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록 2장
서론
1) 2장의 구조적 위치 1장은 과거 요한 당시, 2장, 3장은 아시아의 일곱 교회로서 현재 4장 이하는 미래 계시입니다. 현재는 교회시대라고 봅니다.
2장부터는 일곱 교회에 대해서 기록하는데, 특별히 4개의 교회가 등장합니다.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교회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 ‘4' 라는 숫자는 '동서남북'과 더불어 이 세상을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일곱 교회는 요한이 있는 밧모 섬을 기점으로 타원형을 그리며 소개하고 있습니다.
2) 일곱 교회에 대한 여러 견해 그러면 우리가 이 일곱 교회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것을 먼저 정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일곱 교회에 대한 견해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교회사의 일곱 시대를 예표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이는 일곱 교회를 일곱 시대의 역사로만 보는 견해입니다. 이 견해는 주로 세대주의 학자들이 지지하는 이론입니다. 또 각 교회가 일곱 중의 하나에 속한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이 견해는 전세계 어느 시대에나 각 교회가 일곱 중의 하나에 속하는 것으로 봅니다. 주로 무천년설 학자들이 따르고 있습니다.
세 번째로는 전세계 교회 전 시대에 주시는 말씀으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소아시아 일곱 교회를 통하여 전세계 교회, 전 시대에 주시는 말씀으로 보는 견해입니다.
따라서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는 영적으로 어느 시대나 전세계 교회에게 주시는 말씀으로만 해석하려는 이론입니다.
3) 일곱 교회에 대한 바른 견해 아시아 일곱 교회를 보는 급진적인 사람들은 일곱 교회 외에 다른 의미로 보지 말라고 합니다. 당시 교회로만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구약을 신약으로 연결하는 것에 질색합니다. 홍해바다면 홍해바다, 만나면 만나지 그것이 어떻게 신약과 연결되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신약도 예수님 당시 그 교회에 해당된다고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일차적으로 일곱 교회에 주신 말씀입니다. 일곱 교회로 주시는 말씀이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만 보는 것은 잘못입니다. 일곱은 완전수이니까 모든 지상교회를 말합니다. 또 예언적으로는 신약 시대를 일곱으로 구분했습니다. 그러므로 세 가지 의미를 다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당시 일곱 교회, 모든 교회, 예언적으로는 신약 일곱 시대를 예표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미국의 역사신학 교수인 밀하임 박사 책에 보면 “신약시대를 계시록 2, 3장에 근거하여 일곱 시대로 나뉜다” 고 나옵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절대 무리한 해석이 아닙니다. '예언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4) 신약의 구조 4장 이하를 대환난이라고 봅니다. 구약과 신약 크게 역사를 나누지만, 예수님 재림 이후에 천년왕국까지 포함해서, 구약과 신약과 천년왕국으로 나눠집니다. 2장, 3장을 통하여 신약 시대의 시대상을 보여줍니다. 저는 여기서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서 10여년전에는 이 일곱 교회를 가지고 너무 놀라서 저녁 부흥 집회를 했습니다. 신약시대가 오기 전에 예언된 것이 역사로 입증되었다는 것은 엄청난 사건입니다. 정리해보면, 지역적으로는 당시의 일곱 교회에 주신 말씀이지만 예언적으로는 당시부터 종말에 이르기까지 교회의 영적인 일곱 가지 시대적 상황을 구분하기 때문에 교회사의 일곱 시대적 특성을 영적으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5) 일곱 시대의 화폐에 나타난 영적 의미 영국 선교사 '죠지 브레스' 목사가 소아시아 각 도시의 화폐를 수집하던 중 각 도시 화폐의 다지인이 교회의 시대별 상황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사도시대를 예표하는 에베소 교회의 화폐 디자인은 나무 열매였습니다. 복음의 열매를 맺는 초대 교회를 예표합니다. 속 사도시대를 예언적으로 의미하고 있는 서머나 교회는 면류관이 디자인 되어 있는데, 이는 극심한 박해 속에 믿음을 지킨 속 사도시대를 예표하는 것입니다. 예언적으로 국교 시대를 의미하고 있는 버가모 교회는 사단의 위가 그려져 있으며, 이는 로마의 국교로 인정된 후 정교의 혼합시대를 예표하는 것입니다.
또, 암흑 시대를 예언적으로 의미하고 있는 두아디라 교회는 주문(呪文)이 새겨져 있으며, 이는 국교로 인정된 후 이방 풍습을 답습하는 시대를 예표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언적으로 개혁 시대를 의미하고 있는 사데 교회는 열린 두루마리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진리로 암흑기를 밝히는 종교 개혁 시대를 예표해 주고 있습니다.
또, 예언적으로 선교 시대를 의미하고 있는 빌라델비아 교회는 열린 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것은 미국의 주도 아래 전세계로 선교의 문이 열리는 것을 예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언적으로 종말 시대를 의미하고 있는 라오디게아 교회는 닫혀진 문짝이 그 화폐에 새겨져 있습니다. 그것은 미지근한 신앙으로 전도의 문이 닫힌 현시대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이제 에베소 교회부터 살펴보겠습니다.
Ⅰ. 에베소 교회[2:1-7]
1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되 2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3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6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 서론
1) 에베소는 타락의 도시임 에베소 교회는 밧모 섬에서 약 60마일 떨어져 있어 일곱 교회 중에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자리한 소아시아 지방에서 으뜸가는 도시였으며, 사도 요한의 모교회로서 초대 교회를 대표합니다. 이것은 예언적으로는 사도 시대를 예표합니다. 에베소가 제일 타락한 교회입니다. 세계적으로 항구도시는 매춘과 쾌락이 성합니다. 여기는 종교적으로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인 아데미 신이 있습니다. 아데미 신은 달의 신입니다. 태양신은 아폴로 신입니다. 이 아데미는 풍요와 생식의 신입니다. 이 아데미에는 유방이 13개나 나와 있습니다. 사람들이 배를 타고 오면 13개의 가슴이 달린 여자에게 넘어가지 않을 사람이 없는 것이지요.
성경은 지명, 기후, 땅, 토질까지도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이런 문화적인 것, 종교적인 것을 살펴보면 성경에서 황홀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아데미 신을 제사할 때는 로마의 황제가 와서 집례합니다. 그리고 이 신전에는 매춘을 위한 여자들 수천명이 있습니다. 왜 그렇게 많은 여자들이 신전에 존재하는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제사를 드리고 매춘으로 들어가려는 것입니다. 몇 개월간 끝없는 항해를 하던 선원들을 생각해 보세요. 오랜만에 배에서 내린 선원들은 여기에 다 빠져드는 것입니다. 아주 더러운 도시입니다.
2) 에베소 교회의 예언적 의미 행 20:31에 바울은 여기서 3년간 사역을 했다고 나옵니다. 그래서 에베소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예언적으로는 에베소 교회는 이 사도들, 사도시대, 교회가 세워진 시대로 봅니다. 그러면 신약 교회가 세워진 에베소 교회는 사도시대를 예표하고, 서머나 교회는 순교시대를 예표하고, 버가모는 국교시대, 두아디라 교회는 암흑시대, 사데 교회는 종교개혁시대, 빌라델비아 교회는 선교시대, 라오디게아 교회는 종말시대, 4장 이하는 대환난이 예언되어 있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야 할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음란문제를 해결 못하면 그 시대가 곧 종말을 고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이미 지나간 역사가 증명하고 있지 않습니까? 에베소에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제일 타락한 곳을 지명해서 교회가 시작되는 것을 보십시오.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죄가 더한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더합니다.
3) 어의에 나타난 의미 '에베소'라는 말은 '바랄만한, 미끄러지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단어의 뜻까지라도 사도 시대를 그대로 반영해줍니다. 교회가 세워졌으니까 바랄만하고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면 미끄러진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초대교회가 세워졌지만 그 신앙이 무너지고 미끄러지는 것을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한절 한절 보겠습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지요.
1.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
1절 =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1) 교회, 사자, 편지의 영적 의미 예수님의 일곱 교회가 모두, 각기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십니다. 그 나름대로 각기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교회에 공통적으로 나오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십시오. 그것은 '교회', '사자', '편지'입니다.
교회는 교회관을 말해줍니다. 사자는 주의 종, 목자관을 말해줍니다. 편지는 말씀관을 말해줍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을 주는 방편이 있는데, 그것이 곧 교회와 사자와 편지입니다. 보십시오. 믿음은 교회를 통해서 생깁니다. 주님이 부활 승천하신 것도 이 세 가지로 연결됩니다.
첫 번째가 교회입니다. 그리고 12사도, 주의 종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편지, 말씀을 남겼습니다.
2) 중요한 신앙관 세가지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는데, 모세, 주의 종을 부르고, 두 번째 십계명, 말씀을 주고, 성막, 교회를 줍니다.
신약에 예수님이 온 인류를 구원하시는데, 첫째, 12제자를 부르십니다. 계 22:16절에 "나 예수는 교회를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증거케 하였다" 고 했습니다.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너무 너무 중요합니다. 교회와 주의 종과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믿음을 주어서 그 믿음으로 구원받게 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교회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단순한 세상 조직이 아닙니다. 주의 몸입니다.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 성령을 보내심으로 탄생했습니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사랑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그림은 교회입니다. 말씀은 깨소금 같습니다. 그런데 배부르면, 너무 흔하면 귀한지를 모릅니다. 일본에서 십자가를 찾아보려고 30분을 달려도 찾지 못했습니다.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그런데 한국은 너무 많으니까 귀한지를 모릅니다. 거기는 주의 종들을 찾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는 너무 많은 목사님들이 계셔서 도무지 귀한지를 모릅니다. 여러분 내가 가진 통장이 귀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가진 집문서, 땅문서가 귀한 것이 아닙니다. 교회, 목자, 말씀이 귀합니다. 그러므로 이 세 가지에서 멀어지면 바로 시험에 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갈 때 어떻게 갔습니까? 성막이 앞에 가고, 그 다음에 제사장이 따라갑니다. 여기서 너무 멀리 떨어지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단 지파가 제일 뒤에 가다가 타락하고 맙니다.
그러니까 교회를 절대적으로 가까이해야 합니다. 목사와도 가까워야 합니다. 영적으로 가까워야 합니다. 말씀을 가까이해야 합니다. 주님의 첫째 모습을 봅니다.
1) 주의 종을 붙드시는 주님
1절 =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별'은 '주의 종'이라고 했습니다. 신약 시대 교회가 시작되니까 12 제자들을 붙들어 주셨습니다.
이 '붙잡는다'는 것은 헬라어로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에코'입니다. 손목을 붙잡듯이 가볍게 잡는 것입니다. 그런데 '크라테오'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것은 못 빠지도록 잡는 것입니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붙잡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기 아니면 살기로 붙잡아 주십니다.
목사님들은 이런 것을 실감합니다. 위험이 있을 때마다, 위기를 만날 때마다 주께서 강하게 붙들어 주셨습니다. 이 말씀이 어떻게 은혜가 되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주께서 나를 붙드시고 계신다고 생각하면 내 영혼이 힘이 생깁니다.
목사들은 외롭습 니다. 고독합니다. 정말 너무 너무 힘들어서 주저앉을 것만 같은 때가 한두번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모릅니다. 그래서 더욱 힘이 드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하루 하루 목양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주께서 그 오른손에 주의 종을 붙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2) 교회를 지키시는 주님
1절 = '…일곱 금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촛대'는 교회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곳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머리가 되십니다. 교회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성막을 보면 지성소가 있는데, 촛대와 떡상, 그리고 향단이 있습니다. 떡상은 생명의 떡 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향단은 우리를 위해 기도하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이십 니다. 등대는 이 땅에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전부 예수입니다.
성소는 창문이 없습니다. 외부 빛이 들어오면 큰일납니다. 교회는 세상 빛이 들어오면 큰일납니다. 빛은 요 1:4에 보면, '그 안에 생명이 있으니 이 생명은 곧 빛이라' 다시 말하면 기름은 성령, 불이 밝혀진 것은 생명의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번제단에 불이 꺼지면 큰일납니다. 이 불은 성령의 불입니다. 아론에게 붙여진 이 불은 1000년을 갔다고 합니다. 우리의 심령 속에 성령의 불이 커지면 큰일납니다. 이 교회는 빛 되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교회의 목적은 예수의 생명의 빛입니다. 교회 나오는 것은 누구 사귀려고 나온 것 아닙니다. 생명의 빛되신 주님 만나려고 온 것입니다. 교회 흉보 는 것에 대해서는 반드시 심판이 있습니다. 교회는 주님의 몸입니다. 1:20절에 별은 주의 사자이고, 촛대는 교회라고 했습니다. 가을에 코스모스가 만개했는데,
산 밑에 있는 코스모스는 가늘고 힘이 없고, 바람만 불면 쓰러질 것 같습니다. 햇빛을 덜 받는 곳에서는 자라지도 못하고 꽃도 못피운 것을 보았습 니다. 예수가 관통하지 못하면 믿음의 꽃을 볼 수 없습니다. 믿음이 자라지 않습니다.
2. 칭찬
23절 =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1) 에베소 교회의 사역 내용
2절 =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행위?는 행함의 신앙을 말합니다. ?수고?는 교회를 위한 수고입니다. 이것은 '코포스' 라는 단어로서 피 흘리기까지 수고하는 순교적 수고를 말합니다. 인내도 죽기까지 참는 인내를 말합니다. 에베소 교회는 믿음의 행위와 수고와 인내가 있었습니다. 에베소 도시 가 풍요와 문화, 정치, 부요, 쾌락의 도시입니다. 그런데 교회 세워졌다고 사람들이 나오 겠습니까? 나오는 사람들은 바보 같지요. 얼마나 믿기가 어려웠겠습니까? 그런데 끝까지 수고했습니다. 인내했습니다. 예언적으로는 초대교회를 말합니다.
2)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함
2절 =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악한 자들은 당시의 이단을 말합니다. 하나는 '에비온파'입니다. 이 파는 율법만을 강조합 니다. 안식교가 왜 잘못입니까? 믿음보다 율법을 강조합니다. 토요일을 율법적으로 강조 합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 또 하나는 노스틱', 영지주의입니다. 영과 육을 분리시킵니다. 육을 더러운 것으로, 영을 거룩한 것으로 봅니다. 어느 시대나 이단이 있습니다. 지금 최대의 이단은 무엇인가? 문선명, 박태선 말할 것도 없이 이단이지만 지금 그것에 대해서는 무장이 되어 있습니다. 정작 무서운 최대의 이단 은 종교다원주의입니다. 이것은 생명을 걸고 용납해서는 안됩니다. 이 혼합주의는 교회안 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한국 강단들에서 이 설교가 선포되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너무 거대한 집단이라 침묵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따르지 못할망정 신앙적으로 철저히 배격하 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가 통합주의자들, 혼합주의자들, 성경을 떠난 자들, 예수 외에도 구원이 있다고 하는 자들과 싸우면 주의 칭찬이 있을 것입니다.
3) 거짓 것을 드러냄
2절 =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거짓된 자들이 로마와 동방 사이에 위치한 무역로인 에베소에 많이 등장했습니다. '자칭 사도라'하는 것은 그 때 당시의'니골라당'을 말합니다. 초대교회 일곱 집사 중에 '니콜라우스'라는 사람이 진리를 떠났습니다. 그래가지고 가까이 지내던 사람들이 당을 결성했는데 그것이 곧 니골라당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교회에서 당 짓는 것을 가장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러면 교회에서는 인간적으로 가까워서는 안됩니다. 인간적으로 가까워지면 꼭 뒷 탈이 생깁니다. 그리고 교회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인간적으로 가까우면 인간적으로 섭섭해 질 날이 옵니다. 우리는 누구와 가까워야 합니까? 주님과 가까워야 합니다. 성도들과는 어떻게 가까워야 합니까? 영적으로 가까워야 합니다.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관계가 되십시오.
4) 인내
3절 = '또 네가 참고…'
주를 위해 참는 일은 힘이 없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로 참는 것이 무엇입니까? 얼마든지 참지 않아도 되지만 참는 것 아니겠습니까? 힘이 없어서 당하는 것은 참는 것이 아닙니다. 육적으로는 이길 수 있지만 영적 승리를 위해서 참아 보세요. 그것이 승리입니다. 지금 예수 때문에 참고 계십니까? 주께서 기억하십니다. 에베소 교회가 어떻게 참았던가 를 주님이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기가 막힌 상황에서 억울함을 누르고 참았습니까? 잘 하셨습니다. 주께서 그 인내를 칭찬하실 것입니다.
5) 견딤
3절 =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주의 이름을 위하여 견뎠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자기 명예 때문에 참는 일이 많습니다. 한번 명예에 손상을 입으면 회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보통 지나가는 경우가 생깁니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칭찬거리가 아닙니다. 그러나 '내 이름을 위하여', 예수 이름 때문에 견디면 왕노릇하게 됩니다.
6) 열심
3절 = '…게으르지 아니한 것…'?
열심히 일했습니다. 초대교회를 말합니다. 우리는 한번 살다 가는 것, 정말로 예수님께 미 쳐 버리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권면합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가 받아야 할 메시지입니다. 게으리지 말아야 합니다. 게으름은 죄악입니다. 더욱이 지금은 때가 악합니다. 세월을 아껴야 합니다. 게으른 종은 악한 종입니다. 선한 종은 부지런합니다. 주의 일에 부지런하십시오.
3. 책망
46절 =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1) 처음 사랑을 잃어버림
4절 =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책망은 한가지가 나옵니다. 바울이 세워서 그렇게 성장했는데, 나중에 열심이 식어 버렸습니다. 주위의 쾌락에 만연해서 열심히 꺼져 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초대교회의 특징과 일치합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설교한번 하니까 '어찌할꼬' 통회 자복했습니다. 날마다 모였습니다. 주님을 기다렸습니다. 죽도록 일했습니다. 그런데 5장 이하부터 보면 식어버립다. 5장에는 아나니아 삽비라사건, 6장은 구제 물자 때문에 옥신각신, 8장은 돈으로 성령을 사려는 시몬이 나옵니다. 15장은 율법이냐 복음이냐하는 무서운 이단 논쟁이 있습니다. 주의 은혜가 이 교회에 함께 하는데 이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를 잃어 버렸습니다.
4. 권면
5절 =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1) 회개 촉구
5절 =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
회개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식어진 원인을 점검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회개는 성도의 최고의 축복입니다. 계 22:14에서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교회는 달라진 것이 없는데, 자신들은 변합니다. 예수님은 변하지 않는데 성도들이 변합니다. 말씀은 변함이 없는데, 말씀은 받는 이들이 변합니다. 회개하고 처음행위를 가지라고 합니다. 철저히 처음 그 열정과 믿음을 가지라고 합니다.
우리 교회 처음 오시면 말씀 받고 보통 좋아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쩔 줄을 몰라합니다. 그런데 정신없이 2, 3년 먹다가 조금 식습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목사님 말씀이 옛날에는 그렇게 좋았는데 지금은 안 나온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변한 것이 없습니다. 스스로 변한 것입니다. 처음 사랑이 식은 것입니다. 세상 이치가 그렇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도 시간이 흐르고 익숙해지면 좋은지를 모릅니다. 그러니까 복음을 사랑해야 합니다. 처음 사랑을 회복하기 바랍니다.
2) 회복을 권면
5절 = '…처음 행위를 가지라…'
우리가 에베소 교회를 생각할 때 가장 쉽게 떠올리는 말씀이 이 말씀입니다. '처음 사랑을 버렸다. 그 처음 행위를 가져라' 처음 가졌던 신앙의 그 열심을 회복하라는 것이지요. 회개에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이 권면은 우리 모두가 받아야 할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처음 만났던 감격은 밀애와 같습니다. 얼마나 뜨거운지 모릅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그 모든 사랑도 흘러가 버립니다.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처음 행위를 가지라' 처음 행위를 기억해 보세요. 여러분이 어떻게 했습니까? 모든 것이 감사하지 않았습니까? 모든 것이 감격스럽지 않았 습니까? 얼마나 순수했습니까? 얼마나 뜨거웠습니까? 얼마나 부지런했습니까? 얼마나 울며 찬양하고 기도했습니까? 얼마나 영혼을 쥐어 잡고 울었습니까? 예배와 말씀을 사모했습니까? 그 행위가 주께는 향기로운 것입니다. 그것을 회복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교회의 축복과 사명을 옮긴다고 하지 않습니까?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직 하나님께서 내게 기회를 주셨을 때, 나를 사용하고 계실 때 회개하고, 합당한 열매를 맺고, 처음 행위를 갖기 바랍니다.
3)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함
6절 =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일곱 집사 중의 한 사람이었던 니골라를 중심한 니골라당의 주장은 이것입니다. '한번 믿은 후에는 어떠한 행동도 죄가 되지 않는다. 육체는 악하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다.' 이렇게 미화합니다. 이것은 교묘하게 속이는 말입니다. 사탄의 음성입니다. 기독교의 적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교회를 파괴하는 이단 사상들을 미워해야 합니다. 용인하면 안됩니다. 오늘 이 시대도 다원주의 사상, 혼합주의 사상, 잘못된 이단들이 교회를 무너뜨리려고 합니다. 싸워야 합니다. 미워해야 합니다. 우리는 때로 싸움의 대상을 오인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가 싸울 대상은 교우들이 아닙니다. 니골라당의 행위와 싸워야 합니다. 혼합주의와 싸워야 합니다. 종교 다원주의와 싸워야 합니다. 이 시대 부패한 어두움의 세력과 더불의 싸워야 합니다. 혹시 여러분이 그것을 동경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미련을 두고 있지 않습니까? 미워해야 합니다. 잘못된 사상을 가까이 하지 마십시오. 미워하십시오. 싫어하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의 영혼에 유익합니다. 주께서 그것을 원하십니다.
