가련한 죄…” 

‘가련하다’는 것은 곧 불쌍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보실 때에 오늘 이 시대의 
믿음이 불쌍합니다.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교회와 성도들이 주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면 사회의 부요가 교회로 들어와서 신앙을 식게 하고, 부요에 젖어 식어진 
신앙을 부여잡고 괴로움을 겪는 모습은 가련할 뿐일 것입니다. 


5) 가난한 죄 

17절 = “…가난한 것…” 

여기, ‘가난’은 육적 가난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가난입니다. 이 교회는 
미지근한 신앙으로 인해 영적인 요소를 다 잃어 버렸습니다. 즉, 주님 말씀처럼 
‘맛 잃은 소금’이 되어 아무 쓸모가 없는 상태임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도 믿음이 가난합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교회들은 이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가난한 것’이 섬기는 교회와 자신에게는 없는지 회개하고 
바라보아야 합니다. 홍수속에 식수가 갈급하듯이, 교회의 홍수 속에 진리를 외치 
는 말씀의 선포는 사라져 가고 있는 현실을 보십시오. 


6) 눈먼 죄 

17절 = “…눈먼 것…” 

라오디게아는 얄질의 안약을 발명함은 물론이고 의학교를 세워 의술이 발달된 이 
곳에서 눈먼 것을 모른다는 책망은 얼마나 역설입니까? 이것은 그들의 영적 상태 
가 감겼다는 것입니다. 시대를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징조와 시대, 진리를 보 
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 시대의 징조를 보는 눈이 필요합니다. 
성경을 통해 역사를 보는 눈이 필요합니다. 


7) 벌거벗은 죄 

17절 = “…벌거벗은 것…” 

라오디게아는 직조업이 발달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도시에서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영적으로 볼 때 너희가 벌거벗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는 것입 
니다. 벌거벗으면 부끄러운 것이 다 드러납니다. 하나님 앞에 믿음의 행위가 다 
벌거벗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라오디게아 시대를 말하는 것이지만, 예언적으로 오늘 이 시 
대를 말해줍니다. 여러분은 그래도 한국 교회에 다니는 것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라오디게아에는 칭찬이 하나도 없습니다. 중세 암흑시대가 타락했다고 하지만, 영 
적으로 볼 때는 지금이 훨씬 타락했습니다. 이와 같은 때에 우리가 믿음위에 굳 
게 서서 철통같이 믿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3. 권면 

만일 권면이 없다면 최악의 상태입니다. 말라기는 대환난과 마찬가지입니다. 마지 
막 구약의 최고 타락한 시대입니다. 마지막 대 환난 때도 가장 타락한 때가 됩니 
다. 이 시대는 희망이 있고, 소망이 있습니다. 의사가 “당신, 술 끊으시오, 약 먹 
으시오, 운동하시오” 이렇게 충고해 주면 아직 소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 알 
아서 하시오” 하면, 이제 끝났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권고하고 계십니다. 



1) 불로 연단한 금을 사라 

18절 =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불로 연단한 금’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금을 갖다가 불 속에 넣으면 금은 금끼리 
모이고, 찌꺼기는 빠져서 찌꺼기들끼리 모입니다. 그 전에는 같이 있다가 뜨거운 
불을 가열하면 금은 금끼리, 찌꺼기는 찌꺼기끼리 모이는 것입니다. 신앙이 그렇 
습니다. 미지근하면 안됩니다. 열정적으로 믿어야 합니다. 불 속에서도, 어떤 환난 
속에서도, 뜨거움 속에서도 금같은 순전한 신앙을 갖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욥기 23장 10절을 보십시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그렇습니다. 불로 연단해야 금이 됩 
니다.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야 내가 정금같이 나오는 것입니다. 


2) 흰옷을 사서 수치를 가려라 

18절 =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성경에서 ‘벌거벗은’이라는 표현은 일반적으로 말할 수 없는 수치를 나태내는 표 
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즉, ‘옷을 벗는다’는 것은 심판과 굴욕의 상징인 동시 
에 ‘좋은 옷’을 입는 것은 바로 영광의 표시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회는 육적인 부요에 넘쳐서 영적으로 벌거벗은 수치를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흰옷을 사서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해야 했던 것입니다. 
‘흰옷’은 ‘거룩’과 ‘성결’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거룩한 생활, 성결한 생활, 믿음의 
생활, 경건한 생활, 기도 생활, 말씀 생활, 주일 성수 생활, 봉사 생활을 통해서 
벌거벗은 부분을 가리라는 것입니다. 즉, 불로 연단한 금 같은 신앙을 갖으라는 
것입니다. 


