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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생명나무 목회’인가/ 생명나무 선택하느냐, 선악과 선택하느냐/소강석 목사의 꽃씨 목회 <6>

영국신사77 2020. 2. 18. 20:55

설교에 시적·예술적 요소… 공동체 주춧돌 된 ‘광대 설교’

소강석 목사의 꽃씨 목회 <6>

입력 : 2020-02-18 00:04
소강석 새에덴교회 목사가 1990년 서울 송파구 가락동 개척 초기 촛불영신예배를 인도하고 있다. 교회는 매년 새해를 맞기 전 전등을 모두 끈 상태에서 강단에 촛불을 켜고 송구영신예배를 드렸다.

나는 개척 초기부터 이야기 설교를 했다. 아무리 아름다운 공동체도 목회자의 설교가 타성에 젖고 정형화되면 이너서클화되고 종교적 카르텔을 형성할 수 있다. 청중들과 소통하고 감동은 주는데 그 이상으로 넘어가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이야기 설교에 시적·예술적 요소를 가미하려고 노력했다. 개척교회 시절에 연세대 박준서 교수님으로부터 ‘어떻게 하면 설교를 시적으로 할 수 있는가’라는 강의를 들었다. ‘구약의 시가서나 예언서는 시적 형태로 기록됐다. 오늘날의 설교에도 시적 언어가 있어야 하며 현대설교일수록 시적 형태로 전달돼야 한다’는 게 주된 내용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설교자의 마음에 시심이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설교가 운율이 있고 음악적이며 예술적 풍미도 있어야 한다고 했다.

설교에 운율을 넣어 전달해 보려 했다. 설교 중간에 찬양도 하고 노래도 불렀다. 보통은 성도들과 같이 부르지만, 때로는 프로급 전문 가수들을 연습시켜서 갈라콘서트처럼 끼워 넣기도 했다. 가령 삭개오에 대한 설교를 하면서 적절한 부분에 복음성가 “세상에서 방황할 때 나 주님을 몰랐네”를 넣는다. 설교 스토리에 음악적 감동이 플러스 돼 은혜의 시너지가 절정을 이루는 것을 경험했다.

성탄절 설교 때는 사도 요한이 고백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감동을 이야기하다가 적절한 부분에서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 다 표현 못 하네” 찬양을 했다. 성도들이 눈물을 흘리며 감동하고 헌신의 결단을 했다.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과 순애보적인 하나님의 마음을 표현할 때는, 심지어 대중가요도 개사해 불렀다. “불타는 이 마음을 믿어 주세요. 말 못 하는 이 마음을 알아주세요.” 호세아서를 설교하며 고멜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돌아오라고 하는 하나님의 애타는 마음을 전할 때는 “돌아와 그대 내게 돌아와 난 항상 그대 생각뿐이야”라는 노래를 불렀다.

처음에는 어설프기도 하고 경박한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했을 것이다. ‘성과 속’의 관점, 이분법적으로만 보면 ‘설교가 세속적이지 않나’하는 의구심이 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속에 담긴 진정성이요 애타는 마음이다.

다시 말해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 즉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과 청중을 향한 아픈 마음을 전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내가 먼저 하나님의 마음을 전율처럼 느끼는 것이 필요했다. 그때 하나님의 마음,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전하는 것이라 느껴졌다. 이야기 설교와 더불어 문화예술적 멋과 분위기를 접목하면서 소통과 감동을 더하는 설교 테크닉도 터득했다.

오늘날 우리의 설교가 성경 해석과 그 자체만 전달하고 있지는 않는가. 성경의 콘텐츠와 복음의 스토리를 더 잘 이해시키고 감동을 주기 위해 우리는 세상의 이야기를 끌어들여 예화로 사용한다. 예화 중에도 곡조 있는 예화와 곡조 없는 예화로 나눌 수 있지 않을까. 똑같은 세상 이야기나 예화지만, 곡조가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그렇다고 설교를 세속적이고 경박한 분위기로 하라는 말은 절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설교자의 마음과 진정성이다.

설교란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히 전달만 하는 신언운반행위(神言運搬行爲)가 아니다. 하나님의 불타는 사랑과 애절한 마음이 설교자의 심장에 이식돼 전달돼야 한다. 하나님의 간절한 마음, 예수님의 사랑 이야기를 어떻게 평범하고 밋밋한 우리의 말과 언어로만 전달할 수 있겠는가. 설교자는 언어의 총체적 행위를 할 뿐만 아니라 온몸으로 예술적 총체적 행위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때 성도들의 마음이 팍팍 깨지고 옥토로 바뀌는 것을 느꼈다. 언어학 이론으로 보면 효과수반 발화행위가 극적으로 일어난 것이다.

나는 설교학자가 아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설교를 통해 경험한 가장 중요한 사실은 설교자의 진정성과 자기 비하였다. 대부분의 목회자는 설교자의 우아함과 품격을 통해 하나님의 우아함과 성품을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래야 한다.