5. 이기는 자에게 주는 축복
7절 =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귀 있는 자'는 영적 귀를 가진 자를 말합니다.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편지를 보냈다고 하는 그것이 성령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1) 생명나무 과실을 먹는 축복
7절 =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낙원이 어디입니까? 에덴동산입니다. 범죄한 후 하나님은 에덴의 오른 쪽 문을 막았습니 다. 거기 나오는 그룹은 천사들로서 주의 종을 예표합니다. 화염검은 성령과 말씀의 예 표성입니다. 생명나무를 먹으면 영생합니다. 그런데 동쪽 문을 막아 버렸습니다. 그런데 에베소 교회를 통하여 이것을 먹게 합니다. 구약은 이것을 성막을 통해 예표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막은 동쪽 문이 열려 있고, 제사장이 동쪽으로 들어옵니다. 에덴동산에 막혔던 영생의 길을 여시고 들어오는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께서 막혔던 동쪽 문을 여셨습니다. 교회를 통하여 구원하실 것을 보여 줍니다. 칼빈은 “생명나무를 예표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라고 했습니다. 교회를 통한 구원의 약속입니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교회 안에만 구원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이 있습니다.
Ⅱ. 서머나 교회[2:8-11] 8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이르시되 9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 10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11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서론
전체적 측면에서 볼 때, 서머나 교회의 주제는 순교입니다. 서머나 교회를 기록한 이유가 두 가지입니다. 예언적으로는 순교시대를 말하지만, 복음적으로, 신앙적으로는 순교의 신앙을 말하기 위해서 서머나 교회가 기록된 것입니다.
버가모 교회는 세속화에 대해서 말해줍니다. 세속화의 대표적인 것이 정치와 결탁하는 것, 국교화되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의 주제는 생명입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영광입니다. 교회가 영광을 추구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암흑시대입니다. 교회가 세상의 영광을 다 가져간 것입니다. 교회는 십자가의 길을 걷는 것이지, 세상 영광을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사데 교회는 개혁입니다. 교회는 날마다 새로워져야 합니다. 교회는 변화되어져야 합니다. 한번 은혜 받은 것으로 몇 년을 견디려고 하면 안됩니다. 매일 매일, 매주일, 매주일, 매년 매년 교회는 새로워져야 합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선교입니다. 교회는 성도는 전도하고 선교하는 것입니다. 전도와 선교 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타락입니다. 타락할 때 '내 입에서 토해버리리라' 심판받는다. 용서하지 않겠다. 그러니까 타락할 때 빨리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전세계 교회에 전성도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의 핵심이 이 일곱 가지입니다. 서머나 교회는 에베소에서 북쪽으로 약 80Km 지점에 있으며 에게 해 서안에 위치하여 아름답고 광대하고 뛰어난 도시였습니다. 또 '아시아의 지배자'와 '대도시'로 불리는 영예를 놓고 에베소와 버가모와 더불어 쌍벽을 이룰 정도로 아름다운 도시였습니다. 예언적으로는 순교시대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
8절 =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서머나'는 '몰약'이라는 뜻입니다. 이곳은 에베소 북방, 64Km가 떨어져 있습니다. 아시아 제일의 아름다운 도시입니다. 주전 195년 신전이 세워졌습니다. ‘로마나’라는 여신 입니다. 초대교회로부터 313년 기독교 공인이 될 때까지 박해가 엄청났던 곳입니다. 순 교자가 많이 나왔습니다. 사도 요한의 제자인 폴리갑 교부가 나왔습니다. 이 분은 유명한 순교자입니다. 한번만 예수 부인하면 살려주겠다고 하니까 “86년 평생을 하나님은 한번도 나를 모른다 하지 않았는데, 내가 어떻게 모른다고 하겠오” 해 가지고 몸을 갈기갈기 찢어 죽였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 교회는 아름다운 도시였는데, 자연까지도 상징적으로 연결시키고 싶습니다. 순교하는 이 교회의 신앙이 아름다웠다는 것을 연결하고 싶습니다. '몰약'은 항상, ‘순교‘, ’고난‘, ’선지자‘라는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동방박사가 세 가지 예물을 드렸는데, 거기 몰약이 선지자권을 말하고, 고난을 상징합니다. 아프리카 소마리아 산에서 나는 감람과에 속하는 것입니다. 칼로 나무를 벗기면 거기서 수약이 나옵니다. 그것을 고체화해서 소화제, 마취제, 방부제로 사용합니다. 이렇게 이름 자체까지도 순교시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1) 시작과 끝이 되신 주
8절 = '…처음이요 나중이요…'
‘처음’은 창조주 하나님, ‘나중’은 재림하실 예수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창조와 재림을 말하는 것으로서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기 ?처음?은 온 우주의 시 작과 기원입니다. 예수님은 창조주요, 시작이요, 기원입니다. ?나중?이라는 것은 예수 님이 완성자요, 끝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가 어떤 예수입니까? 처음과 나중 이신 예수입니다. 세상 사람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세상을 삽니다. 그들의 출신은 모 호합니다. 도무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모르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예수 안에 붙 들려 사는 사람은 처음과 나중을 확실히 알고 사는 것입니다. 주님은 처음이십니다. 주 님은 나중이십니다. 주님은 처음과 나중, 알파와 오메가이십니다. 그 주안에 거하시기를 바랍니다. 2) 부활의 주님
8절 =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왜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나 타나는가? 순교하는 교회니까, ?너희들의 육체는 죽지만 염려하지 말아라.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언젠가 한번은 죽습니다. 어차피 한번 죽는 것, 순교의 최고의 영광인데 도, 그렇게 고귀한 것인데도 우리가 못합니다. 이 교회는 책망이 없습니다. 순교한 곳에 는 책망이 없습니다. 순교한 교회니까 주님이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순교는 어떤 사람이 하는가? 믿음이 좋은 사람이 하지요.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더 원색적으로 말하면 부활 신앙이 있는 사람, 죽어도 다시 산다는 확신이 있는 사람이 순교합니다. 그런 사람이 순 교적 각오로 살 수 있습니다. 죽었다가 살아나신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죽어도 삽니다. 이 것을 믿습니까? 그들은 주를 위해 순교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주께서 죽었다가 살 아나신 것을 강조해 주시는 것입니다.
2. 칭찬
9절 =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1) 환난과 궁핍이 있었음
9절 = '…네 환난과 궁핍…'
여기 '환난'은 예수님 때문에 받는 환난입니다. 이 교회는 예수 믿는 다는 것 하나 때문 에 핍박을 받고 순교를 당했습니다. 여러분들, 남편이 못 믿게 하는데 교회 나온다. 생활 이 어려운데도 예배 시간 지킨다. 이것도 다 환난의 종류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겪는 외 부적 고통은 다 환난입니다. 네로가 핍박을 했는데, 역청에 말아서 산 채로 불을 붙여서 자기 정원의 횃불로 썼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야생 동물 가죽옷을 입혀서 사냥개로 찢어 죽이게 했습니다. 바늘로 찔 러 죽이게 했고, 열로 녹힌 쇳물을 부어서 부지직 부지직 소리가 나면서 타 죽게 했습니 다. 뜨거운 불 놋접시를 몸의 가장 민감한 곳에 대서 고통을 주었고, 눈을 빼 버렸고, 고 통을 길게 하려고 손과 발을 태우면서 온 몸에는 차가운 물을 부었습니다. 바클레이 주석 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클레이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런 것은 생각도 하기 싫은 것들이지만 예수 믿기로 작정했으면 이런것들은 각오하고 있어야 한다.” 옳은 말입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살려준다고들 하는데, 기독교는 죽어야 한다고 합니다. 천국이 이런 자의 것입니다. 천국을 소망하면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도 순교해야 합니다. 고난당해야 합니다. 예수 때문이라면 참고 견뎌야 합니다. 육적으로는 못합니다. 성령이 하십니다. ?들립시스?라는 단어입니다. 물체의 중압에 눌려서 산산히 깨져버린 비참한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칭찬들은 것입니다. '궁핍'에는 두 가지 개념이 있습니다. '페네스'라는 것으로 상대적 가난입니다. 그런데 '프토케이아'이라는 것으로 절대적 가난을 말합니다. 서머나 교인들은 예수 하나, 믿음 하나 지키기 위해서 전부 날려 버렸습니다. 폴리갑도 그랬습니다. 예수 때문에 그렇게 가난할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짐이 너무 많으면 수영 못합니다. 수영복만 입어야 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이 땅에서도 축복해 주십니다. 그것은 이 땅에서 누리고, 영광받고, 타락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큰 일을 맡기기 위해 주십니다. 서머나 교회는 이 환난과 궁핍으로 인해 칭찬했습니다.
2) 신앙의 축복
9절 =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
당시 기독교인이 왜 가난했는가? 사회적으로 대개 노예, 하급 신분이었기 때문입니다. 또, 폭도들로부터 고의적인 약탈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육적으로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성경은 그들을 ?부요한 자?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두 가지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믿음 만은 부요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철저한 믿음이 부요한 것입니다. 또 하나 는 ?이 땅에서는 주님을 위해서 다 잃어 버렸지만 천국이 너희 것이다? 천국의 부요입 니다. 8복에도 이것이 나오지 않습니까? 우리는 실상 부요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자칭 부자인데, 실상은 벌거벗은 사람이 되면 안됩니다. 우리는 이미 부요한 자입니다. 천국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믿음의 부자가 진짜 부자입니다. 믿음에 투자하십시오. 믿음을 키우십시오. ‘실상 부요한 자’로 나타나시기를 바랍니다.
3) 유대인의 방해받음
9절 = '…자칭 유대인…'
여기 ‘사단의 회’는 복음을 방해하는 유대인들을 가리킵니다. 그 괴롭힘에서 이겼습니다. 교만한 자들, 음녀 바벨론에게 이겼습니다. 그것을 우리 주님이 칭찬하고 있습니다. 왜 그 들이 이렇게 고난을 받았느냐면 황제에게 숭배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상숭배는 꼭 절상에 엎드린 것만이 아닙니다. 탐심이 곧 우상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우 상입니다. 자녀가 하나님보다 앞서갑니까? 그것은 여러분을 죽게 하는 독이 됩니다. 물질이 하나님 보다 더 사랑스러운가요? 빨리 해결해야 합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영혼을 죽게 합니다. 그것이 명예입니까? 지위입니까? 그것이 어떤 것이든 이미 그것은 여러분의 심령속에 버 티고 앉아 있는 보이지 않는 교묘한 우상이 되고 있습니다. 찍어 버리십시오. 바알과 아 세라는 찍어 버려야 합니다. 사단의 훼방에서 이기십시오.
3. 권면
10절 = '네가 장차 받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 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 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1) 위로
10절 =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책망이 하나도 없습니다. 순교하는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면류관, 꽃이 순교입니 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최후의 종착역은 순교입니다. 앞으로 계속 고난 과 시험이 올 것을 말해 줍니다. 그 고통 속에서도 위로해 주십니다. '염려하지 말라. 두려워 말라.'는 위로의 권면입니다. 우리 주님은 모든 고난과 고통, 환난과 극한 어려움이 오기 전에 그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찾아가시고 먼저 그것을 감당할 만한 위로를 주십니다. 여러분은 이 비밀을 경험하셨나 요? 우리 스스로 어떻게 이깁니까? 주께서 주신 힘으로, 주께서 주신 위로로 이기는 것입 니다. 보세요. '장차 받을 고난이 있다. 그러나 두려워 말아라' 이 음성이 여러분 삶의 현 장가운데서 경험되기를 바랍니다.
2) 환난의 기간
10절 =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어떤 이유로 핍박했는가를 보면 기가 막힙니다. 로마 황제를 신으로 섬기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핍박했습니다. 또, 성만찬을 보며 사람의 피를 마신다는 것이었고, 예수 안에서 형 제 자매라는 사실을 근거로 가정 파괴자라고 했습니다. 또 성령의 불을 근거로 방화범이 라며 핍박했습니다. ?십일 동안?은 잠깐 동안입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는 열 황제가 엄청나게 기독교 를 핍박했습니다. 마지막 때 무서운 대 환난이 있지만, 그 날을 감해서라도 지켜 줄 것을 말씀해 주십니다. 고통이 있지만 하나님이 반드시 지키십니다. 즐거움의 시간은 왜 그렇게 짧게 느껴집니까? 고난의 시간은 왜 그렇게도 길단 말입니까? 그러나 주의 말씀을 새기십시오. 그 기간은 단지 십일입니다. 숫자 십일이 아닙니다. 주께 서 함께 하시는 고난의 세월은 십일과 같은 것입니다. 주와 동행하기 때문입니다. 깊은 밤 어린아이가 숲을 걸어도 아빠와 가면 길게 느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짧은 거리도 혼자 가면 얼마나 긴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그러므로 십일입니다. 힘 을 내십시오. 주를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승리를 누리십시오.
3) 권면과 약속
10절 =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신앙의 정절과 죽음을 각오한 충성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충성이 무엇입니까? 죽기까지, 순교하기까지 충성하라는 것입니다. 복음이 들어갈 때 피를 많이 흘린 민족은 교회가 크 게 성장합니다. 한국이 엄청난 순교자가 나타났습니다. 집안도 그렇습니다. 첫 신앙이 핍 박을 많이 받으면 반드시 복음이 확산됩니다. 순교적 각오로 하는 신앙의 자세를 보여 주 어야 합니다. 죽음의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순교가 최고의 신앙입니다. 면류관은 상급입니다. 성경에 면류관이 일곱 가지가 나옵니다. 첫째, 생명의 면류관이 있 습니다(약1:12). 둘째, 썩지 않는 면류관이 있습니다(고저9:25). 셋째 금 면류관이 있습니 다(계4:4). 넷째, 의의 면류관이 있습니다(딤후4:8). 다섯째, 영광의 면류관이 있습니다(벧 전5:4). 여섯째, 기쁨의 면류간이 있습니다(빌4:1). 영화로운 면류관이 있습니다(잠4:9). 여기는 생명의 면류관입니다. 면류관은 영원성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생명의 영원을 말합 니다. 그러니까 영원한 상급입니다. 순교한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면류관은 서머나와 빌라델비아 교회에만 약속되어 있습니다. 순교와 선교하는 교회에만 주신 약속 입니다.
4.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
11절 =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1)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함
11절 =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계시록은 눈 귀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영적 눈과 귀를 말합니다. 둘째 사망의 해는 하나님 앞에 심판 받는 것입니다. 영혼이 심판받는 것입니다. 첫째 사망은 육신의 죽음 입니다. 그것은 잠간입니다. 둘째 사망은 영혼이 불못에 가는 것입니다. 끝나지 않는 고통입니다. 그러니까 서머나 교회에는 영원한 생명을, 면류관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저는 이 말씀을 받으면서 늘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순교자가 되게 해 주옵소서. 순교의 신앙을 주옵소서. 한번 죽는 것, 자동차 사고로 죽지 않고, 암으로 죽고, 주님 필요할 때 이 목을 가져가소서' 저는 그렇게 기도합니다.
Ⅲ. 버가모 교회[2:12-17] 12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13 네가 어디에 사는지를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14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15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16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1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서론
1) 계시록에 예언된 중요한 사실들 요한계시록은 너무 다양하고 난해합니다. 표현이 상징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계시록은 될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되어진 것을 보고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미 본 것도 안 믿습니다. 하물며 아직 되어지지 않은 미래의 될 일을 믿는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장차 될 일을 계시록을 통해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계시록은 크게는 두 부분입니다. 신약의 예언성인데, 초림부터 크게 나눕니다. 초림부터 재림까지, 그리고 재림이후 천년왕국입니다. 신약의 부분 중에서 또 둘로 나뉩니다. 대환난. 계시록 1장부터 3장까지는 신약시대, 교회시대입니다. 어느 교회에나 주신 말씀이지만, 예언적으로는 교회시대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예언을 알 수 있다는 것은 보통 감격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엄청난 사건입니다. 오늘 2장은 대환난이 오기 전의 모습입니다. 아시아에 일곱 교회가 있습니다. 계시록은 예언적으로 일곱 가지 중요한 사실을 얘기해줍니다.
(1) 신약 시대를 일곱 구분하여 보여 줌 첫째, 2장 3장에서는 일곱 교회를 통하여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예언적으로는 신약시대를 일곱으로 구분합니다.
저는 지금을 라오디게아 시대로 봅니다. 무엇으로 보나 라오디게아 시대입니다. (2) 징조에 대해 알려줌 두 번째는 징조에 대해서 일러줍니다. 성경에 얼마나 많은 징조가 있습니까? 많은 징조가 요한 계시록에 기록되고 있습니다.
(3) 재림에 대해 알려줌 세 번째는 재림의 모습입니다. 재림의 자세한 모습까지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 1장에 보면 다시 오시겠다는 예언만 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오실 것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계19장에서 하늘이 열리고, 백마를 타고, 이한 검을 가지고 오셔서 심판하실 것을 말씀해 주십니다.
성경 어디에도 재림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24장에서 조금 언급되어 있습니다. 계6장에 보면 어린양의 진노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4) 천국의 모습을 보여줌 네 번째는 천국의 모습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천국의 모습을 자세 히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거지 나사로와 부자 비유에서 가볍게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오늘 밤 너와 네가 낙원에 있으리라? 했습니다. 그러나 천국을 몰라요. 그런 데 요한계시록에서는 천국의 모습을 자세히 기록합니다. 계시록 20장에서는 천년동안 왕 국을 누릴 것을, 21장에서는 새하늘과 새 땅에 대해서 22장에서는 죽음이 없고, 눈물도 없고 곡하는 것도 없고 애통하는 것도 없는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줍니다.
(5) 지옥의 모습을 보여줌 다섯 번째는 지옥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구약 성경은 지옥에 대해서 상징적으로 묘사합니다. '게헨나' 몰록 신을 섬겼던 잔인한 모습을 지옥을 연상시켜 줍니다. 밑에서 불을 타고 있는 곳에다 자식, 어린아이를 집어넣습니다. 부모가 보게 합니다. 거기는 연기가 항상 나고, 아이가 잿더미가 될 때까지 태웁니다. 이것이 지옥입니다. 인간에게 이해시킬 방법이 없으니까 이것을 가지고 비교해서 보여 준 것입니다. 신약에 와서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를 통해서 보여줍니다. 너무 고통스러워서 혀에 물 한 방울만 찍어달라는 곳입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서는 자세히 기록합니다. 14장을 비롯해서 19장, 20장에서 보여줍니다. 지옥에 대한 얘기가 제일 많이 나온 곳이 요한계시록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을 배우면 하나님을 떠날 수 없는 것입니다. 2) 버가모 교회는 국교 시대를 예표함 버가모 교회는 서머나에서 북쪽으로 100Km에 위치한 내륙도시에 있었던 교회입니다. 버 가모는 비옥한 카이쿠스 강의 계곡 연변의 100m 높이의 원추형 구릉 위에 위치하고 있 습니다. 예언적으로는 기독교가 로마 정부의 국교로 인정받아 타락하게 된 국교 시대를 예표합니다. ‘ 버가모’는 합성어입니다. ‘펠’ ‘가모’입니다. 설교자가 그 뜻 가운데 자기 지향하는 바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버가모는 버가뭄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결혼한 곳”, “높여졌다.” 또는 “탑과 결혼”을 말합니다. 그래서 버가모 교회는 교회가 세상과 결탁한 곳, 정치와 결합한 것을 말합니다. 교회가 이 세상에서 높아져 버렸어요. 교회가 이 세상에서 국교가 되어 버렸어요. 로마가 세계를 지배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국교가 되니까 기독교가 세계의 종교가 되어 버렸습니다. 육적으로 권력, 물질, 영광을 갖게 되었습니다. 권력과 물질, 영광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로되, 이런 것들을 통해서 무섭게 타락해 버린 것입니다. 이곳은 교회가 높이 들린 교회입니다. 참 놀랍습니다. 그 자연환경, 정치, 경제의 구조까지도 예언적인 것을 뒷받침해 줍니다. 하나님 말씀에 미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000년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이 땅에 태어나서 살다가 죽고 갔습니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왜 그 많은 사람이 이 말씀에 미쳐 삽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정확하고 신비하기 그지없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카타콤에 숨어살다가 312년에 막텐티우스 황제가 있었는데, 313년에 콘스탄틴 대제가 싸워서 이겼습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가 기독교 신자였습니다. 초대교인들이 생명을 무릅쓰고 노예로 끌려가서 그 어머니에게 전도한 것이 성령이 역사해서 예수를 믿었습니다. 당시는 기독교인을 잡으면 죽이는 시대입니다. 그런데 고관들이 믿으니까 죽이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 어머니가 아들에게 늘 얘기했습니다. 예수를 믿으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래서 막텐티우스와 싸울 때 십자가가 나타났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박해 금지령을 선포했습니다.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가 있었는데, 여기서 기독교를 국교로 정해 버렸습니다. 버가모 교회는 이런 국교 시대의 배경과 연결시킬 수 있습니다. 이런 배경을 생각하면서 말씀을 상고하시기 바랍니다.
3) 버가모 교회는 사단의 위가 있는 곳임 이 버가모 교회는 상업도시이고 정치적으로 중요합니다. A.D. 133년에 로마에 귀속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로마가 아시아 지역의 수도로 삼았습니다. 여기는 제우스 신을 섬겼습니다. 아데나 신, 지혜와 예술의 신도 있었습니다. 의학의 신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뱀 신입니다. 전국의 환자들이 뱀과 신체적 접촉을 하면 병이 낫는다고 뱀과 신체적 접근을 했습니다. 사탄과 접촉한 것을 보여주기라도 합니다. 예언과 성취는 너무도 일치합니다. 놀랍습니다. 그래서 버가모를 사단의 위가 있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탑과 결혼한 것은 정치와 결혼한 것입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
12절 =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버가모는 국교시대이니까 여기에 적절한 모습으로 나타나십니다. 좌우에 날이 선 검을 들 고 오십니다. 좌우에 날 선 검은 예리한 말씀을 예표합니다. 말씀의 예리성, 심판성으로 이 부분을 봅니다. 기독교가 영광을 받고 타락하니까 예수님이 말씀의 칼을 가지고 나타 나서 말씀 떠나면 안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도 국교시 대인 것을 보여줍니다. 주님은 말씀으로 우리를 수술하십니다. 예리한 말씀의 검으로 우 리를 고치십니다. 상한 맘도 고치십니다.
