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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생명나무목회’인가 / 소강석 목사의 꽃씨 목회 <5>- ‘선악과’라는 바벨탑 안에 갇혀있는 복음

영국신사77 2020. 2. 12. 00:01

‘이야기 설교’가 감동의 공동체 만들다

소강석 목사의 꽃씨 목회 <5>

입력 : 2020-02-11 00:06
소강석 새에덴교회 목사(앞줄 오른쪽 네 번째)가 1992년 서울 가락본동에서 사역하던 시절 학생회 주최 ‘시와 찬미와 문학의 밤’을 마치고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당시 교회는 서울 가락도매시장 건너편 신가초등학교 부근에 있었다. 새에덴교회 제공

1988년 서울 송파구 가락동 개척교회 시절 성도들은 대부분 가락시장에서 리어카로 채소를 옮기는 인부나 노점상이었다. 가난하고 외롭고 힘든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가슴에 있는 상처와 한을 어떻게 어루만지고 치유할 수 있는가에 설교의 초점을 맞췄다. 이성적이고 주지주의적 설교보다 성도 개개인에게 다가가듯이 하는 감성 설교를 하려고 했다.

그렇다고 조곤조곤하게 설교한 것은 아니다. 내 설교는 스피치로 말하면 웅변형이고 노래 장르로 말하면 판소리에 가깝다. 이런 스타일에 간증 스토리나 내러티브 구조를 엮어갔다.

그래서 개척교회 때부터 설교하면 많은 사람이 웃거나 울었다. 내가 일부러 눈물을 흘리도록 의도한 것도 아닌데도 울었다. 스토리텔링이나 내러티브 형태의 설교를 더욱 발전시켰다. 연역적 설교나 제목 중심의 설교, 혹은 대지 중심의 설교를 지양하고 스토리텔링이나 내러티브를 중심으로 한 원포인트 설교를 하려고 했다.

물론 절기 설교 때는 달랐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이나 아픔 등을 전달할 때는 항상 이야기 중심의 설교를 했다. 당시에는 다가올 미래의 트렌드를 몰랐지만,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다. 제목 설교와 대지 설교에 익숙한 사람들에게선 설교가 일목요연하지 않다는 평가도 받았다.

지금도 새에덴교회 예배 시간에는 성도들이 울다가 웃고, 웃다가 울고 하면서 참회와 변화, 결단의 시간을 갖는다. 내가 하는 설교 한 마디 한 마디가 성령의 임재 가운데 거룩한 언어의 퍼포먼스가 돼 고도의 ‘효과수반 발화행위’를 일으키는 것을 느낀다.

그래서 요즘 신(新)설교학을 공부하신 분들이 내 설교를 판소리설교, 혹은 광대설교라 명명하곤 한다. 광대설교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에 더 상세하게 하겠지만, 이렇게 스토리 중심의 광대설교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어린 시절 환경 덕분이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이야기를 좋아했다. 이야기를 듣다 보면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나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기도 했다. 이야기는 그야말로 황홀한 상상의 세계였다. 내가 이처럼 이야기를 좋아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막내로 자랐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아버지는 형과 누나를 엄한 매로 다스리며 천자문과 구구단 암송 등을 시켰다. 시험 점수를 올리는 지식 교육을 선택한 것이다. 막내였던 나는 비교적 자유로웠다. 그래서 할머니, 어머니, 누나로부터 옛날이야기를 많이 듣고 자랐다. 귀신, 도깨비, 보릿고개 이야기, 6·25전쟁 때 고생한 이야기 등등… 그야말로 꿈과 환상의 보물섬이었다.

특히 라디오를 들으며 무한한 상상과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었다. 어린이극인 ‘손오공’ ‘무지개마을’을 비롯해 ‘광복 20년’ ‘전설 따라 삼천리’ ‘법창야화’ 등 라디오극을 들으며 상상력을 키웠다. 어떻게 해야 이야기를 흥미롭게 이끌어나가는지 호기심을 갖고 들었다. 그때 들었던 이야기 덕택에 독특한 상상력과 창의력, 문학성이 길러졌다. 사람을 웃기고 울리게 하는 내러티브의 힘이 생긴 것이다.

그 덕분에 어린 시절 백일장에서 수상했고 웅변대회와 고전읽기대회에 나가 교육감상도 받았다. 웅변대회에서 이승복의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나 ‘어머니 은혜’ 등의 주제로 외치면 눈물짓는 학생들이 많았다. 노래도 좀 불렀는지 작은 학교였지만 이런 노래로 콩쿨상을 받은 기억도 난다. “풀냄새 피어나는 잔디에 누워 새파란 하늘가 흰 구름 보면 가슴이 저절로 부풀어 올라 즐거워 노래 불러요.”

어린 시절의 상상과 예술 감성, 이야기의 세계가 나의 설교 형식의 토대가 됐다. 설교는 예배 시간에 한 순서로만 끝나면 안 된다. 오늘날 설교가 너무 정형화되고 화석화돼 가는 것을 느끼지 않는가. 나도 그럴까 봐 항상 도전을 받는다. 설교자는 항상 도전을 느끼고 위기감을 느껴야 한다. 목회자는 설교가 정형화되고 타성화되지 않았는지 늘 점검해야 한다.