3) 안약을 사서 바르라 

18절 =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보게 하라” 

이 말씀은 영적으로 눈을 뜨라는 뜻입니다. 영계를 바라볼 수 있는 성령의 전망 
력과 판단력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 시대를 좀 보아라. 영계를 좀 보아라. 사 
탄의 역사를 좀 보아라. 하나님의 세계를 좀 보아라.”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 
대를 영적인 눈을 뜨고 보아야 합니다. 영적으로 보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 
는 기도를 많이 하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보는 것은 완전하지 않습니 
다. 그러면 무엇으로 볼 것인가? 말씀으로 보는 것이 완전합니다. 그것만이 100% 
정확합니다. 말씀을 통해 모든 것을 보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4) 열심을 내라 

19절 = “…네가 열심을 내라” 

예배생활, 전도생활, 각 기관 봉사 열심히 하라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를 
장거리 경주로 비유한다면 마지막 주자에 해당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 중요성 
을 앞의 교회들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마라톤 선수가 마지막 골인 지점을 향하 
여 열심을 내듯이, 주의 날을 사모하는 성도들도 그날이 임하기를 간절히 바라며 
열심을 내는 신앙이 되어야 할 것을 말합니다. 


5) 회개하라 

19절 = “…회개하라” 

이것은 잘못된 신앙관을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제가 이것보고 예배 시간에 “천부 
의 의지 없어서” 찬송합니다. 이것보고 “예수님처럼, 초대교인처럼 살지 못한 죄” 
를 회개합니다. 회개하면 하나님은 죄의 질을 묻지 않으십니다. 죄의 양도 묻지 
않으십니다. 죄의 기간도 묻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무엇을 회개해야 합니까? 미지 
근한 신앙을 회개해야 합니다. 신앙적인 자만을 회개해야 합니다. 곤고한 것을 회 
개해야 합니다. 가련한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가난한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눈 
먼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벌거벗은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6) 문을 열어라 

20절 =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문을 열라는 것은 주님을 영접하라는 것입니다. 유명한 홀만 혼트의 그림을 다 
보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문밖에 서 계시는 그림입니다. 그런데 그 그림을 유심 
히 보지 않으면 볼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바로 바깥쪽에는 
문고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안에만 문고리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안에서 문을 열 
어야만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요즘은 사람끼리도 마음을 안 엽니다. 목사끼리도, 장로끼리도, 성도끼리도 마음 
을 열지 않습니다. 마음을 열지 않으니까 말씀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 
님이 마음 밖에, 교회 밖에 계십니다. 교회들이 얼마나 타락하고, 혼합주의, 종교 
다원주의가 판을 치니까, 예수님이 그 속에 계시겠습니까? 절대 계실 수 없습니 
다. 
여기, ‘먹고 마신다’는 말은 세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침은 ‘아크라티스 
마(?κρατ?σμα)’인데, 마른 빵 조각을 포도주에 찍어 먹는 것을 말합니다. 점심은 
‘아리스톤(?ριστον)’인데, 도로가나 가로수, 광장에서 먹는 도시락을 말합니다. 
저녁은 ‘데이프논(δε?πνο)’인데, 오래 앉아서 이야기하며 먹는 친교의 식사를 말 
합니다. 이스라엘과 한국은 저녁을 많이 먹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데이프논입니 
다. 
여기서 먹는 것은 무엇일까? 이것은 마24:45절에 ‘때를 따라 양식’입니다. 그러 
니까 말씀입니다. 여기서 저녁을 먹자고 했습니다. 저녁은 특징적으로 종말을 의 
미합니다. 아침은 구약 시대를, 점심은 신약 시대를 예표한다면 저녁은 종말 시 
대, 재림때를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너희가 마음을 열면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먹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다시말하면, 마지막 때 작은 책, 계시록이 열릴 것이며, 
주님의 재림의 복음이 너희 안에 들어가서 이 말씀의 교제가 있겠다. 너와 내가 
말씀으로 교제하고, 말씀으로 하나되는 것을 얘기한다는 말입니다. 
지금 라오디게아 교회는 문을 열어야 하고, 열심히 믿어야 합니다. 마지막 때는 
계시록이 확 열릴 것입니다. 마지막에 일곱 영, 성령이 농사가 여물 때 비가 한번 
쏟아지듯이, 폭우가 한번 쏟아 지듯이, 성령께서 강하게 역사해서, 작은 책 요한 
계시록이 폭발해서 영혼들이 깨어나고 주님이 오신다고 봅니다. 지금은 열매 맺 
을 때입니다. 다 자라서 열매가 맺어서 알곡이 여물 때입니다. 


4. 이기는 자에게 주는 축복 

누가 이기는 자입니까? ‘이기는 그’라는 의미가 역사적으로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성도들 개개인에게 주시는 말씀이지만, 복음적으로는 전 세계 어느 시대, 어느 교 
회 성도에게 주신 말씀이면서도 예언적으로는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종말 
의 교회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1) 보좌에 함께 앉게 하심 

21절 =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패자는 비참합니다. 반드시 이겨야 합니다. 패자는 승자의 발에 입맞춥니다. 왕이 
나와서 적군에게 입을 맞출 때 발로 그 목을 눌러 버립니다. 발에 입을 맞추는 
것은 그의 노예가 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탄에게 지면 사탄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탄은 절대적으로 이겨야 합니다. 잡념이 들어오면 기도해서 
이겨야 합니다. 마귀에게 지면 안됩니다. 
이기는 자에게 축복해주는데, 재림이 임박한 상태의 복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기셨습니다. 육적으로 이기신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신앙적으로 이 
기신 것입니다. 보좌에 올라간다는 것은 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라오디게아 
가 재림이 역사적으로 임박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는 신앙으로 
이겨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