2. 칭찬
13절 =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1) 충성된 증인 안디바를 칭찬함 이 버가모에는 뱀 모양의 ‘에이스클레피오스’라고 하는 치료의 신전이 있었습니다. 술신 으로 통하는 제우스 신전도 있었습니다. 승리자 아테네의 신전도 있었습니다. 지도자 디 오니소스의 신전도 있었습니다. 아구스도에 바친 신전도 있었습니다. 이후에도 황제를 위한 신들이 계속 세워졌습니다. 그래서 ?사단의 위?가 이 도시를 지배해 버렸습니다. 오늘 이 시대도 맘몬, 물질의 신, 탐욕의 신, 정욕의 타락의 신들이 다 지배해 버렸습니 다. 이러한 지역에서도 이 버가모 교회는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 이름을 굳게 잡았다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를 굳게 잡아 야 합니다. 안디바는 그 교회의 중진이었던 같습니다. 자세한 기록은 전해지고 있지 않습 니다. 이름을 굳게 잡았고, 충성했다고 했고, 예수를 전하는 증인이라고 했습니다. 그 타 락의 현장에 안디바와 같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국교 시대에 다 100% 타락한 것이 아닙 니다. 좋은 초대교인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안디바가 순교했습니다. 국교 시대에도 믿음을 지킨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 카타콤이 지하 17, 18쯩까지 있다고 합니다.
2) 하나님이 지켜주심 신문에 보니까 “21세기의 과학은 카타콤을 벗길 일”이라고 했습니다. 로마가 세계를 지 배하는데, 황제를 숭배하지 않으면 다 잡아 죽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미리 피난처를 준비해 두셨습니다. 창조 때부터 초대교인들을 위해 준비해 두신 것으로 믿습니다. 여기 는 동굴이 있어서 돌로 막아 버리면 들어 올 수 없습니다. 어떻게 밀고 들어 왔다고 하더 라도 길을 잘못 들어서 못찾고 그 속에서 죽어 버리는 것입니다. 마지막 대 환난때는 이때보다 더합니다. 마태복음 24장에 “창세 이래로 이런 일이 없 다”고 했습니다. 때문에 우리 힘으로는 이기지 못합니다. 그러나 일곱 영, 성령의 역사로 이기게 해 주십니다. 계시록 12장에 광야의 예비한 곳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알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어떤 모양이로든 지키실 것입니다. 카타콤의 흙은 죽은 시체 의 냄새까지 흡수해서 냄새도 안난다고 합니다. 마지막 때도 그 날을 감해서라도 택한자 를 보호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예수안의 자유입니다. 우리는 육체는 죽더라도 사 망으로부터 자유합니다. 적그리스도로부터 핍박을 받더라도 하나님의 보호가 있기 때문에 자유합니다. 당시 안디바가 있었던 당시 세계 인구를 2억 5천 정도 봅니다. 2억 5천이 다 썩고 흙속 에 부패해 버렸지만 안디바의 이름은 성경에 기록되어 지금까지 흐르고 있습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다 썩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예수 붙잡아야 합니다. 우리도 안디바와 같이 교회가 타락할 때 끝까지 믿음 지키기를 축원합니다. ?저버리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황제를 위해 신전을 지어 놓고 거기 와서 경배하도록 했 습니다. 경배한 사람에게는 표를 주었습니다. 그 표를 가진 사람은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표가 없으면 죽습니다. 그런데 안디바가 끝까지 경배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붙 잡기만 하면 보혜사 성령을 통하여 성령의 역사로 승리하도록 해 주십니다.
3. 책망 14-15절 =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 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 다'
1) 발람의 교훈을 지킴
14절 =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민22장에서 25장에서 모압왕 발람, 발락 사건이 나옵니다. 버가모 교회는 역사적으로는 A.D. 95년입니다. 발락은 왕입니다. 발람은 선지자입니다. 선지자이니까 교회입니다. 그러 니까 발람과 발락이 하나 되었다는 것은 정치와 교회가 하나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 라엘 백성을 간음하게 합니다. 그래서 35,000명이 죽습니다. 이 사건은 간격으로 따지면 2,000년 전 사건입니다. 그러면 왜 이 사건을 말씀하실까? 국교 시대는 교회가 정치와 하 나되어서 영적으로 교회가 죽어 버렸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교회가 정치와 하나되면 안됩니다. 예수님도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드리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정치에 간섭하고 정치했으면, 목사들도 정치해 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요13장에서 “너희가 나처럼 하기 위해서 본을 보인다”고 했습 니다. 교회는 국가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를 정치 집단화하면 안됩니다. 비극입니다. 우리는 복음 운동해야 합니다. 영적 운동해야 합니다. 선거 때만 되면 국회의원들이 찾아 와서 헌금한번 하고 가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안 받겠다고 가시라고 합니다. 목사는 성도가 이해하든 이해하지 않든 오해를 받든 아니든 성경의 모습 그대로를 지켜야 합니 다. 목사는 성경의 양심이요, 거울입니다. 발람과 발락이 하나 되어서 이스라엘 백성 35,000명을 죽였듯이, 교회가 세상에 빠져 버리면 성도들이 영적으로 죽어버립니다. 양은 목자가 가는 데로 갑니다. 목자가 ?정치?하면 정치합니다. 양은 목자 따르기 나름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때는 목자와 교회 잘 만나야 합니다. 예수에게 미쳐야 합니다. 다른데 미 칠 시간이 없습니다. 예수와 회복되면 모든 것이 회복됩니다. ‘행음’은 무엇인가? 교회가 복음을 떠나고 세상과 짝하면 영적 간음입니다. 약4:4보면 세상과 벗된 것이 간음입니 다. 세상과 벗되고 영적 간음하면 하나님과 원수됩니다.
2)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킴
15절 = '…네게도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니골라당은 초대교회 일곱 집사 중에 ‘니콜라우스’라는 머리가 좋고 똑똑한 사람이 있었 습니다. 머리가 좋고 똑똑한 것은 좋은 일인데, 잘못가면 큰 일납니다. 그래서 칼빈이 말 했습니다. ?중생하지 못한 자의 신 지식은 하나님을 배반하는데 사용된다? 니콜라우스 는 지식적, 육적 집사였습니다. 그래서 당을 만들고 이원론을 주장했습니다. 영과 육을 분 리해서 영을 깨끗한 것으로, 육을 더러운 것으로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한계를 정 해놓고 죄를 허용하게 했습니다. 니골라당이 이원론이라는 교묘한 사상으로 다 풀어 버렸 듯이, 오늘날 카톨릭이 교묘한 사상으로 진리를 다 풀어 버립니다. 그러나 교회는 진리를 더욱 강화시켜야 합니다. 마지막 때는 순종이 최고이지만 분별해서 순종해야 합니다. 유사진리에 순종하면 안됩니 다. 버가모 교회가 그랬듯이, 국교가 되니까 이단 사설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박윤선 박사 는 ?나는 책을 쓰다가 죽는 것을 순교로 믿는다?다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고난이 없는 기독교, 고난이 없는 예배는 거짓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말장이들의 꽤에 넘어가면 안 됩니다. 오직 성경입니다.
4. 권면
16절 =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 들과 싸우리라'
1) 회개 촉구
16절 = '…회개하라…'
일곱 교회는 꼭 회개가 나옵니다. 4장 이하는 대환난이 나옵니다. 2, 3장은 교회 시대입 니다. 예언적으로 일곱 시대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끝나면 4장부터 대환난에 들어갑 니다. 6장에서 흰말이 나타나는데 적그리스도입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2장에서 “적그리스 도가 나타나면 대환난의 시작인줄로 알라”고 했습니다. 무화과 나무가 대풍에 선 과일이 떨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가을에 태풍이 불면 충실한 과실은 딱 붙어서 맺혀 있습니다. 그런데 병든 것, 연약한 것은 다 떨어져 버립니다. 태풍의 역할은 못된 열매들을 떨어뜨 려서 남아 있는 열매들을 더 실하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고 그 믿음 이 깨어있지 못한 믿음들은 대환난에 들어가면 다 떨어져 버립니다. 그러니까 ?회개하라? 는 것은 ?믿음을 지키라?는 말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오시기 전에 적그리스도가 나타납니다. 적그리스도가 나타나서 핍박하고 죽이면 얼마나 믿음 죽이겠습니까? 순교하라고 하면 하겠습니까?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고 했습니다. 우리 교회는 예배 시간마다 회개의 기도를 하잖아요. 말라기와 마태복음 사이에 400년의 공백기가 있습니다. 말라기는 구약 최후의 복음입니다. 바벨론에서 돌아와서 또 회복시켜 주니까 또 타락해 버립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마지막에는 예루살렘까지 불 태워 버렸습니다. 하나님에게는 오직 성전밖에 없었는데, 그 아끼던 것 까지도 태워 버렸 습니다. 그런데도 더 타락합니다. 그것이 우리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말라기에서는 회개하 라는 말이 없이 ?크고 두려운 날에 와서 너희를 치리라?하고 끝나버립니다.
2) 이유
16절 =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회개하라”는 말은 굉장한 축복입니다. 이것은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400년은 하나님의 간섭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 때 이스라엘은 완전히 깨져 버립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잡고 있다가 손을 놔버리면 사탄이 가만 두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역사상 가장 비 참했던 시대가 그 400년 기간입니다. 임신한 여인들을 불러다가 길가에 눕혀서 마차가 지나가게 해서 다 죽여 버렸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돼지를 잡아다 놓았습니다. 제사장 을 쳐버렸습니다. 이스라엘은 노예 생활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손놓으면 마귀가 지배 합니다. 그러면 영적으로 완전히 폐허가 되어 버립니다. 그러니까 회개하라는 음성 듣는 것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얼마나 사 랑하시는가? 십자가가 증거입니다. 그 하나님은 지금도 붙들고 계십니다. 지금도 사랑하 고 계십니다. 버가모 교회가 회개하라는 말을 안 들었습니다.
5. 이기는 자에게 주는 축복
17절 =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 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영적 전쟁은 반드시 이겨야 합니다. 술에 넘어가 버리면 마귀가 술에 대해서 마음껏 갖고 놉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무슨 표현을 했습니까? ?마귀가 밀 까부르듯이? 그러니까 마귀가 마음껏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귀에게 지면 안됩니다. 영적 싸움입니다. 당 시 육적 전쟁에서 패배자는 노예가 됩니다. 영적으로 마귀가 되면 비참해 집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자가 되면 얼마나 영광스럽습니까?
1) 감추었던 만나를 줌
17절 =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이긴 자에게는 감췄던 만나를 줍니다. 랍비 전설에 의하면 “예레미야가 이사야가 만나를 담은 법궤를 어디에 감춰 놓았는데 메시야가 나타나면 공개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를 메시야로 보지 않습니다. 메시야를 지금도 기다립니다. 이스라엘 건져 줄 메시야, 중동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메시야가 나타납니다. 그가 적그리스도입니 다. 역사는 마지막 올 때까지 왔습니다. 만나를 준다는 것은 양식을 준다는 것이고, 양 식은 말씀입니다. 교회가 국교화될 때 타락하지 않으면 말씀을 끝까지 공급받을 수 있다 는 것입니다. 믿음이 따르지 않고 물질과 세상 영광이 오면 타락해 버립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물질을 구할 뿐 아니라 물질을 담을 만한 믿음의 그릇을 달라고 구해야 합니다.
2) 새 이름을 기록한 흰 돌을 줌
17절 = '…흰 돌을 줄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
트렌취는 ?흰 것과 새 것은 천국의 기본어?라고 했습니다. 당시 재판장에는 흰돌과 검 은 돌이 있었습니다. 재판에서 검은 돌을 하면 유죄, 흰 돌은 무죄였습니다. 경기장에 입 장할 때 흰 돌이 있으면 입장권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경기 때 흰돌은 이긴 자에게 주어졌 습니다. ?돌?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흰 색?은 승리를 예표합니다. 그러니까 ?흰 돌을 준다?는 것은 ?승리의 예수 그리스도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승리하신 예수안에 거한다 는 것입니다. 그 흰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계21장에 가면 새 예루살렘이 나타납니다. 12 기초석에 12제자의 이름을 새깁니다. 머릿돌, 기초석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새긴 것은 영광이요, 구원의 보증입니다. 교회가 국교가 되니까 풍요로와 졌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부요하게 하는 것은 얼마나 죄 인지 모릅니다. 자리나 물질 자체를 정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엄청난 죄 악으로 빠집니다. 양은 털을 적기에 깍아주지 않으면 죽어버립니다. 털이 살을 찔러서 곪 아서 죽습니다. 그러므로 양은 털이 어느 정도 자라면 깍아 주어야 합니다. 만나도 그래 요. 만나가 산더미같이 내렸어도 하루 분만 가져가야 합니다. 더 가져가면 썩어 버립니다. 인간은 부요 앞에서 넘어집니다. 연약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 고? 그렇게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도들이 부요에 빠지지 않도록 늘 털 을 깍아 주어야 합니다. 옛 이름은 형편없습니다. 그런데 새 이름 받고 나서는 천지가 개 벽합니다. 사울이 바울 되었습니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었습니다. 사래가 사라가 되었 습니다. 야곱이 이스라엘 되었습니다. 시몬이 베드로가 되었습니다. 레위가 마태가 되었습 니다. 우리에게도 이길 때 새이름을 주실 것입니다.
Ⅳ. 두아디라 교회[2:18-29] 18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시되 19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20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21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고자 하지 아니하는도다 22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에 던지고 23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24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은 없노라 25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26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27 그가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28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 29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서론
두아디라 교회는 조그마한 교회입니다. 예언적으로는 암흑시대입니다. 교회는 중세의 깊 은 암흑속에 잠깁니다. 풍요속에서 신앙이 죽어버린 시대를 예언적으로 예표하고 있습 니다. ‘두아디라’라는 단어는 합성어입니다. ‘두아’와 ‘디라’인데, 그 뜻은 “관 쓴 여자”, “면류관 쓴 여자”입니다. 반대로 좋은 의미도 있습니다. “수고의 향기”, “희생” 등 여러 가지 뜻이 있습니다. 중세 교회가 핍박이 없고, 국교가 되었으니 모든 영광을 썼던 그 시 대를 의미합니다. 두아디라는 버가모에서 남동쪽으로 약 64Km쯤 떨어진 곳으로 7대 도시 중에서 좀 적습 니다. 그런데 편지는 가장 길게 나옵니다. 일곱 교회 중에서 두아디라에 보내는 편지가 가장 길 듯이, 일곱 교회 중에서 중세 암흑시대가 가장 길었습니다. 그렇게 연관시켜 생 각해 봅니다. 이 지역은 허무스 계곡과 카이쿠스 강을 연결하는 남북으로 길게 뻗은 강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교회입니다. 두아디라 도시는 전략적 위치로서는 물론 버가모와 사 데, 서머나와 비잔티움을 잇는 중요한 연결 통로의 위치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아주 부자 였습니다. 중세 암흑시대에는 왕도 교회에 가입하지 않으면 교황청에서 파면해 버린 굉장 한 시대였습니다. 교황권이 세상을 지배했던 시대였습니다. 여기는 자주장사 루디아의 고 향입니다. 중세 기독교가 얼마나 영광을 누렸는가? 4세기, 5세기에 교회가 무서운 속도로 확장되어서 전 세계에 놀랍게 퍼져 나갔습니다. 웨스트 민스트 교회는 예술품입니다. A.D590년 그레고리 1세가 교황으로 즉위하면서 약 500년 이상 전성기를 이뤘습니다. 1517년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킬 때까지 교회는 화려했습니다. 좋은 건물에서 권력과 명예와 부를 다 가졌습니다. 모든 예술가들은 로마 교황청 하나를 위해 존재했습니다. 그 러나 영적으로는 말할 수 없이 타락하고 죽어 버렸습니다. 신앙이 무너진 부요가 얼마나 무서운지 모릅니다. 믿음이 떠난 물질은 흉기입니다. 영혼을 죽게 합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
18절 =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 은 하나님의 아들이 가라사대?
1) 불꽃 같은 눈
18절 = ?…그 눈이 불꽃같고…?
예수님의 모습 그 눈이 불꽃같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모든 것을 통찰하시는 예수님을 말 해주고 있습니다. 두아디라가 영적으로 자니까 예리한 눈으로 통찰하시는 예수님을 말합 니다. 예수님은 불꽃같은 눈으로 통찰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통찰하십니다. 감출수가 없 습니다. 인간이 투시기를 만든다고 하면, 그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속을 보지 못하겠습니까? 우리가 감춘다고 감춰지겠습니까?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투명하고 진실하게 살아야 할 것을 말해줍니다. 또 무엇을 말해 줍니까? 악의 세력 이 아무것도 아닌 것을 말해주지 않습니까? 이미 다 보신 주께서 무섭게 심판하실 것입니 다.
2) 주석 같은 발
18절 =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그 발이 빛난 주석 같다는 것은 심판하시는 예수님을 말해줍니다. 빛난다는 것은 번쩍이 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심판의 발입니다. 이글 이글 불이 오르는 주석 발로 밟아 버리 면 모든 생물이 죽어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중세가 너무 너무 타락한 암흑시대이니까 예수님이 심판하겠다는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주의 심판의 모습을 참으로 적절 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불이 활활 타오르는 주석 발로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아들
18절 = ?…하나님의 아들…?
계시록에서는 ‘인자’라는 말로 두 번 나타나는데, ‘하나님의 아들’로는 계시록을 볼 때, 여기서 유일하게 나타납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영적으로 잠자면서 하나님의 대리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너희가 아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는 것입니다. 1949년에 아일랜드 카톨릭 성직자들이 교황 레오 12세에게 “하나님과 사람 사이, 중재자이신 다른 예수”라고 했습니다. 부요가 하나님같이 높아져 버립니다. 무서운 것입니다. 정치도 그렇습니다. 대통령이 신임 해서 높여 놓으면 정치해서 구테타를 일으킵니다. 교회도 집사 때는 조용하다가 장로되면 교회를 좌지우지합니다. 인간은 높아지면 이렇게 됩니다. 하나님 위치까지 높아져 버립니 다. 미국의 청교도 신앙을 보고 하나님께서 각종 좋은 것을 주셨는데, 지금은 거기서 각 종 나쁜 섹스 문화, 타락한 음악 문화, 전쟁 문화, 사탄 문화가 거기서 나옵니다. 처음에 먹을 것도 없던 그들이 하나님이 높이시니까 어느날부터 안주하면서 타락해 버렸습니다. 혹시 제가 이렇게 교만해지면 우리 장로님들이 만나서 제게 얘기 해 주세요. 목사가 그렇 게 되면 이 교회의 영이 다 죽어버립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교황이 그랬던 시절, 예 수님이 아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렇게 영적으로 음성이 들리는 것 같습니다.
2. 칭찬
19절 =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 다 많도다?
두아디라 교회는 일을 많이 했습니다. 부자니까 일을 많이 했습니다. 이것은 중세 암흑시 대가 영적으로는 죽어 갔지만 많은 일을 했습니다. 교회에 사랑도 많았습니다. 고아, 가난 한 자들 양로원, 고아원 만들어서 다 먹였습니다. 믿음, 섬김, 인내도 있었습니다. 큰 흐름 은 타락했지만 그래도 한쪽 흐름은 이런 믿음의 형태가 남아 있었다는 것입니다.
1) 사업
19절 = ?…네 사업…?
고아원, 양로원 시설 등 교회 사업에 열심이었습니다. 주의 이름을 위해 수고한 모든 사 업을 주님이 아십니다. 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흔히 ?사업한다?고 하는데, 사업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치밀하게 그리고 열심히 그 일을 감당합니까? 우리가 세상 사업보 다 주의 사업을 게을리 해서는 안되겠습니다.
2) 사랑
19절 = ?…사랑…?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사랑하신 모든 것을 아십니다. 사랑은 세상 모든 사람들 의 주제입니다. 모두가 사랑을 노래합니다. TV에서도, 극장에서도, 공연장에서도, 책에서 도, 컴퓨터에서도 사랑을 노래합니다. 그러나 주께서 기억하는 사랑은 그런 사랑이 아닙 니다. 그리스도의 이르으로 행해지는 사랑입니다.
3) 믿음
19절 = ?…믿음…?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아름다웠습니다. 주께서 믿음을 보십니다. 믿음을 아십니다. 큰 믿 음을 소유하세요. 가나안 여인같은 믿음, 백부장 같은 믿음을 소유하세요. ?말세에 내가 믿음을 보겠느냐? 말세에는 믿음 보기가 어렵습니다. 풍랑이 일면 우수수 떨어집니다. 믿 음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4) 섬김
19절 = ?…섬김…?
겸손의 신앙이 그들 가운데 있었습니다. 주님은 섬김을 아십니다. 다른 이를 나보다 낫게 여기고, 그의 종이 되어 섬겼습니까? 그는 높아질 것입니다. 높아지지 마세요. 스스로 높 아지는 것은 높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 때 주께서 높여주시는 사람이 되세요. 그렇 다면 주께서 제자들을 섬김같이 겸손하게 하나님의 백성들을 섬기시기 바랍니다.