어떤 설교든지 먼저 들리는 설교가 돼야 하고 소통하고 감동을 주는 설교가 돼야 한다. 언어학 이론으로 말하면 ‘의미수반 발화행위’를 넘어 ‘효과수반 발화행위’가 잘 나타나야 한다. 성도들이 설교를 들으면 격한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리든지, 아니면 복음의 감격과 기쁨을 주체할 수 없어 웃음을 참지 못하든지, 그것도 아니면 너무나 진지해 손에 땀을 쥐고 듣게 한다든지 하는 역사가 나타나야 한다. 적어도 설교시간에는 졸거나 딴생각을 하게 해선 안 된다. 이런 설교는 그냥 울리는 꽹과리와 다름없다.

새에덴교회는 개척교회 때부터 가락시장에서 밤을 새우며 장사를 하고 주일 낮에 예배에 찾아온 성도들이 많았다. 그중 조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막상 졸리다가도 설교 중간에 찬양하고 노래를 부르니 졸 수가 없었을 것이다.

미래학자 롤프 엔센은 저서 ‘드림 소사이어티’에서 미래사회를 이끌어가는 핵심 동력은 이야기가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이미 스펙보다 감동적인 스토리를 가진 사람이 인정받고 주목받는다. 특별히 설교자에게는 자신만의 고난과 역경, 인내와 도전의 스토리가 있어야 한다. 스토리가 있는 설교자가 청중을 감동시키고 감동의 공동체를 만든다.



▒ 왜 ‘생명나무목회’인가
‘선악과’라는 바벨탑 안에 갇혀있는 복음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 먹고 범죄한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 다시 들어가지 못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다 죽었다. 그 후에 에덴동산과 생명나무를 향한 갈망은 아담과 하와의 후손으로 이어졌다. 바로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은 마침내 에덴동산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막과 성전이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구약에 오랫동안 제도적으로 존재해왔던 돌과 나무로 지은 성전을 헐어버리고 새로운 성전을 3일 만에 세우겠다고 선언하셨다.(요 2:19~21) 구약의 성전시대를 종식하고 자신의 몸을 통한 새로운 성전시대를 선언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 에덴으로 돌아가는 또 하나의 새로운 과정을 선포하셨는데, 그곳이 바로 에덴의 구조와 시스템을 담아 놓은 교회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에서 항상 생명나무를 선택하며 살아야 한다. 선악과를 선택하면 안 된다. 그런데 요즘 생명나무를 선택해야 할 교인들이 선악과를 선택하고 있지 않은가. 자기 기준의 도덕과 윤리, 법리를 갖고 선악과를 선택한다. 선악과라는 바벨탑 안에 생명나무 혹은 예수의 복음이 갇혀 있다.

노아의 세 아들 이야기는 큰 교훈을 준다. 노아가 술에 취해 하체를 벌거벗었다. 그런데 함은 아버지의 허물을 마구 까발렸다.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 사실을 사실대로 이야기했을 뿐이었다. 어쩌면 자기 기준의 윤리와 도덕적 잣대로 정의감에 불타올라 아버지의 허물을 지적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허물을 안타까운 사랑의 마음으로 바라봤다. 그리고 아버지의 모습이 덕이 되지 않을까 염려해 조용히 겉옷을 가져다가 하체를 덮고 장막으로 모셔 드렸다.

누가 봐도 노아의 실수였다. 그러나 이 일로 함은 아버지로부터 저주를 받지 않았는가. 그래서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 것이라 한 것이다.(벧전 4:8) 야벳과 셈은 생명나무를 선택했지만 함은 선악과를 선택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는 함 같은 사람이 너무 많다. 자기 기준의 윤리와 도덕의 잣대로 교회를 정죄하고 비판한다. 그러나 교회에는 항상 공의와 사랑이 함께 있어야 한다. 그러면서 교회에 덕을 세우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 비록 객관적 사실이고 옳다고 할지라도 그로 인해 사람을 해치고 죽이게 되거나 교회에 덕이 되지 않는다면 사랑으로 덮고 공동체 안에서 이해와 수용이 될 만한 분위기가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더구나 겉으로는 개혁을 표방하지만 내 안에 욕망의 바벨탑을 쌓고 있다면 개혁이 될 수 없다. 사랑이 없는 공의만으로는 독선과 아집에 빠질 수 있다. 물론 공의가 없는 사랑도 거짓과 위선에 빠질 수 있다. 그러므로 언제나 공의와 사랑을 함께 추구해야 한다.

나는 이 사실을 개척교회 때부터 이야기해왔다. 가슴에 한이 많고 열등의식과 상처가 많은 사람도 생명나무 신앙으로 훈련을 시켰다. 그렇게 훈련을 하니까 교인들의 가슴 속에 쓴 뿌리가 뽑히고 가시덤불이 뽑히면서 생명나무 우거진 교회가 됐다.

그러다 보니 교회가 이전하는 중에도 분란이 없었다. 교회당을 여러 번 건축하는 과정에도 불협화음이 없었다. 성도들의 모든 심령이 생명나무 신앙으로 덮어지고 생명의 물결이 차고 흘러넘쳤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가 새로운 건축부지를 사고 1만평이 넘는 새 예배당을 건축할 때에 오히려 갑절 부흥, 갑절 성장을 했다.

한국교회는 지금 선악과 프레임에 갇혀 서로 싸우고 갈등하고 분열하고 있다. 자기의 이익과 목적에 맞지 않으면 무조건 공격한다. 선악과 프레임에 갇혀 있다는 증거가 아닌가. 이제 생명나무 신앙으로 새롭게 돼야 한다. 그럴 때 서로 이해하고 용서하며 화합하고 새로운 부흥을 일으키는 생명나무 시대를 맞이할 것이다.

소강석 목사