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개척 초기부터 이야기 설교를 했다. 아무리 아름다운 공동체도 목회자의 설교가 타성에 젖고 정형화되면 이너서클화되고 종교적 카르텔을 형성할 수 있다. 청중들과 소통하고 감동은 주는데 그 이상으로 넘어가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이야기 설교에 시적·예술적 요소를 가미하려고 노력했다. 개척교회 시절에 연세대 박준서 교수님으로부터 ‘어떻게 하면 설교를 시적으로 할 수 있는가’라는 강의를 들었다. ‘구약의 시가서나 예언서는 시적 형태로 기록됐다. 오늘날의 설교에도 시적 언어가 있어야 하며 현대설교일수록 시적 형태로 전달돼야 한다’는 게 주된 내용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설교자의 마음에 시심이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설교가 운율이 있고 음악적이며 예술적 풍미도 있어야 한다고 했다.
설교에 운율을 넣어 전달해 보려 했다. 설교 중간에 찬양도 하고 노래도 불렀다. 보통은 성도들과 같이 부르지만, 때로는 프로급 전문 가수들을 연습시켜서 갈라콘서트처럼 끼워 넣기도 했다. 가령 삭개오에 대한 설교를 하면서 적절한 부분에 복음성가 “세상에서 방황할 때 나 주님을 몰랐네”를 넣는다. 설교 스토리에 음악적 감동이 플러스 돼 은혜의 시너지가 절정을 이루는 것을 경험했다.
성탄절 설교 때는 사도 요한이 고백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감동을 이야기하다가 적절한 부분에서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 다 표현 못 하네” 찬양을 했다. 성도들이 눈물을 흘리며 감동하고 헌신의 결단을 했다.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과 순애보적인 하나님의 마음을 표현할 때는, 심지어 대중가요도 개사해 불렀다. “불타는 이 마음을 믿어 주세요. 말 못 하는 이 마음을 알아주세요.” 호세아서를 설교하며 고멜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돌아오라고 하는 하나님의 애타는 마음을 전할 때는 “돌아와 그대 내게 돌아와 난 항상 그대 생각뿐이야”라는 노래를 불렀다.
처음에는 어설프기도 하고 경박한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했을 것이다. ‘성과 속’의 관점, 이분법적으로만 보면 ‘설교가 세속적이지 않나’하는 의구심이 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속에 담긴 진정성이요 애타는 마음이다.
다시 말해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 즉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과 청중을 향한 아픈 마음을 전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내가 먼저 하나님의 마음을 전율처럼 느끼는 것이 필요했다. 그때 하나님의 마음,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전하는 것이라 느껴졌다. 이야기 설교와 더불어 문화예술적 멋과 분위기를 접목하면서 소통과 감동을 더하는 설교 테크닉도 터득했다.
오늘날 우리의 설교가 성경 해석과 그 자체만 전달하고 있지는 않는가. 성경의 콘텐츠와 복음의 스토리를 더 잘 이해시키고 감동을 주기 위해 우리는 세상의 이야기를 끌어들여 예화로 사용한다. 예화 중에도 곡조 있는 예화와 곡조 없는 예화로 나눌 수 있지 않을까. 똑같은 세상 이야기나 예화지만, 곡조가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그렇다고 설교를 세속적이고 경박한 분위기로 하라는 말은 절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설교자의 마음과 진정성이다.
설교란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히 전달만 하는 신언운반행위(神言運搬行爲)가 아니다. 하나님의 불타는 사랑과 애절한 마음이 설교자의 심장에 이식돼 전달돼야 한다. 하나님의 간절한 마음, 예수님의 사랑 이야기를 어떻게 평범하고 밋밋한 우리의 말과 언어로만 전달할 수 있겠는가. 설교자는 언어의 총체적 행위를 할 뿐만 아니라 온몸으로 예술적 총체적 행위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때 성도들의 마음이 팍팍 깨지고 옥토로 바뀌는 것을 느꼈다. 언어학 이론으로 보면 효과수반 발화행위가 극적으로 일어난 것이다.
나는 설교학자가 아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설교를 통해 경험한 가장 중요한 사실은 설교자의 진정성과 자기 비하였다. 대부분의 목회자는 설교자의 우아함과 품격을 통해 하나님의 우아함과 성품을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래야 한다.
그러나 외적인 우아함과 품격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설교자 내면의 순박함과 진정성이다. 이 순박함과 진정성에 목숨을 걸고 설교를 하다 보면 설교자의 자기비하나 자기 죽음이 저절로 이뤄지는 것을 경험한다. 하나님의 마음과 사랑을 전달하기 위해 자기비하를 할 때 성도들에게 오히려 더 큰 은혜와 감동이 임함을 느꼈다.
이런 나의 설교를 총신대 심상법 교수는 ‘판소리 설교’라고, 칼빈대 김덕현 교수는 ‘광대설교’라고 표현했다. 이야기 설교와 예술적 광대설교가 생명과 사랑의 공동체를 견고하게 이뤄가는 주춧돌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