5) 인내
19절 = ?…인내…?
인내를 아십니다. 인내하는 사람은 ?내 이 심정을 누가 알까?? 스스로 질문합니다. 아무 도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주께서 네 인내를 안다고 하지 않습니까? 인내하는 것 은 성격따라 잘하고 못하는 일로 접어 들 수 있어요. 그러나 이것은 신앙과 관련된 열매 입니다.
6) 처음 것보다 많은 나중 행위
19절 =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이것은 갈수록 많아진 교회 사업을 일컫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처음은 화려한데 나중 이 형편없습니다. 이런 것을 두고 ?용두사미?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 교회는 나중 이 처음보다 나았습니다. 처음이나 나중이나 좋으면 가장 좋지만, 처음이 좋고 나중이 안 좋은 것보다는 이것이 좋습니다. 우리 주님은 처음이나 나중이나 늘 한결 같으십니다. 여 러분도 일향 변함이 없으신 주님을 닮으십시오. 신실한 사람들로 인정되시기 바랍니다. 지금은 나중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처음 행위보다 좋아야 할 때입니다.
3. 책망
20-21절 =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 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또 내 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아니하는도다?
1) 이세벨을 용납한 죄
20절 =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
이세벨은 우상, 무속, 각종 무당과 점장이들을 끌어 들였습니다. 이세벨은 왕상 17, 18장 에 나옵니다. 아합왕의 부인입니다. 바알신과 아세라신을 가지고 이스라엘에 왔습니다. 왕 상18:19에 보니까 식탁에서 함께 식사를 한 바알 선지자가 450명, 아세라 선지자가 400 명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조그마한 이스라엘 땅을 완전히 우상의 땅을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영이 떠나면 이렇게 됩니다. 온갖 기적을 다 체험한 그들이 한 여자가 우상을 가지고 오니까 다 넘어가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선 줄로 생각한 자는 넘어질까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 넘어질지 모르 니까 항상 기도하고, 믿음 관리해야 합니다. 기독교 국가인 유럽에도 무당들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로마 교회와 로마 정치의 결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화단을 황폐하게 만드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 내버려두면 황폐해 집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심령의 밭도 그렇습니다. 어제 장미꽃이 피는 화단이라 할지라도 몇 개월만 가꾸지 않으면 금방 황폐해 지고, 타락해져 버립니다. 언어를 들어보면 영적인 상태가 어느정도 짐작이 됩니다. 그렇게 위대했던 초대교회가 중세에 와서 이렇게 된 것을 보는 것입니다. 아합왕이 정치, 이세벨이 우상입니다. 정치와 종교가 만나서 이스라엘을 행음하게 한 것 입니다. 두아디라 교회가 영적으로 말하면 이와 똑같습니다.
2) 간음죄
20절 = ?…행음하게 하고…?
이것은 신전에서 간음행위를 용납한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부요하면 찾아오는 것이 간음입니다. 이 도시가 돈이 많으니까 간음 천지였습니다. 오늘 이 시대 한국도 살만하니 까 성적으로 얼마나 타락하고 있습니까. 육적 간음도 간음이지만 영적인 간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약4:4에 “세상과 벗되면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오직 예 수 안에 빠져야 합니다.
3) 우상 숭배 죄
20절 =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우상을 숭배케하고 제물을 먹습니다. 우상에게 제사를 지낼 때 절을 하고나서 제물을 먹 습니다. 그러니까 우상을 섬겼다는 것입니다.
4) 음행을 회개치 아니하는 죄
21절 =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아니하는도다?
간음죄를 지고, 이세벨을 용납한 죄를 짓고, 우상 숭배죄를 지었더라도 회개만 해라. 그런 데 그 음행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4. 결과
22-24절 =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 일 그의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 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단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이 없노라?
1) 침상에 던짐
22절 =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침상에 던진다”는 것은 왕하9:34-35에 보면 이세벨을 침상에서 창문밖으로 던져 버립니 다. 그래서 온 몸이 피로 왕하 10:25-28절에 보면 바알신을 섬긴 모든 자들도 같은 운명 입니다. 침상에 던진다는 것은 하나님이 심판하심을 말합니다.
2) 큰 환난 가운데 던져짐
22절 =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
큰 환난에 던져진다는 것은 갖가지 어려움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버가모 교회가 나중에 는 어려움에 들어갑니다. 중세 교회가 나중에는 비참하게 됩니다.
3) 자녀들이 사망함
23절 =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이것은 이세벨의 교훈에 빠져서 회개치 아니한 자들을 말합니다. 지역의 후손들이 지배를 받고 비참하게 되었습니다.
4) 행한 대로 갚아 주심
23절 =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하나님은 갚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행위에 대해서 반드시 물으십니다. 죄는 한번이든, 일억 분의 일이든 하나님은 죄는 용서하지 않습니다. 죄에 대해서는 반드 시 묻습니다. 그것을 보여준 것이 구약의 율법입니다. 하나님의 심정입니다. ?눈은 눈으 로, 이는 이로? 이것이 죄에 대한 하나님의 법입니다. 구약의 법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법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인간들이 다 죽게 생겼습니다. 하나도 행위로는 남을 사람이 없 습니다. 그래가지고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십자가를 의지한 자는 행위죄를 피로 씻어 용서해 주십니다. 그래서 예수 피, 회개, 용서입니다. 그러니까 회개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참회록에 보면 어거스틴에게 성령이 임하니까 어머니 젖꼭지 물어뜯 은 것 까지 회개했습니다. 성령의 사람은 죄에 대해서 예민해집니다. 그러나 성령이 역사 하지 않습니다. 무뎌집니다. 그런데 예수가 없으면 용서받을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행위대로 맞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은 바울은 ?죄인중의 괴수?임을 고백했습니다. 예수가 없는 사람은 죄짐으로 죽습니다. 그런데 회개한 자에게는 안길 짐이 없다는 것입 니다. 예수만 있으면 과거에 우리가 어떻게 잘못한 것을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깨끗하 게 용서받습니다. 그러나 예수가 떠나면 과거 모든 죄부터 행위대로 묻는 것입니다.
5. 권면
25절 =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이 교회가 지니고 있는 순수한 신앙을 재림 때까지 굳게 잡으라는 것입니다. 주의 재림 때까지 그 믿음을 꼭 붙잡으라는 것입니다. 사단의 깊은 영은 마귀의 영이 알게 하고, 하 나님의 깊은 것은 성령께서 알게 하십니다. 이 시대는 풍랑을 만난 파산한 배와 같습니 다. 잡고 있는 널판지를 놓으면 죽듯이, 우리가 이 시대 믿음을 굳게 잡아야 합니다. 우리 가 갈 천국이 이렇게 좋은 곳이기 때문에 천국에 갈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법도 엄한 것입 니다.
6. 이기는 자에게 주는 축복
26-29절 =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그가 철장을 가지고 저희를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내가 또 그에게 새벽별을 주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1)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받음
26절 =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바로의 뱀에게 먹히면 바로에게 죽습니다. 바로에게는 세상 권력, 무기가 다 있습니다. 무 서운 사람입니다. 거기서 모세의 뱀이 먹혔으면 바로에게 모세가 죽습니다. 그러니까 영 적 싸움에서 이겨야 합니다. 요16:33, 고후15:7을 보세요. 예수가 없으면 마귀가 지배하 니까 지는 것입니다. 예수와 마귀는 공존하지 않습니다. 예수만 있으면 하나님의 힘으로 이기게 하십니다. 내 힘으로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이긴 예수 안에서 이기는 것입 니다.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는 왕권 성도입니다. 창1:28에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계 20:1에 “왕노릇하리라.” 그러니까 권세를 주는 것입니다. 전쟁 용어입니다. 마귀가 우리를 미혹하려고 해도 무너뜨려야 합니다. 철장권세 받은 사 람은 마귀의 궤략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예수 권세가지고 써 먹지 못하면 안됩니다. 이겼 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이기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2) 새벽 별을 받음
28절 = ?…그에게 새벽별을 주리라?
?새벽별?은 예수입니다. ?나는 광명한 새벽별이라? 우리는 재림의 소망을 가지고 있습 니다. 부요가 찾아올 때, 타락하고 음란하고, 우상숭배했던 것들을 너희가 회개해라. 우리 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오직 예수가 있습니다. 예수 안에서 이길줄로 믿습니다.
3장 제목 : 사데 교회[3:1-6] 본문 : 계3:1-6 1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2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3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4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6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서론
사데 교회는 라오디게아 교회와 더불어 칭찬이 없는 교회입니다. ‘사데’는 고대 루디아 왕국의 수도였으며, 식민지 정책의 일환으로 소아시아 지방을 정복하는 헬라인들에게 가장 끈질긴 공격을 받은 도시입니다. ‘크로에수스’가 통치하던 주 전 546년에는 바사의 고레스에게 침략을 당해 바사 총독의 관할이 되었습니다. 그 후 주전 334년에는 알렉산더 대왕에게, 주전 218년에는 셀류쿠스의 안디오쿠 스에게 함락 되었으며, 그 이후에는 잠시 버가모에 넘어갔다가 주전 133년경에 로마에 의해 점령되었습니다. 그 후, 주전 17년에 끔찍한 지진이 일어나기도 했 습니다. 지리적으로 볼 때, 이 도시는 에베소에서 동쪽으로 약 80Km, 두아디라에서는 약 48Km 지점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 도시는 천연 요새지를 배경으로 하고 있 고, 남쪽을 제외하고는 계곡 위로 450m의 높이로 거의 수직에 가까운 암벽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근본적으로는 그 성에 접근하기 불가능하게 되어 있습니다. 감 히 누가 중세 카톨릭을 무너뜨릴 수 있었습니까? 중세, 교황권이 난공불락이었는 데, 루터와 같은 종교개혁자가 나타나서 하루아침에 무너져 버렸습니다. 그 이름을 볼 때, ‘사르데신(Σ?ρδεσιν)’은 ‘남은 자, 남아 있는 자’라는 의미가 있 고, 산스크리트어로는 ‘새로 태어난’, 또는 ‘새로 되다’를 나타내어 대체적으로 ‘개 혁’이라는 의미를 표현합니다. 또한 이곳은 부와 철학과 음악의 도시로 유명합니다. 양털의 염색이 이곳에서 시 작되었으며, 염직공업이 흥행하였고, 모사공장과 자주 공장, 금, 은, 보석 등의 세 공 공장이 많이 있어서 부요한 도시의 상징처럼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데 교회는 앞의 세 교회가 이단의 교리와 신앙의 혈전을 벌이는 것과는 달리 부요때문에 세 속적인 풍습이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교회로 전락하였습니다. 이 교회는 예언적으로 종교개혁시대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이 A.D. 1517년에 있었는데, 벌써 이 일이 예표되어 있으니, 어떻게 그 하나님께 굴복하 지 않을 수 있습니까? 성경 하나 하나는 원자 폭탄 같습니다. 내 영성에 따라서 성경을 새 총으로 느낄 수도 있고, 소총으로, 포탄으로, 핵으로 느낄 수도 있습니 다. 도덕적으로 느끼는 사람은 새총이나, 소총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어거스틴 같 은 사람에게는 성경이 핵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참회와 변화가 일어난 것입 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진리의 단지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내가 영적으로 얼마나 깨닫느냐에 따라서 새 총이 되느냐, 핵이 되느냐가 결정됩 니다. 여러분들은 말씀을 핵으로 느낄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사데는 중세교회 를 예표적으로 보여줍니다. 한 절, 한 절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
예수님은 7교회, 그 시대에 적절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본문은 일곱 교회에 보 내는 편지가 그렇듯이, 첫째는 수신자인 사데 교회가 나오고, 둘째는 주님의 모습 이 나오고, 셋째는 사데 교회의 행위가 나옵니다. 먼저 주님의 모습입니다.
1) 일곱 영
1절 = “…하나님의 일곱 영…”
여기 ‘하나님의 영’은 성령을 말합니다. 그리고 ‘일곱’은 완전수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는 것은 성령이 충만한 예수님을 말해줍니다. 그러면 예수 님이 왜 이런 모습으로 나타날까? 그것은 성령의 완전성과 충만성과 편재성을 가 르치는 것으로 영적으로 죽어버린 사데 교회의 치료자로 나타나신 분이심을 말하 는 것입니다. 예언적으로는 중세 교회가 다 죽어가기 때문에 성령의 강한 역사를 통해 하나님 의 구속사를 이루시려는 것을 예표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사데 교회 의 영적인 상태는 ‘하나님의 일곱 영’으로 나타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2) 일곱 별을 가지심
1절 = “…일곱 별을 가진 이…”
‘7’은 완전수, ‘별’은 주의 종을 예표합니다. 여기 ‘가시셨다’는 것은 세웠다는 것입니다. 일곱 영이 나오고, 주의 종이 나옵니다. 에베소 교회에도 일곱 별을 붙 드신 예수님으로 나타납니다.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라는 1:16과 20절의 말씀을 반영한 것입니다. 그래서 죽어가는 사데 교회에 주님은 일곱 별을 붙잡으 신 권능의 손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래서 참 종들을 통해 영적으로 죽은 교 회를 일으키시겠다는 의지를 표현해 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개신교를 다시 세 우려니까 주의 종을 붙잡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세우실 때, 성령의 역사가운데 주의 종들을 쓰십니다. 이제, 중세 교회는 폐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카톨릭을 교회로 보지 않습니다. 영세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영세를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다시 세례 를 받도록 합니다. 그들은 타락해서 세속 부요와 권력과 짝하고 정치와 짝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을 떠나셨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교회는 이미 교회가 아닙 니다. 중세 교회가 폐하고 개신교가 세워지니까, 일곱 영과 일곱 별을 붙드신 예수님의 모습으로 나타남으로 종교개혁시대임을 나타내줍니다. 예수님의 모습이 이토록 해당 시대를 정확하게 예표해 주십니다.
2. 책망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라는 말씀은 깊은 사랑과 채찍이 담겨진 생명의 말씀입니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붙잡으신 그 권능으로 사데 교회의 영적 상태를 아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모든 행위를 아시는 분이십니다. 내 모든 행 위를 아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일거수 일투족을 보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 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1) 죽은 이름을 가졌음
1절 =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자로다”
주님이 책망하신 사데교회의 행위는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 로다”하는 것입니다. 사데 교회의 행위에 대해 특별히 세 가지 내용을 생각할 필 요가 있는데, 그 첫째가 외형적인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들의 건물이 얼마나 아름 다운지 모릅니다. 사원들이 찬란합니다. 둘째는 ‘이름’의 의미이고, 셋째는 교회의 내면적인 모습입니다. 고대의 사데는 당당한 도시로, 천연적인 요새지로서 그 명성을 떨쳤습니다. 그러 나 지금은 아무 명성도 없는데, 시민들은 과거의 명성에 의존하며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시민들의 안일한 정신상태가 교회로 들어와서 이단의 고통도 없 었으며, 외부적인 핍박도 없었던 이 교회는 이교도의 환경과 쉽게 타협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때 그 신앙을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헌금을 했으면 그렇게 아름답 게 해 놓았을까요? 얼마나 크고 웅장한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떠난 행위 들은 죽은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정확하게 끄집어내어 책망하십니 다.
3. 권면
책망에 이어 새로운 권고를 주십니다. 주의 이런 권고에는 사데 교회가 아직은 소망이 있는 교회라는 것을 알게 합니다.
1) 남은 것이라도 지켜야 함
2절 =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이 말씀은 죽기 직전에 남은 것이라도 지켜야 한다는 말입니다. 조금 남은 것이 라도 꽉 잡으라는 것입니다. 교회가 다 타락했는데, 루터 개혁파만 남아 있는 것 입니다. “그것이라도 붙잡아야 산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완전히 망한다.”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데 교회에 주어진 이 말씀은 교회를 향하신 주님의 끊임없는 관심과 그 관심을 통하여 아직은 희망이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 다. ‘굳게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원문을 보면, ‘고정시키다, 단단하게 하다’를 의미 합니다. 그러니까 실낱같은 희망을 안고 있는 사데 교회의 성도들에게 무조건적 이면서도 필연적으로 순종해야 할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즉, 교회의 내적 생명인 믿음을 굳게 잡으라고 명령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남은 바’는 무엇일까요? 사데 교회의 신앙상태는 완전히 죽은 것이 아 니라 아직은 교회의 생명이 되는 믿음이 남아 있음을 의미합니다. 성경에 ‘남은 자’의 사상은 전반적으로 흐르는 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록 그들이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죽은 자’였으나 그 소망이 완전히 끊겨진 상태가 아니라 아직은 믿음의 소망이 조금은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언적으로는 중세 카톨릭의 타락이 종교 개혁을 기점으로 극치를 이루는 지경에 와 있을 그 때에, 중세 교회 의 모습은 ‘죽은 자’였지만 ‘남은 자’의 사상을 따라 종교 개혁자들이 있었음을 증 거합니다.
2) 자신을 점검
3절 =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이 말씀은 “네가 어떻게 복음을 받았느냐? 네가 예수 복음 받고 천국 갈 자격이 나 있는 사람이냐?” 하는 것을 지적하는 말씀입니다. 여기, ‘생각하라’는 것은 ‘항 상 염두에 두고 지키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성도는 매일 매일의 삶의 현장에서 자신을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따라서 사데 교 회에게 ‘생각하라’는 말씀은 기회가 지나가기 전에 바로 그들의 행위가 어떠한가 를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또, ‘어떻게 받았으며’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미 받은 상태를 의미 합니다. 그러므로 사데 교회는 ‘네가 복음을 어떻게 받은 것을 항상 생각하라’는 명령을 주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예언적으로 보면, 중세 교회 말기의 현상으로 타락의 극치를 이루고 있는 그들이 복음을 위하여 흘린 순교자들의 ‘믿음의 역사’ 를 통해서 전해진 그 내용들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또, ‘어떻게 들었는지’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것은 그들이 과거의 어느 시점에 결정적으로 들은 그 시기의 감격적인 순간을 항상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전에 어떤 자들이었습니까? 그것을 항상 기억하십 시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주께서 우리를 찾아 오셨습니다. 우리에게 복음이 들려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 니다. 이것을 잊는 순간 우리의 신앙은 실이 끊어진 연처럼 땅에 곤두박질 치게 됩니다. 항상 영적으로 자신을 점검하시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3) 회개하라
3절 = “…지키어 회개하라…”
우리 주님이 주시는 권고는 이제 그 절정을 이룹니다. ‘지키어 회개하라’는 말씀 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여기, ‘지키라’는 것은 ‘지키다, 감시하다, 망을 보다’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이미 앞에서 밝힌 ‘받은 것과 들은 것’을 ‘꼭 붙들고 있으라’ 는 의미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초대 교회의 순교자들이 피흘려 세워 놓은 복음의 터전을 기억 하여 잘 지키라는 것입니다. 이런 주님의 요구는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주어 지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누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받은 원복음을 잘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더욱이 이 시대는 얼마나 복음을 변 질시키고 있습니까? 심지어 예수 말고도 구원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을 지켜야 합니까? ‘오직예수’를 지켜야 합니다. 이 신앙 때문에 우리 신앙의 선진들이 목숨을 초개처럼 버렸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복음을 변질시킬 수 있습니까? 지켜야 합니다. 초대교인들의 신앙, 저 1세기 크리스챤들이 지켰던 그 복음을 우리는 끝까지 지켜야 합니다. 그 다음 ‘회개하라’는 말은 무엇인가? ‘즉시 마음을 돌이키라’는 의미입니다. 죄 악 가운데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즉시 마음을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사데 교회가 회개해야 할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사데 교회는 ‘지키지 못한 자기들의 신앙적 인 죄’와 ‘죽은 믿음’으로 멸망이 눈앞에 이른 자기들의 죄악을 단번에 결정적 으로 회개해야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생각할수록 ‘회개’처럼 좋은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 회는 시간마다 “예수님처럼, 초대교인처럼 살지 못한 죄”를 회개합니다. 우리는 철저히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요구를 거스린 것에 대해 회개해야 합니다. 또, 하나님의 요구에 미치지 못한 것도 회개해야 합니다. 육적인 죄와 신앙적인 죄를 모두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는 날마다 떠나면 안됩니다. 회개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말라기부터 마태복음까지, 구약에서 신약까지, 모든 예언서의 주제는 주제가 ‘회개’입니다. 죄를 책망하는 것이고, 심판을 선고하고,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모든 예언서의 공통점입니다. 예언서를 처음에 보면, 죄를 무섭게 찌릅니다. 그러니까 예언서의 앞에만 보면 못 봅니다. 이사야도 1장만 보 면 얼마나 무서운 책망이 있는지 모릅니다. 책망하고, 회개하라고 하십니다. 회개 하면 회복하고, 축복한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말라기서에 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돌아와 또 타락하니까 그 때는 아예 ‘회개하라’는 말이 없이 끝나버립 니다. 그러니까 그 때부터 하나님의 무간섭 시대가 되어 버립니다. 이것을 신구약 중간기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손을 떼어버린 시대입니다. 하나님께서 손을 떼어버 리시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역사상 가장 비참했습니다. 성전은 불태워지고, 성전에 서 돼지로 드리는 제사가 성행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니까 아무 힘도 없고, 이스 라엘 백성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A.D. 70년에도 간섭하지 않습니다.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기지 않고 멸하리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순교하신 뒤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손을 떼 버 렸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전 세계에 끌려 다니면서 갖은 수치와 고난을 당했습 니다. 선민이라는 그들을 이방 나라들이 마음대로 가지고 놀았습니다. 사탄이 마 음대로 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회개가 그토록 중요합니다. “회개하라”는 음성은 사랑한다는 음성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손 떼시면 사탄이 마음대로 가지고 놀 아버립니다. 하나님이 손 때고, 사탄의 수하에 들어가면 그 때부터 우리도 세상에 서 간음하고, 도둑질합니다. 제가 지금 신앙의 초기 단계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신앙위에 선 사람들, 집사도 되고, 연조가 있는 사람 들에게 드리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언제 떠나시는가? 회개하지 않을 때, 하나님은 그 심령에서 떠나버리십 니다. 우리는 죄를 지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연약합니다. 다윗이 살인죄, 간 음죄를 함께 지었습니다. 이 얼마나 어마 어마한 죄입니까? 그런데 그 무서운 죄 도 회개하니까 용서하시고, 그들 더 크게 쓰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우리 자신 을 직관하고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우리가 죄를 안 지으려 는 몸부림도 중요하지만, 죄를 짓고 나서 빨리 빨리 회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일단 우리가 회개하면 그 죄를 생각지도 않으십니다. ‘회개’라는 말은 사데교회가 너무 풍요롭고, 그 세상에 취해 있을 때 주신 것입니 다. 이것은 중세 교회와 똑같은 모습입니다. 주님이 도적같이 임해서 회개가 없으 면 멸하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어려울지라도 하나님 철저히 붙잡는 자는 하나님이 회복해주십니다. 경제가 무너진 것이 급한 것이 아닙니다. 신앙 무너진 것이 급합니다. 그러므로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4. 칭찬
1) 흰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
4절 =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 니…”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몇 명’이 있어 주님은 그들을 향하여 칭찬을 주십니다. 이것은 사데 교회에 소수의 무리들이 신앙의 정절을 지키는 자들로 남아 있었음 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옷’은 행위를 말합니다. 역사적으로는 사데 교회 당시에 그리스도의 성결을 더럽히지 아니한 소수의 무리들로 볼 수 있지만, 예언적으로 는 중세 교회 말기의 타락한 현상중에서도 믿음의 정절을 지킨 종교 개혁가들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굴뚝 속을 헤쳐 나가면서도 그들의 흰 옷을 더럽히지 않은 자들입니다. 루터가 이런 자입니다. 칼빈이 그렇습니다. 위클리프 가 그렇습니다. 존 후스가 그런 자입니다. 존 낙스를 아시지요? 쯔빙글리도 그렇 습니다. 이들은 흰옷을 더럽히지 않은 자들이었습니다. 개신교를 ‘프로테스탄트’라고 합니다. 이 말은 ‘항의자들’이라는 말입니다. 종교개 혁은 영적으로 항의하는 것입니다. 어느 시대나 하나님이 합당하다고 하는 자들 이 있는데, 그 사람들이 남은 자들입니다. 엘리야 시대에 7,000명이 있었고, 노아 시대에 여덟 식구가 있었고, 다윗 때는 다윗과 함께 한 400명이 있었고, 소돔과 고모라 때는 롯의 세 친구가 있었고, 기드온 때는 300명 용사가 있었고, 마지막 때는 ‘해를 입은 여자’, 참 교회가 있습니다. 이들은 전부 남은 자들입니다. 그 시대에 끝까지 타락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믿음을 지킨 자들이 있습니다. 하나 님은 바로 그 사람들을 남겼다가 불쏘시개로 쓰십니다. 하나님은 바로 거기다 불 을 붙여서 큰불을 만드십니다. 그것이 루터와 같은 사람입니다. 루터는 카톨릭의 조직과 규모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는 작은 사람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서는 루터를 비롯한 개혁자들에게 불을 붙여서 그 불이 활활 타게 했습니다. 작 은 바람은 바람이 불면 곧 꺼져버립니다. 그러나 큰 불은 바람이 불면 오히려 더 잘 탑니다. 하나님께서 종교개혁자들에게 붙이신 불은 결코 작지 않았습니다. 세상 무엇도 끌 수 없는 큰불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불이 저 타락한 카톨릭 교회 를 덮어 버리고, 전혀 새로운 횃불이 타오르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도 믿음 지키며 살아야 합니다. 세상이 다 세 속화된다해도 우리는 절대 예수 한 분 붙잡고, 세속화되지 않고, 우리의 믿음의 정절을 끝까지 지켜서, 주님 오실 때 영접해서 왕권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할렐루 야!