그러나 외적인 우아함과 품격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설교자 내면의 순박함과 진정성이다. 이 순박함과 진정성에 목숨을 걸고 설교를 하다 보면 설교자의 자기비하나 자기 죽음이 저절로 이뤄지는 것을 경험한다. 하나님의 마음과 사랑을 전달하기 위해 자기비하를 할 때 성도들에게 오히려 더 큰 은혜와 감동이 임함을 느꼈다.

이런 나의 설교를 총신대 심상법 교수는 ‘판소리 설교’라고, 칼빈대 김덕현 교수는 ‘광대설교’라고 표현했다. 이야기 설교와 예술적 광대설교가 생명과 사랑의 공동체를 견고하게 이뤄가는 주춧돌이 됐다.



▒ 왜 ‘생명나무 목회’인가
생명나무 선택하느냐, 선악과 선택하느냐

설교에 시적·예술적 요소… 공동체 주춧돌 된 ‘광대 설교’

소강석 목사의 꽃씨 목회 <6>입력 2020-02-18 00:04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크게 두 가지 일을 하셨다. 첫째, 하나님 나라 복음을 선포했다.(마 4:17, 막 1:15) 그래서 아담과 하와 때문에 실패하고 중단됐던 하나님 나라가 예수님을 통해 시작됐다. 둘째, 병자들을 치유하셨다. 예수님은 병자들을 치유하고 성전으로 가서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라고 했다.(눅 5:14, 눅 17:13~14)

왜 성전으로 가서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라고 했는가. 당시 환자들은 온전하지 못한 자였고 성전에도 들어갈 수 없었다.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에서 함께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다. 그런데 예수님은 복음을 받고 병 고침을 받은 사람들에게 먼저 성전으로 들어가도록 했다. 그들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 생명과 축복의 영광을 누릴 수 있게 한 것이다.

왜 성전을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로 생각했는가. 성전이 에덴의 영적인 구조와 시스템을 그대로 담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에덴으로 가는 길이 동쪽에 있었던 것처럼 성막과 성전의 정문은 항상 동쪽에 있었다. 에덴동산으로 가는 길을 그룹천사가 화염검을 들고 지킨 것처럼 지성소와 성소를 가로막고 있던 휘장에도 그룹천사들이 그려져 있었다. 지성소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1년에 딱 한 번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간다. 대제사장이 피를 뿌릴 때 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가 다 사해졌다. 유대인들의 선민사상 가운데 하나는 그 속죄일에 대제사장이 들어가서 영적으로 생명나무 열매를 따 먹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생명나무의 은혜를 입고 나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에게 축복했다.(민 6:24~26)

구약 백성들은 성전으로 가는 것과 성전 공동체의 은혜와 축복을 누리는 것을 최고의 축복으로 생각했다. 거기에 영적으로 에덴의 축복, 곧 생명나무의 은혜와 축복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잠언서는 구약의 언약공동체를 향해 생명나무의 은혜를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언약 백성들이 삶의 현장에서 생명나무의 은혜와 복을 누리라고 한 것이다. 생명나무를 때로는 지혜의 은혜(잠 3:18)로, 때로는 의로운 삶(잠 11:30)으로, 때로는 형통한 삶(잠 13:12)으로, 때로는 온순한 언어의 삶(잠 15:4)으로 소개하고 이를 누리게 한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돌과 나무로 지은 성전을 헐고 당신의 몸 된 성전을 지었다. 그 성전이 몸 된 교회로 이어졌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 생활을 하는 사람은 절대로 선악과를 선택하지 않고 생명나무를 선택해야 한다. 이 땅의 교회 생활은 생명나무를 선택하는 연습을 하고 훈련을 하는 것이다. 지난번에도 설명한 것처럼 생명나무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나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신앙생활과 교회 생활은 생명나무를 선택하느냐, 선악과를 선택하느냐 하는 영적인 전쟁이다. 이 땅에 살면서 생명나무를 선택하는 전쟁에서 이긴 사람은 천상교회에서 영원히 생명나무를 따 먹고 차지하는 상급을 받는다고 했다.(계 2:7, 22:14) 요한계시록에 소개된 생명나무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말론적이고 영원한 존재 방식을 상징적으로 이미지화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개척교회 때부터 성도들에게 생명나무를 선택하는 훈련을 시켰다. 생명나무 신앙이 훈련돼야 예수님이 중심된 신앙의 세계관과 가치관이 세워진다. 이런 성도가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고 신앙의 중심을 지키며 한국교회 생태계를 지키고 반기독교 악법을 막는 사상전, 문화전을 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6·25 참전용사 초청행사를 시작해 14년째 이르고 독소조항이 있는 차별금지법과 나쁜 인권조례, 이슬람채권법을 막고 종교인 과세 문제에 대처하는 등 공적 사역을 할 수 있었다. 어떤 정치적 바람에 흔들린 적도 없고 진영논리 싸움을 해 본 적도 없다. 생명나무 신앙이 깊이 뿌리 내린 교회는 오로지 교회의 영광과 복음의 가치를 지켜나가며 시대를 선도하는 ‘퍼스트 처치’(first church)로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다.


소강석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