5. 이기는 자에게 주는 축복
‘이기는 자’는 영적 싸움에서 이기는 자를 말합니다. 우리도 마귀 사탄과 싸웁니 다. 세상의 음란과 혈기와 야망과 물질 부요와 싸웁니다. 이 모든 싸움이 전부 ‘이기느냐, 지느냐’ 하는 것입니다. 계시록 12장에 보면 ‘뱀 물’이라는 말이 나옵 니다. 뱀 물은 사탄이 주는 소리들입니다. 우리는 거기에 둘러 쌓여있습니다. 바 로 이런 것과 싸워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너무 부요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가난하다고 해도, 예수님과 한번 비 교해보세요. 예수님이 뭐가 있었습니까? 예수님은 아무것도 갖지 않으셨던 분이 아니십니까? 그런데 우리는 왜 그렇게도 덜 갖고, 더 갖고에 매여 살아야 합니 까? 여러분! 이 세상에 안 믿는 사람들이 세워 놓은 가치관에 따라서 비교해서 비참해집니다. 이런 것과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집도 그만큼 살면 됩니다. 차도 그 정도면 됩니다. 셋방이라도 감사하면서 살면 됩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이기는 것입니다. 욕망은 끝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성공을 꿈꾸고 삽니다. 그러나 성공을 꿈꾸며 사는 사람들은 세 상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실패해야 하는가? 아닙니다. 우리도 실패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꿈꾸는 것은 성공이 아닙니다. 우리가 꿈꾸는 것, 우리 가 추구하는 것, 성경이 요구하는 것은 성공이 아니라 ‘승리’하는 것입니다. 이기 는 것입니다. 집 한 평 더 넓힌 것은 성공은 될지언정 승리는 아닙니다. 만약 그 것이 성공이라면 예수님은 철저히 실패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승리하 신 삶을 살았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승리자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혹 실패자라고 낙인이 찍히더라도 우리는 신앙안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이겨야 합니다. 개혁자들이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몸부림쳐서 싸워서 이겼습니다. 여러분도 이 세상이 세워 놓은 가치관에 지면 안됩니다. 그런 것을 초월해야 합니다. 내 친구 가 어떻게 사는가 상관하지 마세요. 사람들이 어떻게 보는가 하는 것은 상관없습 니다. “주님이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주님이 어떻게 보시는가?” 그것을 당신의 유일한 가치관으로 삼으세요. 그런 사람이 성도입니다. 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 회는 그래서 전부 이긴자의 얘기가 나옵니다. 이긴자는 어떻게 될 것인가?
1) 흰 옷 입음
5절 = “…흰옷을 입을 것…”
의복은 신분을 나타내는데 사용됩니다. 우리가 경찰을 어떻게 알아봅니까? 신분 증을 보지 않아도, 그의 입은 옷을 보면 알아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옷을 입지 않은 사복경찰은 알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잠복근무를 할 때는 경찰 복을 입지 않습니다. 때에 따라 의복의 색상도 의미를 갖습니다. 물론 의미없이 그냥 멋으로 입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초상집에 갈 때 사람들은 검정색 옷 을 입습니다. 검정색이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크리스마스에는 빨강색이 물 결을 이룹니다. 녹색은 생명을 상징합니다. 이렇듯 상징이 담겨 있는 옷과 색상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여기 ‘흰옷’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순히 흰색 옷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 기에 상징이 숨어 있습니다. ‘흰 색’이 상징하는 의미는 정결과 공의와 거룩과 신적 권위, 존귀와 청결, 그리고 승리입니다. 여기 흰옷을 입는다는 것은 거룩 한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도의 신분에 맞는 성결의 복장입니다. 이기는 자는 흰옷을 입습니다. 성결의 옷을 입습니다.
2) 생명책에 새겨질 이름
5절 =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흰옷을 입은 자들’은 그 이름이 생명책에서 흐리지 않는 축복을 누린다고 합니 다. 계시록에 ‘생명책’이라는 용어가 6번 등장합니다. 이 말을 원어상으로 보면 ‘신적인 권위를 가지고 보호하시겠다’는 의미를 나타냅니다. 즉, 이 말씀은 구원 의 확실성, 구원의 보장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역사적으로 볼 때, 사데 교회의 신앙이 식어가고 있는 그 때에 말씀에 충성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위로입니다. 또 영적으로는 전 세계의 성도들에게 신 앙의 정절을 준수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승리하여 흰옷을 입은 자들의 이름을 하나님의 생명책에서 흐리지 아니하십니다. 끝까지 책임지십니다. 하나님의 보장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흔들리지 맙시 다. 우리의 싸움은 이미 이긴 싸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승리하신 싸움입니다. 생명책에서 우리의 이름이 흐리지 않는다는 약속의 말씀을 가슴에 간직하고 있다 면 무엇이 두렵습니까? 믿음으로 당당하게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3) 아버지 앞과 천사들 앞에서 그 이름이 인정받음
5절 =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이기는 자’는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될 뿐만 아니라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 과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고 하십니다. 이런 약속을 받는 자들은 어찌 그 기 쁨을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시인하 겠다니 이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일국의 대통령 앞에서 인정받는 것도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데, 하물며 전 우주의 주인이시자 영원한 아버지 집의 주인되시는 그분 앞에서 인정받는 이름은 믿음의 사람들이라면 누구 나 간절히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름을 시인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름을 시인한다’는 것은 구원의 확실성에 대한 보장입니다. 이것은 법정 용어 로서의 가치를 지닌 말입니다. 하늘의 총회 앞에서 공적으로 시인해 주시겠다 는 것입니다. “내가 재림할 때 너를 구원시켜서 그 영광스러운 나라를 상속할 것 이다.”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법에 인정 받는 것보다 더 좋은 축복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이보다 더 좋 은 위로가 어디 있습니까? 이것은 아시아 일곱 교회의 형편이지만, 예언적으로는 종교 개혁시대인데, 1,400 여년 후에 역사속에서 어쩌면 그렇게 정확하게 이루어지는가 하는 것이 놀랍기만 합니다. 우리는 이렇듯 말씀을 확실히 만져 보고 믿기 때문에 더 확실히 믿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 이긴 자들 되기를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제목 : 빌라델비아 교회[3:7-13] 7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 8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9 보라 사탄의 회당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그들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10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11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12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13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서론
계시록 2장, 3장은 교회시대, 1장은 과거, 4장부터 19장까지는 대환난부터 재림 까지, 20장부터는 재림 이후, 천년왕국, 이것이 요한계시록의 구조입니다. 아시아 일곱 교회는 전세계 하나님의 교회에 주신 말씀이면서, 예언적으로는 일곱 시대 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각 교회가 각 시대를 예언하는데, 빌라델비아는 ‘선교시 대’를 역사적으로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볼 때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역 사를 주관하고 계신 것을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종교 개혁시대가 지나고, 타락했던 복음, 변질된 복음, 감춰졌던 복음이 개혁자들 에 의해서 회복되고, 회복된 그 복음이 전 세계에 증거됩니다. 그래서 이 시대를 ‘선교시대’라고 봅니다. 미국이 전 세계에 선교사를 보내어 땅끝까지 복음을 증거 하는 선교시대입니다. 헨드릭슨에 의하면 1792년 이후 전세계는 지구 구석 구석까지 복음이 전파되었 다고 합니다. 선교시대가 지나면 자연히 어떤 시대입니까? “천국 복음이 온 세계 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그랬습니다. 종말 시대입니다. 이렇듯 어떤 면을 보아도, 지금은 마지막 때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을 보아도, 계시 록의 일곱 교회를 보아도, 또, 예수님의 일곱 가지 천국 비유를 보아도 지금은 그 물 비유시대, 종말입니다. 어디를 보아도 우리는 주님이 오실 때가 너무 가까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빌라델비아는 사데 남방 44Km지점에 위치해 있습니다. B.C.150년 경에 버가모 왕조의 아탈루스 2세가 빌라델비오스에 의하여 헬레니즘 문화를 전할 목적으로 건설했습니다. 이 지역 이름이 B.C. 150년경에 지어졌는데, 그 속에는 ‘형제사랑’ 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사랑’을 의미하는 ‘필로스’와 ‘형제’를 의미하는 ‘아델포 스’가 합쳐진 복합 명사인 것입니다. 여러분! ‘선교’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형제 사랑’이 아닙니까? 어쩌면 이렇게 적 절한지 모릅니다. 이름 자체가 선교시대를 예언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이 름 하나가 지어질 때부터 먼 훗날 미국을 통해 전세계에 선교할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위대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이곳은 포도 산지입니다. 왜 포도였을까? 포도는 성도를 예표합니다. 선교시대에 이르러 성도들이 전 세계에서 나타날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빌라델비아는 조 그마한 도시, 제일 적은 도시인데, 바로 그들이 세계를 향하여 선교를 합니다. 이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청교도 102명이 아메리카 대륙에 넘어갔는데, 그들 102 명이 시작하여 전세계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또한 이곳은 순교자를 많이 배출했 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선교시대는 세계에서 순교자가 제일 많이 나옵니다. 우리 나라에도 카톨릭에 해당하는 사건이지만, 유명한 절두산이 있습니다. 한강에 목을 대어놓고 작두로 한 명씩 목을 잘랐습니다. 이 빌라델비아 교회가 순교자가 많이 나왔는데, 미래에 순교자가 많이 나올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피 없이 복음이 전파될 수 없습니다. 피 없이 전파되면 이상하게 사이비가 들어 갑니다. 이것은 일개 가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 예수 믿는 사람이 피를 토하는 고통을 겪으면서 믿어야 결국 그 가문이 예수 앞에 나옵니다. 18세기, 19세기에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나라가 한 나라도 없습니다. 인도에는 ‘윌리암 캐리’, 아프리카는 ‘리빙스턴’, 중국은 ‘모리슨 테일러’, 한국은 ‘언더우드’, ‘아펜셀러’, 버어마는 ‘챠슨’, 일본은 ‘헤븐 브라운드’, ‘윌리암스 박스터’같은 선교 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이렇게 순교한 바로 그 때 미국에는 세계적인 인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러면 지금 세계 선교의 주자는 누구입니까? 세계가 입을 모아 한국이라고 합니 다. 우리 하나님은 21세기 한국을 선교의 주자로 쓰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나 라 이 땅에서 세계적인 기업과 인물, 기업가가 나오는 것입니다. 제가 주일 날 새 벽에 자녀들에게 안수 기도할 때 “하나님, 저 아이들이 21세기 귀한 인물들이 다 되게 하실 줄로 확신합니다”하고 기도하는 것이 바로 이와 같은 것들 때문입니 다. 어느 민족이든 세계 선교를 감당하면 그 민족가운데 뛰어난 인물들이 나옵니다. 이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자녀들을 인간적으로 잘 되는 것 생각하 면 동물적인 차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세 계적인 지도자가 될 것을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가장 짧은 기간동안에 급성장한 교회가 빌라델비아 교회입니다. 이것을 통 해서 우리가 또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18세기, 19세기에 거의 100년도 안되어서 미국이 전세계를 복음화 시켜 버렸습니다. 짧은 기간동안 전세계를 복 음화시킨 것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있다면 ‘선교’입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
편지를 보내는 주님의 모습은,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는 주님의 세 가지 모습을 소개하고 있는 데, 첫째는 거룩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둘째는 진실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시 며, 셋째는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1) 거룩성
7절 = “…거룩하고…”
빌라델비아 교회에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거룩하신 분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거룩하고’라는 말의 원어적인 의미는 ‘거룩한 자’입니다. ‘거룩’을 의미하는 단어 가 신약에서는 총 218회나 등장합니다. 이 말은 ‘구별되다’, ‘성별되다’하는 의미 입니다. 그러니까 상대적 가치로 분별할 때 ‘구별되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 다. 참으로 우리 주님이 선교시대에 걸맞게 거룩하신 예수님으로 나타나셨습니다.
2) 진실성
7절 = “…진실하사…”
‘진실’이라는 말이 헬라어에는 두 가지로 쓰입니다. ‘알레데스(?ληθ??)’와 ‘알레 디노스(?ληθιν??)’가 있습니다. 이 두 단어가 어떻게 다른가? ‘알레데스’는 ‘진 실한’이라는 말로 언어나 증거에 참된 것을 나타낼 때 사용합니다. 그리고 ‘알레 디노스’는 위조품이나 허실한 것에 비해 참된 것을 나타내는 의미로 사용됩니 다. 본문에서는 이 두 번째의 단어가 사용되어 예수 그리스도는 복음이 전파되는 곳 곳에 유대인들의 훼방으로 고통과 핍박을 겪는 성도들에게 “오직 주님만 진시하 신 분”이심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실한 자’라는 표현은 문법적으로 거의 사람에게 사용되 지 않는 용어입니다. 누구만이 진실합니까? 오직 그리스도만이 유일하게 진실한 분이십니다. 이것은 선교의 문이 열리고 있는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더 없는 큰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3)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7절 =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마지막으로 묘사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분”입 니다. 그러면 왜 다윗의 열쇠를 가졌을까? 잘 알 듯이 다윗은 왕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의 왕, 만왕의 왕 예수의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전세계에 선교가 되니까 그 시대에 적절한 모습으로 예수님이 나타나신 것입니다. 열쇠로 문을 열면 들어가고, 닫으면 못 들어갑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권세입니다. 예수님이 열어 주셔서 전 세계에 선교가 되었습니다. 미국이 잘 나서 선교한 것 이 아닙니다. 주님이 열어 주니까 된 것입니다. 빌라델비아 토지는 옥토였습니다. 씨를 뿌리기만 하면 농사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미국이 전 세 계에 선교사를 보낼 때 예수님이 전 세계에 문을 열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러 니까 미국이 똑똑하고 잘 나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언젠가 언더우드 목사님이 섬겼던 교회를 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작은 교 회인지 모릅니다. 한국으로 말하면 50여명쯤 들어가는 조그마한 교회입니다. 무 엇을 말합니까? 사람, 언더우드 목사가 똑똑해서 선교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문을 열어 주셔서 사용된 것입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는 어땠습니까? 그저 전도 지 뿌리고, 북만 쳐도 얼마나 많이 모였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전 혀 다릅니다. 모이도록 하기 위해서 별 이벤트를 다 해도 모이기가 쉽지 않습니 다. 우리가 하는 선교사역도 우리 스스로가 똑똑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헌금하는 것도 여러분이 신앙 좋아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마음을 열어 놓았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 의’를 절대 자랑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선교시대는 우리 주님께서 세상의 모든 문을 열쇠를 가지고 열어 버렸습니다. 헨드릭슨은 1792년부터 선교운동이 흥왕했다고 말합니다. 윌리암 캐리가 세계 선교를 강조한 소책자가 1792년에 나왔습니다. 이것이 미국 전역을 감동했습니 다. 마음을 열어 주었습니다. 지금 한국은 개척교회만 해도 선교한다고 합니다. 한국 교회는 시작하면서 선교합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열어 놓으신 것입 니다. 대원군이 그렇게 쇄국정책을 하면서 복음의 발길을 막았지만, 하나님께서 문을 열어 주셔서 이렇게 기독교가 꽃을 피운 것입니다. 지금 미국 교회가 선교 를 그치기 시작합니다. 교회당을 빌려주고 돈을 받아 살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 서 우리 한국이 지금 복 받는 나라입니다. 지금 우리는 우리 한국교회가 선교하 는 시대, 멋진 시대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2. 칭찬
1) 적은 능력으로 큰 일을 행함
8절 =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빌라델비아 교회는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큰 일을 행한 것에 대하여 칭찬을 받 았습니다. 그러면 ‘적은 능력’이 무엇을 나타내는가? 빌라델비아 교회가 지닌 신 앙의 밑천이라는 것은 ‘적은 능력’으로 불리울 만큼 연약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빌라델비아 도시에서 교회가 거의 영향력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적 은 능력’은 바로 교회의 성도들이 지닌 사회적인 여건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복음을 처음 영접한 빌라델비아 도시의 상태는 상류층 출신이 아니라 바로 하류층이자 빈민층 출신들이 먼저 예수를 영접하였기 때문입 니다. 바로 적은 교회에서 이 도시에 거의 영향력을 행사 할 수 없는 이들이 복 음으로 인해 변화받고 믿음을 지켰기 때문에 어려웠던 그 상황에서 ‘오직 예수’ 를 부여잡고 신앙의 정절을 지켰던 것을 칭찬받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선교는 결코 돈 있고, 큰 교회에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적어도 할 수 있습니다. 없어도 할 수 있습니다. 선교하는 기업과 가정은 반 드시 하나님께서 더 많은 것으로 주십니다. 그러므로 돈이 없어서 선교할 수 없 다고 하지 마세요. 능력이 없다고 하지 마세요. 하나님은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것 을 사용하십니다. 보리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를 몇 명이 먹을 수 있습니까? 그것이 적은 것이로되, 주님께 넘어가면 5,000명이 먹고 남습니다. 빌라델비아는 적은 능력을 가지고 가장 열심히 선교했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2) 예수 이름을 배반치 아니함
8절 =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주님이 칭찬하시는 다음 내용은 “내 이름을 배반치 않았다”는 것입니다. 빌라델 비아 교회 성도들은 적은 능력으로 예수의 말씀을 지켰을 뿐만 아니라 바로 그 이름을 지켰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이 교회 성도들은 내적으로는 예수의 말 씀을 지켰고, 외적으로는 예수의 이름을 배반치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 남미는 카톨릭이 들어가니까 다 죽어갑니다. 이름 배반 하지 않았다는 것은 ‘오직 예수’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 진리만을 전한 것입니다. WCC가 배교하는 행위를 하는데, 출발은 선교가 명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정치가 목적입니다. 혼합주의입니다. 여러분! 선교는 ‘오직예수’ 그 이름을 전하는 것입니다.
3. 약속
1) 지키심
10절 = “…너를 지키어…”
이 말씀은 그들이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위하여 신앙의 인내를 이룩한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지켜 주시리라는 은혜의 약속입 니다. 이것은 죽도록 충성하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자 사랑이 담긴 약속입니다. 선교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이요, 순교입니다. 물질을 드리는 것입니다. 김창인 목 사님이 말씀하셨듯이, 선교는 한강에 벼 한 가마니를 뿌려 놓으면 다 떠내려가 고, 씨 하나가 언덕에 떨어져 벼가 자라 나중에 밭을 이루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힘든 것이 선교이고, 인내가 필요한 것이 선교입니다. 그러나 선교하는 교 회, 선교하는 기업, 선교하는 지갑은 하나님이 지키십니다. 또한 우리 주님은 온 세상에 임할 시련의 때에 지켜 주실 것입니다.
2) 시험을 면제
10절 =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겠다”는 것은 선교할 때 오는 모든 시험에서 너를 지 키겠다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12제자가 선교할 때 지켜 주셨습니다. 미국이 전 세계를 선교할 때 지켜주신 것을 역사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 하나님은 대 환난중에서도 우리를 보호하실 것입니다. 록 펠러가 선교할 때, 십일조를 드리고, 또 십일조를 선교헌금으로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와 그의 후손들을 얼마나 축복하셨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선 교하려면 물질이 있어야 하는데, 물질을 주시지 않고 마냥 선교하라고 하시겠습 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한국에 물질을 주시는 것입니다. 선교하고 기도하는 20% 때문에 80%가 잘 사는 것입니다.
4. 권면
선교시대가 끝나면 “속히오리니” 하신 말씀대로 주님은 속히 오실 것입니다. 마 24:14에는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 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고 했습니다. 빌라델비아 시대가 가버리면 주님이 속히 오 신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때에 우리는 믿음과 면류관을 지켜야 합니다.
1) 믿음을 지켜라
11절 =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믿음의 사람들은 주님의 약속을 계속적으로 확고하게 붙잡아야 합니다. 말씀과 주님에 대한 믿음을 끝까지 굳게 잡으라고 하십니다. 주님이 오실 날이 가까울수 록 믿음 지키기가 어렵습니다. 믿음이 식어집니다. 그렇게 뜨겁던 믿음이 냉냉해 집니다. 때문에 믿음을 굳게 잡아야 합니다. 굳게 잡아야 할 목표가 무엇인가?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하는 것입니다.
2) 면류관을 지켜라
11절 =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일곱 교회 중에 ‘면류관’을 사용하여 권면하고 있는 교회는 두 교회입니다. 오늘 빌라델비아 교회와 또 하나, 서머나 교회입니다. 서머나 교회는 생명의 면류관입 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여기서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우리 주님이 가장 원하시 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순교와 선교입니다. 교회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나는 구원받은 성도가 믿음을 지키며 믿음을 장성시 키는 것입니다. 두 번째 목적은 그렇게 장성한 성도가 다른 사람을 그리스도 앞 에 인도하는 전도와 선교가 목적입니다.
5. 이기는 자에게 주는 축복
1)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함
12절 =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선교한 사람은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졌기 때문에 기둥이 되게 하십니다. 하나님 의 교회를 지탱하는 큰 일꾼, 버팀 기둥이 되게 하십니다. 계시록 21장에 보면 새 예루살렘의 12 기초석이 있습니다. 왕상7장에는 성전의 놋 기둥 둘이 나옵니 다. 예루살렘에는 야긴과 보아스, 두 기둥이 있었습니다. 야긴은 ‘굳게한다’, ‘보아 스’는 ‘유력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교회의 기둥입니다. 이기는 자는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한다고 했습니다. 빌라델비아 도시는 역 사적인 지진 때문에 엄청난 피해를 본 지역입니다. 이런 지진이 지나간 후에 성 전 기둥만 남았습니다. 그것을 보는 그들에게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하리라”는 약 속은 피부에 와 닿는 약속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빌라델비아 백성들에 게 있어서 ‘기둥’이 주는 의미는 견고성과 부동성을 상징하는 모형물이 되었을 것 입니다. 지진 때문에 항상 두려워 떨었던 그들의 생활에서 견고한 기둥이 되게 하시겠다 는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은 세상의 그 어느 약속과도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이 되 었을 것입니다. 예언적으로는 열린 문을 통하여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는 교회에 게 이처럼 “하나님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라”는 축복의 약속을 주시는 것입 니다.
2) 성전에서 나가지 아니함
12절 =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이것은 천국에 영원히 거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축복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선교를 가장 기뻐하십니다. 선교하는 자에게 이런 엄청난 복을 주십니다. 선교는 어떤 의미에서 계속 쏟아 붓는 것입니다. 태 평양에 돌 하나 던지는 것과 같은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그 모든 행위를 기억하십니다. 그래서 복에 복을 더하십니다. 하늘의 신령한 복을 주십니 다. 결코 성전에서 나가지 않도록 하십니다. 천국에 영원히 거하게 하십니다.
3)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함
12절 =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계시록 21장에 새 예루살렘에 열 두 기초석을 세우고, 그 위에 이름을 새긴다는 것은 축복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선교할 때 네 이름을 기록하겠다. 교회에 이름 을 기록하겠다”는 것은 그만큼 축복하고 책임지겠다. 네 이름을 영원히 빛나게 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단12:3에서 뭐라고 약속하셨습니까?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 할렐루야! 사도행전13:1~4절 보면, 안디옥 교회가 바울과 실라를 통해 선교합니다. 그런데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교회는 선교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이 두 장소를 비교해 보 십시오. 안디옥 교회는 지금까지 신앙의 본산지로서 그 아름다운 신앙의 유산이 역사 속에 남아 있습니다. 성경 사본도 안디옥 사본이 가장 좋습니다. 그런데 알 렉산드리아는 자유주의 일색입니다. 카톨릭이 숲을 이룹니다. 이것만 보아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합니다. 여러분들이 전도하고 선교 하면, 하나님의 성전에 여러분의 이름이 기록되어서 영원히 빛날 줄로 믿습니다. 강해(3)
제목 : 라오디게아 교회[3:14-22]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 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 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 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 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 라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 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22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서론
라오디게아 시대는 역사적으로 종말시대를 가리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 대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이미 성경은 지 금으로부터 1,900여 년 전에 예언해 놓았습니다. 요한을 통하여 예언된 그대로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 역사적인 라오디게아 마지막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해 몇 가지 개요를 설명하겠습니다. 라오디게아는 빌라델비아 남쪽 62Km 지점에 위치해 있고, 에베소 동쪽 160Km 지점에 있습니다. B.C. 3세기에 수리아의 안티오커스 2세에 의해 건설되어 주전 190년에는 버가모 성의 지배를 받아 라오디게아의 쇠퇴를 예고하였고, 주전 133 년 로마의 지배 아래서 경제적인 잠재력을 발휘하도록 허락되어 이 도시가 옛 모 습으로 회복되어 갔습니다. 이 도시 이름은 본래 ‘디오스폴리스’라 불렸습니다. 그런데 수리아 왕 셀류커스 가 전쟁에서 승리한 기념으로 충성하는 안티오커스 2세에게 포상으로 내려준 땅 이었기에 안티오커스 2세가 그의 아내 라오디게의 이름을 기념하여 지었습니다. 이 라오디게아의 ‘라오스’라는 말은 ‘백성’, ‘민중’이라는 말입니다. ‘딕토스’는 ‘기 쁘게 하다’, ‘비위를 맞춘다’는 뜻입니다. 또 어떤 곳에는 ‘민주주의’라고 비유해 놓았습니다. 그러니까 민중의 비위를 맞춘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렇게 지금 우 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와 정확하게 맞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이 장엄한 섭리, 말씀의 권위, 역사성에 숨을 죽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엄청난 진리앞에 우리 의 고집이나 자아는 먼지같이 보잘 것 없습니다. 안티오쿠스의 부인의 이름이 정 해질 때부터 하나님은 섭리하신 것입니다. 대환난 직전에 민주주의 시대가 올 것 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 성경밖의 세계, 온 우주, 개인의 삶까지 전부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의 원래 정신은 기독교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지금 민주주의는 타락했 습니다. 타락하고, 세속화된 민주주의가 교회안에 들어오고 있습니다. 어떤 정당 이든 민주가 들어갑니다. 정당들의 다툼도 민주를 걸고 넘어집니다. 우리는 이 ‘라오디게아’라는 이름 하나를 통해서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하나님의 위대하 심, 장엄하심, 초월성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여기서 분명히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타락한 민주주의! 교회는 절대로 민주 주의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민주주의 찾는 교단, 교회는 싸우고 난리입니다. 심 지어 장로가 목사 안수를 줍니다. 장로는 양입니다. 목사는 목자입니다. 오늘 이 시대를 세 가지로 봅니다. ‘민주주의의 확산’, ‘자유무역의 확대’, ‘인권의 신장’입 니다. 그러나 교회는 끝까지 하나님의 신권통치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종을 보내 서 철저히 신권통치를 하십니다. 물론 교회안에도 민주적인 요소는 필요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교회가 민주주의로 나가면 안됩니다. 1992년 2월에 카톨릭 교황청에서 민주주의를 나타내는 구테타적 발상이 나타났 습니다. 그 때까지는 만장일치제였습니다. 그러나 그 때부터 투표를 해서 뽑게 되 었습니다. 교황청에도 민주주의가 들어간 것입니다. 이렇듯 ‘라오디게아’라는 지역 의 개요를 통해서도 그 영적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이곳에서는 검은 빛 나는 양모와 골비안이라는 향유도 생산되었습니다. 최 고 멋쟁이는 검정색을 입습니다. 고급 옷, 향유를 뿌리면서 멋을 부린 시대가 라 오디게아 시대입니다. 오늘 이 시대도 얼마나 멋을 부립니까? 그 다음에 이 곳에 서는 각종 약이 셀 수 없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약 학교’가 있 었습니다. 이렇게 의학을 비롯한 각종 학문이 발달한 도시였습니다. 오늘 이 시대 도 각종 학문이 얼마나 놀랍다록 발전하고 있습니까? 또, 이 곳은 길이 많았고, 문이 많았습니다. 지금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돈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의식주가 넉넉했고, 토지는 비옥했고, 각종 산지에서 오는 산지물이 풍성했고, 산 업, 농업의 중심지였으며, 당시에 제일 잘 사는 도시였습니다. 오늘 이 시대도 보 십시오. 얼마나 잘 사는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너무 잘 알지 않습니까? 바울이 에베소에서 3년간 머무는 동안 이곳에 복음이 전달되었는데, 사도행전 19장 10절이 배경입니다. "이같이 두 해 동안을 하매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 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최초의 감독은 ‘아킵보’였습니다. 364년에 32명이 모이는 유명한 종교회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라오디 게아 종교회의에서 계시록을 정경에서 빼 버렸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 까? 마지막 때는 계시록이 무시당할 것에 대해 역사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
라오디게아 교회에 나타나신 에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삼중적인 확언으로서 자신 을 밝히고 있습니다. 첫째 아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둘째 충성된 예수 그리스도, 셋째 참된 증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1) 아멘이심
14절 = “…아멘이시오…”
‘아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그분의 말씀이 전혀 의심할 것이 없는 진실한 분이심 을 증거하는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아멘이십니다. 예수님은 절대자이십니다. 예수 님이 말씀하시면 그 말씀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 다. 예수님이 왜 이렇게 나타났을까요? 이 시대는 전부 예수님을 훼손하기 때문 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말씀에 철저히 ‘아멘’해야 합니다. 그리고 말 씀이 아닌 것에는 철저히 ‘아니오’라고 해야 합니다. 사탄 마귀는 우리에게 끊임 없이 말씀을 먹지 못하게 합니다. 말씀을 혼잡시킵니다. 진리에 다른 것들을 섞어 버립니다. 혼합주의가 그것입니다. 종교 다원주의가 그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만 ‘아멘’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멘이십니다. 성부 하 나님의 말씀에 ‘아멘’하셨습니다.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아멘’하셨습니다.
2) 충성심
14절 = “…충성되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셨을 뿐 아니라 죽기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 시는 충성되신 분이십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상태가 세상을 향해서는 말할 수 없이 부요했지만, 하나님을 향해서는 기아선상을 헤매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충 성이 없었습니다. 3) 증인되심
14절 = “…참된 증인이시오…”
예수님은 하나님의 참된 증인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참된 증인이 되어야 합 니다. 어떤 사람을 가리켜 증인이라고 합니까? 현장을 목격한 사람 아닙니까? 우 리는 십자가를 목격한 십작의 증인들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목격한 예수의 증인 들입니다. 우리는 천국을 목격한 천국의 증인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증인들 입니다.
4) 창조주되신 예수 그리스도
14절 = “…창조의 근본이신 이…”
이 말씀은 요한복음 1장3절, 히브리서 1장 2절에도 나오는 말로, 곧 예수님이 창 조주시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십니다. 이 말씀이 예수님이라고 했고, 이 말씀이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창세기 1장 1절, 천지를 창조하실 때 삼위가 다 계셨습니다. 지금은 예수님을 창조주로 보지 않습니다. 그래서 창조의 근본이심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1996년 10월 26일에 교황이 진화론이 맞다고 인정했습니다. 그런데 미국 켄사스주에서는 진화론은 잘못된 것이라며 교과서에서 빼 버리도록 결의했 습니다. 1999년 7월 31일, 베이징, 자바인, 네안데르타인, 유인원이라고 했던 것 들이 DNA검사를 통해서 전부 가짜라고 밝혀졌습니다. 저는 이 소식을 듣고 얼마 나 통쾌했는지 모릅니다. 우리 예수님이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것을 믿습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것을 믿습니까? 오늘 이 시대에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기 때문에 아멘이시오, 충성이시오, 창조의 근본이시라고 소개합니다.
2. 책망
1) 미지근한 신앙 죄
15절 =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오늘 이 시대의 신앙은 미지근합니다. 복음의 뜨거운 열정이 없이, 혼합되어 있습 니다. 라오디게아가 종말시대라면 이 시대 최대의 특징이 혼합주의인데, 여기서 무슨 근거가 없을까 생각했습니다. 계17장에서는 “음녀가 많은 물 위에 앉아 있 다”고 했습니다. 혼합주의 사상에 있다는 근거가 있습니다.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 회에는 없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라오디게아 도시에 들어오려면 ‘리쿠스’라는 계곡에서 들어오는 물과, ‘히엘라볼리 스’에서 나오는 온천물이 나옵니다. 이 둘이 서로 만납니다. 민물과 온천수 두 물 이 만나는 것이죠. 그래서 미지근한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 물은 도저히 마실 수 없는 토해버릴 상태입니다. 이것이 곧 혼합주의입니다. 혼합주의가 나타날 것 을 이런 자연환경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는 무엇이든지 섞어져 버립니다. 민족도 섞어집니다. 신앙도 세속화 됩니다. 종교도 섞어집니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 편에서 보면 역겨워서 토해버 리고 싶으신 것입니다. 어쩌면 그렇게 이 시대를 정확하게 보여주는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으려면 확실히 믿고, 안 믿으려면 말아버려야 합니다. 그 색깔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믿는 둥 마는 둥 하면 안됩니다. 여러분 미지근한 신앙이라고 할 때, 단순히 한국만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 나라는 부정적인 면이 많이 있지만 그래도 세계에서 제일 뜨겁고 열정적입니다. 그러나 전 세계적인 추 세가 어떻습니까? 미지근합니다. 어쩌면 그렇게도 정확하고, 실감나는지 모릅니 다.
2) 부요죄
17절 =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라오디게아’에는 돈이 많았습니다. 얼마나 돈이 많은지 시세로가 이곳에서 신용 장으로 현금을 바꿔 썼다고 할 정도입니다. 이곳은 은행이 발달하고 돈이 많은 곳이었습니다. 주후 60년에 대 지진이 났는데, 돈이 많아서 그 모든 피해를 자력 으로 복구 해 버렸습니다. 오늘 이 시대도 부요합니다. 교회들도 물질이 풍요로운 시대입니다. 믿음도 자기 들이 다 부요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죄악입니다. 우리는 이런 때에 “내가 부족하고, 내가 모자라고, 믿음이 이 정도 밖에 안 되는가” 하는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3) 곤고한 죄
17절 = “…네 곤고한 것…”
‘곤고한 것’은 정말로 곤란한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들이 영적으로 갈등이 없 다는 것은 영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시체들은 때려도 모릅니다. 영적으로 괴로 운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영적으로 죽어서 아무것도 모릅니다. 철학, 무신론적 철학 사상이 들어가서 독일 교회가 다 죽어버렸습니다. 다 죽어서, 화인 맞아버리 니까 모릅니다.
4) 가련한 죄
17절 = “…가련한 죄…”
‘가련하다’는 것은 곧 불쌍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보실 때에 오늘 이 시대의 믿음이 불쌍합니다.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교회와 성도들이 주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면 사회의 부요가 교회로 들어와서 신앙을 식게 하고, 부요에 젖어 식어진 신앙을 부여잡고 괴로움을 겪는 모습은 가련할 뿐일 것입니다.
5) 가난한 죄
17절 = “…가난한 것…”
여기, ‘가난’은 육적 가난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가난입니다. 이 교회는 미지근한 신앙으로 인해 영적인 요소를 다 잃어 버렸습니다. 즉, 주님 말씀처럼 ‘맛 잃은 소금’이 되어 아무 쓸모가 없는 상태임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도 믿음이 가난합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교회들은 이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가난한 것’이 섬기는 교회와 자신에게는 없는지 회개하고 바라보아야 합니다. 홍수속에 식수가 갈급하듯이, 교회의 홍수 속에 진리를 외치 는 말씀의 선포는 사라져 가고 있는 현실을 보십시오.
6) 눈먼 죄
17절 = “…눈먼 것…”
라오디게아는 얄질의 안약을 발명함은 물론이고 의학교를 세워 의술이 발달된 이 곳에서 눈먼 것을 모른다는 책망은 얼마나 역설입니까? 이것은 그들의 영적 상태 가 감겼다는 것입니다. 시대를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징조와 시대, 진리를 보 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 시대의 징조를 보는 눈이 필요합니다. 성경을 통해 역사를 보는 눈이 필요합니다.
7) 벌거벗은 죄
17절 = “…벌거벗은 것…”
라오디게아는 직조업이 발달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도시에서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영적으로 볼 때 너희가 벌거벗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는 것입 니다. 벌거벗으면 부끄러운 것이 다 드러납니다. 하나님 앞에 믿음의 행위가 다 벌거벗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라오디게아 시대를 말하는 것이지만, 예언적으로 오늘 이 시 대를 말해줍니다. 여러분은 그래도 한국 교회에 다니는 것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라오디게아에는 칭찬이 하나도 없습니다. 중세 암흑시대가 타락했다고 하지만, 영 적으로 볼 때는 지금이 훨씬 타락했습니다. 이와 같은 때에 우리가 믿음위에 굳 게 서서 철통같이 믿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3. 권면
만일 권면이 없다면 최악의 상태입니다. 말라기는 대환난과 마찬가지입니다. 마지 막 구약의 최고 타락한 시대입니다. 마지막 대 환난 때도 가장 타락한 때가 됩니 다. 이 시대는 희망이 있고, 소망이 있습니다. 의사가 “당신, 술 끊으시오, 약 먹 으시오, 운동하시오” 이렇게 충고해 주면 아직 소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 알 아서 하시오” 하면, 이제 끝났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권고하고 계십니다.
1) 불로 연단한 금을 사라
18절 =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불로 연단한 금’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금을 갖다가 불 속에 넣으면 금은 금끼리 모이고, 찌꺼기는 빠져서 찌꺼기들끼리 모입니다. 그 전에는 같이 있다가 뜨거운 불을 가열하면 금은 금끼리, 찌꺼기는 찌꺼기끼리 모이는 것입니다. 신앙이 그렇 습니다. 미지근하면 안됩니다. 열정적으로 믿어야 합니다. 불 속에서도, 어떤 환난 속에서도, 뜨거움 속에서도 금같은 순전한 신앙을 갖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욥기 23장 10절을 보십시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그렇습니다. 불로 연단해야 금이 됩 니다.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야 내가 정금같이 나오는 것입니다.
2) 흰옷을 사서 수치를 가려라
18절 =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성경에서 ‘벌거벗은’이라는 표현은 일반적으로 말할 수 없는 수치를 나태내는 표 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즉, ‘옷을 벗는다’는 것은 심판과 굴욕의 상징인 동시 에 ‘좋은 옷’을 입는 것은 바로 영광의 표시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회는 육적인 부요에 넘쳐서 영적으로 벌거벗은 수치를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흰옷을 사서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해야 했던 것입니다. ‘흰옷’은 ‘거룩’과 ‘성결’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거룩한 생활, 성결한 생활, 믿음의 생활, 경건한 생활, 기도 생활, 말씀 생활, 주일 성수 생활, 봉사 생활을 통해서 벌거벗은 부분을 가리라는 것입니다. 즉, 불로 연단한 금 같은 신앙을 갖으라는 것입니다.
3) 안약을 사서 바르라
18절 =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보게 하라”
이 말씀은 영적으로 눈을 뜨라는 뜻입니다. 영계를 바라볼 수 있는 성령의 전망 력과 판단력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 시대를 좀 보아라. 영계를 좀 보아라. 사 탄의 역사를 좀 보아라. 하나님의 세계를 좀 보아라.”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 대를 영적인 눈을 뜨고 보아야 합니다. 영적으로 보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 는 기도를 많이 하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보는 것은 완전하지 않습니 다. 그러면 무엇으로 볼 것인가? 말씀으로 보는 것이 완전합니다. 그것만이 100% 정확합니다. 말씀을 통해 모든 것을 보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4) 열심을 내라
19절 = “…네가 열심을 내라”
예배생활, 전도생활, 각 기관 봉사 열심히 하라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를 장거리 경주로 비유한다면 마지막 주자에 해당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 중요성 을 앞의 교회들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마라톤 선수가 마지막 골인 지점을 향하 여 열심을 내듯이, 주의 날을 사모하는 성도들도 그날이 임하기를 간절히 바라며 열심을 내는 신앙이 되어야 할 것을 말합니다.
5) 회개하라
19절 = “…회개하라”
이것은 잘못된 신앙관을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제가 이것보고 예배 시간에 “천부 의 의지 없어서” 찬송합니다. 이것보고 “예수님처럼, 초대교인처럼 살지 못한 죄” 를 회개합니다. 회개하면 하나님은 죄의 질을 묻지 않으십니다. 죄의 양도 묻지 않으십니다. 죄의 기간도 묻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무엇을 회개해야 합니까? 미지 근한 신앙을 회개해야 합니다. 신앙적인 자만을 회개해야 합니다. 곤고한 것을 회 개해야 합니다. 가련한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가난한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눈 먼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벌거벗은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6) 문을 열어라
20절 =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문을 열라는 것은 주님을 영접하라는 것입니다. 유명한 홀만 혼트의 그림을 다 보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문밖에 서 계시는 그림입니다. 그런데 그 그림을 유심 히 보지 않으면 볼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바로 바깥쪽에는 문고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안에만 문고리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안에서 문을 열 어야만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요즘은 사람끼리도 마음을 안 엽니다. 목사끼리도, 장로끼리도, 성도끼리도 마음 을 열지 않습니다. 마음을 열지 않으니까 말씀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 님이 마음 밖에, 교회 밖에 계십니다. 교회들이 얼마나 타락하고, 혼합주의, 종교 다원주의가 판을 치니까, 예수님이 그 속에 계시겠습니까? 절대 계실 수 없습니 다. 여기, ‘먹고 마신다’는 말은 세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침은 ‘아크라티스 마(?κρατ?σμα)’인데, 마른 빵 조각을 포도주에 찍어 먹는 것을 말합니다. 점심은 ‘아리스톤(?ριστον)’인데, 도로가나 가로수, 광장에서 먹는 도시락을 말합니다. 저녁은 ‘데이프논(δε?πνο)’인데, 오래 앉아서 이야기하며 먹는 친교의 식사를 말 합니다. 이스라엘과 한국은 저녁을 많이 먹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데이프논입니 다. 여기서 먹는 것은 무엇일까? 이것은 마24:45절에 ‘때를 따라 양식’입니다. 그러 니까 말씀입니다. 여기서 저녁을 먹자고 했습니다. 저녁은 특징적으로 종말을 의 미합니다. 아침은 구약 시대를, 점심은 신약 시대를 예표한다면 저녁은 종말 시 대, 재림때를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너희가 마음을 열면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먹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다시말하면, 마지막 때 작은 책, 계시록이 열릴 것이며, 주님의 재림의 복음이 너희 안에 들어가서 이 말씀의 교제가 있겠다. 너와 내가 말씀으로 교제하고, 말씀으로 하나되는 것을 얘기한다는 말입니다. 지금 라오디게아 교회는 문을 열어야 하고, 열심히 믿어야 합니다. 마지막 때는 계시록이 확 열릴 것입니다. 마지막에 일곱 영, 성령이 농사가 여물 때 비가 한번 쏟아지듯이, 폭우가 한번 쏟아 지듯이, 성령께서 강하게 역사해서, 작은 책 요한 계시록이 폭발해서 영혼들이 깨어나고 주님이 오신다고 봅니다. 지금은 열매 맺 을 때입니다. 다 자라서 열매가 맺어서 알곡이 여물 때입니다.
4. 이기는 자에게 주는 축복
누가 이기는 자입니까? ‘이기는 그’라는 의미가 역사적으로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성도들 개개인에게 주시는 말씀이지만, 복음적으로는 전 세계 어느 시대, 어느 교 회 성도에게 주신 말씀이면서도 예언적으로는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종말 의 교회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1) 보좌에 함께 앉게 하심
21절 =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패자는 비참합니다. 반드시 이겨야 합니다. 패자는 승자의 발에 입맞춥니다. 왕이 나와서 적군에게 입을 맞출 때 발로 그 목을 눌러 버립니다. 발에 입을 맞추는 것은 그의 노예가 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탄에게 지면 사탄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탄은 절대적으로 이겨야 합니다. 잡념이 들어오면 기도해서 이겨야 합니다. 마귀에게 지면 안됩니다. 이기는 자에게 축복해주는데, 재림이 임박한 상태의 복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기셨습니다. 육적으로 이기신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신앙적으로 이 기신 것입니다. 보좌에 올라간다는 것은 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라오디게아 가 재림이 역사적으로 임박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는 신앙으로 이겨야 합니다.
4장
계시록 4장부터 19장까지는 대환난의 내용입니다.
6장부터는 ‘흰말’, 적그리스 도가 나타남으로 환난이 시작됩니다. 6장부터 환난이 시작되는데, 바로 환난으로 들어가지 않고 하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이것을 ‘중간계시’라고도 합 니다.
계시록 4장과 5장은 천상의 모습입니다. 요한이 그의 몸은 밧모섬에 있고, 영이 성령에 감동되어서 하나님 보좌에 올라갑 니다. 성경 전체에서 영이 하나님 보좌에 올라갔다는 것은 이곳이 최초의 사건입 니다. 고린도전서 12장을 보면, 사도 바울이 삼층천을 보았는데 영이 올라갔다는 말은 없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영이 성령에 감동되어 하나님 보좌에 올라갔습니 다. 특히, 계시록 4장부터는 계시록의 외형적인 문체가 3장까지와는 판이하게 다릅니 다. 1장부터 3장까지는 기록 형식이 다른 서신서와 비슷해서 쉽습니다. 그래서 목사님들도 1장부터 3장까지는 쉽게 생각하고, 인용도 합니다. 그런데 4장부터는 독특합니다. 계시록은 상징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아가서가 상징으로 거의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전 성경에서 아가서와 계시록을 가장 어렵게 생각합 니다. 계시록을 보다가 그 단어들을 하나 하나 생각하고, 연구하고, 정리해보면서 그 하 나님의 언어에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상징속에 깊고 오묘한 진리를 감추셨습니 다. 그래서 그 상징에 대한 것을 하나 하나 깨달을 때마다 너무 놀랍니다. 4장은 천국의 모습입니다. 성경 전체에서 최초로 천국에 대해 공개한 장엄하고, 축복된 천국 공개 사건이 4장과 5장입니다. 요한은 ‘본 것’을 공개했습니다. 계시록에 기록된 것은 ‘본 것’을 기록했는데, 지금 그것이 그대로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사실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본 천국은 역사적인 사실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가 본 세세토록 붉은 유황불 속에서 괴로움을 받는 지옥도 역사적인 사실입니 다. 그런데 이렇게 실제적으로, 계시적으로 요한이 본 지옥을 교황은 없다고 하는 발언을 서슴치 않고 있습니다.
1. 새로운 사명을 받는 요한
1) 사명받는 시기
1절 =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시간적으로 라오디게아 교회가 끝나고 요한에게 될 모든 것을 보여 준 것입니다. 이것은 라오디게아 이전의 사건이 아니기 때문에 종말 이전의 사건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라오디게아 시대라면 그 이후의 시대를 보여 주는 것입 니다. 요한이 영안이 열려서 보았습니다.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그랬습니다. 이 것은 천국문, 곧 신령한 세계를 말합니다. 겔1:1에도 ‘열린 문’이 나옵니다. 계 19:11에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하늘 자체가 열린다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눈이 있는데, 못 봅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맹인’이라고 합니다. 영적으로도 맹인이 있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이지 요. 또, 눈이 있으되 시력이 안좋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보조 기구 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라식 수술을 받든지, 렌즈나 안경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 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돋보기를 들고 다녀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영적으로도 그렇습니다. 눈은 있는데, 시력이 안 좋습니다. 그래서 실수가 많습니다. 다른 도 움이 필요합니다. 스스로 성경을 읽지 못하는 사람, 스스로 기도를 할 수 없는 사 람, 스스로 찬양을 할 수 없는 사람이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그런데 눈이 좋은 사람이 있습니다. 시력이 좋아서 어지간한 것은 다 볼 수 있습 니다. 모세도 죽을 때까지 눈이 흐리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참 감사 하지요. 영적으로 시력이 좋은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요한처럼 영안이 열린 사람 입니다. 신비한 사건을 본다는 차원을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에게 일어나 는 일에 대해서 영적으로 보는 눈이 있습니다. 이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 하 나님의 시각으로 바라 볼 줄 압니다. 사람을 볼 때도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봅니 다. 이런 사람은 영적인 시력이 좋은 사람입니다. 바울은 천국을 보았습니다. 천 국을 본 바울은 자기의 생명을 조금도 아끼지 않고 달려갈 길을 마쳤습니다. 본 사람은 다릅니다. 영안이 활짝 열리기를 바랍니다.
2) 사명받는 상태
1절 = “…이리로 올라 오라…” 요한이 그의 몸은 밧모섬에 있고, 영이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이것은 결코 교회의 휴거가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에는 몇가지 첨예한 대립이 있습니다. 논쟁의 강도로 볼 때, 첫째 논쟁이 무엇인가? 계시록 20장의 ‘천년왕국’ 논쟁입니다. 두 번째 논쟁이 무엇일까? 6장의 ‘흰말’입니다. 세 번 째 논쟁이 무엇인가? 7장의 ‘144,000’에 관한 논쟁입니다. 네 번째 논쟁은 오늘 본문의 “이리로 올라오 라”는 것에 대한 해석입니다. 세대주의자들은 ‘7년 대환난’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7년 전에 휴거해서 공중에 서 혼인 잔치할 때,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함께 온다고 합니다. 바로 이 근거를 오늘 본문의 “이리로 올라오라”에서 잡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교회의 휴거라고 주장합니다. 이 논쟁이 치열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교회의 휴거가 될 수 없습니다. 세대주의에서는 2장, 3장에서 ‘교 회’라는 말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만 대환난 기간동안 남는다고 해석합니 다. 또 한 부류가 있는데, 휴거되지 못한 믿음이 연약하여 남은 자들이 대환난속 에 들어가 지독한 환난과 연단을 받아서 7년 후에 구원받을 자로 나누어진다고 해석합니다. 과거에 이 이론이 한국교회에 주 이론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요한의 개인적인 사건이지, 교회 의 휴거라고 할 만한 근거가 하나도 없습니다. 요한 개인은 밧모섬에 있고, 영만 올라가서 하나님 보좌에서 미래에 될 일을 보고 기록한 것입니다. 휴거는 살전4:16~17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계시록 4:1~2절과 살전4:16~ 17절은 공통점이 전혀 없습니다. 왜 교회의 휴거가 될 수 없는가?
(1) 소리로써 구분되기 때문입니다.
살전4:16절에 보면 교회의 휴거는 하나님의 나팔소리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본 문은 나팔소리 같은 음성을 요한이 들었으므로 본문은 교회의 휴거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2) 장면으로 구분되기 때문입니다.
살전4:16절에 보면 교회의 휴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이 있습니다. 그러나 본 문은 그리스도의 강림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교회의 휴거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3) 내용으로 구분되기 때문입니다.
살전4:16절로 17절에 보면 성도들의 부활과 휴거가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사 도 요한만이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어 하늘 보좌의 환상을 봅니다. 사도 요한을 교회의 대표로 볼 수 없지 않은가? 그러므로 본문은 교회의 휴거가 될 수 없습니 다.
(4) 장소로서 구분되기 때문입니다.
살전4:17절에 보면 교회의 휴거는 부활한 성도와 휴거된 성도들이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지는 환희의 장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밧모 섬의 사도 요한이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열린 문을 바라봅니다. 따라서 본문은 교회의 휴거가 될 수 없습니다.
(5) 목적으로 구분되기 때문입니다.
살전4:17절에 보면 교회 휴거의 목적은 공중에서 영접한 주님과 영원히 함께 있 게 하시려는 것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사도 요한에게 장차 될 일을 보여주신느 일시적인 것이므로 본문은 교회의 휴거가 될 수 없습니다.
(6) 기간으로 구분되기 때문입니다.
살전4:17절에 보면 교회 휴거는 주님과 영원히 함께 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 문은 장차 될 일을 보여주시려는 의도로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일시적인 상황 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교회의 휴거가 될 수 없습니다.
(7) 결론으로 구분되기 때문입니다.
살전4:17절에 보면 휴거는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며 끝맺습니다. 그러나 본문 은 사도 요한에게 새로운 장면을 보이려는 환상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교회의 휴거가 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이리로 올라오라”는 교회의 환난전 휴거가 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 리로 올라오라”는 것은 사도 요한에게 주신 말씀일 뿐 교회에게 주신 말씀이 아 닙니다.
3) 사명받은 내용
1절 = “…이 후에 마땅히 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될 일’을 보여주시는 목적이 있습니다. ‘이 후에’라는 말은 ‘라오디게아 교회 후에’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시대 후에’라는 말입니다. 이 시대 후에 될 일을 예수님이 요한에게 보이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간적으로는 대환난이 고, 내용적으로는 상징이 아니고, ‘될 일’입니다. 제가 요한계시록을 통해 생명을 걸고 주장하는 것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4 장 이하부터는 대환난 때 될 일, 20장 이하는 재림이후에 될 일이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4장 이하는 상징이 아니고, 될 일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 두 가지를 철통같이 붙들고 요한계시록을 해석합니다. 제가 어떻게 이 사실을 이렇게 확증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그렇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 다. 계1:1, 1:19, 4:1, 22:6절에, 그 스스로 ‘장차 될 일’이라는 것을 증거하 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요한계시록을 상징이라고 우겨댑니다. 장차 될 일과는 무관하다고 합니다. 이것은 성경을 우롱하는 것이고, 성경의 자증을 무너 뜨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든 것이 실제 될 사건입니다. 계시록은 종말에 될 일이 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될 일이기 때문에 우리는 순교할 수 있는 것이고, 어 떤 환난속에서도 우리의 신앙을 굳건히 지킬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만일에 계시록 이 없다고 생각하면, 마지막 때 이것은 비참한 일입니다. 교황권이 지금 저렇게 혼합주의로 나가고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이미 계17장 에 될 일로 나타나 있고, 그 될 일이 지금 우리 앞에 너무 확실하게 나타나고 있 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순교적인 자세로 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용의 권세로부 터 승리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여 주었는데, 어떻게 상징이 될 수 있습니까? 우 리 주님이 마지막 때 친히 이런 일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그대로 나타 납니다.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이 독립하기 이전에는 요한계시록이 될 일로 해석하 는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요한 계시록 중에 핵심적인 사건인 ‘음녀’, ‘흰말’, ‘적 그리스도’ 등, 각종 재앙들이 그렇게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물 론 초대교회 이후로 징조들이 점점 강화되어 온 것은 사실이지만 오늘날같이 계 시록에 나타난 그 강도에 거의 버금가는 내용들이 해석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 니까 과거에 나온 주석들은 이 시대적인 감각들이 약했습니다. 그래서 상징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었겠다고 한편으로 이해도 됩니다. 여러분! 놀라운 사건은 여러분과 내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사건으로 요한계시록 이 해석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사건입니까? 성경의 마지막, 장차 될 일이, 계시의 말씀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그대로 볼 수 있고, 만 질 수 있고,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인류역사상 최대의 축복 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번 멋있게 예수 믿고 순교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 습니다. 요한계시록을 통해 이 시대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확신 가운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2. 천국의 하나님 모습
1) 하늘 보좌
2절 =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요한이 성령에 감동했습니다. 고통과 환난과 아픔과 죽음의 위기가운데 있던 요 한을 붙들어 성령이 감동했습니다. 그래서 처음으로 그를 통해 천국을 공개합니 다. 성경 어디에서도 성경을 공개한 적이 없습니다. 모세에게 성막을 통해 그 식 양을 보여 준 적은 있습니다. 그 성막안에 천국의 무궁무진한 비밀이 있는데, 우 리가 미쳐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 부자와 나사로를 통해 비유적으로 보여준 적이 있지만, 이렇게 구체적으로 보여 준 것은 처음입니다. 요한이 보니까 하나님이 있는데, 보좌에 있습니다. 나의 임금되신 하나님께서 천 국 보좌에 앉아 계십니다. 이것도 상징입니다. 그런데 될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모습을, 이 땅에 왕이 임금으로 앉아 있는 모습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는 것입니다. 감히 백성 중에 누가 왕 앞에 들어가서 왕을 뵈올 수 있습니까? 임금이 옥좌에 앉아 있는 것처럼 하나님이 보좌에 앉아 계신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 하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가짜 하나님이 아닙니다. 진짜 하나님이십니다. 구약은 천국을 본 자가 없습니다. 신약은 바울이 보았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보고 는 14년 동안 말을 못 했습니다. 여기 바울의 태도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천국을 본 바울은 생명을 바쳐 버립니다. 천국의 그 놀라운 축복과 그 황홀한 모 습을 보고, 그는 복음을 위해 목숨을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고 바쳐버립니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를 믿고도 천국을 못 보기 때문에 이 땅에 것에 고민하고 메 여 삽니다. 말씀에서 천국을 보아야 합니다. 14년 동안 바울의 말 문을 닫아놓은 그 곳, 바울같이 유식하고 똑똑하고, 영적인 사람이 14년 후에야 인간의 말로 가 히 이를 수 없는 곳이라고 표현해야 했던 그 천국을 우리도 말씀 가운데서 만나 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천국은 확실히 있습니다. 천국을 본 자가 생명을 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천국을 본 자는 생명이 아깝지 않습니다. 열 두 제자가 그랬습니 다. 스데반이 그랬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사는 문제로 고민합 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사는 문제 때문에 매여 살면 안됩니다. 저 좋은 낙원이 기다리는 우리는 그 영원한 나라의 시민으로, 대사로 살아야 합니다. 저는 요한 계시록을 통해서 장차 될 일을 보았기 때문에 어떠한 핍박과 아픔이 와도 진리를 못 바꿉니다. 보았는데 어떻게 전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성경을 볼 때 껍데기만 보면 안됩니다. 문자나 형식보고 지나가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 깊은 진리를 맛보아야 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보았다고 하는데, 그 하나님의 모습을 인간의 모습으로 묘사할 수 없으니까 우리가 가장 귀하게 여기는 보석 같은 것으로 묘사합니다. 그런데 요한보다 더 위대한 사람이 나타납니다. 바울은 보았습니다. 요한은 보고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계22:4에 보면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랬습니다. 이 것을 계시의 점진성이라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천국에 간 사람들은 더 큰 사 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세례요한을 보고, 그가 예수님을 직접 보고 전하니까 여자가 난 자 중에 가장 큰 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천국가면 요한이 어 린아이보다 못하다고 했습니다. 어린아이라 할지라도, 가장 작은자라 할지라도 천 국에 간 자가 최고입니다. 천국은 분명히 있고,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계십니다. 할렐루야!
2) 벽옥
3절 = “…벽옥…”
‘벽옥’의 ‘벽’자는 ‘푸를 벽(碧)’자입니다. ‘구슬 옥’자입니다. 그러니까 이것 은 푸른 빛깔의 보석을 말합니다. 푸른 색, 파란 색은 거룩성을 말하는 것이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성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천사들도 거룩하신 하나님을 찬송 합니다. 교회는 천국의 예표입니다. 천국의 모형을 최초로 갖다 놓은 것이 성막이고, 두 번째 갖다 놓은 것이 성전이고, 세 번째 갖다 놓은 것이 교회입니다. 그러니까 영 적으로 이 땅에서 볼 수 있는 천국이 있는데, 그것이 곧 교회입니다. 교회는 하나 님이 좌정하시고 통치하십니다. 그러므로 인간들이 못된 것 가지고 와서 교회를 어지럽히는 것은 하나님의 좌정을 모르기 때문에 하는 방자한 행동입니다. 적용 적으로 지각한 사람들도 그렇습니다. 정말로 하나님이 나타나서 여기 앉아 계시 다면 감히 누가 지각을 하겠습니까?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밤낮 지각하는 것입니 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껌이나 씹고, 옷차림도 신경 쓰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죄가 없으신 거룩하신 분 이십니다.
3) 홍보석
3절 = “…홍보석…”
‘홍’은 ‘공의성’을 말합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나 님을 사랑하는 자, 하나님을 따르는 자에게 하나님은 천대까지 복을 주시고 천국 으로 인도할 것이며, 우상 숭배하고 하나님을 거역한 자에게는 불심판, 영원한 지 옥불에 들어가게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로운 공의성입니다. 정확히 판단하 시는 하나님을 말합니다. 사랑하실 때는 자신을 이 땅에 생명까지 바쳐 십자가에 서 피를 흘려, 홍보석 붉은 피를 흘리신 사랑의 하나님이시지만, 진노하실 때는 모든 인간을 심판하시는 진노의 하나님이십니다. 각자가 만난 하나님이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하나님은 한없이 사랑을 베푸시는 아버지의 모습과 같습니다. 또, 어떤 사람의 모습에 하나님은 위로의 하 나님이십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러나 그것만 생각하지 마세요. 동시에 하나님은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렇 게 하나님에 대해서 편협함이 없는 이해가 필요합니다. 간혹 신앙이 얕은 사람들 은 죄를 지으면서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다 용서하실 것이라고 둘러댑니 다. 그러나 홍보석 하나님은 공의롭게 심판하십니다.
4) 보좌에 둘려진 무지개
3절 =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렀는데”
무지개는 언약성을 말합니다. 창9:13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내 무지 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의 세상과의 언약의 증거니라". 구름속에 둔 무지개가 언약의 증거였지 않습니까? 무지개는 언약성을 드러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약속의 자녀들입니다. 우리는 약속을 받은 자들입 니다. 약속하신 하나님은 약속에 신실하십니다. 그 언약은 변함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들이여! 믿으려면 멋지게 믿다가 갑시다. 여러분의 삶이 얼마나 남 았는지 계수해 보세요. 멋지게 신앙 생활하다가 갑시다. 하나님의 영 불변하시는 약속 있습니다. 약속 붙잡고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5) 녹보석
3절 = “…녹보석…”
녹색은 생명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성경 어디를 보아도 천국이나 하나님을 묘사 할 때 검정색은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검정색은 마귀 사탄의 색깔이 고, 종말, 죽음의 색깔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검정색 옷을 멋으로 입는 것은 괜 찮지만, 의미로 입는 것은 안됩니다. 그래서 저는 예배시간에 입는 까운도 검정색 을 입지 않습니다. 물론 장례식 때 검정색 옷을 입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니까 괜 찮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만든 형상이 아니며, 가짜 신이 아닙니다.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모세에게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밖에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요한을 통하여 이렇게 자세히 공개했습니다. 요한 이 보니까 천국에 이런 하나님이 임재해 계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 는 마지막에 이 하나님 보좌에 갈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분이 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잘 믿읍시다. 예수 후회 없이 믿다가 하나님 앞에 갑시다.
3. 이십 사 장로
1) 이십사 장로
4절 = “…이십 사 장로들…”
‘보좌에 둘려’, 첫 보좌는 하나님이 앉으신 영광스러운 보좌입니다. ‘이십사 보좌’ 라고 했는데, 여기 ‘24’는 구약의 12지파, 신약의 12제자를 의미합니다. 저는 영원한 하나님의 보좌에는 12천사장이 있는 것으로 봅니다. 예수님이 하늘의 12 영을 동원할 수 있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열 두 영을 열두 천사장으로 봅니다. 천국이 이 땅에 내려온 것이 성막입니다. 성막에는 열두 지파가 중심으로 살아갑 니다. 신약에 와서 이것이 열두 제자로 나타납니다. ‘12’수는 교회 조직수입니다. 하나님 보좌의 천사장의 수요, 구약의 열두 지파의 수요, 신약의 열두 제자의 수 입니다.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있다”고 했습니다. 여기 장로들이 누구인가? 구원받은 자의 대표입니다. 땅의 피조물의 대표입니다. 교회의 장로는 성도들의 대표입니 다. 우리 장로님들은 성도들의 대표입니다. 그러면 천상에 이십사 장로가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이 땅에서 구원받은 성도들이 천국에 갔는데, 그들의 대 표성을 갖습니다. 그러면 이십사 장로가 이십사 보좌에 있다고 했는데, 여기 보좌라는 것이 무엇인 가? 보좌라는 것은 보배로운 자리입니다. 임금이 앉은자리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보좌가 있고, 24개 보좌가 주위에 있습니다. 그러면 구원받은 성도가 천상에서 임금이 앉는 자리에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엄청난 천국의 축복과 영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대표들이 가서 임금이 앉은 보좌에 앉아있다는 말 로 우리가 천국에 가서 누릴 축복과 영광을 이것으로 묘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무 좋은 것은 말로 다 못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결혼식장의 신 랑, 신부가 너무 좋으면 말을 못하는 것입니다. 너무 좋은 것을 보면 말을 못하고 그저 탄성을 지릅니다. 천국이 그렇습니다. 그곳은 말을 못할 곳입니다.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고후12장에 바울이 천국을 보더니, “내가 몸 안에 있었는 지, 몸 밖에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고 고백합니다. 인간의 말로는 설명할 길이 없 습니다. 바울은 설명할 수 없는데, 요한에게 와서는 점점 더 열리는데, 그것을 상 징으로 표현합니다. 세상에서 제일 좋은 것으로 표현합니다. 이 세상에서는 그 이 상 더 좋은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보좌에 앉아있다는 것은 우주적인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상황속에서 도 주님을 노래하고 기뻐해야 합니다. 예수를 안에서 기뻐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육적으로 보면 손해나는 것 같지만, 이런 보좌의 영광이 저와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엄청난 천국속에 저와 여러분이 있습니다. 보좌에 앉아있다는 말 한 마디에서도 그 감동을 다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사실 이런 천국이 없다면 우리가 예수 믿을 필요가 뭐가 있습니까? 여러분들 오 늘밤에라도 죽으면 이 천국에 갈 것을 믿습니까? 우리는 오늘이라도 우리 주님 부르시면 그 영원한 나라에 이를 것입니다. 이 피묻은 주의 복음을 하나님의 종 들이 생명 걸고 전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윤리나 도덕이나 교훈을 전하면 힘이 없고, 생명력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사수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 때는 열매를 거둡니다. 그래서 영적 생활이 훨씬 전투적입니다. 저와 여러 분은 알곡이 되어서 농부에게 바쳐질 수 있는 분명한 천국관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이 시대는 갈수록 천국개념이 없어지고 있습니다. “저 좋은 낙원 이르니 내 기쁨 한이 없도다 이 세상 추운 일기가 화창한 봄날 되도다 영화롭다 낙원이여 이 산 위에서 보오니 먼 바다건너 있는 집 주 예비하 신 곳일세 그 화려하게 지은 것 영원한 내 집이로다” 우리가 바라보는 저 천국, 저 영원한 나라에 우리의 모든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 가 힘들고 어려워도 저 천국만 생각하면 우리 안에서 새록 새록 기쁨과 희망이 솟는 것은 우리에게 그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나라를 사모함으로 날마다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2) 복장
4절 = “…흰옷을 입고…”
흰옷을 입은 모습은 거룩한 성도의 모습입니다. 계7:14을 보십시오.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 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천국은 더러운 자가 결코 갈 수 없는 나라입니다. 죄인들 은 들어갈 수 없습니다. 어떻게 갈 수 있습니까? 대속하신 주를 믿음으로 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다 씻어 버리 고 가는 것입니다.
흰옷을 입었다는 것은 거룩해진 성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 몸 을 흠과 티가 없이 보존하라고 합니다. 우리는 연약해서 죄를 지을 수 밖에 없습 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로 흠과 티가 없이 완전한 하나님의 백성 이 되는 것입니다.
3) 머리치장
4절 = “…머리에 금 면류관을 쓰고 앉았더라”
‘금’은 보배성입니다. ‘면류관’은 상급입니다. 계14:14에 보면 예수님이 흰 구름 위에 면류관을 쓰고 계신 것으로 나타납니다. "또 내가 보니 흰 구름이 있 고 구름 위에 사람의 아들과 같은 이가 앉았는데 그 머리에는 금 면류관이 있고 그 손에는 이한 낫을가졌더라" 이것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이 땅에서 하나님의 교 회를 섬기며, 복음대로 살며, 이제는 예수 따라 전도도 하며, 직분에 충성하며, 주 님을 섬겼고, 사랑했던 모든 것을 말합니다. 계22:12절에 “내가 속히 오리니 내 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이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그래서 이 땅에서 주 님을 위해 수고했던 모든 것에 대한 상급을 금 면류관으로 얘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올림픽에서 일위를 차지하면 금메달을 받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좋은 천국을 우리가 약속받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들이 모든 것을 드리는 것 입니다. 선교사들이 그토록 생명을 바쳐가며 복음 전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그리고 수많은 주의 종들과 선교사들이 그렇게 수고한 모든 노고가 만일에 천국 이 없다면 부질없는 것이 됩니다. 이 땅에서 죽도록 고생하고 불행하게 생을 종 결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땅에서 감히 비길 수 없는, 인간의 말로 가히 설명할 수 없는 저 영원한 천국이 우리에게 보장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기뻐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기쁨이 없습니까? 감동이 없습니까? 예수를 믿어도 환희가 없습니까? 여러분의 천국관을 점검하십시오. 천국을 본 사 람은 세상을 다 가진 것보다 더 행복합니다. 내게 있는 것도 아버지의 것이요, 내 게 없는 것도 아버지의 것입니다. 그래서 다 바치게 되어 있습니다.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계2:10절에 보면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 관을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이 끝까지 믿음 지키기를 축원합니다.
4. 보좌로부터 나는 세 가지
이것은 천국의 특성이며, 하나님 사역의 특성을 보여줍니다. 하나님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뇌성, 이 세 가지가 났습니다.
1) 번개
5절 = “…번개…”
번개가 치는 것을 보셨습니까? 눈 깜짝할 사이에 번개가 칩니다. 번개는 신속성 을 말해줍니다. 번개처럼 신속하게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말씀하시는 것 입니다. 벧후3:9절에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하십니다. 더디 오시는 것이 아니라 천년이 하루 같다 는 것을 잊지 말라고 하십니다. 심판이 빠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신속한 사역의 특성을 볼 수가 있습니다. 번개는 만분의 1초만에 번쩍합니다. 여러분! 교회는 천국의 예표입니다. 우리는 주의 몸된 교회에서 영적인 일, 하나 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감당할 때 번개처럼 즉각 순종하며 해야 합니다. 아마 우 리 교회 당회는 한국에서 제일 빠를 것입니다. 어떤 교회는 100불 선교비 주는데 당회가 몇 번씩 모여도 그 결정을 못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 는 일이라면 그렇게 미룰 일이 아닙니다. 우리도 주의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 신 속할 필요가 있습니다.
2) 음성
5절 = “…음성…”
여기, ‘음성’은 권위성을 말해줍니다. 우주 만물을 통치하시고, 죄인들을 구속 하시고, 저 사탄 권세를 멸하신 하나님의 권위성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 하 나님의 권위 앞에서는 누구도 꼼짝 못합니다. 하나님은 그 엄청난 권위를 가지고 그의 친자녀들을 지키십니다. 또 한편으로는 우리가 하나님의 권위를 생각할 때 우리가 겸손해야 합니다.
3) 뇌성
5절 = “…뇌성…”
뇌성은 진노의 권위성을 말합니다. 이사야 14:12절에 보면, 계명성의 천사가 하 나님을 반역하니까 추방해 버립니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 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하나님의 심 판이 즉각 임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심판은 같이 있습니다. 이 뇌성은 하나님의 공의의 진노성입니다.
5. 일곱 영
1) 일곱 등불
5절 = “…일곱 등불 켠 것…”
‘일곱 등불'이라는 것은 구약시대 성소의 촛대를 의미합니다. ‘촛대’는 교회를, ‘빛’은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촛대의 기름은 성령을 의미합니다. ‘일곱’은 완전 숫자이고, ‘등불’은 성령을 상징하니까, 일곱 등불은 성령의 완정성을 말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보좌는 성령이 충만합니다. 하나님 보좌에는 일곱 등 불, 성령이 계십니다. 삼위가 다 계십니다. 성령이 일곱 등불 켠 것 같이 하나님 사역의 완전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2) 일곱 영의 출처
5절 = “…하나님의 일곱 영…”
교회는 성령으로 가득차야 합니다. 하나님의 보좌가 권위가 있어야 합니다. 교회 는 성령께서 충만하게 덮어 버려야 합니다. 일곱 등불 켠 것, 일곱 영은 삼위가 천국에 계신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일곱 영으로 충만하면 염려, 근심, 걱정 아무 것도 없습니다.
6. 유리 바다
1)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
6절 =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바다’라는 것은 이 세상을 말합니다.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라는 말은 천국 세계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불변성, 견고성, 보배성을 말합니다. 수정도 보석입니다. 수정은 견고해서 견고성을 말합니다. 유리바다입니다. 이 세상 바다 는 유리 바다와는 반대입니다. 이 세상 바다는 갈리리 바다입니다. 예수님이 왜 갈릴리 바다의 사역을 하셨을까요? 바다는 이 세상, 이 세상에서 고기 잡는 것은 어부들, 예수님이 그렇게 예표적으로 말씀하셨잖아요? 제자들이 풍랑을 만났습니 다. 세상 바다는 갑자기 풍랑이 몰아칩니다. 이 세상의 고통과 내일을 알 수 없는 불행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리 바다는 보석바다입니다.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고귀하고 높은 가치가 있습니다. 솔로몬 성전에는 바다같은 유리 마루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유리 바다가 얼마나 투명했든지, 시바 여왕이 이 마루를 건널 때 마치 물을 건너듯 치마를 걷고 건넜 다는 말이 있습니다. 천국 전체를 얘기하는데, 유리 바다와 같다고 합니다.
7. 네 생물
1) 네 생물의 모습
6절 = “…앞뒤에 눈이 가득하더라”
네 생물은 천사들의 대표입니다. 네 생물은 겔10:20절에 보면 ‘그룹’ 천사들이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보좌는 하나님이 계시고, 성령님이 계시고, 성자님이 계시 고, 그리고 또 두 종류가 있습니다. 구원받은 무리들이 앉아있고, 하늘 피조물의 대표로서 천사들이 있습니다. 이사야가 하나님 성전에서 스랍들의 영광을 보고 거기서 무릎을 꿇고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하며 영광을 노래했습니 다. 5장에 가면 천사가 만만이요, 천천이라고 했습니다. 왜 천천이요 만만이라고 하 지 않고, 만만이요, 천천이라고 했을까? 이것은 상징성으로 셀 수 없는 천사들을 말하는데, 만, 수, 천, 백은 만수를 의미합니다. 많은 것부터 언급하는 것은 많다 는 것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갈 천국은 하나님이 계시고, 성령님이 계시고, 어린 양이 계시고, 구원받 은 성도들이 있고, 그 셀 수 없는 천사들이 있습니다. 얼마나 영광스럽습니까? 예 수를 믿을 때, 뼛속 깊이, 살 깊이 믿어야 합니다. 말씀에 반드시 서야 합니다. 그 래야 흔들리지 않습니다. ‘앞뒤에 눈이 가득했다’는 것은 하늘의 수종꾼들, 천사들은 앞에 뿐 아니라 뒤 에까지 봅니다. 이 땅에서도 우리의 삶이 수종꾼들처럼 하나님께 영광돌리고, 충 성스럽게 마음껏 하나님 위해 일해야 합니다.
2) 첫째 생물의 모습
7절 =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이제 네 생물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하나님 보좌에서 천국의 피조물, 천사들의 모 습에서 그 역할을 알 수 있습니다. 사자 같다는 것은 용맹성입니다. 우리도 주의 일을 할 때 강하고 담개하게 합시다.
3) 둘째 생물의 모습
7절 =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둘째 생물, 송아지는 충성, 헌신입니다. 소는 순종하고, 충성하고, 생의 마지막에 는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바칩니다. 우리도 내 삶을 깨끗하게, 내 생각을, 내 모든 것을 깨끗하게, 송아지처럼 드립시다.
4) 셋째 생물의 모습
7절 =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얼굴이 사람 같다는 것은 지혜성입니다. 사람은 지혜의 상징입지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내면서 뱀처럼 지혜로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일 하면서도 지혜롭게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천국 동기 동창생입니다. 주 의 일을 할 때 열심히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동시에 지혜롭게 하는 것도 중요합 니다. 우리가 맡은 모든 일을 지혜롭게 잘 감당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할렐 루야!
5) 넷째 생물의 모습
7절 =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넷째 생물의 모습은 날아가는 독수리입니다. 독수리는 무엇을 상징하는가? 신속 성입니다. 하나님의 수종을 드는데 독수리처럼 신속하게 드는 것입니다. 하나님 의 영광을 위해 신속하게 사역하는 모습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교회에서 일할 일꾼들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교회 일을 하면서 마 귀 사탄과 싸우면서 사자처럼 용맹스럽게 해야 합니다. 또 소처럼 순종하며 충성 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지혜롭게 해야 합니다. 또 독수리처럼 신속하게 해야 합 니다.
6) 여섯 날개
8절 = “각각 여섯 날개가 있고…”
여섯 날개를 가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는 신속성을 말합니다. 날개가 두 개만 되어도 빠른데, 여섯 개니 얼마나 빠르겠습니까? 이사야 6:2절에 "스랍 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 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라고 합니다. 여기 ‘얼굴을 가렸다’는 것 은 겸손을 말합니다. ‘발을 가렸다’는 것은 회개를 말합니다. 날아갔다는 것은 열심을 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주의 일을 할 때, 하나님의 교회를 섬길 때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 얼굴을 가리워야 합니다. 겸손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발을 가 려야 합니다. 철저히 회개해야 합니다. 날아야 합니다.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7) 가득한 눈
8절 = “그 안과 주위에 눈이 가득하더라…”
눈이 가득했다고 했습니다. 여기, ‘눈’은 통찰력과 지혜의 영성, 영안을 얘기합 니다. 이 천사들은 하나님 보좌에서 만만 천천 그 셀 수 없는 천사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합니다. 그 모습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8) 천국 예배 모습
8절 =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이것은 그들이 하는 일, 예배입니다. 천국에서는 밤낮 쉬지 않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밤낮 쉬지 않는’ 예배입니다. 예배관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우리가 하나님 보좌에 가서 밤낮 예배할 것입니다. 초대교인들은 성령이 임하니 까 ‘날마다’ 모였습니다. 교회는 예배가 핵심입니다. 그런데 과거 뜨거웠던 예배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예배가 줄어드는 것은 무엇을 말해 줍니까? 이것이 곧 타락 이요, 세속화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존귀와 감사라고 했습니다. 천국에서 누리는 엄청난 축복을 이 천사들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천국 에서 누리는 것은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숫자로 말할 수 없습니다. 인간적으로 좋다는 것으로 견줄 수 없습니다. 바울의 말대로 사람의 말로는 가히 설명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누릴 천국의 축복은 너무 큰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 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면 우리를 하나님 주위에 보좌에 앉히겠습니까? 하나 님이 계신 가장 가까이에 누가 있는지 아십니까? 천사들은 그 주변에 있습니다. 이십사 장로들은 하나님 주위에 있습니다. 우리와 천사들은 비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보좌 주위에 있습니다. 천사도 거기까지는 오지 못합니다. 그 영광 이 그리스도의 영광입니다. 그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에게 그리스도의 영광을 다 주시는 것입니다.
8. 이십 사 장로의 예배
1) 경배의 대상
10절 = “…보좌에 앉으신 이…”
예배의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당연한 말씀처럼 들리지만, 그러나 혼합주 의 종교다원주의는 예배의 대상이 결코 하나님 한 분이 아니십니다. 그들은 모든 신을 섬깁니다. 그러나 우리는 보좌에 앉으신 이, 하나님을 경배해야 합니다. 평 생에 하나님 한 분만 경배하시기를 바랍니다.
2) 경배의 자세
10절 =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
하나님 앞에 가서 감히 하나님을 보지도 못하면서, 너무 영광스럽고, 너무 감사해 서 하나님께 엎드려서 그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드려야 할 예배 자세가 이런 것이 되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 앞에 엎드려서 예배해야 합 니다. 감격해서 예배해야 합니다. 부엌에서 일하다가 온 복장으로 아무렇게나 예배하지 마세요. 일터에서 온 그대 로 성의없이, 준비없이 예배하지 마세요. 우리의 자세를 가장 잘 나타내는 것이 예배입니다. 엎드려서 하나님께 경배해야 합니다. 내가 받은 축복과 하나님의 영 광이 너무도 큰 것이기 때문에 엎드렸습니다. 요한도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니까 감히 보지를 못하고 천사에게 경배해 버 립니다. 그러니까 천사가 나에게 경배하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가 어쩌다가 이런 예수님의 축복을 소유했을까요? 세상 고통이 많지만 이 천국의 영광으로 얼마든 지 이기고도 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확실한 예수 구원과 천국관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사실은 우리 나이드신 권사님들에게 부럽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안 늙으 려고 주름을 볏겨내고 늙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우리 중에 누가 세월을 거슬릴 수 있습니까? 누가 늙지 않을 수 있습니까? 다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아름답게 늙어가기를 힘써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너무 좋은 천국이 기다리고 있 기 때문입니다. 한번은 임종을 맞은 성도에게 복음을 전하고, 천국을 설명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멘, 그렇게 좋은 곳이 있습니까? 빨리 가고 싶습니다”하는 것입니다. 다 죽 어가던 사람이 천국에 대해 듣더니 빨리 가고 싶다고 고백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렇습니다. 천국이 이런 곳입니다.
할렐루야!
3) 방법
10절 = “…경배하고…”
방법은 경배입니다. 경배는 예배입니다. 그 영광의 하나님께, 존귀한 아버지께 예 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 백성입니다. 예배야말로 우리 성도들의 특권입니 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그 속에 우리의 행복이 있습니다.
4) 경배의 절정
10절 =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졌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천국에 가서 받은 상급까 지도 다 하나님께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그랬을까요? 천국이 너무 영광 스러워서 면류관이 아깝지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께 너무 엄청난 것을 받으니 까 자연스럽게 나온 행동입니다. 오늘 이 땅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너 무 많은 것, 너무 귀한 것을 받으면 어떤 것도 드리게 됩니다. 헌금이 그렇습니 다. 우리가 받은 구원과 천국을 생각하면 이 땅에서 것이 아깝지가 않은 것입니 다. 헌금 드리고 아깝다고 하는 것은 천국에 대한, 구원에 대한 감격이 없기 때문 입니다.
5) 예배의 내용
11절 =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천국에서 누리는 축복이 너무 크기 때문에 이십사 장로들과 천사들이 하나님을 높이고 감격하고 하나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사람도 내게 많은 것을 주면 그 사 람을 높이지 않겠습니까? 나에게 천국과 생명을 주신 하나님을 세세토록 높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저 좋은 낙원 소유했으니 땅에 것에 매이지 말고, 하늘의 영광 을 소유했으니, 하늘 왕자답게 이 땅에서 기쁨과 감격 속에서 살기를 주님 이름 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